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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리어 1권 (1)

2018.06.27 조회 6,306 추천 37


 용감히 행동하며
 권력에 굴복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예의와 신의를 지키며
 아는 이와 모르는 이를 차별하지 않으며
 약한 자를 도우며
 오로지 정의에 따른다.
 
 
 
 
 
 
 
 
 
 
 프롤로그
 
 
 
 
 
 
 
 
 
 
 그날 밤의 에이미즈는 피에 물들어 있었다.
 철갑으로 무장한 오거와 오크, 우르크하이, 피를 뒤집어쓴 골렘, 몇 남지 않은 드래곤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단과 방법이 다 동원되었던 초유의 전쟁.
 그러나 일방적인 전투였다.
 다칸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베이스와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도, 싸움이 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을 때도.
 오히려 다칸을 염려하기까지 했다.
 피로 결속된 형제의 국가.
 설마 그들이 정복 전쟁에 나섰으리라고는 꿈에서도 상상치 못 했으며, 형제인 자신들까지 공격해 오리라고는 더욱 상상하지 못했었다. 믿고 있었던 것은 오로지 오래된 혈연과 가이아뿐이었다.
 그러나 혈연은 무시되었고 가이아는 나타나지 않았다.
 발록을 앞세운 다칸은 플로베로나를 휩쓸었지만 잿더미가 된 성벽 위에 백기가 오르기까지.
 믿음의 대가는 산을 이룬 죽음과 피에 젖은 밭이랑뿐이었다.
 플로베로나가 탄생시킨 영웅 중의 영웅.
 패배와 함께 그는 가장 추하고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 신음했다.
 
 “피로써 복수하리라!”
 
  * * *
 
 무참한 전쟁에서 그 노인은 장님이 되었다. 얼굴조차 화염에 일그러져 어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지녔던 힘과 눈을 잃은 채, 초라하게 이젠 한자리에서 동냥 그릇을 들고 동정을 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다칸을 저주했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저 끔찍했던 전쟁의 패인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가이아는 왜 나타나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원망했지만 노인은 그러지 않았고 오로지 원인만 찾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원인은 벌써 나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봐야 더 옳았다.
 하지만 특별한 희망은 가지지 않았다.
 두 눈을 잃어 앞이 보이지 않듯, 의문을 푼다 해도 어제처럼 평화롭던 대륙이 다시 시작되리라는 기대를 지닐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만치 그의 운명과 대륙의 운명은 같았다.
 오랜 평화와 안일 속에 늙어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카락, 힘을 잃은 몸과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떨리는 다리.
 앙상한 손에 들린 동냥 그릇에 동전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듯 다칸이 자비를 베풀기를 기대하는 것까지.
 
 ‘차라리 보지 못하게 된 것이 다행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했다.
 
 
 
 
 
 
 
 
 
 
 
 
 
 
 
 
 
 *가르미슈의 소년
 
 
 
 
 
 
 
 
 
 
 쿵쿵쿵.
 지축을 흔드는 축성築城 소리.
 누가 봐도 그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전쟁이 일어날 당시에도, 아니, 적의 침공이 우려되고 있을 때도 보수하거나 쌓지 않았던 성벽을 패전 후에 쌓고 있다니.
 그것도 적을 위해서.
 그러나 기도 차지 않을 일은 버젓이 플로베로나 전역에 벌어지고 있었고, 가르미슈에도 똑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노역에 끌려 나온 시민들은 한결같이 이를 갈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힘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게으름을 피웠다가는 채찍이 떨어졌고, 죽을힘을 다해야만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감독관의 눈에 벗어났다가는 감옥으로 끌려갔고, 더 심한 경우에는 반역자로 몰려 목이 잘리거나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광산으로 끌려가 평생 중노동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강제로 끌려 나온 것치고 그나마 월 오 실버라도 주는 것이 다행이었다.
 무엇을 하건, 죽도록 일해 봐야 사십 퍼센트라는 엄청난 세금이 붙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기는 같으니 어차피 그게 그거였다.
 
 사이먼은 전쟁에서 왼쪽 다리를 잃었고, 오른쪽 어깨까지 크게 다쳐 몸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아내까지 집을 나가 버렸지만, 그러나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불구가 된 덕분에 남들처럼 강제 노역에 끌려 나가지 않아도 되었고, 아내가 달아난 덕분에(?) 눈치를 보지도, 생계를 책임지기에도 별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내는 분명히 어디에선가 고양이처럼 영리하게 지내고 있을 것이었다.
 만족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럭저럭 쓸 만한 직업도 있었다.
 전쟁 전만 해도 ‘제법’ 소릴 들었던 그는 여러 무기를 다루는 데 능했고, 이로 인해 가게를 차리고 각종 무기를 수선하는 검공劍工이 되었던 것이다.
 함께 전장으로 갔던 대부분의 친구들이 죽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다행인가.
 몸이 다소 불편하고, 벼리는 것이 대부분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의 무기라 유감일 뿐이지.
 멋대로이긴 하지만 하나뿐인 아들도 다 컸고, 불구가 되었다 해도 먹고살기에 지장이 없는 만큼 분명히 자신이 축복받은 사람이라 생각하고 지내는 터였다.
 
 저 엉뚱한 녀석이 사이먼을 찾아온 것은 오전 무렵이었다.
 “수리할 수 있을까요?”
 제법이라고 봐야 할 호사스러운 옷차림에 어딘지 불안한 표정을 한 머저리같이 생겨먹은 녀석.
 “글쎄요, 이건.”
 사이먼은 그를 보고는 바로 적잖은 의혹을 느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자마자 그는 얼핏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호두 알만 한 에메랄드가 손잡이에 박혀 있는 아주 고귀한 백색의 바스타 소드를 내밀었는데, 호사스러운 차림을 하고는 있었지만 절대 이런 남자가 지니고 다닐 만한 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다마스커스 공법으로 제작된 것이기도 했다.
 퍼렇게 서슬이 도는 섬뜩한 칼날에 물결치듯 한 무늬가 있는 소드.
 박힌 보석은 액세서리일 뿐, 날 자체로 몇 채의 저택과 맞먹는 가치가 있는 대단한 소드다.
 비록 지금은 남의 칼을 수선해 주는 처지가 되었지만 한때 ‘제법’ 소리를 들었던 그가 이런 칼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 지금 이 소드에는 실로 큰 흠집이 생겨나 있었다.
 쇠막대 같은 것에 찍히기라도 한 듯 칼 중간의 날이 삼 센티미터가량이나 톱니처럼 이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필경 군장급 이상의 칼이었을 텐데, 생각하며 사이먼은 신중히 말문을 열었다.
 “훌륭한 칼이군요. 다마스커스 공법으로 제작된 검신에 깊이 파인 혈조血槽하며. 하지만 이런 파손은 복구시킬 수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심할 정도로 깊이 날이 빠져 있어요. 아무리 잘 갈아도 표시가 나게 마련이죠.”
 이리저리 살펴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특수하게 제작된 것이라 더욱 되살리기 어렵습니다. 다마스커스는 대륙에서 가장 훌륭한 칼이죠. 일반의 칼이라면 대강 불에 달궈 날을 두드려 편 후 벼리면 되지만 이런 소드는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랬다가는 쇠가 물러져 가치를 잃게 될 테니까요. 무늬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이 물결무늬는 수십 번 이상 쇠를 접어 가며 두드려 연마함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죠. 아름다움을 더하기 위해 겹쳐진 부분을 염산으로 부식시켜 재생해 내는 겁니다. 잘못 두드리면 무늬가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원상 복구할 방법은 없습니다.”
 “가게는 작지만 실력이 최고라는 소문이던데.”
 그의 표정이 더욱 불안해졌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다소 물러지더라도 흔적만 보이지 않게. 수리비는 원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소드인데 쇠가 물러져도 된단 말씀이십니까?”
 사이먼은 순간 피식 웃고 말았다.
 하고 있는 모습도 그렇거니와 이건 역시 멍청이가 하는 소리였다.
 식칼 따위가 아닌 다음에야, 좋은 소드란 여간해서 부러지거나 마모되지 않을 만치 강하고 질긴 쇠로 중심이 이루어져야 하고 열처리로 강하게 날을 세운 예리한 칼이다.
 그래야만 최고의 위력을 나타낼 수 있고.
 그런데 이만큼이나 훌륭한 칼의 이빨을 뽑아 온 주제에 쇠가 물러져도 괜찮다는 소리까지 하고 있으니.
 그러나 그의 다음 말은 사이먼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수리비는 원하시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십 골드 어떻습니까? 가보로 내려온 칼이라서! 어떻게든 좀 수선해 주셨으면 싶습니다만.”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본시 이들이 몸담은 아틀란타 대륙의 화폐는 실드와 실버, 골드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백 실드가 일 실버였다. 그리고 십 실버가 일 골드였던 것.
 노역에 끌려 나간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일주일 임금이 오 실버라고 볼 것 같으면 십 골드라는 화폐는 실로 엄청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일반의 사람들로서는 수년간 뼈 빠지게 일해도 만져 보기 어려운 거액인 셈이었다.
 한데 마모된 칼의 수리비가 십 골드라니?
 뭔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 재차 그를 향했다.
 “지금 십 골드라 하셨습니까? 쇠가 물러져도 괜찮다 하셨고?”
 우물쭈물, 그의 태도는 같았다.
 “그렇습니다. 사용하지 않는 예장용 칼이라서. 흠집만 감쪽같이 없애 주시면 됩니다.”
 서둘러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 번쩍이는 열 개의 금화를 사이먼에게 내밀었다.
 “그러시다면야.”
 사이먼은 휙, 낚아채듯 금화를 받아 들었다. 이 돈이라면 점포를 확장시킬 수도 있었고 그가 가져왔던 유일한 고민, 골치 아픈 아들 녀석의 진로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보통 칼이 아닌 터라 재차 다짐을 받았다.
 “원래는 맡아서 될 일이 아닌데, 사정이 딱해 보이니 한번 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셔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지만, 다시 말씀드려도 쇠가 약해질 수 있습니다. 무늬 역시 변할 수 있고. 그래도 좋습니까?”
 그는 흐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한 한 원상태로.”
 “알겠습니다. 그럼 작업을 시작할 테니까 여섯 시간쯤 후에 와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물쭈물, 그는 못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몇 번이나 소드를 쳐다본 후 가게를 나갔고, 사이먼은 곧 화덕에 풀무질을 하며 최대한 신중히 소드를 다루기 시작했다.
 다짐은 받았지만 그만치 맡겨진 게 보통 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려 군관학교로 들어가 병사가 된 후 전쟁을 거쳐 검공 일까지 하게 되었지만 한 번도 만져 보지 못했다 할 정도로 훌륭한 칼이었다.
 돈이 필요해 맡은 것이긴 하지만 더 정확히, 맡은 이유는 다행스럽게도 깨어진 부분이 중간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소드란 본시 끝부분이 생명이었다. 검사들은 칼을 쓸 때 모두가 끝부분을 사용했다.
 끝에서 이십에서 삼십 센티미터, 그것으로 무엇인가를 치거나 베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간 부분은 아주 중요하지 않았다. 다소 물러지더라도 끝부분을 예리하게 유지하고 무언가와 부딪쳤을 때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지탱하게 해 주기만 하면 칼의 가치는 그대로 살아남는 것이었다.
 사이먼은 검공 일을 하게 되기까지 겪어 온 모든 경험을 살려 소드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끝부분이 물러지지 않도록 몇 겹이나 물을 적신 천으로 감아 중간을 달궈 낸 후 조심스럽게 작은 망치를 사용해 검신을 두드려 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 후 거친 숫돌에 검신을 갈아 이가 빠진 부분을 없앴고, 소드를 염산에 넣어 재부식시켜 무늬를 살려 냈고, 칼날에 재 열처리를 한 뒤 다시 부드러운 숫돌에 칼을 갈아 새로 날을 세웠다.
 마치고 나자 소드는 다시 새것처럼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패였던 흠집이 없어지고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원 상태로의 복구는 아니었다.
 갈아 낸 만큼 미약하나마 무게가 달라졌고, 펴낸 만큼 검신이 얇아졌으며 무늬 역시 처음보다 다소 넓게 퍼져 보일 정도로 변화가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라면.
 “괜찮군.”
 사이먼은 만족하게 미소 지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칼은 자신이 보기에도 훌륭하다 싶을 만치 멋지게 수리되었고, 그대로 어디에 내밀어도 부끄럽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훌륭합니다! 소문은 들었지만 정말 이 정도로 솜씨가 훌륭하리라고는!”
 시간에 맞춰 찾아온 그 역시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피차 흡족할 만큼 일이 마무리된 것이었다.
 보람도 느꼈지만 특히 수중에 십 골드라는 큰돈이 들어오기도 했으니.
 “앞으로는 주의하십시오.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열처리를 할수록 약해지는 게 소드일뿐더러 더 얇아지면 정말 가치를 상실하고 말 테니까요. 잘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싱글벙글, 주의를 주면서 사이먼은 기분 좋게 아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말썽 많은 녀석이 잘하고 있는지.
 마음만 조였을 뿐 아버지로서 오랫동안 해 줄 수 없었던 일을 마침내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흐뭇한 심정이었다.
 
  * * *
 
 가르미슈 외곽 성벽 축조 터.
 “여봐! 거기 비켜! 밥! 더 힘을 주고! 키르온은 너무 빠르니 좀 천천히!”
 콰드드드!
 “우왓!”
 거론될 때마다 ‘엉망’, 혹은 ‘말썽 많은’이란 수식어가 붙는 사이먼의 아들.
 그러나 그는 제대로 일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여기서 그만치 말썽 없이 병사들이나 감독관의 눈총을 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옳았다.
 그가 이곳으로 나와 일을 하게 된 것은 돈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좀 더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자면 이곳 가르미슈에는 원래 외성벽外城壁이란 게 없었다. 외성벽이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성을 둘러싼 성벽 바깥의 산 능선을 따라 방어용으로 세운 성벽을 뜻한다.
 그러나 플로베로나 성들은 대부분 외성벽이 없었다.
 그만치 평화로운 곳이었던 것이다.
 왕국의 기원은 오백 년 전에 시작되었으며, 이백 년 전만해도 다칸과 한 국가로서 아틀란타 대륙에서 가장 막강한 위세를 떨쳤던 곳이기도 했다.
 그랬던 왕국이 둘로 나누어진 것은 이백 년 전이었다.
 당시의 왕 사마르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을 모두 사랑해 누구에게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전통대로 큰아들에게 후계를 물려 플로베로나의 왕이 되도록 했고, 둘째 아들에게는 북부를 영지로 내려 다스리게끔 했다.
 그만큼 두 아들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형제들 역시 우애가 깊어 그리해도 잘해 나가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던 것이다.
 생각은 맞기도 했다.
 믿은 대로 두 아들은 사마르가 죽은 후에도 가르침을 지켜 형은 왕국을 잘 다스렸고, 아우는 형을 따르며 북부를 이끌어 플로베로나를 더욱 강성하게 키웠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당대가 아니었다.
 두 형제는 우애가 좋았지만 대를 거친 그의 아들들은 부친들만 하지 못했고, 두 사람이 죽고 나자 북부를 맡았던 동생의 아들이 독립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다칸이었다.
 형제이자 아우라 봐야 할 국가였던 것.
 물론 플로베로나의 후세 왕은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북부를 영지로 내렸던 것은 할아버지였고, 부친들만큼은 아니라지만 그들 역시 상당한 우애가 있었으므로 이를 눈감아 줬다.
 지금도 백사십 개의 성으로 이루어져 있을 만큼 플로베로나는 넓었으므로 북부가 분리되어 나가도 충분히 강성하게 왕국을 이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부가 그다지 쓸 만하지 않기도 했다.
 형제의 국가로서, 어떤 일이나 따르고 보조를 함께하기로 한 후 독립을 허락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들의 대에 지나지 않았을 뿐, 그 후세에 이르자 두 왕가의 혈연은 더욱 흐려지게 되었고 또 그 후세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멀어지게 되었으며, 백칠십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결국 전쟁까지 치르게 되었던 셈이다.
 원인은 다칸의 특수한 지형 때문이었다.
 대륙의 중서부에 위치한 플로베로나는 사철이 모두 초여름 같은 온후한 기후로서 부족함이 없는 국가였다.
 반면 북부에 위치한 다칸은 대다수가 산악으로 이루어진 지형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기온이 떨어졌고, 그로 인해 언제나 식량이 부족한 곳이었다.
 반면 각종 광물이 풍부해 그것으로 주변의 국가들과 무역을 해 부족한 식량을 보충해 온 바 있었다.
 주 거래 대상국은 솔베이스 왕국이었다.
 플로베로나보다 더 아래쪽인 아틀란타의 남부에 위치한 아열대 지역으로서 년 삼모작이 가능할 정도로 곡물이 풍부한 왕국이었다.
 반면 대개가 밀림과 평지로 이루어져 있었으므로 다칸과 달리 광물이 부족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다칸은 오래전부터 솔베이스와 무역협정을 맺고 저렴하게 곡물을 가져오는 대신 광물들을 보내 주곤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물의 수요라는 것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다.
 식량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었지만 광물은 필요 이상으로 가져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
 이로 인해 다칸은 늘 솔베이스에 약한 모습을 보여 왔고 솔베이스는 고자세를 취했다.
 거래를 하고 있었지만 이런 솔베이스를 당연히 다칸이 좋아할 리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십오 년 전에 이르러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다.
 플로베로나 등 대륙의 중부와 북쪽 국가들에 심한 가뭄과 병충해가 들어 곡물 수확량이 절반이나 줄어드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플로베로나조차 당황했던 일이지만 평상시에도 곡물이 부족했던 다칸으로서는 재앙이라고 봐야 할 일이었다.
 한데 그때 솔베이스가 슬그머니 곡물의 가격을 두 배에 가깝게 올려 버렸다.
 재해를 기회 삼아 이익을 챙기고자 욕심을 부렸던 것.
 다칸에게도 똑같이 오른 가격을 적용시켰다.
 하지만 이것은 솔베이스의 실수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다칸은 더 전에 솔베이스와 무역에 대한 협정을 맺고 있었으므로 이것은 엄밀히 협정 위반이었고, 이 무렵 다칸은 젊은 신왕新王을 맞이하고 있었는데 그는 어느 왕보다 야심이 큰 남자였다.
 로만.
 모두가 당황하는 속에 그는 곧 솔베이스에 대사를 보냈다.
 협정 위반에 유감을 표시하고 약속된 곡물가로 계약을 이행해 줄 것을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고자세를 취해 왔던 솔베이스의 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덕에 걱정 없이 지내 온 주제에 말이지.
 
 항의를 고깝게 여겨 오히려 무역을 중단시키기까지 했다.
 다칸으로서는 더욱 치명적인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로만은 침착했다.
 모두가 분노하는 속에 대사를 보내 한 번 더 체결된 협정내용을 통고하고 무역 중단을 해제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솔베이스의 왕은 마찬가지로 아랑곳하지 않았고, 한술 더 떠 로만에게 무례를 사과하지 않으면 영구적으로 무역을 중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이놈이 우리를 너무 우습게보고 있군.
 
 로만의 눈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협정을 어긴 것이 누구인데 사과문을 보내라는 거야? 당장 무역 중단을 해제하고 약속을 이행하라고 해! 이 상태에서 무역을 중단시키면 우리에게 죽으라는 거야 뭐야.
 
 한 번 더 솔베이스로 대사를 보냈지만 그러나 솔베이스의 왕은 아예 대사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소식을 들은 로만의 입가에 싸늘히 웃음을 떠올렸다.
 
 -어쩔 수 없는 것 같군. 그렇다면 국가 간의 신의를 버린 녀석에게 맛을 보여 줘야지. 병력을 집결시키고 한 번 더 경고를 해. 당장 금지 조치를 해제하지 않으면 그냥 있지 않겠다고. 우리라고 앉아서 죽을 수는 없으니까.
 
 재해에 이어 재앙이 시작된 것이었다.
 
 -놈이 선전포고를 해 왔다고?
 
 하지만 솔베이스는 여전히 다칸을 얕보고 있었다.
 경고에 이어 로만이 정말 사십만 병력을 국경에 투입시켰는데도 신경 쓰지 않았다.
 까닭은 솔베이스의 국력이 훨씬 위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땅의 크기를 비교해도 다칸의 두 배에 이르고 있었으며 인구 역시 두 배에 가까웠던 것이다.
 
 -쓸어버려!
 
 오히려 공격을 명령했고 결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솔베이스의 두 번째 실수였다.
 그들의 적은 다칸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칸의 뒤에는 라미네스, 레이엘, 비스토니아 등 북부의 국가들이 더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솔베이스가 곡물가를 올리자 덩달아 남부의 다른 국가들까지 가격을 올림으로 흉년에 타격을 입은 그들이 일제히 다칸을 지원했던 것.
 아니라 해도 다칸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춥고 거친 북부의 산악에서 어렵게 생활하며 힘을 쌓아 온 그들의 무력은 솔베이스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고 설상가상 뒤늦게 밝혀진 일로써 뜻밖에도 로만이 네크로맨서들과 교분을 지니고 있음이 밝혀졌다.
 대륙에 존재하는 술법자들 중 가장 사악한 주술을 지닌 자들이었다.
 대개의 술법자들이 진리를 추구해 힘을 쌓으며 초극을 지향하는 반면, 네크로맨서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인체를 해부하고 무덤 속의 시체까지 끌어내었다.
 이로 인해 이들은 흑마법사로 불렸고, 일반에는 위험한 존재로, 같은 술법자들까지 고개를 저었는데 그런 그들을 로만이 가까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그들은 로만을 도와 온갖 사악한 주술을 다 쏟아 내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히프노시스<Hypnosis>.
 혼돈에 속하는 최면술로 오거, 트롤, 우르크하이 등 대륙도처에 존재하는 각종 괴수들을 제어해 싸움에 앞세웠고, 강력한 소환술로 드레이크까지 불러냈던 것이다.
 자만하고 있었던 솔베이스는 비로소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누가 봐도 순간의 마찰로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것을 보여 주기는 어렵다.
 은밀히 주변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등 야심을 품은 로만이 진작부터 전쟁 준비를 해 온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어리석게 거기에 기름을 부었던 것.
 
 -우리가 실수한 것 같으니······.
 
 서둘러 남부의 동맹국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등 뒤늦게 로만에 화해를 청했다.
 그러나 로만은 응하지 않았다.
 시작된 싸움은 삽시간에 솔베이스 전역으로 번져 갔고, 네크로맨서들을 대동한 로만은 선두에 나서 무차별 솔베이스를 함락시키며 계속 남하해 갔던 것이다.
 시체가 평원을 뒤덮고 피가 강이 되어 흘렀다.
 사력을 다해 맞섰지만 솔베이스는 결국 삼 년여 만에 패했다.
 
 -왜? 좀 더 큰소리를 쳐 보지?
 
 왕국이 함락되던 날 솔베이스의 왕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지만 로만은 일족들의 목을 모두 잘랐다.
 그리고 지체 없이 병력을 이끌고 계속 우나무노, 로리엔 등 주변 국가들을 공격해 갔다.
 솔베이스의 동맹으로서 그들을 지원한 곳이었다.
 이 싸움은 좀 더 빠르게 일 년 반 만에 끝이 났다.
 솔베이스를 지원하느라 막대한 타격을 입었던 그들은 다칸에 맞설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쓸데없이 국가가 너무 많아. 그렇다 보니 어느 나라는 넘치고 어느 나라는 부족하고 늘 이 모양이지. 차제에 하나가 되는 게 좋아!
 
 사년 반 만에 남부 삼 개국을 패망시킨 로만은 다시 측근의 남부 오 개국에 눈을 돌렸다. 대륙을 정복해 발아래에 꿇어앉히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또 전쟁.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삼 년여에 걸쳐 로만은 결국 그들마저 정복해 냈다.
 솔베이스의 욕심으로 시작된 전쟁이 남부를 망친 것이었다.
 남은 것은 플로베로나가 있는 중부였다.
 그러나 플로베로나는 그때까지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칸이 남부 전역을 휩쓸었음을 모르지 않았지만 설마 자신들이 있는데 중부까지야, 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설마는 역시 설마로 끝나고 말았다.
 남부를 초토화시킨 지 일 년.
 
 -진격!
 
 쿵쿵쿵쿵!
 전열을 정비한 로만은 선전포고조차 없이 플로베로나의 국경을 범람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플로베로나의 시민들은 경악했다.
 형제라 믿었던 그들이,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더욱이 로만은 극악이라 해야 할 어마어마한 존재까지 동원했다.
 대륙 최악의 존재 발록.
 그러했다. 동원한 흑마법사들의 사악한 정신력을 집중시킨 그가 비크만 산맥의 분화구 속에 존재하던 고대의 악마를 소환해 앞장세웠던 것이다.
 까닭은 전통적으로 플로베로나가 백마법에 강한 국가였기 때문이었다.
 로만이 네크로맨서들을 끌어들였듯 플로베로나의 선왕들은 의로운 술법자들을 존중했고, 이에 많은 백마법사들이 도처의 숲과 산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으며, 대륙 제일의 대마법사로 불리는 그들의 지도자 엘리언까지 플로베로나에 있었던 것이다.
 평화로 일관된 곳이었지만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던 것.
 이에 기습적으로 국경을 침공했던 것으로, 미루어 로만은 일찌감치 플로베로나를 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최대의 적으로 손꼽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플로베로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역시 정확히 본 것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해도 형제거늘!
 
 상상치도 못 했던 침략에 경악했던 플로베로나 시민들은 곧 엄청난 분노로 뭉쳐졌다.
 
 -응징하라!
 
 플로베로나의 왕 데이빗은 즉각 병력을 집결시킴과 함께 중부의 맹방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서둘러 대마법사 엘리언을 찾아 도움을 요청했다.
 로만이 네크로맨서들을 앞세운 이상 자신도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엘리언 등 술법자들도 긴장하고 있었다.
 로만이 흑마법사들을 이끌고 남부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지가 그릇됨으로 모두가 이단으로 배척하고 있는 그들. 이런 상태라면 술법 세계에도 큰 지각 변동이 오게 마련이었다.
 생명의 비밀을 찾아 살아 있는 사람까지 해부하는 그들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남부의 국가들에게도 적잖은 술법자들이 있었지만 전투에 나서 무수히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도 있었다. 아니, 듣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도자인 엘리언은 전쟁 초기부터 솔베이스 등을 지원하던 술법자들로부터 무수한 도움 요청을 받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엘리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까닭은 전쟁이 솔베이스 등의 잘못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남이야 죽든 말든, 위기를 틈타 욕심을 채우고자 했던 그들의 손을 들어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들에게는 일찌감치 전쟁이나 일반의 역사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로만과 네크로맨서들은 솔베이스뿐만 아니라 그들의 동맹, 잘못이 없는 주변 국가까지 붕괴시키고 마침내 중부 대륙까지 침공해 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술법 세계 최악의 금기까지 넘어섰다.
 발록! 비크만의 분화구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놈을 소환해 낸 것이 그것이었다. 고대의 악마라 불리는 이 가공할 개체는 아틀란타 대륙에 존재하는 마물들 중 최강이라 할 힘을 지닌 괴물이었다.
 지하 수천 미터 속에서 유황염을 마시며 존재하는 괴물로서 지상에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개체.
 그러나 어쩌다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낼 때면, 항상 극악이라 할 만큼 끔찍한 재앙을 일으키곤 했다.
 유황염을 마시며 살아가는 만큼 자체가 불의 정精이라 할 이 존재는 나타날 때마다 산과 들, 바위까지 불태우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죽였다.
 제어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존재.
 이로 인해 사람들은 이 괴물을 극도로 두려워했고, 고대에는 신으로 여겨 번제燔祭를 올리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지상에 모습을 보인 것은 육백 년 전이었다.
 남부 이스마엘 지역의 지하를 뚫고 올라왔던 터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스마엘 지역에 생존했던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녀석에게도 천적이 하나 있었다.
 놈이 지하 세계의 왕이라면 하늘의 왕이라 불리는 루비 드래곤 가이아가 그것이었다.
 놈이 유황염을 먹고 존재한다면 가이아는 화산의 분화구 속에서 알을 낳았다.
 그러나 흉포한 성격을 지닌 이 존재는 자신의 영역인 분화구 속이나 유황염 주위에 다른 개체가 접근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이로 인해 때가 되면 가이아와 언제나 어마어마한 싸움을 벌이곤 했는데 싸움은 항상 무승부로 끝나곤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놈이 불의 화신이라면 대륙에 존재하는 드래곤 중 가장 강력한 브레스를 지닌 가이아는 열과 섬광의 폭풍을 일으키는 개체로서 공격해 올 때마다 백열광을 일으켜 놈과 격돌했고, 알이 부화되면 곧 새끼를 물고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놈은 자신의 영역에 들어와 알을 부화시키는 가이아를 싫어했지만 날 수가 없었고, 가이아는 후예만 탄생시키면 그뿐, 지하와 그 이상의 관계가 없기에 사활을 걸고 싸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싸움은 언제나 무승부였던 것.
 그밖에 또 하나, 지금은 아틀란타에 없지만 놈에 맞설 만한 큰 힘을 지녔었던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차원을 떠나간 엘프족이었다.
 인류에 앞서 훨씬 일찍 아틀란타 대륙에 존재했던 지배자들.
 인류보다 빨리 진화했던 지극히 평화를 사랑했던 의로운 종족이었다.
 사람에 비해 몇 배나 큰 정신의 힘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고도 있었다.
 인류보다 일찍 깨어났던 그들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던, 자신들을 닮은 인류를 도와 발전을 이루게 했고, 특별한 정신의 힘으로써 존재하는 세계 밖에 몇 배나 훌륭한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음까지 알아냈다.
 죽음이 없는 영원의 세계.
 이에 그들은 수만 년간 차원의 비밀을 풀고자 했고, 마침내 초극의 정신력으로 공간의 문을 여는 방법을 깨달아 아틀란타를 인류에 맡긴 뒤 세계를 떠났다.
 그러나 존재할 당시, 그들에게도 이 지하의 괴물은 똑같은 골칫거리가 되고 있었다.
 차원을 넘어갔을 정도로 특별한 힘을 가진 그들이었지만 녀석 역시 화염의 신이라 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졌던 만큼 한 번씩 난동을 부리기 시작하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소멸시켜 버릴 수도 없었다.
 난동을 부릴 때만 문제가 되었을 뿐, 초자연이 잉태시켜 낸 이 괴물은 지저에서 용암을 먹으며 존재했으므로 언제나 그것을 지키고 있어 올라오지만 않으면 오히려 도움까지 되었기 때문이었다.
 먹이를 지키기 위해 녀석은 끊임없이 굴을 파 분출되려 하는 용암의 흐름을 바꾸었던 것이다.
 소멸시키면 지각 변동 등 화산의 폭발이 심해진다는 것.
 이에 엘프들은 놈의 서식처 주위에 결계를 쳐 올라올 수 없도록 금제했고, 결계가 약해져 모습을 나타낼 때면 큰 정신의 힘으로 가이아를 소환해 막아 낸 후 다시 땅속에 가두곤 했었다.
 그리고 차원을 떠날 당시, 혹여 이 괴물이 또 난동을 부릴 것을 우려해 자신들과 같은 의지를 가진 의로운 술법자들에게 가이아를 부를 수 있는 주술을 전해 주기까지 했다.
 잠자코 있을 때는 도움이 되지만 올라오면 그만치 큰 재앙을 일으키곤 하는 존재였으므로.
 한데 로만의 네크로맨서들이 결계를 깨트리고 놈을 끌어내었던 것이다.
 까닭은 가이아에게 있기 쉬웠다.
 침공한 만큼, 나설 경우 백마법사들은 강력한 적이 될 것이었고, 스승(엘프)들이 남기고 간 소환서를 지도자인 엘리언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여 엘리언이 가이아를 소환해 낼 경우라면 후환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계산하에 한발 앞서 발록을 끌어내었던 것이다.
 결국 엘리언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우리는 사악한 술법자들과 발록만.
 
 기어코 전쟁이 술법 세계로까지 번져 간 것이었다.
 데이빗 왕은 비로소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엘리언과 빛의 술법자들이 나섰으니 일단 네크로맨서들과 발록의 위험은 퇴치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한 달.
 진격해 오고 있는 네크로맨서들을 막기 위해 술법자들을 집결시킨 엘리언에게 큰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수호자여, 모습을 드러내라.
 
 집결이 끝나자 엘리언은 곧 그들과 힘을 합쳐 가이아를 불렀는데 알 수 없게도 가이아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이다.
 열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고 백 번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이런 일이?
 
 모두의 낯빛이 시커멓게 변하고 말았다.
 엘프들조차도 제어하기 어려워했던 발록이 금제를 깨고 올라온 마당에 가이아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놈을 제압할 것인지.
 그것은 지상의 대재앙이었다.
 자신들은 물론 끌어낸 흑마법사들, 적, 아군 할 것 없이 생존해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어마어마한 위기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당장은 네크로맨서들이 히프노시스의 사악한 주술을 걸어 조종하고 있었다.
 그러나 엘프들의 금제까지 깨트리고 올라왔던 신 격인 이 괴물이 언제까지나 인간에게 조종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주술이 깨어지는 날이면 분노한 그에게 대륙 전체가 절멸絶滅할 위기에 처하는 것이다.
 네크로맨서들조차 가이아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기 쉬웠다.
 그들이 발록을 끌어 올린 것은 틀림없이 가이아가 나타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나타나면 두 개체가 부딪칠 것이니 어느 쪽이 이기든, 이기는 쪽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라 계산하지 않았을까.
 그때 남은 녀석을 봉인시키거나 제거하는 것으로 마무리할 생각이었을 게 분명한 것이었다.
 한데 그 가이아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의 오만함에 저주가 내려졌다.
 
 엘리언을 비롯한 모두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전쟁 이상의 문제가 발생해 버린 것이었다.
 데이빗 왕까지 사색이 되고 말았다.
 같은 즈음 그는 엘리언을 믿고 전 병력과 분노한 시민군들을 집결시키는 등 동맹국들과 함께 맞설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발록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하니.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도 로만은 발록을 앞세운 채 진격해 오고 있었고.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어떻게든 막아 내어야만 했다.
 엘리언은 모두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힘을 합쳐 발록을 금제해 보기로 했고, 데이빗 왕은 결사를 각오한 채 연합군을 이끌고 로만과 마주쳐 나가게 되었다.
 첫 번째 전선이 이루어진 곳은 플로베로나의 남부 국경 지대인 펠란트 성 쪽이었다.
 그러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공포뿐이었다.
 도착하자 그곳에는 역시 그들이 있었다.
 평원을 메운 다칸의 연합군들과 음산한 검은 옷의 네크로맨서들,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는 드레이크들과 철갑을 두른 온갖 괴물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마주 대하기조차 두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형상을 지닌 놈이 무시무시하게 신음을 흘리며 서 있었다.
 발록.
 퍽퍽, 연신 불길이 번지는 삼십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체장에 화염의 채찍을 움켜쥔, 조만간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을 불태워 버릴지 모를 신 격인 존재가.
 놈의 형체는 신화 속의 미노타우로스를 닮았다.
 화염의 정精인만큼 나타날 때 마다 조금씩 외양을 바꾸었지만, 연신 푸른 불길이 번지는 갑옷을 입은 듯한 시커먼 몸체에 사자獅子와 같은 얼굴, 머리 좌우에 양羊과 같은 뿔을 가진 형상을 한.
 보는 즉시 모든 병사들은 얼어붙었다.
 맞서기는커녕 보이는 자체만으로도 심장이 터져 버릴 만큼 끔찍한 공포심을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에 비해 몇백 배나 강한 정신력을 쌓아 온 술법자들과 대륙의 전사들은 용감했다.
 
 -일어서라, 땅의 수호자! 하늘의 지배자들이여!
 
 엘리언과 술법자들은 즉시 큰 정신의 힘으로 땅의 수호자로 일컬어지는 골렘들을 일으키고 거대한 그리핀을 불렀다.
 
 -공격하라!
 -와아아-!
 
 그리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전투의 노래를 부르며 죽음을 불사하고 적진을 향해 섬광처럼 날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퍽!
 
 -으아아아악!
 
 저 끔찍한 발록은 그들과 플로베로나의 전사들이 로만군에 접근하기도 전에 화염의 채찍을 휘둘러 모두를 재 가루로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쏟아져라, 빛의 화살이여!
 
 골렘들과 함께 엘리언과 술법자들이 하늘과 땅을 메우며 새카맣게 공격해 갔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퍼부어 낸 어떤 힘도 놈의 강인한 몸을 파괴시키지 못했고 화염의 채찍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이름조차 무색하게 땅의 거인이라 불리는 골렘들조차 콩가루처럼 부서져 사라졌던 것이다.
 
 -장난들을 치고 있군. 쓸어버려!
 
 여기에 백만이 넘는 다칸 연합의 병사들이 온갖 괴물, 네크로맨서들의 지원을 받으며 물밀 듯 밀려오기 시작했다.
 
 -쿠콰콰콰콰콰쾅!
 -으아아악!
 
 참패.
 남은 것은 평원을 뒤덮은 죽음뿐이었다.
 첫 싸움의 결과로 플로베로나는 십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희생을 남기고 후퇴했다.
 밀리며 로젠베어, 오웰, 피츠버그 등 각처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중부 연합을 이끈 데이빗과 엘리언은 지혜와 힘을 다해 진격해 오는 다칸군에 맞섰지만 그때마다 처참한 죽음만 남기고 결국 수도인 에이미즈까지 밀리고 말았다.
 배신자까지 생겨났다.
 참패가 지속되자 도처의 영주들과 대신들이 무릎을 꿇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총리였던 테일런까지 배신했다.
 초기부터 항복해야 한다는 등의 소리를 하더니 결국 등을 돌려 부하들을 이끌고 로만에게로 가 충성을 맹세해 버렸던 것이다.
 어이없을 노릇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그런 인간들은 있는 법이고, 모든 시민들과 전사들은 끝까지 의지를 잃지 않고 에이미즈에 방어벽을 쳤다.
 그리고 왕성이 함락되던 그날 밤, 엘리언은 마지막 방법으로 최고의 실력을 지닌 삼십여 명의 술법자들과 함께 최후의 비기, 벼락을 일으키는 풀, 콜 라이트닝의 술법으로 발록을 소멸시켜 보기로 했다.
 
 -공격!
 -와아아아아!
 
 그리고 시작된 싸움.
 두 개 연합, 백삼십만의 병력이 새카맣게 벌판을 뒤덮고 밀려 가는 속에 마침내 대륙의 사활을 건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집채만 한 투석들과 화살이 빗발치듯 어둠 속을 메우고 붉고 푸른 섬광의 빔들이 퍼부어지는 속에 하늘에는 드레이크들과 그리핀들이 치열하게 뒤엉켰고, 땅에서는 골렘들이 어마어마하게 육박전을 벌였다.
 
 -내리쳐라! 벼락이여! 지하의 마왕을 영원히 잠재워라!
 
 그런 속에 엘리언은 최고의 실력을 가진 빛의 술법자들과 지팡이를 모우고 마침내 계획을 실행했다.
 최후의 한 방울까지 모든 힘을 다 짜내어 거대한 벼락을 일으켜 접근해 오는 발록을 내리쳤던 것이다.
 
 -쾅-!
 -크아아아아!
 
 그야말로 엄청난 벼락.
 한순간 시퍼렇게 밤하늘을 쫙, 가르며 어마어마한 번갯불이 작열해 발록을 강타했고, 순간 놈은 허옇게 연기를 뿜으며 푹, 고꾸라졌다.
 존재하는 어떤 물체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벼락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괴물은 소멸되지 않았다.
 고꾸라졌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지만 곧 그 가공할 몸을 일으켜 부르짖었다.
 
 -크아아아아-!
 -콰르르릉!
 
 그것이 끝이었다.
 헬 파이어!
 그대로 지옥의 불이라 해야 할지.
 지저地底 수천 미터 아래서 용암을 먹고 존재해 온 불의 정이라 할, 분노한 괴물이 직경 백여 미터가 넘을 만큼 어마어마한 화염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덮쳐들었던 것이다.
 절멸絶滅.
 극악이라 할 아우성이 일어남과 함께 모든 것이 재 가루가 되고 녹아내렸다.
 사람, 짐승, 풀, 나무 할 것 없이 생존한 모든 것들이 탔다.
 데이빗 왕도 숯덩이처럼 타 죽었고, 엘리언 역시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전쟁도 끝났다.
 공포에 질린 네크로맨서들이 사력을 다해 놈을 진정시키는 속에 백기가 올랐던 것이다.
 대인對人 간의 전쟁이라면 모르겠지만 신 격인 이 괴물은 처음부터 인간이 맞서 싸울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머지 중부 국가들도 무조건 항복했다.
 연합군에 엘리언 및 대륙 최고의 술법자들까지 집결했어도 당하고 만 상태에 맞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륙은 정복당했고, 결국 로만은 황제로 등극했다.
 이후 다칸의 감시 정책이 시작되었다.
 로만은 모든 나라에 무장해제를 명하는 등 각국에 집정관을 보내 왕에 우선하게 했고, 대륙 전체를 좌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연히 이런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전쟁역시 실제로는 다 끝나지 않았다.
 왕국들은 항복했으나 전투에 참가했던 많은 장성들과 시민들이 도처의 산악 속이나 숲 속으로 들어가 치열히 항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극렬히 반 다칸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은 역시 남부의 국가들과 플로베로나였다.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솔베이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유 없이 침략당해 주권을 잃게 된 남부의 병사들과 믿었던 그들에게 배신당한 채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된 플로베로나의 시민군이 도처에 숨어 끝없이 다칸에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골치를 앓게 된 로만은 도처의 성주들에게 명령해 방벽을 쌓게 했고, 이로 인해 가르미슈에도 성벽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래서 전쟁 때도 없던 성벽을 적을 위해 쌓고 있다고 한 것.
 동원된 사람들 역시 성의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사이언의 아들이 누구보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 같은 놈. 놈들로 인해 제 아버지가 불구가 된 것을 모르나?”
 당연히 이런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전쟁으로 수십만이 죽고 주권까지 잃은 판국에 나라를 찾고자 하는 아군들을 막으려 쌓는 성벽인데 열심히는 무슨.
 대충대충, 가능한 허술하게, 요령껏 눈치나 보다가 가면 그만이지.
 “거기 비키라고 했잖아! 다치고 싶어?”
 하지만 이런 모두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정말 열심히 하고 있었다.
 키르온<Kill’one>.
 십팔 세.
 타는 듯 붉은빛이 감도는 갈색 머리에 백팔십칠의 후리후리한 몸매와 떡 벌어진 어깨, 길게 치켜 올라간 독수리의 눈, 유난히 커 보이는 손발을 가진 괴상한 이름의 녀석.
 첫눈에 무척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인상이었다.
 붉은빛이 도는 갈색의 머릿결이 타는 듯 열정적으로 보이는 강렬한 느낌을 주고 있었고, 치켜 올라간 독수리의 눈은 여간해서 정면으로 대하기도 어려울 만큼 용감무쌍해 보인다고 해야 할지.
 훌쩍 큰 키에 마른 듯해 보이면서도 떡 벌어진 어깨와 유난히 커 보이는 손발조차 특이했다.
 키에 비해 말라 보이기도 했지만 군살이 없어 그럴 뿐이고, 어깨가 벌어져 보일 만큼 굵직굵직한 뼈대로 이루어진 몸매가 한눈에 보기에도 강골임을 알 수 있었을뿐더러 큰 손발이 타고 난 역사力士의 체격임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흔히 이야기하는 꽃미남이라거나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대단히 눈에 뜨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십팔 세.
 체격은 그렇다 치더라도 스무 살에서 마흔다섯 살 미만의 남자들만 동원해 노역을 시키는 공사장으로, 이런 일을 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그럼에도 나온 까닭은 역시 돈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전문학부로 가기 위함.
 이를테면 플로베로나 왕국의 사람들은 아홉 살이 되면 누구나 왕국에서 지원하는 기본 학교에 입학해 육 년간 무료 교육을 받았다.
 글을 읽는 법과 쓰는 법, 예의범절과 도덕, 더하고 나누는 산술 등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기본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그다지 문명이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그것만으로도 일상생활을 하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에 대부분의 소년 소녀들은 기본 교육을 마친 후 상업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등 진로를 결정해 사회의 일원이 되곤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학업의 모두는 아니었다.
 그밖에도 왕국에는 전문학을 가르치는 고등학부가 더 있었고, 좀 더 많은 공부를 원하는 소년 소녀들은 여기로 진학해 다시 오 년에 거쳐 의학, 교육학, 건축학 등을 더 배웠다. 수료한 후에는 의사나 교사 등 보다 좋은 직업을 얻어 사회로 진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학교들은 호되게 수업료가 비쌌다. 일반 아이들은 진학할 엄두를 낼 수 없을 정도로써, 일부 부유층의 자제들이나 가는 곳이었다.
 그밖에 일반 학문과 다르긴 하지만 힘과 패기가 넘치는 소년들이 선호하는 군관학교가 하나 더 있었다.
 무예와 군사학을 가르치는 학교.
 기본 학교와 마찬가지로 왕국에서 지원하는 곳으로, 신체 건강한 소년들은 누구나 지원해 무상으로 수업받을 수 있지만 대신 수료한 후에는 의무적으로 오 년간 군인이 되어야 하는 곳이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오 년이나 삭막한 병영 생활을 하는 곳에 누가 가랴 싶기도 한 곳.
 하지만 실제로는 무척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만치 큰 특전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자면 이 시대의 군인이란 모든 직업에 우선했다.
 크게는 나라를 지켰지만 법과 시민을 지키는 치안 임무까지 맡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우선 명예가 컸다.
 수입 면에서도 이십 실버라는 만만치 않은 봉급이 지급되고 있었으며, 가족들에게는 상당수의 세금까지 면제해 줬고, 계급이 올라갈수록 대우는 더 좋아졌다.
 군장급이 되면 칠팔 골드에 달하는 봉급을 받을 정도였으며, 실력을 인정받아 전사Warrior(워리어)가 되면 신분의 상승까지 따랐다.
 이 시대 대륙의 신분제도는 평민과 귀족, 왕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준귀족의 신분이 되는 것이었다.
 군부에 영향력을 가지므로 실제로는 귀족 이상의 신분.
 다른 점은, 귀족은 작위를 받게 되면 일가가 모두 귀족이 되고 대물림을 하지만 전사는 개인의 명예이므로 혼자의 범주라는 정도였다.
 그러나 전사는 섬기는 왕 외에 어느 귀족에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고, 여기에서 다시 나라에 공헌하는 무공을 세우면 마침내 왕국에서 영지와 작위를 내려 완전한 귀족이 되었다.
 같은 작위라도 군부의 힘이 있는 만큼 분명 타 귀족을 능가하는 것이다.
 이에 대륙의 패기 있는 소년들은 누구나 군관학교에 입학, 군인이 되어 부와 명예와 권력을 움켜잡기를 희망했다.
 조금 다르긴 했지만 키르온.
 괴상한 이름을 가진, 이 특이해 보이는 소년에게도 비슷한 목표가 있었다. 그리고 군관학교로 가기 위해 공사장에 나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을 하게 된 것도 스스로 감독관을 찾아가서였다.
 
 -뭐야 넌? 나이가 어리잖아?
 
 감독관은 어리둥절해했지만 다음 한마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를 위해 성벽을 쌓는 일에 나이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려도 개미는 배짱이보다 일을 잘합니다.
 
 강제로 나와 마지못해 일하는 사람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말한 대로 그는 현재 개미가 되어 있었다.
 남들이야 어떤 눈으로 쳐다보든 아주 세 명의 친구까지 더 끌어들였다.
 “밥, 더 힘껏 밀라고 했잖아! 각 잘 맞추고!”
 와르르르!
 하는 일은 석공들이 잘라 놓은 네모꼴의 바위들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특별한 도구가 없던 시대라 성벽이나 탑을 쌓을 때 사람들은 흙과 통나무를 이용했다. 벽이 높아지는 만큼 언덕처럼 비스듬히 흙을 다져 쌓고 통나무들을 깐 후, 바위를 밧줄에 묶어 끌고 올라가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가장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됐어! 제대로 끼워 맞춰.”
 쿵-!
 하지만 그와 친구들은 비 오듯 비지땀을 흘리며 힘든 내색조차 없이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바위를 끌어 올리고 있었고, 개미임을 증명하듯 보기 좋게 또 하나의 바위를 운반해 쌓고 있는 성벽의 모서리에 맞춰 넣었다.
 명령하듯 줄곧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데니스였다.
 “좋아! 잘 들어갔어.”
 “휴······!”
 친구들은 각자 밥, 비어홀트, 데니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데니스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 가난한 집안의 출신에 같은 또래들.
 그래도 체격들 하나만큼은 다들 봐줄 만했다.
 데니스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 백칠십오에서 백구십의 키에 이르는 건장한 몸매들을 지니고 있었고 눈빛 역시 여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힘이 드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듯, 바위를 끼워 맞추자 곧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햐, 진짜 힘들다. 넷이서 한 달에 이십 실버 모으기가 이렇게 어렵다니.”
 백칠십 정도로 가장 체격이 작지만 반듯한 미남형의 모습을 한 데니스가 비 오듯 한 땀을 닦으며 한마디 하자 곧 여드름투성이에 말馬상을 한 통나무 같은 비어홀트가 동감이라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게 크로노스를 잡으러 다니는 게 나을 거라고 했잖아. 무슨 꼴이야 이게.”
 숲에 존재하는 큰 멧돼지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백구십, 거구에 곰보 자국이 얽힌 얼굴의 밥이 손에 감은 무명천을 고쳐 묶으며 히죽 웃었다.
 “그건 아니지. 녀석들이 어디 잡아가 달라고 기다리기라도 하나. 잘해야 한 달에 한두 마리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야 십 실버도 모으기 어렵지. 반면 힘들어도 이 일은 고정 수입이 있고. 키르온 생각이 맞는 거야.”
 “이래서야 언제 목표까지 가나. 앞으로도 육 개월은 더 해야 할 텐데.”
 밥은 꽤 긍정적인 성격인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젠 육 개월이야. 처음 시작할 때는 일 년 타령을 했지. 힘내자구. 반은 온 거니까.”
 “하긴.”
 묵묵히 땀을 식히고 있던 키르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기로 한 이상 군소리 않는 거야. 내려가자.”
 모두의 얼굴에 멈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 올라왔는데 벌써?”
 그러나 그는 벌써 몸을 돌리고 있었다.
 “약한 생각 따윈 버리고. 정 힘들면 생각을 바꾸도록 해. 다시 말해도 난 너희들이 가르미슈에 있기를 더 원하니까.”
 “섭한 소릴!”
 정신이 번쩍 드는 듯 데니스와 비어홀트도 일어섰다.
 “그냥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것뿐이었어. 열심히 했으니까 좀 더 땀을 식히자는 것이었고. 키르온, 설마 화난 건 아니지?”
 키르온은 내려가며 뒷손질로 엄지손가락을 치켰고, 이런 그를 보며 밥이 다시 히죽 웃었다.
 “이만한 일로 화낼 남자가 아니잖아. 대장은 진심으로 너희들이 가르미슈에 있길 바라는 거야. 나도 그렇고.”
 “콱!”
 데니스가 당장 칼눈이 되었다.
 “말 한번 예쁘게 한다! 그러니까 키르온이 남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뿐이라 이거야? 넌 괜찮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밥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나야 가르미슈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아닌가? 가르미슈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가야지.”
 “하하! 웃기려고. 제가 가장 강하대. 곰이 요즘 근질근질한가 본데 일 끝내고 뼈라도 추려 줄까?”
 비어홀트가 콧김을 뿜어냈다.
 “내버려 두자구. 곰도 제 잘난 맛에 사는 거니까. 어쨌건 힘 하난 알아줄 만한 게 사실이기도 하고.”
 “그래 봤자야. 정작 제일 힘센 남자는 앞에 가잖아. 키르온이 있는 이상 ‘가장’이라는 것은 없어.”
 다소 이상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본시 힘이란 체격에서 나온다.
 훌쩍 큰 키와 넓은 어깨, 큰 손발로 그가 여간 아닌 역사力士의 체격을 가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밥은 그에 비해 훨씬 큰 몸통과 키, 굵은 골격을 지닌 몇 배나 더한 역사의 체격을 가졌다.
 그럼에도 키르온이 더 힘이 세다고 하니.
 그러나 데니스는 계속 같은 말을 했다.
 “가르미슈의 불가사의지. 말 할 필요도 없이 우리 중에 그를 따라갈 사람은 없어. 솔직히 키르온이 아니었으면 이 짓도 안 했겠지.”
 옥신각신하며 친구들은 이윽고 다시 돌을 묶고 있는 하역장에 도착했다.
 일은 여럿으로 세분화되어 있었는데 첫째는 바위산에서 정과 망치로 알맞은 규격으로 바위를 쪼개는 것, 그것을 마차에 실어 옮겨 와 하역하는 것, 끌고 올라가도록 밧줄로 묶는 것, 마지막으로 벽을 쌓는 일 등이었다.
 따라서 하역장에는 운반해 온 바위를 옮길 수 있게 줄로 묶고 있었고, 묶여진 바위들이 운반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 편한 일로서 묶는 작업은 고참들이 했다.
 “너희들?”
 내려온 친구들을 본 모두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벌써 옮기고 온 거냐?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확실히 제대로 하고 있긴 한 거야?”
 비어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합니다. 가져간 건 이미 성벽이 되었으니까요.”
 “몇 개째지? 스무 개는 되는 것 같은데.”
 밥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정확히 스물여섯 개죠. 지금은 좀 지쳐서 이렇지만 오전엔 속도가 훨씬 빠르니까요. 열 개는 더 옮길 생각입니다.”
 “허허허······.”
 줄을 묶는 이들은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체격도 보통이 아니다만 진짜 장사들이군. 모두가 이렇다면 벌써 성벽이 완성되었겠어.”
 텁석부리의 남자 하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좋은 게 아냐. 좀 쉬도록 해. 올라가면 충분히 땀을 식히고 내려오도록 하고.”
 엄살을 부리던 데니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충분히 쉬고 내려온 것입니다. 별로 힘든 정도도 아녜요. 크로노스도 잡는 우리들인데.”
 처음 말을 걸었던 남자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너희들이 크로노스를 잡았다는 거야? 멧돼지가 아니고?”
 데니스는 계속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반 멧돼지야 너무 가볍죠. 크로노스 정도는 되어야 잡을 맛이 있어요. 장비만 갖춰져 있으면 오거도 잡을 수 있을 거예요.”
 “하하!”
 “녀석들이 큰소리는! 오거가 어떤 괴물인데 잡는다는 거야? 알았으니까 어쨌건 조심하도록 해.”
 친구들은 다시 바위를 묶은 밧줄을 어깨에 걸쳤다.
 사인일조가 되어 좌우에 두 명씩, 키르온과 밥이 앞서고 데니스와 비어홀트가 뒤를 받쳐 밀고 당기며 옮겨 가는 보조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만두라 했잖아!”
 그러나 텁석부리의 남자는 말렸다.
 “곧 중식 시간이니까 쉬도록 해. 말은 그렇게 해도 지친 기색이 보이니까. 무리하면 사고가 나는 거다. 듣지 않으면 내일부터 나오지 못하게 할 테니까.”
 공사장의 속성상 반대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텁석부리는 공사장의 우두머리 격인 십장什長인 남자였는데, 더 하라고 재촉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만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만치 일당들이 열심히 하고 있다는 증거기도 한 것.
 한데 이때였다.
 쾅-!
 “악!”
 “사고다! 사고가 났다!”
 “바보들이?”
 텁석부리의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소란이 일어났다.
 장소는 키르온들이 내려온, 돌을 끌어 올리기 위해 언덕처럼 흙을 쌓아 놓은 아래였는데, 바위를 옮겨 가던 조 하나가 밧줄을 놓침으로 바위가 굴러 아래에서 움직이던 다른 인부들을 덮친 것이었다.
 “도와야 해!”
 우르르, 사고 지점에는 순식간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 보자 상황은 심각했다.
 옮기기 쉽도록 바닥에 통나무를 깖으로 사고가 일어나면 대개, 급격히 아래로 구른 바위에 부딪쳐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다치거나 했는데 이번 경우는 아예 남자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채 하반신이 깔려 버렸던 것이다.
 “어서 바위를 치워!”
 병사들과 몰려든 사람들은 정신없이 힘을 합쳐 바위를 들어 올리고자 했다.
 “아······!”
 그러나 바위는 꿈쩍하지 않았다. 통나무가 깔려 있어 끌고 가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가로 이 미터 세로 일 미터, 성벽을 쌓을 정도로 큰 바위를 들어 올린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렛대가 있어야겠어! 쓸 만한 물건 좀 찾아와!”
 우왕좌왕, 사람들이 급히 사방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당장 지렛대로 쓸 만한 뭔가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바닥에는 통나무들이 깔려 있었지만 둥치가 굵고 길이가 짧아 지렛대로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깔리는 것은 흔치 않은 사고라 지렛대 같은 것을 예치해 놓지도 않았고.
 “다들 좀 나서 봐.”
 키르온이 앞으로 나섰다.
 밥의 얼굴에 멈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어쩌려고? 열 명이 들어도 꿈쩍 않는 무게야! 설마 들어 보자고?”
 앞서 달려왔던 사람들이 이미 실패한 일이었다.
 그러나 키르온은 서둘러 바위 좌측으로 붙어 서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렛대 따위가 있을 게 뭐야. 기울어지지 않게 그쪽을 받쳐. 늦어지면 출혈이 커져 사람이 죽어.”
 쭈뼛쭈뼛, 밥은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글쎄, 하라면 하겠는데 이건 안 된대두?”
 “잔말 말고 어서 붙어.”
 하지만 키르온은 이미 바위의 아래로 손을 넣고 있었다.
 “대체 어쩌려고.”
 어쩔 수 없이 밥, 데니스, 비어홀트 역시 나란히 아래로 손을 넣었다.
 “단단히 정신 차려. 자칫하면 문제가 더 커질 수도 있으니까. 시작할 테니 일제히 들어 올려.”
 키르온의 눈이 번뜩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순간.
 “크아아압!”
 그의 입에서 쩡 하는 외침이 터짐과 함께 양쪽 이마에 툭툭, 퍼렇게 심줄이 불거져 나오더니 실로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드드드득!
 열 몇 명이 들어 올리려 했어도 꿈쩍 않았던 바위가 둔탁한 음향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으왓!”
 “들······ 들린다! 저 큰 놈이?”
 둘러 서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경악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크압!”
 와드드득!
 키르온의 눈이 찢어질 듯 치켜뜨임과 함께 기어코 바위의 한쪽 면이 무릎까지 들려 올라갔다.
 “뭐 해! 돕지 않고! 어서 사람을 끌어내!”
 비로소 모두가 몰려들어 함께 바위를 떠받치는 등 소란을 일으키는 속에 깔린 사람이 구해져 나왔다.
 하반신이 뭉개져 온통 피범벅이 된 상태.
 “어서 의무실로 데려가!”
 그러나 다행히 서둘러 구해 낸 덕분에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고, 사람들은 급히 옷을 찢어 피를 지혈시키는 등 허둥지둥 들것에 실어 의무실 쪽으로 달렸다.
 “······!”
 키르온은 어느새 들어 올렸던 바위를 놓고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고.
 혼자서 한 것은 아니었지만 괴력怪力이었다.
 “굉장해! 역시 체격답게!”
 “정말 수고했네! 덕분에 사람이 살았어!”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밥에게로 모아지고 있었다. 거창하다시피 큰 체격도 그렇고 누가 봐도 힘을 쓴 것은 밥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멍청한 놈 같으니!”
 촥촥!
 “악!”
 하지만 문제는 계속 생겼다.
 웅성대는 사람들의 한쪽에서 느닷없이 성난 호통과 함께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분노한 표정의 병사 하나가 사십 세가량의 중년 남자를 채찍으로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던 것.
 그러나 둘러선 사람들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도 말릴 생각을 않았다.
 특이한 예였다. 강제 노역인 만큼 채찍질이 있기는 다반사였지만 심할 경우에는 늘 반발이 일어나곤 했는데 뜻밖에 사람들이 나서지를 않았던 것이니.
 “그만해. 대체 왜 그러는 건데?”
 밥이 나섰다.
 “이자 때문에 사고가 난 거다! 누차 경고했는데도 요령을 부리더니만!”
 대충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사 인 일 조가 되어 일을 하듯 원래 이 일은 운반하는 사람들의 호흡이 잘 맞아야 했다.
 네 명이 힘을 합쳐 끌고 올라가는 만큼 누가 되건 요령을 부리면 끌고 가는 돌은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리되면 나머지 사람들은 더 힘이 들게 마련이었고, 자칫 기울어진 쪽을 끄는 나머지 한 사람까지 중심을 잃거나 밧줄을 놓치면 사고가 나는 것이었다.
 힐끗, 키르온은 쓰러진 남자를 본 후 함께 나섰다.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을 테니까, 힘이 부쳤던 거겠지.”
 확실히 중년인의 체격은 왜소했다.
 “운반 쪽 일을 맡긴 게 안 좋았던 것 같아. 그러니까 그만둬. 달라질 것도 없는데.”
 “운 좋은 줄 알아! 다행히 이 정도에서 끝났기에 망정이지!”
 화가 치밀었지만 병사는 비로소 채찍을 내리고 친구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너희들은 말투가 왜 그래? 혀가 짧기라도 한가?”
 반말을 하는 것을 지적하는 듯했다.
 그러나 키르온은 신경 안 쓴다는 듯 간단히 대답했다.
 “형이잖아. 같은 가르미슈의.”
 형.
 그것으로 일은 마무리됐다.
 “자식.”
 그 한마디로 병사는 씩, 웃음을 떠올렸던 것이다.
 
 푸른 하늘, 은빛 구름이 흘렀다.
 여기저기에 둘러앉아 중식을 먹는 속에 친구들도 한자리에 모여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라 해야 식기에 담긴 빵 한 덩어리와 수프, 별것 아닌 피클이었지만 노역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이상의 별미가 없었다.
 병사에게 매질을 당하던 남자도 함께였다. 침울한 표정으로 식기를 밀어 두고 있었다.
 “고맙네. 자네들 덕분에 살았어. 자칫하면 감옥에 끌려 갈 뻔했는데. 깔린 사람이 무사해서 더 다행이고.”
 “······!”
 “고의가 아니었어. 정말 힘에 부쳤었네. 다칸 따위를 위해 일하고 싶지 않기도 하지만.”
 그러나 묵묵히 식사에만 열중할 뿐 친구들은 대답이 없었다.
 중년 남자는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한데 자네들은 정말 열심히 하는 것 같더군. 왜인가? 친다칸 성향은 아닐 거고 아군을 막기 위해 쌓는 성벽인데?”
 키르온이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모두가 그런 마음이니까 성벽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몇몇 배신자들이 있긴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같은 생각인 이상 결국 우리들 것이 될 테니까요.”
 “자네······?”
 멈칫, 남자의 얼굴에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제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군?”
 키르온.
 분명 여간한 소년이 아닌 것 같았다.
 열여덟 살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의 특출한 체격에 큰 힘, 강한 설득력을 가진.
 어째서 이런 그를 엉망이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목표와 진로
 
 
 
 
 
 
 
 
 
 
 하지만 세상이란 곳은 묘하다.
 모든 사람이 훌륭하다 해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모든 사람이 옳다 해도 부정하는 사람 역시 있기 마련이었다.
 키르온에게는 하필 그런 사람이 부친인 사이먼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일을 마친 키르온이 성안의 가게로 돌아온 것은 해 질 무렵이었다.
 “햐, 이거 아주, 코가 썩는구먼!”
 어린 나이임에도 뭔가를 해 보겠노라고 노역장에 나가 일하는 아들. 일반의 경우라면 누구라도 대견스럽게 생각할 일이었다.
 하지만 사이먼은 키르온을 보자 인상부터 썼다.
 “하루가 다 가도록 얼씬 않는다 했더니만 또 말라는 짓을 했던 거로군! 당장 뒤꼍으로 가서 몸부터 씻고 와! 속이 뒤집힐 정도니!”
 공사장에서 일을 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키르온도 이런 모습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았다.
 “땀 냄새라면 아버지도 만만치 않으신 걸요 뭐. 집에 가서 씻죠.”
 인사를 하고는 곧 연장들을 한쪽으로 치우는 등 가게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일과 중 하나로서 몸이 불편한 사이먼을 도와 가게를 닫을 준비를 하는 것이다.
 좋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사이먼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지 말라 했는데 왜 자꾸 고집을 피우는 거야! 열여덟 살에 노역장에 나가는 게 자랑이라도 되는 줄 알아?”
 “아닌 줄 알지만 목표가 있으니까요.”
 “대꾸하지 마라! 그조차 제대로 된 것이라야 말이지! 하고 많은 일 중에 군인이라니, 내 꼴이 되고 싶은 거냐?”
 “멋지신데요 뭐.”
 “허허······.”
 사이먼은 결국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키르온은 좋은 마음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결코 유쾌한 기분이 아닌 것이었다.
 사실 한쪽 다리를 잃은 몸에 아내까지 집을 나간 홀아비를 멋지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을지.
 그의 몸이 이렇게 된 것은 칠 년 전의 일이었다.
 원인은 훨씬 더 일찍 시작되었던 것이고.
 원래 그는 가르미슈의 동쪽 조이스 마을의 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남자였다.
 내 땅을 가지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형편이 옹색한.
 그러나 어릴 때부터 특출하다 할 만큼 좋은 체격과 힘을 지니고 있었고, 패기 있는 많은 소년들이 그렇듯이 그 역시 병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성공한 군인이 되어 부와 명예를 얻어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꿈을 좇은 그가 가르미슈의 군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열여섯 살 때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제법’이었다 했듯 군관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이 년 만에 실력을 인정받아 더 윗길인 사관학교로 가게 되었으며 장교 교육까지 받았으니까.
 졸업한 후에는 가르미슈의 팔사단에 배치, 스물한 살에 일장一長(소대장)이 되었으며, 스물일곱 살에 숙장熟長(중대장)이 되기까지 했다.
 저 얄미운 아내를 만나 첫 아들을 얻은 것도 이때였고.
 하지만 이 시기에 군인이 되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그의 운은 여기까지였다.
 그대로였다면 지금쯤은 군장軍長(대대장)을 넘어 꿈을 이루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키르온이 여덟 살이 되던 해로, 남부를 함락시킨 다칸이 침공을 개시했던 것.
 이에 데이빗 왕은 전 군에 집결령을 내렸고, 그도 부하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말할 수 없을 만치 참혹했다.
 펠란트에서 시작된 첫 전투 때부터 사이먼은 다칸군과 맞섰으나 연전연패, 싸울 때마다 수만 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남기며 끝없이 밀렸다.
 로젠베어를 잃고, 오웰을 잃고, 그리고 피츠버그의 전투에서 불행을 맞았다. 비 오듯 퍼부어지던 투석投石에 깔려 한쪽 다리를 잃게 되었던 것이다.
 전쟁 중에 전역을 했던 것.
 말할 필요도 없이 이후의 형편은 엉망이었다.
 전쟁이 지속되는 속에 부상당한 군인에게 주어질 게 무엇이 있겠는가.
 원래대로라면 훈장을 받아야 할 일이었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무수한 병사들이 죽어 나가는 마당에 부상자를 챙길 수 있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모아 뒀던 돈은 치료비로 모두 나갔고,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양식까지 떨어져 버렸다.
 그나마 패전이었다. 그로 인해 상황은 더 악화되었고, 견디다 못한 아내는 돈을 벌어 오겠노라 집을 나갔다.
 키르온이 열 살이 되던 해였다.
 최악의 상황이 이어졌던 것으로 키르온은 열 살 때부터 사이먼과 둘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도 사이먼은 여전히 부상이 다 낫지 않고 있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집을 나간 아내가 가끔씩 보내오는 돈으로 생활했을 정도였고, 검공이 된 것은 아내가 집을 나간 지 이 년이나 지난 후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나마 이 일이라도 일찍 하게 된 것은 총리였던 테일런이 플로베로나를 배신해 그를 따랐던 성주가 함께 항복함으로 적이 밀려오지 않아 다른 곳보다 좀 더 빨리 안정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이래저래 맺힌 게 많았던 것.
 그렇게 따지자면 키르온도 사실 무척 속을 썩였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어릴 때부터 주위 아이들과 싸움이 잦아 툭하면 코가 깨어지거나 눈자위가 터진 아이들의 부모들이 쫓아와 항의하곤 했다.
 까닭은 주위 아이들의 놀림에 있었다.
 그 나이의 세상의 모든 아들들에게 있어 아버지는 최고의 영웅이지만, 외다리 아들이라는 놀림을 받았고, 주정꾼, 어머니까지 도망갔다는 놀림을 받게 되었던 것.
 그럴 때마다 키르온은 절대 녀석들을 용서하지 않았으므로 여간 골치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엉망’ 혹은, ‘말썽 많은’이라는 표현이 따라다녔던 것인데, 다행히 기본 학교에 입학한 후부터는 조금 나아졌다.
 전쟁 당시는 학교까지 문을 닫았으므로 열두 살이 되어서야 입학했고, 수업 시간을 늘려 사 년 만에 졸업을 시켰는데, 그 무렵에는 아이들의 대장급이 되어 있었다. 철이 들어가는 것인지 과묵한 성격이 되어 갔고.
 그제야 간신히 안정감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사이먼 역시 조금씩 돈을 모아 마침내 가게를 차렸다.
 한데 녀석이 졸업하면서부터 몇몇 친구들과 작당,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말썽을 부리려 하고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사이먼은 결국 음성을 낮춰 대화를 청했다.
 “됐으니까 이리 좀 와서 앉아 봐라. 우리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하자꾸나.”
 가게를 치우던 것을 멈추고 키르온은 부친의 앞에 의자를 당겨 놓고 앉았다.
 이런 그를 사이먼은 더 은근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물론 네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너도 맺힌 게 많겠지. 전보다는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집안 형편도 어렵고, 아비가 이렇다 보니 어떻게든 성공해 보겠다는. 하지만 이런 시기에 고집을 부리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거다. 알다시피 전쟁으로 나라는 주권을 잃었고, 여전히 도처에서 반군들과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이런 판국에 군인이 되려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정신 나간 일이라 볼 수밖에 없는 거다.”
 바로 그러했다.
 상급 학교의 진학 문제를 놓고 벌어진 말썽으로써 그가 군관학교에 입학하겠다는 뜻을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먼으로서는 당연히 펄쩍 뛸 수밖에 없다.
 자신조차 전쟁터에서 불구가 된 마당에 하나뿐인 아들이 군인이 되겠다하니.
 계속 은근히 말소리를 줄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절대 그것만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 의술이나 건축학 같은 것을 배우는 게 어떨까 싶다. 군인이 되느니보다는 백배 나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키르온은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럴 형편도 아니잖아요. 반드시 훌륭한 군인이 될 테니까 진로만큼은 저에게 맡겨 주셨으면 해요.”
 사이먼은 씁쓸히 쓴 웃음 지었다.
 전날 군인이 되려 했을 때 우려했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자신이 키르온과 같은 이야기를 했었다.
 “어림없는 이야기지. 다 고사한다 치더라도 머리가 있으면 한번 생각해 봐라. 플로베로나는 다칸의 속국이 된 상태다. 모든 행정이 다칸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고, 군인들조차 다칸에 충성하는 세상이지. 더 쉽게 말해, 군인이 되면 너는 나라를 구하고자 싸우는 아버지의 동료들, 플로베로나의 진짜 군인들과 싸워야 한다는 이야기다. 누가 봐도 바른 일이 아닌 거지. 시민들에게조차 적처럼 되어 있는데 어떻게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냐?”
 그대로였다.
 말 그대로 현재의 대륙은 다칸의 세상이다.
 모든 권력은 다칸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고, 왕국군은 그들에 충성하는 꼴이 되어 있었다.
 훌륭한 군인이 있을 수 없는 시대로서 저항군이 오히려 플로베로나의 진정한 군인이었다.
 “해서 나는 더욱 네가 군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다. 명예를 잃은 군인이란 그야말로 뒷골목의 삼류나 다름없는 존재니까.”
 사이먼은 거듭 고개를 저었다.
 “학비 문제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마침 좋은 일이 있었으니. 오전에 한 부자가 가보인 칼을 망가뜨려서 왔더구나. 수선해 준 대가로 십 골드를 받았다. 학비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군관학교만 제외한다면 어느 학과를 선택하든 말리지 않으마.”
 키르온은 멈칫하는 기분이 되었다.
 “칼 하나를 수선하는 데 십 골드를 내더란 말씀인가요?”
 “그만큼 훌륭한 칼이었지. 다마스커스 소드를 망가뜨려 왔던 것이니까. 전부터 생각한 건데, 연금술을 배워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네 이름이 붙은 최고의 갑옷이나 보검을 만드는 거지. 나를 닮았다면 분명히 풀 플레이트 아머나 드래곤 슬레이어를 제작하고도 남을 테니까. 사이먼의 가게를 크게 키우는 거다.”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키르온은 역시 고개를 저었다.
 “좋은 말씀이시긴 하지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요. 전 역시 에이미즈의 무관이 되고 싶으니까요.”
 에이미즈.
 “허허!”
 사이먼은 결국 다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먹히지 않는군! 그만큼 말했으면 알아들을 만할 텐데도!”
 잔뜩 쌍심지를 돋우었다.
 “대체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수백 번을 한 이야기인데! 더욱이 군관학교라 해도 그렇지, 하필이면 왜 만 리도 넘게 떨어진 에이미즈야! 내가 속이 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거냐!”
 그래도 키르온은 고개를 저었다.
 “졸업해 봐야 여기서는 지방 무관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역시 수도에서 복무하는 게 낫겠죠. 최소라 해도 거기서는 수도 방위대에 편성될 거고, 왕실 경호대에 들어갈 수도 있을 테니까요.”
 “꿈 한번 야무지군!”
 사이먼은 더욱 눈을 부라렸다.
 “에이미즈 같은 도시 학교에서 너 같은 촌뜨기를 기다려 주기나 한다던? 거기 사관학교는 보통 학교가 아니란 말이다! 날고뛰는 녀석들이 모두 입학하려 하는 곳이고, 귀족들의 아들들까지 설치는 곳인데!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만큼이나 어려운 곳인 거야!”
 키르온의 눈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순간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힘의 핵심을 가르쳐 주셨잖아요. 그것이면 어떻게든 될 것 같으니까. 킬이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셔 놓고, 의사나 장인에는 정말 어울리지 않죠.”
 “녀석이······?”
 철렁! 사이먼의 얼굴에 순간 당황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만치 키르온의 말이 보통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힘의 핵심.
 이것은 ‘소오마’, 또는 ‘마나’라 불리는 강력한 정신의 힘을 키우는 비법으로 결코 아무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막을 말하자면 먼저 군관학교의 구조부터 알아야 했는데, 이 시대 대륙의 군관학교는 둘로 구분되어 있었다.
 하나는 군인이 되고자 하는 소년들이 처음으로 들어가는 일반 군관학교였고, 또 하나는 장교를 육성하는 사관학교였다. 졸업 후 일반의 병사가 되는 것과 장교가 되는 차이였다.
 그런 만큼 교육의 과정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군관학교에서는 일반 병사들이 배우는 전투 기술과 방어술 등을 가르치지만 사관학교에서는 차원이 더 높은 전술학戰術學을 가르쳤다. 무예조차 일반을 넘어서는 훨씬 강력한 기술을 가르쳤다.
 일반의 병사들이 방패 막기 기술을 배운다면 장교들은 막기는 물론, 열 배나 강력한 방패 공격을 배웠고, 소드 기술조차 장교들은 일반보다 훨씬 큰 파괴력을 가진 롱 소드 공격법 등 중병기의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그것도 약과, 부하들을 이끌어 나갈 장교들과 전사들을 육성하는 곳인 만큼, 이런 외적인 전투술 외에도 더 강력한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야기 나온 ‘힘의 핵심’이라는 것으로서, 소오마를 키우고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진력을 키워 바람같이 달릴 수 있게 하는 헤이스트라거나 일반에 비해 몇 배나 강하게 힘을 증폭시키는 파워 인챈트 등을 일으키는 비법이었다.
 소질과 능력에 따라 달라지지만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파워 스킬까지 일으킬 수 있는 기술.
 하늘을 날고 빔을 퍼붓는 등의 이적異蹟을 일으키는 술법자들에 준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사관생도라 명시했듯 이런 기술들은 결코 아무에게나 전해 주지 않았다.
 특출한 재능과 실력, 투철한 군인 정신이 인정되는 소년들만 차출, 시험을 거친 후에야 사관생도로 하여 가르치곤 했던 것이다.
 까닭은 기술의 유출에 있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병사들에게 모두 이런 기술을 가르치면 더 강력한 군대를 얻지 않겠는가 싶은 의혹도 들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재능이 없는 경우라면 일반 병사의 기술도 다 배우기 어려웠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기술이 유출되어 퍼져 나가는 날이면 사회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사관학교에서는 재능에 앞서 투철한 군인정신이 있는 가를 더 중요시했고, 가족에게도 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은 후에야 비술을 가르쳤다.
 어길 때는 무서운 처벌을 받았다.
 가르친 사람은 물론 무심코 배운 사람조차도 끌려 가 쌓은 힘을 파괴당하는 등 죽기까지 감옥살이를 해야 할 정도였다.
 한데 그것을 키르온이 배웠다는 것이다.
 사이먼이 기술을 유출했다는 뜻이 되는 것!
 키르온에게 남다른 힘이 있다는 것이다.
 “말조심하라고 했잖아!”
 당연히 사이먼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탄로 나면 큰 벌을 받게 될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가르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키르온은 이것을 철도 들기 전인 일곱 살 때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우습지도 않을 일이었지만 사이먼이 그를 귀여워해 벌어진 어이없는 사고이기도 했다.
 이야기 나왔듯 그가 군관이 된 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숙장의 계급이었지만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부하들을 거느린 그는 어린 키르온에게 있어 영웅이었고.
 지금도 그런 면모가 보이지만 자상한 아버지였던 그는 집에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었다.
 그럴 때마다 키르온은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이며 그의 옆에서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아버지가 관심을 자극하는 기술을 쓸라치면 그것에 대해 재빨리 묻곤 했다.
 그럴 때마다 사이먼은 웃으며 거기에 대해 설명해 줬다. 코흘리개인데 무슨 상관일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일곱 살의 아이 같으면 말해 줘 봐야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뿐더러 곧 잊어버리게 마련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인가 사이먼은 수련 도중 소오마를 실은 ‘토네이도 대거’라는 스킬을 뿜어낸 적이 있었다.
 그날도 키르온은 부친이 수련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던 터인데 대단한 힘을 가진 스킬을 보자 바로 환성을 토하며 그 기술에 대해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이런 아들이 귀여워 사이먼은 별생각 없이 소오마를 키우는 법과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 줬던 것이다.
 복잡한 내용일 뿐만 아니라 기억하기도 어려운 것이라 말해 줘야 무슨 상관이 있겠나 싶었던 것!
 하지만 그것은 사이먼의 실수였다.
 무엇인가에 꽂히게 된 아이들의 집중력과 기억력을 너무 얕봤을뿐더러 아주 드물게는 코흘리개 중에도 특출한 암기력을 지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그런들 일곱 살.
 묻기는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키르온이 그것을 수련한다거나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더러 칼을 휘두르는 시늉은 하곤 했지만 그냥 부친이 수련하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좋아하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묻기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한데 직후 전쟁이 났고, 사이먼이 부상당한 후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전부터 묻고 보아 왔던 기억들을 되살린 키르온이 그것을 수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이먼으로서도 한참이나 후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비로소 사이먼은 그가 매우 특출한 기억력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큰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어 있었다.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열한 살이 되던 해였지만 어떻게 제대로 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맹랑한 녀석은 아홉 살 때부터 수련하기 시작했고, 사소하다 해도 이미 소오마의 힘이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킬 수 없었다.
 깨트리자면 힘을 사용하는 기맥을 폐해야 했는데 그랬다가는 자칫하면 불구, 심하면 목숨까지 잃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수련조차 잘못했다가는 부작용을 일으켜 죽기까지 하는 힘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사이먼은 극비로 하게끔 이르고 부작용이 생길 것을 대비해 바르게 힘을 쌓는 법을 지도해 주게 되었던 것이다.
 혹시라도 남들이 알세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서 다행히 지금까지 잘 지켜져 온 셈이다.
 사이먼은 정말 화가 나 눈을 부라렸다.
 “내 실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었어! 이름도 원래 길드원이었다! 비상 대기로 군영에 있을 때 태어났던 관계로 부하에게 그렇게 전해 달라 했는데, 머리 나쁜 네 엄마가 잘못 알아듣고 등록했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이름이 되어 버린 것이지! 백정도 아니고 킬 원이 뭐야, 도대체!”
 키르온, 정상적인 발음으로는 킬 원, 한 번에 죽인다, 확실히 괴상한 이름을 가진 게 틀림없다.
 사이먼은 이마에 핏줄까지 불거져 나온 모습으로 눈을 부라리며 계속 으름장을 놨다.
 “어쨌건 난 죽어도 널 군관학교에 보낼 생각이 없으니 새겨둬라! 멋대로 에이미즈에 가거나 하는 날이면 다시는 보지 않을 거니까! 부자지간이고 뭐고 끝날 테니 똑똑히 기억해!”
 굉장한 엄포였다.
 “예······.”
 태도가 워낙 완고했으므로 키르온 역시 코가 쑥 빠졌다.
 군인이었던 만큼 성격이 강한 사이먼이었으므로 자칫 고집을 부리다가는 정말 부자지간의 연이 끊기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한데 이때였다.
 두두두!
 별안간 가게 밖에서 요란한 말굽 소리가 울리더니 실로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저놈인가 본데, 당장 체포해!”
 “엇?”
 느닷없이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우르르 가게 안으로 달려 들어오며 사이먼을 끌어내려 했던 것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뜻밖의 일이라 사이먼도 놀랐고, 키르온 역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이야!”
 퍽!
 “앗!”
 와당탕-!
 하지만 병사들은 사이먼을 끌어 낼 수 없었다.
 달려 들어온 병사 둘이 사이먼의 양팔을 낀다 싶은 순간 키르온이 차단했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몸을 날려 강하게 어깨로 들이받아 버렸던 것이다.
 일종의 몸통 공격.
 병사들이 온 것이 뜻밖이라면 키르온이 반격을 가한 것 역시 뜻밖의 일! 부딪힌 병사는 크게 밀려 나동그라지게 되었고, 집기가 뒤집히는 등 가게 안 역시 엉망이 되었다.
 “녀석들이 감히 반항을?”
 “둘 다 체포해!”
 순간 병사들의 태도도 더욱 거칠어졌다.
 창을 앞세우는 등 퍼렇게 칼을 뽑아 들었다.
 예삿일이 아니었지만 키르온으로서도 멋대로 사이먼을 체포해 가게 할 수는 없었다.
 병사들이 칼을 뽑음과 함께, 바로 화덕을 뒤적일 때 사용하는 쇠막대를 주워들며 강하게 눈을 번쩍이기 시작했다.
 “뭐라는 녀석들이야! 왜들 이래? 사람을 체포하려면 영장을 보이거나 까닭부터 말해야 하는 거다!”
 분명히 그랬다.
 뭔가 문제가 있으니 왔을 것이지만 사람을 체포하려면 최소한 거기에 대한 이유를 대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부친인 만큼 어쩔 수 없이 사이먼의 앞에서는 어려질 수밖에 없는 키르온이었지만 붉은빛이 감도는 머리에 대단히 강해 보이는 면모를 가진 소년, 치켜진 독수리의 눈에 빛이 번뜩이기 시작하자 병사들은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표정을 보였다.
 도합 여섯 명, 칼까지 뽑아 들고 있음에도 큰 위압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백팔십칠의 키까지 만만치 않다.
 비로소 병사 중 하나가 인상을 구기며 말문을 열었다.
 “정말 엉망인 놈들이로군! 죄를 짓고도 무슨 잘못을 했는지 모른다는 말인가? 너희는 프린츠 남작 각하의 소드를 멋대로 망가뜨렸다! 그로 인해 체포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남작의 칼?”
 키르온은 자신도 모르게 멈칫하는 심정이 되었다. 사이먼과 관련성이 있는 것 같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릴 하는 거야? 아버지가 칼을 망가뜨리다니? 남작의 칼이라니 들어 보지도 못한 일인데?”
 하지만 병사들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눈을 번쩍이며 계속 두 사람을 압박했다.
 “시침을 떼는군! 분명히 너희들이 한 짓이라 듣고 왔다! 같이 잡혀 가기 싫으면 순순히 비키는 게 좋아!”
 분명히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키르온으로서는 역시 몸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이먼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있을 수는 없다.
 죄가 없어도 잡혀 가면 큰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다. 다칸에 정복당한 대륙이었으므로 남작이란 자신들이 말하는 배신자였고, 그들이 곧 법이었다.
 키르온은 계속 눈을 번뜩였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만 어쨌건 이대로는 안 돼! 아버지께 죄가 없다고 믿어지는 만큼, 이유가 있으면 합당하게 영장을 보이고 좋게 함께 가는 거야! 가서 따져 보면 죄가 있는지 없는지 알게 될 테니까.”
 그러나 병사들은 영장을 가지고 오지 않은 듯했다.
 “녀석이 끝까지 큰소리를! 모두 체포해!”
 “하아압!”
 눈에 쌍심지를 돋우는가 싶더니 그대로 두 사람을 덮쳐 왔다.
 “하!”
 콰차차창!
 “왓!”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역시 키르온을 제압하지 못했다.
 소드를 휘두르며 덮쳐 오는 순간 키르온의 몸은 그들에 비해 몇 배나 더 빨리 번개같이 좌우로 번뜩였고, 찰나 어떻게 손을 쓴 것인지 들고 있던 쇠막대가 시커먼 그림자를 일으키는가 싶더니 즉시 병사들의 칼이 튕겨 날아갔다.
 “물러서!”
 쾅-!
 “악!”
 뿐만 아니라 벼락같이 발차기까지 날았다. 회오리 같은 휘어 차기가 병사 하나의 목덜미를 걷어차 쓰러뜨리는가 싶더니 쉭, 다시 쇠막대가 소나기 같은 섬광을 일으켰다.
 차창!
 “앗······!”
 또 두 병사의 소드가 튀어나갔다.
 좌충우돌, 여섯 명이나 되는 그들이 키르온에게 밀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녀석이?”
 “반역이다! 사람들을 불러!”
 삑! 삐이익~!
 그들은 급히 품속에서 비상 호각을 꺼내 불기 시작했고, 바깥에서 십여 명의 병사들이 또 들이닥쳤다.
 그럼에도 키르온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영장을 가져오면 가겠다 했지? 시민을 상대로 칼까지 뽑아 들고! 목이 부러지고 싶으면 들어와 봐!”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눈을 번쩍이며 들고 있던 쇠막대를 앞세우고 마주칠 자세를 취한 것이었다.
 점차 문제가 커지고 있었다.
 잘잘못을 떠나서라도 병사들에게 맞선 이상 쉽게 끝날 수 없다. 그대로 반역죄가 될 수도 있었다.
 “됐으니 그만둬. 그냥 따라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버지!”
 이런 키르온을 막은 것은 사이먼이었다.
 문제가 커질 조짐이 보이자 그가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놓도록 해.”
 쇠막대를 뺏어 던져 버리며 병사들에게 말했다.
 “반발한 것은 잘못이지만 뭔가 잘못된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병기를 다루는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남작 각하의 소드라는 것은 모르는 일이니 말입니다. 남작 각하를 뵈었으면 합니다.”
 지금은 비록 한쪽 다리를 잃고 검공이 된 그이지만 적어도 가르미슈군의 숙장이었던 그.
 병사들은 또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자들이 정말······?”
 “진짜 무얼 하는 놈들이야?”
 정면으로 맞선 키르온의 모습도 그렇고, 적잖은 압박감이 느껴지는 속에 머뭇하는 태도를 보이는가 싶더니 곧 안면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영장을 가지고 오지 않은 만큼 순순히 가겠다면 항거한 일은 없던 것으로 하지! 나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빨간 머리, 네 녀석도 나오도록 해!”
 “가 보기로 하자.”
 굳어진 표정이 되긴 했지만 죄가 없는 만큼, 사이먼은 곧 병사들을 따라 목발을 짚고 절룩이며 키르온과 함께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밖에는 더욱 뜻밖의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동이 일어난 만큼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웅성대는 앞에 스무 명가량의 병사들을 더 대동한 청색 벤디드 메일(귀족들이 입는 연미복) 차림을 한 푸른 눈을 가진 오십 대 초반의 남자 하나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타고 서 있는 게 보였다.
 병사들이 말한 프린츠인가 하는 남작인 것 같았다.
 한데 정작 엉뚱한 것은 그의 옆에 선 자였다. 서른 살 남짓한 호사스러운 차림을 한 녀석 하나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엉뚱하게도 그는 다마스커스 소드를 수리하러 왔던 자였다.
 사이먼의 얼굴에 흠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도 문제였지만 프린츠라는 말을 탄 남자가 더 크게 그를 긴장하게 했던 것이다.
 “저자가 분명한가?”
 “예, 예! 틀림없습니다, 각하.”
 하지만 사이먼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벤디드 메일의 남자는 두 사람이 나오자 곧 싸늘하게 칼을 수리하러 왔던 녀석에게 뭔가를 물었고, 녀석은 거듭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먼은 점차 더 일이 지저분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죽기보다 경멸하고 있던 어떤 문제와 부딪치게 되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짜증스러웠지만 사이먼은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허리를 꼿꼿이 펴고 벤디드 메일에게로 다가가 일단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잘못 본 것 아닌지 모르겠군요. 혹시 일군 사령부의 루이스 대장님 아니십니까.”
 루이스 일군사령부의 대장.
 “······?”
 벤디드 메일의 남자의 얼굴에 순간 멈칫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들어 본 지 꽤 오래된 호칭.
 지금은 아니었지만 지난 한때 자신은 분명 그런 직책을 가진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곧 다시 싸늘한 원래의 표정을 되찾으며 질문했다.
 “나를 알고 있나?”
 마찬가지로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지만 사이먼은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에 붙여 보이며 경의를 표시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이군 사령부, 팔사단의 사이먼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십 년 전, 팔십이 회 대항 무투대회 때 에어번과 부딪쳤던 사람입니다. 좋은 경기였다고 술잔을 주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에어번?”
 멈칫, 벤디드 메일의 남자의 얼굴에 다시 놀라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나 잠시, 기억이 떠올랐다는 듯 푸른 눈을 번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우승 후 이군 사령부가 꽤 으스댄 적이 있었지. 귀관이 그였나?”
 사이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시는군요.”
 벤디드 메일의 남자는 싸늘한 눈으로 사이먼의 목발을 살피며 말했다.
 “일반의 남자 같으면 기억 못 했겠지. 그 후의 소식도 들었어. 싸움에 나가 대단한 용맹을 떨쳤다고. 피츠버그에서 투석에 깔릴 뻔한 부하를 구하려다가 부상당했다지?”
 뜻밖의 이야기였다.
 사이먼은 지그시 이를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떤 이야기가 나오든 지난 일은 상처일 수밖에 없었다.
 싸늘한 표정이긴 했지만 벤디드 메일의 남자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죽은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거로군. 검공으로 지내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습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한 기분으로 사이먼은 최대한 짧게 대답했다. 말조차 섞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검 수리를 맡기러 왔던 녀석을 쳐다본 후 물었다.
 “한데 어쩐 일이십니까. 제가 칼을 망가뜨렸다는 것 같던데, 혹시 어떤 문제가 생긴 것입니까?”
 벤디드 메일의 남자의 눈에 의혹이 떠올랐다.
 “내가 물을 것을 오히려 귀관이 묻는군. 이 칼 기억하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소드를 뽑아 보였다.
 오전에 수리했던 다마스커스 소드였다.
 사이먼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수리한 칼이군요. 하지만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병사들은 제가 칼을 손상시켰다 했는데 저는 오히려 손상된 것을 복구시켰기 때문입니다.”
 벤디드 메일의 남자의 눈에 재차 싸늘한 빛이 떠올랐다.
 “자세히 말해 보게.”
 “어찌 된 일인지는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옆에 있는 친구가 칼을 수리하러 왔더군요. 삼 센티미터가량이나 먹혀 있었습니다. 딱해 보여서 수리해 줬던 것입니다. 비용으로 십 골드를 주더군요.”
 금화가 든 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가난한 그가 이런 돈을 소지하고 다닐 리 없으니 누가 봐도 어찌 된 일인지 알 법했다.
 사이먼을 아는 눈치인 만큼, 벤디드 메일의 남자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귀관만 한 남자가 칼을 망쳤을 리 없다는 느낌이 드는군. 녀석은 내 시종장의 아들일세. 날이 무뎌진 것 같아 연마해 오라고 했더니만 엉뚱한 일이 생겼던 것 같아. 삼 센티미터나 깨졌었단 말이지?”
 싸늘해 보이는 게 특징인 푸른 눈을 녀석에게로 돌렸다.
 “진실을 말해 봐! 이 친구는 아는 사람이야. 한때 가르미슈 최고의 무관이었던 친구지. 어설피 칼을 다룰 남자가 아니니까 말이야.”
 “각하!”
 사이먼과 벤디드 메일의 남자가 아는 내색을 할 때부터 그는 낯빛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와들와들, 사시나무처럼 떨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죽······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연마하러 나오던 길에 친구들을 만난 게 화근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칼이라고 자랑했더니 쇠파이프를 잘라 보라고······! 다마스커스는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리쳤던 것인데 뜻밖에 칼날이 깨어져 버려서 그만······!”
 소드로 쇠파이프를.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사실 대륙에 존재하는 최고의 공법으로 만들어진 다마스커스 소드는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강했다.
 도끼에 버금가는 강도에 면도칼을 능가하는 예리함을 지닌 소드로서 하기에 따라 분명히 쇠파이프를 잘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숙련된 실력과 섬광 같은 속도의 파워를 가진 검사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강한 공법으로 만들어진 칼이라 해도 소드술에 문외한인 자가 쇠파이프를 자를 수는 없었다.
 결국 그는 칼을 자랑하느라 쇠파이프를 쳤고, 칼이 망가지자 당황해서 사이먼을 찾았던 것이다.
 남작인 만큼 연마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이지만 그에게로 갔다가는 일이 탄로 날 것이었고, 이로 인해 사이먼에게 맡긴 후 어영부영 누명을 씌우려고 했다는 것.
 한데 뜻밖에 저 초라해 보이는 남자가 주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황당하군.”
 벤디드 메일의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을 끌고 가!”
 “가소로운 녀석아! 실수를 했으면 했다고 할 것이지 왜 남에게 누명을 씌워! 넌 이제 죽은 거야!”
 “어이쿠! 한 번만 용서를!”
 끌고 가는 병사들과 버둥대는 녀석의 사이에 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하지만 녀석이야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벤디드 메일의 남자는 이리저리 칼을 살펴보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무늬가 바뀌었기에 화가 나 달려왔던 것이지만 어쨌건 그렇다면 솜씨가 좋군. 삼 센티미터나 깨어졌던 소드를 이 정도로 재생해 내긴 어려운 건데 말이야.”
 소드를 꽂으며 다시 사이먼을 향했다.
 “한데 왜 사령부로 찾아오지 않았나?”
 “예······?”
 “종전 후 왜 사령부를 찾지 않았냐는 거야. 상관이었던 리플리도 있고 여전히 많은 동료들이 복무하고 있는데.”
 사이먼은 침을 뱉고 싶어졌다.
 “이런 꼴로 무슨.”
 벤디드 메일의 남자는 재차 잘린 사이먼의 다리를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우리가 항복한 것을 원망하고 있는 것인가?”
 사이먼은 이를 악물었다.
 “그럴······리가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텐데.”
 벤디드 메일의 남자는 싸늘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이상의 항전은 무모했어. 다칸은 강했고 결국 패했으니까. 계속했으면 가르미슈도 잿더미로 변했겠지.”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일이 있어 며칠간 자리를 비우게 될 테니까 일주일 후 나에게로 와. 사령부에서 다시 근무하는 거야.”
 사이먼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좀! 보시다시피 몸이 성치 않습니다. 제가 할 일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전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으며······!”
 하지만 벤디드 메일의 남자는 계속 싸늘히 말을 잘랐다.
 “실없는 소리 치우는 거야. 사무관에게 다리가 무슨 상관있어. 시키는 대로 해.”
 싸늘히 시선을 키르온에게로 돌렸다.
 “아들인가?”
 철렁하는 심정으로 사이먼은 주저주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를 돕고 있습니다.”
 “좋은 체격이로군. 눈빛도 좋고. 하지만 철이 없는 것 같아. 아버지를 위하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쳐도 겁도 없이 병사들에게 대항할 정도니. 그게 반역 행위라는 것은 알고 있나?”
 사이먼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어려서 그렇습니다! 엉겁결에 한 행동으로······! 각하께서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벤디드 메일의 남자는 키르온을 곁눈질하며 계속 뜻밖이라 할 이야기를 했다.
 “귀관을 봐서 그렇게 하지. 하지만 그냥은 안 돼. 겁도 없이 벌써부터 병사들과 싸우려 할 정도라면 장차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르니까. 엄격한 규율을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것이니 군관학교로 보내도록 해.”
 “옛······?”
 철렁, 사이먼은 또 한 번 가슴이 주저앉았다.
 전혀 상상치도 못 한 말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벤디드 메일의 남자는 더 이야기할 것 없다는 듯 휙, 말고삐를 돌렸다.
 “확인할 테니까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해! 일주일 후 사령부로 오는 걸 잊지 말고.”
 “아······! 각하! 잠깐만!”
 사이먼은 순간 마음이 급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 문제로 입씨름을 벌인 그였는데 이렇게 되면 무조건 키르온을 군관학교에 입학시켜야 하는 것이다.
 “철수해.”
 하지만 벤디드 메일의 남자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말에 박차를 가해 성의 중심부 쪽으로 사라졌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었다.
 
 “최악이로군!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삼류 자식이 말이지!”
 당연히 사이먼의 심정이 엉망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은 수습되었지만 가게로 들어온 그는 화를 식히지 못하고 와당탕! 사방으로 집기를 뒤집어엎었을 정도였다.
 프린츠라는 성을 몰랐던 만큼 전쟁 전의 벤디드 메일 남자는 귀족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귀족이 된 것은 항복과 함께 다칸에 충성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나라에 충성을 바치다 불구가 된 남자와 배신한 대가로 귀족이 된 남자.
 사이먼의 증오심이 얼마만한 것인지는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을 만했다.
 들끓는 분노를 주체 못 해 그는 소나기같이 땀을 흘리며 한참 동안이나 이를 악문 채 선반을 짚고 서 있었다.
 키르온 역시 어두운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사이먼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어떤 남자인가요?”
 사이먼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물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야! 일군 사령부의 대장이었던 놈이지! 싸움이 시작된 후 우린 전선으로 출발했었어! 하지만 녀석은 남았지. 후방 지원과 성을 사수하는 임무로. 한데 전황이 불리해지자 싸워 보지도 않고 성주와 함께 항복했던 거야! 쓰레기보다 못한 테일런의 심복이었던 거지!”
 제일 먼저 등을 돌렸던 배신자 총리.
 “아주 형편없는 남자 같지는 않던데요. 성주가 항복을 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요? 위에서부터 무너지는 데야.”
 쾅! 사이먼은 또 연장통을 한쪽으로 집어 던졌다.
 “성주 놈의 목을 자르고라도 항전했어야지! 하루에도 수만 명의 부하들이 죽어 나가던 판국에! 그야말로 우리의 명예를 휴지 쪽으로 만들어 버린 거야! 개자식들이 말이지!”
 벼락같이 번쩍이는 눈빛.
 그의 모습은 여전히 전장 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과 같았다. 적이 보이면 당장 목을 자를 것 같은.
 하지만 키르온에게는 새삼스럽지 않았다. 내내 봐 오던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싸우다 부상당하신 줄 알았는데 부하를 구하려다가. 뜻밖이었어요.”
 사이먼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느닷없이 닥친 일이라 무의식중에 했지만······ 아니었다면 놈들의 몇 개 대대 정도는 더 부숴 놓을 수 있었을 텐데! 최소한 저런 놈들을 그냥 두지는 않았을 거다!”
 빗발처럼 투석이 퍼부어지는 속에 부하를 구하려고 몸을 던지는 장교.
 멋진 광경이 그려졌다.
 “아버지를 존경해요.”
 키르온은 잠시 호흡을 늦춘 후 눈을 번뜩이며 다시 말을 꺼냈다.
 “어쨌건 싫으시다면 제가 나서 볼게요. 그의 목을 잘라 오죠. 그것으로 또 볼 일도 없을 것이고요.”
 대담한 소리였다. 지나가는 말이라 해도 열여덟 살의 소년에게서 나오기 어려운.
 “정신 나간 녀석! 아무리 엉망이 되었다지만 가르미슈 사령부가 무슨 허수아비인 줄 알아?”
 “항상 사령부에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제발 헛소리 좀 치워!”
 분노하고 있던 사이먼조차 어이없어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침묵.
 여전히 화가 안 풀린 눈치긴 했지만 그래도 다행히, 그것으로 안정을 찾기 시작한 듯 사이먼은 선반을 짚고 한참이나 골똘히 뭔가 생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침묵을 깨고 다시 입을 연 것은 오 분이 훨씬 지난 후였다. 한데 나온 말이 매우 뜻밖의 것이었다.
 “어처구니없지만. 키르온, 너 정말 군인이 되고 싶은 거냐?”
 키르온은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늘 대해 왔던 부친이지만 좀처럼 대할 수 없던 진중한 어투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해 본 후 마찬가지로 신중하게 대답했다.
 “적성에 맞을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녜요. 이런 기분으로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사이먼의 눈이 번쩍였다.
 “에이미즈로 가라! 떠날 채비를 해 줄 테니.”
 “옛······?”
 키르온은 가슴이 철렁했다. 역시 뜻밖의 말.
 하지만 사이먼은 확실히 결심을 굳힌 듯 계속 눈을 번쩍이며 이야기했다.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사실 너는 소질이 있다! 아무렴 사이먼의 아들이니까.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역시 시대가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된 군인은 저항군인 셈인데, 정규군이 되면 너는 그들과 싸워야 하니.”
 반군이 아군인 세상. 사실 애매한 시대였다.
 목숨을 걸고 다칸과 싸운 사이먼이고 보면 허락할 수 없는 일인 것도 분명하고.
 “더욱이 전쟁의 불씨 역시 그대로 남아 있다. 아무리 다칸이 세상을 장악했다고 해도 시민들이 반발하는 한 반드시 싸움은 또 일어나게 마련이니까. 해서 반대한 것이다. 그렇다고 네게 반군이 되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분명히 그들은 다칸에 다시 도전할 것이지만 필경 또 패하게 될 테니까.”
 키르온의 눈에 얼핏 기이한 빛이 떠올랐다.
 “그렇게 다칸이 강한가요?”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놈들이다. 지난 당시만 해도 일 대 삼의 비율이라는 말이 돌았을 정도니까. 놈들 하나를 제거하는 데 둘이나 셋이 희생되었다는 뜻이지. 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술법적인 힘이다. 병사들 외에도 녀석들은 강력한 네크로맨서들을 앞세우고 있는데, 전력이 상상을 넘어설뿐더러 발록까지 조종하고 있다. 그 괴물을 처리할 수 없는 이상 어떤 경우라도 패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발록.
 키르온의 눈이 더욱 강하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소문은 들었지만 사이먼에게서 듣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무서운 괴물인가요?”
 사이먼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가공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다. 삼십 미터에 달하는 체장에 채찍같이 불의 기둥을 휘두른다. 스치고 지나가면 모든 게 타 버릴 정도고. 보다 끔찍한 것은 헬 파이어를 뿜어낸다는 것이다. 피츠버그에서 끝나 직접 보지 못했다만 에이미즈 전투까지 갔던 친구들에 의하면 워리어들까지 질렸을 정도라 한다. 지옥의 브레스라 불리는 것으로 백여 미터가 불의 회오리 속에 휘말려 버렸다고 들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당할 수 없는 괴물이다.”
 워리어!
 키르온은 서서히 몸이 달아올랐다.
 “부풀려진 소문이 아닌가 보군요. 그렇다면 반군들은 무모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해 봐야 이기지도 못할 것인데 말이죠.”
 씰룩, 사이먼은 얼굴에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소득은 거두고 있다. 항거해 줌으로써 시민들이 용기를 얻고 있고, 다칸과 배신자 놈들도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고 있으니까. 승산 역시 전혀 없지는 않다. 악마가 각성하기를 기다리는 거다. 신 격인 놈이 언제까지 네크로맨서들의 술법에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고, 금제에서 풀려나면 분노한 녀석에 의해 놈들이 오히려 당하게 될 테니까.”
 “각성할 때를 기다리는 것인가요?”
 “그런 셈이다! 또 하나의 희망은 가이아를 부를 사람이 나타나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고. 놈에 맞설 힘을 가진 존재는 가이아밖에 없으니까.”
 가이아.
 키르온의 눈에 얼핏, 다시 전광 같은 빛이 스쳐 갔다.
 “가이아는 더 이상 대륙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소문 같던데요? 엘리언 님도 불러내는 데 실패하셨잖아요. 존재하고 있다면 나타났을 텐데. 그나마 엘리언 님까지 돌아가셨고요.”
 “그래도 희망은 가지고 있어야지. 멸종한 게 아니라면 있을 것이고, 언제라도 엘리언 님을 능가하는 위대한 마법사가 나타나면 소환할 수 있을 테니까! 어쨌건 이런 이유들로 인해 반대했던 것이다. 좋은 의지로 너는 군인이 되겠다는 것이겠지만 현실이 이렇게 엉망이니.”
 분명히 반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나마도 이젠 안 될 것 같다. 녀석이 너를 군관학교로 보내라 했으니까. 사실은 눈독을 들인 거다. 나에게까지 사령부로 오라 한 것을 보면 지나가는 말도 아닌 것 같고. 분명히 일주일 후 사람을 보내올 것 같다.”
 루이스 프린츠.
 “그럴 바에야 에이미즈로 가는 게 나은 것이지! 여기서는 배신자 놈들의 부하가 되는 길뿐이지만 에이미즈에는 왕궁이 있으니까! 경호대는 어렵다 쳐도, 왕궁 경비대에만 들어가 줘도 아군들과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니.”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 되어 주면 너에게도 썩 좋은 일이긴 하다. 실수긴 하지만 너는 금지된 힘을 가졌으니까. 사관생도들이 배우는 것인 만큼 숨기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키르온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어쩌시려고요?”
 “나는 상관없다. 녀석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따르는 척하다가 눈치껏 그만두면 될 테니까.”
 힘줘 말했다.
 “대신 너도 아비와 약속을 해 줘야겠다! 왕궁 경비대가 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어떤 경우라도 저항군들과 싸우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문제가 발생할 때는 즉각 놈들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것도.”
 키르온은 심란해졌다.
 “약속하지 않아도 그래야 할 일이지만 말이죠. 저는 아버지가 걱정이에요. 제가 에이미즈로 가면 아버지도 함께 가실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려 한 것인데 상황이 달라져 버렸으니까요.”
 사이먼은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바보 같은 소릴 하는군! 그럼 네 어미는 어떻게 하고?”
 어머니.
 키르온은 더욱 심란해졌다.
 “어차피 칠 년이 넘도록 오지 않으신 분인데요 뭐. 앞으로도 그럴 것 같고.”
 사이먼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건 네 생각이지. 앤은 분명히 곧 돌아온다. 무척 자존심이 강한 여자지. 얼굴을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인데, 보나 마나 신분을 감춘 채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을 하고 있을 거다. 네가 상급 학교로 진학해 공부를 마칠 때까지 돈을 벌 결심 같다만 군관학교로 간 것을 알면 화를 내면서 돌아오겠지. 그러고 보니 좋은 일도 있군.”
 “사실이라면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키르온은 심호흡과 함께 말을 받았다.
 “그럼 아버지께서도 약속해 주세요. 눈치껏 일을 마무리하신 후 어머니를 만나면 에이미즈로 오시겠다고. 저 역시 최선을 다할 테니까요.”
 사이먼은 아들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렇게 하마. 고향이라지만 상처뿐인 곳이고 옆에 있어야 나도 마음이 놓일 테니까.”
 복잡하게 진로가 결정된 것이었다.

댓글(5)

내꿈은노인    
노역자 한명의 5개월치 임금이 엄청난 금액이라기엔. . .
2018.07.06 02:01
n5***********    
솔직히 왕정 국가에서 그것도 귀족출신도 아니고 평민들의 애국이 너무 심하게 표현된듯, 이시대에 평민들이야,유독 평민들은 영주가 바뀌던 왕이 바뀌던 나라가 바뀌던 변할게 없는 아! 영주가 바뀌면 착추의 강도가 달라질수도 있으니 영주는 변화가 있다고 해야하나?
2018.07.18 08:03
천개의가면    
인간의 감정이란 게 합리적인 것이 아님에 윗 분이 이야기한 평민들의 외세에 대한 감정은 납득할 수도 있다고 본다. 허나, 처음에 등장한 발록이라는 신적 존재와 그에 따른 이후의 전개에는 괴리감이 너무 크다. 중걸이라는 작가의 필력과 그동안의 그의 성과는 인정하지만 이번 글이 가진 한계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크다. 작품의 배경을 초월적이고 거대한 무엇으로 삼았다면 이후의 전개도 그에 비견되개 삼는게 아무랴도 적절하지 않을까? 주인공의 성장을 너무도현실적으로 설정해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작가의 새로운 시도는 아무래도 실패한 것 같다. 중걸이라는 이름에 너무 큰 기대를 한 것인가. 자신의 스타일과 정체성에 맞는 변화를 시도하기를. 큰 기대를 가진 작가이기에 힘써 당부해 본다. 중걸이라는 작가는 그만한 역량이 있다. 이 글은 다른 작가가 썼다면 제법 괜찮은 글일지는 몰라도 전혀 중걸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다. 좀 더 힘을 내보길 부탁한다.
2018.07.21 06:16
김영한    
살아 있는 살아있는 (AM)
2019.02.17 16:49
김영한    
흥미롭긴 한데, 뭔가 설정집만 주구장창 읽고있는 느낌.. ㅠ 주인공은 누구지..
2019.02.17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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