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이만 가 보겠습니다.”
청년이 말했다.
“······그래, 들어가 보거라.”
청년의 말에 중년 사내가 답해 주었다. 그러자 청년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것을 본 중년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
“관장님 또 한숨이십니까?”
어느새 또 다른 사내가 다가와 말했다. 그러자 관장이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볼 때마다 아쉬워. 장래가 촉망되는 아이였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또한 재훈을 오 년이나 보았으니까요.”
사내가 방금 빠져나갔던 청년, 그러니까 재훈을 회상하며 답했다.
“그래, 오 년을 본 너도 안타까운데, 이십 년 가까이 보아 온 나는 어떻겠느냐? 분명 저 아이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아이였어. 난 결단코 그 사실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삼 년 전 프랑스에서의 시합을 기억하느냐?”
관장의 물음에 사내는 회상에 젖어 드는 듯 흐릿한 시선으로 대답했다.
“어찌 그날을 잊겠습니까. 프랑스 국가 대표와의 친선 대련을 말입니다. 음악에 몸을 맡겨 검을 휘두르던 재훈은 마치 하나의 예술이었죠.”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눈가에 재훈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떠올랐다.
잠시 말을 멈춘 사내의 입이 다시 열렸다.
“비공식전이고 그냥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생각에 했다지만 그 국가 대표는 지고 말았죠. 대련을 본 사람들은 재훈을 가리켜 댄싱마스터라고 했죠.”
“맞다. 음악에 몸을 맡겨 스텝을 밟던 재훈의 모습이 아직도 아른거리는구나.”
관장은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다.
“어쩌다 저리되었는지······.”
관장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옆의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또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밖으로 나갔던 재훈의 가능성을 말이다. 그는 천재였다. 관장과 이곳의 사람들은, 아니 그를 본 사람들이라면 전부 생각했다. 천재란 말이 재훈을 위해 생긴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만큼 재훈은 남들과 달랐다. 누구보다 재능이 있었으며 누구보다 성실했고 누구보다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비상은 너무 어이없게 꺾이고 말았다. 바로 3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덕분에 그는 하반신 신경에 문제가 생겼다.
다행히 지금은 꾸준한 재활 치료 덕분에 일반적인 활동에는 지장이 없었다. 단지 그렇게 좋아하고 노력했던 펜싱은 끝이었다.
재훈의 찬란할 것만 같았던 미래는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재훈은 어렸을 때부터 이곳 펜싱 클럽에서 펜싱을 배워 왔다.
모든 사람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가끔씩 찾아와 다른 사람을 구경하는 정도다.
지금 재훈은 펜싱 클럽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관장과 주변의 무거운 시선과는 달리 그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게다가 그의 얼굴에선 절망의 그늘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처음엔 재훈도 좌절했다. 수십 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이제 그에게는 펜싱 말고도 다른 것이 있으니까 말이다.
“오늘은 어떤 음악을 연주해 볼까?”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재훈이 중얼거렸다. 이제 그에게는 펜싱이 아닌, 음악이 인생이 되었던 것이다.
사고를 당하고 나서 재훈은 생각했다. 어차피 펜싱의 길은 끝이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뭘 하지? 그 고민은 재훈을 괴롭혔다.
하지만 고민 끝에 그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자신이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가 바로 음악을 듣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남들에게도 자신이 연주하는 음악으로 그런 기분을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
그것이 재훈이 내린 결론이었다. 암흑이 드리웠던 인생에 다시 빛이 생긴 것이다. 재훈은 맨 처음 펜싱을 배울 때처럼 누구보다 노력했다.
재훈은 음악에서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세계적인 악단에서 공연하는 아버지를 둔 탓이다.
어릴 적부터 재훈은 아버지를 통해 음악에 관한 지식이나 음악을 대하는 마음가짐 등을 익혔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사고로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선명한 기억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특별한 훈련으로 인해 재훈은 절대음감에 가까울 정도로 청력이 좋아졌다. 그런 까닭으로 펜싱에 음악을 접목하여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테크닉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댄싱마스터.
이것이 그가 음악적 감각을 펜싱에 접목해 얻어 낸 별명이다.
음악에 맞춰 물 흐르듯 찔러 가는 검과 리듬에 맞춘 스텝은 하나의 춤, 아니 그 이상의 것이었기에 그는 여러 펜싱 대회를 휩쓸 수 있었다.
아쉽지만 이제는 음악을 하고 있으며 음악에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어릴 적에는 바이올린에 주력했던 재훈이 음악을 다시 시작한 후, 선택한 악기는 클라리넷이었다.
물론 그 점에는 이유가 있었다.
클라리넷은 목관 악기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관현악, 실내악 등의 예술 음악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음악에도 쓰이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 클라리넷을 떠올리자 재훈의 심장이 쿵쾅 뛰었다. 어서 돌아가서 클라리넷을 연주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느새 신호등 앞에 도착한 재훈은 멈춰 섰다.
곧이어 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검은 정장과 선글라스를 착용한 남성이 재훈 옆에 다가왔다.
재훈이 이상하다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아 보였다.
이윽고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재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호등을 건넜다. 돌아가서 어떤 곡을 연주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도로 중간쯤에 왔을 때였다.
재훈의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빵! 빵!
재훈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차 한 대가 들어왔다. 그것은 검은 승용차였는데 신호를 무시하려는 듯 멀리서부터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 재훈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문득 3년 전, 자신의 펜싱 인생을 망쳐 버린 교통사고가 떠올랐다. 그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온몸에 신경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대로 굳어 버린 것이다. 3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후유증 탓인지 그때의 충격이 되살아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
재훈의 눈이 부릅떠졌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3년 전, 자신을 치고 달아났던 차. 세상에는 수많은 같은 차가 있지만 확언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차가 바로 그 차라고!
더구나 자신을 치고도 태연했던 운전자. 그자의 얼굴을 재훈은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재훈에게는 무척이나 느린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몇 초간 차는 재훈에게 바짝 다가왔다.
하지만 재훈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그 차를 노려볼 뿐이다.
분노.
그것이 지금 재훈의 몸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쾅!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자동차는 브레이크를 밟은 듯 멈춰 섰다.
그리고 재훈의 몸이 허공으로 튕겨 올랐다.
허공에 떠 있는 재훈의 얼굴은 아까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던 중 자동차는 3년 전, 그때처럼 재훈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재훈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그의 눈에는 어둠이 드리웠다. 그렇게 정신을 잃어가는 재훈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 이것이 한 천재의 결말인가? 보기 드물게 한 분야가 아니라 여러 방면에 뛰어났는데, 안됐군. 하지만 어쩌겠나? 저 위에 계시는 분들은 네가 펜싱으로 성공하는 것도, 네 아버지와 같은 음악의 길을 걷는 것도 원치 않는 것을······.”
그 목소리에 재훈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까 신호등 옆에 서 있던 검은 정장을 입은 괴한.
그제야 3년 전 사고와 지금의 사고, 그리고 아버지의 사고까지 모두 우연이 아님을 깨달은 재훈이 마지막 사력을 다해 소리쳤다.
“빌어먹을 개자식들!”
Chapter 1
철컥!
격자형의 거대한 문이 열리자 한 소년이 뒷짐을 지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제 10살이나 되었을까?
소년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은발에 붉은색 눈동자가 돋보이는 모습이었다. 양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게 누가 봐도 귀엽게 보였다.
소년이 들어간 안쪽에는 장방형의 탁자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서가가 들어차 있었다.
“화아······!”
소년이 눈빛을 번뜩이며 감탄을 터뜨렸다.
서가 하나하나를 가득 채운 책자를 보고 놀란 것이다. 언뜻 보아도 수천 권은 족히 넘을 듯한 책자가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지구의 도서관 수준인데?”
소년은 호기심 넘치는 표정으로 서가를 돌아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책자로부터 최근의 책자까지 보인다. 아무래도 레지던트 대륙에서 발행된 책은 모두 구비된 것 같았다.
스윽.
한동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책 제목을 살피던 소년이 하나의 책을 꺼냈다.
“포이온 왕국 건국왕 일대기.”
책 제목을 중얼거린 소년은 이내 책을 펼쳤다.
건국왕의 이야기가 늘 그렇듯이 책은 건국왕의 성덕과 명예를 온갖 미사여구로 치장하고 있었다.
소년은 한참을 읽다가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음악에 대한 책은 없을까?”
하지만 한참을 돌아다녀도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수많은 책은 모두 역사 혹은 인문에 관련된 서적이었다. 침울해진 소년이 서가 주위를 세 바퀴쯤 돌았을 때였다.
“어! 내 이름이네.”
소년이 금박으로 장식된 책을 발견하고 제목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영웅 루이스
영웅 루이스는 천 년 전에 하늘에서 내려온 용사로 마도시대를 정리하고 악의 무리인 흑마법사들의 뿌리를 뽑은 영웅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사람이 그렇게 대단했단 말이지?”
싱긋 웃은 소년은 책을 꺼내 표지에 묻어 있던 먼지를 쓸어 내렸다.
옆구리에 낀 건국왕 일대기는 자연스레 영웅 루이스가 있던 자리에 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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