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마령군주

1화

2018.05.08 조회 966 추천 4


 1. 반드시 돌아오겠어
 
 
 
 
 
 
 
 
 
 
 
 달마저 눈을 돌린 구름 낀 밤.
 
 
 
 라인은 하니온 공작가 저택 뒷문으로 빠져나와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허억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방망이질 친다.
 
 
 
 뒤편에서 집사인 드골이 라인을 보조하며 따라붙었다.
 
 
 
 “계속 뛰셔야 합니다, 도련님!”
 
 
 
 뛰어야 산다는 건 라인도 알고 있다.
 
 
 
 저택에 쳐들어온 이코프의 병사들이 저택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라인을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추적했다.
 
 
 
 ‘이코프 자식. 감히 형에게 검을 들이대다니.’
 
 
 
 아버지인 하니온 공작의 서거 후 라인이 후계자가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벌인 일이다.
 
 
 
 명분은 라인이 하니온 공작의 유언을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라인이 유언을 조작한 증거는 전혀 없었다.
 
 
 
 하나, 증거 따윈 상관없었다. 무력으로 라인을 죽이고 후계자 자리를 차지하면 그만일 뿐.
 
 
 
 하늘에 대고 통탄할 일이다.
 
 
 
 이복형제라지만 한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난 형제에게 검을 들이대다니.
 
 
 
 그러나 분노를 토해 낼 틈도 없이 말을 탄 기사들이 라인을 쫓아온다. 이대로라면 금방 따라잡힐 터다.
 
 
 
 라인은 달리면서 방향을 꺾었다.
 
 
 
 “산으로 간다.”
 
 
 
 말을 타고선 산을 오를 수 없다. 라인은 지체 없이 몸을 꺾었다.
 
 
 
 초겨울이라 마른 낙엽이 가득 쌓인 산을, 그것도 밤에 횃불도 없이 올라가려니 수도 없이 미끄러지고 넘어졌다.
 
 
 
 금세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얼굴이며 몸이며 자잘한 생채기가 생겨 쓰라렸다.
 
 
 
 “제길.”
 
 
 
 모두가 도륙당하고 유일하게 남은 아군, 드골이 라인을 챙겼다.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아무리 도망쳐도 등 비빌 언덕 하나 없지만, 살아남아야 재기의 가능성도 얻을 수 있다.
 
 
 
 라인이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달리려 하는데, 드골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신이 도련님을 모신 지도 벌써 18년째입니다. 도련님을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30년간 하니온 공작가의 집사로 지내 왔으니 라인이 태어날 때부터 보좌해 온 드골이다.
 
 
 
 그런 드골이 심상치 않은 눈치를 보이자, 라인은 인상을 구기고 시치미를 뗐다.
 
 
 
 “감상에 젖은 소리는 나중에 하지. 지금은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우선이다.”
 
 
 
 하지만 드골은 두 다리를 땅에 박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가십시오, 도련님. 말씀대로 이곳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 아니겠습니까.”
 
 
 
 밑에서 횃불을 든 무장병력이 올라온다.
 
 
 
 그제야 드골의 허리에서 배어 나오는 핏자국이 보였다. 옷에 얼룩진 흔적으로 보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듯했다.
 
 
 
 “드골!”
 
 
 
 라인이 크게 소리쳤지만, 드골은 식은땀을 흘리는 와중에도 꼿꼿하게 섰다.
 
 
 
 “도련님은 하니온 공작님을 닮아 자상하십니다. 그래서 이코프 님이 배반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셨지요. 하지만 일이 이리 된 이상 하니온 공작가로 돌아가 봤자 이코프 님은 어떻게든 도련님을 지우려 들 것입니다. 다소 괴로우시겠지만 공작가로 돌아가는 건 포기하십시오.”
 
 
 
 드골의 말마따나 라인이 다시 하니온 공작가로 돌아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후계자 자리를 되찾을 힘도, 인맥도 없다.
 
 
 
 하지만 라인은 현실의 무거움에 주저앉을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비록 지금은 힘이 없더라도 난 어떻게든 내 자리를 되찾을 거다. 그때까지 계속 나를 보좌해야 하지 않느냐.”
 
 
 
 드골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몸 상태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죽어 간 병사들을 생각하십시오.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모두를 평등하게 대해 주었던 도련님에게 은혜를 갚고자 몸을 던졌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할 생각이십니까?”
 
 
 
 공작가 내에서 입지가 점점 좁아져 가던 라인이었음에도 이기지 못할 싸움을 받아들인 병사들이 있었다.
 
 
 
 하니온 공작이 될 라인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라인을 구하고자 몸을 던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라는 건 오직 하나.
 
 
 
 라인이 살아남아 주는 것이었다.
 
 
 
 흔들리는 드골의 눈동자를 바라본 라인은 그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난 다시 돌아오겠다. 그때 날 보좌할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 꼭 살아남거라.”
 
 
 
 라인의 말은 진심이었다.
 
 
 
 드골이 죽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니,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더 이상 드골에게 짐이 될 수는 없었다.
 
 
 
 얼마 후 뒤편에서 칼부림 소리가 들려왔다.
 
 
 
 라인은 더더욱 필사적으로 달렸다.
 
 
 
 어깨가 무거웠다.
 
 
 
 하지만 추격은 끝나지 않았다.
 
 
 
 자신을 위한 자들의 죽음이 어깨를 짓누르더라도 라인은 더욱 자신의 다리를 재촉했다.
 
 
 
 * * *
 
 
 
 “제길. 무덤 안까지 쫓아오다니.”
 
 
 
 비록 드골이 남아 추격대를 막았다지만, 잔혹하게도 의미는 없었다.
 
 
 
 추격대가 둘로 나뉘어 일부는 드골을 상대하고, 나머지 일부는 추격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뒤를 쫓던 추격대의 수는 줄었다지만, 그렇다 해도 열세는 자명했다.
 
 
 
 라인은 어두운 산길을 최대한 이용했지만, 마나를 가진 자들이 섞여 있어 완전히 떼어 놓기란 불가능했다.
 
 
 
 우여곡절 끝에 하니온 공작가의 무덤까지 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위기는 계속되었다.
 
 
 
 라인이 무덤을 찾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하니온 공작가의 선산은 전통적으로 동굴을 이용하여 만든 무덤으로, 길이 미로처럼 펼쳐져 있었다.
 
 
 
 장례식 때도 대대로 장례를 주관해 온 일족만이 무덤에 들어가 시체를 안치할 정도로 길 찾기가 어려웠다.
 
 
 
 라인도 선산의 길을 완벽히 알지는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코프에게 잡히나, 무덤 안에서 길을 잃어 굶어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다.
 
 
 
 무덤에서라면 추격대를 따돌릴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필사의 각오로 무덤에 돌입했는데, 추격대는 무덤 안까지 쫓아왔던 것이다.
 
 
 
 “쫓아라! 절대 시야에서 놓치면 안 된다!”
 
 
 
 길을 잃는 것보다 라인의 목을 최우선으로 삼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자신의 목에 걸린 보상이 어떨는지는, 굳이 알지 않아도 뻔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라인은 무덤 안을 쉴 새 없이 달리며 추격자들을 교란시켰다.
 
 
 
 “허억허억, 한 번만. 한 번만 날 놓치게 만들면 되는데······.”
 
 
 
 무덤 안의 빛이라곤 천장에 박힌 야광석에서 나오는 게 전부다. 웬만큼 거리가 떨어지기만 해도, 완전히 추격을 따돌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좀처럼 추격자들을 떨어트릴 수 없었다.
 
 
 
 한데 그때였다.
 
 
 
 - 이쪽이다. 이쪽으로 피해라!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인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이쯤 되면 목소리의 정체를 떠나, 그 주인에 거는 수밖에 없었다.
 
 
 
 라인은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쫓아 필사적으도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목소리를 쫓아 이른 곳에 다섯 개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 여기! 이곳이다!
 
 
 
 라인이 목소리를 쫓아 갈림길을 앞에 두고 구석에 있는 기둥 뒤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아무도 없어!’
 
 
 
 분명 목소리가 들렸는데, 기둥 뒤편은 꽉 막혀 있었다.
 
 
 
 그러나 뒤늦게 착오를 탓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다. 갈림길 중 하나를 택하기도 전에 뒤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라인은 재빨리 기둥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이윽고 한 병사가 전방에 횃불을 비추며 걸음을 멈추었다.
 
 
 
 “롤프 경, 놓쳤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추격자들을 이끌던 롤프는 넓은 홀 같은 공간을 주욱 둘러보았다.
 
 
 
 어둠이 내린 곳까지 날카로운 시선이 꽂히는 듯했다. 라인이 숨은 기둥에도 그의 눈길이 닿았다.
 
 
 
 라인은 최대한 숨소리를 죽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들켰나?’
 
 
 
 통로에 울려 퍼지던 외침, 다급한 발소리가 죽었다.
 
 
 
 추격자들의 입장에선 틀림없이 라인이 숨어 있으리라 예상할 만했다.
 
 
 
 벽을 등졌으니, 들키면 끝이라고 봐야 한다.
 
 
 
 이마에서 흐른 식은땀이 턱 끝에 맺혔다가 가슴팍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2인 1조로 나뉘어서 각 통로에 들어가라! 나는 여기서 기다릴 테니 라인이 없는 통로로 들어간 사람은 돌아와서 내 지시를 따르도록.”
 
 
 
 “예!”
 
 
 
 천우신조였음인가. 롤프는 라인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이 떨어진 즉시 추격대가 각각의 갈림길로 흩어졌다.
 
 
 
 하지만 롤프는 어느 곳으로도 들지 않았다.
 
 
 
 ‘역시 교관 롤프인가. 구멍 따윈 만들지 않는다는 건가······.’
 
 
 
 롤프는 하니온 기사단의 검술교관이었다. 라인도 그에게 검술을 배웠던 적이 있었다.
 
 
 
 고민되는 구간이다.
 
 
 
 이 비좁은 기둥 뒤에서 모두가 떠날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 한 놈만 남았을 때 제거할 것인가.
 
 
 
 하니온 공작가 기사단의 롤프는 소드유저 중급이다.
 
 
 
 마나 한 줌 없는 라인이 이길 턱이 없다.
 
 
 
 어떻게든 빈틈을 노리든가 해야 한다.
 
 
 
 라인은 조용히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고민은 짧게, 결단은 과감히!’
 
 
 
 라인이 마침내 마음을 잡고 뛰쳐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병사들이 사라진 걸 확인한 롤프가 기둥 뒤편을 보며 비아냥댔다.
 
 
 
 “큭큭, 그것도 숨는 거라고 숨어 있는 겁니까?”
 
 
 
 들켜 버렸다.
 
 
 
 라인은 지체 없이 검을 뽑아 기둥 옆으로 나갔다.
 
 
 
 미소에 조롱을 머금고 다가오는 롤프를 보자니 분노가 절로 치솟았다.
 
 
 
 “가문의 기사단으로서 가문을 배신하다니, 기사로서 부끄럽지 않나?”
 
 
 
 “배신이라. 저는 처음부터 이코프 도련님 아래에 있었는데 배신이랄 게 있습니까?”
 
 
 
 그의 말마따나 파벌은 분명히 존재했다. 롤프는, 아니 하니온 기사단은 적자인 라인이 아닌, 서자 이코프를 택했다.
 
 
 
 “아버지는 내게 하니온 공작가를 물려주셨다. 그걸 뒤집으려고 억지를 부리는 너희가 옳다고 생각하나?”
 
 
 
 “잘못된 건 전 하니온 공작님이시지요. 마나 한 줌 없는 무능한 자에게 하니온 공작가를 맡기려 했으니까요.”
 
 
 
 라인은 뿌득 이를 갈았다.
 
 
 
 라인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주군이었던 하니온 공작마저 부정하는 행태라니!
 
 
 
 “이놈이!”
 
 
 
 힘껏 검을 휘둘렀지만 롤프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라인의 검을 옆으로 쳐냈다.
 
 
 
 채앵!
 
 
 
 라인의 검에서 이가 빠지며 쇳조각을 튀겼다.
 
 
 
 롤프의 검에는 어느새 마나가 부여되어 있었다.
 
 
 
 검의 강도는 마나의 부여만으로도 자명한 차이가 발생한다. 마나에 의한 위력 상승 때문이었다.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충격에 라인이 두어 걸음 밀려났다.
 
 
 
 “크윽.”
 
 
 
 첫 격돌부터 밀려난 라인을 보며 롤프는 검을 바로 쥐었다.
 
 
 
 “당신에게 검을 가르친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 목, 저의 출세를 위해 내주시지요.”
 
 
 
 라인은 그제야 롤프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포상을 독식하려고 병사들을 미궁으로 보낸 것이다.
 
 
 
 과연 그는 부하들이 돌아오기 전에 라인을 죽일 속셈인지, 검에 불어넣은 마나의 기운이 한층 강력해졌다.
 
 
 
 라인은 다음 공격을 버티지 못할 걸 직감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죽는다면 드골을 볼 면목이 없어.’
 
 
 
 살고 싶다.
 
 
 
 살아서 모든 걸 되찾고 싶다.
 
 
 
 살아야만 한단 말이다!
 
 
 
 라인은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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