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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영웅사 1

2018.05.30 조회 258 추천 1


 중원영웅사 1권
 서장 영웅탑
 
 
 (1)
 
 
 중원대륙(中原大陸)은 넓다.
 그 광활한 대륙을 배경으로 태어난 무림(武林) 역시 넓다.
 그런 무림이기에 각 시대마다 영웅을 만들었고, 그 수많은 영웅들은 스치듯이 명멸(明滅)했다.
 무림에서 어떤 인물들을 무림영웅(武林英雄)이라고 부르는가?
 그 답은 의외로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것이었다.
 오십 년 전에 무림에 돌연히 찬란한 금자탑(金子塔)이 나타났다. 그 탑은 언제부터인지 무림인들 사이에서 영웅탑(英雄塔)이라고 불렸다.
 영웅탑은 그 높이가 무려 이백 장(=약 육백미터)에 이르렀다. 그리고 탑 둘레에는 방원 백 장 넓이의 호수가 만들어져 있다.
 실로 거대하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는 거대한 탑이었다.
 하지만 호수에 채워진 물이 다름 아닌 독수라면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 것인가?
 누가, 언제, 왜 이 영웅탑을 만들었는지 무림에 알려진 것은 전혀 없었다. 단지 알려진 것은 이 거대한 영웅탑이 소리소문도 없이 만들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천 명의 무림인들에게 발송인이 서명되지 않은 초청장이 발부되었다.
 (영웅탑을 밟을 수 있는 자(者), 그 인물이 바로 무림의 영웅이요.)
 초청장을 받아 든 무림인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영웅탑이라니···?”
 초청장을 받은 무림인들에게 있어서 영웅탑이라는 탑명(塔銘)은 금시초문(今時初聞)이었기에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은 무림의 생리(生理)였다. 그렇기에 초청장을 받은 무림인들 외에도 중원의 칼을 찬 무사라면 은연중에 영웅탑을 찾게 되었고, 그들은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 거대한 탑은 바로 대륙의 고도(古都)인 낙양(洛陽)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무림인들은 급기야 모두 영웅탑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영웅탑에는 그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장엄함과 위대함이 서려 있었다. 무림인들이 영웅탑을 보는 순간, 그들은 초청장에 적힌 글이 조금도 허언(虛言)이 아님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영웅탑에 몰려든 무림인들의 마음속에는 한결같은 의문이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도대체 누가, 왜, 무슨 목적으로 저런 거대한 탑을 만들었단 말인가?
 이 거대한 탑을 만들었는데도 어찌 중원무림에 조금치도 소문이 나지 않았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신비로 남아 버렸다.
 갑작스런 영웅탑의 출현은 경악할 만한 신비의 사건이었다.
 영웅탑에는 삼백육십오 개의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계단 하나하나에는 무려 열 가지의 기관장치가 만들어져 있었다.
 기관장치는 너무나 독랄하게 만들어져 있어 그 어떤 절정고수라고 해도 피할 수가 없었다.
 기관장치를 피하려면 단숨에 독담(毒潭)을 날아 첫번째 계단에 내려서야 했다. 한치라도 어긋나게 내려서면 그 순간 열 가지 기관장치가 동시에 발동되어 그 사람은 순식간에 목숨을 빼앗기게 되어 있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백칠십 장 높이의 계단에 설치된 발자국에 단숨에 신형을 날려서 내려서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삼십 장의 높이는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영웅탑의 무서운 점은 바로 이 삼십 장에 모두 몰려 있었다.
 여기에는 일곱 개의 관문(關門)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관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단숨에 백 장 넓이의 독수를 날아 맨 첫 계단에 새겨진 발자국에 내려서야 한다. 하지만 이 단순한 첫번째 관문에서 천 명의 무림인 들 중 반 이상이 되돌아섰다.
 그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영웅의 명예와 위명(威名)도 탐나지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은 더욱 더 탐이 나는 법이었다.
 그렇게 가려진 무림인들은 탑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백 장을 날지 못한 수백 명의 무림인들이 그대로 독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즉시 그들의 몸은 독수(毒水)에 녹아들어 독수의 수위(水位)만 높여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수많은 무림인들이 돌아섰다. 그리고 몇번의 실패 끝에 일단계가 끝난 무림인들이 드러났다.
 영웅탑의 일단계를 거친 사람은 겨우 이십칠 명뿐이었다. 이들만이 모두 이차 관문까지 통과한 무림인들이었다.
 다시 그들중 열여덟 명이 나머지 삼십 장의 영웅탑을 올라가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그렇게 죽은 열여덟 명은 한결같이 공포에 질려 죽어 갔다.
 그 삼차 관문에 어떤 기관이 장치되어 있기에 그들은 공포에 질려 죽어 버렸단 말인가? 그들의 공포는 알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영웅탑의 정상을 밟은 아홉 명, 그들은 정상을 밟긴 했으나, 그들 역시 얼굴이 백납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단지 그들이 영웅탑을 정복했다는 사실만이 무림에 알려졌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일약 영원(永遠)히 꺼지지 않을 엄청난 대명(大名)을 떨치게 되었다.
 고금제일기인(古今第一奇人) 천유자(天儒子), 신수천군(神手天君) 구중성(丘重星), 창룡서생(蒼龍書生) 경좌근(耿左根), 중원일괴협(中原一怪俠) 천응객(天應客), 마심절도(魔心絶刀) 사군명(史君明), 마염신무(魔炎神霧) 감백홍(甘百洪), 태양광마(太陽狂魔) 방대석(方大石), 승천마검(昇天魔劍) 당인룡(當仁龍), 적룡신협(赤龍神俠) 막여사(莫如史)
 이들 구 인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무림의 영웅이 되었다.
 그들이 받은 무림의 존경과 경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들이 왜 무림영웅이 되었는가? 그 이유도 모른 채 무림인들은 이들 아홉 정사양도(正邪兩道) 고수들을 영웅으로 여겼다.
 그후, 자신의 명예와 인생영달을 향해 후지기수들이 영웅탑에 도전을 하였다. 그러나 늘어나는 것은 아까운 젊은 백골들 뿐이었다.
 그 후, 사십 년이 흘렀다.
 마침내, 후기지수(後起之手) 중 두 명의 젊은 고수가 영웅탑을 밟는 영광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인의대유협(仁義大儒俠) 주석빈(朱錫 )
 마혼살유협(魔魂殺儒俠) 엄유랑(嚴柳郞)
 두 청년고수는 일시에 한 몸에 찬탄(讚嘆)과 영광(榮光)을 안았다.
 중원 미녀들은 감미로운 시선을 그들에게 보냈다.
 영웅탑이 만들어진 이래, 무림에서는 영웅탑을 밟은 인물만이 진정한 고수(高手)요,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 이유도 모른 채로······.
 이 점은 틀림없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시류(時流)였다.
 무림에서 무공이 강한 자만이 명예와 돈, 그리고 미녀들을 한 손에 거머쥘 수 있음을······.
 무림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다.
 초청장을 받은 천 명 중에 나타나지 않았던 세 명의 고수들이 있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누구에게 초청장이 발송되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영웅탑을 밟은 아홉 명의 초절정 고수들과 그 이후 사십 년만에 영웅탑을 밟은 주석빈과 엄유랑, 그리고 후에 나타나 중원천하를 구할 한 위대한 인물과의 얽혀진 이야기들······.
 수없는 영혼을 삼킨 영웅탑은 오늘도 고고한 위용(威容)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영웅탑의 신비가 그 어떠한 하나의 거대한 음모라면······.
 인생여정 구만 리는 흐르는 뜬구름이요, 중원대륙 십팔만 리(里)에는 떠도는 영웅의 한(限)이라.
 인생의 정한(情恨)은 하늘의 뜻이오리만, 중원에 담긴 무림의 뜻은 누구의 뜻이오리까?
 오―! 영웅!
 광활한 중원을 두 발로 딛고 선 영웅이여, 그 광활한 대륙은 영원히 식지 않는 어머님의 품 속이리라!
 
 
 제1장 밤! 그리고······
 
 
 (1)
 
 
 흐르는 별(星)이 자신을 불태우며 밤하늘을 밝혔다.
 무수한 별 중에서 이보다 더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을 자랑할 수 있는 별은 없을 것이다.
 유성(流星)이 꼬리를 끌 때는 제아무리 광채를 자랑하는 성좌도 일순 무색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 흐르는 별을 바라보는 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씁쓸히 웃으며, 바윗돌 위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누군인지는 몰라도 그의 눈빛만은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팔 년! 지난 팔 년의 덧없는 흐름을 무엇으로 보상받아야 하나?”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잔잔히 부서졌던 광채가 사라지고 그는 바윗돌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있는 곳은 어느 건물의 후원(後園)이었다.
 후원은 은은한 홍사등롱(紅紗燈籠)으로 감싸여져 있었다.
 밤이었지만, 후원에서 풍기는 은은한 정취는 말없이 고아한 것이었다.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이 망아루(忘我樓)에 온 지도 이 년이 되었구나.”
 그의 눈길이 어느 삼층 누각을 향했다. 그리고 눈 속에 씁쓸한 고소가 어리었다.
 망아루는 중원강호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유명한 기루(妓樓)였다. 또한 망아루는 강남의 유명한 색향(色鄕)인 진회하(溱淮河)의 대표적인 기루이기도 했다.
 망아루의 건물 규모만 하더라도 수천 평, 일개 성을 방불케 하는 규모였다. 거기에 대소 누각만도 천여 개에 달하고 있어, 강남의 최고 기루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한 그 화려함은 당대의 황성인 자금성(紫金城)에 견주어도 조금도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거기에 기녀의 수효만 해도 수천 명이었다.
 밤만 되면 수만 개의 화려한 홍등 속에서 불야성같이 찬란한 자태를 드러내는 망아루는 가히 요화의 꽃이요, 풍류의 천국이었다.
 그가 바라보는 누각의 화려함은 망아루에서 따라올 누각이 없었다.
 누각은 망아루의 주인인 섭유린(葉楡 )의 거처였다.
 사람들은 섭유린이 무슨 재주로 이처럼 엄청난 망아루를 세울 수 있었는지 몰랐다.
 그녀의 신분내력(身分來歷)도 몰랐다. 다만, 삼십대 후반의 미모의 여인이 이만한 부를 쌓았다는데 경탄하고 놀랄 뿐이었다.
 그녀도 물론 기녀였다. 하지만 그녀가 받을 손님의 자격(資格)은 한정되어 있었다.
 당금 대원(大元)의 재상급 대인이거나 무림에서 구파일방(九派一幇)의 장문인(掌門人)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명성을 지닌 최절정의 무림인들 뿐이었다.
 당금 무림에서 그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그녀가 거처하는 누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가득했다.
 “섭유린, 그대는 사랑을 품을 만한 남자를 잘못 골랐소.”
 그는 더욱 짙은 음울한 미소를 지으면서 누각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섭유린은 경대(鏡臺)에 전신을 비추고 있었다.
 백옥보다 더 매끄러운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분홍 나삼(羅衫)을 입고 있는 그녀의 자태는 너무 아름다웠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그녀의 한 몸에 담겨 있는 듯 했다.
 사슴의 목처럼 기다랗고 고아한 목의 선과 평생 탄력을 잃지 않을 것 같은 풍만한 가슴은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세류요보다 더 가늘은 허리와 그 아래로 능선을 타고 부푼 살결은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약간은 여윈 듯 하면서도 몸 전체에 탄력을 지닌 그녀의 몸매를 더욱 선정적으로 보이게 하였다.
 지닌 아름다움 이전에 십대의 청초함과 이십대의 발랄함, 그리고 삼십대의 화려하고 요염함, 우아하고 완숙함이 그녀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지닌 그녀에게도 근심은 있었다.
 그녀의 아미에는 더할 수 없이 깊은 심연이 간직되어 있었다.
 “정랑(情郞), 당신의 무정(無情)함은 언제 지워질런지요?”
 그녀는 긴 탄식을 터트리면 조용히 뇌까렸다.
 그녀는 누군가를 열렬히 갈망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당대 제일의 미모와 부를 지닌 그녀의 사랑을 받는 행복한 사나이는 누구일까? 그녀의 탄식으로 보아 그 행복한 사나이가 자신의 복을 스스로 박차고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아―! 이 섭유린은 닫힌 정랑 마음의 벽을 열고 그 속에 갇히고 싶답니다.”
 쓸쓸한 그녀의 독백은 화려한 그녀의 방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정랑은 왜 아직 안 오시는 것일까?”
 똑똑―!
 그녀의 눈길이 방문을 응시하는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그녀의 얼굴에 화사한 꽃이 피었다. 그녀는 휘장을 젖히고 금으로 장식된 침상에 가서 살포시 엉덩이를 붙였다.
 방 안에 깔린 은은한 홍등이 방 안의 분위기를 더욱 더 선정적(煽情的)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녀는 청아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들어오세요.”
 봉황(鳳凰)이 장식된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섰다.
 그는 우람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꿈틀거리고 굵고 검은 눈썹, 곧게 뻗은 코와 굳게 닫힌 두툼한 입술, 사각형의 얼굴에 담긴 그런 남자의 모습은 그가 남자다운 사나이의 용모를 지녔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특히 깊은 어둠이 스며 있는 두 눈에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음울한 암영(暗影)이 담겨 있었다.
 그 눈을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눈이었다.
 나이는 대략 삼십여 세가 되었을까? 하지만 그는 섭유린의 화려한 방분위기와는 너무 딴판인 점원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는 방 안 한가운데 우뚝 섰다.
 눈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에 드리워진 고뇌는 결코 굳게 닫힌 입을 열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휘장 안에 앉아 있는 섭유린은 나직이 탄식을 했다.
 “아아―! 제게 올 때 만큼은 그 옷과 마대를 벗고 오라고 일렀거늘······.”
 그런 섭유린의 탄성에도 그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주인마님, 저는 이 망아루 점소이입니다. 입고 있어야 할 옷을 입고 있을 뿐입니다.”
 담담하면서도 굳강한 기개가 담긴 음성이었다.
 일개 기루의 점원이 이러한 기도(氣道)를 풍긴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섭유린은 그의 이런 소리에 그저 탄식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아아―! 정랑! 당신은 끝까지 제 앞에서도 점원(店員)임을 고집(固執)하시는군요.”
 그녀는 점원 차림의 남자를 정랑이라고 불렀다.
 실로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대 망아루의 주인인 섭유린이 자신의 기루에서 잡일을 하는 점원을 사랑하다니······.
 점원은 누구인가? 바로 그는 후원에서 흐르는 별을 보고 있었던 바로 그 인물이었다.
 그는 독백하듯이 중얼거렸었다.
 “섭유린, 그대는 사랑을 잘못 선택했소." 라고······.
 사르르―!
 옷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섭유린의 화사한 자태가 나타났다.
 그녀는 그가 휘장쪽으로 전혀 눈길을 주지 앉자 그 앞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맑고 투명한 그녀의 눈에 엷은 이슬이 배어나 있었다.
 “지난 이 년 동안 당신에게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맹석빈(孟錫 )이라는 가명(假名)뿐이에요, 그러나······.”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이슬이 빗물이 되어 그녀의 볼을 타고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자칭 맹석빈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망아루의 주인마님께서 점원을 두고 눈물을 보이신 것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비웃음만 살 뿐입니다.”
 그녀는 그 말에 자조(自嘲)를 터트렸다.
 “비웃음―! 당신을 사랑함에 있어서 돌아올 비웃음 따위는 두렵지 않아요, 비웃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당신이 영원히 무정한 것 뿐이에요.”
 맹석빈의 얼굴은 더욱 짙은 음영(陰影)으로 덮여 버렸다.
 “주인마님! 저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섭유린은 숙이고 있던 얼굴을 급하게 쳐들었다.
 칠흑같은 검은 머리가 물결쳤다. 향긋한 머리 내음이 맹석빈의 코를 자극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완전히 젖어 있었다.
 미인의 눈물, 특히 섭유린의 눈물은 천하의 어떤 철담(鐵膽)의 남자라도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처연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맹석빈의 얼굴은 더욱 더 어두워질 뿐이었다.
 섭유린, 그녀는 슬프게 외쳤다.
 “당신은 꼭 저를 주인마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저는 그렇게 불러야 할 사람입니다.”
 그녀는 그의 말에 몸을 가늘게 떨며 눈을 감아야 했다.
 아마 섭유린을 사랑에 울게 만든 남자는 맹석빈 뿐일 것이다. 그녀의 꼭 감은 눈 속으로 지난 날이 흐르는 영상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맹석빈이 거부할 사이도 없이 그의 손을 잡으며, 잠시 망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녀의 손, 투명하여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기까지 한 이 손, 그런 손을 보는 사람은 꿈에도 이 손이 서리가 덮인 땅에서 고구마를 캐고 눈보라가 치는 날 남에게 구걸하였던 거칠은 손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었다.
 원조(元朝) 말엽, 이때는 격심한 천하의 혼란으로 인해 모든 백성들이 기진맥진(氣盡脈盡)해 있었다.
 가는 곳마다 굶어 죽은 뼈만 남은 사람들의 시체를 가을의 단풍을 보는 듯,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때 여섯 살이었다.
 이런 와중에 집도 없고, 부모도 없으며, 아무 것도 모르는 여섯 살 난 계집아이가 뜻밖에도 계속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출생(出生)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오직 여섯 살의 나이로 깨달은 것은 살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 나가기 위하여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만 했다.
 아니, 인간이라면 전혀 할 수 없는 일도 했다. 그녀는 남의 것을 훔치기도 하고 강탈하기도 했으며, 남을 속이기도 했다.
 열네 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어느 무지막지한 백정에게 돼지고기 두 근에 처녀를 바쳤다.
 그후, 그녀는 때로 남의 개가 되어 만두 한 조각을 주는 사람을 위해 시키는 대로 핥아야 되었고, 짖어야만 했다.
 열일곱 살이 되었다.
 먹고, 악착같이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다 했던 그녀는 일시간에 모든 개같은 행동을 그만 두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진대인(陳大人)을 만나게 된 것이다. 진대인은 하북(河北) 일대에서 제일 갑부(甲富)였다.
 진대인은 굶주림에 지쳐서 쓰러져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구해주었다.
 구해주기만한 것이 아니라 아예 집에까지 데려다 놓았다.
 그동안 지친 생활에서 묻은 때를 완전히 벗고 난 섭유린, 그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진대인은 좋은 향수와 기름진 음식으로 가꾸어진 그녀를 보고 한순간에 넋을 잃고 말아야 했다.
 흙 속의 진주(眞珠)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그녀는 엄청난 미모를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진대인은 자신의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도 않은 상태에서 모든 것을 섭유린에게 갖다 주기 시작했다.
 여자에 빠진 남자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莫論)하고 무엇이든 아낄 줄을 모른다.
 진대인은 무엇이든지 좋고, 귀하고 화려한 것을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는 영리했다. 뼈가 깎이는 삶의 고통속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아무리 친자식이라 해도 황금보다는 못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진대인이 주는 모든 것을 차곡차곡 정리를 했다.
 그녀는 결코 손을 내밀지 않았으나, 진대인 스스로 무엇이든지 모두 내놓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재물을 챙기면서도 진심으로 진대인을 위하고 사랑했다.
 가장 어려울 때 약간의 도움이라도 준 사람은 평생 잊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다.
 진대인은 약간의 도움이 아니라 그녀에게는 엄청난 행운의 남자였다. 그녀는 진대인을 끔찍히 위했지만, 그는 제 스스로 자신을 위하지 못했다.
 가끔 들어서 아는 것이지만 복상사(腹上死)는 실로 처참하면서도 가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진대인은 허구헌날 그녀의 탐스러운 배 위에서 신선 놀음을 보내다 결국은 배 위에서 죽고 말았다.
 그후, 그녀는 자신을 잊었다.
 오직 황금이 그녀의 목표일 뿐이었다.
 그녀는 진대인이 준 엄청난 재화를 밑바탕으로 하여 지금의 망아루의 주인이 된 것이었다.
 망아루의 재산, 이것을 모조리 처분하고 그녀가 갖고 있는 재화마저 처분한다면 능히 중원 십삼개 성의 절반을 살만한 상상불허(想像不許)의 재산인 것이었다.
 붉은 등롱에 비추인 그녀, 섭유린의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하강한 선녀의 모습같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처절한 요기(妖氣)를 내뿜는 악녀같기도 했다.
 문득 그녀의 손이 부드럽고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재화를 긁어 모은 손, 처참했던 과거를 지녔던 손, 허나 지금은 이 손짓 한 번에 중원무림의 영웅들이 울고 웃는다.
 맹석빈은 느끼고 있었다.
 지금 그는 별안간 그녀의 손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완전히 다른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끈끈한 욕정을 느낄 수 있었다.
 섭유린은 망각에 빠진 자신을 일깨우면서 입을 열었다.
 “정랑! 당신은 여자와 자본 일이 있나요?”
 맹석빈은 그녀의 질문에 흠칫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눈길을 다시 돌려서 그녀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다시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섭유린의 눈동자를 바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맑고도 빛났다. 그러나 맹석빈은 그녀의 얼굴이 안개에 덮여 있는 아득한 느낌도 들었다.
 그녀를 만난 이래 처음 보는 것 같은 새삼스러운 미녀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도 맹석빈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지극히 부드러우면서 요염한 미소를 띠우며 있었고, 그녀의 입술은 계속해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정랑은 아직도 여자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지 몰라요.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면 불가사의한 힘을 불러 일으키게 해준다는 사실을······.”
 맹석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서린 어두운 그늘은 점점 짙어만 갈 뿐이었다.
 갑자기 그는 입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서글서글한 눈은 여전히 그녀의 젖은 눈동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안개에 젖은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정랑을 나에게 묶어 둘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천천히 그의 손을 놓으며 극히 세련되고 우아한 자세로 옷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녀는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그녀의 허리는 한 움큼이 될 정도로 가늘었다. 그 위의 젖무덤은 마치 작은 동산을 엎어 놓은 듯이 크고 아름다웠다. 연분홍 유두는 아직 출산을 하지 않은 처녀의 그것처럼 신비롭게 보였다.
 다리는 길고도 탄력이 있었다. 그녀의 젖은 피부는 매끄러운 대리석처럼 윤기가 흘러 절대로 청춘이 지난 여인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염기를 흘리는 그녀의 자태는 청순한 것보다 이런 밤분위기에 더욱 더 잘 어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몸매를 손으로 쓸어갔다. 가슴이 도발적으로 맹석빈의 눈 앞에서 출렁였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희미하게 풀려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스스로 도취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랑, 저는 꽃다운 청춘은 다 지나갔지만, 여전히 남자가 저항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에요.”
 이 순간, 그녀는 과거를 잊고 장래를 잊고, 또한 현재까지도 망각했다.
 그녀는 천천히 한쪽 다리를 침상 위로 들어올리며 몸을 수그린 자세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 아―! 정랑, 당신이 만약 여자를 진정으로 알게 된다면 곧 여자에 대해서 정감을 갖게 될 것이에요. 이제 제가 당신에게 여자가 어떠한 것인지 가르쳐 주겠어요.”
 섭유린의 묘한 자세, 그것은 여인의 가장 신비스러운 곳이 가장 감칠나게 드러나 보였다.
 그녀의 가슴은 커다란 조롱박이 열리듯이 묘하게 매달려 있어 사람을 유혹했다. 특히 그녀의 숲이 우거진 다리 사이로 깊이를 알 수 없는 계곡이 깊게 파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계곡은 마치 붉은 노을의 하늘처럼 붉은색, 일색이었다.
 그런 모습은 남자라면 누구라도 흥분을 하고 덤벼들 자세였지만, 맹석빈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비록 맹석빈이 섭유린의 옥체를 외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나신에 음욕이 치솟는 것도 아니었다.
 ‘섭유린, 나··· 를··· 용서하시오.’
 그녀의 숨결은 봄바람에 훈훈한 꽃향기를 날려주듯 맹석빈의 심신을 도취(陶醉)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방향을 힘껏 들이마시면서 돌아섰다.
 섭유린은 맹석빈이 돌아서자 일시간에 안색이 참담해졌다.
 맹석빈은 매정하다고 느껴질 만큼 옷자락을 펄럭이며 문가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순간, 섭유린이 발악하듯 외쳤다.
 “정랑! 저는 슬프게도 지난 삼십육 년 동안 저 자신에게도 잊혀진 여인이 되고 말았어요. 저는 제 자신을 되찾고 싶어요. 제 자신을 되찾는 방법이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아기를 낳는 일이에요. 저는 없다고 생각했던 사랑을 맹석빈이란 남자에게서 찾았던 것이에요. 오오―! 정랑······.”
 그녀는 번개같이 달려와 맹석빈의 목에 매달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나신을 그의 몸에 밀착시켰다.
 하지만 맹석빈의 입에서는 탄식만이 흘러나왔다.
 “아―!”
 섭유린은 목에 감은 팔에 힘을 주면서 뜨겁게 말했다.
 “저는 태어난 후 처음으로 진지하고 열심히 당신에게 사랑을 보내는 것이에요. 제발··· 제발··· 정랑! 저를 사랑해 주세요.”
 그녀의 뜨거운 사랑이 눈물이 되어 그녀의 볼을 적셨다.
 그러나 맹석빈, 그는 가만히 섭유린을 밀어냈다. 그리고는 뚜벅뚜벅 문가로 걸어갔다.
 섭유린은 넋을 잃고 손잡이를 잡는 맹석빈을 바라보았다.
 섭유린은 쓸쓸히 너무나 쓸쓸히 탄식했다.
 “당신은 끝··· 내··· 저에게 고뇌와 거부를 던져······ 줄··· 뿐··· 이군요.”
 이 일은 지난 이 년 동안 벌어졌던 일이다. 그런데 지난 이 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말이 맹석빈의 입에서 나왔다.
 “섭유린! 당신은 천하에서 제일 다정다감(多情多感)한 여인이오. 그러나 나를 사랑하면 그대에게 돌아올 것은 방랑, 그리고 피뿐이요. 나는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죄인(罪人)이라오.”
 덜컹―!
 육중한 황금 문이 닫혔다. 그 문은 맹석빈의 마음만큼이나 굳세고 담담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닫은 마음처럼 어둡게 문을 닫았다. 다만 섭유린의 넋잃은 탄식만이 화려한 방 안을 맴돌 뿐이었다.
 “죄인··· 당신이 죄··· 인이라구요”
 
 
 (2)
 
 
 무릇 사랑은 고통의 시발점이요, 고통 중에서도 가장 허망한 것이었다.
 회의와 냉담, 사랑에 대한 회의, 부딪혀도 부딪혀도 아무 것도 돌아오는 것이 없는 냉담이야말로 단장지고(斷腸之苦)의 슬픔인 것이다.
 그러나 맹석빈의 냉담, 그것은 냉담한 것이 아니었다.
 섭유린은 분명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거부하는 것은 결코 자신이 여러 사내와 교접을 한 더러운 여인이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는 자신의 밝힐 수 없는 내력(內歷) 때문에 그녀를 거부했다.
 그녀는 여전히 벗은 몸이었다.
 “죄인······ 당신이 죄인이라고······.”
 그녀는 다시 한 번 중얼거리며 서서히 몸을 창가로 돌렸다.
 “당신은 왜 아직도 거기에 계시나요?”
 그녀의 눈길이 닿은 곳, 그곳에는 언제부터 와 있었는지 한 인물이 유령같이 나타나 있었다.
 백의에 장검을 팔꿈치에 끼고 웅크리듯 창틀에 한 인영이 앉아 있었다.
 그는 나직이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나직했으나 웃음 속에는 진한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섭유린, 섭유린아―!”
 그의 음성은 물기가 없었다. 그리고 서천으로 떨어지는 겨울 들녘의 낙일(落日)보다 더욱 더 황량했다.
 어느 틈엔가 고뇌와 회의로 뒤덮였던 섭유린의 얼굴에 담담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백의객(白衣客)을 힐끔 보고는 서서히 허리를 굽혔다.
 그녀가 막 벗었던 옷을 집어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옷을 입지 마라.”
 냉랭한 호통이 백의객의 입에서 떨어졌다. 그것은 거의 폭갈에 가까운 호통이었다.
 “너는 그대로 벗은 채로 있어라.”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그녀는 다시 옷을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휘리리릭―!
 그녀의 손에 들린 옷자락이 허공으로 빨려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옷은 일시간에 걸레조각처럼 산산조각(散散彫刻)으로 찢겨 나갔다.
 그것은 백의객이 자신의 질투심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휘이익―!
 백의객의 몸이 그녀 앞에 내려섰다.
 붉은 등롱에 비추인 백의객의 얼굴, 그것은 지독스레 창백한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날카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오관(五觀) 자체가 모두 살기로 어우러져 있었다.
 심지어, 그의 팔만사천모공(八萬四千毛孔) 모두에서 냉혹한 살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무심한 표정을 지었으나, 전신에선 소리없이 화염같은 살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섭유린은 여전히 그를 무시했다.
 그것은 백의객의 존재를 완전히 망각한 표정이었다.
 백의객은 전혀 주저하지 않고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그는 미친 듯이 애무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벗은 몸을 빨고, 핥고 더듬고 주물렀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계속 되었고, 섭유린은 묵묵히 그의 애무를 받아들였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는 깊은 고뇌가 담겨 있었다.
 “아··· 아··· 여자의 육체란 이런 것일까?”
 벌써, 십수 년간 자신의 몸을 탐해온 사나이가 바로 백의객이었다.
 너무도 능수능란(能手能爛)한 그의 입술과 손끝으로 그녀의 요소요소를 자극시키고 있었다.
 “아― 아―!”
 마침내 그녀는 몸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서서히 무너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자, 침상으로······.”
 백의객은 그녀의 어깨, 유두, 매끄러운 배, 탐스러운 둔부를 핥던 입술을 떼면서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쿵―!
 침상으로 내던져진 섭유린, 그녀는 스스로 백의객을 거부 못하는 자신의 육체에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그를 끌어 안았다.
 “으―”
 그녀는 격함한 숨을 토해 내었다.
 “아― 아― 음!”
 오늘 따라 더욱 거칠게 느껴지는 백의객의 행위였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묘한 쾌락과 희열을 그녀에게 가져다 주었다.
 “아··· 아―!”
 무척 오랜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벗은 두 마리의 말(馬)이 되었다. 그래서 끝없이 펼쳐진 침상이라는 평원을 마음껏 달리고 달렸다.
 여인의 교성과 사내의 등 뒤에 번질거리는 땀방울들!
 그는 내부에 끓어 오르는 질투심 때문에 더욱 격하게 몸을 흔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 아―!”
 섭유린의 짙은 교성(嬌聲), 이것은 극심한 육체의 희열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백의객은 행위(行爲) 속에서도 변하는 섭유린의 안색(顔色)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
 “너··· 너는 내 것이다. 하찮은 점소이 놈에게 너를 뺏길 수는 없다.”
 “하··· 하지만 나··· 나는 그를··· 사랑해요, 너무나 사··· 랑!”
 백의객의 싸늘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아 버렸다.
 그녀는 느꼈다.
 ‘이 사··· 내··· 는 여인을 애무하는 혀에도 살기가 돋아 있어.’
 놀랍게도 백의객은 여인과 사랑을 나누면서도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섭유린은 엄청난 희열과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용··· 용세하세요, 어쩔 수가 없어요. 당신이 나를 거부한 뒤에 오는 허탈감, 저는 그 허탈감을 메우기 위하여 이렇게 창부(娼婦)처럼 육체의 희열로 허탈감을 메우고 있습니다. 어차피··· 나는 창부였던 걸요.’
 그녀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은 완전히 이율배반(二律背反)적인 한(限)많은 여심(女心)의 표출(表出)이었다.
 또한, 그녀의 내심 깊은 곳에서는 주체하기 힘든 희열이 폭죽(爆竹) 터지듯 터지고 있었다.
 “허억―!”
 백의객도 다급한 헛소리를 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순간, 그는 마음 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우리는 처음에 서로 필요해서 만났지만 이제는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이 천한 계집아. 나는 너를 사랑한단 말이야! 사랑을······.’
 그는 사랑한다고 외치면서도 자신의 모든 정열을 그녀의 몸 안에 쏟아 넣었다.
 “아··· 으··· 음···.”
 여인의 손톱이 그의 등을 파 들어가고 있었다.
 필요에 의해서 만난 사이, 섭유린은 그의 존재로 자신의 사업(事業)을 방해하는 인물들을 제거시켰다.
 백의객은 그 대가로 그녀의 완전무결한 육체를 삼켰다.
 필요에 의해 만난 사이였기에, 이 사이는 언제고 필요가 없어지면 갈라질 수 있는 것이었다.
 섭유린은 처음 가진 사랑으로 이제는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녀의 옆에 누워 있는 백의객이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죽인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죽인다는 그 한마디가 그녀의 손끝 모세혈관(毛細血管)까지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안돼요!”
 그녀는 부르짖었다.
 “후후후―! 이 백의마령객(白衣魔靈客)의 사랑을 뺏으려는 놈은 살려둘 수 없지! 나는 이 년간 너무 오래 참아 왔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지.”
 그녀는 포기했다.
 이 사내가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외호(外呼)를 직접 말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 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백의마령객, 그의 외호는 바로 그의 생명이었다.
 자신의 외호로 맹세한다는 것은 자신의 목숨을 내거는 것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나신은 불쌍하리만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백마디 말보다 그런 단순한 동작이 훨씬 그녀의 절망감을 깊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이 년간 자신이 요구했던 목숨을 그가 가져오지 못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정도제일고수(正道第一高手)라 숭앙받던 숭양철검(嵩陽鐵劍) 곽무송(郭武松)도 그의 장검 아래 목없는 귀신이 되었던 처지였다.
 당금, 무림에 어느 누가 그의 일검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답은 없었다. 아무도 없다고 단언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빛이 나도록 아름다운 그의 섬전쾌검(閃電快劍), 그것은 강호 무림인들에게 공포와 악(惡)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일개 주루의 점원이 어찌 그의 검을 피할 수 있을 것인가?
 공포의 마검객인 백의마령객은 지금 웃고 있었다.
 그의 눈은 섭유린의 질린 안색을 탐시(耽視)라도 하듯이 그녀의 공포를 즐기고 있었다.
 섭유린은 혼(魂)을 뺏긴 듯 넋을 잃고 읊조렸다.
 “당··· 신은 그를 죽일··· 수 없을··· 걸요.”
 이것은 거의 발악적인 그녀의 영감(靈感)이었다. 그런데 그후 그녀의 영감은 거의 기적적으로 들어맞고 있었다.
 
 
 (3)
 
 
 맹석빈은 서서히 발길을 천상원(天上院)으로 옮기고 있었다.
 천상원은 그가 일하는 곳이었다.
 이곳은 망우루에서도 가장 뛰어난 미인들만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천상원의 문을 들어서면 휘황찬란한 자석(紫石)이 깔린 소로(小路)가 나타난다. 그리고 기화이초가 어우러져 보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한 기경(奇景)을 자아냈다.
 그 소로를 삼백 장쯤 걸어 올라가면 호화를 넘어선, 화려함의 극치인 이층 누각이 나타난다.
 누각은 누각이되, 넓이는 궁궐 이상이었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값진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계단을 오르면 아래층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화려함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수십여 개의 벽옥(碧玉) 탁자와 그 사이사이에 벽수가 일렁이는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고, 누각의 벽과 천정에는 귀한 자수정(紫水晶)이 수십 개가 박혀 있었다. 그 배치가 기묘하여 자수정의 빛은 허공에서 서로 얽힌 채 묘한 자광(紫光)을 빚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촘촘히 달려 있는 청사(靑絲), 홍사등롱(紅絲燈籠)과 어우러져 마음마저 화려하게 물들였다.
 그는 천천히 누각 대청으로 들어섰다.
 “으하하하―!”
 “호호호!”
 술에 취한 대소, 여체에 홀린 게걸스런 웃음들이 여기저기에서 피어올라 귀를 어지럽혔다.
 기녀들은 속으로는 부지런히 은자를 계산하며 웃음을 흘렸다.
 곱고 화려하게 웃을수록 사내의 주머니에서 은자는 점점 쏟아져 나올테니깐 말이다.
 넓이가 운동장만한 대청에는 수백 명의 남녀가 어우러져 있었다.
 넘치는 술잔, 비릿한 살내음과 코를 자극하는 육욕칠정(六欲七情)의 순간들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향락(享樂)과 사치(奢侈), 넘치는 정력 속에 들끓는 쾌락(快樂)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만약 인의(仁義)를 논하는 군자라면 눈살을 찌푸릴 추한 것들이었다.
 맹석빈은 잠시 회계대(會計臺)로 눈을 주고는 주방쪽으로 걸어갔다.
 이때 그의 뒤를 쫓는 두 개의 눈이 있었다.
 하나의 눈은 회계대에 앉아 있는 뚱뚱한 중년인의 것이었다. 그는 바로 천상원의 회계를 총괄하는 원방(院房)이었다. 성씨는 구(丘)였다.
 이 자의 권력은 대단하여 점원들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었다.
 맹석빈의 뒤를 쫓는 구원방의 눈길은 매우 악독한 것이었다.
 ‘개같은 놈!’
 그는 맹석빈을 극도로 미워하는 인물 중의 하나였다. 맹석빈에게서 흐르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威嚴), 이것이 항상 구원방에게는 눈엣가시같은 것이었다.
 그를 마음대로 부리고, 욕하며, 때릴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그의 소원(所願)이었다.
 일개 점소이에게 위엄으로 눌린 구원방이 맹석빈을 극도로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소치인지도 모르겠다.
 다른 눈길은 바로 어느 여인의 눈길이었다.
 천상원주(天上院主) 설비운(雪飛雲)이 바로 그녀였다. 천상원의 기녀들을 총괄하는 직책에 있는 기녀였다.
 나이는 대략 이십오륙 세 정도였지만, 원숙한 미인이었다.
 얼핏 보아서는 그녀를 예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더더욱 아무도 없었다.
 여인의 눈길은 깊고도 서늘했다. 그녀는 기녀(妓女)이면서도 신선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평범(平凡) 속의 아름다움, 이것은 자세히 보면 볼수록 설비운의 미모는 그야말로 완벽한 미를 풍겨내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정결한 아름다움, 바로 그 자체였다.
 맹석빈의 뒤를 쫓는 그녀의 눈길에는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비록 짝사랑이련만, 그녀의 눈길에는 맹석빈이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는 것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사랑해야 할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보내는 깊은 사랑, 그것뿐이었다.
 그때였다.
 “앗―!”
 여인의 뾰족한 비명이 천상원에 울렸다.
 그것은 바로 설비운이 지른 비명이었다. 그녀는 머리채가 어떤 손에 잡혀 고개가 뒤로 꺾여져 있었다.
 “흐흐흐흐―!”
 음침한 괴소가 여인의 비명 소리에 이어 대청에 음산하게 깔렸다.
 대청 안의 사람들은 일시간에 낯빛이 핼쑥해졌다. 그것은 바로 음산한 괴소 때문이었다.
 괴소는 나직했으나, 듣는 사람의 고막을 파열시킨 만큼 깊은 내력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꽈다당―!
 괴소가 들린 주위의 인물 몇몇이 나뒹굴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안색이 창백해졌고, 귀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이로 보아 괴소의 임자가 지닌 내력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흐흐흐―! 설비운, 네 년은 모신 손님을 옆에 두고 어디다 눈길을 주는 게냐?”
 그 목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를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모든 눈길이 이미 그쪽으로 쏠려 있었다. 순간, 중인들중 누군가 겁에 질려 더듬거렸다.
 “벽··· 혈··· 비사(碧血飛蛇)!”
 설비운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벽혈비사라는 인물의 눈길이 자신의 외호를 말한 인물의 얼굴로 쏠렸다.
 쌔―애―액―! 팍!
 “으아악―!”
 벽혈비사는 젖가락을 날렸고, 그 젖가락은 그 인물의 눈에 정확히 꽂혔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달콤했던 술좌석이 일시간에 혈운으로 가득찼다.
 벽혈비사는 냉혹하게 웃었다.
 “흐흐흐―! 감히 나의 외호(外號)를 읊조리다니······.”
 그리고 그의 눈길이 설비운의 얼굴로 돌려졌다.
 그때에 설비운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대청 안은 타오르는 불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따라서 들끓는 사치의 향락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벽혈비사의 핏기없는 괴소가 다시 흘러 나왔다.
 “흐흐흐흐―! 설비운 나는 네년을 은자 천 냥을 주고 오늘밤 샀다. 그런데 네년은 감히 나를 경시하고 눈길을 다른 놈에게 돌리다니······, 죽고 싶어 환장을 했느냐?”
 그의 목소리 역시 핏기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독사가 말을 한다면 이와 같을 것이었다.
 대청 안의 무림인들은 냉혈비사라는 외호를 듣자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최근 황하 일대에서 벽혈비사보다 더 악독한 자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깡마르면서도 추악(醜惡)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키는 무척이나 단소(短小)했다.
 그러나 거의 얼굴 면적에 삼할을 차지하는 큰 코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코가 어찌나 큰지 두 눈이 마치 귀 옆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눈초리는 지극히 날카로와 마치 반짝이는 독사의 눈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늘 붉은 피풍을 어깨에 두르고 다녔다.
 소문에 의하면 그가 두른 붉은 피풍(皮風)은 사람의 피로 물 들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무림인들은 단지 그의 외호가 벽혈비사라는 것만 알 뿐 아무것도 몰랐다.
 그것은 벽혈비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그와 상대한 인물은 남김없이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설비운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창백한 안색이던 벽혈비사의 얼굴은 투명할 정도였다.
 설비운은 단지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을 일으키게 생긴 벽혈비사, 그가 화를 내고 있으니 개죽음을 당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제2장 영웅과 소인
 
 
 (1)
 
 
 맹석빈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벽혈비사를 주시하고 있었다.
 “음―!”
 담담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벽혈비사는 설비운을 끌고 대청 한가운데로 나왔다.
 “아악! 아아― 악!”
 그녀는 머리채가 통째로 뽑힐 듯한 고통에 비명을 수없이 질렀다. 대청 가운데에 우뚝 선 벽혈비사는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흐흐흐―! 이년! 네년이 감히 나를 희롱한 죄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 주겠다.”
 찌이익―!
 벽혈비사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녀의 상의(上衣)을 잡고는 아래로 잡아 당겼다.
 출렁―!
 설비운의 옷이 찢겨져 나가자 풍만한 젖가슴이 비상(飛上)하듯 밖으로 넘쳐 흘렀다.
 터질 듯한 풍요로움 속에 탄력감이 넘쳐 흐르는 가슴이었다. 실로 그녀의 두 젖무덤은 육봉(肉峰)중의 육봉이었다.
 그리고 젖가슴 위의 가느다란 청색 나선(羅線), 그것은 바로 수궁사(守宮絲)였다.
 그것은 바로 숫처녀를 상징하는 수궁사였다.
 “흐흐흐―! 네년은 역시 소문대로 숫처녀였구나.”
 찌이익―!
 다시 한 겹의 옷이 찢겨 나갔다.
 “아아― 악―!”
 설비운은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두 팔로 젖가슴을 가렸다.
 그러나 이미 드러난 아랫배의 매끈한 살결은 가릴 수 없었다. 하물며 어찌 풍염한 두 젖무덤을 완전히 가릴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수치와 당혹감에 몸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중인들의 얼굴에는 분노의 기색이 역력했다.
 기녀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흐흐흐!”
 뾰족한 핏기 없는 미소가 다시 대청에 넘쳐 흘렀다. 일제히 중인들은 귀를 틀어막았다.
 맹석빈은 더욱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이때 냉혈비사의 악독한 흉광이 맹석빈을 향해 번뜩였다.
 “흐흐흐! 네년의 눈길이 저 놈을 향했었지. 그 눈길에는 사랑이 하나 가득 담겨졌더구나. 흐흐흐― 나는 네 년을 발가벗겨 놓아 저놈이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아야겠구나.”
 찌이익―!
 다시 옷이 한 자락 찢겨 나가고 설비운의 상체는 거의 알몸이 되었다.
 “아― 악! 용서해 주세요. 대······ 협···.”
 “이년! 나는 대마(大魔)이지 대협이 아니다.”
 벽혈비사는 벽력같은 고함을 지르며 손을 치마로 가져갔다. 이제는 인류 역사 수만 년의 근원이 된 여인의 가장 소중하고 신비한 비소(秘所)가 그의 더러운 손에 의하여 드러날 판이었다.
 벽혈비사의 손이 막 그녀의 치마를 잡았다. 그리고 막 찢어지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멈추시오!”
 은은한 호통, 그러나 엄청난 분노가 담긴 소리가 별안간 들려 왔다.
 어느 누구 하나, 두려움에 싸여 나서지 못하는 찰나에 맹석빈이 앞으로 나선 것이었다.
 “안돼요!”
 설비운의 입에서 숨이 넘어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어, 벽혈비사의 살기어린 독소(毒笑)가 그녀의 비명을 삼켰다.
 “흐흐흐―! 드디어 서로 사랑하는 연놈의 애끓는 사랑의 유희가 시작되려는 모양이군!”
 찌이익―!
 그의 우악(愚惡)스런 손길에 의하여 설비운의 치마가 사정(事情)없이 찢겨져 나갔다.
 어찌나 억세게 찢었는지 단 한 번에 그녀의 조그마한 속곳이 드러났다. 탐스럽기만 해야 할 그녀의 허벅지에 새파란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포였다.
 자신이 죽음을 당할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다.
 오직, 마음속의 정인(情人)인 맹석빈이 나서는 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에는 맹석빈이 어떻게 대흉신악살(大凶神惡殺)인 벽혈비사를 당할 수 있냐는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그녀는 입술이 갈라지고 혀가 타는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벽혈비사의 살기띤 눈초리 속에서도 애원의 눈길을 맹석빈에게 보냈다.
 절대로 앞으로 나서지 말라는 무언의 뜻을 함유한 눈길이었다.
 이때, 벽혈비사의 손이 그녀의 한쪽 젖무덤을 거머 쥐었다.
 “제법, 탄력이 좋군! 숫처녀의 젖무덤이라··· 그것은 언제나 손끝에 감미로운 여흥을 남겨 주거든. 흐흐흐―!”
 이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벽혈비사의 손이 그녀의 속곳을 나꿔채려 하였다.
 “멈추지 못할까?”
 맹석빈의 입에서 엄청난 폭갈이 터져 나왔다. 고막이 터져나갈 듯한 엄청난 호통이었다.
 벽혈비사는 섬칫하면서 손을 멈추어야 했다. 그는 잠시 놀란 것 같았으나 여전히 악독할 살기띤 눈이었다.
 “흐흐흐―! 이놈 제법이구나.”
 그는 신경질적(神經質的)으로 설비운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음―!”
 그녀는 알몸이 되어 비참하게 나뒹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렁이는 가슴과 그 위에서 오두마니 떨고 있는 꼭지는 실로 엄청난 유혹이 아닐 수가 없었다.
 비참한 구석에 떨어져도 아름다운 꽃은 여전히 아름다운 꽃으로 남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을 돌볼 사이도 없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돼요, 어서 도망치세요!”
 지금 그녀의 음성에는 오로지 맹석빈을 위한 염려뿐이었다.
 천상원의 기녀라면 어느 누구라도 그녀와 거의 같은 심정이었다. 그것은 맹석빈이라는 인간자체가 진실(眞實)덩어리였기 때문이었다.
 남자에게서 풍기는 흠집 하나 없는 진실은 여인에게 있어서 사랑을 느끼는 시발점인 것이었다.
 그녀들은 이 년 전부터 추악한 것으로 채워진 이 망아루에서 유일하게 진실을 보여준 사나이 맹석빈을 모두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나이가 아무도 나서지 못하는 순간에 나선 것이다. 그것은 감동이기 전에 억제할 수 없는 걱정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벽혈비사는 천천히 맹석빈의 앞으로 다가섰다.
 “흐흐흐―! 제법 용기가 가상한 놈이군!”
 벽혈비사는 그와 다섯 치 간격을 두고 바짝 섰다. 그리고 맹석빈의 눈을 쳐다 보았다.
 그 순간에 벽혈비사는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바짝 다가서서 바라보는 맹석빈, 그는 바로 태산(泰山)이었다.
 일시간에 엄청난 위엄이 키가 작은 벽혈비사를 내리 눌렀다. 그러나 그 위엄은 알아볼 수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설비운은 불행히도 그 위엄을 알아보지 못하고 알몸으로 달려들었다.
 “맹대가! 어서 피하세요.”
 맹대가? 그녀는 다급(多級)한 김에 늘 혼자서 뇌까리던 맹대가란 호칭(呼稱)을 썼다.
 하지만 그것이 벽혈비사의 감정을 더욱 더 거슬리게 만드는 촉발제(觸發製)가 되었다.
 “맹대가? 흥! 일개 점소이 놈에게 천상원주가 맹대가라고······. 저리 비켜라, 이 개같은 년아!”
 벽혈비사의 손이 앞을 가로막으려는 설비운의 가슴을 덮쳤다.
 펑―!
 요란한 폭음이 들리면서 설비운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려 졌다.
 “아아악!”
 그녀는 피를 토하면서 이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피(血)! 피는 두려움의 상징(象徵)이지만 때로는 엄청난 분노(忿怒)를 자아내기도 한다.
 맹석빈의 굳은 얼굴에 싸늘한 살기(殺氣)가 흘렀다. 그러나 그것은 애석하게도 찰나지간에 없어졌기에 그 누구도 볼 수가 없었다.
 “으······ 음······.”
 설비운은 죽지 않았는지 신음을 터뜨리며 일어나려 기를 썼다.
 벗겨진 알몸에 뒤집어 쓴 피의 세례, 그것을 보는 백혈비사의 눈에도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놈!”
 벽혈비사는 음산한 호통을 지르며 맹석빈을 보았다.
 그런데 그는 또 한 번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맹석빈의 전신에서 만 년의 세월이 담긴 정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으······.”
 벽혈비사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터뜨렸다.
 “이··· 이럴 수가?”
 그는 경악을 한 채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엄청난 위압감이 전신을 눌러 버렸다.
 언제나 남에게 공포를 주어왔던 벽혈비사, 그는 어느새 추악한 얼굴에 흐르는 비지땀을 훔쳐내고 있었다.
 맹석빈의 나지막한 호통이 그의 귓전에 울려왔다.
 “돌아가라!”
 그러나 벽혈비사는 결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적어도 무림의 녹을 먹고 살았던 잔마(殘魔)였다.
 비록 두려움을 느낄망정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치 않았다.
 “으··· 이놈··· 이··· 죽어라!”
 그는 십이 성(十二成) 공력이 담긴 장력을 일시간에 발출하였다.
 펑―!
 “우욱!”
 맹석빈이 허공으로 붕 솟아 올랐다.
 “아악! 맹대가―”
 여기저기서 비명과 경악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 기녀들의 음성이었다.
 꽈당!
 맹석빈은 거의 삼 장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 단 한 번의 상황에 벽혈비사는 자신이 느꼈던 공포를 단숨에 떨어버릴 수 있었다.
 “흐흐흐―! 별것도 아닌 놈이······.”
 그의 악독한 눈길이 쓰러져 있는 설비운에게로 돌려졌다.
 “네년도 저 놈과 같이 황천으로 보내주지!”
 그는 걸음을 옮겨 설비운에게로 다가섰다. 그녀는 거의 사색이 되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벽혈비사는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때였다.
 “누가 원주 좀 구해 주세요!”
 “어머나!”
 기녀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역시 아무도 나서지를 못했다.
 벽혈비사는 잠시 기녀들을 훑어보더니 들었던 손을 그대로 내리쳐갔다.
 그의 손이 막 그녀의 몸 한치 정도 남았을 때였다.
 “돌아가······ 라!”
 매우 힘겨운 목소리가 벽혈비사의 등 뒤에서 들렸다. 그 목소리는 비록 작기는 했지만, 위엄이 가득했다.
 “아니······ 저 놈이······.”
 재빨리 돌아선 벽혈비사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깜짝 놀란 이유! 그것은 바로 맹석빈이 피를 흘리며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벽혈비사는 놀라움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십이 성 진력을 맨몸으로 받고도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니······.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맹석빈은 피를 흘리며 벽혈비사에게로 걸어왔다. 이 순간 그는 속으로 애타게 부르짖고 있었다.
 ‘주석빈아. 주석빈아! 이번 한 번만 더 참아라! 지난 팔 년간 무공을 단 한 번도 쓰지 않고, 잘 견디어 오지 않았더냐? 지금 참지 못하고 저 놈을 죽이면 너는 네가 하늘에 두고 한 맹세(盟說)를 스스로 어기는 격이 되지 않느냐?’
 그는 자신을 주석빈이라고 불렀다.
 이때, 벽혈비사는 마치 엄청난 해일이 밀려오는 듯한 중압감을 온 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이놈이······ 죽어라.”
 그는 중압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단숨에 십팔 장을 날렸다.
 천살십팔섬격수(天殺十八閃擊手). 바로 벽혈비사의 성명무공(成名武功)중 하나였다. 이 무공은 단 일초가 될 수도 있고, 십팔초도 될 수 있는 특이한 무공이었다.
 파파파팍!
 정확히 열여덟 번의 장력(掌力)이 벼락치듯 맹석빈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으― 헉!”
 폭포수같은 선혈이 터져나와 벽혈비사의 얼굴을 덮어 버렸다.
 “흐흐흐, 이제는······ 아니 저 놈이!”
 벽혈비사는 득의한 미소를 짓다가 기겁을 했다.
 맹석빈, 그는 쓰러지지 않았던 것이었다. 입으로는 쉴새없이 선혈을 흘리나 눈빛은 더욱 빛났다.
 눈에서 쏟아지는 분노의 화염은 벽혈비사를 태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단지 그렇게 노려볼 뿐이었다.
 이제는 겁이 났다. 어떻게 저런 악종이 태어날 수 있는지 절로 전율이 일어났다. 하지만 벽혈비사는 입을 악물었다.
 번― 쩍!
 한줄기 핏빛 광망이 허공을 갈랐다.
 “으― 으흑!”
 벽혈비사의 손에 연도(軟刀)가 들려져 있었다. 그리고 맹석빈의 가슴은 어느 틈엔가 열십자로 갈라져 있었다.
 “흐흐흐! 이번에는······.”
 그러나 벽혈비사는 말을 잇지 못하고 경악으로 몸을 떨어야 했다.
 분명 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갈라졌으나, 여전히 맹석빈은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돌······ 아··· 가··· 라!”
 그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다가섰다. 이렇게 되자 도리어 벽혈비사가 질려 버렸다.
 “으··· 이 지독한······ 놈······.”
 그는 난생 처음으로 공포를 느끼며 뒤로 물러났다.
 맹석빈은 계속해서 벽혈비사에게로 다가섰고, 피를 흘리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은 너무도 처참해서 주루 안의 모든 사람이 시선을 돌릴 정도였다.
 “돌아가······ 라······.”
 맹석빈은 공력을 운용하여 상처를 치료하고 싶었다. 아니, 일장을 날려 벽혈비사를 쳐 죽이고 싶었다.
 일초지적(一招之敵), 벽혈비사는 그에게 있어 일초지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그런 유혹을 뿌리쳤다.
 스스로 하늘에 두고 한 맹세 때문이었다.
 다시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다시는 무공을 쓰지 않겠노라고 한 바로 그 맹세가 그의 이성을 꽉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돌아가라!”
 “으··· 으··· 물러가지 못할까?”
 벽혈비사는 신음을 토하다가 다시 일도를 날렸다.
 수라탈명팔도(修羅奪命八刀), 오로지 쾌를 위주로 한 무림제일의 도법!
 그것이 벽혈비사의 손에 펼쳐졌다.
 파아악!
 그의 연도는 정확히 맹석빈의 가슴을 꿰뚫었다.
 “으윽!”
 등을 뚫고 나온 도신(刀身)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벽혈비사는 다시 공포를 맛보아야 했다.
 “벽··· 혈비··· 사··· 돌아가······ 라.”
 맹석빈은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도의 손잡이를 잡고 외쳤다.
 벽혈비사는 얼굴이 완전히 변색(?)으로 변하고 말았다. 극도의 공포가 자신의 온몸을 휘감아 왔다.
 “으와아―! 저 놈은 사람이 아니고 귀··· 신··· 이다.”
 벽혈비사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뒤도 안돌아 보고 몸을 날렸다.
 막 그의 몸이 천상원의 문을 나설 때였다.
 “내려서라!”
 목소리 자체가 살기인 너무나 스산한 음성이 어디선가 들려 왔다.
 “으헉!”
 벽혈비사는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밑으로 내려섰다. 순간, 전신을 백의(白衣)로 감싼 인물이 유령같이 나타나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 전신은 살기, 바로 죽음의 집합체였다.
 백의인영을 바라본 벽혈비사는 섬칫한 비명을 질렀다.
 “백의마령객!”
 벽혈비사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자신은 도저히 백의마령객의 상대가 아니었다.
 공포는 피를 부르고 피는 자신이 흘려야 한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음성이 백의마령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벽혈비사, 네놈은 너무 오래 살았다. 가라!”
 가라!
 이 한마디가 바로 지옥의 음성이자 최명부(催命符)였다.
 쇄애액!
 검이 날랐다. 그 속도는 차라리 빛이라고 말을 해야 할 만큼 빨랐다.
 벽혈비사는 찬란한 섬강이 번뜩이는 순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그의 망상이었다.
 팍―!
 “크아아아악!”
 창자를 쥐어짜는 듯한 마지막 비명이 벽혈비사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그의 목줄기는 정확히 세 치가 갈라져 나갔다.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세치 깊이였다.
 공포의 살마(殺魔)가 공포의 지존(至尊)을 만난 격이 되어 버렸다.
 시체를 바라보는 백의마령객의 눈은 무감각하기만 했다. 전혀 살생을 하지 않은 듯한 눈동자였다.
 “감히 네 따위가 무림대영웅(武林大英雄)을 희롱하다니······.”
 그가 중얼거린 무림대영웅은 누굴 말하는가?
 백의마령객은 무감각한 눈길로 맹석빈을 향했다. 놀랍게도 맹석빈은 아직도 숨을 쉬고 있었다.
 백의마령객은 뚜벅뚜벅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쓰으윽―!
 맹석빈의 가슴에 꽂힌 연도를 백의마령객은 주저없이 뽑아내었다.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덕분에 백의마령객이 입고 있는 백의가 피로 물들어졌다.
 그것은 살기와 범벅이 되어서 또 다른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맹석빈의 입에서는 어떤 비명도 들리지 않았고, 고통의 빛도 없었다. 단지 암담한 눈으로 백의마령객을 바라 보았다.
 백의마령객의 눈에 알 듯 모를 듯한 격랑이 스쳐갔다.
 “본객은 이제야 당신이 누군지 알았소.”
 맹석빈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그의 전신이 발기발기 찢겨져 나가는 고통 중에도 음울한 음영(陰影)이 얼굴에 드리워졌다.
 그것은 어느 한 인간의 깊은 고뇌였다.
 “왜 당신이 무림의 단 하나뿐인 영······.”
 백의마령객은 말을 하다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중인이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말이었다.
 “백의마령객! 입을 다물고 화를 자초하지 마라. 모든 화는 입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아직은 나는 너를 죽일 수 없다.”
 대청 안의 중인들은 모두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점원으로만 알았던 맹석빈의 말!
 그런 그의 입에서 공포의 대명사인 백의마령객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맹석빈이 가슴을 관통(貫通)당하고도 아직도 살아 있다는 놀라운 사실마저도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백의마령객의 반응은 더욱 더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렇소! 강호에서 본 객을 죽일 자격과 실력이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오. 무인(武人)은 목숨을 던져도 자격(資格) 있는 무인에게 죽어야 영광인 것이외다. 본 객은 당신의 상처(傷處)가 아무는 날 스스로 찾아가 죽음을 받겠소.”
 의외(意外)로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전혀 살기(殺氣)같은 것을 느낄 수 없었다.
 있다면 천하에 적수를 찾을 수 없다는 백의마령객이 맹석빈을 향해 존경을 보였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경외심(敬畏心)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맹석빈! 과연 그가 한 행위는 필부지용(匹夫之勇)인가? 아니면 영웅의 도리인가?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전혀 감지를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는 감히 나서지 못했던 상황에서 분연히 몸을 드러내어 설비운의 목숨을 살렸던 것이다.
 
 
 (2)
 
 
 맹석빈은 잠시 백의마령객을 주시하더니 몸을 돌렸다.
 “백의마령객, 너는 다시는 나를 찾지 마라. 다시 찾아오게 되면 그때는 네가 좋아하는 사람의 피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의 선고(宣告)였다. 맹석빈은 백의마령객이 다시 찾아오면 죽음을 내리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중인들은 넋을 잃어야만 했다. 도대체 이 사실을 믿어야 좋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피로 목욕을 하는 맹석빈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것은 맹석빈의 사각 턱이 진정한 사나이임을 말해준다는 것이었다.
 은은히 풍기는 영웅의 기상, 그 기상을 받쳐주는 진실한 풍도가 그의 움직임에서 풍겨 나왔다.
 그들은 일개 점소이로만 알았던 인물에게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받고는 일제히 감탄을 터뜨렸다.
 “으― 음!”
 이때, 그들의 탄성을 뚫고 백의마령객의 음성이 들려 왔다.
 “본 객(客)은 대협의 손에 죽는 것을 꿈꿔왔소. 그것은 단 하나의 소원(所願)이오.”
 맹석빈은 움직이다가 그 자리에 멈춰섰다.
 “백의마령객, 더 이상 나를 피곤케 하지 말고 돌아가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의마령객의 신형은 사라졌다. 그리고 잔잔한 음성만이 대청 안에 부서졌다.
 “당신은 꼭 나를 죽이게 될 것이외다.”
 “아마도······ 그렇게 될지··· 도 모르겠지, 그러나······.”
 맹석빈은 혼절한 설비운을 안아 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토해낸 피에 앞가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체온도 싸늘히 식어 있었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맹석빈에게로 쏠렸다.
 뼈가 드러난 열십자의 도상(刀傷)은 둘째 치더라도 가슴을 관통 당하고도 아직도 살아 있는 맹석빈의 모습은 범인(凡人)의 머리로는 답이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맹석빈은 따뜻한 정이 담긴 눈으로 설비운을 내려다 보았다.
 “비운! 다음부터는 소인들 앞에서는 자신을 위해서 절대 웃음을 잃지 말도록 하시오.”
 맹석빈은 그녀를 안고 서서히 사라졌다.
 
 
 (3)
 
 
 섭유린은 새하얗게 질린 눈으로 들어서는 백의마령객을 주시하였다.
 원망의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는 백의마령객을 향해서 발악을 하듯이 외쳤다.
 “당신은 결국 그 분을 죽였군요!”
 그녀는 백의마령객이 맹석빈을 죽였다고 단정하자 너무나 서럽고 억울한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백의마령객은 힐끗 섭유린을 바라보는 것이 다였다.
 차가웠다.
 어찌나 눈빛이 차가운지 그 눈빛과 접하기만 하면 살아 베어져 날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눈길 속에는 번뜩이는 뜨거운 질투의 불길이 타고 있었다.
 백의마령객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안심(安心)해라! 이 넓디넓은 중원에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냉랭한 살기로 절여진 목소리였지만 섭유린의 눈물을 멈추게 하기에는 충분한 한마디였다.
 “그······ 게······ 무슨··· 말··· 이··· 지요?”
 섭유린의 목소리는 매우 떨려 나왔다. 그러나 백의마령객은 눈을 감고 그녀의 질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중얼거렸다.
 “석··· 빈··· 석빈! 이 이름을 조금 더 깊이 생각했다면 그가 누군지 조금 더 일찍 알았··· 을 것··· 을······.”
 섭유린은 전혀 그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짙은 의문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면서 급히 백의마령객에게 물었다.
 “무슨 말뜻인지 자세히 알려 주세요!”
 그러나 백의마령객은 또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했다.
 “인··· 의대유협을 두고 일개 살수(殺手)가 사랑을 질투(嫉妬)했다니 세상이 웃겠구나. 크하하하!”
 갑자기 미친 듯이 대소를 터뜨리는 백의마령객은 단숨에 서서 술병을 입에 붓고는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섭유린의 눈이 기이하게 변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백의마령객의 행동이었다.
 백의마령객의 넋두리는 계속되었다.
 “그··· 그를 죽일 수 있는 인물은 중원에 단 세 사람, 만무공주(萬武宮主) 영세만무성(永世萬武聖) 연대석( 大石), 제천신군(帝天神君) 갈천악(葛天岳), 천마군림존(天魔君臨尊) 백파림(百巴林)뿐이지. 후후후······.”
 섭유린은 극도로 경악했다.
 백의마령객이 말한 세 인물의 이름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중원무림에서 무학의 신으로 추앙받는 세 사람이 어찌 섭유린이 기루의 여인이라 해도 모르겠는가? 그 사람들만이 죽일 수 있는 맹석빈이라면 그의 정체는 거의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섭유린은 영리한 여자였다. 그렇기에 이런 거대한 망아루를 운영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당신은 그를 죽이지 않았나요?”
 백의마령객의 얼굴에 깊은 괴로움과 함께 경외심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죽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 그럼······.”
 “그렇다, 나는 그를 죽이지 못했다.”
 그녀의 머리 속에 조금 전에 들었던 한 인물의 이름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그의 이름은 무림에 너무도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럼 그가 인··· 의대협?”
 “섭유린! 너는 십 년 전 단 하나의 진정한 의인(義人) 인의대협 주석빈을 기억하느냐?”
 “설··· 설마, 설마 그 분이 인의대유협······.”
 “그렇다! 네가 지난 이 년 동안 온 마음을 태우며 사랑했던 점소이가 바로 인······.”
 백의마령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섭유린은 방을 뛰쳐 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막 문을 열어제치려는 순간이었다.
 “섭유린! 그를 사랑하기에 너는 너무 더러운 계집이야! 창부(娼婦)! 너는 창부임을 잊지 마라.”
 섭유린은 문고리를 잡은 채 얼어붙고 말았다.
 백의마령객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한 점, 한 점 도려내고 있었다.
 “창부(娼婦), 그··· 렇··· 지 나는 창··· 부··· 였지!”
 그녀의 탄식을 뚫고 백의마령객의 냉소가 메아리쳤다.
 “후후후··· 그래 너는 바로 창부다. 그리고 평생 창부임을 잊지 마라. 그러나 이 백의마령객의 품에 안기면 창부를 벗어날 수 있지. 크하하하!”
 언제나, 몸은 자신에게 주어도 영혼만은 맹석빈에게 주었던 섭유린이었다. 그녀는 백의마령객의 말을 들으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가 진정 인의대유협이라면 그녀는 도저히 올려다 볼 수 없는 하늘이 바로 맹석빈, 아니 주석빈이었던 것이다.
 
 
 (4)
 
 
 설비운은 조심스럽게 주석빈의 상처를 동여매고 있었다.
 안색이 불그스레한 것이 이미 주석빈에 의해서 내상(內傷)이 완치(完治)된 것 같았다.
 “제가 역시 사람을 잘 보았어요.”
 설비운은 잠시 손을 멈추고 주석빈을 들여다 보았다.
 그녀는 주석빈의 동공 깊은 곳에 잠긴 고독(孤獨)을 볼 수 있었다.
 그 고독의 원인이 무엇일까? 잡념(雜念)이 하나 가득 설비운의 머리안에 자리 잡았다.
 설비운은 고개를 흔들어서 자신의 잡념을 떨쳐버리고 나직이 말했다.
 “이렇게 가까이서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니 늘 느껴 오던 고독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설비운의 말에 주석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무관심한 반응에도 그녀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다시 그녀는 상처를 동여매기 시작했다.
 “당신은 영웅이에요. 여자인 나로서는 잘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신이 보여주었던 행위는 영웅의 행동이에요. 영웅은 고독하다지요?”
 그녀의 긴 말에도 주석빈의 표정에는 한점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설비운은 손길을 멈추면서 다시 뇌까렸다.
 “영웅······.”
 영웅! 그 얼마나 고독한 이름이며 위대한 이름인가? 그녀는 영웅이라고 생각되는 주석빈을 새로이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하나는 음울한 느낌을 주는 고독한 눈이었다. 다른 하나는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는 뜨거운 눈이었다.
 “나는 떠나야 하오.”
 처음으로 주석빈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사랑한다는 정감어린 말이 아닌 이별의 말이었다.
 설비운은 그의 말을 듣고는 살며시 눈을 내리 깔았다.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싶었다.
 “어··· 어디로 가시··· 나요?”
 “나도 모르오, 그러나 내 한몸 숨길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족하오.”
 설비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숨다니요?”
 주석빈은 눈꺼풀이 무거운지 무겁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탄식하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사부를 시해(弑害)한 죄인이오.”
 그녀는 그의 탄식어린 말에 그만 숨이 꽉 막히는 것을 느꼈다.
 사부를 시해(弑害)한 죄인!
 그것은 진정 대악죄인(大惡罪人)을 뜻하는 것이었다. 감히 부모와 같은 사부를 죽이고 무림 어디에서 발을 붙일 수 있겠는가?
 살인(殺人)! 넓디넓은 중원엔 어제도 오늘도 끊임없이 살인이 자행되지만, 사부를 죽인 살인마는 무엇으로든 용납받을 수 없는 것이 중원의 무림이었다.
 설비운은 주석빈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어요. 당신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어느 누구도 당신 말을 믿지 못할 거예요.”
 주석빈의 얼굴 근육이 무섭게 떨렸다.
 그에게는 설비운의 말이 너무나 고마운 것이었다. 그는 눈을 들어서 설비운을 바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벌써 눈물로 젖어 있었다.
 “당신······ 의 진실한 이름······ 은 무엇인가요?”
 “인의대유협 주석빈!”
 주석빈은 짧게 이름을 말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주석빈의 음성은 의외로 담담했다.
 인의대유협 주석빈, 무림에 잠시 잠깐이나마 몸을 담았던 인물이라면 그 어느 누가 인의대유협 주석빈을 모르겠는가?
 오십 년 전, 영웅탑을 밟았던 아홉 명의 개세고수(蓋世高手)들 보다도 더 빠른 시간에 영웅탑을 밟은 인물이 바로 주석빈이었다.
 그는 당금 무림의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로 추앙받던 인물이었다.
 어디 무공뿐이겠는가? 황하(黃河)가 범람하여 수백만 명에 달하는 이재민이 생기자 자신의 전 재산 황금 백만 냥을 아낌없이 내놓기도 했었다.
 그가 사랑하는 친구, 냉심유랑검(冷心流浪劍)이 누명을 쓰고 소림사에 갇힌 사건이 있었다.
 그는 친구 대신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친구 스스로 누명을 벗도록 우정을 베푼 사나이였다. 만약 냉심유랑검이 자신의 누명을 벗지 못했다면, 인의대유협 주석빈은 대신 죽었을 것이다.
 친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목숨을 아낌없이 버리는 인물이 바로 주석빈이었다.
 그를 어찌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으며, 그를 영웅이라고 칭하는 모든 사람들 역시 그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설비운의 입에서 두려움에 물든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당신··· 이 바로 사부인 만무공주, 영세만무성을 죽였다는 인의대유협 주석······ 빈이란 말··· 인가요?”
 “그렇소.”
 갑자기 설비운이 부정이라도 하듯이 강하게 외쳤다.
 “아녜요, 당신은 결코 자신의 사부를 죽일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그렇소! 결코 나는 사부님을 죽이지 않았소. 하늘 아래 어느 누가 영세만무성을 죽일 수 있겠소?”
 “그렇다면 영세만무성은 죽지 않았단 말인가요?”
 주석빈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그분은 소문대로 역시 죽었소.”
 “그 말뜻은······.”
 “그 분은 죽었으나 내가 죽이지 않았단 말이오.”
 설비운이 무엇인지 생각난 듯 주석빈의 손을 잡으며 소리쳤다.
 “누명(陋名), 당신은 누명을 썼군요?”
 “그렇소, 그 분을 죽인 흉수가 나에게 누명을 씌웠던 것이오.”
 이 순간, 주석빈의 눈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마음을 주체할 수 없도록 타오르는 분노의 화염이 그의 눈에서 불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주석빈의 입에서는 피를 토할 것 같은 절규가 쏟아져 나왔다.
 “지난 팔 년간, 나는 한시도 편한 잠,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보지 못했소. 앞으로도 흉수를 찾아내지 못하는 한, 나는 영원히 따뜻한 집을 갖지 못할 것이오. 이제는 방랑과 정체를 숨기고 사는 것에 지쳤소.”
 영웅의 이 평범한 소원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이 순간, 설비운의 눈 속 깊은 곳에서 따뜻한 정과 사랑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지친 주석빈의 얼굴을 감쌌다.
 “오―! 가엾은 분······.”
 주석빈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거칠은 손으로 그녀의 부드럽고 정이 가득한 손을 잡아갔다.
 아니 으스러지도록 꽉 쥐었다.
 실로 얼마만에 느껴보는 인간의 정이란 말인가? 주석빈의 눈에서 눈물이 배어났다.
 영웅의 눈물은 항상 고귀한 것이었다.
 주석빈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아니면 방랑신세인 자신의 처지가 고독해서일까? 그 어떤 눈물이든 무림의 거대한 영웅이 지금 삶에 지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그저 두 사람은 서로를 꼭 안고서 푸근하게 방랑의 시간에서 벗어나 있었다.
 두 사람의 맞닿은 살결에는 진실(眞實)한 인간들의 따뜻한 사랑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로만 한정시키기에는 너무도 많은 교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애정(愛情)이었고, 자신을 아는 사람과의 우정(友情)이기도 했다.
 별안간 주석빈은 얼굴을 감싼 설비운의 손을 떼면서 몸을 일으켰다.
 “당신의 정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요. 나는 이제 행랑(行 )을 꾸려 이곳을 떠나야겠소.”
 주석빈의 그 소리에 설비운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신의 손을 떼어 내는 주석빈의 손길에는 냉랭(冷冷)한 한기가 감돌았기 때문이었다.
 주석빈에게 행랑이라야 옷 몇벌하고 은자 몇닢이 전부였다.
 그는 행랑을 꾸리더니 냉정하게 설비운도 돌아보지 않고 문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는 돌아서지도 않고 말을 하였다.
 “비운! 당신은 참으로 고운 여인이오, 고마웠소.”
 떠난다. 무림의 영웅이고 망아루 여인들을 한숨짓게 하던 주석빈이 그렇게 떠나갈려고 하고 있다.
 마음에 지우지 못할 상처를 입은 한 남자는 그렇게 떠나려 하고 있다.
 만약 이대로 상처입은 사람을 떠나 보내면 이번에는 그녀 자신이 깊은 상처를 입고 말 것이 분명했다.
 설비운은 붙잡아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그 마음속의 부르짖음은 곧 말소리로 옮겨졌다.
 “주대가(朱大哥)! 저도 함께 떠나요.”
 맹석빈은 문고리를 잡은 채 깊은 탄식을 뿜어 내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설비운이 방금 한 말은 안하기를 수십 차례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결국은 설비운은 자신을 따라가겠다고 말하고 만 것이다.
 이것은 주석빈이 감당할 수 없는 멍에였다.
 “안되오, 당신은 나와 함께 갈 수가 없소. 나의 앞길은 방황(彷徨)과 도주(逃走)밖에 없소.”
 설비운은 주석빈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에게로 뛰어갔다. 그녀의 얼굴은 벌써 애원의 눈물로 젖어 있었다.
 “알아요, 알아요 주대가! 하지만 사랑을 간직한 여자에게는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을 당하더라도 능히 그것을 헤쳐 나갈 힘이 있답니다. 저는 주대가의 지친 마음에 조그마한 샘물이 되고 싶어요.”
 “비운! 당신은 아름답소. 당신에게는 흔히 미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오만과 자부심도 없는 진실로 아름다운 여인이오. 그것은 분명 당신에게 커다란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오. 나를 따라와야 그대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뿐이오”
 사실이었다. 설비운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첫눈에 그녀를 아름답다고 할 사람은 진정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설비운은 이 세상의 어떤 여인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오만과 자부심이 없는 여인!
 이 또한 설비운의 미를 더욱 더 돋보이게 하는 것중 하나였다.
 오만과 자부심을 버렸다는 것은 아름다운 미녀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설비운은 이 점으로 인하여 더욱 더 모든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녀의 흠은 단 한 가지, 그녀의 신분이 기녀라는 것이었다.
 “당신만 따라갈 수 있다면 그 어떤 고통이라도 저는 이길 수 없을 거예요. 제발 주대가 저를 데려가 주세요.”
 주석빈은 서서히 몸을 돌렸다.
 “비운, 나는 중원무림인들의 공적(公敵)이오. 오늘 일로써 나의 정체가 드러났을 것이오. 지난 세월 동안 용케 그들의 눈을 피해 왔으나 이제는 만무궁(萬武宮)의 인물들과 무림인들은 필사적으로 나의 뒤를 따를 것이오. 나의 앞길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소. 나는 당신같은 아름다운 여인에게 피를 보여줄 수가 없소. 그러니 제발 마음을 돌리시오.”
 “아니에요. 제가 알기로는 중원무림인 모두 당신을 진정한 친구로 여기고 있어요.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누명을 쓴 줄 알 거예요. 결코 당신의 뒤를 쫓지 않을 거예요.”
 설비운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무림인들은 그를 보았던 사람이나 보지 못했던 사람이나 모두 그를 한 마음이 되어서 진정한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존경과 경외심으로 주석빈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석빈은 설비운의 말을 듣고는 쓰게 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비운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료.”
 그는 쓰윽 자신의 목을 어루만졌다.
 “이 목에는 상금으로 황금 십만 냥과 만무궁의 무공, 양귀비(楊貴妃)보다 더 아름다운 미인 삼십 명이 걸려 있소. 이만한 것이라면 신선(神仙)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을 것이요.”
 그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황금 십만 냥이면 망아루의 일년매상(一年賣上)보다도 많은 것이고, 특히 만무궁의 무공비록이라면 모든 사람이 눈독을 들이는 물건이었다.
 설비운이 비록 무림인은 아니지만 그 정도의 값어치라면 그녀도 금방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있었다.
 “호호호! 그만한 값어치 있는 분의 아내가 될 수만 있다면 그런 여인은 너무나 행복할 거예요.”
 그녀의 행동은 사려깊은 행동이었다. 만약 자신이 경악성이라도 터트리면 주석빈이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봐 그녀는 일부러 대소를 터트린 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은 맑고도 깊었다.
 자신이 선택한 사랑에 대해 추호도 어떤 두려움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주석빈은 그녀의 결심이 어떤 것인지 그녀의 이번 행동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주석빈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일었다.
 드디어 그의 무거운 입에서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 말이 나왔다.
 “우리는 앞으로 한날 한시에 같이······.”
 “죽는 부부가 되기로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맹세하는 바입니다!”
 “하하하하―!”
 주석빈은 맑게 웃었다. 참으로 오래만에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시원한 웃음이었다. 언제나 도망자의 입장에서 웃음이란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웃음은 지난 날의 고생(苦生)을 모두 보상(報償)이라도 해주는 듯 했다.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맞 부딪히는 남녀의 눈길에 사랑이 서서히 뜨겁게 고였다.
 그들의 입술이 합쳐졌다. 달콤한 풋내음이 일었는데 그것은 천상(天上)의 천도화(天桃花)의 향기보다 더욱 향기로운 것이었다.
 설비운은 눈물을 흘렸다. 이런 순간에는 모든 여인이 행복의 눈물을 흘리는 것도 하나의 순서였다.
 이윽고 입술이 떨어졌다.
 “이제 떠납시다.”
 “네! 주대가.”
 그녀는 곱게 순종했다. 그런 설비운을 보고 주석빈이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팔 년만에 내 입에 웃음이 생겨나게 했소. 그 고마움에 대하여 한 가지 선물을 해야겠소.”
 갑작스런 선물타령에 설비운의 눈에 의혹의 빛이 어리었다.
 “선물은 다름아닌 내 맹세를 파기하는 일이오. 나는 누명을 벗기 전에는 절대 무공을 다시 사용하지 않으려 했으나, 이제는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구료.”
 설비운의 얼굴에 그윽한 웃음이 떠올랐다.
 “고마워요, 주대가!”
 “그런데 곤란한 것은 지금부터 무공을 써야 할 것 같소. 벌써 나의 목, 아니 현상금을 타고 싶어하는 무리들이 몰려왔소.”
 설비운은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주석빈의 말은 벌써 그를 노리고 누군가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이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는 순간, 어디선가 음침한 괴소가 그들의 방으로 흘러 들어왔다.
 “흐흐흐! 주석빈, 그동안 쥐새끼처럼 어디 숨어 있었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을 줄이야. 네놈은 사부를 죽인 대역무도한 놈이거늘 어서 빨리 나와 죽음을 받도록 하라.”
 주석빈과 설비운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쓴웃음을 입가에 띄웠다.
 
 
 제3장 영웅은 피로 물들고
 
 
 (1)
 
 
 주석빈은 천천히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살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수십여 명이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흉흉한 살기와 아울러 엄청난 탐욕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주석빈은 그들을 바라보며 마음이 깊은 무저갱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비감(悲感)을 느껴야만 했다.
 그를 노리는 무리들은 대략 오십여 명 정도 되었다.
 “당신들은 모두 나를 노리고 왔소?”
 “흐흐흐―! 사부를, 그것도 전 무림에 하나밖에 없는 대성웅(大聖雄)을 죽이고 온전히 살아남기를 바라느냐?”
 그를 꾸짖는 인물은 녹림대마(綠林大魔)인 추혼괴마(醜魂怪魔) 염해린(炎海隣)이었다. 평소, 살인을 밥 먹듯이 저지르고, 강탈, 살인, 강간의 대명사였으나, 이 인물이 지금 인의대유협 주석빈을 도리(道理)로써 꾸짖고 있는 것이었다.
 맹석빈의 얼굴에 쓰디 쓴 미소가 어리었다.
 “간사한 것은 오직 인간의 마음뿐이다.”
 추혼괴마의 얼굴이 시뻘개졌다.
 “닥쳐라! 너같이 악독한 놈이 감히 노부를 욕하려 들다니······.”
 그가 어찌 이렇듯 주석빈에게 망발을 부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주석빈이 엄중한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렇듯 두려움을 잊고 망발을 부리는 것이었다.
 주석빈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추혼괴마 염해린, 그렇듯 멀찌감치에서 나를 훈계하려 들지 말고 직접 무공으로 훈계토록 해라.”
 추혼괴마는 흠칫하며 몸을 부르를 떨었다.
 아무리 부상을 입어도 태산의 호랑이는 역시 호랑이였다. 감히 여우나 승냥이가 어찌할 수 있는 토끼가 될 수는 없었다.
 하물며, 천하제일고수라고 인식되었던 주석빈이었다. 그런 그에게 추혼괴마 염해린은 너무도 작은 존재였다.
 사실, 그는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취할지언정 앞으로 나설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무정장극(無情長戟), 만리추풍객(萬里追風客), 혈수패혼(血手覇魂), 오! 비룡검객(飛龍劍客)도 있었구료. 그대들 모두 이 대역무도한 놈을 친히 가르치려 왔소?”
 뜻밖에도 주석빈이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불러대자 그들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 갔다.
 그들은 예전 자신이 엄지 손가락을 내세우며 인의대유협 주석빈을 극구 칭찬했었던 순간들을 상기시켰다.
 하지만 물욕은 너무도 컸다. 그의 목에 걸린 것들은 부끄러움 쯤 잊게 하기에는 너무나 충분한 것이었다.
 다시 전혀 의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주석빈은 뚜벅뚜벅 그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도무지, 얼마 전에 가슴을 관통당한 부상을 입은 사람의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태산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중앙에 우뚝 선 주석빈을 바라보면 문득 대해(大海)와 태산(泰山)을 느끼게 했다.
 인간이 거대한 산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평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절대로 아니었다. 지금 주석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주석빈은 오연히 입을 열었다.
 “나는 직접 내 손으로 내 목을 여러분에게 떼어줄 수 없구료. 그러니 여러분 스스로 와서 직접 가져가도록 하시오.”
 실로 광오한 외침이기 그지없었다. 오십 명의 중앙에 턱 서서 외치는 그의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오히려 그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사람들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물욕이 컸기에 물러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먼저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알게 모르게 마음속에 두려움이라는 인간의 원초적(原初的)인 감정이 들어서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거칠은 호흡 소리들만이 불규칙적(不規則的)으로 들릴 뿐이었다.
 주석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도 나의 목을 가져갈 의사(意思)가 없는가 보오. 그럼 나는 이만 돌아서겠소.”
 주석빈이 중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다시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바로 그 순간에 혈수패혼은 주석빈의 등이 대문짝만하게 보였다.
 만약 자신이 귀신도 모르게 암습을 한다면 여지없이 꿰뚫을 수 있을 만큼 그 등은 널다랗게 보였다.
 ‘흐흐흐흐―!’
 눈 앞에 황금과 미녀, 그리고 만무궁의 무공비록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주석빈과의 거리는 불과 일 장여······.
 전력을 다한다면 주석빈이 아니라 영세만무성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혈수패혼의 얼굴에 확신과 자신감이 어렸다. 그렇다면 전혀 주저할 것도 없는 것이었다.
 쌔애애액―!
 벼락같은 일검이 주석빈의 명문혈(命門穴)을 노리고 날아갔다.
 그 일검에는 혈수패혼의 십이 성 진기가 들어 있었기에 쾌속했고,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공격을 하던 혈수패혼은 아찔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등을 보였던 주석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자신의 눈으로 수없는 조영(爪影)이 어른거렸다.
 “봉황무극조(鳳凰無極爪)!”
 웅혼한 외침이 들리는 것과 동시에 혈수패혼은 자신의 목으로 날아오는 조영을 보았다.
 우드득!
 주석빈의 손은 혈수패혼의 목을 여지없이 부러뜨리고 있었다.
 “으아― 아― 악!”
 처참한 비명이 밤하늘을 찢으면서 망아루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것은 하나의 신호로 작용되었다.
 “쳐라―!”
 “대역무도한 놈을 죽여라!”
 오십 명의 인물들이 분분히 허공으로 치솟으면서 주석빈에게 살초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주석빈의 냉엄한 눈길이 뒤편에 쳐져서 고함(高喊)만 지르는 추혼괴마의 얼굴에 꽂혔다.
 “너의 그 더러운 입으로 감히 나를 능멸하다니······.”
 주석빈은 섬전(閃電)같은 일지를 추혼괴마를 향해 퉁겨냈다.
 슈루루룩!
 새파랗다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인광(燐光)이 번뜩이는 지풍이 허공을 가르면서 그대로 추혼괴마에게로 날아갔다.
 추혼괴마는 대경실색을 금하지 못했다.
 “이것은 일······ 지태허강(一指太虛 )!”
 팍!
 추혼괴마는 얼굴 전체가 박살이 나서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으아아악―!”
 그는 어설픈 말로 주석빈을 훈계하려다 최명대왕(催冥大王)의 훈계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주석빈의 움직임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대라불영참(大羅佛影斬)!”
 주석빈의 양수(兩手)가 비수(匕首)가 되어 날았다.
 파파파팍!
 요란한 괴성이 터지면서 주석빈의 손이 여지없이 덤벼드는 고수들의 목줄기를 강타하였다.
 “크― 아아악!”
 “케에― 엑!”
 단 일초에 대라불영참이 열두 번 번뜩이고, 목이 부러진 열 두 구의 시체가 생겨났다.
 쇄애애액!
 장극(長戟)이 주석빈의 목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비룡검객의 송문고검(宋文古劍)의 그의 옆구리를 파고 들어왔다.
 그런 모습에 주석빈의 눈초리가 싸늘하게 굳어졌다.
 “도음접양(導陰接陽)!”
 주석빈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교차했다.
 파파파팍!
 “으으으― 악!”
 “크아아아악!”
 비룡검객은 무정장극의 창에 목이 날아갔고, 무정장극은 옆구리가 불에 데인 듯한 뜨거운 맛을 보아야만 했다.
 도음접양은 남의 공력을 끌어다 자신의 공력을 보태 발출하는 도가(道家)의 지고무상(至高無上)한 무공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모습을 오연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주석빈이 냉엄하게 외쳤다.
 “패천대력장(覇天大力掌)!”
 우르르르― 릉!
 무림 제일의 양강장력(陽剛掌力)이 폭출되자 이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일시에 산산조각이 되면서 허공에 치솟았다.
 “크아아아악―!”
 “커억! 아아아악!”
 장력이 발출(發出)됨에 따라 엄청난 바람이 해일(海溢)처럼 일어나면서 주변을 휩쓸었다.
 한 번 장력에 휘말린 인물들은 육신이 조각이 나서 시신도 제대로 알아볼 수 없는 분시처참(分屍處斬)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
 “으··· 이럴 수··· 가······.”
 아직 목숨을 부지(扶持)하고 있는 대여섯 명이 두려움에 질려 넋을 놓고 신음성을 터뜨렸다.
 그들의 온 몸을 휘감는 감정은 거의 같은 것이었다.
 공포, 경악 바로 그것만이 그들의 모든 마음을 휘잡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와중에서 돈, 미녀, 무공보다도 역시 목숨이 제일 귀중하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고 있었다.
 “으······.”
 그들은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진 눈으로 주석빈을 바라보았다.
 주석빈도 마찬가지로 넋을 잃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깊은 고뇌와 쓰디 쓴 후회가 잘게잘게 여며지고 있었다.
 “이렇게 안해··· 도 되는 것······ 을······.”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눈을 들어 주위에 널려진 시체를 바라보았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이 망아루에서 아름다운 기녀를 끼고 미주가효(美酒佳肴)를 즐기던 사람들이었다.
 그의 쓰디 쓴 눈길이 공포에 질려 있는 사람들에게 향해졌다.
 “돌아가시오. 그대들은 모두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가시오.”
 그들은 주석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라졌다.
 주석빈의 무거운 눈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었다.
 “백의마령객! 이제 나타나거라. 너의 소원을 들어주겠다.”
 “후후후후―!”
 냉막한 웃음, 그 속에 담긴 것이라고는 오직 살기뿐인 웃음과 함께 백의인 하나가 유령같이 나타났다.
 어찌나 신법이 빠른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 같았다.
 주석빈의 먹물보다 검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소문보다 무공이 훨씬 높은 자이군.’
 백의마령객은 살기를 쉴새없이 내뿜으며 그의 일장 앞에 섰다.
 주석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의마령객, 너도 나의 목에 걸린 것들을 원하는가?”
 백의마령객의 눈가가 예리하게 찢어지면서 한광이 나왔다.
 “인의대유협! 당금 무림에서 본 객의 인품과 무공에 있어서 완전히 굴복(屈伏)한 인물은 오직 대협뿐이오. 본객은 존경하는 대협에게서 모욕을 받고 싶지가 않소.”
 “그럼 무엇 때문에 꼭 나와 대결을 하려 하는가?”
 “아까 말해듯이 본 객은 주대협의 손에 죽는 것이 소원이오.”
 “질투때문인가?”
 “처음에는 그랬소. 그러나 이제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던 소치이오. 천하의 어느 여인이 인의대유협을 사랑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닐텐데······.”
 “후후후―! 나는 진정한 친구의 손에 죽을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때가 있을 수 있겠소?”
 백의마령객의 말에 주석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도 무림인으로서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자에게 죽는다면 그것은 여한도 없을 것 같았다.
 “좋다, 덤벼라!”
 주석빈은 백의마령객을 강렬한 눈빛으로 보면서 응낙했다.
 차앙―!
 검을 뽑는 맑은 쇳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청아하기 이를데 없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주위의 공기를 맑게 해주기까지 했다.
 고요한 두 고수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일순, 백의마령객은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아··· 아···, 저 눈에 서린 빛은 너무나 맑아 그가 얼마만한 능력을 지녔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구나,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예측은 했지만 단 한순간도 적수가 되지 않는다니··· 아···.’
 그가 쥐고 있는 검끝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검은 주석빈의 그 어느 곳이라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하늘에 대해서 검을 향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석빈이 그의 마음을 읽은 듯 조용히 말했다.
 “청정무위(淸淨無爲) 청풍무류(靑風無流)! 이것은 검도(劍道)의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알고 있소.”
 백의마령객은 차갑게 응수하더니 일검(一劍)을 날렸다. 그것은 자존심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일수였다.
 대치중인 자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무인으로서 치욕이었다. 그것은 백의마령객이 아무리 주석빈을 존경한다고 해도 백의마령객의 자존심을 억누를 만큼일 수는 없었다.
 무림인이란 자존심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새애애액!
 눈부신 검광(劍光)이 일직선으로 날았다. 그 속도의 빠름이란 필설로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백의마령객은 자신의 검이 어떤 기이한 힘에 의해서 옆으로 밀려나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파아악!
 그의 검은 주석빈의 목 한치 옆의 허공을 찌르고 있었다. 분명 주석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는데, 그의 검은 허공을 찢고 만 것이다.
 “그··· 금강부동신··· 법!”
 주석빈은 그의 경악성을 들으면서 몸을 돌이켰다. 백의마령객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이때였다.
 “주대협! 왜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이오?”
 “가라! 가서 섭유린을 위로해 주어라. 섭유린은 불쌍한 여인이다. 네가 잘 돌보아 주기 바란다.”
 “으······ 흑······.”
 백의마령객은 털썩 주저앉았다.
 “주대협! 나는 영웅은 못되지만 죽을 곳과 때를 알고 있소.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어서 죽여주시오.”
 백의마령객이 끝나자마자 몸을 벼락같이 돌렸다.
 “죽음이 무슨 훈장이라도 된단 말이냐? 네가 원하는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죽음이다. 모름지기 장부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만이 진실한 죽음이다. 나는 네가 그 때를 찾기 바란다.”
 백의마령객은 얼굴을 땅바닥에 파묻었다.
 이때, 설비운이 주석빈의 옆으로 다가섰다.
 “갑시다. 비운!”
 “네, 주대가······.”
 주석빈은 설비운을 안고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두 사람이 사라지고 어둠 속으로부터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두 사람이 사라진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바로 망아루의 루주인 섭유린이었다.
 “차라리 당신이 주석빈이 아닌 맹석빈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2)
 
 
 싸늘한 밤하늘에 달이 차갑게 떠 있었다.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빛이 비치는 듯 하늘은 이상하게 밝았다. 그러나 그 빛은 밤안개 속에 녹았는지 호수의 수면(水面)에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공중에 흩어졌다.
 말하자면 하늘은 밝고 땅은 어두웠다.
 삐이꺽― 삐이꺽―
 어둠에 잠긴 홍택호(洪澤湖) 수면 위를 미끄러져가는 조각배가 있었다.
 낡은 유삼을 걸친 주석빈은 묵묵히 노를 젓고 있었다.
 행색은 초라하고 얼굴에는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의 눈빛만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설비운이 양 손으로 턱을 괸 채 맑은 눈빛으로 주석빈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석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무한한 애정과 깊은 신뢰감이 충만되어 별빛처럼 반짝였다.
 그들은 망아루를 떠난 이래 이곳 홍택호까지 오는 동안 줄잡아 수백 명의 추적자들과 맞부딪쳤다.
 부와 영화를 한 손에 걸머쥐려는 강호인들의 추격은 집요했다.
 주석빈과 설비운이 걷는 길은 실로 뼈와 살이 흐르는 혈로(血路)였다. 그것의 끝은 너무도 요원(遙遠)하기만 한 혈로이기도 했다.
 이때, 설비운이 무슨 생각이 난 듯이 문득 입을 열었다.
 “주대가, 제가 얼마나 노를 잘 젖는지 모르시죠? 한 번 보여드리고 싶어요.”
 설비운은 맑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은 환한 달빛을 받아 너무도 아름답게 빛을 발했다.
 주석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쓴 웃음일 수밖에 없었다.
 그 웃음은 고통이 깊숙이 감추어진 남자만의 고독한 미소였다.
 주석빈이 대답이 없자 설비운은 고운 아미를 약간 찌푸렸다.
 “주대가 제 말씀을 믿지 못하시는 것 같군요.”
 주석빈이 이내 입을 열었다.
 “비운, 당신의 말을 내가 어찌 믿지 않겠소. 이곳은 물살이 거세니 잠시 후에 노를 건네주겠소.”
 설비운이 주석빈의 말에 까르르 교소를 터트렸다.
 “호호호! 저는 물만 봐도 무서운데 언제 노를 저어봤겠어요.”
 주석빈은 설비운의 교소에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알고 있었소.”
 설비운은 귀엽게 아미를 치켜세우면서 물었다.
 “알고 계셨으면서 왜 허락을 하였죠?”
 “당신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었던 게요. 지금 당신이 나를 위로해 주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처럼······.”
 설비운은 주석빈을 응시한 채 잠시 말을 못했다. 그러다가 돌연 놀란 기러기처럼 뛰어올라 주석빈의 가슴으로 뛰어 들었다.
 “주대가! 당신은, 당신은 언제나 나를 감격시키는군요, 도대체 제 작은 가슴으로 어떻게 당신의 그 큰 사랑을 감당하라고······, 아아―! 우리는 왜 좀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요?”
 주석빈은 묵묵히 손을 돌려 그녀의 허리를 안았다.
 포옹! 쏟아지는 달빛 아래 두 사람은 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이 순간만은 그들에게 아무런 불안도 두려움도 없었다.
 포옹은 조용했으나 격렬한 감정이 오고 갔다.
 대해같은 주석빈의 마음과 봄날의 미풍과도 같은 설비운의 마음이 서로 오고가는 정겨운 시간이었다.
 삼십 년의 고독을 부셔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주석빈은 설비운의 입술을 맹렬하게 탐했다.
 설비운은 백옥같은 팔을 주석빈의 목에 두르고 발돋음 해 주석빈의 뜨거운 입술을 받았다.
 영과 혼이 가슴에서 가슴으로, 입술에서 입술로 전해지고 불타올랐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에게는 촌각의 시간이지만 만물에게는 지표가 변하는 대장엄의 시간이었다.
 “비운, 당신은 역시 나를 따라오는 것이 아니었소. 내 생각이 짧았던 것이오.”
 “정랑! 그런 말씀은 하지 않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왜 갑자기 또 그런 말씀을······.”
 주석빈은 대꾸없이 설비운을 품에서 떼어내며 뱃전에 놓여있던 녹슨 고검(古劍)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의 입맞춤이 어쩌면 마지막 나눈 이별의 의식이었는지 모르겠소.”
 주석빈의 눈가에 일렁이는 어떤 긴장감의 빛을 설비운은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휙 소리가 나도록 몸을 돌렸다.
 “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암울한 탄식을 터뜨려야만 했다.
 어두운 수면을 가르며 소리없이 다가드는 수많은 범선들, 두 사람의 조각배는 크고 작은 범선들로 인해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설비운이 절망의 표정으로 다시 주석빈을 향했을 때, 어느샌가 주석빈의 눈가에 일렁이던 긴장은 사라지고 없었다.
 주석빈은 지극히 담담한 얼굴로 오히려 희미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비운, 오늘은 우리 둘이 떨어져 있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질 것 같소. 그러나 되도록 빨리 끝내겠소.”
 “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비운, 당신이 노젓는 솜씨를 발휘할 때요.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조심스럽게 노를 잡고 있기 바라오.”
 “주대가!”
 설비운이 비명처럼 목소리를 높였을 때는 이미 주석빈의 몸은 비스듬히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휘리리릭―!
 
 
 (3)
 
 
 주석빈의 오체(五體)는 비조(飛鳥)로 화했다.
 뱃전에 서 있던 흑의대한이 날아드는 주석빈을 발견하고 급히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이 소리가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억!”
 흑의대한이 발한 것은 짧은 단말마 뿐이었다.
 그의 목이 팔랑개비처럼 날아오르고 옆에서 달려들던 몇 사람이 피의 무지개를 뿌리고 나뒹굴었을 때에야 공포에 가까운 절규가 밤하늘에 울려퍼졌다.
 “여기닷!”
 고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십여 명이 목을 쥐고 나뒹굴었다.
 “으아아악!”
 방어할 겨를도 없었다. 휘파람같은 파공성이 허공을 가르며 검광이 번뜩이자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에에엑!”
 그러나 벌써 다른 순간에 질풍으로 변한 주석빈은 갈대밭같이 우거진 적의 검림(劍林) 속에 유령처럼 드날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고검이, 왼손에는 적에게서 뺏아아든 단창(短槍)이 쥐어져 있었다.
 “악! 왔다.”
 “포위해라, 포위해!”
 “저기닷!”
 짧고 날카로운 외침이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뱃전에 선 자들은 모두 강호 일류고수에 속하는 위인들이었지만 이렇게 무서운 실력을 발휘하는 고수와는 처음 싸워보는 것이다.
 “이놈!”
 함성을 지르고 덤비는 일격의 정확함보다도 주석빈의 검은 더 빠른 속도로 죽음의 일격을 주는 것이다.
 살기를 품고 찔러오는 창, 소용돌이 치는 검기, 몰아치는 경풍 뒤에서 좌우에서 쉴새없이 죽음의 바람이 일지만 주석빈의 검은 언제나 그들보다 조금 빨랐다.
 “아― 으윽!”
 “크으으윽!”
 모든 입이 본능(本能)의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이었다.
 번뜩이는 검망 속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들은 허무하게 허공을 짚고 짚단처럼 거꾸러질 뿐이었다.
 간판 위는 순식간에 시체로 산을 이루고 혈해에 잠겼다. 그제서야 다른 범선 위에 있던 고수들이 급급히 밤하늘로 몸을 띠워 올렸다.
 휘리리릭!
 형형색색의 인영들이 일제히 한 범선 위로 날아가는 모습은 때 아닌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더 치열한 사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펑― 퍼퍼퍼― 어― 엉―!
 슈슈슈슈― 슉!
 어떤 자는 가슴이 박살나 입에서 허연 거품을 토했고, 어떤 자는 얼굴이 두쪽으로 쪼개졌다.
 허리가 동강난 자, 사지가 찢어진 자, 검을 짚고 비틀거리는 자 등 아수라장이 벌어지고 있었다.
 주석빈은 문자 그대로 아수라(阿修羅)가 되어 혈장(血掌)을 휘날렸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 오라!”
 분노에 울부짖는 사자의 포효성(咆哮聲)처럼 주석빈의 대갈이 밤하늘을 갈기갈기 찢어내렸다.
 “무심무상검강(無心無上劍 )!”
 차가운 폭갈이 터져 나왔다.
 츠츠츠츠츠!
 무서운 검기가 온 천지를 뒤덮는 가운데 주석빈의 냉막(冷幕)한 일갈이 다시 발해졌다.
 “천― 극― 검― 환(天極劍環)!”
 기합성이 터지고 주석빈의 삼 척 장검은 수백, 수천 개로 화하여 야천을 오색창연한 무지개로 물들였다.
 츠츠츠츠츠― 파파파팟!
 “크아아악! 검강이······.”
 “우아아아― 악!”
 피, 피보라가 끝없이 홍택호에 펼치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 한명에 의해서 각본되고 연출되어진 거대한 피의 연극이었다.
 해상의 사투는 그렇게 끝없이 피를 불렀다.
 홍택호에서 혈겁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각이었다.
 태행산(太行山)에 깊숙이 자리잡은 만무궁(萬武宮)은 창망한 야색(夜色)에 잠겨 있었다.
 잠자듯 고요한 대전(大殿)을 향해 소리도 없이 날아가는 백영(白影)이 있었다. 호화롭기 비길데 없는 대전은 그 규모(規模)나 장식(裝飾)이 결코 황궁에 못지 않았다.
 백영은 긴 회랑을 지나 화려한 내전으로 황급히 들어섰다.
 내전은 방원이 족히 십 장은 되어 보이는 넓은 공간을 갖고 있었다.
 중앙에 붉은 융단이 깔려 있고, 융단 위에는 좌우로 여섯 명의 백삼인들이 나란히 도열해 있었다.
 일견(一見)에도 기도가 범상(凡常)치 않아 보이는 그들은 한결같이 엄숙한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상단쪽으로 주렴이 내려져 있고, 그 사이로 희미한 사람의 형체가 내비쳤다.
 황망히 달려온 백영은 엄숙히 도열해 있는 백삼인들의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가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공주께 아룁니다. 본 궁의 역도 인의대유협 주석빈은 현재 홍택호에 숫자미상의 무림인들과 접전(接戰)을 벌이고 있습니다. 공주의 하교를 받고자 왔습니다.”
 주렴 안에서 즉시 청아한 옥음(玉音)이 들려왔다.
 “상황은 어떠한가?”
 “강호인들은 숫적으로 절대 우세(優勢)하나 결코 주석빈을 죽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알았다. 만무검관수(萬武劍關手)를 대기시켜라. 지휘는··· 내가 한다.”
 그녀의 한마디에 좌우로 도열해 있던 백삼인들의 얼굴엔 일제히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만무검관수는 십 인(十人)의 절정고수로 구성된 만무궁 검관의 정예들이었다. 당금 무림에서 이들 중 한 사람의 일초(一招)를 받을 자가 손꼽을 정도이니 이들의 무공은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만무공주가 직접 이들 열 명의 절대고수를 지휘한다 하니 만무궁 창건(創建)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최강의 진용이 주석빈을 겨냥해 출동하는 것이었다.
 만무공주 강옥기(姜玉奇)는 약관의 나이로 전 공주의 절학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일대기녀(一代奇女)였다.
 그녀의 진정한 무공의 깊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전력을 다할 상대를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석빈, 그는 이런 만무궁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지······.
 
 
 (4)
 
 
 새벽의 찬란한 여명(黎明)이 수면을 붉게 물들였다. 승부(勝負)는 이제 막 끝이 났다.
 수면 위에 둥둥 떠 다니는 무수한 시체들과 검붉게 변한 물빛은 전날의 참혹한 혈전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주석빈과 설비운을 실은 조각배는 수면 위를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묵묵히 노를 젓고 있는 주석빈의 표정은 극히 담담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이들은 알고 있었다. 이런 혈전과 죽음의 함정은 이미 정해진 숙명이라는 것을······.
 여명을 등으로 받고 있는 주석빈의 전신이 금빛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설비운은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소리없는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하늘이시여! 어찌 이 분에게 이토록 가혹한 시련을 주셨습니까? 차라리 저에게 저 분의 멍에를 대신 걸머질 수 있게 해주소서.’
 그녀는 엄숙하고도 애절한 기원을 올렸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자신의 어깨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를······.
 이윽고 조각배는 건너편 기슭에 당도했다.
 주석빈은 훌쩍 몸을 날려 뭍에 내려섰다.
 묵묵히 내민 그의 손을 설비운은 구원의 손길을 잡듯이 힘차게 쥐었다. 조금이라도 그와 함께 있고 싶은 그녀의 염원이 그 손길안에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선 채로 함께 웃었다.
 이 순간만은 다만 서로를 위해 웃어주는 것만이 있을 뿐이었다.
 “오늘도 날씨가 좋겠군.”
 “네! 저도 방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갑시다.”
 “네, 가야죠.”
 해는 점점 중천을 향해 솟아오르고 폭염은 머리 위에서 이글거렸다.
 거친 들판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목적한 곳도, 꼭 가야 할 곳도 없었으나, 그들은 쉬임없이 걸었다.
 주석빈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말해주지 않았으며, 설비운은 또한 묻지도 않았다.
 그런 질문과 말들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세상의 어느 곳을 간다고 해도, 만약 추적자들의 손을 뿌리친다고 해도 주석빈의 마음은 그저 무거울 것이고, 그런 말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처지만 불쌍하게 만든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경사진 구릉을 막 넘어섰을 때에 시야에 여러 사람의 모습이 비쳐 들었다.
 반짝이는 햇살 아래 눈부신 백의자락을 펄럭이며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의 모습에는 위압갑이 저절로 풍겨지고 있었다.
 백의를 걸친 인물은 도합 십일 인(十一人)이었다.
 일렬로 나란히 서 있는 그들과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다. 그러나 주석빈은 그들의 백의를 본 순간 마치 벼락을 맞은 듯 한차례 몸을 떨었다.
 “왔구나!”
 그는 신음을 하듯이 중얼거렸다.
 설비운은 주석빈의 굳은 얼굴과 멀리 서 있는 백의인들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다급히 부르짖었다.
 “주대가! 우리 도망가요. 서두르면 저들의 추격(追擊)을 따돌릴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주석빈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단지 석상처럼 백의인들을 쳐다볼 뿐이었다.
 건너편에 도열해 있는 십일 인도 역시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설비운은 애가 타 주석빈을 흔들었다.
 “주대가! 어서요, 당신은 몹시 피곤한 상태에요. 제발······.”
 주석빈은 암울한 눈빛으로 설비운을 향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비운, 저들이 나타난 이상 어떠한 행동도 무의미하오. 더구나 나는 저들에게 등을 보이고 싶지 않소.”
 “아아―! 주대가···.”
 순간, 주석빈은 갑자기 떨고 있는 설비운을 안아들고 좌측 숲으로 폭사해 날아갔다.
 휘리리릭!
 주석빈의 돌연한 움직임에 설비운은 당황했다. 그러나 그녀는 주석빈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다급히 부르짖었다.
 “주대가! 당신은 저만 피신시킬 생각이시죠? 싫어요! 죽어도 당신과 함께 있겠어요, 놔요!”
 발버둥치는 설비운을 억세게 끌어안은 주석빈은 숲 속을 질풍처럼 내달렸다. 그들의 좌, 우측으로 아름드리 나무들이 바람처럼 스쳐갔다.
 그러나 숲이 끝난 지점엔 천야만야한 절벽이 걸음을 막고 있었다.
 주석빈이 다시 황급히 몸을 돌리려는 순간, 이미 퇴로는 막혀 있었다.
 십일 인은 나란히 선 채 무표정한 얼굴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들처럼······.
 주석빈은 그들을 한 차례 쭈욱 훑어본 후 느릿하게 움직였다. 설비운을 등 뒤로 돌려놓고 그는 두 발작국 앞으로 나아갔다.
 설비운은 비로소 십일 인의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었다.
 백의에 백건을 이마에 동여맨 동일한 복장의 십일 인, 백건에는 선명하게 커다란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 무(武) ―
 그 글자를 보는 순간 설비운은 둔탁(鈍濁)한 쇠망치가 가슴을 쳐오는 충격을 느꼈다.
 “마······ 만무궁!”
 설비운은 휘청 두 걸음을 물러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때 백의인 중 한 사람이 주석빈과 정면으로 마주섰다.
 그 사람은 바로 만무공주 강옥기였다. 그녀의 옥용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왔으나 지금 그 얼굴은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주석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깊은 혜안에는 소리없는 격동이 출렁였다.
 “주석빈! 당신은 제 아버님을 죽이지 않아도 자연히 만무궁의 공주가 될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제 아버님을 죽였어요.”
 만무공주는 심중에 격동이 이는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다시 말을 이었다.
 “수많은 날들, 나는 당신의 행동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 왔어요. 도대체 당신이 왜 그런 짓을 해야만 됐는가를 알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지금껏 팔 년이 흐른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는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어요. 이제 당신은 말해주셔야 돼요.”
 그녀의 음성은 서리서리 차갑기 이를데 없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잔잔한 애절(哀切)함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 듯 했다.
 주석빈은 말이 없었다. 단지 텅 빈 동공에는 짙은 고뇌만이 가득 덮여가고 있을 뿐이었다.
 만무공주는 주석빈의 고뇌어린 동공을 바라보며 불현듯 가슴 한쪽이 저려왔다.
 언제였던가? 그녀가 주석빈에게 수줍은 첫사랑을 고백할 때, 그 날도 주석빈은 저렇게 암울한 눈빛으로 먼 산을 향하고 있었다.
 만무공주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머리에서 지웠다.
 그녀는 품 속에서 조그만 옥패와 찢어진 옷자락을 꺼내 들었다.
 “이것은 당신의 물건들이에요. 아버님의 시신 옆에 옥패(玉佩)가 떨어져 있었죠. 이 옷자락은 아버님이 움켜쥔 손 안에 들어 있던 것이에요. 자 똑똑히 보세요.”
 그녀는 주석빈의 앞으로 옥패와 옷자락을 내밀었다. 그 손길이 가엾게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주석빈은 떨리는 강옥기의 손길을 아련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렇소. 그것들은 틀림없는 내 물건이오.”
 만무공주는 소리없이 웃었다.
 “당신은 내가 보아왔던 사람 중에 가장 솔직(率直)한 사람이었어요. 여전(如前)하군요.”
 돌연 만무공주의 옥용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하면서 한기가 풀풀 날리더니 앙칼진 외침이 터졌다.
 “왜······ 왜 아버님을 죽인 거예요? 대답해요!”
 파르르 떠는 만무공주의 교구를 바라보며 주석빈은 쓰디 쓴 미소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고뇌, 짙디 짙은 고뇌가 주석빈의 전신을 휘덮었을 뿐이었다.
 “대답해요.”
 하지만 주석빈은 대답이 없었다.
 “변명이라도 해요!”
 만무공주의 귓전에 들려오는 것은 그저 바람소리뿐이었다.
 “당신이 정말 제 아버님을 죽였나요?”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짐승보다 못한 인간아!”
 만무공주의 옥수가 세차게 허공을 갈랐다.
 펑―!
 “으― 윽!”
 주석빈은 앞가슴에 일장을 정통으로 맞고 낙엽처럼 굴렀다. 입가로, 가슴으로 검붉은 선혈이 낭자하게 번졌다.
 “주대가!”
 설비운이 사색이 되어 몸을 날리려는 순간이었다. 주석빈의 쩌렁한 일갈이 터졌다.
 “비운! 움지이지 마시오!”
 설비운은 그 한마디에 돌처럼 굳었다.
 주석빈은 고함을 지르고는 고검을 지팡이 삼아서 힘겹게 일어섰다.
 만무공주의 일장이 다시 허공을 갈랐다.
 펑―!
 “크으윽―!”
 더욱 참혹한 비명이 터지고 주석빈은 공주의 무공수위에 수십 번이나 굴러 거목에 부딪히고서야 겨우 몸을 가눴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다시 일어섰다.
 만무공주의 눈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어났다.
 “왜? 왜 대항하지 않나요? 왜 도망가지 않나요?”
 주석빈은 역시 대답이 없었다. 마치 입을 커다란 자물쇠로 걸어 잠그기라도 하듯이 말이 없었다.
 만무공주는 주석빈을 오랫동안이나 말없이 바라보았다.
 갈등이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교차되는 것은 분명 갈등이었다. 그것은 실로 상상외의 일이었다. 자신의 친부를 죽인 살인자에게 갈등을 느끼리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일이었다.
 긴 침묵 끝에 만무공주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제 아버님을 죽이지 않았어요.”
 뜻밖의 말에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의 얼굴이 일변했다.
 만무공주의 확신에 찬 음성은 지금까지 드러난 확실한 증거에 대한 역설이기에 충분한 것이었고, 그런 말이 만무공주에게 나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경악의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주석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도 또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뭔가 입을 열려다가 힘없이 고개를 돌렸다.
 십 인의 백의인이 일시에 한 걸음 성큼 나서며 짧게 외쳤다.
 “공주! 주석빈은 분명······.”
 “닥쳐라!”
 만무공주의 일갈에 백의인들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주석빈을 여전히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생각일 뿐이에요. 이 옥패와 옷자락이 있는 한 그 사실은 번복될 수가 없어요. 실로 안타까운 일이죠.”
 그녀의 입가에 처연한 미소가 언뜻 스쳐갔다.
 “당신은 밝혀야 돼요.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 의해 누명을 썼다면, 그래서 그 누명을 쓴 채 죽어간다면 이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에요. 제발··· 제발 대답을 해봐요.”
 절대로 열릴 것 같지 않던 주석빈의 입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공주! 무의미한 일이오. 나에게 씌워진 누명은 너무도 완벽하오.”
 “누군가요? 누가 당신에게 누명을 씌웠나요?”
 주석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소. 나는 노력했었소. 처절하게 발버둥쳤다고 해야 더 적합하겠지. 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밝혀낼 수가 없었소. 내가 알아낸 사실은 나에게 완벽한 올가미가 씌워져 절대 누명을 벗을 수가 없다는 것 뿐이오.”
 만무공주는 묵묵히 주석빈의 말을 들었다.
 “내가 발버둥 쳤던 것은 결코 목숨이 아까와서가 아니오. 이 더러운 누명을 벗을 수만 있다면 나는 어떠한 짓이라도 했을 것이오.”
 만무공주는 창백하게 질린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긴 침묵끝에 그녀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증거··· 증거(證據)가 없인 번복(飜覆)될 수가 없어요. 당신이 비록 결백하다 해도···.”
 주석빈은 그녀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소. 내가 침묵을 지켰던 이유를 알려주는 것으로 족하오.”
 만무공주는 입술을 악물었다.
 “나는 아버님 시신 앞에서 맹세했어요. 당신을 반드시 죽이겠다고···.”
 “당연··· 하오.”
 “당신을 죽여야만 해요.”
 그 말에 어떠한 대꾸도 없었다.
 “당신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우리를 죽이는 것 뿐이에요. 당신이 최선을 다한다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죠.”
 그는 침묵으로 만무공주의 말을 듣기만 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겠어요. 당신도··· 조금 전처럼 대항치 않는 어리석음은 범치 마세요. 대항할 것을 약속해요. 당신의 눈빛에는 아직 살기가 어리지 않고 있어요.”
 주석빈은 그제서야 담담히 입을 열었다.
 “살기 없는 눈동자가 왕왕 무서운 결과를 빚는 법이오.”
 주석빈의 말이 끝나자 만무검관수들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석빈은 태산처럼 우뚝 선 채 한곳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살을 에이는 살기가 순식간에 주위를 동결시켰다.
 “얍―!”
 만무공조의 명쾌(明快)한 기합(氣合)이 발해지고 쌍수가 춤을 추듯이 크게 흔들렸다.
 슈우우우우웅!
 참혹한 비명이 터지고 주석빈은 그대로 돌멩이처럼 휘날려 나뒹굴었다.
 만무공주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아! 당신······ 당신은 왜 약속을······.”
 주석빈은 대항하지 않았다. 그는 만무공주의 전력을 다한 일격이 그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주석빈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가 엎어져 있는 흙바닥은 순식간에 선혈로 범벅이 되었다.
 의외의 사태로 모두가 넋이 빠져가는 순간이었다.
 설비운이 비호같이 몸을 날렸다.
 “주― 대가!”
 그녀는 죽은 듯, 미동없이 주석빈의 몸통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돌연, 설비운은 발딱 고개를 쳐들고 만무공주를 향해 앙칼지게 외쳤다.
 “이 분은 절대 만무공주를 죽이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반드시 오늘의 일을 후회할 것이에요.”
 순간, 설비운은 주석빈을 껴안은 채, 몸을 그대로 절벽밑으로 날렸다.
 “앗!”
 만무공주의 신음이 터졌다.
 쉬이이― 익!
 만무검관수가 몸을 날린 것은 더욱 빨랐다.
 “멈춰라!”
 하지만 그들은 만무공주의 말에 몸을 멈추어야만 했다. 만무검관수는 허공에서 가볍게 선회해 땅에 내려섰다.
 “공주! 어찌 역도를 그대로······.”
 만무공주는 대꾸도 없이 절벽끝으로 황망히 다가섰다. 설비운과 주석빈의 몸은 이미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아―!”
 만무공주는 비틀비틀 몇걸음 물러섰다.
 긴 침묵이 흘렀다. 정적 속에 한 여인의 울먹이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죽었겠지?”
 누군가 짤막히 대꾸했다.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손으로 역도를······.”
 “그는······ 역도가 아니야! 그의 행동은······, 모두 돌아간다.”
 그녀는 어느새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5)
 
 
 설비운은 둥줄기를 파고 드는 차디찬 음기에 부시시 눈을 떴다.
 죽지 않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절벽 끝에 늘어진 넝쿨이 아직도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다.
 설비운은 넝쿨 때문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생각도 잊고 황급히 어둠에 잠긴 사위를 휘둘러 보았다.
 약 삼 장 떨어진 거리에 희미한 물체가 보였다.
 “주대가!”
 설비운은 악을 쓰듯 외치며 달려갔다.
 주석빈은 안타깝게도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찬란한 밤하늘을 향해 맑게 떠져 반짝이고 있었다.
 “주대가!”
 설비운은 주석빈의 피흘리는 가슴에 엎어져 오열했다.
 주석빈의 희미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그때 들려왔다.
 “나는··· 틀렸소.”
 “안돼요! 당신이 돌아가시면 안돼요.”
 “비운, 누구나 한 번은 죽기 마련이오.”
 그의 숙명론적인 말에 설비운은 그저 눈물만을 흘려야 했다.
 “흐흐흐흐흑!”
 설비운은 한없이 오열할 뿐이었다.
 돌연 설비운은 울음을 그치고 주석빈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 보았다.
 그리고는 처연히 입을 열었다.
 “주대가! 제가 당신과 함께 죽지 못함을 용서하세요.”
 주석빈은 잠시 의아(疑訝)로운 기색이었으나 곧 담담(淡淡)히 웃음을 띄웠다.
 설비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주석빈은 설비운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곧 알 수 있었다. 그는 설비운을 향해 나직이 한숨을 터뜨렸다.
 “비운! 무의미한 일이오. 옷을 입도록 하시오.”
 그러나 설비운은 쉬임없이 옷을 벗었다.
 잠시 후 알몸이 된 그녀는 주석빈의 옷을 묵묵히 벗기기 시작했다.
 “주대가! 당신의 누명을 벗길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에요. 저는 당신의 아이를 낳겠어요.”
 주석빈은 씁쓸히 웃었다.
 “비운! 한 번의 정사로 어찌 아이를 낳을 수 있겠소.”
 “아니에요. 여자는 이런 일에 민감(敏感)하답니다. 당신은 거절(拒絶)하시면 안돼요.”
 주석빈은 말없이 질끈 눈을 감았다.
 그것은 거대한 바다였다.
 그 끝없이 넓은 바다에 두 사람은 두 줄기 파도되어 치달렸다.
 누가 바다를 무정하다고 말했는가? 달빛 아래 비추어진 바닷물은 마치 비단폭처럼 부드럽고 윤기가 있었다.
 바다는 사람의 생명과도 같이 때로는 파도가 거세게 휘몰아치고 때로는 한없이 평온했다.
 설비운과 주석빈은 서로 한몸 되어 감미로운 바다를 유영했다. 그들의 심정은 마치 달빛에 비춰지는 바다와도 같았다.
 주석빈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일생 중에 가장 행복하고 값진 순간이었다.
 돌연, 바다 수면 가까이 찬란한 유성이 꼬리를 끌며 지나갔다.
 비록 순식간이기는 했지만 바다는 이때 더욱 아름다운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주석빈은 돌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는 드디어 소원을 이룩했소.”
 설비운은 그의 품에 안겨 촉촉히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게 무슨 소원이죠?”
 주석빈은 더욱 으스러져라 그녀를 껴안으며 신념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죽어가는 그의 팔에는 눈에 띄게 힘이 줄어들고 있었다.
 “유성이 스쳐갈 때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은 분명히 이루어진다고 했소.”
 설비운은 한없이 깊고 맑은 눈에 사랑을 가득 담았다.
 “그건 아주 오래된 아름다운 전설이에요. 헌데 유성이 흘러가는 그 짧은 순간에 소원을 빌 수 있을까요?”
 주석빈은 담담히 웃으며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기어코 해냈소.”
 “무슨 소원을 비셨죠?”
 주석빈은 철부지 소년처럼 씨익 미소를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설비운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소원은 바로 그녀의 소원이라는 것을······.
 주석빈은 마지막 불꽃이 타듯 자신의 생명이 한순간 환하게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 불꽃이 꺼지면 자신의 생명도 꺼지리라.
 주석빈은 설비운의 손을 가슴께로 끌어 올렸다.
 “나는 영웅이오!”
 “그래요. 당신은 영웅이에요.”
 “나는 고독하오.”
 “제가 당신의 고독을 풀어드렸잖아요.”
 “고마왔소. 비운!”
 “저는 당신이 한없이 고마운 걸요.”
 “우리 못다 한 사랑은 내세(來世)에 지속되리다.”
 “저도 곧 당신을 따라 가겠어요.”
 “비운, 울지 마시······.”
 주걱빈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꺾여졌다.
 “주······ 대······ 가······.”
 설비운은 울지 않으려 입술을 악물으며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여기, 한 영웅이 잠들었다.
 유성을 유난히도 좋아했던 영웅, 그는 유성에 마지막 소원을 빌고 웃으며 죽어갔다.
 그리고 계곡에서 한 여인의 애잔한 흐느낌이 사흘 밤낮을 쉬지않고 계속해서 들려왔다.
 
 
 제4장 위대한 탄생의 시발
 
 
 (1)
 
 
 강서성(江西城) 흥국현(興國縣), 여기서 서남쪽으로 약 오십리쯤 가노라면 산세가 험악하고 황량한 산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산중에는 오랜 연륜을 가진 한 고찰이 우뚝 서 있었다.
 보화사(寶華寺)라는 이름의 이 고찰은 황량한 산중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천하에 널리 알려진 명찰(名刹)이었다.
 역사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보화사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에 건축된 사찰로 알려졌다.
 또한 당나라 초엽 마조선인(馬祖仙人)이 득도(得道)한 곳도 바로 이 절이라 알려져 있다.
 고풍(古風) 창연한 보화사는 그 규모가 웅장하고 단청(丹靑)이 으리으리하여 가히 천하의 명찰다운 풍모를 엿보였다.
 절로 들어서서 세번째 문을 통과하면 영골전(靈骨展)이 있다. 영골전 앞에는 석비(石碑)가 세워져 있다. 석비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었다.
 ― 역대 고승들의 법체(法體)를 화장하여 이곳에 삼가 안치하였노라!
 석비가 있는 광장 아래쪽에는 돌층계가 있다. 그 층계 양쪽으로 잣나무 두 그루가 구름을 뚫고 우뚝 서 있었다.
 이토록 높고 큰 잣나무에는 전설이 어려있으니, 그것은 마조선인께서 득도하신 직후 그 기념으로 식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잣나무는 줄잡아 천수백 년의 연륜을 가진 셈이다.
 어느날 이른 아침, 아직 햇살이 피어오르지 않아 아침 안개가 온 산을 우유빛으로 감싸고 있을 무렵, 사찰승려들의 밥을 짓는 주방에서는 한참 바쁘게들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한 철솥이 높이 걸려있고, 장작불길 거센 아궁이 앞에는 노승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노승은 언뜻 보아도 백여 세가 되어 보였을 정도로 늙어 있었다. 아니 그보다도 더 되었으면 되었지 적어보이지는 않았다.
 온통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에 나이를 추정키 어려운 초라한 노승이 아궁이 앞에 앉아 있었다.
 노승은 눈을 감고 연신 꾸벅꾸벅 졸면서도 손만은 계속 움직여 아궁이가 터져라 장작을 쑤셔 넣고 있었다.
 그가 졸고 있는 것인지 불을 떼고 있는 것인지 판단키 어려웠다.
 아무튼, 아궁이 속에는 시뻘건 화염이 이글거리며 거세게 타올랐다. 노승은 쉬지 않고 장작을 넣고 또한 끊임없이 졸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끄덕이는 머리는 거의 불가에 닿아 화끈한 열기를 느낄만도 하건만 노승의 고개는 규칙적인 왕복을 계속했다.
 오직 조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낙인 것처럼······.
 이때 한쪽에서 부지런히 소찬(素餐)을 준비하던 젊은 승들이 코를 벌름거리면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킁― 킁―!”
 그들의 콧속으로 파고드는 냄새가 어떤 것인지 알아차린 승들은 금세 안색이 일그러졌다. 그 일그러진 안색은 금세 험악하게 변했다.
 바로 노승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궁이로······.
 승들이 맡은 냄새는 다름 아닌 아궁이 위의 철솥에서 죽이 타는 냄새였던 것이다.
 노승은 죽이 타는지, 젊은 승들이 노려보는지 전혀 의식치 못하고 계속 장작을 쑤셔넣고 있었다.
 이윽고, 체격이 우람한 한 승려의 입이 귀밑까지 쭉 찢어지더니 벼락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내 이 늙은이를 오늘만큼은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
 젊은 승은 고함과 함께 주먹을 쳐들고 달려나갔다. 그의 노여움은 불제자로서 좀 심한 것이었으나 옆에 있던 다른 젊은 승들은 어느 누구 하나 말리려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노승은 본래 보화사의 승려도 아닐뿐더러 신원이 모호한 떠돌이 중이었다. 이러한 노승이 어느날 나타나 보화사에 몸담게 되었고, 주방 일을 돕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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