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영웅의 발자취 - 두 개의 검 [E]

영웅의 발자취 - 두 개의 검 - 1화

2018.07.24 조회 929 추천 10


 영웅의 발자취 - 두 개의 검 - 1화
 
 
 
 
 
 
 
 
 
 
 
 
 
 
 영웅의 발자취 - 두 개의 검 1권
 序
 
 
 마법 시대의 전설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이 큰 것을 손꼽을 때, 희대의 여기사 ‘엘리제 리 시올리나’ 경을 빼놓을 수 없다. 마법의 시대에 검으로 이름을 떨치고, 마룡(魔龍) 케일키리아스의 토벌대를 실질적으로 이끈 영웅이자 또한 당대 제일의 기사 연합 ‘하늘의 방패’의 맹주였던 ‘다섯 시련의 기사’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엔티니올을 비롯한 중부 지방에 불세출의 무신(武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특히 경의 모국인 임펠런에서는 왕실의 굵직한 행사에 경을 기념하기 위한 마창 대회가 빠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국민이 검은 체모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임펠런인 만큼, 민족의 범세계적인 자랑이라는 점에서 경에게 바쳐지는 민간의 경외는 다른 어느 영웅도 따를 수 없는 바이다.
 시올리나 경이 처음으로 참가해 우승한 마창 대회의 개최지인 유클리드 제국이나 경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 알려진 노루스 공국 학자들의 이견이 없지 않으나, 경이 아름다운 흑발과 흑안의 소유자였음을 부인할 사료(史料)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올리나 경의 저서나 그 시대의 문헌에서 경이 임펠런을 모국으로 대했다거나, 특별한 애착을 표현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임펠런의 ‘다섯 시련의 기사 학회’ 학자들이 최근 발굴한 경의 생가에서 경의 일지와 노트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와 같은 구절이 있다.
 
 「······루시의 의견은 타당하다. 불복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의구한다. 우리는 기사라는 존재이다. 기사는 죽이는 자가 아니라 싸우는 자를 말한다. 싸운다는 것은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는 뜻이다. 기사인 나는, 그러나 이 악마를 처단하기 위해 내 어머니의 민족을 아귀도에 끌어들여야 한다는 말이냐.
 ······존 롱스턴 신부가 내게 충고했다. ‘예순일곱 해를 살면서 보니, 세상에 옳기만 한 길 따위 없더구려.’ 그 말에 오열한다.」
 
 토벌대가 마물 군단에 몰려 임펠런의 요충지인 로피닐 산성에 농성하던 시기인 왕국력 522년 까치의 달에 경의 자필로 쓰인 것으로 보이는 이 한 문단은, 그동안 다섯 시련의 기사를 강인하고 차가운 전신(戰神)으로만 보아 온 학계에 작지 않은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 나오시소스, 「마법 시대의 전설」 中
 
 ***
 
 
 야영은 순조로웠다. 그거야 물론 ‘야영 부대’란 말까지 들으며 교외 작전만 수행하고 다닌 우리 부대의 숙련된 지식 때문이지만, 생각보다 꼬장꼬장하지 않고 협조적인 학자들 덕도 좀 있었다.
 사실 처음엔 무척 염려되었던 것이다. 글쎄, 학자라고 하면 보통 그렇지 않은가. 몸은 부실하고 허약한 주제에, 편한 것에만 익숙해져 원하는 건 많고, 자존심도 세어서 뭐든 그들 뜻대로 돼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전형적인 모습 말이다. 아집과 독선으로 가득한 추한 정신세계-
 “루포리, 좀 속상하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군요. 제 내면에도 당신이 말한 ‘아집’과 ‘독선’이 없다고는 확언할 수가 없어요, 부끄럽지만요.”
 ······분명한 것은, 내가 무심코 입에 담은 위와 같은 폭언에 웃으며 화답해 주는 이런 아가씨 학자는 내가 26년을 살며 겪어보지 못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거, 죄송합니다, 레이디 필모어. 이딴 식으로 말씀드리면 기분 나쁘실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 거짓말은 못하거든요. 제가 갖고 있던 ‘학자’의 인상이 그렇단 말이었으니 신경 쓰지 마십쇼. 제가 갖게 된 레이디의 인상은 그것과는 끕이 다르거든요.”
 “어······ 루포리? ‘끕’이 다르단 건 무슨 뜻이죠?”
 아차.
 “어, 격이 다르다고요. 레이디는 저 같은 속물에게도 친절하시니까요.”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오오, 결단코 이건 신성한 아름다움이야. 신성이란 건 잘 모르지만, 내 생애 본 가장 아름다운 미소다.
 “그렇게 좋게 봐 주니 고마울 따름이에요. 그런데 루포리, ‘속물’은 당신에게 그리 어울리지 않는 말 같은데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용병들에 대해선 약간 선입견을 갖고 있었죠.”
 경청한다. 실은 듣는 것보다 말할 때가 좋다만, 그녀는 설명을 할 땐 차분히 발치나 모닥불을 보지만 내 얘길 들을 땐 눈동자를 들어 내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 눈 맞춤이 몹시도 기다려지는 거다, 난.
 그러나 그녀의 청량한 목소리를 듣는 것도 무척 행복한 일이지.
 “루포리처럼 표현하자면, 에흠, 무례, 방탕, 그리고 예의 없는 고성과 폭언, 방자함. 그런 것들이 제가 갖고 있던 ‘용병’의 인상이었습니다.”
 오오, 불경스럽지만, 귀엽다!
 “80점 드릴게요. 꽤 비슷했어요.”
 방긋 웃는다, 오오!
 “에흠, 고마워요. 그랬는데요, 루포리는 제가 갖고 있던 선입견을 깨는 용병이에요. 가끔 말하는 비속어가 아니면 어느 귀족가의 자제분이 아닌가 싶을 만큼, 정중하고 친절한 사람인 것 같아요.”
 난 속으로만 파안대소하며 애써 표정을 감췄다. 아름답고 친절한 아가씨에게 칭찬받는 일이야말로 남아의 일생에서 가장 보람찬 일이 아닐까?
 “감사합니다, 레이디 필모어. 당신은 제 어머니 이후로 제 장점을 제대로 파악한 첫 여성이십니다.”
 “어머, 그런 줄은 몰랐는데, 영광이네요.”
 재치도 있는 아가씨다.
 모두 잠든 새벽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아무튼 우리 일행은 용병이고 학자고 노독으로 나자빠져 코 고는 소리만 우렁찼다.
 조출(早出)이 습관이라서 야영 중임에도 일찍 일어나고 만 이 아름답고 순수한 아우렐리에 필모어 자작 영애와, 부대에서 짬밥이 좀 되는 편이라 편안한 말번 경계를 서다가 놀라운 행운에 직면한 나 루포리 일스터 말고는 아무도 깨어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새벽의 옅은 안개와, 촉촉한 공기. 신분은 다르지만 내게 친절한 아가씨. 그리고 새 울음소리만 시끄러운 고요한 숲 속-
 어라?
 새들이 퍼더덕 날아오르고 있었다.
 놀라운 행운을 안타깝게도 끝내야 했다. 불청객이 있었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사랑스런 아가씨에게 회담의 종언을 고했다.
 “레이디 필모어, 부디 당황하지 마세요. 까만 장난꾸러기들이 조금 왔습니다.”
 “까만······ 장난꾸러기가 뭔가요?”
 그녀는 내 태도를 본받아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했다. 그게 또 못 견디게 귀여웠지만, 내색할 수는 없다.
 “죄송합니다, 마물들 말이에요.”
 그녀가 놀라 움찔했다. 아차.
 “아무것도 아닌 적들이니까 당황하지 마시고 천천히 천막으로 돌아가세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런 것들을 쫓아내려고 저희가 함께 있는 거니까요.”
 최대한 안정감 있는 목소리로, 부드럽게 그녀의 놀란 어깨를 다잡는다. 그녀는 그렇게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떨림이 조금씩 진정돼 갔다. 차츰 안정되어서는, 걱정하는 내 얼굴에 밝게 끄덕여 보이곤 조심조심 천막으로 걸어갔다.
 자, 그럼 나도 움직여 볼까. 사뿐 사뿐.
 “못난이들 놀러왔다. 때리러 가자.”
 일단 5기 녀석들 천막을 살짝 흔들고 소곤소곤 말한다. 역시나 아직 군기가 안 빠진 기수답게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무기를 챙긴다. 음, 대견하다.
 레이디 필모어는 이제 여성 학자들 천막에 안착했다. 좋아, 이제 조심하지 않아도 되겠군. 3, 4기 천막을 흔든다. 그리고 고개를 집어넣고 한 마디.
 “밥 안 먹냐? 빨리 나와.”
 분주하게 동기, 후임들이 일어난다. 그러다가 밖이 아직도 컴컴함을 깨닫고는 상황을 파악한다. 멀리 수풀 사이에서도 움직임에 변화가 생긴 게 느껴진다. 그 움직임을 잠시 관찰한다.
 음, 좋아. 숫자를 보니, 1, 2기 선배님들까지 깨울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내 아래 인원만 해도 우리 정예 ‘성난 소’ 용병대 7인이다. 겨우 로펠메니스나 클라우디스 따위의 하급 마물들이 범접할 수 없는 방호벽인 것이다.
 5기 후임들이 사뿐 사뿐 나오고, 밥 좀 찬 3, 4기 녀석들이 흐느적거리며 기어 나온다. 좋아, 인원 확인 완료.
 “3기 6번 루포리, 임시로 지휘하겠다. 적은 서북서로 예순 걸음 떨어진 곳의 최하급 마물 십여 마리. 준비된 대원으로부터 방호대열 형성한다. 실시.”
 5기는 실전 경험이 세 번 미만인 신참들이지만 그 덕에 아직 빠릿빠릿하다. 10회 이상의 임무로 경험을 쌓은 3, 4기 친구들은 느긋하지만 그래도 관록이란 게 있다. 다들 충분히 좋은 전력들이다.
 더 올라가보면, 2기 선배님들은 관록에 지휘 경험을 통한 지혜가 더해져 막강하고, 1기 선배님들은 수식어가 필요 없다. 그냥 법이다. 진리다. 전설이다.
 음, 그런 분들이니 이미 인기척만으로 잠이 깨셨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번거롭게 해 드려선 안 된다.
 “가자, 성난 소들아.”
 전투 개시의 구호가 내 입으로 완성된다. 우리 성난 소들은, 그러나 성나지 않은 것처럼 조용히 마물들에게 다가간다. 마물들도 이미 수풀에서 튀어나와 우릴 경계하며 둘러싸듯 다가서고 있다. 로펠메니스 13, 아니, 14마리다. 쉬운 상대다.
 서서히 다가갔지만 금세 마물들과 숨소리를 맞대게 되었다. 싸움이 시작되었다.
 “으랏차!”
 싸움이 시작되면 조용히 해결하고 자시고는 없다. 아무리 쉬운 상대라고 해도 그러하다. 목숨을 걸고, 칼날 앞에 몸을 들이밀며 싸우는 것이 전투다.
 네 안의 모든 힘을 격발해 때려 부숴라. 그건 대장님의 지론이자 우리의 지론이다. 이동, 야영할 때는 몰라도 전투에 임할 때만큼은 쾅쾅쾅 우당탕탕 싸우는 것이 바로 우리 성난 소 용병대.
 곤히 자던 학자들이 깨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오로지 내 눈 앞의 전투에 전념한다.
 촤아악!
 단번에 세 걸음을 내달리며 찔러 넣은 내 잡종(Bastard sword)이 마물의 선두 한 놈을 꿰뚫었다. 그걸 바로 비틀어 뽑아낸다. 구멍에서 새까만 피가 솟구친다. 미안, 혼자 앞장서 나온 게 네 죄다.
 응? 잠깐, 나도 죄를 짓고 있는 셈이구나, 혼자 세 걸음이나 뛰쳐나왔으니. 히죽 웃으며 자세를 낮춰 로펠메니스의 채찍처럼 긴 팔을 피한다. 다른 놈의 발차기를 앉은 채 잡종으로 막으며 그 힘으로 몸을 뒤로 날린다.
 다행히 동료와 부딪히는 꼴사나운 불상사는 없었다. 동료들의 기합 소리와 로펠메니스의 전투 함성의 도가니를 쳐다보며 웃듯이 외친다. 지금 나는 성난 소들의 왕이다!
 “다 때려 부숴라, 소들아!”
 그렇지만 이거 뭐 너무 일방적이다. 처음에 내가 나선 게 자극제였는지, 4기는 그렇다 치고 하나뿐인 동기 놈까지 흥분해서 활약하고 있다. 첫 격돌에 무너진 로펠메니스가 3마리는 되는 듯하다. 조금 불쌍하단 생각도 든다.
 하지만 성난 소들의 사전에 대충이란 없다. 아름다운 아가씨와의 좋은 시간을 방해한 놈들아, 오늘 한 번 무덤으로 달려 보자! 잡종을 높이 치켜세운다.
 “으라차차!”
 
 싸움이 끝나고, 5기 아이들은 쉴 틈도 없이 달려 냇가에서 몸을 씻고 돌아왔다. 아침식사를 준비할 녀석들이니 위생을 한 번 점검하고 통과시켰다. 취사도구를 가지러 짐말로 가던 5기 중 한 명이 내게 슬쩍 말을 건다. 통통한 볼 살을 가진 이 녀석은, 이름이 뭐였더라?
 “일스터 선배님, 5기 일드입니다.”
 5기 15번인가 16번인가, 일드 에손이었다.
 “헤헤, 아까 멋졌습니다. 설마 했는데 싸울 땐 진짜 성격이 달라지시네요.”
 “어······ 누가 그러든?”
 “여왕님이요, 헤헤.”
 음, 캐롤린이 술 한 잔 걸치고 애들 앞에서 내 흉 좀 봤나보군.
 캐롤린이라면 일찍이 대장님의 따님만 아니었음 내 혼쭐을 내 주리라 다짐한 바 있는 말썽쟁이 아가씨다. 용병들 사이에서 자라 그런지 왈가닥도 그런 왈가닥이 없어 감당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애들 사이에 용병대의 마스코트니, 여왕님이니 하고 받들어지는 건 내가 이해하기 힘든 이유가 있는 듯하다. 여자 볼 일 없는 용병들이라 그런 건가?
 5기 애들의 작업을 독려, 또는 감시하며 둘러보고 있는데 학자 한 명이 다가왔다. 수려하다는 말은 그를 위한 것인 듯 눈길이 가는 화사한 외모에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는 듯 탄탄한 몸을 가진 친구다. 난 그냥 학자들 중 젊은 축의 대표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좋은 아침이군, 루포리. 난 컨프턴 백작가의 데니스라네.”
 음, 데니스로군.
 “반갑습니다, 닥터 컨프턴. 좋은 꿈 꾸셨습니까?”
 데니스는 한 번 끄덕거린 후, 무표정하던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왔네. 자네들의 무훈에 감명 받은 친구들이 몇 있거든. 그 커다란 마물들을 상대로 아주 용맹하게 싸우더군.”
 하급 마물들일 뿐이지만 학자들은 그 덩치로 미루어 강한 마물들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나저나 치하라면, 상품은 있는 걸까? 염두를 굴려 보며 나도 씨익 웃었다.
 “영광입니다, 닥터 컨프턴. 저희가 잘하는 단 하나의 재주지만 학자 여러분께서 보시기에도 좋았다니 기쁩니다.”
 “음, 확실히 그랬어. 정말 멋졌네. 이에 우리 친구들이 뭘 좀 선사하려고 하는데······.”
 그러면서 그는 1, 2기 선배님들의 막사를 보는 것이다. 나도 뭔가 팍 떠오르는 게 있어 함께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좋아, 보고 있는 사람은 없군!
 “자아, 이거 좀 받게. 알지 모르겠지만 ‘붉은 숨결’이라고 꽤 비싼 술이야. 우릴 지키느라 고생하는데 괜찮다면 맛이라도 좀 보게나.”
 “감사합니다, 닥터 컨프턴. 저희 쪽 애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실 겁니다.”
 실실 웃는 나의 말에 그는 멋쩍은 듯 시선을 돌렸다.
 “그건 민망하구만. 우리 청년 학자들이 함께 선사하는 거라네. 부디 들키지 않고 즐기길 바라네.”
 내 감사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듯 그는 헛기침을 좀 하며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그 쪽을 한 번 보자, 다른 청년 학자들이 날 보며 손을 흔들어 준다.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곤 품속의 보물을 조심스레 내 배낭에 숨겼다.
 오늘 밤에 경계 서는 애들한테 한 잔씩 마시게끔 해야겠다. 실전 경계라곤 해도 한 잔 술쯤이야 괜찮다. 멍청히 보내는 두 식경(食頃, 1식경은 30분)은 꽤나 지루하니까, 혼자 먹는 술이지만 다들 좋아할 것이다. 더구나 비싼 놈이라고 하니······.
 흐음. 그냥 내가 먹을까?
 아니, 아니다. 독차지하고 싶은 욕심만큼이나, 애들과 나누고 싶은 자비로움이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친다. 핫 핫, 아유, 착한 루포리.
 
 식사 준비가 끝나갈 때 즈음, 여성 학자 천막에서 젊은 여학자들이 걸어 나왔다. 이미 거울을 보며 몸가짐을 갖춘 듯 어제와 다르지 않은 모습들이다.
 음, 그녀들을 보다가 깜짝 놀랐다. 가만 보니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놀랍게도 새벽녘보다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해님의 조명 효과가 아니라 분명 변했다.
 그렇다면 내가 새벽까지 가까이서 지켜본 그 뽀얀 피부와 붉은 입술, 발그레한 볼이 화장의 혜택을 입지 않은 수수한 모습이었단 말인가? 문화적 충격에 조금 굳었다.
 그런 날 보며 그녀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방긋 웃으며.
 한 번 꾸벅 한 후 선배님들의 천막으로 걸어간다. 마음 같아선 그녀에게 다가가서 많이 놀라진 않았는지 다정하게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이미 그녀의 주변엔 다른 학자들이 어미를 따르는 아기 오리들처럼 북적북적 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도 느꼈지만 역시 그녀는 저 그룹의 중심이다. 데니스는 대표고, 그녀는 중심. 조금 차이가 있다.
 그런 터에 그녀와 내가 친한 모습을 보이는 거나, 그녀의 나에 대한 말투는 좀 문제가 될 수 있다. 상냥한 그녀는 오늘 새벽에 평민인 내게 잠깐의 고민도 없이 존대를 해 왔었다.
 나야 마냥 좋았지만, 혹시라도 다른 학자들이 그런 모습을 본다면 그녀의 체면에 결코 좋지 않으리라.
 선배님들의 천막 앞에서 크지 않은 목소리로 안부를 여쭸다.
 “3기 6번 루포리 일스터입니다. 선배님들, 방금 식사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실은 신분상의 법도로 학자들의 것은 이미 완성해 배달해 주고 있었지만, 순서야 어찌됐건 내겐 하늘같은 선배님들이시다.
 “수고했어, 수고했어.”
 제일 먼저 천막을 나오신 마린 형님이 내 어깨를 토닥거린다. 2기 선배님들 중 성격 좋기로 손꼽히는 분이시다.
 “좋은 아침입니다, 올리에 선배님.”
 “응, 고생 많았다. 로펠메니스 열네 마리였냐?”
 오오, 마린 형님!?
 “정확하십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상기된 내 얼굴에 마주 웃어주며 마린 형님은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는 취사장으로 가면서 설명했다.
 “꽤 예전 일인데- 네가 들어온 직후였든가, 전이었든가, 나랑 동료 몇 명이 포로로 잡힌 일이 있었어. 구출대가 볼 수 있도록 흔적을 남겼기에 큰 걱정은 안 하고 있었는데, 좀 별난 일이 벌어졌지. 구출이 예정된 밤에 두 군데에서 침입이 시작된 거야. 양동작전이 불가능한 협곡이었는데 말이지. 별난 우연이지만, 동시에 도착한 두 무리 중 한 쪽은 구출대가 아닌 마물들이었던 거야. 무기도 없고 많이 지친 우리 포로들은 간신히 감시병을 물리치고 나왔지만 어느 쪽에 구출대가 있는지 알 수 없었어. 내게 결정권이 주어졌지. 이쪽이냐, 저쪽이냐.”
 “오오, 그때 지금 보여주신 능력으로 구출대 방향을 잡으신 거군요?”
 “으하하, 아냐, 아냐. 그때 난 잘못 선택해서, 동료들을 데리고 마물이 침입한 곳으로 향했지. 그쪽 놈들이 마물들을 해치우고서는 숨을 몰아쉬고 있다가 우리를 보고는 광분해서 덤비더군. 다행히 구출대가 빠르게 도달해 줘서 죽은 놈은 없었지만 진짜 아찔한 순간이었어. 그때 결심했지, 적어도 우리 동료들 기합 소리, 외침 소리만큼은 확실히 외워 두자고.”
 오오, 감동적인 이야기이다.
 “애들의 외침 소리로 적의 전력까지 예상하시다니, 경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으하하, ‘경탄’이야, 이 돌팅아.”
 아차.
 마린 형님한테 끌려서 배식을 받고 한 곳에 앉은 잠시 후, 난 곧 꿈같은 실에 직면했다.
 막강하신 다른 2기 선배님들과 함께, 내겐 법이고 진리고 전설이신 1기 선배님께서 내 쪽으로 다가오신 것이다. 손에 식판을 든 채로!
 “으핫, 뭐 하냐 너?”
 벌떡 일어서서 굳어버린 내게 마린 형님이 웃으며 하신 말씀.
 난 정신을 차리고 전설에 대하여 경례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다, 클링턴 선배님!”
 멋진 아침 인사······가 아닌가? 내 커다란 목소리에 왠지 좌중은 웃음의 도가니가 되었다.
 ······으헉?!
 난 내 멍청한 실수를 깨닫고 좌절했다.
 오션 클링턴 1기 선배님께선 다행히 폭소하진 않으셨다. 부드럽게 미소하며 선배님은 한 마디만 남기셨다.
 “나도 잘 잤다, 루포리. 앉아서 밥 먹어.”
 울고 싶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와 취사장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사실은 그 일을 하는 후임들을 독려 또는 감독하고 있는데- 이번엔 몇몇 여학자들이 찾아왔다. 왠지 방문을 많이 받는 날이다.
 우물쭈물 말을 건네지 못하는 아가씨들에게 난 밝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여러분. 용병 루포리 일스터입니다.”
 아마 내가 후임들 앞에서 무게를 잡고 있어서 어렵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한 마디 꺼내자 아가씨들의 말문이 무서운 속도로 열렸다.
 “어머, 진짜 이름이 루포리야? 너무 예쁘다, 헤헷.”
 채신없이 웃는 빨간 머리카락의 어린 아가씨와,
 “새벽녘 그대들의 수고, 고마워. 좀 놀라긴 했지만 좋은 구경을 했어.”
 왠지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흑발의 육감적인 아가씨,
 “고생했어.”
 말수 적은 금발의 아가씨, 이렇게 세 명이었다.
 어째서 적발과 금발의 아가씨가 여기 있는가, 하는 물음은 우리 임펠런 국민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다. 그리고 난 대답할 수 있다. ‘아마 유학 오신 아가씨들일걸?’ 질문자가 피식 웃으면 주석을 달을 수도 있다. ‘관광 겸 유학 말이야.’
 유례없는 단일민족 국가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지만, 그 말이 폐쇄 정책을 의미하는 바는 아니다. 외국인도 얼마든지 놀러, 또는 살러 오고, 우리 국민과 결혼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임펠런 사람과 타국의 이성이 사랑을 해 아이를 배게 되면, 어찌 된 일인지 꼭 흑발과 흑안의 아이가 태어났다. 분명 다른 나라의 다른 머리색을 가진 사람들이 결혼하면 또 다양한 머리색의 아이들이 나오던데.
 임펠런의 신께선 까만색을 너무 좋아하신 나머지 이런 강대한 유전 능력을 부여하신 듯하다.
 그런 나라와 민족이라서 국내엔 유색 모발이 드물고 까만 머리카락만 수두룩하다. 외국에는 꽤 드물다는 흑발인데 말이지.
 아무튼 그런 우리나라지만 경치가 좋고 마법시대의 유물들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는 까닭에 외국 귀족들의 유학처 겸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다는 듯하다.
 나도 마린 형님한테 들은 얘기다. 그저께 이 아가씨들을 처음 보곤 나도 꽤나 놀랐었다. ‘왜 우리나라 학회에 외국인이 있지?’ 하고.
 내가 그런 생각들을 하며 그녀들의 머리카락을 보는 걸 눈치챘는지 흑발의 아가씨가 말을 꺼냈다.
 “밝은 머리색 보고 놀란 거니? 아까 보던 것보다 말이 없구나.”
 응? 아까 보던 것?
 “많이 놀라진 않았답니다, 레이디. 그런데 제가 아까 어떤 모습을 보여드린 건지?”
 그러자 붉고 노란 머리카락의 아가씨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쿡쿡거렸다. 이, 이 반응은 설마!
 “아까 안녕히 주무셨잖아, 너?”
 윽, 나 언제 대포 화통 삶아먹었나? 이 아가씨들이 들었다면 아우렐리에 아가씨도 들었을지 모른다. 아유, 민망해.
 “그쪽까지 들렸나요? 죄송합니다, 제가 학식이 짧아서 의문사를 잘 못 써요.”
 내 농담에 금발 아가씨는 깜짝 놀란 듯했다.
 “외국인, 너도?”
 아, 금발 아가씨는 어쩌면 말수가 적은 게 아니라, 우리말이 아직 능숙치 못한 걸까? 흑발 아가씨가 금발 아가씨의 등을 팡팡 때렸다.
 “릴리아, 릴리아, 농담이야 그거.”
 “혹시 레이디는 유클리드에서 오셨나요?”
 금발의 릴리아를 향해 묻자 그녀가 반색했다.
 “어떻게 알아? 유클리드 맞아.”
 다른 아가씨들도 놀란 듯했다. 금발이 흔한 머리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느 나라를 특정할 수 있는 머리색도 아니었다.
 단지 난 유클리드에서 왔다는 동료 한 명을 알고 있고, 그가 우리말이 서툴 때 보여 준 말투를 기억하고 있을 따름이다.
 “유클리드 분들의 발음은 억양이 좀 강해서 알 수 있습니다. 레이디의 발음이 이상한 게 아니라, 민족적으로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아니, 물론 저야 제국어는 한 마디도 모르니까 착각일지도 모르지만요.”
 릴리아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뭐가 재밌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발의 아가씨는 좀 억울한 듯했다.
 “힝, 나도 맞춰 봐. 난 임펠런 말 너무 잘해서 어강이 안 남아있나?”
 “유리에 바보야, ‘억양’이라니까.”
 흑발 아가씨가 적발의 유리에 아가씨에게 핀잔을 준다. 유리에 아가씨는 앗차, 하고 중얼거린다. 왠지 정감이 간다. 왜 난 전혀 다른 그녀에게서 내 모습을 보는 걸까?
 아차, 우리말을 못하는 게 닮았구나!
 그나저나 이번에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물론 이 아가씨의 억양으로 어디 출신인지 밝혀낸 건 아니다.
 “레이디, 노루스에서 오셨지요?”
 유리에 아가씨는 깜짝 놀란다. 그러나 흑발의 아가씨는 키득키득 웃고 있다.
 “유리에 바보야, 네 이름은 노루스에서밖에 안 써. 노루스의 성녀 이름을 누가 감히 가져다 쓰겠니?”
 음. 기묘하게도 바보란 접미사가 잘 어울리는 유리에는, 노루스에선 흔하나 다른 나라에선 결코 쓰지 않는 여성 이름이었다. 오래전 노루스에서 탄생하셔서 많은 기적을 베푸셨다는 성녀에 대한 경외의 의미이다.
 이렇게 나는 현명하게 두 가지 시련을 극복했고, 이제 이름만 날린다면 ‘두 시련의 기사’라고 불릴지도 모르겠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흑발 아가씨가, 셋 중 처음이지만 왠지 마지막이 돼 버린 자기소개를 했다.
 “클라시에 백작가의 페넬로페야. 반가워, 루포리.”
 “반갑습니다, 레이디 클라시에.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정중하게 답례했다.
 페넬로페 아가씨는 그 후로 한동안 말없이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날 붙들고 끝도 없이 재잘대는 유학파 아가씨들을 말리며 천막으로 돌아갔다.
 유리에 아가씨는 가다 말고 돌아보며 손을 흔든다. 저러다 넘어질까 겁난다. 꾸벅 인사를 해 주고 손을 훠이 훠이 저어줬다.
 음······ 왠지 시선이 느껴진다. 아까부터 느껴졌다. 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노동 중인 후임들을 바라봤다.
 아아, 저 부러움의 아우라로 가득 찬 중생들을 보라. 질식할 것 같다. 왠지 후임들뿐만 아니라 동기 놈까지 간절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며 다가오고 있다.
 “왜에 너만~”
 “왜에 선배님만~”
 음, 무섭다.
 “아가씨들한테 둘러싸이는 거냣!”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이는 겁니까!”
 무서운 친구들에게서 몸을 피해 난 한 쓰러진 나무의 그루터기에 올라섰다. 중생들은 내 가르침을 갈구하며 날 둘러싸 우러르고 있었다. 난 말했다.
 “아가씨들과 친해지고 싶은가?”
 “그래!”
 “그렇습니다!”
 “그냥 가까이서 향기만 맡아도······ 힉!”
 한 변태스러운 후임을-그러니까 일드를- 째려봐 주고 난 다시 차분히 말했다.
 “그렇다면······.”
 말을 끌자 몇몇이 침을 삼킨다.
 “크게 외쳐 헛소리를 하여라.”
 내 가르침에 감동했는지 다들 넋을 잃었다.
 곧 그들은 나의 연단에서 물러갔다.
 
 세 번째 날의 여정도 순조롭게 진행됐다. 사실 오늘 새벽의 전투가 그나마 우리 일행의 첫 곤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풍광을 즐기며 유유자적 말을 몬다.
 인원도 꽤 많고, 숲을 거쳐야 해서 마차를 가져오지 못해 짐말을 다섯 마리나 달고 가기에 대열은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섰다. 공격받는다면 꽤나 위험한 상황이지만 아직 숲이 깊지 않아 시야가 넓으니 괜찮다. 내일이면 아마 산골짜기에 접어들게 되겠지만.
 자애롭고 위대하신(내 실수를 웃으며 넘겨주신) 오션 클링턴 선배님과 세 분 2기 선배님들, 그리고 3기의 나와 동기 놈, 4기 2명과 5기 4명으로 구성된 우리 ‘성난 소’의 제 3조 12인은, 아홉 명의 학자들을 호위해 목적지로 모시라는 명령을 받고 수행중이다.
 비록 우리 용병대가 마물과의 전투와 토벌에 특화된- 그래서 좀 시끄러운 용병대이긴 하나, 그 힘은 임펠런 내 다른 어느 용병단도 따를 자가 없다.
 그래서 대학의 귀족 어르신들이 직접 우리 ‘성난 소’를 지명했다고 한다. 물론 이것도 마린 형님 말씀이다.
 난 우리의 중대한 임무를 되새기며 오연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서 걷던 동기 놈이 불퉁댄다.
 “뭐가 좋다고 실실 웃는 거여, 넌?”
 “제나인, 어찌하여 너는 그렇게 툴툴거리느냐?”
 내가 또 늙은 학자의 흉내를 내자 제나인 헤이튼이 피식피식 웃었다.
 “닥터 일스터, 제가 술이 고파서 죽겠습니다그려.”
 난 속으로 움찔했지만 담담한 태도를 견지했다.
 이 술고래에게 데니스가 선사한 독한 술을 줬다간 큰일 난다. 관계자 모두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만다.
 “어리석은 아이야. 참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단다. 술도 없고, 있다손 쳐도 선배님들이 네 분이신데 무슨 방법으로 술 냄새를 숨기려느냐?”
 사실 나는 술 냄새를 숨길 비약을 갖고 있다. 아직 시험해보진 않았지만 불개미 용병대의 늙은 선배님에게 들었으니 효과는 확실하다.
 방법은 간단했다. 록펠러 잎을 술자리에 깔아두고, 자리가 파한 뒤에 록펠러 차를 마셔 주면 된다. 물론 그 사실은 몇몇 친한 후임들과만 공유하고 이 주생주사(酒生酒死)의 바보에겐 가르쳐준 바 없다.
 “흑, 그렇죠······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겠지요?”
 나는 연기력을 발휘해 안쓰럽다는 듯 부드러운 눈길로 제나인을 바라보았다.
 “아이야,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내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오늘 밤에는 푹 자도록 하여라. 내 너를 대신해 두 식경을 보낼 것인즉.”
 “어? 진짜여!?”
 놀란 제나인이 상황극을 던져버리고 사투리로 급하게 물었다. 좋아, 미끼를 건드렸구나.
 “뻥이야.”
 한 번은 찌를 튕겨준다, 놈이 더 확실하게 물도록.
 “에이, 싸나이 루포리가 한 입으로 두 말 할 리가 없제! 너만 믿고 나 일드헌티 말헌다?”
 음, 오늘 6번초가 일드였던가? 일드한테 할 말이 있던 나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놈의 곁에 붙었다.
 웃으며 쳐다본다, 이미 완전히 낚여서 나와 아우렐리에 아가씨 사이에 가교를 놓아 주려 애쓰는 고마운 물고기를.
 
 5기 15번인가 16번인 일드 에손은 후위에서 말을 걷고 있었다. 우리의 접근을 받은 그는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에, 아, 5기 일드한테 어쩐 일이세요?”
 “얌마, 똑바로 말 못혀? 어디 감히 루포리 일스터 어른 앞에서!”
 제나인이 날 치켜세워 주곤 실실 웃어보이자 일드도 대충 감을 잡은 듯했다.
 “네에, 헤헤, 죄송해요. 에헴, 5기 15번 일드 에손, 일스터 선배님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음, 아주 바람직한 후임의 전형이다.
 “일드야, 이따 7번초 내가 서기로 했다. 이 주정뱅이는 푹 자라고 내비 둬.”
 착한 내가 동기의 근무를 대신해주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기에 일드는 당황하지 않고 대꾸했다.
 “또 얼마나 빚지셨는데요?”
 “이런 무엄한! 나를 뭐로 보고!”
 난 화가 나서 제나인의 동전주머니를 빼앗아 5브론즈를 꺼냈다. 제나인은 멍한 표정이다.
 “훗, 5브론즈 받았다.”
 일드가 완전 넘어가려는 걸 보며 제나인은 화도 못 내고 울듯이 떠나갔다. 난 일드한테 묻고 싶었던 걸 떠올렸다.
 “내가 물어보려던 게 뭐였지? 머리 사이즈? 스리사이즈? 거기 사이즈?”
 내 혼잣말에 당황한 일드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난 곧 진짜 목적을 기억해냈다.
 “야, 일드야.”
 “예, 일스터 선배님.”
 조금 뒤처진 우리 목소리는 다른 애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난 질문했다.
 “캐롤린 있잖아, 너희들한텐 걔가 대체 어떻게 보이냐? 네 감상도 좋고, 주변 애들 평가도 한 번 싹 불어 봐.”
 일드가 행동이 멍청해서 그렇지 머리가 멍청한 녀석은 아니다. 특히 주변 돌아가는 상황이나 타인의 심정을 감지하는 데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건 그냥 내 감이지만.
 난 신참이나 다름없는 5기 애들에겐 그 말썽쟁이가 어떻게 비치는지 무척 궁금했다.
 “여왕님요? 헤헤, 좋은 분이시죠. 예쁘시고, 성격도 털털하시고, 우리 같은 신참들도 잘 챙겨주시고, 진짜 천사 같으세요. 저희 기수 대부분 그렇게 생각할걸요?”
 아냐, 악마야!
 “근데······ 이건 일스터 선배님이니까 말하는 건데요······.”
 오오, 드디어 말하는구나, 진실을!
 “몸매도 멋지신 것 같아요. 요즘 들어 한결 더 볼록해진 가슴이 정말······ 켁!”
 내 원투 펀치에 헤롱거리는 일드를 두고 난 절망에 빠져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악마는 이미 많은 이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오로지 나만이 이성을 가진 존재인 듯한 기분에 난 고독을 느꼈다. 동기들이고 4기들이고, 이제 5기 애들의 평가까지 일치한다.
 아니, 잠깐만, 이렇게 되고 나면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거란 논리적 결과에 귀납되는 거 아닌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난 캐롤린의 모든 걸 알고 있지.”
 내 혼잣말에 근처에 있던 4기 데롤이 깜짝 놀랐다.
 “여왕님을요? 설마, 선배님······ 컥!”
 놈에게 원투 펀치를 날려 주곤 난 다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왠지 캐롤린의 사악한 홍소(哄笑)가 귓가에 자꾸 맴돌았다. 떨쳐내느라 고생 좀 했다.
 
 대열의 중간쯤을 지나는데, 앞에서 무리지어 걷던 학자들 중 한 명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봤다. 새빨간 머리카락의 유리에 아가씨다.
 “푸로리, 아니, 루포리, 잠깐 와 봐!”
 ······대체 내 이름을 어떤 식으로 기억하고 있는 걸까? 왠지 푸로리란 이름을 정정하기 싫어하는 듯한 그녀에게로 난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러면서 지나치는 청년 학자들에겐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학자란 무릇 귀족이다.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간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마는 것이다.
 역시나 페넬로페 아가씨가 두 유학파 아가씨를 대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미리 명심해야 했던 한 가지가 있다면, 이 일행의 학자는 9명이고, 한 명은 지도자로서 나이 지긋하신 아저씨고, 네 명은 청년 남학도로서 방금 지나친 저 집단이고, 나머지 네 명이 내가 오늘 이야기를 나눈 세 여성과 아우렐리에 아가씨인 것인데, 스무 명 이상의 일행 중 여성이 단 네 명이면 그녀들은 함께 행동하게 마련이다.
 유리에 아가씨의 부름을 받잡고 속으로 구시렁대며 다가갔는데 아우렐리에 아가씨의 모습이 보이자 난 놀랐다. 아가씨가 내게 눈인사를 보내셨을 때는 급기야 공황에 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기억 저편에 묻어뒀던 요상한 인사를 건넸다.
 “태양이 우리의 그림자를 비추도록, 반갑습니다, 레이디 여러분.”
 이러면서 속으로는 ‘그것은 천상의 윙크였다! 나는 신이었다!’하고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흐으응?”
 유리에 아가씨는 비음을 내며 날 쏘아본다. 장난감을 발견한 두 살 아이의 눈빛처럼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찔끔하고 있는데, 다행히 릴리아 아가씨가 말을 받아 줬다.
 “달이, 우리에게 그, 등을 보이도록, 반가워, 용병님.”
 “어, 그건 어떤 인사인가요, 릴리아?”
 아우렐리에 아가씨가 상기된 표정으로 묻는다. 다른 아가씨들도 그 인사가 무척 궁금한 듯 릴리아 아가씨에게로 시선을 모으고 있다.
 집중된 시선에 당황해서 목을 움츠린 금발 아가씨가 대답했다.
 “빛의 신, 알리오스의 이름으로 나누는 인사, 입니다.”
 그러고는 말을 못 잇는다. 난 움츠러든 릴리아 아가씨를 위해 설명을 보충했다.
 “고전의 시대에, 알리오스의 사제와 신자들은 태양이 비추지 못하는 그림자처럼 소외된 곳에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달빛처럼 알리지 않는 선행으로 알리오스의 은총을 나누길 기원하는 의미에서 이렇게 인사했다고 하더라구요. 참 좋은 뜻이죠?”
 “우와아, 어렵다! 푸로리는 그거 어떻게 알았어? 의외로 똑똑하다, 난 대학에서도 못 배웠는데에.”
 두서없이 묻는 유리에 아가씨. 말을 재빨리 하며 내 주의를 뺏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일부러 푸로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지금도 내가 정정할까 봐 염려하는 듯 불안한 눈빛이다.
 아까는 루포리가 예쁘다고 하더니! 제멋대로인 아가씨다.
 “예전에 나이 지긋한 용병 선배님께 배웠습니다, 레이디. 그분의 집이 고전시대부터 이어진 가계여서, 어렸을 때 고문에 나온 이야기들을 많이 읽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대단히 유구한 집안의 용병이로구나······.”
 페넬로페 아가씨는 여운을 남기며 날카로운 눈으로 날 보고 있다. 그 시선이 마치 재료를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는 요리사의 눈빛 같아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긴장하고 있는데, 아우렐리에 아가씨가 화제를 바꿔 주셨다.
 “릴리아는 어떻게 알게 됐나요?”
 “집에 책이 있습니다. 읽었습니다.”
 암, 독서는 숙녀의 교양이지.
 그러나 우연히 읽은 게 아니라 그 지식의 깊이가 빛의 신 알리오스까지 닿았다고 한다면, 이 아가씨 정말 열심히 책을 읽었을 것이다.
 이 시대엔 신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나저나 아가씨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보니 주변의 시선이 따갑다. 흘끔 보니까 남학자들이 내가 혹시 실수를 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담긴 시선을 보내고 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현명한 나였기 망정이지 다른 예의 없는 용병이 이렇게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면 벌써 큰 실수를 열 번은 하고 호된 꼴을 당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학자들을 보다가 문득 데니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쓴웃음을 한 번 짓더니 갑자기 내 쪽으로 말을 몰았다.
 헛, 뭐지? 나 뭐 실수한 게 있나?
 내가 긴장하고 있는 동안, 그는 아가씨들에게 목례를 하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 역시 자네 같은 미남은 어디에서나 빛나는 것일까? 이렇게 많은 레이디들의 곁을 지키는 영광을 누리다니 말이야.”
 이 친구 설마, 그 말 하러 여기까지 온 거야?
 “에이, 저 같은 범부(凡夫)에게 그리 말씀하십니까? 닥터 컨프턴의 광채에 어디 발끝이나 따르려구요?”
 솔직한 심정이다. 나도 어렸을 적 여자깨나 울린(아니, 이거 자랑하는 거 아니다. 잘못했다는 거 이젠 잘 안다.) 반반한 상판을 갖고 있지만 저 데니스의 부드럽고도 강한 멋은 일종의 아름다움이었다. 내가 댈 바는 아닌 것 같다.
 “거, 별 말을 다. 이미 이 레이디들이 증명해 주셨지 않나? 자넨 남자인 내가 봐도 정말 멋진 대장부야.”
 “감당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음, 데니스는 아무래도 내게 꽤 호감을 가진 듯하다. 다행히 이상한 쪽의 호감은 아닌 것 같지만. 순수하게 웃으며 날 칭찬하는 백작 영식을 난 어디까지 가깝게 대해도 되는 건지 고민했다. 너무 친해져도 곤란하단 말씀이야.
 우리가 그렇게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며 조금 앞서 나가자 페넬로페 아가씨가 말을 이끌어 우리 곁에 왔다. 왠지 좀 화가 난 표정이었다.
 “닥터 컨프턴, 루포리와 언제 그렇게 친해지신 거죠?”
 “아, 이거 결례를 범했네요, 레이디 클라시에. 양해도 없이 대화 상대를 빼앗다니, 제가 나빴군요.”
 “별말씀을요, 닥터 컨프턴.”
 말은 그렇게 하면서 흥, 하고 콧방귀를 뀌는 페넬로페 아가씨. 그러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는다. 변색이 여간 빠른 게 아니다.
 마주 웃어 보이며 속으로 데굴데굴 염두를 굴린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 날 보는 눈이 심상치 않다. 글쎄, 여자 좀 겪어 본 내가 하는 말이니 분명하다.
 이건 먹이를 앞에 두고 언제 잡아먹을까 고민하는 창공의 솔개······ 아니지, 그게 아니라, 원하는 남자의 마음을 잡기 위해 수많은 계책을 짜는 여성의 눈이다!
 그야 한때 여러모로 문란한 시절을 보냈던 내겐 이런 것쯤 사소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아가씨는 그때 함께 밤을 보낸 아가씨들과는 다르게 귀족이다.
 시집도 안 간 귀족 숙녀의 몸에 흔적이라도 남겼다간 빠른 시일 내에 형장의 이슬이 된다!
 저 아가씨하곤 너무 가까워져선 안 된다. 내게 어떤 끌림을 느끼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대다. 거 참, 데니스와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원래 성격은 냉정한 것 같은데, 왜 나 따위 용병에게 관심을 갖는 거야?
 “레이디 클라시에, 제게 두 백작가의 귀족 분들을 모실 영광을 주시니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제 못난 손은 말고삐를 잡는 데에 하나를 쓰지 않을 수 없거든요.”
 내 주제에 두 사람 사이에서 대화할 수는 없다고, 그러니까 이따 보자고 빙빙 돌려 말해 봤지만 페넬로페 아가씨는 아미(蛾眉)를 찌푸리곤 오히려 내 곁에 말을 더 붙였다.
 “손 하나는 닥터 컨프턴에게 줘도 좋아. 내 손을 네게 줄 테니. 어때?”
 오오, 그녀는 고삐를 쥔 내 팔에 오른손을 살며시 얹는다. 그건 그냥 비유인데! 이렇게 대담할 데가!
 끙끙 앓으며 말을 못 잇는 날 보더니 데니스가 끼어들었다.
 “레이디 클라시에, 어떤 생각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보는 눈이 많습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누군가의 불민한 입이 오늘의 일을 이야기한다면, 어떠할까요?”
 데니스가 주변을 살짝 둘러보는 시늉을 한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이 아가씨는 조금 놀란 듯 내게서 손을 떼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 곁에서 말을 걷는다.
 아무튼 데니스 녀석 좋은 녀석. 덕분에 형장에 갈 뻔했지만 이슬이 맺히지 않았다.
 내가 감사의 염을 담아 멋쩍게 웃자 그도 다 안다는 듯 씨익 웃어 줬다. 응응, 그래, 넌 이런 경험 많을 테니 내 심정 알 거야.
 내가 좀 더 애절한 눈빛을 보내자, 그는 안 되겠다는 듯 쓴웃음 지으며 페넬로페 아가씨에게 낮게 말했다.
 “실은 제가 루포리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어서 끼어들었습니다, 레이디 클라시에. 잠시면 되니, 제게 이 친구를 좀 빌려주실 수 없을까요?”
 아가씨는 매우 화가 난 표정으로 그의 정중한 청을 승낙했다. 당장 노호성이 터져 나오지 않은 게 신기했다. 난 겁을 집어먹은 채 데니스를 따라 일행에서 조금 떨어져 나왔다.
 데니스는 내 울 것 같은 표정을 보며 허탈한 듯 웃었다.
 “자네, 참 능력도 좋은데? 어느 새 저 도도한 레이디 클라시에를 꼬신 건가?”
 “으악, 큰일 날 말씀이십니다! 제가 어떻게 겁 없이 백작 영애께 흑심이나마 품을까요. 저로서도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왜 보잘것없는 용병에게 이리도 과분한 관심을 보이시는 걸까요?”
 데니스는 잠깐 말없이 걸었다. 아니, 말이 없는 건 그가 말을 안 한 거고, 걷는 건 그가 탄 말이다. 그가 말에서 내려 걸은 것이 아니다.
 난 그렇게 헛생각을 잠깐 하고 있고 데니스는 저쪽의 페넬로페 아가씨를 주시하고 있었다.
 음, 내가 볼 땐 무척 애틋한 눈빛이다.
 “페넬로페의 집안은, 명망 높은 기사 가문이야.”
 어라? 레이디 클라시에에서 페넬로페로 바뀌었다. 그리고 말투도 조금. 데니스는 앞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아니, 기사 가문이었지. 그녀는 클라시에 백작의 외동딸이야. 이제 그 가문에는 대를 이을 기사가 없어.”
 내가 어벙한 표정을 지은 모양이다.
 “아,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마. 그녀밖에 젊은 클라시에가 없다는 말이 아니야. 분가의 클라시에가 모두 무를 버리고 문을 택했기에, 클라시에의 마지막 기사는 현 클라시에 백작뿐이란 말이야. 탓할 수도 없지, 이미 임펠런 왕도 내엔 무(武)가 문(文)의 아래에 짓밟혀 있으니. 누군들 남의 하수인 소리나 들을 기술을 배우고 싶겠어? 그런데도 그녀, 꼭 가문의 전통을 잇고 싶었나봐. 무술을 열심히 익혔지. 그러나 얻게 된 건 그녀에게 만성의 심한 투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안 것뿐이었어. 그때 저 아이, 자기 통증보다도 기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더 슬퍼했어.”
 투엘라는 폐활량에 장애를 가져오는 호흡기 질환이다. 호흡량이 부족해질 경우,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투엘라 환자라는 말은 기사로서는 완전히 결격이라는 말과 동의어다.
 데니스는 다시 페넬로페 아가씨를 보고 있다. 내가 볼 땐 무척 애틋한······ 이건 했던 말 같지? 아무래도 이들 사이엔 내가 모르는 깊은 유대가 있는 모양이다.
 “닥터 컨프턴께선 레이디 클라시에와······.”
 “······소꿉친구야. 이제 저 앤 그렇게 생각지 않는 듯하지만.”
 내가 말없이 있자, 데니스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 년쯤 전인가, 내 아버지께서 클라시에 백작을 폄하했어. 머리에 든 게 없는 인간 병기라고. 그 이후로 페넬로페는 날 남처럼 대하더라. 나도 거기 맞춰주고 있고.”
 ······이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이 청년에게 날 구해달라고 보채다니, 내가 정말 미안한 짓을 하고 말았다. 그는 괜한 일로 페넬로페 아가씨에게 더 미움 받고 말았지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이 친구 이거 너무 성격이 좋은 거 아냐?
 아니, 그나저나 방금 나, 그녀는 외동딸임과 동시에, 확고한 후계자란 얘길 들은 건가?
 “닥터 컨프턴, 혹시 레이디 클라시에는, 저어······.”
 내 입으론 차마 꺼내기 힘들었다.
 “응, 그러니까, 후대에 클라시에 백작이 될 몸이야. 당연히 평민 첩 두엇쯤 거느려도 무방하지. 그리고 저 아인, 튼튼한 아버지에게서 씨를 얻어야 튼튼한 아이가 나올 거라고 믿고 있어. 그도 그럴 게 저 애 어머니도 약한 투엘라가 있으시거든. 관계가 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이야.”
 으아아, 노골적이야! 나는 그럼 종마로 간택된 거란 말인가?!
 내 충격에 아랑곳 않고 데니스는 말을 이었다.
 “물론 내 추측일 뿐이야. 하지만 아까 새벽에, 페넬로페는 마물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는 너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어. 나로선 뭐라 말할 수가 없다. 선택은 루포리, 네 몫이야. 나는······ 모르겠어. 네가 저 앨 정말 충심으로 모실 수 있다면, 그래 줬으면 싶기도 해. 혹시 불쾌한가?”
 악! 소리 나는 요청이긴 했지만 나는 그것과는 다른 것에 불쾌해하고 있었다.
 “왜 평민 첩이 필요한 겁니까?”
 “응? 무슨 말이야, 방금 다 설명했잖아.”
 나는 또 불쾌해졌다.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친구.
 “당신 같은 분이 곁에 있는데 왜 평민 첩이 필요한 겁니까?”
 직선적인 물음에 데니스가 당황했다. 나도 말하고서 당황했다. 이거 예의고 뭐고 다 팔아먹은 말인데 화내면 어떡하지?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무슨, 소리야? 왜 나와 페넬로페를 그렇게 보는 거지? 아까도 봤잖아, 저 앤 날 이제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아! 저번엔 편지로 벌레의 자식이라고까지 말했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저 애한테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그의 슬픔이 절절히 느껴졌다. 아아, 청춘이로고. 내가 좀 뛰어난 인재이긴 해도, 고작 이 나이에 귀족 총각의 사랑 상담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래도 좋아하시잖아요. 그래서 학자면서도 열심히 몸도 만들고, 무술도 단련한 거 아닙니까? 숨길 생각 말아요, 저 숙련된 교관입니다.”
 단호하게 말하자 데니스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더니 끙, 하고 앓는 소릴 냈다. 그의 몸은 마침 좀 작은 옷을 입어서 불끈불끈한 근육을 여기저기로 표출하고 있었다.
 그는 신기하게도 금세 내 얘길 인정했다. 자기 마음을 사실은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 네 말이 맞다 치자. 허나 그런들 어쩌겠어? 내가 그녈 위해 뭘 할 수 있겠냐고. 아버지께 클라시에 백작께 공식으로 사과하라는 부탁이라도 드리란 말인가? 무장을 발톱의 때만큼도 취급하지 않는 그분께? 난 고작 컨프턴 가의 열두 번째 아들일 뿐이야.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음, 그건 그런 것 같았다. 그는 잘생기고, 성격도 좋으며 건강했고, 유구한 학회의 청년 대표이니 학식과 지혜도 얕지 않은 듯했으나 그것이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페넬로페 아가씨를 도울 수 없음에 죄책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자기 잘못이 아님에도 고개를 들고 그 아가씨를 대할 수 없는 것이다.
 크으, 이 착한 청년을 이대로 좌절하게 둘 수 없다는 관대하고 숭고한 사명감 따위가 내면에서 마구 솟구쳤다. 이거 무척 어렵고 귀찮은 일이 될 거야, 하면서 막아 봐도 이미 내 입은 열리고 있다.
 “닥터 컨프턴, 당신은 저를 벗의 예로 대우해 주셨고 제 입의 무거움을 믿고 숨기고 싶은 일들을 얘기해 주셨습니다. 이제 제가 당신을 돕겠습니다. 어떻게든 레이디 클라시에와 당신의 관계를 회복하겠습니다.”
 아, 이런 넓은 오지랖 밟고 넘어져 코 깨질 녀석.
 데니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안 하는지 멍하니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힘없이 웃었다.
 “옛 사람들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 없어.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면 보답 받는다는 말 믿진 않았는데, 오늘 그 말을 뼈저리게 느껴. 고맙다, 루포리. 네겐 순간적인 말일지 몰라도, 내게 네 뜨거운 정이 평생 기억될 거야.”
 아무래도 내 능력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뭐 좋아, 내 능력이야 나도 믿지 못하니까. 그렇지만 시도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페넬로페 아가씨는 내게 관심이 많은 듯하니, 얘길 하다보면 자연스레 말을 꺼낼 수 있겠지.
 난 그렇게 다짐하며 겉으론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데니스는 청년 학자들에게 돌아가고, 난 아가씨들에게 돌아갔다. 아가씨들의 분위기는 얼핏 봐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페넬로페 아가씨는 여전히 화가 나 있다. 아까는 몰랐지만 이젠 나도 그 이유를 안다.
 그녀는 돌아온 날 잠깐 쏘아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고, 고개를 도리도리 젓더니 곧 외면했다.
 음, 이럴 땐 눈치껏 행동해야지.
 “저기, 레이디들께 폐가 되는 것 같아 저는 슬슬 물러나 보겠습니다.”
 아가씨들은 날 잡지 않았다.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미안하다는 듯 눈인사했고 유리에 아가씨는 안 어울리게도 용병들처럼 씨익 웃어보였다. 금발의 릴리아는 눈치를 보더니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저기, 이름이?”
 “아아, 예, 루-포-리-입니다. 이상한 이름이죠?”
 머쓱하니 웃자 그녀도 웃는다. 그러나 왠지 곤란하단 투의 웃음이다.
 “이상해. 별나. 잘 가.”
 ······너무 진솔하잖아! 생긴 건 순하디 순하게 생긴 아가씨가 내 이름을 놀려대니 슬펐다. 유리에 아가씨도 그렇고, 아무래도 유색 모발 아가씨들은 내 이름을 가만 두지 못하는 모양이다.
 페넬로페 아가씨를 설득해야 하지만, 우선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아직 여정은 한참 남아 있다.
 
 해가 지고 나서, 그러니까 따지자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만 하루 정도의 여정이 남게 되자, 난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생각해보니 여유가 별로 없다.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면 탐사대는 이레 정도 탐사를 지속하게 된다. 그 탐사 기간이 사이를 회복하기에 좋은 타이밍인데, 그렇게 한 장소에서 야영하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몰래 접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내일 오전까지는 페넬로페 아가씨를 설득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단 둘이서 조용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데니스와 한참 얘기한 것 때문인지 뭔지 내게 큰 반감을 가진듯한 그녀는 날 볼 때마다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봤다. 소심한 나로선 접근부터가 힘들다.
 아니, 그것보다 얘길 하게 된다 해도 문제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데니스에 대한 그녀의 분노를 풀 수 있을까?
 사실 직접 그를 향한 분노도 아니지만, 그래서 더 풀기가 어려울 듯했다.
 예로부터 종교, 정치, 가문간의 다툼에는 절대 끼어들지 말라 하지 않았던가? 맞아죽기 십상이니까.
 그러나 넓은 오지랖으로 주제넘은 약속을 한 나는 어찌됐든 데니스를 돕고 싶다. 잘은 몰라도, 그건 아마 페넬로페 아가씨 또한 돕는 길이 되리라.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사실 둘이 결혼해서 튼튼 쌈박한 아이 열두어 명 낳아 잘 기르면 되는 거잖아? 데니스는 사랑을 이루고, 아가씨는 아이를 얻는다. 오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런 생각들을 하며 후임들이 세워 준 천막에 들어가 드러누웠다. 슬슬 잠이 온다.
 잠깐 고민은 미뤄두자. 열세 식경만 지나면 아름다운 아우렐리에 필모어 자작 영애를 만날 수 있다. 생각은 그 이후에 하는 걸로.
 
 일드는 실수 없이 나를 찾아 잘 깨웠다.
 까마득한 5기 후임들에게 우리 중견 3기 선배들은 아마 꽤나 무서운 존재일 것이다. 1, 2기 선배님들은 워낙 높은 곳에 있어 그들과 얽힐 일이 없다. 4기는 그래도 바로 위 기수로서 그들의 훈련 조교를 맡았기에 좀 친밀감이 있을 테지만, 비(非)지휘관급 대원 중 최고참인 우리 3기는 구조적으로 그들을 갈구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나는 그나마 장난치기 좋아하고 가벼운 성격이라 정도가 덜했지만 다른 동기들은, 아아, 차마 내 입으론 말 못한다.
 지금 혹시라도 잠자는 제나인을 조금이라도 건드릴까 봐 조심에 조심을 거듭해 천막을 나서는 저 일드를 보라. 안쓰럽기까지 하다.
 아무튼 복장을 갖추고 일드와 교대하자 이미 일다경(一茶頃, 약 15분)이 지나 있었다. 난 아우렐리에 아가씨와 만나 나눌 이야기들을 점검하느라 잠깐 하늘을 보고 있었고, 그래서 일드가 자기 천막 아닌 다른 곳으로 새는 걸 보지 못했다.
 잠시 후, 인기척을 느껴 바라본 곳에는 놀랍게도 일드가 페넬로페 아가씨를 수행해 다가오고 있었다.
 와아, 저 자식 뭐하고 있는 거야?
 ‘야-! 너- 제-정-신-이-냐-!’
 입을 벙긋거려 멀리 다가오는 놈에게 화를 내 봤지만, 일드는 긴장했는지 고개를 깊이 숙인 채 길 안내에만 열중하고 있다. 어쨌든 잠시 후 우리는 삼자대면하게 됐다.
 일드를 내가 노려보자 페넬로페 아가씨가 손을 내저었다.
 “미안해, 루포리. 내가 깨워달라고 부탁했어. 그러니 네 충실한 부하는 이만 돌려보내렴.”
 음, 그렇다고 하는 데에야 내가 화를 낼 이유가 딱히 없었다. 귀족의 부탁을 용병의 위계질서를 내세워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일드가 천막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페넬로페는 머쓱한지 허리께에 닿은 까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그 표정은 나로선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낮에 문득 육감적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잘 발육한 몸을 본다. 분명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아가씨일 것이나 그 몸의 굴곡은 농염하다는 말이 부족하지 않았다.
 보통 통통한 친구들이 운동을 열심히 하면 저렇게 된다. 원래는 군살 때문에 그 미모가 가려져 있지만 운동을 하면 이게 웬걸, 부드러움에 탄력까지 갖춰져 몹시 매력적으로 보인다.
 숙련된 교관인 내가, 지금 간소한 잠옷을 입고 있는 그녀를 보는 것이다. 분명하다. 분명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일 몸을 단련하고 있겠지.
 늘 짓고 있는 찌푸린 듯한 인상은 어쩌면 외롭고 보람 없는 수련의 나날이 만든 것일까.
 그런 생각들을 하며 내가 침묵하고 있자, 그녀는 조급하게 말을 꺼냈다.
 “아까, 혹시 닥터 컨프턴과 무슨 얘길 했니?”
 곤란하단 듯한 표정이지만 여전히 말투는 위엄이 넘쳤고 직선적이었다. 꽤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거 참. 생각하니 웃기네. 이렇게 당당하고 신념으로 가득한 아가씨다. 난 왜 그렇게 머리 싸매고 고민한 걸까?
 그녀를 믿어보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건 어차피 하나뿐이다. 처음에 생각한 대로, 불길이건 급류건 뛰어들 따름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페넬로페 아가씨, 데니스가 제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도대체 무엇에 먼저 놀라야 할지 몰라 당황한 듯했다. 좋아, 일단 마음을 뒤흔드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잠시 후에, 제일 놀라운 것을 발견한 듯했다.
 “말도 안 돼!”
 작은 절규에 나는 웃었다. 사실인뎁쇼? 좀 오해하셨지만.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는 제게 부탁했습니다. 아가씨와 제가 함께 있는 걸 볼 수가 없으니, 제발 더 이상 가까이하지 말아 달라고요. 아주 절실한 부탁이더군요.”
 그녀는 공황 상태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잘 들리지 않는다. 잠깐의 뜸을 들여 그녀가 이성을 좀 찾길 기다렸다.
 “그럴 리 없어, 데니, 아니, 닥터 컨프턴이 그런 취향이었다니.”
 “정말! 저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데니스 이 사람, 겉으로는 전혀 내색도 안 하면서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니 말이죠.”
 페넬로페 아가씨는 백일몽을 꾸는 사람처럼 초점 풀린 눈으로 내 눈만 쳐다보고 있다. 핫, 이거 뭔가 재밌다. 조금만 더 놀려 볼까?
 “너, 너, 그래서 너는 지금 그를 데니스라고······ 부르는 건······.”
 아니 이거 안 되겠다. 이러다 뒷감당이 되질 않겠어. 이미 뒷감당은 안 될 상황이긴 하지만 장난이라도 이성애자로서 최후의 선은 넘지 말아야지.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대사는 최대한 거칠게.
 “사랑하는 여자에게, 흥, 얼굴만 반반한 용병이 집적거리는 걸 도저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어······? 잠깐, 잠깐만?”
 그녀의 다급한 외침은 듣지 않는다. 고개를 돌리고, 답답하다는 듯이 하늘을 보며 한숨 푹-.
 “하아, 내 여자는 내가 지킬 거라며 마구 화를 내시기에 저도 진저리가 났습니다. 귀족들의 사랑이란 원래 그렇게 깊고 일편단심인가요? 정말이지 당신이란 분, 제가 넘보기엔 너무 높은 성벽을 갖고 계시네요. 포기할 수밖에 없잖아요, 이러면. 휴우~.”
 마지막 한숨은 좀 작위적이었지 않았나 고민하며 힐끔 아가씨를 본다. 고개를 갸웃한 채로 눈도 깜빡이지 않는다. 음, 아마도 충격을 받은 표정이지? 역시나 이 아가씨 전혀 모르고 있었어.
 난 단순한 놈이다. 별로 대단한 계책도 모르고, 별로 대단한 통찰력도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게 됐다. 데니스 그 친구가 착하고, 성실하며, 그녀 한 사람만을 사랑해온 청년이란 걸.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란 놈은 문란한 과거는 있어도 순수한 사랑은 몇 번 해 보지 못한 놈이다. 밤에 사랑했던 여자가 아침엔 여자 마음도 모르는 놈이라고 욕한 적도 있다.
 그런 내가 사랑을 안다고 하면 웃기지만, 그래도 이번엔 내 작은 신념에 걸어 보았다.
 페넬로페는 좋은 여자다, 데니스는 좋은 놈이다. 그리고 좋은 여자는 좋은 놈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지그시 페넬로페를 바라본다. 그녀는 혼란한 표정으로 한 가지만 물었다.
 “정말······이니? 데니스가 그렇게 말했니?”
 아직 혼란한 감정만 가득한 그녀를 난 끝까지 최선의 연기로 대했다. 입꼬리에 웃음기를 머금고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다.
 “설마, 그 친구 짝사랑인가요? 이거 뭐야, 그럼 나한테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 아가씨, 혹시 나랑 놀 생각 아직 있다면 언제든지 와요. 나 아주 튼실하니까, 알죠?”
 목이 날아갈 헛소리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녀는 다행히 내 사족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혼자 중얼중얼, 여학자들의 천막으로 돌아간다.
 넋이 나간 듯한 그 모습에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저 모습이 짝사랑하던 상대에게 고백을 들은 소녀의 당황이어야 할 텐데. 난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 계신 아저씨, 한 번만 좀 도와주세요. 네?
 
 내가 하늘에 멍하니 제사를 올린 지 두 다경이 지났다. 여학자들의 천막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때가 된 것이다. 내려놨던 정신줄을 급히 찾아 잡고는 비상경계 태세를 취했다.
 사랑이니 뭐니 나답지 않은 것들을 너무 생각해서 그런가. 아무래도 오늘은 걸어 나오는 그녀를 마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4기가 들어와 부대 생활이 풀린 이후로는 처음으로 정자세를 취해 외부를 경계 중인 내게, 자박자박 발소리가 다가왔다.
 난 천천히 몸을 돌렸다.
 “히익?”
 내 얼빠진 목소리에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화가 나신 듯했다.
 아니, 이미 화가 나 계신 듯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아름다운 아미를 한껏 찌푸리고, 페넬로페보다도 더 심통 맞은 표정을 지은 채 내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페넬로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루포리? 그 애가 왜 그렇게 우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히 당신의 부하가 그 아일 깨워서 함께 나갔고, 당신과 한참 얘길 나눈 그 아인 돌아와서 한참을 울었어요. 울다 지쳤는지 지금은 잠들었지만······.”
 입을 떡 벌리고 보는 내게 아가씨가 예의 그 화난 표정으로 매서운 눈빛을 쏘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한 거냐니까요! 이러긴 싫지만, 나 정말 루포리를 미워할 수도 있어요. 내 말 알겠어요? 정말 화낼 거라구요!”
 나는 살면서 이렇게 귀엽고도 무시무시한 협박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당장 진지하고도 열렬하게 내 사정을 변명했다.
 사실만을 말하려고 노력했지만, ‘루포리 종마설’이나 내 몇몇 대사 등 망측한 부분은 살짝 왜곡해야 했다.
 한 다경에 걸친 내 전심전력의 변명에 그녀는 조금씩 화를 풀었다. 데니스의 내밀한 사랑 이야기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듣더니, 페넬로페와 내 대화 대목에선 숫제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응응, 그래서요?’ 하고 재촉한다.
 “그 말들은 사실 다 연기였습니다. 닥터 컨프턴이 레이디 클라시에를 사랑하고 있단 걸 전 가장 충격적으로 전하고 싶었죠. 들은 얘긴데, 불안정한 상태에서 고백을 받았을 때 여성들이 더 잘 받아준다고 하더라구요.”
 “아하하, 그런 게 어딨어요?”
 그녀가 밝게 웃으니 나도 마냥 기분이 좋았다.
 “제가 봤을 땐 닥터 컨프턴처럼 괜찮은 남자 흔하지 않거든요? 그런 친구랑 어려서부터 친했다면, 레이디 클라시에로서도 사랑에 빠지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아니라면 큰일이지만. 아가씨는 미소 띤 얼굴로 날 보고 있다.
 “루포리······ 우선, 아까 화낸 거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나는 깊게 고개를 숙여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혹시 이거······?
 “레이디 필모어, 혹시, 레이디 클라시에는······.”
 “응, 그래요, 루포리. 그 애, 데니스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데니스의 짝사랑이 아니었다! 정말 다행이다.
 “실은, 곁에서 보기에 좀 안쓰러웠어요. 같은 백작가라 하지만 무가인 클라시에 가문은 이미 그 힘이 쇠락해 가고 있었거든요. 비록 장자가 아니라 하나 촉망받는 젊은 컨프턴을, 몰락한 클라시에의 장녀는 데릴사위로 맞을 엄두를 낼 수 없었죠.”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그런 귀족들의 사정이 민망하다는 듯 땅을 시선을 돌리며 설명하고 있다. 귀족들의 연애에 집안이 중요한 건 뭐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뿐이면 어떻게 되련만, 소꿉친구였던 두 사람,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페넬로페는 데니스가 너무 멀다고 말하곤 했어요. 누가 봐도 완벽하고 눈부신 소꿉친구는 늘 그녀 곁을 지켰지만, 그 행운이 오히려 그녀에겐 자괴감이 된 거예요. 그녀의 단점까지 속속들이 아는 저 완벽한 사람이 그녀를 결코 사랑할 리 없다고 단정했던 거죠.”
 그녀는 힐끔 내 얼굴을 살펴봤다. 그러더니 따뜻한 한숨을 내쉰다.
 “나도 데니스와는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라 중재해 주질 못하고 그저 시간에 맡기고 있었는데, 아, 다행히도 신께서 무심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당신을 보내 데니스도 페넬로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알려 줬으니, 이제 두 사람은 모든 장애를 뛰어넘을 거예요.”
 오랜 고민을 털어놓듯 얘기한 그녀는, 이제 따스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뭘 했느냐고? 난 불경스럽게도 그녀를 외면한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나야말로 너무도 감사했으니까.
 “거기 가게 되면, 정말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황당한 혼잣말에 당황한 아가씨께 설명한다.
 “겁먹고 있었거든요. 만약에 레이디 클라시에가 제 말을 안 믿거나, 아니면 데니스를 좋아하지 않아서 신경 쓰지 않고 소문이라도 낸다면 어떻게 수습해야 되나 머리가 깨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저기 계신 알리오스가 제 소원을 이뤄주셨네요.”
 아가씨는 내 이상한 방식의 숭신(崇神)을 듣곤 밝게 웃었다. 그리고 물었다.
 “소원까지 빌었나요, 루포리? 뭐라고 빌었어요?”
 “좋은 여자가 좋은 남자를 좋아하게 해 달라고요. 근데 이거 너무 당연한 건가요? 하핫!”
 아가씨는 잠깐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렇게 이상한 소원은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다.
 아가씨는 이내 나처럼 즐거워했다.
 “응, 당연한 소원이네요. 그래서, 그 소원 이뤄질 것 같아요.”
 “하핫, 그래서 이렇게 기뻐하고 있잖아요? 맞죠?”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페넬로페와 이야기를 나눠야겠다며 눈인사를 남기고 천막으로 돌아갔다. 난 아쉬움에 그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5기 애들을 깨울 시간이 됐음을 깨달았다.
 새 하루의 시작이었다.
 
 식사 후에, 난 데니스와 페넬로페의 방문을 받았다.
 대단하다. 진실이 알려진 지 몇 시간이 되지 않아 이미 서로서로 달콤해진 듯 보이는 이 신생 커플은, 어째서 자기들끼리 달콤함을 나누지 않고선 이 솔로를 놀리러 온 것일까?
 “루포리, 너는······ 너의 약속을 지켰구나.”
 데니스는 감동받은 표정으로 꿈결처럼 말했다. 으으으, 닭살 돋아, 이 양반아!
 “고맙다, 넌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을 주었단다.”
 페넬로페는 한결 여유를 찾은 모습이었다. 이제 더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지 않아 부담을 던 나도 유쾌하게 대답했다.
 “닥터 컨프턴, 레이디 클라시에.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십쇼. 10년 안에 세계를 주름잡는 해결사가 되어 보이겠습니다. 이 문구 어떻습니까? 해결사 루포리 일스터- 연인들의 수호천사!”
 뜬금없는 농담을 지껄이는 내게 당황해서 ‘괜찮은 문장이다, 관심을 끌 수 있겠다.’ 등등 실없는 감상을 얘기하고 나서 그들은 말을 그쳤다.
 잠깐의 침묵 후, 데니스가 내게 기다란 목함 하나를 내밀었다.
 “네게 혹여 닥칠 위험에서 이것이 널 지켜줄 수 있다면 좋겠구나.”
 눈치를 살살 보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번개처럼 목함을 열어 본다. 선물은 역시 받은 자리에서 보는 게 제 맛 아닌가?
 목함 안에는 한 자루 검이 칼집과 함께 들어있었다. 호화로운 비단 안감 위에 놓인 검은 의장용 검처럼 아름답고 빛났다. 그러나 그 날과 재질은 결코 멋만 부린 의장용 검의 것이 아니다. 이 재질은 필시-
 “저기, 닥터 컨프턴, 이거 미, 미스, 스릴 아닙니까?”
 잠깐 고민하던 데니스가 밝게 웃었다.
 “아하하, 루포리, ‘미스릴’이라고 말한 거냐? 음, 네 생각대로다.”
 내가 까무러치기 일보직전 표정을 짓자 그가 변명(?)했다.
 “물론 도금일 뿐이야. 잘 벼린 칼에 아주 얇게 한 겹 미스릴이 덮여 있다고 하더군. 허나 그것만 해도 어지간한 전투에선 이가 나가지도, 부러지지도 않겠지.”
 에잇, 그뿐이 아니다! 같은 미스릴이 아니고선 어떤 칼도, 갑옷도 이 검을 막을 수 없다.
 도금일 뿐이라고? 아니다, 결코 부서지지도, 깨지지도, 녹지도 않는 신비의 금속 미스릴은 한 겹만 발라도 풀 플레이트 메일의 강도를 웃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게 문제가 아니다.
 미스릴로 만든 칼이란 건 마법시대의 유물로 이제는 만들 수도 없는 희소품, 즉 초고가의 사치품이란 말이다!
 “끄악, 못 받아요! 이런 걸 제가 어떻게 받습니까!? 이거 하나면 우리 용병대를 사고도 남을 걸요?”
 음, 이건 물론 과장이다. 애초에 내가 이 검의 재질을 알아본 것도 미스릴제 검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어디서 봤는지는 묻지 말라. ‘성난 소’ 용병대의 대장이 몹시 유명한 미스릴 검을 갖고 있다는 건 극비 중의 극비니까.
 데니스는 왠지 이상하다는 투로 갸웃거린다. 내가 뭔가 실수한 걸까? 데니스는 갑자기 웃었다.
 “하하, 루포리,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네게 준다고 했어?”
 응? 그 말 아니었나?
 “잠깐 빌려주겠다는 거야. 네가 이 검의 도움 없이도 몸을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만큼 강해졌을 때 내게 돌려줘. 그리고 그때 우리의 아이에게-”
 데니스는 페넬로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정한 눈빛을 주고받는다.
 “너의 그 강해진 검술을 가르쳐다오. 이 나라의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강한 검사가 되도록 도와줘. 이 검의 임대비용이 그 정도는 되겠지?”
 오오, 이 친구 장삿속도 있었군. 엄청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게 좋은 상재(商材)는 아닌 듯하지만.
 우선 목함을 닫는다. 누가 보면 큰일이니까. 그리고 곰곰 고민한다. 이걸 받아, 말아?
 페넬로페가 데니스와 눈짓을 하더니 내게로 다가왔다.
 “루포리, 넌 우리에게 커다란 선물을 주었어. 우리도 네게 뭔가 해주고 싶단다. 그 검을 못 받겠다면 다른 걸 줄 수밖에 없지.”
 응? 다른 거?
 그녀는 내게 좀 더 다가와 소곤거린다.
 “새벽에 네가 말했잖니? 튼실하니까, 언제든 불러달라면서?”
 끄아악! 끄아악!
 “이 검, 제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잘 지키다가 훗날 돌려드리겠습니다!”
 데니스는 웃었다.
 “아니, 그 칼로 네 생명을 지키라니까 그러네. 아무튼 받아 줘서 고맙다. 우리 아들 가르칠 검술도 잊지 말고 잘 만들어야 돼?”
 페넬로페가 데니스의 곁으로 돌아가자 이성이 좀 돌아온다. 휴우, 십년감수했다.
 팔자에 없는 검술 개발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며 그들을 배웅한다. 젊은 학자 커플은 정답게 대화하며 멀어졌다.
 “그런데 페넬로페, 어떻게 저 친구를 그렇게 쉽게 구슬렸어? 무슨 비결이 있는 거야?”
 “아, 그거? 응, 나중에 쟤가 말을 잘 안 들으면 말해. 가르쳐 줄 테니까.”
 무슨! 그걸 가르쳐 줬다간 데니스는 분노에 몸을 떨고 난 공포에 몸을 떨게 될 것이다!
 데니스의 말이라면 이제 무조건 복종하기로 결심하며, 떠나는 마님의 등에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다섯 시련의 기사’ 엘리제 리 시올리나 경의 생가를 이십 리쯤 앞둔, 푸르른 봄날의 일이었다.
 
 
 제 1 장 - 도래(到來)
 
 
 “그것이 너의 기사도이냐?”
 “제 마음이 가는 바일 뿐입니다.”
 “너의 마음은 오로지 기사일 뿐이지 않더냐?”
 “저는 이토록 이기적이고 편협한 기사도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인류의 기사도는 아닐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것은 분명 너의 기사도이다. 너는 인간의 기사이다.”
 
 - 신과 기사의 대화 中
 
 ***
 
 
 흐음.
 “헤헤······.”
 으음.
 “에헤헤······.”
 점심 무렵이 다가오며 나는 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일드야. 너 몇 대 맞을래?”
 “헉! 5기 15번 일드 에손, 주의하겠습니다!”
 흐음.
 “으헤헤······.”
 이 이상한 상황을 부연하자면 이 자식은 지금 망상에 빠져 있다.
 사실 아름다운 귀족 학자 아가씨에게 새벽녘 깨워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부터가 이놈에겐 평생 기억에 남을 일이련만, 그 아가씨가 나와 대화를 나눈 후 일행의 유일한 닭살 커플로서 급부상했고, 식사를 마친 후 곧장 날 찾아와 사의를 표했던 것이다.
 그 일련의 상황을 지켜본 일드는 지금도 숭배하는 눈길로 날 훔쳐보며 실실 웃고 있다.
 사내놈의 그런 눈길 받아 봐야 안 기쁘다니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일드의 착각을 내버려 두기로 했다. 내가 어떤 고생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든 간에 겉모양만은 일드가 본 그대로다. 거짓말로 변명하기도 뭣하고······ 그냥 두고 며칠 지나면 이놈도 시들해지겠지.
 아침나절부터 힘겹게 골짜기 하나를 지나, 이제 여로는 산등성이에 접어들어 있었다. 무성한 수풀 사이로 작게 뚫린 산길을 걸어간다. 나무 사이사이로 얼핏얼핏 산과 들이 아름답게 드리워졌다.
 목적지는 가깝다. 이 능선을 따라 산을 넘으면 다음 산자락의 초입에 영웅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일드, 영웅기사님 생가가 발견된 지 몇 년 됐는지 아냐?”
 일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웅기사님 생가요? 모르는데요?”
 이 자식 혹시······.
 “너 지금 우리가 어디 가는지는 아냐?”
 “지금요? 모르는데요?”
 이이, 멍청한 녀석!
 “우리가 가는 데가 영웅기사님 생가다! 발대식 할 때 졸았냐? 재작년에 심마니들이 영웅기사님 생가를 발견해서 발굴대가 몇 차례나 파견됐고, 이번엔 젊은 학자들의 체험학습으로 소규모 답사대가 꾸려져서 왕궁 기사들이 오지 않고 우리 용병대가 호위에 임하게 된 거라고 선배님들이 다 설명해 주셨잖아!”
 “아아, 맞다, 들은 것도 같네요. 그러고 보니 그랬어요.”
 하나도 기억 못한 표정이다.
 “휴······ 상식이니까 좀 알아둬라. 임펠런의 영웅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니까. 우리 민족의 자랑이라고?”
 일드는 멋쩍은 듯 웃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관이다.
 “역시 선배님은 대단하세요. 멋지고 강하고 똑똑하시기까지······ 존경합니다, 선배님!”
 커흠. 사실 내가 좀 멋지고 강하고 똑똑하긴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듣자니 민망하다. 헛기침을 하고 고개를 돌린다.
 앞 쪽을 보니, 마침 페넬로페가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날 보더니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드는 마녀 아가씨. 난 허겁지겁 몸과 말을 밀착시켰다. 왠지 보이지 않는 화살이 날아올 것 같았다.
 슬그머니 고개만 들어 보니, 마녀 아가씨 옆에서 유리에가 손짓하고 있다. 저 제스쳐는 오라는 건가?
 슬금슬금 말을 몰아 그 쪽으로 다가간다. 가다 보니 일드가 꼬리를 물고 따라온다.
 “어디 가냐?”
 “예? 선배님 따라서요······.”
 흐음. 뭐 안 될 건 없지만 이놈을 달고 다니려니 간이 오그라든다. 설마 귀족들 앞에서도 입방정 떨까 싶긴 하지만.
 “따라오는 건 괜찮은데, 학자 분들한텐 공손하게 인사하고, 말 거는 분 없으면 조용히 있어야 된다?”
 “네엣!”
 앳돼 보이는 통통한 얼굴이지만 이놈도 성인이다. 알아서 처신하겠지. 난 그렇게 꼬리를 하나 달고 아가씨들이 모여 있는 일행의 중심으로 다가갔다. 네 분 아가씨와 데니스가 거기에 있었다.
 “오, 루포리! 어서 와.”
 “어서 오렴.”
 백작가 커플에게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한다. 아우렐리에 아가씨의 눈인사가 내겐 더 반갑지만, 신분상의 법도란 게 있어서 여러 귀족이 있을 땐 그중 가장 높은 분께만 인사해야 한다.
 “푸로리이~.”
 유리에는 빨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내 쪽으로 말을 몰았다. 왠지 릴리아도 따라온다.
 조금 겁을 집어먹고 있자, 빨간 아가씨가 쭈욱 손을 뻗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응?
 “예쁘다, 푸로리. 잘했어~.”
 이잉?
 머리에 손이 하나 더 닿았다.
 “푸로리, 잘했어.”
 왠지 릴리아까지 푸로리다. 확실히 듣기 좋은 어감이긴 한데, 아무래도 사람 이름이 아니잖아, 그거! 강아지 이름이잖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멍청히 있자 릴리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미안. 그렇지만 루포리, 이상해. 루포리, 안 돼.”
 내 이름을 다르게 부른 걸 진심으로 미안해한다. 역시 착한 아가씨다. 난 그런 릴리아가 이렇게나 ‘루포리’를 꺼리는 까닭이 궁금해졌다. 단순히 이상하다고 놀린 게 아닌 듯하다.
 “레이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루포리’가 제국어로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까요?”
 릴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난 내 이름이 제국에서 어떤 식으로 쓰이는지 대충 눈치를 챘다. 유리에가 확인 사살한다.
 “아하하, 푸로리 이름은 제국에서 많이 쓴다? 응······ ‘루폴’이 여기 말로······ ‘여보’거든!”
 아버지, 소자 아무래도 강아지 이름으로 불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운명에 순응하고 있는데 머리에 있던 손이 이젠 내 손을 잡았다. 유리에였다.
 “히히, 루폴~ 다녀오셨어요? 밥은 먹었어요?”
 말은 빨간 아가씨가 하고 얼굴은 노란 아가씨가 붉힌다. 스무 살도 안 된 작은 아가씨들에게 놀림 받는 내 신세가 어쩐지 처량해졌다. 날 구해준 건 내 여신님이셨다.
 “유리에, 장난이 지나치면 허물이 되는 법이에요. 착한 청년을 괴롭히면 나중에 벌을 받게 되겠죠?”
 “몰라아~ 푸로리 놀리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철없는 유리에. 하기야, 이 아가씨는 이제 열다섯이나 됐을까 싶은 모습이다. 이렇게 장난치고 키득거리는 모습이 제일 잘 어울린다.
 하는 짓은 전혀 다르지만, 왠지 여동생이 생각난다.
 “레이디 필모어, 아마 괜찮을 겁니다. 사실 전 착한 청년이 아니거든요.”
 진실을 고백하자 유리에가 기뻐한다. 이젠 숫제 내 팔짱을 끼려 든다. 좀 위험하다 싶어 팔을 빼 내려고 토닥토닥 실랑이를 벌였다. 빨간 아가씨가 빨갛게 상기돼선 애원한다.
 “푸로리, 팔 줘어~.”
 “안 됩니다. 그러다 떨어지시겠어요.”
 냉정한 대답에 울상이 된 채 그녀는 내 곁에서 말을 몰았다. 맞은편엔 금발 아가씨가 말을 몰고 있다. 양 손에 꽃이다. 그녀들이 평민 아가씨였다면 나도 순수하게 기뻐하련만! 어쩔까 싶어서 눈치를 살살 본다.
 그런데 눈치가 빤하다. 다른 용건이 있는 분은 없는 것 같고, 유리에 아가씨가 그냥 놀자고 날 부른 것 같다. 귀족 아가씨와 농담 따먹으며 놀아도 되는 건지 좀 고민을 해 본다. 물론 다른 걸 따먹으며 노는 것보다는 건전하지만······.
 “루포리.”
 아우렐리에 아가씨가 다가오자,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난 찔끔해서 허리를 폈다.
 “옛, 용병 루포리 일스터!”
 “응, 루포리. 바쁘지 않다면 두 분 아가씨와 함께 있어 줘요. 두 분 다 당신과 있는 게 즐거운가 봐요. 그래줄 수 있나요?”
 어, 가만. 말을 낮춰달란 얘기, 어제 깜빡 했구나! 이거 갑자기 위험한 상황이 아닌가!
 흠칫하며 둘러보는데, 어째 내가 생각하던 반응이 없다. 오히려 페넬로페 아가씨는 날 보며 반응을 기대하는 눈치다. 음,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걸까? 좋아, 그럼 기대에 부응해 보자.
 “으아악, 레이디 필모어? 비천한 제게 말씀을 높이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 맹렬하게 눈짓을(말 좀 맞춰 줘요-) 보냈지만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배시시 웃기만 했다. 페넬로페가 킥킥거리며 대신 대답한다.
 “너무 놀라지 마렴. 아우렐리에는 집안의 하인들에게도 하대하지 않으니까. 더 친해지기 전엔 어림도 없단다?”
 헤에······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그나저나 친해지면 존대를 면할 수 있는 건가? 뭔가 이상하다.
 아무튼 아우렐리에 아가씨를 등에 업은 유리에는 신이 났다.
 “푸로리, 푸로리!”
 괜히 부르면서 해맑게 웃어 보인다. 문득 궁금해졌다.
 “레이디. 혹시 ‘푸로리’는 노루스 말로 무슨 뜻이 있나요?”
 “뜻? 그런 거 없는데. 그냥 우리 집 강아지 이름이야!”
 진짜 강아지였어!
 좌절하는 내 곁에서 유리에가 계속 떠들었다.
 “엄청 착하고 커다란 강아지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애거든. 그래서 너도 푸로리야. 괜찮지?”
 눈을 빛내며 물어보는 데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난 조용히 곁을 따르는 릴리아에게도 물었다.
 “레이디도 ‘푸로리’가 더 낫겠지요?”
 “······응.”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는데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난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냥, 예명이라고 생각하자.
 
 아가씨들은 천진난만하게 떠들었다. 일행에게서 조금 떨어지자 릴리아의 말수가 훨씬 많아졌다. 평소에 말이 없는 이유를 물어보자 그녀는 부끄러워했다.
 “서투르니까. 다른 학자들이 웃어서, 싫어.”
 음. 소녀의 마음이로세.
 유리에의 수다와 릴리아의 질문에 성실히 대꾸해주며 한 식경쯤 길을 걷자, 평평한 곳에 야영지가 하나 보였다. 먼저 몇 차례 이 길로 왕복한 왕궁 기사들이 야영했던 곳이다. 일행은 그곳에 짐을 풀고 점심 식사를 준비했다.
 유리에는 작은 체구 어디에 그렇게 힘이 넘치는지 말에서 내리자마자 내 손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저쪽에 가보자~ 아까 엄청 큰 나무가 있었어! 그치, 릴리아? 푸로리, 같이 보고 오자, 응?”
 “에이, 일행이랑 떨어지면 안 된다니까요? 마물이라도 나오면 두 분 다칠 수도 있어요.”
 “다쳐도 된다니까?”
 “안 돼요, 그럼 제가 죽으니까.”
 유리에는 여태 말을 타고 오면서도 저걸 보러 가자느니, 잠깐만 더 있다가 가자느니 제멋대로인 요청을 해 댔다. 나는 그녀를 말리고 끌고 하느라 지쳐서 벌써 녹초였고.
 자기 딴에는 이제 자리를 잡았으니 좀 돌아다녀도 되겠거니 싶었겠지만, 흥, 그렇게는 안 되지.
 내가 자리에 푹 주저앉으니 유리에는 울상을 지었다.
 사실 혼자서라도 가겠다면 나로선 따라가는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는 나름대로 착한 아가씨다.
 그 착한 아가씨는 릴리아가 말에서 내리자 쪼르르 달려가서는 내 욕을 시작했다.
 “푸로리가 나무 보러 안 간대에~ 나쁜 푸로리, 말도 안 듣구.”
 그러고 나니 왠지 릴리아도 아쉬운 눈치를 보인다. 열여섯 정도로 보이는 금발의 가련한 소녀가 작은 찡그림을 얼굴에 그렸다. 그녀의 저 표정은 왠지 내 양심을 쿡쿡 찔렀다.
 “푸로리, 저기, 같이 가면, 안 돼?”
 흐음. 저 나무인가?
 다시 보니 그리 먼 곳은 아니다. 잠깐 갔다 와도 괜찮을 것 같다.
 마음을 고쳐먹고 일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유리에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러면서 불퉁댄다.
 “쳇, 푸로리는 릴리아 말만 들어.”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주 공정하게 다수결에 의거해 결정한 거거든요?”
 “피, 말도 안 돼.”
 뭐, 이것도 나쁘지 않다. 일단 식사 준비에서 빠진다는 메리트가 있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조용히 쫓아오던 일드는 어쩔 줄 모르고 날 쳐다보고 있다.
 “밥 준비 잘 해라~ 나 학자 두 분 모시고 잠깐 저기 다녀온다고 얘기하고.”
 미안하지만 너까지 데려가는 건 4기 애들한테 미안한 일이라서. 내 이 인자한 마음씀씀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일드는 울상을 지었다.
 
 “네, 네, 레이디.”
 커다란 떡갈나무에 다가가며, 몇 번짼가 이어진 유리에의 질문에 몇 번짼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그녀는 날 째려본다.
 “푸로리, 너 왜 나한텐 그냥 ‘레이디’야? 페넬로페한텐 ‘레이디 클라시에’ 하고 부르면서어.”
 이런 억지쟁이가 또 없다.
 “레이디의 성을 모르니까요. 저한텐 아직 안 가르쳐 줬잖아요?”
 유리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날 봐서, 나도 덩달아 깜짝 놀랐다.
 “어? 몰라? 모른다고······?”
 혼란스러운 듯하다. 자길 몰라보는 사람이 퍽 생소한 모양이다.
 아, 어쩌면 이 아가씨, 노루스에서 굉장히 유명한 가문의 딸일까?
 “죄송해요, 레이디. 전 평민이고, 용병이잖아요. 레이디가 어느 가문의 영애신지 몰라요.”
 그제야 유리에는 이해했다는 듯 웃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실수했어. 푸로리는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데 말이야. 내 소개를 제대로 해야겠다.”
 내가 멈춰서 공손하게 서자, 그녀는 밝은 표정으로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반가워! 노루스 앰린 대공의 차녀, 유리에야. 앞으로도 잘 부탁해.”
 어라?
 앰린 대공은 세계의 유일한 대공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노루스 공국의 주인이란 거다. 그 앰린 대공의 차녀라는 건, 공왕의 따님이시란 거다.
 어라?
 “뜨어억! 모, 몰라 뵈었습니다!”
 내가 폭삭 바닥에 엎드리자 유리에는 불만스럽다는 듯 쳇쳇 거렸다. 화가 난 듯하다.
 “일어나! 내가 언제 엎드리랬어? 빨리 일어나서 악수하자구!”
 음, 아까 내민 손은 정말 악수하잔 뜻이었나? 이 아가씨 정말 별나다. 우리나라로 치면 왕녀인데! 어떻게 자랐기에 저렇게 혈기왕성하지?
 어쨌든 계속 엎드려 있긴 뭐해서, 벌떡 일어나서 손을 툭툭 털었다.
 그 모습에 유리에는 씨익 웃는다. 나도 마주 씨익 웃어줬다. 그리고 우린 악수했다. 용병들이 하듯이 소리 나게 탁!
 거 참, 별난 아가씨다.
 별난 아가씨는 작은 가슴을 쭉 펴고는 기쁜 듯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눈부셔서 바라보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난 릴리아의 성도 아직 모른다.
 내가 돌아봤을 때 그녀는 뒤돌아선 채 골똘히 뭔가 궁리하고 있었다. 조용히 다가가서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나는 미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 반갑습니다, 하늘의 첫 밝음이 있을 제, 그, 그, 찬란한? 찬미한? 이름이 있었듯이 오늘 그대를 만나 미욱한? 미려한?”
 “레이디. 그거 우리나라 귀족들이 처음 만난 사람과 나누는 인사말 아닌가요? 갑자기 왜 연습하세요?”
 “응?”
 뒤에 서 있는 날 눈치채곤 뱅글 제 자리에서 도는 릴리아. 밝은 금발이 흩날리며 햇살에 눈부셨다. 그리고 그녀는 굉장히 당황한 표정으로, 오른손을 쭉 내밀었다.
 아아, 나쁜 건 쉽게 물드는 법이야, 정말로.
 “유클리드, 리힐딘 후작가의, 릴리아. 반가워. 저기, 루포리 일스터.”
 모쪼록 너무 물들어서 유리에처럼 되지는 말란 뜻에서, 난 방금 전관 다르게 두 손으로 릴리아의 손을 모아 쥐고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용병 루포리 일스터, 레이디 리힐딘을 뵙습니다.”
 잠깐 그러고 있는데 무언가 등을 토닥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릴리아의 손을 놓고 살짝 뒤를 돌아보니, 유리에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내 등을 때리고 있었다.
 “나랑 전혀 다르잖아아~ 푸로리 미워!”
 아아, 난 죄 많은 남자다.
 그렇지만 어머니도 믿지 못하시겠지, 내가 그 ‘앰린’을 울렸다면 말이야.
 
 “우와아, 크다아~.”
 유리에가 감탄한다. 릴리아도 놀란 표정으로 내 소매를 잡았다.
 “무슨 나무? 어떻게, 이렇게 커?”
 “저흰 오크나무라고 불러요. 원래 이렇게 큰 나무는 아닌데, 어쩌다 이만큼 컸는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가까이서 본 오크나무는 심히 거대했다. 살면서 소나무도 마흔 길(40m)이 넘는 건 별로 못 봤는데, 이 오크나무는 예순 길(60m)은 되어 보인다. 자연의 신비로세.
 “헤헤, 올라가 볼까?”
 유리에가 터무니없는 욕망으로 두근거리며 나무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동안, 릴리아는 품속에서 작은 책자를 꺼냈다. 그리고 바닥에서 상태가 좋은 오크나무 잎을 몇 개 집어 들었다.
 아쉽게도 그 널따란 잎들을 꽂기엔 책자가 너무 작았다.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아가씨들이 떠들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난 아주 오랜만에, ‘귀족’이란 존재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저 아가씨들은 무척 천진난만하고 착하다. 그래선지 내게도 무척 친절하다.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너무도 아름답다. 외모만이 아니라 그 마음이 아름답기 그지없어서 평민에게도 쉽게 말을 놓지 않는다.
 데니스는······ 음, 신분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는 친구 같다. 그 만능·완벽의 반대급부일까, 성격적으로는 ‘경멸’이나 ‘천시’같은 부분이 결여돼 있는 듯하다.
 페넬로페도, 내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귀족 청년들도 참 마음씨 좋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이 집단은 정말 특이한 귀족들만 모인 집단이다.
 애초에 친분이 있는 학자들끼리 모여서 학회에 가입한다고 한다. 끼리끼리 모이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그러니, 아마 이들이 전부가 아닐까?
 이 임펠런 안에서, 사람의 마음을 갖고 있는 귀족이란 건 말이다.
 
 “오오, 드디어 도착했군! 저곳이 다섯 시련의 기사님의 생가!”
 “이게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어. 내가 이곳에 오게 되다니!”
 청년 학자들이 기쁜 마음을 못 가누고 한 마디씩 외친다. 데니스도 한 몫 거든다.
 “위대한 시올리나 경께 영광 있으리!”
 여학자들도-그처럼 시끄럽진 않았지만- 흥분을 숨기지는 못했다. 우리 용병 애들조차 술렁술렁 설레고 있는 터에 학자인 그녀들이 차분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늘 있는지 없는지 조용하던 노학자 어르신도 눈물을 글썽거리며 크게 외친다.
 “영웅기사님께 영광 있으리!”
 난 일드를 보았다. 이 녀석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목적지도 모르던 녀석이었건만 지금은 설레는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한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데, 도착하고 나서 함부로 이것저것 만지면 안 된다. 탐색하러 온 건 저분들이고, 우린 호위하러 온 것뿐이니까.”
 “에이, 선배님도 참. 그 정도는 알고 있슴다.”
 상기된 얼굴로 못미더운 소리를 한다. 뭐, 알아서 하겠지.
 멀리서 자그맣게 보이던 건물이 조금씩 다가가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세월이 세월인지라 폭삭 삭은 건물이다. 원래 어떤 크기의 어떤 건물이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지금은 지붕도 없는 폐허가 되어 있다.
 아마 나무가 썩어서 무너졌거나 발굴대가 탐색 과정에서 무너지지 않게 제거하거나 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영웅기사님의 생가 앞에 다다랐다.
 보기엔 그냥 폐가였지만, 왠지 모두들 감동에 몸을 떨고 있다. 페넬로페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 심정, 이해한다. 기사의 딸로서 느꼈던 그간의 설움을 보상받는 기분도 들겠지.
 늘 뒤에서 따르던 노학자가 이번엔 앞장서서 대문을 젖히고 장원에 들어섰다. 학자들이 그 뒤를 따르고, 우리들도 슬금슬금 대문을 지났다.
 꼬랑지엔 5기 애들도 따라붙고 있다. 지금 야영지를 만들고 식사 준비를 해야 할 녀석들인데······.
 흐음. 저놈들도 임펠런 국민인데, 잠깐만 놔두자.
 넓지 않은 장원은 의외로 볼만했다. 건물은 다 썩고 무너졌지만, 정원의 연못과 커다란 소나무는 건재하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만 어떻게 하면 지금도 정원으로서 부족하지 않을 것 같다.
 노학자와 청년 학자들이 다 무너진 건물에 들어섰다. 어째선지 여학자들과 데니스는 밖에서 기다리는 눈치다. 아홉 명 들어가기에 좁아 보이지는 않는데, 왜지?
 페넬로페와 웃으며 대화하던 데니스가 날 발견하곤 웃으며 다가왔다.
 “정말 좋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영웅이 나신 곳을 찾아와 그 기상을 느낄 수 있다니 말이야.”
 “그런데 왜 다 같이 들어가시지 않습니까? 더 무너지거나 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내 질문에 데니스는 웃었다.
 “아, 넌 몰랐겠구나. 이 건물은 지하로 3층까지 이어져 있어. 먼저 오신 학자 분들은 마법의 기운이 남아 있어서 지하실 바닥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두 조로 나눠서 들어가기로 했지.”
 앗, 그런 건가?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닥터 컨프턴.”
 “원, 별말씀을.”
 얘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여학자들도 우리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인사도 하기 전에, 릴리아가 타박타박 뛰어와 내 오른쪽에 섰다.
 “푸로리, 저 나무, 뭐야?”
 “아, 소나무라고 부릅니다.”
 왜 하필 나한테 묻는지는 모를 일이다. 데니스와 늘 붙어있는 페넬로페 아가씨는 그렇다 쳐도, 상냥한 아우렐리에 아가씨랑 같이 있었으면서 말이야.
 내가 그녀 입장이면 신나게 이것저것 물으며 수다를 떨었을 텐데.
 당연하단 듯이 유리에도 달려와 내 왼쪽에 섰다.
 “푸로리~ 푸로리~ 헤헤.”
 “예에, 예에.”
 유리에는 정말, 무척, 많이 사랑하는 애완동물을 볼 때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본다. 기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끙, 모르겠다.
 난 양쪽에 두 아가씨를 달고 페넬로페와 아우렐리에 아가씨께도 인사했다.
 “긴 여정에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는지요, 레이디?”
 “그래. 고생했다, 루포리.”
 그러면서 페넬로페는 데니스의 곁으로 가서 달라붙었다.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차분한 걸음으로 내 앞에 왔다.
 “루포리. 먼 길에 고생했어요. 그나저나 우리 둘은 얘기할 기회가 별로 없네요. 그렇죠?”
 그러면서 상큼한 눈웃음 한 번!
 “제게 레이디 필모어를 모실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니 정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다른 때, 다른 곳에서 기회가 생기리라 믿고 있습니다.”
 음! 정말 그렇다. 우리는 새벽이 아니고선 둘이서 얘기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너무나도 슬픈 현실이지만 이제 몇 시간만 더 기다리면 되지, 히힛!
 내 여신님과 좀 더 대화하고 싶었지만, 눈치 없는 꼬마 아가씨가 날 잡아끌어 소나무 곁으로 데려갔다. 릴리아도 내 소매를 잡고 따라온다. 흐음.
 방금 전까지 내 앞에 여신님이 있었는데,
 지금은 한 그루 소나무가 있구나.
 이처럼 되는 일이 없는 용병은
 그저 내일 새벽만 기다릴 따름이다.
 “이히히, 푸로리 시인 같은 표정 짓네?”
 아, 들켰다.
 “푸로리, 소나무, 꼬불꼬불해.”
 음. 유클리드엔 소나무가 별로 없는 걸까?
 “원래는 곧게 자라는 나무인데, 이렇게 구불구불한 것도 있죠.”
 릴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모습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애써 설명을 해 본다.
 “잎을 빻아서 차로도 쓰고 약으로도 쓴대요. 나중에 죽은 소나무에서 버섯이 나는데 그걸 복령이라든가 뭐라든가, 아무튼 먹으면 몸에 좋다고 그러던데요?”
 또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유, 귀여워.
 “소나무, 좋은 나무?”
 “예에, 좋은 나무.”
 그나저나 홀로 신난 유리에가 소나무 주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다. 저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싶어서 그쪽으로 다가가자,
 “꺄악-!”
 아니나 다를까 돌부리에 걸린 듯 길게 날아가는 유리에.
 그 쭉 뻗은 몸을 옆에서 받아내었다.
 “이런, 말썽꾸러기 아가씨.”
 말썽꾸러기 아가씨는 무척 놀란 듯했다. 옆에서 받다 보니까 내 왼쪽 팔은 유리에의 가슴 언저리에서 그녀를 지탱했다.
 순전히 우연하게 그렇게 됐다. 그래서 그녀의 심장 박동이 팔을 통해 강하게 전해지고 있다.
 음, 어리다곤 해도, 대공의 차녀 가슴에 팔을 댄 채 오래 있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난 살포시 그녀를 땅에 세워 놓았다.
 “으아악, 죽을 뻔했다아!?”
 이상한 소리를 하며 씩씩거리는 유리에에게 살짝 웃어준다.
 “그럼 제가 죽는다니까요?”
 유리에는 깊이 감명 받은 표정으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정강이를 찬다. 생명의 은인에게 하는 인사 치곤 꽤나 폭력적이다.
 “살려줘서 고마워!”
 한 방 더 찼다.
 아무리 어린 아가씨래도 힘을 모아 부츠 끝으로 정강이를 차면 용병 아저씨를 아프게 할 수 있는 법이다. 나 역시 무척 아팠지만, 꾹 참고 계속 웃어 보였다.
 “히히, 이걸로 용서해 줄게?”
 쳇, 난 구해준 것뿐인데 왜 용서를 구해야 되는 거야?
 속으로 불퉁대며 유리에가 넘어진 자리를 뒤적거렸다. 뭐가 감히 대공의 차녀 발을 걸어 넘어뜨린 걸까? 찾아서 칭찬 좀 해줘야겠다.
 두 아가씨는 내가 뭘 찾고 있자 궁금해져서는 같이 쪼그려 앉았다. 난 곧 동그랗고 두툼한 돌덩이 하나를 들어올렸다. 오오, 이것이 감히 저 말썽쟁이 아가씨를······ 응?
 왠지 이 돌, 빛나고 있다?
 “빛나고 있다?!”
 “이상한, 돌!?”
 왠지 이상한 감탄사들에 둘러싸인 난 빛나는 돌을 높이 들어올리며 외쳤다.
 “데니, 아니, 닥터 컨프턴! 이 도, 돌 대체 뭘까요?!”
 데니스는 아까 말했었다- 이곳엔 아직 마법의 기운이 남아 있다고. 원래 돌은 빛나지 않는다. 이 돌은 빛나고 있다. 돌이 빛나는 것은, 칼로 쳤을 때랑,
 “마, 마법! 루포리, 그걸 당장-”
 마법이 발동할 때뿐이다!
 돌이 점점 뜨거워진다고 느끼며, 하늘로 던지기 위해 막 팔에 힘을 주는 순간,
 우리는 빛에 휩싸였다.
 
 ***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상기된 얼굴로 내 품에 안겨 있었다.
 “으응, 루폴~.”
 왠지 유클리드 말로 나를 ‘여보’ 하고 부른다.
 “사랑해요. 알죠?”
 아아, 알다마다. 나는 너무 행복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의 가는 허리를 꼭 껴안고 그녀의 입술에 내 입을 포개었다. 너무도 달콤한 맛이 났다.
 
 “휴우.”
 평생 기억에 남을 꿈이었어.
 좋은 꿈을 꾼 듯했다. 깨어나자마자 그 생각을 했으니까. 그리고 그 직후,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꿈은 순식간에 잊었다.
 “아우렐리에 아가씨!”
 외치며 누웠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몸 어디에도 부상이나 구속물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난 일어선 후 잠시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멍청히 서 있어야 했다.
 여긴 도대체 어디야······?
 영웅기사님의 생가도, 그 근처에 있으리라 짐작되는 삼림 언저리도 아니었다. 난 동굴 안에 있었다.
 위쪽 지반에 뚫린 구멍으로 빛이 조금씩 새어 들어와서 동굴 안은 그럭저럭 사위가 분간되었다.
 그건 좋다. 문제는 들어오는 빛이 ‘햇빛’이 아니라 ‘달빛’인 점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걸까? 한나절? 혹은 이틀? 사흘?
 잠깐 주변을 둘러보다가 사람 모습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갔다. 엎어져 있기에 뒤집어 보니, 유리에였다. 상처는 없고, 숨도 쉬고 있다.
 확인을 마친 후 다시 일어서서 둘러본다. 울퉁불퉁한 동굴의 바닥 이곳저곳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이제 분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그중 아우렐리에 아가씨의 모습을 찾은 난 곧장 그리로 달려갔다.
 “레이디 필모어, 정신 차려요!”
 그녀도 잠든 듯 누워 있었다. 내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금세 눈을 뜬다. 그리고 코앞에 드리워 있는 내 얼굴에 놀랐다.
 “어머! 어······ 뭐하고 있나요, 루포리?”
 예쁘게도 놀라는 사람이다. 다행히 몸에는 별 이상 없는 듯하다.
 “레이디 필모어? 침착하게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저는 지금 불경하게도 당신을 깨웠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아, 이해해요, 루포리. 그런데······ 저 이제 일어나도 될까요?”
 내가 뚜껑을 덮듯이 그녀 위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녀는 아직 주변을 보지 못했다. 난 천천히 몸을 젖혀 앉았다.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아주 침착하게 놀랐다.
 “여긴, 동굴이군요? 그 돌이······ 우릴 데려온 건가요?”
 빠른 판단, 좋은 분석이다. 아직은 가정일 뿐이지만.
 “에, 공간이동 마법이란 거 말씀이시죠? 일단 그런 것 같은데요- 저도 방금 일어났을 뿐이거든요. 그놈의 돌도 보이질 않고요.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레이디는 몸이 좀 어떠신가요?”
 질겁할 만한 상황임에도 그녀는 내게 애써 웃어보였다.
 “전 괜찮은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여기저기 쓰러져 있습니다. 닥터 컨프턴과 레이디 클라시에, 레이디 앰린, 레이디 리힐딘, 그리고······ 제 후배 일드 에손이 있더군요.”
 아무래도 마법에 휩쓸린 건 내 곁에 있던- 그러니까 내가 든 돌 근처에 있던 몇 명으로 한정된 것 같았다, 일드가 언제 내 곁에 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이제 그분들을 깨우겠습니다. 잠시 앉아서 쉬세요.”
 “아, 아뇨, 같이 가요.”
 혼자 남는 게 두려운 듯 조금 떨리는 목소리였다. 난 거의 본능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두우니 손을 잡을게요.”
 동굴 안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사리사욕에 가득 찬 변명이었지만,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믿어 주었다.
 우리는 유리에를 깨웠다. 그리고 유리에가 다른 학자들을 깨웠다, 커다란 비명으로.
 “꺄악! 꺄악! 꺄앗!?”
 대공가의 차녀가 큰 소리를 쳤음에도 동굴 안에선 다른 동물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다들 많이 놀란 듯 일어나자마자 서로를 부르며 무슨 말들을 했으나, 모든 목소리는 데니스의 외침에 묻혔다.
 “페넬로페! 페······ 아아, 정말 다행이다! 다친 데는 없어? 네가 잘못됐다면 난 정말······”
 학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난 후, 난 한 명이 부족하단 걸 깨달았다. 바위틈에 누워 코를 골고 있던 그를 발로 깨웠다.
 불명예스럽게 깨어난 일드의 반응은 가관이었다.
 “으헤헤헤, 이거, 꿈이죠?”
 머리를 한 대 때려 주자 정신을 차렸다.
 아무튼 일행이 모두 모이자, 중구난방으로 안부를 확인하고 있던 분위기가 사그라졌다. 일의 심각성은 이미 모두 느꼈을 터였다.
 데니스가 혼란스런 표정으로 화제를 입에 올렸다.
 “우선 루포리, 네게 묻자. 아마 이건, 그 돌의 마법이겠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모든 분들께 사죄드립니다. 제가 함부로 행동하는 바람에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제 책임이 큽니다.”
 탓하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 마, 네 잘못이 아니니까. 우리도 설마 집 밖에 그런 아티팩트(artefact=마법도구)가 남아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는걸. 차라리 아티팩트를 빠뜨리고 간 발굴대 학자 분들의 잘못이겠지.”
 마음씨 좋은 데니스는 날 감싸준다. 페넬로페가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이다. 혹시 자그마한 생채기라도 났더라면 저렇게 착한 사람이라도 화를 냈을지 모를 일이다.
 데니스의 곁에 붙어 불안한 시선으로 동굴을 둘러보던 페넬로페가 오늘의 본제를 말했다.
 “여긴, 정말이지······. 루포리, 네 생각을 말해 보렴. 여긴 도대체 어디지?”
 “아, 예.”
 지명을 받아 대답하며 한 발 나서긴 했는데, 경청하겠다는 표정으로 주목하는 학자들을 둘러보니 왠지 위축된다. 꽤 친해졌다곤 하지만 그래도 귀족들인 것이다.
 할 수 없이 일드를 쳐다보며 말을 시작했다.
 “우선은······ 그렇군요. 다들 느끼셨을 테지만, 우선 확실히 짚고 넘어가죠. 이 바다냄새와 멀리 들리는 파도소리로 여기가 바닷가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시원하게 인정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 사람 있을 리 없다, 나를 포함해서.
 “기온으로 보면 북해나 남해는 아닐 테니까, 아마 룽겔 만이나 동해안일 겁니다. 어느 쪽이든 말을 달려 한 달 이상을 가야 하는 거리죠. 전 마법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데, 혹시 레이디 리힐딘은 이 정도의 이동 마법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고전시대의 신을 알고 있던 릴리아라면 마법시대의 마법에 대해서도 해박할 수 있다 싶었는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마법, 몰라. 우리, 멀리 왔어.”
 “어, 이런 장거리를 뛰어넘는 이동 마법은 모르신단 말씀이죠?”
 릴리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학자들도 동의하는 눈치다. 잠깐 날 보던 그녀는 이내 웃음을 지우고 설명을 계속했다.
 “‘하늘의 방패’에 마법사 있었어요. 리오 캠벨, 당대에 가장 대단한 마법사였어요. ‘방패’, 공간이동 할 때, 십 리 이상은 안 했어요. 그게 공간 마법의 한계라고 누군가, 말한 기록은 없어요. 그렇지만 저는 그 사람보다, 공간 마법, 잘 한 사람, 없다고 알아요.”
 아우렐리에 아가씨도 동의했다.
 “그래요. 그는 ‘방패’의 작전을 위해 공간 마법을 오랫동안 연구했다고 해요. 그런 그가 하지 못한 마법이라면 어느 마법사도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근데 우린 여기 왔잖아? 마법 아니야?”
 유리에가 생각 없이 툭 내뱉었다.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곤란한 표정만 지었고, 내가 나서서 대답했다.
 “그렇죠. 그래서 겁이 나는 겁니다. 저야 마법이 뭔지도 잘 모르지만, 이런 먼 거리를 이동시키는 마법은 어떤 전설에서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며 사람들이 부풀린 민담에도 없는 마법을 우리가 겪게 된 거죠. 그 돌이 도대체 어떤 고명한 마법사가 남긴 마법 도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범상한 위인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주위를 의식해 말을 끝맺지 못하자, 데니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런 마법 도구가 아무 이유 없이 정원에 떨어져 있었을 리도 없고, 우린 어쩌면 그 엄청난 마법사의 계획에 말려든 건지도 몰라.”
 거기까지 말하자 유리에도 상황을 좀 이해한 듯했다. 신비로운 동화를 듣는 표정으로 ‘우화아~’ 하고 감탄한다.
 “그거 참 큰일이다?”
 그걸 자각을 좀 하시죠?
 “마지막으로, 저쪽에 좁은 굴이 하나 나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다른 곳은 암반으로 막혀 있어요. 그 통로도 지상으로 이어졌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우선 그쪽으로 가보죠.”
 내 의견에 반론이나 보충은 없었다. 공식적인 폐회 없이 회의가 끝나자 개인 정비 시간이 되었다.
 난 당장 출발할 생각으로 말한 거였지만, 아가씨들은 이 미지의 모험에 흥분한 듯 모여 서서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유리에의 정신없는 수다에 웃으며 화답하는 아우렐리에 아가씨만 여전히 침착해 보였다.
 난 홀로 굴을 바라봤다. 미지의 구렁텅이다. 달빛이 드는 구멍이 있는지 아주 컴컴하진 않았으나 이쪽보단 어두웠다.
 뭐, 잘 보이지 않는 안쪽은 어찌됐건, 입구는 두 명이 어깨를 맞대면 꽉 찰 듯 좁은 모양새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일드를 후위에 세우고 내가 홀로 앞장선다.
 그 안에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으나, 어차피 인원에 비해 전력이 턱없이 부족한 일행인 것이다. 안전을 염려한다면 후미에 전력을 배치하지 않을 수도 없다.
 대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꼬?
 학자처럼 고민하고 있는데 데니스가 다가왔다.
 “내게도 칼을 다오, 루포리.”
 “엇, 닥터 컨프턴?”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어깨 위로 삐져나온 잡종(bastard sword)의 손잡이를 가리켰다.
 “네 칼을 빌려줘.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손은 하나라도 많은 편이 좋겠지. 어쨌든 루포리, 지금 넌 칼이 두 자루잖아?”
 내게 칼이 두 자루······가 있긴 하다. 망토 안감에 숨겨둔 미스릴 보검을 떠올린다. 야영할 때 모포 대용으로 쓰는 망토인 만큼 안감은 두터웠고, 장검 하나 숨긴 건 티도 나지 않았다.
 데니스가 검을 들고 있다면 유사시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아마 실전 경험은 없겠지만, 잘 단련된 상체가 그의 훈련이 결코 어지간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에게 검이 있다면 아마도 페넬로페만큼은 그 어떤 위난에서도 무사하리라.
 “예에. 호위를 맡은 입장에선 염치없지만, 지금은 그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직무유기다, 이거. 대장장이가 손님에게 ‘손이 모자라니 좀 도와!’ 하며 풀무질을 시키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아아, 두 명이 다섯 명을 지키는 건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에 비해 세 명이 네 명을 지키는 건 열 배는 쉬운 임무다. 전투인원 한 명 차이지만 기댓값은 전혀 다른 것이다.
 보검은 애초에 그가 빌려줬던 것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이게 최선이겠지. 나는 망토를 벗기 위해 가죽 벨트를 풀었다.
 약간의 방어력과 따뜻한 잠자리를 제공하긴 하지만, 망토는 조용하고 신속한 행동에 방해를 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용병들은 보통 망토 위로 어깨에서 허리를 가로지르게끔 가죽벨트를 매어 망토를 고정하곤 한다.
 내 잡종의 경우 그 가죽벨트에 달아서 어깨에 메이는 식이어서, 망토를 벗기 위해선 가죽 벨트와 함께 바닥에 내려놓아야 했다.
 데니스는 가죽 벨트를 집어들더니, 자기가 맸다.
 “줬던 칼을 다시 빌리는 것도 뭣하니, 이 칼을 좀 빌릴게.”
 “어······ 외나무되지만 그거, 안 어울리시는데요?”
 그는 밝게 웃었다.
 “핫하, ‘외람’이야, 이 친구야.”
 데니스는 웃으면서 페넬로페 곁으로 돌아갔다. 뭐, 좋아. 어쨌든 검을 꺼내야지.
 망토의 윗부분에 난 흠집에 손을 넣어 보검을 꺼낸다. 내가 늘 쓰던 잡종 검보단 열 치(30cm)쯤 짧은 아밍 소드 계열의 칼이다. 등에 걸기엔 짧아서 허리 쪽의 끈에 대충 꽂고 망토를 둘렀다.
 그렇지만, 문득 생각한다. 데니스가 내 실용주의적(그러니까 조금도 멋이 없는) 잡종 칼을 메고 있는데 내가 이런 보검을 차고 있어도 되는 건가?
 신분과 겉멋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을 하는데, 어느새 유리에가 내 옆으로 다가와 보검을 살펴보고 있었다.
 “와아, 와아, 푸로리 좋은 칼 찼네?”
 “에······ 제 검은 아니지만요. 아무튼 이 검으로 레이디 앰린을 지키겠나이다.”
 내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하자 유리에는 눈을 크게 떴다.
 “에엣? 푸로리 멍청이?”
 이 아가씨도 뜬금없이 그런 말을 했다. 난 멍청이인 건가? 제법 잔머리는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여기가 어쩌면 노루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머리를 스쳐 대공의 차녀에게 이제부터라도 공손히 대해볼까 했던 내 변덕은 금세 자취를 감췄다.
 “해 본 말이에요. 어쨌든 지키긴 할 거지만.”
 유리에는 잠깐 날 지그시 본다.
 “그건 고마워. 그래도 푸로리, 너무 무리하면 안 돼? 혹시 푸로리가 다치면 나 좀 슬플 거야.”
 이번엔 무척 상냥한 말을 했다. 이 아가씨가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나 싶어 대답하지 못하고 있자, 유리에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전에 싸울 때 보니까 미친개가 따로 없던걸? 조마조마해서 보기 힘들었어.”
 “예이, 예이.”
 상냥한 얼굴로 심한 말을 한 그녀는 사뿐사뿐 아가씨들 곁으로 돌아갔다.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어찌됐건 유리에는 호위의 0순위다. 노루스 대공의 차녀는 기록상 임펠런에 유학 와서 임펠런의 유적을 답사하는 중이다.
 지금 이 아가씨의 신상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임펠런 왕국에도 어떤 문제가 생길 거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중요한 분이 낀 답사대를 왜 고작 일개 용병대가 맡아 호위하게 됐는지는 지금 생각하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생각하기 싫은 일이나, 아우렐리에 아가씨와 유리에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면 난-
 음, 난-
 그러니까, 난-
 으으음······.
 “루포리.”
 “아! 레이디 필모어.”
 잠깐 고민하던 사이, 아우렐리에 아가씨가 내 곁에 와 있었다. 놀란 표정을 가까스로 감추고 미소를 그려보이자, 그녀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들어-
 내 턱에 살며시 가져다 대었다.
 “이런 상황이지만······ 루포리가 함께 있어서 참 다행이에요. 우리들끼리였다면 정말 큰일이었을 거예요.”
 “예? 에이, 과분한 말씀이십니다.”
 턱의 감촉에 멍해진 채 그렇게 대답했지만, 아우렐리에 아가씨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군요, 루포리? 레이디 앰린은 저렇게 보여도 실은 외로움도 많이 타고 겁이 많은 소녀예요. 레이디 리힐딘도, 지식은 깊지만 바깥세상엔 처음 나온 거나 다름없어 무척 혼란스러울 거예요. 그 점은 데니스나 페넬로페도 다를 바 없죠, 영지 안에서만 지내온 아이들이니까. 하지만, 봐요. 지금은 누구도 불안을, 비관을 입에 담지 않고 있네요. 오히려 입가에 작은 웃음을 머금고 탐험을 기대하고 있죠. 도대체 어떤 마법을 부린 건가요, 루포리?”
 아아, 나, 마법사였던가?
 너무나 맑고 포근한 여신님의 목소리에 반쯤 정신을 놓은 채, 난 그런 생각을 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아까 루포리가 절 깨우기 전에, 저 실은 살짝 깨어 있었어요. 몽롱했지만 조금은 기억나요. 무척 두려워하고 있었죠. 눈도 뜨지 못한 채, 그 돌이 빛을 뿜어내던 순간 떠올렸던 수많은 불길한 상상들을 곱씹어보고 있었어요. 그리고 눈을 뜬 순간, 루포리의 얼굴을 본 순간 아, 아무 일도 아니었구나, 다 잘 풀리겠구나, 하고 안심했어요. 정말, 이상한 일이죠?”
 아아, 그런가······.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할 것 같던 아우렐리에 아가씨가, 솔직한 표정으로 진심을 말해왔다.
 그래, 그랬으리라. 난 대체 왜, 이 여린 아가씨를 어떤 초월적인 존재로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던 걸까?
 이제 스물이나 됐을, 무척 아름답고 차분하지만- 어리고 순수한 처녀다. 무척 놀랐을 것이다. 무척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걱정하는 날 위해서 놀라지 않은 척 침착한 모습을 보이려 애썼던 그녀······ 왠지 가슴 한구석이 찡했다.
 “걱정 마세요. 정확하게 예지하신 겁니다, 이거. 아무 일도 아니고 다 잘 풀릴 테니까요.”
 내 호언장담에 아우렐리에는 밝게 웃었다.
 “예, 루포리를 믿어요.”
 그리고 그녀도 학자들 쪽으로 돌아갔다.
 조오오오-았어! 대공 차녀고 여신님이고 서적 소녀고 닭살 커플이고, 내가 다 지켜내 보이겠다! 걱정 따위 어디 끼칠까보냐!
 내가 결연한 의지로 그렇게 불타오르자, 있는 듯 없는 듯 곁에 있던 일드가 배시시 웃었다.
 “은근히 단순하신 구석이 있으셔요, 네.”
 난 넓은 아량으로 녀석의 발을 밟아 그 오해를 불식시켜주었다.
 
 “에,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휴식시간 동안 다른 동물의 기척이 전혀 없던 게 좋은 징조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쓰며 출발을 알린다.
 내가 선두에, 데니스를 필두로 한 학자들이 가운데 서고 후위에 일드가 섰다. 방금 전까지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떠들고 있었지만 학자들도 완연히 긴장한 눈치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미지의 세계로 탐험을 떠나는 모험가다.
 굴은 밖에서 본 대로 퍽 좁았다. 그 점은 어쩌면 다행일지 모른다. 적어도 포위당하거나 돌파당할 염려는 없다- 나 혼자서도 정면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발에 닿는 바위 역시 단단해서, 땅에 숨는 마물들도 이런 지반을 뚫고 튀어나오진 못할 것이다.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조금씩 발을 옮긴다. 구불구불한 굴은 미세하지만 분명 오르막길이었다. 지상으로 연결된다면 좋으련만······.
 마치 사람이 길을 내려고 파 낸 것 마냥, 막히는 일도 넓은 공동이 나오는 일도 없이 그저 그런 바위길이 이어졌다.
 하나 좋은 징조라면, 달빛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굴이 한 번씩 꺾일 때마다 빛은 조금 더 밝아졌고, 아홉 번째 굽이를 돌아 나온 직후엔 이제 발치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걷는 데 무리가 없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내가 그 위화감을 느낀 것은.
 말없이 걸음을 멈춘다. 두어 걸음쯤 거리를 두고 따르던 데니스도 멈춰서야 했다.
 “루포리······? 무슨 일이야?”
 “잠시만요. 어이, 일드. 다들 무사하시냐?”
 방금 한 굽이를 돌아 왔기에 내게는 뒤쪽 일행이 보이지 않는다. 이내 일드의 목소리가 대답했다.
 “예, 다 무사하신데요?”
 난 데니스를 보았다.
 “닥터 컨프턴, 하나 여쭙고 싶습니다.”
 그는 약간 긴장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아홉 굽이를 돌며 굴을 걸었습니다. 혹시, 한 번이라도 빛이 드는 구멍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잠깐 고개를 기울이더니, 그도 말을 잃었다.
 “어······ 잠깐만, 이상한데, 이건, 그럴 순 없잖아? 아니, 난 분명히 하나도 못 봤지만 분명히 어딘가 빛이 들어왔기에 이렇게······ 밝은 게 아니겠어······?”
 말을 하며 내 뒤를 보던 그가 인상을 찌푸린다. 내가 보던 것을 그 역시 보았을 것이다. 그는 굴의 다음 굽이를 보고 있다.
 열 길(10m)쯤 떨어진 곳에서 굴은 다시 꺾인다. 그리고 그 굽이로 얼핏 보이는 다음 통로는, 달빛이 직접 닿는 지상인 것처럼 밝았다.
 그러나 그 바위로 둘러싸인 둥그런 통로가 지상일 리는 없다. 그곳은 ‘밝은 굴’이었다.
 거의 직각에 가깝게 꺾이는 아홉 개의 굽이 길을 반사광만으로 밝히는 이 빛. 이 빛의 원천이, 아마도 저 굽이 뒤나, 그 다음 굽이 뒤에 있을 것이다.
 그 원천이 무엇일까 따위의 고민을 접어둔 채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게 무엇이건 관계없다. 빛이 어디서 나오건, 우리가 처한 상황이 더 안전해지거나 더 위험해지는 일은 없다. 분위기는 다행히 어둡지 않았지만,
 애초에 우린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다.
 점점 밝아지는 동굴에 놀라는 아가씨들의 탄성을 뒤로하고 난 계속 걸었다. 무엇이 있지? 이 뒤엔 무엇이 있지?
 이미 굴이라고 볼 수 없는 밝은 빛 속에서 열두 번째 굽이를 돌았을 때, 나는 그것과 마주했다.
 빛으로 가득한 공동이었다. 거기엔 단 한 뼘의 그림자도 허용하지 않을 듯 충만한 빛이 있었다. 그렇지만 어째서일까, 눈은 부시지 않다.
 세상을 은은히 비추는 달빛처럼 그 빛은 공동을 지배하지 않고 그저 이 공간에 기대어 있었다. 그리고,
 빛이 집중된 공동의 정중앙에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빛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새하얀 여성이 그곳에 서 있었다.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무어라 설명해야 옳을까?
 빛으로 가득한 하얀 공동에서, 은발과 은빛 갑옷으로 무장한 그녀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부츠가 분명 땅에 닿아 있었으나 그녀는 땅의 중력에 조금도 구속되지 않은 듯했다- 어떻게 보면 ‘떠’ 있었다!
 현실감각이 이상해진 게 틀림없었다. 그녀를 바라본다. 눈을 꼭 감은 채 떠 있는 여성······.
 냉정하게 보면 분명 여성 치고도 작은 키임에 틀림없으나, 그녀가 나보다 키가 작다고 누가 말한다면 못 믿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 공동 모든 곳에 있었으며, 빛이었으며,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기사였다.
 단언컨대, 그녀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었다.
 정돈되지 않은 생각을 하며 공동 안에 한 발을 내딛었다.
 터벅.
 내 발소리에 내가 놀란다.
 그래서였을까- 나처럼 내 발소리에 놀란 것처럼- 공동의 주인이던 그 밝고도 은은한 빛이 그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갑작스런 어둠은 내 시야를 한순간 제한했다. 그러나 이내 완전한 어둠이 아니란 걸 깨닫는다. 공동은 뚫린 천장으로 달빛을 듬뿍 받고 있었
 시야는 금세 회복된다. 그리고 은빛의 기사가 움직였다.
 한순간, 그녀가 내게 다가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내 침입에 격분해 다가오는 거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했다.
 다음 순간, 나는 몸을 튕겼다. 그녀는 내게 다가오려던 것이 아니었다.
 “어, 어어, 루포리?!”
 뒤에서 데니스의 얼빠진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무작정 몸을 날려 하얀 기사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이게 웬 뜬금없는 첫 만남인가 생각한다.
 변명 같지만, 일단 말해 두자.
 그녀는 쓰러지려고 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분명히 그랬다. 그랬기에 난 몸을 날려 그녀를 받아주려 했다.
 그러나 도중까지 스르르 무너지던 그녀가 한순간 다리에 힘을 주며 몸을 세웠다. 그 타이밍이 너무 나빴다.
 그녀를 돕겠다는 순수한 사명감으로 마구 달리던 나는, 갑자기 자세를 회복한 그녀의 하얀 이마에 턱을 박기 일보직전이 되어 있었다.
 간신히 발은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관성으로 몸은 기울어 있었고, 나는 팔을 펼치고 가슴으로 그녀를 껴안아, 충돌로 그녀가 입을 피해를 최소화했다.
 바람직한 행동이었다.
 ······근데, 논리적으로는 참 바람직한 일인데도, 이거 이상한 그림이겠지?
 “루포리, 그······ 뭐 하고 있는 거야?”
 아아, 답할 말이 없습니다, 데니스.
 이제라도 몸을 빼내고 데니스와 이 기사에게 해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은빛의 플레이트 메일로 둘러싸인 가는 팔이 다정한 연인을 안듯 나를 껴안고 있다. 그것도 매우 강하게, 꼬옥!
 왜, 대체 왜?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위기감에 덜덜 떨고 있을 때, 품속에서 간지러운 감촉이 전해졌다. 그녀가 내 가슴에 닿은 얼굴을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포리, 그것이 너의 이름이더냐?”
 달의 목소리······ 그렇게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맑은 목소리라면 물소리 같다고, 밝은 목소리라면 새소리 같다고 생각하련만, 난 왜 맑고도 밝은 그녀의 목소리가 달빛처럼 느껴지는 걸까?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단 이 손 좀······ 어흑!”
 그녀가 팔을 더 세게 조여, 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유를 몰라 벌벌 떠는 내게 그녀는, 왠지, 아마 아니겠지만, 쑥스러워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더 이렇게 있자꾸나. 네 냄새가 맡고 싶다.”
 너무나 당황스런 답변에 순간 머리가 비어버렸다.
 잠시 후, 내게서 무슨 냄새가 나는 거지 하고 생각한 나는, 그러나 그 순간 내 냄새가 아니라 그녀의 냄새를 맡아야 했다.
 비단처럼 부드러운 은발에서는 과일 향기가 났다.
 발소리가 난다. 학자들이 공동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학자들의 경악성이 들린다. 페넬로페는 아가씨들을 대표해 데니스에게 묻고 있다.
 “데, 데니스, 지금 이게······?”
 “아아, 나도 모르니까, 묻지 말아 주라. 빛 속에 저 여성분이 있었는데, 왜인지 루포리랑 서로 껴안고 있어. 그저 그것뿐이야.”
 “그것뿐일 리가 없잖아?”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데니스 역시 파악이 어려운 것 같다.
 그들의 토론을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생각한다.
 달의 목소리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투명했으며, 허망할 정도로 깊었다. 어느 곳에나 닿지만 어느 곳에도 닿지 못할 것 같은 목소리다.
 그 점이, 달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댓글(1)

tr****    
하늘의 방패의 맹주였던 다섯 시련의기사 가 시올리나라는 여기사인가요 문장을 제한테는 애매하네요
2020.09.26 04:34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