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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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2018.06.04 조회 816 추천 7


 톡.
 
 짙붉은 핏물이 검을 따라 또르르 흘렀다.
 
 쉼 없이 흘러내린 피가 이윽고 자그만 웅덩이를 만들어 냈다.
 
 카엔은 그 웅덩이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마치 피를 먹고 자라난 악마라도 되는 듯이, 분노 가득한 시선으로 주변을 노려보면서.
 
 주변에는 카엔과 비슷한 갑옷 차림을 한 기사들이 서 있었다.
 
 “기사라면······!”
 
 이윽고 그가 피 고인 땅을 박차며 검을 휘둘렀다.
 
 피가 튀고,
 
 휘익!
 
 카엔의 세찬 검에 그와 맞서던 기사들이 검을 놓쳤다.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카에븐, 헤시룬 기사단에서 가장 강한 기사를 뜻하는 그 말은 역시 헛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해야 할 기사의 수가 너무나 많았음일까, 카엔은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진흙 속을 구르는 듯 온몸이 무거웠고, 나아가야 할 오른발은 휘청거렸다.
 
 결국 카엔은 검을 놓치고 무릎을 꿇 수밖에 없었다.
 
 빙 둘러싼 수많은 검을 보며, 카엔이 입술 끝을 꽉 깨물었다.
 
 “카엔. 넌 옳았다.”
 
 그 말과 함께 그의 앞으로 기사 단장이 다가왔다.
 
 “그러나 우리 또한 옳다.”
 
 “무슨 개소리냐! 너희와 한때 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에 수치를 느낀다!”
 
 평소의 카엔이라면 감히 단장에게 내뱉지 못할 말이었다. 하지만 정작 단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태연했다.
 
 “기사의 논리는 말이 아닌 검으로 결정되는 법. 살아 돌아와서 우릴 무릎 꿇려라. 그럼 네가 옳은 것이다.”
 
 “허튼소리, 어떤 변명을 해도 너희들의 행동은 용서되지 않는다! 너흰 더 이상 헤시룬 기사단이 아니야!”
 
 단장이 웃었다.
 
 “마지막 남은 헤시룬의 기사여, 우릴 무릎 꿇려라. 강한 자가 옳은 것이다.”
 
 Chapter 1. 프비론 감옥
 
 
 
 
 
 소년은 어둠 속에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팔을 얹어 고개를 묻은 자세는 얼핏 보면 자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소년은 고요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주변은 그렇지 못했다.
 
 통제받고 있다는 말로 일축될 열기가 느껴졌다.
 
 이곳은 감옥, 어쩌면 그 통제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들린다.”
 
 소년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만, 옆에 있던 한 청년은 그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몸을 세우고 창살 밖으로 고개를 쭉 뺐다.
 
 소년을 제외하고는.
 
 그럼에도 한참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기다림에 익숙했다. 드디어 오른쪽 복도 끝의 문이 열리고 꽤 많은 사람들이 정렬해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생각보다 많은데?”
 
 “계집도 있어!”
 
 오늘은 3년에 한 번 꼴로 프비론 감옥에 새로운 죄수들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동시에 3년에 한 번씩 죄수들이 서쪽 통로 안 ‘광장’으로 불려 오는 날이기도 하다.
 
 대개가 그렇듯이 신입 죄수들은 두 종류였다. 두려울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치켜들고 눈에 힘을 주고 있거나, 겁에 질린 듯 벌벌 떨고 있거나.
 
 “프비론에 온 걸 환영한다고! 끼아아악!”
 
 신입 죄수들을 본 죄수들이 겁을 주려는 듯 괴성을 질렀다. 어떤 이들은 한 명씩 가리키며 평가를 하기도 했다.
 
 좁은 감옥 안이 시끄러워졌다.
 
 깡깡깡!
 
 아수라장이 되기가 무섭게 간수장이 쇠창살을 두드렸다. 소음은 순식간에 잦아들어 사라졌다. 단지 먹잇감을 노리는 듯 번뜩이는 눈만 남아 있었다.
 
 그 위로 나지막하면서도 무게 있는 목소리가 실렸다.
 
 “검수 앞으로!”
 
 검을 들고 있는 간수들이 앞으로 나서고, 마법사인 간수들이 두 걸음 물러났다. 감옥과 밖이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서쪽 통로를 막아선 것이었다,
 
 감옥 안에서 파충류처럼 눈을 희번덕거리는 죄수들은 대륙의 최악질들.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
 
 “모두 물러나라! 명령에 불복하면 목숨을 책임지지 못한다!”
 
 죄수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간수들은 결코 긴장감을 놓지 않으며 신입 죄수들을 차례로 광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전통대로 기존의 죄수들은 왼쪽과 가운데로 흩어졌고, 새로운 죄수들은 오른쪽 벽으로 붙었다.
 
 신입은 전부 48명. 상당히 많은 숫자였다.
 
 “음?”
 
 오른쪽 벽으로 사람이 몰리자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밀려난 신입 죄수는 발에 무언가가 닿았음을 느꼈다.
 
 시선을 내리니 어둠 속에 한 소년이 웅크려 있었다.
 
 ‘기척을 전혀 못 느꼈다.’
 
 사실, 소년의 존재는 신입 죄수들 중 누구도 모르고 있었다.
 
 사내가 소년에게 놀라 한 발 앞으로 튀어나오고, 그것을 본 간수장이 쇠창살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브뮨, 움직여라.”
 
 소년은 대수롭지 않게 일어나서 기존의 죄수들 틈으로 향했다. 그가 움직이지 않은 건 단지 귀찮아서였을 뿐이다.
 
 “마흔여덟 명. 끝입니다.”
 
 “좋아.”
 
 이제 마지막으로 간수장과 간수들 5명이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간수장은 키가 크고 건장한 30대 초반의 사내였고, 간수들 역시 하나같이 검을 들고 있었다.
 
 “긴말하지 않겠다.”
 
 간수장이 신입 죄수들 앞을 차례대로 지나가며 입을 열었다.
 
 “너흰 감옥에 수감됐다. 죄를 지은 놈에겐 당연한 처사지만, 분명 이 중엔 억울하다고 울부짖을 놈도 있을 것이다.”
 
 “저, 저는 억울합니다!”
 
 간수장의 말을 듣고 유난히 벌벌 떨던 비쩍 마른 청년이 외쳤다.
 
 “그래, 이런 놈들.”
 
 간수장이 그 말을 씹어 뱉기가 무섭게, 청년의 가슴이 갈라지며 피가 뿜어졌다.
 
 간수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검을 휘두른 것이다.
 
 “유후!”
 
 휘익!
 
 갑자기 휘파람 소리와 환호성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존의 죄수들이 환호하고 있었다. 간수장이 그쪽을 노려보며 분위기를 환기한 후, 말을 이었다.
 
 “죄를 지었든 짓지 않았든, 너흰 프비론 감옥에 수감됐다. 이제 이것만 명심해라.”
 
 그가 목청을 가다듬으며 신입 죄수들을 둘러보았다. 그것만으로도 신입들은 잡아먹힐 듯한 간수장의 기세를 느껴야 했다.
 
 간수장이 말했다.
 
 “절대, 두 발로 걸어 나갈 수 없다!”
 
 간수장의 말이 끝나자 기존의 죄수들이 입을 열었다.
 
 “이 안에서도 멀쩡히 두 발로 다니긴 힘들단다, 애송이들아!”
 
 “어이, 거기 예쁜이! 몇 년 만에 들어오는 계집이야!”
 
 유독 이 소란에서 벗어나 있는 죄수는 브뮨뿐이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히 신입 죄수들을 살폈다.
 
 흥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할 일이 없었다.
 
 “음.”
 
 그런 브뮨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지저분한 턱수염을 기른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가장 눈에 띈 것은 잘생긴 외모도 한몫을 했지만 유일하게 검을 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을 가지고 들어왔다는 것은 제법 든든한 연줄이 있었다는 뜻과 동일하다.
 
 ‘이곳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러나 왠지 흥미가 내킨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브뮨의 눈이 잠깐 빛났다.
 
 곧이어 사내에 대한 간단한 정보 몇 가지가 들어왔다.
 
 ‘절름발이.’
 
 그는 왼쪽 발목의 인대가 끊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대단히 강해 보였다.
 
 그때 절름발이 사내가 고개를 돌려 브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브뮨 역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시선이 교환됐다.
 
 사실 브뮨뿐이 아니라 많은 수의 죄수들이 알게 모르게 그 사내를 주목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그만이 신입 죄수들의 두 가지 그룹 중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사내는 두려움에 떨지도,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검을 차고 있었다.
 
 “이제 그만. 모두 밭으로 향해라!”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간수들이 소리쳤다.
 
 브뮨과 사내는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기존 죄수들은 안타깝다는 듯이 신입들을 겁주는 것을 멈추고 한 곳으로 이동했다.
 
 이제 신입들은 죄수 번호와 간단한 규칙을 전해 받고 방을 배정받을 것이다.
 
 사상 최대, 그리고 최악의 감옥인 프비론.
 
 이곳에 적응해 살아남는 것이 몇 명이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끝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던 브뮨의 등 뒤로 채찍이 날아왔다. 하지만 브뮨은 귀신처럼 피해 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죄수들은 ‘밭’에 도착했다.
 
 밭이라는 것은 광산을 뜻하는 은어였다.
 
 광산을 먼저 찾고 감옥을 지었는지, 감옥을 짓고 광산을 찾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죄수들은 광석을 발굴하는 데 이용됐다.
 
 비단 광산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곳에 죄수들의 인력이 이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죄수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브뮨은 광산에 도착해서 적당한 곳을 찾아 이동했다. 정해진 할당량을 채운다면 조금은 쉴 수도 있다.
 
 “브뮨.”
 
 그때 브뮨의 옆에 선 사내가 속삭였다. 브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생각 없나?”
 
 “평생.”
 
 “이제 신입도 들어왔으니 그렇게 여유 부릴 때는 아닐 텐데?”
 
 “좋을 대로.”
 
 사내는 화가 나는 듯 잠시 숨을 고르다가 간수들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속삭였다.
 
 “신입들의 적응 기간인 보름을 주겠다.”
 
 “한 시간만 줘도 충분해.”
 
 “헬! 브뮨!”
 
 퍽!
 
 사내와 브뮨이 대화한다고 생각한 간수가 검집째 휘둘렀다. 옆구리를 채인 헬과 브뮨이 나동그라졌다.
 
 ‘젠장.’
 
 속에서 욕이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브뮨은 반항하지 않고 간수가 휘두르는 발과 검집에 고스란히 채였다. 간수의 구타는 유난히 브뮨을 향하고 있었다.
 
 간수들은 브뮨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건 쉬쉬하며 맴도는 브뮨의 ‘능력’에 대한 소문 탓이기도 했고, 브뮨의 눈 때문이기도 했다. 브뮨의 눈은 천생 깔아 보고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생김새였다.
 
 “어디서 잡담이야!”
 
 퍽! 퍼퍽!
 
 관자놀이를 맞았는지 잠깐 귀가 멍해졌다.
 
 브뮨은 아프겠다 싶은 공격만 슬쩍슬쩍 몸을 빼서 충격을 최소화시키며 고스란히 얻어터졌다.
 
 “일어나라.”
 
 헬과 브뮨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치로.”
 
 브뮨은 묵묵히 멀리 떨어져 있는 곡괭이를 주워서 돌을 내려쳤다.
 
 땅! 땅!
 
 “네가 유난히 얻어터진 것도 그룹이 없기 때문이지.”
 
 헬이 끝까지 이죽거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간수는 멀어져 있었고, 브뮨은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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