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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조 1

2018.06.29 조회 324 추천 1


 대왕조 1권
 프롤로그
 
 
 대왕조(大王祖)!
 단 십 인(十人)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중원 십팔만 리를 움켜쥐고 있는 하늘이었다.
 그러나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
 패배의 칼날은 그들의 심장에 천오백 년 동안 박혀 있었다.
 그 혈검(血劍)의 주인이 있으니
 하늘도 두려워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대왕맥(大王脈)!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중원의 원주인(原主人).
 드디어 잠을 깨고 중원정복을 위한 포효를 터뜨렸으니······.
 냉벽린!
 운명은 그에게 역천(逆天)과 패륜(悖倫)으로 점철된 출생의 비밀을 주었고,
 하늘은 그에게 제왕(帝王)의 신분을 주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아버지!
 기껏 패배자에게 승리하려고 발버둥치신 겁니까?
 패배만이 서린 세월을 살아온 아버지의 한(恨)을 받아
 그가 승부의 길에 검(劍)을 드리웠다.
 
 
 서장
 
 
 (1)
 
 
 골수에 각인된 이름이 있다.
 이 이름을 잊을 수 있다면 그는 당금 무림의 절대자가 되리라. 중원을 내리누르는 새로운 하늘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 이름을 뼈에 새기며 되씹었다.
 대왕조(大王朝)!
 그들은 모두 열 개의 세력으로 나누어져 정사마불도(正邪魔佛道)의 중원무림을 통치해 나아갔다. 그 열 개의 세력을 다른 이름으로 십절군단(十節軍團)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무림 절대의 하늘이다.
 십절군단으로 이루어진 대왕조는 각기 무림에 하나의 영역을 가지고 무림의 하늘로 군림하고 있었다.
 십절군단의 제일가(第一家)는 천추무가(千秋武家)라고 불린다.
 가주(家主)인 천추만승제(千秋萬乘帝) 동방대군(東方大軍)은 당금 무림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자 십절대군단장(十節大軍團長)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너희들에게 만들 수 있는 삶이란 없다. 단지 한 길! 본 제(帝)에게 경배하라. 그것이 아니라면 혀를 깨물라.”
 그의 한마디는 곧 중원의 법이자 목숨이 열 개인 자라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명령(絶代命令)이었다.
 십절군단의 제이가(第二家)는 살인마벌(殺人魔伐)이라 불린다.
 목이 열 개인가. 그렇다고 해도 웃을 수 없는 이유가 있었으니 이들의 표적이 된다면 죽어서도 묘에 묻히지 못하리라.
 사람들은 말한다. 그들의 검에 매일 다른 피를 적시지 않으면 녹슬게 될 것이라고. 지옥에서 유배온 살인귀들의 집합체인 살인마벌의 벌주는 살인혈황(殺人血皇) 착시간(着時間). 그의 유일한 낙은 죽음이다.
 그가 지금까지 살인의 전리품으로 모은 수급(首級)의 숫자는 정확하게 일천칠백육십칠 개(一千七百六十七個)였다. 그는 숨쉬는 살인기계(殺人機械)였다.
 십절군단의 제삼가(第三家)는 대상가(大商家)라고 불린다.
 가주는 대상주(大商主) 여의대상천(如意大商天) 단천리(斷千里). 그는 중원의 상권 중 팔 할을 쥐고 있었다. 심지어 황실까지도 그에게 손을 내밀 정도로 대상가는 엄청난 금력(金力)을 가지고 있었다.
 재신이란 이름도 성이 차지 않을 그는 천만 명을 굶겨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힘이 있었다.
 대왕조의 재정은 바로 이 대상단이 쥐고 있었다.
 십절군단의 제사가(第四家)는 구룡해벌(九龍海伐)이라고 불린다.
 예전에 배를 탄다는 사람들은 출항전 해신(海神)에게 무사와 많은 수확을 기원하는 제(祭)를 올렸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들이 엎드려 부복하는 새로운 하늘이 있으니, 그가 바로 구룡해벌군주(九龍海伐軍主)인 천해대군주(天海大軍主) 국검령(菊劍令)이었다. 그의 호통 한마디에 바다는 물론이고, 모든 수로(水路)와 중원의 오대호(五大湖)는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대륙(大陸)은 끝이 있으나 바다는 끝이 없다. 그래서 망망대해(茫茫大海)라 하지 않던가.
 그 망망대해의 주인이 바로 구룡해벌이었다.
 십절군단의 제오가(第五家)는 녹림천(綠林天)이라고 불린다.
 녹림천주(綠林天主)인 녹황마제(綠皇魔帝) 언룡무(堰龍武)는 바로 백만 녹림의 하늘이자 절대적인 지배자(支配者)였다.
 예전부터 무림에서 녹림이 차지하는 위치란 더럽고 추잡한 이름들밖에는 없었다. 그들의 구성원이 도적, 산적, 사기꾼들 정도였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향한 손가락질은 더 이상 없다. 십절군단의 다섯번째 서열(序列)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십절군단의 제육가(弟六家)는 태양궁(太陽宮)이다.
 궁주는 태양화군(太陽火君) 능혈비(陵血飛)였다. 불의 광인이라 불리우는 그는 화기, 화포 등의 제조기술에서 신을 능가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태산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거짓말 같은 소문들이 떠돌곤 했다. 그러나 그의 비격진천뢰는 그런 소문들을 사그리 불태워 버리고 거짓을 진실로 만들어 버렸다.
 십절군단의 제칠가(第七家)는 빙해(氷海)였다.
 빙해주(氷海主)인 빙해무왕(氷海武王) 백리향(百里香)은 절대신비(絶代神秘)의 인물이었다.
 억겁(億劫)의 설지(雪地)요, 천형(天刑)의 땅(地)인 북해(北海)를 지배하는 곳이 바로 빙해였다. 그들은 거의 무림에 알려진 사실이 없어 마치 환설(幻雪) 같은 신비세력이었다.
 십절군단의 제팔가(第八家)는 백마성(百魔城)이라고 부른다.
 십절군단 중 가장 신비(神秘)로운 백마성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단지 알려진 것은 백마성주가 천마(天魔) 벽한(碧寒)이라는 것과 백마성이라는 이름의 유래(由來) 정도가 고작이었다.
 백마성에는 백 명의 절대자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신에 각기 백 가지 마공(魔功)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그들은 마의 하늘이기도 했다. 그들의 백 가지 마공은 중원무림에 전래하는 마공 중 가장 위대(偉大)하고 강맹(强猛)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마 벽한 역시 백마성만큼이나 신비롭기 그지없는 고수(高手)였다. 그는 이백 년 전에 홀연히 무림에 나타나서 백마성을 창건(創建)하였다. 그러니 그의 나이를 대충 따져도 족히 이백 살은 넘었다는 말이 된다. 이백 년 전에 홀연히 무림에 나타나서 절대강자 구십구 명을 굴복시키고는 그들을 이끌고 백마성으로 들어갔다.
 백마성의 모든 것은 마치 신기루(蜃氣樓)처럼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십절군단의 제구가(第九家)는 천불동(千佛洞)이라 부른다.
 천불동의 동주(洞主)는 천불대승좌(千佛大乘座) 천불신령불(千佛神靈佛)이었는데 그의 호 천불대승좌는 달마조사의 유언에도 나온다.
 - 천불대승좌는 모든 불문무학(佛門武學)의 시작이며, 끝이다. 소림이 이를 깨닫지 못하면 차후 태산북두의 자리를 잃으리라. 비록 후에 천불대승좌가 소림에서 배출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천불대승좌가 현신(現身)하면, 소림은 경배하라. -
 천불대승좌는 천불동 동주의 아호(雅號)이기도 했지만 불문의 영원한 신비이자 최고의 무공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십절군단의 마지막 제십가(第十家)는 태상도궁(太上道宮)이었다.
 태상도궁의 궁주는 태상진인(太上眞人)이었다. 태상도궁은 도가(道家)의 삼대조종(三大祖宗)인 무당(武當), 곤륜(崑崙), 전진도가(全眞道家)를 차례로 무너트리고 도가의 천외천(天外天)으로 자리잡았다.
 태상도궁의 원동력은 바로 태상법천(太上法天)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천무진인(天武眞人) 장삼봉(張三峰) 조사께서 그토록 찾던 도가의 진정한 도력(道力)이었다.
 
 
 (2)
 
 
 대왕조를 이루고 있는 십절군단의 왕조십맥(王朝十脈)은 무려 이백 년 동안이나 무림을 장악(掌握)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백 년 동안 서로간에 단 한 번의 충돌(衝突)도 없었으며 나아가 서로의 힘을 합하여 무림을 통치하고 있었다.
 왕조십맥은 혼맥(婚脈)으로 피를 나누었고, 왕조십맥은 서로의 후손을 각 왕조의 제자로 받아들여 사문을 같이했다.
 하지만 우열을 가리기 힘든 열 개의 세력이 서로 한 번도 충돌 없이 어떻게 중원 십팔만 리를 이끌어 올 수 있었을까?
 세상사가 왕왕 그러하듯이 시종일관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란, 대개는 시작의 뜻이 같아도 언젠가는 이해관계가 틀리게 되어 서로 반목(反目)을 하게 되는 것이 무림의 생리였다.
 하지만 왕조십맥은 달랐고, 왕조십맥은 항시 협력하고 도왔다.
 이것이야말로 대왕조, 십절군단을 이루는 왕조십맥의 신비였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이기도 했다. 강한 힘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비좁은 하늘에서 서로 숨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장 속에 갖힌 독수리 꼴이 되는 것이다.
 무림인들은 가끔 그 불가사의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곤 했다. 혼맥과 사문으로만 그들이 이토록 결속한다는 것에는 어딘가 분명 어폐(語弊)가 있었다.
 그렇다면 중원무림이 모르는 어떤 다른 비밀이 왕조십맥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어딘가에 필시 비밀이, 신비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단지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었다.
 십절군단은 과거에 이런 불가사의한 협력의 힘을 세상에 알렸다.
 백오십 년 전 십절군단이 완전히 중원에 뿌리를 내리고 대왕조를 형성해 갈 무렵에 대왕조에 심각한 도전이 발생했다.
 새외변황(塞外邊黃)의 오대세력이 합쳐져 대세력으로 변한 북서십칠회(北西十七會)가 중원을 넘본 것이었다.
 십절군단과 마찬가지로 변황의 역사상(歷史上) 이렇게 거대한 세력이 형성된 것도 처음이었다.
 천축, 서역, 신강, 대막, 묘강이 중심이 된 북서십칠회의 세력은 감히 중원을 넘보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변황세력과는 질적으로 다른 점이 그들에게 있었다.
 오랜 준비와 철저한 훈련으로 수많은 정병을 기른 그들은 물밀 듯이 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실수였다.
 중원의 실제적인 지배자였던 대왕조는 조소를 머금고 무섭게 분노했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지만 그들은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감히 중원에 대한 같잖은 야망을 가졌으니 그들의 간이 얼마나 큰 것인가까지 의문이 갔다.
 그 어느 때보다 대왕조는 강력하게 대응을 했다.
 십절군단은 각 왕조십맥에서 각기 백 명의 고수들을 착출했다.
 그렇게 천 명의 무사가 모였고, 대왕조는 그들을 십절대군단(十絶大軍團)이라 칭했다. 특히 천추무가의 일대가주(一代家主)였던 대천룡무제(大天龍武帝) 동방천(東方天)을 십절대군단장(十絶大軍團長)이 되어 십절대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왕조는 처음으로 힘을 결성하게 된 것이었다.
 십절군단의 최고 고수로 구성된 십절대군단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단 한 달만에 북서십칠회를 모조리 몰살시켜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바로 시작이었다.
 십절대군단이란 역사상 최강의 힘을 결성한 대왕조는 아예 천하를 정벌(征伐)하기 시작했다.
 천축의 파파문교, 홍의교(紅衣敎), 황의교(黃衣敎), 아수마궁(阿修魔宮)을 비롯하여 칠십이 개 문파가 모조리 괴멸당했다.
 서역은 라마들의 영원한 성역(聖域) 포달랍궁(布達拉宮)을 비롯하여 삼십팔 개 라마사찰이 불에 탔다.
 신강(新疆)의 신이라 불렸던 신강대왕(新疆大王) 마가랍(麻加拉)은 새외(塞外)에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신강의 모든 기반을 잃어야만 했다.
 심지어, 십절대군단은 그 여세를 조금도 멈추지 않고, 장백파(長伯波)를 걸쳐 동영(東瀛)의 전국인자단(全局忍者團)까지 없애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대막(大漠)의 수라궁(修羅宮), 막북(漠北) 금타성(金陀城)을 없애고 마지막으로 묘강(苗疆)의 만독동(萬毒洞)을 정벌했다.
 대왕조의 천하대정벌(天下大征伐)!
 후에 십절대군단의 천하정벌을 사가들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세외변방과 중원은 십 년에 걸친 천하정벌로 인하여 삼백 년 동안 극복(克復)의 노력을 기울어야 겨우 회복될 수 있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그때 천하는 숨을 죽이고 십절대군단장 대천룡무제 동방천의 일갈(一喝)을 들어야 했다.
 “묘강 만독동의 정벌을 끝으로 십절대군단은 천하대정벌을 멈춘다. 그러나 천하는 본좌의 말을 들어라!”
 그것은 천하를 향한 포고(布告)이지, 천하를 자신의 발밑에 둔 대왕조의 사자후(獅子吼)이기도 했다.
 “우리 십절대군단, 즉 대왕조는 왕조십맥 외에는 어떤 세력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하는 대왕조만으로 유지할 수 없는 것이기에 십절대군단이 정벌한 문파들의 모체는 남겨두었다. 그러나 만약 복수 따위를 꿈꾼다든지 조공(朝貢)을 바치지 아니할 시에는 멸문의 겁을 당하게 될 것이다. 천하무림은 대왕조에 경배하라. 그렇지 않을 시에는 십절대군단이 너희들을 방문할 것이다.”
 그의 포호성(咆號聲)에 모든 천하는 숨을 죽여야 했다.
 무림 역사상 이처럼 강하고 무서운 집단을 그 누구도 듣거나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천하가 대왕조의 십절대군단에게 무릎을 꿇은 것을 보았기에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그저 공포에 떨 뿐이었다.
 
 
 (3)
 
 
 영웅문! 영웅문(英雄門)도 십절대군단에 의해 무너졌다.
 이 몇 마디의 말에 중원무림은 백오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절망감과 안타까움에 빠졌다.
 중원무림이 영웅문에 은근히 기대해 왔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만사휴의(萬事休矣)로 돌아간 것이다.
 과거 대왕조가 나오기 전에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는 대천보(大天堡)였다. 하지만 그런 대천보도 대왕조의 파천적(破天的)인 위력에 굴복(屈伏)해야 했다. 그래서 과거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의 삼대손(三代孫) 냉천상이 대왕조를 무너뜨리기 위해 힘을 모아 왔다.
 그곳이 바로 영웅문이었다.
 영웅문주(英雄門主)였던 십기천작(十技天爵) 냉천상(冷天翔)을 중심으로 대왕조에 굴복했던 수천 명의 무림인들이 과거의 영광을 찾으려고 은밀히 모여 회동(會同)을 했다.
 하지만 대왕조는 도전을 거부했다.
 꿈을 채 펼쳐보기도 전에 십절군단에 의해서 영웅문은 사라져야 했다. 그리고 십기천작은 어느 밀처(密處)에 갇힌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당세(當世)의 영광(榮光) 대왕조와 그에 물락한 한 가문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제1장 사이(邪異)한 미감(美感)이여
 
 
 (1)
 
 
 십기천작 냉천상, 뉘라서 이 이름을 모를까.
 이 세상에는 여인들이 한숨 짓는 이름 두 개가 있었다. 사랑에 겨워 쳐다보는 서러운 달빛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바로 십기천작 냉천상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는 또한 중원 십팔만 리에서 가장 고고(孤高)하고 냉오(冷傲)한 인물이었다.
 중원 십팔만 리에서 대왕조를 형성하는 십절군단이 아니고서는 어디 감히 이름을 날리기를 바라며 명성 얻기를 원하랴. 그것은 곧 죽으려고 뛰어드는 불나방꼴이었으니 목숨이 아깝지 않고서야 미친 짓이었다.
 땅에서는 천추무가에, 바다에서는 구룡해벌에 모두가 대왕조의 십절군단에 거역하지 않으려 할 때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 한 사나이가 어깨에 검을 걸치고 중원무림을 주유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그를 미친놈이라 치부해 버렸다. 그러나 그러한 손가락질은 소인배들의 살아남기 위한 몸짓일 뿐이었다.
 중원무림인치고 대왕조, 그들에게 짓밟히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으니 모두들 품고 있는 칼들이 있었으나 결코 미친놈처럼 대범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냉천상, 그는 광오했지만 역시 미친놈이었다.
 천추무가가 중원을 평정하기 전 중원의 법이자 자존심이었던 냉세가 대천보가 있었다.
 환우무군(環宇武君) 냉하경(冷夏景)!
 중원태대성(中原太大星) 냉한성(冷寒成)!
 역대로 대천보의 위세를 하늘 높이 드리우게 했던 가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미친놈의 조부와 부친이었다. 이들 또한 예외는 될 수 없었고 천추무가에 모든 가업을 잃고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냉천상, 그는 원한을 갚고 옛 대천보의 존엄을 되찾기 위해 대왕조에 처절한 원한을 갖고 있는 고수들을 끌어모았다. 발화점을 얻은 폭탄 같은 인물들은 차츰 그 수를 늘려갔으며 드디어 냉천상의 기치 아래 영웅문이란 광오한 단체가 생겨난 것이다. 손가락질하던 모든 이들이 손가락을 접었으며 그 손을 가슴에 얹고 하나같이 기원하기 시작했다. 무모한 줄은 알았지만 그것은 잡지 않을 수 없는 한 줄기 빛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십절군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두가 대왕조의 하늘아래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던 시기였으나 승부를 즐겼기에 명사(名士)들을 찾았고 술과 시를 검만큼 사랑했다. 아름답기에 여난이 끊이지를 않았지만 이 시대에 진정한 풍류를 아는 그는 많은 여인들의 마음 속에 정을 심어주었다. 그러나 영웅은 한 마리 새와 같은 법, 절대 한 둥지에서 오래 있어 주지 않았다.
 그랬기에 여인들은 그의 끝없는 정렬을 그리워하며 흐느껴야 했다. 어느덧 냉천상 앞에 십기천작이라는 위대한 이름이 붙었다.
 무(武), 금(琴), 기( ), 서(書), 예(藝), 화(畵), 다(茶), 법(法), 그리고 사랑(愛). 이 중 하나라도 그만큼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더욱 그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이 소문은 발도 없이 만 리를 갔으며, 중원을 경악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었다.
 살인마벌주 살인혈황 착시간이 십기천작 냉천상에 대한 청부살인을 실패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십절군단에 소외된 사람들이 더욱더 그의 휘하에 모이게 되었고 이렇게 또 하나의 군단이 만들어질 무렵, 천추만승제 동방대군은 냉천상에게 명령을 내렸다.
 - 천추무가에 들어와서 본 제에게 경배하고 휘하에 들라. 본 제는 십기천작 냉천상을 차기 천추무가의 후계자로 지목한다.
 그의 한마디는 언제나 중원을 뒤흔들었지만 이번만큼 강하지는 못했다. 어느 누가 천추무가의 후계자가 되고 싶지 않겠는가. 무(武)라는 한 글자라도 배운 사람이라면 심장이라도 꺼내어 주고 이루고 싶은 숙원이리라.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미친놈이었다. 동방대군의 말이 그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는 하늘에 대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핫! 내 결코 그에 못지않거늘 감히 나를 후계자로 지목하다니!
 그는 더욱 영웅문의 힘을 길러 갔다. 결코 꺾이지 않는 불굴의 사나이가 되리라. 중원대천보 냉세가의 위명을 되찾으리라.
 동방대군의 명령에 대한 그의 대답이 있고 나서 사람들은 간담을 졸여야 했다. 그의 분노가 어떤 피바람을 몰고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몰래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막혀 있던 체증이 밀려 내려갔기 때문이다. 가뭄에 갈라진 논둑에 들이 붓는 한 동이의 물이었지만 살아가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그 동안 질식할 것만 같았던 그들에게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즐거움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동방대군은 광소했고, 또한 그의 웃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냉한성은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방종의 대가는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그는 무릎을 꿇었다. 삼만의 수하는 피바다속에 잠겼고, 그는 명예를 잃었고 자존심을 짓밟혔다.
 대벌암천(大伐暗天)!
 하북 대벌에서의 영웅문의 패배를 아는 사람들은 그 사건을 대벌암천이라 부르며 다시 한 번 대왕조의 공포에 진저리를 쳐야 했다.
 황산(黃山)!
 천추무가는 이 삼십육 봉에 달하는 거대한 영산 위에 세워져 있다. 광대한 삼십육 봉을 가득 메우고 우뚝 세워져 있는 수천 개의 전각들은 마치 원을 그리듯 둥글게 삼십육 봉을 포진하고 있었다.
 천추무가가 대왕조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것은 동방대군이 위대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곳에 그를 보필하는 가공할 십이세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 십이세가는 대왕조 속의 또 하나의 대왕조라고 불리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십이세가 중 이 인(二人)만 힘을 합하면 동방대군이라 할지라도 일만 초를 싸워야 한다는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들이었다. 또한 그들 개인은 각기 중원무림에 전설처럼 내려오던 기연(奇緣) 이십이 개 중 각기 하나씩을 얻은 인물들이었다.
 
 
 (2)
 
 
 사신봉(四神峯)!
 황산에서도 가장 험한 네 개의 봉우리였고 기이하게도 멀리서 보면 하나의 봉우리처럼 보여 사신봉이라고 불리운다.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에는 수만 평에 달하는 초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초지 한편으로는 조그마한 인공호수가 있고 물레방아가 돌고 있었다. 호수 옆에는 버드나무가 잎을 늘어뜨리고 이름 모를 새들이 한껏 지저귀고 있었다. 그 옆에는 하나의 소축이 있었는데 소축 벽으로는 등나무가 벽전체를 똬리 틀 듯 휘감아 자라고 있어 그 모습이 꽤 고풍스러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넓은 초지는 하나의 커다란 분지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곳은 네 개의 봉우리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소축 안의 정실, 차라리 대청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 방안에서 무공을 연마하지 않는 이상 사람이 생활하는데 이렇게 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거인이라도 살고 있단 말인가.
 띵띠디딩! 따당 땅!
 그 대청만한 정실에서는 끊임없이 우아한 가락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실 안에서는 십여 명의 여인들이 일렬로 앉아 금과 비파, 퉁소 그리고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었다. 전면에는 눈부신 백옥의 서탁이 있는데 한 인물이 백옥서탁 위에 올려진 화선지 위에 난을 치고 있었다.
 어디 제사라도 지내고 온 모양이었다. 난을 그리고 있는 인물은 기이하게도 배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는 방갓을 쓰고 있었다. 미친 사람이 아니라면 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배옷을 입고 있는 것이야 제(祭)가 있었다면 그렇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방갓까지 쓰고 있는 것은 방안에 새똥이라도 떨어진다는 말인가.
 배옷의 사나이는 유려하고도 힘찬 화체로 난을 그리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의 손에 그려지는 난이라기보다 그의 손이 여인의 손보다 희고 투명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화폭에 그려지는 난은 유난히도 무거웠다. 그것은 난을 그리고 있는 배옷의 사나이가 지니고 있는 분위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딩딩따당!
 삘릴리리!
 여러 개의 악기들은 절묘한 화음을 연출하고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여인들의 시선은 모두 배옷의 사나이들을 향하고 있었고 그 눈빛 속에는 어떤 진한 아픔이 배여 있었다.
 ‘아아······ 저 분은 언제쯤 방갓을 벗게 되실까?’
 ‘아······ 냉영웅께서 한 번만이라도 웃어 주었으면······.’
 그렇다면 그는?
 그때였다. 악기들이 엮어내는 화음을 뚫고 방문 밖에서 청수한 음성이 들려왔다.
 “가주께서 드십니다.”
 그 음성이 끝남과 동시에 여인들의 탄주도 멈추었다.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여인들의 얼굴에는 은은한 두려움과 존경심이 일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배옷의 사나이는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그 자세 그대로일 것처럼 미동조차 없었다. 그의 손길과 그의 눈빛은 모두 난을 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방문이 열리고 앞서 들려온 음성이 말한 가주라는 인물이 들어섰다.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가 단지 방안에 발 하나를 들이민 것뿐이었다. 그 순간 방안의 모든 인물들은 갑자기 숨이 턱 막혀옴을 느꼈다. 패도적인 기운이 방안을 터뜨려 버릴 듯 가득 메웠다. 이윽고 그는 방안으로 몸을 드리웠다.
 말이 필요없이 악기를 연주하던 여인들의 얼굴에서 그의 정중한 면모가 어떠하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세월이 몇십 년쯤 지난 후에라도 이 여인들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강인한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대답할 것이다. 지금 방안으로 들어선 이 중년인이었다고.
 중년인은 허리에 한 자루 고검(孤劍)을 비껴 차고 있었고 몸에는 승천하는 묵룡(墨龍)이 수놓아진 금룡포를 걸치고 있었다.
 얼굴은 중동호목(重瞳虎目)의 호상(虎相)이었고 한편으로는 조각처럼 정교하고 섬세한 면모가 엿보였다. 강인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한 풍모를 지닌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젊고 발랄한 소년 영웅의 패기(覇氣)와 황혼의 역광을 받으며 지내온 노영웅의 노련함이 어우러진 완벽한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여인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날아갈 듯 절을 올렸다.
 “천추만승제 동방가주님을 배알하나이다.”
 “음······.”
 그는 그저 가벼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난을 치고 있는 배옷의 사나이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배옷의 사나이는 자신도 모르게 붓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난이 여지껏 가지고 있던 풍모는 일시에 무너져 버리고 화선지 위에 흔적처럼 잘못 그어진 먹선 하나가 싸늘히 자리했다.
 동방대군은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쯧······ 너는 요즘 들어서 더욱 침착함을 잃는 것 같구나.”
 뒤이어 화선지를 구기는 그의 방갓 밑으로 칼날같이 예리한 냉소가 터져나왔다.
 “흐흐······.”
 이때 여인들은 다시 연주를 하기 시작했고, 한 여인이 작은 술상을 가져다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동방대군은 술병을 들어 두 개의 잔에 술을 가득 따라 한 잔을 배옷의 사나이에게 내밀었다.
 “천상! 들어라.”
 배옷의 사나이, 그는 바로 십기천작 냉천상이었다.
 냉천상은 술잔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그들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 동방대군은 냉천상의 눈빛에서 그의 모든 것을 읽은 듯했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흘렀다.
 “너는 아직도 이곳에서 도망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구나?”
 “흐흐······ 이곳에서 도망쳐야 당신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아니오?”
 그들의 대화대로라면 냉천상은 이곳에 잡혀 있다는 말이 된다. 이만하다면 싸움에 임해서 죽자 사자 싸우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모두들 적에게 사로잡혀서 그처럼 호강하는 길을 택하지, 어떤 미친놈이 사서 죽을 짓을 하고 있겠는가.
 동방대군은 그의 대답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가볍게 두 번 손뼉을 쳤다.
 그러자 검은 운무가 천장으로부터 내려오더니 이내 사람으로 변하지 않는가.
 스르르!
 나타난 그 인물은 눈 외에는 드러난 곳이 없었다. 작은 쟁반을 들고 있는 손에도 검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이어 그는 들고 있는 쟁반을 서탁 위에 내려놓았다.
 “헝겊을 치워라.”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쟁반 위에 덮여져 있던 검은 천이 치워졌고 동시에 냉천상의 아미가 깊은 내천자를 그렸다.
 “아악!”
 “꺄악!”
 여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쟁반 위에는 여인의 수급이 놓여 있는 것이었다. 냉천상은 파랗게 탈색한 여인의 수급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으음······.”
 파작!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부서지며 그의 손에서 선혈이 흘러내렸다. 원통하게 두 눈을 부릅뜨고 죽어간 여인의 수급, 살아 있다면 꽤나 아름다웠을 얼굴이었다.
 냉천상은 그 수급의 임자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의 품에서 하늘거리던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몸은 어디에다 두었는지 목만으로 그 앞에 온 것이다. 당연히 잘려진 목에서는 인사 한마디 없었고 의레 짓고 있을 사랑스런 미소도 없었다. 단지 퀭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경악에 몸서리치는 냉천상을 응시하는 동방대군의 표정은 담담했다.
 “본좌의 조카딸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다. 알겠느냐?”
 설득력을 갖게 하기 위한 행동이었다고는 하나 어찌 용납될 일인가. 설마 그럴 리가라는 표정들이 방안의 모든 인물들의 얼굴에 쓰여졌으나 설마가 사람잡을 때도 있는 법. 그라면 서슴지 않았으리라. 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이라곤 자신이 저지른 죄까지 정당화시킬 만큼의 담담함뿐이었다.
 “너는 이곳에서 도망치지 못한다.”
 냉천상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는 아직 냉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동방대군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고 음성 역시 장강의 물결처럼 도도했다.
 “설사 본좌의 딸을 유혹해서 도망가려 했다 해도 발각되면 딸의 목을 자를 것이다.”
 “음······.”
 냉천상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곤 침음성뿐이었다.
 ‘이 지독한 자식! 자신의 조카딸의 목을 베다니!’
 설마 조카딸까지 죽이랴 생각했던 그는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말을 되씹어야 했다.
 “냉천상! 본좌가 너를 살려두고 이렇게 가둬둔 것은 네가 좋아서가 아니다.”
 냉천상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소. 다만 나는 당신의 속셈을 모르고 있을 뿐이오.”
 “본좌의 명을 받들어라. 그럼 너를 살려두고 있는 내 속셈을 말해 주겠다.”
 “흐흐······ 나더러 당신의 제자가 되라는 미친 짓 말이오?”
 동방대군의 짙은 검미가 꿈틀했다.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는 단숨에 태산이라도 깔아뭉갤 것 같은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네놈이나 본좌나 목적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악당이지. 네가 네 가문의 복수를 하는 첩경이 바로 본좌의 제자가 되는 길임을 모를 리는 없을 텐데?”
 “그것은 당신 생각일 뿐이지. 나를 이제 그만 풀어주시오. 내게는 당신에게 복수할 훌륭한 방법이 따로 있소.”
 “후후······ 그럴 순 없지.”
 동방대군이 고개를 가로젓자 냉천상의 방갓 밑에서 새파란 빛이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지독한 살기였다.
 ‘절대 복수의 비수를 버리지 않는군.’
 냉천상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그럼 지금 당장 나를 죽여라.”
 그러자 동방대군의 입가에 한 줄기 조소가 걸렸다.
 “흐흐······ 너는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어.”
 냉천상도 구차한 변명 따윈 하지 않았다. 그의 두려움이란 단지 목숨을 잃기 때문이라는 비굴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인하지 않겠소. 삼대에 걸친 원한을 갚지 못하고 죽으면 개죽음일 테니까.”
 “음······.”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본좌는 더 기다리겠다. 네놈이 지칠 때까지.”
 말을 마치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냉천상은 백옥탁자를 움켜쥐었다. 힘줄이 툭 불거졌으나 그에게 남아 있는 공력이라고는 한 줌도 없었다. 그저 이를 갈 뿐이었다.
 그 사이에 동방대군은 방을 나서고 있었다.
 “동방대군! 기다리시오. 당신 심장에 검이 꽂히는 날을.”
 그러자 방을 나서던 동방대군은 걸음을 멈추고 냉천상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보일락 말락한 희미한 웃음을 띄웠다.
 “네까짓 놈이 하늘을 보기가 부끄러워 방갓을 쓰고 있는 짓은 어울리지 않아. 본좌보다 더한 악당놈이 감히 영웅 흉내를 내고 있다니.”
 동방대군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슬쩍 손을 올렸다 내리고는 정실을 빠져나갔다. 다시 방문이 닫혔다. 그때였다. 냉천상이 쓰고 있던 방갓이 돌연 두 쪽으로 갈라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로 인해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
 “오오······.”
 연주가 또 한 번 멈췄다. 여인들의 표정은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듯 몽롱했다. 영웅이 어떻고, 악당이 어떻든 다 좋았다. 이런 얼굴이라면 지옥불이라도 견뎌내리라.
 바라보다가 그대로 눈이 터져 버릴 것 같은 황홀한 아름다움이었다. 그 얼굴의 주인이 남자라는 사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창백한 피부와 선렬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핏빛 입술, 육감적인 입술은 다소 얇았지만 좋았다.
 퇴폐적이고 병에 걸린 듯 창백한 아름다움을 던지는 얼굴은 사이한 미감을 던져주었다.
 정절을 생명으로 여기는 여인들이라면 저 얼굴을 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아!”
 일시에 방안에는 한숨소리가 가득했다. 무엇이 그리 허망한가.
 ‘저 분과 슬픔을 같이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내가 저 분을 이곳에서 도망치게 해드렸으면······.’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는 슬픔이다. 그녀들이 태어나서 부모님을 원망해 본 적이 딱 한 번뿐이라면 바로 이때였다. 백만번 윤회를 하지 않아도 좋으니, 내세에 개, 돼지로 환생해도 좋으니 그와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감수할 것이다.
 
 
 (3)
 
 
 하루를 접었으니 감상에 젖어 있어도 좋을 시간이다. 그래서인가. 냉천상은 어둠을 뒤집어쓴 채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생겨난 버릇이었다. 매일밤 술을 마시지 않고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게 된 것이다. 패배로 인한 괴로움이 그의 신경 한 올 한 올을 붙잡고 있으니 시체가 아니라면 잠을 잘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때마다 기댈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술잔뿐이었다. 추잡한 패배자의 그늘을 남에게 보일 수 없으니 밤이 좋았다.
 벽에 기대어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있는 그의 눈빛은 강렬했다. 여느 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가 마시는 술이 평소 마시던 소주가 아닌 독한 죽엽청으로 바뀐 것을 뺀다면 그의 눈빛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깔려 있는 무거운 그림자는 그 눈빛 하나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오늘 밤······ 꼭 성공해야 한다.’
 그는 무언가 꾸미고 있다. 또 하나 달라진 것이 있었으니 지금의 그는 흐트러진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언가 단단히 조여지고 당금질이 된 한 자루 예리한 검이었다.
 ‘오늘 밤 탈출하지 못하면 개 같은 경우지만 동방대군의 말대로 나는 그의 제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복수를 하려면 말이지.’
 어둠 속에 그의 눈빛이 강렬히 타올랐다. 산중의 왕인 대호(大虎)가 십 리 밖에서도 볼 수 있는 안광을 쏘아낸다지만 그의 앞이라면 오줌을 지릴 판이다.
 그는 어둠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흑지에 먹물로 그려진 그림이라면 알아볼 수 없겠지만.
 ‘후후······ 오늘 밤 친구들이 온다고 했지.’
 그는 술병을 든 손을 꺾었다. 입안 가득 넘치는 술이 그의 목줄기를 타고 음란하게 흘러내렸다. 독한 죽엽청이었는데도 그의 눈빛은 갈수록 또렷해지고 싸늘해져만 갔다.
 ‘다섯 친구가 온다고 했지. 믿을 만한. 흐흐흐······.’
 눈빛이 독사였다.
 ‘흐흐······ 동방대군, 내가 너보다 더한 악당이라고 했지. 물론 맞아. 이 악당이 어떻게 네게 복수하는지 두고 보라고.’
 동방대군을 떠올려서인지 그의 입가에 잔 경련이 일었다.
 ‘할아버님, 아버님, 그리고 나, 이렇게 삼대가 천추무가에 피를 토했다. 복수라면 마누라도 팔아먹을 것이다. 악당! 그래 난 악당이지.’
 그는 잔인하게 웃으며 또 한 번 손목을 꺾어 술을 들이부었다. 사이함이 극에 달하면 이처럼 아름다우리라. 암천에 떠 있는 보름달도 빛을 잃었다. 어떤 의미에서건 그의 미소는 살인적이다.
 ‘영웅 노릇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흐흐······ 네놈이 후광(後光)이라는 것을 생각이라도 해봤느냐?’
 그는 손에 든 술병을 내던지며 손을 뻗어 자신의 옆에 놓인 세 개의 술병 중 쓰러져 있지 않은 술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내 아들이 말이야. 가문을 위해서 복수를 할 때 아버지인 나 냉천상이 영웅이었다는 후광을 받게 될 거야. 그 후광은 내 아들에게 사람을 몰아주는 역할을 해줄 것이고. 흐흐······.’
 그는 복수를 위해 영웅인 척했단 말인가.
 ‘물론 아직 내겐 아들이 없어. 흐흐······ 그러나 곧 생기게 될 거야.’
 그의 목젖이 심하게 기복을 일으켰다. 그는 흥분이 되는지 술병을 아예 입속에 넣고 마셨기 때문이다.
 “크······ 속이 타는군.”
 그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동방대군, 흐흐······ 어디 있느냐? 네놈의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아야 돼. 그래야 제대로 된 탈출이거든.”
 취기가 올라서인가. 마치 미친 사람이 발광을 하는 듯한 광기어린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흐흐······ 역천(逆天)! 천기를 거스를 것이다. 복수를 위해, 꼭 한 번 주어진 기회를!’
 역천이라니. 그는 도대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꼭 제왕지재(帝王之才)를 태어나게 하리라. 꼭 중원무림을 대왕조에서 내 아들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흐흐흐······.’
 문득 그의 얼굴에 초조감이 어렸다. 탈출을 위해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던 그라면 약속시간이 늦어진 까닭일 것이다.
 ‘음! 어찌된 일인가? 삼경이 지났는데.’
 그의 얼굴에 초조감이 서리자 두려움도 같이 일어났다. 마지막 기회라는 무게는 그를 약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이번 일의 비중이 큰 탓일 것이다.
 ‘오늘 밤······ 오늘 밤 탈출하지 못하면······.’
 그는 미쳐 죽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으면 편할 일이지만 일은 그처럼 여의치 않았다. 이미 복수라는 끈에 단단히 옭아매져 있는 그였다. 혀를 깨무는 것처럼 간단했다면 벌써 동방대군의 손에 무릎꿇었던 그 순간에 했을 것이다.
 ‘오늘 밤, 꼭 오늘 밤 탈출해야 역천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오늘이 아니면 탈출은 의미가 없다.’
 갑자기 밀어닥치는 초조감을 그는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을 것 같아 다시 입속에 술병을 쑤셔넣었다.
 그를 이처럼 초조하게 만드는 단 한 번뿐이라는 역천의 기회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4)
 
 
 동방대군!
 그는 태사의 깊숙이 몸을 묻고 있었다. 웅장한 그의 얼굴은 상당히 심각해 있었다.
 “천하만승백년총회(天下萬乘百年總會)가 얼마 남지 않았다.”
 꽤나 중요한 모임인 것 같다. 그에게서 평소의 여유있는 패자(覇者)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무언가 어려움이 많은 듯했다. 단지 모임 따위가 그를 이처럼 곤란하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니까.
 “흐흐······ 천상······ 너는 천추무가에 원한이 있지만 천추무가 역시 도저히 갚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치욕이 있음을 너는 모를 것이다.”
 천추무가에 그런 치욕이 있었던가. 세인들로서는 도저히 믿지 못할 일이다. 천추무가가 생각하는 치욕이라면 분명 패배했다는 것밖에는 없을 텐데 그렇다면 도대체 어느 누가 천추무가를 패배시켰단 말인가.
 “냉천상, 너는 이 시대에 가장 뛰어난 근골과 가장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다. 네가 나의 후계자가 된다면, 능히······.”
 동방대군의 얼굴에 깊은 고뇌가 어렸다.
 “천하만승백년총회에서 능히 승리하여 대왕조의 왕(王)이 될 수 있을 것을······.”
 그렇다면 천하만승백년총회란 바로 대왕조의 왕을 뽑기 위한 모임이란 말이다. 그러나 진정 놀라운 것은 그런 대단한 사실이 중원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꼭 치욕을 씻어야 하는데.”
 이런 간절한 염원이 있기에 그는 자신의 원수인 냉천상을 후계자로 정했던 것이다. 승리를 위해 남겨진 비장의 한 패는 바로 냉천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원수였다. 처음엔 그도 고개를 저었다. 어찌 원수를 후계자로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중원을 손아귀에 넣은 그였지만 그 넓은 땅 어디에도 자신의 뜻을 이루어 줄 단 한 명의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곧 자신이 너무 흐트러졌다는 것을 깨닫고 생각을 돌렸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어제 있었던 일이었다.
 “헌데, 그 놈이 어째서 운미를 유혹해 밖으로 내보냈을까?”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의혹이 아니었다. 아픔이었다. 동방운미, 그녀는 그의 조카딸이었다. 목적을 위해, 냉천상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서슴없이 자신의 조카딸의 목을 벤 것이었다. 그도 인간임으로 죄책감과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보통이들과 다른 것은 그것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들킬 것을 뻔히 알면서 무엇 때문에 운미를 유혹했을까?”
 그가 후계자로 정한 냉천상이 바보일 수는 없었다. 알면서 그랬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뜻이 있다는 소리다. 지금 그가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다른 뜻이었다.
 “나를 사신봉으로 부르기 위해서였을까?”
 그러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그가 만나자고 하면 달려올 내가 아닌가? 으음······ 무언가 있긴 한데······.”
 천추검대주(千秋劍隊主) 한성검군(寒星劍君) 엄무외(嚴武外), 그는 잠자리에 들기 앞서 천추순찰검령(千秋巡察劍令)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이젠 그의 보고가 지겨울 정도였다. 이미 오래 전에 순찰검령의 보고는 꿰차고 있었다. 대신 말해 줘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 정도였다.
 형식적인 일이었고 사람의 일이란 한 길 앞을 예상할 수 없으니 만에 하나라도 일이 생기면 돌아올 책임은 전부 그에게 묻게 되어 있으므로 들어야 했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버릇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냉천상은 지금 술에 취해······.’
 “냉천상은 지금 술에 취해 방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엄무외는 엷게 웃었다.
 “하루도 빠지지 않는군.”
 “그래봤자 돌아올 것도 없을 텐데 왜 매일 미친 짓을 하는 것일까요?”
 “글쎄······ 그렇게 욕이나 실컷 해서 마음 속의 분노를 씻어보자는 뜻이겠지.”
 순찰검령의 얼굴에는 이제 이런 쓸데없는 감시는 안 했으면 한다는 마음이 써 있었다. 사실 요사이 그는 이럴려면 무공을 괜히 배웠지 하는 불만이 쌓여 있었다. 남들이 감히 쳐다보지 못할 천추무가의 일원인데다가 높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순찰검령이라는 버젓한 이름표까지 갖게 된 것을 고마워하며 신을 믿지 않는 그가 하늘에 대고 절을 했었다.
 사실 천추무가에는 따로 순찰 따위를 돌지 않아도 되었다. 가끔 멋모르는 도둑 나부랭이들이 침입하곤 했지만 그들은 이 안에서 세 발자국을 떼어놓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런 미친놈들이 아니라면 감히 이곳에 침입하는 미친 짓은 안 했다.
 그렇게 쌓인 불만에다가 요사이 짜놓은 연극을 보듯 매일 미친놈의 감시나 하고 있으니 못할 노릇이었다. 엄무외는 역시 달랐다.
 그는 흐트러진 그의 얼굴 표정을 읽고 차갑게 일갈했다.
 “모든 일에 의외의 일이란 있는 법이다. 철저히 지켜라.”
 칼로 찌르는 듯한 그의 싸늘한 냉갈에 순찰검령은 순식간에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했다.
 “봉명(奉命)!”
 “그의 호가 십기천작이다. 무서운 인물이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추호도 방심하지 말고 지켜라.”
 “예!”
 순찰검령은 공손히 절을 하고는 그의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나자 오늘 일을 다 마친 그는 잠자리에 들려고 천천히 옷을 벗었다.
 “천추검대주로서 사람 하나 지키는 경비를 서다니······. 불쾌하나······ 어쩔 수 없다.”
 엄무외는 솟구치는 짜증을 삼키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가주께서 이곳에 계시니 첩을 데리고 잘 수도 없고······.”
 천추검대(千秋劍隊)는 천추만승제 동방대군의 경호위대였다. 그의 신변을 지켜야 하는 천추검대는 동방대군 이외에는 그 어떤 이의 명령도 듣지 않았다. 그만큼의 실력도 있었다.
 한성검군 엄무외, 은한쌍열류라고도 불리우는 그의 독문검학 낙성대천하는 그를 천추무가 서열 팔 위에 올려놓았다. 팔 위라는 숫자가 우습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이곳이 천추무가라는 사실이다.
 그런 천추검대의 반 이상이 이곳 사신봉에서 무공을 잃고 영어의 몸인 십기천작 냉천상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엄무외는 이내 가늘게 코까지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5)
 
 
 휘이이이잉!
 바람만이 활개를 치는 지금은 축시가 넘어선 깊은 시간이었다. 분명 달이 떴고 별도 떴지만 지금은 묵빛 구름에 가려져 음침한 어둠만이 뿌려져 있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구름이 낮게 떠 있었다.
 야경꾼이 아닌 다음에야 이런 늦은 밤에 특히 오늘 같은 밤에는 볼일 보러 나오지 않는 이상 밖에 나와 있는 것은 한을 안고 죽은 귀신이 아닌 다음에야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냉천상이 머무는 소축을 중심으로 무서운 살기가 뻗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분명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살기이기에 그것도 내공이 이 갑자 이상 되는 고수들이 낼 수 있는 것이기에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더욱이 그 숫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회류벽강군세(廻流碧 君勢)!
 살기의 근원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것은 소축을 중심으로 천추검대가 펼치고 있는 무서운 검진이었다. 무려 백이십 명의 검수들이 뿜어내는 철통 같은 검진 속에는 바람이라 해도 허락없이 지날 수 없으리라.
 정확히 말해 동쪽, 그러니까 그들의 뒤통수 쪽으로 불어대던 바람이 방향을 바꾼 후였다. 이 기이한 냄새는 맞은편으로 방향을 바꾼 바람에 실려 차츰 고약함을 더해갔다.
 일체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하는 천추검대였고, 지금 그들은 대주의 명에 따라 검진을 펼치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수급이 몸과 분리되어 땅바닥에 나뒹굴더라도 변하지 않을 표정이 찡그려졌다.
 썩은 생선의 내장을 날로 씹어먹어도 이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슨 냄새지?”
 천추검대의 검수들은 기분 나쁜 냄새에 온 공력을 끌어모으고 눈을 밝혔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라곤 전혀 없었다. 적어도 그들의 시야 거리인 백 장 내에서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넓은 초지 어느 곳에서 계속해서 속을 까뒤집어 놓는 비린내가 풍겨오는 것일까.
 그때였다. 그들의 손등에 무의식적으로 굵은 힘줄이 툭 불거져 나왔다. 수중에 들린 검이 파르르 떨고 있는 것은 공력이 주입된 탓이었다.
 스슷!
 한 줄기 검은 인영이 회류벽강군세를 통과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 이상 없느냐?”
 “아무 이상 없습니다.”
 일시에 긴장이 풀렸다. 그 검은 인영은 천추순찰검령이었다. 그는 기분 나쁜 냄새가 계속해서 풍겨오자 혹시 진세가 흐트러지지는 않았나 하고 순찰을 나온 것이었다.
 “보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는 섬전같이 사신봉을 둘러보았으나 전혀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미 지겹도록 둘러본 후였으니 새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벼랑 끝에 섰다.
 “으······ 생전 이런 빌어먹을 냄새는 맡아본 적이 없다.”
 그는 불빛 하나 없는 밤이 왠지 기분 나빴다. 그러나 그가 서있는 사신봉은 수십 년의 공력이 없으면 아예 오르지도 못할 험준한 봉우리였다. 그런 완벽한 뒷받침이 그의 의혹을 더욱 짓게 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 비릿한 냄새는······.”
 그는 문득 허공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 마침 낮게 깔린 검은 구름 속에서 얼핏 달이 나오는 듯했다. 그러나 나올 뻔한 것은 그의 두 눈알이었다.
 “까마귀떼?”
 직접 눈으로 보고 나서도 살을 꼬집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구름이 아니었다. 낮에 그렇게 맑았던 하늘이었는데 밤이 되자 마자 먹구름이 깔린다는 것이 왠지 이상했었다. 하지만 뭐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덕을 부리는 날씨였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것이 구름이 아닌 까마귀떼였다니.
 “비린내는 바로······.”
 휙--!
 그가 채 부릅떠진 눈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무엇인가가 그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엇?”
 그는 본능적으로 재빠르게 손을 뻗어 날아드는 물체를 쥐어갔다. 물컹 하면서도 매우 차가운 감촉이 느껴지는 게 여름에 목에 두르고 자면 꽤나 잠이 잘 오겠는걸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아니?”
 손을 들어 무엇인가 확인하는 순간 그는 채 진정되지 않았던 두 눈을 또 부릅떠야 했다.
 이게 생명체라는 생각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물컹 하고 차가운 것이 꽤나 생김새를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었으니 확인해 보려고 들어올린 것이었다. 그 순간 그를 놀라게 하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이 빳빳이 일어서는 것이었다.
 번쩍!
 그리고 세모꼴의 눈에서 새파란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머리 속에 순간적으로 자신이 익히 알고 있었던 단어 하나가 스쳐갔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등줄기에 좌르륵 하고 소름이 훑고 지나간 것은 그와 동시였다. 창피한 일이지만 오줌도 약간 지린 듯했다.
 “도, 독사!”
 휘이이이······ 쉬이이이······!
 쉭-- 쉬쉭--!
 그의 놀란 음성이 신호라도 되었던 듯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무엇인가가 사신봉 정상을 넘어오기 시작했다.
 “으······ 독사떼들이······.”
 자신의 손에 들린 그것은 바닥에 널려 있었다. 아니 뱀으로 만들어진 바닥 위에 흙을 뿌려놓았다고 하는 게 맞는 소리였다.
 하도 질렸는지 아예 무섭지도 않았다. 담담해지는 것이 지금 눈앞에 닥쳐온 죽음이란 단어도 그리 큰 충격은 못 되었다. 그중 한 마리가 바닥에서부터 튀어올랐다. 뜨끔하는 것이 생각보다 아팠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게 다였다. 그의 몸이 있던 자리를 독사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순식간에 그의 몸은 내장 부스러기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이제 어느 정도 취기가 돌았고 마실 술도 떨어졌던지라 냉천상도 잠자리에 들려는 듯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이상한 것은 잘 때도 껴입고 자던 배옷을 벗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 표정이 도저히 잠자리에 들려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술을 마셨다는 전제를 걸어 두고라도 말이다.
 “이 냄새······ 흐흐······ 나는 이 냄새가 무엇인지 잘 알지. 바로 나를 구하러 친구들이 나타난 것이지.”
 그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약속된 삼경을 어기긴 했지만 친구들은 어김없이 와주었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으헉! 배, 뱀들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천추검대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다니. 그러나 현실이었다.
 소축을 향해 다가오는 새파란 인광이 무엇인지 확인하던 천추검대수들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빨리 불을 켜라!”
 “횃불을! 불을 켜라!”
 순식간에 사신봉 정상은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일시에 환해졌다. 아니 차라리 불을 밝히지 않았던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아, 아니!”
 “이, 이럴 수가!”
 백이십 명의 천추검대수들은 천추검대가 만들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불문율을 깨고 경악성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공포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까, 까마귀, 그리고 박쥐······.”
 인간의 상상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지만 그게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온통 까마귀와 박쥐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건 도대체 시작과 끝이 없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넓은 초지에는 풀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오직 뱀들뿐이었다.
 이것들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소리도 없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단 말인가. 비린내의 정체는 바로 까마귀와 박쥐, 그리고 뱀들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휙!
 무엇인가가 또 사신봉 위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누군가 경악을 터뜨렸다.
 “나, 낭왕 염천월이······.”
 늑대 중에서 산중의 왕대호보다도 두 배는 더 큰 몸집을 가진 것이 있다면 중원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을 더욱 확고히 해주는 것은 늑대가 가진 금빛갈기와 금빛털이었다.
 낭중지왕(狼中之王)!
 황금늑대는 낭중지왕이었다. 그리고 그 위맹한 모습만큼 이 땅에 최고의 힘을 가진 짐승이었다. 어금니는 만년한철이라도 박살을 내며 그 발톱으로 후려치면 단숨에 대호 서너 마리는 갈가리 찢어놓을 수 있는 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황금랑의 황금피(黃金皮)는 도검으로도 흠집 하나 낼 수 없었고 사람 못지않는 영리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백수지왕이라는 황금랑의 등 위에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낭왕 염천월(狼王 閻天月)!
 얼굴에는 흉측한 이리탈을 쓰고 핏빛의 손톱을 근 한 자 가량 기른 끔찍한 모습이 아닌가. 이리탈 깊숙이 먹우물처럼 움푹 패인 두 눈의 깊숙한 곳에서 간이 새파란 광채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영혼을 쪼갤 듯한 빛이었다.
 인간의 눈빛이 아닌 바로 늑대의 눈빛, 그것이었다.
 “흐흐······ 크르르······.”
 웃음인지 울음인지 구분이 안 가는 소리가 염천월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2장 탈출은 성공하고···
 
 
 (1)
 
 
 쿠아아아앙--!
 허공을 찢으며 하늘로부터 황금빛 덩어리가 떨어졌다. 유성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황금부리를 가진 한 마리의 까마귀였다.
 얼마나 빠른지 바람을 가르는 가공할 굉음이 벼락 터지듯 울리고 있었다. 황금부리의 끝은 천추검대의 한 검수에게 향해 있었고 쏜살 같은 속도로 날아들고 있었다.
 “미물이 감히 어딜!”
 쌔애애액!
 마치 난생 처음으로 경악성을 터뜨리게 만든 화풀이를 하려는 듯 검수는 백 년 공력을 검에 실어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까마귀를 향해 검을 날렸다.
 그런데 분풀이는 물 건너 가버리고 그는 또 한 번 경악해야 했다. 이 까마귀는 분명 새이긴 했지만 미물이 아니었다.
 깡--!
 그럴 수 없는 쇳소리가 울리면서 산산조각이 난 것은 예상을 뒤엎고 검수의 검이었다. 까마귀와 부딪친 검은 산산조각이 났지만 까마귀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고 날아오는 속도는 그대로였다.
 퍼벅--!
 호박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검수의 검이 산산조각이 난 것과 동시였다.
 “크아악!”
 검수는 머리가 박살난 채 즉사해 버렸다.
 “아니?”
 “호, 혹시······ 오왕(烏王)이?”
 누군가의 떨리는 경악성에 천추검대수들은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오왕(烏王)!
 수명이 이천 년이 넘는 이 영물은, 날 때는 다른 까마귀와 달리 털이 새하얗다고 한다. 그러나 태어난 지 천 년이 지나면 영성이 생기고 전신에서 묵광이 빛나기 시작하며 하얀 털은 까맣게 바뀌게 되고 그와 동시에 그 어떤 것으로도 오왕의 몸에 상처를 입힐 수가 없다고 한다.
 황금부리는 만년한철보다도 더 단단해서 무엇이든 부수고 꿰뚫어 버리고 하루 칠천 리를 날 수 있으며 사람 말을 까마귀 말보다 더 잘 알아듣는다고 한다.
 비명과 동시에 하늘을 덮고 있던 까마귀떼와 박쥐떼들이 천추검대수들을 향해 유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아아아악!”
 “크으으윽······ 흐, 흡혈복(吸血 )······.”
 그렇다. 박쥐들은 한결같이 검수들의 목을 향해 파고들었다. 까마귀와 박쥐떼들의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아예 그들의 검이 지나갈 자리조차 없었다. 천추검대, 그들은 검조차 뽑아보지 못하고 죽어갔다.
 한성검군 엄무외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언제 코까지 골고 잤냐는 듯 그의 얼굴에서는 잠에서 방금 깬 사람의 나른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웬 비명소리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신봉 정상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다니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상식으로는 이곳에 적이 쳐들어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의혹을 눈으로 보기 위해 그는 애검(愛劍) 비상(秘翔)을 손에 쥐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그의 등 뒤 벽에서 두 개의 손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 손은 벼락같이 엄무외의 양쪽 견정혈을 움켜쥐었다.
 “헉!”
 한성검군 엄무외는 놀라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막 잠에서 깬 탓으로 돌리기엔 상대의 등장은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다.
 “누, 누구?”
 돌로 된 벽에서 별안간 손 두 개가 튀어나와 혈도를 짚는데도 안 놀래는 것은 시체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견정혈을 제압당했으니 엄무외는 온 공력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도대체 어떤 놈이?”
 그가 천추검대의 대주라지만 지금은 말을 막할 입장은 아닌 것 같다. 도대체 무림에서 어느 누가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침실로 침입해 혈도를 제압할 수 있단 말인가. 천추무가 외의 다른 인물이라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곧 평정을 되찾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벽속에서 번뜩이는 머리 하나가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민대머리, 머리카락이라고는 한 올도 없는 완벽한 대머리였다.
 푸르스름한 이끼가 피어날 정도로 파리하고 음습한 얼굴에 뻣뻣한 잿빛 눈썹 아래 우묵한 두 눈은 마치 늪처럼 깊고 어두웠다.
 그 얼굴이 반쯤 벽 속에서 고개를 들이민 채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었다.
 “흐흐흐······ 실컷 보았나? 잘생긴 얼굴이지?”
 엄무외는 이를 갈았다.
 “전진의 환허무흔술(幻虛無痕術)! 으음······ 전진의 말코도사 놈이었군.”
 그의 말에 대한 대답으로 민대머리가 음산한 괴소를 뿌릴 때였다.
 “엄무외! 여기도 있다.”
 이가 부딪치도록 차가운 음성이었다.
 “으헉!”
 엄무외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꼈다. 음성과 함께 그의 머리 속을 스쳐간 인물이 하나 있었고 그것은 오래 전부터 공포란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던 이름이었다.
 그는 제발 착각이길 빌며 고개를 돌렸다.
 “으으······.”
 하늘은 무심했다. 언제부터 있었던가. 마치 오래 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것처럼 음침한 한 덩어리의 어둠이 방 한가운데 있었다. 그저 유령처럼 검은 안개에 가려져 있을 뿐 실체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무외의 짐작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각인시켜 주기에는 가혹할 정도로 뚜렷한 증거였다.
 “으으······ 오수편복제(烏首 帝)! 네가?”
 엄무외의 시선에 급격히 죽음의 공포가 번져갔다. 오수편복제라 불린 인물, 그는 알았으면 됐다는 식으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갈했다.
 “광밀왕(光密王)! 가랏!”
 마치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음성이었다. 영혼이라도 팔아넘길 것만 같았다.
 푸드득!
 한 차례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된 순간이었다.
 “크악!”
 엄무외는 참담한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목에는 어느새 한 마리 박쥐가 달라붙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광밀왕!
 영성을 지니고 있으며 금강불괴의 신체를 가졌고 사람의 피를 빨아 먹고 산다. 이 영물은 몸 안에 내단(內丹)을 키우는데, 그것은 다음대 광밀왕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
 푸드득!
 또 한차례 날갯짓 소리가 들리고 광밀왕은 다시 오수편복제의 장포자락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벽 속에서 얼굴만 나와 있는 민대머리가 음소를 흘렸다.
 “흐흐······ 자 가자. 동방대군이 오면 모든 게 끝장이야.”
 스윽!
 그의 얼굴이 벽 속으로 순신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였다.
 쿠웅!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 바닥에 떨어졌다. 핏기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은 회칠을 해놓은 듯 창백했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었다. 광밀왕에게 전신의 피를 모조리 빨린 엄무외였다.
 
 
 (2)
 
 
 냉천상은 패배하기 전 늘 즐겨 입었던 백의장삼을 입고 있었다. 마구잡이로 술을 들이키던 때의 헝클어진 머리는 어느새 잘 정돈되어 영웅건으로 단정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사이하면서도 현란한 아름다움을 뭘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입가에 한 조각 비릿한 조소를 베어 물었다. 그의 미소는 어떤 뜻을 담고 있어도 황홀한 것이었다.
 “흐흐······ 동방대군. 네 조카딸을 유혹한 것은 내가 탈출하는 날 그 모습을 내게 보여주기 위해서였지. 너를 이곳으로 불러 들이려고 말이야.”
 그는 창문 너머로 심유한 시선을 던졌다.
 “너는 강한 척하느라 네 조카딸을 베었지만······. 흐흐······ 내가 계집이나 꼬여 도망칠 놈인줄 알았더냐?”
 그때였다.
 쿠광!
 천장이 박살나면서 돌과 흙더미가 방안으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까악!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귀청이 찢어질 듯한 까마귀 울음소리가 정실을 무너뜨릴 것만 같았다.
 “오왕! 왔구나.”
 냉천상의 얼굴에 희열이 번져갔다.
 까악!
 오왕은 다시 세차게 울음을 터뜨리면서 천장에 구멍을 크게 뚫었다.
 “후훗······.”
 냉천상이 야릇한 웃음을 터뜨릴 때 뚫린 구멍 속으로부터 하나의 거대한 연이 떨어져 내렸다.
 연(鳶)! 그 연은 보통 연이 아니었다. 사람이 타고 날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커다란 연이었다. 냉천상은 주저없이 그 연 위에 올라탔다.
 “드디어 탈출이다. 삼 년! 삼 년만에 이곳을 벗어나는구나. 으하하하하!”
 그의 얼굴에 희열이 번져갔다.
 “동방대군, 너는 내가 오늘 도망감으로써 머지않아 네 목에 칼을 겨누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라. 그 복수의 첫걸음은 역천지기(逆天之期)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천기를 거스르면서 시작하는 그의 복수는 과연 어떤 것일까.
 그가 탄 연이 천장에 뚫린 구멍을 지나 둥실 허공으로 솟구쳤다.
 “으하하하하! 이제 간다.”
 하늘에는 이미 세 명의 인물들이 연을 타고 있었다.
 오수편복제와 벽 속에서 얼굴만 타나냈던 민대머리, 황금랑을 타고 있던 이리탈을 쓴 낭왕 염천월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까마귀와 박쥐들이 허공을 뒤덮고 있어 까마귀만 딛고도 하늘을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땅 위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뱀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막강한 위력을 자랑하던 천추검대는 이 소름끼치는 미물들에 의해 몰살당해 있었다. 그들의 자랑하던 회류벽강군세는 펼쳐보지도 못한 채였다. 아니 검은 검집에서 뽑혀지지도 않은 채였다.
 하나의 연에는 수백 마리의 까마귀가 발톱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민대머리가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으하하하핫! 어서 오시오. 냉영웅!”
 그의 눈빛과 음성에는 흠모의 빛이 역력했다.
 “고맙소. 친구들!”
 오수편복제와 낭왕은 냉천상을 보면서도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세상이 없어져도 놀라지 않을 사람들일 것이다.
 “자, 가자!”
 민대머리가 우렁차게 외쳤다.
 까악 까아아악! 푸드득 푸드드득!
 그들은 점차 멀리 사라져 갔다.
 꽝!
 잠들어 있던 동방대군은 침상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도대체 웬 소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침입자가 있으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던 그는 단지 이 소란을 수하들 짓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소란을 피우는 놈을 찾아 목을 비틀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그것은 비명소리였다. 그렇다면 분명 누군가가 침입했다는 소리인데 그것은 대왕조의 명예문제를 떠나서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비명소리는 분명 자신의 수하들 것이었기 때문이다.
 누가 있어 천추검대에게 비명소리를 뽑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창문짝이 부서져라 열어제쳤다. 그때였다.
 까악 깍깍!
 푸득푸드드득!
 창문을 여는 순간 까마귀와 박쥐들이 방안으로 물밀 듯이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은지 마치 검은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으음?”
 천하의 동방대군이었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검이나 화살이 쏟아져 들어왔다면 놀랄 만한 것도 아니었지만 난데없이 까마귀와 박쥐떼라니.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밑도 끝도 없는 까마귀와 박쥐떼들이 모든 것을 덮어 버린 것이었다. 동방대군은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으음······ 냉천상! 네가 왜 동방운미를 유혹해 탈출하려는 듯 수작을 꾸몄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는구나.”
 동방대군의 얼굴은 더할 수 없는 분노로 물들었다. 이때 까마귀와 박쥐들은 그를 향해 겁도 없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오수편복제! 네놈이 천상을 구하러 오다니.”
 까악 까깍!
 갑자기 동방대군을 향해 달려들던 까마귀와 박쥐들이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까마귀와 박쥐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자 순간적으로 동방대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전신에서 무서운 광화(光華)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온몸은 찬란한 금광으로 뒤덮였다.
 쿠우우우우!
 금광으로 둘러싸인 그의 신형이 앞으로 폭사되자 무서운 굉음이 터졌다.
 천지대광명법신(天地大光明法神)!
 오늘날의 동방대군을 있게 한 천추무가 최고의 무공이자 이 시대 최고의 무공이었다.
 쿠콰콰콰콰!
 그것은 찬란한 빛의 질주였다. 분노한 동방대군은 천지대광명법신을 극도로 끌어올려 냉천상이 있는 곳으로 쏘아져 갔다.
 파파파파팟!
 까마귀들의 비명소리와 박쥐들의 날개짓 소리가 난무했다. 그것들은 모조리 동방대군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금광에 부딪혀 형체도 없이 사그러져 갔다.
 까마귀와 박쥐, 뱀들로 가득 메워진 공간을 가르며 날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암천을 가로지르는 유성과 같았다.
 꽝!
 냉천상이 묵고 있는 방앞에 도달한 동방대군은 그대로 벽을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냉천상의 방안에는 그가 입었던 배옷과 갈라진 방갓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 통의 서찰이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서찰에 쓰여진 글씨를 확인하는 순간 동방대군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는 곧 서찰의 겉봉을 뜯고 그것을 읽어내려갔다.
 <동방대군!
 그냥 도망치기는 싫었다. 꼭 네가 보는 데서 도망치고 싶었지. 그래서 내가 도망치는 날에 맞추어 네놈이 사신봉으로 올라오도록 약간의 수작을 부렸지. 네가 네 조카딸의 수급을 가지고 오도록 말이야. 네가 한 말대로 나는 영웅이 아니고 악당이니까 악당다운 짓은 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 안 그런가?
 동방대군!
 나 십기천작 냉천상은 이대로 주저앉지는 않아. 기다리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동방대군은 천장에 뚫려진 구멍을 통해 지붕 위로 올라섰다.
 “음······.”
 그는 저절로 신음을 흘렸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은 둥근 만월, 그토록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검은 구름은 사라지고 사신봉 하늘 위에는 커다란 만월이 저주스러울 정도로 너무나 보기 좋게 떠 있었다.
 그리고 하늘 저편으로 밀려가는 검은 구름처럼 까마귀와 박쥐떼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또한 만월 한가운데를 몇 개의 거대한 연이 날고 있었다. 그 연에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확인해보지 않아도 냉천상과 그를 구해간 인물들임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 연으로부터 우렁찬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하하하하핫! 동방대군, 기다려라. 복수의 그날을 말이다. 으하하하하!”
 거대한 연을 바라보는 동방대군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 놈이 까마귀, 박쥐 대장과 친구인 줄은 몰랐군.”
 이건 정말 사기 같은 탈출극이었다. 차츰 하늘은 제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신형을 날려 수하들이 쓰러져 있는 곳에 떨어져 내렸다.
 스스슷!
 까마귀와 박쥐떼들이 물러감과 동시에 뱀들도 물러가기 시작했다.
 “사월만후도 왔었던 모양이군.”
 이미 냉천상이 탄 연은 멀어져 가 까만 점이 되어 있었다.
 “이로써 천하에는 이야깃거리가 생겼군.”
 그렇다. 천추무가를 우롱하며 유유히 빠져나간 냉천상의 얘기와 앞으로 벌어질 동방대군과 냉천상의 새로운 싸움을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지켜볼 것이다.
 돌연 동방대군은 벼락같이 일장을 내질렀다.
 콰아아아!
 한 줄기 찬란한 금광이 냉천상이 기거하고 있던 소축으로 날아갔다.
 꽝!
 소축은 폭발이라도 난 듯 산산조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것도 그의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여줄 수는 없었다. 동방대군의 눈은 마치 폭발하는 활화산과도 같았다.
 “이, 이런 치욕이······.”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끝나 있는 상태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두고 마음에 둘 정도로 그의 속은 좁지 않았다.
 “과연 저 놈이 어떤 식으로 복수해 올 것인가. 사뭇 기대가 되는군.”
 그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침중하게 굳어져 가고 있었다.
 
 
 (3)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인가. 말 그대로 장대 같은 비가 어제 저녁부터 숨쉴 틈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개봉(開封)의 서문(西門)을 벗어나 삼십 장 정도 걸어가면 한 채의 장원이 나온다.
 은성장(銀星莊)!
 그리 큰 장원은 아니었지만 빗속에 그 모습은 마치 커다란 괴물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 빗속을 뚫고 은성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넓은 죽립을 깊게 눌러쓰고 비옷을 입은 그 인물은 은성장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은 희열로 물들어 있었다.
 꽝! 꽝!
 죽립인은 은성장의 문을 세차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나직하게 뇌까렸다.
 “흐흐······ 동방대군. 내가 이곳에 도착한 이상 너는 졌다.”
 그렇다면 이 죽립인은 바로. 그때 안에서 인기척이 들리며 짜증 섞인 늙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런 궂은 날에? 누구쇼?”
 사립문이 빠끔히 열리며 은성장의 청지기가 나타났다. 대수로운 사람이 아니라면 당장에 욕설을 퍼부을 듯한 험악한 얼굴이었다. 그가 나오자 죽립인은 죽립을 들어올리며 나직이 말했다.
 사이한 미감의 얼굴, 죽립 속에 가려져 있던 너무나 화려하고 아름다운 얼굴이 드러났다. 바로 냉천상이었다.
 비를 피해 하룻밤 묶으러 온 과객이겠거니 했던 청지기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아니? 큰도련님?”
 “아우 있나?”
 “있고 말굽쇼.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어서 안내하게.”
 냉천상은 의자에 몸을 묻고 청지기가 내다 준 용정차를 마시고 있었다. 실로 얼마만에 마시는 용정차인지 모른다. 천추무가에 갖혀 있을 때도 용정차를 마시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곳의 시비가 끓여다 주는 용정차를 매일 마셨다. 게다가 청지기의 차끓이는 솜씨란 그 시비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달랐다.
 사람의 마음에 따라 음식맛이 달라진다는 것은 시장이 반찬이란 말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그렇다. 그는 자유와 복수에 항상 시장기를 느꼈다. 그에게 있어 지금 마시는 용정차 한 잔은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그의 입술에는 한 줄기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사이(邪異)하고 잔인해 보이는 비정한 미소. 어쨌든 아름다웠다.
 “동방대군, 너는 졌다. 너의 패배가 비록 이십 년 후의 일이지만. 흐흐······ 너는 지고 말 것이다. 내 아들의 손에 의해서.”
 그렇다면 그에게 숨겨둔 자식이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때였다. 밖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얼굴을 떠올리게 만드는 반가움이 가득 담긴 음성이 들려왔다.
 “뭣이? 형님께서 오셨다고?”
 “예. 안에 계십니다.”
 시비의 대답소리가 시작되는 것과 동시에 냉천상이 있는 서실의 문이 덜컹 열렸다. 한 인물이 전신을 부르르 떨며 들어섰다.
 말할 수 없이 단아한 기품이 흐르는 귀골(貴骨)의 얼굴이었다.
 “형님······.”
 문사의 얼굴에는 말할 수 없는 반가움이 있었다. 숨이 넘어간 부모님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런 얼굴을 할 수 있으리라.
 냉천상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그를 맞았다.
 “아우······.”
 문사와 냉천상은 서로 굳게 포옹했다.
 “형님!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문사의 음성은 울먹거렸다.
 “고생은······. 지난 삼 년 동안 호의호식 했다네.”
 “형님.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뵙게 되다니.”
 냉천상은 그에게 친근감 넘치는 농을 던졌다.
 “이 사람 혹시 내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 아니야?”
 “혀, 형님, 무슨 소리를?”
 이들이 반가운 해후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방안에 화려한 향기가 몰아쳤다. 사내의 마음을 황홀하게 적시는 감미로운 향기, 이런 향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여인밖에 없다. 궁장머리에 홍의궁장을 입은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냉천상을 향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주버님이 오시다니?”
 그녀를 발견한 냉천상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감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름다워! 그녀 이상의 여인은 없을 것이다.’
 천하의 바람둥이 냉천상을 이토록 감탄시키는 여인이 있었다니. 냉천상은 문사와 떨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수씨.”
 여인은 냉천상의 감탄한 표정을 발견하고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보석처럼 빛나는 저 아름다운 얼굴은 아무리 많게 보아도 절대 삼십을 넘지 않아 보였다. 사람의 영혼을 빨아들일 듯한 강렬한 눈빛, 구름처럼 삼단으로 틀어올린 윤기 흐르는 흑발 하며 그 탐스러운 머리는 미끈한 다리, 부풀어오른 엉덩이와 함께 사내를 숨막히게 만들어 죽여 버릴 듯한 한 자루 검이었다.
 전신으로 흐르는 기운은 고귀해 보이면서도 얼굴에는 누구에게나 친근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또한 그늘진 눈가의 그림자는 숨이 막힐 정도로 요염한 것이었다. 남자라면 한 번씩 꿈을 꿔보는 그런 미인이었다.
 “아주버님, 다시 뵙게 되어 정말 반갑기 한량없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생과 제수씨를 볼 수 있게 되어 너무나 기쁩니다.”
 문사는 너무 긴 대화는 필요없다는 듯 외치듯이 말했다.
 “자, 부인! 가서 술상을 차려오시오. 오늘 혼이 나가도록 취해 보겠소.”
 “호호······ 물론이지요. 내 낭군의 생명의 은인이신 아주버님께서 오셨는데 어찌 술상을 올리지 않겠습니까?”
 그녀는 또한 건강하고 활달했다.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활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는 방안을 나서기 전 자신을 향해 웃음을 보내는 냉천상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만 자신도 모르게 전신을 가늘게 떨고 말았다.
 ‘저 남자는 너무 요기(妖氣)가 넘쳐.’
 예전에도 몇 번 저 얼굴만 바라보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어떤 상황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붉은 등불 아래 흐드러지는 비단 보요, 침상 밑으로 떨어지는 옷가지들, 어우러지는 희멀건 두 개의 육신.
 ‘아아······.’
 그녀는 내심 까닭 모를 한숨을 내쉬다가 얼른 서실 밖으로 나갔다.
 ‘나도 모르게 또 그런 해괴한 망상을······.’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냉천상의 미소는 점점 짙어져만 갓다. 퇴폐적이고 사이한 미소가, 어떤 잔인한 운명의 굴레처럼 그녀의 뒤를 따라 구르는 것이었다.
 
 
 (4)
 
 
 꽈르르르릉 꽝!
 폭포수가 굉음을 울리며 밑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수십여 장을 가르며 떨어지는 폭포는 정말 일대가관이었다.
 이곳은 해룡탄(海龍灘)이라 불리우는 개봉 근교 일월산(日月山) 쌍일곡에 위치한 폭포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해룡탄 밑에는 한 사람이 좌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수천만 근의 압력을 이기고 사람이 앉아 있다니 실로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바로 냉천상이었다. 그는 떨어지는 폭포수를 맞으며 냉혹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동방대군, 복수를 위해 내가 잡은 여건지기가 무엇인줄 알면 전율하고 말 것이다.”
 쏴아아!
 꽈르르르릉!
 폭포수는 사정없이 그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동방대군. 분명 냉씨 가문은 삼대째 네놈에게 졌다. 내가 무공을 회복해도 너에게 다시 지고 말 거야. 그러나······.”
 그의 미소는 끝없는 자존심의 표시였다.
 “그러나 흐흐······ 나는 아들을 낳는다. 나의 후예를 말이다. 내 후예는 아비와 가문의 복수는 물론 천하를 거머쥐는 제왕(帝王)이 될 것이다.”
 그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요기 서린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광기(狂氣)가 감돌고 있었다.
 “제왕이 되려면 완벽한 사주(四柱)를 지니고 태어나야 하지. 태어나는 해(年), 달(月), 그리고 날짜와 태어나는 시간(時). 흐흐······ 하늘이 원하는 시간에 태어나야 하지.”
 꽈르르르!
 폭포수는 그를 부숴 버리기라도 할 듯 내리꽂혔지만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광무(光武) 십오년(十五年) 청동치(淸洞治) 삼년(三年) 이월 이십일(二月二十日)! 이것이 바로 제왕지재가 갖고 태어날 제왕의 완벽한 사주다. 시간은 첫 새벽이지.”
 그는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동방대군, 제왕의 사주를 알 수 있음은 바로 천기이지. 그렇다면 역천은 무엇인지 아는가? 흐흐······ 역천이란 사람이 인위적으로 그날에 아기가 태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가 말한 역천지기란 바로 이것을 말함이었단 말인가.
 “내가 사흘 전 탈출하지 못했다면 나는 제왕을 만들 시기를 놓치고 말았을 것이나······. 흐흐······ 나는 탈출했고 오늘 밤 아기를 만들면 정확히 광무 십오년 청동치 삼년 이월 이십일 새벽에 아이가 태어나게 되지. 흐흐······ 동방대군. 이런데도 네가 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후후······ 십기(十技)란 말의 의미는 나 냉천상이 못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지. 허나 내가 천기까지 짚고 역천을 할 수 있음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서서히 그의 눈에서 광기는 사라지고 있었고 고요하고도 담담하게 가라앉아 갔다.
 “제왕을 낳아줄 밭도 이미 찾았고 씨앗은 오늘 밤 뿌린다. 흐흐······ 열 달 후 제왕지재가 태어나면······.”
 그의 아들, 하늘이 아닌 사람이 만들어 낸 제왕지재를 낳아줄 여인은 과연 누구일까.
 잠시 후 그는 폭포 밑에서 나와 젖은 머리를 말리고는 이마에 흰 띠를 둘렀다. 그 흰 띠에는 태극(太極)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어서 그는 빳빳하게 풀을 먹인 도포를 입었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는 폭포 옆에 있는 십여 장 넓이의 바위 위로 올라섰다. 그런데 바위 위에는 동쪽을 향해 하나의 제단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제단에는 도가(道家)의 시조(始祖) 노자(老子)의 화상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는 하나의 축문이 쓰여져 있었다.
 <태극도세천지일통(太極道世天地一統).>
 제단 앞에는 세 개의 향로가 놓여 있었고 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향불 앞에는 대접에 냉수가 떠져 놓여 있었다. 그는 제사를 올리려고 하는 것 같다.
 그는 제단 앞에 서서 향불을 사르더니 경건하게 구배(九拜)를 올리기 시작했다.
 “천지신명(天地神明)이시여! 도(道)의 시조(始祖)이시여! 부족한 술사(術士) 냉천상이 목욕재계하고 태극대주술(太極大呪術)을 펼치려 합니다. 부디 이 한(恨) 많은 냉천상의 염원을 들어주십시오.”
 그는 동편 하늘을 향해 염원을 했다. 그런데 태극대주술이라니!
 태극대주술(太極大呪術)!
 도가의 제사 중 역천의 제로서 역술사(易術士)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며 울리는 제사이다. 역술사들이 도저히 이루지 못할 소망을 이루고 싶을 때,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리면 무엇이든 꼭 한 번은 그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역천의 제!
 냉천상은 한 손에 불진(佛塵)을 들고 왼손에는 세 개의 방울, 즉 도사들이 쓰는 삼령(三玲)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푸우!
 그는 손가락에서 흘러나온 선혈을 입에 머금고는 허공에 대고 세차게 뱉어냈다.
 이것은 태극대주술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방(東方)의 오악대신(五嶽大神), 서방(西方)의 명왕대신(明王大神), 남방(南方)의 한음여왕(韓陰女王), 북방(北方)의 태무신왕(太武神王)이시여······.”
 그는 불진을 신장(神將) 삼아 붙들고 있었고 산령을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딸랑딸랑딸랑!
 삼령의 요란한 방울소리가 폭포소리를 뚫고 울려퍼졌다.
 “냉천상이 혀를 깨물어 제(祭)를 올리고 염을 하니 들어주소서.”
 하늘은 잿빛이었다. 음산한 공기가 대기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가운데 냉천상은 삼령을 흔들며 불진을 떨고 있었다. 그런 그의 표정이란 이 세상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피를 머금었던 탓인지 섬뜩하도록 붉은 입술이 마치 괴사(怪事) 속에 나오는 사람의 간을 파먹는 요괴의 입술을 보는 듯했다.
 “천하를 주재하시고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시는 천지신명이시여. 도가의 시조시여!”
 딸랑! 딸랑! 딸랑!
 방울은 미친 듯이 울려댔다. 구천을 떠도는 한 맺힌 원혼의 울음소리 같았다. 또한 그것은 냉천상의 광기 어린 얼굴과 붉게 타오르는 듯한 충혈된 눈, 마치 악마의 눈처럼 붉은 그 눈동자와 어울려 정말 음산한 귀기를 뿌려댔다.
 곧 비라도 뿌릴 듯이 잿빛 하늘은 점점 더 음산해져 갈 뿐이었다.
 태극대주술은 근 한 시진 동안 행해진다. 도가의 역도(逆道) 마천진인(魔天眞人)이 천하를 움켜쥐기 위해 펼쳤다는 역천의 제.
 냉천상은 괘(卦)를 집어들었다.
 “천지신명이시여! 제왕지재의 탄생을 위하여 괘를 다시 한 번 뽑습니다. 지난날 내려주신 신명(神明)의 계시를 다시 주시옵소서.”
 그는 광기 어린 얼굴로 괘를 뚫어져라 노려보다가 조심스레 그 중 하나의 괘를 뽑아들었다.
 - 광무 십오년 청동치 삼년 이월 이십일 축시.
 괘를 들여다보던 냉천상은 미친 듯이 광소(狂笑)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핫! 천지신명이시여! 이 냉천상을 버리지 않으시는군요. 크하하하핫!”
 냉천상은 동천을 향해 다시 구배를 올리기 시작했다.
 “만방(萬方)의 대신(大神)들께서 점지하신 제왕의 사주! 결코 대신들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씨앗을 뿌리겠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냉천상이 이처럼 역술사들의 역천의 제를 지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크게 비웃을 것이다. 차라리 그럴바에야 마누라를 한 번 더 안고 말겠다고 말이다. 집념이란 것을 가져 보지 못한 사람, 갖지 않은 사람에겐 터무니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냉천상에게는 목숨과 바꾸는 일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야천을 응시했다. 밤하늘엔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냉천상은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대는 제왕지재를 낳아야 하오. 내 씨앗을 받아, 역천지기의 완성은 그대가 해야 하오.”
 
 
 제3장 제왕의 씨앗이 뿌려지다
 
 
 (1)
 
 
 맑은 가을의 대기가 문약빙에게서 유난히 아름다운 향기로 운집되는 느낌이었다. 그녀에게는 청초함이 가득했다. 상아빛을 닮은 얼굴은 너무나 맑았다.
 “호호······ 아주버님 이렇게 오셔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제수씨, 별 말씀을 다 하시오.”
 그는 술잔을 비우고는 의제 강엽문에게 내밀었다.
 “자! 아우님, 한 잔 받으시오.”
 술잔을 권하면서 그의 시선은 빠르게 문약빙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너무나 아름답다. 여왕이 될 만해. 제왕을 낳아줄······.’
 수많은 여인을 안아본 그에게는 여인이란 옷을 입고 있으나 벗고 있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한 번 보기만 해도 그 여인의 모든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는 마음을 지긋이 내리눌렀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녀를 보고 난 순간 그의 마음에는 걷잡을 수 없는 감동이 일고 있었다.
 ‘약빙! 그대의 사주는 왕비의 사주이고 나는 대부(大父)의 사주요. 우리들이 합치면 제왕지재가 태어나게 되오. 그리고 제왕지재가 태어나는 시를 정확히 맞추기 위해 우리는 오늘 밤 화합을 가져야 하오.’
 그는 강엽문의 술잔에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자네가 별탈없이 살아가니 이 우형은 기쁘기 한량없네.”
 “하하······ 모두가 형님의 덕이지요.”
 그는 해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 같았다.
 강엽문(姜葉文).
 그는 세상이 싫어 숨어 살고 있는 인재였고 그 지닌 학문의 깊이는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학과 같이 고고하고 명리를 탐하지 않는 그의 인품 때문에 전국 유림엔 그 이름에 대한 명성이 자자했다.
 운강대학사(雲剛大學士)!
 전국 유림들이 그에게 붙여준 칭호였다. 의례적으로 그런 칭호는 적어도 환갑 이상은 지나야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갖출 것을 모두 겸비한 그에게는 그런 예가 적용되지 않았다. 나이 이십오 세에 대학사의 명예를 누린 것이었다.
 그는 존경이 가득한 시선으로 냉천상을 응시했다.
 “형님! 아직도 제가 살아갈 수 있음은 오로지 형님 덕이외다. 소제는······.”
 냉천상이 웃으면서 그의 말을 막았다.
 “그만 두게, 이 사람아. 볼 적마다 그 소리를 꺼내어 내가 얼마나 거북한 줄 아는가?”
 “형님에게 꼭 보은을 해야 하는데······.”
 “하하하! 이 사람 참.”
 냉천상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술잔을 들었다.
 ‘그래. 이들은 내가 아니면 죽었을 사람들이지.’
 강엽문과 문약빙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이 시대에 가문을 이어갈 후사가 없음은 문중에 있어 가장 큰 죄였다. 소문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고 시켜서 한 일이었지만 아들 잘 났는다는 부부의 속곳을 가져다가 입고 지내기도 해보았다. 그러나 노력한 만큼의 대가는 없었다.
 학자들은 대개 세상의 모든 것을 이론으로 밝히는 일을 하기에 신 같은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런 그가 마지막 택한 것이 기도였다.
 문약빙은 개봉에서 백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 보국사(報國寺)에 백 일 치성을 올렸다. 치성이 끝나고 그들 부부가 산을 내려올 때였다. 그 길에서 녹림도적을 만났고 강엽문의 책이나 붙잡던 손으로 그들을 어찌해볼 수 없었다.
 용기만 가득한 그는 끝까지 도적들에게 달려들다 가슴에 칼을 맞았고 당연히 도적들은 문약빙을 가만 두지 않았다. 그들이 개침을 흘리며 그녀를 겁탈하려 할 때, 우연처럼 냉천상이 그 길을 지나갔고 그의 손에 구함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강엽문이 잊지 못하는 은혜는 바로 이를 두고 말한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았고 그 길로 의형제의 연을 맺게 된 것이었고 냉천상은 그들을 간간이 방문해 왔던 것이다.
 문약빙은 그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동생의 내자(內子)가 형님에게 술을 따름은 법도에 없는 일이나, 구명지은을 얻은 이들에게 그것은 단지 겉치레일 뿐이었다.
 “아주버님, 왠지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아니오······ 오다가 비를 좀 많이 맞아서 그런 것 같소이다.”
 문약빙은 이제 자리를 비켜야 할 시간임을 알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형제분께서 의좋게 마시세요. 저는 아주버님의 잠자리를 보고 그만 자야겠어요.”
 “알았소, 부인.”
 그녀는 곧 몸을 돌려 방안을 나갔다. 이제부터 새로 시작이라는 듯 강엽문은 술잔을 들어올리며 냉천상에게 권했다.
 “자! 형님, 건배하지요.”
 “그러지.”
 “오셔서 정말 반갑습니다. 하하하······.”
 “나도 그렇네.”
 냉천상은 술을 넘기면서 강엽문의 핼쑥하지만 구김살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 마음이 조각나듯 아파왔다.
 ‘미안하네, 아우! 나의 염원을 위해 자네 부인을 겁탈해야 하네.’
 그의 내심을 강엽문이 알 리가 없엇다.
 ‘자네 부인은 제왕지재를 출산하기에 더할 수 없이 좋은 몸을 갖고 있네. 사주란 운명도 자네 부인을 점찍었고······.’
 강엽문은 이 밤이 새도록 형님과 같이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하며 즐겁게 웃고 있었다.
 ‘내 원한이 너무나 깊어······ 상대는 이렇게 하지 않고는 도저히 원수를 갚을 수가 없는 자이네. 제왕이 될 아이가 아니고서는 그를 이길 수가 없다네······.’
 강엽문은 반가운 마음에 연거푸 석 잔의 술을 마셨다. 분위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주량인가. 탁자 위에는 벌써 네 병이나 되는 술병들이 비워져 있었다. 평소라면 채 반병의 술도 마시지 못하는 그였다. 그런 그가 세 병이나 되는 술을 마신 것이었다.
 형님이 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구명지은을 입은 덕에 얻어진 인연이었지만 의형제를 맺은 후 그는 냉천상에게 남자다운 호기를 배웠다.
 무림인인 의형을 존경했다. 책밖에 모르던 그는 냉천상덕 분에 술을 배웠고 풍류를 배웠다. 오늘 형님이 왔으니 술 마시다 죽어도 웃는 얼굴일 수 있었다.
 ‘용서하게, 아우······. 자결로서 사죄하겠네.’
 그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진한 아픔의 빛이 물들었다. 그러나 기분좋게 취한 강엽문이 이를 알 수 없었다.
 “자자! 형님! 끅! 사내대장부가 지기를 만났을 때는 끄윽! 마음껏 취해야 하는 법이오.”
 학처럼 고고하던 그의 혀가 풀렸다.
 “형님······ 정말······ 정말······.”
 처음엔 사람이 술을 마시지만 종래에는 술이 사람을 마시게 되는 법. 그는 감정이 격해져 제대로 말을 잊지 못했다.
 “허허······ 이 사람 운강! 벌써 취했나?”
 냉천상은 그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평소라면 그를 재웠을 것이다. 술병을 잡은 그의 손에는 뭔가가 들려져 있었고 강엽문의 술잔에는 술만이 아닌 흰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대개 최심분(催心粉)이란 손톱만큼만 넣어도 코까지 골며 잠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냉천상의 손에서 떨어진 것은 최심분이었다. 그의 손이 떨리며 작은 봉지에 들었던 세 번은 사용하고 남을 최심분이 전부 떨어졌다.
 그때였다. 강엽문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끄윽! 형님! 더우신가요?”
 그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꽤 많은 양의 최심분이었지만 술에 닿자마자 모두 녹아 없어졌다.
 ‘미안하네. 아우, 최심분(催心粉)을 술에 넣었네. 아무것도 모르고 하룻밤 편히 잘 수 있을 것이네.’
 떨어진 최심분 속에 그의 마음도 함께 떨어져 내린 것이다.
 강엽문은 다시 술잔을 들었다.
 “형님! 이번에는 떠나시지 말고 아예 우리 한평생 같이 삽시다.”
 “그럴까······ 그러나 자네 부부가 불편할 텐데······.”
 강엽문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형님, 취하셨습니까? 끄윽! 눈이 약간 풀린 듯······.”
 냉천상은 강엽문 같은 문사가 아니었다. 그의 눈이 감정을 이기지 못해 초점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엽문은 술상에 푹 쓰러져 버렸다. 냉천상은 그대로 꽤나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잠시 후 다시 평정을 되찾은 그는 쓰러진 강엽문을 안아들었다. 남자치고 매우 가벼운 것이 그의 몸이 얼마나 약한지를 말해주었다.
 냉천상은 전부터 그에게 항상 말했었다.
 ‘동생, 책도 좋지만 몸이 성해야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아닌가. 틈나는 대로 운동이라도 하게. 남자라면 자신은 물론이고 자신의 여인 정도는 지켜줄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어야 하는 법이네.’
 진심 어린 그의 말에 항상 그러겠다고 약속은 했지만 다음에 만날 때 그는 항상 변명처럼 말했다.
 ‘이렇게 든든한 형님이 있는데 무엇이 걱정입니까?’
 냉천상은 강엽문을 침상에 눕히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허! 천하의 냉천상이 이렇게 심장이 약했던가?”
 동방대군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그였다. 그런데 오늘 이꼴은 완전 거지새끼가 만두 하나 훔칠 때나 보이는 꼴이지 않는가.
 그러나 그의 자존심보다, 그의 무공보다는 죄의식이 강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의 북두(北斗)는······.”
 달없는 밤하늘에 북두칠성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북두군(北斗群) 중 태대칠성(太大七星)이 유난히도 빛을 뿌리는군.”
 그는 심호흡을 하며 두려움을 가라앉혔다. 별빛이 어슴푸레 깔린 후원 저편으로 불이 켜진 내실이 보였다.
 바람 한 점 없었지만 꽃향기가 날리는 듯했다. 그는 그 방앞에 서서 가볍게 기침을 했다.
 “험험······.”
 “누구세요? 당신이세요?”
 또르르 굴러떨어지는 옥구슬 같은 음성이 들리며 문이 열렸다.
 “아니?”
 방문이 열리고 보인 얼굴은 그녀가 언제나 보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밤이 깊었고 그가 이곳에 올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얼굴을 찡그릴 수 없었다. 그녀는 곧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버님께서 어인 일로?”
 그녀는 의혹에 찬 표정으로 몸을 사리며 입을 열었다. 냉천상은 감탄에 찬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옆얼굴에 불빛을 받고 있는 문약빙의 모습은 신화 속에 나오는 천녀(天女)를 닮아 요염하면서도 우아했다.
 ‘저토록 아름다운 얼굴은 아직 보지 못했어.’
 냉천상은 말없이 순식간에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엉겁결에 일어난 의외의 상황에 겁에 질려 뒷걸음질을 쳤다. 여인 특유의 육감이 있었고, 냉천상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게다가 오래 전부터 그의 뜨거운 눈길을 받아온 터였다.
 “이, 이게 무슨 짓······.”
 금방 비명소리라도 터져나올 것 같은 절박한 공기가 방안에 감돌았다. 냉천상은 화들짝 놀라 어쩔줄 몰라하는 그녀를 향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침착하시오, 제수씨.”
 “아주버님······.”
 자신의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혀갔다. 그러나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과 술을 마시던 그가 이 야심한 밤에 혼자 이곳에 올 만한 이유라고는 억지로라도 없었다.
 냉천상도 그녀의 눈빛을 읽었다. 그는 침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제수씨. 나는 오늘 밤 제수씨를 갖고 싶어 찾아온 것이오.”
 “어, 어떻게 그런······ 빨리 나가세요.”
 날카롭지만 소리는 크지 않았다. 어쨌든 이런 모습이 남에게 좋게 비쳐질 일은 아니었다.
 냉천상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한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소리를 지르겠어요.”
 “소리를 질러야 소용없소. 제수씨의 부군은 지금 깊은 잠에 빠져 있소.”
 “아니?”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지만 이를 악물며 참았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박살나 와르르 무너져 내리며 함께 등줄기를 훑어내리는 소름이 느껴졌다.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지난 일들이 그녀의 머리 속에 일이 몹시 잘못 되어 간다는 생각을 뿌리 깊이 심어주었다.
 “제수씨 오늘 내가 제수씨의 방에 찾아든 것은 하찮은 욕망 따위 때문이 아니오. 나는 천기에 의해 제수씨의 방에 들른 것이오.”
 한참을 못 본 사이에 남편으로부터 그가 누군가에게 잡혀 있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사이에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다시 본 그의 모습은 그녀가 생각하는 미친 사람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았다.
 그녀는 방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여전히 떨고 있었다.
 바스러져 가는 행복을 붙잡고 있는 듯했다. 애처롭긴 했지만 지금 그의 가슴속을 칼로 헤집는 일이 있다 해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수씨가 알다시피 나는 역술에도 달통했소. 천기를 짚어 본 바에 의하면 오늘 밤 제수씨와 내가 합일(合一)하게 되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제황(帝皇)을 낳을 수가 있소.”
 “해괴한 소리 그만하고 어서 이 방을 나가 주세요!”
 그녀가 날카롭게 외쳤지만 냉천상의 발걸음은 여전히 그녀에게로 옮겨질 뿐이었다.
 “제수씨, 천기는 거스를 수가 없는 것이오. 제수씨의 사주에는 제왕의 어머니가 될, 이른바 왕비의 운을 끼고 태어났소.”
 그녀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철저한 경계의 눈빛으로 그를 쏘아볼 뿐이었다.
 “나 역시 제왕의 아버지가 될 상(相)이오. 우리의 궁합은 하늘이 점지한 것. 천생의 배필이자 제왕지재를 얻을 수 있는 운기(運氣)까지 일치해 있소.”
 그녀는 도통 말이 없었다. 벽을 향해 앉아 있는 문약빙의 모습은 바위와도 같았다. 북풍한설(北風寒雪), 삭풍이 그녀의 언저리를 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자의 생명은 정절에 있거늘 어찌 천기가 법도에 어긋나게 행하여질 수 있단 말이죠?”
 “제수씨, 진나라 시황(始皇)은 여불위의 아들이오. 천상의 배필은 시운의 어긋남으로 해서 각기 달리 헤매다가도 언젠가 한 번은 결합하는 것이외다.”
 “음······.”
 “진시황의 모주(母主)와 여불위의 만남이 진정 그러하였소이다. 그리고 어찌 인간의 생각으로 천기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겠소.”
 냉천상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녀는 어떠한 말로도 요지부동이었다.
 “제수씨, 사욕(私慾)은 없소이다. 천기를 놓치면 하늘에 대죄를 짓는 것이외다.”
 “그렇다면 제게도 생각할 기회를 주세요. 그러니 오늘 밤은 그냥 돌아가 주세요. 이 일은 비밀로 하겠어요.”
 어느덧 그녀는 냉정을 되찾은 듯 조리있게 말을 했다. 그러나 칼바람이 일 듯한 차가운 음성이었다.
 냉천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 밤을 놓치면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소. 갑자년 무진월 경인일 을축시의 제왕지재의 사주는 영원히 오지 않소이다.”
 그녀는 냉천상이 이대로는 결코 물러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굳어지자 그만 쓰러질 것만 같았다.
 “천기는 한 번 있지. 두 번 되풀이되는 것이 아니오. 제발! 제발 제왕지재의 어머니가 되어 주시오.”
 “나는 제왕지재의 어머니가 되길 원하지 않아요. 단지 정숙한 아내이기를 원할 뿐이에요.”
 그녀는 그가 나가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자신이 밖으로 나가려 냉천상의 몸 뒤로 돌았다.
 ‘내가 마음 속으로나마 해괴한 생각을 했기에 이런 마(魔)가 끼는 거야.’
 뼛속 깊은 후회가 그녀의 전신을 후려쳤을 때였다. 갑자기 냉천상이 그녀의 완맥을 움켜쥐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녀는 냉엄한 음성으로 외쳤다.
 “이 손을 놓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겠어요.”
 “소리를 질러봐야 소용없소.”
 “사람 살려욧!”
 그녀의 외침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냉천상은 그녀의 명치를 엄지로 찔렀다.
 “으읍!”
 그녀는 그대로 꺾어지듯 그의 품으로 쓰러졌다. 냉천상은 그녀를 방안에 놔두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장원 내에는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되었군. 하인들의 수혈을 모두 짚어놓았으니 오늘 일을 아는 사람은 없겠지.”
 그는 야천을 올려다보았다. 성두(星斗)는 찬란하게 만천(滿天)을 수놓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고요 속에서 만천의 별들이 자신의 행동을 응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물전의 생선처럼 자신의 모든 것이 까발려지는 듯한 별빛은 오늘따라 기분 나빴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그녀가 알고······ 그리고 내가 알겠지.”
 그는 한차례 한숨을 몰아쉬었다.
 “냉천상······ 단지 자존심의 회복을 위해서가 아니라곤 말 못하겠지.”
 
 
 (2)
 
 
 정신을 잃고 흐트러진 그녀의 모습은 더욱 아름다웠다. 냉천상이 그녀를 안아 침상 위에 내려놓는 순간 약간의 흔들림으로 인해 그녀의 가슴이 질식할 듯한 흔들림을 보였다. 약간 벌려진 입술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내를 극락으로 보내 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전신을 훑어보던 냉천상의 얼굴에 더할 수 없는 감탄이 흘렀다.
 “정말 훌륭해······. 이 선(線)의 흐름······.”
 그는 침상 옆에 놓여진 물주전자를 들어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더니 그녀의 입술에 대고 넣어 주었다. 기가 막힌 감촉이었다. 이어 그는 그녀의 서너 군데 혈(穴)을 문지르면서 하나둘씩 그녀의 옷을 벗겨내렸다.
 이제 그와 그녀 사이의 벽이라곤 속치마 하나밖에는 없었다. 문약빙은 의식을 회복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막 뜬 눈을 스르르 감아 버렸다. 눈을 감는 순간 그녀의 눈꼬리로부터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만 개의 진주들, 깊고 깊은 속눈썹 아래로 만 개의 진주를 풀어놓은 듯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미안하오.”
 냉천상은 속삭이면서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그녀의 속옷을 벗겨갔다. 기력과 함께 의지도 잃어버린 듯 문약빙은 그의 손놀림에 따라 이리저리로 움직였다. 냉천상은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이런······ 마치 바위 같군.’
 한암(寒岩)이 고목(枯木)을 느끼듯 해서야 무슨 성취를 느끼겠는가.
 ‘천하의 풍류쟁이 냉천상이 겁탈할 수야 없지.’
 그의 자존심으로는 기력을 잃은 그녀를 겁탈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나직이 속삭였다.
 “천기 때문만은 아니었소. 이 천상은 제수씨를······ 미안하오. 사랑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만 사랑하고 말았소.”
 그러나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어떤 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약빙······.”
 그가 뜨거운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바르르 떨었다.
 “당신을 사랑했기에 당신과 나의 사주를 보게 되었고 천기를 알게 된 것이오.”
 그의 손은 서서히 그녀의 전신을 어루만졌다. 깊고도 뜨거운 손놀림이었다.
 ‘흑······.’
 그녀의 전신은 느껴질 듯 말 듯한 산들바람을 받은 나뭇잎처럼 요동하기 시작했다. 그 몸짓은 해빙기(解氷期)를 알리는 전조였다. 이윽고 포근히 녹은 여체의 감촉이 냉천상의 손끝으로 전해졌다.
 ‘됐다! 드디어 서서히 불이 붙기 시작했다.’
 냉천상의 손길은 노련했다.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그의 손아래 넘치는 뜨거움에 입술을 말렸던가.
 바위와 같던 그녀의 몸에 정화(情火)가 불붙기 시작했다. 불이야 붙이기가 어려웠을 뿐이지 붙기만 한다면 절대 꺼지지 않는 법이다.
 ‘흐흑······ 아아······.’
 모든 것을 포기한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숨소리를 죽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가공할 힘은 그녀가 빗장을 걸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아······.”
 그녀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여체란 이토록 슬픈 생리를 가지고 태어났단 말인가?’
 차디찬 바윗돌처럼 얼어 있던 그녀의 육체는 어느덧 봄눈처럼 녹아내려 가벼운 신음소리가 꽃잎 같은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몸이 녹았다. 이제 그녀의 뜻마저 녹는다면 성공이다.’
 그는 자신이 사욕 때문에 그녀를 갖는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의 입술이 입술에서 떨어져 나와 그녀의 목줄기를 타고 흐르다가 귀쪽으로 미끄러져 갔다. 그는 자근자근하게 그녀의 귓불을 입술로 깨물며 속삭였다.
 “약빙······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래서 왔소.”
 “아아······.”
 그녀는 기쁨과 환희를 담은 그리고 슬픔을 담은 탄식을 뿜었다. 그의 손은 입술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쪽을 맴돌고 있을 때 그의 손은 어느새 그녀의 가슴에 가 있었다.
 그는 검날을 만지는 듯한 손길로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당신을 구했을 때 하룻밤만이라도 당신의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죽음도 기쁠 것이라는 생각을 했었소.”
 그의 속삼임은 애소(愛訴)였고 그녀는 화답하듯 가늘게 몸을 떨었다.
 ‘결코 서둘지 않으리라 밤은 아직도 길다.’
 비로소 그녀의 육체를 바라보며 음미(吟味)할 수 있는 여유가 냉천상에게 주어졌다.
 “으음······.”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신음은 순전히 부지불식간의 일이었다.
 명장(名匠)의 조탁으로 된 나신이 촛불에 감싸여 그 황홀한 상앗빛 광채로 방안을 녹여 버리고 있었다.
 부용(芙蓉)의 얼굴, 황홀한 선이 흐르는 목덜미로부터 흘러내린 우아한 선이 신비를 품은 원구의 동산에 이르러 봉긋하게 솟아 있고, 세요(細腰)의 극치를 가진 교치(巧緻)를 지나면 풍요로운 완구(緩丘)에서 절정을 치달았다.
 곤륜산(崑崙山)의 옥(玉)을 깎아 만든 기둥처럼 괴려(怪麗)한 두 다리는 질끈 눈을 감게 만들었다. 그의 시선과 함께 그녀의 몸을 훑은 것은 그의 노련한 손길이었다.
 “약빙······.”
 그의 십기천작이란 별호, 그중 세인들이 가장 쳐주는 것이 풍류였고 자신도 제일 자신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내기로 얻어진 이름이 아니었고 당연히 그는 여인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여인과 사랑을 나눌 때 여인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것은 그가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었다.
 ‘아아······ 이 뜨거운 음성······.’
 그녀는 차츰 정신마저 무너져 가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가 이렇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제대로 반항 한 번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녀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기 전 운명처럼 남편 강엽문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순간 그녀는 냉천상의 무거운 동체가 몸에 실리는 것을 느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리던 강엽문의 영상은 산산조각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소녀경구법(素女經口法)과 동현자삼십법(同玄子三十法)을 골고루 활용하리라.’
 그가 생각하는 것들은 모두 방중술(房中術), 그중에서도 천하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음양육로사십팔변(陰陽肉路四十八變)이었다. 냉천상은 서서히 사세(四勢)의 전기(前技)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서주무( 綢繆) - 먼저 그 몸을 합일(合一)하고, 이는 시작이다.
 신견권(申絹 ) - 거듭 거듭 간곡하게 정성을 다 들이니 이는 정사의 사랑이고.
 폭사어(曝 魚) - 뜨거운 태양 아래 아가미를 드러내 놓고 숨을 쉬는 고기와 같으니 이는 사랑이 극(極)을 향해 달림이고.
 기린각(麒麟角)-기린의 뿔은 극의 치(致)를 의미하는 것이니 몸과 마음이 태허(太虛)에 노니 이는 정사의 올바른 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사세의 전기는 방중비전(房中秘傳) 옥방지요(玉房指要)에 기록된 음양육로사십팔변의 일세(一世) 십이변, 즉 사세 사십팔변을 말함이다.
 냉천상은 서주무의 기법으로 들어갔다.
 “올해는 계해년이라······.”
 벌레소리도 멎은 고요 속을 그녀의 신음소리와 서주무가 행해지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그녀의 몸은 열려진 새장을 박차고 나는 한 마리 새였다. 머리 속에 든 것만 뺀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강엽문, 그는 그녀를 만족시켜 줄 수 없었다. 그러나 문약빙은 육욕에 목말라 하는 천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생각은 겪어보지 않았던 탓이었다. 지금 물을 만난 고기는 전신을 퍼덕거리며 요란한 물결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었다.
 서주무는 이내 끝나고 냉천상은 계속해서 신견권의 기법으로 들어갔다.
 “거듭 뜨겁게 사랑하니 이 달은 기묘월인지라.”
 “아아······.”
 그녀의 신음소리는 차츰 높아졌지만 냉천상의 목소리가 그 신음소릴 가렸다. 냉천상은 년, 월, 일, 시에 맞추어 음양육로사십팔변을 베풀어 갔다. 그는 능숙하게 신견권을 조절하며 폭사어의 기법으로 동작을 옮겨갔다.
 “아아······ 여, 여보······.”
 그녀의 신음소리는 이제 극에 달해 있었다.
 ‘아아······ 내 몸은 도대체······.’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몸은 바야흐로 환희를 찾아 절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폭사어도 정도가 지켜져야 그 도(道)를 깨뜨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바로 정사의 중용(中庸)의 도리였다.
 “그는 기린각의 기법으로 동작을 변형시켰다.
 “으음······.”
 그녀에게서 순간적으로 다급하면서도 짧은 강한 비음(鼻音)소리가 터져나왔다. 문약빙의 몸은 불덩어리가 되어 오정(五情)과 오욕(五慾)이 모조리 쏟아져 버린 듯 인내력의 마지막을 다하고 경련하는 팔을 뻗어 냉천상의 목을 끌어안았다.
 적시(適時)에 다다른 것이다. 그는 몸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그녀의 팔을 풀었다. 양대(陽大)로써 옥리(玉理)를 건드리고 드디어는 지공(地空)을 찔렀다.
 “아······ 아아······.”
 그녀의 교성이 겁겁(劫劫)하고 눈이 몽롱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구천일심지법(九淺一深之法)이 필요하다.’
 깊고 낮음, 완만하고 급격함, 강하고 약함의 적절한 배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구천일심을 팔천이심으로, 거기서 칠천삼심, 오천오심으로 옮아선 연심법(連深法)을 교대하다가 다시 구천일심지법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흑흑······ 아흑······ 당신이 제 주인이 되어······ 아아······ 기뻐요······ 정말 기뻐요. 아학······.”
 그녀의 열성은 극을 넘어 오열이 터질 듯할 즈음이었다. 냉천상은 이미 세 번이나 파정(破精)을 한 후였다. 그녀는 황홀의 나락과 기적 속에서 무아의 경계를 오락가락했다. 자시(子時)에 시작한 정사는 축시를 거의 지나서야 그 운우(雲雨)의 막을 내렸다.
 정사는 끝났어도 문약빙은 황홀경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마지막 선경(仙境)의 가르침이 남았군.”
 그는 그녀에게 음양육로사십팔변의 삼세(三勢)의 후기(後技)를 베풀었다.
 원앙무(鴛鴦舞) - 원앙의 사랑은 입맞춤에 있고.
 유화도(柳花跳) - 버드나무 꽃과 여체는 격랑에 일어 이를 다스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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