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로무정 1권
서장(序章)
그들은 죽음의 심판자(審判者)였다.
그들의 검(劍)은 무정(無情)하고 늘 피(血)를 그리워 했다한다.
사랑과 정(情) 그따위 것들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들을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죽였다.
이미 죽인 것은 잊어버리고 못다 죽인 이름만을 기억했다.
오직 죽음(死)을 위하여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심판을 위하여 그들의 검(劍)은 피(血)를 불렀다.
그들은 결코 서두르지는 않았다.
천천히, 지극히 천천히 온 세상을 천천히 피로 씻었다.
그리고 이 추악한 무림(武林)을 단호히 심판했다.
죽음의 심판자!
무한히 드넓은 중원무림에 영원히 기억될 이름.
강호무림인(江湖武林人)들의 뇌리에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이름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죽음의 심판자!
백팔사혼혈영대(百八死魂血影隊)
백팔사혼혈영대는 중원무림사(中原武林史)에 있어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마명(魔名)을 얻은 유일한 이름이다.
그들은 무림이 멸망하지 않는 한 모든 강호인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저주와 공포(恐怖)의 이름으로 백팔 명(百八名)의 살귀(殺鬼)를 기억할 것이다.
이들을 상징하는 것은 단 두마디뿐이다.
피(血), 그리고 죽음(死).
이들은 단 백팔 명으로 구성되었을 뿐이지만, 고금(古今)을 통틀어도 이들처럼 최강(最强)의 무적고수(無敵高手)들로 구성된 방파( 派)는 없었다.
결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백팔사혼혈영대.
이들은 폭풍(暴風)이었다. 가공할 피바람(血風)을 몰고 오는 광란의 폭풍!
이들이 스쳐가는 곳에 생(生)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죽음(死)이 있을 뿐이었다.
일단, 백팔사혼혈영대의 목표가 된 방파는 일문(一門)의 몰살은 물론, 구족(九族)까지 깨끗이 쓸려야 하는 참혹한 비극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은 은연중 강호의 철칙이 되었다.
백팔사혼혈영대.
이 위대하고 가공할 이름은 신비(神秘)의 대명사였다.
강호인들은 그들이 어느 곳에서 나타나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수가 없었다.
신출귀몰(神出鬼沒)!
백팔사혼혈영대의 모든 것은 돌 속에 파묻힌 보석처럼 너무도 철저한 신비에 묻혀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이 이름을 떠올리는 자는 바로 지옥의 최명부(催名府)에 족보가 올라간다.
이 한 마디를 알 뿐이다.
아무도, 그 누구도 설사 자신 혼자 있는 측간에서라도 그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들은 저기에도 있으며, 이곳에도 있는 어쩌면 자신의 그림자 속에 있을 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 목표로 각인되는 순간부터는 곧바로 염라대왕의 회명록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었으니, 자결을 한다고해도 그 시신마저라도 찾아내어 끝내 가루도 남김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들이 무림에 남긴 신화(神話)란 그중에 대표적인 일들만을 꼽아 보더라도 하루를 꼬박 얘기해도 다 못할 정도였다.
삼십 년 전, 흑도(黑道)와 녹림(綠林)을 통합하여 일약 흑도대종사(黑道大宗師)로 군림했던 일대거마(一代巨魔)가 있었다.
혈세추혼마(血洗追魂魔) 구유마제(九幽魔帝)!
그는 흑도무림(黑道武林)을 통합한 이래, 일약 중원제일거마(中原第一巨魔)로 부상(浮上)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억세게도 운이 없는 사나이였다.
그가 그런 자리에 오른 지 채 한 달도 못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한참 기루에서 기녀들을 옆에 끼고 자신에 대한 얘기로 침까지 튀겨가며 흥청거렸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술 몇 병이 그의 앞에 창창하게 펼쳐져 있는 행복한 일생을 단 한순간에 앗아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술이 그의 객기를 자극했고, 또한 그 주위에는 여자들까지 있어 그를 죽음으로 이끄는 데 한 몫, 단단히 했던 것이다.
무심코 던진 그 한마디 중에는 절대로 입에 올려서는 안되었을 이름 하나가 들어 있었다.
백팔사혼혈영대!
그 한 마디를 입에 떠올린 죄로 그는 사지(四肢)가 찢긴 처참한 시체로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낙양(洛陽) 한복판에 개도 멀찌감치 피해갈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 되어 나뒹굴게 되었다.
실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백팔사혼혈영대 중의 단 일기(一騎), 그것도 최고 하수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단 한 명에 의해 저질러진 일이었으니 이 어찌 경심동백(驚心動魄)할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강호인들은 그저 세차게 몸서리를 칠 뿐이었다.
이십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천하제일(天下第一)의 통신망을 갖고 있다는 개방( )!
그런데 그 개방의 북육성(北六省) 삼십육 개 분타가 단 하룻밤만에 무참하게 몰살당했다.
백팔사혼혈영대!
동네를 떠도는 똥개의 어미가 어떤 개들과 교미를 했으며 지금 그 개들이 어디 누구의 뱃속에 들어가 있는지까지를 알아내는데 단 반나절을 넘기지 않는다는 개방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영문도 모른 체 귀를 막히게 하고 눈을 감기운 것이다.
공포(恐怖). 단지 그들은 손모아 기도할 뿐이었다.
제발 자신들의 망할 주둥아리가 잠꼬대로라도 그들의 이름을 담지 말기를 간절히 원할 뿐이었다.
그들은 모든 정파(正派)와 모든 사파(邪派)중에서도 단연코 최상위(最上位)에 오르는 이름이다.
정사(正邪)를 초월하여 고고히 홀로 선 무림 최강의 방파!
무적(無敵)이란 말은 바로 이들을 위해 태어난 말이다.
과연 그들은 누구인가?
백팔 명의 살귀(殺鬼)들로 이루어진 지옥에서 온 특급살귀단, 과연 그들은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일까?
끝없는 신비와 공포에 싸여 있는 죽음(死)의 상징은 스물스물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전설지장(傳說之章)
또 하나의 전설(傳說)이 있었다.
칠백 년 전(七百年前), 낙양성(洛陽省) 한귀퉁이에 조그만 방(榜)이 나붙었다.
그것은 지극히 작고 초라하기 짝이 없는 방(榜)이었다. 그리고, 그 방(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當今武林歸一統天下
이제 무림(武林)은 하나로 통합되리라!>
너무도 광오(狂傲)한 말이었다. 그리고 광자(狂者)의 망언(妄言)이기도 했다.
아무도, 그 누구도 이것을 믿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며 침까지 뱉을 정도였다.
급기야, 방(榜)은 아이들의 낙서(落書)로 난장판이 되어 구겨지고 마침내는 갈기갈기 찢어져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 방(榜)을 무시한 무림인들이 치룬 대가는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었다. 단지 종이쪼가리에 불과한 방 하나가 그들을 피바다로 쑤셔 넣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거대한 피의 폭풍이 중원(中原)을 모조리 휘말아 올려 땅바닥에 내동댕이쳐 박살낸 것이다.
동(東), 서(西), 남(南), 북(北).
사 인(四人)의 신비고수(神秘高手)는 그렇게 사개방위(四個方位)에서 동시에 출현했다.
한결같이 평범한 청의(靑衣)를 입고 있었으며, 눈부신 백면(白面)을 가지고 있었다.
사 인의 신비고수!
그러나 낙양성에 붙었던 방(榜)을 무시했듯 아무도 그들을 주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바탕의 피바람을 맡고서도 여전히 멍청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도 뻔했다.
아무도 주시하지 않았던 이 사 인의 신비고수에 의해 무림천하는 피를 토하게 된 것이다.
경동천하(驚動天下)!
그것은 실로 천하를 경동시킨 고금미증유(古今未曾有)의 대참사(大慘事)였다.
사 인의 신비고수는 동서남북 네 곳에서 서서히 중원으로 좁혀 들어왔다.
추풍낙엽(秋風落葉)!
말그대로 태풍 앞에 가랑잎처럼 남칠(南七), 북육성(北六省)의 최절정고수(最絶頂高手)들이 차례차례 목이 날아가고, 중원백개문파(中原百個門派)의 장문지존(掌門之尊)들이 모조리 허리가 동강났다.
일세(一世)를 풍미했던 당대의 영웅(英雄)들이, 산천초목(山川草木)을 떨어 울리던 거마효웅(巨魔梟雄)들이 그저 풀잎에 이슬처럼 스러져 간 것이다.
피의 혈로(血路)만이 끝없이 이어졌다.
중원을 피로 적신 그들은 한곳에서 합류했다. 바로, 그 초라한 방(榜)이 붙여졌던 곳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다시 한 번 통천가공할 사실이 밝혀졌다.
복면을 벗어던진 사 인의 신비고수!
그들은 이제 약관(弱冠)을 갓 벗어난 홍안(紅顔)의 절세미공자(絶世美公者)들이 아닌가?
무림천하는 그저 경악할 뿐이었다.
바로 이때, 넋이 빠져 있는 무림인들의 뒤통수를 호되게 후려친 또 하나의 강풍(强風)!
사 인의 신비고수들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청강장검(靑鋼長劍)을 높이 빼어들고, 일성(一聲)의 사자후(獅子吼)를 터뜨린 것이다.
<獨尊天下 不死魔候尊(독존천하 불사마후존),
唯我永世 太陽府(유아영세 태양부)>
사 인의 신비고수들은 바로 불사마후존이 키워낸 불후의 걸작(傑作)이었던 것이다.
전설(傳說)! 그것은 전설이었다.
불사마후존(不死魔侯尊)!
그는 무림천하를 독패(獨覇)한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마웅(魔雄)이었다. 그는 예전에 자신이 말했던 무림을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들의 출현 이후 무림에는 정파(正派)와 사파(邪派)의 구별이 없어졌다.
오직, 태양부(太陽府)!
불사마후존이 이끄는 태양부만이 모든 이름에 우선했다.
불사마후존(不死魔侯尊)!
기이하게도 그는 홀연히 출연했던 것처럼 그가 키워낸 사 인의 신비고수와 함께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러나 그는 사라지기 전에 무림천하를 향해 한마디 말과 한 편의 시(詩)를 남겼다.
태양부(太陽府)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남긴 시(詩)의 비밀을 깨닫는 자 천하만세(天下萬世)에 유아독존(唯我獨尊)하리라.
天狹如掌(천협여장)
地廣如海(지광여해)
損而不盡(손이불진)
天孫天帝(천손천제)
하늘은 손바닥처럼 좁고,
땅은 바다처럼 넓다.
덜어도 다함이 없으니,
하늘의 후손이 하늘의 제왕이라.
무심한 것이 세월이다.
그렇게 가공스런 혈풍(血風)을 몰아쳤던 불사마후존도 그 세월이란 망각제에 의해 차츰 잊혀져 갔다.
그가 남긴 시(詩)의 비밀도 끝내 비밀로만 남겨졌다.
다만, 무림에 몸을 담은 자들이라면 오직 한마디를 영원히 기억할 뿐이었다.
- 태양부(太陽府)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운명지장(運命之章)
자금성(紫禁省)!
당금 황상(皇上)이 기거하는 황궁(皇宮)이다.
금전옥루(金殿玉樓)와 칠채단청(七彩丹靑)이 황실의 권위와 부(富)를 상징해주는 이곳,
세인(世人)들은 이곳을 가리켜 구중심처(九重深處)라 했다.
때는 엄동설한(嚴冬雪寒), 날카로운 얼음조각을 닮은 겨울바람은 혹독하게 자금성 곳곳을 채찍질하듯 사정없이 후려쳤다.
쌔애앵――!
뼈속을 에일 듯한 차가운 북풍(北風)이다.
한 칸의 밀실(密室).
언제부터인가 밀실 안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타오르는 황촛불이 실내를 은은히 밝혀주고 있었고, 그 황촛불의 노란 불빛을 받은 두 개의 그림자가 있다.
두 사람은 석상인 양 움직임이 없었다.
자단목(紫檀木)을 정교하게 깎아만든 태사의(太獅椅)에는 청수(淸秀)한 모습의 금의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이는 오순 가량쯤 되어 보였으며, 일견키에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용모였다.
유약해 보이면서도 전신에서 풍기는 고귀함이나 고아함, 덕망이 서린 모습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옷깃을 여미게 했다.
가히 만승지존(萬乘之尊)의 풍도(風度)를 엿보이고 있는 인물, 이 사람이 바로 당금 명(明)의 황제(皇帝) 영락제(永樂帝)였다.
그런데 무엇때문인지 지금 황제의 용안(龍顔)은 고심(苦心)의 빛으로 잔뜩 흐려져 있었다.
어떤 중대한 고사(苦事)가 있는 듯 했다.
황제 앞에는 자색궁장(紫色宮裝)을 입은 중후한 인상의 노관(老官)이 깊숙이 부복해 있었다.
정기로운 눈동자와 귀밑까지 뻗은 짙고 검은 검미(劍眉)는 젊은 미장부를 뺨칠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풍기는 위엄은 결코 황제에 못지 않았다.
대호(大虎)의 앞가슴처럼 늠름하고 당차 보이는 가슴은 가히 전형적인 무인(武人)의 풍도를 엿보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 역시 잔뜩 찌푸려져 비라도 내릴 것 같은 하늘처럼 고뇌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슨 일때문에 이 두 사람은 이토록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일까?
부복해 있는 노관인의 앞가슴에는 비단 강보(强保)로 싸여진 하나의 물체가 안겨져 있었다.
그것은 아기였다.
고사리같은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아기는 이제 태어난 지 얼마 안된 핏덩이인 듯 가끔 노관인을 바라보며 방실방실 티없이 순진한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노관인은 그때마다 암울한 눈빛으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으니 진정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긴 침묵을 깨고 노관인이 비장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폐하! 미신(微臣)은 이미 모든 각오가 되어 있사오니 어서 하명(下命)을 내려주시옵소서!”
그의 음성은 준렬했으나 심중의 격동을 참기 어려운 듯, 간간히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굳게 닫혀진 황제의 입은 좀체로 열릴 줄을 몰랐다. 그는 고뇌어린 시선으로 노관인과 강보에 싸인 아기를 몇번이고 번갈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황제는 큰한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힘없이 내밀었다.
“정위대장군(精危大將軍)! 아기를 짐에게 한 번 더······.”
황제는 심히 괴로운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눈 앞의 이 노관인이 바로 정위대장군이라니 진정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위대장군 능혁진(陵革鎭)!
그는 당금 명(明)의 일대명장(一代名將)이요, 곧 수많은 사람들이 추앙하고 있는 영웅(英雄)이었다.
그는 약관에 무과(武科)에 등과(登科)한 이래 수많은 전장(戰場)을 승승장구하며 오늘날 정위대장군이라는 막강한 지위까지 오른 백전노장이었다.
그가 수많은 전장을 돌며 세운 전공(戰功)이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그가 출전(出戰)한 전장(戰場)에서라면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듯 언제나 명(明)의 깃발이 나부꼈다.
패배를 모르는 장군이었고, 더구나, 그는 언제나 선봉에 서서 적을 격퇴시키는 용장(勇將)인 동시에, 모든 군략(軍略)과 병법(兵法)에 능통한 지장(智將)이기도 했다.
이십 년 전, 몽고족이 명(明)에 반기를 들고 대반란을 일으켰다.
명은 즉각 대군을 급파하여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몽고족의 위세는 가히 하늘을 찌를 듯하여 명의 대장군 두 명과 오십만 대군이 오히려 그들에게 몰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몽고족은 더욱더 사기충천하여 파죽지세로 명의 본토까지 침공해 왔다.
사직(社稷)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순간, 명의 국운(國運)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늠름하게 반군을 격퇴시키기 위해 출전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위대장군 능혁진이었다.
그는 정병(精兵) 삼십만을 이끌고 출전하여 만 삼개월만에 몽고의 대군을 통쾌하게 격퇴시켰다.
이 대전(大戰)은 불세출(不世出)의 영웅을 탄생시켰다.
그는 명을 구한 동시에 만 백성이 신봉(信奉)하는 우상(偶像)으로 받들어졌다.
그가 장도(壯途)에서 돌아오는 날, 거리에 몰려나온 수많은 백성들은 열화와 같은 함성으로 그를 맞았으며 황제까지도 친히 그를 배웅했다.
정위대장군 능혁진!
이 이름은 중원(中原)의 천공(天空)을 여지없이 꿰뚫었으며, 모든 무반(武班)들의 표상(表象)으로 굳어졌다.
그는 이처럼 명의 전사(戰史)에 영원히 남을 위대한 무인(武人)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당대의 영웅이 왜 이토록 암울한 눈빛으로 황제와 대좌하고 있는 것인가?
황제의 부름을 받은 그는 조심스럽게 황제에게 다가가 공손히 강보에 싸인 아기를 내밀었다.
황제는 묵묵히 아기를 받아들었다.
황제의 품에서도 아기는 여전히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음······.”
황제는 아기의 티없는 미소를 바라보다가 홀연 뜻모를 탄식을 불어냈다. 그것은 고통에 찬 신음이었다.
이윽고, 황제의 시선이 아기의 정수리 부위에 고정되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아기의 정수리, 그곳에는 실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괴한 형상이 뚜렷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가운데에 있는 불타는 듯한 커다란 홍점(紅點)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세 개의 희미한 선홍색 반점(鮮紅色班點)이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가?
진정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제 갓 태어난 아기의 머리에 어찌 저런 형상이 새겨져 있는 것인가?
이때, 황제의 입가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기 시작했다.
“트, 틀림없는 전륜성제상(轉輪聖帝相)이다! 이 아이는 전륜성제가 되어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 났으니······. 아아······.”
황제의 두 눈은 더할 수 없이 크게 부릅떠졌으며, 아기를 받쳐들고 있는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대관절, 전륜성제상이 무엇이길래 당금의 천자가 이토록 격동을 보인단 말인가?
전륜성제상(轉輪聖帝相).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이를 지니고 태어난 인물은 사해만방을 굴복시키는 만승제왕(萬乘帝王)이 된다는 것이다.
유사이래 그 어떤 영명(英明)한 황제들도 이룩하지 못했던, 만왕지왕(萬王之王), 제중지제(帝中之帝)가 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전륜성제의 상징인 네 개의 홍점(紅點)이 바로 불타(佛陀)의 정화(精華)가 모여 형상화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불타의 정화!
이것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신력(神力)과 신안(神眼)을 가진 전지전능의 불신(佛神)을 일컬음이었다.
이 전륜성제상을 타고 태어난 인물은 필연적으로 만인지상(萬人之上)의 권좌에 오르게끔 하늘이 점지한 인물인 것이다.
그러니 황제가 이토록 격동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고심에 차 있던 황제는 이윽고 땅이 꺼지는 듯한 장탄식을 불어내었다.
“이 아이가 짐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면 좋으련만 불행히도······.”
황제가 말끝을 흐리자 정위대장군은 더욱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어 침통하게 말했다.
“폐하! 이 아이가 황가(皇家)에서 태어나지 않고 미천한 미신의 가문에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이······.”
“흠······.”
황제는 심히 괴로운 듯 두 눈을 질끈 내리 감았다. 그의 내리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정위대장군 능혁진은 수심에 찬 용안을 바라보며 뜨거운 침묵을 삼켜야 했다.
이윽고, 그의 눈가에는 체념의 빛과 아울러 어떤 결의의 빛이 번뜩였다.
“폐하! 어서 미신이 스스로 이 아이의 목숨을 끊어 훗날의 우환을 미리 제거하게 윤허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는 말을 제대로 맺지 못하며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 모습을 보던 황제 역시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장군······.”
부자지정(父子之情)은 천륜(天倫)이라 하였거늘 아비가 제 손으로 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이 상황에 어찌 비통하지 않겠는가?
영웅의 눈물은 뜨겁게, 뜨겁게 뺨을 적셨다.
정위대장군 능혁진!
그는 우국충정(憂國忠情)에 불타는 대장부였으니 너무도 가슴찢어지는 일이었지만, 황실의 존엄과 안녕을 위해 자신의 혈육을 죽이는 대의멸친(大義滅親)의 길을 택한 것이다.
황제도 정위대장군 능혁진도 말이 없었다.
더할 수 없는 비애가, 또 한편으로는 뜨거운 감동이 그렇게 두 사람의 가슴을 흠뻑 적시고 녹아흐르는 촛불처럼 뚝뚝 떨어졌다.
얼마나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황제는 말없이 강보에 싸인 아기를 정위대장군에게 내밀었다.
“아기를······.”
정위대장군 능혁진은 일순 멈칫했으나 곧 결심을 굳힌 듯 묵묵히 아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준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미신의 뜻을 윤허해주신 것으로 알고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황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뜨거운 시선으로 이 우국충정에 불타는 신하를 굽어볼 뿐이었다.
정위대장군 능혁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돌연 황제의 묵직한 일성이 떨어졌다.
“장군! 그 아이는 하늘이 점지하신 천인이오, 아무리 사직(社稷)을 지키기 위한 대의명분이 있다 해도 어찌 천의를 어기겠소? ”
“폐······ 폐하.”
정위대장군 능혁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갑자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황제도 용안에 온화한 미소를 띄웠다.
“그 아이를 부디 잘 거두기 바랄 뿐이오.”
“폐······ 폐하! 폐하의 성은(聖恩)은 미신 백골(白骨)이 진토(盡土)된다 한들 어찌 잊겠습니까마는 부디 그 말씀만은 거둬 주시옵소서! 그것은 진정 아니될 말씀이시옵니다. ”
“아니오, 장군! 그 아이가 전륜성제상을 타고 태어났으니 만약 황좌(皇坐)에 오르더라도 반드시 그 아이는 만 백성을 총애할 성군(聖君)이 될 것이오. ”
황제의 용안에는 결연한 확신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장군이 사직을 위해 혈육을 희생시키려 했듯이 짐 역시 백성과 대명을 위한 일이라면 굳이 황좌를 고집하진 않겠소. 이것은 천의이니 그 천의를 어겨 더 큰 화를 부르는 일이 있어선 아니될 것이오.”
“폐하!”
정위대장군 능혁진은 그 자리에 쓰러지듯 엎드려 격동의 눈물을 쏟았다.
자금성의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전륜성제상!
이 천고의 골상(骨上)을 타고 태어난 한 아이의 운명을 결정지은 밤이었다.
과연 앞으로 이 아이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제1장 태자루(太子樓)의 피(血)
(1)
친구여!
자네의 가슴에 내 검이 박히더라도 언제나처럼 웃어주게나.
부디 내 무정한 검을 탓하진 말게.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무림에 태어났다는 것뿐, 어차피 피와 죽음은 우리의 숙명이 아니던가?
친구여!
부디 고이고이 잠들게.
그리고 우리 굳게 약속하세.
내세(來世)에는 절대로 이 비정(非情)한 무림이라는 세계에 태어나지 않기를.
번쩍!
한 차례 섬광(閃光)이 일었다. 그리고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를 갈랐다. 찰나지간에 온 천지는 시퍼런 마기(魔氣)에 휩싸였다.
휘이잉······.
때마침 세찬 바람이 낮게 깔린 먹장구름을 거대한 흑룡(黑龍)의 꿈틀거림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갔던 관도(官道)는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썰렁했다. 하기사 오늘같은 이런 날씨에 이 길을 걷는다면 세찬 폭우를 만나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다.
양편에 무성히 자란 키 큰 잡초들이 쉴새없이 부는 차디찬 바람에 자꾸만 전신을 세차게 떨고 있었다.
후두둑······.
한껏 물을 머금고 있던 먹장구름은 무거웠던지 몇 개의 빗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삽시간에 그 빗발은 거센 폭우로 변해갔다.
쏴아아······.
폭우는 점점 그 기세를 더해가고 먹장구름은 그에 따라 거친 요동을 보였다.
번쩍! 섬광에 짙게 깔린 어둠이 한순간 베어져나갔다. 그러자 세 개의 인영(人影)이 잠시지만 확연히 관도 위를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세 사람 모두 핏물을 뒤집어 쓴 듯한 적포(赤袍)에 사악한 마기를 내뿜고 있는 혈검(血劍)을 패용하고 있었다. 온통 붉은색 일색인 그들의 몸에선 질식할 듯한 기운이 뭉클뭉클 피어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적포에 혈검을 품고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용종(龍種) 홍화류를 타고 있었다.
따가닥 따가닥······.
세 필의 홍화류는 폭우에 아랑곳없이 천천히 내달렸다.
번쩍! 한 차례 섬광이 다시 일자 그들의 모습이 좀더 분명히 드러났다. 그들의 모습은 언뜻 보면 세쌍동이로 착각을 일으킬 만큼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그렇게 같아 보이게 한 것은 그들에게서 한결같이 질식할 듯한 기운이 풍기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서 인성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데에서 오는 냉막함과 몸 전체에 짙게 배어있는 살기(殺氣)였다.
그들은 세찬 폭우에도 불구하고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조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유연한 반동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들이 기마술에 매우 능숙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이런 폭우 속을 뚫고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적포와 혈검 그리고 홍화류!
저주와 피로 얼룩진 죽음의 그림자 백팔사혼혈영대의 상징이다.
(2)
절강성(浙江省)의 항주(抗州)는 중원제일(中原第一)의 색향(色鄕)이다. 번잡스러운 상가를 지나면 서문이 있고 그곳에는 십 리에 걸쳐 긴 홍등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홍등가는 태고이래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생업을 가진 여인들이 무리지어 사는 그들 나름대로의 삶의 터전이었다.
밤이 되면 환하게 홍등이 밝혀지고 또 하나의 야시(夜市)가 서는 것이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축축한 내음으로 이곳은 언제나 음습하게 젖어 있었다.
이 밤도 역시 그랬다. 거리엔 야화(夜花)들이 피어나고 노류장화(路柳墻花)를 찾는 한량들로 혼잡하게 붐볐다.
“하하하······!”
“호호호······!”
호탕한 웃음소리, 과객을 유혹하는 간드러진 교성들, 시가는 이곳저곳에서 내뿜는 뜨거운 열기와 기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홍등가 중에서도 대표적 명물을 꼽으라면 단연 태자루(太子樓)가 꼽힌다.
태자루는 중원제일의 기루(妓樓)인 동시에 제일의 도박장이기도 했다. 술, 여자, 그리고 도박, 이곳엔 없는 것이 없었다.
한량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비된 제일의 풍류장(風流莊)인 것이다.
태자루는 삼층의 호화로운 건물로 이루어 졌으며 입구에는 오색등이 화려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 등불은 밤이든 낮이든 사시사철 계속 켜져 있었다.
대부호와 거상(巨商), 심지어는 황궁(皇宮)의 고관대작들로 오늘도 태자루는 만원이었다.
창 밖에는 폭우와 뇌성벽력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태자루 안은 오직 향락과 광란의 열기로 그 도(度)를 더해가고 있을 뿐이었다.
일층은 도박장이었다.
도박장 안은 도박에 미친 자들의 열기로 시끌벅적했고 소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희열에 찬 환성과 대소(大笑)가 터지는가 하면 온통 땅이 꺼지는 듯한 비탄의 한숨도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모두가 도박에 미쳐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광적인 중독이었다. 땅을 팔고 집을 잡히고, 심지어는 마누라가 미인이라고 자기 처를 걸고 도박을 한다.
파멸되어 가는 인생을 그들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것이 도박이다. 본전만, 그래 본전만 하는 식으로 오대(五代)가 놀고 먹어도 될 돈을 그렇게 한순간 날려 버리는 것이다.
짧은 시간내에 온갖 희비가 벌어지는 곳이기에 그 풍경도 광적(狂的)이었다.
이층은 기루였다.
바닥에는 짙은 감빛의 융단이 넓게 깔려 있고 그 위에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진귀한 탁자들이 즐비했다. 탁자마다 호사스런 차림의 한량들과 꽃보다 아름다운 가화(佳花)들이 가득했다.
“하하하······!”
“호호호······!”
한량들은 자신의 부와 호기로움을 과시하고, 기녀들은 속으로 부지런히 은자(銀子)를 헤아리며 그렇게 마냥 흥청거림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한쪽 창가에 앉아 있는 청의인(靑衣人)곁에는 유일하게 기녀들이 없었다.
그는 한량들이 기녀의 가슴을 만지건 치맛속으로 손을 집어넣던 아무 관심이 없는 듯 쏟아지는 폭우를 바라보며 외로이 자작(自酌)을 잇고 있었다.
대략 이십 세쯤 되었을까?
그는 결코 화려한 차림은 아니었다. 그저 누구나 입는 평범한 청의(靑衣)를 걸쳤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수백 명의 한량보다도 수백 명의 가화보다도 유독 눈길을 끌고 있었다.
여인네들처럼 희고 맑은 피부, 끝이 약간 치켜 올라간 짙은 검미(劍眉)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우뚝 선 콧날이 강한 의지를, 무심하게 닫혀진 석류처럼 붉은 입술이 그의 냉정함을, 어쩌면 평범한 미장부라고만 할 수도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섬광(閃光)처럼 빛나는 두 눈이 그를 전혀 새로운 얼굴로 만들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무서운 한의(寒意)를 느끼게 하는 검은 무저(無底)의 동공, 거기서 뻗치는 섬뜩한 광채와 사람의 마음을 빨아들이는 듯한 마력(魔力)의 시선, 한 번 본 사람은 그 눈빛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창 밖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간간히 자작을 이을 뿐 그의 옆을 스치며 교태로운 추파를 던지는 기녀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술과 폭우, 다만 그 두 가지를 즐길 뿐이다.
따가닥 따가닥······.
세 필의 홍화류는 오색등이 명멸하는 홍등가로 접어들고 있었다.
번쩍! 꽝꽈르······릉!
폭우와 뇌성벽력은 여전했다.
홍화류를 탄 삼 인의 적포인들 역시 똑같은 자세 그대로였다.
어느 순간 세 필의 홍화류는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한 곳에서 멈췄다. 그곳은 태자루 앞이었다.
적포인들은 기수를 돌려 태자루 입구로 말을 몰았다.
꽝!
세 필의 홍화류는 머리로 태자루의 입구를 박살내며 그대로 밀어닥쳤다. 도박에 미쳐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그저 또 어떤 놈팽이가 돈을 잃고 객기를 부리나 보다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한 사람, 두 사람······ 시뻘건 홍화류, 그리고 적포와 혈검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대로 입을 딱 벌린 채 돌덩이처럼 굳고 말았다.
일순 질식할 듯한 죽음의 기운이 장내를 휘감아 돌았다. 누구 하나 뭐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말같은 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대신 그들은 조금씩 떨기 시작했다. 경련은 입가에서 시작해 삽시간에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들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오직 사(死)라는 한 글자뿐이었다.
광란의 열기에 휩싸여 있던 도박장 안은 순식간에 죽음의 공포로 물들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세 필의 홍화류는 수백 개의 화석(化石)들을 뒤로하고 이층 기루로 향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기루에서도 도박장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이 있었다. 부들부들 전신을 떨던 기녀들이 이윽고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아아악······!”
그 비명과 함께 이제껏 전혀 표정이 없던 세 적포인의 입가에 한 줄기 냉소가 스쳐갔다. 그 순간 허공으로 수없이 많은 혈선이 섬전(閃電)처럼 뻗어갔다. 그 빛줄기가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휘감았다.
“커어억······ 크아아악······!”
오장(五臟)을 쥐어 뜯는 듯한 처절한 비명이 태자루를 뒤덮었다. 피가 쉼없이 치솟고 끊어진 살점이 날아 올랐다. 얼굴 반쪽이 통째로 날아가고 가슴이 박살난 채,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죽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 체 억울하게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비명은 끝없이 이어지고 천정은 온통 검붉은 피로 얼룩지고 바닥은 끈적한 피비린내를 한껏 머금었다.
적포인들의 쌍수(雙手)가 춤추는 곳에 오직 피와 죽음이 있을 뿐이다. 순식간에 지상의 천국이었던 태자루를 광란의 아수라장(阿修羅場)으로 뒤바꿨다.
믿을 수 없게도 수백 명이 도륙당하는 시간은 술 한 잔 따라 마실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악몽이었다. 그리고 악몽이라고 생각이 든 순간 그 악몽은 어느새 끝나 있었다.
태풍(颱風)이 지나간 뒤에 고요함이라고 할까? 태자루에는 어느새 정적이 찾아왔다.
(3)
기루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 단 한 사람의 생존자가 있었다. 생존자는 기녀들의 추파에도 아랑곳 않고 홀로 자작하던 청의인이었다.
그는 그 와중에도 핏물을 뒤집어 쓴 채 자리에 꼿꼿이 앉아있었다. 마치 기루에서 일어난 일은 관심 밖의 일이라는 것처럼 그의 모습은 너무나 여유로웠다.
그의 행동은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것이 없었다. 단지 바뀐 것이 있다면 손이 피로 얼룩졌다는 점과 피 고인 술잔을 입에 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시선은 무심하게 항상 창 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술잔을 들이키고 탁자에 내려놓은 순간 질식할 듯한 침묵을 누군가가 깨뜨렸다.
“돌아가자. 검혼(劍魂)!”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이 한마디는 지극히 간단하면서도 무게가 있었다. 말을 한 자는 삼기(三綺) 중 중앙에 선 적포인이었다.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두 눈 그리고 얄팍한 입술이 굳게 닫혀 있는 사나이는 조금은 창백하고 야윈 얼굴이었다. 우뚝 솟은 콧날은 그의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이런 얼굴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강암과 같은 강인함을 연상케 했다.
그의 시선은 청의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비단 그 뿐이 아니라 나머지 이기(二騎)의 적포인들도 청의인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약관을 갓 벗어난 세 사람의 미장부, 누가 이 준미수려한 미장부들을 방금 전에 태자루를 혈수로 만든 살귀(殺鬼)라 상상할 수 있겠는가?
청의인이 입을 뗀 것은 한참 후였다.
“오랜만이군! 열흘만인가?”
“그렇지, 검혼! 우리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서 지낸 적이 없었다.”
중앙의 적포인의 대꾸에 청의인은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느릿한 동작으로 술잔을 채웠다. 세 잔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검혼은 비로소 고개들어 적포인들을 바라보았다.
“도번(刀蒜), 환풍(幻風), 독비(毒飛). 이곳 태자루(太子樓)의 술맛은 과히 나쁘지 않네만······. 어때? 한 잔씩들 들지 않겠나?”
“······?”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적포인들의 얼굴에 약간 의외롭다는 표정이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그러나 곧 그 표정은 부드러운 미소로 바뀌었다.
창백한 안색의 도번이 입을 열었다.
“검혼! 자네는 역시 우리 백팔사혼혈영대 중에 가장 멋진 친구다. 만약 내가 자네의 입장이라면 이렇게 여유롭지는 못했을 것이네.”
검혼은 싱긋 웃었다.
“도번! 자네의 칭찬은 늘 들어도 싫지가 않군.”
“내가 칭찬하는 유일한 인물은 오직 자네뿐이네. 나는 늘 자네에게 감탄했었지.”
검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은 일순간 암울하게 변했다.
“그래, 너는 좋은 친구였지.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지만······.”
돌연 도번 옆에 있던 독비(毒飛)가 불쑥 입을 열었다.
“검혼! 친구가 아니라는 말은 하지 말아라. 우리는 아직 변함없는 형제다.”
독비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검혼! 우리는 자네가 왜 백팔사혼혈영대를 뛰쳐나왔는지 알 수가 없네. 자네는 배반자의 말로가 얼마나 참혹하다는 걸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검혼의 입은 꽉 다물어져 있었다.
검혼의 대꾸가 없자 시종일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환풍(幻風)이 느릿하게, 그러나 단호히 입을 열었다.
“돌아가자! 검혼! 자네의 시체라도 들고 오라는 대주(隊主)의 명령을 받고 왔다.”
검혼은 웃었다. 그저 소리없이 웃었을 뿐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의 소리없는 웃음은 엄청난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환풍! 너는 내 시체를 메고 갈 자신이 있나?”
환풍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쏴아아······.
폭우는 더욱 거세졌다. 마치 온 세상의 추한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려는 듯, 그와 더불어 태자루의 이층에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자 답답함을 참지 못한 환풍이 극히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런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검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번이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렇다! 검혼,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다.”
검혼이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그러나 내가 너희들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피할 수 없는 불행이기도 하지······.”
그 말에 세 명의 얼굴에는 완연한 긴장감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은 나타났을 때보다 더욱 빠르게 사라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도번이었다.
“검혼! 네가 우리를 따라가지 않겠다는 것은 결국 피를 부를 뿐이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검혼은 느릿하게 그러나 한자 한자 또렷하게 입을 열었다.
“도번! 우리는 쓸데없는 말을 너무 오래 하고 있다. 이제 너희들의 임무를 수행해야 할 시간이다.”
“답답하구나, 검혼!”
도번의 음성은 격앙되어 있었다.
“너는 누구보다 대주가 아꼈던 인재다. 백팔사혼혈영대의 차기대주로 지목되었을 만큼.”
그 말에 돌연 검혼이 앙천광소(仰天狂笑)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차기대주······.”
그의 웃음에는 섬뜩한 한기(寒氣)와 진한 비애(悲哀)가 함께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도번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검혼! 너는 이제 친구의 충고를 비웃을 만큼 변했구나!”
순간 검혼이 웃음이 일시에 뚝 멎었다. 웃음기 가신 그의 얼굴에는 놀랍게도 단 한점의 표정도 없었다.
무심(無心)! 그의 얼굴은 차디찬 돌덩어리마냥 무심하게 변해 있었다.
“도번! 나는 변함없는 너희들의 친구다. 허나 나는 더 이상 백팔사혼혈영대일 수는 없다. 나는 기필코 대주를······.”
도번이 싸늘하게 말을 잘랐다.
“검혼! 너는 감히 대주를 배신하겠단 말인가? 오늘의 너를 있게 한 대주를 진정 배신하겠다고?”
검혼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무심한 두 눈이 허무와 공허함으로 짙게 물들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모두가 부질없는 일. 내가 대주를 모욕한다면 너희들은 분명히 화를 낼 것이다.”
마치 절대로 들어서는 안될 말을 들은 것처럼 세 사람의 표정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돌변했다. 이윽고 그들은 거의 동시에 합창하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 검혼! 대주는 어떤 경우에도 모욕당할 수 없다. 모든 영광과 생사(生死)가 오직 대주에게 있으며 대주는 곧 우리의 신(神)이다.”
대주를 입에 올리는 그들의 얼굴은 온통 경의지심으로 가득했다. 이 무정한 살수들에게 이토록 절대적인 신(神)으로 자리잡은 그는 과연 누구이길래?
검혼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신(神)! 그래. 대주는 신이다. 그러나 나는 기필코 그 신을 죽일 것이다.’
그들도 말이 없었다. 다만 무심한 얼굴로 검혼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었다. 검혼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이제 그들에게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질식할 듯한 침묵 속에서 어디선가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환풍의 신형이 마상(馬上)에서 앉은 자세 그대로 검혼을 향해 폭사되었다. 그것은 차라리 한 줄기 번개였다. 그의 쌍수(雙手)가 춤추듯 앞가슴에서 좌우로 물결쳤다.
언뜻 보기에 매우 단순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그 눈깜박할 사이에 환풍의 손에서는 최소한 열일곱 가지의 초식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순식간에 허공은 천겹만겹의 눈부신 금광(金光)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용서해라. 환풍!”
심유무심(深幽無心)한 검혼의 일성과 함께 한 줄기 빛살이 허공을 갈랐다.
“크아악!”
그 빛살은 바로 검강(劍 )이었다. 검강은 그대로 환풍의 장력을 뚫고 그의 머리에 떨어져 그의 몸을 수직으로 양단(兩斷)하고 말았다.
어느새 검혼의 손에는 얇디 얇은 연검(軟劍)이 굳게 쥐어져 있었다.
환풍을 죽였다. 친구를 죽인 것이다. 그러나 검혼에게는 나약한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가 없었다. 도번과 독비의 연수합공(連手合功)이 밀어닥친 것이다.
도번이 도(刀)를 빼어들자 허공은 온통 붉은 광채로 뒤덮여 버렸다. 삼백육십 방위가 폐쇄되고, 도초는 도합 칠백이십사변(七百二十四變)을 이루어냈다.
실로 가공할 쾌도다변(快刀多變)!
바람 한 점 스며들지 못할 그물같은 검세가 검혼의 전신을 뒤덮은 것이다.
순간 검혼의 신형은 허공에 한 줄기 호선을 그리며 비스듬히 날아갔다. 그는 정확히 다섯 자를 그 자세로 옮겨갔다.
이것은 그가 앉아 있던 탁자에서 건너편 탁자로 위치를 옮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동작은 상상할 수도 없이 빠를 뿐아니라 시기적절하여 실로 유연하게 공세를 피해냈다.
그러나 도번의 변초(變招)는 더욱 빨랐다.
그는 마치 검혼이 그쪽으로 피할 것을 미리 예상했던 것처럼 더욱 가공할 살초를 전개했다.
“비폭쾌섬참(飛瀑快閃斬)!”
도번의 도가 허공에서 원을 그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뻗쳐지며 그 선홍색의 둥근 륜(輪)을 발출시켰다.
쐐애애애액······!
그것은 실제 륜이 아니라 비폭쾌섬참의 도강(刀 )이었다. 더구나 그 도강은 검혼의 지척에 이르자 갑자기 수십 줄기로 분산되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순간 검혼은 한 마리 대붕(大鵬)처럼 수직으로 솟아 올랐다. 그의 전신은 어느새 세 치 두께의 철벽강기로 휩싸여 있었다.
파파파파······ 팟!
강기와 강기가 맞부딪쳐 시퍼런 불꽃을 퉁겼다.
“음······!”
짤막한 신음과 함께 검혼의 신형이 휘청했다.
때맞춰 독비의 일갈이 터졌다.
“잘 가거라! 검혼!”
이어 그의 검붉게 물든 독장(毒掌)이 허공을 갈랐다.
꽈르르릉······!
혈광(血光)이 번쩍 일며 벽력성이 터졌다. 삽시간에 검혼의 주위는 자욱한 혈무(血霧)로 휩싸였다.
절대절명의 순간 검혼의 신형이 빛살처럼 빠르게 회전했다.
검혼은 그 와중에서도 연검을 빼어들고는 그대로 내리 그었다. 그러자 시퍼런 검기(劍氣)가 혈무를 일직선으로 갈랐다.
“아흑!”
누군가의 비명이 터졌다.
별다른 변식(變式)도 없이 전개한 검혼의 일검(一劍), 그것은 불필요한 모든 동작을 일제히 배제한 극히 잔인한 살초(殺招)였다.
오직 살인을 위한 그의 쾌검은 독비의 목줄기를 관통한 것이다.
독비의 목구멍에서는 부르륵 부르륵 하는 묘한 음향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그 순간 검혼의 등줄기에 시퍼런 섬광이 작렬했다.
“우욱!”
검혼이 어떤 방어 자세도 취하기 전에 도번의 혈도(血刀)가 그의 등줄기를 가른 것이다. 피화살을 허공에 흩뿌리며 검혼의 신형은 앞으로 거꾸러졌다.
그런데 놀랍게도, 분명 거꾸러지던 검혼의 신형이 두 번 회전해 다섯 자 앞에서 빙글 돌아섰다.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서도 그의 표정은 무심했다. 다만 안색이 지극히 창백할 뿐이었다.
“음!”
도번은 나직한 탄성을 뱉었다.
“놀랍구나. 검혼!”
무정한 살귀 도번의 얼굴에도 일순 경이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얼굴도 곧 무심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피같이 붉은 도에서는 아직도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길이는 삼 척, 손가락 두 개 넓이의 도신(刀身)에서는 피를 부르는 혈귀(血鬼)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 했다.
검혼의 몸이 미미하게 경련했다.
순간 도번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팽이처럼 회전했다.
파파파팟······.
대기를 통째로 양단해 버리는 듯한 끔찍스러운 파열음과 함께, 천지는 무서운 도광(刀光)으로 순식간에 휘덮이고 말았다.
그러나 더욱 가공할 것은 도번의 이초(二招)가 연이어 펼쳐진 순간이었다. 팽이처럼 회전하는 도번의 신형이 그대로 검혼에게 폭사된 것이다.
쐐애애액······!
그의 몸은 전체가 도기(刀氣) 덩어리였다. 그 가공할 도법에 천지는 암흑의 혼돈 속으로 처박혔다. 검붉은 도기(刀氣)는 모래처럼 일어나 검혼의 전신을 휩쓸어갔다.
순간 야수의 울부짖음같은 검혼의 기성(奇聲)이 터졌다.
“도번!”
동시에 허공에 섬광이 일어 도기에 마주쳐갔다.
꽝꽈르릉······!
엄청난 굉음이 작렬했으나 검혼과 도번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수천수만 개의 은광과 묵영(墨影)이 허공에 범벅되어 번뜩였다. 그 난무하는 은광과 묵영이 서서히 걷혀진 순간 검혼의 검은 이미 도번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시키고 있었다.
도번의 심장에서는 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니, 쏟아져 나오지 않는 게 아니라 미처 흘러나올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검혼의 암울한 시선은 심한 경련이 일어나고 있는 도번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도번! 결국은 이······ 이렇게······.”
검혼의 뺨을 축축히 적시는 끈적끈적한 액체는 핏물보다 더 진한 우정의 눈물이었다.
도번의 입술이 미미한 떨림을 보였다.
“거······ 검혼 도······ 돌아가라······. 추격······ 주······ 죽는······다······.”
검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유야 어찌됐든 그들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다.
생사(生死)를 도외시하고 죽음의 사선(死線)을 몇번이나 같이 넘었던 친구였다. 그런 친구를 그것도 셋씩이나 죽인 것이다. 그러니 그의 얼굴에 더할 수 없는 고통의 비애(悲哀)가 흐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돌연 검혼은 도번의 몸을 세차게 포옹하며 악쓰듯 소리를 질렀다.
“도번! 나는 돌아가지 않겠다. 우리는 다만 살인도구(殺人道具)로 키워졌을 뿐이다. 철저한 살인도구로 대주는 그렇게 이용하기 위해서 우리를 키운 것뿐이다.”
“대······ 대주는 신······ 거역······ 하······ 검혼······.”
그 말을 끝으로 도번은 선 채로 숨이 끊어졌다.
검혼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피로 범벅된 두 젊은 몸뚱이는 그렇게 한데 얽혀 언제까지고 떨어질 줄을 몰랐다.
누가 이들에게 이토록 가혹한 운명을 주었는가?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 참혹한 슬픔 앞에 내동댕이 쳤는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검혼의 손은 한없이 떨렸다. 그 떨리는 손길로 그는 시체들을 말등에 실었다.
도번, 환풍, 독비.
철들기 이전부터 함께 자라온 그 친구들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세 필의 홍화류는 그들 주인의 시신을 싣고 천천히 태자루 계단을 내려갔다. 철저하게 훈련된 홍화류들은 그들의 주인을 정확히 목적지까지 운반해 갈 것이다.
한일자로 깊숙이 패인 검혼의 등에서는 쉬임없이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참혹한 고통 앞에서도 오직 한 곳을 덧없이 응시할 뿐이었다. 친구의 시신을 실은 세 필의 홍화류!
친구여!
자네의 가슴에 내 검(劍)이 박히더라도 언제나처럼 웃어주게나.
부디 내 무정(無情)한 검(劍)을 탓하진 말게.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무림에 태어났다는 것뿐.
어차피 피는 우리의 숙명이 아니던가.
친구여!
부디 고이 잠들게나.
그리고 우리 굳게 약속하세.
내세(來世)에는······
내세에는 절대로 이 비정(非情)한 세계에 태어나지 않기를······.
제2장 신비녀(神秘女)와 냉혈쌍사(冷血雙蛇)
(1)
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오는 곳은 북방(北方)쪽, 곧이어 질풍같이 내달리는 한 대의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한 대가 아니었다.
사방에서 구름처럼 마차가 몰려오고 있었다. 마차들이 내달리는 모습은 차라리 날아오고 있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였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질주해온 마차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한 곳에서 멈춰섰다.
그곳은 태자루 입구였다.
비단 마차들뿐이 아니라 수많은 무림인들이 이미 태자루 입구로 빨려들 듯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무림인들 거의가 모두 이층 기루로 몰려들었다.
이층의 광경을 본 무림인들의 입에서는 더할 수 없는 경악성이 토해졌다.
“허억!”
“오! 이······ 이럴 수가!”
아수라지옥도(阿修羅地獄圖)!
그곳의 참상은 이 한마디로 표현되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오직 피뿐이었다.
널려진 시체들! 그 시체들 중에는 그들의 형제가 있었다. 부모도, 친구도, 자식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시체가 그들의 혈육인지 그들은 분간할 수 없었다. 처참히 찢겨져 육편(肉片)뿐인 시체들을 어떻게 그들이 분간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동시에 느낀 것은 오직 분노뿐이었다. 순간 그 분노의 시선들은 일시에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그곳은 검혼이 앉아 있는 자리였다. 이층의 유일한 생존자 검혼, 그에게 모든 분노와 원망의 시선이 집중되어있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공통적인 것이었다.
안봐도 훤했다. 저기 태연하게 앉아 있는 놈이, 유약한 서생으로 가장한 흉신악살(凶神惡殺)이 이들을 모두 죽인 것이다.
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곧 복수의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검혼은 그 분노와 광망들이 자신에게 곧 어떤 행동을 요구할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안중에 두지 않는지도 몰랐다. 그는 석상인 양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들 또한 검자루를 움켜 쥐었을 뿐 선뜻 앞으로 나서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아니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검혼의 일신(一身)에서 뿜어지는 무형(無形)의 기도(氣道)는 그들의 혼(魂)을 꽁꽁 묶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는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건만 그의 전신에선 태산같은 위엄과 소름끼치는 전율, 그리고 형언키 어려운 공포가 뒤범벅이 되어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때 검혼이 무료했던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한 사람이 움직였다. 그의 행동은 극히 조심스럽고도 신중했다.
검붉은 얼굴에 거대한 체구 화려한 금의(錦衣)에 금검(金劍)을 든 오십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형형한 안광을 내뿜으며 검혼에게 한 발 다가섰다.
“귀하는 본인의 질문에 분명히 답해 줘야겠소. 어떻게 귀하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말이오.”
검혼은 말이 없었다. 비단 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금의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만 텅 빈 듯한 공허한 시선으로 여전히 창 밖만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금의인의 입가에 야릇한 경련이 일었다. 그는 더욱 무서운 신광을 폭사하며 다그치듯 입을 열었다.
“귀하는 만약 본인의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못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빚어질 것이오.”
그때 금의인의 나섬에 용기를 얻었음인지 여러 사람들이 각기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나서며 외쳐댔다.
“그렇소. 귀하는 어서 대답하시오.”
“백팔사혼혈영대와 귀하는 어떤 관계가 있소?”
“귀하의 신분을 밝히시오.”
실내는 여러 사람들의 외침으로 왁자지껄했다.
순간 검혼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려졌다. 그의 시선은 맨 처음에 나섰던 금의인에게 고정되었다.
“나는 몹시 피곤하오. 오직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소.”
그의 음성은 너무나 조용하여 마치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금의인은 한동안 할 말을 잃었을 뿐아니라 일순 경미하게 몸을 떨었다.
그것은 검혼의 순간적인 시선 때문이었다.
검혼의 눈동자 깊숙한 곳 그 아득하고 유현(幽玄)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두 줄기 빛, 그 빛은 바로 예리한 비수였다.
이윽고 금의인은 절로 검자루를 굳게 감아쥐었다. 그리고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분노와 슬픔에 잠겨 있소. 귀하의 대답에 따라 이들의 분노는 바로 귀하에게 집중될 수도 있소.”
“하하하하······!”
돌연 검혼은 고막을 찢을 듯한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우욱!”
“헉!”
공력이 약한 무림인들은 이미 선혈로 입가를 물들이고 있었다.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끓어오르는 기혈(氣穴)을 억제하느라 고심의 빛이 역력히 내비쳤다.
일순 검혼의 광소가 뚝 멎었다. 그의 눈가에는 형용키 어려운 고통의 빛이 잠잠이 배어 있었다.
그가 지금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이들을 내가 죽인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해야 하는가?
어차피 이들은 나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닌가. 내가 이 자리에 없었으면 아직도 이들은 기녀의 펑퍼짐한 둔부를 쓰다듬으며 희희락낙거리며 자신의 생(生)을 한껏 즐기고 있을 것을······. 나는 이들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이윽고 검혼의 표정은 무심으로 돌아왔다. 마음은 고통스러워도 이미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할 말이 없소. 다만 내게 대답을 강요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 가를 보여줄 수 있을 뿐이오.”
검혼은 어리둥절해 있는 무림인들을 뒤로 하고 금의인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그가 다가서자 금의인은 갑자기 숨이 꽉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는 검혼이 마치 거대한 태산처럼 느껴졌다.
검혼에게서는 일말의 살기(殺氣)도 뿜어지지 않았는데도 그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직감했다.
그는 무엇인가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행동은 생각보다 빨랐다. 그의 우수(右手)는 번개같이 검자루로 향했다.
그러나 검혼의 손이 더 빨리 앞으로 뻗어졌다.
쐐액!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파공음이 일었다.
“아흑!”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허공에 시뻘건 선혈이 홱 뿌려졌다. 금의인의 목은 이미 몸뚱아리에서 떨어져 바닥 한구석으로 떨어져 나갔다.
금의인의 옆에 서 있던 몇 사람이 튀는 피로 인하여 얼굴에 피비(血雨)를 뒤집어 썼다.
장내는 일시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검혼의 쾌검 앞에 누가 경악하지 않으랴!
불필요한 동작을 빼고 가장 빨리 닿을 수 있는 직선을 택하여 아무렇게나 뻗은 쾌수(快手)! 그러나 더욱 놀라운 사실은, 검혼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이 다름아닌 금의인의 금검(金劍)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돌연 옥(玉)구슬을 은쟁반에 굴리는 듯한 여인의 교성이 울려퍼졌다.
“호호호호······! 과연 절묘한 비기(秘技)군요.”
숙연했던 장내에 홀연히 울려퍼진 여인의 교성은 절로 흠칫한 감정을 일게 했다. 중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교성이 들려온 곳으로 집중됐다.
여인의 모습을 발견한 중인들은 갑자기 눈 앞이 어질어질해짐을 느껴야 했다.
(2)
세상에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도 있는 것인가?
삼층 계단에서 막 내려선 그녀는 그야말로 모든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십팔구 세 정도 되었을까?
세류요(細柳腰)의 섬세한 허리를 중심으로 매끈하게 빠진 몸매. 전신에는 자의(紫衣)를 걸친 미녀의 용모는 가히 선녀(仙女)를 방불케 했다.
두 눈은 봉(鳳)의 눈이요, 살결은 뿌연 우유빛이었다.
빙기옥골(氷肌玉骨),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 모든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도 그녀의 미는 제대로 형언할 길이 없었다.
자의미녀는 전신을 매력있게 흔들면서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나왔다.
그녀의 등 뒤에는 두 사람이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붉은 색 피풍(被風)을 걸친 중년인들이었다.
여인은 꽃같이 아름다운 반면, 그들 두 사내는 깡마르면서도 지극히 추악한 용모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눈초리였다. 그것은 섬뜩하도록 날카로와 마치 반짝이는 독사의 눈을 보는 듯 했다. 그들은 붉은 피풍 안에 검으면서도 몸에 착 달라붙는 경쾌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들의 몸 또한 독사와 진배 없었다. 가냘프면서도 매우 단단했고 자유자재로 전신을 꿈틀거렸다.
이러한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형언키 어려운 공포감을 불러 일으켰다.
모든 인물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이윽고 자의미녀는 검혼과 일 장 간격을 두고 멈춰섰다.
일순 검혼의 눈가에는 기이한 광채가 번뜩였다.
자의미녀는 검혼을 찬찬히 훑어본 후 몸을 돌려 중인들과 마주섰다. 그녀는 입가에 한 줄기 극히 고혹적인 미소를 띠운 채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 분은 오늘 이곳에서 벌어진 혈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돌연한 이 말에 좌중은 일제히 술렁거렸다.
검혼 역시 의외의 말을 들은 듯 일순 검미를 꿈틀거렸다.
이때 청삼(靑衫)을 걸친 준수한 용모의 중년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낭자께선 무엇을 근거로 저 젊은이의 결백을 주장하시오? 방금 저 젊은이가 저지른 잔혹한 살인을 보고도 하시는 말씀이오?”
중년인의 음성은 나직하면서도 은연중 위엄이 실려 있었다.
자의미녀는 청삼중년인을 흘깃 바라보더니 더욱 고혹적인 미소를 띠었다.
“호호······! 어느 고인이신가 했더니 당금 강호에 위명이 쟁쟁하신 독수불심(毒手佛心) 막대협(莫大俠)이시군요.”
독수불심이라는 네 글자가 들려지자 중인들의 얼굴에 일제히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들의 놀란 시선들은 방금 나선 청삼중년인에게 쏟아졌다.
독수불심(毒手佛心) 막준평(莫俊坪).
그는 황하(黃河) 칠십이수로(七十二水路)의 총채주(總寨主)로서 현 사도무림(邪道武林)의 가장 걸출한 인재로 꼽혀졌다.
그는 본시 살인을 즐겨하지 않으나 일단 살인을 할 때면 그 수법이 지극히 잔혹하여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그를 두려워했다.
독수불심 막준평은 자의미녀가 한눈에 자신을 알아보자 일순 기이로운 광채를 폭사시켰다.
‘음, 저 계집아이가 누구이길래 나를 한눈에 알아 본단 말인가? 보기에는 전혀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 같은데······.’
그는 심중의 의문을 내색 않은 채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위명이라 함은 감당키 어렵소만 내가 독수불심인 것만은 사실이오.”
자의미녀는 그를 잠자코 바라보더니 죽은 금의인의 시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할 위인이에요. 저 자가 채화음적 여소량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아신다면 아무도 저 자를 동정하지 않을 거예요.”
과연 그녀의 한마디는 효과가 있었다.
근자에 수많은 여인을 능욕하고 살해한 채화음적 여소량이 바로 검혼에게 죽은 금의인이라는 사실에 무림인들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독수불심 역시 잠시 미간을 좁히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저 자는 그렇다치고 저 젊은이가 오늘의 혈겁과 무관하다는 확실한 증거라도 있소? 만약 정확한 증거없이 저 젊은이를 두둔한다면 낭장 역시 화를 면키 어려울 것이오.”
자의미녀는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물론이에요.”
그녀는 검혼을 한 차례 바라본 후 좌중을 향해 말을 이었다.
“저 분은 백팔사혼혈영대의 삼기(三騎)를 죽인 장본인이에요.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당신들은 저분에게 오히려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억!”
“무······ 무엇이?”
중인들의 입에선 더할 수 없는 놀라움의 경악성이 뱉어졌다. 아울러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불신(不信)의 빛이 얼굴 가득 떠올랐다.
죽음과 피의 상징인 당금무림의 최강의 방파!
이 절대살신(絶代殺神)들을 죽인 장본인이 바로 눈 앞의 젊은이라니, 더구나 한 명이 아닌 세 명씩이나 죽인 인물이라니, 이것은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불가사의한 일로 중인들에게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실내 한귀퉁이에서 무심한 일성이 터졌다.
“저 젊은이가 백팔사혼혈영대의 삼기(三騎)를 죽였다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하오?”
그 음성은 마치 심산에 부엉이가 울부짖는 듯한 거북한 탁성(濁聲)이었다.
그 음성과 함께 세 명의 인물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왔다. 모두 일신에 먹빛같이 검은 장삼을 걸친 사십대의 중년인들이었다.
“아! 마혼삼살(魔魂三殺)!”
누군가의 나지막한 탄성이 터졌다.
과연 세 중인들은 마혼삼살이었다.
마혼삼살(魔魂三殺)!
이들은 강호에 출도한 지 불과 일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인 인물들로 무림사(武林史)에 기록될 살귀(殺鬼)들이었다.
특히, 이들의 쾌검식(快劍式)은 어찌나 빠르고 정확한지 이들이 검을 뽑는 순간을 보았다는 사람이 아직 없을 정도였다.
이 공포의 마혼삼살이 지금 눈 앞에 있는 것이다.
자의미녀는 일순 가볍게 아미를 찌푸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예의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명쾌히 입을 열었다.
“증거는 바로 내 자신이에요. 나는 오늘 이곳에서 벌어진 혈겁을 계속 지켜봤으니까요.”
그 말에 장내는 다시 술렁거렸다.
이때 마혼삼살 중 가운데 선 자가 냉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는 마혼삼살 중 맏형격에 있는 자였다.
“호호······! 당신의 말을 누가 믿겠소? 당신이 누구이며 또한 어떻게 그 장면을 목격했는지 납득이 가도록 설명한다면 혹 모르겠소만······.”
그 말에 자의미녀의 양 옆에 묵묵히 서 있던 피풍의 두 사내가 가공할 살기를 뿜어냈다.
마혼삼살도 살기를 감지했음인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 그러나 자의미녀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곳 태자루의 주인이며 내가 머물고 있는 삼층 거실에서는 이층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확연히 볼 수 있게끔 특별히 설계 되어 있어요. 이만하면 당신들은 납득이 가겠어요?”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던 무림인들은 모두 넋나간 시선으로 자의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엔 경악과 회의의 빛이 떠올랐다.
태자루는 중원제일의 기루요, 도박장이었지만 실제 주인(主人)이 누구인가는 신비에 가려져 있었다.
단지, 무림인들은 태자루의 주인이 엄청난 부와 모종의 비밀을 은닉한 신비의 인물일 것이라는 사실만을 막연히 추측해올 따름이었다.
그런데 바로 눈 앞의 절세미녀가 이 막대한 부의 상징인 태자루의 주인이라니, 이것은 가히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더구나 모든 무림인들의 뇌리에 동시에 떠오른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이 여인이 만약 태자루의 주인이라면 어찌 이 끔찍한 상황하에서 저토록 침착할 수 있단 말인가?’
자의미녀는 중인들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표연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붉은 피풍의 두 사내 중 하나가 중인들을 향해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모두 그만 돌아 가시오. 본루(本樓)는 이만 문을 닫아야겠소.”
이 음성은 더할 수 없이 뾰족한데다가 극히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만약 독사가 말을 한다면 바로 이런 투의 목소리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의 음성에 무림인들은 전신에 오싹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마혼삼살은 당황하지 않고 일제히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후후후······!”
“감히 우리 삼형제를 오라가라할 인물이 있을 줄이야. 흐흐흐흐······!”
그때였다. 마혼삼살의 입가에 미소가 채 사라지기도 전 냉막한 일성이 터졌다.
“죽음이란 이런 것이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붉은 광채가 허공에 번뜩였다.
쉬이익!
마치 독사의 입에서 뱉어진 듯한 섬뜩한 파공음이 일자 마혼삼살 중 이살(二殺)과 삼살(三殺)이 갑자기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허공으로 다섯 자나 치솟아 올랐다.
“으아아악!”
“크아아악!”
이것은 너무도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붉은 피풍의 사내는 여전히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다만 그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만이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믿을 수 없는 쾌검!
이 갑작스러운 일에 모든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 더구나 붉은 피풍의 사내가 무슨 수법을 펼쳤는지는 도저히 짐작조차 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그때 마혼삼살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일살(一殺)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다······ 당신들은 내, 냉혈쌍사(冷血雙蛇)!”
냉혈쌍사!
이 한마디가 나오자 실내에 있던 무림인들은 대경실색하여 세차게 전신을 떨었다.
냉혈쌍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들로 강호에 정평이 나있었다. 그들을 떠올리는 강호인들은 처음에 독사를 연상한다.
그들의 수법은 잔인하지 않았으나 죽이고자 마음먹은 사람은 어떻게서든 죽여야 직성이 풀렸다. 마치 독사가 먹이를 노리고 잽싸게 아가리를 벌리는 것처럼.
이때 붉은 피풍의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더니 가볍게 장탄식을 했다.
“하지만 우리를 알아보기엔 너무 늦었다. 만약 진작 우리를 알아보았다면 너희들은 이런 낭패를 결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혼일살은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냉혈쌍사가 자신을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이미 자신의 생명은 사명부(死名簿)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도망칠 구멍은 봐두었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대로 몸을 날렸다.
와장창! 쾅!
마혼일살은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창문을 뚫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붉은 광채가 허공에 번쩍이는가 싶더니 처절한 단말마가 터졌다.
“크악!”
그의 몸은 허공에서 정확히 양단되어 밑으로 떨어져 나갔다.
이어 실내를 가득 메웠던 무림인들 역시 주춤주춤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장내에 있는 무림인들 중 냉혈쌍사의 일검을 받아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당면 과제는 우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으아악! 살인귀!”
“냉혈쌍사가 우리들을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우리는 끝장이오!”
급기야 그들은 공포의 비명을 내지르며 앞을 다투어 줄행랑을 놓았다.
(3)
순식간에 실내는 정적을 되찾았다. 그렇게 많던 무림인들이 모두 떠난 이상 시끄러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검혼은 지독하게도 무심했다. 냉혈쌍사가 마혼삼살을 죽이고 장내에 있던 무림인들에게 축객령을 내릴 때까지 그의 시선은 온통 창 밖으로만 쏠려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그의 얼굴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모르는 석고상 마냥 굳어 있었다. 그리고 한귀퉁이 좌석에 홀로 앉아 홀짝홀짝 피고인 술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이윽고 그를 무심히 바라보던 자의미녀가 이채로운 눈빛을 발하며 검혼에게 다가섰다.
“술은 상처에 해롭답니다.”
검혼은 이렇게 아름다운 손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미인의 손, 아니 여인의 손이란 대부분이 아름답다. 그러나 제아무리 아름다운 손이라 해도 검혼은 거기에 결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피부가 다소 검다거나, 아니면 손톱이 약간 크다거나 그리고 땀구멍이 유난히 큰 것 등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상처를 정성스럽게 싸매고 있는 자의미녀의 손, 그 손만은 완전무결하여 결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백옥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자의미녀는 교태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셨군요.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고도 지금껏 견디시다니······.”
그녀의 음성은 너무도 고와 이 세상의 온갖 형용사를 동원한다 해도 부족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검혼은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나직이 말했다.
“나는 당신의 친절과 정체가 궁금할 뿐이오.”
자의미녀는 간드러지게 웃으면서 말했다.
“여인이라면 누구나 당신같은 미남을 좋아하지 않겠어요? 거기에다 강한 미남은 금상첨화(錦上添花) 아닌가요?”
그러나 검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가 않소. 여인의 과잉 친절은 불행을 가져온다는 철칙을 나는 너무 일찍 배웠소. 특히 당신같은 미녀의 친절은 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소.”
“호호호호!”
자의미녀는 사나이의 넋을 빼앗을 듯 요염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검혼은 심신이 절로 격탕됨을 느껴야 했다.
‘음, 이 여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천하게 굴면서도 천하게 보이지 않는 이 여인은 나에게 어떤 이유로 친절을 베푸는 걸까?’
이때 자의미녀는 상처를 싸맨 헝겊의 매듭을 지으며 밝게 입을 열었다.
“이제 됐어요. 이삼 일 후면 상처는 완치될 거예요.”
“어쨌든 고맙소이다.”
검혼은 상의를 입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당신의 용건을 들어봅시다.”
자의미녀는 초승달 같이 고운 아미를 찌푸리더니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차피 우리의 거래는 빨리 끝맺을수록 서로에게 좋지요.”
그녀는 잠시 검혼을 지그시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백팔사혼혈영대의 비밀을 알고 싶어요. 그들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말이에요.”
검혼은 싱긋 웃었다. 신비롭고도 황홀한 특이한 미소였다.
검혼이 입을 연 것은 잠시 후였다.
“당신의 용건이 이런 것이었다면 당신은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했소. 오늘의 신세는 잊지 않으리다.”
그의 음성은 나직했으나 항거할 수 없는 위엄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러나 자의미녀는 동요의 기색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마치 검혼의 반발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의 미소는 자연스러웠다.
“우리의 거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당신은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본 후 결정을 해도 늦지 않아요.”
검혼이 대꾸없이 푹신한 교의에 깊숙이 상체를 묻자 자의미녀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처지는 매우 어려워요. 백팔사혼혈영대의 추격 이외에도 이제는 강호무림인들의 추적까지 신경을 써야 할 형편이에요.”
“······.”
“당신의 얼굴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어요. 강호의 소문은 무섭도록 빠르죠. 가장 중요한 것은 백팔사혼혈영대가 중원에 너무 많은 원한을 남겨두었다는 것이에요.”
검혼은 한껏 편한 자세를 유지한 채 빙긋이 웃었다.
“당신의 말은 일리가 있소. 그러나 나, 검혼은 죽음이 두려워 일개 여인과 거래를 해야 할 만큼 나약해졌거나 초조하지는 않소.”
“호호호! 믿음직스러운 말씀이에요. 하지만 당신은 한 가지를 염두에 두셔야 해요. 지금 이 순간에도 백팔사혼혈영대를 무너뜨리기 위해 와신상담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예요.”
자의미녀는 싸늘한 정광을 내쏘았다.
“그들의 집념은 처절할 정도죠. 강호에 영원한 승자는 없는 거예요.”
검혼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모든 일에는 예외라는 것이 있소. 바로 그 좋은 예가 백팔사혼혈영대요.”
“당신은 백팔사혼혈영대가 영원한 무적방파라 확신하나요?”
“그렇소!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검혼의 깊고 서늘한 시선이 자의미녀에게 꽂히듯 쏟아졌다.
“백팔사혼혈영대에 반기를 들만한 인물들은 이미 모두 명단에 올라 있소.”
“명단······?”
“살인명단을 말함이요.”
일순 자의미녀의 눈가에 가는 경련이 일었다.
검혼이 무심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명단에 오른 인물들은 철저한 조직망에 의해 감시받고 있소. 만약 조금이라도 수상한 기미가 엿보이면 즉시 살해되오. 언제 어디서를 막론하고 말이오.”
자의미녀는 앵두같은 입술이 지그시 물었다.
이상한 전율이 등줄기를 가르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것은 식은땀이었다. 지금도 백팔사혼혈영대는 그들에게는 깨부술 수 없는 무적의 방파였다. 그러나 그녀는 내심 한편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래! 무엇이든 말해라. 백팔사혼혈영대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러나 그녀의 내심과는 달리 검혼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다는 듯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 기회에······.’
그녀는 무엇을 결심한 듯 애교가 담뿍 서린 눈길로 검혼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소녀가 아름답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그녀의 음성은 갑자기 교태로우면서도 애잔하게 변해 있었다. 은쟁반에 옥구슬을 굴린다는 식의 표현이 무색할 만큼, 마치 화창한 봄날의 훈풍처럼 사나이의 가슴을 간지럽히는 듯 했다.
검혼은 잠자코 그녀를 바라보더니 빙긋 웃었다.
“당신은 참으로 아름답소. 저항키 어려울 만큼······.”
자의미녀는 유혹적인 눈길을 건넸다.
“이제 당신과 다시 거래를 논해도 되겠나요?”
자의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들어 양쪽 옷소매를 걷었다.그러자 백설같이 희면서도 토실토실한 양팔이 검혼의 눈 앞에 눈부시게 드러났다.
아름다운 손과 백옥같이 흰 팔, 그것이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자의미녀는 다시 물었다.
“지금은 어떻죠?”
검혼은 신비롭게 미소지었다.
“당신이 말하는 거래란 이런 것이었소?”
“오! 섭섭한 말씀. 당신은 지금 너무 외로워요. 나는 당신을 돕고 싶을 뿐이에요. 이 순간만은······.”
“하하하!”
검혼은 갑자기 호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그의 웃음은 여인의 혼백을 앗아갈 듯한 신비롭고도 황홀한 것이었다.
검혼은 한동안 그렇게 웃어 젖히더니 짤막히 말했다.
“내가 여인을 고르는 눈은 꽤 까다롭소.”
그러자 자의미녀는 봄날의 훈풍처럼 간지러운 웃음을 날렸다.
“호호호······! 남자들이란 원래 욕심이 많지요. 특히 자신이 능력이 많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더하죠.”
전신을 요염하게 흔들면서 이렇게 말한 그녀는 어느새 모기장같이 투명한 속옷만 입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희고도 투명한 그녀의 속옷은 그녀의 신비스러운 몸을 살포시 감싸고 있었다. 그러한 광경은 마치 뽀얀 안개를 통해서 활짝 핀 꽃을 보듯 신비스럽고 황홀했다.
검혼은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느릿하게 들어올리면서 탄복한 듯 중얼거렸다.
“꽃을 구경하는데 어찌 술이 없으리오. 자!”
그리고는 한 잔의 술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자의미녀는 가볍게 웃더니 다시 검혼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당신은 아직도 부족한 것 같군요.”
검혼은 빙긋이 웃으며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욕심이 많다고 당신이 방금 말하지 않았소?”
“호호호호!”
자의미녀는 사내의 혼을 빼앗을 듯이 요염하게 웃더니 이번에는 신발을 벗었다.
어떤 여자건 신을 벗는 자세는 과히 보기가 좋지 않다. 그러나 지금 이 자의여인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세상 어떤 사람의 발이라도 발은 거치른 것이 통례지만 그녀의 발은 그렇지 않았다.
보드러운 흰 살결로 뒤덮인 아담한 발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발위에 조그마한 복숭아뼈는 뭇 사내들의 넋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이어서 그녀는 길고도 곡선이 뚜렷한 다리를 속옷 속에서 드러냈다. 이 순간 검혼은 호흡이 딱 정지되는 것 같았다.
이때 자의미녀가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물어왔다.
“아직도 부족하세요?”
검혼은 다시 술을 한 잔 마시고 나서 빙글거리며 웃었다.
“만약 지금 내가 족하다고 하면 당신은 아마 나를 바보라고 할 것이오.”
자의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이번에는 그나마 남은 속옷까지 완전히 벗어버리고 말았다.
여인의 나신!
지금 자의미녀는 이미 완전한 나체가 되어 검혼의 앞에 섰다.
학처럼 긴 목, 가냘프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동그스름한 어깨, 그리고 풍만한 젖가슴이 그의 눈 앞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삼각지대의 신비의 숲, 굴곡이 뚜렷한 젖가슴 가운데 자리잡은 유두는 분홍색을 띤 채 그래도 약간은 수줍은 듯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양쪽 다리를 살짝 벌린 채 서 있는 그녀의 자세, 그것은 실로 불가항력적인 유혹을 발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처절한 욕정까지도 내포되어 있었으니, 여인의 이러한 모습은 세상의 어떤 남자들에게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 가능성을 안겨다주는 것이었다.
이때 자의미녀는 고귀하면서도 수정같이 반짝이는 두 눈으로 검혼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젠 충분하시겠어요?”
검혼은 유유히 술 한 잔을 들이키더니 흐뭇한 듯이 웃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런 눈복을 누린 적이 없었소. 정말 고맙구료.”
자의미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더니 약간 부끄러운 듯이 입을 열었다.
“당신같이 냉정한 사람도 담량을 키우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검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쉽사리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흥!”
자의미녀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눈을 살짝 흘겼다. 그리고 갑자기 나체인 자신의 몸을 검혼의 품 속으로 던졌다.
참을 수 없는 욕정으로 그녀가 먼저 행동을 취하도록 한 것일까?
챙그랑!
검혼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검혼은 개의치 않고 그녀의 부드러우면서도 매끄러운 등을 천천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한 손에서 한순간 빛의 반짝거림이 있었다. 그것은 깨진 술잔의 날카로운 유리조각이었다.
자의미녀는 전신을 뱀처럼 꿈틀거리면서 검혼의 안면에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 이럴 때는 수중에 그런 것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닌 줄 알아요.”
검혼은 한 손으로 그녀의 향기로우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을 유유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더할 수 없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남자가 이런 것을 들고 있을 땐 품 속으로 파고들어선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소.”
자의미녀는 요염하게 웃으면서 검혼의 입술을 더듬었다.
검혼도 지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파고 들었다. 치열한 설전(舌戰)이 계속되자 끈적한 타액이 입술사이로 조금씩 흘러내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검혼은 입술을 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여자란 너무 자신을 가져서는 안되오. 그리고 홀랑 벗어 던지고 남자를 유혹해서는 더더욱 안되오.”
검혼이 그녀의 붉은 유실을 가볍게 건드리자 자의여인이 짧게 신음했다.
“아음······.”
검혼은 손으로 계속 여인의 몸을 쓰다듬듯이 애무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여자란 옷을 단정하게 입은 채 남자가 스스로 옷을 벗겨주기를 기다려야 미덕이고, 그것이 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오.”
말과 동시에 그는 서서히 자의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잡아 당겨 예리한 유리조각으로 가볍게 그녀의 목을 그었다.
제3장 패존혈해마유심경(覇尊血海魔幽心經)
(1)
그녀의 얇은 목에 혈선이 그어지면서 즉시 붉은 피가 여인의 목을 타고 내렸다. 그것은 그녀의 희고도 탐스러운 젖가슴까지 한 줄로 흘러내렸다.
“아아······.”
신음소리를 지른 그녀의 안색은 순식간에 사색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물결치듯 꿈틀거리던 그녀의 야들야들한 몸은 완전히 굳어진 듯 움직이지 않았다.
검혼은 자의미녀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대고 부드럽게 물었다.
“당신은 아직도 자신을 갖고 있소? 당신의 몸 하나로 이 세상에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말이오.”
날카로운 유리조각은 여전히 그녀의 목에 바짝 붙은 채 떨어질 줄 몰랐다.
자의미녀의 탐스러운 육체가 드디어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의 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부르르 커다란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검혼의 목을 두 팔로 안고 있었으나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검혼은 가볍게 탄식을 터뜨렸다.
“우리는 마상(馬上)에서 여인을 품는 법을 배웠지. 아주 어린 나이에, 아마 내가 열세 살 무렵이었지.”
자의미녀의 음성은 무섭게 떨려나왔다.
“제가······ 제가 졌어요. 이젠 그만 이것을 좀 치워주세요.”
그러나 검혼은 유리조각을 치울 생각을 하지 않고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내 당신에게 한 가지 일러주지. 그것은 당신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당신은 그리 아름답지가 않다는 것이오. 그리고 당신 정도의 여인은 백팔사혼혈영대에 수도 없이 많소.”
“아아······.”
자의미녀는 공포와 치욕에 세차게 몸을 떨었다.
검혼은 결론을 내리듯 명쾌히 한마디를 던졌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백팔사혼혈영대의 비밀을 알고자 했는지는 묻지 않겠소.”
자의미녀는 여전히 묵묵부답(默默不答)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를 명심하시오. 그곳의 비밀을 안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오. 불행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오.”
자의미녀는 체념하듯 말했다.
“하지만 당신 역시 백팔사혼혈영대의 적이 되지 않았나요?”
검혼은 그 말에는 아무 대꾸도 없이 자의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살짝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만약 내가 이 유리조각을 당신의 목에서 치우지 않으면 당신은 영원히 이렇게 앉아 있을 작정이오?”
자의미녀는 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우둔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목을 서서히 유리조각에서 떼더니 이어 그의 품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는 몸을 움츠렸다. 수치와 모욕으로 인한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한 손으로는 젖무덤을, 그리고 한 손으로는 두 다리 사이의 우거진 숲을 가렸다. 그러나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탄력있는 젖가슴은 한쪽 손으로 가리기에는 너무도 컸다.
검혼은 담담히 말했다. 그의 모습에서는 자의미녀를 취하지 못한 애석함 같은 것은 ㅊ아볼 수 없었다.
“날씨가 매우 추우니 어서 옷을 입으시오.”
자의미녀의 두 눈은 당장 불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처럼 붉게 충혈되었다. 그녀는 그런 눈으로 검혼을 태워버리기라도 하듯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그녀는 주섬주섬 옷을 대강 추스리더니 극히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죽이기 아까운 사람이지만 어쩔 수가 없군요.”
그녀의 말이 끝나는 순간 기관이 작동하는 굉음과 함께 자의미녀가 서 있던 뒤쪽 벽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녀가 뒤로 몸을 날려 실내를 빠져나감과 동시에 두 인영이 안으로 들어서 검혼의 앞을 막았다.
이러한 것은 모두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두 사내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자 검혼의 눈빛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음! 냉혈쌍사 ’
붉은 피풍과 검은 경장의 두 사내, 그들은 공포의 쾌검을 구사했던 냉혈쌍사였다. 독사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네 개의 동공이 검혼을 묵묵히 응시하고 있었다.
검혼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살기가 삽시간에 실내를 동결시켰다.
검혼은 빙긋이 웃었다.
“어느 분이 먼저 가르침을 주시겠소? 두 분이 함께 가르침을 주셔도 무방하오만······.”
검혼은 알고 있었다.
강적을 상대할수록 침착하고 유들유들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분노를 일으키게 하고 심기를 흐트러지게 만들어야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냉혈쌍사 그들 역시 이 방면의 전문가였다. 그들은 검혼의 말에 전혀 표정에 변화가 없었을 뿐아니라 더욱 가공할 살기를 뿜어내었다.
(2)
한 칸의 밀실.
중앙에 놓인 단목 의자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백색경사로 가려져 있어 외모를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여인의 섬세한 몸매와 백색경사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얼굴의 윤곽으로 미루어 필시 빼어난 미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신에는 범인으로 범접 어려울 고귀한 기품이 은은히 배어 있었다. 또한, 그녀의 양 옆으로 백의(白衣)를 단정히 차려입은 두 여인이 공손히 시립해 있었는데 그녀들의 자태 역시 눈부신 것이었다.
아직 스물이 채 못된 듯, 봄날에 피어난 백합처럼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들이었다.
세 여인은 모두 한 곳을 응시하는 가운데 실내는 숙연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실로 놀라운 광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옆 방의 광경이 투명한 벽을 통하여 낱낱히 비치고 있지 않는가? 바로 검혼과 냉혈쌍사가 대치하고 있는 밀실 안의 정경이 시야에 확연히 비치고 있는 것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특수하고도 정교한 기관장치였다.
이때 밀실의 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한 인영이 실내로 스며들었다. 그녀는 바로 검혼 곁을 빠져나온 자의미녀였다.
자의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단목의자에 앉아 있는 백의여인 앞에 단정히 부복했다.
“속하 위시랑(偉始郞) 회주(會主)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그녀는 방금 전의 치욕이 부끄러운 듯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회주라 불리운 여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너는 최선을 다했다. 다만 우리가 상대를 과소평가한데 책임이 있다.”
그녀의 음성은 심산에 꾀꼬리가 우짖는 듯 청아하고도 아름다웠다. 위시랑은 더욱 송구스러운 듯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검혼이란 자는 일신무공이 고절(高絶)할 뿐 아니라 심계(心計)까지도 뛰어난 인물로 사료되는 바 회주님의 특별한 안배가 있어야 될 줄 압니다.”
회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비책은 이미 서 있으니 너는 그만 물러가서 쉬도록 해라.”
“예.”
위시랑은 단정히 일례한 후 곧 자리를 물러났다.
회주는 여전히 시선을 정면에 고정시킨 채 나직히 입을 열었다.
“상관호법(上官護法), 패존혈해마유심경(覇尊血海魔幽心經)은 몸에 지니고 있겠지?”
우측의 백의여인이 공손히 대꾸했다.
“예. 지니고 있습니다.”
“그 비급을 가지고 검혼이라는 자와 흥정하도록 해라.”
일순 상관호법의 안색은 갑자기 창백해졌다.
“회······ 주님!”
그녀의 말을 가로막듯 회주가 다시 침착하게 말했다.
“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방법은 그것뿐이니 속히 시행토록 해라.”
상관호법은 안색이 어두웠으나 회주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듯 곧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백팔사혼혈영대의 근거지와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면 그 비급을 넘겨준다 한들 무엇이 아깝겠는냐?”
회주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가능한 한 검혼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도록 해라. 그는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인물이다. 상관호법의 능력을 믿겠다.”
“속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어서 가거라. 냉혈쌍사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다.”
한편, 검혼과 냉혈쌍사는 이미 생사를 건 일전을 벌이고 있었다.
쐐애애애액!
불빛을 받아 무지개빛 같은 검광이 난무하는 가운데 냉혈쌍사의 합공은 집요하게 검혼을 휘몰아쳤다.
그러나 검혼은 물살을 가르고 유유히 헤엄치는 한 마리 잉어인 양 전후좌우로 유연히 몸을 날려 그들의 공세를 피하고 있었다.
“후후후! 이것은 부엌에서나 쓰는 칼솜씨지, 어찌 무공이라 할 수 있겠소?”
검혼의 비아냥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차가운 폭갈이 터졌다.
“차아압!”
무엇인지 언뜻 봐선 구별이 안됐다. 단지 차갑게 느껴지는 백선(白線)이 냉혈쌍사의 폭갈과 동시에 검혼에게 폭사되었다.
“신검합일(身劍合一)!”
검혼은 나직한 탄성을 토했다.
쐐애액!
바로 냉혈쌍사 중의 하나가 몸과 검이 일체가 되어 쏘아든 것이다. 그의 전신에서는 가공할 한기(寒氣)가 함께 뿜어졌다.
순간 검혼의 손이 섬전의 속도로 허리춤의 연검을 뽑아들었다. 동시에 그의 전신은 은은한 담황색 기체와 백연으로 휩싸여졌다.
그때였다. 냉혈쌍사 중 흑포를 입은 자가 급박한 비명을 토했다.
“앗! 섬극광(閃極光)!”
그렇다.
이백 년 전의 검도제일인(劍道第一人) 사검절혼마(死劍絶魂魔)의 독문절기인 공포의 검식!
내공이 신화경에 이른 자만이 펼칠 수 있는 검도지학(劍道之學)의 최상승비기(最上昇秘技)인 섬극광이 시전된 것이다.
이때 검혼의 몸이 날아드는 냉혈쌍사를 맞받아쳐 폭사되었다.
쇄애애액!
대기를 통째로 양단하는 듯한 끔찍스러운 파열음이 천지를 메웠다. 이어 검혼의 연검에서 수십 줄기의 강기( 氣)가 폭출되었다.
파파파······ 팟!
“아······ 흐윽!”
쥐어짜는 듯한 처절한 비명이 터졌다. 그리고 허공을 가득 메웠던 검광이 순식간에 걷혔다.
냉혈쌍사의 모습은 예전에 그렇게 위풍당당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 그들의 모습은 전신에 피칠을 한 악귀였다.
걸레조각처럼 갈기갈기 찢어진 옷, 그리고 찢어진 옷사이로 뿜어지는 피화살!
그들의 두 눈은 당혹과 불신의 빛으로 부릅떠져 있었다. 이제 그들은 검혼이 손 한 번 내려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였다.
꾸르······ 릉!
굉음과 함께 한 여인이 갈라진 입구를 통해 실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녀는 바로 옆 방에서 회주의 명을 받았던 백의여인 상관호법이었다.
“물러가라!”
그녀의 짤막한 한마디 명령에 냉혈쌍사는 비틀거리며 실내를 물러섰다.
검혼은 백의여인을 향해 싱긋 뜻모를 미소를 던진 후 연검을 다시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유유히 탁자로 다가가 교의에 깊숙이 몸을 실었다. 그의 황홀한 미소와 여유로운 몸짓에 상관호법은 순간적으로 야릇한 감흥이 가슴에 번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 없었다.
그녀는 그윽한 방향(芳香)을 몰고 느릿하게 검혼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밀실에서 보았을 때보다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갸름한 얼굴에 오똑 솟은 콧날, 우유빛 피부와 함초롬히 젖어 있는 도톰한 입술, 조금은 도도해 보이는 몸짓.
경성경국(傾城傾國)의 절세가화(絶世假花)란 바로 이런 여인을 두고 말함인가?
이제 갓 스물 남짓된 처녀 특유의 농염이 무르익은 성숙한 아름다움이 화사하게 피어난 여인이었다.
문득 검혼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한 명씩 선을 뵐 필요가 있겠소? 일행이 있으면 한꺼번에 들어오라고 좀 해주시오.”
“호호호! 우리의 접대가 조금은 소홀했던 모양이군요.”
방안은 일진의 부드러운 기류로 감싸이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비록 한마디를 했을 뿐이지만 이내 화사한 봄기운을 방 안 가득 불러들인 것이다.
검혼의 눈동자는 일순 반짝 빛을 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작은 불꽃을 퉁겼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백의여인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어요. 이제 당신과 마지막 흥정을 하겠어요.”
그녀는 말과 함께 한 권의 책을 검혼에게 내밀었다.
일견에도 매우 오래된 책자인 듯 두툼하고 고색창연한 빛이 나는 고서(古書)였다.
표지에는 붉은 핏빛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패존혈해마유심경(覇尊血海魔幽心經).
책자의 표지를 대한 검혼의 눈동자는 금세 횃불처럼 타올랐다.
“음!”
짤막한 단음이 뱉어짐과 동시에 검혼의 손은 이미 낡은 책을 넘기고 있었다.
그의 눈에 격동의 빛이 그리고 그의 손이 미미한 경련을 보이고 있었다.
무엇이 이 얼음장보다 차가운 사나이를 격동시키는 것인가?
패존혈해마유심경(覇尊血海魔幽心經).
이것은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희세의 기보(奇寶)였다.
오백 년 전, 무림 유사 이래 가장 뛰어난 한 명의 절세마녀(絶世魔女)가 탄생했다.
이름하여 사망천면마희(死亡千面魔姬)!
그녀는 일신에 통천가공할 혼세신공(混世神功)을 지녔을 뿐 아니라 역용술(易容術)에 있어서 전무후무한 고금제일기녀(古今第一奇女)로 꼽혀졌다.
그녀의 역용술 조예는 이 한마디로 표현되었다.
환상적인 변신역용술(變身易容術)!
실로 천(千)의 얼굴과 만(萬)의 모습을 구사하는 환상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는 세 살 먹은 아이의 모습에서부터 호호백발 노파의 모습까지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절세의 마녀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용모와 근골은 물론 음성까지도 완벽하게 구사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손자에게 갑자기 목이 비틀려 살해됐으며, 혹은 자신의 아내에게 죽음을 당하는 등 상상을 초월하는 살인수법이 모두 그녀에 의해 벌어진 것이었다.
패존혈해마유심경!
이 한 권의 비급이 바로 사망천면마희가 남긴 그녀의 모든 것이니, 비급 안에는 그녀의 독문절기와 함께 희세의 역용술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검혼은 천천히 비급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조금 전에 비쳤던 격동의 빛은 이미 씻은 듯 사라지고 그의 얼굴은 담담하게 돌아와 있었다.
문득 그의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흥미있는 거래가 될 것 같소.”
상관호법은 화사한 미소를 담뿍 머금었다.
“그래요. 당신에게 가치있는 물건이 될 거예요. 적어도 백팔사혼혈영대의 추격은 쉽게 따돌릴 수 있을테니까.”
검혼은 희미하게 웃었다.
“쉽다는 표현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오. 당신들은 대체적으로 백팔사혼혈영대을 과소평가하고 있소.”
그는 상관호법을 직시한 채 말을 이었다.
“물론 당신들의 수완도 조금은 인정하오. 허나 그들을 대적하기에는 아직도 멀었소.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는 표현이 알맞을까?”
상관호법은 그의 비양거림에도 전혀 동요의 기색이 없었다.
“이 자리는 서로의 능력을 평가하자는 자리가 아니잖아요? 우리는 다만 당신과 정당한 거래를 원할 뿐이에요.”
검혼은 유유히 술 한 잔을 따라 느릿하게 마셨다. 그리고 술잔을 상관호법 앞으로 밀어놓았다.
“한 잔 하시겠소. 미녀와 마시는 즐거움을 누린 지가 꽤 오래된 것 같구료.”
“호호호! 당신의 칭찬은 왠지 듣기가 좋군요.”
백의미녀는 서슴없이 잔을 받아들었다.
검혼은 상관호법에 대해 여타의 여인과 다른 느낌을 받았다.
‘음! 이 여인들은 어쩌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의 능력을 갖춘 인물들인지도 모르겠군.’
상관호법은 기품 있는 자세를 흐트리지 않은 채 한 모금의 술로 목을 축였다.
‘위시랑이 실패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군. 이토록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이 있을 줄은.’
그녀는 내심 탄복하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의 거래를 마쳐야 하지 않겠어요?”
검혼은 잠시 침묵 끝에 나직하게 말했다.
“나에게 원하는 것은?”
상관호법은 화려하고 우아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 속삭이듯 다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백팔사혼혈영대의 모든 것이에요.”
녹아내리는 듯한 음성. 검혼은 일시 심신이 격탕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침착하게 말했다.
“이 비급 하나로 나와 거래를 하겠다면 우리의 거래는 이미 끝났소.”
상관호법은 의아롭다는 듯 고운 아미를 찌푸렸다.
“응하지 않겠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소.”
검혼은 잘라 말했다.
“이해할 수 없군요.”
“후후후! 세상을 사노라면 왕왕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부딪히게 되는 법이오.”
“당신은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나는 어린애가 아니오. 구전진신활근단(九轉鎭神活筋丹)이 없는 패존혈해마유심경은 그저 휴지에 불과하지 않소?”
“음!”
상관호법은 희미한 탄식을 불어내었다. 그녀는 내심 탄복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 이 사람이 모르는 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약관의 나이에 이토록 해박한 지식과 견문을 갖추었다니!’
기실 사망천면마희의 절세역용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한 알의 신단(神丹)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구전진신활근단이었다.
이 영약을 복용하고 패존혈해마유심경의 구결을 운용해야만 완벽한 역용술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당금 무림에 전무(全無)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니 검혼의 한마디는 백의여인을 당혹과 경외감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백의여인의 귓전으로 전음(傳音)이 날아든 것은 그때였다.
(구전진신활근단은 한 시진 이내로 보내주겠다. 침착하게 그와의 흥정을 맺도록.)
전음을 보낸 사람은 바로 이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낱낱이 보고 있는 회주였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벽을 하나 두고 낱낱이 볼 수 있게 만든 기관지학도 놀라운 일이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회주라는 여인이 그 희세의 영약인 구전진신활근단을 보내 준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 시진내에 보내 준다니?
구전진신활근단은 영약인 만큼 구하기 어려울 뿐만아니라 사망천면마희만이 제조법을 알고 있었다. 아울러 그녀가 죽기 전 만들어 놓은 구전진신활극단은 세 개밖에 없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때 상관호법은 난데없는 회주의 전음에 놀랐으나 곧 평온을 되찾아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비급과 신단을 함께 드리도록 하겠어요.”
검혼은 대꾸대신 문득 허공을 응시했다.
텅 빈 듯 공허하기만 했던 그의 눈동자에 서서히 어떤 열기(熱氣)가 담기기 시작했다. 그는 내심 생각에 잠겼다.
‘패존혈해마유심경을 익히면 그녀의 말대로 나는 그들의 추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거듭 태어나는 밑거름이 되줄 수 있을까?’
이윽고 검혼의 명쾌한 일성이 떨어졌다.
“좋소. 우리의 거래는 성립되었소.”
상관호법은 내심 깊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또 다른 감정이, 한 마리 고독한 늑대를 연상케 하는 이 사내를 그 고독한 사내를 포근히 감싸주고 싶은 여인의 마음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것을 모성애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백의여인은 검혼의 검은 동공을 조용히 응시했다.
“당신은 알아두셔야 해요. 비록 역용술로 용모는 바꿀 수 있을지언정 당신의 몸에서 발산되는 특유의 살기를 지우지 않고는 결코 완벽한 변신은 어려울 거예요.”
검혼은 흠칫했다.
감동같기도 하고 전율같기도 한 이상한 감정이 가슴을 때리는 것이다.
‘그렇다. 내가 살아온 이십 년의 세월 그것은 죽음과 피로만 점철되온 비정의 세월이 아니던가?’
검혼의 두 손은 절로 꽉 쥐어졌다.
‘어쩔 수 없이 저절로 몸에 배인 살기! 그래 이 죽음의 냄새를 씻어내야 한다. 이 더러운 피냄새를!’
(3)
“백팔사혼혈영대는 모두 오대(五隊)로 나뉘어져 있소.”
상관호법은 긴장된 표정으로 검혼의 한마디 한마디를 새기듯이 듣고 있었다.
검혼은 담담하게 이어갔다.
“오대는 검(劍) 전문인 검혼대(劍魂隊)를 비롯 도(刀) 전문인 도마대(刀魔隊), 경공의 환무대(幻霧隊), 암기(暗器)의 혈전대(血箭隊), 그리고 독(毒) 전문인 독황대(毒荒隊) 등이오.”
“······.”
“일대(一隊)의 구성 인원은 각 이십 인(二十人)씩, 각대(各隊)를 이끄는 다섯 명의 통령(統領)이 있고 그 위에 대주와 양대시위(兩代侍衛)가 있소.”
“아! 정확히 백팔 명이군요.”
“그렇소.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그곳에서 자랐소. 각자의 출신내력은 물론 이름까지도 모르오. 검혼대에 속하면 모두 성이 검(劍)씨가 되고 도마대이면 도(刀)씨가 되오.”
검혼의 눈빛은 차츰 우울하게 변했다.
“우리는 세 살때부터 말(馬)타는 법을 배웠소. 우리가 최초로 받은 장난감이 검(劍)이었소. 때로는 도(刀)가 되기도 했지. 우리의 훈련은 혹독하도록 철저했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상관호법의 얼굴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갔다. 그것을 꼭 집어 말한다면 동정심(同情心)같은 것이었다.
“혹독한 훈련은 나로 하여금 다섯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살인을 저지르게 만들었소.”
“아! 그럴 수가······.”
백의여인의 두 눈엔 경악과 회의의 빛이 가득 뒤덮였다.
검혼은 한마디 더 덧붙여 말하려다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당신은 첫 살인의 충격과 아픔을 아시오? 내 검이 다른 사람의 목줄기를 관통했을 때의 그 느낌! 검신을 타고 흘러내리는 어린아이의 뜨거운 피! 그 진저리쳐지는 느낌을······. 그는 나의 적이 아니었소. 설사 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어린 나이에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오. 그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요. 그것보다도 당신! 당신이 백팔살혼혈영대를 나에게 묻는 것 그 자체가 나한테는 얼마나 큰 고통인지 아시오? 그들과의 추억을 돌이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아느냐 말이오? 그것을 내게 묻는 당신들은 정말 잔혹하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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