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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우문령장단성 1

2018.04.30 조회 301 추천 1


 야우문령장단성 1권
 야우문령장단성(夜雨聞鈴腸斷聲)
 
 비 내리는 밤에 말방울 소리만 들리어도 창자를 끊는 듯한 생각이 절로 난다.
 
 
 장한가(長恨歌)
 
 
 서장(序章) 발기(發起)
 
 
 1. 전설(傳說)
 
 
 옛날 옛적에 사(四) 형제(兄弟)가 있었다. 그들 형제는 너무도 의리(義理)가 좋아 주위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형제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그런 모습이었다.
 후에 맏형이 죽어 용왕(龍王)이 되었다. 용왕이 된 형은 남해(南海) 바다를 지배했다.
 둘째형은 죽어 큰 구렁이가 되고, 셋째형은 죽어 큰 매가 되었다. 구렁이는 무려 삼십(三十) 장(丈)의 길이가 되어 그 크기가 하나의 강을 가로막았고, 큰 매는 한번 날면 두 개의 마을이 날갯짓에 부서져 날아갈 정도였다.
 형들은 일찍 죽었으나 막내는 살아 있었다.
 어느 날 마을을 지나던 중 아리따운 아가씨를 본 막내는 아가씨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한눈에 반해 버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가씨도 그를 본 후, 그가 마음에 드는 듯 수줍은 얼굴을 보이며 몸을 어찌하지 못했다.
 막내는 자기 마음에 드는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닭을 사서 선물하고 사랑을 속삭이며 그녀의 부모에게 청혼(請婚)하고 싶었으나, 어찌나 가난한지 까마귀 한 마리 살 돈도 없었다.
 그는 고민하다 한 가지로 마음을 굳혔다.
 “형님들께 사정(事情)해 보자.”
 그리하여 동생은 물을 건너고 벌판을 가로질러 남해(南海)에 다다랐다. 남해의 푸른 물결에게 형이 있는 곳을 물으니 파도는 자신이 안내를 하겠다 했다.
 막내는 물결을 타고 형을 찾아갔다.
 이야기를 들은 맏형은 자신이 쓰고 있던 용왕관(龍王冠)을 벗어 동생에게 주었다.
 둘째형을 찾아갔을 때 이미 맏형에게 이야기를 들은 듯 두말하지 않고 자신의 발톱을 뽑아주었고, 셋째형도 자신의 깃털을 뽑아주는 데 마다하지 않았다.
 막내는 형들에게 받은 물건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용왕의 관과 구렁이의 발톱, 매의 깃털은 한 순간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닭으로 변했다. 막내가 인간세상(人間世上)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오뚝한 관과 화려한 날개, 위엄(威嚴)이 있어 보이는 닭이었다.
 동생은 닭을 들고 아가씨의 집으로 달려갔다. 아가씨의 부모는 막내가 가져 온 닭을 보고 매우 놀랐다. 인간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닭이 그들의 눈 앞에 퍼덕거리고 있었다.
 부모는 그들의 결혼을 허락했다. 인간세상에 살지 않는 닭을 지닌 사람이라면 신(神)과 가까운 사람이라 여긴 것이다. 닭도 받을 수가 없어 도로 돌려보냈다.
 형님들에게 받은 귀중한 물건들이 막내의 요긴(要緊)한 약혼예물(約婚禮物)로 변했다.
 그 후로 막내는 사랑하는 아가씨와 결혼을 하고 잘 살았다. 막내와 아가씨는 닭이 낳은 새끼들을 팔아 행복한 가정을 꾸려갔다.
 그 후, 그들은 형들의 고마움을 기리고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남해의 용왕과 큰 구렁이, 하늘을 덮는 큰 매에게 제사를 지내고 즐겁게 노는 날을 정했다.
 
 운남(雲南) 지방과 남해, 사천(四川)을 포함하는 청해(靑海), 그리고 서장(西藏) 지역에 흩어져 사는 따이족[族]에게는 형제의 의를 강조하고 결혼예물로 닭을 준다는 이야기가 전설(傳說)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따이족은 중원의 서남부(西南部)에 군데군데 흩어져 조그만 군락을 이루고 살았으며 중원의 남부에 널리 퍼져 있었으나, 소수민족(少數民族)이면서 힘이 약했다.
 그러나 그 역사만큼은 중원에 비겨 뒤지지 않는 것으로, 유구(悠久)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진 가족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며, 형제간의 우애(友愛)를 중요시 여기는 생활을 했다.
 처녀들은 혼기(婚期)가 차면 설날이나 명절날을 선택하여 시장에서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닭고기를 팔아 마음이 있음을 표시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에게는 닭고기를 팔지 않았다.
 그들은 그러한 닭고기를 사고파는 방식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단란한 가족을 이루는 것이었다.
 
 
 2. 현실(現實)
 
 
 밤이 깊었다.
 한 사내가 달도 없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늘은 날씨가 흐렸기 때문인지 별도 보이지 않아 차라리 암흑(暗黑)이었다.
 “이제 세상이 바뀔 것이다. 형제이며 친구인 너! 그러나 너는 내가 넘어야 할 벽, 이제 너는 곧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사내는 몸을 돌렸고 어둠으로 인해 얼굴은 확연(確然)하게 보이지 않았다.
 쏴아아!
 바람이 불고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 어둠 속에 서 있던 사내의 모습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1장 서천에 해가 뜨니 불자(佛子)는 동으로 향하고 동천에 해가 지니 사람은 칼을 품는다.
 
 
 1. 혈우난(血雨亂)
 
 
 황혼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붉은 운무는 성큼 다가왔다 물러서기를 반복했고 산정에 걸린 붉은 해는 이미 한 입 베어먹은 월병(月餠)을 연상시켰다. 산봉이 해를 가렸기 때문인가?
 낮 동안 모든 것을 태워버릴 것 같았던 해는 이미 식어버렸다. 빛마저 흐려지고.
 길게 늘어진 노을은 주단(綢緞)을 편 듯하고, 바람에 휘어지는 갈대는 석양을 피하려는 듯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그래도 잎에 부어지는 빛을 피하지는 못했고, 결국에는 잎뿐만이 아니라 대공과 수술도 붉은 빛으로 물들어갔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
 사람이었다.
 온 천하가 석양에 물들고 뭇 사물들이 하루를 마감하는 이때, 하늘을 날던 한 마리 수금(水禽:물새)마저 물가의 둥지를 찾아 날아가는 지금, 움직이지 않는 사람의 그림자.
 승인(僧人)이었다.
 몸에 걸친 가사는 이미 걸레가 되어버렸지만 눈만은 형형한 빛을 뿜어내는 중년승인.
 범자대불(梵慈大佛)!
 그는 포달랍궁(布達拉宮)으로 대변되는 황모교의 법승이었다.
 사사사삿!
 바람이 갈대를 쓸고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범자대불은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이어 목에 걸고 있던 염주를 끌러 오른손에 잡아 내공을 주입했다.
 염주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파닥거렸다.
 ‘온다.’
 그는 삭도(削刀)로 밀어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은 머리카락이 마구 하늘로 뻗어 올라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는 이미 호신부(護身府)로 사용하던 항마저(降魔杵)가 부러지고 어떤 병기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염주에 내공을 실어 병기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포달랍궁의 무공이 무서운 것은 병기술이 아니라 뛰어난 박투술(搏鬪術)이었다. 그렇지만 내공의 소모를 덜고 체력을 아껴야 할 상황이니 병기는 중요했다.
 더구나 지금으로서는 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싸움은 결과일 뿐.
 지금은 결과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도주!
 그는 자신이 도주를 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싸우는 것보다 나타나는 자들의 눈을 피해 멀리 도주를 하거나 포달랍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도주하는 것보다 상책이 포달랍궁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차책(次策)은 다가오는 자들을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싸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 방법이며 차선책(次善策)은 다가오는 자들과 싸우는 것이지만 흉사가 되니 이는 방법이라 할 수 없는 것이고, 결국은 원하지 않는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
 그의 왼손으로 흘러든 내공이 혈맥을 부풀리게 만들었다. 여차하면 대수인(大手印)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본 대불은 이미 여기에 이르러 있으니 볼일이 있는 자는 모습을 드러내시구려. 아미타불!”
 범자대불은 갈대숲으로 안개처럼 다가오는 자들의 몸에서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기파를 느끼며 나직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가 서 있는 곳에서 반경 오십여 장은 바위가 흉물스럽게 드러난 언덕이었고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자잘한 풀이 자라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숨어 있기에는 부적절했다.
 사람이 숨을 수 있는 곳은 오십여 장 전방.
 범자대불은 자신을 노리는 자들이 오십 장 밖의 갈대와 듬성듬성 자라 있는 나무 밑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내의 거리는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예측은 정확했다. 이들이 노리는 것은 진경(眞經)이다. 애석하구나. 불심이 깊어야 할 자들이 한낱 불경을 얻기 위해 살생을 주저하지 않다니.’
 범자대불은 발에 힘을 주었다.
 생각 같아서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도주하고 싶었다. 목숨을 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품 속에 있는 진경을 보호해야 했다.
 삼 년이 걸린 일이었다.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포달랍궁으로 가지고 가야 할 진경이었다.
 생각은 있지만 도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주변에 흐르는 살기(殺氣)는 적지 않은 자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더구나 그들의 숫자가 많고 한결같은 고수임을 감안할 때 이곳에서 몸을 빼낸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진경을 내려놓고 물러가라! 우리도 불자로서 목숨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진경에 연연한다면 열반(涅槃)에 이르지 못하고 진토(塵土)가 될 것이다!”
 허공에서 웅장한 목소리가 울렸다.
 범자대불은 움직이지 않았다.
 쩌렁하게 허공에 울린 목소리로 보아 목소리를 흘린 자가 제법 강한 내공을 지닌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발바닥을 바닥에 붙이고 끄떡도 하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내공을 실은 것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놈은 강하다.’
 범자대불은 목소리에 실린 내공만으로도 그 기결(氣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홀연 떠오르는 바가 있어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호통을 질렀다.
 “아미타불! 나서라. 본 대불은 결코 숨어서 쥐새끼처럼 앙앙거리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
 잠시의 정적이 있었다.
 그의 내공을 실은 목소리가 언덕을 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갈대숲에서는 작은 부스럭거림이 있었을 뿐이었다. 막상 누군가 일어설 만도 하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시간을 벌자는 이야긴가?’
 범자대불은 속이 탔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사람은 범자대불이었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그의 내공은 거의 고갈(枯渴)에 이르고 있었다. 숱한 추적자들의 손을 피하고 미친 듯 달리느라 자신이 가야 하는 방향조차 잃어버렸다.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게 하는 것은 내공의 고갈이었다. 아무리 죽음이 두렵지 않다 해도 무공을 익힌 무인으로서 내공이 고갈되었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숨돌릴 틈도 없고 마음 편히 앉아 볼 사이도 없으니 운기조식(運氣調息) 따위는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이미 오십 회의 격전!
 계속해 덤벼드는 자들로 인해 그는 쉴 틈도 없었고 잠을 자지도 못했다. 사흘 동안 단 한 끼도 먹지 못했고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했다.
 천축(天竺)과 서장(西藏)의 접경인 단파강(丹巴江) 줄기를 둘러싸고 있는 산, 흔히 세 개의 산이 삼재(三才)의 형태로 서 있다고 하여 삼산지경(三山地境)이라 불리는 곳에서부터 추적은 시작되었다. 그를 따르던 포달랍궁의 제자들은 이미 주살되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오로지 그 혼자였다.
 단파강은 서장에서 가장 큰 물줄기 중 하나인 아노장포강(雅魯藏布江)으로 흘러드는 물줄기였다.
 라싸[拉薩]를 스치고 흐르는 물줄기.
 청해의 젖줄.
 청해의 곳곳에서 모아진 물줄기들은 모두 모여 아노장포강을 만들고 청해를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른다. 라싸를 지난 아노장포강은 염청당고랍산(念靑唐古拉山)을 뚫지 못하고 크게 꺾어져 천축으로 들어간다.
 단파강은 청해의 남부에서 발원하여 아노장포강으로 들어가는 작은 물줄기였다.
 애초에 아노장포강을 선택해 이동했다면.
 고통이 따르기는 하지만 희마랍아산령(喜馬拉雅山嶺)을 넘었다면 추적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단파강을 탔다는 것이 실수였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어야 했는데.
 희마랍아산령의 한 줄기를 자르고 흐르는 단파강에서 포달랍궁이 자리한 라싸는 그리 멀지 않았다.
 서북방으로 쉬지 않고 열흘을 달리면 만날 수 있는 거리.
 남천축의 아라사왕국(俄羅斯王國)의 거리가 석 달 하고도 열이틀이 걸린 것을 생각하면 라싸까지의 거리는 결코 먼 거리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라싸 방향에 인의 장막을 치고 몰아붙이고 있었다. 결국 그들의 기나긴 추적을 피해 몸을 숨기고 도주하다 보니 운남(雲南)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운남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자신이 어디까지 쫓겨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미타불······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목이 갈라지고 입술이 터져 피가 났다.
 범자대불의 말이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누군가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일.
 갈대숲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건방진 놈이군!”
 범자대불은 흔들리는 갈대를 노려보았다.
 그는 손목에 감겨 있던 염주를 끌러 손에 쥐며 입을 열었다.
 까드드득!
 염주에서 울리는 소리.
 그가 염주를 손가락 사이에서 비비자, 번개를 맞은 자단목(紫檀木)을 베어 다듬고 깎아 만든 염주는 나무가 갈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괘씸하다! 누구도 본 대불에게는 고개를 숙이거늘, 어찌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는가?”
 범자대불은 일부러 격하게 토했다.
 숨어 있는 자들의 모습을 드러나게 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아무리 강한 자라 해도 드러나는 자는 두렵지 않지만 숨어 있는 자는 언제 어느 곳으로 다가들지 알 수 없었다.
 상대를 드러나게 하는 방법은 많았다.
 그들에게 다가갈 수는 없으니 불자로서 그다지 어울리지 않지만 격한 언사를 사용할 수밖에.
 ‘모습을 드러내겠지.’
 범자대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성격이 그토록 낙천적이지 못했다면 사흘간의 추적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을 드러나게 한다는 의도는 틀리지 않았지만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그도 예측할 수 없었다. 막연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으로 유도하고자 했다면 이어진 모든 일들은 그의 의도를 벗어났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슈슈슈슈슈슛!
 갈대가 흔들리는가 했는데, 사람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화살이 허공을 격하고 날아들었다.
 강한 기파가 실린 화살이었다.
 하늘을 가득 덮은 화살!
 한두 발이 아니고 십여 발이 넘을 것으로 보이는 화살은 오십 장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오차없이 각 대혈(大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만약 피하지 않는다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대혈에 틀어박힐 것 같았다.
 사사(斜射)!
 보통의 경우라면 아무리 궁술에 능해도 오십 장의 거리에서 직사(直射)를 하기는 힘들다.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사사뿐이다. 그러나 사사는 목표물을 정확하게 명중시키기가 어렵다. 그것이 활이 지닌 한계였다.
 오십 장의 거리에서 화살을 날려 대혈을 조준할 수 있다는 것은 경악할 일이었다.
 직사도 아니고 사사라면 더욱.
 ‘강궁의 명인(名人)이 있었군. 그런데 기이한 일이다. 홍모(紅帽)의 밀승(密僧)들 중에서 강궁을 사용하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범자대불은 마음 속으로 감탄하며 급히 발을 굴러 바닥을 퉁기고 삼 장이나 이동했다. 단전이 주먹으로 맞은 듯 통증을 뿌렸다. 허공을 날아온 화살은 비록 빠르고 정확했지만, 빠르게 이동한 범자대불의 발을 잡지는 못했다.
 ‘진기의 고갈로 내기가 흔들리고 있다.’
 몸의 중심을 잡은 범자대불은 허리를 펴며 인상을 찌푸렸다. 결코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었다.
 파파팍!
 무수히 날아든 화살은 범자대불이 서 있던 곳을 반경으로 이 장 내외에 박혀들었다.
 길이가 오 척에 이르는 장시(杖矢)였다.
 “응!”
 범자대불은 나직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눈에 보이는 것.
 우연히 눈을 돌리다 발견한 곳은 지면이었다. 황토 사이로 드러난 바위가 마치 검봉처럼 보이는 지면, 그것이 범자대불의 시선을 잠시 머물게 했다.
 지면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지면이 조금씩 들썩거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네 줄기의 가는 선을 긋듯 땅이 갈라졌고, 그 속으로 무언가 다가서는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두더지가 땅을 파면 땅이 들썩거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흙이 조심스럽게 갈라지며 네 줄기의 힘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화살이 날아들면 범자대불이 어느 곳으로 피할 것인지 예측했다는 듯 오래 전부터 한 방향으로 접근해 들어오고 있었다.
 범자대불이 몸을 옮긴 곳이었다.
 들썩!
 땅이 갈라지며 흙 부스러기가 솟아오르다 다시 주저앉았다.
 두더지가 그토록 큰 들썩거림을 만들 수는 없는 일.
 꿀꺽!
 마른침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식도(食道)가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몰고 왔다.
 피피피피핑!
 다시 화살이 날았다.
 ‘화살로 나의 시선을 유도(誘導)하여 보지 못하게 하고 숨어서 나에게 접근하는 자가 있다. 땅 속이라······ 그나저나 놀라운 지둔술(地遁術)이군. 아무래도 기이하다. 홍모에 지둔술을 익힌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거늘. 이는 그들에게 동조자가 있다는 것이다. 아미타불!’
 땅을 파며 접근하는 자들이 지둔술을 익힌 것이 분명했다.
 홍모의 무공 중에는 지둔술이 없다.
 범자대불은 홍모가 지닌 무공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확연하게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가 황모(黃帽)의 제자인 바에야 뿌리가 같은 홍모의 무공을 모를 리가 없다. 다만 내공과 그 수련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누구란 말인가?
 홍모의 밀승들이 지둔술을 익혔을 리 없으나 누군가 다가오고 있음은 분명하다.
 강호에 지둔술은 그리 알려진 것이 아니지만 땅 속으로 전진할 수 있는 방법은 지둔술뿐이다.
 범자대불은 눈 앞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바라보며 가사를 펄럭였다.
 마음이 급하고 의문이 뭉게구름 같았지만 우선은 눈 앞으로 다가오는 화살부터 막아야 했다.
 후두두두두!
 잘 익은 밤이 떨어지듯 그를 향해 날아들던 화살이 떨어져 내렸다. 화살은 가사를 뚫지 못하고 반탄되거나 방향을 바꾸어 낙엽처럼 흩날려 날아갔다. 땅에 박혀드는 화살촉이 돌과 부딪쳤는지 작은 불꽃을 퉁겨내었다.
 “놈을 죽여라!”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며 갈대숲에서 한 명의 중년승인이 몸을 일으켰다.
 전신에 붉은 홍의가사를 두른 그는 머리에 붉은 원두모(圓頭帽)를 쓰고 있어 홍모교의 밀승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응?”
 그 순간이었다.
 범자대불의 얼굴색이 변했다. 더불어 눈썹 끝이 휘어지며 두 눈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그는 손에 쥐고 있는 염주에 더욱 강한 내력을 쏟아넣었다.
 네 줄기 선을 그으며 갈라지던 땅이 격하게 흔들렸다.
 파스스스슷!
 땅이 갈라지고 흙이 튀어오르며 범자대불이 주시하고 있던 네 줄기 기운이 번개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땅이 갈라진 곳에서 각기 다른 네 줄기의 경력이 범자대불의 복부를 향해 날아든 것이었다.
 사람은 아니었다.
 마치 작은 조각처럼 보이는 암기가 범자대불의 몸으로 뿌려진 것이었다.
 네 방향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로 인해 네 줄기로 보였지만 암기는 하나씩이 아니었다. 검광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지 않은 양의 암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핫! 어리석은 수작!”
 휘류류류류!
 범자대불은 급히 오른발 끝을 바닥에 모를 심듯 박아넣고 왼발로 지면을 찼다. 몸이 오른발을 축으로 팽이처럼 회전을 일으키자 그의 두 손이 어지럽게 휘둘러지고 가사 자락이 허공 가득 황색의 바람개비를 만들었다.
 범자대불의 몸이 힘차게 회전을 일으키며 몸에서 회오리가 일어났다.
 놀랍도록 빠르게 뿜어지는 회전력이었다.
 권격(拳擊)에 있어 타격력(打擊力)은 손목이나 발목 같은 작은 관절을 이용해 뿜어낼 수도 있지만, 전신을 회전시켜 뿜어낼 수도 있는 것이었다. 범자대불의 몸이 회전하자 나선형(螺旋形)의 강기가 피어오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
 사람의 몸도 그렇지만 물체가 움직이면 바람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사람이 회전하면 회전에 따른 바람의 현상도 바뀌기 마련이다. 회전에 따른 바람의 현상은 회오리!
 티티틱! 파스스슷!
 마치 나뭇가지가 꺾이는 듯한 미세한 소리가 들리고 암기들이 날아오는 것보다 빠르게 퉁겨져 날아갔다. 때로는 비껴지나가듯 몸을 스치며 방향을 틀어 날아가는 암기도 있었다.
 빠르게 돌아가는 회전력을 뚫고 들어가려면 회전보다 빠른 속도를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 회전의 방향과 속도에 의해 퉁겨나가거나 비껴가기 마련이었다.
 범자대불의 몸에서 뿌려지는 나선형의 반탄강기(反彈剛氣)는 날아드는 암기를 떨구어내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가사에 스친 암기는 방향을 바꾸어 땅 속에 박혀들었다.
 몸의 회전을 멈춘 범자대불은 몸을 낮추었다.
 마치 두 다리를 구부린 듯하여 짐승이 도약을 위해 몸을 구부린 듯한 모습이었다.
 “흥, 어리석은 중생들 같으니라고······ 무엇을 욕심내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쾅!
 범자대불은 오른발을 들어 힘차게 땅을 굴렀다. 우레 같은 소리가 울리고 그의 발이 땅 속으로 발목까지 파고들며 흙이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아침 이슬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이던 지면에서 누런 황사(黃砂)가 피어올랐다. 황사 사이로 군데군데 보이던 풀, 발목에도 자라지 못하던 풀이 뿌리째 뽑히며 흙과 함께 튀어올랐다.
 우르르르르-
 지면이 진동하자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고 뿌리가 깊은 풀들이 잎사귀를 마구 흔들었다. 풀잎에 매달려 있던 이슬들이 우박처럼 흩어졌다.
 “크어어어억!”
 “켁!”
 지면이 울리자 네 개의 신형이 땅에서 상체를 드러내며 허공으로 피화살을 뿜었다. 내공이 고갈지경에 이르렀지만 범자대불의 다리에는 땅을 울리고도 남는 진력이 담겨 있었다.
 범자대불은 막상 진력을 사용하고도 몸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지나친 진력의 사용으로 내기가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다친 내기에 다시 손상을 입자 그는 눈 앞이 어지럽고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간지러워 기침이 날 것 같았다.
 비릿한 냄새가 식도를 타고 올라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만약 기침이라도 하면 목까지 타고 오른 피가 뿜어질 것이고, 숨어 있는 자들은 그의 내상을 눈치챌 것이다. 그리고 벌 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큭! 내공이······’
 범자대불은 목으로 넘어오는 피를 삼켰다.
 만에 하나 내상을 입었다는 것이 홍모의 밀승들에게 알려지거나 내공의 고갈을 들키기라도 한다면 앞으로의 모든 일이 험난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개의 그림자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살계(殺戒)를 여노라!”
 범자대불의 입이 벌어지며 호령이 떨어져 울렸다. 그는 온몸의 진력이 고갈되어 혈도를 통해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주저한다고 해서 공격을 멈출 자들도 아니었고, 물러가라고 해서 순순히 물러갈 자들도 아니었다. 삶과 죽음, 오로지 두 가지만이 남았을 뿐이니 망설이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범자대불은 알고 있었다.
 두 발로 지면을 박차고 무릎을 퉁겼다.
 범자대불의 몸이 빠르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지둔술을 쓰며 접근했던 네 명의 무인 중 두 명은 지면에 엎어져 피를 토했으나 두 명은 허공으로 솟구치며 몸에 이는 충격을 털어내려 했다.
 그들이 미처 몸에 이는 여진(餘震) 같은 충격을 털어내기도 전에 범자대불의 염주가 허공을 휘감았다.
 퍽!
 수박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염주가 한 무인의 머리를 산산조각으로 바수어 버렸다. 허공으로 피비가 번지고 부서진 뇌수(腦髓)가 비처럼 흩뿌려졌다.
 불자의 몸이라고는 하나 이미 살계를 열기로 마음을 굳혔으므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누가 지옥에 가랴!’
 범자대불은 부처의 말씀을 마음 속에 새기며 거칠게 손을 흔들었다.
 “뭐냐?”
 “어서 피해······ 크아아악!”
 허공에 뜬 몸으로 동료가 죽어가는 모습을 본 중년의 무인이 급히 등에서 한 자루의 활계자(滑械子)를 뽑으며 외쳤지만, 그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슝!
 범자대불의 정권(正拳)이 뻗어나갔다.
 중년인은 사선을 그으며 다가드는 주먹을 보았다. 심장이 목으로 치밀어 오르는 느낌에 눈을 크게 뜨고 몸을 뒤집으려 했다. 그러나 이미 허공으로 튀어오르는 순간 비립으로 몸을 틀고 있었기 때문에 몸의 방향이 돌아가 있어 생각대로 몸을 피할 수가 없었다.
 쾅! 와지지지지!
 무쇠로 만든 종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에 이어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이어, 허공으로 자욱하게 퍼져 나가는 것은 핏줄기와 허연 뇌수였다.
 비명도 없었다.
 얼굴이 뭉개지고 머리가 깨진 중년인은 이 장이나 날아가 뻣뻣한 나무토막처럼 나뒹굴었다.
 몇 번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신경이 살아 있는지 산길을 달리는 마차의 바퀴처럼 덜컥거렸으나 이내 몸이 굳어버렸다. 혼이 그의 육체를 떠났음을 알 수 있었다.
 “무서운 중놈이다!”
 “놈이 사술(邪術)을 부린다!”
 땅에서 기어나오다 몸이 굳어버린 두 명의 무인은 놀라 부르짖었다.
 중원인들에게 서장의 법승(法僧)들은 밀교(密敎)의 승려로 통하고 있었다. 중원의 모든 사람들은 포달랍궁을 비롯한 서장의 네 개 종파(宗派)를 모두 밀교로 지칭하고 있었다.
 때로는 대승의 진리를 따르는 서장의 불파(佛派)를 주술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인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부처의 자비는 지상을 떠났노라.”
 범자대불은 허공에서 신형을 틀어 이어타정(鯉魚打挺)의 수법으로 머리를 지면으로 향해 떨어져 내렸다.
 지상에서 멍청한 표정이 되어 있는 두 명의 무인에게 다가갔다. 잠시 혼백을 놓았던 두 명의 승인은 놀라 땅에서 몸을 뽑아내며 허리에 달려 있던 호두구(虎頭鉤)를 뽑아들었다.
 호두구는 마치 갈고리 같은 검인을 가지고 있어 상대를 걸어 당겨 죽이거나 벨 수 있지만, 특히 땅을 파거나 수중에서 사용하기가 용이했다.
 지둔술을 이용해 접근했던 두 명의 무인은 호두구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어지러이 휘두르며 일월망망(日月茫茫)의 초식으로 방어하며 소리를 질렀다.
 “막아!”
 “놈이 다가온다.”
 스아아아앙!
 두 명의 무인들은 일월망망의 초식으로 몸 주위에 자욱한 막을 일으킨 후 일제히 몸을 퉁겨올리며 호두구를 팔방풍우(八方風雨)로 흔들었다.
 놀랍도록 빠른 수법이었고 질식할 것같이 강한 내력이 심어져 있었지만 범자대불의 몸은 그들의 움직임보다 더욱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두 팔을 벌리고 마치 팽이처럼 돌아가며 떨어져 내리는 범자대불의 몸에서 거역하기 어려운 나선형의 회전이 일어났다. 회전력을 이용해 병기를 퉁겨낼 수 있다는 것은 강한 내공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내공이 없다면 감히 회전력을 일으켜 찔러드는 병기를 퉁겨내거나 방어할 수 없었다.
 내력의 고갈로 평소의 범자대불이 뿜어낼 수 있는 무위(武威)에 비교해 현저히 약해졌다. 그러나 범자대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회전력은 무인들로서는 방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은 호두구를 휘두르는 무인들이 평소 견식하지 못했던 강한 강기였고 몸이 빨려들 것 같은 회전력이었다. 그들을 한 순간에 날려버릴 것 같은 강한 나선형의 강기는 바람 소리를 동반하고 무인들의 지척으로 다가들었다.
 한 순간에 범자대불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파파파파파!
 사람은 회전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뿌연 황색의 회오리만 보였다. 범자대불이 걸친 옷이 황의가사였기 때문에 그들은 황색으로 보이는 회오리만 보았을 뿐이었다.
 가가가각!
 호두구가 회오리에 부딪쳐 방향을 틀었다.
 무인들의 호두구는 회오리를 찔러 갔으나 불꽃을 일으키며 퉁겨져 무인들의 등 뒤로 방향을 틀었다.
 콰등!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리며 두 개의 신형이 허공으로 퉁겨졌다. 퉁겨진 신형들도 회전에 말렸는지 빙글빙글 돌며 날아갔다. 이어, 그들의 입에서는 비명이 터졌다.
 “크아아악!”
 “으헛!”
 비명과 함께 그들의 칠공(七孔)에서 피가 뿜어졌다. 팔이 부러졌는지 호두구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철퍼덕!
 이 장이나 날아간 무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한 번의 꿈틀거림도 없었다. 허공에서 이미 숨이 끓어진 듯 보이는 그들의 몸은 마치 칼로 저며놓은 듯 몸 이곳저곳이 갈가리 찢겨져 있었다.
 옷은 갈가리 찢겨져 나풀거렸고 드러나는 몸에는 수십 줄기의 상처가 남았다.
 사선으로 그어진 상처들이 무인들의 몸에 남겨진 상처였다. 마치 예리한 예도(銳刀)에 긁힌 것 같은 상처는 회전이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땅 속에 숨어 전진했던 네 명은 그렇게 생의 종지부(終止符)를 찍었다.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누구도 점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생생하게 살아 숨쉬던 그들 사 인은 이제 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것은 걸레처럼 찢어발겨진 육체였다.
 휘이이이이-
 진하고 역겨운 피비린내가 허공에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부유했다. 범자대불은 코를 씰룩거리며 혈향을 맡았지만 긴장을 늦추지는 않았다.
 ‘조금 전의 그 시주들은 홍모의 무리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홍모와 손을 잡은 자들인가? 들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막상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다.’
 범자대불은 눈 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오십여 회의 격전을 치르며 운남으로 도주했지만 지금까지 그를 공격했던 자들은 한결같이 홍모의 밀승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이 나타난 자들은 홍모의 무리가 아니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
 홍모의 무리들만도 벅찬 상대인데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자들이 목숨을 노린다면 그야말로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그들이 누구라는 것을 모르니 피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몸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2. 범자대불(梵慈大佛)
 
 
 “고약한 땡중이로군. 살계를 두려워하지 않다니.”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는 지면의 먼지를 핥듯이 다가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범자대불에게 화살을 날린 자들이 몸을 일으켰다.
 이십 명은 족히 될 것 같은 그들은 명령만 내려지면 언제든지 달려들 수 있다는 표정으로 잡아먹을 듯 범자대불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손에는 한결같이 냉병기(冷兵器)가 들려 있었다.
 그들이 걸치고 있는 백색 무복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등에 진 활과 전통(箭筒)의 화살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화살로는 아무런 이득도 보지 못할 것을 안 모양이었다. 그들은 차라리 접전으로 얻을 것을 찾겠다는 생각인 듯 보였다.
 ‘천룡사(天龍寺)의 법밀사들도 아니다. 그렇다고 대뢰음사(大雷音寺)나 소뢰음사(小雷音寺)의 존자들도 아니다. 도대체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침이 고였다.
 다가서는 무인들의 손에 들린 병기는 일정하지 않았다. 각기 다른 병기였다.
 ‘결코 약하지 않은 자들이다.’
 범자대불은 다가오는 자들 중에서 네 명의 무인이 놀랍도록 강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눈에 가득한 열기를 담고 있었는데 그것은 살기였다.
 그들 사 인의 앞에 선 이십여 명의 무인들은 눈에 뜨이는 정도도 아니었고 무공을 가늠해 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 사 인의 무인에게서는 놀라우리만치 가공한 기파가 뿌려지고 있었다.
 범자대불은 눈을 숙여 일순간에 지면을 훑었다.
 바닥에는 지둔술을 이용해 다가들었던 자들이 발출(拔出)했던 암기가 떨어져 있었다.
 탈수표(脫手)였다.
 탈수표는 비표(飛)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으로 날카로운 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범자대불에게 날려보낸 것은 앞은 삼각형으로 만들어졌고 뒤는 세 개의 뿔처럼 만들어진 것으로 각기 세 개의 표의(衣)가 붙어 있었다.
 ‘갖출 것은 모두 갖춘 자들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결코 녹록치 않은 무공을 지닌 무인들. 내 품 속에 있는 진경의 값어치를 모르지는 않지만 이렇게 많은 무인들이 홍모의 무리들과 손을 잡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범자대불은 목을 옥죄는 것 같은 궁금증을 느꼈다.
 그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울려왔다.
 “감히 승인의 몸으로 살생을 즐기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네놈의 악행이 하늘에 닿아 징계를 함이 마땅하나 진경을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범자대불을 둘러싼 자들 중에 맨 뒤에 서 있는 자.
 중년의 나이라 보기에는 나이를 먹었고 노인이라 부르기에는 젊어 보이는 사내가 나직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턱에 달린 수염이 눈을 잡았다. 마치 염소의 수염처럼 꼬여 바람에 떨리고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초로인(初老人)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지만 얼굴은 구리처럼 빛이 났다. 붉은 얼굴과 마구 자란 수염이 그가 누구인지 기억나게 만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음울하고 가라앉은 것 같았다.
 범자대불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손에 들고 있는 호아도(虎牙刀)에서 반사된 적광(赤光)에 유난히 눈이 부셨다.
 “혹시 호아철면(虎牙鐵面) 도자경(淘炙耕)?”
 “나를 아는군.”
 초로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범자대불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홍모교의 추적을 피하며 끊임없이 들어온 이름이었다. 운남으로 들어서자마자 귀를 아프게 했던 이름의 주인.
 운남십걸(雲南十傑)이라 했던가!
 서장과 운남은 맞닿아 있었다.
 더구나 운남에는 그럴 듯 이름을 날리는 무인이나 문파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인지 조금만 무공이 뛰어나도 이름을 얻기가 여반장이었다.
 도자경은 달랐다.
 운남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무인 중 열 손가락에 꼽히는 자가 바로 그였다. 운남에서는 보기 드물게 큰 문파, 벽운산장(碧雲山莊)의 주인이 바로 그였다.
 도자경이 벽운산장의 삼대 주인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의 호아도는 이름을 얻어 서장까지 심심지 않게 들려오고 있었고, 범자대불도 익히 들은 적이 있었다. 운남에 들어서자 그의 이름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서장에서 들었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진 이름이 바로 도자경이었으니 범자대불의 마음이 뒤숭숭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욕심을 부릴 만한 자였군.’
 범자대불은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본 대불은 벽운산장과 아무런 은원이 없는데 왜 핍박을 하는 것이오? 이 일은 벽운산장이 낄 자리가 아니니 그만 돌아가시기 바라오. 아마타불!”
 범자대불은 종용하듯 말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기는 하지만 그와 은원을 맺을 필요는 없었다. 가능한 그와의 충돌을 피해야 하는 것이 범자대불의 입장이고 보면 싸우기보다는 말로 설득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할 행동이었다.
 도자경이 빙그레 웃었다.
 범자대불의 말에 수긍이 간다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그가 바라는 바가 있었으므로 속이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몸을 비틀어 보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후후후! 법승, 범자대불이라 했던가? 이곳 영강(盈江)이 벽운산장의 땅이라는 것을 몰랐던가? 더구나 나는 홍모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으니 물러설 수 없다. 나는 옳고 그름을 떠나 의리를 중요시 여기는 사람이다. 은혜를 입은 적이 있으니 갚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지. 더구나 네놈은 이미 내 제자들을 죽였다. 네놈이 저지른 일이니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더구나 마빡에 머리털도 없는 네놈이 이곳에서 건방을 떠는 꼴을 그냥 두고 보라는 말이냐?”
 범자대불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의 의도가 명백하고 보니 달리 설득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고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는 두 발을 땅 위에 굳건하게 세웠지만 입은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누구도 이곳에서 나를 거역하지 못한다. 포달랍궁이라 해도 나를 어쩔 수는 없다. 네놈이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이 네놈의 명을 재촉했다.”
 도자경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범자대불은 더 이상 말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몸을 굽히며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손에 들린 염주가 꼿꼿하게 세워졌다.
 범자대불은 손에 내공을 실어 만약에 대비하면서도 마지막 설득을 주저하지 않았다.
 “시주, 나는 부득이하게 살계를 열었을 뿐이오. 귀파의 제자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본 대불 또한 살계를 여는 일은 없었을 것이오.”
 범자대불은 마음이 갑갑해졌다.
 입으로 말은 하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포달랍궁을 가볍게 볼 수 없음에도 도자경이 이리 난삽(難澁)하게 다가드는 것은 홍모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이 막연하게 길을 막은 것보다는 적지 않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벽운산장의 힘이 아무리 영강을 울린다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강은 작은 마을이었다.
 아무리 운남에서 힘을 얻고 있으며 무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해도 서장의 포달랍궁에는 미치지 못한다. 포달랍궁의 힘을 무시할 수 있는 방파(邦派) 따위는 운남 땅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미타불, 놀라운 일이오. 그럼 본 대불을 막는 것이 홍모와의 결탁이라 생각해도 좋겠소?”
 “법승,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는 하지도 말아라. 우리는 단지 우리의 땅을 보호하려는 것뿐이다.”
 도자경이 강하게 부인했지만 범자대불은 마음이 허락되지 않았다. 도자경이 입을 열어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해도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짐작일 뿐이지만 때로는 감(感)이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정확하다. 그러나 포달랍궁의 제자로서 그들이 두려워 도주했다는 말을 남기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는 죽을 준비가 되었겠지. 법승, 네놈을 서방정토(西方淨土)로 보내주고 가슴 속의 물건을 내가 가지겠다.”
 슥!
 도자경이 손을 들어올리자 갈대숲과 나무 밑에 엎드려 있다 몸을 일으킨 이십여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병기를 치켜세우며 앞으로 나섰다.
 “살인멸구(殺人滅口)! 나의 입을 막고 더러운 촉수를 내밀려는 수작인가?”
 범자대불은 온몸의 진기를 끌어올려 몸에 유포(流布)시키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단전이 꿈틀거리자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삶을 지탱하는 한 줌의 내기까지 모두 끌어올렸으므로 그의 몸은 마지막 불꽃을 피우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의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지만 누가 듣든지 모른 척하든지 관계없는 일이었다.
 ‘정신 바싹 차려야 한다. 어차피 이들을 뚫고 지나가기는 어렵다. 처절한 살육만이 있을 뿐이다.’
 범자대불은 입을 악다물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범자대불이 살계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서장에 모여 있는 네 개의 불파는 포교를 위해서는 병기를 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살계를 벌이지 말라는 불법에 따라 오래도록 수양한 그였지만 이제는 악(惡)을 멸하고 가슴 속의 진경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살계를 열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포교를 위해 살계를 여는 것.
 그것은 오랫동안 서장이 중원의 침공(侵攻)을 받았기 때문에 변질된 교리(敎理)이기는 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교리이기도 했다.
 “죽여라.”
 간단한 명령!
 도자경의 목소리가 울리자 이십 개의 신형이 바람처럼 날아들었다.
 각기 손에 든 병기는 달랐지만 목적은 하나였다.
 오로지 범자대불을 죽인다는 생각뿐이었기에 그들은 물밀듯이 다가들었다.
 파아아아아-
 땅이 울고 허공에 떠오르던 일광의 빛이 산산조각으로 갈라지는 순간, 이십여 개의 병기가 범자대불의 가슴에 이르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려 광망(光芒)을 뿜어내고 있는 길고 짧은 냉병기(冷兵器)는 한 순간에 범자대불의 몸을 갈가리 찢어버릴 것 같았다.
 수싯!
 날카로운 기파에 의해 바람이 수십 조각으로 갈라지며 예리한 한 쌍의 자모이환도(子母二還刀)가 목을 그어들었다. 한 쌍의 환도가 가슴에 이르는 찰나 범자대불의 몸이 변화를 일으켰다.
 “헛!”
 나직한 비명을 토하고 급히 신형을 주저앉혀 상체를 그어오는 수 개의 병기를 피한 범자대불은 마치 무릎을 꿇어앉은 듯한 상태에서 두 팔을 벌리고 땅을 박차고 몸을 세우며 몸을 돌리기 시작했다.
 파파팍! 파파팍!
 검은 광채가 나는 염주가 허공에 보이는가 했는데 이내 무인들이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거친 기파에 말린 무인들의 입에서 경악이 울렸다.
 한결같이 백의무복(白衣武服)을 입고 있던 무인들의 다리가 붉게 물들었다.
 “으응!”
 “다리······ 다리를 조심해! 어이쿠!”
 염주가 허공을 격하고 움직이며 다가오는 무인들의 정강이를 사정없이 후려친 것이었다. 동시에 무인들은 심하게 몸을 휘청거리며 중심을 잃었다.
 범자대불을 찌르던 병기가 방향을 잃었다.
 “큭!”
 “검이 엉겼다.”
 방향을 튼 병기가 동료를 찔렀고 뒤따라 달려온 동료의 투로(鬪路)를 막았다. 절묘한 한 수라 아니할 수 없는 방어였고 적절한 공격의 효과를 노리는 반전이었다.
 “앞을 막는 자는 모두 죽인다.”
 범자대불의 목소리가 울리고 그의 몸이 퉁기듯 일어서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회전을 일으켰다.
 돌아가는 그의 몸에서 돌풍 같은 회오리가 일어나며 그를 찔러 가다 엉겨 있던 병장기들이 사방으로 퉁겨졌다. 범자대불은 몸을 회전시키며 연속으로 장을 휘둘렀다.
 손바닥에서는 기파가 일어났고, 기파는 눈이 달리기라도 한 듯 정확하게 목표를 찾아 날아갔다.
 대수인(大手印).
 천축과 서장을 거친 권격이 만들어낸 절초가 허공에 무수한 그림자를 만들어낸 것도 잠시뿐.
 콰콰콰! 콰등!
 창! 차차창! 카카캉!
 비가 오려는지 우레 같은 소리가 들리고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컥!”
 “피해. 우아아악!”
 비명 소리는 병기가 부딪치는 소리의 뒤를 따랐다.
 누가 보아도 아비규환(阿鼻叫喚)의 생지옥(生地獄)이 드러나고 있었다. 달려들던 무인들은 백의를 적의(赤衣)로 변모시키며 날아갔다.
 허공으로 붉은 피가 비산(飛散)했다.
 무인들은 한무더기가 되어 나뒹굴기도 하고 피를 토하며 바닥을 기기도 했다. 팔다리를 축 늘어뜨리고 허공으로 날아가는 자도 보였다.
 “으으으으!”
 “사신(死神)이다! 밀교의 환술(幻術)이야.”
 비명이 울리고 무인들은 나뒹굴었다. 그들은 이미 사람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져 있었다.
 범자대불이 몸을 멈추었을 때 그의 가사는 걸레처럼 이곳저곳이 찢겨져 있었다. 그러나 입가에 흐르는 가는 핏줄기를 제외하고는 이십여 명의 합공을 감안할 때 비교적 온전한 것 같았다.
 다만 염주는 보이지 않았다.
 몸을 회전시키며 기파를 뿌려 몸으로 다가드는 병기를 염주로 막는 과정에서 염주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사방으로 퉁겨져 날아간 것이었다.
 ‘윽! 내상이 깊어졌다.’
 범자대불은 몸을 세웠지만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비록 그에게 달려든 무인들은 예상했던 것보다는 내공이 약한 자들이었지만 숨돌릴 사이를 주지 않고 연속으로 공격을 해왔기 때문에 단신으로 부딪쳐야 하는 범자대불로서는 몸에 이는 충격이 적지 않았다.
 이십 명의 무인 중 범자대불을 상대하기 위해 몸을 일으킬 수 있는 무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 몸이 부서지거나 서로의 병기에 몸이 상한 무인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비명만을 토할 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한 번 대수인을 사용하고 싶었지만 이미 진기의 소모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또한 내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다시 한 번 대수인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의 분노를 차갑게 가라앉혔다.
 ‘음, 심한 내상을 입었다. 저들과 싸우기보다는 남은 진기로 멀리 도주했어야 하는 건데······ 실수였다.’
 범자대불은 마음이 쓰렸다.
 비록 그들을 모두 물리치기는 했지만 충격을 입어 원하지 않은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내상을 입었다고 도주하거나 멈출 수는 없었다. 도주를 하면 아마도 어디선가 보고 있을 홍모의 무리들이 자신을 추적할 것이고 결과는 예측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도주한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범자대불은 비통하게 울리는 비명을 뒤로하며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바로 했다.
 “무서운 법승이로군.”
 도자경이 나직하게 부르짖었다.
 “아주 좋아!”
 “아미타불! 범자의 목숨도 이곳에서 끝이로군. 살계를 열었으니 서방으로 가기는 틀린 일 아닌가?”
 나직한 목소리가 울리며 도자경의 등 뒤로 붉은 그림자가 몸을 일으키며 다가들었다. 한결같이 홍의가사를 걸치고 붉은 원두모를 쓰고 있어 그들이 홍모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알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한결같이 중년 이상의 나이를 먹은 밀승들이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천축에 머물렀던 범자대불은 갑자기 나타난 네 명의 밀승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범자대불은 의도적으로 몸의 진기를 외부로 발산하며 발걸음을 옮겨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것만이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허장성세(虛張聲勢)였지만 조금 전 자신이 보여준 정도라면 충분히 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등 뒤에서 밀려오는 살기와 병기의 기운으로 보아 이미 포위된 상태였다. 그러나 만약 그들을 물리치고 달려갈 수 있다면 도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도자경과 네 명의 밀승 뒤에는 포진한 무인들의 기척이나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범자대불의 발 밑에 피가 떨어졌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의 복부에는 상처가 남아 있었다. 도자경과 그의 곁에 서 있는 무인들이 몰라본다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잠깐!”
 범자대불이 다가들 때 도자경이 손을 들었다. 범자대불은 그의 손을 보며 몸을 멈추었다. 그러나 눈에서 피어오르는 강렬한 눈빛은 지우지 않았다.
 “잠깐이라니?”
 “우리가 싸울 필요가 있을까?”
 “싸울 필요? 이미 시주는 나에게 공격을 했소. 본승은 반드시 빚을 갚는 성미요.”
 범자대불은 속으로 웃고 싶어졌다.
 운남에 그 명성이 자자한 도자경이 자신의 부하들이 죽었는데도 싸움을 거부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먼저 싸움을 걸었고, 먼저 싸움을 중지하자는 제안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는 영강에서는 황제처럼 군림하는 벽운산장의 당대 장주가 아니던가!
 그것이 속임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도자경에게 유리했다. 범자대불로서는 한시라도 그들의 눈에서 멀어져야 했다.
 범자대불은 마음 속으론 그만 멈추고 싶었지만, 만약 기운을 흩뜨리고 물러선다면 그들이 자신의 상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법승, 당신이 이곳으로 온 것을 포달랍궁이 알고 있소?”
 범자대불은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것이 두려웠군.’
 범자대불은 도자경이 싸움을 중지하고자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결국 범자대불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포달랍궁이 두려운 것이었다.
 겉으로야 벽운산장이 어떻다는 등, 홍모와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가 얻고자 하는 것은 가슴 속의 진경이었고, 두려운 것은 포달랍궁의 힘이었다. 만약 포달랍궁이 움직인다면 벽운산장 정도는 그야말로 태풍에 쓸려가는 논바닥 같은 처지에 불과했다.
 도자경이 모를 리 없었다.
 만에 하나 범자대불이 살아난다면······
 포달랍궁이 지니고 있는 무공을 모르는 무인은 아무도 없었다. 도자경이라 해서 모를 리가 없었다. 범자대불은 마음 속으로 하얗게 웃었다.
 “본승이 움직인 것은 달라이라마의 명령.”
 범자대불은 의도적으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것으로 도자경이 물러설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었다. 그가 물러선다면 그나마 한 명의 적은 줄어드는 셈이다. 무엇보다 도자경이 이끄는 무인들을 물러서게 함으로써 범자대불은 자신의 몸을 추스를 수가 있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도자경의 얼굴이 똥 씹은 얼굴이 되었다.
 “잠깐, 나는 비록 운남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명성과 무공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달라이라마를 상대하고 싶지는 않다.”
 “본승을 건드린 것은 너희들이다.”
 “그것은 실수였다. 우리는 달라이라마의 이름 앞에 나서고 싶지 않다. 법승은 나의 부하들을 죽였으니 이것으로 모든 책임을 묻지 않겠다.”
 범자대불은 웃고 싶어졌다.
 도자경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운남을 지탱하는 열 명의 무인 중 하나라는 도자경이 꼬리를 만다는 사실이 허파가 뒤틀리도록 우스웠다.
 범자대불은 한 발 다가섰다.
 “벽운산장이 포달랍궁을 업신여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물러설 수 없다.”
 도자경의 이마가 좁혀졌다. 그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범자대불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부하를 풀었던 사람이었다. 이십 명에 이르는 부하들이 모두 죽거나 다시는 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는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좋다. 우리는 이곳에서 물러가겠다. 우리 벽운산장은 포달랍궁을 건드리지 않겠다.”
 도자경이 몸을 돌렸다.
 그것으로 자신의 의사(意思)를 모두 표현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범자대불은 멍한 표정으로 도자경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맥이 풀리고 어이없는 일이었다. 죽이기 위해 덤벼들 때는 언제고 일방적으로 싸움을 중지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그가 지닌 생각은 무엇이란 말인가?
 도자경의 행동은 지난밤 토묘에서 몸을 숨기고 쉬려 할 때 일단의 무리로부터 갑자기 습격을 당했던 것과 같이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난밤 습격을 했던 자들이 누구인지는 불분명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가 찾아낸 한 자루의 비침에 흔하지 않은 독이 발려져 있었다는 것.
 그는 자신을 공격하는 자들 중에 독을 사용하는 자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이기는 하다.’
 범자대불은 숨을 몰아쉬었다. 입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피냄새가 다시 느껴졌다. 지나친 심력의 낭비가 호흡을 거칠게 만들자 피가 목을 타고 오른 것이다.
 “장주, 이 무슨 망발이오. 지난날의 호의를 잊었다는 말이오?”
 도자경의 등 뒤에 서 있던 밀승 중 한 사람이 벽력 같은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격한 숨결을 토하며 앞으로 나서자 망설임 없이 손에 들고 있던 선장(禪杖)을 휘둘렀다.
 사사삭!
 바스락!
 풀이 밟히는 소리가 들리며 이곳저곳에서 홍모의 밀승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손에 들린 병기가 석양을 반사시켰다.
 “놈을 죽여라!”
 밀승의 말이 떨어지자 함성이 울리고 일진광풍이 몰아쳤다. 갈대숲을 벗어난 일단의 밀승들은 삼십여 명이 넘었다. 그들은 발 밑에서 황토와 작은 돌을 피워올리며 달려들었다.
 그들이 다가오는 방향은 등 뒤쪽과 옆.
 범자대불은 앞을 노려보았다.
 ‘방법은 하나.’
 범자대불은 이를 악물었다.
 팍!
 그의 발이 땅을 박찼다.
 그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가자 네 명의 밀승과 도자경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범자대불은 이를 악물고 염주를 허공에 휘둘러 무수한 기파를 뿌렸다.
 그의 신형이 빨라졌다.
 
 
 2장 화마(火魔)는 천중을 가르고 소녀는 눈물을 뿌리니 천년영화가 사라지기 전에 길을 떠나야 한다
 
 
 1. 화광충천(火光衝天)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든 장원은 누구 하나 다가오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산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늦은 시간.
 장원의 하인들조차 모두 잠든 야심한 시각에 목잔홍(木盞泓) 부부와 그의 딸은 주안상(酒案床)을 마련해 놓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참으로 기쁜 날이었다.
 나이 사십에 아내가 임신을 하다니······
 일찍이 사천 남부에 그럴 듯한 장원을 세웠고, 가전(家傳)의 무공을 십이 성 연성해 사천무림에서는 자전신도(紫電神刀)라 불리는 목잔홍이 아니던가?
 아들이 없음에 늘 섭섭해 하던 그였다.
 딸이 한 명 있기는 했지만 목가(木家)는 대대로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무공까지 전수해 주었다. 딸이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수십 대를 전해 내려온 가문의 전통을 묵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조상에 대한 후인의 예의이기도 했다.
 오래도록 노력을 했다.
 심산유곡(深山幽谷)을 찾아 깊은 곳에 자리를 마련해 빌기도 했었고 부처 앞에 적잖은 시주를 했다.
 기쁜 일이었다.
 이른 저녁에 다녀간 의생은 그들 부부에게 자식이 생겼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이가 사십이나 된 아내가 십오 년 만에 다시 임신을 한 것이었다.
 “아버님, 어머님! 축하드려요.”
 목진추(木珍秋)는 맑은 음성으로 축하를 했다.
 목가 집안에 태어난 것이 그녀에게 복이기는 했지만 아들이 없어 늘 근심을 버리지 못했던 부모에게 태기가 있다는 사실은 경하할 일이었다.
 목진추,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지 않아 선남(善男)들의 발로 문지방이 닳아지게 만들 것 같은 용모를 지닌 여아였다. 그녀는 용모뿐 아니라 재기도 출중하여, 일찍이 총명함으로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목잔홍의 무공을 오 성 이상 전수받은 귀재였다.
 목잔홍 부부가 늘 한탄을 했던 딸.
 차라리 남자였다면 하는 생각으로 그들 부부는 딸을 볼 때마다 늘 안타까웠다.
 “아이, 애도 참!”
 한때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다던 상단(商團)의 딸인 어머니 도금영(都琴瑛)이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손에 들고 있던 식저(食箸)를 흔들었다.
 나이 사십에 아이를 수태했다는 것이 그리 자랑만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허허허! 당신도 참, 오늘 같이 좋은 날에 웬······”
 말을 이어가던 목잔홍이 말을 멈추었다.
 가볍게 들려오는 소리.
 삼 층으로 만든 누각은 목조로 만들었기 때문에 누군가 계단을 타고 오르기라도 한다면 삼 층까지 약간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목가장(木家莊)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걸음을 걷는 데 상당히 조심을 했다.
 극히 의도적이었다.
 목잔홍은 건물을 지을 때 난삽한 무림에서 살아남기 위한 여러 가지 방도를 취했다. 특이 자신이 대문파의 제자도 아니었고 가전무공으로 이름을 얻었기 때문에 언젠가 불행이 다가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건물도 그런 일환으로 지어졌다.
 사람이 들어서면 울리게 만든 것이다.
 목잔홍의 멈칫함에 놀란 도금영이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 불안한 기색으로 남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보, 무슨 소리 들리는 것 같지 않아요?”
 다다다다-
 갑자기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전각이 울리는 것 같은 흔들림이 일어나 음식이 가득 차려진 식탁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상하군. 하인들은 모두 잠을 잘 텐데. 누가 이리도 경망스럽게 계단을 박차고 올라온다는 말인가? 아직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목잔홍은 의아하다는 목소리를 토했다. 그의 말대로 누구를 막론하고 계단을 뛰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목잔홍이 늘 강조하는 일이었기에 그의 가솔들이나 식솔, 심지어 하인들도 익숙해진 일이었다. 더구나 그의 아내가 임신했다는 것을 모르는 하인은 없었다.
 다른 때보다도 더욱 조심을 해야 하건만.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 소리는 거칠었다. 그 발걸음에는 목잔홍이 늘 강조하는 예의가 없었고 지나칠 정도로 소란스러워 짜증이 밀려올 정도였다.
 그들은 한동안 마주보다 생각난 듯 몸을 일으켜 벽에 걸려 있는 각자의 병기를 들었다.
 목잔홍은 거궐도(巨闕刀)를 들었고 목진추는 직도(直刀)를 들었다. 어쩐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서 그들은 모두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아닐까요?”
 도금영이 불안한 안색을 띠었다.
 한 달 전, 일단의 무리들이 몰려왔었다. 그들은 목잔홍에게 중원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 했었고 앞장서서 지리를 안내해 달라고 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들이 중원인도 아니고 그다지 익숙하지 않은 서장의 홍모교도(紅帽敎徒)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목에 칼을 물고 넘어지는 한이 있어도 들어줄 수 없는 말이었다.
 “모두 조심하시오.”
 목잔홍은 거궐도를 치켜들고 문을 노려보았다.
 다다다다다-
 바삐 올라오던 발걸음 소리가 문 앞에서 멈추었다.
 ‘이상하다. 기분이 좋지 않아.’
 목잔홍은 가슴이 타는 것 같았다. 야밤에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는 결코 기분을 즐겁게 하지 않았다. 근래 들어 목가장은 여러 가지 위난(危難)에 접해 있었다. 홍모의 무리들이 굳이 목가장을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목가장은 작은 문파였으므로 그다지 큰 힘이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앞장을 서라 하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었다.
 “누구냐?”
 목잔홍은 몸을 일으키며 물음을 던졌다.
 대답이 없었다.
 목잔홍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목진추는 부친 곁으로 다가갔다. 목잔홍은 벽에 붙어서며 나직하게 말했다.
 “너는 여차하면 어머니를 모시고 창문을 타넘어라. 암하노불(岩下老佛) 아래 가면 우리 가문의 비전절학을 모두 모아두었다. 만약 발자국의 주인이 의도적이고 이유가 있다면 나와 헤어질 수도 있으니 대비하거라.”
 목진추는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나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쾅!
 문이 부서지며 사람들이 난입한 것은 그때였다.
 “누, 누구냐?”
 목잔홍이 벽력처럼 소리를 질렀다.
 나타난 자들은 한결같이 얼굴에 검은 두건을 쓰고 있었고 손에는 병기를 들고 있었다. 목잔홍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느끼고 몸을 일으키며 일도를 그었다.
 스팟!
 “크어어억!”
 허공으로 백선이 그어지며 난입했던 복면인 중 하나가 가슴을 부여안으며 쓰러졌다. 그의 가슴에서는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천장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슈슈슈슈!
 허공에서 암기가 날아들었다.
 파파팍!
 목잔홍이 몸을 뒤채이며 연속으로 전차륜(前車輪)을 전개하자, 그의 몸을 벗어난 암기가 벽에 박혔다.
 갈미구(蝎尾鉤)였다.
 “당문(唐門)인가?”
 목잔홍이 소리를 질렀다.
 갈미구는 두 개의 바늘과 구부러진 낚시 바늘 같은 암기가 결합된 것으로 사천당문의 독문암기였다.
 당문이라는 소리가 울리자 복면인 중 칠 척에 이르는 한 무인이 번개처럼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에서 번쩍이는 빛이 마치 은하수 같았다.
 차차창!
 검과 도가 부딪치며 불똥이 튀었다.
 “도망가라!”
 검을 막는 중에도 목잔홍의 목소리는 거칠게 울려나왔다. 방 안 가득 병기가 어우러지고 음식을 차렸던 식탁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음식물이 허공으로 날았다.
 복면인들의 무공은 눈부신 것이었지만 누구도 단번에 목잔홍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거궐도가 중병(重兵)이기도 했지만 좁은 공간이기에 몰려든 사람 모두가 끼여들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네놈들은 누구이기에······”
 거궐도를 휘둘러 몸으로 다가오는 병기를 후려치며 목잔홍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복면인들 누구도 입을 열이 않았다. 마치 꿀 먹은 벙어리 같았다.
 그때였다.
 “와아아아!”
 “불이야! 불이 났다.”
 갑자기 누각 밖에서 소란스럽게 소리가 울려나왔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스님들이 사람을 죽인다!”
 “어서 도망가라!”
 비명과 병기가 충돌하는 소리 속으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울리기를 수 차례.
 “네놈들이······ 홍모의 앞잡이로구나!”
 목잔홍은 미친 듯 소리를 질렀다.
 그사이 목진추는 몸을 물리며 어머니 도금영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무공을 몰랐다. 몸이 굳었는지 자연히 발은 더뎠고 마음대로 할 수도 없었다.
 목진추는 직도를 휘두르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며 물러섰다.
 “저년들도 죽여라!”
 갑자기 함성이 울리며 서너 명의 무인들이 몸의 방향을 틀어 공격해 왔다.
 선장(禪杖)이 휘둘러지고 검이 다가들었다.
 그녀는 연속으로 가문의 비전도법인 자전신도십이결(紫電神刀十二訣)을 전개했지만, 단 한 번의 충돌에 손발이 풀리고 헛구역질이 일어나며 내공의 부족으로 연속 뒷걸음질칠 수밖에 없었다.
 “카아아아!”
 비명이 울리며 도금영이 목을 부둥켜안으며 무너졌다.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대전의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언제 병기가 스치고 지나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여, 여보!”
 부인의 죽음에 혼백이 달아난 목잔홍은 급히 몸을 돌리다 어깨에서 피를 뿜었다. 팔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등에서 다시 한 번 피가 솟구쳤다.
 “크아아악!”
 그의 입이 벌어지며 비명이 울렸다.
 목잔홍은 손을 들어 허우적거렸으나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고 대신 허공으로 날아든 장검이 그의 목을 베어갔다.
 삭!
 고기가 육도(肉刀)에 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목잔홍의 목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잘려진 목잔홍의 머리는 분노로 인한 것인지 눈을 감지도 못하고 있었다.
 “안 돼!”
 목진추는 비통하게 소리를 토하며 직도를 휘둘러 나아가다 복부를 파고드는 기파에 밀려 연속 일곱 걸음을 물러섰다.
 턱!
 그녀는 물러서다 걸음을 멈추었다.
 등에 닿는 것이 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목진추는 눈 앞이 캄캄해졌다. 남은 것은 오로지 죽음뿐이었다. 부모님을 죽인 자들이 그녀를 살려둘 리 없었다.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입을 막을 것.
 ‘이젠 죽나 봐!’
 만약 등에 닿는 벽이 없었다면 더욱 멀리 물러났으리라. 막상 물러섰지만 그녀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그녀를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검을 완전하게 피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나를 죽이시오.’ 하며 목을 내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하체가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직도를 앞으로 내밀었다.
 죽기 전까지는 그들과 싸우든지 도주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생각 같아서는 부모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미 난도질당해 어육(魚肉)이 되어버린 후였다.
 “뭐지?”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과연 방 안에 연기가 차고 있었다.
 화르르르!
 창으로는 불길이 치솟아 올라 독사의 혀처럼 날름거렸다. 한 순간 복면인들의 공격이 소강상태(小康狀態)를 이루었다. 그들로서는 어린 계집애 하나 때려잡지 못할 것 같으냐 하는 생각인 듯했다.
 슈으으으!
 계단을 타고 솟구친 연기가 모두의 행동에 제약을 주었다. 방 안 가득 연기가 몰려들었다.
 “제길! 이 누각은 불사르지 않기로 했잖아.”
 누군가 불만을 토했다.
 다다다당!
 갑자기 누군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뭐냐?”
 복면인들이 엉거주춤 눈을 돌렸을 때 하나의 물체가 방 안으로 날아들었다.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진추는 흐릿한 인형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장주님!”
 나타난 자는 육십대 후반의 노인이었다.
 전신에는 허름한 마의를 입었지만 놀랍도록 깨끗했고 잠을 자다 일어난 듯했지만 의복은 모두 갖춘 것으로 보아 격식을 차리고 있었다. 더구나 그의 허리에 걸려 있는 한 자루의 채찍은 평범했으므로 그가 마부(馬夫)라는 것을 알게 했다.
 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죽은 목잔홍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도금영도 마찬가지였다.
 목진추는 나타난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마장을 손질하고 말을 기르는 하인 중 한 명인 진노(陳老)였다. 언제나 그녀의 가까운 곳에 있는 하인이었다.
 “진노?”
 “아가씨!”
 진노는 번개처럼 채찍을 휘두르며 연기 속을 헤치고 목진추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평소 구부정한 모습에 말이 없는 노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무공을 지녔을 것이라 생각지 못했지만 그의 채찍에는 기파가 실려 있었다.
 복면인들이 어지럽게 몸을 날렸다.
 목진추는 순간 자신이 진노의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것 같았다.
 눈을 뜨고 보니 그녀의 몸은 이미 누각을 벗어나 있었다. 삼 층이나 되는 높은 누각이었지만 진노는 그녀의 몸을 안고 허공으로 날아 내리고 있었다.
 등 뒤가 뜨거웠다.
 누각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이제 늦었습니다. 두 분은 이미 돌아가셨으니 우선은 아가씨가 살고 볼 일입니다.”
 땅에 착지하고 보니 말 두 필이 있었다. 아마도 장주 부부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것 같았다.
 “타세요.”
 진노는 자신이 앞의 말에 타며 재촉했다.
 그녀는 어린 마음에도 무작정 도주할 수는 없었다. 부모의 죽음을 눈으로 보고 시체를 보았는데 어찌 그들의 발 아래 팽개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녀는 머뭇거렸다.
 팽!
 진노의 몸이 퉁겨지듯 날아오며 그녀의 혼수혈(昏睡穴)을 짚었다. 그녀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무너졌다.
 “찻!”
 진노는 채찍을 휘둘러 그녀의 몸을 말에 옆으로 실은 뒤 자신도 말에 올랐다. 그리고 두 개의 고삐를 쥐고 미친 듯 채찍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말이 달리자 불길이 멀어졌다.
 “추적하라!”
 우레 같은 외침이 들리며 복면인들이 불타는 누각에서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들이 내려섰을 때 이미 두 마리의 말은 오십여 장을 내달리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바람처럼 달리는 명마(名馬)였고 준족(駿足)이었다. 누각에서 날아내린 십여 명의 복면인들은 미친 듯 경공을 전개해 말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그 뒤에는 홍모의 무리들이 가사를 펄럭이고 있었다.
 
 
 2. 포달랍궁(布達拉宮)
 
 
 화르르르-
 향로(香爐)에서는 파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방은 칠흑처럼 어두웠지만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으로 인해 어슴푸레하기는 해도 방 안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어려움이 없었다.
 새어드는 바람이 없었음에도 불꽃은 간간이 치솟아 오르며 방 안의 밝기를 변화시켰고, 그때마다 사람은 움직이지 않는 듯했으나 길게 누운 그림자는 깊은 물 속에서 흔들리는 해초처럼 흐느적거렸다.
 방 안은 탁해 보였다.
 희미한 불꽃에 보이는 실내는 매우 넓었으며 사방의 벽이 모두 돌로 조각조각 맞추어져 있었다.
 화르르르!
 타오르는 것은 불꽃만이 아니었다.
 향촉!
 원탁에 놓여진 향촉은 가벼운 바람에도 일렁이며 돌로 만들어져 있는 벽을 비추었다.
 벽을 구성한 돌에는 사방으로 돌아가며 조각이 되어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조각은 양각(陽刻)으로 돌출되어 향로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일렁거릴 때마다 음울한 그림자가 튀어나올 듯 몸체를 내밀었다.
 조각은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상조각(佛像彫刻)이었다. 다만, 중원에 세워진 일반의 절에 모셔져 있는 불상조각과 탱화보다는 크고 웅장하게 새겨져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모양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유난히 눈에 뜨이는 것은 채색이 중원의 불상보다는 화려했다.
 거대한 불상조각의 크기는 방의 천장이 높다는 것을 대변하는 듯 보였다. 중앙 벽면에 새겨져 있는 불상은 크기가 칠 척의 키를 가진 어른의 키보다 다섯 배 이상은 컸다.
 휘르르르-
 고요함이 흐르는 방 안에는 바람도 없건만 불꽃이 두 자는 피어올랐다. 불꽃이 피어오르자 사람들의 모습이 다시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사람의 그림자.
 향로의 불빛과 향촉이 비틀거릴 때마다 드러나는 사람의 동체(動體).
 향로 주위에 앉아 있는 칠 인은 모두 승인의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한결같이 몸에는 잿빛이 도는 승복을 둘렀으며 어깨에서부터 무릎 아래에 이르기까지 황색의 가사로 몸을 감싸 그들이 오래도록 절 밥을 먹은 승인들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향로의 정면, 방 안의 중앙에 앉은 한 명의 노승이 보였다. 허리에 이르는 긴 수염을 탐스럽게 지니고 있었으며 목에는 배꼽에 이르는 긴 염주를 걸고 있었다. 다른 승인들도 한결같이 목에 염주를 걸고 손에는 묵주(珠)를 쥐고 있었다.
 “후!”
 파르르르!
 누구의 입에선가 긴 한숨이 몰려나왔고 기다렸다는 듯 향촉은 발정 난 계집처럼 춤을 추었다.
 불꽃이 일렁이는 데 따라 모여 앉은 승인들의 얼굴에도 밝음과 어둠이 스쳐 지나갔고 그림자도 길게 늘어졌다 다시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중앙에 앉아 있는 수염이 긴 노승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범자대불, 그 아이가 홍모교의 무리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달라이라마시어, 아무래도 그들은 그 아이가 지닌 세존(世尊)의 보물을 탐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허어! 고얀 일이로구나. 삼 년에 걸려 성사시킨 일이 한 순간에 재가 되다니. 그래! 언제 누구에게 들었는고?”
 “예. 발탁(拔鐸)이 돌아왔습니다.”
 노승의 정면에 앉은 중년승인이 손을 모아 합장하며 말했다. 삭도로 밀어낸 머리에서도 희다 못해 파르라니 빛을 뿌렸다.
 빛이 잘게 부서지는 듯 보일 지경이었지만 누구도 관심을 가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눈을 찡그리는 것이 마음이 산란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특히 달라이라마라 불린 노승의 얼굴에 어리는 표정은 추측불가의 산란함과 경건함이 어려 있었다.
 “발탁이 돌아왔다고. 난 보지 못했거늘. 왜 나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느냐? 그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고?”
 중년승인의 말에 달라이라마는 매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놀라움 속에는 반가움도 가득했다. 아마도 발탁이라고 부르는 승인은 그가 기다리던 매우 중요한 사람인 것 같았다.
 달라이라마는 가볍게 손에 들린 백팔염주를 굴렸다. 자단목으로 정성 들여 깎은 염주는 소리없이 노승의 손가락 사이를 핥듯이 미끄러졌다.
 “발탁이라면 범자와 함께 천축으로 떠났던 아이가 아니더냐? 발탁이 돌아왔다면 의당 범자대불, 그 아이도 와야 하거늘 이 무슨 해괴한 일인고.”
 “아미타불!”
 중년승인은 감히 대답하지 못하고 법구(法句)를 되뇌었다. 다른 승인들도 난감한 표정으로 노승과 중년승인을 바라만 볼 뿐 딱히 입을 열거나 대꾸하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노승과 눈이 마주치면 목을 떨구고 고개를 숙이는 것밖에 없었다.
 노승의 입가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어허! 큰일이로구나. 세존을 어찌 뵈올 수가 있을까!”
 노승의 목소리가 탄식으로 물들었다.
 또로로로-
 한 알의 굵기가 호두알만한 염주가 그의 손에서 마찰을 일으켰다. 포달랍궁의 주인들에게만 물려진 보물! 무려 이십대를 물려온 염주였다. 천축에서만 자라는 자단목으로 만든 귀한 염주였다.
 노승은 쉴 사이 없이 염주를 굴렸다.
 “꼭 보물을 찾아야 합니다. 이미 천 년 전 당조(唐朝)의 문성공주(文成公主)께서 서장에 불심을 안고 온 이래 지금처럼 환란을 겪은 적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천 년 만에 무너진 포달랍궁을 다시 세운 때가 아닙니까! 만약 이번 일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 포달랍궁은 횡액을 일삼는 황음(荒淫)의 무리에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으음!”
 노승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황모의 법종(法宗)을 계승한 이래 이토록 곤혹스러운 일은 한 번도 없었거늘.’
 달라이라마!
 서장의 등불이며 모든 불자의 정신적 지주가 바로 그였다.
 달라이라마의 얼굴에 수심이 밀려들었다. 눈에는 오래도록 불심에 젖어 자비를 베풀었던 고승대덕(高僧大德)답지 않은 짙은 고뇌가 구름처럼 걸려 있었다.
 “그래, 발탁은 어디 있느냐?”
 “그게······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아미타불······”
 중년승인이 고개를 숙였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매달렸다.
 설사 포달랍궁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불심이 깊고 굳건한 심장을 가진 승려였지만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달라이라마 앞에서는 거짓을 고하기도 쉽지가 않았기 때문에 좌불안석(坐不安席)의 상태였다.
 “범천(梵舛),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다. 그가 전한 말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중년승인은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쉴새없이 그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다. 간혹 눈썹을 찡그리기도 했고 입술을 가늘게 떨기도 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 때, 그는 입을 열었다.
 “발탁 사질은 이미 입적했습니다.”
 “흐흠!”
 달라이라마의 얼굴에도 고통이 어렸다. 이미 세수가 백 세를 넘은 고승이었으나, 그도 인간이기에 제자의 죽음을 그냥 넘기기는 어려운 것 같았다.
 달라이라마의 눈가에 가늘게 떨리는 잔주름이 바람에 일어나는 물가의 파랑 같았다.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지만 달라이라마의 몸도 가볍게 흔들렸다.
 “그가 남긴 말을 나에게 해다오.”
 “발탁은 범자대불 사제와 함께 천축을 출발해 희마랍아산령을 돌아 무사히 서장으로 돌아왔다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단파강에 다다랐을 때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승인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단의 속인(俗人)들이 나타나 기다리고 있었기라도 한 듯 무차별 도륙을 했다 합니다.”
 “그래서 모두 열반에 들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다행히 범자대불 사제만이 진경을 품에 지닌 채 남쪽 방향으로 도주했다 합니다. 발탁의 말을 들어보건대 홍모의 두 개 파와 뢰음사(雷音寺)의 두 개 파가 연합하여 진경을 탈취하고자 모두 몰려든 듯합니다.”
 부르르-
 파지직!
 달라이라마의 몸이 격하게 떨렸다. 눈에서는 철판이라도 녹일 것 같은 안광이 쏟아졌다. 달라이라마의 눈에서 쏟아지는 안광은 분노였다.
 눈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대신 이를 악무는 달라이라마의 입에서는 비통하리만치 싸늘한 음성이 흘렀다. 불가의 몸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한기가 깃든 음성이었다.
 “천하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피를 쏟았건만 그것을 노려 피를 보다니, 범연(梵衍)!”
 “예! 대라마.”
 다른 한 명의 승인이 몸을 일으켰다.
 얼굴에 수염이 가득한 승인으로, 승인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도살장의 주인으로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을 지닌 승인이었다. 그의 고리 같은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더구나 구 척에 이르러 보이는 키는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다. 서장의 척박한 땅에 몸을 묻고 살아가는 장족(莊族)과 몽고족(蒙古族)은 눈에 표시가 나게 작아 중원인들은 서장인들을 가르켜 단구신(短龜身)이라고 놀려대기까지 했다. 서장인이 구 척의 키를 지녔다는 것은 중원인들로 치자면 십이 척에 해당하는 거인이나 다름없었다.
 “어서 범자의 뒤를 추적하도록 하라. 범자의 종적을 추적하고 그가 지니고 있다는 최후의 비결을 찾아오도록 하라. 우리 서장의 안위가 그것에 달렸다.”
 “알겠습니다, 대라마.”
 범연이 서서히 몸을 움직였다. 그를 따라 다시 다섯 명의 승인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몸에서는 조심스러운 기운이 안개처럼 흘렀다.
 범연의 사제들인 승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달라이라마가 얼마만큼의 인내심으로 마음을 태우고 있는지.
 “저희들도 따라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라. 닝마파나 샤까파의 뒤를 밟으면 범자를 구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니 신속하게 행동에 옮기도록 하라.”
 달라이라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창노한 목소리에는 분노가 진하게 배어 있어 그가 얼마나 격분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법승들은 몸을 일으켜 손을 모아 합장을 한 뒤 조심스럽게 물러났다. 그들이 물러나도록 달라이라마는 묵묵히 앉아 타오르는 향촉을 바라볼 뿐이었다.
 타오르는 향촉 속에 지난날의 영화와 우울함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불심(佛心)을 찾았거늘······”
 달라이라마의 이마에 깊은 골이 패였다.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날로 회귀하려는 홍모의 불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안쓰러워지기도 했다.
 모든 것을 버린 불자이건만······
 서장은 오랫동안의 먼지를 걷어내고 질곡에서 새로이 깨어나고 있었다.
 오래 전, 중원에 당조가 들어섰을 때 서장은 손첸캄포의 손에 의해 토번황조(土蕃皇朝)가 들어섰었다.
 손첸캄포는 서장을 처음 통일한 황조, 토번황조의 황제였다. 천 년의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간 아직도 사가(史家)들은 토번을 손첸황조라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처럼 손첸캄포는 서장이 배출한 뛰어난 무장이었으며 두려움을 모르는 황제였기 때문에 그리 부르는 것이다.
 토번황조는 유목민(遊牧民)이었던 서장의 여러 부족들을 통일하고 서남으로는 천축과 아우르고 동북으로는 당을 압박해 한때 당의 황성(皇城)이었던 장안(長安)까지 함락시켰다. 그래서 천축과 설산국(雪山國), 그리고 당의 태종은 공주와 당시 토번황조의 황제이던 손첸캄포와 정략결혼을 시켰는데 당시 당나라의 공주가 문성공주였다.
 문성공주는 손첸캄포에게 시집을 오며 두 개의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이 서장에 불법이 전해지게 된 시작이었다.
 서장의 불법은 찬란한 발전을 이루었다.
 문성공주와 손첸캄포는 당시 황무지였던 언덕에 포달랍궁을 세웠다. 문성공주는 불심이 깊었으므로 서장의 모든 민족에게 불심을 전파했다.
 오래도록 불심은 민심을 잡았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천 년의 세월!
 서장에 사는 사람들은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한 가정에서 한 자식을 출가(出家)시킬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밤이 길면 끝도 길다 했던가?
 물이 고이면 썩는다.
 서장의 불교가 그랬다.
 아무리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교리도 욕심을 부리는 자들에게는 방법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을 때 서장의 불교는 점점 타락했다. 포달랍궁은 비적(匪賊)들과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불파들의 소행에 의해 네 번이나 불에 탔으며 오래도록 서장의 불심을 이끌어온 구교(舊敎)는 초야권(初夜權) 등의 횡액을 일삼았다. 그들은 사재(私財)를 가지기 시작했으며 대처(帶妻)를 통해 재산을 축적했다.
 부처의 자비가 사라지고 대신 탐욕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머리에 붉은 모자를 쓰고 몸에는 붉은색의 가사를 걸쳤으므로 홍모라 불렸다.
 천 년의 긴 영화는 불심을 타락시켰다.
 민심이 불심을 이반(離反)하자 황모가 일어났다.
 겔룩은 황모파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었다.
 다른 세 개의 종파는 각각 닝마파와 샤까파, 가교파라 부른다. 닝마파는 홍교라 부르는 종파로서 고파(古派)라고도 불린다. 당대(唐代) 후기에 밀교를 창설한 파드마삼바바의 후예들이 만든 종파이다.
 황모의 봉기는 구교를 잇는 홍모에 대한 반발이었다.
 황모는 겔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간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겔룩은 오래 전 홍모의 횡액에 반발해 철봉사(鐵棒寺)에서 유래했다고 해서 철봉사의 간덴궁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철봉사에 지어진 간덴궁에 몽골 아르타칸의 후예 달라이라마 사세(四世)가 살았기 때문에 간덴파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들이 불타의 정신에 입각한 황모교였다. 그들을 황모라 부르는 것은 머리에 황색의 법모를 쓰기 때문이었다.
 황모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다른 세 개의 불파가 일어났으나 그 힘이 미약하여 홍모에 미치지 못했다.
 황모교도는 다른 종파와 달리 집안에 여인을 들이는 대처를 하지 않는다. 이제 서장에 있는 대부분의 불찰들은 겔룩의 불파라 보아야 한다. 오래 전 서장을 일통(一統)했던 토번황조의 후예이며 서장의 종신(宗神) 손첸캄포가 간덴사를 설립한 것에 그 기원을 두었다.
 달라이라마는 타오르는 향촉을 응시했다.
 “라싸를 다시 불자들의 싸움으로 인한 질곡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달라이라마는 손가락에 걸린 묵주를 돌렸다.
 빠드드드!
 자단목을 깎아 만든 묵주가 손가락 위에서 구르며 거친 마찰로 소리를 냈다.
 “아미타불! 겨우 자리를 잡아가고 있건만.”
 그의 목소리에 놀란 향촉이 또다시 몸을 비틀었다.
 달라이라마의 한숨은 지난날 홍모가 세상을 변질시켰던 과오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피나는 노력으로 황모의 불심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홍모가 차지했던 모든 사찰들이 모두 황모의 불승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라싸는 불심이 넘치고 있었다.
 서장에 위치한 라싸는 천축과 가까운 서장의 남부에 위치하고 있어 천축의 불교문화를 신속하고 밀도있게 받아들여 라마교를 만들었다.
 서장의 유목민들은 문성공주의 명을 받아 천하제일고봉 주목랑마봉(珠穆朗瑪峰:히말라야) 기슭에 모여 자신을 수양하고 천하를 구제할 도량을 세우니 라마교의 본산(本山)으로 불리는 포달랍궁이 바로 그곳이었다.
 포달랍궁은 동서의 폭이 백오십 장이나 되었고 높이는 십삼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부에는 석가세존의 진산사리가 보관되어진 성묘(聖墓)가 있고 오천 명이 한번에 앉을 수 있는 커다란 불당도 있었다.
 달라이라마의 거실은 중원 황제의 침실보다도 화려하며 그 규모도 자못 거대했다. 각각의 방들은 금은, 청동, 보석, 자기, 그리고 크고 작은 이십만 개에 이르는 불상과 극채색(極彩色)의 아름다운 불화로 치장되어 있었다.
 포달랍궁을 둘러싸고 있는 포달랍사는 반경 오백 장을 포함하고 있으며 세 개의 부속된 도량을 지니고 있었다. 포달랍궁에서 백여 장 떨어진 팔각사(八角寺)에는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으며, 이십여 리 떨어진 색랍사(色拉寺)는 라마승들의 학문적 기초를 다지는 곳이었다.
 라싸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철봉사는 바위산 비탈에 건설되어 있으며 온통 흰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라싸를 오가는 중원인들은 철봉사가 온통 흰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해서 백마사(白馬寺)라고 부르기도 했다.
 철봉사는 수십 개의 불각(佛閣)으로 이루어져 과거 원조(元朝) 때에는 육천 명에서 만 명에 이르는 대가람이었으나 지금은 천여 명이 거주하며 포달랍궁의 무공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때 경내에 있는 간덴궁에 몽골 아르타칸의 후예인 달라이라마가 살았기에 몽골계 승려가 많았으나 지금은 모두 서장인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포달랍사의 직계에 속하지는 않으나 갈단사(葛丹寺)가 있어 포달랍궁은 그곳에서 제자를 키우고 있었다.
 지난날, 홍모의 밀승들이 서장을 손에 쥐고 주무를 때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달라이라마를 위시한 법승들이 희생을 아끼지 않았고 새로운 낙토(樂土)를 건설한다는 생각으로 백여 년 동안 일궈온 결과였다.
 “후!”
 달라이라마의 입에서 터질 듯한 한숨이 밀렸다.
 아무리 화려한 불당의 탱화나 불화도 그의 수심을 잠재우지 못했다.
 그는 제자들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제발.”
 그의 입에서 나직한 간구(干求)가 흘러나왔다.
 
 ***
 
 바람이 불고 황혼이 미친년처럼 머리를 풀어헤치는 어스름한 저녁, 일단의 무리가 포달랍사의 산문을 벗어났다.
 한결같이 등에는 가죽으로 만든 바랑을 메고 손에는 반월아(半月牙)가 달린 선장이 들려 있었다. 누가 보아도 그들이 포달랍궁의 수호자라 불리는 서장십패불승(西藏十覇佛僧)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색랍사와 철봉사에서도 이십여 명에 이르는 승인들이 산문을 나섰다. 한결같이 병장기를 지니고 바랑을 멘 승려들로 먼 길에 오르는 행렬임을 짐작케 했다.
 말과 낙타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어서 서두르도록 하자. 어쩌면 이미 범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와 그가 지니고 있는 진경을 찾아오지 못한다면 서장뿐만이 아니고 천축과 중원도 피에 잠기게 될지 모른다.”
 말을 하는 중년승인은 범연이라 불린 승인이었다.
 손에는 한 자루의 선장이 들려 저무는 저녁 노을을 쪼갰다. 선장은 핏빛으로 보이는 빛의 잔상을 흩뿌리고 무너져 내린 듯 날카로워 보이는 고봉 사이로 스며들었다.
 범연의 뒤에는 각기 선장과 월아산(月牙), 금종산(金鐘)을 둘러맨 십여 명의 승인들이 묵묵히 따르고 있었다. 서장십패불승은 범연이 가르치고 지도한 제자들로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는 포달랍궁의 무승들이었다.
 ‘범자 사제는 무공이 누구보다도 강했다. 어쩌면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범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 북쪽 하늘에 일곱 개의 별이 어우러져 있었다. 어찌 보면 물을 떠먹는 나무 국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길게 휘어진 별의 집합이었다.
 
 
 3장 노강(怒江)의 물은 변함없이 푸른데 번져 오는 혈운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네
 
 
 1. 따이족[族]
 
 
 원단(元旦)을 밝히는 붉은 해가 동쪽 갈대밭을 스치고 떠오른 지 한참이 지났다.
 피어오르는 홍운.
 마을 동쪽에 자리한 첨고산의 정상이 붉은 막으로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
 “봉봉(鳳鳳)이 기다리기 전에 빨리 가야지.”
 초무량(楚武良)은 허리에 넓은 요대(腰帶)를 두르며 기분이 좋은 듯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늘을 위해 장만한 요대는 언제 보아도 마음에 들었다.
 요대는 흰색의 비단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푸른색의 염료(染料)로 대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얼마나 정교(精巧)하게 그려졌는지 대나무는 곧 자라날 것 같았다.
 “흠! 제법 어울리는데 그래.”
 자화자찬(自畵自讚)을 하면서도 그는 기분이 좋았다.
 초무량은 자신의 허리에 둘러진 요대를 다시 한 번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요대를 구매한 것은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에서 그가 두른 것과 같은 비싼 요대를 두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덜컹!
 머리에 사건을 단정히 묶고 치장을 끝내자 방문을 열었다. 청량감(淸凉感)이 느껴지는 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초무량은 가슴을 펴고 마음껏 공기를 흡입했다.
 한 발을 내밀었다.
 “좋은 날씨인걸. 이제 곧 봄이 오겠지.”
 발 밑으로 스멀거리는 것 같은 온기가 밀려왔다.
 하늘에는 따사로운 햇빛이 알알이 부서져 내렸다. 한참 동안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던 초무량은 눈이 아려옴을 느끼며 눈을 내리깔았다.
 초무량은 서둘러 마루를 건넜다.
 윤기가 흐르는 나무가 깔린 복도가 보였다.
 단목으로 되어 있는 복도는 진한 단향으로 코를 묶었다.
 복도의 초입에는 검은 비단으로 만든 한 켤레의 신이 코를 밖으로 하고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신발을 꿰고 앞으로 나섰다.
 “너무 좋은 날씨로군.”
 옥당혜(玉唐鞋)를 신은 그는 모래가 깔린 마당으로 내려섰다. 오늘따라 발바닥에 모래의 감촉이 맨살에 닿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의 기분처럼.
 갑자기 가늘고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발에 밟혔다. 초무량은 눈을 들었다.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오빠! 어디 가?”
 “으응!”
 “어디 가냐고?”
 말을 건 사람은 동생이었다.
 이제 열다섯을 넘어선 여동생도 가슴이 불룩해지고 엉덩이가 펑퍼짐하게 퍼지는 것이 제법 여자 티가 났다. 저 아이도 올해부터는 물방앗간에 다닐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초무량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다 컸군.’
 따이족의 여인들은 나이가 열다섯이 되면 물방앗간에 가서 곡식을 찧을 수가 있었고 그곳에서 남자를 만나 부모의 허락을 얻어 결혼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여자가 남자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물방앗간은 남녀가 만날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일반 처자(妻子)들의 즐거움이 동생에게는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근래 들어 예전과는 달리 따이족의 귀족들은 중원의 영향을 받아 아녀자(兒女子)를 단속하는 풍습이 생겼다.
 물방앗간에 가는 일은 평민들이야 괜찮겠지만 귀족(貴族)의 신분인 그의 집안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그의 부모는 딸들에게는 제법 엄격한 면이 있었다.
 “구정(龜井)에 좀 갔다올게.”
 구정은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시장(市場) 이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해가 시작되는 원단에는 구정에 큰 장이 서고 청춘남녀(靑春男女)들이 모여드는 곳이 되어버렸다. 일 년 중 마을에서 가장 북적거리게 되는 곳이 바로 원단이 밝아오는 날 오시(午時) 이전의 구정 거리였다.
 그것은 따이족의 오랜 전통에 따라 구정의 저잣거리에서 사내가 마음에 드는 여인에게 청혼하는 오래된 풍습이 있기 때문이었다.
 동생이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알았다. 봉봉 언니 만나러 가는구나.”
 “왜! 너도 봉봉 언니가 좋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지. 그렇지만 오빠가 정말로 결혼한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괜히 이상한 거 있지. 그나저나 아버님은 오빠가 봉봉 언니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신 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딱!
 “아야-!”
 초무량은 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동생은 얼굴을 찡그렸으나 그리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사실 아플 것도 없는 그런 꿀밤이었다.
 동생은 싫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의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한참 동안 눈을 흘기던 동생이 입술을 내밀었다.
 “에잉, 왜 때려?”
 “너도 물방앗간에 나가봐라. 넌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만만하지 않을걸.”
 “핏!”
 동생이 혀를 내밀었다.
 착각이었을까!
 그녀의 혀 끝에 햇볕이 머물렀다.
 초무량은 동생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초무량이 몸을 돌리자 등 뒤로 햇볕이 잘게 부서졌다.
 “도련님, 어디 가시게요?”
 마당을 쓸던 노인이 다가왔다.
 벌써 수대(數代)를 내려오며 초무량의 집에 살고 있는 궁씨(弓氏) 성(性)을 가진 노인이었다. 허리는 굽었으나 팽팽한 얼굴을 지닌 노인은 나이보다는 적어도 이십 년은 젊어 보였다.
 비록 그가 그의 집안에서 하인으로 지내나 초무량은 한 번도 그를 하인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초무량은 누구에게도 불손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궁씨들은 그의 집안에서 하인으로 살고 있었다. 자유인으로 떠나라 해도 떠나지 않는 그들이기에 이제는 한식구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요. 구정에 다녀올게요.”
 초무량은 걸음을 옮겨 마당을 가로질렀다.
 이미 궁씨 노인이 손을 댄 마당은 어느 곳이던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가 걸어가자 깨끗하게 쓸려진 마당에 발자국이 도장처럼 새겨졌다.
 ‘궁 노인이 있어 언제나 깨끗하군.’
 초무량은 조금 서둘렀다.
 그의 등 뒤로는 궁 노인과 여동생이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으며 서 있었다.
 
 초무량의 가문은 따이족 내에서는 상당한 재력(財力)과 신망(信望)을 지니고 있는 가문이었다.
 비록 중원에 있는 거대가문(巨大家門)에는 미치지 못하나 유구(悠久)한 역사로만 치자면 중원의 어떤 가문과 견주어도 결코 뒤질 것이 없는 명문세가(名門世家)였다.
 따이족의 모든 뿌리는 그의 가문에서 나왔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은 따이족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결같이 초씨가문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발륭국(拔隆國)의 후예!
 한때 따이족이 운남 남서부에 세웠던 소국, 천 년 전 발륭국이 멸망한 뒤 따이족의 전통과 문화는 초무량의 가문에 의해 계승(繼承)되고 유지되었다. 초무량의 가문이 있었기에 그나마 발륭국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짐을 발륭국의 황제라 칭하노라.”
 벌써 천 년 전의 이야기였다.
 당시 중원은 진이라고 불리는 왕조가 만들어져 번성하고 있었다. 진(秦)의 시대에 따이족은 하나의 왕국(王國)을 만들었으니 발륭국이라 불렀었다.
 그 후 한족들의 끊임없는 공격과 열성황조의 습격과 질타에 발륭국은 멸망을 당했다.
 황족은 난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남아 있던 황가(皇家)의 자손들은 불행히도 모두 참살(斬殺)을 당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남은 황자(皇子)가 있었다. 그 뿌리가 지금의 초무량 일가였다.
 따이족은 모두 모으면 십만에 이르는 식솔들이 있었다.
 그 중 구 할에 이르는 가족들이 명조가 세운 포정사사(布政使司)와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 그리고 운남을 정벌하기 위해 몰려든 오군제독부(五軍提督部)의 난행(亂行)을 피해 중원으로, 변방(邊方)으로 흩어져 갔다.
 명나라가 들어선 이래로 부족의 이동은 더욱 심해져 명조(明朝) 구대(九代)인 지금은 청해, 서장, 운남 지방, 심지어는 천축까지 이동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운남 지방 서남쪽의 모서리 완정(腕町), 영강(盈江) 지방에는 부족의 일 할이 살고 있었다. 그들만 해도 적게는 만 명이 넘는 숫자였다.
 예로부터 따이족은 힘이 장사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부족 대대로 농사를 지었고, 그것을 하늘이 주신 은혜로 인식하며 살아왔다.
 운남의 서남지방(西南地方)에 치우친 그들의 터전은 늘 온난한 기후를 지녔기에 농사를 짓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상춘(常春)의 기후는 일 년 내내 꽃을 피게 하였고, 그런 기후 탓인지 사람들은 순박하고 여유가 있었다.
 따이족은 순박하며 자연을 즐길 줄 아는 부족이었다. 봄이면 북쪽의 첨고산(尖高山)이 푸르렀고 남쪽으로는 공명산(公明山)의 자태가 빛났다.
 그들 부락 앞으로는 서장의 눈물이라고 불리는 노강(怒江)이 흘러 중원으로부터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막았다.
 서쪽으로는 천축과 경계를 짓는 산줄기가 길게 이어져 있고 만년설이 햇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산의 높이는 낮은 곳이 천 장(千丈: 3000미터)에 이를 정도로 높고 마치 바위산을 보는 것처럼 험했다.
 높은 산의 줄기가 있어 발륭국이 멸망한 이후 산을 넘어 따이족의 마을로 들어온 천축인이나 남만인은 아직 없었다.
 초무량의 가문은 발륭국이 멸망한 이후로도 귀족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왕족이었기에 따이족은 오히려 위해 주고 아껴주는 심정으로 대했다.
 초무량의 조상들은 대를 이어 부족들을 보호하며 천 년의 세월을 묵묵하게 이겨오고 있었다. 수많은 고난과 역경이 있었으나 슬기로운 조상이 많았던 이유로 무사히 종족을 보존하고 이제 서서히 기지개를 펴려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초무량이 사는 집을 가리켜 발륭전(拔隆殿)이라 불렀다. 물론 편액에도 그와 똑같이 쓰여 있었다.
 따이족의 집 중에서 그의 집만큼 큰 집은 없었다.
 그의 집은 오십여 칸에 이르는 커다란 집으로 집을 지키는 무사도 있고 마구간도 있었다. 따이족에서 장원을 지키는 무사와 수십 명에 이르는 하인을 거느리는 집은 아무도 없었다.
 발륭전과 견줄 수는 없지만 버금가는 가문이 하나 있기는 하였다. 그들은 발륭국이 번성(繁盛)했을 때 병사를 조련하고 국경을 경비했던 가문으로 그들을 사람들은 부씨가(芙氏家)라 불렀다.
 초무량의 가문을 초씨가(楚氏家)라 부르는 것과 대비되는 것으로, 사람들은 이 두 개의 가문을 가르켜 발륭이가(拔隆二家)라 불렀다. 초씨가가 문(文)을 숭상하는 가문이라면 부씨가는 무(武)를 숭상하고 있었다.
 발륭이가라고 불리며 추앙받는 두 가문은 각각 초씨문가(楚氏文家)와 부씨무가(芙氏武家)라 불렸다.
 따지고 보면 부씨가도 초씨가에서 갈라져 나온 작은집이나 같았다. 이미 셀 수 없는 세월의 강 저편에 분가(分家)를 해 뿌리조차 희미해 졌지만 따이족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세월이 흘러 완벽하게 다른 가문을 이룬 지금 초무량의 아버지와 부씨가의 가주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초무량과 부씨가의 소주인도 물론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두 집안의 가주(家主)만 계시다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물에 잠겨도 우리는 살 수 있을 거야.”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했다.
 두 집안의 협력과 따이족을 위하는 마음은 한결 같아서 모든 부족민들은 그들을 칭송해 마지않았다. 특히 초씨가의 가주인 초무량의 아버지는 칭송이 더욱 높았다.
 오죽하면 그를 가르켜 인의대협(仁義大俠)이라 했을까?
 
 ***
 
 초무량이 구정에 도착한 것은 한낮으로 넘어가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구정에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어 오늘이 명절이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도련님 나왔어요?”
 “도련님도 닭을 사시게요?”
 초무량과 비슷한 또래의 청년들이 말을 걸었다. 그들도 좋은 배필(配匹)을 만나기 위해 구정에 나왔으리라! 오래된 전통은 그들이 여자를 고를 좋은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래, 배필은 구했나?”
 “뭘요. 오늘따라 농농(籠籠:여동생)들이 배짱을 퉁겨서 영 재미가 없는데요.”
 “잘해 보게.”
 초무량은 그들과 헤어져 구정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나무가 우거진 가로변(街路邊)에 소녀들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들도 이미 눈을 맞추어두었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자신이 원하는 배필을 고르기 위해 성장(盛裝)을 하고 눈을 빛내고 있으리라.
 역시 그녀들 앞에는 깨끗하게 튀겨진 닭고기가 놓여 있었다.
 ‘봉봉은 어디에 있지?’
 초무량은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기 있군.’
 초무량은 가로변에 앉아 있는 봉봉을 발견하고 빠른 걸음을 옮겼다. 이미 봉봉은 오랜 시간을 기다렸음직했다.
 “어, 부광(芙光)이잖아!”
 걸음을 재촉하던 초무량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향하는 곳에 한 명의 사내가 서 있었는데 바로 봉봉의 앞이었다.
 부광과 봉봉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이야기하는 쪽은 주로 부광이었고 봉봉은 듣는 입장인 듯 간혹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기도 했다.
 ‘부광이 아직도 봉봉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나?’
 초무량은 걸음을 멈추고 멀찍이 서서 그들을 바라보기로 했다.
 부광이라는 청년은 초무량과 비슷한 나이였지만 얼굴에는 구레나룻이 자라 있었고 몸에는 화복(華服)을 걸치고 있었다. 눈이 유난히 부리부리한 사내였다. 그가 바로 부씨무가의 장손(長孫)으로 초무량과는 둘도 없이 절친한 친구이며 따이족을 이끌어갈 후일(後日)의 기둥이었다.
 초무량과 그는 풍기는 외모부터가 매우 달랐다. 초무량이 학문을 좋아하여 유약(柔弱)하다면 그는 무공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완연한 무인(武人)의 모습이었다.
 그의 등에는 한 자루의 도(刀)가 꽂혀 있었는데 초무량은 그 도의 이름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지 몰랐다. 무엇보다 그는 무공에 관심이 없었다.
 따이족의 청년들이 근래 들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무공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무공을 익히면 하늘을 붕붕 날아다닌다고 했다. 또 배가 없어도 강을 건널 수도 있고 마음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나와 봉봉이 이미 혼약하기로 한 사실이 부족에 퍼졌건만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었나. 어른들은 모르지만 젊은 사람들과 또래들은 모두 아는 사실인데.’
 부광은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는 성미를 지니고 있었다. 따이족 마을에서는 누구도 부광의 화를 돋우지 못했다.
 부광은 불 같은 성격에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무공을 지니고 있어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더구나 그의 집안은 감히 쳐다보기조차 어려운 부씨의 종가였다.
 부광은 부씨의 종손이었고, 거들먹거리는 몇몇 청년들에게는 소군(小君)으로 추앙받고 있기도 했다.
 사실 봉봉에게 먼저 접근한 것도 부광이었으나 봉봉이 그의 청혼을 거부하고 초무량을 선택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부광이 외고집이고 사려 깊지 못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가는군. 왠지 미안한 느낌인데.’
 초무량은 부광이 자리를 뜨자 봉봉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부광의 의도도 알고 있었고 봉봉이 취할 수 있는 행동도 알고 있었다.
 
 따이족의 처녀들은 명절날이 되면 자기 집에서 기르는 살찐 닭을 골라잡는다. 닭은 처녀들이 직접 잡아야 하며 깨끗하게 튀겨야 한다.
 튀긴 닭은 다시 각종 양념을 넣고 푹 고아 구정으로 가지고 나와 자신이 사모(思慕)하는 남자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 총각이 와서 닭을 사려 하면 처녀는 닭고기값을 엄청나게 높게 불러 거절의 마음을 보인다. 그러면 대개는 총각들이 알아채고 물러난다.
 마음에 드는 총각이 나타나면 처녀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서로 눈길이 마주치면 수줍어 머리를 숙이고 총각의 눈길을 피하는 것이다. 그러면 총각은 처녀에게 가벼운 농을 걸고 둘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애모(愛慕)의 정을 나누었다.
 
 초무량은 봉봉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앞에 섰다. 봉봉은 부광이 이미 그녀의 앞을 떠나갔는데도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부광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이미 초무량이 그녀와 깊이 사귀고 있다는 이야기는 마을에 파다하게 돌고 있어, 모든 청년들이 그녀에게 감히 시시껄렁한 농담을 걸거나 설혹 그녀를 사모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해도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어려웠다.
 부락에 사는 청년들은 봉봉과 초무량이 곧 결혼할 사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같이 원단 이른 시간에, 짝을 찾는 행사에서 그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따이족 중에서 초무량의 일에 간섭하거나 그가 하고자 하는 일에 훼방을 놓을 자는 없었다.
 그가 무공을 지니고 있다거나 막강한 재력이 있어 그런 것이 아니라 부족의 청년들 모두가 그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봉봉.”
 초무량이 부르자 봉봉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내 얼굴이 숙여지며 수줍은 듯 귀밑이 빨개졌다. 사랑하는 님 앞에서는 늘 수줍음을 타는 그녀였다.
 따이족의 여인들은 건강하고 예의바르며 수줍음을 잘 탔다. 봉봉은 그런 처녀들 중에서도 가장 예의바르고 아름다웠다. 부족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초무량이지만 그것만은 확실하다고 믿었다.
 “오빠, 오셨어요.”
 얼굴을 숙인 채 봉봉이 가는 목소리로 화답(和答)했다. 그리고 그녀는 얼굴을 들었다.
 ‘확실히 봉봉은 미인이야.’
 봉봉은 마을 글선생의 딸이었다.
 초무량도 그녀의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초무량은 그녀의 아버지를 스승으로 모시면서부터 그녀를 알게 되고 사모의 정을 쌓은 지가 벌써 오 년째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을에는 혼기(婚期)에 다다른 처녀가 삼십 명은 되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를 따라올 미인은 없었다.
 따이족 미인의 조건은 우선 얼굴이 달걀 모양으로 생겨야 하고 눈썹이 짙으며, 눈은 커야 했다. 입술은 붉어야 했고, 입이 너무 크면 메기처럼 보여 복이 없다고 했다.
 목이 긴 것은 미인의 첫째 조건이라 할 수 있고, 어깨가 넓으면 미인의 축에 끼지 못했다. 가슴도 너무 커서는 안 되며 엉덩이는 동그란 것을 정상(正常)으로 보았다. 이 모든 조건을 갖춘 여자를 따이족은 최고의 미인으로 꼽았다.
 이왕이면 머리는 짙은 검은색이며 눈도 깨끗하고 맑아야 했다. 봉봉은 모든 조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처녀였다.
 초무량은 그녀의 앞에 쪼그리며 앉았다. 따이족의 총각은 처녀의 닭고기를 살 때 옛날부터 내려온 방식을 사용하기에 초무량도 예외는 아니었다.
 초무량은 자리를 잡으며 입을 열어 노래를 시작했다.
 “농농, 그 닭고기에서 구수한 냄새가 풍겨오는데. 봉황산(鳳凰山)의 풋고추, 공작호(孔雀湖)의 소금, 공명산(公明山)에서 나는 약초(藥草)를 넣어 만드셨나요? 미리 언약한 분이 있어 기다리고 계신가요? 아니면 닭고기의 값이 얼마인가요?”
 초무량이 하는 말은 전통적으로 따이족의 처녀총각들이 하는 가벼운 농담이었다. 그의 말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봉봉이 입을 열어 화답했다.
 역시 옛날부터 내려오는 노랫가락이었다.
 봉봉이 노래를 받았다.
 “오라버니도 참! 앞마당에 널린 보통의 풋고추, 남해(南海)에서 만들어진 굵은 소금을 사용했지요. 약초는 사용하지도 않았답니다. 그렇지만 저의 정성이 들어 있어요. 오라버니, 저를 사랑하시면 맛을 보세요.”
 초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봉봉은 자신의 뒤쪽에서 미리 준비했던 쪽걸상을 내어 자신의 앞에 펼쳤다. 쪽걸상은 앙증맞게 작아 초무량의 엉덩이가 걸릴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초무량은 그녀가 내민 쪽걸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같이 들어야 가볍고 같이 먹어야 맛있다, 라는 속담이 있듯 우리 둘이 같이 먹어야 맛이 있겠는데요.”
 그들이 노래로 이어부르는 화답은 이미 수백 년 동안 따이족의 선남선녀(善男善女)가 부른 노래 중의 한 구절로, 따이족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들의 후예도 부를 아름다운 상사(想思)의 곡(曲)이었다.
 봉봉은 얼굴을 숙였다.
 창피하기보다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사내에게 쪽걸상을 내주고 같이 닭고기를 먹게 되면 삽시간에 마을에 소문이 퍼지게 될 것을 잘 알기에······
 어른들의 눈에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고 다시는 변명을 하지 못하게 된다.
 또 조금은 창피하다는 뜻이 숨겨져 있는 몸짓이었다. 구정에서 남녀가 어울리는 모습을 본 어른은 양가(兩家)에 알려준다. 소문이 사실로 확인되면 남자의 부모는 아들의 생각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친다.
 아들의 마음이 기울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매파(媒婆)를 여자의 집으로 보내 딸을 줄 것을 간청하게 되고 여자의 집에서도 딸의 생각을 확인한다. 그래서 딸도 마음이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매파에게 선물과 은자를 주고 수고했음을 치하한다. 물론 여자의 생각이 그렇지 않으면 수고비는 주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는 청춘남녀가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어 그때부터 모든 일이 빨라지게 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가문의 재력(財力)과 문벌(門閥)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따이족은 귀족과 평민이 구별되어 있어 비록 섞여 살더라도 혼인에 있어 문벌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주변에 맞는 짝이 없으면 이웃 부락에 통혼(通婚)하여 짝을 찾더라도, 문벌이 기우는 경우에는 결혼이 성사되기 어려웠다. 문벌의 경중이 파악되면 양가는 서로 만나 혼례를 올릴 준비를 하게 된다.
 “오라버니, 마음놓고 먹어야 감칠맛 나고 마음놓고 행동해야 자유롭다는 속담과 같이 이곳에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예 숲 속으로 들어가 같이 먹는 것이 어때요. 그곳은 시원하고 아늑하니까요.”
 끄덕끄덕!
 초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모든 절차는 끝났다. 따이족의 전통적인 구혼에 의해 그들이 닭고기를 나누어 먹게 된다는 것은 자신들끼리는 결혼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몇 명의 마을 어른들이 그들을 보았을 것이고 이미 양가의 부모에게는 소식이 갔을지도 모른다.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봉봉의 집안은 나름대로 귀족에 속했다.
 따이족은 아내를 얻을 때 여자의 몸값으로 얼마만큼의 보답(報答)을 여자 쪽의 부모에게 해야 하는 풍습이 있었다.
 문벌에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심지어는 여자의 몸값을 줄 수 없어 여자의 집에 들어가 살며 수 년 동안 일을 하여 갚거나 도둑결혼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여자의 몸값은 여자 쪽의 집과 남자 쪽의 집이 상의를 해서 결정하는데 그 격이 너무 벌어지면 고민이 생기고 예물 때문에 파혼(破婚)이 생기기도 했다.
 초무량과 봉봉은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따이족의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초씨가의 장손이었고, 봉봉의 집안은 그의 가문에 비겨 조금 뒤진다 할지라도 마을에서 제법 신망(信望)이 있는 글선생의 집안이었다.
 “여기가 좋겠어요.”
 “정말이네, 이쪽이 제법 풀들이 잘 자라 있는데.”
 “오빠가 그쪽에 앉아요. 내가 미리 자리를 보아두었는데 잔풀이 매우 고왔어요.”
 그들은 커다란 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운남 지방은 상춘(常春)의 계절이 이어지는 지방이었다. 사시사철 온난했기에 어디를 가도 꽃이 피고 어디를 가도 풀이 파릇파릇했다.
 약간 쌀쌀한 기운이 느껴지기는 했어도 풀들이 자라는 데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오빠, 드세요.”
 봉봉은 풀밭에 자신이 정성스레 만들어온 닭고기를 펼쳤다. 초무량을 생각하며 이른 아침부터 만든 음식이었다. 오로지 한 남자를 위해 만든 음식!
 “같이 먹자. 오늘따라 봉봉이 더욱 예쁜 것 같은데.”
 “오빠, 지금 나를 놀리시는 거죠.”
 “아니야, 난 아직 봉봉보다 아름답고 현숙(賢淑)한 여자를 보지 못했어. 우리는 곧 결혼하게 될 거야.”
 “아잉!”
 봉봉이 얼굴을 붉혔다.
 
 “두고 보자. 내가 포기한다면 성을 갈겠다.”
 한 사나이가 숲 속으로 사라지는 두 남녀를 바라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하였는지 그의 손은 우악스럽게 주먹 쥐어져 있었다.
 장대한 기골과 텁수룩한 수염이 사나이다움을 보이고 있는 이십을 갓 넘긴 사내였다. 운명이 부광이라 이름지어 버린 부씨가문의 장손이 바로 그였다.
 그는 초무량과는 친한 친구이며 동갑(同甲)으로 초무량과 함께 따이족을 이끌어갈 동량(棟梁)이었다. 그러나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갈아붙이는 그의 모습은 짙은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부광의 머릿속에 그려진 남녀간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었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그였기에 봉봉이 따르는 사내는 그의 적이었다.
 그는 사랑이 여자의 선택에 의해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은 힘있는 자가 쟁취한다고 믿고 있는 그였다.
 ‘흥, 봉봉! 네년은 언젠가 후회를 하게 될 거다. 글만 좋아하는 그는 결코 네 남편이 될 수 없어. 넌 내 여자가 되어야 하니까!’
 우두둑!
 그는 손을 움켜쥐었다.
 바위라도 부숴버릴 것처럼 힘이 넘치는 그의 손에서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
 
 주머니 던지기 놀이는 따이족 선남선녀들이 상대를 찾는 공개적(公開的)인 놀이였다. 물방앗간에서 곡식을 찧는 놀이에서도 상대를 찾을 수 있지만 주머니 던지기 놀이는 더욱 확실하게 상대를 고를 수가 있었다.
 육 개월 전.
 해마다 따이족은 살수절이라 불리는 명절을 지낸다. 이때 따이족의 처녀총각들은 모두 모여 주머니 던지기 놀이를 하며 하루를 지내는 오랜 풍습이 있었다.
 주머니는 처녀들이 만들었다.
 처녀들은 비단 천을 구해 네모난 주머니를 만들어 안에는 목화씨를 넣고 겉에는 아름다운 수를 놓고 색실로 주머니에 끈을 달았다.
 주머니는 처녀의 애정(愛情)이 담긴 것이므로, 사흘의 낮과 밤을 새워 온갖 정성을 들여 만들어 바늘땀은 총총했고 매듭은 튼튼했다.
 살수절.
 처녀총각 도합 삼십 명은 서로 마주보고 길게 늘어서 주머니 던지기 놀이를 했다.
 “오빠, 내 주머니만 받아야 해요.”
 글방을 나서는 그에게 봉봉은 그렇게 말했다.
 벌써 오 년째 그녀의 아버지를 글선생으로 모시고 있으나 한 번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느낌을 주지 않았었기에 초무량은 마음이 두근거렸다.
 ‘봉봉도 내게 마음을 두고 있었나 보지.’
 초무량은 기뻤다.
 오 년 동안 보아온 그녀는 자신이 바라던 연인(戀人)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그 동안 한 번도 자신에게 감정을 보이지 않아 그는 늘 마음이 아팠었다.
 주머니 던지기 놀이는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와- 와!”
 “어서 던져. 까르르르!”
 “누가 만든 건지 벌써 터져 버렸어. 주인이 누구야.”
 처녀총각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주머니를 던졌다. 자신이 던진 주머니가 누구에게 날아가던지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주머니는 서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상대와 주머니를 주고받으며 눈짓을 교환했다.
 “어어, 나 놓쳤는데.”
 한 명이 주머니를 잡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총각이 주머니를 받지 못하면 처녀에게 선물을 주어야 했다. 반대로 처녀가 주머니를 받지 못하면 총각에게 길가의 꽃을 꺾어주어야 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서로 짝이 갈라졌다. 서로 마음에 드는 짝을 구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주머니를 던지지 않고 둘만이 던지고 놀다 하나둘씩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물론 핑계는 주머니를 받지 못해 선물을 주거나 꽃을 꺾어준다는 구실이었다.
 “받아요.”
 봉봉이 주머니를 던졌다. 주머니는 높게 떠서 초무량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이건 받으면 안 된다는 뜻이었지.’
 초무량은 속으로 하얗게 웃었다.
 처녀들은 던지기 놀이를 하다 상대 남자가 마음에 들면 주머니를 높이 던져 남자로 하여금 받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상대가 받지 못하면 선물을 주거나 꽃을 주고받으며 사랑을 전달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주머니가 높이 떠서 그의 머리로 날아들자 그는 두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은 주머니를 받으려는 모습이었다.
 툭!
 그러나 그의 손을 스친 주머니는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손바닥은 폈으나 그대로 들고만 있으니 주머니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당연했다.
 “이것. 놓쳐 버렸는데······”
 그가 난처하다는 듯 말했다.
 “형님, 어서 봉봉에게로 가보세요.”
 “속 보인다. 나 같아도 받을 수 있는데, 도련님이 주머니를 떨어뜨리다니.”
 “너무 무안 주지 마라, 봉봉 아씨가 일부러 그랬던 모양인데.”
 그의 주위에서 주머니를 받고 있던 몇 명의 총각들이 그를 응원했다. 평상시 조용하기만 하던 초무량이 이런 모임에 나온 것만 하더라도 그들은 신기할 뿐이었다.
 사실 초무량의 가문은 이런 주머니 놀이나 물방앗간 놀이를 하지 않아도 마음에 드는 상대를 얼마든지 고를 수 있었다. 심지어는 다른 부락에서 문벌을 따져 아내를 맞을 수도 있었다.
 초무량은 그것이 싫었고, 또 그를 따르는 총각들이 하도 같이 나가보자고 하며 은근히 어깨를 떠밀어 어쩔 수 없이 주머니 던지기에 나온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나가보라고 간곡하게 이야기했었다.
 그는 떨어진 주머니를 들고 길가의 나무숲으로 들어가는 봉봉을 따라갔다. 봉봉은 너무도 천천히 걷고 있어 숨 한 모금 쉴 사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봉봉, 어디까지 갈 거지?”
 그는 그녀의 곁에 다다르자 서둘러 불렀다.
 “오빠, 지금은 아무 말 하지 말아요. 그냥 우리 강가에 나가 놀아요.”
 “그러자꾸나.”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넓은 바위가 있는 강가가 있어요. 그곳까지만 가도록 해요.”
 봉봉은 앞서 걸었다.
 그는 그녀를 따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앞에 넓은 강이 나타났다. 강 옆에는 열 명 정도 누워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넓은 바위가 있었다.
 둘은 바위에 나란히 앉았다.
 “오빠는 언제 결혼할 거예요?”
 그녀의 첫 번째 물음은 그것이었다. 화사한 얼굴에는 땀이 솟고 있었으며 복사꽃의 꽃잎보다도 붉게 변해 있어 그녀가 얼마나 용기를 내어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쉬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좋은 냄새야.’
 문득 그녀의 몸에서 들꽃 냄새가 난다고 느껴졌다.
 따이족의 남녀는 보통 열여덟이 넘으면 결혼을 했다. 이미 그와 봉봉은 열여덟을 넘긴 나이였다. 초무량이 스물하나, 봉봉이 열아홉이었기에 결혼하는 데 나이는 문제없었다.
 “글쎄, 부모님이 곧 신부감을 구하거나 내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허락하시겠지. 그나저나 봉봉은 누구하고 결혼하고 싶어?”
 “난, 난······”
 봉봉이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수줍음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은 홍시(紅)처럼 붉어졌다. 그녀도 막상 친구들과 주머니 던지기 놀이에 나오기는 했으나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고개가 다시 숙여졌다.
 “난 말야, 아직 한 번도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어. 그런데 삼 년 전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거든.”
 부르르-
 봉봉의 몸이 격하게 떨렸다.
 만약 초무량이 사랑하는 처녀가 있다면 자신의 생각은 물 건너간 것이라고 보면 되었다. 그녀는 어린아이 때부터 초무량을 좋아했고 자라서 어른이 되자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어릴 때 초무량이 부광에게 맞는 것을 보면 주먹에 불끈불끈 힘이 들어가기도 했었다. 유약하기만 했던 초무량은 건강하고 드센 부광에게 늘 주먹다짐을 받아 코피를 흘리고 상처를 입었었다.
 ‘오빠! 힘을 내. 오빠도 마구 때리란 말야.’
 봉봉은 마음 속으로 늘 그렇게 응원을 했었다. 그를 사랑하면서도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으나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랬군요. 그런데 왜 제 주머니를 받지 않으신 거죠?’
 초무량이 원망스러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머니를 받아 자신의 뜻을 분명히 해야 했다. 그랬다면 그녀도 눈치를 채고 생각을 바꿀 수도 있었다.
 “난 이미 삼 년 전부터 그녀에게 내 신부(新婦)가 되어달라고 하고 싶었어. 그런데 말을 할 수가 없었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좋겠군요. 자신을 그리며 애태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녀는 얼마나 행복할까요. 누군지 몰라도 난 정말 그녀가 부러워요.”
 그녀는 엉겁결에 입을 연 것이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해 버린 꼴이 되었다. 그녀의 얼굴이 저녁 노을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머리를 숙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어.”
 “누군지 말하면 제가 오빠의 마음을 전해 드릴게요.”
 봉봉은 속이 상했지만 그렇게 말했다. 물론 누구인지 안다면 그의 마음을 전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초무량을 사랑하는 만큼 그도 그 처녀를 사랑하고 있을 테니.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마음은 쓰리지만.
 “그 처녀는 우리 마을의 훈장(訓長) 따님이지.”
 쿵!
 봉봉은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그들이 사는 마을에 글방은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봉봉의 아버지가 훈장으로 있는 그 글방이었다.
 그렇다면!
 “오, 오빠!”
 “그래, 내가 사랑하는 처녀는 바로 봉봉이야. 그러나 난 너의 마음을 알 수 없었거든.”
 “아니에요. 오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빠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커졌다. 수줍기만 하던 그녀의 입에서 그토록 큰 소리가 나오리라고는 그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듯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르르!
 자신의 실태(失態)를 짐작한 듯 봉봉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목소리는 너무 컸다. 평상시 정숙해야 한다고 부모에게 배운 그녀로서는 무안하기가 한량없는 일이었다.
 “난 부광과 봉봉이 서로 좋아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초무량은 말 끝을 흐렸다.
 부광은 그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노라고······ 언젠가는 봉봉이 자신의 여인이 될 것이라고.
 그는 봉봉이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과 결혼할 것이라고 초무량에게 다짐하듯 말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근동에서 봉봉을 따를 만한 규수는 없었다.
 “그건 사연이 길어요. 부광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한 거지, 난 허락한 적이 없어요. 더구나 부광같이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는 사람하고는 결혼할 수 없어요.”
 봉봉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얼마 전이었어요.
 내 친한 친구 보옥(寶玉)이 있잖아요.
 윗마을에서 아버지가 촌장(村長)을 한다는 애 말이에요. 그 애가 나를 찾아왔었어요. 처음에는 그 아이인지 알아보지 못했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어요.
 보옥이 이야기로는 부광과 이 년 동안 몰래 사랑을 했대요. 오빠도 알고 있듯이 사실 우리 따이족은 일정한 나이가 되어야 결혼을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부광과 보옥이는 몰래 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대요. 마음을 주고 심지어는 몸도 주었다고 하면서 울었어요. 벌써 깊은 관계인 모양이에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나 봐요.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어 결혼하자고 보옥이 조르니까 부광이 싫다고 했대요. 보옥은 이미 망가진 몸이라 생각하고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나 봐요.
 오빠도 잘 알잖아요.
 처녀가 애를 낳아도, 또 깊은 관계까지 가도 사내들은 값만 지불하면 끝나는 것이 우리 부족의 방법이라는 것을.
 부광의 가문은 재산이 많으니 보옥의 몸값 정도는 지불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보옥이의 마음에 멍든 상처는 누가 책임질 수 있겠어요.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내가 설사 부광이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마음이 끌리겠어요? 더구나 부광처럼 아집(我執)과 교만(驕慢)이 가득한 사람은 제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그가 곁에 오는 것도 싫어요.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부광이 봉봉을 좋아한다고 나에게 말한 것은 모두 거짓말이란 말이지?”
 “그래요. 난 부광에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오빠라고 말했어요. 그 말을 하지는 않던가요?”
 그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부광은 자신이 봉봉을 사랑한다고 했었다. 봉봉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다고 이야기를 하며 과장된 표정을 짓기도 했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 것에 불과했다. 부광이 좀더 정직했다면 봉봉이 초무량을 사랑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전해 주었어야 옳았다. 그러나 부광은 그에게 그런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다.
 “난 봉봉을 믿는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봉봉이듯 봉봉이 하는 이야기는 무조건 난 믿어.”
 “고마워요, 오빠.”
 봉봉의 얼굴이 웃음이 피어났다.
 그들은 밤이 이슥하게 저물도록 강가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였는지 둘밖에는 아무도 몰랐다.
 이튿날부터 따이족의 처녀총각 사이에는 초무량과 봉봉이 사랑하는 사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게 벌써 육 개월 전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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