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선(魔仙)
序
“술 가져와! 술!”
낡은 초옥에서 호통소리와 함께 그릇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놈들 당장 오지 못해!”
아버지가 술에 취해 물건을 던지고 소리를 지를 때마다 담장 밑에 웅크린 소년은 옆에 앉아있는 어린 여동생의 손을 꼬옥 잡았다.
한 겨울 추위는 매섭기 짝이 없어 담장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어린 남매의 모습은 비를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하기 짝이 없었다.
추위와 두려움에 떨던 소녀가 파르스름한 얼굴로 소년을 보았다.
“오빠, 나 추워.”
“이거 입고 있어.”
소년은 단삼 위에 입은 더러운 외투를 벗어 소녀에게 덮어주었다.
소녀는 외투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에 몸이 풀리는 걸 느꼈다.
그러나 그런 만큼 홑옷만 입은 소년이 더 걱정되었다.
“오빠는?”
“걱정 마. 오빠는 세상에서 추위를 가장 타지 않는 사람이야.”
그러나 외투만으로는 혹한의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다.
“이리와. 오빠가 안아줄게.”
소년은 소녀를 품에 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파랗게 질려 있던 소녀의 얼굴에 혈색이 다시 돌았다.
“오빠, 우리 언제 들어가?”
“아버지가 곧 잠잠해지실 거야. 그때 들어가자.”
그러나 소년의 말과 다르게 초옥의 상황은 점점 더 흉포해져갔다.
“네 이놈들! 어디에 숨어 있는 거냐? 아버지가 가서 술 사오란 말 안 들려! 냉큼 가서 술을 사오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놈들아!”
소년은 공포에 질린 소녀를 보고 급히 두 손으로 귀를 막아주었다.
그러나 귀를 막는다고 듣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가서 비럭질을 하던 뭘 하던 상관없어! 무조건 술을 사오란 말이야!”
가슴을 졸이던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 것일까.
단삼만 입은 소년의 얼굴이 혹한에 지쳐 푸르뎅뎅해졌을 때였다.
마침내 초옥 안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소녀가 간절할 표정으로 물었다.
“오빠, 이제 들어가도 되는 거지?”
“아버지가 주무실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리자.”
주사가 거의 끝난 게 분명하고 단 일각도 비티기 힘들만큼 추운 날씨였으나 소년은 안전을 기하기 위해 더 기다리기로 하였다.
이는 소년의 성격이 치밀하고 참을성이 아주 강하다는 말이었다.
소년이 추위에 질려있는 소녀의 얼굴을 애처로이 보고 있을 때였다.
머리가 하얗게 센 선풍도골의 노인이 남매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남매의 집은 인가와 떨어져 있어 사람이 오지 않는 곳이었다.
한데 갑자기 모르는 노인이 나타나자 소년은 소녀 앞을 막아섰다.
“누굴 찾아오셨습니까?”
나이답지 않게 정중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대답 대신, 소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동네 어디에서나 볼법한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입술이 굳게 닫힌 모양새는 의지가 견정함을 보여주었다.
다만, 그뿐이라면 노인의 관심을 끌기에는 너무 모자랐다.
노인은 마치 그 자리에 못이 박힌 사람마냥 소년의 얼굴에서 한참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소년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바로 눈썹 사이에 세로로 붉은색 기운이 어려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일(一)자 형태의 푸른색 기운이 그 붉은색 기운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십(十)자 낙인을 보는 듯했다.
노인의 주름진 얼굴이 괴이하게 비틀렸다.
마치 반은 웃고 반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남매는 노인의 괴이한 모습에 몸이 움츠러드는 걸 느꼈다.
노인은 갑자기 하늘을 보며 폐부에서 짜낸 듯한 장탄식을 터트렸다.
“내 천지음양선인맥(天地陰陽仙人脈)을 찾아 수십 년 간 천하를 떠돌았음에도 끝내 찾지 못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 줄 모르고 엄한 데만 찾아다녔구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이 나이가 되어서야 깨닫게 되다니 이 또한 운명의 한 조화란 말인가.”
고개를 내린 노인은 혀를 찼다.
“한데 어찌 천지음양선인맥과 저주받은 혈미운(血眉運)이 같이 있다는 말인가. 아, 이 역시 난세를 위한 하늘의 배려라는 말인가. 아니면 내가 타고난 업보란 말인가. 참으로 애석한 일이로구나!”
천지음양선인맥은 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을 고루 갖추고 태어난 선체(仙體) 중의 선체로 선근(仙根)이 두터워 제대로 된 도학을 배우면 천선(天仙)에 이른다는 선문(仙門)의 지고한 신체였다.
그리고 혈미운은 살성을 타고난 자들에게 보이는 특징으로 손속이 잔혹하여 살심이 깃들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운명을 지녔다.
한데 소년은 놀랍게도 천지음양선인맥과 혈미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만약, 노인이 포기한다면 소년은 희대의 살성이 될 것이다.
탄식을 멈춘 노인은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야, 나와 함께 가자. 나와 함께 가서 도를 배우자구나.”
소년은 노인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음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간절한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몰랐으나 노인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노인에게 흐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소년은 처음 본 노인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무척 신기했다.
그러나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버지와 동생을 건사해야하는 책임이 있어요.”
노인은 품속에서 두툼한 주머니를 꺼내 소년에게 주었다.
“이 돈이면 네가 도를 이루고 하산할 때까지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을 게다. 이러한 기회는 천고에 없을 테니 잘 생각해보아라.”
그러나 소년은 대답대신, 소녀의 얼굴을 먼저 보았다.
소녀는 오빠가 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해보였다.
소년도 술주정꾼 아버지 밑에 동생을 두고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안 됩니다. 저는 동생을 버리고 갈 수 없습니다.”
“허허. 보기 좋은 우애로다.”
말을 마친 노인이 소매를 펄럭이는 순간, 남매는 이를 모를 조용한 산중에 도착해 있었다. 절벽 끝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었고 암자 안에서는 비구니의 독경 소리가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인이 소녀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와는 인연이 없으나 잠시 몸을 의탁하는 데는 문제없을 게다. 오빠가 너를 다시 찾으러 올 때까지 이 암자에서 기다리겠느냐?”
소녀가 노인을 빤히 보며 물었다.
“오빠에게 중요한 일인가요?”
“삼세(三世)동안 이어진 인연을 찾는 일이니 아주 중요하지.”
소녀는 노인의 말을 듣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나 곧 소매로 눈물을 닦고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오빠, 꼭 돌아와서 나를 찾아야해.”
“정말 괜찮겠어?”
“오빠가 올 때까지 한밤도 자지 않고 기다릴 거야.”
“네가 가지 말라고 하면 오빠는 할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을 거야.”
“아니야. 오빠는 저 할아버지를 꼭 따라가야 돼. 그런 생각이 들어.”
그 모습을 보던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주머니에서 단약을 꺼냈다.
“이건 몸을 보하는 단약이란다. 평생 무병장수할 수 있는 약이지.”
노인이 손가락을 튕기자 소녀의 입이 벌어지며 단약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노인은 이어서 허공을 격해 몇 개의 혈도를 짚었다.
소녀는 어느새 새액새액 거리며 잠이 들어있었다.
“너는 여기서 기다려라.”
그런 후 노인은 소녀를 안고 암자로 날아갔다.
“령(靈)아!”
소년이 급히 뛰어가 보았으나 이미 노인은 소녀를 암자에 데려다주고 돌아온 후였다. 소년은 참지 못하고 암자를 향해 달려갔다.
“너희 남매의 연은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니 곧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노인이 소매에서 바람을 일으키는 순간, 소년은 정신을 잃었다. 노인이 소년을 데려간 곳은 운남(雲南) 천유선원(天遊仙園)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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