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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파 1권 (1)

2018.07.11 조회 783 추천 4


 # 0. 序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의 보름달 아래, 수많은 도검이 주인의 손을 떠나 땅에 널려 있었다.
 칼날이 맞부딪치는 소리, 사람들이 내는 비명 소리,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 잠시 전까지만 해도 경내를 가득 채우고 있던 수많은 소리들은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들려오는 것은 죽어 가는 사람들의 신음.
 그 소리만 가득한 공간, 중앙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동공이 풀린 채로 멍하니 달을 올려다보고 있는 소년의 손에는 피범벅이 된 단도가 들려 있었다.
 달을 바라보던 소년은 고개를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절의 경내에는 검은 복면을 한 무사들과 검정색 천을 손목에 감은 무사들의 시체가 가득 널려 있었다. 꽤 긴 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던 듯, 무사들의 옷은 피와 땀으로 흠뻑 젖은 채였다.
 시체들이 가장 많이 쌓인 곳 중앙에는 온몸에 화살을 꽂은 채 뒹구는 한 남자와, 오른팔이 잘린 채 신음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잠시 슬픈 눈빛으로 그 방향을 의식하던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방금 전과는 정반대로 눈빛을 바꿨다.
 얼음장도 녹여 버릴 듯 활활 불타는 그 눈빛의 끝에는 목에 큰 도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하얀 두건의 한 사내가 보였다. 가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 사내의 두건 가운데에는 ‘위衛’라는 글자가 금빛 실로 수놓여 있었다.
 그 사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소년은 양손으로 단도를 부여잡고 목의 상처 부분을 마구 찍어 내렸다. 상처가 점점 벌어지며 피가 튀어 올라 소년의 몸을 적셨다.
 입과 목으로 피를 쏟아 내던 사내의 가는 숨이 끊어지자, 소년은 그의 목에 단도를 꽂아 놓은 채로 일어나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가쁘게 숨을 쉬는 소년의 눈에, 죽었다고 생각한 사내의 가슴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다시 무섭게 돌변한 눈빛의 소년이 목에 꽂힌 단도를 뽑아 사내의 가슴을 향해 내리쳤다.
 몸을 꿰뚫을 것같이 사내의 몸에 내리쳐지던 단도의 끝이 무언가에 막혔다. 와작 소리와 함께 단도의 끝이 부서져 나가자 소년의 눈이 커졌다.
 조심조심 사내의 품을 헤친 소년의 시야에, 파르르 진동하며 빛나고 있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소년은 손을 뻗어 그것을 쥐었다. 목걸이에 달린 까만 구슬이었다.
 힘을 주어 사내의 시체에서 목걸이째로 떼어 낸 소년은, 무엇에 홀린 듯이 품 안에 그것을 갈무리했다.
 순간 손목에 금빛 천을 감은 일단의 무사들이 장소성과 함께 현장으로 다가왔다.
 선두에 선 냉막한 인상의 한 사내가 숨을 씩씩거리며 멍한 표정으로 장내를 둘러보다, 소년을 보고 증오에 가득한 눈빛을 띠었다.
 시체의 산을 헤치고 다가온 냉막한 인상의 사내가 소년의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자그마한 두 발이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네 녀석 때문에······ 네 녀석 때문에!”
 입술을 깨문 사내가 소년을 거칠게 휘두르다가 바닥에 집어 던졌다.
 숨이 막혀 한참을 컥컥거리다가 겨우 일어난 소년의 귀에 그 사내의 말이 들려왔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진명······입니다.”
 “뭐라고?”
 눈을 부릅뜨고 묻는 그의 기세에 소년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왔다.
 다시 풀썩 주저앉으려는 소년의 품 안에서, 검은 구슬이 은은한 기운을 내뿜었다. 기운이 퍼져 나가며 소년의 몸을 감쌌고, 떨림이 잦아들었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던 다리가 멈추고 소년이 이를 악물고 시선을 마주하자, 분노로 가득하던 사내의 눈빛에 약간의 이채로움이 감돌았다.
 “남궁······진명입니다.”
 
 
 
 # 1. 성만 남궁
 
 
 
 비무대 위, 은색 천을 손목에 감은 무사가 검을 들고 서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무사의 눈은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의문감 그리고 그 감정을 훨씬 뛰어넘는 분노로 가득했다. 그 무사의 눈처럼, 비무대 주변의 구경꾼들 역시 똑같이 의문과 반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어느 한 지점을 주시했다.
 그 모든 시선들의 끝에, 한 청년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시장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투박한 모양의 박도 한 자루를 잡은 청년의 손목에는 머리카락처럼 짙은 검은색 천이 감겨 있었다. 그의 호흡은 무사와는 달리, 조금의 흐트러짐도 느껴지지 않았다.
 “헉······헉······ 뭐냐, 그 표정은. 날 얕보는 것이냐?”
 은색 천의 무사가 숨을 헐떡거리며 입을 열었지만 청년은 대화하기도 싫다는 듯, 살짝 내리고 있던 칼끝을 고쳐 세웠다.
 왼손으로 든 칼을 가슴 앞에 일자로 세운 청년은 오른팔을 쭉 뻗어 상대방에게 향하게 한 후, 천천히 손을 두어 번 까딱거렸다.
 일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도발을 하는 청년의 모습에 무사의 분노가 폭발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악! 창천굉뢰蒼天轟雷!”
 은색 천을 손목에 감은 무사가 발악하듯 소리를 지르며 검을 내질렀다.
 무사의 검에서 발출된 검기가 전투 시작 전에 쏘아 올린 효시嚆矢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검기가 청년의 머리 위를 지나려는 순간 무사가 발작적으로 검을 내려치자, 검기가 수직으로 꺾여 청년의 머리 위로 쇄도했다.
 엄청난 속도감에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지만, 청년의 표정에는 전혀 변화의 기색이 없었다. 청년이 살짝 시선을 들며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창천굉뢰는 그렇게 쓰는 게 아니지······.”
 말과 함께 청년이 가슴 앞에 세워 들고 있던 도를 머리 위로 곧추세웠다.
 검기가 도와 부딪치는 순간, 청년은 부드럽게 몸을 돌리며 도를 오른편으로 내리 저었다. 도신을 타고 비껴 흐른 검기가 땅에 처박히며 폭음을 냈다.
 이를 악문 무사가 기합과 함께 재차 손을 휘저었다. 환영처럼 생겨난 수십의 검영이 청년의 몸을 향했지만, 흔들림이 없는 그의 눈빛은 무감정을 넘어 경멸의 빛까지 띠고 있는 듯 보였다.
 “아무리 천수千手라고 하지만, 무작정 수만 늘리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지. 천수일검千手一劍이 아니라 십수十手가 되더라도 검의 속도와 힘을 줄이면 안 돼. 천수일검은 상대의 방어를 속도와 힘으로 무너트리는 초식이거든. 상대를 헷갈리게 하려는 무공이 아니라.”
 말과 함께 청년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무사의 공격에 맞서기 시작했다. 차근차근 변화를 읽으며 그는 거리를 벌리고 하나 둘 상대의 검영을 향해 박도를 순차적으로 가져다 댔다.
 목표 지점을 놓쳐 위력이 약해진 검영이 하나 둘 스러져 나가자 무사의 눈이 커졌다.
 “이런 미친······! 네 녀석, 무슨 사술을 쓴 것이냐?”
 “사술······이라. 이게 사술로 보인다면, 네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겠지.”
 청년이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무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사술이 아니라고? 네 공력, 네 무공 모두 뻔한 수준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겨우 대연공大衍功 따위로 쌓은 십 년 내공으로 내 이십 년 공력이 담긴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의 절예를 막아 내는 게 가능할 리가······.”
 “섬전십삼검뢰는 맞지만, 절예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지. 그리고, 엄연한 세가의 기본 내공 심법을 ‘따위’라고 하는 건 거의 불경죄 아닌가.”
 청년이 피식 웃으며 도를 무사에게로 향하고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무사가 다시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 파르르 떨리던 청년의 도가 사냥감을 포착한 뱀처럼 쏜살같이 튕겨 나갔다.
 
 흑검대식 천풍검법 비격. 일점사.
 黑劍隊式 天風劍法 飛擊. 一點射.
 
 무사가 급히 입을 닫으며 검 끝을 돌리려 했지만, 청년의 몸과 함께 화살처럼 날아간 도는 자신의 진로가 차단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검을 통과한 도의 끝이 정확히 무사의 미간 앞에서 멈췄고, 무사는 얼음장처럼 굳은 상태로 검을 떨어트렸다.
 적막감이 감도는 비무대, 상대 미간 앞에 도를 가져다 댄 채로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던, 심판을 맡고 있는 장로와 시선이 마주쳤다.
 뭐 하냐는 듯 청년이 자신의 도 끝을 향해 고갯짓을 하자, 인상을 찌푸린 장로가 못마땅한 말투로 결과를 선언했다.
 “승자······ 남궁진명.”
 멍하니 비무대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감탄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현재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청년이 어떻게, 왜 이긴 건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쏟아 내는 의문이 그 소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반응을 보며 남궁진명이라 불린 청년은 도를 거두고 피식 웃으며 등을 돌려 비무대 아래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여유로운 걸음을 본 무사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공력을 끌어 올렸다.
 
  * * *
 
 콰아아앙!
 폭음과 함께 진명이 비무대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건 사기야! 난 이런 결과를 인정할 수 없어!”
 진명이 떨어진 비무대 위에서는 은색 천을 손목에 감은, 진명에게 패한 무사가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진명의 승리를 선언했던 장로가 비무대 위로 올라오며 입을 열었다.
 “어째서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거냐. 이유를 좀 들을 수 있을까.”
 “그······ 그것이.”
 무사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며, 비무대 아래에서 뒹굴던 진명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별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무조건 자기가 이기리라고 생각했다가 완벽하게 패배했으니 당황스러운 거겠죠.”
 “네게 묻지 않았다, 남궁진명.”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며 말한 장로가 다시 무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저 자식이 암수를 쓴 게 분명합니다! 공격 방향, 속도, 도 끝의 변화, 모두 눈에 들어왔지만 순간 몸에 힘이 빠진 듯 대응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제 몸에 위해를 가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놀라는 소리가 새어 나오고, 진명의 눈이 커졌다. 이를 악문 진명이 비무대로 올라가려는 순간, 금색 천을 손목에 감은 무사 두 명이 다가와 그를 저지했다.
 진명이 제지당하는 것을 확인한 장로가 비무대 위의 무사를 바라보았다.
 “은검대銀劍隊 소속 검수 남궁진수,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무, 물론입니다. 어떤 수단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궁진수라 불린 무사가 대답하자, 장로가 엄한 눈길로 진명을 돌아보았다.
 “할 말은?”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저런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진명의 대답을 들은 장로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없다니, 조사를 해 봐야겠군.”
 “······!”
 진명이 고개를 번쩍 들었지만, 그에 개의치 않고 장로가 턱짓을 보내자 금색 천의 두 무사가 진명을 잡아 꿇렸다.
 천천히 비무대를 걸어 내려간 장로가 제압당한 그의 앞에 와 섰다.
 “네 실력으로 세가의 정예를 이렇게 쉽게 이겼다면 누구라도 고개를 갸웃거릴 것은 당연한 이치. 안 그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가 제기되었고 본인이 별 반박을 하지 못했으니, 조사할 이유는 충분하겠지.”
 “하다 하다 이제는 몸수색까지 하겠다는 건가. 대단하군, 남궁세가.”
 말이 끝나자마자 날아든 발에 진명이 바닥을 뒹굴었다. 분노한 표정의 장로가 검을 뽑아 들었다.
 “네 녀석, 감히 가문의 이름을 모욕하다니. 목숨에 여벌이라도 있는 것이냐.”
 여벌이라도 있었으면 말만으로 이러고 있지는 않았겠지. 쓴웃음을 지으며 진명은 생각했다.
 일회전에서도 그랬고 이회전에서도 그랬다. 마주한 상대, 주변의 구경꾼들, 심판을 맡고 있는 장로들. 아무도 그가 세가의 직계를 이길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떻게든 이유를 찾으려 했고, 어떻게든 트집을 잡으려 했다. 그가 강해졌다거나 혹은 이미 강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다가온 무사들이 진명의 옷 이곳저곳을 뒤적였지만, 별다른 도구나 의심스러워 보이는 어떤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로를 보며 진명이 피식 웃었다.
 “비무 대회에 참가하기 전만 해도 확신하지 못했는데, 이제 보니 제 능력이 참 대단하긴 한가 봅니다. 수십 년간 무림에서 굴러먹으신 장로분과 이 주변의 수많은 세가 사람들의 이목을 전부 속이고 암경을 날릴 수 있다니.”
 이를 악문 장로가 다시 그를 노려보는 순간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대로입니다.”
 하얀 무복을 입은 한 사내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나왔다. 사내의 얼굴은 땅에 무릎을 꿇고 있는 진명과 놀랄 정도로 닮아 있었다.
 “소가주, 무슨······?”
 “다음 상대가 궁금해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진명의 말대로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어떤 수를 쓰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그것은 보증하죠.”
 “소가주, 하지만······.”
 “설령 무슨 수를 썼다 하더라도, 소속도 없고 섬전십삼검뢰조차 배우지도 못한 이에게 패했다는 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거기다가 마지막 순간에, 무사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검까지 떨구면서. 은검대씩에나 들어가 있는 세가의 직계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죠. 저 같으면 어떻게든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을 것 같은데.”
 얼굴을 붉힌 남궁진수가 슬그머니 비무대 반대편으로 내려갔다. 생긋 웃은 사내가 다시 장로를 돌아보았다.
 “장로님도 못 보셨고, 저도 확인하지 못했고, 증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 정도면 혐의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괜히 제 다음 상대에게 벌써부터 견제가 들어간다는 말이 나올까 두렵기도 하니 이만 풀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친구.”
 “······크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장로가 손짓으로 무사들을 물리자, 사내는 생긋 웃으며 진명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마지막은 정말 멋진 공격이었어. 수련을 많이 한 것 같더군. 솔직히 놀랐어.”
 “동년배에게 평가받고 싶은 마음 따위는 없다, 남궁은진.”
 손을 무시하고 진명이 일어났다. 남궁은진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지 않은 채, 나머지 손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조금 팔 아프네. 손이 무안하기도 하고.”
 “날 깔보는 녀석과 악수하고 싶은 마음 따위 없다.”
 “······무슨?”
 옷에 묻은 먼지를 턴 진명이 남궁은진을 노려보았다.
 “내가 무언가를 했으면 자신이 확인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식의 평가하는 말투. 아래로 보고 있지 않다면 나올 수 없는 얘기지. 솔직히 지금 도망간 그 녀석보다도 네가 더 기분이 나쁘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알면, 꺼져라.”
 차갑게 말을 내뱉고 진명은 돌아섰다. 등 뒤에서 남궁은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하는 걸로 봐선 꽤나 자신이 있는 모양이야. 기대하고 있겠어, 동생.”
 진명의 주먹이 꽉 쥐였다.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하는 그 손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남궁은진은 뒤에서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
 
 “구백구십팔, 구백구십구, 천······ 끝났다.”
 팔굽혀펴기를 끝마친 진명이 바닥에 드러누우며 하늘을 보았다. 비무 때만 해도 높이 떠 있던 태양은 어느새 붉은빛을 내며 서쪽 하늘로 이동해 있었다. 지친 숨을 몰아쉬며 진명은 혼잣말을 했다.
 “시팔, 오늘따라 힘드네.”
 윗몸일으키기 이천 번, 마보 두 시진, 물구나무서서 손가락으로 팔굽혀펴기 천 번.
 아버지의 시신이 담긴 관을 들고 세가로 들어온 지 십 년, 하루도 빠짐없이 해 온 수련이었지만 오늘따라 힘이 들었다.
 대결도 지난 두 번보다 빨리 끝났는데, 진명은 중얼거렸다.
 눈을 감고 바닥에 누운 채로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붉은빛이 점점 짙어질수록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어 갔다.
 살짝 웃음을 지은 후 몸을 일으키려는 진명의 귀에,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흑검장黑劍莊에 찾아올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진명이 상체를 세우기가 무섭게, 한 남자가 문을 박차고 정원으로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음식이라도 만들고 있었는지, 손에 하얀 반죽이 잔뜩 묻은 남자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가끔 시장에 나갈 때마다 끼니를 해결하는 주막의 숙수였다.
 “진명 군!”
 “오랜만에 뵙네요, 대우 아저씨. 무슨 일이세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진명에게 다가온 숙수, 대우가 다짜고짜 그를 문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 두 발로 버티고 선 진명이 인상을 굳혔다.
 “무슨 일이에요, 얘기는 해 주셔야······.”
 “이렇게 태평하게 서서 얘기하다가 큰일 난다. 너희 아저씨······.”
 “상 아저씨가요?”
 대번에 안색이 바뀐 진명이, 오히려 그를 끌고 몸을 날렸다. 진명보다 더 커다란 체구의 숙수가 마치 깃발이라도 된 듯 발이 붕 뜬 채로 펄럭이며 진명에게 끌려갔다.
 “어디예요?”
 “시장!”
 “그럼 이쪽이 아니잖아요!”
 급히 멈춘 진명이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다시 몸을 날렸다. 여전히 대우의 발은 땅에서 떨어져 있었다.
 
 윤상이 있는 곳은 멀리서도 금방 알 수 있었다. 수많은 구경꾼들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치열한 칼부림 소리가 들렸다.
 대우를 손에서 놓으며, 진명은 미친 듯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파고들어 갔다.
 사람의 장벽을 뚫고 나온 순간, 눈앞에 피범벅이 된 한 중년의 사내가 붕 날아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사내의 오른쪽 소매는 텅 비어 있었다.
 바닥을 뒹구는 외팔의 사내, 윤상을 향해 한 남자가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아저씨!”
 허리춤에서 박도를 빼 든 진명이 몸을 날리며 그 도를 집어 던졌다. 동시에 윤상에게 다시 일격을 날리려던 남자의 뒤편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적구赤狗!”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남자가, 자신의 머리를 뚫어 버릴 기세로 날아오는 도를 발견하고 황급히 고개를 젖혔다. 도가 간발의 차이로 남자의 오른쪽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분노한 그는 도가 날아온 쪽으로 시선을 돌리다 이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진명이 벌써 그의 눈앞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꺼져 버려!”
 한마디와 함께 진명이 온몸을 남자에게 부딪쳐 갔다. 거의 무방비 상태로 몸통 박치기를 허용한 남자는 붕 날아가 외곽에 서 있던 구경꾼들과 충돌했다.
 사람들이 엉켜 쓰러지며 혼란해진 사이, 도를 집어 든 진명이 나머지 손으로 윤상을 부축해 일으켰다.
 “괜찮아요, 아저씨?”
 복부에 심한 타격을 입은 것인지, 끊임없이 기침하는 그의 입에서는 비릿한 혈향이 섞인 짙은 술 냄새가 나고 있었다.
 쿨럭거리는 그를 부축하며 진명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몸에 들이받혀 날아간 남자를 다른 사내 둘이 일으키는 것이 보였다.
 어디선가 몇 번 얼굴을 본 듯한 세 명의 왈짜패.
 기억을 잠시 더듬자 진명의 머릿속에 그들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청랑파靑狼派. 겨우 세 명으로 구성되었지만 ‘파’라고 거창하게 간판을 걸고 있는, 인근 지역의 뒷골목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
 겨우 몸을 일으킨, 적구라 불리는 사내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비겁하게 기습을 하다니, 죽고 싶은 게로구나.”
 “팔 하나가 없는 사람을 상대로 셋이 달려들어 놓고서 할 말은 아닌 듯하군.”
 한마디를 내뱉은 진명이 살짝 시선을 돌려 적구 뒤의 다른 두 사내를 노려보았다.
 “감히 남궁세가의 코앞인 한림촌寒林村에서 이런 소란을 내다니, 하오배들 주제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냐? 동검대銅劍隊의 순찰조와 마주치면 쉽게 넘어가지는 못할 텐데.”
 “순찰조가 이곳을 지나려면 일각 정도는 남아 있지.”
 왼편에 서 있던 흑의의 사내가 나지막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진명의 눈이 살짝 흔들리자, 그것을 본 가운데의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 말대로, 남궁세가의 코앞인 한림촌에서 이 장사로 먹고살려면 어지간한 눈치로는 힘들거든. 그럼 계속해 보도록 하지. 적구, 흑묘黑猫.”
 사내가 턱짓을 하자 흑묘라 불린 사내가 품에서 단도 두 자루를 꺼내 들었고, 적구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날렸다. 뺨에서 줄줄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두 주먹에는 수갑手甲이 씌워져 있었다.
 겨우 사람 사이를 파고들어 온 대우에게 윤상을 던지며, 진명은 간발의 차이로 그 공격을 피해 냈다.
 뒤로 몸을 날려 간격을 벌리려는 진명의 오른쪽에서 순간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흑묘가 던진 단도가 그의 옆구리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황급히 도를 틀어 단도를 튕겨 내는 순간, 다시 간격을 좁힌 적구가 기합과 함께 미친 듯이 주먹을 내질렀다.
 “백열권白熱拳!”
 햇빛이 반사된 듯 하얗게 빛나는 금속의 덩어리가 진명의 몸을 향해 쏟아졌다.
 수십 번의 격타음과 함께 진명이 뒤로 날아가자 주변의 사람들은 탄성을 냈지만, 정작 공격을 가한 적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공격을 지시한 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 짧은 사이에 도의 손잡이를 이용해 공격을 막아 낸 건가······ 대단하군.”
 “맨손이나 몸으로 받아 냈다가는 뼈가 남아날 것 같지 않아서 말이지.”
 자세를 정비한 진명이 대답했다. 아직 권격의 충격이 남아 있는 듯, 진명의 도 손잡이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침을 뱉은 적구가 다시 몸을 날리려는 순간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만.”
 “청랑靑狼 형님?”
 다시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 들던 흑묘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청랑이라 불린,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가 표정을 풀었다.
 “너무 얕봤나. 일각 안에 끝낼 수 있는 싸움은 아닌 것 같군. 여기까지 하자.”
 “······.”
 흑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씩씩대던 적구도 뺨의 피를 닦은 후 뒤로 물러섰다.
 자리를 뜨려 하는 그들을 보며 진명이 도를 고쳐 잡았다.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그냥 갈 수 있을 것 같은가?”
 “비싼 술 실컷 처먹고 도박에서 돈을 잃은 후 행패를 부린 건 잘한 짓인가?”
 계속 숨을 씩씩거리던 적구가 볼멘소리를 하자 가운데에 있던 청랑이 그를 노려보았다.
 “아우, 그만.”
 “하지만······!”
 “남궁세가의 코앞이다. 필요 이상의 소란을 일으키다 저자의 말대로 순찰조와 마주치게 되면, 우리 같은 뒷골목 인생들은 눈 깜짝하는 사이에 쓸려 나갈 수 있어. 여기까지 하자.”
 적구를 진정시킨 그가 다시 진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친인인가?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칼까지 뽑아 들고 날뛰는 저런 자를 방치해 뒀다간 장사가 불가능하거든. 남궁세가 앞에서 소란을 피워서 좋을 것 없으니 여기까지 하지. 그쪽도 소속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대단한 사람들 만나서 좋을 것 없다고 보는데. 아니면 혹시, 남궁세가 소속이신가?”
 “······.”
 진명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청랑의 얼굴이 풀렸다.
 “다행이군. 그럼 그쪽도 별로 처지가 다르지는 않을 테니 무슨 얘기인지는 알아듣겠는걸. 피는 제법 흘렸지만 장기나 뼈가 손상되진 않았을 걸세. 혹시나 치료비 배상 같은 것을 원한다면 한림촌 중앙의 도박장으로 찾아오라고. 거기가 우리 청랑파의 근거지이니.”
 “그 정도로 거지는 아니다.”
 짤막하게 대답한 진명은 칼을 수습한 후 윤상 쪽으로 다가가 피투성이가 된 그를 들쳐 업었다.
 등을 돌려 구경꾼들을 헤치고 나가려는 진명의 귀에, 청랑의 말이 들려왔다.
 “근데 그 사람, 술만 취하면 자기 입으로는 항상, 자신이 칼만 뽑아 들면 당해 낼 사람이 없다고 떠들어 대더군. 이 시장 통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어. 술 취한 한량의 허풍이라고 생각했는데, 아까 보니 제법 움직임이 좋더군. 왕년에는 진짜 한가락 했나 보지?”
 진명이 다시 고개를 돌려 사내를 쳐다보았다. 한이 서린 듯 날카로운 눈빛에 사내가 움찔했다.
 한참 그를 노려본 진명이 입을 열었다.
 “너 같은 건 입에 담아 볼 수 있다는 자체가 영광일 정도로.”
 말을 마친 진명이 윤상을 업은 채로 인파를 헤치고 사라졌다.
 한참 동안 서서 눈으로 그 뒷모습을 좇던 청랑이 말했다.
 “아우들.”
 “예, 형님.”
 좌우의 두 사내, 흑묘와 적구가 동시에 허리를 숙였다. 청랑은 여전히 시선을 고정한 채 입만 열었다.
 “저 친구들, 조사 좀 해 봐.”
 “알겠습니다.”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인 두 사내가 몸을 돌려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청랑도 천천히 몸을 돌려 시장 밖으로 사라졌다.
 
 
 
 # 2. 남궁제일검의 아들
 
 
 
 거처로 돌아온 진명은 윤상을 자신의 침상에 눕혔다.
 피범벅이 되어 있었던 것치고 윤상의 숨소리는 잔잔하고 가벼웠다. 처음 봤을 때의 우려와는 달리, 청랑이라는 사내의 말대로 단순한 외상 정도에 불과한 듯했다.
 진명은 윤상의 몸에 이불을 덮어 주고 문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술기운이 사라지면 일어나시겠지. 좀 아프긴 할 테지만.”
 진명은 어두운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겉보기와는 달리 만만치 않은 상대인 것 같기는 했지만, 상대에게 별다른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고 엉망으로 무너진 윤상의 모습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오래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기억났다. 어린 진명의 키만 한 대도大刀를 등에 멘 그는 아버지의 옆에 서서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사방을 오시하고 있었다.
 세가의 장로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던 도의 고수, 섬전도閃電刀 윤상.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죽던 그날 밤 천마문주에게 내공과 오른팔을 잃었고, 십 년이 흐른 지금은 잠깐잠깐 자신의 수련을 봐주는 것 이외에는 도박과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이 인질로 잡혔던 상황 때문에 나온 결과였기에, 진명의 마음속에는 항상 윤상에 대한 죄책감 비슷한 것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의 몫까지 다하기 위해 진명은 항상 필사적으로 수련해 왔다.
 “그리고, 이제 한 번.”
 비무 대회를 생각하며 진명은 이마의 땀을 훔쳤다.
 경멸 어린 시선을 감수하며 참가 신청을 할 때만 해도 이 정도의 성과를 올리리라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의외로 진명은 그 자신도 놀랄 정도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미 두 번의 승리를 거두고, 오늘은 세가의 두 번째 무력 부대인 은검대 소속의 남궁진수까지 꺾었다. 단 한 번만 더 이기면 그는 일 년 후 무림맹武林盟을 향해 떠날 세가의 대표단에 포함될 수 있고, 그렇게만 된다면 그와 윤상을 천대를 넘어 없는 사람 취급하던 세가의 이들도 자신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패배한 녀석들은 하나같이 핑계를 대기 바빴지만.
 “그러고 보니, 그 녀석들 누굴까······.”
 윤상을 저렇게 만든 삼인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궁세가와 너무 인접해 있는 탓에 도박장 하나와 술집 두어 군데를 제외하면 유흥과 관련된 시설이 전무한 이곳 한림촌.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궁세가라는 대문파의 후기지수 비무에서 여덟 손가락에 들어간 자신을 그렇게 자신감 있게 몰아붙일 정도의 이들이 만족하고 있을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청랑이라 불렸던 사내, 자신에게 달려든 그 둘을 통제할 정도의 인물이라면······.
 “······지금 내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지.”
 내일의 중요한 대결이 남아 있다.
 고개를 흔들어 다른 생각을 털어 내며, 진명은 도를 뽑아 들고 양손으로 꼭 부여잡았다. 아까 미처 끝내지 못한 훈련을 마무리 지을 시간이었다.
 다리를 벌려 자세를 잡은 후,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조용히 도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얼마 동안 도를 내리쳤을까, 진명의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예전보다는 제법 안정이 된 것 같구나.”
 “길거리에서 불량배에게까지 맞고 들어오는 파락호破落戶에게 평가받고 싶은 생각 없습니다.”
 도를 멈춘 진명이 입을 열며 몸을 돌렸다. 술병을 손에 든 윤상이 벽에 등을 기댄 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대체 그 술은 어디서 난 겁니까? 전부 치웠다고 생각했는데.”
 “다 비밀의 장소가 있는 법이지.”
 피식 웃은 윤상이 술병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꿀꺽 술이 넘어가는 소리가 조용한 정원을 가득 채웠다. 진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몸 생각도 하셔야죠. 그러다 진짜······.”
 “몸 걱정해서 뭐할까. 이 몸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윤상이 자조 섞인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오른쪽 소매 부분의 옷이 축 늘어져 바닥에 닿아 있었다.
 “오른팔도 없고, 단전도 박살이 났다. 내게 남은 건 이 술뿐이야. 가끔 네 자세나 봐주는 정도를 제외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그 술 살 돈도 떨어져 갑니다. 그러니 좀 자제하세요.”
 퉁명스레 말한 진명이 다시 몸을 돌려 자세를 잡았다. 그의 눈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기합을 한번 내지르고, 그는 다시 도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상태가 멀쩡한 걸 보니 오늘도 이기긴 했나 보구나.”
 “제가 누구의 아들인데요. 그리고 상대도 별것 아니었습니다.”
 검을 내리치며 진명이 대답하자 윤상이 피식 웃었다.
 “뭐, 방심한 틈을 노렸겠지. 남궁진수가 헐렁한 녀석이기는 하지만 내공과 익힌 무공 모두 네가 정면으로 감당할 만한 수준은 아니니.”
 “녀석에 대해 잘 아십니까?”
 진명의 말에 윤상이 입을 열었다.
 “녀석에 대해서야 잘 모르지만, 은검대가 만만치 않은 곳이라는 건 안다. 아무리 뒷배경 같은 것이 있어도, 기본도 안 되는 녀석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
 “그렇군요.”
 짧게 대답하며 진명은 계속 도를 내려쳤다.
 술을 계속 들이켜며, 윤상은 그런 진명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았다.
 “다음 상대는?”
 “남궁은진입니다.”
 “······소가주로군.”
 “예.”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진명은 계속 도를 내리치고 있었다.
 
 내려치기를 멈춘 진명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베기 연습으로 전환했다.
 두어 번쯤 좌우로 진명의 검이 왕복했을까, 뒤에서 술병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서 일어난 윤상이 빈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진명에게로 다가왔다.
 “이런 연습만으로는 소용없다.”
 입을 꽉 다물고 진명은 도를 계속 움직였다. 그의 바로 뒤까지 다가온 윤상이 입을 열었다.
 “네 기초와 체력은 같은 나이대에서는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다. 내 경험을 전부 이어받은 덕에 임기응변도 뛰어나고 다양한 수법을 사용할 수 있지. 그리고 전투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은, 가끔 나조차도 놀랄 정도야. 지금 강호에 나가도 넌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넘기에 소가주는 너무 큰 벽이야.”
 “소가주, 잘 모르시잖습니까. 무공을 잃은 뒤로는 남궁세가 대문의 문턱을 넘은 게 손에 꼽을 정도인 걸로 기억하는데요. 금검대주金劍隊主께 들은 겁니까?”
 검을 멈춘 진명이 뒤로 몸을 돌려 윤상을 응시했다.
 “명진······이라. 오랜만에 들어 보는 이름이군.”
 윤상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진명은 속으로 후회를 했다.
 자신의 아버지 남궁명한, 현재 세가 최고의 무력 부대인 금검대金劍隊의 대주 남궁명진 그리고 윤상. 이렇게 셋은 첫 출도부터 십 년 전의 그때까지 함께 무림을 종횡한 사이.
 하지만 남궁세가 출신이 아닌 윤상은 무공과 한 팔을 잃은 이후로 세가에서 완전히 버림을 받았고, 금검대주와의 왕래도 끊어진 상황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 술에 취한 윤상이 추억 어린 어조로 내뱉는 말 때문에 종종 진명은 그들이 아직도 친하다는 착각에 빠지고는 했다.
 이내 안색을 푼 윤상이 말을 이어 갔다.
 “들은 것은 없다. 나도 소가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일반적인 대문파에서 후계자에게 어느 정도의 투자를 하는지는 아주 잘 안다. 내 형님, 그러니까 네 아버지도 소가주셨으니.”
 아버지의 얘기가 나오자 이번에는 진명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윤상은 그런 진명의 얼굴을 힐끗 보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공, 무공, 스승, 교육······ 문파의 후계자에게는 그 문파의 모든 역량을 기울인 투자가 쏟아진다. 혈족으로 구성되는 세가는 특히 더하지. 우리처럼 같은 성을 가지지 않은 구성원들까지 밑에 두려면 그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니.”
 윤상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어릴 때부터 몸을 보호해 주는 약재와 내공의 기반을 닦아 주는 영약이 투입되고, 어느 정도 성장하면 경험 많은 원로들의 내공 인도하에 혈도를 깨끗이 한다. 그러고 그 문파가 가진 최고 수준의 내공 심법과 가장 강한 무공을 문주 혹은 문파 최고수의 지도하에 익혀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너처럼 일반적인 스승들 밑에서, 별 도움을 받지 못하고 혼자서 필사적으로 수련하는 이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진명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쩌란 얘기입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상대가 되겠습니까 하고 기권이라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
 윤상이 말없이 진명을 바라보았다. 진명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힘들 거라는 거,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이겨야 합니다. 이대로 세가에 속한 것도 속하지 않은 것도 아닌 채, 관심 밖에 버려져서 희미해져 가는 것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딱 한 번만 더 이기면 세가의 내년 무림맹 대표단에 포함될 수 있고, 이는 남궁세가를 대표하는 존재 중 한 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가문도 더 이상 저를, 세가의 옛 공헌자들을 외면할 수는 없겠지요.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흑검대는 아버지의 꿈이자, 남궁 성을 갖지 않은 세가 무인들의 희망이었습니다. 전 반드시, 흑검대를 다시 살려 낼 생각입니다.”
 말을 마친 진명이 다시 몸을 돌려 검을 좌우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잠깐 침묵하던 윤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몸을 옮겼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뒤에서 진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저씨의 말에는 틀린 점이 있습니다.”
 윤상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버지와 아저씨, 누가 뭐래도 천하 무림의 정점에 근접했던 최고의 스승들입니다. 일반적인 스승들이라니, 인정할 수 없네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진명에게 보이지 않게 피식 웃은 윤상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오기가 무섭게, 진명의 목소리가 다시 정원을 채우기 시작했다.
 “마흔여덟, 마흔아홉, 쉰, 쉰하나······.”
 
 
  * * *
 
 “그래, 좀 어때 보였나?”
 “실전을 전혀 경험하지 않았다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백전은 치른 듯이 과감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대상이 될 만한 자질은 충분한 듯이 보입니다.”
 “내일 상대가, 은진이라고?”
 “예.”
 “내일쯤이면 확실히 알 수 있겠군. 적합한 대상인지 아닌지. 그래도 그동안의 대우나 무공의 근원을 생각해 볼 때 반감이 작지 않을 걸로 생각하는데, 거기에 대한 방안은 마련해 놓았나?”
 “원하는 것이 확실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어렵진 않을 겁니다.”
 “알겠네. 그럼 내일 결과가 나오면 데려오도록.”
 “예, 가주.”
 
  * * *
 
 보통 주변이 소란스러우면 잠을 잘 이룰 수 없다고 하지만, 항상 시끄러웠던 주변이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면 그것 역시 잠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항상 들려오던, 귀를 찌르는 코 고는 소리가 사라진 환경에 진명의 눈이 뜨였다. 눈을 비비며 고개를 돌린 곳에는 항상 술에 취해 쓰러져 있던 윤상이 보이지 않았다. 덩그러니 버려진 이불에서 미세한 술 향기가 느껴졌다.
 대충 손을 휘저어 그 이불을 한쪽으로 밀어낸 진명은 몸을 일으켰다. 도가 들어 있는 묵빛 칼집을 집어 들어 허리춤에 차고, 진명은 아침 수련을 위해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햇살이 정원을 뒤덮은 가운데, 마당에 서 있는 윤상이 눈에 띄었다.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네요. 이 시간에 아저씨가 깨어 계시다니.”
 “맞은 곳이 쑤시더라.”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는 윤상의 오른쪽, 텅 빈 소매가 아침 바람에 휘날렸다. 조금은 슬픈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명의 눈에, 윤상의 왼손에 들린 검이 보였다.
 “무기를 잡은 지는 꽤 되셨잖아요. 어쩐 일로? ······거기다가 도도 아니고 검을.”
 진명의 질문에 윤상이 말없이 살짝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시선은 진명의 허리춤에 찬 도를 향하고 있었다. 윤상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진명이 환하게 웃으며 도를 뽑아 들었다.
 “아저씨가 대련을 해 주시는 건 오랜만이네요. 열다섯 살쯤이었나. 한창 천풍검법을 연마할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대남궁세가의 은검대원을 꺾은 실력을 한 번쯤은 보고 싶어서 말이지. 지금은 내가 하수니까, 먼저 가마.”
 진명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신호로 윤상이 몸을 움직였다. 매섭게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오는 검을 보며, 진명이 공력을 억누른 채 도를 움직여 맞부딪쳐 갔다.
 한참 검과 도가 오고 간 후, 윤상이 먼저 검을 던지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 모습을 보며 진명이 농을 던졌다.
 “아저씨, 아직 쓸 만하신데요?”
 “그게 칼밥을 너보다 이십 년은 더 먹은 사람에게 할 소리냐.”
 윤상은 바닥에 드러누워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은 진명이 그의 앞으로 다가가 도를 옆에 놓고 주저앉았다.
 “그래서, 시험해 본 소감은 어떠세요?”
 “······대형이 생각나는구나.”
 윤상의 말에 진명의 얼굴이 웃는 표정 그대로 굳었다.
 “대형이 싸울 때 딱 너 같았다. 상대의 무공을 파악하고 그것을 파해하며, 약점을 찔러 들어가 상대를 당황시켰지. 두어 수 위의 무인조차 대형을 만나면 승부를 장담하지 못했어. 그랬기 때문에 약관의 나이로도 천하에 이름을 진동시킬 수 있었지.”
 “······.”
 “용케도 기억하고 있구나, 대형의 싸우는 방법을. 나와 대련 몇 번 하는 걸 지켜본 게 네 기억의 전부일 텐데.”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진명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보고 또 봤죠. 그날 밤.”
 “······젠장. 겨우 잊고 있었는데. 그날.”
 “거짓말하지 마시죠. 아저씨의 그 잠꼬대 때문에 깬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한숨을 푹 내쉰 윤상이 누운 채로 옆에 있던 검을 집어 들더니 공중으로 휙 던져 버렸다.
 하늘로 솟구친 검이 포물선을 그리며 진명의 몸을 향해 떨어졌다. 기겁한 진명이 몸을 굴려 피하자 방금 전까지 그의 배꼽이 있던 자리에 정확히 검이 박혔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진명이 몸을 일으켰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거, 네 아버지의 유품이다.”
 무심히 던진 윤상의 말에 진명의 눈이 커졌다.
 천천히 검으로 다가간 진명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살폈다.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검신의 자루에는 백룡白龍이라는 두 글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남궁제일검南宮第一劍이라는 칭호를 얻기 전까지 네 아버지의 별호는 백룡이었지. 항상 하얀색 무복을 입고 그 백룡검을 들고 다녔거든. 네 어머니를 기적妓籍에서 빼내기 위해 팔아먹기 전까지는.”
 “······!”
 “원래는 네가 언젠가 무림에 출도하게 되면 주려고 했지만, 네가 싸우는 모습을 보니 지금 필요할 것 같구나. 내 생각을 해서 계속 도를 쓰는 건 알지만, 네 무공은 엄연히 검법이고 네가 싸움을 하는 방식도 보다 섬세한 검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은, 그걸 들고 나가라.”
 고개를 끄덕인 진명이 검을 뽑아 들어 두어 번 휘둘러 보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진명의 귀에는 왜 그런지 날카롭게 들렸다.
 “비싸 보이네요, 이 검. 우리 어머니 몸값보다는 많이 쌀 것 같지만.”
 “여림女林 형수가 좀 예쁘긴 했지.”
 윤상이 누운 채로 검집을 풀어 진명에게 던졌다. 진명이 검과 검집을 허리춤에 갈무리하는 것을 보며 윤상이 말을 이어 갔다.
 “장담하지만, 정면으로 맞붙으면 절대 승산이 없다. 무공의 위력, 보유한 내공 모두 압도적으로 차이가 날 거다. 지금처럼, 최대한 너처럼 싸워라. 네 아버지의 검으로, 아버지처럼. 대형은 첫 출도 때 산서의 사파 거물 태원염라太原閻羅를 홀로 제압해 냈지. 너라고 못 해내란 법은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진명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후 가옥 밖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대문을 열고 나가려던 진명이 멈춰 선 후, 입을 열었다.
 “오늘, 보러 오실 겁니까?”
 “······아는 사람 만나면 싫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별로.”
 “그럼 끝나고 술이나 한잔하시죠. 아저씨가 사는 걸로.”
 진명의 말에 윤상이 피식 웃었다.
 “어른에게 대작 신청을 하는 게냐······. 뭐, 이긴다면 생각해 보지.”
 “술상, 준비하세요. 그럼······.”
 진명의 몸이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윤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남궁세가의 소가주를 그 정도로 이길 생각인 거냐. 네 조건에 비하면 정말 놀랄 만큼의 성장이기는 하다만.”
 깊은 한숨을 내쉰 윤상이 몸을 일으켰다.
 잠시 침묵한 채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입맛을 다신 후, 진명이 바닥에 풀어 놓은 박도를 집어 들었다.
 “오랜만에······ 한번 휘둘러 볼까.”
 나지막하게 한마디를 내뱉은 그는 진명이 항상 수련을 하던 자리로 가 심호흡을 한 후 도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오른팔의 허전함 때문인지 자세는 부자연스러워 보였지만, 얼굴 표정만큼은 진명의 것 이상으로 진지했다.
 
 문을 나서고 한동안 앞으로만 나아가던 진명의 발이 멈췄다.
 가만히 서서 바닥을 내려다보던 그는 백룡검을 뽑아 들어 검 자루를 한참 응시했다. 기합을 넣으며 검을 두어 번 휘둘러 감각을 확인한 진명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의 몸은 비무대가 설치된 본가 중앙의 광장을 향하고 있었다.
 
 
 
 # 3. 패배
 
 
 
 비무대 아래에 도착한 진명은 무대 위를 바라보며 한차례 심호흡을 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비무대 주변에는 단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무대 위로 올라간 진명은 허리를 좌우로 돌리며 몸을 푼 후, 검을 뽑아 들고 내려치기를 시작했다.
 오백 번쯤 팔을 휘둘렀을까, 땀을 흘리는 진명의 등 뒤로 한 사내가 다가왔다.
 “백룡검······ 오랜만에 보는걸.”
 검을 멈추고 진명은 뒤로 돌았다. 어디서 본 듯 만 듯, 어렴풋이 떠오르는 얼굴.
 아버지가 죽던 날 진명은 그를 본 기억이 있었다.
 손목에 감긴 금빛 천, 싸늘한 눈빛.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그 눈빛.
 “금검대주님이시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다지 인사받고 싶은 생각 없다. 오늘의 심판장이 나라 일찍 둘러보러 온 것뿐이니.”
 싸늘히 대꾸한 금검대주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비무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꼼꼼히 살피는 그는 진명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마치 진명이 투명 인간이기라도 한 양.
 진명 역시 한숨을 한번 내쉰 후, 다시 검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진명의 귀에 다시 금검대주의 말이 들려왔다.
 “그 자세는 누가 봐준 건가?”
 “윤상 아저씨가 봐주신 겁니다.”
 “······윤상?”
 “섬전도 윤상. 대주님의 친구분인······.”
 진명의 대답에 금검대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는 예전에 죽지 않았나? 벌써 십 년도 지난 일 같은데.”
 “천우신조로 살아 계십니다. 지금은 흑검장에서 저와······.”
 “내공도 거의 잃고 도를 쓰던 오른팔도 상실한 상태인데 살아 있다고 하긴 뭐하지 않나? 말 그대로 ‘살아’만 있을 뿐이겠지. 숨만 쉬는.”
 “······!”
 그의 신랄한 말에 진명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표정을 숨기는 훈련이 덜 되었군. 내 형님, 그러니까 네 아버지와는 딴판이야. 그분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법이 없었는데. 그저 생글생글 웃으실 뿐.”
 “······.”
 “네게 오늘 비무가 없었다면, 그리고 내가 심판이 아니었더라면, 그 표정을 짓는 순간 넌 이미 죽을 만큼 맞았을 거다. 앞으로 날 보면 조심하도록.”
 피식 웃은 금검대주가 진명을 지나쳤다. 비무대 계단을 걸어 내려가던 그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자세는 좋다. 계속해 봐. 그렇다고 네가 소가주를 이길 리는 없지만.”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멀리 사라졌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진명은 다시 검을 한 번, 두 번 내려치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검을 내려치던 진명이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아저씨는 죽지 않았습니다. 꼭······ 보여 드리죠.”
 
 사라진 듯 보이던 금검대주는 몸을 숨긴 채로 진명을 지켜보고 있었다.
 “놀랄 만큼 대형을 쏙 빼닮았구나. 생김새며, 검을 내려치는 품까지. 천한 계집의 품에서 나왔어도 역시 아들은 아들이라 이건가······.”
 그렇게 한참 동안 그는 수련을 하는 진명을 숨어서 지켜보았다.
 내려치기와 베기, 찌르기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마칠 때까지 수련을 지켜보던 금검대주는, 진명이 가부좌를 틀고 명상에 잠기는 것을 본 연후에야 비로소 등을 돌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진명이 눈을 뜨자 비무대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대고 있었다. 그와 연관되지 않은 대화도 있는 듯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명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워낙 말소리가 크고 서로 엉킨 터라 알아듣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순간 옆에 다가온 누군가가 그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뺨을 부여잡고 고개를 돌린 곳에는 싸늘한 표정의 금검대주가 있었다.
 “몇 번을 불렀건만 이제야 눈을 뜨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냐, 네 녀석.”
 “······아침 수련이 끝난 후 잠깐 명상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내려가라. 오늘의 첫 순서는 네가 아니다.”
 금검대주가 턱짓으로 비무대 아래를 가리켰다.
 여전히 볼을 감싼 채로 진명이 무대를 내려가려 하는 순간, 누군가가 몸을 날려 위로 올라왔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주변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한 명 올라와 있는 김에 지금 하죠. 굳이 순서가 의미 있는 것도 아닌데.”
 “······소가주.”
 누구인지를 확인한 금검대주가 얼굴을 찌푸렸다.
 새하얀 무복에 남궁세가 특유의 창궁건蒼穹巾을 머리에 비끄러매고 빙글빙글 웃으며 금검대주를 쳐다보고 있는 얼굴은 이미 무대 위에 올라와 있던 진명과 놀랄 만큼 닮아 있었다. 소가주, 남궁은진이었다.
 “하지만······.”
 “숙부, 그냥 가요. 주변에서 이렇게 원하는데.”
 이미 주변의 환호성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져 있었다. 전쟁터에서 승리 후 군사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이 정도일까.
 금검대주가 계속 난감한 표정으로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남궁은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도 그다지 기다리고 싶지 않아요. 오늘, 재밌을 것 같아서.”
 말과 함께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어느새 백룡검을 뽑아 든 진명이 투지 어린 눈빛으로 자세를 잡고 있었다.
 둘을 번갈아 본 금검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네 말대로 순서가 의미 있는 건 아니지. 마음대로 해라.”
 고개를 끄덕인 그가 아래로 내려가고, 비무대 위에는 똑같이 생긴 두 사람이 남았다.
 잔뜩 가시를 세운 듯 보이는 진명을 바라보며, 남궁은진은 씩 웃은 후 검을 뽑아 들었다.
 둘의 자세가 잡히자 금검대주가 입을 열었다.
 “시작.”
 주변의 환호성과 달리 그의 말은 아주 조용했다.
 
  * * *
 
 신호와 함께 진명이 움직였다. 화살처럼 몸을 날려 남궁은진에게 접근하자마자 그의 검이 최단거리를 거쳐 찔러 들어갔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놀랄 정도로 매서운 속도였지만 남궁은진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검을 살짝 들어 진명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그가 있던 자리를 휑하니 지나간 진명이 돌아보자 남궁은진이 검을 든 채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천풍검법天風劍法 중의 일점사一點射로군. 원래 초식은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 걸로 아는데, 변형시킨 건가? 다음 연결을 없애고 온몸을 던져 속도를 높인 거로군.”
 “······.”
 “그래도 명색이 세가 내 비무이니, 초식명 같은 건 좀 외쳐 달라고.”
 입을 꾹 다문 채 진명이 검을 고쳐 잡고 다시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 남궁은진의 앞에 도착한 진명이 다시 매섭게 검을 내질렀다. 아까와 같이 남궁은진이 검을 들어 흘리려는 순간 진명이 살짝 손목을 꺾어 검의 궤도를 비틀었다.
 자신의 검을 비껴 몸으로 쇄도하는 검을 남궁은진이 몸을 숙여 피하자, 진명이 몸의 회전을 따라 바닥을 쓸 듯이 발 차기를 날렸다. 남궁은진이 재빨리 몸을 뒤로 날려 발을 피하며 외쳤다.
 “이건 좋은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명이 다시 몸을 움직여 거리를 좁히고 검격을 날렸다.
 상하좌우 사방에서 검광이 번뜩였지만 정작 그 가운데에 서 있는 이의 표정은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몸을 슬쩍슬쩍 움직여 진명의 공격을 피해 가면서 남궁은진은 계속 입을 열었다.
 “분명히 천풍검법의 초식들인데 전부 조금씩 변형이 되어 있군. 뭔가 실전적인 느낌이랄까. 위협적이긴 한데 무게감이 없어. 너무 실전적인 변형이라 살초를 쓸 수 없는 비무에 맞지 않는 걸까, 아니면 공력이 부족해 검에 힘이 실리지 않는 건가······.”
 “닥쳐라.”
 계속 검을 날리며 진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까 뺨을 맞은 자국이 남은 건지 아니면 흥분을 한 것인지,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힐끗 기색을 살핀 남궁은진은 피식 웃으며 살짝 검을 고쳐 잡았다.
 “계속 공격하기 힘들어 보이는데, 이제 좀 쉴 때도 되지 않았나?”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그가 방출한 기세에, 진명이 움찔 놀라며 공격을 멈추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며 남궁은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기세 좋게 달려들 때는 언제고, 조금 분위기를 잡아 주니 뒤로 물러나는 건가? 생각과는 영 다른걸. 어제 진수 형을 아주 깔끔하게 제압하길래 기대를 많이 했는데 말이지.”
 약간 조롱하는 듯한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야유를 보냈다. 어머니 아버지에 삼대 조상까지 욕하는 소리가 들려오자 진명의 머리가 차가워졌다.
 심호흡을 한 진명이 쭉 뻗어 잡았던 검을 몸 쪽으로 바짝 끌어당기고 몸을 웅크렸다. 곰처럼 웅크린 모습에 주변의 야유가 더 심해졌지만, 이제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진명은 가만히 남궁은진을 응시했다.
 그 침착한 표정에, 심판을 보고 있던 금검대주의 얼굴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제 내 차례인가? 그럼 가지.”
 남궁세가 특유의 보법인 무한보無限步의 방위를 밟으며, 남궁은진이 미끄러지듯 진명의 정면으로 다가왔다. 잔뜩 웅크리고 있는 진명에게 남궁은진이 검을 내질렀다. 아니, 내지르려 했다.
 “섬전십삼검뢰 팔절, 천······ 어라?”
 원을 그리며 내려치려는 남궁은진의 오른 손목 앞에, 어느새 진명의 검이 다가와 있었다.
 대경실색한 남궁은진이 손을 물리는 순간, 그 흐름을 타고 진명이 그의 품으로 바짝 치고 들어가며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다급히 남궁은진이 왼손에 공력을 집중해 그 공격을 튕겨 내자 진명이 바로 몸을 뒤로 젖히며 돌려 차기를 날렸다. 발에 가슴팍을 정통으로 차인 남궁은진이 실이 끊긴 인형처럼 붕 뒤로 날아갔다.
 절체절명의 위기, 주변 이들의 함성이 커졌지만 정작 진명은 한 발 뒤로 물러선 채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연기가 서툴러.”
 진명의 말에 비틀대던 남궁은진이 씩 웃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주변에서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안 거지?”
 “반발 하나 없이 너무 시원하게 밀려 나가더라고.”
 진명이 다시 잔뜩 자세를 웅크렸다. 남궁은진이 검을 든 손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다시 달려들었다.
 
 섬전십삼검뢰 십이절. 천수일검.
 閃電十三劍雷 十二節. 千手一劍.
 
 남궁은진이 번개같이 손을 움직였지만 진명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살짝살짝 손을 움직였다.
 자신이 만들어 낸 검영이 상대에게 접근하기도 전에 전부 튕겨 나가자 남궁은진의 눈이 커졌다.
 “······?”
 남궁은진이 다시 한 번 천수일검을 펼쳐 냈지만 진명은 미동 없이 아까와 같은 동작을 펼치며, 오히려 한 걸음을 내디뎠다.
 초식이 발동하는 지점으로 진명의 검이 조금씩 다가오자 인상을 잔뜩 굳힌 남궁은진이 결국 뒤로 물러났다.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고, 진명이 움직였다. 바로 따라붙어 일 검을 날리자 그를 지켜보고 있던 금검대주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좋다!”
 바짝 자신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온 진명을 보며 남궁은진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와선풍渦線風인가······.”
 전장에서 기마대가 우회기동을 하는 것처럼, 진명의 검이 멀게 돌아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오고 있었다.
 남궁은진이 검을 자신의 왼편으로 돌리는 순간, 허리춤에 가 있던 진명의 왼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흑검대식 천풍검법. 와선풍 개·쌍룡
 黑劍隊式 天風劍法. 渦線風 改·雙龍
 
 어느새 진명의 허리에서 풀려나온 검집이 무서운 속도로 남궁은진을 향해 쇄도했다.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난 검집에 기겁한 남궁은진이 몸을 빼려 했지만, 진명의 공격은 정확히 그의 몸을 강타했다.
 엄청난 격타음에, 지켜보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검집을 회수한 진명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번 건 좋았나?”
 “······생각보다는.”
 오 보 정도 뒤로 밀려난 남궁은진이 쓰게 웃으며 격타당한 가슴을 문질렀다. 오른쪽 가슴 부분의 옷이 충격으로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예상과 달리 진명이 우세해 보이자 주변의 세가원들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안절부절못하던 장로 중 한 명이 금검대주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거, 소가주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팔짱을 낀 채 유심히 비무대 위를 지켜보던 금검대주가,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소가주가 이길 겁니다. 절대적으로.”
 “······절대?”
 “이건, 비무니까요.”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장로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금검대주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매서운 눈빛으로 비무대 위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꽉 다물린 입은 더는 열리지 않았다.
 무안했던 듯 장로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며 헛기침을 했고, 그 소리를 신호로 비무대 위의 두 사람이 동시에 신형을 날려 맞붙기 시작했다.
 
 
  * * *
 
 둘의 검이 정신없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고,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그런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가주님을 상대로, 생각보다 제법인데?”
 “그동안 운으로 이긴 건 아니었나 봐.”
 의외로 대등해 보이는 대결의 모습에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놀란 기색이었지만, 정작 검을 맞대고 있는 진명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내 검이 조금씩 느리다. 그리고 가벼워. 점점 내 검이 밀리는 게 느껴진다.’
 그 광경을 보며 금검대주가 중얼거렸다.
 “검집을 이용해 쓴 와선풍의 개량형, 참 대단한 초식이기는 했다. 하지만 저렇게 정통으로 명중시켰는데도 별 타격이 없다면, 그 시점에서 승부는 이미 너무 뻔한 얘기지. 애초에 공력의 차이가 너무 심하다. 진검으로 살초를 펼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지.”
 집중력을 살린 치열한 대결이었지만 결국은 비무. 단번에 숨을 끊어 놓지 않는 이상에야 공력을 이용해서 타격을 주는 것 그리고 방어를 하는 것. 어떤 면에서든 눈에 보이는 격차를 극복하기는 힘들었다. 하물며 진명이 익히고 있는 검법조차 섬전십삼검뢰의 한 단계 아래 검공인 천풍검법이었으니.
 땀을 흘리며 진명은 필사적으로 검을 내질렀지만, 남궁은진의 검을 따라가는 것이 점점 버거워졌다.
 수십 번 정도 검을 마주쳤을까, 결국 견디다 못한 진명이 뒤로 몸을 날렸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남궁은진이 살짝 몸을 움츠렸다가, 진명이 후퇴한 쪽으로 화살과 같이 몸을 날렸다.
 “궁신탄영弓身彈影!”
 진명의 경악한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눈앞까지 접근한 남궁은진이 검을 내질렀다.
 똑같은 천수일검의 초식, 하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공력을 끌어 올린 상태로 펼친 터라 속도와 세기 둘 모두 아까의 천수일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큭······ 크아악!”
 한 번, 두 번, 세 번······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그의 검이 진명을 향해 쇄도해 왔다. 진명의 검이 점점 뒤로 밀려났다.
 필사적으로 막아 내던 진명이 결국 공격을 놓쳤는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뒤로 붕 날아갔다. 바닥에서 세 바퀴쯤 구른 그가 무릎을 꿇고 든 시선 끝에는, 남궁은진이 약간 놀란 듯한 표정과 함께 오른발을 내뻗은 채로 서 있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소가주님이셔!”
 “저런 녀석이 소가주님에게 맞설 수 있을 리가 있나.”
 사람들이 환호를 보냈지만 남궁은진의 얼굴에는 그를 신경 쓰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른발을 내리고 다시 자세를 정비하며 남궁은진이 입을 열었다.
 “아까 느낀 게 잘못된 게 아니었군. 너, 섬전십삼검뢰의 검로劍路를 파악하고 있어.”
 “······.”
 “방계가 전수받는 것은 천풍검법이 한계일 텐데, 어떻게 섬전십삼검뢰에 대해 알고 있는 거지?”
 힘들게 몸을 추스르며 진명이 대답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주 보여 주시던 검식이니까. 정식으로 배우지는 못했어도 눈에는 익어 있거든. 쿨럭.”
 “······그렇군. 분명히 이 공격을 막아 낼 능력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방계지만 네가 그분의 아들이란 걸 잊고 있었어. 사과하지. 덕분에 발까지 쓰고 말았어.”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거칠게 숨을 내쉬던 진명이 기습적으로 검초를 펼쳤지만, 남궁은진은 여유롭게 그 공격을 막아 내며 입을 열었다.
 “그만 포기하는 게 어때?”
 “······.”
 “잠깐 사이였지만 이미 네 힘이 많이 빠진 게 내 눈에도 보인다. 지금 상태로는 다음의 검을 제대로 막기 어려울 거야. 그럼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여유로운 그의 말에 진명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대꾸했다.
 “제길. 생각해 주는 척하지 마라, 은진. 같은 항렬 주제에 마치 내 스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내공 차이로 검이 밀리지만 않았어도 잘난 척 지껄이는 네 녀석의 주둥이를 뭉개 버릴 수 있었을 거다.”
 독기가 어린 진명의 대꾸에 남궁은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런.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공의 차이가 없다고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오!”
 말 중에 이어지는 검을 쳐 내며 그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설령 네 내공이 나와 큰 차이가 없다고 가정해도 지금의 네 무공인 천풍검법의 현재 성취로는 날 꺾을 수 없어. 솔직히 이제까지 네가 세 번이나 본가의 다른 직계들을 이기고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기적에 가깝다. 이대로 여기서 포기하고 내려가도 모두의 박수를 받을 수 있을 거야.”
 그의 말에 진명이 피식 웃었다.
 “박수? 훗, 지랄하고 자빠졌네. 첫 번째 녀석을 이겼을 때는 비겁하게 기습을 했다는 말을 들었고, 두 번째 이긴 녀석은 이전 상대와 혈투를 벌여서 제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댔지. 그리고 세 번째 녀석은? 쓰지도 않은 암수를 썼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통에 비무가 끝나고 몸수색까지 받게 만들었지. 아무도 내게 박수 따위는 보내지 않아. 멍청한 건지 가식이 끝에 달한 건지, 구분이 가질 않는구나. 큭큭.”
 “철저히 비뚤어졌구나. 아쉽군. 너 정도의 재질이라면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가문의 중요 부대에 들어갈 수도 있을 텐데. 안 그래, 동생?”
 남궁은진의 말에 진명은 이를 빠드득 갈며 바닥에 거의 늘어뜨리다시피 쥐고 있던 검을 필사적으로 다시 세워 상대를 겨누었다.
 검의 무게가 지탱이 되지 않는 듯 오른 소매 부근을 입으로 물고 버티는 진명의 모습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던 남궁은진은, 이제 그만 끝내야겠다는 듯 검을 곧추세워 단숨에 뛰어들었다.
 “그만 쉬어라, 진명!”
 남궁은진의 검이 빛살과 같은 속도로 진명의 몸을 향해 쇄도해 왔다. 당장 일 검을 맞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진명은 필사적으로 몸의 주요 부위와 검을 쥔 오른팔을 보호하며 후퇴했다.
 섬전십삼검뢰의 연환 공격이 절반쯤 지나갈 무렵이었을까, 진명이 손에서 검을 놓쳤다.
 놓친 검이 남궁은진의 방향으로 날아가자, 당황한 그가 검을 들어 진명의 손을 떠난 검을 막았다. 순간 진명이 입을 열어 무언가를 남궁은진의 얼굴을 향해 뱉었다.
 눈에 정확히 명중한 무언가에 그가 시야를 잃고 허둥대는 순간, 진명이 사력을 다해 그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와선풍으로 타격을 입혔던 그 부위, 온 힘을 담은 진명의 공격이 작렬했다.
 금검대주가 탄성을 질렀다.
 “저건······ 천풍장天風掌!”
 진명의 천풍장에 무방비 상태로 가격당한 남궁은진이 검을 잡은 채로 뒤로 날아가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상황 반전에 어리둥절한 사람들이, 쓰러진 그의 눈가를 보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지독한 놈······ 자기 살을 일부러 물어뜯어 피를 냈어······.”
 한 사람이 멍하니 말하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진명에게 향했다. 지친 표정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진명의 오른 소매 부근이 피로 흥건히 물들어 있었다.
 “비겁한 놈! 네 녀석이 소가주님께 암수를 쓰다니!”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로 성질 급한 한 여성이 소리치자 이내 장내의 분위기가 적대적으로 변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공격하려 뛰어올라 올 것 같은 주변 분위기였지만, 진명의 눈은 쓰러져 있는 남궁은진을 향해 있었다.
 ‘검을 놓치지 않았다. 큭, 이 일격으로 끝냈어야 했는데······.’
 주변의 소리에 깨어난 것일까, 남궁은진이 소매로 눈가의 피를 닦은 후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비난과 욕설로 가득했던 주변에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시야를 회복한 그가 진명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대단하구나, 진명. 이번 대회에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건 네가 처음이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넌 제법 놀라운 자질을 지니고 있다.”
 ‘젠장, 분명히 정통으로 들어갔는데도 타격이 거의 없어 보인다. 일부러 아까 공격을 가했던 위치를 노려 거듭 쳤는데도. 역시 공력의 차이가 큰 건가.’
 진명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따뜻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남궁은진은 웃음을 거두고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비겁한 수법, 승리를 향한 비정상적인 집착은 정파인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승리를 훔쳐 가도 변하는 건 없어. 넌 하루하루의 생존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사파인이 아니다. 자랑스러운 세가의 일원으로 살아가려면 그런 자세는 버려야 한다.”
 “······지랄한다. 덤벼.”
 적의가 담긴 진명의 대꾸에 그는 피식 웃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이미 검을 던져 버린 진명은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검집을 풀어 손에 들었다. 조금 전에 물어뜯었던 오른쪽 손목 부근이 아려 왔다. 출혈이 심했던 모양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목으로 검집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있는 진명을 안타깝게 보던 남궁은진이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이걸 선보이는 건 네가 처음이다. 받아라! 제왕검형帝王劍形!”
 엄청난 기세가 진명의 몸을 향해 집중되었다.
 진명은 날아드는 그의 검을 향해 필사적으로 검집을 들어 막아 보려 했지만, 기로 가득 찬 검과 충돌한 진명의 검집은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이를 악문 진명이 왼손을 움직여 남궁은진에게 주먹을 날리려 했지만 그보다 빨리, 그의 검이 진명의 목젖에 와 닿았다.
 생긋 웃는 남궁은진의 표정이 진명에게 엄청난 패배감을 불러일으켰다.
 “승자, 남궁은진!”
 비무대 한편에서 경과를 바라보던 금검대주가 손을 들어 남궁은진의 승리를 선언했다.
 승부의 결과가 난 상태였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의외로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사람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제왕검형? 지금 제왕검형이라고 한 것 맞지?”
 “전전대 가주님 이후로 실전되었다고 들었는데······.”
 “현 가주님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 아닌가.”
 금검대주가 천천히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둘의 앞에 도달한 그가, 진명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남궁은진을 주시했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듯해 보였지만, 아래쪽에 있는 진명의 눈에는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소가주.”
 “예.”
 “정녕, 도달한 것인가?”
 그의 물음에 남궁은진이 활짝 웃었다.
 “조카가 불민하여 아직까지 완전한 형태를 재현해 내지는 못했지만, 굳이 구별하자면 맞습니다.”
 잠시 말을 잊고 있던 금검대주가 와락, 거칠게 그를 껴안았다.
 손에서 검을 놓친 남궁은진이 켁켁대고 있는 사이, 상황을 완전히 깨달은 주변의 사람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비무대 위로 올라왔다.
 무대 위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둘의 주변을 감싸고 손으로 두드리며 괴성을 지르다, 급기야 남궁은진을 떼어 냈다. 체격이 큰 누군가가 그를 무등을 태우자, 나머지 주변의 사람들이 가운데에 둘러싸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향은 가주와 원로들이 있는 세가의 중심 방향이었다.
 “남궁은진! 남궁은진!”
 사람들이 휑하니 사라진 가운데에 진명은 무릎을 꿇은 채, 아까의 자세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잠깐 위를 바라보고 있었던 그의 시선은 어느새 비무대 바닥을 향하고 있었고, 입 역시 굳게 닫힌 채였다. 아까보다는 약간 안정된 듯한 그의 숨소리만이, 그 공간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전부였다.
 대열을 따라 이동하던 금검대주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진명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꽤 부드러웠다.
 
 
 
 # 4. 천마신위도결
 
 
 
 “그만 일어나라, 남궁진명.”
 오늘도 술을 마신 듯,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비무대에 다가온 윤상이 중앙에 꿇어앉아 있는 이에게 말했다.
 진명은 마치 방금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기지개를 펴며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비무를 벌일 때만 해도 환했던 하늘에는 별이 보였고, 줄줄 흐르던 오른 팔목의 피도 멈춰 있었다. 비무대 위와 주변에는 한 명의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그와 윤상, 오직 둘뿐이었다.
 “두 시진쯤 지났다. 네가 거기 널브러져 있은 지.”
 윤상의 말에 진명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럴 때는 위로해 주는 겁니다, 아저씨.”
 같이 피식 웃는 그를 뒤로하고 진명은 검을 향해 걸어갔다. 중간 중간 발에 밟히는 검집 조각을 느끼며 그는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것을 물려받았다는 생각에 정말 두근거렸는데, 하루도 못 가 박살 나 버렸네요. 이 검도 이렇게······ 금방 부러질까요?”
 “괜찮은 거냐?”
 윤상의 얼굴에 처음으로 안타까움이 어렸다. 진명은 검을 뽑아 먼지를 털며, 독백을 하듯 이야기를 이어 갔다.
 “괜찮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절대 잊지 못할 줄 알았는데, 이 정도 나이를 먹으니 사실 아버지는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어요. 가끔 생각나도 슬픈 감정보다는 웃음이 납니다. ‘아,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지.’ 하고 말이죠. 게다가 어머니는 제 눈앞에서 돌아가신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주모의 일은 내가 미안하다. 그때 내가 어떻게든 했어야 했는데······.”
 윤상의 자책에 진명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아무리 당시에 위명이 높았더라도, 남궁의 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아저씨가 이 세가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것도 아버지의 본래 부인과 그 주변의 직계들을 상대로. 되려 목숨을 걸고 달려와 주신 아저씨와 흑검대 아저씨들이 없었더라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이나마 수습하기도 힘들었겠죠. 물론 저도 죽었을 테고요. 오히려 절 구하려다 모든 걸 잃으셨으니······ 아저씨한테는 지금도 죄송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멀리서 풍악 소리와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명의 시선에 윤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전대 가주 이후로는 아무도 재현해 내지 못했던 제왕검형이, 불완전하긴 하지만 이제 갓 스물이 좀 넘은 소가주의 손으로 펼쳐졌다. 잔치가 난 게 당연하지. 비무 대회도 그 대결 이후로는 중단되었다. 아니면 네가 지금까지 거기 그렇게 널브러져 있을 수 있었겠느냐? 누가 치워도 당장 치웠지.”
 “제왕검형······ 대단하긴 했습니다. 제가 아닌 검집에 충격이 가해지는데도 엄청난 압력이 느껴지더군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진명은 이내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하지만, 제가 그 녀석에게 뒤진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만약 살수를 펼칠 수 있었더라면, 제가 익힌 것이 단순한 천풍장이 아니라 폭뢰신권爆雷神拳이나 구벽신권九劈神拳과 같은 세가의 상승 권법이었더라면, 아니 직계들이 밥 먹듯이 드시는 몸에 좋은 약재의 사분지 일만 먹어서 천풍장에 더 강한 힘을 담을 수 있었더라면······ 최후에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었던 건 남궁은진 그 녀석이 아니라 저, 진명이었을 겁니다.”
 “승부는 결과로 말하는 것. 이유야 어쨌든 소가주가 이겼고 넌 진 거다.”
 윤상의 짤막한 대꾸에 진명은 더욱 분한 표정으로, 손에 든 검으로 땅 이곳저곳을 찍어 댔다.
 “그것도 어느 정도 출발선이 비슷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와선풍·쌍룡을 무방비 상태의 가슴에 명중시키고, 온 힘을 다해 그 부위에 천풍장을 한 번 더 꽂아 넣었는데도 그 녀석은 거의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공력의 차이가 너무 심한 겁니다. 나이와 수련의 세월이 다르다면 모를까, 녀석과 저는 똑같은 시기에 처음 검을 잡고 무공을 배웠습니다. 아저씨도 아시잖습니까, 제가 밥 먹는 시간을 빼고는 항상 검을 연마했고, 잠잘 시간까지 줄여 가면서 외공과 내공 수련을 해 왔다는 것을. 좋은 것 실컷 처먹고 뒷방의 늙은이들이 온 힘을 다해서 돌봐 주지 않는다면 그 나이에 그 정도의 내공을 지닐 수는 없습니다. 이건 불공평한 겁니다. 그리고 그 녀석뿐만이 아닙니다. 제 앞에서 뽐내는 녀석들, 제가 비겁한 수를 쓴다고 하는 녀석들······ 그 녀석들 모두······.”
 진명이 땅에 검을 찍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마치 듣지 못했다는 양, 윤상은 왼손에 든 술병을 다시 입가로 가져가 꿀꺽꿀꺽 들이켜며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의 앞쪽 바닥을 벌집으로 만들어 놓은 진명이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보셨던 겁니까?”
 “네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쌍룡을 명중시키던 때, 그 정도부터였을까.”
 “······많이 실망하셨겠네요, 아저씨.”
 고개를 푹 숙이는 진명을 보며 윤상은 시큰둥한 말투로 대답했다.
 “한두 해 칼밥을 먹은 것도 아닌데 이런 결과를 예상 못 했겠느냐? 어제도 얘기하지 않았느냐. 넌 소가주를 넘어설 수 없을 거라고.”
 “그래도 조금이나마 기대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말하시진 못할 겁니다. 딱 한 번이었으니까요. 그 한 번만 이겼더라면······.”
 “네 녀석만 구제받았겠지.”
 중간을 끊고 들어온 윤상의 말에 진명이 고개를 홱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윤상은 다시 술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아무리 네가 찬밥 신세인 서출이라지만, 이전 남궁가 제일 고수의 유일한 아들이다. 천풍검법이나 천풍장 같은 경우도 네 입장에서야 성에 안 차는 무공이겠지만 일반 구성원들은 쉽게 배울 수 없는 남궁가의 근본 무공이기도 하고. 그들이 남궁의 성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이미 거의 무공을 상실한 나를 돌아봐 주기나 할 것 같으냐? 네가 없었으면 우리가 지금 머물고 있는 그 집 한 칸조차 세가는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남궁은 같은 성을 가지지 않은 구성원에게는 특별히 가혹하기로 유명한 곳이니까. 대형은 그것을 뒤집어엎으려다가 백안시白眼視받았던 것이고.”
 “······.”
 “그러니, 너도 더 이상 헛된 꿈은 꾸지 말고 슬슬 네 갈 길을 생각하도록 해라. 내가 전해 줄 수 있는 건, 어지간한 건 다 전해 줬다. 난 이제 네게 쓸모없는 존재야.”
 “아, 배가 고프네요. 밥이나 먹으러 갈까요? 잔치 음식 얻어먹기는 힘들 것 같고, 마을에서 뭐 좀 사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죠. 오리구이에 죽엽청 한 병이 당기네요.”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는 듯 딴청을 피우며 대충 검을 추스른 진명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모습을 보는 윤상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어렸다.
 그가 본 이들 중 진명은 가장 무공에 대한 자질이 뛰어났고 열의 또한 넘쳤다. 아무리 그가 숨겨 둔 첩의 자식이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아버지의 원래 부인과 그를 따르는 세력에 눈엣가시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가문을 위해서라면 진명은 직계 이상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소가주가 대단한 재질을 지녔다지만, 진명 역시 그에 절대 뒤처지지 않아. 되려 그에게 없는 독한 성품까지 가지고 있으니 제대로만 키웠다면 남궁가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는 녀석이었다. 그걸 알아볼 수 있는 녀석이 없는 건지, 아니면 알아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참 한심한 일이야. 긴 평화가 남궁가를 안이함에 젖어들게 만든 건가······.’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윤상은 고개를 흔들었다.
 “제길, 내가 이런 생각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다고.”
 남궁가를 바꾸고 싶다던 진명의 아버지, 남궁명한을 따라 들어온 남궁세가. 하지만 그가 목숨을 잃던 그날에 자신 역시 한쪽 팔과 평생 쌓아 온 내공 전부를 잃은 터였다.
 진작에라도 모든 걸 훌훌 털어 버리고 떠나고 싶었으나 어린 진명이 무사히 자라는 것을 보기 위해, 그리고 그동안 쌓였던 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었던 시간.
 진명은 어떻게든 남궁명한의 뜻을 잇고 세가 내에서 존재를 인정받아 보겠다고 필사적으로 뛰고 있었지만, 한때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던 그가 보기에는 너무나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다. 진명이 그런 뜻만 버려도, 이곳을 떠나 한적한 곳에서 같이 살면 될 것을.
 “······하긴, 진명이가 떠나게 순순히 놔줄 리도 없지만.”
 아무리 서출이라도 어쨌든 세가의 가장 중심이었던 인물의 아들이라 천풍검법과 천풍장 같은 핵심 무공들도 배운 몸이었다. 세가에서 진명이 순순히 나가게 둘 리가 만무했다.
 단전을 파괴하고 사지근맥을 절단하는 것은 물론 심하면 아예 목숨을 취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 고개를 든 그의 눈에는 진명이 보이지 않았다. 발돋움을 하고 시선을 더 멀리하자 저 멀리 비무장을 둘러싼 벽의 끝, 진명이 모퉁이를 돌아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경공이라도 시전하고 있는 듯, 그의 움직임은 상당히 빨랐다.
 “······그렇게 빠르게 가면 내가 어떻게 쫓아가란 말이냐.”
 한숨을 푹 내쉰 후, 윤상은 발을 움직여 진명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움직였음에도 진명은 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중간쯤에라도 자신을 두고 온 것을 깨닫고 기다렸을 텐데······.
 “역시, 많이 상심한 건가.”
 걱정하는 마음이 든 윤상은 더 빨리 따라가려 했지만, 발끝만 아플 뿐 속력은 더 높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숨을 견디다 못한 그는 담 한쪽 구석을 붙잡고 허리를 굽혔다. 가쁜 숨이 땅까지 닿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벌써 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는 가끔 자신의 몸에서 공력이 사라졌다는 것을 잊을 때가 있었다. 틈만 나면 진명에게 과거를 잊고 새로 시작하자고 말했지만, 정작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인지도 모른다.
 “씨팔.”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의 원인이기라도 한 양, 바닥을 노려보며 욕을 뱉은 윤상은 다시 몸을 세우고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번엔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그는 천천히 갔다. 세가 밖, 자신들의 거처로.
 
  * * *
 
 한참이 걸려 도착한 윤상이 문을 열어젖혔을 때, 이미 진명은 정원에 사 온 음식을 펼쳐 놓고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윤상의 찡그린 얼굴을 보며 이미 얼굴이 새빨개진 진명이 입을 열었다.
 “어디 갔었어요, 아저씨?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더니만.”
 “······네가 날 두고 갔다만.”
 “······그랬나?”
 윤상이 말없이 진명을 노려보았다.
 “뭘 그렇게 따져요, 아저씨. 그냥 앉으세요, 앉아.”
 몸을 일으킨 진명이 윤상의 왼팔 옷자락을 잡고 끌어당겼다.
 결국 피식 웃어 버린 윤상도 자리에 앉아, 성한 손으로 술잔과 젓가락 한 벌씩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왔다. 이내 손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졌고, 굳어 있던 표정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리에 앉은 둘은 미친 듯이 먹고 마시며, 더욱 미친 듯 웃고 떠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일이 생기기라도 한 날인 듯.
 얼마를 그렇게 웃고 떠들었을까, 문 쪽에서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남궁세가 특유의 창궁건으로 머리를 감싼 한 무사가 대문 안쪽에 기대 큭큭 웃고 있었다. 이미 날이 어두워진 터라 그의 생김새는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상심해 있어도 잘 달래 보라고 명을 받았는데 이건 뭐······ 누가 보면 이긴 줄 알겠군. 큭큭큭큭······.”
 “히끅~ 뉘슈?”
 자리에서 일어난 윤상이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비틀비틀 그에게 다가갔다. 술 냄새를 풍기며 자신의 눈앞에서 딸꾹질을 하고 있는 그를 한심한 눈빛으로 보던 무사가 손을 확 내뻗었다.
 휘청거리다 쓰러지는 윤상을 지나쳐 무사는 성큼성큼 진명이 앉아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윤상이 넘어지는 것을 보며 진명이 취한 와중에도 무서운 눈빛을 무사에게 보냈지만, 그는 그런 것 정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진명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 까딱까딱 손짓을 보냈다. 그의 오른쪽 볼에 선명한 검상劍傷 자국이 보였다.
 진명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주먹을 꼭 쥔 상태로 무사에게 적대감을 표현하려 했지만, 의도와는 달리 그의 혀는 우스꽝스럽게 꼬여 있었다.
 “······히끅~ 무슨······ 일이시죠?”
 “총관께서 찾으신다. 따라와라.”
 진명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총관······께서? 저 같은 미천한 놈을, 무슨 일로.”
 “내가 할 말이다. 너같이 미천한 놈을 왜 찾으시는지.”
 “······!”
 “하여튼 따라와라. 지금 당장.”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은 무사가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고개를 좌우로 저은 진명도 그 뒤를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휘청거리는 그의 걸음걸이를 보며, 한숨을 푹 쉰 윤상이 고개를 거칠게 흔든 후 몸을 일으켜 따라붙었다. 진명이 그를 돌아보았다.
 “아저씨, 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기다리고 계십시오.”
 “같이 가자. 남궁명은은 아무 일 없이 사람을 찾는 성격이 아니야.”
 윤상이 심각한 표정으로 짤막하게 대답한 후 침묵을 지켰다. 힐끗 그 모습을 본 무사가 피식 웃으며 속도를 높였고, 진명과 윤상도 심각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
 
 “이제 좀 정신이 드느냐?”
 싸늘한 눈초리를 보내며 총관, 남궁명은이 말했다. 젖은 강아지가 몸을 흔들어 물을 털어 내듯, 고개를 휘저어 흠뻑 뒤집어쓴 물을 살짝이나마 털어 낸 진명이 대답했다.
 “예, 총관님.”
 “망나니 같은 놈. 아무리 중요한 비무에서 패배했다지만 상처를 입은 몸으로 그를 치료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술독에 빠지기부터 하는지. 명한 형님의 이름이 울겠구나. 어찌 호랑이의 배에서 고양이 새끼가 나왔는지······ 역시 천출이라 다른 건가.”
 남궁명은의 말에 진명의 오른 주먹이 꽉 쥐였다. 겨우 아문 듯했던 오른 손목의 상처가 다시 터질 듯이 부어올랐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아낀다더니, 꼭 그 반대로구나. 저를 욕하는 건 용서해도 제 어미를 욕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 이건가? 하지만 있잖느냐.”
 말을 하던 남궁명은이 바람과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진명이 손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몸을 틀어 그의 측면으로 빠져나간 남궁명은은 장력을 날렸다.
 정확히 허리에 명중한 공격에 진명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앙다문 입술에서 미세하게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를 드러낼 상대를 보고 드러내야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남궁명은이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진명이 남궁명은을 노려보며 천풍장의 기수식을 취했다.
 “······해보겠다는 것이냐? 말했을 텐데. 이를 드러낼 상대를 보고 드러내라고.”
 다시 발을 움직여 다가오는 남궁명은을 향해 진명은 계속 공격을 퍼부었지만 닿지 않았다.
 한 끗 차로 여유 있게 공격을 피해 가며 남궁명은은 계속 주먹을 날렸다. 지속적인 타격을 입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버티는 진명을 보며, 그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끝장을 보겠다는 것이냐. 뭐, 상관은 없다만.”
 “하실 말씀이 있어서 부르신 걸로 압니다만.”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남궁명은이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려온 곳에서는 윤상이 싸늘한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이런. 한때 천하에 이름이 높으셨던 섬전도시구려. 아직도 안휘에 남아 계셨소? 지금쯤이면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나셨을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세가의 귀한 곡식을 축내서. 형님께서 저 녀석 사람 구실할 때까지만 옆에 있으라고 하셨거든요. 뭐, 지금은 제가 더 사람 구실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윤상의 대답에 남궁명은은 졌다는 듯 피식 웃었다.
 “이를테면 보호자라는 건가. 뭐, 시간이 넉넉한 건 아니니 이쯤 하지. 같이 들으려면 들으시든가.”
 고개를 끄덕인 윤상이 진명의 옆으로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윤상에게 몸을 의지해 겨우 일어난 진명은 남궁명은을 올려다보았다.
 남궁명은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진명의 발치에 던졌다. 까만 표지의 서책, 표지에는 ‘천마신위도결天魔身衛刀抉’이라는 글자가 피처럼 붉은 빛깔로 새겨져 있었다. 진명이 서책을 주워 들었다.
 “이게 뭡니까.”
 “천마문주의 독문 무공이다.”
 “······이런 씨팔.”
 옆에서 들려온 윤상의 목소리에 진명이 고개를 홱 돌렸다.
 윤상의 눈은 살벌할 정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마치 십 년 전 천마문주와 대치하던 그때로 돌아간 듯이.
 그 눈으로 남궁명은을 마주하고, 윤상이 입을 열었다.
 “그걸 왜 총관께서 가지고 계신 겁니까.”
 “그런 걸 굳이 알 필요는 없을 텐데.”
 “천마문주의 목숨을 거둔 건 저였고, 그의 근거지를 박살 낸 것 역시 저희 흑검대였습니다. 세가 안에만 있었던 총관의 손에, 우리가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그게 왜 있는 겁니까.”
 “나중에 발견했다. 굳이 알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남궁명은이 인상을 찌푸리며 윤상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운 기세가 윤상의 몸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압박해 왔다.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는 와중에도, 계속 그를 노려보는 윤상의 앞을 진명이 막아서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걸 왜 제게 주시는 겁니까.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만.”
 기세를 거둔 남궁명은이, 생각해 보라는 듯 피식 웃으며 팔짱을 꼈다.
 “······이걸 연마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영 글러 먹은 놈은 아니군.”
 남궁명은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윤상의 눈이 커졌다.
 “천마문이라는 작은 현판이 안휘의 한 자락에 걸렸던 것은 이십여 년 전. 하지만 그 작은 현판은 겨우 십 년 만에 원래 안휘에 자리를 잡고 있던 우리에게 필적할 정도로 급속하게 커졌다. 뒤에 특별히 밀어주는 세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 무공이 대단한 거라는 이야기군요.”
 “그래. 특히 초대 문주의 실력은 어지간한 대문파의 장문인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했다. 그가 죽고, 수행을 떠났던 네 아버지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맞붙는 것이 꺼려질 정도였지. 그래서 그들을 쓰러트린 후 가장 먼저 우리가 확보하려 했던 건 그의 무공과 심법이었다.”
 남궁명은은 잠깐 침을 삼킨 후 말을 이어 갔다.
 “일단의 노력 끝에 결국 우리는 이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였지. 천마의 바로 곁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 그림자처럼 그 곁을 지켰다고 하는, 어쩌면 천마 이상의 고수일 수도 있다고 평가받았던 천마신위 호제광의 독문 무공. 어째서 그 무공이 이 먼 안휘까지 흘러들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천마문’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본다면 천마문주와 그 혈족은 천마신위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마교가 이 광오한 문파 이름을 그냥 두고 볼 리가 만무하지. 하여튼 내용을 확인하고 우리는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이 무공을 익힐 사람은 없었지.”
 “······어째서죠?”
 “우리는 정파. 그리고 이 무공은 마공이니까.”
 진명의 얼굴이 굳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천마의 곁을 지키고 있던 이가 정파의 무공을 익혔을 리가 없다는 것은.
 “이 정도 수준의 무공을 제대로 익히려면 그만큼의 재질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녀석이 직계 중에 있다면 본가의 무공을 익히게 해야지, 마공을 던져 줄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고 방계나 먼 혈족, 혹은 남궁의 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을 고르자니 그게 어떤 화가 되어 돌아올지 알 수 없다. 힘을 얻고 나서도 그들이 우리에게 순순히 복종하리라 볼 수도 없고, 혹시나 남궁세가 안에 마공이 존재한다는 것이 새어 나갈 우려도 있으니까.”
 “그래서, 저인 겁니까.”
 “그렇다. 직계가 아니면서도 그 혈통상 온전한 방계라고도 할 수 없는 네 녀석. 보호자가 없기 때문에 창궁대연신공蒼穹大衍神功 같은 상승의 내공 운용 따위는 익힌 적도 없으니 기존의 심법을 버리고 마공을 새로 익히기에도 적합하지. 재질 쪽이 의문이었지만, 그간 비밀리에 쭉 관찰한 결과로는 그 또한 충분했고 노력 또한 대단해 보였다. 소가주와의 대결에서 보여 준, 승리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심성 역시 마공에 적합해 보였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진명의 입이 열렸다.
 “싫습니다.”
 단호한 거절에 윤상이 고개를 끄덕였고 남궁명은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감히 가문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저 역시 정파인이고, 비록 서자이긴 하나 남궁제일검의 아들입니다. 그런 제가 마공을 익힐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비밀리에 말씀하시는 걸 보면, 마공을 익힌 것이 들통이 났을 경우의 일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요. 어차피 이것을 잘 익혀 낸다고 해서 세가 내에서의 제 처지가 달라지는 것도 없는 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작두 위에 목을 올려놓을 이유는 없습니다.”
 진명의 대답에 남궁명은이 되물었다.
 “네 말은, 대가에 따라서는 일을 맡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구나. 바라는 것이 혹시 있느냐?”
 “······흑검대를 부활시켜 주십시오.”
 “······!”
 윤상의 눈이 크게 뜨였다. 남궁명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검대라면, 명한 형님이 죽을 때 전멸한 걸로 아는데 무슨 수로?”
 “전멸하지 않았습니다.”
 “뒤에 계신 섬전도 나으리를 말하는 거라면 잘 알고 있다. 무사로서의 구실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라는 것도 말이지.”
 남궁명은의 비웃음 섞인 말을 듣고 윤상이 모멸감에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손을 진명이 꼭 잡았다. 파들파들 떨리던 그의 손이 진정되는 것을 확인한 진명이 다시 고개를 돌려 남궁명은을 마주했다.
 “무공은 잃었지만 세가를 위해 많은 공을 쌓으셨던 분이고, 그 경험은 아직도 충분히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신다면 더 이상 얘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 치자. 너와 그, 두 명으로 뭘 할 수 있단 말이냐.”
 “뜻을 가지고 기를 세우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모이게 마련입니다. 흑검대는 남궁의 성을 가진 사람들이 아닌, 남궁의 깃발 아래 살아가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단이니까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남궁명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네 무공이 어느 정도 이상의 수위에 올라 가문의 일에 팔을 거들게 되면, 그때 그렇게 하도록 하지. 한 육 성 정도면 적당할 것 같은데. 어차피 네 녀석을 양지에서 쓸 순 없으니 적당히 위장할 직책도 필요하고. 이 정도면 되겠느냐?”
 남궁명은의 말에 진명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천천히 고개를 든 진명은 뒤의 윤상을 한번 돌아보고 남궁명은과 시선을 마주했다. 굳게 닫혀 있던 진명의 입이 열렸다.
 “하겠습니다.”
 남궁명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그럼 내일, 본가로 들어와라. 연공실을 따로 마련해 줄 터이니.”
 진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궁명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또 뭐냐.”
 “그냥 지금의 거처에서 익히겠습니다. 괜히 세가 내에서 익히면 누군가에게 들킬 우려가 있으니까요. 보아하니 세가 내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일 같은데.”
 “······하긴 그렇군. 네 뜻대로 해라.”
 “그럼.”
 진명이 고개를 끄덕인 후, 윤상의 손을 잡은 채로 돌아섰다.
 그들의 등을 바라보던 남궁명은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런 표정으로 그는 한참 동안 진명과 윤상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고 있었다.
 “자, 이번에는 얼마나 가려나······.”
 
  * * *
 
 진명이 문을 열고, 윤상이 그 뒤를 따라 들어왔다. 떠나기 전 그대로 음식과 술이 마당에 널려 있는 것이 보였다.
 앞서 들어온 윤상이 먼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명아, 괜찮으냐.”
 “······괜찮습니다.”
 진명은 짤막하게 대답하고, 힘없이 살짝 웃으며 윤상이 앉아 있는 곳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 안으로 진명의 모습이 사라지자, 오른 소매를 덜렁거리며 윤상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딜 봐서 괜찮다는 거냐.”
 쓰게 웃으며 윤상은 오리 다리 하나를 집어 들고 뜯기 시작했다.
 차갑게 식어 있는 술을 마시며, 그는 맛있다는 듯 계속 큰 탄성을 내지르고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렇게 웃는 와중에도 그의 눈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 * *
 
 바깥에서 윤상의 탄성과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바깥 방향으로 고개를 향했던 진명은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그의 앞에는 남궁명은에게서 건네받은 비급과 아버지의 검이 놓여 있었다. 검집이 없는 검은 날을 그대로 드러낸 채로,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반사해 빛을 발했다.
 한참 그렇게 그 두 가지 물건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검을 잡고, 왼손으로 살짝 검의 날이 있는 부분을 움켜쥐었다. 움켜쥔 손 사이로 핏방울이 조금씩 새어 나와 검을 타고 흘렀다.
 잠시 후 진명은 검을 놓고 옷자락을 찢어 검에 묻은 피를 정성스레 닦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 검을 들고 벽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장 깊숙한 곳에 검을 집어넣고 돌아선 그는 자리로 돌아와 책을 펼쳤다. 어두운 방 가운데,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눈빛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원수의 무공이라······.”
 조용히 중얼거리던 진명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일어나 벽장 쪽으로 다가갔다.
 벽장 밑의 서랍을 열고 그는 무언가를 꺼냈다. 천마문주의 목에서 가져왔던, 검은 구슬이 달린 목걸이가 진명의 손아귀에 있었다.
 “천마문주의 물건이었지, 이것. 그럼 나름 스승님의 유품이라고 해도 되려나. 큭큭······.”
 나지막하게 웃은 진명은 목걸이를 목에 걸고 거울 앞에 섰다. 가슴팍까지 늘어진 검은 구슬을 보며, 그는 아홉 번 고개를 숙였다.
 검은 구슬이 은은히 빛을 내고 있었다.
 
 
 
 # 5. 그림자 무사
 
 
 
 안휘의 초여름, 합비合肥에서 조금 서쪽으로 가면 나오는, 남궁세가의 코앞에 있는 마을인 한림촌의 구석, 흑검장이라고 쓰인 조악한 현판이 걸린 한 가옥이 보였다.
 더운 날씨지만 아직 완전히 여름이 되지는 않았다는 듯, 시원한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살짝 열린 대문 틈을 비집고 정원으로 들어갔다. 텅 비어 있는 정원을 대여섯 바퀴쯤 빙글빙글 돈 바람은 정원 구석의 커다란 나무를 향해 흘러갔다. 바람을 맞이한 나무의 파란 잎들이 사라락 소리를 내면서 부드럽게 흔들렸다.
 부드럽게 흔들리던 나뭇잎이 어느 순간, 바람이 지나갔음에도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흔들림은 점점 커졌고, 그것을 견디다 못한 잎들이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요행히 붙어 있다 싶었던 잎들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조금씩 생기를 잃어 가며 점점 갈색으로 변해 가고, 더욱 심해진 흔들림에 가지조차 삐걱대며 소리를 냈다.
 결국 굵은 가지 하나가 뚝 소리를 내며 부러졌고, 가지의 뒤를 따르듯 한 청년이 뛰어내렸다. 남궁세가 특유의 창궁건을 머리에 비끄러매고 손목에 검은 천을 묶은 그의 목에는 까만 구슬이 은은한 빛을 내며 빛나고 있었다.
 흑검장의 가장이자 최고수, 진명이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진명은 중얼거렸다.
 “연공을 시작한 지 일 년,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발전 속도가 빠르다. 이대로라면 육 성을 달성하는 것도 몇 년 걸리지 않겠는걸······.”
 비록 조악한 심법으로 연마한 것이었지만, 열 살 때부터 쌓아 온 십 년 내공을 버리고 시작한 수련임에도 그의 내공은 살벌하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급격히 불어나는 중이었다.
 겨우 일 년 만에 이미 기존에 자신이 쌓았던 수위를 넘어섰고, 지금 이 순간도 일주천을 할 때마다 몸속의 기운이 커지는 것이 느껴졌다. 눈에 띄도록.
 몸을 숙인 진명은 떨어진 가지 끝에 매달린 나뭇잎 몇 장을 잡아 뜯었다. 갈색으로 변한 나뭇잎이 그의 손안에서 스르르 부서져 가루가 되어 갔다.
 “벌써 연공 중에 주변의 생기를 밀어내는 수준에 도달했어. 잘은 모르지만, 이제부터는 마기가 외부로 드러나게 될지도 모르겠군. 앞으로는 조심해야겠어.”
 나뭇잎 가루를 손안에서 털어 버리고 진명은 정원 한가운데 병기가 거치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도를 뽑아 든 그는 칼날을 내려다보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반해 도법은······ 쩝.”
 크게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공 수련이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는 반면, 되려 그 내공을 기반으로 펼쳐야 할 도법은 처음의 생각과는 달리 답보 상태였다.
 그가 보고 자란 것은 아버지의 검법, 그가 십 년간 수련한 것도 비록 도로 펼치기는 했지만 남궁세가에서 전수받은 검법. 그에 익숙해져 있는 그의 머리와 손은 계속 기대를 배반하고 손에 든 도로 검의 변화를 일으키기 일쑤였다.
 그나마 도로 극의 경지에 올랐던 윤상이 조언을 해 주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헤매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온전한 조언이라고 하기에는 표현이 거의 술주정 수준이었지만.
 
 -미련한 놈, 무슨 도를 계집애 다루듯 세심하게 쓰다듬고 있는 거냐. 개방 거지들이 개 잡을 때처럼 온 힘을 담아 두드려 패라고.
 
 잔뜩 혀가 꼬인 채로 말하는 그 소리를 들은 이후로 그나마 조금 발전이 있었지만, 아직도 영 손에 익은 움직임이 아니었다.
 진명이 언제나 이상적으로 생각해 왔던 건 아버지의 움직임이었고, 남궁명한의 검은 윤상이 말한 거칠고 강맹한 움직임과는 양극단에 위치한 검이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필요한 지점으로만 움직이고 상대의 흐름을 가로막는 검.
 자신의 실력이 그런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임시방편처럼 흑검대 대원들의 변칙적인 운용을 덧붙였었지만,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역시 아버지와 같은 움직임.
 그랬기 때문에 파괴력을 추구하는 도법 중에서도 정점에 위치해 있는 천마신위도법天魔身衛刀法은 진명에게 상당히 난해하고 익히기 어려운 무공이었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진명은 도를 움직여 천풍검법의 움직임을 가져가 보았다. 도로 펼치니 약간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연스러운 초식의 흐름이 눈에 띄게 보였다.
 “아저씨가 들어오시면 억지로라도 붙잡고 더 물어봐야겠어. 이대로는 너무 느려.”
 진명이 ‘천마신위도결’이라고 쓰인, 내공과 도법으로 이루어진 이 마공을 수련하기 시작한 이후로 윤상은 집을 떠나 있는 일이 잦았다. 마을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술과 도박을 일삼고, 심지어는 합비나 회남淮南까지 다녀오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마공을 수련하기 시작한 이후로 총관 쪽에서 암암리에 지원해 주는 액수 때문에 그가 그렇게 돈을 펑펑 쓰고 다녀도 살림이 어려워질 일은 없었지만, 진명은 그래도 그가 신경이 쓰였다. 윤상의 건강 문제도 그렇고, 윤상의 마음 상태도 그랬다. 자신 때문에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고, 진명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는데.”
 침울한 표정으로 진명은 도를 다시 다잡고, 천마신위도법의 요결에 따라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십 번 정도 도를 휘두르고 어느 정도 속도가 붙었다는 생각이 들 만한 시점, 진명은 본격적으로 공력을 실어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마치 도가 검정색으로 변한 듯, 어두운 기운이 날의 주변을 감싸며 강한 기세를 주변으로 퍼부었다. 먼지가 마구 휘날리며, 회오리바람이 부는 것처럼 진명의 주변에 기류를 일으켰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도를 휘두르던 중, 진명의 기감에 미세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
 수련을 멈춘 진명이 눈을 감고 기감을 확장시켰다. 누군가가 흑검장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숨김없는 날카로운 기운이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그다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체 누구지? 여기 올 사람이 없을 텐데. 아, 일단······.”
 진명의 몸놀림이 바빠졌다. 재빨리 병기 거치대로 달려간 진명은 도를 제자리에 놓고 평범한 청강검 한 자루를 뽑아 들고 구석의 나무로 달려갔다.
 갈색으로 변한 나뭇잎을 발로 황급히 모아 나무 뒤에 밀어 넣고 몸을 겨우 돌리는 순간, 문을 거칠게 열고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금검대주, 남궁명진이었다.
 검을 뽑아 들고 사방을 둘러보며 날카로운 눈빛을 한 것이, 마치 생사대적이라도 숨어 있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마의 땀을 닦은 진명이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미세하지만 여기에서 마기가 느껴진 것 같다. 혹시 누구 본 사람 없느냐?”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금검대주가 대답했다. 흔적을 지운 곳들을 힐끗 돌아보며 진명이 입을 열었다.
 “뭐 볼 게 있다고 여기 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최근 몇 달간 이곳을 찾은 외인은 술장수를 제외하면 지금 대주님이 유일합니다.”
 “그럼 혹시 이 안에······.”
 금검대주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명이 눈에 들어왔다. 피식 웃으며 금검대주가 검을 거뒀다.
 “······내가 뭔 생각을 했던 건지. 오랫동안 실전을 겪지 않아 날이 무뎌진 건지도 모르겠군.”
 “······.”
 “윤상은?”
 “아저씨는 무슨 일로 찾으시는지······.”
 진명의 말에 금검대주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그런 걸 일일이 네 녀석에게 설명해야 하느냐.”
 “······나간 지 꽤 되셨습니다.”
 “어디로?”
 금검대주의 물음에 진명이 쓰게 웃었다.
 “도박은 어제 하고 오셨으니, 아마 술 드시러 가셨겠죠.”
 “언제쯤 들어오느냐.”
 “한림촌에서 드시면 해가 지고 나서, 합비나 회남 쪽으로 가셨으면 이틀 정도 걸리실지도 모릅니다.”
 진명의 대답에 금검대주가 피식 웃었다.
 “젠장. 헛걸음을 한 셈인가.”
 금검대주가 정원을 가로질러 가옥을 향해 걸어갔다. 마루에 걸터앉은 그는 한쪽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다른 손으로 허리춤에서 술병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시큰둥한 표정의 그를 힐끗힐끗 보며 진명이 옆으로 다가갔다.
 “저······ 물이라도 드릴까요, 대주님.”
 “할 일 없으면 나가서 섬전도나 잡아 와라. 오랜만에 마음먹고 술까지 가져왔는데.”
 퉁명스러운 그의 대답에 진명이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향하려다 고개를 돌렸다.
 “······두 분의 왕래는 아예 끊긴 걸로 압니다만.”
 “왕래가 끊긴 세월만큼 같이 다니기도 했지. 오랜만에 얼굴 한번 보고 싶고, 하고 싶은 얘기도 있고.”
 “인연을 끊으신 줄 알았는데,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었군요.”
 진명의 말에 금검대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명이 몸을 돌려 다시 금검대주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는 그렇게 잔인하게 말씀하셨던 겁니까.”
 물음을 던지고, 입을 꽉 다문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진명을 힐끗 본 금검대주가 술병을 손에 들었다. 뚜껑을 열고 한 모금을 입으로 가져간 그가 입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무인이 싸울 능력을 잃었다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 비참한 일이다. 아직 네 녀석이 어려서 모르나 본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손을 휙 내젓자, 파공성을 내며 날아간 병뚜껑이 진명의 머리를 정확히 강타했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진명이 이마를 감싸며 쭈그려 앉자, 금검대주가 술병을 옆에 내려놓고 진명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에서는 표정 관리하라는 말, 잊었나 보군. 혹시 일 년 내 전설의 무공이라도 수련해서 날 넘어서기라도 한 거냐?”
 “······.”
 “시험해 주지.”
 말과 함께 금검대주는 허리춤에 찬 검을 검집째로 빼 들어 진명을 겨누고 자세를 취했다. 입술을 꼭 깨문 진명도 검 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잠깐의 대치, 금검대주가 피식 웃었다.
 “설마, 지금 나더러 선공을 하라는 거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명이 검을 빼 들고 몸을 날렸다. 몸을 현란하게 좌우로 움직이며 빈틈을 노렸지만, 금검대주는 몸을 살짝살짝 돌려 그에 대응하며 무심한 눈빛으로 진명을 바라보았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눈빛에, 진명의 왼쪽 뺨을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두려움을 떨쳐 내려는 듯 진명이 검을 빠르게 내질렀다. 남궁은진과의 대결에서도 선보였던 일점사의 초식, 하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금검대주는 검집을 든 팔을 한번 짧게 휘둘렀다.
 충돌음과 함께 진명이 뒤로 주르륵 밀려나다 겨우 발에 힘을 주어 멈춰 섰다. 오 보쯤 물러나 겨우 자세를 정돈한 진명의 발은 땅에 제법 깊게 들어가 있었다. 금검대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겨우, 이것뿐이냐?”
 발악하듯 큰 소리를 지른 후, 다시 진명이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온 힘을 다하는 듯 팔목의 힘줄이 불거져 나왔지만 그 기세에 비해 공격은 그리 날카롭지 않았다.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검을 한숨을 계속 내쉬며 막아 내던 금검대주가 발을 쭉 내뻗었다. 복부를 강타당한 진명이 붕 뒤로 날아가 바닥에 굴렀다. 신음 소리를 내는 그를 보며 금검대주가 검집을 다시 허리에 찼다.
 “때릴 맛도 안 나는군. 일 년 전에 비해 오히려 퇴보했어. 이런 녀석을 살리기 위해 그 미친놈은 왜 모든 걸 던진 건지······.”
 “혹시 그 미친놈, 절 말씀하시는 겁니까, 금검대주님.”
 고개를 돌리자 대문에 윤상이 기대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이 녀석 말로는 일찍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의외로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요. 그런데 어쩐 일로 금검대주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에 납시셨습니까?”
 금검대주의 말에 짤막한 대답을 한 윤상이, 이내 약간 비아냥거리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 잠깐 쓰게 웃은 금검대주가 다시 표정을 굳히고 대답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서 말이지.”
 “대주님의 말씀이라면야. 그런데 저 같은 병신이 대답해 드릴 것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윤상의 말에 금검대주와 그 뒤에 널브러져 있던 진명이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술도 가져왔으니 잠깐 앉지.”
 “술은 이미 마시고 왔습······.”
 계속 날이 선 대답을 하던 윤상의 시선이 멈췄다. 금검대주의 뒤에서 진명이 계속 문밖으로 나가라는 손짓을 보내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진명의 손에 평소와는 달리 검이 들려 있는 것을 본 윤상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술을 사 주실 거라면 밖에서 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좋은 데를 발견했는데 마침 돈이 다 떨어져서 그냥 온 참이었습니다.”
 “한림촌 바닥에 있는 술집이라고 해 봤자 달랑 두어 군데. 아직도 네가 ‘새로’ 발견할 술집이 있다는 게 미심쩍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에게 다가온 윤상이 소매를 잡아끌었다.
 “장소가 아니라 여자를 얘기하는 거죠. 자, 자! 빨리빨리.”
 못 이긴 척 결국 금검대주도 그를 따라나섰다.
 대문가에 도착한 금검대주가 고개를 돌려 진명을 쳐다보았다.
 “소가주는 본격적인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혹시나······ 영원히 뒤처지기 싫다면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할 거다.”
 그 말을 던지고 금검대주는 등을 돌려 문을 나섰다.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진명에게 살짝 눈을 찡긋거리며, 윤상이 그를 따라 문을 나섰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검을 땅에 짚고 일어난 진명이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눈을 감고 문 바깥의 기감을 살짝 감지하며 진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최대한 조심하면서 수련을 했는데 그 미약한 기운을 감지할 줄이야. 괜히 현재 남궁세가의 최고수가 아닌 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진명은 손에 든 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휙 던져 버렸다. 거치대 밑의 바닥에 뒹구는 검을 보며 진명은 다시 중얼거렸다.
 “아무리 내공을 억눌렀다지만 그도 제대로 내공을 운용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 꽤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초일류들과의 차이는 큰 건가······ 아직 부족해. 부족해······.”
 거치대로 다가간 진명이 다시 도를 뽑아 들었다.
 
  * * *
 
 금검대주가 길 위에 멈춰 섰다. 앞서 가던 윤상이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두고 온 게 있다. 먼저 가고 있어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으로 향하는 윤상을 확인한 그는 뒤로 돌아 오던 길을 되짚어갔다.
 한 오십 보쯤 걸었을까, 발 앞의 커다란 돌멩이 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금검대주가 그것을 집어 들어 옆의 나무 위로 뿌렸다.
 “크아아악!”
 나무 위에서 복면을 한 야행의 차림의 한 사내가 떨어져 내렸다.
 고통에 몸을 버둥거리던 사내가 겨우 몸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목에는 어느새 금검대주의 검이 와 닿아 있었다.
 “뭐 하는 녀석이냐. 왜 저곳을 감시하고 있는 거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 끝에 힘이 가해졌다.
 목구멍을 향해 조금씩 파고드는 검에 복면 위의 눈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사내는 복면으로 가려진 입을 통해 필사적으로 말을 쏟아 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대주님, 아닙니다! 저, 저 남궁세가 사람입니다!”
 검 끝이 멈췄다. 금검대주는 검 끝을 움직여 사내의 얼굴을 가린 복면을 걷어 냈다. 공포에 질린 한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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