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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실록 전신전설 1

2018.05.28 조회 562 추천 1


 무림실록 전신전설 1권
 서(序)
 
 
 산의 정상에 서서 바라보아도 접한 바다를 볼 수 없는 대륙을 본 적이 있다면 광활하다는 것의 느낌을 조금 알 수 있을까.
 가도 가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같은 그 거대한 중압감을 바로 중원에서 느낄 수 있다.
 무공을 익힌 자들의 또 하나의 대륙인 중원.
 나라의 개념까지도 초월해버린 이 중원은 사막의 모래 알갱이처럼 많은 이들을 담고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저 정상을 향하여 가지만, 저 냉혹한 중원은 그들에게 이름을 남기는 것조차 쉽게 허락해 주지 않는다.
 그런 중원에서 스스로 광오하게 자신이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될 것인가?
 어줍잖은 자신감으로는 칭송을 받기는커녕 스스로 내세우기조차 부끄러울 것이다.
 물론 간혹 자신을 모르고 나대는 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자들은 제외하고 하는 말이다.
 무적신권(無敵神拳) 당궤(唐軌).
 그는 권법(拳法)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사내였다.
 사람들은 그의 권(拳) 아래에선 오호사해(五湖四海)가 숨을 죽이고 삼산오악(三山五岳)이 침묵한다 칭할 정도였고, 그의 일권에는 철벽(鐵壁)일지라도 한줌의 모래로 스러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권법의 대가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그의 일권을 겁냈으며, 그의 일수에 경외감을 갖고 있었다. 당궤 앞에서는 자신들의 명호도 못 내밀 정도였던 것이다.
 언젠가 그가 성난 백호(白虎)를 한 주먹에 혈우(血雨)로 만들어버렸고, 강남(江南)의 제일검(第一劍) 뇌독현(雷獨現)의 신검(神劍) 어장(魚腸)을 고철로 만들어버렸던 것은 중원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일화였다.
 그런 그가 죽었다.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가 쓰러져 있던 주변의 바위는 온통 모래가 되어 있었고, 그는 그 가운데 잠든 듯 누워 있었다.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그는 누워 있었고, 그가 누워 있던 자리에는 두 양동이는 나올 듯한 피가 엉겨붙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자랑하는 권법으로 심장이 터져 죽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단 일권이었다. 그의 심장은 걸레가 되어 등에 작은 구멍을 뚫고, 시신의 삼 장 밖에 버려지듯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자그마한 장미가 핏빛으로 선명하게 그려진 손수건이 엽전 일 문에 꽂혀 나부끼고 있었다.
 그후 무림에는 풍운(風雲)이 일었다.
 누구인가? 누가 이토록 혹독한 살인을 하는 것인가?
 아니 그보다도, 어느 누가 권으로 당궤를 저렇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인가?
 사람들은 권의 대가들을 손으로 꼽아봤지만 곧 고개를 저어야만 했다. 알려진 그 누구도 당궤를 권으로 이길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후, 하남성 제일검수(第一劍手) 신검일비(神劍一批) 문인청(聞仁靑)이 단 일 검에 내부 사정을 훤히 드러내 놓고 죽어 있었고 그 옆에는 한 장의 손수건과 엽전 일문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남경(南京)의 철편서생(鐵鞭書生) 무휘(武揮).
 그는 칠체철편으로 무적을 자랑하던 사내였지만 역시 한 많은 세상을 노려보며 자신이 애용하던 칠체철편에 가슴이 뚫려 있었고 어김없이 그의 옆에는 손수건과 엽전 일 문이 놓여 있었다.
 그 외에도 중원제일도를 자랑하던 봉황신도(鳳凰伸刀) 청유제강(靑釉製鋼), 암기의 달인인 비화노인(飛禍老人) 소백(小伯), 천잠사(天蠶사)와 철추(鐵椎)로 신산을 주름잡고 있던 철추신인(鐵錐神人) 적추(赤醜), 궁(弓)으로는 천 장 밖의 소의 눈도 맞춘다는 제일천궁(第一天弓) 호접비(胡蝶匕) 등이 모두 한 사람에 의해 생(生)에서 사(死)의 관문으로 전업(轉業)한 사내들이었다.
 모두 한 사내에게 당한 이들을 바라보면서 중원인들의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도대체 그는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그는 형태조차 없는 듯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날이 갈수록 시신만이 늘어날 뿐이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려진 바 없었고, 또한 그의 그림자도 본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신비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법이다. 사람들은 어느새 그를 홍화객(紅花客)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의 살인행각 후에는 항상 주변에 붉은색 꽃이 수놓아진 손수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하제일의 살수 홍화객(紅花客).
 시간이 갈수록 그의 신기에 가까운 살인이 거듭되면서,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고, 그의 흔적을 쫓는 자들 또한 늘어만 갔다.
 어떤 자는 호기심에, 어떤 자는 복수를 하기 위해, 어떤 자는 무림도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제각기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그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떠나갈 땐 눈빛을 빛내며 걸음을 재촉했던 그들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늪이 그들 전부를 꾸역꾸역 삼켜버린 듯 그들은 소리소문 없이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한 명씩 많아질 때마다, 홍화객이란 그의 이름은 사람들의 머리에 공포로 자리 잡았고, 이젠 누구도 홍화객의 정체를 밝히려 들지 않았다. 숨어서 숨어서 홍화객이 아직까지도 남기고 다니는 화려한 전적들을 숨죽여 얘기 나눌 뿐이었다.
 홍화객, 그는 누구인가?
 그의 진실한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현재까지는 말이다.
 
 
 전설(傳說)
 
 
 어느 시대에나 전설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중원의 모든 사람이 알 정도의 전설이라면 그 신빙성을 믿어 보아도 좋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누구나 입에 올리는 하나의 전설이 있었다.
 어떤 이는 그저 할 일 없는 자들이 만들어 놓은 얘깃거리로 치부했고, 어떤 이는 진실이라 믿고 그 뒤를 쫓느라 전생(全生)을 투자하는 그런 전설이었다.
 할머니는 손자를 무릎에 앉혀 놓고 얘기하기도 했고, 주정뱅이가 술에 취해 일장 연설을 하기도 했다. 객잔마다 두서넛이 모이면 그 얘기로 밤이 새는 줄 몰랐으며, 누구나 한 번쯤 그 전설을 차지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껏 그 누구도 전설의 진의를 밝혀내지 못했다.
 늘 그렇듯이 옛날 얘기는 이렇게 시작을 한다.
 아주 먼 옛날, 전신(戰神)이라 불리는 사나이가 있었다.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더니 일순간에 신화를 만들어버린 사나이.
 그는 오로지 싸움을 위해 사는 아수라 같았고, 그의 일검에 죽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그의 일수를 막을 자도, 그의 걸음을 막을 단체도 없었다. 그는 그의 이름처럼 신(神)이었다.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서 그를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가 나타나던 날부터 중원의 하늘에 태양은 보이지 않았고, 대지는 매일매일 피로 물들어갔다. 황하(黃河)에, 또 장강(長江)에 물이 아닌 피가 흘렀다.
 하루는 일 년처럼 길었고, 언제 자신의 앞에 그가 나타날지 몰랐으며, 또 언제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목이 베어질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가 왜 살인을 하고 다니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허나, 그의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은 오금을 펴지 못했다.
 한 명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수천을 죽이면 영웅이라 했던가?
 무림이 생성된 이래로 손꼽혀지는 희대의 살성들 중에서 그를 능가할 자는 없었고, 후에도 없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그가 신이 되어 버린 이유는 그의 모든 업적이 그 혼자만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조직도, 동지도 없었다. 오직 적과 자기 자신뿐이었다. 누구에게 의지하지도 않았으며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관군이든, 관리든, 무인이든 일 점의 거리낌없이 죽였다.
 그럼에도 그가 악마로 분류되지 않는 것은 무공이 없거나 힘없는 자들에게는 검을 들이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가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일화는 그가 사라지기 전에 있었던 전쟁 때문이었다. 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그는 마지막 전투에서 천여 명의 정예 군사들을 향해 장검 한 자루를 휘두르며 일신을 던졌다.
 천대일(千對一)의 혈전(血戰).
 해가 뜨고 지기를 네 번, 비명과 함성이 끊이지 않았고, 그 동안은 혈우가 멎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의 대결에서 살아 남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전신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쩌면 전쟁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도살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후 그는 사막의 열화처럼 피어오르는 혈향(血香) 속에 서 있었다고 했다.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고 자신이 일궈 놓은 논밭을 바라보는 농부처럼 그저 하염없이 서 있었다고 한다.
 부러진 검 한 자루에 의지해 슬픈 눈빛으로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서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후 그는 사라졌다. 그는 그 피의 대지에서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사람들의 입이 또 한 차례 바빠졌다. 그가 어디로 갔는가, 왜 사라져야 했는가, 무엇을 위해 그 많은 사람들과 치열한 싸움을 해야만 했는가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무도 명쾌히 해답을 말해주지는 못했다.
 단지 추측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패해 은거했다거나, 그 전투에서 심한 중상을 입어 더 이상 무공을 쓸 수 없었을 거라는 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뉘라서 그 진실을 알 수 있겠는가?
 그가 사라져 아무것도 알 수 있는 게 없는 그때에 사람들은 그의 과거담을 얘기하기에도 지쳤는지 전설을 만들어냈다.
 ‘언젠가 그의 후손이 나타나 다시 한 번 세상을 어지럽힐 것이고, 그의 후손은 천하를 지배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만들어진 말이었으나, 누구도 쉬이 흘릴 수 없는 말이었다. 전신, 그가 어딘가에 무공비급을 남겼거나, 자신의 전인을 만들었을 거라는 것이 전혀 신빙성이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나타날 전신의 후예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 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설에 대한 아무런 징후도 일어나지 않았고, 사람들은 점점 전신에 대한 무서움을 잊어가기 시작했다.
 전신이란 이름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져갔다. 이제 전신의 전설은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이었다.
 
 
 제1장 자객(刺客)
 
 
 풍뇌촌(風雷村).
 본시 이 마을은 오십여 호의 가구에 백오십여 명의 주민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오목한 분지 형태의 대지 위에 자리한 마을은 산 위에 올라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은폐되어 있었다. 마치 거대한 호를 파고 은거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장강(長江)의 줄기가 마을의 옆으로 길게 뻗어져 있었고, 그 뒤로는 쌍둥산이라 불리는 두 개의 산이 형제라도 되는 양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산 아래로 병풍을 두른 듯 대나무가 둘러쳐져 마치 마을을 감싸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산 깊숙이 자리해서 드나들기 어려운 때문인지 평상시에는 지나가는 사람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다. 간혹 타지방으로 가기 위해 산을 넘는 장사치들이나 시인묵객들이 지나곤 할 뿐이었다. 그러나 한 번 이곳을 지나간 이들은 호젓한 마을의 풍경과 그 어머니 같은 포근함에 이끌려 다시 이곳을 찾았다.
 그렇게 평온하던 이 마을이 장마를 맞이해 벌써 삼 일째 비가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쏴아아―.
 어른 손가락만한 장대비가 도저히 그칠 생각을 안 했다. 이미 강물은 불어날 대로 불어 마을로 범람하려 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마을의 도로는 빗물에 씻기어 깊은 골이 파여 있었고, 그 사이로는 시커먼 흙탕물이 줄지어 흐르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위험해 보이는 곳은 마을과 강 사이에 위치한 작은 나루터와 객점이었다. 그러나, 언제 쌓았는지 나루터 앞에는 작은 둑이 쌓여 있었고 그것으로 객점 안의 사람들은 안도를 하고 있었다.
 본시 이 나루터에는 그다지 많은 사람들이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객점이 서 있는 것은 요즘처럼 배가 전혀 운항을 하지 못할 때에는 배가 이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손님들이 제법 있기 때문일 것이다.
 철 장사라 그런지 주점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바람만 불어도 지붕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벽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어, 비가 새어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 객점이 마을에선 유일한 것이니 어찌 하겠는가? 이 빗속에서 노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무리 방 값이 비싸다 할지라도 마다할 수 없었다. 이런 실정이니 손님이 아무리 못마땅해도 마음껏 주인한테 불만을 얘기할 수 있는 입장이 못되었다.
 게다가 이 객점은 이 마을에 유일하게 자리한 주점이기도 해서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자리 잡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누구라도 비가 오는 날이면 술 한 잔이 생각나지 않겠는가? 비는 술의 영원한 말벗인 듯하다.
 객점 안은 비로 인해 끈적끈적함과 함께 곰팡이 냄새까지 피어올라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내뱉는 거친 숨소리와 땀냄새도 한몫을 했다.
 끼익―.
 습기를 먹은 문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안으로 밀렸다. 마치 문이 '아이고 죽겠다'하고 발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도 커 객점 안에 앉아 술을 마시거나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모두 문을 향해 돌아볼 정도였다.
 문에는 스물서넛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서 있었다.
 청년의 등에는 책상자가 짊어져 있었고, 머리에는 흰색의 문사건이 질끈 동여매어져 있었다. 청년은 그저 글줄이나 아는 시골의 서생처럼 그렇게 화려하지도 남루하지도 않은 의복을 입고 있었다.
 청년은 대나무 우산을 탁탁 문에 두드리고는 문가에 기대어 놓았다. 그러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사람 없다고 했던가?
 키가 웬만한 어른보다 머리 하나 정도 차이가 날만큼 커서 모두 올려 보아야 할 지경이었는데, 몸이 마른 편이라서 더욱 장대처럼 길다랗게만 보였다.
 먼길을 온 듯 청년의 몸은 온통 빗물에 젖어 물에 빠진 생쥐가 있다면 그와 같다고 했을 것이다.
 아마도 비바람이 거세어 우산도 소용없는 듯 했다.
 청년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여있자 멋쩍은 듯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볼일들 보시지요.”
 청년은 부드럽게 웃으며 사람들에게 일일이 포권을 해 보였다.
 사람들 역시 청년의 평범함에 그다지 큰 호기심을 느끼지는 못하는 듯 제각기 돌아앉아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청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휘적휘적 걸어가 구석에 자리한 빈 탁자에 자신의 책상자를 올려놓고 앉았다.
 주점 안은 이미 정오를 넘긴 지 한참이 지났을 시간임에도 제법 사람들이 자리하고 앉아 있었다. 하긴 움직이려 해도 어쩔 수 없으니 객방 안에서 심심하게 있는 것보다야 주점으로 나와 술이라도 걸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제 이맘때보다 오히려 적은 것이었다. 어제 이미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 몇몇이 지루함을 이기지 못해 상류를 향해 도보(徒步)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태반은 여행객들이었으며 본고장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찾아드는 손님도 없자 구석에서 꾸벅거리던 주인이 퉁기듯 일어나 청년에게 다가서서 물었다.
 “손님, 무얼 드시겠습니까?”
 주인은 보기 얄미울 정도로 살살거리는 자였다.
 나름대로는 친절을 베풀려고 하는 것이겠지만, 구부정한 자세나 마치 먹이를 얻어먹으려고 꼬리를 치는 개처럼 보이는 표정이 그를 비굴해 보이게 했다.
 “이 집에서 가장 독한 죽엽청 한 독만 가져다주시오.”
 주인은 청년의 말을 듣고는 놀라는 눈치였다.
 “예? 누구 오실 분이라도······?”
 “아니, 나 혼자요.”
 “그런데 독한 죽엽청을 한 독이나 가져오란 말씀이십니까?”
 주인은 청년의 호리호리한 몸을 보고는 아무래도 미심쩍어했다. 그의 몸으로는 한 독은 고사하고 한 잔만 마셔도 금방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소.”
 주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야 돈을 버니까 좋습니다만, 손님께서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닌지?”
 그러자 청년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본인은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여 밥보다는 술 찌꺼기를 먹고 자랐기 때문에 본시 잘 취하지 않소이다. 그리고 만약 취한다 해도 어차피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도 없는 입장이고,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도 오늘은 오지 않을 것 같은데 무엇이 걱정되겠소? 걱정 마시고 술독이나 하나 내어 오시오.”
 “예. 그, 그러지요.”
 주인은 아직도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대답하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청년이 주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눈에는 어딘지 모르게 장난끼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는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보는 듯 눈에 호기심과 웃음을 가득 담고 주루를 한 번 둘러보았다.
 주루 안에는 모두 열다섯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 옆으로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세 사나이가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문만을 연신 힐끔거리고 있었다. 어깨를 움츠린 채 주위를 경계하는 듯한 그들의 모습은 죄 짓고 도망 다니는 죄수처럼 보였다. 그들은 가끔 말을 나눌 때도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노화자 하나가 만취가 되어 탁자에 널브러져 잠이 들어 있었다.
 그 노인이 코를 얼마나 기세 좋게 골아대는지 그의 옆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귀에 대고 말해야만 했다.
 그들은 한 쌍의 남녀였는데, 대단히 사이가 좋은 듯 노인의 코고는 소리에 인상을 쓰면서도 서로에게 말 할 때에는 매우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청년의 바른편에는 얼굴에 검은색 휘장을 한 여인 넷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기이하게 식사를 하면서도 자신들의 얼굴을 가린 휘장을 들추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용케 음식을 먹고 있었다.
 청년의 왼편에는 마을 청년들인 듯한 다섯 명의 사람들이 웃고 떠들며 술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큰소리로 떠들며 얘기하고 있었는데 주로 마을의 여자들 얘기였다.
 누구의 엉덩이가 펑퍼짐해서 애를 잘 낳을 것이라는 둥, 누구와 누구의 행동이 수상한데 정분이 난 것이 아니냐는 둥, 누구는 오래 전부터 어떤 여자를 짝사랑했었는데, 이제 시집을 가니 불쌍하다는 둥 전부 사소한 얘기들이었다.
 청년이 흥미어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주인장이 술을 내왔으며 청년은 술을 사발에 따라 연거푸 석 잔을 들이켰다.
 “좋다! 좋아!”
 혼자 마시는 술에도 흥이 돋는지 그의 행동은 경쾌했다.
 청년이 막 세 번째 '좋아!'를 외쳤을 때, 탁자에 엎드려 있던 노화자가 어기적거리면서 일어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청년에게 시선이 멈췄다. 청년이 가장 만만해 보이기도 했거니와 엄밀히 말하자면 청년의 옆에 놓인 술독이 그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물주라도 만난 양, 만면에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어떻게 보면 몹시 기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찌 보면 비굴해 보이기도 했다.
 노화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청년에게 접근해 가는 것이었다.
 “하하하. 소형제, 내 이 자리에 앉아도 되겠는가?”
 노화자가 제법 호탕함을 가장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청년 역시 마주 웃었다.
 “하하하. 문 밖을 나서면 사해가 모두 친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가 어려울 게 있겠습니까? 앉으십시오.”
 그러고는 노화자의 속셈을 짐작하고 있는 듯 주인을 향해 외쳤다.
 “여기 술잔 하나 가져다주시오.”
 그러나 청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화자는 자신의 허리춤에서 깨어진 쪽박 비슷한 것을 꺼내는 것이었다.
 “허허. 관두게. 얻어먹는 주제에 다른 사람의 술잔마저 빌릴 것이 뭐 있나? 나는 여기다 먹으면 된다네.”
 청년은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주며 노화자에게 권했다.
 “자, 드십시오.”
 술을 보자 노화자는 좀 전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내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소형제는 대길운(大吉運)을 타고났군. 게다가 이렇게 인심까지 후하니 이는 경탄할만한 일이야. 암, 경탄할만 하고 말고.”
 “과찬이십니다. 과찬이십니다.”
 서로 마음이 맞았는지, 둘은 마주 앉아 연신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두 단지의 술을 비웠고, 이제 그들이 자리한 탁자에는 세 단지째의 술동이가 놓여 있었다.
 “크으······.”
 둘은 마치 술에 원한이라도 진 사람처럼 그저 미친 듯이 마셔대고 있었다.
 청년과 노인은 이미 취한 듯 눈이 풀려 있었다.
 노인은 술기운이 올라 더운 듯 윗도리를 풀러 가슴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청년은 그저 의자에 기대앉아 있었다.
 청년이 몇 순배의 술을 더 마셨으나 술에 취한 듯 보이는 것은 노화자였다.
 이미 혀가 꼬여 발음마저 부정확했으나 그의 손은 정확하게 입으로 술을 퍼 나르고 있었다.
 “낄낄낄. 동생, 어떠한가? 술에는 가무(歌舞)가 있어야 하는 법, 장단을 잡을 테니 자네는 노래를 하려는가?”
 그들은 척 보기에도 나이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샌가 이미 서로를 형과 동생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술을 같이 마시면서 동료의식이 생겨난 것인가?
 “아닙니다. 아닙니다. 워낙 노래를 할 줄 몰라 동생은 감당하기 힘들군요. 그러니 제가 노래대신 재미있는 옛날 얘기 하나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얘기라, 그거 좋군. 무릇 술에는 권주가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만 한가락 이야기도 그 흥취가 있는 법, 그래 무슨 얘기인가?”
 “하하하. 소인은 본시 떠돌기를 좋아해 여기저기를 유람하다 보니 세상의 많은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지요. 왕후장상(王侯將相)들의 비사에서부터 무림의 이야기까지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야기할 것은 저만이 아는 비사로 어떤 사나이들의 일대기입니다. 아마 이런 기회가 아니면 형님께서는 듣지 못할 아주 진기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노화자는 손뼉까지 마주치며 맞장구를 쳤다.
 “호! 그런가? 좋네, 좋아! 그런데 무슨 이야기인가?”
 “바로 무림의 비사입니다.”
 노화자는 눈을 반짝였다.
 “무림이라, 동생은 무공을 하시는가?”
 “무공이랄 것은 없고, 그저 가전무공을 조금 할 줄 압니다. 겨우 호신술 정도지요.”
 “그렇군. 여하튼 이야기를 들어봄세. 무슨 얘기인지 궁금하구먼.”
 청년은 술기운이 오른 듯 의자에 기대어 앉아 약간은 졸린 듯 눈을 감고 나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노형은 전신이라는 사람의 전설을 들어보셨습니까?”
 질문으로 시작된 이야기에 노화자는 과장되게 눈을 크게 뜨고는 대꾸했다.
 “자네, 전신(戰神)이라 했는가? 허허. 내 이런 행색으로 비렁뱅이질을 해 먹고 살지만, 나 역시 그 동안 중원을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네. 그런데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이야기를 묻다니. 허허······. 그런데 자네는 그 이야기를 왜 꺼내는가?”
 청년은 황망히 두 손을 마주 잡고 역시 좀 과장되게 포권을 했다.
 “죄송합니다. 노형을 무시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 전설의 이야기가 바로 제가 말하려는 세 사람들 중 하나와 너무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어서 물어 보는 것입니다.”
 순간, 노화자는 흠칫했다.
 “그, 그게 정말인가?”
 “예.”
 청년의 얘기에 회가 돌았는지, 주위에서 떠들며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다음엔 무슨 말이 나올까하고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특히, 문가에 앉아 있는 우락부락한 세 사나이는 마시려던 술잔까지 내려놓고는 말하는 청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흠! 그럼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사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 그렇군요. 정확히 사십이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
 중국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미인을 보려거든 서주로 가고, 돈을 벌려거든 강남에 가고, 권력을 잡으려거든 북경에 가라.’
 이렇듯 북경은 많은 기회가 있는 곳이었다.
 북경은 당금 황제가 기거하는 거대한 황궁이 자리하고 있고, 역대의 무수한 환란들이 일어났던 곳이고, 중국을 좌지우지하는 절대 권력자들이 천하를 내려다보는 곳이고, 수많은 젊은 협사들이 자신의 기량을 내보여 기회를 잡으려 하는 곳이며, 또 수많은 문인들이 자신의 글재주를 펴기 위해 모여드는 곳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기회의 땅, 바로 중국이라 불리는 거대한 대륙의 중심 축이었다.
 그럼, 당금의 북경에 가면 제일 먼저 들을 수 있는 얘기는 무엇일까?
 그건, 황제의 얘기도, 즐비하게 늘어선 유곽들과 주점의 얘기도, 거부나 왕후장상들의 비리나 추잡한 얘기도 아니며, 황궁에서도 골치를 썩고 있다는 대도의 이야기도 아니다.
 북경의 성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마도 이 사람의 얘기일 것이다.
 무황(武皇) 남태천(南太天).
 정도(正道)의 사람이라면 그를 모를 수 없고, 정도의 모든 원로들이 차세대 맹주감으로 손꼽고 있다고 하는 바로 그가 무황 남태천이었다.
 그의 학식은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다 할 정도였고, 그의 무공은 이미 후지기수들 속에서는 견줄 자가 없었다. 그러하니, 정도의 늙은 지배자들이 그들의 후계자로 남태천을 찍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남태천의 부친은 남천이었다.
 몇십 년 전만 해도 철화검객이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며, 무인은 물론이거니와 뭇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바로 그 한 자루의 철검과 단장화가 철화검객 남천을 나타내는 상징물들이었다.
 그 누구도 부인 못할 협객이며, 또 모두가 두려워 할만한 실력을 지닌 검객인 남천. 그러나 그는 강호를 떠돌며, 협의를 행하고 자신의 무공을 완성시키는 일에만 몰두했었다.
 그런 남천이 어느덧 사랑이란 걸 알게 되었고, 바로 그 운명의 주인공은 남궁제일가의 남궁화였다.
 남궁제일가 역시 오랜 전통과 세력을 자랑할만한 가문이 아니겠는가. 남궁화는 그 중에서도 희대의 기녀(奇女)로 꼽히는 남궁세가의 꽃이었다.
 그런 남궁화가 남천과의 운명적인 사랑에 의해 남태천을 임신하고 있을 즈음, 남궁화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남천의 죽음이었다.
 그는 무적철환(無敵鐵丸) 벽제웅( 除雄)과의 혈투에서 천 초를 겨루던 중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남궁화는 무려 열두 번이나 혼절을 하고 심한 고열을 앓아야 했다.
 그러나 죽은 자가 돌아올 수 있는가?
 또한 처녀의 몸으로 그의 아이를 갖고 있었으니 문제가 아니 될 수 없었다.
 남궁제일가는 뒤늦게 그 소식을 듣고 그녀에게 아이를 지울 것을 강요했다.
 이미 남편을 잃은 남궁화는 자식마저 잃을 수 없다는 이유로 완강히 거부했고, 어느 추운 겨울날, 남궁가 깊은 곳의 어느 밀실에서 남태천을 출산했다.
 그렇게 태어난 남태천은 자신의 부모님들의 피를 그대로 이어 받았는지 어려서부터 뛰어난 오성을 보였다.
 그는 세 살 때 검을 잡았고, 일곱 살 때는 소림(少林) 장문인 환우대사에게 개정대법을 시전 받았고, 기본검경(基本劍經)이라 할 수 있는 칠성파(七成派)의 칠성검(七成劍)과 무당파(武當派) 태극혜검(太極慧劍)을 완벽히 시전했으며, 열 살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준 기재가 아니면 백 년을 연마해도 터득할 수 없다는 소림의 반야장(般若掌)과 백보신권(百步神拳)을 연성했고, 게다가 무당파의 진산절기인 육가괴권(六架乖拳)과 오성검진(五星劍陣)을 시전할 수 있는 오성검법(五星劍法)들을 십 성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올해 나이 삼십오 세에 이른 그의 무공수위란, 그 추측을 불허할 정도였다. 무당과 소림, 그리고 개방(  ), 칠성(七成), 아미(峨嵋) 등, 오대문파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이미 다음 무림맹주로 추대되고 있는 실정이었으니, 그의 위엄이란 가히 천하를 진동시킬만 하였다.
 그런 남태천에게 어느 날 쪽지 한 장이 날아들었다.
 <무황 전.
 사흘 뒤, 귀하의 목을 가지러 가겠소. 잘 닦아 두시오.
 홍화객.>
 쪽지의 내용을 들은 사람들은 너무나도 기가 막힌 나머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쪽지를 보낸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듣는 순간 그들은 웃음을 삼키고 말았다.
 홍화객. 그가 다시 피바람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라면 무황 남태천이라 해도 쉽게 생각할 수 없을 것이었다.
 ***
 저자거리에 나가 세상에서 가장 부자이면서 가장 치사하고 악랄하면서도 좀스러운 자가 누구냐고 한다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할 것이다.
 천태랑(天台郞).
 그는 사람들에게 금귀(金鬼)라 불리고 있다. 아니 금노(金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자식은 아마 자신이 벌어 놓은 돈이 아까워 죽지도 못할 놈이야.”
 “저승사자가 와도 돈으로 흥정을 할 놈이지.”
 그는 돈을 사랑하고 힘을 숭상했다.
 자신보다 힘있고 돈 있는 자 앞에서는 마치 엉덩이라도 핥아 줄 듯하지만, 자신보다 못한 자라면 자신이 기르는 개만큼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이나 궁금한 것이 생긴다면 밤잠을 자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그것을 얻거나 궁금증이 풀리기 전까지는.
 하남성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만리장(萬里牆).
 장원을 둘러싼 담벼락이 만 리는 되어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집을 한바퀴 돌려고 한다면 식량을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다 라고. 그렇지 않다면 굶어 죽게 될 테니까 말이다.
 담이라 하기에는 너무 높고 성벽이라 하기에는 조금 낮은 만리장의 담은 그 높이가 일장이 넘었다.
 그리고 담 곳곳에는 기관매복(機關埋伏)이 거미줄처럼 뒤덮여 있어 나는 새라도 넘지 못할 정도였다.
 또, 담 위에는 그 권세를 더하듯이 청와가 덮여 있어 햇볕에 번들거렸다.
 그 청와(靑瓦)는 흑토(黑土)와 취옥(翠玉)을 섞어 구워낸 것으로 그 굳기가 강철같았고, 한 장의 가격은 중류층 사 인 가족의 하루 식사 값이었다.
 외관상의 위용이 이 정도니 안의 풍광이야 이루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리장 외각에만 오백여 채의 전각과 누각이 얽히고 설켜 있어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땅을 밟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건물의 배치가 일정한 진세를 이루고 있어 만약 기관이 작동한다면 그 위용이 자금성을 방불케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안에는 비어 있겠는가?
 안에는 전각과 누각이 삼백여 채가 있다.
 이들이 늘어서 있는 것은 마치 청와로 만든 바다를 보는 듯 한 느낌을 주었다.
 만리장에 기거하는 자들만 하여도 일만이 넘었다.
 그 중 대다수가 고용되어 만리장을 지키는 무사들이니 가히 철옹성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만리장 주변이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삼천이나 되는 무사들이 병장기를 번뜩이며 삼엄하게 경계를 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사건은 삼 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태랑에게는 여느 때와 같은 하루였다.
 따스한 햇살에 눈을 뜨자마자, 옆에 자고 있던 애랑이 목에 안기며 애교를 떨어 기분도 좋은 편이었다.
 애랑은 얼마 전에 황금 삼백 냥이나 주고 사들인 기녀로 다섯 번째 첩이었다.
 꽉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외모에, 마른 듯 보이지만 풍만한 몸매, 그리고 방중술까지 뛰어나 천태랑의 사랑을 한몸에 독차지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천태랑이 누리던 작은 평화는 그날 오후 깨어졌다.
 정오가 조금 넘었을 땐가, 총관을 맡아 만리장 내의 작은 일 처리를 도맡고 있는 천문이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거리며 뛰어 들어 온 것이다.
 그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다급한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가?”
 약간 짜증이 어린 목소리였다.
 다른 때 같으면 천태랑의 짜증스런 목소리만 들어도 눈치 살피기에 여념이 없던 천문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고려를 하지 않은 채 발악하듯이 외쳤다.
 “장주님, 이것을 보십시오.”
 인상을 쓰며 천문이 건네주는 쪽지를 바라보는 순간,
 “헉!”
 천태랑은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얼굴은 바라보기 민망할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져버렸다. 아니, 아예 썩은 돼지간처럼 흑빛으로 변해버렸다.
 <천 장주님 전.
 본인은 장주님이 연일 계속되는 업무로 고민이 많아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소이다. 그래서 본인은 당신의 그 고민을 덜어 주리라 결심했소이다. 삼 일 뒤 첫닭이 울기 전, 당신 목 위의 물건을 떼어 드리려 하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홍화객.>
 천문은 근심스러운 듯이 천태랑을 올려다보았다.
 “장주님 방비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차갑게 식어있던 천태랑의 얼굴이 다시 제 색을 찾는 듯 싶더니 붉게 물들면서, 그는 쪽지를 잘게 찢어발겨 버렸다.
 아마 잘 익은 홍시를 그의 옆에 가져다 놓아도 그보다는 붉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거지발싸개 같은 자객 따위가 나를 죽이겠다고? 이런 찢어 죽일! 삼 일 후랬냐?”
 “예!”
 “돈이 얼마가 들든지 상관치 않겠다. 사람이 필요하면 사라. 그리고, 그 시건방진 자객 놈을 내 앞에 무릎 꿇려라! 내 친히 그놈을 심문하고 사지를 찢어놓고 말 것이다.”
 천태랑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싶더니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휘와 선천비를 소환해라. 열두 시진을 철통 같이 방비하도록 하라! 본좌는 천극관에 들겠다.”
 “예!”
 말을 마친 천태랑은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사라져갔다.
 멍청히 서 있던 천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문을 박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후부터 만리장에는 더욱 삼엄한 경비가 세워졌다.
 물론 오늘은 천태랑이 문 밖 출입을 하지 않은 지 이제 딱 삼 일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천극관(天極關).
 천태랑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거대한 요새인 이곳은, 원래는 거대한 지하 암굴이었다.
 그것을 천태랑이 발견하고 금고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유사시에 들어가 안에서 문을 닫으면 일 년간 밖에 나오지 않아도 될 정도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일면만 보아도 천태랑이란 자가 얼마나 철두철미(徹頭徹尾)한 자인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단단하기 이를 데가 없는 대리석질의 동굴 벽은 한 자 정도의 한철에 주석을 섞어 제조한 특수 재질의 철판이 대어져 있었다.
 천태랑은 만 근의 폭약이 지상에서 터져도 이 천극관 만큼은 끄덕 없다고 자부했다.
 그 천태랑이 천극관에서 벌써 삼 일째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천극관은 하나의 일화를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전설적인 대도였던 무형신투가 이곳으로 숨어들려 하다가 천극관 바로 앞에서 철환에 두 토막이 난 채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홍화객이라도 이번만큼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이다.
 드디어 밤이 되었다.
 보름이니 달빛이 있어야 정상이겠지만, 두터운 구름이 천공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정말 자신의 코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밤이었다.
 얼마나 어두운지 자신이 눈을 뜨고 있는 건지 감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사들이 어디 눈으로 보고 적을 감지한단 말인가?
 만리장의 고수들과 천태랑은 자신들의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피를 말리고 있었다.
 바로 홍화객이 오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한두 개씩 모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굵은 빗방울이 쏟아졌다.
 칠흑 같은 밤에 비마저 장대처럼 오니 주위의 분위기는 더욱 음산하게 변해버렸다.
 무인들의 본능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바로 지척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두려움으로 변하고 곧 그것은 자기 보호본능으로 이어졌다. 자신의 주위에 나뭇잎 하나가 떨어진다 해도, 단번에 칼이 뽑혀질 첨예한 살기가 내뿜어지고 있었다.
 지금, 만리장에는 전체적으로 짙은 살기가 흘렀다.
 처마 밑에서, 혹은 연못 안에서, 심지어는 측간 안에서조차 살의를 품은 음산한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술시(戌時)를 넘어 해시(亥時)를 지나 자시(子時)에 접어들려는 찰라, 만리장의 동쪽 벽에 무언가 움직이는 물체가 있었다.
 그 물체는 마치 고양이인 양 어떤 소리도 내지 않고 움직였다. 신묘한 움직임으로 담에서 뛰어내린 검은 그림자는 철저하게 주위를 살피면서 건물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섰다.
 그리고 거대한 건물 앞에 자리를 하고 서서, 등뒤에 둘러멘 검을 뽑아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주위가 환해지면서 사방에서 불길이 일었다.
 그 횃불들이 일사불란하게 간격을 좁혀오며 흑의인을 포위해 갔다.
 흑의인은 움찔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무려 천여 명은 되 보이는 잠행인들이 검, 도, 창 등을 들고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퍼억!
 몽둥이가 내질러졌다.
 “크윽!”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한 사내의 몸이 벽에 거칠게 밀어 부쳐졌다.
 적산은 오늘 바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평상시 그저 하는 일없이 빈둥대며 노는 것이 일이었다. 아마도 이 만리장에서 일을 하지 않고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장주인 천태랑조차도 업무에 시달리고 있을 때, 그는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발이나 까딱거리다 술에 취해 낮잠을 즐길 수가 있었다. 그런 그가 오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많게 잡아야 서너 평 정도의 공간에는, 중간에 한 사내가 묶여 있었고 양 옆의 벽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형구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너에게 일을 의뢰한 자가 누구냐?”
 그 사내 앞에 적산이 서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자그마한 몽둥이가 들려있었다.
 파혈봉(破血棒).
 묘강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채취한 액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적산이 즐겨 쓰는 물건이기도 했다.
 기껏해야 한 자 정도 크기의 몽둥이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그마한 몽둥이는 고문을 하기에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고문의 최상 요건이 무엇이겠는가?
 최고의 고통을 주되 대상자의 생명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파혈봉은 한 번 칠 때마다 그 고통이 전신으로 파문처럼 번져가게 해서, 아픔은 점점 커지지만 생명에는 이상이 없게 하는 그런 고문도구였다.
 적산은 자신의 고문술을 철저히 믿었다. 자신의 고문에 걸리면 죽은 시신의 입이라도 열지 않고는 못 견딜 거라고 수도 없이 장담하곤 했다.
 그는 고문을 심하게 해서 병신을 만들거나 죽이는 자들을 제일 경멸한다. 그들은 고문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티끌만큼도 모르는 하급의 고문관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그런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문관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들어온 이자는 그의 그런 자만심에 금이 가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가 갖고 있는 백여 가지의 고문술 중 반 이상을 시전 했지만, 그 자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향해서 입가에 여유 있는 미소마저 띄우고 있었다. 적산으로서는 열불이 터질 노릇이었다.
 적산은 이를 악물었다.
 “좋다! 이제부터는 고문이 아닌 살형(殺形)을 가해 주겠다. 네놈이 어디까지 버티나 두고 보자.”
 그는 자신이 잘 사용하지 않는 면도를 꺼내들며 말했다.
 “흐흐. 지금부터는 네놈이 말할 기회도 없을 것이다.”
 적산은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입을 열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기절하기에도 바쁠 테니까.”
 그러자 묶여있던 흑의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대했던 자백의 말이 아니었다.
 “꽤 말이 많군.”
 적산의 얼굴이 보기 민망할 정도로 굳어져버렸다.
 “잇! 이노옴!”
 그는 능숙한 솜씨로 면도를 들고는 흑의인에게 다가서며 고문을 시작하려 했다. 그의 전신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적산은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흑포인이 들어와 허리를 굽히며 천태랑의 명령을 전했던 것이다.
 “장주님이 이자를 데려 오랍니다.”
 “뭣이? 하필이면 이때라니. 크흐흐흐······. 지독히 운 좋은 놈이군.”
 적산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적산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거대한 광장, 아니 지하실이라고 해야 옳을 그런 곳이었다.
 천연적으로 생긴 석벽을 뚫어 거대한 암전을 만들었는데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저 뒤에 쌓여 있는 금괴와 보석, 그리고 명화와 진산지보들은 눈이 부셨다. 어지간한 간담을 지닌 자가 아니면 기가 죽어서 제대로 말을 잇기조차 힘들어 할 것이다.
 이곳이 바로 천극관이었다.
 중앙에 호피가 덮여있는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피둥피둥 살이 찐, 천태랑이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뒤에는 장포를 걸친 중년인과 언뜻 보기에 나이를 분간하기 힘들어 보이는 장년인이 시립해 있었다.
 이들이 바로 천태랑이 천 관의 황금을 투자해 키운 무휘와 선천비였다.
 이들은 오 년간 무술수업을 위해 태산북두라 불리는 소림과 무당에서 무술수업을 받고 하산하던 중 천태랑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것이었다.
 그들은 천태랑에게 무한한 믿음을 주었다.
 “홍화객······.”
 천태랑은 뭔가를 음미하는 듯 홍화객을 불러보더니, 곧 특유의 느글느글한 미소로 그를 비웃듯 말했다.
 “그래, 네가 나를 죽이겠다고 했던 놈이냐?”
 아마 돼지의 웃음을 인간이 짓는다면 능히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천태랑은 패배한 홍화객의 침울한 대답을 상상했다.
 “그렇소.”
 담담하면서도 광장을 나직이 울리는 목소리. 천태랑은 홍화객의 당당한 모습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건방진 노옴!”
 “네 녀석이 어떻게 나를 죽이겠다는 것이냐? 이렇게 잡혀 내 앞에 묶여 있는 주제에.”
 천태랑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훈계하듯 소리쳤지만, 홍화객은 엷은 미소를 띄울 뿐이었다.
 그 엷은 미소가 무언가 알 수 없는 불길함을 천태랑의 뇌리에 심어주었지만, 천태랑의 자만심은 곧 그걸 털어 버리게 했다.
 자객질에 실패하여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에게 불안감을 느낀다는 건 당치 않았다.
 “흐흘······. 네놈이 아직도 기가 살았구나.”
 “아직 내가 예고한 시간은 오지 않았소.”
 그의 말에 천태랑은 대소를 터뜨렸다.
 “좋아, 좋아! 자존심이 대단하군.”
 선천비와 무휘의 입에도 천태랑과 너무도 닮은 비웃음의 미소가 그려졌다.
 그들은 분명 살업에 실패해서 초라하게 무릎 꿇고 있는 눈앞의 자객을 비웃고 있었다.
 이따위 자 한 명 때문에 자신들이 긴급 호출을 받은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천태랑이 갑자기 말의 방향을 바꾸었다.
 “무엇이오?”
 “나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굶주림도, 살벌하게 행해지는 고문도 아니었다. 바로 내가 갖고자 하는 것! 그것을 가질 수 없을 때 나는 가장 큰 고통을 느꼈었다.”
 천태랑의 입가에서는 자신의 지독하게 살아온 날들을 회고하는 듯 자조의 미소가 스며 나왔다. 잔악하게만 느껴지던 분위기가 한 순간 일소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일순간이었지만, 홍화객은 그의 또 다른 일면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갖기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일을 해야 했고, 다른 이의 발이라도 핥아야 했다. 때에 따라서는 말이야. 나의 친구도 형제마저도 서슴없이 죽여야 했지. 지금의 내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
 그가 말을 멈추자 묘한 정적이 일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나를 거스를 것은 없었지.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러던 나에게는 갑작스레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지. 그걸 가져온 사람이 바로 너다!”
 ***
 사람들은 왜 차를 마시는가?
 중원은 특히 차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이곳이 차문화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황하의 물을 그대로는 마실 수 없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그건 처음 차가 생겼을 때에나 맞는 말일 뿐이고 지금은 모두 각양각색의 이유를 가지고 차를 즐긴다.
 향기로운 향을 음미하기 위해서, 혹은 맛이 좋아서, 또 분위기 때문에 마시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건강을 위해서 마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옛 성인들은 다(茶)를 다루는 것을 다도(茶道)라 하여 하나의 도(道)로 승화시켰다.
 다도를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예를 숭상함은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고, 자신을 다스린다 함은 자기를 완성해 가는 것이므로, 차를 예로써 마신다는 것이 곧 자신의 수양정도를 말해주는 하나의 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차를 마실 때에는 경건한 자세에서 마시고 곧은 자세를 유지하려 하며 스스로를 인내하고자 한다.
 이것이 다예(茶禮)이고 다예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져져 하나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을 다도(茶道)라 한다.
 만류귀종(滿流歸宗), 그 모든 일은 시작은 다르되 그 근본은 같아 자신이 하는 일에 온 정신을 심어 넣으면 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학문은 지식습득이라는 단순한 작업을 벗어나서, 그것을 이해하고 정립하는 것이 학문의 길이요, 학문을 알고 있으되 그것을 널리 표내지 않으며 부정에 대해서는 완고한 고집을 갖고 있으며 자신을 스스로 다스리는 것이 학문의 예(禮)요, 스스로를 알고 고쳐 나가며 아무런 사심이 없는 것이 학문의 도(道)라 하겠다.
 이처럼 무(武) 역시 그 길이 다르지 않다.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수양하는 것이 그 목적일 수 있으나, 예를 알고 인간으로서 완성을 위해 노력하면 예가 된다.
 그리고 인간의 심(心)과 신(身)이 하나가 되어 오욕(五慾)과 칠정(七情)을 초월하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 도의 길로 접어들며 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욕심과 사심을 빼라하면 곧 백치를 뜻하는 것일진데 어찌 그런 인간이 나타날 수 있으며, 백치와 같은 인간이 어느 한 곳에 심취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인간은 무예(武禮)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고, 무예(武藝)나 무술(武術)의 경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리라.
 다(茶)와 문(文), 그리고 무의 그 길은 시작은 다르나 그 끝에 이르는 경지에 있어서는 같다 할 수 있겠다.
 파도가 굽이치는 듯한 산세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험한데, 그것들에 둘러싸인 험준한 절벽 위에 세워진 하나의 정자가 있었는데, 세인들은 그 정자를 두고 천향정(天香亭)이라 일컬었다.
 바로 이 천향정에 한 명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하나의 산맥인 양, 아니 자연 속에 동화되어 버린 바위인 양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은 선풍도골의 신선을 보는 듯한 풍도였다.
 정좌해 앉아 있는 그의 손 위에는 한 잔의 찻잔이 얹혀져 있어서 차를 마시는 중임을 알 수 있었는데,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 다향(茶香)에 취해 있는 듯 보였다. 바로 이런 모습이 다예를 도의 경지에까지 올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바로 문인들의 하늘이라는 문천(文天) 우문성(于文聖) 이었다.
 그는 벌써 십여 년 전부터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은거 중이었는데, 소일이라고 해야 가끔 혼자서 바둑을 두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다가 가끔 산을 타는 사냥꾼이나 약초를 캐는 이라도 나타나면 몇 마디 주고받는 게 세속으로의 유일한 접촉이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시중드는 소동이 유일한 말벗이었다.
 그러나 십 년이 지났음에도 그는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강산이 한 번 변했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를 칭송했고 문인들의 뇌리에 그는 문선(文仙)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이미 문의 그 경지를 벗어난 사람이었다.
 앞에서도 장황하게 설명했듯이 그는 한 잔의 차에서 문의 그 근본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흠.”
 그대로 우화등선한 듯한 모습이던 우문성의 입에서 약한 한숨소리가 새어나오더니 얼굴에 잠시 고뇌의 빛이 흘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이내 평소의 신색을 찾으며 한 모금의 차로 입술을 적셨다.
 그러고는 낭랑한 목소리로 한 자락의 시를 읊었다.
 <백 년의 영화(榮華)도 한낱 물거품이요
 천 년의 권세(權勢)도 한줌의 모래와 같다.
 나 이곳에서 한 잔의 차에 흠취( 醉)해 있건만,
 부질없는 사념(邪念)에 고통이 이는구나.
 오호라, 세월이 약이려니
 한잔의 차라도 나눠 마시며 등 두드려줄
 이제는 진정한 친구 한 명이 기꺼웁구나.>
 “후우······.”
 그러나 좋아하는 시를 읊어도 기분이 나지 않는 듯, 우문성 의 입에서 다시 뜻 모를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디선가 불어온 한줄기 바람이 그마저도 묻어버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지만······.
 우문성, 그는 무슨 고뇌에 싸여 있는 것인가?
 ***
 “나는 내가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미지.”
 천태랑은 말하면서 홍화객의 얼굴을 살폈다.
 홍화객, 그의 얼굴은 평범했다.
 저자거리에 나서면 비슷한 사람을 하루에도 열은 찾을 수 있을 만큼 그는 아무런 특징도 없었다.
 단지 눈매가 조금 매섭다는 정도일까?
 “그런데 자네는 내가 상상하던 홍화객과는 조금은 다르군.”
 “당신이 상상한 내 모습은 어떤 것인가?”
 천태랑은 장난기가 어린 얼굴을 들어 홍화객의 얼굴 가까이 들이대었다. 홍화객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있었다.
 “흠! 글쎄, 조금 더 냉막한 얼굴이랄까? 한 점의 표정도 없는, 철저하게 죽음의 향기로 가득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군.”
 홍화객은 쓰게 웃었다.
 “그렇다면 내가 미안하군. 당신의 상상을 망쳐 놓았으니 말이야. 그러나 내 자신이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을 낸들 어찌 하겠는가?”
 천태랑은 곧 질문을 바꿨다.
 “그런데 네놈의 이름은 뭐지?”
 홍화객은 붉게 타오르는 듯한 눈을 들어 천태랑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입가에는 조소의 빛을 띤 미소를 담고서.
 “내 이름이라······. 그토록 궁금해하던 것이 겨우 이름인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질문이 유치하군.”
 비웃음이 역력한 소리를 들었으니 마땅히 화를 내야 하는 천태랑이지만, 그는 그럴 수 없었다. 홍화객의 붉은 눈을 보며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싸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죽음에 향기가 있다면 이런 것일까?
 그의 눈에서는 지옥의 마화(魔火)가 피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 마화는 천태랑의 등에 식은땀이 맺히게 했다.
 “당신은 내 이름을 듣는 순간 죽음을 예고 받는 것이나 다름없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태랑은 찜찜한 기분을 털어 버리려는 듯 파한대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하! 자네는 지금 자신의 처지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그리고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댔다. 등엔 계속 땀이 맺히고 있었지만, 애써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내 뒤에 장승 같이 서 있는 이 친구들은 허수아비가 아닐세. 내 옆에 선 이 친구는 선천비라 하지. 소림에서 나온 지 겨우 오 일밖에 되지 않았다네. 그는 소림의 이십사 절기 중 금강권(金剛拳)과 반야장(般若掌), 그리고 원, 호, 웅, 사, 학권 등 십이 절기를 습득하고 각종 약물로 도움을 받은 그의 내공은 소림의 십팔나한 중 그 어느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정도이네. 초일류의 고수라 할 수 있지.”
 자랑을 하는 동안 좀 전의 불안함이 우스워져갔다. 득의양양한 얼굴로 홍화객을 내려다 본 천태랑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친구 무휘는 무당의 속가제자인 천월검성(仟月劍聖) 냉야월의 직전제자로 무당의 태허진인의 밑에서 수업을 하고 나왔지. 아마 검을 든 그를 벨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면 무황 남태천을 비롯하여 이 중원에서 한 열댓 명 정도를 꼽을 수 있을까? 황금 앞에서는 무당의 위명도 소용없더군. 몇 푼 집어주자 자신들의 절기를 서슴없이 내어놓더란 말이야. 이 둘을 키우기 위해 천 냥의 황금을 투자했다네.”
 그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을 들어 홍화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는 이들을 믿고 있다네. 어떤가? 자넨 자네 몸을 묶어 놓은 천잠사를 끊고 이들을 물리친 후 나를 죽일 수 있겠나? 흐흘,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홍화객의 눈에서 차가운 한광이 새어나왔다.
 “자, 그럼 이제 자네의 이름부터 말해 보게. 이름이 뭔가?”
 “내 이름은 사마천인······이오.”
 “사마천인이라. 흠, 좋아.”
 천태랑은 득의에 찬웃음을 보였다.
 승리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느긋하게 물었다.
 “그럼 내가 궁금한 것은 석 달 전 무적신권(無敵神權) 당궤를 죽였을 때의 상황이다. 그것에 대해 소상히 알고 싶다.”
 천태랑은 거드름을 한껏 피우고 있었다.
 사마천인은 그런 천태랑을 바라보았다.
 무심해 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싸늘해 보이기도 하는 눈빛이었다.
 사마천인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왜인지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는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소? 흐흐.”
 사마천인은 실소까지 흘리고 있었다.
 천태랑은 움찔했지만, 그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의 입에서 곧 기다리던 말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럼 얘기해 드리지.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방안에는 음침한 기운의 빛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고, 삼 인의 사나이는 그의 말을 기다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제2장 만남
 
 
 쏴아아―!
 빗줄기는 더욱 거세어졌다. 이제는 아예 폭포수가 떨어지는 듯한 굉음에 귀가 다 멍멍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 하나 빗소리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들 청년의 이야기에 혼을 빼앗긴 채 듣기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두둑······!
 빗물로 묵직해진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자 흡사 북소리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고, 허름한 객점의 낡은 나무문이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듯 덜컹거리며, 금세 귀신이라도 나올 것처럼 주위의 분위기는 어둡기만 했다.
 객점 안은 비가 만들어 내는 소음을 제외하곤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처럼 고요했다.
 이따금 귓속말을 하며 히히덕거리던 남녀마저 청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지 조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객점 안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 주인만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 기세 좋게 코까지 골아대며 잠이 들어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노화자는 참을 수 없는 듯 청년의 말을 재촉했다.
 “그는 자신이 왜 당궤를 살해하게 되었는지, 그 모든 것을 천태랑에게 털어놓기 시작했소이다.”
 노화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에이. 그 자는 영웅이 아니군, 그래. 외부의 힘에 의해 굴복하다니. 본시 영웅은 어느 누구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아야 하지. 그게 진짜 영웅인데 말이야. 안 그런가?”
 청년은 미소지었다.
 “그렇지요, 그는 영웅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힘에 의해 굴복할 사람은 아니지요. 절대로 말입니다.”
 청년은 다짐하듯이 힘차게 말했다. 홍화객이 눈앞에 있어 당장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는 투였다.
 그러자 노화자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럼 그는 왜 천태랑에게 굴복했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유라니?”
 “그는 천태랑의 목숨을 노리고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얘기를 이실직고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럼 설마······! 홍화객은 천태랑의 곁으로 다가서기 위해서 일부러 잡혔단 말인가? 허어, 만약 그의 곁에 가기도 전에 죽임을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무모한 짓을······.”
 노화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홍화객은 왜 천태랑의 목숨을 노린 것인가?”
 청년은 노화자가 조급해 하는 것을 보고는 나직히 웃었다.
 “노형님은 너무도 조급하시군요. 이제부터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한 여인을 만남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
 만한루(滿恨樓).
 누가 지었는지 음산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었다.
 한이 가득한 집이라니, 어느 누가 이런 곳에 들어 식사를 하며 술을 마시려 하겠는가?
 게다가 주인은 어떤 괴팍한 사람이기에 좋은 이름을 모두 버리고 저런 섬뜩한 이름을 걸어 놓은 것인가?
 많은 질문이 있을 것이지만, 그 질문에 답을 할만한 사람도, 그 질문을 던질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 이유는 이곳에 이런 이상한 이름의 주루가 선지 족히 삼 년이 흘러갔지만 이 근방의 어느 누구도 주인의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무인이나 인근의 건달들이 전부여서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신기한 듯 바라보기만 할뿐 발을 들여놓을 생각 따위는 갖지도 못했다.
 쏴······ 쏴아아······.
 칠월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혀 주려는 듯이 시원스레 빗방울이 대지 위에 놓인 모든 것을 적셔주고 있었다.
 이런 날이면, 그 어느 누구라도 일을 하기 싫어 할 것이고, 사람들은 주루에 모여 술을 나누게 된다. 그로 인해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곳은 아무래도 주루가 아니겠는가.
 그 중에서도 만한루는 때아닌 호황으로 사람이 앉을 곳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유별난 사내가 한 명 앉아 있었다.
 그는 헐렁한 청의를 걸치고 있었고 다 헤어진 가죽신발을 신고 있었다.
 하나 신기할 것 없는 복장이지만, 그에게 그 복장은 너무나도 어색했다.
 남자의 몸 같지 않게 너무나도 가냘픈 몸매에 얼굴 선은 갸름했으며, 그의 얼굴은 여인의 그것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남성에게 아름답다는 말을 쓰기에는 좀 어색하지만 이 사내에게는 너무나도 어울리는 말이었다.
 이때, 점소이가 다가서며 작은 주루의 점소이 답지 않게 정중히 말했다.
 “뭘 주문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청년의 입에서는 가녀린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화전 한 접시와 죽엽청 한 병, 그런데 화전은 붉은 것으로 하고 설익혀도 좋으니 빨리 가져오게. 그리고 죽엽청은 가장 병목이 높은 것으로 하는 것이 좋겠네.”
 점소이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는 잰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들어갔다.
 그런데, 이들의 말을 들으면 단순히 음식을 시킨 것처럼 보이나 어딘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어찌 한여름에 화전이 나올 수 있는가?
 또, 화전에 쓰이는 꽃은 그 쓴맛이 덜하고 독성이 없으며 향기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고, 또 화전에 쓰이는 꽃들 중 붉은색을 띤 것은 진달래가 있으나 이는 붉은색이 아닌 분홍색이라 해야 맞을 듯싶다.
 그리고 무릇 술병은 병목이 짧아야 술을 따르기가 좋은 것인데, 굳이 불편한 목이 긴 것을 달라하니 이 또한 이상하다.
 그것은 지금의 대화가 바로 암호이기 때문이다.
 그 청년이 붉은색 화전을 얘기한 것은 홍화객을 의미하는 것이며, 목이 긴 죽엽청은 바로 가장 높은 자를 만나게 해 달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암호로 주인을 찾는 이 자는 누구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초조와 불안으로 두리번거리던 청년 앞에 세 사람의 장년인이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들은 그 청년을 보자마자 곧바로 그에게 다가섰다.
 그들은 챙이 넓은 죽간모를 쓰고 있었으며, 얼굴 전체에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고, 그의 몸에 붙은 장신구에서부터 옷에 이르기까지 온통 검은색 일색이었다.
 그들에게서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음습한 냄새가 피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괴상한 사교집단에서 나온 것 같지 아니한가?
 그 중 하나가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다가섰다.
 “흐흐. 화혼녀(華婚女) 진주영, 네 목을 거두고자 왔다.”
 사내는 흠칫 놀랐다.
 “당신들은 누구시오?”
 사내의 입에서는 예의 굵은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화혼녀, 네가 목소리와 모습을 바꾼다 하여 우리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단 말이냐?”
 이 사내가 여자였단 말인가?
 화혼녀 진주영(眞珠影).
 그 이름은 녹녹치 않은 이름이었다.
 중원에는 사선녀(四仙女)로 통하는 천하절색들이 있었다.
 천녀(天女) 신예원(愼禮元), 화화녀(花火女) 남궁선(南宮仙), 월기신녀(月旗神女) 조약빙(朝弱氷), 그리고 화혼녀(華婚女) 진주영(眞珠影)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지(知), 덕(德), 미(美)를 갖춘 중원 사대천녀(四大天女)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중 일인이 이곳 만한루에 왜 나타난 것인가?
 “사, 사람을 잘못 보았소.”
 사내는 굵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였고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여자가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참혹할 정도로 굳어 있었고 식은땀이 쉴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 흑포인은 품에서 극(戟)을 꺼내어 들었다.
 “크흐흐흐. 가소로운 몸부림. 죽어라!”
 휭―. 극이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손에서 떠난 극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회전을 하며 사내를 향해 짓이겨 들어갔다.
 “아악!”
 사내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가리며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다가오는 극을 피하려고 허둥대보았으나, 무공(武功)의 무(武)자도 모르는 그가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그러나 곧 들릴 것이라고 여겨졌던, 사람을 파고드는 소리가 아닌 무언가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챙―.
 사내를 향해 날아가던 극이 어디선가 날아온 사발에 맞으며 도로 퉁겨 나온 것이다.
 물론, 그 사발은 공중에서 바스러져 먼지로 화해 흩어져버렸다.
 “누, 누구냐?”
 흑포인들은 날아 돌아오는 극을 받으면서 외쳤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느새 모두 도망가 버렸고, 남은 자라고는 한쪽 구석에 술에 잔뜩 절어 엎드려 자고 있는 늙은 노인 하나가 전부였던 것이다.
 일견하기에 술에 절은 거렁뱅이가 틀림없었다.
 종업원과 주인마저 주루를 버리고 달아났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쥐새끼가 나오지도 못하고 숨어서 지랄하는 것이냐?”
 흑포인들은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끌끌.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그 목소리는 마치 쇳덩이와 쇳덩이를 마주 비비는 듯 듣기가 거북했다. 목소리와 함께 움직인 사람은 다름 아닌 노인이었다.
 “후아암.”
 노인은 찢어질 듯한 하품을 하며 후줄근하게 일어나 앉더니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흑포인의 눈가에서 이채가 흘렀다.
 ‘그렇다면, 이자가?’
 흑포인의 마음속에는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세상에 얼마나 많은 기인이사들이 있는가? 겉은 후줄근해 보이지만, 혹시라도 이자가 전대고수라도 된다면 낭패가 아닌가?
 그래서 그는 최대한 예의를 갖추었다.
 “어느 고인(古人)이신데 우리가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오?”
 “고인? 흐흐흐, 고인이라······. 네놈들은 죽기를 자처하는구나.”
 순간 흑포인들은 할 말을 잃었다.
 이 거렁뱅이가 자신들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게 아니고······.”
 “시끄럽다.”
 “윽!”
 노인이 가볍게 내지른 소리에 고막을 베어내는 듯한 고통을 느꼈고 그들은 한 발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가공할 내가 고수다.’
 흑포인들은 순간 흠칫했다.
 “너희는 나에게 세 가지 죄를 지었다.”
 노인은 구부정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걷던 걸음을 멈추고 진주영 옆에서 그들과 마주서며 말을 이었다.
 “켈켈. 하나는 나의 단잠을 방해한 것이고, 둘째는 신성한 술집에서 소란을 피운 것! 그리고 이렇게 아리따운 아가씨를 핍박한 것. 음! 또한 나를 움직이게 한 것······.”
 잠시 말을 끊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싶더니,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이런 넷이었군. 여하튼, 나는 죄를 지은 너희를 용서하고 싶지 않으나, 오늘은 마음이 울적하니 한 팔씩 내어놓고 가는 것으로 너희 죄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
 그 노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번째 흑포인의 입에서 욕설이 뿜어져 나왔다.
 “이런 개 같은 늙은이를 봤나. 우리를 졸(卒)로 보는 게냐?”
 “말로 해서는 안 될 늙은이로군”
 삼 인 중 첫 번째 흑포인이 그들을 포위하며 외쳤다.
 “이 계집과 늙은이를 단칼에 끝내 버리자!”
 노인은 서늘한 눈빛으로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입가에 엷은 주름이 생겼다.
 “끌······. 말로 해서는 안될 아해들이로구만. 그렇다면 내 몸소 재미있는 놀이를 가르쳐 주지. 끌끌끌.”
 노인은 술을 한 모금 들이키더니 팔을 늘이면서 무방비 상태로 서 있었다.
 마치 움직이기 귀찮아 그렇게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화선풍극(南畵仙風戟) 환(環)!”
 이때, 흑포인들 중 하나가 소리치자 삼 인은 한 몸이라도 되는 양 몸을 움직여 나갔다.
 삼 인이 빙글빙글 돌면서 극을 돌리자 나선형의 강기가 노인과 진주영의 몸을 감싸고돌았다.
 “천뇌난화(天雷亂花).”
 “꺄악!”
 진주영이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빙글빙글 돌던 강기가 그들을 향해 쏟아지듯이 들어 왔으니, 무공을 모르는 그녀로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금방이라도 자신을 쪼갤 듯이 다가드는 강기에 놀라 기절하지 않는 것만 해도 가상할 지경이었다.
 시시각각 다가드는 강기 속에서도 노인은 태연히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강기가 노인과 여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려는 순간 노인의 입에서는 노래가 터져 나왔다.
 “청춘은 어제런가. 나 이제 이곳에 서서 뒤돌아 보건만은 험난한 가시밭 인생 길을 헤치고 온 것이 신기하기만 하구나······.”
 하며 가볍게 술병을 흔들자, 쨍! 하는 소리와 함께 극이 퉁겨 나가고 강기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크윽, 취권(醉拳)!”
 술기운에 기운 없이 쓰러져 누워버리는 노인의 입에서는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나련다. 이 빌어먹을 인생은 하나련다. 개똥밭의 이승이 저승보다야 낫다고 하지만, 내 이 인생은 어찌하여 개똥만도 못한고······.”
 쓰러져 있던 노인을 향해 흑포인들이 다시 극을 내려찍자 노인은 선풍각(仙風脚)을 시전해 다시 극을 발끝으로 퉁겨 내면서 일어서더니 두 손을 꺾어 삼 인의 허리와 턱, 그리고 정강이를 쳐 쓰러뜨렸다.
 우당탕! 쿵탕!
 “컥!”
 “크윽.”
 족히 삼 장은 날아가 멈추지 못하고 벽에 쳐 박힌 흑포인들은 입가에서 새어나오는 피를 소매로 닦으며 일어섰다.
 다시 한 모금의 술을 들어 입에 부어 넣으며 자세를 바로 하던 노인의 입에서 다시 끊어졌던 노래가 새어나왔다.
 “하늘이여! 빌어먹을 하늘이여, 내 손에서는 피가 마를 날이 없구나. 차라리 미물이나 범부로서 태어났다면 다른 이의 손에 죽더라도 웃을 수 있을 텐데······. 죽지조차 못할 인생 만들어 인고(人苦)를 겪게 하는가.”
 노인의 노래는 뭔지 모를 인생의 비애감마저 들게 하였다.
 흑포인들은 일순 공중으로 튀어 올라 노인에게 동귀어진(同歸御眞)의 수법으로 삼면에서 다가들었다.
 “주병선풍(酒甁旋風)!”
 직각으로 삼면에서 노인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던 흑포인들의 극(戟)이 노인의 머리를 두 조각 낼 듯이 다가드는 순간이었다.
 노인은 자신이 마시던 술병을 풍차 돌리듯 휘두르며 뛰어올랐다.
 콰앙!
 천지가 개벽하는 소리가 이러할까?
 엄청난 진동과 함께 노인이 뛰어내렸다.
 노인이 가볍게 내려서는 순간 세 개의 둔탁한 마찰음이 일었다.
 쿵! 쿵!
 털썩―!
 “흠······.”
 노인의 입가에서도 얇은 실핏줄이 새어나왔으나, 순간 노인의 소매에 의해서 사라졌다.
 진주영은 이 놀라운 광경에 할말을 잊고 말았다.
 노인은 자신의 손에 의해 죽은 자들을 위해 합장을 하고는 다시 구석진 자리에 앉아 술병을 기울였다.
 이때 안으로 들어갔던 점소이가 그제야 나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했다.
 “손님!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점소이의 손에 이끌린 진주영은 노인에게 감사하다는 말도 못한 채 점소이의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섰다.
 이를 본 노인의 입가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진주영, 이로써 또 하나가 이루어지는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일순 노인의 얼굴이 흔들리며, 인상이 변하고 있었다. 현기가 서린 맑은 눈이 잠시 보이는 듯 하더니 어느새 다시 초라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무도 노인의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 할만큼 순간적인 일이었다.
 다시 노인의 모습을 한 그는 왠지 모를 슬픈 표정으로 침울해 하였다.
 “끌끌끌······. 빌어먹을! 오늘따라 하늘이 더 우울해 보이는군.”
 진주영은 자신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무려 보름 전만 하여도 그저 평범한 생활을 했던 십팔 세의 꿈 많은 소녀였다. 꽃을 좋아하고 한 줄의 시를 사랑했으며 한 잔의 차를 음미하기 좋아하는 그런 소녀였다.
 중원에서 자신을 사대천녀라 일컫는 것조차 그녀에겐 별반 관심 없는 일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보름 전 어느 날 밤 그녀는 아버님의 진노한 음성에 설들었던 잠에서 깨어났다.
 “이 불한당 같은 놈들! 내가 네놈들에게 나의 딸을 내줄 듯 싶으냐? 못한다. 나는 죽어도 못한다!”
 “크흐흐흐, 공손노인. 우리 천마무림맹(天魔武林盟)의 서천지부장님이 당신의 딸을 어여삐 여기시어 제 일첩으로 간택하시었소.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대와 이 집안 식구들의 목숨을 위해서 말이오.”
 자신의 아버지 방에서 들었던 소리였다. 그녀를 누군가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아버지는 그녀를 줄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하고 계셨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진주영은 사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천품제일예관(天稟第一禮官), 바로 아버지의 직함이었다.
 아버지는 조정관리로 육두품 중 제 일품에 해당하는 조정 최고의 관리였다.
 그것도 직함에서 말하듯, 조정에서 일어나는 대소사의 예법을 담당했다. 황제와 공주, 혹은 대신들이 주관하는 다과회에서부터 황제의 등극(登極)시 혹은 서거(逝去)시에 조정의 예법이란 모든 예법을 주관하고, 관리에서부터 궁궐의 대소사, 종묘사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그의 지시에 따라 행해졌다.
 그러기에 유학자 중 천품제일관은 최고 중의 최고이자 황제의 측근이 될만한 자로 청렴한 자를 뽑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기에 이토록 화를 내어 본적이 없는 그런 분이시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상처 입은 호랑이의 포효 같은 발악을 하고 계시지 않은가?
 “이 개만도 못한 것들. 하늘에도 법도가 있거늘 감히 너희 같은 사갈(蛇蝎)의 무리들에게 나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을 내어 줄 듯 싶으냐? 이놈들!”
 “크흐흐······. 말로 해서는 안될 노친네구만.”
 “이 짐승만도 못한!”
 그리고는 우당탕! 하고 뭔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컥! 이······.”
 “크흐흐흐.”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넘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진주영은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진주영의 귀에 뒤이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울 안에 있는 것은 뭐든지 죽여라! 그 계집만 빼놓고.”
 “옛!”
 그후 진주영은 보아야 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동물인지 그녀는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가족들이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있었고, 어머니는 윤간 당하다 분함을 못 이겨 자결을 했으며, 동생은 사지가 잘려 나가면서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뒹굴다가 흑의인의 장난스러운 발길질에 머리가 으스러져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지저분한 흙탕물이 흐르는 하수구에 엎드려 이 모든 것을 다 바라보았다.
 머리에선 이 모든 상황들이 헝클어져 맴돌았고, 너무나도 강한 충격에 그녀는 혼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철저하게 타버려 잿더미가 되어버린 자신의 집과 한 줌의 고깃덩이가 되어버린 가족들의 시신 앞에서 그녀는 오열을 터뜨려야 했다.
 그리고 천지신명에게 자신의 몸뚱이를 팔아서라도 복수할 것을 맹세했다.
 그때부터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알겠는가?
 온실 속에서 잘 가꾸어진 화초는 바깥의 공기에 견디어 내지 못하는 법이 아닌가.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강호의 비정함에 대해 모르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몇 번의 죽음의 위기를 넘겼는지 모른다.
 어떤 서러움을 당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길가에서 건달들에게 강간당하고 창녀촌에 팔려 갈 뻔했을 때도 있었고, 산적에게 쫓겨 절벽에서 굴러 떨어졌을 때도 있었으며, 배가 고파 개가 먹던 고기 조각을 빼앗아 먹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울지 않았다. 한 번 울면 그대로 무너져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세상 누구를 죽인다고 해도 자신만은 살아 남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복수를 하기 전에는 그녀의 목숨과 몸뚱이는 그녀의 몸이 아니었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던 중 그녀는 만한루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자신이 했던 맹세를 떠올리며 갈 길을 정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것이다.
 작은 방안이었다.
 특별한 장식도, 가구도 없는 방의 유일한 장식이라곤 벽에 걸린 싸구려 족자(簇子)가 다였고, 가구라고 해봐야 가운데 놓인 탁자와 의자가 전부였다.
 그리고 어디서 주워 왔는지 모를 한 십 년은 쓴 듯한 양탄자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엔 왠지 모를 아늑함이 어려있었다. 고향의 집에 돌아온 편안함이라고 해야 할 그런 아늑함.
 벽에 난 작은 창에서는 비가 그쳤는지 손바닥만한 저녁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탁자에 기댄 그녀는 지난 십오 일 간을 잊고 평안한 얼굴로 잠이 들어있었다.
 어머니의 모태(母胎)인 양 편안함이 밀려왔고, 바닥의 낡은 양탄자의 털은 마치 아버지의 수염인 양 까칠한 감촉으로 와 닿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어느새 누구도 모를 눈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꿈에서 헤어진 가족이라도 만나고 있는 것인가?
 그런 그녀를 언제부터인가 한 쌍의 눈동자가 쳐다보고 있었으니······.
 사마천인은 그녀가 주루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문이 멸문당한 것은 십오 일 전의 일이었고, 워낙에 많은 일이 일어나는 강호인지라 사람들의 뇌리에서는 이미 지워져버린 옛 일이었지만, 사마천인, 그만은 그녀가 나타나는 순간, 그 사실을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흑포인들 셋이 나타나 그녀를 죽이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들 셋은 예전 마교 절기인 철인마극(鐵人魔戟)을 시전했다.’
 그의 눈은 진주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마교의 부활인가? 골치 아프게 되었군.’
 어느 샌가 떠오른 달빛이 은은히 새어 들어와 잠들어 있는 그녀를 감싸안고 있었다.
 밤 공기가 차서 그런지 진주영은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측은해 보였을까? 사마천인은 자신의 웃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주고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막아주었다.
 옷이 닿는 느낌에 잠깐 움찔했던 그녀는 다시 깊은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었고 그녀의 눈가에 매달려 있던 눈물은 탁자 위에 떨어져 내렸다.
 ***
 무적신권 당궤.
 그에 관한 일화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당궤가 십오 세에 권법을 수련하러 산에 올라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단 일권(一拳)으로 황소만한 호랑이를 때려잡은 이야기는 권과 장(掌)을 수련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신화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호랑이는 전신에 온전한 뼈가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그의 일권에 모두 으스러져 가루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호랑이의 외형에는 긁힌 상처 하나 없었다고 하니 당궤의 권이 얼마만한 경지에 올라있는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지 않겠는가.
 그후 그는 외호 대신 무적신권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 걸리면 거석이 모래가 되었고, 모래는 먼지가 되었다.
 또한 그의 일권에 쓰러져간 무수히 많은 인물들 역시 다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는 가히 권계(拳界)에 군림한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한 장의 쪽지가 날아들었다.
 당궤가 오래간만에 야외에서 애첩이 내어온 용정차를 음미하고 있을 때였다.
 휘익!
 허공을 가르며 당궤의 미간을 향해 무언가가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서늘한 기운, 그것은 분명 살기였다.
 갑작스런 암습에 위기감을 느낀 당궤는 그대로 몸을 구르며 그 물체를 피했다.
 당시에는 막 눈이 녹아 땅이 질퍽했다. 당연히 그는 새로 차려 입은 비단옷을 염려할 틈이 없었고, 옷은 질퍽한 눈과 흙덩이들이 묻어 크게 더럽혀졌다.
 그런데 막상 날아온 물체는 다름 아닌 작은 나뭇가지가 아닌가?
 나뭇가지는 바람결에 날리는 먼지처럼 힘없이 날아와 그가 마시던 찻잔에 떨어졌고, 수선을 떨었던 당궤는 애첩과 하인들 앞에서 낭패를 보았다.
 그 나뭇가지의 끝에는 한 장의 종이가 매어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당궤나리.
 당신의 주먹이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었소이다.
 다음 달 보름, 당신을 찾아가 일장을 겨루고 싶소. 부디 응해 주시기 바라오.
 홍화객.>
 이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선전포고가 분명했다.
 이에 당궤는 분통을 터뜨렸고 그는 그 종이 쪽지를 던져버렸다. 자신이 애첩 앞에서 추태를 부렸다는 사실에 분노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성급한 분노로 인해 당궤는 한 가지를 간과하고 말았다.
 당시 그가 있던 자리는 몸을 숨길만한 장소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홍화객이 다가와 그에게 나뭇가지를 던졌다는 것, 게다가 그런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다는 것은 이미 홍화객의 무공이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무공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당궤는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 채 호기롭게 소리쳤다.
 “좋다. 네놈이 누군지 모르나 진정 간이 부은 놈임에는 틀림없구나!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받아준다. 하지만, 너의 목숨은 책임 질 수 없다.”
 ***
 넓은 정원이었다.
 사람 하나쯤은 어느 곳에 숨어 있어도 찾기가 힘들 정도로 넓고도 훌륭하게 손질이 되어 있는 정원이었다.
 마치 꽃으로 만든 동산이 하늘과 맞닿을 것처럼 펼쳐진 곳에 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문천(文天) 우문성.
 그의 손끝에는 전지도(前支刀)가 들려 있었고, 그의 앞에는 동백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한쪽 가지가 누렇게 변해 있는 병든 나무였다.
 투둑!
 그의 전지도가 지나가고 나뭇가지들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의 뒤에는 열 살 정도의 소동이 그 동안 정원을 손보면서 모은 것인 한 아름의 나뭇가지들을 두 손으로 꼭 끌어안고 있었다.
 “소하야.”
 “예. 스승님.”
 “병든 가지는 애초에 베어버려야 하는 법이다.”
 “예?”
 소동은 천진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스승의 갑작스러운 말에 의아해했다.
 “나무 하나를 전부 버릴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네에······.”
 그래도 소하는 어떤 뜻으로 우문성이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뭔가 심오한 말을 하나보다 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우문성은 동편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줄기 소슬바람이 정원을 휩쓸고 지나갔다.
 “아니다. 바람이 차구나. 이만 들어가자.”
 “예, 스승님.”
 “이젠 가을이 얼마 남지 않았군. 음······.”
 수많은 상념이 우문성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가지를 자른 동백나무는 그 생기를 더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원에서 풍기는 이 기이한 기운은 결코 생기만이 아니었다.
 이는 살기가 분명했다.
 우문성! 이자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
 금세 이십여 일이 지나 보름이 다가왔다.
 시간이 여삼추와 같다고 하는 말은 결코 그냥 생겨난 말이 아닌 것이다.
 운명의 화살은 누구에게로 돌아갈 것인가?
 당대 최고의 권왕과 당대 최고의 자객의 대결로 사람들의 이목이 주목되고 있었다.
 천우산(天宇山).
 하늘의 처마 끝이라 불릴 만큼 험하고 또한 높이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높아 천우산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기골장대(氣骨壯大)한 산이었다.
 취룡곡(聚龍谷) 천룡폭포(天龍瀑布).
 용이 모인다고 하는 그 이름 그대로 이곳저곳이 다 용이 솟아오르는 듯한 절경을 이루고 있는 폭포였다.
 웅대한 물결이 지축을 뒤흔들 정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곳에 언제부턴가? 기골장대하고 눈망울이 투박한 장년인이 한 사람 서 있었다.
 천하명인이 이곳에 조각이라도 해 놓은 것일까?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었던 듯한 그 모습은, 용의 머리를 뚫고 나온 뿔처럼 강해 보였다.
 그 기운이 험한 산세에도 꿇림이 없으며, 천룡폭의 굉음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대자연에 맞서도 일점 뒤지지 않는 기세를 지닌, 그 안에 자연의 준엄함을 내포한 바로 그가 무적신권 당궤였다.
 그의 굳건한 두 주먹은 어느 누구도 쓰러뜨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해 보였다.
 그런 그가 지금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이제까지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니 겁먹었나 보군.”
 당궤의 나직한 울림성이 천룡폭을 진동하자마자 왼쪽 숲 속에서 한 사나이가 걸어나왔다.
 “하하하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입니까?”
 당궤의 눈에서는 이채가 흘러나왔다. 홍화객, 그는 당궤가 상상하던 그런 유의 인간이 아니었다.
 ‘분명 자객이라 그랬거늘······.’
 당궤의 상상을 뒤집어엎어 놓을 만큼 너무도 평범하게 생기지 않았는가?
 “생각과는 다른 인상이군.”
 “미안하오. 다들 그럽디다. 하지만 어쩌겠소? 원판이 이러니. 하하.”
 당궤는 다소 긴장하고 있었다.
 ‘쉽게 생각하다가는 당한다.’
 싱글거리며 다가서는 그를 보면서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묘한 떨림이 전해져왔다.
 ‘자객의 특성을 살려 나를 공격했더라면 더욱 쉬웠을 터인데, 굳이 내 앞에 나서다니······.’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다.
 “마교에 대해 아시오?”
 흠칫! 당궤는 자신의 귀를 의심할 만큼 놀랐다.
 그만이 아는 사실을 홍화객이 어찌 안단 말인가? 당궤는 자신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껴야 했다.
 ‘이자가 무엇을 알고 있기에?’
 그는 기이한 위기의식에 빠졌다. 이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파멸은 불을 보듯 자명한 것이다.
 자신만이 홀로 이곳에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그의 기세는 사뭇 달라졌다.
 둘만이 아는 일이고, 여차하면 그를 죽이면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그의 불안감을 일소시킨 것이다.
 “무슨 말이냐?”
 “아니오. 그냥 갑자기 궁금해졌소. 혹시 마교에 대해서 아는지?”
 “물론이다.”
 사마천인은 기이한 표정을 띄우면서 말을 이었다.
 “오호, 그래 얼마나 아시오?”
 당궤의 눈가에 잔주름이 일었다.
 “사교집단이란 건 알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겨우 그것을 알아보려고 나를 이곳까지 불렀나?”
 “하하하. 그럴 리가 있겠소? 단지······.”
 “단지?”
 “한 가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오.”
 당궤는 굳은 얼굴로 사마천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꺼낼 것인지가 심히 염려스러운 것이리라.
 그러나 사마천인 역시 마주 보고 있었지만 그와는 다르게 무엇이 즐거운지 웃고 있었다.
 “서천 지역에서 무림인도 아닌 한 일족이 몰살하는 사건이 있었소. 당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란 느낌이 들어서 말이오. 화혼녀 진주영에 대해서도.”
 “윽!”
 당궤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싸우러 왔으면 싸워야지. 웬 잔말이 많은가?”
 “왜 그렇게 흥분하시오. 천마무림맹 서천지부장님?”
 “뭐, 뭐라고?”
 우두두둑!
 그는 채 놀람이 가시기도 전에 온몸의 기를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어느새 당궤의 두 주먹이 굳게 뭉쳐지며 푸른 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당궤의 얼굴에는 필살(必殺)의 각오와 살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에게 남은 길은 홍화객, 그를 죽이는 일밖에는 없었다.
 “당신은 진주영을 넘봐 그 집안을 몰살시키지 않았는가? 흠.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죄상을 감추기 위해 그녀를 죽이려 하다니!”
 사마천인의 목소리에는 살기가 어려있었다.
 그의 말에 당궤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큭. 죽어라!”
 일순 뻗어 나오는 일권의 강기는 산처럼 사마천인을 향해 뒤덮어왔다.
 우르릉―!
 엄청난 압력에 의해 주위의 돌들이 밖으로 퉁겨져 나가고 있었다.
 권기(拳氣)에 격중 당하려는 찰라 사마천인은 좌우로 갈라지는 듯 싶더니 사라져버리고 그 뒤에 놓여있던 애꿎은 거석만 우수수 먼지로 화해버렸다.
 “왜? 자신이 마교인 것이 탄로나 부끄러운가?”
 자신의 공격이 실패하자 당궤는 더욱 강공을 펼쳤다.
 “거석투공(巨石透功)!”
 그의 주먹에서 순간순간 권풍이 휩쓸고 권기가 뻗어 나왔다.
 퍼엉! 파직!
 연속적인 권기로 취룡곡과 천룡폭포 주변은 바윗덩이들이 자갈덩이로 화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마천인은 단 일권도 공격은 하지 않고 신기막측한 보법으로 당궤의 권을 피하고만 있었고, 되려 그의 권이 위력이 떨어지면 뛰어난 언변으로 다시 흥을 돋구어 주기도 하는 게 아닌가!
 “허억······ 허억.”
 얼마가 지났을까? 당궤는 지칠 대로 지쳐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그의 권도 이미 위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천인은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전혀 지치지 않은 모습으로 그의 앞에 다소곳이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밭가는 데는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구려!”
 미소까지 실실 흘리며 사마천인은 과장된 몸짓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많던 기암괴석들이 작은 돌멩이가 되어버리고 울퉁불퉁하던 지면이 고르게 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허억! 주, 죽인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가 갑자기 숨을 고르며 외쳤다.
 “으득. 죽인다. 천마파천권(天魔破天拳)!”
 아마도 세인이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아마 열이면 열, 모두 탈혼(脫魂)했을 것이다.
 ―천마파천권.
 마교 십대 절기의 말석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말석이라고 우습게 본다면 큰 오산이다.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무공들 중에서 십 위라는 것은 녹녹한 것이 아니었다.
 천마파천권은 광마(狂魔)의 절기로 이 절기 하나로 인해 무려 이천여 명이 넘는 목숨이 세상과 이별을 했다.
 광마는 어린 시절 충격으로 반절은 광인이고 반은 정상인이었다.
 그는 시간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괴상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그가 하는 행동은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강아지 한 마리를 가지고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뒹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 강아지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된 일인지 패도적인 무공을 하나 익히게 되었다.
 그 이름이 바로 천마파천권이었다.
 어디에서 배웠는지, 스승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위력만큼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가 가는 길은 혈로였고 그가 발을 딛는 순간 혈해(血海)가 되었다. 시산혈해(屍山血海)란 말은 바로 그 순간을 위해서 탄생한 말일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사람들의 뇌리에 공포라는 이름으로 각인 되어 버렸다.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크하하하! 어느 누가 나와 대적 할 수 있으랴. 내 주먹은 신이라도 가를 수 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결코 광오하다 할 수 없었다.
 “그렇지! 나는 이것을 찾고 있었다.”
 엄청난 강기의 벽이 밀려오고 있었고, 느리게 다가오는 강기는 깊은 골을 파며 사마천인의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무서운 소리와 함께 주위의 돌들이 회오리바람에 빨려 들었다.
 피하더라도 조금만 늦으면 절대절명의 순간, 그러나 사마천인은 마치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벽력권(霹靂拳)! 천뇌(天雷)!”
 순간 사마천인의 두 주먹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일순간 당궤가 시전한 천마파천권의 권기에 묻혀버렸다.
 퍼펑― 콰앙!
 압력의 폭풍에 의해 천우산이 흔들리는 듯 보였다. 회백색의 먼지가 푸석푸석 일었다가 산야에 낮게 깔렸다.
 그때,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먼지가 서서히 걷히더니 이내 두 사람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의 가슴팍에서 한 사발이나 되는 피를 쏟고 있었다.
 “그, 그것이 무슨 권인가?”
 “벽력권이오.”
 “대단······하군.”
 당궤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한 채 거산(巨山)이 무너지듯이 쓰러져 버렸다.
 광마에게는 비사가 하나 있었다.
 벽력권은 삼백 년 전 인물인 벽력대제(霹靂大帝) 소양춘이 만든 권공(拳功)으로 당시 일세를 풍미했던 기인이었다.
 특히 마교의 창시자였던 마천태자(魔天太子) 조양소와의 대결에서 사용했던 권으로 천여 합의 싸움 도중 벽력대제의 반 초 차이 승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세인들에게 훗날 전해지기를 그 싸움이 끝난 후 하나의 바위산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평야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훗날 마천태자는 이렇게 말했다 한다.
 “벽력제일가의 사람을 만나면 훗날을 노려라! 반드시 패할 테니까.”
 그 정도로 마교에서도 인정하던 권법이었다.
 어쨌든 무적신권이라 호칭되며 당대를 풍미(風靡)하던 마인 당궤의 최후는 이처럼 매우 초라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붉은 손수건 한 장이 엽전 일문에 꽂혀 나부끼고 있었다.
 ***
 “그것이 끝인가?”
 “그렇소.”
 천태랑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래.”
 그의 얼굴에 비친 미소는 승자의 미소였다.
 마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의 어린아이가 짓는 미소처럼 천진함마저 묻어 나왔다.
 “그런데, 나는 한 가지 궁금증이 더 생겼다.”
 “무엇이오?”
 “너는 새벽 첫 닭이 울기 전 나를 죽이겠다고 했다.”
 이렇게 말을 하는 천태랑의 얼굴은 방금 전과는 다르게 싸늘히 식어있었다.
 “그런데, 너는 나에게 잡혀있다.”
 “그렇소.”
 “그럼 나를 어떻게 죽일 수 있단 말이냐?”
 “할 수 있소.”
 사마천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천태랑을 뒤에서 호위하고 서 있던 선천비와 무휘의 눈가가 일순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바라보면서도 사마천인은 싱글거리고 있었다.
 천태랑은 또 다시 호기심이 발작하여 사마천인을 향해 물었다.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렇듯 태연한 것은 천잠사와 선천비, 무휘에 대한 믿음이 사마천인의 말보다 컸던 탓이었다.
 “흐흘, 천잠사가 너를 묶고 있는데 어찌 풀겠다는 것이냐?”
 “천잠사라, 이 줄의 효용을 아시오?”
 “알다 마다. 어떠한 내가공력으로도 끊을 수 없고 탄력을 갖고 있어 축골공으로도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 아니냐?”
 “그렇소. 그런 효용 때문에 고수나 중요인물을 포박할 때 이 천잠사를 많이 사용하곤 하지.”
 사마천인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피어났다.
 “하지만! 나는 이 천잠사를 풀 수 있소.”
 일순 천태랑을 비롯한 선천비와 무휘의 눈에 수많은 의문이 피어올랐다.
 “호, 어떻게?”
 이 순간까지도 천태랑은 느긋했다.
 “들어 봤을지 모르겠소. 저 먼 나라 서역에는 요가라는 정신무(正身武)가 있다오.”
 “요가?”
 “그렇소. 어떠한 상태에서도 자신의 정신을 하나로 모을 수 있으니, 이런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쉽지.”
 순간, 무릎을 꿇고있던 사마천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뒤로 묶여있던 두 팔을 한바퀴 빙글 돌려 앞으로 모았다. 그리고는 두 손을 맞잡고 천잠사를 풀어버렸다.
 “이, 이런!”
 “제길!”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선천비와 무휘가 합공을 펼쳤다.
 선천비의 쌍장에선 반야대장력(般若大掌力)이 시전되어 선천비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다.
 섬전이라 불릴만한 속력으로 무섭게 쏘아가는 선천비의 뒤에는 무휘가 신검합일의 신법으로 천월검성 냉야월의 비전지기인 천뇌야참(天雷夜斬)을 시전하면서 사마천인의 목을 노리고 쏘아갔다.
 그들 개개인만으로도 일류 고수의 반열에 들 수 있을 터이니, 둘이 함께 한 합격술이 능히 태산을 꺾을만한 위력을 담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들의 기세가 막 사마천인의 몸에 격중되려는 찰라, 사마천인의 입에서 벽력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이앗!”
 그의 몸에서는 웅후한 빛과 함께 천수대장력(千手大掌力)의 인자결(印字結)이 터져 나왔다.
 쾅― 우르릉!
 동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무언가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천극관을 울렸다.
 한철로 이루어진 벽이 들썩거리며 먼지가 자욱히 쏟아져 내렸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먼지가 가라앉자 그곳에는 두 구의 시신이 있었다.
 “아! 아!”
 천태랑은 너무도 놀라운 무위에 말을 잇지 못한 채 죽어 넘어진 두 수하들만 하염없이 내려보고 있었고, 그의 입에서는 경악성만이 터져 나왔다.
 “이제 당신 차례요. 마교 제일 자금, 아니 천마무림맹 대내총관 나리!”
 이 말을 들은 천태랑이 얼굴이 벌개지며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이미 그의 목구멍으로는 자신의 수하였던 무휘가 지녔던 검이 들어와 그의 몸과 머리를 분리하고 있었다.
 “억······ 컥!”
 언제 그의 머리를 베어들었는지 사마천인의 손에는 핏물이 흘러 넘치고 있는 천태랑의 거대한 머리가 들려 있었고, 그의 입에서는 뜻 모를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무황 남태천, 기다려라.”
 금귀라 불리며 평생을 돈을 모으기 위해 보내야 했던 천태랑은 사십오 세의 나이로 그 한 많은 생을 끝냈다.
 자신이 그 동안 벌어들인 돈을, 죽어서조차 감지 못한 부릅뜬 두 눈으로 노려보며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다.
 중원 최고 거부의 최후였다.
 이때 멀리서 여명을 알리는 수탉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
 “아!”
 주루 안에서 청년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청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람들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술을 한 잔 들이켰다.
 노화자는 입술에 침이 마르는 듯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그런데 동생, 홍화객이란 자는 어떻게 무공을 익혔길래 그렇게 고강 할 수 있단 말인가?”
 “아! 그렇군요. 그가 어떤 사나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채셨을 것입니다. 혹시, 살수탑이란 곳을 알고 계십니까?”
 “살수탑?”
 노화자는 경악성을 터뜨렸다.
 놀란 건 노화자만이 아니었다. 객잔 안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 자네. 살수탑이라고 했는가?”
 청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잘 알고 있네. 암, 불과 백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의 위명을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였지 않은가? 이 중원은 물론 저 멀리 대막이나 사해에까지 알려져 있었지.”
 살수탑(殺手塔).
 그들의 역사는 권력이란 것이 생겨나면서부터이다.
 권력에는 늘 보이지 않는 암투와 그에 따른 위험에 대비해야만 했다. 필요에 따라서는 상대의 목을 쳐야만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수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것이, 당금에 이르러서는 전 중원에 천여 곳이 넘는 살수단체가 생기고 세외에서 흘러든 특수한 무리들까지 더하면 그 수를 파악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들 살수에게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어렸다.
 아무리 조그만 단체라도 우두머리는 필요한 법이다.
 살수라고 다르지 않았다. 만약 이들에게 명령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들은 자멸하고 말 것이다.
 다른 것보다도 살행(殺行)에는 단결과 무조건적인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살업(殺業)을 실행할 수 없는 법이고, 실행한다 해도 대부분이 실패로 끝나는 것이 자명한 일이기 때문이다.
 암흑을 지배하는 제황들의 모임, 그 탑이 어느 곳에 존재하고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살수라면, 자신이 알던 모르던 그 살수탑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은 그림자처럼 권력자들의 도구 노릇을 하며 암중에 활동해 왔다. 중원의 역사 역시 권력자들이 아닌 그들이 만들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철저한 이익에 따라 최고의 권력에 기생충처럼 붙어 생존해 왔고, 그 권력의 힘을 지키며 이용해 왔다.
 그들은 본능처럼 피를 그리워했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난세를 만들어왔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그림자라 여겨졌던 자들, 그러나 그들은 어느 순간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혹자들은 그들이 권력의 암투로 인해 자멸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천자의 힘에 의해서 사라져 버렸다고도 했다.
 이제 세월은 많이 흘러 그들은 잊혀져 버렸지만, 아직도 그들이 중원에 뿌려놓은 그림자는 걷히지 않고 있었고, 다른 형태지만 그들의 살업 역시 끝나지 않은 것으로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제법 자세히 아시는군요. 그들은 백여 년 전 갑자기 사라져 버렸기에 많은 의혹을 남겼습니다.”
 “그럼 홍화객이 그 살수탑의 살수인가?”
 노화자의 음성은 은은히 떨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그는 그 살수탑의 마지막 생존자이며, 마지막 탑주였습니다.”
 “아!”
 주루 안의 사람들 사이에서 또 다시 작은 소요가 일었다.
 만약 이곳에 무림인이 있었다면 이 정도의 소요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대단한 난리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럼, 그 살수탑은 어떻게 된 것인가?”
 “후후후. 그들은 배반을 당했습니다. 권력을 옹호한 필연적인 결과였지요. 그들은 태조(太祖) 홍무제를 도와 당금 명을 세웠습니다. 물론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명을 세우려는 홍무제를 위해 많은 일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니, 그 말로는 부족한 감이 있군요. 원을 물리치기 위해 살수탑의 정예 삼천을 잃었으니까요. 그런 그들을 홍무제는 자신이 권력을 잡자마자 배반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왜 그 살수탑은 무너지게 된 것인가? 홍무제는 왜 일등공신인 살수탑을 그렇게 없애버렸지?”
 청년은 목이 타는 듯 시원스럽게 술을 한 잔 마시더니, 회상하듯 그의 눈은 창 밖을 향했다.
 “겁이 났던 것입니다. 그들의 잠재력에 대해서 말이죠. 자신이 권력을 잡자마자 그는 살수탑이 자신의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모두 없애버리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청년이 말을 이어가자 주루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
 “황상.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구룡포(九龍袍)를 입은 사나이가 계곡 아래 서 있는 거대한 석탑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검은빛의 탑은 산그늘에 가리어져 달빛이 닿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은 몹시도 기분 나쁜 형상이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좋지 않게 할뿐만 아니라 사악함마저도 깃들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창. 내가 어떻게 이 대륙을 일통(一統)시켰다고 생각하는가?”
 “예?”
 “사람들은 말하지. 나를 지독한 기회주의자라고 말이야. 나의 모든 것이 백련교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살수탑의 저들이 없었다면 아마도 오 할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네. 저들이 있어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지. 그대는 궁금하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왜 저들을 치려는가 하는 것이 말이네.”
 “무엇이옵니까?”
 태조는 두 손은 꼭 쥐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은 비록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들 정도였지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두렵네. 저들은 천 년의 중원 역사와 함께 살아 남았고, 앞으로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네. 자네는 모르지. 저들의 잔혹성과 그 철저함을 말이네.”
 태조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두 손을 가슴에까지 끌어올려 마주 잡고 있었다.
 철의 황제라 알려진 그가 이토록 두려워하는 대상이라니, 무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삼만의 군사를 단 일만으로 막아낼 때도 그는 당당했었다.
 “나는 지금에도 떨림이 멈추지 않고 있다네. 저들을 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떨리기 시작했지. 지금 저들 오백을 치기 위해 나는 일만의 정예무사들을 사방에 풀어놓았네. 자네는 웃을지 모르네. 어찌 저들 오백을 향해 이렇게 많은 장수들을 불러 놓았는가 하고 말일세. 그러나 그렇지가 않아. 나는 지금 백만 대군으로 이곳을 둘러쌓고 싶다네. 조금만 여유가 있었다고 한다면 말이네. 저 변방에 자리한 군사들이라도 불러들여서 말이야.”
 무창은 장검을 땅에 짚고 조용히 서서 읍을 하고 있었다.
 “저들은 오만하지. 그들에게는 하늘도 없네, 이 대지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아. 그런데 황제를 안중에 두겠는가? 자네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게. 저들은 모두 없어져야 한다네. 황실의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위해서는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황제의 눈은 시종 살수탑에 고정되어 떠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은은한 두려움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시각, 태조와는 반대로 하늘의 달을 바라보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서른 정도의 사내로 그 나이에 비해 너무도 침착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탑주. 일만의 군사가 성의 외각 기문진 부근에서 포위하고 서 있습니다. 어서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사내의 뒤에는 육순의 노인이 엎드려 애절한 목소리로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탑주라 불리는 사나이는 그저 묵묵히 하늘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천노.”
 “예.”
 “자네는 저 하늘의 달을 두 손으로 가릴 수가 있겠는가?”
 순간 천노의 몸은 움찔했다.
 “나는 누구보다도 주원장을 잘 알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말일세. 내 이미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네. 아니, 알고 있었다고 해야 정확하겠지. 자네는 내가 왜 갑자기 우리 정예들을 중원의 각처에 분산시켜 놓았고, 삼단을 해외로 돌려놓았는지 아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천노의 눈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네. 너무 화내지는 마시게. 나로서도 어렵게 결정한 일이니. 우리의 죽음으로 우리 형제들의 목숨은 구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렇지 않은가?”
 “······!”
 사내는 하늘을 바라보며 허허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이 밝으이.”
 천노로서는 황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도, 탑주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하늘만 바라보니 뭐라 더 말을 하겠는가? 그러나 천노는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었다.
 “탑주, 그렇다면 소공자님은 어찌 하시렵니까?”
 “그 아이는 지금쯤 삼백 리 밖으로 피신해 있을 것이네. 허허. 나는 후일 그 아이가 우리의 복수를 해줄 것이라 믿고 있네만 마음 한구석에서 그 아이가 그저 평범하게 살아주었으면 싶기도 하다네. 아버지 된 마음으로 그 아이가 편하게 살기를 바라네만 어디 세상이 그리 놔두겠는가? 죽을 고비도 많이 넘기게 되겠지. 못난 마음이지만 내 아이가 불쌍하네 그려. 허허허······.”
 “탑주······.”
 천노는 그의 말을 듣고 바닥에 쓰러지듯 꿇어앉았다. 주군의 아픔과 근심을 헤아리지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럽고 부끄러웠다.
 “달빛 하늘에 가득하고, 한 조각 구름에 근심은 쌓여간다. 술잔에 달빛을 받아 가득 채우고 가슴은 한 잔 술로 적시니, 만천하를 호령한들 이보다 기쁠손가.”
 사내는 한 잔의 술을 높이 들어 시를 읊고는 입 안에 쏟아 넣었다.
 “허허허. 자네도 한 잔 하시려는가?”
 이때 그들이 서 있는 머리 위로 한 대의 화전(火箭)이 천공을 가르며 솟아올랐다.
 쾅! 콰르릉―!
 멀리서 폭약소리와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허망한 것을 어찌 그렇게 버둥대며 살아왔는지······ 허허, 인간사 정말 공수래 공수거로다.”
 사내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한 잔의 술을 다시 털어 넣고는 탑 아래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게 검을 주게. 술에 취했으니 이제는 죽음에 취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천노는 장검을 가져다 사내에게 바쳤다. 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것은 마를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자신이 죽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 사내, 신이라 여기며 목숨마저도 아끼지 않던 사내가 동지들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결심 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사내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마시고는 술잔에 다시 한 잔의 술을 따라 창가에 내려놓았다.
 “한때 동지였던 원장이 이곳에서 이 술잔을 발견했으면 좋겠구만. 아마도 이 한 잔으로 저들의 피 값을 감당하기는 부족하겠지만 말이네. 운명인 것이야. 그래, 운명으로 치부해야겠어······.”
 사내는 검집을 벗겨 술잔 옆에 세워놓았다.
 그러고는 유령처럼 빠져나가 몰려드는 군졸들의 속으로 뛰어 들었다.
 군졸들은 삽시간에 그를 에워쌌다. 그러나, 그 개미떼 같은 적의 틈에서 사내는 자신의 자리를 고수하며 적들을 베어갔다. 그 모습은 아수라, 싸움을 위하여 탄생한 신, 아수라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베고, 찌르고, 긋고, 많은 움직임과 함께 많은 군졸들이 죽어갔지만, 어느 틈엔가 그의 몸에도 상처가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살수탑주를 호위하던 사내들 역시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는 않았지만, 오백 대 만 명이란 것은 중과부적이었다.
 천노는 그렇게 밀리는 중에서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그에게 목숨이란 더 이상 미련을 둘만한 것이 못 되었다.
 “내 평생에 이토록 통쾌하게 싸우다 죽게 될 줄은 몰랐다. 하하하. 탑주님! 내가 죽거든 지옥에서 술 한 잔 나눠주시구려. 내 옥황상제의 목이라도 비틀라면 비틀어 드릴 테니.”
 천노는 미친 듯이 전장을 헤집고 다녔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 자신들을 배반한 반역자 그를 찾기 위해 자신의 살이 갈라지고 뼈가 부러지는 것을 느끼지 못한 듯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언덕 위에 서 있는 한 사내, 구룡포의 사내를 발견했다.
 “크하하하. 드디어 찾았구나! 내 너만은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 가자, 나와 같이 가자!”
 천노는 미친 듯이 언덕 위로 달려 올라갔다. 하지만, 그의 앞을 가로막는 오백여 군사들은 필사적이었다.
 “주군을 보호해라.”
 “황제폐하의 안전을 지켜라!”
 베고 또 베었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았고, 이미 지칠 대로 지치고 상처투성이인 몸으로는 더 이상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그는 주원장과 겨우 열 걸음을 남겨두고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주원장의 얼굴이 어른거렸고, 이내 천노의 뇌리에서 주원장의 얼굴은 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밤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날 밤 이 지상에서 살수탑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태조는 그 계곡에 수천관의 폭약을 터뜨려 일시에 살수탑을 땅 속으로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후 중원에서 활동하던 살수탑의 살수들은 모두 자취를 감춰버렸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많은 살수들이 생겨나 활동을 하고 있지만 당시 몇 년간 살수는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사람들은 살수들이 돈으로 목숨을 사는 천한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견임을 알 수 있지요. 오히려 그들의 의리가 저 권력을 쥐고 자기만 살겠다고 하는 자들보다 낫지 않습니까?”
 청년은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더니 얼굴이 발그스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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