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序)
“유모 안녕! 석두 안녕! 앗 오 매(妹)도 안녕! 하마터면 놓칠 뻔했네.”
“아이고 공자님, 살살 좀 뛰셔요!”
백타문엔 활기가 넘쳤다. 소공자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소공자가 돌변했다.
하루가 멀다고 사고나 치던 철부지가 이젠 먼저 나서서 남을 돕기도 하고, 무공에도 열의를 쏟았다.
그러더니 이젠 인사한답시고 백타문 이곳저곳을 휘저어 놓았다.
처음엔 거처 부근에서만 손을 흔들던 소공자였으나, 날이 갈수록 범위가 넓어졌다. 학관마저도 빼먹으며 백타문을 뛰어다녔다.
보다 못한 문주가 나서서 말리기도 했지만 소공자는 완강했다. 자식 된 도리로서 실패하면 안 된다는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하루하루 더 열심히 달렸다.
그러기를 열흘가량. 드디어 소공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동시에 인세의 것이 아닌 듯한 음성이 소공자의 고막을 울렸다.
<임무 달성―착한 아이는 매일 인사를 해요. 10일 차. (66/66명)>
―보상이 지급됩니다.
―칭호가 장착됩니다.
<예의 바른 아이>
적이 아닌 대상에게 기본 호감도 5% 상승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됐다아!”
두 팔을 하늘 높이 뻗는 소공자 유소운의 얼굴엔 성취감이 가득했다.
# 백타문의 소공자
“후우···.”
호남 장사에 터를 잡은 백타문.
은은한 흙빛 진목(眞木) 책상 앞에 청수한 인상의 장년인이 앉아 있다.
백타문의 문주인 유호연이었다.
유호연은 보던 장부를 덮으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가는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백타문의 위세는 몇 세대 전부터 꾸준히 줄었지만, 근래의 하락세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가팔랐다.
‘사업만 제대로 되었더라면.’
몇 해 전 큰 실패를 맛봤었다.
야심차게 창설했던 상단이 고작 첫 번째 출행에 몰살을 당했었다.
조사 끝에 감숙에서 암약하는 마적단이 흉수라는 게 밝혀졌지만 여러모로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이때 진 빚은 아직도 백타문의 목을 죄고 있었다.
또한, 그보다 몇 해 앞서 있었던 전대 문주의 실종도 하락세에 한몫했다.
훌륭한 수장이자 무인이었던 유진충이 갑작스레 사라진 뒤로 백타문이 겪은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여러 요인 탓에 백을 훌쩍 웃돌던 무사들도 이젠 서른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절로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유호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를 괴롭히는 문제는 아직 두 가지나 더 있었다.
하나는 사랑하는 부인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의 결실인 외동아들, 소운이었다.
무림 방파의 후계자면 후계자답게 무공에 힘써야 할 터인데, 도통 사고만 칠 줄 알지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잠시 졸던 총관의 유건(儒巾)을 뒤집어놔 망신주는 건 예사요, 어떤 때는 인근의 주인 잃은 개들을 죄 거둬오기도 했다.
덕분에 한동안 백타문 곳곳에서는 밤낮 할 것 없이 개소리가 들려왔었다.
그뿐인가.
내라는 학관비는 안 내고 잡동사니를 사 모으지 않나, 연무장에 비치해 놓은 병장기를 빼돌려서 군것질하지 않나.
고삐 풀린, 아니 애초에 고삐 없는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는 탓에 유호연의 두통은 나날이 심해져만 갔다.
‘이젠 엄하게 대해야겠어.’
아픈 어미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온전히 쏟고자 했었다. 크게 혼날 일도 조용히 넘어간 게 어디 한둘이던가.
하지만 더는 이래선 안 됐다.
‘후계자에게 걸맞은 태도를 심어주마.’
유호연의 표정엔 단호함이 감돌았다.
***
[시스템에 새로운 사용자를 등록합니다.]
어젯밤이었다.
소년 유소운의 귀에 생전 처음 듣는 여인의 음성이 들렸었다.
처음엔 귀신 들린 줄 알았다. 아버지 말씀을 안 듣고 사고만 치고 다닌 벌로 말이다.
다행히 귀신은 아니었다. 음성은 본인을 ‘진이’라고 소개하며 많은 말을 해주었으니까.
“진아.”
지금처럼 부르면, 진이는 대답했다.
[‘지니’입니다.]
소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됐든 대답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신기하단 말야.’
소운은 삐딱하니 누워 우측 하단을 바라봤다. 테두리가 가죽으로 곱게 처리된 고급 비단이 보였다.
시스템이라는 것에 등록되었다는 말이 들림과 동시에 나타난 것이었다.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눈에만 보이고 손으로는 만져지지도 않았다.
비단 위엔 글자들이 쓰여 있었다.
<상태><임무><보관>
<무공>
진이는 각 항목을 친절히 설명해 주고, 임무를 줬었다. 저 글자들을 한 번씩 읽어보란 거였다.
소운은 속는 셈치고 읽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상태’라고 말하자 커다란 비단 두루마리가 나타나며 자신에 대한 정보가 나타났고, 보관이라고 말하자 소재지를 알 수 없는 창고가 나타났다.
단순히 생각만으로 물건을 넣고 뺄 수 있는 그런.
여하튼 시키는 대로 하고 나자 무려 금 다섯 냥이나 되는 엄청난 액수가 보상으로 주어졌다.
이쯤 되자 이 시스템이란 것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근데 말이야. 이 시수탬이란 게 대체 뭐야? 나한테 왜 이런 게 생긴 거고.”
진즉부터 궁금했는데 경황이 없어 묻지 못했었다.
진이는 간단히 대답했다.
[후자부터 답해 드리겠습니다. 시스템은 혈통을 통해 전이됩니다. 격세유전(隔世遺傳)이기에 전대 사용자와 후대 사용자의 차이가 수십 세대의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놀라운 얘기였다. 조상님 중 자신과 같은 일을 겪었던 사람이 있었다니.
진이의 말은 계속됐다.
[시스템은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작동합니다. 사용자의 성장을 도와 최고가 되게 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 강호제일인이 되게 해준다는 얘기였다.
소운은 코웃음을 쳤다. 진이와 시스템이 신묘하긴 했지만, 어디 강호제일인이 뉘 집 개 이름이라던가?
하여 웃음기를 머금고 다시 물었었다. 조상님은 강호제일인이 되었느냐고.
[신화가 되셨습니다.]
이 한마디에, 소운의 온몸엔 닭살이 돋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손발이 절로 접히며 온몸이 베베 꼬이는 느낌?
그래도 일단은 시키는 대로 해볼까 하는 마음은 생겨났다.
혹시 또 아는가. 강호제일인까진 아니더라도 호남제일인은 될 수 있을지.
그때였다.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잠시 들어가도 돼요?”
“들어와.”
열대여섯은 되었을까.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진홍이란 이름의 시비였다.
방 안을 두리번거리는 진홍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또 잔뜩 어지르셨네요.”
“그럴 일이 있었어. 헤헤.”
진홍은 바지런히 움직이며 방 정리를 시작했다. 바닥에 널브러진 서책을 서가에 꽂고, 당최 용도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들을 한 곳에 가지런히 쌓아놓았다.
“문주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기억 안 나세요?”
“뭐라고 하셨는데?”
“거적때기를 자꾸 늘리시면 용돈 끊으신다고요.”
“아아 그거?”
소운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이를 먹었더니 기억력이 전 같지 않네.”
“이제 고작 열둘이시잖아요!”
“열두 살 되니까 하루하루가 달라.”
기가 막힌지 진홍은 두 손으로 허리춤을 짚으며 소운을 바라봤다.
“어휴··· 말씀이나 못 하시면. 정말 용돈 끊기시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공자님 좋아하는 당과도 못 사드실 텐데.”
“백타문에 널린 게 내다 팔건데 뭐.”
“아이고 머리야···.”
진홍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가 몇 년간이나 보살펴온 공자지만 이럴 때는 당최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끝났다.’
소운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신분이야 위아래가 있었지만, 기실 진홍은 소운에게 손위 누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잔소리가 제대로 시작되면 꼼짝없이 듣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그리되기 전에 말문이 닫히게 해야 했다.
오늘은 성공이었다.
소운은 상태창을 소환하기 위해 조막만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못다 끝낸 시스템 탐구를 이어갈 요량이었다.
“상태.”
속삭이듯 작게 말하자, 상태 정보를 새긴 비단 두루마리가 시야 한쪽을 가리며 나타났다.
[유소운, Lv: 4]
경지: ―
칭호: ―
평판: 0
자질: 12
소속: 백타문
체력: 6
내력: 8
근력: 2
순발력: 3
포인트: 0
진이가 준 임무를 수행할 땐 의미도 모르고 넘어갔었다.
‘Lv가 뭐지?’
Lv라는 글자를 한참 쳐다보자, 설명 창이 나타났다.
<레벨(Lv): 강함의 등급. 높을수록 좋다.>
‘레벨이라고? 흐음.’
다음으로 소운은 하나씩 정보의 공백을 채워갔다. 약 반각여가 지나자 소운은 상태창에 새겨진 항목들에 관한 정보를 전부 파악했다.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참 허접하네.’였다.
“참, 공자님 깜빡하고 못 드린 말씀이 있어요.”
방 정리를 다 끝냈는지, 진홍은 어느새 문가에 몸을 걸치고 섰다.
소운이 진홍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진홍은 웃음이 터지려는 얼굴로 말했다.
“문주님이 신시(申時)까지 연무장으로 오라고 하셨어요. 제 시각에 가시려면 지금 뛰셔야 할걸요? 그럼 전 이만! 키킥.”
쌩하니 달려나가는 진홍. 홀로 남은 소운의 얼굴에 의문이 어리다, 이내 일그러졌다.
“에이 씨!”
소운은 신을 신는 둥 마는 둥 하곤 벼락처럼 달려나갔다. 아무리 사고뭉치여도, 아버지는 무서운 법이었다.
***
“허억··· 허억···.”
황급히 당도한 연무장엔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아구 죽겠다.”
소운은 연무장 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진매 나중에 두고 봐···!’
적당히 숨을 몰아 쉬자 힘든 게 어느 정도 가신다. 몸이 편해져서 그런지 복수심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소운은 진홍을 어떻게 골려줄까 머리를 굴렸다.
‘아침에 신발을 숨겨둘까?’
안 된다. 진홍은 자신보다 훨씬 빨리 기상한다.
‘방에 귀뚜라미를 한 열 마리 정도 풀어놓을까?’
이건 괜찮을 것 같았다. 진홍은 벌레라면 질색을 했으니까.
‘아니지. 열 마리는 조금 과해.’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진지해진 소운이었다.
그렇게 한창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을 때, 연무장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유호연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소운은 벌떡 일어났다.
“오셨어요? 헤헤.”
웃는 얼굴에 침 뱉겠냐는 말이 있다. 소운은 있는 힘껏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오늘의 유호연은 씨익 마주 웃어주던 평상시와는 달랐다.
“일전에 내준 과제 기억하느냐?”
“과··· 제요?”
“잊어버렸느냐?”
소운이 머리를 긁적이는데,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일지를 참조하십시오.]
‘일지?’
소운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일지 창을 띄웠다. 타인과 나눈 모든 대화가 시간별로 기록되어있었다.
진이의 도움 때문인지 곧바로 며칠 전 연무장에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나왔다.
<아버지: 자, 뇌풍권(雷風拳)의 초식은 이게 끝이다. 다음 연무 시간까지 뇌풍권의 형(形)을 전부 외워오너라.>
‘허걱.’
이제야 기억이 떠오른다.
“뇌, 뇌풍권의 형을 외워오라고 하셨었죠.”
“다행히 기억하는구나. 그럼 한번 펼쳐보려무나. 설마 이번에도 아비를 실망하게 하진 않겠지?”
“혹시 실망하게 해드리면 어떻게 되나요···?”
당돌한 질문에도 유호연의 표정엔 일절 변화가 없다. 대신,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질문에 답했다.
“폐관시킬 예정이다.”
“헐! 폐관수련이요? 말도 안 돼요!”
“아니, 돼.”
“갑자기 이러시는 게 어딨어요!”
“시끄럽고, 당장 펼쳐 보거라.”
아주 호되게 혼낼 생각을 하고, 유호연은 팔짱을 꼈다.
“이힝···.”
소운은 우거지 죽상을 했다. 자연히 뇌풍권의 기수식을 취하는 태도도 소극적이었다.
‘폐관이라니, 이 나이에 폐관이라니!’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진이에게 받은 금덩이로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당과도 한 보따리는 사 먹어야 했고, 진명이 녀석이랑 다루(茶樓)에도 가야 했다.
사실 이것까진 괜찮았다. 정말 마음에 걸리는 건, 엄마였다.
지금도 하루에 한 번, 그것도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만날 수 있는데 폐관에 들어가면 그마저도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그때 비단 두루마리가 펄럭이며 나타났다.
<돌발 임무―아버지에게 희망의 손길을>
언제나 마음고생을 하는 아버지. 한 번쯤은 기쁘게 해드리는 게 어떨까요?
―뇌풍권의 투로를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 보이세요.
―성공 시 <희귀 비급 상자>, <희귀 무기 상자> 지급.
―실패 시 칠 주야간 폐관.
‘이건 또 뭐야!’
아예 쐐기를 박다못해 관 뚜껑을 닫아버리는 임무가 아닌가!
실패할 게 뻔한 데 실패하면 7일간 감금이라니!
하지만 천만다행이게도, 이번에도 도움의 손길이 내밀어졌다.
[수련 기능을 활성화하시겠습니까?]
‘수련 기능?’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빨랐다. 소운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수련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현재 설정 무공―뇌풍권.]
진이의 음성이 끝남과 동시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투명한 형상의 인형이 나타난 것이다.
전체적으로 소운과 꼭 같은 체형이었다.
인형은 뚜벅뚜벅 걸어 소운과 제 몸을 겹쳤다.
소운은 깨달았다. 인형이 뇌풍권의 투로를 그릴 거라고.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인형은 뇌풍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소운은 얼른 인형의 자세를 따라 했다. [훌륭해요!]라는 진이의 말이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이건 또 뭐야. 잘했다는 건가?’
그때 인형이 뇌풍권의 1초식 뇌진온을 펼쳤다.
소운은 재빨리 인형을 따라 왼발로 좌전방을 밟으며 왼 팔뚝을 내뻗었다.
자세가 어설펐는지 [아쉬워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라고!’
소운은 개의치 않았다. 하체에 힘을 주어 몸을 당기고, 팔뚝을 내리면서 그 자리를 굳게 쥔 오른 주먹이 힘껏 가격했다.
‘어라?’
지켜보던 유호연의 눈이 커졌다. 다소 어설프긴 했지만, 그래도 소운이 그리는 투로는 확실히 뇌풍권의 그것과 유사했다.
이어지는 동작도 마찬가지였다. 소운은 허우적거리면서도 끝까지 인형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결코 폐관만은 피하고 싶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이윽고 오른발을 높이 차올리며 마지막 초식인 풍뢰추혼이 끝났다.
소운은 숨을 할딱이며 유호연을 바라봤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냐는 듯 뭔가 자랑스러워 보이는 표정과 함께였다.
“뜻··· 밖이구나.”
유호연은 솔직히 놀랐다. 당연히 과제 따위 까마득히 잊었을 거라 여겼는데 그 생각이 틀려버렸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기뻐야 하는데, 유호연은 외려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소운이 과제를 해왔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었다.
유호연은 이런 마음은 꾹 누르고 말을 이었다.
“고생했다. 오늘은 전반부 초식의 세밀함을 손보자꾸나.”
‘됐다!’
소운의 눈앞에 새로운 글자들이 나타났다.
<임무 달성―아버지에게 희망의 손길을>
―보상이 지급됩니다.
―경험치가 50 상승합니다.
―누적 경험치: 150.
―다음 레벨업까지 필요 경험치: 30.
***
수련이 끝났다. 소운은 어머니의 처소를 향해 달렸다.
“엄마아아!”
백타문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소운은 어머니의 처소에 도착했다.
유모가 후다닥 달려 나왔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막으며 연신 “쉿! 쉿!”거렸다.
“왜? 엄마는?”
“막 잠드셨어요. 마님 깨지 않게 조용히 하셔요.”
“헉. 그래?”
소운은 자기도 손가락을 들어 입술을 가렸다. 이미 지를 소리는 다 질러놓고 말이다.
“우리 소운이 왔니···?”
처소 안에서 병색이 완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구 못살아.”
유모가 소운을 흘겼다. 마님의 수면이 만성적으로 부족하다는 걸 알기에 한 행동이었다.
소운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약향(藥香)이 가득 메운 공간. 침상 위에 허옇다 못해 투명해 보이는 피부의 아름다운 여인이 누워 있다.
소운의 어머니인 주설란이었다.
“엄마. 나 때문에 깼어?”
주설란은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 운아 보고 싶어서 안 자고 있었어···.”
“으응.”
거짓말이다. 그걸 알기에 소운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엄마는 태어날 때부터 심약한 체질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 결실인 자신을 낳으며 건강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고 했다.
이따금 소운은 엄마가 아픈 게 꼭 자기 탓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엄마 오늘 있잖아···.”
소운은 슬그머니 말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무공을 열심히 연마해서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었다는 얘기였다.
재미난 얘기도 아니었는데 주설란의 창백한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저, 공자님···.“
두 모자를 지켜보던 유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뜰 때가 된 것이다.
“또 올게. 엄마.”
처소를 나오는 소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엄마의 병세가 갈수록 위중해지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거처를 나와 터덜터덜 걷고 있는데 저 멀리서 총관 응계춘이 다가오고 있었다.
“공자. 무슨 일이 있는가? 표정이 영 말이 아닌데.”
“엄마 보고 왔어요.”
“아하··· 그래서 그랬군.”
응계춘은 딱하다는 듯 옅은 한숨을 흘렸다.
“금방 일어나실 걸세. 이번에 문주께서 곤륜의선(崑崙醫仙)을 어렵사리 초빙하지 않았나. 공자는 무거운 마음을 거두고 이제 그만 백타문의 후계로서의 자각을···.”
“어, 모자 돌아갔다.”
뜬금없는 소운의 말.
응계춘은 황급히 머리에 인 유건을 매만졌다. 지난번 공자가 유건으로 장난친 탓에 어찌나 창피했던지.
“응? 멀쩡한··· 공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소운은 저 멀리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
“어휴 주변에 온통 잔소리하는 사람들뿐이야.”
방으로 돌아온 소운은 몸을 부르르 떨며 침상에 발라당 누웠다.
그렇게 지친 영혼에 촉촉한 휴식을 주려는데 진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템 확인을 권고드립니다.]
“아이뎀은 또 뭐야?”
<아이템: 사용함으로써 특별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물품. 보관 창에서 확인 가능. 일반―고급―희귀―고대―영웅―신화―불멸의 일곱 가지 등급이 있음.>
“등급이 많기도 하네.”
소운은 보관 창을 소환했다. 널찍한 반투명 비단이 시야 전면을 가리며 나타났다.
비단 바탕엔 격자무늬가 어지러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중 맨 첫 번째 칸엔 누런 금덩어리가, 두 번째, 세 번째 칸엔 상자가 하나씩 있었다.
“내 금돌이들 잘 있었니? 헤헤.”
아이템을 꺼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원하는 항목에 눈을 맞추고 깜빡이면 되는 거였다.
곧 작은 상자 하나가 앞에 놓였다. 희귀 비급 상자였다.
“근데 희귀 등급은 그렇게 좋은 게 아니네?”
희귀는 일곱 가지 등급 중에 밑에서 세 번째다. 소운의 입장에선 좋아 보일 수가 없었다.
[뇌풍권의 등급은 일반입니다.]
진이는 단 한마디로 소운의 입을 다물렸다.
소운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비급 상자의 상판을 잡았다. 그 상태에서 살짝 힘을 주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우와!”
상자가 있던 자리엔 새것처럼 보이는 비급이 대신 자리했다.
“운형보(雲形步)?”
표지에 적힌 이름을 말하자, 비급은 늦은 봄에 내린 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희귀 등급 무공 <운형보>를 학습합니다.]
[새로운 임무가 등록되었습니다.]
<구름을 밟아 보아요.>
보법 없는 무인은 달지 않은 당과나 다름없어요. 꾸준히 익히도록 해요!
―운형보 2성을 성취하세요.
―성공 시 <자질 개선권> 지급.
“헐. 자질도 개선돼??”
소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자질이 너무나도 낮아 내심 시무룩했었는데, 횡재한 기분이었다.
[운형보의 수련 기능을 활성화하시겠습니까?]
“좋아! 운형보 가자!”
진이의 말에 잔뜩 고양된 소운이 힘차게 외쳤다.
[공간이 협소합니다. 보법 수련엔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아, 그렇지. 보법을 방에서 익힐 수는 없는 노릇이지.”
창문을 벌컥 여는 소운. 멀쩡한 문을 놔두고 창틀을 집고 폴짝 뛴다.
‘나 흥분했소.’ 하고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차앗.”
소운은 후원에 가볍게 착지하곤 다시 수련 기능을 활성화했다.
[수련 기능을 활성화합니다. 현재 설정 무공―운형보.]
예의 그 인형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엔 지난번과는 뭔가가 사뭇 달랐다.
‘뭐지?’
소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손바닥을 탁 쳤다.
지면에 인공적으로 형성된 발자국이 널려 있었다. 가운데에 숫자가 쓰여 있는 것으로 봐서 발을 디디는 순서인 듯했다.
그리고 인형의 위치도 달랐다. 이전엔 자신과 몸을 겹쳤는데, 이번엔 발자국들의 정중앙에서 홀로 자리를 잡고 있다.
[시범을 보고 따라하십시오.]
소운을 배려해서인지 인형은 느릿하게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밟힌 발자국이 사라졌다. 얼마 되지도 않아 모든 발자국은 사라지고, 인형은 다시 원래 위치에 우뚝 섰다.
“···이걸 어떻게 해? 내가 기재도 아니고.”
[연습은 완벽을 만듭니다.]
“흐음.”
발자국이 다시 생겨났다.
소운은 터덜터덜 걸었다. 인형이 선 위치로 자리를 옮기자 주변이 더욱 복잡해 보였다.
“음··· 이렇게였나?”
일단 1번 발자국을 밟자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좋아요!]
2번, 3번까진 괜찮았다. 그러나 4번 발자국의 위치는 3번과 다소 멀었다.
힘껏 왼발을 밀어 가까스로 밟았다.
[허접해요!]
‘말이 조금 심하잖아!’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니 끝은 봐야 한다.
소운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기어코 모든 발자국을 밟았다. 하도 비난을 듣다 보니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곧 들려온 총평도 마찬가지였다.
[형편없네요.]
“에이씨 처음 하는 건데 당연한 거 아냐?”
소운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재수련을 시행하시겠습니까?]
소운은 잔뜩 튀어나온 주둥이를 집어넣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방금보다 한결 진지해진 모습이었다.
시스템이 내뱉는 비난이 오기에 불을 붙인 것이다. 본인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번엔 인형과 함께 움직였다. 아무리 속도가 느릴지언정 인형의 움직임을 맞추는 건 소운에겐 무리였다.
그러나 소운은 몇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처음부터 운형보를 반복했다.
가히 밀어도 쓰러지지 않는 부도옹(不倒翁: 오뚝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소운은 힐끔 우측 상단을 바라봤다.
무공의 진척도가 새겨진 비단 두루마리가 있었다.
처음 시작할 때 1성 0%였던 게 이젠 1성 35%까지 늘어 있었다.
[좋아요!]
[훌륭해요!]
[아쉬워요!]
[좋아요!]
보법을 반복할수록 비난보단 칭찬의 말이 늘었다.
소운은 어린아이답게 잔뜩 신나서 더 열심히 발을 놀렸다.
“촤! 촤!”
지치지도 않는지, 소운은 무려 한 시진이 지나서야 수련을 멈췄다.
동시에 임무를 달성했다는 비단 두루마리가 떴다.
<임무 달성―구름을 밟아보아요>
―보상이 지급됩니다.
―경험치가 80 상승합니다.
―누적 경험치: 230.
―레벨이 상승합니다.
―다음 레벨업까지 필요 경험치: 70.
“됐다!”
소운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벌러덩 드러누웠다.
굉장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게 성취감이란 걸까?
여태 장난에만 취미를 붙여왔던 소운에겐 임무를 달성함으로서 주어지는 보상과 성취감이 마력(魔力)으로 다가왔다.
어느덧 저녁을 향해 가는 하늘이 잔잔한 노을로 물들어 있다.
“앗, 이럴 수가!”
뭔가 잊은 게 있는지, 소운이 벌떡 일어났다.
“밥 먹을 시간이네.”
소운은 옷에 묻은 흙을 대강 털고 부모님의 거처인 청심각을 향해 달렸다.
***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소운. 침상 위에 앉아 보관 창을 소환했다.
보관 창엔 금덩이와 아직 사용하지 않은 희귀 무기 상자, 그리고 새로 받은 자질 개선권이 있었다.
소운은 우선 희귀 무기 상자부터 꺼냈다.
“어떤 녀석이 나오려나.”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 건 단검이었다. 손에 쥐자 설명이 나타났다.
<진가철방제 단검>
진가철방의 최고 장인인 진영추가 만든 단검.
―등급: 희귀
―내구도: 30
―효과: 순발력 +10 / 치명타율 +2%
“평범하네.”
희귀 등급이니만큼 나쁘진 않겠지만 설명만으로는 딱히 장점을 찾을 수가 없다.
다음으로, 소운은 자질 개선권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자질 개선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당연.”
[자질 개선권을 사용합니다. 소운님의 신체를 재구성합니다.]
“뭐?”
으드득.
놀랄 새도 없이 자질 개선이 시작됐다.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소운의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파지기 시작했다.
“끄으으···.”
어마어마한 격통이 소운의 전신을 휩쓸었다. 아직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고통이었다.
소운은 거품을 물며 침상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끄아아아···!”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영원할 것 같던 고통이 끝났다.
정확히 말하면, 고통만 끝났다. 자질 개선의 전체적인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체내에 쌓인 노폐물을 배출합니다.]
소운에게서 짙은검은 색의 찐득한 점액이 흘러나왔다. 점액은 엄청난 악취를 풍기며 방 안을 잠식했다.
“하악··· 하악···.”
소운은 입을 열고 할딱거렸다. 악취 때문에 도저히 코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오래지 않아 점액의 배출이 끝났다.
[자질 개선 부분 완료. (1/4)]
[대상자의 근골이 개선되었습니다. 자질이 32로 상승했습니다.]
“세, 세 번이나 더 남았다고···?”
망연자실한 듯 소운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벌컥 하며 문이 열렸다.
“공자님! 무슨 일 있으세요?”
다급한 음성과 함께 뛰어든 것은 진홍이었다. 소운이 지른 소리를 듣고 걱정되어 달려온 것이었다.
걱정이 가득한 음성에 소운은 내심 뭉클했지만, 이어지는 진홍의 말에 그 생각은 싸늘히 식어버렸다.
“공자님··· 똥 싸셨어요?”
진홍은 코를 거머쥐었다.
# 세고 넌 내 거야
짹짹.
이른 아침, 눈부신 햇살이 소운의 눈가를 간지럽힌다.
“으음···.”
잠에서 깨기 싫은지 소운은 이불을 끌어안고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러나 우렁차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귀에 박혀 든다.
결국 소운은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불을 발로 뻥 찬다.
“으아아!”
지난밤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진홍은 다 이해한다는 듯 소운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나머지 한 손으론 여전히 코를 틀어막은 채로 말이다.
여하튼 진홍의 희생(?)하에 침구가 교체됐고, 거기에 목욕물까지 따뜻하게 데워주어 소운은 목욕을 하고 잠이 들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자질이 올랐으니까 무공도 더 빠르게 익혀질 거야.’
소운은 누운 채로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상태 창을 소환했다.
[유소운, Lv: 5]
경지: ―
칭호: ―
평판: 0
자질: 32
소속: 백타문
체력: 7
내력: 8
근력: 2
순발력: 3
포인트: 4
어제 레벨이 올랐었는데 여러 일이 있었다 보니 이제야 확인하게 됐다.
“레벨이 하나 올랐네. 자질도 높아졌고. 또 어디가 달라졌지?”
[수련으로 체력이 1 오르고, 레벨업 보상으로 포인트가 4 올랐습니다.]
진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비단 두루마리가 펄럭이며 나타났다.
<포인트>
레벨업할 때마다 4씩 생성.
체력, 내력, 근력, 순발력에 분배할 수 있음.
포인트가 분배되면 능력이 상승.
예) 내력에 1포인트를 분배하면 3개월치의 내공이 상승.
“포인트 하나에 3개월치 내공이 상승한다고?!”
소운의 입이 떡 벌어졌다.
6살 때 아버지의 도움으로 단전을 생성하고, 6년간 심법을 익혀왔다. 그런데 이제 고작 2년치 내공이 쌓여 있다.
물론 이는 소운이 운기조식을 워낙 게을리하고, 또 백타문의 기본 심법인 뇌정기공의 효율이 높지 않아서이긴 했다.
만약 소운이 단련에 힘썼고, 강호일절이라 불리우는 소림의 심법을 운용했다면 지금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여하튼 포인트에 관한 설명은 놀라움을 넘어서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내공에 몰빵해야겠네!”
소운이 잔뜩 흥분하여 외쳤다.
그러나 진이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은 체력, 순발력에 배분하는 것을 권고드립니다.]
“왜? 무조건 내공이 많아야 좋은 거 아냐?”
[저렙일 때는 내공이 효율적으로 사용되기 어렵습니다.]
“저렙?”
[레벨이 낮다는 뜻입니다.]
“흐음. 그럼 내력은 어떻게 올려?”
[우선 운기조식에 투자하는 시간을 늘리십시오. 또한 간혹 임무 보상으로 영약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직 해금되지 않은 기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시스템에서 영약을 주기도 한다는 말이지? 좋아. 그럼 일단 체력 2, 순발력 2에 투자.”
[체력과 순발력이 2씩 상승했습니다.]
미묘한 감각이 몸을 감싼다. 소운은 신기한 듯 팔을 휘두르기도 하고, 무릎을 접었다 펴기도 했다.
“공자님 일어나셨나요?”
밖에서 진홍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소운은 입을 틀어막으며 냅다 누웠다.
“아직 주무세요? 식사하시고 학관 갈 준비하셔야죠.”
‘아, 학관.’
소운은 인상을 잔뜩 썼다.
***
약 백여 년 전, 삼공(三公) 중 하나인 사도(司徒)라는 높은 벼슬을 지낸 위인이 있었다.
이자는 말년에 고향인 장사로 내려와 학관을 차렸는데, 그게 바로 송원학관이다.
송원학관은 초대 관주의 명성으로 인해 빠르게 성장했다.
죽기 전, 초대 관주는 제자 중 하나에게 학관을 물려주었다. 이때 남긴 유언이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주란 말이었다.
후대 관주는 초대의 유지를 잘 계승했다. 가난한 아이들을 장학생으로 선발한 것이다.
그러자, 선순환이 발생했다.
고등 교육의 기회를 얻은 아이들은 누구보다 절실히 학문에 매진했다.
간절함은 기적을 낳는다 했던가.
이들 중 과거에 급제하거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이들로 인해 송원학관의 명성은 널리 퍼졌다.
호남의 안찰사나 부사 등 고급 관료들도 자제들을 송원학관에 보내기 시작했다.
다음 차례는 상인들과 무림 방파의 수장들이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심지어 관료들까지 자제를 이곳으로 보내는데 그들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이를 송원학관에 보내지 않으면 뒤쳐져 보이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학관생이 늘며 높아진 수익으로 송원학관은 장학생의 수를 다시 늘렸다.
이렇게 몇 대가 지나자 송원학관은 호남 땅에서 으뜸가는 곳이 되었다.
소운도 송원학관의 학생이었다.
“두 시진 후에 요 앞으로 오겠습니다요.”
마부 장 씨가 학관 맞은편을 가리켰다. 알겠다고 대답하며 마차에서 내린 소운이 학관으로 향하는 대열에 합류한다.
소운을 알아본 아이들이 부지런히 인사를 건넨다. 언제나 밝고 장난기가 많아 소운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소운은 마주 인사하면서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우···”
누군들 아니겠냐만, 소운은 정말 글공부가 싫었다.
시필사명(視必思明)이니 견득사의(見得思義)니. 뜬구름 잡는 소리에 놀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투자하는 게 너무나 아까웠다.
더군다나 학관의 글 스승이 오죽 엄한 게 아니었다. 자연히 가뜩이나 없던 흥미도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소, 소운아···.”
소운은 우거지 죽상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허연 피부에 유약하게 생긴 녀석이 손 흔들며 다가온다.
홍영무관의 셋째, 홍진명인데 무관의 자제답지 않게 몸도 약하고 소심한 성격이었다.
소운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어, 왔냐?”
“으응. 고, 공부해 왔어···?”
“뭘?”
“까, 까먹었어? 오늘 세, 세고(歲考) 치는 날이잖아···.”
“아, 그게 오늘이었어?!”
소운의 미간이 좁혀진다.
세고라는 건 본디 나라의 교육 기관에서 1년에 한 번 치는 시험을 의미한다.
송원학관은 이 제도를 본떠 분기별로 세고를 행했다.
성적이 우수한 자에겐 장학금을 비롯해 각종 혜택이 주어졌고 반대로 저조한 성적을 받은 자에겐 유급과 부모님 소환 등의 처벌이 주어졌다.
물론 소위 내로라하는 작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본인들 체면에 말이 되냐며 말이다.
관주의 대처는 단호했다.
“이 방침이 싫으시면 다른 학관으로 가십시오.”
이 한마디로 정리를 끝낸 것이다.
여하튼 지금에 와선 세고가 제대로 정착해 가난한 집 아이들에겐 한 줄기 희망이, 잘사는 집 아이들에겐 호환마마에 버금가는 절망이 되고야 말았다.
“아후···. 미치겠네.”
소운은 당연히 후자였다. 지난번도, 지지난번도, 지지지난번도, 아버지는 소환 대상이었다.
그때마다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한숨을 내쉬던 아버지에게 어찌나 죄송했었는지.
물론 그렇다고 공부를 했던 건 또 아니었지만.
결국 소운은 머리를 쥐어뜯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새로운 임무가 등록되었습니다.]
<세고 넌 내 꼬>
언제나 세고 앞에 축 처지는 당신. 사내대장부가 그래서 쓰나요? 이까짓 시험 따위 파죽지세로 통과해 버리자고요!
―세고를 통과하세요.
―성공 시 <애완 영물 소환권> 지급.
―실패 시 칠 주야간 폐관.
‘왜 또 폐관인데!’
빽 소리치고 싶었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다. 소운은 작게 씩씩대며 화나는 마음을 달랬다.
“소, 소운아. 왜 그래?”
소운의 기분을 눈치챈 홍진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소운은 고개를 획 돌려 홍진명을 바라봤다.
“세고 범위가 어디였지?”
“이, 입교제일부터 계고제사까지잖아···.”
“그럼 거의 반 권이잖아?”
머리를 쥐어뜯는 힘이 강해졌다. 십이 세 인생이, 너무나 고달팠다.
폐관만은 한사코 피하고 싶은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한창 머리를 쥐어뜯던 소운의 손이 우뚝 멎었다. 기가 막힌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소운은 옆으로 비켜 멘 책 보퉁이에서 소학 책을 꺼냈다.
“뭐, 뭐 하는 거야?”
“시험 준비. 크크크.”
소운의 눈이 반짝 빛났다.
***
소운은 다짜고짜 책을 펴더니 첫 줄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입교제일자사자왈천명지위성솔성지위도···.”
“소, 소운아 왜 그래?”
“넌 조용히 듣기만 해.”
남들과는 다르게 누구보다 빠르게 소학을 읽어대는 소운.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주변을 지나가던 학관생들이 길 가다 말고 전부 소운을 쳐다볼 정도였다.
소운은 아무 반응하지 않고 환상적인 속도로 소학을 읽어 나갔다.
그 기세에 움츠러든 진명의 얼굴이 점차 새파래졌지만, 소운에겐 보이지 않았다.
“시험 준비 끝! 으하하하.”
“소, 소운아아··· 괜찮은 거야?”
진명의 손바닥이 소운의 이마에 닿는다. 소운은 머리를 흔들어 손을 털어냈다.
“뭐 하냐? 들어가자.”
소학을 읽는 사이 이미 수업 시간 코앞으로 다가왔다. 소운은 재빨리 학관으로 내달렸다.
***
“다들 알다시피 오늘은 세고가 있는 날이다. 전부 공부해 왔겠지?”
날카로운 눈빛이 학관생을 훑는다. 학사 이곽은 내심 웃음을 지었다.
그가 벼슬길을 마다하고 송원학관에 일한 지도 어느덧 다섯 해. 이젠 표정만 봐도 누가 공부를 해 왔고 안 해 왔는지 뻔히 짐작이 갔다.
‘포목점 왕삼이는 열심히 했나 보군. 대장간 종열이는 이번에도 꽝이고.’
그런데 아이들을 보던 이곽의 표정에 갑자기 묘한 기색이 스쳤다.
‘저 녀석은 웬일로 저리 자신만만한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엔 소운이 있었다. 언제나 꼴찌 다툼을 치열하게 하는 사고뭉치였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공부를 해 왔을 리는 없고. 뭔가 수작을 부릴 모양인걸? 후후 꿈 깨라 요놈아. 허튼 짓거리를 하는 즉시 혼쭐을 내주마.’
이곽은 조소를 흘렸다.
***
초급생의 세고는 총 스무 문제로 치러졌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필사하는 수준의 난도였기에 소학을 달달 외우지 않았다면 고전할 수밖에 없을 난이도였다.
그 탓에 답으로 적어야 할 글자 수가 제법 되었기에 시험 시간 또한 무려 한 시진 반이나 되었다.
“하아···.”
학관생들이 장탄식을 내뱉는 가운데, 단 몇 명만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물론 소운도 그중 하나였다.
소운은 나지막이 속삭였다.
“일지.”
일지 창을 띄우자 학관에 들어서기 전 진명에게 읊었던 말들이 전부 쓰여 있었다.
‘히히!’
소운은 희희낙락하며 붓을 들었다.
이상하게도 이곽의 눈빛이 따갑게 와 닿았지만 그따위 걸 신경 쓸 소운이 아니었다.
마치 속기로 유명한 화공이 거침없이 그림 그리듯, 소운 또한 한 치 망설임도 없이 여백을 채워 넣었다.
‘아우, 손가락 아퍼.’
써야 할 게 너무나 많았다. 답을 보고 쓰고 있었음에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이쯤 되자 소운에겐 답안지가 생사대적으로 보였다. 다 채우지 못하면 죽는다는 심정으로 소운은 붓을 놀렸다.
처음엔 반듯하던 글자가 갈수록 미친개 날뛰듯 엉망이 되어갔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얼른 끝내고 싶었을 뿐.
시험 시작 후 한 시진이 다 되어갔을 무렵.
결국 소운은 폭풍 같은 붓질 끝에 모든 답안을 다 채워 넣었다.
“차앗.”
다 끝났다는 기쁨 때문일까. 소운은 저도 모르게 괴상한 소리를 내며 붓을 탁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이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벌써 끝났나?”
소운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네. 끝났어요.”
“네가?”
목소리에 불신이 가득 어려 있다.
소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슬쩍 주변을 보니 학관생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꽂혀 있다.
하나같이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이곽은 성큼성큼 걸어와 소운의 답안지 뭉치를 거칠게 집어 들었다.
‘장난이었다면 혼날 줄 알아라.’
공부를 안 하는 건 괜찮다. 어차피 무림방파의 자제들은 대부분 어영부영 다니다 중급생의 문턱을 못 넘고 때려치우니까.
그러나 지금처럼 장난을 치는 꼬락서니는 용납할 수 없다.
이곽은 인상을 잔뜩 쓰고 답안지를 들여다봤다. 그런데 답안지를 보던 그의 인상이 슬그머니 풀린다.
뭘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글자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음?”
이곽은 손등으로 눈을 한 번 비비고 답안지를 마구 넘겼다.
전부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강 보니 장난스레 아무 글자나 써놓은 건 분명 아니었다.
이곽의 입이 슬며시 벌어졌다.
‘이놈이 웬일로? 일단 차후에 자세히 살펴야겠군.’
여전히 소운이 세고를 잘 봤으리란 생각은 않는 이곽이었다.
“수신각에 가 있거라.”
“넵.”
수신각은 일종의 휴식 공간인데, 세고 때는 답안지를 먼저 제출한 이들이 대기하는 장소로 쓰였다.
후다닥 달려나가는 소운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
수신각에 들어선 소운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아무 자리에나 앉았다. 자신 혼자밖에 없었다.
어차피 평소에도 세고를 먼저 끝마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때 소운의 시야에 비단 두루마리가 펄럭이며 나타났다.
<임무 달성―세고 넌 내 꼬.>
―보상이 지급됩니다.
―경험치가 200 상승합니다.
―누적 경험치: 350.
―레벨이 상승합니다.
―다음 레벨업까지 필요 경험치: 120.
“엥? 아직 결과도 안 나왔는데?”
[돌발 변수가 극히 적을 땐 임무 달성 창이 미리 뜨기도 합니다.]
“돌···.”
생소한 말에 소운의 말문이 막혔다.
‘뭐 어쨌든 이런 일도 있다는 거구나.’
소운은 기쁜 마음으로 임무 달성 창을 바라봤다.
‘경험치가 200이나? 우와.’
소운은 감탄하며 상태 창을 열었다. 경험치가 풍부하게 주어진 덕분에 5였던 레벨이 7이 되었다.
‘근력이 너무 낮은 거 같은데.’
체력이 9이고 순발력이 5인데, 근력은 2였다. 낮아도 너무 낮아 보였다.
소운은 근력에 포인트를 배분하려다 문득 진이의 조언을 떠올렸다.
진이는 레벨이 낮을 땐 체력과 순발력에 투자하는 게 좋다고 했었다.
왜일까 곰곰이 고민해 보니 대충 가닥이 잡힌다. 만일의 상황이 발생할 시 어떻게 해야 할까?
맞서 싸울 힘이 없으므로 당연히 도망쳐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게 체력과 순발력인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운은 레벨업으로 주어진 8포인트를 절반씩 나눠 체력과 순발력에 각기 투자했다.
이제 체력은 13, 순발력은 9가 되었다.
‘좀 세진 느낌인데?’
소운은 붕붕 팔을 휘둘렀다. 근력은 올리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이제 아이템을 확인할 차례다.
소운은 보상으로 받은 애완 영물 소환권을 꺼냈다.
‘영물인데, 애완이라고?’
영물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씹어 먹으면 비명을 지른다는 사람 모양의 인삼이라든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잉어라든가.
개중엔 유독 인상적이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인면지주(人面蜘蛛). 즉, 사람의 얼굴처럼 생긴 거미의 이야기였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때, 총관에게 이 얘기를 듣고 어찌나 무서웠었는지.
그 영향으로 소운은 지금도 거미를 보면 기겁을 했다.
“아으 설마 인면지주가 나오는 건 아니겠지···.”
[소환 가능 영물 목록에 인면지주는 없습니다.]
“휴우···. 그럼 다행인데.”
사실, 목록에 인면지주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소운은 소환을 하려 했다.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겼기 때문이다.
삼 대가 복을 쌓아야만 끄트머리나마 한 번 볼 수 있다는 그 영물이 아니었던가.
그런 존재를 직접 만나볼 수 있다니, 너무나도 설레는 일이었다.
소운은 벌떡 일어나 수신각 밖으로 달렸다. 주변을 살피니, 여전히 근처에는 자신밖에 안 보였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소운이 심호흡을 했다.
“좋아, 간다.”
[애완 영물 소환권이 사용되었습니다. 영물이 소환됩니다.]
어마어마하게 환한 빛이 눈이 시리도록 번쩍였다.
“으읏···!”
소운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곧, 영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영물을 소환하다
“키잉!”
“키잉?”
빛이 사라지고, 눈을 뜬 소운의 앞에 나타난 건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이었다.
<재규어 초월 종(種)>
세상에 단 한 마리만 존재하는 특이 개체. 전신에서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엄으로 모든 금수를 제압하는 진정한 금수의 왕.
“얘가? 금수의 왕?”
소운은 얼떨떨한 눈으로 자신의 무릎에 엎드린 영물을 바라봤다.
‘이거 그냥 고양이 아냐?’
어른 주먹 정도밖에 안 되는 크기에, 순결한 눈처럼 새하얀 털을 지녔다. 그리고 동그란 눈동자와 살짝 내민 혀가···.
‘겁나 귀엽네.’
소운은 손가락으로 영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이잉.”
느껴지는 손길이 기분 좋은지 눈을 감고 작은 울음을 내뱉는다. 소운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아구 귀여워. 너 이름이 뭐였지? 재ㄱ···.”
발음이 어렵다.
“재규··· 아 모르겠다 너 그냥 재구 해라.”
“키잉.”
“좋다구? 헤헤.”
재규어, 아니 재구의 턱을 쓰다듬는 소운의 손길엔 벌써 정이 듬뿍 담겨 있다.
그렇게 한창 재구와 놀고 있는데, 밖이 시끌시끌해졌다.
‘다 끝났나 보네.’
소운은 책 보퉁이를 챙겨 일어났다.
재구는 품속에 숨겨두었다. 앞섶을 단단히 묶어 추락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시험이 너무 어려웠는지 쏟아져 나오는 학관생들의 표정엔 그늘이 지어 있었다.
“소, 소운아.”
무리에서 진명이 튀어나와 소운의 앞에 섰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세, 세고.”
“짜식아 형님이 한다면 하잖아. 그거 몰라?”
“모, 모르는데.”
“이제부터 알아둬, 헤헤. 우리 다루나 갈래?”
가서 볼일도 있고 재구도 자랑하고 싶었다. 분명 진명의 눈이 휘둥그레지리라.
소운은 내심 진명의 반응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진명은 우중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모, 못 갈 거 같아. 둘째 형이 끝나고 바로 오랬어.”
“왜?”
“무, 무공 가르쳐 준다고···.”
“헐. 오늘 잔뜩 얻어터지겠네···.”
진명을 바라보는 소운의 눈에 동정심이 어렸다.
진명의 둘째 형은 나약한 아우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무공 교습을 핑계로 때리고는 했다.
“힘내, 진명아.”
“으응.”
기운이 없는 대답이었다. 소운은 진명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학관을 나섰다.
혼자라도 다루에 갈 생각이었다.
***
“햐.”
일다연(一茶緣).
간판을 수놓은 웅혼한 필체에 소년 하나가 감탄성을 흘렸다.
소운이었다.
‘이 간판은 언제 봐도 멋있단 말야.’
감탄하며 다루로 들어서는 소운. 점소이가 찰나에 위아래를 훑는다.
그러더니 낯이 익다는 걸 알고 얼른 달려온다.
“아이쿠 소공자님 오셨습니까? 어느 자리로 안내해드릴까요.”
“이 층 창가 자리로 주시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어른 흉내를 내는 소운의 말투가 제법 그럴듯하다.
“이리로 오시지요.”
점소이는 소운의 요구대로 저자가 내려다보이는 좋은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소운은 보관 창에서 금 한 냥을 꺼내 탁자에 탁 올려두었다.
“헉···!”
점소이가 두 눈이 튀어나올 기세로 놀랐다.
금 1냥은 은 20냥과 같은 가치다. 은 1냥이 쌀이 두 가마니 정도 한다는 걸 감안할 때, 실로 엄청난 액수인 것이다.
소운은 놀라는 점소이의 얼굴을 보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가장 비싼 차 한잔 내오시고, 그 뭐였더라.”
소운이 머리를 긁적였다. 분명히 이름을 들었었는데 기억이 안 났다.
“뭐지 그거?”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거 왜 있잖아요. 태호에서 난다는···.”
당황했는지 말투가 변했다.
태호라는 말을 듣자 점소이의 표정이 대번 밝아졌다.
꼬마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하살인향(吓煞人香) 벽라춘(碧螺春)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사람의 혼을 빼서 죽일 만큼 너무나도 신비로운 향기가 난다는, 부르는 게 값인 차의 이름이다.
“그래, 그거! 하사리··· 아무튼 벽라춘. 이거 찻잎 좀 줘요.”
“오, 손님 운이 좋으시군요. 마침 며칠 전에 특상품이 들어왔습니다. 이게 생산량 자체가 적고 수확 시기가 중요해서 특상품은 구경하기가 힘든 해도···.”
“그냥 주면 안 돼요?”
가뜩이나 세고 때문에 고생했던 소운이었다. 차 수업까지 들을 생각은 없었다.
점소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얼마나 드릴까요?”
“찻값 제하고 남는 만큼 전부요.”
“알겠습니다, 소공자님. 금방 올리겠습니다!”
‘너무 많이 샀나?’
일단 내키는 대로 달라 하긴 했는데, 새삼 부피가 걱정된다.
‘잠깐 맡겨 놓고 마부 아저씨를 데려오면 되겠지.’
간단히 고민을 해결한 소운. 앞섶을 살짝 열어 재구를 살핀다.
‘잘 자네.’
재구는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ㅅ자 모양을 한 코와 입술이 무척이나 앙증맞았다.
도로롱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소운도 절로 졸린 듯한 기분이었다.
소운은 앞섶을 다시 여미고 저잣거리를 내려다보았다.
항시 같이 오던 진명이도 없으니 사람 구경밖에 할 게 없었다.
그런데 그중 유독 튀는 차림새를 한 사람이 소운의 시야에 들어왔다.
커다란 행랑을 맨 젊은 도사였다.
도사는 다루의 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소운의 바로 밑쪽이었다. 곧 도사의 품속에서 뭔가가 꺼내졌다.
“뭐지?”
스윽.
소운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도사가 머리를 뒤로 젖혀 위를 바라봤다.
‘응?’
가까이서 보니 멀리서 봤을 때와는 인상이 달랐다. 야무지게 각진 얼굴 안에 짙은 눈썹과 큼지막한 눈코입이 시원하게 자리 잡고 있다.
도사는 소운을 보며 씨익 웃더니 다시 고개를 앞으로 향했다.
이내 청아한 피리 소리가 소운의 귀를 울렸다.
황제가 있었다. 여인도 있었다.
황제는 여인을 사랑했다. 아들에게서 그 여인을 빼앗을 만큼.
여인도 황제를 사랑했다. 은총을 받아 그녀의 일가는 높은 권세를 누리게 된다.
여인에게 푹 빠진 황제는 정사에 소홀했다.
이는, 수하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피난 끝에 막다른 길에 몰린 황제. 반란 세력은 여인과 그 일가를 주살하라 요청했다.
황제는 한사코 거부했지만, 이미 그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그날로 여인은 황제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나무에 목을 매단다.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에 관한 이 이야기는, 위대한 시인 백거이에게 영감을 주었다.
비록 두 사람에겐 아름답지 못한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백거이에겐 중요치 않았다.
그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애절한 장편 시로 그려놓았다.
이것이 바로 장한가였다.
도사가 연주한 곡은 이 장한가에 곡조를 입힌 음악이었다.
피리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하면서도 구슬픈 음률에 길을 지나던 사람들은 가야 할 곳도 잊은 채 우뚝 멈춰 섰다.
코를 훌쩍이고 눈물을 흘리고. 모두가 연주에 푹 빠졌다.
이는 소운도 마찬가지였다.
***
“하아···.”
애절하다는 감정을 이해하기엔 소운은 너무 어렸다. 그러나 굽이굽이마다 배어 나오는 슬픔은 소운을 울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투명한 미소로 웃어 주는 어머니가 떠오른 것이다.
소운은 음악에 몰입했다. 점소이가 차를 내오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음악이 전해 준 여운에서 벗어 난 소운. 창밖을 보더니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연주를 너무 감명 깊게 들어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었건만, 도사는 이미 자리를 뜨고 난 뒤였다.
‘참. 집에 가야지.’
소운은 이미 식어버린 차를 후루룩 단숨에 들이켜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를 봐야 할 시간이었다.
***
“엄마아아!”
우렁찬 소리가 적막을 뚫었다. 주설란을 돌보던 유모가 사색이 되어 달려 나왔다.
“소리 좀 지르지 마세요! 마님 놀라요.”
“아, 미안. 헤헤.”
소운은 발뒤꿈치를 떼고 살금살금 걸었다. 이미 지를 소리 다 질러 놓고 말이다.
“지금 안 주무세요. 호호.”
그 모습이 재밌는지 유모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래?”
소운은 냅다 달렸다. 약향이 코를 찔렀다.
“우리 소운이 왔니?”
여전히 기운 없는 목소리가 소운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소운은 제 어미에게 말하고 싶은 게 한가득했다. 세고를 본 일부터 해서 재구를 얻은 일, 다루에서 기막힌 연주를 들은 일까지.
그러나 이 모든 얘기를 할 수는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소운은 앞섶을 살짝 열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재구가 보였다.
‘이 녀석은 온종일 잠만 자나?’
재구의 옆쪽엔 작은 찻병이 보였는데, 대략 소운의 손바닥만 한 크기였다. 일다연에서 사 온 것이었다.
다루를 나올 때 점소이가 찻병을 건넸었다. 소운은 그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
무려 금 한 냥을 줬는데 고작 이거라니.
점소이는 특상품의 벽라춘은 무척이나 비싸 본디 고관대작이나 거부가 아니면 접하지 못한다며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미리 경고했으면 좋았으련만, 어린아이가 금을 턱 하니 꺼내는 걸 보고 엄청난 부잣집의 자제일 거라고 잘못 짐작한 것이다.
“엄마 이거 뭔지 알아?”
“···?”
소운이 묶은 끈을 풀어 병 주둥이를 막은 종이를 열었다. 그러자 향긋하면서도 쌉싸래한 냄새가 약향을 뚫고 풍겨 나갔다.
“이 향기는···?”
주설란의 얼굴에 아련함이 깃들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는 친정 부모와 함께 마셨던 차였다.
가격이 너무도 비싸 백타문으로 출가한 뒤엔 마시지 못했지만, 언제나 그리웠었다.
지금 소운이 꺼낸 찻병에선, 그때의 향기가 났다.
“전에 엄마가 그랬었잖아. 태호 벽라춘 맛이 생각난다고.”
“내가···? 그런데 어디서···?”
“용돈 모아서 샀어. 유모한테 주고 갈 테니까 마시고 꼭 나아야 돼.”
돌연, 주설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최근 죽음을 예감하던 그녀였는데, 아들이 이런 깜짝 선물해올 줄은 조금도 예상치 못했었다.
비록 몇 푼 되지도 않는 용돈을 모아 샀다는 게 말이 안 되긴 했지만 병세가 위중한 주설란에겐 이를 따질 정신이 없었다.
“고마워, 소운아. 이 차 마시고 엄마 꼭 나을게···.”
“응. 얼른 나아야 돼. 내일 또 올게.”
소운은 눈가를 가리며 뛰쳐나갔다. 계속 있었다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방 밖에서 기다리던 유모에게 찻병을 준 소운은 자신의 방을 향해 달렸다.
한참 달리고 나자 울적하던 마음이 조금은 가셨다.
‘사오길 잘했다.’
어머니에게 종종 얘기를 들었기에 항상 염두에 두고는 있었다. 그러나 찻값이 어디 한두 푼 한다던 가.
가뜩이나 용돈도 당과 몇 개 사 먹을 정도밖에 못 받았기에 벽라춘은 상상도 못 하던 소운이었다.
그러나 진이 덕에 뜻밖의 효도를 할 수 있었다.
“진이야, 고마워.”
소운은 모처럼 진이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 제 나름대로는 말이다.
[‘지니’입니다.]
“진이나 지니나. 그런데 재구는 왜 계속 잠만 자는 거야?”
어느덧 방으로 돌아온 소운. 재구를 살며시 꺼내 침상 위에 내려놓았다.
재구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재규어 초월종의 유체는 하루 대부분 수면을 취합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성장을 시키십시오.]
“성장? 어떻게?”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냥하거나 영약을 복용하거나, 소운님과 같은 공간에 있으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성장합니다.]
“영약 같은 소리하고 있네.”
본인이 먹고 죽을 것도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성장시킬 게 뭐 이리 많은지. 자신도 성장시켜야 하고, 재구도 시켜야 하고.
소운은 재구 옆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귀엽긴 참 귀여워.”
재구를 바라보며, 소운은 스르륵 잠이 들었다.
***
이른 아침. 뺨에 닿는 축축한 느낌에 소운이 눈을 떴다.
“으응?”
축축한 느낌의 정체는, 재구였다. 재구가 열심히 소운의 뺨을 핥고 있었다.
“야···. 나 안 죽었거든···.”
막 잠에서 깨어난 탓인지 소운의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있다.
“키이잉.”
재구는 뺨을 핥다 말고 이불에 머리를 파묻었다.
갈라진 소운의 목소리가 무서웠던 모양이다.
‘이런 겁쟁이가 무슨 금수의 왕이야?’
“이리와.”
소운은 재구를 눈앞으로 번쩍 들었다.
“형이 무섭냐?”
“키잉.”
“크허어엉. 난 산군(山君)이다아아.”
“끼잉. 끼잉.”
재구가 자지러질 듯 앞발 뒷발을 모조리 흔들었다.
“으이구 겁쟁이.”
품에 안고 쓰다듬어주자 재구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그때 밖에서 진홍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자님, 일어나셨어요?”
“응. 일어났어.”
“그럼 들어갈게요.”
방문을 여는 진홍의 손엔 냉수 잔이 들려 있다. 소운을 위한 것이었다.
“어머, 얘 뭐예요? 너무 귀여워요!”
재구를 본 진홍이 꺄― 하며 다가왔다.
“귀엽지? 학관 다녀오는 길에 주웠어.”
“그럼 어미는 없는 거예요? 불쌍해라. 근데 이렇게 생긴 고양이는 처음 봐요.”
“얘가 고양이로 보여?”
“아니에요? 맞는 것 같은데. 안아 봐도 돼요?”
“되긴 하는데 얘가 무척 위험한 녀석이거든? 거의 뭐 금수의 왕이라고 봐야지. 조심해야 돼.”
“금수의 왕이요? 푸힛! 말도 안 돼요.”
‘그지? 실은 내 생각도 그래.’
소운의 생각이야 어쨌든, 진홍은 재구를 받아 들고 해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꺄, 진짜 귀엽다. 야옹! 야옹!”
“키잉.”
“되게 희한하게 우네? 근데 얘는 뭘 먹여야 할까요?”
“먹이? 글쎄.”
그러고 보니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성장시키려면 영약 먹이라는 말만 들었을 뿐.
“염소젖이면 되려나? 원래 새끼 짐승들이 젖 먹잖아요.”
“음. 그게 좋겠다.”
“그럼 공자님 학관 가 있는 동안 제가 틈틈이 돌볼게요.”
“그럴래? 참 재구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안 돼. 또 짐승 주워왔다고 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어떡해.”
“알겠어요, 공자님.”
왠지 진홍의 얼굴이 밝았기에 소운도 기분이 좋아졌다.
소운은 간단히 씻고 청심각으로 향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곤 모든 식사는 청심각에서 아버지와 함께했다.
아들에게 관심을 가지려는 유호연 나름의 사랑법이었다.
“먹자꾸나.”
각종 야채볶음과 고기 요리가 저마다 먹음직스러운 빛깔을 내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앞에 놓인 접시에 요리를 덜었다.
”학업이든 무예든 언제나 정진해야 한다.“
지극히 당연한 소리다. 소운은 입안 가득 넣은 음식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네엡.”
그러곤 곧바로 다시 음식을 털어 넣는 소운.
‘이 녀석은 언제 철이 들꼬.’
유호연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문득 곧 있을 장사오문(長沙五門)의 회동이 뇌리를 스친다.
‘그러고 보니 며칠 안 남았군.’
순간적으로 기름기 번지르르한 낯짝 하나가 떠올랐다. 자신의 불행을 기쁨으로 여기는 것만 같은 작자였다.
최근엔 소운과 같은 나이인 자식의 자랑을 어찌나 늘어놓는지, 듣고 있다 보면 귀가 썩을 지경이었다.
“후우···.”
유호연은 힘없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대는 소운과는 대비적인 모습이었다.
# 무공에 미치다
학관에 다녀온 소운은 주설란의 안부를 확인하고, 곧바로 방으로 향했다.
웬일인지 새로운 임무가 무려 두 개나 동시에 떴기에 찬찬히 살펴볼 요량이었다.
“공자님 오셨어요?”
재구를 품에 안고 있던 진홍이 반갑게 소운을 맞이했다.
진홍은 재구의 앞발을 들어 소운을 향해 흔들었다.
“야옹! 공자님 공부 잘하고 오셨냐옹?”
“키이이잉.”
“얘 고양이 아니라니까? 그치, 재구야?”
“키잉!”
“봐봐. 맞대잖아.”
“맞긴 뭐가 맞아요!”
몇 마디를 더 노닥거린 뒤, 진홍이 방을 나갔다. 소운은 재구의 배를 쓰다듬으며 임무를 확인했다.
<군자의 소양>
군자의 다섯 가지 덕목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에요. 공자 뺨치는 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 보아요!
―仁義禮智信 백 번 필사.
―성공 시 판관필 <묵광> 지급
‘미친.’
군자가 되라면서 공자 뺨은 왜 치라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거기에 임무가 인의예지신 다섯 글자를 백 번이나 필사하는 거라니. 학관에서도 이런 건 안 시킨다.
보상은 더 황당하다. 판관필은 붓 모양의 무기가 아니던가.
무슨 군자가 공자 뺨도 때리고 무기도 든단 말인가.
“안 해.”
어차피 실패 시 받는 처벌도 없다. 소운은 과감히 다음 임무 창을 열었다.
<무공에 미치다>
무공의 즐거움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이래서야 강호제일인은 언제 되겠어요? 재미를 느낄 때까지, 수련하세요!
―매일 1시진 간 무공 수련 (0/7일)
―성공 시 금 다섯 냥 지급, <특기> 해금.
―실패 시 이틀간 시스템 먹통.
임무 창에 적힌 말이 맞긴 하다.
이전보다 무공에 흥미는 붙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먼저 나서서 익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근데 뭔 실패 대가가 이래.”
이틀간 시스템이 먹통이라는 건, 진이와 대화도 할 수 없고 이제는 제법 편리해진 다른 기능도 사용할 수 없다는 말.
결국 소운은 임무 수행을 마음먹었다.
시스템도 시스템이었지만 요 며칠 아버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아직 폐관의 위기는 끝난 게 아니라는 거다.
“그런데 특기라는 건 뭐야?”
[미해금 항목입니다.]
“그게 끝? 치사하네.”
소운은 투덜거리며 아버지가 내준 새 과제를 떠올렸다.
‘뇌풍권 전반부 반복해 오라고 하셨지?’
“진아, 무공을 전체 말고 한 부분만 떼서 수련할 수도 있어?”
[가능합니다.]
“좋아. 그럼 지난번 아버지랑 수련했을 때, 뇌풍권 전반 6식 했던 거 있잖아. 그것만 반복해줘.”
[알겠습니다. 지금 수련 기능을 활성화하시겠습니까?]
“응.”
인형이 나타났다.
소운은 침상에 재구를 내려 두고 수련을 시작했다.
***
드넓은 중원에서도, 장사는 비옥하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장사를 동서로 나누며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상강(湘水) 덕분이었다.
그 덕분인지 장사 인근에만 물경 스무 군데 이상의 방파들이 있었다.
이들은 때로는 반목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균형을 맞춰 왔다. 그 중심엔 백타문이 있었다.
드높은 성세를 구가하던 백타문은 커다란 문파 몇을 중재해 장사오문이 지속적인 회동을 하게 하였다.
세월이 흐르며 장사오문의 구성원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백타문은 언제나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그러나 영원한 건 없다고 했다.
어느 순간부터 백타문의 하락세는 시작됐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건 합류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공가장이었다.
“으하하하! 그렇다고 하지 않소. 우리 충이 녀석의 오성이 얼마나 뛰어난지 초빙한 고수들마다 혀를 내두른다니까. 하하핫!”
고풍스러운 자기와 서화로 장식된 방. 널따란 원탁에 장년인 다섯이 앉아있다. 장사를 대표하는 다섯 방파의 수장이었다.
“장주께선 복도 많으시지요. 본인의 탁월한 재주로 공가장의 위세를 드높인 데다, 자제까지 천골지체에 버금가는 무재를 타고났으니 말이오. 이거 머지않아 이 장사 땅에서 무림 최고 후기지수가 나오는 건 아닐까 싶소만. 허허허.”
염소수염을 팔(八)자로 기른 사내, 석굉이 배불뚝이 사내를 향해 손바닥을 비빌 기세로 아첨을 늘어놓는다.
이를 본 나머지 세 사람의 이마에 내 천(川)자가 그려졌다.
엄밀히 따지자면 배불뚝이 사내는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입회(立會)를 허용하긴 했다. 하지만 저렇게 아첨하는 건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깎아내리는 일인 것이다.
“장주라니요. 아직 가친께서 정정하시거늘. 하하하!”
“사실상 전권을 일임하고 뒤로 물러나 계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소장주께서 장주인 것과 진배없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여러분들?”
석굉이 나머지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공가장의 소장주, 공형남도 흥미로운 눈으로 좌중을 살폈다.
“뭐, 굳이 따지자면 그렇긴 하오만.”
영파문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핫핫핫! 이거 참 벌써 장주 대접을 해주시니 영 낯이 뜨겁구려.”
화제는 다시 공형남의 아들 공충에 관한 얘기로 넘어갔다.
“뭐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오만, 우리 충이가 학문에도 소질이 있는 모양이오. 지난번 세고에서 무려 십 등을 하지 않았소이까? 생전 책 보는 걸 못 봤는데 말이오. 하하하.”
이번에도 석굉이 얼른 말을 받았다.
“원래 천재들은 그런다고 합디다. 남들은 종일 봐야 할 것도 한 번 쓱 보면 다 외워버린다고 하니까 말이오.”
“천재라? 과찬이오, 과찬. 하하하!”
신명나게 웃어젖힌 공형남이 문득 침묵하고 있는 유호연을 바라봤다.
“참. 그러고 보니 귀하의 아이도 송원학관에 다니고 있다 하지 않았소? 그래 학문에 소질이 좀 있으려나 모르겠소. 듣자 하니 사고치는 건 제일이라고 하더구먼.”
유호연의 얼굴이 굳었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공형남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짙어졌다. 가진 것도 없는 주제에 고고한 척하는 게 영 꼴 보기 싫던 차였었다.
그런데 그때, 유호연과 공형남을 번갈아 바라보던 홍주용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못 들으신 모양이구려.”
“무엇을 말이오?”
희희낙락하던 공형남이 물었다.
“진명이가 그럽디다. 며칠 전 임시로 세고 성적이 발표되었는데···.”
홍주용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곧 말을 이었다.
“소운이가 장원이라고.”
“뭐, 뭐욧?”
공형남과 유호연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다, 다시 말해 보시오. 누가 장원이라고?”
다그치듯 외치는 공형남. 홍주용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유.소.운.이라고 합디다. 여기 계신 백타문주의 독자 말이오.”
“마, 말도 안 되는···.”
무례한 말이었지만, 유호연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렇기에 평소와는 다르게 공적인 자리임에도 평대로 되물었다.
“자, 자네 말이 사실인가?”
유호연과 홍주용은 어릴 적부터 장사를 떠난 적이 없는 토박이 중 토박이였다. 자연히 오래전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하여 홍주용도 유호연을 타박하지 않고 인상을 풀며 대답했다.
“틀림없는 사실일세.”
“허어···!”
감탄사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튀어나왔다. 유호연은 마치 꿈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회동이 끝나고 백타문으로 돌아온 유호연. 곧바로 소운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합! 하압!“
‘음?’
앳된 소년의 기합이 귀에 와 닿는다. 또 한 번 유호연의 입이 벌어졌다.
‘서, 설마, 수련하는 것인가?’
기척을 숨기고 다가가자 한창 뇌풍권을 펼치는 소운의 모습이 들어온다.
‘요새 이 녀석이 대체 왜 이러는 게야?’
유호연은 당최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해도 문제, 안 해도 문제라는 게 딱 이런 경우에 쓰는 말 같았다.
너무 노력을 안 해서 속 썩이던 녀석이, 갑자기 변하자 되레 걱정이 벌컥 드는 것이다.
사람이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지 않은가.
‘저 짐승은 또 무엇이지?’
소운의 근처에 새하얀 털을 지닌, 꼭 고양이처럼 생긴 녀석이 흙을 잔뜩 묻히고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이거 참.”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하여 유호연은 소운을 붙잡고 물어볼까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공에 열중하는 아들의 집중을 깨고 싶지 않았다.
‘차후 대화를 나눠야겠군.’
유호연은 조심스레 발걸음을 돌렸다.
***
세고 장원은, 소운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저 임무를 수행할 생각에 앞뒤 안 가리고 모든 답을 적어냈는데, 그만 만점을 받아버렸다. 실수였다.
소운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응당 부장원이 받아야 했을 영예를 자신이 훔쳐버렸으니 말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의심 어린 시선도 소운을 불편하게 했다.
상식적으로 매번 꼴찌 다툼을 치열히 벌이던 아이가 난데없이 장원을 해버리니, 다들 믿으려야 믿을 수가 없는 거였다.
그 탓에 소운은 학관의 대학사와 면담까지 해야 했다. 작폐(作弊: 부정 행위)를 의심한 것이다.
소운은 결국 일지 창을 몰래 열어 소학을 줄줄 읊은 뒤에야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번 일로 소운은 시스템 이용에 주의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합! 하압!”
유호연이 몰래 다녀간, 해가 서편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초저녁.
소운은 구슬땀을 흘리며 무공 수련에 한창이었다. 투명한 인형을 따라 몸을 움직일 때마다 [훌륭해요!]라는 음성이 고막을 울렸다.
무슨 춤이라도 추는 줄 아는지, 재구도 열심히 키잉거리며 데구르르 구르고, 제자리에서 뛰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차앗!”
왼쪽 팔꿈치로 허공을 가르며 뇌풍권의 전반 6식이 마무리 지어졌다.
소운은 땀을 닦으며 우측 상단의 진척도 창을 바라봤다.
<뇌풍권― 2성 81%>
‘무공에 미치다’ 임무를 받고 이제 고작 5일째인데, 벌써 뇌풍권의 성취가 3성이 다 돼간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단히 빠른 성취였다. 자질이 높아진 덕분이었다.
사실 소운이 처음부터 무공 수련에 소홀했던 건 아니었다.
자질 개선권으로 근골을 높이기 전까지의 소운의 자질은 12였다. 최하가 1, 최상이 100이니 소운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리라.
평생 무공을 갈고 닦아봐야 이류를 넘어설까 말까 할 정도로 처참하다는 얘기다.
그 탓에 아무리 배운 걸 복습해도 마음처럼 안 되니 금세 싫증이 날 수밖에.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예전엔 반나절을 노력해도 안 되던 동작이 지금은 한 시진이면 몸에 익는다.
그래서일까. 소운은 임무의 목적대로, 정말 무공의 재미를 조금씩 느껴가고 있었다.
‘조금 더 할까?’
소운은 다시 뇌풍권의 전반 6식을 차분히 풀어냈다. 선선한 바람 탓에 멎었던 땀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
다음 날 오후 송원학관.
진명이 옆에 엎드려 있는 소운의 어깨를 흔든다.
“소, 소운아 일어나. 수업 끝났어.”
“응···?”
소운의 눈이 게슴츠레 뜨였다.
“스읍···.”
소운은 입가에 흥건한 침을 닦으며 좌우를 살폈다.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책을 챙기고 있었다.
“흐아아암···. 끝났네.”
“학사님이 너 몇 번 노, 노려봤어.”
“괜찮아 뭐 한두 번이야?”
늘어지라 기지개를 켜고 학습관을 나선 소운. 진명에게 놀다 들어가자고 말하는데, 진명은 고개를 저었다.
“두, 둘째 형이 일찍 오래···.”
“오늘도? 니네 형 진짜 이상하다.”
“그러게···. 아무튼 미안. 내일 봐···.”
진명은 고개를 푹 숙이고 멀어져갔다. 소운은 슬며시 고개를 젓고 학관을 나왔다.
그런데 그때였다.
너덧 명쯤 되는 녀석들이 우루루 나타나 소운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녀석들의 면면을 살피던 소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앞을 막은 건 송원학관의 초급생이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녀석들이었다.
“야 잠깐 따라와.”
무리의 맨 뒤에 있는 녀석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가장주의 손자인 공충이었는데, 잘나가는 집안을 믿고 매사에 제멋대로 행동하는 녀석이었다.
제 눈에 걸리는 아이가 있으면 곧바로 주먹을 내지른다거나, 옷을 벗겨 놀림거리를 만든다거나 하는 통에 아이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언제나 병풍처럼 공가장에 예속된 집안의 아이들을 달고 다녔기에 누구 하나 나서서 뭐라고 하지도 못했다.
그래도 영악한 탓인지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을 만한 배경을 가진 아이들은 건드리지 않았었다.
소운도 그중 하나였다.
어찌 되었건 장사오문 중 하나인 백타문의 자제였기에, 그간 소 닭 보듯 해온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난데없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았다.
“어딜?”
“그냥 따라와! 콱씨.”
‘이 미친 자식이 갑자기 왜 이래?’
소운으로서는 공충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사실 이는 전부 세고로부터 비롯된 일이었다.
바로 어제, 장사오문의 회동이 끝난 뒤 공형남은 콧김을 씩씩 뿜으며 공충을 대령시켰다.
공형남에게선 사자후와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한심하다고 소문난 백타문의 애새끼도 장원을 하는데, 넌 뭐 하냐는 거였다.
공충으로선 아닌 밤중에 물벼락을 맞는 일이었다.
학자나 관료가 될 것도 아닌데, 십 위권 정도 성적을 받으면 잘하는 것 아니겠는가.
뭐 그 성적도 매번 협박해가며 남의 답안지를 베낀 덕분이긴 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잔뜩 깨지고 난 공충은 방에 틀어박혀 생각했다.
이 화를 풀 길은 소운을 쥐어패는 것밖에 없다고.
그러나 일의 전말을 모르는 소운으로선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비켜 인마. 나 바빠.”
오늘이 ‘무공에 미치다’ 임무의 마지막 날이었다.
얼른 돌아가 임무 달성하고, 새 기능을 해금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맞고 갈래, 그냥 갈래?”
노골적인 협박이었다.
‘아씨 어쩌지?’
소운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단체로 구타라도 하려는 듯했다. 이렇게까지 해놓고 어깨를 토닥이진 않을 것 아닌가.
“크크.”
공충이 아이답지 않은 웃음을 흘렸다. 뜸을 들이는 소운을 겁먹었다고 여긴 것이다.
“이 자식 겁먹었나 본데? 푸하하.”
공충이 웃자, 떨거지들도 와하하 따라 웃었다.
개중엔 목이 찢어지라 과장해서 웃는 녀석도 있었다.
‘너 내가 딱 봐놨다.’
소운이 고개를 훽 돌려, 날카로운 눈으로 과장해서 웃는 녀석을 째려봤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녀석은 돌연 웃음을 뚝 그치고 고개를 숙였다.
‘이미 얼굴 다 봤거든? 어쨌든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한 가지다.’
짧은 시간 동안 잔머리를 굴린 소운. 슬쩍 몇 걸음 물러선다. 주춤거리는 게 꼭 겁먹은 듯한 모양새였다.
“야 막아.”
공충의 말에 떨거지들이 소운의 뒤를 막았다.
정면에는 공충이, 후면에는 떨거지들이 늘어선 모양새였다.
소운은 어깨를 으쓱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어?”
“뭐? 무슨 말?”
“고.”
“고?”
“고오···.”
“안 들리니까 크게 말해, 인마!”
공충은 성격이 급했다. 버럭 소리 지르며 성큼 다가오더니 소운의 멱살을 거세게 잡았다.
“켁켁···.”
손에 깃든 힘이 어찌나 강한지 절로 기침이 나온다.
소운은 멱살을 잡은 공충의 손목을 쥐고, 무릎을 굽히며 힘차게 차올렸다.
퍽!
“아악!”
“고추 조심하라고 이 새끼야!”
공충이 낭심을 부여잡고 무릎 꿇었다.
그래도 소운의 무릎에 자비가 실린 탓에, 크나큰 불상사가 벌어지는 건 피했다.
“이, 이 미친놈이!”
바닥에 엎드린 공충의 등을 밟고 포위망을 벗어나는 소운.
동시에 기운찬 목소리가 학관 입구를 쩌렁쩌렁 울렸다.
“공충이 고자 됐다아!”
소운은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향해 후다닥 뛰었다.
“아저씨, 속도 최대로!”
마부 장 씨가 얼른 말을 채근했다.
“너, 너어 가만 안 둬어!!”
잘게 떨리는 공충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
거처로 돌아온 소운은 곧바로 수련을 시작했다.
이윽고 한 시진이 지나고, 비단 두루마리가 나타났다.
<임무 달성―무공에 미치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경험치가 200 상승합니다.
―누적 경험치: 550
―레벨이 상승합니다.
―다음 레벨업까지 필요 경험치: 150
“그렇지!”
“키잉!”
재구가 소운을 따라 외쳤다. 주인의 성취가 덩달아 기분 좋았나 보다.
[특기가 해금됩니다. 메뉴 창을 확인하십시오.]
[특기 해금 보상이 주어집니다. <쌍수의 술>]
음성이 들려오며 소운의 뇌에 미세한 자극이 느껴졌다.
아프진 않았지만, 자극 탓에 소운의 입이 헤, 하고 벌어졌다.
“뭐야 이거?”
소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우측 하단의 메뉴 창을 확인했다.
<상태><임무><보관>
<무공><특기>
본래는 없던, <특기>라는 항목이 생겨났다.
“설명 좀.”
설명은 금방 나타났다.
<특기>
특정 조건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능력. 항목별로 고유한 특수 능력이 주어진다. 활성 특기와, 상시 적용 특기로 나뉜다.
“흠.”
설명만 보고는 이해가 안 간다.
소운은 바로 특기 창을 띄웠다.
<쌍수의 술> Lv. 1
―상시 적용 특기.
―좌수와 우수로 각기 다른 무공을 사용할 수 있다.
“이것도 레벨이 있네?”
[특기는 사용하는 빈도가 높을수록 레벨이 상승하며 효율과 위력 등이 상승합니다. 최대 레벨은 9입니다.]
“그렇구나. 근데 양손으로 각자 다른 무공을 사용할 수 있다고?”
소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와 닿지 않았다.
대개 무공 초식은 동작이 큼지막한데, 어떻게 동시에 펼칠 수 있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더군다나 자신은 무공이라고는 운형보와 뇌풍권밖에 모르기에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 같았다.
‘잠깐 묻어두지 뭐.’
추후 새로운 무공을 익히게 된다면 그때 해볼 요량으로, 특기 창을 끌 때였다.
문밖에서 진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홍영무관에서 서신이 왔어요.”
<『레벨업하는 소공자』 1-2권에 계속>
댓글(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