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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火神) 004 - 절맥

2012.06.20 조회 6,053 추천 8


 제 2장 절맥
 
  홍무 9년, 감숙성(甘肅省) 기련산(祁連山).
  며칠 전부터 내린 폭설로 길조차 보이지 않고 달도 뜨지 않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산속을 한 노인이 복잡한 표정으로 걷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분명 걷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한걸음에 최소 십장씩 거침없이 앞으로 나서는데다가, 지금도 계속 쌓이고 있는 눈 위에 발자국조차 남기지 않는 게 아닌가.
  “후, 이 근처라고 들은 것 같은데 아직 찾지를 못하겠구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거 큰일이군.”
  노인이 낭패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가장 높은 나무 위로 순식간에 올라서서 사방을 둘러본다.
  “호연이 그 녀석을 먼저 찾아간다는 게 깜박했군. 일단 산을 내려간 뒤에 찾아봐야겠어. 방향은 맞는 것 같은데 도저히 길을 못 찾겠군.”
  조용히 탄식을 한 노인이 사방을 둘러보고는 이내 산 아래를 향해 순식간에 사라진다.
 
 
  ***
 
 
  오십여 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산기슭의 작은 마을.
  “으으. 하아……. 아악!”
  한 여인이 방에 누워 천장에 묶어놓은 천을 부여잡으며 산고(産苦)에 한 시진이 넘도록 힘들어 하고 있다.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내쉬면서 한 번에 힘을 줘. 이제 조금만 더하면 아이가 나올 게야.”
  산파가 천천히 호흡을 유도하면서 산모를 격려한다.
  밖에서는 초조한 기색으로 한 사내가 안절부절 못하고 방 안에서 나는 신음소리에 계속 긴장하고 있다.
  “훈장님, 물이 다 끓었습니다요. 안에 넣어줘야 할 것 같은데 어찌 할까요?”
  “조심해서 잘 가져다 놓도록 하게.”
  사내가 벌써 네 번째의 솥을 들고 방 입구에 가져다 놓고 안의 산파에게 전한 뒤, 이내 반쯤 식어버린 다른 솥을 들고 나온다.
  “자네, 오늘 고맙네.”
  “이 정도야 뭐 별것 아닙니다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할 뿐인데 제가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이런 허드렛일은 자신 있습죠.”
  사내가 쑥스러운 듯 이내 머리를 긁으며 솥을 씻고 물을 받으러 간다.
  “후, 정말 괴롭구나.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니.”
  계속해서 마당에서 방 앞까지 정신없이 오가는 찰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기가 혜아의 집이 맞는가?”
  훈장이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니 아까 산을 헤매던 노인이 서 있었다.
  “마, 맞습니다만…… 어디서 오신 누구십니까?”
  “나는 혜아 할아비 되는 사람일세.”
  훈장이 깜짝 놀라 넙죽 절을 하며 말했다.
  “미리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는 혜매와 혼례를 치른 강현일(姜賢日)이라고 합니다.”
  “됐다. 그만 일어나거라.”
  불편한 기색으로 주섬주섬 일어나려는 찰나, 방안에서 또다시 여인의 비명과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산고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된 것이냐?”
  천백기가 애틋한 눈으로 방을 바라보며 물었다.
  “얼추 두 시진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저 아이의 몸이 약해 오랜 시간 버티기에는 역부족일터, 너는 산후를 대비한 준비는 하고 있었느냐?”
  “의괴(醫怪)가 만들어놓았다던 청명환(淸命丸)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청명환이라.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하겠구나.”
  “단지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내가고수가 필요하다는데 그것은 아직…….”
  “괜찮다. 그냥 먹어도 괜찮을 테지만 이왕 내가 왔으니 걱정 안 해도 될것이야.”
  “감사합니다.”
 
  그때 방안에서 또다시 신음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린다.
  “조금만 더.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으니 조금만 더 힘을 내 어서.”
  산파가 다급한 맘으로 산모에게 호통 친다.
  “으으……. 아악!”
  두 다리를 벌려 묶어놓은 천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산모가 또다시 힘을 쓰자, 아기의 머리가 살짝 내비쳤다.
  “자 다됐다. 아이의 머리가 나왔어. 호흡을 가다듬고 힘을 모아 준비를 해.”
  산파는 차분하게 산모를 격려하며 솥의 물 온도를 가늠한 뒤 그릇에 옮겨 담았다.
  산모가 몸이 약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산파도 내심 걱정이 든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산모와 아이 둘 중 하나는 포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계속 말을 걸며 일단은 출산을 유도했다.
 
  “아악!”
  계속되는 산통에 산모가 너무 지치고 힘들어하고, 또 아기의 머리가 보이지만 오래도록 나오지 않아 아무래도 둘의 목숨이 위험한지라 산파가 독한 마음을 먹고 말한다.
  “이보게, 아무래도 아이를 포기해야겠네. 더 이상은 자네도 위험해.”
  산모가 입에 물고 있던 재갈을 뱉으며 소리쳤다.
  “아악. 안돼요.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 아이만은 꼭 살려주세요. 내 아이. 차라리 아이를 살려주세요.”
  “아니야, 자네가 죽으면 아이도 죽네. 그럴 바엔 자네라도 몸을 보전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래도. 안돼요. 어떻게 가진 아이인데.”
  산파는 셀 수도 없는 많은 아이를 받아오면서 지금처럼 아이의 머리가 오랜 시간 빠져나오지 못하면 대부분이 사산(死産)이라는 것을 알기에 정말 답답한 심정이었다. 거기에 산모까지 몸이 안 좋지 않는가. 정말이지 자신이 대신 낳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 산모는 걱정 말고 자네는 아이를 받는데 최선을 다하도록 하게. 산모가 해를 입는 일은 없을 것이야.
  기척도 없이 어느 새 방안에 들어와 산모 옆에 앉아 있는 노인을 보며 산파가 놀라 뒤로 버둥대며 물러선다.
  “아, 아니 누구, 누구십니까?”
  - 말할 틈이 없으니 자네는 자네 할 일만 하게.
  천백기가 눈을 감으며 맥문을 통해 기를 통제하여 불어넣기 시작했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눈조차 제대로 뜨기 버거울 정도로 탈진한 산모가 어디선가 서서히 몸 안에 퍼지는 기운을 느끼며 옆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자신에게 기를 불어 넣어주는 천백기를 보며 눈가에 살짝 눈물을 내비친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흑.’
  다시 재갈을 입에 물고 산통을 이겨내며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로부터 일각 후, 드디어 아기가 세상에 나왔다. 사내아이였다.
  산파가 아이를 받아 노련한 손길로 탯줄을 끊고 조심스레 묶은 뒤 나머지 탯줄을 잘라 손질했다. 그리고는 아기를 거꾸로 들어 엉덩이를 내려쳐 식도에 잔재한 양수와 그 외 찌꺼기들을 뱉어내게 한 다음 아기의 폐호흡을 유도했다.
 
  “으앙! 으아앙!”
  아기가 사내답게 시원하고 큰소리로 울었다.
  “휴, 다행히 사산은 되지 않았구나. 천운(天運)이야.”
  산파가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아기를 따뜻한 물에 씻긴 다음 조심스레 깨끗한 천에 감싸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피로 범벅이 된 산모의 하체를 깨끗한 물로 씻고 닦아주고 묶인 양다리를 풀어 주었다.
  아직까지 천을 부여잡고 있던 양손도 손에서 천을 빼낸 후 아기를 안겨준 다음, 대충 정리를 마친 산파가 방문을 열고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강현일을 불러들였다.
  “사내아이네. 그리고 산모와 아기, 둘 다 무사하네. 그러니 이제 걱정 말고 잠시 후 들어와 보게나.”
  산파는 나머지 정리를 마치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생기면 부르라고 한 다음 방에서 빠져나갔다.
  산모에게 아기를 안겨 주었지만 아직 젖을 먹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느라 탈진하고 너무나 많은 기를 소모 하여 빈사상태였기에, 옆에서 천백기가 계속 기를 불어넣어주며 신체의 균형을 맞추는데 노력하고 있었다.
  끝이 없을 것만 같았던 내력이 계속 소모가 되었지만 여전히 산모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천백기의 파리한 안색에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리며 내력이 이할 남짓 남았을 때 겨우 산모가 눈을 떴다.
 
  “할아버지…….”
  천백기는 손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고 나서야 서서히 기를 가다듬었고, 곧 긴 호흡과 함께 눈을 떴다.
  “휴, 이 녀석아. 미리 연락을 하지 그랬느냐. 보름 전에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오기는 했다만,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어쩔 뻔 했느냐.”
  “죄송해요. 할아버지.”
  “아니다. 그런데 아직도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더냐? 그렇다고는 해도 이게 무슨 꼴이냐. 서로 조금씩 양보를 했다면 이런 멀고 험한 곳이 아니라 네 집에서 몸을 추스르며 편안히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휴, 어찌됐건 고생이 많았다.”
  “아니에요, 할아버지. 비록 전처럼 풍족하게 지내지는 못하지만 아이들 가르치며 보람 있게 살고 있답니다.”
  “에잉, 일단 몸부터 추슬러라. 아침에 다시 말하자꾸나.”
  “할아버지. 정말 고마워요.”
  천백기가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가자 몸을 돌려 가슴을 내어 아기에게 젖을 먹이기 시작했다. 아기는 마치 지금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힘차게 젖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 아기를 천인혜가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 예쁘기도 하구나. 많이 먹으렴.”
 
  ***
 
  천백기는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강현일을 불러 세운다.
  “자네는 나 좀 보게.”
  “예. 어르신.”
  옆의 큰방에 들어가서 자리에 마주 앉아 천백기와 강현일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현일이라고 했던가?”
  “예. 어르신. 강현일이라고 합니다.”
  “전에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자네 집안은 어디서 뭘 하는 가문인가?”
  “집안 대대로 대장간을 하고 있습니다.”
  강현일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민망하다는 듯이 말한다.
  “뭐? 대장장이? 흠, 그럼 조금 전 내가 오면서 들으니 훈장이라고 한 것 같았는데 그건 무엇인가?”
  “대장일에는 아무래도 재능이 없어서 공부를 조금 했습니다. 그리하여 향시에는 어떻게 합격을 했지만, 더 이상은 제가 부족한 탓인지 대과에는 매번 떨어졌습니다. 더 도전해보고 싶었지만 혜매의 몸이 좋지 않아 이곳에 자리 잡고 소일거리로 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괜찮군. 그것도 보람된 일일 테지. 그런데 흐음…….”
 
  천백기가 말을 대뜸 끊더니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강현일이 보기에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꾹꾹 참는 것 같아 물어보았다.
  “혹시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그게 말이야. 아기의 이름은 혹시 정했는가?”
  “아닙니다. 여아의 이름은 정해놓았으나 남아의 이름은 돌림자만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사내아이니 어르신께서 지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기 이름 때문이었던가. 아무래도 외가다보니 먼저 말을 못 꺼냈는데 강현일이 증손자의 이름을 직접 지어달라고 부탁하자 천백기의 안색이 환해졌다.
  “허허, 그런가? 정해놓은 글자가 무엇인가?”
  “운(雲)이라고 합니다.”
  “흐음, 구름이라. 그럼 용(龍)은 어떠한가? 아직 관상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만, 나의 피도 이어 받은 만큼 크게 될 터지. 암.”
  “용운(龍雲)이라……. 좋은 이름이군요. 감사합니다.”
  “허허. 아무래도 선물이 필요할 듯하구나. 일단 운기조식을 좀 해야 할 것 같으니 자네는 자리를 좀 비워주겠나?”
  “예, 어르신.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현일이 조용히 방문을 닫으며 아내와 아기가 있는 방으로 갔다.
  노인은 긴 호흡과 함께 품속에서 청아한 향을 내뿜는 조그마한 검은색의 단약을 하나 꺼내 입에 물고는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얼마 후 고요하던 노인의 주변에 아지랑이 같은 기의 흐름이 서서히 노인의 통제에 따라 회전하며 떠올랐다. 머리 위까지 올라간 아지랑이들이 순간 격하게 회전하며 하나의 큰 꽃의 형상을 띄는 듯 하더니 이내 정수리로 모조리 흡수 되었다.
  그리고 노인은 흡수된 기를 몸 내부에서 통제하며 정해진 순서에 따라 대주천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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