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픽션입니다. 글 속에 등장하는 기업, 인물, 사건, 상품 등 모든 내용은 허구입니다.
프롤로그. 2018, 대한민국 서울
JH E&M의 총괄 기획 본부장 이준수.
서른두 살의 내 명함에 찍힌 직위다.
2010년대 들어와서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3분의 2를 장악하고 지배하고 있는 JH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주식회사.
- 현재의 JH를 만든 사람들
언론에서 기획 기사를 쓸 때 항상 들어가는 이름.
십 년을 함께 일한 이들은 언제든 나를 칭송하기에 바쁘다.
그럴 수밖에.
사주(社主)의 동생이면서도 초창기 본사의 지원금밖에 없었던 사무실에서 하루 3시간 정도밖에 자지 않고 일하며, 현재는 상암동 일대에 JH E&M 간판을 단 빌딩들이 즐비하도록 만들었으니까.
미국에서 수입하는 영화마다 대박을 쳤고, 발굴하는 연예인마다 스타가 되었다.
심지어 제일 먼저 드라마 제작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그동안 공중파 방송에서만 제작하던 드라마를 JH 산하에 설립한 드라마 제작사를 통해 직접 제작했다.
그 드라마들이 한류 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 엄청난 수익을 안겨 주었다.
심지어 2000년대 초반에 거의 유선 방송국 수준인 케이블 방송사의 인수를 주도했고, 그것이 현재 JH 미디어 왕국을 건설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TV만 틀면 JH 계열 방송사 채널들에서 영화, 드라마, 쇼, 예능 방송이 나왔다.
- 엔터테인먼트계의 미다스의 손, 이준수.
2013년이 되면서 나는 그렇게 불렸다.
그리고.
나는 밀려났다.
정상에 오른 후 한 걸음 떼자 그곳은 절벽이었다.
추락했다.
- JH 엔터테인먼트 대표 이준수.
상장도 되지 않은 계열사로 쫓겨났다.
머리를 쓸 필요도 없었고, 크게 할 일도 없는 곳.
그냥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시간만 때우면 되는 회사.
이미 모든 게 내부 시스템에 의해 움직여 가는 곳.
대외적 행사도 새롭게 JH E&M의 총괄 기획 본부장이 된 이성민이 나섰다.
조카가 나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고, 내가 하던 모든 업무를 해나갔다.
나는······.
할 일이 없었다.
노트북과 태블릿에 존재하는 연습생들의 명단.
각 분기별 데뷔 예정자.
일일이 섭외한 작가들. 직접 뽑은 가장 잘 연출할 것 같은 감독들. 그렇게 제작에 들어갈 드라마에 밀어 넣어야 할 배우들까지.
마치 죽기 전 회광반조의 상태가 되면 살면서 겪었던 모든 기억들이 너무나 선명하게 머릿속에 떠오른다더니만, 나 또한 그들 모두의 얼굴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것뿐인가?
마지막 방점.
‘중국이나 일본을 넘어서 미국 시장까지 노릴 보이 그룹과 걸 그룹 육성 프로젝트를 갓 시작했건만······.’
눈만 감으면 연습생들 면접을 볼 때마다 느꼈던 실망과 환희가 스쳐 갔다.
기대만큼 연습생의 실력이 보이지 않을 때는 간신히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아야 했고, 보석같이 빛나는 재능을 가진 연습생을 만났을 때는 절로 튀어나오려는 환호를 애써 포커페이스로 무덤덤하게 바꿔야 했다. 그랬던 얼마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나하나 내 손으로 직접 뽑아서 데뷔 그룹을 만들었고, 곡 선정과 뮤비 및 홍보 전략까지 직접 다 수립해서 하나씩 실천해 나갈 때였다.
그룹의 최고 경영진에서도 반대했건만, 나는 용의 눈에 마지막 점을 찍는 화룡정점이 될 수 있다며 그들을 설득해 냈다.
아시아를 점령했고, 유럽과 중남미에 한류를 불러일으켰고, 마지막 남은 미국 시장.
나는 성공을 확신했다.
그들의 곡들이 빌보드 차트 핫 100의 상위를 점령할 것이며, 그래미나 빌보드 시상식 무대에 오를 것임을.
그렇게······.
‘세계 최고의 쇼 비즈니스계 거물이 되고 싶었건만······.’
꿈은 끝났다.
한 발짝만 더 갔으면 이루어졌을 그 꿈이.
무력감은 생각보다······. 깊었다.
나는 업무에 대한 기획력과 추진력은 뛰어났지만, 이복형을 찾아가서 항의하거나 저항할 엄두와 용기를 내는 것에선 미약했다.
좌절했고, 절망했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내가 얼마나 온실 속의 화초처럼 나약한지 새삼 확인한 것뿐.
그냥 매일 성실하게 출퇴근하면서 대표실에 앉아서 컴퓨터 게임이나 했다.
그 대신 사람이 생겨났다.
장혜미.
JH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배우.
밀려나기 전 마지막으로 내가 발굴했던 그녀는 예상대로 연기적 재능을 터뜨리면서 미니시리즈 주연급으로 성장했다.
그녀가······.
내 옆에 있어주었다.
모두들 떠나갔지만 혜미는 항상 내 곁에 머물면서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나는 점점 치욕을 잊어갔고, 절망을 치료했고, 새로운 현실에 평온하게 안주했다.
그리고 5년이 흘렀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일명 JH 파티장이라 불리는 장소.
JH 그룹 이현수 회장의 석방 기념을 환영하는 파티가 열렸다.
철저하게 보안 조치가 이루어져서 언론 미디어 관계자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파파라치처럼 오려는 기자가 있다면, 그는 아마 한국에서 더 살기를 포기할 인간일 것이다.
절대 이 자리의 모습은 누구도 감히 사진 한 장 밖으로 퍼뜨릴 생각을 하지 못한다.
SNS가 아무리 발전했어도!
그런 인간이 있다면, 아마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더 살 생각을 하지 않는 인간일 테다.
가족들은 당연히 오늘 사진을 그따위 머슴들이나 보는 공간에 올리지 않는다.
아니, 머슴은 고상하게 표현한 말이고, 그냥 개돼지가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나는 무심하게 무리를 보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이현수 회장 주변에 모인 삼 남매.
이복형제란 이유로 나는 그곳에 낄 수 없었다.
“축하합니다!”
“사필귀정입니다!”
“앞으로 그룹이 몇 배나 더 커질 것 같습니다.”
그 주변에서 사장단들이 연신 덕담을 쏟아냈다.
그들 중 누구도 내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아무리 사주 가족이라도 JH E&M 산하 엔터테인먼트의 바지 사장일 뿐인 나에게 다가올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내가 실질적으로 JH 엔터테인먼트와 미디어 회사를 현재처럼 키워낸 사람이라도!
나는 이현수 회장을 보았다.
최근 십 년 사이에 벌써 두 번이나 검찰에 기소되었다.
첫 번째는 비자금 담당 직원에 대한 살인 청부 사건.
그때는 살인 교사 혐의로 고발되었으나 구속을 면했다.
그러나.
두 번째 탈세와 횡령은 결국 빠져나올 수 없었다.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고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1년을 살고는 올해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나는 더 이상 머물지 않고 파티 룸을 빠져나온다.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
그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비친 것이다.
이미 인사도 나눴으니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존재.
“삼촌, 벌써 가는 거야?”
주차장으로 들어서는데 차에서 내리는 녀석.
이성민.
이현수 회장의 장남이자 독자.
올해 서른일곱인 나보다 11살 어리다.
5년 전부터 그룹 내에서 승계 작업이 들어가 그때부터 JH E&M의 총괄 기획 본부장으로 승진했다.
“하긴 삼촌이 오래 머물 수는 없겠지.”
싸가지 없는 자식.
능력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녀석이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말투가 이렇다.
“어머, 대표님······!”
조수석에서 내리는 여자.
평상복 차림이었으나 단번에 누군지 알 수 있는 배우.
집에서 입는 옷차림이었다.
내가 자주 보던 옷차림이니까.
그것도 그녀의 집에서.
육감적인 신체의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는 핑크빛 트레이닝 바지와 헐렁한 흰색 티셔츠를 걸쳤다. 고개를 숙이면 속살이 그대로 다 드러날 정도로 목이 깊게 파인 옷이었다.
눈이 마주친 그녀는 어쩔 줄 몰라서 시선을 돌렸다.
나도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혜미야, 네가 여기 어떻게?”
“나 데려다주려고 따라온 거야. 혜미, 이제 너는 차 갖고 가봐. 다른 데로 새지 말고 집에서 얌전히 기다려!”
“혜미, 너 뭐야······? 양다리··· 였어?”
나는 이성민의 말을 무시하며 여전히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운전석에 앉으려는 장혜미의 팔을 붙잡았다.
평소 사람들에게 언성 한 번 높이지 않던 온순한 내 태도가 확 바뀌자, 혜미는 거세게 팔을 휘두르며 저항했다.
이성민은 마치 팝콘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로 싱글거렸다.
“왜··· 뭐요!”
이성민의 그 표정을 본 것일까, 혜미는 눈에 날을 세운 채 나를 올려다보며 외치듯 말했다.
“······.”
이내 손에 힘이 풀리면서 잡고 있던 장혜미의 팔을 놓았다.
유능하게 일을 할수록, 그에 따른 결과물을 낼수록, 그룹 내에서 내 위치는 좁아졌다.
후계 구도에 끼어드는 혼외자의 능력은 오히려 그룹 승계에 방해만 되니까.
“삼촌, 아니, 이준수 대표님! 그만 쪽팔리지 말고 가보세요!”
혜미가 차를 몰고 주차장을 벗어났다.
‘시팔, 진짜 결혼 생각까지 했는데······.’
곧이어 이성민마저 사라질 때까지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평소 거의 하지 않던 욕설까지 할 정도로 이가 갈렸다.
그렇다고 멍하니 서 있을 수는 없어서 그 상태로 차가 주차된 곳까지 간신히 걸어갔다.
‘이 상태로 운전할 수 있을까······.’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면서.
두 다리는 저절로 후들거렸다.
그때.
차들 사이에서 불쑥 나타나는 사내.
“대표님 차를 긁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뭐, 내 차를?”
내가 대뜸 의아해하는 사이였다.
퍽~!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엎어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뒤통수가 뜨겁고 아프다.
볼에 닿는 콘크리트 바닥의 감촉이 사라진다.
그리고 의식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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