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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신혈 1

2018.06.14 조회 447 추천 1


 뇌신혈 1권
 제1장 암울했던 무림의 이야기
 
 
 1
 
 
 태행산(太行山).
 길이 구백 리에 걸쳐 용(龍)의 몸부림인 듯 산줄기마다 무서운 기세(氣勢)가 서려 있다. 게다가 솟아오른 삼백삼십 연봉(連峰)들은 모두가 봉황의 수직 상승인 듯이 기운차게 솟아올라 있다. 이 연봉들 중에 오만하리 만큼 우뚝 솟은 제천봉(帝天峯)은 태행산 최고의 봉우리였다.
 제천봉의 그 깎아지른 듯한 정상에 환상의 성채(城砦)인 듯 수라제천보전(修羅帝天寶殿)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바로 천하무림에 군림한 절대자 수라제천의 보금자리였다. 동시에 세인들에게는 종원을 지배하는 악(惡)의 상징이었고, 피와 죽음의 본산으로 인식된 곳이다.
 수라제천으로 인해 중원무림계는 완전히 몰락하여 그 자취조차 없어졌다. 게다가 무림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무리인 구파일방은 영원히 무림사에서 사라지는 듯싶었다.
 태양조차 빛을 잃은 듯한 암흑의 혼돈 속에서 무심한 세월만이 흘러 어느덧 삼십 년이 지났다.
 말로 하면 짧게 삼십 년이지만, 실제로 그 기간은 아비규환(阿鼻叫喚)과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사건들로 범벅이 된 세월이었다.
 그러나 변함없이 삼십 년 동안 중원을 지배해 온 수라제천은 아직까지도 진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비단 그가 지닌 가공할 천의무봉의 절학의 출처와 출신 내력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의 진실한 이름조차 세상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하지만 장막에 싸인 그의 정체는 이것 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세월을 지배해 온 수라제천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핏빛이 은은히 감도는 금삼(錦衫)으로 전신을 휘덮었다. 실로 철저하게 자신을 가리고 또 가렸던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 감출 수 없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냉혹무비할 만큼 차가우면서도 강렬한 두 줄기 안광(眼光)뿐이었다.
 이러한 수라제천이 중원을 지배한 본바탕은 당연히 그 누구도 도달치 못한 지고무상(至高無上) 절세마공(絶世魔功) 때문이었다.
 그의 마공은 단순히 마(魔)의 속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사도(邪道)의 무공과 정도지학(正道之學)의 모든 정수가 녹아들어 있는 엄청난 것이었다.
 지금까지 수라제천은 신(神)이라 해도 넘침이 없을 만큼 무서운 자였다.
 그러나 하늘은 진노하여 무림의 절대적 존재인 수라제천이 저지른 악행에 보응(報應)하려는 계획을 암암리에 진척시키는 듯 했다.
 이는 실로 오행상극(五行相剋)의 이치처럼 불[火]이 승하면 물[水]로써 멸하며, 금(金)빛이 비록 찬란하여도 한 움큼 흙[土]에 묻히면 그 광휘를 잃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계획의 발판은 삼십 년 동안 무적의 제왕이었던 수라제천에게 감히 도전한 절세 고인의 출현이었다.
 만일 이 다섯 명의 절세 고인들이 시대를 달리하여 현신하였다면, 저마다 능히 일대(一代)의 무림종사(武林宗師)로서 천하제일인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절세 고인들이 삼십 년의 침묵 끝에 홀연히 한 날 한 시에 수라제천 앞에 출현한 것은 치밀한 하늘의 안배가 아니었다면 정녕 불가능한 일이다.
 만절벽을 이룬 태행산 제천봉 정상에 우뚝 솟은 수라제천보전(修羅帝天寶殿)은 바로 수라제천의 소굴이었다.
 그곳은 화려한 성채였건만 주인의 악업 때문인지 그 주위에는 언제나 짙은 운무와 더불어 요악(妖惡)한 사기(邪氣)가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이 날만은 운무도 요악한 사기도 감히 그 둘레에 흐르지 못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천지 개벽의 순간인 양 작렬하는 뇌성벽력 때문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따금 작렬하는 섬전이 실로 종말의 순간인 듯 공포스러웠다.
 마치 분노한 하늘이 수라제천보를 향해 경고의 암시를 보내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미물들마저 놀라 도망쳐 버릴 전율이 연이어졌다.
 그러던 순간, 다시 한 차례 푸르디푸른 섬전이 천지를 온통 그 휘황한 광휘 속으로 함몰시켰다. 이어서 동, 서, 남, 북의 각 방향으로부터 홀연히 한 줄기씩의 인영이 번뜩였다.
 이윽고 그들은 순식간에 산정 위에 괴물처럼 서 있는 신비의 보전 앞에 안착했다.
 뇌성벽력과 더불어 사납게 포효하는 광풍 속을 뚫고 거의 동시에 각 방위(方位)로부터 다섯 줄기의 인영이 수라제천보전 앞에 섰다.
 그들의 옷자락이 미친 듯 바람에 휘날렸다.
 그들은 비록 거의 같은 시각에 출현하였으나, 결코 사전에 약속한 바는 없었다.
 단지 그들이 이곳이 나타난 이유는 각자의 가슴속에 저마다 피에 젖어 사무친 혈한(血恨)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동시에 출현한 것은 우연이었고,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자면 진노한 하늘의 안배였다.
 한 순간 뇌전이 또 한 번 작렬하고 나자, 다섯 고인들은 각자 자신 외에 또 다른 방문자가 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잠시 망연하게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계속하여 뇌성벽력이 온 천지간을 뒤집어엎을 듯이 세차게 수라제천보전을 향해 내리꽂혔다.
 우연히도 동시에 출현한 다섯 명의 방문자는 잠시 말을 잃고 악의 상징인 수라제천보전 앞에 영원의 석상인 듯 우뚝 서 있었다.
 광풍에 휘날리는 그들의 옷자락이 찢겨진 기폭(旗幅)인 양 너무도 스산했다.
 그들 다섯 고인은 일찍이 뼛속까지 절절이 사무쳤던 원한이 쌓여 금세라도 폭발할 것 같은 복수의 깃발처럼 우뚝 서 있는 것 같았다.
 수라제천의 가려진 진체는 그렇다 치고, 홀연히 나타난 이들 다섯 고인의 정체는 또한 무엇인가?
 이들은 다름 아닌 훗날 무림천하가 천외오존(天外五尊)이라고 칭하며 떠받드는 장본인들이었다.
 그들의 탄생의 직접적 계기는 바로 수라제천이 저지른 악행에 있었다. 그로 인하여 복수의 원념(怨念)에 불탄 나머지 각고 끝에 비공(秘功)을 성취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들의 손에 의해 수라제천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출현은 실로 너무도 철저한 수라제천에 대한 하늘의 응징이었으며, 전율할 만큼 무서운 섭리라 아니할 수 없었다.
 천외오존(天外五尊)이라 불리는 다섯 명의 기인 중에 두 명은 공문(空門)의 출신이었다.
 망아(忘我)!
 그의 명호(名號)가 말해 주듯이 그는 소림 출신이었다.
 삼십 년 전, 천 년 내의 대참화가 소림을 휩쓸었을 때 천행으로 살아남은 소림 유일의 후예였다.
 당시 그는 십여 세에 불과한 소사미승(少沙彌僧)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문을 휩쓴 대참화에 직면하여 하늘을 우러러 절규하며 복수에 대한 한(恨)을 불태웠던 것이다.
 ‘비록 내 한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을지언정 기필코 수라제천을 타도하고 사문의 천 년 영화를 되찾겠노라!’
 그는 피어린 원념을 가슴에 품고 복수의 길을 찾았다. 그러던 도중 우연히 천 년의 긴 세월 동안 장경각에 소장되어 있던 절세 비급을 얻게 된 것이다.
 소사미승 망아는 숭산 소림사에서 비역으로 보리달마존자가 면벽구년을 수행했던 장소인 선사동(先師洞)에 비급과 혈한을 품은 채 입동(入洞)하였다.
 삼십 년의 세월은 수라제천이 천하에 군림한 세월이기도 했지만, 망아에게는 각고의 세월이었다.
 뼈와 살을 에는 입동 삼십 년의 세월은 정녕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혈루를 삼키며 불철주야 오직 소림의 권토중래(捲土重來)만을 꿈꾸었다.
 그리하여 필사적으로 조사의 유학(遺學)을 익힌 지 어언 삼십 년이 지나게 되었다.
 드디어 그는 절학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고 몸에 익혀 출동(出洞)의 날을 맞게 되었다.
 이때, 그는 이미 달마존자 이래 일찍이 유래 없던 소림의 절세 기승으로 화(化)해 있었다.
 현천자(玄天子).
 그는 무당파(武當派)의 장문인 현광자(玄光子)의 가장 나이 어린 사제였다.
 무당파는 수라제천의 일차 침입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무당파 개파 이래 가장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무당파 최대의 성역인 상천관(上天觀)이 고스란히 잿더미로 변한 사건이었다.
 그로 인해 현천자 또한 무당파 유일의 생존자가 되었다. 그는 당시 장문인이었던 현광자의 유지에 따라 조사금탕지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현천자는 끝내 조사금탕지에 남은 무당파 유학을 얻게 되었다. 본시 하늘의 안배는 삼라만상의 구석구석에까지 미치는 법이라, 조사의 유학은 기이하게도 현천비록(玄天秘錄)라는 이름이었다.
 현천자 또한 피맺힌 수련을 거듭한 지 삼십 년이었다.
 이들 망아와 현천자.
 공문(公門) 두 기인의 탄생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그 두 공문의 기인(奇人) 외에 나머지 세 명의 전륜고인, 그들 또한 평범한 내력의 인물들은 아니었다.
 천산신검 상관청봉(天山神劍 上官靑峯).
 그는 서역(西域) 천산(天山)의 천의무봉한 검학(劍學) 외에도 일찍이 어린 시절에 이미 광세기연마저 얻은 바 있었다.
 그 기연은 다름 아닌 상고(上古) 전국시대를 풍미했던 절세 기협 검령자(劍靈子)의 유학을 얻은 것이었다.
 검령자가 남긴 검도지학(劍道之學)은 실로 절세 무적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를 깨우친 상관청봉은 스스로 천하제일의 검도제일고수(劍道第一高手)를 자부하였다. 그러나 누구하나 상관청봉이 붙인 자칭에 불만을 가진 자는 없었다.
 그런데 누구나 일신에 절예를 익히면 새로운 야망에 불타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었고, 천산신검 상관청봉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때마침 천하에 독패적 존재로 군림하는 수라제천이 있으니, 상관청봉은 자신의 지닌 바 절예로써 패도마두와 일대 자웅(雌雄)을 결하고자 중원으로 왔던 것이다.
 백타령주 독고진(白駝令主 獨孤鎭).
 그는 대막(大漠)을 호령하는 패주(覇主)였다. 그러나 그는 사막의 모래 돌풍과 같은 신비의 인물이었다.
 그의 무공은 기이하게도 강호에서조차 실전된 지 오래인 상고시대의 사도기학(邪道奇學)들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의 사도제일 고수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오늘 이곳 수라제천보전을 찾은 것은 다름 아닌 수라제천을 꺾어 천하 제패의 야욕을 달성하려는 웅심(雄心)에서였다.
 독중지성 만천기(毒中之聖 萬天機).
 만천기 또한 중원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남만(南蠻) 일대를 석권한 독보패주(獨步覇主)였던 것이다.
 그는 무공보다는 독에 조예가 깊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무림 역사상 두 번 다시없을 용독대가(用毒大家)라고 여겼다.
 많은 무림인들은 그의 일신 전체가 독으로 뭉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보면 사실이었다. 그는 천하제일의 극독일지라도 다시없는 진미(珍味)인 양 식음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의 용독술이 이러한 경지에 달해 있었기에, 그가 밟고 지나가는 백 장 이내에는 감히 목숨을 부지할 자가 없었다.
 정녕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대강(大江)의 도도한 탁류마저 순식간에 피로 물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그가 일개 남만의 패주에 머무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또한 백타령주 독고진과 마찬가지로 천하제패의 야욕을 품고 이렇듯 중원에 출현하였던 것이다.
 
 
 2
 
 
 이토록 일대 종사를 자처할 만한 인물들이 한 날 한 시에 똑같이 수라제천보전에 출현한 사실은 너무도 기이하여 하늘의 안배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광란하는 뇌성벽력 속에 그들 오인(五人)은 순식간에 이심전심으로 저마다의 의중(意中)을 간파했다.
 그리고 일순간에 포효하는 뇌성마저 짓누르며 다섯 줄기의 광소가 작렬하는 번개처럼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
 그 순간, 굳게 침묵하던 마(魔)의 보전으로부터 홀연히 한 인영이 솟구쳐 나왔다. 비록 칠흑 같은 암야(暗夜)였으나, 쉴새없이 작렬하는 섬전이 있었기에 다섯 명의 절세 고인은 상대를 똑똑히 알아보았다.
 홀연히 나타난 인영은 미친 듯 휘날리는 핏빛 옷자락을 일신에 걸쳤고, 염천(炎天)의 태양이라도 녹일 만한 냉혹무비의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꽈르르!
 형언할 수 없는 긴장과 함께 뇌성벽력만이 여전히 광란할 뿐 침묵이 감돌았다.
 때로는 침묵이 웅변보다 더한 위력을 지니는 법이다. 게다가 천하의 운명을 좌우할 이 한 판의 결전에 임박해서 구차한 언행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돌연, 광야에 메아리 치는 사자후인 듯 저 광노(狂怒)의 하늘마저 침묵시키는 대소(大笑)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하.”
 수라제천은 지금의 상황을 첫눈에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다섯 명의 불청객이 심야에 내방한 목적까지도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수라제천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대소가 이윽고 멈춰졌다.
 그러나 수라제천의 두 눈에는 거대한 불기둥보다 더욱 공포스러운 눈빛이 서려 있었다.
 수라제천은 계속하여 타오르는 불길 같은 안광을 폭사하였다. 그리고 다섯 명의 고인을 향해 음산한 괴소를 흘리는 동시에 낮음 음성으로 말하였다.
 “흐흐흐, 네놈들이 오늘 이곳을 내방한 목적이 진정 본좌에게 도전하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는가?”
 그의 낮은 음성은 너무도 싸늘하여 마치 지옥의 귀음(鬼音)인 것처럼 들려왔다.
 그 살기어린 질문에 응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바람 속에 우뚝 선 다섯 인물의 자태는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하였다.
 그 순간, 수라제천의 눈가에 한가닥 싸늘한 조소의 빛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수라제천은 이미 앞에 선 다섯 명의 무공 경지를 간파하고 있었다.
 수라제천은 첫눈에 그들이 자신의 이제까지의 모든 적수 중 가장 뛰어난 인물들임에 틀림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수라제천 본신은 결코 그저 뛰어난 인물이라고는 치부할 수 없는 자였다. 그는 무림 천 년의 기업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삼십 년 동안 절대무적으로 존재해 온 무림 천 년 역사상 유래 없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비록 그들 다섯 명이 한결같이 천상(天上)의 사자(使者)라고 할지언정 수라제천과 비교해 볼 때, 고양이 앞에 다섯 마리 쥐일 뿐이었다.
 이미 극고에 이른 수라제천의 자존심은 그들 다섯 명 따위를 추호도 적수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긴 세월 동안 단 한 명의 적수조차 대해 보지 못해 사무쳤던 고의 고독지감(孤獨之感)은 결국 그들 다섯 명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수라제천은 다시금 태산경동의 앙천 대소를 터트렸다.
 “으하하하하.”
 그리고 그에 이어 분연히 광언(狂言)을 했다.
 “네놈들 다섯 중의 그 누구라도 본좌의 십 초를 견뎌낸다면 본좌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리라. 만약 본좌가 패한다면 본좌는 즉시 강호에서 사라져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겠다고 다짐하겠다. 또한 그대들 다섯이 연합하여 도전할지라도 능히 백 초만 받아낸다면 이 역시 본좌의 패배로 자인하겠다.”
 비록 절대의 패주로 군림하던 수라제천일지라도 이러한 조건은 그들 다섯 명의 고인을 너무 무시한 처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섯 고인들은 결국 자존심을 굽힌 채 수라제천의 이 조건을 인정하고 대결하기로 했다.
 뇌성벽력이 길기리 날뛰는 암야의 산정 위에서는 마침내 만세유일(萬世唯一)의 대결전이 벌어졌다.
 꽈릉!
 온 하늘이 산산이 갈라지는 듯 뇌전의 푸른 섬광이 암야를 거북의 등처럼 수놓았다. 그 푸른 섬광과 함께 일찍이 누구도 보지 못했던 희대의 결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짧은 시간에 허망한 결과만을 초래하고 말았다.
 비록 저마다 능히 일대의 종사를 자처할 만한 다섯 명의 절세 고수이나, 수라제천의 적수로는 역부족이었다.
 천산신검 상관청봉이 겨우 팔 초를 받아냈고, 기승 망아가 가까스로 구 초를 받아냈다. 또한 현천자, 백타령주 독고진, 독중지성 만천기 등은 겨우 사 초, 오 초만에 패배의 분노를 삼켜야 했다.
 너무도 참담하게 끝난 결전의 결과로 다섯 명의 절세 기인은 오직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그들이 지닌 자존망대하던 자부심이 지금 이 순간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 다섯 명의 어깨에는 각자의 자존심보다 앞선 무림의 구제라는 대의가 걸려 있었다.
 그 때문에 눈앞의 수라제천을 꺾어야 함은 다섯 명 모두에게 생명을 바칠 만한 지상 과제였다.
 다섯 고인들은 잃었던 정신을 가까스로 수습하고는 수라제천이 제시한 또 하나의 조건을 떠올렸다.
 “수라제천, 아직 그대가 제시한 나머지 조건을 잊지는 않았겠지? 그렇다면, 우리들 다섯 명이 합심하여 그대에게 재차 도전하겠소.”
 수라제천의 웅심은 이미 하늘마저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한 그가 지금 이 다섯 고인을 안중에 둘 리가 없었다.
 “본좌가 너희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리가 없지 않느냐? 정히 그렇다면, 덤벼라! 모조리 황천으로 보내주도록 하지!”
 수라제천의 음산한 일성(一聲) 호언이 끝나기 무섭게 다섯 명의 절세 고인은 일제히 몸을 날렸다.
 
 
 3
 
 
 꽈르르!
 그들의 기세는 마치 화산의 폭발과도 같았다.
 수라제천에게 날아간 다섯 고인은 전력 전심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다. 일생의 절기를 아낌없이 쏟아낸 끝에 마침내 십 초도 지나지 않아 수라제천의 입에서 뜻밖의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음······.”
 수라제천이 흘린 곤혹스러운 비명에 다섯 고인은 더욱더 힘을 내었다.
 ‘이럴 줄이야!’
 지금 이 순간 수라제천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이들 다섯 명의 절제 고인이 펼치는 합공지세는 정녕 불가사의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 다섯 명의 절학은 비록 각기 장단점은 있었으나 일단 서로 배합되니, 수라제천의 마공(魔功)으로도 일시에 격파하기가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아아!’
 수라제천은 자신의 우세를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지금 벌이진 뜻밖의 형세에 놀라고 당황하였다.
 여하튼 수라제천이 놀랄 만한 다섯 고인의 합공지세는 무서운 위력을 지닌 것이었다.
 망아와 현천자는 도불(道佛) 양 가의 무공을 배합하여 공격했다. 그러자 무서운 기세의 두 줄기 경력이 대해(大海)가 송두리째 뒤집혀 덮쳐오는 듯한 기세로 수라제천을 위협했다.
 그 무상의 선공과 도가 강기와 배합되니 제아무리 수라제천이 절세 신공을 지녔다 해도 그들을 당해내기는 쉽지 않았다.
 다섯 고인이 펼친 합공의 위력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천산신검 상관청봉의 검도지학도 또한 태산을 가르는 듯한 기세여서 그 역시 수라제천의 절학을 봉쇄하는 일익에 추호의 손색도 없었다.
 더구나, 백타령주 독고진은 그 독보적 사도기학으로써 괴이 독랄한 살초를 번득여 수라제천의 유령처럼 번득이던 신형을 무디게 하였다.
 독중지성 만천기마저도 그 천하에 자랑하는 영독술을 유감없이 떨쳐내니 수라제천이 비록 만독불침(萬毒不侵)의 금강지체(金剛之體)일지라도 감히 경시할 수는 없었다.
 이토록 무서운 공세를 쉴새없이 퍼붓던 다섯 고인들에게 승리의 순간이 다가왔다.
 불꽃이 타오르고, 우주 운행의 배열마저 흐트러지는 듯 경천동지의 백여 초가 마침내 지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산정(山頂)에는 어느덧 진노하던 뇌성벽력마저 멈추어지고 심연과 같은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수라제천은 지금의 이 상황에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보통 이러한 경우에 처하게 되면 분노가 하늘 끝에 닿아도 모자람이 없을 그였다. 그러나 이번만은 황당함 그 자체였다.
 ‘허헉! 이······ 이것은 무림에 출현한 이래 일찍이 없던 일이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내······ 내가 저런 자들에게 패배하다니!’
 수라제천의 입장에서는 백 초의 시간이 무심히 흘렀고, 그 동안 다섯 고인을 격파하지 못했다.
 확실히 그는 패배하였고, 다섯 명의 절세 고인은 실로 승리를 쟁취하였다.
 그러나 그들 다섯 명에게 승리의 희열은 없었다.
 다섯 고인들은 비록 자신들이 승리하였을망정 이는 결코 진정한 승리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사실 지금은 수라제천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 상황이다. 하지만 만일 수라제천이 지금 당장 약속을 무시한 채 자신들과 계속 대결한다면, 그들로서는 오백 초를 지탱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쯤 수라제천의 가려진 얼굴도 찡그려져 있겠지만, 다섯 고인의 얼굴 또한 그리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섯 고인들은 수라제천이라는 일대의 마두가 과연 진정으로 패배를 인정하고 중원무림에서 떠날 것인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 고인들은 수라제천의 공세가 다시 시작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승리하긴 했지만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실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토록 광란하던 뇌성벽력마저 어느 사이 잠잠해졌으며, 무서운 적막이 온 누리를 뒤덮었다.
 그런데 갑자기 터져 나온 처절무비의 광소가 강산의 적막을 깨뜨렸다.
 “으하하하!”
 그것은 다름 아닌 수라제천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의 광소는 너무도 처절하여 실로 상처 입은 야수의 포효인 양 소름이 끼쳤다. 개세적 절학을 지닌 다섯 명의 절세 고수들마저 아연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수라제천은 이윽고 광소를 그치고 처절히 부르짖었다.
 “오냐! 나 수라제천은 약속대로 패배를 자인하고 즉시 강호에서 사라져 이후 두 번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리라! 그러나 긴 세월이 흐르고, 그 언제인가 나의 후인(後人)이 이 땅을 밟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천하무림은 다시 나의 제자에 의해 지배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그 누구도 오늘과 같은 요행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대들은 나의 제자의 출현을 가슴속에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그의 말은 너무도 처절하여 다섯 고인을 너무도 날카롭게 후벼팠다. 그들은 앞날의 일을 이미 목전의 현실인 양 너무도 뼈저리게 실감하며 전율하였다.
 그러나 다섯 고인의 생각이 그렇게 흐르는 사이에 수라제천은 이미 신형을 번득여 까마득한 암야의 허공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날이 오면 과연 그 누가 막으랴!”
 그 마지막 말의 여운만이 악몽처럼 다섯 절세 기인의 혼백까지 뒤흔들 뿐, 이제 천지는 온통 어둠에 파묻혀 고요하기만 했다.
 승리자에게는 수많은 찬사와 존경이 뒤따르는 것이 관례였다. 게다가 홀연히 나타난 다섯 기인들은 암야와 혼돈의 세월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하여 세인(世人)들은 수라제천의 피에 굶주렸던 마수로부터 천하무림의 운명을 구한 이들 다섯 기인을 가리켜 천외오존(天外五尊)이라고 불렀다.
 삼십 년만에 초목은 다시 녹음과 함께 생기를 되찾았고, 창생(蒼生)은 안도를 누리게 되었다.
 천외오존이 이룩한 대업은 다름 아닌 모든 강호인의 목숨을 건져낸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하니 강호인들이 천외오존을 무림 구성으로서 받들고 존경함은 너무도 당연했다.
 천외오존!
 비록 그들 개개인의 일신 절학은 수라제천에 감히 비교조차 될 수 없을 경지였으나, 강호인들은 그들을 무림 역사상 유래없이 천하무림오대종사(天下武林五大宗師)로서 거리낌없이 칭하였다.
 소림사의 유일한 생존자인 망아와 무당파의 유일무이한 계승자 현천자는 각각 도불의 절세 무공으로 수라제천과의 일전에서 공을 세워 공문이성(空門二聖)이라고 불렸다.
 자칭 검도 천하제일 고수인 천산신검 상관청봉은 이제 천하가 인정하는 검도 제일 고수였다. 또한 백타령주 독고진은 대막의 패주이며, 절정 무공을 지녀 모든 무림인들이 추앙하게 되었다. 게다가 천하제일의 용독술을 지닌 독중지성 만천기는 비록 남만인이나 오랑캐라는 인식을 철저히 깨뜨리고,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은 이들 삼 인을 일러 천산삼정(天山三鼎)이라고 존칭하였다.
 그리하여 천외오존을 다르게 가리켜 이성삼정(二聖三鼎)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그들 다섯 명이 수라제천을 향해 검을 겨눈 목적이다.
 공문이성은 사문의 한을 풀려는 목적이었으나, 천산삼정은 각기 자신들의 무림독패라는 뚜렷한 개인적인 목표가 있었다.
 그들 오 인이 천하를 거머쥔 상황이라면, 각각의 욕심이 다시 치솟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을 서로 논한다면 확실한 대소의 우열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 중 어느 한 사람이 그들 중의 두 사람을 당해내지는 못했으니, 어느 누구도 감히 천하독패의 웅심을 이룰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러한 견제 균형으로 인해 강호는 어느덧 미묘한 평화가 지속되었다.
 그리고 세월은 다시 유수(流水)처럼 흐르고 흘렀다.
 갈등과 견제의 미묘한 암투 속에서 지속된 평화가 사십 년 되던 어느 날이었다.
 천외오존이 홀연히 무림에서 동시에 종적을 감추고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무림인들은 그것이 어찌된 일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의 수레바퀴만이 무심히 돌았다.
 그리하여 천외오존이 홀연히 사라지고 나서도 다시 육십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 동안 강호에는 평화가 완전히 정착되었고, 삼십여 년 전 그 옛날에 사라졌던 강호대소문파도 다수 부활하였다.
 구파일방 역시 어느덧 다시금 중흥의 성세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천외오존으로 인해 지켜져 온 무림의 평화가 지속될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제2장 단장(斷腸)의 사미인곡(思美人曲)
 
 
 1
 
 
 수라제천이 일으킨 겁난은 죽음과 폐허만이 남았다. 비록 천외오존에 의해 그의 통치가 종지부를 찍었지만, 수술자국과도 같은 상흔(傷痕)은 지워지지 않았다.
 수라제천이 일으킨 겁난은 천 년 무림사에 일대 악몽이었으나, 그것은 이미 아득히 오랜 세월 전의 일이었다.
 그 겁난의 아픈 기억도 백 년이라는 세월에 묻혀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그리고 암흑과 혼돈을 깨고 사십 년 동안 강호에 풍미하였던 천외오존의 일도 이미 까마득한 백여 년 전의 한낱 전설로만 세인(世人)의 뇌리에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인생에 있어서도 그리고 세태에 있어서도 망각이라는 것은 항상 무서운 것이었다.
 과거의 쓰라린 기억은 망각해서는 안될 것 중의 하나이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며, 그것을 통해 당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반성의 기회를 부여한다.
 당금 무림인들은 그 옛날의 겁난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런데 백 년 전의 공포가 한 세기를 지난 당금 무림에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일대의 사건이 터졌다.
 수라제천 이래 백 년만의 혈겁은 서역의 제일고수 천뢰존자(天雷尊者)가 휘하의 밀교(密敎) 십대 천왕과 더불어 홀연히 중원무림에 나타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는 광풍(狂風)처럼 천지를 휩쓸며 선언하였다.
 “백 년 전에 초토화된 이래 이미 쇠락의 잔영이 짙은 중원무림이 천하무학(天下武學)의 정종(正宗)을 자처함은 너무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나 천뢰존자가 선언하건데 밀종무학(密宗武學)만이 천상천하 유아독존, 오직 유일무이의 정종(正宗)임을 자부하노라.”
 이 오만방자한 선언의 진의(眞意)는 너무도 명백했다. 당금 무림의 각 문파는 수라제천으로 인하여 전대(前代)에 이미 조사(祖師) 이래의 절학을 실전하였다. 천뢰존자는 이 틈을 타고 천하무림을 송두리째 서역 휘하에 넣으려는 대야욕을 표출한 것이었다.
 과연 그는 질풍과 같이 천하무림을 휩쓸었다.
 백 년만에 또다시 하늘마저 핏빛으로 물들어지는 죽음의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패도난마와 같은 천뢰존자의 손길은 최후로 마침내 소림사에까지 미쳤다.
 백삼십여 년 전 수라제천의 혈겁으로 인해 소림사는 치욕의 순간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 악몽처럼 다시 되살아날 줄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소림사의 운명은 천뢰존자 앞에서 바람 앞의 등불격이었다.
 천하무림의 오대 종사인 천외오존 중 기승(奇僧) 망아가 분연히 외쳤다.
 “중원과 서역 사이에 본시 원한이 없는데 어찌하여 그대들이 이토록 천의(天意)를 거역하는가? 만일 머나먼 이곳 중원 땅에 그대들의 혼백을 묻고 싶지 않다면 돌아가거라! 또한 만세 천추의 회한을 남기지 않으려면,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즉시 서역으로 돌아가거라!”
 그러나 천뢰존자는 그의 말을 추호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수하인 밀교 십대 천왕과 자신의 개세적 무공을 믿은 탓이다.
 “미암에 젖은 자는 오히려 그대들 중원무림인이다. 이미 중원무학은 이미 쇠락했는데, 그 따위 것으로 어찌 밀종의 심오한 무학을 대적할 것인가? 참으로 불쌍하도다.”
 중원과 서역의 자존심을 대표하는 중원무림의 오대 종사와 서역의 제일고수의 주장이 이리로 엇갈리니 충돌은 불가피했다.
 피할 수 없는 중원과 서역의 숙명적인 결전은 이로써 그 막이 올랐다.
 그러나 결과는 서역의 참담한 패배였다.
 밀교 십대 천왕은 고사하고 천뢰존자마저 이성삼정 중의 그 누구에게도 결코 승리하지 못했다.
 서역의 제일고수로 칭송받던 천뢰존자는 설마 이토록 허무하게 중원의 다섯 기인 천외오존에 격패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승부의 기로는 너무도 명백하여 천뢰존자는 패배를 감히 부정할 수 없었다.
 패한 자는 말이 없는 법이었으나, 홀연히 천뢰존자가 광소와 함께 부르짖었다.
 “나 천뢰존자가 한낱 중원의 하류배들에게 패배하다니! 그러나 좋다! 나는 솔직히 패배를 인정한다. 다만 경고하노니, 이를 두고 결코 중원무학이 서역 밀종무학보다 월등한 종자라고 오해하지 말라. 나의 말을 믿지 않으면 후회하리라! 하하하!”
 이 말에 천외오존은 치솟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리하여 기승 망아가 이를 두고 힐책하였다.
 “천뢰존자, 그대가 서역의 일대 종사를 자처하는 신분이라면 패배를 승복함이 도리 아닌가? 패배를 자인하고도 다시 왈가왈부함은 결코 일대의 종사로서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천뢰존자의 자존심은 과거 수라제천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기승 망아의 힐책에 대해서 눈꼽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 힘있는 어조로 말했다.
 “흥! 속단하지 말라. 만일 노납이 사문(師門)인 서역 보수사(菩修寺)의 범천륜화마황경(梵天輪化魔皇經)을 익혔다면 오늘의 이런 낭패를 결코 없었을 것이다.”
 범천륜화마황경이라는 말을 듣고 천외오존은 갑자기 흠칫했다. 그 이유는 미궁이었다.
 천뢰존자가 다시 말하였다.
 “비록 본좌는 한 가지 사정이 있어 사문의 이 무상절학을 익히지 않았다. 그러나 십 년 후, 본좌는 후인에게 이를 전수시키겠다. 그리고 그대들 천외오존에게 도전하기 위해 다시 중원 땅을 밟을 것이다. 그대들은 명심하고 학수고대하거라!”
 천뢰존자는 중원무림에게 충분히 위협이 될 만한 일언을 던져 놓은 채, 휘하의 십대 천왕을 거느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 * *
 운소산(雲 山).
 강서지방 호남의 양성(兩省) 사이의 경계를 이루며, 수백 리에 걸친 꿈틀대는 한 마리의 용이 자태를 자랑하는 험산 준령이였다. 그 웅혼한 자태에 손색없이 산세의 험준하기는 실로 천하제일이었다.
 수백 리의 준령이 거침없이 내뻗고 있었으나, 그 중 언제나 짙은 운무에 싸여 신비로움 속에 우뚝 솟은 한 절봉이 있었다.
 그 봉우리의 정상에는 그 누군가가 언제부터인지 미동도 않은 채 좌정하고 있었다. 표표히 흐르는 운무 사이로 언뜻 비치는 그는 바로 백의의 한 미서생(美書生)이었다.
 태고 이래로 단 한 번도 인적 없던 절봉의 산정에 앉아 있는 그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것인지, 또한 언제부터 이곳에 앉아 있었는지 그 무엇도 알 수 없었다.
 계절은 쓸쓸함이 가득 찬 만추(晩秋)에 들어서 북풍한설의 엄동도 그리 멀지 않은 듯 간간이 싸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주위 대산악의 모든 연봉에 타는 듯 새빨간 홍엽들이 하나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을의 풍취는 멋있기도 했지만, 그로부터 풍겨 나오는 고독지감은 떨쳐버릴 수 없었다.
 천 년 바위인 듯 움직일 줄 모르는 백의서생이 앉은 산정 위에도 아침에 하얗게 내린 서리가 녹지 않고 남아, 실로 춥고 황량한 풍경이었다. 산풍이 살을 에이었다. 바람이 스치고 갈 때마다 칼날 같은 바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시간이 지났고, 산중에는 유난히 빠르게 황혼이 찾아왔다. 그리고 밤이 옴에 삭풍은 더욱 날카롭게 몰아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의미서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뚫어지게 한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바라다보는 곳은 바다 위 출렁이는 물결처럼 흐르는 운해(雲海) 사이로 문득 한 점 섬인 양 떠 있는 맞은편 또 하나의 절봉이었다. 백의미서생의 눈길은 그 곳 어딘가에 못박혀 추호도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얗게 내린 서리가 늦은 가을의 쌀쌀한 밤을 더욱 재촉하고 있었다.
 이때, 홀연히 어디선가 한 마리 청초한 눈망울을 가진 사슴의 신음인 양 한 줄기 금음(琴音)이 들려왔다.
 음률은 지극히 애절하면서도 그윽하게 들려왔다. 듣는 사람의 감정이 그 음률에 따라 수시로 변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기 때문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이유 때문인가? 움직일 줄 모르던 백의서생의 눈이 문득 광채를 발했다.
 그리고 백의서생은 이내 사무치는 감회에 젖어갔다.
 금음 소리는 점차 더욱 높고 낭랑하게 허공에 메아리 쳤다. 모진 바람소리마저 운무 속 야색을 뚫고 들려오는 금음에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다.
 천상(天上)의 선율인 양 들려오는 신비의 금음은 듣는 이의 심금을 한없이 울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아······”
 백의미서생은 돌연 찬탄의 신음을 발했다. 동시에 은색 투명한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렸다.
 신비 금음은 맞은편 절봉으로부터 이때에도 여전히 심금을 울리며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홀연히 또 한줄기 음성이 산곡에 메아리 치기 시작했다.
 “주근분강지저습(住近分江地低濕)
 황노고죽요택생(黃蘆苦竹繞宅生),
 기간단모문하물(其間旦暮聞何物).
 분강을 끼고 낮고 습한 곳에 자리한 집 둘레에는
 누런 갈대와 억센 왕대가 우거졌으니,
 자나깨나 조석으로 아무 소리조차 듣지 못하였다.”
 그 음성은 바로 한 수의 고시(古詩)였다. 그런데 그것은 영원히 벌어질 줄 모르는 듯하던 미서생의 입술 사이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피 토하는 두견새와 애절한 원숭이 울음뿐이요,
 봄 맞은 강물, 꽃 핀 아침, 달 밝은 가을밤에 왕왕히
 술 받아 홀로 앉아 잔을 기울였노라.”
 이것은 만인의 심금을 울리던 백락천의 고시(古詩)이다. 그런데 이를 낭송하는 백의미서생은 흡사 무엇에 홀린 듯 넋잃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산정에 울리는 음성이기에 그것은 더욱 외롭고 청량한 느낌이었다.
 “금야문군비파어(今夜聞君琵琶語),
 여청선악이장명(女聽仙樂耳暫明).
 탄일곡(彈一曲),
 위군번작비파행(爲君蒜作琵琶行).
 오늘밤 그대의 비파 소리 들으니,
 마치 신선의 음악소리 들은 듯 귀가 번쩍 트였노라.
 (사양 않고 다시 앉아) 한 곡 더 타 준다면,
 그대를 위해 내가 비파행의 시를 지으리.”
 그런데 이때였다. 아름답게 들려오던 금율이 갑자기 멈추어 버렸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맞은편 절봉에서의 금음은 두 번 다시 들려올 줄 몰랐다.
 
 
 2
 
 
 백의미서생의 감회에 빛나던 두 눈이 굳게 감겼다. 하지만 그 망막에는 여전히 한 여인의 영상이 어리어 지워질 줄 몰랐다.
 그런데 그의 눈동자에 맺힌 영상 속의 여인은 마치 천상의 선녀를 방불케 했다.
 여인의 새까맣고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은 물결인 듯 출렁이고 있었으며, 백옥의 얼굴 위에는 그린 듯 솟은 눈썹이 자리잡고 있었다. 게다가 그 아래 혼백을 빼앗을 것 같은 순결의 표상인 듯한 눈동자가 고고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단아하고 고고하게 솟은 콧날이 있었고, 그 아래 타는 듯 붉은 입술에는 뜨거운 열정이 감추어져 있었다.
 고쳐서 비교하자면, 천상의 선녀인들 그 아름다움을 따를 수는 없었다.
 삭풍 에이는 산정에 앉은 백의미서생은 또 다시 천 년 깊은 침묵에 잠겼다.
 만추의 짙은 야색 또한 침묵에 고요함을 더해 주위는 너무도 쓸쓸했다.
 그러다 홀연히 백의미서생의 굳게 감았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리고 마치 검은 밤을 질타라도 하듯 형형한 안광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의 자태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르게 살기가 어려 공포감까지 밀려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발작하듯 광란의 살기를 띠었던 그의 모습은 이내 사라졌다.
 그는 또다시 담담한 눈길이 되어 본래대로 운해 속의 맞은편 절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 점 표정도 없이 석상인 듯 굳게 변하여 오직 눈만을 크게 뜨고 요지부동으로 앉은 백의미서생은 왜, 그리고 무엇을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주시하는 것일까?
 그런데 언뜻 보기에 백의미서생은 중원인의 풍모와는 어딘가 달랐다.
 그의 눈빛은 벽안의 푸른빛이었다. 중원인이라면 새까만 눈동자가 보통이었다.
 게다가 그의 눈빛은 마치 깊고 깊은 호수의 수면 같았다.
 이로 보아 그는 중원인이 아님에 틀림없었다.
 또한 이 벽안이국(碧眼異國)풍의 미서생의 등뒤로 한 자루 장검이 메어져 있음으로 보아 그 역시 무림인이 틀림없었다.
 당금 천하에 벽안이국풍의 외모를 가진 무림인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벽안마영(碧眼魔影)뿐이었다.
 그는 바로 당금 무림에서 벽안마영이라 불리는 자였던 것이다.
 그가 강호무림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불과 일 년 전이었으나, 그 사이 벽안마영의 위명은 천지사해(天地四海)에 떨쳐 울렸다.
 신출귀몰한 행적과 함께 그의 발길이 머무는 그 어느 곳에도 그의 삼 초를 벗어날 수 있는 적수는 없었다.
 그는 결투에 임해서 항상 그 이국풍의 푸른 눈을 굳게 감고 있었다. 오직 손을 써서 상대를 제압할 때 외에는 언제나 눈을 굳게 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행동에 대해 누구도 그 까닭을 몰랐다.
 여하튼 그가 눈을 뜨는 순간 상대는 그의 푸르디푸른 벽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갑고 강렬한 눈빛에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낀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몸이 만년빙궁 속에 떨어지기나 한 듯한 느낌과 비교하면 알맞을 것이다.
 벽안마영에게는 그 신비한 눈빛과 신인(神人)의 경지에 오른 절예가 있었다.
 그의 일신 절예가 가공하리 만큼 고강하나, 그 누구도 그의 손에 의해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그가 상대를 제압한 후에 더 이상의 어떠한 행동도 행하지 않은 채 소리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사라질 때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장탄식과 함께 그 푸른 눈망울에서 깊은 우수의 빛을 흘리고 있었다.
 신비의 눈빛과 함께 신출귀몰한 행적이야말로 나타난 지 불과 일 년도 안 되어 그 위명을 천하에 떨치게 하는 요인이되었다.
 더구나 그는 이를 데 없이 잘 생긴 미남자였다. 그 때문에, 흔치는 않으나 이따금 그가 미소를 한 번 흘리면 천하의 그 어떤 여인이라도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강호를 종횡무진하던 일 년간, 그에게는 수많은 여인들이 유혹의 손길을 뻗쳐왔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마치 영원히 녹을 줄 모르는 대설산(大雪山)의 만년빙(萬年氷)과도 같았다. 그는 숱한 유혹에도 단 한 번일망정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강렬한 태양빛에도 녹지 않을 영원한 냉심(冷心)의 소유자였다.
 그는 실로 신비의 인물이었다. 절세의 준미한 용모와 한기가 감도는 체취, 그리고 신화경에 이른 일신 절학의 삼박자에 대해서는 이미 강호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왜 천하를 정처 없이 떠도는지, 어느 사문의 출신인지를 아는 사람은 전무했다. 가장 중요한 그의 출신 내력 또한 베일에 쌓여 있었다.
 다만 그는 가는 곳마다 의혹과 신비만을 남기는 채 신출귀몰하게 강호 전역을 정처 없이 유랑하는 것이었다.
 흡사 그 누군가를 찾듯 그의 발길은 대강남북(大江南北)의 구석구석까지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 동안 그의 삼 초 아래 무수한 강호 고수들이 패배의 쓰라림을 겪어야 했다.
 정녕 천하의 그 누구도 벽안마영의 삼 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랬기에 자연 그의 등뒤에 멘 한 자루 괴이한 형상의 기형고검(奇形古劍)이 펼쳐짐 또한 아무도 볼 수 없었다.
 벽안마영에 관하여 알려는 바는 이렇듯 일신 절학이 개세적이라는 것과, 그의 외모, 그리고 그의 전투 방식 등 단 세 가지 뿐이다.
 그러나 그의 절학 또한 그것이 중원이 무학인지 아니면 다른 지역의 무공인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그의 무학은 정사(正邪)조차 가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펼치는 초식은 언제나 삼 초식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백의미서생 벽안마영은 묘연한 행적 속에 발길 머무는 곳마다 화제를 꽃피워 무수한 소동이 일어났다.
 그의 결투 방법은 너무도 특이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의 손에 죽은 자 하나 없었고, 결투 후에는 표연히 사라지니 아무도 원한을 품지 않았다.
 원한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단 한 번이라도 겨루었던 자는 한결같이 스스로 진정한 패배를 자인하였다.
 벽안마영은 비록 약관의 청년이나 그는 실로 천외오존 이래 가장 뛰어난 존재였다. 혹자는 그가 천외오존마저 능가할 정도라고 호언할 지경이었다.
 이처럼 온갖 화제를 강호에 꽃피웠던 신비와 의문에 둘러싸인 그가 지금은 대체 어떤 연유로 이곳 인적조차 없는 운소산 절봉 위에 요지부동인 채 앉아 있는 것일까?
 그것도 벌써 사흘 밤낮이 지났다. 하지만 벽안마영의 행동은 여전히 이어졌다.
 황혼도 저물고 어둠이 온 천지에 내리 덮었다. 산정의 한 밤은 삭풍이 거세게 몰아치고 무서리가 내려 지옥처럼 싸늘했다.
 그럼에도 벽안마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뚫어져라 오직 한 곳에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다.
 허공은 마치 구름의 바다 같기도 했고, 암흑의 바다이기도 했다. 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망의 허공에서 도대체 그는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맞은편 절봉의 한 곳에 날마다 하루 두 번 어김없이 똑같은 시각에 절세 용모의 한 여인이 잠깐 동안 모습을 드러낸다.
 그 때마다 그녀는 고색창연한 혈금(血琴)을 탄주하였다. 벽안마영은 천상의 음률인 듯 심금을 울리는 신비 금음은 물론이요, 그녀의 섬섬옥수의 가녀린 손길마저 운해 사이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이곳에 오직 그녀의 금음을 듣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움직임이란 불필요한 것이었다. 단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사지오관(四肢五官) 중에 오직 하루 두 번 그녀를 볼 수 있는 눈과 한가닥 금음을 듣기 위한 청각뿐이었다.
 그러나 벽안마영 동방휘(東方輝)는 스스로 자신의 한 몸에 지닌 사문의 막중한 임무마저 저버리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 했다.
 하루 중 두 번 그녀가 나타나는 시간을 제외하고 공손한 눈길만을 던지고 있을 때면, 그의 생각은 이렇듯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이었다.
 “맹세코 나는 사문의 사명을 저버리지 않았다. 비록 목숨을 바쳐서라도 기어이 임무를 완수할 것이다.”
 그렇게 다짐을 할 때마다 그는 감연히 박차고 일어서 이곳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자리를 뜨려고 하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감정은 이성보다 너무도 앞서 있었기에 다짐을 하여도 그 곳을 떠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수레바퀴 돌 듯 그의 내심은 수없이 후회하고 스스로 꾸짖어도 끝내 미련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맞은편 절봉에 그녀의 자태가 드러나면, 그의 철벽같던 자책마저 눈 녹듯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일개 여인으로 인해 스스로 묶인 것은 사문의 임무를 망각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3
 
 
 동방휘가 맞은편 절봉의 자의소녀(紫衣少女)를 처음으로 본 것은 불과 보름 전이었다.
 벽안마영 동방휘는 강호를 주유하다 하남(河南) 관도를 지나던 중이었다. 그런데 관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진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여 보니, 날카로운 금속성과 파공성이 연이어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동방휘는 어디선가 싸움이 벌어진 것 같다고 생각하여 거의 본능적으로 소리나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단숨에 도달한 곳은 때마침 늦가을의 야색마저 서려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벌판이었다.
 그 곳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한 판의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는 수십 인의 흑의 대한들이 오직 한 명의 소녀를 두고 독랄무비하게 협공하고 있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네 년을 반드시 쳐죽이겠다!”
 흑의 대한들은 어린 소녀를 향해 일시에 강렬한 일 장씩을 퍼부었다. 소녀는 이에 기겁하여 재빠르게 몇 걸음 후퇴했다. 한눈에 보아도 소녀는 도저히 날아오는 열 개의 장풍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동방휘는 평소 강직한 성격에 정도를 걸어왔기에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이 장면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그의 푸른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비열한 무리들이로다! 사내자식 수십 명이 일개 어린 소녀를 상대로 이토록 협공를 퍼붓다니!”
 그는 분노하여 싸움에 가담을 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홀연히 소녀가 한 줄기 냉소를 흘리며, 한 손에 들고 있던 혈금(血琴)의 현(弦)을 가볍게 퉁겼다.
 일순 동방휘의 가슴으로 섬광과 같은 전율이 스치고 지나갔다.
 동방휘의 지고무상한 무공으로도 전율을 느꼈는데, 격전장의 모든 상대들이 한 순간 전율하여 아연 굳어버린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소녀는 살기등등했던 흑의 대한들의 협공을 오직 한 줄기의 금음으로 와해시켰던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소녀는 유유히 장중에서 사라져 어디론가 가버렸다.
 이때, 동방휘는 알 수 없는 야릇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녀와의 실로 예기치 않았던 우연한 만남이 예삿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동방휘는 자의소녀의 그림자가 되어 단 한 시도 그녀의 곁에서 떠날 줄 몰랐다.
 그녀는 실로 천상의 선녀였다. 그 아름다운 자태는 눈을 감아도 너무나 선연히 떠올랐다. 그 절세의 미모는 흡사 수많은 기화요초 중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오직 한 송이의 꽃 중의 꽃인 듯 너무나도 눈부셨다. 게다가 그녀는 길게 흘러내려 수면의 파문처럼 출렁이는 검은 머리카락과 백옥도 따르지 못할 눈부신 살결을 지녔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세류요(細柳腰)가 하늘거리는 것이 미풍에라도 금시 쓰러질 것만 같아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했다. 또한 그녀는 그린 듯 한 검은 눈썹을 지녔으며, 코에서는 혼향을 뿜고 있었다.
 그리고 붉은 입술 사이로 비치는 너무도 새하얀 치아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녀의 자태야말로 어느 화공의 신기로도 가히 그리지 못한 한 폭의 미인도(美人圖)였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단 한 점일망정 속세의 티가 묻지 않았다. 그녀의 청초함은 빗속에 피어나는 한 송이 수선화와 비교하여도 우위였다.
 이후, 벽안마영 동방휘는 비록 그녀 앞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떠날 줄 모르는 그림자가 되었다.
 전정 동방휘는 그녀의 곁을 떠날 수 없었다.
 그것은 정녕 단단한 운명의 끈이 그를 옭아매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야 단 한 번의 만남이 이토록 엄청난 비중으로 그의 가슴을 차지할 수는 없었다.
 동방휘에게 그녀의 존재는 자신의 일부분인 듯 하였다. 아니,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로 부각되고 있었다.
 자의소녀는 웬일인지 그 싸움이 있은 후로 한 날 한 시도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마치 속세를 꺼리는 듯 쉽사리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오직 이름 없는 유곡(幽谷)과 산천(山川)만을 거닐며 간혹 현금을 탄주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슨 곡절이나 있는 듯이 단장의 슬픔을 지닌 듯 애조 띤 가락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금음에 따라 취한 듯 넋 나간 듯 울고 웃고 하였다.
 동방휘는 여전히 그녀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았다.
 십여 일 후, 자의소녀의 발걸음이 여기 운소산에 닿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운소산에서는 유독 그녀가 움직일 줄 모르는 것이었다.
 한 날 한 시도 한 곳에 머무르지 않던 그녀가 이미 나흘이나 지나도록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벽안마영 동방휘 또한 그녀를 따라 이곳에 자리잡은 것이었다.
 그는 나흘 동안 한 모금의 물조차 마시지 못했다. 비록 그 일신의 내공이 절정 수위에 달했을지언정 이리 버티기 힘들었다.
 그의 내가공력은 점차 고갈되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눈은 더욱 광채를 띠어갔다.
 그는 움직이는 것을 영원히 잊어버린 채 이곳에 못박힌 듯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단지 그는 온몸의 모든 정혈(精血)을 오직 눈에만 집중하는 것 같았다.
 이미 무르익은 만추의 삭풍이 더욱 싸늘하고 황량하게 그를 할퀴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그의 요지부동한 자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다시금 해와 달은 거듭나고 저물어 닷새가 지났다.
 그래도 동방휘는 그 자리에 말뚝처럼 좌정해 있었다.
 이날은 유난히도 삭풍이 더욱 불어와 뼈를 에이고 살이 찢기는 듯했다. 하지만 이날조차도 그는 천 년 바위인 양 움직이지 않았다. 이대로 굳어 영영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고, 진정 바위로 화한 듯싶었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유일의 증거는 아직도 빛나고 있는 두 눈의 광채뿐이었다.
 그의 어깨 위에는 밤마다 내려진 서리가 하얗게 얼어붙어 삭풍이 불 때마다 얼음 조각끼리 서로 부딪쳐 바스락 소리를 내었다.
 또 하루의 밤이 지나고 어둠은 걷혀 일출(日出)의 여명 사이로 스러져 갔다. 자애로운 손길인 듯 여명의 빛이 그의 가슴을 비추었다.
 그러나 이미 만추의 햇살인지라 그 빛은 얼어붙은 서리도 녹이지 못했다.
 아직도 그의 눈빛은 짙은 운무를 뚫고 맞은편 절봉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내심은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초조하였다. 이유인 즉, 이상하게도 지난 삼 일간 자의소년가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동방휘는 그녀가 결코 떠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연 사흘째 단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을 뿐이다.
 동방휘는 벌컥 겁을 집어먹었다. 혹시나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시 그녀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외부인의 침입조차 없었다. 그럼, 호······ 혹시! 어디가 아픈 걸까? 아아! 만일 그렇다면 어서 쾌유해야 할 터인데!’
 동방휘의 가슴은 단장(斷腸)의 아픔으로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그 진위 여부가 너무도 궁금했다. 만약에 그녀가 아픈 것이 정말이라면, 누구하나 돌봐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견딜 수 없어 푸르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절봉과 절봉 사이 운무는 여전히 심해처럼 깊고 짙었다. 때문에 동방휘는 절봉의 어디에서도 자의소녀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없었다.
 돌연, 잠룡(潛龍)이 떨치고 일어서듯 동방휘는 분연히 일어섰다.
 한 순간 소매를 떨치는 팟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어깨와 등에 하얗게 내려 얼어붙어 있던 성에와 얼음 조각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마치 섬광인 듯 번쩍거리는 광휘를 발했다.
 이어 순식간에 한가닥 낙성(落星)인 양 산 아래를 향하여 쏜살같이 쏘아져 가는 것이었다.
 때마침 태양은 높이 떠올라 짙은 구름의 바다조차 은빛으로 빛났다.
 지금 운소산 대자연의 광경은 너무도 아름다워 제아무리 바쁘더라도 한 번쯤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고로 아름다운 산일수록 험악한 법이었다.
 이곳 또한 깎아지른 듯한 천 길 절애와 그 사이사이로 칼날인 듯 솟은 기암 거석들로 인해 새도 감히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할 험준한 형세였다.
 그러나 일단 동방휘가 몸을 일으키자 그 어떤 자연의 험악한 형세도 그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동방휘는 한줄기의 광풍이 산하를 넘듯 거침없이 산 아래로 쏘아져 가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그의 모습은 까마득히 사라져, 이윽고 완전히 구름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그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없는 이 자리는 영원히 그 누구도 재차 발을 들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불과 한 식경도 못 되어 건너편 절봉에 한 인영이 번뜩였다. 빛살처럼 번뜩이며 표연히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동방휘였다. 그는 이곳을 떠나 구름의 바다 사이로 보이던 자의소녀의 거처를 찾아간 것이다. 그는 마치 행운유수(行雲流水)와도 같이 곧장 맞은편 절봉에 있던 암동 앞으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암동 앞에 다다랐다. 동굴의 입구는 마치 괴물이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곳으로부터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동방휘의 안색이 해쓱히 변하였다. 분명히 있어야 할 자의소녀가 없는 것 같았다. 동굴 속에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자취가 없었다. 동방휘는 점점 불안해져만 갔다.
 ‘진정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아니야! 이것은 제발 나의 부질없는 기우(杞憂)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자꾸 떠오르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짙은 불안이 마치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돌연 그의 눈가에 격동의 빛이 넘쳐흘렀다.
 ‘그렇다! 기왕 여기까지 온 이상 그녀 앞에 나서는 한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 직접 확인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그녀 앞에 나서기가 사실은 두려웠다. 일방적인 자신의 감정에 대해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혹시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앞서 암동 속에 들어가 보려고 결심한 것이다.
 동방휘의 가슴이 왠지 모르게 크게 뛰었다. 그리고 그는 얼굴 가득 격동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이윽고 발을 들여 놓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안색이 서릿발처럼 굳어졌다. 그는 등뒤로부터 예기치 않게 몇 가닥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안색을 돌이키고, 침착하게 돌아섰다. 과연 어느 사이 동방휘의 서너 장 뒤로 다섯 명의 노인이 나타나 우뚝 멈춰 섰다.
 그러나 그 순간 동방휘의 얼굴빛은 딱딱히 굳었고, 두 눈에서는 더욱더 차디찬 한망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다섯 명의 노인들은 승(僧), 도(道), 속(俗) 등의 갖가지 차림새였다. 순간 동방휘의 눈빛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윽고 동방휘는 그들 다섯 노인의 정체를 간단히 파악해 낼 수 있었다.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동방휘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단말마의 비명처럼 나직이 부르짖었다.
 “천외오존(天外五存)!”
 
 
 제3장 동방휘(東方輝)의 한(恨)
 
 
 1
 
 
 동방휘의 추측대로 그들 다섯 명의 노인이야말로 천외오존임에 틀림없었다.
 회의가사를 입고 양 미간의 백설 같은 눈썹을 휘날리며 짙은 우수의 시선으로 동방휘를 바라보는 백미노승(白眉老僧)은 바로 소림사의 망아였다.
 또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때마침 부는 바람에 황색 도포 자락을 표표히 휘날리는 노도인(老道人)은 다름 아닌 무당파의 현천자이다.
 기승(奇僧) 망아선사(忘我禪師)와 무당(武當)의 현천자(玄天子)는 바로 천외오존의 두 인물로서 공문이성(公門二聖)이라 불리었다.
 그 외, 청색 장포를 입고 동안(童顔)의 청수준미한 중년인(中年人)은 다름 아닌 천하제일의 검도지학을 지닌 천산신검 상관청봉(上官靑峯)이었다.
 또한 전신을 백의(白衣)로 감싼 노인이 대막의 패주인 백타령주(白駝令主) 독고진(獨孤鎭)이었다. 그의 눈빛은 백 년 전 혈기왕성했던 때와 다를 바 없이 너무도 매서워 마치 한 마리의 표독한 맹수와 같았다.
 나머지 한 명은 전신에서 온화한 기운을 뿜으며 유유히 서 있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이었다.
 그 외모로만 논한다면, 이를 데 없이 자애로움을 느끼게 하는 선인(仙人)의 풍모였다.
 그러나 그가 바로 천하제일의 용독대가(用毒大家)로서 그의 온몸이 독으로 뭉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독중지성 만천기(毒中之聖 萬天機)였다.
 그런데 순간, 동방휘는 만천기의 눈가에 언뜻 스쳐 지나가는 한가닥의 음산한 살기(殺氣)를 놓치지 않고 보았다.
 비록 짧은 순간에 거의 보이지 않을 듯 스쳐 가는 것이었으나, 그 눈빛이야말로 보는 이의 가슴을 얼어붙게 하여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동방휘의 전신 근육이 긴장으로 인하여 팽팽히 수축됐다.
 실로 머리털마저 곤두서는 듯 부르르 경련하였다.
 동방휘에게 있어서 천외오존의 돌연한 출현이야말로 실로 전율하리만큼 충격적인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그가 지닌 사문의 임무를 생각한다면, 더욱더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를 데 없이 격동하던 그의 얼굴빛은 순간에 불과했다.
 삽시간에 그의 얼굴은 마치 두터운 얼음 덩어리인 듯 냉혹하게 변해갔다. 눈빛 또한 차갑기 이를 데 없어 보는 이의 심장까지 꿰뚫는 지경이었다.
 동방휘의 표정은 마치 한 마리 성난 흑호(黑虎)의 표정보다 더 험악했다.
 한 순간 동방휘는 싸늘히 좌중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돌연 그는 앙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운소산 구석구석까지 빠짐없이 닿을 것만 같던 동방휘의 사자후(獅子吼)가 한참을 계속되더니, 어느 순간 뚝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낮음 음성으로 말했다.
 “소생은 당신들 천외오존을 일 년간 천지 구석구석까지 찾아 헤매었소. 하지만 수많은 노력을 경주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생은 당신들의 그림자조차 찾아낼 수 없었소. 그런데 마침 당신들 천외오존이 오늘 이렇듯 스스로 나타나주어 의외의 상면을 이룰 줄이야, 정녕 소생은 짐작치 못했소!”
 순간 전신에서 한광을 발하던 백의노인 백타령주 독고진이 말했다.
 “십 년 전, 노부 등 오인(五人)에게 서역의 제일고수인 천뢰존자라는 인물이 패하여 중원에서 도망쳤다. 그는 일대의 종사였으나, 우리에게 후일을 기약하겠다며 패배를 자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십 년 후 자신의 전인을 중원에 파견하겠다고 다짐했다.”
 독고진은 여기까지 얘기하더니, 잠시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얼마 전, 그의 전인을 자처하는 벽안마영 동방휘라는 후배가 무림에 출현했다고 들었다. 그리하여 우리 오 인 또한 그를 일견해 보고 싶어 찾아 헤매였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너를 만나게 되었는데, 보아하니 네가 그 벽안마영 동방휘라는 후배인 것 같구나. 틀림없느냐?”
 순간, 동방휘의 냉막한 표정 사이로 한가닥 미미한 격동의 빛이 흘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예의 만년빙(萬年氷)처럼 차가운 빛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독고진의 물음에 그는 씹듯이 짧은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렇소!”
 그러자, 백타령주 독고진이 광소로써 응대했다.
 “으하하하! 진정 분수를 모르는 후생이로다. 흥! 너의 사부 천뢰존자조차 일찍이 본 영주 등의 앞에서는 이토록 광망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너 따위의 나이 어린 후배가 감히 이토록 광망하다니!”
 순간 백타령주의 날카로운 안광이 섬광처럼 작렬하였다.
 “네 놈의 그 광망함을 고쳐주기 위해서라도 노부 등이 중원무학의 광오무변(廣奧無變)한 정수를 보여주어야겠구나!”
 그러나 동방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어조로 말했다.
 “당신의 그 말은 나로 하여금 정말이지 가소로움 느끼게 하는구려!”
 이 순간 동방휘의 얼굴에 붉은 혈색이 피어올랐다. 이는 너무도 짙은 살의의 번뜩임이었다.
 이어 그는 더욱더 냉혹한 표정을 띤 채 감연히 부르짖었다.
 “나는 선사(先師)로부터 당신들의 비열함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정도요. 흥! 당신들 천외오존이 양두구육(羊頭狗肉)의 탈을 쓴 비열한 자들이면서도 태연히 천하인의 이목을 가린 채 그 존경을 한몸에 받아오다니!”
 동방휘는 갑자기 크게 냉소를 쳤다.
 “흥! 나 동방휘는 진정 생각만 하여도 치가 떨리 지경이오. 그대들과 이렇듯 면전을 맞대고 있으니, 나는 실로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소!”
 이 순간 가장 정신 수양이 깊은 망아 선사의 얼굴에 짙은 분노의 빛이 은은히 어렸다. 그러나 그는 애써 자제하려고 하며 의외라는 듯 물었다.
 “아미타불! 그대는 방금 자신의 사부를 가리켜 선사(先師)라 불렀는데, 그렇다면 그대의 사부는 이미 세상을 등졌단 말인가?”
 그러자 동방휘는 어이가 없다는 웃었으며, 말했다.
 “허! 허허, 그것이 어떻단 말이오? 망아, 당신은 고양이가 쥐의 죽음을 짐짓 애통해 하듯이 그렇게 능청까지 부려야 하겠소?”
 이어 동방휘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났는지 부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세차게 갈았다. 그리고 동시에 분연히 외쳤다.
 동방휘의 눈에서는 원한과 증오가 서린 시퍼런 불길이 이글거렸다.
 “흥! 여전히 모르는 척 시치미 뗄 필요 없소. 당신들은 선사께서 십 년 후 다시 볼 것을 기약하니 이에 불안을 느꼈소. 그리하여 당시 일전에서 내 선사의 몸에 암계(暗計)를 펼쳤던 것이오! 가증스럽게도 말이오. 당신들의 암중 술수로 인해 선사의 천인(天人)에 달하던 일신지학은 한낱 쓸모 없게 쇠퇴하고 마침내 삼 년이 지났소. 그러나 그 동안 선사의 상세는 도무지 속수무책이었소. 그리하여 선사는 그만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셔야 했소!”
 그의 분노에 찬 노후는 온 산악을 뒤흔들었다.
 돌연, 동방휘는 그 섬뜩하리 만큼 무서운 시선을 백타령주 독고진에게 던졌다.
 “백타령주! 당신은 독문의 절세 신공인 혈잔마환귀령수(血殘魔幻鬼靈手)로써 선사와 대결할 당시에 한가닥 귀음소혼(鬼音銷魂)이라는 음공을 베풀어 선사로 하여금 자신도 의식치 못하는 사이에 치명적 상세를 입힌 장본인이오!”
 동방휘 어조에는 힘이 가득했고, 백타령주 독고진을 향한 강렬한 눈길에는 뼈에 사무친 원한이 가득했다.
 “당신이 입힌 상세는 너무도 악독하여 선사의 팔괘음혈(八卦陰穴)이 송두리째 녹아 흐르게 되었소. 그러나 선사께서 그것을 깨우쳤을 때는 이미 회복 불능의 경지였소! 너무도 당연한 일로 이때 이미 선사의 내공 수위는 극도로 미약해져 있었소! 선사께서는 생각다 못해 마침내 스스로 무공을 폐쇄시키려 하셨소!”
 그의 눈에서 타오르던 원한과 증오의 불길이 더욱 처절한 기세로 이글거렸다.
 “그러나 선사는 무공을 폐쇄하기 전 크나큰 위험 부담을 안고 최후의 시도를 감행하셨소. 그러나 그것마저 독중지성 만천기가 암중 시전했던 무영탈혼(無影奪魂) 천독지(千毒指)의 독랄한 위세에 의해 아무런 상과도 거둘 수 없었소!”
 동방휘가 홀연히 눈길을 돌려 자신을 노려보자 독중지성 만천기는 잠시나마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방휘는 실로 구천에 사무치는 한으로 부드득 이를 갈고 있었던 것이다.
 “독중지성 만청기! 십 년 전 그대는 내 선사와 더불어 암기수법을 비견하였다. 당시 내 선사께서는 서역의 일대 절기로 알려졌던 통천비발(通天飛鉢)을 사용하셨다. 이에 맞서 당신은 만천혈화무영신침(滿天血花無影神針)으로써 승부를 논하였다. 결과 당신의 수법은 나의 사부를 능가하는 위력이었다. 이에 사부께서는 의연히 패배를 자인하시고 순순히 물러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순간 당신은 한가닥 무영탈혼소혼지(無影奪魂 魂指)의 극악무도한 암수를 암중 시전하지 않았던가?”
 그의 분노에 찬 절규에 산천마저 얼어붙는 듯하였다.
 “흥! 그대들이 이처럼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도 감히 태연하다니! 참으로 하늘을 우롱하는 처사로다. 이러한 만행의 저의야말로 너무도 뻔한 것이다. 자신들의 적수를 아예 뿌리 뽑겠다는 독랄한 심보가 맞지 않는가? 흥! 과연 그 간교함에 어긋남 없이 암중 수법은 성공하였다. 그러하니 내 선사께서는 아직 살아 계실 리 만무하지 않는가? 그러고도 내 선사의 생사를 내게 묻고 있는 가증스러운 망언을 하다니!”
 그는 또다시 부드득 이를 갈았다. 이 갈리는 소리에 오 인은 실로 모골이 송연했다.
 장중에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동방휘의 긴 사연을 전해 들은 천외오존의 안색은 잿빛으로 침울했다. 그리고 동방휘는 마치 제자에게 이제 막 회초리질을 마친 스승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방휘의 입가에 일순간 희미하고도 미묘한 신비의 미소가 감돌았다.
 “당신들은 과연 쾌재를 불러도 좋소. 다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이로써 모든 일이 끝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오. 즉, 선사께서는 서역으로 돌아온 즉시 자신이 당신들 천외오존의 비열한 암습에 걸려 이미 최후가 임박했음을 알아차리셨소. 그리하여 당신의 원한을 풀어줄 후계자에게 그 최후의 불꽃을 온통 사르셨소!”
 여기까지 말을 마친 동방휘는 운소산 기암 절벽이 모두 무너져 내릴 정도로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때아닌 웃음에 천외오존이 어리둥절하는 찰나 그는 마치 실성한 듯 부르짖었다.
 “당신들은 정녕 알고 있는가? 만일 당신들의 비열한 수법만 없었더라면, 나 동방휘야말로 서역 제일의 종파인 보수종(菩修宗)이 선정한 생불(生佛)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생불(生佛)! 이는 진정 사문(師門)으로서 최상의 영광이요, 서역 밀종의 제자라면 그 누구나 열망해 마지 않는 자리이다. 그러나 선사이신 천뢰존자의 원한이 너무도 구천에 사무쳤기에 나는 그 생불의 보위에 오르는 것을 스스로 포기했다. 그 대신 오백여 년간 서역 보수사에 비장(秘藏)되어 전해 내려온 밀종 희대의 무학 비전 범천륜화마황경상의 절예를 익히기로 하였다. 선사를 잃은 슬픔과 함께 생불의 보위마저 포기하고 내 스스로 바라지 않던 무학 수련의 길을 걷게 될 줄은 나 자신조차 몰랐다. 그러나 슬픔 위에서 피나는 고련 끝에 항마의 뜻을 지닌 절예를 성취하던 날, 나는 진정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였다. 그 맹세는 바로 그대들 천외오존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의 겁화 속으로 떨어뜨리겠다는 것이다.”
 동방휘는 갑작스럽게 몸을 돌리고 팔짱을 끼며 나직이 부르짖었다.
 “이제 알겠는가? 내가 당신들 스스로 나에게 찾아온 사실을 기뻐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한 명도 아니고 오 인이 한꺼번에 이 자리에 나타났으니, 나는 더욱 기쁘기 그지없다.”
 말을 마친 동방휘는 그 어느 때보다 광포한 앙천 대소를 터뜨렸다.
 순간, 산정(山頂)의 주위로 자욱히 흐르던 백운무해(白雲霧海)가 산산이 흩어졌고, 그 진동의 여운이 온 산악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실로 가공할 내공 절학의 발로가 아니면 실현할 수 없는 경지였다.
 “흑! 저 나이 어린 후배의 내공 조예가 설마 이런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니! 믿을 수 없다.”
 
 
 2
 
 
 동방휘의 앙천 대소에 귀 아파할 여유도 없이 천외오존은 일제히 아연실색했다. 비록 백 년 전 천하를 주름잡던 광세마두 수라제천마저 격패시켰던 그들이었으나, 이 자리에서는 실로 형언키 어려운 두려움을 느꼈다.
 천외오존의 오 인은 동방휘의 노후(怒吼)로부터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이때, 문제의 장본인으로 지목 당한 천외오존 중의 두 기인 독중지성 만천기와 백타령주 독고진의 얼굴은 푸르락붉으락 실로 가관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광분해 마지 않았다.
 홀연히 백타령주 독고진이 커다란 광소와 함께 동방휘를 향해 부르짖었다.
 “으하하하! 네가 세치(三寸) 혀로써 없던 말을 꾸며 감히 노부 등을 농간하다니! 이는 정녕 천외오존의 명성에 씻을 길 없는 오욕이다. 애송아, 노부가 네 놈을 단호히를 징벌하여야겠다.”
 돌연 독고진의 일신 신형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 순간 그의 온몸이 피로써 적셔지는 듯 시뻘겋게 화하더니, 마치 유성인 양 쾌속무비하게 앞으로 쏘아져 가는 것이었다.
 동시에 백타령주 독고진의 신형은 서너 개의 분신을 창출해냈다.
 갈라진 그의 신형은 일제히 동방휘의 전신을 에워쌌다. 그러고는 바다가 송두리째 뒤집혀 끓어오르듯 거대한 핏빛 경력이 동방휘에게 쇄도해 갔다.
 그러나 경쾌한 일성과 파공음이 들리는 순간 동방휘의 신형은 마치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정녕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신기조화였다.
 “헉!”
 진력으로 일격을 가하던 백타령주 독고진은 너무도 당황하여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또다시 허공에 한가닥 공허한 파공음이 작렬하였다. 그 순간 독고진의 일격은 여지없이 무산되어 춘풍의 도화인 양 분분한 혈화(血花)만을 휘날릴 뿐이었다.
 백타령주 독고진은 당황하다 못해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그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전으로 한가닥 차가운 조소가 들려왔다.
 “혈잔마환귀령수에 대해 비록 스스로가 천하제일의 절예로 자부할지 모르나, 내게는 수많은 사도방문지학 중 하나밖에는 특별한 것도 없소! 흥, 당신이 겨우 이 정도의 잔재주로 감히 나를 상대하려 하니, 나로서는 섭섭할 뿐이오.”
 백타령주 독고진은 흑빛으로 화한 얼굴로 황급히 동방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동방휘는 어느 사이에 그 곳으로부터 삼 장이나 멀리 떨어져 유유히 비웃고 있었다.
 독고진의 흑빛 안색이 이제는 창백하게 변하였다.
 동방휘가 이처럼 몸을 피한 수법이야말로 정녕 희세적 신법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천외오존 중 나머지 네 명도 동방휘의 신화에 달한 신법을 보고 아연 경악해 마지 않았다.
 동방휘는 마치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비록 가슴에는 천추에도 씻지 못할 혈한을 품었으나 자태만은 유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는 정녕 그의 무학이 지고의 경지에 달했음을 단적으로 웅변해 주고 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때, 백타령주 독고진은 최초의 충격에서 벗어나 얼굴 전체가 푸르락붉으락 말이 아니었다.
 독고진은 백 년에 걸쳐 천외오존 중의 일 인으로 억만창생으로부터 추앙받아 왔고, 일찍이 유래 없던 불세출의 대마두 수라제천마저 무림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런데 이제 겨우 약관을 면치 못한 나이 어린 후생에게 이런 치욕을 당하고 보니, 그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끓어올랐다.
 “동방휘! 잘 들어라! 오늘 노부가 네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면, 내 스스로 천외오존 중의 일 인임을 포기하마! 각오하거라, 애송아!”
 그의 날카로운 면모에 서릿발 같은 원한이 서리자 그 기세는 모골을 송연케 했다.
 마치 태풍의 전야처럼 갑작스럽게 장내는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 상황은 바로 독고진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려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찰나 누군가가 벽력같이 소리를 질렀다.
 “독고 노형, 잠깐 참으시오!”
 이어 장중으로 청색 장포를 휘날리며, 그 면모도 청수하고 준미한 중년인 하나가 쾌속히 뛰어들었다. 그는 다름 아닌 천산신검 상관청봉이였다.
 백타령주 독고진이 흠칫하며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천산신검 상관청봉은 개의치 않고 오직 동방휘만을 똑바로 직시했다. 이어 그는 동방휘를 향해 거역할 수 없이 준렬하게 입을 열었다.
 “노부가 그대에게 묻겠다.”
 그러자 동방휘는 형형한 안광을 발하며, 그에게 대꾸했다.
 “흥! 내가 이미 모든 사실을 밝혔는데, 당신은 이제 와서 새삼스레 또 무엇을 묻겠단 말이요?”
 상관청봉은 동방휘의 반문을 못 들은 척하며, 낭랑한 어조로 말했다.
 “노부는 비록 너의 말을 들었으나, 그 말의 진위 여부에 관해서는 솔직히 판단하지 못하겠다. 십 년 전 당시 선사와의 대결에는 물론 노부도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 때 노부는 이런 일이 있었음에 대해 일말의 눈치도 채지 못했다. 그러니 어찌 네 말을 선뜻 믿을 수 있겠느냐?”
 동방휘는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
 “흥! 믿고 안 믿고는 당신 마음이요. 다만 이 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을 밝혀두겠소!”
 천산신검 상관청봉의 목소리가 어느덧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탄식과 함께 강력한 어조로 이어지는 한마디를 던졌다.
 “허허! 일찍이 천외오존이 강호에 나선 이래 단 한 점의 오욕도 남기지 않았거늘! 너야말로 명심하라, 이 일은 천외오존 전체의 명예에 관계되는 바 노부 등이 기어이 철저하게 규명할 것이다.”
 동방휘는 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돌연 무섭게 호통쳤다.
 “당신들은 명백히 가증스러운 추태를 자행하고서도 이제 와서 새삼 그럴 듯한 명분 따위로 은폐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천외오존이 양두구육의 탈을 쓴 위선자임을 증명함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어 그는 하늘이 무너져라 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 당신들 천외오존이 짐짓 겉으로는 인의(仁義)를 가장하고 천하 모든 사람을 속여왔어도 나 동방휘는 결코 속일 수 없을 것이다.”
 이 순간 천산신검 상관청봉의 얼굴이 창백히 변하였다. 동방휘의 한 마디는 일찍이 겪어보지 못했던 치욕적 언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천산신검 상관청봉은 분노를 누르고 침착한 마음을 유지하며 말했다.
 “우매한 후생! 네가 감히 천외오존을 안중에 두지 않는 듯 함부로 광언을 늘어놓는구나!”
 연이어 그는 서릿발처럼 단언했다.
 “그렇다면 이 일의 진위를 가리기 전에 먼저 너의 어리석음부터 깨우쳐야겠다.”
 그가 표연히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등뒤의 검을 휘어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아미타불!”
 일성 청아한 불호 소리가 폭풍전야와도 같은 긴장을 잠시 침묵시켰다. 말할 것도 없이 불호를 외운 장본인은 기승 망아 선사였다. 그는 상관청봉을 가벼운 손짓과 더불어 만류했다.
 “상관 대협, 잠깐 진정하시오!”
 장내는 다시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고, 그 와중에 망아 선사의 눈빛이 동방휘에게로 닿았다. 그는 눈까지 덮은 백미를 분분히 휘날리며 말했다.
 “노납이 동방 시주에게 한 가지 묻겠소. 노납을 비롯하여 우리 천외오존은 광세마두 수라제천을 격패시킨 이래 사십 년이 지난 후 강호에서 은거하여 나타나지 않았다. 그대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흥!”
 동방휘는 망아 선사의 정중한 질문에도 대답치 않고 오직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을 뿐이었다. 그러자 망아 선사의 백설처럼 흰 눈썹이 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애써 격동을 자제하며 침착히 말하였다.
 “사실, 노납 등 우리 천외오존이 지난 육십 년간 강호에 나타나지 않았음은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즉,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같은 산중 안에 두 마리의 범이 있을 수 없는 법이었기 때문이다. 하여 노납 등은 각자 지닌 바 절학을 비교하여 천하제일 고수를 가려내려 하였다. 그러나 우리 오 인이 비록 서로 대소의 우열은 있었지만, 어느 한 사람을 천하제일이라 단언할 수는 없었다.”
 동방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 말을 들었다. 그 모습에는 어떠한 말에도 결코 원한을 지울 수 없다는 단호한 결의가 엿보이고 있었다.
 태양은 중천에 떠올랐지만, 만추의 양광(陽光)은 이미 빛을 잃었고 다만 삭풍만이 살을 에일 뿐이었다.
 바람소리에 흩어지지 않으려는 듯 망아 선사의 음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에 노납 등 천외오존은 서로 헤어져 십 년마다 한 번씩 만나기로 하였다. 물론 그 때마다 서로의 절기를 비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십 년 전 그대의 선사가 중원 제패의 야욕을 품고 출현함에 우리는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십 년 전을 회고하는 망아 선사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상이 서렸다.
 “우리 천외오존은 각자의 절학으로 그대의 선사와 겨루었는데, 결과 그대의 선사는 패배하였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그대 선사의 패배라고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천뢰존자는 우리들 오 인이 자랑하는 각자의 절기와 똑같은 수법으로 겨루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가 그러하지 않고 일신의 모든 재주를 발휘하여 우리와 일 대 일로 겨루었다면 우리 중의 그 누구도 천뢰존자를 능가하지 못했을 것이다.”
 망아 선사의 음성이 더욱 높아져 갔다.
 “더욱이 그가 후일을 기약하였을 때 일말의 불안을 느꼈음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십 년이 지난 오늘 강호에 혜성처럼 등장한 벽안마영이라는 별호의 그대 동방 시주가 그의 후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순간 망아 선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십 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그대가 진정 천뢰존자의 절학을 이어받은 후인임에 틀림없다면 능히 우리를 능가하리라 짐작하고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돌연 노승은 백미에 뒤덮여 거의 보이지 않던 눈을 번쩍 떴다. 여느 때 없이 형형한 안광이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대의 선사 천뢰존자가 제아무리 무서운 강적이었을지언정 조금 전 그대 동방 시주의 말처럼 독고 시주와 만노시주 두 분이 오욕을 자초하고 자존심마저 버리면서까지 암수를 썼으리라고는 결코 믿어지지 않는다. 만일 이 일이 사실일 경우 노납이라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사전에 말해 둔다. 그러나 그 일은 우리들 천외오존 모두에게 관련된 것인지라 결코 섣불리 경거망동할 수 없다. 노납의 말뜻을 알겠는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방휘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망아 선사, 당신의 말은 제법 그럴 듯 하지만 결국 결론은 당신들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변명하려 함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되오. 그렇다면, 내가 묻겠소!”
 벽안마영 동방휘의 푸르디푸른 두 눈에서 쏟아지는 광망이야말로 진정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당신은 내가 감히 선사를 빙자하여 그대들을 기만하려 한다고 생각하시오?”
 망아 선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흥! 만일 그렇게 의심한다면 나는 절대 거짓이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하겠소!”
 동방휘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망아 선사의 눈이 번쩍 빛났다. 만일 정말 동방휘의 말처럼 명백한 증거가 제시된다면, 망아 선사로서는 기타 천외오존의 한 인물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때, 동방휘는 품속으로부터 무엇인가 꺼냈다. 이어 그는 삭풍이 에이는 허공을 향해 분연히 외쳤다.
 “보라! 오늘을 위하여 여기 칠 년 전 당시 선사의 시신(屍身)을 화장할 때 거두어 보관했던 것이다.”
 때마침 부는 삭풍이 그의 손에 쥐어진 붉은 보자기를 찢어진 기폭처럼 휘날렸다. 그 안에는 세 개의 거무스레한 물체가 담겨 있었다.
 
 
 3
 
 
 동방휘는 이 물체를 가리키며 분노에 찬 목소리를 허공 가득 메아리 치도록 흘렸다.
 “이것은 내 선사의 유골이다. 이는 화장 후에도 사리(舍利)로 화하지 않았던 세 조각의 유골인데, 마치 먹물인 듯 검다. 이유가 무엇인 줄 아는가?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다. 이는 저 가증스러운 만 늙은이의 독수(毒手)에 의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 조각의 검은 유골은 그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명백한 증거였다. 일순간 망아 선사의 얼굴에 곤혹의 빛이 떠올랐다.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이럴 수가! 만노시주, 이것이 진정 사실이오?”
 이 순간 독중지성 만천기의 얼굴은 푸르락붉으락 실로 당황을 금치 못하는 빛이 역력했다. 한 마디 변명조차 못하는 데다가 만천기의 얼굴빛이 변해 가자, 망아 선사는 동방휘의 말이 사실임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망아 선사가 신음하듯 내뱉으며 분노를 격발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독중지성 만천기가 갑작스레 광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으하하하! 망아, 당신마저 나를 모욕할 셈이오? 나는 이처럼 어이없는 누명에 대해 결코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으니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이때 백타령주 독고진도 침묵한 채 짙은 살기만을 발할 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천산신검 상관청봉, 현천자 등은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다는 듯 실로 곤혹에 찬 표정이있다.
 이때 독중지성 만천기가 재차 분연히 부르짖었다.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건대 나 독중지성 만천기는 결코 천외오존의 명성에 먹칠을 하지 않았다. 망아 선사, 그리고 나머지 세 분, 비록 우리가 걷는 바 정(正)과 사(邪)의 길이 다를망정 지난 백 년간 함께 고락하며 우의를 나눠왔는데 이제 한낱 나이 어린 애송이의 세 치 혀에 놀아나 노부를 의심할 줄은 몰랐소! 이제 보니, 나의 생애가 너무도 비참하기 그지없소.”
 돌연 그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나 만천기는 피할 수 없는 누명을 썼다. 이에 죽음으로써 결백을 밝히고자 한다!”
 순간 그의 손이 번뜩 움직였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 시뻘건 선혈이 솟구쳤다.
 “앗! 만노시주!”
 천외오존이 일제히 부르짖었다. 그러나 천외오존 중 나머지 사 인이 말릴 겨를도 없이 만천기는 스스로 천령개를 찍어 자결하고 만 것이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에 일어난 변고였다.
 나머지 천외오존은 아연 경악하여 넋을 잃었을 정도였다.
 이때 백타령주 독고진이 부드득 이를 갈며, 분노가 구천에 사무치듯 광분하여 소리쳤다.
 “우리들 천외오존이 백 년간 함께 지내오다가 이런 참화에 놓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모두가 저 애송이의 간교한 수작 때문이다. 동방휘! 네놈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다.”
 망아 선사 역시 그의 말을 긍정하듯 살기충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독중지성 만천기의 예기치 않은 자살에 놀란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동방휘 역시 순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당황하고 있던 동방휘를 향해 백타령주 독고진이 다시 소리쳤다.
 “모두 저자를 협공하여 그 피로써 만형의 영혼을 위로해야 할 것이오!”
 이윽고 망아 선사가 은은한 노기마저 띠고 동방휘에게 힐책을 던졌다.
 “아미타불! 그대는 어찌하여 거짓으로 만노시주를 모함하였는가? 그 때문에 만노시주가 죽음에까지 이르렀으니, 이 일은 응당 그대에게 책임이 있는 게 분명하다.”
 동방휘가 이내 응수하였다.
 “흥! 그는 스스로 잘못하여 죽음을 택했을 뿐 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소!”
 망아 선사가 그 말에 참을 수 없다는 듯 분연히 소리쳤다.
 “소시주! 그대는 소승의 힐책에도 반성치 못하고, 아직도 간교한 수작을 부리려 하는구려!”
 “선사, 당신은 나를 핍박하지 마시오. 그가 죽은 것은 스스로의 죄를 인정했기 때문이오!”
 동방휘는 독중지성 만천기의 죽음이 자신의 책임은커녕 응당 죽어 마땅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에 망아 선사는 더할 수 없이 분노했다.
 “닥쳐라! 죽음을 눈앞에 두고 거짓을 행하는 자가 고금에 걸쳐 누가 있느냐? 그대는 결코 망인(亡人)을 욕되게 하지 마라!”
 “그렇다면 당신들이 감히 나의 사부를 의심한단 말인가?”
 이에 백타령주 독고진이 차디차게 웃었다.
 “흐흐흐! 애송이, 너는 오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결코 여기에서 떠나지 못할 것이다!”
 스르릉!
 차가운 금속성이 울렸다. 천산신검 상관청봉이 그의 명성도 드높은 백룡신검(白龍神劍)을 뽑는 소리였다.
 동방휘는 차디찬 코웃음을 날렸다.
 “흥! 당신들이 기어이······,”
 이어 그의 얼굴에는 단호한 의지의 표정이 서렸다.
 바야흐로 일전을 피할 수 없는 결정적 시기였다.
 “천외오존의 이름을 더럽히고 중원무림을 모독하는 자, 이에 하늘을 대신하여 너를 징벌하니 너무 원망치 말라!”
 홀연히 한가닥 인영이 번뜩이며, 청색 푸른 검광이 동방휘에게 섬전처럼 날아갔다. 이어 망아 선사와 현천자, 그리고 백타령주 독고진은 일제히 협공하였다.
 천외오존 중 사 인은 동방휘를 향해 경천동지의 대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 대공세의 위력은 무림 천 년의 유구한 세월 중에서도 일찍이 그 유래가 없던 불세출의 대마두인 수라제천마저 패하게 할 정도였다.
 비록 각자의 우열은 있으나 각각 독보적 경지를 자랑하는 다섯 기인 천외오존이 분노한 끝에 협력하는 기세는 실로 하늘을 무너뜨리고 땅이 갈라질 정도였다.
 그러나 동방휘는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대공세에도 불구하고 싸늘한 코웃음을 쳤다.
 “흥!”
 순간 동방휘는 극도로 빠른 신법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장내에 한 차례 커다란 굉음이 진동하는 순간, 동방휘는 실로 득의하며,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괴변이었다. 동방휘가 천외오존의 가공할 협공을 간단하게 피해낸 것이었다. 이에 천외오존 중 사 인의 얼굴이 일제히 변하였다.
 그러나 이때 천산신검 상관청봉이 분연히 소리쳤다.
 “애송이! 제법이다. 그렇다면 노부가 단신으로 너를 상대하겠다.”
 여전히 동방휘는 얼굴에 차가운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군자는 극기로써 스스로를 자제하는 법이요! 당신의 그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에서 나온 태도는 후일 반드시 그대에게 치명적 실패의 원인이 될 것이오!”
 이 한마디는 간단히 말해서 스무 살의 새파란 청년이 백 살 넘은 노인에게 훈계를 하는 꼴이었다. 그러하니 백 살이 넘은 노인에 해당하는 상관청봉으로서는 분노가 하늘까지 치밀어 오르는 게 당연했다.
 “닥쳐라! 네가 감히 누구를 훈계하는 것이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관청봉은 동방휘에게 일검을 쓸어갔다. 그가 강호 천지에 자랑하는 일대의 절세 검식 천강십이식이 숨돌릴 사이도 없이 연거푸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천강십이식, 이는 본시 전후의 각 사식(四式)과 후 삼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먼저, 기수세인 제일 초 섬(閃)이 실로 섬광처럼 작렬하기 무섭게 전(電), 뇌(雷), 사(射)가 쏟아졌다.
 “흐흠!”
 벽안마영 동방휘가 아무리 뛰어난들 이러한 공격을 감히 경시할 수 없었다.
 천산신검의 예리무비한 공세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잇따라 후삼식 유(流), 폭(瀑), 참(斬), 어(禦) 등은 실로 파죽의 기세로 동방휘를 휩쓸어갔다.
 그러나 벽안마영 동방휘는 이내 정신을 추스렸다. 그리고 추호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한 가닥 담담한 미소마저 흘리며 이에 맞섰다.
 그는 신기에 달한 신법으로써 마치 빛살인 양 이리 번뜩 저리 번뜩 몸을 피하며, 양장(兩掌)을 번갈아 휘둘렀다.
 쏴아!
 마치 죽림을 누비는 찬바람인 듯 예리하고도 모골이 송연한 소리가 들렸다.
 동방휘의 공격도 이에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는 이어 유유히 뻗치는 십여 가닥 지풍을 날렸다. 이는 바로 밀종의 비공 밀종대수인(密宗大手印)이었다.
 이러한 동방휘의 반격에 그토록 광포무비하던 천산신검의 전후 팔식검식조차 헛되이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자 천산신검 상관청봉의 안색이 창백히 변하였다.
 “이······. 이럴 수가!”
 그는 지금 벌어진 상황에 대해 도무지 인정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애송이, 이번에야말로 각오하라!”
 상관청봉이 전력을 다하여 동방휘를 덮쳐 가니 그 기세가 마치 천군만마(千軍萬馬)의 쇄도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이 무서운 기세에도 동방휘는 여전히 차갑게 비웃을 뿐이었다.
 “얼마든지 공격해 보거라!”
 순간 동방휘의 장지(掌指)가 갑자기 변하였다. 거세난만의 경기가 폭사되는가 싶자, 그 기세가 홀연히 변하여 마치 뼈가 없는 양 흐물흐물한 한가닥 괴이한 장력이 흐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기세는 온유한 중에 무섭도록 강맹하여 그 어떤 수법으로도 맞설 수 없었다.
 이 역시 밀종의 독문절예인 대라의산수(大羅儀算手)와 유가신공(幽加神功)이었던 것이다.
 역시 동방휘가 쏟아낸 절기에 천산신검 상관청봉은 전력을 다했으나, 막아내기 힘들었다. 이에 상관청봉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여전히 그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파황(破荒)!”
 그가 피를 토하듯 부르짖었다. 그에 이어 또다시 그는 죽음의 목소리를 토해 냈다.
 “쇄혼(碎魂)!”
 그러자 태산이 무너지듯 엄청난 검세가 동방휘에게로 밀려왔다.
 상관청봉이 지금 펼친 이 식은 다름 아닌 그가 스스로 천하에 자랑하던 천강십이식 중 최후의 후 삼식이었던 것이다.
 동방휘의 유가신공은 이러한 검세에 밀려 자칫하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삼관청봉은 크게 득의하고,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각오하라! 멸천(滅天)!”
 멸천, 이는 진실로 무상의 절초였다. 만일 이를 펼치고도 승리할 수 없다면 오히려 시전했던 자가 절명하게 되는 최후의 필살 일 초였다.
 이때, 벽안마영 동방휘는 얼굴에 단호한 결의를 떠올림과 동시에 손을 들어올렸다.
 찰나, 그의 두 손이 마치 거대한 수레바퀴인 듯 변하며 하나의 신비로운 핏빛 일륜(日輪)이 허공에 드리워졌다.
 그것은 해질 무렵 붉게 타는 태양의 화려함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하나의 대일륜(大一輪)이 허공에 나타나는 순간, 그가 다시금 양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크고 작은 십여 개의 일륜이 찬란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네 명의 절세 고수는 이 장면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동방휘의 일 초는 거듭 변화하여 정녕 헤아릴 수 없는 탄복의 경지를 속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감탄의 순간도 잠시 뿐, 홀연히 한 줄기의 거대한 금빛 광채가 불기둥처럼 솟구쳐 오르더니 곧장 네 사람을 향하여 쏘아져 가는 것이었다.
 “아앗!”
 천외오존 중 사 인은 대경실색하여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앗!”
 이 순간 그들은 목전의 이 일장이야말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리 만큼 지고무상한 위력이 담긴 것을 깨달았다.
 본능적인 위기가 엄습한 순간 그들은 대항하는 것마저 포기하고 즉시 신형을 후퇴시켰다.
 슈슈슈슉!
 네 가닥의 금빛 기류가 괴이한 소리와 함께 그들의 귓전을 스쳤다. 이어 작렬하는 경천동지의 굉음이 울려 퍼졌다.
 꽈르르릉!
 그러자 그들의 옆에 있는 하나의 거암(巨巖)에 금빛 찬란한 장인(掌印) 하나가 새겨지며, 미세한 돌가루가 허공으로 날렸다. 잠시 뒤에 또 한 차례의 굉음이 들려왔고, 거대한 암석은 송두리째 녹아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아앗!”
 천산신검 상관청봉은 물론, 망아 선사와 현천자, 백타령주 독고진도 일제히 크게 놀라고 말았다.
 “이럴수가!”
 그들로서는 도대체 벽안마영 동방휘의 방금 이 일 초가 어떤 초식인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들은 비록 이 초식에 대해 알지 못하였으나 이 일 초의 위력에 대해서는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한 초식이 천하의 그 어떤 절학보다 뛰어나고 가공할 위력을 가진 신공절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순간 그들은 또 한 가지를 느꼈다. 그들은 백 년 전에 수라제천과 대결했던 이래 처음으로 결코 얕볼 수 없는 강적에 직면하였다고 느낀 것이었다.
 “아미타불!”
 망아 선사가 목청도 드높게 불호를 내었다.
 “벽안마영 동방 시주! 그대의 방금 절륜무쌍의 그 초식이야말로 지난날 천뢰존자가 말하던 범천륜화마황경 중의 일식인가?”
 그 말에 동방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 점 감정도 깃들이지 않은 채 차갑게 대꾸하였다.
 “그렇소. 조금 전 내가 시전하였던 일 초야말로 범천륜화마황경의 세 가지 경세지학(經世之學) 중 하나인 범천금륜신공(梵天金輪神功)이오!”
 
 
 제4장 죽음
 
 
 1
 
 
 동방휘의 장엄한 목소리 끝에 그들 네 명의 얼굴에는 일제히 자제할 수 없는 격동의 빛이 흘렀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격동의 빛은 결코 두려움이 아니었다.
 무림에 전해진 적은 없지만, 천외오존은 십 년 전 천뢰존자로부터 서역 밀종 최대의 극고 비급 범천륜화마황경의 존재를 들은 바 있었다.
 그런데 그 한낱 전설과도 같아 실감할 수 없었던 지고무상의 비급이 홀연히 현실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천외오존의 바로 앞에 그 절학을 지닌 인물이 실제로 출현했다.
 지금 이 순간, 천외오존은 단지 이 신비한 인연에 놀라워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상대의 절학이 비록 신화에 달했을지언정 자신들의 절학 또한 서역 밀종에 뒤지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입을 벌려 말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그들에게는 일말의 불안은 있었다.
 조금 전 전력을 다하여 합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동방휘는 추호도 패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천외오존은 내심 초조했던 것이다.
 또한 결정적으로 만일 자신들이 이대로 그와 싸운다면 종국에는 결코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는 비록 그 누구도 입을 벌려 말하지는 않았으나, 이심전심으로 서로의 의중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가 이제야말로 추호의 방심도 없이 자신들이 지닌 일신절학을 극고의 경지까지 최대한 발휘해야 하리라고 은연중에 약속한 셈이었다.
 일순간 그들 네 명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은은한 살기가 어렸다.
 동방휘 또한 형세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경각심을 곤두세웠다.
 깊은 침묵이 흘렀고, 주위에는 팽팽한 긴장만이 고조되어 갔다. 산중의 황혼은 그 어디에서보다 일찍 찾아드는 법이었다. 이곳 또한 아직 해는 저물지 않았으나, 으스름한 어둠이 내려오고 있었다.
 휘잉!
 뼛속까지 에일 듯 찬바람이 불어왔으나, 장내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오히려 터질 듯한 긴장의 연속으로 이곳은 후덥지근하기까지 했다.
 긴장과 초조 속에서 모두의 얼굴에 붉은 빛 형형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때, 천산신검 상관천봉이 홀연히 침묵을 깨뜨리며 사납게 부르짖었다.
 “벽안마영! 스스로 분수조차 모르고 날뛰는 어린 녀석아! 조금 전 노부는 약간 너를 경시하였기에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번에야말로 너에게 똑바른 가르침을 주어야겠구나!”
 그의 전신 손발이 있는 대로 곤두서 때마침 부는 삭풍에 분분히 휘날렸다.
 천산신검 상관청봉은 본시 천외오존 중 가장 준미수려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나이 백여 세가 넘었음에도 중년인 같은 홍안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심에서 끓어오르는 격분을 참을 수 없었던 탓에 얼굴 표정이 그 누구보다도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와 대조되게 벽안마영 동방휘는 상관청봉의 노성에도 아랑곳없이 묵묵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이를 데 없이 착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그는 진정으로 이들 천외오존과 생사지투를 벌이겠다고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선사의 죽음에 대하여 얽혀진 의혹의 진상만을 추궁하고 싶었다.
 천외오존이 비록 지난날 선사와 대결하며 암중 음모를 꾀했다 하나 그들 모두가 비열한 암수를 썼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의 암중 흉수를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천하로부터 근 백년 동안이나 추앙받는 절세의 고인들인 것이다.
 그러나 동방휘의 이처럼 소박하기까지 한 열망은 독중지성 만천기의 예기치 않았던 자결로 인해 결코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그는 착잡한 내심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이들과 기어이 생사의 일전을 벌여야 하는가?”
 만일 그가 일신의 신공을 펼친다면 이들 천외오존은 결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또한 그들 천외오존은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동방휘가 진정 의도했던 바가 아니었다.
 조금 전, 그가 범천금륜신공을 펼쳤던 것도 사실 천외오존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만일 동방휘가 그 최후의 살초, 멸천을 펼친다면 필히 그들의 목숨이 부지될 수 없겠기에 짐짓 신공을 펼쳐낸 것이었다.
 동방휘의 입장에서는 아직 사부의 죽음에 관한 의문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이들을 싸워 절명시킬 수는 없었다.
 ‘아아!’
 벽안마영 동방휘는 암중 깊이 탄식했다.
 이때, 천산신검 상관청봉이 마침내 신형을 날렸다.
 백룡신검(白龍神劍).
 그것은 바로 백 년 전 수라제천과 대결했던 이래 그의 성가를 높였던 절세의 신검이다.
 백룡신검과 더불어 그의 날카롭고 신속한 검초가 감히 저항할 수 없이 펼쳐져 왔다. 제일 초 섬(閃), 이는 정녕 비할 바 없이 쾌속한 일 초였다.
 “각오하라!”
 일성 노갈이 끝나기도 전에 한가닥 예리한 검세가 동방휘의 코앞으로 밀어닥쳤다. 비록 조금 전과 검식은 같을지언정 그 위력에 있어서는 천양지차였다.
 이에 동방휘는 이번에는 가슴이 섬뜩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차갑게 비웃었다.
 “결코 원하는 바는 아니지만, 당신들의 뜻이 정 이러하다면 어쩔 수 없구려!”
 그는 신속하고도 담담히 양 손을 뒤집었다. 이어 네 가닥의 푸른 경기가 쾌속히 뿜어졌다. 동방휘가 또다시 서역의 절예 밀종대수인을 시전하는 것이었다.
 이에 천산신검 상관청봉이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서역의 이 정도 절학쯤이야 이미 십 년 전 너의 사부 천뢰존자가 펼쳐 격패당했다. 그런데 우습게도 네가 그 무공으로 감히 노부를 상대하려 하다니!”
 그와 동시에 상관청봉은 신속히 검초를 변화시켰다.
 파팟!
 폭죽이 터지듯 작렬하는 금속성의 굉음이 장내를 크게 뒤흔들었다. 바로 천강십이식 중 그 전사식(前四式) 전(電), 뇌(雷), 사(射) 등이 숨돌릴 사이도 없이 연거푸 쏟아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관청봉의 검세는 동방휘로 하여금 섣불리 경시할 수 없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벽안마영 동방휘의 각 양쪽으로부터도 거역할 수 없는 두 가닥의 무서운 경력이 밀어닥쳤다.
 그 중 하나의 경력은 기승 망아 선사의 반야미륵수미신공이었으며, 나머지 한가닥은 현천자의 현천무극태원강기였다.
 이와 더불어, 백타령주 독고진 역시 극고의 혈잔마환귀령수를 격발시켜 공세를 퍼부었다.
 이로써 동방휘는 사위(四圍)로부터 네 가지 일대의 절세 무공의 공격을 받는 지난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순간이었다.
 펑!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이 작렬하였고, 동방휘의 신형은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진정 희세의 신법이었다.
 “헉!”
 천외오존이 이에 너무도 당황하여 숨을 돌이키려는 찰나였다.
 “천외오존! 당신들의 드높았던 명성이 결코 명불허전이외다. 실로 탄복할 만한 절예요. 그러나! 망아 선사, 당신의 불문신공은 부드러움이 강함에 못 미쳐 그 진정한 위력이 부족하오. 그리고 현천자, 당신의 현천무극태원강기로 불리는 도가의 신공 또한 강함이 부드러움에 미치지 못하니 그 역시 최강의 경지라 할 수 없소!”
 망아와 현천자, 이들 도불양가(道佛兩家)의 두 공문이성은 그의 말에 창백히 안색을 변하였다.
 “아미타불!”
 “무량수불!”
 그들은 제각기 불호와 도호를 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담담히 말하였다.
 “노납 등은 동방 시주의 예리한 혜안에 감탄하는 바이오! 그러나 이번에는 정녕 그토록 허술하지 않을 것이니 진정 각오하게!”
 사실 두 사람은 그 공력을 약 팔 성까지밖에 발휘치 않았다. 이는 처음부터 진정한 공력을 펼쳐 상대를 격발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얼굴에 짙은 살기가 어렸다.
 “아미타불!”
 마침내 일성 우렁찬 불호가 사자후처럼 울리며 공문이성이 동시에 신형을 번뜩였다.
 벽안마영 동방휘는 이에 경각하여 급히 방비태세를 갖추었다. 그런데 이때였다.
 “멸천!”
 예기치도 않게 무서운 노호(怒號)가 터져 나오며, 하늘마저 암담히 변하는 듯 천지가 온통 싸늘한 검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아차!”
 동방휘는 천려일실의 순간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곧 냉연히 입술을 깨물었다.
 동방휘는 급급히 범천금륜신공으로써 망아와 현천자의 도불 양가의 유, 강 두 가닥 신공에 맞섰다.
 한편 동방휘는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양 손을 번쩍 들어 천산신검 상관청봉과 백타령주 독고진에 맞섰다.
 순간 한가닥 금빛이 거대한 불기둥인 듯 쾌속히 솟구쳤다.
 챙!
 갑자기 허공으로 예리무비한 금속성이 울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불덩이처럼 솟구친 한가닥 금빛 기둥은 바로 동방휘의 팔이었던 것이다.
 이 상황은 동방휘의 너무도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는 천하에 그 위명도 드높은 절세의 신검인 백룡신검을 맨 팔로 막아내려 한 것이다.
 정말이지 이 일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동방휘가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로 의외였다.
 땅!
 시끄러운 금속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동방휘의 팔은 여전히 금빛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그의 팔에 부딪친 백룡신검은 흡사 부러질 듯 부르르 떨고 있었다.
 “으윽!”
 천산신검 상관청봉은 단말마의 신음을 뿜어냈다. 동방휘의 팔에 부딪친 검이 손에서 퉁겨져 나가려는 듯 무섭게 떨렸기 때문이다. 이에 상관청봉은 검을 놓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동방휘의 팔은 더욱 금빛으로 빛났다.
 이것은 정녕 믿어지지 않는 일련의 변고였다. 이를 데 없이 예리한 신검을 자신의 팔뚝으로 막아낸다는 것은 전설 속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괴사였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범천륜화마황경 중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절예 중 하나였을 뿐이다.
 동방휘가 범천금륜금비신장(梵天金輪金臂神掌)을 끌어올리게 되면, 그의 팔이 찬란한 금빛으로 빛나며 금강불괴지체로 화하는 것이었다.
 여하튼 상관청봉은 동방휘의 팔에 붙은 검을 놓칠 듯싶자, 더욱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크윽!”
 찰나, 그는 자제할 수 없이 울컥 한 모금의 시뻘건 핏물을 토해 내고야 말았다.
 이와 동시에 백타령주 독고진의 혈잔마환귀령수 또한 동방휘의 금빛 팔에 깊이 박혔다. 그리하여 그 역시 충격으로 인해 울컥 선혈을 뿜으며 대여섯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한편, 동방휘의 범천금륜신공과 정면으로 부딪쳤던 망아와 현천자 또한 결코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으윽!”
 “크윽!”
 그들도 거의 동시에 기혈이 뒤집혀 일성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 상황은 결코 벽안마영 동방휘의 승리라 단언할 수 없었다.
 그 또한 망아 선사와 현천자의 합공하에서 전신 기혈이 뒤집힌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천산신검 상관청봉의 돌이킬 수 없는 살초가 펼쳐져 오자, 무리하게 내공을 끌어올려 범천금륜금비신장을 전개했던 탓으로 극심한 내상을 면치 못했다.
 “으윽”
 동방휘 역시 을컥울컥 치솟는 선혈을 토해 냈다.
 이 일전은 그 누구도 승리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양패구상의 결과였다.
 동방휘는 내심으로 탄식해 마지 않았다. 이미 내분의 기혈이 극심하게 뒤집혔던 탓으로 그는 한시라도 운공요상해야 했다. 그러나 운공요상을 하다가 상대에게 한 치의 틈이라도 준다면 운소산 절봉에 허무하게 뼈를 묻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벽안마영 동방휘로서는 살아남을 방법이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 지닌 최후의 절초 범천뇌강삼식(梵天雷 三式)을 펼쳐내는 것이었다. 이 무공은 범천륜화마황경의 모든 절예 중에서도 가장 높은 경지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범천뇌강삼식을 일단 전개하면 천외오존 정도는 능히 제압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따랐다. 사실 그가 익힌 범천뇌강삼식의 경지는 겨우 칠성(七成)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때문에 이 절대절명의 초식을 펼친다면 비록 펼칠 수는 있지만, 결코 임의로 거두어 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초식을 시전할 경우 비록 천외오존이라고 하는 초일류 고수도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동방휘는 사람의 생명을 아끼고 중시하는 편이었다. 이에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아! 이는 진정 나의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아직 선사의 죽음에 얽힌 의혹조차 풀지 못했는데 어찌 이들을 몰살시킬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나는 아직까지 단 한 번의 살인도 한 일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나 사람은 죽음 앞에서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동방휘 또한 그랬다. 일신의 기혈이 극도로 뒤집혀진 지금 범천뇌강삼식을 펼치지 않으면 자신이 죽어야 할 처지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문득 비통히 부르짖었다.
 “아! 나는 기어이 범천뇌강삼식을 펼쳐야 하며, 살생을 피할 수 없단 말인가?”
 회한과 절망에 어린 탄식이 삭풍 에이는 황혼의 허공 멀리까지 메아리 쳤다.
 동방휘는 생각 끝에 마침내 단호히 결심했다. 그리고 드디어 공력을 주입하여 이 무상무적의 범천뇌강삼식을 펼치려는 준비를 감행했다.
 
 
 2
 
 
 그런데 이때였다.
 “잠깐만! 제발 멈추세요!”
 황혼의 노을이 죽음의 그림자인 양 짙게 드리워진 이곳 절봉에 때아닌 여인의 음성이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잇따라 홀연히 자의를 걸친 미소녀가 장중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때마침 부는 삭풍에 그녀의 유난히 긴 머리카락이 하염없이 흩날렸다.
 그녀의 살결은 백옥(白玉)이라 해도 비할 바 못되었고, 두 눈동자는 꿈꾸는 듯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었으며, 오뚝한 콧날은 슬픔과 고아한 품위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타는 듯 붉은 입술에는 한없는 열정의 불꽃이 감추어진 듯 하면서도 웬일인지 우수와 비애에 젖어 있었다.
 진정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절세 가인의 자태였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어느 때 없이 창백하였고, 두 볼에는 끊임없이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
 벽안마영 동방휘가 먼저 탄성을 발하며 부르르 떨었다.
 자의소녀는 다름 아닌 그가 그토록 오매불망했던 그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필살의 일전을 벌이던 천외오존 중에 네 명 또한 적지 않게 놀랐다.
 불현듯 백타령주 독고진이 소리쳤다.
 “그대는 바로 남궁 소저!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곳에까지 왔단 말인가?”
 의혹에 찬 그 말에 대답이나 하듯 자의소녀가 울컥 울음을 터뜨렸다.
 “흐흑! 소녀 남궁려려(南宮麗麗) 그 어찌 더 이상 천지를 속이겠습니까? 엎드려 죽음으로써 용서를 빌며 말씀드리니, 이 싸움의 결과는 모든 분이 비참한 최후로써 끝날 것입니다. 이를 알고 있는 소녀는 진정 더 이상 앉아서 볼 수만 없었습니다.”
 네 명의 절세 고인은 아연 흠칫했다.
 “무엇이?”
 벽안마영 동방휘 또한 그녀의 말이 심상치 않음에 흠칫 긴장하였다.
 백타령주 독고진이 다시금 분명히 소리쳤다.
 “남궁 소저, 그대는 어찌된 영문인가 속히 사실대로 말해보라!”
 자의소녀 남궁려려는 감히 직시할 수 없는 듯 더욱 크게 울었다.
 “아, 흐흑! 소녀가 이제 와서 어찌 더 이상 숨기겠습니까? 오늘의 이 싸움은 시종일관 그 누군가의 음모에 의하여 치밀히 안배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싸움의 승패가 어찌되든 결과는 오직 모든 분의 비참한 최후가 있을 뿐입니다.”
 그녀의 오열이 더욱 높아졌다. 하늘마저 그녀의 슬픔을 헤아리시는 것인지 서편 하늘의 황혼이 유난히도 핏빛으로 붉었다.
 피끓는 오열과 함께 그녀가 홀연히 부르짖었다.
 “음모! 실로 가증스러운 음모에 의해 여기의 모든 분이 이미 극독에 중독되신 거예요! 그것은 천하에서 그 해약조차 찾을 수 없는 극독무비의 칠정착정무영지독(七情 情無影之毒)입니다. 그러하니, 여러분이 어찌 죽음을 피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게 진정 사실인가?”
 중인이 모두 경악하여 안색이 흙빛으로 변하였다.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세를 풍미하던 전대(前代)의 고인 네 사람과 그들보다 한 수 위 실력을 자랑하던 동방휘에게 극독을 시전할 수 있는 사람이 천하에 과연 누구인가.
 남궁려려가 처연히 말하였다.
 “만일 소녀의 말이 추호라도 거짓으로 의심되신다면 네 분은 지금 즉시 운공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도 그녀의 말을 선뜻 믿을 수 없었으나 밀어닥치는 불안감 또한 떨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황급히 운공하여 보았다.
 ‘이······ 이럴수가!’
 정녕 황혼의 노을마저 사신(死神)의 그림자인 듯 천외사존은 모두가 아연 경악해 마지 않았다. 반신반의하며 운공하던 즉시, 자신들의 내가공력이 이미 절반이나 흩어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천외사존이 처음부터 이런 현상을 까마득히 몰랐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 이런 기미를 느끼고 단지 조금 전에 입었던 내상 때문이려니 여겼을 뿐이다. 그런데 절반밖에 남지 않은 내가공력마저 이내 단전에서 분분히 흩어지니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 어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삽시간에 그들은 암울한 절망에 휩싸였다. 게다가 그들은 이에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밀물처럼 스며드는 것이었다.
 그들은 실로 하늘을 우러러 원망해 마지 않았다.
 일찍이 비원을 품고 절학을 연마했던 이래 격동과 풍상의 세월 백삼십여 년간 풍운의 강호를 종횡하면서도, 불세출의 마두 수라제천과 겨루면서도, 그 어느 때고 일찍이 겪어 보지 않았던 죽음의 두려움이 밀려오는 것이었다.
 자의소녀 남궁려려의 음성은 통한과 비애에 젖어 있었다.
 “아! 여러분의 그나마 남은 일신의 공력마저 일각이 지나지 않아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이윽고 지옥의 겁화에 떨어진 듯 무서운 고통이 엄습할 것이며, 그때야말로 비록 대라신선(大羅神仙)이라 할지라도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남궁려려는 낙조를 물들이는 통한의 오열을 터뜨리며 계속 말했다.
 “소녀 남궁려려는 일찍이 이런 음모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전에 여러분께 말씀드리지 않았으니, 이는 진정 소녀가 황하(黃河)의 탁류에 스스로 몸을 던져 물고기의 밥이 되더라도 씻을 수 없는 큰 죄입니다.”
 이에 현천자의 온후했던 얼굴에 노기가 충천했다.
 “남궁 여시주! 우리들 천외오존은 일찍이 남궁세가(南宮世家)에 있어 불구대천의 원수 수라제천을 멸하였을 뿐 아니라 그대의 조부 남궁천(南宮天)에게 우리 천외오존의 각기 절학도 전수해 주었다. 결과 남궁천은 현 중원무림의 제일인자로 군림하게 되었거늘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이지 어찌 이럴수가 있는가?”
 이에 남궁려려는 더욱 소리 높여 통곡하였다.
 “소녀 진정 죽어 구천지옥에 간다 하더라도 할 말이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데 소녀의 책임지지 못할 큰 죄를 죽음으로 씻게 하소서!”
 천외사존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심연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죽음이 임박하였음을 알리는 황혼의 노을은 더욱 붉게 타오르고 몸부림 치는 그녀의 통곡만이 드높았다.
 이때, 벽안마영 동방휘가 돌연 그녀를 주시하며 말하였다.
 “남궁려려라······. 그대의 이름이 남궁려려였소? 그렇다면 당신은 결국 이 모든 음모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말인데 이 음모의 배후자가 대체 누구란 말이오?”
 남궁려려는 대답 대신 더욱 소리 높여 통곡하였다.
 벽안마영 동방휘가 분노하여 소리쳤다.
 “이처럼 극악무도한 음모의 흉수가 누구인가를 어서 말하시오!”
 그런데 이때였다.
 “으하하하!”
 홀연히, 황량한 산정을 뒤흔드는 일성 광소가 있었다. 잇따라 표연히 한가닥 인영이 장중에 나타났다.
 “아아! 그대는 만 노형!”
 천산신검 상관청봉이 경악하여 부르짖었다.
 과연, 그 인영은 다름 아닌 틀림없는 독중지성 만천기였다. 겉보기에 이를 데 없이 온화한 선풍도골의 풍모에서부터 그 어디에도 만천기가 아니라고 부정할 만한 것이 없었다.
 천외사존은 너무도 경악하여 이미 쓰러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만천기의 시체와 뒤늦게 나타난 또 하나의 만천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때 독중지성 만천기는 태연자약하다 못해 오히려 표표히 웃었다.
 “상관청봉, 그대는 그토록 놀랄 것 없다. 또한 나 독중지성 만천기는 이렇듯 엄연히 살아 있으니, 이미 고깃덩이에 불과한 그 자를 쳐다볼 필요도 없다!”
 상관청봉은 실로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대체 어찌 이런 일이!”
 만천기가 시큰둥하게 받아넘겼다.
 “괴이할 것 없는 일이다. 그는 그대들을 위하여 노부가 미리부터 안배했던 화신(化身)에 불과할 뿐이다.”
 “아미타불!”
 홀연히 망아 선사가 짙고 백설 같은 백미(白眉)를 치켜 뜨며 분연히 외쳤다.
 “만노시주! 그대가 백 년간의 우의마저 져버리고 이처럼 괴이쩍게 행동하다니!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오?”
 그러자 갑자기 독중지성 만천기는 미친 듯 웃어젖혔다.
 “으하하하! 당신, 늙은 중은 그 이유를 진정 몰라서 묻는가?”
 이어 그는 제법 엄숙한 신색으로 단호히 내뱉었다.
 “본시 천하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는 법이지! 이는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산중에 두 마리 뱀이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니겠는가? 노부는 수라제천을 궤멸시킨 이래 지난 백 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너무도 절실히 깨달았다. 더구나 나는 독술(毒術)에 있어서만 그대들 사 인을 능가할 뿐이었다.”
 그는 괴이한 소성(笑聲)을 흘렸다. 이 순간만은 그의 인자하기만 하던 선풍도골의 그 풍모는 모두 사라져버린 듯했다. 비로소 마수를 드러낸 이 마당에 이르러 그는 실로 아수라의 면모를 연상케 했다.
 “독술을 제외하고 모든 무공이 그대들보다 뒤떨어지는 나 독중지성 만천기가 그대들이 살아 있는 한 어찌 천하 제패의 꿈을 이룰 수 있겠는가? 영영 그 기회는 오지 않으리라 절망하던 중에 십 년 전 천뢰존자가 나타난 것을 계기로 나는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가 흉안을 빛내며 백타령주 독고진을 바라보았다.
 “더구나 그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일깨운 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그대 백타령주 독고진이었다!”
 백타령주 독고진의 창백한 안색이 채 흠칫하였다.
 이내 황혼은 저물고 어둠이 짙게 내리깔렸다. 천외사존과 동방휘는 암야(暗夜)를 뒤흔드는 저 웃음이 장차 천하에 미증유의 대겁난을 예고하는 폭풍의 징후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타령주! 그대 역시 암수를 썼으나, 그것은 오직 후환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결과를 예측하여 미리 안배해 놓고자 함이었으니 심기의 깊이에서 그대는 나보다 뒤졌다!”
 백타령주 독고진은 골수에 사무치는 분노로 부드득 이를 갈았다. 만천기는 이 사이 또 한 차례 광포하게 웃었다.
 “하하하! 어디 그 뿐이랴! 어리석게도 그대들은 아직까지도 깨우치지 못하는 바가 있다. 노부 만천기가 오늘의 안배를 더욱 치밀하게 하기 위하여 남궁려려를 이 일에 끌어들인 것이다. 하하하하······.”
 독중지성 만천기는 동방휘를 바라보았다.
 “천뢰존자의 후인인 너 애송이 동방휘! 네 딴에는 네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이 우연인 줄 알았을 것이나, 기실 십 년 전부터 노부가 치밀하게 안배해 놓았던 일련의 조치였다. 남궁려려! 이 아이야말로 남궁세가의 천금으로 그 미모마저 이렇듯 천하제일이니 강호상에서 천상옥화(天上玉花)라 불리지 않더냐? 노부는 이 일을 꾸미기 위해 남궁세가의 가솔(家率) 칠백팔십구 명의 생명을 담보로 만일의 경우 몰살시킨다 하였으니, 그녀가 어찌 이 일에 가담치 않을 수 있었겠느냐?”
 그가 말을 마치자, 남궁려려는 갑자기 통한이 복받치는 듯 통곡해 마지 않았다.
 이때, 모든 사실을 명백히 깨닫고 난 중인은 일제히 격분해 마지 않았다.
 “천하에 이를 데 없이 악독한 자! 어찌 사람으로 이럴 수 있는가?”
 그 중에서도 가장 격분한 인물은 천산신검 상관청봉이었다.
 “내 어찌 너 따위 흉악무도한 자를 그대로 두랴!”
 성난 맹수가 대지를 박차듯 덮쳐들려는 찰나였다.
 독중지성 만천기의 냉혹한 음성이 귓전에 울렸다.
 “상관청봉! 우리 천외오존 중 비록 대소의 우열은 있었으나 엄격히 따진다면 그대의 실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노부 역시 인정한다. 게다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대가 노부쯤은 안중에도 두지 않음을 모르지 않는다!”
 천산신검 상관청봉의 노후가 야공을 찢었다.
 “오냐! 너의 흉적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다시 한 차례 노후(怒吼)를 지르며 등뒤의 백룡신검을 뽑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만천기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만천기는 오히려 입가에 차갑고도 야릇한 조소마저 흘리고 있었다.
 “흐흐흐! 그래 좋다! 어디 마음껏 날뛰어 봐라!”
 천산신검 상관청봉은 이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천지간에 두 번 다시없을 악적아! 노부가 일검에 너의 그 흉악한 몸을 두 동강 내리라!”
 마침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한 무리의 섬광이 번뜩하였다. 천산신검 상관청봉이 드디어 절초를 펼쳐내자, 그 검광이 찬란한 광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어찌된 일인지, 검세는 비록 찬란히 빛났지만 기이하게도 진기가 끝까지 주입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천산신검 상관청봉은 도중에 허무하게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실로 양광(陽光) 아래의 이슬인 듯 이 무력함에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가 흠칫하는 사이에 득의의 대소와 함께 만천기의 손이 번뜩였다.
 이어 먹물을 뿌린 듯 쇄도해 오는 한 줄기의 묵영장법(墨影掌法)이 있었다.
 “만독신장(萬毒神掌)!”
 그것은 옷깃에 스치기만 하여도 일시에 시골(屍骨)로 화하는 절세독공(絶世毒功)이었다. 만일 보통 때 같으면 상관청봉 같은 전대 고인은 이쯤을 두려워할 리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진기가 고갈되어 한낱 무력한 상태였기에 그는 실로 어이없이 최후의 순간에 임박하게 되었던 것이다.
 
 
 3
 
 
 팟!
 만독신장의 장세가 상관청봉의 가슴 앞까지 파고들던 그 순간, 귀청을 찢는 파공음과 함께 홀연히 솟구친 한 줄기 금빛 일륜이 만천기의 공세를 제지시켰다.
 절대절명의 순간에 의외로 동방휘가 이를 대신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러나 비록 천산신검의 절대절명적 위기는 구하였으나, 동방휘 역시 진기가 고갈되었던 상태인지라 장력이 부딪치는 순간 기혈이 진탕되어 선혈을 뿜으며 뒤로 대여섯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독중지성 만천기는 겨우 세 걸음을 물러섰을 뿐이다.
 “설마 네가 상관청봉을 구하려 들 줄이야! 정녕 뜻밖이다. 그러나 흥! 애송아! 너는 스스로의 일신조차 가누지 못하면서 천방지축 함부로 날뛰다니 실로 가소롭다!”
 이어 그는 사신(死神)의 음성인 듯 싸늘히 내뱉었다.
 “벽안마영 동방휘! 너는 과연 천하제일의 절륜고수임을 노부도 인정한다. 그러나 너는 과연 노부의 생각대로 한낱 인정에 이끌려 그 고강절륜한 일신지학마저 빛을 잃게 되었다. 예로부터 영웅은 굴강무비해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나 보구나!”
 다시 그는 네 명의 전대 기인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사실 이들 네 명의 인물이 자존망대하여 스스로 천하무적임을 자부했으나, 이 역시 어리석은 일이다. 만일 동방휘, 그대가 진정 독하게 마음먹었다면 나를 포함한 천외오존을 격살시킬 수 있었음을 이들은 모르나, 나만은 일찍부터 알았다. 동방휘! 그대는 어찌 범천륜화마황경 중의 최상 절초인 범천뇌강삼식을 펼치지 않았느냐?”
 순간 동방휘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네가 그걸 어찌 알았느냐?”
 “내 어찌 그 정도도 모르랴. 네놈은 이처럼 지고무상한 비급 중에서도 최상의 절학 범천뇌강삼식을 지니고도 오히려 내게 패하여 최후를 맞으니, 실로 어리석은 작태(作態)로구나!”
 이어 그는 흉안을 번뜩였다.
 “네가 절학을 익힌 이상 비급 또한 너의 몸에 있을 테니, 범천륜화마황경과 범천뇌강검(梵天雷 劍)은 이제 나의 차지로다! 이로써 나는 천하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독중지성 만천기는 이윽고 동방휘 앞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이때, 모든 사람은 이미 독이 골수까지 퍼져 감히 대항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속수무책인 채 오직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흐흐흐!”
 만천기의 괴소가 소름 끼치리 만큼 전신을 누볐다.
 벽안마영 동방휘는 이를 악물고 저항하려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전신에 퍼진 독기로 인해 운심조차 어려웠다.
 파팟!
 순간 경쾌한 파공음이 작렬했다.
 “윽!”
 동방휘가 신음과 함께 입가에 낭자한 선혈을 흘렸다. 독 중지성 만천기의 무영탈환지(無影奪還指)가 여지없이 그를 격중시킨 것이었다.
 반면 만천기의 손에는 어느 사이인가 한 권의 고색창연한 양피지의 책자가 들려 있었다.
 “범천륜화마황경! 드디어 나의 손에 들어왔구나! 나를 천하패주의 보좌에 올려줄 비급이여! 이제 동방휘 그대는 보검 또한 노부에게 양도해야 한다. 이렇듯 은혜를 베푸는 네놈에게 노부는 무한히 고마움을 느낀다. 잘 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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