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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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공질풍기 1-1권

2018.06.22 조회 3,710 추천 31


 # 서장
 
 
 
 
 
 깊은 동굴 안으로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등이나 어깨에 짐을 지고 있거나, 두 명씩 짝을 지어 커다란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짐을 옮기는 인부들이 아니다.
 커다란 청석판을 옮기는데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다. 숨소리도 차분하고 발걸음 또한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들 하나하나가 절정의 무인들이기 때문이었다.
 율천대(律天帶).
 절정의 무인들로만 구성된 무림맹 소속 집단이었다. 게다가 다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오직 맹주의 명령만 따르는 독립적인 집단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인부처럼 줄줄이 짐을 옮기고 있었다.
 게다가 짐을 내려놓는 곳은 더욱 황당했다. 동굴의 가장 안쪽, 철창을 박아 놓은 공간. 즉, 감옥 안으로 짐을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율천대 무인들이 몇 번 오가니 감옥 안이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다.
 평평하게 골라진 바닥에는 단단한 청석판이 깔리고, 그 위에 고급스러운 가죽 깔개가 덮였다.
 그리고 안쪽 벽에서부터 고급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침상에서부터 탁자와 다탁, 질 좋은 다기와 각종 차, 책장과 지필묵들이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공간은 아무리 봐도 감옥인데, 꾸며진 것은 지체 높은 집안 공자의 정갈한 방이다.
 그리고 침상에 한 사람이 걸터앉아 있었다. 소년이라 하기에는 나이가 많고, 청년이라 하기에는 어리다.
 대충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것이 굳이 표현 하자면 ‘어린 청년’이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창살 너머에서 감옥 안을 노려보는 한 사내를 향해 있었다. 어린 청년이 짙은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이죽거리듯 말했다.
 “인상 좀 펴.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너무 티 낸다.”
 그 말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한 사내가 얼굴을 한층 더 구기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어린 청년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네깟 놈이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이거 전부 내 돈으로 산 물건들이거든. 그러니까 당신이 아까워할 이유가 없는데?”
 “시끄럽다.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이려는 거냐?”
 “헛소리?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나?”
 어린 청년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아무리 봐도 앞에 있는 사내를 놀리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사내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한참 동안 감옥 안을 노려보던 사내가 살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는 모르지만, 내 기필코 네놈의 속임수를 파헤칠 것이다!”
 “뭐, 그러시든지.”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말하는 모습에 사내는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네놈이 언제까지 그렇게 자신만만······. 이, 이놈!”
 말을 하던 사내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옥 안에 있던 어린 청년이 자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침상 위에 벌렁 드러누워 버린 탓이었다.
 팔베개를 한 채 눈을 감았던 어린 청년이 힐끔 사내 쪽을 쳐다보더니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응? 아직 안 갔어?”
 “내 말이 말 같지 않······.”
 하지만 이번에도 사내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아아, 나 이제 잘 거니까 조용히 좀 해 줬으면 하는데?”
 빠드드득!
 참을 수 없는 모욕감에 사내가 거세게 이를 갈아붙였다. 하지만 감옥 안의 청년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이미 두 눈을 감고 있었다.
 “크으윽!”
 사내는 아무리 떠들어 봐야 자신만 바보 취급당할 뿐이라는 생각에 홱 하고 몸을 틀었다. 그런 사내의 등 뒤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가.”
 
 
 
 
 
 # 1장. 호화로운 특별 뇌옥
 
 
 
 
 
 “흡!”
 구양결은 오늘 네 번째 놀라고 있었다.
 무림맹 본산에 이렇게 숨겨진 길과 동굴이 있고, 그 안에 특별 뇌옥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놀랐다.
 무림맹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였지만,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것은 몰랐다.
 맹주의 직속으로, 절정의 무인들로만 구성된 율천대(律天隊)가 뇌옥의 간수라는 사실이 두 번째였다. 게다가 책임자는 율천대 부대주인 맹도굉이었다.
 눅눅하고 악취가 풍기는 뇌옥의 환경을 생각하며 인상을 찡그리고 들어왔는데, 뜬금없이 은은한 방향과 상쾌한 공기가 감돌고 있다는 것이 세 번째.
 마지막은 동굴의 끝까지 들어온 후였다.
 동굴 끝에 일정 공간만을 남겨 두고 창살로 가로막아 뇌옥을 만들어 낸 형태였다. 그런데 그 동굴 안의 광경이 도저히 뇌옥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그저 창살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었다. 침상에서부터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집기들이 한눈에 봐도 고급이다.
 아니, 고급이고 아니고를 떠나 감옥 안에 식탁에 다탁과 다기 등의 온갖 것들이 다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다탁 앞에 앉아 너무나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사내. 수인(囚人)이 분명한 사내가 질 좋은 비단옷에 고급스러운 다기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게다가 그 차향이 뭔가 아주 비쌀 것 같다. 질 좋은 차를 마셔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구양결은 뒤에 있는 맹도굉을 뒤돌아보려다 멈칫했다.
 맹도굉이 뇌물을 받고 이런 짓을 했다면, 이렇게 버젓이 보여 주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결국 좀 더 위쪽에서 인정 혹은 묵인한 일이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황당한 결론이지만 그 외에 다른 답이 나오지 않았다.
 “후우!”
 구양결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길게 호흡을 정돈하고 나니 놀란 마음이 꽤 진정되는 듯했다. 이제 곧 수인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앞으로 한동안 그와 함께 있어야 하는데, 처음부터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창살 너머의 수인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채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창살 가까이 다가선 구양결이 수인을 향해 물었다.
 “네가 진소천(陳召天)인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채 이쪽을 빤히 바라보던 수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 년 만에 보는 새로운 얼굴이군. 이름이?”
 “묻는 말에 답해라! 네가 진소천이냐?”
 “희한한 놈이네? 알고 찾아와서 굳이 물어 보는 이유가 뭐냐?”
 “어서 말해라!”
 “쯧, 어린놈이 싸가지 하고는······. 그게 내 이름이다. 그래서 너는?”
 “구양제현 맹주의 명을 받고 온 구양결이다.”
 진소천은 뭔가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어째 닮았다 했더니 구양 늙은이의 자식이었군.”
 “수인 주제에 맹주께 무슨 망발이냐! 네깟 놈이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니 맹주지 내 맹주냐? 용건이나 말해.”
 “이놈이!”
 “쯧, 괜히 힘 빼지 말고 말이나 해라. 왜 왔냐?”
 “후우!”
 구양결이 다시 한 번 숨을 고르는 사이, 진소천은 아주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듯 눈을 빛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맹주께서 네놈에게 제안을 하셨다.”
 “크큭, 제안이 아니라 씨알도 안 먹힐 명령이겠지. 그래 어디 한 번 들어 보자.”
 “네가 해 줄 일이 있다.”
 “그러니까 뭘?”
 “자세한 내용은 말해 줄 수 없고, 네가 직접 가야 한다.”
 “밖으로 나가야 된다고?”
 시종일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던 진소천이 그제야 흥미가 동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그래서 나한테 줄 건?”
 “너를 풀어 주겠다.”
 “크큭, 구양 노물이 나이를 더 먹더니 허언증이라도 생긴 모양이군. 아니면 미쳤거나.”
 “입 조심해라! 맹주께서는 허언을 입에 담는 분이 아니시다!”
 구양결이 울컥한 표정으로 소리를 질러보지만, 진소천은 피식 웃으며 대꾸할 뿐이었다.
 “그건 니 생각이고.”
 “닥쳐!”
 “쯧, 싸가지도 없는데 성질까지 더러운 놈이군.”
 “이, 이놈이 끝까지!”
 “내가 필요해서 온 걸로 기억하는데? 필요 없으면 말고.”
 뻣뻣한 진소천의 반응에 구양결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이냐? 안 하겠다는 거냐?”
 대가로 풀어 주겠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도 안 하겠다는 말을 하는 게 구양결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니가 제안이라며?”
 “풀려날 수도 있는 기회를 버리겠다는 말이냐?”
 “그건 니 생각이라니까.”
 “그래서 안 하겠다는 말이냐?”
 구양결의 얼굴에 조급함이 떠올랐다.
 “아니, 하지.”
 “음?”
 “오랜만에 바깥 구경이나 하고 ‘다시 오면’ 되지 뭐.”
 “맹주께서 네놈을 풀어주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니까!”
 구양결이 신경질 적으로 외쳤지만, 진소천의 태도는 여전히 아주 느긋하다.
 “아, 그래. 알았다, 알았어.”
 “후우!”
 “그런데 준비할 게 좀 많을 거야.”
 “준비?”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묻는 구양결은 향해, 진소천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좀 귀하게 컸거든.”
 “무슨 말이냐?”
 “일단 준비해야 될 것이 있다.”
 “준비?”
 “황금화.”
 “뭐!”
 
 “어제도 왔는데 오늘도 손님이군.”
 진소천의 말에 창살 앞에 서 있던 중년 사내가 버릇처럼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그리고는 고급스럽고 정갈하게 꾸며진 창살 안의 광경을 보면 또 한 번 인상을 찡그렸다. 감옥 안의 고급스러움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말없이 사내를 지켜보던 진소천이 약이라도 올리려는 듯 키득거리며 말했다.
 “크큭, 그렇게 본다고 내 여기 환경이 달라지진 않으니까 신경 좀 끄시지?”
 하지만 사내는 입을 꾹 다무는 것으로 진소천의 말을 무시했다.
 “아무튼······.”
 “잔말 말고 얼른 적어서 내놔라.”
 “응? 뭘?”
 “네놈이 없는 동안 사용할 깃발에 대해 알려 줘야 될 것 아니냐?”
 “아아, 맞다. 그게 있었지?”
 고개를 끄덕인 진소천이 다탁 앞에서 일어나 다른 쪽에 놓인 탁자로 향했다. 그리고 지필묵을 꺼내 들며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갔다 오는데 얼마나 오래 걸려?”
 “왜?”
 “몇 개를 적어 줘야 되는지 알아야지.”
 “넉넉하게 다섯 달은 걸릴 거다.”
 “다섯 달?”
 진소천은 확인하듯 되물어 놓고는 사내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종이에 뭔가를 써 내려 갔다.
 그 모습에 사내는 또 한 번 인상을 찡그렸지만 뭐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다. 마치 진소천과 말을 섞는 것조차도 싫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는 진소천이 징그러울 정도로 싫었다.
 종이 위에 뭔가 목록 같은 것을 몇 줄 써 내려 가던 진소천이 갑자기 붓을 멈췄다.
 그리고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물었다.
 “다섯 달이면······. 운남으로 가는 모양이네?”
 사내가 흠칫 놀라며 진소천을 향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어떻게 알았느냐?”
 구양결에게는 절대 함구하라 일러두었었다. 물론 행선지가 특별히 비밀이라고 할 것은 없다.
 진소천 또한 밖으로 나가 어느 정도 이동하다 보면 목적지를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미리 알리고 싶지 않았다. 진소천이 행선지를 알게 되면 뭔가 간계를 꾸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알기는? 방금 당신이 가르쳐 줬잖아?”
 “아!”
 사내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탄식을 터트렸다.
 왕복 다섯 달이라는 자신의 말로 운남을 유추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진소천이 사내를 놀리기라도 하듯 주절주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왕복하는 것도 아니고 가서 뭔가 일을 해야 한다고 했지. 게다가 가고 오는 길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그런 상황까지 고려해서 넉넉하게 생각하면 대략 경사 너머거나 섬서 끝 혹은 운남인데, 내가 할 일이 있다면 운남······.”
 “시끄럽다.”
 사내가 억지로 분을 삭히며 진소천의 말을 끊었다. 그가 진소천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항상 어떤 식으로든 사람 속을 긁어 대는데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자신을 가지고 노는 상황에 처하는 것에 대한 묘한 열등감까지 섞이면서 생긴 감정이다.
 진소천은 그런 사내의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빙글빙글 웃으며 종이에 몇 줄의 목록을 더 추가한 후 건네주었다.
 사내가 무언가를 찾는 듯한 눈빛으로 종이에 적힌 목록을 노려보았다.
 종이에 적혀 있는 것은 색깔의 이름이었다. 각각 세 가지의 색 이름과 하나의 글자가 나열되어 있는 것을 한 줄로 모두 열 줄이었다. 그런데 그 색의 이름이라는 것이 조금 이상했다.
 단순히 색 이름만을 써 놓은 것이 아니었다.
 완산포목점의 청색, 하중선포목점의 적색, 만로포목점의 검은색이라는 식이다.
 단순히 청색, 적색이 아니라 정해진 포목점의 해당 색깔의 천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내의 눈살이 다시 한 번 찌푸려진다. 그는 벌써 오 년째 이런 목록을 받고 있었다. 그것도 보름에 한 번씩.
 이 목록을 볼 때마다 가장 먼저 느끼는 의문은, 같은 색깔인데도 포목점이 다르다고 해서 그게 구분이 가는가 하는 점이었다.
 물론 가끔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구분이 힘들다.
 뚫어져라 목록을 노려보는 사내를 향해 진소천이 설명을 덧붙였다.
 “순서는 이전이랑 똑같아. 테두리, 깃발, 글자 색, 그리고 써넣어야 할 글자 순서야.”
 하지만 사내는 진소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진소천 역시 별다른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듯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찾겠다던 그 법칙은······.”
 “흥!”
 진소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내는 몸을 틀어 동굴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그런 사내의 뒤통수를 향해 진소천이 한마디 덧붙였다.
 “크크, 다 커서 삐치기는!”
 순간 사내의 발이 멈칫하는 듯했으나, 사내는 들어 올렸던 발을 내려놓으며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계속 상대해 봐야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으음······.”
 사내의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한쪽 구석에서 누군가의 침음성이 들렸다.
 각진 턱과 굵은 얼굴선에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듯 부리부리한 눈과 꽉 다문 두터운 입술이 자리를 잡아 꽤 강직한 느낌과 함께 순박한 느낌을 풍기는 중년 사내였다.
 뇌옥을 관리하는 율천대 부대주 맹도굉이었다.
 소리가 들리자마자 진소천이 기다렸다는 듯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재미있었어?”
 맹도굉은 오른쪽 팔꿈치를 탁자에 댄 채 조금은 지루한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웃고 있는 진소천을 향해 맹도굉이 조금은 애원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를 괴롭히는 게 그렇게 재미있나?”
 “이 지루한 감옥에 있으면서 그런 재미라도 없으면 무슨 낙으로 살아? 그리고 저 바보는 놀리기 딱 좋거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했다. 아무리 봐도 여느 죄수와 간수의 사이로 보이지 않았다. 굳이 따지면 한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는 나이 차이가 좀 있는 이웃 정도의 느낌이다.
 맹도굉은 진소천이 이 감옥에 갇힌 그때부터 그를 알고 지냈다.
 이곳의 관리를 맡으면서부터 맹도굉은 무림맹의 외부 행사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대부분 내부의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면 이곳을 관리하며 지냈다. 그러다 보니 묘하게 친해진 것이었다.
 물론 그러한 점을 감안한다 해도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맹도굉 스스로도 몰랐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진소천이 편하게 느껴졌고, 편하게 아무 이야기나 하는 것이 싫지가 않았을 뿐이다.
 진소천의 말에 맹도굉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허허, 무림맹 군사에게 바보라······.”
 “사실 저 바보가 무림맹 군사라는 사실이야말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지.”
 진소천의 말에 맹도굉은 슬며시 등받이에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진소천이 한 말을 가만히 곱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운현성. 방금 동굴 밖으로 바삐 걸어 나간 사내의 이름이자, 무림맹 군사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맹도굉이 아는 운현성은 ‘군사’라는 위치에 충분히 어울리는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냉철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진소천과 이야기만 하면 항상 저렇게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사실 맹도굉의 눈에도, 진소천을 만날 때의 운현성은 확실히 바보 같았다. 그러니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고민에 잠긴 맹도굉의 모습에 진소천이 씩 웃으며 물었다.
 “크크, 맹 형도 같은 생각인 모양이군.”
 “아니 그 보다는, 그냥 왜 그럴까 싶어서 말이야.”
 “뭐가?”
 “자네하고 이야기만 하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이유가.”
 “알려 줄까?”
 “응?”
 맹도굉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되물었다. 항상 궁금해하던 이야기였다.
 진소천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 물어보기가 애매했을 뿐이었다.
 맹주 직속의 율천대 부대주가, 무림맹 군사가 바보가 되는 이유를 묻는다는 게 모양새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쉬운 게 없잖아.”
 “흐음······.”
 듣자마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실 진소천은 이 감옥 안에서 아주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단점이기는 한데, 갇혀 있는 당사자가 딱히 그것에 목을 매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무림맹 측에서는 분명 진소천에게 아쉬운 것이 있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정말 가지고 있는 건가?”
 “뭘?”
 “운 군사가 보름마다 자네에게 색이 적힌 종이를 받아 가는 이유 말이야.”
 “크흐흐, 나중에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진소천이 대답을 거부하자 맹도굉도 더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막상 물어보기는 했는데 대답을 듣자니 꽤 애매한 부분이 있는 탓이었다.
 맹도굉의 반응을 확인한 진소천이 피식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맹 형도 이번 일정에 함께하는 거요?”
 “그렇다고 하더군.”
 “오랜만에 바깥 구경도 하고 좋겠네?”
 “자네만 하겠나?”
 “나는 딱히 안 나가도 상관없는데?”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진소천의 말에 맹도굉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 아무튼 이번 일이 잘 끝나면 자네도 자유의 몸이 되겠구먼.”
 맹도굉의 말에 진소천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하지만 맹주께서 그리 약속을 했다 하지 않았나?”
 “절대 그럴 리가 없다니까.”
 “가끔은 좀 믿어 보게.”
 선한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 맹도굉의 모습에 진소천은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꼈다.
 “맹 형은 세상 경험을 좀 더 해야 돼.”
 “어허, 그 사람 참! 내가 혼인만 일찍 했어도 자네 같은 자식을 봤을 걸세.”
 맹도굉의 나이는 이미 불혹을 넘었다. 진소천의 나이가 올해로 겨우 스물둘이니, 일찍 자식을 보았다면 비슷한 또래일 것이다.
 하지만 진소천에게 그런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아직 홀몸인 사람이 그런 소리하면 안 되지. 보아하니 맹 형 아직 숫총각인데?”
 “허허!”
 참으로 무례한 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맹도굉은 그저 너털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맹도굉이 진소천을 처음 만났을 때, 진소천의 나이는 겨우 열일곱이었다. 그리고 진소천의 말투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지금과 같은 말투였다.
 화가 날 법도 했지만 맹도굉은 화를 내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당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웃고 있는 맹도굉에게 진소천이 당부하듯 말했다.
 “그런데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인가?”
 “느낌이 안 좋아.”
 “무슨?”
 “나를 밖으로 내보낸다는 것부터가 이상해.”
 “그만큼 중대한 일이라서 그렇겠지.”
 그러나 진소천은 가볍게 고개를 젓는 것으로 맹도굉의 말을 부정했다.
 “맹 형이 중요한 사실을 몰라서 그래.”
 “중요한 사실?”
 “구양 늙은이가 날 여기에 잡아 두고 있는 이유 말이야.”
 진소천의 말에 맹도굉은 오래전 접어 두었던 의문을 다시 떠올렸다.
 적어도 맹도굉의 눈이 비친 진소천은, 감옥에 갇혀 있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를 위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소천은 이곳에 갇혀 있었고, 그 스스로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진소천은 그것을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맹주인 구양제현도 군사인 운현성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니, 그것을 궁금해하는 것 자체를 금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뭔가?”
 맹도굉이 조심스레 이유를 물었지만, 진소천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몰라도 돼. 아니, 알면 안 돼. 예전에 말했잖아?”
 “그렇지만······.”
 “자자, 거기까지. 알면 다쳐. 아, 난 이제 좀 자야겠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맹도굉의 말을 끊은 진소천이 몸을 돌려 침상으로 가더니, 팔베개를 하고 누워 버렸다.
 “쩝!”
 맹도굉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진소천의 행동이 더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침상에 드러누워 눈을 감은 채 맹도굉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진소천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구양 늙은이의 반응이 뭔가 좀 찝찝한데?’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운현성이 온 그 순간이었다.
 어제 구양결에게 황금화를 요구했었다.
 그리고 오늘 찾아온 운현성은 황금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섯 달 동안 쓸 색 목록을 요구했다. 즉, 진소천은 감옥에서 나가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림맹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였다. 진소천의 요구를 들어주거나, 묵살하고 억지로 내보내거나.
 하지만 진소천은 후자의 경우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림맹에서 자신을 윽박지를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소천이 개운하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는 그 과정이었다. 무림맹이 진소천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는 해도, 이렇게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맹주인 구양제현이나 운현성, 하다못해 어제 왔던 구양결이라도 와서 투덜거리기라도 해야 했다.
 ‘뭘 꾸미고 있는 거지?’
 평소와 다른 행동이라는 것은 결국 평소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의미.
 그러니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보는 쪽이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이 감옥 안에 있는 한 알 수가 없다.
 ‘뭐, 어차피 나가면 알게 될 일.’
 
 진소천이 갇혀 있던 감옥을 벗어난 운현성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운현성은 감옥에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와 냉정한 표정 등 진소천 앞에서 당황하고 화내던 모습은 도통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것이 평상시 그의 모습이었는데, 유독 진소천과 이야기만 하다 보면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해 매번 당하고 마는 것이었다.
 한참을 걸어 운현성이 도착한 곳은 의천각이었다.
 의천각은 무림맹의 각 부서의 집무실이 모여 있었는데, 운현성은 취의전(聚議殿) 앞의 긴 복도를 따라 그 끝에 있는 문 앞에 섰다. 무림맹주의 개인 집무실이었다.
 “맹주님, 현성입니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장년의 사내가 운현성을 맞이했다.
 현 무림맹 맹주인 구양제현이었다. 보기에는 이제 겨우 마흔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순이 넘은 나이였다. 고절한 무공 덕분에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은 몸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 되었나?”
 “별다른 말은 없더군요. 다만 제 실수로 놈이 목적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네. 어차피 놈도 다 알게 될 일이 아닌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놈이 미리 알게 된다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운현성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지만, 구양제현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마차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제 생각에는 맹주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네도 그리 생각하나?”
 “어차피 운남까지 가는 길은 피로 여는 혈로가 될 것입니다. 동행하는 구양 공자의 안위까지 생각한다면 맹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다만,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뭐, 그건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이번 일에 확실히 결론을 지을 생각이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당장 남경으로 사람을 보내고, 장인들을 모으도록 하겠습니다.”
 운현성의 말에 구양제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갑자기 은밀한 눈빛으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외의 준비는?”
 “이미 따로 사람을 풀어 준비를 해 두었습니다. 시기만 알려 주면 바로 시작될 겁니다.”
 “잘했네. 그럼 계속 진행 상황을 알려 주게.”
 “예,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직 안 자고 있었느냐?”
 문이 열리며 들리는 소리에 구양결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이미 누군가 자신의 방으로 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 안에 들어선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양제현이었다.
 “아, 아버지. 운남까지 가는 길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밤늦게까지 고생이 많구나. 앉거라.”
 구양제현이 먼저 다탁에 앉고, 맞은편에 구양결이 앉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아니다.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구양제현의 말에도 구양결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구양결은 자신의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밤늦게 찾아와 격려를 해 줄 정도로 다정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걱정 되는 일이라도 있는지요?”
 “으음······.”
 구양결의 생각이 맞는지 구양제현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소천, 그자를 만나 보니 어떻더냐?”
 “안하무인에 무례한 자였습니다.”
 “그랬겠지. 원래 그런 놈이니까.”
 “그런데······.”
 뭔가 말을 꺼내려던 구양결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그것이······.”
 “어서 말해 보아라.”
 “예, 그곳에 있던 가구며 집기들이 감옥이라고는 생각하기가 힘들더군요. 제 생각으로는 아버지께서 묵인하신 일인 것 같은데,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놈의 협박이 있었다.”
 “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구양결이 당혹스러운 외침을 터트렸다.
 협박이라니. 감옥에 갇힌 자가 어떻게 자신을 가둔 자를 협박한단 말인가. 아니 그것을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가 그 협박에 굴복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들이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듯 구양제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놈이 그곳에 갇혀 있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적다. 나와 운 군사, 감옥을 지키는 율천대원들, 그리고 무당과 화산 장문인이 알고 있다.”
 “으음!”
 진소천에 대한 이야기를 철저히 함구하라는 말을 들었었기에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있으리라는 건 짐작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일에 무당과 화산의 장문인이 연계되어 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두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와 젊은 시절부터 절친한 관계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이야기는 그다음부터였다.
 “그놈이 협박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무당과 화산 장문인이었다.”
 “어떤 식으로 협박을 했기에 수인이 그런 호사를 누린단 말입니까?”
 “비급이다.”
 “네?”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무당과 화산 비급의 필사본을 강호에 풀어놓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 그 말을 믿었단 말입니까?”
 무공 비급을 풀겠다는 건, 해당 문파의 근간을 무너트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협박을 하기에 충분한 무기가 된다. 단, 필사본이 있다는 전제 하에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문파라 해도, 자파의 비급은 필사적으로 관리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무당과 화산이다. 그런 거대 문파가 자파의 비급 관리를 소홀하게 할 리가 없었다.
 구양결로서는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한 일. 하지만 구양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놈이 증거를 보여 줬으니까.”
 “즈, 증거라고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구양제현의 모습에 구양결은 갑자기 머릿속에 무언가 번뜩하고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 설마 오 년 전에!”
 “그래.”
 오 년 전이면 구양결이 열다섯이던 해였다. 아직 무공 수련에만 전념하던 때였지만, 워낙 무림을 떠들썩하게 했던 소문이었기에 구양결도 알고 있었다.
 화산파 최고의 절기 중 하나인 이십사수매화검의 비급이 화음현에 나타났다는 내용이었다.
 “그, 그것이 사실이었던 겁니까?”
 당시 화산에서는 절대 사실이 아니라고 공표를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화산에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거짓을 말했던 모양이다.
 구양제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틀림없는 사실이었지. 다행스럽게도 화음현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다른 사고 없이 회수할 수는 있었지만 말이다.”
 “감옥에 있던 자가 어떻게 비급의 필사본을 그곳에 풀어놓았단 말입니까?”
 “그놈의 말로는 친구가 많다 했었지.”
 “하지만 그자가 외부에 있는 누군가에게 연락을 취할 방법이 없었을 것 아닙니까?”
 구양결이 질문에 구양제현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현재 그 연락을 우리가 대신하고 있지.”
 “그, 그게 무슨 말씀······.”
 점입가경, 들으면 들을수록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말하는 형태의 깃발을 보름에 한 번 이릉 저잣거리에 올리면 비급이 풀리지 않을 거라 하더구나.”
 “깃발을요?”
 “그래, 당연히 매번 모양이 바뀌는 깃발이다.”
 “어, 어떻게요?”
 “세모꼴에 가운데 하나의 글자가 들어가는 깃발이다. 매번 깃발과 테두리, 글자의 색이 바뀌고 글자 또한 바뀌지.”
 “그러니까······. 매번 자신이 정한 형태의 깃발이 올라가지 않으면 문제의 필사본이 강호에 풀릴 거라고 협박을 했다는 말이군요.”
 구양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구양결의 의문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깃발의 색 조합을 만드는 일종의 법칙이 있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우리도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운 군사가 그 법칙을 알아내려고 했지.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법칙은 없다고 하더구나.”
 “네?”
 “운 군사가 내린 결론으로는 그렇다고 하더구나. 무작위로 조합을 만들어 놓고 순서를 정해 그것을 통째로 외운 것 같다고 하더구나.”
 구양결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보름에 한 번이라면 일 년 동안 올려야 하는 깃발은 모두 스물네 개입니다. 그리고 깃발 하나는 세 개의 색과 하나의 글자로 총 네 개의 조합입니다. 깃발 하나 당 네 개의 목록을 외워야 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는 것은 일 년이면 총 구십육 개의 목록입니다. 그리고 오 년이라 하셨으니, 지금까지 총 사백팔십 개의 목록을 불러 준 겁니다. 물론 그 정도면 힘들기는 해도 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자가 얼마나 갇혀 있을 줄 알고 그것들을 미리 만들어 외워 둔단 말입니까?”
 “정확하게는 팔백사십 개다. 각 색깔의 염포를 파는 포목점까지 지정을 했으니, 깃발 하나 당 일곱 개의 목록인 셈이지.”
 “그, 그게 구분이 된단 말입니까?”
 구양결이 허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상한 이야기를 너무 들은 탓에 이제는 더 놀라기도 힘들었다.
 “가끔은 포목점마다 확연히 구분이 갈 정도로 차이가 있는 것들도 있지.”
 “어, 어쨌든 문장도 아닌 단순한 포목점의 이름과 색깔과 글자의 나열입니다. 만약 십 년이라면 천육백팔십 개가 됩니다. 놈이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다 외우고 있다는 말입니까?”
 “믿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지만, 청허나 호겸 그 사람들로서는 모험을 할 수 없는 일이었지.”
 청허는 무당 장문인의 도명이었고, 호겸은 화산 장문인 이호겸이었다.
 “후우.”
 구양결이 작은 소리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구양제현이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해 주는 이유는, 그 만큼 용의주도하고 흉계를 꾸미는 데 능한 놈이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다. 가는 동안 절대 놈에게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아, 알겠습니다.”
 “명심하거라. 절대, 절대 놈에게서 눈을 떼서는 안 된다.”
 “예, 아버지. 믿어 주십시오. 반드시 이번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대한 일을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 들은 이야기는, 진소천을 밖으로 풀어놓는다는 것은 크나큰 위험을 안고 있는 일이었다.
 그런 중대한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을 믿고 있다는 뜻이다.
 그 이야기로 인해 한층 더 긴장되기는 하지만, 그 만큼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이기에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했다.
 구양제현이 아들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이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보았기에 맡긴 일이다.”
 구양제현은 한 번 더 아들의 어깨를 다독거린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 테니 하던 일 마저 하거라.”
 “예, 아버지.”
 구양제현이 방을 나선 후 구양결은 원래 앉아 있던 탁자로 돌아가 앉았다.
 탁자 위에는 호광 북부와 사천, 귀주, 그리고 운남의 각 지역을 정교하게 그려 놓은 지도들이 놓여 있었다.
 지도에는 붉은 선들이 빼곡하게 그어져 있고, 곳곳에 따로 주석을 달아 놓은 상태였다.
 “다시 짜야 하나?”
 구양결이 지도를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돌발 상황이나 혹시 모를 외부의 공격을 감안해 최대한 안전하고 신속한 경로를 만들어 놓았었다.
 하지만 진소천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우선순위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진소천이 엉뚱한 짓을 꾸미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했다.
 “도대체 뭘 하는 놈이기에······.”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머리가 아파 왔다. 그가 만난 진소천은 아무리 많이 봐줘도 자신보다 두어 살 많은 나이였다.
 오 년 전에 잡혀 왔다고 하니 당시 나이는 대략 열여섯이나 열일곱. 겨우 그 나이에 무당과 화산의 장문인, 그리고 무림맹주를 가지고 놀았다는 뜻이었다.
 ‘정말 머리가 비상한 놈이거나, 미친놈이 분명하군.’
 그가 이번에 맡은 일은 정말 중대한 일이었다. 그런데 절대 상식선에서 생각할 수 없는 놈이 동행한다고 생각하니 한층 더 어깨가 무거워졌다.
 “후우!”
 구양결은 깊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절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2장. 장마노와 흑왕
 
 
 
 
 
 “허!”
 짧고 탁한 한숨 뒤에 남궁무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감정이었다.
 실망스럽고 모욕적이며 황당함과 더불어 허탈함과 배신감까지 짙게 배어 있는 표정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남궁무원이 불신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 보시오.”
 그 목소리에는 은근하면서도 짙은 살기가 배어 있었다. 그 살기를 느낀 탓인지 마주 서 있던 중년의 사내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오늘 벌써 세 번째다.
 “죄송합니다, 남궁 공자!”
 “나는 죄송하다는 말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겠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요!”
 “하, 하지만 그것이······.”
 중년 사내, 황윤은 난감한 얼굴로 말끝을 흐릴 뿐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와 약속을 한 것이 벌써 넉 달 전이지 않소!”
 남궁무원이 버럭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황윤은 연방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으득!
 남궁무원이 이를 갈아붙이며 황윤을 노려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도대체 안 된다는 이유가 뭐요!”
 이유를 물어 보게 되면 설명을 듣게 되고, 설명이 타당할 경우에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무림의 사대세가 중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궁세가의 장남이, 타당한 이유를 듣고도 상대를 핍박하는 것은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는 즉시 그는 소가주라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물론 남궁무원의 속마음이야 그렇지 않았지만, 중인환시에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만약 아무도 보는 이가 없었다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순간 황윤은 이미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남궁무원이 아는 황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말은 분명 타당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고, 그렇기 때문에 남궁무원은 지금까지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다.
 “장마노(張馬老)가 팔이 부러졌습니다.”
 “팔을? 어쩌다가 다쳤소?”
 “그것이······. 말에서 떨어져서······.”
 “큭!”
 남궁무원이 갑자기 코웃음을 터트렸다. 예상과는 달랐다. 황윤에게서는 타당한 이유가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을 지금 믿으라고 하는 말이오?”
 남직례(南直隷)에 있는 그 누구도 믿지 않을 말을 지금 황윤이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마노가 말에서 떨어져 다쳤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그의 이름은 장마노가 아니라 장현천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장현천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장마노가 누구인지는 안다.
 마술(馬術)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인물이었다.
 말을 보는 안목과 길들이기, 그리고 기마술에 있어서만큼은 중원 최고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였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장마노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런 장마노가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다니. 절대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어디 한 번 봅시다. 그가 정말 팔이 부러졌는지.”
 “지, 지금 치료를 받으러 가서 장원에 없습니다.”
 “없다고?”
 “예, 소호(巢湖)에 접골에 능한 의원이 있다 하여 치료를 받으러 갔습니다.”
 “육의원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황윤을 보며 남궁무원은 할 말이 궁해지는 것을 느꼈다.
 전혀 타당한 느낌이 들지 않는 말인데도 불구하고 추궁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물론 더 추궁을 해 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호 호숫가 어딘가에 있다는 육의원을 찾아가서 확인한 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인데 믿는 도리밖에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그러다 문득 남궁무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있었다.
 생각이 떠오른 남궁무원이 가만히 장원 안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흑왕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뭐요?”
 “아! 그, 그것이······.”
 당황하는 황윤의 모습에 남궁무원은 더욱 짙은 비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내가 알기로 장마노가 없으면 흑왕은 하루 종일 울어 댄다고 하던데 말이오. 그래서 장마노가 방도 마다하고 마구간 옆에 따로 침상을 놓았다고 들었소만?”
 고삐를 매고 있는 야생마. 흔히 흑왕을 일컫는 말이었다.
 발굽에는 제철(蹄鐵)을 신고 안장을 얹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탈 수 없는 말이 바로 흑왕이었다.
 오직 한 사람, 장마노만이 흑왕의 안장에 오를 수 있고, 흑왕을 부릴 수 있었다.
 한때 그런 소문이 도는 바람에, 중원의 내로라하는 말 조련사들이 흑왕에게 덤벼들었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가끔 무공의 고수들이 힘으로 흑왕을 제압한 적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힘으로 눌러도 흑왕을 몰고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단순히 장마노의 말만 듣는 수준이 아니었다. 장마노가 없으면 하루 종일 울어 대고 난동을 피워, 같은 마사에 있는 다른 말들이 흑왕의 뒷발에 차여 줄줄이 죽어 나갔다.
 그 탓에 장마노는 아예 마사 한쪽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거기에서 숙식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분명 장마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흑왕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장마노의 말을 잘 듣는다 해도, 팔이 부러진 장마노가 흑왕을 끌고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을 터.
 남궁무원이 나지막하지만 위압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사실을 말해 줄 때가 된 것 같소만?”
 “그, 그것이 사실은······.”
 황윤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뭐라고 말하려는데, 남궁무원이 그 말을 자르며 한마디 더 보탰다.
 “이번에는 사실을 말해 주었으면 좋겠소.”
 순간적이지만 짙은 살기가 황윤에게 엄습했다. 그것을 느낀 황윤이 핼쑥해진 안색으로 뭔가 포기한 듯 입을 열었다.
 “무림맹입니다.”
 “음?”
 “무림맹에서 장마노와 흑왕을 포함해 다른 말들까지 모두 끌고 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황 장주는 남궁세가보다 무림맹이 더 중했던 모양이구려. 미리 정해져 있던 약속까지 어길 정도로?”
 “그,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남궁 공자와의 약속을 말했지만, 그 부분은 무림맹에서 알아서 하겠다 하여······.”
 뭐라고 말을 맺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듯, 황윤은 말꼬리를 흐리며 남궁무원의 눈치를 살폈다.
 ‘무림맹이라니.’
 남궁무원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림맹에서 무슨 이유로 장마노와 흑왕을 끌고 갔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궁금해진 것이 있었다.
 “그렇다면 황금화[鐵花]는?”
 황금화는 한 대의 마차였다. 꽃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쇠처럼 단단한 한 대의 마차.
 황윤은 이 황금화를 돈을 받고 빌려 주었는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탐을 내 아무 때나, 그리고 아무나 돈만 낸다고 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탓에 처음 황금화가 등장했을 때는 황족이나 고관대작들만이 마차를 빌릴 수가 있었다. 그러니 직급에 따라 순서가 정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이유로 일반 세가나 무림인들은 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그들이 황금화를 빌릴 수 있게 된 것은 거의 반년 전쯤부터였다.
 남궁무원이 넉 달 전에 약속했던 것도 바로 그 황금화였다.
 그런데 이 황금화는 흑왕이 있어야만 달리는 것이 가능한 마차였다. 그러니 장마노와 흑왕까지 데리고 갔다면 필시 황금화를 쓰기 위한 목적이라 생각했기에 물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황윤은 손으로 장원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금화는 장원 안에 있습니다. 무림맹에서는 장마노와 흑왕을 포함한 말들만 데리고 갔습니다.”
 “으음······.”
 남궁무원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
 황금화를 끌게 할 목적이 아니라면 무림맹에서 왜 장마노와 흑왕을 데리고 갔단 말인가? 듣기로는 흑왕도 그렇지만 흑왕의 새끼들 역시 장마노가 아니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했었다.
 즉, 명마 중의 명마지만 탈 수 없는 명마들. 그런 말들이 여덟 마리나 필요할 이유가 없었다.
 ‘뭔가 냄새가 나는데?’
 여기서 황윤을 더 추궁해도 알아낼 것은 없을 듯했다.
 남궁무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천천히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황윤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남직례에서 남궁세가를 무시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지겠소.”
 “나, 남궁 공자!”
 황윤이 다급한 표정으로 외쳤지만, 남궁무원은 이미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남경 서쪽의 번화한 거리에 우뚝 솟아 있는 오층 누각의 입구 편액에는 천향루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흔히 남경제일루라 불리는 곳이었다.
 남경이 응천부라 불리던 시절부터 단 한 번도 최고라는 수식을 빼앗긴 적이 없는, 말 그대로 극상의 맛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유명하고 대단한 곳일수록 건물은 높이 올라가기 마련이고, 층이 높을수록 자리 값이 비싸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천향루의 5층. 모든 식탁이 창가에만 자리 잡고 있어, 창문만 열면 남경의 풍광을 내려다보며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식탁의 수도 적었고, 그만큼 앉는 것만으로도 거금을 들여야 하는 곳이었다. 그중 한 식탁에 홀로 앉아 있는 여자가 있었다.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관천의 딸, 모용혜였다.
 둘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뛰어난 미모와 더불어 깊은 혜안으로 모용관천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모용혜는 다로를 포함한 다기들만이 놓인 식탁을 앞에 둔 채, 가끔 올라오는 계단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가장 앞에서 황윤에게 으름장을 놓고 사라졌던 남궁무원이었다.
 “모용 소저.”
 남궁무원이 모용혜가 있는 식탁으로 곧장 다가가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모용혜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사과부터 건넸다.
 “오래 기다리셨소.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괜찮아요.”
 모용혜는 별다른 말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남궁무원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 동작에도 하나하나 기품이 서린다.
 ‘훗, 이러니 내가 정신을 못 차리지.’
 남궁무원은 누군가에게 감탄한 적도 양보를 한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남궁세가라는 배경과 소가주라는 자리, 그리고 무공에 대한 천부적인 자질.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인간이었기에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감탄하고 양보하는 대상이 모용혜였다. 남궁무원이 황금화를 빌리려 했던 이유도 모용혜가 황금화를 타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애써 정신을 수습한 남궁무원이 모용혜의 맞은편에 앉으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이런 말을 꺼내기가 참으로 민망하오만, 황금화를 빌릴 수 없게 되었소이다.”
 모용혜가 살짝 고개를 외로 꼬며 물었다.
 “무슨 말씀인가요? 남궁 공자께서 미리 약속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지금부터 말하려던 참이었소. 그리고 이건 변명 같겠지만, 황금화보다 더 흥미를 가질 만한 일이 일어났소. 황금화야 나중에 탈 수도 있지만, 이 일은 지금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오.”
 모용혜의 얼굴에 흥미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기 눈앞에 있는 남궁무원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가진 완벽한 사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실수에 대해 변명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완벽하고 오만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변명하는 것이 오히려 소인배로 보인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모용혜가 미래의 남편감으로 그를 고른 것이었다. 그런 완벽한 인물만이,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있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남궁무원이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 그런 일이 있었다는 의미다.
 “무슨 일이죠?”
 “무림맹에서 장마노와 흑왕을 포함해 다른 일곱 마리 말들까지 모두 끌고 갔다 하오.”
 남궁무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확실히 황금화보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무림맹이요? 그들이 남궁세가를 무시할 수는 없을 텐데요?”
 “그러니 더욱 흥미로운 일이 아니겠소?”
 무림맹은 말 그대로 무림 세력들의 뜻을 모으는 곳이지, 무림 위에 군림하는 곳이 아니었다. 무림맹주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맹에 속해 있는 각 세력의 주인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인물이지, 전체 무림 위에 군림하는 인물이 아니다.
 무림맹에서 길러 낸 무인들이 있었고, 그들만의 독자적인 움직임을 취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림맹에 소속되어 있는 문파나 세가의 권한을 침범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남궁무원의 선약을 무시한 것이 남궁세가의 권한을 침범한 것이라고 규정하기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암묵적으로 지켜 주어야 할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마노와 흑왕을 끌고 갔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남궁무원과 모용혜에게는 흥미로운 일로 다가오는 것이다. 아무런 힘도 없는 무림맹주가 그런 일을 한 것은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
 모용혜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그 소문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닐까요?”
 “소문이라니?”
 “반년 전에 돌았던 그 소문 말이에요.”
 모용혜의 설명에 남궁무원도 뭔가 생각난 듯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검선유고(劍仙遺庫)말이오?”
 “네.”
 검선(劍仙)은 무림에 회자되는 전설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가 실존 인물인지조차 확인된 바가 없었다.
 그에 대해서는 이백여 년 전에 활약했던 검공의 고수이며, 어느 날 더 이상 검으로 깨달을 것이 없다며 태산에 올라 우화등선했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제법 나이가 있는 무림의 명숙들은 ‘검의 신선’이라는 그 별호가 가진 강렬한 느낌 때문이라 말하며,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는 않다 여기는 추세였다.
 그런 검선의 전설에 한 가지가 더해진 것이 반년 전이었다. 검선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장보고(藏寶庫)가 운남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곳에는 검선이 평생 강호를 떠돌며 모았던 수많은 보물들과 그와 평생을 함께했다는 보검 현령검(玄靈劍), 그리고 그의 무공비급이 잠들어 있다고 했다.
 대부분 신빙성이 없다고 말했다. 실존 인물인지조차 확인이 안 된 사람의 물건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 대부분이 귀를 쫑긋 세웠다. 검선, 그리고 전설이라는 것이 가지는 거대한 힘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둘 무인들이 운남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움직인 자들은 낭인들이었다. 낭인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뉘는데, 돈을 받고 무공을 파는 이들과 수련을 위해 떠돌아다니는 이들이다.
 그리고 그 두 종류의 낭인들이 모두 움직였다. 어떤 이들은 무공을 위해, 어떤 이들은 돈을 위해.
 그다음은 흑도의 방파들이, 마지막으로 정파를 자처하는 중소 방파들이 움직였다.
 그냥 떠도는 말로 흘려듣기에는 검선의 장보고가 가지는 유혹이 너무 강했다. 만에 하나 정말 장보고가 있다면 그것을 놓쳐서 억울해하느니 헛수고가 되더라도 가보겠다는 심리도 강하게 작용했다.
 그리고 떠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일부는 아직까지 남아서 검선유고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검선유고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모용혜가 뜬금없이 그 이야기를 꺼냈으니 이상하게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검선유고는 이미 거짓이라고 판명 나지 않았소?”
 모용혜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검선유고가 발견되지 않는 한 그것의 진위 여부를 확신할 수는 없지요. 진짜 있는데 찾지 못했을 가능성은 남아 있으니까요. 그리고 혹시 누군가 그걸 찾았다면 과연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할까요? 아니면 사실을 숨길까요?”
 “하지만 구파일방과 세가들은 검선유고에 대해 처음부터 관심이 없지 않았소? 그런데 갑자기 이번 일과 그 일을 연관 짓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소이다.”
 “또 다른 소문이 있잖아요.”
 “어떤 소문 말이오?”
 “무당과 화산의 후기지수들이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그거야 알고 있지만, 그것이 검선유고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오?”
 “모용세가의 비선(秘線)에 걸려든 이야기 중 하나가 있어요. 검선유고의 소문이 있던 당시에 무당과 화산에서 비밀리에 하오문과 접촉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무림맹의 비선 조직 일부가 운남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었지요.”
 아무리 뜬소문이라 해도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이어지면 꽤나 신빙성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모용 소저는······. 무당과 화산, 그리고 무림맹이 독자적으로 혹은 함께 검선유고를 조사하고 있으며, 이번 장마노와 흑왕도 그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거요?”
 “모든 추측이라는 것이, 한쪽 방향으로만 생각하다 보면 그것이 사실처럼 느껴지는 법이니 확신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남궁무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는 무림맹의 이번 행사를 쫓아가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검선유고와 관련된 무언가를 얻게 된다면?
 ‘어쩌면 이번 여행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얻게 될지도 모르겠군.’
 생각에 잠긴 남궁무원을 향해 모용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남궁 공자는 지금부터 그 일을 쫓을 생각인가요?”
 “아무래도 그래야 될 것 같소이다.”
 “그렇군요.”
 짧은 문답 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남궁무원의 얼굴에 조급함이 떠올랐다.
 황금화를 타고 가는 여행은 못하게 되었지만, 무림맹의 이야기를 통해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모용혜의 반응이 영 시원찮은 탓이었다.
 그리고 모용혜는 남궁무원의 반응을 즐겼다. 그가 자신에게 목을 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러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남궁무원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포기를 하려는 듯한 얼굴. 그것을 본 모용혜가 재빨리, 하지만 조금도 급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말했다.
 “저도 동행해도 될까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궁무원의 얼굴에 일종의 안도감이 떠올랐다.
 모용혜는 남궁무원에게는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인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남궁무원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럼 서두릅시다.”
 “그래야죠.”
 
 사방이 탁 트인 공터인데도 불구하고 요란한 소음이 가득하다. 바로 옆 사람과 대화를 하는 데도 큰 소리로 말을 해야 겨우 듣는 것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공터를 가득 메운 채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은 목수 이거나 대장장이들이었다. 한쪽에서 목재를 자르고 다듬고, 다른 한쪽에서는 풀무질과 망치질 소리가 요란하다.
 그 공터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 위에 한 청년이 눈살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그때 그의 뒤쪽에서 인기척과 함께 한 사내가 다가왔다.
 먼저 서 있던 청년과 매우 닮은 얼굴로 한눈에 봐도 서로가 형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먼저 있던 청년이 이제 갓 약관을 넘은 듯한 나이라면, 나중에 다가온 사내는 마흔쯤으로 나이 차가 꽤 있을 뿐이었다.
 뒤돌아본 청년이 다가오는 사내를 알아보고는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형님?”
 사내가 가볍게 손짓을 하며 인사를 받았다.
 “그래, 알려 줄 것이 있어서 왔다.”
 “알려 줄 것이라니요?”
 “흑왕이 도착했다.”
 “아아.”
 고개를 끄덕이는 청년의 이름은 구양결, 그리고 나란히 선 사내의 이름은 구양윤이었다. 현 무림맹의 맹주인 구양제현의 두 아들로 두 사람 사이에는 스물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마차 제작은 얼마나 진척이 있느냐?”
 “이제 닷새 정도만 있으면 끝이 난다 합니다.”
 “닷새라······. 그럼 이제 곧 출발할 수 있겠구나.”
 “네, 그렇습니다.”
 대답을 하는 구양결의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구양윤이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느냐?”
 “그것이······. 형님께도 자세한 사정을 말해 줄 수 없는 것이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요.”
 구양윤은 이번 일이 대충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지, 저 마차가 왜 필요한지는 모르고 있었다.
 워낙 비밀스러운 일이라 구양윤에게도 함구령이 내려진 탓이었다.
 하지만 구양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구양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어떤 때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은 일이 있는 법이다. 그것은 가족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으니 네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예, 형님.”
 구양결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라면 아주 섭섭해했을 일인데, 자신의 형은 넓은 마음으로 그것을 이해해 준다.
 구양결 자신이 아버지 다음으로 존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구양윤의 미소에 안심한 표정을 지은 구양결이 천천히 마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젠장!’
 제작되고 있는 마차를 보니 괜스레 울화가 치밀었다.
 ‘황금화라니!’
 진소천이 황금화를 준비하라는 말에 구양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황금화, 남경의 명물 중 하나로, 중원 제일의 목공이라 알려진 이홍위가 귀하디귀한 목재를 몇 년 동안 다듬어 만든 최고의 마차였다.
 길이만 해도 보통 마차의 세 배에 이르는, 이 마차에는 침상에 목욕통까지 마련되어 있는 호화로운 마차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락함이다.
 그 커다란 마차가 달리는데도 불구하고 타고 있는 사람은 거의 흔들림을 느끼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게다가 마차 외부에는 수많은 연꽃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고, 멀리서 보면 마차 전체가 한 송이 황금색 연꽃으로 보일 정도로 아름답다. 그래서 황금화라 불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소천이 그 황금화를 요구해 왔다.
 ‘너랑 같이 가면 노숙을 밥 먹듯 할 것 같은데, 나는 이슬 맞으면서 자는 취미는 전혀 없거든. 그리고 목욕도 매일 해야 된단 말이야.’
 진소천이 황금화를 요구하며 꺼내 든 이유였다. 구양결은 당연히 이런 미친놈을 봤나 하는 표정으로 거절했다.
 그 역시 황금화에 대해 알고 있었다.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무인에게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물건이라는 생각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쓰는데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는 알고 있었다.
 ‘아니면 말고. 나는 밤이슬 맞고 자면서까지 바깥 구경을 하고 싶지는 않거든.’
 말은 장난스럽게 하는데 눈에는 진지함이 가득했다.
 결국 구양결은 구양제현에게 보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구양제현이 황금화를 빌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황금화와 비슷한 마차를 만들라고 지시한 것이었다.
 아니, 비슷한 정도가 아니다.
 마차의 벽과 지붕, 바닥을 이루는 나무판을 두 장으로 하고 그 사이에 철판까지 집어넣도록 지시를 했다. 황금화보다 훨씬 더 튼튼하게 만들도록 한 것이었다.
 지금 저 아래 보이는 공터의 광경은 그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그리고 황금화를 끄는 흑왕을 포함한 여덟 마리 말들이 필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황금화는 아름답고 안락한 마차였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그 엄청난 무게였다.
 물에 가라앉은 정도로 무거우면서 단단한 나무인 금단목(金檀木)으로 만든 데다 보통 마차의 세 배나 되는 길이 때문에 너무 무거워 끌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 된 것이 흑왕이었다.
 흑왕의 씨를 받아 태어난 말들 중 가장 강인한 말들을 포함해 여덟 마리의 말이 황금화를 끌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무림맹에서 만드는 마차 또한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금단목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철판을 끼워 넣었고, 황금화와 비슷한 길이로 인해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그런 이유로 그 마차를 끌기 위해서, 황금화를 끄는 흑왕과 나머지 일곱 마리 말들을 불러온 것이었다.
 만들고 있는 마차를 보고 있으니 구양결의 머릿속에 풀리지 않았던 의문이 떠올랐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사실을 아실 텐데도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시는 이유도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황금화를 끌고 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었다. 황금화 역시 불에도 잘 타지 않는 단단하기 짝이 없는 나무가 아닌가.
 “얼핏 들은 이야기지만, 시간이 촉박한 일은 아니라더구나. 그러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다. 언제 아버지께서 아무 이유 없이 무언가를 하시더냐?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이번 일을 잘 마무리할 생각이나 해라.”
 “물론 그래야지요.”
 고개를 끄덕인 구양결이 힐끔 형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빙긋 미소를 지었다.
 구양윤의 행동 하나하나에서는 이제 연륜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많은 경험을 통해 이름을 알리고 대협이라 칭송받는 형은, 구양결이 평생 뒤를 쫓아가야 할 사람이었다.
 사실 그는 꽤 조급해하고 있었다.
 구양결은 무림맹주 구양제현의 아들로 태어나 아주 어려서부터 고련에 고련을 거듭해 왔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 났는데 쉼 없이 단련을 해 온 덕분에 그의 무공은 그 또래에서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단지 그뿐이었다.
 무공은 물론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였지만, 정작 그것으로 활약을 할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인 구양제현이 그에게는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경험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미 열여덟에 강호에 출사표를 던졌다. 몇 번의 강호행을 통해 협행을 쌓았고, 나름의 이름도 얻었다.
 하지만 강호의 모든 이들에게 굵은 인상을 남길 만한 것이 아직 없었다. 그것이 그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고, 자칫하면 형을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중책을 맡게 된 것이었다.
 아직은 무슨 일인지 공표할 수 없지만, 일이 끝나면 자신은 무림에 굵은 인상을 남길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존경하는 형에게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구양윤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짓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마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말했다.
 “이만 내려가자꾸나. 흑왕을 끌고 온 장마노라는 사람도 만나야 되지 않겠느냐.”
 “예, 형님.”
 
 “음!”
 장마노를 처음 본 구양결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는 등이 거의 직각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중원에서 가장 말을 잘 다룬다는 장마노가 꼽추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놀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얼굴이 심하게 얽어 있어 반백의 머리를 보고서야 나이를 짐작하는 것이 가능했다.
 잠시 장마노의 위아래를 훑어보던 구양결이 그제야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사과를 했다.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반응이 장마노에게는 꽤 익숙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장현천이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커다란 죽립을 머리 위에 얹어 얼굴을 가렸다.
 할 말이 궁색해진 구양결이 뒤쪽에 있든 접객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먼 길을 오셨을 테니 일단 좀 쉬십시오.”
 “아니오. 흑왕은 내가 보이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나는 마구간에서 자겠소.”
 그제야 구양결의 시선이 장마노 뒤쪽에 있는 커다랗고 검은 말 쪽으로 향했다.
 ‘아!’
 감탄이 절로 터져 나왔다. 한낱 짐승에게 ‘왕’이라는 이름이 가당키나 하냐던 이전의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크기는 보통 말들 보다 훨씬 컸고, 온몸 가득 꿈틀거리는 근육과 윤이 날 정도로 짙고 검은 털, 그리고 긴 다리가 그야말로 명마 중의 명마였다.
 그리고 그 흑왕의 씨를 받았다는 다른 말들 역시 흑왕 못지않게 훌륭한 말들이었다.
 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한 번 보기만 하면 반할 정도로 멋진 모습에, 구양결이 저도 모르게 흑왕을 향해 다가갔다.
 푸르릉!
 “흡!”
 몇 걸음 다가서던 구양결이 갑자기 흠칫한 표정을 지으며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갑자기 온몸을 엄습해 오는 강렬한 투기(鬪氣)에 놀란 탓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더욱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신경을 자극하는 그 강렬한 투기의 발원지가 다름 아닌 흑왕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흑왕을 바라보는 구양결의 귓전에 조금 짓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왕의 투기는 어지간한 장정도 오줌을 지릴 정도라오.”
 “대단한 말이군요!”
 구양결이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탄성을 터트렸다.
 “더는 다가가지 않는 게 좋을 거요. 흑왕은 나 외에 사람이 가까이 오면 일단 싸우려고 드니까 말이오. 그리고 녀석이 한 번 성질을 부리면 진정하는 데 며칠이 걸릴지 모르오.”
 “하하, 이거 내가 실수를 할 뻔했군요.”
 구양결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흑왕에게서 물러섰다.
 “그럼 이제 마구간으로 안내해 주겠소?”
 “예, 이야기를 듣고 마구간 옆에 따로 방을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그렇구려. 그런데 흑왕이 끌어야 한다는 마차를 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아직 제작 중이라······.”
 “흐음, 아주 튼튼해야 할 것이오. 안 그러면 마차가 부서질 테니.”
 흑왕과 다른 말들의 끄는 힘이 너무 강한 탓이었다. 일반적인 마차라면 덜컹거림이 심해 채 하루도 가지 못하고 부서질 것이 뻔했다.
 “걱정 마십시오.”
 “알겠소이다. 그럼 마구간으로 안내해 주시오. 흑왕도 좀 쉬어야 하니.”
 “알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 3장. 출옥
 
 
 
 
 
 “으으으윽!”
 진소천이 두 팔을 양쪽으로 쫙 펼치며 크게 기지개를 폈다. 구름 한 점 없는 탓에 강렬한 햇빛이 두 눈으로 바로 밀려들어 온다.
 오랜만에 보는 햇빛에 진소천은 기분 좋게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날씨 참 좋군!”
 느긋하게 햇볕을 쬐는 진소천의 모습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구양결이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고 널 꺼낸 게 아니다. 얼른 움직여.”
 “거 누가 어린놈 아니랄까 봐 성미 한 번 급하네. 알았다, 가자 가. 앞장서라.”
 구양결을 따라 산길을 내려온 진소천을 맞이한 것은, 네모반듯하고 기다란 한 대의 마차였다.
 슬쩍 마차에 매어져 있는 여덟 마리의 말을 확인한 진소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에 있는 말은 흑왕이 맞는 것 같은데, 마차는 황금화가 아닌 것 같다?”
 “네놈 때문에 맹주께서 특별히 제작하라고 지시하셨다. 네가 원하던 침상에 목욕통까지 들어 있다.”
 순간 진소천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뒤이어 짙은 의구심이 떠올랐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농담하듯 말을 던졌다.
 “응? 구양 늙은이가 진짜 노망이 들었나?”
 “이 자식!”
 구양결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진소천의 앞섶을 와락 그러쥐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드러난 팔뚝에 푸른 힘줄이 툭 불거져 나올 정도였다.
 “한 번만 더 맹주께 그따위로 말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말했을 텐데!”
 으르렁 거리는 구양결에게서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진소천은 처음의 피식 웃어 보였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였다.
 “알았다. 알았어. 그러니 좀 놔라. 숨 못 쉬겠다.”
 구양결은 분이 가시지 않는 듯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일단 쥐고 있던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때 한 떼의 인마가 마차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진소천이 한층 짙은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익히 아는 얼굴들이기 때문이었다.
 “어서와. 즐거운 여행이 될 거야.”
 선두의 말에 앉은 이는 율천대 부대주인 맹도굉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이들도 율천대 무인들이었다.
 모두 지난 오 년 동안 진소천이 갇혀 있던 특별 뇌옥의 관리를 책임졌던 사람들이었다. 오 년간 얼굴을 보고 지낸 덕분인지 다들 진소천에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맹도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를 보는 것도 이번 여행이 마지막이겠구먼.”
 “크, 말했잖아. 어차피 돌아와야 된다니까.”
 그 말에 구양결이 또 발끈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는 맹주의 약속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분명 아버지는 이번 일이 끝나면 놈을 풀어 준다고 말했었다.
 무림맹주가 입을 가볍게 놀릴 리가 없을 터. 그렇게 말했다면 분명 그리 하리라. 그런데도 눈앞의 이 죄수 놈은 그 말을 계속 무시하고 있었다.
 진소천이, 발끈하는 바람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구양결에게 딱하다는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넌 무림맹이 왜 날 잡아 놨는지 아냐?”
 “내 알바 아니다.”
 “모르면 말을 말던지.”
 “이익!”
 구양결이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진소천은 이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구양결이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마차에 매인 여덟 말이 말 중 선두에 서 있는 흑마, 흑왕이 보였다.
 “저놈이 흑왕인가 보군.”
 진소천이 진귀한 세공품을 감상하듯 세심한 눈길로 흑왕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 내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성큼성큼 흑왕을 향해 걸어갔다.
 갑작스러운 진소천의 행동에 놀라 멍하니 있던 구양결의 머릿속에 며칠 전, 장마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거, 거기 서!”
 “응?”
 진소천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돌려 되물으면서도 걸음은 쉬지 않고 흑왕에게로 향했다.
 히이이잉―!
 갑자기 우렁찬 말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느새 흑왕은 앞발을 들고 허공을 향해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히이잉!
 흑왕의 사나운 기세에 다른 말들이 덩달아 놀라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쿠쿠쿵!
 여덟 마리 말의 몸부림이 어찌나 거센지 무겁기 짝이 없는 마차가 들썩이며 땅을 찧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멈추시오!”
 흑왕의 무시무시한 힘에 깜짝 놀란 구양결이 잠시 멍하게 서 있는 사이, 카랑카랑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자석에 앉아 있던 장마노가 황급히 진소천에게 다가가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더 이상 다가오면 언제 출발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소이다!”
 진소천이 앞을 막아선 장마노와 흑왕을 번갈아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뒤돌아섰다.
 “거 까칠한 놈이네?”
 “제길!”
 되돌아오는 진소천의 모습에 구양결이 험악한 소리를 뱉었지만, 진소천은 신경도 쓰지 않은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런 반응에, 구양결은 부아가 치민 표정으로 진소천을 노려보았지만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 대신 똑같이 무시해 주겠다는 듯 장마노를 향해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장마노가 까치발을 하고는 손을 높이 들어 올려 흑왕의 목을 쓸어 주고 있었다.
 등이 굽어 키가 아주 작은 장마노가 거대한 흑왕을 다독이는 모습은 충분히 어색해 보일 수 있는 광경이었는데도, 이상하게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장마노가 말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흑왕이 진정이 됐는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가볍게 투레질을 했다. 장마노는 그제야 몇 걸음 뒤로 물러나 구양결의 말에 대답했다.
 “다행히 괜찮은 것 같소이다. 앞으로는 조심하시오.”
 “예,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장마노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인 구양결이 바로 진소천을 노려보며 날 선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마차에 타라.”
 진소천이 군말 없이 마차에 오르자, 구양결이 뒤이어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가장 앞쪽은 길고 푹신한 의자가 마주 보고 있고, 그 뒤로 침상이 있었다. 침상 뒤에는 한쪽이 트인 칸막이가 있는 것이, 아마 목욕통이 있는 곳인 듯했다.
 진소천은 마차가 마음에 들었는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꽤 돈을 들인 모양이군.”
 하지만 구양결은 별다른 대꾸 없이 마차 문을 닫은 후 진소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모여 있던 이십 명의 율천대가 마차를 호위하듯 자리를 잡았다.
 “출발하십시오!”
 구양결이 어자석을 향해 외치자, 장마노가 흑왕을 비롯한 여덟 마리 말이 묶여 있는 고삐를 흔들었다.
 “이랴!”
 쿠르르르!
 마차를 받치고 있던 두 쌍이 바퀴가 묵직한 소음을 터트리며 구르기 시작했다.
 “절대 흑왕에게는 가까이 가지 마라!”
 “거참 한 번만 얘기해도 알 거든.”
 “만약 한 번만 더 그런 짓을 하면, 네놈을 묶어서 끌고 가는 수가 있다!”
 구양결이 으르렁거리며 엄포를 놓아 보지만 진소천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는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고 보니 내 물건들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다른 얘기를 하는 진소천의 태도에 구양결은 분통이 터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애써 분을 삭였다. 몇 번 상대해 본 경험으로 화를 내봐야 자신만 손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다.”
 구양결이 건넨 것은 하나의 낡은 쥘부채였다. 뺏듯이 부채를 받아 든 진소천이 곧장 부채를 펼쳤다.
 차르륵.
 꽤 낡았지만 기분 좋은 소리가 나며 부채가 활짝 펼쳐졌다.
 한쪽에 정교한 산수화가 그려진 고풍스러운 부채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외에 뭔가 특이한 내력이 있어 보이는 물건이 아니었다.
 부채를 보관하고 있던 맹도굉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도 아는 것이 없었다.
 다만 진소천이 뇌옥에 갇힐 때, 그 부채를 버리면 혀 깨물고 자결해 버리겠다며 협박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가보라도 되는 듯 부채를 세세하게 살펴보는 진소천의 모습에 구양결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그게 무슨 물건이냐?”
 “부채.”
 아무것도 아닌 듯 말하면서도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는 저 말투는 아무리 봐도 진소천의 버릇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버릇 때문에 구양결은 부쩍 저도 모르게 울컥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니까 무슨 부채냐고!”
 “넌 몰라도 돼.”
 “젠장!”
 
 “그간 별고 없으셨습니까, 숙부님?”
 포권을 하며 깊이 읍을 하는 남궁무원의 모습에 남궁정룡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네가 이곳까지는 어쩐 일이더냐?”
 “지나는 길에 숙부님 생각이 나서 들렀습니다.”
 의례적인 대답을 하는 남궁무원의 표정이 어딘가 의미심장했다. 그것을 제대로 알아본 남궁정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자신의 집무실 문을 열었다.
 “먼 길을 왔을 테니 피곤하겠구나.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예, 숙부님.”
 남궁무원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남궁정룡은 대기하고 있는 세가의 무인을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모두에게 경계를 강화하라 이르고, 이 주위에는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하게.”
 “예!”
 대답과 동시에 무인이 재빨리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사이 남궁정룡은 재빨리 기감을 열어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남궁정룡은 현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기룡의 동생으로, 무림맹 본산에 마련되어 있는 창궁원의 원주였다.
 무림맹이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무림맹에 속해 있는 문파들 사이에 의견 대립이 일어날 경우 그것을 조율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무림 전체에 어떠한 일이 생겼을 경우 소속 문파들의 의견을 취합하는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는 협의에 의해 무력을 개입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그 때문에 무림맹에 속해 있는 각 세력들은 일정 수의 무인들을 무림맹에 상시 파견하도록 협의를 했다. 어떤 일이든 신속하게 대응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무림맹 본산의 독립된 작은 장원들이었다. 각 문파에서 파견된 무인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창궁원은 그중 남궁세가의 장원이었다.
 이 창궁원은 남궁세가의 세력권으로 인정을 받는 곳이었기에 외부 사람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곳이었다.
 물론 다른 문파 소유의 장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허락 없이 타 문파의 장원에 발을 들이는 것은, 그 문파의 본산에 침입한 것으로 간주되어 서로 간에 심각한 갈등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서로가 조심하는 편이었고, 창궁원 역시 드나드는 사람은 철저하게 관리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궁정룡이 조심스러운 이유는 얼마 전 본가로 날려 보낸 보고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궁무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주변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이제 말을 해 보아라.”
 “예, 숙부님. 혹 최근 무림맹에서 뭔가 특이한 일이 있지는 않았는지요?”
 남궁정룡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본가에 보낸 연락 때문에 온 것이 아니더냐?”
 “네?”
 무슨 일이냐는 듯 되묻는 조카의 모습에 남궁정룡이 잠시 날짜를 더듬었다. 그리고는 조금은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연락을 받고 본가에서 사람을 보냈다고 해도 벌써 도착하기는 힘들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궁금한 표정으로 묻는 남궁무원을 향해 남궁정룡이 말했다.
 “우선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인지 말해 보아라.”
 “예, 실은······.”
 남궁무원은 얼마 전 남경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했다. 이야기를 들은 남궁정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운이 좋았던 건지도 모르겠구나.”
 “무슨 말씀인지요? 자세히 알려 주십시오.”
 “얼마 전 무림맹 안에서 한 대의 마차를 만들었다.”
 “마차요?”
 “그래, 안에 철판까지 덧대고 보통 마차보다 세 배나 긴 특이한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장마노와 흑왕을 불러들인 이유가 그 마차를 끌게 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군요.”
 “그렇겠지.”
 “혹시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남궁정룡을 고개를 저었다.
 “여러 문파에서 이유를 물었지만 무림맹에서는 제대로 된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다.”
 “네?”
 남궁무원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무림맹과 각 문파는 서로 별개의 집단이었다. 그런 만큼 무림맹에서 자신들의 일을 일일이 다른 문파에 알려 줄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무림맹이 각 문파에서 출자한 돈으로 운영되는 만큼,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남궁정룡을 포함한 각 문파 사람들은 더 추궁을 할 수는 없었다. 무림맹에서 무조건 자신들의 일을 공개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마차의 제작에 드는 돈은 무림맹의 운영비가 아니라 구양제현 개인의 자금으로 진행하는 일이라 했다.
 일련의 과정을 전해들은 남궁무원이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그렇지. 차라리 비밀리에 그런 일을 한 것도 아니고 보란 듯이 공개된 곳에서 만들어 놓고 이유를 말해 주지 않는다는 건······.”
 “구양 맹주가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걸까요?”
 “알 수 없다. 하지만 절대 만만히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 않느냐. 하지만 이렇게 네가 우연히 이곳으로 왔으니 운이 좋은지도 모르겠구나.”
 일이 일어났을 때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바로 본가로 연락을 보냈다. 다른 문파들 역시 같은 행동을 취했는데, 문제는 거리였다.
 무림맹이 위치한 곳은 형문산이었고, 가장 가까운 문파가 무당파와 무창에 있는 제갈세가였다. 남궁세가는 그보다 더 거리가 있었기에 다른 문파에 비해 반응이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당과 제갈세가에서 사람이 오기도 전에 남궁무원이 찾아왔으니 먼저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무림맹에 파견되어 있는 무인들은 함부로 무인들을 움직일 수 없다. 무림맹과 소속 문파들의 독특한 관계가 원인이었다.
 무림맹에 파견되는 무인들의 수준은 대부분이 일류 이상이었다. 그런 무인들이 한곳에 몰려 있다 보니 어떤 식으로든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서로 간의 감정 대립을 넘어 가끔 서로 피를 보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문파들은 무림맹에 파견된 무인들의 행동에 제약을 거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무림맹주의 요청이나 본문의 명령 없이는 절대 무인들이 단체로 행동할 수 없도록 한 것이었다.
 서로 쓸데없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제약이기 때문에 그것은 꽤나 강제성이 강했다.
 그런데 본가의 소가주가 왔으니 무인들을 외부로 내보낼 구실이 생긴 것이다.
 남궁무원 역시 그러한 속사정을 알기에 별다른 설명을 듣지 않고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가장 먼저 움직이는 건가요?”
 “그렇지.”
 “아, 그런데 혹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무슨 이야기 말이냐?”
 “검선유고 말입니다.”
 “음?”
 남궁정룡이 뜬금없는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근거 없는 소문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용 소저를 통해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남궁무원이 모용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남궁정룡에게 해 주었다.
 “그래?”
 남궁정룡으로서는 금시초문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가볍게 넘길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모용세가의 그 정보는 확실한 것이더냐?”
 “그렇다고 하더군요.”
 “흐음, 그럼 그 마차가 향하는 곳이 운남일 가능성도 있겠구나.”
 더불어 검선유고가 단순히 근거 없는 소문이 아니라, 진짜 존재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남궁세가에서 차지할 수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남궁정룡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정황상 모용세가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만약 검선유고가 실재하는 것이라면 반으로 나누어도 충분히 큰 이익을 챙길 수 있으리라.
 “창궁대 스무 명을 붙여 주마. 모용세가의 건곤전 무인들도 어느 정도 움직일 테니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외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무리 없이 움직이는 데는 스무 명이 한계다. 남궁정룡은 자신의 역량에서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최대한의 지원을 해 주는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어서 준비를 해라. 당장 창궁대를 모아 주마.”
 “예, 숙부님.”
 
 늦은 밤.
 관도 옆의 넓은 공터에 한 대의 긴 마차가 서 있었다. 그 주위로 스무 마리의 말이 매어 있고, 스무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몇 군데 모닥불을 피워 놓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 안에서도 은근한 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차는 아침에 무림맹에서 출발한 흑왕이 끄는 마차였고, 밖의 사람들은 무림맹 율천대 무인들이었다.
 마차 안에서 작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쯧, 이왕 돈 들이는 거 좀 더 쓰지 그랬냐?”
 진소천이 마차 내부에 놓인 화로에 손을 쬐며 딱하다는 듯 말했다.
 “무슨 말이냐?”
 구양결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소천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절대 흥분해서도 안 되고 관심을 보이는 내색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진소천이 손을 돌려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허리 안 아프냐?
 “뭐?”
 “마차가 너무 흔들린단 말이다. 하루 종일 요동을 쳤더니 아주 죽을 맛이네.”
 “큭!”
 구양결은 저도 모르게 울컥하고 속에서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마차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형태나 튼튼함에만 신경을 썼지 안락함 따위를 생각해서 만든 것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진소천은 그걸 가지고 구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흥, 무림맹에서 네놈 때문에 이런 걸 만든 것만으로도 감사해라.”
 “넌 참 태도가 불량하단 말이야.”
 “뭐?”
 “아쉬운 놈의 태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제길, 수인 주제에!”
 구양결은 결국 참지 못했다. 애써 시큰둥한 척하던 것이 한계에 도달한 것이다.
 “쉿!”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구양결을 향해 진소천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흥분한 구양결에게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무슨 수작······.”
 “조용히 하라고!”
 “음!”
 처음으로 보는 진소천의 진지한 모습에 구양결이 저도 모르게 숨을 끊으며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기감을 끌어올리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구양결의 기감에 걸려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슬쩍 마차 밖을 살펴보았지만, 율천대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젠장!”
 구양결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진소천이 자신을 놀린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조용히 하라니까!”
 “조용히는 무슨!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 멍청한 놈!”
 “이, 이게 끝까지! 주변엔 아무것도 없다!”
 “그게 문제다!”
 진소천이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나지막이 외쳤다.
 “뭐?”
 “갑자기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 안 드냐?”
 “음?”
 그러고 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사방에 풀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귀에 걸리는 소리라고는, 밖에 있는 율천대 무인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는 소리뿐이었다.
 “뭐지?”
 진소천이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살기.”
 “음?”
 “살기를 느끼고 벌레들이 조용해졌다는 말이다.”
 “살기라고?”
 “그래, 니가 말한 대로 주변에는 없지만 은밀한 살기가 주변에 퍼지고 있는 거지.”
 구양결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과연 이 말을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스럽다.
 아버지로부터 진소천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감시하라는 말이 있었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양결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슈아아아악!
 갑자기 사방에서 요란한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파바바박!
 밖에 앉아 있던 율천대 무인들이 그 소리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반응을 보아하니 그들은 이미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눈치 없고 경험도 없는 애송이 때문에 걱정했었는데, 맹 형이 경험이 많아 다행이네.”
 진소천이 이죽거리며 말했지만 구양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기습이다!”
 마차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뛰쳐나간 구양결이 의미 없는 외침을 터트렸다.
 그리고 훨씬 더 유용한 외침이 뒤이어 터져 나왔다.
 “최소한 서른! 독이다!”
 날아드는 화살을 살피던 맹도굉이 큰 소리로 외쳤다. 활을 쏘는 사람이 적어도 서른 명이 있으며, 화살촉에는 독이 발라져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화살은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율천대는 모두가 절정 이상의 무인들이었다. 소리 없는 암기도 아니고 화살 정도에 당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탁, 타닥! 파박!
 일부 화살은 율천대의 손에 허무하게 튕겨 나가고, 일부는 마차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마차의 나무판 안쪽에 있는 철판에 부딪쳐 제대로 박히지 못하고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어이, 어이! 조심하라고! 나 죽으면 다 소용없어 진다고!”
 진소천의 장난스러운 외침이 들렸지만, 그 소리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구양결 하나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런 농담이나 하고 있는 게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화살은 꽤 긴 시간 퍼부어졌다. 단 한 명도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단순히 막기만 하기에는 꽤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공격을 하는 적들도 서서히 지칠 때가 된 것 같은데도 화살 공격은 그칠 줄을 몰랐다.
 “맹 부대주님, 먼저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구양결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하지만 맹도굉은 고개를 저었다.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흩어지면 오히려 손해만 봅니다.”
 화살을 쏘고 있는 자들은 서른 명 정도지만, 저 어둠 속에 얼마나 많은 적들이 있을지 모른다. 이런 때에 인원을 나누는 것은 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맹도굉은 단순히 사실을 말한 것이었지만, 무안함을 느낀 구양결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구양결은 어두운 밤이라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거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였다.
 피이잉!
 맹도굉의 감각에, 요란한 파공성 사이에 섞여 있는 미세한 소음이 잡혔다. 아주 작은 무언가가 모닥불의 불빛을 반사시키며 날아들고 있었다.
 “암기가 섞여 있다!”
 맹도굉의 외침에 율천대는 한층 더 긴장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간사한 놈들!”
 화살 공격에 익숙해지는 순간 암기를 섞어 공격을 했다. 주의를 하지 않았으면 율천대 몇 명 정도는 암기에 당했을 것이다.
 무공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모두가 절정의 무인인 율천대에게 화살은 그리 긴장해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이 긴 시간 이어지게 되면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그로 인해 원하지 않아도 바짝 조여졌던 긴장이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곧 방심을 불러일으킨다. 지금의 암기 공격은 바로 그 긴장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온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수작이야?’
 바깥의 상황을 살피던 진소천이, 지금 눈앞에 없는 누군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겨우 하루만에?’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의 공격만이 아니다. 황금화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을 때부터.
 갑자기 진소천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간과했던 부분이 있었다.
 ‘아니, 그 전부터. 구양결이 왔을 때부터!’
 진소천을 감옥에 가둔 사람은 구양제현과 청운, 이호겸 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은 진소천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단순히 무당과 화산의 비급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데 구양결이 와서 한 이야기는 진소천이 나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를 감옥 밖으로 내보내는 게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묻는 것이 우선이어야 했는데?’
 다짜고짜 진소천이 밖으로 내보낸다는 말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지금 타고 있는 마차도 마찬가지다. 정황으로 보면 자신이 운남으로 향하는 것은 아주 은밀한 무언가를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이동 역시 비밀스러워야 했다.
 그런데 황금화를 요구하자 이런 마차를 만들었다. 황금화라면 차라리 많이 알려져 있으니, 눈길을 받기는 하더라도 의심을 받는 것은 덜할 것이다. 반면 이 마차는 사람들의 시선과 더불어 의심을 받기에 아주 좋은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무림맹에서 출발한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 그런데 밤이 되자마자 공격을 받았다. 정황으로 보아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해 놓은 공격이다.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은······.’
 저 화살 공격을 퍼붓는 자들은 십중팔구 진소천 자신을 노리고 온 것이었다.
 ‘정보가 샌 건가? 아니, 정보를 흘렸어!’
 이렇게 빨리 정보가 샌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누군가가 계획적으로 정보를 흘린 것이 분명하다. 그것도 진소천을 노리도록.
 그리고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구양제현, 운현성!’
 그 두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수작이냐?’
 진소천은 처음 던졌던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졌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온몸의 신경이 바짝 죄어 오는 느낌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긴장감이었다.
 진소천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한 번 해보자 이거지?’
 “후우!”
 진소천은 긴 한숨을 내쉬며 호흡을 골랐다. 일단은 지금의 상황부터 처리해야 했다.
 물론 산공독에 의해 공력을 쓸 수 없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진소천이 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맹 형, 가까워졌어!”
 암기는 화살에 비해 사정거리가 현저히 짧다. 어두운 밤이라 해도 절정의 무인들의 눈을 속이려고 할 정도로 작은 암기라면 더더욱 거리가 짧다. 무게 때문에 일정 거리 이상은 날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음!”
 갑작스러운 암기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을 못하고 있던 맹도굉의 얼굴에 힘이 들었다.
 ‘있군!’
 기감을 완전히 개방하니 걸려드는 것들이 있었다.
 ‘암기 또한 연막!’
 적들의 목적은 암기를 날려 율천대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암기를 날리는 것이 목적인 것처럼 느끼게 해 놓고 사실은 거리를 좁히려 한 것이었다.
 이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암기 공격이 시작된 후 화살이 날아오지 않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수십 개의 기척이 다가오고 있었다.
 “후우!”
 맹도굉은 크게 호흡을 고르며 서서히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정확한 방향을 가늠한 순간 그대로 땅을 박차며 외쳤다.
 “현재의 자리를 유지해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맹도굉의 신형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차 안에서 진소천의 외침이 들려왔다.
 “위치를 고수하고 돌이라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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