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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의 검 1-1

2018.08.16 조회 833 추천 7


 목차
 
 프롤로그
 제1장 총잡이
 제2장 대평원
 
 
 
 프롤로그
 
 
 
 “1167번, 면회다!”
 사형수 감방 앞에 온 교도관이 소리치더니 문을 열었다.
 철컹!
 ‘면회라고?’
 1167번 사형수 김현준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머리를 갸웃했다.
 “어서 나와.”
 교도관이 머뭇거리는 김현준을 보고 소리쳤다.
 ‘이상하군. 누가 날 면회 왔단 말인가?’
 감방 복도를 걸어가는 김현준의 머리에 의혹이 맴돌았다.
 “반갑네, 현준 군.”
 여긴 면회실이 아니다. 고급 카펫이 깔린 방.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이 김현준이 들어서자 환하게 웃으며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난 댁을 처음 봅니다만······.”
 김현준이 내민 손을 잡지 않자 남자는 품속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밀었다.
 “아, 내 소개를 하지 않았군. 난 이런 사람이네.”
 김현준이 명함에 적힌 글을 읽었다.
 
 <대한제국 우주탐험부 인사국장 이정찬>
 
 “허, 이거 영광이구려. 나 같은 깡패가 대한제국의 우주탐험부 인사국장을 만나다니. 후후.”
 빈정거리는 김현준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우주탐험부에서 인사국은 우주선의 선원들을 임명하는 부서이다.
 그 때문에 김현준은 인사국장이 왜 자기를 만나러 왔는지 짐작이 된 것이다. 지금은 서기 3015년. 서기 2300년부터 우주로 진출하기 시작한 인류는 과학의 발전으로 수명이 500년으로 길어졌으며, 각 나라는 우주의 행성을 수십 개씩 차지하고 제국을 선포했다.
 그런데 어째서 민주주의를 던지고 제국을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겠지만 그건 당연했다.
 우주로 진출한 후 인류는 하나의 나라가 수십 개의 행성을 영토로 보유했다. 어떤 나라는 100개가 넘는 행성을 가졌다. 그러니 국가의 영역이 넓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행성과 행성을 오가자면 몇 달씩, 혹은 몇 년이 걸리기도 했다. 그러니 국가의 통치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대안으로 각 나라는 중앙집권을 강화하는 방법으로 제국을 선택했다. 그래야 우주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행성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세기나 19세기의 제국들처럼 잔혹한 전제정치는 아니었다. 새로운 우주제국의 황제는 20년에 한 번씩 교체되며 투표로 선출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황제 선거에서 이기면 다시 황제를 하기도 하지만 두 번 황제가 되는 것은 정말 어려웠다.
 그리고 임기 동안 국민의 의견에 반대되는 행동을 했을 때 황제는 하야해야 한다. 그 때문에 황제라고 해도 국민의 눈치를 봐야 했다.
 각설하고, 지금은 우주 대항해 시대이다.
 각 제국은 더 많은 행성을 차지하기 위해 우주를 탐험했다. 사람이 살 만한 행성은 먼저 발견한 제국의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주로 진출한 대한민국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새로운 행성 탐험에 많은 힘을 쏟았다.
 그런데 우주를 탐험하여 제국의 영역을 넓혀가던 각 제국은 비상이 걸렸다. 우주 탐험에 나서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이 제국시대라고 하지만 인권은 더 강하다.
 그 때문에 군인이라고 해도 우주 탐험은 본인이 자원해야만 간다. 명령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행성을 탐험하러 떠났다가 돌아온 탐험선은 1만 대에 1대 정도. 나머지 탐험선은 우주의 미아가 되어 소멸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우주 탐험에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
 500년의 수명을 가진 인간이 탐험을 떠났다가 죽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각 제국은 탐험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돈을 많이 주고 명예를 줘도 가려는 자는 소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각 나라는 우주 탐험 인력난에 시달렸다.
 담배에 불을 붙여 문 김현준이 말없이 쳐다보는 국장에게 말했다.
 “탐험선을 타고 떠날 사람으로 내가 당첨된 거요, 국장?”
 “여기서 사형을 당할 바에는 차라리 탐험을 떠나는 게 좋은 조건 아닌가? 돌아오지 못해도 죽는 것은 마찬가지고, 살아 돌아오면 무죄가 될 것이고. 내 생각엔 남는 장사 같은데, 어떤가?”
 그러자 김현준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죄수는 많은데, 왜 하필 나요?”
 “자넨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아오면서 태양파의 행동대장이 됐더군. 순전히 깡과 악으로 말일세. 미지의 우주에서는 악과 깡이 있어야 하지. 그게 내가 자넬 뽑은 이유이네.”
 “그래도 난 32명을 죽인 살인자요. 그것도 알고 있소?”
 “탐험에서 돌아오면 어떤 죄든 무죄가 되네. 우주 탐험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지.”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부딪쳤다. 한참 동안 마주 보던 김현준이 입을 열었다.
 “내 나이 이제 겨우 50. 아직 450년을 더 살아야 하는데, 사형을 언도 받았지. 남은 450년이 아깝기는 했소.”
 말을 끊고 빙그레 웃은 김현준이 말했다.
 지금 시대의 인간은 생명공학이 발전해서 DNA 자체를 진화시켰다. 이를테면 육체 개조를 하여 강화 육체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노화가 천천히 진행되며 젊은 육체로 오래 살 수 있었다.
 현재 김현준의 나이는 50살. 지금 그의 육체 상태는 예전 지구의 인간으로 치면 18세 정도밖에 안 된다.
 그 시대의 인간들이 지금의 김현준을 보면 아마 고등학생인 줄 알 것이다.
 그만큼 앳돼 보이는 것이다.
 물론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육체가 개조되어 그런 것이지만.
 “뭐, 어차피 죽을 운명을 살려주는데 안 가면 바보라고 하지 않겠소? 후후. 가죠. 여기 있으면 사형당할 거. 만에 하나라도 성공하기를 바랄 수밖에. 날 뽑아줘서 고맙소, 국장.”
 김현준의 말에 국장이 빙그레 웃었다.
 “그럼 탐험에 자원하는 걸로 알겠네.”
 국장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선 김현준이 말했다.
 “하지만 탐험선은 최신식이길 바라겠소. 내가 살아 돌아와야 제국에도 이로울 테니 말이요. 안 그렇소, 국장?”
 그러자 국장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 말게. 이번에 건조한 우주 탐험선 환웅호는 대한제국의 최첨단 과학이 집약된 총아라고 장담할 수 있네.”
 “그건 다행이구려. 그나저나 내 방에 좋은 음식을 좀 넣어주시오. 사형수 감방이라고 영 음식이 시원치 않구려, 국장.”
 국장이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 말게. 오늘부터 자넨 사형수가 아니라 VIP 대접을 받게 될 걸세.”
 “고맙구려. 후후후.”
 김현준이 비릿한 웃음을 터뜨리며 감방으로 돌아갔다.
 서기 3015년. 조직폭력배 32명을 죽이고 사형을 언도받은 태양파 행동대장 김현준이 우주 탐험선 ‘환웅호’를 타고 미지의 우주로 떠났다.
 
 ***
 
 제1장. 총잡이
 
 
 
 -선장님, 선장님.
 김현준이 눈을 떴다. 제일 처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에 떠가는 하얀 솜 같은 구름이었다.
 -선장님, 드디어 정신을 차리셨군요!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현준이 머리를 흔들었다.
 ‘정신을 차려?’
 이게 무슨 소리지 하고 생각하던 현준은 불쑥 떠오르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그렇지. 그 이상한 검은 통로에 갇혀서 정신을 잃었지.’
 대한제국 봉황 행성을 떠나 끝없는 우주를 항해한 지 3년. 미지의 우주에 들어선 환웅호는 어느 날 항해 도중 괴이한 검은 통로로 빨려들어 갔다.
 깜짝 놀란 현준은 최대 출력으로 벗어나려고 했지만 환웅호는 점점 안쪽으로 빨려들어 갈 뿐이었다. 게다가 엄청난 압력에 환웅호는 깡통처럼 쭈그러들었다.
 우주의 거대한 힘 앞에서는 인류가 이룩한 최신의 과학도 무용지물이었다.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은 무시무시한 검은 통로였다.
 그때 현준은 검은 통로의 거대한 압력에 피를 쏟으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어, 저건 산?”
 벌떡 일어난 현준의 눈에 사령실 시창 너머로 하얀 눈에 덮인 산이 보였다. 그것도 엄청나게 높은 산이다. 그 밑으로는 우거진 수림과 아름다운 폭포가 쏟아지는 것이 보였다. 5단으로 연이어 푸른 물이 쏟아진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장관이다.
 폭포의 오른쪽으로는 끝없는 수림과 푸른 풀이 융단처럼 펼쳐진 초원이 보였다. 그리고 나뭇잎이 울긋불긋한 것을 보아 가을인 듯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현준은 어리둥절했다. 끔찍하던 검은 통로에 갇힌 환웅호가 어떻게 이런 대지에 있는 것일까? 현준이 소리쳤다.
 “야, 꺽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꺽쇠는 우주 탐험선 환웅호의 슈퍼컴퓨터다.
 -선장님, 여긴 지구입니다.
 “지구? 설마 내가 아는 그 지구?”
 현준이 의아해서 물었다. 그러자 꺽쇠의 대답이 들려왔다.
 -선장님, 일단 홀로그램을 보세요.
 그 말과 함께 현준의 앞에 홀로그램이 나타났다.
 검은 우주, 그리고 보석처럼 푸르게 빛나는 행성.
 분명 봉황 행성에서 낙원의 행성이라고 선전하던 인류의 모행성인 지구가 분명했다.
 “돌쇠, 탐험선은 지금 정상이냐?”
 현준은 푸른 지구를 보다가 급히 물었다. 이 홀로그램은 분명 우주에서 지구를 촬영한 영상이었기 때문이다.
 -선장님, 일단 환웅호의 상태부터 보고하겠습니다. 환웅호의 블랙 엔진은 그 검은 통로에서 파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블랙 엔진은 현재 우리 탐험선이 가진 기술로는 복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환웅호는 더 이상 우주로 날아오를 수가 없게 됐습니다. 하지만 플라즈마 핵융합 발전기를 사용하는 20개의 보조 엔진은 정상으로 작동하고 있어서, 환웅호 내부의 모든 것은 정상적으로 가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안드로이드는 2,000기 중 10기가 남았고, 작업 로봇은 10만 기 중 5,000기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무인 정찰정은 200정 중 2정만 살아남았고······.
 “이런, 빌어먹을. 젠장.”
 현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3015년 우주의 탐험선과 함선들은 모두 블랙 엔진, 즉 블랙 에너지를 사용했다. 광대한 우주의 72%가 블랙 에너지로 차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주의 광대한 영역을 항해하는 탐험선이지만 블랙 에너지를 사용하면 연료 고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데 그 블랙 엔진이 파괴되었다면 환웅호는 다시 날아오르지 못할 것이다.
 환웅호의 엔진은 서기 3015년 대한제국 과학의 총아이다.
 한데 그런 엔진이 파괴됐다면 고칠 방법이 없다. 아니, 고칠 수는 있다. 여기가 서기 3015년 우주로 진출한 위대한 인류의 모행성인 그 지구라면 말이다.
 그러나 현준은 머리를 갸웃했다. 여기가 지구가 맞다면 벌써 지구 관리국의 우주정이 왔어야 한다. 환웅호는 지구에 무단 침입했기 때문이다.
 서기 3015년의 지구는 전 우주에서 가장 큰 공로를 세웠거나 인류를 위해 무엇이든 한 가지 이상 이바지한 사람들만 살 권리를 인정받는 곳이다.
 그 외의 사람들은 지구에 발을 디디지도 못한다. 몰래 우주선을 타고 들어와도 즉시 지구 관리국의 우주정에 잡혀서 추방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구의 단속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꺽쇠야, 근데 지구 관리국에서 아무도 오지 않았냐?”
 현준의 의아해하는 말에 꺽쇠가 홀로그램을 켜주었다.
 -선장님이 정신을 잃고 있을 때 제가 무인 정찰정으로 촬영한 지구입니다. 보세요.
 무인 정찰정 송골매는 가로 3.5m에 세로 2.5m, 길이 5m의 계란형 비행체다. 지상과 지하, 수중까지 투시할 수 있고 최대 30㎏까지 실을 수 있는 전천후 정찰정이다.
 그런데 그런 첨단 정찰정이 겨우 2정만 살아남았단다. 하지만 2정만 살아남은 것도 다행이다. 송골매가 다 파괴됐다면 지금처럼 지구를 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라? 근데 뭐냐, 이건?”
 현준은 홀로그램에 나타난 지구의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홀로그램에 나타난 영상이 예상외였기 때문이다.
 밭에서 농사를 짓는 흑인들, 그리고 검은 옷에 긴 치마를 입고 거리를 걸어가는 백인 여자들, 머리에 갖가지 장식을 한, 이상한 모자를 쓰고 얼굴에는 베일을 두른 여자도 보였다.
 그리고 검은 옷에 조끼를 입고 운두 높은 모자(톱 햇)을 썼으며, 지팡이를 멋지게 휘저으며 걸어가는 남자들도 보인다.
 저 옷차림은 분명 어릴 때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며 본 19세기 지구인의 것이다.
 벽돌로 지은 뾰족뾰족한 서양식 집, 철로를 달리는 증기 기차, 도시의 도로를 줄지어 달리는 승용 마차들, 굴뚝에서 검은 연기를 구름처럼 뿜어대며 항구에 가득 서 있는 배들.
 저건 분명 증기선이다.
 “어! 저건 인디언들 같은데······.”
 원뿔형의 티피(인디언의 천막)가 보이고, 머리에 꿩의 깃 같은 것을 꽂은 남자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고기를 굽는 것이 보였다.
 저건 분명 책에서만 보던 그들, 오래전 사라진 인디언의 모습이 분명했다. 아니, 다른 것도 있다. 책에서 본 그림의 인디언은 상의는 알몸이고, 사타구니만 가리는 바지 비슷한 것을 입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인디언들은 가죽옷을 입었거나 직물로 된 옷을 입었다.
 역시 책과 현실은 달랐다. 그나저나 현준은 정말 어이가 없었다. 증기선에 흑인과 인디언들까지.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꺽쇠야, 여기가 분명 지구냐?”
 -예, 분명 지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던 지구가 아닌 천 년 전의 다른 지구인 것 같습니다.
 꺽쇠의 보고에 현준은 입을 딱 벌렸다.
 천 년 전의 다른 지구라니? 그럼 지구가 둘이란 말인가?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 먹는 소리란 말인가?
 “야, 꺽쇠. 너 혹시 검은 통로 속에 있을 때 맛이 간 거냐?”
 현준의 어이없어 하는 말에 꺽쇠가 침착하게 말했다.
 -선장님, 전 지극히 정상적으로 가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장님, 제 본체에는 인류가 걸어온 모든 역사와 과학 기술 지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대조해 본 결과 우리가 불시착한 이곳은 북아메리카 대륙의 미국 땅으로, 몬태나 주의 그레이트폴스 지역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1875년으로 우리가 살던 시대로부터 1140년 전입니다.
 “뭐, 뭐? 1875년? 그리고 여기가 미국 땅의 몬태나 주라고?”
 현준이 놀라며 말했다. 하지만 꺽쇠의 대답은 건조했다.
 -예, 사실입니다.
 “그게 말이 되냐?”
 -여기가 평행 차원의 지구라면 말이 됩니다.
 “평행 차원의 지구? 그게 뭔데?”
 우주 개척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현준은 우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깡패가 그런 것을 알 이유도, 알 필요도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자 꺽쇠가 알기 쉽게 설명했다.
 -우리가 살던 우주와는 또 다른 차원의 우주로, 지금 우리가 불시착한 지구는 우리가 알던 지구와는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즉 제게 내장된 계산기의 판단으로는 평행 차원의 또 다른 지구가 분명합니다.
 “야, 인마. 난 무식하니까 아리송하게 말하지 말고 콕 집어서 말해. 알았냐?”
 -예, 선장님. 그냥 지구에 왔는데, 1140년 전의 지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말에 현준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꺽쇠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니라면 벌써 우주 관리국의 우주정에서 단속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스크린에 보이는 인디언과 흑인, 백인들의 옷은 3015년의 디자인이 아니었다.
 더구나 집도 19세기의 것들이고, 증기 기차와 거리를 달리는 승용 마차, 바다의 증기선들이 꺽쇠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고 있었다.
 “시발, 난 어째 자빠져도 코가 깨지냐?”
 현준은 어이가 없어서 눈만 끔뻑거렸다. 인류 역사에 취미는 없었지만 대충은 알고 있다.
 지금 이 아메리카 땅에서 유색인종은 벌레나 다름없다는 것을.
 게다가 여기 미국 땅은 백인들이 유색인종인 인디언들을 말살시키고 차지한 곳이 아닌가?
 인디언들을 퉁구스 계통의 인류로 보면 김현준 자신도 인디언과 같은 계통의 유색인종이다.
 그것은 다르게 말하면 자기도 말살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주로 도망칠 수도 없다. 이미 엔진이 파괴되었으니 말이다.
 “야, 꺽쇠야. 이젠 어떡하지?”
 현준의 말에 꺽쇠가 대답했다.
 -전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선장님의 명령을 받는 슈퍼컴퓨터입니다, 선장님.
 꺽쇠의 말에 현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꺽쇠가 너무 똑똑해서 가끔 인간으로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꺽쇠는 엄연히 슈퍼컴퓨터로 현준의 명이 떨어져야 무엇이든 한다.
 그게 컴퓨터의 한계였다.
 “그래, 내가 잊고 있었군. 네가 컴퓨터라는 것을.”
 현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현준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3015년에 흔히 있는 인큐베이터에서 태어난 인간도 아니다.
 3015년의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정자와 난자를 정부에 기증한다. 3015년의 여자들은 결혼은 하지만 대부분 평생 임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예쁜 몸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하지만 정부는 필요에 따라 인큐베이터에서 아이들을 키워낸다. 그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제국에 필요한 아이들을 얼마든지 태어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준은 분명 인간인 어머니가 배 아파 낳은 생명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태어나자마자 고아원 앞에 버려졌고, 그곳에서 자랐다.
 고아로 자란 현준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폭력 조직인 태양파에 들어갔다. 그리고 20년 동안 깡패질을 했고, 결국엔 태양파의 행동대장까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현준은 ‘월섬파’라는 깡패 조직원 32명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것도 도끼로 찍어서.
 그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현준은 후회하지 않았다. 고아인 자기를 아들처럼 생각해 주던 태양파 두목의 복수를 했으니까.
 그렇다고 남은 생명이 아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500년 인생에서 50살이면 이제 인생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총살형을 받았다고 살고 싶지 않다면 인간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대한제국의 법은 엄격했다. 살인자는 마땅히 사형을 받는다.
 정당방위가 아닌 이상에는.
 그래서 현준은 체념하고 자기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두목의 복수를 다짐했을 때 죽음을 각오했기에.
 그런데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현준에게도 서광이 비쳤다. 운 좋게도 탐험선의 선장으로 당첨되는 바람에 사형을 면하게 된 것이다.
 그 바람에 삶의 의지가 생겼다. 인간이 살 행성 하나를 찾으면 면죄되니 이번에는 다르게 살아보려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런데 미지의 우주에서 이상한 검은 통로에 빨려들어 갔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유색인종을 벌레처럼 취급하는 1875년의 미국 땅에 불시착했다.
 이렇게 기가 막힐 수는 없었다.
 “젠장, 내 꿈은 그리 큰 것도 아닌데. 쩝.”
 현준의 꿈은 하나였다. 괜찮은 여자나 하나 얻어서 가끔 술주정도 하고, 생선 굽는 냄새가 나는 마당에 자기의 성을 가진 아이들이 뛰노는 것을 보며 살다가 조용히 죽는 것이었다.
 고아원에 있을 때 현준은 형제가 있는 다른 애들을 보면 부러웠다. 그래서 자식이라도 많이 낳으려는 꿈을 가진 것이다.
 서기 3015년은 일부다처제와 일처다부제가 제도화됐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남자 한 명이 아내를 여러 명 두는 것도, 여자 한 명이 여러 명의 남편을 두는 것도 흠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젠 다 틀렸다. 여기 미국 땅의 백인들이 난 조용히 살겠으니 건드리지 말라고 하면, 그래, 너 잘 살아라, 할까?
 절대 아닐 것이다.
 “후, 젠장.”
 한숨을 푹 쉰 현준이 갑자기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꺽쇠에게 물었다.
 “꺽쇠야, 지금 한반도에는 어느 나라가 있냐?”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꺽쇠가 의아한 듯 물었다.
 “지구에 말이다. 우리 대한제국 전에, 그러니까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기 전에는 우리 대한제국이 한국으로 불렸다고 내가 국사 시간에 배웠다.”
 -그래서요?
 “그 한국 전에 우리 민족의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이름이······.”
 -조··· 선 말입니까?
 “맞아, 조선!”
 현준이 무릎을 탁 쳤다. 그가 후다닥 일어섰다. 그리고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이 1875년이면 한반도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을 거야. 그 조선으로 가면 되겠어. 조상들이라고 해도 한민족이 사는 나라니까 인종 차별은 없을 것 아니야? 안 그러냐, 꺽쇠야?”
 하지만 꺽쇠의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조선으로 가겠다고요? 뭘 타고요?
 “응? 그, 그건······.”
 현준이 말끝을 흐렸다. 맞다. 환웅호는 다시 날아오를 수가 없다. 블랙 엔진이 파괴되었으니까. 그리고 모든 탐사용 비행정은 블랙홀을 통과할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살아남은 것은 겨우 정찰정 두 정뿐이다. 하지만 그 정찰정은 30㎏ 이상은 실을 수 없다.
 “하지만 꺽쇠야, 너에게는 지구의 모든 과학기술이 저장되어 있다고 했지?”
 -예, 선장님.
 “그럼 그 기술로 송골매 비슷한 것을 만들면 되잖아.”
 -선장님, 송골매는 작지만 대한제국 과학의 총아입니다. 괜히 송골매가 우주까지 날아오르고 지하까지 촬영하는 줄 아십니까? 아무리 과학기술이 있어도 그건 만들지 못합니다.
 “그럼 다른 비행기를 만들 수 있잖아?”
 -선장님, 비행기는 무슨 요술 망치로 뚝딱 만듭니까? 비행기를 만들자면 먼저 광산을 개발하고 공장을 세워야 합니다. 그다음 각종 설비를 만들어야 하고, 비행기를 만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얼마나?”
 -한 5년쯤? 어쩌면 6년이 걸릴지도 모르죠.
 “이런, 젠장.”
 현준은 입맛을 다셨다. 6년이라니? 그럼 그 6년 동안 무엇을 한단 말인가? 답답해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그때 꺽쇠의 말이 들려왔다.
 -그리고 선장님, 비행기를 만들었다고 해도 조선에 갈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조선은 갓 쓰고 당나귀를 타고 다니는 시대입니다. 길이란 것은 겨우 오솔길 정도고요.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가서 어디에 내리겠습니까? 헬기라면 몰라도.
 “그렇군!”
 한숨이 나온다.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현준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꺽쇠야, 지금 시대에 백인들과 살아가는 인디언은 하나도 없냐?”
 꺽쇠의 말이 다시 들려왔다.
 -몇 명 되지는 않지만 있습니다.
 “오, 그래, 있단 말이지?”
 현준의 눈이 번들거렸다. 백인들과 살아가는 인디언들이 있단다. 그럼 자기도 그들처럼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는 것이다. 현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들은 어떻게 백인들과 어울려 살게 됐지?”
 -땅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가진 부자가 되었죠.
 “땅을 팔아? 무슨 땅?”
 -백인들에게 몰살된 자기 부족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돈만 있으면 여기서도 잘살 수 있다는 거잖아? 흐흐흐!”
 현준은 기분 좋게 웃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환웅호에는 탐험과 정착에 필요한 수많은 장비와 기계가 실려 있었다.
 지금은 1875년, 3015년의 과학기술이라면 지금의 달러와 똑같은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탐험선 환웅호의 슈퍼컴퓨터에는 인류의 방대한 역사와 그 기술이 저장되어 있는데, 돈도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 돈이 가짜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완전 똑같이 만들 테니까.
 그런데 그의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 꺽쇠의 말이 들려왔다. 결코 환영하고 싶지 않은 말이.
 -백인들은 그들을 졸부라면서 경멸했습니다. 자기 부족을 다 죽인 백인들에게 땅을 팔아 부자가 됐다고요.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들도 백인들에게 처형당했습니다.
 “왜?”
 현준의 눈이 둥그레졌다. 영문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디언이 거들먹거리며 사는 것이 아니꼽다고 KKK단원들이 밤중에 목을 잘라 죽였습니다. 아내와 딸들은 겁탈해 죽였고, 남자 아이들은 팔다리를 잘라 불에 처넣었습니다.
 “아니, 뭐 그런 새끼들이 다 있냐? 아, 그 새끼들, 진짜 개새끼들이네!”
 현준이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자기도 조폭이지만 이건 조폭보다 더 무지막지하지 않은가?
 -지금 시대의 백인들은 그렇습니다, 선장님.
 “아, 시발. 젠장.”
 현준은 머리를 싸쥐고 생각에 잠겼다. 꺽쇠의 말이 사실이라면 절대 백인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었다.
 하지만 꺽쇠의 말도 자료에 불과하지 않은가?
 꺽쇠는 누군가가 컴퓨터에 입력한 대로 말하는 것이다. 그게 기계의 한계이다. 그리고 기록이라는 것이 다 진실은 아니다.
 “결국 내가 직접 알아내야 한단 말인가?”
 어느 것이든 진실은 직접 부딪쳐 봐야 안다는 게 현준의 신념이었다.
 컴퓨터의 자료가 부풀려진 것인지도 모르지 않은가?
 이젠 같은 민족이 사는 나라, 조선으로 가고 싶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다.
 여기는 바닷가도 아닌 내륙의 오지인 몬태나 주였다.
 환웅선이 날아오르지 못하는 이상 배도 만들 수 없다. 그건 불가피하게 여기서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여기서 살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러다가 정 안 되면 그때 다시 조선으로 가는 방법을 찾으면 될 것이다. 일단은 여기서 살 방도를 찾자. 현준이 중얼거렸다.
 “좋아, 살 수 있는지 없는지 어디 한번 부딪쳐 보자.”
 직접 부딪쳐 보면 이 시대의 백인들이 유색인종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백인들의 생각이 자료와 다르다면 현준은 그들과 공생할 생각이다.
 자기에게는 이 시대에는 꿈조차 꿀 수 없는 엄청난 장비와 과학기술이 있다. 만약 백인들이 함께 어울려 살게만 해준다면 3015년의 엄청난 과학도 그들과 공유할 생각이 현준에게는 있었다.
 인간이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힘이 솟았다. 기분이 조금 좋아진 현준이 물었다.
 “꺽쇠야, 지금 시대의 화폐는 어떤 것들이지?”
 -지금 시대, 그러니까 1800년대는 금본위제의 시대입니다. 금과 은이 곧 화폐지요. 하지만 지폐도 있습니다. 지폐를 만들까요?
 비록 환웅호가 파괴되긴 했지만 지폐를 만들 장비는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면 지금 시대의 지폐와 똑같은 지폐를 만들어낼 수 있다. 현준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지폐를 만들고, 저기 보이는 저 산맥, 가만, 저 산맥의 이름이 뭐지?”
 -로키산맥입니다, 선장님.
 “그래. 저 로키산맥에 금과 은 같은 보석이 있는지 확인해 봐.”
 꼭대기에 눈이 하얗게 덮인 산을 가리키는 현준의 말에 꺽쇠가 즉시 대답했다.
 -선장님, 이미 송골매로 확인해 봤습니다.
 “벌써?”
 -제 임무는 선장님에게 닥친 위험을 먼저 해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컴퓨터가 작동하자마자 주변에 대한 탐색을 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좋아, 좋아. 그런데 금이 있어?”
 -예. 금과 은, 보석도 있고, 여러 가지 광물과 석유가 이 지역과 로키산맥에 있습니다.
 그 말에 현준의 얼굴이 환해졌다.
 “좋군. 그럼 금과 은 같은 것을 우선적으로 캐. 그래서 금화와 은화를 만들어. 보석은 멋지게 세공하고. 물론 지금 시대의 지폐도 만들어야겠지.”
 -곧 작업 로봇을 투입하겠습니다. 하지만 돈을 만들어낼 장비를 만들어야 하니 지폐를 만들자면 시간이 걸립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시작해.”
 -알겠습니다, 선장님.
 “그럼 돈은 해결됐고······.”
 현준은 사령실을 거닐며 생각에 잠겼다. 돈은 해결된 셈이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했다. 꺽쇠가 보여준 자료를 보면 미국은 총기가 흔하게 널린 곳이다.
 그야말로 먼저 쏘는 자가 사는 무법천지의 나라이다. 그러니 일단 무장을 해야 했다.
 물론 현준에게는 3015년의 방어 무장이 있긴 하다. 바로 우주복에 설치된 광선검과 광선 방패, 그리고 광선총이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무기는 화약을 폭발시킨 힘으로 철 알을 날려 보내는 총기이다.
 현준의 관점으로 보면 그야말로 원시 무기였다.
 하지만 광선총을 가지고 다니면?
 아마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럼 이 시대에 적응하기가 힘들어질 것이다.
 “총을 만들어야겠군. 더불어 방탄복도 만들고.”
 현준은 그레이트폴스의 장쾌한 폭포를 보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어차피 조선으로 갈 수 없다면 세상으로 나가볼 생각이다. 직접 부딪쳐서 백인들과 함께 살 수 있는지 없는지 실험해 볼 심산인 것이다.
 정말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백인과 살 수 없다면 다시 돌아오면 된다. 그때는 꺽쇠가 비행기를 만들어놓을 테니까.
 
 ***
 
 새하얀 폭포가 떨어지는 그레이트폴스 지역의 우거진 숲. 그 안 통나무로 만든 집에서 새카만 가죽옷을 입은 사내가 밖으로 나왔다.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가죽옷,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반들거리는 부츠, 양쪽 허벅지에 차여 있는 두 자루의 권총집, 그리고 머리에 쓴 모자는 이 시대에 한창 유행하는 카우보이모자이다. 다만 다른 점은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만들졌다는 것과 카우보이모자의 양쪽 옆에 두 개의 새의 깃털이 꽂혀 있다는 것이다.
 미국 땅에서 머리나 모자에 새의 깃털을 꽂는 사람은 인디언뿐이다.
 그럼 이 사내는 인디언일까?
 아니다. 인디언처럼 보이는 앳된 남자, 그는 다름 아닌 현준이었다. 현준의 나이는 50세이지만, 개조 강화 육체이기에 18세 정도로 어려 보였다.
 그리고 실제 육체도 18세 정도의 청춘이다. 참으로 부러운 몸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3015년의 사람들은 다 그랬다.
 “꺽쇠야, 말을 가져와라.”
 -예, 선장님.
 이곳에 불시착한 지 오늘로 딱 1년째. 그동안 현준은 꺽쇠에게 명하여 자신이 입을 옷과 무기를 만들게 했다.
 지금 시대에 광선총을 휘두르면 아마도 전 미국 땅의 백인들이 달려들 것이다.
 신비한 무기를 빼앗기 위해.
 물론 백인들이 무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준이 바라는 것은 백인들과 어울려 등 따시고 배부르게 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화약을 폭발시켜 철 알을 날려 보내는 무기를 만들게 했다.
 한데 아무리 3015년의 과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게 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총을 만들자면 철이 있어야 하고, 철을 만들자면 광산과 용광로, 제철소와 제련소가 있어야 했다.
 다행히 파괴된 10만 기의 작업 로봇 중 5,000기는 살아남았다. 그것들이 있어서 현준은 광산을 개발하고 광석을 캤으며, 용광로를 만들고, 공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쇠를 만들고 이번에는 선반을 비롯한 공작 기계 공장을 만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생각한 일이 커졌다.
 그래서 작업 로봇들이 금광과 은광, 보석 광산을 개발할 때 철광을 비롯한 여러 가지 광석을 캐내기 위한 광산도 함께 개발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환웅호는 탐험선이다. 탐험을 하다 보면 대한제국 봉황 행성에서 미지의 우주로 수백 광년, 또는 수천, 수만 광년을 날아가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람이 살 만한 행성을 발견하고 다시 제국에 알리려면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난자와 정자를 결합시킨 사람의 씨앗을 특수 캡슐에 냉동시켜 가지고 떠난다.
 그리고 사람이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하면 해동시켜 인간 씨앗을 인큐베이터에서 키워낸다.
 그야말로 3015년의 과학이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3015년의 각 제국들은 탐험선에 사람의 씨앗뿐만 아니라 동물의 씨앗도 함께 실었다. 말과 소, 염소, 양, 돼지, 닭 등 사람에게 이로운 짐승들의 것 말이다.
 또한 200만 종이 넘는 곡식 종자도 함께 싣고 있다. 모두 인류가 3015년까지 개조하고 또 개조한 우량종자들이다.
 새로운 행성에 도착하면 그 행성에 사람과 곡식, 동물이 퍼지게 만든다. 그래야 인간이 새로운 행성에서 죽지 않고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환웅호에 있던 씨앗과 곡식 종자들은 이상이 없었다. 현준은 꺽쇠에게 명을 내려 우량종 말 두 마리를 키우게 만들었다.
 세상에 나갈 때 타고 가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사람은 키워내지 않았다.
 현준은 호위병이 필요 없었다. 현준의 몸속, 정확히 허리의 양쪽 뼛속에는 생체 에너지 방어 칩이 삽입되어 있다.
 만약 위험이 닥치면 그곳에서 투명한 에너지 방어 실드가 나와 현준의 몸을 감싼다.
 에너지 투명 방어 실드이다. 이 시대에 에너지 쉴드를 뚫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호위병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이만하면 세상에 나갈 준비는 된 셈이군.”
 현준은 본인의 몸을 훑어보았다. 허리에 찬 두 자루의 권총. 이 권총은 21세기 지구인들이 사용하던 체코제 CZ-75이다.
 탄창에 15발의 탄환이 장전되고, 약실에 한 발이 있어서 16발의 탄환이 든 권총이다.
 지금 시대의 사람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최첨단 총인 것이다.
 “말을 가져왔습니다, 선장님.”
 돌아보니 안드로이드가 검은 칠을 한 것처럼 새카만 흑마의 고삐를 잡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살아남은 10기의 안드로이드 중 하나이다.
 “멋진 말이군.”
 현준은 흑마를 쓰다듬어 보며 감탄했다. 이 흑마도 환웅호에 탑재되어 있던 동물의 씨앗으로 키워낸 것이다.
 “마침 내가 말을 탈 줄 알아서 다행이야. 후후.”
 현준은 경마를 좋아했다. 그래서 갱단의 행동대장을 하면서도 시간만 나면 경마를 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고 도박을 하곤 했다. 그리고 말의 귀신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것이 이제는 도움이 되었다. 지금 시대에는 말이 가장 기본이 되는 교통수단이니 말이다.
 “꺽쇠.”
 -예, 선장님.
 현준의 귓속에 꺽쇠의 대답이 울렸다. 귓속에 삽입된 수신 칩을 통해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은폐막을 절대 열지 마라.”
 -예, 선장님.
 지금 건설한 공장들을 백인들이 보면 당장 소문이 날 것이다. 다행히 아직 여기는 백인들이 오지 않아서 안전했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 헬레나에 골드러시 바람이 불어 백인들이 금을 캐내는 도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에 오른 현준은 마지막으로 꺽쇠에게 명을 내렸다.
 “만약 주변에 접근하는 백인들이 있으면 소멸시켜라. 내 말 알아들었지?”
 -예. 접근하는 자는 모두 없애겠습니다, 선장님.
 명을 받은 이상 꺽쇠는 그레이트폴스 지역, 더 정확하게는 환웅호가 있는 지역에 접근하는 자는 누구나 광선총으로 청소할 것이다.
 광선총에 맞으면 인간의 육신은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그야말로 뼈도 추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럼 난 간다.”
 현준이 말의 배를 부츠로 툭 쳤다. 그러자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한 마리에는 짐을 실었고, 한 마리는 현준이 타고 달린다.
 -잘 다녀오십시오, 선장님.
 그리고 꺽쇠의 명령이 떨어졌다.
 -선장님의 명령을 실행한다. 은폐막 가동.
 스스스스.
 그 말이 끝나자 탐험선에서 뽀얀 안개 같은 것이 넘실거리며 숲을 덮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분 후, 그레이트폴스 지역의 서북쪽에 있는 숲이 사라져버렸다. 대신 그 앞에 거대한 절벽이 생겨났다.
 그 안에서 우주선의 슈퍼컴퓨터 꺽쇠의 말소리가 울려 나왔다.
 -행성정착시행법 제1조 1항에 의거, 이 시각부터 선장님을 지원할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행성정착시행법 제1조 1항이 대체 무엇이기에 선장인 현준의 지시도 없이 꺽쇠가 스스로 발동하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묵묵히 굽어보는 저 하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
 
 내리쬐던 햇볕이 대평원의 지평선 위로 기울어지는 오후 6시, 초원에 먼지가 뽀얗게 묻은 풍을 씌운 포장마차 두 대가 서 있다.
 그 주변의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무쇠 냄비에서 고기가 익는 구수한 냄새가 주위로 퍼져 나갔다.
 냄비 옆의 바위에다 도마를 놓은 여인이 고기를 썰고 있고, 다른 여인은 검은 빵을 자르고 있었다. 얼핏 봐도 어디론가 이동하던 사람들이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대체로 풍을 씌운 포장마차로 가족이 통째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나, 상을 차려라.”
 “네, 엄마.”
 여인의 말에 주전자에 물을 길어 오던 금발의 처녀가 달려와 바닥에 방수 천을 깔았다.
 해맑은 얼굴, 쌍꺼풀이 진 커다란 푸른 눈, 늘씬하면서도 풍만한 몸매.
 이제 18살이나 됐을까? 금발이 찰랑이는 아가씨의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은 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굉장히 청초했다.
 그녀가 방수 천 위에 두 여인이 자른 검은 빵과 고기, 야채를 가져다 놓았다. 이 시대의 최하층 백인들은 흰 빵을 먹기가 어려웠다.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자, 어서 모여요! 식사 시간이에요! 비비안, 제임스를 데리고 와!”
 안나의 외침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차의 풍 천이 젖혀지고 한 금발 아가씨가 13세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내려섰다.
 한데 금발의 아가씨는 몸매, 해맑고 큰 두 눈이 안나와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안나보다 조금 더 앳되어 보인다.
 이제 16세가 된 안나의 동생 비비안이다.
 “어서 가자, 제임스.”
 “응, 누나.”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오는 동안 마차에서 좀 떨어져 주변을 경계하던 두 명의 남자가 돌아왔다. 모두 두 가족인 것이다. 아가씨 둘에 아주머니가 둘, 남자아이 하나에 두 명의 남편. 척 봐도 두 가족이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얘들아, 기도하고 먹어야지.”
 둘 중 조금 뚱뚱한 여인의 말에 식탁 앞에 앉은 두 가족이 모두 눈을 감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어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순한 양들은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여인의 기도를 모두가 따라 한다. 그리고 한참 만에 뚱보 여인의 기도가 끝났다.
 “아멘.”
 “아멘.”
 “자, 이제 먹자.”
 모두 빵과 고기를 집어 씹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유는 없었다.
 “질, 헬레나에 도착하면 우유부터 사야겠어요. 제임스가 벌써 일주일째 우유를 못 마셔서 힘이 없어요.”
 뚱보 여인의 말에 질이라는 남편이 아들에게 말했다.
 “그래, 헬레나에 들어가면 우유부터 사주마, 제임스.”
 “아빠, 괜찮아요.”
 남자아이가 어른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목젖이 꿈틀거린다. 우유가 먹고 싶은 것이다.
 “밥, 헬레나는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이번에는 몸이 호리호리한 여자가 자기 남편에게 물었다.
 “글쎄. 이젠 거의 다 온 것 같긴 한데······.”
 밥이라는 남편이 자신 없는 투로 대답한다. 이 시대는 제대로 된 지도가 없었다. 그저 주와 주의 경계만 확실할 뿐, 주 안의 구체적인 지도는 찾기가 힘들었다.
 아니, 없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했다. 서부는 아직 미개척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네브래스카 주에서 몬태나 주의 헬레나로 가기 위해 오는 아일랜드계 이민들이다.
 이들이 헬레나로 오는 것은 다름 아닌 골드러시 때문이었다.
 사실 헬레나의 골드러시는 2년 전에 시작됐지만 이젠 시들해졌다. 하지만 동부에는 일자리가 얼마 없다.
 이 시대에는 유럽 각국에서 이민자가 매해 100만 명 이상 모여들고 있었다.
 현재 미국의 인구는 5천만. 그중 35%는 흑인이고, 35%가 백인, 25%가 흑인과 백인, 황인과 백인의 혼혈 인종이다. 그리고 5%는 중국인과 일본인, 인디언과 백인의 혼혈 인종이다.
 미국은 이제 산업혁명을 시작한 나라, 그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를 보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골드러시가 일어났던 헬레나로 아직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몰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륙 횡단 기차를 타고 와이오밍 주까지 오고 거기서부터는 이렇게 포장마차로 몇 주, 또는 몇십 일까지 걸려 헬레나를 향해 갔다.
 모두 황금을 캐서 일확천금을 노리는 욕망 때문이다. 하지만 황금을 캐러 가는 사람들은 험한 여정을 거쳐야 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저거, 말 아니에요?”
 두 아가씨 중 몸이 좀 더 풍만한 안나가 초원 한쪽을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고,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를 보았다. 분명했다. 산 능선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건 분명 먼지구름이었다.
 “질, 아무래도 인디언들 같네.”
 밥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들은 동부에 이민을 와서 지금까지 인디언에 대한 갖가지 소문을 들었다. 아주 좋지 않은 소문을. 그러니 얼굴이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그래, 어서 떠나세.”
 질이 대답하자 모두 다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무쇠 냄비를 두 남편이 마차에 싣자 여자들과 두 아가씨도 조리 도구를 재빨리 실었다.
 “자, 가자.”
 마차에 오른 그들이 떠나려 할 때였다.
 두두두두두!
 갑자기 우레가 치는 듯한 말발굽 소리가 울리고 산 능선을 에돌아 기병들이 나타났다.
 대략 25명 정도. 함성을 지르며 위압적으로 달려오는 기병들은 한 손으론 고삐를 쥐고 다른 손에는 후장식 연발 소총을 들었다.
 그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온다. 한데 망원경을 들고 그들을 자세히 보던 질이 다급하게 말했다.
 “밥, 저건 제임스 패거리야.”
 “이런, 빨리 마차를 몰게. 어서.”
 밥이 마차를 급히 몰았다.
 “이랴! 이랴!”
 두두두두두두두!
 그러다 이제는 여인들이 마차를 몰고 두 남편은 스펜서 라이플을 들고 마차 뒤에 엎드렸다.
 “하필 저놈들과 마주치다니······.”
 장탄을 하는 질의 손이 자꾸 떨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초원의 무법자, 무자비한 강탈자, 지옥의 살인자, 여자에 눈이 뒤집힌 강간마.
 그것이 제임스 패거리에게 붙은 칭호였다. 저들은 대평원의 여러 강도단 중 하나이다. 이 시기에는 대평원에 수백 개의 강도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광산의 금 호송 마차, 또는 노동자들의 봉급 마차를 습격했고, 백인 거주 지역의 은행이나 상점, 주택들도 습격했다.
 또한 이렇게 초원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기습하여 재물을 빼앗거나 재물이 없으면 남자는 쏴 죽이고 여자는 싫증이 날 때까지 끌고 다니며 강간한 후에 유곽에 팔아버렸다.
 그야말로 인간 망종들이 대평원의 강도단이었다.
 그 때문에 저들을 잡으라는 수배 전단이 곳곳에 나붙었지만 잡지 못했다.
 개척촌이 대부분인 서부 촌락이나 도시의 보안관들 힘으로는 떼 지어 강도질을 하는 저들을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안관들은 강도단이 나타나면 도망쳐서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판이었다. 그러니 강도단이 제 세상 만난 것처럼 날뛸 수밖에 없었다.
 “서라! 멈추면 목숨은 살려준다!”
 확성기를 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개자식들.”
 중얼거린 밥이 머리를 돌려 외쳤다.
 “계속 말을 때려 몰아!”
 “네.”
 두 집의 식구들은 모두 앞 마차에 탔다. 뒤의 마차에는 밥과 질, 그리고 밥의 딸인 안나가 마차를 몰고 있다.
 “저것들을 쏴라!”
 기병들 중 한 놈이 고함을 질렀다. 아마도 수배 전단에 얼굴이 그려져 있는 제임스일 것이다.
 타앙!
 하지만 첫 총성은 마차에서 질이 먼저 울렸다. 제임스 패거리가 쏘기 전에 먼저 쏜 것이다.
 탕탕탕탕!
 총성이 울리자 제임스 패거리가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달리는 말 위라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대신 밥과 질은 마차 위에 엎드려 있기에 상당히 유리했다.
 마차 위는 총의 흔들림이 기병들보다는 덜하기 때문이다.
 타앙!
 “크악!”
 우당탕!
 한 놈이 달리는 말 위에서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쫙 펴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 말에서 떨어져 내렸다.
 놈은 말안장에 한쪽 발이 걸려 거꾸로 매달린 채 10여 m나 질질 끌려오다가 너부러졌다. 저건 보나마나 즉사이다.
 저렇게 맹렬히 달리는 말에 거꾸로 끌려오면 척추가 부서지기 때문이다.
 타앙! 타앙!
 마차에서 계속 조준 사격을 하자 제임스가 외쳤다.
 “조별로 흩어져서 공격하라!”
 두두두두두두!
 말들이 달리면서 2인 1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강도질을 하면서 반격하는 자들을 만나면 써먹는 추격 방식이다.
 이제 마차를 중심으로 제임스 패거리가 부챗살처럼 벌어졌다.
 그리고 일제 사격을 해댔다.
 탕탕탕탕탕탕!
 총알이 사방에서 포장마차를 향해 날아들었다.
 “엎드려라, 안나야!”
 “걱정 말아요.”
 약간 허리를 숙인 안나가 양손에 말고삐를 쥐고 말 등을 후려쳤다.
 “이랴! 이랴!”
 두두두두두두!
 마차는 사두마차이다. 그 때문에 달리는 속도가 결코 제임스 패거리에 뒤지지 않았다.
 문제는 총의 숫자였다. 이쪽은 밥과 질 두 사람이 쏘는 데 비해 제임스 패거리는 한 번에 24발의 총탄을 날려 보낸다. 그것은 정확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탕탕탕탕탕탕!
 평원에 메아리치는 일제 사격의 메아리, 그리고 달리던 말들이 앞다리를 번쩍 들고 비명을 질렀다. 말들이 총에 맞은 것이다.
 오호홍!
 와당탕!
 달리던 속도 그대로 말들이 엎어졌다. 그러자 마차가 통째로 뒤집어지며 사람들을 뿌려 던졌다.
 “악! 까악!”
 우당탕! 쿠다당!
 마차에 싣고 있던 모든 것이 산산이 흩어졌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었다. 허공으로 날려가 땅바닥에 처박힌 밥과 질은 벌떡 일어서자마자 아내와 아이들을 찾았다.
 “여보, 안나야, 비비안.”
 “제, 제임스.”
 그러나 대답이 없다. 그러나 날려가 태질하며 쓰러졌음에도 꿈틀거리는 것을 보아 죽지는 않았다. 둘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족들에게로 내달았다.
 하지만 밥과 질은 가족들에게 달려갈 수 없었다.
 휘익, 휘익, 휙.
 사방에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올가미가 날아들었다.
 그 올가미가 밥과 질의 목에 걸렸다.
 “윽!”
 “컥!”
 밥과 질은 목을 조이는 밧줄을 두 손으로 잡고 필사적으로 당겼다. 아니면 목이 졸려 질식사하기 때문이다.
 “헤이, 헤이, 헤헤헤~ 이~”
 두 사람의 목에 밧줄 올가미를 던져 건 제임스 패거리가 말을 몰고 이리저리 내달렸다.
 밥과 질은 목에 걸린 올가미를 두 손으로 꽉 잡고 질질 끌려다녔다.
 자욱하게 일어나는 먼지. 땅바닥에 쓸려 두 사람의 등과 엉덩이, 다리 부분의 옷이 갈가리 찢겨 나갔다.
 “크아악!”
 그리고 살이 찢겨지는 극통에 두 사람은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반쯤 실신한 후에야 놈들은 말을 멈추었다.
 “아빠!”
 “여보!”
 다행히 밥과 질의 가족은 한 명도 죽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제임스 패거리에게 사로잡혔다. 결과는 생각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놈들의 악명은 이미 전 아메리카 대륙이 퍼져 있었다.
 살인과 강간을 놀음처럼 하는 자들. 잡힌 사람들이 반항한다고 그들의 팔다리를 잘라 늑대 먹이로 던져주는 서부의 악당들. 이놈들은 악당 중에서도 가장 악질이었다.
 “물을 끼얹어라.”
 촤르륵.
 “음, 으으······.”
 정신을 잃고 쓰러진 밥과 질이 찬물을 끼얹자 눈을 떴다.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절망했다. 말을 탄 제임스 패거리가 자신의 가족들을 다 잡은 것이다.
 “여보!”
 “아빠!”
 아내와 자식들의 외침에 밥과 질은 이를 악물었다.
 “크크크, 하하하!”
 제임스가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부하들도 같이 따라 웃었다. 제임스는 이럴 때가 제일 기분이 유쾌했다.
 타인의 목숨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끝없는 희열과 신이 된 것 같은 만족감이 드는 것이다. 그가 말채찍으로 부츠를 툭툭 두드리며 두 사람에게 허리를 굽혔다.
 “네놈들은 내 부하를 둘이나 죽였다.”
 제임스의 말에 밥과 질은 그저 쏘아볼 뿐이다. 그것을 본 제임스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내 부하의 피 값을 이제부터 받는다. 무엇으로 받을지 궁금하지 않나? 응, 친구들?”
 제임스가 말채찍으로 밥과 질의 머리를 툭툭 치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기다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부하들에게 외쳤다.
 “계집들의 옷을 다 벗겨라!”
 “오케이! 여자 만세!”
 “으하하! 오늘 영계 맛을 보게 됐다!”
 제임스 패거리가 와락 달려들어 두 여인과 18살이 된 안나, 그리고 16살이 된 비비안의 옷을 찢어 벗기기 시작했다.
 그걸 본 밥과 질의 입에서 비통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이 새끼들아!”
 “그만둬!”
 두 여인과 안나, 비비안이 필사적으로 몸부림 쳤다.
 “싫어! 손대지 마!”
 “치워, 이 더러운 놈들아!”
 부인들은 남편 앞에서, 두 아가씨는 가족 앞에서 강간을 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 패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놈들은 살인과 강간에 맛을 들인 야수일 뿐이었다.
 이들에게는 인간의 어떤 윤리와 도덕도 다 필요 없었다.
 “크크크! 이것 봐, 이년하고 저년은 숫처녀 같아! 하하하!”
 비비안의 옷을 벗긴 자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그녀의 탱탱한 젖가슴을 주물럭거렸다.
 다른 한 놈은 이제 노란 숲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소녀의 금지 구역을 쓸어보며 좋아 죽었다.
 “히히히, 이거 죽인다.”
 “캡틴부터 하쇼!”
 부하들이 사타구니를 움켜잡고 외쳤다. 빨리 제임스가 여자를 선택해야 자기들도 할 수 있었다.
 언젠가 부하 하나가 제임스보다 먼저 여자에게 올라탔다가 총탄에 머리통이 부서져 죽은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절대 제임스보다 먼저 여자를 차지하는 일이 없었다. 목숨을 잃기 싫은 것은 제임스 패거리도 일반 사람들과 같았다.
 제임스가 말채찍으로 자신의 부츠를 툭툭 치며 발가벗고 꿇려 있는 여인들 앞으로 다가갔다.
 밥과 질의 두 아내, 그리고 안나와 비비안은 수치심에 머리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안나와 비비안은 두 허벅지를 힘껏 마주 붙이고 꿇어앉아 있었다. 놈들에게 자기의 가장 중요한 곳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탱탱한 허벅지 사이, 기름진 팽팽한 배 위에 솟아난 금빛의 삼각지는 다 감출 수 없어서 조금 보인다.
 제임스가 그것을 뚫어지게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크! 좋군! 아주 좋아! 히히히!”
 누런 침을 질질 흘리며 그녀들을 둘러보던 제임스가 말채찍으로 안나를 가리켰다.
 “저년으로 하지.”
 “크크크, 이 계집을 찍을 줄 알았습니다, 캡틴.”
 안나를 잡고 있던 두 놈이 그녀의 겨드랑이를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한창 피어나는 안나의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희고 뽀얀 피부, 한 손으로 잡기 힘들 정도로 큰 젖가슴, 하얗고 단단해 보이는 커다란 둔부, 팽팽하면서도 매끈한 허벅지.
 그녀가 끌려 나오면서 몸부림 쳤다.
 “놔! 싫단 말이야, 이 개새끼들아!”
 “크크크, 내가 너에게 남자의 맛을 알려주지. 킬킬킬!”
 징그럽게 웃은 제임스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자, 마음껏 즐겨라.”
 “오케이!”
 “내가 먼저다.”
 사타구니를 움켜잡고 있던 놈들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와르르 달려들었다.
 “아아, 이놈들.”
 “내가 살아나면 네놈들을 갈가리 찢어 죽인다.”
 밥과 질이 이를 갈았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두 사람은 엎어진 포장마차에 꽁꽁 묶여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놈들이 아내와 딸들에게 덮쳐들었다.
 “자, 이제 우리도 시작해 볼까?”
 제임스가 팔이 뒤로 묶인 안나의 턱을 잡아들며 말했다. 그러자 안나가 침을 탁 뱉었다.
 “싫어, 이 미친 새끼야!”
 어린 처녀는 담찼다. 얼굴에 묻은 침을 닦은 제임스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 정도는 돼야 할 맛이 나지. 크크크.”
 제임스가 안나의 어깨를 확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녀를 넘어뜨리려는 순간이었다.
 “어이, 아가씨가 싫다잖아!”
 느닷없이 울리는 맑은 목소리에 제임스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그리고 제임스의 눈에 이제 청년이 된 것 같은 앳된 남자가 말에 앉아 빙글빙글 웃는 것이 보였다.
 한데 옷차림이 조금 이상했다. 처음 보는 형태의 검은 가죽 상의와 바지,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카우보이모자의 양쪽 귀 위에 꽂혀 있는 아름다운 새의 깃털.
 젊은 청년, 현준의 옷은 3015년의 디자인이다. 그것도 우주 탐험선 선장의 디자인이어서 더 특이했다.
 팽팽하게 딱 들러붙은 바지와 상의, 검게 번들거리는 부츠, 바지의 양쪽으로 내리그은 듯이 선명하게 빛나는 하얀 두 개의 줄, 그리고 왼팔과 가슴의 계란형 마크에 새겨진 글씨.
 <환웅>
 하지만 제임스는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한글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준은 지금 사람들로서는 처음 보는 희한한 옷차림이었다. 거기에 검은 모자의 양쪽 귀에 새의 깃털을 꽂은 것은 순전히 현준의 장난이다.
 인디언의 자료를 보던 중 그들이 새의 깃털을 머리에 꽂는 것을 보고 꺽쇠에게 지시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산 새의 깃털처럼 보이는 저것은 사실 인조 깃털이었다.
 하지만 제임스는 이상한 옷차림과 새의 깃털을 보고는 현준을 인디언이라고 판단했다.
 북아메리카에서 새의 깃털로 모자를 장식하는 것은 인디언뿐이기 때문이다.
 ‘인디언?’
 그러고 보니 놈은 백인이 아니다. 제임스의 얼굴에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놈이 언제 여기에 나타났는지 모르지만 참 운이 없는 놈이다.
 인디언은 아무리 많이 죽여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부에서는 인디언의 머리 가죽을 가져가면 한 개에 5달러를 주었다.
 1800년대의 인디언은 그저 죽여야 할, 거치적거리는 불필요한 동물이었다. 그러니 내년 오늘이 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감히 인디언 따위가! 죽어라!”
 제임스가 번개처럼 리볼버를 꺼내며 방아쇠를 당겼다. 이름난 총잡이 강도답게.
 탕! 탕! 탕!
 세 방의 총소리가 대평원을 울렸다. 분명 총은 자신이 쏘았다. 그런데 자기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이 극통은 뭐란 말인가?
 가슴을 내려다본 제임스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어, 어떻게······.”
 제임스가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언제 꺼냈는지 인디언 청년의 권총이 먼저 불을 뿜은 것이다.
 “내, 내가 인디언 따위에게··· 끅.”
 털썩.
 제임스가 인디언 청년에게 절을 하듯 무릎부터 꿇으며 엎어졌다. 땅에 머리를 박고 쓰러진 제임스의 얼굴. 그 얼굴의 두 눈동자는 죽었지만 아직도 경악이 어려 있었다.
 총은 자기가 먼저 꺼냈지만 인디언이 더 빨랐고, 그래서 총에 맞았기 때문이다.
 “저, 저저······.”
 총소리가 울리는 순간, 바지를 내리며 흉측한 거시기를 꺼내 들던 제임스의 부하들이 흠칫 굳었다. 제임스가 피를 뿜으며 고꾸라지는 것을 본 것이다.
 제임스가 누군가? 수년 동안 서부 대평원의 무법자로 이름을 떨친 자기들의 두목이다. 그리고 사격술은 10발을 쏘면 9발을 맞히는 명사수이다.
 그런 그가 먼저 총을 뽑고도 상대의 총에 맞은 것이다. 그것도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인디언에게 말이다.
 1875년의 아메리카 대륙에서 백인들은, 아니 정부는 인디언을 고릴라와 인간 사이의 사람으로 진화하지 못한 동물로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도 아닌 인디언의 총에 자기들의 캡틴이 죽었다.
 “인디언이 제임스를 죽였다!”
 “놈을 죽여라!”
 흉흉한 분위기. 제임스 패거리는 분노했다. 다른 백인에게 제임스가 죽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강도단에게 죽었다 해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어이없게도 인디언에게 죽었다. 사람도 아닌 인디언에게 말이다. 이건 죽은 제임스뿐만 아니라 그의 부하인 자기들의 명예까지 걸린 일이었다.
 인디언에게 캡틴을 잃었다고 하면 서부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무법자들의 패거리가 자기들을 비웃을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놈을 죽여야 했다.
 일제히 뽑히는 권총. 그들이 겨눈 총이 불이 뿜었다.
 탕탕탕탕탕탕!
 “아!”
 자욱하게 일어나는 화약 연기. 안나는 자신을 구해준 인디언이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한데 그 순간 안나는 보았다. 말 등을 박차고 날아 내리는 인디언 청년을.
 그가 땅에 발을 디딜 때, 그의 손에는 특이하게 생긴 두 자루의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청년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청년은 발을 굴러 허공에 몸을 띄웠다.
 핏핏핏핏핏핏!
 탕탕탕탕탕탕탕!
 허공을 빙글빙글 회전하는 인디언 청년의 손에 쥐어진 두 자루의 권총에서 총알이 연사되었다. 자동 권총이니 당연한 일이지만 이 시대에는 그런 권총이 없었다.
 그러니 제임스 패거리나 안나의 가족들에게는 인디언 청년이 쏘는 사격은 무서운 속사였다.
 “윽!”
 “악!”
 인디언에게 총을 쏘던 제임스 패거리가 대혼란에 빠졌다. 인디언 청년의 사격술은 정확했다.
 머리가 맞아 피와 허연 뇌수를 쏟으며 쓰러지는 자, 눈과 눈 사이에 총알이 박혀 굵은 호스로 물을 뿜어내는 것처럼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자, 심장에 총알이 박혀 엎어지는 자.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사격술이었다. 안나의 머리에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백발백중의 명사수!
 안나의 생각이지만 당연했다. 현준의 몸은 500년을 살 수 있도록 3015년의 기술로 DNA가 개조된 강화 육체이다. 따라서 현준의 육체는 다른 사람보다 열 배는 강한 파워와 반사 신경, 그리고 유연성과 탄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두 눈에 장착된 생체 광학 망원렌즈는 어둠 속도 대낮처럼 볼 수 있고, 총을 겨누면 눈이 자동적으로 목표물과 총의 가늠자를 일치시켰다.
 망원렌즈 속에는 머리카락보다 몇 배나 가는 선이 내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컴퓨터이다.
 그 미세 컴퓨터가 순식간에 거리와 각도를 계산하여 현준의 뇌에 전달하고 강화 육체가 그에 따라 사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만 먹으면 단 한 발의 총탄도 실수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슈퍼 인간인 것이다.
 또한 허리의 양쪽 뼛속에는 생체 에너지 방어막 칩이 장착되어 있었다.
 생체 에너지 방어막 칩은 몸에 위기가 닥치면 자동적으로 센서가 감지했다. 그다음 위험성의 강도에 따라 투명한 에너지 실드가 온몸을 휘감았다.
 그래서 총알이나 칼이 날아들면 옷은 찢을 수 있지만 신체에는 닿지 못했다. 칼이든 총알이든 투명 에너지 막에 부딪쳐 튕겨 나가기 때문이다.
 마치 생고무를 찌른 칼이 튕기듯이.
 그러니 무서울 것이 없었다. 또 목숨을 잃을 이유가 없으니 과감하게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제임스 패거리에게 인디언 청년은 지옥의 킬러였다.
 “으아아.”
 갑자기 한 놈이 말머리를 돌리더니 정신없이 달아났다.
 순식간에 11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기 때문이다. 저 인디언은 괴물이다.
 순식간에 연사로 11명을 눕히다니······.
 인디언을 우습게 여기던 제임스 부하들의 생각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지금 그들은 도망쳐야 산다는 생각 한 가지뿐이었다.
 그들이 미친 듯이 달아나자 인디언 청년 김현준은 권총을 내렸다.
 “새끼들, 까불고 있어. 뒈지려고.”
 혀를 찬 현준이 권총을 넣었다. 사실 저자들이 무법자든 강도든 현준과는 상관이 없었다.
 현준이 밥과 질의 가족을 구한 것은 인정이나 동정심 때문이 아니었다.
 현준은 서부의 무법자 강도단에게 당하는 백인들을 보자 한 가지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다.
 정말 이 시대의 백인 모두가 인디언을 원숭이나 성성이 취급을 하는지 직접 체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을 구했다.
 이제 그것을 알 수 있으리라.
 현준이 돌아서자 안나의 가족이 모두 입을 쩍 벌리고 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현준은 단신으로 그 악명 높은 제임스 패거리 25명 중 12명을 쓸어버렸다.
 그것도 단숨에.
 ‘어라, 내가 좀 오버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현준은 시치미를 뚝 떼고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현준의 유창한 영어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현준의 모습은 분명 인디언이다. 그런데 영어를 너무나 잘한다.
 현준의 영어는 우주 탐험선 환웅호에 있는 지식 입력기를 통해 전수한 것이다.
 그러니 정확한 표준말을, 그것도 유창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두 어안이 벙벙해 있지만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안나였다. 그녀가 제임스에게 겁탈을 당할 뻔한 순간에 구원해 준 사람이 바로 현준이다. 그녀가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시했다.
 “고마워요.”
 “제 이름은 김현준입니다. 이름이 뭐예요?”
 현준이 다정하게 말하자 안나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것은 그녀가 들은 인디언의 표상과 현준의 모습이나 행동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동부에 있을 때 본 신문에 실린 글이나 사람들의 말로는 인디언은 야만인이라고 했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을 만나면 무조건 공격하여 죽이고 머리 가죽을 벗겨 자기의 용맹성을 뽐낸다고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인디언들은 백인 여자들을 잡으면 무조건 강간하고 살까지 베어 먹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인디언은 사람을 죽이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식인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눈앞의 인디언은 그런 말과는 너무도 달랐다.
 일단 눈앞의 젊은 인디언은 제임스 강도단으로부터 자기와 가족을 구해주었다. 그것도 목숨을 내걸고 단신으로.
 이건 백인 사회에서 말하는 흑기사의 표상이 아닌가?
 그리고 영어를 할 줄 아는 데다 깍듯하게 예의를 갖췄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야만인이란 말인가?
 오히려 백인들보다 더 세련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인디언이 자기 또래이며 참으로 잘 생겼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인지 현준의 물음에 안나는 숨이 가빠져 왔다.
 이런 느낌은 18년 동안 살면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
 “전 아, 안나예요.”
 안나가 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안나의 부모와 질의 가족은 인디언 현준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건 선입감 때문이다. 현준이 그런 그들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빌어먹을, 목숨을 구해줬는데도 이 정도라니. 꺽쇠의 자료가 정말인 것 같군.’
 속으로 쓴 입맛을 다신 현준이 안나에게 말했다. 물론 아주 친절하게. 이 아가씨는 자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안나, 어딜 가는지 모르지만 조심해서 가. 여기는 강도단이 한두 개가 아니거든. 그럼 잘 가.”
 그리고 미련 없이 몸을 돌린 현준이 말의 배를 툭 찼다. 그러자 말이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그제야 밥과 질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리고 둘은 서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인디언이라고 해서 인사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용기를 낸 밥이 말했다.
 “저기, 도와줘서 고, 고맙습니다.”
 ‘그럼 그렇지. 사람인 이상 그래야지.’
 현준은 기뻤다. 일단 백인인데도 목숨의 빚을 알고 있으며 인디언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다면 백인도 일부만 인디언을 싫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훌륭한 나라라도 좋은 사람이 있고 악당도 있게 마련이다. 현준은 백인들의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조금은 생겼다.
 그래서 아주 깍듯하게 말했다.
 “뭘요.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 그냥 지나가면 사람이 아니죠. 개의치 마세요.”
 현준이 그렇게 말하고는 일부러 말의 배를 툭 쳤다. 그러자 말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준은 속으로 셈을 셌다.
 ‘자, 이제 나를 불러. 고맙다고. 하나, 두울.’
 “저기, 잠깐만요.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같이 식사나 한 끼 합시다.”
 이번에 말한 것은 밥의 동료인 질이었다. 현준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아싸!’
 역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 백인이라고 모두 인디언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조금 더 두고 봐야겠지만.
 “고맙습니다만, 전······.”
 “하, 함께 식사해요, 킴.”
 현준의 말을 자르며 안나가 말했다. 그러고는 얼굴이 불타는 듯 새빨개졌다. 현준이 그냥 갈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그녀를 구해주었다.
 “우리도 식사를 하지 못했어요. 함께하고 가세요.”
 ‘됐군. 흐흐흐.’
 현준은 만족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겉은 앳된 얼굴이지만 50년을 산 현준이다. 그가 말 위에 앉은 채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그럼 폐를 끼치겠습니다.”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현준과 안나의 아버지 밥, 그리고 질은 시신들에서 무기를 수거한 다음 시신들을 묻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시간쯤 달려 작은 냇가가 나타나자 식사 준비를 했다. 사람은 함께 싸우거나 목숨을 건 일을 같이하면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밥과 질도 마찬가지였다. 냇가에서 손을 씻고 식사를 할 때는 이미 허물없이 말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오, 미스터 킴?”
 밥이 물었다. 하지만 아직도 말을 놓지는 못했다. 그건 현준이 보여준 무서운 사격술 때문이었다. 현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주 편안하게 해주는 미소였다.
 “저기, 편하게 말하세요, 형님. 전 아직 어립니다.”
 현준이 스스럼없이 밥을 형님이라고 부르며 말했다.
 그러자 밥의 얼굴에 웃음이 그려졌다.
 “그, 그럴까? 그런데 자네, 몇 살인가?”
 “스무 살입니다.”
 현준은 뻔뻔하게 30살을 낮췄다. 뭐, 여긴 자신의 나이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리고 지금 현준의 얼굴이나 육체 상태는 스무 살 청년이 분명하기도 했다.
 “그럼 우리 안나보다 오빠로군. 그런데 자네, 총을 정말 잘 쏘더군. 언제부터 총 쏘는 것을 배웠나?”
 “우리 환웅족은 어려서부터 총과 활을 다룹니다, 그래서 환웅족은 누구나 총과 활을 잘 쏩니다.”
 “환웅족?”
 질이 고개를 갸웃했다. 환웅족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이다. 하지만 밥과 질은 그런 인디언족이 있겠거니 했다. 원체 인디언부족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디언부족이 거의 멸족했지만.
 “그런데 자네, 영어는 어디서 배웠나?”
 그러자 밥과 질의 부인은 물론 안나도 귀를 쫑긋이 세우고 현준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리 부족에 영국인 모피 장사꾼이 몇 년 동안 와 있었습니다. 그때 그분에게 배웠지요. 우리 환웅 부족은 성인이 되면 세상에 나가 경험을 쌓고 들어오는 풍습이 있거든요. 그때 영어를 배웠습니다. 지금은 백인들의 세상이니까요.”
 “그렇군.”
 밥과 질이 머리를 끄덕이자 현준이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까, 형님?”
 “우린 헬레나로 가는 중일세.”
 “아, 그거 잘됐네요. 나도 헬레나 시로 가는 중이거든요.”
 실은 현준은 헬레나 시로 가던 중이 아니다. 이들이 그곳으로 간다고 하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어차피 백인 세상에 끼어들자면 이들과 함께 섞이는 것이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모두 현준을 쳐다보았다.
 그중 반짝이는 눈빛으로 현준을 보던 안나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머리를 숙였다.
 “자네도 금을 캐려는 건가?”
 “아뇨. 전 땅을 사서 채소 농사를 하려고 합니다.”
 “채, 채소 농사?”
 사람들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인디언 부족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현준이 빙그레 웃었다.
 “우리 환웅족은 오래전부터 농사를 지었습니다. 물론 유목도 했지만요.”
 “그렇군.”
 밥과 질이 머리를 끄덕이며 새삼스럽다는 듯 현준을 보았다.
 “그럼 땅을 사야 하는데······.”
 “땅을 살 돈은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요.”
 “하하, 그럼 미래의 농장주를 위해 건배하자고.”
 “좋아. 자, 건배!”
 밀주(집에서 만든 술)를 담은 컵을 부딪친 세 사람이 술을 넘겼다.
 ‘백인이 모두 이들 같았으면 좋겠는데······.’
 밤이 되었다. 모두 잠이 들었고, 현준은 불침번을 섰다. 현준이 자청한 것이다. 인디언인 현준이 불침번을 서고 있지만 가족들은 편히 잠들었다. 현준이 자기들을 구해주었고, 이제 현준을 믿기 시작했던 것이다.
 타오르는 모닥불 앞에 앉은 현준은 기분이 좋았다. 백인이지만 이들은 순박했고, 인디언이라고 자칭했지만 별로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준은 이들과 더 친해지려고 불침번을 자청한 것이었다.
 깊어가는 밤. 하늘에 총총히 뜬 수많은 별을 보던 현준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머리를 돌렸다.
 긴 치마를 입고 수줍게 얼굴을 붉힌 안나였다.
 “저기··· 좀 앉아도 되죠, 킴?”
 “왜 자지 않고?”
 “잠이 오지 않아서요.”
 그녀가 모닥불에 상기된 얼굴로 현준을 쳐다보며 눈을 빛냈다. 그런 그녀의 두 눈이 불빛에 샛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저기, 킴.”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는 현준을 흘끔거리던 안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현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언뜻 떠올랐다가 번개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크크, 넌 이제 내 거다!’
 현준은 50살이다. 또 3015년의 미래에서 현준은 조폭의 행동대장이었다. 당연히 싸움질에 강하며 여자를 안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물론 강제로 한 적은 없다. 현준은 강간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또한 3015년에 강간은 극히 중대한 범죄로 강간을 하면 이유를 막론하고 무조건 사형이었다.
 하지만 현준은 여자는 처녀부터 유부녀와 과부, 그리고 연상이든 연하든 기회만 생기면 앞뒤 가리지 않고 품었다.
 3015년의 성 문화는 개방적이었고, 둘이 좋아서 하는 관계는 인정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좋다고 따라다니며 마음을 여는 여자를 싫다고 할 남자가 있을까?
 있다면 아마 뭔가 부족한 남자일 것이다.
 그리고 현준 역시 남자, 따라서 현준은 여자를 마다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많은 여자를 안다 보니 현준은 여자의 눈빛만 보고도 그녀가 자기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안을 수 있는 여자와 안을 수 없는 여자를 눈빛을 보는 즉시 알아채는 도사가 된 것이다.
 지금 안나의 표정을 보아 현준에 대한 호감도가 80%다. 이 정도의 호감을 가진 여자는 얼마든지 안을 수가 있었다. 조금만 노력하면 말이다.
 그리고 현준은 이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선수였다.
 “응. 궁금한 것 있어?”
 시침을 뚝 뗀 현준이 물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최대한 다정하게 들리게 강약을 조절하면서.
 “네. 킴의 그 화, 환······.”
 “환웅 부족.”
 현준이 제꺽 말해주었다.
 “네. 그, 환웅 부족은 커요?”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묻는 것이다. 현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응. 우리 환웅 부족은 대부족이야. 엄청나지.”
 현준은 3015년의 대한제국을 생각하며 한 말이다. 눈을 빛내며 현준을 보던 안나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부족으로 돌아가야 하나요?”
 ‘그렇게 물을 줄 알았다. 크크크.’
 현준은 속으로 웃었다. 안나가 왜 그렇게 묻는지 속이 보이기 때문이다. 안나는 현준이 부족으로 돌아가지 않고 백인들의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 목적은 하나이다. 그녀가 현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안나는 3015년의 여자가 아니다. 3015년의 여인들은 남자와의 관계가 개방적이다. 3015년의 여자들은 남자와 몇 번 잤다고 해서 살자고 하지 않는다.
 그냥 서로 눈이 맞으면 동거를 하면서 같이 즐기고 싫증이 나면 헤어진다. 웃으면서.
 그리고 여자는 또 다른 남자를 찾고, 남자 역시 또 다른 여자를 찾는다. 그것이 3015년 남녀의 성 풍속이다.
 그러나 1875년의 여자들은 다르다. 지금의 여자들은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을 결혼이라는 전제하에 행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여자도 있지만 그건 소수이다.
 ‘그래, 안나. 네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크크크.’
 현준은 지금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안나를 안을 수도 있고, 안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반드시 부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대답하면 안나의 현준에 대한 호감이 30% 미만으로 떨어질 것이다.
 아무리 현준에게 호감이 있어도 인디언 부족의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인디언과 백인의 생활을 비교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백인의 기준으로 보면 인디언은 그야말로 야생의 인간이다. 마른 풀로 만든 티피(인디언의 원뿔형 천막식의 집)나 흙으로 만든 움막 같은 집. 통나무로 만든 집에서 사는 인디언도 있지만 백인의 눈으로 보면 거기서 거기이다.
 그러니 안나로서는 인디언의 생활을 견뎌낼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눈앞의 현준이 마음에 들어도 그런 삶을 살기는 힘들다.
 그러니 물러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준은 자신의 그물에 걸린 여자를 놔준 적이 없는 선수이다. 현준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응, 가야 해. 그게 우리 부족의 율법이거든.”
 “그렇군요.”
 안나의 목소리가 힘없이 울렸다. 그때 현준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안 갈 수도 있지.”
 실망스러워서 머리를 숙이고 앉아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던 안나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그리고 현준을 보는 그녀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건 뭔가 갈망하는 눈빛이다.
 “어, 어떻게요?”
 “내게 사랑하는 백인 여자가 생기면 부족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거든.”
 “지, 진짜요?”
 안나의 눈이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강렬한 열기였다.
 ‘후후. 안나, 넌 이제 내 포로다.’
 현준은 빙그레 웃으며 안나에게 말했다.
 “안나.”
 “네?”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던 현준이 어느새 일어서더니 안나의 옆으로 갔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안나의 어깨를 한 팔로 휘감았다.
 그러자 안나의 몸이 현준의 품에 쏙 안기고 말았다. 현준과 안나의 얼굴이 거의 붙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아!’
 안나는 현준의 품에 안긴 순간부터 온몸이 갑자기 뜨거워지고 심장이 세차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뭔지는 모르지만 아득한 느낌이 몸을 전율시키는 것을 느꼈다.
 그때 현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려왔다.
 “안나, 난 널 보는 순간부터 네가 좋았다.”
 그리고 현준의 입술이 안나의 입술로 다가왔다.
 “나, 난··· 훕!”
 본능적으로 현준을 밀어내며 얼굴을 뒤로 젖히던 안나는 아찔한 느낌과 함께 숨을 들이켰다. 현준의 두툼한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두꺼비처럼 덥석 문 것이다.
 ‘아아, 난 몰라!’
 안나는 자신의 입술이 한없이 부드럽고 깊은 곳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아니, 온몸이 현준의 입술로 빨려들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어떡해!’
 정신없는 키스 속에서 안나는 온몸이 너무 달아올라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인지 모르지만 빨리 이 갈증을 풀고 싶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현준의 목에 팔을 두르며 매달렸다. 그러자 현준이 안나의 몸을 덥석 안아 들어 끌어당겼다.
 그러자 안나가 끌려가 현준의 무릎 위에 올라앉게 되었다.
 ‘크, 좋군!’
 안나의 엉덩이가 현준의 다리를 내리누르고 그녀의 두 허벅지가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부드러운 허벅지와 풍만한 엉덩이의 압박은 참으로 기분 좋았다. 그러나 현준의 기분을 취하게 만드는 것은 안나의 몸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체향이었다.
 그 싱그럽고 건강한 18세의 체향이 현준의 코에 스며들었다.
 현준이 두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힘껏 잡고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녀의 배와 현준의 배가 딱 붙어버렸고, 가쁘게 숨을 쉴 때마다 뱃살이 움직이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하아~ 하아~’
 이제 안나는 정신이 몽롱해져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때 안나는 자신의 등을 현준의 손이 천천히 쓸어내리는 것을 느꼈다.
 크고 두툼한 손, 그 손이 왜 이렇게 부드럽고 감미로울까?
 아니, 손으로 쓸어내리는 등에서부터 찌릿찌릿한 전기가 온몸에 퍼졌다. 그리고 그 찌릿찌릿함이 온몸에 퍼질 때마다 안나는 전율하는 것 같은 쾌감을 느꼈다.
 ‘아, 아하~’
 그녀의 몸이 저도 모르게 현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가슴이 현준의 가슴에 짓눌려 이지러졌다. 하지만 안나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지금 그녀의 온몸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고, 신경은 온통 현준이 쓸어주는 손길에 집중돼 있었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뜨거운 갈망이 자꾸 온몸을 휘저었다. 그래서 안나는 무작정 현준의 목을 감은 팔에 힘을 주며 점점 더 그의 품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이제 두 사람은 한 치의 틈도 없이 밀착되었다.
 그리고 온몸에서 열기를 뿜어댔다.
 ‘후후, 완전히 흥분했군!’
 현준은 빙그레 웃었다. 그것은 이제 먹이를 완전히 무장 해제시켰다는 만족감이었다. 지금 안나는 몸은 물론 정신까지 완전히 타오르는 성욕에 휩싸였다.
 이럴 때는 앞날에 대한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현준이 유색인종이라는 생각도, 자신이 백인 여자라는 생각도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지금 안나는 온몸이 달아올라 그저 현준의 향기를 흠뻑 들이켜고 있고, 현준의 모든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안나를 취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몸을 섞고 나면 안나는 후회할 것이다. 아무리 호감을 가졌어도 현준은 유색인종, 바로 인디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자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시간 동안 안나가 유색인종인 현준을 사랑하게 될지, 또는 유색인종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을 인지하고 물러설지는 알 수 없었다.
 명백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안나를 취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라는 것이다.
 ‘그럼 어디 안나의 몸을 좀 볼까?’
 현준은 이미 3015년에 백인 여자들과 많이 해봤다. 그 시대에는 인종을 가리지 않고 연애를 했으니까. 하지만 처녀와 해본 적은 없었다.
 많은 여자와 성관계를 자유롭게 가졌지만 숫처녀와는 해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자기의 몸에 안겨 흥분으로 몸부림치는 안나는 숫처녀가 분명했다. 그건 안나의 행동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평생 숫처녀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 순간 현준의 두툼한 손이 그녀의 몸을 더듬었다.
 ‘하아~!’
 순간, 안나가 현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신음을 흘렸다.
 ‘어, 어떡해!’
 안나는 자기의 옷을 들추고 현준의 손이 들어오자 몸을 바르르 떨었다. 18년 동안 누구도 만져 보지 못한 자신의 엉덩이를 쓸며 내려온 현준의 손가락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자신의 온몸 곳곳을 누볐다.
 ‘흐읏!’
 안나는 입을 딱 벌렸다. 그리고 온몸으로 퍼지는 아찔한 충격파! 안나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건 맹세코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지독한 쾌감이었다.
 ‘으으으~’
 현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안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안나는 자기도 모르게 현준의 허리를 두 손으로 감고 힘껏 조였다.
 ‘아, 나 못 참겠어!’
 대체 이 안타까움은 뭘까? 무섭게 온몸을 달구는 이 갈증은 대체 뭘까?
 뭔지는 모르지만 그 안타까움과 갈증을 풀어줄 사람은 오직 현준뿐이라는 것을 안나는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그러자 현준의 눈과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하아~ 하아~ 킴, 난··· 나······.”
 안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촉촉이 젖은 긴 속눈썹이 갈증에 안타깝게 떨렸다. 그런데도 현준은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흐윽~!’
 그녀의 몸을 덮은 현준의 손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때는 부드럽게, 어떤 때는 강하게.
 그리고 터져 오르는 욕망은 그녀를 폭발시켰다.
 “킴, 킴, 날··· 날 좀······.”
 순간 현준이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뜨겁다. 마치 불덩이를 쥔 것처럼 안나의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다. 현준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로 다가왔다.
 따뜻하다. 그리고 무한히 부드럽다. 안나의 빨갛고 통통한 입술과 현준의 입술이 겹쳐졌다.
 ‘아~!’
 한순간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이 느낌, 이 부드러운 현준의 입술이 너무나 좋았다. 안나는 현준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그리고 서투른 몸짓으로 현준의 입술을 탐했다.
 그러자 현준의 입속에서 뜨겁고 미끄러운 것이 밀려나와 안나의 입술을 헤집었다.
 안나는 처녀이다. 키스도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열고 현준에게 열었다.
 저도 모르게 작은 신음이 그녀의 입술을 헤집고 나왔다.
 ‘아아~’
 맛있다. 아니, 달다. 너무나 달콤하고 향기롭다. 아니,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세상의 어떤 것이 현준의 입술보다 맛있을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현준의 입술이 최고로 맛있다고 안나는 생각했다.
 “쭈으웁~”
 현준이 키스하던 안나의 입술과의 거리를 벌렸다. 하지만 안나는 놓아주지 않았다. 떨어진 현준의 입술을 따라간 안나의 입술이 다시 현준의 입술과 포개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현준의 입안을 안나의 달아오른 입술이 이리저리 더듬었다. 그러자 현준의 입술이 안나에 응답하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으, 음, 흐윽.’
 안나는 쾌감에 미친 것처럼 현준의 입술을 탐하고 또 탐했다.
 그녀가 코로 거친 숨결을 뿜어내며 현준의 입술을 탐할 때 현준이 입술을 뗐다.
 쩌억.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지며 눈이 마주쳤다. 열기로 뜨거워진 안나의 두 눈이 현준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 날 안아줘요. 나, 죽을 것 같아요.”
 그녀가 가쁜 숨을 쉬며 거침없이 말했다. 현준은 속으로 너무 좋아 기분이 째질 것 같았다. 아름답고 싱싱하기 짝이 없는 18세의 숫처녀가 스스로 몸을 개방하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쉬우면 안 되지, 안나.’
 현준은 처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그녀의 엉덩이 밑에 붙어 있는 손은 열심히 움직이면서.
 “안나, 난 백인이 아니야. 그러니 여기서 그만하자.”
 “흐윽!”
 안나가 엉덩이를 비틀며 현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현준의 손이 재간을 부린 탓이다. 안나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런 거 상관··· 없어요. 윽! 어서 날 좀··· 흐윽··· 어떻게 해줘요, 킴.”
 안나가 현준의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
 “그럼 후회하지 마. 그럴 수 있어, 안나?”
 “네, 후회 따위 안 해요. 어서요, 킴.”
 “알았어.”
 ‘흐흐흐, 좋았어!’
 현준은 속으로 흉물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몸부림치는 안나의 입술을 입술로 덮쳤다.
 “훕!”
 안나가 현준의 입술을 음미했다. 그리고 안나는 부드러운 초지에 자신의 몸이 눕혀진다는 것을 알았다.
 또 싱그러운 잔디가 융단처럼 자신의 둔부를 받치는 것을 느꼈다. 그때 현준의 육중한 몸이 안나의 몸 위로 겹쳐지며 숨이 가빠졌다.
 하지만 그 육중한 눌림이 안나는 너무나 좋았다. 그때였다. 자신의 옷을 다 벗긴 현준의 몸이 자신의 몸을 지그시 눌러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흐읏!’
 안나의 몸이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파닥이며 진동했다.
 ‘아앗!’
 ‘윽!’
 안나가 입을 딱 벌리는 순간, 현준의 육중한 몸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안나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 아하, 아흐, 하읏.’
 점차 빠르게 움직이는 현준의 육체. 그 율동에 따라 안나는 온몸을 전율시키는 숨 가쁜 쾌감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그 움직임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북아메리카의 대평원. 그 광대한 자연의 품에서 안나의 하얗고 탄탄한 육신이 황홀한 쾌감으로 울부짖기 시작했다.
 ‘웃, 웃, 으흣.’
 땀에 젖은 안나의 입안에서 쾌락의 신음이 터지고, 그들의 소리가 대평원 위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안나는 숨이 넘어가는 느낌과 함께 칠색의 폭죽이 눈앞에서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키, 킴, 흐윽!”
 목을 한껏 젖힌 안나의 입에서 현준을 찾는 뜨거운 외침이 터져 나왔다. 한껏 쳐들린 그녀의 허리, 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쳐들린 풍만한 엉덩이가 부들부들 떨렸다.
 대평원의 초원에서 안나는 18년 만에 처음으로 유색인종 현준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날 밤, 안나는 새벽이 될 때까지 세 번이나 더 현준을 자신의 몸에 가득 받아들였다.
 
 ***
 
 끝없이 펼쳐진 대평야. 그 평야가 끝나고 저 앞에 로키산맥과 연결된 프리클리페어 계곡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바로 저곳이 목적지인 헬레나 시다.
 프리클리페어 계곡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생긴 곳이 헬레나 시였다.
 “그럼 킴이 환웅족의 추장이에요?”
 미주리 강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두 대의 포장마차가 달리고 있다. 포장마차의 앞에는 말을 탄 현준과 안나, 그리고 안나의 동생인 비비안이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포장마차 뒤에도 아홉 필의 말이 따라오고 있다. 포장마차에 말의 고삐를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 말들은 모두 죽은 제임스 패거리가 탔던 것이다.
 이 시대에는 말이 통행이나 운송의 중요 수단이다. 그래서 말은 비쌌다. 저 말들을 헬레나 시에 가서 팔면 돈이 될 것이다. 그래서 끌고 온 것이다.
 “밥, 안나가 저 친구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은가?”
 앞의 마차에는 밥과 질이 앉아 있었다. 밥이 질의 말에 눈을 흘겼다.
 “쓸데없는 소리. 그냥 친구일 뿐이야.”
 밥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눈을 흘기자 질이 피식 웃었다. 사실 질은 인디언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던 사람이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현준에게 구원을 받았고, 며칠 동안 헬레나로 오면서 본 현준은 착한 인디언이었다. 그래서 질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신문이나 소문으로 들은 인디언에 대한 나쁜 말은 와전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생명의 빚을 지었지만 인디언에게 딸을 주고 싶지는 않겠지.’
 질은 밥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세상에서 인디언은 사람 축에 들지 못한다. 그러니 한창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는 딸 안나를 줄 생각이 없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질 자신도 현준을 만나기 전에는 인디언이 야만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앞을 내다보던 질이 불쑥 옆에 있는 소총을 집어 들었다.
 윈체스터 1873년형 레버 액션 식으로 제임스 패거리가 사용하던 총이다. 이 시대의 소총 중 가장 강력하며 뛰어난 소총이 바로 이 윈체스터였다.
 “질, 저길 보게.”
 “나도 봤네.”
 밥도 윈체스터를 집어 들며 말했다. 저 앞쪽 미주리 강의 구부러진 지점에서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나며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누군가 오고 있는 것이다.
 밥과 질의 앞에서 5m 정도 앞서가던 현준과 안나, 비비안이 말을 멈춰 세웠다.
 안나와 비비안도 권총을 뽑아 들고 있다. 며칠 동안 미주리 강을 따라오면서 안나와 비비안은 현준에게서 열심히 총 쏘는 법을 익혔다.
 원래 밥은 딸들이 총을 잡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하지만 이번에 죽음의 강을 한번 넘어서자 생각이 바뀌었다.
 이 시대에서 자기를 방어하자면 여자도 총기를 익숙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딸들이 현준에게 총 쏘는 법을 배우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킴, 강도들일까요?”
 안나와 비비안이 쥐고 있는 은빛의 권총은 현준이 준 것으로 21세기에 사용하던 여성용 CZ-75 권총이다.
 탄창에 열다섯 발이 들어가는 권총. 명중률이 대단히 뛰어난, 1875년의 지금 시대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무기이다.
 저 권총은 무인 정찰정 송골매에서 현준이 밤에 아무도 모르게 꺼낸 것이다. 송골매는 30㎏의 짐을 실을 수 있는데 현준에게 필요한 물품이 실려 있었다.
 또 송골매는 은폐막을 치고 있어서 현준의 머리 위에 떠서 같이 움직이고 있지만 사람들은 볼 수가 없다.
 -선장님, 달려오는 인간은 모두 열두 명, 무기는 윈체스터와 스미스 앤드 웨슨 리볼버, 개셔 리볼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에 자경단이라는 배지가 붙어 있습니다.
 현준의 귓속에 심어져 있는 수신 칩에서 송골매 컴퓨터의 보고가 울리고 있었다.
 -사살할까요?
 “놔둬.”
 현준이 말했다. 그럼 입속의 발신 칩에 의해 송골매의 수신 칩에 명령이 전달된다.
 -알겠습니다, 선장님.
 마차를 세운 밥과 질이 말에 올라탄 채 다가왔다. 그때는 자경단원들이 거의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에 쓴 카우보이모자, 말안장의 뒤쪽으로 꽂혀 있는 윈체스터 소총, 허벅지의 양쪽 홀더에 꽂혀 있는 두 자루의 권총. 그들이 맹렬하게 달려오더니 먼지를 일으키며 멈춰 섰다.
 그중 맨 앞 중앙에 선 사내가 이쪽을 보며 말했다.
 “어리지만 아름다운 숙녀들이군!”
 하지만 밥과 질은 물론 안나와 비비안도 말없이 쏘아보기만 했다.
 손에 든 권총을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는 자세로 세워 든 채.
 “우린 헬레나 시의 자경단이네. 난 자경단 제10기동순찰조장 윌리엄이고. 그대들은 누군가?”
 윌리엄이라는 남자가 가슴에 매달린 배지를 보이며 말했다.
 그제야 긴장하고 있던 밥이 총의 방아쇠에 걸고 있던 손가락을 뺐다. 하지만 완전히 긴장을 늦춘 것은 아니었다. 저들이 자경단이든 아니든 아직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긴장한 채로 말했다.
 “우린 헬레나 시로 정착하러 오는 이주민들이오. 나는 밥이고, 이 친구는 질, 내 딸들과 질의 아들, 그리고 아내들이오.”
 “오, 새로운 정착민들이군!”
 윌리엄이 반갑다는 기색으로 머리를 끄덕이더니 현준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 친구는 인디언 같군, 밥.”
 기동순찰조의 모든 조원들이 현준을 노려보고 있다. 밥이 말했다.
 “그게 무슨 문제가 있소, 조장?”
 “인디언은 인디언 보호 구역에 들어가 있어야지. 보호 구역 밖의 인디언은 사살해도 된다는 것이 정부의 명령이오.”
 “무슨 그런······.”
 밥은 어이가 없어서 그렇게 말했지만 윌리엄과 자경단은 당연하다는 표정이다.
 “그게 정말이오?”
 “내가 무엇 때문에 거짓을 말하겠소. 그러니 당신들은 가시오. 저 인디언은 우리가 처리할 테니.”
 철컥철컥!
 윌리엄이 그렇게 말하자 조원들이 일제히 권총을 뽑아 들고 현준을 겨누었다. 한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기동순찰조원들이 보기에는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멈춰요. 그이는 내 약혼자예요.”
 현준의 옆에 있던 안나와 비비안이 동시에 윌리엄을 향해 권총을 겨눈 것이다. 자매는 나이가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 체격이 비슷했다.
 또 이 시대에는 열다섯 살에도 시집을 가며 열여섯 살이면 성인이다. 그러니 열여덟 살의 안나가 약혼자라고 해도 뭐라 할 말은 없는 것이다.
 두 아가씨가 매서운 눈으로 윌리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 말에 깜짝 놀란 것은 밥이었다.
 “아니, 안나야.”
 “밥.”
 그때 옆에 있던 질이 밥을 불렀다. 서로 눈빛이 마주친 질과 밥. 밥은 질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젠장, 빌어먹을!’
 만약 여기에 인디언 청년을 두고 가면 저들은 분명 살해할 것이다. 이 시대의 백인들은 인디언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니까.
 더구나 정부의 명령까지 있었다면 아무 거리낌도 없을 것이다.
 저 청년에게 딸을 주고 싶지 않지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저 인디언 청년은 누가 뭐래도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아닌가?
 그때 윌리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오? 저 인디언이 당신 딸의 약혼자라는 것이.”
 “맞소. 그는 내 사윗감이오.”
 밥이 마음을 정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현준에게 목숨의 빚을 진 자신들이다.
 그렇다면 한 번은 그의 목숨을 구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자네들, 들었나? 인디언이 백인 여자의 약혼자라는군. 저렇게 아름답고 어린 숙녀의 약혼자라는 거야.”
 윌리엄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조원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조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준과 안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손이 스르르 허벅지 옆으로 내려가 권총 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밥과 질도 윈체스터를 쳐들었다. 저들이 권총을 뽑으면 즉시 발사할 자세였다.
 “윌리엄 씨, 난 자유 인디언이오.”
 현준이 품에서 증명서를 꺼내 윌리엄에게 던졌다. 미국 정부는 정부에 적대적인 인디언과의 전쟁에서 정부군의 편이 되어 싸운 인디언들을 자유 인디언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것은 인디언을 하나로 단결하지 못하게 하고 각개격파하려는 속심 때문이었다. 물론 1890년대가 되면 자유 인디언도 모두 보호 구역이라고 명명한 오지에 몰아넣었다.
 그때가 되면 인디언은 거의 다 몰살시키고 겨우 명맥만 남게 된다. 그리고 자유 인디언들마저 보호 구역에 가두어 버린다.
 하지만 지금은 자유 인디언이라는 증명서가 효력이 있었다.
 환웅호의 슈퍼컴퓨터 꺽쇠는 이 시대의 인디언에 대한 자료에 근거하여 연방 정부에서 발명한 자유 인디언 증명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군. 자유 인디언이었어. 크크크.”
 입맛이 쓰다는 듯 윌리엄이 현준을 쏘아보며 말했다. 그의 눈이 현준과 그 옆에 바싹 말을 붙이고 총을 겨눈 아름다운 안나를 번갈아 보았다.
 ‘감히 인디언 따위가 저렇게 아름다운 백인 처녀를 가지다니, 이건 백인의 치욕이다.’
 윌리엄의 생각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기동순찰조원 모두의 생각이었다. 현준을 노려보는 그들의 눈에서 분노와 증오, 질투의 불길이 이글거렸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인디언을 죽일 수는 없었다. 자유 인디언 증명서를 가진 인디언을 죽이면 연방법을 어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잠깐 숨을 더 쉬게 해주지. 그러나 넌 곧 뒈지게 될 것이다. 더러운 인디언 놈.’
 악물고 있던 어금니의 힘을 풀면서 윌리엄이 말했다.
 “이거 미안하게 됐군, 인디언 킴.”
 윌리엄이 증명서를 현준에게 던져주며 빙긋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싸늘한 살기가 숨겨져 있었다. 그걸 모를 현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다.
 아니, 비위 좋게 빙글거리며 말했다.
 “그럼 헬레나 시에서 다시 봅시다, 윌리엄 씨.”
 그리고 말의 배를 툭 차며 안나에게 말했다.
 “가자, 안나. 총은 넣고.”
 안나가 현준의 뒤를 따라 말을 달렸다. 하지만 권총은 언제든 쏠 수 있게 손에 든 채였다.
 그 뒤로 밥과 질, 그리고 포장마차가 달려갔다.
 “따라가서 쏘아 죽입시다, 조장님.”
 윌리엄의 심복인 아담스가 질투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현준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저놈을 죽이자면 저들도 다 죽여야 해. 그렇게 할까?”
 “그, 그건······.”
 아담스가 현준의 옆에서 금발을 날리며 달리는 안나를 보며 버벅거렸다.
 “멍청한 놈, 헬레나에 사는 한 저 더러운 인디언을 죽일 기회는 많다. 지금은 순찰이나 하자. 이랴!”
 오호홍!
 갑자기 배를 차인 말이 앞발굽을 들고 울부짖더니 냅다 달려갔다.
 ‘놈, 감히 백인 여자를 더럽히다니?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죽인다. 최대한 고통을 주면서.’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내달리는 윌리엄의 온몸에서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
 
 헬레나 시가 만들어진 것은 1862년이다. 그때 프리클리페어 계곡에서 금이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그 소문이 퍼지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당시는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도 끝나갈 때이다. 그런데 프리클리페어 계곡에서 금이 발견되자 꺼져가던 골드러시가 다시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13년이 된 지금 헬레나 시는 몬태나 주의 주도가 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모두 일확천금의 꿈을 꾸면서.
 그러나 이미 헬레나 시의 부자들은 따로 있었다.
 동부에서 몰려온 그들은 원래도 부자들이었기에 돈이 많았다. 그들은 이곳에 오자마자 땅을 사들였다. 금광은 이미 주인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땅을 사서 금광을 만들려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는 금광의 초기였기에 금이 나오는 프리클리페어 계곡 주변만 땅값이 비쌌고 다른 지역은 상당히 쌌다. 그곳에서는 금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많이 몰려들면 거대한 소비 시장이 형성된다. 금을 캐는 사람들도 금을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어야 하기 까닭이다.
 그리고 잠도 자야 하고, 술도 마셔야 하며, 섹스도 해야 하고, 옷도 입어야 한다.
 그건 인간이라면 누구다 다 해야 하는 생존의 법칙이다.
 그래서 술집과 유곽, 가게와 점포들이 지어졌고, 주택들이 생기며 그곳이 거리가 되었다. 거대한 소비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미리 금광 주변의 땅을 헐값에 사가지고 있던 부자들에게는 이때가 기회였다.
 그들은 땅을 팔거나 대여를 해주어 더 큰 부자가 되었고, 헬레나 시의 가장 높은 위치에 정착한 유지가 되었다.
 그런 가문이 헬레나 시에 다섯 가문이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다섯 하늘이라고 했다.
 어쨌든 금이 계속 생산되는 한 헬레나 시는 번성하고 거리는 북적거릴 것이다.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고 있으니까. 밥과 질의 가족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섯 하늘의 돈주머니는 계속 커질 것이다. 금광에서 일해 번 돈이 이들 다섯 가문이 관리하는 식당과 잡화점, 술집과 유곽에 쓰일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이 아무리 많이 와도 그들은 계속 쪼들린 생활만 하다가 죽을 것이다. 물론 그 덕에 다섯 가문은 더 큰 부자가 되겠지만.
 “드디어 왔군!”
 밥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보며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겪었던 것이다.
 “황금이여, 우리가 너를 가지러 왔노라! 하하하!”
 질이 두 팔을 벌리며 시를 읊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길옆으로 걸어가던 사람들이 쳐다보고는 피식피식 웃었다. 그건 뭔가 비웃는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이제 왔다는 기쁨에 취한 밥과 질은 미처 그들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현준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도로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사방에서 오물이 썩는 퀴퀴한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이건 도시가 아니라 하수도로군. 그것도 완전히 썩은 하수도.’
 그렇다. 당시 서부의 도시들은 하수도가 없었다.
 그로 인해 길바닥에 던져지는 오물과 변소에 가득한 똥과 오줌이 비가 오면 넘쳐서 거리로 흘러나와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것이다.
 “자, 이제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일단 먹고 무엇을 하든 생각해 보자고. 모두 하차!”
 “예썰.”
 밥의 외침에 질이 경쾌하게 거수경례를 붙이며 대답하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그의 얼굴이 환했다. 뒤의 마차에서 내리는 밥과 질의 아내들도 얼굴이 밝아졌다.
 드디어 종착지에 도착했으니 기쁠 수밖에 없다. 이제 이곳은 이들이 살아가야 할 도시인 것이다.
 “자, 어서 들어가지.”
 “네.”
 그들이 식당 문을 열었다. 그러자 식당 안에서 구수한 음식 냄새와 위스키의 독한 냄새가 코로 스며들었다.
 ‘흐흐흐, 위스키다!’
 ‘오랜만에 위스키 냄새를 맡는군.’
 밥과 질은 코를 벌렁거리며 얼굴이 환해진 반면에 그들의 두 아내는 얼굴이 찌푸려졌다. 식당 안을 덮은 자욱한 담배 연기와 혼탁한 냄새가 그녀들의 기분을 흐리게 만든 것이다.
 식당은 바와 레스토랑이 합쳐진 것 같은 전형적인 서부시대의 구조였다. 밥의 일행이 들어서자 웃고 떠들던 식당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눈이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기 시작했다. 밥의 일행도 들어서다가 멈칫하며 안을 휘둘러보았다. 그러자 식당 안의 사람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텐더 앞에 술잔을 들고 앉아 몸을 반쯤 돌리고 보는 중년의 남자, 카드를 쥐고 앉아서 이쪽을 유심히 보는 네 명의 남자, 식탁에 앉아 버터 바른 빵을 한입 물고 쳐다보는 남자. 또 한쪽에서는 여자들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술을 먹던 남자들이 일제히 바라보았다. 여자들은 얼핏 봐도 몸 파는 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의 식당이 모두 그렇듯 ‘네이키드’라는 곳도 유곽을 겸하고 있었다. 네이키드라는 말은 벌거벗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식당 안의 남자들이 밥 일행을 보는 눈에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밥과 질을 훑어보았지만 곧 흥미를 잃었다. 하지만 뒤이어 들어서는 여자들을 보곤 눈빛이 달라졌다.
 그들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밥과 질의 아내를 훑어보았다.
 그녀들의 몸을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샅샅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안나와 현준, 비비안이 들어서자 그들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안나와 비비안의 몸을 훑는 욕망에 찬 눈들.
 그 눈들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킴, 우리 여기 앉아요.”
 네이키드의 식탁은 네 명이 앉을 수 있게 만들어진 사각형이었다. 한 식탁에 네 명밖에 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밥과 질, 그리고 두 아내가 한 식탁에 앉았고, 비비안과 안나, 현준과 질의 아들 제임스가 한 식탁에 앉았다.
 “무엇을 드시겠소?”
 배가 불룩한 남자가 다가와 메뉴판을 내밀며 물었다. 이 식당의 주인이다.
 “브레드 앤드 버터 푸딩(버터를 바른 빵으로 만든 푸딩)하고 버플 앤드 스퀴크(소금에 절인 소고기를 삶은 다음 얇게 썰어서 기름에 볶고, 잘게 썰어 삶은 양배추를 따로 기름에 볶아서 함께 차려내는 음식), 완두콩과 쇠고기를 넣어 끓인 수프하고 위스키를 주시오.”
 그러자 뚱뚱한 주인이 물었다.
 “혹시 아일랜드인이오?”
 아일랜드인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찾자 주인이 밥에게 물었다.
 “예. 그럼 그쪽도······.”
 “하하, 이거 고향 사람들을 만났군. 난 디킨스요.”
 디킨스가 뚱뚱한 몸을 굽히며 손을 내밀었다. 이 당시 아일랜드는 영국에 합병되어 있어서 같은 아일랜드인끼리 만나면 아주 반가워했다.
 그것은 밥과 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없는 타지에서 아일랜드인을 만나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난 밥이오.”
 “난 질입니다.”
 악수를 하고 난 디킨스가 물었다.
 “그런데 여기에 아는 사람은 있소?”
 있을 리가 없다. 밥이 머리를 흔들었다.
 “없습니다.”
 “그럼 집을 살 때 조심하시오. 바가지를 쓸 수도 있으니까.”
 “고맙소, 디킨슨.”
 머리를 끄덕이며 돌아선 디킨스가 주방에 대고 소리쳤다.
 “로렌스, 어서 음식을 내와. 꾸물거리지 말고.”
 “예이, 사장님.”
 곧 주방 쪽에서 젊은 사람이 음식을 들고 나왔다.
 “안녕하세요. 주방장 겸 웨이터이며 디킨스 님의 아들인 로렌스입니다.”
 아주 유쾌한 청년이다. 그가 내려놓는 음식 접시를 받으며 밥이 웃었다.
 “잘 먹겠네, 로렌스.”
 “어서 드세요.”
 로렌스가 안나, 비비안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지며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총각은 총각이다.
 “자, 무사히 도착한 것을 축하하며 건배하지.”
 “그래, 건배.”
 술잔을 부딪친 밥과 질, 그의 아내들이 술잔을 입에 댔다. 여자들은 조금만 마시고 내려놓았다.
 하지만 밥과 질은 단숨에 잔에 담긴 위스키를 입안에 부어 넣었다.
 “크으, 좋군!”
 “이제야 살 것 같군.”
 밥과 질이 야채와 볶은 소고기를 집어 먹으며 싱글거렸다. 그때 현준과 안나도 술잔을 부딪쳤다.
 “킴, 무엇을 위해 마실까요?”
 “다 같이 살기 위해서.”
 “좋아요. 함께 살기 위하여 건배.”
 쨍!
 술잔을 부딪친 안나와 현준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수프를 한술 떠먹었다.
 “킴, 어때요?”
 안나는 현준이 아무 거리낌 없이 수프를 먹자 방그레 웃으며 물었다. 인디언들은 어떤 음식을 먹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음, 맛있어.”
 “킴의 부족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어요?”
 “여러 가지가 있지. 그리고 이와 비슷한 국도 있어.”
 “국이요?”
 “음, 우리말로 이런 수프를 국이라고 해.”
 “아, 그렇군요.”
 안나가 현준을 반짝이는 눈으로 보며 방실거렸다. 그것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눈빛이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 아닌가?
 동생 비비안이 그런 안나를 보며 머리를 갸웃했다.
 ‘이상해. 언니는 저런 모습을 한 적이 없는데······.’
 비비안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질투심이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사내들이 있었다. 바텐더 앞에 앉아 술을 마시던 세 명의 사내이다.
 탁!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은 세 명 중 털보가 현준의 식탁으로 걸어왔다. 순간, 식당 안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눈이 털보를 따라 움직였다.
 그가 척척 걸어오더니 현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짙은 회색의 털이 가득 덮인 손이다.
 “이봐, 인디언. 일어나라.”
 “손 치워라, 털보.”
 현준이 태연하게 앉아 말했다. 그러자 피식 웃은 털보가 한 손을 권총집에 올려놓으며 으르렁거렸다.
 “여긴 인디언 따위가 들어오는 식당이 아니다. 일어나지 않으면 당장 머리통에 구멍을 내주지.”
 순간 그의 손이 홀더에서 권총을 뽑았다. 그리고 권총이 현준의 머리로 올라갔다.
 “저, 저런······!”
 질이 그것을 보고 다급한 소리를 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저 인디언이 아무리 빨리 자기 권총을 뽑는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인디언이 권총을 뽑으려는 사이에 털보의 총구가 머리에 닿을 것이고, 총탄이 발사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 인디언의 머리가 폭죽처럼 터질 것이다.
 사람들이 그 상상을 하며 얼굴을 찡그렸을 때다.
 “크악!”
 목이 찢어지는 것 같은 비명과 함께 털보의 팔이 비틀려지는 것이 보였다.
 현준이 앉은 자세에서 번개처럼 옆으로 몸을 돌린 것이다.
 그리고 털보의 권총을 든 팔을 잡아 비틀었다.
 정말 빛처럼 빠른 몸놀림이다. 그리고 현준의 팔심이 얼마나 강한지 털보의 팔이 엿가락처럼 비틀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현준의 육체적 힘은 일반인의 열 배나 되는 강화 육체이다. 털보가 아무리 용을 써도 팔이 엿가락처럼 비틀리는 것은 당연했다.
 콰드득, 뚜드득.
 “아악!”
 철커덕!
 총이 떨어지고 털보가 털썩 주저앉았다. 처참하게 비틀린 그의 오른팔. 뼈가 산산이 부서져서 이제 털보는 오른쪽 팔을 못 쓰고 영영 불구가 될 것이다.
 그때다. 바텐더 앞에서 술을 마시던 털보의 동료 둘이 권총을 뽑아 들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동료는 구하지 못했지만 저 인디언을 쏘아 죽일 수는 있었다.
 그들이 현준을 향해 권총을 쳐들었을 때다.
 탕탕탕탕!
 연이어 울리는 총소리.
 “악!”
 “크악!”
 두 명이 쳐들었던 총을 놓쳤다. 그들의 손에서 떨어지는 두 자루의 모젤 권총.
 그때 사람들은 보았다. 현준을 쏘려던 두 남자의 손바닥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어느새 뽑았는지 현준의 손에 권총이 들려 있다. 그리고 현준의 총탄은 정확히 두 사내의 권총 쥔 손을 뚫어버렸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권총을 든 현준이 차갑게 말했다.
 “꿇어라.”
 “너, 너, 인디언 따위가 감히······.”
 그들은 총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인디언에게 당한 것이 더 화가 나는 모양이다.
 현준의 얼굴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죽고 싶단 말이지.”
 현준이 일어섰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난 자유 인디언이다. 고로 미국 시민이지. 이건 미합중국 대통령 명령 00276호에 명시되어 있다. 자유 인디언은 미국 시민이며 모든 권리를 백인과 똑같이 가진다고 말이다.”
 현준의 말에 모두 침묵을 지키고 바라보고 있다. 사실 그것은 흑인도 마찬가지였다.
 노예해방을 하면서 흑인에게도 그런 권리를 주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흑인들은 아직도 백인들과 마주서지 못하며 식당에 들어오지 못했다. 자칫하다가는 총에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는 누구도 그 법이 책 속에 있을 뿐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지금은 총을 쥔 현준이 강자이기 때문이다.
 현준이 총에 맞아 주저앉아 있는 놈들에게 말했다.
 “네놈들은 비겁하게 뒤에서 총을 겨누었다. 미국 시민을 뒤에서 쏘아 죽이려고 한 것은 분명 살인죄에 해당되기에 나는 정당방위로 네놈들을 쏘아 죽여도 잘못이 없다.”
 “으으으!”
 털보와 동료들이 신음을 흘리며 말을 하지 못했다. 현준의 말이 맞기 때문이다. 미국 시민인 이상 결투는 허락되지만 뒤에서 쏘는 것은 고의적인 살인 행위였다.
 “꿇고 빌어라. 내가 셋을 셀 때까지. 아니면 네놈들은 다 죽는다. 하나, 두울.”
 셈을 세는 것과 함께 위로 쳐들려 있던 현준의 손에 들린 권총이 아래로 서서히 내려왔다.
 털보와 두 동료의 눈이 커지고 몸에서 땀이 흘렀다.
 셋이 끝나면 총은 수평으로 내려와 발사될 것이다. 그러면 자기들은 죽는다.
 “세엣.”
 “으헉! 자, 잘못했습니다.”
 “사, 살려주시오.”
 그들이 후다닥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박았다. 당장 총탄이 머리를 꿰뚫는 것 같아 세 사람은 수치심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러자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고 있던 식당 안의 백인들이 허탈해했다. 백인이 인디언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이다.
 “밥맛없는 놈들, 꺼져라.”
 “예, 예, 인디언님.”
 그들이 후다닥 일어나더니 우르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것을 본 현준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의 모습을 안나가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멋있을까?’
 아무리 봐도 자신의 남자 현준은 누구도 감히 덤빌 수 없는 사내였다.
 “한잔하세요, 킴.”
 안나가 방그레 웃으며 현준의 잔에 술을 따랐다.
 ‘시발 놈!’
 질투로 중얼거리는 것은 백인 남자들이고,
 ‘아아, 저 억센 품에 안기면 얼마나 좋을까?’
 현준의 강함에 몸을 비틀며 끈적끈적한 시선을 보내는 것은 백인 여자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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