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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소드마스터 1권 (1)

2018.05.11 조회 11,674 추천 102


 #탑에 갇히다
 
 
 
 사방이 조용했다.
 어둠으로 가득한 미궁.
 윤곽을 밝히는 건 양초의 불빛뿐이다.
 그 사이에서 웬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흑흑, 흐읍. 끕.”
 소리를 내는 건 어린 소년이었다.
 무엇이 그리 서러운지, 수 시간 동안 계속 같은 자세다.
 한데 이상한 게 하나 있다.
 이렇게 슬피 훌쩍이면서도.
 결코 소리를 높이진 않는다는 것이다.
 소년의 이름은 에밀.
 승천의 탑에 들어온 도전자 중 한 명이다.
 “후욱, 흑. 으윽······ 으끄윽······.”
 숨소리가 진정되자 에밀은 조금씩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엔 온통 암흑뿐.
 그나마 보이는 곳에서도 희망이라 할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끼 낀 벽.
 벌레 하나 보이지 않는 차가운 복도.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녀도 똑같은 풍경이 이어질 뿐이다.
 “후우, 후우. 하······.”
 간신히 진정한 에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여전히 어둠으로 가득했다.
 한 걸음.
 발을 내딛는다.
 달그락!
 무언가가 발에 차여 소리를 냈다.
 고개를 아래로 내린 에밀의 눈이 커졌다.
 “히, 히익!”
 어둠 속에 있던 건 바싹 마른 해골이었다.
 살점조차 남지 않고 스러진.
 그래서 누구도 봐 주지 않는 동안 죽어 간 자의 해골.
 자기도 조만간 저렇게 될 거라 생각하니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왔다.
 “으, 으아아아아!”
 간신히 참았던 울음이 다시 거하게 터졌다.
 에밀은 제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울음소리가 벽과 천장에 부딪혀 메아리로 퍼져 나갔다.
 하염없이 울고 있던 에밀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가득 맺힌 눈물 너머로, 불과 며칠 전의 자신이 보였다.
 
  * * *
 
 아리온 백작가는 북방의 사자로 이름을 떨쳤다.
 에밀은 그 아리온가의 18대 장손이었다.
 행복한 가정과 평화로운 영지.
 귀족의 명예, 밝은 미래
 이 모든 게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그는 18대 백작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주로서 떳떳한 삶을 살아갔겠지.
 하지만 패전과 함께 그 꿈도 같이 깨졌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싸우다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에밀을 대피시키고 야만족에게 살해당했다.
 이 상황에 나타난 것이 수도에 있던 큰아버지.
 베른 후작이라 불리는 그는 수만의 국왕군을 데려와 야만족을 몰아냈다.
 처음 봤을 때, 그가 했던 말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걱정 말거라. 이제부터는 내가 동생 녀석을 대신해 너를 키워 주마.
 
 그 말을 들은 세 달 후.
 에밀은 강제로 승천의 탑에 내던져졌다.
 베른 후작과, 그 아들인 제임스가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서.
 ‘큰아버지, 형님······ 아니, 베른 후작! 이 씹어 죽일 반역자들 같으니! 그딴 더러운 수를 써서 내 가문을 먹고 싶었느냐!’
 애당초 그 군대는 몇 달 전 국경에 배치되었어야 했다.
 거기에 참견한 게 베른 후작이었음을 눈치챈 건, 이미 상황이 너무 늦은 뒤였다.
 에밀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아직도 마지막으로 본 그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었다.
 병사들로 둘러싸인 너머, 활짝 미소 짓는 부자를.
 승천의 탑은 표면상 고대인들이 만든 관문이다.
 신에게 닿기 위해 만들었다는 탑.
 엄청난 힘이 보상으로 준비되어 있다곤 하나,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진 베일에 싸여 있었다.
 하나, 한 가지.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확실했다.
 처음부터 그들은 자신을 죽이고 가문을 가로채려 획책한 것이다.
 “하아, 하아······.”
 시간이 지나자 점점 울음소리가 사그라들었다.
 며칠 동안 먹은 거라곤 벽의 이끼뿐.
 그런 상황에서 수 시간 동안 울었다.
 더 울고 싶어도 이젠 그럴 힘이 없었다.
 “······배고파.”
 한참을 더 엎드려 있던 에밀의 첫말.
 그것은 삶의 원초적인 욕구 중 하나인 배고픔이었다.
 저벅.
 일어서서, 앞으로 걷는다.
 지금까지처럼 이끼라도 뜯어 먹기 위해서.
 일어서 걷던 에밀의 몸이 벼락 맞은 듯 굳었다.
 인기척이었다.
 며칠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미궁.
 그곳에서 드디어 자신 외에 다른 존재를 확인한 것이다.
 ‘뭐, 뭐지?’
 하지만 그건 결코 자신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복도 너머로 울려 퍼지는 괴성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 탑에서 돌아온 사람은 없다.
 그들이 여기서 어떻게 됐을까?
 생각이 커지는 와중에도 인기척은 점차 가까워졌다.
 촛불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희끗희끗 비친다.
 가까워진 그림자가 모퉁이를 도는 순간.
 에밀은 호흡을 멈추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악마의 하수인들이 가진 검붉은 피부다.
 붉은 눈.
 침을 질질 흘리는 입.
 뾰족하게 튀어나온 때 탄 손톱.
 닫혀 있던 입이 열리고, 한마디를 내뱉었다.
 “······고블린?”
 “크륵?”
 고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동시에 에밀은 기겁하며 뒤로 엎어졌다.
 “으, 으아악!”
 일반 병사들에게 있어, 고블린은 꽤나 흔한 몬스터였다.
 놈들은 숲 가장자리나 물가에 주로 사는 최약체였다.
 틈만 나면 토벌당하는 게 일상일 정도로.
 하지만 곱게 자란 도련님에게 고블린은 낯설기 짝이 없었다.
 괜히 악마의 하수인이라 생각된 게 아니었다.
 “키, 키익!”
 고블린도 눈앞에 나타난 적을 보고 긴장했다.
 손톱을 세우고, 눈을 부릅떴다.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사이 에밀은 자신이 무언가를 깔고 앉았음을 깨달았다.
 ‘아······.’
 아까 보았던 죽은 자의 해골이다.
 에밀은 천천히 아래를 보았다.
 해골은 더 이상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부서져 있었다.
 사람 한 명의 몸무게를 감당하긴 너무 벅찼던 모양이다.
 한데 이상하다.
 분명 뼛조각밖에 없을 텐데,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손을 아래로 집어넣자 무언가가 잡혔다.
 단검.
 단검의 손잡이다.
 ‘이 사람은 살아생전에 트레저 헌터 같은 사람이었구나.’
 그렇게 판단한 순간 고블린이 입을 쩍 벌렸다.
 단검을 본 모양인지 놈은 그대로 돌진해 왔다.
 무기는 없지만, 기다란 손톱과 이빨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휘익!
 에밀은 고개를 숙여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맨몸으로 손톱을 완전히 비껴 낼 순 없었다.
 촤학!
 피가 튀기고, 고블린이 거칠게 숨을 쉬며 으르렁거렸다.
 “키익? 케륵킥취륵키웨엑!”
 “으, 으아아!”
 첫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긁고 지나갔다.
 에밀은 기겁하여 뒤쪽으로 기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축축한 물 같은 게 흘러내렸다.
 보지 않아도 그게 피라는 건 알고 있었다.
 “키익! 캭! 캬아아! 키아아아!”
 다행히 고블린의 공격은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길고 투박한 손톱.
 손톱이 벽돌 사이에 박혀, 몸을 붙들어 맨 것이다.
 덜덜.
 허리가, 온몸이 떨렸다.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파들파들 떨리던 눈엔 어느새 독기가 배어들고 있었다.
 “죽는다······ 이 녀석을 죽이지 않으면, 이번엔 내가 죽는다······!”
 핏물의 감촉이 일깨워 주었다.
 이건 한낮의 꿈 따위가 아닌, 엄연한 현실이고.
 울고만 있다간 이 녀석의 먹이가 된다는 사실을.
 죽이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승천의 탑은 그러한 장소였다.
 갇힌 지 사흘 만에 에밀은 비로소 그것을 깨달았다.
 에밀은 단검을 꽉 쥐었다.
 팔을 빼낸 고블린이 으르렁거렸다.
 
  * * *
 
 화르륵.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던 촛불이 한차례 흔들거렸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푸른 불꽃.
 그 빛에 비치는 광경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사지는 잘게 베여 조각이 났다.
 도대체 어디에 이만큼의 피를 감추고 있었는지, 바닥은 검은 피로 흥건했다.
 그 위의 몸은 얼마나 찔렀는지 숫제 으깨져 있다.
 이미 살아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에밀은 칼질을 멈추지 않았다.
 죽은 게 확실해진 뒤에도 찌르고 또 찔렀다.
 단순 작업을 반복하는 기계처럼.
 기계를 움직이려면 연료가 필요하다.
 에밀이란 기계의 경우, 그 연료는 음식이었다.
 꼬르륵.
 배곯는 소리가 에밀의 정신을 일깨웠다.
 헐떡이며 일어서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우욱!”
 에밀은 구석으로 가 연신 토했다.
 첫 살생.
 살아남기 위해 죽였다고는 하나, 그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본래 그는 절대 고블린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고블린이 비록 약하다고는 하나, 에밀은 그보다 훨씬 더 약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일 뿐이니까.
 거기다 들어온 후 계속 굶기까지 했으니, 사실상 이긴 게 기적이었다.
 10여 분 정도 지났을까.
 간신히 몸을 추스른 에밀이 사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핏 본 고블린은 맨몸이 아니었다.
 승천의 탑은 바깥과 완전히 단절된 곳.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필요한 건 챙겨서 가야 했다.
 “윽······!”
 사체의 몰골을 보자마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에밀은 이를 악물고 거리를 좁혔다.
 스륵.
 슥.
 피 떡이 된 시체를 뒤지자, 몇 가지 쓸 만한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고블린의 허름한 가죽 바지> 습득.
 <하급 상처 재생 약> 습득.
 <고블린의 독니> 습득.
 
 잘 가공한다면 쓸 만하겠지만, 지금은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다.
 먹을 것.
 무언가 먹을 만한 것을 찾아야 했다.
 “어디 육포 같은 게 없나······?”
 시체를 뒤지던 에밀의 머릿속에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화롯가에 자신을 앉혀 놓고 이야기하던 아버지.
 그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네 엄마랑 결혼하기 전이었나, 야만족들에게 포위당해서 꼼짝없이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지. 식량은 떨어지고, 놈들은 조여 오고.
 -그래서요?
 -어떻게 동굴 속에 숨긴 숨었는데, 녀석들도 내가 지독한 걸 아는지 집요하게 추격해 오더라. 하는 수 없이 먹었다.
 -네?
 -동굴 트롤이라든가, 거대 흡혈박쥐 같은 놈들 말이다. 의외로 꽤나 먹을 만했지.
 
 그렇게 말한 아버지는 에밀을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물론 너는 절대 그럴 일 없을 것이다. 이 아비가 절대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사체에서 나온 피는 이제 질척이며 굳어 가고 있었다.
 끈끈한 바닥은 마치 늪 같았다.
 희생자가 발을 디디면 그대로 끌고 들어가는 바닥없는 늪!
 “······안 돼. 나는 사람이야, 나는 사람이라고.”
 에밀은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했다.
 다른 곳에 무언가가 더 있을 것이다.
 이끼나 몬스터 사체가 아닌, 먹을 만한 무언가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사체에서 멀어졌다.
 그럴수록 꼬르륵거리는 소리는 커져만 갔다.
 어두운 던전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나 에밀은 아까와 약간 달라져 있었다.
 조금 더 독기가 강해지고, 조금 더 피 냄새에 익숙해졌다.
 “하아, 하아, 하아.”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에밀은 천천히 발걸음을 멈췄다.
 신선한 공기가 볼 위로 흐르는 걸 느낀 것이다.
 ‘어라? 승천의 탑 안에 신선한 공기가 있다고?’
 공기는 바깥에서 들어온다.
 그렇다는 말은, 저 앞에 출구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출구!’
 여기서 나가서, 실컷 먹고, 푹 잘 수 있는 바깥의 세상.
 그게 눈앞에 있었다.
 “바깥, 바깥! 바깥이야! 나갈 수 있어!”
 이미 사흘을 굶은 몸이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으나, 에밀은 젖 먹던 힘까지 써서 나아갔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자 보인 것은 출구가 아니었다.
 “아······.”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절망은 무겁다.
 특히 살짝 희망을 보여 주고 그걸 짓밟을 때, 더욱 무겁다.
 에밀은 멍하니 층계 위를 바라보았다.
 2층.
 아직 가 보지는 않았으나, 틀림없이 저 위에도 몬스터가 있을 것이다.
 고블린보다 훨씬 더 강한 몬스터가.
 “하아······.”
 바깥으로 향하는 출구는 없고, 위에는 몬스터가 웅크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죽어서, 아까의 해골처럼 될 것이다.
 베른과 제임스가 부당하게 뺏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동안.
 “그렇게 둘 수는 없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것만큼은 절대로!”
 살아남자.
 살아남아서 놈들에게 복수하자.
 고통스러울 때마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에밀은 천천히 걸어 고블린 사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혹시 누군가 거둬 가진 않았을까.
 마음속에선 그런 생각이 계속 들었다.
 다행히도 잘게 다져진 사체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막상 보니 다시 토악질이 나왔다.
 아까 그렇게 굳게 다짐했던 게 무색할 정도였다.
 “우욱! 웨에엑! 에게엑! 에윽! 으으우욱!”
 먹은 게 없다 보니 위액만 줄줄 흘러나왔다.
 아니, 그마저도 이젠 없어 헛구역질이 계속되었다.
 비틀.
 벽에 기대 있던 에밀이 일순 휘청거렸다.
 독기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하아, 하악, 하악.”
 달뜬 숨엔 열이 한가득 올라 있었다.
 의학 지식이 없더라도 상태가 심각하다는 건 느껴졌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먹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배고픔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으, 으아아압!”
 사체로 달려간 에밀이 크게 입을 벌렸다.
 단검에 으깨지다시피 한 살은 부드럽게 씹히고, 훌쩍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한 입. 그리고 또 한 입.
 정신없이 물어뜯다 보니 천천히 배가 찼다.
 그러자 미처 맡지 못했던 피비린내가 다시 코끝으로 몰려왔다.
 “우, 우웨에에에엑! 에에엑! 으게에엑!”
 미처 막을 새도 없이 토사물이 입 밖으로 나왔다.
 그렇지만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토하면서 먹고, 그리고 토했다.
 그렇게 한 끼 식사를 마쳤다.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가 탑의 곳곳에 울려 퍼졌다.
 에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겹고, 비릿하고, 혐오스러웠다.
 그렇지만 더는 배고프지 않았다.
 그건 아주 좋은 일이었다.
 ‘살아남았구나, 나는.’
 이런 짓을 해서까지 살아남아야 하는가?
 대답은 당연히 ‘그렇다’였다.
 가문을 집어삼킨 그들에 대한 복수.
 그것을 위해서라도 자신은 살아서 나가야 했다.
 에밀은 독기를 품고 고블린의 핏자국을 뇌리에 새겼다.
 다음 차례엔 망설임 없이 먹기 위해서.
 그때였다.
 ‘띠링’ 하는 알림과 함께 네모난 창이 떠올랐다.
 
 -스킬 <고블린의 비열함>을 습득하였습니다.
 
 -스킬 <후려치기>를 습득하였습니다.
 
 이건 또 무엇일까.
 머릿속에 알림이 뜨고, 무언가를 습득한다는 건 처음 듣는 일이다.
 경지에 올랐던 아버지, 날고뛰던 기사단의 기사들.
 그들 중 스킬을 얻었다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이름은 또 왜 이런지.
 고블린의 비열함이라니, 마치 자신이 고블린이라도 된 느낌이다.
 ‘흥, 나는 아리온 백작가의 적통 계승자, 에밀 아리온이다. 고블린 따위가 아니야!’
 아리송한 이야기지만, 에밀은 의외로 쉽게 받아들였다.
 여기는 승천의 탑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후우.’
 잠시 계단을 바라본 에밀이 심호흡을 했다.
 저 위의 괴물은 고블린보다 훨씬 더 강할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에 맞게, 이쪽도 한층 더 강해져야 한다.
 우선은 스킬부터.
 에밀은 조심스레 손을 움직이며, 후려치기를 사용한다 생각해 보았다.
 휘익-!
 힘이 실린 손이, 믿을 수 없을 만한 속도로 움직였다.
 그냥 손에 힘을 담아 움직이는 것과는 천지 차이였다.
 “오오······?”
 눈이 절로 크게 뜨였다.
 어릴 적 연무장에서 본 기사들의 움직임이 꼭 이랬다.
 속도는 그쪽이 더 빠르긴 하다만.
 기세를 몰아 고블린의 비열함도 사용해 보았다.
 하지만 그건 후려치기와 달리, 바로 써지지 않았다.
 대신 어떤 알림 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대상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고블린의 비열함은 타깃을 정하고 쓸 수 있는 것 같다.
 여하튼 간에 이로써 스킬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았다.
 이젠 아이템을 살필 차례였다.
 ‘아이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할 것도 없었다.
 확인하겠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눈앞에 아이템 목록이 나타난 것이다.
 
 <고블린의 허름한 가죽 바지>
 -고블린이 입고 있던 가죽 바지다.
 -피가 묻고 해져서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하급 상처 재생 약>
 -피를 멎게 하고, 새살을 돋우는 효과가 있는 가루 재생 약이다.
 
 <고블린의 독니>
 -누런 때가 끼어 있는 고블린의 독니.
 -강한 독이라기보다는, 음식물이 썩어 만들어 낸 독기가 서려 있다.
 
 <?>
 -?의 단검.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다.
 
 ‘단검은······ 뭐지?’
 효과도, 제목도 보이지 않는 아이템.
 한눈에도 다른 셋과 다르다는 게 보였다.
 에밀은 잠깐 갸웃거리다, 이내 단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 한 번, 후려치기를 쓴다.
 부웅!
 무기를 가진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기사들도 반응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로 신속한 일격이었다.
 “오!”
 에밀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맨손과 무기를 든 것 간의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이 정도라면 다음 층의 괴물도 어렵지는 않으리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왠지 그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 보면 출구가 있을까.
 천천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저기 어딘가에 나갈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설령 그 바깥이 천상이더라도.
 반드시 나가야만 했다.
 “내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목 잘 닦고 있어라, 이 간악한 놈들.”
 베른 후작에 대한 복수.
 그것 외에도 나가야 할 이유야 많았다.
 가문을 잇고, 원수를 갚는 것 둘째 치고.
 우선 여기서 굶어 죽거나 혼자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라크리사는 어떻게 됐을까?’
 에밀은 몸을 일으키다 문득 생각했다.
 라크리사, 그녀는 어릴 적 자신과 혼약을 맺은 약혼녀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적, 가끔 저택을 방문할 때 어울린 적 있었다.
 비록 몇 번 보지 않았다지만, 그때마다 얼굴을 붉히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항상 내 편을 들어 줬었지.’
 가정교사의 숙제를 마치지 않았거나.
 동네에서 말썽을 피웠을 때.
 그때마다 혼나던 에밀의 편을 들어 준 착한 아이다.
 비록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론 만나지 못했지만.
 ‘잘 지내고 있어야 하는데.’
 북방의 수호신이던 아리온 백작가가 사라졌다.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을 터.
 부디 휩쓸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어쨌든, 이 현실을 바꾸려면 지금은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서 죽으면 놈들의 뜻대로 되는 셈이니까.
 “반드시 살아 나간다. 고블린 사체가 아니라 더한 거라도 먹어 주마.”
 이를 악물고 복도를 나아갔다. 아니, 가려 했다.
 비틀.
 다시 한 번 휘청거린 몸이 그대로 복도에 엎어졌다.
 에밀은 힘을 주려 했으나,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사흘 내내 굶주리고, 울고, 먹고, 화내고.
 그러느라 생기란 생기는 모조리 써 버렸으니까.
 “올라······가야······.”
 마지막으로 손을 뻗던 에밀이 결국은 정신을 잃었다.
 그 위로 어둠이 내렸다.
 막막하지만, 마냥 차갑지는 않은.
 
  * * *
 
 내가 들어간 곳은 승천의 탑.
 대륙 4대금역 중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다.
 하늘 끝까지 뻗은 탑.
 이 탑이 지금껏 잡아먹은 사람만도 10만 명에 달했으니까.
 2층에 올라서자, 들어본 적 있는 케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앞으로 나아가자 나를 반긴 건 두 마리의 고블린.
 아니, 지팡이를 들고 있었으니 고블린 샤먼Goblin shaman이라 해야 맞았다.
 아무래도 층을 오를 때마다 더욱 강한 상대가 나오는 것 같다.
 그 예상대로, 고블린 샤먼은 강했다.
 놈들의 주술은 조악하지만 그만큼 지독했다.
 게다가 둘이라서 호흡마저 착착 들어맞았다.
 반면 나는 한낱 어린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겨야만 했다.
 이기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그리고 살아남지 못하면 복수도 할 수 없고 명예도 가질 수 없었기에······.
 두 마리의 고블린 샤먼을 남김없이 뜯어 먹었다.
 그러면서 운 좋게 기초나마 마력을 익힐 수 있었다.
 행운이었다.
 정말로 행운이었다.
 아마도 그때, 마력을 얻지 못했다면.
 나는 어딘가에서 차가운 바닥에 누웠을 것이다.
 1층에 있었던 그 해골처럼.
 
 
 
 #탑을 오르다
 
 
 
 구구궁.
 탑의 27층에는 두 마리의 고대 스톤 골렘이 포진하고 있었다.
 마법 역장으로 보호되는 몸체.
 오러를 방불케 하는 막강한 공격.
 어디 하나 빠질 데 없는 고대의 괴물이었다.
 물론, 지금은 한낱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았다.
 와그작!
 아득! 아드득!
 골렘의 잔해 위.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이는 20대쯤 됐을까.
 온몸에 근육과 흉터가 가득한, 야생미가 넘치는 남자였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에밀.
 오랜 세월 전, 승천의 탑 1층에서 고블린 사체를 먹던 어린 소년이다.
 “으으윽······! 하아, 아웁! 우웁! 우굽!”
 이제는 남자가 된 에밀이다.
 그는 무엇이 바쁜지 급히 손에 든 것을 입안으로 욱여넣고 있었다.
 식사다.
 식탁 용구는 맨손, 그리고 메뉴는 고대 스톤 골렘의 핵이다.
 스톤 골렘의 핵!
 엄청난 마나의 집약체인 그것은, 골렘의 동력원이자 가장 단단한 광물질이기도 했다.
 그걸 대놓고 씹을 수 있는 존재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씨발! 아프잖아! 씹······ 끄웁! 안 먹을 수도 없고······. 아윽!”
 적어도, 그 본인은 자신을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스킬 <고대 언어>를 습득하셨습니다.
 
 -스킬 <마나 역장>을 습득하셨습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알림이 귓가에 들려왔다.
 에밀은 천천히 일어나 몸에 힘을 주었다.
 고오오-!
 솜털이 곤두서는가 싶더니, 온몸을 투명한 기파가 둘러쌌다.
 방금 전 처치했던 골렘이 쓰던 역장 결계다.
 그 방어력은 어떤 칼도, 마법도 부술 수 없었다.
 괜히 고대인의 기술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최강의 방어 기술을 손에 넣었다.
 에밀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이거라면 어떤 공격에도 대처할 수 있으니까.
 더 이상 아프거나, 어디가 잘리거나 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재생되긴 하지만, 기왕이면 고통은 없는 게 좋지.’
 한창 흐뭇해하던 에밀은 문득 두 번째 스킬을 떠올렸다.
 고대 언어.
 마침 스킬을 테스트할 견본도 하나 가지고 있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내고, 거기에 음각된 글귀를 읽었다.
 “저장 장치를 가동한다, 라고?”
 에밀이 천천히 내용을 읽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검날에 새겨져 있던 알 수 없는 언어.
 그것이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놀랄 새도 없이, 그것은 허공에 몇 개의 문장이 되어 나타났다.
 전부 단검에 있던 것과 똑같은 내용이다.
 에밀은 홀린 듯이 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읽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조차 잊은 채로.
 “여기, 나의 기억을 담노나니 후일 누가 나를 발견한다면 이 단검과 기억을 반드시 의장님께 전하도록 하라.”
 그 순간, 빛이 커지더니 그대로 에밀을 집어삼켰다.
 반응할 새도 없었다.
 물밀듯이 쏟아지는 광채 너머로, 수십 가지 영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00층이 넘을 것 같은 거대한 탑들.
 공중에 떠 있는 도시와 비공정.
 하나같이 낯선 모습뿐이다.
 호기심이 동했다.
 그러나 단편적인 기억은 순식간에 다른 풍경으로 넘어갔다.
 익숙한 풍경이다.
 저곳은 수년 전, 베른 후작의 흉계에 당했을 때.
 처음 들어가자마자 눈앞에 나타난 바로 그곳이었다.
 가만히 있자니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시도르, 카터 팀의 팀장으로서 ~에 들어왔다. 우리의 목적은 ~의 ~을 파악하고, 그 힘인 ~를 얻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금 X급 던전인 ~에 들어왔다. 그러나 15층에서 비열한 세오든이 나를 배신했다. 녀석은 힘에 취해 있었고, 그걸 전부 손에 넣으려 했다. 나는 간신히 돌아왔으나, 문은 닫혀 있었다. ~에 꼼짝없이 갇힌 것이다. 부활이 불가능한 지금 ~에 진입한 건 미친 짓이었다. 그 잘못된 선택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렇구나!’
 에밀은 목소리를 들으며 놀라워했다.
 1층의 해골, 이시도르는 몬스터에게 죽은 게 아니었다.
 15층까지 무탈하게 올라갔던 그는 믿던 동료에게 배반당했다.
 간신히 도망쳐 1층까지 왔으나, 탑은 이미 닫힌 상태.
 결국 그는 부상을 치유하지 못하고 쓸쓸히 죽어 갔다.
 기억을 보고 있자니 이시도르에 대한 동정심이 생겼다.
 그가 선한지 악한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이 탑에서 쓸쓸히 죽을 사람이 아니란 건 확실했다.
 에밀은 묵묵히 목소리를 들었다.
 
 -세오든은 홀로 ~의 힘을 얻기 위해 올라갔다. 멍청한 녀석. 그 힘은 네놈 혼자서 쓸 게 아니란 말이다. 하긴, 놈을 호위로 고용한 내 잘못이겠지. 실력 하나만 믿은 과거의 내가 후회스럽다.
 
 내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대개는 이시도르의 독백이었다.
 하지만 가끔 꽤나 유용한 정보도 보였다.
 예를 들면 탑에 대한 정보나 원리 같은 것들.
 
 -이 탑에서 식량을 얻을 방법은 존재치 않는다. 이끼도, 벌레도 없는 완벽한 강철의 땅. 가져온 양식은 충분하다. ×× 전에 클리어할 수 있으니 문제는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강철의 땅이라.’
 에밀은 고개를 들었다.
 괴이한 문양이 음각된 가운데, 이끼와 버섯 따위가 보인다.
 이시도르가 본 탑과 에밀이 보는 탑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어느덧 내용은 마지막 부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 부분에서, 이시도르는 탑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다.
 
 -이 던전은 ~전부터 있었다. ~가 발명되고, 신을 노예로 삼았어도 이 던전을 파헤칠 수는 없었다. 나 이시도르는 그 비밀을 파헤치려 했으나, 세오든의 배신 때문에 여기서 생을 다했다. 후임자여, 누군진 모르겠지만, 나가면 이시도르의 억울함을 증언하고 세오든 씹어 먹을 놈, 그리고 놈을 소개시켜 준 ~길드에 반드시 소송을 걸도록!
 
 파앗!
 빛이 다하고, 단검은 평범한 무기로 되돌아왔다.
 에밀은 멍하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확실히 알았다.
 이건 평범한 단검이 아니었다.
 기억을 자유자재로 보여 주는 고대인의 아티팩트!
 ‘밖에서라면 천금을 줘도 구할 수 없는 기물이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냥 고대인이 쓰던 식기라도 성 한 채 가격에 거래된다.
 한데 기억을 보이고 담는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라니.
 일국의 공작 위라도 팔아야 겨우 노려 볼 만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의 가치와 별개로, 얻은 정보들도 범상치 않았다.
 우선 이 탑의 역사에 얽힌 비밀부터 그러했다.
 ‘고대인들이 이 탑을 세운 게 아니었다니, 도대체 여긴······?’
 현세와 수천 년의 간격을 두고 번영한 고대의 문명.
 그들은 드래곤을 병기 삼고, 신마저 무릎 꿇렸다고 전해졌다.
 지금의 인류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대했던 것이다.
 이 승천의 탑도, 역사에서는 그런 고대인의 건축물이라 가르쳐 왔다.
 하지만 이 단검의 기억은 그게 아니라 말하고 있었다.
 수천 년 후에 쓰인 역사서.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담은 아티팩트.
 무엇이 진실을 담고 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고대인들이 아니라면, 여긴 도대체······.’
 의문이 꼬리를 무는 순간, 다른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에테르식 저장 장치가 활성화됩니다.
 
 -에테르식 저장 장치를 사용 가능합니다.
 
 에밀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의 진정한 용도가 아티팩트였다니.
 아무것도 모르고 무기로 써 온 지난 세월이 떠오른다.
 “크흠, 흠.”
 헛기침을 한 뒤, 집어넣었다.
 알았으니 조금 더 곱게 써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위로 걸음을 옮겼다.
 힘이 남았으니, 다음 층을 깨는 데 쓰려는 것이다.
 수많은 상처로 가득한 몸이, 계단 위로 사라져 갔다.
 얼마 후, 그 너머로 새로운 몬스터의 괴성이 들려왔다.
 
  * * *
 
 “드디어······ 100층······!”
 에밀은 감개무량한 한숨을 내뱉었다.
 눈앞엔 육중해 보이는 금속 문이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시간을 세는 걸 포기할 정도로.
 몇 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탑의 각 층마다 있는 수많은 난관들.
 하나하나, 힘들지 않은 게 없었다.
 매 층마다 몬스터가 나오는 건 익숙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탑은 새로운 난관을 내놓았다.
 각종 마법과 함정, 그리고 기관 장치들.
 어떤 층에서는 5년 이상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렇게 살아남고, 또 살아남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날짜가 얼마나 지났는지 아는 건 진작 포기했다.
 그래도 얼추 짐작하기로는 최소한 100년 이상.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가 봤자, 복수는 이미 물 건너간 게 아닐까?
 멍하니 문을 보던 에밀이 흘깃 등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깨어 온 수많은 난관이 가득한 탑.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이젠 집처럼 익숙하다.
 그러나 나가야 했다.
 설령 복수도, 인연도 스러졌다 하더라도.
 이 외로움만큼은 도저히 풀어지지 않았으니까.
 다른 사람과 만나고 싶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음식을 먹고, 또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동안 얻은 정보에 의하면, 승천의 탑은 100층이 마지막이야.’
 탑을 오르면서 얻은 정보들은 이시도르의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들에 의하면, 이 탑의 구성은 총 100층.
 마지막 100층을 통과하면, 탑을 완전히 클리어하는 것이다.
 ‘즉 이번 층만 이겨 내면, 나는 드디어 이 탑을 나갈 수 있어!’
 심호흡을 하고, 다시 앞을 보았다.
 그그긍.
 두 손을 대자, 문은 너무나도 간단히 열렸다.
 그 안엔 넓은 대전이 있었다.
 수많은 장식으로 가득 찬, 장엄하기까지 한 대전.
 양옆의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빛이 내리쬐어 앞길을 비췄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나아간다.
 이 길 끝에 무슨 시련이 있을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건 확실했다.
 탑이 이기든, 내가 이기든.
 결판을 낼 차례다.
 대전의 끝엔 거대한 문이 하나 있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찬란한 문이다.
 그리고 그 앞엔, 해골 한 구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마치 문을 향해, 그 너머로 기도하듯이.
 스륵.
 한 걸음 더 가까이 가자 해골이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100층의 상대는 저 녀석인가 보다.
 에밀은 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먼지 섞인 검푸른 제복.
 눈구멍 안에서 흉흉하게 빛나는 귀화.
 저 몬스터가 무엇인진, 예전에 한번 부딪쳐 봐서 알고 있었다.
 “데스나이트······?”
 중얼거림에 응하듯 해골 남자가 입을 벌렸다.
 “아아······ 허, 헌터······ 드디디어 왔······.”
 고대인의 말.
 지식을 얻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저 말이 뭘 뜻하는지, 그리고 마지막 시련의 상대가 누구인지.
 에밀은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데스나이트, 81층에서 본 놈들과는 다른 녀석이겠지?”
 데스나이트.
 생전 유명한 기사나 무인이 죽은 뒤 된 언데드.
 그 힘은 살았을 때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진다.
 워낙 유명한 마물이라, 어릴 적에 들은 기억이 있었다.
 강한 데스나이트는 나라 하나를 위협할 정도.
 언데드 몬스터 중에서도 가히 최강급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다.
 에밀은 그동안 수많은 몬스터를 상대로 싸워 이겨 왔다.
 끝없이 머리가 재생하는 히드라.
 자신을 복제한 도플갱어 무리.
 사지가 묶인 발록까지.
 당장 바로 아래층에선 본 드래곤을 잡고 올라왔다.
 한데 고작해야 데스나이트?
 강하긴 하지만, 이제 와서 맞붙기엔 급이 맞지 않았다.
 ‘페이크인가?’
 에밀은 데스나이트에게서 시선을 떼었다.
 데스나이트라면 꽤나 있어 보이는 미끼다.
 저걸 무는 순간, 진짜 적이 습격해 올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패턴상으로는 대부분 그러했다.
 하지만, 데스나이트가 힘을 쓴 순간 그 생각은 달라졌다.
 “그아아아······!”
 기합과 함께 그의 전신에 검은 오러가 일었다.
 산 자의 생명을 불태워 빨아들인다는 데스 오러!
 데스나이트의 가장 무서운 힘이 나타났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으읏!”
 검과 주먹이 부딪친 순간, 에밀은 밀리는 자신을 느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무리 강해도 그렇지.
 설마 인간이 본 드래곤보다 훨씬 더 무서울 줄이야.
 카카카칵!
 겨우 자세가 무너지는 건 막았다.
 그러나 등골이 서늘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고일의 석화>.
 <오우거의 근력>.
 <마나 역장>.
 세 가지를 모조리 썼음에도 버티는 게 한계라니.
 ‘과연 마지막 시련이라 이거군.’
 공격은 이번 한 번으로 끝이 아니었다.
 데스 오러를 머금은 검이 사방에서 뻗어 왔다.
 눈으로 따라가지 못할 만큼 빠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인간일 경우에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팟!
 에밀의 몸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하피의 신속함>.
 <위습의 인지능력>.
 그리고 <본 드래곤의 강대한 마력>.
 이 세 가지를 같이 쓴 결과물이다.
 빈 공간.
 방금까지 에밀이 있던 곳으로 죽음의 오러가 스쳐 간다.
 간발의 차이였으나, 계산된 차이였다.
 “실실패패했했어······ 나는······ 너어너너도······ 실패한다면······ 그 전에······.”
 “하앗!”
 녀석의 힘은 지금껏 만난 어떤 시련보다 강했다.
 세상 어떤 무인도 맞부딪칠 수 없을 정도.
 하지만 에밀은 그보다 더 강한 자신을 느꼈다.
 수없이 얻어 온 몬스터들의 능력이.
 팔에 힘을 실어 주었다.
 데스나이트의 공격은 맨손으로는 부딪칠 수 없었다.
 데스 오러는 악마의 기술.
 살아 있는 것과 부딪친 순간, 그 힘을 집어삼켜 버린다.
 이를 막기 위해 에밀은 손 대신 가지고 있던 무기를 썼다.
 이시도르의 단검.
 마나 역장을 가득 씌우고, 온 힘을 다해 휘둘러 검격을 막았다.
 카아앙! 캉! 카칵! 캉!
 짧은 순간, 수십 번의 공방이 지나갔다.
 서서히 전세가 뒤바뀌고 있었다.
 그때였다.
 단검을 본 데스나이트가 말했다.
 “이이시시도르······? 나, 나를를······ 죽이러 왔구나? 마마침침내내······ 비밀을 밝혀내고······!”
 광기에 젖은 말 한마디.
 이로써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긴가민가했건만 이제야 확실해졌다.
 에밀은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세오든.”
 해골 남자, 세오든은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밀은 알고 있었다.
 저 남자의 복장.
 이시도르의 기억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 중 하나였으니까.
 ‘보아하니 녀석은 여기서 죽고, 데스나이트가 된 것이군.’
 에밀의 짐작은 들어맞았다.
 세오든.
 탐사대의 배반자이자, 홀로 탑을 올라갔다 적힌 자가 바로 그였다.
 이자는 막강한 고대인 중에서도 특별히 선별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도 결국 마지막 시련을 뚫지 못했다.
 수천 년 동안 탑에 매여.
 죽지도 못하고 강해져 온 그가 바로 탑의 마지막 시련, 세오든이었다.
 ‘불쌍한 자군. 살아남기 위해 배신했음에도, 결국 그 때문에 죽었다니.’
 새삼 동정심이 일었다.
 그리고 의문도 같이 피어났다.
 ‘잠깐만, 그런데 어떻게 된 거지? 세오든이 데스나이트가 되었다면, 살아 있을 적엔 도대체 무엇이 그를 막은 거야?’
 결론은 간단했다.
 100층의 진정한 시련은 세오든이 아니었다.
 세오든을 잡아먹은 그것이 바로 마지막 시련!
 아마 이 녀석을 죽이면 그다음으로 나타나겠지.
 에밀은 이를 악물고 적을 주시했다.
 마음속의 잡념이 금세 가라앉았다.
 <고스트의 냉기>의 효과다.
 본래는 주변에 공포를 주는 용도.
 하지만 지금은 에밀의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쓰인다.
 에밀은 그 상태로 세오든에게 돌격했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패기 넘치는 공세!
 <미노타우로스의 돌진>이었다.
 투웅!
 속도와 힘 모두 갖춰진 공격.
 세오든이 처음으로 밀려났다.
 “이이시시도오르르!”
 데스 오러가 한층 더 거세졌다.
 딱히 대미지는 들어가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들어갈 때까지 쳐 주면 그만이었다.
 에밀은 가진 바 능력들을 전부 개방하며 움직였다.
 피할 수 없는 검격은 몸을 불이나 바람으로 바꿔 흘렸다.
 <엘리멘탈의 정령화>를 쓴 것이다.
 그다음엔 에밀이 공격할 차례.
 그는 사라지듯 공간을 격해 등 뒤를 잡았다.
 리치를 잡고 얻은 <리치의 마법> 중엔 블링크도 있었다.
 공간을 이동하는 마법이니, 적도 반응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직접 공격은 반드시 마력으로 친다.
 천천히, 하지만 깔끔하고 철저하게, 틈을 주지 않고 유린해 갔다.
 수천 년의 집념도.
 지금껏 강해져 왔던 한 남자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공격이 거세지는가 싶더니, 에밀이 기어이 세오든의 머리를 붙들었다.
 “부서져라!”
 본 드래곤을 잡아먹고 얻은 힘.
 <언령>.
 필살기라 불러야 할 그것이 세오든의 머리에 작렬했다.
 파삭!
 데스 오러로 무장한 세오든의 두개골이 깨져 나갔다.
 그것을 끝으로, 검은 오러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망집이 소멸하는 순간이었다.
 “허억······ 허억······ 크윽!”
 홀로 남은 에밀의 몸이 비틀거렸다.
 언령은 드래곤의 힘.
 신이 세상을 만들 때 쓴 말이다.
 인간의 몸으로 그걸 사용하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그래도 데스나이트를 쓰러뜨렸으니, 그 값어치는 한 셈.
 천천히 다가가 세오든에게서 전리품을 찾았다.
 
 <전투용 제복> 습득.
 <에테르 블레이드> 습득.
 <인벤토리 아뮬렛> 습득.
 <사멸의 검> 습득.
 
 과연 최후의 상대라는 걸까.
 고생한 만큼 전리품이 있다 생각하니 미소가 지어졌다.
 ‘어떤 아티팩트들일까?’
 각 아티팩트를 살피자, 금방 정보가 보였다.
 
 <전투용 제복>
 -정체 모를 물질로 만들어진 제복.
 -가볍고 각종 충격에 강하며, 에너지가 잘 통한다.
 -현시대의 기술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기술의 집약체.
 
 <에테르 블레이드>
 -사용자의 힘을 치환해, 무적의 에테르 블레이드를 뽑아낸다.
 -다이아몬드는 물론, 영적인 것마저도 베어 내 소멸시킬 수 있다.
 
 <인벤토리 아뮬렛>
 -공간을 왜곡시켜 만든 인공 창고.
 -안에 넣은 물건, 생명은 그 순간 시간 왜곡 보관법으로 보존되어,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멀쩡히 남아 있을 것이다.
 
 <사멸의 검>
 -데스나이트가 쓰는 데스 오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암흑의 마병이다.
 -데스 오러를 다루거나, 그걸 이겨 낼 만큼 강하지 않은 자, 이 검을 잡지 말지어다.
 -영혼마저도 죽음의 힘 앞에서 바스러져, 안식도 윤회도 얻지 못할 것이니!
 
 아티팩트를 전부 본 에밀은 솔직히 감탄했다.
 네 가지 모두 엄청나게 대단한 것들이다.
 과연 고대 문명의 유산이라 해야 할까.
 고개를 들어, 눈앞을 보았다.
 그 고대 문명마저 벗어나지 못한 탑이.
 눈앞에 문을 열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는 건가?’
 저벅. 저벅.
 걸음마다 점점 조심스러워졌다.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심장이 뛰었다.
 감격에 겨운 사이.
 탑의 마지막 시련이 느닷없이 에밀을 쳐 왔다.
 고오오오······!
 강력한 힘이 온몸을 내리눌렀다.
 어떤 몬스터의 능력을 써도 속수무책이었다.
 왜냐면 이건 자아에 닥쳐오는 시련이었으니까.
 “커헉! 컥! 허억! 어으윽! 으극!”
 머리가 울렸다.
 시야는 이미 두 개로 분리되어 있었다.
 눈앞에 놓인 문의 빛과 반대편, 여기서 죽은 수많은 자들의 기억으로.
 가지 마, 바깥은 이미 멸망했어.
 여기만이 안전해. 이 밖으로 나가 봤자 영원히 소멸할 뿐이야.
 세상은 전부 번뇌로 가득 차 있노라.
 하나 이 안은 아니야.
 잊고, 열락을 누려라.
 진실로 이 탑은 너를 하늘로 올려 보내 줄 것이니.
 “으으읏!”
 에밀은 비틀거리며 안간힘을 썼다.
 쓰러져서는 안 된다.
 바닥에 얼굴이 닿는 순간, 정말로 저 목소리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행복, 행복을 준다고? 무엇보다 더 큰 행복을······?’
 안식. 평온. 열락.
 탑에 들어온 후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것들이었다.
 바깥세상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극상의 희락.
 이 탑은 그것을 내밀며 유혹하고 있었다.
 스윽.
 손을 뻗쳤다.
 결심이 눈 녹듯 스러져 갔다.
 이렇게 모두가 행복해지면 되는 일이다.
 베른 후작과 제임스도······ 그들도?
 ‘안 돼!’
 격렬한 분노가 일순 터져 나왔다.
 에밀은 제 손으로 바닥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쿠웅!
 쿠웅!
 한 번씩 울릴 때마다, 증오스러운 원수들의 얼굴이 선명해졌다.
 반면, 영혼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갔다.
 에밀은 천천히 호흡을 하며 힘을 끌어 올렸다.
 진정은 놀랍도록 빨랐다.
 <고스트의 냉기>, 그리고 <엔트의 인내>가 가진 효과다.
 강인한 인내로 다져진 마음은 기억의 물결에도 쓸리지 않았다.
 고스트의 냉기로 차분해진 마음을, 따스한 온기가 치유했다.
 <드라이어드의 치유>.
 <페어리의 환상>.
 환상은 공격의 무게를 덜었고, 자연의 치유는 몸과 마음의 기운을 북돋았다.
 ‘이제 일어서자.’
 일어서야 했다.
 언령을 써서라도.
 “일어서!”
 에밀은 자신의 몸에게 명령했다.
 드래곤의 힘이 강제로 육신을 일으켜 세웠다.
 쿠웅!
 탑이 한차례 요동쳤다.
 영혼들의 속삭임이 멈추더니, 열린 문틈으로 다른 영상이 비쳤다.
 환상이었다.
 탑에 나선 순간 보이는 후작 부자, 그리고 수많은 군대.
 그들 앞에서 에밀은 너무나도 무력했다.
 병사 한 명도 이기지 못하고 무릎 꿇려져, 온갖 멸시를 받는다.
 환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두려움이 절로 일어났다.
 그냥 탑 안에 있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하지만 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저벅저벅.
 걸음걸이마다 한층 더 강한 힘이 깃들었다.
 영혼들의 유혹도 두려움의 환상도, 더 이상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에밀은 문 앞에 섰다.
 활짝 열린 백색 사각형 너머로 정체 모를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하.”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제, 이것만 통과한다면 탑을 나갈 수 있었다.
 앞으로 한 걸음만.
 그러나 에밀은 거기서 더 이상 가지 않았다.
 목표가 눈앞에 있지만, 이와 별개로 할 게 있었다.
 스윽.
 고개를 돌리고 천장을 향해 씩 웃었다.
 반응이 오기 전, 온 힘을 모은다.
 그리고 그대로 문을 쳤다.
 콰과-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문이, 승천의 탑이 무너져 내렸다.
 빛이 요동치는 가운데 에밀은 씨익 웃었다.
 그 얼굴은 탑에 들어온 후로 가장 행복해 보였다.
 “드디어 한 대 먹일 수 있게 됐구나, 이 씹새끼야.”
 쿠쿠쿠쿵!
 탑이 무너지는 가운데, 빛이 온몸을 감쌌다.
 사방이 새하얘졌다.
 그 빛은 모든 걸 삼켰다. 심지어 에밀 본인마저도.
 사방이 빛으로 가득 차고, 그 너머에서 어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어 시스템 올림포스, 시스템 메인 설비 파괴 확인.
 
 -8,812,728번째 사용자 에밀, 난관 ‘기간토마키아’ 클리어 확인.
 
 -사용자 에밀의 소지품 중 임시 저장 장치 확인.
 
 -데이터 백업 완료. 귀속자 에밀. 프로세싱 시작합니다.
 
 -프로세싱 완료. 명령을 부탁드립니다, 주인님.
 
 
 
 #탑에서 나오다
 
 
 
 승천의 탑은 모든 게 신비에 싸여 있는 건물이다.
 만들어진 시대부터, 층을 이루는 외벽까지 전부 다.
 세상엔 단지 고대인들이 만들었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예로부터 수많은 군주들은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했다.
 하늘 끝까지 뻗은 탑.
 이 얼마나 야망을 자극하는 장소인가.
 대륙 4대금역 중에서 가장 늦게 지정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 전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갔고.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위대한 영웅들을 집어삼킨, 태곳적부터 있던 탑.
 수많은 시대가 피고 져도 그것은 언제나 오연히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영원히 서 있을 것 같던, 평범한 어느 날.
 승천의 탑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 * *
 
 휘오오오.
 바람이 불었다.
 산맥의 바람은 차갑다.
 남쪽이라고는 하나, 고지대는 여전히 태고의 눈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공에서 내려온 찬 바람은 아래로, 아래로 내달린다.
 에밀은 그 위에 서서, 가장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은 굳게 닫혀 있다.
 사실, 그 안에서는 빛의 여운이 남아 감도는 중이다.
 탑이 무너지면서 일어난 대폭발의 잔재다.
 “으으음······.”
 닫혀 있던 입이 살며시 열렸다.
 석상처럼 굳어 있던 그가 마침내 반응한 것이다.
 눈을 뜬 에밀의 첫마디는 이거였다.
 “춥군.”
 빛이 가시자, 차가운 바람이 온몸에 느껴졌다.
 입고 있던 옷도 폭발에 휘말려 누더기가 되었다.
 아무리 강인하더라도, 이 조건이면 추울 만도 했다.
 보통 사람은 숨 쉬는 것조차도 힘들어할 정상의 환경.
 그러나 에밀은 잠시 후 멀쩡히 숨을 내쉬었다.
 몸에서 나온 열기가 주변을 따뜻하게 데운 것이다.
 “안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지만.”
 산맥 정상의 만년설은 오랜 세월 동안 모인 냉기의 정화.
 그러나 <샐러맨더의 홍염>이 한층 더 강했다.
 신수神獸인 샐러맨더를 잡아먹고 얻은 스킬.
 여기에 대적하려면 동급, 혹은 그보다 강한 냉기가 필요했다.
 만년설을 녹이던 에밀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폐에 가득 찬 공기를 음미하고, 다시 내쉰다.
 몇 번을 호흡해도 꿈에서 깨는 일은 없었다.
 이것은 틀림없는 바깥의 공기였다.
 “아, 아아, 아아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적게 잡아도 100년이 넘는 시간.
 그동안 이 공기를, 이 풍경을 얼마나 희망했던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걸 위해서, 자신은 100층의 탑을 전부 오른 것이다.
 “우아아아-! 아아아아아!”
 신음성은 커져서 함성이 되었다.
 거기엔 한 인간의 희로애락이 전부 담겨 있었다.
 우르르릉. 쿠르릉.
 산맥 정상의 만년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득한 세월 동안 쌓인 빙정도 이 목소리엔 비할 수 없었다.
 무너져 가는 주변을 향해 호흡한다.
 그 안에서 나타나는 빙정을 흡수하기 위해서.
 샤아아아.
 산맥 꼭대기의 빙정들이 한곳으로 몰렸다.
 흡수에 익숙해진 몸은 거리낌 없이 냉기를 받아들였다.
 산맥 정상에 쌓인 만년설의 빙정.
 보통 사람을 한순간에 초인으로 만들 만한 힘이다.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승천의 탑에서 받은 힘은 이것보다 훨씬 강했다.
 “후우······.”
 진정한 에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바탕 눈사태가 났음에도 주변은 여전히 흰색으로 덮여 있다.
 맑고 깨끗한 공기가 느껴졌다.
 한껏 들이마시고 내뱉으면서, 생각했다.
 ‘여기는 어디지?’
 분명 승천의 탑은 평지에 있었다.
 한데 지금 있는 곳은 끝도 없이 높은 산맥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덜컥,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분명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탑 안에 있었지, 내가.’
 확실한 것도 아니다.
 최소한 100년이지, 그보다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어쩌면······.’
 지형이 바뀔 때까지 그 안에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 번 더 주변을 둘려보려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빛과 함께 사각형 창이 나타났다.
 
 -현재 위치는 대륙 남부 단층 지대입니다.
 
 “단층?”
 
 -고지대, 산맥이라고도 합니다.
 
 “그렇군.”
 에밀은 갑작스러운 답변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익숙했기 때문이다.
 탑에 있던 동안 틈만 나면 뜨던 알림 창.
 눈앞에 나타난 건 바로 그것이었다.
 추가된 점이라면 능동적으로 변했다는 정도?
 예전엔 필요한 정보만 보여 줬다면, 지금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느낌이다.
 미쳐 날뛰는 야생마를 길들였다고도 할 수 있는 셈.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우선 이 녀석, 꽤나 편리했으니까.
 “남부 산맥이면 혹시 파트리아스 산맥이야?”
 
 -분석 중입니다. 분석 완료했습니다. 현재 가장 많은 지성체 ‘인간’의 말로는 파트리아스 산맥이라 불리는 게 맞습니다.
 
 “간단히 말해.”
 
 -맞습니다.
 
 살며시 윽박지르자 말의 길이가 확 줄어들었다.
 칭찬이라도 해 주고 싶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파트리아스 산맥이라면 내가 들어갈 적에도 있던 산맥이었지. 세계의 남쪽을 막고 있는 산맥이라고.’
 “너, 이름이 올림포스라 했나?”
 
 -시스템명 올림포스, 맞습니다.
 
 “그럼 앞으로 줄여서 포스라고 부르지. 포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처리 완료되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그래, 그럼······ 후우, 혹시 지금 연도가 어떻게 되는지 말해 줄 수 있어?”
 질문과 대답 사이엔 잠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에밀은 제 심장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다행히, 포스는 생각보다 빨리 답을 내놓았다.
 
 -창세력 ?년. 신대력 33,208년입니다.
 
 “······.”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에밀은 즉각 질문을 재조정했다.
 “신대력인지 뭔지 말고 제국력으로 대답해. 제국력 몇 년이야?”
 
 -명령 확인했습니다. 정보 수집이 필요합니다. 영자 광역 정보망 접속. 접속 완료. 정보 수집에 착수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포스의 응답이 멈췄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기다리면 답이 나온다는 확신은 들었다.
 승천의 탑에서 얻은 이 정령체(?).
 능력 하나만큼은 굉장히 쓸 만해 보였으니까.
 ‘그럼 이 녀석이 분석하는 동안 나도 할 일을 해야지. 여기가 남쪽에 있는 산맥이라니, 북쪽으로 가 보자.’
 더 있다간 정말 만년설이 다 녹을지도 몰랐다.
 에밀은 발에 힘을 주고, 그대로 점프했다.
 파앗!
 종이 찢는 소음과 함께 산맥이 한차례 흔들렸다.
 간신히 진정됐던 눈사태가 다시금 일어날 만큼 큰 파동이었다.
 크워어어!
 그어어!
 영봉에 살던 신수들은 때아닌 눈사태에 비명을 질렀다.
 신령스러운 존재인 그들에게도 이건 재앙 그 자체였다.
 하지만 신수들 중 그 누구도 깨닫지 못했다.
 이 눈사태가 한 인간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정보 수집 완료했습니다. 현재 제국력 연도는 864년입니다.
 
 “864년? 정말이야?”
 그가 탑에 들어간 것은 제국력 854년이었다.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오차 0%. 확실합니다.
 
 “10년밖에 흐르지 않았다고······.”
 
 -시공간 왜곡 역장이 시전되어, 시간이 붙들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강제로 왜곡시켰단다.
 놀라움에 입이 절로 살며시 벌어졌다.
 과연 승천의 탑이다.
 고맙게도, 덕분에 모든 걸 바로잡을 기회가 생겼다.
 “베른, 제임스. 네놈들이 잊고 있었을 내가 왔다. 조만간 찾아가도록 하마.”
 바깥에 나왔으니, 이제 집에 가 볼 때다.
 아리온 백작가의 장남이자 가장으로서.
 집안을 돌보는 건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였으니까.
 복수의 시간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 * *
 
 파트리아스 산맥은 온도 차가 확연한 곳이다.
 고지대는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다.
 반면 저지대는 1년의 반이 온난한 상태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선이 있다.
 지금같이 주변이 뜨거운 경우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캬아악!
 크르릉. 크릉.
 캥캥캥!
 때아닌 폭염에 숲은 난리가 났다.
 여우나 늑대는 물론, 산의 제왕인 오우거도 참지 못하고 도망쳤다.
 “그리운 소리들이군.”
 에밀은 지나가다가 한마디 했다.
 탑 안과는 달리, 숲은 생기가 넘쳤다.
 살며시 눈을 감았다.
 시야가 닫힌 와중에도, 감각이 차단되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뜬 것보다 훨씬 더 잘 보였다.
 ‘자이언트 뱃이었나? <반향정위>의 능력을 준 것이.’
 
 -그렇습니다.
 
 ‘조용히.’
 
 -알겠습니다.
 
 포스를 조용히 시킨 에밀이 양팔을 쫙 폈다.
 매 순간 살아남기 위한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점점 실감이 가기 시작했다.
 여긴 승천의 탑이 아니었다.
 주변의 모든 게 낯설었다.
 몸을 스치는 바람, 넓게 펼쳐진 하늘과 땅.
 전부 수백 년 동안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니까.
 저벅저벅.
 어느덧 산맥 기슭까지 내려왔다.
 이대로 북쪽으로 가면, 조만간 마을이나 도시가 나올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산맥 북쪽은 메스릴 제국의 땅이지.”
 사람을 만나는 건 너무 오랜만이다.
 에밀은 심호흡을 두어 번 한 뒤 걸음을 재촉했다.
 
  * * *
 
 메스릴 제국의 이명은 다름 아닌 세계의 보고다.
 물자부터 사람, 지식까지.
 온갖 게 모여든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북에서는 아이언 왕국의 철과 무기 그리고 용병들이 제국으로 넘어왔다.
 서에서는 시바나 왕국의 말과 곡물.
 남에서는 페롤 왕국의 진주와 생선이.
 그리고 동에서는 동방의 진귀한 병기와 보물들.
 이 모든 것을 운반하는 건 역시나 사람이었다.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움직이는 상인들.
 그들은 이 세상 어디에나 있기에, 세상 어디든지 갈 수 있었다.
 황금이 가득한 제국으로 상인이 몰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스네일 상단도 다른 상단들처럼 제국으로 가고자 했다.
 하지만 이번엔 어째선지 때가 좋지 않은 듯했다.
 “아, 지루하다.”
 마차 밖을 바라보던 여인, 플로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며칠째 똑같은 숲만 보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제국에 간다는 기대감도 하루 이틀이지.
 이대로 있다가는 말라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아아······.”
 “뭐, 무사하기만 하면 됐지 않느냐. 별일 없이 제국에 도착하기만 하면 아무래도 괜찮다.”
 옆에 있던 중년 남자, 벨릭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플로라는 퉁명스레 벨릭에게 대꾸했다.
 “그럼 그 전에 별일이 날 것 같네요. 제가 지루해서 죽으면 묏자리는 산맥에다 만들어 주세요.”
 “허어, 이 상황에서 지루하다고 하는 걸 보니 너도 어지간하구나.”
 당장 이번 상행에서 받은 습격부터 평소의 두세 배에 달한다.
 그뿐인가, 높은 산에서 일제히 눈사태가 내리는 것까지 보기도 했다.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진귀한 구경이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눈사태는 정말 좋았어요. 오랜만에 마음이 상쾌해지더라고요. 그런데······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요. 정말 몇 년 만에 모처럼 얻은 자유인데, 그걸 이렇게······.”
 “허허, 주변에 몬스터들이 많이 몰려드니 어쩔 수 없구나. 평소엔 금방 가던 길인데, 허허.”
 플로라는 실실 웃는 벨릭을 뒤로하고 한숨을 쉬었다.
 모처럼 집안의 규범을 벗어난 참이다.
 여기서 지체하는 1분1초가 너무도 아쉬웠다.
 “정 지루하다면 호위 용병들한테라도 가지 그러냐? 그 사람들은 손길 하나라도 더 필요할 텐데.”
 “차암, 그러라고 고용한 사람들이잖아요. 제가 일을 도우면 그 사람들은 제 값어치를 받을 이유가 없는 거라고요.”
 “하하, 과연 내 딸이야. 벌써 상인의 마음가짐을 새겨 놨구나.”
 제값을 주고 고용한 사람의 일을 덜어 주면 안 된다.
 사람이 아닌 금전을 다루는 자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 중 하나였다.
 친자식이라도 같은 상단의 사람.
 기특한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디베르만 집사님, 호위들에게 특별히 인당 50실버씩을 더 지급하도록 하세요. 제가 개인적으로 주는 거라고 반드시 달아 두시고요. 그리고 보급품 중 물과 음식도 마음껏 이용하게 해 주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
 디베르만 집사는 즉시 명을 받들었다.
 확실히 이번 상행은 이상할 정도로 방해가 많았다.
 그만큼 호위 용병들의 고생도 심해질 터.
 이 정도밖에 못 해 주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지. 상인은 어중간하게 돕는 것보다 금으로 대해야지. 암!”
 벨릭의 탄성이 한층 더 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그는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아이가 그놈의 규범이니 여자의 도리에 얽매여 있다니. 내 여편네도 참 어처구니없는 사람이야.”
 “아시면 아빠가 직접 운영하시면 되죠. 신의랑 정이 중요하단 건 알지만······.”
 상인에게 있어 신의는 꽤나 중요한 덕목이다.
 하지만 정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그런데 벨릭은 그게 너무 많았다.
 플로라가 한숨을 내쉴 정도로.
 “허허,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네 어미처럼 똑 부러질 자신이 없어서 말이다.”
 “벨릭 상단주님! 급한 용무입니다!”
 대화가 이어지려는 순간, 멀리서 한 젊은이가 급히 이쪽으로 달려왔다.
 젊은이의 이름은 파웰.
 철성의 기사라는 칭호의 주인이자, 제국에도 이름이 퍼진 유명한 기사다.
 이런 유명인이 상단 호위나 하고 있으니 이상하다 생각할지 모른다.
 하나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단지 둘의 집안이 막역한 친우 사이인 것뿐이니까.
 사실 그뿐 아니라, 파웰 본인의 뜻도 강건했다.
 이참에 제국에 가 자신의 무위를 널리 알려야겠다나?
 이미 왕국 내에 유명세를 떨친 기사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물론, 벨릭과 플로라 부녀에겐 그저 챙겨 주고 싶은 친구네 아들일 뿐이었다.
 여하간, 그 정도의 인물이 이리 흐트러져서 오는 건 드문 일이다.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바꾼 벨릭 상단주가 말했다.
 “무슨 일인가, 파웰.”
 “급한 용무요? 드래곤이라도 나타났나요?”
 진짜 드래곤이 나타났다면 분명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파웰의 말은 그 이상으로 플로라를 놀라게 했다.
 “아니, 더 큰일입니다.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사람을 만나다
 
 
 
 “세상에, 저게 무슨 꼴이래?”
 “말을 하는 걸 보니 사람은 맞는데.”
 “알려지지 않은 신종 몬스터 아니야? 뭐······ 그런 거 있잖아.”
 “으으음!”
 수군거리는 대화의 내용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저들 딴에는 목소리를 죽인 듯하지만, 에밀의 초감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당장 포스가 음량을 증폭시켜 들려주고 있기도 하고.
 ‘실수했군.’
 사람의 행렬을 보자마자 무턱대고 내려간 게 화근이었다.
 몬스터로 가득한 산맥에서 갑자기 나타난 야인.
 누구라도 수상하게 여길 게 뻔했다.
 
 -정지! 더 이상 접근하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수백 년 만에 들은 첫마디가 그거라니.
 되뇌다 보니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그래도 실제로 칼을 휘두를 일은 없었다.
 첫 대면을 살인으로 장식하고 싶진 않았는데.
 다행이었다.
 감각을 돋우다 보니 서너 명의 사람들이 오는 게 느껴졌다.
 개중 한 명은 다른 이들에 비해 유별나게 강했다.
 그자가 무리의 우두머리, 혹은 책임자인 듯했다.
 “저긴가?”
 “예, 그렇습니다.”
 “흐음······ 우욱!”
 “냄새가······.”
 막 모습을 드러낸 네 명이 일제히 코를 감싸 쥐었다.
 처음 에밀을 발견했던 사람과 같은 반응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탑에 있었던 시간 동안, 몸을 씻을 수 있는 건 몬스터들의 피뿐이었으니까.
 잠깐 코를 막은 중년인이 가까이 왔다.
 넷 중 두 번째로 늙었을까, 풍채 좋은 일반인이었다.
 “이런 산맥에서 사람을 대면할 줄이야. 솔직히 꽤나 놀랐네.”
 “예.”
 “혹시 자네가 누군지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겠나?”
 서슴없이 다가오는 중년인.
 그 앞을 검을 든 젊은이가 막아섰다.
 “상단주님, 위험합니다. 거리를 둬 주십시오.”
 “자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을 하겠나.”
 “그래도 혹시 모를 일입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젊은이가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파웰이고, 이쪽은 스네일 상단의 벨릭 상단주님, 그리고 그분 슬하의 플로라 영애다. 그대는 무슨 일로 여기에 왔고, 신원이 어떻게 되는지 말하라.”
 “아······.”
 무심코 대답하려는 순간, 빛살 같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지금 신분을 말한다 한들 저들이 믿어 줄까?
 침묵은 금이다.
 잠깐 생각하다가, 조용히 양옆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군. 누군지는 밝힐 수 없다라······. 알았네, 잠시만 기다리게.”
 파웰은 그렇게 말하고 나머지 둘을 뒤쪽으로 데려갔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마 이대로 쫓겨나지 않을까 싶었다.
 파웰은 물론, 플로라란 여자도 이쪽을 보는 눈길이 심상치 않았다.
 책임자 셋 중 둘이 저럴진대, 상단주도 함부로 그들을 무시할 순 없을 테니까.
 ‘들어나 볼까.’
 
 -도청하겠습니다.
 
 포스가 명령을 받들더니, 곧 그들이 하는 대화를 재생하기 시작했다.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상단주님. 아르망드 상단의 첩자일지도 모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파웰.
 -우선 산맥에서 혼자 덩그러니 나타난 사람이란 것부터가 수상합니다. 당장 호위로 백 명이 넘는 마나 능력자를 고용한 우리도 평소의 두 배나 더 늦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도 있고, 다른 때라면 몰라도 이번만큼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파웰의 말은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그래서인지 상단주란 중년인도 말을 아끼는 듯했다.
 그런데, ‘그것’은 또 뭘까?
 
 -흐음, 플로라, 네 생각은 어떠냐?
 -저는 딱히 상관없어요. 일단 저 사람이 첩자는 아닐 테니까요.
 -플로라! 중요한 일이다!
 -파웰 오라버니, 그런 중요한 일에 저런 사람을 첩자로 쓸 리 없잖아요. 저건 아예 대놓고 들여보낸 수준인데, 우리가 아는 아르망드 상단이 그러겠어요? 그리고 저 꾀죄죄한 몰골에 저 수염이랑 장발은 작정하고 저리 키우지 않는 이상 못 키울 테고요. 으으, 냄새.
 
 의외로 플로라가 에밀을 받아들이자는 의견을 냈다.
 이유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지만.
 파웰은 그 말에 우물쭈물했고, 그게 벨릭 상단주에게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아니, 플로라. 잘 생각해 보아라. 저 사람은······.
 -그만하게, 파웰. 내 생각에도 저 사람이 아르망드 상단의 첩자는 아닌 듯하니.
 -그런······!
 -일단 생김새부터 억양까지 모든 게 아르망드 놈들의 첩자는 아닐밖에 없어. 생김새야 꾸민다 해도, 저런 억양은 처음 듣지 않나. 혼자서 몇십 년 동안 있지 않은 이상은 불가능해.
 
 상단주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아귀가 들어맞는 말들뿐이다.
 하긴, 그러니 이 정도 규모의 상단을 만들 수 있었겠지.
 
 -저 사람은 에루 님께서 우리들을 시험하기 위해 보내신 사자일지도 모르지. 보게, 몬스터가 이렇게 나오고, 눈사태까지 나지 않았는가. 만약 여기서 덕을 베풀지 않으면 무슨 재앙이 덮칠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네. 당장 우리가 데려가지 않으면 몬스터들의 먹잇감이 될 테니까. 사람으로서 그 꼴은 못 보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준비하시게.
 -끄응, 알겠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철저히 감시하도록 하고, 관문을 넘으면 바로 보내 버리도록 하지요.
 
 벨릭 상단주의 대답에 파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의견을 물은 뒤, 결국 에밀을 받아들이기로 결정이 났다.
 
 -그럼 결정 난 걸로 알아 둬도 되겠나?
 -예.
 
 넷이 돌아오는 사이 생각을 정리했다.
 이 상단의 이름은 스네일 상단.
 행렬의 규모를 봐서는 상당히 큰 세력을 지닌 곳이다.
 아르망드 상단은 아마 경쟁 관계인 곳일 테고.
 저들의 말만으로는 알 수 있는 정보가 부족했다.
 조용히 머릿속으로 포스를 불렀다.
 ‘포스, 명령이다.’
 
 -말씀하십시오.
 
 ‘이 상단, 어떤 곳인지 정보를 수집해 줄 수 있어? 아까 전처럼.’
 
 -분석하겠습니다.
 
 목소리가 사라진 지 얼마 지난 후.
 네 명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맨 앞의 중년인, 벨릭 상단주가 말했다.
 “혹시 자네가 원한다면, 우리 스네일 상단에서 숙식을 해결해도 좋네. 짐만 좀 들어 준다면 산맥을 탈출할 때까지 식사와 나름 편한 잠자리 그리고 신변의 안전을 보장하지.”
 “그 말씀 따르겠습니다.”
 사람들과 같이 가는 게 지금보다는 의심을 덜 살 것이다.
 망설임 없이 제안을 승낙했다.
 
  * * *
 
 에밀이 행렬에 합류한 뒤, 상단의 움직임은 확연히 빨라졌다.
 속도를 낸 탓도 있었지만, 몬스터의 습격이 줄어들었다는 게 컸다.
 마차나 도보로 가던 짐꾼들 모두 어리둥절해했다.
 “허, 참,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안 오는군.”
 “뭐가 어떻게 된 거람?”
 마치 잘 정비된 가도를 걷는 듯한 안정감이 든다.
 파트리아스 산맥에서 이런 느낌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다.
 상행원들 모두 신기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괜히 파트리아스 산맥이 위험한 게 아니다.
 그렇기에 호위를 엄청나게 고용했건만.
 이 정도면 사실상 짐꾼만 와도 될 뻔했다.
 몬스터들이 오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행렬 안에 있는 압도적인 포식자의 존재!
 산맥의 몬스터들은 냄새를 맡자마자 느꼈다.
 저 냄새의 주인은 괴물이다.
 수없이 많은 몬스터들의 피를 묻힌.
 절대로 마주쳐서는 안 되는 괴물이라고.
 눈을 돌린 몬스터들은 그제야 서로를 인식했다.
 강한 적을 못 잡는다면, 잡을 수 있는 먹이를 잡으면 된다.
 캬아앙!
 크허엉!
 포효 소리와 단말마가 행렬 양옆에서 들렸다.
 그때마다 호위병들의 어깨가 들썩이는 건 꽤나 볼만했다.
 한편 에밀은 행렬 중후반부에 끼어 움직였다.
 그 주변 수 미터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몸의 악취 때문에 도무지 거리를 좁힐 수 없는 것이다.
 “어후······ 무슨 냄새가 이리 심해.”
 “시체 썩는 냄새도 맡아 봤지만, 이건 도무지······!”
 코를 싸쥐는 사람이 속출하는 가운데, 에밀은 픽 웃고 말았다.
 이 정도 냄새야 별것도 아니다.
 ‘어차피 도시에 도착하면 헤어질 사람들이니 신경 쓰는 게 이상하지.’
 그래도 모두가 에밀을 역겨워하진 않았다.
 바깥쪽의 호위병들, 특히 경험 많은 노장들은 오히려 짐꾼들에게 면박까지 줄 정도였다.
 “예끼! 이놈아, 저 냄새가 우리들 구명줄이야, 구명줄! 어딜 손을 대려고 해. 에잉.”
 “아니, 영감님. 그게 아니라······ 아구구구!”
 “시끄러워! 가기나 해!”
 그들은 몬스터들이 저 냄새를 겁낸다는 걸 눈치챘다.
 무슨 원리인진 모르겠으나, 오랜 경험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개중 용기 있는 몇은 악취를 무릅쓰고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보게나, 혹시 그 향수, 뭘 재료로 써서 만들었는지 알려 줄 수 있겠나?”
 “향······수 말씀이십니까?”
 “그래, 향수.”
 “그것만 있으면 몬스터 놈들이 올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서. 전부 뒈지는 것보다 코만 뒈지는 게 낫지.”
 다른 용병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몬스터의 접근을 원천 봉쇄하는 건 이들에게 있어 꿈 같은 일이다.
 그렇기에 악취를 무릅쓰고 다가온 것이었다.
 “이건······.”
 에밀은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멀찍이 있는 용병들도 이편을 흘긋거리고 있다.
 그들도 관심이 있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다만 이 악취를 버텨 낼 만큼 의지가 굳지 못할 뿐이지.
 ‘이건 알려 주고 싶어도······.’
 이 악취는 거저 주어진 게 아니다.
 수없이 많은 몬스터의 살과 피.
 그것을 헤집으면서 자연스레 섞인 냄새의 결과물.
 말하자면 진짜배기인 셈이다.
 용병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걸 인공적으로 만들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거짓말을 꾸며 말하는 건 오해만 살 것 같은 느낌이다.
 넉살스레 거짓을 말하기엔 100년이 넘는 공백이 너무 컸으니까.
 ‘하는 수 없지.’
 잠깐 생각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냄새가 아닙니다.”
 “어?”
 “놈들은 칼과 마법에 겁먹어서 안 오는 겁니다. 이건 하등 쓸모가 없는 겁니다.”
 이 말에 깃든 진의는 이랬다.
 ‘너희들이 잘 싸우는 덕분이지, 딱히 냄새 따위에 놈들이 안 오는 게 아니다.’
 칭찬이니만큼 저들도 기분 상하지 않고 넘어갈 것이다.
 웃는 얼굴에 침 뱉진 않을 테니.
 하지만 그 예측은 틀린 것 같았다.
 일단 대답을 들은 용병들의 반응부터가 영 이상했다.
 “그, 그렇군.”
 “하긴, 그걸 거저 얻을 수 있을 리 없지. 성의가 부족했던 점, 이해해.”
 “자아, 얼마, 얼마 정도면 되겠나? 남은 게 있으면 조금이라도 팔게.”
 짤그랑.
 너도나도 주머니에서 은화들을 꺼내 내민다.
 금화의 가치를 생각했을 때, 이건 저들이 내밀 수 있는 최대한의 성의였다.
 이런.
 아무래도 일부러 감춘다고 오해한 모양이다.
 그건 곤란했다.
 두고두고 계속 접근하면 귀찮으니까.
 하는 수 없이 직접 정정시켜 주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이건 씻지 않아 생긴 냄새라 딱히 팔 것도 없고요.”
 “아, 그런가?”
 “흐흠,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네만, 알겠네.”
 용병들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착할 때까지 꽤나 시달릴 것 같다.
 뭐, 조금만 참자.
 
 그날 저녁, 상단은 널찍한 호숫가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맑은 물과 넓은 땅이 있어 야영지로는 최적의 장소다.
 게다가 몬스터의 공격로까지도 호수가 차단해 준다.
 산맥 전체를 통틀어도 이만한 덴 몇 곳 없었다.
 “상단주님 덕분에 산맥에서 천막 치고 자 보는구먼.”
 “그뿐이야? 도시에도 안 갔는데 거하게 씻을 수도 있잖아.”
 “맞다, 맞아. 내가 이래서 다른 상단에 못 간다니까?”
 사람들은 벨릭 상단주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지 인품만 있는 바보였다면 이런 말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인품과 신의를 뒷받침해 줄 세세한 부분에서의 능력.
 그것이 스네일 상단을 바닥에서부터 유지시켜 주는 굳건한 기반이었다.
 “거기, 새로 온 짐꾼.”
 혼자 주변을 둘러보려던 에밀의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고갤 돌리자 다른 짐꾼 여럿이 모인 게 보였다.
 술이라도 한잔하자는 것일까?
 가까이 가려 하자 그들이 코를 싸쥐고 말했다.
 “어후, 씁! 가까이 오지 말고! 세면도구 줄 테니까 가서 몸 좀 씻고 와라. 냄새 때문에 죽을 것 같으니까.”
 “음.”
 아무래도 의도를 오해한 모양.
 괜히 머쓱하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이 가위와 수건, 물통 등의 세면도구를 내밀었다.
 “가위는 왜?”
 “못 봤어? 네 수염이나 머리털 같은 것들, 원숭이도 아니고 그게 뭐냐? 가서 깎고 와.”
 ‘수염이라.’
 그러고 보니 어느덧 자신도 수염이 날 만큼 성장해 있었다.
 탑 안에서는 살아남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진다.
 에밀은 손을 들어 턱 밑을 만져 보았다.
 수북한 턱수염이 손가락 사이로 만져졌다.
 어릴 적 기억에 있던 아버지도 이런 수염이 있었다.
 빳빳한 수염의 감촉.
 어느덧 나도 이런 수염을 가질 때가 됐구나 싶었다.
 모두가 잠이 든 깊은 밤, 잠시 씻고 오겠다고 한 뒤 야영지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안 보는 호숫가 쪽으로 간 뒤 몸을 담근다.
 촤아악.
 몸에 묻어 있던 때와 굳은 피 등이 한꺼번에 풀렸다.
 더없는 상쾌함이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느껴졌다.
 시간도 많고 적도 없겠다, 정성을 들여 꼼꼼히 몸을 씻었다.
 물론 이발과 면도도 빼놓지 않았다.
 슥. 슥.
 털과 머리카락이 점차 사라지고 맨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탑의 시련으로 한계를 넘으며 단련된 다부진 몸통.
 거기다 괜찮은 본바탕이 더해지니 저절로 빛을 발했다.
 ‘음?’
 한창 몸을 씻던 도중, 에밀은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급히 몸을 수풀 뒤로 움직인다.
 몬스터인가 싶어 유심히 보자, 금방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플로라라고 했던가······?’
 일부러 멀리까지 와서 닦았는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사과하도록 하자.
 남은 부위를 마저 닦고, 상단에서 준 깨끗한 면 옷으로 갈아입었다.
 깨끗한 물로 씻으니 온몸이 상쾌했다.
 오늘은 꿈도 꾸지 않고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 *
 
 “하아, 하아.”
 그 시각, 플로라는 막사로 돌아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뭐야, 그 사람, 도대체!”
 혼자 호수를 보러 나간 게 잘못이었다.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지루함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가 보니 아까 그 야인이 먼저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세상에······!’
 위기, 그것도 대위기다.
 설마 저 남자를 혼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깜짝 놀랐지만 애써 참으며 몸을 낮췄다.
 에밀이라 이름을 밝힌 저자는 상단 입장에서 요주의 인물이었다.
 첩자는 아닌 것 같지만, 그와 별개로 수상하기 짝이 없다.
 애당초 이 산맥에서 불쑥 나오는 게 평범한 사람은 아닐 테니까.
 그런 남자와 단둘이 마주하다니.
 최악의 사태 중 하나였다.
 ‘들키면 위험해!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 빠져나가야지.’
 플로라는 제 입을 막으며 생각했다.
 여기서 들켰다간 저 남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아무리 조심한다 한들, 일단 당하고 나면 답도 없었다.
 그걸 피하기 위해서라도, 절대 들킬 순 없었다.
 악착같이 기척을 죽이고,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고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시선이 에밀에게 향했다.
 좋든 싫든 그가 목욕하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보게 생긴 것이다.
 한편 에밀은 그대로 호수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물에 몸을 담그자마자 검붉은 물결이 확 퍼져 나왔다.
 저게 바로 악취의 근원이자, 몬스터들의 핏덩이였다.
 ‘우욱······!’
 토기가 절로 일었다.
 처음 볼 때부터 냄새가 심하긴 했다.
 하지만 저건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마치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안 씻은 것 같다.
 플로라는 알지 못했다.
 저 때와 자국이 실제로 수십 년 동안 쌓인 것임을.
 감히 누가 상상하겠는가.
 그만한 세월을 전투만으로 보낸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래도 하나만큼은 분명했다.
 저 사람, 의외로 꽤나 좋은 몸을 지니고 있었다.
 ‘흠흠, 보기보다는 꽤나 튼실하네.’
 저 정도라면 거의 파웰급, 아니 그 이상이었다.
 처음 볼 때는 미처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털과 수염 탓에 원숭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이러면 안 돼! 긴장이 흐트러지잖아!’
 애써 마음을 다잡은 것도 잠시.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 있으니 될 것도 안 된다.
 간신히 참고 있던 플로라에게 더욱 큰 난관이 닥쳤다.
 에밀이 맨몸을 드러내고 때를 씻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크, 크다.’
 본의 아니게 양물까지 본 플로라.
 희디희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당장에라도 힘이 풀려 엎어질 것 같았다.
 ‘안 돼!’
 기회는 아직 저 사람이 눈치채지 못한 지금뿐이었다.
 질끈 눈을 감고, 온 힘을 다해 뒤로 돌아 달렸다.
 바스락!
 버석버석.
 안간힘을 써서 달리다 보니 어느덧 막사에 이르렀다.
 주변을 지키던 용병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아뇨? 예, 괜찮아요. 잠깐 바람 좀 쐬고 왔는데, 들어가도 괜찮죠?”
 “무, 물론입니다.”
 무엇을 보았는지, 굉장히 놀라 있다.
 용병들은 굳이 그걸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말해 봤자 무엇 하겠는가.
 아마 호숫가를 나다니다 뱀이라도 봤을 것이다.
 거기까지가 방금 전까지 플로라에게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침대에 누워도 좀처럼 그 충격은 가시지 않았다.
 남자의 알몸을 본 건 어릴 적 이후 처음.
 그것도 앞뒤로 꼼꼼히 봤으니 이러는 것도 당연했다.
 ‘그래도 그 사람, 생각보다 잘생겼었지.’
 기억을 되짚던 플로라의 어깨가 오스스 떨렸다.
 하루 종일 몸을 짓누르던 지루함과 나른함.
 어느새 그것들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푸욱 한숨이 나왔다.
 “하아.”
 심장은 멈출 기미를 모른다.
 가만있자니 갑자기 괘씸한 생각도 든다.
 ‘어째서 안 쫓아온 거야?’
 쫓아오지 않길 바란 건 분명 이쪽이다.
 하지만 그것도 잊을 만큼 플로라는 동요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다.
 그날따라 달빛이 유난히 밝았다.
 
  * * *
 
 다음 날, 상단은 여유롭게 준비를 마친 뒤 출발했다.
 에밀도 그 사이에 끼어 짐을 들어 올렸다.
 “웃차.”
 “그럼 움직이자고들.”
 어제와 같이, 여정이 계속된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게 있었다.
 짐꾼과 용병 모두 천천히 그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이렇게 가는 길이 편안했나?’
 ‘어제부터 좀 조용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몬스터가 단 한 마리도 오지 않다니, 이래서야 시골길을 지나가는 것 같지 않은가.’
 파트리아스 산맥은 몬스터의 천국이라 할 수 있는 곳.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몬스터의 제왕인 오거는커녕, 고블린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람?”
 “글쎄, 도대체 알 수가 없군. 위험 지대를 벗어난 건 아닐 텐데.”
 뜻밖의 행운에 모두가 무슨 일인지 수군거린다.
 하나 벨릭 상단주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암, 역시 나는 틀리지 않았어. 어제 받은 그 에밀이란 짐꾼. 그 사람을 받음으로 신께서 우릴 어여삐 보신 거지. 앗하하하.”
 “과연 맞는 말씀이십니다.”
 디베르만 집사가 옆에서 추임새를 넣었다.
 평소 아부가 많은 그였으나, 이 말만큼은 진담이었다.
 산맥을 넘는 건 매년마다 이뤄지는 행사라 낯설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편한 건 맹세코 처음이었다.
 “우연일 겁니다. 설마 사람 한 명으로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파웰은 아직 미심쩍은 듯, 얼굴을 굳히며 덧붙였다.
 하지만 다음 명령이 떨어진 순간, 파웰은 물론 칭찬을 잇던 디베르만조차도 난색을 표했다.
 “좋아. 에밀이란 그 친구, 이리 불러오게.”
 “예? 상단주님, 하지만 그건······.”
 “벨릭 상단주님! 안 됩니다.”
 어제 행렬에 합류한, 신용할 수 없는 산사람.
 그것이 파웰이 생각하고 있는 에밀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벨릭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 친구가 정말 신께서 내리신 은총이자 행운의 표식이라면, 내 주변에 데리고 있는 게 가장 낫겠지. 최소한 이 산맥을 벗어날 때까지만이라도.’
 신의와 배려.
 그것만으로는 상단을 꾸려 갈 수 없다.
 그 빈자리를 메워 주는 것이 바로 행운이란 놈이다.
 이번에도 그놈이 손을 뻗었을 것이라고, 적어도 벨릭 상단주는 그렇게 확신했다.
 “파웰, 그럼 더욱 가까이 두고 확인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짐꾼의 감시만으로는 안 돼. 자네가 있어야 그나마 안심이 된단 말일세.”
 “하기야 그렇긴 하지요······. 위험하긴 하지만 제가 있다면······.”
 파웰의 실력은 일기당천.
 칭찬이긴 하지만, 딱히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의아한 것은 플로라의 반응이었다.
 어째서인지 별다른 반발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저 아이가 그럴 애가 아닌데?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결국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 꺾이고, 사람들이 에밀을 부르러 갔다.
 잠시 후, 그들이 올 땐 한 명이 더 끼어 있었다.
 그 사람을 본 순간, 플로라를 제외한 셋이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앗?”
 “어어?”
 “허어, 저 친구가 어제의 그 사람이라고? 잘못 데려온 거 아닌가?”
 벨릭 상단주가 깜짝 놀라 말했다.
 가장 담이 큰 그가 그 정도이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세상에······.”
 “아니, 저 사람이?”
 주변에 있던 호위 용병들도 한마디씩 덧붙였다.
 그도 그럴 게, 거기엔 웬 미남자 한 명이 있었던 것이다.
 어제의 그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
 플로라는 그 모습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뭐야, 남사스럽게!’
 에밀을 마주하자 갑자기 어제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태연한 척하려 해도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
 플로라는 후드를 일부러 눌러쓰며 눈을 가렸다.
 그 모습을 본 파웰의 얼굴에 잔물결이 일었다.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야······ 자네 이야기 한번 듣고 싶어서지. 무슨 일을 하다가 산속에서 튀어나왔는지. 어쩌다 이런 곳에 살게 됐는지 한번 들어 보고 싶네만.”
 꿀꺽.
 날 선 파웰은 물론, 플로라와 주변 용병들까지 조용해졌다.
 경계하는 것과 별개로, 이 사람에 대해선 궁금한 것 천지다.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에밀의 입이 열렸다.
 “저는······.”
 
 
 
 #신임을 얻다
 
 
 
 “으어어엇! 당신 누구야?”
 “세상에, 자네가 어제의 그 냄새 풍기던 산사람이라고?”
 에밀은 귀를 가볍게 훑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 소릴 듣는 건지 모른다.
 씻고 온 뒤부터 계속 사람을 보고 놀란다.
 사람 자체가 확 달라졌으니 당연한 변화다.
 “평소에 면도를 안 하다 보니까.”
 “그래도 그렇지, 아예 다른 사람 같구먼.”
 “여자들이 아주 줄을 서겠어, 줄을.”
 마침 그 역한 냄새도 없어졌겠다, 짐꾼들부터 다가와 살갑게 말을 건넸다.
 냄새가 없어진 것만으로 반응이 180도 달라진 것이다.
 근본적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자, 그럼 슬슬 출발하지.”
 “웃차! 아이쿠······ 쿠!”
 막 일어서려던 짐꾼 한 명이 순간 비틀거렸다.
 “무슨 일이야, 멜슨?”
 “아니, 그게. 갑자기 허리가 삐끗해서······. 괜찮아, 별거 아냐.”
 “이런······.”
 말과는 달리 멜슨은 허리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큰 상처는 아니나, 하루 이틀 정도는 정양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짐을 버려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
 짐꾼들은 저마다 서로를 바라봤다.
 “여기서 더 들면 엎어질 텐데.”
 “안 돼, 이건.”
 “어디 힘 남는 다른 사람 없어? 누가 좀 와서 도와줘 봐.”
 짐꾼들은 서로를 돌아보았으나, 개중 선뜻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 그래도 산맥을 지나느라 다들 힘들다.
 거기서 짐을 더 떠안으려면 어지간한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그게 세 명이 들 만큼 무거운 화물이라면 더더욱.
 모두가 곤란해할 때, 에밀이 천천히 말했다.
 “주십시오.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
 “아, 자네가?”
 “아니, 근데 자네, 괜찮나?”
 “괜찮습니다.”
 가볍게 대답한 뒤, 성큼 다가가 단번에 짐을 들었다.
 터억.
 “어, 어어?”
 “이봐!”
 주변 짐꾼들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라서 미처 반응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건 이제부터였다.
 “됐습니다. 가시죠.”
 “이, 이럴 수가.”
 “장정 다섯 명이 들 짐을 혼자서······!”
 사방에서 손을 뻗었으나, 에밀은 별거 아니라는 듯 움직였다.
 탑에서는 골렘도 맨몸으로 들어 본 적 있었다.
 이 정도야 가뿐했다.
 “출발!”
 “출발한다!”
 “행렬 순번대로 움직여! 낙오하는 자는 죽는다! 여기가 어딘지 항상 유의하고 있어라!”
 출발령이 떨어지자 상단은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룻밤 푹 쉰 터라 다들 기운이 넘쳤다.
 거기에 끼어서 가던 중, 선두의 용병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에밀, 어제 합류한 에밀은 어디 있지? 상단주님께서 찾으신다.”
 “상단주님께서요?”
 “그래. 지금 당장 따라오도록.”
 “알겠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거기에 쐐기를 박듯, 포스가 귀엣말을 건넸다.
 
 -에밀 님에 대한 정보를 캐물으려는 의도입니다.
 
 ‘역시 그렇군.’
 예상했던 대로다.
 뭐, 적당히 선을 지켜 대답해 주도록 하자.
 짐을 들고 따라가자 용병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럴 수가······. 괜찮나?”
 “괜찮습니다, 딱히 무겁지도 않고.”
 “그거, 다섯 명분의 짐인데······.”
 “가시죠.”
 한 번 더 말하자, 용병도 하는 수 없이 말 머리를 돌렸다.
 그를 따라가자, 상단주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플로라에게는 사과를 해야 한다.
 하지만 말을 꺼내자니 주변에 눈이 너무 많았다.
 ‘때가 오겠지.’
 가볍게 넘기는 사이, 예상대로 벨릭 상단주가 질문을 해 왔다.
 다만 물어보는 어조는 꽤나 부드러웠다.
 특별히 해칠 기색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미 포스를 통해 이야기를 엿듣기도 했고.
 경계할 건 없을 것 같았다.
 에밀은 간단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오래 살아왔을 뿐인지라 딱히 흥미를 보이실 만한 게 없습니다. 악취가 불편을 끼쳤다면 죄송합니다.”
 사람과 만난 경험은 드문 게 아니라 아예 없다.
 대신 그 자릴 채운 건 바로 수많은 싸움의 기억들.
 각 층마다 막아서던 온갖 난관과 적수들이었다.
 하지만 벨릭 상단주는 약간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하긴 그렇지, 이 산맥에서 사람을 보기야 하늘의 별 따기였을 테니까.”
 “그럼 여기 온 것은······. 살고 계시던 곳이 전부 몬스터들에게······.”
 옆에서 묻던 플로라가 말끝을 흐린다.
 파웰도 한마디 덧붙여 말했다.
 “거······ 안타깝게 됐소. 그래도 당신이나마 살아서 다행이오. 이번 생엔 화전민으로 태어나 가더라도, 다음 생에서는 귀족으로 태어나기를.”
 화전민촌의 생존자.
 나쁘지 않은 오해다.
 구구절절 과거사를 설명할 필요도 없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그러기를 빕니다.”
 이시도르와 세오든.
 그들도 안식을 찾기를 조용히 빌어 주었다.
 “한데 무겁진 않은가?”
 “아니요. 괜찮습니다.”
 계속해서 움직이던 도중, 벨릭 상단주가 물어 왔다.
 그도 에밀의 등에 실린 짐이 심상찮음을 눈치챈 것이다.
 “와아!”
 “저러고서 허리가 멀쩡하단 말이야?”
 상단주를 지키던 호위 용병들도 놀랐다.
 행렬 중 최정예인 그들마저도 저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단해······.”
 이 진기한 광경엔 플로라마저 넋을 잃었다.
 보고 있던 파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 나름 대단하긴 하다만,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소이다.”
 “파웰 경은 각종 훈련에 마나까지 능숙하게 다루시잖아요. 맨몸으로 이러는 거랑 같아요?”
 지지 않기 위해 말했건만, 대번에 핀잔이 날아든다.
 보고 있는 입장에서 왠지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하기야 철성의 기사와 민간인(?)을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상단이 움직이는 동안 에밀은 대부분의 시간을 조용히 보냈다.
 가끔 짐꾼들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는 것만 빼면.
 물어보는 몇 가지.
 지금 몸담고 있는 스네일 상단에 대한 게 바로 그것이었다.
 “여긴 어떤 곳이냐고?”
 “예.”
 믿을 수 없는 사람인 에밀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여 준 곳이다.
 어떤 사람들인지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싶었다.
 에밀 자신에 대한 질문도 돌릴 수 있고.
 “뭐, 벨릭 상단주님께서 상단주님이시고······. 플로라 아씨, 그리고 디베르만 총관 겸 집사님께서 계시지. 본점인 남쪽엔 마님께서 전 업무를 총괄하시고.”
 “그렇군요.”
 “그리고······ 음, 뭐 믿을 만한 곳이라는 것만큼은 내 보증함세. 우리들이야 고달프지만, 그만큼 돈도 많이 주고.”
 손님에게는 신의와 정 그리고 믿음을 최대한 지키려 노력한다.
 그만큼 내부 사람들은 고달프지만, 그만한 대가는 약속되어 있다.
 이것이 짐꾼들에게 들은 스네일 상단의 모습이었다.
 ‘신용과 성실······. 믿을 수 있는 상단이라. 나중에 가문을 되살리면 거래를 맡기고 싶군.’
 대륙 북방과 남방.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이랴, 이랴.”
 “워, 워.”
 그러는 동안에도 상단은 특별한 사건 없이 계속 움직였다.
 기이하게도 그동안 몬스터에 의한 곤란은 전혀 겪지 않았다.
 아니, 이쪽에서 먼저 처리했다고 해야 맞다.
 뭔가 움직일 때마다, 에밀이 빼먹지 않고 미리 말했기 때문이다.
 “상단주님, 저쪽에서는 왼쪽으로 조금 돌아가셔야 합니다.”
 “음? 하지만 그대로 가는 게 훨씬 빠를 텐데.”
 “돌이 떨어집니다. 보십시오.”
 에밀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벨릭 상단주가 눈매를 좁혔다.
 실제로 거기엔 커다란 바윗돌 몇 개가 흔들리고 있었다.
 “예전부터 그랬지 않습니까, 상단주님.”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는데, 딱히 떨어질 것 같진 않습니다.”
 양옆을 걷던 호위 용병들이 반대 의견을 냈다.
 그들도 나름 몇 번이나 산맥을 타 온 베테랑이다.
 저것이 떨어질 것 같았다면 진작 눈치챘을 터.
 하지만 바윗돌은 굳건했고, 암반은 아무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흠······.”
 잠깐 고민하던 벨릭 상단주.
 그가 손을 들어 준 건 에밀 쪽이었다.
 “이 친구 말대로 하게. 그래서, 왼쪽으로 가랬나?”
 
 -왼편으로 움직여, 낙심지에서 반경 5미터 이상 떨어지면 안전합니다. 그 외에 추가로 파편이 떨어질 수 있으니 따로 보호막을 치면 부상자 없이 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머릿속에서 귀엣말을 건네는 포스.
 그의 예측은 정확했다.
 쿠르릉-!
 명령대로 행로를 약간 틀자, 기다렸다는 듯 바위가 떨어져 내렸다.
 수 톤은 될 듯한 무게와 크기의 바위!
 미리 대비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재빨리 손을 썼다.
 “우와앗!”
 “실드!”
 “어스 월!”
 “윈드 스텝!”
 각종 마법에 의해 밀려가는 낙석들.
 남은 잔해도 실드를 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우, 우와!”
 “이럴 수가······!”
 바위는 아무도 없는 땅 한복판에 떨어졌다.
 만약 행렬이 그대로 갔으면 족히 십여 명은 죽었을 것이다.
 모두가 일제히 입을 쩍 벌렸다.
 “사, 살았다······!”
 “어떻게 안 거지?”
 “보다 보니 느꼈습니다.”
 벨릭 상단주가 물어 왔다.
 포스의 존재를 말할 수는 없는 상황.
 어쩔 수 없이 그냥 느낀 것이라 답했다.
 “과연 그렇군. 역시 신께서 선행에 대한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겐가.”
 다행히 벨릭 상단주도 납득하는 기색이다.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것 같긴 하지만.
 어차피 포스에 대해 말할 수는 없는 지금.
 의심만 안 사면 어찌 생각하든 좋았다.
 “훈련된 길잡이들도 그럴 리 없다 한 걸, 홀로 맞히실 줄이야······.”
 플로라도 놀란 듯 이쪽을 보며 말했다.
 어제 일 이후로 계속 시선을 두고 있다.
 역시 그때 바로 쫓아가 사과했어야 했나.
 후회해도 지나간 일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걸었다.
 “허.”
 한편 뒤늦게 다가온 파웰은 사정을 듣고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도대체······.’
 분명 에밀이란 짐꾼이 큰일을 한 건 맞다.
 응당 칭찬해 줘야 할 일.
 하지만 말을 꺼내자니 왠지 모르게 속이 씁쓸하다.
 ‘그래, 우연이겠지, 우연. 이번 한 번만 우연히 그런 걸 거야.’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파웰이 칭찬을 건넸다.
 “아주 잘했네. 덕분에 무고한 목숨이 죽지 않을 수 있었어.”
 “그냥 말해야 해서 말했을 뿐입니다.”
 에밀은 겸손히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럴수록 파웰의 속은 더욱 부글부글 끓었다.
 사람이 산 건 다행이지만, 이와 별개로 화나는 건 어쩔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파웰에겐 아쉽게도 이런 일은 한 번뿐이 아니었다.
 “우측 능선 나무 사이에 놀 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비하셔야 합니다.”
 “오우거 세 마리가 후방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신들린 듯 몬스터의 접근을 예언하는 에밀.
 그때마다 몬스터들이 그대로 상행을 습격해 온다.
 하지만 베테랑인 용병들은 너무도 쉽게 놈들을 쳐 냈다.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면 몬스터들은 이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결국 습격해 온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초주검이 되어 도망쳐야 했다.
 “허어.”
 “미쳤군, 미쳤어.”
 “이걸 전부 다 예상하다니.”
 한 번이면 우연이라 할지 모른다.
 하나 지금은 얘기가 달랐다.
 벌써 여섯 번이다.
 이제 벨릭은 에밀의 말이라면 뭐든 믿을 지경이었다.
 물론, 그때마다 파웰은 속을 내리누르느라 고생해야 했다.
 
 “말도 안 돼, 저게 가능한 일이야?”
 플로라는 눈앞에 보이는 인물을 향해 내뱉었다.
 벨릭 상단주는 물론, 용병들과 짐꾼들마저 주변에 몰려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에밀.
 어제 상단에 합류한 산사람이었다.
 “여기서 화전민촌을 일구고 살아왔다니까요. 저 정도로 감이 좋지 않으면 진작 몬스터들에게 먹혔겠지요.”
 “그렇지만, 그래도 저건 설명이 안 된다고요.”
 상단주의 명으로 와 있던 디베르만이 말했다.
 얼핏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하지만 플로라는 알 수 있었다.
 아니, 확신했다.
 저 남자에게는 단순한 ‘경험’만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무언가가 있다고.
 “허허, 어쩌면 정말 행운이 저 사람에게 깃들어 있는지도 모르지요.”
 “행운요?”
 플로라가 반문했다.
 “예. 가끔 유일신 에루께서 한 사람만을 지켜볼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된다 하지요. 거래를 하면 이득을 보고, 요리를 하면 평소보다 맛좋게 되는 식으로요. 아마 저 친구도 그런 때일 겁니다.”
 “그렇구나. 알겠어요, 디베르만.”
 유일신 에루가 보고 있는 사람.
 그렇게 들으니 아까와 또 다르게 보인다.
 ‘그럼 어제 내가 밤에 나갔던 것도 저 사람의 행운에 이끌린 것 때문인가?’
 고개가 절로 갸웃거렸다.
 분명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는데, 그게 사실 행운에 끌린 거라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적잖게 충격을 받을 것 같다.
 “하아······.”
 한 번 더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플로라는 깨닫지 못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지루함.
 그것이 어느새 완벽히 자취를 감췄다는 사실을.
 상념에 잠겨 있던 그녀에게 디베르만 집사가 말했다.
 “아가씨, 파웰 님께서 오십니다.”
 “파웰 오라버니가요? 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마차 앞으로 말 한 마리가 선다.
 그 위론 육중한 갑옷을 입은 파웰이 미소 짓고 있었다.
 “혹시 뭐 하는 중은 아니었지?”
 “아니, 그런 건 아녜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아, 실은 아까 주변을 둘러보던 중에 우연히 봤지 뭐야?”
 “봐요? 몬스터라도 보인 거예요?”
 플로라는 목소리를 굳히며 물었다.
 정말 몬스터를 봤다면 당장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대비하는 것과 그러지 않은 건 천지 차이.
 몬스터가 온다면 이러는 시간 자체가 아까웠다.
 “하하, 아니다. 몬스터가 아니라, 그보다 더 대단한 거지.”
 “네?”
 “자.”
 말을 마친 파웰이 등 뒤에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여러 개의 꽃잎이 휘날리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
 그가 들고 있던 것이다.
 “너를 닮은 꽃이 있어서 가져왔어. 한번 머리에 꽂아 보지 않으련?”
 “아······. 고마워요.”
 플로라는 천천히 꽃을 받아 머리에 끼웠다.
 지켜보던 파웰은 물론, 디베르만 집사마저도 감탄했다.
 아름답다.
 단지 그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았다.
 “이야, 아가씨. 대단하십니다.”
 “고마워요, 디베르만.”
 “하하, 역시 내 예상이 그대로 들어맞았구나. 아주 잘 어울려!”
 파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무슨 꽃인진 모르겠으나, 굉장히 아름다운 건 사실이었다.
 “어머, 파웰 오라버니. 정말 고마워요. 덕분에 이런 곳에서 치장도 해 보네요.”
 “뭘, 당연한 일이지. 하하하하.”
 “역시 절 생각해 주는 건 파웰 오라버니밖에 없어요. 이런 진정한 친구는 천금을 줘도 얻을 수 없다 했는데······. 오라버니께선 저와 제 가문의 진정한 친구예요.”
 “하, 하, 물론이지.”
 시간이 지날수록 웃음소리가 점점 줄어들어 간다.
 거기에 쐐기를 박듯 플로라가 말했다.
 “나중에 제가 어머니가 되어도 축하해 주실 거죠? 기대하고 있을게요, 파웰 오라버니.”
 “······그, 그래······.”
 애써 안색을 관리하지만, 이미 어깨가 축 처져 있다.
 영락없이 비 맞은 강아지 꼴이었다.
 근처에 있던 에밀은 가볍게 혀를 찼다.
 ‘저 녀석도 어지간히 불쌍하군.’
 아무리 어릴 적 유폐되었다고는 하나 최소한의 눈치는 있다.
 아까 꽃을 꺾어 올 때도 그렇고, 대놓고 좋아한다는 티를 내는 게 뻔히 보인다.
 ‘아마 저 여자 빼고는 다들 알고 있겠지?’
 알면서 일부러 거절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결국 플로라가 그 방면엔 눈치가 제로라는 것밖엔 없었다.
 눈앞에서 돌아 나오는 파웰의 얼굴엔 구름이 가득했다.
 보고 있자니 약간이나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의도가 뻔한데······. 쟤도 눈치가 참 없구나.’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에밀은 주변 짐꾼들의 질문들에 대답하며 몸을 뉘었다.
 이제 산맥도 거의 다 넘었다.
 
  * * *
 
 의외로 파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운을 되찾았다.
 불과 수십 분 만에 다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경험 많은 짐꾼에게 사정을 듣자 하니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모양이었다.
 “늘 그랬지, 뭐. 파웰 경이 아무리 이런저런 어필을 해도 플로라 아가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말이야.”
 “흠?”
 “저분이 어떤 분인지 아나? 페롤 왕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분이시자, 차기 오러 마스터로 가장 유력한 초신성이라고.”
 “그렇단 말이죠.”
 오러 마스터라면 어릴 적 들어 본 기억이 있다.
 오러 능력의 극의에 다다른 무적의 초인들.
 한 나라에 두 명이면 많다 했던가.
 슥.
 앞서가는 파웰을 다시 한 번 본다.
 아무리 봐도 그다지 강한 것 같지 않다.
 고개가 저도 모르게 갸웃거렸다.
 “한데 그렇게 된 게 왠지 아나?”
 “아니요.”
 “흠, 실은 플로라 아가씨께서 어릴 적에 파웰 경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말씀하시길 강한 남자가 좋다고 했다더군. 그 말에 자극받은 파웰 경이 온 힘을 다해 무술을 연마했고······ 지금 저 정도의 경지에 오르신 거라네.”
 그러니까, 어릴 적 한 그 말 때문에 나라에서 손꼽히는 기사가 됐다 이거다.
 참으로 대단한 순정이다.
 보답받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지만.
 “여하간에 자네도 파웰 경만큼은 얕보지 않는 게 좋아. 혹시나 해서 말해 주는 걸세.”
 “배려 감사합니다, 어르신.”
 “허허, 무얼.”
 늙은 짐꾼은 그리 말하며 에밀의 등을 바라보았다.
 지게가 삐걱거릴 정도로 올려진 상자들이 보인다.
 놀랍게도, 에밀은 지금 5인분의 짐을 진 채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그것도 힘든 기색 하나 없이!
 “자네, 안 무겁나?”
 “괜찮습니다.”
 겸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게.”
 “너무 무리하다간 허리가 나갈 수 있으니 조심하고.”
 “허 참, 젊은 친구가 정말 대단하군.”
 “별말씀을요.”
 간단하게 대화를 마치고 가려던 도중, 파웰이 다시 플로라 쪽으로 가는 게 보였다.
 손에는 저번과 또 다른 꽃이 들려 있었다.
 다시 한 번 도전하려는 것일까?
 일단은 지켜보려 하는 사이, 파웰이 마차에 가 말했다.
 “플로라, 잠깐 이리 와 보거라.”
 “네? 무슨 일이에요, 오라버니?”
 마차 안에서 고개를 내미는 플로라.
 파웰은 그녀에게 씩 웃어 보이며 새 꽃을 내밀었다.
 “어제의 꽃은 어제로, 오늘의 꽃은 오늘로. 자, 이것도 어디 한번 장식해 보거라. 아주 아름다울 거다.”
 “그런가요? 이 꽃은······.”
 “어제의 것은 너무 수수해서 네 매력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어. 이 꽃의 화려함이라면 그럴 일은 없을 게다.”
 그 말대로 이번 꽃은 어제의 것보다 두 배는 더 화려했다.
 저번의 그 꽃이 은근한 매력을 풍겼다면 오늘은 대놓고 나를 보라는 듯한 느낌.
 장신구였더라도 약간 부담이 될 정도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한번 해 볼게요. 주세요, 오라버니.”
 “좋아, 자, 여기 있다.”
 파웰이 껄껄 웃으며 꽃을 건네려 했다.
 순간, 그 사이를 누군가가 가로막으며 말했다.
 “안 돼!”
 타악!
 짧은 타격성과 함께 꽃이 손아귀에서 밀려 나갔다.
 누가 반응할 새도 없이 빠른 속도였다.
 “아, 아?”
 “이게 무슨 짓이냐!”
 멍하니 입을 벌린 플로라를 대신해 파웰이 소리쳤다.
 그만큼 뛰어든 사람의 속도는 빨랐다.
 “에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등 뒤에 있던 짐꾼들은 눈을 크게 떴다.
 분명 그는 방금까지 자신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어떻게 한순간 저기 가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안 됩니다. 이 꽃, 당장 치우십시오.”
 “뭐가 안 된다는 거냐! 내가 플로라에게 꽃 한 송이 선물하는 것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게야?”
 으르렁거리는 파웰의 얼굴에서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보였다.
 마침 에밀에 대한 플로라의 이상한 반응이 신경 쓰이던 차다.
 그동안 쌓여 있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네가······.”
 “이걸 잘 보십시오.”
 결투를 신청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온 순간.
 에밀이 천천히 꽃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꽃을?”
 “하?”
 “뭐야, 무슨 일이야?”
 주변이 술렁거리는 사이로 들쥐 한 마리가 지나간다.
 에밀은 대번에 놈을 붙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들쥐는 왜······?”
 에밀은 대답 없이 꽃을 쥐에게 가까이 대었다.
 스윽.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멀쩡하던 쥐가 갑자기 거품을 물더니, 축 늘어진 것이다.
 “주, 죽었어!”
 “이럴 수가!”
 보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 파웰의 얼굴마저 창백해졌다.
 에밀이 말했다.
 “보십시오. 이 꽃은 케모스레크란 독초로, 제대로 향기를 맡으면 오우거도 거꾸러뜨리는 맹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그런!”
 “그리고 이 꽃의 향기는 그 독을 가장 진하게 담아 바깥으로 퍼뜨리고 있지요. 만약 그걸 드렸다간 파웰 경은 평생 후회 속에서 살아가야 했을 겁니다.”
 그렇다.
 자칫하다간 플로라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널 뻔했다.
 파웰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한숨을 내쉬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허허, 세상에나. 아직 젊은 친구가 이렇게 박식할 수가!”
 먼저 말한 것은 보고 있던 디베르만 집사.
 그를 시작으로 짐꾼들이 천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는 거예요?”
 목숨을 건진 플로라도 호기심을 보였다.
 약초학에 해박하지 않다면 이걸 아는 건 불가능한 일.
 게다가 멀찍이서 슥 보고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던가.
 ‘자신이 본 것에 확신이 있지 않으면 그렇게는 못 해!’
 범상치 않은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보는 순간, 에밀이 대답했다.
 “여기서 있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됐습니다. 별거 아닙니다.”
 “아······.”
 “하긴, 오래 살던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구먼.”
 학문을 배우는 방법엔 분명 경험도 속해 있다.
 아니, 경험하며 배우는 것이 사실상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산맥에 오래 있었다면 저 꽃 때문에 죽은 동물을 봤을 터.
 그렇다면 이걸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물론 에밀이 그걸 알아챈 건 어디까지나 포스의 분석 덕분이었다.
 말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를 테지만.
 “덕분에 큰일을 막았네요. 당신 덕이에요. 고마워요, 에밀.”
 플로라가 얼굴을 붉히며 감사 인사를 해 왔다.
 이상하게도 정면이 아닌 옆으로 고갤 돌리고 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남의 알몸을 봤으니 트라우마가 없진 않을 테니까.
 “그냥 동행시켜 주신 은혜를 갚았을 뿐입니다. 별거 아닙니다.”
 가볍게 답하고 짐 쪽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순간 멈칫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 중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게 하나.
 껄끄러운 것을 바라보는 것 같다.
 ‘뭐지?’
 파웰은 아니다.
 그는 나라 잃은 듯한 눈빛으로 플로라 쪽을 보고 있으니까.
 그럼 대체 누가 그런단 말인가.
 잠깐 생각하던 에밀은 이내 픽 웃고 말았다.
 누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간에 상관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누가 오더라도 한 몸 지킬 자신은 있었으니까.
 
 파트리아스 산맥은 베테랑 모험가조차 꺼려 하는 곳이다.
 제국이나 왕국의 정규군마저도 감히 산맥을 넘으려 시도하지 못했다.
 험한 산세도 산세지만, 진정한 위협은 틈만 나면 튀어나오는 몬스터였다.
 오크부터 시작해 하피, 와이번, 심지어는 드레이크까지 보이는 파트리아스 산맥.
 하지만, 9부 능선을 넘는 중인 지금도.
 몬스터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휴우.”
 “조금만 더 가면 몬스터들의 영향권을 벗어난다! 다들 끝까지 힘을 내도록!”
 “예에!”
 상단주의 격려에 사방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다들 생각하고 있었다.
 조만간 보일 거대한 제국의 도시.
 맛있는 술과 음식, 그리고 여자들을.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급해하는 사람도 없고 다들 페이스를 유지한 채 할 일을 하고 있다.
 과연 대상단의 일원이라 할 만했다.
 “잠깐 쉬고 다시 속도를 낸다!”
 “정지! 휴식이다!”
 빠르게 가다 보니 다들 금방 지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벨릭 상단주는 시기적절하게 휴식 명령을 내렸다.
 “어디 가나?”
 “근처에서 과일 냄새가 나서요. 몇 개 따 오겠습니다.”
 “오, 그래? 그거 좋지.”
 용병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열었다.
 안 그래도 다들 지쳐 있는 참이었다.
 즙 많고 달콤한 과일이라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오래 안 쉴 듯하니, 서두르게나.”
 “예.”
 에밀은 천천히 숲속으로 들어갔다.
 조금 걷자 향기를 풍기던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다.
 잘 익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열매가 가득 열려 있었다.
 몇 개를 따서 주머니에 넣은 순간.
 바스락.
 ‘음?’
 인기척이다.
 다른 사람이 용변이라도 보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조금 과하게 주변을 신경 쓰고 있다.
 몬스터도 이제 거의 없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천천히, 그 기척을 향해 소리를 죽여 이동했다.
 발소리는 물론, 느낌마저도 완벽히 없앤 채다.
 <엘리멘탈의 정령화>를 통해, 실제 몸을 바람처럼 가볍게 만들었다.
 그 움직임은 마치 진짜 바람과도 같았다.
 ‘음?’
 인기척의 근원지로 간 에밀이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디베르만 집사.
 언제나 플로라와 벨릭 부녀에게 붙어 있던 그 사람이었다.
 “자, 가거라.”
 구구! 구구구!
 전서구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았다.
 높이 날지 않는 폼이, 멀리 가지는 않는 듯했다.
 보고 있자니 집사가 다시 한 번 주변을 둘러본다.
 마치 들키면 안 될 일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수상하군.’
 몇 번이나 주변을 훑는 디베르만 집사.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하고 나서야 상단 행렬로 돌아간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모습이다.
 “왔나? 과일은?”
 “여기 있습니다.”
 “오오! 복숭아라니!”
 “뭣! 복숭아?”
 상단의 짐꾼들은 과즙 많은 복숭아에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들었다.
 그들 중 누구도 디베르만의 행동을 눈치챈 사람은 없어 보였다.
 ‘상단의 총관이자 직속 수하니까. 전서구로 지점에 연락이라도 하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려 해도 왠지 불안한 느낌이 든다.
 복숭아 맛이 못내 시큼했다.
 거기에 몰두하는 사이, 파웰이 다가와 옆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복숭아는 맛있나?”
 “네.”
 “흠흠, 그거 다행이군.”
 잠깐 말을 끊었던 파웰이 머뭇거리며 사과의 말을 꺼냈다.
 주된 내용은 너무 차갑게 대해서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앞장서서 자네를 의심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에밀, 자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상단은 지금보다 수배의 피해를 봤을 걸세. 많은 귀중한 목숨이 사라졌겠지. 고맙네, 그리고 미안하네.”
 파웰은 기사다.
 젊은 층에서 상대할 자가 없는 강력한 기사!
 그렇기에 그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때문에 머리를 굽히는 덴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다만 당사자인 에밀은 전혀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여하간에 다시 한 번 잘 부탁하네, 에밀. 나 파웰,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람이야.”
 “감사합니다, 기사님.”
 “······파웰일세.”
 “예, 파웰 님.”
 “······.”
 
  * * *
 
 상행이 다시 출발하기 직전.
 용무를 보고 돌아온 디베르만 집사는 즉시 벨릭 상단주에게로 향했다.
 “상단주님.”
 “오, 디베르만. 무슨 일인가?”
 “아까 보고를 하나 받았는데······ 별로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자세히 말해 보게.”
 “예.”
 숨을 들이마신 디베르만 집사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요 앞에 다리 있잖습니까.”
 “그렇지, 돌로 된 거라 아주 튼튼한 놈으로. 별일 없으면 그 루트로 갈 생각이었네만, 왜 그러나?”
 “실은 그것이 얼마 전 있었던 몬스터들의 싸움으로 완전히 박살 났다고 합니다. 현재 수리 중이긴 한데 적어도 며칠은 걸릴 것으로······.”
 “뭐야?”
 벨릭 상단주의 목소리가 커졌다.
 다리가 부서졌다는 건 그만큼 큰일이었다.
 “그럼 일정이 며칠은 늦춰진단 얘기지 않은가!”
 “예, 그렇습니다.”
 스네일 상단의 강점은 무엇보다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신의!
 끈끈한 정이나 상업 수완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수적으로 갖춰진 것이지, 주된 가치로 내세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데 지금 그 신뢰가 깨지게 생겼다.
 다리 수리비야 별문제 아니지만, 상단 브랜드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이를 어째야 하지. 마법사들을 이용한다 한들 이 정도의 행렬이라면 건너지 못할 텐데! 아아······.”
 “진정, 진정하십시오! 상단주님!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 방법이 있다고? 그게 뭔가!”
 번개같이 어깨를 붙드는 벨릭 상단주.
 그 눈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놀랄 만도 하건만, 디베르만 집사는 침착하게 대안을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다른 루트를 찾는 작업에서 발견했던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상류 쪽이었는데, 물살이 약하고 물도 얕아 다리를 놓을 필요 없이 건널 수 있습니다.”
 “오오, 그런가?”
 “거길 이용한다면 오늘 안엔 건널 수 있을 겁니다. 약간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다리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이게 낫겠지요.”
 벨릭 상단주의 얼굴색이 더욱 밝아졌다.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디베르만을 껴안으며 외쳤다.
 “역시 자네밖에 없어! 정말 고맙네! 여봐들! 길을 옮긴다. 왼쪽으로 선두 열을 틀어라!”
 “예! 상단주 어른! 왼쪽으로 틀어라!”
 드르르르.
 사람들의 움직임이 급히 왼쪽으로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남은 지시를 마친 디베르만이 에밀에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자네, 산맥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은데. 내 말이 맞나?”
 “예.”
 모른다고 하면 지금까지 했던 게 모조리 의심을 사 버린다.
 고개를 끄덕이자, 디베르만의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게 보였다.
 “아주 좋아. 그럼 개인적인 일을 한 가지만 도와줄 수 있겠나? 보수는 섭섭잖게 줌세.”
 “보수요?”
 “그래. 실은 얼마 전 아는 약초꾼 조합에서 저 산 정상 부근에 천 년 묵은 만드라고라가 있다고 귀띔받아서 말일세.”
 디베르만은 말을 마치고 산맥 기슭에 불쑥 솟은 작은 언덕을 가리켜 보였다.
 “자네라면 발걸음이 빠르니, 저기까지 갔다 오는 것도 금방이겠지. 어떤가, 일이 잘 풀리면 뿌리 조각 하나 정도는 자네에게 주겠네.”
 천 년 묵은 만드라고라는 무인에게 대단한 영약으로 취급되는 귀물이다.
 엄청난 양의 마나는 물론, 체질이나 마나 감응력을 향상시켜 주기 때문이다.
 타고난 천성을 향상시킬 수 있는 영약!
 작은 뿌리라도 그 가치는 대저택 서너 개에 필적했다.
 ‘안 그래도 돈이 부족한데, 마침 잘됐군.’
 가문을 계승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자신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전쟁은 혼자서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일단 최소한의 용병 부대 정도는 고용할 수 있어야 했다.
 만드라고라의 뿌리 조각이라면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다.
 ‘다만 문제는 이 사람을 믿을 수 있느냐인데······.’
 디베르만을 돌아보자 절로 눈길이 가늘어졌다.
 마냥 믿기에는 아까의 그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잠깐 고민하던 에밀은 다른 사람을 부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단, 믿을 만한 분의 공증이 필요합니다만.”
 “믿을 만한 사람이라······. 상단주님이라도 불러올까?”
 “아니요.”
 에밀은 그 자리에서 플로라 쪽으로 향했다.
 상단주의 딸이자,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은 고위직의 사람.
 그녀라면 충분히 믿고 공증을 맡길 수 있었다.
 “심부름값으로 의뢰 물건의 10분의 1을 떼 준다고요? 뭐, 그러세요. 디베르만 집사가 약속을 어기면 제게 찾아오시고요.”
 “이제 됐나? 너무 늦기 전에 다녀오게.”
 “감사합니다. 그럼.”
 공증까지 받았으니 더 이상 뺄 수도 없는 노릇.
 에밀은 성큼성큼 걸어 행렬에서 멀어졌다.
 “그런데 디베르만, 정말 저 언덕 정상 부근에 그런 약초가 있나요?”
 “믿을 만한 소식통에게서 들었으니 아마 맞을 겁니다. 뭐, 아니라도 상관없고요.”
 말을 마친 디베르만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플로라는 눈치 못 챌 정도로 미세하게.
 
  * * *
 
 파팟.
 탓.
 바스슥.
 우거진 수풀과 나뭇가지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그 사이로 수많은 몬스터들이 튀어나왔다.
 키릿!
 캬아악!
 약한 놈, 강한 놈.
 하나같이 겁에 질려 있다.
 갑작스럽게 포식자가 나타나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그는 몬스터들의 권역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았다.
 “여긴가?”
 산 정상에 도착한 포식자는 다름 아닌 에밀이었다.
 시야에서 멀어지자마자 속도를 냈기에 아직 행렬이 보이는 위치였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딱히 만드라고라라 여겨지는 게 보이진 않았다.
 “분명 이 근처를 가리켰는데?”
 
 -마나 집결체 검색 결과 : 0건
 
 포스도 부정적인 탐지 결과를 내놓았다.
 이미 산 정상 부근은 완전히 둘러본 지 오래다.
 그럼 결과는 둘 중 하나.
 믿을 만하다던 약초꾼이 거짓말을 했거나, 디베르만이 에밀을 속여 따로 떨어뜨린 것이다.
 “하.”
 앞서의 감각까지 생각해 보면, 뭐가 진실인지는 명확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생각하니 또 다른 의문이 들었다.
 디베르만은 뭣 때문에 에밀을 상단으로부터 떼 놓은 것일까?
 그 답은 예상외로 금방 나왔다.
 ‘이 기척은?’
 
 -인간 이십여 개체 접근 중. 전부 마나 능력자입니다.
 
 파팟!
 스윽!
 포스가 다급히 경보음을 냈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검푸른 인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착 붙는 야행복을 입은 남자 이십여 명.
 한눈에 봐도 암살자들, 혹은 그에 준하는 은신법을 익힌 자들이었다.
 “이놈인가?”
 “그런 듯하군. 다른 타깃은 어딜 봐도 없어.”
 “그럼 작업을 시작하지. 본업을 앞둔 애피타이저니까 가볍게 처리하자고.”
 스르릉.
 검을 뽑아 든 암살자들에게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일렁이는 오러가 끝에 맺히는 걸로 봐선, 적어도 오러 어프렌티스 정도의 실력자다.
 러너, 어프렌티스, 익스퍼트.
 이 세 단계로 나뉘는 게 오러 유저의 등급이다.
 어프렌티스면 족히 백 명의 병사를 상대할 수 있는 초인이었다.
 하지만 에밀에게서는 전혀 긴장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여유롭게 뒷짐까지 진 채 암살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운이 나쁜 걸 탓해라!”
 “너희가 디베르만 집사랑 내통하고 있었나?”
 갑작스러운 질문에 암살자 몇몇이 움찔했다.
 단순한 말 한마디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무, 무슨 압박감이?’
 에밀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기세.
 그것이 그들의 온몸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비틀.
 심약한 몇 명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이, 이럴 수가!”
 “제기랄! 이놈! 파웰에 비해 떨어지지 않아!”
 “아니, 어쩌면 파웰보다도 위험할지 모른다. 어서 그분에게 말씀드려야······.”
 “어딜 도망가려고.”
 휘익!
 날아든 돌멩이가 막 돌아서던 암살자 하나의 머리를 터뜨렸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날았기에.
 그것의 위력은 가히 포탄과도 비슷했다.
 “허, 허억.”
 “읏!”
 남은 이들은 두려운 얼굴로 가운데의 산 사람을 돌아보았다.
 고오오오.
 막강한 살기가 산 정상을 덮었다.
 승천의 탑에서 수없이 단련된 야성이.
 이제 바깥에서 처음으로 풀려나려 하고 있었다.
 
 “크아악!”
 “놈들이 파고든다! 막아!”
 “아, 안 돼!”
 사방에서 피가 흘렀다.
 검은 인영들이 이리저리 뒤엉키며,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인다.
 귀를 쫑긋 세워도 비명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행렬을 전부 태울 듯 타오르는 불길은 덤이다.
 얼마 전까지 평온했던 상행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끔찍한 참상이었다.

댓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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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필하세요
2018.05.30 12:05
Deadboy    
97% 아닐밖에 없어-> 아닐 수 밖에 없어
2018.05.30 23:01
박독자    
호우
2018.05.31 11:52
명황케인    
괜히 대여 했네 2권읽다 하차... 돈 아깝다.!
2018.06.01 22:07
야불    
ㅇ ㄷ ㅇㄷㅇㄷㄷ으믕ㄷ ㄷ므으ㅁㄷㅇㄷ업데이트가 ㄷㅇ ㅇㅌ ㅡㅇㄷㅇㄷ 으 ㅇㅡㅇu h 8 you h 8 h u8 u I h 8 u u u u h hi u u8 u hungry 8 u
2020.03.21 04:01
야불    
8 bu
2020.03.21 04:01
남양군    
내용이 왜 이래. 왔다갔다 정신없네요.
2020.03.2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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