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대형 1권
서(序) 1 중원십오의(中原十五義)!
신비대형(神秘大兄)!
일제(一弟) 벽력흑금강(霹靂黑金剛)!
이제(二弟) 마검(魔劍)!
삼제(三弟) 사도(邪刀)!
사제(四弟) 마령(魔靈)!
오제(五弟) 환객(幻客)!
육제(六弟) 혈소야(血小爺)!
칠제(七弟) 은삭(銀 )!
팔제(八弟) 혈염(血艶)!
구제(九弟) 냉미(冷美)!
십제(十弟) 구환룡(九環龍)!
십일제(十一弟) 뇌궁(雷弓)!
십이제(十二弟) 탈명비(奪命飛)!
십삼제(十三弟) 대력부(大力斧)!
그리고, 태상노야(太上老爺)!
이들 십오 명(十五名)은 누구인가?
신비대형과 십삼 명의 형제, 그리고 태상노야. 이들은 총칭 중원십오의(中原十五義)로 불리운다. 이들의 출현은 불과 이 년 전이었다. 신비한 출현이었으며, 불과 이 년 동안 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였다.
불과 이 년 전(二年前)만 해도 중원무림은 한 문파(門派)의 것이었다.
수라교(修羅敎)!
수라교라 명명된 마(魔)의 집단에 의해 중원무림은 지배되고 있었다.
패천수라존(覇天修羅尊) 기무위(奇武偉)라 불리우는 수라교주(修羅敎主)를 정점으로 한 지배하의 중원은 마(魔)의 중원이었다. 전율과 공포의 중원이었으며 죽음(死)의 혈륜(血輪)이 그치지를 않았다.
패천수라존 기무위는 강(强)했으며 악랄했다.
수라교에 거부하는 것은 무엇 하나 가만두지 않았다.
중원대문파들인 구파일방(九派一幇)은 그 힘이 약했기에 침묵했다. 그들의 일파의 힘은 수라교의 일당(一堂)의 힘도 감당해 내지 못할 만큼 나약했다.
중원육대세가(中原六大世家) 중 사대세가가 수라교에 충성을 맹세했고 중원십팔만리(中原十八萬里)에 산재한 장(莊), 보(堡), 곡(谷), 궁(宮) 등 모든 대소문파(大小門派)가 조공을 바치고 충성을 맹세했다.
동정호 군산(君山)에 총단이 있는 수라교의 조직은 실로 방대했다.
중원십삼개 성(省)에 당(堂)이 있었으며 그 휘하에 삼십 개의 분단(分團)이 있고 각 분단은 각기 열두 개의 분타(分舵)를 거느렸다. 물샐 틈 없는 정보망과 무서운 힘으로 전 중원을 통치한 것이었다.
난세(亂世)가 그렇듯이, 압박과 설움의 수라교 통치하에 중원무림은 자연히 평화를 되찾아 줄 영웅(英雄)을 기다리게 되었다.
어느 날, 진정 어느 날 갑자기였다.
황산(黃山) 천도봉(天桃峯)에 하나의 거대한 석탑(石塔)이 세워졌다.
중원의탑(中原義塔)이 세워졌다. 탑에는 십 오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십오인(十五人)의 피(血)로써 의(義)를 맺고 하늘을 우러러 형제가 되노니 태어난 날은 모두 달라도 중원평화를 위해 한 날 한 시에 죽기로 맹세하노라!>
신비대형(神秘大兄)일 이름 시작으로 해서 일제 벽력흑금강, 이제 마검, 삼제 사도로 해서 십삼제 대력부까지. 그 이름들 밑으로 태상노야란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들은 누구인가?
뉘라서 수라천하(修羅天下) 하에서 중원의탑(中原義塔)을 세우고 평화를 되찾으려 피로 맺었다 외치는가?
신비대형과 태상노야, 그리고 열세 명의 형제들은 총칭 중원십오의라 불리우며 화려하게 무림에 나섰다.
이들 의의 형제들은 병기에 달관(達觀)했으며 공격은 산을 부수고 대해를 가를 듯했다. 일신에서는 수천 년 중원무림에 무학의 꽃을 피웠던 실전무학들이 쏟아져 나왔다.
거령진천패황권(巨靈震天覇皇券)은 일제 벽력흑금강이 쏟아내는 절세신권(絶世神拳)으로 육백 년 전 기인(奇人) 진악신군(眞嶽神君)이 중원을 통채로 때려 부수던 가공할 권법이었다.
이제 마검의 단 하나의 일검식(一劍式)인 마검일견휴(魔劍一見休)로 펼치는 검강(劍剛)을 만나는 순간 영원히 숨을 멈추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 사백 년 전의 절대검마(絶代劍魔)의 비학(秘學)이었다.
삼제 사도는 사령일도류(死靈一刀流)라는 마의 사찰 소뢰음사(小雷音寺)의 단 하나의 도법(刀法)으로 대륙을 양단했다.
사제 마령은 마륜단천지(魔輪斷天指)로 오제 환객(幻客)에게서는 백오십 년 전 중원제일괴인인 천환괴노(天幻怪老)의 역체기환공(易體奇幻功)이 펼쳐졌다.
혈혈마라장(血血魔羅掌)은 육제 혈소야의 핏빛 장법이었고 제룡단맥사흔삭법(制龍斷脈死魂索法)은 칠제 은삭(銀 )의 단혼삭(斷魂索)에서 펼쳐지는데, 칠십이로(七十二路) 제룡단맥사혼삭법은 용(龍)의 심맥도 끊는다.
팔제 혈염은 여자이며 아름다움은 하늘이 시기를 느낄 정도였다. 그녀의 염라혈염탈심소(閻羅血艶奪心笑)는 귀신(鬼神)도 색(色)을 취하고, 망자(亡者)마저도 욕정을 참지 못해 무덤 속을 헤집고 나온다고 알려져 있었다.
구제 냉미는 혈염과 아름다움의 짝을 이루는 미남자(美男子)였다. 고고한 기품과 차가운 고독감이 함께 있어 대하는 여자는 누구나 눈물을 뿌리며 그를 위로하려 한다.
어느 여자든 냉미의 얼굴에 서린 미소가 육백 년 전의 탕아(蕩兒) 색화랑군(色花郞君)의 천향미소(天香美笑)임을 알지 못한다.
십제 구환룡은 아홉 개의 환(環)으로 천탈굉뢰구환멸(天奪轟雷九環滅)을, 십일제 뇌궁은 벽력대천궁(霹靂大天弓)으로 화살 한 대에 백 명의 십장을 터뜨렸다.
십이제 탈명비(奪命飛)는 삼백육십비도(三百六十飛刀)를 사용하고, 십삼제 대력부는 타고 난 신력(神力)으로 백팔십 근이나 되는 대력금부(大力金斧)로 대력연환백팔십변(大力蓮幻百八十變)이란 부법을 벼락처럼 펼쳤다.
그들 모두가 펼치는 무공들은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광고절금(廣古絶今)의 가공할 무학들 이었다.
게다가, 가공하게도 모두 이갑자(二甲子)란 상상불허의 내공이 뒷받침이 되어 전부 실전무학들을 완벽 이상으로 펼쳐냈다.
수라교는 단 한 달 만에 신비대형과 중원십삼의에 의해 와해되었다.
신비대형이 단신으로 수라교 총단을 찾아간 날, 중원십삼의는 중원십삼개 성의 수라교 각 당을 공격했다. 그것으로 수라교의 핵심 세력은 끝이 난 것이었다.
수라교 총단은 이원(二院) 일각(一閣) 삼당(三堂)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수라교의 초절정고수 삼십 명이 총단에서 천하대권(天下大權)을 쥐고 흔들었다.
혼세광마(混世狂魔), 광요일살(狂妖一煞), 혈천마군(血天魔君), 구음신마(九陰神魔) 등등, 패천수라존 기무위를 보필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기라성같은 대마(大魔)들이 수라교 총단에 있었다.
이름만 대도 천하를 몸살나게 만드는 노마들을 신비대형은 가공하게도 하나도 남김없이 죽였다.
신룡검(神龍劍)!
그는 천고기검 신룡검 한 자루로 무려 열 여섯 류(類)의 상승검학으로써 모조리 목을 날린 것이었다. 그 후, 지친 몸으로 패천수라존 기무위와 장장 삼주야(三晝夜)를 싸웠다. 결국, 패천수라존 기무위는 사지(四肢)가 잘려 죽었다. 그 주검을 내려다 보는 신비대형의 복면 속 두 눈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피는 끊임없이 흘렀고 백의(白衣)는 피에 젖어 혈의(血衣)로 변해 있었다.
"수라교가 멸망함으로써 중원은 평화를 되찾았으나 잠시 뿐인 평화일 뿐이다."
그는 한 마디 말을 남기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 수라교의 멸망은 전 중원십팔만리를 흥분으로 몰아 넣었다.
신비대형, 태상노야와 열세 명의 의의 형제들. 그들의 이름들은 중원의 찬란한 태양(太陽)이 되었다. 황산 천도봉은 성역이 되었고, 수라교가 멸망한 다음 날부터 무림인들의 중원의탑 순례가 시작되었다.
수라교가 멸망 되고 그 후 이 년 동안, 그들의 모든 것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전설과 신화(神話)가 되어 버렸다.
중원인들은 중원을 흘러 다니는 한 가지 소문에 항상 감격했다.
"앞으로도 신비대형과 태상노야, 중원십삼의는 영원히 그늘에서 중원 무림을 지켜볼 것이다. 중원이 있는 한 신비대형과 중원십삼의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중원인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그토록 무서운 무공을 익히게 되었느지, 그런 것은 몰라도 된다. 다만, 영원히 중원의 어느 하늘 아래서건 중원을 지켜주기만을 바랬다.
누구나가 한 번쯤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모두가 외치는 그런 위대한 이름들이 된 것이었다.
서(序) 2 판도(版圖), 그리고 전설(傳說)!
수라천하(修羅天下)가 중원십오의(中原十五義)에 의해 평정된 후, 당금 중원무림의 판도는 일궁이곡삼문삼방(一宮二谷三門三幇)의 거대한 아홉 개의 세력으로 분할되었다.
일궁, 이곡, 삼문, 삼방(一宮二谷三門三幇)!
일궁(一宮)은 하북성(河北省) 태행산(太行山) 천검궁(天劍宮)을 일컬음이다.
이곡(二谷)은 사천성(四川省) 천극산(天極山)의 태양곡(太陽谷)과 운남성(雲南省) 구운산(九雲山)의 봉황곡(鳳凰谷)을 일컬음이다.
삼문(三門)은 강서(江西) 북태극문(北太極門), 하남(河南) 천도문(天刀門), 신비지문(神秘之門) 유문(幽門)을 일컬음이다.
삼방(三幇)은 절강(浙江) 혈살방(血殺幇), 산서(山西) 일월마방(日月魔幇), 광동(廣東) 십패방(十覇幇)을 일컬음이다.
일궁, 이곡, 삼문, 삼방의 지존(至尊)들은 당금 무림을 대표한 십일인(十一人)의 아홉명이었다.
일궁, 이곡, 삼문, 삼방의 특색은, 아홉 세력의 지존들이 명성을 날리며 각기 일파(一派)를 세운 것은 불과 이삼십년(二三十年) 전(前)이었다. 이들은 각기 엇비슷한 시기에 일어나 명성을 떨쳤으며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한 것이다. 더욱 기이한 것은, 이년 전 수라천하(修羅天下)를 이룩한 수라교주(修羅敎主) 패천수라존(覇天修羅尊) 기무위(奇武偉)의 천하 하(下)에서도 전혀 세력의 다침이 없이 더욱 굳건한 세력을 다져온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수라교는 이들 아홉 세력과 전혀 충돌없이 천하를 지배했던 것이다. 이들 아홉 세력의 지존들의 더욱 놀라운 점은 그들 각 개개인의 일신절예가 이 시대(時代)의 최강(最强)의 무학이라는 것이다.
결코, 이천 년 무림사(武林史)를 통해 굳어진 위엄과 권위의 실전무학들이 아니었다. 단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볼 수 없었던 새로운 무학들이었으나, 그들은 이 시대에 창안된 무공으로 오랜 전통의 유수한 절학(絶學)들을 무참히 깨뜨렸던 것이다. 그리고 아직 천하는 넓었다. 개대 세력만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북해(北海) 사태청(沙太靑)! 서역(西域) 소뢰음사(少雷音寺)!
천축(天竺) 파라마교(婆羅魔敎)! 남해(南海) 남천독문(南天毒門)!
이들을 총칭 세외사패천(世外四覇天)이라 한다.
역사는 천년(千年)에 달하며 그 힘은 언제나 공포와 경외(敬畏)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드넓은 대륙 중원무림을 정복하기를 바랬으며, 언제나 침범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천여 년 세월 동안 중원침범이 무려 열네 번, 번번이 중원의(中原義)에 좌절당했으나 아직도 그들은 어둠의 잔재요, 전율의 공포인 것이다.
중원무림엔 언제나 세 가지 신비한 전설이 사람들 입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십전무원록(十全武元錄)!
백마경(百魔經)!
황궁(皇宮) 구중비고(九重秘庫)에 얽힌 세가지 전설이었다.
십전무원록은 열 권의 비급을 말함이다.
이천 년 무림의 역사 이래 가장 완벽하다는 열 권의 무공비급이 중원십팔만리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이 세월따라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십전무원록은, 이백 년(二百年)을 주기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그 시대의 최고무학들이라는 것이다. 이토록 무서운 십전무원록은 한 신비가문(神秘家門)에 의해 절묘히 수집되어 어딘가에 비장되어 있다는 전설로 알려졌기에 듣는 이들의 흥분을 금치 못하게 했다.
신비가문을 찾아라! 허나 그 누구도 신비가문을 알지 못했으며 찾지 못했다. 만약 그 전설이 진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면 중원은 그날로 피로 덮힐 것이다.
백마경(百魔經)은 백 권의 마공비록(魔功秘錄)에 대한 전설이었다.
천 오백 년 전, 이 대륙에 마(魔)로써 하늘(天)을 이룩하리라는 거대한 야망을 가진 인물이 있었다.
천마(天魔) 방대석(方大石)!
마교(魔敎)의 시조(始祖)이며 온갖 사공이술(邪功異術)을 집대성한 마의 영원한 대부(代父)였다. 그는 중원무림을 향해 광오히 외쳤다.
"마(魔)로써 정의(正義)를 세우고, 마(魔)가 진정한 행도(行道)임을 중원무림(中原武林)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마(魔)를 추종하는 자들은 본좌에게 오라. 마신(魔神)이 부여한 위대한 업(業)을 함께 이룩하리라!"
당시 천하를 주름잡던 구십 구 명의 거마(巨魔)들이 구름같이 마교로 몰려들었다. 이는 마의 총화였으며 중원무림의 모든 마공이 단숨에 마교(魔敎)로 몰려 들었음을 의미했다. 중원십팔만리 무림은 전율을 느끼며 이들을 백마(百魔)라 명명하고 두려운 눈으로 주시했다.
소림이대장문인(少林二代掌門人) 각원선사(覺元禪師)가 황급히 무림첩을 발송하여 이들의 행동에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허나, 어찌된 일인지 마교에 모인 백마는 그후 전혀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십 년(十年)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들은 마교의 본산 십만대산(十萬大山)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일으킬 혈겁에 대비한 정도무림은 십 년 동안 내실을 기하며 조금치도 경계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대신 그 십 년 동안 정도무림은 천 년을 이어갈 엄청난 기반을 닦을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마총(百魔塚)!
돌연 백마총이란 말이 중원에 퍼졌다.
- 백마총은 백마(百魔)가 묻힌 무덤이며 그 안에 백마의 모든 비급이 있다. 백마는 서로 마공을 비교 연구하다 서로 흑심(黑心)이 생겼다. 백마 모두의 무공을 홀로 전부 취한다면 무림사상 공전절후의 천하제일인이 된다는 흑심하에 백마간에 심각한 반목과 불화가 생겼다. 이것이 억누를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천마 방대석은 하늘을 우러러 통한의 눈물을 뿌리며 스스로 백마총에 몸을 던졌다.
"마(魔)는 역시 마(魔)일 뿐인가? 마의 정의, 행로, 마(魔)로써 무림의 도를 이룩하려던 본좌가 어리석었도다!"
그와 구십구마(九十九魔)는 영원히 백 권의 마공비급과 함께 백마총에 묻혀 버렸다.
백마총을 찾아라. 고금유일의 천하제일인이 되리라.'
이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수십 만의 무림인이 십만대산을 이잡 듯이 뒤져도 백마총은 결코 찾을 수 없었다. 그 발걸음은 그 후 이백 년 동안 끊이지 않았으나 결국 차츰 묻혀진 전설이 되어 갔다.
백마경(百魔經)! 백 권의 마공비급은 천 오백 년이 흐르는 동안 아직도 생생한, 중원무림을 끝없이 흥분시키는 전설이었다.
황궁(皇宮) 구중비고(九重秘庫)는 무엇을 말함인가?
원(元)이 명(明)의 주원장(朱元章)에게 망하기 직전, 원(元)의 구문제독(九門提督) 철목위(鐵木偉)가 원(元) 황실(皇室)의 보고(寶庫)를 어딘가로 옮겨 숨겨 놓았다는 전설이다. 이 또한 엄청난 흥분과 경악을 불러 일으키는 전설이 아닐 수 없었다.
원(元) 황실의 보고는 세인의 상상을 불허하는 온갖 기진이보, 영약, 병기, 황금 등이 산처럼 쌓여 있다는 전설의 금지(禁地)였다. 원 당대의 보물 뿐만이 아니라, 당(唐), 송(宋), 심지어 멀리 상고시대(上古時代)인 은(殷), 주(周) 황실의 모든 보고까지 산재되었다는 보고(寶庫)가 중원십팔만리 어딘가에 있다는 전설이다.
더 구미가 당기는 말은, 원(元)의 구문제독 철목위가 구중비고의 장진도를 몽고로 가져가지 못하고 중원에 떠돈다는 소문이었다.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철목위는 중원에 자신의 혈육을 남겨 놓아 그 장진도를 보관 시켰다는데, 과연 어느 누가 갖고 있는 것일까?
알려지면 전 중원에 몰아칠 혈풍(血風)은 감당할 길 없는 것이지만, 아직도 전설만이 뜬구름처럼 중원십팔만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항주거리의 왕초!
항주 진회하(秦淮河)!
명실공히 사내라 이름 달은 자들에게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백이면 백 모두 항주 진회하를 입에 올린다. 중원최대의 색향(色香)인 진회하는 그만큼 모든 사내들이 염원하고 동경하는 환락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망선대(望仙臺)는 항주의 남쪽 하변(河邊)에 위치한 작은 언덕이었다.
이곳은 비단 그 경치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지세(地勢)가 가파르지 않아 진회하의 사람들은 물론 천하인들이 즐겨찾는 명소(名所)였다.
이 망선대에 올라서면 진회하의 모든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더욱 유명했다.
진회하 푸른 물결 위에 유람선(遊覽船)들이 점점이 떠 있는, 정답게 하변을 거닐고 있는 연인(戀人)의 모습이 한층 더 싱그러운 한낮인 지금은 봄(春)이었다.
천하만물(天下萬物)이 유동(遊動)하는 좋은 계절, 향긋한 꽃내음과 함께 이 작은 언덕은 온통 푸른 초지(草地)를 이루고 있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처녀들의 싱그러운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호호호. 깔깔"
꽃향기처럼 울려 퍼지는 이 일진의 아름다운 웃음소리의 주인은 세명의 처녀들이었다. 눈처럼 희디 흰 백의(白衣)와 녹의(綠衣), 취의(翠衣)를 입은 처녀들의 그 생기발랄한 모습은 생동하는 봄날과 함께 더욱 싱그러움을 느끼게 했다.
푸른 초지 위를 나비처럼 날아 다니는 그 아름다운 모습은 차라리 한폭의 그림이었다. 세 소녀의 차림을 보니 이 진회하 어느 기루(妓樓)의 기녀(妓女)들 같았다.
"호호호······"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야. 이래서 봄날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것이야. 호호호."
즐겁게 웃으며 떠드는 것은 녹의와 취의소녀였다.
그녀들의 앞에서 걷고 있는 백의소녀는 흐뭇한 표정으로 그것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나들이를 나온 듯, 취의소녀는 양손에 붉은 보퉁이와 돗자리를 들고 있었으며, 녹의소녀는 품에 하나의 칠채단금(七彩短琴)을 소중하게 안고 있었다.
칠채단금(七彩短琴)은 일견하기에도 그것은 예사 물건이 아닌 듯했다. 비록 보통 금(琴)에 비해 훨씬 작았으나, 상아를 정교히 깎아만든 몸체에서는 일곱 색깔 무지개빛이 영롱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취의소녀가 백의소녀를 향해 간드러진 음성으로 물었다.
"호호. 아씨, 진회하 첫나들이 감상이 어떠세요?"
백의소녀의 나이는 이제 열 여덟 아홉 쯤 되었을가?
봄날의 미풍에 흑단같은 머리채를 날리고 있는 그녀의 자태,
그녀의 자태는 실로 월궁(月宮)의 선녀 상아(像娥)를 방불케 했다.
그 현란하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미(美)란 눈이 부시도록 아찔한 것이어서 그 고아하도록 성스러운 자태는 그녀가 기녀일까 의심스러웠다.
그녀의 모습은 가을날 달빛 아래 정결하게 피어난 박꽃처럼 청순하고도 고아했다.
백의 소녀는 꿈꾸듯 몽롱한 눈을 푸른 하늘에다 주었다.
"그렇다. 춘홍(春紅)과 동매(冬梅)야, 너무 아름다워 나는 지금 할 말을 잊고 있단다.정말 너희들 말대로 나오길 잘했구나."
음성 또한 어찌 그리도 영롱하고 맑을 수 있단 말인가. 일 년 내내 귀를 씻지 않고 간직하고픈 그윽한 매력이 물씬 풍겼다.
취의소녀는 동매(冬梅)였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호호호······아씨. 진회하의 절경도 아름답지만 항주제일기(抗州第一妓)인 야화(夜花) 유운지(柳雲芝) 앞에선 정말 명월(明月) 아래 반딧물이지요."
항주제일기 야화 유운지가 백의소녀의 이름이었다. 유운지는 희디 흰 양볼을 살짝 붉혔다.
"동매야, 너의 칭찬은 고맙다만 여인의 용모를 어찌 이 위대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비교할 수 있겠느냐?"
옆의 녹의소녀 춘홍이 정색을 하며 말을 받았다.
"어머나, 아니예요 아가씨. 동매의 말엔 추호의 거짓도 없어요. 아가씨는 정말 너무 겸손한 것이 탈이라니까요."
동매는 까르르 웃으며 저만치 달아났다.
"그러니까 누구를 막론하고 밤이면 우리 아가씨만 찾지. 호호호······"
야화 유운지는 수줍은 듯 길고 긴 손가락으로 얼굴을 살짝 가렸다. 어찌된 일인지 유운지는 극상의 칭찬을 들으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래. 난 너희들의 칭찬을 듣고 있으면 언제나 황비(皇妃)가 된 기분이란다."
"호홋. 황비라 한들 우리 아가씨의 용모와 견줄 수 있을까요?"
"호호호."
봄날은 정말 좋았다.
진회정(秦淮亭)은 진회하가 한 눈에 보이는 이 작은 언덕 위에 위치한 정자였다. 동매와 춘홍은 가지고 온 음식을 그곳에다 펼쳐 놓았다.
"아가씨, 시장하시죠? 어서 드세요."
"오늘은 저희 둘이서 특별히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것으로만 만들었지요."
동매와 춘홍은 여전히 즐겁게 조잘거렸다. 그러나 유운지의 눈길은 멀리 진회하의 물결 위를 향해 있었다. 말이 없는 성격인 듯 그녀는 그 후로 입을 떼지 않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별빛처럼 맑은 눈 속에 가득히 쓸쓸함이 배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어찌된 일일까? 눈빛에 쓸쓸함이 배어나온다는 것은 마음 속의 언어다. 마음이 쓸쓸하기에 눈은 무언의 말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동매와 춘홍은 그런 유운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연신 떠들어 댔다.
"아하······"
유운지의 석류같이 붉은 입술 속에서 흘러나오는 탄식에는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애소(哀訴)가 가득 담겼다. 항주제일기 야화 유운지에게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더욱 그녀의 이런 수심은 일개 기녀에게서 볼 수 없는 심오한 것이었다.
동매와 춘홍은 갑자기 재잘거리던 입을 멈추었다. 유운지의 탄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둘은 동시에 침울해졌다.
'아가씨께선 또 그 생각을 하시는 모양이군.'
그녀들은 무엇이 유운지를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춘홍이 안타까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가씨······이제 지난 일은 그만 잊으세요."
유운지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동매가 풀이 죽어 중얼거렸다.
"저희들은 아가씨의 슬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잊게 해드리려고 이곳에 왔는데."
갑자기 수정같은 눈물 한 방울이 유운지의 희디흰 뺨을 타고 굴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자조의 웃음을 흘렸다.
"잊어야지. 모두 지나간 일인 것을 누가 모르겠느냐. 허나 나 운지의 앞날은 영영 웃음을 파는 기녀로 끝마쳐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처절한 상심(傷心)이 내재된 독백이었다. 미녀의 슬픔은 금세 주위의 풍경까지 암울하게 만들었다.
불어오는 미풍도 숨을 죽이고 즐겁게 지저귀던 새들도 입을 다물었다.
고요히 침잠되어 흐르는 침묵을 유운지는 슬픔을 떨어내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백옥같은 흰 손을 뻗어냈다.
"동매야, 술 한 잔 따라주련?"
동매는 활짝 웃으며 술병을 잡았다.
"물론이지요. 아가씨."
맑은 액체가 옥배 위에 고여 들었다. 야화 유운지는 한 잔 그득한 술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후······매일 마시는 술이건만 오늘은 더욱 쓰구나."
그녀의 양 뺨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어졌다. 그 요요(妖妖)한 모습이란 뜨거운 정열(情熱)을 간직한 화사한 연꽃으로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진정, 불가사의한 미(美)를 지닌 소녀였다.
천하 풍류아들을 치마폭에 굴복시키는 항주 제일기 야화 유운지에게 대체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 것일까?
"금(琴)을 다오."
유운지의 말에 동매가 한옆에 놓아두었던 칠채단금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여기 있어요. 아가씨!"
유운지는 희디흰 옥수를 놀려 탄금(彈琴)을 시작했다. 아름다운 음률이 봄날을 화사하게 수놓기 시작했다. 듣는 이의 심신을 상쾌하게 만드는 천상의 음률이었다.
촉촉히 젖은 입술로 사랑을 속삭인다면 천하가 모두 행복에 겨워할 것이요, 탄식을 발하면 만화(萬花)가 고개를 숙일 아름다운 입술, 그 입술이 꽃잎과 같이 열리며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흐르는 만리(萬里) 물길은 끝간데 없고,
물결 위에 실은 사연은 눈물겹기만 하구나.
강물아!
네가 멈출 수만 있다면 쫓아가기라도 하련만······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그녀의 뺨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잡은 금이 더욱 그녀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유운지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가씨······"
"아름다운 자연을 대하면 오늘 하루 쯤은 슬픔에서 벗어나실 줄 알았는데."
동매와 춘홍이 울먹이며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봄날의 화려한 양광(陽光)은 항주제일기 야화 유운지의 눈물 속으로 슬프게 가라 앉고 있었다.
진회정 뒤는 울창한 수림이었다. 새들의 노랫소리와 한없이 평화로운 정적만이 흐르고 있는 곳에서 돌연 어디선가 심하게 코고는 소리가 들렸다.
"드르렁······드르렁······푸우······"
두 개의 고목 사이에 그물이 쳐져 있었는데, 지금 그 위에서 한 청년(靑年)이 신나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청년은 영낙없는 상거지 꼴이었다. 발끝까지 내리 덮히는 흑의장포(黑衣長袍)는 단 한 번도 빨아본 적이 없는 듯 땟국물이 자르르 흘렀고 그나마 여기저기 기운 자국하며 아예 살갗까지 내비칠 정도였다.
청년은 신나게 자다 말고 돌연 코를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흠흠! 흠······"
향긋한 음식 냄새라도 맡은 모양이었다. 다음 순간 흑의청년은 지체없이 벌떡 일어났다.
"어디서 날아오느뇨? 이 아름답고 향긋한 내음은, 흠흠······ 좋구나!"
거지청년은 즉시 그물 위에서 내려오더니 길게 기지개를 켰다.
"하······ 함, 잘잤다."
그는 눈을 지그시 내려뜨더니 하늘을 살폈다.
"하하······ 때는 오전이 지나고 점심때가 되니 이 어르신네의 공복을 채워주려 누가 또 봄나들이를 나왔구나."
천연덕스럽게 중얼거리며 그는 뒷짐을 진 채 어슬렁 어슬렁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청년은 한 마디로 기이하기 그지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볼품사나운 거지행색이 그에게는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이다.
아니, 그 어떤 모습을 해도 천하에 그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뻗어내는 손짓, 발짓 하나에는 신비한 매력이 묻어나고 있었다.
얼굴 역시 보기 드물게 잘생겼는데 특히 그의 두 눈은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심해(深海)인 듯 신비한 마력(魔力)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보는 이의 심혼(心魂)을 한없이 빨아들이는 그의 눈은 눈여겨 보자니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세계(世界)였다.
이십여 세 가량 들어 보이는데 펄펄 끓어도 시원찮을 나이에 나이답지 않게 안색이 유독 창백했다. 다 떨어진 먹물같은 장포와 창백한 얼굴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어우러져 하여튼 기가막힌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갑자기 한 줄기 구슬픈 노랫소리와 금음이 그의 귓전에 흘러 들어왔다.
스치는 만리 바람 끝간데 없고,
바람따라 실어보낸 사연 회답 없으니······
바람아!
너의 야속함에 애간장이 타는구나······
가슴이 찡 하도록 슬픈 가락이었다. 거지청년이 흠칫했다. 허나 이내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쯧쯧··· 누군지 모르나 바람 불어 슬픈 날인가 본데, 이 왕초 주운빈(朱雲彬)이 바람 불어 좋은 날로 만들어주지."
그는 목적지를 포착한 듯 빙그레 웃으며 진회정을 향해 다가갔다.
왕초 주운빈(朱雲彬)! 스스로 왕초라 칭하는 거렁뱅이 주운빈은 노래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어슬렁거리며 가기 시작했다. 다가 갈수록 금음과 노랫소리, 그리고 주운빈을 즐겁게 하는 음식냄새는 더욱 짙어졌다.
막 수림을 벗어나던 주운빈은 정자를 바라보다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
야화 유운지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발견하는 순간 주운빈의 생전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두 눈에 기이한 일렁임이 있었다.
"으음······ 저리도 아름다울 수가?"
그는 침음을 흘리며 돌연 씨익 웃었다.
"잘하면 횡재하겠구나."
정자 난간에 앉아 금음을 타며 노래를 부르던 유운지는 폭포수같이 흘러내린 검은 머리결을 고운 손으로 쓸어 올렸다.
"아하······"
이어지는 탄식에 이은 그 일련의 동작 하나에 주운빈은 한없이 빠져드는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유운지를 찬찬히 보던 그는 흠칫했다.
"대체 누구인가? 차림을 보아 기녀같은데? 저토록 아름다운 것을 보니 혹시?"
주운빈의 눈이 좁혀졌다.
'진회하에 온 지 일주일만에 항주제일기란 칭호를 받은 야화가 아닐까? 맞아. 용모로 보아서는 야화 외에는 없다.'
주운빈의 눈빛이 힘차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이 왕초의 신위를 기필코 보여줘야겠군!'
주운빈은 어깨까지 내려온 흑발을 이리저리 가다듬었다. 이때 유운지 그녀들은 진회정 뒤에 나타난 주운빈의 출현을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주운빈이 막 힘차게 거보(巨步)를 내딪는 순간이었다. 돌연 한 줄기 전음이 주운빈에게 전해져왔다.
"흐흐흐······ 왕초! 간만에 대어(大魚)가 눈에 띄었으니 신바람이 나겠구료."
"이런?"
주운빈의 기세좋던 얼굴이 일그러지며 내심 투덜거렸다.
'쳇! 빌어먹을 검둥이 녀석. 어디갔다 꼭 이런 순간이면 나타난단 말이야.'
주운빈도 어디론가 전음을 보냈다.
(검둥아, 너 또 지난번 같이 끼어들어 일을 깨놓는다면 그땐···.)
돌연 주운빈의 말을 끊으며 벼락치는 듯한 전음이 들려왔다.
(흐흐······ 그땐 어떡하시겠다는 것이오? 왕초가 나를 두들겨 패기 밖에 더하겠소?)
말을 들어보니 이 모종의 인물은 매맞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으······ 저놈이 계속 물고 늘어질 모양이군.'
주운빈은 울화가 치밀었으나 때가 때이니만큼 애원을 아끼지 않았다.
(검둥아,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면 내 열흘 동안 쉬지 않고 먹도록 후아감로주(喉兒兒甘露酒)를 사주겠다.)
시큰둥한 전음이 들려왔다.
(내게도 술 사먹을 은자는 있소.)
주운빈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럼 무엇을 원하느냐?)
(흐흐······ 감리신공(坎離神功)이면 모를까 그 외는 안되겠소.)
그 음성은 여운을 길게 끌었다. 주운빈의 얼굴은 낭패로 일그러졌다.
'꼭 탑(塔)같이 시커멓고 덩치가 큰 놈이 여우같이 약기는. 우라질 놈 같으니.'
몹시 아까운 표정이나 어쩔 수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가 방해를 놓지 않는 조건하에서 감리신공을 전수해 주겠다. 허나 한 가지 약속을 해라.)
(흐흐흐······ 약속이란 뻔한 것 아니오? 감리신공을 익힌 후 사고치지 말라는 것 말이오.)
주운빈은 얄미운 듯 냉소쳤다.
(알긴 아는구나.)
(흐흐······ 내가 이렇게 똑똑해진 것은 모두 왕초 덕이 아니겠소?)
주운빈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내가 길을 잘못 들였어. 이젠 여우가 다 되어 말로는 당해내질 못하겠으니.'
이때 전음이 급히 재촉했다.
(왕초! 줄려면 빨리 주시오!)
(알았다!)
주운빈은 다 떨어진 흑의장삼 속으로 손을 넣었다. 다음 순간 한 권의 얇고도 누런 책자가 그의 손에 쥐어져 나왔다.
(옛다!)
주운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 뒤로 내던졌다. 책자는 수림 안으로 사라졌다.
(흐흐······ 반갑다. 이제야 겨우 내 손에 들어왔군.)
매우 흡족해 하는 전음이 수림 속에서 들렸다.
(이놈 검둥아! 어째 고맙다는 말 한 마디가 없느냐?)
(원래 대형(大兄)께서 내게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오? 그동안 공연히 내 속을 태우느라 주는 것을 밀었었지만······ 흥, 이는 정당한 거래인데 뭐가 고맙단 말이오?)
주운빈은 휘휘 양손을 내저었다.
(졌다. 졌어. 그러니 이제 제발 사라져라.)
(흐흐······ 그럼 왕초, 또 만납시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림 속에서 하나의 인물이 튀어올라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어찌 사람의 형체가 저리도 크단 말인가? 이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철탑(鐵塔)인 것이다. 게다가 전신은 숯덩이처럼 검으니 아무리 담이 큰 사내라도 대낮에 봐도 기절초풍할 정도였다.
그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주운빈의 눈빛에 한없이 따스한 빛이 일렁였다.
"좋은 녀석."
좋은 녀석이란 한 마디엔 깊은 우정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헌데, 왕초 주운빈이 대체 누구이기에 칠백 년 전 도가제일고수(道家第一高手)이자 천하제일고수로 불리웠던 무당(武當) 적봉우사(赤鳳羽士)가 남긴 감리신공을 가졌고 그것을 스스럼없이 친구에게 준단 말인가.
주운빈은 실로 신비(神秘)한 왕초였다.
봄날의 미풍이 간지럽게 불어오는 화사한 오후에 한 채의 정자와 소담스럽게 앉아 있는 세 처녀들의 모습은 정녕 그림과 같은 풍경이었다.
그 광경을 응시하고 있는 주운빈은 돌연 목청을 높여 한 가닥 타령을 뽑기 시작했다.
"과부의 동네는 홀아비가 대빡, 처녀의 동네는 총각이 대빡, 난다고 기는 놈은 장돌로 찍어라! 어-- 허! 씨구씨구 잘도 한다."
이어 그는 양손을 들어 어깨춤까지 곁들이며 다가왔다. 별안간 들려온 이 타령세에 세 소녀는 깜짝 놀랐다.
"어멋!"
"······!"
그녀들은 놀란 토끼눈이 되어 나타난 불청객(不請客)을 쳐다보았다.
주운빈은 그녀들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더니 타령을 계속했다.
"얼씨구 씨구 들어간다아아······ 병아리 잡는데는 도끼가 대빡! 고래를 잡는데는 바늘이 대빡. 슬퍼서 우는 여자는 입술로 때려라. 어허 좋다! 들어간다······"
그 타령이 얼마나 구성지고 가사가 재미있던지 세 소녀는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오호호호······"
"호호······ 대체 누구지? 저 거렁뱅이는?"
특히, 한 잔 술에 양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유운지는 기이한 시선으로 주운빈을 응시했다.
'저 자의 전신에 어린 기운은 한낱 거렁뱅이가 풍겨내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거렁뱅이에겐 어울리지 않는다. 누군가? 정체를 감춘 기인(奇人)인가?'
그녀의 안목은 예리했다. 사람을 간파할 수 있는 안목은 절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많은 학문(學文)을 쌓고 지식(智識)과 경험(經驗)이 풍부한 데서만 오는 것이다.
유운지, 그녀는 예사 기녀가 아니었다.
주운빈이 정자 안으로 뛰어 올라왔다. 유운지와 동매, 춘홍 두 시비는 흥미로운 눈길을 모았다. 주운빈은 아랑곳 없다는 듯 음식을 차려놓은 곳에 털썩 주저 앉았다.
"쩝쩝······"
그는 입맛을 다시며 불타는(?) 시선으로 음식을 노려보았다.
"이 음식을 먹어도 되겠소?"
동매가 코웃음을 치며 톡 쏘아붙였다.
"흥! 먹으려고 달려든 주제에 묻기는 왜 물어보지?"
주운빈은 그녀에게 한쪽 눈을 찡긋 해보이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하하하······ 거렁뱅이 신조(信條)는 주는 음식이 아니면 먹지 않는 법이오."
동매는 그의 눈짓에 얼굴이 붉어져 앙칼지게 되쳤다.
"그래도 염치는 있어서."
앙칼지게 외치는 동매의 얼굴이 어찌된 일인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어쩜, 거렁뱅이 주제에 눈빛이 저토록 매력적일 수가 있을까.'
유운지가 상냥한 어조로 입을 떼었다.
"드시고 싶으면 어서 드세요."
주운빈은 그녀를 향해서도 눈짓을 보냈다.
"고맙소. 소저는 얼굴만 예쁜줄 알았는데 마음씨도 곱구료."
거침없는 행동이다. 허나 더러운 거렁뱅이인데도 그 행동이 조금도 추하거나 비굴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주책 맞을법한 행동임에도 어찌된 일인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기이한 매력이 묻어나오는 것이었다.
주운빈은 맛있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참으로 기인한 분위기를 가진 거렁뱅이구나.'
그런 기이한 분위기는 오히려 그녀의 흥을 깨는 것이 아니라 점점 그를 마음에 들게 했다.
세 처녀는 흥미롭게 주운빈이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운빈이 어찌나 맛있게 먹어대는지 그녀들은 옆에서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실컷 먹던 주운빈은 유운지를 향해 불쑥 술잔을 내밀었다.
"술 한 잔 따르시오. 그대가 따라 준 반주를 곁들인다면 더욱 맛있는 점심식사가 되겠소."
춘홍의 눈이 날카롭게 찢어졌다.
"이 거렁뱅이가 감히?"
동매도 질세라 발끈 달려들었다.
"어디서 이런 거렁뱅이가 굴러들어와 감히 아가씨께 술을 따르라는 것이냐?"
주운빈은 낭랑하게 웃으며 여전히 능청스럽게 반문했다.
"하하······ 행색을 보아하니 너희 아가씨는 기녀같은데 술 한잔 따른다 함이 무어 잘못되었느냐? 왜 너희 아가씨가 술 따라주기엔 내 행색이 너무 초라하냐?"
춘홍과 동매가 동시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냅다 호통을 내질렀다.
"닥치지 못해? 감히 우리 아가씨가 누구신데 네까짓 주제에."
유운지가 나서서 조용히 그녀들을 만류했다.
"너희들은 가만 있거라. 저분 말대로 난 항주의 기녀가 아니냐? 기녀가 대낮에 술 따르지 말란 법은 없지 않느냐?"
유운지는 눈가에 웃음기를 머금고 두 시비를 가볍게 나무랐다. 두 시비는 그녀의 말이 천금(千金)과 같은 듯 두 번 다시 떠들지 못했다.
지켜 보는 주운빈의 눈 속에 기이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역시 범상한 기녀가 아니군. 필시 내력(來歷)이 있음직하다.'
유운지가 지닌 내력(來歷)은 어떤 성질의 것일까?
유운지는 희디 흰 손길을 움직이며 손수 술을 따랐다. 그 모습은 매우 공경스러웠으며 어떤 아름다움까지도 내포되어 있었다.
두 시비는 흠칫하며 서로 마주보았다.
'어찌 아가씨께서 생전 안하시던 일을?'
주운빈은 유운지를 시종일관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유운지가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찰나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 얽혀 들었다.
'아······!'
유운지는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탄성을 발하고 말았다.
주운빈의 눈은 너무도 깊고 서늘했다. 기이한 매력이 앙금처럼 가라앉아 그녀를 한없이 끌어 당기는 것이었다. 일시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거대한 세계로 한없이 빠져 들어 눈빛을 거둘 생각도 못했다.
'아아······ 저 눈빛.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원한 깊이는 대체 어디서 부터 기인되는 것일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떨었다. 단 한 번 눈빛에 마음까지 빠져드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던 것이었다. 주운빈은 그녀의 눈빛을 피하며 단숨에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하하······ 미인(美人)이 따라 준 술은 역시 미주(美酒)일 수밖에 없소."
"······!"
유운지는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수많은 언어(言語)와 생각을 함축한 듯한 신비로운 미소였다. 주운빈은 기분 좋게 술을 들이킨 후 계속 식사를 했다.
춘홍과 동매는 아예 넋을 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대체 아가씨께선 저런 거렁뱅이가 뭐가 좋다고 이런 호의를 베푸신담.'
그녀들은 주운빈이 고개를 들 때는 험악하게 노려보기까지 했다.
이윽고, 주운빈은 먹기를 끝마쳤다. 놀랍게도 그 많던 음식은 깨끗이 그의 뱃속으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커억······! 잘 먹었다!"
춘홍이 빽 소리쳤다.
"어디서 더럽게 트림을 하는게야? 그것도 아가씨 면전에다가 말이야."
들은 척도 않는 주운빈은 만족한 포만감에 배를 한 번 쓸어내리더니 유운지를 향해 물었다.
"거렁뱅이가 이만한 포식을 해보기는 쉽지 않은 일, 하하······ 내 그 보답으로 멋있는 타령이나 한 곡조 들려드리겠소."
"······?"
유운지는 기대가 담긴 눈으로 주운빈을 응시하며 생긋 웃었다.
"기대하겠어요."
주운빈은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하하······ 무슨 말씀을. 오히려 그대와 같은 미인의 앞에서 한 타령 읊게 되어 영광이오."
그는 짐짓 유운지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까지 올리는 것이었다.
유운지는 느닷없는 주운빈의 출현에 기분이 한껏 돌았는지 배시시 웃으며 주운빈의 행동에 반죽을 맞추었다.
"매력있는 거렁뱅이 대협의 멋진 타령을 들려주십시오."
그녀는 한껏 우아한 모습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오."
주운빈은 한 마디 내뱉은 후 빙글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렸다. 이어 그의 입에서는 신나는 가락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허라! 한 발 가진 따--귀! 두 발 가진 까마귀! 세 발 가진 독노귀(毒老鬼)! 네 발 가진 당나귀! 먹다 죽은 귀신은 아귀(餓鬼)라, 얼씨구 씨구 잘도 한다······ 으싸! 으싸! 잘넘어 간다!"
가락에 맞추어 덩실덩실 춤까지 추어댔다.
흥에 겨운 그 모습은 한껏 익살맞으면서도 절대로 추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런 모습 또한 주운빈을 신비스럽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 중의 하나일지도 몰랐다.
"헤이······ 헤이헤이······ 오늘 아침에 얻은 밥은 내가 먹고요, 오늘 저녁에 얻은 밥은 그대에게 바치고요. 천지연(天池淵)의 물을 길어 사랑의 불에 붙은 여인의 마음을 끄고요. 어허이······ 씨구씨구······ 잘 돌아간다."
그칠 줄 모르는 타령을 하며 춤을 추고 있는 주운빈, 그러면서도 그의 눈길은 유운지에게 못이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
유운지는 그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더욱 뚜렷한 눈망울로 주운빈의 눈을 바라보았다.
말할 수 없이 심유(深幽)했던 눈빛은 지금 거대한 화산(火山)이 타고 있는 듯 뜨겁고 강렬했다. 아마 천하의 유운지가 아니었다면 이미 재가 되도록 타버렸을 것이다.
그 눈빛을 고스란히 받는 유운지의 얼굴은 일견 담담해 보였으나 심장은 세차게 뛰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에 심장이 뛰는 일은 처음이었다.
매일 밤 지겹도록 남자를 대하면서도 온갖 별별 종류의 남자가 다 있었지만 단숨에 심장을 뛰게하는 남자는 없었던 것이다. 심장이 뛰면서 뜨거워졌다. 마치 확확 불이 타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운빈은 한 곡을 늘어지게(?) 뽑고나서 동작을 멈추었다. 유운지는 기탄없이 박수를 보냈다.
"멋있어요! 정말 멋있었어요."
주운빈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그녀를 똑바로 주시했다.
"지금 난 결정한 것이 있소."
유운지는 의아해 하며 물었다.
"그게 뭐지요?"
이렇게 묻는 그녀의 눈빛은 반짝 빛났다. 주운빈은 씨익 웃었다.
"보면 알 거요."
그는 다 떨어진 흑의장포 속으로 손을 집어 넣어 한참 부시럭 거리더니 조그만 물건을 꺼냈다. 그것은 손바닥만한 작은 서첩(書帖)이었는데 끝에 붓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유운지는 몹시 궁금한 듯 재촉해 물었다.
"그게 무엇인가요?"
주운빈은 자랑스럽게 서첩을 촤라락 펼쳐보였다.
"이건 바로 내 부인될 여인들의 신상명세서(身上明細書)요."
"예에?"
유운지는 그만 크게 놀랐다. 참으로 상상밖인 듯 그녀는 고개를 내젓기까지 했다.
"세상에 그런 엉뚱한 말을······?"
춘홍과 동매는 배를 움켜쥐고 웃어대었다.
"호호호······ 아이 웃겨라. 뭐······ 뭐라고?"
"이제보니 저자가 배 고팠다가 밥을 배불리 먹더니 완전히 머리가 돌았나봐. 호호호."
그녀들은 눈물이 찔끔 나도록 웃어대더니 손을 들어 주운빈을 가리켰다.
"호호······ 아니 너같은 거렁뱅이가 뭐 부인될 여인들의 신상명세서라고?"
"야아! 네 꼴을 몰라서 하는 소리냐? 어디 진회하에 가서 그 더러운 몸이나 한 번 씻고 오시지 그래. 정말 웃기는 노릇이야."
신랄한 야유가 계속 됐다. 들어넘기기 힘든 심한 야유였다.
그러나, 주운빈은 전혀 개의치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색을 하며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하······ 무슨 소리, 나는 도합 모두 열 명의 부인을 얻을 작정이다."
"네에?"
유운지는 그 능청스런 변죽에 어이가 없었다.
"호호호······ 못살겠네."
"정말 죽여주는구나. 깔깔깔."
동매와 춘홍은 아예 데구르 굴러 대며 웃어대었다.
"자아, 보시오."
주운빈이 헛기침을 하며 심각하게 말했다.
"ㅌ!"
그는 손가락에 침을 묻히더니 그 작은 서첩을 들추어 보였다.
그 위에는 부인명첩(夫人名帖)이라고 실로 거창하게도 이런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유운지와 두 시비는 이제 아예 넋을 놓아버렸다. 주운빈은 세 연인의 눈앞에 그 글자를 구경시키더니 천천히 첫장을 넘겼다.
"눈을 뜨고 잘 보기 바라오."
그가 넘긴 다음 장에 깨알만한 글씨가 나타났다.
대부인(大夫人) 하덕추(河德醜)!
이 이름을 필두로 그 아래에는 상세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
<하덕추, 그녀는 항주교의 부석산(斧石山) 연곡(蓮谷)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녀의 용모는 매우 추하다. 허나 추한 용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두 눈, 그 눈만은 천하의 그 어떤 아름다움도 따르지 못할만큼 아름답다. 그녀의 눈빛은 깊이를 측량할 수 없는 대해(大海)처럼 심원(深遠)하여 천하의 그 어떤 것도 모조리 포용할 수 있으며 그 맑고 시원한 눈빛은 마치 열심히 갈고 닦은 보석과도 같다. 한 마디로 그녀의 눈은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천하의 단 하나 뿐인 아름다운 보물이다.
더욱, 그녀의 전신에서 풍기는 고고한 기품과, 사슴처럼 길고 유려한 목의 선(線)은 한 마리 학(鶴)처럼 깨끗하다.
다만, 그녀의 눈은 너무도 진한 아픔이 배어 있어 안타깝기 이를데 없다. 누구든 그 눈을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은 없으리라
이런 그녀이기에, 나 주운빈은 그녀를 나의 대부인으로 정하기에 추호도 주저하지 않았노라!>
절로 웃음이 터지는 기이한 신상명세서였다. 그러나 유운지는 웃지 않았다. 오히려 유운지의 표정은 기이하게 변하고 있었다. 비록 장난기 서린 글이었으나 그 속에서는 어떤 절실한 진실감이 느껴졌던 까닭이었다.
주운빈은 그녀를 향해 흡족하게 웃었다.
"험, 다 보았소? 그럼 또 장(章)을 넘기리다."
그러나 두 번째 장은 깨끗한 공백이었다. 주운빈은 그 빈 공간을 가리키며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오늘 내 두 번째 부인을 위해 비워둔 이 장(章)이 채워지리라."
"······!"
유운지와 두 시비는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바로 그 속에다 항주제일기 야화 유운지의 이름을 기입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동매와 춘홍이 발작을 일으키려는데,
"킥!"
유운지는 입을 막으며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동매와 춘홍은 유운지가 제지를 하는 바람에 잡아먹을 듯 주운빈을 노려보며 씨근덕거렸다. 그녀들의 눈빛은 푸르락 붉으락 시시각각 달라지며 너무나 분해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활화산(活火山)과도 같았다.
그러나 주운빈은 그녀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자못 엄중한 표정으로 유운지를 향해 따져 물었다.
"왜 웃소?"
과연 이 항주제일기 야화 유운지가 천하의 신비한 거렁뱅이의 두 번째 부인이 될 것인가.
사위를 구하는 비무(比武)!
주운빈은 어떠냐 마음에 들지? 하듯이 넌즈시 유운지를 바라 보았다.
"저를 두 번째 부인으로 삼겠다고 하셨는데 자신 있으세요?"
아름답고도 장난기 서린 미소를 띄우며 유운지가 반문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동매와 춘홍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운빈은 양어깨를 으쓱하더니 빙긋 웃었다.
"물론! 자신이 없어서야 어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겠소?"
"제가 그렇게 허술한 여자로 보였나요?"
갑자기 그녀의 태도는 자못 쌀쌀하게 변했다. 주운빈은 정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어 댔다.
"아니, 그 무슨 섭한 소리요? 내가 허술한 여자를 부인으로 삼으려는 바보로 보이오?"
그는 여기까지 말한 후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대는 내가 본 여자 중 가장 최고요."
유운지는 눈살을 곱게 찌푸렸다.
"허면 어째서 두 번째지요?"
확실히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다. 주운빈은 지체없이 대답했다.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탄식까지 섞어서 자못 안타깝다는 투로 말이다.
"그것은 당신이 날 늦게 만난 탓이오."
유운지는 돌연 요요하게 웃더니 짓궂게 반문했다.
"그렇다면 순서야 아무가 먼저면 어때요?"
총명한 반격이었다. 주운빈은 흠칫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제법인걸. 이거야 정말 난감하지 않나.'
주운빈이 일시 대답을 하지 못하자 춘홍과 동매는 고소한 듯 쿡쿡 웃었다. 유운지는 이번엔 생글생글 웃으며 은근한 어조로 다시 물었다.
"왜요? 바꾸기가 곤란한가요?"
주운빈은 일시 어찌할 줄을 몰라 더듬거렸다.
"기실······ 그······ 그것이 그렇소."
일순, 유운지의 해맑은 옥용에 한 겹 차가운 서리가 깔렸다. 그녀는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흥! 그렇다면 당신은 대부인으로 정한 여자보다 제가 못하다는 말인가요?"
주운빈은 극도로 당황했다.
'제기랄, 그게 그렇게 되나.'
쩝쩝 입맛을 다시는 것이 매우 낭패한 꼴이 되고 말았다. 허나, 다음 순간 주운빈은 예의 그 느물느물한 웃음을 흘리더니 붓을 잡고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대 이름은?"
유운지는 고개를 홱 돌리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흥! 대부인이 아닌 두 번째 부인 자리는 절대 사양이에요."
동매와 춘홍은 유운지의 행동에 가슴이 덜컹 내려 앉았다. 여태 주운빈을 놀려주기 위해 맞장구를 하는줄 알았더니 아예 그의 부인이 될 것을 기정사실화 해 놓고 둘째 부인은 될 수 없다고 토라지는 것이 아닌가. 둘의 눈에는 유운지의 행동이 진실로 보였기에 가슴이 덜컹한 것이었다.
동매가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아가씨--!"
주운빈은 두 시녀가 유운지를 정신차리게(?) 할까봐 틈새를 안주고 당당하게 맞장구를 쳤다.
"당연하지! 어느 여자라고 승복하겠소? 허나 하핫······"
주운빈은 어느 정도 끌려오는 유운지의 마음을 짐작했다. 끌려 들었음에도 토라진 그녀를 두고 이토록 여유롭게 변한 것을 보면 그에게 다른 계책이 있는 듯 보였다. 주운빈은 껄껄 웃으며 그녀를 향해 선포했다.
"하하······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 뜻을 승복 시키고야 말겠소."
뒤이어 단정하듯 자신있게 말했다.
"그대는 꼭 내 결정에 따르고야 말걸."
유운지는 고개를 돌리며 마주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정말 대단한 배짱이군요! 그 배짱 하나는 높이 사줄만 해요! 그러나 당신은 나 유운지를 잘못 보았어요."
돌연 주운빈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후훗."
웃음은 그의 저의를 짐작할 수 없도록 기묘하게 들렸다.
"나를 보시오."
주운빈이 그녀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
유운지는 일순 멍했다. 나를 보라니? 여태까지 그 얼굴을 보아오지 않았던가? 순간, 주운빈은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이 일련의 간단한 동작을 취한 후 그는 싱긋 웃었다.
"어떻소?"
주운빈은 자신의 얼굴을 전부 드러내놓고 싱그러운 미소를 띄운 것이다. 싱그럽게 보이는 미소는 은연중에 대단한 자신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웃음은 부지불식간에 세 처녀를 동시에 탄성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아······오--"
주운빈의 웃음은 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이 파문(波紋)이 번지듯 서서히 확대되더니 마지막으로 입가에 도착했다.
마치 얼어붙은 빙결(氷結)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 천 개의 태양(太陽)이 일시에 폭발하듯 화려하고도 찬란한 미소였다.
이 순간 유운지는 그 미소에서 전율할 감동을 맛보았다.
'너무 눈부셔.'
유운지는 정체모를 한 신비한 남자에게서 난생 처음 진정한 미소의 의미를 절감했다. 그리고 감탄했다.
'아직 그리 많지 않은 나이인데 어떻게 모든 것을 포용한 듯한 깊은 내면을 담은 미소를 보일 수 있는 것일까.'
유운지는 그 미소에 취했다. 완전히 취해 버렸다. 주운빈은 이때다 싶어 부인명첩을 들었다.
"그대의 이름은?"
유운지는 어떤 최면에라도 걸린 듯 자신도 모르게 몽롱한 음성으로 말했다.
"유운지에요."
주운빈은 즉시 공백의 장(章)에다 그녀의 이름을 기입했다.
"유운지라, 정말 아름다운 이름이오."
"······!"
그제야 유운지는 어떤 감미로운 환상(幻想)에서 깨어났다.
"아!"
다음 순간 그녀의 옥용은 대번에 빨갛게 물들었다. 주운빈이 낭랑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다른 남자의 대부인이 되는 것보다 나의 둘째 부인이 되는 것이 유소저에겐 더욱 행운이오! 그럼······"
주운빈은 그녀를 향해 한 쪽 눈을 찡긋하고는 몸을 돌려 멀어져 갔다.
'일부러 넋이 나간 척 하고 더 이상 따지지를 않다니. 여자가 그런 이해심을 갖기는 힘든 것인데 고맙소. 유소저.'
주운빈은 조금 전 유운지의 그런 행동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콧노래를 부르며 떠나갔다.
세 여인은 넋을 잃고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 모습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산(山)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물론 이 느낌은 유운지 그녀만의 것이었다.
'맞았어. 산(山)이야. 마치 산이 사라져가는 것만 같았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돌연 유운지는 아랫입술을 꼬옥 깨무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신을 만난건 정녕 내겐 행운예요. 그러나······'
그녀는 어떤 결심을 굳히려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쩌면 나의 자존심 따위는 당신 앞에선 무용지물이 될지 모르겠군요.'
그녀는 오늘 주운빈을 만난 것이 행운인지 다른 무엇인지 자존심 때문에 오래도록 생각해야 했다. 그녀의 자존심은 천하에서 가장 꺾기 힘든 것이라는 것만 알아두자.
단번에 웃음 하나로 야화 유운지의 모든 상식(常識)과 경험(經驗)을 부숴버린 왕초 주운빈은 과연 누구인가?
항주의 오후는 매우 복잡했다. 저녁을 맞이하기 위한 사람들의 행렬과, 장사치들의 갖은 아양을 띈 외침이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왕초 주운빈은 서쪽 대로(大路)에 어슬렁 어슬렁 긴 장삼을 끌며 나타났다.
지금 이 행위(行爲)는 그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대로는 무수한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으나 그의 독특한 걸음은 그들에게 한 번도 부딪치는 일 없이 통과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이쿠! 왕초······"
돌연 북새통 속에서 반가움에 찬 외침이 터져나왔다. 동시에 주운빈의 앞에 넙죽 허리를 굽히는 우직한 장한(長漢).
"왕초! 오늘도 어김없이 이 시각에 나타나는구료."
장한의 미소는 반갑고 친근했다. 아니 그의 눈빛은 완전히 주운빈을 흠모하는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주운빈은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장삼(張三)! 요즘은 도박 안하지?"
장삼이라 불리는 장한은 뒤통수를 긁었다.
"헤헤······ 물론입니다. 이제 그 계통에서 손을 끊었지요."
장삼은 항주성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자 없는 타고난 도박꾼이었다. 예전에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꽤 있었는데 그 못된 손버릇으로 숫가락까지 몽땅 날리고 말았다. 병든 노모(老母)와 처자식이 졸지에 거리로 나앉는 찰나, 이 신비스런 왕초 주운빈이 모두 되찾아 주었던 것이다. 아니, 되찾아 준 정도가 아니라 그전의 재산에 일곱 배를 늘려서 찾아 주었다.
그러니, 어찌 장삼이 주운빈을 천신(天神)을 만난 듯 대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때 여기저기서 요란한 인사가 튀어나왔다.
"왕초! 안녕하시오?"
"왕초! 오늘은 제가 죽엽청(竹葉靑) 한 말을 사겠습니다."
"왕초! 왕초······"
대로의 사람들 모두가 반색을 하며 그를 반겼다.
주운빈은 연신 미소 지으며 그 인사를 받기에 바빴다.
"고맙네. 왕이노(王二老)······"
"하핫······ 전칠(田七), 자네 부인의 산후조리는 어떤가?"
"항우(亢羽), 요즘 장사는?"
대로의 사람들은 모두 주운빈을 향해 친근하고도 우정어린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왕초 주운빈은 이 항주성의 사람들 말 그대로 왕초였다. 술잔을 들었다 하면 열 말이요, 입심 좋지, 인정 많지, 거기다가 귀신같은 도박술(賭博術)의 재주까지 지녔으니 누구도 이 항주성의 바닥에서 물을 먹은 사람이면 그를 화나게 만들지 못한다.
만약, 어떤 주루(酒樓)에서 그에게 한끼 식사를 거절했다면 그날로 파산(破産)이었다.
또한 기루에서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면 석달 열흘 동안은 문을 닫아야 한다. 항주성 내의 모든 거렁뱅이들이 그날로 그 집을 점령해 완전해 부패(腐敗)의 지옥(地獄)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도박장(賭博場)에선 아예 그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다.
감히 그의 입장(入場)을 막을 수는 없으나, 주운빈이 나타난 날은 도박장이 초상집으로 변하는 까닭이다.
왕초 주운빈은 항주성 내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한다. 그러나 돈 있고 권세 있는 사람은 뱀을 보듯 그를 싫어했다. 주운빈은 일단 돈 있는 사람이 걸리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박을 하게 만든다.
그의 입심은 놀라운 것이라 누구라도 걸려들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주운빈은 자신이 따고 싶은 만큼 따고, 상대는 완전히 털려서야 그 도박은 끝이 나고 만다.
어디 그뿐인가.
돈 있는 자들이 자신의 힘을 이용해 가난한 서민들을 괴롭히는 일이 있다면, 그곳엔 어김없이 왕초 주운빈이 나타난다. 그가 끼어 들었다면 그 일은 일찌감치 손을 떼는 게 낫다. 비단 권세가들은 본전도 못찾을 뿐 아니라 지독한 골탕까지 먹기 때문이다.
왕초 주운빈은 항주 시민들에게 하늘과 같은 존재였다. 항주의 권문세가에겐 그야말로 그 이름만 들어도 골머리를 싸매고 열흘을 드러눕게 만드는 골치 아프고 물귀신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왜? 그는 바로 신비한 왕초 주운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호시탐탐 주운빈을 노리는 자가 하나 있었다.
바로 천하의 대방과 개방(개幇)의 항주 분타주(分舵主)인 적면후개(赤面侯개) 노중박(魯中博)이었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적면후개 노중박과 주운빈 사이는 불공대천의 원수와 같은 사이로 그는 주운빈을 갈아 마시고 싶도록 미원하고 있었다.
물론 적면후개 노중박도 감히 주운빈을 건들지 못했다.
왕초 주운빈! 그는 신비한 왕초 주운빈이기 때문이다.
주운빈은 천천히 구경하듯 대로를 나아가고 있었다. 문득 그의 눈에 반짝 이채가 떠올랐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만큼에서 모여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왠 사람들이지?"
그 사람들 모두 흥미진진한 표정들이다.
주운빈이 그곳으로 다가가는데.
괭! 인파 속에서 요란한 징소리가 들리며 컬컬한 음성이 뒤를 따랐다.
"자아--! 누구 또 없소? 있으면 어서 나오시오! 고절한 무공을 지닌 자가 있어 내 손녀딸을 이기기만 하면 천상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인 내 손녀딸을 배필로 삼을 수 있소이다! 자! 서슴치 마시고 나오시오."
괭! 다시 일성의 징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순간, 주운빈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손녀딸을 배필로? 하면 저들이 바로······"
주운빈은 즉시 그리로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주운빈의 새로운 흥미가 시작된 이 징소리의 주인공들은 과연 누구인가?
일 년 전, 중원의 한 괴상한 노인(老人)과 절색의 미녀가 나타났다. 그들은 조손 사이로 나타나는 즉시 중원을 흥미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노인이 말하길 손녀딸을 이기는 자, 손녀의 배필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흥미있고 재미있는 기행(奇行)으로 무림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허나, 그 노인과 손녀가 나타난 지 일 년이 되도록 아직 그녀를 이긴 인물이 없었다.
그동안 그녀의 미모에 반해 당대에서 이름을 떨치는 고수가 부지기수로 도전했으나 모두 창피만 당했다.
백면서생(百面書生) 공손기(公孫奇)를 비롯 곤륜일기(崑崙一奇) 유한생(柳漢生), 파천검(破天劍) 양지(楊志), 하남삼웅(河南三雄) 삼형제 등 제법 내로라 하던 고수들이었다.
이들은 그녀에게 도전했던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인물들인데, 무림에 혜성같이 나타난 후기지수(後期之秀)와,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절정고수(絶頂高手)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인물들이 그녀의 손에 십초지적(十招之敵)도 되지 못했다.
어느새, 중원인들은 이 기이한 조손을 가리켜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부운신로(浮雲神老)와 부운일요화(浮雲一妖花)로.
부운조손(浮雲組孫)!
그들은 흘러 흘러 이 항주성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 누구도 이들 부운조손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주운빈이 인파 속으로 들어서자 모두 물러나며 길을 터 주었다.
"어? 왕초도 구경오셨소?"
"맨 앞으로 나오십시오."
"고맙네."
주운빈은 스스럼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로 둘러 쌓인 중앙에는 커다란 징을 든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노인은 허름한 마의(麻衣)를 걸쳤고 왜소한 체격이었으나 키는 보통 사람보다 컸다.
헌데, 턱밑의 수염과 머리를 길게 땋아 그 모습이 여간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일견하여 강호를 떠돌아 다니는 약장사와도 같았으나 주운빈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를 않았다.
주운빈의 눈에 기이한 섬광이 떠올라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더니 돌연 주운빈의 동공이 더할 수 없이 확대되었다.
취의소녀(翠衣少女)!
그 마의노인과 정반대의 화려한 한 소녀가 노인의 옆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전신을 꽉 죄는 취의는 오직 그녀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 그처럼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더욱, 동그란 복숭아를 연상시키듯 알맞게 살찐 통통한 얼굴과, 크고 흑백이 뚜렷한 눈동자는 한 쌍의 흑진주(黑珍珠)를 보는 듯했다.
귀여운 콧날과 도톰한 붉은 입술은 앙증맞도록 아름다웠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십 팔구 세? 매우 생기발랄하고 건강한 미를 지닌 소녀였다.
그러나, 진정한 미소를 볼 줄 아는 사람은 느끼리라.
그녀의 큰 눈, 그리고 그 촉촉히 젖은 앵두같은 입술에 뿌리치기 힘든 요염함이 배어나오고 있는 것을 말이다.
주운빈은 속으로 신음했다.
'으음. 역시 엄청난 미녀로구나. 유운지와 맞먹을 정도로 매력있다.'
부운신로는 계속 징을 두들기며 고래고래 외쳐댔다.
"자, 없소? 노부는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단 말이오! 대체 이 항주엔 인물이 없다는 것이오?"
괭괭괭! 울려 퍼지는 소리는 중인들을 재촉했으나 허사였다. 부운신로는 좌중을 훑어보며 연신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
중인들은 모두 침묵했다. 다만 두 눈만은 무섭게 번들거리며 부운일요화에게서 떠나지 못했다.
'정말 아름다운 소녀구나.'
'떠그랄. 내가 늦장가만 들지 않았어도.'
'제기랄, 일찍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것이 후회로다!'
어느새, 주운빈은 예의 그 평정한 낯색으로 부운일요화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상대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부운일요화의 눈길이 주운빈의 시선과 마주쳤다. 순간, 그녀는 흠칫했다.
주운빈의 눈빛에서 뿜어지는 어떤 강렬한 느낌에 그녀는 내심 크게 당황했다.
다음 순간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아니 내가 왜 이러지? 남자 눈빛을 한 두 번 받아 본 것도 아닌데······'
그녀가 어찌 알 수가 있으랴. 남자의 눈빛이라도 전부 똑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때 부운신로의 시선도 주운빈을 향하고 있었다.
일순 그의 시선에 경악이 가득 차 올랐다. 놀랍게도 부운신로의 두 눈에서 엄청난 신광이 뿜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 찰나, 부운신로라 불리우는 이 평범한 일상의 노인은 갑자기 무섭게 달라졌다.
숨통을 꽉 죄는 기도(氣度)와 그 무형(無形)의 태산과 같은 압력(壓力)이 찰나지간 거침없이 뿜어졌다 사라졌다.
'으음······ 인중룡(人中龍). 이제야 찾았는가!'
이내 어찌된 일인지 그의 시선은 감격에 차오르고 있었다.
'아아······ 천년신비(千年神秘)가 이제야 풀릴 실마리를 드디어 찾았구나.'
내심 중얼거리는 천년신비(千年神秘)란 무슨 말인가.
허면, 이들 조손은 그저 손녀 사윗감을 고르려는 것만은 아니었단 말인가.
왕초 주운빈, 이 신비스런 인간은 순간적으로 보인 부운신로의 기도를 접했으면서도 무심한 척 그들 조손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마의노인 부운신로만은 감격과 희망으로 전신을 떨고 있었다.
이때 무리 속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나왔다.
"본 옥면서생(玉面書生)이 도전을 청하겠소!"
날카로우면서도 예리한 그 음성엔 심후한 공력이 담겨 있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헌데 스스로 옥면서생이라 칭한 인물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옥면서생의 면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부운일요화는 흑진주같은 새까만 눈동자를 빛내며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부운신로는 어느새 주운빈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징을 한 번 울렸다.
괭!
"자, 신청을 했으면 옥면서생은 어서 나와 내 손녀딸과 비무(比武)하시오! 힘껏 싸워 부디 내 손녀딸을 데려가길 바라오!"
말없이 등을 돌린 채 한참 뜸을 들이던 옥면서생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동시에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옥면서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중인들의 얼굴이 또 일제히 질려 버리는 것이 아닌가.
"오······맙소사!"
"저자가 자칭 옥면서생이라고. 푸핫핫핫."
"클클클. 주제에 눈은 똑바로 박혀 여자 보는 눈은 있네, 그려?"
그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부운일요화가 참을 수 없다는 듯 킥! 웃어버리고 주운빈도 실소했다.
"후훗······ 정말 재미있는 친구로군."
옥면서생, 대체 그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길래 중인들이 이 야단들이란 말인가.
맙소사! 한 마디로 맙소사였다.
빗물을 받을 듯한 들창코, 거대한 뻐드렁니, 더구나 두 개 중 하나는 부러지고, 거기다 새우눈이지, 얼굴은 살짝 얽은 곰보가 아닌가.
헌데 기이한 것은, 추남(醜男)의 표본같은 그 못생긴 얼굴이 전혀 추악해 보이지 않았으며, 어떤 신선한 정기(精氣)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옥면서생은 중인들의 비웃음 따위엔 눈썹 하나 까딱치 않고 오히려 호통을 쳤다.
"다들 입 다물어라! 얼굴이 잘 생겨야만 옥면서생이냐? 마음이 잘 생겨야 진정한 옥면서생이지!"
그렇다. 얼굴이 반지르하면서 심성이 악독한 자들이 어디 하나 둘인가.
백 번 옳은 말이었다. 주운빈의 눈에 번쩍하며 이채가 떠올랐다.
'훌륭한 생각을 지닌 인물이로구나! 저 배짱! 그리고 인품! 눈빛에 서린 정기! 게다가 골격 또한 훌륭하지 않은가! 됐다! 또 하나 찾았다!'
무슨 뜻인가? 또 하나 신비스런 면이 주운빈에게 내제되고 있었다.
부운일요화와 마주 선 옥면서생의 눈에서 중후한 신광(神光)이 폭사되어 나왔다.
"소생, 옥면서생 추풍우(秋風雨)! 한 수 지도를 바랍니다!"
그러자 부운일요화는 생긋 웃으며 날아갈 듯 사뿐히 답례를 올렸다.
"추대협, 저를 꼭 이기시길 바래요."
그녀의 태도와 어투는 매우 진지해 전혀 상대를 비웃는 기색이 없었다.
순간 옥면서생 추풍우의 눈에 어떤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주운빈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흐음··· 오늘 정말 운수 좋은 날이다. 저렇듯 좋은 여자들을 벌써 둘씩이나 만나다니 이 왕초가 놓칠 수 없지! 하핫······.'
다음 순간 그는 예의 그 부인명첩을 꺼내들고 있었다. 그는 세 번째 여백을 펼쳤다.
<삼부인(三夫人) 부운일요화>
그가 붓으로 적기를 끝마쳤을 때, 옥면서생과 부운일요화는 결투를 시작하고 있었다.
"조심하시오. 소저!"
옥면서생 추풍우의 입에서 한 마디가 떨어지며 그의 쌍장이 기쾌하게 뻗어나갔다.
위이-- 잉-- 쉬익--!
순간 다섯 가닥의 날카롭고 웅후한 경풍(輕風)이 부운일요화의 전신을 향해 번개같이 쏘아져 나왔다. 부운일요화는 흠칫하더니 기쾌하게 몸을 빙글 돌렸다.
"마음껏 펼치세요!"
어느새 그녀는 상대의 공격을 피해낸 후 품 속에서 한 자 길이의 벽옥소(碧玉簫)를 꺼내 휘둘렀다.
파파팟!
벽옥소를 한 번 휘두르자 수십 개의 환영이 분출되며 그녀 주위에 엄밀한 막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
일순 주운빈의 두 눈이 경악으로 가득차 올랐다.
'아니 저것은 검법이 아닌가!'
그렇다. 벽옥소에서 펼쳐지는 것은 옥소를 이용해서 펼치는 검법이었다.
'저 검법은 바로 삼백 년 전에 실전된 천외검선(天外劍仙)의 태극삼류도(太極三流刀)가 아닌가?'
주운빈이 이렇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천외검선(天外劍仙) 엽천운(葉天雲)!
삼백 년 전, 한 자루 검을 어깨에 걸치고 사랑따라 바람따라 천하를 주유했던 풍류검객(風流劍客)이었던 천외검선(天外劍仙) 엽천운(葉天雲)이란 고수가 있었다.
삼십 년 주유 끝에 그는 천하제일검(天下第一劍)이란 칭호를 얻었다. 완벽히 익히던 검학(劍學)이 전설적 경지인 어검술(馭劍術)에 이른다는 가공할 검도지학(劍道之學) 태극삼류도가 비록 옥소에 의해서지만 한낱 소녀의 손에서 재현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허나 옥면서생 역시 만만치 않았다.
'음··· 과연 일 년 동안 적수를 만나보지 못했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돌연 옥면서생 추풍우가 괴이한 동작을 취했다. 두 손을 기이하게 교차시켜 앞으로 내뻗더니 두 발로는 여덟 팔자(八字) 형식을 취하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그의 상체는 땅을 기듯이 앞으로 깊숙이 굽혀졌다.
그 모습은 마치 한 마리 용이 꿈틀대는 것 같았다.
이때 옥면서생의 입에서 웅후한 일갈이 터져나왔다.
"청룡등천권(靑龍登天拳)!"
우우우-- 우웅--!
다음 순간 무시무시한 장력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부운일요화는 그것을 보자 움찔했다.
'처음으로 고강한 적수를 만났구나!'
그러나 여전히 여유스럽게 벽옥소를 휘둘렀다.
쏴-- 쏴아아--!
그녀는 벽옥소를 허공에다 열 여덟 번의 원을 그렸다.
순간 그녀의 손에서 태극삼류도가 호호탕탕, 장강의 대하(大河)처럼 끊임없이 물밀 듯 쏟아져 나왔다.
펑! 퍼펑!
"윽!"
거대한 굉음과 함께 신음이 터졌다. 옥면서생 추풍우는 자신의 장력이 산산이 분산되어 흩어지는 반탄력에 손목이 끊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크게 경악하고 말았다.
'이럴 수가. 내가 천년설련(千年雪蓮)을 복용한 기연으로 공력이 일갑자에 달하거늘 밀리다니.'
그러나 이내 그는 자세를 가다듬고는 다시 우수(右手)를 괴이하게 떨쳐냈다.
위잉--!
조금 전보다 훨씬 막강한 경기가 부운일요화를 향해 몰아쳐 왔다.
그것은 마치 손을 절개하는 것 같기도 했고 후려치는 것 같기도 한 괴이하고도 놀라운 수법이었다.
관전하던 주운빈 역시 그의 무공에 놀라고 있었다.
'으음, 저자의 무공 역시 백 오십 년 전에 제멸(制滅)된 사신문(四神門)의 백호무극권(白虎無極拳)인데. 그렇다면 완전히 멸살된 줄 알았는데 사신문의 후예인가?'
부운일요화의 옥소에서 쏟아지는 예리한 기와 옥면서생의 손끝에서 발출되는 경기가 부딪치며 굉음을 일으켰다.
펑! 퍼펑--!
거대한 폭음이 터지며 물밀듯한 경기가 사방으로 밀려왔다.
이미 구경꾼들은 전권(戰拳) 밖으로 물러났다.
뿌연 먼지 속에 옥면서생이 창백한 낯색으로 대여섯 걸음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그의 두 눈은 감당할 수 없는 경악으로 떠졌다.
'대체 무슨 검법이길래 나의 장력이 모조리 되돌아 온단 말인가?'
허나 부운일요화는 호흡 하나 흩어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옥면서생을 응시하며 물었다.
"더 싸우시겠어요?"
옥면서생 추풍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아직 패배를 자인할 수 없소!"
"좋아요! 마음껏 공격하세요."
"고맙소. 그럼······."
그는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비호같이 몸을 날려 주작비영보(朱雀飛影步)를 펼치며 현무탈명지(玄無奪命指)를 발출했다.
슈슈슈-- 슛슛슛--!
엄청난 경풍이 살을 에일 듯 사방을 뒤덮었다. 이것은 사신문의 무공 중 가장 무서운 절기(絶技)였다. 칼날과 같은 열 여덟 줄기의 지풍이 부운일요화의 전신요혈을 노리고 격중될 찰나,
"조심하세요!"
부운일요화의 입에서 한 마디가 떨어지며 벽옥소의 검법이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쏴아아--!
일시에 수천 개의 벽옥소 그림자가 폭풍처럼 난무하며 펼쳐져 나갔다.
"헉!"
옥면서생은 순간 눈앞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녀의 검법에 휘말리는 순간 괴이하게도 기혈(氣血)이 역류하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가공할 무형의 살기(殺氣)가 그의 전신요혈을 무섭게 압박해 들어왔다.
'으··· 허억······.'
대번에 그의 안색이 창백해지며 발길이 어지러워졌다. 미처 삼초(三招)도 받아내기 전에 그는 자신의 무공이 완전히 무기력해지며 벽옥소의 끝이 사혈(死穴)을 찔러오는 것을 느꼈다.
"윽!"
그는 목줄기에 차가운 느낌을 받았다.
어느새 벽옥소가 그의 목줄기에 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찰나 부운일요화는 벽옥소를 거두며 물러났다.
"대협, 소녀의 결례를 용서하세요."
그녀의 음성이 들리자 이 환상적인 싸움을 구경하던 중인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와아! 최고다!"
"과연 무공이 강한 사위를 구할만 하다."
싸움을 구경하던 왕초 주운빈의 경악은 내내 극에 달해 있었다.
'부운일요화가 옥면서생을 제압하는데 도합 칠초(七招)를 시전했다. 헌데 그 칠초 동안 검법은 무려 세 번이나 바뀌었다. 지금 시전된 것은 실전된 지 오래인 무당(武當)의 태극혜검(太極慧劍)과 점창(點蒼)의 사일쾌검(射一快劍)이었고, 마지막 추풍우의 목줄기를 관통시킨건 칠백 년 전 마검제일인(魔劍第一人)이라 불리웠던 방랑검마(放浪劍魔)의 천마삼검(天魔三劍) 중 일초(一招)인 천마탕천(天魔蕩天)이었다. 으음, 실로 놀라운 일이다.'
주운빈은 의혹에 찬 시선으로 이들 부운조손을 응시했다.
헌데 그녀의 검법이 모두 실전된 것이며 가공한 것이라 해도 이 모든 것을 한눈에 간파하는 주운빈의 안목은 더욱 놀라운 것이 아닌가.
정녕 무섭도록 놀랍고 해박한 무공지식(武功智識)이었다. 주운빈은 어찌하여 실전된 지 수백 년이 지난 이 초강한 무공들을 모두 알아볼 수 있는 것일까?
옥면서생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조용히 말했다.
"소생은 패배를 자인하오. 실로 훌륭한 가르침이었소."
깨끗한 시인이다. 비록 얼굴은 못생겼으나 진정 사나이다운 태도를 지닌 대장부였다.
중인들은 그에게 스스럼없이 감탄을 보냈다.
그때 부운일요화의 눈에 언뜻 놀라움이 스쳤다.
"아닙니다. 대협, 소녀는 요행히 이겼을 따름이에요."
"그럼 이만······."
옥면서생 추풍우는 패배를 자인한 사실에 일점 부끄러움이 없는 듯 어깨를 쭉 펴고는 사라졌다.
그때 주운빈의 입술이 소리없이 달싹이는 것이 아닌가.
(보았느냐?)
전음(傳音)을 펼치는 모양인데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가? 어디선가 한 줄기 메마른 전음이 들려왔다.
(보았습니다.)
(옥면서생을 오늘 밤 그곳으로 데려와라.)
(알았습니다.)
전음으로 나눈 이 간단한 대화. 주운빈이 누군가에게 옥면서생을 데려오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주운빈은 대체 얼마만큼의 신비를 감추고 있는 것일까.
주운빈은 아무 일도 없는 듯 장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이때 부운일요화는 한 음침하게 생긴 청의공자와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준수하지만 미간에 음침한 기색이 서린 것으로 보아 별로 심정이 좋지 못한 것 같았다.
"낄낄. 아름다운 소저, 정말 영광이오. 본 공자는 공동(共桐)의 옥룡신협(玉龍神俠) 상관태(上官泰)라 하오. 어떻소? 본공자는 소저와 매우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생각하는데."
그는 손을 놀리면서도 연신 음탕한 시선으로 부운일요화의 아래 위를 훑었다.
부운일요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옥면서생과는 비교도 안되는 작자군!'
옥룡신협 상관태는 공동파 장문인인 절검수사(絶劍秀士) 냉운형(冷雲亨)의 제자였다.
허나, 그는 성격이 편협하고 속이 좁은 위인으로 공동파라는 뒷배경을 믿고 평소 겁없이 설치고 다녔다. 항간에 듣자니 옥룡신협이란 호는 스스로 붙였다는 소문이었다.
옥룡신협 상관태는 공동파의 절기 유운십팔해(遊雲十八解)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해내고 있었으나 그가 공격하는 곳은 모든 여인들이 수치로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부운일요화의 차디찬 냉갈이 터져나왔다.
"이래도 말이냐?"
그녀는 벽옥소를 앞으로 쭉 뻗어냈다.
쉬익--!
마치 은어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한 줄기 경풍이 유운십팔해 장세 속을 교묘히 역(易)으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큭!"
어이없게도 그 한 수에 옥룡신협 상관태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이 터졌다. 부운일요화의 벽옥소가 그의 목을 가볍게 찔러냈던 것이다.
상관태의 안색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건방진 년. 그냥 두지 않겠다."
그는 수치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해 전력을 다해 대력광천조공(大力狂天爪功)을 펼쳐냈다. 이것은 격중당하면 즉시 즉사를 하고 마는 공동절기 중 최고의 패도적인 무공이었다.
그러나 부운일요화는 눈살을 찌푸리며 냉갈을 터뜨렸다.
"흥! 수치도 모르는 작자같으니······."
동시에 그녀 수중의 벽옥소가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빠르게 번뜩였다.
팍!
"크윽!"
격중 당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대체 어떤 수법인지 알아볼 겨를도 없이 옥룡신협은 오른쪽 어깨를 강타당하고 이 장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사방에선 물밀듯한 함성이 일었다.
"와아! 정말 멋지다!"
"훌륭하다! 누군가 상대 있으면 한 번 더 싸워라!"
그 열광적인 함성 속에 상관태는 벌레씹은 얼굴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으··· 두고보자. 이 치욕은 꼭 갚고야 말겠다."
그는 악독하게 부운일요화를 쏘아보더니 줄행랑을 놓았다.
"못난 놈. 쯧쯧······."
주운빈이 끌끌 혀를 찼다. 그가 혀를 차는 소리는 부운일요화의 시선을 끌어 당겼다. 주운빈과 부운일요화의 시선이 마주쳤다. 주운빈은 그녀를 향해 씨익 웃었다.
지금의 미소는 어찌나 야릇하고 개구진지 부운일요화는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킥······."
자고로 여자들은 호의를 느끼는 남자의 별로인 행동에도 웃음을 잘 터뜨린다.
처음부터 주운빈을 의식하고 있었던 그녀는 주운빈이 개구진 미소를 띄우자 그만 킥 웃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대개 남녀 사이의 시작이 가벼운 호감에서부터 시작되듯이 둘 사이에 슬슬 뭔가가 이루어질 듯한 예감이 드는 그녀의 웃음인 것이다.
부운신로는 예리한 시선으로 주운빈과 손녀딸을 번갈아 보았다.
'이젠 저 녀석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필시 저 녀석은 주아(珠兒)의 무공에 떨어지지 않는 무공을 갖추었을 것이다.'
부운신로는 주운빈에게 언질을 주려는 듯 징을 거세게 내려쳤다.
괭괭괭!
"자! 이제 곧 해가 집니다! 누가 더 없소! 노부의 손녀딸같은 미인은 중원천하가 아무리 넓다 해도 그리 흔한 게 아니오! 자아 자신있는 남자는 노소를 괘념치말고 나오시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주운빈이 감탄해서 세 번째 부인으로 등재했을 정도였으니까.
부운신로는 흘끔흘끔 주운빈을 쳐다보았다. 어서 나오라는 재촉이 담긴 시선이다.
그러나 주운빈은 전혀 생각이 없는지 계속 부운일요화만 쳐다보고 있었다.
부운일요화는 그가 오래도록 쳐다보자 괜시리 얼굴이 붉어지며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
'짓궂어. 무슨 사람이······.'
부운신로는 슬슬 애가 타기 시작했다.
'아니 저 녀석은 남의 속도 모르고 왜 저리 뜸을 들이지.'
이때 중인들의 뒷편에서 괴상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끄끄끄··· 이번엔 이 어르신네가 저 계집애의 상대로 나가볼까나."
중인들은 궁금한 시선으로 소리가 난 쪽에 시선을 돌렸다.
헌데,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질겁을 하며 코를 쥐어박고는 급급히 피하는 것이 아닌가.
"어이쿠! 이 무슨 냄새냐!"
"악취다! 도망가자!"
일시에 길이 트이며 한 인물이 걸어나왔다. 헌데 나타난 자는 노화자(老化子)였다.
다 떨어진 단삼(短衫)에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지독히 못생긴 늙은 거지였다.
"······."
부운일요화는 한 순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주운빈은 내심 다급한 비명을 질러댔다.
'어이쿠! 저 노인네가 또 장난기가 동했군.'
그는 아마도 이 노화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다.
노화자는 휘적휘적 걸어나와 부운일요화와 마주서더니 웅덩이만한 콧구멍을 쑤시며 괴소를 터뜨렸다.
"끼끼··· 왜 계집애야! 넌 이 노화자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
순간 부운일요화가 찌푸렸던 눈살을 펴며 생긋 웃었다.
"물론이죠. 누가 할아버지같은 거지 신랑을 맞게 되는 걸 좋아 하겠어요?"
"클클··· 그렇다면 노화자가 너의 신랑이 되는 것을 누가 싫어하느냐?"
교묘한 역습이었다.
그러자 중인들 속에서 요란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와하핫··· 맞다! 늙은 거지가 아가씨의 신랑되는 것을 누가 싫어해!"
"크크··· 그럼 그럼 모두 좋아하지."
그들은 하나같이 못되먹은 구경꾼들이었다. 부운일요화는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었다.
"어쨌든 거지할아버지는 너무 늙고 더러워서 싫어요."
그러자 노화자가 눈을 부릅뜨고는 버럭 외쳤다.
"흥,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이 규칙에 상대가 늙고 더러우면 안된다는 조항은 없었지 않느냐? 네 할아버지도 분명 노소를 막론하고 참가하라고 징을 치며 외치지 않았느냐?"
"······."
부운일요화는 할 말을 잊었다. 허나 일순 뜻모를 기이한 미소를 짓고 있던 부운신로가 징을 울렸다.
괭!
"좋소, 좋소. 말은 맞는 말이니 어서 시작하시오!"
"아니 할아버지······."
부운일요화는 할아버지까지 동의하자 더욱 난감해졌다.
노화자가 기쁜 듯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섰다.
"클클. 계집애야, 어서 시작하자!"
중원십오의(中原十五義)의 출현
'아아······.'
부운일요화는 속으로 깊게 탄식했으나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떼었다.
"좋아요. 할 수 없지요······ 만약 제가 져서 거지할아버지의 부인이 된다면 그것도 제 운명이겠지요."
노화자는 능청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네가 만약 노화자의 마누라가 된다면 그건 하늘이 네게 내려준 복연(福緣)이다."
그 익살맞은 말에 중인들은 대소를 터뜨렸다.
"하핫······ 맞는 말이지. 복이 없다면 저런 신랑감을 어디서 구하겠나."
"으핫핫핫."
부운일요화는 입술을 깨물더니 교갈을 터뜨렸다.
"조심하세요!"
순간, 번쩍! 한 줄기 섬광이 일어나며 벽옥소에서 새파란 벽광이 벼락치듯 폭사해 나왔다.
우웅! 벽옥소가 웅후한 진동을 일으키며 흔들리자 노화자가 깜짝 놀랐다. 놀랐지만 노화자는 이내 움충 맞은 웃음을 흘렸다.
"흐흐, 단천십팔섬(斷天十八閃)이 제법 훌륭하군."
벽옥소의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빠름으로 노화자의 전신요혈을 노리며 덮쳐들었다.
너무 빨라 중인들은 단천십팔섬에 노화자가 당하는줄 알고 두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나 팍 소리와 함께 노화자의 신형이 물방울처럼 꺼지며 종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 아닌가.
"흥!"
부운일요화는 추호도 놀람이 없이 코웃음을 치며 빙글 몸을 돌며 공격을 감행했다.
"이제보니 십절궁신(十絶窮神) 할아버지였군요!"
그녀의 뒤로 신형을 옮겼던 노화자는 깜짝 놀란 음성을 터뜨렸다.
"어, 계집애가 눈도 밝구나! 노부를 단숨에 알아보다니 말이다."
팍!
벽옥소가 그를 덮치는 순간 그의 신형은 다시 귀신처럼 꺼져버렸다.
부운일요화는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건곤미리환영보법(乾坤彌提幻影步法)으로 제 공격을 감당키 힘들 거예요!"
그녀의 음성엔 돌연 활력(活力)이 넘쳤다. 갑자기 부운일요화 수중의 벽옥소가 가공할 혈광(血光)을 발출시키기 시작했다.
쐐액! 귀를 찢는 파공성과 함께 그 혈광은 엄청난 속도로 폭사해 갔다.
"으헛! 천마삼검(天魔三劍)을."
십절궁신이 대경실색해 부르짖었다.
십절궁신(十絶窮神)은 나이 백팔십여 세에 이르는 풍진기인(風塵奇人)이었다.
개방방주(价幇幇主) 자리를 궁궁개(窮窮价)에게 물려주고 주유천하(周遊天下)하기를 백년. 무림(武林)에 관한한 대소사(大小事)를 막론하고 전혀 개입치를 않는 괴팍한 노괴인이었다.
십절궁신은 대경실색을 하며 건곤미리환영보법을 극도로 펼쳤다.
스스스··· 순식간에 그의 신형은 수십 개로 분리되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놀라운 보법이었다.
그러나 관전하던 주운빈은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오늘 십절궁신께서 혼좀 나시겠군. 지금 천마삼검에서 소림(少林)의 대라달마범천탕마팔검(大羅達磨梵天蕩魔八劍)으로 바뀌고 있으니 애꽤나 먹겠구나.'
어느덧 주위에는 붉은 그림자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천의 태양은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턱걸이를 하고 있었다.
천색(天色)을 살피던 주운빈은 슬며시 몸을 빼냈다.
'이젠 가야할 시간이구나.'
그때였다. 십절궁신이 그 황망 중에도 크게 외쳤다.
"너 이놈. 그냥 가기냐?"
주운빈은 뒤도 안돌아 보고 한 마디 던졌다.
"형님! 잘해 보시구랴."
형님? 일백팔십 살도 더 먹은 십절궁신을 주운빈은 형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주운빈의 모습은 장내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부운신로의 시선이 아쉬움을 가득 담고는 그의 뒤를 한참 쫓고 있었다.
'결국 오늘은 나서지 않는군. 그러나 그가 항주에 있는 이상 또 만나게 되겠지.'
그에게 어떤 염원이 있기에 이리도 주운빈이 나서기를 바라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 순간 아쉬움을 가득 담은 또 하나의 시선이 허공을 쫓고 있었다.
'갑자기 내 마음이 왜 이렇게 허전한 걸까.'
부운신로는 손녀의 그런 눈빛을 느끼면서 내심 속으로 혀를 찼다.
'쯧. 그새 녀석이 마음에 들었더냐.'
그녀의 허전한 마음은 손에 더욱 힘을 주게 만들었다. 그녀의 손에서 발출되고 있는 소림의 단 하나의 검법인 대라달마범천탕마검법은 아쉬움을 잊기라도 하듯 더욱 거세지면서도 완벽히 구사되고 있었다. 그 속에 십절궁신은 어마 뜨거라 하며 꽁지가 빠져라 피해내고 있었다.
부운신로와 일신에 수많은 실전절학을 지닌 부운일요화. 과연 이들 조손은 누구이며 어떤 정체를 지닌 이들인가.
부소산(富沼山)은 항주 교외에 위치한 곳으로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다.
허나 가파른 계곡과 험악한 산세로 이루어져 대낮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뜸했다.
서산으로 떨어져 가는 잔양에 의한 황혼에 의해 부소산의 산세가 핏물을 뒤집어쓴 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주운빈은 그 황혼을 몸 전체로 받아내고 있었다. 황혼에 물든 그의 창백한 얼굴은 여인처럼 해맑았다. 굳게 다문 입, 장승처럼 선 모습, 태산이라 한들 이처럼 장중할 수 있을까.
미동도 않는 그의 모습과는 달리 두 눈빛만은 소리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헌데 그의 심해와 같이 현허로운 눈빛은 한없이 어둡고 음울하지 않은가.
"······!"
어찌된 일일까. 지금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기도는 전과는 크게 달랐다.
뭔가 알 수 없는 거대한 신비가 그의 전신을 휘어감으며, 주위의 공기를 서서히 경직시키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도저히 읽어낼 수 없을 만큼 모호해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아······."
돌연 굳게 다문 그의 입술 사이에서 흐르는 탄식이 고요한 정적을 깨뜨렸다.
"지금 중원의 장래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풍전등화(風前燈火)인데······."
그의 탄식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 년 전, 중원을 피로 물들였던 수라교(修羅敎)가 중원십오의(中原十五義)에 의해 철저히 궤멸된 후 중원은 지금까지 평화로왔다.
또한 중원무림인들은 중원십오의의 의혈(義血)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무림의탑(武林義塔)을 순례하며, 오직 이 중원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와신상담(臥薪嘗膽) 힘을 기르고 있지 않은가.
중원의 모든 대소사는 조용하건만, 주운빈의 이 탄식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이란 말인가.
"나는 이 년 전 입은 내상(內傷)을 치유할 방도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을고."
그렇다. 그의 안색이 유난히 창백했던 것은 그때의 혈전에 의한 내상에 의한 것이었다. 비록 치유할 수 없는 내상에 의한 안색이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 모습이 신비감을 더해 주고 있었다.
주운빈은 허리를 우뚝 세웠다. 두눈은 석양의 잔재를 쫓았다.
모든 것이 신비투성이로 점철된 주운빈이 몸을 곧추 세우자 비롯 그의 말대로 치유할 수 없는 내상을 입은 몸이지만 구름같은 신위가 피어 올랐다.
그의 탄식은 남이 듣는다면 분명 코웃음을 칠 일이었다.
중원의 장래를 그가 뭐라고 한탄하고 걱정을 한단 말인가. 더욱 놀라운 것은 중원에 혈겁이 일어나면 막아낼 사람은 마치 자신 밖에 없다는 듯한 광오한 말이 아닌가.
그가 어떤 자격으로 감히 중원의 장래를 운운한단 말인가.
왕초라 불리우는 주운빈!
대체 어디가 그의 신비의 시작이고 끝이란 말인가.
이 순간 전신으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구름과 같은 대인(大人)의 신위를 뿜어내고 있는 주운빈. 이것이 어쩌면 그의 참모습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주운빈의 뒤로 소리없이 다가드는 두 개의 그림자가 있었다.
마치 거대한 흑탑을 연상시키는 시커먼 장한과 일신을 흑의로 감싼 청년이었다.
흑탑과 같은 흑의인이 주운빈의 뒤에 서자 주운빈의 몸이 그의 그림자에 모조리 가려졌다.
그러면서 깊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힘이 흑의인의 전신에서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가 멈추자 오래 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것처럼 육중한 압력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있었던 것도 같고 없었던 것도 같은, 그것은 바로 무(無)라 이름지을 수 있을 것이다.
무(無)!
흑탑괴인은 그 속에 보는 이의 심장을 동결시키는 무서운 신위를 뿜어내고 있었다.
흑의청년의 신체에는 별 특징이 없었으나, 서늘한 두 눈에 별빛과 같은 심오한 혜지를 담고 있었다. 그 눈빛만으로 상대의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는 그런 마력(魔力)을 지닌 눈이었다.
주운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관제(關弟)! 오늘 들어온 보고는?"
흑탑괴인은 벽력흑금강(霹靂黑金剛) 관불여(關不如)였다.
관불여는 그렁그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천하는 아직 조용합니다. 별다른 태동(胎動)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들의 대화로 미루어 이들에게는 천하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정보망이 있는 듯 했다. 그렇다면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흑의청년은 마검(魔劍) 여무송(呂武松)이었다.
"대형, 너무 천하의 안위에 대해 신경쓰지 마십시오."
주운빈은 냉엄한 어조로 그의 말을 잘랐다.
"여제(呂弟)! 내가 신경쓰지 않으면 누가 쓰겠느냐?"
여무송은 추호도 굽힘없이 굳은 어조로 답했다.
"대형, 대형은 중원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우리 중원십삼의(中原十三義)의 대형이기도 합니다. 대형을 하늘로 아는 우리 형제들 생각도 해주셔야 합니다."
"······."
주운빈은 충정이 담긴 여무송의 말에 잠자코 있었다. 다만 그의 두눈에 진한 아픔이 스치고 지나갔다.
대형(大兄)! 당금 중원에서 그 누가 이 이름을 모르랴!
왕초 주운빈. 그가 바로 중원십삽의 중 대형인 것이다.
이 년 전, 노야(老爺)와 더불어 십삼 명의 형제를 이끌고 수라교를 궤멸시킨 신비대형(神秘大兄), 그 대형이 바로 주운빈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천하를 경동 시키고도 남음이 있는 대사건인 것이다.
주운빈은 쓸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때 입은 나의 내상은 치명적이었다. 내 몸이 완전해도 중원십팔만리를 지켜내기 어렵거늘 이제와서 신경이라도 쓰지 않는다면 나는 미쳐 죽고 말 것이다."
그의 쓸쓸한 어조에 두 아우의 눈에선 진한 아픔이 떠올랐다.
'대형께선 하루라도 빨리 편히 쉬고 싶어 하신다. 그러나 아직도 태동하고 있는 천하의 위기가 그를 놓아주지 않으니.'
'스스로 떠맡아 온 중원무림의 평화! 대형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중원은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들은 물론 알고 있었다.
주운빈이 없었다면 지금 중원무림은 치가 떨리는 공포의 암흑시대였을 것을.
침묵이 세 사람에게 젖어 들었다. 누구도 쉽게 깨기 힘든 침울한 침묵이었다.
문득 주운빈의 시선이 어딘가를 힐끗 스쳤다.
우측 수림(樹林)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마검 여무송의 전음이 들렸다.
(놈은 벌써 한 달째 대형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주운빈 역시 전음으로 물었다.
(놈의 정체는 파악했느냐?)
(놈은 녹림의 순찰당주인 비천마영(飛天魔影)입니다.)
(녹림?)
주운빈의 눈빛에 차가운 조소의 빛이 떠올랐다.
(녹림대제(綠林大帝) 천마군림존(天魔君臨尊) 소진천(蘇震天). 내일이 바로 그의 생일이지?)
역시 전음이었다. 마검 여무송은 짙은 검미를 찌푸리며 대답했다.
(예, 중원의 전 녹림거마들이 그의 생일을 축하하러 모두 구화산 녹림총단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주운빈은 어두운 신색으로 밤하늘을 응시했다.
'그가 무슨 말을 수하들에게 할까?'
혈풍이 곧 일어날 조짐을 예고하는 듯한 어두운 음성이요, 눈길이었다.
벽력흑금강 관불여가 씹어 뱉듯 전음으로 말했다.
(그놈이 이미 지난 이년(二年) 동안 중원십오의를 그림자처럼 쫓아 다녔으니 우리를 없애라고 말하겠지요.)
"천마군림존 소진천은 어떤 인물인가?"
여무송은 가래침을 뱉아내며 입을 열었다.
"대단한 인물이지요. 녹림을 힘만이 아닌, 지혜, 인품으로서 의리(義理)를 병행하여 굴복시킨 인물입니다."
"영리한 늙은인가 보군. 힘 있는 자가 지혜까지 곁들였다면 절대 만만히 볼 자가 아니지."
관불여가 그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그 놈의 무공은 벽력파천마공(霹靂破天魔功)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운빈의 검미가 꿈틀했다.
"벽력파천마공이라······."
"오대호(五大湖) 연합 총맹주 열혈대제(熱血大帝)가 익힌 사도제일신공(邪道第一神功)인 단천열화마공(斷天熱火魔功)보다 위력이 두어 단계 위로써, 전래 되어온 무공이 아닌, 이 시대에 창안된 극양마공(極陽魔功)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음······."
주운빈의 안색은 의외로 심각했다.
'새로이 창안된 마공이 천 년 동안 사도제일신공이라 알려진 단천열화마공조차 감당할 수 없다면 그 위력이야 불을 보듯 뻔한 것이 아닌가?'
마검 여무송의 안색 역시 침중했다.
"그는 야망이 대단하여 결코 녹림통일로만 만족치 못할 인물로 판단됩니다."
"그러니까 수라교 멸망 이래 계속 중원십오의의 동태를 주시해 왔겠지."
"대형! 그러나 노야(老爺)께서는 이미 녹림총단에 두 동생을 보내 놓았습니다."
주운빈은 서너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그의 생일이 지난 후, 그의 본심을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미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그는 녹림살수집단 청살문(靑殺門)을 중원전역에 보냈다는 보고입니다."
주운빈은 냉소를 터뜨렸다.
"우리의 정보망인 구류방을 없애겠다는 수작인가. 그렇다면 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한 것 뿐이다."
일순 두 아우의 전신 역시 싸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미 노야께서는 모든 만반의 준비를 갖추셨습니다."
"결국 누가 빠르느냐에 승패가 달렸겠군. 후훗······."
주운빈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소진천은 대형만 주시하다 태상노야께 뒤통수를 얻어 맞게 될 것입니다."
"과연 노야는 무서운 지략가란 말이야."
그런데 마침 여무송의 얼굴에 심히 곤란한 기색이 떠올랐다.
"헌데, 만약 녹림과 한판 붙게 되면 한 가지 곤란한 점이······."
주운빈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를 감당할 인물이 우리 형제들 중 없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대형!"
순간 주운빈의 얼굴에 극히 신비로운 미소가 스치듯 번져갔다.
"그 점은 염려마라. 그를 감당할 인물이 있다."
두 아우는 동시에 경악을 했다. 관불여가 뚝빼기 깨지는 듯한 큰 음성으로 외쳤다.
"아니 대형! 대형은 전신 공력이 이푼도 채 안되거늘······."
"이미 나에겐 계책이 세워져 있어 전보다 더 강한 공력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런데 다만 잠시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주운빈의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서리고 있었다.
허나 웬일인지 매우 어두웠다.
"······!"
그들은 내심 경악이 바다만큼 컸으나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들은 주운빈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를 믿고 있었다.
'워낙 귀신같은 대형이었으니까······!'
이때 주운빈은 한 여인을 머리 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덕추. 내가 대부인으로 정한 여인. 그녀라면 능히 내가 잃은 공력을 되살려 놓을 수 있다."
관불여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덕추? 하덕추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주운빈은 빙그레 미소를 지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허나 침묵은 곧 긍정. 그러기에 두 아우의 놀람은 더욱 커졌다.
표정은 더욱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덕추란 여인이 그 정도였단 말인가?'
'만년학정홍과 금단영과가 없으면 아니된다 했거늘 그녀가 무슨 방법으로 대형의 공력을 되살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의문을 풀기 위해 다시 되묻지 않았다. 주운빈에게 방법이 있다면 틀림없이 있는 것이다.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생각이 없는지 어둠과 함께 주운빈의 의미심장한 미소만 더욱 짙어졌다.
순간 주운빈은 어깨를 쭉 폈다.
일시에 다시 그의 전신에선 호호탐탐 노도와 같은 기개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중원십팔만리가 존재하는 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내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결코 지칠 줄 모르는 대장부의 불타는 투지였다. 관불여와 여무송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을 느꼈다.
"저희들 역시 끝까지 대형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주운빈의 음성이 돌연 냉정해졌다.
"너희들은 한시라도 놓치지 말고 중원을 주시해야 한다. 조그마한 어둠의 세력이라도 결코 소홀해선 안될 것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옥면서생은 데려다 놓았겠지?"
"바로 그 장소에······."
마검 여무송이 대답하자 주운빈이 몸을 날렸다.
"가자!"
휙! 행운유수(行雲流水)처럼 세 그림자가 황혼 속으로 떠나갔다.
신비대형 주운빈은 어떤 내상을 입었기에 만년학정홍과 금단영과를 필요로 한단 말인가.
헌데 그들의 대화로 미루어, 이미 녹림대제 천마군림존 소진천은 중원에 대한 모든 준비가 끝나 있는 듯 하지 않은가!
이백 년 만에 광활한 녹림을 통일한 녹림제일인 천마군림존 소진천! 그는 어떤 인물이기에 중원십삼의를 노리고 중원제패를 노리는 것인가?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즉시 그곳에 바람같이 한 줄기 흑영(黑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복면 속 두 눈에 음산한 조롱이 가득했다.
"흐흐. 신비대형. 대제께서는 이미 너의 모든 것을 파악하였다. 내일이 지나면 네놈의 신화는 영원히 끝나게 된다."
흑의복면인의 음성은 마치 주운빈의 목이 호주머니 속 물건이라도 되는 듯 단호했다. 흑의복면인은 주운빈의 뒤를 언제나 감시하는 녹림의 순찰당주 비천마영이었다.
밀실(密室)은 어둠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옥면서생 추풍우가 침중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으음······ 대체 이곳은 어디인가? 누가 나를 이곳에 납치한 것인가?"
옥면서생은 부운일요화에게 패한 후 항주성을 벗어날 무렵 괴이한 암습에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바로 이곳 밀실인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군. 무슨 이유가 있기에 정체모를 자가 나같은 인물을 납치했단 말인가?"
그는 어의가 없었다. 비록 초절정의 고수는 아닐지라도 사신문(四神門)의 무공을 익힌 몸으로 어디가서도 절대 빠지지 않는 고수라 자부했는데 별 저항을 할 새도 없이 정체모를 자에게 납치를 당하고 만 것이었다.
비록 부운일요화에게 패해 조금은 상심해 있었지만 부운일요화의 옥통소에서 쏟아지는 절기들은 사신문의 무공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벌써 일각 동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미 밀실을 조사했지만 한 자 두께의 철로 만들어진 밀실이라 밖에서 누가 들어오기 전에는 절대 빠져 나갈 수 없는 처지였다.
그때였다. 그그그긍하는 육중한 소리가 들리면서 밀실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 문으로 어둠의 한편에서 빛이 들어오며 낭랑한 웃음이 뒤따랐다.
"하하하······ 추대협을 모셔온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소."
추풍우는 흠칫하며 그곳을 응시하다 멍해지고 말았다.
나타난 인물은 바로 주운빈이었다. 헌데 지금 그의 모습은 처음의 거지 차림과는 전혀 판이했다.
발끝까지 덮히는 깨끗한 흑의장포를 입고 있었으며 치렁치렁한 흑발을 단정히 빗어 뒤로 묶었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으나 그 얼굴은 천하의 모든 것을 포용할 듯한 넘치는 위엄을 갖춘 대인(大人)의 모습이 아닌가.
더욱 고고한 기품까지 흐르는 것이 범인은 절대 흉내낼 수 없는 분위기가 거기 있었다.
"아······."
옥면서생은 놀라 한 차례 경련을 일으켰다.
'저 사람의 모습. 처음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느끼게할 정도로 참으로 깊고도 넓은 분위기를 지녔구나.'
사람이 사람에게 감동을 느낀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세월의 연륜과 지혜의 경륜은 물론이요 은연중에 사람을 감싸 안을 수 있는 포용력이 있어야 했다.
'마치 장구한 세월을 지켜온 거산(巨山)을 보는 것 같다.'
그렇다. 주운빈에게는 그 모든 것이 있었기에 옥면서생 같은 고수가 단숨에 감탄을 하며 감동을 느끼는 것이었다.
문득 옥면서생은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꼈다. 눈앞의 존재에 비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진 것이다.
'결코 나보다 많은 나이는 아닐텐데 저 나이에 벌써 저런 기도를 지니다니.'
허나 그것은 일순간의 감정일 뿐이었다.
'아니다! 그것은 저 사람이 지니고 태어난 그릇일 뿐! 내가 거기에 위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자신이 지니고 태어난 그릇만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옥면서생 추풍우는 충분한 그릇이었다. 잠시 옥면서생 추풍우의 마음 속 갈등을 주시하던 주운빈은 앞으로 걸어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추대협, 이렇게 모셔온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럼 대협께서 나를 납치한 것입니까?"
주운빈은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하핫. 용서하십시오. 추대협을 이리로 모셔오는 일은 극비(極秘)에 행해져야 하기에 부득이 편법(便法)을 썼소이다."
옥면서생은 의혹의 빛을 띄우다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극비? 하하핫······ 말이 제법 우습군요."
"그렇게 느끼셨소?"
"그렇지 않으면 이 추풍우가 별로 대단한 인물도 아니거늘 극비에 납치했다니 어찌 우습지 않겠소?"
돌연 주운빈의 두 눈에 강렬한 신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옥면서생은 잠시 흠칫하다가 그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대협은 누구십니까?"
주운빈의 두눈에서 뻗어 나오던 신광은 사라지고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다시 감돌기 시작했다. 그 미소 속에는 보는 이의 마음을 경직시키는 신비한 위엄이 담겨 있었다.
"나는 중원십오의 중 대형인 주운빈이오."
순간, 옥면서생은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떴다.
"뭣, 뭣이? 바로 그 신비대형이란 말이오?"
주운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나는 추대협을 제이(第二)의 중원십삼인의 형제로 모시기 위해 불쾌한 방법으로 초청한 것이오."
"음······."
옥면서생의 안면에 세찬 경련이 일었다. 그는 도저히 이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간신히 진정했다.
'아아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내 그토록 흠모해 오던 중원십오인의 신비대형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다니. 그랬었구나. 그래서 내가 그토록 그의 기도에 감명을 받았구나.'
그의 내심으로는 벌써 주운빈에 대한 존경과 흠모가 무섭게 피어올랐다.
주운빈이 다시 조용히 말을 꺼냈다.
"추형, 중원의 평화를 위해 나와 함께 일해 볼 생각이 없소?"
옥면서생 추풍우는 몸을 떨며 일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찌 저같은 것을······."
"아니오. 추형께선 충분한 자격이 있소. 나 주운빈은 오늘 옥면서생 추풍우를 정식으로 중원십삼의의 형제로 초청하니 승낙해 주시오."
추풍우는 아직도 몸을 떨고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건만 막상 기회가 오니 왜 이처럼 떨리는 것일까.'
이윽고 그는 낯빛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허나 제 용모가 너무 추해서······."
"하하······ 얼굴이 무슨 소용이오? 마음이 예뻐야 진정한 옥면서생 아니겠소?"
지금 주운빈의 말은 아까 추풍우가 부운일요화에게 했던 말이 아닌가. 돌연, 옥면서생 추풍우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형! 아우 옥면서생 추풍우가 대형을 뵙습니다!"
"오오······."
주운빈은 탄성을 발하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고맙소!"
뜨거운 열류가 전해지는 뜨거운 손과 손. 여기 의리와 신뢰로 충성을 다할 또 한명의 중원십삼의가 탄생하고 있었다.
왕초 주운빈은 서서히 자신의 신비를 벗어 던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관면산(觀面山)은 천하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사천성(四川省)에 위치한 명산(名山)이다. 하얀 달빛이 쏟아지는 깊은 밤이었다. 달빛은 곳곳에 부어졌다.
관면산의 가장 높은 상상봉인 독두봉(禿頭峰)에도 부어졌고 언제부터인지 독두봉 정상에 서 있는 한 백의중년인의 전신에도 부어졌다.
어깨에 내려 앉아 잔잔이 부서져나가는 달빛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백의중년인은 한가롭게 뒷짐을 진 채 만월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지금 만월을 올려다 보고 있는 그의 모습을 실로 무엇이라 표현해야 옳을까.
우선 아름다왔다. 남자에게 여자에게나 쓰는 아름답다는 말은 대단한 실례가 되는 말이나 그외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사십대 중년의 나이답지 않게 어느 여자라도 부러워하고야 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관자놀이까지 쫙 뻗어올라간 검미(劍眉)에 그 아래 자리한 별처럼 맑은 성목(星目)과 굴강한 의지를 표출하는 산악과 같이 오똑한 콧날이 여자보다 아름다운 남자임을 말해주면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지녔으니 아름다움과 절대적인 위엄이 조화를 이루어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감을 느끼게 했다. 주운빈과는 또 다른 신비감이 그에게 있는 것이다.
선명하면서도 얇은 입술은 붉다 못해 피라도 떨어질 정도였다.
이 모든 것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용모였기에 실로 천하의 그 어떤 미(美)를 지닌 여인도 따르지 못할 것 같았다.
게다가 그의 전신에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고아한 기품과 준수한 위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수려한 자태와 빼어난 위용을 지닌 채 삼천리에 걸쳐 존재하는 산악(山岳)이라고나 불러야 옳을까.
아니 차라리 대자연(大自然)이라 불러야 옳을지도 몰랐다.
그가 지닌 모든 것은 실로 천하의 그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관면산의 웅대하고 수려한 절경조차 그의 앞에선 초라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헌데 여인처럼 맑고 심유한 두 눈 속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키게 만드는 무정(無情)함이 담겨 있었다.
더욱 기이하게도, 그 무정함이 어떤 때는 한없이 감미롭고 정감(情感)을 느끼게도 만드는 것이었다.
정(情)과 무정(無情)이 함께 자리한 그 눈,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마력이 그 속에 깊이 침잠되어 있었다.
단언하건데 천하에 이보다 더 신비한 아름다움과 위엄을 지닌 인물은 다시 없을 것이다.
허공 중에 뜬 만월은 하얀 빛을 한껏 부어내어 정녕 운치롭기만 한데 독두봉 전체를 자욱이 휘감고 있는 밤안개는 우울하기만 해 전체 분위기는 묘한 대비감이 일어 백의중년인 못지않게 신비감을 더했다.
신비감이 짙기에 어쩐지 적막함 속에 표현할 수 없는 음울함이 흐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또한 백의중년인 전신에서 풍겨내는 물씬한 고독감 때문일런지도.
문득 중년사내는 나직이 탄식을 불어냈다.
"후우······."
기이하게도 듣는 사람이 있다면 전율을 일으키게 만드는 고독한 탄식이다.
그의 탄식에 배인 우울함에 주위의 풍경까지 숨죽이는 듯, 수목은 고개 숙이고 바람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백의중년 사내에겐 풀 수 없는 깊은 고뇌가 있는 것일까.
한 순간 그의 입에선 다시 저미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월아(月娥)······ 진정 보고 싶구료."
월아(月娥)란 여인(女人)의 이름이 아닌가. 대체 그 여인이 누구길래 이 멋들어진 사나이가 그리워하며 한숨 짓는 것일까.
문득 그의 심유한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아름다운 밤안개가 그의 두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그 처절한 고독함 속에 아련한 슬픔이 가슴 저미도록 두 눈 속으로 투영되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그것은 환상(幻想)이었다. 장담하건대 천하 그 어떤 여인이라도 그 눈빛을 대한다면 스스로 목숨을 바치리라.
"월아······ 당신이 남긴 우리의 분신(分身), 우리의 생명, 추(秋)아는 이 아비가 싫어 홀로 떨어져 살고 있소. 그 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곧 찾을 수 있을 것이오."
그는 스스로 시작한 독백을 스스로 멈추었다.
그의 맑은 두 눈빛은 서서하게 그러나 참담하게 일그러져 갔다. 어찌 인간의 눈빛이 이리도 급격히 바뀔 수 있는 것일까.
밝기만 한 만월. 그 밝은 달속에 한 여인의 영상이 수증기처럼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만월 속에 그려지는 여인은 진정 달 속에 산다는 월궁(月宮)의 선녀 상아련가. 천하에 이토록 기품 있고 고고한 용모를 지닌 미인은 없으리라.
정교히 조각한 백옥같은 얼굴에 깨끗히 한 올 남김없이 틀어올린 삼단같은 머리, 그 아래 드러난 희디 흰 목은 사슴을 보는 듯 유려했다.
초승달처럼 유려한 그녀의 아미(娥眉)와 엷은 안개가 서린듯한 그녀의 눈(目)은 사내의 영혼을 빨아들일 듯 신비했고 그녀의 입술은 일 년내내 이슬만 머금고 있는 듯 촉촉히 젖어 있었다. 그 입술은 아마도 꿀을 머금고 있으리라.
만월에 새겨진 여인의 고아하고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무엇에다 비교할 수 있으리.
여인의 아름다움은 천하를 무너뜨릴 만큼이었다. 이 한 마디 밖에는 더 이상 그녀를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만약 덧붙인다면,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두 눈동자를 한 번만이라도 본 자(者), 그 누구라도 슬픔을 주체치 못하고 통곡을 하고 말 것이다.
그 눈은 천하에서 가장 맑고도 아름다우며, 천하에서 가장 고귀한 보석이었다.
환상(幻想)의 미인이란 바로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허나, 그 여인의 얼굴은 이 세상에서 오직 중년사내만이 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직 그만이 느낄 수 있는 차가운 한기가 그녀의 슬픔을 담은 두 눈에서 폭사되어 나왔다.
갑자기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월아······ 나를 저주하지 마시오. 그 모든 것이 나의 위선이었어도 당신을 사랑한 것만은 나의 진정이었소."
백의중년사내는 여인의 그 어떤 표정에도 전율할만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당신을 사랑한 것이 내 인생의 전부였소. 월아······ 제발 제발 그런 얼굴은 하지 마시오."
그가 바라보는 달빛 속의 여인은 무서운 저주의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소와 경멸에 가득찬 눈으로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백의중년사내는 이내 몸을 떨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월아······ 제발! 벌써 이십 년이 넘지 않았소. 이제 나를 향한 그 저주도 버릴 때가 되지 않았소."
그 음성엔 고통과 절실한 애원이 담겨 있었다. 눈빛은 실성이라도 한 듯 시뻘겋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달 속의 여인은 그 어떤 표정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마치 중년사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면 그녀는 이 중년사내를 증오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듯 했다.
백의중년사내는 안타까이 외쳤다.
"월아! 이 하위천(河韋天)을 그렇게도 용서할 수 없단 말이오?"
하위천은 중년사내의 이름이었다.
한 순간 그의 아름다운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동시에 지독한 모멸감이 이 아름다운 이목구비를 덮었다. 한차례 전신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그는 미친 듯이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엽군영(葉君英)! 이놈. 네놈이 또 월아를 찾아오다니."
그의 아름다운 두 눈에서 만월을 갈가리 찢어놓을 듯한 무서운 살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디찬 살기에 일시에 주위는 모두 얼어붙었다.
정녕 무섭고도 놀라운 변신이었다.
그러나, 달 속의 여인 월아는 해맑은 미소를 지어 가고 있었다.
천만 가지의 꽃들이 일제히 피어나듯 봄날의 미풍과 같이 감미롭고 훈훈한 미소이지만 그 미소는 결코 하위천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는 어느 틈에 한 사나이가 다정히 웃으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사내는 해맑고도 고고한 자태를 지닌 절세적인 미남이었다.
그 준수함이 이 하위천과 맞먹을 정도였으나, 그의 전신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도는 대해(大海)처럼 웅후하고 한없이 관용스러웠다.
때문에 그의 전신 모두가, 행동 하나하나가 충심(忠心)과 진실에 차 있다는 것을 능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두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존경심이 일게 만들었고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평온하게 하는 것이었다.
대인(大人)!
이 위대한 단어가 바로 그를 위해 존재하는 것을 실감케 만드는 풍도였다.
환상 속의 엽군영은 만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며 월아의 옆에 섰다.
"······!"
월아는 심신 깊은 곳에서부터 아름다운 미소를 뿜어올리며 그의 품에 안겼다. 순간 하위천은 자신의 머리카락이라도 뜯어낼듯이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으으······ 엽군영! 죽이리라 죽이리라아아."
전신을 엄습한 질투로 인한 하늘 끝까지 치솟는 분노에 하위천은 자신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달 속의 두 남녀는 서로 깊이, 영원히 사랑하는 듯 뜨겁게 포옹하고 있었다. 넘치는 행복을 담은 시선이었다. 천하의 그 무엇도 이들을 갈라놓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오래도록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었다.
그 모습을 쳐다 보는 하위천은 분노를 터뜨리기에 지쳤는지 극도로 허탈해 했다.
한참 후 월아와 엽군영의 시선이 하위천을 향했다. 두 남녀의 얼굴에는 짙은 조소와 경멸이 담겨 있었다.
하위천은 피를 토하듯 몸을 떨며 절규했다.
"죽이리라! 너희 두 년놈을 산 채로 찢어 죽이리라."
순간 백옥같이 희고 고운 그의 두 손에서 무서운 경기가 뻗어나왔다.
꽈르르르-- 릉-- 꽝--!
그의 경기가 스치고 부딪치는 곳은 무엇이든 파괴 됐다. 이내 놀랍게도 그의 앞 백 장 내는 평지로 화한 듯 깨끗이 초토화가 되버린 것이 아닌가. 가공할 위력이었다.
그러나 달 속의 두 남녀는 전혀 괘념치 않는지 완전히 그를 조소하고 있었다.
"으으······ 너희들이 끝까지 나를······."
하위천은 분노에 이를 갈아 붙였다.
그는 미친 듯 광분하며 닥치는대로 때려 부수었다. 독두봉의 산정은 날벼락을 만난 듯 그 지형이 무섭게 변해갔다.
지금의 모두가 이내 사그라질 환상이거늘 하위천은 어찌 이리도 깨닫지 못하는가. 그러나 환상은 집요하게 그를 붙들고 늘어졌다.
미친 듯이 산정상을 아예 평지로 만들어 버리는 하위천은 그 행동을 멈출 생각을 안했다. 그는 월아와 엽군영을 떠올리는 순간부터 그 자신이 지닌 모든 품위와 위엄을 잃어버리고 반미치광이가 되어 광분하는 것이었다.
그를 지배하고 있는 상념은 그의 뇌리 속에 무섭게 자리잡은 바뀔 수 없는 업이였던 것이다.
광분하는 하위천의 뒤로 소리없이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마치 유령처럼 기척도 없이 조용히 내려서는 인물은 마치 산악을 보듯 장대한 체구의 노인이었다.
노인(老人)은 그의 머리와 수염이 희어서 노인일 뿐이지, 그의 신체와 그 얼굴을 본다면 노인이란 표현은 매우 모호한 것이었다.
신체는 철판과 같이 단단했고, 얼굴은 홍안의 소녀같이 불그레했다.
더욱 그의 두 눈속에서는 소름끼치는 녹광(綠光)이 지옥의 연화(煉火)처럼 타올라 무서운 공포를 느끼게 했다.
발광하는 하위천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한 순간 가슴 저리도록 착잡해져 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노인은 머리가 땅바닥에 닿도록 깊이 부복했다. 그는 천둥같은 목소리로 마치 하위천의 행동을 멈추게 하려는 듯이 말했다.
"지존(至尊)! 천마당주(天魔堂主) 소진천(蘇震天)이 문우 드립니다."
순간, 하위천의 모든 동작이 일시에 멈추었다.
천마당주 소진천을 잘 알고 있는 듯 어느새 그의 얼굴은 처음의 그 유현하고도 아름다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핏발이 곤두섰던 눈은 정상으로 돌아 왔고 이내 다시 그 예의 무정함과 무심함만이 가득차 버렸다.
"무슨 일인가?"
"······."
천마당주 소진천은 잠시 주저했다. 일순 그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땅바닥에 이마를 처박았다.
"지존! 속하 소진천은 지존의 도우심으로 오늘 날 녹림대제(綠林大帝) 천마군림존(天魔君臨尊) 소진천이 되었사옵니다."
"······."
하위천은 일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체투지하고 있는 소진천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녹림대제 천마군림존 소진천이라는 이 이름은 바로 중원무림의 녹림주상(綠林主上)의 이름이 아닌가.
천하 흑도(黑道)와 사도(邪道)를 장악하고 있는 인물. 무림정파인들도 감히 이 이름 앞에서는 두려움을 갖고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한다.
그런 거대한 신분을 지닌 그가 하위천의 앞에 머리를 처박고 지존이라 부르다니 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이랴.
실로 놀랍고도 경악할 일이었다. 이 사실을 누군가 지켜 본다 해도 아마 천하의 그 누구라도 믿지 못하리라.
하위천! 그가 대체 누구길래 녹림지존이란 어마어마한 신분의 소진천이 오체투지한단 말인가.
더욱 놀라운 것은 녹림대제 천마군림존 소진천이 그의 앞에서 일개 당주의 신분이라 말하고 하위천의 덕으로 녹림지존의 자리에 설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위천은 대체 어느 문파의 지존이기에 소진천과 같은 녹림의 대지존을 일개 당주로 거느릴 수 있는 것인가!
현실이기에 믿어지는 일이나 상상으론 있을 수 없는 변괴다.
천마당주 소진천은 이마에서 선혈이 흐르는 것도 아랑곳 없이 절실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속하 소진천, 그동안 쌓아올린 모든 지위와 목숨을 내걸고 지금 지존께 한 마디 올리려 합니다. 지존께선 언제까지 한 여인의 환상 속에서 질투를 느끼며 살아가실 참입니까?"
순간, 하위천의 전신이 무섭게 경련했다.
"닥쳐라! 네놈이 감히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다니!"
무서운 호통이었다. 대자연(大自然)도 깨뜨릴 수 있는 위엄이 그의 전신에서 폭사되어 나왔다.
그러나 소진천은 다시 머리를 처박으며 추호도 굽힘이 없는 태도로 말을 계속했다.
"죽여 주십시오. 지존! 그러나 목숨이 아까와 하던 말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순간 분노 때문인가. 바람도 없는데 하위천의 장삼이 쉴새없이 펄럭이는 것이 아닌가.
"그래도 네놈이······ 감히······."
"지존! 이젠 잊으셔야 합니다! 지존께서 손만 뻗으면 모두가 두 손 들어 바칠 천하가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천하가 눈 앞에 있다니 이 무슨 또 광오한 말인가?
"천하! 이 천하 위에 군림하십시오. 지존!"
말뜻은 광오하나 어투는 간절하기 이를데 없다. 대체 다시 말하지만 하위천이 누구길래 녹림대제 소진천과 같은 인물이 이토록 눈물어린 충정을 바치는가.
하위천은 가볍게 냉소했다.
"천하? 흥! 그것은 이미 본좌의 호주머니 속 물건이거늘 뭘 또 다시 취하라는 말이냐?"
중원십팔만리가 자신의 호주머니 속 물건이라니 지난 날 중원무림 역사를 뒤돌아 봄에 있어서 누가 이토록 광오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자가 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는 이미 천하의 주인이란 말인가?
이건 절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중원무림엔 엄연히 중원십오의(中原十五義)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거늘, 중원무림에 이름 한줄조차 알려지지 않은 하위천, 어찌 그가 천하를 호주머니 속의 물건이라 장담하는 것인가.
소진천이 공경한 어투로 말을 꺼냈다.
"지존! 지존께 충성을 맹세한 수하들은 모두 지존의 그 말씀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허나 지존께서 암중으로 무림을 제패하는 것은 인정하지 못합니다!"
하위천의 모습은 고요한 한 그루 거목과 같았다. 어느새 그의 격정을 가라앉힌 모양이다.
"암중으로 움켜 쥐고 있어 밖으로 손만 뻗으면 되는 천하! 굳이 무엇하러 움켜쥐려 손을 드러내겠느냐?"
"아닙니다. 지존! 속하들은 모두 지존의 그러한 뜻이 진정한 천하제패로 향하길 바랍니다. 속하들은 암중에서 천하를 요리하기 보다 만천하에 우뚝 서 밝은 태양 아래서 천하를 향해 호령하고 싶어 합니다."
"······."
하위천은 잠시 상념에 젖어 들었는지 말이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가. 소진천은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힘있게 내뱉았다.
"지존! 윤허를 바랍니다! 삼 년! 앞으로 삼 년이면 제 손으로 천하를 지존께 바치겠습니다!"
돌연 하위천은 밝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중원엔 중원십오의의 신비대형인 주운빈이 있다! 전날 패천당주(覇天堂主) 기무위(奇武偉)가 장담했다가 그에게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신비대형 주운빈이 이끄는 중원십오의에 의해 무참히 패배를 맛본 수라교의 교주 패천수라존(覇天修羅尊) 기무위(奇武偉)도 바로 그의 수하였단 말인가.
이들의 대화를 만약 신비대형 주운빈이 듣는다면 그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태상노야와 더불어 중원십삼의가 듣는다면 또한 그들의 얼굴은.
신비대형 주운빈은 수라교를 중원무림에서 멸문 시키느라 치유될 수 없는 내상을 입고 있는 처지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원을 제패하고 있는 수라교주 패천수라존 기무위가 한낱 어떤 집단의 일개 당주라니.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전날 중원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고, 거대한 힘으로 중원천하를 삼켰던 공포의 수라교가 일개 당주 휘하의 세력이고 또한 삼십만의 문도를 자랑하는 녹림도 일개 당주 휘하의 세력이 아닌가.
그들의 일개 당이 중원천하를 제패했다면 대체 하위천 그가 거느린 힘은 어느 정도인가!
실로 가공하고도 무서운 비밀이 이곳 관면산 독두봉에서 암중의 절대자와 녹림의 지존에 의해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천하가 이 사실을 어찌 알 것인가.
이 무서운 신비에 싸인 하위천이란 존재를. 아직은 다행이라는 것은 그가 암중으로 제패하고 있다는 천하를 밖으로 드러내어 굴복 시키려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뿐.
그가 모습을 밝은 태양 아래 드러낸다면 천하는 어떤 충격에 휩싸일 것인가.
녹림(綠林) 집합(集合)!
밤 안개가 더욱 짙어져 서서히 환영처럼 독두봉 주위를 맴돌다 스멀스멀 하위천과 부복하고 있는 소진천에게 밀려 왔다. 밤안개는 그 둘을 휘감았다.
무림에서 수라교주나 녹림지존의 위대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절대자들을 수하로 데리고 있으면서 중원에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하위천은 침중한 얼굴로 고고히 만월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부복한 녹림의 대지존 소진천은 온 몸을 감싸고 휘도는 밤안개가 서늘하다고 느꼈다. 밤안개 정도의 한기에 서늘함을 느낄 소진천은 물론 절대 아니다.
다만 자신이 신으로 여기며 섬기는 하위천이 혹시나 불허할까봐 조마조마한 심정을 가라 앉히지 못해 마치 가슴에 구멍이라도 난듯한 기분이었다.
소진천은 부복한 채 묵묵히 그러나 끈질기게 하위천의 윤허를 기다렸다.
- 천하를 제패하겠다 -
수라교가 중원십오의에 의해 무림 제패의 위를 내놓은 이상 지금의 소진천으로서는 중원제패는 지상명제인 것이다.
"속하는 결코 지존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그의 명예를 건 자신과 신념에 찬 맹세였다. 그러나 하위천은 피식 냉소를 쳤다.
"네가 중원을 다시 제패하던 못하던 본좌가 무엇 때문에 실망을 하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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