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련산 1권
서장 태특마호(台特馬湖)에 뿌려지는 눈물
그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고 맑은 하늘의 끝자락처럼 푸르던 태특마호의 물이 언제부터인지 점차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호수를 붉게 물들이며 떠다니고 있는 물체들은 놀랍게도 사람의 시체. 그것도 명조의 군복을 입은 병사들과 목이 잘린 말들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체들은 호수 전체로 점점 퍼지며 하늘마저 붉게 물들였다.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머리에는 양털로 만든 모자를 쓰고 몸에도 짐승의 가죽을 걸친 자들이 말을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배가 부른 만도(彎刀)를 들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말을 탄 자들의 손이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변방을 질타하던 명조의 군병들은 속절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손이 들려지고 창이 허공을 돌아 땅에 박혀들었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자들을 향해 찔러져야 하는 창은 무기력하게 땅에 박히고, 창을 들었던 명조의 군병들은 목에서 피를 뿌리며 호수에 넘어졌다.
지면은 붉게 물들고 군병들의 몸에서 흐른 피는 내가 되어 흘렀다. 피는 지면을 훑고 흘러 호수로 들어갔고 이미 붉게 변한 호수는 더욱 진하게 물들었다.
도살이었다.
천 명에 이르는 명조의 군병들은 이만 명에 달하는 위구르족과 서역인(西域人)으로 구성된 적으로부터 살아날 가망성은 전연 보이지 않았다.
“퇴로를 열어라!”
“후퇴하라는 명령이다!”
둥둥둥!
북이 울리고 함성이 퍼지며 명군은 퇴로를 뚫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태특마호를 반원으로 둘러싼 위구르족들은 자신들의 영토에 침범한 명조의 군대를 용서하지 않았다.
휙! 파파파파팟!
허공에서 화살이 날고 다시 수십여 명의 군병들이 무릎을 꿇고 무너졌다.
“도주하라! 각자 살 길을 찾아라.”
최후의 명령이 떨어지자 군병들은 미친 듯 앞길을 헤치며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말을 탄 군병은 말의 허리를 박찼고 보군(步軍)은 그들대로 미친 듯 달려갔다.
퍽!
“크으으으으!”
명조의 군병들을 지휘하던 장군은 가슴을 끌어안으며 무너졌다. 등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그에게 충격을 주는 순간, 타병(打兵)이 가슴을 후려쳤기 때문이었다.
화살은 장군이 입고 있는 보갑(保匣)을 뚫지 못했지만 가슴으로 떨어져 내린 철퇴의 충격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장군!”
역시 몸에 보갑을 걸친 장군이 달려와 쓰러지는 장군을 부축했다.
쓰러지는 장군은 목에 붉은 사건을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천호(正千戶)의 직위를 지니고 있었고, 달려온 장군은 면갑(綿甲)을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정백호(正百戶)의 지위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서 도주하게······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네.”
정천호는 무너지는 신음으로 입을 열었다. 정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정천호는 눈을 들어 푸른 태특마호를 바라보았다. 호수 가장자리에 가까운 곳의 물은 이미 붉게 변해 가고 있었지만 멀리 보이는 호수는 아직 푸른 물이었다.
“이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쓰러져 간 천 명의 목숨을 어찌한단 말인가?”
정천호는 부르짖었지만 그의 몸도 기력을 잃고 있었다. 쓰러지는 정천호의 눈에 무수히 쓰러져 가는 명조의 군병들이 들어왔다.
수 년 동안 자신을 따르던 그들이 하나둘씩 호수 속으로 사라져 가자 정천호의 눈에서는 진한 피가 섞인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1장 어둠 속의 그림자
1
일월곡(日月谷)이 터전을 잡고 있는 감숙(甘肅)은 황량한 곳으로, 서북에서 동남으로 길게 뻗은 지형으로 남으로는 사천(四川)과 섬서(陝西)를 딛고 북으로는 몽골과 접하며 서로는 서역과 접했다.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모래벌판에서 시작하여 모래벌판으로 끝나는 감숙이지만 한시도 조용하지 않았다.
명조는 건국의 기치를 걸자마자 감숙을 중요시하게 여겼다. 감숙을 지배하고 서역을 토벌하는 것이 중원을 안정시킨다는 것을 인식한 명조는 감숙에 군사를 보내어 일대의 영토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오랜 전쟁으로 봉록(俸祿)을 받던 군사들이 전장을 피해 낭인이 되어 감숙으로 흘러들었고, 이들은 곧 토비(土匪)가 되어 감숙에서 오고가는 상단을 습격했다.
감숙의 한 곳에 기련산이 있었다.
마치 감숙의 서쪽을 막아주는 등처럼 따스해 보이지만, 사시사철 만년설(萬年雪)을 이고 있었고 빙하(氷河)가 흐르는 곳으로 감히 사람의 접근을 불허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 기련산을 장악하고 있는 곳이 일월곡이었다.
멀지 않은 과거에는 감숙사가(甘肅四家)라 불리는 무파들이 감숙을 지배했었다. 또한 공동파(派)와 종남파(終南派)의 제자들이 중원 무림의 중추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활보를 했고 적잖은 크고 작은 문파들이 있었다.
하지만 원조와 명조의 오랜 전쟁이 막 끝난 터라 너무도 혼란했기 때문인지 공동파와 종남파는 근래 활동을 삼가고 있었고, 감숙사가라 불리던 네 개의 문파는 종적을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언제부터인지 일월곡은 감숙을 대표하는 문파가 되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넓다고 여기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방은 애초부터 서재로 지어진 듯 보였다. 지필묵(紙筆墨)을 비롯한 문방사우(文房四友)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원탁을 보면 더욱 확연했다. 원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초립(草笠)이 놓여 있었다.
파르르르-
불꽃이 심하게 몸부림을 일으키자 사람의 팔목보다 굵은 향촉에서 촉루가 흘렀다.
하늘처럼 파랗게 보이는 불꽃은 바람이 난 계집의 허리처럼 비틀어지며 요염하게 혀를 날름거렸다.
한 사내가 급히 붓을 놀리고 있었다.
그는 제법 큰 원탁에 한 손을 짚고 상체를 숙인 모습으로 다른 손으로는 부지런히 글을 쓰고 있었다. 원탁에서는 코를 자극하는 미향(微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흠! 이제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인가?”
사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몸을 숙이고 있어 그가 누구인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모관 밑으로 보이는 반백의 머리카락으로 보아 오십은 넘었을 것 같았다.
초로인은 간혹 생각하는 것이 있는지 허리를 펴고는 했는데 놀랍도록 넓은 어깨와 바위처럼 단단한 뒷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평범한 문사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그가 지닌 어깨의 넓이와 은연중 풍기는 기도가 결코 유약해 보이지 않았다.
“오늘따라 단향(檀香)이 진한 것 같군.”
자단목으로 만든 원탁에서 흘러나오는 향기가 유독 진하게 느껴졌다.
기련산(祁連山)에는 자단목이 제법 많이 자랐고, 그가 머무는 곳에서 목재로 사용하는 나무 중에는 자단목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눈 앞에는 면이 매끄러운 제법 넓은 백록지(白綠紙)가 문진(文鎭)에 눌려 있었다. 문진은 일반 문사들이 사용하는 척(尺)의 모양이 아니라, 마치 호수반(護手盤)이 없는 비수의 모양으로 생겼다.
문진은 백록지의 네 귀퉁이를 모두 누르고 있었다.
보통의 문사들이 상방(上方)과 하방(下方)에 문진을 두는 것과 비교했을 때, 그가 네 곳이나 누른 것으로 미루어 바람이 강하게 부는 곳이거나 조금의 오차가 있어서도 안 되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은연중 나타내고 있었다.
문진에 눌린 백록지의 오른쪽에는 붓이 담겨 있는 대나무통이 놓여 있었고 잘 갈린 먹물이 주인에 의해 희생할 각오로 향촉의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먹물은 반짝거리는 모습으로 방을 차지하고 있는 주인의 눈에 다가왔다.
백록지 위에는 손바닥보다 조금 커 보이는 당지(唐紙)가 놓여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붉은색이 나는 것이었다. 황량한 기련산에서 물감을 먹인 당지는 귀한 것이었다.
거친 당지 위에 정실의 주인은 가늘디가는 세필(細筆)로 부지런히 글을 썼다.
“흠! 모든 것이 시대를 잘못 타고난 탓이다.”
초로인은 간혹 글쓰기를 멈추고 눈을 들어 눈 앞에 세워진 서가(書架)를 바라보았다. 입에서 한숨이 밀려나오기도 했고 뜻 모를 중얼거림을 토하기도 했다.
방에는 제법 많은 책이 있었다.
사람의 허리 둘레에 버금가는 굵고 꼿꼿한 나무를 옆으로 켜서 서가를 세웠는데, 일견해도 오천여 권은 될 것 같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정실의 주인이 학문에 적지 않은 정성을 쏟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책은 한결같이 손때가 묻어 있었다.
책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문사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시경(詩經)과 초사(楚辭), 주역(周易)과 춘추좌전(春秋左傳)을 포함하는 십삼경(十三經)뿐만이 아니라 왕창(王昶)의 원각본(元刻本) 호해시전(湖海詩傳)이 있는가 하면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모진(毛晉)의 송육십가사(宋六十歌詞)도 있었다.
송대를 거슬러 가장 뛰어나다는 육십 명의 대가, 그들이 지은 가사를 모은 송육십가사는 급고각(汲古閣)에서 단 두 번만 찍었다는 귀한 것이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방의 주인은 유난히도 가사(歌詞)에 적잖은 관심이 있는 듯 중원에 이름을 떨쳤던 사가(詞家)들의 문집은 모두 모아놓은 듯했다.
도잠(陶潛)의 도연명집(陶淵明集)을 필두로 하여 포조(鮑照)의 포명원집(鮑明遠集)도 보였다. 시대를 망라해 전대의 사부(辭賦)를 모은 듯 주방언(周邦彦)의 문집도 있었고, 귀유광(歸有光)의 귀진천집(歸震川集)과 같이 구하기 힘든 문집도 적지 않았다.
일견 난잡하게 보이기도 하는 서가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정한 배열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무 오래 심신을 안정시켰다. 무릇 장수라는 것은 말을 달리고 검을 휘둘러 피를 보고 하루라도 노숙을 하지 않으면 손에 가시가 돋는 법인데······”
초로인은 더욱 깊은 한숨을 불어냈다.
향촉이 자지러지며 몸부림을 일으켰으나 쉽사리 꺼지지는 않았다.
향촉의 불빛이 일렁이자 서가가 흉물스러운 천 장 절벽처럼 어둡게 다가들었다. 초로인은 주변의 경물이 어떤 몸부림을 치든지 주저하거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벽에는 문인화가 한 장 걸려 있었다. 대나무가 살아서 움직일 것 같은 그림이었다. 그림이 주인의 성품을 말해 준다면 그는 분명 고결하고 의기가 넘치는 문사의 모습을 지니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다.
벽과 서가가 만나는 곳에 허술해 보이는 병가(兵架)가 세워져 있었다.
나무를 다듬어 만들어 세운 병가에는 적지 않을 만큼의 병기가 골고루 걸려 있었는데, 이미 사용하지 않게 된 고대의 병기까지 있어 방의 주인이 병기를 모으는 취미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흠! 이제 이곳은 쑥밭이 될 것이다.”
초로인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우후후! 우리는 일월곡(日月谷)을 없애버리기 위해 육 개월 동안이나 이곳에서 움츠리고 살았다. 삼 년 동안 준비를 했으니 이제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일월곡에서 아무나 입을 수 없는 화복을 걸친 것으로 보아 그는 제법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기련산의 기슭에 자리잡은 일월곡의 식솔들은 대게 마의(麻衣)를 입었다. 일월곡의 식솔들이 화려한 옷을 입으려고 한다면 입지 못할 것도 없었다. 일월곡에서 하루만 달리면 천산남로(天山南路)가 나오고 그곳에서 비단을 싣고 서역으로 들어가는 상단을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신분의 구분을 두기 위해서 화복을 걸치는 것을 제한했다.
보드라운 비단으로 만들어진 화복을 입을 수 있는 자라면 당주(堂主) 이상의 지위를 가진 관주(關主)나 호법(護法)일 것이었다.
“이제 때가 왔을 뿐이다. 나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다 머리가 셀 지경이었다.”
나직한 음성이 다시 흘렀다.
글을 쓰는 자가 화복을 입고 있다는 것은 일월곡에서 삼십 명 안에 드는 수뇌부(首腦部)가 틀림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말은 자신이 묵고 있는 곳을 초토화(焦土化)시키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었다.
화복의 초로인은 부지런히 붓을 놀렸다. 언뜻 초로인이 쓰는 글씨가 보였다.
<이제 준비가 끝난 듯합니다. 일월곡은 이미 주변의 모든 비적(匪賊)들을 통합했습니다. 극히 팽창되어 있으므로 더 이상 세력이 커지기 전에 막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서둘러 일을 마무리지어야 될 것 같은데, 이곳은······>
초로인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서찰에 글을 적어갔다.
“이제 되었군.”
한참 동안 글을 쓰던 초로인은 당지에서 붓을 떼었다.
마르지 않은 깨알 같은 글씨에 향촉의 불빛이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초로인은 아직 물이 찰랑거리는 연적(硯滴)에 반복해서 붓을 씻은 뒤 대나무통에 거꾸로 세웠다.
수십 개의 붓 속으로 세필은 섞여 들어갔다.
휙!
초로인의 손이 허공을 긋자, 향촉은 요염한 계집이 허리를 퍼덕거리듯 몸을 비틀고는 꺼져 버렸다.
한 순간에 어둠이 밀려왔다.
희미한 향촉의 그을음 냄새가 정실을 감아돌기 시작했다. 초로인은 한동안 향촉의 그을음 냄새를 음미하듯 몸을 굳히고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보았다면 초로인이 있다는 사실마저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부스스스스-
초로인이 움직이는지 옷감이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인생의 목적이 겨우 이까짓 기련산에 모여든 비적의 무리 하나를 없애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목소리가 굵어졌다.
마치 목에 먼지가 들어간 듯 탁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는데, 그것은 격한 감정이 녹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어둠이 내린 방 안에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이 그의 목소리만이 자욱하게 번질 뿐이었다.
휙!
바람 소리가 일어났다.
덜컹!
열린 창문은 그린 듯 보이는 반월창(半月窓)이었는데 창살이 드러나 보였다. 밖은 제법 밝았는지 투영되듯 창살의 모양이 다가오고 있었다.
“달이 밝군.”
삐이이익!
미세한 마찰음이 들려오며 반월창은 여인의 몸이 격정으로 뒤치듯 열렸다. 초로인은 별이 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희미한 빛이 그의 얼굴에 쏘아져 들어왔다.
“하늘이 맑은 것을 보니 날씨가 차가운 것을 알겠다. 움직이기 좋은 날이다.”
초로인의 목소리가 다시 갈라졌다.
기련산의 기후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건조한 기후로 인해 비가 적게 오고, 낮에는 머리털을 모두 뽑아버릴 듯 더웠으나 밤이 되면 몸서리가 쳐지도록 추웠다.
별이 떠 있다는 것은 눈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겨울이 긴 감숙이었고 더구나 주천(酒泉)과 멀지 않은 기련산은 유난히 눈이 많은 곳이기도 했다.
“이제 모든 것을 시작할 때다. 아니, 그 동안 조용했지만 일월곡을 없앨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군영(軍營)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그의 입에서는 잔잔하지만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극()이옵니다.”
갑자기 밖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정실의 주인이 머리를 들었다.
“들어오라.”
초로인의 말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명멸하는 별들이 눈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초로인은 별빛에 눈이 따갑다는 듯 눈을 깜박거렸다.
별무리를 등에 지고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희미한 별빛이지만 사내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나타난 사내는 청년이었다.
어둠이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청년은 준수한 용모에 균형 잡힌 몸을 지니고 있었다. 눈가에 그늘이 심한 것으로 보아 유난히 검미(劍眉)가 짙어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비록 별그림자를 등에 지고 있어 안색이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언뜻 보아도 이십 세는 넘었고 삼십 세에는 이르지 못한 얼굴이었다.
“누군가 따라온 자는 없었느냐?”
“그렇습니다.”
“좋다. 매사에 조심스러워야 한다. 한 치의 실수라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알고 있습니다.”
초로인의 말에 청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의식적으로 몸을 돌려 뒤를 훑어보았다. 극히 의도적이기는 했지만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청년이 다시 고개를 돌릴 때 달빛이 코에 부어졌다. 오뚝한 코가 태산처럼 보였다.
“장군을 뵈옵니다.”
청년은 문을 닫고 들어와 허리를 깊게 숙여 절을 한 뒤, 초로인이 서 있는 맞은편 탁자 앞에 놓인 나무의자에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디밀었다.
행동은 공손했지만, 이미 수차에 거쳐 그와 같은 일이 있었는지 너무도 자유롭고 몸에 익은 행동이었다.
“준비는 끝났느냐?”
“이미 끝마쳤습니다. 명령만 있으면 곧 출발할 수 있습니다.”
장군이라 불린 초로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반쯤 열린 반월창으로 스며든 별빛이 초로인의 얼굴을 비추었다. 미소는 믿음직스러운 자신의 부하에 대한 넘치는 자부심과 같은 것이었다.
초로인은 청년이 앉은 의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방 안을 흐르던 바람이 갑자기 멈춘 것 같은 적막감이 흘렀다.
“이제 우리가 움직일 때가 되었다. 그 동안 웅크리고 있었지만 네가 돌아오는 날에는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오랫동안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청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로지 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자신의 상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에서는 장군이라 불린 초로인을 존경하는 빛과 함께 자부심이 어리고 있었다.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감내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니, 영원히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 된다면 우리도 토비들 사이에서 죽어갈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절대로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사로잡힐 것 같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덜 고통스러울 것이다. 만약의 경우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깨물어 먹어라.”
초로인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에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검은빛이 돌기는 하지만 은은한 단향이 나는 둥근 환(環)이었다.
청년은 망설이지 않고 손을 앞으로 내밀어 초로인이 건네주는 단약을 잡아 품에 갈무리했다.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청년은 손을 뻗어 원탁에 놓여 있는 초립을 집어들었다. 기련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회목(檜木)을 잘라 껍질을 벗겨 정성스레 만든 초립이었다. 초로인이 청년을 위해 준비를 해놓았던 것 같았다.
청년은 초립을 쓰고 길게 늘어진 삼베 끈을 턱 아래서 단단하게 묶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초립은 그의 머리에서 벗겨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이곳을 출발해 담을 타넘으면 모든 것은 너의 판단에 달렸다.”
“알겠습니다.”
들에 자라는 회목을 잘게 쪼개 만든 초립을 쓴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보이는 눈에는 의연한 의지가 담겨 있어 보였다.
“받아라.”
청년은 초로인이 내미는 당지를 받아 좁게 접은 다음 팔목에 채워진 보호대 속에 밀어넣었다. 짐승의 가죽을 벗겨 만든 보호대는 일월곡에 머무는 사람들 대부분이 차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투박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곰의 가죽으로 만든 보호대는 그가 죽지 않는 이상 벗겨지지 않을 것이며 서찰은 잊어먹지 않을 것이었다.
청년은 몸을 일으키고 손을 들어 가슴에 대는 것으로 예를 취했다. 너무도 오랫동안 해온 행동이라 몸에 익은 동작은 절도가 있었고, 누가 보아도 그가 군영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게 했다. 청년의 마음에도 이미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등에 걸려 있는 한 자루의 장검이 달빛을 받았다. 청년이 예를 취한 후 몸을 움직이려 해도 초로인은 묵묵히 전면을 응시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어서 떠나거라. 이미 모두 떠났으니 네가 마지막이다. 나도 이곳이 정리되는 대로 뒤를 따를 것이다.”
청년은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전혀 흔들림없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만큼의 각오를 했는지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드르르르르-
미닫이문이 다시 열리며 청년의 몸이 문을 벗어났다.
육 척을 넘기는 체구, 등에는 장검으로 보이는 병기를 단단히 고정시킨 모습이었다. 발에는 삼베로 만든 끈으로 질끈 동여매 어떤 경우라도 초혜(草鞋)가 벗겨지지 않도록 했다. 완벽한 준비였다.
삐이이익!
둔한 마찰음이 들리고 정실의 문이 닫혔다.
청년은 주의를 둘러보았다. 수차에 걸쳐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다가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나선 청년은 몸을 숙이고 주위를 둘러보다 마음을 굳힌 듯 바람같이 내달아 초로인이 머물고 있는 누각을 둘러싼 담을 타넘었다.
2
일월곡은 깊은 협곡(峽谷)이었다.
감숙성은 긴 국자와 같은 모양을 지니고 있었고, 기련산과 감숙의 오대 시진 중 하나인 주천은 불과 이백여 리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천의 서북방에 지어지고 있는 가욕관(嘉關)은 중원에서 서역으로 이어지는 삼대 관문 중 하나로 이전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역의 활동과 천산남로의 상인들 활동이 극에 달한 근래에는 매우 중요한 곳으로 여겨지는 곳이기도 했다.
중원에서 내륙과 변방을 나누는 관문은 무수히 많지만 그 중에는 삼대 관문을 제일로 치게 마련이었다.
당대의 대시인이었던 왕유(王維)가 서역으로 부임하는 친구를 위해 ‘서출양관무고인(西出陽關無故人)’ 이라 해서 이름을 얻은 ‘양관(楊關)’ 이 그 하나였다.
두 번째는 역시 당나라 시인인 왕지환(王之煥)이 황막한 변방의 모습을 묘사한 시 ‘춘풍부도옥문관(春風不度玉門關)’ 에서 이름이 나온 옥문관(玉門關)이 두 번째의 관문이다.
마지막 하나가 만리장성 밖의 주천(酒泉)에서 멀지 않은 가욕관을 이르는 말이었다.
한때 가욕관은 주천의 외곽에 세워진 군막이었으나, 지금은 홍무제의 명을 받은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풍승(馮勝)이 토성을 쌓고 방어진지를 만들고 있었다.
감숙에서 원(元)이 물러가고 명이 세워진 지 오 년에 불과했기 때문인지 모든 것이 불안했다.
풍승 장군은 연일 군사들을 독려해 가욕관의 완성에 박차를 가했다.
가욕관은 언제나 군사들로 북적거렸다.
군사들은 오랫동안 변방에 이르러 죽음을 넘기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포악해져 있었다. 그들도 처음에는 마음이 여린 농민들이었지만 군역의 임무를 다하는 중에 고초가 밀려 서서히 악독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그들은 군사의 본분을 잊고 서역을 왕래하는 상단의 황금과 비단을 뺏기 일쑤였고 살인을 저지르기도 했다. 적지 않은 상단들이 가욕관을 피해 발길을 돌렸다.
“산적보다도 더 무서운 자들이 군병들이다.”
상인들은 불평을 토했다.
고난이 따르기는 하지만 상단은 서역과 중원을 왕래할 수밖에 없었는지라 가욕관을 버리고 좌우로 길을 벌려 서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중의 하나는 주천에서 가욕관으로 가지 않고 기련산맥에서 발원하여 몽고의 거연호로 흘러드는 백하(白河)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다 금탑(金塔)에서 가욕관을 돌아 안서(安西)로 가는 방법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반대로 백하의 발원지인 기련산맥 쪽으로 이동해 산비탈을 타고 돈황(敦煌)으로 가는 방법이었다.
두 가지의 방법 또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안서로 가는 방법이나 기련산맥의 비탈을 타고 가는 방법이나 산적의 출몰은 예측해야 했다. 그러나 산적들은 상단들을 건드려도 사람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많은 재물도 뺏는 경우가 없었다.
산적들은 자신들에게 무기와 옷감을 대주는 역할을 하는 상단들에게 약간의 필요한 물건을 빼앗는 것으로 족했다. 게다가 이곳을 이용하는 상인들이 떼 몰살이라도 당해 상인들이 이 길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산적들도 앞으로의 생계에 막심한 타격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산적들의 생각은 옳았다.
상단은 군병들에게 수치를 당하고 때로는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약간의 재물을 잃고 목숨을 구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기련산맥은 감숙과 청해(淸海), 중원과 서역을 나누는 경계였다. 그 중에서 가장 첨예한 곳에 자리잡은 산이 기련산맥의 주봉이라 할 수 있는 기련산이었다. 기련산도 오랫동안 산에 사는 사람들의 영토쟁탈로 얼룩져 있었다.
기련산은 육 척의 키를 가진 성인을 하늘을 향해 일렬로 세우면 삼천여 명에 가까운 사람이 소요될 것 같은 높이를 지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련산을 영산(靈山)이라 부르기도 했고, 산에서 흘러내리는 빙하가 눈이 부셔서인지 ‘천사의 눈물’ 이라 부르기도 했다.
기련산 삼천육백 개의 골짜기 중 하나인 일월곡에는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잠을 자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삼 장의 높이를 지닌 목책(木柵)과 흙벽 위에서 창을 들고 달빛이 부서지는 계곡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봐.”
“왜 또 그래?”
“오늘 전초(前哨) 밖에 나갈 밀사(密使)가 있나? 통보받은 것이 있었는지 모르겠군.”
일월곡을 둘러싼 여덟 개의 문 중 서북방으로 난 장평문(章坪門)의 수문위사 방이군(方已)은 귀찮다는 투로 대답했다. 언제나 말이 많고 의문을 토하는 호굉(胡轟) 때문에 간혹 귀찮은 일에 휩쓸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일월곡은 삼백여 명의 사람들이 몸을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는 계곡으로, 인근에서는 가장 넓은 곳이었다. 더구나 일월곡은 백 년의 전통을 지닌 무파였다.
비록 이제는 토비들의 근거지가 되어버렸지만, 감숙의 사람들은 아직도 일월곡이라 하면 손가락을 세워주었다. 게다가 감숙을 굽어보던 무파의 전통이 아직 남아 있어서 조직력과 무력이 다른 곳과 사뭇 달랐다.
일월곡은 군병들의 공격에 대비해 날카로운 바위를 성벽으로 삼고 계곡 주변에 목책과 흙을 이용해 방벽을 쌓았다. 이런 준비 덕분에 일 년에 걸쳐 일곱 번의 공격을 했던 군병들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고, 그 결과 감숙에서 가장 큰 힘있는 문파로 불리게 되었다. 방이군과 호굉은 일월곡에 몸을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의 두 명이었다.
‘또 시작하려는 모양이군.’
방이군은 호굉과 한 조가 되었다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자신은 늘 조용한데, 입술 얇은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 호굉은 늘 쓸데없는 몽상과 말이 많았다.
“아니, 오늘은 누구도 문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방이군은 자신이 서고 있는 근무를 생각했다.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평상시라면 늘 밀사와 전령들이 전초와 본관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당주들의 순찰도 잦아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전혀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명을 거역하고 관문을 벗어나려 하는 자는 지휘 고하를 막론하고 추살해도 좋다.
아침부터 비밀리에 내려온 지시였다.
왜 그런 지시가 내려왔는지 몰랐지만, 아침부터 일월곡을 둘러싼 여덟 개의 문이 모두 닫혔고 누구도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호굉과 방이군도 일월곡 내부의 심상치 않은 기운에 불안과 초조함으로 눈을 빛내야 했다.
“그러면 저건 뭐야?”
“어디?”
방이군은 손으로 눈썹을 누르며 호굉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과연 하나의 왜소한 그림자가 비조처럼 날쌔게 움직이고 있었다.
휙!
바람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순식간에 삼 장에 이르는 일월곡을 둘러싼 담을 타넘은 인형은 동으로 치달리기 시작했다.
일월곡 밖은 모두가 협곡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숨어 있기는 쉽지만 도주하거나 몸을 움직이는 데는 용이하지는 않았다. 도주하는 자이거나 목적이 있어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망루와 번초를 서는 자의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저, 저것.”
“담을 타넘은 모양인데. 이거 이야기가 이상하게 꼬이는 것 같은데.”
“어서 알려.”
방이군은 급히 망루로 다가가 길게 늘어진 삼베로 꼬아 만든 줄을 잡아당겼다.
일월곡을 둥글게 에워싼 담의 외곽과 나무를 잘라 만든 망루에 머물고 있는 수문위사들과 전초와 본관 사이에 있는 총당(總堂)에서는 그의 신호를 받았을 것이었다.
호굉은 급히 품을 뒤져 대나무통을 하나 끄집어냈다. 대나무의 길이는 불과 반 자도 되지 않았으나 굵기는 제법 굵어 어른의 팔뚝만했다.
파아아아아-
대나무통에 나온 심지에 불을 붙이자 황색의 불꽃이 허공으로 쏘아져 올라갔다.
신호용으로 사용되는 향전(香箭)이었다.
퍽!
향전은 허공에서 터지며 은하수처럼 붉은 빛을 뿌려내었고 일월곡의 내부에서는 부산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
어두운 밤이었다.
방 안은 더욱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있어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어둠이었다. 목소리가 흘러나온 곳은 일월곡에서 보기 드문 삼 층의 고색창연한 누각이었다.
“이제 조용할 날은 지나지 않았을까? 이제 우리도 움직여야 하지 않나?”
“아직은 시기상조야.”
“아니, 이제 우리 손에 머리가죽이 들어왔으니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향촉 한 자루 피어오르지 않을 뿐 아니라, 말소리를 너무 죽여 설사 그들과 오랫동안 생활한 자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목소리를 죽이기 위해 애를 썼기 때문인지 바람이 새는 소리가 섞여 들리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눈치를 채지 못했겠지?”
“물론이야. 놈은 아직도 계집의 품 안에 안겨 미친 듯 방사에 열중하고 있을 것이야.”
“미친놈이지.”
“그래도 주의를 해야 해!”
“놈의 곁에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는 자가 있으니, 우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그들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다.
어두운 방 안에 흐르는 공기는 사람의 체온으로 데워져 있었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방 안에 앉은 자들은 희미하게나마 서로의 형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사가(四家)는 온전하게 보전되고 있는지 모르겠군. 오래도록 일월곡에 머물고 있으니 가업이 이어지기나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는군.”
“걱정하지 말게. 근래 곡으로 들어온 자들에게 물어보니 우리 가문이 움직였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네. 당연히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도 없었네.”
“후후후! 기쁜 일이야.”
“그럼!”
어린아이들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야기를 하듯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그들의 음성에서는 알지 못할 음습함과 계략의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분명 일월곡에 태양화제(太陽火帝)의 무공이 남겨져 있다는 것이 틀림없나? 천려일실이라고 만약 일이 어그러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지난날의 고통과 수많은 세월이 물거품이 될 것이네. 그리 되면 다시는 가문을 일으켜 세울 수 없을 것이네.”
“물론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곳에서 젊음을 모두 버릴 이유가 없었잖아. 우리는 이제 누구 앞에서도 허리를 굽히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걸세.”
“그날이 가까이 왔지.”
목소리는 은밀했지만 희망을 담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같이 이야기를 했다.
“그나저나 밖에 일이 생긴 것 같으니 그만 나가보자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군.”
은밀한 기류가 흐르고 몸의 움직임이 일어났을 때도 그들을 보고 있는 눈은 어디에도 없었다.
명군의 장수로서 자부심을 지니고 여섯 달 동안 일월곡에 잠입해 있던 허조극(許詔)은 미친 듯 발을 차며 앞으로 나갔다.
발 밑에서 살얼음이 부서지고, 수천 수만 년 동안 흘러 내려온 빙하가 손을 흔들 듯 멀어져 갔다.
빙하를 벗어나 비탈을 기어 내려갔다. 마구 머리를 내민 바위와 엉클어져 지면으로 누운 나무가 그의 앞을 막았지만 그는 망설이거나 멈추지 않았다.
콰당!
“커으으윽!”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 순간 허리에 통증이 밀려왔다. 불쑥 다가온 바위가 옆구리를 후비고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발이 걸려 넘어지고 때로는 날카롭기가 검극과도 같은 바위에 부딪쳐 팔다리에 통증이 일어나 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허조극은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멈추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그때는 죽음만이 앞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잔악한 성정을 지닌 토비들이 허조극을 살려둘 리가 없었다.
군병들은 수차에 걸쳐 일월곡을 습격했었고 적지 않은 수의 토비들이 죽었다.
토비들에게 군병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만약 허조극이 군병, 더구나 정백호의 관직을 가진 장군이라는 것을 안다면 토비들의 손에 오체분시(五體分屍)를 당하고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든지 이곳을 벗어나 장군이 명령한 곳까지는 가야 한다. 멈출 수는 없는 일이다.’
허연 김이 입에서 토해졌다.
이제는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었고,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허조극은 잘 알고 있었다.
이미 앞을 가로막은 십여 명의 토비들을 죽인 뒤였다.
무심코 그를 막았던 산채의 토비들은 그의 장검에 무너져 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가 토비들을 죽였다는 것을 모를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핑! 팍!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고 허공에서 향전이 피어올랐다. 허조극은 귓가에 들려오는 소리에 허공을 바라보다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붉은 불꽃이 허공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허조극은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거북이 등처럼 보이는 바위를 뛰어넘었다.
“잡히면 죽는다.”
생각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목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왔다. 거친 숨소리에 섞여 있어 마치 사냥꾼의 창에 맞은 멧돼지의 숨결 같은 목소리였다.
“잡아라!”
“놈의 흔적이 여기에 있다. 다시 계곡으로 내려갔다. 어서 막아라!”
멀리서 무수하게 많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마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같았다. 벌 떼들이 날개를 요란하게 흔드는 듯한 소리가 들렸고 둔탁하게 달리는 발걸음 소리도 들렸다. 발에 밟혔는지 마른나무가 부러지는 소리도 제법 크게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고 자세히 들을 수 없었지만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와······! 출동로(出東路)로 향하고 있다.”
“전초에 연락을 해서 앞을 막아라!”
이구동성으로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허조극의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허조극은 입 안이 바싹 타들어갔다. 그가 아는 일월곡의 토비들은 추측하기 어려운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일월곡에 있는 토비의 반 이상이 농사를 짓다 관리들의 횡포를 이기지 못해 토비의 길로 들어선 평민들이지만, 오래도록 무공을 익힌 자들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요 몇 년 동안 감숙 일대에서 낭인으로 떠돌던 자들 중 상당수가 몰려들어 무력만으로는 어지간한 무림 문파를 능가했다.
‘제길, 명예로운 명의 장군이 겨우 토비들에게 쫓겨 도망이나 해야 하다니······’
허조극은 미칠 것 같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육 개월 전, 가욕관을 지키는 변방수비군의 정백호라는 명예로운 직함을 달고 남경에서 감숙으로 왔을 때만 해도 그에게 아쉬운 것은 없었다.
출세를 해야 한다는 것만이 그의 목표였다.
무관(武官)으로 관직을 나온 이상 출세를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 있었다. 그것 중의 하나가 삼관 중 하나를 지킨 이력을 만드는 일이었다. 물론 중앙에는 그를 도와줄 관리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이부(吏部)에 몸을 담고 있는 개국공신(開國功臣) 호유용(胡維庸)이 그의 외숙부였다.
“이 년만 고생해라. 다음에는 중서성(中書省)으로 이끌어주겠다. 아마 그때는 너를 황궁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외숙부가 이부에 몸담은 개국공신이라는 것은 좋은 조건이었다.
외숙부가 황궁의 관리인 이상 그의 앞길은 순탄했다.
허조극은 외숙부를 믿었고, 자신의 이력에도 이렇다 할 흠집이 없었다. 적지 않은 전투경험이 있었고 서역정벌군을 거쳐 마지막으로 변방수비군까지 온 것이었다.
고달픈 보군(步軍)은 이제 마지막이었다. 이제 변방수비군만 떠난다면 황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일월곡에서 육 개월을 지냈다는 것은 황궁에 들어가기 위해 과대포장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일 중 하나였기 때문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이곳만 벗어나면 영화가 보장된다.”
그러나 입으로 튀어나오는 말과는 달리 마음 속에서는 참을 수 없는 불안이 밀려왔다. 좀 전에 내뱉은 말과는 다른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빌어먹을······ 토비들에게 쫓기는 신세라니······’
일월곡에 침투한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정삼품(正三品)의 만호장군(萬戶將軍) 저여후(著轝珝)는 오래 전부터 일월곡을 토벌하기 위해 열두 명의 휘하 장군들을 일정한 기간 동안 일월곡의 요소요소에 잠입시켰다.
스윙!
바람이 얼굴로 밀려들었다. 급히 몸을 숙였지만 눈에는 검은빛이 다가와 있었다.
철썩!
“으헉!”
갑자기 얼굴이 불을 만난 듯 화끈해졌다.
비명을 토하며 눈을 들어보니 어린아이의 손목 굵기만한 나무가 그의 얼굴을 후려치고 있었다.
계곡 주변으로는 제법 큰 나무들이 자라 있었다.
계곡 물가에 자란 나무를 생각지 못하고 돌만 밟고 달려가던 중이었기에 얼굴로 다가오는 나뭇가지를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었다.
“윽!”
우당탕!
허조극은 허공에서 몸을 뒤치다 뒤로 넘어졌다. 몸을 얼릴 것같이 차가운 계곡의 물에 몸을 적시며 널브러졌다. 등으로 차가운 물이 스며들었다.
화들짝 몸을 일으킨 그의 귀로 두려운 목소리가 밀려들었다.
“놈이다. 잡아라!”
“놈이 앞에 있다. 어서 잡아라!”
계곡의 이곳저곳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리고 사람들이 나타났다. 비록 어두운 밤이라고는 하지만 허공에서는 붉은 빛을 뿜어내는 향전이 타오르고 있었고 달빛이 있었기에 다가오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구태여 생각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허조극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쉽게 빠져 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삼십여 명은 되어 보이는 토비들이 각기 손에 날카로운 병기를 들고 원형으로 진을 만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허공에는 향전이 쉬지 않고 타올라 토비들과 허조극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추고 있었다.
“이리도 빠르다니······”
이를 악물었지만 다가온 자들을 회피할 수는 없었다. 허조극은 손에 힘을 주었다.
등을 더듬자 투박한 병기가 잡혔다.
본시 명군의 장군은 지휘를 하기 위해 어린도(魚鱗刀)나 용천검(龍泉劍)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는 일월곡에 침투하기 위해 투박한 장검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그가 어린도나 용천검을 지니고 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신분이 탄로나 토비들에게 죽음을 당했을 것이었다.
오래도록 검법을 익힌 그에게 장검은 투박하지만 그럭저럭 어울리는 병기였다. 조금 길기는 했지만 장검이야말로 어떤 경우라도 사용하기에 가장 적당한 병기였기 때문이다.
일 년 동안의 준비를 한 후에야 육 개월 전에 겨우 일월곡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제는 반대로 오랜 준비 끝에 도주를 하기 위해 일월곡을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는 중이었다.
“오라! 뚫고 지나가겠다.”
허조극은 호기롭게 외침을 터뜨렸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불안한 마음으로 계곡의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은 사람의 키보다 열 배는 높은 폭포가 있는 곳이었다.
‘어떻게든 저곳까지만 갈 수 있다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폭포는 높지 않아 떨어져도 그다지 큰 충격이 없을 거라는 것을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퇴로를 생각해 수십 번이나 둘러본 지형이었다.
폭포 아래에는 제법 물의 양이 많았고 군데군데 돌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물에서는 행동이 자유롭지 못할 것이고 결국은 물 위로 머리를 내민 바위에 올라서서 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많은 적이 달려와도 일 대 일이라는 수가 맞추어지는 것을 허조극은 알고 있었다.
“내가 맡겠다!”
우렁찬 목소리가 울리더니 밝은 빛이 눈 앞으로 다가들었다. 어둠 속이라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곡도(曲刀)의 일종인 유엽도(柳葉刀)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도신에 달빛이 반사되어 편광이 일어났다.
“어림없는 수작!”
허조극은 급히 장검을 뽑아 날아드는 유엽도에 부딪쳐 가며 상체를 비틀었다. 그들이 두려워 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적의 숫자였다.
카강!
허공에서 불똥이 튀었다.
눈 앞이 환해지며 머리 위를 스치는 유엽도가 보였다. 손목이 찌르르 하고 울렸다.
허조극은 뼈를 시리게 하는 충격을 몸으로 느꼈지만 이를 악물며 장검을 횡으로 그었다.
“크헉!”
손에 고기를 써는 듯한 묵직한 느낌이 다가오며 뜨거운 느낌이 얼굴에 느껴졌다.
진한 피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끓는 물이 담긴 솥뚜껑을 열 듯 얼굴에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이 자신의 장검에 베어진 토비의 몸에서 뿜어진 피라는 것을 인식하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첨벙!
유엽도를 흔들었던 토비가 물 속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어디를 베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일 검은 제법 정확했던 것 같았다. 위기가 중첩된 상황에서도 허조극은 몸에 이는 전율로 어깨를 흔들었다.
‘토비들의 우두머리들이 나타나면 걷잡을 수 없다. 이들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
비단 토비들의 우두머리만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허조극이 일월곡에서 경험하고 겪은 바로는 그들이 명조의 군병들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군병들보다 경험이 풍부해 위기의식이나 무공이 나은 경우가 허다했다.
명조의 군병들은 군영에 이르기 전 교련소(敎鍊所)에서 창을 사용하는 법과 도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지만 한 달에 걸친 훈련은 그야말로 형식에 불과했다.
간혹 사병(射兵)을 익히기도 하고 도법을 배우는 군병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 경우는 외국으로 영토확장을 떠나는 서역정벌군 정도였다.
“목숨을 내놓아라!”
바람이 갈리는 소리가 들리며 두 자루의 장창이 가슴과 허리를 파고들었다. 그들의 모습에서 허조극은 군병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이 사용한 창격(槍擊)은 명군의 모든 군사들이 익히는 선창격(旋槍擊)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 군문(軍門)에서 도주한 자들도 섞여 있다는 말이 있더니 사실인 모양이다.’
허조극은 선 채로 몸을 비틀며 장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오른발을 꼿꼿하게 세우고 왼발로 땅을 긁듯 하자 그의 몸이 빠르게 회전하며 찔러오는 장창을 비꼈다.
찌이이이익!
마사로 만든 옷이 찢어지는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갑자기 옆구리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미처 살펴볼 사이가 없었지만 옷이 찢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놈을 사로잡아라!”
귀에 익은 목소리.
‘아차! 육자홍(陸恣)을 생각하지 못했다.’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허조극은 자신의 반응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둘러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이유는 하나둘이 아니었지만, 육자홍의 경우도 그가 피해야 하는 사람들의 범주에 드는 인물이었다. 그가 나타난다면 아무리 기를 쓰고 방법을 찾는다 해도 결과는 비참해질 뿐이었다. 방법을 알아도 몸을 움직이기 전에 무공이 강한 자가 나타난다면 몸을 피할 기회를 상실할 수 있었다. 그것은 두려운 일이었다.
현실은 냉정했다.
“이런! 우라질!”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나타나기 전에 토비들의 틈에서 빠져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육자홍은 일월곡을 둘러싼 여덟 개의 문을 총괄하는 각주(閣主)였다.
소문대로라면 그는 한때 중원에서도 제법 그 이름이 높았다는 대도문(大刀門)의 제자였고, 강한 내공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대도문은 십여 년 전에 원군(元軍)을 돕는다는 구실에 몰려 당시 건국의 기치를 내걸고 기세를 올리던 명군의 난입으로 멸망했지만 대도를 사용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일월곡에서도 그가 대도를 들고 다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 허조극이었다.
육자홍의 명령을 받은 십여 명의 토비들이 전후를 생각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들은 각기 병기를 앞세우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는데 명령을 내린 육자홍 때문이었는지 두 다리와 두 팔을 겨냥하고 있었다.
“어림없는 수작!”
차차창!
허조극은 급히 몸을 틀며 찔러오는 병기들을 후려쳤다. 그의 장검이 휘둘러진 곳에서 토비들과의 병기가 충돌하며 밝은 불똥이 튀었다.
슝!
허조극은 등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기파가 일어나며 등을 파고드는 힘은 강한 내공을 지닌 자만이 낼 수 있는 무서운 것이었다.
‘육자홍이 나를 공격하고 있다.’
허조극은 머리털이 솟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물에 넘어질 때 흐르는 녹수(綠水)에 젖어버린 옷이 몸에 붙었는지 팔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었다.
허조극은 눈 앞이 캄캄해졌다. 자신도 내공을 익히고 있었지만 변변한 것은 아니었다. 소림의 말사(末寺)라고 하는 남경의 광불사(光佛寺)에서 늙은 노승에게 배운 선밀공(禪密功)이 그가 익힌 내공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미처 오의(奧義)를 깨닫지 못해 완벽하게 내공을 소화시키지는 못한 상태였다.
등으로 다가드는 기파는 그의 단전에 있는 내력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허조극으로서는 목숨이 경각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당하면 안 된다.’
마음 속에서는 급히 몸을 돌려 등으로 쏘아져 드는 기파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앞으로 쇄도해 드는 병기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호락호락 당하지 않는다.”
허조극은 급히 몸을 흔들어 장검을 팔방풍우(八方風雨)의 초식으로 변화시키며 앞으로 쏘아나갔다.
팔방풍우의 초식은 본시 창과 곤(棍)을 위시한 장병기로 방어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초식이었지만, 적이 내미는 병기가 많았으므로 허조극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내공을 지닌 자들과 부딪치기보다는 내공이 없는 자들에게 부딪치는 것이 유리했다. 설사 열 개의 병기가 찔러온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창! 차차창!
병기가 다시 부딪치며 불똥이 피어올랐을 때 허조극은 자신의 눈 앞으로 다가오는 박도(朴刀)를 보았다. 허조극의 눈이 황소의 눈처럼 떠졌다. 미처 장검을 회수할 수가 없었다.
장검은 강한 충돌로 방향을 틀어 허공에 멈추어져 있었다. 눈 앞에 위기가 보였지만 눈 앞으로 긋듯 다가드는 박도를 막을 수는 없었다.
“사갈(蛇蝎) 같은 놈들!”
허조극은 몸을 번요(飜腰)의 수법으로 비틀며 왼쪽 주먹을 뻗어내었다. 박도가 귀밑머리를 베며 등 뒤로 밀려갔다.
어깨에서 아픔이 밀려왔다. 박도가 어깨의 일부를 베었다는 것을 느끼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손을 움직이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퍽!
“컥!”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팔꿈치가 굽혀졌다. 엉겁결에 전개했지만 다가드는 자의 가슴에 주먹이 정확하게 꽂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이 으스스 떨렸다.
그것은 작은 희열이었다.
마음 속에 희열이 이는 것과는 달리 입으로는 비명이 흘렀다. 어깨가 아려왔다. 비록 손은 쓸 수가 있었지만 박도는 생각보다 큰 상처를 입힌 것 같았다.
비명은 허조극만 흘린 것이 아니었다. 허조극의 주먹에 가슴이 격타당한 토비도 허리를 숙이며 밭은 비명을 뿌렸다. 허조극은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우우욱!”
불행이라면 불행일 수 있는 일이 벌어진 것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가슴에 일(一) 권(拳)을 맞은 토비가 그의 품으로 안겨왔던 것이었다.
슈각!
바람이 갈라지며 한 자루의 판부(板斧)가 다리로 다가들었다.
“윽!”
자신의 가슴에 안겨오며 무너지는 토비 때문에 미처 깨닫기도 전에 판부가 허벅지를 파고들었다.
허조극은 다급해지는 마음에 토비의 몸을 밀며 자신의 몸을 뒤로 물리려 했지만 이미 판부가 허벅지의 일부를 베어버린 뒤였다. 다리가 따로 노는 것 같았다. 차라리 시원하게 느껴지는 통증이 온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휘청!
허조극은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몸을 비틀거렸다. 병기의 충돌로 물러섰던 토비들이 다시 다가들었다. 그들은 판부를 든 사내의 등 뒤에 다시 횡으로 늘어섰다.
“죽일 놈!”
허조극은 판부를 든 사내를 노려보았다.
수염이 길게 늘어진 중년인이었다.
허조극은 발을 까치발처럼 세워 박차며 앞으로 나가, 손에 들린 장검을 찔러갔다. 장검은 한 순간에 중년인의 가슴을 파고 들어갔다. 중년인은 황급히 몸을 틀었지만 허조극의 검은 빨랐고 너무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사사삭! 쿠쿡!
살이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 검병(劍柄)을 통해 장심(掌心)에 느껴졌고 뼈가 잘리는 소리가 들렸다.
쾅!
“크어어어억!”
등에서 벼락이 치는 소리가 들리고 눈에서 불이 튀었다. 기파가 등을 후려쳤는지 하체에 기운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입이 열리며 피가 튀어나왔다.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비명이 그의 의지를 배반했다.
‘안 되는데······’
마음 속의 외침을 들었지만 허조극은 마음과는 달리 무릎을 꿇었다. 정말 두려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몸이 생각과는 달리 따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의 생각을 무시하고 무릎을 꿇은 신체는 판부에 의해 근육이 잘린 다리였다.
허조극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눈을 들어 다가오는 자들에게 장검을 겨누었다.
“팔을 잘라주겠어.”
어스름한 달빛에도 털보로 보이는 장한이 손에 들고 있던 파풍도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흥! 아직은 아니다.”
사삭! 툭!
허조극은 급히 허리를 세우며 장검을 사선으로 그어올렸다. 손에 이는 감촉을 느끼며 허조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장검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털보 장한의 늑골을 훑으며 심장까지 올라간 뒤였다.
허조극은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이······ 이! 큭!”
심장이 갈린 토비가 두 손을 들어 허공으로 흔들다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파팍!
강한 근육이 잘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기파의 파동 소리에 이어 허조극의 눈에 자신의 팔이 잘려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털보 장한의 가슴을 갈라버린 장검이 들린 손이었다. 붉은 피가 뿜어지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는 피가 눈을 아리게 파고들었다.
“으! 누가?”
허조극은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돌렸다. 이미 자신의 팔이 어깨에서 잘린 것을 느꼈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허조극은 자신의 팔을 베어버린 자가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한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방문각주(防門閣主) 육자홍!”
쾅!
그의 말이 떨어지자 얼굴에서 거친 소리가 울렸다. 허조극의 어깨를 베어버린 사내의 주먹이 뻗어나온 것이었다.
허조극은 눈 앞이 아득해지며 몸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얼굴을 때린 사내가 육자홍이라는 것을 느꼈지만 입이 열리지도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독단(毒丹)을 먹어야 하는데······’
허조극은 아련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몸에 한 줌의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미련하기가 곰 같은 놈! 감히 나 육모(陸某)에게 건방진 이빨을 보이다니······”
손에 미첨도를 든 중년 사내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허조극으로서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오래 전부터 네놈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네놈이 움직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육자홍은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그는 오래 전부터 허조극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허조극은 알 수 없었다. 이미 정신을 잃고 물 속에 머리를 처박았기 때문이었다.
“어서 지혈(止血)을 하고 곡으로 운반하라.”
“예!”
밤하늘에 기고만장한 육자홍의 목소리가 울리고 허조극의 도주는 그렇게 끝이 났다.
2장 무심인(無心人)이라 불렸다
1
고독군자(孤獨君子)!
일월곡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음침한 토굴 속에 몸을 묻고 살아가는 한 사람을 가리켜 그렇게 불렀다.
온갖 사람들이 모여사는 일월곡이었다. 그들 중에는 본시 일월곡의 제자였던 무인들도 있었지만 그보다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평생 계집의 등을 쳐먹던 창녀촌(娼女村)의 기둥서방이 있었고, 나이 사십이 넘도록 농사를 짓다 들이닥친 관리들의 손에 군역에 끌려가 야밤에 탈출해 어쩔 수 없이 추적을 피해 일월곡으로 스며든 자들도 있었다.
감숙을 지나치는 상인들의 재물을 약탈하던 토비나 평생을 도축(屠畜)에 몸담았던 살도부(殺屠夫)도 있었다. 그들 모두는 한 덩어리로 묶여 일월곡에서 살을 비비며 살고 있었다.
“그에게 걸리면 국물도 없지.”
“그가 본시 무엇을 하던 놈인지 모르겠어.”
사람들이 고독군자를 가리켜 말하기를 살인을 즐기는 자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본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다만 사람들이 본 것은 그가 죽인 시체였다.
한결같이 헤집어져 인육 덩어리로 변해 사람인지 짐승인지 구별이 가지 않게 된 시체만이 그의 손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머무는 동굴을 가리켜 인욕굴(人慾窟)이라 불렀고 그를 가리켜 고독군자라 불렀다. 그러나 진실한 그의 신분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동굴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벽을 보고 앉아 있던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몸을 돌렸다. 전신에는 칠흑같이 검은 옷을 입고 얼굴에는 마귀의 얼굴 같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음습한 동굴이었다.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에 인공을 가미해 다듬은 동굴은 제법 넓어 보였다. 동굴의 이곳저곳에는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횃불이 일렁일 때마다 음습한 그림자가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처럼 움직였다.
사방으로 오 장을 넘길 정도의 방장형 동굴에서 고독군자는 어둠과 동화된 듯 웅크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때로는 그가 살아 있다는 생각마저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깊게 가라앉아 보이는 눈뿐이었다.
“후! 오늘 또다시 피를 보고 말겠군.”
그림자는 허리를 폈다.
육 척에 육박하는 몸에 균형이 잡힌 것이 어떤 여인이라도 뒷모습만 보고서도 반할 것 같았다. 깊게 파인 허리의 굴곡과 펑퍼짐한 둔부가 언뜻 여인의 그것처럼 느껴졌지만 균형이 제대로 잡힌 것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독군자라 불리는 사람.
일월곡에 알려진 대로라면 사람을 대면하고 만난다는 것 자체를 극히 혐오하여 굴 밖으로 나오지 않아 고독군자라 불린다는 소문이 있을 뿐이었다.
고독군자는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횃불이 타오르는 빛으로 인해 동굴은 더욱 음습해 보였는데 음침하고 깊게 가라앉아 보이는 고독군자의 모습과는 너무도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고독군자의 눈이 휘둘러지며 동굴의 모습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넓은 침상이 보였다.
거친 나무를 마구 잘라 짜맞춘 것으로 보이는 나무침상에는 아무것도 깔려 있지 않았다. 다만 볼썽사납게도 불그죽죽한 흔적이 있었다.
고문을 당해 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잠을 자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고문을 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침상에는 곳곳에 피가 묻어 있을 뿐 아니라 가죽으로 만들어진 고리도 있었다. 그나마 고리도 피에 젖어 검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후후후! 이곳에서 사람의 피를 보며 살아가고 있다니. 한때는 양 떼를 몰고 사막을 질타하던 내가 이제는 사람의 목을 베고 뼈를 발라내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모든 것이 한 순간의 일이다.”
고독군자는 냉소를 뿌렸다.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얼굴에 한 꺼풀 씌워진 귀면상(鬼面像)이 그의 얼굴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상을 제외하고도 동굴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부엌에서 쓰는 식도(食刀), 과일을 다듬기 위한 과도(果刀)가 있었다. 여인의 손톱을 다듬고 눈썹을 다듬기 위한 면도(面刀)가 있는가 하면 소의 뿔을 자르는 우각도(牛角刀)가 있었다.
“어서 데리고 들어오도록 해라!”
고독군자는 동굴의 입구를 바라보며 소리를 질렀다. 항상 그랬다.
그가 원하는 것은 사람의 몸이었고 해야 하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다. 죽인다 할 수 있는지는 당하는 사람의 입장이었다. 그에게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은 죽인다라는 표현보다는 증오한다는 표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아무튼 고독군자는 사람을 죽였다. 아주 잔인하게! 더불어 해야 하는 일은 자신에게 고문을 당하는 자들의 입을 통해 얻어낼 것을 얻는 것이었다.
두 명의 무인이 초주검이 된 한 명의 사내를 질질 끌고 들어왔다. 끌려 들어온 사내는 허조극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두 시진 전만 해도 그는 날아갈 듯 달리고 펄떡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무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오른팔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몸에는 의복도 입혀져 있지 않았다. 겨우 하체를 가린 작은 천 조각이 그가 걸치고 있는 의복의 전부였다.
“쯧! 이미 인사불성(人事不省)이군.”
고독군자는 혀를 찼다.
고독군자에 대해 아는 자가 있다면 누구도 그가 진정으로 애통한 마음을 지니고 있어 그렇게 혀를 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의 앞에서 두 명의 무인은 두려운 눈으로 고독군자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언제 어느 시점에 자신도 고독군자의 육도(肉刀) 아래 머리가 빠개지고 뼈와 살이 분리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고독군자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자를 고문하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흠! 무엇을?”
“이자는 도주하다 잡혔습니다. 육자홍 각주의 대도에 팔이 잘렸지요. 이자가 명조의 장군으로 보인다는 육자홍 각주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재미있군.”
고독군자는 정말 재미있는 놀이거리를 찾았다는 듯한 목소리를 토했다.
그것이 두 명의 무인을 더욱 질리게 만들었다. 두 명의 무인은 고독군자와 눈이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고독군자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테지만 아예 관심이 없는 듯했다.
“침상에 눕히고 두 팔과 두 다리를 묶어. 목도 묶고······ 아니, 한 팔이 없으니 두 팔이 아니로군.”
고독군자는 재미있는 일이라도 벌어졌다는 듯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두 명의 무사는 두려운 눈빛을 감추지 못하며 끌고 들어온 허조극의 몸을 나무침상에 뉘었다.
그들은 침상에 묶여 있는 가죽끈을 들어올려 허조극의 몸 구석구석을 결박하고 물러섰다.
“이제 시작해 볼까?”
고독군자는 눈가에 진한 미소를 떠올렸다. 두 명의 무인은 벽에 등을 기대고 섰지만 여전히 얼굴에서 두려운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고독군자는 허조극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 어느 정도는 접근했다. 아버님이 잃어버린 후대(後代)를 찾지 못할 바에는 이곳에서 생을 마칠 것이다. 그가 이곳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고독군자는 이를 악물었다.
고독군자가 어떤 생각으로 일월곡에 머물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그가 일 년 전 홀연히 나타나 일월곡주(日月谷主)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그때부터 동굴에 기거하게 되었다는 소문만이 일월곡에 떠돌 뿐이었다.
동굴을 고집한 것은 고독군자였다.
“화로를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두 명의 무인은 급히 걸음을 옮겨 동굴의 한 곳으로 다가가 화로를 끌었다.
그그그그그-
화로가 바닥에 끌리자 듣기 거북한 소리가 울렸다. 화로는 제법 컸다. 사람의 무릎에 이르는 큰 화로는 반경이 두 자가 넘었고 삼족(三足)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화로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소나무와 참나무를 넣은 화로의 불은 극에 달해 불길이 여섯 자나 솟구쳐 올랐다. 천장에 불꽃이 스치자 동굴이 환해졌다. 무인들은 화로가 너무도 붉게 달구어져 있어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철삭(鐵索)으로 다리를 걸어 잡아끌었다.
“서둘러라!”
고독군자의 말소리가 떨어지기도 전에 두 명의 무인은 급히 대답했다.
“준비했습니다!”
무인들이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고독군자는 알고 있었다. 몸으로 다가오는 화기가 몸을 훈훈하게 했고 얼굴에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고독군자는 화로로 다가가 불 속에서 길게 튀어나온 철사(鐵絲)를 꺼내었다. 철사는 불에 달구어져 붉게 변해 있었다. 철사의 끝에는 조각배 같은 모양의 철덩어리가 붙어 있었다.
그것은 인두였다.
“경험이 중요해. 이곳에서 잠을 자는 배짱을 가진 놈을 보기는 처음인 것 같은데. 잠을 깨우는 방법으로는 불로 지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고독군자는 허조극이 잠을 자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 그렇게 여길 만도 했지만 그의 말에는 진한 살기가 담겨 있었다.
치이이이이-
인두는 밖으로 꺼내어지자 푸른색으로 변해 가며 허공의 습기를 말려버렸다. 고독군자는 망설이지 않고 인두를 허조극의 허벅지에 가져다 대었다.
치이이이익!
물기를 말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인두가 닿은 허벅지에서 살이 타는 소리가 들리며 허조극의 몸이 작살을 맞은 은어(銀魚)처럼 퍼덕거렸다.
살이 타는 냄새가 동굴을 휘돌았다. 늘 있는 일이지만 두 명의 무인은 코를 감싸쥐었다.
“으으으으······!”
허조극이 몸을 부들부들 떨다 눈을 떴다. 이미 눈은 붉게 충혈이 되어 있어 그가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극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조극은 초점이 잡히지 않은 눈으로 고독군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동공이 풀어져 있어 고독군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고독군자의 눈가에 웃음이 걸렸다.
“묻겠다. 이름은?”
허조극이라 해서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음습한 기운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목소리가 울리자 허조극의 몸에 가는 경련이 일어났다.
그의 눈에서 절망이 스쳤다.
“허조극!”
허조극도 일월곡에서 육 개월 동안 몸을 의탁하고 있었기에 고독군자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다. 아니, 누구보다도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가면 사이로 드러나는 고독군자의 긴 속눈썹이 여인의 눈썹같이 아름다웠지만 눈가에 드러나는 웃음은 질식할 것 같은 살기를 담고 있었다.
“소속은?”
허조극은 고개를 흔들었다.
소속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인지, 정신을 차리려 애를 쓰는 것인지 부정확한 동작이었다. 허조극의 눈은 아직도 깊이 가라앉아 있었고 동공이 풀려 있었다.
‘이자는 너무도 많은 피를 흘렸다.’
고독군자는 허조극의 생명이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전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했다. 허조극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할 것은 너무도 많았다.
“소속은?”
“몰라!”
치지지직-
“끄아아아악!”
살이 타는 소리가 들렸고 진한 냄새가 흘렀다. 사람의 혼백을 흔들 것 같은 비명이 동굴에 메아리를 만들었지만 고독군자는 꿈쩍하지도 않았다.
허조극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주먹이 쥐어지며 핏줄이 솟구쳤다. 온몸에 이는 경련은 비 맞은 갈대가 부는 바람에 이슬을 떨구는 것 같았다.
꾸르르르르-
좁은 얼음 구덩이로 물이 스며들 때 공기가 빠져 나오는 듯한 소리가 울리며 잘려진 어깨에서는 피가 새어나왔다. 적지 않은 피가 이미 빠져 나갔는지 피의 양은 많지 않았다.
급히 지혈을 해 피를 멈추게 했지만 심장이 격하게 뛰는 바람에 다시 핏줄이 터져 피가 나오는 것 같았다.
“다시 묻겠다. 소속은?”
“변방······ 국경수비······”
“소속 장군은?”
“저······ 여후!”
“좋아.”
무엇이 좋다는 것인지, 허조극이 소속을 말했다는 사실로 기분이 풀어진 탓인지 고독군자는 만족스럽다는 듯한 목소리를 뿜어내었다. 고독군자는 허조극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고 활활 타오르는 화로에 인두를 집어던졌다.
치이이이이-
낮은 소음을 터뜨린 인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화로에 들어갔고 다시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너는 버들잎과 같이 생긴 유엽전(柳葉錢)을 가진 장군을 본 적이 있느냐?”
갑작스러운 물음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허조극은 강하게 도리질을 치며 들썩거리듯 얼굴을 들고 입을 열었다.
“모르오.”
“다시 생각해라. 버들잎과 같이 생긴 유엽전이다. 명군의 장수 중에는 누군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 생각해라. 아니, 생각해야 한다.”
“몰라!”
허조극은 다시 도리질을 쳤다.
허조극으로서는 고독군자가 묻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뚱딴지 같은 말을 물어오는 고독군자의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그가 깊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고독군자는 집요하게 유엽전에 대해 물음을 던졌지만 허조극은 아는 것이 없으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정말 모르는가?”
“난······ 아는 것이······ 없어.”
“좋아. 이곳에 잠입한 목적은?”
“으으으! 날 죽일 것인가?”
허조극은 자신의 생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에도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나가기만 한다면 황궁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살아야 해.’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순간에 자신의 목숨이 살아 있는 목숨이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허조극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라도 입을 다물어야 한다.
결국 비밀을 지키지 못한 자는 버림을 받게 마련이었다.
적의 입장에서도, 아군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허조극은 알고 있었다. 정신이 산란하고 경황이 없어 자신이 어떤 지경에 놓여 있는지 몰라도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말하면 안 돼!’
한 마디를 아껴야 그나마 살아날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 고독군자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일월곡에서 무심객(無心客) 중 일인으로 불리는 고독군자의 손에 걸렸으니 살아도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어떻게든 견디어 내고 싶었다.
“이곳에 잠입한 이유를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푹!
“끄아아아악!”
허조극은 몸을 푸들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복부로 싸늘한 느낌이 파고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기해혈(氣海穴)로 파고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는 내공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전에 미칠 것 같은 아픔이 온몸을 굳게 만들었다.
“나는 이것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랬는데······ 이것은 쇄혼침(碎魂針)이라 불러. 굵기는 새끼손가락보다 가늘지만 단전과 혈도를 파괴하는 데는 쇄혼침을 따라올 것이 없지.”
울컥!
허조극은 한 사발의 피를 토했다.
기해혈이 파괴되며 그가 이십 년 동안 익히고 수련을 했던 모든 내가진기가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었다.
입에서 욕설이 돌았지만 고통과 전신의 충격으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단전이 깨어지며 진기가 마구 역류를 시작해 온몸에 개미가 기어다니는 듯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악독한······ 놈!”
“난 본시 악독해. 내가 누구인지 듣지 못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불행이지.”
고독군자가 빈정거렸다.
고독군자는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원을 그리듯 허조극의 주위를 돌았다. 그의 움직임을 따라 바람이 밀렸고 화로의 불빛이 흔들거렸다. 불빛이 고독군자의 얼굴에 쓰여진 탈을 더욱 기괴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고독군자는 몸을 숙여 허조극의 눈 앞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나직하게 물었다. 마치 친한 친구를 만난 것같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다시 묻겠다. 이곳에 들어와 네가 한 일이 무엇이냐?”
“이곳을 정탐했다. 으으······ 이곳의 지리를 알아내어 저여후······ 저여후 장군에게 알리는 것이 내 임무였다.”
“그러리라 생각했어.”
고독군자는 빈정거리듯 입을 열었다.
무엇이 본심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였다. 허조극은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음에도 맥이 풀렸다. 자신이 말한 것이 고독군자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자는 다른 것을 듣고 싶어한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고 입을 열고 싶었지만 허조극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만약 자신이 입을 연다면 자신과 같이 일월곡에 스며든 자들의 생명은 보장할 수 없었다.
“명령을 내린 놈이 누구냐?”
“난, 몰라. 누구인지 몰라.”
“네가 모른다고 하리라는 것을 난 알아. 몇 명인지는 알겠지?”
“말할 수 없어.”
“그래?”
허조극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회유를 해도, 몸에 어떤 고통을 주어도 입을 다물 생각이었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구토가 날 것 같고 귀에서는 이명(耳鳴)이 울었다.
‘이러다 정말로 죽는 것인지도 몰라.’
허조극은 마음이 떨리고 미칠 것 같은 오한이 밀려왔지만 참으리라 생각했다. 명조의 장군으로서 영광스레 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헉!”
이를 악물었던 허조극은 눈을 크게 떴다. 고독군자가 그의 눈 앞에 들이민 것은 아주 작은 과도였다. 시퍼렇게 갈려 있어 보기만 해도 기가 질렸다.
고독군자는 눈가에 잔인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소금물을 준비해라.”
“예.”
고독군자의 명령이 떨어지자, 기다리고 있던 두 명의 무인이 급히 나무로 만들어진 통을 들고 왔다.
사람의 허리 둘레만한 통은 굵은 나무 속을 판 것으로 짐승의 먹이를 주는 구유 같은 것이었는데, 밑바닥에는 소금이 깔려 있고 물이 담겨 있었다.
소금을 너무 많이 넣어 미처 녹지 못한 소금이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나는 영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들이 있기에는 너무도 많은 피의 대가가 있기 때문이야. 너는 저여후를 영웅으로 만들 생각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자를 증오해.”
찌이이이익-
마치 옷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허조극은 뱀이 몸의 구석구석을 기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간지러움인가? 뱀이 기어가는 듯한 느낌은 가슴에서 시작하여 사타구니를 지나 허벅지까지 길게 이어졌다.
“뭘 하는 짓이냐?”
허조극은 혼미해져 가는 정신을 잡으며 외쳤다. 몸에 느껴지는 감촉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혼이 육체를 빠져 나가 수십 장 상공으로 날아가는 것 같았지만, 아직 약간의 정신은 차리고 있었고 살기 위해서는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검으로 몸을 저미고 있다.’
허조극은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마치 뱀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아릿한 느낌은 서서히 아픔으로 다가왔다.
“들어보았는지 모르겠어. 사람의 껍질은 세 겹이야. 나는 지금 너의 피하지방(皮下脂肪)을 끄집어내고 있는 중이지.”
“으으으으!”
허조극은 말을 잊어버렸다.
아픔이 밀려오는 것은 뒷전이었다.
고독군자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조극은 아예 말을 잊어버리고 입을 쩍 벌렸다.
부르르르르-
갑자기 몸에서 오한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따끔거리는 통증이 일어났으나 이내 온몸이 가렵고 미칠 것 같은 아픔이 밀려들었다.
“끄아아아악!”
허조극은 몸을 뒤치며 비명을 터뜨렸다.
고독군자는 붓에 소금물을 찍어 자신이 그은 가는 칼자국 위에 발랐던 것이었다.
과도는 허조극의 피부에 가는 금을 그었지만 피부를 한 겹 뚫고 들어간 것이었고, 붓에 발려진 소금물은 그어진 피부를 따라 체내로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따끔하다는 생각이었다.
조금 지났을 때는 온몸에 가는 가시가 박혀드는 듯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붓이 멈추었을 때는 이미 온몸을 찢어발기는 듯한 아픔이었다. 마지막으로 뼈를 가르는 통증이 밀려들자 허조극으로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말하라. 네놈들을 지휘하는 자가 누구냐?”
“으으으! 관주(關主).”
고통이 극에 달하자 허조극의 입은 너무도 쉽게 열렸다.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허조극의 정신은 거부하고 있었지만 입은 주인을 배반하고 있었다.
고독군자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허조극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고독군자는 상체를 숙였다.
그의 눈에서는 횃불 같은 귀화가 이글거리듯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것은 악귀의 탈과 너무도 잘 어울려 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릴 지경이었다
고독군자는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관주라고 했나? 그가 누구냐?”
고독군자의 날카롭게 울리는 물음에 거부하기라도 하려는 듯 허조극은 잠시 머리를 저었다.
약을 먹기 싫어하는 아이가 투정을 부리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지만, 그것은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픔을 참지 못하겠다는 애원이었다.
고독군자는 살며시 허조극의 가슴을 눌렀다.
그의 손가락이 과도에 그어지고 소금물에 절여져 붉게 변한 피부를 누르자 붉은 피가 송골송골 맺혀나왔다.
허조극의 몸이 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 아픔이 얼마나 극심했는지 상체가 흔들리고 두 개의 다리와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렸지만, 나무침상에 묶인 그의 몸은 오로지 버둥거림에서 멈추어야 했다.
고독군자의 눈이 다시 독해졌다.
“관주라는 자가 누구냐?”
“왕방(王坊)!”
고통이 극에 달하자 원하지 않아도 입이 술술 열렸다. 입을 여는 와중에도 몸은 심하게 꿈틀거렸고 격렬한 정사를 치르는 여인처럼 전신이 푸들거렸다.
피가 흘러 붉게 변한 그의 몸에서는 이미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잘근잘근 다져진 고깃덩어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만약 그가 숨을 쉬지 않고 입을 열지 않는다면 사람이라 생각하기조차 겁이 날 것 같은 처절함이었다.
고독군자의 눈에 변화의 기색이 스쳤다. 그는 손을 움켜쥐며 다시 고개를 수그려 허조극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숨을 헐떡거리는 허조극의 모습이 눈을 파고들었지만 고독군자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왕방? 그가 누구냐?”
“흐······ 흑월관주(黑月關主)! 허어억!”
가쁜 숨결과 미약한 음성이 어우러졌다. 입에서는 피와 섞인 침이 튀어나왔고, 거친 숨은 그의 생명이 이제 극을 향해 치달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고독군자의 눈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
고독군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무인이 바람같이 동굴을 빠져 나갔다.
그가 서둘러 동굴을 빠져 나가는 이유는 뻔했다. 왕방이라는 자가 흑월관주의 모습으로 잠입해 있다는 것을 곡주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일월곡의 무인들과 토비들이 알고 있는 흑월관주는 평소 동벽호(董碧昊)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일월곡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자들은 모두 흑월관주가 동벽호라고 알고 있었기에 왕방이라는 이름은 고독군자로서도 금시초문이었다.
“모두 몇 명이냐?”
“열세 명!”
“그들이 누구냐?”
“모르오.”
허조극은 기진맥진한 정도가 아니라 몸의 기운이 빠지고 혈관의 모든 피가 빠져 나가 입을 연다는 것만으로도 경이를 느끼게 하는 모습이었다.
몸에서 흐른 피와 땀이 범벅이 되어 그의 몸 구석구석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져진 어육이라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짐작하게 하는 모습. 불빛에 반짝이는 그의 몸은 이미 혈인이 되어 있었다.
고독군자는 멈추지 않았다.
“어서 말하라. 말하지 않는다면 더욱 혹독한 형벌이 주어질 것이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고독군자가 알고 있는 고문의 기술은 수천 가지가 되며 누구도 그의 고문을 벗어날 수 없다고 했었다. 그에게 인간은 짐승과도 같았다.
허조극의 얼굴은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촌망 중에도 더욱 가볍게 탈색되었다.
“정말 몰라······ 왕방만을 알 뿐이야.”
퍽!
물에 젖은 사건(絲巾)이 허조극의 얼굴에 씌워졌다.
“고춧가루가 섞인 물을 가지고 와라.”
“예!”
고독군자의 목소리가 울리고 대답을 하는 무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혼미해져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허조극이었지만 바람 앞에 내밀어진 향촉의 화촉(華燭)처럼 몸을 떨었다.
허조극이 아무리 두려움을 느끼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도 모든 결정은 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고독군자가 하는 것이었다.
촤아아아아-
물이 쏟아졌다.
“읍푸푸푸푸!”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허조극은 입을 열고 밀려드는 따갑고 매운 물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고춧가루가 섞인 물은 사건이 덮여 있는 허조극의 얼굴을 위시하여 몸에도 부어졌다. 소금에 절여진 상처에 다시 고춧가루 물이 부어졌다. 허조극은 몸으로 파고드는 고통에 놀라 버러지처럼 버둥거렸다.
“말하라. 그들이 누구인가?”
“모르오. 나는 단지······ 단지······ 왕방 장군으로부터 명령을 받을 뿐······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오.”
“말하게 해주지.”
화르르르-
고독군자의 손 끝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화로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고독군자의 손가락으로 옮겨온 것 같았다.
화로가 피워져 있기는 했지만 어두웠던 동굴이었다. 고독군자의 손가락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자 동굴이 조금은 밝아진 듯 느껴졌다.
고독군자의 손 끝에는 마치 불이 피어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불꽃은 작은 촉이었다. 고독군자의 손가락에는 가는 향촉이 들려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손톱 끝에서 불이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향을 갈아 만든 촉은 불이 타들어가고 있었고 마지막 부분은 피부에 닿아 있었다.
슈슈슈슛!
고독군자의 손이 허공을 그었다고 느껴진 순간, 작은 불꽃들이 허조극의 몸에 떨어졌다.
“그것은 지심촉(至深燭)이다. 체내의 기름을 뽑아올려 타들어간다. 네놈이 입을 열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으으으으!”
허조극은 아예 눈을 까뒤집으며 기절해 버렸다.
허조극이 기절해 버렸지만 지심촉은 계속해서 타들어가고 있었다. 살이 타는 듯한 노린내가 다시 동굴을 휘감아돌았다.
고독군자는 손가락을 뻗어 허조극의 눈을 까뒤집었다. 익숙한 동작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독군자가 얼마나 많은 경험으로 사람을 난도질하는지 짐작이 갔다.
허조극의 눈은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실혼인(失魂人)으로 변해 있었다. 동공은 풀어져 초점이 잡히지 않았고 흰자위의 실핏줄은 모두 터져 붉게 변해 있었다.
“이것 또한 불행이라 할 수 있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해라.”
고독군자는 몸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아련함과 어딘지 모를 섬뜩함, 더불어 착잡함이 깃들여 있었지만 누구도 그의 눈을 볼 수는 없었다.
인욕굴에서 그를 따르는 무인들 모두에게 고독군자는 두려움의 실체였고 얼굴을 마주본다는 것은 목숨이 열 개 있어도 모자라는 행동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고독군자의 얼굴은 알 수 없었다.
만약 얼굴에 가려진 악귀의 탈이 없었다면 그나마 짐작할 수 있거나 추측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의 얼굴은 늘 가려져 있었다.
“물!”
“예, 준비되어 있습니다.”
고독군자가 입을 열기 바쁘게 남아 있던 무인이 나무로 만든 물통을 들고 달려왔다. 그의 몸은 고독군자가 어떤 명령을 내리더라도 움직일 수 있도록 주눅이 들어 있었다.
고독군자는 무인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부어라.”
촤아아아아!
혼절한 허조극의 몸 위에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부어졌다. 한동안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허조극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촹!
고독군자는 망설이지 않고 벽에 박혀 있던 두 자루의 육도를 뽑았다. 그가 꺼낸 육도는 소의 뿔을 자르거나 뼈를 바를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달리 우각도라 부르기도 했다.
고독군자는 서두르지 않는 기색으로 허조극의 허벅지에 육도를 가져다 대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입을 열면 편안하게 죽을 것이지만 거부하면 너의 몸은 난도질될 것이다.”
“끄으으으으!”
허조극은 정신을 차린 듯 보였지만 입을 열지는 못했다. 입술은 파랗다 못해 잿빛을 지나 백설처럼 탈색이 되었고 피부마저도 백설같이 창백하게 변했다.
체내의 피가 모두 빠져 나갔기 때문에 그의 피부는 아예 백설처럼 창백해진 것이었다.
“나는 사람을 쉽게 죽이지 않아. 재미가 없기 때문이지.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내 취미라면 믿겠나?”
서서서섯! 서서석!
칼이 밀리는 소리가 들리고 육도가 피로 범벅이 된 허벅지 속으로 파고들었다. 붉은 살점이 벌어졌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너무도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의 체내에 피는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말하라. 유엽전을 닮은 패를 본 적이 있는가? 버드나무 잎처럼 생긴 유엽전을 가진 자를 명군의 장수 중에서 본 적이 있는가? 어서 말하란 말이다.”
“컥! 없어.”
“있는가?”
“없······ 어, 없······”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양 허벅지가 모두 저며져 눈처럼 흰 뼈가 드러났지만 인간의 목숨은 질기기가 한이 없어 허조극의 숨은 한 순간에 끊어지지 않았다.
허조극의 몸은 미세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살아 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허조극은 연신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지만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신경이 살아 입술이 달싹거릴 뿐이었다.
“어차피 너는 죽을 것이다. 죽음만이 너에게 주어진 고통을 덜어줄 것이다.”
푹!
육도가 가슴을 가르고 들어갔다.
늑골이 잘리고 살이 갈라진 사이로 육도는 파고들었다. 한 순간에 심장이 반으로 잘리고 육도는 다시 빠져 나왔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육도의 도신에 붉은 피가 끈적거리는 오물처럼 붙어 있을 뿐이었다. 불빛에 비친 육도는 검은빛으로 보였다. 그때까지도 허조극의 입술은 움직이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창!
고독군자는 육도를 집어던졌다.
육도는 허공을 날아 벽에 박혀들었다. 손잡이만 남기고 깊숙하게 박혀든 육도는 어둠 속에 묻혀 눈에 힘을 주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시체를 끌어내고 보고 들은 그대로 보고하라.”
“알았습니다.”
남아 있던 무인이 황급히 달려와 허조극의 몸 이곳저곳을 묶은 가죽끈을 끌렀다. 고독군자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둠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후! 무서운 자다.”
무인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내 꽁지에 불이 붙어 화들짝 놀란 멧돼지처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조극의 시체가 치워지고 화로가 옮겨졌다.
화르르르-
어두운 동굴에서는 하나 남은 향촉이 애써 자위하듯 몸을 비틀며 요염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동굴에서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2
콰르르르르!
지축이 흔들렸다.
마치 현기증이 일어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땅이 얼굴로 다가오고 지면이 뱃가죽 움직이듯 움직였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벽이 흔들리고 동굴에서는 돌덩어리가 떨어졌다.
솟구치던 샘이 말라버렸다.
간혹 있는 일.
근래 들어 기련산에 이는 지축의 흔들림은 사람들을 경악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과거에도 산이 흔들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근래 들어 몸이 느끼는 진동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격하고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동굴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후!”
어두운 곳에 가벼운 기류가 흘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엇으로 만들어진 곳인지, 어디인지조차도 알 수 없는 곳이었지만 사람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분명 누군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또 땅이 흔들렸다. 무슨 일인가? 혹, 언젠가 사부님이 말씀하시던 일이 기련산에서도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무서운 일이다. 만에 하나 산이 흔들리고 지면이 갈라지는 일이라면 사부님과 내가 무공을 수련하던 화염산(火焰山)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 정말 그렇다면 모르기는 해도 오래지 않아 이곳은 용암이 흐르고 말 거야. 산이 타고 짐승이 죽는다. 모두 죽을지도 몰라. 서둘러야 해.”
다급함과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
목소리의 주인은 고독군자였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고 그가 어떤 모양으로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고독군자는 도망가고 싶다는 듯한 목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빛 하나 새어들지 않는 동굴이었기 때문이었고 먹물처럼 짙은 어둠이 모든 것을 가리고 있었다.
따각, 딱!
손가락의 마디를 꺾는 소리.
파스스스스!
멀리 화로에서 타오르는 불빛이 보였다.
잠시 잠자는 듯 수그러져 있던 불꽃은 다시 피어오르며 희미하게 나마 어둠을 밀어내었다.
동굴이었다.
동굴에는 갖가지 병기들이 널려 있었고 자질구레한 집기들이 보였다. 그것으로 보아 고독군자가 허조극의 살을 발라내며 자백을 강요하던 동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가가!
마치 돌과 돌이 비벼지며 나는 듯한 소리, 사람의 귀를 자극하는 소리였다. 그것은 가벼운 무게를 지닌 돌이 마찰되는 소리가 아니라 무거운 돌이 서로 밀리거나 비벼지며 나는 소리였다.
일렁이는 화로의 불빛이 곳곳을 핥듯이 파고들 때, 동굴의 벽면에도 희미한 빛이 새어들었다. 겨우 사물의 형체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빛이었다. 눈이 어두운 자는 알아볼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나무를 잘라 얼기설기 엮어 만든 문이 보였다. 그 문은 열려 있었고 빛이 스며 들어갔다.
문이 열린 곳은 밖으로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
동굴 내부는 모두 돌로 이루어진 벽처럼 보였지만 어느 한 면은 굴곡과 뛰어나온 바위가 있었다. 그 아래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벽면에는 다른 곳과 통하는 문이 있었고, 바위로 이루어진 문이 반이나 열려 있었다. 문이 열리며 만들어낸 소리는 동굴 안에서만 메아리를 만들었다.
동굴의 한 면.
네모 반듯한 두부에서 한 면을 베어낸 듯 싹둑 잘린 곳이 있었다. 동굴의 천장이 내려와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공간. 불빛이 있어도 미세한 틈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아래 마치 벽에 문이 달린 것 같은 그런 동굴이 이어져 있었는데 깊이가 제법 깊었다. 고독군자는 그곳에 나무로 만든 탁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빛이 스며드는 사이에 희끄무레한 고독군자의 형체가 드러났다.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에 웅크린 듯 몸을 수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긴 머리가 보였다.
여인의 머릿결같이 탐스럽게 보이는 삼단 같은 머리였다.
여인.
희미하게 드러나 용모를 쉽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가 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삼단 같은 머리카락이 흩어져 얼굴을 가리고 있다고는 하지만 머릿결의 윤기며 조금은 튀어나온 광대뼈, 가냘프고 동그란 호선을 지닌 어깨, 무엇보다 목소리는 고독군자가 여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가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누구도 고독군자가 여인이라 생각하지 못했고, 그렇게 신분을 감추고 살아오고 있었던 여인.
일월곡에 몸을 담은 자들이 그들 스스로 그녀가 남자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남자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라고 말한 적도 없었다. 사람들은 스스로 판단했고 스스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만약 고독군자가 여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모든 사람이 혀를 내두르고 말 것이다.
“지진(地震)······ 모두 죽어. 지금도 화염산을 생각하면 기가 질리고 살갗이 타는 것 같아. 사부님은 열량지기를 모아 양장기공을 익히기에는 최상이라 했지만 나는 죽는 줄 알았다. 사부님은 아직도 그곳에서 무공을 익히고 계실 것이다.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돌아갈 기약이 없으니 한심하고 서글픈 일이다.”
고독군자는 고개를 숙였다.
지난날의 고달픔이 그녀의 몸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빠드드드!
손가락을 움켜쥐자 관절이 마디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여인의 몸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녀의 몸에서 뿜어지는 허무와 안타까움, 그리고 손가락 마디를 꺾는 일련의 동작은 모든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지진이 일어난다면 모두 죽을 것이다. 나는 알아. 뜨거운 용암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모두 타죽고 말 거야. 그전에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해. 사흘에 한 번씩 산이 흔들린다는 것은 지진이 이미 임박했다는 증거야. 이곳에서 어물쩍거리다가 개죽음을 당할 수 없어. 그러나 어떻게 한단 말이냐? 아직도 할 일이 남았어.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를 찾지 못하다니······ 한심스러울 뿐이다. 후······!”
긴 한숨이 허공의 공기를 말아올렸다.
“유엽비호전(柳葉庇護錢). 아버님은 그것을 찾기 위해 이십 년을 허비했다. 나 또한 유엽비호전을 찾아야 한다는 부친의 명을 받들어 중원을 떠돌았다. 사부님에게 무공을 전수받은 사오 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나 아직도 오리무중이야. 이제 이곳에서 유엽비호전을 지닌 사람을 찾지 못하면 나도 초원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아버님은 유엽비호전의 주인을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 했으니 생각처럼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후우우······!”
다시 한 번 긴 한숨이 이어졌다.
천장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은 긴 한숨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석연치 않다는 듯한 느낌을 지우지 못하는 목소리가 차라리 답답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목을 외로 꼬았다.
고민과 스스로 악독해지기 위해 지나치도록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 등이 당기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스르르르르-
어디선가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휘르르르르-
물이 흐르는 소리 같았지만 다시 귀를 기울이니 마치 모래가 쓸리는 듯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지하였다.
고독군자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곳은 제법 깊이가 있는 지하였고 모래가 쓸리는 듯한 소리는 그녀가 있는 곳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지하수(地下水)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기련산의 지하에는 적지 않은 수맥(水脈)이 있었다. 산의 곳곳에서 눈이 녹은 물은 설수(雪水)라 칭해지며 지하로 스며들었다가 산의 기저에서 용출수(溶出水)처럼 뿜어졌다. 그래서 기련산 기슭에서 흘러내린 눈 녹은 물을 녹수(綠水)라고 불렀다.
“이곳이 마지막 보루다. 부친이 알려주신 패불(覇佛)을 찾아갔을 때 그는 죽어 있었다. 사부님이 패불의 거처를 몰랐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죽은 것이 모든 일을 어그러뜨렸다. 다만 벽에 ‘군(軍)’이라는 글씨가 피로 적혀 있었다. 나는 벽에 쓰여져 있던 그 한 자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해독하는 데만도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군, 그것의 의미는 너무도 간단했다. 처음에는 그 군이라는 한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그가 군문에 몸을 담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누가 그의 사부, 패불을 죽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한이야 남겠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나는 그를 찾지 못하면······ 야율자미는 여기에서 주저앉지 않는다.”
야율자미(耶律子美)!
그것이 고독군자의 이름이었다.
“후······!”
다시 한 번 긴 한숨이 이어졌다.
만약 사람이 그녀의 앞에 서 있다면 이 장은 날아갈 것 같은 거친 숨결이었다. 그녀의 한숨은 예측하기 어려운 깊은 한을 담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명조의 군대에 몸을 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감숙만을 남겼다. 그가 태특마호에서 죽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많은 군병들이 일월곡으로 스며들었다. 그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결코 주저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를 찾아야 한다. 아버지는 그를 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다. 그를 찾지 못한다면 나의 꿈과 이상도 모두 뜬구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고독군자는 몸을 일으켰다.
한동안 어둠 속을 바라보던 그녀는 심사가 어지러운지 이리저리 배회하기 시작했다.
간혹 희미하게 비쳐 드는 불빛이 그녀의 안면에 부어졌지만, 흉측하게 그려진 가면을 쓰고 있어 얼굴 생김새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음영이 그녀의 가면을 더욱 짙고 요란한 색으로 물들였고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괴기를 흘릴 뿐이었다.
“그에게 내 인생이 걸려 있다. 오래 전 가문의 약속이지만 나는 지킬 것이다.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를 찾기 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초원(草原)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초원의 여인은 한번 결심하면 결코 굴하지 않는다. 초원의 한(汗)이시던 철목진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에는 강렬한 기대와 소망이 깃들여져 있었다.
그녀는 문으로 다가갔다.
화로에서 피어오른 불빛이 심하게 일렁이자, 그녀의 몸에서 만들어진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녀는 문을 잡고 힘껏 당겼다.
가가각!
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고 빛은 사라져 버렸다. 눈 앞에 있는 손가락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이 다시 밀려왔다.
어둠 속에는 거친 숨소리만 남았다.
3장 삼절검(三節劍) 도홍(桃)
1
“모르오!”
그는 중원의 무인들이 자랑하는 명문대파(名門大派)의 제자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뛰어난 세가(世家)의 후예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떳떳했다.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만 아니라 맡은 바 소임을 다했고, 누구에게도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절검(三節劍) 도홍(桃)!
도홍은 늘 허리에 한 자루의 장검을 비끄러매고 다녔다. 그가 차고 다니는 검은 삼 척은 넘고 사 척에는 이르지 못하는 청강검(靑剛劍)이었고, 신기하게도 세 개의 편검(片劍)으로 분리가 되어 있었다. 분리된 세 개의 편검은 다시 환으로 연결되어 장검을 이루었다.
평상시는 세 개의 편검을 접고 다니기 때문에 허리에 걸린 검갑은 불과 두 자를 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자라면 그의 허리에 걸린 검이 두 자를 넘지 않는 크기를 지녔으리라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은 늘 그에게 관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쫓았다. 상대적인 관점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늘 관심의 실체를 피해 가려고 애쓰는 듯 보였다.
“모르오!”
누군가 그에게 물음을 던졌다면 그의 입에서는 달리 나올 말이 없을 것이다.
그는 늘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했다.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도홍을 보게 마련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큰 키를 올려다보며 눈을 끔벅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시 생각해서 물었다.
“모르오!”
역시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그제야 관심을 거두었다. 사실 더 이상 물어도 도홍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도홍의 입에서 ‘모르오’ 라는 대답이 세 번이나 나왔다면 그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도홍은 늘 한 번만 대답하고는 큰 키를 휘적거리며 물러나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에게 물음을 던지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가 곡주의 명에 따라 암암리에 움직이는 귀검당(鬼劍堂)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그가 일월곡에 들어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가 일월곡에 들어온 것도 따지고 보면 기이했다. 그의 출신내력은 아무도 몰랐고, 감숙에서 이름 있는 흑도의 인물들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전대곡주(前代谷主) 등량(鄧梁)이 오 개월 전에 출타했다 데리고 들어와 귀검당을 맡겼다.
모두들 내심으로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곡주가 직접 한 일이라 토를 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가 친구가 되는 이들은 없었다. 왠지 그에게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불타는 눈이 그 원인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눈길을 무서워했다. 그래서였는지 무심함으로 치면 도홍은 고독군자에 버금가는 사람이었다.
도홍은 고독군자와 더불어 무심객 중 일인이었다.
***
여자!
일월곡에서 여자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었다. 오래 전에는 일월곡에도 적지 않은 수의 여자가 거처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관군과 벌어진 삼 년에 걸친 난전(亂戰)으로 여인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곡을 떠났다.
이제 일월곡에서 여자라고는 곡주의 처소에 머물고 있는 여인들이 전부였다.
밉상으로 보이지 않는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어둠침침한 석실에는 도홍 외에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당신이 도홍인가요?”
도홍은 돌아보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돌아보지 않아도 계집의 냄새는 맡을 수가 있었다. 후끈한 땀냄새와는 다른, 사내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기이한 향기는 계집만이 내 뿜을 수 있었다.
도홍은 동경 안에 비치는 계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계집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도홍이라는 분이신가 물었습니다.”
도홍이 머무는 곳에 들어오면 거친 사내들도 겁을 먹었다. 한데 저런 계집이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다시 묻는다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나다.”
계집은 곱게 미소를 지었다.
동경으로 보이는 계집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미인의 축에 들 것 같았다. 문을 들어설 때 계집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한 것은 아마도 어둠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사방이 삼 장은 족히 넘어 보이는 석실을 밝히는 단 한 개의 향촉으로 형체만 파악할 수 있었다. 계집은 도홍의 등만 보일 것이다. 계집은 태연하게 말을 이끌어갔다.
“곡주님이 서둘러 일월각(日月閣)으로 오시랍니다.”
“왜?”
계집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제야 계집은 석실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는지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고 경악에 물든 얼굴을 보이며 당황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도홍이 머무는 석실은 누구나 들어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월곡에서도 수뇌부에 해당하는 몇몇의 간부와 귀검당에 소속된 열 명의 무인들이 전부였다.
“그것을 어찌 소녀가 알겠습니까? 다만 서둘러 오시라는 전갈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알았다.”
“물러갑니다.”
계집은 서둘러 물러갔다. 그러나 얼굴에 흐르는 웃음을 잃지는 않았다.
아마도 곡주는 계집을 단단히 타일렀고, 경고를 해서 보냈을 것이 분명했다. 귀검당의 석실에 들어가 얼굴을 찡그리거나 두려운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고······
어쩌면 그녀는 과장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정도의 담력이면 제법 간이 부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삐이이익-
석실의 문이 요란한 마찰음을 토하고 닫혔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 하나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단지 어둠과 동화되어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허리에 한 자루의 휘어진 도를 꽂아넣은 옥철주(玉鐵柱)는 성큼 다가왔다.
“어쩐 일로 부르셨을까요? 전대곡주께서 돌아가시고 칠 일 만에 부르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군.”
도홍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나타난 옥철주의 말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사실 귀검당뿐만이 아니라 일월곡 전체를 뒤집어도 도홍을 제대로 이해해 주는 자는 옥철주뿐일 것이었다. 잔월랑(殘月狼)이라 불리는 외호를 지닌 옥철주는 도홍이 일월곡에 들어오기 전부터 그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잔월랑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허리에 꽂혀 있는 한 자루 반월처럼 휘어진 잔도(殘刀) 때문이었다. 잔도는 중원의 병기가 아니라 서역의 오로족(惡露族)이 사용하는 병기였다. 검신이 가늘고 크게 휘어져 쓸모없어 보이지만 사람을 죽일 때에는 무서운 병기가 되는 것으로, 강호에서 그와 같이 생긴 병기를 사용하는 자가 적어 그의 모습은 남달라 보였다.
그의 명호에 여우나 이리를 뜻하는 ‘랑(狼)’ 자가 붙었다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만큼 잔악하게 사람을 죽인다고 하는 뜻인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몇 년짼가?”
“육 개월째입니다.”
그들이 묻고 답하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도홍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닌 것 같군.”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파랑대(波浪隊)가 붕괴된 지 벌써 삼 년이 지났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렇게 따진다면 말이 되겠지.”
그들에게는 은밀하게 통하는 감정이 있었다. 도홍이 일월곡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아니 파랑대가 멸망했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도홍과 옥철주 단둘뿐이었다.
“무슨 일일까요?”
“궁금하지 않다.”
도홍은 몸을 돌렸다.
벽에 걸린 삼절검을 허리에 차고 요대를 당겨 묶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칙칙한 기운이 흐르는 방갓을 썼다.
이제 모든 복장은 갖추어진 셈이었다.
일월곡은 중원에 자리한 수많은 문파들과 비교해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는 방파였지만 나름대로 긴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전대곡주의 부친이 세웠다고 하니 적어도 백 년은 넘은 감숙 무림의 방파였다.
한때 감숙 지방에서는 공동파(派)와 점창파 다음으로 큰 문파였고 적지 않은 무인도 배출했었다. 부근에서도 일월곡 출신이라 하면 괄시를 당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초대곡주가 가업(家業)을 일으켰을 때는 공동파보다 더욱 큰 세력을 유지했었다. 한때는 제자의 수가 오백 명에 이르렀던 적도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세월이 흘러 일월곡은 쇠퇴했고, 삼대에 이른 지금에 와서는 곡주가 감숙을 떠도는 토비들을 모아 세력을 불리고 있었기 때문에 놀랄 만치 규모가 커졌다고는 하나 예전의 정기는 느낄 수 없게 되었다.
도홍이 곡주의 처소를 가기 위해 후원에 들어섰을 때, 그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이었다. 지난 육 개월 사이 후원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이곳도 떠날 때가 된 것 같군.”
도홍은 눈을 들고 턱을 당겼다.
육 개월 전만 하더라도 연무장(鍊武場)이었던 곳이 이제는 화원(花園)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어른의 키를 겨우 넘어설 듯 보이는 담에도 온통 담쟁이로 뒤덮여 있었다.
도홍은 꽃에는 관심이 없으나 담쟁이덩굴이 담을 덮을 정도로 자라려면 몇 년의 세월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새로운 곡주가 몇 달 전부터 담에 담쟁이덩굴이 자랄 수 있게 어떤 방법을 사용했을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전대곡주가 와병(臥病) 중이었다.
“진작 떠났어야 했다. 아직 마음 속의 그림자를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도홍은 안타까운 목소리를 흘렸다.
전대곡주는 삼 년 동안의 긴 병을 앓았고 실질적으로 곡주를 대신해 후인이 일월곡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강호를 떠도는 어중이떠중이들을 끌어모은 것도 그때부터의 일이었다. 비록 제자들의 숫자가 줄었어도 내실을 다지며 전대곡주는 슬기롭게 일월곡을 끌어가고 있었다.
삼대곡주는 달랐다.
그는 전대곡주가 자리에 눕자마자 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세력을 확장시키기 시작했다.
부근의 토비들을 흡수했고 군벌에서 도주해 온 군병들까지도 모두 수용했다. 그랬기 때문에 도홍도 일월곡에 몸을 담을 수 있었다. 전대곡주는 약초를 구하기 위해 산을 내려왔다 도홍을 만났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전대곡주와 도홍은 인연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팽창한 듯 보였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도홍의 생각은 달랐다. 이질감으로 가득한 일월곡은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사상누각(沙上樓閣)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더구나 토비들의 횡액으로 군병들은 일월곡을 붕괴시키기 위해 호시탐탐(虎視耽耽) 노리고 있었다.
도홍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쓸데없는 짓! 무엇이 먼저인지 모르는 쓰레기!’
그가 욕을 하는 상대는 후원의 주인이었다. 이미 적이 코 앞에 다가와 있는 상황에서 화원이나 가꾸고 있다는 사실이 불쾌했다. 버리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도홍에게 가슴을 누르며 다가오는 것은 전대곡주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감숙은 봄과 여름, 가을이 짧고 겨울이 길었다.
한겨울이 다가와 눈이 날리는 계절이었고 담을 벗어나면 빙하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후원에서 가장 깊은 이리원(離離園)에서는 꽃이 만발해 있었다. 이미 계절이 깊어 곳곳에 눈이 보였지만 후원만은 봄과 같았다.
처마가 계집의 속옷처럼 휘어진 지붕을 지닌 삼 층의 누각 일월각 앞에 도홍을 기다리는 자가 있었다.
봉황이 새겨진 팔걸이가 있는 윤안거(輪安車)에 앉은 사내는 햇살이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애써 지우려 하지 않았다. 손에는 꽃을 다듬는 전도(剪刀)가 들려 있고, 막 시들어가는 한 송이 호목초(虎目草)를 전정(剪定)하는 중이었다.
손가락 마디가 가늘었고 파란 실핏줄이 돋아난 손은 여인의 손보다 더욱 고왔다. 가는 눈썹과 가는 눈, 오뚝하지만 어딘지 여리게 서 있는 코가 그가 지닌 성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나이는 도홍과 비슷한 이십오 세 정도나 되었을까?
너무나 가냘파 보이는 몸매, 어딘지 모르게 보는 것만으로도 유약해 보이는 사내는 무인의 검을 들어보지도 못할 만큼 여리게 보였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도홍을 안내해 준 시녀가 바삐 허리를 숙이고 물러갔다. 지금은 도홍이 곁에 있기 때문에 그나마도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아 보였다. 도홍은 눈살을 찌푸렸다.
겉으로 보기에 시녀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밤이 되면 곡주와 침상을 구르며 짐승의 소리를 낼 것 같아 보이는 시녀였다. 그만큼 시녀의 가슴은 부풀어올라 도드라져 보였고 둔부는 사내를 기절시킬 만큼 되바라져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퍼진 소문이니 틀림이 없을 것이고, 조금 전 눈치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곡주, 불과 일주일 전 전대곡주의 갑작스런 서거로 곡주의 자리를 물려받은 사내는 도홍이 나타났다는 것에는 관심도 없는 듯 꽃을 다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도홍은 성큼성큼 다가가 호목초가 자욱하게 깔린 곡주의 앞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아마도 곡주가 정성 들여 다듬어야 할 꽃이 늘어날 것이었다.
곡주는 태연했다. 굳이 눈을 들어 바라보지도 않았고 화를 내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정성 들여 가꾸어도 죽는 꽃은 죽는 법이지.”
일월곡의 삼백 명 목숨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청년, 등무벽(鄧武)은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언제 거두어 들였는지 손에는 전도가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새로운 곡주였다.
이틀 전 전대곡주였던 감숙쾌도(甘肅快刀) 등량을 묻기가 바쁘게 다시 계집들의 치마 속에 묻혀버린 사내가 바로 그였다.
“정성을 들이지 않아도 사는 꽃은 사는 법이오. 오히려 더 오래 사는 경우도 있소.”
도홍은 무감각하게 내뱉었다. 마치 대드는 것처럼 보이는 말투였지만 깊이를 담고 있었다. 생각이 없었다면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었다.
등무벽은 도홍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들은 것 같았다.한때는 천재였다는 소문이 있었던 등무벽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계집들의 치마에 싸이고 앵속(罌粟)을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어떤가?”
“뭘 말씀하시는 거요?”
“모두!”
“썩었소이다. 안으로는 꽃이 썩어 들어가고 있고, 한 꺼풀 벗어나면 모두 썩었소. 썩지 않은 것은 피를 흘리는 번초들과 전초를 지휘하는 총당뿐이랄까.”
도홍은 곡주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담쟁이덩굴의 비틀린 몸이었다. 담쟁이들은 몸을 비틀고 갈 지 자로 벽을 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땀이 흐를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세상은 담 사이를 두고 각각 달랐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담쟁이는 땀을 흘리며 벽을 타고 오르려고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도홍은 아련한 애상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눈을 돌리고 등무벽을 바라보았다. 그가 알고 있는 등무벽의 나이는 삼십을 넘겼는데도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것이 조금은 신기했다. 창백한 피부와 놀란 듯 보이는 동그란 눈 때문인 것 같았다.
“왜 썩었다고 생각하나?”
“모두가 썩었으니까.”
언뜻 동문서답(東問西答) 같은 말로 얼버무리며 도홍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가슴으로 쏘아져 들어왔다. 등무벽은 도홍의 말에 기가 질린 모양이었다.
등무벽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도홍은 도대체 친구가 없었다. 누구에게나 반말을 지껄였고 이야기의 핵심이 없는 듯 보였다. 전대곡주 등량 때부터 도홍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누구와 어울리기도 싫어하고 술 한잔 마시지도 않는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묵묵히 자신의 일만 했다.
“우리는 최악의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물론.”
등무벽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도홍은 알고 있었다. 대내외의 모든 정보망을 통해 얻어지는 정보에 따라 척살(刺殺)의 임무를 띠고 있는 도홍이었다. 정확한 정보만이 확실한 척살을 감행할 수 있었다.
중요한 정보를 취급하는 그가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일월곡은 마지막에 몰린 상태였다. 현재 일월곡도는 삼백이 넘었다. 이백 명의 제자들은 본관에 머물고 있었고 백이십 명은 전초로 경계임무를 수행했다.
이백 명이라는 숫자와 백이십 명의 전초가 적은 숫자가 아니었지만, 모두들 명군의 수비군이 달려올까 하루도 걱정을 지우지 않았다. 그래서 방비는 제법 튼튼했지만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 마음 속에 떠도는 그림자는 찾았나?”
“찾지는 못했소. 곧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난 자네가 그것을 찾지 못하기 바라네.”
도홍은 냉소를 터뜨렸다.
어차피 등무벽은 도홍이 찾는 마음 속의 그림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였다.
등무벽은 도홍이 이끌던 파랑대가 옥문관 밖의 사막에서 멸망하고 도홍과 옥철주만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친인 등량이 도홍과 인연이 있어서 일월곡에 머무르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흠!”
도홍은 나직하게 코를 푸는 듯한 바람 소리를 뿌렸다. 습관적인 반응이었다. 무시를 하는 것이 빨랐다. 간혹 마음 속에서 불이 타기는 하지만 반 년이라는 세월은 잔인하게도 도홍에게 인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나를 부른 이유는?”
“어젯밤에 이곳을 탈출하려던 자를 잡았다. 그를 취조해서 적지 않은 정보를 얻었다. 그는 관군의 하수인이었다. 그가 도주하려 한 이유를 찾아내고 보니 군병들이 일월곡을 치기 위해 숨긴 자였다. 우리는 그를 통해 알아낸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오?”
“그것은 흑월관주가 관군의 장수라는 사실이다. 그를 척살해 주기 바란다.”
“알았소.”
도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안 신세를 진 것도 있었으므로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혹여 탈출자를 통해 무언가 알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도홍은 몸을 일으켰다.
***
누각은 어두웠다.
누구도 다가오지 않는 장소에 그는 홀로 앉아 있었다.
“후! 이미 지나간 일이거늘!”
도홍은 몸을 비틀었다.
모든 것이 지나간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깨어날 수 없는 것은 미련 때문이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과거가 떠올라 마음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부러울 것이 없었고 전도가 양양하다고 믿었었다.”
지나간 과거가 다시 마음을 헤집으며 달려들자 도홍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말발굽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그날은 갑작스럽게 내린 눈이 허리까지 쌓인 날이었다.
감숙의 날씨는 불규칙하기가 변덕이 난 사춘기의 소녀가 뿜어내는 질투와 같았다. 예측하기도 어려웠고, 알았다 하더라도 대비하기가 쉽지 않았다.
춘삼월이 지나도 눈이 내리기 일쑤였고 밤낮의 기온차는 추측이 불가한 것이었다. 사막이라는 것이 낮에는 머리가죽이 벗겨질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지만 밤이 되면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한기가 몰려들었다.
그날은 때늦은 사월의 중순이었지만 밤새도록 온 눈으로 인해 천지가 백설로 덮여 있었다.
“오른쪽으로 간다.”
기련산맥에서 가욕관으로 뻗어내린 염제봉(炎帝峰)에서는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불과 오백 년 전만 하더라도 용암이 분출되고 화산의 폭발이 있었다는 소문이 있는 산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어느 모로 보나 화산의 징후는 없었다.
이십여 명에 이르는 군병들이 바삐 말을 몰고 있었다. 각기 활을 들거나 장창 등으로 무장한 군병들은 산의 정상을 향해 거칠게 내달리고 있었다.
그들에게 말의 무릎까지 빠져 드는 눈은 문제가 아닌 듯했다. 간혹 바람에 날려 보이지 않는 구덩이에 빠져 나뒹구는 군병들도 있었지만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곧 일어났다.
짐승을 몰고 있는 군병들은 두 개의 무리로 확연하게 구별되었다. 활을 든 군병들은 열 명이 되지 않았고 창을 든 군병들은 십여 명이 넘어 보였다. 활을 든 자들은 장군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몸에 면포갑(綿布甲)을 걸치고 있었다.
면포갑은 바람을 막고 몸의 온기를 보호하는 면을 안팎으로 대고 안에는 쇄자갑(鎖子甲)을 만들 때 사용하는 철로 만든 고리를 촘촘히 넣은 것으로, 추위를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활에 대해서도 강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천인호 이상의 장수들만 입을 수 있었다.
“백호를 찾았다!”
콰르르르!
산의 사면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고 산중의 왕이라는 호랑이의 울음 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서 뿜어지는 빛은 양천을 받은 눈에서 반사되는 잔광보다도 더욱 밝아 보였다.
“하하하! 드디어 찾았다. 산정으로 몰아라!”
노년으로 접어드는 흑염의 장군이 호탕한 목소리로 외쳤다. 전신에 걸친 면포갑 안으로 금빛이 나는 전포(戰袍)가 드러났다. 허리에는 한 자루의 어린도가 걸려 있었고 손에는 강궁(强弓)이 쥐어져 있었는데 이미 시위가 메겨진 상태였다. 가슴까지 늘어지는 수염이 바람에 흔들렸다.
감숙에서 모래바람과 벗하여 살아가는 군병들 중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느린 군병들의 숫자만 삼만 명이 넘으며 중원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는 그는 감숙에서만큼은 황제가 부럽지 않은 자였다.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풍승(馮勝)!
서역의 삼십오 개 이족들이 이름만 들어도 줄행랑을 친다는 장군의 이름이었다.
“하하하! 과연 기련산에 백호가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군.”
장군은 호탕한 소리를 토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주위에 있던 십여 명의 장군들이 빠르게 말을 몰아 산정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풍승의 주위로 삼 인이 다가왔다.
“하하하! 장군께서는 곧 기련산의 신령스러운 영물을 손에 넣을 것 같군요.”
말을 토하며 다가온 이십대 중반의 사내는 백마를 타고 있었고 허리에는 도갑이 달랑거리고 있었다. 칠 척의 키에 몸에 걸친 쇄자갑이제법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허허! 용 장군, 자네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 같군. 어찌 되었던 기련산까지 오기를 잘했네.”
풍승은 만족감에 넘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가욕관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기련산 염제봉까지 백호 사냥을 나가자고 풍승에게 제의를 한 사람은 용 장군이라 불리는 젊은 장군이었다. 그의 이름은 용도신(龍刀神)으로 파랑대를 통할하며 서역정벌대 서열 십오 위의 천인호 장군이었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저는 사냥꾼들로부터 이곳에 백호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허! 그것으로 족하네. 용 장군이 아니었다면 기련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결국 백호도 볼 수 없었을 것이야.”
기련산은 감숙의 서쪽에 치우친 산으로 청해와 경계를 이루는 긴 산이었다. 서역정벌군이 위치하고 있는 주천에서도 말을 달려 한나절이 걸리는 거리였다. 평상시라면 풍승이 사냥을 나설 리도 없는 곳이었다.
“용 장군, 아무튼 자네 덕에 백호를 보게 되었군.”
용도신은 가볍게 손을 모아 예를 올렸다. 더 이상 대답을 하다 보면 자신에 대한 칭찬이 계속 나올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풍승을 둘러싼 많은 경쟁자들의 눈에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용도신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고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장군! 어서 가시죠!”
다가온 삼십대 후반의 장군이 가볍게 풍승을 재촉했다. 전신에 중후한 기도를 뿌리는 장군을 바라보는 풍승의 눈에 자애로운 미소가 어렸다.
등에 한 자루의 관인도(寬刃刀)를 맨 장군은 몸에 쇄자갑을 걸치고 얼룩점이 박힌 말을 타고 있었는데 그가 풍승 장군의 조카로 풍운몽(馮雲夢)이라는 이름을 지닌 천인호 장군이었다.
“어서 가자!”
퍽!
히히히힝!
풍운몽의 말을 들은 풍승이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자 말이 투레질을 토하며 앞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는 장군들도 일제히 달려나갔다.
“용 장군, 어서 갑시다.”
풍운몽이 재촉했다.
“그러시지요.”
용도신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용도신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풍운몽은 거칠게 말의 엉덩이를 후려쳤다. 말은 곧 투레질과 함께 달려나갔다. 모두가 산정으로 달려가는 통에 용도신만이 혼자 남게 되었다.
“언젠가는 나도 중원제일의 장군이 되고 말 것이다.”
용도신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말의 무릎까지 빠져 드는 눈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말이 지나간 흔적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그의 동공에서는 지면을 덮은 눈을 녹일 것 같은 강렬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용도신은 대다수의 장군들이 자랑하는 명문대파의 제자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뛰어난 세가(世家)의 후예도 아니었지만 실력으로 천인호의 위치에 오른 만큼 다른 이들과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풍승 장군님처럼 뛰어난 장군이 되어 초원을 질타하고 서역을 평정하리라.’
“이럇!”
용도신은 급히 말의 옆구리를 허벅지로 조이며 발로 찼다. 말이 앞발을 찼다. 투레질을 토한 말이 거친 숨을 토하며 산정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다시 눈이 내렸다.
어디선가 불이 타오르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도홍은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잠을 자거나 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을 뜨고 바라보니 눈 앞의 향촉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오랜 상념에서 깨어났다.
“모든 것은 지나간 일이다. 하지만 내가 이끄는 파랑대가 그리도 처절하게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석실에 앉은 도홍은 향촉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미친 듯 출렁거리는 불길이 물 속에서 자라는 수초(水草)가 거친 물결에 휩쓸리는 것 같았다.
도홍은 타오르는 불길에 눈을 던지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지난 이 년 반이나 되는 기간 동안 그는 마음 속에 이는 번뇌를 추적했다. 그러나 번뇌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그의 마음 속에서 똬리를 튼 채 자신을 보며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놈을 잡아죽이려고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좌절감이었다.
“그때는 죽을 것 같았지.”
도홍은 불빛 속에 스쳐 지나가는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웃었다. 지난 이 년 반 동안 그는 옥철주와 함께 사막을 헤매고 버러지처럼 살아남았다.
남경을 출발해 감숙의 황량한 사막에 이르렀고 옥문관을 넘어 서역을 공격해 들어갈 때만 해도 도홍은 자랑스러운 서역정벌군의 정천호였다.
정오품(正五品)의 관직을 지닌 그에게 전장은 원하던 일이었다. 장군이라는 지위. 장군은 싸워야 하고 싸움에 이기는 것이 출세가 보장되는 일이었다.
한때는 싸움만을 원했었다.
스물두 살의 나이에 천인호, 그것도 정천호에 올라 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장군이 되었을 때 출세가 눈 앞에 있는 듯 보여졌다. 그것은 희망을 부채질했다.
남은 것은 무관으로서의 역량이었다.
명조는 국토를 넓히기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때문에 변경은 전란의 연속이었다. 이런 곳에서 무공을 세우기는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황제의 일언에 군부는 힘을 얻었다.
“한대 이후 중원의 통치를 받았던 서역을 점령하리라.”
홍무제(洪武帝)는 나이가 들었어도 혈기가 왕성했다. 몽고를 몰아낸 주원장(朱元璋)은 서역을 버릴 수 없었다.
그는 무명이 높았던 풍승(馮勝)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임명하여 서역을 치게 했다. 원을 몰아내는 데 공이 컸던 풍승은 응천부(應天府)를 출발하여 서안(西安)을 거쳐 감숙의 난주(蘭州)로 들어섰다.
오래도록 변방의 관문 역할을 했던 옥문관과 양관까지 영토를 넓히고 당대의 땅을 다시 회복한 풍승은 서역의 침공을 막기 위해 제 삼의 관문으로 가욕관을 선택했다. 풍승은 군사들과 도편수들을 동원해 비단길을 따라 토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때 풍승은 시간을 끌기 위해 일단의 병력을 파병했다.
“파랑대는 양관을 통과해 태특마호까지 전진하여 교두보(橋頭堡)를 확보하라.”
풍승 장군의 명령을 받았을 때 도홍으로서는 말을 잊어버렸다. 당시 서역정벌군은 돈황(敦煌)에 진을 치고 있었다.
옥문관과 양관을 벗어나면 위구르족이 진을 친 서역이었다. 과거 한대에 중원이 차지한 적이 있었고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세운 적이 있다고는 하나 오래도록 서역은 위구르족의 땅이었다. 불과 오 년 전 중원 땅에서 완전히 손을 뗀 북원(北元)의 기병들도 서역 땅에서 고토회복을 노리고 있었다.
돈황에서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태특마호까지는 무려 천 리나 되는 길이었다. 흔히 천산남로라 부르는 거친 황야와 모래사막을 건너야 하는 험난한 길이었다. 더구나 위구르족들의 반발은 거세게 명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아무리 황제의 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불과 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태특마호까지 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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