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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란 1

2018.06.22 조회 446 추천 0


 대도란 1권
 1장 철궁세가(鐵弓世家)
 
 
 꽈르르릉!
 캄캄한 심야를 쪼갤 듯이 가르는 광풍폭우, 그리고 뇌성벽력. 엄청난 뇌전이 빛이 되어 흐르고 그때마다 시커먼 암야(暗夜)가 쩍쩍 갈라졌다.
 마치 이대로 천지(天地)의 종말을 고할 것처럼······.
 기암거봉(奇岩巨峰).
 그곳의 정상에 깍아지른 듯한 형상의 만장단애(萬丈斷崖)가 있다. 그리고 그 기암거봉에 위치한 만장단애의 끝에 천지를 뒤바꿔 놓을 듯한 뇌성벽력과 광풍폭우를 맞으며 정체 모를 두 사람이 서 있다.
 무슨 이유로, 나는 새마저도 날아들지 않는다는 죽음의 거대한 암봉의 끝에 광풍폭우를 맞으며 서 있는 것인가?
 “······.”
 “······.”
 말 없이 서 있는 두 사람. 컴컴한 어둠 속에서 서로를 향해 서 있는 두 사람의 눈에서는 뇌전보다도 날카로운 인광이 줄기줄기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마치 세상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서로를 주시했다.
 한순간, 침묵을 지킨 채 서로를 뚫어질 듯 쳐다보던 두 사람 사이로 시커먼 암야를 깨부술 듯이 가르며 엄청난 뇌전이 빛줄기를 토해냈다.
 동시에 천지가 환해지는 그 찰라 두 사람의 모습을 뚜렷하게 볼 수가 있었으니, 그 모습은 한 명의 구부정한 노인과 호리호리한 중년 미부(美婦)였다.
 흑의(黑衣)에 감추어진 노인의 전신에선 웬지모를 소름이 끼치는 이상한 기운이 안개처럼 스물스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또한 그 싸늘한 눈빛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주눅이 들게 할 정도로 강렬했다. 더구나 그 모진 폭우가 그의 전신 일 장 밖에서 무형의 막에 부딪친 듯 퉁겨지고 부서지는 모습은 그가 절대(絶代)의 무공을 지녔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었다.
 그를 앞으로 하고 서 있는 수려한 미부의 자태는 노인과는 너무도 다른 분위기의 기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성스럽고, 고아하고······ 한없이 우아하고 귀족적인 기품이 전신을 감싸고 있는 여인. 이런 여인이라면 이 세상에 어떤 번뇌를 지닌 자라도 그녀의 어루만짐 한 번이면 모든 고통을 훌훌 털어 버리고 박장대소를 날리게 할 힘을 가졌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그녀의 그 고아한 기질과 아름다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그녀의 두 눈엔 사악(邪惡)한 기운이 안개처럼 밀려나오고 있었다.
 현숙하고 우아한 자태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그 기질은 대체 어디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인가?
 아무튼, 두 사람은 침묵을 계속한 채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한 두 사람 사이로 천지를 가르는 뇌전은 쉬지 않고 지나갔으며 그럴 때마다 두 명의 희미한 운무에 싸인 인영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갔을까?
 문득, 구부정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사후(邪后)! 모든 준비는 되어 있다. 놈을 현혹시켰느냐?”
 노인의 말에는 의미 모를 음습함이 깔려 있었다.
 “호호호! 물론이예요, 종사(宗師).”
 미부는 그녀의 전신을 감싸는 그 고아한 기질에 어울리지 않게 요사한 웃음을 뿌렸다.
 그런데 종사라니, 그렇다면 이 노인이 어떠한 단체를 이끌고 있는 신분이란 말이 아닌가?
 “종사. 설마 이번 거사(巨事)가 끝난다고 천첩을 멀리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구부정한 노인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 끝을 올렸다.
 “물론이다. 이 세상에 너만큼 기교와 허리 기술이 좋은 년이 있다더냐? 절대 널 멀리 할 순 없을테니 걱정말아라. 너의 신호가 울리면 일만의 마병(魔兵)이······ 크크크크!”
 아수라가 토해내는 웃음처럼, 노인은 듣기 싫은 금속성이 섞인 웃음소리를 흘려내고 있었다.
 그때, 천지간을 수천 조각으로 부숴 버리는 뇌성벽력이 노인의 목소리를 삼켜버렸다.
 미부가 입술을 질끈 깨물며 허공을 매서운 눈으로 응시했다.
 “이 날을 위해······ 오 년 동안 그에게 접근했다.”
 그녀의 표정을 살피던 노인은 더욱 큰 소리로 웃었다.
 “크크크, 잘했다. 마후!”
 문득 중년미부가 안색을 굳혔다.
 뇌전 속의 그 모습은 마치 빙굴에서 방금 뛰쳐 나온 얼음 조각을 보는 듯 할 정도로 차가워 보였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뇌전을 박살내 버릴 듯한 가공한 살기가 주위에 흩뿌려졌다. 동시에 엄청난 뇌전의 벽을 뚫고 미부가 부르짖는 음성이 쨍쨍한 사방에 금을 그었다.
 “호호호. 본교(本敎)가 세 번씩이나 철궁(鐵弓)에게 치욕을 당할 수 있사오리까? 더구나 그는 우리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도(大盜)······.”
 “되었다. 가자! 가서 죽음의 축제를 준비하자꾸나!”
 갑자기 튀어나온 노인의 음성은 그대로 허공에 부서져 부스스 암천을 가루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흩어지기도 전에, 미부의 가녀린 교구가 가볍게 진동을 일으키는가 싶은 순간, 그녀의 몸은 천공(天空)을 가르는 뇌전보다도 빠르게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그녀가 마지막 내뱉은 음성은 뇌전보다도 더욱 커다랗고 확실하게 사방에 균열을 일으키며 들려오고 있었다.
 “호호호호! 종사! 철궁의 맥은 이제 본 마후에 의해 완전히 잠들게 될 것입니다.”
 덩그라니 맴돌아 떨어지는 소리의 여운을 남기며 사라져간 방향을 바라보는 노인의 얼굴에선 알 수 없는 희색(喜色)이 만면에 떠올랐다.
 “철궁세가(鐵弓世家)! 네놈들의 이백 년 몸짓을 지켜보았다. 이제 본존이 네놈을 대신하여 중원을 통치하리라!”
 하고 말을 마친 순간,
 파악! 노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사라지는 신법은 하늘마저 놀라고 말 통천가공의 기예, 바로 그것이었다.
 두 사람, 그들이 뿌린 기도와 음악하기 짝이 없는 마기와 사기는 인세의 것이 아니었는데 그들이 뱉아낸 말들은 무엇을 의미한단 말인가?
 도대체, 이 두 남녀는 어떤 존재이며, 또 그들이 이야기하던 철궁세가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의문과 요악한 분위기를 뿌려내던 거봉 위엔 여전히 폭우가 쏟아지고 뇌전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 * *
 항산(恒山)은 중원을 가리키는 오악(五嶽) 중 북악(北嶽)이라고 불리는 천하대산이다. 기이절륜한 기봉(奇峰)과 괴암(怪岩)이 사방 만 리(萬里)를 내려다 보고 있는 곳. 항산이 준봉과 기암, 그리고 괴봉을 품고 천하를 굽어 보듯 이 높은 곳엔 중원천하를 내려다 보는 무림의 천하지주(天下支柱)가 있었다.
 그의 찬란한 영광과 그의 빛나는 위명을 시사해 주듯, 장장 백여 리에 뻗친 성보(城堡)에는 수십만 개의 등종(燈鐘)이 어둠을 밝혀 일대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철궁세가(鐵弓世家)>
 바로 이곳이 당금 무림을 주도 하고 있는 정무대천(正武大天)의 하늘이요, 정도의 신(神)이라 일컬어지는 이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중원세가(中原世家)라는 거대한 이름으로 칭해지는 철궁세가는 항산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금 무림이 내우외환(內憂外患)과 잡다한 세력의 난립(亂立)으로 어지럽고 종잡을 수가 없다하나 어찌 중원의 하늘에 검을 들이댈 수가 있겠는가?
 중원천하에 칠백이십 개의 마파(魔派)와 삼백칠십칠 개의 사파(邪派)가 있다하지만 철궁세가에는 새발의 피. 때문에 이 철궁세가야말로 중원정의(中原正義)를 수호하는 정주(正主)인 것이다.
 누구나 넘볼 수 없고 그 어떤 힘을 가진 자라도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철궁세가인 것이다.
 심야(深夜).
 달빛과 수십 수백만의 별빛이 수면에 일렁이는 포말과 같이 부서져 내리는 심야, 철궁세가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한 노인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잊혀진 청춘의 생각에 심야의 아름다운 정경을 감상하고 있는 것일까?
 넋을 잃은 듯 무려 반 시진을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별빛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
 그러나,
 “으음!”
 노인의 입에서는 전혀 상상치도 못한 무겁고 묵직한 신음성이 터져나왔다.
 전신에 미미한 경련을 일으키며 고개를 떨어뜨린 노인.
 일신에 눈부신 백의를 걸치고 눈보다 더욱 흰 백염(白髥)을 늘어뜨린 그의 전신에서는 누구도 범접치 못할 태산의 위엄이 흐르고 있었다.
 청수한 얼굴에 지닌 숨길 수 없는 기상, 그것은 군계일학과도 같이 수십만의 사람속에 끼어 있어도 오직 그만이 있음을 느끼게 할 그러한 뛰어난 풍도를 지니고 있었다.
 한 순간 노인은 내려뜨렸던 고개를 들어 다시 한곳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천기가 몹시도 어지럽구나······. 마기와 사기는 이제 극에 달한 상태로군.”
 노인의 입에서는 천지를 허물어 버리는 듯한 탄식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노인의 시선이 향한 천공에는 하나의 크고 찬란한 성좌(星座)가 요사한 붉은 기운을 뿜으며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찬란한 영광에 싸여 있는 철궁세가를 마의 기운으로 덮어 버리려는 듯, 기이한 홍광은 점점 철궁세가를 덮쳐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노인은 천공의 별을 보고 천기를 헤아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입증이나 하듯이 노인은 꺼질 듯한 탄식과 함께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을 흘려냈다.
 “허허허······. 이제 나 철궁대제(鐵弓大帝)의 시대는 끝나가는 것인가?”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메마른 듯한 푸석푸석한 목소리를 흘려내는 노인, 그렇다면 이 인물이 바로 오늘의 철궁세가를 이끌고 있는 철궁대제란 말인가?
 당대의 천하제일인, 철궁세가를 세운 철궁무존(鐵弓武尊)의 오대손, 그리고 중원정도를 지키는 무인들에게 무한한 존경을 받고 있는 정천(正天)이 바로 그였다.
 무림인들의 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채 무림의 신으로 받들어지는 철궁대제가 바로 이 노인이라니.
 이십 년 전,
 마(魔)와 사(邪)의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피와 죽음의 제전을 벌일 때 그들을 제압하고 혈사(血史)의 주인공이 된 만마존(萬魔尊)과 사무후(邪武后)가 나타났다.
 그들은 사마천하를 부르짖으며 천하를 혈수(血水)에 잠기게 하였다. 그대로 천하는 암흑이 되어 버렸으며 그 이후로 하루도 피가 마르지 않는 혈우성풍이 몰아쳤다.
 오직 마와 사, 죽음의 제전만이 있을 바로 그 때, 그는 오직 한 자루 가전의 신물 철궁(鐵弓)으로 태산(泰山)에서 십 주야의 혈투 끝에 두 명의 마인을 베고 천하를 피와 죽음에서 구해내었다.
 그 후로 그는 무림의 신적 존재가 되었다.
 그의 부친이 그러 했듯이 또한 그의 조부들이 무림의 패자(覇者)로 군림 했듯이······. 그의 찬란한 위명을 길이 만들고자 황산에 백 리에 달하는 전각과 성채를 세운 구대문파와 천하의 군소방파가 무림의 영원한 평화를 지켜주기를 엎드려 기원하니, 그는 기꺼이 그들의 뜻을 받들어 개봉에서 항산으로 옮겨 새로운 철궁세가를 열었다.
 지금도 철궁대제는 천공에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허허······ 살만큼 살았으니 죽는 것은 결코 억울한 일이 아닐 것이야. 게다가 비룡(飛龍)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자라고 있으니 그건 한 점의 가능성이 아니던가.”
 철궁대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최후의 위안, 철비룡(鐵飛龍).
 다섯 살밖에 안된 어린아이였다.
 철궁대제에게는 철궁무웅(鐵弓武雄)이라는 협명을 가지고 철궁대제 못지 않게 위명을 날리던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가 바로 철궁대제의 독자(獨子)였으며 앞으로의 철궁세가를 이끌어 나갈 제목이었다.
 그러나 오 년 전 철궁무웅은 노산(魯山)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부친인 철궁대제를 능가하는 재질로 이미 정도 이인자의 위(位)에 올라 있던 무협······. 그러나 그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때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어 그 여인의 뱃 속에는 핏덩이가 자라고 있었으니, 그 이세는 그가 죽은지 두 달만에 태어났다.
 그 사실은 철궁대제만이 알아챌 수 있었다. 그때 이미 천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기에 그는 사랑하는 손자의 탄생을 느낄수 있었고 만일을 위해 그 사실을 비밀로 감추었다. 다만 아이를 위해 전대의 고수 다섯을 보내 주었을 뿐이었다.
 문득,
 사르륵······. 비단자락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철궁대제가 있는 곳에 자의궁장으로 온 몸을 감싼 삼십 전후의 아름다운 중년미부가 나타났다.
 아름답고 성스러운 고아함이 넘치며, 인세의 어떤 악인도 그녀를 보면 단 한 번에 살심(殺心)을 풀어 버릴 듯한 포근한 모습의 여인.
 거봉 위 뇌전 속에 서 있던 여인이 어찌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철궁대제 앞에 나타난 이 여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여인은 철궁대제 앞에 당당히 섰고,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듯 감미로운 목소리를 흘려냈다.
 “상공······. 밤바람이 차옵니다.”
 조용히 달빛처럼 다가서는 미부를 보고 철궁대제의 닫혀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허허허, 부인. 어찌 나오셨소? 먼저 주무시지 않고.”
 그 음성에는 그지없는 애정이 진하디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런데 이 자의궁장 미부가, 그것도 고작해야 삼십 전후의 미부가 대제의 동반자인 옥화부인이란 말인가?
 삼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모든 여인의 추격을 뿌리치고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의 아명을 누리던 그녀!
 그녀가 바로 전설적 여인들의 집단인 신비문파 옥화성(玉花城)의 후예였으며, 철궁세가의 주모(主母)일 뿐 아니라 천하의 절정고수 대열에 드는 무학의 대가이기도 했다. 더불어 영원히 늙지 않는 주안술(駐顔術)을 익혀 이토록 아름다운 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철궁대제는 다가선 옥화부인을 향해 부드러운 눈길로 위 아래를 쓸어보았다.
 “안색이 좋지 않구료.”
 옥화부인은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옵니다.”
 철궁대제는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부인, 곧 대풍운이 일 것이오.”
 “상공······!”
 옥화부인은 철궁대제의 무거운 심사를 털어주려는 듯 그에게 다가가며 살포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녀는 터질 듯한 청춘의 그것보다도 아름답고 농염했다. 자연스럽게 나긋나긋한 동체를 움직인 그녀는 근심에 잠겨 있는 철궁대제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철궁대제는 안겨오는 그녀의 부드러운 허리를 안으며 또 다시 시선을 들어 무섭게 홍운(紅雲)을 일으키는 성좌를 바라보았다.
 “부인, 요샌 나도 모르게 앞날들이 두려워지는구료.”
 옥화부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철궁대제의 양 볼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상공답지 않사옵니다.”
 철궁대제는 옥화부인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그 부드러운 눈길에 그는 불안 속에서도 편안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소, 부인. 아무래도 내가 늙었나 보오.”
 옥화부인은 좌수를 움직여 철궁대제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레 그녀의 소매에서 한 자 가량의 비수가 소리없이 밀려나왔다.
 그 찰나 비수는 번뜩이는 월광을 반사시키며 그대로 철궁대제의 심장으로 향했다.
 “헛!”
 이상한 예기를 느낀 철궁대제가 바람 빠진 소리를 토하며 신형을 빼냈지만 그때는 이미 비수가 그의 심장 깊숙이 파고들어가 있었다.
 푸― 욱! 비수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철궁대제의 심장에 깊숙하게 박혀버렸다.
 “아, 아니! 부······ 부인. 왜, 다··· 당신이 나를?”
 철궁대제, 그의 얼굴은 경악과 불신, 그리고 분노가 뒤섞여 있었고 그는 그러한 채로 전신을 휘청거렸다.
 “호호호호호!”
 옥화부인은 요사한 웃음을 날리며 몸을 십 장 밖으로 퉁겨내었다.
 “철궁대제, 그동안 본녀를 즐겁게 해 주어 고맙기 짝이 없구나.”
 철궁대제는 휘청거리는 몸을 가다듬으며 옥화부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으······ 그, 그대는 옥화가 아니었군.”
 철궁대제는 가슴으로부터 폭포수 같은 피를 쏟으며 분노에 찬 음성을 토해내었다.
 “호호호, 그렇다! 옥화, 그 계집은 이미 삼 년 전 본후의 손에 죽었다. 네 놈은 바보같이 잘 속아왔던 것이지.”
 그 말을 듣는 철궁대제의 얼굴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듯 완전히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어찌 삼 년씩이나 잠자리를 같이 한 이 여인에게서 삼십 년 전부터 자기와 같이 한 아내의 모든 것을 하나도 분간하지 못했던 것인가?
 그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인가? 철궁대제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메마른 목소리를 흘려냈다.
 “본후(本后)라······?”
 파― 악! 그는 심장에서 이미 피에 젖어 버린 비수를 뽑아내었다. 핏물에 젖어 분간할 수 없지만 짧은 비수에는 두 개의 여체가 생생하게 조각돼 있었다.
 “이건 마, 마비(魔匕)!”
 비수를 내려다 본 그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앞을 주시했다.
 “그대는 전설의 마교에서 왔는가?”
 철궁대제의 안색은 흑빛이었으나 분노에 찬 음성은 너무도 똑똑하게 울려나오고 있었다.
 그때 유령의 호곡처럼 솟아오르는 한마디의 목소리.
 “중원정도의 태양이라는 철궁대제의 머리가 이토록 둔하다니······. 실망이로구나.”
 한 명의 흑의노인이 불꽃과 같이 솟아올랐다.
 나타난 흑의노인은 바로 폭우와 천둥치던 밤, 거봉에 나타났던 기분 나쁜 인상의 구부정한 노인이었다.
 “크크크, 삼백 년에 걸친 철궁천하(鐵弓天下)······ 아니, 이제 중원정도는 끝나버렸어. 본교의 제물에 불과할 뿐!”
 철궁대제의 전신은 더욱 심한 경련에 부들부들 떨었다.
 흑의노인은 한 치도 빈 틈 없는 살기를 뿌리며 하나의 물체를 허공에 던졌다.
 그 순간, 펑! 하는 굉음과 함께 물체는 허공에서 폭발하여 천지를 가르는 오색의 불꽃을 피워내었다.
 “와― 와―!”
 “크하하하······ 한 놈도 남기지 마라!”
 수만의 흑영들이 메뚜기처럼 철궁세가로 날아들며 무자비하게 살수를 전개했다.
 철궁대제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처연한 음성을 토해내었다.
 “이것이었나? 천기가 가리키던 것이······!”
 그는 허탈한 웃음을 뿌리며 최후의 일전을 위한 진기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심장에 꽂힌 비수를 뽑아냈기에 피는 콸콸 넘쳐 흘러내렸고, 철궁대제는 갈수록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안돼······.”
 철퍽! 앞으로 고꾸라져버린 그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다.
 * * *
 경악, 그리고 분노.
 그것은 강호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인간 모두에게 내재된 감정이 분명했다.
 하나의 소문이 중원 전역에 퍼져나갔다. 그것은 대강남북(大江南北)을 울리고도 남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철궁세가 멸문지화(滅門之禍)!
 철궁세가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무림인들을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는 곧 강호에 정(正)이라는 짧은 한마디 단어의 종말이 될지도, 중원의 혈운을 예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백여 년간 일대강호를 풍미한 철궁세가, 그 엄청난 세력이 풍지박살 난 것이다. 여태껏 철궁세가는 정의 표방 아래 사마의 세력들을 적당히 무마시켜왔다. 정도라는 입장을 내세워 여러 협행으로 이름을 드높였으며 그 명성을 이용해 뒷면으론 사와 마가 공존할 수 있도록 크게 대립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마의 세력 중에서도 철궁세가를 따르는 문파는 수도 없이 많았다.
 정과 사, 그리고 마를 가리지 않고 중원은 분노했다.
 그런데······.
 무림인들을 더욱 경악케 한 사실은 다른 곳에 있었다.
 ― 철궁세가의 괴멸은 옥화부인이 꾸민 음모였다!
 하늘에 비견되는, 신의 부인이라고 불리우던 옥화부인이 마의 세력과 배가 맞아 자신의 지아비이자 중원의 신이라 불리우던 철궁대제를 시해 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오년 전 철궁무웅의 죽음도 옥화부인의 소행이라는 것이었는데, 누가 이러한 사실을 믿을 수 있으랴마는 그러나 눈 앞에 엄연하게 도래한 현실을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안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폭풍의 회오리 속에 잠겨버린 정도의 분노는 옥화부인에게로 향했다. 더불어 이때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천하는 악마들의 말굽 아래 짓밟혀 대혈란(大血亂)의 어둠 속으로 말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새로이 강호를 뒤덮기 시작한 마도들로 인하여 옥화부인의 누명은 서서히 덮여져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수그러들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 나타난 악마의 추종자들은 그러한 것을 생각할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고 피의 대전 속으로 중원을 밀고 갔다.
 대혈란은 하나의 문파가 등장함으로써 현실화 되었다.
 혈마부(血魔府).
 이 이름은 이십 년 전 철궁대제에게 태산에서 패하여 영원히 중원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사라졌던 만마존과 사무후가 세운 피의 문파였다.
 그들이 협약을 깨고 중원 강호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정도인들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정도인들은 반항하지도, 그렇다고 철궁세가의 복수도 할 수조차 없었다.
 아니, 반항이나 복수라는 말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했다.
 정의 하늘을 무너뜨린 두 악마에 대항해 봤자 죽음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는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숨어서 천하가 피에 젖어가는 것을 바라만 보며 속으로 내장이 썩어가는 통한의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역시 철궁대제에게 은혜를 입었던 수많은 마웅들도 지하로 잠적하여 언젠가 은혜를 갚을 날이 오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만마존과 사무후는 각각 남과 북을 가르고 각자의 문파를 세웠다.
 천하는 대강(大江)을 경계로 둘로 양분되고 말았다.
 북무림(北武林), 그곳은 만마존이 거느리는 만마궁(萬魔宮)의 천하가 되었다.
 남무림(南武林), 이곳은 사무후가 여인들을 모아 여제궁(女帝宮)을 세웠다.
 두 악마의 발 아래, 정도의 무리들은 철저히 짓밟혀 갔으며 그나마 의기(義氣)가 있던 중원마도 역시 점점 지하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제, 중원은 오직 피를 갈구하는 만마궁에 포섭된 주구와 발가벗은 사타구니 사이로 천하를 희롱하는 여제궁의 천하였다. 오직 피와 죽음만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혈세천하(血洗天下)였던 것이다.
 그 속에서 정의 세력들은 소리없이 눈 녹듯 사그러져 가고 있었다. 또한 예전에 기세를 드높였던 중원마도도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 * *
 고루거각(高樓巨閣).
 성채의 높이는 적어도 십여 장 높이로 보일 정도로 대단했고 도합 여덟 개의 문이 팔자 형의 바위 같이 단단하게 배치되어 있어 그 기세가 당당했다.
 허나, 그것은 성채가 아니라 장원(莊園)이었다. 그건 명(明)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황도(皇都)에서 자금성(紫禁城) 다음으로 큰 건물.
 비조불입(飛鳥不入)이라는 말이 실감나도록 엄중한 경계가 도처에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으며 십 보(十步) 사이로 경비병이 철통 같은 모습으로 지키고 서 있었다.
 건물은 처마와 맞닿아 있으며 거각(巨閣)의 기둥은 장한 두 명이 손을 합쳐야 겨우 껴안을 수 있는 흑오석(黑烏石)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한 군데군데 가산(假山)과 인공호수(人工湖水)가 즐비했으며 자금성에서나 볼 수가 있다는 삼층누각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었다.
 이 거대한 장원 안, 무원 깊숙한 곳에 한 채의 누각이 있었으니 그것은 참으로 아담하고 운치있게 짜 맞추어 지어진 이층누각이었다.
 애월각(愛月閣).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현판에 쓰여진 글씨는 용사비등(龍蛇飛騰)의 필체도 아니고 그렇다고 용등호약(龍騰虎躍)의 힘이 넘치는 필체는 더욱 아니었다. 어딘지 맵시가 있고 유연하며 운치가 깃들어 있어 누가 보아도 그 현판은 남자가 아닌 규중의 처녀가 썼음을 쉽게 알 수가 있었다.
 글씨를 쓴 주인공은 바로 그 이 층의 규방에 있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사생아를 낳았다는 사실은 알만한 사람은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사는 그곳, 넓은 방은 여인의 규방이라고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게 꾸며져 있었다.
 여인의 것이라면 휘장 사이로 보이는 분홍색 침상과 역시 분홍색으로 깔린 넓은 보루, 그리고 그 곁에 세워진 금(琴)이 전부인 듯했다. 벽에는 신선과 폭포가 그려진 신선월하도(神仙月下圖)가 한 폭 걸려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전면, 그것만 본다면 결코 여인의 규방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검(劍), 도(刀), 창(槍), 부(斧), 궁(弓), 비(匕)······.
 중원에서 사용하는 십팔만 병기 외에도 기형의 무기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언뜻 본다면 필시 무기라고 해야 옳으리라.
 무슨 이유로 이 규방에는 이리도 많은 병기가 모아져 있단 말인가?
 문득 방안에서 처절한 절규성이 새어나왔다.
 “흑흑······ 만마궁, 여제궁! 내 기필코 복수를 하고 말리라.”
 완전십미(完全十美)의 여인이 수정 같은 눈물을 흘리며 심하게 오열하고 있었다. 오열을 토해 내는 여인은 인세에서 보기 힘든 선녀 같은 자태를 지니고 있는지라 뭇 사내라면 누구라도 목숨을 걸만할 정도였다.
 과거 천하제일미와 비교 한다면 비교함 그 자체가 욕이 될 것 같은 여인, 아미는 반달을 두른 듯하고 두 눈은 유난히 밝아 수정을 박아 놓았다고 착각을 하리라.
 그 아래 코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오똑 솟아 그녀가 천상미인임을 증명하니, 한 번 웃으면 천하의 남자가 색정의 노예가 되고 말리라.
 월궁(月宮)의 항아가 또한 이 여인과 같을까?
 필설로써 형용하는 자체가 이 여인에게는 누를 끼치게 됨인데, 여인은 계속 피를 토하는 오열을 터뜨렸다.
 “흐흑흑흑! 만마존, 사무후, 네 놈년들이 사랑하는 남편을 앗아 갔다. 비룡이 재롱을 떨어야 할 할아버지마저 빼앗아 갔다.”
 그녀는 이를 갈아붙이며 허공을 잡아먹을 듯 응시했다.
 “빠드드득! 기다려라······. 언젠가는 당한 것의 천 배로 비룡이 갚아 주리라.”
 한(恨), 처절한 한이 서린 음성이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누구이기에 만마존과 사무후에게 이토록 피뿌리는 분노를 토하는가?
 “이 죽일 년놈들! 이 백유연을 몰랐다면 언젠가는 후회하리라. 본인의 지아비와 시아버님의 원수를 언젠가는 피로 보상하게 하리라!”
 말을 하는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은 냉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천세일려(天世一麗) 백유연(白柔娟), 그녀의 별호가 말해 주듯 그녀는 하늘과 인세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난 여인이었다. 당금 명조의 충신 명군대사마(明軍大師馬) 백무혼(白武混)의 무남독녀.
 이미 삼 세에 사서오경을 끝내고 칠 세에 경전을 읽고 십오 세에 이르러 손에서 책을 놓았다는 재녀로서 유림(儒林)에서는 그녀를 가리켜 천년학사(千年學士)라 부를 정도의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십팔 세가 넘어서부터는 문 밖으로 출입을 한 적이 없었다. 허나, 당금 이십삼 세가 된 그녀에게 씻지 못할 오명이 있으니 그것은 그녀가 애를 낳았다는 사실이다.
 아직 혼례도 올리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애를 낳았다는 것 자체로도 커다란 수치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황자(皇子)가 청혼을 한 적도 있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엄하게도 정인이 있노라고 황자의 청혼을 무시해 버릴 정도로 줏대가 있는 여인이기도 했다.
 그녀를 알려 한다면 그녀의 아버지인 명군대사마 백무혼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으리라.
 명군대사마 백무혼.
 태조(太祖) 주원장이 명(明)을 건국한 이래 그의 가문처럼 명예로운 가문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명군대사마라 하면 명군(明軍)의 최고 통수권자임을 가리키는 말이다.
 명나라 어디에라도 퍼져있는 명의 군사들은 그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목을 걸고 죽음을 불사한 채 명을 따른다.
 명친건흥군(明親建興軍) 이백삼십 만의 군병이 그의 손에 달려 있으니 그 위세 또한 막강하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가문 역사상 가장 뛰어난 무인은 백상엽으로서 당시 마인에 불과했던 그는 주원장을 도와 명을 건국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우기에 이른다. 이에 주원장은 역적의 죄를 짓더라도 한 번은 용서해 주겠다는 약속의 단서철권과 더불어 대대로 명군대사마의 직위를 이어 왔다.
 더구나 백무혼은 상황(上皇)이 가장 총애하던 경옥공주와 결혼한 사람으로 명나라의 부마이기도 했다. 경옥공주와 백무혼 사이에 딸이 하나 있으니 그녀가 바로 백유연인 것이다.
 세인들은 명군대사마의 대저택을 가리켜 무왕부(武王府), 또는 자금별부(紫禁別府)라고 부르며 경외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만큼 그의 가문은 대단했고 자금별부라 칭해질 만큼 황제가 춘하추동(春夏秋冬)을 가리지 않고 찾는 곳이었다.
 대명 제일의 가문이라는 사실이 실감날 정도로 명성은 하늘을 찔렀고 그 위치는 항상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무왕부의 규중 심처에서 한 서린 여인의 칼날 같은 절규를 들어야 하다니······.
 * * *
 항산(恒山)에 자리한 거대한 성보. 한때 천하지주로서 정천(正天)으로서 대륙을 질타하며 영광을 누렸던 철궁세가.
 그러나 지금은 검은 어둠의 그림자만이 스산하게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다. 괴묘한 기운이 천지간을 두루 감싸고 모골이 송연하도록 칙칙한 사기만이 폭풍처럼 소용돌이 치고 있을 뿐이었다.
 위대한 성역이었던 철궁세가의 자리에 현재는 북무림을 뒤덮어버린 만마존이 자리 하고 있었으며 그의 강력한 수하들이 만마궁을 세워 총본산으로 삼고 있었다.
 항산 철궁세가의 삼백 년 영화는 어디로 갔는가?
 “크― 아― 악!”
 마색(魔色)의 기류가 바윗덩어리처럼 내려 앉아 있는 만마궁의 한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목을 가르듯 찢어져 나왔다.
 동시에, 콰르르릉! 하는 굉렬한 폭음과 함께 만마궁의 일각이 산산히 부서지며 천지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엄청난 화기가 천지간에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솟아오르며 웅크린 듯이 엎드려 있던 만마궁은 늦은 밤 시간, 대낮이 무색하리만치 밝아졌다.
 그건 화광충천이었다.
 “잡아랏! 감히 무기고를 습격하려 들다니!”
 우― 우!
 한바탕 어지러운 경계의 좌중이 어두운 공간을 흐르고 지나가자 여기 저기에서 아우성과 웅후한 사자후가 허공을 가르며 승천의 자세로 다가왔다.
 더불어, 수백의 인영들이 한곳을 향하며 허공으로 몸을 뽑아올렸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은 불길이 치솟는 곳, 바로 사자후가 울려나온 곳이었다.
 “감히 무영살객(無影殺客) 네 놈이 쥐새끼마냥 숨어들어 대만마의 무기고를 탈취하려 들다니······. 잡아서 육시를 내라고 궁주님이 말씀하셨다!”
 섬뜩한 기운을 실은 폭갈이 만마궁의 내부를 심하게 흔들었다 싶은 찰라,
 슈아― 아악!
 유성이 스치고 지나는가? 아니면 바람인가?
 한 줄기 혈영이 암천을 마치 빛살처럼 빠르게 가르며 지나갔다. 마치 불꽃이 터졌다 꺼지듯 인영은 일시에 수십 마장을 스쳐 지나갔다.
 누가 보아도 그것은 환영을 보았을 뿐이지 사람이라고 생각지 못할 것임이 분명하다.
 어찌 인간으로서 이러한 빠름을 흉내낼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인간의 몸짓이 아닌 가히 신의 몸짓과도 버금가는 것이었다.
 또 다시, 슈― 아악! 혈영이 허공을 격하며 십여 장을 휩쓸고 검극을 비추었을 때,
 “으으윽!”
 쿵! 하며 듣기조차 둔탁한 신음을 내뱉으며 혈영인은 그대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크― 윽······ 지독한······.”
 바람을 피로 적시며 비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은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어 아수라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혈의인은 전신에 도검의 상흔이 쩍쩍 갈라져 있었으며 극한의 아픔에 겨운 듯 전신을 뒤틀었다.
 처참의 극을 달리고 있는 몰골의 혈의인은 중년 정도로 보이는 자였다.
 그는 한순간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크······ 나 아수대군(阿修大君)이 이따위에 죽을 수는 없다.”
 그의 입과 눈에서는 수치와 분노의 덩어리가 선혈이 되어 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는 당금 천하를 울리는 인물 중의 한 명으로 위명이 대단한 자였다.
 아수대군이란 높다란 명호를 가진, 천하의 북무림을 장악하고 있는 만마궁의 부궁주의 신분으로 이미 천하에 악명이 자자하며 과거 마도일살(魔道一殺)로 불리워졌던 일대 무심한(無心漢).
 현 무림에 그만큼 막강한 쾌도(快刀)를 펼치는 사람은 없다.
 부상(扶桑)의 일도류(一刀流)와 마도의 극섬쾌도(極閃快刀)를 혼합하여 그가 창안한 쾌도류(快刀流)는 중원 최고 도법으로 소문날 정도였다.
 삼십 년 전, 그는 만마궁에 투신했으며 그가 지닌 높은 악명과 극고의 공력, 그리고 가공지경의 무공으로 부궁주의 위(位)에 오를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뛰어난 경신법을 가지고 있어 과거 마도에서 필요로 하는 정도의 비밀을 많이 빼어 내었던 사람으로 그의 경신법 또한 강호에서 소문난 일인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본거지 만마궁에서 이런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아수대군은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는 그런 상태에서도 희열에 찬 음성으로 고함을 터뜨리고 있지 않은가?
 “흐흐흐······ 사지가 떨어져 나가면 어떠냐? 이것이 나의 손에 들어온 이상은······. 하하!”
 더불어 그는 자신의 품 속에서 낡아빠진 두 권의 고서를 꺼내들었다.
 <만마지존공(萬魔至尊功)>
 <철가비전(鐵家秘典)>
 스치고 지나가는 화광으로 인하여 낡은 겉 표지의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하하하하······ 만마궁은 설마 이 아수대군이 철궁세가에서 심어 놓은 최후의 보루였음을 몰랐으리라. 이제 다행히 철궁세가의 진산비급과 만마궁의 무급을 회수하게 되었구나.”
 그렇다면, 삼십 년 전부터 살명을 날리던 그가 철가의 수호자였단 말인가?
 아수대군은 고통을 감추려는 듯 툴툴 웃으며 화광이 충천한 만마궁을 돌아보았다.
 그때, 대낮 같이 환히 밝혀진 만마궁에서 수백 줄기의 인영이 파공성을 울리며 아수대군을 향하여 섬광처럼 쏟아져 나갔다.
 “으하하하, 이제 두 권의 비급을 회수했으니······ 이제 정도는 다시 부활하리라. 도련님에 의해 마도는 풍비박산될테니, 그 누구도 막지 못하리라.”
 또 다시 그의 신형이 야풍을 타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어서 슈파파팟! 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몸은 허공에 엄청난 폭풍우를 휘몰고 암천 서편으로 까마득히 사라져 갔다.
 과연 가공할 내공의 운용이었고 소문답게 빠른 경신법이 아닐 수 없다.
 “기다려라! 감히 철궁세가를 건드린 대가 천배 만배 정무대천(正武大天)의 이름으로 갚아 주리라.”
 그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그의 음성이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허공을 울려대고 있었다.
 
 
 2장 경도일절(京都一節)
 
 
 성조 영락제가 금릉(金陵)에서 도읍을 옮긴 이래 명조의 통치자 황제들이 정정(政政)하였던 도읍지가 바로 경도(京都)인 북경(北京)이다.
 사해오호(四海五湖), 십팔만리(十八萬里), 오악오강(五嶽五江)이란 말들이 중원을 대표하는 것이라면 북경을 대표하는 것이 있었으니, 중인들은 그것을 일컬어 경도삼절(京都三節)이라 불렀다.
 제삼절(弟三節) 자금성(紫禁城).
 역대 황제들이 민정(民政)을 살피고 억조창생을 구현하는 곳.
 누각은 누각에 이어져 있고 중원에서 제일 화려한 건물이 있는 곳. 수백, 수천 명의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있으며 수만, 수십만의 군병(軍兵)이 기치창검을 휘날리고 있는 곳.
 현재, 태조 주원장이 명을 세운 이래 가장 영화를 날리고 있는 시기였으며, 성군으로 추앙받는 영락제는 명을 든든한 반석으로 다졌다.
 더구나 황궁일미(皇宮一美)라고 불리우는 천병군주(天兵君主) 주혜빈(朱惠彬)은 강호의 일류무사 보다도 뛰어난 무공 수위와 더불어 그녀의 휘호가 말해 주듯 천하의 병장기를 모으는 취미가 있어 천하에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현재 자금성이라 하면 떠오르는 이는 천병군주 주혜빈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그녀가 제삼절을 대표하는 인물인지도 몰랐다.
 자금성은 경도삼절이었다.
 제이절(第二節) 천문서고(天文書庫).
 천문서고는 이름이 말해 주듯 책 파는 상점으로서 상인들이 우글거리는 마가로(馬家路) 북쪽 네거리의 모퉁이에 있다.
 천문서고는 이름과는 달리 낡디 낡은 허름한 서고였으나, 그곳에 얼마나 많은 책이 보관되어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가 원하는 책이던 그곳에 가면 꼭 있었기 때문이다.
 진기하다는 갑골문(甲骨文) 정도는 기초였으며, 과두문( ?文)과 천축의 소멸어인 바라밀문(婆羅密文) 정도도 그곳에서는 귀한 것이 아니었다.
 늘 어지럽게 널려있는 서고였으나 세상에 존재하는 책은 모두 갖추어져 있는 곳.
 천문서고는 경도이절이었다.
 제일절(第一節) 경도일랑(京都一郞).
 이 말은 한 명의 소년을 가리키는 말이다.
 기이하게도 경도일절은 앳된 소년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 소년이 어떠한 존재인지 보지 않고도 짐작 할만 하지 않은가?
 소문은 말한다. 경도일랑은 삼 세가 되던 해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떼고 사 세에 오구구류를 떼었으며 오 세에 제자백가와 오만 권의 책을 이미 읽었노라고.
 십 세에 이르렀을 때 이 소년은 대과(大科)에 급제했으며, 하루도 되지 않아 공주의 글선생이 되었으나, 공주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 하여 훌훌 걷어차 버렸다.
 당대의 최고 학사라 하는 우문대학사(宇文大學士)도 그에게 한 시진의 문답을 하면 머리를 휘휘 내젓고 만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따스한 난향(蘭香)인지 부드러운 미풍인지 모를 바람이······.
 그 바람은 중원 천하에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진 무인이 웅크리고 있으며 대명제국의 기둥인 백무혼이 있는 장군부(將軍府)에도 불고 있었다.
 백사각(百士閣).
 그곳은 황궁의 한림원에 버금가는 곳으로 항상 문인들이 들끓었으며 수만 명의 학사들이 모여 경륜을 논하는 곳이었다.
 장군부에는 장군부 나름대로 삼백여 명에 육박하는 문인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이들은 그들의 문학이 실로 뛰어나 황궁에 거주하는 학사들보다도 몇 배나 낫다고 말 할 정도였다.
 특히 무(武)를 추종하고 있는 명군대사마 백무혼이었지만 그 탁월한 무공에 못지 않게 문(文)을 익혀 그는 당대의 유사(儒士)중 하나로 추앙받고 있었다.
 백사각에 거주하는 삼백의 문인들은 그가 걱정하는 것을 지혜로서 해결해 주었으며 그가 사랑하는 식솔들에게는 훌륭한 스승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명군대사마 백무혼을 존경하여 모여들었으나 단 한 사람의 소년 때문에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논문루(論文樓)는 백사각에 딸린 하나의 조그마한 누각으로써 백사각의 가장 깊은 곳에 있다. 그곳에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으니 그들은 과연 어떤 이들인가?
 “으음, 이제 소공(少公)께서는 본인들이 원하는 십팔반의 무예를 익히신 듯 하오이다. 이제 장군의 허가만 얻으면 되겠소.”
 “장하오이다, 우문대학사.”
 기쁨에 들뜬 탄성소리가 여기 저기에서 울려나왔다.
 논문루 안에서 세 명의 인물이 품자 형으로 마주 앉아 희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우문대학사라 하면 당대제일의 석학이며 황궁의 한림원주가 아닌가? 중앙의 마치 학과 같이 고고한 노문사가 바로 우문대학사임이 분명하리라.
 “마군께서 죽음을 무릅쓰고 만마궁에 잠입하여 철궁진서와 만마지존공을 회수한 뒤로 채 오 년이 지나지 않아 소공께선 모든 것을 익히셨습니다.”
 “······.”
 “믿기 어려운 일이지요. 아무리 기재라 해도 그것은 너무 난해하여 구결을 익히는 데만도 십 년의 세월을 허비하리라 믿었었는데,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갔습니다.”
 “이제 소공은 이 갑자의 능력을 갖추셨으며 강호의 일류 고수에 버금갈만할 정도가 되셨으니, 장군께 종용하여 천간뇌옥(天間雷獄)에 보내 여섯 늙은이의 무공을 익히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귀공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오?”
 우문대학사가 두 명의 중년문사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뜻을 비추었다.
 그런데, 그의 말 속에는 귀신조차 놀랄만한 곳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천간뇌옥(天間雷獄).
 중원의 문무관들은 그곳을 가리켜 불회귀옥(不回鬼獄)이라고 부른다.
 중원에서 팔만 리를 가면 뜨거운 열사(熱砂)의 사막 열하성(熱河省)이 나오며 그곳에서 다시 팔만 리를 가면 호른호라고 불리우는 호수가 나온다.
 호른호는 대막과 북해와도 근접해 있으며 중원에서 적어도 다섯 개의 성을 지나야 갈 수 있는 험난한 곳에 위치한 뇌옥이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현이 해랍밀이며 그곳에서 삼천 리의 거리에 있다.
 그곳에 한 번 들면 탈옥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중원에서 그곳을 가리켜 불회귀옥이라고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특징이 있다면 그곳은 아무나 죄를 지었다고 들어갈 수가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황가의 후손이나 고관대작의 아들이나 자제, 그리고 왕족과 선이 연결된 거물급들만 가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말은 뇌옥이라고 하나 사실 일개 공자의 사저라고 할 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불회귀옥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유는 그곳이 너무도 멀고 험난한 길을 가야 하며 사방이 오지와 밀림, 그리고 수천 리에 인가가 없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무단 탈옥이라는 말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곳.
 “천하를 위한 일이니 마군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오. 황상께서 이미 명군대사마 백장군과 논의가 된 것으로 알고 있소이다.”
 우문대학사가 좌측의 청수한 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좌측의 청수한 문사, 그는 수염이 가슴까지 늘어져 마치 삼국(三國)의 촉장 관우를 연상케 할 정도였으며 두 눈에서는 맑은 정광이 줄기줄기 뻗어나와 그가 심오한 내공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한다.
 그가 바로 수십 년 동안 만마궁의 부궁주로서 악명을 날렸으며 당금 최고의 살인예술가(殺人藝術家)라고 불리어지는 아수마군이었다.
 철궁세가의 가주 철궁대제가 최후의 포석으로서 만마궁에 침투시켰던 인자(忍者)가 바로 그였으며 실질적인 철궁세가의 오대 가신 중 한 명이 바로 그였다.
 석년 그는 만마궁에서 두 권의 기서를 탈취하지 않았던가?
 “천하에 철궁의 일맥은 소공 뿐이니 소공을 염려하시는 마음 잘 알고 있소이다. 그러나 철궁을 빛내고 천하를 암흑으로 구할 분은 오로지 소공 뿐, 염려 때문에 큰 일을 망쳐 버릴 수는 없는 일이오.”
 입을 연 인물, 아수마군을 달래는 또 다른 단아한 용모의 중년인은 누구인가?
 그는 천산(天山)이 낳은 최고의 기재였다.
 그의 무공과 더불어 학문의 깊이 또한 한없이 깊고 넓어 우문대학사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다.
 이미 멸망해버린 천산의 속가 장령제자로서 천산의 오백삼십 구 종의 절기를 완벽하게 익힌 천산이 낳은 걸출한 인재 중의 한 명이 바로 그였다.
 천산대뇌(天山大腦), 이것이 그가 지닌 명호였다.
 우문대학사와 아수마군은 철궁세가를 받드는 이대가신이었으나 이 천산대뇌란 자는 다만 철궁세가를 흠모하고 존경하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철궁세가가 멸문을 당할 때 오대가신 중 참화에 의해 생명을 잃어 대가 끊긴 무가(武家), 즉 무가신(武家臣)의 뒤를 잇게 된 것이다.
 철궁세가에는 오대가신이 직책별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중 제 일가신인 문가신(文家臣)은 대명의 우문대학사로서 본연의 신분을 속이며 철궁세가의 유일한 후예인 철비룡을 위해 학문들을 전수하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소공이란 다시 말해서 백유연이 낳은 철비룡을 가리키는 것이다.
 제 이가신은 무가신(武家臣)이란 이름으로, 현재는 공석중이었으나 천산대뇌가 그 자리를 메꿈으로써 이미 허물어진 철궁세가의 체제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제 삼가신은 정보가신(情報家臣)으로서 가장 뛰어난 경공술과 과감한 판단 능력을 지닌 아수마군이 팔십 년 가까이 이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제 사가신은 살가신(殺家臣)이라 명명된 이로서 추적과 암살 등의 임무를 맡고 있으니 당금 천하에 가장 뛰어난 살수 무영섬도(無影閃刀)가 바로 그였다.
 마지막 제 오가신이 내가신(內家臣)으로서 철궁세가의 재정과 군자금을 관리하는 가신으로 유일하게 여인이었으며 그녀는 북경 제일의 기루 봉황일루(鳳凰一樓)의 주인으로 알려져 있는 얼굴없는 여인 신기야화(神技夜花) 문미봉(文美鳳)이었으니, 어찌보면 상상 할 수도 없는 일이리라.
 천산대뇌가 안색을 굳히며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천간뇌옥의 여섯 늙은이가 괴퍅하기 이를 데가 없다고 알려진 것은 이미 천하가 아는 사실······. 소공께서 그들의 절기를 꼭 얻을 수 있다고 장담을 할 수는 없지 않소?”
 천산대뇌의 물음에 우문대학사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도 않소이다. 소공께서는 만약 얻으려고만 한다면 중원에 있는 모든 것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오. 더구나 그곳에 대도지궁(大盜之宮)이 있음을 안 이상 무리를 할 수밖에 없소.”
 우문대학사의 음성이 가늘게 부서지듯 떨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천산대뇌와 아수마군 모두가 신형을 잘게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들이 가리키는 여섯 노인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들이 이렇게도 이들을 격상시킨다면 아마도 개개인의 능력이 하늘을 가리킬 수 있음은 알만 하지 않은가.
 더구나, 전설의 대도지궁(大盜之宮)이 천간뇌옥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강호인들 뿐 아니라 천간뇌옥에 갇힌 죄수들도 물욕에 눈이 어두워 광란을 일으킬 것이 틀림없다.
 대도지궁을 얻는다면 천하를 얻는 것이나 결과적으로 진배가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때, 다른 이의 목소리가 세 사람의 귓속으로 들어왔다.
 “천통대석(天通大碩)이 결코 한 시진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우리의 예상은 맞았소이다.”
 동시에 말을 마친 천산대뇌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고 곧 그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
 그의 시선을 따라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머문 곳은 백사각의 후원을 가로질러 그들이 앉아 있는 논문루와는 삼각 지점에 위치한 한 채의 누각 앞이었다.
 누각의 현판에는 용사비등의 필체로 위와 같이 인각되어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정서헌(頂書軒).
 명군대사마 백무혼에게는 무남독녀 외딸이 있으니 그녀가 바로 천세일려라고 미모를 칭송받던 백유연이란 당대의 미인이었다.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하여 혼전에 잉태를 했으나 그 직전 남편이 죽어 수많은 질시와 냉대, 그리고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가 낳은 자식은 상상 이상으로 총명하여 백무혼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있었다.
 정서헌이란 현판이 달린 곳은 바로 백무혼의 외손주가 기거하는 누각인 것이다.
 그 소년은 철궁세가의 삼가신이 소공이라 부르는 당사자 였으며, 철가의 유일한 후손인 비룡이었다.
 바로 그때, 그들이 모여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 천통대석이라고 불리우는 노문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원주! 이곳에 계시오이까? 제자가 불민하여 공자께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하게 되어 원주님께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사오이다.”
 천통대석이 화원을 가로질러 다가와 우문대학사에게 읍을 하였다.
 천통대석 노문사는 우문대학사가 원주로 있는 한림원의 수석 석학으로서 그 위치만으로도 학문의 깊이는 일세를 대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단 한 시진 만에 철비룡에게 무릎을 꿇고 말다니······.
 “할 수 없는 일······. 공자의 자존심을 꺾어 주려다 오히려 자만심을 심어줄까 걱정이로구나. 알겠네. 천통대석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시오.”
 “예!”
 천통대석이 허리를 굽혀 읍을 한 뒤 멀어져 갔다.
 “후후후, 이번에는 유림계(儒林界)의 대문사라는 창허선옹(蒼虛仙翁)께서 소공의 방으로 들어가고 있소이다.”
 딴전을 피우던 아수마군이 웃음을 흘리며 천통대석이 나온 문을 바라보았다.
 머리에 소요건을 단정히 쓰고 허리에는 금실을 둘렀으며 전신에 눈보다 더욱 흰 유생복을 입은 초로의 노인이 정서헌의 문을 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의 눈에 창허선옹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방금 정서헌으로 스며든 창허선옹은 문무를 갖춘 것으로 소문난 기인이사 중의 하나였다. 강호의 사람들이 경외로운 마음으로 일컫는 무림십걸의 일 인이기도 한 그는 절세의 고수였으며 학문에 관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 한다는 유림계의 대문사였다.
 “허허허······. 창허선옹께서 몇 시진만에 소공에게 덜미를 잡힐 것이라 생각하오?”
 천산대뇌가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인 생각으로는 적어도 한 시진 이상 견딜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귀공들의 생각은 다르오이까? 이제 중원천하에 소공의 학문을 따를 자 아무도 없소이다.”
 그러나 우문대학사는 그의 말에 설레설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니! 그럼 소공은 그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이오? 있을 수가 없소이다.”
 우문대학사의 아연한 표정에 천산대뇌가 기이하고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그것이 아니지요. 창허선옹은 불과 반 시진만에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럼······.”
 “그럼, 그것이!”
 우문대학사의 말에 아수마군과 천산대뇌의 얼굴에 짙은 의혹이 새겨졌다.
 “본인은 이만 실례 하겠소. 오늘 중으로 백장군, 그리고 황상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소이다. 그리하여 소공을 천간뇌옥으로 가게 할 준비를 하겠소.”
 말을 마친 우문대학사의 몸이 한순간 허공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 *
 천문서고.
 천문서고는 그 이름처럼 거창하고 거대하게 보이진 않았다. 들어가는 입구는 좁디 좁았으며 그 앞은 먼지가 풀풀 날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허나 경도이절로 불리우는 이유는 겉 모습 때문이 아니었으니, 그것은 천문서고에 보관 되어 있는 방대한 양의 서책 때문이었다.
 보기에는 너무도 허술한 모습으로 자오양문로(紫午陽門路)의 곁에 서 있었으나 겉 모습과는 달리 내면은 방대한 서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서고의 주인 문노야(文老爺)마저도 책의 분량을 모를 정도였다.
 이곳 천문서고에서 하루에 얼마 만큼의 책이 유입되고 유출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더구나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이 읽은 책의 분량은 더욱 헤아리기 어렵다.
 혹자는 하루에 수만 권이 천문서고로 유입 된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자는 수천 권의 서책이 하루 사이에 천문서고에서 유출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어떤 자는 이곳에어 읽혀지고 있는 책의 분량이 모르면 몰라도 황궁서고에 버금 간다고 말하고 있다.
 무성한 소문······.
 그러나 그러한 소문은 제쳐두고 천문서고를 잘 아는 인물은 하나 밖에 없었다.
 늘 책을 손에서 떼지 않으며 꽃을 벗하여 살아가는 한 명의 소년.
 책과 꽃 속에서 살며 가끔씩 사륜거에 몸을 싣고 경도의 대유학자들에게 우주의 진리를 이야기 하기도 하며 천하 학문을 표현 하기도 했고, 자신 나름의 탄탄한 학문 체계를 구축 하고 있는 십삼 세의 소년, 그는 오히려 문노야 보다도 천문서고를 잘 알고 있었다.
 오후.
 구월의 일양(日陽)은 아직 뜨거워 한낮은 매우 더웠다.
 책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천문서고의 삼십육가 중 마지막 병가(兵架)에는 수만 권의 고서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천문서고에는 총 삼십육가가 있었으며 일가(一架)인 문가(文架)에서부터 삼십육가인 마지막 병가에 이르기까지 수십만 권 이상의 고금현서(古今現書)가 빼곡하게 채워져 향긋한 냄새를 풍겨 내고 있었다.
 전신에 은은한 자태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금삼(錦衫)을 두른 소년은 삼십육가 중 마지막 병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푸석거리는 양피지 책자가 들려 있었으며 얼마나 오래되고 낡았는지 표지의 글자도 희미하게 탈색되어 있었다.
 삼도해본(三刀解本).
 소년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의 이름은 천 년 전 중원을 떨게 하였던 세 가지의 도법을 해설해 놓고 파해법을 연구해 놓은 책자였다.
 삼도해본은 소년이 그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책이었으므로 얼른 집어 보았고 처음부터 나오는 그 내용의 신기함에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자세는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형상이었다.
 “흐음······. 이 천문고서에 이토록 기이하고 현란한 무예의 해설서가 기록되어 있다니 금시초문이라고 아니 할 수가 없군.”
 소년은 책장을 넘기며 흥미로움을 견딜 수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팔랑 팔랑······. 소년이 양피지 고서(古書)를 넘기는 것은 보고 읽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책장을 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과연 천룡자(天龍子) 어른은 기인이라 할만 하군. 이 철비룡은 태어나서 아직껏 이처럼 정확하고 난해한 도보(刀譜)를 본 적이 없다.”
 소년은 진정 감탄스럽다는 듯 신음성에 가까운 감탄을 터뜨렸다.
 그는 이름이 철비룡이라고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가 진정 철비룡이라면 경도일랑(京都一郞)이 분명 하리라.
 책을 좋아하고 꽃을 좋아하여 화서랑(花書郞)이라고 불리워지는 경도일랑, 그는 명군대사마 백무혼의 손자라는 후광을 뒤에 업고 있었으나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혀져 있지 않아 사생아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뛰어난 학문과 그의 모친이 백무혼의 딸 백유연이라는 미명의 여인이라는 사실은 그러한 단점들을 감출 정도였으니 이젠 철비룡이라 하면 경도일랑이란 칭호만이 생각나게 할뿐, 사생아란 오명은 쉽게 벗어져 버린 뒤였다.
 사실, 이 천문서고를 주인이라는 문노야보다도 훤히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왜냐하면 이 천문서고의 모든 고서가 그의 손에 의해 정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문서고가 세워진 것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삼년 전 문노야는 마가로와 자오양문이 부딪치는 모퉁이의 허술한 옛 서원(書院)을 사 그곳에 천문서고라는 간판을 걸었다.
 그러나 그가 어디에서 온 사람이며 예전에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가 늘 허름한 문사복을 입고 있으며 여러 잡다한 학문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고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이 소문에 날릴 정도였다. 그에게는 당금 십여 세의 손녀 하나만이 있을 뿐 식솔도 없었다.
 수십 수백만 권의 책을 관리하는 그였으나 점원 한 명 두지 않아 그 혼자로서는 힘든 일이었다.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철비룡은 자처해서 그것을 정리해 주는 것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일곱 살의 철비룡은 나름대로 마련된 삼십육가에 분류해 정돈 하였는 바,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오차가 있을 수 없는 정확한 안배였다.
 그 뒤로 철비룡은 천문서고에 마음대로 출입 할 수가 있었으며 따라서 철비룡은 하루의 반을 이 천문서고에서 보낼 수가 있었다. 육 년째 천문서고를 쉬지 않고 드나들었고 그로 인해 이곳에 소장된 삼십오가에서 수십만 권의 서책을 읽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가 읽지 않은 서책은 쉽사리 찾아보기 드문 터였다.
 갑골문과 가두문의 고서는 물론이고 삼천 년 전 신비롭게 사라진 야야족(耶耶族)의 기문(奇文) 화리묘어(火理妙語)도 이미 해독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철비룡이고 보면 그의 학문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삼십육가 중 그가 읽지 않은 책이라면 마지막 일가, 병가(兵架)에 소장되고 비치된 무학서(武學書) 뿐이었다.
 철비룡은 이제 삼십오가의 모든 서책을 읽었기에 마지막 서가로 온 것이다. 그는 마지막 서가로 오기 전, 오늘 이곳에 유입된 서책을 모두 읽은 뒤였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다른 서가에는 수십만 권의 고서가 쌓여 있던 것과는 달리 병가에는 겨우 수천 권의 서책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그 커다란 서가의 반도 채우지 못하는 기이한 형태를 자아내는 특이한 모습이었다.
 바로 그 병가의 첫 번째 서책이 삼도해본(三刀解本) 이었던 것이다. 천 년 전 무공 수집광이라고 소문이 자자했던 천통자(天通子)가 만든 절정도법의 해설집이 바로 삼도해본이었다. 삼도해본은 천년 전에는 매우 유명했던 해본으로, 천통자 사후(死後)에도 이백 년동안 피를 부를 정도로 뭇 사람들의 이목을 주목 시켰으며 그 뒤로는 행방이 묘연해져 이미 잊혀진 고서였다.
 삼도해본은 삼도(三刀), 즉 세 가지의 도법과 해석, 그리고 파해법이 적혀 있다.
 그 당시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세 가지의 도법은 다음과 같다.
 우주폭멸도(宇宙瀑滅刀)!
 천백년 전 사천에서 일어나 반 년만에 오천 명의 검객과 승부를 다투었던 만승백도(萬勝白刀)의 독문도법.
 만승백도가 살아 있을 당시, 그의 뛰어난 무공과 함께 최고의 영예를 누린 독문도법인 우주폭멸도의 파해법은 커다란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강호인들은 그들의 목적을 성취할 수가 없었다.
 오색분영도(五色分影刀)!
 천 년 전, 천통자 당대 최고의 살수라고 불리워지던 무영살객(無影殺客)의 독문도법으로 빠르고 번개 같은 도법으로 당대 최고의 살수라는 무영살객은 이 한 수의 칼질로 일만이천의 살업을 행했고 일만이천 번 모두 성공 했다는 전설이 있다.
 일설에는 무공을 익히지 못했던 저자 천통자도 그의 손에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도를 휘두르면 각각 다섯 가지의 색으로 물든 환도(幻刀)가 나타나며 누구도 어느 것이 진도(眞刀)임을 알아 낼 수가 없다. 그 사이에 무영살객은 상대의 목을 베고 사라지는 것이다. 가히 살수지왕(殺手之王)의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월참양파도(月斬陽破刀)!
 이름 그대로 달을 베고 태양을 파괴 한다는 가공무지의 도법.
 당시 정도 맹주 절정도신(絶頂刀神) 우문천의 독문도법으로써 그것은 정도 최고의 도법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천통자가 중원정도의 추적도 무시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고 보면 그는 어쩌면 당시의 무림맹에 의해 추살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무림맹은 수 년 후 마파연합세의 습격으로 패망했으며 절정도신 우문천은 당시 처참하게 죽었다.
 따라서 그 이후로 월참양파도는 철저히 매장된 채, 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팔랑 팔랑······.
 책장은 쉬지 않고 넘겨졌으며 가끔씩 철비룡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수 차례 반복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수수수수―!
 철비룡이 책을 다 넘기자 더 이상 고서는 지탱하기 힘든 듯 재가 되어 부서져버리며 바닥에 무엇인가를 떨어뜨렸다.
 탱그랑― 차랑!
 “엇! 이런 일이······. 이거 커다란 실수를 했군.”
 놀람의 외침을 토한 철비룡은 가루로 부서져 날리는 책의 잔해를 바라보다 쇠붙이 소리가 들린 자신의 발 밑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발 밑에는 조그마한 쇠붙이가 떨어져 있었다.
 쇠붙이는 환(環)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맑은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엇, 기이한 일이군. 책은 재가 되어버리고 그 대신 환이 생겨나다니!”
 철비룡은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떨어진 환을 집어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환은 팔찌의 형상으로 이루어졌는데 넓은 면적으로 만들어져 작은 보갑(寶甲)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었다. 환의 면에는 수천 개의 가는 실금으로 여러 가지 문양이 새겨져 있었으며 그 중앙에는 머리가 허리까지 늘어지고 허리에는 호리병을 맨 채 구름에 올라탄 노인의 모습이 음양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기이하고 운치가 있어 보이는구나. 그런데 이것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철비룡은 의아해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자신의 우수에 그것을 끼워 보았다.
 환은 너무도 쉽게 철비룡의 우수로 스며들었다.
 철컥!
 경쾌한 음향이 울리며 환은 순식간에 줄어들며 철비룡의 손에 채워져 버렸다. 이는 철비룡을 너무도 놀라게 했다.
 “어엇! 어떻게 이런 일이?”
 철비룡은 놀라 자신의 팔에 채워진 팔찌를 벗겨 내려고 했으나 환은 철비룡의 팔목에 붙어버린 듯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애쓰던 철비룡은 단념하고야 말았다.
 “너도 내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빠지지 않는 것을 보니······. 사실 나도 네가 마음에 드니 일생을 같이 해도 손해 날 것은 없을 것 같다!”
 사실 철비룡은 환이 마음에 들었기에 그냥 놔두기로 했다.
 잠시 후, 철비룡은 자신의 팔에 감겨진 환의 생각은 잊어버린 듯 다른 서책에 몰두해 있었으며 그것 또한 고금을 통틀어 구하기 힘든 것이었다.
 금창단보(金槍段譜).
 육백 년 전 항산에 자리하고 대륙을 울렸던 금창보(金槍堡)의 비기비록(秘技秘錄)으로 금창보는 후인이 없이 멸망한 집단이었다.
 육백 년 전 불과 오백 명의 소문파였던 금창보는 금창신(金槍神) 염기보의 기치 아래 무려 삼십 년간 구대문파를 누리고 중원을 대표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하루 아침에 금창보는 부상(扶桑)의 무리에 초토화되고 말았으니.
 “어머······ 오빠! 벌써 이곳까지 오셨군요.”
 한마디의 꾀꼬리 같은 교성이 책 속에 흠뻑 빠져버린 그의 혼을 일깨웠으며 서책에 깊이 빠져 있던 철비룡은 정신을 추스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소녀.
 이제 열 살을 갓 넘긴 듯한 아주 앳되 보이는 소녀였다.
 그러나, 추수 같은 눈이라든지 무저처럼 깊은 눈, 그리고 앵두처럼 붉은 입술과 오똑한 코가 균형있게 안배 되어 있음은 그녀가 아름다운 소녀임을 알게 했다. 더구나 그녀의 조화있는 이목구비는 그녀가 몇 년 지나지 않아 경국지색의 미인으로 발돋음 할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었다.
 몸매는 궁장을 걸치고 있었으며 머리마저 궁형으로 땋아 내리고 있어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아름답게 보이는지 마치 천상의 동녀(童女)가 내려와 노니는 듯 했다.
 “보련(寶蓮)! 오늘도 서고에 나왔구나!”
 철비룡은 소녀를 바라보며 정겹고 유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오늘도 오빠가 올 줄 알았지. 오빠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곳에 왔으니까!”
 그녀의 음성에는 꾀꼬리가 지저귀는 듯한 여운이 있었다.
 “오늘은 어디까지 읽었지? 사흘 전에 보련은 십이가(十二架) 진서가(眞書架)까지 읽은 것으로 아는데.”
 철비룡은 계속해서 물었다.
 그런데 그 말! 만약 철비룡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소녀 또한 한 마리 봉황(鳳凰)이 틀림없을 것이다.
 십이가 진서가까지라면 육십만 권의 서책을 읽었음이며 그 많은 양과 책을 이해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신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여인이라면 천부의 지혜를 타고난 것이다.
 황보련(黃寶連)이란 이름을 갖고 있는 그녀의 나이는 당금 십 세로써 귀엽고 똑똑하기로 소문난 소녀였다.
 그녀는 천문고서의 주인인 문노야(文老爺) 황궁(黃弓)의 손녀로서 천문고서를 찾는 문인들에게 많은 귀여움을 받고 있었다.
 왜냐 하면, 그녀는 서책이 어디 어디에 소장 되어 있는지 환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녀의 문학 수준이 이미 이름난 학사에 버금갈 정도의 수재였기 때문이었다. 천문서고를 찾는 어떤 이는 철비룡과 황보련을 가리켜 천문이학이라고 칭하기도 할 정도였으니 그녀의 능력은 보지 않아도 알 정도였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오빠께 여쭈어 보려고 왔어요.”
 황보련이 예쁘장한 얼굴에 보조개를 띄우며 철비룡을 바라보았다.
 탁! 하는 소리를 내며 철비룡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금창단보를 우수로 꽂았다.
 이때, 무엇을 발견 했음인지 황보련의 두 눈에 묘한 빛이 일렁였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무엇 때문이지? 오늘은 무슨 핑계를 대고 이곳에 있으려는 거지?”
 철비룡의 준수한 얼굴이 웃음기를 머금으며 황보련에게 물었다.
 사실 황보련은 철비룡이 보고 싶어, 이와 같이 무엇인가 물어보려 왔다는 핑계를 대고는 두 시진이나 이야기를 나눈 뒤 가고는 하는 것이었다.
 철비룡 역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자신을 진정으로 따르고 있으며 자신도 황보련을 귀여워 하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변은 여태껏 거부한 적이 없었다.
 벌써 그들의 관계는 오 년이나 되는 것이기에 그들의 사이는 마치 친 남매와 같았다.
 “오빠는 진법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황보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철비룡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철비룡은 그녀가 진서가의 고서를 읽고 있다고 생각 했기에 음양오행(陰陽五行)이나 이기이원(二氣二元) 정도나 물을 것이라 생각 했었다. 아니면 그것보다 조금 단수가 높은 일원(一元)이나 십전(十全) 정도?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 진법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아이가 지금 진법을 익히고 있단 말이지. 흠, 과연 련이는 뛰어나다고 밖에 할 수 없겠구나!’
 철비룡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사실 그는 중원에 산재하는 모든 진에 대해서 아수마군에게 배운 적이 있었고 이제는 아수마군도 그에게서 진법의 묘리를 배울 정도였다.
 따라서 진에 관한한 그는 대가(大家)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 과연 어떤 진이기에 그러지?”
 “풍운만변사황진(風雲萬變沙荒陣)에 관해서 알고 싶어요!”
 “헉! 정말?”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 진법의 명칭은 철비룡의 머리를 강타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풍운만변사황진.
 천삼백 년 전의 상고절전(上古絶陣).
 천기자(天氣子)가 지었다는 천기비기(天氣秘記)에서 처음 유래되어 나온 말로 소림의 나한대진보다도 열 배는 무서운 절진이라고 전해진다. 천축의 홍교(紅敎)와 대막(大漠)의 밀궁(密宮)의 합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직 아무도 파해한 적이 없다고 알려진 절진.
 “그것은 아직 시술자조차도 풀 수 없다고 알려진 상고절진이란다. 보련이는 설치를 알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파해법을 알고 싶은 것이냐?”
 “오빠는 그 누구도 파해하지 못한 진의 파해법을 알고 있을 거예요! 저는 진의 시술법과 파해법, 두 가지 모두를 알고 싶어요.”
 “알았다.”
 철비룡은 가만히 그녀의 두 눈을 내려다 보았다.
 
 
 3장 천기(天氣)의 서곡(序曲)
 
 
 “그래, 비룡이 지존환(至尊環)을 끼고 있더냐?”
 어둠 속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엄숙했으며 유현했다.
 “그래요. 오빠의 우수에는 할아버지께서도 말씀 하셨던 지존환이 감겨져 있었는데······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고서 역시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이어 울려나온 목소리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철비룡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마디씩의 대화를 들어보건데 말을 나누는 두 사람의 관계는 아무래도 사이가 좋은 조손간이 분명했다.
 그런데 지존환이라니, 그렇다면 철비룡이 삼도해본에서 얻은 환(環)을 말하는 것인가?
 “이 할애비는 이미 백이십 년간 조상의 명을 받들어 지존환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 했었다.”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조사의 유시는 자미성(紫眉星)을 가리키는 것이었단다. 자미성의 특징은 눈썹의 끝이 약간 붉어지는 것, 할애비는 그것을 비룡공자에게서 보았다.”
 노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할애비는 천 년의 대를 이어 이 목적을 위해 수행해 왔다. 만약 내가 자미성을 찾지 못했다면 네가 찾아야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 자미성이 무엇이기에 할아버지께서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야 했나요?”
 소녀는 모르고 있었다.
 자미성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또 자미성을 타고난 인간이 어떤한 능력을 가진 인간인지에 대해서.
 자미성(紫眉星)!
 천기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자미성체(紫眉星體)라 부른다.
 자미성에 대해서는 삼천 년 전 황제(黃帝)의 서(書)에 이미 나와 있다. 또한, 천오백 년 전 무림의 기인 아도천인(我道天人)은 자신의 저서인 천기불서(天氣不書)에서 자미성에 대해 언급했다.
 자미성체는 타고난 지혜로 범인의 열 배에 해당 되는 학문을 익힐 수 있고 그 이해력도 남달라 한 번 보면 열을 이해 한다고 한다. 만약 자미성체가 무공을 익힌다면 우내제일인(宇內第一人)이 되고 말 것이다
 마도천인의 저서 천기불서의 제 삼 장 신체편에는 자미성체에 대해서 위와 같이 적고 있다.
 문일지십(聞一知十)이요, 문일지백(聞一知百)이라.
 그것이 자미성체의 능력이다.
 그러나 그가 예언한 이래 천오백 년동안 자미성체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특징으로는 눈썹과 귀밑의 이어지는 부분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과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혈(穴)이 없는 것이다. 그건 무공을 익힌다면 그야말로 일사천리라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자미성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뿐······. 정확히 알고 있는 이들은 지금 이야기를 나누는 조손녀 뿐이라고 할까?
 “할아버지! 자미성체를 가진 용오빠가 지존환을 지니셨으니 이제 우리 식솔들도 모두 밖으로 나올 수가 있는 것인가요?”
 “아니란다. 비록 지존환을 지니고 있다 해도 지존환의 비밀을 풀지 못한다면 우리는 계속 지하에서 숨어 살아야 한단다.”
 노인의 목소리가 그곳까지 이어졌을 때에는 왠지 처연하게 들려왔다.
 이들은 누구 이기에 이러한 고독 속에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할아버지께서는 그 고서에 지존환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계셨지요?”
 다시 앳된 소녀가 물었다.
 “그것은 역시 이 할애비의 아버님께 들은 것이다. 불행히도 쌍환(雙環) 중에 철환(鐵環)은 찾았으나 옥환(玉環)이 있는 곳은 찾을 수가 없구나.”
 “그렇다면 용오빠가 아무리 환을 가지고 있다 해도 소용이 없잖아요.”
 “그렇단다. 허나 조사의 유서 대로 자미성체를 지닌 비룡에게 지존환이 가도록 안배 했으니 이제 그 아이가 스스로의 기연으로 옥환으로 찾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렇지만 찾지 못한다면······.”
 소녀의 음성은 애처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만약 밝은 곳이었다면 소녀의 얼굴에 슬픔이 깃들어 있음을 볼 수 있으리라.
 “만약 비룡이 옥환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의 무존들은 또 다른 자미성체가 나타날 때까지 지하에 잠적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누구인가?
 그들의 말 대로라면 그들은 어느 거대한 문파가 틀림없으리라. 아마도 수백 년 이상 신분을 숨기고 살아온 이인(異人)들이 분명할 것이다.
 자미성체를 찾은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분명한 것은, 그들은 철비룡이 자미성체의 신체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철비룡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소녀가 철비룡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철비룡과는 더없이 가까운 사이라는 것.
 그것보다도 그들이 어떠한 목적으로 철비룡에게 접근했으며 그들이 말하는 지존의 신물이 철비룡에게 가도록 유인 했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가?
 그것으로 보아 철비룡에게 무슨 일이 닥쳤음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건만, 아직 철비룡은 그러한 사실을 꿈에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차츰 어둠이 익숙해지면서 어둠 속의 정경이 환하지는 못했지만 희미한 음영으로 인해 주변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둠 속의 공간은 커다란 석실인 듯싶었다.
 사면은 지하에서 강하기로 두 번째 가라면 서럽다는 천축에서 토출되는 흑옥강석(黑玉强石)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자세히 둘러보면 벽의 군데 군데에는 병장기가 걸려 있음을 볼 수가 있었다.
 이 인, 석실에는 두 명의 인영이 칙칙한 어둠 속에 마주 앉아 있었다. 청수한 한 명의 노문사와 아리따운 모습에 천상의 소녀를 연상케 하는 빙기옥골의 자태를 지닌 십여 세의 소녀.
 이 인 중 청수한 문사복을 걸친 노문사는 천문서고의 주인으로 알려진 이로 세인들이 문노야라고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소녀는 천문고서의 주인인 문노야의 일점혈육으로 알려진 황보련이 분명할진데 어찌 그들이 철비룡을 거론한단 말인가.
 이미 경도에서 뛰어난 용모와 지혜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황보련, 그들의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의 말 대로라면 철비룡이 삼십육가 병가에서 삼도해본을 보고 그것에서 환을 얻은 것이 우연이 아니란 말인가?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문노야의 안배가 틀림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들은 철비룡을 일컬어 자신들이 기다려온 자미성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할아버지······ 그렇지만 만약에 비룡오빠가 나머지 옥환을 얻지 못한다면 아무런 소용없이 어쩌면 우리의 정체를 노출시키게 되는 것이 아닌지요?”
 황보련이 근심스럽다는 뜻으로 목소리를 떨었다.
 “얘야! 걱정할 것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철비룡 그 아이는 석년 멸망한 철궁세가의 일점혈육임이 틀림없다.”
 “철궁세가. 중원 최고의 가문이라던 철궁세가······.”
 “그렇단다. 비록 만마존과 사무후가 중원을 양분하고 있으나 시간이 흐르면 철비룡은 그들을 제거하고 중원을 구원하며 철궁세가를 일으켜 세우려고 할 것이다.”
 이미 문노야는 철비룡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우리가 비록 천 년의 억울함을 무릅쓰고 신분을 속이고 있지만 그를 도와 일익을 담당 한다면 우리는 떳떳하게 중원에 얼굴을 내밀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군요······.”
 문노야의 말에 황보련이 수긍의 응답을 했다.
 “지금 어쩌면 철비룡은 우리가 안배한 새로운 기연을 얻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문노야의 입에서 황보련이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터져나오자 황보련은 궁금증을 풀려는 듯 문노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
 “알 것 없느니라. 그것은 비룡에게 약간의 호신(護身)만을 도와줄 뿐이니까.”
 문노야의 음성에 황보련은 고개를 숙였다.
 이러한 밀담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천문서고의 지하였으며 중원인들이 알지 못하는 한 신비 단체의 군사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천문서고······.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어딘가 짙은 냄새가 풍기는 곳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 * *
 병가(兵架).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서고인 천문서고의 마지막 서가.
 그 규모답게 천하에 없는 것이 없었으며 소문만 무성한 황궁서고 보다도 크리라 짐작되는 곳으로 황궁서고와 다르다면 그곳은 밀반(密班)이 없다는 것이다.
 병가에는 수천 종의 무공 서적이 쌓여 있었다.
 도가(道家)의 무공, 불가(佛家)와 속가(俗家), 그리고 사술(邪術)에 가까운 배교(背敎)의 무공기서도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천하에 손꼽히는 절세무공임이 분명했다. 이미 그곳에서 구대문파의 무공은 기본에 속했으며 그 외의 무공은 기초에도 수록 되지 않았으니 그 병가의 서적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철비룡은 여전히 병가에 비스듬하게 기대서 무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음······ 이것도 다 알고 있고, 이것 역시 읽었고······ 이건 익히 알고 있는 것이고.”
 철비룡은 책을 뽑다가도 문득문득 실망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려지는 무공서적이 이미 그가 알고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철비룡은 수천 가지의 무공을 알고 있었으며 체내에는 이 갑자의 놀라운 내공을 가지고 있어 능히 일류고수라 칭할만한 것이었다.
 겉으로는 유약하고 나약해 보였으나 깊숙이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태산과 같은 기도였으니 그것은 그가 나이에 걸맞지 않은 중후한 인품과 무공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문득, 그의 두 눈이 번쩍 하고 빛을 발했다.
 “이것은······ 처음 본 책인데!”
 그의 입에서 즐거움의 음성이 터져 나왔고, 곧 손에 든 책을 예리하게 내려다 보았다.
 붉은 비단으로 표지가 싸여 있는 책.
 그러나, 아주 상고 시대의 책자인 듯 양피지 책자는 아주 낡게 변해 있어 곧 무너질 듯 위태위태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것은 삼천 권의 무서 중 이천육십 번째의 자리에 있었다. 책은 너무도 낡아 책의 제목까지 흐릿하게 변해 있어 육안으로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역시 천문서고의 책은 쓸만한 것이 가끔 있단 말이야!”
 어느새, 철비룡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것은 희열이었으며 그만이 지을 수 있는 현묘한 미소가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철비룡은 빛바랜 낡은 표지를 안력을 집중시켜 자세히 살펴 보았다.
 <천지일월대후신공(天地日月大吼神功)>
 철비룡의 총기 어린 두 개의 시선은 더욱 빛을 발했고 그는 부지불식간 탄성을 질러 자신의 놀라움을 표출했다.
 “천지일월대후신공?”
 철비룡은 표지의 제목을 읽는 순간 망설임없이 표지를 넘기며 책을 들여다 보았다.
 “어엇!”
 부르르르······. 철비룡은 표지를 들추는 순간 그의 전신이 바람에 흔들리듯 와스스 떨렸다.
 ‘누, 눈을 뗄 수가 없다!’
 책의 겉 표지를 들추는 순간 그의 두 눈을 붙들어 매는 기이한 기운이 그를 감싸며 그로 하여 눈을 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또한, 그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그의 혼을 빨아들여 버리는 것이 아닌가?
 천지일월대후신공.
 이것은 사실상 최상승의 내공심결이었으며 그에 따르는 천지일월신공은 천하에 독보적인 경지를 이룩하고 있는 대승신공이었다.
 마음을 박심정대하게 만들고 어떤 사마의 유혹도 뿌리치게 만드는 정신력을 키워주는 상승의 심결! 또한, 이것은 마음 속에 태산의 웅장함을 세우는 것이기도 하여 이것을 익힌 사람은 그의 몸에서 웅장한 태산의 웅지가 뻗어나는 것이다.
 더구나 천지일월대후신공의 구결은 한 번만 외워 두면 잠을 자거나 상처를 입거나 어떤 상태에서도 내공을 키우는 무공을 익히게 하는 효능이 있는 것으로서, 무림인들은 꿈에도 그리는 내가의 보물이었고 목숨과 바꿀 만큼 값어치가 있었다.
 철비룡이 천지일월대후신공에 대하여 조금만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놀라움의 각도는 이보다 열 배는 더하였으리라.
 아무튼 천지일월대후신공의 요결은 그의 손에 있었고 양 손에 잡혀진 천지일월대후신공의 구결은 붉은 바탕에 하얀 글로 적혀 있었다.
 그런데,
 스스스스······!
 붉은 바탕에서 기이한 기운이 흘러나와 철비룡의 혼을 빨아들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맹목적으로 천지일월대후신공을 읽도록 유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철비룡은 홀린 듯 몽롱한 기운을 추스리기도 전에 구결을 읽고 암기하기 시작했다.
 대정천후십팔수(大正天吼十八手).
 천지일월신공(天地日月神功).
 용후뇌성음공(龍吼雷聲音功).
 쾌비변식(快秘變式).
 그의 입에서 심오막대한 천지일월대후신공의 구결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더불어, 그의 눈길이 한 번 스치면 마치 판에 새기듯 그의 뇌리에 꽉꽉 박혀가는 것이었다. 거역 할 수 없는 신비한 힘이 그의 영혼을 붙들어 매고 있었으며 각각의 구결이 그의 뇌리에 새겨지고 있었다.
 “으······!”
 철비룡은 비지땀을 흘리며 천지일월대후신공에서 눈을 떼려 노력했고 결국 어렵사리 제 정신을 찾았다.
 헌데, 어느새 그는 천지일월대후신공의 구결을 모두 머리 속에 새겨 넣은 뒤였다.
 “아······.”
 철비룡은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옴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 앉고싶은 심정이었다.
 “책 속에 사기를 삽입하다니······. 나로 하여금 이 난해한 구결을 완벽하게 새기게 하다니.”
 철비룡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내며 천지일월대후신공의 구결을 내려다 보았다.
 ‘도대체 이것이 어떤 경우란 말인가?’
 철비룡은 도저히 풀 수 없는 일련의 사태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움에 대한 유혹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천지일월대후신공을 다시 펼쳐 들었다.
 철비룡은 천지일월대후신공을 펼쳐 들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의 몸에는 이 갑자의 공력이 쌓여있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 없을 정도였어. 심법을 운용하기도 전에 강력한 힘은 내 공력을 모조리 끌어당긴 기분이었다.”
 그러나, 철비룡이 다시 비급을 펼쳐들었을 때 처음의 지독한 흡입력은 없었다.
 전자체의 고체(古體)가 그의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전자체의 아주 수려한 글씨는 문필에 관한한 달인의 경지에 올라선 철비룡마저도 감탄하게 만들 수려한 서체였다.
 <후인이 보게 됨을 경하 하노라.
 그대가 만약 이 글을 볼 수 있었다면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본인이 원하는 자미성체의 기재가 분명할 것이리라.
 자미성체의 신체를 지니지 않았다면 결코 천지일월대후신공의 구결을 볼 수 없었을 것인 즉, 후인은 본존(本尊)이 조금 격한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무어라 논하지 말라.
 천지일월대후신공은 지미성체를 지닌 기재만이 익힐 수 있도록 안배된 것, 이를 본존이 천년의 천기를 살펴 강호로 흘려보낸 것이다.
 본존이 장담 하건데 당금 무림에서 천지일월대후신공이 가장 뛰어난 무공임을 자부하며 차후에도 이와 버금가는 심공은 없을 것이니라······ 중략 ······.>
 철비룡이 읽고 있는 전자체의 고문(古文)은 아주 긴 것이었다.
 “굉장한 자부심이로군. 고금 최강의 심공이라 자부 할 수가 있다니······.”
 철비룡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다시 고서를 들여다 보았다.
 <본인 또한 현 무림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자미성체를 지니고 있다. 본인의 세수가 이제 이백오십이 세, 후인을 구하려 했으나 자미성체를 이룬 뛰어난 기재를 찾을 수가 없어 천기를 살핀 바 오백 년 후에나 자미성체의 기재가 탄생 됨을 알아 그대에게 이 비급이 흘러갈 수 있도록 안배 하노라.
 그대는 자미성체의 명예를 걸고 본인의 무공을 익혀 본인에게 치욕을 안겨준 마교의 오절마맥(五絶魔脈)의 기재와 일전을 벌여야 할 것인즉, 천기에 의하면 자미성체가 탄생할 때 마교의 득세는 이루어 질 것이며 그 핵이 새로운 오절마맥임을 알 수가 있었노라.
 자미성체의 진정한 능력은 타인의 무공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무공을 수용하여 나름대로의 무공을 창시해야 하는 것.
 본인은 비록 사 주야의 혈전 끝에 반 초 차이로 오절마맥의 마교주에게 패했다고 하지만 이는 영원한 패배가 아닐 것이니, 그대가 오백 년 후 마교를 꺽어 주기 바라노라.
 본인이 남긴 천지일월대후신공은 그대에게, 약간의 호신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강호에 자미성체를 도울 수족을 남겼는바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니 표식은 대연화문(大蓮花紋)이니라.
 어느 때고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그대를 도우리라.
 자세한 내막은 본인이 남긴 수족들에게서 듣기 바라며 무림 최대의 혈겁으로 예상되는 때, 그대가 혈류(血流)를 막아 민생을 구원 하기를 바라노라.
 ······ 하략 ······.
 무무존(無武尊).>
 철비룡의 두 눈이 빛나는 혜지의 빛을 뿜었다.
 “무무존······. 이분이 바로······!”
 철비룡은 경악에 물든 표정에 아연실색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복받쳐 오르는 희열의 감정과 전신을 강타하는 기쁨을 맛보아야만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무무존(無武尊).
 고금제일의 신비인.
 그가 활동하던 시대조차도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무림 전설 속의 기인이 바로 그였다.
 대략 그의 활동 시기가 작금 오백 년 전으로만 추정되고 있으나 자세한 것은 불분명 했다. 따라서 후세인들도 그를 오직 고금제일의 신비인으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그가 누구였는지······.
 다만 알려진 것은 그의 무공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움직일 정도라는 것. 앞으로 천 년이 흘러도 세상의 사람들은 충분히 그의 명호와 전설을 기억할 정도였다.
 고금제일인.
 고금제일부.
 고금제일무.
 그러한 것들로 그의 이름과 명성은 안개처럼 전설 속에 젖어있는 까닭이었으니······.
 알려진 전설의 장을 열어 보면, 그가 모은 재물은 천하를 수 번이나 사고도 남는 것이며, 그의 무학은 천하무종(天下武宗)의 원류(原流), 바로 그것이었고, 그에게는 십만 종의 영약과 수 만 종의 영성신종신병(永聲神鍾神兵)은 물론 수만 명의 초절정 고수가 그림자처럼 그를 따르니, 그를 가리켜 우내일존(宇內一尊)이라 칭했다.
 어디까지가 전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모르는 안개 같은 소문은 무무존의 존재를 더욱 격상 시켰으며 그가 이룬 업적이 뚜렷하지 않았음에도 만인들은 그를 경외시했다.
 전설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그가 만화봉(萬花峰)에서 신비로운 고수와 삼 주야의 혈전을 벌였고 그에 따라 그 후 사라졌다고 전한다. 소문은 무성했으나 그가 어느 정도의 재물과 신병을 모았는지 몰랐으며 그를 따르는 그림자의 고수를 확인한 사람은 천하에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그의 진면목을 보았다는 사람도 없어 추측 또한 중구난방이었으며 진정한 그의 무학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의 무학이 중원의 모든 무학을 집대성한 것이며 아무도 그를 꺽을 수 없다고 알려져 왔을 뿐 그와 겨룬 사람 또한 없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오백 년 전의 전설이었으나, 이제 그 신비가 철비룡의 손에 연결되고 있는 것이었으니 기막힌 안배이며 철비룡에게 있어서는 가슴이 울렁거리는 기연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강호에서 말하는 기연이라는 것인가?”
 철비룡은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안색은 어떤 희열로 붉게 변해 있었으며 자신에게 닥친 기연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무무존의 기연이 나에게 이어지다니······ 믿을 수가 없군. 더구나 이분이 나와 같은 자미성체였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흥분시킨다.”
 아니, 그의 말 대로라면 그는 이미 자신의 신체가 자미성체임을 알고 있단 말인가?
 “무무존! 대단한 분이시군. 이분이 이 정도라면 무무존을 따르던 수하들도 대단하리라. 아무튼 차후에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철비룡은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에 들린 천지일월대후신공의 진경을 서가에 꽂으며 발길을 돌려 병가를 벗어났다.
 그러나 그는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그가 꽂아 놓은 천지일월대후신공의 글씨가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 * *
 자금성.
 수백, 수천의 거대무비한 고루거각이 하늘을 향해 그 웅자를 드러내고 있는 곳.
 그 규모의 웅대함과 장엄함은 누가 뭐라 해도 천하제일의 대궁(大宮)인바, 이곳이 바로 경도삼절 중 일절이며 대명의 성역인 곳이었다.
 중원십팔만리를 통치하는 황제가 정사를 돌보는 곳. 그런 중요하고 거대한 곳이기에 자금성은 열 두 개의 커다란 궁문(宮門)을 가지고 있었으며, 말 그대로 비조불입(飛鳥不入)의 철옹성과 다를 바가 없었다.
 웅장함과 장엄함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닌 아름답고 현란하기까지한 아름다운 건물로 이루어진 곳이 바로 자금성이었다. 처마와 처마를 맞대고 있는 무수한 고루거각들은 방어식과 오묘한 진식의 배치와 어울려 그 속에서 자연스레 아름다움이 배어나왔던 것이다.
 대황전(大皇殿).
 자금성의 중심부를 일컫는 세 글자였다.
 언뜻 보기에는 동정호의 군산을 옮겨다 놓은 듯 인공의 가산에 지어져 있었으며 대황전을 중심으로 십팔로(十八路)의 도로가 쭉 뻗어 있었다.
 대황전을 경계하는 자금위사만 하여도 자그마치 이만여 명.
 가화 무적.
 갖가지 병기를 꼬나든 군졸과 경비무사들이 눈에 쌍불을 켜고 겹겹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이곳이 누구의 근접도 허락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황제의 집무실이었다. 당금의 황제가 중원의 정사를 돌보고 모든 결정을 내리는 곳이다.
 그 웅장한 대전 내에 이 인이 마주 앉아있었다.
 한 명의 중년인과 초로의 노인으로서, 두 명의 기도가 범상치 않은 것으로 보아 대단한 내력을 지니고 있음을 생각 할 수 있게 한다.
 중년인.
 전신에는 위세 당당한 용포(龍袍)를 걸치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용관(龍冠)을 쓰고 있어 그가 결코 평범한 이가 아님을 나타내 주었다. 또한 얼굴은 구리빛처럼 붉었으며 호목(虎目)은 마치 인간의 그것이 아닌양 심유하고 장엄하기조차 하여 신광이 남달라 보였다.
 검고 굳세게 내뻗은 수염은 그의 의지가 또한 금석(金石)과 같음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이 중년인은 누구란 말인가?
 초로인.
 그의 신분은 너무도 확연하게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전신에는 백광이 눈부시게 흐드러지는 연환갑을 걸치고 있었으며 허리에는 오 척 길이의 장검을 걸고 있었다.
 그것으로 그가 무인의 신분이라는 것을 쉽사리 살필 수 있었고 더구나 갑주를 걸친 것으로 보아 황궁의 무사임을 알 수가 있었다.
 황제가 기거하는 대황전에서 갑주를 걸치고 검을 소지할 수 있는 인물은 한정되어 있는 것. 그것으로서 그가 황제에게 지대한 신임을 받고 있는 막대한 실력자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허나 이 상태로는 누가 보아도 그의 내력을 알 수 없을 듯했다.
 그의 안색이 초로의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붉게 빛나고 있었고 눈에서도 무인다운 무서운 신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흰 머리칼과 가슴까지 늘어진 흰 수염은 그의 지긋한 나이를 알 수 있게 했다.
 대환전의 이 인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 침묵 속에 곧 팍!하고 피어오를 것만 같은 불씨를 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온다면 그것은 착각일까?
 중년인은 태사의에 깊이 상체를 파묻고 있었으며 초로의 노무사는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고 한쪽 무릎을 세운 채였다.
 그때, 잠잠한 침묵을 깨며 초로인이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의 손자 철비룡은 황상의 고충을 깨닫고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킬 것이옵니다.”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상좌에 상체를 깊숙하게 묻고 있는 이 중년인이 바로 중원의 황제란 말인가?
 “백공(白公)! 짐도 그것을 알고 있소. 그러나 만약 비룡, 그 아이에게 어떠한 일이 생긴다면 짐은 평생을 죄책감에 살아야만 할 것이오.”
 “폐하······.”
 “백대장군, 짐 또한 장군께서 손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소. 비룡은 앞으로 명을 받들고 차 후 태자를 인도할 마지막 희망이 아니오?”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황제와 밀담을 나누고 있는 초로의 무사는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철비룡의 이름이 황제와 이 초로의 노인의 입에서 거론되고 있단 말인가? 더구나 이 노인은 철비룡을 자신의 손자라고 했다. 당금 천하에 철비룡을 자신의 손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중원 천하에는 오로지 한 명밖에 없으니 그는 바로 당금 명의 모든 병권을 통제하고 있으며 철비룡의 외조부가 되는 백도대장군 백무혼인 것이다.
 당금 명에서는 백도대장군 백무혼을 가리켜 명군대사마라고 부르고 있었으며 그는 중원 최고의 무장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저택을 가리켜 장군부라고 호칭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었다.
 “폐하! 중원과 종묘사직이 걸린 일이옵니다. 현재 천하에서 칠대무신(七大武神)의 무공을 훔쳐 배울 수 있는 인재는 비룡 그 아이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한 순간, 백무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제의 안색이 침중하게 변했다. 차라리 침통한 모습에 가까웠다.
 무엇이 황제의 안색을 이리도 침울하게 만들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했다.
 중원은 사마의 무리에 짓밟혀 버린 상태였고 강력한 황권 역시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여 황제와 백무혼은 굉장히 고심하고 있는 터였다. 헌데 최근 생각지도 않게 한가지 비밀을 캐어 그들을 견제할 힘이 있는 곳을 알아낸 것이다.
 그러나 그 비밀을 가진 자들이 모두 괴이독랄하고 추측불가의 괴인들인지라 감히 그들로부터 비밀을 빼어낼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비밀을 얻기 위해 황제와 백무혼은 삼십 차례에 걸쳐 오십여 명의 기재를 보냈으나 오십여 명의 기재는 비밀을 얻기는커녕 허무하게 쓰러져갔다.
 비밀은 모두 일곱 명의 전대괴인이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무공은 전혀 추측불가의 지순한 것이었으며 성격이 괴퍅하여 오십여 명의 기재는 그들에게서 결국 하나의 비밀도 알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인물들은 그들을 가리켜 칠대무신이라고 칭할 정도였다.
 결국, 이미 십여 세에 대과를 급제한 천하의 기재로 소문난 철비룡을 칠대무신에게로 보내려 하였으나 너무도 많은 장애가 앞을 가리고 있었다.
 우선 칠대무신의 무공과 괴퍅한 성격은 제쳐두고서도 칠대무신이 있는 곳은 천하에 헤어나지 못하는 절지(絶地)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죽지 않았으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자(死者)의 최후가 그곳이었으니······.
 그러나, 중원의 안위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황제의 애타는 부정은 더욱 철비룡을 잡고 있는 것이었다.
 부정(父情)이라? 황제가 결코 칠비룡의 부친이 아닐진데 어찌 그들의 사이에 부정이란 기류의 흐름이 존재할 수가 있겠느냐마는 그것은 엄연히 존재했다. 비록 그것이 제 삼자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백공! 짐도 중원과 종묘사직을 위해 비룡을 더더욱 보내고 싶소. 그러나 지금 짐은 그 부정의 그물에 매어 더욱 보낼 수 없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소?”
 “무슨 말씀이오이까? 폐하!”
 백무혼이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반문했으나 급히 허리를 숙여 신하의 예를 취했다.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 짙게 배어있었다. 지금 확실한 것은 철비룡이 자신의 외손자일 따름, 결코 황제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황제가 부정을 운운했으니 무슨 까닭일까?
 “소옥(少玉), 그 아이 때문이라오.”
 “소옥··· 공주······.”
 백무혼의 입에서 부지불식간에 의아함과 놀람의 외침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잠시 후 그는 무엇을 생각했는지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고 전신에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마치 황제가 어떠한 의도로 이야기 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말이다.
 소옥공주······.
 현 황제 헌종에게는 열두 명의 황자가 있으며 또한 열한 명의 황녀가 있으니 역대에 그보다 많은 자식을 가진 황제는 없었다.
 헌종은 우당을 태자로 책봉했으며 그 뒤로 열한 명에게는 황자의 지위를 내려, 황자들끼리는 어느 때 보다도 우애가 좋았다. 열 한 명의 황녀 중 두 명은 공주였으며 나머지 아홉 명이 군주였다. 그 중 마지막에 황후가 얻은 황녀가 바로 소옥공주였던 것이다.
 십오 세의 나이로 자금일미(紫禁一美) 또는 자금일지(紫禁一智)라고 불리우고 있으며 석년 철비룡에 의해 학문을 익히던 소녀가 바로 소옥이었다. 황제의 극진한 총애를 받고 있는 자금성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그녀는 모든 문무대신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한 재녀였던 것이다.
 “폐하······.”
 백무혼이 헌종의 의도를 알고 더욱 허리를 숙였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소옥공주는 하루도 빠짐없이 철비룡에게 화기(花技)를 배운다는 핑계로 장군부의 화원에 놀러오고 있었으며 철비룡은 그녀에게 화도(花道)를 가르치고 있음을······.
 그러나 철비룡은 황궁에 가는 적이 없었다.
 대과에 급제한 후 사상 처음 소년대학사가 되어 공주의 글선생이 되더니 단 두 달을 가르치지 못하고 뛰쳐나온 그였었다. 황궁의 생활은 자유분방하고 장난기 심한 철비룡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뒤로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공주가 하루도 빠짐없이 핑계를 대고 장군부로 그를 찾아 간다는 것이었다.
 “그렇소. 소옥은······ 비룡, 그 아이를 연모하고 있음이오. 비록 짐을 가리켜 만인지상이라 하나 피가 흐르는 인간으로 딸이 사랑하는 사람을 어찌 사지로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짐의 머리를 심히 어지럽히고 있소.”
 황제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황제의 말을 들으며 머리를 숙이고 있는 백무혼은 나직하게 말했다.
 “폐하! 폐하께오서는 하나가 아닌 둘, 셋을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폐하께 있어 공주가 귀중한 만큼 신에게도 하나 뿐인 손자가 귀하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원에 평화가 있어야 폐하도 있고 공주도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백무혼의 강한 어조에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황제의 말 그대로라면 헌종은 철비룡을 부마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백무혼은 자신의 손자를 사지로 보내기를 재촉했다. 그에게도 손자는 귀했지만 천하의 안위가 더욱 중했기 때문이다.
 얼마동안 침묵이 유지되었다.
 황제와 명군대사마 백무혼, 둘은 장시간을 침묵 속에 잠겨 깊은 생각을 더듬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결과는 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백공, 나는 비룡, 그 아이를 부마로 생각하고 있소. 그 아이가 대업(大業)을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짐은 비룡을 부마로 맞을 것이오.”
 “감읍하여이다, 폐하.”
 백무혼은 다시 깊숙하게 허리를 굽혔다.
 “비룡을 사지로 보낼 준비를 하시오. 백공······ 난 소옥을 달래며 비룡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것이오. 모든 것은 백공이 알아서 해주시오.”
 “황공하여이다.”
 백무혼은 깊숙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나 그때의 그의 가슴에는 짙은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용(龍)!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구나. 이제 생과 사······ 둘 중 하나만이 너의 앞길에 존재하게 될 것이니.’
 
 
 4장 잠룡와생(潛龍臥生)
 
 
 만화원(萬花苑)은 백무혼이 거처하는 곳이며 잠룡이 웅크리고 있는 장군부의 후원을 가리킨다. 잠룡은 경도일절이라 불리우는 철비룡을 말하는 것이었고, 또한 경도일절에게 있어 특출난 학문 만큼이나 뛰어난 것이 있었으니 바로 화예(花藝)였다.
 철비룡은 하루의 반을 이곳 만화원에서 지내고 있다.
 화원은 너무도 아름다워 전설의 무릉도원과도 같았다.
 수 개의 인공가산(人工假山)이 있었으며 하나의 인공호수와 두 개의 인공수로가 있었는데 마치 천연석으로 꾸며진 것만 같았다. 연못의 형태는 중원의 십삼 개 성을 축소한 형태였으며 다섯 개의 산은 중원오악(中原五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사이 사이에는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는 온갖 기화요초들이 가득차 있었으며 계절에 맞게 꽃망울이 흐드러지게 터져 올라가고 있었다.
 너무나 귀하여 눈을 씻고도 보기 힘들다는 온갖 기화요초,
 설련(雪蓮), 천설란(天雪蘭), 금백수화(金白水花), 하오자련(河五紫蓮), 산유장(山有蔣), 오계칠엽화(烏界七葉花), 막사초(莫沙草)······.
 어떤 곳에서도 불 수 없는 기화요초들이 아닐 수 없다.
 연못의 넓이는 인공호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넓은 것이었다.
 하긴, 중원의 전 병권을 쥐고 흔드는 장군부가 결코 자금성에 못지 않는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닌 바에야 당연한 것이었다.
 연못에는 말할 수 없이 귀한 수십 종의 기어(奇魚)가 유영하고 있었다. 남만에서만 서식 한다는 쌍두미린어(雙頭尾鱗魚)는 제쳐두고라도.
 태양화리(太陽火鯉), 대하장만(大河長鰻), 흑선백저, 흑비어, 두봉구미어, 와두인면어······.
 실로 값으로 따질 수가 없는 것들이 가득차 있었다.
 호수 또한 장강을 경계로 둑을 막아 이루어져 두 개의 연못을 가지고 있었는데, 장강의 경계는 실제의 장강과 너무도 정확한 위치에 가로막혀 있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중원의 육지와 물로 이루어진 장강이 이곳 만화원의 인공호수에서는 돌로 가로막듯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더욱 특이한 것은, 돌로 만들어진 장강의 경계를 시작으로 좌측의 인공호수는 완연한 온수(溫水)였으나 반대로 우측의 인공호수는 손발이 모두 얼어붙어 버릴 듯 차가운 빙수(氷水)로써 마치 얼음과 같은 냉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따라서 좌측의 인공호수에는 열양지물(熱陽之物)이 가득차 있었으나 우측의 인공호수에는 너무도 상반되게 빙한지물(氷寒之物)이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만약 무림인들이 그것을 보았다면 그 누구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곳에 있는 수십 종의 어류는 모두가 절세지보, 절세영약 이었으니 말이다.
 이 인······.
 인공호수에 연결된 부근에는 이 인의 그림자가 움직여 수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소년과 소녀, 그 두 사람은 천상의 미동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동남동녀(童男童女)였다.
 소년의 전신은 백색일색(白色一色)으로 치장되었으며 머리에는 문사건이, 그리고 백색의 문사복은 고고한 학인 양 매화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유약해 보였으며 그것만으로 그가 공부를 익히고 있는 소년 서생임을 알게 만들었다. 우뚝 솟은 코하며 앵두 보다도 짙은 입술은 그가 강직한 성품과 고집을 지니고 있으며 정(情)에 깊은 사람임을 알게 한다.
 눈(目), 한 쌍의 눈은 무저갱처럼 가라앉아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남다른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뜻했고 넓은 이마와 두툼한 귓볼, 그리고 귀 밑까지 이어진 눈썹은 그가 광명정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한 치의 오차없이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한 명의 소녀.
 소녀의 눈망울은 새벽의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었으며 오똑한 코는 마치 마늘쪽 같아 누가 보아도 탄성을 발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것이다. 입술은 두 개의 꽃잎을 문 듯했으며 갸름한 턱은 미인의 조건을 무난히 갖추고 있어 모든 상황으로 보아 그녀가 미녀라 말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목과 귀에는 오색의 보석들이 빛을 발하고 있으나 그것은 소녀의 미모에 오히려 빛을 잃고 돌조각 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전신에는 봉황(鳳凰)이 수놓아진 궁장을 입고 있었으며 자색(紫色)인 것으로 보아 그녀가 황녀이거나 지체 높은 집안의 소녀임이 은연중 드러나고 있었다.
 소녀의 나이는 열다섯 정도로 보였으며 이미 성숙한 몸매를 지니고 있어 그녀의 앞에 서 있는 소년 보다 두세 살은 더 먹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잘리워진 자설란 한 송이가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자설란은 이미 시들어 있었으며 소생할 수 없을 것 같이 퇴색되어 있었다.
 “사부······ 사부께서는 화도(花道)에 일가견이 있다고 들었어요. 시위들이 말하기를 사부께서는 화도에 있어 신의 경지에 들었다고 하더군요.”
 소녀는 자신보다도 어려 보이는 소년에게 사부라 호칭했다.
 “공주마마, 신이 비록 화도에 심취해 있다고는 하나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낭설일 뿐 신은 결코 화중선(花中仙)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소년은 단아한 자세로 웃으며 소녀의 말을 막았다.
 그런데 소년은 소녀에게 공주라고 말을 했다.
 이 소녀가 바로 당금황제 헌종의 총애를 받고 있는 소옥공주(少玉公主)이며 그녀의 앞에 있는 소년이 바로 그녀의 사부인 경도일절 철비룡이었다.
 철비룡은 십 세에 대과급제를 이룬 이래 단 삼 년동안 공주를 가르쳤을 뿐 그 뒤로는 공주의 처소에 들지 않았음은 만근백관이 아는 사실이었다.
 자유분방하고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철비룡의 성격으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으며 황제도 그의 발길을 막지 않은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다.
 공주의 나이는 철비룡의 나이 보다도 세 살이나 많았으나 공주는 늘 철비룡을 사부라 칭했으며 삼 년동안 철비룡의 처소를 찾았다. 그녀가 철비룡을 찾는 시각에는 늘 철비룡이 만화원에 있었지만 공주 자신은 철비룡이 화예에 어떠한 조예를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사부, 이 공주는 이미 사부로부터 모든 것을 다 배웠지요. 학문, 필법(筆法), 천기, 토목(土木), 금기서화(琴棋書畵) 등등.”
 “······.”
 “그러나 경도일절을 차지하게 된 사부님의 두 가지 기예 중 문은 익히 알고 있지만 화예(花藝)는 전혀 알지 못하는지라 그것을 물어보고자 왔습니다.”
 그녀의 태도는 공손했다.
 일국의 황녀인 그녀도 철비룡의 앞에서는 독수리 앞의 참새와 같이 고분고분한 어투와 표정이었다.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세도가의 집안 소공녀와는 다른 일면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빌자면 자신이 여러 학문은 말할 것도 없이 천기와 토목, 그리고 금기서화를 비롯한 모든 잡기를 모두 익히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불과 십오 세의 나이로 이 모든 것을 익히고 있다면 천하의 누가 믿을 수가 있겠는가.
 일예로, 천기자라는 송(宋)의 기인은 천기를 헤아림에 이백 년의 세월을 허비했으며 당(唐)의 토목을기자(土木乙氣子)는 기관지학과 토목지술을 백오십 년동안 익히고도 죽을 때는 자신이 익히지 못한 토목지술에 한(恨)을 두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십오 세의 소녀가 이 모든 것을 익히고 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을까?
 더구나 문과 필(筆)은 부단한 노력으로 이룩 할 수 있는 것이었으나 기관토목, 성복지술은 기민한 두뇌와 영활한 지혜의 터전이 없다면 꿈조차 꿀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그 모든 것을 십분의 일 정도의 오의를 깨우쳤다면 그녀는 수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투로 보건데 그녀는 이미 그것들 모두를 익혔을 뿐 아니라 진정한 오의를 깨닫고 있는 것 같은 말을 하지 않는가? 만약 진정한 오의를 깨우치지 못했다면 결코 모든 것을 다 배웠다고 말을 하지 못할 것이며 그녀는 자신이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퐁!
 갑자기 공주는 자신이 들고 있던 자설란의 잎을 따서 호수에 떨어뜨렸다.
 지속되는 침묵이 두려웠을까?
 그랬으리라.
 십삼 세의 소년이라면 아직 남녀의 정리를 모르겠으나 십오 세의 소녀라면 남녀간의 정리를 어느 정도 깨닫고 있을 것이 아닌가?
 천하의 재녀라고 불리우는 소옥공주가 모든 것에는 남들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지혜를 발휘하면서 유독 남녀간의 정리에는 문외한이라고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부, 이미 자설란은 시들었어요. 이 자설란은 황궁에도 두 뿌리 밖에는 없지요. 또한 이곳 만화원에도 한 뿌리 밖에는 없어요.”
 과연 자설란은 이미 시들어 있어 천하의 화예를 지닌 인간이라 해도 그것을 다시 소생시키리라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소옥공주는 이미 시들어가는 자설란을 살리길 원하고 있었다.
 “공주께서는 그 귀중한 자설란을 이 못난 사람의 화도를 보기 위해 그렇게 만드신 겁니까?”
 철비룡의 입에서 무감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래요······!”
 공주는 두 볼에 두 개의 보조개를 그리며 생긋 웃었다.
 자설란!
 이 꽃은 다른 말로는 은하자설란(銀河紫雪蘭)이라고 부르는 기화(奇花)로써 엄밀히 말하자면 난(蘭)과 연(蓮)의 중간 형태를 지니고 있는 꽃이다. 자설란은 일반 연이나 난과 같이 중원 어느 곳에서나 자생되는 것이 아니어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는 것이다.
 천축의 타밀분지(駝密盆地)에서 자생되는 것으로써 항간에는 이미 멸종되었다고 소문이 난것으로써 중원에 널려 있는 자설란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황궁에 두 뿌리, 장군부에 두 뿌리, 그리고 중원 최고의 황금주(黃金主)라는 만금산(萬金山)에 한 송이의 자설란이 있다고 전한다.
 그런데 지금 공주에게 들려 있는 한 송이의 자설란이 시들어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최고의 가치로 금백(金帛)을 주고도 구하지 못하는 것······.
 “소옥은 벌써 사부님께 삼 년간의 수업을 닦았어요. 비록 천고의 기재로 이름을 얻은 사부님의 만분의 일밖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모든 기예를 익혔다고 자부해요.”
 “그런데······?”
 갑작스럽게 터져나온 소옥공주의 음성에는 어딘지 모르게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는 듯했으며 그것을 느낀 철비룡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뭐가 그런데이지요? 모든 기예를 전수해 주시면서 사부님은 오직 화도만은 제게 전수하지 않으셨어요.”
 “그랬던가?”
 공주의 노기도 아랑곳 없이 철비룡의 태도는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그의 모습에 공주는 약이 오를대로 오른 것 같았다.
 “흥! 사부! 비록 철대학사(鐵大學士)께서 소녀의 사부이시라 하나 아바마마의 신하 이시고 더불어 이 공주의 신하 일 수도 있는 것이예요.”
 “갑자기, 무슨 말이십니까?”
 갑자기 언변을 달리하는 공주의 음성에 철비룡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말을 하던 철비룡은 고개를 들어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요. 비록 지혜가 사부한테 모자란다 해도 이 공주는 사부의 누나가 될 수도 있어요. 나이로 따져봐도 공주가 사부님 보다는 두 살이 위이지요.”
 공주의 노기 띤 음성이 철비룡의 귓전에 파도를 쳤다.
 “뭐? 누, 누나?”
 또 다시 철비룡은 어이없다는 듯 공주를 쳐다보았다.
 동시에 그의 눈은 공주의 아름다운 자태에서 뿜어내는 눈부심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때의 공주의 모습은 철비룡이 결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공주는 개미의 허리 같은 자신의 허리에 한 손을 걸치고 있었다.
 도도한 모습.
 그러한 모습은 일찍이 공주의 행동에서 찾아 볼 수 없었던 모습으로 삼 년 내내 철비룡을 깎듯이 사부로 모셨던 그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언가 일이 잘못 되어가고 있는 것 같군.’
 불현듯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그것은 공주의 모습에서 철비룡이 느낀 것으로서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흥, 이제까지 사부였으나 이 공주는 이제 사부로서가 아니라 비룡을 동생으로 여기는 누나로서 명령하는 거예요.”
 ‘우와······!’
 철비룡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태도가 변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아름답다.’
 철비룡은 화를 내는 듯한 모습의 소옥공주가 너무도 아름답게 느껴졌으며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가 일시에 빛살이 되어 그에게 덮쳐오는 것 같은 환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모습, 화가 난 듯한 모습의 소옥공주는 정녕 청초했고 우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차라리 먹이를 쪼고 난 뒤의 우아한 학의 자태와 같았다.
 위로 치켜 뜬 두 눈은 더욱 커서 아름다웠으며 그 속에서 영롱한 보석의 눈은 묘안석이나 밤의 별보다 더욱 강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철비룡은 찬찬한 눈빛으로 다시 쳐다보았다.
 그제서야 철비룡은 그녀의 모습이 삼 년 전 자신이 가르치던 천진난만하고 어리광을 피우던 열세 살의 공주가 아님을 간파할 수가 있었다.
 철비룡은 공주의 나이를 생각했다.
 ‘그렇군······. 공주께서는 이제 여인이 되셨군.’
 맙소사, 열세 살의 철비룡이 여인이 무엇인지 진의를 깨닫고 있단 말인가?
 과연 소옥공주의 모습은 너무도 고혹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으로서 중원의 모든 남아가 그녀를 보았다면 상사병에 걸리고도 남을 일이었다.
 설백처럼 아릿한 피부, 진한 눈썹, 찬란히 빛나 차라리 혼백이 빨려들 듯 영롱한 빛을 발하는 눈동자, 그리고 붉은 입술, 궁장의 모습에 돋보이게 갸름한 몸매에 알맞게 부풀어 오른 듯이 보이는 앞가슴의 융기!
 모든 것이 아름다운 그것이었다.
 그것은 철비룡이 소옥공주의 새로운 모습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었다.
 “비룡, 이 공주에게 화도를 보여 주세요. 누나로서의 명령이예요.”
 ‘누나라······. 명령이라고?’
 철비룡은 어이가 없었으나 그녀가 누나라고 하는 것이 그리 싫진 않았기에 가슴에서 아름다운 한 자루의 소도를 꺼내들었다.
 “좋습니다. 비룡도 공주마마께 사부라는 소리를 듣기 보다는 동생이라는 소리를 듣기가 더욱 좋을 것 같군요!”
 철비룡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화도란 것은 문과 달라 예(藝)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정기신일체(精氣神一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화도를 이룰 수가 없지요.”
 철비룡은 공주에게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움찔! 순간적으로 공주는 몸을 움츠렸으나 그가 원하는 것이 자신의 손에 들린 자설란임을 알고 빙그레 웃으며 자설란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요. 만약 시들어 버린 자설란을 살리지 못한다면 비룡은 경도일절의 이름에 먹칠을 하게 되는 것이예요. 또······!”
 그녀는 말을 잇다가 멈추었다.
 자설란을 받아든 철비룡이 소도를 날렵하게 그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 둑― 투―!
 잘리워진 자설란의 잎과 뿌리, 그리고 가지가 부교의 위에 떨어져 내렸다.
 순간, 공주의 입에서 탄성인지 비명인지조차 분간 할 수 없는 음성이 울려나오며 그녀의 동체가 불상이 된 듯 굳어버린 상태로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엇 때문인가?
 철비룡의 손에 들려진 자설란에 기이한 변화가 어리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본 소옥공주의 안색이 흥분과 경악으로 물들어 있지 않은가?
 화르르······! 그것은 기적이며 이변에 속하는 것으로써 믿을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이미 죽어 잎이 마르고 가지가 말라가던 자설란이 잎에 물기가 감돌며, 영원히 피지 않을 것 같던 자설란이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는가?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결코 믿지 못할 현실이 공주의 눈 앞에서 도래하고 있었다.
 “지··· 진정 화, 화도······!”
 공주는 말을 맺지 못했으며 벌어진 입을 다물 여유가 없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느새 철비룡은 자설란의 가지와 뿌리, 그리고 잎을 잘라낸 소도를 품에 집어 넣고 있었으며 자설란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한편,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일 인이 있었으나 철비룡과 소옥공주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고, 그러한 모습을 훔쳐보는 일 인은 매우 낯이 익은 사람이었다.
 전신에 갑주를 두르고 허리에는 오 척 장검을 걸었으며 수염은 반백이 되어 가슴에 이른 초로의 무장. 그는 황제의 어전에 나타났던 철비룡의 외조부 백무혼이 아닌가?
 “그렇다. 비룡, 이제 네가 잠룡(潛龍)이 아닌 천룡(天龍)으로서 승천할 때가 온 것이다. 이제 너는 가문의 명예와 너의 본 모습을 찾아야 한다.”
 백무혼의 음성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으나 그것은 기쁨이었다.
 그 시각에도 철비룡과 소옥공주는 서로 마주보며 침묵 속에 있었다.
 “이제 한을 씻으리라. 딸과 손자의 한과 더불어 사위의 한을 씻으리라. 이 모든 것은 저 아이에 의해 이루어지리라!”
 스스슥······.
 혼잣말을 마친 백무혼은 말없이 몸을 돌려 스미듯 사라져 버렸다.
 만화원에서 일어난 일, 그것은 조그마한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 * *
 색밀로(色密路).
 대도(大都) 황경(皇京)에서 이곳을 모르는 사람은 중원인이 아니라 한 번도 문밖 출입을 하지 않은 규중처자가 분명할 것이다. 아니 설사 겹겹 속에 싸여있던 규중처자라 할지라도 이곳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 세의 소년소녀라 하더라도 이곳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
 이 길은 자금성 정문에서부터 이십 리까지 펼쳐져 있는 도로로써 낮이나 밤이나 불이 밝혀져 있는 야화(夜花)의 집들이 있는 곳이다.
 때문에 항상 윤이 나는 청석대로(靑石大路) 위로 번쩍거리는 금의화복과 궁장에 값진 패물로 전신을 단장한 선남선녀들이 거닐고 있는 곳, 특히 중로(中路)라 불리우는 곳에 다다르면 정경이 확 달라져 보인다.
 색밀로라 이름짓게 만든 중원 제일의 홍등가가 바로 이곳이었으며 중원의 이대색향이라 지칭되는 항주(抗州)나 소주(蘇州)보다도 백 배나 이름이 뛰어난 곳이었다.
 술과 계집이 있고 유혹과 욕망이 산처럼 싸여 수많은 남아를 타락시키고 소년을 청년으로 탈바꿈시키며 금전이 오가는 곳.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남문대로(南門大路)라고 불리던 이곳을 색밀로라 명칭을 바꾸어 버렸다.
 오늘도 무색할 만큼의 욕망이 춤추고 있었으니······.
 밀다원(密多院).
 이곳 색밀로의 중간에 위치한 기루로써 가장 사치스러운 곳이다. 색밀로의 가장 한복판에 위치한 밀다원은 간단히 말해서 맞은편의 현녀루(玄女樓)와 더불어 천하 이대기루로 손꼽힐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특히나 밀다원은 정사의 고관대작들이나 천하의 거부들을 상대로 춤과 노래와 끈끈한 정념을 파는 곳이어서 자연히 기녀들의 용모는 천하절색이었다.
 밀다원은 이미 십오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무수한 의혈남아를 정(情)의 노예로 만들었으며 또한 수천 명의 갑부를 빈천한 신분으로 만들 정도였다.
 그러나, 하루도 객은 끊기지 않았으며 더욱 더 들끓고 있었다. 그것은 밀다원에 하나의 커다란 유혹이 있었기 때문이다.
 초하(初夏)의 밤.
 홍등가의 등촉은 색밀로를 밝히며 붉고 요염한 빛을 뿌려 남아들을 유혹하였다.
 밤이 되면 정의 폭풍으로 회오리에 싸이는 이곳이 초저녁이 지난 벌써부터 사방에 요란한 교소와 음심을 돋구는 기녀의 음탕한 난소(亂笑)가 흐드러지고 있었다.
 초하선으로 얼굴을 가린 기녀들의 자태를 기웃거리다 기녀들이 잡아당기는 대로 못이기는척 끌려 들어가는 호색한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헌데, 전신에 백색도포를 걸친 소년 한 명이 색밀로의 홍등가로 비틀비틀 걸어오고 있었다.
 술에 만취한 듯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청년.
 이제 십삼 세의 어린 소년의 모습이 역력했으나, 그의 전신에서는 기이한 힘과 고고한 기질이 주위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여타의 소년들에게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태산의 기질이었다.
 또한 그의 용모는 형용할 수 없을만큼 준미하여 누구든지 보기만 하면 좀처럼 눈길을 뗄 수가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자 사람들은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으며 소년은 망설이지 않고 열려진 길로 걸어갔다.
 허나, 소년이 지나고 나면 사람들은 누구나 한마디씩 던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쯧쯧······. 경도일절이 술에 흠뻑 취했으니 벌써 칠 일이 지났는가? 오늘도 밀다원이 조용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군!”
 “그렇군. 꼭 칠 일만에 만취가 되어왔군.”
 그들은 이미 소년이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다는 말투였으며 그들의 말을 빌건데 경도일절 철비룡이 칠 일에 한 번씩 밀다원에 들른다는 것이 아닌가?
 그때 철비룡은 전신에 술기운을 풍기고 전신을 비틀거리며 밀다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자, 교태로운 웃음과 함께 요염절륜하여 차라리 눈이 어지러운 한 명의 기녀가 버선발로 뛰어 나오며 그를 부축했다.
 “호호호, 철공자님. 꼭 칠 일만이예요. 어서 오시와요.”
 기녀의 자태는 사내의 허리를 녹일 듯 교태가 자르르 흘렀으며 그녀의 두 눈은 철비룡을 바라보며 두 눈에 색기를 자르르 흘렸다.
 “끄윽! 그래. 밀봉녀(密蜂女)에게 나 경도일절이 왔다고 이르거라!”
 “호호! 염려 마시와요.”
 그 말에 기녀는 이미 그의 말이 무엇인가 알고 있었다는 듯 대답했으며 그것은 철비룡을 수차례 이곳에서 맞은 기녀의 이름인 듯했다.
 “가자!”
 철비룡이 입을 열자 기녀는 그를 부축하며 안으로 사라졌다.
 한편 경도에서는 경도삼절에 버금가는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두 개의 기루와 두 명의 여인이었다.
 <재경이루(在京二樓) 재루이녀(在樓二女)>
 경도에는 두 개의 루가 있고 두 개의 기루에는 두 명의 여인이 있음이니······.
 최근 경도에서 천하를 통털어 견줄 수 없는 두 개의 기루와 두 개의 기루를 관장하는 주인의 신분으로 알려진 두 명의 기녀들이 있었으니 그들을 가리켜 천하이대기녀(天下二大妓女)라 불렀으며 그들이 운영하는 기루를 중원이루(中原二樓)라 불렀다.
 천하이대기녀와 중원이대기루는 항주와 소주에서 날리던 홍등가의 명성을 모두 경도로 불러들일 정도였고 그것은 또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런 이유로 중원제일의 색향은 이제 경도가 차지하게 되었다.
 밀다원(密多院).
 만기집루(萬妓集樓).
 바로 이것을 가리켜 중원이대기루라 칭했으며 이 두 개의 기루는 색밀로에 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 이는 경도 홍등가의 기둥이었다.
 밀봉녀(密蜂女).
 봉황녀(鳳凰女).
 이 두 명의 기녀를 가리켜 천하이대기녀라 칭하니 밀봉녀는 밀다원을 관장 한다고 알려진 기녀였으며 봉황녀는 만기집루를 다스린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진정한 그들의 신분과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다.
 밀다원.
 이 이름은 십오 년 전부터 경도에 뿌리를 박은 중원 최고의 기루로써 미기(美妓)가 오백 이나 되었으며 가녀(歌女)와 무녀(舞女)가 각각 이백씩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은 경도의 홍등가를 있게 한 두 개의 주루 중 하나였으며 고관대작이나 억만금을 지닌 갑부가 아니라면 결코 발도 들여놓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다.
 더구나 고관대작이나 거부라고 할지라도 일반 미기를 품을 뿐이지 결코 제일미기라고 알려진 밀봉녀를 품어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것은 밀봉녀가 내걸은 한 줄의 문구 때문이었는데······.
 ― 지(智), 용(勇), 문무(文武)의 삼관을 통과하는 분에게 몸을 맡긴다. 예(藝)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면 결코 도전하지 말라.
 만기집루.
 이름 그대로 만기집루는 중원의 미기들 뿐만 아니라 멀리 서역, 부상(扶桑), 대막등의 기녀들을 소유하고 있어 극히 보기드문 기루였다.
 그녀들은 중원의 여인들과는 다른 독특한 방중술로 풍류객들을 잔뜩 녹여내고 있었고, 밀다원과 더불어 중원이루 중의 하나로 지대한 명성을 얻고 있다.
 만기집루는 중원의 여인이 아닌 이국미녀가 관장하고 있으며 그녀의 이름은 봉황녀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아무도 그녀를 본적이 없었다.
 그것 또한 밀봉녀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내건 조건 때문이었으니······.
 ― 봉황녀에게 방중술을 익힌 봉황십녀(鳳凰十女)의 절정방중술을 견딘 자만이 봉황녀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가 있다.
 밀다원의 가장 깊숙한 곳.
 “하하, 달콤한 것은 늘 남아의 십장을 들뜨게 하지. 꿀 또한 으뜸이라! 사내들이 어찌 봉황녀를 탐하지 않겠는가?”
 취기 어린, 그러나 맑은 목소리가 기화요초가 어우러진 화려한 정원에서 울려나왔다.
 가산과 기화요초, 그리고 맑은 연못이 있어 연못에 달이 비치고 있는 곳 근처에 그림과 같이 유미한 정자가 하나 솟아 있었다.
 정자 안은 등촉의 파장과 더불어 쏟아져 내리는 달빛의 잔영으로 인해 주위의 아름다운 선경과 어울려 일대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인세가 아닌 전설 속의 무릉도원 같은 착각이 드는 곳이었다.
 이 음유하고 현묘한 음성은 정자 안에서 울려나온 것이었다.
 지금, 아름답고 우아한 정자 안에서는 한 번 보면 용과 봉(鳳)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수려한 일남일녀가 있었다.
 사내는 백의유삼을 단정히 걸친 청년으로서 바로 경도일절 철비룡이었다.
 운명의 도마 위에 올려져 있는 소년이 바로 그였으니······.
 그의 앞에 마주 앉아 그의 잔에 미주(美酒)를 따르고 있는 여인, 적어도 철비룡 보다는 다섯 살 이상은 더 먹어 보였는데 분홍빛 나삼으로 가리워진 몸매에 어울리게 그 요염함과 현란함의 극치란 가히 인세의 봉황이라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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