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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세일무존 1

2018.06.08 조회 1,277 추천 9


 영세일무존 1권
 서장(序章)
 
 
 강호무림(江湖武林)은 흔히 혈세무림(血洗武林)이라고도 일컫는다.
 이는 바로 당금의 무림 상황을 가장 간결하게 지적한 표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무림(武林)은 이른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冷血)의 세계.
 그러나 천차만별(千差萬別)한 인간사(人間史)에 어찌 냉혈만이 흐르겠는가?
 예측할 수 없는 풍운 속에 무림인들만이 느낄 수 있는 뜨거운 피(血)가 흐른다.
 무림인들은 생사(生死)를 초개같이 여기나 그들에게도 분명히 정(情)과 한(恨)이 은(恩)과 원(怨)이 얽혀 있는 바는 일반 백성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세계에서도 의리가 있고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본능적으로 흐르는 피(血)는 어쩔 수 없는 무림의 생리다. 숙명적으로 피를 흘림으로써 그들의 운명이 참담함으로 이끌어진다는 것이다.
 난세(亂世)는 기인(奇人)을 탄생시키고 또한 영웅(英雄)을 갈구한다.
 천여 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림에서는 수많은 영출걸재(英出傑才)들이 명멸(明滅)하듯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무림인들은 그들을 부러워하고 기억하면서 또 추모한다.
 그러나 그것도 일시적일 뿐 그들도 죽으면 한 줌의 분토(糞土)로 변하고 꺼질 줄 모르고 불길처럼 타오르던 그들의 명성 또한 점점 희미해지는 것이다.
 명나라 말엽에 무림 역사상 전무후무한 두 명의 기인이 출현했다.
 한 기인은 신안천기자(神眼天奇子)라 불리울 뿐 이름이 없었다.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모른다.
 아마 자기 자신도 자신의 이름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단 한 번도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재질(才質)만큼은 중원무림사(中原武林史)를 통틀어 제일 뛰어나리라는 점은 누구나 알았다.
 그는 천하의 모든 무학을 연구했으며 어느 무학이든 한 번만 보면 절대 잊어 버리는 법이 없었다.
 기억력만의 천재라면 그 못지 않은 천재들이 많았다.
 그가 세인들에게 위대한 무인으로 각인된 것은 세상의 어떤 무학이든 그의 머리를 거치면 더욱 완벽한 무학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무학을 연구함에 있어서 깊이 몰두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무학이든 그의 눈에 스치기만 하여도 그 무학의 결점과 보완점을 그 즉시에 만들어 내는 귀재(鬼才)였을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절세적인 무학을 부지기수로 창안해 내었기 때문에 위대한 무인인 것이다.
 그는 평생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절기를 무림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각대문파에게는 그들 자신도 복원 못한 실전된 무학을 완벽하게 재창조하여 돌려주었다.
 수많은 젊은 영재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무학을 가공무비한 무공으로 바꾸어 주었다.
 이것이 그의 생(生)의 점철이었다.
 그의 손을 거쳐간 무림 영재들은 하나같이 절세고수(絶世高手)들로 변해 버렸다.
 무림인들은 그를 신안천기자와는 달리 만무록(萬武綠)이라고도 부르며 존경해 마지 않았다.
 만무록(萬武綠).
 문자 그대로 모든 무학을 알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천봉(恨天峰).
 기련산(奇蓮山)의 최남단에 자리잡고 있는 이 봉우리는 오늘도 그 위용을 자랑하며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서 있다.
 아직도 여름은 멀었지만 산은 한 점의 흙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온통 푸르디 푸른 신록(新綠)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이 한천봉만은 주위의 다른 봉우리는 아랑곳 없다는 듯이 부서진 바위조각과 누런 흙, 약간의 이끼와 잡초 외엔 나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깎아지른 듯한 급경사를 이룬 이 봉우리를 보면 어지간한 사람은 아예 오를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기암괴석(奇岩怪石)만이 즐비한 이 한천봉을 오르면 어지간한 봉우리 맨 위에 넓이가 거의 천여 평은 됨직한 거대한 바위가 하나 널찍하게 놓여 있다.
 이 바위 한가운데 한 명의 황의노인(黃衣老人)이 옷자락을 표표히 날리며 우뚝 서 있었다.
 뒷짐을 진 채로 석양(夕陽)의 붉은 노을을 감상하는 황의노인의 모습은 신선(神仙)을 연상케 했다.
 하얗게 센 은발은 뒤로 단정하게 넘겨 묶었다.
 백설같이 희고도 탐스러운 은염(銀髥)은 가슴까지 길게 드리워져 저녁바람에 가볍게 나부끼고 있었다.
 황의노인은 아까부터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채 지는 석양을 응시하고 있었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자연의 아름다움에 깊이 심취되어 자기 자신마저도 잊어 버린 몰아(沒我)의 경지에 들어간 황의노인의 모습은 실로 무척이나 고아(高雅)해 보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석양을 바라보는 그 황의노인의 두 눈 깊숙한 곳에는 깊은 고뇌(苦惱)의 빛이 잔뜩 어려 있는 것이었다.
 선풍도골의 모습으로 세속의 일체를 해탈했을 것만 같은 지고해 보이는 황의노인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고뇌가 있는 것일까.
 "아름다운 석양 노을임에도 도무지 아름다움을 감상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무엇 때문이지 아시오? 영세무존(永世武尊). 그대는 노부를 왜 이다지도 괴롭히는 것이오."
 석양을 보면서도 아름다움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토로한 황의노인은 땅이 꺼져라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영세무존. 천재란 겨룰 만한 인물이 없으면 고독(孤獨)하다는 것을 노부도 익히 알고 있소. 그러나 한낱 천하제일이란 허명(虛名)때문에 오늘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한다니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이오. 그대로 인한 노부 신안천기자의 성명도 오늘로 끝이 되는구료."
 스스로 자신을 신안천기자(神眼天奇子)라 칭한 황의노인.
 그는 놀랍게도 불세출(不世出)의 대귀재(大鬼才) 신안천기자(神眼天奇子)인 것이다.
 그 누구도 받아 보지 못했던 위대한 무림인으로 추앙되는 일대의 무학거성(無學巨星) 신안천기자의 지금 모습은 너무도 고독해 보였다.
 그의 탄식대로 상대가 될 만한 인물이 없어서 일까?
 아니면 그의 예언대로 천명(天命)이 다된 수명(壽命)을 염려해서 일까?
 그의 모습은 지는 석양과 어울려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희미한 경풍소리가 주위의 적막한 산봉우리를 울리며 조용히 들려왔다.
 신안천기자는 나직한 탄식을 뿜으며 천천히 몸을 돌려 뒤돌아 보았다.
 "아아. 노부의 수명이 이제 한 시진도 못남았구나."
 그의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산 아래 쪽에서 한 명의 흑색인영이 행운유수(行雲流水)와도 같이 한천봉 정상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인영은 흑의를 걸친 준수한 중년문사였다.
 하얀 문사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그의 얼굴은 마치 백옥같이 희고도 깨끗해 보였다. 칼날같은 눈썹 아래에는 영기가 서린 검목(劍目)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의 그런 모습은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것 같은 아주 연약한 서생 그대로였다.
 잠깐 사이에 그는 정상에 있는 신안천기자 앞으로 다가왔다. 신안천기자를 응시하는 그의 유약해 보이는 얼굴에 차갑고 음랭한 빛이 감돌았다.
 "당신이 신안천기자요?"
 신안천기자는 음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노부가 신안천기자요."
 중년문사의 수정알처럼 맑고 차가워 보이는 두 눈에 일순 희열이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감정없는 말로 나직이 뇌까렸다.
 "꼭 육십 년만이로군. 육십 년만에 당신을 만나게 되었군."
 "그렇소. 육십 년만이오. 당신은 육십 년 동안 노부를 찾으려고 무던히도 애썼구료."
 그렇다면 이들은 육십 년 동안 숨바꼭질 했단 말인가?
 영세무존(永世武尊).
 신안천기자와 더불어 그 이름을 나란히 하는 영세무존이란 이름은 흑의중년인의 외호였다.
 그는 신안천기자와 엇비슷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신안천기자와 근본적으로 생각이 달랐다.
 지기 싫어하는 천성(天性)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무학에 뜻을 두고 천하제일인이 되고자 염원(念願)했을 때 그것을 가로막은 장애가 있었다.
 장애는 바로 신안천기자였다.
 두 사람은 이름을 나란히 할 정도로 무학의 천재들이었는데 무림인들은 어찌된 일인지 누구나가 다 신안천기자를 영세무존보다 우위로 단정했다.
 천성적으로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영세무존으로서는 그 평가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도저히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의 외호를 살펴 보면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영원 세월을 두고 보아도 무학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만이 존귀하다는 뜻이었다.
 그런 그가 어찌 모욕을 참을 수 있겠는가?
 그는 신안천기자에 의해서 절세고수로 탈피한 인물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모두 일초(一招)에 격패시킨 후 한결같이 패배자들에게 물어보았다.
 누가 천하제일이냐고?
 그러나 비록 영세무존에게 패배했더라도 그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신안천기자였다.
 그는 불같이 노했고 신안천기자라고 대답한 무림인들을 죽여 버렸다. 신안천기자를 찾아 꼭 우열을 가르리라 하늘에 맹세하고는 평생을 걸고 신안천기자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그는 신안천기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를 찾는 동안 영세무존은 자신의 무공 발전을 위해 수많은 혈전을 벌였고 상대한 고수들마다 단 일초로 살생해 버렸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두번째 초식이란 없었다.
 영세무존이란 이름은 위대한 무인으로 인정되기보다 잔인한 살륙자의 이름으로 무림인 모두에게 공포를 주는 이름이 되고 말았다.
 추적을 시작한 지 벌써 육십 년
 그는 천하제일을 쟁취하기 위해서 육십 년 동안 오직 신안천기자만을 추적했던 것이다.
 육십 년 동안 오로지 적수를 쫓아 마침내 찾아낸 영세무존이지만 그를 대하면서도 전혀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었다. 실로 무서우리만치 냉정한 인물이었다.
 음울한 한 기인과 냉정하기 이를데 없는 두 기인이 대치하는 동안 석양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만월(滿月).
 어느새 으스름한 아니 어찌 보면 푸른빛으로 가득 찬 보름달빛이 한천봉을 비추고 있었다.
 적막한 고요함이 흐르는 가운데 두 불세출의 무학의 대종사들은 침묵 속에 대치하고 있었다.
 "······."
 한 사람은 더할 수 없이 고독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만년빙굴의 차디찬 냉혹함을 풍기며 마주보고 서 있었다.
 두 기인 사이의 질식할 듯한 침묵을 깨뜨리며 신안천기자가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영세무존. 노부는 이미 당신이 천하제일임을 무림에 선포하였는데 어찌 이토록 노부를 괴롭히시오?"
 영세무존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흥. 그것이 당신의 진실된 마음이었을까? 그로 인하여 노부는 더욱 참담한 패배감을 느꼈을 뿐이오. 노부는 실제로 당신을 꺾어 노부가 진정한 천하제일이라는 것을 무림에 보여주고 말겠소. 자 여러 소리 말고 어서 덤비시오."
 그러나 신안천기자의 얼굴에는 더욱 쓸쓸함이 고조될 뿐이었다.
 자신은 명리(名理)를 초월한 무도의 길을 걸어 왔다. 무학으로써 이룬 인간 해탈(解脫)의 경지는 그 아니면 어느 누구도 이루지 못할 경지인 것이다.
 이미 해탈의 경지를 체득한 신안천기자로서는 영세무존의 행위가 한낱 무의미할 뿐이었다.
 "영세무존. 당신은 다시 생각해 보시오. 죽으면 지나온 세월은 꿈에 불과한 것인 걸 천하제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 우리의 싸움은 무의미할 뿐이오."
 신안천기자는 간곡한 어조로 영세무존의 도전을 거절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영세무존의 조소어린 콧소리 뿐이었다.
 "당신 말 몇 마디에 집어 치울 것 같으면 육십 년 동안 쫓지도 않았지. 더 이상 여러 소리 하지 말고 어서 결판을 냅시다."
 "······."
 신안천기자는 안타까움으로 인해 목이 탔다. 공기가 매우 건조한지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음에 스며드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무의미한 얼굴이 눈 앞에 있다. 해탈의 경지인 신안천기자로서는 영세무존의 집착이 헛된 욕망일 뿐이지만 오직 천하제일만을 목표로 살아온 영세무존에게는 도저히 이루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일생의 염원인 것이다.
 신안천기자는 만월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온기조차 없는 푸른 달빛이 그의 얼굴을 더욱 고즈넉하게 비추었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탄식이 끊이지를 않았다.
 '아직 못다한 일도 많은데 이렇게 된 이상 이백 년 후, 그 이백 년 후의 혈겁을 영세무존에게 맡길 수밖에 없겠구나. 그는 잘해 주겠지.'
 이백 년 후에 일어날 혈겁을 꿰뚫어 보고 있는 신안천기자는 무공의 신일 뿐 아니라 미래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단 말인가.
 신의 눈을 지닌 그이기에 신안천기자로 불리우지 않는가.
 그가 뜸을 들이고 있다고 여기는 영세무존은 더 이상 기다리기 짜증이 나는지 벼락같이 외쳤다.
 "신안천기자. 어서 싸울 준비는 안하고 무얼 하는 게요?"
 신안천기자는 물끄러미 영세무존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탄식을 하더니 서서히 오른손을 치켜올렸다.
 단순히 손을 들어올린 것인데 그의 자세는 너무나 완벽하였다. 무거운 중압감이 신안천기자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에서 우러나는 만류귀종(萬流歸宗)의 부드러운 힘. 사물의 극(極)과 극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을 때 쓰는 말이아. 그러나 또한 서로 너무 다르기에 너무나 똑같다.
 일원(一元)에서 음양(陰陽)으로 발전한 사물의 이치는 사상(四象)으로 변화한다. 일원에서 삼재(三才)로 발전한 이치는 천지인(天地人)을 일컬음이다. 천지인을 일컫는 삼재는 오행(五行)으로 변화한다. 육합칠성팔괘구궁(六合七星八卦九宮)으로 사물의 이치는 발전하여 십전(十全)으로 완성된다.
 십전은 완전한 힘을 말한다. 완전한 변화인 십전은 곧 일원과 상통한다. 극과 극이 같다는 이치이다.
 무학에서는 이 힘을 만류귀종이라 명명한다.
 신안천기자의 자세가 만류귀종임을 단숨에 알아 본 영세무존은 숨이 콱 막혔다.
 '만류귀종이라니? 무서운 위압감이로구나. 내가 감당하기 힘든 저 위압감이라니. 저 자야말로 진정한 천하제일이란 말인가? 아니다. 나에게는 그를 이기기 위하여 고혈을 짜내 창안한 무공이 있지 않은가?'
 그는 공력을 끌어 올리면서 서서히 쌍장을 펼쳤다.
 건곤멸멸(乾坤滅滅).
 하늘과 땅을 멸하고 멸한다. 건곤멸멸은 그가 창안한 필살(必殺)의 단 한 초식이었다.
 그의 자세를 본 신안천기자는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역시 나와 천하제일을 견주려는 자다운 자세이군.'
 두 사람은 전혀 빈틈이 없었다.
 영세무존에게서 쏟아지는 무서운 살기. 살기를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는 신안천기자.
 일촉즉발(一觸卽發)의 긴장된 상황에서 둘은 땀이 났고 숨이 막혔다.
 곧 그들이 벌일 격돌의 흉흉함을 예측했는지 산 정상은 무너질 것 같았고 만월은 구름 속으로 숨어 버렸다.
 "차앗."
 "이야압."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우렁찬 기합이 터져나왔다.
 그들의 양 손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섭고도 거대한 장력이 터져나왔다.
 꽈르르르르릉.
 꽝-- 꽝--
 엄청난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날리는 가운데,
 "으-- 억."
 어이없게도 신안천기자가 피보라를 뿌리며 오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주위 사물이 드러났다.
 이때 영세무존은 창백한 얼굴로 넋나간 사람처럼 오 장 밖에 쓰러져 있는 신안천기자를 바라 보고 있었다.
 땅에 떨어진 신안천기자의 가슴에 정확히 열여덟 개의 붉은 장인(掌印)이 새겨져 있었다.
 그 사이로 혈육(血肉)이 뒤엉킨 모습은 실로 끔찍스러웠다.
 영세무존은 그에게로 서서히 다가갔다. 그의 얼굴에는 믿어지지 않는 불신이 가득 서려 있었다.
 "신안천기자 이게 무슨 짓이오?"
 그의 격한 어조에 신안천기자는 힘겹게 눈을 뜨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영세무존, 당신이 이겼소. 노부는 진정한 천하제일인의 손에 죽게 되어 영광이오."
 "천만에. 이것은 결코 나의 승리가 아니오. 당신은 왜 마지막에 가서 오성(五成)의 공력을 거두었소? 또한 당신이 창안한 천지인극오행합일인(天地人極五行合一人)의 만류귀종을 왜 스스로 감추었소?"
 신안천기자는 그 말에 힘겹게 웃음을 떠올렸다. 그는 고통이 심한지 식은 땀을 떨리는 손길로 훔쳐 내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당신의 무진기심극살강(無眞氣心極殺剛)은 내가 변화를 다 펼쳤다 하더라도 능히 나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오."
 "거짓말 마시오."
 영세무존은 버럭 호통을 쳤다.
 그는 알고 있었다.
 생활(生活)을 근본으로 한 신안천기자의 무학이 살사(殺死)를 근본으로 한 자신의 무학을 앞서고 있음을 지금 이 순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영세무존은 신안천기자의 얼굴을 어두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신안천기자 당신은 바보요. 나는 이 결전에 나의 생명을 걸었는데, 스스로 무공을 거두고 죽음을 받아 들이다니. 내가 그렇게 당신 안중에는 시원치 않았단 말이오. 이렇게 해서 나를 부끄럽게 만들어 당신이 천하제일임을 증명하는 것이 옳단 말이오?"
 육십 년만에 적수를 만났을 때도 무표정하기 이를데 없던 영세무존은 신안천기자의 행동에 너무 화가 나 얼굴이 벌개져 무섭게 화를 냈다.
 신안천기자는 길게 기침을 하더니 다시 웃었다.
 "당신은 나를 이기려는 욕심이 너무 지나쳐 건곤멸멸 무공에 두 가지 잘못을 저질렀오. 당신이 건곤과 음양의 이치를 모를 리 없건만 건이 음을 끌어 들이고 양이 곤으로 변한 이치를 소홀히 했오. 이 점만 보완했다면 노부는 전력을 다했어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천하제일이요."
 더 이상 영세무존은 아무 말도 안했다. 아니 할 수가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신안천기자의 지적을 듣자 무언가 마음 한 구석에 미진하게 남아 있던 오류가 씻은 듯 사라졌다.
 신안천기자의 지적은 옳은 것이었고 자신은 어떤 점이 미진한지 그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영세무존은 자신의 능력이 한 수 아래임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이 마음 속에 회오리쳤다. 회한은 이내 감당 못할 수치로 변해 버렸다.
 영세무존은 고통에 겨워 신음을 흘리는 신안천기자를 오래도록 내려다 보았다. 그렇게 얼마를 쳐다 보았을까. 돌연 영세무존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신안천기자 그대야말로 영세무존이란 칭호를 받을 만한 인물이오."
 그가 느닷없이 무릎을 꿇자 당황한 신안천기자는 공허하게 웃었다.
 "허허허······."
 이때 갑자기 고통으로 시커멓게 변해 가던 신안천기자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영세무존은 나타난 생기가 사람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빛을 내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의 현상임을 알고 있기에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신안천기자는 억지로 웃음을 띠우려 했다. 마침내 고통의 표정을 뚫고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매우 안락하고 푸근한 미소였다.
 "당신은 너무 애통해 할 것 없소. 아차피 노부는 그대가 아니더라도 수명이 다한 운명이었으니까. 영세무존. 내가 죽기 전에 당신께 부탁할 일이 있오."
 "무엇이오?"
 되묻는 영세무존은 여전히 냉정한 얼굴이었으나 풀 수 없는 고뇌가 어려 있었다. 갑자기 신안천기자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그는 간신히 한 손을 뻗어 영세무존의 손을 잡았다.
 "나의 품 속에 평생 동안 내가 쌓아올린 정수(精髓)가 담긴 비록과 유언장(遺言狀)이 있오. 노부는 당신이 나의 유언장에 쓰여진 대로 해주기를 부탁하오."
 말을 끝내는 신안천기자는 있는 힘을 다해 잡고 있던 영세무존의 손에 힘을 주었다.
 영세무존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을 했다.
 "염려마시오."
 "그··· 그럼··· 부탁하오."
 신안천기자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영세무존은 완전히 넋이 빠진 듯 오래도록 신안천기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름 속으로 숨었던 만월이 나와 빛을 뿌렸다. 영세무존은 난생 처음 달빛이 매우 허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코 감상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신안천기자의 죽음으로 인해 갑자기 세상이 허무해졌다.
 "나의 허욕(虛慾)으로 인하여 천하제일고수가 허무하게 죽어갔구나. 아···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검은 구름이 생겨나면서 다시 만월을 집어 삼켰다. 우중충해 진 밤하늘은 마치 폭우라도 퍼부을 듯 잔뜩 흐려져 버렸다.
 영세무존은 신안천기자의 품 속에서 그의 유언장을 꺼내 들었다. 그는 그것을 읽어가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얼굴이 수시로 변했다. 그토록 냉정하였던 그가 왜 그렇게 놀라고 있는 것일까?
 유언장을 다 읽고 난 후 그는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현세의 살성(殺星)인 나 영세무존이 사라지려 하는데 이백 년 후 또 하나의 살성이 나타나는구나. 신안천기자. 당신의 유언대로 이백 년 후 나타날 살성의 혈겁을 막는 것으로 나의 죄악을 보상받아야 되겠소."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린 후 신안천기자의 시신을 안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후 이백 년이 지나도록 신안천기자와 영세무존의 이야기는 어떻게 알았는지 무림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구전되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무림은 영세무존이 만든 영세무비도로 인하여 백여 년 동안 피보라가 일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차지한 인물은 없었다.
 과연 영세무비도는 어디에 있을까?
 
 
 제1장 찬란한 나부산(羅浮山)의 이성(二星)
 
 
 중원(中原)의 남방에 위치한 광동성(廣東省)에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기화이초(奇花異草)들이 만개하고 또다시 스러지며 피어나는 절경의 명산(名山)이 있다.
 나부산(羅浮山).
 비록 장엄한 맥을 갖춘 명산은 아니지만 철마다 새로운 형형색색의 화려한 꽃들로 뒤덮이는 이 산을 세인들은 화산(花山)이라고도 불렀다.
 그만치 나부산의 맑은 물과 경치는 뛰어난 것이었다.
 나부산 인근에 자리잡은 부평현(浮平縣)에는 한 줄기 크지 않은 내(川)가 유유히 산에서부터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구름이 흐르는 물길같다 해서 유운하(流雲河)로 불리우는데 유운하의 물길은 너무나 맑아 바닥의 수초(水草)와 고기들의 움직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강을 따라 펼쳐져 있는 눈처럼 희디 흰 백사(白沙)는 햇빛에 반사되어 마치 사금처럼 빛을 내었고 따뜻한 봄의 햇살을 받으며 노니는 물고기들은 한가롭기 그지 없었다.
 유운하를 거슬러 올라 나부산 기슭으로 올라가게 되면 고아한 운치가 넘치는 죽림(竹林)이 나타나며 그 가운데 한 채의 모옥이 자리잡고 있었다.
 모옥은 매우 아담하고 청결한 기운을 풍겼다.
 그 청결함은 죽림과 조화를 이루어 세속의 때가 전혀 묻지 않아 보였다.
 오늘도 햇살은 매우 따뜻했다.
 이 모옥은 바로 나부산 일대에서 신(神)의 손을 지녔다는 한 의원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의원의 이름은 율성하(律成河)였다.
 율성하는 지금으로부터 약 십오 년 전이었던가, 그때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된 갓난아기와 함께 나부산 기슭으로 이사해 와 오늘날까지 살아온 인물이었다.
 고을 주민들은 그가 어디에서 왔으며 무얼하던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다만 청수하게 생긴 중년인의 모습으로 미루어 낙향(落鄕)한 선비가 아닌가 생각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가 신(神)의 손을 지닌 의원이었음을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는 나부산에 자리잡고 살아가면서 고을 주민들과는 거의 왕래를 하지 않고 살았다.
 다만 때때로 일상품을 구입할 때에만 부평현으로 나올 뿐이었다. 그러나 고을 주민들은 그를 대단히 존경했다.
 그의 몸에서 흐르는 범상치 않은 기도(氣道)와 고고(高高)히 흐르는 인품은 순박한 시골 사람들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가 신의 손을 지닌 의원으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육 개월 전이었다.
 그때에 나부산 일대에 괴질이 한 차례 돌았다.
 괴질은 어찌나 지독한 지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나갔다.
 관의(官醫)는 물론 부평현의 의원들도 괴질을 치료하려고 노력을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괴질이 돈 지 보름만에 고을 주민의 수가 무려 반 정도로 줄어 버렸다.
 일이 이쯤 되자 처음에는 수수방관(袖手傍觀)만 하고 있던 율성하는 더 이상 사람이 죽어 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손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내 명(命)을 스스로 재촉을 하는구나. 그렇지만 인명재천(人命在天)이라 했으니 나와 내 자식의 안위만을 위하여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는다면 그것 또한 의술을 배운 사람의 도리(道理)가 아닐 것이다."
 그가 중얼거린 말 뜻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말 뜻에는 무슨 사연이 있어 숨어 사는 인물이라는 뜻이 역력히 들어 있었다.
 "이로 인하여 나의 정체와 거처가 무림인들에게 발각된다 하여도 하늘의 뜻일 것이다."
 율성하는 자신이 괴질을 퇴치함으로써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것을 꺼려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의술은 인술이라는 것을 천도(天道)로 여기는 그는 결국 손을 쓰려고 결정한 것이었다.
 진정 그의 의술은 눈부신 것이었다.
 괴질은 일종의 전염병이었다.
 그가 손을 쓴 지 칠 일만에 괴질은 물러가 버렸다.
 더 이상 죽어 나가는 사람이 없었고 앓아 누었던 병자들까지 깨끗이 치료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명성은 삽시간에 광동성 일대를 떨어 울리게 되었다.
 그는 신의 손을 지닌 의원이라는 칭송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괴질이 완전히 퇴치된 것을 확인한 율성하는 그 날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거의 짐을 챙길 무렵 부평현의 촌장을 비롯한 마을 촌로들이 찾아왔다.
 감사를 표시하러 왔던 그들은 율성하가 나부산을 떠나려고 함에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라 만류하였다.
 심지어 어떤 촌로는 무릎까지 꿇고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율성하는 짐을 도로 풀고 말았다. 그리고 나직이 탄식을 토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의 운명은 나부산에서 종결되고 마는 것인가?"
 그러나 그가 나부산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진정 다른 데 있었다.
 오늘도 모옥 앞에는 수많은 병자들로 들끓고 있었다.
 병자들은 이곳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병이 나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말 놀랬어. 어쩜 어린 나이에 그토록 신통한 의술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아마 모르긴 해도 아버지인 율신의 보다도 더욱 의술이 뛰어날껄?"
 모옥 안에 들어가서 치료를 받고 나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런 소리들을 했다. 그들은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아, 생기기는 얼마나 잘 생겼나? 아마 내 생애에 그보다 더 잘 생긴 소년은 죽을 때까지도 다신 보지 못할 것이네."
 누군가가 옆에서 한 마디 덧붙였다.
 모옥 안에는 약 십오 세 가량 되었을까? 아직 홍안의 소년이 진료를 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토록 잘 생긴 소년이 있나 싶을 정도로 누구나 보게 되면 감탄할 만큼 잘 생겼다.
 그 소년의 얼굴은 남자의 얼굴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진정 조물주의 걸작품인 양 아름다웠다.
 짙은 검날같은 눈썹은 옆으로 길게 쭉 뻗어 있었고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우뚝한 코는 그의 의지가 무척이나 강인함을 나타내 주고 있었다.
 아직 소년이라 그런지 그의 입술은 여자의 입술처럼 촉촉히 젖어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바탕을 지닌 소년의 얼굴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은 그의 커다란 두 눈이었다.
 물기를 머금은 듯한 커다란 눈망울엔 보는 이로 하여금 그 눈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이 끊임없이 신비로운 광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말 기이할 정도로 아름답기 짝이 없는 눈이었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소년의 입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곧 안색이 누렇게 뜬 농부차림의 중년인이 들어섰다.
 중년 농부는 이곳을 처음 왔는지 소년을 보며 너무 놀라 멍하니 굳어 버리는 것이었다.
 '세상에 내가 꿈을 꾸는 것인가? 이렇게도 잘 생긴 소년이······.'
 소년은 빙그레 웃으면서 중년 농부의 안색을 자세히 살피더니 진맥도 하지 않고 진단과 치료법을 말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저씨는 어제 저녁 떡을 너무 많이 먹어 얹혔군요. 치료 방법은 여울에서 깨끗한 조약돌을 주어 불에 따뜻하게 한 후 명치 위에다 올려 놓고 들기름 세 숟가락을 잡수세요. 그러면 속이 시원하게 뚫릴 것입니다. 조약돌은 꼭 끓는 물에 넣어 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효력이 없습니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소년은 진맥도 하지 않고 농부의 안색만 살피고서 집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민간요법(民間療法)을 일러주는 것이었다.
 소년의 처방은 언제나 이러했다.
 그러나 그가 말해준 처방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얼핏 듣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으나 신통하게도 꼭 들어맞는 처방을 내려주는 것이었다.
 농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가면서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원 세상에. 엊저녁에 먹은 떡을 안색만 보고 알아내다니. 그러나 소년 신의가 알려준 처방이 옳게 들을까?'
 누구나가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집에 돌아가서 그대로 시행한 후 이루 말할 수 없이 감탄을 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해지기 전까지 무려 삼백에 가까운 병자를 치료했다.
 병자들이 한결같이 감탄한 얼굴로 돌아간 후 소년은 피곤한 지 나른한 몸으로 기지개를 켰다.
 이 소년이 바로 신의의 아들인 율원양(律元陽)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정작 아버지보다 더 명성을 떨치는 신의였다.
 율원양은 천천히 모옥 밖으로 나갔다.
 "아아. 오늘따라 저녁 노을이 왜 저렇게 붉지? 마치 핏빛같잖아?"
 지는 석양은 율원양의 감탄대로 굉장히 붉었다.
 약간의 구름 사이로 비치고 있는 노을은 사람의 마음을 섬뜩하게 할 만큼 붉다 못해 완전히 피를 쏟는 것 같았다.
 석양에 물든 율원양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천하의 어떤 여인이라도 단번에 녹일 듯한 신비로운 매력이 저절로 풍겨났다.
 이때 약간 경미한 발걸음 소리가 죽림 속에서 들려왔다.
 "율오빠."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죽림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뒤이어 가냘픈 소녀가 죽림 밖으로 나타났다.
 율원양의 안색에 매우 귀찮은 빛이 서렸다.
 '쳇. 저 애가 나타났으니 나머지 애들도 또 나타나겠지. 저 애들은 왜 해가 지면 매일같이 찾아와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일까?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율원양이 매우 귀찮은 듯한 표정으로 바라 보는 소녀는 백의나삼(白衣羅衫)을 입고 있었다.
 "율오빠. 그새 안녕하셨어요?"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떠듬떠듬 말문을 꺼냈다. 매우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쳇. 저애는 태어나서 저 말만 배웠나? 매일같이 저 말 한 마디만 간신히 하고 돌아가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매일 오는지 모르겠군.'
 율원양이 속으로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무어라 대답을 하려 할 때.
 "율오빠."
 "율오빠."
 매우 당돌한 것 같으면서 명랑한 두 마디 소녀의 음성이 연이어 들렸다. 그러자 처음 나타났던 소녀는 표정이 돌변하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율원양의 얼굴에는 더 더욱 귀찮고 난처한 기색이 서렸다.
 홍의(紅衣)와 청의(淸衣)를 입은 두 명의 소녀가 나타났다.
 '언제 보아도 정말 잘 생긴 율오빠로구나'
 소녀들은 환한 미소를 띠우며 다가 오다가 먼저 온 소녀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표독하게 변해 버렸다.
 "아니 저애가 또 왔잖아?"
 홍의를 입은 소녀가 그녀를 향해 매섭게 소리쳤다. 청의소녀도 뒤를 이어 입가에 싸늘한 조소를 띠우면서 한 마디를 했다.
 "너같은 맹추가 왜 매일같이 율오빠를 찾아와 귀찮게 하는지 정말 모르겠구나?"
 질투에 젖은 표독스런 말이었다. 게다가 얼마나 모욕적인 말인가.
 그러나 백의소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 따름이었다. 이때 율원양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맙소사. 정작 나를 귀찮게 하는 것은 자기들이면서 도리어 남을 욕하다니 정말 부끄러움도 모르는 계집애들이구나.'
 처음 나타난 소녀는 부평현 촌장의 손녀로서 이름은 갈영지(葛英知)라 했다.
 홍의를 입은 소녀는 부평현을 다스리는 현감(縣監)의 딸이었고 이름은 맹려군(孟儷君)이다.
 청의소녀는 부평현에서 제일 부자인 객점 주인의 딸인 정추운(丁秋雲)이었다.
 이 세 소녀들은 율원양을 한 번 본 후 정신을 잃을 정도로 빠져들어 매일 해질 무렵 율원양을 찾아오기에 여념이 없는 소녀들이었다.
 맹려군의 눈꼬리가 샐쭉 치켜 떠졌다.
 "이 계집애야, 너는 네 분수도 모르고 어찌 천방지축(天方地軸) 날뛰느냐?"
 정추운도 뒤지지 않고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언니 저 계집애는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해요. 흥. 꼭 비루먹은 토끼같은 계집애가."
 갈영지는 고개를 숙인 채 급기야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갈영지는 두 소녀보다 신분이 낮기 때문에 감히 대들지 못했다. 아니 대들 수가 없었다.
 일개 촌장의 손녀가 감히 생사여탈권을 쥔 현감의 딸에게 대들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로서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으나 꾹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은 매일같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일이 이쯤 되면 율원양은 하늘 끝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된다.
 그는 신분이 높은 것을 빙자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방자한 두 소녀도 싫었지만 매일 나약하게 당하기만 하는 갈영지도 싫어했다.
 아니 자신한테 반해 매일같이 찾아와 자신 앞에서 벌이는 소녀들의 질투 싸움이 더 싫다고나 할까?
 어쨌든 율원양을 흠모하는 소녀들은 그녀들 뿐이 아니었다.
 부평현 일대의 모든 소녀가 그를 좋아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맹려군과 정추운은 한참 갈영지를 욕했으나 그래도 떠나지 않자 나중에는 지쳐 버렸다.
 "그래도 돌아가지 않다니 정말 파렴치한 계집애로구나."
 "정말 그래요. 언니 저 계집애는 더 상관하지 말고 율오빠에게 가요."
 그녀들이 몸을 돌렸을 때 율원양은 이미 소리없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니 율오빠가 어디 가셨지?"
 맹려군의 놀라는 소리에 숙여져 있던 갈영지의 고개가 얼핏 들려졌다.
 율원양이 사라지자 몸이 달은 두 소녀는 모옥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녀들이 모옥 안으로 사라지자 갈영지는 급히 몸을 돌렸다.
 그것은 두 소녀가 율원양을 찾지 못할 시 자신에게 돌아올 봉변을 염려해서 였다.
 '이 계집애들 어디 두고 보자. 나중에 나에게 크나큰 봉변을 당할 날이 있으리라.'
 그녀가 총총히 사라지고 나자 분한 얼굴을 한 두 소녀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들은 율원양을 찾지 못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들은 갈영지가 사라진 것을 곧 발견할 수 있었다.
 "아유. 고 여우같은 계집애가 벌써 도망가 버렸네. 이 계집애 때문에 율오빠를 놓쳤는데 감쪽같이 없어지다니. 내일 만나면 그냥 두지 말아야지."
 그녀들은 너무 분한 나머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때 쯤 율원양은 유운하를 따라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어느덧 달빛만이 교교롭게 그가 걸어가는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걸으면서 연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여자애들은 나만 보면 한결같이 저 모양이니 언제쯤 저런 꼴들을 안 보게 될 것인가?"
 남들이 들으면 행복한 투정이라고 핀잔을 주겠지만 율원양은 진정 싫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율원양이 늙어 죽기 전에는 여자들의 질투 싸움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여자들의 잘못이 아니다.
 잘못이 있다면 너무 잘 생긴 율원양에게 있다고나 할까?
 "나는 언제쯤 내 모습을 보고 초연한 기색을 짓는 여자를 만날 수 있을까?"
 남들이 들으면 기가 막힐 뿐이겠지만 이 독백이야말로 그가 지닌 단 한 가지 소원이었다.
 자신을 보는 여자들마다 순식간에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그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었다.
 여자의 자존심, 즉 여자 본연의 태도를 지니지 못한 여자들은 딱 질색이었다. 계곡 깊숙한 곳에 또 한 채의 모옥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모옥은 아버지인 율성하가 따로 기거하는 곳이었다.
 그가 무엇 때문에 따로 모옥을 짓고 산단 말인가?
 율원양은 모옥에 가까이 갈수록 근심하는 표정이 점점 짙어졌다.
 "아버님은 오늘도 고심참담(苦心慘憺)하고 계실까?"
 그는 발걸음 소리를 죽여가며 천천히 다가갔다.
 "휴우······."
 모옥 안에서 긴 탄식이 새어나왔다.
 탄식에는 온갖 복잡한 심정이 모두 들어 있는 한숨이었다.
 율원양은 근심에 찬 얼굴로 아버지가 기거하는 방을 바라보았다.
 '아버님은 내가 어려서부터 심혈을 기울여 무엇인가 연구를 해오셨는데 대체 어떤 것이기에 십수 년이 넘도록 해결을 못하고 있는 것일까?'
 율원양은 모옥 앞에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고는 자신이 왔음을 고했다.
 "아버님. 소자입니다."
 매우 공손한 어조였다. 잠시 후 모옥 안에서 수려한 중년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오늘 병자들의 치료는 어려운 점이 없었느냐?"
 "다행히도 모두 소자가 알고 있는 병을 지닌 환자들이었습니다."
 "알았다. 그만 물러가 쉬도록 하거라."
 "예. 아버님."
 얼마 전부터인가 부자 간의 대화는 아침 문안 인사 외는 이것밖에 없었다.
 율원양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아버님 편히 주무십시오."
 몸을 돌려 얼마나 걸었을까?
 "휴우······."
 율성하의 무거운 탄식이 다시 새어나왔다. 율원양은 그 탄식 소리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그의 머리 속에 심각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족히 수천 장은 될 탁자 위의 종이들과 그 종이들 위에 그려진 수많은 선들이 스치듯 아버지의 얼굴과 겹쳐져 떠올랐다.
 아버지는 지금도 종이에다 선들을 그려가며 연구를 하고 계실 것이다.
 율원양은 어려서부터 그러한 것들을 보며 자라왔다.
 율원양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엄격한 지도 아래 의술을 배워 왔다.
 아버지는 낮에 의술을 가르치고는 밤이면 어떤 비도(秘圖)를 가지고 연구를 했었다.
 아버지는 무려 십여 년이 넘도록 비도와 씨름을 해오는 중이었지만 아직도 비도에 담긴 뜻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밤마다 탄식하는 아버지의 버릇은 그때부터 생긴 것이었다.
 삼 개월 전, 신의 손을 지닌 의원으로 명성이 나고 그때부터 수많은 병자들이 몰려들었다.
 아버지는 병자들에게 많은 시간을 뺏기자 아예 율원양에게 그 일을 맡기고 석달 전부터 계곡 깊숙이 모옥을 짓고는 밤낮으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비도가 무엇이길래 율성하는 십여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연구를 해 온 것일까?
 율원양은 아버지의 탄식소리를 마음이 아파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탄식을 자신이 멈추어 주지 못한다면 아들의 도리가 아니라고 결심을 했다.
 율원양이 모옥을 향해 다시 몸을 돌렸을 때 끼이익, 문소리가 들리면서 중년인이 모옥 밖으로 나섰다.
 
 율성하였다.
 달빛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핼쑥하고 안색은 더할 수 없이 창백하였다.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는 율원양의 두 눈에 순간적으로 눈물이 글썽였다.
 "아···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침식을 잊으셨으면 얼굴이 저토록 변하셨을까?"
 집을 나서다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발견한 율성하는 흠칫했다. 그는 아직 가지 않은 율원양을 발견하고는 눈쌀을 찌푸리며 나직이 꾸짖었다.
 "왜 아직 안돌아가고 있었느냐? 어서 내려가도록 해라."
 음성은 매우 침중하였다. 율원양은 조심스레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색이 너무 초췌해 지셨습니다. 소자로서는 외람된 말씀이오나 아버님께서는 옥체를 보중하시기 바랍니다. 제게는 한 분 밖에 안 계신 아버님이십니다."
 매우 안타까운 음성이었다. 그러나 율원양의 간곡한 말에도 율성하는 냉정하게 말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내려가도록 해라. 요즘은 워낙 밤바람이 차다."
 냉정한 가운데도 아들을 염려하는 뜻이 가득했다. 냉정한 말에도 염려가 크기 때문인지 율원양은 선뜻 돌아서지 못했다.
 "아버님. 소자는 더 이상 아버님의 근심을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아버님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이시는 일이 무엇인지 소자에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소자는 아버님의 근심을 나눠 갖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율성하는 아들의 어조에서 진정 자신을 염려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어찌 아버지로서 아들의 염려를 모를 리 있겠는가.
 '아직 어린 애인 줄 알았더니만 어느새 다 컸구나. 아비를 이토록 염려하다니.'
 마음 속으로는 흐뭇하기 이를데 없으나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네 이 놈. 이 아비의 일에 절대 관심을 두지 말라는 엄명을 잊었느냐? 내가 하는 일은 어린 네가 같이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니 어서 물러가 쉬도록 해라."
 매우 강렬한 꾸짖음이었다.
 "하오나 아버님······."
 율원양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말을 이으려 하자 율성하의 냉엄한 호통이 떨어졌다.
 "아니 그래도 이 놈이?"
 그의 호통에 눈에 그렁하던 눈물이 율원양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율원양은 돌아 섰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내려가다가 율원양은 걸음을 멈추었다.
 '아버님의 말씀이 엄하시지만 아들로서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커다란 불효가 아닌가?'
 그는 모종의 결심을 했는지 몸을 돌렸고 다시 모옥으로 돌아갔다.
 '만약 내가 아버님의 심려를 풀어 드린다면 그것은 효이다.'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마음 속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는 사이 율원양은 이미 문 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는 문 앞에 도착하자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중에 닥쳐올 아버지의 불호령 그것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엄명을 어기는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초췌한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중에 산수갑산(山水甲山)을 가는 한이 있더라도 아버지의 심려를 푸는 것이 먼저였던 것이다.
 방 안은 매우 간단했다.
 돌침상과 나무탁자 그리고 벽에 걸린 잔잔한 호수를 그린 그림 한 폭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탁자 위에는 수천 장의 종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종이마다 수많은 선(線)들이 종횡으로 교차되어 그려져 있었다. 가운데에는 누렇게 바랜 두꺼운 양피지가 놓여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율원양은 마침 아버지가 없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나무탁자로 다가갔다.
 율원양은 떨리는 손으로 나무 탁자 위에 놓인 양피지를 집어 들면서 커다란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한 겹 접혀 있는 양피지를 젖혔다.
 양피지에는 매우 복잡한 붉은 선들이 수없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이것이구나. 아버님께서는 이것을 풀기 위해서 수많은 나날을 보내신 것이구나."
 율원양의 손이 미미하게 ㄸ렸다.
 그는 양피지를 신중하게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양피지의 선들은 얼핏 보아서는 전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두서없이 아무렇게나 그려 놓은 듯 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볼수록 선들은 기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어 어떤 노선인 것 같았다.
 율원양은 처음에는 무엇인가 알 것 같더니 보면 볼수록 머리가 복잡하여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무엇이길래 아버님은 나로 하여금 들여다 보는 것을 막으셨단 말인가?'
 그는 점점 양피지의 선에 빨려 들어갔다.
 그는 손가락으로 선들의 교차점을 하나하나 짚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교차점을 짚다보면 손가가락은 처음 짚었던 교차점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율원양은 매우 이상하여 다시 서너 번을 되풀이 했다. 별안간 그는 자신의 무릎을 탁 쳤다.
 "아하. 처음 열 개의 교차점은 역오행(易五行)을 이루고 있구나. 그러고 보니 이 선들은 일종의 기이한 진세(陳勢)군."
 율원양은 무엇을 깨달았는지 아예 의자에 앉으며 더욱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진이라면 문제없지"
 그는 자신에 찬 어조로 중얼거리면서 선들을 따라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는 깨끗한 종이를 가져다가 선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흐음······."
 그는 수많은 선들을 그려가면서 연신 신음을 터뜨렸다.
 그가 그린 선들은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윽고 원래의 양피지보다 더욱 복잡하게 그려진 한 장의 종이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선들이 한 군데로 모이는 곳에 이르러서는 모두 막혀 전혀 들어갈 곳이 없었다.
 "으음··· 이 선의 연결은 정말 이상하구나. 왜 선의 연결이 모두 역(易)으로 되어 있는 것일까?"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때 밤바람을 쐬고 돌아오던 율성하가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는 목소리의 임자가 누구인지 살필 겨를도 없이 소스라치게 놀라 버렸다.
 '아니? 어떤 놈이 모옥에 들어왔단 말인가?'
 그가 막 문을 박차고 들어가려 할 때 음성이 다시 들렸다.
 "만약 이것이 인위적으로 작성되어 보는 이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면 만든 사람의 능력은 나의 능력을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율성하는 그 목소리가 바로 아들의 것임을 알았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는 절로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후, 십 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줄 알았네. 그런데 내 이놈의 자식을······.'
 뒤이어 그의 마음 속에 열화와 같은 노기가 치솟았다.
 그가 다시 문을 열려고 거칠게 손을 내밀다가 다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역(易)은 반(反)으로 이어져 나가야 순리인데 이 선들은 모두 정(正)으로 이어지고 있다. 역이 정이 된다? 그래, 역이 정이 됐는데 이게 왜 이렇게 됐는지 이것만 풀면 되겠구나."
 율원양의 두번째 음성을 들은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청히 굳어 버렸다. 그는 율원양의 말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삼 년 전부터 자신이 고심해 오던 문제가 아니었던가? 그는 비도를 얻은 지 십이 년만에 그 문제에 다다랐고 삼 년이 지날 동안 아직도 그 문제를 풀지 못하고 뱅뱅 돌고만 있었던 터였다.
 그는 한참을 굳은 자세로 모옥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모옥을 나선 지 약 반 시진 정도밖에 되지를 않았다.
 그 짧은 시각에 아들은 자신이 십이 년만에 도달한 문제를 가지고 고심하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내 아들을 너무 몰랐었구나. 저 녀석은 진정 세상을 뒤엎을 정도의 재능을 지니고 있구나.'
 이러는 동안 율성하는 자신의 기력이 서서히 탈진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십오 년 동안 지녀왔던 긴장감과 초조함이 아들의 재능을 발견함으로써 일시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일순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덜컹.
 비틀거리는 찰나 문잡이를 잡자 방문이 열렸다.
 율성하는 거의 쓰러질 듯하면서 모옥 안으로 들어섰다.
 율원양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왔음을 느끼고 얼굴이 핼쑥하게 변해 버렸다. 재빨리 몸을 돌렸다.
 "아니, 아버님."
 그가 본 아버지는 창백한 안색에 식은 땀을 흘리며 간신히 문가에 기대어 서 있는 것이었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날려 아버지를 부축했다.
 "아버님. 어찌된 일이옵니까?"
 "괜찮다. 원양아, 나를 잠시 침상으로 데려가다오."
 "예, 아버님."
 침상으로 부축해 가는 율원양은 아버지의 몸이 매우 가벼움을 여실히 느꼈다.
 '그 동안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셨으면 몸이 이토록 수척해지셨단 말인가?'
 그의 마음에 안스러움이 물밀 듯이 스며들었다. 침상에 도달한 율성하는 곧 가부좌를 틀고는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율원양은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운기조식을 하는 것을 자주 보아왔었다. 그는 운기조식을 하고 나면 모든 피로가 일시에 풀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몇 번인가 운기조식을 가르쳐 달라고 아버지에게 졸랐으나 아버지는 침중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 보면서 언제나 흉내도 내지 말라고 엄중히 꾸짖고는 했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율원양은 몰랐다.
 운기조식으로 내공을 혈도를 따라 일주천 시킨 후 율성하는 눈을 떴다.
 기력이 보완되고 현기증은 사라졌으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아들을 직시(指示)했다. 돌연 율원양은 흠칫 떨면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소자가 아버님의 엄명을 어기고 그만 불효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어떠한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꿇은 무릎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한 번도 아버지의 엄명을 거역한 적이 없었던 그인지라 불효를 저지른데 대한 막중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크게 혼나리라 각오하고 있는 율원양의 생각과는 달리 율성하의 음성은 의외로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원양아. 이리 가까이 오너라."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았던 율원양은 아버지의 부드러운 음성에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아버지에게 다가섰다.
 율성하의 눈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자애스런 눈빛이 흘러나왔다.
 "네 나이가 올해 몇이더냐?"
 물론 아들의 나이를 모를 리 없는 그였지만 아들이 너무 대견스러워 묻는 것이었다.
 "열다섯 살입니다."
 율성하는 아들의 손을 잡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의 손은 매우 따뜻했다.
 "네가 그토록 총명한 줄을 알았으면서도 이 일을 일찍 맡기지 않았던 것이 매우 후회스럽구나."
 율원양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고개를 숙였다.
 간혹 의술을 배울 때도 아버지는 감탄을 하면서 칭찬을 하곤 했었다.
 율성하는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율원양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의혹이 있구나. 저 비도는 진법(陳法)을 모르면 풀 수가 없는데 네가 어떻게 저것을 풀었느냐? 나는 너에게 진법을 가르친 적이 없지 않느냐?"
 율원양은 약간 주저하더니 품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바로 이 책을 보고 스스로 깨우친 것입니다."
 그는 책자를 아버지에게 공손히 건넸다.
 책 겉장에는 무외총요(武外總要)라고 쓰여 있었다. 책 속의 글은 얼핏 보기에도 무척 어려운 내용이었다.
 뛰어난 귀재(鬼才)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그 즉시 깨우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더구나 앞부분에는 기이한 도형(圖形)이 그려져 있고 도형 위에는 붉은 선(線)이 여기저기 그어져 있었다.
 율성하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책장을 넘겼다. 한데 맨 뒷장을 본 그는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곳에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고만 쓰여져 있었다.
 이 책을 누가 저술했는지 이름은 남겨져 있지 않았다.
 "이 책은 어디서 났느냐?"
 그 말에 율원양은 머리를 조아렸다.
 "두 달 전 현(縣)의 서점에서 일하는 장소이(長小二)를 치료해 주었더니 감사의 표시로 가져온 것입니다."
 그 말에 율성하는 실소를 터뜨렸다.
 "허허허, 그 녀석이 안목이 없어 이처럼 귀중한 책을 너에게 갖다 주었구나."
 "그 책이 얼마나 귀중하기에 그러십니까?"
 "이 책은 천금(千金)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중한 책이다. 이 책은 춘추전국시대의 어떤 뛰어난 기인이 저술한 모양인데 놀랍게도 무공 외에 천하의 모든 것이 수록되어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진법은 물론 점성술(占星術)과 역리신산학(易理神算學) 기관지학(機關之學)에다 변형술(變形術) 등 모든 것이 실려 있구나. 너는 이 중 얼마나 깨우쳤느냐?"
 율원양은 얼굴을 붉히면서 대답했다.
 "저는 두 달 동안 만진편(萬陳篇)만을 간신히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율성하는 어이가 없는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마치 넋나간 사람처럼 무릎 꿇고 있는 아들을 멍하니 내려다 볼 뿐이었다.
 "······."
 언제나 위엄이 가득 흘렀던 인물이 그런 표정을 짓자 매우 우스웠다.
 차츰 율성하의 눈에 더할 수 없이 기쁜 희열이 담겨졌다.
 '나같으면 이 년이 지나야 깨달을까 말까 한 내용을 단 두 달 만에 깨우쳤다니. 이거 오늘 내가 내 자식 놈에게 너무 놀라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아들에게 의술을 가르쳤을 때 느낀 총명을 상기하였다면 그처럼 놀라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깜빡 그 점을 잊고 있었다.
 '아아··· 이 아이가 원영건양체(元孀乾陽體)만 아니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비도의 비밀만 푼다면 고칠 희망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는 기쁨 가운데 가슴을 적시는 진한 슬픔을 맛보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얘야."
 율성하는 부드럽게 아들을 불렀다.
 "예, 아버님."
 "너는 이 양피지에 담겨진 뜻을 언제쯤 알아 낼 수 있겠느냐?"
 율원양은 아버지가 양피지의 해독을 맡기려는 뜻의 말을 하자 기쁨으로 차 올랐다. 그는 신이 나서 장담하듯이 대답을 했다.
 "아마 이삼 일이면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율성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부드럽게 건넸다.
 "그럼 자리에 앉거라. 이제부터 너에게 들려 줄 이야기가 있다."
 율원양은 호기심을 가지고 아버지 옆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참인지 율성하의 안색은 매우 침중해졌다.
 "이 아비가 십수 년 동안 저 양피지를 연구하면서 왜 네가 알게 되는 것을 불허했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겠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십육 년이 조금 못되었구나."
 십육 년 전 율성하는 약초를 캐기 위하여 황산(黃山)을 헤매던 중 유운곡(流雲谷) 깊숙한 곳에서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는 한 노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노인을 급히 구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노인은 오장(五腸)이 파열되고 심맥(心脈)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는 간신히 죽어가는 노인이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하였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노인의 얼굴에서 급작스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율성하는 그것이 사람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빛을 내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의 현상임을 알고 있기에 마음이 매우 안타까웠다.
 노인은 품 속에서 한 장의 누런 양피지를 꺼내 들더니 마지막 유언을 부탁했다.
 "이것을 낙양 근교에 자리잡고 있는 무적미검객(無敵美劍客) 맹석빈에게 전해 주시오. 그는 내 아들이오."
 노인의 말을 듣는 율성하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고 말았다.
 "아니 그렇다면 노선배님은 바로 인수검후(仁手劍侯) 맹성린(孟星隣)이 아니십니까?"
 이 인물이 누구이기에 율성하가 이토록 놀라는 것일까.
 인수검후 맹성린은 당대(當代) 천하제일검객(天下第一劍客)으로 불리우는 인물이었다.
 그는 십팔 세에 강호에 출도(出道)하여 한 자루 용천검(龍穿劍)과 환허무극십팔검법(幻虛無極十八劍法)으로 대강남북(大江南北)의 무수한 고수들을 격패시켰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검에 단 한 번도 남의 피(血)를 묻히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인수검후란 명예로운 명성을 얻게 되었고 수십 년 동안 천하제일검의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무적미검객 맹석빈은 인수검후 맹성린의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보다 더욱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의 용모는 천하를 통틀어 보아도 그와 비교할 만한 인물이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용모가 뛰어나도 기재가 특출나지 못하면 소용없는 법. 그에게는 용모를 더욱 빛내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가전검법인 환허무극십팔검법의 단점을 보완하여 필살삼초식(必殺三招式)을 만들어 부친보다 더욱 뛰어난 검객이란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달리 인품이 매우 냉오(冷傲)하여 손 아래 결코 사정을 두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강호에 출도한 지 삼 년만에 무려 삼백여 명의 악도(惡徒)들을 죽였다.
 물론 그가 죽인 인물들은 무림을 어지럽히는 마두들이었지만 그는 너무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부용옥봉(芙蓉玉鳳) 유소란(劉小蘭)을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검을 꺾고 낙양 교외에 장원을 짓고 은거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훌륭한 아들을 두었으며 무림에 나온 이래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인수검후 맹성린을 누가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인수검후의 태양과도 같은 명성을 잘 아는 율성하인지라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놀란 표정에 맹성린은 쓴 웃음을 지었다.
 "놀랄 것 없소. 무림의 세계에서 진정한 천하제일이란 게 어디 있겠소? 노부가 그 동안 허명(虛名)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다만 뛰어난 고수를 만나지 못했던 덕에 불과했던 것이오."
 그의 어조에서 무림인만이 지닌 승부의 허탈감이 진하게 배어 올랐다. 말을 마친 그는 심하게 기침을 터뜨리더니 이내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수명이 다했음인지 급히 말을 이어갔다.
 "내가 준 양피지는 이백 년 전 천하제일고수였던 영세일무존(永世一武尊)의 비급(秘及)이 남겨진 곳을 가리키는 영세무비도(永世武秘圖)요.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그대의 인품을 믿고 맡기는 것이니 부디 내 아들에게 전해 주기 바라오. 그러나, 그러나······."
 인수검후의 몸이 급격히 떨리기 시작하면서 갑자기 음성이 목 안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쩌면 이미 나의 아들도 무사하지 못할지도 모르오. 만약 노부의 아들이 이미 혈겁을 당했으면 이 영세무비도를 그대가 가지······."
 유언을 제대로 마치지도 못하고 인수검후는 씁쓸한 미소를 띄우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율성하는 그의 얼굴에서 일생을 무림에서 보내온 한 무림인으로서의 인생무상(人生無常)을 읽을 수 있었다.
 일생을 인의(仁義)로만 보낸 일대무인(一代武人)은 이렇게 하여 적막한 황산의 계곡에서 죽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율성하에게는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가 어떻게 해서 영세무비도를 얻게 되었으며 인수검후 정도의 절세고수를 죽일 만한 인물이 누구인지, 그리고 중상을 입은 몸으로 황산까지 오게 된 연유 등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나 그 궁금증 때문에 유운곡에서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무적미검객이 혈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는 인수검후의 말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는 인수검후를 묻어주고 난 후 낙양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가 무적미검객의 장원에 도착하였을 때 보게 된 것은 너무나 비참한 것 뿐이었다.
 방원 만여 평에 달하는 장원은 한줌의 재로 변해 있었고 숯덩이가 되어 버린 시체들은 물론이고 타다 만 시체들마저 널브러져 있어 오로지 시체들 뿐이었다.
 그는 경악, 분노 그리고 비통함만을 맛본 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율성하는 나직이 한숨을 뿜어 내었다.
 "휴, 그후 강호는 무적미검객의 장원이 개미새끼 한 마리 남김 없이 초토화되었다는 소문에 발칵 뒤집어 졌다. 이유는 그가 당한 혈겁때문이 아니라 바로 영세무비도 때문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가 혈겁을 당한 이유가 영세무비도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알려졌고, 영세무비도는 장원이 혈겁을 당할 때 정체모를 절세기인(絶 世奇人)에게 구출당한 무적미검객 딸의 품 속에 있다는 소문이 전 무림에 퍼진 것이었다. 그 소문에 강호는 그야말로 벌집 들썩이듯이 들끓기 시작했고 무림인들은 일제히 무적미검객의 딸을 찾기에 혈안이 되었다. 물론 이 아비도 영세무비도를 돌려주기 위해 암암리에 활동을 했지. 그러나 소문은 틀렸는지 전혀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율성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아들을 바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고뇌의 빛이 점점 서려가고 있었다.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율원양은 아버지의 신색이 갑자기 변하자 흠칫했다.
 "갑자기 어디 편찮아지셨습니까?"
 "아, 아니다."
 율성하는 말 끝을 흐리며 얼른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 얼굴을 돌린 율성하의 두 눈에 뿌연 안개가 서리면서 굵은 눈물이 맺히는 것이 아닌가?
 미처 그것을 발견 못한 율원양은 조심스레 자신의 느낌을 피력했다.
 "강호란 매우 비정한 세계로군요."
 "그렇다. 강호의 세계란 별로 사람이 몸담을 곳이 못되는 곳이란다."
 율성하는 고개를 들어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막으면서 대답을 하였다. 그는 왜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제2장 원영건양체(元孀乾陽體)
 
 
 "그 뒤 어떻게 되었습니까? 뒷 이야기가 매우 궁금하군요. 아버님."
 율원양은 호기심에 가득 찬 질문을 하였다.
 가까스로 눈물을 멈춘 율성하는 천천히 이야기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아비는 거의 육 개월 가까이 강호를 헤매며 그들을 찾았으나 전혀 찾을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지난 육 개월의 세월이 천추지한(千秋之恨)을 남기게 되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느냐?"
 갑자기 간신히 평정을 찾았던 율성하의 안색이 침통해 지면서 더할 수 없이 쓸쓸해 졌다.
 조금 전 율원양을 바라보았을 때 지었던 고뇌와는 또 다른 비감(悲感)의 표정이었다.
 율원양은 서너 차례 뒤바뀌는 아버지의 표정에서 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슬픔이 느껴져 율원양은 마음 한 구석이 매우 아려졌다.
 아버지의 슬픔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있다.
 아버지가 죽은 부인을 생각할 때의 표정은 언제나 지금과 같았다. 율원양의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난산으로 인하여 죽었다.
 천추지한이란 율성하가 인수검후 맹성린의 유언을 들어주려고 강호를 헤매다가 집에 돌아오는 시기가 늦어 부인을 구하지 못한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율원양의 표정도 곧이어 아버지의 표정과 똑같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는 어린 언제나 율원양을 울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앞에서는 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그것을 허락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슬픔은 자신이 손을 쓰지 못하고 부인을 죽게 한 자신에 대한 질책과 회한이었고 율원양의 슬픔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율원양은 억지로 미소를 떠올렸다.
 "어머니는 무척 예쁘게 생기셨지요?"
 율성하의 입가에 씁쓸한 주름이 잡혔다. 의미없는 메마른 웃음이었다.
 "허허··· 녀석. 네 어미가 예쁘지 않았다면 어찌 너같이 잘생긴 아들을 낳을 수 있었겠느냐?"
 "그··· 그렇겠군요."
 율원양은 얼떨결에 대답한 것이었지만 그만 자신이 잘 생겼다고 시인한 꼴이 되어 버렸다.
 율성하는 대소를 터뜨렸다.
 "아니, 이 녀석 보게. 제 스스로 잘 생겼다고 시인을 하다니. 어허허허허······."
 간만에 터뜨리는 매우 유쾌한 웃음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
 율원양은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거웠던 분위기가 걷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웃음을 멈추고 아들을 내려보는 아버지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욱 고뇌에 찬 것이었다.
 '쯧쯧쯧··· 아까운 녀석같으니라고. 이제 너의 생명은 사 년도 채 못남았느니라. 그러나 한 가닥 길은 있다. 그 길을 네 자신이 거의 만들어 놓았다. 영세무비도만 네 녀석이 풀어내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하자 율성하의 고뇌에 찬 얼굴에 서서히 생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영세무비도에 대해 궁금증으로 가득 차 있는 율원양은 분위기가 호전된 참에 기회다 싶어 얼른 물어 보았다.
 "영세무비도가 무엇이길래 무림인들이 그토록 혈안이 되어 찾으려 하는 걸까요?"
 율원양의 질문에 율성하는 이백 년 전의 대기인들이었던 신안천기자와 영세무존의 비화(秘話)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율성하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하여 무림인들은 영세무비도를 차지하려고 혈안이 된 것이란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되고 싶은 건 모든 무림인들이 지닌 최고의 꿈이지. 그 꿈을 이룰 수 있다면야 제 부모도 서슴치 않고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무림인들이란다. 영세무비도만 가지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데 무림인들이 어찌 미치지 않겠느냐?"
 율원양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렇다면 아버님도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니고 싶어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말을 하던 율원양은 돌연 아버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지자 아차 싶었다. 그는 아버지가 얼마나 청백(淸白)한 성품을 지니고 있는지를 그만 잊었던 것이다.
 율원양의 얼굴이 급속도로 사색이 되어 버렸다.
 "아버님. 소자를 용서해 주십시오."
 율성하는 나직이 한숨을 뿜으면서 싸늘한 안색을 풀었다.
 "휴···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아비가 너의 접근을 막았던 것도 네가 이것을 알게 되어 만에 하나라도 누군가가 알게 될까 하는 두려움에서였다. 만약 이 비도를 우리 부자가 지니고 있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지게 되면 우리 부자는 천하에 숨을 곳이 없게 된다."
 그제서야 이유를 알게 된 율원양은 고개를 끄덕였다.
 율성하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였다.
 "아비는 처음에 영세무비도를 간직하고 있다가 무적미검객의 후손이 나타나면 돌려 주려고 결심을 했었다. 그러나 내가 그 결심을 스스로 파기하고 영세무비도를 풀으려 한 것은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것도 매우 절실한 이유이다."
 아들을 쳐다보는 율성하의 눈빛은 아까처럼 고뇌에 찬 것이 아니었다. 고뇌 속에 한 가닥 빛이 서려 있었다.
 율원양은 수시로 변하는 아버지의 안색에 매우 의아스러웠으나 아직 소년이기 때문에 솟아오르는 호기심이 그 마음을 앞질렀다.
 "그 절실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바로 너 때문이다."
 율성하는 너라는 말을 굉장히 강하게 했다. 율원양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저 때문이라고요? 아버님."
 "그렇다. 바로 너 때문이다."
 율성하는 더욱 강한 어조로 똑같이 대답했다.
 율원양은 아버지의 말뜻을 진정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총명한 율원양이라 해도 밑도 끝도 없는 아버지의 말에 구름같은 의혹만 품을 뿐이었다.
 율성하의 얼굴이 다시 침중하게 굳어졌다.
 '지금이 저 녀석에게 원영건양체을 지니고 태어났음을 알려야 할 때이다.'
 그의 얼굴에 굳은 결심의 빛이 어렸다.
 그의 얼굴에는 동정인지 연민인지 또는 슬픔인지 체념인지 모를 복잡한 표정이 함께 얽혀 있었다.
 "원양아. 그 이유는 언젠가는 너 스스로 알게 될는지도 모르는 일 후일 큰 충격을 받느니 보다 차라리 지금 아는 것도 좋겠지. 그러나 원양아, 아비가 이유를 말하기 전에 너는 한 가지 약속을 해야 한다."
 "약속을요?"
 "그렇다. 약속이다. 어떠냐? 아비와 약속을 지킬 수 있겠느냐?"
 "무슨 약속을?"
 율원양은 의아스러움에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율성하는 엄숙한 얼굴로 율원양을 바라 보았다.
 이윽고 율성하의 입에서 무겁기 한량없는 침중하고 엄숙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원양아. 너는 엄연히 사내 대장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대장부란 흔들림이 없이 굳고 단호해야 하므로 결코 어떠한 충격을 받더라도 놀라거나 비탄해서는 아니된다. 알아 듣겠느냐?"
 율원양은 숙연한 자세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아버님의 옥언(玉言) 소자는 각별히 새겨 듣겠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진 율원양은 그럴수록 궁금증은 더해갔다. 율성하는 드디어 음성을 가다듬더니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집에 돌아왔을 때 네 어미가 난산으로 죽었으나 아버지는 너를 안고 커다란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위안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것은 네가, 네가······."
 율성하는 갑자기 말꼬리를 흐렸다. 그렇지만 율원양은 말을 듣자마자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율원양의 얼굴이 초연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얼른 아버지의 뒷말을 받았다.
 "제가 원영건양체(元瓔乾陽體)를 지니고 태어난 것을 말씀 하시려는 것입니까?"
 그의 반문에 율성하의 표정은 온통 일그러져 버렸다.
 "너는··· 너는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느냐?"
 그의 목소리는 온통 경악으로 물들어 터져나왔다.
 율원양은 물기서린 미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님. 저는 제가 원영건양체의 신체를 지니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차츰 율성하의 눈에는 연민과 동정 그리고 사랑의 정이 고여 안개처럼 흐릿하게 젖어 가고 있었다.
 "너는 원영건양체를 알고 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단 말이냐?"
 율원양의 힘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님.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했습니다. 제가 일찍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저는 얼마든지 그대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율원양은 말을 멈추고 염려가 가득 찬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를 위로하는 말을 했으나 어조에 배인 슬픔만은 지울 수가 없었다.
 "다만··· 저는 다만··· 아버님이 염려될 뿐입니다."
 율성하는 양 손으로 한없이 자랑스러워 보이는 아들의 양 어깨를 꽉 움켜 쥐었다.
 "이 녀석. 너는 오늘 이 아비를 너무나 감동시키는구나."
 허공에서 부딪힌 부자간의 눈길은 말할 수 없는 정감이 어려있었다. 율성하의 눈에 뿌연 안개가 서려 갔다.
 '녀석. 마냥 어리게만 보았더니 원영건양체임을 알면서도 그간 슬픈 내색 한 번 내지 않았다니. 그래. 과연 너는 이 율성하의 자랑스러운 아들답다.'
 율원양은 눈물을 주르륵 흘러 내렸다.
 남자는 태어나서 오직 세 번 울 뿐이라고 쉽게 말들 하지만 진한 부정(父情)을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남자가 아닌 것은 아니리라.
 
 원영건양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은 태어난 지 얼마 안됐을 때까지는 기경팔맥(奇經八脈)이 뚫려 있는 법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나쁜 기운이 쌓이면서 점점 기경팔맥은 폐쇄되면서 임독양맥(任督兩脈)까지도 막혀 버린다.
 이렇게 한 번 폐쇄된 맥은 다시 뚫리지 않는다.
 단지 막강한 내공의 힘을 빌어서만 그 맥을 뚫을 수 있는데 거기에도 상당한 장애가 많았다.
 단순히 내공만 강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익힌 내공의 종류와 익힌 사람의 자질에도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만약 임독양맥이 타통된다면 그 자의 무공은 일사천리 격으로 증진된다. 아무리 싸워도 진기가 마르지 않고 샘물처럼 솟아나는 것이다. 원영건양체로 태어난 사람도 일반 사람들과 별반 틀린 점이 없다. 그러나 다른 점은 그 사람은 기경팔맥 중 육맥만이 막히는 것이다.
 즉 기경팔맥 중 임독양맥만은 막히지 않고 선천적으로 뚫려있는 상태의 몸을 말한다.
 그 사람은 나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임독양맥을 보호하는 막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영건양체의 사람은 만 열아홉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된다.
 그것은 자라면서 기경육맥에 쌓인 나쁜 기운이 태어난 지 만 십구 년이 되는 날 일시에 임독양맥에 스며들어 보호막을 허물어 뜨리면서 임독양맥까지 파열시켜서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 열아홉이 되기 전 막힌 기경육맥을 뚫을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몸으로 돌변하게 된다.
 기경육맥이 뚫리는 즉시 삼 갑자의 내공을 지닌 몸으로 돌변하게 되며 만독불가침(萬毒不可侵)의 몸이 된다.
 또한 물과 불 사이와 같은 극양극음(極陽極陰) 양공(兩功)을 동시에 익힐 수 있으며 정공(正功)과 사도마공(邪道魔功)도 무리없이 익힐 수 있는 절세적인 체질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기경육맥이 뚫리게 되면 임독양맥을 가로막고 있는 보호막이 인체로 흡수되면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작용때문이다.
 보호막의 이름은 원영피막(元瓔皮幕)!
 원영피막은 임독양맥에 침투되는 나쁜 기운을 막으면서 정기(精氣)만을 빨아들이게 된다. 천지간의 가장 깨끗한 음양정기(陰陽精氣)만을 흡수하는 원영피막이기에 기경육맥이 뚫리게 되면 원영피막은 저절로 몸 안에 흡수되어 그런 신비로운 작용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무림 역사상 단 한 사람도 태어난 적이 없는 원영건양체.
 율원양은 과연 만 열아홉이 되기 전 기경육맥을 뚫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율성하는 글썽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너는 원영건양체가 어떤 것인지를 알면서도 그토록 초연할 수 있었다니 너의 태도는 실로 이 아비를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죄송합니다. 아버님."
 "죄송할 게 뭐가 있느냐? 그러나 원양아, 너무 초연해질 필요는 없다. 이 아비는 너의 원영건양체를 고칠 길을 한 가닥 터놓고 있다."
 율원양은 반색을 했다.
 "정말입니까?"
 살 수 있다는 데야 그 어느 누가 좋아하지 않을까?
 율원양의 눈은 금세 희열에 젖어갔다.
 득도한 도인처럼 초연한 자세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생을 포기한 것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살 수 있다는 희망에 그는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원영건양체를 고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 갑자(四甲子) 이상의 공력을 지닌 인물이 막힌 기경육맥을 뚫어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만년삼왕(萬年蔘王)이나 설형하수오(雪形何首烏) 또는 구엽홍지(九葉紅芝) 영청석유(靈淸石乳)와 같은 영약이 필요하다. 너는 무공을 익히지 못한 몸이기 때문에 내력으로 경맥을 뚫을 시 체력을 견디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두번째는 원영곤음체(元孀坤陰體)를 지닌 여자와 음양교합(陰陽交合)을 하여 서로의 경맥을 뚫는 방법이다."
 율성하가 두번째 방법을 이야기할 때 율원양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는 음양교합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곧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뒤이어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져 버린 것이다. 율성하는 아들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하여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외면을 했다. 율원양은 쓴 웃음을 띠우며 탄식을 했다.
 "아아··· 모두 꿈같은 일이군요. 그 두 가지 방법은 모두 얻기가 하늘의 별처럼 어려운 것이 아닌지요."
 율성하는 탄식을 금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
 그가 말한 영약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구경조차 하기 힘든 지극히 희귀한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 갑자의 공력을 지닌 인물이 무림에 존재하는 지에 대해서도 의문이다. 거기다 원영건양체와 똑같은 여자의 신체인 원영곤음체를 지닌 여자를 어디에서 구한단 말인가.
 율원양이 원영건양체의 신체로 태어난 것도 무림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써 동시에 그와 똑같은 신체를 지닌 여자가 태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을 꺼내지 않음만 못한 결과가 되어 버렸지만 율성하는 아들의 곤혹스런 얼굴을 희망에 찬 눈으로 똑바로 주시하였다.
 "그러나 원양아, 아비는 이미 첫번째 방법을 찾았다. 아비가 핏덩이인 너를 데리고 나부산에 은거하기 시작한 것은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바로 이 나부산 절심곡(絶心谷)에 영청석유가 영글고 있다. 앞으로 한 달이면 영청석유는 완전히 영글게 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창백한 율원양의 안색에 한 줄기 홍광이 어리기 시작했다.
 율성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아비가 영세무비도를 그토록 파헤치려 한 것은 사 갑자의 내공을 지닌 인물을 찾기 위해서였다. 즉 비도를 풀어 그 곳에 가면 영세무존이란 분이 살아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창백했던 율원양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버님. 어찌 이백 년 전의 인물이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허허허··· 얘야. 천하에는 네가 상상도 못할 일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아라. 내공이 극치에 달한 사람은 능히 백오십 세까지도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안천기자나 영세일무존같은 천하제일의 무공을 깨달은 분들이 여태 살아 있으리라는 생각은 결코 허상(虛相)만은 아니다. 그러니 너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기필코 영세무비도의 비밀을 밝혀내야 하느니라. 알았느냐?"
 "꼭 명심하겠습니다."
 율성하는 굳은 결심이 서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만약, 하늘의 인연이 닿아 네가 원영건양체를 고칠 수만 있다면······."
 그는 잠시 말꼬리를 흐리면서 다시 탄식을 불어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앞으로 닥쳐올 무림의 혈겁을 막을 수도 있으련만······."
 별안간 그의 입에서는 율원양으로서는 도저히 감지할 수 없는 의미심장한 말이 흘러나왔다.
 율원양은 깜짝 놀랐다.
 "아니 아버님. 방금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아니다. 지금 네게 설명해 주어도 너는 모른다. 밤이 깊었으니 이만 가서 쉬도록 해라. 명심해야 할 것은 네가 공언한 대로 꼭 이삼 일 안에 저 영세무비도를 깨우쳐야 하느니라."
 율원양은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아버님의 옥언 각골명심(刻骨銘心)하겠습니다."
 율성하는 아들의 굳건한 태도에 지난 십수 년의 고심(苦心)이 일시에 풀리는 것 같았다. 그는 품 속에서 오래된 한 권의 고서를 꺼내 율원양에게 주었다.
 "이 책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명의 화타(華陀)가 저술한 의서이니라. 그간 나에게서 배우고 싶어했던 모든 의술이 수록되어 있으니 혼자 깨우치도록 하여라."
 율원양은 책을 받아 들고는 미미하게 떨었다.
 책 표지에는 화타성수의경(華陀聖手醫經)이라 쓰여져 있었다. 평소에 얼마나 갖고 싶어했던 책인가.
 화타성수의경은 화타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기록한 의서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병에 대한 설명, 인간의 혈행 이치 그리고 혈행 이치에 따른 침술(針術) 등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서 가히 의학의 총 집합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었다.
 율성하는 아들이 너무나 기뻐하는 것을 보자 빙그레 웃으면서 품 속에서 작은 옥갑을 또 꺼내 들었다.
 "이것은 아비가 강호를 행협(行俠)하면서 무림인들을 구할 때 쓰던 옥침(玉針)이다. 의서를 보고 옥침의 술을 잘 익혀 두도록 해라. 이제 저 영세무비도도 함께 가지고 내려가도록 해라. 밤이 매우 깊었다."
 초경이 되기 전에 왔던 시각은 어느새 사경의 깊은 밤이 되고 있었다.
 율원양은 그제서야 방 안 깊숙이 스며든 달빛을 볼 수 있었다. 율원양은 희열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받은 물건들을 소중히 갈무리 하고는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아버님. 편히 쉬십시오."
 "그래. 어서 내려가도록 해라."
 율성하는 자신의 모옥으로 돌아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암울한 빛을 떠올렸다.
 "아비가 이 나부산으로 은거한 이유가 어찌 너의 일 뿐이겠느냐? 원양아, 아비에게는 너에게 말 못할 고충이 너무나 많구나. 부디 기연이 닿아 무림에 닥쳐오는 암울한 기운을 네가 막아주기를 아비는 속으로 빌 뿐이다."
 중얼거리는 어조는 매우 침중한 것이었다.
 
 다음 날.
 율원양은 오늘도 몰려온 병자들을 치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그들 하나하나를 친절하게 치료해 그날 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율원양은 언제나 병자들로부터 처방료를 받지 않았다.
 그는 되도록 약을 쓰지 않는 처방을 했으며 약을 대야 할 경우인데도 약값을 못내는 병자들한테는 오히려 약값을 대주는 형편이었다.
 그렇게 해서 병이 완쾌된 사람들은 크게 감격하여 종종 그에게 떡이나 과일 등을 가져오곤 했다.
 그러면 그는 가져온 성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받곤 했다.
 점점 그들 부자의 명성은 나부산 일대에서 성불(聖佛)처럼 떠받들어져 갔다.
 그날 오후가 되어 진료가 끝나갈 무렵 율원양은 잠시 한숨 돌릴 수가 있었다.
 '매일마다 이백여 명의 병자들을 돌보아야 하니 정말 피곤하구나. 이제 몇 명 남지 않았으니 마저 진료하고 어서 영세무비도의 신비를 풀어보아야 겠구나.'
 이때 모옥 문이 열리면서 한 명의 병자가 들어섰다.
 그러나 방금 들어선 병자의 모습은 율원양으로서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하얀 백삼에 문사건을 두른 중년인이었는데 손에 우유빛이 흐르는 백옥선(白玉扇)이 들려 있었다. 매우 청수하고도 수려한 모습이었으나 미간에는 간간이 음침한 기가 흐르고 있었다.
 율원양은 여태까지 대하던 병자들과는 전혀 별개의 모습을 한 중년인의 모습에 흠칫 놀랐다. 눈이 마주치자 중년문사는 빙그레 웃었다.
 싸늘한 냉기가 도는 웃음이었다. 율원양은 그의 웃음을 보면서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웃음이란 서로간에 친밀감이 일도록 하는 것인데 저 사람의 웃음은 얼음장같기만 하니 차라리 웃지 아니한 것만도 못하구나.'
 중년문사의 웃음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율원양도 따라 웃었다.
 불그스름한 양 볼에 떠오른 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단번에 넋을 잃도록 하기에 너무나 충분한 것이었다. 중년문사의 웃음과는 전혀 격이 다른 포근한 미소였다.
 중년문사는 일순 웃음을 거두면서 멍하니 서서 미소를 띤 그를 바라 보았다.
 '으음 정말 잘 생긴 녀석이로구나. 소문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군.'
 그는 내심 거듭 감탄을 하였다.
 율원양은 신비스러우리만치 깊고 맑은 눈에 기이한 빛을 떠올렸다.
 "손님께선 어디가 아프셔서 소생을 찾아오셨습니까?"
 그의 맑은 목소리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중년문사는 나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본 공자가 듣기로는 소년신의(少年神醫)께서는 병자의 얼굴만 보아도 엊저녁에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알아내는 신묘한 의술을 지녔다는데 어찌 본 공자에게는 어디가 아프냐고 묻소?"
 율원양은 중년문사가 자기 스스로를 공자라 칭하자 그만 어이가 없었다.
 '저렇게 늙은 사람이 공자이면 나는 내 스스로를 뭐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율원양은 그를 세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양쪽 태양혈(太陽穴)이 불쑥 튀어나오고 눈에서 흐르는 빛은 차라리 흉광(凶光)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율원양의 폐부를 찌를 것만 같았다.
 
 율원양은 이내 시선을 천정으로 던지며 단정하듯이 말했다.
 "대협의 미간에 미약하나마 푸른 기운이 서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약 한 달 전 어떤 악랄한 독(毒)에 중독되었던 적이 있는 것 같소이다."
 중년문사는 안색이 대변했다. 그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세상에 진맥(診脈)도 하지 않고 내가 독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다니. 지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놀란 표정은 율원양에게 있어서는 별 것 아니었다.
 "대협은 독을 거의 해소(解消)했으나 아직 여독(餘毒)이 체내에 남아 있어 미간에 푸른 기운이 서려 있소이다. 처방은 끓는 물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로 한 시진 동안 몸을 쏘이고 난 후 귀비탕(歸脾湯)에다 당귀, 주선, 숙지황(熟地黃) 등 각 삼전(三錢)을 섞어 달여 먹으면 나머지 여독도 충분히 해독할 수 있을 겁니다."
 중년문사는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율원양의 낭랑한 목소리에 거의 넋을 잃다시피 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는 더할 수 없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정말 놀랍소이다. 정말 놀라워. 소협 그대는 과연 신의 손을 가진 명의라는 칭호를 들을만 하오."
 그러나 그의 속 마음은 전혀 달랐다.
 '드디어 찾았다. 저런 의술을 지닐 만한 인물을 키워낼 신의는 당금 무림에 남극성수를 빼놓고는 아무도 없다. 남극성수, 네가 지난 십여 년 동안 잘도 숨어 있었으나 이제야말로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것이다.'
 그의 심정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남극성수(南極聖手)란 이름은 그야말로 중천에 뜬 해와 같은 이름이었다.
 사십 년 전 무림에 전례에 없던 약관의 신의가 나타났다.
 청년신의는 무림에 나타나자마자 신비한 의술로 지대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백팔옥침지술(百八玉針之術)로 명명된 이 침술은 인간의 백팔번뇌(百八煩惱)의 갖가지 침해(侵害)를 다스리는 사상을 뒤엎는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신묘스럽기 그지없는 옥침술이다.
 이것은 어떠한 내상이나 외상은 물론 마음 속에 일어난 홧병, 난치(難治)의 고질(痼疾)까지도 죽지만 않았다면 고칠 수 있는 침술이었다.
 바로 인간의 잠재력을 한층 더 발휘할 수 있게 해 주는 신침술(神針術)인 것이다.
 청년신의는 강호에 출도한 지 일 년만에 이 옥침술로 인하여 남극성수란 성스러운 칭호를 얻었다.
 그가 백팔옥침술로 무림에 광명을 뿌린 지 이십오 년, 남극성수는 돌연 아무런 이유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가 바로 율원양의 아버지 율성하였다.
 율원양은 그의 칭찬에 멋적은 웃음을 날렸다.
 중년문사는 눈이 기이롭게 변하며 음침한 미소를 띠었다.
 그 웃음을 바라보는 율원양은 결코 유쾌한 기분을 가질 수 없었다.
 중년문사는 율원양을 위 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소협. 소협은 소문난 두 분 신의 중 한 분인 것 같은데 한 분은 어디 가셨오? 혹시 그 분은 소협의 아버님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그 분은 저의 아버님이십니다."
 율원양은 대답을 하면서 불안한 기분이었다.
 중년문사의 음침한 기색은 더욱 그의 마음을 어둡게 했다. 중년문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소협. 혹시 소협의 아버님은 남극성수란 외호를 지닌 분이 아니시오?"
 "남극성수?"
 율원양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나직이 반문했다.
 "그렇소. 남극성수 말이요."
 율원양은 의혹의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아버님이 그런 칭호를 지니고 계신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런데 대협께서는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십니까?"
 율원양의 싸늘한 질문에 중년문사는 흠칫 했다. 그러더니 웃음을 지으며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아··· 아니오. 소협의 의술이 하도 놀라워 혹시 옛 친구의 자제가 아닌가 해서 물어 보았을 따름이오."
 그의 어투는 분명히 어색한 변명이었다.
 율원양이 무어라 말하려 하자 그는 앞질러 다시 말했다.
 "소협. 진료비는 얼마요?"
 "진료비는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중년문사는 품 속에서 커다란 금덩이를 꺼냈다.
 "그럴 수는 없오. 자, 약소하지만 받아주시오. 소협으로 인하여 독을 마저 해독하게 됐으니 어찌 이만한 값을 치루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럼, 소협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겠소이다."
 중년문사는 율원양에게 말할 기회는 전혀 주지 않고 급하게 말을 마치더니 밖으로 나가 버렸다.
 율원양은 그가 놓고 간 금덩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내가 대단히 실수를 한 것 같구나. 무언가 영 기분이 좋지 않은데 왜 그럴까? 이만한 진료에 스무 냥 정도의 금덩이를 놓고 간 중년문사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는 왜 아버님에 대해서 물어 보았을까? 남극성수? 아버님이 강호를 행협할 때 남극성수란 칭호를 얻으셨을까? 그렇다면 그 자도 무림인이 분명하구나. 혹시?'
 그의 생각은 뒤이어 들어온 병자로 인하여 끊겼다.
 그는 남은 열 명 정도의 병자를 진료하면서 내내 불안한 심정을 떨칠 수가 없었다.
 
 모옥을 나선 중년문사는 급히 뒷산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정도 걸어가더니 돌연 왼쪽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양은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석양의 노을 빛으로 인하여 음침한 중년문사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숲 속으로 십 장 정도 들어갔을까?
 방원 이 장 넓이의 분지가 있는데 분지에는 흑의를 입은 한 명의 복면인이 서 있었다. 중년문사는 복면인을 발견하고는 매우 두려운 기색을 떠올렸다.
 그는 급히 다가가서는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속하(俗下). 다녀왔습니다."
 복면인은 잠시 그대로 서 있더니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남극성수의 아들이 분명하더냐?"
 음성은 매우 무거웠으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깔려 있었다.
 중년문사는 지체없이 대답하였다.
 "그 놈은 남극성수가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마 제 아비가 가르쳐 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놈의 의술은 진정 뛰어난 것이어서 제 아비가 남극성수가 아니라면 지닐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남극성수는 신분이 노출될까봐 아들에게까지 명호를 숨긴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의 보고가 끝나자마자 휘이익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면서 세 명의 복면인이 장중에 나타났다.
 그들도 먼저의 복면인을 발견하고는 내려서자마자 급히 무릎을 꿇었다.
 "속하 사령수라(死靈修羅) 일, 이, 삼호가 부전주(副殿主)님을 배알하나이다."
 말을 한 사령일호의 목소리는 매우 젊었다.
 그러나 음성은 매우 칼날같아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두려움이 생기도록 만드는 살기 어린 음성이었다.
 부전주라 불린 복면인이 느릿하게 말했다.
 "찾아냈느냐?"
 "내리신 명령 욕되지 않게 완수했습니다. 그는 뒷산 계곡에 따로 모옥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틀림없는 남극성수이더냐?"
 "부전주님께서 주신 그림 속의 인물과 똑같이 생겼습니다."
 사령수라 일호의 대답에 부전주는 나직이 신음을 터뜨렸다.
 "흐음. 드디어 찾았구나. 흐흐흐··· 이제야 대업을 성취할 수 있게 되었구나."
 부전주는 갑자기 몸을 돌렸다.
 번쩍!
 복면 속의 두 눈에서 예리한 살광(殺光)이 번뜩였다.
 중년문사는 그 눈과 마주치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부전주를 매우 잘 알고 있는 것 같았으며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음혼공자(陰魂公子). 너는 그 어린 놈을 제압하여 뒷산 모옥으로 오너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사령수라들은 앞장을 서라."
 부전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네 사람은 신속히 사라졌다.
 그들은 무슨 신법을 썼는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음혼공자도 급히 몸을 날렸다.
 음혼공자(陰魂公子) 구용춘(九戎春)이라 불리운 중년 문사는 삼십 년 전부터 악행을 일삼던 강호의 흉도(兇徒)였다.
 그는 마음이 악랄하고 사람을 파리 죽이듯이 죽여왔던 인물이다. 특히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음탕한 위인이기도 했다.
 음혼공자는 수림을 벗어나 율원양의 모옥으로 몸을 날리려는 찰나 계곡을 거슬러 올라 오는 율원양을 발견했다.
 '흐흐흐··· 저 놈이 본 공자의 수고를 덜어주려고 제발로 찾아드는군.'
 그는 속으로 음침하게 웃으며 잠시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율원양이 침중한 기색으로 수림 앞을 지나갔다. 이미 석양은 스러지고 하늘에는 별이 총총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음혼공자는 음침한 미소를 흘리며 그의 뒤로 몸을 나타냈다.
 "흐흐흐··· 소년 신의 안녕하신가?"
 음산한 목소리에 율원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당신은?"
 뒤로 돌아선 그는 음혼공자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아직 안 가고 있었소?"
 "흐흐흐··· 그렇다. 네게 볼 일이 남아 있어 아직 안가고 있었다."
 율원양은 흠칫했다. 목적을 품은 그의 미소는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욱 징그러웠다.
 음혼공자는 만면에 가득한 살기를 띠우면서 한 발 한 발 다가섰다.
 율원양은 그가 좋지 않은 뜻을 가지고 가까이 다가오자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할 말이 있으면 거기서 하지 무엇하러 다가오시오?"
 "너는 나하고 잠시 갈 데가 있다."
 "갈 데라니?"
 "그렇다. 네 아비한테 나하고 같이 가는 것이다."
 율원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버지한테? 아니 당신이 무슨 이유로 내 아버지를 만나려 한단 말이오?"
 "흐흐흐··· 가보면 절로 알게 될 것이다."
 음혼공자는 서서히 다가갔다.
 율원양은 다시 서너 걸음 물러서며 급히 말했다.
 "도대체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오? 그리고 무엇 때문에 나의 아버지를 만나려 하시오?"
 이때 어디선가 커다란 호통소리가 율원양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웬 놈이냐?"
 그 음성의 주인공은 율성하였다.
 "흐흐흐··· 남극성수 율성하, 오랜만이군 그래."
 뒤이어 들리는 음침하기 이를데 없는 웃음 소리가 율원양의 귀를 후벼팠다. 율원양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는 다급하게 부르짖으며 율성하의 모옥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 놈이 어딜?"
 음혼공자는 허공으로 솟구치며 율원양의 등 뒤 마혈(麻血)을 향하여 세 가닥 지풍을 날렸다.
 세 가닥 지풍은 허공을 찢는 듯한 예리한 음향을 발출하며 율원양의 등 삼 개 마혈을 향해 날아 들었다.
 쌔. 쌕. 퍽. 퍽. 퍽!
 지풍이 삼 개 마혈을 강타하는 둔탁한 소리가 차례로 울렸다.
 율원양은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 자리에서 석상처럼 굳어 버리고 말았다.
 "으윽."
 음혼공자는 율원양의 앞에 내려 섰다. 율원양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 보았다. 두 눈에는 무서운 분노가 담겨 있어 음혼공자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는 율원양의 뺨을 살짝 서너 번 때리며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흐흐흐··· 무공도 익힌 적이 없는 녀석이 눈빛 한 번 맵구나."
 음혼공자는 율원양의 몸을 옆구리에 끼더니 몸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가 율성하의 모옥에 당도했을 때 율성하는 네 명의 복면인들과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었다.
 음혼공자는 그 자리에 직접 나서지 않고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율성하의 안면은 경악과 분노 그리고 두려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부전주라 불리운 복면인은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율성하. 순순히 우리를 따라가면 너의 장래가 보장될 텐데 어찌 고집을 부리느냐?"
 "나의 부귀영화만을 위하여 어찌 마(魔)의 무리에 가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절대로 너희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그의 말로 미루어 보아 그는 이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 했다. 부전주는 그의 강경한 말에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그 웃음소리에는 무한한 공력이 담겨 있었다.
 "크하하하핫"
 웃음소리는 점점 드높아져 갔다.
 약 반각이 지나자 율성하는 안색이 점점 창백해져 갔다. 그는 기혈이 들끓어 오르는지 견디지 못하고 비칠 했다.
 부전주는 그 모습을 보더니 대소를 멈추었다.
 "율성하. 네가 지난 십오 년 동안 몸을 감추는 바람에 본 교의 대업(大業)을 이루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너를 분시처참(分屍處斬)을 하여도 시원치 않다. 하나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고 본 교의 대업을 위하여 분골쇄신(粉骨碎身)하겠다면 지난 일을 모두 용서하겠다. 네가 뜻을 꺾고 다시 그 일을 맡아준다면 교주님께서도 너를 용서하겠다고 하셨다. 그러니 교주님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순순히 응낙을 해야 한다."
 간신히 기혈을 억제시킨 율성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끝없이 펼쳐진 은하(銀河)의 세계가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율성하의 동공은 흐릿하여 그것을 볼 수가 없었다.
 "끝내는 예측한 대로 되고 말았구나."
 그의 음성은 더할 수 없는 자조의 음성이었다. 그는 갑자기 나부산 일대에서 의술을 펼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더욱 후회스러운 것은 그 뒤라도 나부산을 떠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부산을 떠날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는 더욱 원망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이때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율원양이 음혼공자에게 무엇인가 소리치려 했다. 그러나 입술만 움직여질 뿐 소리는 전혀 튀어나오지 않았다.
 '이 놈이 나의 아혈(啞穴)마저 찍었구나.'
 율원양은 치솟아 오르는 노기를 참을 수 없었으나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만 소름이 끼칠 듯한 시선으로 음혼공자를 노려볼 뿐이었다.
 '아버님의 안위가 어떻게 될까 그게 걱정이로구나.'
 다시 부전주의 목소리가 계곡 일대를 울렸다.
 "율성하, 어서 결정하라. 그러나 단 한 가지 명심할 일이 있다. 만약 네가 승낙하지 않을 때에는 흐흐흐, 네 자식 놈의 생명은 오늘로 끝이다."
 그제서야 아들이 생각난 율성하의 안색이 핼쑥하게 질려 버렸다.
 "내 아들을 어떻게 했느냐?"
 그는 다급하게 부르짖었다. 뒤이어 그는 격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부전주는 음랭하게 웃으며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 순간을 기다린 음혼공자는 율원양을 옆구리에 끼더니 훌쩍 몸을 솟구쳤다. 그가 장중에 내려서는 것을 본 율성하의 안색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아니 네놈은 음혼공자?"
 음혼공자는 율원양을 옆에다 내팽개치면서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으흐흐흐··· 율성하, 오래간만이오."
 "네놈이 감히 여기에 나타나다니? 이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아."
 율성하는 음혼공자에게 어떤 지대한 원한이 있는지 뼈골이 싸늘하게 외쳤다.
 율원양은 자신을 붙잡은 중년문사의 음혼공자라는 외호를 마음 깊숙이 새겨 두었다.
 '음혼공자, 내가 만일 살아남게 된다면 오늘 일을 열 배 이상으로 갚아주겠다. 너는 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라.'
 율원양은 땅바닥에 내팽개진 상태에서 율성하를 바라 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염려하는 빛이 가득했다. 율원양을 바라보는 율성하도 마찬가지였다.
 "음혼공자 너는 내 아들을 어떻게 했느냐?"
 "염려할 것 없다. 다만 세 군데의 마혈을 찍었을 뿐이다."
 음혼공자의 대답에 율성하는 저으기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부전주에게로 눈길을 던졌다.
 "당신은 우리 부자를 어떻게 할 참이오?"
 "네가 순순히 우리를 따라가면 네 아들 놈을 살려주겠다. 그러나 거듭 다짐하지만 네가 응낙하지 않는다면 저 녀석 뿐만 아니라 이 부평현 일대의 모든 주민들의 목숨까지도 부지할 수 없게 된다."
 율성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 악독한 놈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선량한 백성들의 목숨을 노리려 하다니······."
 "시끄럽다. 응낙할 테냐? 거절할 테냐?"
 부전주가 그의 말을 끊으며 싸늘하게 외쳤다. 이윽고 율성하는 체념을 하였는지 나직이 탄성을 터뜨렸다.
 '휴··· 이들의 요구대로 움직이면 수많은 무림인들의 안위가 끝장날 것이고 거절하자니 선량한 주민들이 죽음을 당할 테고. 이를 두고 사면초가(四面楚歌)라 했던가?'
 율성하는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율원양에게 서서히 눈길을 돌렸다.
 '원양을, 원양을 살려야 한다. 내 아들이 하늘의 보살핌으로 인연이 닿아 원영건양체를 고치게 된다면 향후(向後) 무림은 원양의 어깨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속으로 결심을 하는 율성하였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원양은 이 자리에서 탈출시켜야 한다.'
 율성하는 처연한 눈으로 부전주를 바라보았다.
 "내 자식 놈과 촌민들의 생명으로 나를 위협하니 하는 수 없이 응낙하겠소."
 부전주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응낙을 하자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내 그럴 줄 알았지. 율성하 당신은 보기 보다는 머리가 잘 돌아간단 말이야. 으하하하--."
 그는 매우 유쾌한지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율성하는 귀를 틀어 막고 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조건을 걸어야만 했다.
 "다만"
 "다만 뭔가?"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아들을 풀어 주시오."
 율성하의 요구에 부전주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음혼공자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 놈의 마혈을 풀어 주어라."
 음혼공자는 흠칫했다.
 "부전주님. 이 놈의 재질은 천 년에 한 번 있을 정도로 뛰어난 놈입니다. 만약 저 놈을 풀어 주었다간 후환이 두려울까 걱정 됩니다."
 부전주는 복면 속의 두 눈을 번들거렸다.
 "음혼공자. 요즘 너는 말이 많아졌다."
 부전주의 노기서린 냉랭한 말에 음혼공자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지체없이 율원양의 막힌 마혈을 향해 지풍을 날렸다.
 퍽. 퍽.
 "윽."
 마혈과 아혈이 풀린 율원양은 짧은 신음을 토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몸을 일으킨 후 음혼공자를 쏘아 보았다.
 "음혼공자. 지금은 내가 무공을 익히지 않아 너에게 당했다만 차후에 나를 만나게 되면 부디 몸조심 하기를 바란다."
 그의 눈에서 쏟아지는 예리한 살광은 음혼공자의 심장을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율원양의 눈에서 새하얀 살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으··· 어린 놈의 눈이 저토록 매섭다니 가공할 노릇이구나.'
 이때 율원양을 바라보는 부전주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음혼공자의 말대로 정말 뛰어난 기재로구나. 가히 천 년만에 태어날 정도의 기재로구나. 저런 녀석이 무공을 익히게 된다면 진정 천하를 뒤엎을만 하겠군. 하나 흐흐흐, 아깝다만 네 녀석은 오늘 밤이 마지막이다.'
 암암리에 안도의 숨을 내쉬던 율성하는 부전주의 눈이 수시로 변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내 보는 앞에서는 원양에게 어떤 행동도 안하겠지만 저 놈이 원양을 살려줄 리는 없을 것이다. 다만 나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율성하는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부전주. 잠시 아들 녀석과 이야기 할 시간을 주시오."
 "안 된다. 네가 제시한 조건에는 그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부전주는 일언지하로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부자의 안색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율원양의 분노가 더욱 대단했다. 그는 당장 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처지임에도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냉엄하게 호통을 쳤다.
 "부전주. 네놈이 안면을 감추었다만 너도 차후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부전주를 비롯 그의 수하들은 일개 꼬마가 거침없이 욕을 하는데 어안이 벙벙했다.
 율원양의 귀에 가느다란 부친의 전음이 들려왔다.
 (원양아. 너는 지체없이 계곡 뒤로 도망쳐야 한다. 계곡 끝에는 하나의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 속에 영청석유가 있다. 너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취해서 마셔야 한다. 자, 어서 가거라.)
 율원양은 이승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 같은 부친의 처연한 음성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부친의 앞으로 가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소자는 아버님을 남겨 놓고 이대로 떠날 수 없습니다."
 그의 눈은 어느새 굵은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율성하는 고개를 돌렸다.
 "아비 걱정은 하지 말고 어서 떠나거라."
 "아버님.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율원양은 거의 울부짖듯이 단호하게 말했다. 율성하는 두 눈을 부릅떴다.
 "염려하지 말고 어서 떠나라. 저들은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이 아비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 아비의 목숨은 염려 안 해도 되느니라."
 "그래도 아버님, 소자가 어떻게 아······."
 "어서 떠나지 못할까?"
 율성하는 돌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버지의 성품을 익히 잘 아는 율원양은 눈물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눈이 멀쩡히 떠 있는 상태에서 부친과 생이별을 하게 된 율원양은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에게 잡혀가게 되는 아버지를 생각하자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제3장 여섯 사혈(死穴)에 꽂힌 비수(匕首)
 
 
 "어서 떠나래도 어찌 머뭇거리기만 하느냐?"
 율성하가 다시 호통을 쳤다.
 율원양은 눈물을 흘리며 간신히 한 걸음을 떼어 놓았다.
 두 걸음, 세 걸음을 옮기는데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무겁기 이를데 없어 보였다. 그는 이를 악물고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간신히 오 장 정도 걸어갔다.
 그의 양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로 인하여 바닥이 흥건히 젖을 정도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에게 끌려가야 할 아버지. 생이별을 해야 하는 아들. 두 사람의 가슴 속에는 홍수가 범람하듯 슬픔이 솟구쳐 올랐다.
 무림을 해치려는 무리들에게 어쩔 수 없이 자신을 내맡겨야 할 운명인 율성하는 아들과 헤어지는 아픔보다 더 큰 아픔이 뒤를 이었다.
 어느덧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율원양이 계곡 속으로 사라지자 부전주는 재촉하였다.
 "율성하, 이제 가자."
 "안 된다. 내 아들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 시진은 여기 이렇게 서 있어야 한다."
 율성하의 음성은 매우 단호했다.
 부전주를 제외한 네 사람은 그의 말에 살기를 뿜어 내었다. 그들은 후환(後患)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직접 율원양의 눈에 서린 살기와 겁을 모르는 용기를 목격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절세의 고수라도 만나 무공을 익히게 된다면 차후 그들은 편히 발을 뻗고 잘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실로 호랑이를 산으로 풀어주는 결과가 되는 꼴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부전주의 태도는 여유만만했다.
 '흐흐흐··· 율성하. 한 시진 동안 기다린다 하여도 네놈의 생각은 물거품이 되어 버릴 것이다. 효성이 지극한 네놈의 아들은 도망가지 않고 삼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다시 되돌아 오고 있다.'
 그는 암암리에 공력을 끌어올려 천이통(千耳通)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 결과 율원양은 그의 이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천이통(千耳通)을 시전하려면 백 년 이상의 공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천시지청술(千視之廳術) 중의 한 가지 무공으로서 이것을 펼치면 방원 십 리 이내의 모든 사물이 움직이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부전주란 인물이 누구이기에 이런 공력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이윽고 시간은 흘러 한 시진이 되었다.
 "사령수라 일호. 저 자의 수혈을 찍어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명의 복면인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율성하는 안색이 급변하며 이때다 싶어 손을 들어 스스로 천령개(天靈蓋)를 내리쳐 갔다.
 부전주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그게 마음대로 될까?"
 그는 번개같이 일지(一指)를 퉁겨 내었다.
 쐐액--!
 퍽.
 그의 지풍은 여지없이 율성하의 곡지혈(曲池血)을 강타하였다.
 "으억."
 율성하는 답답한 신음을 지르며 얼굴이 핼쑥하게 변해 버렸다.
 "유명한빙지(幽瞑寒氷指). 네놈은 유······."
 그러나 그는 거기서 말이 막혔다. 뒤늦게 그의 앞에 내린 사령수라가 아혈을 찍었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세 군데의 마혈과 수혈(睡穴)을 제압당했다.
 경악으로 물들어 있던 율성하의 안색이 이내 풀어졌다.
 "빨리 총단으로 데려가라."
 이때 안심이 되지 않아 되돌아오던 율원양은 사령수라들이 아버지를 옆구리에 끼고 몸을 날리는 것을 보았다.
 "아버님."
 그는 피를 토하듯 부르짖으며 달려왔다.
 부전주가 싸늘한 눈으로 뛰어오는 율원양을 바라보았다.
 "흐흐흐··· 네가 아예 죽으러 오는구나."
 율원양은 부전주의 앞에 다다르자 걸음을 멈추며 숨을 헐떡였다.
 "이 악마같은 놈아. 내 아버지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
 그는 벼락같이 호통을 치며 부전주에게 달려 들었다.
 그러자 뒤에 시립해 있던 음혼공자가 음랭하게 외치며 일장을 날렸다.
 "어린 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소리를 지르느냐?"
 장력에는 막중한 경력이 들어 있었다.
 펑.
 "으악."
 가슴에 장력을 얻어맞은 율원양은 한 줄기 피보라를 뿜으며 이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그러나 율원양은 곧 몸을 일으켰다.
 그는 고통으로 인하여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두 눈에서는 감히 견디기 어려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음혼공자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저 놈이 무공도 익히지 않은 몸으로 나의 팔성(八成) 공력이 담긴 장풍에 격중되었으면서도 죽기는커녕 즉시 일어나다니 어이가 없군.'
 율원양은 독기 품은 눈으로 다시 달려들었다.
 부전주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로 범벅이 된 율원양의 얼굴은 마치 악귀와도 같았으며 두 눈에서 흐르는 원독의 광망은 소름이 끼치도록 매서운 것이었다.
 부전주는 절로 신음을 터뜨렸다.
 "으음. 실로 의지가 깊은 놈이로구나. 아깝지만 죽이지 않을 수 없다. 음혼공자, 비수(匕首)를 날려라."
 "알겠습니다."
 음혼공자는 별안간 다가오는 율원양을 향하여 오른손 소맷자락을 휘둘렀다.
 쉬-- 아-- 앙.
 허공을 찢는 예리한 소리가 들리면서 비수 한 자루가 허공을 갈랐다.
 율원양은 비수가 날아오는 것을 분명히 보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가 없었다.
 팍.
 "컥."
 날아간 비수는 정확히 율원양의 유부혈(兪府穴)에 꽂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쉬-- 아-- 앙. 쉬앙.
 음혼공자의 소맷자락에서 다시 다섯 자루의 비수가 발출되었다. 그는 무공도 모르는 한 어린 소년을 죽이려고 악독하게 연속 비수를 날린 것이다.
 마치 조금 전 무공도 익히지 않은 어린 아이에게 겁을 먹었던 자신의 수치를 씻어내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팍. 팍. 팍.
 비수는 관원(關元) 거궐(巨闕) 중추(中樞) 곡골(曲骨)의 다섯 혈도에 꽂혀 버렸다.
 "으- 악."
 율원양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나가 떨어졌다.
 유부혈 한 군데 꽂힌 비수만 하여도 율원양을 절명시킬 수 있는 것인데 음혼공자는 그것도 모자라 다섯 개의 비수를 더 날린 것이었다. 부전주는 죽은 율원양을 바라보면서 매우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진정 짝을 찾을 수 없는 근골과 재질을 지닌 녀석이었는데 아깝지만 할 수 없구나. 자 그만 가자."
 그들이 떠나자 한 차례 싸늘한 바람이 계곡을 휩쓸고 지나갔다. 반듯하게 쓰러진 율원양의 몸 위에 비수가 일렬로 꽂혀 있었다.
 비수가 꽂힌 곳은 인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혈(要穴)일 뿐 아니라 모두 사혈(死穴)이기도 했다.
 그것도 모두 여섯 자루가 여섯 군데의 사혈에 일렬로 쭉 꽂혀 있는 것이었다.
 율원양은 채 피어나기도 전에 흉적의 손에 죽었단 말인가?
 휘-- 잉.
 싸늘한 바람이 한 차례 계곡을 훑으며 지나갔다.
 죽은 율원양의 몸 위로도 스치고 있었다. 자루만 남기고 깊숙이 박힌 비수가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계곡은 숨이 막힐 듯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어디선가 스산한 산짐승의 포효가 울리기 시작했다.
 커- 엉. 컹. 컹.
 우-우- 우-
 갈라진 살 틈을 타고 흘러나오는 피는 율원양의 전신을 축축이 적셨다.
 어느 틈엔가 밝은 달이 나타나 율원양의 시신을 비추었다. 피로 물들은 얼굴은 혈귀가 되어 있었다.
 혈인(血人).
 그렇다. 죽은 율원양의 모습은 피로 목욕한 완전한 혈인이었다. 아마도 달은 부자(父子)의 생이별을 비추기 싫었음인지 구름 속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시진, 아니 두 시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율원양에게서 해괴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끄응······."
 나직한 신음소리가 율원양의 입에서 흘러나오면서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으으윽."
 그의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창자가 끊어질 듯한 고통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렇다면 율원양은 살아 있단 말인가?
 만약 그가 여섯 군데의 사혈에 비수를 맞고도 살아 있다면 고금동서(古今東西)를 통 틀어서라도 찾아볼 수 없는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몸이 점점 심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드드득.
 그러는 중에도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고통 때문에 그는 무의식 중에서도 이빨을 갈아 붙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비수가 꽂힌 혈도가 좌우로 수축을 하며 비수를 몰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비수들은 점점 위로 솟구치더니 피로 물든 비신(匕身)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혈도의 맥은 점점 심하게 수축을 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툭, 툭, 툭, 여섯 개의 비수들은 저절로 완전히 뽑혀져 힘없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단 말인가? 누가 이런 일을 들었다면 믿을 수가 있겠는가?
 아니 직접 보았다해도 전혀 믿지 못할 일이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비수가 빠지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감겨 있던 율원양의 눈이 번쩍 떠졌다.
 번쩍.
 살기어린 잿빛 광망이 그의 눈에서 폭사했다.
 눈빛에 의하여 밤하늘이 수천 수만 갈래로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죽인다. 죽일 것이다."
 원독에 가득 찬 가라앉은 음성으로 한 마디 뱉은 율원양은 다시 혼절해 버렸다.
 으스스한 살념(殺念)이 가득 담긴 처절한 음성이었다. 움켜쥔 두 주먹에서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 피가 흘러나왔다.
 비수가 빠져 버리고 사혈의 수축도 멈추었다. 그리고는 이내 흘러나오던 피도 스스로 지혈이 되었다. 어떻게 하여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율원양이 원영건양체의 몸이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임독양맥을 보호하고 있는 원영피막 덕이었다.
 원영피막은 실로 위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기경육맥에 쌓인 나쁜 기운이 만 열아홉이 되었을 때 임독양맥을 침입하여 양맥이 파열되어 죽기 전까지 원영피막은 외부의 그 어떤 충격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율원양이 맨 처음 음혼공자의 장력에 격중되었을 때에 원영피막은 공력의 가장 정순한 진기를 흡수했었다.
 그뒤 바로 율원양이 사혈에 여섯 개의 비수를 맞았을 때 원영피막은 신체를 보호하는 기능을 스스로 발휘하여 흡수하였던 진기를 발산하여 사혈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발산된 진기는 혈맥의 수축 작용을 유도하였을 뿐 아니라 지혈까지 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그것은 발산된 진기에 원영피막이 본래 지니고 있던 효능이 가미되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던 작용이었다.
 전신이 갈갈이 찢겨지거나 심맥이 파열되기 전에는 그 어떤 외부 충격에 의해서도 죽지 않는 몸. 그것이 바로 원영건양체였던 것이다.
 남극성수 율성하도 미처 모르고 있던 이 신묘한 보호능력이 사혈에 비수를 여섯 개나 맞고도 죽지 않는 불사신(不死身)의 몸으로 율원양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서서히 시간은 지나 율원양이 쓰러져 있는 계곡에 찬란한 여명(黎明)이 깃들기 시작했다.
 새 생명을 만들기 가장 좋은 시각, 음모술수(陰謀術數)가 횡행하기에 가장 좋은 시각, 세상에 필요한 두 가지 상반된 선악(善惡)이 태어나기 가장 좋은 어둠이 물러가고 생명이 약동하는 아침이 찾아왔다.
 양광(陽光)에 드러난 율원양의 몰골은 너무나 처참하였다.
 피로 점철된 쓰러진 육체는 마치 지옥(地獄) 아수라(阿修羅)가 지키는 십팔 층 만겁단(萬劫段)을 간신히 탈출한 파라만겁신(婆羅萬劫神)의 흉흉한 모습이었다.
 "으으윽."
 율원양이 신음을 토하며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정신을 차린 율원양은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어억."
 상체를 일으키다 가슴이 빠개질 듯한 통증이 엄습하자 괴로운 신음을 토했다. 떠진 눈은 빛을 잃어 버려 흐릿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점점 두 눈에 눈동자가 돌아왔다.
 "우엑."
 율원양은 시커먼 선혈 한 덩어리를 내뱉았다. 시커먼 피가 토해지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시원해졌다.
 그는 자신의 전신을 훑어 보았다. 피에 물들지 않은 부분이 전혀 없었다.
 "흐흐흐··· 피로 목욕을 했구나."
 보라. 전신을 엄습하는 고통 속에서 피에 젖은 육신을 꿈틀거리며 일어서고 있음을.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 으스러지게 악물어진 이빨, 억세게 움켜잡은 두 주먹.
 돌연 율원양의 눈이 불을 뿜을 듯 활활 타오르는 태양을 향하여 부릅뜨여졌다.
 동시에 심혼(心魂)의 밑바닥에서 폐부를 쥐어 짜낼 듯한 부르짖음을 토해냈다.
 "음혼공자, 부전주, 세 명의 흑의복면 놈들.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방법으로 죽여줄 테다."
 마음 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심화(心火)로 인해 한 줄기 피화살이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죽여줄 테다. 죽여줄 테다."
 그의 불붙은 음성은 허공 중에서 메아리가 되어 넓게 넓게 울려 나갔다.
 일출(日出)로 올라오는 아름다운 진홍빛의 여명은 율원양의 전신을 음산하게 했다.
 율원양은 그 자리에 장승처럼 우뚝 서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크나큰 슬픔에 고통도 잊어 버렸다.
 잠시 후 그는 피 묻은 전신을 씻어내기 위하여 유운하로 걸어갔다.
 
 피가 뚝뚝 떨어질 듯한 적홍색(赤紅色) 장삼으로 갈아 입은 율원양은 계곡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계곡 끝은 양 쪽이 만장단애(萬丈斷崖)의 절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계곡 끝에는 두 그루의 거대한 노송이 서 있었고 노송 사이로 샘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유운하의 원천(源泉)이 되기도 했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아버지가 말한 동굴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전신에 욱신거리는 고통을 참으며 계곡 끝을 샅샅이 뒤져갔다. 동굴을 찾았을 때 탄식이 절로 나왔다.
 동굴은 왼쪽 절벽의 십여 장 되는 곳에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아. 무공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떻게 저곳을 올라가야 한단 말이냐. 더군다나 지금 나의 전신은 부서져 나갈 듯한 고통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아닌가."
 사실 그는 이를 악물고 억지로 고통을 참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계곡 끝까지 간신히 기어오다시피 다다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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