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무림 영주 [E]

무림영주 1-1권

2018.06.22 조회 9,770 추천 61


 # 서장
 
 
 
 
 
 「헤인스, 이 할아버지 고향이 어디라고 했지?」
 「중원이요.」
 「그래,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 중원이라고 불리는 곳이란다. 너와 내가 이렇게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중원 이야기 더 해주세요.」
 「그래, 그러자꾸나. 할아버지의 원래 가문은, 그곳 중원에서 이름 높은 명문인 담씨세가였단다.」
 
 아, 꿈인가? 흐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꿈을 꾼 건 처음이군.
 내 이름은 헤인스다.
 아페리온 대륙 최강국인 케르네스 제국의 대귀족 가문, 드레이크 공작가의 유일한 후계자다.
 그리고 내 할아버지는 케르네스 제국 역사상 왕족이 아닌데도 공작의 작위를 받은 유일한 분이며, 케르네스 제국 유일한 마스터이자, 황제 폐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발아래에 두신 케인 드레이크 공작이시다.
 당연히 내 아버지는 그런 할아버지의 아들이고, 지금은 할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드레이크 공작이 되셨다.
 그런데 할아버지에게는 케인 드레이크가 아닌 또 다른 이름, ‘담기령’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아페리온 대륙이 아닌 다른 세계, 달과 별자리가 다른 하늘 아래, 중원이라는 곳이 할아버지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아 금발에 푸른 눈인 아버지보다, 당신처럼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얼굴까지도 할아버지를 빼다 박은 듯 닮은 나를 아주 아껴주셨다.
 나 또한 그런 할아버지가 좋아서,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그 중원이라는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가장 좋아했었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케르네스 제국의 유일한 마스터이신 할아버지가 그런 거짓말을 하실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할아버지가 마스터가 아니라 깊은 산속 화전민 마을의 촌로라 해도 그 말을 믿는다.
 왜냐고?
 어젯밤에 분명 내 방에서 잠들었던 내가 지금 중원에 와 있으니까.
 아, 물론 지금 내가 중원에 와 있기 때문에 할아버지를 믿는다는 건 절대 아니다. 나는 원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진짜다.
 아무튼······. 여기가 중원이라는 건 어떻게 아느냐고?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시체들 때문이다. 죽은 이들의 생김새가 할아버지나 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아, 절대 내가 죽인 건 아니다. 깨어나 보니 시체들 사이에 누워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방금 전 시체들 틈에서 일어난 한 녀석이 처음 보는 나에게 뜬금없는 부탁을 하고는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머리에 쥐가 나도록 배웠던 중원의 말로.
 그러니 여기는 할아버지의 고향인 중원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중원으로 오기 전 나는 공작령의 확실한 후계자였다. 단순히 내가 아버지의 외아들이라서가 아니었다.
 무려 이 년 동안 전장에 나가 있었고, 거기에 더해 삼 년 동안 작은 영지를 운영해 보기까지 했다.
 겨우 스물둘의 나이에 말이다. 물론, 내가 자발적으로 한 건 아니다. 아버지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일이긴 하다.
 어쨌든 그 덕에 나는 완벽하게 준비된 영주였다.
 그런데 정말 뜬금없이 중원으로 와 버렸다.
 어젯밤 잠들 때의 모습 그대로. 입고 있는 옷은 겨우 바지밖에 없고, 지니고 있는 물건이라고 해봐야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할아버지의 목걸이, 그리고 양쪽 손목의 ‘녹스’와 ‘루나’가 전부다.
 말로는 절대 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에 허탈해 하고, 짜증을 내고, 멍하니 하늘만 보는 것은 방금 전까지 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되짚으며 돌아갈 방법에 대한 고민 역시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했다.
 그렇게 반나절을 고민하고 끙끙거렸으니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 내 상황은 할아버지 때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할아버지는 정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망망대해 같은 곳에 뜬금없이 떨어진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할아버지의 고향집, 할아버지가 누누이 말씀하셨던 천하제일세가라는 담씨세가가 있다.
 일단은 그곳으로 가야겠다.
 아까 그 남자가 죽기 직전에 했던 부탁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당장 내가 어찌할 방법이 없다.
 철패 하나 주면서 전해 주라고 말하고는 죽어 버렸으니 말이다.
 어디로 전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 일단은 뒤로 미룰 수밖에.
 일단 할아버지의 고향집에 가면 뭔가 방법이 생기겠지.
 가기 전에 여기 죽은 사람들 시신이나 수습해 주고 가야겠다.
 수습하다 보면, 죽은 이들 주머니에서 돈도 조금은 챙길 수 있을 거다. 음, 저기 보니 옷이 깨끗한 시신도 있네.
 시체도 수습해 주고 나름대로 묘비도 세워줄 거니 내가 그걸 좀 가지고 갔다고 원한을 품을 사람은 없겠지.
 어? 가만······.
 
 「헤인스, 이걸 너에게 주마.」
 「이게 뭐예요?」
 「할아버지의 가문, 담씨세가 적통의 후계자에게 주는 적옥패란다. 혹시, 언젠가 네가 이 할아버지의 고향에 갈 수 있다면, 이 적옥패를 가지고 가서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 주렴. 목걸이로 만들었으니 항상 목에 걸고 있어야 한다. 알았지?」
 「응, 알았어요!」
 
 설마 그 약속 때문에 내가 여기로 온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절대 그건 아닐 거다.
 절대로······.
 
 
 
 
 
 # 1장. 천하제일세가, 담씨세가
 
 
 
 
 
 “이거 영 찜찜한데?”
 갈색 갈기의 말 한 마리가 잘 닦인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말은 경쾌하게 발굽을 굴리고 있었고 그에 따라 마상에 앉은 사내, 헤인스 드레이크의 상체 역시 기분 좋게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쾌한 흔들림과 달리 헤인스의 표정은 방금 중얼거린 말 만큼이나 찜찜했다.
 그리고 그 찜찜한 표정을 한층 더 찜찜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느낌을 명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의구심, 혹은 의혹, 그것도 아니면 위화감.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그 느낌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헤인스가 고삐를 당기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찜찜해.”
 
 “몇 번을 말해야 알겠느냐!”
 묵직한 호통이 터졌다.
 “하지만 그 일은 세가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그것을 받아 주는 사람이 없으면 결과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방향을 바꿔야 할 시기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항변이 이어졌다.
 “그따위 변명으로 네 실수를 무마하자는 것이더냐?”
 나이는 이제 쉰 살이 넘은 듯 보이는데 머리는 이미 반백이 된 남자, 그리고 두 눈 가득 피곤한 기색을 매달고 있는 젊은 남자.
 두 사람은 서로 조금도 양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직시하고 있었다.
 “변명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도 제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허, 그 일로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다쳤는지 모르는 게냐? 담씨세가의 후계자라는 놈이 자신의 실수를 그런 식으로 무마하려고 들다니, 그게 얼마나 비겁한 짓인지 모르는 게냐?”
 “제가 먼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주변을 살피고 행동을 했어야지!”
 형형한 안광을 쏟아내는 두 부자의 날선 목소리는 조금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우리 담씨세가가 무엇이 두려워, 그런 근본도 없는 놈들에게 항상 양보를 해야 하는 겁니까?”
 “가문의 위상보다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라는 말이다!”
 “세가의 자존심을 지키고 놈들의 방자한 짓거리를 멈추는 것이 더 사람들을 위하는 것입니다!”
 “네놈이 끝까지 그리 변명할 셈이냐? 그래, 좋다. 네가 그렇게 자존심을 지킨 결과가 무엇이냐? 철혈대 절반이 부상을 입고 주변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것은 물론, 오히려 세가의 위상만 떨어졌다. 그게 네가 말했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더냐!”
 “하지만······.”
 뭐라 항변하려던 아들의 목소리는 아버지의 독한 한마디에 뚝 끊겼다.
 “못난 놈!”
 동시에 아들의 입에서 울컥한 외침이 터졌다.
 “형이 있었다 해도 저와 똑같이 행동했을 것입니다!”
 순간 아버지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아들은 그제야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드, 들어가 보겠습니다.”
 “후우······.”
 뒤돌아서는 아들의 귓전으로 아버지의 긴 한숨이 날아와 얹혔다.
 
 ‘아, 할아버지.’
 헤인스는 맥이 탁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중원에 와서 할아버지의 고향집으로 가기로 마음먹은 후에 했던 고민은 단 한 가지였다.
 할아버지의 고향집을 찾아가 담기령의 손자라고 말을 했는데, 어디서 온 협잡꾼이냐며 쫓겨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었다.
 이곳에서 담기령이라는 사람이 사라진 지 벌써 오십 년 이상 흘렀을 테니 그럴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이내 지워 버렸다.
 헤인스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의 지인들에게 케인 드레이크 공작을 판에 박은 듯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이쪽 세상에서 케인 드레이크 공작인 담기령이 사라진 지 오십 년이 넘었겠지만, 같은 핏줄인 만큼 자신과 닮은 사람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헤인스에게는 할아버지가 물려준, 담씨세가 적통의 후계자에게만 전해진다는 적옥패가 있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엉뚱한 곳에서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저 멀리 보이는 장원 때문이었다.
 “하아!”
 헤인스의 입에서 다시 한 번 맥 빠진 한숨이 터졌다.
 
 「이 할아버지의 가문, 그리고 너의 가문이기도 한 담씨세가는 무인들만의 세상인 무림이라는 곳에 속해 있단다. 그리고 담씨세가는 그 무림에서도 홀로 우뚝 솟아 있는 하늘 같은 곳이란다. 모든 무인들이 우러러보며 추앙하던, 전 무림을 호령하는 천하제일의 가문이지. 너는 그런 가문의 후손인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헤인스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다. 케르네스 제국의 드레이크 공작가 만큼은 안 되겠지만, 담씨세가 역시 아주 어마어마한 가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그곳에 가면 운신의 폭도 넓어질 것이고, 지금처럼 막막한 기분도 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조금은 허풍이 섞였을 거라고 예상했다. 어떤 사람이든 어느 정도의 허풍은 있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그것이 자신의 가문이라면 더욱더.
 거기에 더해서 절대 확인할 길이 없는 허풍이라면 한층 더 과장이 실릴 수밖에 없다.
 ‘할아버지, 당신께서 말씀하신 천하제일의 가문이 이곳인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허풍이 조금······ 아니, 엄청나게 과하셨습니다.’
 헤인스는 마치 할아버지를 보듯,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내려 저 멀리 보이는 장원을 살펴보았다.
 오래된 한 채의 고택이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아주 큰 장원인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 해도 할아버지 담기령이 말했던 천하제일세가의 위용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원의 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헤인스였지만, 눈을 씻고 보아도 영락없는 시골의 장원이었다.
 즉, 할아버지의 천하제일세가라는 말은 재고의 여지도 없는 허풍이었다는 뜻이다.
 ‘잘못 찾아왔나?’
 헤인스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들었던 길을 따라 정확하게 온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믿기가 어려웠는지 헤인스는 공력을 끌어올려 안력을 돋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장원의 정문 위에 걸린 편액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네 글자는 분명 담가숭택이었다.
 ‘그런 거였군.’
 헤인스는 그제야 아까부터 기분이 찜찜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의구심과 의혹, 위화감이 동시에 교차한 까닭도 알 수 있었다.
 중원 무림의 세가와 케르네스 제국 귀족가는 분명 다른 개념이었다. 헤인스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넓은 땅에 많은 소작을 주고, 무력을 소유하며, 해당 지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찾아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한 점도 많았다.
 그렇다면 천하제일 세가가 자리한 곳은 아주 번화하고 인구가 많은 곳이어야 했다.
 하지만 헤인스가 지나온 곳은 아주 작지는 않았지만 그리 크지도 않은 수준의 마을이었고, 그리 많은 농지가 보이지도 않았으며, 당연히 세가 외부에서 보여야 할 무인들도 없었다.
 그 괴리감으로 인한 위화감이었던 것이다.
 함께 느껴졌던 의혹은 그 위화감으로 인한 할아버지에 대한 의심이었고, 의구심은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헤인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허탈한 기분을 애써 떨쳐냈다.
 ‘고민하지 말자. 집도 절도 없는 곳에 떨어져서, 이렇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더불어서 천하제일세가든 시골 동네 토호 수준이든 헤인스에게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집안에 와서 큰 자리를 꿰차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적옥패를 내밀면서 후계자라고 주장할 생각도 아니었다.
 헤인스에게 필요한 것은 몸을 뉠 집이었다. 그런 후에 다시 케르네스 제국의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러니 실망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헤인스는 다시 천천히 말을 몰았다.
 “어?”
 하지만 이내 다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까부터 정문 입구에 서 있던, 보초인 듯 보이는 두 명의 사내 중 한 명이 갑자기 이쪽을 향해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뭐, 뭐지?’
 무시무시한 기세로 경공을 펼쳐 달려오는 사내의 모습에 헤인스는 온몸에 긴장감이 도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공력을 끌어올렸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후웁!”
 헤인스가 재빨리 숨을 끊으며 안장을 박차고 뛰어오려는 순간, 바로 앞까지 달려온 사내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공자님!”
 “에?”
 헤인스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사내를 보았다. 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있나 하는 생각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사내는 자신을 향해 말한 것이었다. 그것도 눈물까지 글썽이며, 마치 아주 오래전 헤어진 피붙이라도 만난 듯이.
 “맞네요. 큰 공자님이 맞아요!”
 사내는 두 손으로 박수까지 짝짝 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분명 헤인스를 아주 잘 안다는 듯한 태도.
 하지만 헤인스는 맹세코 이 사내를 처음 보았다.
 “누구신지?”
 헤인스의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물음에 사내의 얼굴에 갑자기 섭섭한 표정이 번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내가 고삐를 잡고 있는 헤인스의 손을 덥석 잡으며 외쳤다.
 “기령 공자님, 이 응천이를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어렸을 때 공자님과 비무를 했던 기응천이요. 하하, 뭐 그럴 수도 있지요. 벌써 오 년이나 흘렀고, 그사이 제 얼굴이 좀 많이 변했으니까요.”
 ‘그러니까 당신 이름이 응천이든 은천이든 내가 그걸 어떻게······ 가만? 뭐라고? 지금 나를 누구라고 부른 거지?’
 헤인스는 흠칫한 표정으로 방금 전 사내의 말을 곱씹었다.
 ‘기령? 담씨세가에서 공자라고 불렀으니 당연히 담씨. 그렇다면 담기령? 하지만 그건······ 내 할아버지 이름인데?’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는 헤인스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기응천이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는 그것을 다른 의미로 받은 모양이다.
 “하하하, 제 얼굴이 너무 변해서 놀라신 모양이군요.”
 기응천이 자신은 섭섭하지 않으니 괜찮다는 듯 신경 쓰지 말라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자신의 오른쪽 이마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보십시오. 어렸을 때 겁도 없이 서로 진검으로 비무하다가 공자님이 여기 상처를 내시지 않았습니까?”
 ‘헉, 내가 언제!’
 헤인스가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기응천은 고개를 정문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뭐하는 겐가! 당장 안으로 들어가서 가주님께 알리게! 큰 공자님이, 기령 공자님이 돌아오셨다고 말이야!”
 기응천의 외침에 헤인스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기응천이라는 사내는 분명 헤인스를 향해, 헤인스 할아버지의 이름을 불렀다.
 헤인스는 아까의 찜찜함과는 또 다른 기분을 느꼈다. 이번에는 근원을 알 수 없는 괴리감이었다.
 이곳의 관점에서 볼 때, 헤인스의 할아버지가 실종된 지는 거의 오십 년은 지났다.
 그런데 헤인스를 그의 할아버지로 부르는 자가 있다.
 그것도 할아버지 담기령과 아주 닮은 얼굴인 헤인스를 향해.
 그러던 중 헤인스의 머릿속에 아까 기응천이 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떠올랐다.
 “오 년? 내가 집을 나선 지 벌써 오 년이나 됐나?”
 “그러믄요. 공자님께서 실종된 후에, 가주님이 공자님을 찾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아십니까요? 어디 기령 공자님뿐입니까? 작은 공자님, 기명 공자님도 얼마나 애를 썼는데요.”
 헤인스가 아는 이름이 하나 더 나왔다. 기명, 담기명. 헤인스 할아버지의 동생 이름이었다. 즉, 헤인스에게는 종조부가 되는 사람이 바로 담기명이다.
 ‘시간이 좀 있어야겠는데······.’
 지금 이 순간 헤인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
 하지만 헤인스는 그런 차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령아, 기령이냐!”
 저 멀리, 담가숭택의 정문에서 이쪽을 향해, 아까의 기응천보다 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오는 오십대 초반 남자가 있었다.
 헤인스의 얼굴과 그리고 헤인스의 할아버지인 케인 드레이크 공작과 아주 닮은 남자.
 그는 담씨세가의 가주인 담고성이었다.
 헤인스는 방금 기응천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내가 만약 할아버지라면 저분은 내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그러니까 증조부님?’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헤인스는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아닌가.
 헤인스를 향해 달려가는 담고성 뒤에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두 번째 사람은 헤인스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였는데, 그 사내 역시 헤인스와 닮은 사내였다.
 담고성의 둘째 아들, 담기명이었다.
 ‘아까 응천이란 사내가 말한 기명 공자님인가? 그러니까 만약 저 앞의 분이, 만에 하나라도 내 증조부님이라면 저 사람은 내 종조할아버지?’
 헤인스가 복잡한 생각 탓에 멍하니 있는 순간, 앞서 달려왔던 사내 담고성이 헤인스 앞에 도착했다.
 “이 녀석아, 이 아비를 보고도 그리 멍하니 있는 게냐!”
 담고성의 얼굴에 은은한 노기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보다는 복받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눈물이 글썽글썽 한다.
 번쩍 정신을 차린 헤인스가 황급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일단은 장단이라도 맞춰주자.’
 헤인스는 일단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자신과 닮은 주름 가득한 얼굴을 보자니 도저히 아니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물론, 나중에 아니라고 하면 더 큰 실망감이 들 수 있었지만, 헤인스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너무 당황스러운 상황이 연달아 들이닥친 탓이었다.
 헤인스가 급히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올렸다.
 “아버지, 소자 기령이 오 년 만에 인사 올립니다.”
 헤인스가 할아버지에게 배운 것은, 단순히 이곳 중원의 말과 글만이 아니었다.
 중원의 예절 또한 인이 박이도록 배웠기 때문에 제대로 예를 차려 인사할 수 있었다.
 담고성이 절을 올리는 헤인스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며 찬찬히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헤인스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동안 어디 있었던 게냐? 내 너를 찾아 얼마나 애를 썼는데, 왜 이제야 나타난 게야?”
 “죄송합니다. 그건······.”
 그때였다.
 “형님?”
 사내의 뒤를 따라 달려왔던 또 한 명의 남자, 담기명이 헤인스를 보며 말했다.
 그리고 연이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헤인스를 향해, 담고성이 말했다.
 “네 동생의 얼굴도 잊은 것이냐?”
 “아, 아닙니다.”
 이왕 장단을 맞춰주기로 한 참이었다.
 “그, 그동안 잘 지냈느냐?”
 “잘 지내기는요. 형님이 사라지는 바람에 제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십니까?”
 담기명의 눈에도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아, 뭔가 실수한 것 같은데······.’
 헤인스는 답답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어색하게 담기명의 어깨에 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 그래. 그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괜찮습니다. 이제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담기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담고성이 두 아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들어가자꾸나. 들어가서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다오. 어디 있었기에 이 아비를 그리 마음고생을 시켰는지.”
 헤인스는 서늘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위험한데? 아직 제대로 생각이 정리가 안 됐는데 이야기하다 보면 뭔가 허점이 드러날지도······.’
 시간이 필요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생각을 정리하고 앞뒤를 맞출 시간이, 그리고 한 가지 언뜻 머릿속을 스쳤던 한 가지 가설을 확인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해서 그러는데 일단은 좀 쉬고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
 버릇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럴싸한 요구였다. 헤인스의 말에 담고성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허, 그래 내 경황이 없어 그걸 미처 생각 못했구나. 자자, 일단은 들어가자. 네 방은, 네가 떠날 때 그대로 있으니 어여 들어가자꾸나.”
 
 “후우!”
 방으로 들어온 헤인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기응천이 자신을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르고, 스스로 아버지라 밝힌 사람과 종조할아버지와 똑같은 이름으로 인사를 한 남자까지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생각이 짧아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다.
 ‘함정일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지?’
 헤인스는 일단 함정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배제하기로 했다.
 자신이 이곳으로 온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 리가 없는데, 할아버지의 고향집인 담씨세가에서 어떻게 함정을 판단 말인가.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을뿐더러, 자신이 다른 세계로 가 버린 담기령의 손자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절대 함정은 아니야.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건, 이곳 중원에서는 할아버지가 저쪽 세상으로 떠난 시점을 기준으로 겨우 오 년의 세월밖에 흐르지 않았다는 건데······.’
 처음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른 세상으로 갑자기 떨어져 나가는 일도 있었다. 그러니 아예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헤인스가 서둘러 이 방으로 온 것도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저분들이 진짜 할아버지의 아버지와 동생, 그러니까 증조부님과 종조할아버지라면 분명 있을 것이다.’
 헤인스는 재빨리 방 안을 훑은 후, 방문 맞은편에 있는 서각으로 향했다. 그리고 서각의 뒤편으로 손을 뻗어 아래쪽으로 밀어 넣었다. 서각 아랫부분의 문갑 공간의 뒤쪽.
 ‘분명 이쯤이라고 하셨는데······ 이, 있다!’
 헤인스의 손가락 끝에 각진 나뭇조각이 걸렸다.
 달칵!
 나뭇조각을 옆으로 돌리자 문갑 뒤쪽의 나무판이 열렸다. 담기령에게 들었던, 그의 일기를 숨겨두는 비밀 공간이었다.
 그리고 손끝에 닿는 몇 권의 책.
 설마 했던 생각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흐으읍!”
 헤인스는 연거푸 숨을 들이마시며 떨리는 손으로 책들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신중한 표정으로 꺼낸 책을 펼쳤다.
 “컥!”
 헤인스는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눈꼬리에 파르르 경련이 일어나고, 눈동자는 초점을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이, 이건!’
 헤인스는 부르르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다른 책들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꺼낸 모든 책들을 확인한 후, 헤인스의 입에서 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우리 할아버지 취향도 참 고상하셨네.’
 비밀 공간에 있던 책은 모두 다섯 권. 그중 두 권이 춘화도였고, 두 권은 음서, 그리고 겨우 한 권만이 일기였다.
 헤인스는 저쪽 세상 자신의 방에 숨겨져 있는 비슷한 책들을 떠올리며 잠시 뒤통수를 긁적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짧게 심호흡을 했다.
 ‘역시 저분들은······.’
 담기령의 물건들이 있다는 사실이 가리키는 것은 명백했다. 지금이 정말로 담기령이 실종된 지 오 년이 흐른 시점이라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아까 만난 그들이 틀림없는 헤인스의 할아버지의 아버지이고, 할아버지의 동생이라는 말이다.
 만약 오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면, 이 방의 주인은 분명 바뀌었을 터.
 옛날 주인의 물건이 남아 있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오십여 년이 지나도 일기가 남아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헤인스를 담기령으로 생각하는 담고성과 담기명이 있었고, 먼저 달려와 아는 척하는 기응천도 있었다.
 가능성이 낮은 여러 가지 일들이 이렇게까지 겹치기는 힘든 법이었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
 ‘지금이 할아버지가 사라진 지 오 년이 지난 시점이라면, 실종 당시 할아버지의 나이가 열일곱이니 현재는 스물둘이고 지금의 내 나이 역시 스물둘이다.
 오 년 동안 못 봤는데 이 정도로 닮은 얼굴이라면 충분히 나를 할아버지로 오해할 만해.’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이, 담기령 실종으로부터 오 년 후라고 가정하면 아귀가 척척 들어맞는다.
 “그러고 보니 기응천이라는 이름도 언젠가 한 번 들어 본 것도 같고······.”
 잠시 멍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던 헤인스가 갑자기 뭔가에 생각이 미친 듯, 급히 목에 걸고 있던 적옥패를 꺼내 들고는 중얼거렸다.
 “할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던 이 물건까지 있으니, 아니라고 우기면 오히려 미친놈 취급받게 생겼네? 크흐흐흐······.”
 너무 당혹스러운 상황을 맞이한 탓에 헤인스는 저도 모르게 실없이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피식거리며 웃어대던 헤인스의 얼굴에 잠시 표정이 사라지는 듯하더니, 이내 안쓰럽고 죄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증조부의 애처로운 얼굴과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눈물이 떠오른 탓이었다.
 ‘내가 사실을 말한다면?’
 헤인스는 이를 악문 채 고개를 저었다. 믿어줄 사람도 없을뿐더러, 그랬다가는 증조부의 가슴에 그야말로 대못을 박는 격이다.
 
 「아버지······. 그러니까 헤인스 너에게는 증조부가 되시겠지. 내가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흐르는 바람에 아버지께 본의 아니게 죄를 짓게 되었단다. 이 할아버지는 그것이 평생 한으로 남는구나.」
 
 헤인스가 철이 들 무렵, 담기령은 종종 아련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곤 했었다.
 ‘증조부는 물론 할아버지께도 못할 짓이 되어 버리겠군.’
 헤인스는 심한 갈등을 느끼는 듯 한층 더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간단하게 생각하면 할아버지의 이름, 담기령으로서 사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자신은 이 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죽은 할아버지의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족보가 살짝 꼬여 버리게 되기는 하지만, 헤인스 혼자만 알고 있는다면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리되면 헤인스는 아주 긴 세월 동안, 어쩌면 죽을 때까지 자신의 고향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할아버지와 증조부도 문제였지만, 헤인스에게는 고향에서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고 노심초사하고 있을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후우,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였다.
 “대공자님,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문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입구에서 보았던 기응천의 목소리였다.
 ‘후우, 생각할 시간을 안 주는군.’
 헤인스는 짧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나가지.”
 방을 나서니 친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기응천의 모습이 보였다.
 “앞장서게.”
 “예, 공자님.”
 장원의 구조를 확실하게 모르는 헤인스로서는 안내를 받아야만 찾아갈 수가 있었다.
 아까 방을 찾아갈 때도, 이렇게 기응천을 따라왔었다.
 “대공자님 정말 잘 돌아오셨습니다. 제가 그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십니까?”
 기응천의 말에 헤인스는 저도 모르게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기응천과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기응천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계속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때 그 일······ 기억하세요?”
 기응천의 아주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헤인스는 저도 모르게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무, 무슨 일?’
 “왜 그때, 그러니까 대공자님이 집을 나서시기 한 달 전에 말입니다. 그때 같이 처주부도에 가지 않았습니까?”
 “그, 그랬었나?”
 “에이, 왜 그러십니까? 그때 같이 기루에 가지 않았습니까요?”
 “아!”
 순간 헤인스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기응천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던 이유를 깨달은 탓이었다.
 
 「할아버지가 이곳으로 넘어오기 얼마 전이었지, 아마? 그러니까 딱 지금 네 나이쯤이었다. 그때 기응천이라는 세가의 무인 녀석을 데리고 기루에 간 적이 있는데, 그 녀석이 난생처음 아리따운 아가씨들 옆에 앉으니 뻣뻣하게 얼어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술만 마셔대더니, 크허허허!」
 
 이곳저곳 많은 영지에서, 헤인스를 두고 혼담이 오가던 시절이었다.
 케르네스 제국의 귀족가에서는 열여덟을 전후로 결혼을 하는 편이었고, 그 가문의 위세가 크면 클수록 그 시기가 빨랐다.
 조금 급한 곳은 열다섯에 이미 혼담을 주고받고 아예 약혼을 해놓는 일도 많은 편이었다.
 어쨌든 그 시기에 담기령은 손자인 헤인스에게, 어른들만의 무용담을 들려주기도 했었다.
 바로 그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헤인스는 재빨리 기응천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아하, 그랬지. 그때 내가 자네를 데리고 기루에 갔었지? 아마 그때가 응천이 자네가 처음 기루에 갔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순간 기응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동시에 헤인스의 얼굴에도 불안이 떠올랐다.
 ‘뭐지? 그게 아닌가? 분명 맞는데?’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아무리 곱씹어 봐도 자신은 틀리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 기루에 처음 가신 건 공자님이시잖아요. 한 번도 못 가보셨다면서, 꼭 한 번 데리고 가달라고······.”
 ‘아, 할아버지!’
 헤인스의 미간에 짙은 주름이 잡혔다.
 “그, 그랬었나?”
 “하하하, 예. 분명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때 모시고 갔더니······.”
 물론 헤인스는 그 뒤의 이야기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할아버지와 기응천의 역할이 바뀌겠지만.
 어쨌든 더 들을 필요는 없다.
 “자자, 어서 가세.”
 “예? 아아, 가시지요.”
 자신의 말을 끊는 헤인스를 보며, 기응천은 부끄러워서 그러나 보다 하는 생각에 슬며시 이야기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동안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요? 가주님이 중원은 물론 서역까지 곳곳을 다 뒤지셨습니다. 하다못해 서역 너머 법국(法國:프랑스)이나 덕국(德國:독일)까지 가시겠다는 걸, 둘째 공자님이 겨우 말리셨지요.”
 그 말에 헤인스는 갑자기 귀가 번뜩 틔는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난감했던 한 가지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말로만 듣던 법국이나 덕국인 줄 알았단다.」
 「법국? 덕국? 거긴 어디예요?」
 「중원의 서쪽에 있는 서역을 지나면 나오는 나라라고 들었는데, 이 할아버지도 가본 적은 없다만, 그곳 사람들의 머리카락이 붉거나 노랗고, 파란 눈에 붉은 눈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거든.」
 
 ‘일단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되겠군.’
 오 년 동안의 행적을 얼버무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어차피 거기에도 아페리온 대륙인들과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하니까, 딱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지.’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전혀 다른 세상에 있었노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받아들이기도 쉬울 것이다.
 기응천을 따라 도착한 곳은, 장원 내부에 지어진 가산(假山)이었다.
 정확하게는 가산의 연못가에 지어진 혜심정이라는 정자 안이었다.
 “자, 받거라.”
 헤인스가 자리에 앉자마자 담고성이 대뜸 술병을 내밀며 말했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헤인스가 황급히 술잔을 들어 올린다.
 쪼로로록!
 맑은 소리와 함께 호박색 투명한 액체가 차분하게 술잔을 채웠다.
 “네가 사라진 후에 가장 한스러웠던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헤인스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그러니 대답할 말도 없다.
 아무 말 없이 술잔만 들고 있는 헤인스의 모습에, 담고성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너와 기명이, 그리고 이 애비까지 삼부자가 모여서 술잔 한 번 기울인 적이 없었다는 거다. 자, 어서 마셔라.”
 “예.”
 술잔을 기울이니 호박색 투명한 액체가 혀를 타고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넘어갔다.
 “크으!”
 그리고 그 뒤에 갑자기 치솟는 화끈한 기운. 하지만 곧바로 짙은 향이 뒤따르며 화끈한 기운을 감싼다.
 저쪽 세상에서 마셨던 맥주나 와인, 혹은 그것들을 증류한 브랜디나 위스키와는 또 다른 향취가 느껴졌다.
 “뭘 하느냐? 이 아비에게도 따라 주어야지.”
 “예, 받으세요.”
 헤인스는 담고성의 술잔을 채운 후, 담기명에게도 술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 세 부자 사이에 말없이 술잔이 오고 간다.
 그렇게 술이 몇 순배 돈 후, 담고성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간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
 “그것이······ 법국에 가 있었습니다.”
 “뭐, 뭐라고? 법국이라면 분명······.”
 “예, 서역 너머에 있는 나라입니다.”
 담담한 헤인스의 표정과는 달리, 담고성은 말문이 막힐 이야기였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오 년 만에 돌아와서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도대체 그 먼 타국까지 가서 뭘 했단 말이냐?”
 “그것이······. 세상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서신 한 통 없이, 기별 한 번 주지 않고 이 애비가 속을 끓이게 만든 이유란 말이냐!”
 “죄송합니다.”
 담고성의 얼굴에 섭섭함과 노기가 함께 떠올랐다.
 하지만 그보다는 이렇게 무사한 모습으로 돌아와 주어 고마운 마음이 더 크다.
 “하아, 그래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괜찮다. 이렇게 돌아왔으니 되었어.”
 담고성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 담기명이 말했다.
 “그럼 형님은 그곳에 가서 무얼 하신 겁니까?”
 “응?”
 “가서 무얼 하셨는지 그 이야기나 한 번 해주십시오.”
 “궁금하더냐?”
 “아, 그럼 안 궁금하게 생겼습니까?”
 헤인스의 시선이 슬쩍 담고성에게로 향했다. 담고성 역시 몹시 궁금한 듯, 기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어쩌면 그것이 증조부에게 할아버지의 소식을 알려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물론, 어느 정도 빠지는 것도, 더하는 것도 있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헤인스는 머릿속으로 어려서부터 들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법국에 들어섰을 때······ 하필이면 그곳은 전장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한 친구를 만났지요.”
 헤인스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담고성과 담기명은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함께 손에 땀을 쥐고, 걱정을 하고, 화를 내고, 웃으며 이야기는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그리고 세 부자는 새벽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질 때까지 술잔을 나누었다.
 
 
 
 
 
 # 2장. 담씨세가의 묘한 풍경
 
 
 
 
 
 “이제 어쩐다?”
 헤인스는 침상에 누워 천장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담고성, 담기명과 술잔을 기울인 것이 어젯밤의 일이었다.
 그리고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깊은 고민에 잠겼다.
 원래 이곳으로 온 헤인스의 목적은 단 한 가지였다.
 일단은 안전한 곳에서 몸을 쉬면서 자신의 진짜 고향, 드레이크 공작가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돌아갈 방법은 없었다고 하셨지만······.’
 할아버지는 중원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헤인스의 생각은 달랐다. 실제로 자신이 이곳 중원으로 오지 않았는가.
 중원에서 아페리온 대륙으로 넘어가는 일도 있었고, 아페리온 대륙에서 중원으로 넘어오는 일도 벌어졌다. 즉, 두 개의 세상을 왕래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곳 상황을 알지 못했을 때의 생각이었다.
 아페리온 대륙에서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곳 중원에서는 겨우 오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처음부터 아니라고 말을 했어야 하는 건데······.’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믿어 줄지도 의문인데다, 설혹 믿어준다 해도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자신이 담기령이 아니라고 했을 때 마음 아파하실 증조부의 얼굴을 차마 볼 자신이 없었다.
 사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헤인스의 입장에서는 어제 처음 본 사람이었다.
 그러니 매정해 보일지라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헤인스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너무 존경하고 사랑했다.
 할아버지 담기령이 평생 동안 증조부에게 죄스러워했다는 것과 증조부 생각이 날 때마다 밤새 술잔을 기울이며 긴 한숨을 내쉬던 모습을 자주 보았었다.
 겨우 하룻밤의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 동안 너무 멀리 와 버린 것이다.
 “후우,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긴 고민 끝에 헤인스는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뭔가 결심을 한 듯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로 끙끙 앓는 것은 헤인스의 성격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이 ‘가짜’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가짜가 아닌 ‘진짜’가 되는 수밖에.
 “우선은 정체가 들통 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겠군.”
 하지만 뒤이어 또 다른 문제가 밀려들었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하나?”
 할아버지 담기령은 담씨세가의 소가주였다. 즉, 지금 자신은 담씨세가의 소가주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난 오 년 동안은 할아버지의 동생이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는 다시 그 지위가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헤인스가 담기령 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설마 계승권 문제로 다툼이 생기는 건······.’
 잠시 그런 생각을 떠올리던 헤인스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제 종조부가 보여주었던 반응으로 보아 그럴 일은 없을 듯했다.
 그보다는 다른 것이 더 중요했다.
 ‘담씨세가의 소가주라······.’
 과연 스스로에게 그럴 마음이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꽤나 많은 부분에서 연관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자신은 논외자였다.
 그런 자신이 세가를 이어받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지가 걸렸다.
 ‘산을 넘어도 산이군.’
 워낙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을 일이 흐르니 고민을 해도 해도 끝이 나지 않았다.
 그때 방문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목소리를 들어보니 헤인스의 방을 담당하게 된 ‘여란’이라는 시녀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냐?”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헤인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제는 갑작스러운 귀환에 세 부자가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마무리했지만, 오늘부터는 해야 할 이야기, 해야 할 일도 많으리라.
 
 ‘누구지?’
 담고성의 집무실로 들어서던 헤인스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집무실 안에는 담고성만이 아니라 낯선 사내가 한 사람 앉아 있었다.
 “어서 오너라. 네가 돌아왔다는 말에 급히 본가로 돌아온 참이다.”
 사내가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헤인스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헤인스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려는 발을 억지로 제자리로 돌리며 바쁘게 시선을 움직여 사내를 훑었다.
 태도를 보니 분명 할아버지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자리에 있는 헤인스에게는 아주 낯선 사내였다.
 위험했다. 담기령 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 지 채 일각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삼십대 중반에 옷은 세가의 무복. 나를 대하는 친근한 태도는 분명 매우 가까운 사이라는 뜻.’
 사내는 헤인스를 껴안기라도 할 듯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벌써 두 걸음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장성하여 헌헌장부가 되어 돌아왔구나. 그래 법국에 가 있었다고? 하하하, 세상 공부는 아주 제대로 했겠구나!”
 사내가 활짝 펼친 두 손으로 헤인스의 양쪽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어댔다.
 “많은 공부를 하고 왔습니다. 당숙께서도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숙모님께서는요? 그러고 보니 기천이가 많이 컸겠습니다. 떠날 당시만 해도 젖먹이었는데······.”
 “하하, 이제 한창 말썽을 일으키고 있다.”
 사내는 담고성의 사촌동생으로 담기령에게는 오촌 숙부, 즉 당숙부인 담유성이었다.
 헤인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빙긋이 웃어 보였다.
 운이 좋았다. 헤인스는 방으로 들어서던 순간, 가주인 담고성 앞에서도 아주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사내의 모습을 기억해 냈다.
 거기에 세가의 무복을 입고, 소가주인 자신을 아주 편하게 대하는 태도에서 담씨세가의 외당 당주인 담유성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 담씨세가의 사정에 대해 귀에 딱지가 않도록 들은 덕분에 모두 외우고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담유성이 담고성 쪽을 보며 말했다.
 “형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계속 수고하거라.”
 “하하, 맡겨만 주십시오. 그리고 기령이 너는 나중에 한 번 찾아오너라. 그간 얼마나 늘었는지 이 숙부가 확인해 줄 테니.”
 “알겠습니다.”
 담유성이 집무실을 나선 후, 헤인스가 담고성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네가 이제 막 돌아온 참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급한 감도 있기는 하다만······.”
 슬쩍 말꼬리를 흐리는 담고성의 모습에 헤인스는 조용히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요즘 세가의 상황이 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겠구나. 이제 네가 돌아왔으니 소가주의 자리에서 세가의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헤인스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가 풀어졌다. 방금 전 방 안에서 고민했던 것이 바로 튀어나오니 올 것이 온 기분이었다.
 하지만 헤인스는 아직까지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세가의 가주 자리에 욕심이 있지도 않았고, 따지고 보면 논외자인 자신이 냉큼 그 자리를 꿰차는 것도 이상했다.
 잠시 고민하던 헤인스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지금껏 기명이가 잘해 온 것 같으니 계속 기명이가 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담고성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헤인스를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장자인 네가 후계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냐? 혹 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더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헤인스의 말에 담고성이 인상을 굳히며 말했다.
 “그럴 수는 없다. 내가 가문의 적옥패를 너에게 주었던 것을 벌써 잊은 게냐?”
 “그건 아닙니다만, 너무 오랫동안 세가를 떠나 있었······.”
 헤인스가 급히 뭐라고 설명을 하려 했지만, 담고성은 단박에 그 말을 잘랐다.
 “어제 막 돌아온 참이니 사흘 정도 말미를 주마. 하지만 그것은 며칠 쉬라는 뜻이지, 가주의 자리를 기명이에게 잇게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알았느냐?”
 아니라는 대답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담고성의 강경한 태도에 헤인스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보아라.”
 “예.”
 헤인스는 조용히 인사를 하고는 담고성의 집무실을 나섰다. 하지만 밖으로 나서자마자 다시 몸이 굳었다.
 집무실 문밖에 서 있는 담기명을 발견한 탓이었다.
 헤인스는 재빨리 숨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지께 오는 길이냐?”
 “형님을 찾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응? 나를?”
 헤인스는 궁금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며 조심스레 담기명의 표정을 살폈다.
 ‘욕심이 없는 성격이셨나?’
 문 앞에 서 있었다면, 분명 소가주 자리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을 들었으리라.
 그런데도 아주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소가주 자리에 그다지 미련이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너는 외동이지만, 이 할아버지에게는 동생이 있었단다. 너에게는 종조부가 되지. 허허, 그놈이 어려서부터 어찌나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지······. 어머님이, 그러니까 네 증조할머니가 세상을 뜨신 후로는 내 곁에서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을 정도란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니 너무 형을 따르는 동생이기에 애초에 그럴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역시 할아버지의 허풍일 수도 있었다. 혹은 오 년이라는 세월이 있는 만큼 그사이에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
 그러니 단순히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가 애매했다.
 그사이 담기명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이 자리를 비운 동안, 세가에 따로 철혈대가 만들어졌습니다.”
 “철혈대?”
 “예, 새로 초빙한 무인들로 구성된 일종의 별동대지요. 외당 소속이 아닌 소가주 직속이니, 앞으로는 형님이 그들을 이끌어야 할 겁니다.”
 담기명의 말에 헤인스는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철혈대가 지난 오 년 사이에 조직되었다면, 자신은 당연히 모르는 자들이라는 뜻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세가의 식솔들과 달리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할 필요가 없다.
 헤인스는 그 사실에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불길한 기분 또한 함께 느꼈다.
 “소가주 직속의 별동대?”
 “예, 형님. 꽤 실력이 좋은 이들로만 가려서 모았으니 실력은 충분합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무인 집단을 따로 만들 정도로 세가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이냐?”
 원래 없던 것을 새로이 만드는 데는 자금이 들어간다.
 그렇다는 것은 원래는 쓰지 않아도 될 돈을 쓴 것이니 세가의 입장에서는 무리가 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즉, 무리를 해서라도 그런 무인 집단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아까 아버지와 그 이야기는 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아직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헤인스의 말에 담기명은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 세가에 온 것이 어제 저녁 무렵이었으니, 뭔가 자세한 사정을 파악하기는 힘든 시간이었다.
 그리고 아까 들어본 바로는, 다시 소가주의 위치로 복귀하는 것을 두고 아버지와 의견이 맞지 않는 듯했다.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감천방 놈들 때문입니다.”
 “감천방?”
 헤인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역시 할아버지에게는 듣지 못했던 새로운 이야기였다.
 “예, 반년 전쯤에 외부에서 들어온 놈들이지요.”
 “으음······.”
 헤인스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큰 차이······.’
 헤인스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통해 중원의 무림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림의 세력들이 헤인스가 살던 아페리온 대륙의 영주 가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 가지 분명한 차이에 대해서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바로 지배력의 근간이었다.
 아페리온 대륙의 케르네스 제국, 아니, 모든 왕국에 존재하는 영주들은 그들의 황제 혹은 국왕으로부터 자신의 영지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다.
 그것은 거대한 국가라는 차원에서 공인된 힘이기에, 어지간해서는 다른 세력에 의해 침해받을 위험이 없었다.
 하지만 무림 세력이 갖는 지배력의 근간은 역사와 재력, 그리고 무력이었다. 공인된 지배력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든 다른 이에게 자신의 지배력을 침해받거나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말한 감천방이라는 세력이 바로 그것이리라.
 “흠, 그래서 외부의 무인들을 돈으로 고용한 것이냐?”
 “세상에서 돈에 무공을 파는 낭인들이라 경시하기는 합니다만 그들 나름의 대의도 협의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이 헤인스의 귓전으로 요란한 외침과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열 명 정도 되는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사내들이 각자의 병장기를 휘두르며 수련을 하고 있었다.
 헤인스가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저들이냐?”
 “예, 저기 장검을 든 장신의 남자가 철혈대 대주인 오채군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전부인 것이냐?”
 세가의 규모가 작다고는 해도, 독립된 하나의 무인 집단이라고 하기에는 사람 수가 너무 적었다.
 “아닙니다. 원래는 스무 명인데 며칠 전에 일이 좀 생겨서 아홉 명이 부상을 치유하는 중입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저 연무장은?”
 헤인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리 긴 세월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탓이다.
 “철혈대만을 위해 새롭게 꾸민 곳입니다.”
 “그래? 연무장을 새롭게 만드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저들은 아무래도 낭인 출신이다 보니 세가의 무인들과는 여러모로 다른 점들도 있고, 한데 섞이기가 힘들다고 말해서 아버지께서 조금 무리를 하셨습니다.”
 “그렇구나. 그런데 저들은 자신들의 주인이랄 수 있는 소가주가 왔는데도 고개 한 번 안 돌리는데?”
 “하하, 수련에 너무 열중한 탓이지요. 어쨌든 가시지요. 인사부터 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헤인스는 고개를 저으며 방향을 틀었다.
 “오늘은 때가 아닌 것 같으니 나중에 하는 것이 좋겠구나.”
 “예?”
 조금은 당황하는 담기명의 반응에 헤인스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도 사흘 정도 시간을 주신 참이니 그때까지는 쉬어야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저들도 갑자기 자신들의 주인이 바뀐 일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거다.”
 “아, 그렇긴 하겠군요. 하지만 저는, 형님이 하루라도 빨리 세가의 일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담기명의 말에 헤인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준 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돌아선 헤인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수련에 열중한 탓에 보지 못했다고?’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연무장으로 다가가던 헤인스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오채군이라는 사내를 비롯해 모든 철혈대 무인들이 자신과 담기명을 곁눈질로 슬쩍 확인하는 모습을.
 게다가 수련하는 모습 또한 요란하기만 할 뿐, 아무런 열의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연무장을 새로 만들어 달라 했다고?’
 어처구니가 없다. 철혈대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모았다는 것은, 온전히 세가의 ‘식솔’로 들어왔다는 의미다.
 그 말은 곧 그들은 세가의 무인들과 같은 소속이라는 뜻이다.
 한데 어우러지고 서로 절차탁마하며 세가를 위해 한 곳에서 함께 노력함이 옳은 일이다.
 그런데도 무공의 성향이 다르니 어쩌니 하며 그러한 요구를 했다.
 주인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와 아무런 열의도 느껴지지 않는 수련, 그리고 세가와 섞이기를 거부하는 요구까지.
 그들 스스로 세가의 식솔이 될 마음이 없다는 방증이다.
 ‘증조부와 종조부께서 많이 무르시군.’
 헤인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곳이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담씨세가의 성격은, 무림 세력보다는 무인 집단을 보유하고 있는 작은 지방의 토호 세력에 가까웠다.
 이는 비단 담씨세가만이 아니라, 중원 천지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규모의 무림 세력 모두에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어쨌든 그런 성격이 있는 만큼, 인근 지역의 사람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 또한 무력보다는 오랜 역사나 재력 혹은 인망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재력과 무력을 이용해 인근 사람들을 갈취하는 자들 또한 만만찮게 많기는 하지만, 적어도 현 담씨세가의 가주인 담고성은 그렇지 않았다.
 담씨세가는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인망을 통해 이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담고성은 넉넉하고 인자한 성격이 만들어졌고, 간계에는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무림의 소규모 세력들 모두가 이런 상황은 아니겠지만, 더러는 그 몇 가지 조건들이 잘 맞아떨어진 곳이 있으리라.
 그리고 담씨세가가 그중 하나였다.
 ‘협잡꾼들에게는 차려놓은 밥상이나 진배없지.’
 거기까지 생각한 헤인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픽하고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 성격이 증조할아버지를 많이 닮으신 모양이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의문이 솟는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접점도 없는 다른 세상에서 넘어와서 수많은 전쟁 끝에 황족이 아닌데도 공작이라는 작위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어떻게 그 느긋하고 자애로운 성격으로 그런 어마어마하고 전설적인 업적을 세울 수 있었던 걸까.
 헤인스는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지금의 그로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이야기였기에.
 ‘일단은 생각을 좀 정리할 필요가······.’
 조금은 머릿속이 멍한 상태로 자신의 방으로 향하던 헤인스가 갑자기 발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 듯 혼잣말로 뭐라 중얼거리더니, 이내 방향을 바꿔 급히 걸음을 옮겼다.
 
 탁, 타악!
 온힘을 다해 땅을 밟는 소리.
 “하앗!”
 뒤이어 동작과 동작 사이에 울려 퍼지는 우렁찬 함성.
 “허!”
 그리고 연무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쭈그리고 앉은 헤인스의 허탈한 비명이 이어졌다.
 ‘이건 뭐야?’
 발을 구르는 소리는 분명 하나였다.
 연무장이 떠나갈 듯 울려 퍼지는 기합성 역시나 마찬가지.
 하지만 정작 청석판을 넓게 깔아놓은 연무장 위에는 정확하게 쉰 명의 사내들이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도 흐름을 놓치지 않고 미세한 호흡마저도 완전히 하나가 되어 수련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청석판 위로 피어오르는 뿌연 먼지들이 무색할 정도로 굵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흩어져 내리고 있었다.
 지금 헤인스가 서 있는 곳은, 담씨세가의 외당 소속 무인들이 수련을 하는 연무장이었다. 철혈대라는 협잡꾼들이 필요할 정도라면, 세가 무인들의 수준이 도대체 얼마나 떨어지나 싶어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철혈대가 왜 필요한 거지?’
 헤인스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아페리온 대륙에 있는 드레이크 공작령의 병영에서도 이 정도로 훈련이 잘된 병사들은 본 적이 없었다.
 저 정도의 무인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철혈대라는 무인 집단을 또 만들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감천방이 위협이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헤인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지.’
 철혈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수련 중인 외당 무인들의 훈련 상태가 아주 좋기는 했지만, 각자의 무공 수준으로 따져 보면 철혈대 무인들에 비해서는 한 수 처지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연무장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터졌다.
 “납도(納刀)!”
 시선을 옮겨 소리가 난 쪽을 보니, 쉰 명의 외당 무인들 앞에서 무공 교두의 역할을 하고 있던 사내였다.
 사내의 구령에 외당 무인들이 손에 들고 있던 대감도를 갈무리한 후, 통일된 동작으로 포권을 올렸다.
 “자, 다들 수고했다. 오늘은 우리 율천향이 야간 번을 서는 날이니 씻고 휴식한 후에 준비하도록.”
 “예, 향주님!”
 마지막까지 절도 있고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을 한 후에야, 무인들이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다.
 “대공자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어제 세가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일이 바빠 미처 인사 드리러 가지를 못했습니다.”
 외당 무인들이 해산시킨 사내가 곧장 헤인스 쪽으로 다가오며 친근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헛!’
 헤인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렸다. 지금 다가오는 사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탓이었다.
 ‘그러니까······. 방금 전 율천향이라고 했고 향주라고 했으니 율천향주라는 건 알겠는데······.’
 헤인스는 황급히 어제 보았던 일기의 내용을 떠올렸다.
 일반적인 무림 세력의 조직 편성은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오(伍)’를 기본으로 한다.
 그 오가 모여서 ‘조(組)’를 이루고, 조를 모아 ‘향(香)’, 마지막으로 몇 개의 향을 묶어 ‘당(黨)’을 구성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편성이다.
 중원 누구든 붙잡고 이름만 말해도 알 만한 거대 세력들의 경우에는 각 세력의 성향이나 사승 관계 등에 따른 독특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리고 담씨세가 정도로 아주 작은 세력들은, 조직을 세분화하지 않고 큰 덩어리로 나누는 경우가 많았다.
 담씨세가는 크게 외당과 내당으로 나뉜다. 그리고 외당은 당주 아래로 쉰 명의 무인으로 구성된 세 개의 향으로 나뉘어 있었다.
 천지인 삼재의 이름을 딴 율천향(律天香), 순지향(順池香), 숭인향(崇人香)의 세 곳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따로 대나 오를 편성하지는 않았다.
 그중 지금 헤인스에게 다가오는 율천향의 향주.
 ‘아, 젠장!’
 할아버지의 일기,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 그 어디에도 지금 다가오고 있는 율천향주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
 “아, 외당의 수련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군요.”
 율천향주가 멈칫하더니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헤인스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숨긴 채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하하, 대공자께서도 이제 어엿한 장부가 되셨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예전에는 윤 아저씨라고 부르며 연무장으로 놀러오시곤 했었는데, 오 년 만에 너무 의젓해지신 모습에 잠시 당황했습니다.”
 윤 향주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에 헤인스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야 어렸으니 그랬지만 지금까지 그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오랜만에 보는 데도 외당의 수련 상태가 좋은 것을 보니 윤 향주께서 애를 많이 쓰시는 모양입니다.”
 헤인스의 말에 윤 향주, 윤명산은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듯 어색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감천방 놈들이 언제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으니 항상 바짝 조여 놓고 있습니다. 게다가······.”
 뭔가 덧붙일 말이 있다는 듯 이야기를 꺼내던 윤명산이 말끝을 흐린다.
 “게다가? 더 할 이야기가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윤명산이 재빨리 고개를 저었지만 헤인스는 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기다렸다.
 “험험, 그것이 그러니까······.”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며칠 전에 철혈대가 감천방 놈들과 부딪쳤다가 부상을 입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외당이라도 당하지 않도록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었다는 말씀을······.”
 윤명산이 슬쩍 말꼬리를 흩었다. 철혈대가 소장주 직속인데, 이제 곧 소장주가 될 대공자 앞에서 철혈대를 흉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 탓이다.
 처음에 이야기를 꺼냈다가 말을 흐린 이유 또한 그것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그들 또한 담씨세가의 식솔이 되었는데, 같은 식구끼리 흉을 보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헤인스는 윤명산의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불만스러운 감정을 읽어냈다.
 “제가 어제 막 돌아온 참이라 세가의 상황을 다 읽어내지 못해서 그러는데······. 세가에 철혈대를 새롭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윤명산이 저도 모르게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대놓고 물어본 탓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지금 이 물음이 자신을 떠보기 위한 것인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윤명산은 평생 담씨세가의 외당 소속 무인으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어려운 질문에 우회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방법 따위는 모른다.
 그렇다고 기분 좋으라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할 수 있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것이······.”
 곤혹스러워 하는 윤명산을 보며 헤인스가 슬쩍 질문을 바꿨다.
 “세가의 외당만으로는 감천방 놈들을 상대하는 것이 어려운 모양이군요?”
 이번에는 확실하게 답할 수 있는 물음이었다.
 “놈들이 직접적인 충돌을 피해서 그렇지 제대로 붙기만 한다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헤인스는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고는 인사를 건넸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오늘 밤에 번을 선다고 하셨으니 이만 쉬십시오.”
 마음 같아서는 더 들어보고 싶었지만, 더 길게 이야기를 하기에는 위험한 면이 있었다. 성이 윤씨라는 것 외에 이름도 모르는 상황에서, 혹여 예전의 이야기라도 나왔다가는 대답하기가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직책이 있는 사람들 이름이라도 알아둬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헤인스의 머릿속에 갑작스러운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너그럽고 무른 성격의 주인과 군기가 바짝 든 병사들이라······.’
 정확하게 말해서 외당 무인들을 ‘병사’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비슷한 맥락이었다.
 어쨌든, 주인의 성격이 무르다고 해서 그 병사들까지 물러터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곳, 어떤 때든 병사들의 군기는 시퍼렇게 날이 설 정도로 잘 벼려져 있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보통은 주인의 성격이 무른 만큼 그 병사들 또한 무르고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헤인스는 단순히 외당 무인들의 훈련 상태가 좋다는 것에 의문을 품은 것이 아니었다.
 대단히 공격적인 성향. 외당 무인들의 수련 모습에서 아주 공격적이고 저돌적인 느낌을 받은 탓이었다.
 ‘감천방? 아니야.’
 적이 있으면 기질이 바뀔 수는 있다.
 하지만 감천방에 대한 태도는, 버티고 지킨다는 느낌이지 저돌적으로 공격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뭐냐?’
 결국 헤인스는 자신의 방으로 가려던 걸음을 또 한 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소가주가 되든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든 일단 알 건 알아야지. 누굴 붙잡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서고로 가야겠다. 드레이크 공작가도 그랬지만 이곳 세가 역시 서고에 단순히 책만 모아 놓지는 않았으리라.
 책 외에 글자로 만들어 놓은 물건, 기록이 있을 것이다. 지난 오 년은 물론, 이야기로만 들었던 더 과거의 일들까지 모든 것이.
 ‘그나저나 서고는 어디로 가야 되지?’
 헤인스는 막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3장.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늘의 해가 중천에 걸리며 뜨거운 볕을 뿌리는 시간, 담가숭택의 어느 방에서 기묘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크허어!”
 침상에 앉은 헤인스는 온몸을 그대로 꼬아 놓기라도 할 기세로 비틀어 댔다.
 기묘한 소리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해괴한 비명이었다.
 “끄으으으으!”
 그리고 그 비명이 극에 달하던 순간.
 “크하!”
 뭔가 묵직하면서도 탁한, 그러면서도 개운한 느낌의 한숨을 내뿜었다. 뒤이어 늘어지는 듯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아아아!”
 격하게 기지개를 켰음에도 찌뿌듯한 몸은 도통 개운해지지를 않았다.
 그 기분을 그대로 보여주기라도 하듯 헤인스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거의 이틀 밤을 서고에서 꼼짝 않고 보낸 탓이었다.
 헤인스는 지금 있는 이곳 중원을 기준으로 해도, 충분히 고수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의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하지만 거의 그대로 굳어 버리기라도 할 기세로 이틀 밤 동안 똑같은 자세로 책을 보는 것은 무공의 고하와 상관없이 짙은 피로를 불러왔다.
 아무튼 고생을 한 보람은 있었다.
 ‘대충 돌아가는 상황은 파악이 됐고······.’
 이틀간 식사까지 서고에서 해결을 하며 자신이 알아야 할 기록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본래 한 세력의 기록이라는 것은 대개 객관적인 사실들을 모아 놓는다. 그리고 그 기록들이 긴 시간 쌓이면서 역사가 된다.
 헤인스는 할아버지가 태어났을 이십이 년 전부터 최근까지의 기록을 몇 번에 걸쳐 읽고 외웠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되새기고 이곳에 남아 있던 일기의 내용을, 기록과 대조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허풍 가득한 이야기를 사실에 근거해 짜 맞췄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할아버지의 지난 과거를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할아버지와 관계된 세가의 공적인 일들과 현재의 상황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 꼭 좋은 곳에 가셨어야 할 텐데······.”
 허풍은 어쨌든 허풍일 뿐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 심하게 허탈하고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이 든다면 허풍은 그 순간 명백한 거짓말이 된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한테 그 정도로 어마어마한 거짓말을 했으니 할아버지가 심히 걱정이 되었다.
 ‘어쩌면 그 마지막 말씀까지도······.’
 문득 임종하시던 날, 자신은 우화등선한다고 했던 말이 심히 의심스럽다.
 “뭐 어쨌든.”
 헤인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돌아가신 할아버지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가주이신 증조할아버지가 말했던 사흘이 바로 내일이었다.
 ‘어떻게 한다?’
 여전히 고민스러운 일이었다.
 “하아!”
 사실 헤인스는 이렇게까지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길게 끄는 성격이 아니었다.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답을 낼 수 없는 고민이라면 일단 생각하기보다는 부딪쳐 보는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이 문제만큼은 그러기가 힘들었다.
 그 자신이 ‘담기령’이었다면 절대 고민하지 않을 일이, 담기령 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한없이 애매해진 것이다.
 땡땡땡땡!
 “어? 무슨?”
 바깥에서 다급한 종소리가 울렸다. 헤인스는 반사적으로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다급히 옷을 걸쳤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다. 이런 다급한 소리라면 위급할 때 울리는 경종이다.
 헤인스 역시 세가의 일원으로 들어온 이상 가만히 방에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헉!”
 방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온 헤인스가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켰다. 경내를 황급히 달려가는 담씨세가 무인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역시!’
 이틀 전 외당 무인들을 두고 내렸던 평가는 정확했다. 이만큼이나 잘 훈련된 정예들이 또 있을까 싶다.
 대여섯 명씩 무리를 이루어 각자의 방향으로 달려가는데, 그 모습에 조금의 어지러움도 보이지가 않았다.
 누구 하나 헤매는 이도 큰소리를 치는 사람도 없다.
 서로 각자의 방향으로 움직이니 한 번쯤 부딪칠 만한 데도 그런 일조차 없다.
 그저 긴장 가득한 얼굴로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일치된 발소리와 다급한 경종 소리뿐이었다.
 이 역시도 질리도록 반복된 훈련과 거듭된 경험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광경이다.
 헤인스는 케르네스 제국 황실근위군의 사열식에서도 이 정도의 질서 정연함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왜구들의 위협이 꽤 심각한 모양이군.’
 헤인스는 이틀간 조사를 하면서, 세가의 무인들이 이렇게나 잘 훈련되고 공격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툭하면 약탈을 하러 오는 왜구들 때문이었다.
 왜구들은 바닷가는 물론이거니와 강물을 거슬러 올라와 내륙까지 약탈을 감행한다고 했다.
 언제든 그놈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항상 벼려진 칼날처럼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헤인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는 앞을 지나가는 외당 무인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증······ 아니, 가주님은 어디 계시나?”
 돌아오는 것은 간단명료한 대답.
 “장원 정문에 계십니다!”
 그리고 인사 한마디 없이 재빨리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 버렸다.
 “대단하군.”
 헤인스는 다시 한 번 감탄을 터트리며 황급히 장원 정문을 향해 달렸다.
 
 “무슨 일입니까?”
 “왔느냐?”
 헤인스의 물음에 담고성이 힐끗 곁눈질을 하고는 다시 활짝 열려 있는 정문 너머를 노려본다.
 왠지 더 이상 말을 걸기가 힘들다고 생각한 헤인스가 조용히 자리를 잡고는 옆에 있는 담기명에게 슬쩍 물었다.
 “무슨 일이냐?”
 “감천방 놈들이 올라오고 있답니다.”
 “음!”
 헤인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돌았다. 경종이 울리고, 세가의 가주까지 직접 나와 있을 정도였다.
 즉, 감천방이 그냥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대적인 모습으로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어지럽게 귓바퀴를 두드렸다.
 ‘저것들이!’
 힐끗 뒤를 돌아본 헤인스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오채군을 비롯한 철혈대 무인들이 저들끼리 떠들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부상을 입었다던 철혈대들도 그사이 치료를 끝냈는지 스무 명 모두 뭉쳐서 오고 있었다.
 조금 전 보았던 세가의 외당 무인들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어느새 바로 뒤까지 다가온 오채군이 담기명을 향해 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소가주?”
 오채군의 물음에 담기명이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헤인스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는 돌아온 형님이 소가주이기에 자신에게 그런 호칭을 하는 것에 괜히 눈치가 보인 탓이다.
 하지만 헤인스는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감천방 놈들이 올라오고 있소. 대비를 하시오.”
 “이 오채군이 있는데 겁도 없이 이곳까지 쳐들어왔단 말입니까? 크허허, 저번에는 엉겁결에 실수를 했지만 오늘은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도록 하지요.”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외친 오채군이 자신의 뒤에 있는 철혈대를 향해 말했다.
 “네놈들도 잘 들었지? 지난번의 복수까지 제대로 해주는 거다. 오늘 담씨세가 철혈대의 무서움을 제대로 알게 해줘라!”
 “걱정 마십시오. 오늘은 제대로 대비를 하고 왔으니까!”
 “제깟 놈들이 설쳐 봐야 한 주먹감도 안 되지요!”
 오채군의 외침에 저마다 한마디씩 떠들어대는 통에 정적과 긴장이 가득했던 장내가 순식간에 소란스럽게 변했다.
 ‘내가 뭘 하고 살든 저것들만큼은 꼭 처리를 해야겠군.’
 그렇게 다짐한 헤인스가 슬쩍 곁눈질로 담고성의 눈치를 살폈다.
 담고성 역시 그들의 그런 모습이 탐탁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울렸다.
 “옵니다!”
 모여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모였다. 저 멀리, 담씨세가의 장원으로 올라오는 길에 한 무리의 사내들이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준비!”
 외당 당주 담유성의 호령과 동시에 장원 담장 위에 올라가 있던 외당 무인들이 일제히 살통에서 화살을 뽑아 들고 시위를 당길 준비를 했다.
 헤인스가 슬쩍 주변을 살피니, 세가 전각의 지붕 위에도 무인들이 활을 들고 대비를 하고 있었다.
 활을 들지 않은 이들은 하나같이 창대를 움켜쥐고 긴장된 숨을 토해냈다.
 ‘확실히 훌륭한 정병들이다.’
 헤인스는 다시 한 번 아까의 느낌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철혈대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저것들이 왜 필요한 거야?’
 하지만 지금은 외부의 적을 맞이할 때지, 내부를 다스릴 때가 아니었다.
 조용히 앞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헤인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개를 앞으로 쭉 내밀며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리고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담고성에게 말했다.
 “뭔가 이상합니다.”
 “뭐가 말이냐”
 “아무리 봐도 싸움을 걸러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 말에 다른 이들도 다시 한 번 저 멀리 다가오는 자들을 살폈다.
 “이상하구나.”
 담고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 멀리 다가오고 있는 감천방은 겨우 열다섯 명 남짓 되는 적은 수의 인원이었다.
 거기에 선두에 있는 세 사람은 아주 화려한 복색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싸우러 오는 사람의 옷차림이 아니었다.
 그사이 감천방과의 거리는 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마찬가지로 감천방 방도들을 살펴보던 담유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형님, 저 행렬의 두 번째 선 자는 처음 보는 자인데 뭔가 이상합니다.”
 “그래, 가장 선두에 있는 감천방주가 마치 상전처럼 대하고 있구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헤인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저 선두에 선 자가 감천방주 조설근입니까?”
 “그래.”
 “확실히 이상하긴 하군요.”
 헤인스가 보기에도 담유성이 말한 대로였다.
 감천방주 조설근이라는 풍성한 콧수염의 중년 사내가, 뒤따라오는 젊은 남자에게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난감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이 장 정도까지 거리가 좁혀지자, 감천방 방도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뒤쪽에 있던 감천방도 하나가 조용히 다가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총관이자 내당 당주인 고잔형이 앞으로 나가 그 무언가를 받아 들고는 조심스레 담고성에게 전해주었다.
 “음?”
 담고성이 건네받은 것은 한 장의 붉은 종이였다. 그런데 종이를 받아 읽은 담고성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담유성이 물었지만 담고성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더니 대답 대신 명령을 내렸다.
 “외당 무인들을 물리고 총관은 손님들을 접객실로 모셔라. 그리고 잠시 후 찾아갈 것이니 일단은 차를 내드리도록!”
 “네?”
 담유성은 물론 헤인스와 담기명까지도 의아한 표정으로 담고성을 보았다. 하지만 담고성은 그들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일단은 가주의 명이었다.
 고잔형이 조심스레 감천방도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고, 담유성은 손짓으로 외당 무인들을 철수시켰다.
 “이게 뭡니까, 김 팍 새는구먼!”
 오채군이 끝까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한 소리 구시렁거리고, 헤인스가 그들을 한 번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의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그게 누구의 배첩이기에 그러십니까, 형님?”
 담고성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선 담유성이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감천방이 싸울 생각으로 온 것이 아니니 외당을 물리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껏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세가의 사람들은 물론 양민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히고 있는 감천방 놈들을 세가 안으로 들이다니.
 그것도 그냥 들이는 것도 아닌 손님으로 말이다.
 담유성의 물음에 담고성이 탁자 주변에 둘러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을 한 번 쓱 훑었다.
 그리고 탁자 위를 쓸듯이 오른손을 탁자 한가운데로 쭉 밀었다.
 모두의 시선이 탁자 가운데로 모이고, 담고성이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탁자에는 한 장의 붉은 종이만이 남았다.
 담유성이 말한 대로 한 장의 배첩(拜帖)이었다.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써 넣은 종이로, 보통 다른 집을 방문하고자 할 때 미리 사람을 통해 보내거나 직접 내미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붉은색 종이를 사용하기 때문에 담유성도 그것이 배첩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었다.
 문제는 배첩에 씌여 있는 열 개의 글자.
 
 철문방 금도사자 장운담.
 
 “철문방! 그리고 장운담이라면?”
 담유성이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철문방주 장부동의 아들이다.”
 “도대체 철문방과 감천방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담유성이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물었다. 철문방은, 담씨세가의 용천현이 속해 있는 처주부의 인접 부(府)인 구주부를 장악하고 있는 방파였다.
 겨우 한 개 현 정도를 세력권으로 하는 담씨세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 커다란 세력이었다.
 대답은 헤인스의 입에서 나왔다.
 “혹시 감천방은 이 지역을 삼키기 위한 철문방의 척후가 아니었을까요?”
 “뭣이?”
 담유성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헤인스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난 이틀 동안, 제가 없는 사이의 기록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생기더군요.”
 “궁금한 것이라면?”
 “감천방의 위세는, 적어도 한 개 현 정도는 충분히 장악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무림 전체로 보자면 아주 작은 소규모 방파지만, 우리와 같은 규모의 세가에서는 충분히 벅찬 상대지요. 그런데 그런 힘 있는 세력이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나타난 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철문방이 이쪽 지역을 삼키기 위해 자신들의 힘 일부를 떼어서 보낸 거라면 말이 되지요.”
 헤인스의 말에 모두들 침음성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 감천방주가 장운담을 모시듯 데리고 온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가만히 듣고 있던 고잔형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쪽이 다른 방파들과 손을 잡고 견제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런 수를 썼다는 말이 되는군요.”
 “그럴 것 같습니다. 우리 현만의 문제라면 이목은 집중되더라도 다른 방파에서 긴장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 말을 들은 담기명이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저들이 지금 직접 정체를 드러내고 왔다는 건?”
 “우리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게지.”
 “그런데도 일단 찾아왔다는 말은······.”
 “조용히 세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거나, 철문방 밑으로 들어오라는 강요를 하러 왔겠지.”
 콰앙!
 헤인스와 담기명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담유성이 탁자를 내려치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것들이 우리 세가를 어떻게 보고!”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기세의 담유성에게 담고성이 손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한 사람씩 눈을 맞추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은 가보자꾸나. 무슨 이야기를 할지. 대답은 이야기를 들은 후에, 행동은 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담고성의 두 눈에도 짙은 노기가 은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담씨세가의 가주인 담고성이오. 어느 분이 철문방의 금도사자이시오?”
 방으로 들어선 담고성이 정중하게, 그러면서도 조금도 비굴하지 않게 포권을 하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조금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퍼어억, 우당탕!
 갑자기 둔탁한 소음과 함께 누군가 요란하게 바닥을 굴렀다.
 “사, 사자님!”
 심각한 모습으로 바닥을 굴렀음에도 벌떡 일어나 한껏 허리를 숙이는 자는 다름 아닌 감천방주 조설근.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눈두덩이가 순식간에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조설근.”
 “예, 금도사자님!”
 “지금 이 자리가 담씨세가의 주인이 나를 손님으로 맞이하는 자리였는가?”
 “그, 그것이!”
 조설근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외치며 장운담과 담고성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장운담은 조설근은 물론 담고성에게도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손에 든 찻잔을 보며 말했다.
 “나는 오늘 내가 이곳의 주인으로 내 가신에게 인사를 받는 자리라는 기대를 하고 왔는데, 그렇지가 않구나.”
 조설근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오늘 분명, 자신이 그렇게 말렸음에도 말로 풀면 좋지 않겠냐며 온 게 아니었나.
 하지만 더 어처구니가 없는 사람은 담고성을 포함한 담씨세가 사람들이다.
 “아버지, 지금 저자가 무슨 헛소리를······.”
 흥분한 담기명이 목소리까지 떨며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담고성이 조용히 그를 말렸다.
 “아, 담 가주가 있었군.”
 그제야 장운담이 담고성을 보았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포권을 했다.
 “철문방 소방주이자, 금도사자인 장운담이오. 내 수하가 부족한 점이 많아 오늘 추한 꼴을 보여 미안하게 생각하오.”
 담고성이 굳은 표정으로 장운담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천방이 철문방과 가까운 사이인 줄을 미처 몰랐소이다.”
 “하하, 별것도 아닌 일인데 아주 비밀스러운 일인 듯 말씀을 하는구려. 뭐, 이제라도 알았으니 되었소이다. 그리고 이제 곧 한식구가 될 사이인데 그런 게 뭐 아주 중요한 것도 아니지 않소?”
 명백한 도발.
 담고성의 뒤에 서 있는 이들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뛰어나가 장운담의 주둥이를 짓이겨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깊이 침잠한 눈동자 한가득 노기를 품고 있는 헤인스가 있었다.
 ‘감히 케인 드레이크 공작의 본가에 저딴 허섭스레기가!’
 장운담의 말은 도발이 아니라 협박이었다.
 이미 용천현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감천방의 힘에 철문방의 힘을 조금만 보태도 충분히 담씨세가를 장악하고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니 조용히 밑으로 들어오라는 협박.
 하지만 담고성은 침착함을 유지했다. 지금 저 도발에 넘어가거나 협박에 굴복해 봐야 득 될 것이 없었다.
 일단은 이들을 돌려보낸 후, 처주부에 있는 각 방파에 연락을 보내 도움을 청해야 했다.
 철문방이 겨우 용천현 하나만 노리고 왔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한식구라니 금시초문이오. 이곳은 대대로 우리 담씨세가의 터전이었던 곳으로 아직은 누구와 한식구가 될 마음을 먹은 적이 없소이다.”
 뻐어억!
 두 번째 타격음이 이어지고, 조설근이 또 한 번 바닥을 굴렀다.
 “끄윽!”
 조설근은 아까보다 더욱 심하게 맞고 굴렀음에도 또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하하,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오. 내가 성격이 급해서 버릇없는 소리를 들으면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가는 버릇이 있어서 말이오.”
 뚜둑!
 탁자 아래에서 관절 꺾는 소리가 조용히 울린다.
 아래로 손을 내리고 있던 담고성이 어찌나 주먹을 세게 움켜쥐었는지 힘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하지만 화를 내면 정말 저자의 말대로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참아야 할 때였다.
 장운담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다시 담고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며 말을 잇는다.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내 이야기는 다 했군. 그래서 담 가주의 생각은 어떠시오?”
 “분명히 말하겠소. 본 가주는 단 한 번도 조상 대대로 내려온 이 땅을 남에게 허락할 마음이 없소.”
 퍼어억!
 세 번째가 되자 조설근은 더 이상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나뒹군 채 몸을 비틀며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하지만 담고성 역시 더 이상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분명히 기억하도록 말씀드리지. 본 세가는 철문방과 한가족이 될 마음은 추호도 없소!”
 담고성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비굴하지는 않지만 상대를 흥분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담고성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의사표시였다.
 “허허, 평화롭고 서로가 좋은 결론이 나올 수 있는데 꼭 이렇게 앞뒤 꽉 막힌 족속들이 있단 말이지.”
 방 안 한가득 짙은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헤인스는 입안에 맴도는 비릿한 맛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삐쭉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저런 것들은 어디 가도 꼭 있다니까.’
 가문의 위세, 세력의 힘을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것들은 어디든 있다. 장운담 역시 그런 부류 중 하나.
 만약 장운담의 저런 행동들이 진심으로 개인적인 선호에 의한 것이라면, 장운담은 분명히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접객실에서 보인 장운담의 행동은 자신의 성격이 아니라, 과시를 위한 행동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특이하면서도 무시무시한 괴물의 모습을 그럴듯하게 꾸며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헤인스에게는 너무나 분명하게 보였다. 바로 장운담의 눈 때문이었다.
 스스로 꾸며낸 모습에 만족하며, 자신의 것도 아닌 권력에 취해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헤인스는 케르네스 제국에서도 최상류층에 속해 있었다.
 그러니 수많은 귀족들과 그들의 자제들을 알았고, 그들 중에서도 저런 행태를 보이는 자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그 덕분에 장운담에 대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더 이상 볼일이 없을 것이오.”
 장운담이 한껏 목소리를 깔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헤인스가 불쑥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철문방의 금도사자께 물어볼 것이 있소.”
 “내가 이곳에서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있었던가?”
 장운담이 헤인스를 무시하듯 말했지만, 헤인스 역시 장운담의 그 말을 무시했다.
 “지금 이곳에서 한 모든 말은, 철문방주 장부동의 뜻이 분명하오?”
 자신의 말을 깨끗하게 날려 버린 헤인스의 태도에 장운담의 얼굴에 울컥한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방주님의 뜻이 없었다면 이런 공적인 자리가 만들어졌을 리가 없지.”
 “그 말인즉, 오늘 이 자리에서 철문방이 우리 담씨세가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말이오?”
 “크허허, 전쟁이라니? 그런 것은 서로 힘이 비슷할 때나 하는 것이지. 너희 같은 것들······.”
 장운담이 별 우스운 이야기도 다 들어본다는 듯 말했지만, 헤인스는 그 말조차 깨끗하게 잘라냈다.
 “다시 말해 금도사자는, 철문방의 사자(使者)로서 오늘 본 세가를 방문했다는 말이오?”
 빠드드득!
 두 번이나 자신의 말을 무시한 헤인스의 태도에 장운담이 이를 갈아붙였다.
 하지만 방금까지 만들어 놓은 자신의 특이함을 이제 와서 무너트리기는 싫었다.
 “크흐흐, 그렇다. 철문방주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온 사자로서 이 자리에 왔다. 물론 네놈들에게는 저승사자이기도 하다만.”
 “그렇다면 이건 분명히 알고 있겠지?”
 “무얼 말인가?”
 “그대들이 본 장원을 벗어나는 순간, 전쟁이 시작된다는 것을.”
 “뭣이!”
 장운담의 얼굴이 결국 일그러지고 말았다. 헤인스의 말은 장원을 떠나는 순간 공격하겠다는 엄포인 탓이다.
 하지만 장운담은 끝까지 숨을 골랐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아라. 이런 촌구석에 그만한 배포와 실력을 지닌 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이만 나가주실까?”
 헤인스의 말에 장운담이 애써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데리고 온 수하들을 이끌고 문쪽을 향해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 그런데······.”
 그러다 헤인스의 옆에서 잠깐 멈추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사지가 잘리고 눈알을 파도 그렇게 주둥이를 놀릴 수 있을지 기대되는구나. 그래도 너는 좋아할지도 모르겠구나. 세가가 없어져도 제 한 몸 건사할 수는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장운담을 접객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정작 그 대상인 헤인스는 이를 악문 채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장운담의 말을 듣지 못했다.
 ‘하는 수밖에 없겠군.’
 소가주라는 것을 해야 할 것 같다. 케르네스 제국, 아니, 아페리온 대륙 최강자인 케인 드레이크 공작의 본가가 이따위로 무시당할 수는 없다.
 케인 드레이크 공작의 본가는, 전 무림을 발아래 두는 천하제일의 세가여야 한다.
 ‘이제부터는 이름만 빌린 담기령이 아닌, 진짜 담기령으로 살겠다.’
 “후우우!”
 헤인스는 긴 숨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어?”
 그리고 그제야 담고성을 비롯한 세가 사람들이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러십니까?”
 하지만 담고성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과거에 알던, 오 년 전 갑자기 사라지기 전까지 알고 있던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게 도발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애를 쓴 이유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다른 현에 있는 방파들과 연계하여 철문방을 막을 시간을.
 담씨세가가 자리한 용천현은, 처주부에서도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용천현이 넘어간다면 처주부 전체가 철문방에 삼켜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렇기에 더욱 시간을 벌려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상대를 도발하며 그것을 날려 버렸으니 황당하고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아들이 말을 하려는 순간, 그것을 막지 못했던 스스로를 책망했다.
 “어쩌자고 그런 짓을······.”
 하지만 헤인스는 묻는 말에 답하기보다는 곧장 방향을 틀며 다른 말을 꺼냈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끈 후에 말씀을 나누시지요. 지금은 나가봐야 합니다.”
 “뭐?”
 아들의 뜬금없는 말에 담고성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아들은 이미 접객실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우선 놈을 잡아야 합니다. 먼저 가겠습니다.”
 밖으로 나선 헤인스는 정문 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결론을 내렸으니 행동하는 것이 순서. 시간이 촉박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할아버지의 가문, 그리고 너의 가문이기도 한 담씨세가는 무인들만의 세상인 무림이라는 곳에 속해 있단다. 그리고 담씨세가는 그 무림에서도 홀로 우뚝 솟아 있는 하늘 같은 곳이란다. 모든 무인들이 우러러보며 추앙하던, 전 무림을 호령하는 천하제일의 가문이지. 너는 그런 가문의 후손인 것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어쩌면 그건 단순한 허풍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바람이 아니었을까.’
 당신께서 세상을 떠난 지금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일을 겪고 보니 왠지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헤인스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웅장하지는 않지만 오랜 시간을 담고 있는 전각들이 헤인스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긴 세월의 흔적들이 새삼 아릿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저쪽 세상에 있는 드레이크 공작령의 내성은 채 삼십 년도 되지 않은 건물이었다.
 할아버지가 작위와 영지를 받으면서부터 짓기 시작해, 아버지가 작위를 물려받은 후에야 마무리가 되었다고 했다.
 웅장하고 위압감 넘치는 드레이크 공작의 위엄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소였다.
 하지만 이런 긴 세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할아버지가 하신 만큼, 나도 한다.’
 혈혈단신으로 대륙 최강의 가문을 세우신 것처럼.
 이곳에 깃들어 있는 세월의 흔적에 드레이크 공작가의 힘과 위엄을 더하리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헤인스는, 아니, 이제부터는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충실하게 살기로 마음먹은 ‘담기령’은 다시 정문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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