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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혼열 1

2018.05.02 조회 398 추천 0


 귀혼열 1권
 발서(發瑞)
 
 
 인간사(人間事) 어디에나 음모는 있다.
 고래(古來)로 음모는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음모의 문제는 음모임이 분명할진데 음모가 아닌 것처럼 위장되는 데 있다. 음모로 파생되는 문제는 또 다른 음모가 늘 선량한 사람들을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진실을 망각시킨다는 것이다.
 
 
 서장 낙조(落照)
 
 
 그 날, 운명의 그 날!
 청해호(靑海湖)에 낙조를 기울이던 태양은 화염처럼 이글거렸고, 황토는 바람에 날렸다.
 눈을 뜰 수 없으리 만치 강한 바람이 모든 것을 날려 버릴 듯 불었으나 청해땅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붉은 낙조를 보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 날 낙조가 너무나 붉어 마치 청해가 피에 물들은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늘처럼 파랗던 청해호를 감싸고 형성된 변방(邊方)의 한 곳, 청해지방을 주름잡던 수많은 방파 중 하나였던 마하주(馬河州)가 초토화가 되었다.
 마하주의 식솔들이 흘린 피는 척박한 모래땅을 붉게 채색했고, 사호(沙湖)로 흘러들어 붉은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물들였다.
 마하주! 한때는 청해지방의 모든 것처럼 보였던 문파였다. 비록 세워진 지 십오,십륙 년의 짧은 역사로 오래되지 않았지만 청해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무인치고 마하주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 한때 중원을 위협하던 청해 무림의 옛 영화는 사라져 버렸고, 중원의 무인들에게 무시를 당했지만 마하주가 있음으로 해서 아직은 중원에 몸을 맡기고 있다는 강호인들 누구도 괄시하지 못하는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마하주가 왜 혈겁에 쓸려가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어린아이였다.
 부친은 죽어 가면서까지 그에게 말했다.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말라고······.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말라고······.
 너무도 창백한 소년의 입술은 경악으로 떨렸다.
 그가 떨었던 것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배가 고팠다. 옷을 마련해 주고 잠자리를 보아주는 유모(乳母)가 사라졌다. 소년이 잠을 자는 침상 근처, 멀지 않은 정실 귀퉁이에서 유모는 불에 타 죽어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음식을 마련해 주던 찬모(饌母)는 하체에 피 칠이 된 채 하녀들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핏물에 잠겨 있었다.
 소년이 슬퍼한 것은 그들이 없다는 이유였다. 소년에게 다른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저 서러울 뿐.
 그 붉은 낙조를 바라보는 사람은 사순(四旬)의 나이로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등에는 긴 이랑도(二郞刀)를 메고 중년인은 묵묵히, 그러나 입술을 깨물며 타오르는 마하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도 중년인이 언덕에 서서 타오르는 마하주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중년인의 손에는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가슴에 안긴 채 손을 잡고 있었다. 유모가 없다고 슬퍼하던, 찬모가 죽어 밥을 굶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순박하고 여린 소년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왜 중년인의 가슴에 안겨 있는지 몰랐다. 다만 중년인은 불타는 집으로 들어와 자신을 안아들었을 뿐이었다. 소년이 처음 보는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의 따스한 손길은 소년을 감쌌다.
 소년은 잘 생기지도 못했고, 귀공자 같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다만 눈만은 살아 있었다. 그가 그토록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그 소년이 호화로운 생활을 했었다는 증거는 오로지 입고 있는 옷뿐이었다. 소년은 중년인의 가슴에 안겨 한참을 울었고, 깨어나서 아버지를 부르다 다시 잠이 들었다. 그 때마다 중년인은 소년의 등을 다독거렸다.
 마하주가 모두 타고 재가 되어 버렸을 때, 중년인은 소년을 이끌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누구도 중년인을 알지 못했다. 아니, 그는 불타는 마하주에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곧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소년을 안고 사라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장 흑봉산성(黑蜂山城)
 
 
 1
 
 
 귀혼열(鬼魂熱),
 팔십만 명군(明軍)이 자랑하는 최고의 돌격조(突擊組)! 귀신도 잡을 수 있다고 알려진 죽음을 모르는 전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이 왔다.
 
 ***
 
 일렬 횡대(橫隊)!
 어둠 속에서 앞을 바라보는 일곱 명의 사내는 절대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았다. 서로의 얼굴에 떠오를 표정이 보기 싫어서라는 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서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곧 죽을지도 모를 그들은 늘 죽음에 임박한 상황에서는 얼굴을 피했다. 싸움에 임하면 서로의 눈을 보지 않는 것은 이미 오랜 전통이 되어 버린 습관과도 같은 불문률(不文律)이었다.
 사위는 적요(寂寥)했다.
 그들이 접근하기 전 밤벌레들은 미리부터 사람들의 접근을 알고 있었다는 듯 숨을 죽여 버렸다. 사방이 깊은 바닷속처럼 고요했다.
 불과 일각 전까지만 해도 밤새들이 홰를 쳤지만 이제는 두텁게 깔린 살기(殺氣)를 느꼈는지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천지는 어둠에 잠겼고, 하늘은 괴괴했다.
 휘이이잉!
 스산하게 부는 바람이 귓가의 머리카락을 날리는 것으로 보아 비라도 한줄기 올 것 같은 날씨였지만 모든 것이 죽어 있었다. 죽은 하늘에는 달도 없었다. 그믐도 아니었건만 하늘에는 달도 없었고, 병든 닭처럼 조는 별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믐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달빛이 없다는 것은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시(子時)였다. 천중에 떠 있는 만월의 월령(月靈)이 빛의 편린을 흩뿌려야 하는 시간인 것이다.
 하늘은 어두웠지만 누구 하나 불평을 토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어둠이 그들의 몸을 숨겨 준다는 것에 안도하는 것 같은 모습들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천축군(天竺軍)의 천재장군(天才將軍)이라는 간다라와 수이족의 우두머리라는 을제산인뿐이다. 그뿐, 누구도 상대하지 않는다.”
 일곱 명 중에서 오늘의 조장이 된 애꾸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오늘의 조장이라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지만 그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장인 애꾸가 말을 해도 대답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산을 포위한 오십이 명의 명군 돌격대 중에 속한 일곱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역할로 따지면 그들 개개인이 오십이 인보다 컸으면 컸지 작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일은 늘 그랬다.
 애꾸의 목소리는 이[齒]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 늘 거북살스러웠다. 그러나 애꾸의 목소리가 상대에게 살기를 느끼게 하는데는 적당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목표의 위치는 이미 지도를 본 바가 있으니 다시 설명은 하지 않는다. 무엇도 가리지 않는다. 무조건 돌격이다. 걸리는 것은
 베고, 어떤 일이 있어도 멈추지 않는다. 설사 동료가 죽어도 멈추지 않는다.”
 타탁!
 바닥에 깔리는 애꾸의 말에 나머지 여섯 명은 손으로 가볍게 땅바닥을 두드렸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모래성을 쌓으며 장난처럼 두드리는 소리와 같은 그 소리는 그들 모두가 같이 한 행동이었고,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그 소리는 너무 미약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애꾸는 그들이 듣든 말든 상관이 없다는 것인지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의 일상(日常)은 늘 그랬다.
 처음에는 열두 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줄어 일곱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일곱 명은 서로 돌아가며 조장을 하고는 있었지만 설사 지휘를 하는 조장이 없어도 그들은 전혀 자신이 맡은 역할에 혼선을 빚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모든 마음과 행동이 몸에 배어 있었고, 그들이 움직이면 반드시 죽는 자가 생겼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늘 죽음만이 남았다.
 “놈을 베면 우리는 직선으로 가로질러 오백여 장을 전진한 후, 좌로 돌아 다시 석성(石城) 밑에 은신한다.”
 타탁!
 두 번의 손바닥 소리가 들리자 일곱 사람은 지체없이 자신의 병기를 뽑았다.
 명군은 황실(皇室)에서 지정한 병기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고 원칙이었지만 예외는 있었다. 그들이 바로 그 중 한 부류로서 그들이 가진 병기는 다양했다.
 그들의 병기는 마치 무기 전시장을 보는 것 같았지만, 단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한결같이 단병(短兵)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빌어먹을! 오늘 또 다시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되는군.’
 하풍백(河風 )은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며 허리춤을 더듬었다. 두 자루의 짧은 검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길이라고 해 보아야 이 척에 불과한 두 자루의 검은 그의 생명을 오 년이나 연장시켜 준 물건이기도 했다.
 이미 사용하는 자가 드물어진 중도(中刀)를 사용하는 것이 조금 별스럽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병기였다.
 쿡!
 옆구리에 가벼운 기척이 느껴졌다.
 검상(劍償)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를 검상이라 부르는 것은 그의 얼굴에 긴 상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북경 근처에 주둔할 당시 자신이 속해 있던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의 동료 일곱을 난자(亂刺)해 죽일 때 얻은 상처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누구도 진위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도 알려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도 입을 열어 굳이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지는 않았다.
 하풍백도 입을 벌려 자신의 이를 보여 주었다.
 검상은 그나마도 유일하게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나이는 하풍백보다 열 살이나 많을 것으로 보였지만 목숨을 걸 때 외에는 늘 편안하게 사람을 대하는 자였다. 다만 얼굴에 난 자상(刺傷)이 사람의 눈을 거슬리게 하지만 하풍백은 그의 상처가 눈에 거슬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풍백은 고개를 내밀어 전면을 바라보았다.
 칠흑같이 어둡다고 사람들은 이야기하지만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다 보면 희끄무레하게 사물이 보이는 법이었다.
 지금 하풍백의 눈이 그랬다.
 급히 쌓아올린 듯 보이는 석성은 지난 하루 기병(騎兵)들의 연속적인 공격으로 미친년 속치마처럼 허물어져 있었다.
 사흘 간에 걸친 기병의 공격은 어제 저녁에서야 겨우 동서방(東西方)의 성벽을 타넘을 수가 있었다. 오 장이나 되는 높이를 지닌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명군은 이천 명의 군사를 잃었다. 소문에는 천축군이 성을 버리고 도주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남은 군사들이 있다고 했다.
 공격의 결과는 비참했다.
 팔로군(八路軍)이라 이름 붙여진 명군의 기병들은 팔다리가 성한 놈이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무너져 돌아온 것이었다. 그나마도 공격에 참가했던 군사들 중 반은 성벽에 걸려 있거나 죽은 시체로 말에 의해 끌려왔었다. 모두들 분노했었고, 치를 떨었었다. 그래서 준비된 것이 오늘의 습격이었다.
 “그래도 통로를 열었다.”
 팔로군이 반이나 전사해 돌아왔을 때, 명군의 첨도장군( 將軍)이라 불리는 도독동지(都督同知) 우경하(禹 賀)는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로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정일품(正一品)의 관직에 해당되는 도독동지는 오래도록 서장정벌(西藏征伐)에 머리가 셀 지경이었다. 그것은 굳이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들은 대로 액면을 아무런 사심 없이 그대로 이해한다고 하면 그는 벌써 삼 년째 서장을 점령하고 있는 천축인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우경하로서는 삼 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서장에서 유배(流配)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빨리 끝나기만을 바랐을른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그의 그러한 마음으로 인해 죽음을 무릅쓰고 진격했던 명군의 손해는 막심했다.
 천축의 무인들과 수이족[水族]이 힘을 합쳐 서장을 점령한 상태라 서쪽과 북쪽으로 팽창 중인 명조로서는 여간 골치가 아프지 않았다.
 우경하는 무려 삼 년째 라싸[拉薩]를 두고 뺏고 뺏기는 접전 속에 몸을 묻어 두고 있었다.
 밤이 이슥해져서인지 산성 안에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때로는 머리를 내미는 놈들이 있을 법도 한데 머리는커녕 조그만 빛도 새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성벽에 세워진 목책(木柵)이 어둠 속에서도 느껴졌다.
 ‘왠지 머리가 바싹바싹 서는군.’
 하풍백은 양 손에 쥔 검을 움켜잡았다.
 마치 부엌칼처럼 빛이 나지 않는 무쇠로 만든 검이었다. 그들 일곱 명 모두의 병기는 한결같이 병기에서 빛이 나지 않았다. 그것은 쇠의 재질도 한몫을 했지만 기름에 갠 흙을 병기에 발라 어떤 빛도 반사되지 않았다.
 야간이라는 것이 때로는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기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하지만, 그들 칠 인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벌건 태양이 머리카락을 바짝 서게 하는 한낮보다는 이슬이 내리는 밤이 좋았다. 좋다고 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익숙해 있었다. 그들이 하는 일의 십중팔구(十中八九)는 밤에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놈들이 대가리를 처박고 고개를 들지도 않는 것 같은데.”
 검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낮게 흐렸다. 삼 보만 떨어져도 들리지 않을 것 같은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낮았지만 그가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들 칠인 중 아무도 없었다. 그가 가장 용기가 있는 사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귀검! 이번에는 내가 빠를 거다.”
 검상이 이를 드러냈다.
 놈은 아무래도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 그도 아니라면 왠지 긴장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긴장이라는 것이 어울리지는 않겠지만 사람이다 보니 때로는 우울하기도 하고 긴장하기도 했다. 그들이 비록 사육(飼育)되었다고는 하지만 인간임을 부인하지 못했다.
 하풍백은 두 자루의 검을 잡은 두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묵직한 느낌이 장심(掌心)을 타고 어깨로 흘렀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며 향기로운 냄새가 스몄다. 앞으로 일어날 피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2
 
 
 피이이이―
 허공으로 한줄기 불빛이 화조(火鳥)의 날개처럼 타오르며 솟구쳤다. 그것은 그들이 너무도 오랫동안 기다리던 공격 신호였다.
 화전(火箭)!
 화전이 오른 것은 공격을 뜻했다.
 “가자!”
 하풍백은 낮은 신음을 토하며 두 자루의 검을 가슴 앞에 열 십자로 교차시키며 앞으로 내달렸다. 마치 가슴에 귀한 물건이라도 싸안은 듯한 모습이었다. 하풍백이 달려나갔다고는 하지만 빠르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의 곁으로 일곱 개의 신형이 더욱 빠르게 질주했다.
 그들이 달리는 속도는 일정해서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다리를 이용해 전력으로 질주를 하고 있었기에 약간의 차이는 있었다.
 발 밑에 깔려 있던 돌들이 아우성을 터뜨리며 발 뒤로 튀어나갔다. 삭정이가 비명을 토하며 부러졌고, 마사토(磨砂土)가 먼지를 일으켰다.
 오리가 물 속에서 발을 저어 빠른 속도로 다가가도 소리가 나지 않듯 그들도 날아가는 것처럼 소리 없이 달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무너진 성벽이 발 밑에 스쳤다. 하풍백은 마치 앵속(罌粟)에 취한 사람처럼 앞으로 달려나갔다.
 쉭!
 갑자기 검은 물체가 일어서며 흰 포물선이 허리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무너진 성벽을 단숨에 타넘어 땅에 착지하려던 순간이었다.
 너무나 빠른 급습이었다.
 하풍백은 몸을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기에는 달려나가던 속도가 너무 빨랐다.
 “비켜!”
 허공에서 검은 바람이 공기를 가르는 것 같았다. 굳이 신중하게 보지 않더라도 두 자루의 혈부(血斧)가 허공을 갈랐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원 중에 두 자루의 혈부를 사용해 이름마저도 혈부라고 불리는 놈은 꼭 상대의 목을 날리는 습성이 있었다.
 ‘아― 앗!’
 하풍백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달릴 때부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전속력으로 달려야 할 때 입을 벌리고 달리면 목이 갈라져 숨소리가 거칠어지게 되어 적에게 노출이 되기가 쉬웠다. 자연히 숙달된 것이 입술을 깨물고 코로만 숨을 쉬는 것이었다.
 늘 야습(夜襲)을 하고 적장(敵將)의 목을 따기 위해 몰래 스며드는 것이 몸에 배어 있기는 했지만 갑자기 허리를 파고드는 예리한 경력에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풍백은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머릿속에서 벌이 날개를 흔드는 듯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놈의 병기가 몸에 닿기 전에 상대의 몸에 접근하라.
 허공에서 들려오는 듯한 적미월(赤眉月)의 소리를 환청으로 느끼며 하풍백은 발바닥에 걸리는 돌에 힘을 주었다. 달려오던 탄력에 힘이 붙어 하풍백의 몸이 두 배는 빠르게 어둠 속을 달려갔다. 그의 몸이 검은 선으로 변했다.
 귀혼열의 애송이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던 교두(敎頭) 적미월은 늘 자신이 살아날 수 있었던 방법만을 가르쳤었다. 그도 하풍백과 다를 바 없는 미천한 곳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 교두가 된 자였다.
 그의 말이 그랬다.
 그가 미천한 신분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풍백이 아는 적미월은 교두 이상의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소문에는 적미월이 중원무림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하는 무서운 자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하풍백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하풍백의 가문이 무가(武家)인 것은 분명했지만 무공과는 담을 쌓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도 관심이 없었으므로······.
 언제부터인가? 접전이 계속되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적미월이 했던 말 한 마디가 마치 신의 암시 같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적미월이 가르쳐 준 모든 것은 하풍백에게 살기 위한 경전과도 같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창―
 하풍백의 몸이 무릎을 꿇으며 낮아지자 허리를 베어 오던 바람이 가슴 높이가 되었다.
 하풍백은 달려가던 속도를 줄이지 않고 가슴을 가렸던 쌍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맑은 금속성은 허리를 베어 오던 파풍도(破風刀)가 그가 내민 쌍검에 가로막히는 소리였다.
 하풍백은 쌍검에 막히는 파풍도의 날을 바라보며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눈앞에 병기의 충돌로 인해 밝은 빛이 피어 올랐다.
 빛이 사라지며 눈앞이 갑자기 어두워졌지만 목표물을 놓칠 정도로 그의 몸에 이는 감각이 허약하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무릎이 일어서는 자의 가슴을 찍었다. 동시에 그의 쌍검이 물러서는 검은 그림자의 목에 십자로 내리 꽂혔다.
 “커억!”
 마치 가위를 벌려 목을 자른 모양이 되었지만 상대는 이미 불귀(不歸)의 객(客)으로 변해 있었다.
 그들 일곱 명의 임무는 늘 은밀함을 요구했다. 설사 상대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비명을 남겨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늘 목을 잘라 버리는 것이 그들의 공격방법이었다. 이제는 숙달이 되어서인지 손을 뻗으면 목이었다. 육 년 동안 참으로 많은 적을 죽였다.
 푸하하학―
 바람이 새는 소리가 들리고 피비린내가 역겹게 밀려들었다. 목이 끈끈해졌고 후끈한 느낌이 가슴을 타고 전해졌다. 죽은 자의 피가 가슴에 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풍백은 얼굴에 묻은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달려가다 보면 일부는 날아가 버릴 것이고, 일부는 말라붙어 버릴 것이었다. 손으로 닦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앞으로!”
 애꾸의 바람 새는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죽은 자의 가슴을 발로 밟아 심장에 기복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하풍백은 다시 앞으로 달려나갔다. 마사(磨砂)가 미끄러워 발이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다.
 경사가 심하고 계집의 코처럼 뾰족한 산에 산성을 쌓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나마도 산은 바람만 불어도 흩어져 날릴 것 같은 마사토와 바람난 계집이 오금을 펴지 못하고 흐느적거리듯 부서진 화강암(花崗巖)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갑자기 눈앞으로 이층 전각이 발에 편자를 달고 달리는 말처럼 다가들었다. 이미 지도를 보았기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 전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풍백이 보았던 지도에는 문장대(紋章臺)란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붉은 세필(細筆)로 북북 그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다. 하풍백과 그의 동료들이 신경 쓰지 않아도 뒤를 따르는 기병이나 보군(步軍)에 의해 무너질 전각이었다.
 “헉헉!”
 갑자기 귓가에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눈을 옆으로 돌리니 머리를 산발하고 얼굴이 피처럼 붉은 사내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 사내의 얼굴은 어둡고 얼굴에 칠해진 피로 인해 첫눈에 알아보기가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는 귀혼열을 이루는 일곱 명 중의 한 명인 반도(半刀)였다. 그의 얼굴은 평소 관옥(管玉) 같았는데, 붉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도 얼굴과 몸에 피를 묻힌 것 같았다. 그는 부러진 반도를 휘두르며 바람처럼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숨소리를 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늘 숨소리 한 번 흘리지 않았다. 그래서 하풍백은 그가 내공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항이 없어.”
 지나가는 말처럼 반도가 중얼거렸다. 역시 그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숨소리를 낼 리가 없었다. 미약한 음성이었지만 달리는 와중에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흔히 명군들이 편복군( 軍)이라 부르는 그들에게 작전 지시를 했던 장군은 산성에 적어도 오십 명에 가까운 적이 남아 있다고 이야기했었다. 그 정도였다면 적은 이미 모습을 드러냈어야 옳았다. 기껏 서너 명만이 보인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모두 정지!”
 애꾸가 외치자 달려가던 일곱 개의 그림자가 고무줄처럼 탄력을 받아 되돌아왔다. 마지막 '지'자가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반원을 그리며 앉아 있었다. 신속하고 군더더기 없는 행동에 바람이 회오리를 일으켰다.
 모두 밖을 향해 앉은 모습이었다.
 여섯 명이 반원을 그렸고, 애꾸가 반원의 중앙에 있었다. 모두들 자신이 맡은 방향을 향해 눈길을 쏘았다. 그러나 귀는 애꾸를 향해 열려 있었다.
 오늘은 공격 중의 명령은 오로지 조장만이 하게 되어 있었다. 설사 계략 속으로 빠져들어가 모두 죽게 되어도 명령은 조장의 권한이었다. 그들은 늘 같은 방식으로 조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실패를 한 적이 없었다.
 그 동안 죽은 자들은 죽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산 자들은 나름대로 살아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 칠 인은 최소한 육 년 이상을 접전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속은 것 같아.”
 애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아무리 죽음을 넘나드는 첨예(尖銳)한 검봉(劍鋒) 위에서 살아가는 그들이지만 죽음에 대해 무조건 심상(心想)할 수만은 없었다.
 하풍백은 정면을 노려보며 숨을 가다듬었다.
 잠자고 있던 오감이 맹렬하게 활동을 시작했다. 깊이 잠자고 있던 피가 끓기 시작했다. 그것은 죽음을 부르는 피였고, 두려움을 가시게 하는 피의 흐름이었다.
 십이경락과 임독양맥(任督兩脈)으로 표현할 수 없는 기운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적에 대한 적의였다. 하풍백 뿐만이 아니라 귀혼열에 몸을 담은 자들의 모든 신경이 그렇게 작용하도록 만들어진 살인 기계였다.
 “수정은 불가(不可)하다.”
 일제히 손을 뒤로 내밀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하풍백도 손을 등뒤로 내밀어 엄지를 세웠다. 그것으로 그의 의사는 반영되었다. 오로지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손가락뿐이었다.
 엄지손가락을 들면 찬성의 표시였고, 새끼손가락을 들면 반대의 표시였다. 당연한 이야기가 되지만 그것에 상관없이 결정은 조장이 했다.
 “좋다. 앞으로 돌진이다. 산개대형(散開隊形)으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좌측 끝 선에 무릎을 꿇고 전면을 노려보던 비패(飛牌)가 달려나갔다.
 왼쪽 팔뚝에 둥근 방패를 고정시킨 그는 과거 수군에 몸을 담았던 삼십대 후반의 외팔이였다. 그는 오른팔이 없었다. 그래서 왼팔에 패를 부착해서 싸우는 자였다.
 그러나 그가 팔이 하나 없다고 해서 누구보다 약하지 않았다. 그는 한 개의 팔은 열 개의 팔을 능가하는 무서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경이(驚異)의 대상이었다.
 그의 방패는 사방 일 척에 이르는 작은 병기였지만 검이나 도보다 날카로워 감히 경시하지 못할 무서운 병기였다.
 그는 방패를 병기로 사용하기 때문에 비패라 불렸다. 더구나 그는 방패를 날리는 기법을 구사하는데 있어 단 한 번의 실패도 하지 않았다.
 오른쪽 끝에 몸을 숙이고 있던 검상이 퉁기듯 달려나갔다. 아무런 요격이 없음을 알자 나머지 그림자들이 폭사되는 화살처럼 쏘아갔다.
 탁!
 애꾸가 하풍백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풍백은 앞으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조장인 애꾸가 어깨를 쳤다는 것은 선봉(先鋒)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누각의 모퉁이를 돌아서자 갑자기 하나의 그림자가 놀란 토끼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려움으로 누각의 기둥 어디에 숨어 있던 자였다.
 모두 하나의 신형은 무시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풍백의 눈이 어둠 속에서 붉게 달아올랐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지만 하풍백은 자신의 몸에 이는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 드러나는 적은 모두 죽여라. 살기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 기다린다는 것은 죽여 달라고 목을 내미는 것과 같다.
 암중에 속삭이는 듯이 들려오는 적미월의 음성이 귀를 갈랐다. 어디에나 적미월의 음성은 울리고 있었다.
 적미월은 그들 모두에게 살인기예를 가르친 사람이기도 했고, 그들 모두를 악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을 살려 준 은인이기도 했다. 그에게 무공을 전수 받아 죽지 않고 살아났으므로······.
 죽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선택되어진다는 귀혼열, 귀혼열의 제일 교두인 적미월은 연약하던 소년을 살수로 키워내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한촌(寒村)에서 농사를 짓던 순박한 사람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단 일 년만에 철저한 살도부(殺屠夫)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하풍백도 그의 손에 의해 귀혼열 제일의 무인이 되었다.
 “죽여야 한다.”
 하풍백의 입이 가볍게 울리며 한 모금의 숨을 빨아들였다. 하풍백은 발끝을 이용해 퉁기듯 달려 검은 그림자의 등으로 다가갔다.
 검은 그림자는 손에 한 자루의 귀두도(鬼頭刀)를 들고 있었으나 도주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마도 그는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접근하는 그들을 본 것 같았다.
 하풍백은 발끝으로 땅을 찍으며 뱀처럼 몸을 길게 늘였다. 그가 달려가는 모습이 그렇게 보였다. 만약 그를 놓쳐 경종이라도 울리게 된다면 만사휴의(萬事休矣)였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오십여 명의 군병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을 넘을 것이고, 곧 난전이 이루어질 것은 분명했다. 그 전에 그들은 적의 우두머리를 요절내 버려야 했다. 그것만이 모두가 사는 길이었다.
 하풍백은 도주하는 자가 등을 보이든 상관이 없었다. 두 자루의 검을 휘둘러 목 뒤의 아문혈(啞門穴)을 찍어 갔다. 독맥을 구성하는 이십팔 개의 혈 중 아문혈은 뇌와 심장을 이어 주는 아주 중요한 혈도였다.
 푹!
 “커흑!”
 섬뜩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살 속으로 무엇인가 박혀 들 때 나는 소리였다. 짧은 신음도 미처 목을 빠져나오지 못했는지 바람이 새는 듯한 소리로 들렸다.
 오른손에 들려 있던 검이 그림자의 목에 깊숙히 박혀 들었다. 어둠에 가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검이 그림자의 목을 뚫고 염천혈(廉泉穴) 방향으로 빠져 나갔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토록 정확하게 가르고 들어갔는데도 인간의 목숨은 질긴 것이었다. 검은 그림자는 쉽게 죽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는 두 팔을 기러기가 날개를 퍼덕이듯 움직였다.
 부르르―
 하풍백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손에 이는 촉감이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마치 배설 후의 기쁨이랄까? 아니면 사내의 배꼽에 걸려 한 시진 동안 격정(激情)을 참지 못하는 창녀의 호흡이랄까?
 하풍백은 손에 이는 감촉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몸이 떨리자 검신을 타고 흐른 피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또 다른 비명은 없었다.
 목의 울대가 자리한 염천혈을 찔렸으니 비명이란 애초에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풍백은 자신의 손에 목이 제압 당한 그림자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목이 베이거나 뼈가 부러지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뼈가 부러지며 죽는 자의 수는 적지 않았다. 아무리 병기가 날카롭다 해도 검이나 창, 또는 도에 죽는 자의 대부분은 단칼에 베어지기는 어려웠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내공을 이룬 자들의 경지였다.
 단칼에 사람의 몸을 벨 수 있다면 신력이 대단해야 하고 병기가 날카로워야 하며 병기가 무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임이 분명했다.
 대개의 경우 단 일 수로 사람의 몸을 베어 버리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그들처럼 단병기(短兵器)로 사람을 베어 버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좋았다.
 사람을 죽이기는 쉬웠다.
 질긴 것이 사람의 목숨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의외로 약한 것이 사람의 목숨이었다.
 사람의 몸에 자리하고 있는 혈도들은 강한 사람도 가장 약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그래서 혈도를 강화시키기 위해 내공심법을 만들고 끊임없이 수련을 하지만 그것으로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혈도를 강하게 격타당하거나 파괴되었을 때에는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사람이 죽는 명확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사람이 죽는 가장 큰 이유는 몸에 박혔던 병기가 뽑힘으로써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겉이 아닌 내부까지 깊숙히 상처를 입었을 때는 지혈(止血)을 할 수도 없다. 설사 지혈을 한다고 해도 내부의 파열이나 대동맥의 절단으로 몸 안에 혈류가 엉켜 죽는 것이 가장 큰 죽음의 이유이다.
 “그만 죽어 주어야겠다.”
 하풍백은 검을 그림자의 목에서 뽑으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검을 잡아 뽑으려는데 등으로 이어지는 뼈의 틈에 박혔는지 그림자까지 딸려 움직였다. 하풍백은 급히 손을 비틀어 검이 찔러 들어갔던 방향과 약간의 불일치가 일어나게 방향을 틀며 검을 뽑았다.
 드드드―
 검에 뼈가 갈리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리며 검이 뽑혔다. 하풍백은 신경질적으로 무너지는 그림자를 발로 걷어찼다. 그림자가 발길질에 실린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이 장을 날아가 나뒹굴었다.
 바람에 실려 짙은 혈향(血香)이 코로 스며들었다.
 
 
 3
 
 
 애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왠지 공성(空城)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그가 공격에 대한 명령을 받았을 때 들었던 것과는 상황이 너무 달랐다. 아무래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정천호(正千戶) 이걸(李杰)은 그들이 오른 산성이 벌써 수백 번은 주인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불과 한 달 전에는 명군의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가 지키고 있던 성이라 했었다.
 애꾸는 외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지난 저녁, 술시(戌時)에 있었던 작전회의를 돌이켜 생각하며 그가 듣고 보았던 모든 것을 하나씩 더듬어 보고 있었다.
 “이 성으로 오르기는 쉽지 않다. 총 네 군데의 진로가 있으나 세 군데는 적에게 장악 당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기마대가 목숨을 걸고 확보한 길밖에는 없다.”
 정천호 이걸은 명문 자제 출신의 장군답게 말이 또박또박 끊어졌다. 들리는 소문에는 북경에서도 명가에 속하는 청천이가(靑天李家)의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학문뿐만 아니라 무공과 지략에도 뛰어나다는 소문이 있었다. 지도를 가리키는 작은 지휘봉도 그에게 어울려 보였다.
 열심히 설명하는 그의 주위로 열 명의 조장들이 앉아 있었다. 각각 열 명에서 열두 명으로 이루어진 한 개의 조는 그들이 지닌 최소 단위였다. 그들 열 개의 조는 편복군 중의 한 개 지로(支路)인 일지대(一枝隊) 소속이었다. 그들과 다른 조가 있다면 귀혼열뿐이었다.
 아무튼 귀혼열이 편복군의 군제에 편입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편복군의 주류는 오래 전에 오군도독부의 다른 네 개의 지대와 함께 운남(雲南)에서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 중이었다. 다만 그들 열 개의 조로 이루어진 일지대만 서장으로 원병(援兵)을 온 것이었다.
 특히 일지대에는 긴급 보충된 그들, 흔히 귀혼열이라 부르는 악마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누구의 명령도 거부하는 귀혼열은 팔십만 명에 이르는 명군을 통틀어서도 이백 명을 넘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다.
 “우리는 흑봉산성을 점령하기 위해 무려 육 개월째 이곳에서 머물고 있다. 곧 우기(雨期)가 닥쳐올 것이고 이번에 점령하지 못하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걸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눈을 빛내고 있지만 안개가 퍼지듯 얼굴에 피어 오르는 긴장과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것을 그라고 해서 모를 리는 없었다.
 아무튼 그의 임무는 흑봉산성의 탈환이었다.
 그것이 그의 출세와 연관이 되어 있었고, 명군에서 가장 무서운 조(組)라는 귀혼열이 일곱 명이나 도착했으니 무조건 산성을 탈환해야 했다.
 “우리측의 첩보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산성에는 적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오십 명에서 많게는 백 명 정도로 보면 된다. 총지휘자는 을제산인 하부부(河 )다. 놈은 수이족을 이끄는 열두 명의 족장 중 하나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 두 명의 족장이 더 있다고 하지만 하부부에 비해서는 약한 놈이다. 오늘의 공격 목표는 하부부를 죽이고 산성을 탈환하는 것이다.”
 이걸은 애꾸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하는 표정이 눈을 아리게 파고들었다.
 애꾸는 대답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그들 귀혼열에게 주어지는 일은 늘 죽음이 곁에 있는 일이었다. 적과 싸운다는 것이, 병기를 들고 싸운다는 것이 적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는 이미 육 년 동안 이 지긋지긋한 귀혼열에서 수백 명을 죽였고 수없이 많은 동료들이 죽는 것을 보았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귀혼열의 살귀(殺鬼)들에게는 사치였다.
 애꾸는 이걸을 바라보았다.
 “선봉은 귀혼열이 맡는다. 귀혼열은 성 내로 진입해 하부부를 잡는다. 다른 것은 신경 쓰지 마라.”
 애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기도 싫었고, 항상 그렇듯이 그들 귀혼열은 어떤 명령이 떨어지든 몸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았다.
 
 ***
 
 ‘이곳 지형이 마사토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군.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알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애꾸는 자꾸만 신경이 거슬렸다.
 습격에서 지형은 매우 중요했다. 지형에 따라 속력이 감소되거나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었다. 매복이 유리한 지형도 있었고, 공격자의 몸이 노출되기 쉬운 지형도 있었다. 문제는 지형을 알면 지형을 이용한다는 것이고, 모르면 지형에 의해 노출된다는 사실이었다.
 명군에서 지혜가 출중하다고 알려진 이걸이라면 산성이 어떤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인지 깜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부족한 지형의 설명에 따른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었고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한 곳에 머물러서 좋은 결과는 기대할 수 없지.’
 애꾸가 눈을 들었을 때 선봉에 선 귀검의 몸은 이미 십여 장 앞에 튀어나가고 있었다.
 두 자루의 날렵해 보이는 검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치 소의 뿔처럼 어깨 위로 튀어나온 모습을 생각하자 다리에 힘이 생겼다.
 “어서 움직여!”
 산성이라 하나 있을 것은 빼놓지 않고 모두 있었다.
 일곱 명의 귀혼열이 무수한 장애를 극복하고 오백여 장을 전진했지만 나타나는 적은 없었다. 대신 수없이 많은 장애가 그들의 발을 묶었다.
 땅으로 꺼지는 함정이 있었는가 하면 불쑥 솟아오르는 지둔창(地屯槍)도 있었다.
 창을 땅에 묻고 적이 다가와 가는 실을 건드리게 되면 솟구쳐 오르게 하는 지둔창은 예로부터 남만(南蠻)에서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특히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군사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병기가 지둔창이었고,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를 잘라 만든 것이므로 설치하기도 쉬웠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수백 번의 쟁투(爭鬪)에서 승리를 낚았던 그들, 귀혼열도 막막하게 다가오는 감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적이 있다면 싸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은 싸우도록 만들어진 야수들이었다.
 명군은 그들에게 단 한 가지만 요구했다. 싸우고 죽이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죽이거나 죽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들 개개인은 수십 번 죽였고, 수백 번 죽을 고비를 넘긴 그들이었다.
 문제는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적이 없다는 것은 성이 비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결국은 암계(暗計)가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뻔한 이치였지만 생과 사가 갈리는 갈림길에서는 모든 것이 결정되기도 하는 일이었다.
 “모두 정지!”
 애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들이 목표했던 산성각(山城閣)에 들어갔을 때 적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수이족의 족장 을제산인 하부부와 성을 지키기 위해 남아 있을 것이라던 천축의 장수 마하간다라는 없었다.
 그들이 기거하고 있었다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그들이 사용했다고는 보기 힘든 집기 몇 개뿐이었다. 모두가 허탈해 맥이 풀린 것 같았다.
 애꾸의 목소리가 울리자 모두들 멈추어 섰다.
 죽은 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은 공격다운 공격을 받지도 못했고, 습격다운 습격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앞으로 달렸고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사실 외에는 그들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몇 번의 기관(機關)에 걸려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거동이 불편하거나 마음이 걸릴 정도의 상처를 입은 사람은 없었다.
 갑자기 그들 모두와 주변의 모습이 밝아졌다. 기이하도록 그들의 모습이 잘 보이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하늘에 만월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잠시 쉬며 전력을 가다듬는다. 어딘가는 적의 매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애꾸는 조장의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경험이 많은 그로서는 이런 산성을 습격하는 일에 익숙해 있었다. 그들 모두는 각각의 특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적을 공격할 때 조장을 누가 할 것이냐를 결정했다.
 지금과 같이 산을 공격하거나 산성의 공격이 있을 때에는 애꾸가 조장이었다. 판성(板城)이나 도심의 외곽을 둘러싼 성곽을 공격하게 된다면 귀검이 조장을 맡게 될 것이었다. 귀검은 성과 시가전(市街戰)의 조장이었다.
 또한 수전(水戰)을 치르게 된다면 비패가 조장이 되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은 그들이 지닌 특기이기도 했고, 또한 귀굴(鬼窟)이라 불리는 살귀 양성소에서 배운 기술이기도 했다.
 그들은 수십 길이나 되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주저앉는 동안에도 그들의 눈은 결코 자신이 맡은 지역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손에 들린 병기도 놓치지 않았다.
 “제길! 이처럼 싱거운 싸움은 처음이군.”
 반도가 허탈하다는 듯이 비틀린 목소리를 뿌렸다. 피만 보면 유난히 광분하는 반도로서는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이왕 일이 벌어지면 무언가는 저질러야 풀리는 성미이기도 했다.
 하풍백은 뒤를 돌아보았다.
 선봉을 맡은 그로서는 동료들보다 오륙 보 앞에 나와 앉아 있었다. 그것으로 적의 목표가 되어 주는 것이지만 실제로 선봉이 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전술이라는 것이 어느 군대나 마찬가지지만 선봉은 그냥 지나치도록 놔두고 뒤따르는 본대(本隊)를 치는 것이 관례화된 전술이었다.
 “귀검!”
 나직하게 들리는 애꾸의 목소리에 하풍백은 손을 들어 주먹을 들었다 폈다. 듣고 있으니 이야기하라는 귀혼열의 수(手)신호였다. 그들은 수백 리를 가더라도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의 수신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은밀함을 유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말을 삼가하고 있었다.
 
 
 4
 
 
 가가가각!
 혈부는 자신의 손에 들린 두 자루의 혈부를 서로 비비고 있었다. 혈부에서는 날이 갈리며 낮은 금속성의 마찰음이 울려 나오고 있었다.
 ‘벌써 팔 년이 지났다.’
 고즈넉한 밤, 움직이지 않고 쉬거나 잠을 잘 때면 혈부는 끓어오르는 살기에 몸을 뒤척거렸다.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벌써 오래된 이야기였다.
 아니, 이제는 잊혀질 만도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생생해졌다. 만월이 뜨는 날이면 더욱 생생해지는 기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더욱 악랄한 살귀가 되어 가고 있었다.
 팔 년 전, 그 날!
 주인이 그를 부른 것은 전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이환, 나 좀 보게!”
 사천(四川)의 끝자락에 위치한 거대시진 울지화(鬱枝花)에서 두 번째로 큰 장원을 가지고 있는 만금대인(萬金大人) 호대인(胡大人)이 그를 부른 것은 장작을 막 패고 한숨을 돌리는 참이었다. 저고리를 벗어 버린 그의 등과 가슴의 우람한 근육에서는 땀방울이 흘렀다.
 호대인은 그의 주인이었다.
 명이환(明理煥)이 언제부터 호대인의 장원에서 하인으로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분명하지 않은 관계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명이환의 부친이 호대인의 하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명이환은 주인이 바람에 죽선(竹扇)을 날리며 긴 장죽을 빼어 문 호선루(昊仙樓)로 다가갔다. 멀리 장강의 끝자락이 보이는 호선루는 호대인이 천금을 들여 세웠다는 화려한 이층 누각이었다.
 명이환이 다가서자 호대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오십줄의 호대인은 배가 올챙이처럼 나왔고 권세가(權勢家)다운 욕심이 입가에 묻어 있는 자였다.
 “심부름을 다녀오게나. 급한 일이니 금하(金河)에 가서 방유(方裕)를 만나게. 내 이미 서찰은 준비해 두었네.”
 명이환은 의문이 생겼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금하는 울지화에서 말을 달려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금하의 현령(縣令)인 방유가 호대인의 친구라는 소문이 있기는 했다. 일설에는 호대인이 만금을 들여 관직을 사고 방유를 금하의 현령으로 앉혔다는 소문도 있었다. 몇 번의 심부름을 다녀온 경험이 있어 명이환은 방유를 잘 알지는 못해도 안면은 가지고 있었다.
 “속히 다녀오게.”
 호대인은 두터운 봉투를 내밀었다.
 당지(唐紙)로 만들어 까칠하기는 했지만 튼튼하게 봉해져 있는 것이 귀한 서찰인 것 같았다. 명이환은 급히 허리를 숙이고 물러나왔다.
 그가 호선루를 나서 장원의 대문으로 가려고 서두를 때 멀리서 마누라가 하늘거리는 몸짓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누라와는 이 년 전에 결혼을 했다.
 미련한 곰탱이처럼 생긴 명이환과는 달리 마누라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연꽃처럼 예뻤다. 마누라는 미색이 곱기로 일대에서는 소문이 자자했다. 명이환은 자신이 마누라와 살을 섞고 한 이불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을 늘 행운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호대인이 없었다면 그녀와의 결혼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녀와 명이환이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호대인이 중간에서 주선을 잘해 준 덕이었다.
 엄격하게 말하면 그녀, 명이환의 마누라인 춘앵(春鶯)은 호대인의 집에서 하인 노릇을 하던 좌노이(左老二)의 둘째 딸이었기에 더욱 가능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명이환의 아내, 춘앵은 아름다웠다.
 하늘거리는 허리를 가지고 있었고 붉은 입술도 가지고 있었다. 사내의 몸이 열 개라도 받칠 수 있을 것 같은 두툼하고 살집 좋은 궁둥이도 가지고 있었고, 열 명의 자식이 달려들어도 능히 먹여 살릴 수 있는 풍만한 가슴도 가지고 있었다.
 “당신! 어디 가시나요?”
 “응, 대인의 심부름으로 금하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계집의 두툼한 가슴을 보며 명이환은 급히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누라의 가슴만 보고 있어도 질펀한 밤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명이환이었다.
 마누라의 얼굴에 웃음이 걸렸다.
 소문에는 그녀의 웃음으로 인해 상사병에 걸려 죽은 미친놈도 여럿 된다고 했고, 그녀의 마음이 넓었는지 그들에게 몸을 나누어 주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고 믿고 있었지만 오로지 명이환만은 믿지 않았다.
 “빨리 다녀오세요.”
 ‘흐흠, 춘앵도 벌써 몸이 타는 것 같군.’
 명이환은 바짓가랑이에서 두 개의 방울이 부딪쳐 아프도록 뛰어나갔다.
 문을 나서 한참을 달려가던 명이환은 자신이 무언가 빠뜨리고 왔다는 생각을 했다. 말(馬)이 필요했던 것이다. 금하까지 가려면 말이 필요했다. 항상 말을 타고 다녔는데 새삼스레 걸어다닌다는 것도 이상했다.
 ‘이상하다? 대인이 말을 내주지 않다니······. 늘 말을 내주셨는데.’
 굳이 대인에게 고하고 마구간의 말을 뺄 필요는 없었다. 말을 관리하는 것도 명이환의 일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대인에게 말씀은 드려야겠지?”
 그것이 일의 발단이었다.
 명이환이 대인을 보기 위해 누각으로 달려갔을 때 호대인은 자리에 없었다.
 명이환은 다시 방향을 바꾸어 평소 호대인이 기거하는 거마채(巨馬寨)로 달려갔다. 거마채는 호대인이 낮잠을 자거나 안채의 여주인에게 가지 않을 때 머무르는 곳으로 장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마채 앞으로 달려가던 명이환은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몹시 난처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문이 반쯤 열린 거마채에서는 두 개의 몸뚱이가 땀을 흘리며 부둥켜안은 체 방사(房事)에 땀을 흘리고 있었다.
 계집이 누구인지 불분명했지만 사내는 분명 호대인이었다. 반쯤 열려진 문틈으로 보이는 뚱뚱한 몸집, 임신한 여자처럼 툭 불거진 올챙이 배와 두터운 허리의 비곗살이 호대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호호호, 그 어리석은 놈은 죽어라 달려가고 있겠죠?”
 “물론, 놈은 가면 곧 죽게될 거야.”
 “아흥! 좀더······.”
 두 연놈은 마구 어우러져 비음과 격정의 신음을 터뜨렸고, 배불뚝이는 연신 허리를 움직이며 노를 젖고 있었다. 명이환은 한참 동안 비켜서서 호대인의 방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어딘지 계집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던 것이다. 목소리만 귀에 익었다면 문제가 아니었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거마채의 마루 밑에 놓여진 초혜(草鞋)도 눈에 익었다. 감정에 겨워 이를 악물 듯 질러대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는 오로지 한 명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설마?’
 너무나 귀에 익은 소리였다. 명이환은 믿을 수 없었지만 머리를 방으로 들이밀었다.
 그의 눈에 피가 몰렸다.
 “이런, 미친 연 놈들!”
 명이환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소문은 들었지만 그럴 리가 있겠나 하는 생각을 했었던 그였다.
 “호홍! 그럼 명이환은 죽겠네요. 결국 그 멍청이는 자신을 죽여 달라는 서찰과 청부금(請負金)을 들고 간 거네요.”
 “하하하, 그렇지.”
 “아잉, 대인은 너무 화끈해서 탈이라니까요. 허헉!”
 계집과 사내는 미친 듯 방사를 했다. 명이환은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얼굴이 불에 타는 듯했고, 무릎의 힘이 빠져 나갔다.
 분노로 젖은 얼굴을 들었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은 거마채의 벽에 걸려 있는 한 자루의 박도(朴刀)였다. 제법 권세가 있는 호대인이고 보니 그는 박도를 멋으로 차고 다녔고 아마도 방사를 즐기기 위해 벽에 걸어둔 것 같았다.
 명이환은 박도를 들고 거마채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놀라는 계집의 얼굴은 흥분이 가시지 않은 채 들려졌고, 비곗살이 두터운 사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손을 내젓는 사내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악, 여보!”
 명이환은 박도를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스물······. 그리고!
 명이환이 박도를 내리치다 멈추었을 때 세상이 변해 있었다. 그곳에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정실 바닥에는 잘게 다져진 육편(肉片) 쪼가리만이 난삽하게 뒹굴고 있었다.
 스슥!
 여섯 사람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하풍백이 손을 들어 허공에 두 번의 원을 그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집합의 신호였다. 여섯 명은 빠르게 하풍백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반원의 대오(隊伍)는 흐트러진 것이 없었다.
 생각에 잠겼던 혈부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지난날의 비탄과 살심을 흔들리는 머릿속에 감추며 대오의 좌측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었다.
 “귀검! 무슨 일이야?”
 애꾸가 구르듯 다가와 낮게 속삭였다.
 하풍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은 그들이 조금 전 지나쳐 온 곳으로 산성의 우물이 있던 방향이었다. 손끝을 바라보던 애꾸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그것은 그의 귀에 들려오는 작은 병장기의 소리 때문이었다.
 한두 명 정도의 적이 숨어 있었다면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따위는 설사 들린다 해도 길지 않았을 것이지만 병기가 충돌하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리고 있었다.
 애꾸가 손을 들었다. 엄지와 검지가 곧게 펼쳐져 있었다. 모두의 손이 허공으로 올라갔다. 한결같이 엄지손가락을 세운 모습이었다.
 하풍백이 퉁겨져 쏘아나갔다. 그 뒤를 따라 나머지 여섯 개의 신형이 밤바람을 가르기 시작했다.
 
 
 2장 살인유혹(殺人誘惑)
 
 
 1
 
 
 정천호 이걸은 귀혼열을 제외한 나머지 조를 이끌고 빠르게 흑봉산성으로 진입했다. 앞서 달려간 귀혼열의 일곱 그림자는 보이지도 않았다.
 애초부터 그들이 앞에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가 아는 일천한 지식과 소문으로도 귀혼열의 발걸음은 말처럼 빠르며 날다람쥐처럼 거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중에 몇 군데서 시체를 보았지만 이걸과 그가 이끄는 오십여 명의 발걸음을 방해하는 자는 없었다. 그는 몇 번인가 걸음을 멈추었지만 무사히 흑봉산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치 산책을 하듯 거리낌이 없는 그의 모습에 뒤를 따르는 부하들은 질린 표정이었지만 이걸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만큼 그는 귀혼열을 믿었다.
 “과연 귀혼열이다!”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귀혼열에 대한 소문은 들었었다. 오군도독부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편복군에서도 그 핵심이 바로 귀혼열이었다. 그들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그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승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는 이걸이었다.
 명조의 관병이 팔십만에 이르지만 그들과 비교할 수 있는 관병은 없었다. 이미 귀혼열이 만들어진 지 이십 년! 그들은 명군의 이름 앞에 자신들의 무명(武名)을 날렸다.
 이백 명으로 이루어진 귀혼열은 불과 열두 명이 정수로 채워지는 한 개 조로 위지휘사사라 불리는 오천칠백 명을 상대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지만 그 동안의 혁혁한 전과(戰果)를 보아 믿어도 좋았다.
 오죽했으면 첨도 장군은 라싸를 평정하기 위해 단 한조의 귀혼열이라도 좋으니 어디에 있건, 어느 정도의 위력을 지닌 조라도 상관이 없으니 귀혼열을 보내달라고 황제에게 장계(狀啓)를 올렸었다.
 그들이 라싸에 배치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일곱 명으로 이루어진 귀혼열로 이루어진 일 개 조가 나타났을 때 라싸에 주둔하고 있던 오군도독부의 십팔 지대는 사기가 두 배는 올랐다는 것을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너무 조용하군. 귀혼열이 앞을 지나쳐 갔다고는 하지만 이럴 수는 없는데.”
 너무도 조용했기에 이걸은 불안했다.
 이번 흑봉산성의 탈환에 대한 모든 책임은 이걸에게 있었다. 첨도 장군은 이걸에게 장마가 오기 전에 흑봉산성을 탈환하라는 명을 내리며 귀혼열을 그에게 보내 주었다.
 한편으로 뒤집어 생각하면 무리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만약 거부한다면 장군의 옷을 벗든지 군법에 회부되는 길밖에 없었다.
 이걸을 중심으로 한 사십육 명은 모두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전진을 계속했다. 무너진 담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고, 기울어진 누각도 다시 보았다.
 한참을 전진한 그들은 자연스레 산성의 중앙에 모여들었다. 제법 넓은 터는 사방이 오십 장이 넘었고, 중앙에는 우물이 있었다.
 흑봉산성에서 유일하게 샘이 나는 우물이었다.
 “이상합니다. 어디에도 놈들이 물러갔다는 흔적은 없는데 보이지는 않는군요.”
 이걸을 보호하며 뒤를 따르던 정백호(正百戶) 정여립(鄭轝立)이 나직한 음성을 흘렸다. 정백호라 하면 정구품의 관직을 지닌 장수였다.
 명군의 군제대로 따져 보아 평상시라면 백 명의 부하를 거느려야 옳으나 오래된 접전으로 부하를 모두 잃어버린 그는 이걸의 부장(副將)으로 보직을 변경한 후였다. 그의 부하는 오래 전 흑봉산성에서 모두 죽었다.
 사실 삼 년 동안의 지루한 영토 분쟁으로 많은 수의 관병이 죽었다. 처음 첨도 장군이 북경을 떠났을 때는 팔만에 육박하는 숫자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삼 만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도 이만오천 명의 관병은 운남으로 이동을 해서 라싸에는 오천 명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 방어로 전환한다.”
 이걸은 급히 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함정에 빠졌다고밖에는 달리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걸은 순간적으로 모든 것이 어긋났다고 생각했다. 바라지 않던 일이지만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일어나기도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기도 하는 것임을 아는 이걸이었다. 전장에서는 특히 그랬다.
 사십육 개의 그림자가 한 곳으로 모였다. 한결같이 병기를 뽑아 앞으로 내밀어 언제든지 날아드는 사병(射兵)을 막을 태세를 갖추었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모두 도주한 것은 아닐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측의 첩보가 잘못되었거나.”
 정여립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것을 원하나?”
 이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생각 같아서는 단칼에 목이라도 베어 버리고 싶다는 뜻이 눈에 비추어졌다. 그러나 목을 베지는 않았다.
 ‘멍청한 놈!’
 이걸은 침을 삼켰다.
 목 울대가 출렁이며 마른침이 넘어갔다. 목구멍이 예리한 면도로 그은 듯 통증이 느껴졌다. 급히 달려오느라 먼지를 많이 마신 탓이었다. 이걸은 귀에 정신을 모으며 몸을 돌렸다.
 사사삭!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팟!
 갑자기 울린 소리는 너무도 미약했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예리한 소리였다. 이걸이 놀라 눈을 크게 떴을 때, 갑자기 사방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백여 명은 족히 넘을 것 같은 무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는데, 들려 온 소리는 그들이 든 횃불에 불이 당겨진 소리 같았다. 다른 손에 든 병기에서 횃불이 반사되며 어둠이 편광(片光)으로 산산이 쪼개져 부서졌다.
 “함정이었구나.”
 이걸은 침을 뱉었다.
 완벽한 함정이었다. 나타나는 자들의 숫자는 백 명, 이걸을 따르는 명군의 숫자는 오십을 넘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군사력은 숫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기습을 제외하고 정면대결은 숫자의 싸움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이걸이었다. 더구나 천축과 수이족의 연합군과 명군의 군사들이 지닌 무공 정도는 비슷했다. 그것으로 보아 반수밖에 안 되는 명군은 자연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나타난 그림자들은 한결같이 장병기(長兵器)를 들고 있었다. 이미 원대(元代) 이후 사라졌다는 호아도(虎牙刀)가 보이고, 풀을 자르는 작두 같아 보이는 마아자(馬牙刺)도 눈에 들어왔다. 한결같이 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투박한 병기들이었다.
 “저들은 어떤 놈들이기에 저토록 무거운 병기를 장난감처럼 다루는 거지?”
 “우리는 상대도 안돼.”
 무거운 중도(重刀)를 든 그들의 모습에 명군은 기가 질릴 판이었다. 그들이 신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식할 수 있었다.
 나타난 자들은 어느새 이걸과 그의 부하들을 둥글게 에워싸 버렸다.
 갑자기 나타난 자들로 인해 위축된 명군은 자신의 날개 속으로 부리를 묻는 닭처럼 자꾸만 뒤로 물러섰고, 결국에는 작은 공처럼 둥글게 말려 버렸다.
 전술로 진을 펴기 위해 원을 만드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지금 명군이 보여 주는 둥근 원은 그런 진과는 차이가 있었다.
 나타난 자들이 누구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들의 앞에는 한 사내가 자신에 키에 이를 것 같은 긴 장병기를 들고 서 있었다. 언뜻 보아서는 대초자곤(大哨子棍)과 비슷했지만 달리 보면 전혀 달랐다.
 십 척은 능히 되어 보이는 긴 장봉에 이 척 정도의 철환(鐵環)으로 보이는 고리를 지니고 있으며, 단봉은 세 개가 이어져 있었다.
 단봉에는 날카로운 표창 같은 철침이 달려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달리 보면 명군이 사용하는 다절곤(多節棍)과 비슷했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달랐다.
 그들의 전면에 거만한 모습으로 나타난 중년인의 전신에는 붓으로 그은 먹물처럼 검은 흑의무복을 입고 있었는데, 구 척의 키에 너무도 잘 어울려 보였다.
 그가 풍기고 있는 신위보다도 특이한 것은 그가 중원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수이족도 아니었다.
 운남과 서장의 일부를 노리고 거병하여 천축의 군사를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킨 수이족은 이미 멸망한 과거의 대리국(大理國)을 잇는 연장선상에 후인으로 자처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축과 손을 잡고 과거 대리국의 고토(古土)인 운남과 서장 남부를 손에 넣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너는?”
 이걸은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대에 대한 의문을 감추지 못하는 것은 놀라움 때문이었다.
 중년 사내가 빙그레 웃었다. 가소롭다는 표정일 수도 있었고, 어찌 보면 기고만장한 모습일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그의 표정은 거만했다. 그의 거만한 모습이 다시 명군을 위축시켰다.
 “본좌를 모른다고? 재미있는 일이로군. 오군도독부의 머리라고 자부한다는 이걸이 천축의 가르파를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나타난 중년인은 가르파였다.
 그는 인도에서 서장을 경략(經略)하기 위해 파견했다는 십여 명의 무장(武將) 중 한 명으로 능히 그 이름만으로도 명군을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한 무명을 지니고 있었다.
 용기백배하여 흑봉산성으로 뛰어들었던 명군은 순식간에 북극의 태풍을 만난 것처럼 얼어붙었다.
 
 ***
 
 “우리의 후미(後尾)다.”
 애꾸가 들려오는 방향의 소리를 가늠하며 외쳤다. 애꾸의 눈에서 진한 집념의 불덩이가 활활 타올랐다. 만약 동전으로 가린 잃어버린 눈도 있었다면 하나 남은 눈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풍백은 활활 타오르는 애꾸의 눈을 보며 언젠가 자신이 보았던 부친의 눈과 같다고 생각했다.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린다. 우리의 모든 작전은 변경한다. 우선은 우리의 후미를 따라 들어온 이걸 장군을 살리고 본다.”
 모두들 엄지를 치켜올리며 눈을 마주쳤다. 그것으로 모든 결정은 난 셈이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고, 의논할 가치조차 없었다.
 애꾸가 들을 달리는 고양이처럼 날래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따라 여섯 개의 신형이 어둠 속에 검은 빛줄기를 그으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귀검이 선봉이다. 후미는 검상이 맡는다.”
 애꾸는 달리는 와중에도 명령을 거두지 않았다. 하풍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애꾸가 조장이었다. 조장이 명령을 내리면 그뿐이었다. 더 이상은 말이 필요 없었다.
 하풍백은 발끝으로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쏘아나갔다.
 발아래 사암층(砂巖層)이 마구 부서지며 발바닥을 따라 모래가 솟구쳤다. 등으로 솟구친 모래가 무복을 타고 몸으로 들어갔다. 너구리 가죽으로 감싼 발목 보호대 속으로 모래알이 들어가자 발뒤꿈치가 아려왔다.
 “최초의 진은 추행지진(錐行之陣)이다.”
 하풍백이 몸을 날려 앞에 서자 기다렸다는 듯 애꾸가 낮게 깔린 소리를 흘렸다.
 추행지진이라는 것은 손빈(孫賓)이 주창한 팔진법(八陣法)중의 하나로 날카로운 송곳처럼 적진을 돌파한다는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 행진이었다.
 가장 빠른 자를 앞에 세우고 좌우로는 둔기(鈍器)를 지닌 자가 선다. 그들의 중앙에 삼각지점을 정해 선두에 달린 자와 교대할 수 있는 보조자적인 역할을 맡긴다. 통상 지휘자는 바로 그곳, 압추정(押錘正)이라 칭해지는 자리에 선다.
 하풍백이 앞에 서며 두 자루의 검을 앞으로 내밀어 가슴과 하체를 보호하는 삼재의 방향을 취하자 좌측으로는 혈부가 달라붙었다. 그의 모습으로 보아서는 연의 꼬리처럼 이 보 뒤에 달라붙은 것 같았다.
 좌측으로는 잔도(殘刀)가 따라 붙었다. 한결같이 단병(短兵)을 쓰지만 귀혼열에서 잔도의 병기는 그 중 비교적 길었다.
 항상 등에는 한 자루의 장봉을 둘로 나누어 만든 중봉을 메고 다니는 그를 누구든지 잔도라 불렀다. 그것은 그가 들고 있는 도가 잔도라는 흉물이기 때문이었다. 많은 적을 상대할 때는 두 개의 중봉과 잔도를 연결해 대도를 만들어 상대를 하는 잔도였다.
 잔도가 사용하는 도는 그야말로 보기가 흉할 지경이었다. 미인의 아름다운 아미를 지칭하는 말처럼 반월(半月)처럼 휘어진 곡도(曲刀)의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도배(刀背)가 사막의 무법자 혈랑(血狼)에게 뜯긴 것처럼 톱니로 이루어져 있었다.
 길이는 삼 척에 달했다.
 그는 십일 년 동안 귀혼열에서 피와 더불어 살았다. 긴 세월동안 살아남은 몇 남지 않은 자 중의 하나인 그는 사람을 하나 죽일 때마다 자신의 도에 금을 긋는 묘한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곡도였던 유엽도(柳葉刀)가 기기묘묘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고, 그를 아는 귀혼열의 동료들은 그를 잔도라 불렀다.
 그의 본명은 잔도라는 이름이 불려지며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고 다른 자들이 본명으로 불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귀혼열에 몸을 담은 자들은 한결같이 이름이 없었다.
 애꾸가 다가와 하풍백의 뒤에 섰다.
 만약 하풍백이 쓰러지면 그가 선봉에 서서 지휘를 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하풍백이 쓰러져도 부축한다거나 어떻게든 살려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며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불문률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일이 너무도 힘이 들어 죽는 것이 행복할지도 모른다는 은연중 생각이 그들을 그토록 잔인한 모습으로 만들어 갔다. 그들은 그것이 진정으로 동료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둘러!”
 목소리가 들리자 비패가 일자로 늘어섰고 맨 뒤에는 검상이 섰다. 그는 만약의 경우 뒤로 다가서는 적을 향해 살초(殺招)를 아끼지 않을 것이고, 그런 그의 임무가 막중한지를 알고 있을 것이었다.
 비패와 검상의 중앙에는 반도가 섰다.
 그들이 만든 진의 모습은 마치 삼첨시(三尖矢)처럼 뾰족한 활의 모양이었다. 소수의 인원으로 많은 적을 뚫기에는 더없이 좋은 진으로 팔진법에 의하면 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진이었다.
 “누구도 죽어서는 안 된다. 중앙 진입!”
 멀리서 둥글게 만들어진 진이 보이자 애꾸가 외쳤다. 한눈에 보아도 그들이 걸친 복장은 명의 군사들이 입는 옷의 형태가 아니었다.
 둥글게 만들어진 원진을 파괴하기 위해 화살과 같은 형태로 바꾸어 달리는 그들의 발에서는 먼지가 피어 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죽어서는 안돼!”
 하풍백은 나지막하게 외치며 달려가는 중에도 쌍검을 미친 듯 휘둘렀다.
 그의 쌍검이 허공에 흩어지는 어둠의 잔재를 마구 베어 넘겼다. 하풍백의 머릿속에서 어렴풋하게 흩어져 가던 기억의 편린이 은어(銀魚)의 비늘처럼 가슴을 찢으며 눈앞에 펼쳐졌다.
 “앉아라.”
 운명의 그 날, 부친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부친은 그에게 말을 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간혹 무공을 익힐 생각은 없느냐는 말을 했지만 무뚝뚝한 말투였었다. 하풍백이 무공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부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풍백은 부친이 그토록 무공을 익히라는 말을 했지만 단 한 번도 무공을 익혀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무공이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배우는 것으로 알고 있는 하풍백에게는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그 날따라 왠지 부친의 목소리가 잠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풍백은 부친이 앉은 맞은편의 자리에 앉았다. 정면을 마주본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부친의 표정으로 보아 그것이 옳을 것 같았다.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하풍백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 번도 자신이 누구인지 이야기하지 않았던 부친이었다. 하풍백은 부친의 과거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부친에 대한 애틋함이 없느냐 하면 그건 더욱 아니었다.
 모든 것을 비밀처럼 싸고도는 가풍(家風) 때문이었다.
 하풍백이 결정적으로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도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비밀로 치부되는 음울한 가풍이 싫어서 반발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 뒤부터는 문학으로 마음이 쏠려 있기도 했다.
 가문의 은밀함이 극에 달해 오죽하면 부친은 하풍백을 낳다 돌아가셨다는 모친이 누구인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풍백은 누군가 이야기해 주기를 은근히 바랐지만 왠지 이야기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풍백은 많은 생각을 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하가(河家)의 핏줄이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도 해 보았고, 부친이 타지에서 창녀와 눈이 맞아 자신이 태어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것이 번민을 가져올까 두려워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하풍백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꺼렸다.
 ‘무언가 다르다. 갑자기 부친의 모습이 천 년이나 묵은 노송처럼 보인다.’
 부친이 오늘처럼 정색을 하고 입을 연 적도 없었다. 하풍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에 힘을 주고 부친을 바라다보았을 뿐이었다. 어차피 대꾸하지 않아도 부친은 사실을 이야기해 주리라고 생각했다.
 부친은 하풍백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왠지 보기 싫다는 생각이 드는 웃음이었다.
 “그것을 열어라.”
 부친이 가리키는 원탁 위에는 비단 보자기로 싸여 있는 하나의 목갑이 있었다.
 목갑을 싼 보자기는 비단이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온 물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귀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왠지 목갑에서 귀신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구나 칠에서 나는 냄새인지 코가 얼얼했다.
 부친의 얼굴을 보니 놀랄 정도로 담담했다.
 하풍백은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어쩐지 목갑에서는 그가 상상할 수도 없는 보물이 튀어나오거나 악마의 모습을 지닌 그 무엇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너는 형이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모릅니다.”
 형은 한 달째 중원에 나가 있었다.
 형님은 중원으로 나가기 전에 하풍백에게 무당산(武當山)의 풍진도인(風塵道人)을 찾아간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정말로 풍진도인에게 갔는지는 의심이 가는 일이었다.
 하풍백은 형이 풍진도인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청해호에서 무당산까지는 먼 거리였다.
 호북(湖北)에 있는 무당산은 청해호에 자리잡은 집과는 왕복 삼 개월은 걸릴지도 모르는 먼길이었다. 아마도 형은 시간을 벌기 위해 그토록 먼 곳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풍백이 알기에는 형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부친도 알고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형의 마음을 빼앗은 여인은 청해를 건너 사류하(沙流河)의 시진에 사는 우노(牛老)의 여식이라 했었다. 따지고 본다면 집이 있는 청해호에 자리잡은 해심산도(海心山島)와는 지척의 거리였다.
 해심산도에 자리한 하풍백의 집은 부친이 십오 년 전에 세웠다는 검왕장(劍王莊)이었다. 청해호의 깊은 수심이 자리한 곳에 우뚝 솟은 해심산도는 오래도록 검왕장을 세파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고 있었다.
 하풍백은 늘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요즘 너의 형이 여인에게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중원에서 들은 이야기다.”
 “중원에서 듣다니요?”
 부친은 근 한 달이나 걸리는 길을 다녀오셨다. 그래서인지 지친 기색도 보였다. 아마도 부친이 들었다는 것은 중요한 이야기일 것이었다. 그것이 원탁에 놓여 있는 목갑과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이 가져온 것이다. 열어 보아라.”
 부친은 질문을 던져 놓고는 잊어 버렸다는 듯 다른 이야기를 했다.
 턱으로 가리키는 목갑은 하풍백이 돌아오기 전에 중년인과 아리따운 소녀가 가져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인지 부친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설사 질문을 했더라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장원 밖에서 그들을 보았기에 하풍백은 능히 짐작을 할 수 있었다. 하풍백은 목갑으로 손을 가져갔다.
 “듣기에 중원에는 거친 격랑(激浪)이 일고 있다. 서로의 욕심 때문이다. 내가 이곳에 은거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욕심이 보기 싫어서다.”
 부친은 하풍백이 듣건 말건 상관없이 입을 열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풍백은 귓가에 맴도는 부친의 말소리를 들으며 목갑을 잡아당겼다.
 목갑을 싼 비단천은 결이 고왔다.
 “나는 한때, 청해무림을 이끄는 영도자의 위치에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청해를 이끄는 청해무련(淸海武聯)의 련주(聯主)였다. 청해무련은 대방파(大邦派) 여덟 개를 위시하여 총 사십칠 개의 방파가 모인 집단이었다.”
 하풍백은 눈을 들었다.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였다.
 아직 한 번도 부친이 그토록 뛰어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하풍백이었다. 무엇보다 부친은 무림인이었으면서도 무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의식적으로 피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했는데 그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풍백은 가슴을 찌르듯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하풍백은 의식적으로 부친의 무림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었다. 간혹 중원을 다녀오신다고 청해호를 벗어나는 적은 있었지만 청해 무림에 대해 왈가왈부한 적은 없었다.
 자신이 청해 무림의 총수(總帥)였다는 이야기는 듣느니 금시초문이었다. 하풍백은 그런 부친이 달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듣느니 경악이었다.
 그 동안 생각했던 부친은 누구라도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는 위대한 사내였던 것이다.
 목갑을 싼 비단 보자기의 네 개의 매듭 중 하나가 손가락에서 부드럽게 풀렸다. 귓가로 스며드는 부친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했지만 귓가가 울렸다.
 “그러나 보지 못할 것을 보았기에 나는 청해무련을 버리고 이곳 해심산도에 틀어박혔다.”
 하풍백은 묵묵히 보자기를 풀었다.
 두번 째의 매듭이 풀리자 목갑이 단단하기 그지없는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자단목에는 옷 칠이 되어 있는지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고, 방안에 켜져 있는 향촉의 빛을 받아 잘게 부서지는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왠지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과거 나에게는 형제가 있었다. 나는 홀로 강호를 유랑하며 삼첨양도신(三尖兩刀神)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아우는 마하주의 젊은 주인이었다. 내가 청해무련의 련주가 되기 전부터 이미 내 아우는 청해의 일각을 차지하는 마하주의 무인이었다.”
 “대단했군요.”
 얼굴을 들던 하풍백은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부친의 눈가에 눈물 같은 물기가 번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풍백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마하주가 무엇인지는 하풍백도 알고 있었다. 안다고 하기보다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언젠가 부친의 생일에 하신 말씀이었다.
 마하주가 얼마나 명예스러운 집단이었는지 부친은 감격적으로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당시에 마하주가 망했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어떤 이유로 멸망했는지는 이야기 하지 않았었다. 물론 부친과 마하주의 관계도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따라서 마하주와 부친의 관계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부친의 말씀에 의하면 마하주는 이미 십오 년 전에 청해에서 사라진 방파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청해인들이 주축이 되어 세력을 구성하는 청해 무림에서 유일하게 중원인들이 세웠던 방파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갑자기 부친의 눈이 쏘아오자 눈을 마주볼 수가 없어 다시 눈을 떨구었다.
 “그는 죽었다.”
 부친의 말은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하풍백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부친이 숙부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부친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묻는 것보다 이야기를 하시도록 놔두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는 것을 알 것 같았던 것이다.
 “내가 이끄는 청해무련이 아우를 죽이고 마하주를 초토화시켰다.”
 “불행한 일이군요.”
 하풍백은 담담하게 말했다.
 부친이 하는 말을 그는 분명하게 듣지 못하고 있었다.
 부친이 이끄는 부하들이 숙부를 죽였다고 하는데도 그는 놀라지 않을 만치 담담했다. 그러나 부친의 눈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놀랐다.
 “모두들 마하주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했다. 모든 정황 증거가 분명했다. 그들의 주장은 마하주가 청해 땅에 피를 뿌리기 전에 그들을 모두 죽여서 후환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련주였지만 거부할 수가 없었다. 모두는 내가 아우와 형제인 줄 모르고 있었다.”
 하풍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이 부친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 대신 마음에 이는 바람을 이기지 못해 가슴의 기복이 심하게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가문의 비사(泌事)였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숙부였지만 부친이 숙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부친에게 눈물이 그것을 증명했다.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던 부친이었다. 늘 담담했고,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 주던 부친도 눈물이 있다는 사실이 어쩐지 신비하기도 했다.
 부친은 숙부가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부친은 알고 있었을 테지만 일부러 삼가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것은 음모였다. 동생은 하나의 무경(武經)을 얻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너무도 강한 무공이었기에 청해의 무인들은 음모를 꾸며 나에게 맹도(盟徒)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청해 무림에서 중원인이 힘을 키운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배알이 꼴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또 있었다. 아우가 무경을 얻은 것을 청해 무림인들이 어찌 알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부친의 음성이 분노에 젖어 갔다.
 하풍백은 대답하지도, 그렇다고 눈을 들어 부친을 마주보지도 않았다.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부친의 눈을 보게 된다면 자신까지 슬퍼질 것 같았다. 하풍백으로서는 그런 분위기와 음울한 느낌이 싫었다.
 평소 같으면 늦은 시간이었기에 먼저 밥을 먹으라고 이야기했을 부친이 묵묵히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결코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동생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마하주가 불에 타오르고 초토화되던 날, 나는 얼굴과 몸에 누구도 알 수 없는 옷과 두건을 쓰고 들어가 한 권의 무경과 아우가 낳은 아들을 데리고 도주했다.”
 “그가 누구죠?”
 “나는 반 년 후에 청해무련에 염증을 느껴 련주의 직을 그만두고 해심산도로 물러났다. 모두들 나에게 련주직을 이어가 달라고 했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부친은 하풍백의 말에 동문서답하듯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풍백의 물음에는 대답할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부친은 가슴의 한을 풀려고 하는 것 같았다.
 비록 그 상대가 아들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다만 하풍백은 부친의 생각과 달리 가슴으로 삭히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풍백도 구태여 묻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리라는 것을 하풍백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차분한 기다림이 해결해 줄 것이었다.
 하풍백은 상자를 싸고 있던 비단 천을 완전히 풀었다. 망설이지 않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허걱!”
 하풍백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심장을 들쑤시는 역한 냄새가 상자에서 마구 피어 올라 정실(正室)을 어지럽혔다. 하풍백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네 형이냐?”
 부친의 물음은 담담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한 표정이었다.
 상자에는 사람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긴 머리카락에 싸인 머리는 분명 하풍백이 잘 아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유난히 해맑아 보이는 그 얼굴은 이미 반쯤은 썩어 있었다.
 얼굴의 주인은 형이었다.
 형은 눈을 감지 못한 얼굴로 하풍백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눈은 어디에도 없었다. 눈이 있던 자리에는 퀭하니 구멍이 뚫어져 있을 뿐이었다.
 뚫린 구멍은 그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검게 썩은 피부가 보였고 말려 들어간 피부는 뼈에 달라붙었다. 역겨운 것은 눈이 없는 눈두덩에 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낮에 먹은 음식이 오물이 되어 올라오도록 역겨웠다.
 “아우가 낳은 아이는 잘 자라 주었다.”
 부친은 놀랍도록 무심했다.
 하풍백은 부친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형이 죽은 마당에, 더구나 형의 수급(首級)을 눈앞에 두고도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부친은 형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모든 것에 무감각하게 대처하는 부친에 대한 분노였다. 부친은 흉수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형이 숙부의 자식이었군요.”
 부친이 담담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숙부의 자식이라는 이유밖에는 모든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풍백은 분노가 치밀었다.
 숙부의 자식도 자식인 것이다. 더구나 형은 부친의 명을 따라 부지런히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하풍백보다는 효도를 했던 형이었다.
 “아니다. 네가 내 동생의 아들이다.”
 쾅!
 하풍백은 심하게 몸을 떨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다면 부친은 자신의 자식이 죽었다는 사실에도 무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닌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온몸이 와들와들 떨려왔다.
 자신이 마하주의 후인이라는 말 때문이 아니었다. 부친이 자식의 죽음에도 이처럼 담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욱 몸이 떨렸다.
 하풍백의 충격은 컸다.
 이십 년 동안 믿고 살았던 부친이 백부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형이 이끄는 맹우들에 의해 동생이 죽었다면 그것은 절통할 일이 아닌가? 그리 따져 본다면 부친은 백부였고, 자신의 원수였던 것이다.
 백부는 용서를 받기 위해 자신을 구해 지금까지 길러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땅히 분노를 터뜨려야 옳았으나 하풍백은 차분하게 가라앉는 자신을 보았다.
 그것은 슬픔이었다.
 “그들은 너를 노렸다.”
 부친은 여전히 담담했다.
 하풍백은 말을 잊어 버렸다. 머릿속이 텅 빈 것이 부친의 음성도 울리는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하풍백은 이를 악다물었다. 그것만이 정신을 차리는 길이었다.
 모든 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부친이 갑자기 그를 불러 앉힌 것도 따지고 보면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늘 자유로운 하풍백에게 어떤 일도 지시를 한 적이 없었고 속박하려 한 적도 없던 부친이었다. 아니, 이제는 백부였다. 그러나 부친일 수밖에 없었다.
 하풍백은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손톱을 세워서 옆구리를 쥐어뜯은 뒤에야 겨우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격한 감정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들은 네 형을 죽이고도 너를 내놓으라는 것이다.”
 하풍백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유도 없이 더러운 누명을 쓰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부친의 말씀대로라면 마하주는 명예로웠다. 아니 명예롭기 때문에 망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청해 무림의 이단자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모든 것이 허망한 일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하풍백은 눈을 부릅뜨고 부친을 바라보았다. 부친의 눈에서는 피가 눈물과 섞여 흐르고 있었다. 하풍백은 아랫입술이 깨져라 물었다.
 입 안으로 침과는 다른 느낌이 흘렀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입술에서도 진한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의 우리 힘으로는 그들을 막을 수가 없다. 오로지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만약 막고자 한다면 우리 식솔들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버지!”
 “이제 나는 식솔들을 모두 내보낼 것이다. 그리고 명예롭게 죽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도주해야 한다. 네가 살아야만 가문의 맥이 끊어지지 않는다.”
 최후 통첩이었다.
 부친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너무도 담담하게 했다.
 하풍백은 언제부터인가 부친의 말을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하풍백은 갑자기 마음이 가라앉아 화도 나지 않았다. 그것으로 그들은 비록 백부와 아우의 자식이기는 했지만 서로 통하는 사이임이 증명되었다.
 하풍백은 힘을 주어 주먹을 쥔 채로 부친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로서는 발작을 할 수도, 뛰쳐나갈 수도 없었다.
 분노가 일지 않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얼어붙은 이상 아무리 애를 써도 흥분이 되지 않았다.
 “저도 싸우겠습니다.”
 그것으로 하풍백의 신형은 밑 빠진 물독처럼 주저앉았다. 이미 몸이 물 먹은 솜처럼 젖어있었다.
 
 
 2
 
 
 명군을 훑어보는 가르파의 눈에 경멸과 살기가 어렸다. 비록 밤이라고는 하나 주위에 밝혀진 불과 눈에서 쏘아지는 새파란 인광(燐光)으로 가르파의 눈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가르파의 눈은 자신을 쫓는 사냥꾼을 일격에 쓰러뜨리기 직전의 독이 오른 백호(白虎)의 눈을 지니고 있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지만 그것으로 오십여 명에서도 모자라는 명군의 사기를 죽이기는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고개를 가볍게 옮겨 가며 명군을 훑어보는 가르파의 동작에는 명군이 가지고 있지 않은 여유와 흡족함이 흐르고 있었다. 먹이를 잡아 놓은 맹수의 눈과도 같은 포만감까지 어리고 있었다.
 경악으로 입을 벌린 이걸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걸 정도의 장수라면 설사 가르파가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가슴을 펴고 조금은 당당해야 옳은 행동이었다.
 그것이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명군의 최강 군사 오군도독부의 천인호의 관직을 가진 장수인 것이었다. 대명 정오품의 장수가 바로 그였다.
 가르파의 눈이 살기를 더해감에 따라 명군의 모습은 생쥐처럼 초라해져 갔다. 마치 바람 앞에 선 등불처럼 그들은 점점 오그라드는 자신들을 생각하며 위축되었다.
 칠절탁사(七絶琢邪) 가르파의 위명은 그토록 놀라운 바가 있었다. 그가 천축의 장수 중에서 백대 고수에 드는 자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이걸이었다.
 그에 대한 소문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공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서장과 운남에는 안개처럼 퍼져 있었다. 누가 퍼뜨린 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그의 명성은 놀라웠다.
 그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서장에 왔다는 소문도 없었다.
 소문으로 듣자면 그는 운남의 대리(大理)에서 부하 오백을 끌고 나와 명군 이천과 싸워 칠백을 죽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근래 소문은 그가 천축 황제의 부름으로 천축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었다.
 “여기 흑봉산성이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건방진 중원의 무리들 같으니라고.”
 “뭐라고! 우리 중원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군.”
 이걸이 용기를 냈다.
 손에 들린 어린도(魚鱗刀)를 앞으로 내밀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에 들린 어린도는 황제가 직접 하사한 병기였다. 그로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 같았다.
 그도 나설 때와 뒤로 물러설 때를 아는 장수였다.
 비록 명군의 장수들 사이에서는 현자(賢者)라고 통하지만 분명 갑주(甲胄)를 입고 어린도를 찬 장수였다.
 이걸이 앞으로 나서자 가르파는 빙긋이 웃으며 병기를 흔들었다. 그도 한 발 앞으로 나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 상대를 한 수 접어 보는 웃음이 걸렸다.
 “흐흐흐! 내가 들고 있는 철간추(鐵 錐)에 맞서겠다는 자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가르파의 목소리는 아예 비웃음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걸이 비록 명군의 장수라고는 하나 무림에서의 위치는 낭인무사(浪人武士), 그것도 하류에 속하는 청부 살인업자의 수준이었다.
 비바람을 맞으며 성장하는 강호의 무인과 장수는 달랐다. 강호의 고수들은 내공을 바탕으로 무공을 익히지만 장군은 내공보다는 투로(鬪路)에 의존한 형(形)을 익히는 외공을 익히기 때문이었다.
 이걸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감히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던 것이었다.
 소문에는 가르파가 내공을 익혔기 때문에 강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소문의 진위야 어찌 되었든 그가 강한 것은 사실이었다. 더불어 지략도 뛰어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몸을 움츠리고 있다 귀혼열이 사라지자 불현듯 나타난 것만 보아도 그의 지략이 뛰어나다는 것은 증명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외공을 지니고 있건 내공을 지니고 있건 간에 상황이 이걸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누군가는 나서서 가르파를 저지해야 했다.
 윙윙윙!
 가르파의 손이 허공에서 맴돌자 뿌연 막이 쳐졌다. 달빛을 받아 만들어진 막은 가르파의 철간추가 만들어 내는 환상과도 같은 무지개였다.
 ‘으음! 불길하다. 승률은 채 일할이 되지 않는다.’
 물러설 수만은 없는 것! 이걸은 마음을 다잡았다. 어찌 되었든 누군가 결판을 내야 했다.
 “좋은 날이다.”
 가르파는 흡족했다.
 그는 하루 전 곡수(曲水)에 도착했다. 곡수는 말을 달려 라싸와는 반나절의 거리에 있었고, 흑봉산성과는 불과 한 시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천축과 수이족의 연합군은 곡수의 성채에 본영을 두고 있었다.
 가르파는 천축에서 보름을 달려 곡수에 도착했지만 흑봉산성이 명군의 기마병에 의해 위기를 맞았다는 소리를 들고 단숨에 달려와 명군의 기병에 부상을 입은 마하간다라와 바꾸어 진을 치고 있었다.
 가르파는 자신이 흑봉산성으로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서는 하루만에 공은 세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이걸 정도의 장수는 백 명이 와도 무섭지 않았다. 더구나 이걸이 걸친 갑주는 적어도 오십 근은 나갈 것이고 행동이 둔화될 것임은 명약관하(名藥管下)한 일이었다.
 천축의 장수들이 특별히 성을 지키거나 방어의 입장에 섰을 때를 제외하고는 갑주를 입지 않는 경우가 바로 몸이 무겁기 때문이었다.
 가르파가 지닌 철간추는 아무리 두터운 갑주를 입었다 해도 위력을 발휘하는 무거운 타병(打兵)이었다.
 더구나 가르파가 곡수의 본영에서 들은 바로는 이걸이 매우 노련한 장수라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가 거느린 명군의 오군도독부는 이미 수십 년 동안 천하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가르파라 해서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지략이 뛰어나다는 이걸을 죽인다는 것은 오군도독부의 기세를 꺾을 수 있는 절호의 순간이었다. 무엇보다도 명군의 무인 중 하나인 천호소를 벤다는 사실이었다.
 지루한 삼 년 동안의 접경전투(接境戰鬪)에서 천축과 명군은 인원(人員)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매일 사람이 죽기는 하지만 결국 하졸들과 이름 없이 끌려와 전장에 투입된 낭인무사들만 피곤죽이 되는 상황이었다. 정황으로 보아 정천호의 높은 관직을 가진 장군을 죽인다는 것은 사기 측면에서도 바람직한 일이었다.
 “후후후! 애송이, 그만 죽어 주어야겠다.”
 서툰 한어를 뱉어 낸 가르파는 철간추를 더욱 빠르게 회전시켰다. 비록 완벽하게 익히지는 못했지만 비교적 강한 내공이 단전에서 일어나 장심(掌心)으로 퍼졌고, 온몸이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가르파는 서서히 다가들었다. 어차피 내공을 익히지 않은 장수 정도는 그의 보법(步法)과 경공(輕功)에서 발휘되는 무위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윙! 윙! 윙!
 철추가 돌아가는 소리는 점차 커지며 귀를 찢는 소리로 변했다.
 이걸은 눈이 퉁방울 같이 커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선공(先攻)!’
 이걸은 그가 익힌 수만 가지의 병법을 생각했다.
 오로지 선공만이 그나마 조금의 기선이라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르파가 천축 정규군의 장군이라면 그들이 익히고 있는 무공을 펼치기 전에 승부를 걸어야 했다.
 소문대로 그가 내공을 지니고 있으며, 내공을 바탕으로 한 무예를 펼치게 된다면 오십여 명의 군사들은 모두 까마귀의 먹이가 될 것이 뻔했다.
 “꿀꺽!”
 이걸의 목으로 침이 넘어갔다.
 이걸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다가가며 어린도를 횡으로 그었다. 두어 번 눈을 끔벅였을 때, 이걸의 몸은 가르파의 일 보 앞에 접근하고 있었다. 전신에 무거운 백포갑(白布甲)을 걸치기는 했지만 놀랄 만치 빠른 접근이었다.
 삼 장의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던 가르파와 이걸의 거리가 순식간에 오 척 이내로 좁혀졌다. 군사를 지휘하는 사 척 이 촌의 어린도를 사용하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거리였다.
 “호락호락 하지 않는다. 건방진 놈!”
 사아아악!
 이걸의 어린도가 황금색의 파도를 일으켰다.
 무릎 아래에서 시작하여 허리를 베고 목으로 사선을 그으며 솟구치듯 이어지는 일월낭리파(一月浪離波)의 초식은 언뜻 보면 마치 그어 올리는 것 같았다. 이걸이 시전한 일월낭리파의 초식은 명군의 장수들이 익히는 건붕명황도(建鵬明皇刀)의 십이 초식 중 하나였다.
 이걸은 머리 위에서 철간추가 돌고 있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가르파에게 작은 상처라도 준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걸은 달려가며 상체를 숙이고 오른 다리를 길게 뻗었다. 앞발로 뻗은 오른 다리에 칠할의 몸무게를 실어 몸을 지탱하며 삼할의 몸무게를 담은 왼발을 힘껏 앞으로 옮겨 가며 허식(虛式)의 보법을 전개했다.
 어린도가 무수한 은빛 조각들을 허공에 뿌리며 솟구쳤다.
 “애송이! 멀었다.”
 창!
 가르파의 서툰 한어가 끝나기도 전에 이걸은 손에 이는 진한 아픔을 느꼈다.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충격이었다.
 어린도의 도신(刀身)을 타고 전해진 충격은 장심을 산산이 찢는 듯했고, 이어 팔목을 감았다. 팔목에서 시작된 충격이 팔을 거쳐 어깨까지 울렸다.
 어린도가 잔떨림을 일으키며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이걸이 노렸던 회심의 일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커흑!”
 비명을 토하는 이걸의 눈에 자신의 병기를 퉁겨 낸 가르파의 철간추가 보였다. 찰간추의 장봉이 어린도를 퉁겨낸 것이었다. 병기의 충돌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병기란 충돌할 수도 있고, 방어를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어지는 가르파의 공격이었다.
 허공에서 무지개를 그리던 철간추가 이걸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비록 머리에 투구를 쓰고 있다고 하더라도 철간추에 맞으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퍽!
 “빌어먹을!”
 이걸은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좌로 굴렀다.
 땅이 울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며 땅에 세 가닥으로 갈라진 철간추가 땅으로 떨어졌다.
 투구가 철간추에 맞기는 했으나 머리에는 충격이 없었다. 철간추에 맞은 투구가 어디로 날아갔는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땅을 구르는 이걸의 눈에 움푹 파여 들어가는 철간추가 보였다. 장봉에는 세 개의 철간추가 달려 있었는데 땅이 움푹 꺼져 들어가는 곳에서 서로 부딪쳐 맑은 불꽃을 피워 올렸다.
 이걸의 눈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몸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몸에는 무거운 갑주를 걸쳤으니 공격을 당하면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더구나 눈으로만 보아도 철간추는 무서운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갑주를 걸치고 있다 해도 철간추에 맞으면 그 위력이 놀라울 것 같았다.
 “용케도 피했구나. 요행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바람을 가르며 가르파의 발이 얼굴을 찍어왔다.
 곰의 가죽으로 만든 혁피화(革皮靴)에 굽은 말의 편자 같은 거무튀튀한 쇠가 박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신발은 무서운 병기와도 같았다. 신발은 발을 보호하기 위해 신는 것이지만 한 순간 무서운 흉기로 돌변해 있었다.
 퍼퍼퍽!
 흙이 튀어 올랐다.
 이걸은 다시 몸을 한 바퀴 굴려 날아드는 발 공격을 피했다. 동시에 상대의 접근을 방어하고자 어린도를 하늘을 향해 찌르며 몸을 두 번이나 회전시켰다.
 왼팔과 오른쪽 무릎을 땅에 짚으며 앞으로 길게 찔러 가는 어린도의 도세(刀勢)가 제법 막강해 파공성을 일으켰다. 가르파가 훌쩍 몸을 날렸다.
 “어리석은 놈! 그래봐야 목숨이 연장되는 것은 아니다.”
 목소리는 허공에서 울렸다.
 어린도가 찔러 오자 허공으로 뛰어오른 가르파가 떨어져 내리며 이걸의 등을 공격해 왔다.
 ‘피할 수가 없다. 너무 빠르다.’
 이걸은 눈을 감고 싶었다.
 상대가 이리도 기민(機敏)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빠른 습격이라면 가르파를 이기지는 못해도 충격은 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모든 것이 그의 생각으로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걸은 떨어져 내리는 철간추를 보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벌이 날아다녔다.
 퍽!
 “크헉!”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목에 가시가 박힌 듯한 소리가 울렸다. 가까스로 등은 피했지만 어깨에 강한 충격을 느낀 이걸이 삼 장이나 날아가 나뒹굴었다.
 입으로 피비린내가 올라왔다. 그러나 이걸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피를 억지로 삼켰다.
 자신이 약해지거나 쓰러진다는 것은 곧 모두의 죽음이었다. 피를 보인다는 것은 적의 사기를 올려 주는 일이었다.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피를 토해 적을 즐겁게 해 줄 수는 없었다. 이걸는 이를 악물고 넘어오는 피를 삼켰다.
 갑주 위에 맞아 죽지는 않았으나 뼈가 부서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소한 탈골이었다.
 어깨가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모든 것이 끝나는 것 같았다.
 가르파가 여전히 철간추를 허공에 돌리며 다가왔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이제 모든 것이 끝이었다.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었다.
 수없이 많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올린 전과도 이제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와아아!”
 어디선가 일단의 함성이 들렸다.
 누구의 함성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불분명한 상태였지만 분명한 것은 함성이 천축인과 수이족의 연합군이 만든 원진 밖에서 들린다는 것이었다.
 누워 있던 이걸이나 공격해 들어가던 가르파나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모든 행동을 멈추고 함성을 들었다. 이걸의 안색이 더욱 어이가 없었다.
 ‘매복이 또 있었던가? 멍청하게 당하는구나!’
 가르파도 심상치 않은 얼굴로 멈추어 선 채 자신이 이걸을 요절내려던 중이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응원군이 없을 텐데?’
 어둠을 뚫고 몇 개의 그림자가 미친 황소처럼 달려오고 있었다.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선두에서 달려오는 자가 물소의 뿔처럼 두 자루의 병기를 어깨 위로 추켜세운 채 달려온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누구야?”
 철간추를 내리찍어 가던 가르파가 눈을 돌렸다. 잡아 놓은 먹이는 걱정하지 않아도 좋았다.
 어차피 몸이 굳어 움직이지도 못하는 이걸 정도는 철추만 내리찍으면 모든 것이 끝나게 되어 있었다. 가르파로서는 여유를 부려도 좋았다.
 몇 개의 그림자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으나 세 개의 그림자는 구별할 수 있었다.
 정면에 거칠 것 없이 달려오는 놈은 두 자루의 중도를 어깨 위에 소의 뿔처럼 세웠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머지 두 놈은 미친 듯 달리는 놈 양 옆에 서서 달리고 있었는데 그들도 미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 놈은 한 자루의 편월(片月)처럼 휘어진 도를 들었는데 매우 가늘어 보였다. 도배에서는 달빛이 부서져 편광으로 변하고 있었는데 짧은 시간에 그 이유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잔도였다.
 선봉에 선 하풍백을 좌우로 보좌하듯 달리는 그들이라 해서 하풍백과 다를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한 놈은 관병(官兵)이라는 것이 어울리지 않게 뚱뚱한 놈이었는데 손에 들린 것은 두 자루의 핏빛 도끼였다. 혈부가 가슴 앞에서 두 자루의 도끼를 휘둘러 바람개비처럼 원을 그리고 있었다.
 “적이다.”
 가르파는 둥글게 둘러싼 원 밖으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아군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아군이라면 그런 방법으로 달려와 가르파를 돕지는 않을 것이었다.
 바닥에 뒹굴던 이걸도 누운 채로 어깨를 감싸며 달려오는 그림자를 보았다.
 허름한 흑의무복에 두 자루의 중도를 든 사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개개인을 안다고 하기보다는 그들이 이틀 전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라싸의 본영(本營)에 도착하자마자 무작정 자신들이 묵을 곳을 달라고 했었고, 검을 세우고 달려오는 자는 가장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귀혼열이 온다.”
 이걸은 나직하게 부르짖으며 어깨의 통증을 참지 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귀검 부탁한다.”
 애꾸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하풍백이 원진(圓陣)의 일단(一端)을 무너뜨리느냐? 그 반대의 경우냐에 있었다. 선봉에 선 하풍백이 길을 열어야 그들은 자유롭게 살인을 즐길 수 있었다.
 그와 같이 돌격대형(突擊隊形)이나 도주를 하기 위한 대형을 갖출 때는 가장 앞에 선 자가 상대가 구축한 방어의 벽을 뚫어 주느냐, 그 반대의 경우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법이었다.
 그런 점이라면 하풍백을 믿어도 좋다는 것을 귀혼열의 조원들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애꾸도 하풍백을 선두에 세웠던 것이고 의도한대로 진을 뚫어 주리라 믿었다.
 달려가면서도 애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미친 듯 달려드는 귀혼열의 동료들이 후끈한 숨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좋아하는 철저한 접근전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또 누군가가 죽겠군.”
 애꾸는 누군가는 죽을 것이지만 귀혼열의 동료들이 죽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일곱 명에 불과하지만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사람을 죽일 때 가장 잔인하게 죽이는 귀검이 앞에 선 이상 누구도 그의 쌍검을 막기는 쉽지 않았다.
 수십 번에 이르는 조원들의 교체가 있었다. 조원들이 교체되는 경우는 단 한 번뿐이었다.
 죽음! 귀혼열에서 조원의 교체는 죽은 자와 산 자를 바꾸는 일이었다. 애꾸는 십 년이 넘어서는 귀혼열의 생활 속에서 수십 명이 죽는 것을 보았고,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새롭게 조원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대개는 일 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나 일 년만 넘기면 영원히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귀검은 가장 놀라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새로이 보충되는 자가 늘 앞에 서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죽음과도 가깝다는 뜻이었다. 귀검은 귀혼열에 온 이후 늘 선두였다.
 “헉, 조장!”
 정신없이 달리던 애꾸의 귀에 반도의 가뿐 숨결이 다가왔다. 반도의 손에는 언제 뽑아들었는지 부러진 파풍도(破風刀)의 반신(半身)이 쥐어져 있었다.
 그들은 무표정했다. 오로지 한 개의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는 수레바퀴와도 같았다.
 애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제외한 여섯 개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정면으로 얼굴이 보이는 자도 있었고 등만 보이는 자도 있었다. 등을 그에게 맡겨 둔 채 가장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귀검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등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무섭다.’
 누구든 나타나면 베어 버리고 말겠다는 신념이 등을 타고 흘렀다. 뒤를 돌아보는 애꾸와 하풍백의 눈이 허공에서 잠시간 어우러졌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하풍백은 개의치 않고 앞으로만 내달렸다.
 “선봉(先鋒), 척살(刺殺)!”
 애꾸가 바람 새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내질렀다. 은밀히 들리기만 하던 그의 목소리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거친 목소리가 되었다.
 
 
 3
 
 
 가르파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목이 꺾이듯 넘어간 이걸의 모습은 더 이상 반항할 것 같은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죽여라.”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그의 동작이 멈칫했다. 쓰러져 있는 이걸과는 불과 여섯 걸음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가르파는 갑자기 들려오는 함성과 부지런히 울리는 발자국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고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지만 둥글게 둘러싼 자신의 부하들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멀게만 들려오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는 사실이었다.
 “뭐야?”
 한 순간, 그의 눈이 심하게 출렁였다.
 어디서부터 흔들리는 것인지 원진이 뒤틀리고 있었다. 천축과 수이족이 반반씩 섞인 그의 부하들은 둥근 원진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타원형으로 변했다.
 “이건 뭐야.”
 그가 노한 음성을 마치기도 전에 크게 출렁이는 원진의 한 곳으로 일단의 무리들이 돌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순식간에 수 명의 부하들이 가슴을 부여안으며, 혹은 다리를 끌어안으며 주저앉았다.
 한결같이 팔다리가 잘리거나 가슴과 복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참상이었다.
 그들이 들고 있던 횃불이 땅에 떨어져 굴렀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주변에 서 있던 천축과 수이족의 연합들이 심하게 출렁거렸다. 원진은 한 순간에 무너질 것 같았다.
 그들, 무너지는 부하들 사이로 일곱 개의 그림자가 원진 안으로 미친개처럼 난입했다.
 가르파는 어이가 없었다.
 엉겁결에 눈을 부릅뜨기는 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는 자세히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명군이라는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가르파가 알고 있는 명조(明朝)의 군사는 일정한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나타난 자들은 명조의 군사들이 입는 군복을 입지 않았다.
 아니, 명군이 입은 무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관복이라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 마디로 그들이 걸친 옷은 정상인의 눈으로 보아 옷이라 부를 수도 없는 것이 태반이었다.
 어떤 자는 검은 무복을 입고 있었고, 또 다른 자는 사냥꾼이나 입을 것 같은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과 털로 만든 보호대를 손에 감아 착용하고 있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문사복(文士服)을 입은 자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보아도 전쟁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미친놈들로 보였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애꾸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퍼지며 잔잔하게 얼어붙어 있던 하늘을 갈랐다.
 맨 앞에 뛰어나오는 자는 검은 무복에 소의 뿔처럼 두 자루의 검을 어깨 위에 세운 자였다. 그는 나타나자마자 허공으로 도약하며 검을 휘둘러 순식간에 두 명의 천축군 부하를 황천으로 보냈다.
 검이 묵기를 뿌리며 머리가 빠개졌다. 피가 번지며 혈향이 뿌려졌다. 그들은 악귀처럼 얼굴에 뿌려지는 피를 무시하며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으드드득!
 “이건 꿈이다.”
 가르파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이를 가는 황망 중에도 한숨소리가 밀려나왔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 진행되는 줄 알았었다.
 숨 한 번 길게 몰아쉴 시간이면 이걸의 목을 벨 수도 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직 갑작스레 나타나 미친 듯 사람을 죽이는 살도부들이 가르파의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있었다.
 천축군들이 순식간에 지면에 누웠다. 누운 자는 말이 없었다. 그들의 눈은 죽은 후에도 부릅떠져 있었는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들은 열 명 중 아홉 명이 같은 모습으로 죽었다.
 한결같이 목을 감싼 모습으로 죽어 갔는데 감싼 손위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기이하게도 미친 듯 날뛰는 자들은 한결같이 목만을 공격했다. 목이 베어진 이후에야 다른 곳을 공격하는 특이한 모습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끼여드는 거야.”
 가르파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동안 살육이 전개되어 부하들이 피를 토하며 무너지고 목이 굴러 떨어졌지만 그는 아직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이 핏물이 되어 나뒹굴어도 나타난 자들이 명군에 숨겨진 최강의 살인 기계 귀혼열이라는 것을 알 수 없었다. 그에게 도전해 오는 자가 있다는 사실조차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화살과도 같은 모습으로 달려 들어오던 일곱 개의 신형이 갑자기 진의 모양을 바꾸었다.
 커다란 국자 같은 모양으로 모습을 바꾸는 진의 변화가 순식간에 일어났다. 국자의 한 끝이 중심 축이 되고 회전을 일으키는 모습이 마치 별이 뾰족한 모서리를 중심으로 회전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칠성참장진(七星斬將陣)이었다.
 고금십대절진(古今十代絶陣) 중 하나인 칠성참장진은 일곱 명으로 전개할 수 있는 진으로는 가장 위력이 놀라운 진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는 했지만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 국자의 모양을 지닌 칠성참장진은 기계적인 동작으로 가르파의 부하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일정한 방식으로 지면을 훑듯 움직이는 자들이었지만 가르파의 부하들은 속수무책이었다.
 “크아아악!”
 “이쪽으로 온다. 막아라!”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비명을 지르는 일 뿐이었다.
 그들이 지닌 병기도 제각각이었기에 무엇으로 공격하는지 불확실할 정도였다. 그들이 돌아가며 병기를 휘둘렀고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고 있어 부하들이 죽어도 무엇에 죽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베고 찌르고 퉁겨 내는 일련의 동작들이 마치 거대한 마차바퀴가 구르며 모래와 작은 돌들이 사방으로 퉁겨져 나오는 것 같았다.
 “크아아악!”
 사방으로 퉁겨지는 가르파의 부하들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목에 선홍빛 선이 그어진 채 무너져 주저앉는 자가 있는가 하면 가슴을 부여안는 자도 있었다.
 그 중에는 복부를 끌어안는 자도 있었는데 이미 붉으죽죽한 창자가 배 밖으로 빨랫줄처럼 늘어져 있었다. 복부 밖으로 밀려나온 창자는 어스름한 달빛으로 인해 검은색으로 보였다. 느끼한 기름기가 붙어 있는 창자는 쏘아져 내리는 달빛과 별빛을 반사시켰다.
 그것도 잠시 창자들은 모래와 흙에 얼룩이 생겼고 점차 잿빛으로 변해갔다. 어스름 속이었지만 횃불과 달빛 속에서 하나같이 눈에 들어와 놓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었다.
 귀혼열의 일곱 명은 살귀들이었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물러서는 무리들에게서 간격을 두지 않고 달라붙었다. 천축의 무인들과 수이족은 한결같이 장병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귀혼열은 한결같이 단병기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접근전에 탁월한 전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일곱 명의 사내는 미친것 같았다.
 오로지 베고 찌르며 퉁겨 내어 사람을 살상하는 기능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였다. 순식간에 원진을 구성하고 있던 일각이 무너졌다.
 이제 가르파의 부하들이 구성했던 원진은 진의 형태를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정도를 넘어 서로 먼저 피하려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건방진 놈들! 감히 가르파의 앞길에 뛰어들어 난전을 조장하다니.”
 가르파는 격노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오로지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분노만이 그의 몸을, 피를 지배했다.
 가르파의 지나친 자신감이 가져온 결과였다. 진을 구성한 부하들도 가르파를 철석 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등을 보호하기 위한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등은 완전히 노출되었던 것이다.
 귀혼열의 빠른 급습도 놀라운 일이었다. 특히나 그들의 무차별적 살상은 모든 것을 혼란지경으로 만들었고 피아(彼我)를 가릴 수 없는 난전으로 몰아갔다. 순식간에 얽힌 그들은 적과 아군을 식별할 수 없었다.
 “죽여 버리겠다.”
 가르파는 미친 듯 고함을 질렀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부하들의 모습에서 그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가르파는 미친 듯 달려갔다. 조금 전 자신의 손에 의해 쓰러졌던 이걸을 요절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미친 듯 살수를 뿌리는 일곱 명의 살귀들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선봉 참파(斬破)!”
 원심력을 이루며 돌아가는 황망 중에 하풍백은 자신의 어깨를 미는 힘을 느끼고 이어 애꾸의 낮은 음성을 들었다. 무수히 달려드는 적의 머리를 찍어가던 하풍백은 급히 몸을 되돌려 칠성참장진에서 떨어져 나왔다.
 조장인 애꾸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항상 그런 모양이었다. 그들 일곱 중 하풍백이 가장 어리고 몸이 날래기는 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적장(敵將)을 잡는 것은 하풍백의 임무가 되어 있었다.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하풍백도 자신이 적장을 잡는데 익숙해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상대해 주마.”
 “크아아악.”
 하풍백은 지면에서 몸을 굴려 두 개의 발을 자른 뒤 몸을 일으켰다. 등뒤에서 그의 몸을 따라 피가 뿌려졌다.
 그의 등뒤에서 발목을 잃은 수이족 한 명이 비틀거리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는 살지 못할 것이다. 두 다리가 잘렸으니 피가 쏟아져 나올 것이고, 난전 중이니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을 것이었다.
 하풍백은 몸을 굴려 적장으로 보이는 사내를 향해 나아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난전 중이기는 했지만 명군의 수는 아직 불리했다. 그러나 귀혼열의 무서운 힘으로 인해 서서히 동수(同數)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 움츠러들었던 명군은 미친 듯 출렁거리는 가르파의 부하들과 겨루고 있었다. 사기가 죽어 움츠러들었던 명군들도 귀혼열의 출현으로 용기를 낸 것 같았다.
 가르파의 부하들이 만들었던 원진은 이미 흩어지고 군데군데 난마(亂麻)의 모습으로 얽혀 접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죽여 주마.”
 가르파는 분노했다.
 허공에서 철간추가 빙빙 돌아가자 주위의 바람이 모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지 그들의 주위로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단 한 명도 접근하지 않았다.
 가르파는 자신에게 겁도 없이 달려드는 사내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보나마나 명군일 테지만 목숨을 걸고 달려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가르파는 자신이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명군을 격퇴시킬 것이라는 본영 밀사들과 군사들의 말을 믿었었다.
 가르파의 눈으로 보기에 달려드는 검은 옷의 사내는 자신과 비교해 너무나 작았다.
 구 척에 이르는 가르파의 몸집과 다르게 사내는 칠 척을 겨우 넘기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칠 척의 키는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 작은 것은 아니었다. 칠 척의 키를 넘긴다는 것은 드물게 큰 키였음에도 불구하고 작게 보이는 것은 가르파의 신장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었다. 칠 척의 키와 구 척의 키는 지대한 차이가 있었다.
 키도 차이가 있었지만 병기의 차이도 엄청났다. 그것도 겨우 이 척에 이르는 부엌칼 같은 검을 들고 달려드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핫!”
 최초의 공격은 하풍백으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마치 곰처럼 웅크린 모습으로 달려드는 하풍백의 모습에 가르파는 일순 당황했다.
 상대의 달리는 모습으로 보아 내공이 없는 것은 알아보았지만 무작정으로 보이는 모습은 너무도 무모했다. 일직선으로 투로를 밟아오는 모습이 마치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나마 얕기는 했지만 내공을 지닌 가르파로서는 가소로운 모습일 수도 있었다.
 가르파는 긴장했다.
 비록 내공은 없어 보였고 외공만 뛰어나 보이기는 했지만 지니고 있는 외공 이상의 무서운 저력이 느껴졌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한 자루의 검을 가슴에 세우고 다른 한 자루의 검은 뒤로 뻗어 언뜻 보이기만 했다. 하풍백의 몸이 직선으로 다가왔다. 제법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르파는 온몸의 진기를 손에 모아 다가드는 그림자에게 휘두르던 철간추를 내리쳤다. 철간추의 끝이 하풍백의 머리를 노렸다. 철간추는 곧 하풍백의 머리끝에 이르렀다.
 막강한 진력이 스며 있어 부딪치면 피떡이 되어 날아갈 상황이었다. 아무리 강한 내공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피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하풍백은 피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가르파는 자신의 일격이 더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자신의 공격을 무시하고 달려드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우라질!”
 가르파는 분노를 토했다.
 그대로 내리쳐 가면 미친놈처럼 달려드는 자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 죽이지 못한다면 두 자루의 검에 난자당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가르파는 급히 몸을 뒤틀며 뒤로 물러났다. 자연히 내리쳐 오던 철간추가 방향을 벗어났다.
 “이젠 죽어라.”
 하풍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가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하풍백은 상대의 심리를 이용할 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지니고 있는 능력보다 때로는 수배의 위력을 보이고 있었다.
 하풍백은 그림자처럼 따라 붙었다.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가르파는 급히 철간추의 장봉으로 공격했다. 철추가 방향을 벗어나 있기 때문에 부득이한 공격이었지만 장봉의 공격에도 놀라운 위력이 숨겨져 있었다.
 장봉의 끝이 하풍백의 미간으로 파고들었다. 급히 고개를 젖히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피한 것이 아니었다. 머리의 한 부분이 찢겨졌는지 아득해졌다.
 “커흑!”
 하풍백은 급히 몸을 뒤집었다.
 몸 위로 세 개의 철추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철추에는 탈수표(脫手票)와 같은 강침(强針)이 달려 있어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맞으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하풍백은 두 자루의 검을 가슴에 안으며 좌측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오른쪽 어깨가 시렸다.
 철추의 강침이 어깨의 살점을 뭉턱 베어 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깨를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판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고 만다.’
 하풍백은 구르는 중에도 이를 갈았다. 어금니를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턱이 얼얼할 지경이었지만 무엇보다 죽음이 눈앞에 있으므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퍼퍼퍼퍽!
 땅위에서 뽀얀 먼지가 피어 올랐다.
 가르파가 뿌려낸 기파(氣波)와 철추가 땅에 떨어지며 먼지를 일으켰다. 그때마다 하풍백의 몸은 아슬아슬하게 철간추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완벽하지는 않았는지 허공으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몸이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상처는 아닌 듯했다. 간헐적으로 피가 튀기는 하나 곧 멈추었고, 결정적인 타격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피부를 스치는 공격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몸통이나 신체의 중요한 부분에 한 번이라도 맞게 된다면 하풍백으로서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하풍백의 모습은 혈인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몸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력은 남아 있는 듯 보였다.
 수십 번의 공격에서도 가르파는 하풍백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라면 한참의 공격이 진행되어도 하풍백을 제압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하하하! 굼벵이 같은 놈, 언제까지 굴러다니며 피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다.”
 가르파는 기고만장한 목소리를 뿌렸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내공을 익히지 않은 관병으로서는 막강하지는 않아도 내공을 지닌 무인을 상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이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가르파는 강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대로 내공을 익히고 있었고 하풍백은 전혀 내공을 익히고 있지 않았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 당연히 내공을 지닌 무인이 내공이 없는 외공의 고수를 이겨야 한다는 무인들의 생각을 뒤집어 놓는 순간이기도 했다.
 가르파와 하풍백의 혈전을 제외하고는 접전은 어느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미친 듯 난전을 펼치던 쌍방이 멀찍이 물러서서 가르파와 하풍백의 혼전을 지켜보는 모습으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양측이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두 사람은 양 군의 승부를 결정 짓는 열쇠를 쥐게 된 셈이었다. 어느새 하풍백의 몸이 가르파의 발 밑에 이르러 있었다.
 하풍백의 목적은 그것이었다. 내공을 익힌 가르파라 해서 완벽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구 척의 큰 키를 가진 가르파로서는 가장 취약한 부분이 하체일 수밖에 없었다.
 쉬리리릿!
 “다리를 베어 주마. 장대 같은 놈아.”
 하풍백이 번개같이 두 자루의 쌍검을 휘둘러 십자의 모양으로 교차시켰다.
 걸리기만 한다면 다리는 무처럼 베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르파가 지닌 내공의 힘은 놀라웠고 가르파의 반응도 놀라웠다. 가르파가 천축의 백대 고수라는 사실이 눈으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움찔하고 어깨를 떨던 가르파는 철간추의 장봉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하풍백이 회심의 일격으로 펼친 수법은 허망하게 목표를 잃어버리고 허공에서 무지개만을 그려내었다. 가르파의 몸놀림은 임기응변의 한 수였지만 놀라운 바가 있었다.
 “우우우우!”
 “대단하다. 우리는 모두 죽을 뻔했어.”
 여기저기에서 놀람과 감탄의 함성이 울렸다.
 한결같이 가르파에 대한 경탄이었다. 가르파를 따르는 천축과 수이족의 연한군은 탄복이었고, 살아남은 명군은 탄식이었다. 누가 보아도 명군의 일 인으로 보이는 사내는 가르파의 손에 죽을 것 같았다. 그래도 수십 합을 견뎠다는 것이 놀라웠다.
 “탓!”
 하풍백의 몸이 등을 지면에 붙인 채 급격히 회전했다. 마치 팽이가 돌아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했다.
 그렇다고 그가 사라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적당한 빠름이 어둠과 합쳐지며 그의 모습을 흐릿하게 바꾸어 버렸다. 마치 팽이가 돌아가면 그려져 있거나 깎다 생긴 모든 무늬가 연결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두워서 분명하지는 않았으나 달빛과 꺼지지 않은 몇 개의 횃불이 하풍백의 몸이 얼마나 빠르게 돌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타탁!
 무서운 속도로 회전을 일으키던 하풍백의 두 다리가 종아리의 살을 이용해 땅에 짚어진 철간추의 장봉을 걷어찼다. 장봉은 무겁고 단단해 뼈나 발등으로 찼을 때는 오히려 공격을 한 신체 부위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기 십상이었다.
 하풍백은 목숨이 경각에 몰리는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하풍백의 발과 다리가 장봉을 중앙에 두고 미친 듯 휘둘러지고 뻗어 나왔다. 마치 하늘에 대고 삿대질을 하는 자의 모습이었다.
 “어억!”
 허공에 몸이 들려진 가르파의 입에서 경악이 퉁겨져 나왔다.
 숨돌릴 사이 없이 몰아치는 하풍백의 공세에 내공의 운용이 자유롭지 않았다. 더구나 그의 내공은 자유롭거나 깊이 심취하여 일가(一家)를 이룬 수준도 아니었다.
 강호의 고수로 따지자면 겨우 삼류의 내공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외공만을 익힌 군병들에게는 놀라운 신위였다.
 몸을 지탱했던 장봉이 퉁겨 나가자 미쳐 내공을 운용해 몸을 퉁길 사이도 없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두 손이 허우적거리며 사이 순식간에 지면을 향해 등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둘러서서 긴장을 감추지 못했던 모두의 눈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지면에서 정신없이 손을 뻗고 발을 차올려 장봉을 기울어지게 만든 하풍백의 몸이 퉁기듯 일어섰다. 몸을 퉁기듯 일으키며 두 자루의 검이 하늘을 향해 찔러간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죽어라. 곰 같은 놈!”
 푹!
 하풍백의 목소리와 살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가르파의 몸이 허공에서 폭포를 오르는 은어처럼 퍼덕이더니 하풍백의 몸을 깔고 누웠다.
 순식간에 하풍백의 몸이 가르파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둘의 몸집은 너무나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가르파의 등에 깔린 하풍백의 모습은 손가락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크아아악!”
 폐를 가르는 단말마의 비명이 울렸다.
 누구의 비명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찌 들으면 하풍백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달리 들으면 가르파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알 수는 없었다.
 사람의 비명은 목소리와는 달랐다. 폐부를 가르며 나는 소리였기에 가늘고 굵은 것의 차이는 있지만 음색으로 판단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따르는 것이 비명이었다.
 분명한 것은 하풍백과 가르파,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달빛에 빛나는 희끄무레한 하풍백의 도가 보였다. 두 자루의 도가 모두 가르파의 겨드랑이 사이로 허공을 찌른 것 같았다. 그리 되었다면 결과는 뻔했다. 옹기종기 모여 사태를 지켜보던 명군들의 안색이 질려 갔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천축과 명조의 군사들은 멍한 표정으로 움직이지 않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들의 눈에는 오로지 한 사람만 보였다. 한동안 굳은 듯 서 있던 사람들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서로의 눈에는 의혹과 궁금증, 그리고 불안감이 깊이 내재되어 있었다.
 꿈틀!
 움직일 것 같지 않았던 가르파의 몸이 움직였다. 마치 거북이 뒤집힌 몸을 바로 세우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르파의 몸은 한동안 계속해서 꿈틀거렸다. 바로 일어서지 못하고 꿈틀거리는 모습으로 보아서는 비록 그 상처가 심하기는 해도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얼굴이 변했다.
 명군의 군사들은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고, 천축과 수이족의 연합군은 희열과 안심에 물든 얼굴로 변했다. 그들은 일제히 병기를 꼬나들었다. 가르파가 살아났으니 단숨에 명군을 쓸어 버리겠다는 모습이었다.
 털썩!
 가르파의 몸이 뒤집어지며 바닥에 개구리처럼 널브러졌다. 믿을 수 없게도 그 등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하풍백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전신을 붉은 피로 물들인 모습의 하풍백은 앞니를 드러내고 도리질하듯 고개를 흔들며 웃었다. 그리 심한 상처를 입지는 않은 듯 몸도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하풍백의 허리가 일어섰다. 동시에 두 자루의 검을 거칠게 비틀어 뽑았다.
 파하하하―
 가르파의 등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검이 파고들었던 자리였다. 검은 가르파의 등을 관통하여 심장을 찔렀고, 다른 하나의 중도는 간장을 베어 버렸다.
 하풍백은 지면에 몸을 누이며 떨어지는 가르파의 등을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검으로 찌른 것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떴던 천축군과 명군의 적지 않은 눈이 진위(眞僞)를 알 수 없었던 것은 하풍백이 가르파의 밑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풍백의 신형이 심하게 비틀거렸다.
 막상 가르파의 심장을 찌르고 일어서기는 했지만 충격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전신에 뿌려진 피는 가르파의 등에서 흘러나온 피도 있었지만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도 만만치 않았다. 그의 몸에는 그물처럼 잔 상처가 새겨졌고 옷이 걸레처럼 마구 찢겨졌지만 어둠으로 인해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밝은 대낮이었다면 그의 몸에 흐르는 피와 긁힌 듯 보이는 적지 않은 상처를 볼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귀검을 보호해!”
 애꾸의 목소리가 울리고 여섯 개의 신형이 달려나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하풍백을 둘러싸고 작은 원진을 구성했다. 그들은 번개처럼 회전하며 가르파를 구하려 달려들던 십여 명의 천축인들을 베고 퉁겨 내었다.
 너무도 빨라 누구 하나 그들의 행동이 언제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숨 한 번 길게 몰아쉴 사이에 일어난 일이고 보니, 귀혼열의 육 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방관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천축과 수이족의 연합군들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들의 얼굴에는 믿을 수 없다는 경악과 두려움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어리는 두려움으로 그들 스스로 위축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전쟁에서 장군을 잃는 것은 망망대해(茫茫大海)를 가는 배에서 뱃사공을 잃은 것과 같았다. 그들을 이끌어 줄 자가 없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두려움이었다.
 “모두 주살하라!”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이걸이 벽력같이 외침을 토했다. 일제히 복명(復命)을 토한 명군이 병기를 세우며 달려나갔다.
 천축군의 습격과 무공에 밀려 이미 숫자는 반으로 줄어 있었지만 용기백배한 모습이었다. 적의 장수를 죽이는 것을 보았고, 적이 두려워하는 것을 느낀 명군의 사기가 갑자기 하늘을 찔렀다. 그들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피에 젖은 마사토가 허공으로 퉁겨져 올랐다. 언제부터인지 진한 혈향이 넓은 공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순식간에 두 개의 무리는 난전으로 얽혀 들었다.
 “퇴각하라!”
 투박한 한어가 울렸다. 아마도 천축인 중 누군가가 명령을 내린 것 같았다. 허둥거리며 형식적으로 병기를 휘두르던 천축인들의 얼굴에 가는 희열이 떠올랐다. 마치 십년 지우를 만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난전을 벌이던 천축인들이 몸을 돌려 물러나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 수이족의 무인들도 빠르게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수명의 천축과 수이족 군사들의 목이 또다시 베어지고 팔다리가 끊어져 나뒹굴었다.
 “추격하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이걸의 목소리가 밤바람을 흔들어 울렸다. 장창과 도검을 든 명군이 넓게 학익진(鶴翼陣)의 형태를 만들며 달려나갔다.
 퇴각하는 천축인들과 수이족의 무인들은 혼백이 나갈 정도로 다급했기에 손에 들었던 대도와 장창까지 떨구며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다.
 “으음! 목숨의 은혜를 입었군.”
 이걸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홍운(紅雲)이 동녘으로부터 밝아 오고 있었다.
 야밤을 틈타 두 시진 동안 이루어졌던 산성의 공격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이십육 명의 희생자가 있기는 했으나 천축과 수이족의 연합군에 비해서는 미미한 숫자였다. 천축과 수이족은 무려 칠십이 구의 시체를 흑봉산성에 버려 두어야 했다. 당연하게도 가르파의 시신은 흑봉산성의 서쪽 성문 누각에 효수(梟首)되었다.
 태풍에 밀린 장마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 같이 오래도록 끌려다니던 싸움 끝에 흑봉산성은 명군의 손에 넘어오게 되었고, 오군도독부는 다시 위명을 날리게 되었다.
 오군도독부는 흑봉산성을 보완하는 공사를 시작했다. 다시는 적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라싸를 빼앗기게 된다면 청해와 사천까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오군도독부를 지휘하는 장군들의 생각이었다. 전쟁의 장소로만 생각했던 청해와 라싸가 중요한 영토의 개념으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오군도독부는 흑봉산성을 지키기 위해 오백 명의 군병을 운남 대리성(大理城)에서 흑봉산성으로 이동시켰다. 결국 흑봉산성에는 오천여 명의 군병이 남게 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라싸가 완전하게 평정되기 전까지는 결코 서장을 떠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3장 전의(戰意)
 
 
 1
 
 
 “그래서?”
 쾅!
 천축인들만의 회의가 벌어지고 있는 곡수성(曲水城)의 만군루(萬軍樓)에는 괴이하리 만치 후끈한 열기와 사람의 시선을 얼릴 것 같은 상반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곡수성은 삼 년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수이족과 천축의 연합군 손에 들어가 있었고, 만군루는 곡수성의 중앙에 위치한 이층 누각으로 곡수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누군가 손으로 탁자를 후려쳤고 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렸다. 탁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것은 그들이 내공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탁자의 다리 중 하나가 땅에 닿지 않아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공에 뜬 탁자의 다리가 손바닥에 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숙여지며 나무판자로 만들어진 바닥과 부딪쳤기 때문에 둔탁한 소리는 컷다.
 만군루는 천축인들과 수이족들이 차지한 곡수성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져 있었기에 천축인들을 지휘하는 장소가 되어 있었다.
 한때 중산(仲山)이라 불려졌던 산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았지만 성 내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었다. 만군루에서 바라보면 곡수성에 면한 강줄기뿐만 아니라 성을 둘러싼 외곽까지도 눈에 들어왔다.
 “그게······.”
 더듬거리는 말소리는 만군루의 문루(門樓)에 걸린 두 개의 붉은 깃발을 흔들리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군루의 좌우로 나 있는 문루는 이층의 만군루보다 그 규모가 형편없이 작은 문루를 가지고 있었으며, 붉은 색을 띠고 있는 깃발을 걸고 있었다.
 “우라질! 내가 중원 땅, 곡수까지 와서 이런 수모를 당해야 옳다는 것이냐?”
 쾅!
 천축에서 수이족의 구토를 회복해 준다는 명목하에 높은 산령을 넘어 서장의 곡수로 넘어온 십여 명의 장수들······. 그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두루가는 노한 음성을 뿌리며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가 다시 요란한 고통의 신음을 토하듯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몸을 기우뚱거리며 아픔을 호소했지만 누구도 탁자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중원인들을 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야 수이족을 돕는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속으로는 서장에서 나는 흑연(黑鉛)을 얻기 위한 전쟁이었다.
 “빌어먹을! 그래서 네놈들은 가르파가 죽는 것을 보면서도 무작정 후퇴를 했단 말이냐? 그것도 겨루어 보지도 않고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몰골로!”
 천축에서는 오기장군(五旗將軍)이라 불리는 두루가의 목소리는 분노에 절어 있었다. 만약 가르파를 죽인 하풍백이 곁에 있었다면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분노가 넘실거리는 눈빛이었다.
 그가 거느리고 국경을 넘은 구 인의 장수 중 하나였던 가르파는 두루가와는 매제(妹弟)의 관계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자신의 수족 중 가장 믿을 수 있는 장수였다.
 천축이 자랑하는 수많은 장군들 중 두루가와 가르파는 아라하바드[阿拉哈巴德] 출신이었고, 부근에서는 가장 뛰어난 무맥을 지닌 천축비도문(天竺飛刀門) 출신이기도 했다. 두루가의 목소리에 젖은 분노를 알았기 때문인지 누구 하나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다.
 두루가가 한때 불문에 젖어 부처의 제자라고 하는 소문이 있기는 했지만, 소문과 다르게 그의 성격이 포악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설사 자신의 부하라고 하더라도 직접 참수(斬首)를 하는 인물이었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장수들과 군사들이 능력 이상의 힘을 내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손에 죽을까 두려워 강한 힘을 내는 이유도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기 살기로 항전(抗戰)했지만 적은 세뇌갈(世腦葛)이라 불리는 이걸의 군대입니다.”
 얼굴에 비오듯 땀을 흘리던 늙은 장수 하나가 얼굴 만면에 사색을 띠며 반박했다.
 자신으로서는 할 말이 많다는 것을 애써 알리려 하는지 입술을 오물거리고 볼따구니를 씰룩거렸지만 노안(老顔)에 어리는 것은 두려움이었다.
 다른 장수들이 중원인의 모습과는 다르게 마구 날리는 머리와 검은색에 가까운 얼굴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는 유일한 중원인 장군이었다.
 천도장군(天刀將軍)이라 불리는 도호겸(都護 )은 중원에서 천축으로 귀화한 자로 가르파를 도와 흑봉산성을 지키도록 이미 약조가 되어 있던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공격명령을 내리지도 않았고 맞서 싸우지도 않았다.
 그는 단지 매에 쫓긴 꿩과 같이 어둠 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다가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과 도주했을 뿐이었다.
 흑봉산성에 참가하지 않았던 나머지 여덟 명의 장수가 얼굴과 입가에 비웃음을 매달았다.
 ‘미친놈들······ 귀혼열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는 네놈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알아!’
 도호겸은 이를 악물었다.
 어떤 고난이 있어도 참아야 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목숨을 건지는 길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다. 괜히 만용을 부리다가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황천행 마차를 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오래 전 명군의 장수였기에 귀혼열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게 들은 적이 있었다. 아니, 눈으로 보았다.
 오래 전 중원에서 장군으로 초원을 질타했던 도호겸은 신강정벌(新疆征伐)에 참가했었던 자였다. 한때 그의 휘하에도 두 개조의 귀혼열이 있었고, 그는 그들이 누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두루가는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주저앉으며 몸을 웅크렸다. 코끼리가 몸을 웅크린 듯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풍기는 느낌이 천축에서 귀히 여기는 백색 상아를 지닌 백상(白象)과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루가는 굳이 도호겸을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용서하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불길이 쏘아져 나올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덟 개의 눈을 훑었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눈길이었다.
 그의 눈은 농부가 갈퀴로 땅바닥에 떨어진 검불을 긁어대듯 날카로웠다. 눈빛에 소리가 있다면 그의 눈에서는 쇠붙이나 나무가 땅에 끌리는 듯한 거북한 소리가 났을 것 같았다.
 그의 눈앞에 앉은 여덟 명은 막연하게 따가운 안광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두루가의 눈빛을 몸으로 맞으며 그들은 한결같이 목을 숙였다.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마치 약속이나 한 것 같이 일사분란한 모습이었기에 두루가는 더욱 열이 오른 듯한 모습이었다.
 “불가항력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 입을 열었다. 머리에 투구나 머리를 묶은 적건(赤巾)대신 말총을 잘라 만든 머리띠를 묶은 자였다. 특히 눈썹이 붉은 태양을 연상시키는 듯한 모습에서 노인의 기도는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두루가의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보았고, 전혀 몸을 숙이거나 눈을 돌리는 등의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으로 보아 그가 누구이건 간에 두루가의 상상을 벗어나는 자임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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