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만 하자.”
선생님의 말이 날 서린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입술을 질근 깨물며,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만 불끈 말아 쥐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해. 여기서 더 고통 받을 필요가 없잖니. 영웅이 되지 못하더라도 네가 해 온 노력은 분명 다른 직업을 통해 보상 받게 될 거야.”
영웅.
세계의 격, 영령을 무기나 가호의 형태로 현현시키는 자.
생전 영령의 위상이 강할수록 무기나 가호의 형태는 더욱 뚜렷해진다.
소수의 축복받은 ‘적성자’들 만이 영령과 계약을 맺어 영웅의 자격을 허락 받는다.
보통 적성은 15살부터 17살 사이에 발현된다.
이 기간을 벗어나는 적성자들은 99.9%의 확률로 적성 수치를 상실하고 평범한 민간인이 되어 버린다.
바로 나처럼.....
나도 한 때는 적성 수치가 최상급에 달하는 인재였다.
사람들은 모두 내가 훌륭한 영웅이 될 거라며 입을 모아 칭찬했다.
나는 개천에서 태어난 용이었다.
앞으로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선구자들 못지 않은 영웅이 될 거라 다짐했다.
하지만.
난 어느 영령과도 계약하지 못했다.
자랑스러운 적성 수치는 18살을 넘긴 순간 촛불처럼 일렁이다 훅 꺼졌다.
내 마음을 정리하기도 전에 내 하나 뿐이던 꿈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대체 뭐가 문제였던 것일까?
지금까지 나를 키워준 고향 사람들을 어떻게 봐야 하지?
내가 지금껏 해온 일들은 대체.......?
“선생님.”
난 가슴을 치고 목구멍까지 치솟은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1년만. 1년만 더 기다려 주실 수는.....”
“재하야.”
선생님이 한 쪽 다리를 꼬며 나를 보는 순간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타고난 적성 수치의 천재를 보듬어주던 따뜻한 눈빛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선생님의 망막에는 타인을 바라보는 서늘한 한기만이 감돌고 있었다.
“17살을 넘긴 순간 영령과 계약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단다.”
“하지만 나이 30을 넘겨서 영령 계약에 성공한 사람도 있잖아요!”
“그 확률은 0.001% 밖에 되지 않아.”
“제가 그 확률에 해당할 거라고.....”
“정신차려, 민재하!”
선생님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았다.
“미약한 확률로 영령 계약에 성공한 사람들은 그 나이가 되도록 적성 수치를 ‘유지’했기에 가능했어. 하지만 지금의 넌 그 적성 수치마저 상실해버렸다. 한 번 꺼진 적성 수치는 다시 살아나지 않아!”
단호한 목소리를 반박하지 못하는 내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분하고 억울해서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지금은 네 진로를 새로 찾아야만 하는 때다. 일반 고교로 전학해서, 대학을 나오고, 직장에 취업해서 먹고 살 생각을 해야지. 안 되는 일에 미련을 가져봐야 너만 힘들 뿐이야.”
선생님은 내 눈을 응시하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심장이 가슴 속에서 천갈래로 쪼개지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이 내 앞으로 ‘전학서’를 내민다.
사형 선고를 내리듯 종이 하단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넌 절대 영웅이 될 수 없어. 민재하.”
그 한 마디에 억눌렀던 감정이 폭발했다.
모든 사람의 기대와 나 자신의 희망이 송두리째 짓밟히는 광경이 두 눈에 선해서.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하염 없이 눈물만 쏟아냈다.
***
18살.
내 아름다웠던 꿈이 나락으로 떨어진 그 날.
나는 앞으로의 모든 순간들이 이토록 절망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 때는.
정말 그 때는 몰랐다.
이 지옥 같은 순간에서 벗어날 기회가 다시 주어질 거라고.
안타깝게도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기적’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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