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T
그래서 그날 이후로는 음악을 달고 살았다.
그렇게 버틴 것 같다. 그 당시 내가 처한 상황을 바꿀 수 없으니, 이곳을 벗어나는 길은 음악뿐이었다. 당장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없을 때는 이 장면에 어울리는 배경음악을 상상하기도 하고.
하지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그날에 어울리는 곡을 찾아보자면, 음··· 이건 좀 어렵네.
그래도 그날 들었던 노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암 라잇 TT! 저스트 라잇 TT! 이런 내 맘 모르고, 너무해! 너무해!
크~! 언제 들어도 명곡이란 말이지.
곧 돌아가실 것 같은 오래된 트럭의 덜덜거리는 소음 속에서도, 또와이스의 상큼상큼한 목소리는 귀에 팍팍 들어온다.
작은 냉장고며 썩은 매트리스, 연식 모를 컴퓨터 기타 등등, 자잘한 이삿짐은 이 용달차 하나에 알차게도 실렸다. 과속방지턱 하나를 넘어갈 때마다 뒤 칸에서 물건이 ‘덜컹!’ 함께 뛰어오른다.
가로수 대신 골목길의 전신주에 달라붙은 매미가 시끄럽게도 울어 댄다.
나는 아주 더운 여름날에 이사했다.
윤준, 31세.
한창 남들 정신 차리고 취직 준비할 동안, 작곡가가 되겠다며 집을 나왔다. 그렇게 독립한 지 어언 5년.
분명 목표는 최정상급의 작곡가였지만, 현실은 보다시피 시궁창이다. 애초에 작곡 관련 전공도, 지식도, 인맥도 없는 내가 무슨 수로 다른 이들을 따라잡겠는가.
우여곡절 끝에 어떤 소속사의 새끼 작곡가로 들어간 적은 있지만. 그게 사기였다. 계약 사기로 내 모든 돈과 멘탈을 날리고서, 작곡은 자연스럽게 접었다.
그러고는 알바를 전전하는 중인데. 근데 하다 보니 하필 또 음악 관련 알바다. 음악 쪽은 완전히 학을 뗐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또 그 주변을 맴돌고 있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어쩌면 내 맴인데 왜, 내 맴대로 할 수 없는 건 왜~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노래를 쌀쌀맞은 내비 언니가 싹둑 잘라 버린다.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하···.”
에휴, 내가 정말 여기까지는 안 오고 싶었는데. 옆머리를 긁적거리며 도착지를 바라봤다.
새로 이사 온 집은 다 쓰러져 가는 3층짜리 주택. 칠이 다 벗겨진 낡은 철문이 흉물스럽게 서 있다. 빨리하고 빨리 끝내자, 가장 먼저 트럭에서 밥솥부터 들고 주택 안으로 들어섰다.
밖만큼이나 안도 볼품없다. 주택 정원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깨진 항아리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다.
도대체 여기는 사람이 사는 건지 귀신이 사는 건지. 그러나 이 열악한 곳에서도 내가 계약한 곳은 궁창 오브 시궁창, 저어기 창고 옆 반지하다.
‘시바 냄새···.’
계단 입구에 당도하자 십 년 묶은 곰팡이 냄새가 훅 치고 올라온다. 어후, 한 번 더 한숨을 내쉬었다.
‘개 사장 씹 새끼···. 그놈만 아니었어도 여기까지는 안 왔을 텐데.’
이놈이 그놈이다. 내 돈 떼어먹은 새끼. 나중에 입봉(데뷔)시켜 준다면서 새끼 작곡가 일만 오지게 부려 먹고 내 앨범 제작비며 투자비 명목으로 도리어 돈을 뜯어냈다. 그리고 그 돈과 함께 사라졌다.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3천만 원. 정말 안 먹고 안 사고 그렇게 모은 돈이었는데···. 억대 사기였는데, 증거 불충분 등등으로 수사 진행은 미미한 상황. 이래서 소속사네 작곡가네 이런 이야기만 나오면 아주 넌덜머리가 난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까 더 덥네. 휴···.’
가만히만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 8월, 그것도 한낮에 몸을 쓰니 탈진할 것처럼 더웠다. 이삿짐은 대충 바닥에 늘어놓고 근처 마트로 갔다. 근데 드럽게 머네.
대로변까지 나가서야 마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당장 필요한 생수랑 아이스크림 하나 물고 마트를 나서는데, 아오, 눈부셔! 갑작스런 빛에 눈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이 시각 테러의 주범은 바로 길 건너 저놈. 길 건너편 새 아파트의 금빛 로고가 번쩍거렸다.
“뭔데 저렇게 요란하게 장식을 해 놨어? 뭐 얼마나 잘 지었다고···.”
동네 구경도 할 겸, 새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새로 지은 요즘 아파트, 살지는 못하지만 구경이나 실컷 하려고 했던 건데,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 저것은?!’
지금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새 아파트 단지에는 여러 가지 볼 게 많았다. 주차장을 전부 지하로 빼니 지상에는 산책 트랙, 분수대, 조형물 등등.
하지만 나를 확 끌어당긴 그것은, 경비실 옆 분리수거장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분을 영접한 흥분을 가라앉히질 못하고 네모반듯한 모양으로 지어진 이곳에 후다닥 들어갔다.
분리수거장으로 들어서니 거대한 마대 자루들이 시선을 압도하고, 깊이가 남다른 쓰레기 냄새가 훅 풍겨 올라왔다.
그러나 지금 저런 건 중요한 게 아냐, 지금 중요한 건!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난 무릎부터 꿇었다.
오 마이 갓··· 그분이 맞으시다!
무릎 꿇은 자세로 굽어보게 만드는 이 빨간 키보드는 바로 노드 스테이지2 EX.
전자악기 중에서 유명한 노드사의 건반 중에서 가장 상위 모델이다. 어쿠스틱, 피아노, 신시사이저 음색까지. 못 다루는 것이 없는 신시사이저 건반의 끝판왕.
게다가 색상은 노드사의 시그니처, 붉은 레드인데, 이게 악기 덕후들의 마음에 시뻘건 불을 지른다. 아주 후끈후끈하지!
쉽게 비유하자만 신시사이저계의 포르쉐라고 보면 되겠다. 가격도 세다. 중고가 3백5십 이상, 신품은 5백 정도. 함부로 데려올 수 있는 아이가 아니다.
그런데 이 귀하디귀한 분을 쓰레기장에서 마주했으니, 내 심장이 얼마나 두근 반 세근 반 했겠어!
‘이분이 왜 여기에, 와 이 씨, 잘사는 애들은 버리는 물건의 클래스가 다르구나?!’
살펴볼수록 놀라움의 연속. 심지어 정품인, 바퀴 달린 세미 하드 케이스와 같은 레드 컬러의 커버까지 옆에 조신하게 놓여 있었으니, 크흡! 악기 덕후는 웁니다.
‘심지어 상태도 괜찮아 보이는데?’
못 쓸 지경이니 이곳에 버렸겠다만, 그걸 의심케 할 정도로 기스 하나 없이 매끈했다.
‘···원일?’
매직으로 이름 같은 게 적혀 있긴 했다만, 이거야 뭐 지우면 그만이고.
자, 이제 나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째, 혹시 모르니 집에 가서 확인해 본다. 안 될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제대로 작동한다면 할렐루야~!
둘째, 혹시 모르니 집에 가서 확인해 본다. 안 될 수도 있지만 만에 하나 제대로 작동한다면 야래 야래 오야르~!
얘기야, 가자!
***
그렇게 이 더운 여름에 키보드를 들쳐 업고 머나먼 반지하까지 걸어갔다만···.
“아 X발···.”
깊은 빡침이 올라온다. 난 드라이버를 집어 던지며 바닥에 벌렁 누웠다.
노드 스테이지2, 저 개눔 새끼는 진작 매트리스 위에 집어 던진 상태였다. 저거 완전 갔다. 아주 영영. 안에 뭐가 터졌는지 아무런 소리가 안 나네.
그 먼 길을 낑낑거리며, 더위 속에서 땀을 줄줄줄 흘려 가며 업어 왔건만, 역시나 뻘짓이었다. 정신 차리란 뜻이었다면 제대로 된 일침이었다.
‘내 인생 왜 이러냐 진짜···.’
반지하는 숨만 쉬어도 우울한 그런 감성이 있다. 그래서 정말 여기만큼은 오고 싶지 않았는데···.
습한데, 더운 날씨에, 속에서까지 열불이 올라오니 아주 환장하겠다. 에어컨은 당연히 없기에 창문을 열었다.
역시 반지하, 창문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발목이 보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절반짜리 창문에서도 용케 바람은 불어왔다. 근데 더운 바람임. 에라이.
“에휴···.”
다시 바닥에 드러누웠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다. 근데 다 귀찮다. 잠시 눈을 감는다는 게 잠에 들었다.
기묘한 꿈이었다. 바닷속이었는데, 물의 감촉이 어찌나 생생하게 느껴지던지.
‘진짜, 물속에 있는 것 같다. 차갑고, 축축해.’
그렇게 몸을 한편으로 돌리는데 뭔가가 코에 훅 들어왔다.
“켁! 컥!”
와 씨 뭐야 왜 코에 물이? 흥흥,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코에서 물을 빼냈다. 어스름한 저녁, 내 방의 모습은 아주 가관이었다.
―쏴아아아···.
푹푹 찌는 폭염 끝에 내린 폭우.
도로를 따라 흘러내리는 장맛비는 창문을 통해 내 방 안으로 콸콸 쏟아 내린다. 이 폭포 실화냐.
황급히 창문을 닫았다만, 하, 이미 들어온 물들은 어쩌지. 벌써 물이 발목까지 고였다.
‘자, 잠깐만···.’
두려운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지만 이미 참사는 일어난 다음이다. 몇 개 안 되는 내 이삿짐, 다 바닥에 늘어놨었는데 다 잠겨 버렸다. 밥솥, 매트리스, 컴퓨터 본체···. 아 그만, 너무 슬프다. TT.
‘노드, 노드는?!’
아까 집어 던진 노드 스테이지를 보니 매트 모서리에 간당간당 얹어져 있었다.
‘이 새끼는 명줄도 기네.’
짐 덩어리 저거, 노드 스테이지를 흘겨보니 아직 선이 콘센트에 연결된 상태였다. 그리고 콘센트 바로 밑에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이걸 본 순간 등짝에 소름이 쫙···.
‘저, 저기에 물 들어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저기 물 들어가면 감전이 될 수 있다는 생각보다, 수리비 걱정이 먼저 들었다.
‘지금 여기 다 젖어서 도배장판도 욕먹게 생겼는데, 저기 물 들어가서 이 집 전기 설비까지 망하면··· 안 돼, 안 돼!!!’
그 뭐였지? 이승탈출 넘버원이었나? 예전에 채널 돌리다가 수해 시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 이런 거 보긴 봤는데.
‘이, 일단 코드를 뽑고, 그다음에 두꺼비집을 내리고, 그리고 또···.’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으며, 먼저 코드의 전선 부분을 잡아당겼다. 원래 콘센트 머리 부분을 잡고 쏙 뽑아야 하는데, 지금 손에 물 묻은 손으로 그랬다간 오히려 물을 넣는 셈이 될까 봐 그렇게는 못 하겠고.
이영차! 줄다리기하는 것처럼 전선을 손에 감아 확 뒤로 젖혔다.
암만 생각해도, 그날은 운수 나쁜 날이 맞았다. 그것도 오지게 재수 없는 날.
힘차게 뽑힌 검은색 코드는 꼬리 잡힌 실뱀처럼 휘익 날아올랐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는 이 뱀의 기다란 두 송곳니, 플러그 사이로 ‘티틱’ 푸른 스파크가 튀었다.
그러고는 이 위험한 이빨은 물기가 묻은 내 팔을 앙 물었다.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없다.
―쏴아아아···.
매트리스 위에 쓰러진 윤준,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그때 이 어둑한 방에 파르스름한 빛이 반짝인다.
아까 뭔 짓을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노드 스테이지에서 파르스름한 화면이 뜬다.
―새로운 사용자 접속. 동기화 진행 중···. 완료.
이제 푸른빛은 윤준의 두 손으로 옮겨졌다. 그 빛은 잠시 머물다가 사라졌다.
# 서머 페스티벌
―CHEER UP BABY~
CHEER UP BABY~
좀 더 힘내자~
상큼미 대폭발, 또와이스의 노랫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태연하게~ 아닌 척할래~ 아무렇지 않게~
내가 너 보고 싶은 맘 모르게~
just get it, together,
and then baby CHEER UP~
“응 자기야, 왜?”
누군가의 전화를 받으면서 벨 소리가 뚝 끊겼다. 전화를 받은 사람의 목소리는 점차 반지하 방에서 멀어져 갔다.
난 그렇게 눈을 떴다.
‘나··· 사, 살아 있는 거야?’
물난리가 난 바닥에 자빠진 채로 기절했나 보다. 그래도 상반신은 매트리스 위에 쓰러져서 살았다. 아니면 저체온증으로 갔을지도.
“아구! 아그그···.”
축축한 바지도 기분 더럽지만, 엎드린 자세로 기절했다가 일어나려 하니 허리가 아주 작살이 난 것처럼 아프다.
‘손은 또 왜 이래?’
두 손이 굉장히 저릿하다. 꺾인 채로 기절했던가?
‘근데 지금 몇 시야?’
하으, 아주 삭신이 안 쑤신 데가 없다. 어깨를 통통 두드리다가, 전 세입자가 두고 간 벽시계를 바라봤다. 시간은 벌써 오전 10시.
“아, 어, 으아 씨!!”
아 망했어! 난 후다닥 출근 준비를 했다.
***
최정상급 작곡가들이 한 해에 벌어들이는 저작권료는 11억~13억 정도.
음원을 받을 때, 행사에서 사용되거나 방송에서 틀어 줬을 때, 그리고 노래방에서 해당 노래를 부를 때에도 작곡가에게 일정 비율의 이익이 돌아간다.
그러니까 노래 하나 잘 만들면 돈이 계속 들어오는 거다.
하지만 그건 메이저들의 이야기고. 모든 작곡가들 벌이가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예술계가 그렇듯 작곡계도 빈부 격차가 심하다. 누구는 한 해에 십억씩 쓸어 담는다지만 누구는 십 원 한 푼 못 벌기도 하는 것이 현실.
그렇기에 인지도가 없는 작곡가들은 투잡을 병행하거나 생계형 알바를 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 점점 그 일이 본업이 되지. 지금 내가 그렇다.
내가 일하는 곳은 음향 렌트업체로, 이벤트 회사 외주를 뛰고 있다. 행사 음향 지원이 주요 업무.
이 회사에서는 소위 행사 뛴다고 할 때 공연팀이 행사할 수 있도록, 무대 설치, 음향, 조명, MC 섭외, 그 외 자잘한 가수팀까지 마련하는 일까지 두루두루 한다. 이 중 음향 기기 관련 업무는 우리한테 외주를 주는 식이다.
오늘의 행사는, ‘중랑구 서머 페스티벌’, 한강 변에 있는 야외무대에서 이뤄진다.
“여기서 세워 주세요.”
헐레벌떡 택시에서 내리니, 아직 더운 늦여름이긴 하지만 강바람이 나름 시원하긴 하다.
“형 저 왔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거대한 믹서, 스피커 사이에서 분주하게 손을 놀리는 빨간 모자 형은 구성진 욕 장단으로 응수했다.
“야 이 시발 새끼야, 늦으면 늦는다고 할 것이지 너 펑크 내는 줄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음향은 너랑 나랑 둘뿐인데 이럴래 이 씹 새꺄?”
“죄송합니다. 집이 물에 잠기는 바람에 폰이 먹통이 돼서, 알람도 안 되고 전화도 먹통에, 아무튼 늦어서 죄송합니다.”
“뭐? 어쩌다 집이 물에 잠겼어? 이사 간 집이 그렇게 된 거야?”
욱했다가 혹했다가. 화낼 때는 살벌하지만 잘해 줄 때는 또 살가운 이 빨간 모자 형. 나와 같이 일하는 홍익이 형이다.
연배만큼이나 두둑하게 나온 배나, 네모난 턱을 따라 난 정리 안 된 수염, 사시사철 절어 있는 얼굴이 이 바닥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사람임을 증명한다.
내가 이 바닥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음향 일이 지랄 맞아도 같이 일하는 홍익이 형과의 관계가 그럭저럭 괜찮았기 때문.
근데 이 형은 덩치와 다르게 입이 좀 가벼운 게 조금 아쉽다.
“아 그리고 오늘 공연 중에 괜찮은 부분 회사 홍보용으로 올린다더라. 있던 거 쓰지, 하여간에 우리만 귀찮아졌어. 아무튼 음향 영상 연결 수시로 확인해. 전원은 내가 했고, 저기 PC랑 오디오 연결부터 하면 돼.”
“넵.”
무대 뒤로 가 보니, 이따 올릴 장비 중에 디제잉 기기도 있었다. 약간의 불안감이 엄습했다.
‘설마 그 새끼도 나오는 건 아니겠지.’
“야 똥준!”
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를 않나.
어금니를 꽉 깨물고 뒤돌았다. 모른 척하면 더 크게 부르기 때문에 그냥 초장부터 겪는 게 낫다.
“똥준 너 작곡 공부는 잘하고 있냐?”
똥준이라는 같잖은 별명으로 부르는 저놈은 허세가 작렬하는 걸음걸이로 걸어왔다.
펄럭이는 셔츠에는 유명 브랜드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다. 그 밖에도 모자, 바지, 신발에도 여러 브랜드 로고가 덕지덕지. 브랜드에 한 맺혔냐. 그야말로, 총체적 졸부 스타일.
저놈은 제이슨, 윤준이 알바로 일하는 이 이벤트 회사에서 종종 섭외되는 DJ 놈이다.
본명은 모른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아마 본명은 존나 촌스럽거나 아무도 기억 못 한 흔한 이름이겠지.
“아 네, 제이슨 형님 오셨어요. 제가 지금 지각을 해 가지고, 빨리 해야 하는 일만 먼저 좀 마무리할게요.”
인사는 깍듯하게, 그리고 매정한 걸음새로 가서 무대 뒤에 널린 수많은 선들, 아웃 코드 인 코드를 꼼꼼하게 확인하는데 시벌, 이 새끼는 다리도 짧은 게 용케 따라붙어서 옆에서 쫑알댄다. 아 이 눈치 없는 새끼.
“디제잉 궁금하면 형한테 물어봐. 너 저번에 들어보니까, 허 참. 또 생각하니까 귀여워서 웃음이 나네. 야, 쪽팔려 하지 말고 형한테 물어봐. 디제잉이 말이야, 이게 또 하면 금방 해. 넌 아마 금방 배울 거야. 어설프게 알면 나쁜 버릇이 드는데 넌 아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가르쳐 준답시고 선심 쓰는 척하면서 까 내리기. 내가 그를 싫어하는 건 이런 이유다. 기승전 까 대기.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서로 맡은 일만 하는 그런 사이였는데, 한 달 전부터 상황이 이렇게 엿같이 됐다.
‘하, 진짜. 그 일만 아니었어도···.’
3류 DJ 제이슨의 타깃이 된 건 다 홍익이 형의 싸디싼 주둥이 때문이다.
저번 달이었나. 행사 마감하고 물건 정리하는데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내린 것이 디제잉 기기, CDJ2000이었다. 다 똑같은 버튼이 뭐 이리도 많은지. 차 정비한대서 시간도 남아 호기심에 이것저것 만지며 좀 놀았단 말이지.
홍익이 형이 그걸 찍어 놨었다. 나 놀려 먹으려고.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 치듯이 더듬더듬 만져 보고, 혼자 화들짝 놀라고 이런 병신 플레이를 찍어 놨는데.
이 형아가 그걸 회식에서 푼 거지···.
존나 꽐라가 되셔 가지고는 사람들이랑 그걸 돌려 보면서 날 수치사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사람 중에는 저 제이슨 놈도 있었다. 정말 내가 그날 밤 지붕 뚫고 이불킥을 아주 밤새 했지.
그날 이후 난 제이슨의 아주 좋은 타깃이 되었다. 제이슨은 그런 놈이다. 자기보다 못하는 놈 하나만 잡아서 주구장창 갈구는 못난 놈.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A급이 될 수가 없으니, 자기보다 못한 놈을 밟아서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다. 나보다 더 못한 루저를 깔면, 난 그놈에 비해 더 나은 위너가 되는 거니까.
물론 난 제이슨의, 루저와 위너 역할극에 동참해 줄 생각은 1도 없다. 나도 귀한 집 자식이다 새끼야.
“저기 형님. 형님 기계 볼륨 수치 좀 점검해 주시겠어요? 이거 리허설 없이 갈 거라서 지금밖에 확인할 시간이 없어요. 형님이 이 장비에 대해 더 빠삭하시니까 직접 점검하시는 게 좋겠어요. 형님은 프로시니까.”
엤다 관심. 이런 마음으로 던진 말이지만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침내 디제잉 기기가 있는 오른쪽 무대로 꺼져 주었다.
‘어떻게 벌써 피곤하냐···.’
후우, 믹서 채널에 누구의 마이크와 연결된 것인지, 라벨을 써 붙이는데 고개가 절로 좌우로 흔들린다.
***
따가운 햇볕은, 한강의 강바람을 한결 더 시원하게 해 준다. 천막을 치니 그늘은 시원하네.
서머 페스티벌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관객 수는 대략 백여 명. 이따 축제 막바지, 해 질 때쯤 되면 대략 2백쯤 될 거라 예상 중이다.
지금 무대 위에 올라와 있는, 딱 봐도 말 많게 생긴 MC 형은 이 백여 명을 상대로 되지도 않는 드립을 시전 중이었다.
“화장실에, 그런 낙서가 있었대요. ‘신은 죽었다, 니체.’ 이에 누군가가 댓글을 달았습니다. 밑에다가 이렇게. ‘너는 죽었다, 신.’ 그런데 여기에 댓글이 또 달렸어! 뭐라고 써져 있었게요?”
무표정으로 보는 관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몇 명은 예의상 대꾸해 주고, MC 형은 고개를 내저으며 정답을 공개했다.
“이번엔 이렇게 써져 있었다고 합니다. ‘너희 둘 다 죽었다, 청소부 아줌마.’”
파핫! 자기가 말해 놓고 MC 형이 가장 크게 웃는다.
‘···내가 분명 저거 하지 말라고 했는데.’
쓰읍, 무대 옆에서 마이크를 준비하다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음 공연팀은, 뭐라더라? 하여간에 처음 들어보는 아이돌 그룹이었다. 요즘 아이돌이 좀 많아야 말이지.
한 명씩 마이크를 달아 주면서 이러저러한 유의 사항을 말해 주었다.
“공연 중에 인이어 문제 생길 수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귀 넘겨 주면서 수신호 하세요. 그러면 백댄서 뒤로 넘어갈 때 바로 가서 교체할 거예요. 그리고···.”
역시 초짜들인 게 틀림없어. 다섯 명의 얼굴에 잔뜩 긴장한 티가 아주 역력했다.
음향 알바를 하면서 무대를 거쳐 가는 수많은 팀을 보다 보니 그런 안목이 생겼다. 아 얘네는 무조건 되겠다. 혹은, 얘네는 저번 팀에 비해 무대 구성이 좀 아쉽다, 가창력은 좋은데 댄스가 좀 빠진다 등등.
나야 뭐, 여기서 뭣도 아니지만 그래도 음향 체크하려면 무대를 봐야 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비교와 분석을 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댄스가 좋네. 연습을 많이 한 게 보인다. 그런데 곡이 좀 아쉽네. 특히 멤버별 음색과 안 맞아. 내가 작곡가라면 이런 곡보다는···.’
뭐 이러다가 현타도 오고.
‘···정신 차리자. 내가 무슨 프로듀서도 아니고. 음향 알바 주제에 무슨 분석질이야. 내가 뭐라고.’
내 처지는 내가 더 잘 안다. 나는 능력도, 근성도, 배경도 없는 그런 일반인일 뿐. 음악 가지고 뭐라 할 처지가 못 되지.
그때 귀에 낀 인이어로 홍익이 형의 지시 사항이 전달되었다.
“윤준아. 다음이 여기 지역 댄스팀이랑 제이슨 무대인데, 디제잉 기기는 멘트 칠 때 올리자.”
“네, 형”
신인 아이돌의 무대가 마무리되고, 다음 공연 가기 전에 MC 형이 다시 올라가 이런저런 멘트를 쳐 주었다.
이때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연결할 게 좀 많아야 말이지. 제이슨이 사용할 기기, CDJ2000과 믹서를 무대에 올려 전원을 연결했다.
이 길고 납작한 디제잉 기기는 얼핏 보기에 기다란 한 개의 판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3개의 기기를 연결한 거다. 그래서 옮길 때 하나하나 나눠서 갈 수 있어서 편리하다.
“똥준아, 형 점검 좀 할게.”
같이 뒤로 올라온 제이슨 저놈은, 지금 들어가기 바로 1분 전인데 이제서야 기기를 확인한다.
아 놔, 내가 아까 미리 좀 해 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하여간에 안 되는 새끼들은 다 이유가 있다.
결국 옷에 붙은 마이크로, 저 멀리 관객석 뒤에서 총괄하고 있는 홍익이 형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기 점검 중입니다. 2채널 뮤트로 해 주세요.”
“오케이.”
모든 소리를 총괄하는 믹서에서 해당 채널을 뮤트, 음 소거를 해 놓으면 기기에서는 소리가 나지만, 그 소리가 스피커로 송출되지 않는다.
지금 기기 소리 확인 중인 제이슨이 쓴 헤드셋을 통해서만 소리가 나오고 있을 것이다.
‘이게 마지막 공연이니까, 이것까지만 하면···.’
집에 가자마자 물난리 난 거 치울 생각을 하니 벌써 피곤하네. 어떻게 일 끝나자마자 또 일이냐, 아으.
근데 제이슨이 내 팔을 붙잡았다.
“너 연결 똑바로 한 거 맞아? 지금 기기에서 소리가 전혀 안 나잖아!”
···뭐시?
***
총괄팀에다가 2분 정도 딜레이, 시간 좀 끌어 달라고 요청하고 재빠르게 점검을 했다. 케이블 연결, 기기의 각 채널 연결 상태 등등.
‘음 이건···.’
진단을 마치고서,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로 서 있는 제이슨에게 곧장 알려 줬다.
“형 이건 저희 문제가 아니라요. 봐요, 케이블 연결에는 이상 없어요. 문제는 여기, 액정 보면 알아요. 지금 기기에 USB 꽂아 놨는데도 액정에 곡 리스트가 안 뜨죠? 인식이 안 된 거예요. 그래서 곡이 안 나온 거고. USB가 뭐에 감염됐거나 그러면 종종 이래요.”
“그. 그럼 어떡해야···.”
“다른 USB를 한번 꽂아 보고, USB 딴 거 없어요?”
“어, 없어···.”
필드 경력 3년 차라는 놈이 여분 USB도 없이 다닌다고? 뭐 하는 새끼야 도대체···.
세상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니 제이슨이 욱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야! 디제잉으로 돈 버는 게 쉬운 줄 알아? 곡의 RPM 정박, 공박이랑 멜로디 파트, 후렴 파트까지 다 계산해서 연결해야 한다고! 그것도 3분짜리가 아닌 1시간짜리로! 이런 거 생각하다 보면 USB 하나 더 챙기는 거 깜빡할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렇네요. 디제이 입장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겠네요.”
진상 고객 대처 매뉴얼은 이러하다. 첫째, 적극적 경청을 통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 준다. 그리고 둘째.
“그리고 스태프로서, 준비가 안 된 사람은 무대에 올릴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집에 가서 못다 한 준비를 마저 하시면 되겠어요.”
나의 입장도 객관적으로 알려 주었다.
워낙에 행사 지원을 많이 다니다 보니 공연팀 펑크도 종종 겪어 봤다. 갑작스런 펑크는 언제 겪어도 당황스럽지만, 그래도 대처할 수 있다.
“펑크라고 할게요. MC 형이 멘트 좀 더 던지고, 다른 팀들 앵콜로 조금씩 채워 넣죠. 이런 무대라도 절실한 팀들이야 많으니까. 사장님한테도 형 빵꾸 냈다고 보고 올릴 테니까 따로 연락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마 사장님도 이 인간에게 다신 연락하는 일 없겠지. 준비 똑바로 안 하고 펑크 내는 사람을 누가 써.
배추 싹 자르듯이 딱 자르고 가려는데, 제이슨은 내 소맷자락을 더 강하게 붙잡았다.
“아, 안 돼! 나 이번 거 해야 해! 이번 주 행사는 이것뿐이라고! 카드론 이자도 밀렸는데, 이번에도 못 내면 압류당한단 말이야!”
순간 제이슨의 눈높이가 확 떨어졌다. 내려다보니, 무릎까지 꿇으셨다. 아우 야···.
언젠가 이 재수 없는 놈을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완전히 무너진 모습을 보니, 이건 더 꼴 보기가 싫네.
불편해진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게 일종의 “난 이제 모르겠다, 네가 알아서 해라”라는 뜻의 제스처로 받아들인 것인지 제이슨은 더 악착같이 매달렸다.
“야 제발. 방법을 좀, 펑크는 안 돼, 제발···.”
아니 씨, 그러니까 이 새끼 말은 펑크인데 펑크 같지 않은 펑크로 만들어 달라는 거잖아 지금. 그게 말이 되냐고!
“야 윤준아! 거기 무슨 일이야?”
저 멀리 메인 믹서 앞에 있던 빨간 모자, 홍익이 형의 목소리가 인이어로 들려왔다.
하긴, 스태프가 후딱 빠져야 공연 들어가는데 무대 위에서 둘이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이상해 보였겠지. 무대 밑에서 대기 중인 댄스팀도 의아한 얼굴로 대기 중이었다. 하여간에 이놈 하나 때문에 다 꼬인 상황.
그럼에도 제이슨은 여전히 제발, 안 된다는 말은 안 된다는 간절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일단 마이크를 손으로 가리고서 제이슨에게 말했다.
“형. 못 하는 건 못 한다고 해야 해요. 그냥 펑크 내요. 지금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러면 형만 피해 가는 게 아니라 우리도···.”
“너, 네가 해 줘!”
뭐?
“너, 너도 이거 어느 정도 다룰 줄은 알잖아. 그, 그때 동영상으로 봤어. 혼자 조절 다 하더만.”
“아 그건 디제잉 기기 자체가 다른 음향 기기들과 좀 비슷한 구조라서, 믹서도 비슷하고 그래서···.”
“아 그러니까! 난 긴장하면 그것도 안 된단 말이야. 그래서 라이브로는 절대 못 한다고. 그, 선곡한 거 조금씩만 효과 넣어서 이 무대 어떻게 살려 보면 안 되겠니? 응? 아 행사비, 우리 그거 절반씩만 하자 그래서···.”
그러니까 지금, 너도 못 하는 무대를 스태프한테 해 달라, 이런 거야?
이런 미친 새끼를 봤나.
***
어느덧 하늘이 연보랏빛으로 변하며 초저녁에 접어들었다.
피날레 공연을 앞두고 조명팀에서 밝은 조명 세 개를 더 틀었다. 무대 위가 더 밝아졌다.
그리고 이 환한 조명 아래 서 있는 건 바로 나였다. 내가 생각해도 황당하네.
‘미친 또라이 새끼···.’
제이슨 그놈보다 더 미친놈, 그게 바로 나였다.
‘올라가란다고 진짜 올라가? 나 미친 거 아니냐?’
다시 생각해도 얼척이 없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이미 약간 홀려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하고도 이상하게,
떨리지가 않았던 것을 보면.
‘잘하려고 하지 말고 실수만 하지 말자. 전에 한 것처럼 1시간 동안만 원래 틀기로 했던 거 순서대로만 틀면 돼!’
굳은 결심을 하고서 손을 겨우겨우 제이슨의 디제잉 기기, CDJ2000에 올렸다.
그때였다.
―찌릿!
손등에서부터 올라온 강렬한 감각이 각 손가락의 손끝에까지 찌릿찌릿하게 번져 나갔다.
당황한 눈앞에는 작은 팝업창이 튀어나왔다.
====
* 당신의 손은 모든 음악 기기 사용에 최적화됩니다 *
기기: CDJ2000
사용자 상태: 쪼렙 DJ
관중들의 선호곡: 분석 중 34%···.
원하시는 디제잉 스타일을 선택하세요.
1.하우스
2.테크노
3.직접 입력
0.자동 모드(추천)
====
‘이게 뭐지?’
내가 진짜 미쳤나 봐. 헛것이 다 보이네.
어이가 없으면서도 이 와중에 내 눈은 반사적으로 설명 창을 읽어 내려갔다.
‘자동 연주···? 그런 게 되면 정말 좋겠다. 여기서 누가 나 대신 이것만 좀 때워 준다면···.’
정말 되면 좋겠는데, 약간 제정신이 아니기도 했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으로 0번, 자동 모드를 눌러 봤다. 창이 바뀐다.
―자동 모드 들어갑니다. 3, 2, 1···.
거짓말처럼,
손이 저절로 움직인다.
‘어, 어어어어?’
자동 연주, 말 그대로 내 손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으악, 느낌 이상해!!! 누가 내 손을 조종하는 느낌!!!
기기에 연결된 노트북 자판을 막 두다다다닥! 빛의 속도로 조작하더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선곡부터 훅 들어간다.
―Trying to let you know~
사인을 줄게~ 시그널 줄게~
I must let you know~
사인을 줄게~ 시그널 줄게~
밀리언 히트 걸 그룹 또와이스의 노래, 시그널의 상큼한 도입부가 흘러나온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이 노래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걸. 고작 3초 인트로에 남자 관객들은 벌써부터 광대 기립. 또와이스는 사랑입니다.
나도 이거 좋아. 좋은데···.
‘근데 이걸 어떻게 바꾸지?’
이미 충분히 좋은 곡이다. 뭘 더 더하고 자시고 할 게 없어. 그리고 잘못 바꿨다간 욕 뒈지게 먹을 것 같은데. 물론 이게 내가 고민할 거리는 아니었다.
디제잉은 내가 아닌, 내 손이 할 거니까.
―사인을 줄게~ 시그널 줄게~
근데 전혀 모르네~
눈빛을 줄게 눈치를 줄게
근데 못 알아채네~
고조되는 음악 소리와 함께 관객들의 떼창이 벌써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손이 뭐 알지도 못하는 버튼을 휙 당기자 속도가 쭉 올라간다. 신나는 속도가 아니라 날뛰는 속도. 한결 빨라지고 바빠진 리듬 속에서 왼손이 동그란 휠을 휘리릭 돌린다. 박자 딱딱 맞춰서.
―사인을 줄게~ 시그널 줄게~
휘릭! 찌릿! 휘릭! 찌릿
오, 이걸 돌리면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알던 곡에 낯선 소리들이 슬슬 섞여 들어간다.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고 언짢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난 너를 원해~ 난 네가 좋아~
왜 대답이 없니~
니,니,니,니, 니니니니, 니니니니, 니니니니닌~ 끝음이 요상하게 달라지더니 B 트랙 큐! 두 번째 음악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낯설지만 분명 들어 본 적 있는 곡이다. 관객들이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실물 걸 그룹이 무대로 뛰어나온다.
아까 곡이 아쉬웠던 그 신인 걸 그룹. 이름이 뭐라더라, 레걸즈랬나.
하여간에 얘네들한테 무대 펑크 났는데 한 번 더 하는 거 어떻겠냐고 물어봤다. 음향 알바 짬밥 2년 차에 이 정도 대처는 기본이지. 당연히 무대 한 번 한 번이 귀한 얘네들과 매니저는 오케이했다.
아까도 느꼈지만 댄스가 참 뛰어난 팀이다. 아까 다 된다고 말이야 했지만 정말로 어지간한 히트곡은 죄다 커버한다. 아까보다 훨씬 나은데?
이러면 가수도 좋고, 나도 좋고, 보는 이들도 좋고. 아싸 좋구나, 고도리!
마음대로 움직이는 손에 대한 당혹스러움보다, 일단 여기서 나오는 음악이 나부터가 좋아서 신이 난다. 좋아, 가는 거야!
진짜 오랜만의, 아니 처음 느끼는 음악의 즐거움이었다.
“윤준이 저놈 저거···?”
개빡친 얼굴로 의자에 꿍 앉아 있던 빨간 모자도 의자에서 일어난 상태였다.
방금 전만 해도, 직접 무대를 때우고 있는 윤준의 모습은 아주 못마땅했었다. 그런데 지금, 능숙한 손놀림으로 CDJ를 만지는 것을 보니···.
“이거, 잘하면···.”
빨간 모자는 벌써 까칠하게 수염이 올라오기 시작한 아래턱을 쓱쓱 문지르며 무대를 바라봤다.
***
KIM엔터테인먼트. 우리나라 3대 기획사에 속하는 대형 기획사다.
신관에 걸린, 메가 히트를 친 소속 가수들의 사진들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가수들이 이곳에서 스타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들의 거대 브로마이드가 양옆으로 쫘라락 붙어 있는 이 복도는 흔히 명예의 전당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 스타들을 진정 배경으로 만들어 버리는 미모의 직원이 지나가고 있다. 그 매력이 무엇이라 딱 말할 수는 없지만 포인트를 짚어 보자면 귀를 덮은 똑단발에 레드 립이 인상적. 다만 무슨 일이 있는지, 표정이 조금 심란해 보여 말을 걸기는 어려운 분위기다.
그렇게 한쪽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안에 있던 직원들이 모니터 하나에 달라붙어 뭔가를 같이 보고 있다.
“아, 유 실장님! 여기, 이 사람 보세요, 대박.”
“이벤트 회사 홍보 영상에 올라온 건데, 어제부터 난리예요.”
그들이 보던 영상은 윤준의 무대였다. 무대는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유 실장도 그들 뒤에 서서 별생각 없이 영상을 봤다가 표정이 싹 굳어 버렸다.
그녀는 음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다. 곡, 연주 스타일 이런 것으로도 누구의 것인지를 유추할 수 있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중반쯤에는 설마, 그리고 마지막에 윤준이 공연 후에 ‘똭’ 하고 내보인 시그니처 사인, 손동작을 보고는 비명처럼 누군가의 이름을 내뱉는다.
“원일이···?”
***
―설레요 나 Likey~
나 Likey Likey Likey~
나 Likey Likey Likey~
나 Likey Likey Likey~
쿵쿵콩콩쿵쿵~ Heart Heart
“네, 사장님. 저희 도착 5분 전입니다.”
아 좀 늦게 받지, 노래 좋았는데.
1톤 트럭의 조수석에 앉은 빨간 모자, 홍익이 형은 벨 소리가 울리자마자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담배 꽤나 핀 걸걸한 목소리. 네모난 턱선을 따라 난 수염들도 턱을 따라 움직인다.
“네네, 알겠습니다. 그럼 올려다 놓고 기다리겠습니다.”
“늦는대요?”
“지금 밖이라서 사람 보낸대.”
오후 3시의 이태원. 길거리에 사람이 없어서 한산하긴 하지만 골목길은 그 자체로도 복잡했다. 좁기도 좁고, 경사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트럭 다니기 참 불편하네.
‘나이스 사운드 음향 기기’라고 써 붙여진 1톤 트럭을 요리조리 살살 몰고 가는 중이다. 트럭도 트럭이지만, 이 트럭엔 꽤 귀하신 몸이 타고 있다.
“그럼 사람 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려요? 차 댈 데가 없을 텐데.”
“아, 아니. 직원 있대.”
“그럼 그 사람이 물건 확인하면 되지, 뭘 또 사람을 보낸대요.”
피유우, 홍익이 형은 턱수염을 득득 긁으며 말했다. 세상 귀찮은 표정.
“야, 이게 한두 푼짜리냐. 게다가 우퍼는 위치 잘 봐야 하니까 당연히 전문가가 와서 봐야지. 직원이 이거 본다고 알겠냐.”
그래. 저번에 대충 설치해 달래서 해 줬더니 소리가 이상하다며 결국 다시 가서 다 다시 해 줬었지. 그래 기다리자. 그게 가장 빠른 길이다.
“야 근데, 정말 사장이 한 푼도 안 줬어?”
“뭐요.”
“아니 그거, 영상! 홍보 영상 들어가서 우리 행사 스케줄 대박 났잖아! 문의도 엄청 왔다더구만. 보너스 같은 거 없었어?”
홍익이 형 이야기는 그거다. 저번에 내가 무대에서 어찌어찌 좋은 공연을 했고, 홍익이 형은 그걸 회사 홍보 영상으로 편집해서 넘겼다. 결과는 성공적, 그때 무대 나온 걸 그룹도 그렇고 우리 회사도 그렇고 인지도가 꽤 높아졌다.
“알바한테 무슨 보너스를 주겠어요. 저번 주에 고기 한 번 사 주고 말았어요.”
“에라이···. 거기? 건너편 육횟집?”
“아뇨. 삼겹살집.”
그것도 심지어 대패 삼겹살이었지···. 그리하여 디제잉 이후의 상황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설명하고 자시고가 없이, 근무 상황이 그 전과 조금도 다름없다.
뭐, 사장님 입장도 이해된다. 그냥 알바생 하나가 근무 외 행동을 했는데 그게 좀 잘된 것뿐이니까. 그냥 내가, 내 자리에 안 맞는 짓을 한 거지.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뺑뺑이를 돌고 있다. 음향 기기 렌트는 행사 지원도 많이 가지만, 오늘처럼 음향 기기 판매 및 설치도 한다.
이런 날은 괴로운 게, 홍익이 형의 징그러운 노랫소리를 바로 옆에서 꼼짝없이 들어야 한다. 이 형, 좀 잠잠하다 싶었더니만 그 걸걸한 목소리로 감히 또와이스 노래를 나불거린다.
“비비크림~ 팡팡파! 틴트를~ 뽐뽐뽀!”
하지 마···. 내 또와이스 건들지 말라고! 형이고 나발이고 명존세(명치 존나 세게 때림)하고 싶다···.
“노래 좀 안 하면 안 돼요?”
그 말에 노래를 딱 멈춘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더니, 이랬다.
“이거 보고 웃어 줭~ 그리고 꾹 눌러 줭~”
에이 씨···.
“표정 보소. 내 노래가 뭐 어때서! 나 정도면 잘 부르는 거지. 아 그리고 그동안 생각해 봤어? 빨리 넘어와! 내가 다 해 줄게!”
하여간에 틈만 나면 또와이스 팬클럽 가입하라고 난리다.
“전 모두에게 공평한 잡덕입니다. 취존해 주시죠.”
아니아니, 홍익이 형은 바로 질문을 고쳤다.
“걸 그룹 입덕 말고. 나 담 달에 회사 나갈 거라니까? 같이 나가자. 너 올 거라 생각하고 아직 팀장 자리 비워 놨다.”
내가 여기 알바 2년 차, 홍익이 형은 5년 차다. 우리 회사에서 음향 기기 설치 등은 형이랑 내가 둘이서 다 했기에, 이곳 돌아가는 모양새는 대충 다 알았다. 그간 주고받은 거래처 연락처도 다 알고.
그러니 괜히 회사 거칠 거 없이, 우리끼리 새로운 회사 하나 파서 직접 해 보자는 거였다.
“나랑 일하면서 뭐, 큰 문제도 없었잖아? 나도 하던 사람이 편하고. 내가 여기보다 더 많이 챙겨 줄게! 아예 직급도 팀장으로 달고 본격적으로 해 보자고. 너도 나이가 있는데, 언제까지 알바나 할 수는 없잖아?”
뭐 나야 이런 제안이 고맙지. 같이 잘해 보자는 거니까. 홍익이 형 말대로 지금보다는 수입도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도 선뜻 마음이 따라가질 않는다.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좀 복잡한 감정이다.
“형이 내 생각해 준 건 고맙지만···. 그냥 다른 사람 구하세요. 뭐, 이쪽 일이야 1년이면 다 배우잖아요. 싹싹한 친구 하나 구해서 하시면···.”
“아 왜, 뭐 다른 거 하는 거 있어?”
“아뇨 그런 건 없는데···.”
“아 그럼 왜 싫은데?”
그러니까 말입니다. 나도 모르겠어서 가만히 있자, 결국 형이 구시렁거리는 소리로 한마디 한다.
“넌 다 좋은데, 진짜 그건 고쳐야 해. 뭔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러는지 말을 해야 알지. 실없는 말은 잘하면서 결정적인 일 앞에서는 꼭 그러더라. 너 이러는 게 주변 사람 얼마나 답답하게 만드는지 알아?”
할 말이 더 없어지네. 대신 난 다른 말을 꺼냈다.
“알았어요. 근데 여기 근처 아니에요?”
입력한 주소로는 여기가 맞다. 골목길 사이에 잠시 트럭을 멈추고서 주변을 둘러봤다. 홍익이 형도 폰의 지도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어, 여기 맞네. 저기 2층. 클럽 뭄바2.”
형이랑 같이 BOSE 서브 우퍼님들을 조심조심 들고 올라갔다.
2층, 문은 열려 있는데 안에 인기척이 없다. 영업 준비를 하는 낮 시간대의 클럽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저기요! 우퍼 가져왔는데요!”
두어 번 외치자 대답이 들려온다.
“네, 잠시만요!”
어두워서 몰랐는데, 안쪽에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또 있다. 탁탁탁, 누군가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매니저님 곧 오실 거예요.”
오··· 여기 사장님 안목이 괜찮네.
긴 생머리를 뒤로 살짝 묶은 여직원이었는데 깔끔한 단색 맨투맨에 스키니 청바지가 아주 잘 어울린다. 그녀는 카운터 뒤에 있던 청소 도구를 챙겨서 다시 3층으로 올라갔다.
빈 클럽에 형이랑 둘만 남아 있는데, 홍익이 형도 대뜸 들어왔던 문으로 나간다.
“아, 어디 가요.”
나 이거이거, 형은 대답 대신에 담뱃갑을 내보이고는 간다. 아 나는 담배를 안 피우니까 도망갈 방법도 없고, 비흡연자 서러워서 살겠나.
아무도 없는 클럽에 혼자 있으니 좀 그렇다. 난 뒷짐을 지고서 슬슬 클럽 안을 구경했다.
살펴보니, 이 클럽의 사장은 꽤나 음악 부심이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가져온 서브 우퍼도 그렇고, 이미 설치되어 있는 음향 기기들이 상당히 고가의 물건들이다. 하긴, 클럽까지 왔는데 내 컴퓨터 스피커 같은 게 있으면 배신감이 엄청날 듯.
인테리어도 손이 많이 간 것 같은데, 이 클럽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저거였다.
‘불 켜면 괜찮겠는데?’
홀 가운데에는 지구본만 한 은색 미러볼이 매달려 있었다. 그래, 클럽은 역시 미러볼이지. 자세히 보려고 무대로 갔다가, 이것까지 보게 되었다.
무대가 훤히 보이는 곳, 일명 박스라고 부르는 곳. 네모 길쭉한 디제잉 기기가 올려 있었다. 근데 판이 까만색이 아니라 하얀색이다. 이상하네.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디제잉 기기는 90%가 CDJ2000이다. 업계 표준 정도. 하얀색은 처음 봤는데. 순간 그게 떠올랐다.
‘서, 설마···!’
듣기만 했다. CDJ2000 NXS3, 플래티넘 버전.
하양이가 먼지도 잘 보이고 얼룩도 잘 생겨서 관리가 빡세지만, 그래도 한정판의 매력은 한정 없지. 이 귀하신 분이 한국에도 있었다니!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보겠어, 난 가까이 다가가 좀 더 자세히 살펴봤다.
하여간에 여기 사장, 악기 덕후가 틀림없다. 하양이 관리를 이렇게 잘했다니. 그 많은 버튼과 틈새 사이사이가 반들반들하다 못해 깨끗하다. 마치, 누구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처럼.
가운데에는 채널별로 하이, 미들, 로우 레버가 잔뜩 있는 믹서. 양옆에는 동그란 휠이 있는 플레이어가 연결되어 있다. DJ 플레이어의 휠 테두리에 파란색 불이, 기기의 주요 버튼에도 색색의 불이 들어와 있다. 전원이 켜져 있다.
‘이걸로 디제잉을 하면, 어떤 느낌일까?’
무슨 생각이었는지, 저번에 무대 위에서 디제잉했던 감각이 다시금 떠올랐다. 미친 짓이었지만 좋은 미친 짓이었지.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그 뒤로는 이 손을 써 본 적이 없다. 아니,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한 번 더 해 봤는데 또 그런 능력이 발현된다면. 그럼 그때는, 정말 되돌릴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염려되어, 그 뒤로는 하지 않았다.
근데 하필 이 디제잉 기기는 또 흰색이다. 한 번이라도 내 흔적을 남기고 싶어지는 그 하얀색···.
‘···한번 눌러나 볼까?’
하여간에 난 그래. 문과인데도 기계에 관심이 많았다.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봤다. 그렇게 기기에 손을 대었는데.
―찌릿!
아 따가! 정전기 오른 것처럼 손에 뭔가 찌릿한 감각이 튀어 오른다. 여전히 적응 안 되는 이 갑작스런 감각에 놀라서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떴는데.
====
* 당신의 손은 모든 음악 기기에 최적화됩니다 *
기기: CDJ2000NXS3, DJM900NXS3
상태: 쪼렙 DJ
스킬: ??
선호곡 분석: 접근 가능한 관객이 없습니다. 범위를 넓혀서 검색 중···.
원하시는 디제잉 스타일을 선택하세요.
1.하우스
2.테크노
3.직접 입력
0.자동 모드(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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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또 이런다···!’
역시 저번에 본 상태창은 헛것이 아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음악 기기를 만지면 이렇게 창이 뜬다.
···느낌이 좋지 않다. 거짓말하고 학교 땡땡이치고서 오락실 갔다가 엄마가 내 뒤에서 날 노려보던 그때의 그 싸함이 싹 느껴진다. 으으.
‘···어엇?!’
악 시발! 살짝 손을 떼니, 맨들맨들한 하얀 바디에 내 지문이 떡하니 묻어 버렸다. 이대로 경찰서 가면 지문 딸 수 있을 듯.
막상 내 손자국이 나니 적잖이 당황스럽다. 이렇게 관리 철저한 주인이라면 누군가가 자기 물건 만진 것도 알 텐데.
‘어, 어서 끄자!’
후다닥, 전원 버튼을 찾아봤다. 오, 저기. 난 모서리 쪽에 있는 동그란 버튼을 누르려고 손을 들었는데···.
―자동 연주를 선택하셨습니다.
응?
누가요?
제, 제가요??
놀라서 오른손 왼손 서둘러 살펴보니, 왼손이 있는 곳이 딱 아까 그 자동 연주 창 근처다.
아 시바···.
이거 뭔가 느낌이 싸한데.
―자동 연주 모드에 들어갑니다. 3, 2, 1···.
뭐 내가 어떻게 막을 새도 없이, 손등에서부터 시작된 따가움이 각 손가락의 손끝에까지 찌릿찌릿하게 번져 나갔다.
그러더니 손이 저절로 움직인다.
‘으아아아???’
척척척, 내 손은 자기 맘대로 노트북을 켜더니 나도 모르는 프로그램에서 플레이 셋을 준비한다. 아니 남의 거를 막 이렇게, 아니 저기 여보세요! 야!!
내 손으로 내 손을 말리고 싶은데 엔터까지 탁, 바로 곡이 재생된다.
―시간이 10, 9, 8, 달리자 10, 9, 8, 7, 6,
나에게 5, 4, 3, 다가와 5, 4, 3, 2, 1,
TOUCHDOWN!
힘차다 못해 빡센 인트로, 난 곧바로 노트북의 플레이 리스트를 확인했다.
‘또와이스의 터치다운···.’
행진하는 밴드 느낌이 물씬 나는 또와이스의 댄스곡. 평소 잘 듣던 곡이긴 한데. 손도 어째 더 신난 모양새로, CDJ 위를 뛰어다니는데. 아 적응 안 돼···.
***
“어? 노래를 벌써 트나?”
1층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빨간 모자, 홍익은 외부 스피커로 나오는 소리를 듣더니 헤헷 웃는다.
“여기 DJ 선곡 센스 좋네~ 우리 트둥이들의 노래를 틀다니! 어 아니다 잠깐만···.”
좋아하는 그룹 노래라고 마냥 반기던 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귀를 기울였다.
“···좀 다른데? 리믹스 버전인가?”
아니 나도 모르는 사이 언제 리믹스 버전이, 리터칭 앨범인가. 여기까지 생각을 하던 홍익은 다시 생각 따위 접어 두었다.
새롭게 편곡된 버전은 충분히 듣기 좋았다.
***
클럽 안에 있던 나는 대략 난감이었다. 손이 뭔가를 누르고 만지고 할 때마다 곡의 원래 묘미를 극대화된다는 거, 그래 그건 나도 귀가 있으니까 알겠어.
하지만 내 손이, 그것도 남의 영업장 남의 기기에서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광경은 그야말로 내 멘탈을 탈탈 털어 갔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넌 자꾸 멈추지 마~
날 바라본 미소 한 번이~
1, 2, 3, 4, 5, 나를 미치게 해!
그래 우리 또와이스 말이 맞아. 이 꼴을 계속 보자니 조만간 미치지 않나 싶다. 반면 손은 아주 난리 났다.
왼쪽 트랙을 막 움직이더니 큐 버튼 탁, 두두둥 두두둥 드럼 소리가 또와이스 노래에 겹쳐서 나온다.
‘다른 곡인데 박자가 맞네?’
마치 원래 있던 반주를 빼었다가 다시 넣은 것처럼, 두 곡은 딱 맞물려서 흘러갔다. 여기에 이펙터 조작으로 적절한 소리 조작은 양념처럼 맛깔나게 얹어졌으니. 여기 폭풍 댄스곡 하나 나왔습니다.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래, 솔직히 신나긴 신나.
근데 내가 이러는 거 누가 보면, 나 어떻게 되는 거야?
‘배달 온 알바가 난데없이 남의 영업장에서 디제잉을 하고 있다니···.’
이거 최소 또라이. 내가 봐도 그래. 으으, 상상만 해도 벌써 곤란해. 그러니까 그만, 아 그만 좀 하라고 이 손 새끼야!!!
―10, 9, 8, 네 맘을 10, 9, 8, 7, 6
말해 줘 5, 4, 3, 나에게로 5, 4, 3, 2, 1
TOUCHDOWN!
짠!
노래와 동시에 손이 풀썩, 떨어진다. 잘은 모르지만 내 손에 뭔가가 나간 기분. 동시에 손끝에서부터 다시 내 힘이 느껴진다. 주먹을 쥐었다 펴는데.
오케이, 된다.
내 손이 돌아왔어!!!
“어? 윤준아 너···.”
그때 홍익이 형이 올라왔다. 하지만 난 이미 기기에서 손을 뗀 상태. 판사님,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네 그냥 여기 구경을···.”
“옆에 있는 분은 누구셔?”
···네?
여기 나 혼자 있는 거 아니었어?
끼기긱, 난 고장 난 기계처럼 어색하게 옆을 돌아봤다.
그리고 홍익이 가리킨 그쪽, 2층 계단. 스타일 좋게 늙은 한 아저씨가 계단에 걸터앉아서 날 빤히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 디제잉 배틀
“···죄송합니다.”
누군가가 그랬었지, 감사와 사과는 빨리할수록 좋다고.
난 빠르게 계단에 앉아 있던 아저씨한테 사과했다. 이제 막 올라온 홍익이 형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너 뭐 했어? 왜 사과를 해?”
“아, 괜찮습니다.”
계단에 앉아 있던 아저씨는 세상 쿨한 태도로 일어섰다. 나이는 일단 40은 넘은 것 같다. 근데 몸 관리도 잘하셨네. 체형도 좋고 옷도 깔끔하게 잘 입고.
“면접 앞두고 손 좀 풀 수 있죠. 9시 타임 디제이 면접 오신 거 맞죠?”
목소리도 좋···.
어, 근데. 뭐요?
면접?
“네? 아니, 저 면접 보러 온 거 아닌데요.”
아닌 건 아니지. 곧바로 홍익이 형이 설명을 덧붙인다.
“저희는 ‘나이스 사운드’에서 왔습니다. 서브 우퍼 구입하셨죠?”
“아~ 그분들이시구나. 저는 여기 매니저, 김용대라고 합니다. 뭐 맨날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사장 친구로 알고 계시면 돼요. 근데···.”
잘생긴 아저씨는 다시 또 나를 바라봤다.
“그쪽, 아니. 이름이 어떻게 돼요?”
“저는 윤준입니다.”
“그래요 윤준 씨, 근데 진짜 아니에요? 아까 보니까 아마추어의 손놀림이 아니던데?”
당황하셨죠?
저도 많이 당황했습니다···.
“아 무슨 소리세요~ 얘가 디제잉을 한다고요? 에이~ 얘는 기계나 보지, 그런 거 할 줄은 몰라요.”
맞는 말인데 남이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하니까 괜히 기분 나쁘네. 당신의 팩트, 누군가에겐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제가 손은 불편하지만, 눈은 멀쩡하거든요.”
그 말에 눈이 자동으로 그 아저씨의 손으로 내려갔다. 정말로 왼손에 여러 바늘을 꿰맨 흉터가 있다. 흉터가 저 정도면 다쳤을 당시에는 손이 아작이 났겠는걸.
물론 말싸움에 손이 아픈지 아닌지 여부는 상관없다. 홍익이 형은 내가 디제잉할 수 있는 거 절대 아니다, 클럽 매니저 아저씨는 맞는다고 말하며 서로 물러섬이 없다.
그래, 결국 내가 나서야겠구나.
“저기 매니저님, 형 말이 맞아요. 저 디제잉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너무 겸손하신데. 아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더블 트랙을 해요? 이건 우연히 될 수가 없는 건데. 두 노래의 BPM에 맞춰서 타이밍 맞춰 넣고, 이펙트 조정까지. 이건 각 버튼의 기능을 모르면 할 수가 없는 일인데?”
형님, 저 지금 그쪽이 말씀하시는 거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이 동네 디알못(디제잉 알지 못함)은 나야 나, 나야 나~
“아까 그랬던 건 제가 한 게 아니라, 제 손이 멋대로···”라고 사실대로 말하면 미친놈인 줄 알겠지. 아 뭐라고 둘러대지.
에라, 모르겠다.
“어 그러니까···. 그, 유튜브 영상으로 디제잉하는 건 한두 번 본 적은 있어요. 그래서 딱 오늘 한 것만 알아요. 나머지는 전혀 모르고요, 직접 만져 본 건 오늘이 처음, 아니 두 번째예요.”
“아···.”
내 말에 매니저 아저씨가 말을 못 잇는다.
좋아 완벽해. 오늘은 잘했지만 내일은 잘할 수 없는 이유를 아주 적당하게 둘러댔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난 이 형에 대해 잘 몰랐다.
용대 형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긍정왕이라는 것을.
“한두 번 보고 한 건데 그 정도면, 본격적으로 배우면 장난 아니겠네! 와 이거, 내가 오늘 원석을 발굴했구만! 오우야 소름 돋았어!!!”
어, 어째서 이런 결론이 도출되는 거지. 그런데 이 형의 본론은 더 과감했다.
“윤준이라고 했지? 여기서 디제이로 일해 보는 거 어때요? 마침 우리도 9시 타임 구하고 있거든, 딱이네 아주!”
“아니, 아니라니까요? 저 아무것도 모르는···.”
“모르는 거야 배우면 되는 거고. 테크닉적인 부분은 다 하면서 느는 거고. 나도 그렇게 시작했어~ 난 전원 켜는 것만 알고 박스 올라갔다니까~ 뭐 좀 불안하다 싶으면 일찍 출근해, 내가 다 알려 줄게.”
그러더니 세상 친근하게 어느새 어깨에 팔까지 두르고서 나를 확 잡아당긴다. 아 아니, 뭐야? 사람을 이렇게 막 즉흥적으로 고용하고 그래도 되는 거야? 저, 저기요? 저기요???
“아니 지금 일 잘하고 있는 애한테 무슨 소리세요.”
나만큼이나 홍익이 형이 당황한 얼굴로 껴들었다. 하긴, 홍익이 형 입장에서는 나랑 같이 회사 나가려고 공들이는 중인데. 이런 뜻밖의 장소에서 스카우트를 할 줄은 몰랐겠지.
“뭐 이런 일이 무슨 비전이 있겠습니까. 잠깐 재밌고 마는 거죠. 준이는 저랑 회사 차려서 착실하게 일해서 돈 벌 거니까 이상한 바람 넣지 마시죠.”
“저희도 근무 일자랑 시간 딱딱 지켜 가면서 일 착실하게 합니다만? 세상에는 즐겁게 하는 일도 있어요.”
그때 홍익이 형이 날 바라봤는데, 내가 무슨 생각인지 알려고 본 것 같다. 물론 별 도움은 안 되었을 것이다. 난 생각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 스타일이니까. 어떻게 그러냐고?
정말로 지금 아무런 생각이 없거든. 심지어 영혼도 가출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결국 홍익이 형은 스스로 비장한 결단을 내렸다.
“준아. 지금보다 10 더 줄게! 우리 회사로 오면 160에 맞춰 줄게! 이런 꼬임에 넘어가지 말고 형이랑 같이 돈 바짝 벌자!”
으잉? 그런 추임새와 함께 용대 아저씨도 말이 한결 빨라진다.
“160? 오케이 그럼 우리도 거기에 맞춰 줄게요. 금토 9시 타임에 들어가면 딱이네.”
뭣이 어째?! 홍익이 형은, 별이 다섯 개! 그 표정으로 손가락 두 개를 내게 확 내민다.
“160 받고 20 더! 준아, 180에 해 줄게! 직함도 알바 말고 팀장급으로! 어때?!”
저기요··· 지금 두 분이서 제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그렇게 돈으로만 사람을 사려고 하는 것은 정말이지···.
감사합니다.
앉아서 돈 벌었네. 이름하여, 연봉이 자꾸 올라.
“흠··· 180이라···.”
그렇게 상대방이 침묵하자 홍익이 형은 승리를 확신했다.
“자 그럼 앞으로 윤준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고···.”
“잠시만요, 어 영찬아.”
그사이 누군가와 통화가 연결된 용대 아저씨가 잠시 양해를 구한다.
“어, 너네 둘째 넷째 목요일 8시 타임 구한다고 했지? 구했어?”
아, 제발 없다고 해라. 홍익이 형의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는데. 이 아저씨, 상대방의 말을 가만 듣더니 우리 쪽을 보고 씨익 웃는다.
“아~~ 아직 안 구했다고?”
짤막한 통화가 끝나자마자 용대 아저씨는 그 능글능글한 웃음으로 손가락 세 개를 쫙 펼쳐 보인다.
“다른 클럽 타임 확보했어요. 우리도 160 받고 20 더! 180 해 줄 수 있어요!”
다시 동점. 타이스코어가 굉장히 타이하다. 팝콘이 당기는 이 순간! 과연 연봉 배틀의 승자는?
선빵은 좀 더 다급해진 홍익이 형부터.
“아니 이게 말이 돼요? 회사 잘 다니다가 갑자기 디제잉이라니? 진로는 진지하게 결정해야 해요. 이렇게 즉흥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아니 지금 일도 그렇게 계획적으로 정한 건 아니었는데···.
“게다가 얘 오늘 처음 보셨잖아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채용하는 건 그쪽도 상당한 마이너스일 텐데요? 좀 신중하게 생각하시죠?”
아이 씨, 내 앞에서 그런 말은 좀 그렇지.
한마디 하려고 홍익이 형을 딱 째려보는데 용대 아저씨가 한발 빨랐다.
“그쵸. 오늘 처음 봤고, 잘 모릅니다. 그런데 첫눈에 봐도 디제잉 잘하는 건 압니다. 이건, 확실해요. 이 친구 진짜, 잘해요. 그리고 앞으로는 더, 잘할 겁니다. 분명히.”
‘···잘한다고?’
생전 처음 보는 아저씨인데. 내 능력이 아니라 이 손이 제멋대로 움직인 것이고. 그래서 이러는 게 말이 안 되는 거 아는데도.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칭찬 한마디에 이러는 거 보면 나 꽤나 칭찬에 목말랐나 보다. 하긴, 잘했다는 말 들어 본 지 꽤 되었었구나.
이제 두 명 다 말이 없고, 날 쳐다본다. 각자 할 말은 다 했다. 남은 건 내 결정뿐이다.
지금 내겐 두 가지 길이 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가 보지 않은 길.
가 보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과 미련. 나도 안다 하지만 알지 못한 길에는 알지 못한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는 나이.
지금 내 일이 그렇게 만족스러운 건 아니지만, 그나마 지금 내 손에 있는 것들을 다 내던지고 싶을 만큼 불만이 엄청난 것도 아니야.
그래 역시 나는···.
“아 그리고 한마디만 더! 우리 쪽 페이는 시급이에요. 근무 시간 이런 거 없이 목금토, 각각 한 시간씩만 나오면 됩니다!”
와우,
이 조건 실화임?!
***
6개월 후.
이태원 클럽 뭄바2. 워낙 인기 있던 뭄바 본점에 힘입어 생긴 2호점이다.
서울에 클럽이야 많지만 이태원 클럽들은 그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난다 긴다 하는 디제이들이 보고 싶다면 이태원으로 오면 된다. 이 중에서도 클럽 뭄바는 항상 가장 이태원스러운 클럽으로서 톱급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의 가장 큰 자랑인 디제잉은 지금 딱 멈춘 상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핀 조명 한 줄기만 홀로 단아하게 스테이지의 한곳을 비추고 있다. 이 빛 아래 서 있는 한 남자, 정지 화면 같은 이 침묵을 깨는 목소리가 힘 있게 흘러나온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뱃심 좋은 목소리가 우렁차다.
20대가 분명한데 30대처럼 보이는 그런 체격. 무대 위에 서 있는 남자는 스냅백을 힙합 스타일로 살짝 비뚤게 썼다. 그의 스타일인 듯.
“기다리던 대결이, 준비되었습니다! 클럽 뭄바2, 우리나라에서 스크래치를 볼 수 있는 몇 없는 클럽이죠. 그런데 우리 감히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급하게 배틀을 준비했는데요, 이 겁 없는 도전자를, 소개합니다!”
오른쪽에서 핀 조명이 하나 더 커지고, 디제잉 기기 앞, 그러니까 박스 앞에 선 그놈이 보였다. 그가 입은 주황색 단색 원투맨이 멀리서도 눈에 띈다. 관객석 곳곳에서 격한 환호로 그를 반긴다.
“어제 공연 마치고 오늘 여기 놀러 왔다가 난데없이 배틀을 신청한 빼박 DJ! 워커홀릭! 놀려고 온 곳에서도 싸우는 배틀 중독! DJ Play!”
저 녀석은 이름만큼이나 장난이 심한 놈으로, 커다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게 여간 잔망스럽다. 그는 자신의 이름과 설명이 소개되자 두 손을 번쩍 들어 관객들의 반응을 유도한다. 관중들 대부분이 마찬가지로 손을 번쩍 들어 환대한다.
검은 스냅백은 막간에 준비한 메모지를 빠르게 보고 읽으며 Play의 이력을 읊어 내려간다.
“DJ Play는 작년 DMC에서 최초로! 한국 대표로 출전한 실력자입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중국적자인데 한국 대표로 출전한 거는 우리가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해 주는 부분이죠!”
우우, 약간의 야유. 그래도 Play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DMC, WORLD DJ CHAMPION이라는 대회를 뜻한다.
DJ들이 턴테이블을 이용해서 퍼포먼스를 겨루는 세계 대회로, 스크래치 좀 긁는 놈들 사이에서는 이곳에 출전하는 것 자체가 대단한 영광이다.
스크래치가 참 돈이 안 되는 분야이긴 하지만 그래도 대회 영상에서 손 날아다니는 거 보면 진짜 간지 간지 씹간지. 여태까지 한국은 이 대회에 출전도 못 했기에 더더욱 선망의 그곳으로 간주된다.
그 대회를 저놈이 최초로 나갔을 때 DJ 사이에서 반응이 대단했다. 뭐, 우리끼리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자 그럼 우리 측 DJ를 소개해야죠?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해서는 6개월 만에 메인 타임까지 넘보는 괴물 신인! 윤준!”
마침내 내 박스 위에도 핀 조명이 팍 켜졌다.
***
음향 알바를 하던 내가 이곳의 DJ가 된 이유는 6개월 전, 갑자기 내 손에 깃든 능력 때문이다. 이 능력은 나의 직장, 성격, 환경 등 내 삶을 180도로 바꾸어 놓았다.
이건 모든 음악 기기를 자동으로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처음으로 사용해 본 게 이 클럽의 디제잉 기기였는데, 여기 매니저인 용대 형이 이걸 보고 나를 덜컥 DJ로 채용했다.
근데 이 형, 알고 보니 정말 인생 마이 웨이더만. 김즉흥이라고 이름을 바꾸면 될 것 같다.
처음에 디제잉 알려 준다고 할 땐 언제고, 나 하는 거 보더니 “잘하네!”라며 기술은 제쳐 놓고 온통 자기 좋아하는 딥 하우스 이야기만 주구장창.
그리고 그것도 잠시, 현재는 잠수 한 달째다···. 어디 여행 간 것 같다고 뭄바 본점 사장님이 알려 주셨다. 듣자 하니 이 양반 전에도 종종 이랬다고···. 아무튼 그 형에 대해서는 후술하기로 하고.
그리고 그간 가장 큰 변화, 어느 날 직업까지 바꾸게 해 준 이 손에 대해서는 그냥 이해를 포기하기로 했다.
왜, 그것도 나에게, 이런 능력이 생긴 건지 알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이건 나의 이해를 뛰어넘는 일이었다. 해도 안 될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없기에, 생각을 포기했다.
그래도 내가 이 손에 대해 확실하게 아는 건 하나 생겼다.
이 능력을 사용해서 신들린 디제잉을 할 때면, 기분이 아주 끝내준다는 것이다.
“시합 전에 혹시 서로들 할 이야기는 없나요?”
뭔 소리야 그냥 해. 난 그렇게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데 Play는 손짓을 한다. 검정 스냅백이 그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그런데 Play 저건 랩을 하던 녀석인가? 손을 확확 움직이며 뭐라 뭐라 지껄인다.
“Hey, you know ‘8mile’? There were fucking lyric. Listen, ‘If you have ears. I, will, just kill mics and show these people what my level of skill’s like.’ Get it?”
아 영어 극혐···. 뭐라냐.
“오오···!”
관객들에게서는 뭐 그런 감탄사나 나오는데, 네놈들도 못 알아들었으면서 알아듣는 척하는 거 다 안다.
난 스테이지 가운데에 서 있는 스냅백에게 손짓을 해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후후, 짱짱하게 울려 퍼지는 볼륨을 확인하고서 분명히 말했다.
“야, 한국에 왔으면 조선말로 해 이 새끼야.”
아까 사장님이랑 이야기할 때는 한국말 겁나 잘하더니만 어디서 외국인 코스프레야?
이에 Play는 자신은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둥 아이 캔트 스피킹 코리안이라는 둥 또 시답잖은 영어를 씨불인다. 거 말 많네. 난 곧바로 휠을 돌려 버렸다.
―봥봥봥!
디제잉하는 놈이라면, 이 업계 내 만국 공통어인 내 손짓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입 닥치고 손 올려 새끼야.
그는 긴장한 입술을 혀로 한 번 훑더니
―봥봥봥!
똑같이 이펙트를 쏘아 댔다. 대결을 요청했고, 이에 응했다. 배틀이 성사되었다.
“오오···!”
“와, 둘이 진짜로 하는 거야?”
대결이 일촉즉발 앞으로 다가오자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구경하는 이들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가득하다. 진행을 보던 검은 스냅백은 타이밍 좋게 멘트를 날린다.
“뭄바2의 신성 윤준! DMC의 신성 Play! 과연 어떻게 될지 흥미진진한데요, 일단 저희 클럽의 DJ 배틀 룰을 알려 드립니다. 시간은 3분! 장르는 자유!”
녀석은 다시 왼손으로 숫자 3을 만들어 위로 흔들었다.
“원래 턴테이블은 저글링, 믹싱, 스크래치 이런 게 있는데 시발 우리는 그런 거 몰라! 그냥 뻑 가면 좋은 거지 안 그러냐?!”
그래, 우리가 여기 놀러 왔지 뭐 배우러 왔냐.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스냅백은 손에 들고 있던 캔을 흔든다.
“아까 하나씩 나눠 드린 거 있죠? 이거 드시고 신나게 음악을 즐기다가, 마음에 든 디제이의 박스 밑에 내려놓으면 됩니다. 캔 하나가 한 표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박스 밑에 있는 애들이 연두색 캔을 번쩍 들어 흔드는데, 연두색 파도 같은 모습이 꽤 볼만했다. 과연, 저 많은 캔은 다 어디로 갈지.
“순서는 도전자 선빵입니다. DJ Play, Are you ready?”
이에 그놈은 손으로 오케이 모양을 만들어 내보인다. 시작되었다.
그가 다루는 기기는 CDJ가 아니다. 가운데 믹서는 같지만 양쪽에 동그란 휠은 턴테이블. 그래, 그 LP 놓는 턴테이블 맞다. 디제잉용으로 더 튼튼하게 나온 건데, 이걸 돌리면 ‘휘끼휘끼휙’ 이런 소리가 나면서 묘한 리듬감을 가미한다.
놈이 첫 스타트를 끊은 노래는 ‘와오오, 와오오’ 소리가 나는, 일렉트로닉 기타가 인상적인 연주곡.
휠을 휘 돌려서 노래를 다시 뒤로 돌린다. 그리고 박자를 조절하는 RPM 레버를 한 뼘 훅 올리면서 스피드 업. 이제 소리는 ‘와오와오와오’ 하며 짧아진다. 다시 백, 스피드 업. ‘왕왕왕왕!’ 이제 기타 소리는 미친개처럼 짖어 댄다, 짖어 대면서 내달린다.
저놈은 격한 고갯짓으로 리듬을 타며 듣다가 손으로 판을 탁, 잡아서 멈춘다. 그리고 왼손으로 왼쪽 판, B 트랙을 재생하니, ‘둥둥’ 드럼 소리가 난다.
오른쪽은 기타, 왼쪽은 드럼 사운드. 재료가 모두모두 등장했으니 이제 본격적인 비트 믹싱이 시작될 것이다.
턴테이블리즘, 디제이의 역할을 선곡과 편곡뿐만 아니라 화려하게 판을 노니는 그 행동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개념이고, 지금 저놈이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왼쪽 멈추고 오른쪽 틀면 ‘왕왕왕’, 오른쪽 멈추고 왼쪽 틀면 ‘둥둥둥’, 그 와중에 가운데 크로스 페이더 버튼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이에 따라 오른쪽 소리, 왼쪽 소리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소리가 나니 묘한 공간감을 그려 낸다.
이걸 빠르게, 빠르게,
아주아주아주아주 빠르게!
한 손으로는 크로스 페이더를 열라 치면서 다른 손으로는 오른쪽 왼쪽 휘끼리 휘끼 왔다 갔다. 이대로 속도 붙여서 바로 치고 가나 싶었는데 저놈은 판을 탁 잡았다.
절묘한 타이밍, 저놈이 가져온 음악에서는 보컬이 딱 이렇게 노래 부르던 참이었다.
―Let’s Play Now!
거, 잔망스러운 타이밍 보소.
자기 디제잉 네임이 들어간 보컬 사운드를 이용,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한다. 그것을 신호로 저놈의 두 손은 휠과 휠 사이를 날아다녔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왕왕 둥둥 왕왕 둥둥. 이걸 엄청 빠르게. 왕둥왕둥왕둥왕둥, 이렇게 여러 버튼을 조작하는 걸 가만히 서서 하질 않는다. 앞으로 서서, 뒤돌아서, 다리 하나 들어서 그 사이로, 이번에는 다리 내리고 뒤돌아서.
기예에 가까운 동작임에도 속도는 전혀 줄지 않는다. 변주의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관객들의 탄성 소리도 높아진다.
“완전 빨라! 저기만 빨리 감기 한 거 아니지?”
코앞에서 보던 여자 하나가 굉장한 하이 톤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속도를 영접하고 놀람 속에서 간증한다. 안 그래도 나도 내 눈을 의심하던 참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스크래치 좀 한다는 사람들이 모인 클럽이 뭄바이건만, 여기서도 저 정도의 실력은 본 적 없다.
‘DMC 예선 떨어진 쩌리라 하더라도, 월드 쩌리다 이거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월드 클래스가 다르긴 하구나. 나만큼이나 놀란 사람들이 내지르는 함성 소리에 귀가 먹먹해진다. 아주 언짢군.
디제잉이 끝났지만 불편한 함성은 계속된다. 그리고 녀석이 계속 이쪽을 바라보는데.
너 이거 못 하지? 딱 그런 미소.
참 유치하고도 원초적인 도발이다.
아 근데 손에 힘이 빡 들어가네?
“미친 선곡! 미친 속도! 미친 퍼포먼스! DJ Play의 손을 보신 분 있나요? 타이밍 맞춰 간간이 들려오는 보컬 사운드까지! 와우, 대단하네요!”
관객들과 함께 스냅백도 몹시 흥분했다. 볼 빨간 청년기처럼 시뻘게진 얼굴로 날 바라보며.
“괜찮겠어요 형? 장난 아닌데? 와 씨바, 나 이런 거 처음 봐!”
눈빛부터가 완전 들뜬 게, ‘나 지금 저 새끼한테 완전 뻑 갔어! 오늘부터 팬이야!’라고 외치는 속내가 뻔히 보였다. 저놈 저거, 내가 술 사준 게 몇 번인데···.
하여간에,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인생은 혼자라니까. 동생이고 친구도 다 부질없다. 내 몸 하나 잘 챙기는 게 중요하지.
‘특히 이 손 말이지.’
그동안 수고했지만, 오늘은 더 수고해 줘.
검은색을 바탕으로 중요 버튼마다 알록달록 불이 들어온 디제잉 기기에 손을 올렸다. 찌릿! 튀어 오르는 손과 함께 창이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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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손은 모든 음악 기기에 최적화됩니다 *
기기: CDJ1000. 믹서 DJM―400
상태: 중렙 DJ
배틀 모드가 진행 중입니다.
스킬: ?? (배틀 모드의 숙련도에 따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선곡: 관객들의 취향 분석 중 67%···.
1.수동 연주
2.자동 연주(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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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모드? 뭐야, 스킬도 있어?’
배틀은 처음이라, 못 보던 문구들이 보인다. 뭐 이건 나중에 차차 알아 가기로 하고, 내가 기다렸던 문구가 잠시 후에 떴다.
―자동 연주를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자동 연주를 선택하자, 두 손에 내 것이 아닌 힘이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손가락 관절이 툭, 툭, 툭, 꺾이고 CDJ1000의 액정에는 곡이 자동으로 선곡된다.
액정에 뜬 선곡을 봤는데 오, 오늘 선곡 아주 좋아. 선곡 센스 칭찬해. 빨리, 어서 빨리 그 음악을 갖고 놀고 싶다는 흥분이 팍팍팍 올라온다.
―자동 연주 들어갑니다. 3,2,1···.
관객들 취향을 고려하여 선택된 그 음악은 망치 할배, MC Hammer의 Can’t Touch This.
이 할배는 진짜 하으, 리얼 갓할배라고 할 수 있지. 이게 대략 30년 전 음악이라니, 믿어져? 지금 들어도 신나! CF나 배경음악 등으로 엄청나게 우려먹었지만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곡은 몇 번을 재생해도 그 느낌이 어딜 가지 않지.
물론 아무래도 나이 어린 관객들에게는 그럼 감각이 어필이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걱정 마. 고작 Play 따위와 놀아 주는 데에는 한 소절이면 충분하니까.
한 소절만 가지고도 5분이고 10분이고 늘였다 엎었다 붙였다 접었다 하면서 놀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DJ의 특기 아니겠어?
―따~ 다라 단, 딴딴딴딴!
경쾌한 반주와 함께, 난 아까 저놈 못지않은 잔망스런 스텝을 밟으며 놈을 쳐다봤다. 왜 봤냐고? 알려 주려고.
너 아까 이러던데, 귀엽더라? 이렇게 아장아장했었지? 이런 식으로 아까 저 녀석이 한 퍼포먼스를 확 평가 절하 해 주었다. 그리고 휠을 휙 돌려 이 곡에서 내가 저놈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했다.
들어라 이 외코(외국인 코스프레) 하는 놈아, 네가 그렇게 환장하는 그 영어다.
―You Can’t Touch This! (넌 나 건들지도 못해 새끼야!)
알겠냐?
그리고 바로 구간 선택을 한 다음에 곡을 뒤로 당기도록 휠을 휙 돌려 휘끼휘끼, Can’t touch, Can’t touch Can’t Can’t Can’t Can’t, Can’t touch this! 못 건드려 못 건든다, 아주 귀에 박히듯이 연속으로 날려 줬다.
Play의 반응 따위 살펴볼 것도 없다. 충격 먹은 듯 입을 가리면서도 올라간 입꼬리가 다 보이는 관중들 반응만 봐도 저놈의 표정을 알 것 같으니까.
디제잉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이거다.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리믹스. 내가 좋아하는 곡에 나만의 감성을 넣을 수 있다. 따 다라단, 이 부분에 즉흥 비트를 오지게 섞어 줄 것이다.
그게 그거 같은 수많은 레버들 사이에서 내 손은 단번에 FX 이펙터 부분을 찾아갔다. 하이 레버를 확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RPM을 쫙 낮췄다. ‘따’ 하고 울리던 노래가 ‘끼이이잉’, 기이한 소리로 변화하는데. 마치 치즈가 푹 녹았을 때 쭉 잡아 올린 모습처럼 음이 가늘게 늘어지며 올라간다.
왜 음을 늘렸냐고?
채우려고.
타 타라 타타, 타타타! 비트 주세요!
마치 타악기를 두드린 것처럼 쪼개진 박자. 춤이 절로 나오는 리듬 속에 난 흥이 절로 났다. X나 빠른 퍼포먼스고 나발이고, 일단 음악을 즐기는 게 기본 아니겠어?
“오오···.”
다양하게 변모되는 소리에 놀라 가만 듣던 사람들도 이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새로이 만든 리듬을 쫓아온다. 이 모든 건 즉흥으로.
타임 모드로 설정했던 액정을 바라보니 어느덧 절반이 흘렀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우리 해머 형 목소리 한번 들어 볼 때가 되었지?
간만에 손과 마음이 통했다. 이심전심, 손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 손은 곧바로 휠 쪽으로 날아갔다. 휘리릭거리던 휠을 서서히 늦추더니 완전히 멈췄다. 속도를 원래대로 바꾸자, 바로 다음 가사가 선명한 발음으로 튀어나왔다.
―Break down!
가자,
부시러!
한 손으로는 가운데 페이드 레버를 겁나 왔다리 갔다리 때리면서, 다른 손으로는 휠을 돌렸다 당겼다 돌렸다 당겼다.
휘리리릭 띠리리릭 휘리리릭 띠리리릭 휘끽 휘끽, 본음원에서는 들어 본 적 없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소리만 듣는다면 디제잉이 아니라 어떤 타악기를 두드려 대는 것 같은 리듬이 느껴진다.
손이 매우 분주하다만, 여기서 키포인트는 바로, 여유로운 얼굴이지. 등 딱 펴고, 발로는 리듬 탁탁 타면서.
“뭐야 저거? 녹음해 온 거겠지?”
“병신아 눈 없냐? 아까 그 자리에서 조정해 놓고 휠 치는 거잖아. 저거 다 라이브야!”
헐 X바 그게 가능해? 그렇게 욕을 섞어 대면서도 한 발자국 물러서고야 마는 경외심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녀석들, 나 이런 놈인 거 이제 알았어?
여기에 아까 약간의 잔재주를 더해 준다. 두 손을 크로스로 바꿔서 치고, 한 손을 허리 뒤로 해서 이쪽으로 와서 치고, 뒤돌아서 치고. 어디서 본 거지? 그래 아까 Play가 엄청 젠체하면서 했던 거 나도 할 수 있단다. 그것도 이렇게 여유롭게.
저놈 급으로 보일까 봐 유치해서 안 하려고 했던 건데, 그래도 역시 시각적인 퍼포먼스가 들어가니 곳곳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게 먹히는구나 너희들은?
휘리리리리리릭, 난 휠을 천천히 멈추었다. 소리가 잦아든다.
액정에 뜬 남은 시간은 5초. 내가 저놈에게 선물 하나 줄 시간 정도는 되겠지.
바지 주머니, 여기에도 없고, 티셔츠 앞주머니까지 뒤적이다가 마침내 찾은 그것을 두 손으로 싸악 꺼내 보였다.
바로 내, 가운뎃손가락.
“FUXX You!”
와아아아악!!! 디제잉 내내 간간히 터질 뿐, 숨죽여 보던 사람들도 디제잉이 끝나자 제대로 터졌다.
배틀이 종료되어 스테이지의 모든 조명이 켜졌다. 그러나 이곳에서 역대급 스크래치를 목도한 관객들의 잔뜩 흥분한 함성은 쉽게 잦아들지 않을 것 같다.
“여러분! 진정하시고, 결과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상황을 정리하고 다음 순서를 안내하고자 스냅백이 다시 등장하여 뭐라 뭐라 마무리 멘트를 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그리고 뭐, 굳이 스냅백이 저렇게 애를 쓰며 결과를 안내할 필요도 없다. 이걸 뭐 굳이 말로 해야 하나? 더 이상 들을 것도, 볼 것도 없다.
내 박스 앞으로 밀려들은 캔들만 보더라도 결과는 명백했으니까.
***
박스 아래로 내려와 뒷문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여기에도 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디제잉 배워 보려는 철없는 것들, 섭외하려는 놈들, 그리고 말없이 날 쳐다보고 있는 여자들.
“윤준 씨, 다음 주에 큰 행사가 있는데, 돈을 우리가 맞춰 줄 테니까 시간만 좀···.”
“우리 스피커가 새로 나왔는데 협찬을 해 주면···.”
내가 자리를 피하자 이 아저씨들, 막무가내로 내 주머니에 명함을 쑤셔 넣는다. 아오, 아저씨! 주머니 늘어나요!
“저 와와와, 완, 완전 팬이에요 완전···.”
무대의 잔상이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가끔 이렇게 격하게 들이대는 사람들이 있다. 근데 몇 번을 겪어도 이런 격한 반응은 적응이 안 돼. 그래서 그들의 인사를 대충 흘려 냈다.
하지만 이분들은 아주 중요하지. 난 뒷문 벽에 기대서 날 보는 여자애들을 슥 스캔했다. 위아래 위위 아래.
원래 안 그랬는데, 요새는 똑단발이 그렇게 당긴단 말이지. 근데 이 이 녀석이 이 중요한 아이 콘택에 난입한다. 야!!
“아까 2분 14초쯤부터 페이드 레버 걸 때 있잖아요! 그거 어느 손가락으로 한 거예요? 근데 형 오른손잡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왼손으로도 그렇게 잘해요?”
“어 그냥, 하다 보면 그렇게 돼.”
자동 연주니까 그렇지,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으니까.
“우와! 진짜요? 대박! 그리고 스크래치는 누구한테 배우셨어요? 저도 그분한테 레슨을···.”
안 되겠어. 이대로 이놈에게 붙들려 있다간 여자애들이 다 자리를 뜨고 말 것이야. 할 수 없지, 난 이 눈치 없는 꼬맹이의 어깨를 꾹 잡았다.
“근데 지금 나한테 백번 물어봐도 소용없어. 그냥 네 손으로 직접 해 보는 게 제일 효과적이야. 레슨도 좋은데, 결국 네 손으로 부딪쳐 보는 정도(正道)가 지름길이다.”
크헝, 녀석은 그런 소리를 내며 힘껏 감격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더니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어떻게든 내보내려고 한 아무 말 대잔치였는데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휴.
벽에 기대어 늘씬하게 서 있는 여자애들은 안 보는 척하면서도 나와 호기심 어린 눈빛을 교환했다. 난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 보이는, 검은색 똑단발을 한 애와 클럽을 나섰다.
훅, 쌀쌀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어흐···.”
곡소리가 절로 나온다. 나이가 드니까 한 해 한 해가 달라 정말. 난 대충 입었던 코트의 단추를 꼼꼼하게 여몄다.
1월 중순, 강추위는 한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어림없다. 게다가 새벽 공기는 밤공기보다 더 서늘한 게 있단 말이지.
‘얜 안 춥나.’
흘끗 곁을 바라보니 이 여자애, 아까 그 헐벗은 모습은 어딜 가고 발끝까지 내려오는 롱 패딩에 얼굴만 빼꼼 나왔다.
“뭐 할래? 뭐 먹을까?”
형광 분홍빛 틴트를 바른 입은 도톰하지만 작은 편. 꼬무락거릴 뿐 선뜻 말하지 않는 입술이 꽤나 새침하다.
“저 집 꼬치 맛있는데, 갈래?”
그래도 묵묵부답.
‘···잘못 골랐나.’
아 씨, 아까 그 걔만 아니었어도 내가 좀 더 살펴보고 골랐을 텐데. 그 옆에 걔도 괜찮았는데.
그때, 위에서
아래로.
단발머리의 작은 손이, 주머니 속에 있던 내 손을 사악 훑어 내린다. 난 다시 단발머리를 쳐다봤다.
아, 내가 잘못 생각했다. 어떤 말은, 눈빛으로도 알 수 있는 건데.
“···그럼 바로 갈래?”
뭐 그런 걸 대놓고 물어보냐는 듯, 여자애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그 묘한 분홍빛 입꼬리만 살짝 올린 채.
하, 거참···. 어린애가 저런 건 또 어디서 배웠대.
맞잡은 손에서는 따뜻함이 전해졌다. 나와 다른 체온이 주는 따뜻함. 그래, 난 이 정도의 온도가 딱 좋다.
***
낮 12시,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털고서 설렁탕집에 앉았다.
어제 걔는, 0교시 수업이 있다며 티슈에 폰 번호를 함께 적어 놓고 가 버렸다. 쿨해 아주.
내가 어제의 모텔을 애용하는 건, 이 설렁탕집 때문이다. 바로 옆집인데, 여기 국물이 진짜 죽이거든.
“후, 후아, 후···.”
자글자글 끓는 뚝배기 속의 희뿌연 국물을 후후 불어 가며 먹는데, 뒤쪽 테이블에서 새파랗게 어린 녀석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영상 벌써 올라왔네···. 야, 어제 진짜 장난 아니지 않았냐? 시발, 윤준이 한 손으로 휠 저글링 뛸 때 나 소름 돋았어.”
이제 홍대 근처에서 내 이름이 들리는 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만, 들을 때마다 기분이 좋긴 하구나. 훗.
근데 뭐, 좋은 말만 들리는 건 아니다.
“디제잉 잘해서 뭐? 그거 해서 얼마 버는지 알기나 하냐? 한 시간에 20만 원 겨우 벌어. 그것도 누가 불러 줄 때나 그렇지, 감 떨어지거나 아니면 손가락 관절 나가면 바로 끝이야.”
사각, 난 섞박지를 베어 물며 가만 귀를 기울였다. 괘씸한데, 맞는 말이긴 하거든. 안 그래도 나도 그걸로 고민 중이긴 했다.
난 지금의 일상이 너무 좋다. 그래, 좋긴 한데···. 천년만년 이러고 살 수는 없잖아.
지금이야 두 타임, 그러니까 두 시간씩 꼬박 뛰고 레슨받고 하니까 괜찮다만,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는지는 솔직히 아무도 모른다. 이게 뭐, 공무원은 아니니까.
상황이 여유로울 때, 마냥 좋다고 퍼질러 앉아서 처놀다가 정말로 앉아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못 하는 앉은뱅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불확실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길을 준비하긴 해야 하는 건 나도 안다. 다만, 그 방법이 까마득해서 미뤄만 왔을 뿐.
디제이로서 돈 많이 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나도 궁금한, 디제잉의 미래에 대해 녀석들의 갑론을박에 귀를 기울여 봤다.
“요즘 디제잉 레슨이 얼마나 많이 들어오는데! 학원도 좋고, 아니면 블로그 하나 파 가지고 온라인으로 홍보하면 반응 바로 오지. 저번에 보니까 아프리카 TV에 활동하는 디제이들 하루에 버는 수익이···.”
“그래서,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데? 그리고, 그 레슨비 푼돈 받아서 뭐, 건물주 된 사람 있어? 어? 주님 아래 건물주님 되었냐고.”
어휴, 그놈의 건물주. 하여간에 성공의 최종 단계는 기승전 건물주인 건가.
‘이번 기회에 부동산을 좀 알아볼까···.’
도대체 그놈의 건물은 얼마나 하나, 집 근처 매물을 찾아나 보려고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는데, 폰과 함께 어제 받은 명함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아놔.
“아줌마 여기 김치 좀 더 주세요!”
녀석이 주방을 향해 뒤를 홱 돌아봤다. 그때 난 바닥에 떨어진 명함을 주섬주섬 줍는 중이었다.
그래, 날 못 본 게 틀림없다. 녀석이 디제이에 대한 신랄한 말을 이어 간 걸 보니.
“디제이들,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결국 남의 곡 틀어 주는 것들 아냐. 걔넨 아티스트가 아니야. 남의 곡 집어다가 그대로 틀어 주는, 단순 기술자라고 해야지. 이를테면, 우리 아빠 회사한테 외주나 받아먹는 하청업체 정도?”
킬킬, 그렇게 웃어 대며 밥을 국물에 풍덩, 말아 버린다.
“게다가, 다른 놈도 아니고 윤준? 참나, 걔 음향 알바였다면서? 그럼 우리 아빠네 회사 밑에서도 일했을걸? 굿뮤직, 아빠네 회사가 한국에서 제일 큰 음향 기기 회사거든.”
시다 새끼가 말이야, 그렇게 쌍욕과 함께 말이 이어졌다.
“세상 좋아졌어? 야, 조선 시대로 치면 갠 완전 사노비야. 우리 아빠네 회사 거상, 걔네 회사 하청업체는 중개상, 그리고 윤준 그 새끼는 그 중개상에게 밟히는 개막내고. 완전 시다였던 게 손 기술 좀 익혔다고 나대기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들이 하는 이야기라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도무지 안 될 것 같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들이 앉아 있는 테이블 뒤에 가서 딱 섰다.
뚝배기를 세워 놓은 채 국물을 긁어 먹던 놈 하나가, 누군가 하고 힐끔 쳐다봤다가 ‘풋’ 하고 국물을 뿜는다.
“유, 유유유유유, 윤준?”
꼬라지 보아하니 군대도 안 갔다 온 새파랗게 어린 새끼다. 근데 왜 나한테 형 소리는 왜 빼먹니. 국물이랑 같이 먹은 거니.
뭐, 알아서 꼬리 내린 이놈은 됐고, 난 아까부터 남의 이야기로 주둥이 함부로 놀리는 그 개싸가지를 바라봤다.
낮 12시에도 포마드 발라 정갈하게 넘긴 머릿발이 아주 반듯하시다. 새끼, 잘생긴 놈이 옷도 잘 입었네. 있는 집 아들이라는 티가 난다.
“너 진짜 굿뮤직 사장 아들이야?”
“네. 왜요?”
“뻥 아니고?”
참 나, 녀석은 그렇게 한 번 웃고는 바로 정색한다.
“굿뮤직 사장 이재갑의 아들 이인출입니다. 됐어요? 뭐, 이렇게 말한다고 아시려나, 시다 출신이 볼 수 있는 분도 아닌데.”
···참, 일관성 있는 캐릭터구나 너.
“뭐, 제가 틀린 말 했어요? 기분 나빠요? 표정 보니까 한 대 치시겠어요?”
“아냐···. 사장 아드님을, 쩌리 알바생 출신인 내가 어떻게 건들겠어.”
“알면 됐어요”라고 하며 피식 웃어 버리는 놈 앞에서 난 어제 받은 명함을 꺼냈다. 그리고 바로 전화 걸었다.
“네, 이재갑 사장님. 통화 괜찮으세요?”
그래, 나 같은 게 어떻게 사장 아들을 건들겠어.
그 아버지라면 모를까.
“다름이 아니고, 한 달 전부터 계속 연락 주셨죠? 그 헤드셋 협찬 때문에. 죄송한데, 전 안 될 것 같습니다. 아니, 그, 저는 너무 영광이고 좋은데, 후으···. 아드님께서, 제가 알바 출신이라 마음에 안 드나 봐요.”
뻐끔뻐끔, 사장 아들놈은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늦었어 새끼야.
“아드님 성함이 이인출, 맞죠? 지금 식당에서 만났는데···. 아 너무 그러지 마세요. 아 뭐가 그렇게 죄송해요 아니에요, 잘못은 제가 했죠. 제가 너―무 수준이 낮아서 송구하지요.”
“야, 이 비겁한 새끼야!”라고 말하며 사장 아들이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뭘 할 필요는 없다. 아마 3초 이내에···.
―부으으웅, 부으으으웅.
테이블 위에 있던 녀석의 핸드폰에서 곧바로 진동 소리가 들렸다. 발신자명은 ‘꼰대’. 이를 바라본 놈의 얼굴이 서늘하게 굳었다.
난 여유로운 표정으로 슥, 턱짓으로 진동이 오는 폰을 가리켰다. 뭐 해 안 받고? 왜, 아버지한테 참교육받을 거 생각하니까 쫄리냐?
“시발, 남의 곡이나 띄워 먹는 디제이 주제, 게다가 옷 입는 거 죄다 원일이 형이나 따라 하면서 무슨···.”
“야야야, 너네 아빠, 나한테까지 전화하시는데.”
친구 녀석이 자기 폰을 보여 준다. 이에 놈은 더 빨라진 목소리로 말을 다다닥 뱉어 낸다.
“너, 내가 지켜볼 거야. 지금은 좋지? 1년만 지나 봐라. 요즘 경력만 쌓게 해 달라며 공짜로 일하는 초보 디제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네가 내년에도 지금처럼 대우받을 수 있을 것 같아? 1년 뒤엔 분명 갈데없이 빌빌거리면서···.”
“어 그래. 아마 그럴 거야.”
한쪽 귀를 휘적거리며 말했다. 이따 귀부터 닦든가 해야지, 아침부터 너무 드러운 말을 많이 들었어.
“내가 너네처럼 어린것도 아니고 나이도 있는데, 1년 뒤엔 이 바닥에 못 있지. 내년에는 아마···.”
검지 하나를 들어, 위를 가리켰다.
“저 위에 가 있을 거야. 밑바닥에서부터, 너도 못 가는 저어어어기 위로 올라가는 거. 남들 못 하는 거 해내는 게, 내 전문이거든. 으휴 니는, 금수저면 뭐 하냐 그걸로 밥 처먹는 거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녀석은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근데 너, 그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부으으으응, 부으으으으응···.
녀석의 폰은 쉬지 않고 울린다. 결국 친구가 녀석의 폰도 챙겨 주고, 팔을 잡아 질질 끌고 나가면서 녀석의 체면을 나름 세워 주었다.
마지막 그 얼빠진 표정을 생각하니 킥 웃음이 삐져나온다. 난 내 자리로 돌아와, 아까 먹다 말았던 설렁탕을 한 숟갈 후룩 떠먹었다.
‘···다 식었네.’
뚝배기는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릇에 옮겨 담은 맛난 깍두기도 그 빨간 양념이 왠지 좀 말라붙은 것 같은 느낌. 한 끼 식사를 다 먹지도 못 했는데 입맛이 뚝 떨어진다.
난 뜨거운 것보다는 따뜻한 정도의 온도가 좋다. 하지만 따스함은 너무도 빨리 식어 버린다.
난 좀 더, 뜨거운 것이 필요해졌다.
***
평소대로라면 집에 오자마자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며 TV를 켰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컴퓨터가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난 네이버에 ‘고원일’이라는 이름을 쳐 봤다. 아까 그 사장 아들놈이, 내가 따라 한다는 그 고원일 말이다.
내가 이 녀석을 따라 한다는 비아냥거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아까 그 녀석도 말했듯이 디제잉 패턴이나 선곡이 꽤 비슷하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런 이야기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렇잖아. 내가 따라 하지를 않았는데. 내가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해 무슨 해명을 해. 하질 않았는데. 무엇보다 난 이놈 알지도 못하는데. 본 적도 없다니까?
그런데 아까 그렇게 대놓고 깐죽거리는 소리를 들어 보니···.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뭐, 어디가 얼마나 비슷하다는 것인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으음?’
검색 결과, 고원일은 생각보다 지명도가 있는 녀석이었다.
누구나 아는 유명인은 아니지만 거의 준연예인급이었던 듯 관련 내용도 많았다. 게다가 프로필 사진은 거의···.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런 포즈를 잡는 거지? 약 하나 이 새끼?’
프로필 사진은 뭐 아주 배우다 배우. ‘나는 키도 크고, 잘생겼고, 잘났다.’ 뭐 이딴 자신감이 속눈썹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새끼였다. 재수 없네 진짜.
그런데 프로필 내용은 따른 의미로 더더욱 가관이었다.
―고원일. 작곡가, DJ.
출생 1990년 11월 19일.
학력 Y대 작곡과.
‘허얼? Y대 작곡과?’
물론 Y대라는 네임 밸류도 놀랐지만, 일단 작곡과 출신이라는 것 자체에 더 놀라웠다. 실용음악도 아니고 작곡과라니. 우리나라에는 서울대, 한예종, 연세대, 이화여대, 한양대 등등의 대학에 작곡과가 있는데 보통 클래식 작곡을 말한다.
한 곡에 악기 스무 개씩 들어 있는 그 클래식 작곡 말이다. 난 클래식 악보만 보면 아주 머리가 다 아프던데. 이걸 만드는 공부를 한 녀석이라고?
그럼 다니던 학교나 잘 다닐 것이지, 왜 대중가요 쪽으로 온 거지? 클래식 하는 애들은 이쪽 보지도 않던데? 당최 왜 가요 쪽으로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기본기가 장난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화성이나 청음 같은 건 가볍게 씹어 먹을 수준이겠구만.
‘프로필 사진의 자신감은, 대학 부심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프로필 내용의 나머지 부분을 읽었는데, 기분이 더 나빠졌다.
―소속그룹 라르고.
수상 2016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편곡 부분 최우수상.
2015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편곡 부분 최우수상.
그 외에도 기타 등등 상상상···.
그래 너 잘났다. 아주 다 해 처먹어라.
수상 경력도 먼치킨이지만 소속 그룹부터가 너무 사기다. 작곡가 사단 중에서도, 라르고라니.
‘라르고 소속? 여기 거기 아닌가, 송연우 사단?!’
송연우, 우리나라 최정상급 작곡가다.
히트곡을 쓴 작곡가는 많지만, 그처럼 20년을 한결같이 히트곡을 만드는 작곡가는 정말 드물다. 우리나라 톱가수 중에서 그를 안 거쳐 간 사람은 없을 정도.
꾸준한 세월 동안 유행 장르가 많이도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톱을 유지한다는 건, 음악에 대한 개방성과 후배 및 동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실력만큼이나 인품이 좋다는 평이 많다.
방송 출연도 요청이 오면 되도록 나오는 편인 것 같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그의 얼굴을 다 안다. TV에 나와서 주로 하는 건 ‘허허허’ 하고 사람 좋게 웃는 것 정도지만 이게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머리 색깔만 회색일 뿐, 켄터키 할아버지를 닮은 그의 푸근한 인상으로 광고도 여럿 찍었었다.
그리고 라르고는 이 송연우가 이끄는 작곡가 사단의 정식 명칭이다. 라르고란, 폭넓게, 느릿하게라는 뜻의 이탈리아 말인데, 표현 면에서는 ‘표정 풍부하게’ 음악에서는 ‘아주 느리게’라는 빠르기표로 사용된다. 즉, 라르고처럼 이 바닥에서 천천히, 오래오래 해 먹겠다는 뜻이지.
사단 소속 후배 작곡가들과의 협업은, 송연우의 기본 내공에 요즘의 감각을 더해 준다. 그 결과 어떤 장르가 유행해도 송연우 사단은 꾸준히 히트곡을 만들어 냈다.
이곳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실력을 갖췄다는 뜻.
그렇게 검색을 하면 할수록, 고원일 이놈이 전면적으로 나서질 않아서 그렇지 작곡계에서 꽤나 사부작거리던 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사도 꽤 있다.
―[인터뷰] 16년 최고의 한 해를 보낸 송연우
“올해의 히트송은 모두 후배가 작업한 것···.”
실력에 겸손함까지 갖춘 올해의 작곡가 송연우 씨는 자기 사단 소속의 후배, 고원일에게 모든 공을 돌리며···.
‘인터뷰에서도 언급을 해 주네.’
16년, 송연우 사단에서는 유독 많은 히트곡을 배출했다. 그냥 여기서 곡을 받은 가수들은 그해 다 차트 1위를 찍었으니까. 이에 대한 인터뷰였는데, 이 인상 좋은 아저씨는 여기에서 고원일 덕이라며 생불과 같은 칭찬을 늘어놓았다.
‘저렇게나 대단한 사람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름까지 직접 언급하며 치켜세우면, 기분이 어떨까?’
···부럽다. 심하게 부러워 이 자식.
그런데 기사를 정확도가 아닌 최신순으로 하니, 다른 유형의 기사들도 쏟아졌다.
―엔터테인먼트 사기 급증. 20억대 횡령.
국내 실력파 작곡가로 손꼽히던 고 모 씨(26)가 투자자들에게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고소되었다. 현재 피해 금액은 20억 원으로 추정되며, 고 모 씨는 현재 행적이 묘연한 상황이다. 피해자들은 경찰의 한발 늦은 초동 조치에 대해 강력한 비난을···.
―작곡 유망주에서 지명수배범으로··· 끝없는 추락.
최근 대규모 사기 혐의로 조사가 진행 중인 고 모 씨가 고원일(26)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고원일은 가요계에서 촉망받던 편곡가다. 그는 본인의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다면서 작년부터 투자자를 모집했었다···.
이게 뭔 소리야. 연예란이 아닌 사회란에 나올 법한 사기 이야기에 난 기사들을 다시 정독했다.
‘투자 사기? 그럼 얘 지금, 돈 먹고 튄 거야?’
이건 너무 막장이잖아. 잘나가다가 갑자기 왜 이랬대?
하여간에 고원일에 대한 최근 뉴스는 모두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거 이제 보니 몹쓸 놈이네. 어랏, 동영상도 있다. 게시일을 보니 좀 오래된 것이긴 한데, 그래도 한번 눌러 봤다.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한 10년 전쯤에는 그야말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퀸’ 프로그램의 모습이었다.
스타퀸은 MC도 그 시절 제일 잘나가는 사람들이 나왔고, 게스트들도 다 한가락 하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다.
하지만 메인은 이들이 아닌, 일반인 참가자들이었다. ‘스타’에 견줄 만큼 특별한 재주를 선보인다. 여기서 화제가 되어 가수나 배우 등의 길을 가게 된 경우도 제법 있다.
‘근데 얘가 여길 왜 나왔지?’
무대 가운데에 10년 전 스타일의 MC가 서 있다. 짙은 눈 화장을 한 눈으로 화면을 응시한다.
―이번 참가자는 고등학생이네요. 고원일 군, 나와 주세요!
교복을 입은 앳된 얼굴의 고원일이 나왔다. 근데 보통 일반인이 스튜디오 들어오면 조금이라고 굳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조금도 쭈뼛거리거나 그런 게 없다. 어려서도 저 재수 없는 잘난 척은 똑같았구나.
―고원일 군은 어떤 특이한 재주를 갖고 있나요?
―네 저는, 모든 악기를 수준급으로 연주할 수 있어요. 전자악기 계통이면 모든지요.
―그래요? 그러면 한번 볼게요. 이런 악기도 가능한가요?
천을 씌운 채로, 두 명의 스태프들이 뭔가를 낑낑 들고 온다. MC가 그 천을 확 걷어 내니, 삼각 스탠드 위에 활처럼 거대한 전자 하프가 떡하니 놓여 있다.
어린 고원일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하프를 살펴본다.
―우와··· 전자 하프예요?
―네. 하프 연주해 본 적 있나요?
―없어요. 그런데 상관없어요. 뭔지 몰라도 저는 다 연주할 수 있어요.
녀석의 표정은 아주 여유로웠다. 방송이 처음이라 많이 떨릴 텐데도, 녀석에게서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반면 이를 지켜보는 연예인 패널들은 혀를 내두른다.
―못 해, 못 해. 하프가 보기에는 쉬워 보여도 실제로 하려면 얼마나 어려운데. 어른도 아니고 얘가, 어휴 저건 못 해.
―뭐 어디에 앉아야 해요? 어디가 앞이고 뒤야? 난 그것도 모르겠어.
그래, 여기까지는 이런 쇼에 매번 나오는 리액션들이지. 뻔하다 뻔해. 하지만 바로 이어진 다음 장면에는 반전이 있었다.
―연주, 시작할게요.
그 녀석은 그 앞에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휠에 두 손을 올렸다.
이 부분에서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잘못 봤나 싶어서 다시 돌려 봤다. 잘못 본 게 아니다. 난 그것을 분명히 봤다.
기계에 닿은 순간 녀석의 두 손이 찌릿! 튕겨 올라왔다. 그러고는 마치 전문 하프 연주자처럼 움직이는 능숙한 손놀림···.
그동안 내가 원일을 따라 한다고 했던 녀석들의 말은 틀렸다. 이건 누가 누굴 따라 한 게 아니다.
고원일, 저 녀석과 나는 똑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
15분의 영상이 끝이 났다. 영상이 끝이 나고도 난 그것을 닫지 못했다. 충격을 받은 내 머리가 다시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니 뭐, 그래··· 나도 이런 능력이 있으니 남도 이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그럼 혹시 저 녀석은 알까? 이 능력이 왜 생겼고, 어디서 왔는지?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는지? 혹시 부작용 같은 건 없는지? 물어볼게 산더미인데 그 생각이 났다.
‘잠깐 근데 도피 중이잖아, 이걸 만나서 물어볼 수도 없고···.’
이 능력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바람에 잠시 좀, 멘붕을 겪다가 그런 생각이 났다.
‘그럼 저 녀석, 이 능력을 사용해서 저기까지 간 거야?’
교복 입은 학생 때부터 그랬으니 실기도 이 능력으로 했을 테고. 옛날부터 썼다면 이 손에 대한 노하우도 있었겠지. 그렇게 학교에서 작업도 하고.
아까 그 프로필의 학력, 수상 경력, 소속까지 모두 이 손을 활용한 것이라 생각하니, 그런 생각도 든다.
‘···그러면, 나라고 못 할 거 없겠는데?’
그렇잖아? 능력이 똑같으니, 같은 곳까지 올라갈 수 있겠지. 예전의 나라면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같은 능력을 가진 녀석도 했는데 나라고 못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력이야 이 손이 받쳐 주니까 확고한 목표 의식을 갖고 시도한다면. 그리고 여기에 인맥과 운이 따라 준다면 저 녀석보다 더 나아갈 수도 있겠지.’
물론 쟤는 작곡, 나는 DJ 쪽이니까 루트는 다르지만, 그래도 올라가는 정도가 남들보다는 더 많이 더 빨리 갈 수 있지 않겠어?
마음이 묘하게 차분해지면서도 심장 박동이 힘차게 뛰는 게 느껴졌다.
뭣도 없는 내가 그런다는 게 말도 안 되지만, 말도 안 되는 건 내 손에 깃든 이 능력도 마찬가지잖아. 난 이미 벌써, 말도 안 되는 녀석이다.
‘···한번 가 보자. 지금도 좋지만 언제까지 여기에 머무를 수 없는 노릇이잖아. 그리고 움직일 수밖에 없다면, 당연히 위로 간다.’
성공이 무엇인지는, 나도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가 원하는 그걸, 내가 찾아보려 한다. 이 손으로.
―까톡!
매트리스 위에 던져 놨던 핸드폰, 여기서 난 알림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폰을 바라봤다.
‘···어?’
잊고 지냈던지라 갑작스런 연락에 꽤 놀랐다.
그때는 몰랐다. 이것이 내가 DJ 신에서 본격적으로 독보적인 존재가 되는 시작점이 될 줄은.
<『신들린 뮤지션』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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