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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바치는 시 1화

2018.08.21 조회 218 추천 1


 1화.
 
 
 Chapter 00. 서장
 
 동이 터올랐다.
 찬란하게 빛나는 아침 햇살이 광활하게 펼쳐진 해수면을 비추었다.
 본래 아름다웠을 것이 분명한 맑은 푸른색의 바다는 온데간데없이 새빨간 핏빛의 바다가 파란 하늘 아래 흉물스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피눈물처럼 검은 연기를 흘리는 부서진 배들과, 걸레처럼 찢어지고 짓이겨져 일부만 남은 사람의 팔다리가 물결 사이로 일렁였다. 적조로 물든 바다를 바라보는 소녀의 새하얀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파도가 울부짖고 있었다. 핏물이 엉겨 붙은 해안의 모래가 절규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이, 이 모든 게 너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것 같았다. 레이휘나는 눈앞의 광경을 보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내 잘못이야.
 
 후회해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바로잡을 기회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미 흘러가버린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죽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삶의 무게가 레이휘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붉은 핏방울이 배어나와 닫힌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수병들이 다가와서, 레이휘나의 뒤에서 서있던 제독을 향해 보고했다.
 “모두 죽었습니다.”
 “가서 시신 숫자 확인하고 잔해를 모아서 화장해줘라.”
 부제독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수병들과 함께 멀어졌다.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레이휘나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시신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았다.
 피비린내가 진동했지만 역하다는 느낌 대신 상실감만 가득했다. 그 상실감이 조금씩 가라앉자 이번에는 그 빈 자리에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당신들을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한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슬픔을 가득 담은 결정이 레이휘나의 뺨을 타고 흘러, 시신의 구겨진 옷깃에 얼룩을 남겼다.
 제독은 그런 레이휘나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모자를 벗어서 그녀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기울어진 모자의 그늘이 눈 앞을 가렸다. 레이휘나는 히끅대며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오늘의 일은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죽게 했는지, 이들의 목숨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두 번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만이 지금 이 순간 레이휘나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마지막 눈물을 새빨간 모래사장에 떨구며 레이휘나는 이를 악물었다. 비릿한 피의 향기가 입 안에 퍼졌다.
 
 오늘의 교훈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으리라.
 이 비극을 만들어낸 자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
 반드시 밝혀내서, 심판대에 올리리라.
 
 레이휘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
 
 Chapter 01. 빛바랜 고국
 
 
 1.
 
 바닷바람이 불었다.
 짜디짠 소금기를 머금은 북해의 습한 바람은 시원함을 넘어선 매서운 칼바람이었다.
 추운 날씨 덕분인지 갑판에서 일을 하는 선원 몇을 제외하면 선상에 나와 있는 사람은 고작 열 명 남짓도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앳되어 보이는 금발의 소녀, 레이휘나는 뱃머리의 끝에 서서 물결치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몰아치는 추위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도 레이휘나는 해가 질 때까지도 뱃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선실에서 대기하던 시종이 올라와 이제 들어가 쉬셔야 한다는 말을 하기 전까지, 아니, 한 후에도 그녀의 시선은 내내 바다에 머물러 있었다.
 짜디짠 소금기를 머금은 북해의 습한 바람은 시원함을 넘어선 매서운 칼바람이었다. 추운 날씨 덕분인지 갑판에서 일을 하는 선원 몇을 제외하면 선상에 나와있는 사람은 고작 열 명 남짓도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앳되어 보이는 금발의 소녀는 뱃머리의 끝에 서서 물결치는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가는구나.
 레이휘나의 머릿속엔 시종일관 그 생각뿐이었다. 10년 만이었다.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평생 두 번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왕궁과,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가족들의 모습이 뇌리에 떠올랐다.
 빨리 보고 싶다. 바다와 닮은 그녀의 푸른 눈에 켜켜이 쌓아온 그리움이 맺혔다.
 “날이 춥습니다. 공주님.”
 목청을 돋구어 말하는 시종의 말에 레이휘나는 가까스로 뱃머리의 난간에 기대고 있던 몸을 떼었다. 그녀의 뒤에 그림자처럼 서 있던 키 큰 여자 역시 몸을 돌렸다.
 “알겠어요, 들어가죠. 마음이 계속 두근거려서.”
 레이휘나의 말에 시종이 고개를 조아렸다.
 레이휘나는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추스르며 시종을 따라 갑판 아래의 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선실 안쪽으로 들어가는 계단에 막 발을 올리면서, 소녀는 다시 한번 바다를 돌아보았다.
 노을이 드리워 붉게 빛나는 바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파도와 희게 떠올랐다 가라앉는 포말은 10년 전 그녀가 동제국에 볼모로 끌려갈 때와 변함없이 똑같은 모습이었다.
 
 *
 
 동제국 메르탄틴.
 대륙의 동북부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제국은 그 이름답게 오랜 세월동안 다져진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다.
 천신을 믿는 나라이자 그 믿음의 발상지인 교국은, 이웃 나라들의 귀감이 되는 곳이자 동시에 동방의 여러 나라들의 문화를 결집시킨 정수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것은 먼 과거의 일이었다.
 교국은 서거한 선황 세론 2세 시절부터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군사력을 키우고, 스스로 '제국'이라 칭했다. 수많은 주변 나라들은 이에 반발했고, 덕치가 아닌 패권주의를 내세운 메르탄틴에 저항했다.
 예상 이상으로 훨씬 격렬한 반대에 부딪힌 세론 2세는 야망을 견딜 의지가 굳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결국 몸져 누우면서 제국은 행로를 잃었다.
 거기서 끝났더라면 로페즈의 동방과 남방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번 불어온 전쟁의 바람은 그대로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일들이 전주곡에 불과하다는 듯이 세론 2세의 의지를 더 강렬하게 이은 슈페르 황태자는 이웃 나라에 노골적으로 조공을 요구했다. 거의 속국에 가까운 취급에 분노한 나라들은 당연하게도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세론 2세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는데, 고작 열다섯 살이었던 황태자의 명령을 들을 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침략의 구실이 되었다.
 제일 먼저 표적이 된 것은 제국 서남방의 카르디스 왕국이었다. 왕국은 4만의 원정군에 5만의 병사로 대응했다.
 당연히 첫 전투는 카르디스의 우세한 승리였다. 그것을 보고 모두 제국이 이전처럼 물러날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다음의 전투, 또 그 다음의 전투에서 카르디스는 황태자의 친정군에 패배했다. 심지어 두 번의 전투로 카르디스 왕국군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초여름에 시작된 전쟁은 그 여름이 끝나기도 전에 끝났다. 카르디스의 수도는 함락되었다. 왕가에 살아남은 사람은 몇 없었고, 카르디스는 제국에 복속되며 왕국의 이름을 잃었다.
 그 다음은 카르디스 남쪽의 모라크 왕국이었다.
 모라크는 제국의 3만 원정군에 대항해 8만의 병사를 준비했으나 처참히 패배했다. 카르디스보다 훨씬 복잡한 지리적 이점을 낀 방어전이었음에도.
 모라크의 국왕, 케이시 3세는 성난 태풍같은 기세로 밀고 들어오는 제국군이 수도에 도달하기 전에 사절을 파견했다. 항복의 표시였다.
 그리고 굴욕에 가까운 강화 협정이 맺어졌다.
 왕실의 재산은 절반 이상 몰수되고, 당시 일곱 살에 불과했던 공주가 볼모로 지목되었다. 거기에 더해 매 해 세금의 4할을 조공으로 바치라는 조약이 붙었다.
 레이휘나 아나벨 드루카심, 모라크 왕국의 공주는 나고 자란 고국을 떠나기 전 아버지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미안하다 속삭이는 아버지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이 모든 비극적인 상황을 어린 공주가 다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슬프고 괴로운 아버지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제국군의 손에 이끌려 범선에 올라탄 공주의 눈에 들어온 것은 쉼없이 흔들리는 바다의 파도였다.
 이제부터 걸어갈 공주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처럼, 때로는 거칠게 몰아치고 때로는 잔잔히 가라앉는 깊고 넓은 대양의 파도였다.
 
 *
 
 철썩, 철썩.
 철썩.
 
 새카맣게 물든 밤바다의 표면 위로 별빛이 무수히 떨어져 내렸다.
 모라크 왕국의 공주, 레이휘나는 시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시 갑판으로 나왔다.
 이젠 희미해진 아버지의 얼굴과 어린 동생의 모습이 얼마나 바뀌어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매일같이 동생과 키 재기 놀이를 하던 정원의 나무가 그 모습 그대로 있을지도.
 돌아가면 앞으로는 함께 할 수 있겠지.
 지금까지 떨어져 지내며 그리워했던 만큼 못다 나눈 정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하며 레이휘나는 줄곧 뒤에 시립해 있던 여자를 바라보았다.
 “춥지 않아요, 드레가?”
 “···괜찮···습니다.”
 어눌한 말투로 드레가가 대답했다.
 드레가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레이휘나에게 황제가 호위 역으로 붙여준 여검사였다.
 이 여검사는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어딘가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키는 크지만 마르고 가녀린 몸매인데 보통 기사의 검보다도 굉장히 큰 대검을 허리에 차고 있는 것이나, 핏기 없이 창백한 피부와 초점이 잘 맞지 않는 것처럼 흐릿한 눈빛이 특히 그랬다.
 “···그렇게 입고서 정말 안 추워요?”
 두터운 숄을 두르고 나와있는 레이휘나와 달리 드레가는 가벼워 보이는 팔 다리가 드러난 타이트한 가죽 갑옷 차림이었다.
 이제 곧 남쪽으로 접어들면 따듯해진다고 해도 지금 당장 불어오는 밤바람은 매우 차가운 것이 분명한데, 맨살을 드러내놓는 복장을 하고서도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는 드레가의 말이 레이휘나에게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피부 차잖아요. 이거라도 둘러요.”
 “정말로 안···춥습니다.”
 드레가는 어깨에 숄을 둘러주는 레이휘나의 손길을 정중히 사양했다. 걱정과 불만이 어린 레이휘나의 눈빛에 드레가가 고개를 숙였다.
 “공녀께서··· 감기에, 걸리십니다.”
 레이휘나가 한숨을 쉬었다. 나 그 정도로 연약하지 않다고요. 투정부리는 듯한 말에도 드레가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꿈쩍없었다.
 정말로 다루기 힘든 사람이다. 그것이 드레가에 대한 레이휘나의 판단이었다.
 명령에 따르며 충성하는 기사나 무관들의 무뚝뚝한, 좋게 말하면 근엄하고 나쁘게 말하면 답답한 속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드레가는 단순히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지나쳐 보였다.
 ‘자리를 비우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라는 이유로 잠깐 안에 들어가서 겉옷이라도 가지고 오라는 말도 듣지 않는 걸 보면.
 낮은 한숨을 쉬며 레이휘나는 벌어진 숄의 앞섶을 여몄다. 찬바람이 스며들어 살짝 시린 기분이 들었다.
 기이할 정도로 황제의 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수행원이다. 그녀가 정말 신변의 안전을 위한 수호자일 뿐일까.
 작게 피어오른 의심을 애써 접으며 레이휘나는 다시 어두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뭐, 감시까지 붙여가면서 돌려보낼 황제 폐하로는 안 보였으니까···’
 그때 묵묵히 레이휘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드레가가 말했다.
 “···폐하의, 명령에··· 따르면.”
 “······?”
 “공녀께서··· 위험에 처하시면, ···칼날이 되어주라고···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일까. 레이휘나는 동그래진 눈을 하고 드레가를 보았다.
 거짓을 말하거나, 숨기는 게 있을 때 드러나는 사람들의 미미한 표정의 변화가 드레가에게선 보이지 않았다.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지, 아니면 의심할지는 결국 레이휘나의 몫이었다.
 “든든하네요. 고마워요.”
 어차피 가까이 지낼 사람이었다. 믿지 못한다면 자기 손해였다.
 “오랜만에 돌아가는 고향이긴 하지만, 특별히 위험할 일이야 있겠어요?”
 “······.”
 “뭐, 도적떼라든가, 도적떼라든가, 도적떼라든가 하는 건 모험 소설에서만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아, 여긴 바다니까 해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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