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해질녘의 저주
“갑자기 왜 불렀어?”
연희의 새침한 목소리가 달콤하다. 견우는 그 앞에서 한껏 폼을 잡으며 담배연기를 흘렸다.
“연희야, 슬슬 우리 사귀자.”
견우가 담배꽁초를 지려 밟으며 말했다. 그는 눈동자를 살짝 흘기며 연희를 바라봤다.
달과 별이 아름답게 빛나는 밤이었다. 여름밤 산벌레들이 찌르르 울어댄다. 문학 소설에나 나올 법한 낭만이 공기를 타고 흘렀다. 사랑에 빠지기 좋은 시간이다.
“······그 말을 하려고 나오라고 했니?”
한참을 머뭇거리던 연희가 입을 뗐다. 견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치가 한창인 민박집을 바라봤다.
“아까 들어보니까 성진 선배는 자기가 너랑 썸 타는 줄 알고 있더라고. 그런데 넌 나랑 지금 만나는 사이잖아. 이쯤해서 학과 사람들한테도 못박아두자. 괜한 오해 때문에 분란 일으키지 말고.”
견우는 이번 학술답사에서 밀고 당기는 시기를 끝내자고 결심했다. 그럴 때가 되었다.
“저기 견우야, 뭔가 네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응?”
“나는 지금까지 너한테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어.”
연희가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견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잠깐만. 저번에 너 나랑 빕스 가서 밥 먹고 영화도 같이 봤잖아.”
“그건 네가 사준다고 해서 간 거지.”
“너 야밤에 내가 메시지 보내면 답변도 했잖아.”
연희가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그거야 넌 내 동기니까 무시 할 순 없잖아······.”
견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머릿속에서 지진이 일어난 듯했다.
“야! 그럼 웃는 이모티콘은 왜 맨날 쓴 건데? 사람 헷갈리게!”
견우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다.
“목소리 높이지 마. 다른 사람들 듣겠다.”
연희가 당황하며 숙소를 바라봤다. 다행히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견우와 사귄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다. 아무래도 과내에서 견우의 평판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뭐가? 네가 날 갖고 논 거? 시발, 그렇게 나한테 살갑게 굴면서 꼬리 치더니······!”
견우가 잔뜩 흥분했다. 연희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견우의 담배와 라이터를 뺏었다.
“야,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오견우.”
연희의 말투가 서늘했다. 그녀는 능숙한 솜씨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동자는 경멸을 품고 있었다.
“너 담배 폈어?”
“지금 그게 중요하니? 그래, 내가 너랑 밥도 같이 먹고 영화도 보고, 연락 오면 살갑게 대답했지. 근데 우리 사이는 그게 전부야. 착각 좀 하지 마. 하, 젠장. 남자 새끼들은 좀만 잘해주면 다 자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한다니까. 후우, 대학 들어오고 나서 담배 끊었었는데······.”
연희가 혼잣말로 욕을 내뱉으며 짜증을 냈다. 그녀는 담배연기를 거칠게 빨아들이다가 시원하게 내뱉었다. 폐까지 스며들었다가 나온 연기가 알싸했다. 겉멋으로 담배를 피우는 견우와 다른 진짜배기였다.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나랑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다고?”
견우의 목소리는 살짝 주눅이 들었다.
“누가 국문과 아니랄까봐 혼자 소설 쓰고 자빠졌네. 그만 좀 해.”
연희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반응은 확실했다.
털썩.
견우가 그대로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연희도 그런 견우를 보더니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가 너무 심했나?’
연희는 담배꽁초를 흙바닥에 묻으며 견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말이 좀 험해졌는데 악감정은 없어. 방금 일은 없었던 걸로 치자. 앞으로도 밥 정돈 같이 먹어줄게.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천천히 들어와.”
그 말을 들은 견우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내가 병신이라서 착각한 거네. 미안하다, 연희야. 다음부터 밥 먹자는 소리도 안 할 게.”
“그렇게 자기를 비하할 것까진 없어. 너도 꽤 입담이 재밌는 편이야. 안 그랬으면 같이 놀지도 않았겠지. 그러니까 신입생이나 적당히 꼬셔봐. 솔직히 나 내년이면 졸업하고 취직하는데 이제 와서 남자동기랑 사귀기도 애매하잖아.”
연희도 짜증이 누그러졌는지 말투가 조곤조곤했다. 그녀도 딱히 견우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잠깐만.”
견우가 일어서서 연희의 손목을 붙잡았다. 연희는 흠칫 놀라며 견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쩐지 견우의 얼굴이 오싹했다. 온갖 뉴스의 헤드라인이 머릿속을 스치고 갔다.
“야, 너, 이상한 생각하지 마. 지금 나 소리 지르면 사람들 다 모여들 거야.”
연희가 견우의 손을 재빨리 뿌리쳤다. 견우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아니라 내가 착각한 거니까 저번에 내가 사준 밥값 돌려달라고. 친구끼린 더치페이잖아.”
연희가 어이가 없어서 견우를 한참 쳐다보다가 지갑을 꺼냈다.
“견우야, 이건 좀 많이 찌질하다······.”
* * *
담배꽁초가 견우의 발밑에 우수수 떨어져있다. 견우는 연희를 먼저 보내고도 한참이나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젠장.”
견우는 구겨진 지폐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 병신 같은 새끼야, 왜 그런 거야?”
짜증만 솟구쳤다.
“쓰으으읍!”
견우는 애꿎은 돌을 걷어찼다. 그는 그냥 가려다가 아까 내던진 지폐를 응시했다.
“돈이 무슨 죄가 있으랴 다 내 업보지.”
구깃구깃한 지폐를 펴서 지갑에 집어넣었다.
‘연희, 그 년은 사람 착각하게 왜 잘해주고 지랄이야.’
견우는 복학하고 나서 우연히 동기인 이연희와 수업을 같이 듣게 되었다. 군대 가기 전에도 나름 마음이 있었던 터라, 견우에겐 그야말로 장밋빛 한 달이었다.
“하, 나 혼자서 결혼하고 애까지 몇 낳을지 망상한 거냐?”
상상만 폭주했었다. 힘이 빠진 견우가 느슨하게 눈을 들어 숙소를 바라봤다. 드문드문 들리는 소리만 들어도 학술답사를 왔는지 파티에 왔는지 모를 정도로 흥겨운 분위기였다.
“이제 수업 누구랑 듣지······.”
견우는 우울하게 야외화장실에 들어가다가 흠칫했다. 남녀공용인지라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여성의 굴곡이 보였다.
삐걱.
화장실의 문이 열린다. 해골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여자가 막 화장실에서 나왔다.
“시원하게 차이고 왔니? 찌질이?”
다짜고짜 무례한 말이었다. 견우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곤 인상 찌푸렸다.
‘이게 펑크룩인가 뭔가 하는 거겠지.’
찢어진 청바지, 과할 정도로 화려한 귀의 피어싱. 견우의 한 학번 위인 강세인이었다. 반항적인 인상이 강렬해서 학과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말이 험하시네요. 세인 선배. 근데 제가 차인 건 누구한테 들은 거죠? 그 사이에 연희 그 계집애가 여기저기······.”
“아니, 화장실에서 똥 싸고 있는데 너희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싸운 지 30분은 넘은 것 같은데요?”
“내가 악성변비거든. 지금 들어가면 냄새가 좀 지독할 거야.”
“이쪽 업계에선······ 후, 아닙니다.”
견우는 농을 던지려다가 말았다. 기분도 우울한데다가 농을 막 던질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잘은 모르지만 힘내라, 찌질아. 세상의 반은 여자잖니.”
세인은 견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지나갔다. 견우는 응원을 받고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제 어깨에 물 닦지 마세요.”
“어이구, 눈치는 빠르네.”
견우는 세인이 사라지는 걸 보고서야 화장실로 들어갔다.
킁, 킁.
견우가 코를 벌렁거렸다. 냄새는 지독했다.
* * *
견우는 국어국문학과다. 딱히 학문이 뜻이 있어서 선택한 건 아니었다. 적당히 성적에 맞춰서 괜찮은 대학간판 따려다보니 선택지가 몇 없었다.
‘제길, 연희만 아니었다면 핑계대고 학술답사에 빠졌을 텐데······.’
견우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주변에는 다른 학생들도 많았다.
“젊은 놈들이 뭘 그리 힘이 없어? 젊음이 울겠다, 이 녀석들아.”
학술답사를 지휘하는 교수가 학생들을 독려했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학생들이 초췌한 얼굴로 산을 올랐다.
교수의 옆에선 나이가 중년에 접어든 민박집 주인이 뒷짐을 지고 걷고 있었다. 민박집 주인은 가이드 역할까지 자진해서 도맡았다.
“허허, 교수님. 좀만 더 올라가면 됩니다. 원래 문중의 선산이라서 출입금지인데 특별히 이번에만 안내해드리는 겁니다. 학생들이 배우고자 하는데 막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요.”
“저도 말로만 들었지만 처음 가보는 거라 무척 기대가 됩니다. 꽤 큰 동굴이라 들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선조님들이 왜놈들을 피해 이 선산으로 대피하셨죠. 운이 좋게 숨어살 만한 동굴이 있어서 거기서 수 년을 버텼다고 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터가 나왔다. 가이드를 맡은 민박집 주인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학생들 앞으로 나왔다.
교수도 땀을 닦으며 그늘 밑에 앉았다.
“이놈들아,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니까 잘 들어. 나중에 시험에도 나올 거다.”
성실한 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수첩을 꺼냈다. 견우는 그다지 열의가 없는지라 맨 뒤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젠장, 먹통이네.’
안테나가 하나도 뜨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던 견우는 앞줄에 앉은 연희를 발견했다.
‘저, 저 년이······.’
견우는 목구멍까지 나오던 욕설을 삼켰다.
“성진 선배도 참······.”
연희와 성진이 사이좋게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시발년. 진짜로 성진 선배랑 썸 타고 있었잖아. 나만 중간에서 병신 됐네.’
견우는 인상을 잔뜩 구겼다. 안내하는 민박집 주인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성진과 이야기하던 연희는 힐끗 눈을 흘겨서 견우를 바라봤다. 견우와 연희는 눈이 마주쳤다.
‘미안.’
연희가 입모양으로 견우에게 그리 말했다.
“하아.”
견우는 화를 내는 것도 웃겨서 한숨만 쉬었다.
“여어, 맨 뒤에서 뭐하냐? 찌질이.”
세인이 견우의 옆에 앉았다.
“학술답사 온 걸 후회하고 있는 중이죠. 선배는요? 학술답사 왜 왔어요? 이런 거 오는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
견우가 아는 강세인은 자발적 아웃사이더에 가까운 존재였다.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이었다. 그녀의 묘한 카리스마에 이끌려 친해지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녀는 과내의 술자리나 모임에는 모습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나도 민속학 수업 듣잖니. 심 교수님 엄청 깐깐해서 이런 거 빠지면 점수 잘 안 주거든.”
“선배가 그런 것도 신경 쓰는지는 몰랐네요.”
“너처럼 팔자가 좋진 않아서 장학금을 놓치면 끝장이거든.”
“······근데 저랑 나란히 이렇게 앉아있으면 괜히 오해받을 걸요?”
“이야, 남녀가 같이 밥만 먹어도 사귀는 사이가 됐다고 착각하는 모태 솔로나 할 법한 생각이네. 어제는 마지막이 압권이었지. 밥값을 뒤늦게 더치페이하는 부분이 인상 깊었어.”
견우는 차마 세인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고 한숨만 푹푹 쉬었다.
창피하긴 해도 세인과 이야기하는 동안 시간은 제법 잘 지나갔다. 멍하니 앉아있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학생 여러분, 여기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동굴이 하나 보일 겁니다. 거긴 임진왜란 때 산으로 대피한 선조들이 숨어 살던 곳이었는데······.”
견우는 한쪽 귀로 이야기를 얼추 주워 담았다.
‘왜구들이 여기서 집단학살을 저질렀고, 지금도 그 원혼이 어쩌고저쩌고······ 이 정도만 알아도 되겠지.’
민담과 전설의 영역인 이야기였다. 어느 정도 사실은 있겠지만 대부분은 허구일 터다.
이야기를 마친 민박집 주인은 다시 출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그리고 올라가면 주변을 돌아다녀도 되는데 동굴 안으로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됩니다.”
“왜 들어가면 안 되는 거죠?”
호기심 많은 학생이 반문했다.
“돌아가신 제 조부께서 말씀하시길 동굴 안에 들어간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며, 세상에는 큰 재앙이 닥친다고 하셨습니다. ···뭐, 제가 생각하기에도 동굴 안에 들어간다고 별탈이 있겠나 싶지만 선조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거라고 보면 됩니다.”
민박집 주인은 두리뭉실하게 대답했다. 그저 대대로 전해져온 말일 뿐이었다. 그는 손뼉을 크게 치며 학생들의 주의를 환기했다.
“자자, 그럼 올라갑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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