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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인사동 마법사 [E](종료230808)

인사동 마법사 1-1권

2018.08.24 조회 4,937 추천 25


 # 유물 감정사
 
 “기, 긴장할 거 없다. 알았지?”
 “아저씨가 더 긴장한 거 같은데요?”
 정상필은 한진호의 말에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이놈은 나이도 어린 것이 왜 이리 침착한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 보면 자신보다 더 노련해 보일 때가 있었다.
 두 사람은 거대한 저택 입구에 서 있었다. 대문에서 여기까지 차를 타고 10분이나 들어왔다. 그 정도로 넓은 집이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정중히 안으로 안내했다. 그는 정상필과 한진호를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이기도 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긴 복도가 나왔다.
 복도를 따라 걸어 들어가니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응접실로 쓰이는 공간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 오늘 그들이 만나야 할 사람이 앉아 있었다.
 “회장님,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양복 사내가 소파에 앉은 사람, 최남희 회장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보고했다.
 정상필이 얼른 허리를 굽혔다.
 “저, 정상필입니다, 회장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정상필은 그렇게 인사한 다음 한진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자 한진호도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한진호라고 합니다.”
 최남희 회장은 그런 한진호의 모습에 눈을 빛냈다.
 “정 선생에 대한 얘기는 내 자주 들었소. 국내 최고의 감정사라고 하던데.”
 “과찬이십니다.”
 정상필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가 국내 최고의 감정사라는 타이틀을 가질 수 있게 된 건, 모두 한진호 덕분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국내 최고의 감정사는 정상필이 아니라 한진호다.
 “피차 시간이 없으니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최남희 회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응접실 안쪽에서 사람들이 커다란 상을 들고 나왔다.
 그 상 위에는 족자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한문이 잔뜩 쓰인 족자였다.
 “글씨체를 보면 알겠지만, 추사의 작품으로 추정되네. 한데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지라 확인이 필요해서 정 선생을 굳이 불렀다네.”
 사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진품이라고 했다. 하지만 최남희 회장은 왠지 꺼림칙한 느낌에 좀 더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것이 바로 정상필이었다.
 정상필이 비록 국내 최고의 감정사로 꼽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타이틀이었다.
 정상필은 양지에서 활동하는 감정사가 아니었다. 그는 음지에서 골동품을 취급하는 사람이었다.
 족자가 펼쳐진 상이 정상필 앞에 놓였다.
 정상필은 잠시 족자를 내려다봤다. 얼핏 보기엔 진품 같았다. 하지만 이런 건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모른다.
 돋보기를 꺼낸 정상필은 족자를 세심히 살폈다. 보면 볼수록 감탄이 나왔다. 아무리 봐도 이건 진품이 분명했다.
 정상필은 옆에 서 있는 한진호를 힐끗 쳐다봤다. 한데 한진호의 표정이 뭔가 평소와 달랐다.
 ‘왜 저러지?’
 한진호는 난감한 표정으로 정상필에게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가짜예요.”
 정상필은 하마터면 ‘뭐?’하고 소리칠 뻔했다. 그는 놀란 눈으로 한진호를 바라봤다.
 자신은 아무리 봐도 진품이라고 여겼는데, 한진호는 물건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가짜라고 말했다.
 정상필은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듯 한진호에게 눈짓을 보냈다.
 한진호가 다시 귓속말을 했다.
 “저거 내가 만든 거라고요.”
 “뭐?”
 이번엔 정상필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전문가들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정교한 위작을 한진호가 만들었다니.
 “무슨 일 있소?”
 최남희 회장이 날카로운 눈으로 정상필과 한진호를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방안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정상필은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말문이 콱 막혀 버려서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한진호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거 몇 달 전에 제가 취미 삼아 만들어본 위작입니다.”
 한진호의 말에 최남희 회장 뒤쪽에 서 있던 중년인 두 명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그럴 리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들은 최남희 회장 아래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었다.
 스스로 최고라고 여기는 자들이어서 정상필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오늘의 자리도 굉장히 못마땅했고 말이다.
 한데 자신들이 진품이라고 인정한 작품을 그냥 가짜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직접 만들었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어찌 믿는단 말인가.
 게다가 이게 위작이면 정말 큰일 난다. 자신들이 진품이라고 확신했기에 이걸 구매했으니까.
 만일 이것이 정말 위작이라면 자신들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러니 반응이 격렬한 것이 당연했다.
 그런 그들의 태도에 한진호가 한마디 툭 던졌다.
 “증거도 있는데요?”
 “뭐?”
 증거라는 말에 다들 눈이 커다래졌다.
 만일 정말로 증거가 있다면 이곳에 있는 전문가들은 눈 뜬 바보가 된다. 명확히 위작이라는 증거가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한 셈이니 말이다.
 한진호는 더 대화를 길게 끌기 싫어서 얼른 말을 이었다.
 “증거는 낙관에 있습니다.”
 “그럴 리 없다!”
 전문가들은 확신했다. 낙관에는 이 작품이 위작이라는 그 어떤 증거도 없다고 말이다.
 고배율 돋보기를 동원해 이미 세심히 확인했다. 그들이 가장 신경 써서 확인한 부분이 바로 낙관과 종이였다.
 이 낙관은 이 작품이 진품이라는 그야말로 완벽한 증거였다. 적어도 그들이 보기엔 그랬다.
 최남희 회장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을 슬쩍 들었다.
 그러자 호통을 쏟아내던 전문가들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들은 괘씸한 눈으로 한진호를 노려봤다. 그리고 경멸 섞인 눈빛으로 정상필을 쳐다봤다.
 상황을 일단 정리한 최남희 회장은 한진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낙관에 증거가 있다고 했나?”
 “맞습니다.”
 “어떤 증거가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
 한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지 않지요. 위작이라는 걸 구분하기 위해 일부러 남긴 증거니까요.”
 “호오. 위작이라는 걸 일부러 알리고자 했다 이거지?”
 최남희 회장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뒤쪽으로 힐끗 돌렸다.
 그곳에는 두 전문가가 창백해진 얼굴로 서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한진호가 대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명백한데 말이다.
 “말해보게. 자네가 낙관에 뭘 남겼는지.”
 “낙관에 제 이니셜을 남겼습니다. JH라고요. 설마 추사의 낙관에 영어가 들어가 있을 리 없으니 가장 확실한 증거죠.”
 “말도 안 돼!”
 전문가 두 명이 동시에 외쳤다. 그들이 보기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영어 이니셜을 낙관에 남겼다니. 그런데도 자신들이 못 알아봤다니.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진호는 품에서 랜턴 하나를 꺼냈다. 정교한 파장을 내도록 제작한 아주 특별한 랜턴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이니셜이 드러나게 되지만, 그 전에 확인할 때를 대비해 이런 걸 만들었죠.”
 한진호가 랜턴을 켜자, 그 안에서 파랑과 보라색의 중간쯤 되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한진호는 낙관이 있는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돌아가 낙관을 바라봤다.
 “이럴 수가!”
 낙관의 붉은 부분에 하얀 글씨로 분명히 JH라는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한진호가 랜턴을 끄자, 글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랜턴을 켜자 또 글자가 나타났다.
 아주 특수한 파장에만 모습을 드러내도록 정교하게 만든 글씨였다.
 한진호는 다시 랜턴을 품에 넣었다.
 좌중은 충격과 침묵에 잠겼다. 이 족자 하나의 가격은 무려 6억이었다.
 진짜 추사의 작품이라고 확신해 6억이면 싼값이라고 무조건 사야 한다고 주장했던 두 전문가의 안색이 점점 시커멓게 죽어갔다.
 사실 최남희 회장 입장에서 6억은 껌값도 안 되는 돈이지만, 중요한 건 그가 사기를 당했다는 점이었다.
 최남희 회장의 시선이 한진호에게 꽂혔다.
 “그러니까 자네가 이 범죄의 시작인 셈이로군.”
 “범죄요? 전 취미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취미로 만든 것이 내 돈 6억을 빼앗아가지 않았나. 그런데도 발뺌을 할 셈인가?”
 한진호가 피식 웃었다.
 “칼 만든 대장장이가 왜 살인자가 될 걱정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관계가 없다?”
 “증거까지 새겨놓은 위작에 제가 관심이나 둘 것 같습니까?”
 한진호는 더 얘기 나눌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정상필을 쳐다봤다.
 “아저씨, 일 끝났으니 이제 가죠.”
 “응? 어······ 그, 그럴까?”
 정상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어쨌든 여기 있어봐야 좋은 꼴 보긴 힘들 것 같았다.
 “보수 챙겨야죠. 설마 은행으로 받을 건 아니죠?”
 “어?”
 정상필은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최남희 회장과 한진호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최남희 회장은 뒤쪽 구석에 서 있는 사내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사내가 다가와 미리 준비한 봉투를 정상필에게 건넸다.
 “일단 계산은 확실해야지.”
 정상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툼한 봉투를 받았다. 빳빳한 5만 원짜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최남희 회장이 정상필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이만 가보라는 뜻이었다.
 한진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당당하게 돌아서서 정상필의 팔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문을 나설 무렵 최남희 회장의 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나한테 이 물건 판 놈, 책임지고 데려와.”
 한진호는 그 말을 흘려들으며 문을 나섰다. 아무래도 보안에 좀 신경을 써야 할 듯했다.
 
 * * *
 
 “그놈 참, 버르장머리 없기는.”
 최남희 회장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말과 달리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음에 드셨습니까?”
 어느새 옆에 다가온 비서가 정중히 물었다.
 “그래. 아주 마음에 쏙 들어. 무슨 일을 시키든 제대로 해낼 거야.”
 최남희의 만족스러운 반응에 비서가 서류 몇 장을 내밀었다.
 “한진호에 대해 조사한 내용입니다.”
 최남희 회장은 서류를 받아 담담히 읽었다. 별로 중요한 내용은 없었다.
 “일단······ 고아로군? 대학생이고. 지금 이 일은 그러니까 아르바이트인 셈인가?”
 오늘 보여준 실력을 생각하면 미술이나 고문학, 혹은 역사 계통을 전공했을 것 같은데, 실제 전공은 경영학과였다.
 게다가 학교에는 관심이 없는지 성적도 형편없었다. 이 정도 성적이라면 경영학에 관한 기본적인 상식을 물어도 대답하지 못할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없군. 그럼 이 모든 게 독학이라고? 정상필이 가르쳤을 가능성도 없고?”
 “보시면 아시겠지만 정상필은 한진호와 인연을 맺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한진호가 직접 그를 찾아가 일을 구했습니다.”
 최남희 회장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 정도면 된 것 같으니 영입을 추진해 보게.”
 비서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즉시 이행하겠습니다.”
 최남희 회장은 비서가 물러가려하자, 얼른 질문 하나를 덧붙였다.
 “다른 놈들은 어쩌고 있나?”
 밖으로 나가려던 비서가 대답했다.
 “교육 준비 중입니다. 한진호만 영입 문제로 일정을 멈춘 상태입니다.”
 최남희 회장은 소파에 편안히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냥 진행시켜. 저놈이야 좀 늦어도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을 테니까.”
 비서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최남희 회장은 소파에 몸을 묻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 * *
 
 정상필은 운전하는 내내 몸을 덜덜 떨었다. 옆에 앉은 한진호가 불안할 정도였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운전 제가 할까요?”
 “괜찮다. 이제 다 왔는데 뭐.”
 정상필은 한진호가 말을 걸어주자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사실 오늘은 정말 크게 놀랐다.
 잠시 후, 한진호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각자 생각할 것들이 좀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떤 놈일까요?”
 “그러게 말이다.”
 “제가 취미 삼아 위작을 만든다는 건 진짜 아무도 모르는 건데. 아저씨도 오늘 알았죠?”
 “그렇지. 나도 아까 너 때문에 정말 깜짝 놀랐다.”
 정상필은 그렇게 말하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데 너 대체 언제부터 그런 걸 만들기 시작한 거냐? 보아하니 1, 2년 된 건 아닌 것 같던데.”
 “10년 좀 넘은 거 같네요. 중학교 때부터 했으니까.”
 “그렇게나 어릴 때부터 했어? 그나저나 정말 끝내주긴 하더라. 전문가들도 못 알아차릴 정도니, 원.”
 “그냥 취미로 하는 건데요, 뭐. 어차피 가짜라 쓸모도 없고.”
 “쓸모가 없긴 왜 없어! 전문가도 못 알아보는데!”
 특히 이번에 본 추사의 글은 정말 최고였다. 알려지지 않은 작품인지라 들킬 염려도 없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몇 개만 만들어 팔아도 평생 호의호식하면서 살 수 있다.
 “아무튼 그런 걸 만들어 왔으니 작품 감정을 그렇게 기가 막히게 하지. 사실 감정이 별거 있냐? 그거 만드는 게 백배는 더 힘들지. 안 그래?”
 “뭐······ 반쯤은?”
 “에이, 반은 무슨.”
 정상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하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진호야, 내 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안 합니다.”
 “야, 아직 말 꺼내지도 않았다!”
 “가짜 만들어서 사기 치자는 거잖아요. 전 그런 거 안 해요.”
 “그게 왜 나빠! 어차피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물건 만드는 건데! 엄밀히 따지면 사기도 아니야!”
 한진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저, 한 번 안 한다고 하면 절대 안 하는 거 아시잖아요. 빨리 정산이나 하죠. 피곤해서 좀 자야겠어요.”
 “끄응.”
 정상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몇 달이나 한진호를 겪어왔다. 그러니 성격을 모를 리 없었다.
 “기다려라.”
 정상필은 오늘 받은 봉투를 꺼내 액수를 확인했다. 5만 원짜리가 50장이나 들어 있었다.
 “반 나누기 애매하네. 자.”
 정상필은 30장을 봉투에 담아 한진호에게 내밀었다.
 “어차피 너 아니었으면 못 벌 돈이니 받아라.”
 “고맙습니다.”
 한진호는 사양도 하지 않고 넙죽 받았다. 그리고는 정상필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아저씨, 조심하세요.”
 “응?”
 “느낌 안 좋으니까 조심하시라고요. 오늘 일 좀 마음에 걸려서 그래요.”
 정상필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또 조심성 하나는 업계 최고 아니냐. 그거 아니었으면 이렇게 살아남지도 못했어. 그러니까 걱정 마라.”
 한진호는 그렇게 말하는 정상필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 또 왜?”
 한진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차문을 열고 내렸다. 그러면서 슬쩍 말했다.
 “당분간 연락하지 마세요.”
 “뭐? 갑자기 왜?”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얼마나 걸리는데?”
 “나도 아직 몰라요. 끝나면 연락할게요.”
 텅.
 한진호가 그 말을 끝으로 차문을 닫았다. 정상필은 얼른 창문을 내리고 소리쳤다.
 “연락 꼭 해야 돼!”
 한진호가 뒤돌아 걸어가며 손을 휙휙 흔들어 주었다. 걱정 말라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작별인사 같기도 했다.
 마음이 안 놓인 정상필이 또 소리쳤다.
 “꼭이야, 꼭! 안 하면 학교로 찾아간다!”
 한진호는 이번에도 손만 휙휙 흔들었다. 그리고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쑥 들어갔다.
 정상필은 한동안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한진호가 들어간 건물 입구를 바라보다가 그곳을 떠났다.
 왠지 다신 연락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젠장, 설마 눈치챈 건 아니겠지?”
 오늘 왠지 한진호가 차에서 했던 말들이 마음에 걸렸다. 조심하라는 둥, 연락하지 말라는 둥 말이다.
 모르는 척 혼신의 연기를 다했지만, 한진호가 얼마나 눈치가 빠른 놈인지 알기에 불안했다.
 정상필은 잡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휘휘 젓고는 차를 다시 출발시켰다.
 “어쨌든 돈 벌었으면 됐지. 아깐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오늘 판 추사의 모작을 판 사람은 바로 정상필이었다. 물론 드러나지 않게 은밀히 몇 단계 거쳐서 팔았기에 들킬 염려는 없었다.
 대신 받은 돈이 조금 적을 뿐이었다.
 “작품 팔아서 2억에 감정수수료 천이라······ 이렇게 몇 탕만 하면 진짜 팔자 제대로 고치겠다.”
 정상필은 한진호의 오피스텔이 있는 층을 힐끗 쳐다보고는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부우웅.
 굉음을 토해내며 그의 차가 빠르게 도로를 질주했다.
 
 * * *
 
 철컥.
 오피스텔 문을 닫은 한진호는 안으로 들어갔다. 자동으로 등이 켜지면서 방 안이 환해졌다.
 한진호의 오피스텔은 상당히 넓었다.
 그리고 그 넓은 공간이 온통 골동품이나 고서화로 꽉 채워져 있었다.
 “이제 슬슬 저것들도 정리해야겠네.”
 이곳에 있는 골동품과 고서화는 모두 위작이었다. 전부 한진호가 제작한 것들이었다.
 정말 취미로 만든 건 아니었다. 이건 수련의 일환이었다.
 기념 삼아 남겨뒀는데, 이젠 그러면 안 될듯했다.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걸 6억이나 받고 판 거야?”
 딱 그거 하나만 사라졌다. 그거 하나만 아직 표식이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표식이 천천히 드러나게 제작한 것도 일부러 그랬다. 그것 역시 수련의 과정 중 하나였으니까.
 가짜라는 표시가 워낙 명확해서 별문제 없을 줄 알았다. 그래서 보안에 신경을 안 썼더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정상필을 너무 믿었다.
 한진호는 벽장을 열고 그 안에서 커다란 자루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 자루에 자신이 만든 위작들을 툭툭 넣었다.
 별로 조심해서 다룰 필요도 없었다. 다 부숴서 버릴 생각이었으니까.
 모든 작품을 싹 정리한 한진호는 작업대에 앉았다.
 “자, 오늘은 뭘 만들어 볼까?”
 머릿속으로 오늘 작업할 작품을 고르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폰을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였다. 잠시 고민하던 한진호는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진호 씨?
 “네. 누구시죠?”
 -오늘 회장님 댁에서 만났던 사람입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한진호의 머릿속에서 오늘 만났던 사람과 목소리가 차르륵 지나갔다.
 모두의 목소리를 들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 전화한 이 사람은 알 것 같았다.
 ‘비서?’
 최남희 회장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비서가 분명했다. 문을 나서면서 회장에게 대답하는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은 듯했다.
 “무슨 일인데요?”
 -한진호 씨에게 나쁘지 않은 얘기일 겁니다. 제가 댁으로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마침 집 근처인데.
 “집 근처라고요?”
 여기 주소는 또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제법 조사를 한 모양이다. 어쩌면 오늘 감정 의뢰도 이 만남을 위한 밑밥일 수도 있고.
 -부담되시면 적당히 밖에서 뵈어도 됩니다. 근처에 손님이 별로 없는 커피숍도 하나 있는 것 같더군요.
 이 정도로 조사했으면 굳이 밖에서 만날 필요도 없었다.
 “들어오시죠.”
 한진호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주위를 슥 둘러보며 몇 가지 준비를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미리 대비하는 것이 안전을 위한 지름길이었다.
 이렇게 상대가 자신을 조사하기 시작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뭐······ 모든 걸 알아내진 못했겠지만.’
 한진호가 대충 준비를 끝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 열려 있습니다.”
 문이 열리고 건장한 사내 세 명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최남희 회장의 비서가 들어왔다.
 철컥.
 문이 닫혔다. 최남희 회장의 비서는 날카로운, 그러면서도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진호를 바라봤다.
 “혼자 사는 곳이라 손님 대접이 어려운 점, 이해 바랍니다.”
 아닌 게 아니라 한진호의 집에는 변변한 의자나 소파조차 없었다.
 한진호가 작업할 때 앉는 의자 한 개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 의자에는 한진호가 앉아 있었고.
 비서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다가가 한진호 앞에 섰다.
 “영입 제안을 드리러 왔습니다.”
 “영입? 저 말고도 좋은 전문가는 많을 텐데요? 전 전공자도 아닌데. 아, 혹시 위작을 만들고 싶으신 거라면 거절입니다.”
 “위작을 만들려는 게 아니라 감정을 위해서 영입하려는 것입니다.”
 한진호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 비서를 가만히 쳐다봤다.
 “조건은 정말 마음에 드실 겁니다. 회장님께서 이렇게 마음에 들어하는 사람은 한진호 씨가 처음입니다.”
 “립서비스라도 듣기 나쁜 말은 아니네요.”
 “립서비스가 아닙니다. 업계 최고의 대우를 약속드리겠습니다.”
 한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장님이 골동품을 많이 구입하시나요? 굳이 전문가를 영입까지 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 그냥 전문 업체랑 계약하시는 편이 훨씬 낫지 않나요?”
 한진호는 왜 자신에게 이렇게 영입까지 제안하면서 집착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비서가 단호히 말했다.
 “재능 때문입니다.”
 “재능? 실력이 아니라요?”
 한진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얘기가 어째 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숨기지 않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한진호 씨가 일하시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검증과정을 거친 거군요.”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검증과정은 필수입니다.”
 “그러니까 그 중요한 일, 전문 업체랑 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비서는 그 말에 눈을 빛내며 물었다.
 “혹시 아주 특별한 유물을 보신 적 있으십니까?”
 “유물? 빗살무늬토기나 금관, 뭐 그런 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비서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좋은 유물이긴 하지만 특별하진 않지요. 제가 말씀드리는 건 아주 특별한 유물입니다.”
 한진호는 입을 다문 채 비서를 쳐다봤다.
 비서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장담하건대, 아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주 특별한 유물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게 뭡니까?”
 “그게 뭔지 알려면 특수한 교육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특별한 유물을 보는 눈과 유물에 대한 지식이 아주 많이 필요하니까요.”
 “그래서 재능이 필요하다는 거로군요?”
 “예. 맞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진호 씨가 아주 적합한 인재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한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나쁘진 않네요. 그래도 당장 결정할 수 없다는 건 이해하시죠?”
 “물론입니다.”
 비서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한진호가 명함을 받자, 말을 이었다.
 “결심이 서시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밤이건 새벽이건 시간은 상관없습니다.”
 비서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중히 인사하고 한진호의 오피스텔에서 나갔다.
 한진호는 비서가 준 명함을 슥 살펴보고는 옆에 있는 휴지통에 구겨 넣었다.
 “특별한 유물을 아느냐고? 알지, 아주 잘 알아.”
 한진호가 씨익 웃으며 작업 준비를 했다. 아마 그 특별한 유물에 대해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최초의 유물을 발견한 사람이 나니까.”
 그리고 이렇게 위작을 만드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는 이유가 바로 그 유물 때문이었으니까.
 
 
 # 아주 특별한 유물
 
 수련을 위해 만든 위작을 한쪽에 치워둔 한진호는 본격적으로 진짜 일을 시작했다.
 굉장히 오랜 시간과 집중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일을 마무리할 무렵 벌써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한진호는 모든 걸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침대에 쓰러져 깊이 잠들었다.
 물론 오랫동안 잘 수는 없었다. 오늘은 반드시 학교에 가야 하는 날이었으니까.
 미친 듯이 울리는 알람을 끈 한진호는 부스스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다음,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향했다.
 순식간에 외출 준비를 마친 한진호는 오피스텔에서 나가 학교로 향했다.
 굳이 한진호가 다른 곳보다 훨씬 비싼 오피스텔에서 지내는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학교에서 가까웠다.
 오피스텔에서 나가 3분 정도 걸어가면 바로 학교 정문이었다. 아마 이보다 더 가까운 숙소를 구하려면, 학교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한진호는 현재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군대에 다녀와서 복학한 지 1년쯤 지났다.
 학교에 도착한 한진호는 일단 강의부터 듣기로 했다. 절대 빠져선 안 되는 강의 두 개를 듣는 것이 오늘 할 일의 전부였다.
 어쨌든 무사히 졸업은 하고 싶었으니까.
 그건 돌아가신 부모님과의 약속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최소한 대학은 졸업하겠다고 말이다.
 약속은 졸업이었지 성적이 아니었기에 한진호는 졸업을 위한 일이 아니면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에게 대학은 딱 그 정도 의미였다.
 그렇기에 수업시간 내내 한진호의 머릿속에서는 수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생각이 떠다녔다.
 ‘수업 다 끝나면 물건 하나 더 팔아야겠다.’
 사실 현재 한진호가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골동품 감정 아르바이트를 하고, 대학에 다니는 평범한 모습은 한진호가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가 가진 다른 모습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한진호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강의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들어야 하는 강의가 하나 더 남았기에 잠시 시간을 때워야 한다.
 사실 강의를 듣는 동안에도 계속 머릿속으로는 다른 일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다.
 강의실에서 나간 한진호는 자판기에서 커피 하나를 뽑아들고 근처 벤치로 향했다.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저 멀리서 걷고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유채인.’
 이 학교에서 아주 유명한 여자였다.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소식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유채인은 연예인 같은 학생이었다. 실제로 여러 연예기획사들로부터 영입 제안을 수없이 받기도 했다. 지금도 꾸준히 받고 있었고.
 미모가 굉장해서 누구든 한 번 보면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였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서 그녀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였다.
 같은 과였기에 몇 번 인사도 하고, 모임에서 짧게나마 대화를 나눠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진호 또래의 남자들은 어떻게든 관심 한 자락이라도 받아보려고 용을 썼지만, 한진호는 아예 관심을 끊었다.
 현재 한진호의 관심은 온통 유물에 꽂혀 있었다.
 아주 특별한 유물 말이다.
 한진호는 커피를 마시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쫙 펼쳐져 있었다.
 맑은 하늘에 이번에 새로 만들 작품을 그려봤다. 어젯밤에 만든 건 진짜를 만들기 전에 손을 풀기 위한 거였다.
 지금까지의 꾸준한 수련은 이번 작품을 만들기 위한 준비단계였다.
 하늘에 그 설계도를 가상으로 차근차근 그려나가고 있을 때, 주변이 살짝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고개를 내려 확인해보니 유채인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란의 정체는 유채인과 함께 있는 사람들의 대화소리였다.
 마음 같아선 얼른 커피를 원샷하고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어느새 다가온 유채인이 환하게 웃으며 한진호에게 인사했다.
 한진호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었다.
 “어, 그래.”
 순간, 한진호의 눈에 유채인의 목걸이가 보였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유채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특이한 목걸이죠? 할아버지가 선물로 주셨어요.”
 한진호는 또 한 번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찬 목걸이를 만든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저거······ 38억에 낙찰됐는데.’
 저건 평범한 목걸이가 아니었다. 특별한 힘이 담긴 목걸이였다. 경매를 통해 팔았는데, 설마 그걸 유채인의 할아버지가 샀을 줄은 몰랐다.
 “어? 커피 드시고 계셨네요? 저도 하나 뽑아주시면 안 돼요?”
 유채인이 여전히 미소 지은 채 물었다. 그러자 그녀 근처에 있던 남자 한 명이 얼른 나섰다.
 “내, 내가 가서 뽑아올게.”
 남자가 자판기로 후다닥 달려갔다.
 한진호는 그걸 보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커피 잘 마시고 가. 난 수업이 있어서.”
 순식간에 자리를 뜬 한진호의 뒷모습을 유채인이 가만히 바라봤다.
 잠시 후, 자판기로 뛰어갔던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커피를 내밀었다.
 “허억, 허억. 여, 여기 커피.”
 유채인은 빙긋 웃으며 그것을 받았다.
 “고마워.”
 유채인의 미소를 마주한 남자의 몸과 표정이 흠칫 경직되었다.
 ‘예, 예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무섭지?’
 유채인의 미소는 혼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남자가 보기엔 왠지 무서웠다.
 ‘무서울 정도로 예뻐서 그런 건가?’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 * *
 
 “가끔 저럴 때마다 곤란해 죽겠네.”
 유채인은 가끔 저렇게 살갑게 인사하며 다가올 때가 있었다. 한진호는 그때마다 적당한 핑계로 자리를 벗어나곤 했다.
 한진호가 판단하기에 유채인이 저러는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녀에게 관심의 눈길을 주지 않는 거의 유일한 남자가 바로 한진호였으니까.
 심지어 나이 좀 있는 노교수들조차 유채인을 볼 때면 눈빛이 달라진다.
 그 정도로 그녀가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뜻이었다.
 어쨌든 간신히 그 자리를 벗어났으니 적당히 시간 때울 만한 곳을 찾아야 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한진호는 적당히 구석진 곳에 있는 벤치를 발견했다.
 그곳에 앉아 주위를 확인하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원래는 새로 만들 작품 구상을 하려고 했지만, 아까 유채인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준 선물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그녀의 할아버지가 제법 대단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또한 특별한 유물에 대해 아는 사람 중 하나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은 사실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아마 한진호가 제대로 마음먹고 조사하면 금방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건 귀찮으면서도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머니에 있는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지이이잉.
 확인하니 전화가 온 건 아니고, 특별한 상황에 울리게 설정해 놓은 알람이었다.
 한진호는 앱 하나를 실행했다. 직접 만든 앱이었다.
 누군가 특정한 계정으로 메일을 보내면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앱이었다.
 굳이 이렇게 따로 앱까지 만든 이유는 그 메일 계정과 한진호를 연결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즉, 이 앱을 이용하면 메일 계정과 한진호 사이에 있어야 할 연결고리를 끊은 상태에서 메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한진호가 가진 아주 특별한 힘이 가미되어 있기에 그 어떤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해도 빈틈을 파고들 수 없었다.
 “드디어 경매가 열리는군.”
 메일은 특수 경매회사인 루이나로부터 온 것이었다.
 경매에 참가할 수 있는 모든 회원들에게 곧 경매가 시작된다고 알려주는 메일이었다.
 경매를 통해 판매할 물품을 준비하거나 혹은 그 물품을 구입할 돈을 준비하라는 신호였다.
 제대로 된 물품 리스트와 정확한 경매시간과 장소는 경매가 열리기 15일 전에 다시 알려주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진호는 매번 루이나의 경매 때마다 자신의 작품을 판매해 왔다.
 지난번에 판매한 물건은 아까 유채인이 차고 있던 목걸이였다.
 그 전에 판매했던 물건 중에는 그 목걸이보다 더 비싼 것도 수두룩했다.
 한진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이번엔 뭘 팔아야 할까? 그리고 언제쯤 진짜 경매에 참가해 그곳에서 파는 물건을 살 수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슬슬 수업시간이네.”
 한진호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오늘 남은 수업을 듣고 나면 처리해야 할 일이 제법 많았다.
 아마 오늘은 좀 바쁜 하루가 될 것이다.
 
 * * *
 
 수업이 끝난 후, 한진호는 학교에서 나가 큰 도로를 따라 쭉 걸어갔다.
 그러다가 큰길에 연결된 작은 도로로 빠졌다.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그쯤이었다.
 큰 도로에서는 긴가민가했는데, 작은 도로로 들어서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 놈이 아닌데?’
 일단 대놓고 따라오는 자가 한 명 있었고, 그자와 좀 떨어진 곳에서 조심스럽게 따라오는 사람이 두 명 있었다.
 한진호는 작은 도로에 연결된 골목으로 쑥 들어갔다.
 낌새조차 없이 갑자기 들어갔기에 가장 앞에서 뒤쫓던 사람이 황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한진호를 마주해야 했다.
 한진호는 그곳에 서서 그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용건이 뭡니까?”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처음 한진호가 서 있는 모습에 흠칫 놀랐지만 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천천히 다가갔다.
 “전 이런 사람입니다.”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한진호에게 내밀었다.
 제일기획 부장 이명훈.
 명함에 적힌 이름이었다. 한진호는 이명훈의 손에 있는 명함을 받으며 그의 표정과 눈빛을 확인했다.
 한진호가 보기에 이명훈은 절대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 뒤쪽에서 아직 다가오지 않고 기다리는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이렇게 한진호 씨를 찾아뵌 것은 아주 좋은 제안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한진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명훈 뒤쪽을 향해 소리쳤다.
 “거기 그러고 있지 마시고 일단 나오시죠. 같은 말 여러 번 듣기 싫으니 한꺼번에 하자고요.”
 그 말에 이명훈의 표정이 확 굳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고는 인상을 팍 썼다.
 어느새 두 명의 남자가 또 등장한 것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다들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했다. 물론 좋은 사이는 아니겠지만.
 “일단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게 낫겠죠? 따라와요.”
 한진호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이 서로를 견제하며 그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골목을 몇 개 지나쳐 주택가로 들어가더니, 그곳마저 지나치자, 작은 산자락이 나타났다.
 등산로 쪽에는 사람이 좀 있었는데, 그 옆으로 쭉 돌아가자 인적이 아예 없는 적당한 넓이의 공터가 나타났다.
 “자, 이쯤이면 편하게 얘기할 수 있겠네요. 말씀들 해보시죠.”
 한진호는 공터 한가운데 서서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세 사람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목적은 다 같은 듯했다.
 그중 한 명이 나머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제안했다.
 “우리끼리 이러지 말고 적당히 손잡는 게 어때?”
 “손잡자고?”
 “어차피 물건 만들어 봐야 서로 방해하면 끝장 아냐? 그러니 사이좋게 나누자고. 어때?”
 잠시 고민하던 나머지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너 형님 설득할 수 있어?”
 “이해득실을 따지면 되지. 전쟁할 거 아니면 나누는 게 답이야. 안 그래? 애초에 서로 몰랐다면 모를까.”
 “하, 나 참. 그러고 보면 정 사장이 너구리는 너구리야.”
 “셋 모두한테 안 팔았으면 나중에 감당 못하지.”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던 한진호는 마지막에 나온 정 사장이라는 단어에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정상필이었다.
 
 “이제 얘기 다 끝난 겁니까?”
 한진호는 세 사람을 슥 훑어보며 물었다.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 아니라는 판단은, 그저 그들의 분위기가 험악하거나 어두웠기 때문에 내린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하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서 위험한 느낌이 풍겼기 때문이다. 또한 눈빛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살기 때문이기도 했다.
 즉, 사람을 겁주거나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일이 잦은 자들이란 뜻이었다.
 “너 우리랑 어디 좀 같이 가줘야겠다.”
 힘쓸 일이 있으면 이런 인적 없는 공터가 좋겠지만, 서로 손잡기로 한 마당이니 차라리 한진호를 더 조용하면서도 다루기 편한 곳으로 데려가는 게 나았다.
 “음······ 자신은 있고요?”
 한진호의 담담한 물음에 세 사람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자신들을 누구라고 생각한단 말인가.
 “너 설마······ 우리가 정말 평범한 회사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한진호가 씨익 웃었다.
 “그럼 설마······ 내가 아무 대비도 없이 여기로 데려온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뭐?”
 세 사람의 눈빛이 확 바뀌었다. 그들의 눈에 경계심이 깃들었다. 그리고 살기가 겉으로 드러나 번들거렸다.
 그들은 한진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우리는 그냥 왔을 것 같아?”
 “뒤따라오던 그 사람들 말인가요? 한······ 스무 명쯤 되는 것 같던데. 일곱, 일곱, 여섯.”
 한진호는 세 사람을 한 명씩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그들이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렇게 대놓고 따라오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죠.”
 한진호는 마치 몸을 풀듯이 목을 이리저리 꺾고, 어깨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런데 나 잡아갈 수 있겠어요?”
 한진호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 싸움 잘하는데.”
 세 사람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허, 이것 참······ 지금 내 앞에서 싸움 자랑 하는 거냐?”
 사내 중 한 명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나머지 두 사람은 끼어들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들은 한진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자리를 조금 옮겨 퇴로를 차단했다.
 한진호는 다가오는 사내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내 사내가 다가와 기습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한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옆으로 젖히는 것만으로 주먹을 피해냈다. 그러면서 사내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쭉 뻗었다.
 뻐억!
 “쿠워억!”
 사내의 눈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앞으로 퍽 쓰러지더니 입에서 피와 오물을 토해냈다.
 한진호가 돌아서서 나머지 두 사람을 쳐다봤다.
 “도망 안 갈 거죠?”
 그럴 리 있겠는가. 두 사람은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중 한 명은 품에서 칼까지 꺼냈다.
 한진호는 두 사람을 향해 마치 점프하듯 훌쩍 뛰었다.
 뻐벅!
 두 사람이 채 공격하기도 전에 급소에 주먹을 각각 한 방씩 선물해 주었다.
 “꾸워억!”
 두 사람 역시 처음 사내와 마찬가지로 피와 오물을 토하며 정신을 잃었다.
 한진호는 쓰러진 자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놈들을 어쩐다······.”
 일단 박살 내긴 했는데, 이후의 일을 잘 처리하지 않으면 아마 두고두고 골치 아플 것이다.
 그리고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자들도 해결해야 한다.
 “그놈들을 다 처리한다고 해서 그냥 끝날 리도 없고······.”
 당연한 얘기다. 이런 일은 아예 뿌리째 도려내야 한다.
 한진호는 세 사람의 품을 뒤져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에는 제법 많은 돈과 카드들이 있었다. 하지만 한진호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여깄군.”
 한진호는 그 안에서 명함들을 꺼냈다. 한두 장이 아니었고, 전부 다른 명함이었다.
 하지만 그 명함들을 쭉 살펴보면 이들이 정확히 어디에 소속된 자들인지 알아낼 수 있었다.
 한진호가 이쪽 바닥에 대해 아예 아는 것이 없다면 모를까, 그동안 정상필과 함께 제법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다양한 경험을 했기에 충분히 파악이 가능했다.
 명함에 있는 회사명 중에 아주 익숙한 것들이 수두룩했다. 그걸 토대로 저들의 소속을 확실히 알아낼 수 있었다.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야 아주 많지.”
 한진호는 이들이 조직 내에서 갖는 위치를 대충 확인하고는 씨익 웃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자, 어차피 날 인간으로 대접할 생각은 없었을 테니까 너무 원망하지 마시길.”
 한진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내 중 한 명의 옆머리에 손바닥을 올렸다.
 지잉.
 손목에 찬 은색 팔찌가 살짝 진동하더니 은은한 빛을 토해냈다.
 한진호의 손바닥에 빛으로 이루어진 문양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문양이 그대로 사내의 머릿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나머지 두 사람의 머리에도 똑같이 빛의 문양을 넣은 다음, 세 사람을 흔들어 깨웠다.
 “끄응.”
 세 사람은 두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진호를 보고는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자, 이제 내가 당신들에게 뭘 했는지 설명할 테니 잘 들으세요.”
 세 사람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한진호를 바라봤다.
 한진호는 그들의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손가락 하나를 들어올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당신들 머릿속에 초소형 나노머신을 넣었습니다.”
 세 사람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저 말을 믿으라는 건가?
 “그건 내 심장의 신호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점점 더 가관이다.
 “내가 죽으면, 당신들도 죽습니다.”
 그런 황당한 말에도 세 사람은 굳이 따지거나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부하들이 오기 전까지는 무조건 참아야 한다.
 ‘그나저나 이놈들 왜 이렇게 굼떠?’
 왔어도 벌써 왔어야 할 시간인데 아직도 소식이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한진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내가 죽이고자 마음먹어도 당신들은 죽습니다.”
 이젠 더 이상 황당한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대체 저 개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 하나 생각할 뿐이었다. 그 생각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당신들이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내가 확인할 수 있으며, 내가 원하는 수준의 고통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한진호는 그렇게 말하고 세 사람을 슥 둘러봤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한진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사람이 그대로 허리를 접으며 고꾸라졌다.
 다들 눈을 부릅뜬 채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바닥에 쓰러져 몸을 덜덜덜 떨었다.
 정말 고통스러웠다. 지금까지 그들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사실 고통이 아니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숨이 턱 막혔다. 육체적 고통에 호흡까지 멈췄으니 고통이 점점 더 깊어졌다.
 따악!
 한진호가 손가락을 튀겼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온몸을 뒤덮었던 고통이 사라졌다.
 “허억! 허억! 허억!”
 세 사람은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한진호를 바라봤다. 그가 짓고 있는 미소가 마치 악마의 웃음처럼 보였다.
 “아직 설명 부족하신 분?”
 세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어찌나 맹렬하고 절박한지 저러다가 고개가 떨어져 나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알겠습니다. 이제 여러분의 충성심을 제가 의심할 필요는 없겠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마, 맞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완수하겠습니다!”
 한진호는 그들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원하는 건 별거 아닙니다. 자, 어디 세 분이 속한 조직이······.”
 한진호는 그렇게 말하며 명함 뭉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제일 기획입니다!”
 “삼영 건설입니다!”
 “신영 시큐리티입니다!”
 한진호는 명함뭉치를 바닥에 휙 던졌다. 짐작했던 회사가 맞다. 저 회사들의 특징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세 회사 모두 골동품이나 유물에 대한 관심이 상당하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세 분, 회사에서는 어느 정도 위치입니까? 그냥 시키는 일이나 대충 하는 정도면 사실······ 별로 필요 없는데.”
 “제 위로 다섯밖에 없습니다! 저 쓸모 많은 놈입니다!”
 “전 위로 넷밖에 없습니다!”
 “저도 넷입니다!”
 세 사람의 뇌리에 남은 고통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들은 지금 어떻게든 한진호에게 잘 보이려 애쓰고 있었다.
 “잘됐네요. 그럼 회사를 뒤집어엎거나 하는 것도 가능하겠군요?”
 “예?”
 “그, 그건······.”
 세 사람이 울상을 지었다. 아무리 그들이 조직에서 신임을 받고 있고 어느 정도 지위에 올랐다고 해도 그 정도 힘은 없었다.
 그런 일을 하려면 최소한 10년 가까이 더 조직에 헌신하고 자리를 잡아야 가능할 것이다. 그나마도 확실한 조력자가 있어야 한다.
 “그럼 차라리 더 위에 있는 분을 다시 잡아오는 게 나으려나요?”
 세 사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말이 마치 자신들을 버리겠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죽는다.’
 그냥 죽는 것도 아니고 아까 그 고통을 당하다가 죽을 것이다. 세 사람이 덜덜덜 떨며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한진호를 바라봤다.
 “그럼 세 분이 힘을 합하면 어떻습니까?”
 “예?”
 “우리······ 셋이요?”
 세 사람은 서로를 돌아봤다. 그런 생각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자금을 대면 셋이 손잡고 각자의 조직을 하나씩 상대하는 거, 가능합니까?”
 “그, 글쎄요······.”
 “자금만 충분하면······.”
 한진호가 즉시 말했다.
 “자금은 충분할 겁니다.”
 지금도 무수한 조세회피처마다 한진호의 계좌가 수십 개도 더 있었다.
 거기에 있는 돈을 잘 빼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진호는 되도록이면 자신이 드러나지 않길 원했다. 누군가 자금을 추적해 자신을 파악하면 정말 귀찮은 일이 연달아 발생할 것이다.
 그 계좌 중 몇 개만 써먹어도 저들이 조직을 장악하는 자금으로는 충분할 것이다.
 “당장은 뒤엎기 힘들 겁니다. 먼저 조직 내에 은밀히 분란을 일으키세요. 가능합니까?”
 한진호의 질문에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도 이쪽 바닥에서 밥 먹고 산 지 10년이 넘었다.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대충 밑그림이 그려졌다.
 혼자라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셋이 손을 잡으면 충분히 가능하다.
 셋이 손잡으면 세 조직의 싸움을 조장할 수도 있다. 전쟁이 벌어지진 않겠지만 외부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혼란스러울 때 막대한 자금을 이용해 야금야금 조직을 먹어치우면 된다.
 세 사람의 눈에 야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맡겨 주십시오!”
 “아주 깔끔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앞으로 귀찮은 일, 절대 없게 하겠습니다!”
 세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한진호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배신해도 상관없어요. 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게 뭔지는 다들 아시죠?”
 세 사람은 한진호의 미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만으로도 오줌이 찔끔 나올 것처럼 무서웠다.
 “그,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한진호가 손을 내저었다.
 “그만 가보세요. 부하들이 찾고 있을 텐데.”
 “예? 아, 예. 아, 알겠습니다.”
 세 사람이 조심스럽게 물러갔다. 그들은 공터를 벗어난 순간 또 한 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뒤쫓아 오기로 했던 스무 명의 부하들이 공터 근처를 열심히 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봤다.
 공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뇌리에 꿈에서조차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부하들한테 같이 있는 모습 아직은 들키면 안 될 텐데요. 아닌가요?
 세 사람은 화들짝 놀라 사방으로 후다닥 흩어졌다.
 그리고 부하들을 찾아 얼른 돌아갔다.
 한진호는 공터 한가운데 서서 그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리고 손목에 찬 팔찌를 슬쩍 쳐다봤다.
 “이걸 이렇게 써먹네.”
 
 * * *
 
 공터에서 나온 한진호는 원래 가려던 곳으로 향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집이 아니었다.
 학교에서 20분 거리쯤에 있는 골목이었다.
 비교적 넓은 골목이었는데, 그 골목 중간쯤에 작은 상점이 있었다.
 한진호는 그곳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새하얀 간판에 A라는 글자만 있었다. 그게 그 상점 이름이었다. 밖에서 보면 대체 뭐 하는 곳인지 알 수 없게 생겨먹은 곳이었다.
 더 중요한 건, 그곳은 아무나 발견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A는 오직 한진호에게만 허락된 공간이었다.
 그곳은 한진호의 작업실이자 창고이기도 했다.
 오피스텔에서는 작업을 하루에 끝낼 수 있을 만한 물건만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물건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다가 이곳에 왔을 때 창고에 보관했다.
 한진호는 작업실 한쪽 벽을 꽉 채우고 있는 진열장에 작은 반지 하나를 올려놨다. 어제 만든 작품이었다.
 그 다음에는 한쪽에 마련된 바로 갔다.
 바 테이블 위에 황금색 금속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위에는 굉장히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면 그저 단순한 선으로 이루어진 문양이 아니었다.
 선 하나하나가 튜브 형태로 이루어진 입체적인 문양이었다. 각각의 튜브에 또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금속판 위에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 위에 홀로그램으로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한 그림을 그려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바로 한진호가 가장 처음 발견한 특별한 유물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깨끗한 물이 담긴 커다란 유리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유리병에도 표면에 복잡한 문양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진호는 컵을 들고 가 유리병에서 물을 따랐다.
 신기하게도 병에서 빠져나간 만큼 다시 물이 채워졌다.
 금속판에서 은은한 빛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굉장히 특별한 힘이었다.
 한진호는 그렇게 컵에 담은 특수한 물로 커피를 탔다.
 세상에서 가장 맛과 향이 뛰어나고, 특별한 힘까지 담긴 최고의 커피가 완성되었다.
 한진호는 커피를 마시면서 다시 진열장으로 향했다.
 “자, 이번엔 뭘 팔지 골라볼까?”
 진열장에는 정말 많은 물건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물건의 종류는 다양했다. 팔찌, 반지, 칼, 심지어 펜과 총까지 있었다.
 한진호는 그중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그 안에는 무지갯빛 액체가 담겨 있었는데, 정말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걸 성수라 불렀다.
 “오늘은 너로 정했다.”
 사실 성수는 굉장히 높은 가치를 가지지만, 만들기는 쉬웠다.
 지금까지 루이나의 경매에 성수가 등장한 건 총 세 번이었다.
 그건 한진호가 만들어 판매한 게 아니라 유적을 통해 얻은 성수였다.
 당연히 판매한 사람도 다른 사람이었다.
 즉, 이번에 한진호가 이걸 갖다 판다면 네 번째 성수가 등장하는 셈이었다.
 한진호는 성수가 담긴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자리에 앉아 남은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커피를 마실 때마다 마력이 울컥울컥 밀려 들어왔다.
 한진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몸속을 휘젓는 마력을 차분히 안정시켰다.
 마력을 완벽하게 흡수한 한진호는 잠시 그렇게 앉은 채로 편안히 쉬었다.
 그의 눈에 손목에 찬 은색 팔찌가 보였다. 오늘 아주 잘 써먹은 팔찌이기도 했다.
 오늘 그 세 사람에게 한 것은, 대상을 종속체로 만드는 마법이었다.
 원래 사람을 종속한다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냥 정신을 지배해서 부하로 써먹고 하는 단순한 방식이 아니었기에 종속자가 죽거나 서로의 연결이 끊어지면 시전자에게 타격이 오게 되어 있었다.
 정말 재수없고 심한 경우 시전자가 그 타격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그걸 막아주는 것이 바로 한진호가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였다.
 은색이긴 했지만 실제 재질은 은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특수한 마력이 깃든 금속이었다.
 표면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은 이 팔찌에 깃든 특별한 힘을 유지해 주는 장치로, 흔히 마법진이라 부르는 문양이었다.
 즉, 이 팔찌는 마법이 깃든 마법물품이었다.
 한진호는 팔찌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이런 건 대체 언제쯤 만들 수 있을까?”
 아쉽게도 이건 한진호가 만든 물건이 아니었다. 특별한 유적에서 발굴한 유물이었다.
 이 팔찌는 마법의 반동을 받아주는 아티팩트다.
 예를 들어 마법사가 정신제압을 하다가 실패하면 그 반동으로 뇌가 터져 버릴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만든 아티팩트였다.
 한진호는 오늘 종속마법을 쓰면서 이 팔찌를 매개체로 썼다.
 만일 마법에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링크가 끊어져 이쪽에 타격이 오면 그걸 이 팔찌가 모조리 받아줄 것이다.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당연히 만들기도 어렵고 아주 귀한 아티팩트였다. 아직 한진호의 실력으로는 시도할 엄두도 못 낼 만큼 말이다.
 어쨌든 마법은 제대로 걸었다. 이제 원할 때마다 그들의 시야와 청각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 직접 말을 전할 수도 있게 되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알 수 있고 말이다.
 “그쪽은 그렇게 처리하면 되고······.”
 아마 당분간은 접근하는 자들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을 거기에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이제 상필이 아저씨랑 남은 계산을 할 차례네.”
 
 * * *
 
 한진호는 몇 가지 처리할 일을 마무리했다.
 예를 들어 오늘 종속자로 만든 이명훈을 비롯한 세 사람에게 돈을 보내준다거나 루이나의 경매에 내놓을 물품을 보내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밖에 최소 학점을 받기 위한 과제 몇 가지를 하고 나니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9시가 살짝 넘었다.
 한진호는 번화가를 걸어가며 전화를 걸었다.
 “생각보다 일찍 연락했죠?”
 -오! 진호구나! 그래, 어쩐 일이야? 벌써 시간이 난 거야?
 “지금 어디세요?”
 -나야 항상 작업실에 있지. 오늘 괜찮은 물건 몇 개 들어와서 좀 살펴보는 중이다. 왜? 오려고?
 “그럴 줄 알고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어요.”
 -오, 그래? 마침 잘됐네. 얼른 와라. 네 안목이 필요하다. 이거 내가 제대로 된 물건을 얻은 건지 확신이 안 드네. 가짜 같기도 하고······.
 “금방 가죠.”
 한진호가 씨익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한진호는 골동품점들이 쭉 늘어선 거리에 도착했다. 그중 태고당이란 간판이 달린 곳으로 쑥 들어갔다.
 불이 꺼져 있었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한진호는 안쪽으로 쭉 들어가 끝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정상필의 작업실이었다.
 “어? 정말 빨리 왔네.”
 정상필은 그렇게 말하며 한진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바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평소와 미묘하게 달라진 표정과 눈빛의 변화를 파악한 것이다. 굉장한 눈치였다.
 “일단 거기 앉아. 내가 물건 보여줄 테니까.”
 정상필의 말에 한진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왜 그랬어요?”
 “응? 무슨 말이냐?”
 한진호는 더 말하지 않고 그저 미소 지은 채 정상필을 지그시 쳐다보기만 했다.
 무언의 압박에도 정상필은 열심히 표정을 관리하며 다시 물었다.
 “왜 그러는지 말을 해 보라니까? 그렇게 보고만 있으면 뭘 원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제일 기획.”
 그 한마디에 정상필의 표정이 싹 굳었다.
 “삼영 건걸, 신영 시큐리티.”
 남은 두 회사의 이름까지 말하자 정상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놈들이 말해준 거야? 하여간 이놈들 상도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니까.”
 한진호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상도덕을 말하는가.
 “그래서, 뭘 원하는데? 참고로 돈은 없다. 이미 다 써버려서.”
 그렇게 말하며 한쪽 테이블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이번에 정상필이 구입했다는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한진호는 정상필의 뻔뻔한 태도에 그냥 담담히 말했다.
 “돈 없으면 목숨으로 갚으면 되죠. 그동안 정리가 있으니까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드릴게요.”
 사람 목숨을 마치 주머니 속 물건을 꺼내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모습에 정상필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설마 정말로 그럴 거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그냥 담담히 저런 말을 하니 인상을 쓰고 협박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웠다.
 “진호야, 우리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나 죽여서 뭐하게? 그냥 적절한 보상을 받는 게 낫지 않겠어? 괜히 경찰 들락거리고 그러면 너도 좋을 거 없잖아.”
 “경찰 안 들락거리게 처리할 수 있어요. 별걱정을 다 하시네.”
 정상필이 다급하지만 최대한 여유를 가장하며 말했다.
 “에이, 내가 인심 썼다. 새로 구입한 물건 다 가져가. 그리고 이것도 추가로 주마.”
 그가 품에서 얇은 금속판 하나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착 올려놨다.
 마치 종이처럼 얇았는데, 마치 금으로 만든 것처럼 번쩍였다.
 그 위에는 기묘하고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마법진 같은 건 아니었고, 미리 약속된 일종의 코드였다. 무언가를 증명하는 표가 분명했다.
 “초대장이야.”
 “무슨 초대장이요?”
 “특별한 경매에 참석할 수 있는 초대장. 내가 이걸 얻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면 아마 눈물을 줄줄 흘릴 거다.”
 정상필은 당당하려고 애썼지만 눈빛이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이 살짝살짝 묻어났다.
 “더 자세히.”
 한진호의 차가운 말에 정상필이 흠칫 놀랐다. 그러더니 황급히 말을 이었다.
 “세 달에 한 번씩 아주 특별한 경매가 열려. 장소는 매번 달라지는데 그 초대장에 시간과 장소가 적혀 있지. 그걸 확인한 다음, 초대장을 들고 가면 경매에 참석할 수 있어.”
 “특별한 경매가 뭔데요? 뭐······ 사람이라도 사고팔아요?”
 정상필이 기겁했다.
 “너 진짜 무섭게 왜 그래? 내가 그런 걸 할 리 없잖아! 난 그냥 예술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주는 사람일 뿐이야. 그 경매에서 유물을 팔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유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유물?”
 한진호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방식이 루이나랑 비슷하지 않은가. 하지만 분명히 루이나는 아니었다.
 “초대장에 있는 시간이랑 장소는 어떻게 읽는데요?”
 “앱이 있어. 앱을 이용해서 사진을 찍으면 돼. 이 앱이야.”
 정상필이 얼른 스마트폰을 꺼내 앱 하나를 실행시켰다. 그러자 카메라가 떴고, 그 카메라로 초대장을 찍자, 간단한 약도와 함께 시간이 나타났다.
 “자, 어때? 뭐······ 가격이 워낙 비싸서 물건을 살 수는 없겠지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충분한 공부와 경험이 되잖아?”
 한진호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옆 테이블에 놓인 물건들을 쳐다봤다.
 “그거 내가 암시장에서 비싸게 주고 산 유물들이야. 다 줄 테니까, 이번 일만 좀 눈감아 줘라.”
 테이블 위에는 다섯 개의 유물이 놓여 있었다. 제법 그럴듯하게 만든 유물들이었다.
 “그거 멕시코 어딘가에서 발견된 유적에서 꺼낸 물건이야. 아주 귀한 거라고.”
 정상필은 그 귀한 걸 싸게 후려쳐서 샀다는 자랑까지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한진호는 어이가 없었다. 그냥 척 보기에도 겉만 그럴듯하게 만든 가짜를 대체 왜 샀단 말인가.
 “난 이거 하나면 돼요.”
 한진호가 집어든 건 아기 손바닥만 한 동전이었다. 보통 동전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었지만 그 위에 새겨진 숫자나 문양이 제법 정교했다.
 그걸 본 정상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설마 저거 다 가짜야? 응? 그런 거야?”
 한진호는 초대장을 집으며 냉정하게 돌아섰다.
 “앞으로는 서로 연락하지 말죠.”
 골동품점을 나서는데 뒤쪽에서 정상필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그렇게 안심할 때가 아닐 텐데.’
 한진호는 굳이 정상필에게 경고해주지 않았다.
 최남희 회장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특별한 유물의 힘을 알고 있고, 그걸 어느 정도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정도 능력이 있는 자가 자신에게 사기 친 놈을 못 찾을 리 없었다.
 아마 조만간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고 정상필을 잡으러 올 것이다.
 굳이 한진호가 그 사실을 최남희 회장에게 흘릴 필요도 없었다. 그냥 내버려두면 조만간 확실히 그렇게 된다.
 골동품점에서 나온 한진호는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초대장에 있는 날짜는 일주일 후였다.
 “이거······ 좀 조사를 해봐야 할 거 같은데?”
 그냥 이 초대장만 믿고 참석할 수는 없었다. 한진호는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 비밀 경매
 
 세상에는 수많은 경매 회사가 존재한다. 그중에서 예술품이나 골동품을 취급하는 경매 회사도 무수히 많다.
 그리고 그렇게 양지에서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경매가 아닌, 음지에서 비밀리에 이뤄지는 경매도 존재한다.
 그중 아주 특별한 사람이나 가문들이 가장 주목하는 회사가 바로 루이나였다.
 루이나가 주목받는 이유는 그들이 취급하는 물품이 굉장히 특별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는 유적에서 발굴한 유물, 그중에서도 오묘한 힘이 깃든 유물만을 취급한다.
 루이나의 사장인 닉스는 이번 경매에 올릴 물품 목록을 확인했다.
 루이나의 경매는 세 달에 한 번 열리며, 경매 개최 15일 전에 회원들에게 정확한 시간과 장소, 그리고 경매 목록을 고지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슬슬 제대로 리스트를 확정해야 한다.
 “이번엔 물건이 제법 많군.”
 사실 경매를 할 때마다 물건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경매가 열릴 때에 비해 가치가 큰 폭으로 하락한 물건도 제법 많았다.
 예를 들면 활력의 포션 같은 것들 말이다.
 활력의 포션은 말 그대로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물약이었다. 복용하면 체력이 급격히 올라간다. 그래서 돈 많은 늙은이들이 정력제로 이용하곤 했다.
 처음 나왔을 때는 안정성 때문에 복용을 꺼렸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며 많이 찾는 물건 중 하나가 되었다. 아무리 복용해도 부작용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처음에는 물량이 없어 굉장한 고가에 거래되었지만 지금은 워낙 많은 양이 쏟아져 나오기에 루이나의 다른 경매 물품에 비하면 공짜가 다름없는 가격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제 활력의 포션은······ 받지 말아야 하나?”
 너무 양이 많아서 루이나의 가치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생겼다.
 슬슬 쳐내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그렇게 한창 리스트를 정리하고 있을 때, 누군가 노크를 했다.
 똑똑.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도 노크를 했다는 건, 그런 명령을 무시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 있다는 뜻이었다.
 닉스는 테이블 옆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열린 문 앞에는 그의 비서가 서 있었다. 커다란 은색 상자를 들고서.
 그걸 본 닉스의 눈에서 광채가 일어났다.
 “드디어 왔군!”
 정말 기다리던 물건이 왔다. 저 은색 상자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굉장한 물건이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은색 상자를 보내는 자의 정체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A라는 별칭으로 부를 뿐이었다.
 저 상자가 한국에서 온다는 것 정도가 루이나에서 파악한 전부였다.
 사실 그보다 더 자세한 정보는 추적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괜한 짓을 벌여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생각은 없었으니까.
 “이쪽으로, 이쪽에 조심해서 내려놓게.”
 닉스는 흥분한 표정으로 서둘렀다. 비서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빙긋 웃으며 닉스가 말한 테이블 위에 은색 상자를 올려놓았다.
 처음 이 상자를 받았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무슨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서로 만족할 만한 안전한 거래를 정착시켰다.
 닉스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환희로 물들었다.
 “오 마이 갓!”
 그 안에는 무지갯빛 액체가 담긴 아름다운 모양의 병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병 옆에는 계좌가 적인 쪽지가 함께 있었고.
 “성수라니!”
 닉스는 성수가 담긴 병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리고 아주 소중히 가져가 테이블 위에 미리 준비해둔 상자에 담았다.
 자칫 충격에 병이 깨지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상자였다.
 그곳에 성수를 놓은 닉스는 얼른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리고 목록 마지막에 힘차게 성수라고 썼다.
 다른 목록은 전부 프린터로 인쇄한 건데, 성수만 닉스의 필체로 쓴 것이다.
 그것이 성수라는 단어를 굉장히 돋보이게 만들었다.
 성수는 흔히 만병통치약으로 통한다. 그 어떤 병이라도 단숨에 낫게 해주는 그야말로 마법의 약이었다.
 지금까지 세 번 경매에 나왔고, 매번 등장할 때마다 기록을 갱신했다.
 지난번에는 9500만 달러를 기록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1억 달러를 넘어서지 않을까?
 닉스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상자 안에 아직 남아 있는 쪽지를 집었다.
 “이번엔 파나마 쪽이로군.”
 경매 낙찰 대금을 입금할 계좌였다. 매번 다른 계좌였고, 언제나 조세회피처의 계좌를 이용했다.
 어차피 루이나는 철저히 판매자의 신분을 보장하는 회사였다. 추적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루이나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힘 있는 자들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루이나는 최대한 고객의 비밀을 지키지만, 루이나의 역량을 넘어서는 자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이번 경매는 정말 기대되는군.”
 닉스는 이번 경매일이 정말로 기다려졌다.
 
 * * *
 
 한진호는 오늘도 강의가 있는 날인지라 학교에 있었다.
 한데 오늘따라 뭔가 계속 뒤통수를 간질이는 느낌이 들었다.
 꼭 누군가 뚫어져라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주변을 확인했다. 물론 대놓고 하진 않고 은근슬쩍 확인했다. 그래도 봐야 할 건 전부 봤다.
 ‘딱히 이상한 점은 없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진호는 손가락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은은한 마력의 파동이 한진호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확 퍼져 나갔다.
 ‘역시나.’
 마력의 파동에 무언가가 반응했다. 마력과 관계된 힘이 없다면 나오지 않았을 반응이었다.
 반응이 일어난 쪽을 슬쩍 확인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사람 하나가 보였다.
 굉장히 늘씬한 여자였다. 레깅스에 래쉬가드를 입고 있어 누가 보면 운동이라도 하러 나온 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긴 학교였다. 저런 복장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기에 굉장히 튀는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단 말이지.’
 여자는 지금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약간의 마력반응과 함께 여자의 모습이 허공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저 여자가 뭘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뭘 하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날 감시하고 있는데? 뭐지?’
 루이나 쪽에서 온 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최남희 회장 쪽도 아닐 것이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게다가 그냥 감시만 하는 시선이 아니었다. 저건 관찰이었다.
 ‘그렇다는 건······ 내 뒤를 캐고 있다는 뜻인데?’
 보아하니 특별한 능력을 가졌거나, 특별한 능력이 깃든 장비를 가진 여자였다.
 한진호의 예상으로는 장비보다는 능력 쪽인 듯했다.
 그리고 하는 일을 보니 정보 계통에 몸담고 있음이 분명했고.
 안 그래도 필요한 정보가 있지 않았던가. 오늘쯤 적당한 업체 몇 군데 선정해서 알아볼 참이었는데, 저 여자를 이용하면 아주 편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을 듯했다.
 “일단은 강의부터 듣고.”
 한진호는 강의실이 있는 건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수업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온 신경을 뒤를 쫓는 여자 쪽에 집중했다.
 
 * * *
 
 채민영은 긴장한 눈으로 멀어져가는 한진호의 등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었다.
 만일 조금 전 있었던 이상현상이 아니었다면 바짝 붙어서 따라갔을 것이다.
 ‘대체 뭐였지? 그건?’
 한진호가 뭔가를 했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아니, 채민영이 보기에 한진호가 딱히 뭔가를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자신의 은신이 한순간 확 풀려버렸다. 그런데 중요한 건 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한진호가 건물로 들어간 다음에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다행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은밀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여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갔다. 그녀의 은신술은 이제 제법 경지에 올라 그렇게 대놓고 벽을 타는데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강의실 창문턱에 엉덩이를 살짝 걸쳐 앉은 채민영은 창을 통해 한진호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공부에는 아예 관심이 없네.’
 이런 사소한 것까지 모두 알아오라는 의뢰였다.
 처음에는 의뢰 내용이 너무 사소하고 찌질해서 받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유명호 회장의 의뢰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의뢰금도 상상 이상으로 많았고.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의뢰를 받아들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암초를 만난 것이다.
 ‘막상 한진호는 별거 없는데······.’
 그렇게 지켜보다 보니 강의가 끝났다. 그리고 한진호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채민영은 모습을 감춘 채 한진호 뒤를 따랐다. 한데 그렇게 따라가다 보니 왠지 주변에 인적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여긴······ 왜 가는 거지?’
 채민영이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뭔가 하나 괜찮은 걸 건지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 한진호는 학교 뒤에 있는 작은 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캠퍼스커플들이 일탈하는 장소 중 하나였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이렇게 깊은 곳으로 들어가지는 않는다.
 더구나 이렇게 이른 시간에는 더더욱 사람이 없는 장소였다.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한진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옆에 있는 나무를 이용해 몸을 가렸다.
 채민영은 순간 등줄기를 훑고 지나가는 소름에 황급히 몸을 날렸다.
 방금 한진호가 몸을 감춘 그 나무 뒤쪽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 목 뒤가 뜨끔했다.
 “헉!”
 채민영은 온몸이 마비되는 걸 느끼며 인상을 썼다.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그녀는 누군가 자신의 양쪽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는 것을 보고는 진저리를 쳤다. 앞으로 무슨 꼴을 당할지 생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그녀가 걱정하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한진호는 그녀의 몸을 질질 끌고 근처 나무에 등을 기대게 앉혔다.
 “말은 할 수 있을 겁니다. 몸은 못 움직이겠지만.”
 “이게 무슨 짓이죠?”
 “내 뒤를 쫓던 사람은 왜 다 그 얘기를 먼저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럼 역으로 묻죠. 이게 무슨 짓이죠?”
 채민영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목표에게 뒤를 잡힌 순간 끝난 것이다.
 그녀는 살짝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뢰자는 말해줄 수 없어요.”
 “죽어도?”
 “죽어도.”
 이 바닥에서는 이렇게 되면 끝이다. 만일 의뢰자를 밝히면 여기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결국은 죽는다. 아니, 차라리 여기서 깔끔하게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한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여자한테 그걸 알아낼 생각은 없었다.
 그가 원한 건 이 여자의 실력이었다.
 “이름이 뭡니까?”
 “채민영이요.”
 “소속은?”
 “전 혼자 일해요. 이 바닥에 있다 보니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서.”
 “좋네요.”
 채민영이 의아한 눈으로 한진호를 바라봤다.
 “제 뒤를 캐는 의뢰는 포기하시죠. 목숨값으로 그 정도면 괜찮은 거 같은데.”
 채민영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다. 여기서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나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한테 잡히기 전까지 알아낸 건 전부 보고해도 됩니다.”
 “어차피 의뢰 포기한 순간 위약금 물어야 하는데 애써 알아낸 정보 알려줄 생각은 없어요.”
 생각해보면 그게 보통 정보인가. 목숨 걸고 알아낸 정보인데.
 물론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한진호가 그 말에 빙긋 웃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해볼까요?”
 “예? 일이요?”
 “의뢰 포기하고 놀 거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내 의뢰를 받아요. 콜?”
 채민영은 멍하니 한진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대답했다.
 “콜.”
 
 * * *
 
 한진호는 명품정장을 입고 집을 나섰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눈이 휙 돌아갈 정도로 비싼 옷과 악세사리를 집에 준비해뒀다.
 아마 정상필에게 명품을 보는 안목이 있었다면 추사의 위작을 훔쳐갈 때, 적어도 지금 찬 시계는 함께 가져갔을 것이다.
 “그나저나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최남희 회장이 아직도 모를 리가 없는데. 채민영 실장한테 물어볼까?”
 한진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다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버렸다.
 지금은 정상필 따위에게 낭비할 정신이 없었다.
 한진호는 품에 넣은 초대장을 다시 확인하고, 주머니에 든 작은 보석함을 확인했다.
 그 보석함 안에는 얼마 전 정상필에게서 대가로 가져온 동전이 들어 있었다.
 오늘 한진호가 할 일은 경매에 나온 유물 중에서 쓸 만한 물건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동전을 나중에 경매에 올릴 수 있는 루트를 개발하는 것이 두 번째 목표였다.
 “자, 그럼 가볼까?”
 한진호는 힘차게 집을 나섰다.
 그리고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던 차를 타고 가기 위해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지하 주차장에는 한진호의 차가 세 대나 있었다. 한진호는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고가의 스포츠카를 선택했다.
 오늘은 좀 눈에 띄어야 한다. 어차피 차량은 법인 소유였고, 경매장에 입장하기 전에 가면을 쓴다.
 그러니 정체가 드러날 염려는 거의 없었다.
 부아아앙!
 굉음을 토하며 오렌지색 스포츠카가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한진호의 차가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디자인도 그렇고 색도 그렇고 어딜 가나 튈 수밖에 없는 차였다.
 게다가 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헉 소리가 날 정도로 비싼 차였으니 더더욱 눈에 띄었다.
 한진호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나름 즐기려 애쓰면서 도로를 쭉쭉 질주했다.
 목적지는 서울 도심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빌딩이었다.
 그 빌딩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선 한진호는 초대장에 기록된 숫자와 화살표들을 떠올렸다.
 그건 주차장 내에서 가야 할 방향을 표시한 것이었다.
 숫자는 주차장 기둥에 적힌 번호, 그리고 화살표는 그 번호를 기준으로 가야 할 방향이었다.
 정확히 화살표를 따라 가다보니 널찍한 주차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 주차된 차들을 본 한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네.”
 그곳의 차들은 하나같이 한진호의 차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그보다 더 비싼 것들이었다.
 오늘 경매에 참석하는 자들의 차라는 뜻이었다.
 한진호는 조수석에 놓아둔 가면을 착용했다. 도깨비 가면이었다.
 그냥 평범한 가면은 아니었다. 한진호가 자신의 능력을 이용해서 만든 특수한 가면이었다.
 얼굴이 닿는 가면 안쪽에는 무수한 문양이 촘촘하게 그려져 있었다.
 한진호는 차에서 내린 다음 문을 닫았다. 그러자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 세 명이 빠르게 다가왔다.
 품에서 초대장을 꺼내 보여주자 그들이 정중하게 말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초대장은 잘 보관해 주십시오.”
 한진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초대장을 다시 품에 넣었다. 그리고 경호원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주차장 끝에 있는 철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커다란 열쇠를 꺼내 철문을 열었다.
 철컹.
 철문이 열리자 제법 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그 복도 끝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경비원들은 그 엘리베이터로 한진호를 안내했다.
 한진호가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경호원 중 두 명이 함께 탔다.
 ‘철저하네.’
 만일 엘리베이터가 지하로 쭉 이어져 있었다면 좀 더 감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갔다.
 멈추는 층은 딱 두 개였는데, 경호원이 누른 층은 위쪽 버튼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쭉쭉 위로 올라갔다. 아마 최상층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띵.
 경쾌한 벨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내리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안내데스크가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단정한 제복을 입은 아름다운 여직원이 그곳에 서서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두 경호원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한진호는 안내데스크의 여직원에게 다가갔다.
 “초대장을 보여주십시오.”
 품에서 초대장을 내밀자, 여직원이 바코드스캐너처럼 생긴 장비를 꺼냈다.
 지이잉.
 초대장을 스캔하자, 장비에서 경쾌한 소리가 났다.
 띠리링.
 “이쪽 문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여직원이 초대장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한진호는 여직원 왼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제법 많은 사람이 여기저기 자유롭게 서 있었다.
 다들 개성 있는 가면을 쓰고 있어서 마치 가면무도회 같았다.
 ‘루이나의 경매장도 이런 식인가?’
 홀 끝에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어디에 서 있건 무대 위가 잘 보일 정도로 높았다.
 한진호는 일단 홀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가면을 쓴 사람들도 세심히 확인했다.
 체형이나 분위기만으로도 아는 사람을 골라낼 수 있었다.
 ‘역시 내가 아는 돈 많은 사람은 다 왔군.’
 정상필을 통해 감정 의뢰를 한 사람은 최남희 회장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급의 부자들이 제법 많이 의뢰를 했다.
 정상필의 인맥과 한진호의 실력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때 봤던 그 부자들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
 홀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가면을 쓴 건 아니었다. 곳곳에 가면을 쓰지 않은 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대부분 경호원이었고, 일부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직원들이었다.
 한진호는 좀 더 사람이 많은 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 유심히 들어봤다.
 다들 유물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늘 무슨 유물이 나온다더라, 정체를 모르는 유물도 있다더라, 그 유물은 다음으로 판매가 미뤄졌다더라 하는 얘기들이 주였다.
 몇몇은 서로 잘 아는 눈치였다. 하지만 서로 모른 척 대화를 이어갔다.
 아마 사석에서는 따로 만나서 그때 어땠지 하고 얘기할지도 모른다.
 “자,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어느새 무대 위에 키 크고 비율이 훌륭한 남자가 올라가 있었다. 그 역시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총 스무 점의 유물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생각보다 수가 적지요? 하지만 충분히 만족하실 수 있을 거라 자신합니다. 일단 유물부터 확인하시지요.”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물을 든 사람이 한 명씩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푹신하고 넓적한 쿠션이 놓인 쟁반에 유물을 받치고 있었다.
 정해진 길이 있는지 홀 안을 크게 S자 모양으로 돌아다녔다.
 한진호는 바닥을 확인했다. 역시나 바닥에 저들이 이동할 경로를 굵은 선으로 표시해 뒀다.
 그 선에서 살짝 벗어난 곳에 서 있으면 저 유물을 모두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진호는 유물이 자신의 앞으로 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찬찬히 살필 시간이 없으니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마력의 감각을 날카롭게 벼리고, 언제든 마력을 꺼내 쓸 수 있도록 체내의 마력을 활성화 시켰다.
 유물의 행렬로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이내 한진호 앞으로 유물이 차례대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유물을 든 사람들은 최대한 걸음을 천천히 했다. 손님들이 물건을 자세히 살필 시간을 주는 것이다.
 물론 자체적으로 이미 감정을 마친 것들이었다. 그러니 지금 행렬은 그저 이런 유물이 있다고 자랑하는 순서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의미일지 몰라도 한진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한진호는 유물 하나하나를 세심히 살폈다.
 유물에 새겨진 마법진과 그곳에 마력을 흘렸을 때의 반응과 그 순간 이어지는 마력의 통로까지 모조리 파악했다.
 머리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아났다. 뇌를 너무 혹사시켜서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하지만 한진호는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자신만의 감정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마력 한 줄기를 뇌로 보냈다.
 뇌가 뜨거워지는 경험을 처음 하는 거라면 놀라서 멈췄겠지만, 이미 몇 번이나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뇌를 활용하는 능력이 큰 폭으로 올라갔다. 물론 모든 것이 마력 덕분이었다.
 한 줄기 마력이 한진호의 뇌를 씻어냈다. 머리가 확 맑아지면서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여전히 뇌를 과도하게 쓰고 있었기에 다시 뜨거워졌다.
 뜨거워지면 마력으로 식히고 다시 뜨거워지면 또 마력으로 식히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스무 개의 유물이 모두 지나갔다. 그리고 한진호는 그 스무 개 유물의 정보를 뇌리에 차곡차곡 저장할 수 있었다.
 “후우. 쉽지 않네.”
 연달아 스무 개의 유물을 이렇게 빠르게 감정한 건 한진호도 처음 해보는 일이었다.
 덕분에 한계를 몇 번이나 넘나들었다.
 아마 그것은 앞으로 한진호가 발전하는 데 아주 중요한 양분이 되어줄 것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유물을 든 직원들이 퇴장하고 나자 사회자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쉽게 좌중의 주목을 이끌어냈다.
 “자, 다들 바쁘신 분들이니 최대한 서둘러 보겠습니다. 첫 번째 상품입니다!”
 첫 번째 유물을 든 직원이 무대로 올라왔다. 그리고 무대에 설치해 놓은 진열장에 그것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천장에서 조명이 내려와 유물을 비췄다.
 그것은 핏빛 단검이었다.
 “뱀파이어의 손길을 소개합니다!”
 조명을 받은 단검은 왠지 스스로 핏빛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굉장히 불길한 느낌이 드는 단검이었다.
 “보기에도 굉장해 보이죠? 이건 아주 특별한 칼입니다. 대상의 피를 빨아들여 힘을 건네주죠.”
 사회자는 씨익 웃으며 좌중을 둘러봤다.
 “자세한 내용은 팜플릿에 나와 있습니다. 이걸로 범죄를 저지르는 분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
 좌중에 가벼운 웃음이 흘렀다.
 “자, 일단 5천부터 시작합니다. 5천 없으십니까!”
 그러자 누군가 손을 들었다.
 “5천 나왔습니다. 5100 없으십니까! 네, 5100 나왔습니다!”
 그런 식으로 경매가 이어졌다. 뱀파이어의 손길은 최종적으로 1억5천에 낙찰되었다.
 한진호는 돌아다니는 직원에게 팜플릿 하나를 받아 내용을 확인해봤다.
 오늘 경매에 올라온 물품에 대한 감정 내용이 자세히 쓰여 있었다.
 한진호는 그걸 보다가 눈을 빛냈다.
 ‘이건 좀 다른데?’
 오늘 올라온 경매 물품 중 세 개가 실제 한진호가 감정한 것과 달랐다.
 유물에 기본적으로 내장된 기능을 저들이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이거 재미있는데?’
 사실 이런 식의 경매에 참석한 건 처음이었기에 저들의 감정이 이렇게 심하게 틀리는 경우가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어쩌면 그게 당연한가?’
 유물감정을 제대로 하려면 마력을 다뤄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어쩌면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을지 모른다.
 마력을 다룬다는 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그러려면 제대로 된 마법서를 찾아 공부하고 익혀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마법서는 유적을 통해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마력을 다룰 수 있어야 하고 마법서를 구해야 하며, 그 마법서를 제대로 해석해서 정확하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그런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을까?’
 한진호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경매를 유심히 지켜봤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첫 번째 유물이 나왔다.
 
 * * *
 
 “열기가 정말 뜨겁군요. 그 열기를 잠시 식히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직원이 다음 상품을 들고 무대로 올라왔다.
 진열장에 놓인 이번 유물은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수정구였다.
 “빛의 구슬을 소개합니다!”
 팸플릿의 설명은 그 어떤 전기장치나 다른 장비 없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수정구라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진호는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시동어는 간단합니다. 에스트라냐.”
 수정구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보다시피 무드를 살리기에 아주 적당한 밝기입니다.”
 즉, 별 쓸모가 없다는 뜻이었다. 특별한 유물이라는 가치 외에는 전혀 없는 그저 수집품에 불과한 물건이었다.
 “자, 가볍게 천으로 시작해 볼까요?”
 한진호는 일단 손을 들었다. 운 좋으면 천만 원에 저 수정구를 살 수 있을 테니까.
 “오, 저기 젊은 신사분이 참가하셨습니다. 천백 없습니까?”
 한진호와 좀 떨어진 곳에 있던 여자가 손을 들었다.
 얼굴은 여우가면으로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았다.
 “오! 이번엔 젊은 숙녀분이시군요.”
 한진호는 호가가 올라갈 때마다 손을 들었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흥미로운 눈으로 한진호와 여우가면을 번갈아 바라봤다.
 “설마 이 수정구의 가격이 이렇게 올라갈 줄은 몰랐군요. 신사분, 2천 하시겠습니까?”
 한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었다.
 “오! 좋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호가를 2백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2천2백으로 갈까요?”
 여자가 결국 포기했다. 사실 별로 살 생각은 없었고 그야말로 여흥으로 장난삼아 참석한 것이다.
 한진호는 여자의 정체를 바로 꿰뚫었다.
 ‘직원이로군.’
 가격을 적당한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 포진한 경매회사 측 직원이 분명했다.
 그녀는 한진호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미련 없이 손을 털었다.
 어쨌든 2천만 원에 빛이 나는 수정구슬을 얻어냈다.
 가면에 가려진 한진호의 표정이 더없이 환해졌다.
 ‘이 귀한 걸 고작 2천에 얻다니.’
 다른 사람에게는 그저 빛나는 수정구일지 모르지만 한진호에게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이 수정구는 일종의 저장장치였다. 글이나 영상, 그림을 보관하는 마법도구였다.
 그리고 마법서를 보관하는 방식이 바로 이 저장수정구였다. 아마 이 수정구에는 높은 확률로 마법서가 들어있을 것이다.
 한진호는 갑자기 유물 경매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높아졌다.
 이런 눈먼 마법서가 얼마나 세상에 많겠는가. 그걸 모조리 찾아낼 수 있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한진호는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계속해서 경매를 지켜봤다.
 
 * * *
 
 경매가 모두 끝났다. 한진호는 자신이 원했던 세 개의 유물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받으면 끝난다.
 돈 지불은 조세회피처의 계좌를 통해 이체할 계획이었다.
 그 다음에 경매에 물건을 올릴 수 있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비단 오늘 가져온 동전뿐 아니라 그동안 한진호가 만들었던 물건 중에서 루이나에 주기에는 좀 떨어지는 것들을 처분하기 딱 좋았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기념 삼아 보관하고 있었는데 슬슬 장식장에 놓을 자리가 부족해지고 있었다.
 이곳 경매장에서 판매된 물건의 평균가는 5억 정도였다.
 제일 싼 게 한진호가 산 빛나는 수정구였고, 가장 비싼 건 아쿠아 펜던트로 14억이었다.
 대부분의 유물은 3억에서 6억 사이의 가격대에 팔렸다.
 이 경매의 수준이 딱 그 정도라는 뜻이다.
 보통 생존에 관계된 유물이 비쌌다. 즉, 불을 일으키는 유물보다는 치유나 건강에 관계된 유물이 수십 배나 더 높은 가격에 팔린다.
 특히나 이런 유물을 사는 사람은 돈이 썩어날 정도로 많은 부자들이다. 그들이 자신의 수명과 건강에 막대한 돈을 쓰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유물의 가치는 희소성과 능력으로 정해지는 법인데, 이곳에서 판매하는 유물은 그 두 가지 모두 모자랐다.
 그리고 한진호가 슬슬 처분하려는 물건들이 딱 그 정도였다.
 한진호가 그걸 여기서 처분하려는 이유는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돈은 지금도 엄청나게 많다. 오히려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어 루이나에 갖다 파는 것이 돈은 훨씬 많이 번다.
 유채인이 차고 있던 목걸이가 38억에 팔렸는데, 그 목걸이가 가진 능력은 고작 체온을 유지해주고 아주 약간의 치유력이 있는 정도였다.
 치유력도 그저 칼에 살짝 베인 상처 정도나 회복할 수 있을 정도로 약했기에 쓸모 있는 능력은 아니었다.
 물론 생존으로 가면 얘기가 좀 달라지긴 한다.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체온을 유지해주는 능력은 굉장한 위력을 발휘할 테니까.
 아무튼 그런 식으로 그동안 비쌀 만한 물건을 루이나에 갖다 팔았다. 그리고 이번에 드디어 성수를 경매물품으로 내놨다.
 모르긴 해도 어마어마한 값에 팔릴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수는 여분의 생명 하나를 더 가진 셈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실제로 이 경매장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한진호에게 큰 의미가 없었다.
 한진호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경매에 나오는 다른 상품들이었다.
 오늘 경매에 와서 보고 확신했다. 이 세상에는 정말 눈먼 유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거라고.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비밀 경매가 비단 여기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물론 오늘 열린 경매가 우리나라에서는 최고 수준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한진호의 목적을 생각하면 이런 곳보다는 좀 더 어설프고 위험한 곳에서 대박을 건질 확률이 컸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경매 물품을 인도하는 곳에 도착했다.
 무대 뒤쪽에 마련된 제법 잘 꾸며진 방이었는데, 물건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서로 마주치지 않도록 신경을 쓴 티가 역력했다.
 한진호는 불투명한 유리로 막힌 곳으로 들어갔다.
 아까의 그 사회자가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 테이블 위에 한진호가 낙찰 받은 물건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다.
 사실 한진호가 이번 경매에서 쓴 돈은 1억 정도였다. 다른 고객에 비하면 그야말로 미미한 수준. 하지만 사회자는 정말 정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대금 지급방식을 골라 주십시오. 현금, 수표, 이체, 카드까지 뭐든 가능합니다. 혹시 그밖에 다른 방식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한진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카드까지 된다고 할 줄은 몰랐다.
 “계좌 주시면 이체하죠.”
 이체가 가장 편했다. 조세회피처의 계좌를 이용하면 되니까. 이체도 편했고, 또 정체를 드러낼 염려도 없었으니까.
 사회자가 메모지 한 장을 테이블 위에 놓고 슥 밀었다.
 한진호는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지에 적힌 계좌로 돈을 이체했다.
 그걸 보며 사회자가 눈을 빛냈다.
 “이체 확인되었습니다. 이제 물건을 갖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혹시 경호 서비스를 원하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한진호가 물건을 챙기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사회자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대단히 비싸고 귀한 물건도 아닌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강도짓을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하니 말이다.
 아마 여기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물건을 샀는지조차 알 수 없을 것이다.
 이 건물에서 나가는 모든 사람을 덮칠 수는 없을 것 아닌가.
 “그럼 살펴 가십시오.”
 사회자가 정중히 인사했다. 하지만 한진호는 그냥 갈 생각이 없었다.
 “물건을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진호의 질문에 사회자가 눈을 반짝였다.
 “호오. 팔고 싶은 물건이 있으신 겁니까?”
 한진호는 주머니에서 동전이 든 작은 상자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 동전을 유심히 살펴보던 사회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 안목으로는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이건 정확히 어떤 물건입니까?”
 “방패입니다.”
 “예?”
 사회자가 황당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한진호를 바라봤다.
 방패라니. 지금 이 작은 동전을 보고 한 말인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한진호는 동전을 집었다. 그리고 시동어를 읊었다.
 “에스트라냐.”
 지잉!
 동전이 한 차례 진동하더니, 한진호의 정면에 우윳빛 막을 만들어냈다.
 지름 50센티미터의 원형 막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방패였다.
 “시험삼아 총이라도 쏴보시죠.”
 “예? 그래도 되겠습니까?”
 사회자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한진호의 말에 화들짝 놀라더니 그렇게 물었다.
 한진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회자는 품에서 총을 꺼냈다.
 확실히 보통 조직이 아니었다. 사회자가 총까지 갖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어쩌면 밖에 있는 경호원들도 모두 총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한진호는 그걸 확인해 볼까 하다가 말았다. 그걸 알아서 뭐 하겠는가. 그저 이들이 비밀 경매장을 운영하고 아주 위험한 자들이라는 사실만 알면 그만이지.
 “자, 쏩니다.”
 푸슝.
 소음기가 달려 있었기에 소리는 별로 나지 않았다. 하지만 총알은 확실히 우윳빛 장막에 맞았다.
 팅!
 우윳빛 막으로 이루어진 방패는 총에 맞았는데도 끄떡없었다. 오히려 튕겨난 총알이 천장에 푹 박혔다.
 그걸 본 사회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어떻습니까? 경매에 올릴 만한 물건입니까?”
 “물론입니다! 이 물건, 꼭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반드시 최고의 가치를 매겨드리겠습니다!”
 “여기 자세한 감정 내역서가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한진호가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회자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나갔다가 누군가를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였는데, 눈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다.
 “저희 측이 보유한 최고의 감정사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회자가 데려온 남자는 신중한 눈으로 동전을 이리저리 감정했다.
 그의 손에는 바코드 스캐너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 들려 있었는데, 그걸 통해 동전 곳곳을 살폈다.
 그리고 동전의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모든 작업이 끝나자 사회자가 정중히 말했다.
 “아무래도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저희 측에서도 나름의 감정이 필요했습니다.”
 사회자가 초대장 하나를 내밀었다. 기존의 초대장과는 달리 백금으로 만들어진 초대장이었다.
 당연히 복잡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VIP들을 위한 특별 초대장입니다. 앞으로 굳이 초대장을 새로 발급받으실 필요 없이 언제든 오실 수 있습니다. 경매 참여는 물론이고 혹시 판매할 물건이 있을 경우 언제든 이곳에 방문하셔서 일 처리를 하실 수 있습니다.”
 “좋군요.”
 한진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백금 초대장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 동전을 다시 챙겼다.
 이곳에 와서 하고자 한 목표는 모두 이뤘다.
 “그럼 살펴 가시길.”
 사회자가 아까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중히 인사했다.
 한진호는 가볍게 고개를 살짝 숙여 마주 인사하고는 경매 물품을 품에 안고 그곳을 나섰다.
 ‘채민영 실장한테 추가 의뢰를 해야겠어.’
 오늘 비밀 경매에 한번 참석해 보고 나니, 다른 경매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
 당분간은 한국에서 열리는 비밀 경매에 모조리 참석할 작정이었다.
 전문가와 인맥이 생기니 이럴 때 정말 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돌아가서 이 물건들부터 제대로 확인해야겠어.’
 한진호는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밖으로 나간 한진호의 손에는 어느새 아무것도 없었다.
 
 
 # 빛나는 수정구
 
 부아아앙!
 오렌지색 스포츠카가 도로를 질주했다.
 한진호는 빨리 수정구를 확인하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다.
 과연 거기에는 뭐가 들어있을까?
 새로운 마법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그동안 한진호가 구한 수정구의 수는 모두 17개였는데, 그 17개 모두 마법과 관계된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오늘 얻은 물건은 전부 간이 아공간에 넣어 두었다.
 오른손 검지에 낀 반지가 바로 아공간의 반지였다.
 반지가 열 수 있는 아공간은 이 세상과는 완벽하게 격리된 공간에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일종의 보관함이었다.
 물론 공간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커다란 여행용 캐리어 대여섯 개 정도는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한진호는 아공간에 다양한 물건을 보관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생존에 필요한 용품과 몇 가지 특별한 무기를 비롯해 몇 가지 편의장비나 돈, 귀금속들을 보관했다.
 물론 임시 보관일 뿐이었다.
 한진호는 실력을 좀 더 키워서 정말 제대로 된 아공간을 만들 계획이었다.
 그 아공간은 장비에 새기지 않고 몸에 직접 새길 작정이었다.
 약간의 위험과 고통만 감수하면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보통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어쨌든 그날은 그리 멀지 않은 듯했다.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마법을 갈구하고 실력을 키워나간다면 말이다.
 한창 운전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확인해보니 채민영이었다.
 “여보세요.”
 -첫 번째 조치는 끝났어요.
 “오, 빠르네요. 역시 최고의 전문가다운데요?”
 -일반적인 전문가들은 이제 뒤를 캐기 어려울 거예요.
 한진호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채민영에게 의뢰한 내용은 자신의 정보를 감추는 일이었다.
 요즘 자꾸 뒤를 캐는 자들이 나와서 그들로부터 정보를 숨기는 작업을 채민영에게 의뢰했다.
 그리고 채민영은 그걸 아주 훌륭하게 완수했다.
 -이제 저 같은 전문가로부터 정보를 감추는 작업에 들어갈 거예요. 참고로 이건 시간이 좀 걸려요. 그리고 돈도 많이 들고.
 “그거 기대되는군요. 사실 채 실장님이 저에 대해 조사한 거 보여주셨을 때 좀 놀랐거든요.”
 -처음에는 알아내지도 못했는데요, 뭐.
 “그래도 결국은 다 알아내셨을 거 아닙니까.”
 채민영은 놀랍게도 한진호가 가진 조세회피처의 페이퍼 컴퍼니들과 그곳에 보관된 돈의 액수와 출처를 알아냈다.
 물론 전부 알아낸 건 아니고 그중 네 개를 알아냈을 뿐이지만 한진호로서는 깜짝 놀랄 만했다.
 한진호와의 계약 당시에는 거기까지는 조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후, 한진호가 그녀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과정에서 그게 드러난 것이다.
 그냥 단순히 계좌를 만들고 이용한 게 아니라, 한진호가 가진 특별한 마법의 힘까지 섞어서 연결 고리를 관리했기에 아무에게도 들킬 일이 없다고 여겼기에 더 충격적이었다.
 이제 채민영은 전문가도 추적할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고 확실하게 한진호의 정보를 감출 것이다.
 -다른 전문가들이 나선 정황을 찾아냈어요. 그러니 조심하셔야 할 거예요.
 “그래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뢰인인데 당연하죠. 그럼 나중에 또 연락할게요.
 “아, 잠시만요.”
 -왜 그러시죠?
 “추가로 간단한 의뢰를 부탁하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간단한 거라면 괜찮아요.
 “혹시 비밀 경매에 대해 아십니까?”
 -당연하죠.
 한진호는 그 대답을 듣고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그 뒤로 채민영과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기분 좋은 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 * *
 
 유명호 회장은 편안한 소파에 앉아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바라봤다.
 이차범. 정보 쪽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자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잔혹한 자로 더 유명했다.
 사실 그 소문 때문에 유명호 회장도 그를 자주 쓰지 않았다. 일이 있으면 대부분 채민영에게 의뢰했다.
 한데 이번 일은 채민영이 위약금까지 물고 의뢰를 포기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채민영 실장에게 의뢰한 일이었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괜찮겠나? 자네의 자존심을 건드릴 생각은 없네.”
 “괜찮습니다. 이렇게 미리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아주 충분합니다. 오히려 이런 기회를 주셨으니 제가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럼 다행이군.”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채민영 실장이 남긴 정보는 없습니까?”
 “위약금까지 물었는데 그걸 주겠는가?”
 “그냥 확인만 한 겁니다. 바로 조사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예. 그럼.”
 이차범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가자, 유명호 회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튼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있어야지.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야.”
 유명호 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한 의뢰는 유채인 때문이었다. 유채인이 관심을 둔 남자가 있다고 해서 가볍게 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원래는 그랬다.
 웬만하면 둘이 사귀든 말든 신경 안 쓰려고 했다. 상대가 개차반이거나 사이코패스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래서 그룹 정보실에 지시를 내렸다. 한 번 뭐 하는 놈인지 알아나 보라고.
 한데 이게 웬걸? 불법적인 놈들과 엮여서 골동품 감정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것에 비해서는 뒤가 정말 깨끗했다.
 원래 보통 사람이라면 그쯤이면 됐다고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유명호 회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뭔가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한마디로 감이 안 좋았다.
 그래서 다시 제대로 조사해 보겠다고 채민영에게 의뢰를 맡긴 것이다.
 선입견을 없애기 위해 그룹 정보실을 움직였다는 얘기는 해주지 않았고 말이다.
 그랬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
 “수상해. 아주 수상해.”
 유명호 회장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그 한진호라는 놈에게는 말이다.
 
 * * *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한진호는 집으로 올라가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오피스텔에는 CCTV가 상당히 많지만 한진호의 모습은 전혀 찍히지 않았다.
 전자장비의 인식까지 방해하는 특별한 파장을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은 한진호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이번엔 작업실로 갈 차례였다.
 너무 궁금해서 내일로 미룰 수가 없었다. 오늘 바로 수정구를 확인해볼 것이다.
 집에서 작업실까지는 걸어서 20분 거리였다.
 한진호는 거의 뛰다시피 해서 15분 만에 작업실에 도착했다.
 작업실에 들어가자마자 간이 아공간에서 물건들을 꺼냈다. 당연히 플래티넘 초대카드는 안에 그대로 두었다.
 거기에 무슨 짓을 해놨을지 모른다. 혹시 추적기라도 달아놨으면 아주 곤란하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전자장비나 마법적 처리가 된 추적 장치라도 아공간 안에 들어가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곳은 이 세상과 분리된 전혀 다른 세상의 공간, 들어가는 순간 이곳과의 모든 연결이 끊어져 버린다. 심지어 시간마저도.
 사실 자세히 조사해보면 안에 어떤 전자장비가 있는지, 혹은 어떤 마법적 처리가 되어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한진호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공간에 보관하면 끝이다. 그걸 할 시간에 수련을 한 시간 더 하는 게 이득이었다.
 한진호는 오늘 경매에서 산 물건들을 하나하나 확인해봤다.
 빛나는 수정구 말고도 전기충격 팔찌, 그리고 따스한 펜던트가 있었다.
 사실 한진호는 이 물건들이 그렇게 헐값에 올라온 걸 보고는 기가 막혔다.
 아마 저걸 판매한 자들이 진실을 알았다면 심장이 멎을 정도로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일단 따스한 펜던트는 마정석 보관장치였다.
 펜던트 중앙에 위치한 보석이 바로 마정석이었다. 아마 보통 사람이 보면 아무리 제대로 분석을 해도 자수정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 자수정에 강대한 마력이 극도로 압축되어 깃들게 되면 그게 바로 마정석이 된다.
 크기만으로 보면 상급에 해당하는 마정석이었다. 하지만 더 정확한 건 보관장치에서 꺼내 순도와 안정성까지 정밀하게 확인해야 한다.
 크기만 크고 쓸모가 적은 마정석도 있고, 크기는 작아도 굉장한 마력 압축도와 안정성 때문에 몇 단계 위의 마정석이 되기도 한다.
 이 펜던트가 따스한 이유는 마정석의 마력을 안정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열 때문이다.
 표면의 기이한 문양과 끊임없이 나오는 열기 때문에 특이한 유물이라 판단한 것이겠지만, 아마 보통 사람의 눈에는 정말 쓸모없어 보일 것이다.
 “이 정도로 큰 마정석을 구할 줄이야.”
 마정석은 생각보다 흔한 물질이다. 다만 그렇게 흔한 마정석은 크기가 아주 작다. 쌀알보다 작은 경우가 보통이고, 심지어 좁쌀만 한 것도 있다.
 당연히 크면 클수록 좋다. 펜던트에 박힌 마정석의 크기는 무려 어린아이 주먹만 했다. 이 정도 마정석은 구하고자 한다고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이 정도 마정석으로 뭘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영감이 폭발했다.
 몸에 아공간을 새기는 마법은 좀 더 뒤로 미뤄야겠다. 아마 거기에 제법 괜찮은 몇 가지 기능을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정화 마법진이 좀 구식인데? 이것도 교체해야겠군.”
 한진호는 다행히 마정석 보관장치에 들어가는 다양한 마법진들을 아주 잘 안다. 지금 이것보다 훨씬 좋은 장치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보관장치를 좀 살피다가 다시 간이 아공간에 넣은 한진호는 전기충격 팔찌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파직! 파직! 파지직!
 팔찌를 건드릴 때마다 강력한 전격이 뿜어져 나왔다. 아마 한진호가 손가락에 마력을 두르지 않고 건드렸다면 쇼크로 기절했을 것이다.
 이 팔찌가 그렇게 싼값에 나왔던 이유는 제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건드리기만 해도 전격을 뿜어내는데, 정작 그 전격을 이용해 뭔가를 할 방법이 없었다.
 발전기로 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저 전기충격기 외에는 용도가 없었다. 그것도 아주 위험한 전기충격기다. 적아를 가리지 않는.
 하지만 한진호는 이 팔찌의 진정한 용도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팔찌를 건드릴 때마다 전격이 뿜어져 나오는 건, 주인 외의 다른 사람이 훔쳐가지 못하도록 도난방지 마법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런 식의 도난방지 마법은 가치가 대단히 높거나, 아니면 귀중품을 보관하는 아공간 장비에 건다.
 아직 제대로 확인은 못 했지만, 한진호는 이 팔찌에 높은 수준의 아공간이 연결되어 있다는 건 알아냈다.
 한진호가 구매한 물건 중에서 이 팔찌가 가장 비쌌다. 그래도 사람을 일격에 기절시킬 정도의 전격이 뿜어져 나오는 유물이었으니까.
 게다가 예술적으로도 상당히 아름다웠다. 은으로만 만들어져 있었지만, 세공이 어찌나 세밀한지 유물이 아니었더라도 제법 비쌌을 것이다.
 “이게 은이 아니라는 것도 아마 몰랐을 거야.”
 이건 은처럼 보이지만 은이 아니었다. 성분을 분석해도 은으로 나오겠지만, 그냥 은이 아니었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오랜 시간 동안 마력을 흡수해 마력적으로 변형된 은이었다.
 사실 한진호식 가치로 따지면 이 팔찌에 아무 기능이 없어도 1조가 넘는 가격을 매겨야 한다. 이건 그 정도 가치가 있는 물질이었다.
 “도난방지 마법부터 해체해야 하는데, 만만치 않네. 수준이 아주 높아.”
 한진호는 당장 이 팔찌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판단해 다시 간이 아공간에 넣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빛나는 수정구 하나만 남았다. 한진호는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수정구 위에 양손을 얹었다.
 
 <『인사동 마법사』 1-2권에 계속>

댓글(4)

[탈퇴계정]    
대여해서 보는중인대 주인공이 일을 엄청 돌려서 하구요 장난아니게 엄청 답답합니다 시원한 느낌은 하나도 없어요 일이 해결되도 답답해요 힘숨찐에 남들이 다 자기죽일려해도 잘 살려줍니다 고작 3년전소설인대 온갖 클리세는 다있네요 힘을숨김.살인은 안함. 엄청 돌려서 일 해결함 돈 아까워라
2021.07.08 22:51
[탈퇴계정]    
8권 보는중인대 너무 힘드네요 결제 했으니 다봐야하는대..
2021.07.12 00:05
콩알이네1    
무료만보세요 결제후 너무후회함
2021.07.21 19:55
ga******    
7 1 까지봄
2022.07.07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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