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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검유비 1

2018.06.07 조회 369 추천 4


 유검유비 1권
 제1장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1
 
 휘이잉, 휘이잉!
 계곡에는 을씨년스런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한 와중에도 모든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노란 국화(菊花)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그 국화들은 계곡의 한 구석에서 거친 바람에 저항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꺾어도 꺾어도 다시 필 것 같은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듯했다.
 갓 피어난 꽃들은 거친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싱그러운 자태를 간직하고 있었고, 어떤 꽃들은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듯 앙상한 줄기만 남아 있었다.
 국화꽃들은 바람에 날려 계곡의 운치를 한층 더해 주고 있었다.
 
 ***
 
 그런 계곡의 한 구석에 검은 동굴이 표범의 아가리처럼 입구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동굴은 조그맣지만 세상을 전부 삼키려는 듯 보였다.
 동굴 입구에는 몇 십 년은 족히 묵어 보이는 나무로 만든 문이 바람에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동굴의 벽으로는 겨우 개나 한 마리 정도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인데도 동굴 속은 어두컴컴하여 앞을 알아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문득 음울한 동굴의 안쪽으로부터 먹을 갈아대는 소리와 사람의 말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왔다.
 “흐흐흐! 일평생 내가 죽인 자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네. 그 중 내가 찾아간 자들도 있었고, 그들이 찾아오기도 했지.”
 동굴 속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는 나직하고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이 얼마나 심오한지 목소리가 계곡 전체로 울려 퍼져 말소리가 또랑또랑하게 들려 왔다.
 “처음에는 내 혈채(血債)를 갚기 위해서 죽였지. 그러나 후에는 그들이 저절로 찾아오더군.”
 동굴 속에는 한 괴인(怪人)이 좌정(坐定)하고 있었다. 그 괴인은 산발한 머리에 목에 칼을 차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감옥의 죄수처럼 보였으나 담담하고 모든 것을 달관한 듯한 목소리와 풍기는 기도를 보건대 그는 결코 죄인은 아니었다.
 아니! 그는 결코 죄인이 될 수 없는 사람 같았다.
 괴인은 은백색 머리카락에 수염을 듬성듬성 기르고 있어 나이를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괴인은 몇 마디 말을 내뱉고는 회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대지도 그의 회상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용하기만 했다.
 차 한잔 할 정도의 침묵이 지나고 나서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혈채를 갚는 동안 살인마(殺人魔)로 낙인 찍혀 강호공적(江湖公敵)이 되었다네. 물론 개중에는 강호 공적을 처단한다는 명분으로 나를 찾아온 자들도 있었네만 대부분은 제 분수도 모르고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의 명성을 얻고자 하는 놈들이었지.”
 괴인은 자기 자신의 무공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의 말투는 세상 사람들을 조롱하는 말투였다.
 “나이 삼십에 칼을 귀신같이 잘 써 잔심혈(殘心血)이라 불린 부도(
 徒)의 칼은 정말 무서웠지. 아마도 그가 나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라 불렸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천왕장(天王掌) 순우명(淳于明)의 장법은 벽력이 이는 가운데 펼쳐졌지만 결국 그도 내 손 안에서 삼 초를 넘기지 못했네.”
 아니! 잔심혈과 순우명이라니?
 한때 강남일대에서 강남 칠대고수(七大高手) 중의 일 석(席)을 차지하고 있던 인물들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그들을 삼 초식도 채 되지 않아 꺾었다니, 남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면 오매불망(寤寐不忘) 동굴 속 괴인을 사부로 모시길 간절히 바랄 정도로 괴인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광오한 것이었다.
 강남칠대고수(江南七大高手)라고 불리던 자들 중에서 현재 살아 있는 자들은 무림에 위명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는 용음검(龍吟劍) 팽련호를 비롯해 고적 등 감히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자가 드물었다.
 괴인의 말이 이어졌다.
 “자네, 월마(月魔)라고 들어봤나? 그의 무공은 잔심혈과 순우명의 무공을 합한 것보다 세었지. 그는 특이한 무공을 익혀 한 달 중 달의 정기(精氣)를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십오야(十五夜)에 무공이 절정을 이루었지. 그러나 그도 십오야 아래에서 내 손에 피를 흘리고 말았네. 그의 소원이 그때 눈을 감는 것이라고 했는데 내가 그 소원을 들어준 것이지.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는 너무나 광오하여 그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님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칼을 쓴 괴인은 잠시 말을 끊으며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검붉은 눈자위가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의 맞은편에는 은색 도포를 입은 한 중년인이 열심히 붓을 놀리고 있었다.
 글을 받아 쓰고 있는 사내는 괴인의 웃음소리에 기혈이 진동하는 것을 느끼며 급히 운공을 하여 대항해야 했다.
 그 사람은 마치 괴인의 말을 한 자라도 놓치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그의 신색은 붓을 놀리는 것 외에는 어떠한 관심도 없어 보였다.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허공을 바라보던 괴인의 눈동자가 다시 붓을 든 장년인을 향했다.
 괴인은 다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몇 번의 위기는 있었네. 그 중 죽이기에 아까운 자들도 있었지. 천산신검(天山神劍) 독고진(獨孤眞)은 오 년만 더 검을 닦고 내게 도전했다면 아마도 그가 영광을 차지했을지도 모르지. 자신들이 정한 고수들을 택해 백 번에 걸친 비무행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아야만 가주가 될 수 있는 천하제일검가(天下第一劍家)의 법규가 문제였지. 그는 정말로 아까운 인재였어.”
 붓을 든 사내는 잠시 붓을 멈추고 칼을 쓴 괴인의 입을 쳐다보았다.
 “그 외에도 강남북의 내로라 하는 이들이 죄다 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그들 모두 무인답게 최후를 장식하게 해 주었지. 나는 나를 건드리지 않는 자는 결코 건드리지 않았지만······.”
 말을 채 잇지 않는 그의 건조한 입술 사이로 다시 한 마디가 튀어나왔을 때 열심히 붓을 놀리던 중년인은 신음 소리를 삼켜야만 했다.
 “흐흐흐······. 그러나 나를 먼저 건드린 자들은 결코 살려두지 않았지.”
 괴인의 마지막 한 마디에서는 살기가 짙게 배어 나와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았다.
 그 후로도 괴인과 중년인의 일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한 사람은 지나간 얘기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붓을 들어 괴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열심히 적는 일이 계속된 것이다.
 몇 시진이 흘렀을까?
 마침내 붓을 든 사내는 마지막 말을 다 적은 듯 고개를 들고는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의 수양도 꽤나 깊은지 목소리가 중후하고 위엄이 느껴졌다.
 “구대문파(九大門派)의 고수들은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질문을 들은 괴인의 입가에 비웃음과도 같은 묘한 미소가 살짝 드리워졌다.
 “예(藝)와 형식만을 쫓는 그 겁쟁이들이 스스로 나를 찾을 리가 있겠는가?”
 오히려 반문하는 그의 말에 중년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무림에서 최고의 영예를 차지하고 있는 구대문파를 괴인은 오히려 조롱하는 듯 말했다.
 “그들, 소위 자기들을 명문정파라 부르는 것들은 결코 내가 자신들을 건드리지 않는 한 스스로 나를 찾을 이유가 없네. 먼저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패한다면 그들 명예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결과가 되거든.”
 사내의 입가로 다시 한 번 비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사내의 말은 전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소림(小林), 무당(武當)을 비롯한 수많은 명문정파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쫓는 것은 무(武), 그것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예와 형식에 사로잡혀 틀에 박힌 무공을 고집하는 그들은 사실 그 힘에 있어 실전무예(實戰武藝)를 추구하는 자들보다 나약했기 때문이다.
 쓴웃음 뒤로 다시 괴인의 말이 이어졌다.
 “뒤로는 자기들이 제일인 것처럼 떠벌리지만 너무도 소심한 자들이라서 감히 그럴 엄두도 못 내지. 자기들 자파(自派) 내에서조차 실전무학을 추구하는 제자는 가차없이 내쫓는 그들이 아닌가?”
 붓을 든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들 중에서도 몇몇 용기 있는 자들도 있었지. 사실 그게 전부다 실전무예를 추구하다 자파에서 쫓겨난 자들이었지만 말이야.”
 천하를 깔보던 괴인에게도 탄복한 무림고수가 몇 명은 되어 보이는 것 같았다.
 그가 실전무예를 추구하러 도전장을 내밀었던 자들을 얘기할 때 그의 눈에 언뜻 감탄의 눈빛이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붓을 든 중년인이 다시 물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힘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중년인의 질문에 괴인이 고개를 들어 희미하게 스며드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좁은 틈을 통해 스며드는 햇빛은 강렬한 생명력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동굴 안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주유승(侏儒僧)······. 그가 보고 싶군. 정말로 보고 싶어. 비록 내게 패했지만 거의 대등하게 싸운 인물은 그 밖에 없었네. 무려 천여 초식을 겨뤄 겨우 일 초 반 식의 차이로 내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
 그러나 괴인은 중년인의 말을 못 들었는지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했다.
 “주유승이라면?”
 붓을 든 사내가 물었다.
 하지만 그가 몰라서 물었으랴? 그 이름이 갖는 의미가 너무나 커서 반문했을 것이다.
 중년인은 과거의 무림사를 회상해 보았다.
 과거라고 해 보아야 겨우 이삼십 년 전의 과거일 뿐이지만 말이다.
 주유승(侏儒僧).
 그의 이름 석 자를 모르는 무림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각계 무림정파에서 실전무예를 추구하다 파문당한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명망이 높던 인물이 아닌가?
 지금은 비록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그 소식이 끊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고 있지만 붓을 든 중년인은 확신하고 있었다. 분명 어딘가에서 과거 괴인에게 패했던 기억을 곱씹으며 철치부심하고 있을 것을.
 만약 괴인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천하제일인의 자리는 그에게 돌아갔으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무림인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정녕 소림에서 파문당한 그 주유승을 말하는 것이옵니까? 어르신.”
 “맞네. 그 이름 석 자를 감히 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그 자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괴인은 정녕코 주유승에 탄복한 모양이었다.
 “소림의 장대무비한 불문무학(佛門武學)은 참으로 내가 존경하는 바이네. 종류와 크기, 모든 면에서 소림 무학을 따라갈 수 있는 무예는 없어. 그것을 실전무공으로 접목시킨 주유승의 능력이야 말로 대단하다고 봐야지.”
 칼을 쓴 괴인은 주유승과의 결투를 말할 때는 언뜻 눈에 진한 생기가 스쳐 갔다.
 “그때 그와 내가 초식을 겨루는 동안 그의 주먹을 여덟 대나 맞아야 했네. 천여 초만에 간신히 그를 물리칠 수는 있었지만 그를 죽일 수는 없었네. 내 손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지.”
 괴인의 무공을 익히 알고 있던 중년인은 새삼 주유승의 무공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에 그와 삼 초식을 겨룰 수 있는 자도 드물거니와 무려 천여 초를 겨루는 동안 그에게 여덟 대의 권장을 먹이다니!
 그러나 괴인의 말에 중년인의 감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아나? 그는 이런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나 버렸지. ‘그대는 무공의 요체에 대해 알고 있는 내가 만난 첫 번째 상대였네. 졌지만 즐거웠어. 오늘은 비록 자네의 손에 패했지만 다음 번에는 자네도 자신할 수 없을 걸세. 다시 자네를 찾을 때까지 죽지 말고 기다리고 있게나. 자네를 죽일 수 있는 상대도 없을 것이지만 말이야.’라고 하더군.”
 말을 마친 괴인의 눈빛이 아득하게 젖어들었다.
 괴인의 눈을 바라보던 중년인은 이 세상에 대적할 상대가 없는 절대강자의 외로움을 엿볼 수 있었다.
 그렇게 괴인의 눈에는 절대자의 고독함이 진하게 배어 있는 것이었다.
 상대가 없어 무(武)를 논할 수 없는 절대고독(絶對孤獨)!
 그러한 절대고독은 겪어 보지 않은 자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괴인의 눈은 주유승과 같은 강자들이 실력을 키워 한시 바삐 자기의 상대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는 눈초리 같았다.
 칼을 쓴 괴인은 지그시 눈을 내리감았다. 눈썹 끝이 살며시 떨리기 시작했다.
 눈꺼풀 아래로 드러난 괴인의 눈동자가 기다림을 말해 주는 듯 보였다.
 “그렇군요.”
 붓을 든 중년인은 그러한 괴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말했다.
 중년인은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나긴 이야기들을 마저 정리하기라도 하듯이 붓을 놀린 후 다시 질문을 던졌다.
 “무예가 오의(奧義)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를 듣고 싶습니다.”
 “무예라······.”
 칼을 쓴 괴인은 잠깐 말끝을 흐리는 듯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말을 하기 시작했다.
 “크크, 얼빠진 놈들은 가끔 이런 소리도 하더군. 무예란 정신함양을 도모하고 육체의 건강을 위해 익히는 것이라고······. 정신 나간 놈들.”
 칼을 쓴 괴인의 입가로 쓰디쓰게 보이는 미소가 스쳐 갔다.
 “그것은 실력 없는 놈들의 한풀이 소리지. 무예는 곧 죽이기 위해서 익히는 공부야. 남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데 무슨 도(道)고 정신이야. 크크크······.”
 이때 동굴 안으로 나 있는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국화꽃 한 송이가 날아 들어왔다.
 하지만 칼을 쓴 괴인은 꽃잎 하나의 흔들림도 놓치지 않았다.
 괴인이 손을 들자 꽃잎은 마치 자석에 이끌린 쇠조각처럼 사내의 손 위로 떨어졌다.
 그는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나를 찾아오는 자들이 더 이상 없게 되자 이번에는 친구가 되겠다고 하는 작자들이 주위로 몰려들더군. 물론 개중에 나의 무공을 흠모하고 진심으로 존경해 찾아온 사람들도 있기는 했지.”
 잠시 괴인의 눈가가 꿈틀거렸다.
 “하지만 대부분 탐욕(貪慾)을 숨긴 치사한 놈들이었지. 그 빌어먹을 놈들은 한결같이 진정 수심어린 표정으로 강호무림의 장래를 걱정했고 한결같이 의연하게 외쳤지.”
 붓을 든 중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正)과 의(義)를 외치며 정도를 걷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실상은 내심에 사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이 많다는 것을 붓을 든 중년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소인배들은 입에 침이 마를 날이 없었지. 강호무림을 다스릴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말이야. 난 세상에 그처럼 대의지사(大義志士)들이 많은 줄 그때 알았네. 빌어먹을 노릇이지.”
 괴인의 목소리에는 한없는 비웃음이 숨어 있었다.
 “강호무림의 제패는 영웅(英雄)들의 영원한 염원이 아닙니까?”
 붓을 들고 있던 사내가 칼을 쓴 괴인의 말을 끊기라도 하듯 갑작스레 질문을 던져왔다.
 순간 칼을 쓴 괴인의 눈가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괴인은 이내 그런 움직임을 감추고 다시 잔잔한 눈빛으로 돌아와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는 살인하는 자의 고통을 모르는군.”
 칼을 쓴 괴인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중년인을 쳐다보았다.
 붓을 든 사내는 괴인의 눈빛에 압도당하여 가슴이 떨려오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으음······. 눈 앞에서 근 팔십 명의 식솔이 아무 이유도 없이 죽어 갔네. 부모님, 형제 자매들, 그리고 식솔들이 내 눈 앞에서 하나씩 쓰러지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네. 나는 그들의 눈을 보았지. 그들의 눈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네.”
 어두운 과거라도 반영하듯 괴인의 눈빛이 어두워져 갔다.
 그의 입에서는 침통한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지금 떠올리는 과거의 기억들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행여 내가 복수를 포기할까봐 죽어 가는 순간까지도 무언의 강요를 하고 있었네.”
 괴인이 잠시 몸을 흠칫 떨었다.
 피를 흘리며 자신의 앞에서 죽어 가던 사람들의 눈빛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그를 놓아 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동굴 밖을 바라보며 침묵에 빠져들었다.
 잠시 후 괴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 눈빛은 내게 말하고 있었지. ‘너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복수를 해야 한다. 너만이 복수를 할 수 있다’라고······. 나는 복수를 끝낼 때까지 결코 가족들의 한 맺힌 눈빛을 잊지 못했네. 한 마디로 그건 지옥이었어. 오늘의 나는······.”
 칼을 쓴 괴인은 말을 잇기가 힘든 듯 굵은 침을 서너 번 천천히 삼켰다.
 “나는 그런 수십 명의 피를 바탕으로 이룩된 거야. 나란 인간자체가······.”
 중년인은 잠시 붓의 움직임을 멈추고는 괴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괴인은 그 몇 마디 말을 하기 위해 뼈를 깎는 과거의 고통을 생각했으리라.
 괴인의 전신에서는 어두운 그림자가 뭉게뭉게 피어 오르고 있었다.
 중년인은 괴인의 과거가 이토록 비통(悲痛)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그는 그런 괴인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듯 괴인에게 산책을 나갈 것을 권했다.
 괴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년인은 놀리던 붓을 붓걸이에 걸어 놓고 일어서서 문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양 손으로 문을 천천히 밀어젖혔다.
 문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듯 끼익끼익 거칠은 파열음을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2
 
 쩔그렁 쩔그렁
 칼을 쓴 괴인의 손목과 발목에는 언뜻 보기에도 족히 몇 십 근은 되어 보이는 쇠사슬과 쇠고랑이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괴인은 그러한 것에 전혀 영향 받지 않는 듯 걸음걸이가 사뿐하기 그지없었다.
 국화꽃 사이를 천천히 걷던 괴인이 문득 허리를 굽혀 국화 한 송이를 꺾어 코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국화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괴인의 행동은 마치 금방 죽을 사람이 그 향기를 영원히 가슴속에 간직하려는 듯 보였다.
 문득 괴인의 눈빛이 초점을 잃고 노랗게 변해 갔다.
 은빛 도포의 중년인은 그러한 괴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와 같은 일대 거인(巨人)에게도 감상적인 면이 있다는 사실에 적이 놀라워하고 있었다.
 
 ***
 
 한참 동안이나 꽃의 향기를 맡고 있던 괴인이 꽃을 하늘로 향해 들었다.
 아주 잠깐 괴인의 손에서 빛이 이는 듯하더니 꽃잎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바람에 날렸다.
 이내 꽃잎 부스러기는 산 위에 걸려 있는 노을 사이로 사라져 갔다.
 문득 사라져 가는 꽃을 보던 괴인의 입에서 나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팽영······.”
 괴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중년인은 팽영(彭暎)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은 것 같았으나 자세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중 문득 예전에 선친이 팽영이라는 여인에 대해 잠깐 언급했던 적이 있음을 기억해 냈다.
 중년인은 조심스레 그 괴인에게 팽영이란 여인에 대해 운을 떼 보았다.
 “어르신! 예전에 선친에게서 팽영이란 여자에 대해 잠깐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녀에 대해 어르신께 이야기를 여쭤보아도 실례가 안 될는지요?”
 은빛 도포의 중년인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칼을 쓴 사내를 바라보았다.
 중년인의 물음에 괴인은 고개를 돌려 중년인의 눈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괴인의 눈을 마주한 중년인은 순간 가슴으로 차가운 기운이 스쳐 가는 것을 느꼈다.
 괴인의 눈빛은 그렇게 사람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중년인의 눈을 말없이 쳐다보던 괴인은 다시 시선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하늘에 걸린 노을을 바라보던 괴인은 은빛 도포의 사내를 뒤로 한 채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내 소원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나?”
 괴인의 목소리가 살며시 떨리는 것이 짙은 추억에 빠져 있는 듯했다.
 “······.”
 중년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괴인의 추억을 깨지 않기 위해서였다.
 “단 한 번이라도 사람답게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어.”
 ‘사람답게 산다······. 하긴 강호무림에서 칼을 잡고 살아가는 이들 중에 그런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은빛 도포의 중년인은 그런 생각을 하며 괴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괴인의 뒷모습은 이 세상의 고독이라는 고독은 전부 혼자 둘러메고 있는 것처럼 쓸쓸해 보였다.
 “팽영······. 그녀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난 내가 사람답게 사는구나 생각했지.”
 칼을 쓴 괴인의 눈빛이 노을 속에 어둡게 물들어갔다.
 “그녀의 눈빛은 별처럼 영롱했고, 그녀가 웃는 모습은 그야말로 화사하기 그지없었지.”
 팽영이라는 여인을 괴인은 무척이나 사랑한 듯 괴인의 얼굴에도 따스한 기운이 역력히 지나갔다.
 “그보다 더 좋은 표현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아무리 좋은 문구라도 그녀를 표현하는 데는 부족할 거야.”
 은빛 도포의 중년인은 괴인과 같은 무인에게도 그러한 면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지금까지 괴인을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귓전으로 정에 넘친 괴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녀는 눈부시게 투명한 팔로 나의 목을 감싸 안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네.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꿀처럼 달콤했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나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었지.”
 괴인은 허리를 굽혀 국화꽃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한없는 비애(悲哀)가 숨어 있는 듯한 손길이었다.
 “그토록 사랑한 그녀였기에 나는 그녀에게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네. 아마 그녀가 나의 목숨을 요구했다 해도 들어주었을 거야. 하지만 그러하지 못했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고 말을 해야 옳겠지.”
 허리를 들어올린 괴인의 얼굴은 한껏 어두워져 있었다.
 슬픔, 분노, 사랑, 행복······.
 인간지사(人間之事)의 모든 감정이 하나도 정리되지 않은 모습으로 뒤엉킨 얼굴이었다.
 괴인은 그렇게 한참 동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러했네.”
 괴인은 짧게, 그러나 한없이 쓸쓸하게 말을 내뱉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괴인은 한참을 말없이 꽃밭을 걸었다.
 괴인의 어두운 그림자가 만들어 내는 쓸쓸하고 적막한 분위기 사이사이로 그의 발에 묶인 쇠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그가 걸을 때마다 같이 울려 퍼지는 쇠사슬이 만들어 내는 소리는 묘한 조화를 불러일으켜 그야말로 적적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중년인은 감히 괴인의 심사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도 괴인과 같이 침묵을 지키며 말없이 그를 따라서 걸어갈 따름이었다.
 괴인의 오랜 침묵은 노을이 산 아래로 숨어 버리고 어둠이 찾아와서야 끝이 났다.
 “그녀는······ 나에게만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지. 그녀는······.”
 그때 괴인의 머리 위로 국화 꽃잎이 다시 날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괴인도 국화 꽃잎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다시 국화꽃 한 잎이 날아왔다. 그리고 다시 날아왔다.
 문득 검게 변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 방울 떨어지며 국화꽃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물에 젖은 국화 꽃잎이 땅으로 떨어졌고 그 위로 빗방울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 소리가 묘한 여운을 남기며 두 사람의 심금을 파고들었다.
 중년인은 괴인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괴인은 이 일련의 말들을 꺼내 놓으면서 그 고통을 잊으려는 듯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 비애를 이야기하듯 감싸쥔 손 매듭에 피가 맺히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만난 모든 남자에게 최선을 다했단 말일세. 여자가 남자에게, 그것도 모든 남자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의미를 자네는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말과 함께 괴인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의 악다문 입술 사이로도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괴인은 차마 남에게 꺼내기 힘든 자신의 치부(恥部)를 중년인에게 드러내고 있는 중이었다.
 중년인은 괴인의 어두운 과거를 들으며 그에게 한 발 더 다가서는 느낌이었다.
 바람도 두 사람의 어두운 분위기를 더욱 어둡게 만들려는 듯 쓸쓸히 휘몰아치고 있었다.
 문득 괴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말에 중년인은 까무러칠 정도로 기겁을 했다.
 “후후후······. 그녀가 최선을 다한 남자들은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가장 귀중한 것을 바쳤다네.”
 괴인은 이 말을 꺼내면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계곡에는 이제 완연한 어둠이 찾아와 하늘에는 희미하게 떠도는 구름만이 보일 뿐이었다.
 은빛 도포의 중년인도 괴인의 시선을 쫓아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대불화상(大佛和尙)은 소림의 최고 비전(秘典)인 역근세수경(易筋洗手經)을, 무당의 영허자(靈虛子)는 태극혜검(太極慧劍) 검결을 바쳤지.”
 괴인은 혼자말을 하듯이 나직이 뇌아리고 있었다.
 마치 자기의 치부를 남이 못 알아들었으면 하는 심정인 것 같았다.
 중년인은 괴인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커지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괴인이 들려 주는 비사는 모두가 십수 년 전 한바탕 무림을 뒤흔들었던 사건이었다.
 한때 몇몇 문파의 비급(秘
 )이 사라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들 비급을 그 누군가에게 도둑맞았다고만 생각했지 소위 문파의 명숙(名宿)들이 한 여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스스로 바쳤을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더구나 대불화상과 영허자는 소림과 무당의 최고 명사들이었다.
 두 사람은 문파를 떠나 무림인이라면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을 정도로 명망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했던 그들이 한 여인의 치마폭 때문에 무공비급을 스스로 바쳤다는 괴인의 말을 중년인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괴인이 들려 주는 비사(秘使)는 중년인에게는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괴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최고 자객 살인혈랑(殺人血狼)은 서른 일곱 명의 목숨을 그녀에게 바쳤고, 강북 서문세가(西門勢家)의 서문장청(西門張靑)은 삼백 년을 캐고도 다시 삼백 년은 더 캐고도 남을 만큼의 금이 매장되어 있는 금광을 바쳤다네.”
 새로운 사실들이 괴인의 입을 통해 계속 흘러 나왔다.
 마침 하늘에서는 괴인의 어두운 심정을 씻어 내리려는 듯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서서히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괴인은 하늘을 한 번 쳐다보더니 동굴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게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자 많은 영웅호걸들이 애썼지만 그녀는 원래가 한 지아비를 섬길 여자가 아니었지. 개 중에는 결국 서문세가(西門勢家)의 서문장청(西門狀請)처럼 미쳐 버리고만 인간도 있었다네.”
 중년인은 팽영이란 여자에 대해서 곰곰이 머리를 굴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인이 얼마나 절색(絶色)이고 요염하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치마폭에 굴복했단 말인가? 그녀가 섭혼술(攝魂術) 같은 사도(邪道)의 무공을 배웠더라도 그렇지, 무공을 배우지 않은 평민이라면 모를까 하나같이 무림에 그 명성을 쟁쟁하게 떨치고 있는 고수들이 한낱 여인의 치마폭에 굴복할 수 있단 말인가?’
 중년인은 팽영이라는 여인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인물인지 궁금하여 미칠 지경이었다.
 마침 중년인의 그와 같은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괴인의 말이 다시 들려 왔다.
 “그녀······. 그럴 만한 여자였지. 당대에 무명(武名)을 날리며 영웅이라 불릴 만한 자들이 자신의 모두를 바칠 정도의 여자였지. 심지어 천하제일의 무공을 자랑하던 나조차 그녀를 한 번 보고 나서 푹 빠질 정도였으니까.”
 괴인은 동굴 입구의 앞에 이르러서는 말을 멈추었다.
 은빛 도포의 중년인은 다시 천천히 문을 열어 괴인과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3
 
 중년인은 그 동안의 이야기를 정리하는 듯 붓을 한참 동안 놀리다가 괴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르신은 그녀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나? 나는 그녀에게 어떤 남자도 주지 못했던 최고의 선물을 주었네. 천하에서 가장 무정하다는 살인혈랑도 주지 못했던, 그 어떤 영웅도 주지 못했던 선물······.”
 괴인은 마지막 말을 하기 힘든 듯 잠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 한 마디를 입 밖으로 뱉어냈을 때 중년인은 신음 소리를 삼켜야만 했다.
 “죽음······. 그녀에게 죽음을 선물했다네.”
 말을 하는 괴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르신! 어르신은 팽영이라는 여자분을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사랑? 그래, 사랑했지. 죽도록 사랑했어. 내 모든 것을 바치고자 했을 정도로 사랑했지. 하지만 여자의 사랑은 진실된 것이 아니었다네.”
 괴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의 감겨진 눈에는 온갖 회한(悔恨)이 들어 있는 듯 침울하게 보였다.
 “그녀는 단지 나를 이용하려 했을 뿐이야. 결코 나 자체를 사랑했던 게 아니었어. 처음에는 자신 가문의 복수를 위해서 나를 이용했다네. 그리고 다음에는 나를 이용해 강호무림을 멸살시키려고 했었지.”
 중년인은 놀리던 붓을 멈춰 세웠다.
 “그 여자는 내가 무림의 왕이 되기를 바랐고, 그런 나를 이용해 무림 왕후가 되어 무림을 말살(抹殺)할 음모를 가지고 있었던 거야. 자네 같으면 어떻게 하겠나? 자신의 혈채(血債)를 갚기에도 지친 남자가 그런 여자에게 어떻게 해야 했겠나?”
 은빛 도포의 중년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괴인의 말에 수긍이라도 하듯.
 “나와 함께 할 수 없는 여자를 나는 사랑한 것이네.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녀를 죽였던 거야. 그렇게 나를 충동하지만 않았다면 지금껏 함께 있을 여인이었는데······. 불쌍한 여인······.”
 칼을 쓴 괴인은 어느새 일어서서 동굴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굴에 난 작은 창으로 빗방울이 들이치며 괴인의 얼굴로 튀어왔다.
 중년인이 물었다.
 “어르신, 그렇다면 어르신께서 스스로 자신에게 칼과 쇠사슬을 채우고 인고의 세월을 보내시는 것은 그녀에 대한 죄책감(罪責感) 때문입니까?”
 “글쎄······. 그녀는 죽어 가면서 나에게 이런 말을 했지. 복수의 칼날을 세운 음성이었어. 너도 천수를 누리고 죽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렇게 나를 저주하며 죽어 갔지. 맞는 말이야. 맞는 말이고 말고.”
 “그 말씀은?”
 “자네의 은현세가(殷賢勢家)는 천하제일인으로 인정한 고수가 죽을 때까지 적수가 없어야만 천하제일인으로 공표해 오지 않았던가?”
 괴인이 은현세가를 은연중에 내비치자 붓을 놀리던 중년인의 눈가에 득의의 눈빛이 지나갔다.
 그의 표정에서는 은현세가와 모종의 관계가 있음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기실 관계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중년인이 바로 은현세가의 가주(家主)인 구한승(具翰昇)이었다.
 은현세가(殷賢勢家)!
 그 명망은 무림에서 소림, 무당 등 구대문파에 비교하지는 못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명망을 쌓아 가고 있었다.
 무공으로도 일절을 이루고 있었으나 그보다 은현세가가 유명한 것은 한 권의 무림사가(武林史家) 때문이었다.
 무림사가에 이름이 오를 정도의 무림인이라면 누구도 무시 못하는 고수의 반열(班列)에 오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로 은현세가는 무림에서 백 위까지의 서열을 판단하여 무림사가에 기록하는데, 강호무림인이라면 그 누구도 이에 토를 달지 않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렇습니다만······.”
 은현세가의 가주 구한승이 답했다.
 “내게 남은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나보다 무공이 더 뛰어난 자의 손에 죽기를 바라네. 그것이야말로 무인에게 어울리는 최후가 아니겠는가?”
 괴인은 자기를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을 살며시 만졌다.
 “나는 나에게 진정으로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나 어서 빨리 결전의 날을 맞이하기를 바라네. 내게 채운 칼과 쇠고랑은 그 날을 기다리며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네. 이것 모두 내 스스로 내게 씌운 형구들인 셈이지.”
 은빛 도포의 중년인, 은현세가의 가주 구한승은 괴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전율감과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괴인의 말은 진정 광오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천하에 대적할 적수가 없어 그러한 적수가 찾아오기를 몽매(夢寐)하며 스스로 족쇄를 채우다니. 구한승과 같은 고수가 생각하기에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과연 천하에 누가 있어 나의 소원을 들어줄 것인지······. 그래서 예전에 내가 인정한 유일한 적수인 주유승을 찾아갔었다네. 지독하게 눈발이 내리던 날이었지······.”
 괴인의 말에는 진정 절대자의 짙은 고독감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아직은 아니다.’였어. 아직 나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얘기였지. 자신의 필생의 무공인 생사박(生死博)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이야.”
 구한승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수가 있었다.
 천하에 적수가 없는 괴인 같은 자에게는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여겼다.
 절대강자의 고독, 바로 그것이었다.
 “상비운(尙飛雲) 어르신, 그러면 언제 그 주유승의 생사박 무공이 완성된다 하였습니까?”
 그가 처음으로 동굴 속 괴인의 이름을 들먹였다.
 무적구패(無敵求敗) 상비운(尙飛雲).
 괴인의 이름 석 자였다.
 언뜻 듣기에는 그저 평범한 한 무림인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무림에 뜻을 두고자 하는 그 누가 있어 지금 이 이름을 들었다면 아마 놀라 기절했을 것이다.
 강산이 두세 번 변할 정도의 시간이 흐르기 전 무림의 내로라 하는 모든 고수들을 꺾고 무림의 절대신이라 불렸던 무적구패 상비운.
 그의 무공은 적수를 찾아볼 수가 없었고 심지어 그와 비무하여 삼 초를 넘긴 자가 드물 정도로 절대자였다.
 오죽하면 상비운과 비무하여 삼 초식을 견딘 자라면 능히 무림에서 한가락 한다는 고수 반열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겠는가?
 요행히 그의 자비를 얻어 생명을 유지한다면 말이다.
 그가 한 말이 결코 과장이나 헛된 말이 아니라 진실이었다는 것은 그의 입에 오른 이름 석 자만으로도 불식(不息)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가 대적할 상대가 없어 고독하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절대자가 어떤 고독감을 느끼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하게 느껴졌다.
 상비운이 말했다.
 “소림, 무당, 천산(天山), 그 모두가 내 적수가 되지 못하는 마당에 그의 생사박이 아니라면 무엇도 나를 꺾을 수는 없을 것이야.”
 구한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주유승은 대답했네. ‘반드시 너를 찾겠다, 무적구패. 내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내 후계자를 키워서라도 꼭 보낼 것이다.’라고 장담했지. 나는 그를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는 중이네. 그는 꼭 올 거야, 오고말고······.”
 구한승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주유승이 아니면 그 누가 무적구패의 적수가 될 수 있겠는가?
 잠시 동안 다시 침묵이 흘렀다.
 상비운은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고, 구한승은 글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붓을 움직이던 구한승이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제 어르신의 무공 연혁에 대해서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구한승의 눈은 잔뜩 기대를 품고 있었다.
 당대 무림의 신(神)과 같은 존재의 무공 연혁을 듣는다는 것에 어찌 기대를 갖지 않겠는가?
 더욱이 그 자가 당대 최고의 무림사가(武林史家)의 가주라면 더욱 말할 나위없는 것이었다.
 “생사박(生死博).”
 그러나 상비운의 대답은 단 한 마디였다.
 “어르신, 좀 전에 생사박은 주유승의 무공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구한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다.
 “무공이라면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니 생사를 건 싸움이라는 생사박보다 어울리는 명칭은 없네. 실전무공을 익힌 자들의 무공은 무조건 생사박이라고 불러야 옳겠지.”
 잠시 동안 말없이 상비운의 얼굴을 쳐다보던 구한승이 비로서 고개를 끄덕였다.
 구한승은 붓에 먹물을 잔뜩 묻혀 종이 위에 생사박이라는 글자를 힘껏 눌러썼다.
 종이 위에서 생사박이라는 세 글자가 희미한 불빛 속에 한껏 빛을 발했다.
 ‘생사박, 생사박, 생사박.’
 종이 위에 선명하게 쓰여진 글자를 바라보며 박복해서 읽던 구한승이 다시 상비운을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만일 어르신을 패배시키는 자가 출현한다면, 그래서 제 생애에 천하제일인의 일생을 두 번 기록할 수 있게 된다면 은현세가의 어느 가주들도 누리지 못했던 흥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럼······.”
 구한승은 이 시대의 절대자에게 깊은 대례를 올리고 문을 나섰다.
 그가 나간 문틈 사이로 잠시 싸한 국화꽃 향이 동굴 안으로 흘러들었다.
 비릿한 빗물의 향과 어울린 국화꽃 향은 한없이 그윽하고 아득하기만 했다.
 
 
 제2장 무창성의 파락호(破落戶)
 
 
 1
 
 발목이 파묻히도록 쌓여 있는 눈이 환한 보름달 아래에서 한껏 빛을 내고 있었다.
 더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는 광경이었다.
 이따금씩 울어대는 부엉이 소리만이 겨울 밤의 을씨년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듯했다.
 
 ***
 
 사각사각.
 한 젊은 여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길을 걸어 쓰러져 가는 초옥을 향해 걷고 있었다.
 무슨 비밀이라도 있는지 그 여인은 아주 조심스럽게 그 초옥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 것이 열여덟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녀였다.
 그러나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둔부와 금방이라도 삐져 나올 듯이 부풀어오른 가슴을 보노라니 이미 성숙할 대로 성숙한 여인이었다.
 한 마디로 저절로 군침이 돌 정도의 절색이었다.
 걸음걸음마다 여인의 엉덩이는 좌우로 교태롭게 흔들거렸고 늘씬한 다리가 드러났다.
 ‘공자님은 와 계시겠지?’
 여자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얼굴에 살며시 홍조를 띠며 초옥(草屋)의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초옥 안은 어둠에 묻혀 있어 아무것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
 “공자가 아직 오시지 않았나?”
 그녀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돌연 어둠 속에서 하나의 손이 나타났다.
 “어머!”
 순간 여인은 어떤 강한 힘이 뒤에서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헉!”
 여자는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사내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것이다. 그것도 젊은 사내의 손이······.
 소녀의 가슴을 움켜잡은 사내의 손은 거침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옷 안으로 스며들어 소녀의 젖을 문지르고 젖꼭지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언제 이 소녀가 남자를 경험해 보았던가?
 처음 접하는 사내의 억센 힘에서 그녀는 가슴속에 불길이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사내의 손은 거침없이 여자의 앞섶을 헤치며 옷을 벗겨 나갔다.
 소녀의 몸을 가리고 있던 옷들이 하나씩 바닥으로 흘러내리렸다.
 옷이 벗겨지고 마침내 어둠 속으로 소녀의 하얀 가슴과 둔부가 드러나 버렸다.
 소녀의 가슴과 둔부는 어둠을 배경으로 하여 본래의 살색보다 더욱 희게 보였다.
 “공자님!”
 소녀가 당황한 목소리로 자그맣게 외쳤다.
 “쉿!”
 사내는 여인의 입을 자신의 입으로 막아 버렸다.
 그와 함께 그의 두 손은 여자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공자님, 이러시면 안 되옵니다.”
 소녀는 사내의 손길을 저지하려 애를 쓰며 말했다.
 사실 애를 쓴다 뿐이지 사내에게 있어서 그녀의 행동은 더욱 욕정을 부채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여인은 사내의 손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참으로 애교스러운 목소리였다.
 “공자님, 저를 사랑하시는 거죠. 저를 일평생 책임져 주시는 거죠?”
 “헤헤! 그럼, 그럼. 내 어찌 너를 사랑하지 않겠냐? 사랑하고 말고.”
 사내는 여인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소녀의 몸을 탐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사내의 말에 그래도 못 미덥던지 여인은 재차 물었다.
 “공자님, 저······정말 책임져 주시는 거죠?”
 “그······그래, 책임진다니까. 우리 얘기는 그만하고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꾸자.”
 사내는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소녀의 몸을 핥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능숙하기 그지없었다.
 다년간에 걸쳐 그 방면에 공부를 쌓은 것 같았다.
 사내가 소녀의 몸을 탐하는 순간 한 줄기의 달빛이 초옥으로 스며들었다.
 잘록한 허리에 풍만한 가슴, 그리고 처녀를 상징하듯 그녀의 유두는 조그마했다.
 아직 다 성숙하지 않았는지 그녀의 비림은 까칠까칠한 털이 몇 송이 솟아나 있어 사내의 욕정을 부채질했다.
 사내는 손길을 움직여 먼저 여자의 얼굴을 쓰다듬고는 다시 여자의 목을 타서 가슴에 이르렀다.
 “아!”
 사내의 애무에 소녀는 처음 겪는 짜릿한 흥분을 느끼며 낮은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어느 사이 사내가 여인의 분홍색 유두(乳頭)를 물었다.
 그의 행동은 마치 갓난아기들이 어미의 젖을 빠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내는 여인의 가슴에서 꿀물이라도 빠는 듯이 유두를 굴리고 있었다.
 혀끝으로 살짝 애무하고 이빨로 살며시 깨물어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유두를 애무했다.
 소녀의 유두는 사내의 애무에 흥분하여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다.
 “어서······ 어서······.”
 소녀의 몸은 한껏 달아올라 사내를 간절히 원했다. 처녀인 소녀. 그러나 사내의 능숙한 손길은 그런 소녀마저도 충분히 달아오르게 했다.
 사내는 쉬이 그녀의 소원을 이루어 주려 하지 않았다.
 사내는 다시 소녀의 입에 입을 맞추고는 혀를 집어넣었다. 소녀는 사내의 혀가 안으로 침범하자 마치 예전부터 익숙한 행위인 듯 사내의 혀를 빨아가기 시작했다.
 사내는 그녀의 입 안을 유영하며 손을 들어 여자의 숲으로 다가갔다.
 “헉!”
 순간 소녀의 몸이 활처럼 휘어졌다. 도저히 인간의 몸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 모습이었다.
 사내의 손이 소녀의 동굴을 탐험하자 소녀는 자지러질 듯한 흥분을 느껴야 했다.
 그녀의 동굴에서는 지극한 흥분으로 인해 액이 넘쳐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사내가 그녀의 몸 위로 몸을 실어갔다.
 “큭큭큭! 네년이 안달이 났구나.”
 보름달이 환히 비추고 있는 초옥 밖으로 흘러 나오는 남녀의 낮은 신음 소리가 밤 하늘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문득 산등성이로부터 남녀의 조화를 방해라도 하듯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탁탁탁······.
 산 밑으로부터 불혹을 갓 넘겼을까한 중년의 사내가 손에 몽둥이를 움켜쥐고 초옥을 향해 정신 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지극한 분노에 이미 이성을 잃어 흰 눈동자만 보이고 있었다.
 “내 이 죽일 연놈들을!”
 사내는 초옥에 다다라서는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 시퍼런 서슬에 초옥의 문이 산산조각나며 떨어져 나가고야 말았다.
 그의 두 눈에 발가벗은 남녀의 뒤엉킨 모습이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이······이것들이!”
 사내는 제 분에 못 이겨 씩씩 화를 내고 욕을 하면서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의 두 눈에서는 분노가 치밀어 붉은 혈광(血光)이 폭사되어 나오고 있었다.
 “악! 아······아버지!”
 소녀가 질끈 눈을 감으며 소리쳤다.
 사내는 급히 몸을 일으켜 두 손으로 몽둥이를 막으며 문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얼마나 다급한지 아랫도리를 가릴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의 출렁거리는 아랫도리가 그의 다급함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중년의 남자는 사내를 붙잡으려 했으나 그 신속함에서 사내를 쫓을 수가 없었다.
 중년의 남자는 사내가 도망을 가 버리자 소녀에게 몸을 돌렸다.
 “이 죽일 년, 벌써부터 몸을 함부로 내굴려?”
 사내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고 있었다.
 “아······아버지.”
 소녀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이······이 죽일 년! 어디 할 짓이 없어 처녀 몸으로 사내질이야? 그놈 어떤 놈이야? 이······이름을 대, 누구냔 말이야?”
 극도로 흥분한 사내는 말과 함께 소녀에게 매질을 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아버지의 매질에 두 손을 싹싹 빌며 애원을 했다.
 “흑흑······. 몰라요. 단지 범 공자라는 것밖에 아무것도 몰라요.”
 “뭐라고? 모른다고? 아니, 집도 절도 모르는 놈한테 몸을 바쳤단 말이냐? 이 정신 나간 년아.”
 그때 사내의 뒤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는 천뢰보(天雷堡)의 범천악(範天岳)이오.”
 그 중년의 사내는 분을 못 참고 있다가 뒤에서 들려 오는 소리에 돌아다보았다.
 그의 눈에 삿갓을 깊게 눌러 쓴 사내가 뒷짐을 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중년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사실이오······?”
 “그렇소.”
 그 사내는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삿갓을 더욱 깊게 눌러 썼다.
 삿갓 쓴 사내의 대답에 중년인은 몽둥이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이 미친년아, 세······세상에······ 몸을 줄 놈이 따로 있지 천하의 파락호에게 당하다니······.”
 그 사내가 주저앉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천뢰보하면 어디인가?
 무창성의 일대 패주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용담호혈(龍膽虎穴)이 천뢰보이다.
 천뢰보의 보주인 범유(範儒)로 말하면 한 자루 검으로써 현 무림에 위명을 크게 떨치고 있는 무림의 일류고수였다.
 천뢰검(天雷劍) 범유.
 그가 한 번 칼을 휘두르면 마치 우뢰가 치듯이 그 위세가 강맹하다 하여 천뢰검이란 별호가 붙게 된 것이다.
 그는 정도를 사수하는 사람으로서 신표로 삼는 한 자루 천인검(千
 劍)을 빼어 들 때면 뭇흑도의 나부랭이들은 제 오금도 못 추스르고 꽁지를 빼기 바쁠 정도로 그는 사해팔방(四海八方)에 그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범유는 원래 무당파 청허도장(晴虛導掌)의 한 속가제자(俗家弟子)였다.
 청허도장은 근 오십 년 전에 이미 그 무공으로써 천하에 이름을 크게 떨친 일대 기인(畸人)이었다.
 그는 현 무당의 장문인인 운룡(雲龍)도장의 사숙뻘 되는 사람이다.
 청허도장의 위치는 현 무당에서도 장문인을 비롯한 모든 무당제자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에 있었다.
 현재 그는 속세의 모든 것에 초월하여 오로지 도(道)를 추구하고자 심산에 은거(隱居)를 하고 있었다.
 강호 무림인들은 그를 한 번 만나 보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는 좀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하물며 무당 내에서도 근 십 년간 그를 본 자가 극히 드물 정도였다.
 천뢰검 범유도 자기의 무학 증진을 위해서 사부를 뵙고자 했으나 근 몇 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염원이 성취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나 그가 배운 검법인 태극검결(太極劍訣)과 태을청령진기(太乙淸靈眞氣), 그리고 육지비행술(陸地飛行術)의 경신술(輕信術)만으로도 일절(一切)을 이루어 무창성 일대에서 뿐만 아니라 대강남북(大江南北)에 그 이름을 떨칠 수가 있었다.
 그런 천뢰검 범유에게도 애물단지가 하나 있었다.
 바로 그의 아들인 범천악이었다. 그의 아들은 천하의 파락호로 소문난 놈이었다.
 그저 자기 아비와 가문의 위명을 등에 업고 여기저기 계집질 할 곳이 없나 두 눈이 빠져라 하고 사방팔방(四方八方)으로 동분서주(東奔西走)하고 있는 아주 바쁜 몸이었다.
 천뢰보에서 범유를 만나는 것보다 범천악을 만나기가 더 어려울 정도로 그는 여자를 찾아다니느라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범천악은 여자도 처녀만 찾는 게 아니라 조금 눈에 반반하면 처녀건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계집이건 대가집 유부녀건 가리지 않고 포식하는 습성을 지녔다.
 그래도 생긴 것 하나는 천하의 미공자(美公子)라 그 방면에는 꽤 소질이 발달했다.
 그래서인지 천하의 파락호란 소문을 듣고도 범천악에게 군침을 흘리는 계집이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범천악이 계집질만 했다면 그토록 그 아비가 속을 썩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놈은 천하에 명색이 사나이 대장부라면 안 해 보는 일 없이 다 해 보아야 한다고 계집질 외에도 도박, 술, 그 외에도 다른 명문정파의 공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일을 혼자 도맡아 해 오고 있었다.
 한창 주야로 무공 공부에 전념해도 모자랄 시기에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다른 일에만 신경 쓰니 그 아비인 범유야말로 얼마나 속이 타겠는가?
 그러나 범천악은 아비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계집질을 하다가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들켜 옷가지도 추스르지 못하고 꽁무니를 빼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런 위명이 자자한 천뢰보의 공자에게 한낱 촌부(村夫)가 어찌 대들어 볼 수나 있겠는가?
 천뢰보의 대문에다가 큰소리야 한 번 쳐 보겠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일이었다.
 소녀의 아비는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아비의 허탈한 심정을 모르는지 이렇게 일찍 들이닥친 아비가 그저 미울 따름이었다.
 아비가 조금만 늦게 왔더라도 그 잘생긴 범천악과 운우의 정을 끝까지 누릴 수 있었을 텐데 그저 아비가 미울 따름이었다.
 그저 그녀의 가슴에는 범천악과 한 번 더 상면했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2
 
 범 공자.
 천뢰보의 소주이자 천하의 파락호인 범천악은 지금 기겁을 해서는 벌거벗은 몸으로 눈밭을 급히 달리기에 바빴다.
 얼마나 놀랐는지 자신의 하체를 가릴 새도 없이 도망쳐 나와서 자기의 그것이 추운 겨울 날씨에 자라새끼의 그것마냥 오그라든 줄도 모르는 듯했다.
 그런 범천악의 모습을 혀를 끌끌 차며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쯧쯧. 네가 찾은 절대기재(絶對奇才)가 저 자란 말이냐?”
 사내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십삼 세까지 신동(神童)이라 일컬어지던 자입니다. 유심히 살펴보시면 제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실 겁니다.”
 이백 년은 족히 됨직한 커다란 나무 위에서 두 사람이 범천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내는 삿갓을 깊게 눌러 쓴 채 어깨에 칼을 메고 있었다.
 그의 몸에서는 매우 날카로운 기가 흘러 나와 달빛마저 누그러뜨리는 듯했다.
 그의 옆에는 은빛 도포를 입고 있는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팔 척은 족히 됨직한 커다란 키에 호랑이의 근육을 연상시키는 건장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의 두 눈은 날아가던 새도 놀라 떨어질 것같이 날카롭게 빛나는 눈망울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은현세가의 가주인 구한승이었다.
 “저 자는 이미 십삼 세에 금(琴), 기(棋), 시(詩), 서(書), 예(藝), 화(
 ) 등의 육예(六藝)에 달통하여 당대의 석학들에게 칭송이 자자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학문을 버리고 지금은 오직 계집만을 탐하는 파락호가 되어 상당한 원성을 사고 있습니다.”
 벌거벗은 채 내달리는 범천악을 내려다보던 구한승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무공은?”
 “무공을 단 한 번도 펼친 적은 없으나 타고난 기재로 볼 때 무공은 익혔으나 숨기고 있는 듯합니다.”
 구한승의 눈살이 찌프려졌다.
 “무공을 익힌 흔적이 전혀 없단 말이냐?”
 “예. 그러나 속하가 보기에는 무공을 숨기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놈이 파락호가 된 이유는 무엇이냐?”
 “알려져 있기는 타고난 오만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만?”
 구한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학문이든 손을 대기만 하면 당대의 대가들조차 두 손을 들고 말자 세상에 누가 나를 가르치랴 하며 항상 떠들고 다녔다 합니다.”
 “오호! 그래. 그게 사실이라면 놈이야말로 일대 기재가 틀림없겠군.”
 구한승은 팔짱을 끼며 삿갓을 쓴 사내의 입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계집은 아무리 접해도 계집마다 지닌 느낌이 다르니 영원히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은 계집뿐이라며 한평생 나갈 길은 오직 외도(外道:계집질)뿐이라고 했다 합니다.”
 그러나 구한승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삿갓을 쓴 사내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것은 그와 같은 정인군자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난해한 이유였다.
 “그래? 계집을 대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한 적은 없고?”
 “여태껏 노려서 실패한 계집이 없었답니다. 더욱이 지위를 이용하는 것은 진정한 화화공자(花花公子)가 아니라고 믿고 있는 녀석입니다.”
 구한승의 고개가 마침내 끄덕거렸다.
 “흠······. 놈을 데려오게.”
 “존명!”
 삿갓을 쓰고 있는 사내는 구한승의 말과 함께 나무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의 발걸음이 너무나 가벼워 눈 위에 거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고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그도 일류 고수의 반열에 올라 있음이 틀림없어 보였다.
 천하의 파락호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다니 누가 이와 같은 사실을 보았다면 그들 둘을 미친놈으로 여겼을 것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
 
 한참을 꽁지가 빠지게 내달리던 범천악은 이제 됐다 싶었는지 급한 숨을 몰아쉬며 나무에 기대었다.
 범천악은 놀람 때문에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밤중에 이런 산중을 돌아다니는 놈이 있다면 분명 미친놈이겠지.’
 혼자 중얼거리던 범천악은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둠에 둘러싸인 숲 이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애잇, 내가 착각했겠지. 지금 같은 야밤에 어떤 미친놈이 여기에 있을라구. 여기까지 도망왔으니 그 망할 놈의 영감탱이가 쫓아오진 못하겠지.’
 그는 그제야 자기 꼴을 내려다보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도망치기에 급급해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 보니 아무것도 걸친 것이 없었다.
 범천악은 갑자기 추위가 찾아오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그의 등뒤로부터 스산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놈아, 늘어진 하초꼴이 흉하니 우선 그것부터 가리도록 하여라. 꼭 자라새끼 같구나.”
 말과 함께 도포 한 장이 공중에서 춤을 추듯이 내려 범천악의 발 밑에 떨어졌다.
 ‘설마 귀신일 리는 없을 터이고.’
 범천악은 잠시 동안 넋을 잃은 듯 발 밑에 떨어진 도포를 쳐다보았다.
 “이놈아, 어서 옷을 입도록 해라.”
 다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범천악이 당황한 모습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사람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래 좋다. 어떤 놈인지는 모르지만 한 번 해 보자.”
 범천악은 호기롭게 소리치며 옷을 주워 입었다.
 “그래, 이놈아 산신령이든, 귀신이든 어서 모습이나 드러내라. 네 몰골이나 한번 구경해 보자.”
 범천악이 소리치는 사이 그의 뒤로 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범천악은 동시에 등뒤의 인기척을 느끼며 돌아다보았다.
 어느 사이 삿갓을 눌러 쓰고 칼을 멘 사내가 귀신인 양 그의 등뒤에 와 서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구한승의 명을 받고 범천악을 데리러 온 오노대였다.
 범천악은 그가 언제 어떻게 와 있는지 기척도 느끼지 못한 터였다.
 “좋아! 일단 형체를 보니 귀신이나 산신령은 아닌 듯하고. 그래, 그대는 누군가?”
 범천악이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태연스럽게 말했다.
 “나에 대해서 알 필요는 없다. 너는 나와 함께 가기만 하면 된다. 너를 보고 싶어하는 분이 계시니까.”
 ‘나를 보고 싶다고······? 혹시 나한테 당한 계집 중에······.’
 범천악은 오노대에게서 대단한 기도가 흘러 나옴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무림세가(武林勢家)의 딸년이 있었던 게 아닐가? 이럴 때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인데······.’
 생각에 빠져 있던 범천악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행동을 할 지 판단이 섰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를 데려가기가 쉽지는 않을걸.’
 범천악은 오노대가 어느 무림세가의 고수라 생각하고는 뒤를 향해 잽싸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오노대가 즉시 몸을 날려 범천악을 뒤쫓은 것이다.
 “싫다면 힘으로 할 수밖에.”
 오노대의 손이 범천악의 몸으로 날아갔다.
 하지만 범천악이 가볍게 몸을 숙이자 오노대의 주먹은 애꿎은 허공만을 가르고 말았다. 동시에 오노대는 이어지는 동작으로 암기를 날렸다.
 순간 범천악이 손을 앞으로 뻗으며 암기를 나꿔챘다.
 ‘암기를 맨손으로 잡는 접기술이라! 역시 무공을 숨기고 있었구나.’
 오노대는 적이 놀랐다.
 범천악이 무공을 숨기고 있을 거라고는 예측을 했으나 자기의 공격을 이토록 간단히 파해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차후 이어질 범천악의 반격에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숨기고 있던 무공을 드러낸 범천악은 연속되는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무당(武當)의 이지선도(二指仙道), 종남(終南)의 배학권(拜鶴拳), 곤륜(崑崙)의 슬격복타(膝格腹打)가 연속되는 동작으로 이어져 삿갓 쓴 사내를 공격해 왔다.
 범천악을 경시하고 있던 오노대는 위기에 빠져 일순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지선도를 가까스로 피해 내면 종남의 배학권이 뒤를 공격했고, 다시 이를 막아내면 곤륜의 슬격복타가 옆을 공격해 오는 것이었다.
 “오노대, 양수합일(兩手合一)로 슬격복타를 막고 양수격흉(兩手擊胸)으로 끝내라.’
 순간 삿갓을 쓴 사내의 귓전으로 한 줄기 음성이 들려 왔다. 구한승의 목소리였다.
 지금 구한승이 사용하는 무공은 천리전음술(千里轉音術)로써 이 무공은 내공이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자여야만 쓸 수 있는 고급 기술 중의 하나였다.
 적어도 내공이 일 갑자에 이르러서야 그 기초 지식을 수박 겉핥기식이나마 배울 수 있는 무공인 것이다.
 오노대는 구한승의 말대로 양수합일을 시전했다.
 두 손을 모아 범천악의 발을 막으며 몸을 뒤로 뺐다. 그리고 약수격흉으로, 다시 모았던 그 손을 그대로 내뻗으며 범천악의 가슴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범천악의 변초는 사내의 동작보다 빨랐다. 삿갓을 쓴 사내가 양수격흉으로 범천악을 공격하기도 전에 이미 범천악의 손은 사내의 목덜미를 잡고 있었다.
 사내의 놀라움은 처음 범천악을 같잖게 여겼던 것이 오히려 범천악의 무공에 탄복하는 경지로 바뀌고 말았다.
 비록 범천악을 경시하여 이런 위태로운 경지에 몰렸으나 지금 범천악이 보여준 무공은 무림에서도 꽤 정평을 얻을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범천악은 삿갓의 사혈(死穴)을 짚으며 물었다.
 “누구냐? 나를 보자고 한 위인이?”
 오노대는 범천악의 오만방자한 말에 실소를 금치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주인인 구한승을 한낱 파락호가 위인이라고 부르다니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구한승과 그의 은현세가(殷賢勢家)의 위명을 한 번이라도 들었던 무림인이라면 아마 범천악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지금은 분명히 오노대의 생명은 범천악의 손에 맡겨져 있을 뿐이었다.
 순간 범천악의 등뒤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범천악은 그 소리에 몸을 돌려 수비를 하려 했으나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구한승의 수하 한 명쯤은 요행히 격파할 수 있었으나 천하의 구한승을 어찌 범천악 같은 하수가 상대할 수 있겠는가?
 범천악이 채 몸을 돌리기도 전에 그 파공음은 그의 등뒤에 도착하여 혈을 제압했다.
 그 순간 범천악은 등에 있는 신주혈(身柱穴)이 따끔함을 느끼며 정신을 잃고 고목나무처럼 쓰러졌다.
 구한승은 비록 그를 쓰러뜨렸지만 그의 놀라움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놀랍군. 겨우 몇 초식을 겨루는 동안 사대문파의 실전무공이 이 자의 몸에서 펼쳐지다니. 아무래도 구전룡(九戰龍)의 무공을 전수받은 것 같군.”
 구한승이 쓰러져 있는 범천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구한승은 무림사가를 작성하면서 직접 그 상대자들과의 무공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곤 하였다.
 그래야만이 진정으로 무림사가의 한 장을 장식할 고수의 진 면목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연구를 통해 이미 구한승은 구전룡의 무공 연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오만 때문에 학문을 집어치우고 파락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겠어.”
 구한승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돌아섰다.
 방금 범천악이 펼쳐 보였던 무공을 다시 생각해 보니 그로서는 범천악이 파락호가 된 이유가 어떤 귀계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앞서 가는 구한승의 뒤로 오노대가 범천악의 쳐진 몸을 어깨에 걸치고 바삐 뒤따랐다.
 문득 사라져 가는 구한승의 뒤로 몇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옛말에 걷는 놈 위에 뛰는 놈 있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던가?
 천하의 구한승도 처음부터 그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만큼 이 사람들의 무공 실력과 심계(心計)는 구한승을 능가하고도 남는 점이 있었다.
 만약 그들이 구한승보다 하수라면 그에게 들키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일련의 단막극(單幕劇)을 보지 못했을 터였다.
 “구한승이 범천악을 제압한 지공(指功)은 분명 태천기(跆穿技)였어.”
 “은현세가는 천하제일 고수들의 일대기만 기록하는 줄 알았더니 태천기란 가공할 무공도 알고 있군.”
 “은현세가의 당대 가주 구한승이 태천기를 완벽히 익혔다면 우리 못지 않은 고수일걸세”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고수일지도 몰라.”
 “무슨 목적으로 범천악을 데려갔는지 모르지만 이대로 보고 있을 참인가요?”
 “놈의 행동으로 봐서는 범천악을 해칠 것 같지는 않은데······.”
 “웬 말들이 이리 많아. 궁금하면 당장 쫓아가서 살펴보면 될거 아냐?”
 몇 마디의 말소리와 함께 유령 같은 신법을 펼치는 몇 명의 사람들이 방금 사라진 구한승이 있던 눈밭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 중에는 비쩍 마른 얼굴에 수염을 가득 기른 사내, 거대한 몸집에 승복(僧服)을 걸치고 굵은 알의 염주(念珠)를 굴리고 있는 중, 바짝 여윈 몸에 승복을 입고 울 듯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비구니(比丘尼), 군데군데 기운 옷을 입고 눈가에 가득하니 찌든 인상을 심고 있는 사내 등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몇 명의 사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범천악이 사라진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아홉 명이었다.
 이름하여 구전룡(九戰龍)!
 구전룡은 각기 구대문파에서 실전무예를 추구하다 파문당한 아홉 명의 절대고수들이었다.
 말이야 파문이지 그들이 추구하는 무예와 소속되어 있던 파(派)와의 견해가 맞지 않아 스스로 문을 나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을 모르는 무림인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라면 모를까, 무림에 몸 담고 있는 무림인이라면 그토록 갈망하는 최고 경지에 이른 사람이 이들이었다.
 무적구패 상비운과 주유승을 제외하고는 이들과 상대를 할 수 있는 자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구대문파(九大門派)의 장문인들조차 이들과 무공을 겨룬다면 감히 승리를 장담하는 말을 하지 못하리라.
 그만큼 이들의 존재는 무림에서 하나의 큰 획을 긋고 있었다.
 소림에서 파문당한 일지자(一指者) 지승(知僧), 개방에서 파문당한 구전신룡(九戰神龍) 왕개지(王
 志), 한때 무당에서 문을 나서지만 않았다면 장문인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건양검(建陽劍) 장무(張武), 유일하게 여자인 아미(峨嵋)의 정진사태, 화산파(華山派)의 신비검(神秘劍) 악비운(岳悲雲) 등을 비롯하여 그들 아홉 명은 이미 그 무공 성취가 측정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들 아홉 마리 용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즉시 동시에 한 줄기 흰 선이 되어 구한승 일행을 쫓아갔다.
 구전룡은 같이 생활하기를 어언 십여 년이라 눈빛만으로도 말을 대신하는 듯했다.
 구전룡.
 그들이 아마도 구한승 일행을 쫓는 것은 범천악이라는 희대의 파락호 때문이리라.
 제자가 뭔지······.
 천하의 개망나니 같은 파락호도 그들에게는 버릴 수 없는 안타깝고도 사랑스러운 존재임에 틀림없는 것이었다.
 
 
 3
 
 어두운 동굴 속이었다.
 범천악을 생포해 온 구한승은 마침 이 동굴을 찾아내어 이곳에서 범천악을 조사해 보고 있었다.
 범천악의 혈(穴)들을 짚어 가던 구한승은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천하의 파락호로 소문난 범천악이지만 무공을 익히기에는 최고로 적합하다는 신체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범천악의 몸에서 강렬한 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강렬한 기에서 구한승은 벌써 범천악이 익힌 내공조예가 이미 상당한 수준에 근접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내공조예는 자기와 맞먹을 정도로 심후(深厚)할지도 몰랐다.
 “강근(强筋)에 아예 철골(鐵骨)이군. 구전룡이 이놈 몸에다가 어떤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천재라 하더라도 이 나이에 이런 조예를 쌓기가 여간 쉬운 노릇이 아니지. 네가 인재를 제대로 보기는 보았구나.”
 구한승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송구스럽습니다.”
 “이런 놈을 자식으로 두고도 엉뚱한 마음을 먹은 천뢰검 범유가 아쉽군.”
 구한승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이 젖어들었다.
 “주유승은 지금 어디에 있나?”
 “그는 지금 인재를 찾아 나선 이래 계속 남하하여 지금은 사천성 성도에 있습니다.”
 “건방진 놈!”
 구한승이 손을 돌려 삿갓 쓴 사내의 목을 타격했다. 삿갓 쓴 사내, 오노대는 그 일 격에 날아가 벽에 부딪친 뒤에야 몸을 세울 수 있었다.
 구한승의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 그의 입가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무적구패 상비운, 그 어르신도 주유승을 최고의 무인으로 여기시거늘 너 따위 하찮은 놈이 그 분을 그라고?”
 “속하의 실언을 용서하십시오.”
 “그것은 그 분에 대한 너무나 크나큰 모독이야.”
 오노대는 몸을 바로 하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구한승의 얼굴이 펴지는 것이 적이 화가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구대문파에서 쫓겨난 실전무예의 달인(達人)들인 구전룡을 사부로 모시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나중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놈을 주유승의 제자가 되도록 해야 돼.”
 구한승은 몸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섰다.
 ‘구전룡이 이 일에 끼어 든다면 골치가 여간 아프지 않을 텐데. 좀 성가시게 되겠군.’
 구한승은 인상을 찌프리며 동굴을 벗어났다.
 
 ***
 
 구한승과 오노대가 나가고 난 후 아홉 개의 흰 선이 나란히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구전룡은 범천악의 앞에 멈춰 서더니 범천악을 나란히 쳐다보았다.
 그들 아홉 쌍의 눈에는 제자를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라 구한승이 왜 이런 행동을 하고 떠나갔나 하는 의구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매부리코에 찢어진 눈매를 한 사갈같이 생긴 노인이 말했다. 바로 신비검 악비운이었다.
 “그런데 은현세가가 언제부터 무림의 동향을 주시하기 시작한 거지?”
 곤륜(崑崙)의 비산검(飛散劍) 유구환(柳龜紈)이 말했다.
 “말코, 네놈은 항상 뭐가 그렇게도 궁금한 것이 많냐?”
 유구환은 곤륜에서 파문당한 자로 그가 익힌 태허도룡검(太虛屠龍劍)과 태청진기(太淸眞氣)는 곤륜에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또한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검을 수련하여 그가 한 번 검을 펼치면 사방팔방으로 검이 비산되어 상대는 피할 곳을 못 찾고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의 비산검(飛散劍)이라는 별호도 여기서 기인한 것이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고 있는 사이 여기저기 기운 옷을 입고 있는 사내가 범천악의 등을 걷어차며 투덜댔다.
 개방에서 파문당한 구전신룡(九戰神龍) 왕개지였다.
 “이자식······. 그래서 건방 떨지 말라고 얼마나 일렀어. 안 그랬으면 오늘같이 매맞고 까무러치지는 않잖아.”
 그러한 왕개지의 등뒤로 정진사태가 손을 얹었다.
 “그 성질 때문에 또 대사를 그르치려고 그래요?”
 그러나 왕개지의 흥분은 진정이 되지 않는 듯했다.
 “저놈의 새끼, 당장 고자로 만들어 버려야 해. 제 아비가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허구헌날 계집질이나 해대는 이놈만 보면 열불이 터져 참을 수가 없다니까.”
 왕개지는 범천악을 뒤흔들며 소리쳤다.
 “더구나 무공요결이 대가리 속에 들어 있다고 해도 각고의 연마가 없다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알아? 내가 그토록 입이 닳도록 말했는데도 코방귀만 뀌더니만 이 빌어먹을 놈이 구전룡을 망신시켜?”
 비산검이 말했다.
 “맞아, 거지야. 범천악에게는 사실 독한 자극이 필요해.”
 “그렇다고 천뢰보의 일백팔 명이 죽어 나가는 것을 두고봐야 한다는 말야?”
 “늙은 거지는 아직도 노부처럼 세력 싸움에 끼여들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구먼.”
 육 척은 됨직한 키에 어울리지 않게 바짝 마른 몸을 하고 가느다란 콧수염을 기른 서생이 대화에 끼어 들었다.
 그는 청성(靑城)에서 파문당한 막소비(莫蘇飛)였다.
 그의 장기는 칠십이파검(七十二波劍)이라는 한 가지 검법으로써 칠십이파검의 일 초 일 초식에는 각기 열두 가지의 변화를 내포하여 실로 그 변화를 예측하기가 어려운 검법이었다.
 막소비는 그러한 칠십이파검을 하나의 주판에 응용시켜 독특한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맹세를 깨고 세력 싸움에 끼어 든다면 손해만 있지 이익은 한 푼도 없어.”
 막소비는 절대 손해가 되는 일을 하는 적이 없었다. 그런 막소비가 한심한지 왕개지가 군시렁댔다.
 “네놈은 쓸모 없는 계산 좀 집어치울 수 없냐?”
 “천뢰보 사람들의 목숨으로 수만 명이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죠.”
 정진사태의 말에 구전룡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듯했다.
 “하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놈은 절대 무공을 배우려 하지 않을 테니까.”
 “빌어먹을······ 빌어먹을······.”
 왕개지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어조로 욕을 내뱉고 있었다.
 “괴이한 것은 은현세가주도 우리처럼 범천악을 주유승에게 연결해 주려 하고 있다는 점이지. 게다가 천뢰검 범유가 엉뚱한 것을 획책하고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는 느낌도 들고······.”
 “어허······.일단은 참는 것이 좋아. 만일 무적구패 상비운을 꺾을 자신이 있다면 모르지만······.”
 커다란 몸집에 염주를 손에 쥔 노승이 천천히 말을 꺼내자 모두가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는 소림에서 파문당한 일지자(一指者) 지승이었다. 지승은 가진 인품으로 인해 은연중 구전룡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범천악은 그런 침묵 아닌 침묵 속에서도 고요하게 잠들어 있는 듯싶었다.
 
 
 제3장 천뢰보(天雷堡)
 
 
 1
 
 천뢰보(天雷堡).
 무당의 속가제자이나 현 무당 장문인인 운룡(雲龍)도장을 능가한다고 알려져 있는 천뢰검 범유가 보주(堡主)로 있는 무창성 제일의 무가(武家)이다.
 사람들은 천뢰보를 그러한 연유로 흔히들 강북제일보(江北第一堡)라고도 부른다.
 
 ***
 
 “저 꽃들이 참 불쌍해······.”
 창가에 한 여인이 턱을 괴고는 꽃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다른 곳의 화원에서 자라면 한껏 아름다움을 뽐낼 꽃들이건만 어쩌자고 불쌍하게도 우리집, 그것도 하필이면 내 누각 앞에서 꽃을 피웠단 말이냐? 아, 나로 인해서 그 빛을 잃어버리고 있으니······.”
 그런 말을 하는 여인의 생김새는 보는 이로 하여금 밥맛이 뚝 떨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여인은 두꺼운 입술에 코는 들창코요, 찢어진 눈매를 하고 있었다.
 실로 남들이 볼까봐 두려워 어디 방구석에 처박혀 이불이나 뒤집어쓰고 있어야 될 팔자가 창가에 턱을 턱하니 괴고는 꽃밭을 구경하고 있는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왠만한 공주병이 아닌 듯싶었다.
 지지리도 못생긴 얼굴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여자가 바로 천뢰검 범유의 딸인 범유하(範流河)였다.
 그녀는 천뢰보의 외동딸인지라 그녀의 비위를 맞추려는 모든 식솔들로부터 이쁘다, 이쁘다 하는 말만 들었지, 어디 못생겼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 터였다.
 그러니 그녀에게 공주병이 생긴 게 그녀만의 탓은 절대 아니었다.
 한참 동안 꽃밭을 바라보며 넋두리를 하던 범유하가 시녀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시녀들은 끓어오르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 어금니가 빠지도록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아마 처음 그녀를 시중드는 시녀라면 천뢰보가 웃음보가 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오늘쯤은 그이가 내 거처를 찾을 듯싶구나. 얘들아, 어서 그이가 좋아하시는 홍포소육을 준비해라. 그리고 자라에 잉어와 인삼, 죽순을 넣고 끓인 용봉탕과 술 백하홍도 아울러 준비하도록 해라.”
 시녀들은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아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그 분이 오신다는 말씀을 듣지 못했는데······.”
 시녀의 말에 범유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년들아, 벌써 몇 해를 시중들면서 아직도 나의 의중조차 짐작 못한다는 말이냐?”
 “예, 예. 곧 준비하겠습니다. 아가씨.”
 범유하가 무척 화가 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자 시녀들은 급히 몸을 돌려 달려나갔다.
 그녀는 씩씩거리며 방 안을 돌고 돌았다.
 “여기도 먼지, 저기도 먼지······. 이것들이 내가 얼마나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인가?”
 제풀에 겨워 한참을 씩씩거리던 범유하가 다시 창가로 가서 꽃밭을 바라보았다.
 꽃밭에 있는 꽃들의 빛이 한껏 어두워져 있었다.
 
 ***
 
 천뢰보는 강북제일보답게 수십 개의 고루거각(高樓巨閣)들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 있었다.
 지붕이 자리하고 있는 하늘 아래로는 한 마리의 새나 한 점의 구름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보의 담은 웬만한 고수가 아니고서는 감히 보(堡)에 침입할 엄두를 못 내게 거의 삼 장이나 솟구쳐 그 위용을 자랑하듯이 보였다.
 그러한 천뢰보도 파락호 범천악으로 인해 바람잘 날이 없었다.
 천뢰보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소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탁탁탁탁.
 오늘도 어김없이 한 중년의 촌로가 젊은 소녀의 손목을 잡고 천뢰보의 대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대문을 지키던 두 명의 무사는 이런 일에 도가 텄는지 그런 두 부녀를 보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오늘에만 벌써 세 번째군.”
 “이번에는 대체 어느 집 딸이야?”
 문 앞에 서 있는 병사들은 무덤덤한 어투로 말을 주고받았다. 아주 흔히 있는 일을 대하는 모습이었다.
 촌로가 오더니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한껏 노기가 어려 있었다.
 “무창성에 사는 장표가 천뢰보주께 따질 일이 있어서 왔소.”
 “저리로 들어가서 용건을 말하면 될 것이오.”
 한 무사가 무관심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작은 문을 가리켰다.
 작은 문에는 병사도 없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수시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듯싶었다.
 아마 파락호에게 당한 여자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특별히 마련해 놓은 문인 듯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에 존귀한 천뢰보의 정문을 수시로 열어젖힐 수는 없을 터이니 말이다.
 
 ***
 
 톡! 톡! 톡!’
 방 안에서 은빛과 회색이 어울어진 도포를 입은 천뢰검 범유가 정성스레 해송(海松)을 다듬고 있었다.
 방 안은 너무도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 해송을 다듬는 소리마저도 방 안을 어지럽히는 것 같았다.
 ‘저런······. 쯧쯧쯧!’
 범유는 잘못된 손질로 잘린 해송 가지를 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나답지 않게 긴장을 하다니.’
 범유는 잘린 해송 가지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 몸을 돌려 창가로 다가갔다.
 시선을 멀리 해서 바라보는 모습이 아마도 어떤 중요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십오야(十五夜) 운중산(雲仲山) 흑접맹(黑盟) 결성이라······.’
 그는 며칠 전에 받은 서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홀연히 방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범유를 불렀다.
 “보주님.”
 “······.”
 그러나 범유는 너무나 생각에 골몰해 있는 듯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보주님, 보주님!”
 몇 번에 걸쳐 부르는 소리가 울린 뒤에야 범유는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것을 깨닫고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의 뒤에는 어느 사이 방 안으로 들어온 집사가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
 범유는 짐짓 무안하여 집사에게 차를 권했다.
 “같이 앉아 차나 한 잔 하세.”
 그러나 집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무척 굳어 있는 얼굴이었다.
 “오늘만 해도 공자님으로 인해 벌써 세 명의 아비들이 찾아왔습니다.”
 집사는 범유의 외아들 범천악 문제로 인해 무척 짜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들과 보상 문제를 협의 중이나 그 중 둘은 이미 공자의 애를 가졌다 합니다. 이대로 공자를 두셨다가는······.”
 그러나 범유는 손을 내밀어 집사의 말을 제지했다.
 “집사,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염려치 마시오. 그저 뒷처리나 잘해 주기 바라오.”
 “생각이라 하오면······.”
 집사의 눈빛이 밝아졌다.
 “며칠 내로 녀석을 산으로 보내 사람을 만들 참이오.”
 범유의 말소리는 담담하기만 했다.
 “산이라 하시면······. 아! 무당으로 보내시기로 결정을 내리셨군요. 잘하셨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집사는 몇 번에 걸쳐 허리를 숙이며 ‘잘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범천악으로 인해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었다.
 “집사, 무사들을 풀어 천악을 잡아 오도록 하시오.”
 범유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명령을 했다.
 “예, 알겠습니다.”
 집사가 밝은 표정으로 방에서 나가자 범유는 다시 몸을 돌려 창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눈동자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래······. 나라고 해서 강북(江北)의 무림맹주(武林盟主)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천뢰검 범유는 내심 한 마리 웅대한 야심을 키우고 있는 중이었다.
 강북무림, 나아가서는 전 무림의 맹주(盟主)가 되는 것이 그의 야심인 것이었다.
 사실 천뢰검 범유의 능력이라면 능히 천하무림의 맹주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강북에서는 그의 무공을 따를 자가 없었다. 또한 그의 사부(師父)인 청허도장은 무림의 전대선배(前代先輩)였다.
 범유의 명성은 무당 장문인에게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그를 존경하지 않는 무림인은 없었다.
 범유의 입가로 차가운 미소가 스쳐 갔다.
 마치 금세 강북무림이 손에 잡히기라도 할 듯한 미소였다.
 
 
 2
 
 범유하는 홍포소육과 용봉탕과 술 백하홍을 비롯한 갖가지 진귀한 음식들을 차려 놓고 초조한 모습으로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른 것이 기쁨이 완연해 보였다. 그녀의 붉은색 얼굴빛은 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방문 앞에 이르고 미닫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릴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은 마치 붉은 물감을 탄 것보다도 더욱 붉게 상기되었다.
 “사형(師兄)!”
 범유하는 방문 앞의 건장한 사내에게 뛸 듯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그 건장한 사내는 은백색의 도포를 입었으며 키는 육 척 장신에 무척이나 고결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그 고결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약간은 으스스하고 날카로운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바로 천뢰검의 제자인 양불군(養佛君)이었다. 그는 몇 년 전 우연히 범유의 눈에 띄어 그의 제자가 된 자였다.
 천뢰보 내에서 양불군의 내력을 아는 자가 없었다.
 심지어 그의 사부인 천뢰검 범유도 그의 신분내력(身分來歷)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양불군은 베일에 싸인 남자였다.
 그러나 그의 재능이 대단하여 그러한 것을 보충하고도 남았다. 양불군은 범유의 제자가 된 지 몇 년이 채 되지 않아서 범유의 모든 것을 깨우치고 있었다.
 더욱이 그의 생활은 범천악과는 다르게 모범적이어서 범유의 총애(寵愛)를 한껏 받고 있었다.
 준수한 외모, 탁월한 기재, 건실한 생활. 이런 사내라면 한 여자가 사랑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의 눈은 언제나 맑은 빛을 내고 있었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눈빛에 숨어 있는 야욕과 잔인함을 알아채지는 못했다.
 양불군은 품에 안긴 범유하를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힘껏 껴안았다.
 “유하, 나는 그대를 품에 안을 때마다 항상 행복한 남자라는 생각이 드오.”
 양불군은 침에 발린 듯한 소리를 거침없이 뱉어댔다.
 그에게서는 마치 하루라도 범유하와 떨어져 있으면 견디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범유하는 양불군의 태도에 꿈길을 걷고 있었다. 그의 소리는 한없이 달콤하게 들려 왔다.
 “사랑해요, 사형······.”
 범유하는 양불군의 말에 더욱 그의 가슴에 안기며 애교를 부렸다.
 그러자 양불군도 두 팔에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껴안았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왠지 묘한 부조화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모든 처녀들의 방심을 설레게 할 정도로 준수한 사내의 얼굴. 차마 마주 바라보기에도 역겨울 정도인 여인의 얼굴. 그런 것들이 결코 어울릴 수 없는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었다.
 “사랑해, 유하.”
 양불군은 입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연신 속삭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사랑하는 여인을 대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만약 범유하가 좀더 주의해 본다면 그러한 달콤한 말을 하는 사내의 두 눈이 차디찬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리라.
 그러나 사랑에 눈이 멀어 정신을 놓고 있는 여인에게 그런 것이 보일 리가 만무했다.
 양불군의 눈빛은 너무나 차디차 그야말로 빙설(氷雪)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더욱이 그 속에는 어떤 살의(殺意)마저도 깊이 서려 있는 듯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범유하가 몸을 빼내 시선을 마주해 왔을 때 그런 눈빛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오직 사랑이 가득 찬 눈빛만이 존재했다.
 “유하같이 완벽한 여자를 이렇게 품에 안을 수 있다니! 나처럼 행복한 놈을 이 세상 천지 어디에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사랑해······. 유하!”
 양불군의 달콤한 말에 취한 듯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지 못했다.
 그녀는 더욱 흥분된 얼굴로 양불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코먹은 소리로 답했다.
 “아니에요. 제가 사형을 내 남자로 선택한 것은 그대야말로 완벽한 남자이기 때문이죠. 저야말로 행복한 여자예요.”
 범유하는 그 말을 하고는 부끄러운 듯 볼이 빨개져서는 양불군의 품에 다시 몸을 기댔다.
 그러자 양불군도 사랑한다는 말을 다시 반복했다. 잠시 후 양불군이 천천히 범유하의 몸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미 한두 번이 아닌 듯 그들의 사랑의 속삭임은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양불군의 쓸어내리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범유하의 살집들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그녀는 미(美)와는 거리가 먼 여자였다.
 그러나 양불군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정에 가득한 눈빛으로 여자의 눈을 마주하면서 옷을 하나씩 벗겨 나갔다.
 “잠깐만······!”
 돌연 범유하가 나직한 소리를 토해내더니 양불군에게서 몸을 빼내 등잔불을 껐다.
 아마 그녀로서도 밝은 불빛에 몸이 드러나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순간 방 안으로 어둠이 찾아와 두 쌍의 눈만이 빛을 발했다.
 양불군의 손길에 의해 이내 범유하의 알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희미한 달빛에도 여인의 기름기가 반사되어 뭉퉁한 몸매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양불군은 서둘러 여자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의 행동은 마치 해야 할 일을 빨리 끝내려는 듯한 행동이었다.
 “사형······.”
 순간 범유하의 입에서 서운해하는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러자 양불군은 범유하의 몸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여자의 몸을 애무해 나갔다.
 마치 필요에 의해서 하는 행동과도 같았다. 그래야만 한다는······. 양불군은 기름기로 가득 찬 범유하의 몸을 섬세하게 만져 나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을 하나씩 세어 나가듯 쓰다듬었고, 피부의 모공(毛孔)을 다듬기라도 하듯 매만졌다.
 그리고 손과 입으로 여인의 가슴을 애무해 나갔다.
 범유하의 가슴은 비대한 몸짓에 비해 작고 초라하기까지 했다. 더욱이 그 가운데에 솟아 있는 유두는 어울리지 않게 검고 크기까지 했다.
 마치 애를 낳아도 열 이상은 낳아 젖을 먹인 여인의 그것과도 같았다.
 범유하의 가슴에 있는 유두를 만지는 양불군의 이맛살이 심하게 찌프러졌다.
 그러나 어둠 속이어서 그런 표정을 범유하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양불군은 다시 손을 내밀이 범유하의 은밀한 숲을 헤집기 시작했다.
 양불군의 손끝으로 이미 축축히 젖어 있는 숲이 만져졌다. 여자는 이미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었다.
 비로소 양불군은 다시 범유하의 배 위로 올라갔다.
 달빛이 창을 통해 흘러들자 범유하의 얼굴이 드러났다.
 순간 양불군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돌린 양불군의 얼굴은 마치 역겨운 것을 본 듯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범유하가 눈치채지 못하게 고개를 가로저은 양불군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범유하를 쳐다보았다. 그 얼굴에는 이내 미소가 담겨져 있었다.
 “사매, 오늘은 자세를 바꿔 보는 것이 어떨까?”
 양불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범유하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범유하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자 양불군은 손을 뻗어 범유하의 허리를 잡아 세웠다. 그리고 천천히 범유하의 몸을 뒤로 돌렸다.
 범유하가 뒤로 돌아서서 얼굴을 마주하지 않게 되자 양불군이 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인상을 찌프렸다.
 그리고 여자의 뒤에서 천천히 몸을 겹쳐갔다.
 양불군의 거친 동작이 여자의 몸 뒤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내 침상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범유하의 입에서 환희(歡喜)에 들뜬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흑! 사······사형.”
 쾌락에 휩싸인 목소리였다.
 그러나 움직임을 서두르고 있는 양불군의 표정은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약 두 시진이 흐른 후 양불군은 그녀의 방을 조용히 빠져 나왔다.
 마치 불륜(不倫)을 저지르고 나서 조용히 도망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양불군이 떠난 방 안에 혼자 남아 있는 범유하의 표정은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리석은 범유하.
 그녀가 어찌 이것이 사랑이 아닐 것이라고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3
 
 사람들이 모두 잠에 골아떨어져 있을 시간인데도 무창성의 한 곳에는 무수한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시사철 성황을 이루는 무창성의 유곽(遊廓)이었다.
 유곽에는 수십 개가 넘는 기원들이 손님을 맞기 위해 부산을 떨고 있었다.
 “오빠, 여기서 놀다가요.”
 “호호! 이리 오세요.”
 기녀들이 문 밖에 나와 지나가는 행인들을 호객하는 모습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런 무창성의 유곽 중에서도 유독 붉은빛을 한껏 발하는 기와집이 보였다.
 홍화루(紅花樓).
 무창성에서 제일 간다는 기원이었다.
 홍화루의 기녀와 술 값은 그야말로 터무니없이 비싸 일반 평민들은 도저히 얼씬거릴 수도 없었다.
 홍화루에서 하룻밤 기녀를 품는데 드는 은자만 해도 일반 평민들은 족히 몇 년을 벌어야만 하는 거금이었다.
 그러나 홍화루의 기녀들은 사내를 녹이는 방중술(房中術)이 타의 추종을 불허(不許)했다.
 그래서 돈푼깨나 있다는 인물들은 돈 아까운 줄 모르고 드나드는 곳이었다.
 그만큼 홍화루의 기녀들의 비림(秘林)은 마를 날이 없었다.
 오늘도 홍화루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 홍화루의 한 기방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요란스럽게 흘러 나왔다.
 “커어어······! 술맛 좋다.”
 범천악이 한 팔에 한 명씩 기녀를 안고는 연신 입에 입을 맞추며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아니 대형(大兄)! 어젯밤 앵화년의 속살 맛은 어찌 털어놓지 않는 거요?”
 범천악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두 명의 남자가 범천악의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한 명은 체구가 오 척도 되지 않는 작은 키에 이마에 왕방울만한 점이 나 있었고, 다른 놈은 체구가 거대한 게 제법 힘깨나 쓸 것 같은 놈이었다.
 실로 대조를 이루는 두 놈이었다.
 그러나 두 놈 다 천박하고 경솔하게 느껴지는 인상은 매한가지였다.
 그 중 작은 놈이 범천악에게 물었다.
 “대형, 그래 앵두년 속살이 맛있었소? 없었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오.”
 “무봉아, 말도 마라. 속살이고 뭐고 맞아 죽는 줄 알았다.”
 무봉이라 불린 작은 사내가 의문이 가득한 눈초리로 범천악을 바라보았다.
 “아니, 무치와 제가 형님이 식사하시기에 알맞게 요리해 놨는데 웬 갑자기 맞아 죽을 뻔한 얘기가 나오는 거요?”
 작은 놈의 이름은 무봉이요, 체구가 거대한 놈의 이름은 무치였다.
 그 둘은 형제로서 범천악의 옆에 붙어 그저 계집질이나 도와 주고 푼돈이나 몇 푼 뜯어 얻어 먹을 양으로 범천악에게 붙어 있는 기생충 같은 놈들이었다.
 범천악이 워낙 계집을 밝혀 범천악을 잘 구워삶기만 하면 제법 두둑한 은자도 가끔씩 만져지곤 했는데, 그 놈이 그 놈인지라 이 형제도 돈만 조금 만졌다 하면 기원에서 죽치고 주색잡기에 열올리기 바빴다.
 범천악과는 취미가 찰떡궁합인지라 서로 형님이니 동생이니 해 가며 계집질에 열을 올리고 있는 사이였다.
 물론 상품(上品)은 그들 두 형제의 큰 형제이자 돈줄인 범천악 몫이지만 말이다.
 지금 대화의 주인공인 앵화도 무봉, 무치 형제가 이 일대에서 제법 한가락 미모를 자랑한다는 계집년을 물색하여 범천악에게 붙여준 것이었다.
 형제가 간사하게 말했다.
 “궁금해 죽겠소, 형님. 속시원히 빨리 얘기나 해 보시오.”
 “망할 년이 어떻게 했기에 제 아비한테 뒤를 밟혔지 뭐야. 한참 재미보다가 몽둥이에 맞아 죽을 뻔했다.”
 그의 말에 두 형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핏!”
 “흥!”
 범천악과 무봉, 무치 형제의 어이없는 대화에 범천악의 좌우로 앉아 있던 두 기녀가 볼멘소리를 내었다.
 제법 기녀들도 앙증맞게 생긴 게 기원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계집들이었다.
 어디서 방중술을 배워 와 그녀들을 찾는 손님이 들끓어 그녀들의 비림(泌林)은 마를 틈이 없었다.
 그만큼 잠자리에서 사내를 녹일 줄 아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기녀들이었다.
 그녀들의 속살 맛을 한 번 본 범천악도 늘상 이 기원을 찾으면 두 기녀를 찾기 마련이어서 그녀들에게는 범천악이 가장 큰 손님이었다.
 범천악이 제법 이 기원에서 신용을 쌓아 놓았던지 두 기녀는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하나도 기이하게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늘상 들어오고 보아온 터라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재미있어 하는 투였다.
 “이것들아, 질투하는 것이냐?”
 말을 하면서도 범천악은 쉬지 않고 기녀들의 가슴과 둔부를 주물러댔다.
 “허 참! 고년들. 기녀 주제에 뭐가 그리 앙탈 부리는 게 많노.”
 “연화, 유선. 니년들은 우리 형님이나 잘 모시기만 하면 한 밑천 두둑이 잡을 텐데 뭐가 그리 불만이 많아 궁시렁데노?”
 기녀들의 이름이 연화와 유선인 모양이었다.
 “아, 우리 큰형님으로 말하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는 무공에 출중(出衆)한 인물을 뽐내니 양귀비, 서시가 다시 도래한다 해도 형님을 한 번 보면 치맛자락을 그 자리에서 내리지 못해 안달일걸?”
 “맞아요, 무봉 형님. 우리 큰 형님이야 반옥(飯玉) 같은 인물에 모든 걸 갖췄으니 그깐 계집애가 뭐가 아쉽겠소. 이리 오너라, 한 마디만 하면 천하의 구멍 달린 계집이란 계집은 모조리 거시기를 열어 젖히고 달려올 텐데 말이오. 흐흐흐.”
 무봉, 무치 형제들은 범천악에게 아첨 떠는 일이 하루 일과인지라 그들의 말은 그야말로 청산유수(靑山流水)요, 머리 쓰는 것은 제갈량(諸葛亮)을 뺨칠 정도였다. 그들의 아부 떠는 기술은 참으로 위대해 보였다.
 비록 둘 다 볼품없는 몰골들이었지만 그들의 세 치 혀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아마 그 쪽으로 잔대가리를 굴렸으면 지금쯤 어디 가서 모사(謀士) 한 자리는 차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범천악은 무봉, 무치 형제의 말이 기특했는지 문득 허리춤에서 은자 한 뭉치를 꺼내 두 형제의 발치로 던져 주었다.
 “하하하, 아우들. 아우들은 역시 이 형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데가 있어. 이따가 그 은자로 어디 가서 한탕 질퍽하게 즐기게나.”
 못난이 두 형제는 이런 일을 예상이라도 한 듯 서둘러 은자를 주워 품에다 밀어넣었다.
 “고맙소, 고맙소.”
 보기에도 그 은자뭉치는 꽤 무게가 나가 보이는 게 족히 몇 십 냥은 되어 보였다.
 범천악은 간밤에 몽둥이 찜질을 당할 뻔하였는데도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양 손으로는 양편에 앉아 있는 기녀들의 가슴을 주무르기에 바빴다.
 제법 손 안에 느껴지는 맛이 토실토실한 게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한 몸이었다.
 “너희들은 너희들 대로, 그것들은 그것들 대로 맛이 다르지 않느냐? 맨날 돈 내고 기원에서 즐기는 맛하고는 맛이 또 다르지 그 년들은. 흐흐흐.”
 뭐가 그리 즐거운지 범천악의 입 언저리에는 웃음 자국이 떠나지 않았다.
 “자, 오늘 밤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셔 보자꾸나. 하하하.”
 “호호호!”
 질퍽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지금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무봉, 무치 형제의 말에 범천악은 마신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바깥 바람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던진 말에 놀란 탓이었다.
 “백화(白花) 부인!”
 무봉이란 놈이 급히 범천악의 입을 막으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범천악은 그 손을 뿌리치며 정색을 하고는 말했다.
 “대······대체 백화 부인이 누군지나 알고 하는 소리냐?”
 천하의 파락호인 범천악도 백화 부인이라는 말에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화 부인이라는 넉 자가 의미하는 것은 그만큼 큰 것이었다.
 백화 부인을 말하는 범천악의 말투에서도 그 사실을 쉽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도 계집이라면 사죽을 못 쓰는 파락호에게 말이다.
 “무창제일의 쾌검수, 손에 검만 쥐었다 하면 죽음의 검신(劍神)이라 불린다는 쾌검당(快劍堂)의 당주(堂主) 일검사수(一劍死手) 사재승(嗣才昇)이 자기 목숨보다도 애지중지한다는 계집이 바로 백화 부인이 아니냐?”
 말을 잇는 범천악의 음성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런 놈의 첩을 건드리라고 하다니. 니들 두 놈 목숨이 여분으로 몇 개는 더 달린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
 무치가 그런 범천악의 말을 이었다.
 “큰형님, 그런 줄은 소인들도 알고 있지만 그 백화 부인이란 계집은 벌써 이 년이 넘게 독수공방(獨守空房)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범천악이 언뜻 그 말이 이해되지 않는지 무봉, 무치 형제를 의아한 눈초리로 돌아보았다.
 무치가 그런 의문을 풀어 주기라도 하듯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큰형님, 일검사수 사재승은 고자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백화 부인, 그 계집년을 두고두고 울궈 먹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 사재승이 고자라······.”
 한참 동안 범천악은 생각에 잠기더니 손바닥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래, 맞아! 나도 일검사수 사재승이 한 가지 검초(劍
 )에 미쳐 이 년 넘게 백화 부인을 멀리 한다는 소식을 언뜻 들은 기억이 나거든.”
 범천악의 목소리에 갑자기 자신감이 배어 나왔다. 아마 모종의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성숙한 여자가 이 년이 가깝게 독수공방이라면 부처라도 돌아 눕고도 남겠지. 그것도 천하에 미색(美色)을 떨치고 있는 백화 부인이라면 말이야. 내 어찌 천하 모든 여인의 연인으로 명성을 날리면서 어찌 그런 여인을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범천악은 천하의 색마(色魔)로서의 자부심도 결코 작지만은 않은 듯했다.
 범천악은 얼굴 가득 자신만만한 웃음을 머금은 채 손을 들어 무봉, 무치 두 형제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네놈들이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이미 그 백화 부인에 대한 뒷조사는 철처히 해 두었겠지?”
 “헤헤, 어찌 저희가 형님에게 운을 떼면서 그러한 뒷조사도 해 보지 않았겠소?”
 그러면서 무봉은 두 손으로 정중히 황제를 대하는 것처럼 범천악에게 뭔가를 바쳤다.
 범천악이 손에 잡힌 것을 펴 보니 한 장의 종이 위에 수많은 글들이 적혀 있었다.
 그 글들은 다름 아닌 백화 부인에 대한 자세한 신상명세서였다.
 백화 부인의 하루 일과가 어떠한지부터 시작하여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편지를 다 읽고 난 범천악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역시, 아우들은 이 형님 맘을 너무 잘 안다니까. 언제 백화 부인에 대해 이렇게 자세히 뒷조사를 해 두었느냐?”
 범천악은 다시 한 번 의동생들의 보살핌에 감격한 모양이었다.
 위기를 만나면 형이고 아우이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내뺄 놈들이지만 말이다.
 “허허허······. 이 아우들이 언제 형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적이 있었소? 감히 형님의 맘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어찌 우리가 형님의 의동생이라고 자처할 수 있겠소. 다만 염려가 되는 게 있기는 하오만······.”
 형제의 여운에 조급해진 범천악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빨리 말해 보거라.”
 범천악의 재촉에 무치와 무봉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형님, 이것만은 필히 약조해 주십시오. 만약 일이 잘못되어도 절대 우리들이 개입되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겠다고.”
 자기들이 펼쳐 준 잔칫상이지만 그래도 걱정은 되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들의 행동은 범천악에게서 푼돈이나마 더 뜯어 보려는 수작 같았다.
 감히 그 빠르기가 번개같다는 쾌검당의 당주인 일검사수 사재승의 애첩을 소개시키려 하니 어찌 겁이 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런 그들의 걱정도 범천악의 손 동작 하나로 불식(不息)되고 말았다.
 범천악이 흐뭇한 표정으로 재차 품에서 은자 한 뭉치를 던져준 것이었다.
 이번의 은자 뭉치는 좀 전보다 더 묵찍한 게 근 백여 냥은 될 것 같았다.
 “천지가 개벽(開闢)하더라도 그런 일은 없을 터이니 걱정 말아라.”
 재차 거듭하는 범천악의 확답에 그들 두 형제는 범천악을 뒤로 하고 기원을 나섰다.
 
 ***
 
 좀 전에 범천악과 함께 있던 두 사내가 인적이 없는 산길을 걷고 있었다.
 그 중 체구가 거대한 놈이 말문을 열었다.
 “무봉 형님, 용돈 얻어 쓰고 술 얻어 먹는 재미에 형님, 형님 해 가며 뒤치다꺼리는 해 주고 있지만 범천악 그 놈은 정말 얼마 못 가 천뢰보를 말아먹을 거요. 범유 그 어르신께서는 그런 놈을 왜 그냥 두는지 모르겠소.”
 무봉이 말했다.
 “이놈아! 어미 없이 자란 오대독자(五大獨子)라 무조건 오냐오냐해서 키워 그런 것이지. 너도 잘 배워 두거라, 자식새끼들은 그렇게 키우면 안 되는 거야.”
 범천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걷던 무봉이 가슴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제법 품안에 만져지는 것이 묵직한지라 저절로 흥이 났다.
 “쯧쯧, 개망나니라도 돈만 있다면야 어디 가서 대접 못 받겠느냐? 그저 돈이 최고지. 흐흐흐.”
 “으흐흐흐······. 형님, 그래도 놈에게서 받은 은자와 적승 어르신께 받을 은자를 생각하니 흥이 절로 나는군요. 하하하!”
 매우 신이 난 걸음으로 두 형제는 산길을 재촉하고 했다.
 두 형제의 입에서 흘러 나온 적승이라는 이름.
 그들이 범천악에게 소개시켜 준 백화 부인에 대해 어떤 삼자가 개입했는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문득 앞서 가던 무봉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영 뒤가 깨끗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이내 표정으로 떠올라 무봉의 얼굴은 한껏 굳어졌다.
 “왜 그러시우?”
 뒤 따라오던 무치가 같이 멈춰 서며 물었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무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백화 부인을 노리라고 범천악에게 바람만 집어넣으면 은자를 두둑이 주겠다는 것이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걸······.”
 그래도 몇 년 일찍 태어났다고 동생보다 뭔가 다르긴 다른 모양이었다.
 “아우야, 이 일은 뭔가 이상하지 않느냐?”
 “뭐가요?”
 “생각해 보거라. 그만한 일에 은자가 웬 말이냐. 그것도 남의 계집을 파락호에게 소개시켜 주라니······.”
 상식이 머릿속에 박힌 놈이라면 남의 계집을 소개시켜 주는 일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여간 미친놈이 아니라면 말이다.
 “흐흐······. 쓸데없는 생각은 할 필요 없잖소. 족히 은자 삼백 냥은 받을 텐데 그 돈이면 앞으로 일이 년간은 황제 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 수 있지 않겠소.”
 동생이 형을 위로하기라도 하듯 달콤한 말로 속삭였다.
 “형님이 정녕 꺼림칙하게 여기신다면 이 일을 때려치웁시다. 그렇잖아도 범천악, 그 망나니를 형님, 형님 하며 따르기도 눈꼴 셔 할 짓이 못 되었는데 잘 되었지 뭐요?”
 동생의 말에 무봉은 조금은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무봉이 말했다.
 “맞아! 돈이면 뭐든지 해결되지. 적승(赤繩) 어르신께 은자를 받으면 서둘러 고장을 떠나야겠다.”
 “형님, 어디 가서 한 잔 거나하게 합시다 그려.”
 두 형제는 즐거운 표정으로 산 고개를 넘어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길을 걷는 이들은 마냥 즐거운 듯 콧노래까지 흥얼댔다.
 그러나 그들의 부푼 꿈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채 몇 마장도 이어지기 전에 웃음을 삼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쉬익―!
 어디선가 어둠을 가르고 날아온 칼이 키 작은 사내의 두개골을 자르고 지나갔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형체도 소리도 없으니 단지 유흥가 뒷마당에서 무공이랍시고 흉내나 내던 그들이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키 작은 사내, 무봉은 동생보다 몇 년 일찍 태어난 죄로 일찍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는 동생보다 오래 명을 살다가 황천으로 갔으니 그다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체구가 거대한 동생, 무치는 형이 앞에서 뇌수를 쏟으며 시체가 되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형이 쓰러져 죽는 것을 본 그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바로 줄행랑을 놓았다.
 공포심에 빠진 그는 형이 죽었다는 것에 분노하거나 슬퍼할 여력도 없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 동생의 머리카락은 하늘로 곤두섰고 달리는 발의 신발에서는 불이 날 지경이었다.
 놀란 사내는 주위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갔다.
 그러나 그 역시 형이 가야 했던 운명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내 닥쳐온 죽음의 운명은 그의 바쁜 걸음도 피할 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늘을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또 다른 한 자루의 칼이 날아왔다.
 무치는 이전에 형이 죽는 과정을 지켜본 탓에 그래도 피하는 시늉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더 불행인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부지불식(不知不息)간에 겪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결국 무치 역시 형처럼 공중을 날아오는 공격을 막지도 피하지도 못한 채 공포에 휩싸여 운명을 맞아야만 했다.
 “으악!”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무치의 몸이 둘로 분리되며 어두운 산 속으로 나뒹굴었다.
 돈이라면 제 어미라도 팔아먹을 놈들이 평생 처음으로 큰 돈을 만지고도 한 번 써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시정잡배(市井雜輩)다운 허무한 죽음이었다.
 눈발이 수북히 쌓여 있어서인지 그들 두 형제에게서 흘러 나온 피는 더욱 새빨갛게 보였다.
 그런 그들의 시체 위로 조용히 한 남자가 내려섰다. 그 사내는 팔 척 장신에 고슴도치와도 같은 거친 수염을 가진 사내였다.
 그는 검에 묻은 피를 정성스레 닦아내며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네놈들 임무는 여기까지야.”
 그런 그의 입가로 한 마디 차갑기 그지없는 음성이 흘러 나왔다. 참으로 메마른 음성이었다.
 그는 검에 묻은 피를 다 닦아내자마자 두 시체에 흰 가루를 뿌리더니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그는 무봉, 무치 두 형제에게 백화 부인에 대한 정보를 흘려 주었던 사내, 바로 적승이었다.
 적승이 사라진 순간 돈벌레 두 형제의 몸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 두 형제의 시체는 급격히 녹아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들의 시체는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뼈까지도 녹아 한 줌의 물로 흘러내렸다.
 다시 눈발이 날려 그들 형제의 시신을 뒤덮고 있었다.
 
 
 제4장 요동치는 무림(武林)
 
 
 1
 
 함께 있던 사내들을 돌려 보낸 범천악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두 기녀와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른편에는 유선(流線)이라는 기녀가 술잔을 들어 범천악의 입에 대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왼편에서는 연화(蓮花)라는 계집이 범천악의 사타구니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렇게 기녀들이 시중을 들고 있는 동안 범천악의 손은 멈추지 않고 두 기녀의 가슴과 둔부를 쓰다듬고 주물렀다.
 파락호가 치맛자락 안에서 무엇을 건드렸는지 연화라는 기녀는 흥에 겨운 신음 소리를 흘렸다.
 “아······아······! 공자님. 거······거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범천악의 얼굴은 짓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연화야, 거······거기가 어떻게 됐단 말이냐?”
 연화의 얼굴을 쳐다보자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 거기······거기······ 어흑. 부끄럽습니다, 공자님.”
 “흥!”
 그들의 작태는 유선의 질투어린 말에 잠시 중단되었다.
 “유선아, 네가 질투하는 것이냐? 너도 곧 극락으로 보내 주마. 그때 가서 살려달라고 하면 안 된다. 흐흐흐.”
 정말로 끈적끈적한 분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연화가 흥분에서 벗어났는지 범천악에게 물어보았다.
 “이번에는 어떤 계집을 찾느라고 당신의 충실한 개들을 보냈나요, 공자님?”
 약간은 뽀로퉁한 목소리가 약간은 샘이 난 듯싶었다.
 “흥, 그래 말야.”
 유선이 연화의 말에 동조라도 하듯 범천악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치 기녀들의 표정은 오늘은 또 어떤 꽃이 꺾일까 하고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너희들은 노류장화(路柳墻花)요, 아무나 훑는 수양버들이거늘 오늘따라 웬 질투가 이리도 심하냐?”
 범천악은 말을 하면서도 연화의 치맛자락 속에서 손을 꺼낼 생각이 없는 듯 계속 그 손을 놀리고 있었다.
 범천악의 말에 두 기녀는 토라지기라도 한 듯 발끈 화를 내었다.
 “흥! 노류장화는 뭐 질투도 없는 줄 알아요?”
 그러나 그녀들의 모습은 너무나 애교스러워 전혀 화를 내는 것 같지가 않았다.
 “허허······. 더 이상 입씨름하기 싫으니 어서 술이나 따라라.”
 범천악은 그런 기녀들의 투정이 그저 애교로만 보이는 듯했다.
 그러자 유선이 술을 한 모금 머금고 범천악에게 입을 맞추었다.
 범천악은 극락으로 몸이 붕 뜨는 기분을 느끼며 유선의 입술과 술을 핥아댔다.
 그때였다.
 그들의 정다운 행동을 방해하는 소리가 문 밖으로부터 다급히 들려 왔다.
 “공자님, 공자님. 떴습니다요.”
 시종이 문을 열며 소리쳤다.
 그러자 별안간 범천악은 몸을 일으키며 옆에 앉아 있는 기녀들의 얼굴에 주먹을 휘둘러 약간의 상처를 입히고는 병풍 뒤에 있는 밀실(密室)로 숨어들었다.
 그러자 이내 기녀들이 주저앉으며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몸 팔아 사는 것도 서러운데, 돈 없는 놈 시중드는 것도 화가 나는데, 이놈이 사람을 패고 도망을 가? 이놈 다음에 잡히기만 해 봐라. 너 죽고 나 살기다. 이놈아, 천하의 개망나니 같은 개새끼야.”
 좀 전까지 범천악이라면 사죽을 못 쓸 것처럼 애교를 부리던 두 기녀가 마치 대악인을 욕하기라도 하듯 고래고래 범천악을 욕하기 시작했다.
 기녀들의 행동은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들의 울음소리는 연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려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열에 아홉은 그 놈이 누구냐며 길길이 날뛸 듯했다.
 범천악이 밀실로 몸을 감추자마자 이내 한 무리의 건장한 사내들이 손에 칼을 꼬나들고는 문을 박차고 방 안으로 들이쳤다.
 범천악이 건드린 어느 여인의 집에서 고용한 칼잡이들이었다.
 물론 범천악은 그 여인이 어느 집안의 여식인지는 알 리가 없을 테지만 말이다.
 그 중 우두머리인 듯한 자가 방 안에 들어서며 방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기녀들을 쳐다보았다.
 얼굴에 멍자국이 나 있는 채 울고 있는 기녀들을 보며 사내는 범천악이 이미 자릴 피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방 안에 아직 술과 안주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범천악이 멀리는 못 갔으리라 어림짐작하고는 무리들에게 소리쳤다.
 “이곳에는 없는 것 같다. 모두들 다른 곳을 뒤져 봐라. 아직 멀리 가지는 못한 것 같으니 기원 내와 주위를 샅샅이 뒤져라!”
 그러자 칼을 든 무리들이 부복을 하고는 사내의 명을 쫓아 한 무리는 기원 내를 수색하고, 다른 무리는 기원 바깥으로 잽싸게 달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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