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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세일소 1-1권

2018.05.04 조회 1,235 추천 8


 # 프롤로그
 
 이제는 눈을 감아도 부모님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잊어서는 안 되는데······.
 매일같이 떠올리면 잊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래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매일같이 생각했건만 어느새 부모님의 얼굴이 오래된 그림처럼 점점 희미해져 간다.
 
 아버지는 점잖은 분이셨다. 무공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늘 올곧게 살려고 노력하셨고,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 협객이셨다.
 어머니는 인정 많고 눈물도 많았으며, 늘 온화한 미소를 띤 분이셨다. 어머니가 웃으시면 여름철 활짝 핀 해당화가 떠올랐다. 천생 여자셨던, 참 고왔던 어머니.
 
 하지만 폭우가 휘몰아치던 어느 날 밤, 두 분은 어린 나만 혼자 두고서 나란히 이생을 하직하셨다. 애타게 나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그 슬픈 눈빛은 아직도 내 가슴에 깨진 유리 조각처럼 박혀 있다.
 
 부모님의 목숨을 앗아간 사람은 눈 옆에 길게 찢어진 흉터가 있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더러운 마교 놈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더러운 마교 놈.
 한 번 본 그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매일같이 떠올렸다. 그래야 부모님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테니.
 
 그래서일까.
 원수의 얼굴은 떠오르는데 부모님의 얼굴은 자꾸만 희미해져 간다.
 
 
 # 세 아이의 소원
 
 섬서성 화양현(華樣懸)의 북적거리는 시장통.
 석추명은 모퉁이의 포목점을 쳐다보며 동생인 듯한 아이에게 소곤거렸다.
 “하진아, 저기 저 포목점에 있는 아주머니 보이지? 오늘은 저 아주머니로 하자. 저 아주머니 전낭이 아주 실해 보인다. 히히히.”
 키가 큰 소년이 하얗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열두세 살쯤 되었을까, 소년은 말라서 나이에 비해 키가 커 보였다. 구멍이 숭숭 난 남루한 옷차림은 쌀쌀한 늦가을 바람을 막기에는 너무 부족해 보였다.
 “늘 하던 대로 하는 거야, 알겠지? 내가 전낭을 훔쳐서 도망치다가 너한테 슬쩍 넘길 테니 너는 그걸 가지고 곧장 집으로 가야 해. 혹시 내가 붙잡히더라도 결코 지난번처럼 뒤를 돌아봐서는 안 돼. 알겠지?”
 추명은 하진에게 몇 번이나 확인했다.
 하진은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꽉 다문 입술이 고집스럽게 보였다.
 “그럼 갔다 올게.”
 “조심해, 형.”
 하진이 뿌루퉁한 표정으로 추명에게 말했다. 추명은 그런 하진이 귀여운 듯 하진의 앞머리를 손으로 한 차례 쓰다듬은 뒤 포목점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올해 열 살인 기하진은 남의 돈을 훔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도둑질은 나쁜 짓이라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누누이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석추명이 훔친 돈으로 음식을 사 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입에 든 음식을 그대로 뱉어내고는 석추명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삼 일을 쫄쫄 굶고 나서야 고집을 꺾었지만 도둑질은 여전히 탐탁지가 않았다. 도둑질을 할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화를 내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석추명과 처음으로 ‘공동 작전’을 펼친 날,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돈주머니를 훔치는 형은 그때마다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얻어먹기만 하는 것이 싫어서 형과 함께 처음으로 시장에 나온 날, 형은 수염투성이 아저씨의 전낭을 훔치다가 붙잡혀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아저씨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형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두 뺨이 부풀어 오르고 입술이 터졌다. 형이 매를 피하려고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팔로 머리를 감싸자 아저씨는 발을 들어 형의 몸을 차더니 지근지근 밟았다.
 그 모습이 너무 무서웠다.
 저러다가 형이 죽을 텐데······. 누가 좀 말려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은 멀뚱히 구경만 할 뿐,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진도 두려움에 가득 차 모퉁이에 숨어 그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한참을 때리던 사내는 그제야 분이 좀 풀렸는지 바닥에 쓰러진 추명의 등을 퍽, 하고 걷어차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내가 사라진 뒤에도 하진은 시장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선뜻 추명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추명은 그렇게 얻어맞고도 엉금엉금 기어서 모퉁이에 숨어 있는 하진에게로 다가왔다.
 그때야 하진은 눈물이 핑 돌았다.
 추명은 얻어맞아 퉁퉁 붓고 시퍼렇게 멍든 얼굴로 씩 웃었다.
 “우지 마, 하진아.”
 입술이 터져 발음조차 분명하지 않았다.
 “아, 오느은 허탕이네. 예린이 배고프 텐데······.”
 추명은 자신이 아픈 것보다 오두막집에서 배곯으며 기다리고 있을 어린 여동생 생각을 먼저 하는 사람이었다. 기껏해야 자신보다 두어 살 많을 뿐인데 기하진에게 석추명은 아빠 같고 큰형 같았다.
 
 기하진이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모른 채, 석추명은 포목점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석추명의 목표물이 된 뚱뚱한 여인은 비단을 펼쳐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미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추명은 주위를 살피며 휘파람을 부는 등 능청을 떨었다. 그러다가 여인의 허리춤에서 전낭을 득달같이 낚아채더니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허리춤이 허전해진 여인은 전낭이 없어진 것을 깨닫고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도둑이야! 도둑 잡아라. 도둑이야!”
 여인은 귀청이 떨어질 듯 소리를 질렀다.
 “누가 저놈 좀 잡아줘요. 아이고, 어머니, 아버지, 저놈이 내 돈을 훔쳐갔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여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길 가던 사람들이 울부짖는 여인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또 저놈이구먼. 저놈을 잡아다가 요절을 내야 하는데 워낙 발이 빨라서 말이야.”
 시장 상인 하나가 달아나는 석추명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전낭을 잃은 여인이 석추명을 따라 달려가며 계속 소리를 질렀다.
 “저놈 좀 잡아줘요. 저놈이 내 전낭을 훔쳐갔소! 아이고, 어머니.”
 석추명은 날쌘 다람쥐처럼 재빨리 시장 골목 사이로 몸을 숨겼다.
 ‘에휴, 살았다. 잡히는 줄 알았네.’
 돈주머니를 가볍게 던지며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꽤 무거웠다. 이 돈이면 열흘 동안은 밥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니 쫓기던 것도 잊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주머니,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지금 우리 동생들이 며칠째 굶고 있어요. 그러니 적선했다 치세요,’
 석추명은 악을 쓰며 쫓아오던 여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드디어 저 앞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는 하진이 보이기 시작했다. 석추명이 웃으며 기하진에게 달려가는 순간, 길옆 담벼락에서 누군가 새처럼 담을 훌쩍 넘어오다가 석추명과 부딪치고 말았다.
 “어이쿠!”
 그 바람에 석추명은 손에 들고 있던 전낭을 놓치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석추명이 놀라서 벌떡 일어서는데 갑자기 가슴속으로 무엇인가가 불쑥 들어왔다.
 “삼 일 후에 찾으러 오마. 절대 다른 사람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 들켰다가는 살아남지 못할 거야.”
 자신과 부딪친 사내가 석추명의 귓가에 속삭였다. 석추명은 그 소리에 놀라서 대답도 못 하고 두 눈만 동그랗게 떴다.
 사내는 상처를 입었는지 피투성이였고 한 손에 커다란 칼을 쥐고 있었다.
 사내가 훌쩍 앞으로 몸을 날리더니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석추명은 무서운 마음에 기하진의 손을 붙잡고 얼른 모퉁이를 돌아 달아났다. 두 소년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사내가 넘어온 담벼락 아래로 검은색 무복을 입은 무인 수십 명이 넘어왔다. 무인들은 하나같이 체격이 크고 기세가 범상치 않았는데 이마에 두른 검정 띠 한가운데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멀리 가지 못했을 게다. 어서 쫓아라!”
 선두에 섰던 무사가 뒤를 돌아보며 말하고는 곧장 사내를 쫓아서 사라졌다.
 석추명은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자신이 한 도둑질 때문에 관병들이 쫓아온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저 사람들, 엄청 빠르구나. 대체 누구지?”
 석추명이 물었다.
 “저 사람들, 무림맹 사람들이야.”
 “무림맹?”
 추명이 의아한 얼굴로 기하진을 쳐다보았다.
 “응, 머리띠에 쓰인 글자가 무림맹을 뜻하는 ‘맹(盟)’ 자였어.”
 아직 글자를 모르는 추명은 넋이 나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림맹 사람들은 모두 일당백이라고 하던데 정말 그런가 봐. 하나같이 무시무시하네.”
 기하진이 무림맹 사람들이 사라진 방향을 계속 응시했다.
 “아이고, 십년감수했네.”
 석추명은 다리가 풀린 듯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런데 아까 도망치던 사람이 형한테 뭘 준 거야?”
 모퉁이에 숨어서 석추명을 기다리던 기하진은 사내가 석추명의 품속으로 무엇인가를 넣는 것을 봤던 것이다. 그제야 생각이 난 석추명이 얼른 품 안을 뒤졌다. 사내가 주고 간 것은 오래된 책이었다.
 “뭐라고 쓰여 있는 거야?”
 석추명이 묻자 기하진이 겉장을 살펴보았다.
 무림 명가에서 자란 하진은 세 살 때부터 글을 배웠기 때문에 웬만한 글자는 다 읽을 수 있었다.
 “중양일지(重陽日誌)라고 적혀 있네.”
 “중양일지? 뭐 일기 같은 건가?”
 기하진이 책장을 주르르 넘겨보았다.
 “그런 것 같아. 보니까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네. 가만, 여기 일지를 쓴 사람의 이름이 있어.”
 “어, 이 글자는 나도 알아. ‘왕(王)’ 자 아니야?”
 추명은 아는 글자가 나오자 신이 났다.
 왕중양(王重陽).
 그 책은 전진교의 조사인 왕중양이 자신의 모든 무공을 수록한 무공비급이었다.
 그러나 추명과 하진은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사내가 이 책을 다른 사람에게 절대 보여주지 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중요한 책일 거라는 추측만 막연히 할 뿐이었다.
 “삼 일 뒤에 찾으러 온댔으니 어디 잘 숨겨두자. 하지만 그것보다······. 짠!”
 석추명이 품에서 전낭을 꺼내 들고 흔들었다.
 “휴, 난 이거 놓치는 줄 알고 정말 놀랐네. 간만에 예린이가 좋아하는 고기만두 실컷 사 가자. 너도 배고프지?”
 “안 고파.”
 기하진이 고개를 돌리며 뿔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훔친 돈이라 찜찜하기 때문이리라.
 그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기하진은 순간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하하하, 우리 하진이 배는 거짓말을 안 하네? 너보다 낫다.”
 석추명이 낄낄거리며 한참 웃었다. 그러고는 기하진의 어깨에 팔을 올리며 어깨동무를 했다.
 “하진아, 우리 얼른 자랐으면 좋겠다. 그렇지? 그러면 네가 싫어하는 도둑질은 안 해도 될 텐데. 먹고 살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무슨 일을 하지? 장사나 해 볼까? 아니면 요 앞 객잔에서 점소이를 해야 하나?”
 석추명과 기하진은 훔친 돈으로 고기만두를 잔뜩 사다가 예린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집이라고 해봤자 다 쓰러져가는 폐가였지만.
 석추명과 기하진이 돌아오자 어린 여자아이가 넘어질 듯 달려왔다.
 “오빠들, 왜 이제야 와? 나 무서웠단 말이야.”
 눈이 초롱초롱하고 피부가 하얀 여자아이는 무척이나 귀여운 인상이었다.
 “우리 예린이 잘 있었어? 오빠가 간만에 예린이 좋아하는 고기만두 사 왔다!”
 “우와!”
 고기만두란 말에 여자아이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며칠을 굶은 아이들은 뜨끈뜨끈한 고기만두를 보자 사족을 못 썼다. 훔친 돈이라 꺼리던 기하진마저 허겁지겁 만두를 입으로 가져가기 바빴다. 어린 동생들이 말도 못 하고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석추명은 그런 동생들을 보며 자신의 몫을 슬그머니 예린이와 하진이 쪽으로 밀었다.
 “물도 마시면서 천천히들 먹어. 나는 잠깐 볼일 좀 보고 올게.”
 석추명이 일어나려 하자 기하진이 눈치를 챈 듯 냉큼 만두를 다시 밀었다.
 “이거 먹고 가. 형.”
 “형은 배불러. 너 먹어라.”
 “나도 배불러. 형은 별로 안 먹었으니 이거 먹어.”
 석추명과 기하진이 남은 만두를 서로 먹으라며 티격태격했다. 그러자 멀뚱히 지켜보던 예린이 사이좋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지 말고 다 같이 먹어.”
 예린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만두를 나누어주자 석추명은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야, 그런 방법이 있었네? 우리 예린이 정말 똑똑한걸?”
 석추명이 예린을 보고 웃자, 인상을 잔뜩 쓰고 있던 기하진도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자 세 아이는 너 나 할 것 없이 갑자기 웃음꽃이 터져서 까르르 웃었다.
 하하하.
 세 아이는 사실 친형제, 남매지간이 아니었다. 셋 다 어찌하다 보니 같이 살게 되었을 뿐이었다.
 제일 큰 아이는 석추명(惜秋明)으로 올해 열두 살이었다. 추명은 부모의 얼굴도 몰랐다. 어떤 아저씨와 같이 살다가 아저씨가 떠나간 이후로 줄곧 폐가에서 혼자 살았다.
 석추명은 어린 나이였지만 세상살이가 얼마나 팍팍한지 잘 알았다. 구걸도 하고 소매치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석추명에게는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그러다 보니 거의 매일같이 얻어터져 맷집이 상당히 좋았다.
 그런 석추명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무사 놀이였다. 나뭇가지를 검 삼아 휘두르면 자신이 무림지존이라도 된 듯했다.
 석추명이 기하진(奇夏盡)을 만난 것은 2년 전이었다. 기하진은 당시 부잣집 도련님 같은 옷을 입고 자신이 사는 폐가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얼마 전까지 부모님이랑 같이 살았는데 부모님이 한날한시에 악인의 손에 죽었다고 했다.
 “우리 부모님의 원수는 마교 놈들이야. 크면 반드시 복수하고 말 거야!”
 기하진은 평소에는 말이 없다가도 마교 얘기만 나오면 이를 빡빡 갈았다.
 임예린(林藝隣)은 일 년 전에 유일하게 어머니와 함께 이 마을에 왔었다. 당시 병이 위중하던 예린의 어머니는 얼마 못 가서 어린 예린만 혼자 남겨놓고 세상을 떠났다. 예린의 모친은 마지막 숨을 쉬며 석추명의 손을 꼬옥 잡았다.
 “얘야, 우리 예린이를 좀 보살펴다오. 미안하구나. 어린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해서.”
 예린의 모친이 숨을 거두자 두 소년은 산기슭에 예린의 모친을 묻었다. 엄마가 죽었는지도 모르고 혼자서 놀던 예린이 엄마를 찾으며 울자 두 소년은 당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한참을 울던 예린이 배가 고파 지쳐 쓰러지자, 석추명이 어딘가에서 고기만두를 구해 왔다. 그때부터 예린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고기만두가 되었다. 다행히 그 뒤로는 그렇게 자주 엄마를 찾지 않았다.
 혼자서 쓸쓸하게 살던 석추명은 갑자기 동생이 둘이나 생기자 너무 좋았다.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가족이 생긴 것만 같았다. 그리고 동생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밤낮으로 온갖 궁리를 다 짜내었다. 하지만 소매치기 외에 어린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남의 물건을 훔치다가 들켜서 두들겨 맞아도 동생들을 위해 먹을 것을 들고 올 때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때마다 석추명은 퉁퉁 부어올라 밤탱이가 된 눈으로 환하게 웃었다.
 임예린은 석추명의 상처에 호, 하고 입김을 불어 넣어 주었다. 자기가 아플 때마다 엄마도 늘 그렇게 해주었다면서.
 기하진은 퉁퉁 부은 석추명의 얼굴 보기가 미안하고 마음이 아파 늘 밖으로 나가서 혼자 있었다. 나이에 비해 조숙하고 생각이 깊어 내색은 안 했지만, 기하진은 석추명이 옆에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기만두로 실컷 배를 채운 세 아이가 방바닥에 등을 대고 나란히 누웠다. 지붕에 숭숭 뚫린 구멍으로 밤하늘의 별이 보였다.
 “우리 소원 하나씩 말해볼까? 하진아, 네 소원은 뭐야?”
 총총한 별을 바라보며 석추명이 물었다.
 “나는 무공을 배워서 강해질 거야. 누구도 무시 못 할 만큼! 그래서 누구든 나를 무시하면 열 배, 백 배로 갚아줄 거야!”
 “우와! 멋있다! 나중에 누가 나 때리면 꼭 네가 복수해줘?”
 석추명이 웃더니 예린이에게 물었다.
 “예린아, 넌 소원이 뭐야?”
 “나는 오빠들이랑 평생 이렇게 같이 살고 싶어.”
 “응? 평생 이렇게? 그러면 맨날 굶어야 하는데?”
 석추명이 되묻자 임예린이 초롱초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맨날 굶어도 좋으니까 오빠들이랑 평생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어. 나중에 크면 큰오빠하고 작은오빠한테 시집갈래. 평생 같이 살게.”
 “바보야, 형이랑 나랑 둘 중에 하나만 골라. 두 사람 모두에게 시집갈 수는 없어.”
 기하진이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피! 왜 못 가? 난 큰오빠도 좋고 작은오빠도 좋은데?”
 깜찍한 임예린의 말에 석추명은 참지 못하고 껄껄 웃었다.
 “그래그래. 우리 다 같이 살자. 예린이가 그러겠다고 하면 그런 거야. 하하하.”
 이번에는 기하진이 물었다.
 “형은 소원이 뭔데?”
 “나? 나는 우리 셋 모두 굶지 말고 매일매일 배부르게 먹을 수만 있으면 좋겠어.”
 석추명의 소원은 너무 소박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두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소년에게는 가장 큰 고민이기도 했다.
 “빨리 자자.”
 세 아이는 어느새 귀뚜라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 운명의 수레바퀴는 구르기 시작하고
 
 책을 주고 도망치던 사내가 약속한 사흘이 지났지만 사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석추명은 혹시나 해서 그 이후로도 매일 책을 가지고 그 장소를 서성거렸지만 마찬가지였다.
 까막눈인 석추명은 책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기하진은 달랐다. 무가에서 자란 하진은 한눈에 그 책이 무공서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하진은 무공을 전혀 할 줄 몰랐다. 다른 무가의 자식들은 세 살이 되면 무공수련을 시작했으나 자신의 아버지는 무공보다 인성이 우선이라며 아들이 여덟 살이 되기 전에는 무공을 배울 수 없다고 못 박았던 것이다.
 대신 기하진은 무공서를 탐독했다. 그래서 비록 무공을 펼칠 줄은 몰랐지만 무공 이론에 대해서는 해박했다. 기의 운용이나 혈도, 초식 명칭 등도 익숙했고 각 문파에 어떤 무공들이 있는지도 잘 알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그것까지 막지는 않으셨다.
 중양일지가 무공비급임을 알아본 기하진은 추명 몰래 틈만 나면 그 책을 꺼내서 보았다. 부모님의 복수를 하려면 무공을 익혀야 했다.
 아직 나이가 어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어려운 내용이 많았지만, 그래도 중양일지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책을 읽다 보니 기하진은 이 책이 평범한 무공서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마음 같아서는 책을 돌려주고 싶지 않았지만 석추명에게 잔소리를 들을까 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한 기하진은 책 욕심에 그만 책 앞쪽 몇 장을 슬그머니 찢어서 숨겼다. 그러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모른 척했다.
 사내가 온다고 하던 날이 어느새 한 달을 넘어갔지만, 석추명은 매일 책을 품에 넣고 사내와 만났던 담벼락 아래로 가서 기다렸다.
 “형, 이제 포기하자. 그 아저씨는 안 올 것 같아.”
 석추명도 이제는 정말 안 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흘 후에 온다던 사람이 한 달을 꼬박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뭔가 변고가 생긴 게 분명했다.
 석추명이 그러자고 대답하려는 순간, 누군가가 석추명과 기하진을 휙 낚아채더니 그대로 날리기 시작했다. 두 소년이 깜짝 놀라 쳐다보니 한 달 전에 만났던 그 사내였다. 사내는 그때보다 몰골이 더 초췌했다. 옷에 묻은 핏자국도 더 많아진 듯했다.
 사내가 두 아이를 양팔로 안고는 나는 듯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두 소년은 말을 타본 적은 없지만 아마 달리는 말도 그처럼 빠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석추명이 놀랍고 반가워서 소리를 내자, 사내가 입을 앞으로 내밀며 ‘쉿!’ 하는 시늉을 지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다급한 사내의 표정에 석추명은 말을 하려다 말고 사내의 뒤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내는 일각 여를 달린 뒤 인적이 드문 곳에 두 아이를 내려놓았다.
 “여기 책이요.”
 추명이 얼른 품에서 책을 꺼냈다.
 “매일같이 와서 아저씨 기다렸어요.”
 석추명의 말에 사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른도 지키기 어려운 약속인데 어린아이가 한 달 동안 매일같이 왔다고 하니 장하고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고맙구나, 꼬마야.”
 사내가 책을 받고서 추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사내가 갑자기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정말 끈질긴 놈들이로구나.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무도 안 보이는데요?”
 석추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두 아이의 귀에는 발걸음 소리는커녕 개 짖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사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중양일지를 반으로 쭉 찢었다.
 “아무래도 오늘 내가 살아나가기는 틀린 것 같구나. 설령 그렇더라도 이 책을 통째로 넘길 수는 없지.”
 사내가 책 뒷부분을 석추명에게 주며 말했다.
 “얘야, 너는 아직 어린데도 신의가 이렇게 대단하니 어른보다 훨씬 낫구나. 그래서 이 아저씨가 아무래도 너에게 한 번 더 부탁해야 할 것만 같다. 나중에 백련신교의 장로 한 분이 이 책을 찾으러 올 거야. 응룡검 황보라는 분인데 이 책을 잘 가지고 있다가 그분에게 넘겨주어라. 이마에 점이 하나 있고 그 점에서 긴 터럭이 나 있는 분이니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게다.”
 말을 마친 사내는 벌떡 일어나더니 기하진과 석추명에게 어서 도망가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얘들아, 나 육굉이 죽어서도 너희들의 은혜를 잊지 않으마. 그럼 꼭 부탁하마.”
 사내가 두 발로 땅을 박차니 몸이 새처럼 공중으로 훌쩍 날아올랐다.
 그 순간,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더니 짧은 화살 수십 대가 사내를 향해 날아왔다. 적이 가까이 왔음을 직감한 사내는 혹시 아이들이 다칠까 봐 즉시 칼을 휘둘러 화살을 모두 쳐냈다.
 화살이 날아오자 석추명은 깜짝 놀랐다. 마침 이 일대는 석추명이 훤히 꿰뚫고 있던 터라 얼른 하진의 손을 잡고 근처 담벼락 아래 개구멍으로 몸을 숨겼다.
 석추명이 개구멍으로 바라보니 지난번에 봤던 무림맹 사람들이 한 손에 검을 들고 공중에서 신장(神將)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족히 수십 명은 되어 보였다.
 “네놈의 운도 여기까지이다. 중양일지를 썩 내놓지 못할까!”
 제일 앞에 있는 사람이 호통을 쳤다. 그러자 육굉이 껄껄껄 웃었다.
 “그 책을 왜 내게서 찾느냐? 그리고 중양일지가 무림맹의 물건이라도 된단 말이냐?”
 육굉의 말에 호통을 치던 무인이 눈을 부라렸다.
 “그럼 그 물건이 마교의 소유란 말이냐?”
 “하하하, 왕중양이 죽은 지 이백 년이 넘었으니 당연히 먼저 찾은 자가 임자이거늘, 어찌 이 어르신을 쫓아다닌단 말이냐?”
 “흥! 건방진 놈. 염라대왕을 목전에 두고도 큰소리를 치는구나.”
 중양일지를 가지고 도망치던 사람은 백련신교(白蓮神敎) 참룡대(斬龍隊)의 대주 육굉(陸宏)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호통을 치는 사람은 무림맹의 첩보조직인 암영단(暗影團) 단주 석문(昔紋)이었다. 암영단은 중양일지를 되찾기 위해 육굉을 석 달 동안 쫓던 중이었다.
 “어서 중양일지를 내놓아라!”
 석문의 말에 육굉이 코웃음을 쳤다.
 “재주 있으면 뺏어 보아라!”
 그 말과 동시에 육굉이 대도를 꺼내어 두 손으로 붙잡았다. 칼이 어찌나 큰지 어른 키만 했고, 도신(刀身)이 무척 넓었다. 바로 참룡대의 독보적인 병기, 참룡도(斬龍刀)였다.
 육굉이 참룡도를 휘두르자 칼에서 웅웅, 바람 소리가 났다.
 “건방진 놈! 쳐라!”
 석문의 호령에 네 명의 단원이 육굉을 둘러싸고 공격해 들어갔다. 암영단은 무림맹의 네 개 단(團) 중 암살과 정보수집을 전담하는 부대. 그만큼 단원 하나하나가 일류고수들로만 이루어진 부대였다.
 그중에서도 맹주에게 직접 무공을 배운 단주 석문은 무공실력이 고강하고 손속이 잔인해서 강호에서는 그를 귀영검객(鬼影劍客)이라고 불렀다.
 암영단원 네 명이 육굉을 가운데 두고 둘러싸더니 동시에 검을 일직선으로 내뻗으며 찔러 들어갔다. 검을 뻗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흰빛이 번쩍인다 싶더니 어느새 검이 육굉의 몸에 꽂혀 들어갔다.
 하지만 육굉도 만만치 않은 고수였다. 육굉은 얍! 기합 소리를 지르며 참룡도를 휘둘러 네 사람의 검을 한꺼번에 막아냈다.
 참룡도는 칼이 크고 무거운 만큼 한 번 휘두를 때의 힘이 무시무시했다. 육굉의 참룡도에 검이 부딪히자 네 개의 검은 모조리 부러지고 말았다. 육굉의 무공에 석문은 속으로 뜨끔했다.
 ‘저놈의 별호가 대력도(大力刀)라고 하더니 과연 팔뚝의 힘이 무지막지하구나. 석 달간의 추격으로 체력이 심하게 고갈되었을 텐데도 저 정도의 위력이라니!’
 석문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 잡은 물고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인정사정 두지 말고 몰아쳐라.”
 “존명!”
 또 다른 단원 네 사람이 합격(合擊)을 이루어 육굉을 다시 공격했다. 네 사람은 폭풍우가 몰아치듯 공격하면서도 마치 한 사람인 양 법도가 엄정하여 전혀 혼란스럽지 않았다.
 육굉의 손발이 점점 바빠지며 호흡도 가빠왔다. 자신의 몸이 정상적이라면 이런 피라미쯤이야 단칼에 끝낼 터이나 심하게 다친 데다 오랫동안 쫓기느라 공력이 오 할도 채 남지 않았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운명이라면 저승 갈 때 한 명이라도 더 동무로 삼아야 하리라.
 이를 악다문 육굉이 남은 공력을 끌어올려 자신의 독문절기인 대력참룡도법을 극성으로 펼쳐냈다.
 웅웅.
 거대한 용이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들 듯, 곧추세운 참룡도에서 무시무시한 칼바람이 쏟아졌다. 육굉은 오른쪽에 있는 적의 다리를 공격하는가 싶더니 별안간 몸을 홱 돌리며 왼쪽에 있는 적의 옆구리를 베었다.
 “윽!”
 암영단원 한 명이 신음소리를 내며 옆구리를 붙잡았다. 움켜쥔 옆구리에선 붉은 피가 철철 흘렀다.
 한 명이 부상을 입자 합격진은 바로 허물어졌다. 다른 세 명이 잠깐 당황하는 사이, 육굉은 대갈일성을 지르며 또 한 명을 공격했다. 공격당한 적은 급히 검을 세워 육굉의 참룡도를 막았지만 쨍강,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부러지고 말았다.
 검이 부러진 단원은 참룡도가 그 기세를 이어 자신에게 날아오자 사색이 되었다. 그때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좌우에 서 있던 동료들이 검을 뻗어 참룡도를 위로 쳐냈다. 그와 동시에 석문이 검을 뽑아 들고 번개같이 육굉의 등을 찔러 들어갔다.
 귀영검객이라더니 정말 석문의 검초가 기이하리만큼 빨랐다.
 육굉은 귀에서 쐐액 하고 바람 소리가 난다 싶더니 어느새 등이 뜨끔했다. 석문의 검에 당한 것이다. 만약 일대일로 싸웠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체력이 고갈 난 상황에서 연합공격을 받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석문의 검이 그대로 육굉의 등을 찌르더니 가슴 앞으로 검날이 튀어나왔다.
 윽!
 육굉이 짧은 비명을 지르더니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섰다. 붉은 선혈이 육굉의 가슴에서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담장 밑에 숨어서 이를 지켜보던 석추명과 기하진은 너무 놀라 두 손으로 자신들의 입을 꼭 막았다. 사람이 눈앞에서 칼에 찔리는 모습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육굉이 잠시 아이들이 숨어 있는 곳을 쳐다보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푹 고꾸라졌다.
 육굉이 쓰러지자 석문은 검을 뽑아 재차 육굉의 아랫배를 다시 한 차례 찔렀다. 혹시라도 살아날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겠다는 생각이겠지만, 정파인 무림맹 검객이 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처사였다.
 “뒤져라!”
 석문이 명령을 내리자 단원 하나가 육굉에게 다가가 품을 더듬었다.
 “찾았습니다!”
 단원이 육굉의 품에서 책자를 꺼내어 석문에게 바쳤다. 빛이 바랜 책자의 겉표지에 ‘중양일지(重陽日誌)’라는 글씨가 단아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오! 이것이 바로 중양진인이 일신의 무공을 기록한 책이로구나.”
 중양일지를 바라보는 석문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책장을 스르르 넘기던 석문의 눈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이게 전부더냐?”
 석문이 책에서 고개를 들어 육굉의 품을 살피던 수하에게 물었다.
 “예.”
 그러자 석문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직접 육굉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육굉은 어느새 숨이 끊어져 있었다.
 다급하게 육굉의 시신을 더듬던 석문이 손길을 멈추었다.
 “이놈이 책 일부를 숨겼다. 간악한 마교 새끼!”
 석문이 분통을 참지 못하고 육굉의 시신을 발로 걷어찼다.
 “그동안 이놈을 추격하던 경로를 역으로 따라간다. 분명히 어딘가에 숨겨놓았을 것이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존명!”
 암영단원들이 부상한 단원을 부축했다. 석문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돌연 석추명과 기하진이 숨은 담벼락을 잠시 노려보았다.
 석추명과 기하진은 금세라도 들킬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석문은 그대로 돌아서더니 사라졌다.
 암영단이 사라진 뒤에도 한참 동안 꼼짝 않던 석추명과 기하진은 쭈그리고 앉은 다리에 쥐가 나서야 겨우 개구멍에서 나올 생각을 했다.
 “아까 무림맹 사람들이 우릴 봤어. 분명히 다시 되돌아올 거야. 어서 달아나야 해.”
 석추명은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기하진은 화가 난 듯 죽은 육굉의 시신만 노려보고 있었다.
 “하진아, 어서 가자.”
 석추명이 계속 손을 잡아끌자 그때야 기하진은 마지못한 듯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석추명은 홀로 있을 예린이가 걱정되었다. 틀림없이 지금쯤 자신들이 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며 무서워하고 있을 것이다.
 두 소년이 종종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뒤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육굉! 자네가 결국······! 미안하네. 내가 너무 늦었네.”
 두 소년이 놀라 뒤를 돌아보니 키가 큰 문사 차림의 남자가 쓰러진 육굉을 부여안고 있었다. 중년 남성은 육굉을 잘 아는지 육굉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석추명은 달아나다 육굉이 한 말이 생각나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중년 남성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정말 이마에 큰 점이 하나 있고 그 점에서 긴 터럭이 한 가닥 나 있었다. 응룡검 황보라는 사람이 분명해 보였다.
 석추명은 두려웠지만 육굉이 죽기 전에 한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진아, 넌 여기 꼼짝 말고 있어. 내가 가서 저 아저씨에게 이 책을 건네주고 올게.”
 기하진은 석추명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계속 육굉을 노려보기만 했다. 하지만 석추명은 기하진의 태도가 이상한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아저씨,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황보는 육굉이 죽어 비통한 심정을 금할 길 없는데 난데없이 어린 소년이 나타나 이름을 묻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누구냐?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는 것이냐?”
 황보는 백련신교의 사대 호교장로 중 한 명이었다. 백련신교는 교주 바로 밑에 네 명의 장로가 있는데 황보는 그중 두 번째로 자신의 예하에 참룡대(斬龍隊)를 두고 있었다. 육굉은 그 참룡대의 대주였다.
 백련신교의 사대 장로는 네 명 모두 검의 고수여서 강호에서는 그들을 사대검왕(四大劍王)이라고 불렀다. 황보의 별호는 응룡검(鷹龍劍)이었다.
 “혹시 아저씨가 응룡검 황보라는 분이신가요?”
 황보는 어린 소년의 입에서 자신의 별호와 이름이 나오자 깜짝 놀랐다.
 
 ***
 
 “아니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석추명은 황보의 얼굴을 꼼꼼히 보더니 품 안에서 책자를 꺼내었다.
 “돌아가신 아저씨가 황보 아저씨에게 전해드리라고 했어요.”
 황보는 석추명이 주는 책을 받아 살펴보았다. 절반이 없어졌으나 그 책이 중양일지임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황보는 책을 보더니 놀라서 다시 석추명을 바라보았다.
 “네가 어찌 이것을 가지고 있느냐?”
 “돌아가신 아저씨가 황보 아저씨에게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황보는 그제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깨닫고 추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특하구나. 네 이름은 뭐고 몇 살이냐?”
 석추명이 이름과 나이를 말하자 황보는 소년의 남루한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신발조차 제대로 신지 못한 것을 보니 형편이 딱한 듯했다.
 “부모님은 어디에 계시냐?”
 황보의 말에 추명은 부끄러운지 말을 더듬었다.
 “부, 부모님은 안 계세요.”
 추명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근래에는 몇 년째 기근이 들어 민심이 흉흉하고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석추명은 나이도 어린데 혼자 산다고 하니 얼마나 고생했을까 짐작이 되어 황보는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네게 은혜를 입었구나. 어떠냐? 나와 같이 가지 않겠느냐? 먹고 자는 것은 물론, 글과 무공도 가르쳐주마.”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말에 추명은 눈을 반짝였다.
 “동생들도 데려갈 수 있나요?”
 그 말에 황보는 난색을 표했다. 지금은 무림맹과 쫓고 쫓기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아이들을 여러 명이나 데리고 다니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추명은 황보가 얼른 대답하지 않자 황보의 뜻을 눈치채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동생들을 두고 갈 수는 없어요.”
 황보는 추명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눈빛이 초롱초롱하고 맑은 것이 영특해 보였다. 게다가 마음 씀씀이가 훌륭하니 잘만 가르친다면 반드시 좋은 인재가 될 성싶었다.
 신교(神敎)의 앞날을 위해 이 정도 인재면 위험해도 한번 시도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황보는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러자꾸나. 동생들도 데려가마.”
 황보의 말에 추명은 너무 기뻐서 환호성을 질렀다.
 “우와! 아저씨, 정말이에요?”
 추명은 너무 좋은 나머지 그 자리에서 팔짝팔짝 뛰더니 몸을 돌려 하진이에게 달려갔다.
 “하진아, 하진아, 좀 나와 봐. 여기 아저씨가 우리를 데려가서 밥도 먹여주고 글도 가르쳐 주신대! 네가 간절히 바라던 무공도 익힐 수 있어.”
 기하진은 멀리 숨어서 추명과 황보가 하는 말을 다 들었다. 신이 난 추명과는 달리 하진은황보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추명은 너무 기쁜 나머지 하진의 기분이 자신과 다른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황보는 기하진이 걸어 나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귀공자같이 얼굴이 새하얀 소년이 이를 악다물고 자신을 노려보며 걸어왔다.
 고집이 세 보이긴 했지만 똑똑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나는 저 아저씨랑 같이 안 가! 형이나 가.”
 하진의 말에 추명이 어리둥절하여 하진을 쳐다보았다.
 “안 간다니, 왜 안 간다는 거야? 너 무공 배우고 싶다며? 저 아저씨가 가르쳐 주신대.”
 “흥! 나는 마교의 무공은 죽어도 배우지 않을 거야!”
 하진이 황보의 얼굴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하진은 아까 암영단주가 하는 말을 듣고 육굉과 황보가 자기 부모님의 원수인 마교 소속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진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자 석추명은 당황했다.
 석추명은 아직 어려서 마교와 무림맹이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황보는 기하진의 말에 뭔가 사연이 있음을 짐작했다. 하지만 어린 소년의 입에서 자신이 싫어하는 ‘마교’라는 말이 나오자 냉랭한 표정으로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네 녀석이 무얼 안다고 그런 소릴 하는 게냐?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왕(魔王)을 숭상하는 악한 단체가 아니다. 오히려 불쌍한 백성들을 돕고 불의에 대항하며, 경을 읽고 향을 피워 다시 오실 미륵부처님을 섬기는 교(敎)이니라!”
 황보가 준엄한 표정으로 얘기했으나 기하진은 증오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황보를 노려보았다.
 “거짓말! 우리 부모님은 당신들 때문에 돌아가셨어! 저 아저씨도 마교인 줄 알았다면 절대 돕지 않았을 거야!”
 기하진이 죽은 육굉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석추명은 몇 번이나 하진을 달래어 보려고 했으나 기하진이 꿈쩍도 하지 않자 당황스러웠다.
 황보는 기하진이 어린 소년이나 고집이 세서 꺾을 수 없자 기하진을 데려가는 것은 포기했다. 황보는 육굉의 시신을 수습하며 말했다.
 “저토록 싫다는데 억지로 데려갈 수는 없구나. 어쩔 수 없지. 추명아, 그만 가자꾸나.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무림맹에서 분명히 시신을 확인하러 한 번 더 올 게다. 시신이 없어진 사실을 알면 이 일대를 샅샅이 뒤질 테니 너희들도 위험해질 거야. 어서 빨리 달아나야 한다.”
 그 말에 다급해진 석추명이 기하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하진아, 고집 좀 그만 부리고 같이 가자. 위험해질 수도 있다잖아!”
 “형이나 가. 예린이도 마교로 데리고 가느니 그냥 내가 데리고 있을게. 형이나 가. 가버려! 마교 놈을 도와주다니 형 같은 사람, 꼴도 보기 싫어!”
 기하진의 말은 아직 어린 석추명에게 상처로 다가왔다.
 평생 셋이서 함께 지내자고 했는데 이제 자신에게 가버리라고 하니 속에서 서운한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가버리라니······. 하진아!”
 기하진은 입을 꾹 다문 채 땅바닥만 바라볼 뿐 석추명을 바라보지 않았다.
 “하진아, 나를 좀 바라봐. 그게 무슨 소리야?”
 석추명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나왔다. 늘 씩씩한 척한 척했지만 석추명도 결국 어린 소년이었다. 함께 자고 함께 먹고, 무엇이든 늘 함께하던 기하진에게서 가버리라는 말을 들은 석추명은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 멀리서 은은하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황보가 대경실색해서 석추명에게 소리쳤다.
 “추명아, 시간이 없다. 얼른 가야 한다.”
 황보가 재촉하자 석추명은 하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황보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아저씨, 저도 안 갈래요. 괜찮아요. 동생들에게는 제가 있어야 해요. 어쨌든 말씀은 감사합니다.”
 석추명이 허리를 숙이고 꾸벅 인사를 하는데 짧은 화살 수십 대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암영단이 다시 온 것이었다.
 석추명은 갑자기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자 놀라서 얼른 기하진을 끌어안고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기하진은 발버둥을 치며 석추명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석추명은 완강했다. 황보가 검을 꺼내 바람개비처럼 돌리며 화살을 막아냈지만 빗발치는 수십 개의 화살을 검 한 자루로 모두 막아낼 수는 없었다.
 석추명은 기하진을 보호하려고 자신의 몸으로 덮고 땅바닥에 엎드렸다. 순식간에 화살 하나가 날아와 석추명의 어깨에 꽂혔다.
 “악!”
 석추명이 비명을 지르자 기하진이 놀라서 바라보았다. 석추명의 어깨에서 붉은 피가 흐르자 기하진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을 더듬었다.
 “혀, 형, 화, 화살이 형 어깨에 꽂혔어.”
 “괜찮아. 나는 끄떡없어. 형 맷집 센 거 알지? 이런 화살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
 석추명은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어느새 석추명의 등에는 화살이 또 하나 꽂혀 있었다.
 “이놈들! 네놈들 눈에는 이 어린애들이 보이지도 않는단 말이냐? 어찌 애들에게 활을 쏘는 게냐?”
 황보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질렀다. 어느새 황보 앞에는 암영단 수십 명이 다가오더니 활시위를 당기고 포진했다.
 “크크크. 역시나 예상대로군. 마교 놈들은 내 손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저놈의 시신을 일부러 내버려 두었더니 과연 나타났구나. 응룡검 황보. 어서 중양일지를 내놓거라!”
 암영단주 석문이 낄낄거렸다. 석문의 눈에는 화살에 맞은 어린 소년들은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황보는 검을 고쳐 들었다.
 “네놈은 누구냐?”
 “이 어르신은 무림맹 암영단주, 석문이라고 한다. 들어보았느냐?”
 석문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자 황보가 콧방귀를 뀌었다.
 “네놈이 귀영검객이라는 놈이로구나. 오냐, 오늘 이 자리에서 아예 귀신으로 만들어 주마.”
 황보가 검을 쳐들었다. 황보는 백련신교 참룡대의 실질적인 주인. 육굉의 참룡도만큼 크지는 않았으나 검의 기상은 더욱 압도적이었다.
 “좋다! 자칭 사대검왕이라는 작자들의 검이 얼마나 고명한지 한번 볼까?”
 석문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황보의 가슴을 찔러 들어갔다. 일검삼휘(一劍三輝)라는 절정의 기법이었다.
 파바박. 검을 휘두른다 싶었는데 검이 순식간에 빛줄기 세 개로 변해 황보의 몸에 꽂혀 들어갔다. 귀영검객이라는 별호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쾌검이었다.
 그러나 황보는 백련신교 내에서도 손꼽히는 고수. 석문의 쾌검에도 전혀 놀라지 않고 여유롭게 검을 휘둘러 석문의 공격을 막아냈다.
 검이 서로 부딪치며 땅, 하고 소리를 냈다. 석문은 대번에 안색이 바뀌었다. 한 차례 검을 부딪친 것만으로도 황보의 실력이 자기보다 훨씬 윗길임을 알아챈 것이다.
 이번에는 황보가 검을 휘두르며 공격에 나섰다. 검 자체에서 용울음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기운이 폭사되어 나왔다.
 석문은 두려운 마음에 감히 황보의 검을 맞받아 칠 생각은 못 하고 자신의 별호대로 몸을 귀신같이 놀려 검을 피했다. 이미 놀란 가슴은 독수리 앞에 선 병아리처럼 쉬지 않고 두근거렸다.
 ‘육굉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수로구나!’
 석문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맹주에게서 직접 사사 받은 무공,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를 펼쳐냈다. 쾌속함의 극치를 추구하는 무공이었다.
 파바박. 불꽃이 튄다 싶더니 석문의 검이 황보를 순식간에 열세 번이나 찔러 들어갔다. 쾌검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종남파의 분광검법(分光劍法)이나 화산파의 매화검법(梅花劍法)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검법이었다.
 석문은 검을 최대한 빠르게 펼쳐 공격하되 황보의 검과는 부딪치지 않았다. 그토록 빨리 검을 휘두르면서도 검이 한 번도 부딪치지 않으니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강호에서 이 정도로 검을 구사하는 고수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황보는 사대검왕(四大劍王) 중의 한 명. 석문의 번개 검법이 통하지 않는 최절정 고수였다.
 콰쾅. 검이 부딪치지도 않았는데 황보의 검에서 폭음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무형의 기세가 화산이 폭발하듯 석문을 향해 쏟아졌다. 그러자 석문은 빽빽한 대나무숲에서 검을 휘두르는 듯 검로가 대번에 막히기 시작했다. 쾌속하게 뻗어야 할 검이 암초에 걸린 듯 움찔거렸다.
 맹주의 섬전검법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대경실색한 석문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석문은 맹주의 검법이 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공력이 맹주보다 낮아 검법이 극치에 닿지 못했음을 몰랐다.
 “이놈! 감히 신교의 제자를 해쳤으니 네놈도 목숨을 내놓아라!”
 마른 체구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지 황보의 목소리가 우레처럼 울렸다. 황보의 검이 치켜 올라간 순간, 다시 수십 발의 화살이 황보를 겨냥해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단주가 위험에 처하자 단원들이 활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강호의 법도도 모르는 놈들 같으니라고!”
 황보는 노성을 지르며 활을 쏘아대는 암영단원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시퍼런 검기가 쾅, 벼락 치는 소리를 내며 뻗어 나갔다. 검기에 맞은 단원들은 순식간에 몸이 두 동강이 나서 땅바닥에 뒹굴었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감히 정파의 우두머리라고 칭하느냐?”
 다시 황보가 검을 휘두르자 시퍼런 검기가 반월을 그리며 폭사되어 나왔다.
 “아악!”
 여기저기서 단원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다급한 단원들은 한 번에 두세 발씩 화살을 장전하여 쏘기 시작했다.
 “애, 애들을 쏴라!”
 석문은 황보만 겨냥해서 공격하다가는 당해내지 못하리라 판단하여 황보의 뒤에 있는 아이들에게 눈을 돌린 것이었다. 화살이 아이들을 향해 날아가자 성난 사자 같은 황보의 고함이 다시 터져 나왔다.
 “이놈들아! 이게 무슨 후안무치한 짓이란 말이냐! 정도 무림의 지존이라는 무림맹이 힘없는 어린아이들을 공격하다니!”
 그러나 석문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아 황보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황보는 기막을 펼쳐 아이들을 구하는 데 공력을 집중했다. 그 바람에 아까와 같이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붓지 못했다. 그때 멀리서 펑 하는 소리가 나더니 초록색 연기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라갔다.
 “용봉단의 지원병력이 곧 도착한다. 더욱 힘을 내라.”
 연기를 본 석문이 말에 암영단원들은 용기백배했지만 황보는 나직한 신음을 냈다. 용봉단은 무림맹의 최정예고수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그들이 도착한다면 빠져나기가 더 어려워질 게 뻔했다. 게다가 화살을 두 대나 맞고 정신을 잃은 석추명도 위험해 보였다. 한시라도 빨리 응급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랐다.
 여전히 기막을 펼친 상태여서 화살이 닿지는 못했지만, 문제는 이 기막을 무한정 유지할 수는 없다는 점이었다. 결심을 굳힌 황보는 아이들을 하나씩 양팔에 안고는 몸을 날렸다. 용봉단이 도착하기 전에 이 자리를 피해야 했다.
 “앗! 황보가 도망친다.”
 암영단원들이 쏘는 화살이 벌떼처럼 황보를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황보가 펼쳐낸 기막을 뚫지는 못했다. 그러나 황보도 이제 공력이 상당히 소진되어 암영단원들을 공격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무조건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다.
 황보가 경공을 펼치려는 순간, 기하진이 갑자기 황보의 손가락을 깨물었다.
 “악!”
 지독한 손가락 통증에 순식간에 공력이 분산되며 기막이 흩어져 버렸다.
 “나를 내려줘. 이 악당아!”
 기하진이 발버둥을 쳐댔다. 그 바람에 황보는 기하진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암영단원들은 그새 검을 빼 들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용봉단도 이쪽으로 달려오는 듯 멀리서 은은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쩔 수 없구나. 다음에 보자꾸나, 꼬맹아!”
 황보는 정신을 잃은 석추명만 안고 공중으로 신법을 펼치더니 한 마리 새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황보가 사라진 방향으로 다시 화살이 수십 대 날아갔다. 기하진은 화살이 너무 무서워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다행히 이번에는 기하진을 겨냥하고 날아오는 화살은 없었다. 수십 대의 화살이 핑핑핑,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날아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현기증이 잃었다.
 “멈추어라!”
 석문이 명을 내리자마자 용봉단 부단주 구휘가 용봉단원 수십 명을 이끌고 도착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구휘의 물음에 석문은 검을 집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이런 제기랄!”
 석문의 반응에 상황을 짐작한 구휘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리한 검기에 갈라진 시신 몇 구와 다친 암영단원들이 신음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누워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구휘의 눈에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채 울고 있는 기하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기하진은 석추명이 몸을 던져 화살로부터 자신을 막아주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기 대신 석추명이 화살에 맞은 것이다. 죽지 말아야 할 텐데······. 형아, 제발 죽지 마. 기하진은 석추명의 목숨이 걱정되어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였다.
 구휘가 ‘저 아이는 누구냐’는 듯한 표정으로 암영단원 중 하나를 쳐다보았다.
 “황보와 같이 있던 아이입니다. 황보가 달아날 때 버리고 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구휘가 기하진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구휘가 다가와도 고개조차 들지도 않았다.
 “얘야, 여기서 왜 우느냐? 방금 도망간 사람과는 무슨 관계냐?”
 
 ***
 
 그제야 기하진은 고개를 들고 구휘를 쳐다보았다.
 “그 악당과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기하진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빽 소리를 질렀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그 사람과 왜 같이 있었느냐? 너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느냐?”
 “알아요. 그 악당은 응룡검 황보라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제 부모님의 원수인 마교 사람이에요!”
 분해서인지 숨이 차기 때문인지 말을 하면서 기하진이 씩씩거렸다.
 “부모님의 원수라니? 네 부모님이 누구냐?”
 “제 아버지는 기자, 일자, 광자를 쓰세요. 어머니는 방자, 혜자, 미자를 쓰시고요.”
 기하진의 말에 구휘는 잠시 두 사람의 이름을 되뇌었다.
 “기일광, 방혜미라······.”
 그러다가 구휘는 갑자기 두 손으로 기하진을 붙잡고 물었다.
 “혹시 네 아버지가 벽력검 기 대협이 아니냐?”
 구휘의 말에 기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아버지를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야.
 “기 대협 댁 사람들이 모두 죽은 줄로만 알았더니 네가 살아있었구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구휘가 다정한 눈빛으로 기하진을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기하진은 울음을 멈추고 구휘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버지를 아세요?”
 “알다마다. 얼마 전 정마대전 때 네 아버지를 뵌 적이 있다. 네 아버지는 섬서 무림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무인이셨지. 그런데 그 간악한 마교 놈들에게 몰살을 당하셨다니······.”
 구휘의 말에 기하진은 아버지가 생각나서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얘야, 아저씨랑 같이 무림맹으로 가지 않겠느냐? 아저씨와 같이 가면 무공도 배우고 친구도 사귈 수 있을 거야.”
 무공을 배울 수 있다는 말에 기하진은 마음이 움직였다. 게다가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니, 기하진은 저도 모르게 구휘에게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좋아요! 데려가 주세요. 그런데 제 동생도 데려가도 돼요?”
 기하진의 말에 구휘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동생이 있느냐? 기 대협은 외동아들만 있는 줄로 알았는데?”
 “아, 친동생은 아니에요. 걔도 얼마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추명이 형과 제가 같이 돌봐줬거든요. 꼭 데려가야 해요.”
 기하진은 어느새 울음 그친 똘망똘망한 눈으로 구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차마 거절하기가 어려웠지만, 지금은 작전 중인 데다가 무림맹과 상관없는 애를 데려가기도 난처했다.
 그때 석문이 명령을 내렸다.
 “암영단은 즉시 맹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구 부단주와 용봉단은 응룡검 황보를 쫓도록.”
 석문은 기하진이 이 년 전 마교에게 일가족이 몰살된 기 대협의 아들이라는 얘기를 듣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 아이는 우리가 맹으로 데려가겠다. 자, 즉시 움직인다!”
 “존명!”
 암영단원 중 하나가 기하진을 안아 들었다. 구휘는 용봉단을 이끌고 즉시 사라진 황보를 쫓아갔다.
 암영단원들이 떠나려는 모습에 기하진은 당황하여 석문에게 소리쳤다.
 “아저씨! 제 동생은요? 동생은 어떡해요?”
 “무림맹이 무슨 고아원이라도 되는 줄 알아?”
 석문의 호통 소리에 기하진은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석문을 노려보며 주먹을 꼭 쥘 뿐이었다.
 문득 폐가에 혼자 있을 예린이 생각이 났다. 아침에 나와서 벌써 저녁이니 지금쯤이면 아마 혼자서 놀다가 지쳐 잠들었을 것이다. 마음이 시큰거렸다. 예린이를 잘 돌보라고 늘 신신당부하던 석추명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러나 기하진은 입을 꽉 깨물었다.
 어쩔 수 없어.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부모님 원수를 못 갚을 수도 있어. 예린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무림맹으로 가야 해!
 기하진은 움츠러드는 자신을 다독이며 자신을 태운 암영단원 무사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자, 출발하자. 이랴!”
 석문의 구령에 대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하진이 탄 말도 달리기 시작했다.
 기하진은 말 등위에서 고개를 돌려 점점 멀어지는 화양현을 바라보았다. 임예린의 커다란 눈망울이 떠올랐다. 가슴속이 진흙으로 가득 찬 듯 답답하고 괴롭기만 했다.
 
 ***
 
 예린은 폐가에서 하루종일 기다렸지만 추명과 하진이 돌아오지 않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깜깜해졌다. 예린은 기다리다 지쳐 자다가, 또 깨어 기다리다 지쳐 자기를 반복했지만 아무리 자고 일어나도 추명과 하진은 오지 않았다.
 밤이 되자 컹컹, 하고 떠돌이 개들이 짖는 소리가 마치 늑대 소리처럼 밤공기를 찢으며 들려왔다. 예린은 그 소리에 놀라 누더기 이불을 뒤집어쓰고 덜덜 떨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벽 틈으로 바람이 들어와 밤새 이빨을 딱딱거렸다.
 아침이 되었지만 추명과 하진은 오지 않았다. 예린은 주린 배를 물로 채우며 또 하루를 기다렸지만 추명과 하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과 배고픔에 지쳐 엉엉 울던 예린은 기다리다 결국 참지 못하고 큰길로 나가 보기로 했다.
 예린은 한참을 걷다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둣가게 앞에서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이틀을 굶은 예린의 배는 어서 만두를 넣어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만두를 보니 이틀 전에 오빠들과 함께 웃으며 만두를 먹던 기억이 떠올라 갑자기 눈물이 났다.
 예린은 결국 만둣가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배고픔보다는 왠지 이제는 오빠들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생각에 더욱 눈물이 났다.
 어린 여자아이가 만둣가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니 측은하게 여길 만도 하건만, 그 당시는 굶는 이도 많고 고아도 많았던 터라 다들 그러려니 했다.
 만둣가게 주인은 한 시진째 가게 앞에 쭈그리고 앉아 만두만 바라보는 예린이 성가신 모양인지 결국 빗자루를 휘두르며 가게에서 뛰쳐나왔다.
 “어서 안 꺼져? 젠장. 손님들이 오려다가도 네년 때문에 못 들어오잖아!”
 만둣가게 주인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빗자루를 휘두르자 겁이 난 예린이 피하려다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으앙!”
 그렇지 않아도 울보인 예린의 울음이 터졌다. 두려움과 배고픔과 돌아오지 않는 오빠들에 대한 원망이 가득 담긴 울음소리는 쉬이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이년이?”
 만둣가게 주인은 예린이 울음을 터뜨리자 더욱 눈을 부라렸다. 그러고는 예린의 뒷덜미를 잡고 뒤로 질질 끌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예린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그때 누군가 만둣가게 주인의 팔을 붙잡았다.
 “어허, 어린애에게 이 무슨 짓이오?”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데없는 목소리에 예린이 울음을 멈추고 올려다보니 비단옷을 입은 중년 부부가 자기를 측은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값비싼 비단에 귀한 담비 가죽옷을 입고 있었다. 남자는 얼굴에 세 가닥 수염을 길러 표정이 엄숙했고, 여자는 피부가 하얗고 눈매가 선하게 생긴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여인이 예린이를 보더니 남편을 보고 얘기했다.
 “우리 아린이도 지금쯤이면 딱 이 애만 하지 않을까요?”
 부인의 말에 남편도 예린을 쳐다보았다. 근엄한 얼굴에 인자한 빛이 스쳤다.
 “그렇구려. 팔 년이나 지났으니 지금쯤 이 애만큼 자랐겠지.”
 남편의 말에 여인이 예린의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얘야, 배가 고파서 울고 있니? 만두가 먹고 싶어?”
 예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은 예린을 품에 안더니 만둣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부부는 예린을 위해서 만두 한 접시를 시켰지만, 웬일인지 예린은 만두를 먹기는커녕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예린을 바라보던 여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 아린이는 어디 있는 건지······. 살아나 있으면 좋으련만.”
 여인의 말에 남자도 눈에 물기가 살짝 묻어났다. 남자가 여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분명히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요.”
 여인은 손끝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만두 하나를 들고 웃으며 예린이에게 내밀었다.
 “어서 먹어보렴. 따끈따끈할 때 먹어야 해.”
 그제야 예린이 만두를 두 손으로 잡고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귀여운지 여인은 예린의 모습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계속 머리를 쓰다듬었다.
 “얘야, 네 이름이 뭐니? 부모님은 어디 계시고?”
 “어머니는 일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제 이름은 예린이예요. 임예린.”
 부부는 예린의 이름을 듣자 깜짝 놀라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 아이의 이름이 어쩜 우리 아린이와 이렇게 비슷할까요?”
 “그러게 말이오. 성도 ‘임’씨라니 정말 신기한 노릇이구려.”
 이 부부는 중원 최대 규모의 상단인 천린상단의 주인, 임풍 부부였다. 임풍 부부는 약 팔 년 전에 당시 갓난아기였던 어린 딸을 잃었다. 딸의 이름이 임아린(林雅隣)이었는데 예린의 이름과 너무 비슷하자 깜짝 놀란 것이다.
 여인은 남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보, 여기서 이 애를 만난 것도 인연인 것 같으니 우리가 데리고 가서 키우면 어떨까요? 아이의 이름이 우리 애와 비슷한 것이 마치 잃어버린 우리 딸이 돌아온 것만 같아요.”
 그렇지 않아도 딸을 잃고 나서 매년 시름에 잠긴 아내의 모습이 안쓰러웠던 임풍은 선뜻 동의했다.
 “그럽시다. 마침 이 아이도 부모를 잃어 사정이 딱하게 됐으니 우리가 데리고 갑시다.”
 남편이 동의하자 여인이 예린을 보고 인자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얘야, 우리와 같이 가면 더는 길에서 헤매지 않아도 된단다. 우리와 함께 갈 테냐?”
 늘 따뜻한 엄마 품이 그리웠던 예린에게 여인의 모습은 바로 엄마의 모습이었다.
 예린이 만두를 놓고 일어나더니 여인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 모습에 여인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예린의 등을 토닥였다. 여인의 따뜻한 체온이 예린의 몸으로 전해져 왔다.
 
 
 # 무림맹의 외톨이 소년
 
 무림맹 의사청(議事廳).
 맹주 남궁진악은 태사의에 앉아 있고 부맹주 천계심과 총군사 사마경은 맹주 좌우에 서 있었다. 세 사람의 앞에는 중양일지 회수에 실패한 암영단주 석문이 무릎을 꿇고 부복하고 있었다.
 “중원 무림의 살수 중 최고라는 암영단원들을 백 명이나 데리고 석 달간 추격한 결과가 고작 이거란 말이냐!”
 부맹주의 노한 음성이 텅 빈 의사청을 쩌렁쩌렁 울렸다. 석문은 머리를 땅바닥에 대고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죽을죄인 것은 아느냐? 이제 중양일지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져나간다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이 비급을 쫓을 것이고, 그로 인해 전 강호가 다시 한번 대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야. 어찌 일 처리를 이따위로 해!”
 석문은 맹으로 복귀하고 나서 어찌 된 영문인지 육굉의 몸에서 찾은 중양일지 전반부를 내놓지 않고 중양일지를 회수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천계심은 중양일지를 잃어버렸다는 말에 맹주의 앞이었지만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뛰는 중이었다.
 비록 석문이 임무에 실패하기는 했으나 석문은 엄연히 맹주의 제자. 그 점을 생각한다면 부맹주가 이토록 석문을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맹주 남궁진악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런 천계심을 내버려 두었다.
 “그래, 석 달간 추격하면서 혹시 육굉이 다른 사람과 연락을 하거나 만나는 것을 전혀 보지 못했느냐?”
 이번에는 총군사 사마경이 물었다. 석문은 고개를 들고 사마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희가 워낙 바짝 뒤쫓아서 육굉은 다른 지원을 받을 처지가 전혀 되지 못했습니다. 육굉을 죽이고 나서 육굉의 몸을 수색했는데 비급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응룡검 황보가 뒤늦게 와서 시신을 처리했지만 역시 비급은 얻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석문의 말에 사마경은 탄식 소리를 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허, 그것참 이상하구나. 그렇다면 그자가 그 비급을 어떻게 했단 말이냐? 어디에 숨긴 것도 아니고?”
 “예. 육굉이 머물렀던 장소마다 우리 단원들이 샅샅이 뒤졌으나 중양일지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흠······.”
 “이 일은 더 두고 볼 것 없소이다. 임무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석 단주를 즉시 파면하고 중벌에 처해야 하오!”
 천계심이 강경하게 나왔다. 석문은 어차피 맹주의 제자. 이 기회를 빌려 맹주의 측근을 한 사람이라도 더 줄일 수만 있다면 나중에 이룩할 대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빠른 계산이 섰다.
 그러나 그뿐만은 아니었다. 중양일지에 수록된 중양신공은 무림 3대 신공 중 으뜸. 그 비급만 자신이 차지할 수만 있다면 맹주나 구대 문파의 장문인들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사실 천계심은 석문이 그 비급을 탈환해 오면 중간에서 은밀히 빼돌릴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건 안됩니다. 석 단주를 파면하면 구대 문파와 오대 세가 장문인들이 의아하게 여길 것이외다. 그들이 파고들면 이 사달이 나게 된 원인인 중양일지의 존재가 알려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중양일지의 존재를 무림에 알리지 않고 은밀히 처리하려던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사마경의 말에 맹주 남궁진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렇겠군.”
 사실 맹주를 포함해서 무림맹 수뇌들은 육굉이 무림맹의 서고인 천림비고에서 중양일지를 탈취하기 전까지 중양일지가 무림맹 내에 있는지도 몰랐다. 무림의 3대 신공은 왕중양 진인의 중양신공, 혼세마검(混世魔劍)으로 이름이 바뀐 천마신검(天魔神劍), 그리고 철산신장(鐵山神掌)이었다. 중양일지를 제외한 두 무공비급, 혼세마검보와 철산신기(鐵山神記)는 무림맹의 장경각인 천림비고에 은밀히 보관되어 있었으나 중양일지는 실전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중양일지가 사라진 것을 눈치챈 사람은 천림비고 관리인 양 노인이었다. 양 노인은 수십 년 동안 서고에서 일했기에 어느 책이 어디에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청소를 하려고 보니 늘 있던 중양일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양 노인은 중양일지가 무공비급인 줄은 모르고 다만 전진교 조사 왕중양의 일기라고만 생각했다고 한다.
 양 노인이 분실 보고를 한 뒤에야 무림맹의 수뇌부들은 천림비고에 중양일지가 보관되어 있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지만 중양일지는 이미 도난당한 뒤였다. 특히 그 사실을 안타까워한 사람은 다름 아닌 부맹주 천계심이었다. 중양신공이야말로 부족한 자신의 무공을 끌어올려 무림의 절대적 지배자로 군림하게 해줄 무공으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천계심은 지금 부복해 있는 석문에게 자신의 그런 감정까지 모두 쏟아내어 질책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넘어가면 맹의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반드시 일벌백계해서 맹의 법도가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맹도들에게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이번에는 천계심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맹주는 천계심의 말을 듣더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부맹주의 말도 일리가 있군. 그도 그렇겠어.”
 오락가락하는 맹주를 보며 천계심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저러니 시시대협(是是大俠)이라는 소리를 듣지. 이것도 흥, 저것도 흥, 도대체 자신의 의견이라고는 없는 사람 같으니. 쯧쯧.’
 천계심이 속으로 자신을 비웃는지도 모르는 맹주는 뜻밖에 부맹주 천계심의 손을 들어주었다.
 “석문은 임무 실패의 책임을 물어 당장 오늘부로 암영단주직을 내려놓는다. 당분간 맹의 임무는 맡지 말고 무공수련에만 집중하도록 하여라.”
 “예. 맹주님.”
 천계심은 대답하는 석문을 내려다보며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맹주. 곧 그 자리를 내게 물려줄 날도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천계심은 중양일지를 잃어버린 바에야 나머지 무공비급들이라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했다.
 천계심의 건너편에 서 있던 사마경은 그런 천계심의 인상 변화를 흥미로운 듯이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밤, 맹주전에 총군사 사마경이 조용히 들었다.
 맹주전에는 남궁진악이 혼자 앉아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총군사께서 이 야심한 밤에 어인 일인가?”
 “조금 전 석문에게 중양일지 전반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부맹주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은밀히 나머지 후반부를 계속 찾으라고 말을 해두었습니다.”
 “잘했군.”
 남궁진악은 사마경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일가족이 몰살당한 것으로 알았던 벽력검 기일광의 아들을 석 단주가 데리고 왔습니다.”
 “벽력검 기일광?”
 남궁진악은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섬서 무림의 한 축이었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강하지 않아서 맹주님께서는 잘 모르실 겁니다. 그런데 그 아들 녀석이 아주 재밌습니다. 부모를 둘 다 한날한시에 잃어서인지 그 녀석, 마교라면 아주 치를 떱니다.”
 사마경의 설명에도 남궁진악은 딱히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가?”
 “그런데 이 녀석이 또 제법 영특하고 고집도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부맹주의 아들, 천옥랑과 같은 학당에 집어넣을 생각입니다. 제 아비를 닮아 안하무인인 옥랑이 이 아이를 그냥 두고 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천옥랑을 좀 눌러주면 지고는 못 견디는 부맹주의 성격상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자충수를 두도록 노려봄직한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맹주님?”
 “흠, 그렇겠구만. 그건 총군사가 알아서 하시오.”
 “명 받들겠습니다.”
 사마경은 그길로 그대로 맹주전을 물러났다.
 
 ***
 
 무림맹 총군사 사마경(司馬慶)은 초로에 접어든 학자풍으로 키가 크고 야위어서 옷이 살짝 헐거워 보였다. 사마경은 연보라색 수정으로 만든 동그란 안경을 코끝에 걸치고 눈앞에 있는 아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이는 고집이 센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초롱초롱한 눈빛에서는 총기가 엿보였다.
 “그래, 네가 기 대협의 아들이로구나. 네 부모님의 일은 우리 무림맹도 가슴 아프게 생각한단다.”
 사마경이 자상한 눈빛으로 기하진을 쳐다보자 기하진은 부모님 생각에 불현듯 가슴이 울컥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부모의 복수를 하고 싶다고?”
 “예. 무공을 배워 마교 놈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키는 것이 제 인생 목표입니다.”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에 사마경은 잠시 껄껄 웃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부모의 원수는 불구대천의 원수라, 같은 하늘 밑에서 살아갈 수 없지. 내 있는 힘껏 너를 돕도록 하마.”
 사마경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 무림맹에는 네 또래의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학당이 있다. 그 학당을 권학당(勸學堂)이라고 한단다. 내일부터 권학당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글과 무공을 배우도록 해라. 그리고 절대 누구에게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지내거라.”
 기하진은 사마경의 말에 꾸벅 인사를 했다. 이때만 하더라도 이 키다리 안경잡이 아저씨가 무림맹에서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그저 사람 좋게 생긴 늙수그레한 아저씨쯤으로 생각했다.
 총군사 사마경의 배려로 기하진은 그다음 날부터 권학당에 나가게 되었다. 권학당은 무림맹 수뇌부의 자제들이 글과 무공을 배우는 학당이었다.
 그러다 보니 권학당에서 공부하는 백여 명의 아이들은 아버지의 지위에 따라 자신들의 지위도 정하고 서로 무리를 지어 다니기 일쑤였다. 누가 새로 들어오면 아이들은 당연히 그 아이의 배경에 관심을 가졌고, 새로 입교한 아이는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현재 권학당에서 가장 위세가 높은 아이는 부맹주의 외아들인 천옥랑(千玉郞)이었다. 당금 무림맹주 남궁진악(南宮眞岳)은 복잡한 것을 싫어해서 맹의 업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맹의 모든 대소사는 부맹주인 천계심(千計深)이 처리했는데 그래서인지 무림맹 안팎에서는 부맹주가 실권자라는 소문이 은연중에 돌고 있었다.
 부맹주 천계심은 청성파 장문인의 사형으로 무공이 고강하고 야욕이 큰 사람이었다. 사실, 구대문파 가운데 입지가 약한 청성파 출신으로 부맹주의 자리에 오른 것도 천계심의 남다른 권력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아버지를 둔 천옥랑은 무림맹 안에서는 황태자로 통했다. 키도 크고 외모도 번듯하게 생긴 데다가 어릴 때부터 부친 천계심에게 직접 무공지도를 받아 무공실력도 출중했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후광 때문에 무림맹 내에서는 감히 누구도 천옥랑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천옥랑은 자신이 마치 부맹주인 듯 행동했다.
 기하진이 권학당에 들어오자 아이들 사이에는 벌써 기하진에 대한 소문이 쫙 퍼졌다. 기하진은 고아인데 암영단주가 어딘가에서 주워왔다는 것이다.
 기하진은 아이들이 자신을 힐끗거리는 것을 알았지만 괘념치 않았다. 어차피 무림맹 내에서 자기는 혼자이다. 이 까짓것은 힘든 축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이를 악물었다.
 권학당은 오전에는 글을 배우고, 오후에는 무공수련을 했다. 기하진이 처음 권학당에 나간 날 마침 오전에 배우는 글은 기하진이 이전에 배운 적이 있는 명심보감이었다.
 “자, 오늘은 어제에 이어 명심보감 안분편(安分篇)이다. 지족자(知足者)는 빈천역락(貧賤亦樂)이오, 부지족자(不知足者)는 부귀역우(富貴亦憂)니라. 이게 무슨 뜻이냐?”
 선생의 질문이 떨어지자 아이들은 다들 조용했다. 사실 선생의 질문이 어렵다기보다는 아이들 간에는 일종의 암묵 같은 것이 있었다.
 천옥랑은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문무(文武) 둘 다 수석을 놓치기 싫어했다. 그래서 문장 수업시간에도 누가 자기보다 먼저 답을 하거나, 자기가 답을 할 수 없는데 답을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천옥랑의 눈치를 보느라 답을 안 하게 되고, 천옥랑은 아무도 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답함으로써 한껏 자기 존재감을 과시했다. 학당의 선생들은 이런 내막은 모른 채 그저 천옥랑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여 천옥랑을 무림수재(武林秀才)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천옥랑은 오늘도 자신이 답을 하여 선생들의 칭찬을 독차지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미처 손을 들기도 전에 처음 보는 녀석이 번쩍 손을 드는 게 아닌가!
 권학당 내의 불문율이 깨지자 천옥랑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속으로는 고소해하면서도 불똥이 자기에게 튈까 봐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호! 오늘 처음 온 하진이가 손을 들었구나. 그래, 무슨 뜻이냐?”
 선생이 묻자 기하진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답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하고 천해도 역시 즐겁고,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하고 귀해도 역시 근심한다는 뜻입니다.”
 기하진이 한 점 막힘없이 답을 하자 선생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서렸다.
 “잘 말해 주었다.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은 가난해도 족하고, 분수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지위가 높고 돈이 많아도 근심 속에서 살아가는 법이지.”
 선생은 하진이를 기특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눈길을 돌려 학생들을 향했다.
 “자, 오늘 새로 온 하진이가 이렇게 답을 해주었는데 오랫동안 공부해온 우리도 이에 질 수 없겠지? 다음 질문이다. 안분신무욕(安分身無辱)이요 지기심자한(知機心自閑)이라, 수거인세상(雖居人世上)이나 각시출인간(却是出人間)이니라. 이것이 무슨 뜻인지 말해볼 사람?”
 이번에도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선생의 눈이 자연스레 천옥랑을 향했다.
 “무림수재가 한번 답을 해 보겠느냐?”
 그러나 이번 질문은 어려워서 천옥랑도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천옥랑은 당혹감으로 얼굴이 시뻘게졌다.
 기하진은 당황하는 천옥랑을 잠시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손을 들었다.
 “오호, 또 하진이냐? 하하, 그래, 무슨 뜻이냐?”
 선생의 질문에 기하진이 또박또박 답을 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분수를 지키면 욕됨이 없고, 일의 실마리를 알면 마음이 절로 한가로울 것이니, 비록 속세에 살지만 도리어 속세를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답을 하는 기하진의 눈빛이 천옥랑의 눈빛과 잠시 마주쳤다. 잠깐이었지만 그사이 두 사람의 눈빛은 허공에서 잠시 엉겨 붙으며 불꽃을 튀겼다.
 천옥랑은 오늘 처음 본 신입생에게 보기 좋게 참패를 당한 셈이었다.
 ‘건방진 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나에게 이런 수모를 줘?’
 천옥랑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데 선생의 다음 말이 불에 기름을 부었다.
 “잘 설명해 주었다. 그동안 권학당의 분위기가 좀 침체되긴 했었지. 이제 당찬 신입생이 들어왔으니 기존 학생들은 훨씬 더 분발해야겠구나. 무림 수재 옥랑이도 우물쭈물하다가는 수재라는 별호를 뺏길 수도 있으니 더욱 분발하거라.”
 선생은 아이들 간에 선의의 경쟁심을 불어넣으려고 한 소리였지만 그 말은 천옥랑에게는 치욕으로 다가왔다.
 기하진의 뒤에 앉은 천옥랑은 그 말을 들으며 기하진의 뒤통수를 한참 노려보았다.
 그러는 사이, 점심시간이 되었다.
 기하진이 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천옥랑의 똘마니인 뚱보 이덕방이었다.
 “아이구, 이게 누구야? 대단하신 무림신동 아니신가?”
 덕방이 대놓고 기하진을 놀렸다. 기하진은 대꾸도 하지 않고 차갑게 이덕방을 노려보았다.
 그때 또 누군가가 어깨로 기하진을 퍽, 밀치는 바람에 들고 있던 식판이 떨어졌다. 어이가 없어 돌아보니 이번에는 천옥랑의 또 다른 똘마니 원성한이었다.
 “식당에 웬 비렁뱅이가 있냐?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걸?”
 원성한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하더니 기하진 앞에서 한 손으로 코를 감싸 쥐었다.
 “어디서 이런 냄새가 나나 했더니 첫날부터 관심을 못 받아 안달 난 관심종자시구먼?”
 원성한이 코를 감싸 쥔 채 빤히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기하진은 화가 나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주먹 색깔이 하얘지며 바들바들 떨렸다.
 “이래서 근본은 못 속이는 거지. 빌어먹던 놈은 어디서나 더러운 냄새가 나는 거지.
 이번에는 이를 악 깨물었다. 기하진은 권학당에 들어온 첫날부터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기하진은 바닥에 떨어진 식판을 주워 다시 줄을 섰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하나같이 기하진을 밀치고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결국 기하진은 제일 마지막에 음식을 받아야 했다.
 기하진이 겨우 밥을 받아서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원성한이 다가와 식판을 냉큼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이, 신입생. 여기 내 자리인데?”
 기하진은 그 말에 산적두목같이 생긴 원성한을 한번 노려보고는 잠자코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려고 했다. 그러자 원성한이 또 냉큼 식판을 그 자리에 밀어 넣으면서 말했다.
 “마음이 바뀌었어. 이 자리에 앉고 싶어.”
 기하진은 식판을 놓고 앉으려다가 엉거주춤 선 상태에서 원성한을 다시 노려보았다. 기하진이 다시 그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려고 하자 원성한은 기하진이 앉기도 전에 또 냉큼 그쪽으로 옮겨 앉았다.
 “신입,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네 자리는 없는 것 같은데?”
 그러자 이덕방이 기하진의 식판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며 말했다.
 “비렁뱅이 놈이니 바닥에 앉아서 처먹으면 되겠네. 크크크.”
 기하진의 식판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자 식판에 담겨 있던 음식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덕방의 말에 원성한과 주위에 있던 아이들 몇 명이 배를 잡고 낄낄거리며 웃었다.
 기하진이 이를 악물며 손으로 흩어진 음식을 식판에 주워 담았다.
 “역시 거렁뱅이 출신이라 그런지 손쓰는 것이 더 편한가 보네? 이래서 근본도 없는 놈을 받아선 안 돼.”
 원성한의 말을 이덕방이 이어받았다.
 “근본이 없긴? 어미, 아비도 거렁뱅이겠지. 크크크.”
 그 말 한마디에 기하진은 정신이 나가버렸다. 꾹꾹 눌러 참았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했다.
 기하진은 주워 담던 식판을 들고 그대로 이덕방의 머리를 내리쳤다. 순식간에 이덕방의 얼굴이 음식과 국물로 뒤범벅이 되었다.
 “이 돼지 새끼야, 터진 입이라고 함부로 놀리지 마!”
 
 ***
 
 난데없는 기하진의 공격에 잠시 얼이 나가 있던 이덕방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이 잡놈의 새끼가!”
 이덕방이 기하진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이덕방의 주먹이 날아오자 기하진이 피하려는 순간,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기하진의 두 팔을 단단히 붙잡아 꼼짝 못 하게 했다.
 퍽! 기하진은 그대로 이덕방의 주먹에 얻어맞고 말았다. 순식간에 코피가 터져 나왔다.
 이덕방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두 번, 세 번, 네 번, 연속으로 기하진의 턱과 복부를 가격했다.
 이덕방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몸무게가 훨씬 무거웠다. 그런 이덕방의 주먹이 복부에 꽂히자 기하진은 앞이 노래지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기하진이 고통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숨을 헐떡거리자 그제야 기하진을 풀어 주었다. 기하진을 붙잡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원성한이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체격이 훨씬 크고 힘이 센 원성한이 붙잡자 기하진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풀려나자 기하진은 다시 이덕방에게 달려들었다. 이덕방은 기하진이 눈빛을 번뜩이며 달려들자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다가 의자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기하진이 그대로 이덕방의 몸에 올라타고는 주먹을 날렸다.
 기하진의 눈빛이 맹수처럼 번들거리자 이덕방은 오싹 두려움을 느꼈다.
 퍽! 퍽!
 기하진의 주먹이 이덕방의 얼굴에 내려꽂혔다. 그러자 이덕방의 코에서 코피가 터져 나왔다.
 “이 새끼, 무슨 짓이냐?”
 옆에 있던 원성한이 기하진의 등을 발로 찼다. 원성한은 남천단주인 아버지에게서 착실하게 무공을 익힌 몸. 원성한의 발길질 한 번에 기하진은 고무줄에 튕긴 돌멩이처럼 사오 척 앞으로 튕겨 나갔다. 그 바람에 입술이 터지고 얼굴에 생채기가 났다. 눈과 볼은 시퍼렇게 부어올랐다.
 기하진은 아픈 것도 모른 채 벌떡 일어서더니 다시 이덕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네가 뭔데 우리 부모님을 욕해! 이 돼지 새끼야!”
 기하진이 마치 정신이 나간 듯이 다시 달려들자 이덕방은 더럭 겁이 났다.
 “그만해. 이 미친 녀석아!”
 이덕방이 소리쳤지만 기하진은 막무가내였다. 그러자 원성한이 다시 다리를 걸어 기하진을 넘어뜨렸다. 식당 안은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고 아이들은 기하진과 이덕방, 원성한을 빙 둘러싸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소란을 들었는지 식당 안으로 무공사범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이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무공사범은 엉겨 붙어 싸우고 있는 기하진과 이덕방을 따로 떼 놓았다. 둘 다 얼굴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원성한은 뛰어난 무공실력으로 요리조리 피하면서 때리기만 해서인지 옷차림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놈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싸움질이냐? 심신을 수련해야 할 명문정파 놈들이 싸움질이라니. 당장 학당 당주님께 보고드리겠다. 그리고 네놈들은 앞으로 석 달간 매일같이 식당 청소와 화장실 청소다. 알겠느냐 이놈들아?”
 무공사범은 애초에 남천단주의 아들인 원성한은 젖혀두고 기하진과 이덕방만 꾸짖었다.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천옥랑이 앞으로 나섰다.
 “윤 사범님.”
 천옥랑이 나타나자 윤 사범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오, 옥랑이구나. 갈수록 신수가 더욱 훤해지는구나. 그래, 부맹주님은 편안하시지?”
 천옥랑은 윤 사범을 비웃듯이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시지요. 윤 사범님, 조금 전 일은 저희끼리 장난 좀 친 겁니다. 별거 아닌 일로 시끄럽게 만들지 마시죠?”
 “그, 그래야지.”
 천옥랑에게 찍소리도 못한 윤 사범이 이번에는 기하진을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 그렇게 천방지축으로 날뛰다가는 권학당에서 쫓아낼 테다. 처음 왔으면 정신 바짝 차리고 매사에 조심해야지, 무슨 싸움질이냐, 이놈아!”
 기하진은 억울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윤 사범의 어깨너머로 천옥랑과 원성한, 이덕방이 모른 척 자신을 비웃는 모습이 보였다.
 오후 권술 수련시간.
 오후에는 권각을 수련하는 시간이었다. 남천단의 부단주를 오랫동안 역임했던 포거정(包巨正)이 무공사범이었다. 이미 은퇴한 지 십 년도 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포 부단주라고 불렀다.
 기하진은 점심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무림맹에서 받은 옷도 더럽혀져서 별수 없이 무림맹으로 올 때 입고 왔던 초라한 누더기를 다시 입고 왔다. 아이들은 기하진이 다 해진 옷을 입고 나타나자 저희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거렁뱅이인가 봐’, ‘아휴, 정말 냄새날 것만 같아’ 하는 말들이 태연한 척 걸어가는 기하진의 귀를 비집고 들어왔다.
 다들 번듯한 옷을 입고 있는데 혼자만 누더기를 입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자, 오늘은 어제 얘기한 대로 일대일 대련이다. 모두 둘씩 짝을 지어라.”
 오자마자 대련이라니, 무공의 기초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기하진은 당황했다.
 “신입생과는 누가 대련하겠느냐?”
 포 부단주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천옥랑이 손을 번쩍 들더니 기하진 옆으로 왔다.
 “제가 하겠습니다.”
 포 부단주는 천옥랑이 나오자 껄껄 웃었다.
 “좋다. 역시 부맹주님을 닮아 매사에 적극적이구나. 그럼 대련 시작!”
 아이들은 각자 두 명씩 짝을 지어 그동안 배운 권각술로 대련을 시작했다. 포 부단주는 아이들 속을 이리저리 다니면서 자세가 잘못된 것을 교정해주고 시범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기하진과 천옥랑은 잠시 포 부단주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신입. 오늘 아침에 보니 글공부가 뛰어나던데 무공도 역시 뛰어나겠지? 어디 한번 제대로 붙어보자.”
 천옥랑이 번개같이 다리를 걸며 기하진의 오른팔을 잡아당겼다. 허중생유(虛中生有)의 가장 초보적인 수법이었으나 아직 무공을 제대로 수련한 적이 없는 하진이 이 방법을 알 리가 없었다. 기하진은 그만 중심을 잃고 나뒹굴고 말았다.
 천옥랑은 기하진의 무공이 형편없다는 사실에 내심 한껏 골탕을 먹이리라 작정했다.
 기하진이 일어나자마자 다시 천옥랑이 발끝으로 기하진의 무릎을 차며 공격해 들어왔다.
 또다시 넘어지지 않으려고 주의해서 천옥랑을 살피던 기하진은 얼른 뒤로 피했으나 천옥랑의 무공은 기하진이 피하려고 한다고 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천옥랑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사숙인 청성파 장문인 무욕자로부터 직접 무공을 전수받아 이미 그 실력이 상당했다.
 기하진은 연이어 들어오는 천옥랑의 발차기를 피하지 못하고 다시 땅바닥에 쓰러져 나뒹굴었다. 이미 여러 번 나뒹군 터라 몸 여기저기 시퍼렇게 멍이 들었으나 기하진은 그만둘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아랫입술만 더욱 꽉 깨물 뿐이었다.
 어느새 원성한과 이덕방도 옆으로 와서 천옥랑의 손에 얻어맞는 자신을 바라보며 고소한 듯 낄낄거렸다. 아이들의 얘기 소리도 귀에 들렸다.
 “아버지가 벽력검 기 대협이라고 하던데 어떻게 무공이 저렇게 형편없을 수가 있지?”
 “우리 아버지가 그러시는데 기 대협은 실력은 쥐뿔도 없으면서도 입으로만 떠드는 인간이었대.”
 “우와, 정말? 그런 사람 정말 질색이다. 하긴, 그러니 그 아들놈도 저렇게 형편없지.”
 아이들의 비웃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기하진은 아이들에게 덤벼들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무림맹은 철저히 있는 자들의 편이었다. 그저 뜨거운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날, 천옥랑과의 대련으로 만신창이가 된 기하진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전신이 욱신거리며 아파서 제대로 누울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잠시 누워 있던 기하진의 머릿속에 석추명의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늘 자기와 예린이를 위해 먹을 것을 훔치다가 사람들에게 쫓기고 맞아서 피멍이 든 얼굴로 와서도 씨익 웃던 그 모습이 너무 그리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
 하필이면 이런 날, 대단한 아버지를 둔 명문정파의 아이들에게 온몸이 아프도록 얻어터진 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을 친동생처럼 돌봐주던 석추명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기하진은 누운 채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자신을 이해해주고 늘 웃어주던 그 모습이 보고 싶어서 가슴이 아려왔다.
 ‘형,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석추명과 헤어지던 날, 자신의 모진 말에 넋이 나가 있던 석추명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내 본심은 그게 아니었는데······.
 ‘형, 지지 않을게. 아무리 힘들어도 지지 않을게. 다시 형이랑 만날 때까지 꾹 참아낼게.’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나았다. 추명이 형도 무공을 익히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그동안 잊고 있던 중양일지 앞부분이 생각났다. 뭔가 중요한 무공비결인 듯해서 석추명 몰래 찢어낸 부분이었다. 무림맹으로 들어올 때 혹시라도 들킬까 봐 속옷 안에 꼬깃꼬깃 구겨 넣어서 들어왔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어서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생각난 것이다.
 기하진은 꽁꽁 숨겨두었던 중양일지 앞부분을 꺼냈다. 기하진이 찢어낸 부분은 내공심법에 관한 내용이었다.
 
 ― 천하의 무공은 반드시 내공을 닦아야 깊은 경지로 들어갈 수 있다. 내공을 닦아 소주천(小周天)을 얻은 사람은 상승무공을 익힐 수 있는 열쇠를 손에 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소주천에 이르는 방식도 백 가지 문파가 모두 다르니 어떤 방식을 따를 것인가? 나 왕중양은 태상노군의 보우하심으로 고대로부터 비밀리에 내려오는 기이한 무공을 얻었으니, 이 무공을 수련한다면 누구든지 손쉽게 소주천과 대주천을 이루어 반로환동하고 우화등선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기하진의 눈이 번뜩 뜨였다. 상승무공을 익힐 수 있는 열쇠라니 자신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기하진은 몸이 아픈 것도 잊고 십여 장에 걸쳐 적혀 있는 소주천을 이루는 방법을 빠르게 읽어 나갔다. 자신이 찢은 부분은 소주천을 이루고 난 뒤 다시 대주천을 이루는 방법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끝이 났다.
 중양일지 내공심결을 펼쳐 든 기하진의 눈앞에 야비하게 미소 짓던 천옥랑과 원성한, 이덕방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하진은 그 모습을 머릿속에서 비우려는 듯이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미안하지만 네놈들 수작에 놀아줄 시간이 없어. 난 가야 할 길이 멀거든.’
 기하진의 눈이 초롱초롱 빛을 내며 다시 중양일지의 내공 심결로 돌아갔다.
 
 
 # 무림신동
 
 기하진은 틈만 나면 무공을 수련했다. 누구보다 가장 먼저 일어났고 가장 늦게 잠이 들었다. 종종 밤잠을 잊고 수련한 적도 많았다.
 기하진이 그렇게 수련에 열중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공을 익혀야겠다는 굳은 다짐도 있었지만 중양일지 내공 구결의 신묘한 효과 때문이기도 했다.
 아직 어려운 글자도 많고, 무슨 뜻인지 모를 구절도 많았지만, 글자를 하나하나 찾아서 살펴보고 모르는 뜻은 권학당의 선생들에게 질문해가면서 혼자서 풀이했다.
 그렇게 수련을 하다 보니 어느덧 단전이 생성되고 몸속에 기(氣)가 운행하는 길이 뚫리기 시작했다. 일단 기로(氣路)가 생기자 기로는 점점 두터워졌고, 이번에는 또 어떤 길이 뚫릴까 하는 호기심도 들었다. 그러다 보니 재미가 있어 자연히 먹고 자는 것도 잊고 수련에 매진하게 된 것이다.
 권학당의 선생들은 기하진의 질문이 날카롭고 가끔 자신들이 생각지도 못한 것을 물어보는 통에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다들 속으로 진짜 무림수재가 나타났다고 생각하며 기특해했다.
 어느 날 천옥랑이 한밤중에 잠에서 깨어 볼일을 보러 가는 중에 수련장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천옥랑은 모든 사람이 다 잠든 이 야심한 시간에 누가 잠도 자지 않고 수련을 하는지 궁금해서 수련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서 보니 어둠 속에서 땀을 흘리며 수련에 열중인 사람은 다름 아닌 기하진이었다.
 천옥랑은 자신도 모르게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기하진이 수련하는 것이 아니꼽게 여겨졌다.
 제까짓 게 잠 안 자고 수련해봤자 어느 세월에 무공이 늘겠어?
 그러면서도 그렇게 열심인 기하진에게 왠지 모를 질투심이 났다.
 천옥랑이 수련장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기하진은 한밤중에 혼자서 수련을 하다가 갑자기 천옥랑이 들이닥치자 깜짝 놀랐다. 달빛에 비친 천옥랑의 인상이 기괴했다.
 “잠도 안 자고 수련을 하다니 정말 정성이 갸륵하군.”
 천옥랑이 기하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웃었다.
 “그렇게 혼자서 치고받고 해봤자 실력이 늘겠냐? 수련이란 대련 상대가 있어야 느는 거야. 좋아. 잠도 오지 않는데 내가 대련 상대가 되어 주지. 덤벼라.”
 천옥랑이 어슬렁거리며 수련장으로 들어오더니 어서 덤벼보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천옥랑이 수련장으로 들어서자 기하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권학당에서 수련을 시작한 지 이제 일 년. 그동안 꽤 늘긴 했지만 아직은 천옥랑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상대가 도전하는데 피하는 건 자신의 방식이 아니었다.
 “좋아. 한번 해 보자.”
 기하진이 땅을 박차고 천옥랑을 공격해 들어갔다. 요즘 권학당에서 배우는 권법인 벽호권(壁虎拳)이었다. 기하진이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더니 천옥랑의 복부를 향해 오른손 주먹을 질풍같이 찔러 넣었다. 주먹을 찌르는 속도나 각도가 일 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정확했다.
 천옥랑은 기하진의 실력이 이렇게 빨리 늘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다가 주먹이 코앞으로 다가와서야 얼른 팔을 들어 막으면서 다리를 들어 기하진의 하체를 공격했다.
 천옥랑은 세 살 때부터 부친에게 무공을 배웠기 때문에 무의식중에도 자연스레 공수의 전환을 이룰 수 있었다.
 기하진이 내지른 권은 몇 날 며칠 침식을 잊고 수련한 권법이라 정확했다. 하지만 천옥랑이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하체를 공격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만 천옥랑의 발길질에 앞쪽 정강이를 까이고 말았다.
 퍽! 소리와 함께 정강이에 상당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러나 기하진은 이를 꽉 깨물어 참고는 다시 두 번째 주먹을 내질렀다.
 천옥랑은 자신의 발길질이 적중하자 내심 쾌재를 불렀다. 공력이 깃든 자신의 발에 맞았으니 뒤로 나뒹굴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가떨어지기는커녕 자신의 발길질에 맞고도 다시 공격해오는 것이 아닌가?
 천옥랑은 기하진이 공격해오자 당황한 나머지 그만 주먹에 옆구리를 내주고 말았다.
 윽! 옆구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기하진이 자신의 발길질에 맞고도 어째서 버틸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갑자기 자신의 공력이 약해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자신이 비록 어리긴 했으나 아버지와 사숙, 그리고 무림맹 권학당의 모든 무공사범이 인정해주는 실력이 아닌가?
 게다가 나이에 맞지 않게 키가 크고 힘이 세서 어른과 맞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의 발길질에 맞고도 저 쪼끄마한 놈이 버텨내다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천옥랑은 아버지와 사숙에게서 배운 청성파의 절기들을 한꺼번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몸을 굽혀 땅을 짚나 싶더니 순식간에 용수철처럼 튕기며 기하진의 면전으로 발길을 여섯 번이나 했다. 기하진은 급히 피하려고 했으나 천옥랑의 발길질이 워낙 빨라 피할 수가 없었다.
 급한 대로 두 팔을 들어 올려 막기는 했으나 천옥랑의 발길질에 얻어맞자 기하진은 눈앞에서 불꽃이 일며 현기증이 났다. 양턱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기하진은 천옥랑의 발길질을 받으며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나다가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그제야 천옥랑은 발길질을 멈추고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기하진을 노려보았다.
 “흥! 네까짓 놈이 밤낮 수련을 한다고 실력이 늘겠냐? 상승무공은 좋은 사문을 타고나야만 하는 거야. 권학당에서 가르쳐주는 무공, 백날 익혀봐라, 나를 이길 수 있나.”
 천옥랑은 넘어진 기하진을 비웃더니 휙 몸을 돌려 수련장을 나갔다.
 천옥랑의 발에 얼굴을 얻어맞아 퉁퉁 부은 기하진은 천옥랑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 노려보더니 다시 일어나서 벽호권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이를 꽉 깨물고 시선은 허공에 구멍이라도 낼 듯이 한 점을 응시했다. 기하진의 시선이 닿는 그곳에 가상의 천옥랑이 있다고 생각했다. 온몸이 욱신욱신 아팠으나 동작은 아까보다 훨씬 절도 있고 정확했다.
 다시 몇 개월이 지났다.
 매일 밤 잠자는 시간을 줄여가며 중양신공의 구결로 내공을 수련하던 기하진은 어느 날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됐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그날도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자마자 곧장 입정(入靜) 상태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날은 부지불식간에 호흡이 길어지더니 뱃속에서 눈이 내리듯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단전에 모여 있던 따뜻한 기운이 돌연 꿈틀거리며 몸 안에서 원을 그리며 저절로 움직이는 게 아닌가! 바로 소주천(小周天)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일단 소주천을 이루자 이전에는 어렵던 동작들도 수월해지면서 무공이 급속도로 늘기 시작했다. 어찌나 진보가 빠른지 권학당의 무공사범들이 모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누구도 천옥랑에게 무림수재라고 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기하진이야말로 진정한 무림수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이 년이 흘러 다시 세밑이 되었다.
 세밑이 되면 무림맹 사람들 모두 기다리는 커다란 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소년들이 그간 갈고닦은 실력을 보이는 비무대회였다.
 무림맹에는 무공수련 단계에 따라 총 세 개의 학당이 있었다. 가장 기초단계는 기하진, 천옥랑 등이 소속된 권학당으로 무공에 막 입문하는 십여 세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했다. 두 번째는 지무각(知武閣)으로 권학당을 수료한 뒤 무공을 더욱 심화 수련하는 과정으로 수련생들은 대부분 십 대 후반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천림원(千林院)은 일종의 대학으로 각 문파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서로 무공을 연구하고 절차탁마했으며 연령대도 십 대에서 오륙십 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특히 천림원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무림맹의 요직에 기용되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권학당과 지무각에서는 수련생들의 부모와 친지, 그리고 무림맹 내 고위직을 초청하여 비무대회를 열었다. 권학당의 비무대회를 기린회(麒麟會), 지무각의 비무대회를 잠룡회(潛龍會)라고 했다. 올해는 특히 권학당의 기린회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부맹주의 아들 천옥랑 때문이었다.
 천옥랑이 권학당에 입교할 때 사람들은 천옥랑이 나이는 어리지만 이미 무공실력이 상당하므로 권학당을 건너뛰고 바로 지무각으로 입교시키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했었다. 그러나 당시 부맹주 천계심은 짐짓 겸손한 척, 그럴수록 기본부터 착실히 다져야 한다면서 천옥랑을 입문단계인 권학당에 넣었다.
 천옥랑이 워낙 들어가기 전부터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몸이라 맹 내 모든 사람의 관심이 이번 기린회에 쏠렸다. 게다가 기린회의 총평은 부맹주가 하는 것이 관례였다.
 천계심은 오늘 비무대회에서 아들이 자신의 체면을 세워 주리라 확신하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부맹주 천계심의 바로 옆자리에는 총군사 사마경이 앉아 있었다. 사마경은 예의 그 동그란 수정 안경을 들어 올리며 출전자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천계심이 그런 사마경을 바라보며 슬쩍 물었다.
 “올해 특별히 눈에 띄는 아이가 있소이까?”
 천계심의 물음에 사마경은 안경을 들고 아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특별히 관심 두는 아이가 있습니다.”
 사마경 옆으로는 기하진을 알아봤던 용봉단 부단주 구휘의 모습도 보였다.
 천계심은 사마경이 따로 관심 두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내심 궁금해졌다.
 우리 옥랑이 말고 다른 인재가 또 있단 말인가? 혹시 남천단주 아들인가?
 “오호! 총군사께서 따로 관심 두는 아이가 있다니 궁금하군요. 그 아이가 누굽니까?”
 그러자 사마경이 안경을 내리며 천계심을 돌아보았다.
 “옥랑이에게서 요즘 권학당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아이에 대해서 아직 못 들으셨나 보군요.”
 사마경의 말은 그 아이가 천옥랑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천계심은 내심 못마땅한 생각이 들었으나 그러자 더 궁금해졌다.
 “허허, 그런 아이가 있소이까?”
 “예. 기하진이라고 마교에게 멸문당한 벽력검 기 대협의 아이이지요. 삼 년 전, 중양일지를 쫓다가 발견해서 맹으로 데려왔었지요.”
 사마경의 말을 들으니 부맹주도 언뜻 기억이 났다.
 “그래, 그 아이가 그렇게 재능이 뛰어나오?”
 천계심의 말투가 퉁명스러웠다. 아비 된 자로서 자기 아들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우리라. 특히 모든 것을 다 가진 부맹주에게는.
 사마경이 허허, 하고 웃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한번 지켜보시지요. 저도 말만 들었기 때문에 별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곧 둥둥둥, 하고 용고가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무복을 입은 아이들이 일렬로 비무장으로 들어왔다. 백 명의 아이들은 오십 명씩 두 조로 나뉘어 열 명씩 일렬횡대로 비무장에 정렬했다.
 기린회는 총 세 차례의 순서가 있는데, 첫 번째는 격파력을 알아보기 위한 기왓장 깨기였다. 기왓장은 기본 열 장부터 시작하여 다섯 장씩 늘려 가는데 중간에 다 깨지 못하면 탈락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해서 가장 많이 깬 사람이 최종승자가 되었다.
 두 번째 방식은 경공을 알아보기 위한 것으로 공중에 기다란 대나무를 놓고 그 위를 걷는 것이었다. 대나무의 높이가 점점 높아지는데 가장 마지막까지 떨어지지 않고 그 대나무를 걸어서 건너는 사람이 승자가 되었다.
 마지막 세 번째 방식은 일대일 자유대련이었다. 백 명이 각자 짝을 지어 동시에 대련을 하다가 마지막 여덟 명이 남게 되면 그때부터는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대회장 중간에서 한 조씩 비무를 진행하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기는 자가 최종승자가 되었다.
 관중들 속에는 수련생들의 부모와 친지, 동문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대회의 열기가 무척 뜨거웠다.
 권학당 수석 사범인 포 부단주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제 일 시합. 격파. 제1조 준비!”
 그러자 두 조로 나뉜 아이들 가운데 오십 명만 남고 나머지는 뒤로 빠졌다. 기하진과 천옥랑은 모두 제2조에 속해 있었다.
 기하진은 집중해서 1조가 기왓장을 깨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옥랑은 그런 기하진을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1조에서 기왓장을 가장 많이 깬 아이는 스물일곱 장을 깼다. 사실 기왓장도 열 장이 넘어가면 어른도 깨기 어렵기 때문에 대단한 실력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제2조 준비!”
 포 부단주의 말에 기하진, 천옥랑이 소속된 제2조 50명이 우르르 앞으로 나왔다.
 “격파 시작!”
 구령과 함께 아이들은 젖먹던 힘을 다해 자기 앞에 놓인 기왓장을 내리쳤다. 기하진도 마찬가지로 공력을 끌어올려 기왓장을 내리쳤다. 10장, 15장, 20장, 25장, 30장······.
 어느새 제2조에서 기하진과 천옥랑, 원성한만 남고 나머지 수련생들은 모두 탈락했다.
 이제 기왓장 35장을 깰 차례였다.
 격파시범에서는 많은 수의 기왓장이 필요하므로 처음에는 자신이 직접 기왓장을 들고 들어오지만 나중에는 다른 수련생들이 들고 와서 앞에 쌓아주었다.
 “35장 격파 준비!”
 포 부단주의 구령이 울려 퍼지자 도중에 탈락한 수련생들이 35장씩 쌓아 올린 기와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런데 뜻밖에도 기하진의 기와를 들고 온 사람이 다름 아닌 천옥랑의 똘마니 이덕방이었다.
 덕방은 기하진 앞에 기왓장을 놓더니 천옥랑과 잠시 시선을 주고받으며 입가에 수상한 미소를 지었다. 천옥랑은 덕방의 눈짓을 받더니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기하진을 쳐다보았다.
 기하진은 수상한 생각에 자신 앞에 놓인 기왓장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깜짝 놀랐다. 기왓장 사이사이에 넓적하고 반질반질한 조약돌이 층층이 박혀 있는 게 아닌가! 조약돌은 기왓장보다 훨씬 단단해서 깨기가 어려운데 그런 조약돌이 적어도 십여 개 이상 기왓장 틈 사이사이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기하진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격파시범 중에는 누구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만약 말을 하면 자동으로 실격처리가 되었다.
 기하진이 천옥랑을 노려보았다. 천옥랑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여유만만한 표정이었다.
 “격파!”
 포 부단주의 구령이 떨어지자 원성한과 천옥랑은 우렁찬 기합을 내지르며 기왓장에 수도(手刀)를 박았다. 원성한 32장, 천옥랑이 35장에서 한 장 부족한 34장을 격파했다. 이제 기하진의 차례였다.
 기하진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중양신공으로 쌓은 내공을 끌어올렸다. 곧 단전에서 뜨끈뜨끈한 기운이 치솟더니 임독맥을 한 번 휘감아 돌고 나서 오른손으로 급속히 모여들었다.
 여기서 질 수야 없지. 절대 지지 않아!
 기하진이 기왓장을 노려보며 대갈일성을 터뜨리고는 기왓장을 내리쳤다. 특이한 것은 앞서와 같이 수도로 내려친 것이 아니라 위에서 장으로 내리누르는 방식을 썼다는 것이다.
 격파시 꼭 수도로 격파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다만 수도로 내려치는 것이 가장 많은 기와를 깰 수 있어서 자연스레 모든 수련생이 수도로 내려치는 것뿐이었다.
 기하진의 기합소리와 함께 기왓장이 쫘악 깨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와는 반 정도 밖에 깨지지 않았다. 그러자 기하진이 기왓장에서 손을 떼지도 않은 채 그대로 다시 한번 기합을 내지르며 손바닥에 공력을 모아 아래로 발출했다.
 그러자 쫘악 소리와 함께 나머지 기왓장들이 마지막 두 장을 남기고 모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하진이 손을 두 번 쓴 셈이나 마찬가지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부맹주도 기하진의 격파방식이 탐탁지 않아 한마디 했다.
 “저것은 명백한 규정 위반 아니오? 한 번에 격파해야지 어째서 힘을 두 번 쓴단 말이오?”
 “손을 기왓장에서 떼지 않았기 때문에 딱히 두 번 힘을 썼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저희도 장을 격출할 때에 한 번 공격하면서 힘줄기를 나누어서 발출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부맹주의 말에 사마경이 은근히 기하진을 두둔하며 말했다. 하지만 사마경도 왜 기하진이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격파했는지 궁금했다.
 “기하진 33장 격파!”
 어쨌든 기하진은 33장, 천옥랑은 34장을 격파했기 때문에 첫 번째 시합은 천옥랑의 우승인 셈이었다.
 포 부단주의 말이 울려 퍼지자 기하진이 갑자기 자신이 깬 기와를 하나하나씩 들어내며 포 부단주 앞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기하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천옥랑은 대경실색했다. 그러나 자신이 내색하면 기하진의 기왓장에 문제가 있었음을 미리 아는 꼴이 되어 뭐라 말도 못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기하진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편, 격파시범을 진행하던 포 부단주는 기하진의 뜬금없는 행동에 노하여 소리를 질렀다.
 “이놈! 뭣 하는 수작이냐?”
 
 ***
 
 그러나 포 부단주의 물음이 끝나기도 무섭게 기왓장 아래에서 반으로 깨진 넓적한 조약돌이 나왔다. 그것을 본 포 부단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냐?”
 포 부단주는 황급히 기하진의 기와장을 손으로 흩뜨렸다. 그랬더니 납작한 조약돌 십여 개가 기왓장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 이런!”
 단상에서 이를 지켜보던 부맹주 천계심과 총군사 사마경도 기하진의 기왓장에 누군가 장난질을 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호, 이것 참 놀랍군요. 기왓장 33개에 손바닥만 한 조약돌 10개를 한꺼번에 깨뜨리다니! 권학당이 아니라 지무각의 아이들도 할 수 없는 대단한 실력입니다.”
 사마경이 수정 안경을 들어 올려 깨진 기왓장과 조약돌을 바라보며 말했다. 기왓장 사이에 조약돌을 넣어둔 것은 부정행위가 분명했다.
 세 명이 격파시범을 벌이는데 한 사람의 기와에 문제가 있다면 범인은 나머지 두 명 중에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사마경은 정작 누가 기하진의 기왓장에 장난질을 쳤는지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천계심이 한심하다는 듯 천옥랑을 쳐다보았다.
 아들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라고 했더니 이런 무리수를 둔 것 같았다. 일을 저질렀으면 들키지나 말든가.
 천옥랑은 아버지의 질책하는 듯한 눈빛을 받자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어깨를 슬쩍 움츠리며 눈길을 돌렸다.
 “포 부단주는 이번 격파시합에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누군지 철저하게 조사하시오. 이번 격파시범의 최종 우승자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기하진이오.”
 관중을 의식한 부맹주의 말이 떨어지자 기하진의 승리를 알리는 포 부단주의 목소리가 대회장에 울려 퍼졌다.
 “기하진 승!”
 와! 관중석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이제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기왓장과 조약돌을 한 번에 깨는 놀라운 신력을 선보였으니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관중들은 우레와 같은 성원을 기하진에게 보냈다. 기하진을 떨어뜨리려는 천옥랑의 방해 작전 때문에 오히려 기하진의 이름 석 자가 무림맹 내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곧이어 두 번째 시합이 벌어졌다. 두 번째 시합은 5척 높이의 공중에 40척이 넘는 기다란 대나무를 옆으로 놓고 그 대나무 위를 건너는 것으로 일종의 경공 시합이었다.
 대나무 자체가 워낙 매끈해서 그 위에서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은데 높아질수록 심리적 부담감도 커지기 때문에 두 번째 시합을 통과하는 아이들의 수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아이들은 두 팔을 벌리고 양손에 각기 커다란 물통 하나씩을 들고 대나무를 건너가야 했다. 대나무에서 떨어지거나 물통의 물이 다 쏟아지면 탈락이었다.
 아이들은 아차 하는 사이에 대나무에서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졌고 중간까지 잘 건너던 아이들도 물이 출렁거리는 바람에 대나무가 흔들리거나 움직이면 곧장 균형을 잃고 떨어져 내렸다. 대나무 다리를 건너더라도 양손에 든 물통의 물이 다 쏟아지는 바람에 떨어지는 아이들도 많았다.
 5척 높이에서는 잘 건너던 아이들도 8척, 10척으로 높이가 올라가자 대부분 탈락하고 역시 이번에도 기하진과 천옥진이 가장 마지막까지 남게 되었다.
 이번 시합은 처음부터 천옥랑의 독무대였다. 어릴 때부터 착실하게 경공 수업을 받아온 천옥랑은 멋들어진 신법으로 공중제비를 넘으며 10척 높이의 대나무 위로 가뿐히 올라갔다. 그러고는 마치 평지를 걷듯 양팔에 든 물통에서 한 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으며 유유히 대나무 다리를 건너 사람들의 탄성을 한 몸에 받았다.
 반면 기하진은 아직 제대로 된 경공을 배운 적이 없어서 그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건널 뿐이었다.
 최종승자를 가리기 위해 대나무의 높이가 다시 두 척 더 올라갔다. 12척 높이의 대나무를 걷는 셈이니 아래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대나무 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천옥랑이 먼저 부운약표(浮雲躍飄)라는 청성파의 경공 절기를 화려하게 선보이며 올라가더니 곧장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전혀 흔들리지 않는 잘 균형 잡힌 걸음이었다.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환호성을 내질렀다.
 부맹주도 앞서 격파시범에서 추락한 위신이 이번 경공 시합에서 회복되어 나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대나무 다리의 높이가 계속 높아졌지만 의외로 기하진은 비틀거리면서도 떨어지지 않고 계속 시합을 통과했다. 양손에 든 물통의 물도 출렁이기는 했으나 쏟아지지는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경공만큼은 천옥랑이 우수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시합의 관건은 결코 동작의 화려함이 아니었다. 날아가든 비틀거리며 건너든 40척 길이의 대나무 다리를 건너기만 하면 되었다. 천옥랑은 이미 한 번 졌기 때문에 이번 시합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했다.
 천옥랑은 두 번째 시합을 자신의 승리로 이끌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신발을 남몰래 신고 있었다. 그 신발 밑바닥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박혀 있어 발바닥에 힘을 주면 칼날이 튀어나오게 되어 있었다.
 천옥랑은 경공을 전개해 대나무 다리를 빠른 속도로 건너면서 중간중간에 발바닥에 힘을 주어 대나무에 금을 그어놓았다. 이제 그 사실을 모르는 기하진이 대나무 위에 올라서서 건너기 시작하면 대나무는 기하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나갈 것이다. 이번 경공시합은 땅에 떨어지면 실격이므로 기하진은 결국 실격패를 당하고 말겠지.
 천옥랑이 대나무 다리를 다 건너자 드디어 기하진이 12척 높이의 대나무 다리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간담이 크다고 자부하던 기하진이었지만 12척 높이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아찔해서 자신도 모르게 발끝에 힘이 들어가면서 몸이 긴장했다. 양팔에 든 물통의 물이 살짝 출렁거렸다.
 기하진은 심호흡을 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앞만 바라보며 건너기 시작했다. 사실, 아래에서 쳐다보는 관중들은 멋진 경공으로 손쉽게 다리를 건넌 천옥랑보다 아슬아슬 위태롭게 건너는 기하진을 보는 것이 훨씬 더 손에 땀을 쥐는 재미가 있었다. 관중들은 저마다 자신이 대나무 다리를 건너는 듯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한편, 대나무 다리를 중간쯤 건너던 기하진의 귀에 대나무가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조금씩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바람에 긴장한 기하진의 발끝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기하진이 대나무 다리를 중간쯤 건널 때 그만 우지끈 소리와 함께 대나무 다리가 반으로 쪼개지더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모양을 아래에서 바라보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단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구휘도 눈이 휘둥그레졌으나 사마경은 오히려 입가에 은근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마경은 대번에 또 누군가 대나무에 장난질을 쳐놓았음을 알게 되었다. 아까 기왓장 격파 때는 두 사람 중 한 명이었지만 이번 경공 시합에서는 이런 못된 짓을 저지를 사람이 천옥랑밖에 없었다.
 일의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기하진이 땅에 떨어져 실격패를 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다들 아쉬워했다. 그중에는 아쉬움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나 한숨을 내쉬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마경은 기하진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간만에 기린회가 재밌어졌군. 어차피 실전에서는 각종 계략이 난무하니 이 정도를 이겨내지 못하고서야 내가 점찍은 인재라고 말할 수 없지. 자,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테냐?’
 “타앗!”
 맑은 기합 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기하진이 대나무가 떨어짐과 동시에 양팔의 물동이를 그대로 공중으로 던져 올렸다. 물동이 두 개가 탄력을 받아 튀어 오른 사이, 기하진은 급히 공중제비를 돌며 몸을 틀어 떨어지던 대나무 반쪽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 대나무 반쪽으로 땅을 짚고는 그 반동을 이용해서 쏜살같이 공중으로 몸을 날리더니 대나무 다리의 종착점을 향해 날아갔다. 물동이 두 개는 물 한 방울 흐르지 않은 채 어느새 수직으로 포개져 기하진의 손 위에 오롯이 올라가 있었다.
 기하진은 결국 땅에 떨어지지 않고 대나무 다리를 완주한 셈이었다.
 “와!”
 절정 고수를 방불케 하는 오묘한 신법에 모두 놀라 탄성과 함성이 터져 나왔다.
 “기하진 최고다!”
 “멋있다!”
 경공 시합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기하진의 오묘한 신법에 매료되어 흥분했다.
 그러나 우승은 천옥랑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중간에 대나무가 떨어지는 바람에 대나무 다리 위를 걸어서 건너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하진은 실격패를 당하고 만 것이다.
 “천옥랑 승!”
 시합 총감독인 포 부단주가 큰 소리로 천옥랑의 승리를 알리자 여기저기에서 야유가 튀어 나왔다.
 “이번 시합은 공동우승이오.”
 “시합을 공명정대하게 진행하시오.”
 “대나무 다리를 검사하시오. 중간에 부러진 것이 말이 되지 않소이다!”
 경공 시합을 지켜보던 사람들 중 일부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대나무가 부러진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격파시합에서도 누군가 기왓장 사이에 몰래 조약돌을 끼워놓지 않았던가.
 무릇 무공대결이란 공정해야 하는데 정도 무림의 총본산이라고 하는 무림맹 안에서,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수련생들 간의 시합에서 공정하지 못한 장난질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서 야유가 터져 나오자 사마경은 힐끗 천계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시합결과에 대한 최종판단은 부맹주가 하게 되어 있으니 만약 천계심이 이번 시합결과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우승자가 바뀔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부맹주 천계심은 사람들의 야유소리를 못 들은 척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그 모습에 사마경은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허허허, 부전자전이라더니 실로 그 아비에 그 아들이로구나. 권력에 눈이 먼 아비와 승부에 눈이 먼 아들이라······. 하하하, 정말 재미있단 말이야. 맹주님이 제대로 보신 거지.’
 사마경은 잠시 천계심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다시 시합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합 총감독 포 부단주는 사람들의 이의제기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다음 시합을 강행했다.
 이번 대회의 관전 초점은 자연스레 기하진과 천옥랑 간의 대결이 되었다. 그래서 기하진과 천옥랑이 각자 비무를 승리로 이끌며 마침내 최종 결승전에서 맞붙게 되자 사람들은 모두 우레와 같은 환호를 질렀다.
 천옥랑을 응원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기하진에게 격려의 함성을 쏟아냈다.
 한편 천옥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번 비무에서 이기고 싶었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녀석에게 패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런데 기하진의 무공이 최근 급속도로 늘더니 결국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었던 원성한마저 꺾고 최종 결승전에 올라왔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 일어나 버린 것이다.
 천옥랑은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기하진을 노려보았다. 어떻게 해야 저놈을 꺾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저놈을 사람들 앞에서 발라버릴 수 있을까? 천옥랑은 무공에 자신이 있었지만 뭔가 안전장치를 해두고 싶었다.
 잠시 부러진 대나무 다리를 바라보던 천옥랑이 갑자기 눈을 빛냈다.
 ‘그렇지!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천옥랑이 갑자기 비무장 한복판으로 걸어 나가더니 단상 중앙에 앉아 있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부맹주님, 조금 전 있었던 경공 대결의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저도 그렇게 찝찝하게 이겼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맹주는 갑자기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기린회 역사상 이렇게 비무 중에 출전자가 최종 강평자인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경공도 실전에서 사용하기 위한 무공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경공 대결은 무승부로 하고 이번 비무대회의 결과로 최종 우승자를 가리는 겁니다. 단, 경공도 시험할 겸, 비무를 아까의 그 대나무 다리 위에서 하는 겁니다. 그러면 두 가지를 동시에 시험해 볼 수 있는 셈이니 좋지 않겠습니까?”
 대범한 척 조금 전 경공 대결은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천옥랑의 제안은 자기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합이었다.
 권학당에서 기초적인 경공을 배우기는 하나 이는 입문에 불과한 수준이다. 그래서 시험도 대나무 다리를 건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천옥랑이 보기에 기하진은 경공이 형편없었다. 비록 뛰어난 균형 감각으로 어떻게든 대나무 다리는 건널 수 있었겠지만, 만약 저 좁은 대나무 위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어떨까? 아마 청성파의 경공 절기를 익힌 자신을 절대 이길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섰다.
 천옥랑이 대나무 다리 위에서의 비무를 제안하자 관중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대나무 다리 위에서 싸우는 것은 어른 고수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데 이제 불과 열서너 살에 불과한 소년들이 그 좁고 매끄러운 대나무 다리 위에서 과연 발길질 한 번, 주먹질 한 번이라도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이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천옥랑이 기하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노려보는 기하진의 눈빛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천옥랑이 물었다.
 “기하진, 네 생각은 어떠냐? 5척 대나무 다리 위에서 나와 싸울 자신이 있느냐?”
 기하진은 천옥랑이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럴수록 천옥랑에게 더 지기 싫었다.
 “흥! 5척이 아니라 아까 하던 데서 마저 하는 게 어떠냐?”
 기하진이 오히려 마지막의 12척 높이에서 하자고 제안했다. 그 모습에 천옥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어리석은 녀석. 쓸데없이 자존심만 세어서.
 “좋다. 사내놈이 한 입으로 두말하기 없기다!”
 천옥랑은 기하진이 비무 결과에 대해 딴말을 하지 못하도록 미리 못을 박았다.
 단상에 앉아 잠시 두 사람을 내려다보던 부맹주는 아들이 필승의 방법을 생각해내자 내심 흐뭇했다. 과연 자신의 아들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천계심은 당장 허락하고 싶었지만 아들이 한 제안을 아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수락하기에는 위신이 서지 않았다.
 천계심이 난처한 듯 옆에 앉은 사마경을 슬쩍 쳐다보았다.
 “총군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러자 사마경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옥랑이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실전을 떠난 경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도록 한번 해 보시지요. 두 아이도 모두 동의했으니 어차피 이번 비무 방식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사람은 없을 듯합니다. 이참에 기린회의 비무 방식도 새롭게 바꿔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합니다.”
 총군사 사마경이 흔쾌히 동의하자 천계심은 그제야 마음의 부담을 든 듯 표정이 밝아졌다.
 “총군사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니 그럼 그렇게 하리다.”
 “이번 기린회는 참 재미있군요. 너무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재미없지요. 저 두 아이는 앞으로 지켜보는 재미가 있을 듯합니다.”
 사마경이 다시 연보라색 수정 안경을 콧등에서 들어 올리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부맹주가 비무 방식을 변경해도 좋다고 허락하자 곧 비무장 한가운데에 어른 키 높이의 두 배보다 높은 대나무 다리가 다시 설치되었다. 사람들은 혹시 아이들이 떨어져 다칠까 걱정하면서도 새로운 비무 방식에 흥미진진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곧 최종 결승전을 알리는 용고 소리가 둥둥둥 울리더니 포 부단주의 우렁찬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천옥랑, 기하진, 비무 준비!”
 포 부단주의 구령에 천옥랑이 다시 경공 신법을 발휘하여 12척 높이의 대나무를 두어 번 발길질 만에 금방 올라갔다.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졌다.
 기하진은 그렇게 멋들어진 경공신법은 아직 구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손으로 대나무를 붙잡고 마치 원숭이가 나무를 올라가듯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그런 기하진을 바라보며 대나무 다리 위에서의 비무 결과가 벌써 눈에 선한 듯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두 사람이 대나무 다리 끝에서 서로 마주 보며 서자 아래에서 두 사람을 올려다보던 포 부단주가 시합 시작을 알리는 구령을 붙였다.
 기하진과 천옥랑이 대나무 다리 중간으로 이동했다. 대나무 다리는 두 사람의 몸무게가 한꺼번에 실리자 가운데 부분이 아래로 살짝 휘면서 아래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옥랑은 대나무가 흔들리는 대로 몸을 맡기며 느긋했으나 기하진은 멈칫멈칫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기하진은 천옥랑 같은 뛰어난 경공신법은 할 줄 몰랐다. 다만 기하진이 믿는 것은 중양신공으로 축적한 내공이었다. 남보다 무공입문이 늦었던 기하진이 쟁쟁한 소년 고수들을 모두 제치고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중양신공 때문이었다.
 기하진은 소주천을 완성하고 나서 처음 걸음을 내딛던 때가 기억났다. 소주천을 이룬 뒤 다른 때와는 달리 몸이 유난히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깃털 같다고 해야 할까. 걸음을 내디디면 무한정 앞으로 뻗어 나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방 안에서 시험 삼아 성큼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만 천장에 머리를 찧고 말았다.
 어이쿠!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어루만지던 기하진은 다음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잠깐만! 내가 지금 천장에 머리를 찧은 건가? 어른 키의 두 배가 넘는 높이의 천장에?
 그 높이까지 경공을 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기하진은 그 순간 무척 어리둥절했다.
 그럴 리가! 다시 한번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은 기하진이 바닥을 박차고 천장을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어느새 천장이 눈부신 속도로 머리를 향해 부딪쳐 오는 것이 아닌가!
 우물쭈물하다가는 다시 머리를 찧을 것만 같아 기하진은 자신도 모르게 공중에서 몸을 틀며 공중제비를 돌았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공중으로 뛰어올라 공중제비를 도는 것도 그동안 한 번 하기도 벅찼건만 지금은 몇 바퀴라도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치 자신의 몸이 공기가 된 듯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기하진은 그 가벼움을 느끼고자 두 눈을 감고 팔을 벌려 가만히 섰다. 그랬더니 고양이의 꼬리가 닿는 듯 온몸 구석구석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기하진이 가만히 자신의 몸을 응시하니, 실낱같은 기운들이 모공 하나하나에서 아지랑이처럼 뻗어 나오며 들락거리고 있었다.
 방 밖으로 나온 기하진이 앞에 보이는 소나무를 향해 힘껏 땅을 박찼다. 그랬더니 발바닥에 커다란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몸이 순식간에 십여 척 높이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때야 기하진은 깨달았다. 자신도 경공을 구사할 수 있음을. 그리고 자신의 온몸을 간지럽히는 그 느낌만 놓치지 않으면 천지간에 가득한 대자연의 기(氣)를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음을.
 대나무 다리 위에 올라간 기하진은 그때의 느낌을 떠올리며 잠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공력을 운행했더니 온몸의 세포에서 기(氣)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발밑은 가느다란 대나무 줄기 하나밖에 없었지만 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기운은 어디를 밟아야 하는지, 어떻게 걸음을 움직여야 하는지 저절로 알려주었다. 떨어질까 봐 걱정할 필요 없이 그 기운에 자신을 그냥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기하진이 눈을 감는 모습을 본 천옥랑이 조롱하며 말했다.
 “갑자기 아래를 내려다보기 무서워지기라도 한 거냐? 이제 와서 눈을 감고 어쩌겠다는 것이냐?”
 천옥랑이 비웃는 소리에 기하진이 눈을 뜨고 대나무 다리 가운데로 걸어 나오더니 갑자기 오른발을 들고 대나무 다리를 쾅 하고 내리밟았다. 그 바람에 대나무 다리가 튕기듯이 진동하기 시작했고 두 사람 모두 몸이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렸다.
 천옥랑은 기하진이 갑자기 예상 밖의 행동을 하자 놀라 분통을 터뜨렸다.
 “네 녀석이 정말 죽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흔들리는 대나무 다리 위에서 교묘하게 균형을 잡은 천옥랑이 먼저 기하진을 향해 주먹을 날리며 선제공격을 했다.
 천옥랑의 주먹에서 눈을 떼지 않던 기하진은 주먹이 몸통을 치기 직전, 돌연 발밑의 대나무에 발을 걸고 반 자 정도 몸을 뒤로 기울였다. 기하진의 몸이 마치 대나무 몸통에서 사선으로 뻗어 나간 가지처럼 옆으로 비스듬히 누이는 형세가 되었다. 그 기이한 동작에 아래에서 쳐다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천옥랑은 기하진이 대나무 다리 위에서 몸을 비스듬히 누이며 자신의 공격을 피하자 믿을 수가 없었다. 기하진이 쓴 수법은 땅에서도 하기 어려운데 그걸 공중에 외로 놓인 대나무 줄기 위에서 시연하다니!
 그러나 놀람도 잠시, 천옥랑은 다시 질풍처럼 좌우 쌍권을 번갈아 뻗어냈다. 쌍권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이번 대나무 위에서의 비무는 자신이 제안했기 때문에 결코 질 수 없었다. 아니 결코 져서는 안 되었다.
 만약 이번 비무를 진다면, 아버지는 결코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또 여섯 달 폐관수련을 명할 수도 있다.
 외부출입이나 외부인과의 접촉은 일체 금지되고 반년 동안 딱딱하기 그지없는 벽곡단과 물만 가지고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서 또 사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온기는 찾아볼 수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동굴 벽에 낀 이끼뿐인 그곳에서 반년을 버텨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천옥랑은 목구멍이 꽉 막힌 듯 갑자기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천옥랑이 또래 아이들보다 체격이 크긴 했으나 아직 열세 살 남짓한 소년에 불과했다. 그 어린 소년에게 어른도 참기 힘든 폐관수련은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다.
 그러나 천계심은 자신의 아들이 누군가에게 지는 꼴을 참지 못했다. 천옥랑이 누군가에게 지거나 맞고 돌아오면 천계심은 아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그리고 옥랑이 그 상대와 다시 싸워서 이기고 돌아올 때까지 결코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다. 천옥랑은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누구와 싸우든지 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했던 것이다.
 천옥랑이 어릴 때부터 쉬지 않고 부친과 사숙에게서 무공을 전수받은 것도 사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만큼 어릴 때부터 단련이 되어 있던 터라 천옥랑은 사실 기하진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하진이 자꾸만 자신의 예상을 벗어나는 능력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번 비무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
 천옥랑의 몸이 좁은 대나무 위에서 공중으로 튀어 오르며 기하진의 안면을 무릎으로 찍어왔다. 상대방이 무릎 공격을 피한다 하더라도 연이어서 여섯 번의 발길질이 뒤따라 나오기 때문에 결코 피할 수 없는 수법이었다.
 “앗! 건곤무영각(乾坤無影脚)이다!”
 밑에서 쳐다보던 누군가가 천옥랑의 공격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건곤무영각은 청성파가 자랑하는 절기 중의 하나로, 한 번 겨냥한 목표를 절대 놓치는 법이 없는 무공이었다.
 아들의 비무를 쳐다보던 천계심은 천옥랑이 좁고 위험한 대나무 위에서도 사문의 절초를 사용하자 흡족하여 빙긋 미소를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옥랑이의 무공이 아주 절묘하군요. 훌륭한 아드님을 두셨습니다.”
 사마경이 천옥랑의 무공에 감탄하자 천계심은 내심 자랑스러우면서도 아닌 척 겸양을 떨었다.
 “아니올시다. 저 녀석 무공이라 해봤자 고양이 세수하는 격으로 흉내만 내는 것이지 무슨 위력이 있겠소이까?”
 “허허허. 고양이 세수라고 하기에는 위력이 실로 무서운 것 같습니다만?”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저 아이가 더 대단하오. 경공신법을 제대로 배운 것 같지도 않은데 저 좁은 대나무 위에서 어찌 저렇게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단 말이오?”
 아닌 게 아니라 기하진은 천옥랑처럼 멋들어진 신법을 구사하지는 못했지만 좁은 대나무 위에서도 진퇴에 전혀 어려움을 안 느끼는 듯했다.
 사마경도 사실 천옥랑보다는 그런 기하진이 더욱 신기했기 때문에 말을 멈추고 다시 두 사람의 비무로 눈을 돌렸다.
 천옥랑의 무릎 공격이 들어오기 직전, 기하진은 천옥랑이 내뿜는 기가 돌변하며 거칠게 증폭되고 있음을 알아챘다. 천옥랑 쪽에서 자신에게로 흘러오는 기에 맹렬한 살기가 담기면서 기하진의 온몸을 따끔따끔하게 찌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옥랑의 기가 무릎 부분에 모이더니 곧 폭사하기 시작했다. 기하진은 기의 흐름을 볼 수 없지만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읽을 수는 있었다. 그래서 천옥랑이 무릎과 다리로 공격해 들어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아챘다.
 천옥랑의 건곤무영각이 폭사하는 순간, 기하진의 몸이 대나무 위에서 스르르 반보가량 뒤로 움직였다. 무릎을 굽히지도 않고 발바닥은 대나무에 붙은 채 움직였기 때문에 아래에서 쳐다보는 사람들은 마치 귀신이 움직이는 모습을 본 양 경악했다.
 뒤로 물러난 기하진이 몸을 살짝 틀면서 복부를 보호하듯 오른손을 뻗는 순간, 천옥랑의 무릎이 밀고 들어왔다. 그러나 기하진은 이 공격을 예견해 무릎이 밀고 들어오는 부위에 이미 오른손을 대고 있었다. 천옥랑의 무릎이 손에 닿자마자 기하진은 그대로 천옥랑의 무릎을 밖으로 쓸어냈다.
 공중에 뜬 천옥랑의 몸이 중심을 잃고 대나무 다리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천옥랑은 무릎 공격 뒤에 곧바로 무영각을 뻗으려고 하다가 상대방이 자신의 공격을 귀신처럼 알아차리고 미리 손을 쓰자 크게 당황했다.
 이미 대나무 다리를 크게 벗어난 천옥랑의 몸은 금방이라도 땅바닥에 곤두박질칠 것처럼 보였다.
 아래에서 쳐다보던 사람들은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분분히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천계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만약 옥랑이 저 녀석이 이대로 땅에 떨어져 자신의 체면까지 깎는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 순간, 천옥랑이 공중에서 두 발을 가위처럼 잽싸게 놀리더니 공중에 뜬 상태에서 그대로 몸의 방향을 바꾸어 다시 대나무 다리 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무리 무림 명숙의 지도를 받았다고는 하나 아직 어린 소년이 펼치기에는 너무나 놀라운 경공 신법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하진마저도 천옥랑이 그 정도로 경공이 뛰어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은 결코 할 수 없는 상승 신법이었다.
 “훌륭하다.”
 싸우는 중이었지만 기하진이 진심으로 천옥랑의 신법을 칭찬했다.
 “흥!”
 천옥랑은 별거 아니란 듯 콧방귀로 응수했지만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조금 전의 상황은 자신이 생각해도 아찔했던 것이다. 천옥랑은 무심코 부친 천계심을 힐끗 쳐다보았다. 천계심의 표정은 얼음같이 차갑기만 해서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기하진, 네가 어떻게 건곤무영각을 막아냈는지 모르지만 이번에도 그런 운이 따를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좋아. 그럼 이번에는 내 공격을 한번 막아봐.”
 그동안 계속 천옥랑의 공격을 방어만 하던 기하진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둥글게 태극을 그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손을 앞으로 뻗어내자 기하진의 몸 주위에서 유영하던 기(氣)가 기하진의 손바닥을 통해 맹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빠른 속도로 원을 그리며 점점 커지던 기의 움직임은 그대로 회오리바람이 되어 천옥랑의 몸에 세차게 부딪쳐 갔다.
 아래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마경은 두 사람의 움직임만으로 기하진이 천옥랑에게 장풍을 내쏘았음을 알아챘다. 열세 살 소년이 벌써 기를 다룰 줄 알다니! 이것은 돌멩이 몇 개를 깨부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기하진을 바라보는 사마경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정말 물건 하나가 들어왔구나. 소림사의 지학(知學)이 후기지수 가운데 으뜸이라던데 저 정도면 지학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듯하구나.’
 한편, 사마경의 바로 옆에서 기하진을 바라보던 천계심도 심사가 복잡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더니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알 수도 없는 놈이 무림 맹주로 키우기 위해 세 살 때부터 혹독한 수련을 시켜온 자신의 아들을 능가하다니!
 누구든지 자신의 앞에 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부맹주에게 이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건방진 녀석.’
 잔뜩 찌푸려진 부맹주의 시선이 태극을 그리는 기하진의 손을 쫓았다. 그 손끝 너머 아들 천옥랑이 삼사 장 밖으로 나가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털썩!
 천옥랑이 대나무 다리에서 떨어지자 이를 전혀 예상치 못한 좌중은 얼어붙은 듯 조용했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대나무 다리 위의 어린 소년과 땅바닥에 떨어진 천옥랑을 주시했다.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우렁찬 포 부단주의 목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지며 정적을 깼다.
 “기하진 승!”
 포 부단주도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는 듯한 눈초리였다.
 우와! 기하진의 승리를 알리는 구령 소리와 함께 우레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가 가하진에게 쏟아졌다. 순식간에 비무장은 흥분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이름도 잘 몰랐던 외톨이 소년 기하진이 바야흐로 무림맹 내 최강 소년 고수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소년 비무대회를 관람하던 모든 사람이 일어서서 기하진에게 박수를 쳤다. 부맹주는 내키지 않았지만 일어서서 형식적으로 몇 번 손바닥을 부딪쳤다.
 “부맹주님, 옥랑이를 이기다니 저 기하진이라는 아이, 과연 소문대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 정도면 무림 신동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저런 아이를 발굴하다니 아직 제 눈이 녹슬지 않았나 봅니다. 껄껄껄.”
 천계심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마경이 대놓고 기하진을 칭찬했다. 천계심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대회의 주관자로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과연 그렇소이다. 총군사께서 주목하신 아이이니 당연히 남다르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정말 놀랍소.”
 사마경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면서 천계심은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멍청한 놈. 감히 애비에게 이런 수모를 안기다니······!’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부맹주의 입술 한쪽은 이미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둥둥둥. 세 번의 용고 소리가 울리고 징 소리가 크게 나면서 올해의 기린회가 끝이 났다.
 “최종 우승자 기하진 앞으로.”
 포 부단주의 구령에 기하진이 앞으로 나와서 부맹주 앞에 섰다. 다시 한번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훌륭하구나. 과연 앞으로 정도 무림의 기둥이 될 동량이로다.”
 부맹주가 기하진을 칭찬하며 금으로 만든 패를 전달했다. 맹주 남궁진악의 이름으로 소년 비무대회 최종 우승자에게 주는 금기린패였다.
 “기린회 최종 우승자에게는 맹주님께서 직접 하사하신 이 패와 함께 은화 백 냥의 상금이 수여된다.”
 상금이 은화 백 냥이라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부러움과 시샘이 가득 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상금으로 무엇을 할 테냐?”
 부맹주의 물음에 기하진이 고개를 들고 부맹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부맹주님, 저는 이 상금 필요 없습니다.”
 당돌한 기하진의 말에 천계심은 순간 말문이 딱 막혔다. 박수갈채를 보내던 좌중들도 상금을 마다한다는 기하진의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순식간에 다시 조용해졌다. 다만 사마경만은 흥미롭다는 듯 수정 안경을 살짝 들며 기하진을 내려다보았다.
 “상금이 필요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대신 청이 하나 있습니다.”
 “청이라니, 그게 무엇이냐?”
 “상금 대신 제가 지무각(知武閣)에 입교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기하진의 말에 좌중은 모두 깜짝 놀라 제 귀를 의심했다. 최종 비무에 패배하여 잔뜩 풀이 죽어 있던 천옥랑마저도 놀란 토끼 눈이 되어 기하진을 바라보았다.
 권학당을 수료하려면 아직 일 년이 더 남아있으나 기하진은 지금 남은 일 년을 채우지 않고 곧바로 지무각으로 월반(越班)을 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흠······.”
 천계심은 전례가 없던 일이라 즉답을 못 하고 옆에 앉아 있는 사마경을 슬쩍 쳐다보았다.
 “제가 보기에는 지무각으로 올라가기에 충분한 실력인 것 같습니다만 부맹주님께서 결정하셔야지요.”
 사마경이 빙그레 웃었다. 천계심은 잠시 말이 없더니 갑자기 껄껄껄 하고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당돌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지만 또한 야심 찬 포부로다. 무릇 사내로 태어나면 그 정도 포부는 가져야지. 하하하. 좋다. 허락하겠다.”
 “감사합니다. 부맹주님!”
 권학당을 수료하지 않고 다음 단계인 지무각으로 올라간 첫 사례가 나온 것이다. 은화 백 냥을 거부하고 월반을 하다니, 수련생들과 관중들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단상에 서서 좌중을 훑어보던 부맹주 천계심의 눈에 아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놈! 그동안 네놈의 발전이 더딘 것은 맞서 싸울 상대가 없어서였다. 그런데 드디어 네놈의 경쟁자를 한 명 발견했구나. 이 정도 파격이면 네 녀석도 정신 바짝 차리겠지.’
 천계심은 아들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기하진은 천계심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자신의 청을 대범하게 들어준 천계심이 너무 고마워서 그대로 땅에 엎드리며 큰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부맹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기하진은 어서 빨리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광세일소』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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