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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요리왕 1-1권

2018.07.09 조회 1,126 추천 6


 # 자네 내가 보이나?
 
 대국대 병원 장례식장 안은 검은 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또륵―
 그 가운데 덩그러니 앉은 오일신이 자신 앞에 놓인 작은 종이컵에 소주를 자작했다.
 그러자 컵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용돌이.
 그리고 이내 그것이 잦아들자 일신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치 내 모습 같다.
 지금 나의 발버둥은 이렇게 보잘것없다.
 아무도 모르게.
 그저 내 안에서만 혼란과 침잠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정말 그만둘 건가? 우리 회사 그렇게 쉽게 나가고 들어오는 데 아닌 거 알잖아? 상일전자가 장난이야? 오일신 씨처럼 빽 없이 여기까지 온 건 거의 기적이야 기적. 어떻게 차지한 차장 자린데 그걸 날려버려? 자네 나이 서른다섯에 차장이야. 잘하면 오십 줄에 임원 배지 달 수도 있다고.]
 부장에게 사직서를 던지던 그 날.
 날 설득하던 그의 말 속에서도 ‘나’를 찾을 수는 없었다.
 세계 최고의 휴대폰 회사인 상일 전자.
 빽 없이는 차지할 수 없는 차장이라는 자리.
 하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불합리함과 타협했던가.
 내 공과 남의 공을 빼앗고 빼앗기는 정글 같은 사회.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잔인한 약육강식.
 나는 그곳에 있어야 할 이유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긴 싫습니다. 사표 수리해 주시죠.]
 보장된 미래보다···.
 두둑한 지갑보다 내가 찾고 싶었던 것은 ‘내’가 있는 삶이었다.
 그리고 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은 바로 저기에 있는 영정 사진이 증명해 주고 있다.
 “아이고, 저 양반 평생을 야근만 하다 결국 돌아가셨네.”
 누군가의 목소리가 일신의 고막을 세차게 때렸다.
 “후―”
 일신의 입술 새로 한숨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내 선택은 옳았지만, 기분은 몹시 씁쓸했다.
 “부장님···.”
 사진 속에서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
 내가 던진 사표를 수리했던 부장은 그 후로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과로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무나 차지할 수 없는 자리.
 1억이 넘는 고액의 연봉.
 그는 그것들과 자신의 목숨을 맞바꾼 셈이다.
 “이제 특판 1팀은 누가 맡아요?”
 “특판팀이야 일 잘하는 친구들로 득실대는데 무슨 걱정이야? 박 차장이나 권 차장 둘 중에 하나가 맡겠지 뭐.”
 “하긴,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거니까.”
 그때, 그들의 말이 일신의 귀에 거슬렸다.
 사람이 죽었는데 자리 걱정?
 일신의 마음속에서 다시 한번 강한 환멸이 밀려왔다.
 샐러리맨.
 혹은 회사원.
 거긴 결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
 
 실력으로 인정받는 치열한 세계.
 그런 곳에 내 인생을 걸어보고 싶다.
 일신이 머리 바로 위에 떠 있는 초승달을 보며 생각했다.
 상일전자를 그만둔 지도 벌써 두 달이 되었다.
 처음엔 샐러리맨만 아니라면 뭐든 괜찮을 것 같았다.
 내 사업을 만들어 보기 위해 퇴사 전 구상했던 여러 아이디어를 사업계획서로 만들어 보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정부에서 지원하는 스타트업 유망 아이템으로 선정되었지만 나는 이내 그것을 고사하였다.
 “가슴이 뛰질 않으니까.”
 사업 계획서는 만들어내는 족족 상일전자 특판팀의 보고서 같았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밀한 시장 분석.
 그 사업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수익 가능성.
 엑셀 시트 위를 수놓는 숫자와 그래프.
 이런 것들은 상일전자에서 하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나는 무언가 다른 차원의 일을 해 보고 싶었다.
 “그게 뭐가 될진 아직 모르지만···”
 “거기 비켜요!”
 “앗···!”
 그때, 환자를 실은 스트레쳐카가 맹렬한 속도로 일신의 옆을 스쳤다.
 그리고 그 너머엔 아직 시동이 꺼지지 않은 구급차가 있었다.
 고개를 올려다보니 거기엔 ‘응급실’ 이라는 빨간 사인이 붙어 있었다.
 스트레쳐카에는 몇 명의 의사와 구급대원이 달라붙어 여러 개의 수액과 혈액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의 의사는 환자 위에 올라 탄 채 심폐소생술을 시행했다.
 “얼마나 큰 사고이기에···?”
 일신은 아비규환을 방불케 하는 그 모습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스트레쳐카 밑으로 쏟아져 내리는 피의 양이 상당했다.
 “괜찮을까···?”
 그런데 그때, 일신의 머릿속에 엉뚱한 호기심 하나가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곧바로 일신의 행동으로 옮겨졌다.
 저벅, 저벅.
 그가 먼저 지나간 스트레쳐카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제세동기 준비해!”
 응급실 안에서 심폐소생술에 열중이던 한 의사가 소리쳤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재빠르게 제세동기를 스트레쳐카 옆으로 끌어다 놓았다.
 침대 아래로 드러난 환자의 발끝은 힘 없이 늘어져 있었다.
 “200줄 차지! 비켜서! 슛!”
 푸슛―!
 들썩―!
 의사가 제세동기의 금속판을 환자의 가슴에 대고 버튼을 누르자 환자의 몸이 바짝 경직되며 공중으로 붕, 떴다 다시 내려앉았다.
 그리고 잠시 대기.
 하지만 환자의 심장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250줄 차지! 비켜서! 슛!”
 의사는 전기의 강도를 조금씩 올려가며 심장 제세동을 계속 퍼부었지만 야속한 환자의 심장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멀찍이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일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야말로 원초적인 공포.
 죽음과 삶이 오고 가는 이 비현실적인 상황이 주는 공포가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더는 못 보겠다.
 눈을 질끈 감은 일신이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삐이―
 그의 뒤쪽에선 바이탈 체크 기계 화면에서 일자로 그어지는 초록색 선이 선명하게 빛났다.
 
 ***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을 수도 있다.
 조금 전 심장이 멈춘 환자의 모습이 일신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신은 기분이 묘했다.
 마치 자신의 몸이 자기 것이 아닌 것처럼 걸음이 저절로 움직여졌다.
 그리고 그 환자의 심장이 멈추는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환자의 죽음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내가 죽는 것처럼.
 지난날 맹목적인 성공만을 쫓던 나를 죽이는 것처럼 난 눈을 부릅뜨고 그 환자를 지켜보았다.
 과연 그는 그가 오늘 죽을 거란 사실을 알았을까?
 “시간이 많지 않아. 어서 찾아야 해.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곳을···.”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세계라면 요리가 딱인데.”
 “음···?”
 그때, 누군가가 일신의 옆으로 한 남자가 소리 없이 다가와 중얼거렸다.
 하얀 셰프복 차림에 후덕한 인상.
 짐작하건대 이 병원 구내식당의 조리장 정도 되는 사람이리라.
 그런데 어떻게 아무런 기척도 없이 다가왔던 걸까?
 응급실에서 30미터쯤 떨어진 이곳은 조금 전까진 사람 하나 없이 조용했다.
 “돈 없어도 그만, 빽 없어도 그만. 그저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만 있다면 성공은 시간문제인 바닥. 이 요리 말고는 찾기가 힘들다니까.”
 남자는 일신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돈.
 빽.
 상일전자에선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해 가져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
 하지만 요리는 다르다고?
 맛있는 요리만 만들 수 있다면 성공은 시간문제?
 마치 지금 일신 자신을 위해 만들어 낸 맞춤형 문장인 듯 귀에 쏙쏙 박히는 말이었다.
 “흠.”
 일신의 마음속에서 수많은 의구심들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던 그때, 그는 옆에 선 남자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이지.
 그래서 당신은 성공했고?
 이 늦은 밤 이런 어두운 골목에서 한숨이나 쉬고 있는 당신은 대체 누군데?
 일신이 느릿느릿 걷던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재빨리 남자보다 세 걸음쯤 앞으로 걸어가 몸을 홱 돌려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어···?”
 “음?”
 “지··· 지··· 집밥···.”
 일신은 남자의 얼굴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입에선 쉽사리 말이 떨어지지 않았고, 온몸은 전기충격기라도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려왔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집밥의 달인 우원봉 선생님?!”
 드디어 일신의 입에서 완전한 문장이 터져 나왔다.
 집밥의 달인 우원봉.
 확실했다.
 그는 우원봉이었다.
 작은 백반집 주방 보조에서 시작하여 수없이 망하고 성공하기를 반복, 지금은 500개가 넘는 가맹점을 가지고 있는 초대형 프랜차이즈 기업의 회장이 된 남자.
 주식회사 봉 푸드를 설립 20년 만에 대한민국 재계 서열 100위권 안에 진입시킨 외식업계의 전설.
 지금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셰프 테이너계의 대표 주자가 되어 셀 수도 없이 많은 방송에 출연하는 셀럽 중에 셀럽이 바로 이 우원봉 선생이었다.
 “아니··· 자네 어떻게 날···.”
 “어떻게는요 선생님. 선생님같이 대단하신 분을 바로 알아보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죠.”
 우원봉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
 요리의 세계에선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공을 실력 하나로 이뤄냈단 말이지?
 일신은 그와 조금만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원봉을 향해 한 발 앞으로 다가선 일신.
 “어?”
 그런데 원봉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점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자네··· 대체 어떻게···.”
 “네? 어떻게라뇨? 대체 뭐가···?”
 “자네 내가 보이나?”
 “네? 네.”
 이어서 들려오는 슈욱― 하는 소리.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그 소리에 일신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을 때.
 “어?! 선생님···?”
 원봉은 그 자리에 없었다.
 
 
 # 어떻게, 내가 좀 도와줄까?
 
 “진짜 이상하단 말이지···”
 집으로 돌아오는 심야의 버스 안은 사람이 거의 없이 한산했다.
 일신은 피곤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 기분에 팔짱을 낀 채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을까?
 우원봉 선생.
 그는 축지법을 쓰는 도인인가?
 아니면 스트레스 때문에 내가 헛것을 본 걸까?
 아니다.
 몇 마디 안 되었지만 그와 나는 분명 대화를 주고받았다.
 “뭐 워낙 바쁘신 분이니까. 조금만 더 얘기하고 싶었는데 아쉽긴 하네.”
 화려하고 분주한 차창 밖의 풍경이 혼란스럽게 일신의 시선을 스쳤다.
 그를 만난 지 두 시간이 넘게 흘렀지만 아직 그가 했던 말이 일신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실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라면 요리가 딱인데.]
 정말일까?
 평생을 죽기 살기로 공부만 해 온 나에게 요리란 생소한 세계다.
 셀 수 없이 많은 식당을 다녀 보았지만, 그 뒤편 주방에 대해선 딱히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하긴, 풍문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좋은 요리 학교를 나와 호텔 경력으로 승승장구하는 셰프들도 지역을 대표하는 맛집 사장님들의 벌이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집밥의 달인 우원봉 선생이고 말이다.
 [오과장, 이번 보고서에 내 이름 좀 올릴게.]
 [일신아,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는 마라. 우리 아버지가 강북 지역 총판하시거든. 미안하지만 나 먼저 차장으로 간다.]
 [그러게 줄 좀 잘 서지 그랬어. 실력만 있으면 뭘 하나? 빽이 없는데. 자네도 이번 참에 줄 좀 갈아타라고.]
 상일전자에서 들었던 뼈아픈 말들이 떠오른다.
 싫다.
 진짜 싫다.
 맨땅에 헤딩도 좋고, 공사판에서 땀을 흘려도 좋으니 내 실력이 통하는 곳으로 가고 싶다.
 나는 오늘 그분과 좀 더 얘기를 나누었어야 했다.
 “어머··· 어머··· 그 사람 죽었대···!”
 “음?”
 그때, 버스 뒤쪽에 앉은 커플 중 여자 쪽이 목소리를 높였다.
 죽었다니 누가?
 또 어느 유명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라도 한 걸까?
 “헐··· 교통사고? 오늘 저녁에?”
 “어떡해··· 너무 무섭다.”
 교통사고라고?
 누가?
 “그럼 이제 TV에서 그 아저씨는 더 이상 못 보겠다.”
 “진짜 재미있었는데, 집밥의 달인.”
 “뭐···?! 누가 죽어?”
 일신이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뒤에 앉은 커플을 향해 소리쳤다.
 두 사람은 놀란 눈을 깜빡거리며 일신의 행동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집밥의 달인이요. 우원봉 선생님. 그분 오늘 돌아가셨대요.”
 “그, 그게··· 정말입니까?”
 찌릿, 찌릿.
 마치 혈관 속의 피가 순간적으로 냉각되는 느낌이었다.
 오싹했지만 땀이 흘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는 그 어디에서도 배운 일이 없다.
 나는···.
 나는 오늘 죽은 사람의 모습을 보았고, 또 그의 말을 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창을 타고 방 안으로 드는 햇살이 일신의 눈을 톡톡 건드렸다.
 침대 위에서 잠시 눈꺼풀을 꿈틀거리던 그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후우.”
 그가 눈을 뜨고서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머리맡에 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빠른 손동작으로 인터넷창을 열어 현재 검색어 순위 1위에 랭크된 문장을 터치했다.
 ―집밥 우원봉 선생, 교통사고로 사망―
 지난 19일 저녁 7시경 북악 스카이웨이를 달리던 우원봉 씨의 차량이 중심을 잃고 흔들리다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도로 옆 산길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우원봉 씨는 사고 직후 대국대 병원 응급실로 급하게 이송되었으나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대국대 병원 응급실.
 내가 어제 우원봉 선생을 만났던 그 장소다.
 혹시 그때 응급실에서 심장이 멈췄던 그 환자가 우원봉 선생이 아니었을까?
 아마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원래 죽음이라는 건 이토록 심오한 것일까?
 죽기 직전 영혼이 잠시 몸에서 벗어나 바람을 쐴 수도 있고 뭐 그런 영적인 거?
 “믿을 수 없어.”
 일신이 베게 위에서 고개를 거칠게 내젓고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마음이 복잡했지만, 상일전자를 그만두고 나서 매일같이 빼놓지 않았던 일과를 소홀히 할 수는 없다.
 하루 한 권, 인문학 서적을 탐독하는 일.
 세상이 좋아진 건지 내가 몰랐던 건지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도서관에는 읽어도, 읽어도 줄지 않는 좋은 책들이 넘쳐난다.
 “라면 하나 끓여 먹고 도서관이나 가자.”
 일신이 가벼운 차림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서 방문 밖 주방으로 향했다.
 
 ***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일신의 방문이 닫혔다.
 그러자 거실에서 분주히 청소에 열중이던 일신의 어머니 한강진이 반사적으로 일신을 향해 몸을 틀었다.
 “일어났니?”
 “네.”
 “반찬 만들어 놨으니까 밥 먹고 나가.”
 “뭐 하러 그러셨어요, 라면 하나 대충 먹으면 되는데.”
 “라면은 몸에 해로워.”
 일신은 강진에게 매일 아침이 미안했다.
 상의도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맞이한 첫날 아침.
 어머니는 아무런 질문도 없이 아침상을 차려 주셨다.
 이렇게 식탁에서 마주한 것이 얼마 만이냐며, 그동안 수고했다며 나를 격려했다.
 얼마나 미안했던지.
 그리고 오늘도 역시 같은 마음이다.
 하루라도 빨리 나의 길을 찾는 것이 어머니를 도와드리는 길이다.
 책 속에 분명히 길이 있을 것이니, 얼른 밥 먹고 도서관으로 간다.
 그러기 위해선 식탁 위에 여러 반찬을 늘어놓는 것보다 냄비째 라면을 먹고 정리하는 편이 빠르다.
 “아, 참. 오늘 지혜 아줌마 놀러 오기로 했어.”
 “지혜 아줌마요? 그 부자 사모님?”
 “그래, 이번엔 저쪽 여고 앞에 상가를 샀다는구나. 그거 자랑하러 오는 거지, 뭐. 거의 다 왔다네, 이른 아침부터.”
 “이런···.”
 전지혜 아줌마.
 어머니와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고, 50세가 넘은 지금도 여전히 일주일에 한두 번은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다.
 그런 지혜 아줌마가 온다?
 그것도 이렇게 아침 일찍?
 “빨리, 빨리.”
 괜히 그분의 눈에 띄어서 아줌마들의 가십거리 하나를 더 늘일 필요는 없다.
 일신이 냄비에 깨끗한 물을 담고서 그것을 빠르게 불 위에 올렸다.
 한 10분이면 되겠지.
 지금 밥을 먹지 않으면 밖에서 괜한 소비를 하게 될 수도 있다.
 최대한 빨리 먹고 나가면 그만이다.
 쿠르륵―
 냄비의 물은 빠르게 끓어올랐다.
 일신은 냄비 뚜껑을 열고 옆에 놓아둔 라면 봉지를 뜯었다.
 그러고는 무심히 면을 물에 넣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틀렸어.”
 “네?”
 “라면 끓이려고?”
 “헉···?!”
 어디선가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고, 자연스럽게 그의 말에 대답했던 일신의 어깨가 놀람으로 들썩거렸다.
 혹시나 자신의 소리를 어머니가 들었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아보았으나 다행히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베란다 쪽을 정리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천만다행이다.
 어머니가 들었으면 분명 내 정신에 문제가 생겼다고 걱정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계신 겁니까···? 우원봉 선생님.”
 이 사람.
 아니, 이 귀신이 어떻게 내 옆에 이렇게 떡하니 서 있는 걸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어떻게···?
 “글쎄, 나도 잘 모르겠네. 도로에서 미끄러진 뒤 정신을 잃었다가 차려보니 자네를 만났었고··· 그리고 또 깜깜해졌다가 정신이 드니 자네 옆에 이렇게 서 있는걸?”
 “그런데 정말 우원봉 선생님이 맞습니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TV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서···”
 “예끼 이 사람아. 내 얼굴을 보고도 몰라? 대한민국에서 나 모르는 사람 있어? 내가 우원봉이 아니면 누구겠나?”
 “헐···.”
 일신은 다리에 힘이 풀려 잠시 몸을 휘청거렸다.
 죽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이런 게 바로 귀신이 들렸다는 경우일까?
 신내림?
 아니면 빙의 같은 거야?
 일신의 얼굴이 점점 창백하게 변해갔다.
 어떻게 내 눈에 귀신이 보이는 걸까?
 그것도 저렇게 유명하고 대단한 귀신이 나에게 왜.
 “일신아, 너 왜 그러니? 물 끓는다. 왜 그렇게 멍하게 섰어?”
 그때, 주방 쪽으로 다가온 강진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일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똑바로 서서 차림새를 가다듬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제 장례식장 갔던 일이 생각나서.”
 “그 부장님? 갑자기 돌아가셔서 마음이 안 좋구나?”
 “아··· 네, 좀 그러네요.”
 “쯧쯧. 그래, 그렇게 사람을 힘들게 하는 회사 잘 때려치웠어. 내 아들이 그렇게 됐다고 생각해 봐라. 정말 끔찍하다 끔찍해.”
 “하하··· 그건 그렇죠.”
 강진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일신은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나 강진이 원봉의 모습을 볼까 싶어 미간을 구기고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의 모습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원봉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그는 귀신이다.
 나 참···.
 이제 어떡하지?
 그럼 이제 이 귀신이 줄곧 나를 따라다니게 된다는 걸까?
 [오일신 군.]
 “네?”
 일신의 귓가를 울리는 공명음에 그가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강진이 뒤돌아서다 말고 의아한 표정으로 일신을 돌아보았다.
 곤란한 표정의 일신을 본 원봉이 차분한 표정으로 그와 눈을 맞추었다.
 [나에게 머릿속으로 말을 한다고 생각해 보게. 그럼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나에게 들릴 걸세.]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들린다고?
 [어떻게?]
 [그렇게.]
 [헉!]
 [잘하는구만. 역시 내가 괜히 자네한테 붙은 게 아니었어. 뭔가 통하는 구석이 있다니까.]
 원봉이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허허, 이름 하나 안 거 가지고 뭘.]
 [네? 이름 하나?]
 [난 생각보다 자네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네. 만 하루 만에 귀신이 된 마당에 이렇게 능숙한 대화를 한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지만, 내가 워낙 산전수전 많이 겪은 사람이라 별로 놀랍진 않아.]
 일신은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이 사실을 누가 믿어 주기는 할까?
 언감생심.
 나조차도 믿기 힘든데 어느 누가 믿어?
 그리고 뭐?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고?
 [뭘 보고 느낄 수 있는데요?]
 [거 젊은 친구가 성격 한번 급하네. 그런 얘기는 차차 해 나가자고. 나 이제 귀신이야. 남는 게 시간이라고.]
 [죄송하지만 전 사람 입니다만···.]
 [사람이면 이제 아침 먹을 시간 아닌가? 계속 그러고 가만히 있을 거야?]
 [네?]
 [저 끓고 있는 냄비. 저거 그냥 둘 거냔 말이야.]
 [아, 아···.]
 일신이 넋을 놓고 있다가 그만 물이 펄펄 끓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일단 재빨리 불을 끄고서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원봉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별다른 대책도 없다.
 꼬르륵―
 그때, 일신의 배꼽시계 알람이 울렸다.
 [허허허, 배고프구만 자네.]
 원봉이 팔짱을 두르며 너털웃음을 뱉어냈다.
 [그러게요. 이 엄청난 상황에 배가 고프네요, 어이없게.]
 [사람이 다 그런 거지. 어떻게, 내가 좀 도와줄까?]
 돌연 심각하게 변해가는 원봉의 표정과 일신의 어리둥절한 표정이 혼란스럽게 엇갈렸다.
 [뭘요?]
 [라면 끓이는 거. 내가 또 라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끓이거든.]
 [아···.]
 [끓는 물에 다짜고짜 면부터 넣다니, 쯧쯧.]
 그때, 일신의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다.
 맞다, 그랬지!
 집밥의 달인이 아닌 주식회사 봉 푸드의 회장 우원봉.
 그가 성공시킨 첫 사업은 다름 아닌 라면 가게였다.
 
 
 # 대파 하나 들어갔을 뿐인데?
 
 [제가 뭐부터 하면 되겠습니까?]
 도움을 주겠다던 원봉의 제안에 일신이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음, 일단 그 면은 잠시 대기. 맹물에 면을 삶으면 면발에 국물 맛이 완전히 스며들지 않아서 맛이 없어.]
 그랬구나.
 일신은 그동안 자신의 라면이 어딘지 모르게 심심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나름 건강을 생각한답시고 국물은 거의 먹지 않았으니 어쩌면 싱거운 게 당연했다.
 [어디 보자.]
 원봉은 인자하고도 환하게 웃으며 손가락 마디마디를 두둑 소리를 내며 풀었다.
 무려 우원봉의 수업이다.
 아니, 수업이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대단한 요리사 중 하나가 무언가를 가르쳐 준다.
 일신의 심장이 서서히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과연 그는 무엇을 이용해 라면을 끓일까?
 30년 전 그가 성공시킨 전설의 라면 가게에선 대체 어떤 방식으로 라면을 끓였던 걸까?
 고기 육수?
 아니면 해물 육수?
 건더기로는 뭐가 들어가지?
 [파 있나? 실한 놈으로다가.]
 [파요? 혹시 대파를 말씀하시나요?]
 [그래, 대파.]
 [그럼요. 바로 가져 올게요. 그리고 또 뭐가 필요한데요? 고기? 아니면 해물?]
 [응? 아니, 그런 건 필요 없어. 스프에 다 들어 있는데 뭐.]
 원봉이 됐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입술 끝을 아래로 내렸다.
 오직 파?
 파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말인가?
 [네, 일단 가져오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일신이 깨끗하게 손질된 대파를 도마 위에 올렸다.
 [자네 칼질은 좀 하나?]
 [칼질··· 이라면 어떤···.]
 [칼질이 칼질이지 어떤 칼질이 따로 있나 뭐. 그 파를 좀 썰어봐. 나는 보시다시피 칼을 잡을 수 없는 몸이라.]
 [네···.]
 일신은 하릴없이 칼을 잡았다.
 하지만 단순한 칼질에도 다 방법이 있을 터.
 그가 잠시 손에 쥔 칼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검지부터 약지까지 모든 손가락을 이용해 칼을 잡으면 어디가 균형 감각이 조금 부족했다.
 아직 파에 칼을 대지 않았지만 왠지 칼날이 바깥쪽으로 빠질 것만 같았다.
 그럼 어떡한다···
 일단 균형을 맞춰야 한다.
 그러려면, 음···
 검지로 칼등을 살짝 받쳐 주는 건 어떨까?
 일신이 검지를 안으로 말아 칼등이 눕지 않도록 받쳐 주었다.
 [일신 군 자네, 칼을 잡아 본 적이 있나?]
 [아니요, 마음먹고 하는 건 이게 처음입니다.]
 [그래? 호오, 제법이군.]
 [네? 가,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칼 쥐는 법은 제대로 한 모양이었다.
 중지부터 약지까지 이용해 손잡이를 쥐고, 검지를 굽혀 칼등을 지탱하는 방식.
 일신은 잡고 있는 칼날의 균형 감각을 몸으로 느꼈다.
 이대로 썰면 되겠어.
 자, 그럼 간다.
 스윽― 스윽―
 “으읏···.”
 일신이 칼을 쥔 손에 힘을 실어 파를 썰었다.
 스윽― 스윽―
 처음엔 어색한 듯했지만, 칼질 소리가 점차 균일한 리듬을 만들어냈다.
 재료에 칼을 밀어 넣을 때는 앞으로 밀어 써는 방식이 자신에게 맞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가는 중이었다.
 원봉은 그런 일신의 칼질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일신이 칼을 제대로 쥐는 것과 균일한 리듬으로 밀어 써는 것도 그것이었지만 무엇보다 원봉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가 썰어내는 파의 크기였다.
 [잠깐.]
 [네?]
 원봉이 잔뜩 긴장 한 채 칼질에 열중이던 일신의 손을 멈춰 세웠다.
 [왜 그러세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일신은 민망한 표정이었다.
 작은 칭찬에 우쭐하여 재료를 삐뚤삐뚤하게도 썰어냈다.
 한심한 놈···.
 [잘못한 건 아니지만··· 굳이 애를 써 가면서 파를 그렇게 얇게 써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군.]
 [아, 그건··· 순간적으로 생각한 건데··· 파를 라면 면발 두께로 썰면 먹는 사람 입에 파가 걸리적거리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런 건데··· 제가 실수한 건가요?]
 [실수? 아니, 아닐세. 계속하게 계속해. 흠흠.]
 그것은 30년 전, 원봉 자신이 라면을 만들 때에도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가 머쓱한 마음에 헛기침을 했다.
 원봉의 눈이 일순 반짝이며 일신을 향해 더욱 강하게 초점을 맞추었다.
 귀신이 된 마당에 또 요리냐고 하면 사람들이 웃겠지만, 원봉은 나름 이승의 여한을 풀고 있는 것이었다.
 단순히 여한풀이, 아니면 심심풀이로 해 본 건데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젊은 친구가 자신의 죽어 있는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어쩌면 이거···.
 생각보다 일이 커질지도 모르겠다.
 
 ***
 
 철컥―
 일신의 집 현관이 열리며 들어온 사람은 강진의 친구인 지혜였다.
 한 손엔 커피, 다른 한 손엔 고급 케이크를 들고 있는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부잣집 사모님 특유의 귀티가 흘렀다.
 “왔니?”
 “왔지.”
 강진은 언제나 그렇듯 무심한 인사로 지혜를 맞이했다.
 평범한 가정주부와 부잣집 사모님.
 언뜻 보면 안 어울릴 것 같은 이 조합도 벌써 40년째였다.
 둘은 친구 이상의 교감을 나누는 가족 같은 사이였다.
 “어쩜 이 아파트는 주차장이 이렇게 좁아? 차 대느라 진땀을 뺐네.”
 “그건 주차장이 좁은 게 아니라 네 차가 큰 거고.”
 “호호, 그러니? 나름 작은 거 산다고 산 건데.”
 “잘난 척하려고 이 아침부터 마실 나온 거야? 얘가 왜 이렇게 염장을 질러?”
 “그런 건 아니고. 호호호. 커피?”
 “거기 놔.”
 한두 번 와 보는 것이 아닌 강진의 집.
 지혜는 익숙하게 거실 안으로 들어와 앉은뱅이 테이블 위에 커피와 케이크를 올려 두었다.
 강진의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지혜가 편안히 앉을 수 있도록 소파를 미리 청소한 후였다.
 오랜 친구들 사이에서만 나오는 격 없는 말투와 행동이 둘에게는 가능했다.
 “상가 구경 같이 갈 거지?”
 지혜가 강진에게 물었다.
 “시간 봐서 그러던지.”
 강진은 깎아 두었던 과일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짧게 대답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부러운 건 부러운 거였다.
 흔쾌히 알았다는 말은 아무리 착한 강진이라도 쉽지 않았다.
 “나 혼자 가면 오후에 심심하단 말이야. 같이 가자. 응? 맛있는 밥 사줄게 내가···.”
 하지만 지혜는 강진의 팔을 붙잡으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어우 알았어 갈게 가. 뭐가 그렇게 심심하다고 그러니 너는?”
 “그 김에 같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그러는 거지 얘는··· 어?”
 그때, 지혜가 하던 말을 멈추고서 고개를 바짝 치켜올렸다.
 그녀의 행동이 마치 사바나 한복판의 미어캣 같았다.
 두리번, 두리번.
 뭐지?
 대체 자신의 코끝을 찌르는 이 알싸한 향기는 뭘까?
 
 ***
 
 [자, 그럼 썰어둔 파를 뜨거운 기름에 볶아.]
 [볶아요? 기름에?]
 [그래.]
 잠시 후, 도마 위에는 한 줌 정도의 썰린 파가 소복이 쌓였다.
 일신은 그가 시키는 대로 프라이팬에 기름을 데웠으나 그다음 순서가 의아하게 느껴졌다.
 라면이 얼마나 기름진 음식인데 또 기름을?
 [라면이 너무 느끼해지진 않을까요?]
 [지금 내 말에 토를 다는 거야? 자네가 나 우원봉에게?]
 아차차.
 새하얀 셰프복의 이 남자는 우원봉이었지.
 일신은 그의 방법에 뭔가 특별한 기술이 숨어 있을 것이라 상상하며 그가 시키는 대로 뜨거운 기름 위에 파를 한 움큼 올렸다.
 치이익―
 그러자 기름에 파 볶이는 소리가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알싸한 파 향기가 고소한 기름 향기를 머금어 군침이 돌게 만들었다.
 [향이 엄청난데요?]
 [원래 파는 향신료야 새삼 놀랄 것도 없다고. 이제 팬 안에 뜨거운 물을 부어. 더 볶다간 파가 타 버리고 말 거야.]
 [이 위에요? 이 기름 위에?]
 [잔말 말고 부으라면 부어.]
 [네···.]
 원봉은 일신을 향해 미간을 구기며 시키는 대로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뜨거운 기름 위에 물을 붓다니.
 요리 문화 충격에 빠진 일신은 자신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원봉의 방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원봉이 괜히 우원봉이겠는가.
 일신은 미리 끓여 놓은 더운 물을 팬 위에 부었다.
 치익― 콰르르―
 그러자 팬 안에서 기름과 물이 만나며 요란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강불로 키우고.]
 [네.]
 [그 상태에서 물이 끓으면 스프와 면을 넣어.]
 [그리고요?]
 [그리고?]
 [네, 그다음엔 뭘 하면 되나요?]
 [음···.]
 일신이 원봉의 다음 말에 초 집중했다.
 과연 그의 숨은 비법은 무엇일까.
 주식회사 봉 푸드의 초석이 되었던 그 엄청난 라면 기술은 무엇이었을까?
 일신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네?!]
 [너무 다 알려주면 재미없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고.]
 [선생님···.]
 후―
 원봉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타는 듯이 뜨거운 일신의 눈빛에 그만 본격적으로 그를 가르칠 뻔했다.
 일신도 모르게 그를 제자로 삼을 뻔했다.
 오일신.
 서툴긴 하지만 자세가 되어 있다.
 그리고 눈썰미와 머리도 보통이 아니다.
 마치 젊은 날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왜 이런 설렘을 죽어서야 느끼게 된 걸까.
 원봉은 일단 한발 물러섰다.
 귀신이 된 지도 만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왜 구천을 떠도는지.
 그리고 그동안 여기선 뭘 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팁 하나 정도는 뭐··· 괜찮겠지.
 [딱 하나만 더 가르쳐 주자면.]
 [···.]
 [면이 최대한 공기와 접촉할 수 있도록 해야 해. 그래야··· 음?]
 원봉이 인심 쓰는 마음으로 말을 꺼냈지만, 일신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지 마라···. 불지 마라···.”
 일신은 이미 면 삶는 데 집중하느라 귀와 머리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허허, 그놈 참 희한한 놈일세.]
 원봉의 입가에 아주 살짝, 미소가 감돌았다.
 
 ***
 
 “다 됐다.”
 일신이 다 만들어진 라면을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렸다.
 “킁킁.”
 그릇 위에서 향을 음미하자 얼굴 근육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실로 엄청난 향.
 겨우 파 기름이 들어갔을 뿐인데 라면의 전체적인 향이 살아났고, 그 위를 알싸한 파 향이 덮어주었다.
 “파는 나중에 넣는 것보다 기름으로 만들어 넣는 게 훨씬 향이 좋구나.”
 간단한 방법이었지만, 그 방법이 라면의 향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과연 맛은 어떨까?
 일신은 냄비 뚜껑이나 앞 접시 따위는 쓰지 않기로 했다.
 향긋한 국물을 잔뜩 머금은 뜨거운 면발 그대로를 음미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젓가락으로 면을 한 움큼 집어 올렸고.
 “후―”
 면을 살짝 식히기 위해 바람을 불었다.
 그리고 그때.
 “잠깐만!”
 “어? 지혜 아줌마? 아, 안녕하세요···.”
 “그래, 일신아 잘 있었지?”
 “네, 뭐···.”
 “그거 뭐니? 라면이야?”
 “네? 네.”
 “그렇구나···. 근데 그 라면··· 그거 내가 조금만 먹어 볼 수 있을까?”
 “네?”
 난데없이 식탁으로 다가와 라면을 달라고 하는 부잣집 사모님 덕에 일신의 표정이 어리둥절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 자네 혹시 요리 배워 볼 생각 없나? 정식으로
 
 “이 라면을··· 드시겠다고요?”
 “그래, 그 라면.”
 일신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혜를 올려다보았다.
 이 라면을 먹겠다고?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왜 그러시는데요? 배가 많이 고프세요? 그러면 차라리 밥을 드시지 그러세요.”
 “밥? 좀 전에 집에서 밥 먹고 왔는데 또 무슨.”
 “네? 식사하셨다고요? 그런데 라면을 또 드세요?”
 “어머, 어머, 일신아. 너 설마 이 아줌마한테 라면 한 그릇 주는 게 아까운 거니?”
 일신이 의아한 마음으로 지혜를 추궁하자 그녀가 서운하다는 듯 양손을 허리춤에 올린 뒤 그를 흘겨보았다.
 이상하네, 정말.
 라면은 어렸을 때 하도 먹어서 이젠 질린다고 하지 않으셨나?
 “여기요, 그럼.”
 일신이 못내 아쉬운 손길로 자신의 라면 그릇을 지혜 앞으로 밀었다.
 원봉의 가르침으로 만들어 낸 라면.
 그 맛이 어떨 지 일신 또한 미치게 궁금했다.
 하지만 지혜 아줌마는 일신의 집안 사정이 어려울 때마다 큰 도움을 몇 번이나 주었던 고마운 사람이었다.
 아무리 원봉의 라면이 궁금해도 지혜의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 그릇 더 끓이지, 뭐.
 일신이 입맛을 다시며 크게 한 젓가락을 들어 올리는 지혜의 손길을 바라보았다.
 “아니, 어쩜 이렇게 향이 알싸하고 좋니 그래?”
 라면 그릇을 건네받은 지혜는 코 바로 아래에서 밀려오는 폭발적인 향에 넋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분명 베이스는 그녀 자신도 알고 있는 매울신 라면이었다.
 그러나 그 아래에 깔려 있는 이 알싸한 향이 매울신 라면의 은은한 향을 넉넉히 받쳐주고 있었다.
 “그러면 맛은···?”
 지혜가 홀로 중얼거리며 한 젓가락 들어 올린 면을 곧바로 입에 넣었다.
 후르릅―!
 위아래 입술이 경쾌하게 면을 치는 소리가 주방에 울려 퍼졌다.
 이를 바라보던 일신의 목구멍으로 고인 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어떠세요?”
 “···.”
 일신이 참다못해 먼저 물었다.
 하지만 지혜는 대답 없이 표정만 심각해진 채로 또 한 번 젓가락을 라면 그릇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후르르릅―! 후르릅―!”
 궁금해 미치겠는데 먹기만···!
 지혜는 젓가락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라면을 먹었다.
 고가의 실리콘이 들어있을 그녀의 잘 뻗은 콧잔등에 땀방울이 서서히 맺혀 올랐다.
 일신은 몸이 달았다.
 과연 우원봉의 라면은 어떤 맛일까?
 지금의 봉 푸드를 있게 한 그 라면의 맛은 과연 어떨까?
 “아줌마, 이제 말 좀 해 주세요. 그 라면 맛··· 어때요?”
 그리고 이 라면은 일신 자신의 손으로 만든 것이었다.
 레시피는 원봉의 것이었지만, 이 맛을 만든 건 온전히 자신의 두 손이다.
 “어머? 네가 끓이고도 이 맛을 몰라?”
 “네?”
 “그렇잖아. 네가 끓였으면서 왜 맛을 물어? 넌 매번 이렇게 끓여먹을 거 아니야.”
 “아, 그게···.”
 지혜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일신은 순간 당황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한다?
 집밥의 달인 우원봉 선생의 귀신이 처음으로 알려준 음식입니다.
 라고 말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할 게 뻔하니 설명은 하지 않기로···.
 “이 방식으로 끓인 건 처음이거든요. 파 기름으로 라면을 끓이면 맛있을 것 같아서 시도해 봤어요.”
 “아아, 그래? 파 기름? 그럼 이 향이 파 향이었구나.”
 “그래서 맛이 어때요? 맛있어요? 아니면 그냥 그래요?”
 하긴, 어쩌면 맛이 없을 리는 없다.
 매울신 라면 그 자체가 식품회사 하나를 수십 년간 먹여 살릴 정도로 최고의 맛을 내지 않는가.
 일신은 큰 기대는 하지 않았고 그저 원봉에 대한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이내 돌아오는 지혜의 대답.
 “물어보는 게 이상할 정도야, 일신아. 이거 내가 먹어 본 라면 중에 최고로 맛있어!”
 
 ***
 
 소란스러웠던 지혜가 강진과 함께 집을 나선 지도 10여 분이 흘렀다.
 지혜는 아까의 그 라면 레시피를 정말 자세하게 캐물었다.
 그 향이 단순한 파 기름 때문이라는 것을 쉽게 믿진 않았지만 일신이 먹기 위해 한 그릇 더 만드는 과정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진짜 물건이네.”
 원봉의 라면에 대한 지혜의 한 줄 평이었다.
 일신은 조용히 식탁에 앉아 새로 끓인 라면을 마주했다.
 이번엔 혼자서 정밀하게 타이밍을 맞추어 파가 아주 살짝만 타도록 했다.
 그러자 미세한 불향이 더해져 향 속의 풍미가 한층 더 살아났다.
 “물건이라.”
 라면을 바라보는 일신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흡사 예술하는 사람들의 마음 같달까?
 혼신의 힘을 다한 작품을 후하게 평가받은 기분이었다.
 겨우 파 기름 하나였는데.
 “후르릅―!”
 드디어 일신도 라면을 한 젓가락 입으로 가져갔다.
 “후아!”
 그러곤 이내 탄성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이럴 수가.
 이건 전에 알던 매울신 라면이 아니다.
 매운맛과 짠맛이 주를 이루었던 것이 원래의 매울신 라면이라면 이건 아주 고급스런 향이 더해진 중국풍 탕면 같았다.
 상일전자 시절 자주 들렀던 고급 중식당에서나 먹을 법한 그 깊은 국물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게다가 원봉의 팁대로 끓고 있던 면을 자주 공기 중에 노출시킨 탓에 그 꼬들거림이 일품이었다.
 면발이 꼬불거리는 그대로 혀와 입천장에 닿아 경쾌한 충돌을 만들어냈다.
 매울신 라면 그대로의 완벽한 밸런스의 간.
 그리고 우원봉 선생의 파 기름.
 마지막으로 나의 노력이 더해져 기분 좋게 꼬들거리는 면발.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실로 완벽한 라면이 탄생한 것이었다.
 물론 일신이 그동안 라면을 먹어 온 경험에 한해서지만 말이다.
 “대단하다. 정말 대단해. 내가 이걸 만들었다니. 요리라곤 집에서 뚝딱거려 본 것이 전부인 내가.”
 [그걸 가지고 대단하다고 하면 나 우원봉이 좀 섭하지.]
 [아, 선생님.]
 [어때, 맛있지? 자고로 음식은 향이 우선이거든. 사람이 음식을 받을 때 제일 먼저 뭘 하게? 알게 모르게 향부터 맡아요. 그러니까 향이 좋으면 일단 첫인상은 먹고 들어가는 셈이지. 간단한 원리야.]
 [그런 거였군요. 정말 대단해요. 저요. 저 말이죠. 살면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린 적이 없었습니다. 아까 지혜 아줌마가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그때. 자꾸만 몸에 소름이 돋아서 아주 혼이 났다고요. 겨우 라면이라고 할진 모르겠지만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감사해요.]
 [음···.]
 일신이 원봉을 향해 정중하게 목례하고서 다시 라면에 집중했다.
 원리를 알고 나니 세밀한 분석도 가능해졌다.
 첫맛에서 알싸하고, 끝맛에서 매콤하다.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이런 새로운 것을 느낀다는 것은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요리란 정말 즐거운 것이구나.
 이토록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이구나.
 라면을 먹던 일신의 입이 점점 웃음기를 머금었다.
 [흠흠. 저, 그래서 말인데.]
 [네? 뭐가 말씀이십니까?]
 [흠···.]
 원봉이 뒷짐을 진 채 쭈뼛거리며 식탁 주위를 배회했다.
 마치 뭐 마려운 사람처럼.
 아니면 꼭 중요한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몸을 배배 꼬았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있습니까?]
 [흠, 그게 말이지···.]
 [뭘 그렇게 망설이세요?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이렇게 죽은 것도 심심하고··· 또 앞으로 이승에서 남은 일들을 처리하자면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고 해서 말인데.]
 [말인데요?]
 일신이 원봉의 입 모양을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그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자네 혹시 나한테 요리 배워 볼 생각 없나? 정식으로.]
 [아 난 또 무슨 말이라고.]
 [···.]
 원봉과 일신의 눈이 마주친 채로 잠시 깜빡거렸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죠?]
 헉.
 일신이 무심코 의자에 몸을 기대다 말고 일순 상체를 바짝 곧추세웠다.
 뭐?
 뭘 배워?
 그것도 정식으로?
 [내 제자가 되어 볼 생각이 없느냐는 말이야. 나 우원봉의 수제자 말이네.]
 헐···?!
 이건 또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래?
 
 
 # 너희 집밥의 문제를 해결하라
 
 [제가 선생님의 제자가 된다고요? 집밥의 달인 우원봉 선생님의 수제자가?]
 [글쎄 그렇다니까.]
 원봉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일신은 그런 원봉의 모습을 바라보며 얼떨떨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대한민국에서 원봉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영광이었다.
 외식업을 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사장님들이 그러할 것이고, 그가 셰프테이너로 거듭난 이후로는 전국의 주부들까지 원봉을 우러러 보았다.
 그런 엄청난 자격을 나한테 주겠다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백수인 나 오일신에게?
 [하지만 제가 선생님의 가르침을 소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요리에 관해선 어제 선생님과 만난 후 생각해 본 것이 전부거든요. 기초가 전혀 없을 텐데···.]
 [기초라··· 자네가 생각하는 요리의 기초는 뭔데?]
 [음. 제가 생각하는 기초는 재료에 대한 지식과 간에 대한 지식, 그리고 기본적인 조리법 등등···.]
 [만일 그런 게 요리의 기초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원봉의 한쪽 입꼬리가 거만하게 올라갔다.
 [네? 그럼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기초는 뭡니까?]
 [간단해. 먹는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 그게 기초라고요?]
 원봉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나오자 일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먹는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기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잊기 쉬운 마음이다.
 [그런 면에서 자네는 합격. 아까 파를 면발 두께로 썰 때의 그 생각. 그거 아주 좋았어.]
 [아···.]
 [그리고 어쩌면 자네는 요리에 대해 아무런 배경도 갖고 있지 않아서 더 좋을지도 모르겠어. 내가 그림을 그리면 그대로 투영되는 하얀 도화지 같거든. 이게 자네가 가진 두 번째 자질이야.]
 [자질을 가졌다고요··· 제가···.]
 [제대로 칼을 잡아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지?]
 [네.]
 [그런데 단번에 완벽하게 칼을 쥐더군.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밀어 썰기였어. 자네의 그런 감각. 이것이 세 번째 자질.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이 됐나?]
 [···.]
 일신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단순한 라면 한 그릇이 아니었다.
 라면 또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
 요리였다.
 그 간단한 과정 속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보는 우원봉 선생은 정말 대단하다.
 그런 사람의 수제자가 될 수 있다고?
 대한민국 외식업의 역사를 새로 쓴 이 남자의 지식과 기술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다.
 내가 상일전자에서 나온 이유.
 그리고 어젯밤 원봉이 혼자 중얼거린 그 말.
 [한 가지만 여쭤 봐도 됩니까?]
 [그러게나.]
 [요리의 세계에선 실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말. 그게 정말입니까? 어제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흠. 이봐 오일신 군.]
 [네.]
 [내가 문제 하나 내도 될까?]
 [문제요? 어떤···.]
 [식당은 허름하지만 진하고 맛있는 국물을 뽑아내는 짬뽕집. 그리고 화려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평범한 맛의 중식당. 자네라면 어딜 가겠나?]
 [당연히 전자죠. 허름한 짬뽕집입니다.]
 일신이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원봉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하고 치며 일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바로 그게 내 대답이네. 물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아···.]
 
 ***
 
 철커덕― 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유리문이 열렸다.
 덕수여고 맞은편에 위치한 신축 상가 건물의 1층.
 이제 막 공사가 끝난 듯 청소가 덜 된 상태의 상가 안으로 지혜와 강진이 들어섰다.
 “여기야. 아직 청소가 덜 돼서 좀 지저분하지?”
 “그렇긴 해도 꽤 크네. 임대료가 꽤나 나오겠는데?”
 “여고 앞이라 업종이 한정적이야. 생각만큼 시세가 높진 않더라고.”
 “그래? 하긴, 여고 앞이면 떡볶이 가게나 분식집이 들어올 테니까.”
 강진이 뒷짐을 진 채 상가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지혜는 무슨 복을 타고난 걸까?
 어린 시절 그녀는 지독하게 가난한 집에서 자랐었다.
 강진의 어머니가 끼니를 거를 정도로 돈이 없는 지혜를 위해 도시락을 하나 더 챙겨주었을 정도였다.
 언제나 안쓰럽고 지켜주고 싶었던 친구.
 전지혜의 인생은 결혼과 함께 180도 뒤바뀌었다.
 5년간 골방에 박혀서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남편이 어느 날 덜컥, 합격해 버린 것.
 그 후로 10년이 넘게 검사 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큰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억 소리 나게 많아진 수입은 지혜의 지혜로운 재테크로 인해 몇 배로 늘어나 지금은 동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부자가 되었다.
 그런 지혜에게 이 정도 상가 한 칸쯤이야,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얘 내가 볼 때 떡볶이 가게가 딱이겠다. 왜 있잖아 프랜차이즈화된 떡볶이집들.”
 강진은 대수롭지 않은 시선으로 상가 밖 덕수여고 정문 쪽으로 바라보았다.
 “음···.”
 내 상가도 아니겠다, 강진은 기분이라도 내자는 심정으로 훈수를 두었다.
 하지만 지혜의 표정이 영 석연치 않았다.
 수십 년간 지혜를 봐 온 강진은 그녀가 무슨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왜? 떡볶이집 별로야?”
 “아니, 떡볶이집이 별로라는 게 아니라.”
 “그럼 왜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건데?”
 “별거 아니야 얘. 그건 그렇고, 구경 다 했으면 우리 요 앞 주꾸미집 가서 주꾸미 볶음 먹을까? 제일 매운맛으로?”
 “음··· 그래, 그러지 뭐.”
 강진은 지혜가 망설이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굳이 재차 묻지 않았다.
 어차피 남의 떡인데 상관해 봤자 배만 아프기 때문이었다.
 지혜는 고개를 내저으며 앞서 걸었다.
 그러다 우뚝 멈춰 서더니 강진을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있잖아.”
 “응?”
 “일신이는 요즘 뭐 해?”
 
 ***
 
 [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제자가 될게요.]
 [잘 생각했네. 알겠지만 내 제자가 된다는 건 흔한 기회가 아니야.]
 [알고 있어요. 이런 엄청난 우연이 왜 제게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가온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허허허, 의욕 한번 좋구만.]
 [그럼 전 선생님께 뭘 해드리면 됩니까? 아까 분명 제가 처리할 일들이 있다고···.]
 [아아, 그건 차차 이야기 하도록 하지. 나도 생각을 정리하는 중이니까 말이야.]
 제자가 되어 보겠냐는 제안은 원봉 입장에서도 등가교환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봉 푸드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여러 문제들.
 그리고 누구보다 슬퍼하고 있을 원봉 자신의 가족들.
 하지만 아직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는 게 좋을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기에 일단 이 재미있는 청년과의 시간에 집중하기로 하는 그였다.
 싹이 파란 인재를 발견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싹을 제대로 된 나무와 열매로 키운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 원봉은 알고 있었다.
 원봉이 시원하게 웃으며 일신의 집 주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모든 집기류가 깨끗하게 관리된 깔끔한 주방이다.
 그럼 냉장고는 어떨까?
 요리사로서의 호기심이 발동하는 원봉.
 [냉장고를 한번 열어봐도 될까?]
 [냉장고를요?]
 일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하긴, 요리 수업을 받자면 어떤 식재료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이 첫걸음일 것이다.
 철컥―
 일신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각각의 재료들이 깔끔한 밀폐용기에 담겨 칸칸이 쌓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일신은 강진이 냉장고 관리에 얼마나 철저한지 알기에 내심 우쭐한 기분도 들었다.
 [흠··· 그렇군.]
 [웬만한 음식은 언제든지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재료들이죠.]
 [뭐라고?]
 일신의 너스레에 원봉의 낯빛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아··· 제 뜻은 그게 아니라··· 기본적인 재료들은 갖춰져 있다, 뭐 그런···.]
 어두워진 원봉의 표정으로 인해 놀란 일신은 제대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아무래도 내 첫 수업은 여기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군.]
 [여기에서요? 어디에서요? 이 냉장고에서요?]
 원봉은 냉장고 안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 리 없는 일신은 그저 멍한 눈으로 원봉과 냉장고를 교대로 바라볼 뿐이었다.
 [자네 집의 밥. 즉, 이 집의 집밥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어.]
 [네에? 문제요? 저희 집밥에 무슨 문제가···?]
 [흠··· 그걸 바로 알려주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몸풀기 차원에서 자네 스스로 한번 해결해 보게.]
 [제 스스로요? 제가 무슨 수로 알지도 못하는 문제를 해결한단 말씀이세요?]
 일신의 표정이 금세 걱정으로 일그러졌다.
 문제를 찾아내기도 어려울 것 같은데 해결까지?
 [똑같은 주방이라도 운영하는 사람에 따라 요리의 맛은 천양지차로 갈리게 마련이지. 재밌겠구만.]
 일신의 눈에 비친 원봉의 표정은 마치 즐거운 놀잇감을 발견한 어린아이 같았다.
 하지만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어머니의 밥에 담긴 문제점을 찾기란 그리 쉬워 보이지 않았다.
 [제 스스로··· 우리 집밥의 문제를 해결하라고요···.]
 [아 참, 그리고 미리 말해둘 게 있는데.]
 [또 뭘··· 말씀이세요?]
 [난 제자로 삼은 녀석한텐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네?]
 [자네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앞으로의 나날이 심히 괴로워질 거라는 말이네.]
 
 
 # 일단은 돈을 벌어야 먹고 산다
 
 “밥 먹자.”
 저녁이 되었고, 강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남편인 성훈과 아들 일신에게 식사 시간을 알렸다.
 일신은 방 안에서 몇 권의 책 속에 빠져 있다 말고 이내 눈을 번뜩였다.
 우리 집밥에 있는 문제.
 그걸 해결하라는 말이지.
 일신이 손에 잡은 책을 책상 위에 두고서 주방으로 향했다.
 그가 놓아 둔 책의 제목은 이러했다.
 <맛있는 식당은 지옥에서도 성공한다>
 ―집밥의 달인 우원봉 선생의 성공 스토리―
 
 ***
 
 “이야, 오늘은 청국장이네?”
 성훈이 식탁 의자에 앉으며 반색을 표했다.
 청국장은 성훈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했던가?
 강진은 남편 잘 만난 지혜에 대한 부러움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는 했다.
 물론 성훈이 이를 알 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잘 먹겠습니다.”
 성훈에 이어 일신이 자리했다.
 우와.
 강진이 차려내는 밥상은 언제 보아도 정갈함의 극치를 자랑했다.
 상 한가운데에 놓인 청국장찌개.
 그리고 그 옆으로 가지런히 나열한 몇 가지 젓갈류.
 강진의 고향인 전라도식으로 담근 새빨간 김치.
 된장, 고추장, 간장에 절인 장아찌들.
 이 모든 것들이 일신으로 하여금 군침이 돌게 만들었다.
 대체 이 맛깔 나는 어머니의 집밥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말일까?
 “역시 당신 손맛은 죽인다니까.”
 성훈이 앞서 청국장을 한 그릇 퍼 담아 맛있게도 먹었다.
 강진은 그 모습이 얄미운지 성훈을 향해 눈을 슬쩍 흘겼다.
 “후릅―“
 일신이 청국장찌개를 한 술 떠 입으로 가져갔다.
 강진의 고향에서 직접 공수한 청국장에 질 좋은 돼지고기, 그리고 알맞게 쉰 김치가 균형을 이루는 꽤 잘 만든 청국장찌개였다.
 맛있다.
 긴 시간 직장 생활을 하며 MSG가 들어간 음식을 수도 없이 먹어 와서 알 수 있다.
 어머니의 찌개엔 그 어떤 화학조미료도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별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냉장고를 들여다보던 원봉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었다.
 그는 결코 허튼 소리를 할 사람이 아닐뿐더러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공한 요리사이기도 하다.
 “분명히 뭔가 있을 텐데···.”
 “응? 지금 뭐라고 했니?”
 “아, 아니에요. 드세요.”
 강진이 반사적으로 혼잣말을 하던 일신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
 나와 아버지를 위해 정성껏 차린 어머니께 이 밥상에 문제가 있다고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참, 오늘 지혜 아줌마가 일신이 너에 대해 묻더라?”
 “저요? 저에 대해 뭘요?”
 “너 요즘 뭐 하냐고. 그래서 천천히 생각하는 중이라고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혹시 남편 로펌에 일자리 난 걸지도 모르겠네.”
 “아, 그래요.”
 일신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강진은 최대한 일신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지혜를 핑계로 돌려 말한 것이었지만, 자신의 의도를 일신이 모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을 믿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일신의 표정이 좋지 않은 걸 눈치챈 강진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일신 스스로도 힘들 텐데 괜한 말을 꺼낸 건 아닐까?
 강진이 말을 꺼낸 후 바로 후회했다.
 그녀는 반쯤 먹은 자신의 밥그릇을 정리하기 위해, 혹은 낯빛이 어두워진 일신을 혼자 두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다 드신 거예요?”
 “그, 그럼. 요즘 밥맛이 통 없어서.”
 “그래도 좀 더 드시죠.”
 “괜찮아. 낮에 지혜랑 많이 먹고 왔어.”
 그런 강진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신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벌써 몇 달이나 백수 생활을 했다.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요리라는 것을 배우는 것도 좋고, 우원봉 선생님의 제자가 된 것도 좋다.
 하지만···.
 하지만 일단 돈을 벌어야 먹고 살 것 아닌가?
 “후.”
 일신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신과 강진의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한 성훈도 요란하게 밥 먹던 소리를 슬쩍 낮추었다.
 내 일을 찾는다는 것은 수없이 찾아오는 갈등에 대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지잉―
 그때 주머니에 넣어 둔 일신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어? 현아가 어쩐 일이지?”
 강현아.
 상일전자 특판팀 2년 차이자 한때 일신의 부사수였던 현아의 전화였다.
 
 ***
 
 “선배님.”
 “어, 현아야.”
 일신의 집에서 30분 쯤 떨어진 곳의 한 카페.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은 현아를 향해 일신이 다가갔다.
 퇴근하고 바로 왔는지, 단정한 정장 차림의 강현아는 청초한 미모를 발산했다.
 하얀 얼굴과 어깨 너머로 늘어뜨린 머리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녀는 상일전자 사무실에만 박혀서 일하기엔 아까운 인물이었다.
 모델이나 배우를 하면 모를까, 회사원 감은 분명 아니었다.
 일신은 그런 현아와 함께 2년간 호흡을 맞췄다.
 현아는 일신의 출중한 업무 능력과 사내 정치에 굴하지 않는 강직함을 존경했고, 일신은 똑 부러지게 일 처리를 잘하는 현아에 대한 신뢰를 갖고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이런 저녁 시간에 단둘이 카페를?
 몇 번의 회식 자리 이외엔 그녀와 이런 시간을 가져 본 일이 아직 없었다.
 “아메리카노, 맞죠?”
 “그래, 고마워.”
 상사의 선호를 먼저 기억하고 준비해 놓는 습관.
 현아가 가진 또 하나의 능력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뭐 그럭저럭. 너는?”
 “아시잖아요, 회사가 어떻다는 거. 상일전자 밖의 세상은 어때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현아가 일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
 일신은 현아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대신 오랜만에 만난 부사수와 편하게 이야기나 나누고 싶었다.
 “좋아. 지갑이 얇아진 것 빼고는. 꽤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고.”
 “특별한 경험이요? 그게 뭔데요?”
 “아··· 그런 게 있어. 들어도 믿을 수 없는 뭐 그런 거.”
 “선배님 그러다 신내림 받고 산속으로 들어가시는 건 아니죠?”
 “푸흡!”
 헐.
 역시 여자의 촉이란 그 한계를 가늠할 수 없다.
 어떻게 단번에 귀신이 들렸다는 걸 알았지?
 “괜찮으세요? 사래 들리셨어요?”
 현아가 재빨리 냅킨 몇 장을 집어 일신에게 건넸다.
 오랜만의 만남인데 스타일을 제대로 구긴 일신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인해 빨갛게 달아올랐다.
 “괘, 괜찮아. 뜨거운 걸 갑자기 마셨더니.”
 “풉.”
 그런 일신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현아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쭈, 웃어?”
 “엉뚱한 건 여전하시네요.”
 “이제 선배 아니라고 막 핀잔도 주고 그러는 건가?”
 “아니에요. 반가워서 그래요, 반가워서.”
 현아가 손사래를 치며 한참을 웃다가 서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또 금세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함께했던 2년의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 일신이 앉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현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네?”
 “무슨 일이 있기에 그렇게 힘든 건데?”
 “···.”
 “괜찮으니까 말해 봐.”
 “선배님···.”
 일신이 진지한 표정을 묻자 현아 또한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괜찮다니까.”
 “선배님··· 다시 상일로 돌아오시면 안 될까요?”
 “뭐?”
 “선배님 자리 아직 공석인 건 아시죠?”
 “그건 알지만···.”
 “뒤에서 선배님 물 먹인 사람들, 이번에 사고 하나 제대로 쳐서 지방 발령을 받았거든요. 남은 차장님들은 다 선배님이 필요하다 하시고요. 특판팀에 선배님 말고는 일 제대로 아는 사람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이라도 선배님이 마음만 돌리시면 상일전자 다시 들어올 수 있어요. 차장님들이 특판본부 본부장님 설득해서 허락도 받았고요. 그리고···.”
 “그리고 또 뭐?”
 “저도 선배님 없으니까 너무 재미없고, 힘들고. 그래서···.”
 “그래서 나보고 다시 상일로 들어가라는 말이야?”
 고개를 숙인 채인 현아를 바라보던 일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상일로 다시 들어간다?
 내가 어떻게 나온 회사인데?
 어떤 마음으로 거길 뛰쳐나왔는데 다시 들어가?
 “미안하지만 절대 그럴 일은 없다. 난 다른 곳에서 새롭게 출발할 거야.”
 “다른 곳 어디요?”
 “어디든.”
 “오늘 사람들이 하는 말 들었어요. 선배님 아직 앞으로 뭘 할지 정해진 거 없다면서요. 혹시 갈피를 못 잡고 헤매시는 건 아닌가 해서요.”
 “뭐?”
 “선배같이 불도저 같은 사람이 머뭇거릴 땐, 진짜 아무런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 아니냔 말이에요. 선배님, 그럴 바에 회사에서 조금만 더 같이 일해 보는 게···.”
 “야, 강현아!”
 현아의 말투가 사뭇 격앙되었다.
 그것이 일신을 자극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일신 자신이었지만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기란 쉽지 않았다.
 
 
 # 실마리가 있다
 
 덜컹, 덜컹―
 현아를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일신은 버스의 제일 뒷좌석에 앉아 멍하니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혹시 갈피를 못 잡고 헤매시는 건 아닌가 해서요.”
 조금 전 현아가 했던 말이 일신의 심장을 쿡 하고 찔렀다.
 젠장.
 현아의 눈에 그렇게 비칠 정도면 말은 다 한 거다.
 그동안 시간을 너무 지체한 걸까?
 상일에 다시 들어오라고?
 내 삶 전체에 대한 회의감이 들게 만든 그 지독한 곳에 다시?
 “그럴 수는 없어, 절대로.”
 일신이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근처에 앉은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시선을 던지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신의 머릿속엔 또 하나의 결심이 굳어졌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한다.
 벌이가 있어야 마음 편히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법.
 원봉의 지식과 기술을 완전히 일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전까진 무엇이라도 좋으니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그였다.
 “마침 생각해 둔 곳도 있고···.”
 
 ***
 
 다음 날 아침, 일신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냉장고 문 앞에 섰다.
 삑삑삑―!
 냉장고 문을 일정 시간 이상 열어 두었을 때 나는 경고음이 적막한 주방의 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흐음.”
 그러거나 말거나 심각한 표정으로 냉장고 속 물건들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일신의 눈빛이 매서웠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혹시 재료들의 신선도?
 유통기한이 지난 식재료가 있었던 건 아닐까?
 일신이 재빨리 재료가 담긴 봉투에 적힌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건 없는데··· 그렇다고 특별히 상한 재료도 없고.”
 재료의 선도가 문제는 아니었다.
 선도를 확인할 수 있는 신선 재료가 몇 개 되지도 않을뿐더러 보관되어 있는 채소들은 하나같이 유통기한이 오래 남은 신선한 것들이었다.
 조미료를 쓰는 것도 아니고 신선도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맛이 없지도 않다.
 일신이 아는 한 강진의 손맛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좋았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 중인가?]
 [아, 선생님.]
 [하도 심각해 보여서 말 걸기도 무안했네.]
 [선생님께서 내 주신 숙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쉽지가 않네요.]
 [허허, 그랬군. 당연히 쉽지 않겠지. 내가 내는 숙제가 쉬우면 그게 말이 되나? 그래서, 단서는 찾았고?]
 [아직이요. 열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신은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 냉장고를 관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그 가설을 하나하나 따라가 본다.
 빠르게 돌아가는 일신의 머리가 하는 일이었다.
 냉장고의 청결 상태도 좋고, 재료들의 배치도 규칙적이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대체 뭐가.
 [그래, 그럼 답을 찾게 되면 날 부르라고. 내가 옆에 있어봤자 방해만 될 것 같구만.]
 [···.]
 집중하고 있는 일신은 지난번 라면 때처럼 원봉의 말을 미처 듣지 못했다.
 [이보게, 오일신 군.]
 [···네?]
 원봉이 일신을 한 번 더 부르자 일신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제대로 맛있게 만든 집밥을 먹을 때 사람들이 밥을 몇 그릇쯤 먹을 것 같나?]
 원봉은 일신의 집중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초심자에게 너무 심오한 수수께끼를 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큰 틀이라도 잡아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질문을 하나 던졌다.
 [음, 진짜 맛있다면 두 그릇? 아니면 세 그릇이요?]
 [틀렸네.]
 [설마 네 그릇이 넘습니까?]
 [가장 이상적인 양은 한 그릇이야.]
 [네?! 한 그릇이라고요? 맛있는데 어째서 한 그릇만 먹습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말했듯이 나와의 수업은 결코 쉽지 않아.]
 슈욱― 하는 소리.
 원봉이 모습을 감출 때마다 나는 소리다.
 [선생님!]
 [난 이만 쉬어야겠네. 그럼.]
 일신이 급한 마음에 원봉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그의 몸은 빠르게 투명해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한 그릇?
 한 그릇만 먹는다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너무 맛있어서 아껴 먹는다는 뜻일까?
 맛있는데 왜 딱 한 그릇만 먹는다는 거지?
 일신의 표정이 혼란으로 일그러졌다.
 삑삑삑―!
 냉장고의 경고음이 그의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얘, 이 새벽부터 냉장고 열어놓고 뭐 하니?”
 “아··· 어머니.”
 그때, 강진이 졸린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걸어왔다.
 “전기료 많이 나간다. 너무 오래 열어두지 마.”
 “네.”
 “하암. 일어난 김에 아침이나 해야겠다.”
 강진이 크게 한 번 하품을 하고서 하얀 쌀통에 달린 버튼을 세 번 꾸욱 눌렀다.
 그러자 꽤 많은 양의 쌀이 척― 하는 소리를 내며 미끄러져 내렸다.
 “밥을 꽤 많이 하시네요?”
 한 눈에 봐도 묵직한 쌀의 양에 의아한 일신이 강진에게 물었다.
 “네 아빠가 밥을 워낙 많이 드시잖니.”
 “네? 아버지가 밥을 많이 드세요?”
 “어머? 너 그것도 몰랐니? 어제도 청국장이 맛있다면서 두 그릇 넘게 드셨어.”
 “두 그릇 넘게요? 그렇게나 많이?”
 “네 아빠 원래 입에 맞는 반찬 있으면 종종 그러신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뭘.”
 반찬이 입에 맞으면 밥을 두 그릇 이상 먹는다라.
 원봉의 말과는 다르다.
 그렇지.
 그게 정상이지.
 그런데 왜 자꾸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걸까?
 “그런데 너 오늘 어디 가니? 셔츠는 왜 다려 놨어?” 
 
 ***
 
 “이모, 여기 반찬 좀 더 주세요!”
 “여기도요!”
 손님들로 가득 찬 백반 전문 식당 ‘감동찌개’ 안으로 일신이 들어섰다.
 “우와.”
 들어서자마자 일신은 손님들의 열기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커다란 홀 안을 가득 메운 손님들이 족히 3, 40명은 되어 보였다.
 ‘감동찌개’는 일신이 사는 상암동 일대에서는 알아주는 맛집이었다.
 점심시간이면 주변의 직장인들로, 저녁 시간이면 가족 단위로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이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주방 보조를 채용한다는 공고가 며칠 전부터 올라와 있었다.
 “손님은 뭘로 드릴까?”
 그때, 재빨리 일신 옆으로 다가온 후덕한 인상의 여성이 친절한 웃음으로 그를 맞이했다.
 “아, 저는 식사를 하러 온 게 아니고 면접을 보러 왔는데요.”
 “그래요? 그럼 우리 채용 공고 보고 찾아온 거?”
 “미리 전화드렸습니다. 오일신이라고 합니다.”
 “호호호, 이렇게 젊고 잘생긴 청년일 줄은 몰랐네? 이쪽으로 와요.”
 일신을 맞이한 여성은 ‘감동찌개’의 사장인 오복자였다.
 복자는 식당 한쪽 구석에 놓인 테이블로 일신을 안내했다.
 손님이 가장 많을 저녁 시간보다 조금 일찍 온 탓에 듬성듬성 비어 있는 테이블이 일신의 눈에 띄었다.
 아직 5시도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라니.
 일신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면 거의 돈을 갈퀴로 긁는 수준일 것이다.
 이곳 ‘감동찌개’의 대표 메뉴인 ‘그날의 백반’ 가격이 9,000원이니 대충 따져 봐도 시간당 100만 원 정도의 매출이 나온다.
 그것을 주로 계산하고 월로 계산한다면 웬만한 소기업 수준의 매출이 나올 터.
 일신이 괜히 ‘감동찌개’의 채용 공고에 주목한 것이 아니었다.
 원봉이 쓴 자서전을 보며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반집은 특성상 매일매일 메뉴가 달라지고, 테이블 회전이 엄청나게 빠르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경험을 쌓기엔 여기만 한 곳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우원봉의 시작이 작은 백반집이었듯, 일신 또한 백반을 전문으로 하는 이곳을 택했다.
 그렇게 마주한 복자와 일신의 면접은 약 30분간 이어졌다.
 “주방 경험이 없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딱 보기에 인상이 참 좋네. 그런데 일신 씨는 좋은 학교에 좋은 직장 경력을 두고 왜 하필 백반집 주방 일을 하려는 거야?”
 “저, 그건···.”
 “사장님, 밥이 몇 개 안 남았는데 어떡하죠? 새로 하고는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서요. 옆 가게에서 몇 개만 빌려올까요?”
 그때, 일신이 머뭇거리던 사이 직원 한 명이 다가와 복자에게 물었다.
 밥?
 일신은 밥이라는 단어에 본능적으로 직원과 복자에게 집중했다.
 “몇 개나 남았는데?”
 “열두 개요.”
 “음···.”
 열두 개?
 적다.
 지금 있는 손님들이 조금 더 먹고 싶은 사람이 분명 절반은 넘을 게 뻔했다.
 이 상황이라면 다른 가게에서 잠시 밥을 빌려오는 게···.
 “열두 개면 괜찮아. 어차피 손님들 두 그릇씩은 잘 안 드셔.”
 “네?!”
 “아우 깜짝이야. 왜 일신 씨가 놀라고 그래?”
 “아차··· 죄송합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해서요. 손님들이 이렇게 많은데 예비 밥이 열 두 개면 부족한 거 아닌가요?”
 일신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복자에게 물었다.
 복자는 그런 일신이 이상했지만, 지원자의 열정이라 여기며 이내 말을 이었다.
 “그러게, 나도 그게 참 이상한데··· 어째 우리 가게 오는 손님들은 밥은 그렇게 많이 안 드시더라고.”
 “그게 정말입니까?”
 복자의 말에 놀란 일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식사 중인 손님들의 테이블 위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복자의 말대로 손님들 중 밥을 한 그릇 넘게 먹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거다.
 여기에 뭔가 실마리가 있다.
 면접이고 뭐고.
 원봉의 수수께끼에 대한 단서가 이곳에 있다는 확신이 든 일신이 복자를 향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 했다.
 “사장님, 여기 백반 1인분이요.”
 
 
 # 대충 가르쳐서는 안 되는 물건이다
 
 “자, 이게 우리 가게 메인 메뉴 ‘그날의 집밥’이야.”
 일신이 백반 1인분을 주문한 지 채 5분이 채 되지 않아 복자가 백반을 내 왔다.
 양철로 된 쟁반 위에 올라간 반찬 접시가 6가지.
 메인 반찬인 제육볶음과 1인용으로 간단히 끓여져 나오는 찌개가 전부였다.
 “잘 먹겠습니다.”
 “호호, 젊은 친구가 자세가 됐네, 됐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일신을 향해 복스럽게 웃어 보이는 복자를 향해 일신이 물었다.
 사실 면접 자리에 와서 음식 맛을 본다는 것이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봉의 수수께끼에 대한 실마리.
 그 해답이 이 백반 안에 있다는 것이 분명한데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자세가 됐다니?
 그럼 설마···?
 일신이 무언가 눈치챘다는 듯 눈을 점점 크게 떴다.
 “언제든 출근해서 일해. 우리는 빠를수록 좋고.”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신이 얼떨결에 머리 숙여 인사했다.
 아무런 경력도 없는 자신을 주방 보조로 흔쾌히 채용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도 그녀는 일신 자신이 가진 성실한 자세와 가능성을 보았으리라.
 일신은 그런 복자의 마음이 고마웠다.
 복자는 어서 먹으라며 손사래를 치며 빠르게 자리를 떴다.
 이제 ‘그날의 백반’과 자신만이 마주한 시간.
 복자에 대한 고마움을 마음에 새긴 일신이 눈앞의 백반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
 
 10여 분 후.
 일신은 아직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은 채 턱을 괴고서 생각에 골몰했다.
 백반의 구성은 이러했다.
 제육볶음을 중심으로 좌에서 우로 콩나물 무침, 계란말이, 청포묵 무침, 오징어젓, 김치, 감자볶음 순서였다.
 “별다를 건 없는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반찬들은 평범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젓가락 집어 먹어보았지만 역시나였다.
 대체로 간이 약하면서 맛이 있었지만 결코 이 반찬 맛을 보기 위해 줄까지 서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이 제육볶음이 특별한 걸까?”
 일신은 다음으로 제육볶음 한 조각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우물우물.
 오, 이건 맛있군.
 일신은 속으로 감탄했다.
 고추장보다 고춧가루의 비중이 높아 깔끔하고 설탕이 충분히 녹아든 달달한 맛의 제육볶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찌개.
 소량의 된장찌개를 짧은 시간 안에 끓여 낸 비주얼.
 “후릅―”
 뭐, 이것도 그런대로 맛있고.
 일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날의 집밥’이 아주 괜찮은 수준의 한 끼 식사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분명 괜찮은 수준이긴 하지만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뭘까.
 대체 원봉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때였다.
 “젊은 총각이 뭘 그렇게 깨작대? 팍팍 좀 먹어!”
 다른 테이블로 나가던 쟁반을 들고서 일신의 옆을 지나던 복자가 그를 향해 한마디 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일신은 자신의 고용주가 될지도 모르는 복자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기에 숟가락을 든 손에 힘을 실었다.
 와구 와구.
 한술 가득 밥을 떠 입에 넣었고, 그때그때 당기는 반찬들을 닥치는 대로 먹었다.
 “어··· 뭐야 이거 생각보다 진짜 맛있잖아?”
 그러자 일신의 눈이 일순 반짝이며 그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났다.
 밥과 오징어 젓갈의 조합으로 한 수저.
 계란말이만으로 입이 한 가득 차오르기도 하고.
 제육은 밥 없이 쌈으로만.
 찌개는 밥이 없으면 안 되고.
 일신이 백반을 정신없이 먹는 동안 배는 급격하게 불러왔다.
 그러나 불러오는 배만큼 줄어들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설마··· 이거··· 이걸 말하는 거였나?”
 바로 일신의 밥 공기였다.
 
 ***
 
 “어머니!”
 날이 어두워진 후에야 일신이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니, 거의 뛰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속도.
 일신은 마음이 급했다.
 “그래, 일신아. 지금 오니?”
 “네.”
 “밥은?”
 “아직이요.”
 “또 라면 먹을 거니?”
 강진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일신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평소의 일신이라면 네, 하고 라면 물을 올렸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니요, 집밥 먹을래요.”
 “어유, 네가 어쩐 일로. 기다려, 금방 차려줄게.”
 “저도 금방 씻고 나올게요.”
 삼십 분 후, 일신이 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식탁 앞에 앉았다.
 한 번 더 집밥을 먹기 위해 밖에서 부지런히 움직인 후였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맛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역시···.”
 일신이 식탁 위에 차려진 반찬들을 바라보았다.
 구성은 대체로 어제 저녁과 비슷했다.
 여러 종류의 젓갈과 장아찌류.
 그리고 돼지고기가 들어간 김치찌개.
 “생각을 하면서 먹어 보는 거다, 오일신. 생각하면서.”
 일신이 최대한 혀에 집중하며 미각 세포를 깨웠다.
 다른 모든 감각을 차단한 채 혀에서 느껴지는 감각에만 집중하기 위해 미간을 구겼다.
 밥과 젓갈로 한 수저.
 그다음엔 밥과 찌개로 한 수저.
 그다음은 밥과 장아찌.
 이러한 순서의 무한 반복이었다.
 “역시 그랬어, 역시.”
 일신이 조용히 중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원봉이 근처에 있을까?
 그를 부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선생님.]
 일신이 원봉과 대화할 때의 그것처럼 머릿속으로 원봉을 불렀다.
 하지만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자 일신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다시 한번 강하게 집중하여 원봉을 불러보았다.
 [우원봉 선생님!]
 [어허, 귀청 떨어지겠구만. 나 여기 있네.]
 [선생님.]
 귀신의 등장이 반가운 걸 보니 일신도 서서히 미쳐가는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밝은 걸 보니 숙제는 다 했나 보군?]
 [검사해 주시겠습니까?]
 [허허, 진짜? 자신 있나? 말했다시피 난 제자한테는 엄한 사람이야.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간 더 어려운 숙제로 자네를 괴롭힐 거라고.]
 원봉이 턱 끝을 올리며 일신을 내려다보았다.
 마음먹고 일신을 키워 보기로 한 이상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자세는 금물이었다.
 원봉 자신의 사소한 질문 하나라도 깊이 생각하고 신중히 대답해야 한다.
 어?
 그런데 일신의 눈을 바라보던 원봉이 일순 움찔했다.
 자신감이 가득 찬 일신의 눈빛.
 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원봉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 살짝 감도는 미묘한 웃음.
 원봉은 점점 호기심이 생겼다.
 [대답해도 되겠습니까?]
 [해 보게.]
 원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는, 저희 집밥의 메뉴 구성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원봉이 속으로 끄응,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설마 진짜로 하루 만에 답을 찾아 낸 건 아니겠지?
 [아마도 아버지의 식성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지만, 여기 있는 이 반찬들, 하나같이 다 짠 것들뿐입니다. 젓갈에 장아찌에 찌개에.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밥의 양이 많아졌던 거고요.]
 [흐음···.]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맛있는 집밥의 조건 중 하나는 바로 반찬의 구성인 것 같습니다. 어느 것은 심심하게, 또 어느 것은 맵기도 하고, 짜야 할 것은 짜게 해서 먹는 사람의 입과 배를 기분 좋게 자극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게다가 영양적인 측면에서도 구성은 중요하지···.]
 원봉은 팔짱을 낀 채 턱 끝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깨달았을까.
 30년 전, 허름한 백반집에서 몇 개월에 걸친 분석으로 알게 된 이치였다.
 모든 음식을 똑같은 간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
 밥뿐 아니라 다양한 영양이 골고루 분포된 반찬들까지 전부 먹게 해야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라는 것.
 요리에 초짜라는 일신이 대체 어떻게 하루 만에 이걸 깨달은 거지?
 [제 답이··· 맞습니까?]
 원봉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기자 자신감이 가득했던 일신의 표정이 흔들렸다.
 이걸 인정해 줘, 말아.
 원봉은 잠시간의 고민 후 대답을 내놓았다.
 [추상적인 대답이었지만 틀리진 않았어···.]
 [저, 정말입니까? 역시··· 역시 그게 맞았군요!]
 일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리자 거실에서 빨래를 개던 강진이 깜짝 놀라며 일신을 쳐다보았다.
 “잘 먹었습니다, 어머니.”
 강진과 눈이 마주친 일신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자 강진 또한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집밥을 180도 바꾸는건 어머니도, 아버지도 내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천천히 조금씩 집밥을 균형 있게 바꿔가리가 다짐하는 일신이었다.
 “그래, 그릇은 개수대에 넣어두기만 해.”
 “네.”
 휴.
 원봉과 대화 하다 보면 자꾸만 저도 모르게 감정이 요동친다.
 다행히 아직까진 강진이 이상한 낌새를 채지는 못했지만 조심해야 했다.
 일신이 밥을 다 먹은 그릇을 개수대 안쪽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리고 강진이 잠깐 방으로 들어간 틈을 타 몰래 설거지를 시작했다.
 일신의 옆에 선 원봉이 그런 일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희한한 놈일세.
 자신이 숙제로 낸 수수께끼는 요리하는 사람들에겐 쉬울지 몰라도 이제 시작 단계인 일신에겐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보통의 경우 초심자들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게 마련이다.
 먹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는 것은 매우 나중 단계라는 말이다.
 대개의 요리사들은 이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기 일쑤다.
 한데, 이 오일신이란 청년은 그 방면에 있어선 타고난 센스가 있다.
 조용히 남을 배려하는 마음.
 자신의 어머니 모르게 조용히 설거지를 하는 이 모습을 봐도 그렇다.
 허허···.
 이거 정말 대충 가르쳐선 안 되는 물건이다.
 [선생님.]
 일신이 설거지를 막 끝낸 후 수도 꼭지를 잠갔다.
 [응?]
 [저 사실, 일자리를 구했습니다.]
 [일자리? 어떤?]
 [선생님의 제자가 되기로 한 이상 제대로 뒤를 따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과 똑같이 백반 전문 식당에서 시작해 보려고요.]
 원봉을 바라보는 일신의 눈빛이 번뜩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어머니를 배려하던 착한 아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하려면 확실히 하겠다는 마음가짐.
 지혜 아줌마에게 라면을 끓여주었을 때와 조금 전 원봉의 수수께끼를 풀어냈을 때 느꼈던 희열.
 짧은 경험이었지만 재미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이 뛰었다.
 일신은 원봉의 모든 것을 배우고 싶었다.
 대한민국 외식업의 역사인 그의 모든 것을 배워 나의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제대로 된 승부를 걸어 볼 것이다.
 이것이 지금 일신의 마음이었다.
 [내가 백반집 주방 보조로 시작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긴 하지.]
 [그렇습니다.]
 [자네가 일하기로 한 곳이 어딘가?]
 [‘감동찌개’라는 식당입니다. 강북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혹시 거기 오복자 사장님이 하시는?]
 [네?! 그곳을 아세요?]
 [알다마다. 3년 전쯤인가? 그때 금요 시식회 백반편에 나왔던 집이잖나. 나도 한동안 자주 갔었다고.]
 [맞아요! 맞습니다!]
 역시 원봉은 알고 있구나.
 내가 제대로 골랐다.
 그런 대단한 집이라면 분명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그 선택이 내 것과 똑같다고? 내가 처음 외식업에 발을 담그던 그때와?]
 [네? 그럼 아닙니까?]
 [미안하지만 오일신 군 자네···.]
 [···.]
 [완전히 잘못 짚었어.]
 [네?! 잘못 짚었다고요? 이유가 뭡니까? 대체 왜···.]
 [자네 생각보다 꽤 바보 같은 구석이 있구만? 쯧쯧쯧.]
 어리둥절한 일신의 표정을 마주한 원봉이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 우리 일신이가 철들었구나!
 
 [대체 선생님의 선택과 제 선택이 어디가 다르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말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네. 뭐, 어떻게 보면 좋은 교육이 될 수 도 있으니 자네 하고 싶은 대로 한번 해 보게. 허허허.]
 원봉의 의미심장한 표정이 며칠 동안 일신의 마음에 계속 걸렸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이유를 물었지만 원봉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저 허허, 웃으며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혹시 요즘같이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 외식업계에서 백반집을 선택한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닐까?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한국인 밥상의 기본은 바로 백반이야. 일식이 맛있네, 양식이 맛있네, 하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그들은 된장찌개를 찾아. 백반은 맞아. 절대 틀린 선택이 아니야.”
 일신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코끝을 타고 넘는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다.
 “아앗!”
 일신이 일순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거기엔 한쪽 면이 타 버린 부침개가 지글거리며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호박 부침개.
 일신이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준비하고 있는 음식이었다.
 “하암. 무슨 냄새가 이렇게 고소하니?”
 그때, 일신의 어머니인 강진이 방문을 열고 주방 쪽으로 걸어오며 하품을 했다.
 “깨셨어요?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배고프니? 그럼 말을 하지.”
 “저도 도와야죠. 주방 일을 어머니만 하라는 법이 있나요 어디?”
 “어유, 기특하다 우리 아들. 부침개 부치는구나?”
 “네. 그런데 잠깐 다른 생각을 하다가 한쪽이 타 버렸어요.”
 일신이 타 버린 부침개를 빈 접시에 덜어 놓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의 노력으로 재배되었을 호박과 밀가루.
 잠깐의 방심이 그들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고 말았다.
 일신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두 번째 부침개 반죽을 팬 위에 올렸다.
 “반죽이 특이하구나 수분이 거의 없네?”
 “네. 책에서 본 레시피대로 해 봤어요. 왜 있잖아요. 집밥의 달인.”
 “아아, 얼마 전에 돌아가신 우원봉 선생? 그 사람 말하는 거니?”
 “역시 그분 모르는 사람은 없어요. 그쵸?”
 일신이 내심 뿌듯함을 느끼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역시 나의 스승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아무도 모르게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어머니가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일신은 잠시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보며 부침개를 뒤집을 타이밍을 재는 중이었다.
 치익―
 팬 위에선 경쾌하고도 청량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탄내는 나지 않는다.
 언제일까?
 언제 뒤집는 게 최적의 타이밍일까?
 옆에 선 강진 또한 저도 모르게 숨 죽이며 뒤집개를 쥔 일신의 손을 지켜보았다.
 [이런 답답한 친구를 봤나?!]
 [어우 깜짝이야!]
 그때, 일신의 등 뒤에서 원봉의 일갈이 들려왔다.
 이에 놀란 일신이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가 겨우 그것을 속으로 삼켰다.
 [내,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그럴 수가 있어야지.]
 [갑자기 그렇게 놀래키시면 어떡합니까···?]
 일신이 가까스로 아무렇지 않은 척 원봉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는 자네는? 갑자기 그렇게 답답한 짓을 하면 난 어떡하나?]
 [답답하세요? 제가 뭘 어쨌기에.]
 일신은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원봉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평소엔 온화한 인상이지만 음식을 대할 때면 호랑이처럼 사나워지는 표정.
 그것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세상에 누가 그렇게 정성 들여 부침개를 부치나?]
 [네? 정성을 들이는 게 뭐가 어때서 그러십니까?]
 [자네가 앞으로 일할 곳이 어디라고 했지?]
 [백반 전문점 ‘감동찌개’입니다만···.]
 아···?!
 그때, 일신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쳤다.
 오늘부터 일하게 된 ‘감동찌개’.
 그곳에서 자신의 역할은 바로 주방 보조.
 닥치는 대로 모든 일을 하는 자리라는 뜻이다.
 [그런 곳에서 부침개 하나를 이렇게 시간과 공을 들여가며 부치겠다고? 그 전쟁터 같은 주방에서?]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일전의 숙제에서도 배웠겠지만 백반 그 자체건, 백반집 주방이건 중요한 것은 균형이야. 맛에도 균형이 필요하고, 만드는 시간에서도 균형이 필요해.]
 원봉의 말은 간단한 원리였지만 일신은 머릿속이 멍해질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만일 조리 시간에 대한 균형 감각 없이 주방에서 부침개 하나로 이렇게 시간을 끌었다면?
 아마도 일 못하는 신입이 들어왔다고 첫날부터 단단히 찍힐 것이 분명했다.
 원봉은 그것이 걱정되어 이렇게 나타나 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인사는 됐어. 어차피 오늘 하루 주방에 있어 보면 깨닫게 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닐 테니.]
 [그렇겠죠.]
 [그럼 오늘 밤, 여기에서 다시 보도록 하지.]
 [아, 네! 알겠습니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
 이것은 그의 첫 수업이 시작된다는 뜻일 터.
 일신이 목소리에 각을 잡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부침개는 여러 번 뒤집어도 아무 문제 없어. 반죽만 잘됐으면 대충 부쳐도 되네.]
 슈욱― 하는 소리가 났다.
 마지막 말을 한 후, 원봉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그렇구나.
 그래서 답답하다고···.
 일신이 곧바로 부침개를 뒤집었다.
 완벽히 노릇노릇해 지진 않았지만 몇 번 더 뒤집어 익히면 그만인 상태였다.
 “그런데 일신아, 왜 하필 부침개야? 너도, 아버지도 별로 안 좋아하잖아.”
 “아, 그건 말이죠···.”
 일신이 순간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몇십 년 넘게 아버지와 자신을 위해 밥을 해 주신 어머니다.
 어머니의 밥에 잘못된 점이 있다고 꼬집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제2의 집밥의 달인이 되기로 결심한 몸.
 여기, 우리 집의 집밥부터 바로잡는 것이 나의 의무이기도 하다.
 “우리 집 반찬, 너무 짠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래서 만들어봤어요. 냉장고에 있는 젓갈이나 장아찌류도 천천히 정리하려고요.”
 아무리 어머니라지만 냉장고를 간섭하는 것은 강진의 자존심에 상당한 금이 갈 것이 분명했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 공중에서 교차했다.
 이내 일신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과연 어머니는 뭐라고 하실까?
 “어머, 우리 일신이가 철들었구나!”
 
 ***
 
 오전 9시.
 씁쓸한 기분의 일신이 ‘감동찌개’ 안으로 들어섰다.
 어머니의 자존심에 금은 무슨.
 어머니는 수십 년간 밥을 하는 것에 지치셨던 거다.
 일신의 간섭은 강진에게 곧 도움을 의미했고, 그건 그녀에게 꽤나 반가운 일이었다.
 그동안 조금씩이라도 도와드릴걸···.
 일신은 그동안 고생스럽게 집밥을 만들어 왔을 강진의 고생을 떠올리며 아려 오는 가슴을 애써 참아냈다.
 “앞으로는 우리 집밥의 절반은 내가 하는 걸로.”
 일신이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읊조리며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아직은 텅 빈 식당.
 저 멀리 주방 안쪽에만 작게 켜진 불빛 쪽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소음.
 “안녕하세요, 오일신입니다.”
 그쪽을 향해 일신이 다가가며 인사를 건넸다.
 “···.”
 그의 인사를 못 들었는지,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오복자 사장님일까?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일을 하는 저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일신이 거의 주방 출입문까지 다가서자 불빛 쪽에서 스윽― 스윽― 하는 필러 특유의 소리가 들렸다.
 짐작하건대 감자나 당근의 껍질을 벗기는 중이리라.
 “사장님이세요? 저 오일신입니다.”
 일신이 한 번 더 인사를 건네자 필러 소리가 일순 멈추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일어나며 끄응― 하고 앓는 소리.
 중년 여성의 목소리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곳의 주인인 오복자···?
 “사장님은 아니고, 여기 주방 책임자.”
 일신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복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복자보다 후덕한 체구에 양쪽으로 찢어진 눈이 인상적인 중년의 여성.
 일신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 백숙희야.”
 “오일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숙희를 마주한 일신이 다시 한번 목례했다.
 그리고 다시 올라오며 그는 아주 짧은 순간 숙희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
 마치 싸늘한 밤 사막의 사나운 여우처럼 날카롭게 말이다.
 
 <『고스트 요리왕』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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