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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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파한 1-1권

2018.06.18 조회 2,385 추천 13


 # 序
 
 패왕지세 도창천(覇王之勢到蒼天)
 검유지혜 포대지(劍儒之慧抱大地)
 대종지교 화풍운(大宗之敎化風雲)
 고검지무 여벽력(孤劍之武如霹靂)
 이(而)
 성검지의 만세존(聖劍之義萬歲尊)
 
 패왕의 기세는 창천에 닿았고 검유의 지혜는 대지를 품에 안았다.
 대종의 가르침은 풍운이 되었으며 고검의 무는 벽력과도 같았다.
 그러나,
 성검의 의로움이야말로 만세에 드높았을지니.
 
 
 대명(大明) 연간, 무림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다섯 무인의 일대기!
 
 나는 이제··· 오래 전 강남 땅에서 벌어진, 이란격석과도 같았던 일전(一戰)으로부터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 제1장 사해지회(四海之會)
 
 청해성에 웅거한 곤륜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구대문파 중에서도 소림, 무당과 더불어 삼첨(三尖)을 이루는 명망 높은 곳이다.
 본산에서 수학한 기명제자들만 해도 일천을 상회하고, 명적(名籍)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무기명의 제자들까지 헤아리면 그 수가 얼마나 될는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단순히 문도 수만 많은 것이 아니라 일세를 풍미한 대고수가 누대에 걸쳐 끊임없이 배출되니, 곤륜의 영예는 풍상에 쇠하지 않는 고송(古松)처럼 드높았다.
 강남에서 사해지회가 열리고 사대세가의 대(對)낭인곽전이 발발한 홍무(洪武) 17년 당대에도 곤륜파에는 그 명성에 걸맞게 당당히 십대고수의 한자리를 차지한 인물이 있었다.
 근자에 장문직을 승계한 파릉군(巴陵君) 임북희에 의해 태상장로(太上長老) 위에 추대된 곤륜일검(崑崙一劍) 금서진, 바로 그였다.
 이제 겨우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로 사질뻘인 본산 장로들보다 십여 세 아래였지만, 무공 수위는 그들보다 한참 윗길이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물론, 그렇기에 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른 것이지만.
 구대문파 후기지수들 중 제일이라던 그는 약관의 나이에 곤륜을 떠나 유랑길에 나선 적이 있었는데, 사형인 백서로가 장문직을 잇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문파 최고의 기대주가 갑자기 사문을 등진 것에 대해 당시 많은 의혹이 있었으나, 알고 보면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 났으나, 천애고아 출신에 사교성마저 부족했던 금서진이 스승인 와룡검자(臥龍劍子) 곽동천의 사후 더욱 노골화된 사형들의 질시를 견디지 못했음이다.
 대부분 명문가 출신이던 그의 사형들은 근본도 알 수 없는 업둥이가 사부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사문의 비전을 차례로 습득하는 것을, 사형들을 제치고 곤륜을 대표하는 신진고수로 급부상하는 것을 무척이나 고깝게 여겼다.
 그래도 곽동천이 생존해 있을 당시는 은연중 그런 눈치가 있었을 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가 죽고 사형들이 문파의 실세로 등장하자 분위기는 본격적으로 악화되었다.
 그들은 눈엣가시 같은 금서진을 노골적으로 배척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누명을 씌워 파문시키려는 시도까지 서슴지 않았다.
 다행히 백서로가 중재에 나서 무위로 끝났으나, 이 무렵부터는 금서진 스스로가 사형들에게 넌덜머리가 나버렸다.
 결국 금서진이 먼저 사문을 떠나겠다 청했고 백서로가 이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승낙했다.
 우여곡절 끝에 산문을 나섰으나, 태어나 한 번도 산문을 벗어나본 적 없는 금서진에게 세속의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선 노회한 시정의 장사치들이 세상물정 어두운 어수룩한 촌뜨기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두 푼짜리 소면 한 그릇에 두 냥을 치르고 다섯 푼이면 하루 묵을 객점에 다섯 냥을 내주다 보니, 백서로가 챙겨준 족히 삼 년은 버틸 여비가 채 한 달도 못 가 바닥을 드러냈다.
 범인들은 상상도 못할 상승의 무공을 지녔으나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지식조차 갖추지 못한 이 절세의 고수는, 산을 내려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결국 거렁뱅이 꼴을 면치 못했다.
 아니, 오히려 거렁뱅이만도 못했다.
 평범한 거렁뱅이라면 동냥질로 목구멍에 풀칠은 했겠지만, 금서진은 그 정도도 못 되었기 때문이다.
 사문의 명예니 무인의 자존심이니 하는 것을 떠나서, 동냥질을 어떻게 해야 될지 그저 막막했던 것이다. 하기야 어찌어찌해서 겨우 구걸에 나섰더라도 도처에 널린 개방 제자들의 텃세에 돈 한 푼 손에 쥘 수 없었을 터.
 속수무책으로 며칠을 굶어 이제는 정신마저 혼미해질 때,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지나가던 낭인무사 하나가 그의 허리춤에 걸린 검을 보고 말을 붙여왔다.
 “호오, 멋진데? 예사 검은 아닌 모양이군!”
 입 열 기운조차 없던 금서진은 ‘이건, 또 뭔가?’ 하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낭인무사를 응시했다.
 금서진의 게슴츠레한 눈빛을 접한 낭인무사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좋은 검인데···, 검을 쓸 줄은 아는가?”
 시골 무지렁이에게는 과분한 검이다 싶으니 어떻게 싼 값에 울궈 내볼까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금서진으로선 기가 찰 노릇이었다.
 실전 경험이 모자라고 화후 또한 부족해 진경에 들지는 못했지만, 검술 그 자체만 놓고 보면 당시에도 곤륜파 내에서 첫째 둘째를 다투던 금서진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검을 쓸 줄 아느냐니!
 금서진의 손이 자연스레 허리춤을 향했고, 다음 순간 무언가 번쩍 하고 빛나더니 낭인무사의 바지가 스르르 흘러내렸다.
 가히 발검술(拔劍術)의 진수라 할 만한 쾌검(快劍).
 눈 깜짝할 새 펼쳐진 금서진의 일검에 넋이 나간 낭인무사는 괴춤을 추켜올릴 생각조차 못하고 입만 떡 벌렸다.
 낭인무사도 바보는 아니다. 뒤늦게 사태 파악에 성공한 낭인무사가 제자리에 털썩 꿇어앉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고인을 몰라 뵈었습니다. 용서를··· 용서를 청합니다.”
 금서진은 귀찮다는 듯 손만 휘휘 내저었다.
 눈으로 쫓지도 못할 무시무시한 일수를 선보인 고수가 결례를 순순히 눈감아줄 듯하자, 낭인무사의 쫄아 들었던 담이 다시 커졌다.
 살짝 눈을 치떠 금서진을 살폈다.
 유심히 보니 생각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짙은 눈썹이 인상적이지만 전체적으로 선이 가는 편이었고, 때에 절어 더러워져 있을 뿐 얼굴엔 잡티 하나 없는 전형적인 미청년이었다. 다만, 볼살이 해쓱하고 눈가에 그늘이 잡힌 것이 무척 초췌해 보였다.
 수년간의 강호생활로 경륜이 붙을 대로 붙은 낭인무사는 단박에 금서진의 처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호라! 보아하니 어디 산중에서 무공만 수련한 신출내기가 강호 초출에 애를 먹고 있는 모양이군. 어쩌면 천운이 닿을 수도 있겠는데?’
 상대의 실체를 파악한 낭인무사가 조용히 소곤거렸다.
 “저, 초면에 외람된 말씀이오나··· 요 앞 객잔에서 대협께 한 상 대접해도 실례가 아닐런지?”
 금서진이 갑자기 무슨 말인가 싶어 낭인무사를 빤히 쳐다봤다.
 “아! 오해는 마십시오. 그저 정식으로 사죄를 드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렇지만, 낭인무사의 본심은 따로 있었다.
 낭인무사의 이름은 범우상, 대부분의 낭인들이 그렇듯 박도를 잘 썼는데, 칼 쓰는 기세가 벽력과 같은 반면 남달리 고상한 면이 있다고 해 강호의 친구들이 벽력사(霹靂士)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서북 일대에서 솜씨를 파는 용병인데 타고난 근성과 오기로 전장에서 실력 이상의 능력을 발휘해 젊은 나이에도 상당히 이름값이 있는 자였다.
 그런 범우상이지만 경험이 붙고 실력이 쌓이면서, 오히려 뭔가 미진하고 부족한 느낌에 고민이 늘고 있던 참이었다. 실전과 경험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무(武)에 대한 갈증이다. 지금 서 있는 자리, 한계까지의 간극, 이를 극복할 방법. 그와 관련된 기반이나 근간이 될 수 있는 어떤 이론적인, 아니면 실질적인 그런 가르침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허나 일개 낭인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용병시장에 가면, ‘소림권술기본서(少林拳術基本書)’, ‘팔괘장도해서(八卦掌圖解書)’, ‘서천축대나이심법입문서(西天竺大拏爾心法入門書)’ 따위의 무공서를 파는 곳도 있었다.
 범우상 또한 그런 종류의 무공서를 몇 권 구해 탐독해 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으나 개 중에는 꽤 쓸 만한 내용을 담은 것도 있었다. 허나, 딱 쓸 만할 뿐이다.
 무술, 무예, 무공, 무도. 어떻게 칭하든 알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깨달아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만 권의 무공서를 읽는 것보다 고수의 시연과 곁들인 한마디 설명이 경지를 높이는데 실질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나 세상에 참 많고도 드문 것이 바로 그 고수라는 존재들이다.
 거친 사내들 세계에서 술 한 잔 들이키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바로 그 고수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아무개 대사가 손가락으로 철판에 글씨를 썼다느니, 모 세가주의 일검에는 팔만사천의 변화가 담겨 있다느니, 경공에 능한 어떤 도인은 물 위를 평지 걷듯 활보한다느니. 별별 고수의 별별 일화가 많지만, 실제로 만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대부분 고귀한 신분 탓에 자파의 심처에 깊숙이 들어앉았거나 혹은 속세를 등지고 심산유곡 깊은 곳에 은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정말 우연한 기회에 고수다운 고수를 만났다.
 범우상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 수만···, 딱 한 수만 가르침 받을 수 있다면!’
 금서진을 앞에 둔 범우상은 정말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그런 범우상의 내심을 알 수 없는 금서진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음, 이런 경우 뭔가 대접을 하며 용서를 비는 모양이군! 하나 또 배웠네. 그나저나 안 그래도 배고파 죽을 것 같았는데 이게 웬 떡이야.’
 금서진은 전혀 다른 입장에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인지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금서진과 범우상의 교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작은 퍽이나 계산적이었지만 의외로 죽이 잘 맞았다. 금서진의 내성적인 성격과 범우상의 활달한 성정이 묘한 조화를 이루었고, 서로 동갑내기라는 우연까지 겹쳐 차츰 속내마저 터놓는 사이로 발전했다.
 둘의 친분이 두터워지면서 금서진도 범우상을 따라 자연스레 용병 일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금서진이 사문의 명예를 생각해 신분을 철저히 숨겼음은 당연하고 범우상 또한 비밀을 엄수할뿐더러 진면목을 감출 수 있게끔 고가의 인피면구(人皮面具)까지 구해주었다.
 이로써 뜻하지 않게 고금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최강의 낭인용병 한 사람이 탄생했다.
 청천객(靑天客)이라는 별호로 아직도 그 바닥에 전설로 회자되는 불세출의 인물이 바로 금서진인 것이다.
 물론, 그가 전설적인 용병으로 뭇 낭인들의 추앙을 받게 된 것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다. 무공만 뛰어나다고 해서 저절로 우수한 용병이 되는 것은 아닌 까닭이다.
 일대일의 싸움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특히나 집단 간의 싸움에선 경험과 관록이 대단히 중요하다. 비록 금서진이 압도적인 무공 실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초기에는 함정에도 여러 차례 빠졌고 그 때마다 죽을 고비도 숱하게 맞았다. 무수한 위기에서 그나마 질긴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는 범우상의 조력이 매우 컸다. 오랜 경험과 기민한 감각으로 싸워야 할 때와 피해야 할 때, 밀고 나갈 때와 물러날 때를 체득한 범우상이 없었다면, 미래의 십대고수 곤륜일검 금서진은 젊은 나이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한편, 금서진과 범우상이 함께 어울려 다닌 과정은 두 사람 모두를 무학의 새로운 경지로 인도했다.
 범우상이 금서진의 지도에 힘입어 일류의 고수로 탈바꿈했을 뿐 아니라, 금서진 또한 용병생활을 통해 많은 것을 익히고 배웠다.
 거듭되는 실전을 통해 임기응변의 능력을 키웠거니와 무공 수위 그 자체도 월등히 높아졌다.
 곤륜에 있을 때는 무공 그 자체를 위해 무공을 수련했으나 용병생활 중에는 생존을 위해 무공을 수련했으므로, 그 수련의 충일함이 더욱 깊었던 것이다.
 그런 금서진이 청천객으로서의 20년 세월을 청산하게 된 것은 대사형 백서로 때문이었다.
 
 ***
 
 삼륜방의 특급용병으로 금오문과의 일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백마표국의 국주 장북헌을 만났다.
 장북헌은 현 곤륜파 사장로 정상기의 속가제자로 굳이 따지면 금서진의 사손(師孫)뻘 되는 자였다.
 오랜만에 곤륜 제자와 마주친 금서진은 신분을 감추고 넌지시 사문의 소식을 캐물었고, 이 과정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사형이자 장문인인 백서로가 임종을 앞두고 백방으로 자신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백서로는 금서진에게 있어 위선과 아집으로 때 묻은 다른 사형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천애고아 금서진에게 사부 곽동천이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면, 백서로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였달까?
 여제자를 받지 않던 당시의 곤륜에서 부모에게 버려진 핏덩이를 실제로 돌봐주고 나아가 무공까지 가르친 이가 바로 백서로였던 것이다.
 금서진은 그런 백서로의 임종을 외면할 정도로 냉정하지 못했다.
 마침 그 무렵 상처(喪妻)한 범우상도 홀로 남겨진 외동딸을 위해 용병 생활을 접고 강남으로 내려갈까 생각 중이어서 금서진 또한 향후 진로를 고심하던 차였다.
 금서진은 길게 생각해볼 것도 없이 그 길로 범우상에게 잠시간의 작별을 고하고 곤륜으로 여정을 잡았다.
 이십여 년 만에 다시 찾은 곤륜파는 금서진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변해 있었다.
 그가 하산할 당시 막 사문의 실세로 부상해 기세등등하던 사형들은 이미 한직(閑職)으로 물러나 있었고, 군자검(君子劍) 연성우와 같은 젊고 패기만만했던 사질들이 어느덧 원숙한 풍모로 곤륜을 이끌고 있었다.
 그들은 백 년래 곤륜이 배출한 최고의 기재라는 젊은 사숙에게 은연중 경계심을 보이기도 했으나, 전대의 아집 덩어리들보다는 훨씬 솔직하게 그를 인정했다.
 심지어 연성우와 같은 실력지상주의자들은 금서진의 귀환을 진심으로 반기며 환대해 주었다.
 예기치 못한 환대에 자못 흐뭇해하며 금서진은 백서로의 병상을 찾았다.
 금서진이 들어섰을 때, 이미 소식을 전해들은 백서로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상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대곤륜의 수장으로서 위풍당당하던 백서로는 오랜 투병생활 탓인지 무척이나 수척해 있었다. 칠척장신의 거구는 뼈밖에 안 남은 듯 볼품없이 앙상했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운 얼굴엔 검버섯만 잔뜩 피어 있었다. 퀭한 두 눈은 짓물러 현기를 잃었고 진물이 흐르다 마른 눈가는 흉하게 얼룩져 있었다.
 그런 백서로 앞에서 금서진은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백서로가 손을 뻗어 침상 가에 무릎 꿇고 앉은 금서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거칠고 부르튼 백서로의 손길이 금서진에겐 섬섬옥수(纖纖玉手)마냥 정겹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백서로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담고 말문을 열었다.
 “녀석··· 이제야 돌아왔구나. 많이··· 기다렸느니라.”
 “면목이 없습니다, 대사형!”
 가슴에서 북받치는 무언가를 억누르며 힘겹게 대꾸하는 금서진을 향해 백서로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동안 어··· 쿨룩 쿨룩, 어떻게 지낸 게야?”
 “잘 지냈습니다.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래, 다행이구먼···.”
 “진작에 한 번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백서로가 가만히 금서진의 손을 잡으며 곁에서 수발을 들던 이들에게 말했다.
 “사제와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물러··· 쿨룩 쿨룩, 물러가··· 있거라.”
 실내에 두 사람만 남게 되자 백서로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제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
 금서진이 선뜻 대답했다.
 “부탁이라니요, 당치도 않으십니다. 하명만 하십시오! 뭐든 하겠습니다.”
 백서로가 잠시 가쁜 숨을 가다듬은 뒤 천천히 본론을 꺼냈다.
 “나는··· 나는 사제가··· 쿨룩, 사제가 내 뒤를 이어주길 바라네···.”
 “예에?”
 순간적으로 백서로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던 금서진이 다시 생각해 보고는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뒤를 잇다니요?”
 “장문직··· 자네가 맡아줘야···겠어!”
 금서진이 백서로의 초췌한 얼굴을 멍하니 올려다 보았다.
 상상조차 못해본 제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일파의 차기 장문직은 전대 장문인의 직계제자들 중 서열이 가장 높은 제자부터 승계 순위가 매겨지고, 조건에 부합하는 인물이 없거나 있더라도 결격사유가 있을 때는 장로회의를 거쳐 방계의 제자들 중에서 선출되는 것이 통상의 관례였다.
 사형제간에 장문직이 전승되는 경우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극히 예외적인 상황이다.
 “아무래도 자네밖에 없어···. 맡아주게.”
 놀라고 당황한 금서진이 손사래를 쳤다.
 “불가합니다. 관례대로 하 사질에게 맡기십시오!”
 “남충은 이미 고사(苦辭)했거니와··· 장문직을 수행하기엔 너무 여려.”
 “싫대도 설득을 하셔야지요. 아니, 정 싫다면 조 사질에게 넘기시면 되잖습니까?”
 “모르고 있었구먼? 철산은··· 쿨룩,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세···. 벌써 여러 해 되었지.”
 “그래도··· 연 사질이 있지 않습니까?”
 “성우는 안 돼. 그 녀석은··· 너무 위험해.”
 “네? 위험하다니요?”
 연성우는 뛰어난 인재였지만 야심이 지나치게 컸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백서로는 연성우의 장문직 승계를 꺼렸다. 연성우의 야심 그 자체보다는 곤륜을 둘러싼 흑막에 그 야심이 이용당할 가능성을 우려한 것인데, 금서진 앞에서 입에 올리기는 곤란한 내용이었다.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더 마다하지 말게. 내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 둔 바일세.”
 그러나 금서진의 뜻도 완강했다.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뭐라고 말씀하셔도 그것만은 못 하겠습니다. 차라리 죽으라고 하시면 따르겠지만, 그 말씀만은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금서진이라고 대곤륜의 장문이란 명예로운 자리가 무조건 싫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이미 거칠 것 없이 자유로운 강호생활을 만끽한 자신이 곤륜과 같은 거대문파의 수장으로서 그 무거운 책임과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또한, 현실적으로 이십여 년 만에 사문에 복귀한 자신이 갑작스레 장문직을 승계했을 때 쏟아질 그 따가운 시기와 질투의 시선도 끔찍하리만치 싫었다.
 백서로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금서진을 응시하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마디 말로는 금서진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백서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정히 그렇다면 내 한 가지 다른 제안을 하겠네. 이것만은 사제가··· 무슨, 쿨럭 쿨럭···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들어줘야 하네···.”
 백서로가 한 발짝 물러나는 기미를 보이자 금서진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장문직을 계승하라는 말씀만 거둬주신다면야···.”
 그런 금서진을 보며 백서로가 침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좋아···. 대신에 성우, 그 아이가 장문직에 있는 동안은··· 그 동안 만큼은 자네도 곤륜을 떠나지 말게.”
 “네? 무슨··· 말씀이신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해하는 금서진의 귀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백서로의 하명이 떨어졌다.
 “말 그대로일세···. 성우가 장문직을 수행하는 동안 자네 또한 본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일세.”
 금서진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연성우의 나이 마흔 여섯,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았지만 무인으로선 그야말로 한창때이다. 이변이 없는 한 족히 20년은 더 장문직을 꿰차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 동안 꼼짝 없이 곤륜산에 갇혀야 된다는 것인데, 사실상 죽을 때까지 사문을 지키라는 뜻이나 진배없었다.
 금서진이 당황해 한마디 하려는데 백서로가 선수를 치고 나왔다.
 “장문직을 잇던가, 앞으로 본산을 지키던가. 선택은··· 자네에게 달려있네.”
 말과 함께 백서로가 침상 머리께에 놓인 삼척 남짓의 낡은 철검을 집어 들었다. 짙은 암갈색 검집에 홍학(紅鶴)을 양각한 검, 바로 곤륜파의 장문신부 고학신검(孤鶴神劍)이다.
 ―스르릉!
 맑은 쇳소리와 함께 백서로에 의해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검신이 창을 넘어 비치는 일광을 반사해 눈부신 광채를 뿌렸다.
 고학신검을 마주한 금서진이 저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렸다.
 백서로가 고학신검까지 꺼내들었다는 것은 자신의 뜻을 끝내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니 이제 금서진은 선택을 피할 수 없었다.
 엄연한 곤륜의 제자로서 장문신부를 앞세운 백서로의 뜻을 감히 거스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금서진이 침울하게 대답했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연 사질이 장문직에 있는 동안은 절대 곤륜산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금서진이 끝내 장문 승계를 거절하자 백서로가 긴 눈썹을 늘어뜨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허나 본인이 그렇게까지 싫다는 데야 백서로 또한 방법이 없었다.
 백서로가 입적한 것은 금서진이 고학신검 앞에서 맹세한 그날로부터 열흘 뒤였다.
 장문직은 예상대로 연성우가 이었으며 금서진은 백서로와의 약속대로 장로들의 숙소인 태허관(太虛館)에 방을 내고 곤륜산에 눌러앉았다.
 세월이 흐르며 금서진은 백서로가 연성우를 경계한 까닭을 반쯤은 이해하게 되었다.
 장문직에 오른 연성우가 본격적으로 그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연성우는 천년 곤륜의 영화를 재건하기 위해서라는 명분 아래 제자들에게 보다 혹독한 무공 수련을 강요하는 한편, 서북 일대 군소문파들의 일에 번번이 개입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각지의 거대문파들과 외교적인 교분을 쌓으며 세력 확장에 주력했다.
 금서진도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한 과거의 곤륜을 달가워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청정수련의 도량이라는 본연의 모습마저 잃어가는 사문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인근의 작은 문파 해공문의 차기 문주 승계 건으로 결국 뜻이 다른 두 사람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해공문의 신임 문주는 전 문주의 대제자인 금부(金釜) 도사령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또한 문주의 선출은 어디까지나 해공문의 고유 권한이므로 본래 곤륜파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성우는 해공문 장로회에 실력을 행사해 이제자인 은창(銀槍) 유운봉이 문주 위에 오르도록 뒷공작을 벌였다.
 유운봉이 연성우에게 매년 곤륜파에 세공(歲貢)을 바치는 조건으로 뒷배를 청했던 것이다.
 금서진은 이러한 사실을 흥분한 도사령의 제자들이 곤륜파에 찾아와 항의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더는 묵과할 수 없었던 금서진이 이를 두고 연성우에게 따지고 들었으나 연성우는 오히려 그런 금서진을 회유하려 들었다.
 “사숙, 긴 안목으로 보셔야 합니다! 도사령의 외숙이 누군지 아십니까? 화산파의 장로 묵공자(默孔子)입니다. 그런 도사령이 문주가 되면, 그동안 본파의 예하에 있던 해공문을 두 눈 멀쩡히 뜨고 화산파에 빼앗기는 격이 되고 맙니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 나름의 전통과 체계를 갖춘 독립문파를 두고 예하에 있다느니, 화산파에 빼앗긴다느니! 정녕 제정신으로 하시는 말씀이시오?”
 “사숙께서 요즘 무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모르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삼대고수의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 지난 이십여 년간, 무림은 도처에서 서로 물고 뜯기는 난세 중의 난세입니다. 서북 일대만 해도 파천신군(破天神君)의 제자를 자처하는 양무기란 자가 마교의 잔당들을 규합해 그 세를 무섭게 확장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 아래 강남에선 동방, 서문, 남궁, 북리의 사대세가가 강남의 패권 장악을 위해 근래 보기 드문 큰 전쟁을 벌이고 있지요. 그뿐입니까? 동쪽에선 수백 년 간 봉문 중이던 만검전이 황실을 등에 업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지요. 구파도 그저 보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화산을 비롯한 5개 파는 후학들의 정예화를 위해 등룡원(登龍院)을 세웠지요. 무당과 아미 같은 문파조차 인근 군소문파들을 단속하며 안으로 칼날을 세우는 형편이구요. 이런 와중에 저희 곤륜만 수수방관하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힘을 키워 난세를 대비해야지요. 그러자면 무림에 저희 편을 하나라도 더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다소 무리하면서까지 유운봉을 문주 자리에 밀어올린 것입니다. 어차피 이런 난세에 본파와 같이 든든한 줄을 잡을 수 있다면, 해공문 입장에서도 나쁠 것은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연성우의 항변에 금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물론, 연성우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곤륜파도 무림에 적을 두고 있는 이상, 이런 난세에 힘을 키울 필요는 있다. 허나, 방어를 위한 소극적 의미의 실력 배양이어야지, 오히려 난세를 조장할 수도 있는 적극적 의미의 세 불리기여서는 곤란했다.
 금서진이 생각할 때 곤륜파가 해야 할 바는 보다 의연하고 공명정대한 일 처리로 군소문파의 모범이 됨으로써 그들이 혼란에 휩쓸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어야 했다. 아예 군소문파들을 복속해 자기 휘하에 두고 훗날의 화살받이로 써먹겠다는 생각이라면 잘못되도 한참 잘못된 발상인 것이다.
 이런 금서진의 생각을 연성우는 정면으로 반박했다.
 “참으로 순진하신 말씀입니다. 그건 그야말로 원론적인 이야기지요. 그런 공자님 같은 생각으론 무림을 영도해나갈 수 없습니다.”
 연성우의 말에 금서진이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그러나! 그것이 정도(正道)요!”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서로의 싸늘한 안광이 마주치는 곳에서 불꽃이 튈 듯한 긴장감이 팽배했다.
 연성우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나이는 어려도 배분상 엄연한 사문의 존장, 할 말은 많았지만 예의도 아닐뿐더러 더 해봐야 소용도 없었다.
 “좋습니다. 사숙의 말씀,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 허나, 어찌되었든 해공문 장로회에서 결정된 바를 다시 번복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번 건은 이대로 덮어 두시지요.”
 연성우가 못을 박으니 금서진도 더 이상 그를 강박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문주를 다시 교체하도록 요구한다면 그 역시 해공문에 대한 또 다른 월권인 것이다.
 해공문 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으나 그 이후로도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의 반목은 끊이지 않았다.
 아울러 문파의 두 어른이 그와 같이 사사건건 충돌하니 제자들도 편을 갈라, ‘내가 옳네, 네가 옳네.’ 하며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곤륜파는 연성우를 따르는 다수파와 하남충과 정상기 등 금서진을 따르는 소수파로 분열 조짐을 보였다.
 
 ***
 
 그러던 어느 날, 연성우가 돌연 병을 얻어 쓰러졌다.
 처음엔 과로로 인한 가벼운 몸살로 보였다.
 연성우 스스로도 병을 가볍게 여겼고 문인들도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경의 경지를 바라보는 초고수가 열병 정도로 어떻게 될 것이라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허나, 중인의 생각과 달리 한 번 쓰러진 연성우는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병세가 악화되어 연성우는 고열과 오한으로 신음하게 되었다.
 그제야 마음이 급해진 제자들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용하다고 소문이 자자한 의원들을 초빙해 왔으나 병명조차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다.
 어떤 이는 약을 쓰고, 어떤 이는 뜸을 뜨고, 또 어떤 이는 침을 놓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병상에 누운 지 삼 개월 만에 연성우는 실로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연성우가 죽자 그를 추종하던 세력들은 금서진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일부는 연성우가 금서진 때문에 울화병을 얻었을 것이라 추측하는 정도였으나, 일부는 금서진이 모종의 암계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며 극단적인 의혹을 제기했다.
 물론, 드러내놓고 그런 소리를 퍼뜨린 것은 아니었지만 수군거림은 바람을 타고 금서진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금서진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일이 바로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는 것이다. 과거에 자신을 시기하던 사형들로 인해 한 번 호되게 데지 않았던가.
 연성우의 대제자 임북희가 장문직을 승계하는 바로 그날부로 금서진은 다시 곤륜을 떠났다.
 어떻든 백서로와의 약속은 지킨 셈이고 임북희가 연성우 못지않은 야심가라고는 하나 하남충과 정상기 등 그를 견제할 이들이 있는데, 굳이 자신이 사손 뻘 되는 자와 시시콜콜 맞닥뜨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곤륜을 내려온 금서진은 범우상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마땅히 갈 데도 없었거니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유일한 지기(知己)가 무척이나 그리웠다.
 금서진과 더불어 서북 용병계의 양대거두로 이름을 날린 벽력사 범우상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범우상이 낭인곽이란 단체를 세워 강남 일대의 용병 사업을 좌지우지하는 거물로 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용병 생활을 통해 상당한 돈을 모은 범우상은 본래 강남에서 조그마한 객점이나 하나 운영하며 남은 여생을 여유롭고 편안하게 즐길 작정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강남은 그가 그리던 고즈넉한 이상향이 아니라 서북보다도 더 격렬한 전장이었다.
 강남 사대세가가 패권을 두고 서로 죽고 죽이는 치열한 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것이다.
 와중에 무인 한 명이 아쉬웠던 사대세가로 인해 강남에도 용병에 대한 수요가 새로 생겨났고, 그에 부응해 금릉 남부에 커다란 용병시장이 들어섰다.
 이쪽 방면의 전문가라 할 범우상의 눈에 이 용병시장은 서북 무림과 비교할 수도 없는 난전(亂廛)으로 비쳐졌다.
 시장에 나와 있는 용병들의 자질도 형편없었을 뿐더러, 중개인들의 관리체계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고용주인 사대세가나 피고용자인 용병들이나 서로 불만만 쌓였다. 사대세가는 작전 수행 능력이 떨어지는 용병들이 엉뚱한 짓으로 외려 해가 된다 불만이었고, 용병들은 그래도 명문이라는 사대세가가 제대로 대우도 해주지 않으면서 화살받이로만 내몬다고 불만이었다.
 누적된 불만이 폭발해 전투 도중 같은 편끼리 내분을 일으키는 경우마저 생길 정도였다.
 이런 사정을 꿰뚫어 본 범우상은 슬슬 몸이 달아올랐다.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시장을 선점하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범우상은 그 즉시 기획서를 작성해 만금전장(萬金錢藏)의 주인 진대부(晉大夫)를 방문했다.
 진대부를 전주(錢主)로 끌어들여 용병사업을 시작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금릉상회(金陵商會)와 더불어 강남의 부를 양분한다는 만금전장은 도박이나 매춘과 같은 음성적인 사업을 기반으로 했다. 그렇기에 현금은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막대한 현금을 굴릴 데가 마땅치 않아 늘 고민이었다.
 표국이나 야철, 혹은 건설 등 보다 안전하고 합법적인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하려 시도했지만, 이미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금릉상회의 방해로 번번이 좌절을 맛본 터였다.
 그런 중에 찾아온 범우상이 참신한 사업거리를 들고 찾아왔다.
 처음에야 시큰둥했지만, 가만히 설명을 듣고 있자니 슬슬 코끝이 간지러웠다. 돈 냄새를 맡는 진대부 특유의 개코가 발동된 것이다.
 마침내 ‘옳거니!’ 하고 무릎을 친 진대부는 앉은 자리에서 흔쾌히 전대를 풀었다.
 자금 확보에 성공한 범우상은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했다.
 금릉의 용병시장을 돌아다니며 자질은 뛰어나나 경험이 부족한 젊은 용병들을 찾아 선수금을 주고 계약을 맺었다. 이어 서북 일대의 관록 있는 용병들을 교관으로 영입해 이들로 하여금 미숙한 용병들에게 체계적인 전투 훈련을 시키도록 조처했다. 아울러 이렇게 양성된 용병들과 사대세가 사이의 계약을 가운데서 직접 중개했다.
 용병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사대세가가 원하는 맞춤형 용병을 제공하는 대신 훨씬 높은 몸값을 받아냈으며, 이 일부를 수수료 명목으로 낭인곽이 챙겼다.
 처음에는 어디에도 얽매이기 싫어하는 젊은 용병들을 낭인곽이란 조직으로 흡수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으나, 낭인곽을 거친 용병들이 사대세가로부터 월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며 낭인곽에 들어오기를 자원하는 용병들이 점점 늘어났다. 물론, 여기에는 용병계에 자자한 벽력사 범우상의 이름값도 크게 작용했다.
 한편, 낭인곽 용병들이 전장에 투입되면서 전장에서 용병들의 위상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용병들이 머릿수나 채우는 들러리가 아니라 사대세가의 한 주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자연히 사대세가 사이에 상대보다 더 많은 수의 낭인곽 용병들을 고용하려는 경쟁이 붙었고 이런 경쟁 속에서 낭인곽 용병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큰돈을 번 범우상은 이를 다시 재투자해 조직을 꾸준히 확장시켜 나갔고 결국엔 금릉에 번듯한 성곽을 보유한 하나의 방파로 거듭났다.
 허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했던가!
 언제까지고 성세를 구가할 것만 같았던 낭인곽의 사업이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낭인곽의 주 수입원은 사대세가. 전쟁이 끝나면 심대한 타격이 불가피하다. 물론, 난세에 쓸 만한 용병에 대한 수요는 넘쳐났다. 왜구의 출몰에 등쌀을 앓고 있는 남방 해역이나 미륵도(彌勒徒)의 횡행에 정국이 불안정한 화북 쪽으로 얼마든지 사업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 그 일대에 난립한 군소업체들과 경쟁해야 하고 본거와 거리가 멀어 용병들의 관리도 어려워지겠지만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사대세가에 고용된 숙련용병들을 빼 사업을 확장할 기회일 수도 있다.
 허나 범우상은 그런 가능성을 아예 고려하지 않았다. 범우상이 처음 낭인곽을 세운 이유는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이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사대세가 전쟁을 통해 따로 노리는 바가 있었고 아직 그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다 판단한 것이다.
 그렇기에 오랜 전쟁에 기진맥진한 사대세가가 서서히 휴전할 기색을 보이자 범우상은 깊은 고심에 빠져 들었다.
 헌데 눈치 빠르고 영민한 수하 하나가 그의 의중을 읽고 사고를 쳤다. 사대세가 전쟁이 재차 불타오르도록 계략을 꾸민 것이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셈. 범우상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게 아니었건만.
 어쨌든 모계가 성공해 한동안 다시 치열한 교전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사대세가가 결국 낭인곽의 소행을 눈치챈 것이다.
 사대세가 입장에서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오랜 전쟁으로 피해가 막심한 사대세가였다.
 수많은 인재들이 다치고 죽었으며, 누대에 걸쳐 쌓아 올린 세가의 재산도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경제적인 피해는 낭인곽으로 인해 몸값이 엄청나게 뛴 용병들을 경쟁적으로 고용한 탓이 컸다. 타 세가에 비해 재력이 뒤처지는 동방세가는 주객이 전도되어 낭인곽에 장원을 담보로 부채까지 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사대세가 모두 내심 이만하고 멈췄으면 싶으면서도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버티고 있었는데, 엉뚱하게 안중에도 없던 낭인곽 따위에 놀아난 꼴이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십대고수의 하나인 쌍검무적(雙劍無敵) 북리청의 제의하에 사대세가 수뇌들이 중립 세력인 세창보에서 역사적인 회합을 가졌다.
 이름 하여 제일차 사해지회. 훗날 사패천의 하나로 천하를 사분하는 강남십삼련(江南十三聯) 탄생의 시발점이었다.
 
 사해지회는 쉽게 종결되지 않았다.
 사대세가 가주들은 모처럼의 회합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고자 숙식도 잊고 꼬박 사흘간 격론을 벌였다.
 강남에 터전을 둔 모든 세력들이 사해지회의 결말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지은 죄가 있는 낭인곽은 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사해지회는 낭인곽 입장에서 최악의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사흘째 밤을 지새우고 네 가주가 흡족한 미소와 함께 손을 맞잡고 세창보의 의사청을 나섰다.
 최고령자인 서문세가주 무혈도(無血刀) 서문교가 사해지회를 통해 얻은 세 가지 결론을 무림에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 사대세가 십년전쟁 종식!
 
 사대세가 식솔들뿐만 아니라 세창보 문인들과 호기심에 몰려든 강남의 모든 무인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지긋지긋한 전쟁에 피폐한 강남 무림인들의 절실한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 낭인곽 토벌!
 
 이번엔 사대세가 식솔들만 환호했을 뿐, 세창보 문인들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사대세가 사람들에게야 낭인곽이 마땅히 응징되어야 할 존재였지만, 그 밖의 무림인들에게 있어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부상한 낭인곽에 대한 선전포고는 강남을 무대로 한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일 뿐이었다. 물론, 그런 불만을 겉으로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간 큰 자들은 없었다.
 
 ― 사대세가 연합체인 사해방 결성!
 
 술렁이던 좌중이 일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대세가 식솔들조차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입장 정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문교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사해지회를 처음 제안했던 쌍검무적 북리청이 서문교를 대신해 연단에 섰다.
 “주지하다시피 사대세가는 오랜 세월 크고 작은 싸움을 지속해 왔소. 매번 부딪칠 때마다 세가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고, 급기야 지난 십년 동안은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전쟁을 치르고야 말았소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실로 참담하오. 네 가문 모두 무엇 하나 얻은 것 없이 무의미한 희생만 치렀소. 많은 이들이 죽었소. 각 세가엔 전쟁 통에 자식을 잃은 늙고 병든 노인들과 부모를 잃은 어린 고아들이 넘쳐나는 실정이오. 금전적 손실도 이루 말할 수가 없소이다. 계속된 전쟁으로 사대세가 각각의 재정은 이제 파탄을 눈앞에 두고 있소. 심지어 유족들을 돌볼 재원마저 부족한 지경이외다. 어디 그뿐이겠소? 더 중요한 것은 드높았던 사대세가의 존엄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이오. 지금의 사대세가를 보시오! 낭인곽이란 저 근본도 없는 사도의 무리들조차 우리를 능멸하려 들 지경이오. 우리가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으면 낭인곽 따위가 사대세가를 조종해 세를 불리고자 했겠소이까? 누군가 이런 말을 하더이다. 사대세가의 전쟁이 이대로 3년만 더 지속되면 강남의 패권을 장악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저들 낭인곽일 것이라고! 이것을 그저 기우라고만 치부할 수 있겠소?”
 연설이 계속되면서, 북리청의 어조가 점점 강해졌다. 그 열변에 사대세가 문인들이 묵묵히 고개를 떨궜다.
 “우리 네 사람의 가주는 이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소. 모든 것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생각해 보았지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사대세가가 서로 남남이 아님을 새삼 깨닫게 되었소. 생각해 보시오! 아시다시피 사대세가는 삼백 년 전 서장 홍교(紅敎)의 요승(妖僧)들이 중원을 침공했을 때 침묵하는 구대문파를 대신해 가솔들을 이끌고 용감히 맞서 싸웠던 네 분 조사님들로부터 발원한 세가들이오. 그러니 어찌 우리가 출발부터 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소? 오히려 우리는 뜻을 같이 했던 조사님들의 뒤를 이은 형제의 가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오. 그런 사대세가가 오늘날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다른 삼대세가를 누르고 홀로 강남을 독패해 천하를 향해 뻗어 나가려는 각 세가의 야욕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소이다. 제 욕심이 앞서 무의미한 피를 흘리면서도 정신을 못 차렸던 것이오.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소? 이에 우리 네 가주들은 지난 과거를 깨끗이 잊고 사대세가 공동의 목적을 위해 힘을 모으기로 했소. 동도 여러분, 상상해 보시오! 사대세가가 하나로 뭉쳤을 때 드러날 그 거대한 힘을! 이제 우리는 사해방의 이름 아래 강남을 영도할 것이며, 나아가 전 무림에 그 기치를 높이 세울 것이오. 우리는 그럴 자격이 있소! 우리는 그럴 역량이 있소! 우리는 할 수 있소!”
 북리청이 열변을 마치며 불끈 쥔 주먹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동시에 사대세가 문인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옳소! 우리는 할 수 있소!”
 “훌륭하시오! 호(好), 호(好), 호(好)!
 ”사대세가 천세! 사해방 천세!”
 사대세가 가주들이 나란히 연단 앞으로 걸어 나와 맞잡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열기는 더욱 고조되었고 세찬 환호와 함성 소리에 세창보 전체가 떠나갈 듯했다.
 사대세가인들이 그렇듯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들 때,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던 다른 무인들은 창백하게 질려 사색이 되었다.
 북리청의 연설은 공개적으로 군림천하의 야망을 선언한 것이나 진배없다.
 자고로 천하를 목표로 야욕을 키우던 세력은 수도 없이 많았으나, 명문정파를 자처하는 사대세가가 이렇듯 공공연히 입에 담을 줄이야! 문제는 북리청의 말대로 사대세가에는 진정 그만한 역량이 있다는 사실이다. 각각의 세가가 구대문파에 비견될 정도. 그들이 뭉치면 그 힘이 어느 정도일지 함부로 가늠할 수 없다.
 일단 강남부터 사해방의 텃밭이 될 터이니, 당장 자리를 빌려준 세창보부터 ‘죽었구나!’ 복창해야 할 처지였다.
 북리청이 손을 들어 좌중을 진정시킨 뒤 몇 마디를 덧붙였다.
 “우리 네 가주는 사해방 출범의 첫 번째 과제로 낭인곽 토벌을 결정했소이다. 조만간 낭인곽을 섬멸하기 위한 조직이 편성될 것이오. 사해방의 조직과 체계는 낭인곽 궤멸 이후 각 세가의 원로들을 모시고 다시 편성할 것이나, 일단은 우리 네 가주들이 공동 방주의 직을 수행할 것이오. 아무쪼록 사대세가의 모든 문인들이 사해방의 성공적 출범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주실 것을 엎드려 당부하는 바요.”
 “와! 와!”
 “타도하자, 낭인곽!”
 “사대세가 천세! 사해방 천세!”
 “군림천하! 사해천하!”
 열기가 더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
 
 금서진이 낭인곽에 도착한 것은 공교롭게도 사해지회가 폐회되고 이틀 뒤였다.
 사해지회의 결정이 알려진 낭인곽은 전에 없는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고, 범우상을 비롯한 수뇌부는 한 자리에 모여 대책을 부심하느라 바빴다.
 그렇다고 해도 금서진이 범우상을 만나는 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정문 앞에 놓인 방명록에 ‘청천객’이란 세 글자를 써 내린 동시에 수문직이 득달같이 범우상에게 달려갔고, 이를 전해들은 범우상이 버선발로 뛰어 나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었다.
 마주 선 두 사람은 세월만큼 변한 서로에게서 지난 추억을 읽어내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서진!”
 “우상···!”
 잠시의 침묵 뒤에 정겨운 포옹이 이어졌다.
 금서진을 맞은 범우상은 대책회의마저 뒷전이었다.
 즉시 금서진을 빈객청으로 안내하고 산해진미를 내어 주연을 베풀었다.
 낭인곽의 수뇌들 역시 대부분 참석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서북 일대에서 용병으로 전전하던 자들이기에 청천객의 신분인 금서진과 안면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들은 순수하게 옛 친우와의 재회를 반기는 범우상과 달리 사해방과의 일전을 앞둔 이 시점에 때맞춰 등장한 청천객이란 인물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까부터 우선 고심했다.
 생각이 번잡스럽다 보니 사람들의 행동도 자연스럽지 못했고, 금서진 또한 이런 분위기를 금세 눈치챘다.
 “낭인곽에 무슨 문제가 있나?”
 금서진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범우상이 손사래를 쳤다.
 “문제는 무슨··· 그런 것 없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뭘. 솔직히 말해보게. 무슨 일인가?”
 “그런 일 없다는데도···.”
 범우상이 재차 부인했지만 금서진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지 말게. 우리끼리 감출 게 뭔가?”
 금서진이 이렇게까지 묻는 데야 별 도리가 없었다.
 하기사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일이다. 며칠만 머물면 지금 낭인곽이 처한 상황을 금서진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테니까.
 “흠, 그게 참··· 암튼 여러모로 좀 안 좋을 때 왔구먼···.”
 범우상이 대강이나마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자, 금서진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허어, 어쩌다 그런 짓을! 사정이 어떻든 자네도 잘한 건 없군, 그래.”
 금서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도문의 제자인 그에게 낭인곽이 벌인 짓은 아무래도 귀에 거슬렸음이다.
 “부끄러울 따름이네···.”
 “그래,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솔직히 잘 모르겠네···. 그저 궁리 중이야.”
 “내 생각엔 낭인곽을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사대세가에 모든 걸 내주고 용서를 구함이 어떻겠나?”
 범우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일단은 나도 같은 생각이라 어제 언변 좋은 수하 하나를 사대세가로 보냈네. 낭인곽을 해체하고 모든 손해를 배상하는 조건으로 용서를 구하게 했는데, 저쪽에서 순순히 받아들일지는 모르겠네. 자, 자! 복잡한 생각은 접어두고 술이나 한 잔 더 하시게.”
 
 세상에 뜻대로 풀리는 일이 없다는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 사대세가에 사죄를 보냈던 수하가 처참한 몰골로 돌아오며 새삼 확인되었다.
 두 눈과 두 팔을 잃은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난 수하를 보고 범우상을 비롯한 낭인곽도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사정을 묻는 범우상의 음성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예기치 않게 불구의 몸이 되어 여러 날을 불안과 고통에 시달린 수하는 범우상의 물음에 갑자기 설움이 복받쳤는지 그대로 주저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범우상이 말릴 새도 없이 곡성은 더욱 커졌고, 채 아물지 않은 두 눈에선 피눈물마저 흘렀다. 수하의 그런 처참한 모습에 범우상은 차마 대답을 채근할 수 없었다. 흐르는 피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옷깃까지 적셨으나, 두 팔마저 잃은 수하는 이를 닦아내지도 못했다. 흐느낌이 조금 잦아지는 기미를 보이자 범우상이 소매로 수하의 피눈물을 직접 닦아주며 재차 물었다.
 “진정하거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이냐?”
 그제야 수하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소···인은 낭인곽을 나서 곽주님의 말씀대로 사해방 창설의 주축으로 보이는··· 흐흑, 북리세가로 향했습죠. 그런데, 도중에 대경방(大鯨幇)의 제자를 만나 사대세가의 가주들이 모두 서문세가에 모여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한 소인은 서문세가 쪽으로 발길을 돌렸고, 서문세가에 당도해 그곳 수문직에게 사대세가 가주들과의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청을 넣었습니다. 낭인곽에서 왔음을 안 그자에게 온갖 모욕을 당하기는 했습니다만, 어찌됐든 가주들에게 소인의 방문이 전해지긴 한 모양이었습니다. 반각 정도 기다리니 집사쯤 되어 보이는 노인네가 저를 별실로 데려갔고 다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떴습니다. 조금 있으니 별실의 방문이 벌컥 열리며 팔자수염을 기른 왜소한 늙은이를 필두로 네 사람이 들어왔습지요. 소인은 그 노인네가 무혈도 서문교임을 금세 알아봤습니다. 물론, 다른 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다른 삼대세가의 가주들이었겠지요.”
 여기까지 말한 수하가 목이 메는지 밭은기침을 해댔다. 범우상의 지시로 누군가 물 한 대접을 떠다 주었고, 그걸 단숨에 들이켠 수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소인은 사대세가 가주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엎드려 예를 갖췄습니다. 그런데, 그 서문 늙은이가 대뜸 ‘버러지 같은 낭인곽 놈이 여긴 무슨 일이냐!’ 하고 호통을 치더군요. 기분은 더러웠지만 곽주님의 명도 있고 또 감히 제가 따질 상대도 아닌지라 그저 가만히 곽주님의 서신을 전했습니다. 서문 늙은이가 서신을 읽어 보더니 콧방귀를 뀌곤, 다른 가주들에게 서신을 넘겼습니다. 서문 늙은이가 말하더군요. ‘그래, 낭인곽을 해체하고 배상을 하겠다?’ 소인이 대답했습죠. ‘저희 곽주께선 본의 아니게 존귀하신 분들께 죄를 지었다고 크게 괴로워하고 계십니다. 죽음으로 죄를 씻어 마땅하나 여러 가주님들께서 너른 아량으로 용서를 받아주시기 바란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서문 늙은이는 냉소할 뿐이었는데, 그 옆에 남색 도포를 입은 초로인이 끼어들더구먼요. 아마 그가 북리청인 것 같았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낭인곽주 벽력사가 그래도 용병계에선 신화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길래, 내 나름대로는 그를 그래도 한 사람의 어엿한 무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제 목숨 귀한 줄만 아는 한낱 장사치에 불과하구나! 죽을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목을 바치던가, 그렇지 않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덤빌 뿐이지 무슨 타협이란 말인가? 또한 황금으로 배상을 한다? 도대체 무엇에 대해? 간교한 계략에 빠져 부질없이 죽어간 우리 사대세가 후기지수들의 희생에 대해?’”
 수하를 통해 북리청의 호통을 간접적으로 접한 범우상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얼핏 금서진을 보니 지그시 눈을 감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 북리청의 말에 다분히 공감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수하의 말이 또 이어졌다.
 “듣고만 있자니 억울한 마음이 들어 소인이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습니다. ‘무림인도 사람인데 어찌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때로는 실수가 큰 죄를 빚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때마다 목숨으로 사죄한다면 이 땅에 버젓이 살아 숨 쉴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또한 저희 곽주께서 무림인이시고 낭인곽 또한 무림에 적을 두고 있으나, 따지고 보면 낭인곽 그 자체는 하나의 사업체에 불과할 뿐입니다. 나아가 곽주께서 금전적인 배상을 하고자 하심은 그간 많은 금원을 벌어 들였으나 그 과정이 옳지 않았음을 깨닫고 수익을 원주인에게 환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결코 전쟁 중에 희생되신 분들의 목숨 값을 황금으로 대신한다는 속된 뜻은 아님을 헤아려 주십시오.’라고요.”
 “좋구나. 그랬더니?”
 “서문 늙은이가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쳤습니다. ‘네 이놈, 뚫린 입이라고 세치 혀를 잘도 놀리는구나! 네깟 놈이 누굴 가르치려는 게야!’ 그제야 소인이 사대세가 가주들 앞에서 사설이 길었음을 깨닫고 사죄했습니다. 서문 늙은이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허리춤의 칼을 빼 들었습니다만 다행히 북리 가주가 그를 진정시켜 주었지요.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어디선가 다시 칼바람 소리가 일더니, 그만··· 갑자기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놀란 소인이 손을 들어 눈으로 가져가려 했는데··· 아아! 그때는 이미 두 팔마저 잘려나가 있었습니다. 곧이어 극심한 통증에 소인이 바닥을 굴렀는데 황망 중에 북리청이 ‘동방 가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미루어 짐작컨대 소인을 이렇게 만든 놈이 필경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독심호리(毒心狐狸) 동방삭이었던 모양입니다. 그가 말하더군요. ‘윗사람도 못 알아보는 눈 따위 무엇에 쓰겠느냐. 쓰레기 같은 서신을 들고 와 더럽혀진 손은 또 어디에 쓰겠느냐. 이 몸이 다른 가주들을 대신해 네놈의 무례를 징죄하였거니와 마땅히 그 더러운 주둥이 또한 찢어놔야 옳겠으나, 다만 낭인곽과 그 주인이라는 범가에게 사해방의 뜻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만은 참았노라. 가서 전하라, 타협은 없다고!’ 거기까지 듣고 소인은 혼절하고 말았습지요.”
 긴 이야기를 마친 수하는 숨이 차는지 씨근덕거렸다.
 그런 수하를 물리고 범우상이 자리를 털고 있어났다.
 범우상은 잔뜩 인상을 쓴 채 회의청을 배회하다 가끔 한 번씩 벽에다 쾅쾅, 주먹질을 해댔다. 쉬 노기를 삭히지 못하는 범우상을 보며 낭인곽 사람들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돌가루가 분분히 날리며 벽에 금간 곳이 일곱 군데가 되었을 때, 범우상이 드디어 좌중을 향해 무겁게 소리쳤다.
 “보았는가, 저 오만한 사대세가의 만행을? 비록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적의 사자(使者)를 해하지 않음은 전장의 기본이다. 사악한 무리라 일컫는 마교도들조차도 이런 무도한 짓은 하지 않는다. 하물며 스스로 명문정파를 자처하는 저들 사대세가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범우상이 불을 뿜을 듯한 안광을 쏟아내며 실내에 있는 낭인관 수뇌들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었다.
 “가능하면 사대세가와의 싸움을 피하고자 했다. 첫째는 일이 이 지경이 되기까지 낭인곽의 책임이 컸던 탓이며, 둘째는 우리 낭인곽에게 사대세가라는 저 거대한 괴물과 싸울 힘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용서를 빌고,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러나 저들은 이마저도 용납하지 않고 있다. 우리에게 최소한의 기회조차 박탈해버린 것이다. 나는 이제 저들의 의도를 알겠다. 저들은 애초부터 우리 낭인곽에 대한 징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저들이 우리를 노리는 까닭은 우리를 굴종시키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핑계 삼아 여타 문파들에게 일벌백계의 본때를 보여 새로 생긴 사해방의 위엄을 떨치겠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렇지 않다면 무슨 이유로 굳이 희생을 감수해가며 스스로 엎드린 우리를 치겠다고 하겠는가? 무슨 득이 있다고!”
 중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현 상황에서 낭인곽을 치기 위해서는 사해방도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낭인곽에 소속된 방도만 약 일천. 대부분 서북 무림에서 용병생활로 잔뼈가 굵은 이들로 낭인곽에서 용병들을 교육시키는 교관이나 낭인곽 자체의 관리 및 경비를 위해 범우상이 직접 선발한 인원들이었다.
 거기다가 사해지회를 앞두고 사대세가로부터 돌아온 용병들이 일천, 합이 이천의 병력이었다.
 물론 정식으로 낭인곽에 속한 이들과 달리 이들 일천의 용병은 낭인곽과 금전을 매개로 한 계약관계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부를 낭인곽의 전력으로 포함시킬 수는 없다. 허나 낭인곽 방도들과는 어찌 보면 사제지간 비슷한 끈끈한 정이 있었고 배움이 짧은 대개의 낭인들은 이런 정에 무척 약했다.
 더구나 범우상이 누군가? 많은 낭인무사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용병계의 전설 아닌가! 그런 연유로 낭인곽이 외부와 전쟁을 벌인다면 정식 방도 외에 이들 용병까지 고려해야 하고, 사대세가도 이를 충분히 잘 알 것이다.
 수만의 가솔들과 수천의 무인들을 전력으로 보유하고 있는 사대세가가지만 이런 낭인곽을 멸하려면 어느 정도 희생은 불가피했다.
 오랜 전쟁에 지쳐 결국은 연합을 결의한 사대세가가 굳이 또 다른 희생을 감수하려는 데는 분명 다른 노림수가 있을 것으로 보였고, 따라서 범우상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범우상이 힘주어 말했다.
 “이제 사대세가와 낭인곽 사이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어차피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 나는 후회 없이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할 것이다. 강요는 않는다. 뜻이 같은 자는 나와 함께 싸울 것이며 생각이 다른 자는 이대로 낭인곽을 떠나면 그만이다. 자, 어떻게 하겠는가? 결정은 그대들의 몫이다.”
 말을 마친 범우상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태산처럼 버티고 섰다.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일 듯 이곳저곳에서 시작된 두런거림이 조금씩 커지며 장내는 이내 몹시 소란스러워졌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갑자기 고요해진 것은 누군가의 눈짓을 받은 한 거한의 우렁찬 외침 때문이었다.
 “부불귀(不佛鬼) 양사천, 곽주를 따르리다! 곽주 덕에 팔자에도 없는 호강을 누렸소. 이제와 배신한다면 개만도 못한 짓이지!”
 부불귀가 그리 외치자 장내의 분위기는 급물살을 탔다. 다시 또 누가 소리쳤다.
 “우리 하북오호(河北五虎)도 곽주와 함께 싸우겠소! 어차피 전장에서 죽는 것이 용병의 숙명 아니던가!”
 하북오호까지 부불귀를 거들고 나서자 대세는 기울었다. 너도 나도 동참의 뜻을 밝히고 나섰다.
 “이몸 소면살(笑面殺)도 같이 하겠소!”
 “웅삭도 이런 판에 빠질 수 없지!”
 들끓는 분위기로 회의청은 금세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싸였다.
 이때 부불귀 등에게 눈짓을 보낸 자가 앞으로 나서 금서진을 가리키며 외쳤다.
 “여러분, 여기를 보시오! 사상 최고의 용병 고수 청천객 어른이 이 자리에 계시오. 서북 무림의 패주를 자처하던 철혈대제(鐵血大帝)를 일검에 제압한 바로 그 청천객 말입니다. 이분 앞에서 허명뿐인 사대세가 가주들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할 따름이외다. 우리 쪽에도 이런 고수가 있는데 사대세가라고 두려울 게 뭡니까? 옥쇄를 각오하고 전력을 다하면 우리에게도 승산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과연 좌중은 더욱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일부는 벌써 ‘청천객’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금서진으로선 실로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금서진은 이미 과거의 금서진이 아니다.
 용병생활을 시작하던 당시의 금서진은 그저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신진고수에 불과했지만, 지금의 금서진은 대곤륜의 태상장로이며 무림 십대고수의 한 사람이다.
 타파의 고수들과 교분을 쌓는데 인색했고 그럴 기회 또한 많지 않았기에 무림에서 그의 진면목을 아는 이가 드물었으나, 그 이름과 무공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었다.
 사대세가의 고수들과 겨루게 된다면 일부 견식 있는 자들에 의해 자신의 무공 내력과 진정한 신분이 탄로 날 가능성이 높았다. 곤륜파의 태상장로 되는 이가 정사의 분별이 불분명한 낭인곽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자칫 훨씬 큰 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 사대세가 측에서 낭인곽을 곤륜파의 전초기지랍시고 칼끝을 곤륜파 쪽으로 돌린다면, 그건 대낭인곽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큰 혼란을 야기할 것임이 자명하다.
 금서진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방금 말을 꺼낸 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론 인피면구 때문에 그런 표정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꽤 낯익은 얼굴이 금서진의 시야에 잡혔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자 그자에 대한 몇 가지 단편적인 정보들이 떠올랐다.
 미도(美刀) 은엽. 과거 황산파와 오행교가 벌인 전장에서 만났는데 용병치고 드물게 머리가 비상해 전술 수립에 더 쓰임새가 많던 인물이었다. 당시 17, 8세 정도의 나이로 황산파 용병들 중에선 가장 막내였고 외모 또한 사내답지 않게 예쁘장해 거친 용병들의 놀림감이 되곤 했는데, 범우상만은 어린 나이에 용병생활을 시작한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그를 유독 잘 챙겨주었다. 그런 탓인지 은엽도 범우상을 잘 따랐고 스스로 범우상의 심복임을 자처하고 다녔다.
 훗날 범우상이 낭인곽을 만들어 옛 동료들을 모은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제일 먼저 달려왔고, 이후 총관직을 맡아 낭인곽의 안살림을 도맡았다. 어떻게 보면 낭인곽이 이렇듯 성세를 누리게 된데 누구보다 큰 기여를 한 자였다.
 그런 만큼 낭인곽에 대한 은엽의 애착은 대단했다.
 사실, 범우상의 의중이 자신과 같을 것이란 전제하에 사대세가 전쟁이 보다 오래 지속되도록 흉계를 꾸민 장본인이 바로 그였고, 범우상이 낭인곽의 해체를 조건으로 사대세가의 용서를 구하려 했을 때 이에 반대하며 차라리 맞서 싸울 것을 강력히 주장한 이 또한 그였다.
 사대세가로 파견한 수하가 끔찍한 꼴을 당하고, 이를 본 범우상이 결국 사대세가와 일전을 불사할 결정을 내리자 은엽은 내심 기뻤다.
 부불귀를 시작으로 낭인곽의 인물들이 군중심리에 휘말려 열광하기 시작했을 때는 좋아서 펄쩍 뛰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했다. 좌중을 보다 강한 최면상태로 몰아갈 수 있는 결정적인 무엇이 필요했다.
 때마침 그런 조건에 적격인 대상이 있었다.
 바로 청천객!
 솔직히 금서진의 진면목을 모르는 은엽은 그가 진정으로 사대세가 가주들을 상대할 정도의 초고수일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청천객이 철혈대제를 꺾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지만 와전된 이야기라 생각했다. 서북 무림에서 혼천도 양무기에 버금간다던 철혈대제를 능가하는 고수라면 뭐하러 떠돌이 용병 생활을 한단 말인가? 그 정도의 고수라면 마교나 만검전과 같은 거대문파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를 꿰차고 호사를 누려도 이상할 게 없다.
 그렇기에 은엽은 청천객이 철혈대제를 꺾은 데는 남들이 모르는 다른 내막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 무공은 명성을 같이 하는 벽력사 범우상 정도의 수준, 즉 사대세가 장로급 정도일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다만, 청천객의 실제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은엽은 무지한 낭인곽 용병들과 달리 문파간의 싸움에 고수 몇이 더 있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점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사기였다.
 은엽의 계산으로는 낭인곽이 사대세가와 싸워 이기기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꼭 처참하게 무너진다는 보장도 없었다.
 물론, 양자의 전력 차이는 엄청나다. 단순히 머릿수만 따져도 계약 용병들을 합쳐봐야 사대세가 연합체인 사해방의 삼분지 일 수준이고, 낭인곽 용병들이 사대세가 정예들에 비해 실력이 한참 떨어진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실제 전력은 잘해야 이삼 할에 불과하다고 보는 게 옳았다.
 허나 낭인곽에게 유리한 변수도 있다. 그것도 네 가지나.
 
 우선 낭인곽은 방어하는 쪽이고 훌륭한 성채까지 끼고 있으니 공성전을 예상할 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병법에 이르기를 공성은 수성보다 열 배 더 어렵다고 한다. 배수야 예시에 불과하나 수성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만은 당연하다.
 둘째로 병참이란 측면에서 낭인곽이 사대세가보다 우위였다.
 딱 잘라 말해 사대세가는 돈이 없다. 전쟁이란 것이 원래 돈 잡아먹는 괴물에 다름 아닌데 자기들끼리의 오랜 전쟁으로 사대세가의 창고는 이미 텅텅 빈 상태였다. 그런 반면 낭인곽은 용병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고, 더 나아가 만금전장의 진대부를 뒤에 두고 있다.
 낭인곽 설립 당시 자금을 댔던 진대부는 명목상이나마 낭인곽 태상이란 자리에 올라 있었다. 진대부가 낭인곽에 쉽게 등 돌리지 못하도록 은엽이 사전에 손을 쓴 것이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일단 낭인곽 태상이란 지위에 적을 올린 이상 사대세가의 침공으로부터 진대부 혼자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진대부와 낭인곽은 싫어도 한 몸이니 이를 잘 주지시키면 사대세가에 비해 절대적으로 월등한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낭인곽 용병들은 사대세가 무인들보다 훨씬 우수한 무구(武具)를 갖출 수 있다. 낭인곽의 활이 사대세가의 활보다 더 멀리, 더 강력하게 살을 쏘아낼 것이요, 쓰는 자의 급이 비슷하다면 낭인곽 용병의 칼이 사대세가 무인의 칼보다 더 우수한 내구성을 지닐 것이다. 나아가 사대세가 무인이 한 번 칼질에 전투력을 상실한다면 고급 무장을 갖춘 낭인곽도들은 적의 칼질을 수차례는 견뎌낼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용병들을 고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원―명 교체기의 혼란 탓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낭인들이 강호에 넘쳤다. 돈만 있으면 이들을 얼마든지 고용할 수도 있다.
 은엽이 세 번째로 꼽는 것은 강남에 터전을 둔 군소문파들의 은근한 후원이다.
 사대세가가 사해방을 결성해 강남 평정을 공공연히 선언한 이상 여타 군소문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다. 당장은 낭인곽이 사대세가의 표적이 되었으나, 일단 낭인곽 토벌이 끝나면 다음엔 어디로 불똥이 튈지 아무도 예단할 수 없었다. 그런 만큼 내심 낭인곽이 선전해주길 바라는 문파들이 제법 있을 것이다.
 감히 드러내놓고 낭인곽을 지지할 수야 없겠지만 간접적인 후원은 보내올 것이다. 하다못해 사대세가의 동향이나 약점 따위라도 은밀히 알려준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 더 나아가 혹여 낭인곽이 크게 선전해 한동안이라도 사대세가와 대등한 국면을 이끌어 갈 수 있다면 직접 문도들을 파견하는 문파도 생길 수 있다.
 낭인곽의 마지막 이점은 관부와의 관계이다.
 강서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육절대인은 무당파와 연이 있는 자로 사대세가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간 사대세가 전쟁을 모르는 체 방기한 것도 그네들의 편의를 봐준 것이 아니라 거대 향용들이 제 살 깎아먹기로 약화되는 것이 관의 입장에서, 또 무림맹의 입장에서 나쁠 게 없다는 시각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기들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세력 확장의 뜻을 내포한 낭인곽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제약을 가할 공산이 크다.
 병마 통수권자의 의지가 이러하니 그 하위의 관인들은 노골적으로 낭인곽을 도울 여지가 있다. 골수 무림세력인 사대세가는 가능한 한 관부와 거리를 두려 애썼으나 낭인곽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주요 현성의 포정사(布政司)들과 각위의 지휘(指揮)들에게 꾸준히 뇌물을 바치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사실 용병사업의 특성상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네들이 받은 낭인곽으로부터 받은 돈의 십분지 일의 가치나마 신경을 써주면 사대세가를 상대로 크게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사대세가가 동원하는 수백, 수천의 병력 이동에 슬쩍 딴지만 걸어주어도, 행군과 포진의 기본 구성만 파악해 알려주어도 병략을 짜는데 어마어마한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사대세가와 충분히 일전을 벌여볼만 하다는 게 은엽의 생각이었다.
 단 한 가지. ‘감히 어떻게 사대세가를 상대로!’라는 부정적인 발상을 경계해야 했다.
 오랜 경험으로 은엽은 전쟁을 수행하는 무인들의 사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익히 알고 있다. 지금은 낭인곽인들이 분위기에 취해 해보겠다는 의지로 충만해 있지만, 뭔가 믿고 의지할 데가 없다면 이런 의지는 금세 나약해 질 것이다. 은엽이 이 시점에 굳이 금서진을 끌어들인 것이 바로 이러한 까닭 때문이다.
 난감해하는 금서진을 본 은엽이 먼저 선수를 쳤다.
 “대협, 대협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시겠지요?”
 은엽의 물음에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금서진에게 쏠렸다.
 금서진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범우상을 돕고도 싶었고 사대세가가 하는 짓 또한 못마땅했지만 잘못될 경우 발생할 파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금서진이 머뭇거리자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뜨끔해진 은엽이 다시 한 번 목청을 돋웠다.
 “대협! 대협과 범 곽주는 생사지교를 나눈 사이 아닙니까? 무엇을 더 망설이십니까!”
 은엽이 아픈 곳을 찔렀다.
 하기사 범우상의 곤궁을 도외시할 정도로 금서진은 모질지도 못했다.
 이내 금서진이 대답했다.
 “나도··· 함께하겠소.”
 빈객청에 모인 낭인곽 무사들이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런 틈을 타고 범우상이 천천히 금서진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힘찬 몸짓으로 금서진을 끌어안았다.
 고마운 우정에 대한 감사 표시이기도 했고 일단 벌어진 판에서 극적인 효과를 가중시키기 위한, 즉흥적이면서도 노련한 연기였다.
 금서진의 귓전으로 범우상의 나직한 전음성이 전해졌다.
 ‘고마워, 서진. 대신 자네가 곤란한 일은 없도록 하겠네.’
 유일하게 금서진의 입장을 이해하는 범우상의 언질이었다.
 
 ***
 
 이후 낭인곽은 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맞아야 했다.
 기존 용병들의 교습을 강화했고 신규로 용병을 뽑아 전력을 보강했으며 축대를 개조하고 망루를 새로 세웠다.
 진대부도 가산을 정리해 낭인곽의 성내로 들어왔다.
 기호지세(騎虎之勢). 낭인곽 밖에 있는 것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사대세가, 아니 사해방이 낭인곽 서쪽 십 리 밖 구릉에 진을 친 것은 그로부터 약 일 개월 후였고, 첫 교전은 다시 이틀 후 낭인곽 성채 앞에서 있었다.
 사해방의 신진들로 구성된 오백의 백호대(白虎隊)를 인솔해온 자는 남궁세가주의 장조카인 남궁한이었다.
 금빛 수술로 장식한 붉은 전포를 걸치고 마상에 앉은 남궁한은 과연 사해방이 후기지수 중 으뜸으로 내세울 만한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남궁한에게 독심호리 동방삭의 사남이자 부대주인 야랑(夜狼) 동방선용이 거들먹거리며 다가왔다.
 “남궁 형, 소제가 가서 저들의 기세를 한 번 꺾어보리다.”
 “적의 기세를 꺾는 것도 좋지만, 자신은 있는 겁니까?”
 빈정대는 듯한 남궁한의 말에 동방선용이 발끈했다.
 “이 몸이 겨우 낭인곽도 따위에게 당할 사람으로 보이시오?”
 “내가 본 낭인곽 용병들 중엔 일류급 고수들도 상당수 있었소. 그러니 그들을 길러낸 낭인곽인들은 결코 얕잡아 볼 상대가 아니오.”
 “흥! 내가 만약 패한다면 목을 깨끗이 씻어 남궁 형께 바치리다!”
 동방선용이 코웃음 치며 말하자 남궁한이 그를 지그시 쏘아보았다.
 “정히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한번 해보시구료. 단, 지금 한 말씀, 잊지는 마시오!"
 동방선용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호오? 뒤끝 있으시구먼?”
 남궁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먼산을 응시하는 남궁한을 잠시 째려본 동방선용이 말머리를 팩 돌렸다.
 “흥, 그리 쉽진 않을 게요. 어디 두고 봅시다!”
 등 뒤로 차가운 한마디를 남긴 동방선용이 낭인곽 쪽으로 쏜살같이 말을 달려 나갔다.
 이에 서문총이 급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말렸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본인이 굳이 원하는 걸 어쩌겠소?”
 “쯧쯧, 공을 탐해 저러는 모양인데··· 낭인곽 쪽에서 누가 나올 줄 알고.”
 “놔둡시다. 자신 있다지 않습니까.”
 남궁한의 냉랭한 반응에 서문총은 그저 쓴 입맛을 다시며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이들이 이렇듯 티격태격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이제 비록 사해방이란 기치 아래 한 편이 되었으나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장에서 생사를 겨루던 사이 아닌가. 세가의 어른들도 사해방이란 하나의 세력으로 뜻을 함께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하물며 혈기방장한 장한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백호대의 출범 때만 해도 대주를 누구로 세울 것인가를 두고 문파 간 경쟁이 치열했다. 특히 남궁한이 강력한 후보로 부상했을 때 동방세가 쪽에선 이를 저지하려 기를 썼다. 사대세가 내에서도 남궁세가와 동방세가의 사이가 유난히 험악한 탓이다.
 당장 남궁한만 해도 바로 저 동방선용에게 누이를 잃었으며 동방선용 또한 자신의 둘째 형을 남궁한의 숙부에게 잃은 바 있다. 그러니 동방선용은 하나라도 더 공을 세워 남궁한으로부터 백호대주 자리를 넘겨받을 마음이고, 남궁한은 동방선용이 이름 없는 낭인곽 무사에게 무참히 깨져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거나··· 아예 죽어버렸으면 싶은 것이다.
 동방선용이 낭인곽 성채 앞에 말을 세우고 목청을 돋웠다.
 “낭인곽 쥐새끼들아, 여기 야랑 님이 납시었다! 어서 나와 목을 바쳐라!”
 성루에서 백호대의 하는 양을 살피던 범우상이 동방선용의 도발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저건 또 뭐하는 물건인가?”
 마침 전에 동방세가에 고용된 바 있던 자가 곁에 있어 범우상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동방선용이라는 놈입니다. 눈이 밝아 야전(夜戰)에 강하다고 야랑이란 별호가 붙었습죠. 동방삭의 넷째입니다.”
 “무모하군. 기껏해야 이립 언저리로 보이는데.”
 “음, 그래도 제대로 배운 친구일세. 만만치 않겠어. 역시 사대세가인가.”
 범우상 옆에 서있던 금서진의 진중한 평가였다.
 “그런가? 그럼, 상대로 누가 좋을까···?”
 범우상의 시선이 주위에 늘어선 낭인곽 고수들을 쓸어갔다.
 부불귀 양사천이 나섰다.
 “곽주, 내가 저 시건방진 애송이를 요절내고 오겠수!”
 한때 오대산 청계사(淸溪寺)에서 수학한 바 있는 양사천은 일류를 넘어 절정을 넘보는 고수였다. 동방선용이 제 아무리 명문의 자제라도 양사천의 상대로는 아직 부족하다 보는 게 옳았다.
 범우상이 흐뭇한 미소로 부불귀의 청을 수락하려는데 미도 은엽이 끼어들었다.
 “제게 좋은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은엽이 손을 들어 백호대의 진용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을 보십시오. 한데 모여 진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 네 패로 나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군. 그런데?”
 “진용만 봐도 저들 사대세가가 아직 남남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말이야 사해방으로 한데 뭉쳤다지만 서로 소속감이 없다는 뜻이죠.”
 범우상이 흥미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래, 확실히 그렇게 볼 수 있겠군. 하긴, 십여 년을 척지고 산 놈들인데 하루 만에 죽고 못 산다 할 리는 없지···.”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저쪽에서 혼자 나와 싸움을 건다고 우리가 꼭 정석으로 받아줄 필요는 없지요. 일단 슬슬 상대해주며 시간을 끌다가 갑자기 일개 전대가 떼로 달려드는 겁니다. 그럼, 저들도 동방 애송이를 도우러 뛰쳐나오겠지요. 하지만 전부 움직일까요? 모르긴 몰라도 저 네 패 중에서 동방세가 무리들만 나설 공산이 큽니다. 상황이 아주 열세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다른 삼대세가는 수수방관할 가능성이 높지요. 그걸 노리는 겁니다. 후문으로 두 개 전대를 은밀히 내보내 저들의 측면에 잠복시켜 놓고 저들이 생각대로 움직이면 동방세가와 나머지 삼대세가의 사이로 파고드는 겁니다. 한 전대는 다른 삼대세가의 앞을 가로막고 기세만 올립니다. 직접 맞붙지는 않고요. 다른 한 전대는 배후에서 떨어져 나온 동방세가 놈들을 칩니다. 전방의 전대와 협공을 하는 거지요. 뜻대로만 되면 동방세가 놈들을 몰살시킬 수도 있습니다.”
 은엽의 설명을 들은 범우상이 무릎을 쳤다.
 “좋은 생각이야! 필경 들어맞을 걸세!”
 이때, 동방선용의 고함 소리가 다시 성벽을 타고 넘어왔다.
 “낭인곽의 잡배들아, 뭣들 하는 게냐? 겁에 질려 꼭꼭 숨어버린 거냐, 하하하핫!”
 범우상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철없는 놈이로고. 좋아, 은 총관의 계획대로 움직인다. 먼저 부불귀가 나가 저놈과 상대해 주게나. 칠검자(七劍子)는 일대를 이끌어 동쪽에 잠복했다가 계획대로 되면 삼대세가 앞을 가로막게. 소면살은 일대를 인솔해 서쪽에 잠복하고 있다가 웅삭이 이끄는 일대가 전방으로 치고 나가면 합류하도록. 자, 다들 서두르게!”
 “네, 곽주!”
 호명된 인물들이 일제히 복창하고 은엽의 계책을 수행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이윽고, 낭인곽의 정문에 놓인 목교가 내려지고 팔십근 선장을 휘두르며 부불귀 양사천이 뛰쳐나갔다.
 “철없는 하룻강아지야! 어디 이 부불귀 님 앞에서도 큰소리 쳐보거라!”
 동방선용이 코웃음 친다.
 “어디 중 같지도 않은 중놈이 위아래도 몰라보고 설치느냐!”
 칼을 빼 들고 말을 달린 동방선용과 선장을 쳐들고 달려 나간 부불귀가 중간에서 부딪치며 드디어 낭인곽과 사해방 사이에 서전의 북소리가 울렸다.
 동방선용이 마상에서 내리친 일도를 가볍게 피한 부불귀가 선장을 휘둘러 동방선용이 탄 말의 뒷다리를 후려쳤다. 말이 격통에 투레질하자 본래 마술에 익숙하지 않았던 동방선용이 땅으로 떨어졌다. 물론, 경공을 십분 발휘해 몸을 날렸기에 낭패를 보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착지와 동시에 칼을 뻗어 부불귀의 가슴을 베고자 했다. 부불귀 역시 당황하지 않고 선장을 들어 동방선용의 도를 막고 천중관일(天中貫日)의 초식으로 선장을 내쳤다. 피둥피둥한 살집으로 곰같이 둔해 보이는 부불귀가 예상과 달리 민첩한 반격을 가해오자 동방선용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가전의 팔로도법(八路刀法)을 착실히 시전해 나갔다.
 역시 동방세가의 유서 깊은 팔로도법은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했다.
 잠시지간 부불귀가 수세에 몰렸다.
 이에 부불귀 또한 깔보는 마음을 버리고 전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부불귀가 본래 청계사에서 파문당한 몸인지라 평소에는 사문의 무공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일단 급해지니 이것저것 가릴 여유가 없었다. 청계사가 자랑하는 여래봉술(如來棒術)을 펼쳐 팔로도법에 맞서기 시작했다.
 하나는 강남을 주름 잡는 일세의 도법이요, 하나는 불도 무학의 정화였으니 초술로는 서로 손색이 없었다. 결국 관건은 내공의 깊이였는데 그쪽으론 아무래도 나이 많은 부불귀가 한 단계 위였다.
 과연 백여 합을 넘어가자 동방선용의 도세가 현저히 둔화되었다. 만약 부불귀에게 다른 노림수가 없었다면 동방선용은 이미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것이다.
 동방선용이 식은땀을 흘리며 고전하고 있는데 돌연 낭인곽 쪽에서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수백의 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대일의 승부만 생각했던 동방선용은 뜻밖의 상황 전개에 당황했다.
 벌떼처럼 쏟아져 나오는 적들을 보고 동방선용이 자존심을 접었다. 부불귀의 일격이 닥쳐올 때 급히 몸을 뒤로 굴러 간격을 만든 다음, 본진을 향해 잽싸게 도망치려 했다.
 물론 부불귀가 이를 그냥 두고 볼 리 만무했다. 대붕전시(大鵬展翅)의 수법으로 몸을 날려 선장으로 동방선용의 뒤통수를 노린다. 동방선용이 칼을 뒤로 휘둘러 간신히 막아내긴 했으나 칼이 두 동강으로 부러지고 말았다.
 한편, 웅삭이 이끄는 전대가 낭인곽으로부터 뛰쳐나오자 백호대 본진에서도 일단의 무인들이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은엽의 예상대로 동방세가 문인들이 남궁한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동방선용을 구하러 나섰던 것이다. 다른 삼대세가인들 중 일부가 무의식중에 달려 나가려 했으나 남궁한이 이를 제지했다.
 “동방가가 책임질 일전이오. 상황이 유동적이니 일단 지켜들 보시오!”
 우두머리인 남궁한이 이렇게 말하자, 안 그래도 썩 내킬 것 없던 삼대세가 측 장한들은 모두 군소리 없이 자리를 지켰다.
 이때 다시 양쪽 숲을 헤치고 또 다른 함성이 터져 나오며 숨어 있던 낭인곽의 이개 전대가 동방세가 무리와 백호대 본진 사이로 끼어들었다.
 은엽의 지시대로 서쪽에서 나타난 소면살의 일대는 동방세가의 배후로 짓쳐 들었고, 동쪽에서 나타난 칠검자의 일대는 백호대 본진을 가로막았다.
 칠검자의 일대는 공격할 뜻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요란하게 고함지르며 흙먼지만 피워냈다. 본진의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어 전방의 전세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숨어있던 낭인곽의 이개 전대가 등장할 때부터 남궁한은 은엽의 계책을 충분히 꿰뚫어봤다. 하지만 동방세가를 위해 백호대를 움직일 생각 또한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 백호대의 대주로서 사감으로 동방세가 문인들을 곤궁에 밀어 넣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원로들로부터 질책 받을 것이 뻔했다.
 남궁한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모른 척 소리쳤다.
 “이놈들, 뭣들 하는 수작이냐!”
 권장을 주로 쓰나 보이지 않는 일곱 개의 검을 가지고 있다 하여 칠검자란 별호가 붙은 타곤이 조소하며 남궁한을 맞았다.
 “그래, 네놈 눈깔엔 우리가 뭐하자는 수작 같으냐?”
 “천한 놈이 버릇이 없구나.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거라!”
 타곤이 두 눈을 부라렸다.
 “너야말로 천한 평민 주제에 어디서 큰 소리냐! 이 몸은 대원 황실의 핏줄, 칠검자 타곤 님이시다!”
 타곤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그의 부친은 원 황실의 일족으로 어사대부의 자리까지 오른 일품귀족이었다.
 남궁한이 코웃음 쳤다.
 “흥! 아직도 중원에 숨은 몽고의 쥐새끼가 있었더냐? 겁도 없구나!”
 남궁한의 말에 대로한 타곤이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애송이가 겁 없이 씨부리는구나. 어디 솜씨가 어떤지 구경이나 해보자!”
 “원한다면 얼마든지!”
 칠검자와 남궁한이 겨루는 그 시간에 동방선용을 비롯한 동방세가인들은 큰 낭패를 보고 있었다.
 동방세가 자제들의 무공이 낭인곽 무인들보다 다소 우위에 있다손 쳐도 워낙 중과부적이었다.
 혼전으로 치달으며 자연스레 부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동방선용은 여기저기 상처 입은 몸으로 수많은 낭인곽인들 틈에서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와중에 육촌 동생인 동방수복과 눈이 마주쳤다.
 “수복, 어찌된 게냐? 왜 다른 세가 놈들은 보이지 않지?”
 “몰라요. 배후에서 들이닥친 낭인곽 놈들 때문에 합류하지 못한 모양이죠.”
 동방선용이 자신을 향해 대감도를 휘둘러 오는 낭인곽 수하를 베어 넘기며 소리쳤다.
 “허튼 소리! 낭인곽 놈들은 몇 백 되지도 않아. 백호대가 그걸 뚫지 못한다면 개가 웃을 노릇 아닌가!”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외다. 일단은 어떻게든 이곳을 벗어나야 해요. 벌써 반 이상 쓰러졌다고요.”
 동방선용이 아랫입술을 짓이기며 으르렁댔다.
 “분명히 남궁한 그 개자식이 우리를 골탕 먹이려는 거야. 두고 보자, 이 쳐 죽일 놈!”
 “선용 형! 진정하고 빨리 빠져나갈 방법이나 강구해 봐요.”
 백호대에 배치된 동방세가 자제들 중 우두머리가 동방선용이다. 옳든 그르든 그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동방선용이 가볍게 몸을 날려 동방수복이 탄 말 잔등이로 올라섰다. 낭인곽의 진세를 살핀 동방선용이 소리쳤다.
 “서남쪽의 포위가 약하다, 서남쪽을 뚫어라! 진을 벗어나면 한천(寒川)에서 일단 합류한다!”
 명이 떨어지자 동방세가 자제들이 모두 말머리를 서남쪽으로 돌렸다. 그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쇄도하자 얼마 안 가 적진 한 귀퉁이가 뚫렸다. 낭인곽 용병들이 그들을 쫓으며 활을 쏘고 암기를 날렸다.
 다행히 도주에 성공했으나 이 일전으로 동방세가인들이 무려 50여 명 이상 죽거나 크게 다친 채 포획되고 말았다.
 한편 칠검자 타곤과 남궁한의 대결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남궁한으로선 본래 동방세가를 돕지 않은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따라서 타곤을 상대로 굳이 전력을 다할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방선용에게 낭인곽도들을 얕잡아 보는 거 아니냐고 쏘아붙였던 남궁한 자신도 타곤과의 승부를 통해 스스로 자만하고 있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몽고에서 유래한 타곤의 무공은 중원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튀어나오는 타곤의 감춰진 일곱 개 검으로 인해 남궁한은 몇 차례나 곤욕을 치렀다. 아니, 정확히는 양 팔꿈치와 오른 손목, 왼쪽 무릎과 양쪽 신발 밑창에 숨겨진 여섯 개의 검이다. 마지막 남은 또 하나의 검은 아직 그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패도를 추구하는 집안의 자제답게 남궁한의 일도 일도는 무시무시한 위력이 있었다. 그의 일도를 받아낼 때마다 타곤이 버들목처럼 휘청거릴 정도. 문제는 그 이상 공격해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몸이 뒤로 꺾이면 그 반동으로 치올라오는 타곤의 발밑에서 예리한 검날이 솟아나와 남궁한의 울대를 노렸다. 팔이 젖혀지면 팔꿈치에 감춰진 검이 옷자락을 뚫고 나와 심장을 겨눴다. 뒤로 물러날 때는 허벅지에 대놓은 검이 무릎을 타고 튀어나와 명치를 공격해 들어왔다. 그렇게 번번이 후속 공격에 실패하니 도무지 승기를 잡을 수 없었다. 승기를 잡기는커녕 사실 수차례나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다.
 더 나쁜 것은 타곤이 스스로를 일러 칠검자라 소개했다는 점이다. 까닭 없이 지어진 별호가 아니라면 분명히 숨은 검이 하나 더 있다는 말인데, 그 소재가 오리무중이었다. 숨은 일곱 번째 검의 소재를 모르면서 함부로 공격해 들어갔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몰라 조심스러웠고,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함만 더해갔다.
 남궁한이 이렇듯 곤혹스러워 할 때 앞쪽에서 커다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지 않아도 동방세가를 물리친 낭인곽인들이 기세를 올리는 소리일 게 뻔했다.
 상황이 이쯤 되니 남궁한도 슬슬 몸을 뺄 궁리를 했다.
 비록 백호대 대주로서 망신살이 잔뜩 뻗친 상황이지만 동방세가를 패퇴시키고 잔뜩 사기가 오른 적들까지 합류하면 더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남궁한이 공력을 십성 끌어올려 일도를 내치며 외쳤다.
 “전원 퇴각! 두무령(頭霧嶺)에서 본진과··· 커헉!”
 힘차게 토해진 남궁한의 호령은 채 완전한 문장을 이루지도 못하고 단말마의 기성으로 끝이 났다. 바로 그 순간 타곤이 비장의 한 수로 감춰둔 마지막 일검이 남궁한의 목젖을 꿰뚫어낸 까닭이다.
 타곤의 마지막 한 개의 검. 그것은 몽고식으로 길게 땋아 내린 타곤의 머리채에 감춰져 있었다.
 남궁한의 거센 일도를 감당할 수 없었던 타곤은 좌수로 도신을 쳐냄과 동시에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적어도 남궁한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신형을 빙그르르 회전시켰다. 동시에 회전력을 빌어 마지막 검이 숨겨진 머리채에 공력을 싣고 남궁한의 인후를 노렸다.
 사실 이번이 마지막 일합일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숨겨진 재간을 꺼내 보였을 뿐, 공격이 이렇듯 멋들어지게 성공할 것이라곤 타곤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다.
 상리를 벗어나는 타곤의 괴초가 남궁한의 허를 정곡으로 찌른 것인데 남궁한의 실전경험이 조금만 더 풍부했다면 이런 무참한 결과가 빚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일합의 초식 교환이 채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한눈을 파는 우를 범하진 않았을 터.
 남궁한이 피분수를 비산하며 쓰러졌고 노련한 타곤은 이미 제 역할을 십분 마쳤음에도 이 천고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쳐라! 쓸어버려!”
 타곤의 명에 수장간의 대결에서 승리해 기세가 오른 낭인곽 무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낭인곽의 전면공격 앞에 대주를 잃고 허둥대던 백호대 내에서 연속해 두 가닥 외침이 터져 나왔다.
 “퇴각하라, 퇴각!”
 “물러서지 마라! 맞서 싸워라!”
 전자는 서문세가의 수장 서문총의 외침이었고, 후자는 남궁세가 내에서 남궁한 바로 다음 서열인 남궁필의 그것이었다.
 원칙대로라면 남궁한의 죽음, 동방선용의 부재로 백호대 삼인자인 서문총이 명령권을 지닌다 하겠으나, 서문총의 존재를 손톱 밑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남궁필이 남궁한의 복수를 위해 전혀 다른 명을 내린 것이다.
 그 바람에 이미 동방세가 무리들이 떨어져 나간 백호대가 다시 두 패로 갈렸다.
 남궁세가 패거리는 달려드는 낭인곽 용병들을 맞아 앞으로 튀어나갔고, 서문세가인들은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기 시작했다. 잠시 망설이던 북리세가 측은 서문세가를 좇았다.
 칠검자 타곤은 더욱 신이 났다.
 기세를 타고 공격 명령을 내렸지만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던 백호대가 스스로 두 패로 갈라섰으니 말이다.
 일부는 남궁세가인들과 직접 충돌하고, 일부는 퇴각하는 서문, 북리세가 자제들을 쫓았다.
 곧 이어 동방세가를 패퇴시킨 후 처음 계획대로 환성하려던 웅삭과 소면살의 전대까지 이쪽의 전황을 감지하고 달려왔다.
 안 그래도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던 남궁세가 무리들은 이들 전대까지 합류하자 몇 배가 넘는 적을 상대하게 되었다. 개개인의 실력도 한 수 위고 싸워 복수하겠다는 의지 또한 강했으나,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전력 차였다.
 결국 남궁세가인들은 한 시진도 안 되어 힘 한 번 제대로 못 써보고 떼 몰살을 당했다.
 서전은 낭인곽의 완벽한 승리였다.
 
 
 # 제2장 합종숙의(合從熟議)
 
 백호대의 참담한 패배는 사해방 수뇌부에게 뼈아픈 충격을 안겼다.
 전력의 손실도 손실이지만 백호대에 소속된 이들이 향후 사해방의 주력을 담당할 젊은 인재들이란 점에서 충격을 넘어선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사대세가 가주들이 직접 나서 책임자를 문책하고 전열을 정비했다.
 사해방 4개 전대 중 실력과 경험이 가장 처지는 백호대를 선봉에 내세운 군사 동방표는 직위해제 당했으며, 패배의 빌미를 제공한 동방선용, 남궁세가 자제들을 두고 퇴각을 명령한 서문총, 이에 동조한 북리장진 등이 죄과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반절로 줄어든 백호대는 여류고수들로 구성된 주작대(朱雀隊)에 흡수되어 서문자연의 휘하로 들어갔으며, 최정예 청룡대(靑龍隊)와 세가 식객들로 이루어진 현무대(玄武隊)는 기존 골격을 유지시키되 개중 민활한 자들을 따로 추려 암살, 첩보, 적전교란 등의 특수임무를 담당하는 새로운 백호대로 출범시켰다.
 또한, 출신세가가 다르다는 이유로 반목하지 않도록 정신교육을 강화하고 엄격한 내규를 제정해 사사로운 대립을 원천적으로 방지하고자 했다.
 여러 날에 걸쳐 전열을 정비한 후 출진을 재개하니, 청룡대를 선두에 내세우고 주작대와 현무대를 좌우익으로 삼았으며 세가주들이 직접 이끄는 본진이 그 뒤를 따랐다. 본진을 다 합치면 그 수가 일만에 육박하는 대규모 행렬이었다.
 
 작정하고 들이닥친 사해방의 대부대를 보고 서전의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낭인곽에 다시 그늘이 드리웠다.
 양측의 진용이 다 갖추어지자, 사해방의 선봉인 청룡대로부터 누군가가 말을 달려 나왔다.
 “북리백이 선봉전을 신청하오! 자신 있는 자, 누구든 나오시오!”
 무령(武靈) 북리백은 북리세가주 북리청의 막내 동생으로 대단한 고수였다. 삼십대 중반의 젊은 나이지만 전 무림에 위명이 쟁쟁한 절정고수로, 남궁한이나 동방선용 따위와는 격이 다른 인물이다. 낭인곽 내에서는 범우상 정도를 제외하면 북리백을 상대할 만한 자가 없어 아주 난감한 상황이었다.
 수하들의 사기를 생각하면 마냥 회피하긴 곤란하다.
 그렇다고 범우상이 직접 선봉전에 나설 수도 없는 노릇. 명색이 일파의 수장인 범우상이 선봉전에 응한다면, 졌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이겨도 망신스러운 일인 것이다.
 서전을 승리로 이끌며 자연스레 군사 역할을 담당하게 된 은엽이 고민 끝에 금서진에게 눈길을 보냈다.
 “어르신, 송구스럽습니다만···.”
 말꼬리를 흐리는 은엽을 보며 금서진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서진도 전장의 경험이 넘칠 만큼 풍부한 사람이다. 은엽의 고민을 모를 리가 없었다.
 금서진이 쓰게 입맛을 다셨다.
 “할 수 없지···.”
 그런 금서진의 소매를 범우상이 잡았다.
 “어허, 자네 어쩌려고···? 이럴 필요까진 없네.”
 “부득이 하지 않나.”
 “그러다 자네 신분이 노출되면 어쩌려고?”
 “우수(右手)만 가지고 어떻게 해보겠네···.”
 원래 곤륜일검 금서진은 무림에 드문 좌수검(左手劍)으로 유명했다. 그런 까닭에 우수로 검을 다뤄 스스로의 신분을 위장하겠다는 뜻이었다.
 범우상이 금서진의 손을 잡았다.
 “면목이 없네.”
 “객쩍은 소리!”
 범우상의 말을 일축하고 금서진이 성루에서 내려갔다.
 육중한 기계음과 함께 목교가 내려와 해자(垓子) 위에 다리를 만들었다.
 천천히 목교 위를 걸어나오는 금서진을 향해 북리백이 외쳤다.
 “무령 북리백! 북리세가 삼가주이며 사해방 청룡대의 대주요!”
 북리백의 소개에 금서진이 예에 따라 담담히 화답했다.
 “청천객! 떠돌이 낭인이외다.”
 “청천객? 철혈대제를 무릎 꿇렸다는?”
 깜짝 놀라 묻는 말에 긍정도 부정도 없자 북리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청천객이 낭인곽의 일원이라는 정보는 없었는데···.”
 “조건만 맞으면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게 용병들 아니겠소?”
 북리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중요한 건 당신이 낭인곽의 대표라는 사실이겠지!”
 “맞는 말이오. 그러니, 사설은 빼고 그만 시작합시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게 담담하기 그지없는 금서진의 모습에 북리백이 눈에 이채를 담았다. 자신인가, 자만인가? 판단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낭인곽 정도의 하등 집단을 상대로 선봉에 섰다는 게 마뜩치 않았는데, 상대가 고수라면 외려 반길 일이다.
 북리백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좋소! 그럼, 준비하시오! 북리세가의 자랑 양의검법이외다!”
 우렁찬 외침과 함께 북리백이 마상에서 훌쩍 몸을 날리며 양쪽 어깨 너머에 엇갈려 메여 있던 쌍검을 뽑았다.
 서늘한 검광이 창공을 에우고 충천하는 검기가 바람을 타고 금서진의 전면으로 쇄도해 들었다. 문외한의 눈에도 실로 위력적인 공세가 아닐 수 없었다.
 ‘과연 명가의 자제로다!’
 금서진이 내심 감탄하며 북리백의 검세에 마주쳐 나갔다.
 북리백의 우검을 쳐낸 금서진의 검이 반동력을 싣고 빛살처럼 빠르게 방향을 전환했다. 왼편 상반신에 드러난 허점을 노린 것이나 북리백에겐 검이 두 자루가 있다. 북리백이 짧은 기합성과 함께 좌검으로 금서진의 검을 막았다. 이어 우검을 내쳐 금서진을 한 발 물러서게 한 북리백이 양의검법의 수비식인 양의제척(兩意除斥)의 수법으로 금서진의 후속공격을 견제하며 살짝 호흡을 가다듬었다.
 금서진이 일단은 평범한 연환삼식의 초술로 공격해 들어갔으나 북리백의 수비식을 뚫을 수 없었다. 오히려 북리백이 양의노번(兩意蘆藩)의 초식을 구사해 금서진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종횡으로 허공을 찢으며 육박해오는 현란한 공세에 금서진이 약간 뒤로 밀렸다.
 양의검법의 검세가 훌륭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수로 다루는 검이 익숙하지 않은데다 장기인 곤륜검법 또한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
 기선을 잡은 북리백이 가진 기량을 마음껏 뽐냈다.
 일초 일초가 빠르고 정확했으며 그 안에 숨은 위력도 무궁무진했다.
 북리백이 기세를 올리자 사해방 쪽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검을 쥔 오른손의 맥문을 노리는 북리백의 일검을 뿌리친 금서진이 무언가 결심한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와 함께 금서진의 검법이 이전과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강호상에 떠도는 지극히 평범한 초식으로 일관하던 금서진의 검이 견문이 넓은 북리백조차 전혀 경험해본 적 없는 기괴한 초식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곤륜파에는 수많은 절기들이 있지만, 무림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검술인 태청검법(太淸劍法)과 경공술인 운룡대구식(雲龍大九式)의 두 가지였다. 보통 곤륜검법하면 태청검법을 일컫는 바, 워낙에 유명해서 무림에서 어느 정도 연륜을 쌓은 고수들은 일 초식만으로도 대번에 알아본다.
 그러나 태청검법에 못지않은 위력에도 불구하고 곤륜파 내에서조차 아는 사람이 드문 검법이 하나 존재하니, 바로 금사검법(金蛇劍法)이다.
 백여 년 전 곤륜이 배출한 기린아 금사신군이 창안한 이 검법은 지나지게 실리를 추구한 나머지 초수 하나하나가 너무 기괴하고 독랄했다. 하여 금사신군 스스로 전승을 꺼려했고 그 때문에 상당 부분이 실전되고 말았다. 그런 것을 곽동천과 백서로, 금서진이 심혈을 기울여 108개 초식으로 새로이 복원해냈다. 그러니 곽동천과 백서로가 세상을 뜬 지금, 금사검법을 아는 이는 세상에 오직 금서진뿐이다. 적어도 금서진은 그리 믿었다.
 금갑신사(金甲神蛇)라는 영물의 움직임을 본떠 만든 금사검법은 빠르고 현란한 변식에 중점을 두었다. 허초인 것 같은데 실초고, 실초인 것 같은데 허초다. 직선인 것 같은데 곡선이고, 곡선인 것 같은데 직선이다. 왼쪽인 것 같은데 오른쪽이고, 오른쪽인 것 같은데 왼쪽이다. 신법마저 제멋대로라 앉고, 서고, 뛰고, 차고 심지어 등을 보이고 돌아서기까지 한다. 검세의 흐름을 도무지 쫓을 수가 없었다. 양의검법도 초식의 기쾌함으로 이름 높으나 상식의 궤를 넘어서는 금사검법에 비하면 오히려 중후하다고 느껴질 정도.
 어떻든 금서진이 금사검법을 운용하자 싸움의 흐름이 조금씩 바뀌었다.
 채 오십 초를 못 넘기고 북리백은 현기증을 느끼며 손발이 어지러워졌고, 금사검법이 거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에는 끝내 오른쪽 팔뚝에 일검을 맞고 검을 놓치고 말았다.
 사실 검법 자체의 우열을 굳이 논하자면 양의검법이 금사검법보다 조금 윗길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하지만, 검을 다루는 솜씨나 경험의 차이가 너무 컸다.
 북리백이 검을 떨구고 망연히 서있자 금서진은 더 공격해 들어가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함성을 지르며 기세를 올리던 사해방 쪽에 적막이 흘렀고, 반대로 낭인곽 쪽에서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북리백이 외쳤다.
 “졌소! 베시오!”
 금서진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베시오!”
 북리백이 울부짖다시피 하며 다시 소리치자 금서진이 담담히 말했다.
 “그대는 아직 젊소. 수십 년 동안 검을 다룬 늙은이에게 한 번 패했다고 죽음을 청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사해방을 대표해 나온 몸이오! 경우가 다르오.”
 “어리석은 소리. 세상 어디에도 목숨보다 귀한 것은 없소.”
 호통과 함께 금서진이 돌아섰다.
 그런 금서진의 눈에 선봉전 승리의 여세를 몰아 쇄도하는 낭인곽 무인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선봉전에 승리한 쪽이 일정 선까지 상대를 몰아치는 것이 통례였고, 낭인곽 또한 이를 따르는 것이다.
 갑자기 뒤에서 컥, 하는 짧은 비명 소리가 들렸다.
 금서진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생각대로 북리백이 자신의 심장에 검을 박고 맥없이 고꾸라지고 있었다.
 젊은 혈기와 상처 입은 자존심이 끝내 스스로를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
 금서진이 말없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안타깝고 씁쓸했다.
 가슴 한켠으로 더운 바람이 휭하니 지나가는 느낌.
 북리백의 시신은 금서진을 지나쳐 사해방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낭인곽 무인들의 발길에 무참히 훼손되고 말았다.
 낭인곽의 거센 공격에 청룡대는 형식적인 저항을 하며 멀찌감치 퇴각해 다시 진용을 가다듬었다.
 이로써 두 번째 전투도 낭인곽의 승리로 돌아갔다.
 
 이튿날부터 양 세력이 본격적인 집단전에 돌입했는데 그 양상이 마치 정규군이 벌이는 공성전(攻城戰)과 유사했다. 낭인곽의 본거가 일반적인 무림 세력들과 달리 장원이 아닌 성곽 형태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수천의 사해방 무인들이 사다리를 이용해 낭인곽의 성벽을 넘으려 시도했고 낭인곽은 이에 대응해 돌을 굴리고, 뜨거운 기름을 퍼부었다. 촉을 날카롭게 벼린 화살이 창공을 빼곡히 수놓으며 성벽 위아래로 넘실거렸고, 크고 작은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양측 모두에게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낭인곽도들 중 상당수는 군문에 들어 북원과의 전쟁을 경험했던 자들이다. 그 경험이 조직력을 바탕으로 하는 전투에서 눈부시게 빛이 났다. 개개의 무력은 물론이요, 머릿수의 우위를 기반으로 일거에 낭인곽을 쓸어버리겠다는 사해방의 순진한 생각은 시간과 함께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공성전은 십수 일에 걸쳐 계속되었고, 무수한 사상자를 발생시키면서도 사해방은 이렇다 할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낭인곽의 저항이 만만치 않자 새로 사해방의 군사로 취임한 병서생(病書生) 서문일지는 전략적 재고를 위해 분루를 삼키며 잠정 퇴각을 결정했다.
 은엽이 서문일지보다 한 수 위였다.
 공성전이 잠시 느슨해지자 별동대를 조직해 사해방의 병참이 집결된 유운장(流雲藏)을 공략했다.
 낭인곽이 성 밖까지 나와 뭔가 일을 저지르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유운장의 방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낭인곽의 별동대는 유운장 안에 숨어들어 수십 발의 뇌화탄을 터뜨리고 유유하게 환성했고, 사해방의 군수물자는 화염에 휩싸인 채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
 
 이후로도 은엽은 물 만난 고기처럼 기책(奇策)을 끝없이 쏟아냈고, 이것이 매번 적중하면서 사해방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졌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 사해방이 직면한 악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낭인곽이 사해방을 상대로 의외의 선전을 거듭하자, 그동안 눈치만 보고 있던 강남의 중소문파들이 하나둘 낭인곽에 동조해오기 시작했다.
 대경방주 고심천이 수하 삼백을 데리고 최초로 낭인곽에 합류했고, 정주 용문(龍門)의 용대인 또한 문도 오백을 인솔해 합세했다.
 이렇게 모인 자들이 불과 삼 개월 만에 십칠 개 문파, 삼천 명에 이르렀다.
 애초에 은엽으로 하여금 사해방과 더불어 싸워볼 만하다고 생각하게 했던 네 가지 요인 중 막연한 기대에 그친 한 가지가 현실화된 것이고, 이는 낭인곽의 연이은 선전이 강남의 군소문파들에게 사해방도 무적은 아니라는 자신감과 용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군소문파들의 합류로 머릿수의 열세를 상당수 극복한 낭인곽의 기세는 점점 더 융성해졌다. 수성에만 치중하던 전략을 바꿔 한 발씩 밖으로 나왔고, 야음을 틈타 사해방 본진에 기습을 가할 정도에 이르렀다.
 사해방은 은엽의 계책으로 한 줌 재로 변한 군량과 필요물자를 조달하는데 급급해 낭인곽의 반격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되지 않을 싸움으로 여기고 낭인곽의 모집 공고에 냉랭했던 용병들마저 낭인곽으로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강남 일대는 물론 서북과 동북의 낭인들, 나아가 멀리 세외에서 활약하던 자들까지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전력 차이는 점점 줄어들었고, 낭인곽의 승승장구 속에 어느덧 강남에도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이 찾아왔다.
 헌데 계절이 바뀌며 싸움이 소강상태로 접어든 어느 날 정주 용문의 문주 용대인이 범우상을 찾았다.
 “어서 오시오, 용 문주. 고생이 많으십니다.”
 반가운 미소로 맞이하는 범우상을 향해 용대인이 마주 예를 취했다.
 “저야 뭐 하는 게 있습니까. 범 곽주야말로 불철주야 고생이 많으시지요.”
 “허허, 별말씀을∙∙∙.”
 따뜻하게 데운 용정차를 앞에 두고 마주앉자 범우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인 일로 절 보시자고∙∙∙?”
 범우상의 물음에 용대인이 눈빛을 반짝 빛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뜬금없는 반문에 범우상이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낭인곽이 사해방을 상대로 지금까지 잘 싸워왔습니다. 허나, 외람되지만 이는 ‘선전’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전에 불과하다?”
 “그렇지요. 본디 승산 없는 싸움을 생각보다 잘 끌어왔다, 이 말씀입니다.”
 “흠, 사실, 그런 면이 있지요.”
 “사해방, 아니 사해방의 근간을 이루는 사대세가는 각기 뿌리 깊은 명문 중의 명문입니다. 지금은 저렇듯 낭패를 보고 있으나 그 잠재력과 관록은 절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범우상이 순순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러운 내용은 아닌 것이다.
 “맞습니다. 저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이 싸움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용대인이 서탁으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차피 저들을 제압할 수 없다면 저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지금 화의를 해야 합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자존심 강한 저들이 화의를 받아들이겠습니까?”
 범우상이 눈살을 찌푸리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용대인은 상체를 외려 더 앞으로 숙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니까, 확실한 중재인을 세워야지요.”
 “중재인?”
 “그렇습니다. 사대세가가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앞세워 몇 가지 조건을 붙여 화의를 요청하는 겁니다.”
 “누굴, 아니 어디를 염두에 두시는 겁니까?”
 “무림맹(武林盟)!”
 용대인의 단호한 한 마디에 범우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림맹이요?”
 “그렇습니다, 무림맹! 그들을 앞세우는 겁니다.”
 무림맹은 전통의 명문 구파일방을 주축으로 하는 백도무림의 연합기구였다.
 사대세가가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던 홍교 침공 이후 구파일방이 무림의 정도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설립한 조직으로 섬서성 남단 복우산(伏牛山)에 총단을 두었다. 총단이라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고즈넉한 한 채의 산장이다. 사실상 무림맹 자체는 형식적인 기구에 불과한 탓이다.
 총단에는 각 문파의 장로급 인물들이 한 명씩 파견되어 있었고 맹주는 오 년 임기로 그들 10인 중에서 선출되었다. 무림맹에 상정된 사안은 장로 9인 중 6인 이상의 찬성과 맹주의 재가로 이루어지는데, 일단 결정된 사안에 대해선 맹주령이 발동되고 구파일방이 이를 반드시 따르도록 약조되어 있었다.
 체계는 그렇게 잡혀 있으나 실제 맹주령이 발동된 것은 지난 세월 동안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합의제 기구에서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를 푸는 일이 결코 간단치 않은 것이다.
 
 범우상이 놀란 표정을 애써 지우며 물었다.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무림맹이 왜 우리를 위해 중재에 나선단 말입니까?”
 “따지고 보면 간단한 이치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해방이 공개적으로 군림천하를 선언한 셈인데 무림맹이 달가워할 리 있겠습니까? 사해방과 직접적인 시비가 없으니 가만있을 뿐이지, 아마 생각 같아선 지금 같을 때 뒤통수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을 겁니다.”
 “그도 그렇겠군요.”
 “그쪽에선 사해방이 낭인곽이랑 싸우느라 전력이 크게 약화된 것에 대해 일단 기뻐하고 있겠지만,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이 끝장나기를 바라진 않을 겁니다. 현 국면에서 사해방이 이기면 결국 강남의 평정하는 셈인데, 이는 강남에 무림맹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거대 세력이 들어선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그들 체면에 미래의 후환이랍시고 먼저 치고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예전에 사대세가가 자기들끼리 치고 박느라 강남을 벗어나지 못했듯이 낭인곽이 언제까지고 버티고 서서 사해방을 견제해 주기 바라는 거지요. 무림맹 입장에서 보면 이이제이(以夷制夷)라고나 할까요. 물론, 낭인곽이 사해방을 물리칠 자신이 있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건 정말 요원한 일이고, 그럴 바엔 지금 무림맹을 끌어들여 이쯤에서 판세를 정리하고 천천히 힘을 키우는 게 나을 겁니다. 즉, 무림맹을 역이용해 먼 미래를 한 번 내다보자 이 말입지요.”
 듣고 보니 상당히 그럴듯한 말이었다.
 더구나 ‘먼 미래를 내다보자!’라니!
 이는 결국 무림맹의 비호 아래 사해방과 더불어 강남을 양분하자는 뜻 아닌가!
 그야말로 범우상의 웅심(雄心)을 자극하는 말이다.
 “좋은 생각이십니다만, 글쎄요. 무림맹이 진정 우리 뜻대로 움직여 줄런지∙∙∙.”
 범우상의 말에 용대인이 목소리를 다시 낮추었다.
 “실은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만한 연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
 “저하고 먼 친척 되는 이가 하나 있는데, 무당파의 속가 제자입니다.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닌지라 벌써 몇 년째 연락도 없이 지냈는데 엊그제 갑자기 절 방문했습니다. 그이가 슬쩍 운을 띄우더군요. 무림맹주가 사석에서 ‘왜 낭인곽이 무림맹에 중재를 청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하더랍니다.”
 “무림맹주가 직접 그런 말을 꺼냈다구요?”
 “네, 말은 그리 했습니다만 십중팔구는 기다리고 있으니 자기들이 개입할 여지를 달라고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리가 있군요.”
 “전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차피 판단은 범 곽주의 몫이니까요.”
 용대인이 일어설 기미를 보이자, 범우상이 그의 손을 잡았다.
 “어쨌거나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무쪼록 현명한 결단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훗날 낭인곽이 잘되면 저희 용문을 잊지 마시고∙∙∙.”
 겸연쩍게 머리를 긁으며 숟가락 얹는 것을 잊지 않은 용대인이 자리를 뜨자 범우상은 즉시 은엽을 불렀다.
 용대인의 말을 전해들은 은엽이 반색을 했다.
 “그렇게만 되면 더 바랄 나위가 없지요. 저희에겐 최상의 패입니다.”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물론입니다. 실은 저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중재에 나서줄 만한 곳이 세 군데인데··· 무림맹은 어렵고, 마교는 너무 멀고, 만검전은 위험해 생각을 접었지요. 헌데 무림맹에서 스스로 중재를 맡아줄 뜻을 보였다니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좋아, 좋아. 그럼, 무림맹으로 누굴 보내면 좋을까?”
 은엽이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먼저 손을 내밀었다지만 어쨌든 무림맹은 무림맹이지요. 언변도 좋아야겠지만 아무래도 격에 맞는 인물이 필요할 텐데요.”
 은엽의 말에 불현듯 범우상의 뇌리를 스치는 인물이 있었다.
 금서진!
 안 그래도 금서진을 엉뚱한 싸움에 휘말리게 해 마음이 영 편치 못했다.
 이런 마당에 무림맹에 사람을 보내는 것은 금서진을 잠시 전장 밖으로 떠나보낼 좋은 빌미가 된다. 더구나 금서진의 진정한 신분이 무엇인가? 무림맹의 한 기둥, 곤륜파의 태상장로 아닌가.
 여러 모로 봤을 때 이 보다 더 적합한 인선은 찾기 힘들 것이다.
 “청천객을 보내야겠어!”
 불쑥 내뱉은 범우상의 말에 은엽이 고개를 갸웃했다.
 “청천객을요?”
 “그래, 그가 딱 적임자야.”
 은엽이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청천객이 대단한 고수이기는 하지만 신분은 떠돌이 낭인일 뿐입니다. 또한 낭인곽 소속도 아니구요. 게다가 청천객이 빠지면 사해방의 진짜 고수들을 상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내 결정을 따르게. 청천객이야말로 적임자일세. 그가 가면 일은 술술 풀리게 되어있어.”
 범우상이 이렇듯 단호하게 잘라 말하니 은엽도 더 반대하지 못했다.
 
 무림맹에 사자로 가달라는 범우상의 요청을 금서진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수많은 사상자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던 금서진은 자신이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는지 오히려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현 무림맹주 일도무산(一刀無山) 원승진은 금서진과도 안면이 있다. 특별히 교분을 나눈 관계는 아니지만 금서진은 연장자로서, 원승진은 웃배분으로서 상호 존중하는 사이. 무림맹에서 먼저 운을 띄웠다는 것은 범우상이 숨겨 몰랐으나 가서 설득하면 수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금서진은 믿었다.
 “내일 당장 출발하겠네!”
 “늘 어려운 부탁만 하네.”
 “그런 말 말게. 이렇게 쉬운 길을 진작에 생각 못한 내 불찰도 크네.”
 이런 금서진을 보며 범우상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몇 마디 더 정겨운 대화를 나눈 금서진이 일어나려는 순간, 문득 범우상이 그를 다시 붙잡았다.
 “서진, 한 가지만 더 부탁함세∙∙∙.”
 “뭔가?”
 범우상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이번 길에∙∙∙ 미안하지만 무린이를 데려가 주게.”
 “자네 아들을?”
 범우상은 슬하에 수린과 무린, 배다른 남매를 두고 있었다.
 딸 범수린은 사별한 전부인의 소생으로 이미 열아홉의 성숙한 아가씨였고, 아들 범무린은 새로 맞은 백씨 부인에게서 얻은 늦둥이 아들로 이제 겨우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였다.
 덧붙여 미도 은엽과 목하 열애중인 범수린은 범우상이 아끼는 백씨 부인과 자주 다퉈 부녀지간의 의까지도 심히 상한 상태였다. 백씨 부인이 폐병으로 병상에 누운 지 벌써 일 년여가 넘어 더 이상 둘이 싸울 일도 없었지만, 부녀관계는 전혀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어쨌거나 범우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섬서로 가는 길에 석모둔이란 마을이 있네. 내 손위 처남 되는 이가 거기 살고 있는데 자네가 무린이를 그리 데려다 주었으면 싶네.”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
 “글쎄∙∙∙ 하나밖에 없는 아들 녀석이라 그런지, 이런 살벌한 전장에서 키우고 싶지 않구먼. 어미가 아프니 마땅히 돌봐줄 사람도 없고.”
 금서진이 생소하지만 살가운 범우상의 부정(父情)에 미소 지었다.
 가족들 간의 정이라는 것을 느껴 보지 못한 금서진이지만, 그렇다고 범우상의 마음을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다. 다만, 지금 낭인곽이 그리 위험한 처지에 놓인 것도 아닌데 범우상이 마치 뭔가를 대비하는 듯해서 괜히 기분은 좀 찜찜했다.
 불길한 생각을 지우며 금서진이 말했다.
 “수린은? 그 아이도 데려갈까?”
 범우상이 고개를 저었다.
 “수린이야 어디 내 말을 듣겠나? 그리고 아마 은엽과 헤어지지 않으려 할 걸세.”
 “알겠네, 그럼, 무린이만 데려가지.”
 “부탁하네.”
 
 <『이소파한』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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