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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풍대문 1

2018.06.18 조회 578 추천 0


 밀풍대문 1권
 서장
 
 
 1. 혈악(血嶽)
 
 하늘 아래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가 있다.
 그를 가리켜 공포천하(恐怖天下) 혈악(血嶽)이라 한다.
 지상에서 가장 신비한 존재가 있다.
 그를 가리켜 신비천하(神秘天下) 혈악이라 한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있다.
 그를 가리켜 혈력천하(血力天下) 혈악이라 한다.
 
 
 천 년 전, 이 땅에서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최강의 기인이 있었다.
 절대무황(絶對武皇) 종일도(鐘一道).
 그 영원불멸의 이름 앞에 온 천하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세상을 휘어잡아 일인천하(一人天下)라는 역사상 유래 없는 금자탑을 세웠다.
 절대무황 종일도.
 세상에서 그를 대적할 사람은 없었지만 그는 세상을 향해 피를 토하며 죽었다. 공포에 전율하며 마지막으로 외쳤다.
 
 
 ― 나, 종일도는 보았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절규했다.
 
 
 ― 아아, 다시는 하늘이 신비롭다고 말하지 마라.
 사람들아! 혈악, 오직 혈악의 신비로움만을 말하라.
 땅의 은혜로움을 노래하지 말고, 혈악의 절대공포를 두려워하라.
 치가 떨린다.
 혈악 앞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힘을 자랑하지 마라.
 혈악이 지닌 혈력(血力)만이 하늘 아래 땅 위에서 유일한 힘이니.
 
 
 혈악(血嶽)이라는 이름은 다름 아닌 절대무황 종일도의 입에서 처음으로 흘러 나왔다. 혈악의 존재는 그를 통해 신비로움을 드러냈다.
 
 
 ― 혈악, 열 개 피의 산 십혈산(十血山)과 열 개 마(魔)의 봉인 십대마봉(十大魔峰)을 거느리고 있다.
 나는 그 십혈산의 존재를 확인하는데 두 발과 한 손, 그리고 한 눈을 잃었다.
 열 개 마의 봉우리 중 하나인 혼마대봉(混魔大峰)만을 봤을 뿐인데, 나의 심장을 혼마대봉에게 제물로 바쳤다.
 
 
 지금까지 혈악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절대무황 종일도만이 유일하게 혈악의 존재를 입에 담았을 뿐.
 하지만 혈악은 하늘과 땅, 사람들의 세상 어디인가에 거칠고 은밀한, 신비하고 공포스러운 숨소리로 살아 있다.
 혈악은 숨을 쉬며 살아 있는 것이다.
 
 
 2. 천문제일가(天門第一家)
 
 혈악의 발길을 묶기 위하여 천문제일가는 일어섰다. 혈악의 악혼을 처단하기 위하여 천문제일가는 존재했다.
 천문제일가의 시조.
 천좌옹 엽검룡!
 그 위대한 존재는 뒤에서 밝혀진다.
 중원대백 엽호강! 그 또한 아버지 천좌옹 엽검룡이 갔던 혈악지로로 과감히 떠난다. 죽음의 길,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길을 향해.
 손자 우아(羽兒)에게 천좌옹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던 엽호강, 그 또한 천좌옹을 따라 혈악지로로 갔다.
 그렇게 그들의 위대한 역사를 딛고 천문제일가는 존재했다. 그들의 활약은 이제 시작된다.
 
 
 3. 밀풍대문(密風大門)
 
 죽음의 땅이었다.
 아주 옛날에도 죽음의 땅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은밀한 바람이 숨을 죽이는 거대한 문(門)······ 밀풍대문!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장소.
 밀풍대문!
 오랜 세월을 마모되지 않고 견뎌온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의 바람이 아주 내밀하고 조심스럽게 불어온다.
 천문제일가와 혈악의 곁으로! 혹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의 곁으로!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통해서 밝혀지는 진실, 그 아래서 밀풍대문의 신비가 벗겨진다.
 
 
 제1장 천문궁(天門宮)
 
 
 1. 천문궁(天門宮)
 
 거대한 무덤[陵]이 보였다.
 무덤은 오랜 세월 바람과 먼지 속에서도 그 풍모를 잃지 않았다.
 하북성(河北省) 천중현(天中縣).
 이곳에 거대한 무덤은 존재했다.
 사람들은 황토의 대평원인 이곳을 성지(聖地)라고 불렀다.
 옛날 반고(班固)가 이곳에서 하늘을 떠받치고 있었다는 신화가 전해 내려왔다.
 이 때문에 천중현을 중원천하에서 가장 성스러운 땅이라고 일컬었다.
 그 중 가장 성스러운 성역(聖域)으로 추앙받는 곳이 있었다.
 바로 무덤!
 놀랍지만 그것은 무덤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능이었다.
 무덤이라고 부르기에는 규모가 컸다. 보통 사람은 감히 묻힐 수 없는 거대한 무덤.
 그 넓이만도 거의 오백여 평이 넘었다. 풀이 깎여 깨끗한 무덤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했다.
 드넓은 대평원 위에 홀로 존재하는 성역의 무덤은 바로 천문궁(天門宮)이었다. 그것은 대궐 같았으며, 하늘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을 떠올리게 했다.
 규모가 얼마나 큰지는 우선 양쪽으로 늘어선 문무석(文武石)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입구에서 중심부까지는 무려 일리(一里)에 가까운 거리였다.
 그 거리를 거의 사오 장 간격으로 메운 문무석의 숫자만 따져도 천여 개가 넘었다.
 오른쪽의 문석(文石)에는 공자와 맹자는 물론 제갈무후, 전국시대를 주름잡았던 이름난 재상들과 당·송시대의 이름난 명필가와 화가들이 자리했다.
 왼쪽의 무석(武石)에는 관운장과 조자룡 등 삼국시대의 이름난 맹장들을 시작으로 숱한 무장(武將)들이 장검을 빼들고 자리했다.
 문무석은 무덤 주위에 설치된 석상(石像)으로서 무덤 속에 잠든 영혼을 지키게 하려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 잠든 사람은 누구일까?
 누구이기에 중원 오천 년 역사의 실록을 장식했던 숱한 문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잠들어 있을까? 더욱이 황족이 잠든 무덤보다 두 배나 더 큰 무덤 속에.
 도대체 어떤 존재기에 이처럼 화려한 예우를 죽어서까지 받을 수 있을까? 대명(大明)을 건국한 홍무제(洪武帝) 주원장(朱元章)의 무덤도 이만큼은 호사스럽지 못했다.
 이 무덤 속에 과연 누가 잠들어 있을까?
 
 
 2. 천문궁의 네 사람
 
 황금빛 석양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 천중현의 대평원은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광활하고 확 트인 공간.
 늦가을 바람이 대륙의 기세를 담아 휘잉 불어제쳤다. 대평원은 석양의 빛무리와 묵직한 바람을 가슴 가득 안으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천문궁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적 없이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천문궁.
 그때 천문궁 네 귀퉁이에서 바람소리에 묻힌 사람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천문궁의 전후좌우 한 귀퉁이씩을 차지한 네 사람.
 그들의 모습은 달랐다.
 입고 있는 옷도 모두 달랐다.
 그러나 어둠을 응시하는 그들의 시선은 한결같이 빛을 뿜으며 번뜩였다.
 그들은 모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 태도가 실로 비범하기 그지없었다.
 전면에 위치한 사람은 자금색 관복을 걸친 청아한 중년이었다. 마흔쯤 되었을까?
 한겨울 반달처럼 맑은 자태는 고귀한 기품을 느끼게 했다. 자금색 관복은 대명의 황족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이다.
 그 중년남자는 바람을 맞으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자세히 보니 온몸이 새끼줄로 친친 묶여 있었다.
 그 옆에 역시 새끼줄로 동여맨 몇 개의 물건이 보였다. 인장(印章)으로 보이는 그것들은 청옥(靑玉)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가장 위에 매달린 청옥색 인장에는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바로 어인(御印)인 것이다.
 당금 황제가 사용하는 어인이 분명했다.
 그 밑으로는 문하성의 중지(衆智)를 모으는 중인(衆印)과 학계를 대표하는 성균관의 학인(學印)이 줄지어 늘어져 있었다.
 그의 무릎 위에는 검 한 자루가 놓였는데, 예사로운 검이 아니었다.
 슬쩍 바라보기만 해도 검의 신비롭고 서늘한 기운이 멀리까지 뻗칠 듯했다.
 검의 손잡이에는 붉은 수실이 달렸고, 검집에는 단 한 글자가 깊숙이 음각되어 있었다.
 
 
 <황(皇)!>
 
 
 이것은 황제의 어검(御劍)인 천승어황검(天乘御皇劍). 황제는 이 검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대관절 천승어황검과 자색 관복의 중년남자가 천문궁에 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한 귀퉁이에는 노승(老僧)이 새끼줄로 친친 감겨 있었다. 두툼한 포단이 깔린 방장실(房丈室)에서 불념(佛念)에 잠겨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몸에 황금빛 가사를 걸친 그의 얼굴에는 은은하고 상서로운 기운마저 어렸다.
 첫눈에 불문의 대선사임을 알 수 있었다.
 열 개의 물체가 그의 온몸에 대롱대롱 매달려 바람결에 흔들렸다. 도(刀), 검(劍), 장(杖) 등을 비롯한 열 개의 물건은 바로 신물(信物).
 보통 사람은 꿈에서도 볼 수 없는 구파일방(九派一 )의 신물이었다.
 등뒤에 주렁주렁 매달린 이십사 개의 물건!
 그것은 천하정파무림(天下正派武林)의 중심을 이루는 정천이십사대파(正天二十四大派)의 신물이었다.
 노승의 무릎 위, 녹옥(綠玉)으로 만들어진 불장(佛杖)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소림사의 절대신물인 녹옥불장임에 틀림없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귀중한 신물들이 그의 한 몸에 매달려 있을까?
 
 
 천문궁의 왼쪽 귀퉁이.
 역시 새끼줄로 온몸을 친친 동여맨 사람이 무겁게 정좌하고 있었다. 쉰 살쯤 되어 보였다.
 핏빛 혈장포(血長袍)를 걸쳤는데, 그의 안색이나 피부도 타는 듯 붉었다.
 움푹 패여 날카롭게 찢어진 두 눈에서는 보기에도 무서운 혈광(血光)이 불꽃처럼 튀겼다. 들짐승처럼 섬뜩했다.
 붉은 머리카락이 삐죽 드러난 머리에는 새하얀 두건이 매여져 있었다.
 두건의 한가운데에는 붉은 피로 물들인 듯한 송곳니 모양의 그림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마치 악마의 피를 머금은 듯한 송곳니는 극도로 사악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걸 본 사람은 누구나 온몸이 전율을 일으킬 만했다.
 그 붉은 송곳니의 의미는 어둠의 지배자란 뜻이었다.
 그것은 사도무림(邪道武林)의 최강자임을 나타내는 신표였다.
 검은 철궤(鐵櫃)를 새끼줄에 매달고 앉은 그는 바로 사도무림의 대종사(大宗師).
 그 철궤는 사도무림을 대표하는 사천삼십육맹(邪天三十六盟)의 신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무릎 위에는 칼집 없이 한 자루의 핏빛 혈장도(血長刀)가 놓였다.
 길이는 넉 자 두 치.
 아수라형상(阿修羅形象)이 깊게 새겨진 혈장도의 끝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휘어지다가 예리한 톱니 모양을 유지했다.
 마치 늑대의 이빨처럼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사도무림에서는 이 기형장도를 사망혈아도(死亡血牙刀)라 불렀다.
 이는 죽음을 맹세한다는 뜻이었다.
 세상의 온갖 요망스런 기운이 다 모인 듯한 사망혈아도의 끝부분에 황혼이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마지막 한 사람.
 천문궁의 오른쪽 귀퉁이를 차지한 그는 아흔 살 정도 된 노인이었다. 그의 강퍅한 눈매는 곧 울음이라도 쏟을 듯이 고독해 보였다.
 외모는 좀 특이했다.
 채두변발(彩頭 髮)의 형태는 그가 몽고인임을 알려주었다.
 또한 반달여우의 털 조끼에 그려진 문양이 독특했다.
 그 문양은 검디검은 한 마리 늑대였다. 사막을 가로지르며 피의 살육을 마다하지 않는 광포한 검은 늑대.
 그것은 몽고의 황족임을 나타내는 독특한 의복이었다. 자금색 관복이 중원의 황족임을 나타낸다면 검은 늑대 문장이 그려진 반달여우의 털 조끼는 몽고의 황족을 나타내는 의복인 것이다.
 그의 온몸에도 다른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볼품없는 새끼줄이 묶여 있었다. 그 새끼줄에는 덩달아 십팔 개의 각양각색의 병장기(兵仗器)가 매달려 있었다. 반월도(半月刀), 금빛 지환(指環), 은륜(銀輪) 등······.
 이것들은 바로 관외(關外)와 대막(大漠)을 주름잡는 관막십팔채(關漠十八寨)의 독문병기.
 다시 말해 몽고인들의 자존심과 뿌리를 나타내는 영부(令符)인 것이다.
 대원(大元)과 관막십팔채는 이미 백 년 전에 대명과 중원무림에 의해 멸망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백 년이란 시공을 뛰어넘어 그 노인의 몸에 나타난 것일까?
 노인의 무릎 위에도 역시 하나의 기괴한 보물이 놓여 있었다. 은은하게 푸른빛이 도는 다섯 자 길이의 장봉(長棒)이었다.
 장봉을 잡고 있는 노인의 거칠고 메마른 손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그 장봉은 바로 대원(大元) 최고의 신병(神兵)이며, 대원개국(大元開國) 철목진(鐵木鎭)의 상징 병기인 것이다. 태양의 정기를 이어 받았다는 전설의 병기[太陽天棒]였다.
 노인의 갈대꽃같이 흰 백미(白眉)는 석양을 받아 불꽃이 타오르듯이 춤을 췄다.
 
 
 이들 네 사람.
 자금색 관복을 걸친 대명의 황족!
 황금빛 가사를 걸친 불문의 선승(禪僧)!
 사망혈아도를 움켜쥔 사도무림 대종사!
 이미 백 년 전에 멸망한 대원의 황족!
 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천문궁 네 귀퉁이를 차지하고 앉았단 말인가. 그것도 황혼 속에서 새끼줄에 묶인 채.
 알 수 없는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들의 모습은 한편으론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또 한편으론 신비스럽기도 했다.
 황혼은 점점 자줏빛으로 사그라졌다. 어둠이 그 세력을 넓혀가고 사위가 어두워졌다.
 그 위로 희미한 달빛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천문궁은 묘한 정적 속에 가라앉았다.
 
 
 3. 위대한 역사
 
 시공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은 듯한 천문궁. 달빛만이 어둠과 한데 어울려 놀아나고 있었다.
 한 순간, 낙엽이 팔랑팔랑 땅으로 떨어졌다.
 그때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림자 하나가 천문궁 입구로 들어섰다.
 달빛에 긴 그림자를 끌며 다가서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새하얀 머리칼을 드러냈다.
 일흔이 넘은 듯한 노인이었다.
 그의 두 눈은 맑은 시선을 흩뿌리며 노안(老眼)답지 않은 청정함을 과시했다.
 눈빛에서 코와 입술로 이어지는 강백한 선은 높은 기품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또한 키가 크고 떡 벌어진 넓은 어깨를 가진 노인은 힘이 넘쳐 보였다.
 거인(巨人)의 풍모에는 가까이할 수 없는 기운과 고귀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태산(泰山) 아래 서면 태산, 끝없는 대해(大海)에 서면 대해, 하늘 아래 서면 그대로 하늘이 되어 버릴 것 같은 노인.
 한없이 넓어 보이는 그의 품이 유독 시선을 끌었다. 이제 갓 말하기 시작한 듯한 두어 살 먹은 꼬마아이가 그의 품안에 안겨 있었다.
 아이의 용모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만지면 그대로 자국이 일 듯한 계집애처럼 고운 피부.
 모든 사람의 마음을 깊이 빨아들일 듯한 순백의 눈망울.
 새까만 눈동자에 어렴풋이 치기(稚氣)가 감돌았다 싶으면 어느새 입가에 머무는 한 조각 짓궂은 웃음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정말 아찔하게 할 정도였다.
 아이는 노인의 품에서 고사리 같은 조그만 손으로 노인의 탐스런 은빛 턱수염을 매만지며 꼼지락거렸다.
 조심스레 노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노인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다시 수염을 비비꼬았다.
 괴괴한 침묵이 흐르는 천문궁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아이의 행동은 앙증맞았다. 달이 어둠과 속닥이다가 아이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그만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천문궁 네 귀퉁이의 네 사람은 여전히 말없이 허공에 빈 시선을 둘 뿐이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달빛은 노인과 아이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려는 듯 한층 더 밝아졌다.
 황사(黃砂)를 동반한 삭풍이 천문궁의 입구에서부터 그들을 스칠 때였다. 지나간 세월을 더듬는 노인의 음성이 천문궁의 적막을 한 순간 깨뜨렸다.
 “우아(羽兒)야, 봐라. 이 무덤이 바로 이 할아비의 아버지가 잠드신 곳이란다.”
 중원 오천 년 사를 찬란하게 장식했던 문무백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 천문궁에서 잠든 사람.
 “우아야.”
 노인의 자애로운 시선이 품속의 아이에게로 쏠렸다.
 “너는 알아둬야 한다. 저 천문궁의 위대한 내력을 말이다.”
 천문궁의 위대한 내력. 이렇게 말하는 노인의 음성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우아라 불린 이 앙증맞은 아이는 그런 것 따위엔 고개도 끄덕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늘어진 노인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뻥긋 웃을 뿐.
 노인은 묵직한 음성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저 천문궁의 주인은 바로 중원 역사상 가장 화려한 금자탑(金子塔)을 이룬 천좌옹(天坐翁) 엽검룡(葉劍龍)이시란다. 천문궁은 그분의 혼과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야.”
 천좌옹 엽검룡.
 노인은 바로 천좌옹 엽검룡의 아들 중원대백(中原大伯) 엽호강(葉虎强)이었다.
 용은 오직 용의 새끼를 낳고, 호랑이의 새끼는 결코 늑대나 개가 될 수 없다.
 이보다 더 강해지거나 위대해질 수 없는 이름 천좌옹 엽검룡과 중원대백 엽호강. 이는 중원의 큰아버지라는 뜻이다.
 엽호강은 용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용이 되었다.
 엽호강의 온몸을 휘감는 하늘같고 태산 같은 기운.
 그것은 아버지가 천좌옹 엽검룡이었기에 가능했다.
 따라서 그가 중원대백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문득 엽호강의 시선이 장엄한 규모를 자랑하는 천문궁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우아야, 너의 증조부는 대원이 멸망하기 삼십 년 전에 태어나셨지. 그분은 타고난 천인(天人)이셨어. 그분 나이 약관 때 중원무학(中原武學)을 집대성하고 문(文)에도 재능이 뛰어나 유림(儒林)의 대조종(大祖宗)이 되셨다.”
 엽호강은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가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문과 무를 겸한 완전한 사람이셨어. 그건 신화에 가까웠다. 스물한 살 때 중원과 변방의 최대 고수들이라고 하는 정사십팔대고인(正邪十八大高人)들을 차례로 물리치고 조정에서 실시한 아홉 차례의 등과(登科)에도 모두 장원(壯元)을 하셨다.”
 엽호강은 감격이 솟구쳐 잠시 말을 잊었다.
 말한다는 게 어쩌면 우스울지 모른다.
 인간의 몸으로 그와 같은 불멸(不滅)의 업적을 쌓은 사람. 그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말한다는 건 얼마나 구차스러운 일인가.
 천인(天人), 천좌옹 엽검룡.
 엽호강은 그의 혼이 살아 숨쉬는 역사를 손자에게 계속 말했다. 두 살배기 아이지만 이 아이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알려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싶었다.
 “그분은 비록 이민족(異民族)의 원수(元首)가 되셨지만 진정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셨다. 백성의 어버이 노릇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거야.”
 엽호강은 엽검룡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강한 무예를 익혀 최고 강자가 되고, 학문에 뜻을 두어 모진 고련(苦練) 끝에 대석학(大碩學)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나 야만족이라 업신여김을 받는 대원의 관직에 올라 백성을 위하고 보호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한족의 우월감 혹은 자존심까지 버렸던 엽검룡. 야만족의 칼끝으로부터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기꺼이 야만족의 대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 험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견디면서, 때론 변절자라는 소리까지 무릅쓰면서.
 천좌옹 엽검룡은 우국충정(憂國衷情)으로 남들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아버지가 지나온 생애를 더듬는 엽호강의 눈에도 불현듯 눈물이 어렸다. 하지만 곧 아버지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표정이 밝아졌다. 목소리도 부드러워졌다.
 “그분의 높은 덕은 세상이 다 알아주었어. 대원이 멸망했을 때, 태조 주원장을 도와 대명을 이룩하셨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로 말이다. 대원이 멸할 때 엄청난 피와 보복의 대폭풍을 미리 방지하셨지. 한 말[斗] 흘릴 피를 한 사발의 피로 막으셨던 거야.”
 엽호강은 다시 한번 천좌옹 엽검룡의 위대함을 되새기며 감동에 젖었다.
 “······.”
 하지만 감회와 감격이 뒤범벅이 된 엽호강과는 달리 아이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입에 베어 물 뿐이었다.
 까르르르.
 아이는 숨넘어갈 정도로 웃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앙증맞은 손은 여전히 할아버지의 부드러운 수염을 당기고 밀며 혹은 비비꼬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이는 아직 어려서 증조부의 위대한 인생사 따윈 관심 없었다.
 엽호강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격정적으로 말했다.
 엽검룡이 꼭 자신의 아버지여서만이 아니었다. 사람으로서, 남자로서 도저히 가슴에 품을 수 없는 그의 넓고 깊은 마음을 진심으로 존경하기 때문이었다.
 “아아, 어찌 몇 마디 말로 그분의 위대함을 다 얘기할 수 있단 말이냐.”
 “······.”
 “우아야, 봐라. 저 거대한 증조부의 무덤을!”
 엽호강은 왼손을 들어 천문궁을 가리켰다. 천문궁은 이러한 내력를 안고 더욱 거대하게 보였다.
 천좌옹 엽검룡의 위대한 역사와 함께 천문궁도 위대해 보였다. 범접 못할 기운을 뿜어댔다.
 천문궁 네 귀퉁이에는 아직도 네 사람이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엽호강의 말이 그들에게도 들렸을까? 그들의 눈에도 아련한 기억들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엽호강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는가 싶더니 물결처럼 번졌다.
 “봐라. 대명의 황족이나 정·사(正邪) 양도의 무림인들, 지금은 망했지만 대원의 황족조차도 너의 증조부의 무덤인 천문궁을 수호하고 있지 않느냐.”
 대명 황족을 비롯한 정사 양도 무림인과 대원의 황족!
 그들은 이 천문궁 천좌옹 엽검룡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줄곧 그런 자세로 앉아 있었던 것이다.
 몸에 세력(勢力)의 절대신물을 걸친 채.
 자부심이 극에 달한 엽호강은 나직하게 부르짖었다. 그 외침은 허공을 울리고 천무궁을 휘돌았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저 천문궁과 천문제일가(天門第一家)라는 위대한 이름을 우리 가문에 아낌없이 바쳤느니라.”
 엽호강은 감격에 겨웠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전율에 휩싸인 음성이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천문제일가를 위해 희생했단다. 우아야! 너는 그것을 기억해야 한다.”
 엽호강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애정이 넘쳤다. 천문제일가의 후손 엽환우.
 하늘이 무너지고 바다가 갈라질 만큼 큰 충격을 온 세상에 던졌던 이름.
 천문제일가!
 
 
 제2장 천문제일가의 움직임
 
 
 1. 혈악지로(血嶽之路)
 
 천문제일가(天門第一家).
 대명조(大明朝)의 개국(開國)과 흥성(興盛)을 함께 한 영광의 가문. 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대명조가 건국된 지도 벌써 백 년이 지났다. 이 기간 동안 중원대륙(中原大陸)은 한 명의 초인(超人)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그 초인의 가문에 신화(神話)의 명예를 부여했다.
 천문제일가. 위대한 추인 엽검룡이 이룩해 놓은 가문.
 
 
 ― 알고 있소? 천문제일가란 이름에 담긴 그 내력, 위대한 내력 말이오.
 
 
 ― 물론이지요. 젖먹이 어린아이라도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어미 태 안에서 이미 배우고 태어난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천문제일가의 내력은 세상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황명(皇命)으로 만들어졌다.
 
 
 ― 들으라. 위대한 초인 엽검룡으로부터 대대손손(代代孫孫) 이어질 한 가문을 만들 것이다. 삼천의 학자(學者)와 삼천의 점성가(占星家), 사천의 명망 높은 무인(武人)들에게 그 영광의 이름을 짓게 하라.
 
 
 그들 만 명이 천문도(天門圖)를 앞에 두고 장장 삼 년 동안 머리를 싸맸다. 그리하여 천문제일가라는 신화적인 이름이 탄생했다.
 개조(開祖)인 엽검룡 이후 천문제일가는 백 년 동안 찬란한 영화를 누렸다. 꺼지지 않는 태양처럼 그 긴 세월을 한결같이 빛냈다.
 하늘과 땅을 통틀어 으뜸인, 두 번째란 결코 있을 수 없는 위대한 가문. 천문제일가.
 
 
 한 순간 감회와 격동에 휩싸였던 엽호강은 품안의 우아를 번쩍 들어올렸다.
 “봐라. 네 증조부 엽검룡의 화려하고도 위대한 역사가 오늘도 저 천문궁, 천문제일가와 함께 하고 있음을.”
 엽호강의 목소리는 딩딩 울리며 달빛 속으로 젖어들었다. 그러나 우아는 천진한 웃음을 뱉어내며 할아버지의 수염을 붙잡고 있었다.
 까르르 까르르.
 수염을 붙든 보드랍고 조그만 손아귀에서 웃음이 뒹굴었다. 엽호강은 아랑곳 없이 말을 이었다.
 “그분은 시작과 끝을 오직 위대함으로 보내셨다. 영원한 위대함의 상징은 세상에서 오직 그분, 엽검룡이라는 이름으로 압축될 것이다.”
 달무리가 서서히 번져들었다. 엽호강은 조용히 우아를 품에 안았다. 두 팔에 힘을 주면서 사뭇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우아야, 이제 이 할아비는 떠난다.”
 우아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엽호강의 눈길은 깊었다. 이제······떠난다.
 달빛과 어둠 그 사이로 말꼬리가 길게 여운을 남겼다.
 한 순간 엽호강의 눈에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서렸다. 어둠을 집어삼킬 듯한 강렬한 눈빛.
 “중원대백 엽호강, 나는 중원을 떠나야 한다. 아버지 천좌옹 엽검룡이 떠나신 그 길을 가야 한다.”
 천좌옹 엽검룡이 떠난 길이란 죽음의 길이었다. 천문궁의 거대한 무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엽호강은 죽음을 앞둔 사람치고는 혈색이 좋다. 그렇다면 죽음의 길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할까?
 엽호강의 목소리는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 길은 한 번 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불귀(不歸)의 길.”
 그 길은 한 번 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불귀의 길, 불귀의 길······.
 공기 속을 떠돌던 그 말은 조용히 어둠으로 스며들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최후의 형벌, 죽음에 반항이라도 하듯 엽호강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눈빛은 아까보다 더 강렬해졌다. 하얀 수염자락이 마치 죽음의 그림자처럼 바람에 나부꼈다.
 갑자기 우아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수염이 바람에 흩날리면서 아이의 뺨을 간지럽혔던 것이다.
 엽호강은 우아가 밝게 웃는 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우아······. 그 길은 정녕 길고도 어려운 불귀의 길. 네 증조부 엽검룡, 그 어르신조차도 한 번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은 그런 길이다.”
 엽호강의 말이 점점 더 아리송해졌다. 그의 눈길은 어느새 천문궁을 향했다. 본능적인 움직임처럼 자연스러웠다.
 “죽음의 길이나 다름없는, 아니 죽음의 길보다 더 잔혹한 운명의 길. 바로 혈악지로.”
 하늘도, 땅도, 세상도 모두 그 이름 앞에서 전율한다는 그 공포천하의 대명사 혈악! 최강의 혈력을 가졌다는 신비 속에 가려진 혈악!
 천 년 전, 무림사상 최고의 금자탑을 쌓았던 절대무황 종일도가 죽음 앞에서 고통스럽게 내뱉은 말이었다.
 혈악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먼지로 사라져야만 했었다. 두 발과 한 손, 한 눈을 잃고 확인했던 그 십혈산.
 혈악, 그 피의 산악. 전설이 되어 버린 종일도의 유언은 일찍이 천 년의 세월 속에 묻혔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중원대백 엽호강은 그 전설 속의 혈악으로 향하는 길을 가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해졌다.
 “천좌옹 엽검룡, 그분은 저 천문궁을 건축하기 전, 그러니까 백 년 전 그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셨다.”
 아버지 엽검룡이 가신 그 길,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혈악을 향해 나도 가야 한다. 엽호강의 결심은 단단했다.
 “혈악, 그 길은 피로 얼룩진 산악(山嶽)으로 가는 길이다.”
 엽호강의 안색은 수시로 변했다.
 “혈악,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신비하며, 엄청난 혈력을 소유한 혈악.”
 엽호강의 표정은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처럼 한 순간 어두워졌다. 때로는 두려움에 떨고, 때로는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혈력에 대한 외경과 공포가 어우러져 한동안 말을 잊었다.
 “······.”
 “우아야, 네 증조부께서는 혈악의 발을 묶기 위해 그 길을 가셨다. 그리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신 거다.”
 으윽.
 엽호강은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신음을 내뱉었다.
 “그 저주받은 혈악은 오히려 그분의 발길을 묶어 버렸고, 그분은 백 년 동안이나 그곳에 갇히셨던 거다.”
 엽호강의 표정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한층 밝은 빛을 띠더니 드디어는 자부심으로 빛났다.
 “우아야, 그렇지만 네 증조부는 정말 대단한 분이셨다. 하늘 아래 누가 그 두려운 혈력의 소유자 혈악을 백 년 동안 묶어 놓을 수 있겠느냐?”
 감회에 젖은 엽호강의 시선은 다시 자부심으로 충만해 파르르 떨렸다.
 “그건 실로 기적이다.”
 하지만 엽검룡은 돌아오지 못했다. 천 년 전 최강기인 종일도의 입에서 한 번 기억되었을 뿐인 혈악, 그리고 백 년 전 엽검룡은 혈악을 묶기 위해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 아들 엽호강이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려는 것이었다.
 우아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듯, 알 필요도 없다는 듯 방긋방긋 웃었다. 우아의 웃는 모습을 들여다보던 엽호강의 눈에 어느 때보다 진한 격정이 스쳤다.
 “우아야, 이제 이 할아비도 그 혈악지로를 향해 떠난다.”
 엽호강은 다시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우리 천문제일가가 아니면 결코 막을 수 없는 피의 길. 네 증조부 천좌옹께서는 그 길을 백 년 동안이나 막았다. 하지만 이 할아비는 그 십분의 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몇 년이나 막을 수 있을는지······.”
 엽호강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그는 그 길을 가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엽검룡에 이어 엽호강까지 내려온 거역할 수 없는 숙명, 불귀의 길. 엽호강의 모습은 마치 외따로 떨어진 한 마리 사자 같았다.
 그는 찬바람 휘날리는 황량한 벌판에서 그 숙명의 끈을 잡으려 하는 것이다. 고독한 사자처럼 맹렬히 치달으면서.
 우아는 여태껏 수염을 붙잡고 장난을 쳐댔다. 방긋 웃다가 또 까르르 웃음소리를 냈다. 우아의 웃음이 잠시 암울한 분위기를 걷어냈다.
 엽호강은 갑자기 우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번쩍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그의 얼굴에 기쁜 빛이 드러났다.
 ‘그렇다. 우아, 나에게는 천문제일가의 이 아이가 있지 않은가.’
 엽호강은 그 동안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달은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에게 하나의 충격이었다.
 ‘우아, 너는 엽씨 성을 가진 천문제일가의 삼대가주(三代家主)로구나.’
 그의 눈은 형형하게 빛났다가 세상에서 가장 선한 웃음을 짓는 우아의 얼굴에 꽂혀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중원대사 엽호강, 천문제일가의 이대 가주인 그가 자신의 모든 기대를 한낱 아무것도 모르는 이 아이에게 걸고 있었다.
 그때였다. 번쩍! 우아를 치켜올린 엽호강은 엽검룡의 위대한 체취를 가까이 느끼려는 듯 천문궁으로 한 발 더 다가섰다.
 “아버지······.”
 엽호강의 부르짖음은 묘한 여운을 남겼다. 천인 엽검룡을 향한 부르짖음이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아버지 엽검룡을 항해 외친 것이다.
 “아버지, 이 아이 환우(桓羽), 바로 아버지 증손자입니다.”
 우아는 엽호강이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여전히 까르르 웃어댔다. 질리지도 않는지 엽호강의 눈치를 보며 수염을 잡아당기면서 장난을 쳤다.
 우아를 바라보는 엽호강의 두 눈에 소리 없이 물안개가 피어 올랐다. 기세가 꺾인 삭풍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엽환우(葉桓羽). 천문제일가의 숭고한 피를 이어받은 아이는 맑은 눈동자를 빛내며 천문궁을 그제야 빤히 쳐다보았다.
 먼지 하나 끼지 않은 수정 같은 눈.
 순진함은 그 눈에서 온통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두 눈동자는 거대한 천문궁을 거울에 비추듯 그대로 담았다. 우아의 동공에 한 치의 틈도 없이 천문궁이 들어차고 있었다.
 한 순간 우아는 조그만 손을 앞으로 뻗었다. 아이의 본능적인 몸짓이었지만 그것은 꼭 천문궁을 한 손에 거머쥐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엽호강은 짙은 격정 속에 빠져 우아의 몸짓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씨잉씨잉.
 사각사각.
 갈대만큼 메마르고 거친 바람이 엽호강의 옆구리를 찌르며 어둠 속으로 빨려갔다.
 “아버지······.”
 엽호강의 눈자위에는 미세한 경련이 포말처럼 부서졌다.
 “아버지, 저도 혈악으로 떠납니다. 아버지 곁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사위는 조용히 어둠에 굴복한 채 소리도 없었다. 천문궁 역시 오랜 세월 다문 입술처럼 완강했다.
 엽호강은 조금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허허, 이십 년만 혈악의 발을 묶어 보렵니다.”
 조심스러운 맹세를 하는 엽호강의 입술이 눈자위만큼 가볍게 떨렸다.
 “아버지께선 혼자하셨지만 저는 도저히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고인(故人)에게 나직이 독백을 하던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을 향했다.
 
 
 2. 네 명의 고수들
 
 자금색 관복을 걸친 중년남자가 그의 눈 안으로 들어왔다.
 어둠이 내린 땅을 망연히 바라보던 그 중년남자의 시선도 서서히 엽호강을 향했다.
 “······.”
 어둠 속에서 순간 반짝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 말이 없었지만 일찍이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듯한 시선이었다.
 한동안 엽호강의 시선을 마주 보던 중년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었다.
 엽호강의 시선은 다른 데로 옮겨갔다.
 낮게 가라앉은 한쪽 모퉁이.
 해탈한 듯한 노승의 동공에서 한 순간 푸른빛이 스쳤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엽호강을 향해 고개를 말없이 끄덕였다.
 엽호강의 눈에는 어느새 혈포를 걸친 장년남자가 들어찼다. 유독 붉은 기운을 토하는 장년남자의 시선에 잠시 성난 파도가 몰아쳤다.
 그러나 곧 엽호강의 뜻이 담긴 눈빛을 대하자 장년남자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들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한쪽 모퉁이에서는 대원의 황족이 웅크리고 엽호강의 시선을 받았다. 반달여우 조끼에 한 조각 짙은 어둠이 걸려 있다가 도망갔다.
 슥.
 대원 황족의 손에 들려 있던 태양천봉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말이 없었다. 천문궁의 깊은 침묵은 쉽사리 깨질 것 같지 않았다.
 엽호강과 그들 네 사람.
 한 순간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엽환우의 환하고 싱그러운 웃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어둠만이 아는 강렬함이 너울거렸다. 오랜 침묵을 깨듯 나뭇잎 하나가 사르륵 떨어졌다.
 
 
 3. 숙명의 길
 
 불귀의 길, 혈악지로.
 중원대백 엽호강은 천문제일가의 이대 가주로서 천좌옹 엽검룡의 숙명을 따라 그곳으로 떠났다.
 그리고 몇 해의 낙엽이 소리 없이 천문궁에 쌓였다. 그 몇 해의 낙엽이란 엽호강이 혈악지로로 떠난 지 정확히 십 년의 세월을 의미했다.
 그 동안 낙엽은 충직한 신하처럼 해를 헤아리며 숨을 쉬고 있었다. 땅속 깊숙이 자신을 묻으면서 은은한 여인의 향내를 기억하듯이 그 시간을 기억했다.
 십 년 동안 조용히 침묵했던 천문궁은 오늘도 변함없었다. 가을빛이 천문궁을 에워쌌지만 그저 가만히 가라앉아 있었다.
 석양이 가을빛과 어우러져 붉게 타올랐다. 천문궁에는 서서히 어둠의 정적이 들어찼다.
 십 년 전, 천문궁 네 모퉁이를 차지하고 앉았던 네 사람. 엽검룡의 혼을 수호하던 그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석상(石像) 같은 그들을 매서운 바람이 장난치듯 스쳐 갔다. 천문궁은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그 네 모퉁이를 지키게 했을까?
 그런데 십 년 전과 조금 달라진 것이 있었다. 네 명의 온몸을 휘감았던 새끼줄에 함께 매달려 있던 각파의 영패(令牌)들. 그것들이 조금 줄어들어 있었다.
 자금색 관복의 중년남자. 황제의 신물인 천승어황검은 여전히 그의 손에 놓였지만, 성균관과 문하성의 중지를 모으는 십여 개의 학인이 세 개밖에 없었다.
 노승도 마찬가지였다. 정천이십사대파의 신물이 열두 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사망혈아도를 움켜쥔 사도 대종사의 철궤는 열려 있었다. 그 안에는 열댓 개쯤의 신물만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원 황족의 새끼줄에 매달렸던 관막십팔채의 독문병기도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천문궁은 여전했으나 십 년의 세월은 무언가를 변화시켰다. 네 사람의 눈가의 잔주름도 흐르는 세월 속에 깊게 패였다. 그러나 천문궁이 침묵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똑같은 정적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흘렀다.
 또 하나의 낙엽이 떨어져 땅속에 뿌리를 내렸다. 일 년이 지난 것이다.
 천문궁은 여전히 침묵에 잠겼지만 그들 네 사람의 몸에 매달렸던 영패들은 또 조금씩 줄어들었다.
 
 
 4. 네 명의 고수들도 혈악지로로
 
 다시 낙엽이 쌓이고 어느새 엽호강이 혈악지로로 떠난 지 십오 년이 지났다. 천문궁에는 여전히 정적이 감돌고, 낙엽이 세월의 두께만큼 쌓여 뒹굴었다.
 휘잉.
 천중현에 예기치 않은 바람이 불어왔다. 세찬 기운을 동반하고 흩어진 세월을 거칠게 날렸다.
 휘잉.
 낙엽이 붕붕 떠다녔다. 더욱이 석양이 길게 깔린 천문궁의 낙엽들은 한결같이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토해냈다.
 유난스럽게 서늘한 천문궁. 그 모퉁이에는 네 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세월 따위는 잊었다는 듯이.
 몇 개의 낙엽이 그들의 무릎 위에서 청승맞게 뒹굴었다.
 그들의 생각은 세월을 잊었어도 그들의 머리칼은 벌써 눈처럼 새하ㅇ다. 천문궁은 변함없었지만 사람들은 세월을 겉모습으로 먹었다.
 석양이 한 순간 자신의 혼을 진저리치듯 토할 때, 부르르 떨림이 전해져 왔다.
 노승의 황금빛 가사가 겨울 바람에 문풍지 떨리듯 떨렸다. 그리고 그의 손에 있던 녹옥불장이 곧게 세워졌다.
 아주 짧은 사이, 노인은 어둠이 내려앉은 땅 위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세월이 움직이는 변화였다.
 노승의 하얀 세월이 잔 떨림을 일으켰다. 그리고 노승은 오랫동안 다물었던 무거운 입을 열었다. 세월이 도망치듯 구구 소리를 내며 달려나갔다. 천문궁의 정적은 이로써 깨졌다.
 “아미타불······.”
 노승의 첫마디는 중생을 구하는 웅얼거림이었다. 그의 부드러운 시선은 석양이 가라앉은 서산으로 향했다.
 “아미타불······. 혈악의 혈력이 천산(天山)을 넘는구나.”
 노승은 가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순간 그의 눈에 서릿발같은 예리한 빛이 맴돌았다.
 “아미타불. 노납 료천(了天), 마지막까지 불력(佛力)으로 천산을 지키리라!”
 이 노승은 바로 료천신승(了天神僧). 불문최강(佛門最强)의 고수(高手)라 추앙받던 사람. 소림(少林)의 현장 문인인 대천선승(大天禪僧)의 사조(師祖)였다.
 달마조사(達磨祖師) 이후 소림 역사상 가장 강했던 신승으로서 그의 무공은 추측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저 이역만리 서장(西藏)에 존재한다는 포달랍궁(包達拉宮)의 불문무공도 완벽히 섭렵(涉獵)했다는 그의 무학(武學)을 어찌 몇 마디 말로써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벌써 백삼십 년을 살아온 사람. 그 연륜만큼이나 그의 불력도 깊었다.
 하지만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제아무리 천문궁의 역사가 위대하다지만 소림 역사상 최대 신승인 그가 한낱 무덤을 수호하고 있는 것이다.
 료천신승은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아미타불. 소림사 역사를 노납의 손으로 막을 내린다. 저 멀리 천산에서.”
 료천신승은 숨을 길게 들이켰다가 내뱉은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소림의 정신은 영원히 남아 이 넓은 중원을 지켜볼 것이다. 또한 지켜낼 것이다.”
 휘잉.
 늦가을의 메마른 삭풍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런데 어디로 사라지는지 알 수 없는 바람을 따라 료천신승의 모습도 표표히 사라지는 게 아닌가. 그가 자신의 혼처럼 지녔던 녹옥불장은 그가 앉았던 석단에 깊이 꽂혀 있었다.
 소림의 막은 내렸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소림의 혼이자 생명인 녹옥불장을 그대로 남겨 두고 떠난 것일까?
 어둠 속에서 녹옥불장의 모양이 유독 선명했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하하하! 료천신승도 떠났다, 저 천산으로.”
 크게 한바탕 웃고 난 혈장포를 걸친 사람이 옷자락을 펄럭이면서 느릿하게 몸을 폈다.
 오랜 세월 동안 앉은 자세에 익숙해진 그의 다리는 잔물결을 일으키며 땅과 수직이 되었다.
 산악(山嶽)이 천 년의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듯 거센 바람이 해일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송곳니! 백건(白巾)에 새겨진 송곳니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사람이 몸을 추스르는 것 같았다.
 “으하하하! 나 혈아황(血牙皇)은 느낄 수 있다.”
 사악한 기운이 밀려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세찬 바람조차 갈가리 찢었다.
 혈아황.
 약관(弱冠) 이십에 홀로 무림계에 혜성같이 등장. 삼십 년 동안 그 누구도 달성하지 못했던 불멸대업(不滅大業)을 이룩했다.
 
 
 ― 사천삼십육맹(邪天三十六盟)의 완전결성(完全結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사도무림의 세력을 통일(統一)하여 하나의 거대한 방파로 조직한 것이다.
 사도무림의 전설적인 인물로 평가되었던 혈아황. 사람들은 사도무림의 꺼지지 않는 태양이라고 주저 없이 불렀다.
 그러한 그가 료천신승과 더불어 천문궁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다. 이는 천좌옹 엽검룡의 이름을 다시 한번 새기게 만들었다.
 한 순간 혈아황의 핏발이 돋은 시선이 남천(南天)으로 향했다.
 “혈악의 혈력이 묘강(苗疆)을 넘어 광동성(廣東省)으로 밀려들고 있다. 오, 가리라. 나 혈아황은 갈 것이다. 모든 사도혈아맹(邪道血牙盟)이 장렬하게 죽을 수 있는 그곳, 묘강으로!”
 사도혈아맹.
 사천삼십육맹의 정화(精華)라 불리는 사도무림의 역사상 최강의 세력.
 다시 바람이 거칠게 불어왔다. 살 속으로 파고들어 곧 생명을 얼려 버릴 듯한 바람이었다.
 곧 피의 바람이 몰아칠 그 바람을 등지고 혈아황은 미련 없이 십오 년을 지켜온 천문궁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혈아왕 역시 분신(分身)인 사망혈아도를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 박아넣고 떠나는 게 아닌가.
 녹옥불장을 남기고 떠난 료천신승과 마찬가지로 그의 행동은 더더욱 짙은 의문을 뿌렸다.
 
 
 어느 순간, 짧은 침묵을 되찾은 천문궁에 다시 크고 쾌활한 웃음소리가 빈 공간을 뒤흔들었다.
 “으하하하. 혈악의 혈력이 동해를 넘어 해일같이 밀려들고 있다.”
 자금색 관복의 황족이 지난 세월을 털어 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깨끗하고 맑은 얼굴 가득 비장의 여운이 서려 있었다.
 “가리라. 나 주원경(朱元京)은 동해로. 한 방울 포말로 부서져 버리더라도 혈악의 해일에 부딪치리라.”
 주원경.
 지금의 황제인 건문제(建文帝)의 대숙(大叔).
 대내제일고수(待內第一高手)로서, 혹은 대학자(大學者)로서 그 이름을 세상에 떨친 철문대공(鐵文大公).
 황실의 비밀조직인 대내십팔금비부(待內十八禁秘府)를 한 손에 장악한 그의 영향력을 사람들은 거의 알지 못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만 그는 스스로 자격을 박탈했다. 대신 그의 가슴속에는 큰 뜻이 불타올랐다.
 
 
 ―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명황조(大明皇朝)의 기틀을 다지겠노라!
 
 
 마침내 그의 손에는 황제의 신물인 천승어황검이 쥐어졌다.
 대명 황실의 진정한 실력자.
 그러한 철문대공 주원경 역시 천문궁 안에서 천좌옹 엽검룡의 넋을 위로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원경은 멀리 태양이 솟구쳐 오르는 동천(東天)을 항해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문득 그는 몸을 고정시키고 길게 늘어진 석양을 바라보았다. 얼굴에는 한 가닥 아쉬움이 드리워졌다.
 “안타깝구나. 태양을 보지 못하고 이 석양 속에서 떠나야 하다니······.”
 석양, 저물 황혼, 밀려오는 땅거미, 그리고 깊은 정적 속의 어둠······.
 철문대공 주원경은 아쉬워하며 동쪽으로 떠났다.
 그런데 천승어황검, 가장 고귀한 신물 그 보검(寶劍)은 그가 앉았던 자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마치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내일의 태양을 맞겠다는 듯.
 휘잉.
 바람이 그가 떠난 자리에 머물렀다.
 그때까지 두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있던 마지막 한 사람.
 채두변발의 대원 황족인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멈췄던 세월을 일으켜 세웠다.
 천천히 일어난 그의 온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솟구쳤다.
 “나 철태궁(鐵太弓)은 떠난다. 혈악이 무서운 그림자를 드리운 대초원(大草原)으로!”
 대초원은 그의 고향이 아니겠는가. 문득 그의 메마른 입술에 한 가닥 의지가 어렸다.
 “그곳에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 태양신의 축복을 받으며 나 철태궁은 최후를 맞으리라.”
 철태궁.
 마음만 먹으면 대원(大元)을 부흥시킬 수 있다고 평가받는 대원개조 철목진 이후 가장 강한 자.
 관막십팔채와 함께 그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그의 숨은 힘은 한 나라를 이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명성은 대초원의 광활함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철태궁이 자신의 야망을 꺾고, 이렇게 천좌옹 엽검룡 옆을 지켰던 것이다.
 그의 눈길은 석양을 넘어 북천(北天)으로 향했다. 대초원의 풀 향기가 그의 망막을 건드리고 콧속으로 후벼들었다.
 어느 순간 철태궁은 어금니를 깨물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대원의 상징인 태양천봉은 그의 손에서 떨어져 황혼 속에 홀로 남겨졌다.
 
 
 네 사람, 그들은 모두 떠났다. 중원대백 엽호강이 혈악지로로 향한 지 정확히 십오 년째 되는 날이었다.
 중원 최고의 성역인 천문궁은 다시 정적 속에 가라앉아 세월을 쌓아갔다. 단지 사람들의 얘기 속에서나 기억되면서.
 혈악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 서쪽 천산과, 남쪽 묘강과, 동쪽 동해와, 북쪽 대초원을 넘어간 그들.
 
 
 천좌옹 엽검룡.
 혈악의 발길을 멈추게 하기 위해 혈악지로로 향했으나 백 년 동안 소식이 없었다.
 중원대백 엽호강.
 그는 엽검룡의 아들로 속명의 혈악지로로 떠났고, 떠난 지 십오 년이 지난 어느 날,
 소림의 최강자인 료천신승이 천산을 향해 갔으며,
 철문대공 주원경은 동해로 떠났다.
 또한 사도무림의 태양 혈아황은 광동성을 넘어 묘강으로,
 철태궁은 고향인 대초원으로 갔다.
 
 
 혈악.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무서운 이름. 그 혈악의 혈력이, 그 가공할 만한 무서운 그들의 힘이 서서히 중원을 포위해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이제 중원은 어떤 국면(局面)을 맞이할 것인가. 또한 고요했던 대륙에 어떤 숨가쁜 태풍이 휘몰아칠 것인가.
 
 ***
 
 파르르 팔랑.
 오랫동안 쌓인 낙엽 위에 또 하나의 낙엽이 겹쳐지던 날. 그날은 석양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제3장 대이변(大異變)
 
 
 1. 소림사(少林寺)의 봉문(封門)
 
 사람들은 괴이한 변고(變故)를 이변(異變)이라고 한다. 이변이란 살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 중원에 대이변이 몰아치고 있었다. 온 세상이 놀라 들썩일 만한 무서운 일이었다.
 대명(大明)의 건문제(建文帝) 사 년 유월 초아흐레가 되던 날이었다. 그 날에 일어난 이변을 가리켜 중원 대이변이라고 했다.
 그것은 숭산(崇山) 소림사에서 시작되었다.
 
 
 쿠르릉쿵쾅.
 거대한 굉음이 산 속 조용한 아침 공기를 산산이 깨부쉈다. 한 무더기 땔감을 지게에 짊어지고 오던 노인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이럴 수가! 나 장삼(張三)은 육십 평생을 살아오면서 그만큼이나 땔감을 날랐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
 아직 놀람이 가시지 않은 뼈만 앙상한 얼굴로 노인은 중얼거렸다.
 장삼.
 하북성(河北省)의 숭산 토박이 나무꾼. 육십 평생 동안 나무 베는 일밖에 몰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품삯이 작고 보잘 것 없어도 자부심만은 대단했다.
 그는 자신이 벌목한 나무를 소림사의 지객원(知客院)에 납품해 왔기 때문이다.
 소림사의 명성은 일자무식인 그에게도 엄청난 경외(敬畏)의 대상이었다. 자신이 벌목한 나무가 소림사에서 쓰인다는 사실은 그에게 한평생 자부심을 갖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믿지 못할 광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소림사(少林寺)>
 
 
 매일 봐 왔던, 오늘도 보고 내일도 봐야 할 편액(扁額)이 그의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대신 그 웅장한 소림사의 문(門) 겉으로는 거무튀튀한 철문(鐵門)이 위에서 아래로 덮여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는 연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였다.
 스르릉.
 기분 나쁜 쇳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그것은 쇠로 만든 철판이 철문 위에 걸리는 소리였다. 그 철판 위의 붉은 글씨가 눈에 띄었다.
 
 
 <봉문(封門)>
 
 
 이것은 곧 대소림사(大少林寺), 즉 정도무림(正道武林)의 태두(泰斗)라 일컬어지는 소림사가 봉문을 감행한다는 말이었다.
 정녕 대이변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대소림의 봉문.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장삼의 쥐꼬리만한 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는 나직이 뇌까렸다.
 “저, 저게 뭐지? 대체 무슨 글자인 거야? 알 수가 있어야지.”
 그는 갑자기 말을 잊고 박수를 쳐댔다.
 “그래. 진노이(陳老二)의 객잔(客棧)에서 저런 붉은 글씨를 본 적이 있어. 아마 금일휴업(今日休業)이란 글자였을 거야.”
 장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윽고 그는 투덜거리며 발길을 돌렸다.
 “제길! 밀린 한 달 치 외상값이나 진작 줄 것이지. 퉤엣.”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가래침을 뱉었다. 그리고 곧 등을 돌려 마을로 내려갔다. 그의 뒷모습은 돈을 못 받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림사의 봉문이라는 이 웃지 못할 희극.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변이 소림사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에 초단을 둔 개방( )도 문을 걸어 잠갔다. 뿐만 아니라 호북성(湖北省) 무당산(武當山)에 천 년 근거지를 둔 무당파도 문을 닫았다.
 또한 청성(靑城), 아미(峨嵋), 점창(點蒼)을 비롯한 정도무림의 핵인 구파일방(九派一 )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봉문을 단행했다.
 그것은 대이변이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봉문이 아니었다. 구파일방의 모든 고수들은 근거지를 박차고 어디론가 떠나 버렸다는 사실이다.
 또한 사도무림의 바탕을 이루었던 사천삼십육맹과 정천이십사대파의 고수들이 동시에 문을 닫아걸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림 사상 전례(前例) 없던 대이변이었다.
 유월의 어느 날 일어난 이 대이변은 대체 무엇의 전주곡일까?
 
 
 2. 황궁의 이변
 
 황궁(皇宮).
 자금성(紫禁城)이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가장 근엄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은 아마도 대정전(大正殿)일 것이다.
 대정전.
 황제가 문무백관을 불러 모아놓고 천하를 호령하는 집정전. 대정전의 기와 위로 늦여름 햇살 한 조각이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뿌앙 뿌아아앙.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황궁 전체를 은은히 흔드는 대라성(大羅聲)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황제가 어전회의 집정을 개최한다고 알리는 음향이었다.
 
 
 집정을 개최하는 대정전은 그 내부가 매우 화려했다. 바닥에는 천축(天竺)에서 만든 녹색 융단이 부드럽게 펼쳐져 있었다. 사면의 벽에는 각 시대를 주름잡았던 명화(名畵)와 귀서(貴書)가 빽빽이 박혀 있었다.
 대라성을 듣고 이름이 널리 알려진 뛰어난 백관 백여 명이 양쪽에 쭉 늘어서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들의 머리는 줄곧 단상(壇上)을 향해 있었다. 곱게 휘늘어진 은사(銀絲)처럼 주렴(珠簾) 앞에 위치한 단상.
 그것은 그냥 단상이 아니라 거대하고 화려한 용상(龍床)이었다. 하늘로 올라가려는 아홉 마리의 용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보기에도 장쾌한 문양이 어렸다.
 그 용상에는 한 사람이 정좌한 채 머리를 조아린 문무백관들을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오십쯤 되어 보이는 그는 뛰어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매우 밝고 맑은 오관에 고귀한 기품이 서리서리 뻗쳤다.
 온몸에 황금빛 용포(龍袍)를 걸친 당당한 모습. 이보다 더 고귀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 만승지존(萬乘之尊)의 기도를 한 몸에 담은 위인.
 건문제(建文帝) 주윤덕(朱允德).
 그는 대명 천자요, 모든 백성의 어버이, 바로 이 땅 중원의 황제였다.
 어렸을 때 이미, 남들보다 훨씬 일찍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깨쳤다. 뿐만 아니라 그 기개가 호방하고 의협심이 뛰어났다. 그래서 태자(太子)일 때, 대내제일고수(待內第一高手)의 위에 올라 제왕지재(帝王之材)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절로 우러나오는 위엄어린 그의 태도는 대정전의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위엄에 짓눌려 아무도 함부로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태초의 침묵처럼 아주 조용했다.
 “······.”
 침묵이 점점 더해갈 때, 문득 건문제의 눈길이 맨 앞줄에 꿇어 엎드린 육십 정도의 노인에게 머물렀다. 곧이어 건문제의 중후한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렸다.
 “지밀원사(知密院使)는······ 어제부터 말이 있었는데, 소금이 얼마나 산출되고 있는지 고하라.”
 “예.”
 지밀원사는 더욱 깊숙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중추원(中樞院)의 삼원승(三院丞)의 자리를 고수하는 지밀원사 황보종하(皇甫鐘河).
 그는 대대로 뿌리 깊은 충정(忠情)을 보여온 황보가문의 노가주(老家主)였다. 그 가문의 애국충정은 모든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어 왔던 터였다.
 고고한 선비풍을 풍기는 황보종하는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말씀올리겠나이다. 오늘 절강성(浙江省)에서 산출된 소금의 양은······ 동해(東海) 인근 바다에서 산출되는 소금의 양을 웃도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
 “지금 소금이 남아돌아 소금 값이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염전어민(鹽田漁民)들의 피해가 날이 갈수록 늘어나 대책이 시급합니다.”
 “으음.”
 건문제는 심각한 표정으로 신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좋은 방안이라도 있는가?”
 이에 황보종하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꼬박 만 열두 시간 동안 그 대책을 고심했는데, 드디어 신(臣) 등은 좋은 방안을 생각해냈습니다.”
 “오, 그래? 그게 무엇인지 어서 말해 보라.”
 “방법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어전회의가 서서히 윤곽을 잡으려 하는 찰나 드르렁,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엎드려 있던 문무백관들은 모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한동안 서로를 쳐다보며 의아해했다.
 “······.”
 “······.”
 묘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이곳은 황제가 자리하고 있는 숭고한 대정전.
 그런데 어전회의가 진행되는 중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황제에게 대책을 말하려던 황보종하의 얼굴은 무참히 구겨졌다.
 ‘부, 분명 코고는 소리······.’
 황보종하는 당황했다.
 그때 또다시 으르릉, 드르릉 이상한 소리가 났다. 분명 신나게 코고는 소리였다.
 황제의 어전에 늘어서 있던 모든 문무백관들은 모두 경악했다.
 ‘마, 말도 안돼.’
 ‘어전에서 코고는 소리라니.’
 ‘날벼락 떨어질 일이군.’
 갑자기 다급한 음성이 대정전의 공기를 갈랐다.
 “폐, 폐하!”
 “이런 법은······.”
 그들의 눈길은 한결같이 황제의 용안(龍顔)으로 쏠렸다. 황제는 그저 빙긋이 웃고만 있었다.
 “계속하시오.”
 “하, 하오나······.”
 황제 이외의 모든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했다.
 “하하, 신경 쓸 거 없소. 어전에서 코를 골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서 오직 그 한 분밖에 없소.”
 황제의 용안에는 은은히 경외감마저 어려 있었다. 그제야 많은 문부백관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아······.’
 ‘그렇다면 혹 그분이?’
 그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손가락을 입에 댔다. 조용히 하라는 시늉이었다.
 뜻밖의 일이었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서는 안 되는 황제의 어전에서, 그것도 국가의 대사를 논하고 있는 자리에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황제도 인정하고,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여 당연히 그럴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그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다시 계속하라.”
 황제는 아뢰던 일을 계속 하라고 황보종하를 다그쳤다. 황제의 분부에 따라 황보종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 방안의 첫째는 인근 교역국인 조선에 팔아 넘기는 일입니다.”
 그 순간이었다.
 드르릉.
 다시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는 달리 마치 호랑이가 포효하는 듯한 소리였다. 황보종하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리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앞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웃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하. 알아서 시행하도록 하시오.”
 그때 사십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 황제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신(臣) 문하성(門下省) 시중(侍中) 모관(毛關), 폐하께 주청올리나이다.”
 “말하라.”
 “이번 대하국(大夏國)의 영신사(令神使)를 접한 바······.”
 문하성 시중 모관. 그는 인근 국가들의 사신(史臣)을 접대하는 외교의 귀재(鬼才)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그가 중요한 발언을 막 시작한 순간이었다.
 “음냐. 대하국의 셋째 공주 수비나(秀秘那)는 허벅지에 콩알만한 검은 점이 있지. 그래서 방중술(房中術)에 뛰어나다지······. 음냐.”
 맙소사. 누구인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분명 좀 전 코고는 소리를 냈던 그 문제의 인물과 동일인이었다. 그러나 황제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이에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회의는 계속되었다.
 “음냐. 폐하, 이거 너무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소이다.”
 “······.”
 황제는 물론이고 백여 명의 문무백관들은 모두 조용한 동작으로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그들은 살금살금 마치 도둑고양이가 목적을 달성해 도망가는 것처럼 소리를 죽여 대정전을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오늘의 어전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그 문제의 인물 때문에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모두가 나간 대정전에는 여전히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릉.
 “음냐. 조용해서 좋다.”
 예의 그 음성은 텅 빈 대정전의 외로운 공기를 달랬다.
 드릉 드르릉 피유.
 몇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대정전에는 코고는 소리가 진동했다. 세상만사 다 잊어버린 듯한 그 소리는 꺼질 줄 몰랐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사람의 그림자가 아침 햇살을 등지고 대정전의 입구로 들어섰다.
 그 사람은 치마를 끌면서 다가왔다. 여인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덜 성숙한 소녀였다.
 비껴드는 햇빛에 빛나는 소녀의 얼굴은 화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서늘한 눈빛은 푸른 바다처럼 맑았다. 만지기라도 하면 곧 눈물을 터뜨릴 듯 이슬 같은 눈이었다. 뽀얀 백옥 피부는 마치 대리석으로 다듬은 듯했다. 마늘쪽 같은 코와 웃음이 길게 꼬리치는 여리디여린 입술의 선.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소녀의 미모는 완벽했다. 그 이면에 언뜻 내비치는 진한 염기(艶氣)는 미색을 배가시켰다. 이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다시없을 듯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소녀의 아름다움은 고귀한 데 있었다. 소녀의 고귀한 아름다움은 남들이 음침한 마음을 품고 쉽게 다가들 수 없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소녀의 자태는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빛났다. 소녀는 은은한 향을 풍기며, 그 맑은 눈동자로 어느 곳인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어느새 소녀의 두 눈에는 진한 애수와 안타까움이 서로 뒤얽혔다. 소녀의 눈은 한 곳에 줄곧 박혀 움직일 줄 몰랐다.
 대정전의 용상(龍床).
 오직 황제만이 앉을 수 있는, 오대 조상이라고 해도 황제가 아니면 결코 앉을 수 없는 그 숭고한 자리에서 누군가 뒤척였다.
 드르릉, 고약한 소리를 내며. 맙소사! 호랑이 울음소리 같은 코고는 소리는 대정전 안을 진동했다. 젊은 청년 같았다. 문득 그를 응시하던 소녀는 나직하게 불렀다.
 “환우(桓羽)······.”
 그 음성에는 안타까움이 가득 서려 있었다.
 
 
 3. 엽환우(葉桓羽)
 
 환우라는 청년. 열아홉 살쯤 되어 보였다.
 몸에 새하얀 백의(白衣)를 걸친 그의 풍모는 매우 늠름했다. 짙은 눈썹과 넓은 이마, 높은 콧날의 선이 그의 얼굴을 아름답게 흘러내렸다. 또한 굳게 한일자로 다물린 이지적인 입술. 뛰어난 예술가가 정성을 다해 조각해 놓은 듯했다.
 이 절세의 용모를 지닌 환우라는 청년.
 그가 눈을 뜬다면, 그가 눈을 뜬다면 뭐라고 말할까? 소녀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고개를 연신 흔들면서 중얼거렸다.
 “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그가 눈을 뜬다면······. 차라리 생각을 말자.”
 소녀는 지극한 눈길로 환우를 바라보았다. 소녀의 아름다움은 환우의 풍모에 한풀 꺾인 듯했다.
 여전히 대정전에는 환우의 코고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아침 햇살이 가볍게 그 깨진 정적 사이를 파고들었다.
 소녀가 자신을 쳐다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계속 코를 골았다.
 환우를 응시하던 그녀의 두 눈에는 점점 더 진한 고혹이 깃들기 시작했다.
 “환우······ 천문제일가의 소가주······.”
 갑자기 그녀는 말을 멈추고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엽환우, 천문제일가의 소가주.
 천좌옹 엽검룡이 천문제일가의 개조(開祖)가 아닌가. 그의 아들 중원대백 엽호강은 숙명의 혈악지로를 향해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엽호강이 혈악지로로 향하기 전, 천문궁에서 그는 어린아이를 꼭 껴안고, 엽검룡에 대하여 혈악지로에 대하여 말해 주었었다.
 그때 엽호강의 품에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마냥 즐거워하던 그 앙증맞은 아이.
 엽환우. 그는 위대한 엽씨 가문의 후손이었다. 십칠 년이란 세월을 물처럼 흘려보내고 아이는 이렇게 장성해 있었다. 할아버지의 수염을 배배꼬며 좋아하던 아이에서 골격이 장대한 청년으로.
 그런데 엽환우는 지금 황제의 용상에서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황궁의 대정전에서.
 산뜻한 햇살 사이로 늦여름의 요란한 여치 소리가 가냘프게 들려왔다.
 
 
 제4장 황궁파행(皇宮跛行)
 
 
 1. 유란공주(悠蘭公主)
 
 엽환우.
 그는 위대한 엽씨 가문의 영광스런 후손.
 그러나 그는 세상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못할 파행(跛行)을 저지르고 있었다. 어전회의를 어이없이 물리고, 용상에 가로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것이다.
 “환우······.”
 소녀의 눈에는 안타까움이 물밀 듯 밀려나왔다.
 “환우, 당신은 벌써 육십 일째 황궁파행(皇宮跛行)을 하고 있어요.”
 육십 일 동안의 황궁파행.
 드르릉 쿨쿨 피유······.
 엽환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드센 소리를 코와 입으로 연신 토하고 있었다.
 “환우······.”
 안타까움이 가득한 소녀의 발걸음이 그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소녀가 그에게 바짝 다가서자 갑자기 자고 있던 엽환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오른팔을 내뻗었다. 그리고 소녀의 가녀린 허리를 휘감아 버렸다.
 “어엇!”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소녀는 당황했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소녀는 갑자기 그의 품안으로 픽 쓰러졌다. 이내 강인한 사내의 품에서 풍기는 체취에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순간 소녀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쥔 남자의 강한 손아귀의 힘을 느꼈다.
 엽환우는 오른손으로 소녀의 허리를 휘감고, 왼손으로 거침없이 소녀의 가슴을 움켜잡았던 것이다.
 어전회의가 개최되는 엄중한 대정전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엽환우의 손놀림은 교활한 독사같이 빨랐다.
 “휴우······.”
 엽환우는 감았던 눈을 갑자기 치켜 뜨고 소리쳤다.
 “유란 공주! 그 동안 예쁜 가슴이 더 여물었구려.”
 엽환우는 유란 공주의 여물어 올라오는 가슴을 매만졌다. 수밀도 같이 단단하고 탄력 있는 가슴이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아······.”
 소녀는 신음 소리를 냈다. 가슴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자신을 빨아들일 듯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의 눈이 가까이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의 불타는 눈에 그만 넋이 나갔다.
 가슴을 찢고 후벼드는 그 살인적인 마력이 그의 눈길에서 온통 뿜어져 나왔다. 소녀는 그의 시선을 받아내며 몸둘 바를 몰랐다.
 “하하하하.”
 이글거리는 엽환우의 짜릿한 웃음이 소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소녀의 피부 세포는 야릇한 소리를 지르며 떨었다.
 유란 공주는 지금의 황제인 건문제의 단 하나뿐인 고명딸 장중보옥(掌中寶玉).
 재색(財色)을 겸비한, 황실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여인, 유란 공주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엽환우의 손안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엽환우는 그녀의 두 가슴을 움켜쥔 채 묘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 어디 아기도 낳을 수 있나 한번 볼까?”
 엽환우는 점점 더 무례해졌다.
 거침없이 유란 공주의 궁장(宮裝)을 걷어올렸다. 자색 나긋한 비단 줄기들이 너울거렸다.
 엽환우는 짓궂게 손을 놀렸다. 입술에는 여전히 이글거리는 웃음이 활활 탔다.
 엽환우가 광적으로 굴든 어쩌든 상관없이 유란 공주는 맥놓고 그의 품안에 안겨 있었다.
 반항을 하거나 소리치는 법도 없이 오히려 아주 편안한 모습이었다. 숙명을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두 눈을 내리감은 채.
 엽환우의 손은 더욱 대담해졌다.
 궁장을 걷어올리고, 여인의 은밀한 곳을 더듬었다. 여인의 세포가 눈을 떴다. 남자의 체취와 허우적거리는 욕망의 소리를 들으며 점점 뜨거워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온몸이 불타오르며 참을 수 없는 듯 비비꼬였다.
 자신도 모르게 붉은 입술이 반쯤 벌어졌다.
 순간 그녀는 엽환우가 어떻게 행동할까 야릇한 기대감에 부풀었다.
 바르르르.
 그녀의 교태가 바람이 스며든 문풍지처럼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줄곧 눈을 감고 있었다. 차마 눈을 뜨고 엽환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자꾸 얼굴이 붉어졌다. 뜨거운 열기가 온몸에서 솟구쳐 올랐다.
 “아아!”
 입에서는 자꾸 작은 교성 같은 신음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눈을 감은 채 엽환우의 손길에 온몸을 내맡겼다.
 엽환우의 손은 부드럽게 유란 공주의 가슴을 배회했다. 돛단배가 유유히 물결을 타듯이.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
 유란 공주는 갑자기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갑자기 자신의 앞가슴이 무거워졌다.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그 순간,
 “아······.”
 유란 공주는 아미를 곱게 찌푸렸다. 입에서는 절망어린 한숨이 쏟아졌다.
 “으, 이게 뭐야?”
 유란 공주는 엽환우의 몸을 조금 밀쳤다. 하지만 엽환우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엽환우!
 황제와 수많은 문무백관, 그리고 유란 공주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파행을 저지른 천문제일가의 영광스런 후손.
 그는 풀어헤쳐진 유란 공주의 봉긋한 앞가슴에 얼굴을 묻은 순간, 고른 숨을 내쉬면서 다시 늘어지게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유란 공주는 차갑게 몸이 식어 버림을 느꼈다. 곧 기분이 무참히 깨져 버렸다.
 ‘환우······ 대체 당신은······.’
 그녀는 여리게 떨었다. 두 눈에는 순간적으로 뽀얀 물안개가 피어 올랐다. 그녀의 눈길은 어느새 엽환우를 향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엽환우는 세상 모르고 잠에 곯아떨어졌다.
 드르릉 피융.
 오똑한 코가 어느 순간 벌렁거렸다.
 “환우······.”
 이윽고 그녀는 나직이 탄식했다.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은 이미 절망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
 
 엽환우!
 천문제일가의 숭고한 피를 이어받은 사람.
 그는 어째서 이러한 파행을 서슴없이 저지른단 말인가.
 그는 사람들이 알면 놀라 까무러칠 광적인 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도저히 모를 일이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육십 일에 걸친 그의 파행은 계속되었다.
 ······ 구십구 일.
 백 일에서 딱 하루 모자란 그의 파행일지(跛行日誌)는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갈수록 더해갈 뿐 없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일이면 파행이 시작된 지 백 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기막힌 백 일······.
 
 
 2. 황궁파행 백 일째
 
 엽환우가 황궁에서 기괴한 행동을 서슴없이 해댄 지 오늘로 백 일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도 어김없이 태양은 솟았다. 세상을 향해 밝고 강렬한 빛을 쏘아보냈다.
 
 
 늦여름의 수란선지(水蘭仙池).
 벌과 나비가 날아들었다. 벌과 나비가 한데 어우러졌다. 그 모습은 실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냈다.
 수란선지.
 수란화가 수면에 만발한 황궁 내의 거대한 연못.
 따사로운 햇빛이 수란선지 위에 눈부신 물결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대체 무슨 일이지?”
 “글쎄 말이야.”
 한동안 웅성거림이 수란선지 수면 위에 떠올랐다. 햇빛은 하릴없이 물결 속을 넘나들며 강렬한 빛을 쏘아댔다.
 웅성거림은 그칠 줄 몰랐다. 팔구십 명 정도 되는 여인들이 수란선지 주변에 모여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몸에 궁장을 걸쳤으며, 빛나는 햇살 아래 저마다 눈부시고 독특한 미모를 발산했다.
 정말 하나하나 뜯어보면 절세의 미인들이었다.
 약간 살이 찐 여인은 무르익은 풍만한 몸매를 과시했다. 버들가지처럼 가녀린 허리를 가진 여인은 본연의 교태미(嬌態美)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발산하며 수란선지 안에 쏟아진 햇빛과 어우러졌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첩지(牒紙). 머릿결을 아름답게 빛내는 봉황첩지(鳳凰牒紙)가 시선을 끌었다.
 이는 황족을 비롯한 왕족, 그리고 황제의 총애를 받는 비빈(妃嬪)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고귀한 신표.
 맨 앞의 왼쪽에 서 있는 여인. 유독 깨끗하고 정갈한 아름다움이 은은히 풍겼는데, 삼십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그 중년의 아름다운 부인은 약간 의아해하는 빛을 얼굴에 드러냈다.
 정혜황비(靜慧皇妃) 설매련(雪梅蓮).
 바로 건문제의 정실부인인 이 나라의 황비. 유란 공주를 낳은 생모이기도 한 그녀는 국모(國母)다운 기품을 은은히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 옆으로 작약 같은 화려한 미모를 가진 이십대 후반의 여인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황제가 지극히 사랑을 쏟는 옥귀인(玉貴人).
 또한 교태로움으로 항상 황제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는 아름다운 화빈(花嬪) 등.
 중원 땅에서 내로라 하는 절세미인들이 이 자리에 모두 모여 있었다.
 실로 이는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자리였다.
 그녀들이 대체 무엇 때문에 한 자리에 모였을까? 또한 그녀들의 얼굴에 가득한 한 줄기 의문은?
 수란선지가에는 그녀들의 웅성거림이 좀체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일까? 폐하께서 친히 어필을 내리시고······.”
 “무조건 복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니······.”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들의 의혹은 짙어갔다.
 
 
 동이 저만큼 트고 있었다. 빛살을 가르며 이른 새벽 공기가 부산히 움직였다.
 그때였다.
 
 
 <들으라!
 그대들은 모두 오늘 아침 수란선지에 모여 있으라.
 엽환우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행하라. 그것을 어길 때에는 능지처참(陵遲處斬)의 대역죄(大逆罪)를 물어 중벌(重罰)로 다스리리라.>
 
 
 이와 같은 황제의 어필(御筆)이 하달되었던 것이다. 그 어필을 받은 사람들은 공교롭게 황족이나 왕족의 여인, 또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비빈들이었다.
 누구라고 감히 거역할 수 있겠는가. 이 나라 만승지존이 하달한 엄격하고 무서운 황명(皇命).
 때문에 황비를 비롯한 어필을 받은 모든 여인들은 무슨 일일까 의아해하면서 급히 이곳 수란선지에 모인 것이다.
 오늘로 백 일이 되는 엽환우의 파행. 그가 시키는 일을 무엇이든지 따르라 했으니.
 ‘······.’
 궁금했지만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가끔은 뭔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모인 그녀들의 눈빛은 복잡하고 묘한 심정을 거듭 담아낼 뿐이었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그 무렵 정혜황비를 비롯한 절세미녀들의 눈길이 한 곳으로 쏠렸다.
 수란선지를 오른쪽으로 끼고 서 있는 대전.
 그 낭하(廊下)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미풍에 하얀 삼베옷자락이 표표히 날렸다.
 기골이 장대한 백삼서생(白衫書生)이 서서히 발걸음을 옮기며 여인들이 모여선 수란선지가로 다가왔다.
 밤 하늘 혜성 주위를 감도는 신비한 빛무리.
 그것처럼 맑고 은은한, 신비롭기 그지없는 두 눈동자. 새카맣고 윤기가 흘러 넘치는 머리카락이 바람의 방향을 따라 너울너울 춤을 췄다.
 그 순간마다 드러나는 찬연한 아름다움.
 드디어 엽환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아······.’
 여인들은 속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엽환우의 입가에 머문 이지적인 냉소에 숨을 죽였다.
 엽환우는 그녀들을 한 차례 쭉 훑어보고 난 뒤 갑작스럽게 고음의 맑은 웃음을 쏟아놓았다.
 “하하하하.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그의 낭랑한 목소리는 여인들의 가슴속으로 후벼들었다. 마치 한지에 스며드는 먹물처럼 빠르게.
 ‘시원하구나.’
 ‘아, 저 목소리를 들으니 절로 숨이 다 트이네.’
 그의 용모는 입이 벌어질 만큼 아름다웠다. 숨을 죽이던 여인들은 눈을 빛냈다. 그리고 그의 단 한마디에 숨이 트이고 가슴이 시원해져옴을 느꼈다.
 온몸이 짜릿짜릿 울리며 쾌감까지 일었다. 여인들은 잔뜩 흥분했다.
 엽환우의 첫인상은 이렇듯 그녀들에게 황홀감을 안겨주었다. 더욱이 그를 매일 대해 왔던 유란 공주마저 오늘 따라 새하얀 백삼을 걸친 그의 모습에 설레었다.
 하물며 그를 처음 대하는 여인들은 얼마나 신선한 충격이었겠는가.
 ‘저분이 바로 천문제일가의 소가주라는 엽환우!’
 ‘백 일 파행을 한다던 그 문제의 인물이란 말인가?’
 
 
 ― 백일파행(百日跛行).
 
 
 한 순간 유란 공주의 서늘한 눈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백 일 파행. 거기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녀는 불규칙한 숨을 한 번 길게 들이마셨다.
 ‘옛날에 나라를 세우신 태조께서는 천좌옹 엽검룡 그분에게 개조지령(開祖之令)을 남기셨지. 그분이 이룩한 대업(大業)을 높이 사는 뜻에서 말야.’
 엽환우의 백 일 파행에 대한 비밀이 서서히 그 껍질을 벗고 있었다.
 
 
 백 일 파행!
 이는 대명의 태조인 주원장이 천좌옹 엽검룡의 공로에 보답하는 뜻에서 하명한 개조지령의 산물이었다. 황제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개조지령의 내용은 이렇다.
 
 
 ― 대명국이 존재하는 한 황실과 모든 백성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짐은 엽검룡, 아니 천하제일가의 전통을 잇는 후손에게 개조지령으로 보답하고자 하노라.
 
 
 태조 주원장은 엽검룡의 존재를 높이 존중했다. 그것은 마침내 개조지령으로 승화되었다.
 
 
 ― 개조령을 남기노라. 황제의 자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파행이든 용납할 것이다. 단 그 기한은 백 일! 하루에 한 가지씩으로 국한한다.
 
 
 태조 주원장이 허용한 백 일 동안의 백 가지 파행.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 황관(皇冠)을 엿과 바꿔 먹어도 좋다!
 ― 황제의 코털을 뽑아도 뭐라 하지 않겠다!
 ― 황궁을 몽땅 태우고 춤을 추어도 좋다!
 ― 어전회의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도 상관치 않겠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유란 공주의 얼굴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엽환우! 저분은 천문제일가의 후손으로 개조지령이 허락한 백 가지 파행을 하고 계시지.’
 ‘백 일 파행. 오늘로 마지막이 되는데······.’
 이런 이유였던가. 엽화우가 어전회의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도 무사했던 것. 유란 공주의 아름답고 고귀한 몸을 마구 유린했던 것.
 유란 공주는 그때 꼼짝하지 못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물론 유란 공주는 엽환우를 사랑했다. 그래서 자꾸 그의 주변을 맴돌았던 것이다.
 엽환우는 개조지령에 따라 백 일 파행을 행하려 황궁에 들어왔다. 오늘로 꼭 백 일이 되었다.
 드디어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이루고 백 일 파행을 끝내려 하는 것이다.
 ‘어떤 행동을 할까?’
 ‘우리는 무엇이든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단 말이지?’
 유란 공주와 황비, 많은 여인들은 일말의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유란 공주는 파르르 떨기까지 하면서 중얼거렸다.
 “어제까지 아흔아홉 가지의 파행을 행한 걸 보면 저 사람 환우는 흡사 개망나니 같아.”
 확실히 그랬다.
 엽환우가 맨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 상궁나인들은 기겁을 했다.
 이른 아침, 닭이 이제 막 아침을 흔들어 깨울 무렵.
 눈을 비비고 잠을 쫓던 수백 명의 상궁나인들은 매우 놀라 소리를 질렀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문 사이로 비껴든 여명 속에 색서(色書)와 도화도(桃花圖)가 교활하게 웃고 있었다.
 바로 상궁나인들 머리맡에 야한 글과 그림이 한 장씩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음담 내용과 실제로 어떻게 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보충설명까지 곁들인 색화도(色畵圖)는 보기만 해도 자극받을 정도였다.
 그러니 절제와 무욕을 기본으로 삼는 상궁나인들이 기겁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자금성 안이 발칵 뒤집혔다.
 아침 나절 내내 북새통을 이루었다. 감히 생각이나 했겠는가. 은밀하고, 보통은 쉬쉬하는 그런 부분을 아무렇지도 않게 건드린 것이다.
 그 짓은 엽환우가 개조지령을 방패 삼아 저지른 파행이었다. 난생 처음 겪어 보는 백 일 파행의 불문율에 상궁나인들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비교적 얌전했고, 시작에 불과했다.
 
 
 팟팟!
 백광(白光)이 번뜩이는 아래로 흩날리는 붉은 선혈. 어전회의가 개최되는 대정전 안에서 엄숙함을 비웃듯이 피가 튀고 있었다.
 엽환우의 두 번째 파행은 살인이었다.
 경비무사 조준(趙俊)은 자금성의 성문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는 아침 일찍 자신에게 다가오는 불행을 알지 못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엽환우의 손에 목이 떨어졌다.
 엽환우가 나름대로 밝힌 살인의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근무를 소홀히 했다는 것.
 기겁할 일은 엽환우가 그를 살해한 장소가 대정전이었다는 것이다.
 모든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은 격분해 마지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무어라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황제가 허용한 개조지령 아래 행해진 일. 누가 감히 거역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엽환우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구문제독(九門提督) 사마천휘(司馬天煇)의 느닷없는 파면(罷免)!
 황제가 여러 번 그 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줄 것을 간청했지만 엽환우는 끝내 고집을 부렸다.
 이것은 마흔여섯 번째 저질러진 파행이었다.
 일흔 번째 파행은 그야말로 기가 막혔다.
 도읍지 금릉에 사는 가난한 백성 사백여 명을 황궁으로 초대했던 것이다.
 엽환우는 그들에게 이틀 동안 밥과 술을 배불리 먹였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 엽환우는 그들에게 비단을 선물했다.
 파행의 절정을 이뤘던 사건은 이보다 더했다. 다음 대의 보위(寶位)에 오를 덕문태자(德文太子)를 발가벗겨 볼기짝을 패댄 것이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뿐인가.
 육순(六旬)의 노상궁을 희롱했다.
 대낮에 술 먹고 황제의 침소(寢所)로 들어가 가차없이 오줌을 싸댔다.
 또한 한밤중에 나인들만이 목욕하는 장소로 성큼 걸어 들어가 북 치고 장구를 쳤다.
 ······.
 엽환우는 개조지령에 따라 백 가지 파행을 저지르며 개망나니처럼 날뛰었다.
 
 
 마지막인 오늘은 무슨 파행을 할 것인가. 황비와 수많은 비빈들을 모아놓고 무엇을 할지.
 유란 공주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난 구십구 일 동안 황실은 엽환우 때문에 그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천문제일가의 영광스런 후손 엽환우가 이렇듯 야만스런 행동으로 모든 사람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엽환우는 예전 황제가 좋은 뜻으로 허용한 개조지령를 만행으로 일관하며 백 가지 파행을 채웠던 것이다.
 
 
 3. 수란선지가에서
 
 어쨌든 이제 엽환우는 마지막 남은 한 가지 파행을 행하려 했다.
 “모두 벗으시오.”
 엽환우의 목소리는 무심할 정도로 담담했다.
 “······?”
 “······.”
 수란선지가에 모여 있던 여인들은 다들 잘못 들었나 싶어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엽환우는 어리벙벙한 그녀들을 바라보며 실룩 웃었다. 다시 담담한 목소리를 돋으며 입을 열었다.
 “무얼 망설인단 말이오. 어서 벗으라니까.”
 “······.”
 여인들의 두 눈동자는 커질 만큼 커졌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해 보기도 했다. 저마다 손을 입으로 가져가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허허, 못 알아들이시는군.”
 엽환우는 짐짓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좀더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벗으란 말이오.”
 엽환우는 망설임 없이 옷을 벗어 던졌다.
 옷을 훌훌 벗어 던지는 모습 또한 뭇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원초적인 알몸이 되었다. 밝은 햇빛 아래 그의 몸은 이제 막 완성된 조각품이었다.
 멋지게 발달된 근육, 단단한 가슴은 햇빛을 기분 좋게 받아내며 구릿빛으로 빛났다. 굳은 살 한 점 없는 복부를 지나 곧게 쭉 뻗은 두 다리. 마치 땅이 그의 두 다리를 위해 그곳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알몸은 여인의 나신(裸身)과는 사뭇 다른 남성적인 매력을 풍겼다.
 “어맛!”
 “앗.”
 여인들은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너무 놀라 짧게 비명을 질렀다. 한편에서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만큼 숨막혀 하는 치들도 있었다.
 정혜황비 역시 말을 잊었다.
 “세, 세상에! 이런 망령(亡靈)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여인들은 급히 고개를 돌리기는 했지만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오직 유란 공주만이 눈을 똑바로 뜨고 앙칼지게 되쏘았다.
 “환우! 당신 지금 제정신이란 말이에요?”
 유란 공주의 낯빛은 이미 백지처럼 창백했다. 엽환우는 아랑곳없이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하하하. 유란, 저 밝은 태양 아래 이보다 더 밝은 정신이 어디 있겠소?”
 그의 질펀한 웃음이 땅 위를 뒹그르르 굴렀다.
 유란 공주는 말문이 막혀 더 이상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녀도 역시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하. 자, 어떻소? 이 몸과 한번 시원하게 놀겠소? 아니면, 저 맑은 수란선지를 피로 물들이겠소?”
 엽환우는 이제 협박조로 말했다.
 “모두들 옷을 벗고 저 수란선지 안에서 시원하게 목욕을 하겠느냐, 개조지령을 거역한 대가로 참수를 당하겠느냐.”
 여인들은 진퇴양난에 빠져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목숨이 제아무리 귀중한들 어찌 외간 남자 앞에서 옷을 벗을 수 있겠는가.
 여인들은 빠져 나갈 방도를 찾지 못했다. 한동안 그녀들은 어지러워 휘청거렸다.
 갑자기 유란 공주가 엽환우를 노려보았다. 두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듯했다.
 “다, 당신, 환우!”
 그러나 엽환우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개조지령을 통해 무엇이든 한번 해 보려는 그의 얼굴에는 예리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 유란 당신이 먼저 벗겠소?”
 “······.”
 “하하, 어서 그 어여쁜 몸을 보여주시오. 그리고 내 이 넓은 가슴에 안겨드오.”
 엽환우는 양 팔을 벌리면서 짓궂게 웃었다. 하지만 곧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
 그 순간 유란 공주는 그의 얼굴에 맺힌 미소를 잡아챘다. 그리고 결심을 굳혔다.
 ‘황실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개조지령을 거역할 수는 없다.’
 결심을 하고 나니 창백했던 안색이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섬섬옥수(纖纖玉手)를 옷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조심스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공자께서는 섣불리 망령된 장난이나 할 사람은 아니다.’
 이제 유란 공주의 얼굴에 확신의 그림자가 뻗쳤다.
 ‘그래,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난 저 사람을 믿는다.’
 믿는다, 믿는다······. 그녀는 뇌까렸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엽환우의 충격적인 파행조차 믿으려 할까?
 
 
 제5장 황궁파행의 비밀
 
 
 1. 백 번째 파행의 추이(推移)
 
 하늘도 놀랄 엽환우의 백 번째 파행.
 하지만 유란 공주는 마음속으로 엽환우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 애썼다. 만약 그의 행동이 단순한 장난에 그친다 해도 그를 믿고 싶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구문제독 사도천휘, 그의 파면만큼은 정당한 조치였어.’
 유란 공주는 구문제독의 파면을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사도천휘가 제독의 자리에 오른 지도 벌써 십육 년. 그는 유달리 효성이 지극했다. 고향에 두고 온 노부모 걱정 때문에 하루도 편하게 잠을 자지 못했다.
 올해 들어 사도천휘는 황제에게 여러 번 사직을 청했다. 그때마다 황제는 그의 국사능력이 유능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그런데 엽환우가 사도천휘를 파면시켰던 것이다. 사도천휘는 파면 당했지만 얼굴빛은 누구보다 밝았다.
 사도천휘가 궁을 떠나기 전, 유란 공주는 그에게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 불충한 신(臣) 사도천휘, 저의 파면은 모두 엽 공자의 배려입니다.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 그게 무슨 말인가요?
 ― 예, 저는 고향에 계신 늙은 부모님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늘 고민을 했지요. 부모님을 제가 모셔야 하는데 국정에 매여 있는 몸이라 말이지요.
 ······ 아버지께 말씀드려 보시지 그랬어요?
 ― 예, 말씀을 올렸지요. 하지만 허락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엽 공자께서 그리 일을 처리해 주신 겁니다. 얼마나 고마운지.
 
 
 ‘그뿐이 아니었어······.’
 유란 공주는 엽환우에 대한 믿음이 더욱 두터워짐을 느꼈다.
 ‘태자가 유달리 마음이 약한 것을 그는 알았던 거야. 그래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욕을 주었지. 태자의 자존심을 건드려 마음속에 칼을 품게 했던 거라고. 그건 오직 나밖에 몰라. 그는 태자를 벌줄 때 매우 괴로워했어. 그의 눈빛, 자책감으로 번민하던 그의 눈빛을 난 봤어.’
 엽환우가 벌인 두 가지 파행의 이면에는 나름대로 뜻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백 번째 파행은 입에 담기조차 곤란한 일이다.
 한 순간 유란 공주의 깊은 눈길이 엽환우의 눈동자에 멎었다. 다시 보니 그의 눈빛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단단하고 강한 무엇이 그의 눈빛에서 쏟아져 나왔다.
 ‘뭔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거야.’
 유란 공주는 몇 번이고 그의 눈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개망나니라고 경멸했지만 엽 공자는 결코 아무 생각 없이 파행을 하지는 않았어. 틀림없어. 엽 공자는 매우 사려 깊은 행동으로 부황(父皇)조차 놀라게 하기도 했잖아. 하지만······.’
 아직도 조금 불안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엽환우를 믿고 옷을 벗었다.
 스륵스륵.
 그녀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옷이 땅으로 흘러내렸다. 매우 조심스럽게 잔물결을 일으키며 그녀의 손길이 막 가슴으로 올라갈 때,
 “이 일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모든 여인들은 탄식했다. 한쪽에서는 흐느낌도 들려왔다.
 유란 공주의 얼굴에는 한때 체념이 서렸다. 그녀는 곧 입을 열었다.
 “이 모든 것은 폐하의 뜻입니다. 거역하면 이보다 더 큰 불충도 없을 거예요.”
 “······.”
 “살아서 황제폐하의 뜻을 충정(衷情)으로 받드는 것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대역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어요?”
 “아아······.”
 “만일 엽 공자가 이번 파행을 이루지 못하면 더욱 괴상한 파행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여인들은 유란 공주의 말을 듣고 더욱 침통해졌다.
 “······.”
 이내 그녀들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이 스며들었다.
 
 
 수란선지에는 수란이 활짝 펴서 그야말로 절경을 이루었다. 하지만 수란의 그윽한 향기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은은한 육향(肉香)만이 사위로 번져갔다.
 여인들은 유란 공주의 말을 듣고 벗을 벗기 시작했다.
 겉옷이 유란 공주의 손에서 흘러내렸다.
 속옷도 하나씩 벗겨졌다. 드디어 그녀의 옥 같은 살결이 서서히 드러났다. 희디흰 그녀의 살결은 햇빛을 받아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사내라면 누구나 탐할 아름다운 육체였다.
 여인들도 하나둘씩 옷을 벗기 시작했다.
 푸릇하고 하얀 여인들의 알몸이 밝은 햇살을 유혹했다. 그 위에 내려앉은 가냘픈 빛이 황홀감에 떨었다.
 이것은 분명 하늘도 눈을 감아 버린 파행 중의 파행이었다.
 황제의 손만이 이 여인들의 고름을 풀 수 있었다. 머리털 하나라도 황제의 뜻이 아니면 그 누구도 만질 수 없었다. 그런 존재들이 옷을 벗은 것이다.
 꿈일까? 하지만 현실이었다. 따가운 햇빛이 그녀들의 뽀얀 살결을 어루만졌다. 가볍게 스쳐 가는 산들바람이 심술궂게 피부에 와 닿았다.
 파르르르.
 아름다운 육체들이 살며시 전율했다.
 삼단 같은 머릿결은 봉긋한 두 개의 동산을 덮을 듯 말 듯 버들처럼 휘늘어졌다. 백옥 피부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어느새 모든 백성이 중원의 어머니라 떠받드는 정혜황비마저 벗었다. 그 고귀한 나신이 하얀 대낮에 드러났다.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여인들의 알몸. 보는 이의 동공을 파열시킬 만큼의 아름다움을 발했다. 온몸에서는 염기(艶氣)가 햇빛과 어우러져 쏟아져 나왔다.
 유란 공주의 알몸은 더욱 눈부셨다. 이제 막 피어 오르는 꽃 몽우리는 시린 아픔이었다. 보호하고 싶을 만큼 여리고 섬세한 모습이었다.
 엽환우는 한동안 만발한 백화(百花) 속에서 넋을 잃었다. 황홀감에 몸이 하늘로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아름다운 백화를 맘껏 만끽했다.
 그는 유들유들한 웃음을 머금고, 그녀들의 알몸을 세심히 훑었다.
 “······.”
 그의 묘한 시선과 따뜻한 햇살 속에서 여인들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의 눈길이 끈적하게 여인들의 알몸을 훑고 있었다.
 “오, 과연 아름답소이다.”
 그녀들은 몸둘 바를 몰라했다. 곧이어 양 팔로 가슴과 은밀한 숲을 가리기에 바빴다.
 이미 정혜황비, 화빈, 옥귀인들의 아름다운 옥체(玉體)는 엽환우의 망막 속에 맺혀 버린 뒤였다.
 엽환우는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은 여인들의 알몸에 넋이 나간 햇빛마저 우롱했다.
 엽환우는 수란선지 안으로 한 발 들여 놓으면서 말했다.
 “아,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요? 들어들 오시오. 시원하지 않겠소?”
 곧 그의 알몸은 연분홍빛 수란선지를 헤치고 물결을 일으켰다. 꽃잎이 물결에 가볍게 일렁였다.
 그는 어느새 꽃잎에 둘러싸였다. 고개만 내놓은 채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소리쳤다.
 “들어오시라니까요. 뭣들 하시는 게요?”
 여인들의 시선은 허공에서 서로 뒤엉켰다.
 ‘그래, 물 속이면 가릴 수도 있겠지.’
 ‘물 속이라면 괜찮을 거야.’
 ‘여기 이렇게 알몸을 내놓고 있을 수는 없지.’
 풍덩, 풍덩, 풍덩······.
 여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후닥닥 연못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들은 다급한 심정에 체면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단지 가리고 보자는 심사였다. 수란 꽃잎들이 해일을 만난 것처럼 크게 출렁였다.
 엽환우는 느긋하게 물위에 누웠다.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햇빛을 받아 더욱 눈부셨다.
 그는 쏘옥 물 속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쑤욱 고개를 내밀고 물위로 떠올랐다. 바다에서 돌고래가 놀 듯이 그는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흥겨워했다.
 여인들은 여전히 가녀린 양 팔로 앞가슴을 가렸다. 그가 언제 어떤 행동을 할지 몰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여인들의 긴장한 눈길은 그의 모양만 응시했다.
 여인들이 서 있는 사이로 물결이 일었다. 하얗게 부서지며 간혹 파르르 전율을 일으켰다.
 엽환우의 단단하고 탄력 있는 몸이 여인들 사이를 후볐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머.’
 ‘아아······.’
 특히 수줍음을 잘 타는 여인들은 당황했다. 그녀들의 눈 속에 소스라치며 놀라는 빛이 역력했다.
 무언가 차갑고 몸서리쳐지는 느낌이 그녀들의 온몸을 자극했다. 꼭 뱀 한 마리가 스쳐 지난 것 같았다.
 엽환우는 대체 물 속에서 무엇을 했을까?
 “으하하하.”
 그는 거창하게 한 번 웃고는 수란선지에서 몸을 뺐다.
 “정말 시원하다.”
 물을 뚝뚝 흘리는 엽환우의 몸은 더욱 매혹적이었다. 그는 물기를 닦아내고 옷을 걸쳤다.
 다시 한바탕 웃고 난 다음 입을 열었다. 그의 호방한 목소리가 꽃잎들을 건드렸다.
 “으하하하. 과연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못답군. 이 수란선지에서 정말 즐거운 한때를 보냈소이다.”
 여인들의 눈에는 어느 순간 원망과 말 못할 안타까움이 뒤섞였다.
 엽환우는 잠시 유란 공주를 바라보았다.
 “공주! 얼마나 기쁘시오? 이제 나는 더 이상 파행을 저지를 수가 없소. 잘 됐지 않소?”
 “······.”
 유란 공주는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동공은 그저 그의 상쾌하고 준수한 모습을 담을 뿐이었다.
 “마지막 파행치고는 정말 멋진 물놀이가 아니었소?”
 엽환우의 웃음이 수란선지의 수란들을 깨웠다.
 여인들은 그저 엽환우가 어떻게 행동할까 주의를 기울였다.
 “하하하하.”
 엽환우가 유쾌하게 웃어젖혔다.
 꽃잎들이 아롱지며 물결 위를 배회했다. 그의 긴 웃음의 여운은 한동안 수란선지가를 떠날 것 같지 않았다.
 엽환우는 어느새 옷에 묻은 물기마저 툭툭 털어 냈다. 그리고 옷자락을 휘날리며 유유히 사라졌다.
 ‘음, 가 버렸군. 별일이 없어서 다행이야.’
 ‘으으, 내 은밀한 곳을 분명 스쳤어. 이제 나는 어떡하면 좋담. 내 몸은 더럽혀진 거라구.’
 ‘음, 혼자서만 즐거워하는군. 뭐가 저리 즐겁단 말이야.’
 여인들은 제각각 생각에 잠겼다. 몇 사람은 매우 침통한 표정이었다.
 엽환우가 사라지자 여인들은 서둘러 수란선지에서 나왔다. 그리고 벗었던 옷을 걸쳤다.
 태양은 마냥 황홀한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이렇게 엽환우의 마지막 파행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 당치도 않은 파행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2. 여인들의 죽음
 
 엽환우의 마지막 백 번째의 파행.
 그것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가슴.
 그 가슴에는 흘러내린 혈액이 검은빛을 띠며 굳어 있었다. 그 사이로는 은장도가 깊숙이 꽂혀 있었다. 서늘한 날이 아직도 살의를 보이며 번뜩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가슴에 은장도를 꽂고 싸늘하게 죽었다. 차갑게 식은 시신 옆에는 유서가 놓였다.
 
 
 <폐하! 천한 이 몸 더 이상 수모를 견딜 수 없습니다. 죽음으로도 이 수모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부디 이 원한을 달래주소서. 수귀비(秀貴妃) 배(拜)!>
 
 
 수많은 비빈 중에서 수귀비는 황제의 총애를 남몰래 받았던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엽환우의 백 일 파행이 끝난 다음 바로 목숨을 끊었다. 스스로 가슴에 은장도를 찔러 죽은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엽환우의 손길이 그녀의 몸 어딘가를 스쳤기 때문이라 했다. 그녀는 그것을 견딜 수 없어 자결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 폐하! 소녀 역시 이 수모를 견딜 수 없습니다······.
 
 
 초하군주(初夏君主), 방년(芳年) 십칠 세. 꽃다운 미모를 가진 그녀는 황제의 조카였다.
 그녀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수귀비와 같은 이유였다.
 수란선지에서 엽환우에게 수모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녀들뿐이겠는가.
 수란선지에서 파행이 있던 그날.
 엽환우의 말에 따라 모든 여인들이 옷을 벗었는데, 그 중 여섯 명이 자살했다.
 
 
 이로써 엽환우의 백 일 파행은 마지막으로 피를 뿌리며 끝났다. 태조 주원장이 천문제일가에 베푼 개조지령을 마침내 행한 것이다.
 아무도 엽환우처럼 그런 파행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보통 사람이든, 어딘가 비범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어쨌든 엽환우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파행을 저질렀다.
 천문제일가의 영광스런 후손인 그가 혹 정신 이상이 생긴 건 아닐까? 하지만 모를 일. 그는 어쩌면 자신이 계획했던 일을 행했을지도.
 
 
 3. 혈악의 악혼
 
 호화로운 황제의 침전(寢殿)에 석양의 붉은빛이 비껴들었다. 그곳에서는 석양의 빛무리만큼 신비한 침묵이 흘렀다.
 옅은 어둠과 붉은빛의 석양이 뒤엉키고, 그 속에서 두 사람의 눈길도 한데 얽혔다.
 바로 황제와 엽환우였다.
 황제를 마주한 엽환우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엽환우는 황제의 코털이라도 뽑을 수 있었다. 백 일 파행이 끝나지 않았다면.
 하지만 지금은 백 일 파행이 다 끝났다.
 그는 더 이상 파행을 저지를 수 없었다. 개조지령의 권한은 이제 끝난 것이다.
 “폐하! 신 엽환우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엽환우는 황제를 향해 엎드린 채였다.
 “아니다, 아니다. 오히려 네 마음에 더 큰 부담을 안겨준 것 같구나.”
 “폐하······.”
 “짐이 덕이 모자라서 비빈들조차 천상천하제일악(天上天下第一惡) 혈악에게 그 혼을 팔았구나.”
 황제의 표정은 더욱 침통해졌다.
 전율과 공포, 신비의 대명사인 혈악이 황제의 입에서 흘러 나온 것이다.
 황제를 바라보는 엽환우의 눈빛은 차가웠다. 지금껏 날뛰던 개망나니의 눈빛이 아니었다. 득도(得道)를 한 고승의 눈빛보다 오히려 형형하게 빛났다.
 “폐하, 그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자칫 반 년이란 시간만 더 흘렀다면 그분들은 정말 혈악의 악혼(惡魂)으로 변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혈악의 악혼.
 “으음. 그들이 자결을 했다고······?”
 황제는 나직이 신음 소리를 냈다.
 수귀비를 비롯한 여섯 명의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엽환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그들이 정말 혈악의 악혼들이었단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엽환우는 지체하지 않고 다시 사실을 명백히 밝혔다.
 수귀비와 그 다섯 명의 여인이 모두 혈악의 악혼이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대체 혈악의 혈력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 황궁에까지 그 촉수(觸手)를 뻗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엽환우는 파행을 행할 때, 항상 혈악의 혈력을 염두에 두었다. 그 힘을 포착하고자 애를 썼던 것이다. 파행의 밑바닥에는 진정 이런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엽환우는 마음이 무거웠다.
 ‘당연히 폐하의 심정은 쓰라릴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들을 잃고 얼마나 상심해하실 것인가.’
 사실이 밝혀졌지만, 황제의 미간에는 여섯 여인에 대한 미련이 아직 남아 있었다. 엽환우는 얼굴에 어른거리는 황제의 심경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엽환우는 안색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공하옵니다만 신이 수귀비, 초하군주, 홀경비, 덕옹옹주 등 십칠 인의 회음혈(廻陰穴)을 확인했습니다.”
 회음혈은 여인의 가장 은밀한 부위에 있는 혈도(穴道)다.
 “그분들의 회음혈에는 악혼의 상징인 녹점(綠點)이 자생하고 있었습니다. 수란선지의 수란액(水蘭液)으로 알 수 있었지요.”
 녹점은 혈악의 악혼을 상징한다.
 “또한 신의 손끝에 확인된 바로는 녹암점(綠暗點)이 이미 악혼십단계 중 적어도 육단계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엽환우의 목소리는 격정적이었다.
 악혼십단계(惡魂十段階). 혈악의 혈력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엽환우가 말을 막 마쳤을 때, 황제의 두 눈은 놀라서 동그래졌다.
 “오오, 그럴 수가!”
 황제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것은 모두 짐의 덕이 모자란 탓이로다.”
 황제의 눈빛은 수심으로 가득 찼다.
 “폐하! 어심(御心)을 달래소서. 혈악의 혈력이 그 정도밖에 뻗치지 못한 것도 폐하의 복입니다.”
 혈력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 황궁에까지 뻗쳤단 말인가.
 “아니야. 이것은 내 복이 아니다. 이 모두 천좌옹과 중원대백 엽호강, 그들이 희생했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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