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연금술사의 항해일지 [E]

연금술사의 항해일지 1-1권

2018.09.07 조회 2,725 추천 24


 # 프롤로그
 
 기사와 마법사의 시대가 저물었다.
 영웅이 광야를 질주하고 현자가 별을 헤아리던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노래는 끝나지 않았다.
 검이 부러지고 믿음이 시들어도 인간은 나아간다.
 
 ***
 
 랑트 시 ‘레드 에일’ 선술집.
 오르크 파우스트는 몸을 낮춰 엄폐했다. 선술집 테이블이 참나무로 만든 견고한 물건이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몸 어딘가에 바람구멍이 생겼을 것이다.
 
 탕! 탕! 타앙―!
 
 오르크는 참나무 테이블에 등을 붙이고 앉아 손가락을 꼽았다. 세 명이 들어왔고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더 이상 총격은 없다. 오르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쳤다.
 
 “네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알······.”
 
 탕―!
 
 오르크는 잽싸게 처음 자세로 돌아갔다. 해적들은 플린트락 머스킷*을 2정씩 가지고 있었다. 하마터면 머리가 날아가 뻔했다. 바텐더가 바 뒤에서 악을 썼다.
 
 “어르신! 어떻게 좀 해 봐요!”
 “···자네는 총 가진 거 없나?”
 “그딴 거 없어요!”
 
 오르크는 한숨을 쉬었다. 적대국 군인, 해적, 악마 추종자, 비밀결사 등등에게 습격당한 지 20년째다. 그들에게 쫓기는 이유와 그들 손에 붙잡히지 않은 이유는 동일하다.
 오르크는 롱코트 안주머니에서 손가락 하나 크기의 작은 앰플을 꺼냈다. 그 안에는 성분이 의심스러운 보라색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저런 조무래기한테 쓰기는 아깝지만······.”
 
 오르크는 이빨로 밀랍을 뜯어내고 액체를 단숨에 마셨다.
 한 모금도 안 되는 연금술 비약Arcanum이지만, 그 효과는 확실하다.
 
 “좋아! 각오해라, 해적 놈들!”
 
 오르크는 연금술 비약을 마신 후 엄폐물로 삼고 있던 참나무 테이블을 뻥― 걷어찼다. 120파운드 나가는 테이블이 빈 깡통처럼 쏘아졌다. 상식에서 벗어난 괴력이다.
 
 “커억!”
 
 운이 없는 해적 하나가 테이블에 맞고 날아갔다. 십중팔구 내장파열로 즉사했을 것이다.
 오르크는 번개처럼 움직였다. 오우거 비약*의 효과는 3분 남짓이다. 그 안에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해적들은 머스킷을 겨누었지만 총구 방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르크는 단 두 걸음 만에 해적 품 안으로 파고들어 손바닥으로 턱을 올려쳤다. 콰득― 이빨이 우수수 떨어지고 턱뼈가 으스러졌다. 혀 깨물지 않은 것이 천운이라면 천운이다.
 
 “으아악! 죽어! 죽엇!”
 
 혼자 남은 해적이 겁에 질려 방아쇠를 당겼다. 오르크는 턱 나간 해적을 바디벙커로 삼았지만 불필요한 방어였다. 해적이 쏜 총탄은 선술집 천장으로 날아갔다. 애초에 명중률 좋은 무기도 아니거니와, 겁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쏘니 제대로 겨냥될 리가 없다.
 오르크는 턱이 으스러진 해적을 팽개치고 혼자 남은 해적에게 다가갔다. 혼자 남은 해적은 발작적으로 커틀러스*를 뽑았지만 전의가 상실된 상태였다.
 
 “연금술사··· 연금술사 오르크 파우스트······.”
 “그래. 잘 아는군.”
 
 오르크는 씨익― 웃어 보이고는 해적 명치를 올려쳤다. 그 한 방으로 상황이 정리된 듯 보였다. 그러나 사건이 정리된 건 아니었다.
 외해(外海) 개척도시도 아닌, 에르나 왕국 대도시 랑트 시 선술집에서 총질과 칼부림이 일어난 일에는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
 
 플린트락 머스킷 :
 일명 수석총. 심지에 불을 붙여 쏘는 아쿼버스(=화승총)에서 한 단계 발전된 총기다. 전장식 장전(총구로 화약을 붓고 총알을 밀어 넣어 장전)이기는 하지만, 현대총기와 비슷한 부싯돌 공이로 화약을 점화시켜 발사한다.
 
 커틀러스 :
 칼날이 약간 휜 소검. 선원 무기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백병전 무기로도 쓰이지만, 돛 줄을 자르거나 배럴 뚜껑을 뜯어내는 등 작업 도구로도 쓰인다. 길이는 50~60cm, 무게는 1.2~1.4kg 정도다.
 
 오우거 비약 :
 작중에 등장하는 오우거 힘을 부여하는 비약. 약효가 2~3분 정도 지속된다. 부유한 모험가가 즐겨 사용하는 비약이다.
 
 
 # 1장. 선원 모집
 
 기사가 몰락하고 마법이 쇠락한 시대.
 기사는 명예직으로 전락했으며 마법은 시장 구경거리가 된 지 오래였다. 검과 마법이 저물고, 총화기와 연금술이 각광받고 있었다.
 
 “···요즘은 상인과 모험가가 더 인기 있지.”
 
 총화기와 연금술의 발전과 더불어, 또 다른 변화는 해상교역의 활성화였다. 유라피아 대륙은 동방항로 개척에 힘입어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차, 향신료, 비단, 도자기 등이 유입되면서 사교계와 예술―문학계가 변하였고, 농업, 건축, 가공기술 등이 동방대륙과 기술교류를 통해 몇 단계 더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상리에 밝은 자와 항해술이 뛰어난 자는 막대한 부와 명예를 얻었다.
 올해 쉰두 살이 된 파우스트 가(家) 집사가 품위를 갖춰 말했다.
 
 “그 덕은 어르신도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르크 파우스트 ‘어르신’은 코웃음 치고 책상 위로 두 발을 올렸다.
 오르크는 18살에서 20살 사이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키가 작고 피부가 새하얀 탓에 더 어려 보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어르신’이란 호칭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오르크도, 집사도 ‘어르신’이란 호칭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 참. 내 배는 어떻게 되었나?”
 “어제 조선소로 도킹되었습니다. 직접 가 보시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지.”
 
 오르크는 말해 뭐 하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는 빙그레 웃었다.
 오르크 파우스트. 전설의 비약 ‘넥타르’를 만들어 낸 최고의 연금술사이며, 북해 곡물 유통을 장악한 파우스트 상회 대표이며, 항해와 모험을 꿈꾸는 낭만주의자였다. 그리고 본인은 인정하지 않지만 ‘새로운 시대’를 가장 잘 누리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
 
 랑트 시.
 오르크 파우스트가 살고 있는 도시였다. 에르나 왕국 북부 해안에 위치한 교역도시로 수도인 에르비아 다음가는 대도시였다. 인구는 약 15만 명. 특산품은 모직물, 향수, 그리고 연금술 비약이다.
 오르크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 냄새를 한껏 들이마신 후 조선소로 걸음을 옮겼다. 오르크의 재산은 주인의 까다로운 요구조건으로 입항하자마자 조선소에 직행했다.
 오르크는 조선소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한가해 보이는 조선공에게 다가갔다.
 
 “이보게. 말 좀 묻지. 수석 조선공은 어디 있나?”
 “뭐야? 수석 조선공?”
 
 대패질하던 젊은 조선공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뒷짐 쥐고 와서 대뜸 수석 조선공을 찾으니 화가 나기 앞서 어이가 없었다.
 
 “임마. 넌 뭔데······.”
 “어이구! 어르신 오셨습니까!”
 
 그때, 나이가 많은 조선공이 허둥거리며 달려왔다. 오르크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자네는?”
 “수석 조선공 안토니입니다. 하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석 조선공은 굽신거리며 오르크를 조선소 안으로 안내했다. 젊은 조선공은 벙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 어르신? 저게?”
 
 수석 조선공을 따라 나온 숙련 조선공이 톱밥 가루를 털어 내며 말했다.
 
 “신참은 처음 보겠군. 저 사람이야. 연금술사 오르크 파우스트.”
 “억! 그 사람은 70살 다 된 늙은이잖아요? 아들이나 손주가 아니고요?”
 “쉿! 말조심해.”
 
 오르크는 젊은 조선공들이 숙덕거리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수석 조선공에게 물었다.
 
 “내 배는?”
 “하하! 정말 잘 빠진 스쿠너(Schooner)*더군요. 주문하신 내용대로 손을 보는 중입니다. 내일까지 마무리될 겁니다.”
 “역시 유능하구먼.”
 “어르신 의뢰인데 당연합죠. 작업 중이긴 하지만 한번 둘러보시겠습니까?”
 
 오르크는 뒷짐 쥐고 느긋하게 조선소 내부를 돌았다. 드라이 독(Dry Dock=건선거)에 올려져 있는 전장 20야드 배수량 35만 파운드의 쾌속 스쿠너가 한눈에 들어왔다.
 포비아 왕국의 모 귀족이 교역 및 탐사용으로 제작하였으나 진수식하기도 전에 집안이 파산하여 경매로 나온 스쿠너다. 그것을 한 다리 걸쳐 오르크가 구매했다. 대리인을 통해 구매한 것이라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호오.”
 “선명(船名)은 다시 정해도 될 듯합니다.”
 “기존 이름은 뭔가?”
 “화이트엔트 호입니다.”
 “···새로 이름 붙이는 게 좋겠군.”
 
 나무로 만든 배에 흰개미(white―ant)라니, 누구 센스인지 몰라도 참 암담하다.
 오르크는 스쿠너 갑판을 둘러보며 선명을 고민했다. 연금술사 아니랄까 봐 연금재료와 실험기구 이름만 떠올랐다. 수석 조선공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어르신. 이 스쿠너는 곡물 수송선으로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가격 대비 운송물량을 보면 브리그(Brig)*나 카락(Carrack)*이 더 나으니까요. 선실과 포문을 늘리는 것도 그렇고··· 교역용보다 탐험용도 같은데··· 맞습니까?”
 “맞네.”
 “누가 쓰려는 겁니까?”
 
 오르크는 수문 너머 조선소 밖으로 이어진 바다를 보았다. 북해의 청량한 바다였다. 오르크는 씨익 웃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장난기가 엿보였다.
 
 “물론 내가 쓸 걸세.”
 
 ***
 
 오르크는 스쿠너 선실과 창고를 둘러보고 조선소를 나왔다.
 수석 조선공은 빠르면 내일 점심. 늦어도 내일 저녁 식사 전까지는 출항준비를 마치겠다고 말했다. 오르크는 잔금내역을 확인하고 조선소를 나왔다.
 
 “배는 준비됐고, 선원이 문제인데······.”
 
 오르크는 선원 모집을 고민했다. 랑트 시는 큰 교역도시였고 선원은 구하고자 하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부두나 술집에서 소리만 질러도 두 자릿수는 모일 것이다. 그러나 오르크가 구하는 선원은 선상 일만 하는 일꾼이 아니었다. 그런 선원은 오르크가 소유한 파우스트 상회에도 많이 있다.
 
 “전투와 모험에 능숙하면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지.”
 
 오르크는 고민하다가 해양조합으로 향했다. 혼자 찾기보다는 전문가의 추천을 받는 편이 좋을 듯했다.
 
 ***
 
 랑트 시 해양조합.
 오르크는 손님맞이를 하는 어린 사환에게 모자를 벗어 주고 조합장실로 향했다. 약속은 없지만 누구도 오르크의 방문을 문제 삼지 않았다.
 
 “안녕하신가, 칸트 조합장.”
 “오오! 어서 오시게! 오르크 백작!”
 
 오르크는 에르나 왕국 백작이고, 선주연합 일원이며, 해양조합 간부였다. 신분으로 보나 직위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명성으로 보나 일개 도시 조합장이 쫓아낼 수 있는 인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신분이나 직위가 대단하지 않다 해도 쫓아내지 않았을 것이다.
 칸트 조합장은 주름진 손으로 홍차를 내리며 말했다.
 
 “그 모습 정말 적응 안 되는군. 넥타르*라는 거. 대단허이. 대단해.”
 “넥타르 ‘마이너 버전*’일 뿐이야. 넥타르는 아직 만들지 못했어.”
 “아 참. 약효가 1년만 지속된다고 했었나? 어허. 난 1년만 젊어질 수 있으면 전 재산도 내놓겠네.”
 “연금술사 앞에서 후회할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오르크와 칸트 조합장은 40년 지기 친구였다. 오르크가 막 독립한 초보 연금술사일 때, 칸트 조합장은 전 재산 털어 어선 한 척 끌고 바다로 나온 병아리 선장이었다. 현실은 모르고 포부만 크던 철부지 청년들은 술 한잔하며 금방 친해졌다. 그때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이번에 스쿠너 한 척 장만했더군.”
 “그래. 더 늦게 전에 출발해야지.”
 
 오르크는 홍차 향을 음미했다. 칸트 조합장은 두 손을 가지런히 놓고 말했다.
 
 “···지금도 충분하지 않은가.”
 “아닐세. 아직 부족해.”
 
 오르크는 차향만 맡고 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진중하게 말했다.
 
 “자네에게 마이너 넥타르를 권하지 않는 이유가 뭔 줄 아는가.”
 “그야 값이 비싸서 아닌가. 국왕 폐하와 자네가 쓸 양도 모자란 걸로 아는데.”
 “그렇지 않아. 젊음의 활력을 만끽하고 나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어지기 때문이야. 활력은 마약보다 지독한 중독이지. 이제 방법이 없어. 진짜 넥타르를 만들어야 하네.”
 
 오르크가 확신을 담아 말했지만 칸트 조합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솜씨 좋은 모험가를 고용하면 되지 않나. 자네가 직접 움직여야만 하는가?”
 “연금재료를 구할 수 있는 모험가가 몇이나 되겠는가. 운이 좋아 재료를 찾는다 해도 손상 없이 채집하고 보관할 수 있는 이는 더욱 드물어. 내가 직접 찾아야 해.”
 “···자네를 노리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야. 너무 위험하네.”
 “그래서 자네를 찾아왔지 않은가.”
 
 오르크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칸트 조합장은 비지땀을 흘리며 말했다.
 
 “나, 난 늙어서 모험은······.”
 “누가 자네 데려간다고 했나? 골골거리는 늙은이는 사양이야.”
 “···자네가 나보다 2살 더 많거든!”
 “아아. 나이 얘기는 됐고. 사람 좀 추천해 주게. 능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그때, 조합장실 밖에서 우당탕― 하는 굉음이 들렸다.
 오르크 파우스트와 칸트 조합장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들었다. 오르크는 보라색 약병과 핸드액스였고, 칸트 조합장은 장전된 플린트락 피스톨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고함 소리에 두 사람 다 무기를 치웠다.
 
 “왜 안 되는 건데요! 왜! 왜! 왜애앳! 그냥 해 줘요!”
 
 어린아이가 떼쓰는 듯한 고음이다. 칸트 조합장은 피스톨을 서랍에 넣으며 투덜거렸다.
 
 “저 아가씨 또 왔군.”
 “잘 아는 사람인가?”
 “잘은 아니지만 알긴 아네. 어린 마녀야.”
 
 오르크는 눈썹을 찡그렸다. 마법은 쇠퇴했지만 마법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시장 광대나 전승학자나 연금술사로 일부 남아 있었다.
 
 “마녀가 무엇 때문에 해양조합에서 난동을 부리는 거지?”
 “난동도 아니고 그냥 떼쓰는 걸세. 자신을 항해사로 고용해 달라는 게야.”
 
 오르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긴 침묵 끝에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마녀가 항해사를?”
 “연금술사가 선장 하겠다고 덤비는데, 마녀가 항해사 하겠다고 덤비는 것도 이상할 것 없지. 요즘 세상이 그렇잖은가.”
 “듣고 보니 그렇군. 그럼 항해사로 고용하면 되지 않나.”
 “마녀를? 풉! 자네 안 본 사이 개그가 늘었군.”
 
 오르크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충분히 식어서 뿌려도 뜨겁지 않을 거 같았다. 다만 조합장 체면을 생각해서 한번 참았다.
 
 “실력은 있는가?”
 “그건 모르지. 포비아 왕국 해상학교 졸업생이라고 하더군. 그쪽에서도 항해사 자리를 못 구해서 여기까지 온 거겠지만.”
 “흐음. 해상학교 졸업생이라.”
 
 ***
 
 오르크는 조합장실 밖으로 나갔다. 해양조합 안내원을 붙잡고 화내고 소리치고 울먹이는 젊은 아가씨가 보였다. 머리에는 고깔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두 손에는 마법지팡이를 들었다. 누가 봐도 고전적인 마녀였다.
 오르크는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상기한 후 대뜸 물었다.
 
 “항해사가 되고 싶다고?”
 “···누구?”
 
 오르크가 다가오자 마녀는 조심스럽게 반문했다. 오르크는 코앞까지 다가가서 말했다.
 
 “난 선장일세. 그리고 선원을 구하고 있지.”
 “그 나이에?”
 
 오르크는 외모만 봤을 때 20살이 넘어 보이지 않는다. 차분히 대화하다 보면 말투, 행동거지, 학식 등에서 나이가 많음을 느낄 수 있지만, 눈에 보이는 부분만 봤을 때는 18살에서 20살 정도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마녀는 오르크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잣집 도련님이구나.’ 마녀는 잠정 결론을 내린 후 딱 잘라 말했다.
 
 “난 어선이나 화물선을 구하는 게 아니에요. 외해(外海)로 나가는 교역선이나 탐험선을 구하는 중이죠.”
 “그거 잘됐군. 내 배도 탐험선이지.”
 “···어? 진짜요?”
 
 오르크가 가볍게 손뼉을 치자 마녀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나를 고용하겠다는 거예요?”
 “실력이 있다면.”
 
 오르크는 롱코트 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던졌다. 마녀는 얼결에 돈을 받았다. 돈주머니가 묵직해서 깜짝 놀랐다.
 
 “그 돈으로 신뢰할 수 있는 선원 9명을 모집하게. 내일 점심까지 4번 부두로 오면 되네.”
 
 오르크는 그렇게 말하고 조합장실로 들어갔다.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았고 상대의 이름도 묻지 않았다. 마녀는 한 손에 지팡이, 한 손에 돈주머니를 들고 황당해했다.
 
 “뭐, 뭐지? 저 참신하게 미친놈은?”
 
 ***
 
 오르크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칸트 조합장이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저 돈 가지고 도망가면 어쩌려고?”
 “그 정도 신뢰도 못 지킨다면 고용하지 않는 편이 낫지. 싼값에 잘 걸러 낸 거야.”
 “어중이떠중이 긁어 오면 어쩔 건가?”
 “그 정도 능력밖에 안 되는 것이니 해고해야지. 역시 싸게 걸러 낸 걸세.”
 
 오르크의 즉답을 듣고 칸트 조합장은 껄껄 웃었다.
 
 “시원시원하군! 그게 자네 매력이지!”
 “새삼스럽게 당연한 말을 하는군.”
 
 오르크는 홍차를 들었다. 칸트 조합장은 홍차 대신 뒷주머니에서 궐련 하나를 꺼내 물었다.
 
 “그런데 얼마나 줬나?”
 
 오르크는 식은 홍차를 비우며 말했다.
 
 “1만 페닝*.”
 “···에라이 미친놈아!”
 
 ***
 
 랑트 시 오르크 저택.
 오르크는 현실적인 낭만주의자였다. 인간의 본성은 사랑과 우정과 신뢰로 가득하다고 믿지만, 그 믿음이 증명되지 않았음도 알고 있다. 따라서 자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사람을 시켜 마녀를 뒷조사했다.
 집사는 반나절 만에 신상정보를 모아왔다.
 
 “레니 뮬. 22세. 여. 포비아 왕국 하얀 숲 출신입니다.”
 “하얀 숲이면 드루이드 일족인가?”
 “드루이드는 아닌 듯 하지만 드루이드 마법을 배우긴 한 모양입니다.”
 “그거 좋군.”
 
 드루이드는 동식물과 교감하는 마법을 사용한다. 일반 마법사보다 훨씬 쓸모가 많다.
 
 “포비아 왕국 해상학교 수석 졸업자입니다. 그러나 여자라서, 또는 마녀라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올해 여름 랑트 시로 이사 왔습니다. 음식점 서빙과 꽃집 판매원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집사는 외눈 안경을 쓱 올리고 말했다.
 
 “어르신, 시험 삼아 1만 페닝을 주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아무래도 잘못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소문이 나면 너도나도 돈을 목적으로 접근해 올 겁니다. 옥석을 가리기가 더 힘들지 않겠습니까.”
 
 오르크는 머리를 조금 기울였다가 원상복구 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거짓말 탐지 비약을 만들지 뭐.”
 “오! 그런 비약이 있습니까?”
 “···아니. 농담일세.”
 
 오르크는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사는 시간만 더 주면 재산목록, 특기, 취미, 대인관계, 이상형까지 알아 오겠노라 장담했지만 오르크는 충분하니 그만하라고 말렸다.
 집사는 레니 뮬 신상 보고서를 곧게 펴서 책상에 올려놓고 두 번째 파일을 꺼냈다.
 
 “이것도 확인해 주십시오.”
 “상회 업무는 각 마스터에게 위임했을 텐데?”
 “상회 업무가 아닙니다. 에르나 왕실에서 보내온 편지입니다.”
 
 오르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왕실 편지라면 좋은 내용은 아닐 것이다.
 
 “제길. 악마 추종자 아니면 비밀결사 일이겠지.”
 
 오르크는 에르나 왕실 인장을 확인하고 편지를 개봉했다.
 
 ―레드 에일로 오시오.
 
 오르크는 오해하거나 곡해할 여지가 없는 짤막한 편지 내용을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르신?”
 “아. 별일 아니네. 늦을지도 모르니 퇴근하도록.”
 
 ***
 
 랑트 시 ‘레드 에일’ 선술집.
 오르크는 편지에서 지정한 선술집에 도착했다. 과거 몇 번 방문했던 선술집이라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는 않았다. 바텐더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르신? 오랜만에 오셨군요?”
 “그런가. 델 포니 와인 한 잔 주게.”
 
 오르크는 술 한 잔 주문하고 선술집 안을 살폈다. 큰 소리로 떠드는 선원 두 명과 인사불성으로 만취한 취객 한 명이 전부였다. 왕실 인사나 편지를 전달할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일찍 온 걸까. 늦게 온 걸까.”
 
 오르크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아니면··· 오면 안 되는 곳에 온 걸까.”
 
 오르크는 왕실 편지에 의문을 가졌다. 에르나 왕실 인장이 찍혀 있지만, 그조차도 완전히 믿을 수 없다. 표본만 있으면 인장위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외지역이 아닌 시내 선술집에서 접선을 요청할 것도 의심스러웠다. 이 정도 공개된 장소면 그냥 오르크 저택으로 찾아오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함정인가?”
 “정답!”
 
 오르크의 혼잣말에 대답이 들려왔다. 선술집 안으로 중무장한 남자 셋이 들어왔다. 머리를 대충 묶은 두건, 허리에 찬 커틀러스, 그리고 견착한 플린트락 머스킷이 위협적이다.
 
 “해적? 제길!”
 
 오르크는 몸을 낮춰 어깨로 테이블을 들어 올렸다. 일명 밥상 뒤집기! 그러나 음식을 쏟아 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탕! 콰득―!
 
 총성과 톱밥 날리는 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해적이 쏜 총탄이 테이블에 박혔다. 선술집 테이블이 참나무로 만든 견고한 물건이라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몸 어딘가에 바람구멍이 생겼을 것이다.
 
 탕! 타앙―!
 
 오르크는 참나무 테이블에 등을 붙이고 앉아 손가락을 꼽았다. 세 명이 들어왔고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더 이상 총격은 없다. 오르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통쳤다.
 
 “네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알······.”
 
 탕―!
 
 오르크는 잽싸게 처음 자세로 돌아갔다. 해적들은 플린트락 머스킷을 2정씩 가지고 있었다. 하마터면 머리가 날아가 뻔했다. 바텐더가 바 뒤에서 악을 썼다.
 
 “어르신! 어떻게 좀 해 봐요!”
 “···자네는 총 가진 거 없나?”
 “그딴 거 없어요!”
 
 오르크는 한숨을 쉬었다. 적대국 군인, 해적, 악마 추종자, 비밀결사 등등에게 습격당한 지 20년째다. 그들에게 쫓기는 이유와 그들 손에 붙잡히지 않은 이유는 동일하다.
 오르크는 롱코트 안주머니에서 손가락 하나 크기의 작은 앰플을 꺼냈다. 그 안에는 성분이 의심스러운 보라색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저런 조무래기한테 쓰기는 아깝지만······.”
 
 오르크는 이빨로 밀랍을 뜯어내고 액체를 단숨에 마셨다.
 한 모금도 안 되는 연금술 비약Arcanum이지만, 그 효과는 확실하다.
 
 “좋아! 각오해라, 해적 놈들!”
 
 오르크는 연금술 비약을 마신 후 엄폐물로 삼고 있던 참나무 테이블을 뻥― 걷어찼다. 120파운드 나가는 테이블이 빈 깡통처럼 쏘아졌다. 상식에서 벗어난 괴력이다.
 
 “커억!”
 
 운이 없는 해적 하나가 테이블에 맞고 날아갔다. 십중팔구 내장파열로 즉사했을 것이다.
 오르크는 번개처럼 움직였다. 오우거 비약의 효과는 3분 남짓이다. 그 안에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
 해적들은 머스킷을 겨누었지만 총구 방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르크는 단 두 걸음 만에 해적 품 안으로 파고들어 손바닥으로 턱을 올려쳤다. 콰득― 이빨이 우수수 떨어지고 턱뼈가 으스러졌다. 혀 깨물지 않은 것이 천운이라면 천운이다.
 
 “으아악! 죽어! 죽엇!”
 
 혼자 남은 해적이 겁에 질려 방아쇠를 당겼다. 오르크는 턱 나간 해적을 바디 벙커로 삼았지만 불필요한 방어였다. 해적이 쏜 총탄은 선술집 천장으로 날아갔다. 애초에 명중률 좋은 무기도 아니거니와, 겁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쏘니 제대로 겨냥될 리가 없다.
 오르크는 턱이 으스러진 해적을 팽개치고 혼자 남은 해적에게 다가갔다. 혼자 남은 해적은 발작적으로 커틀러스를 뽑았지만 전의가 상실된 상태였다.
 
 “연금술사··· 연금술사 오르크 파우스트······.”
 “그래. 잘 아는군.”
 
 오르크는 씨익― 웃어 보이고는 해적의 명치를 올려쳤다. 해적은 일격에 혼절했다. 오르크는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겨우 셋이라니. 과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나를 잡을 거면 30명은 와야지.”
 
 오르크는 유라피아 대륙 최고의 연금술사라 불린다. 해적 셋이서 잡자고 덤빌 만한 인물이 아니다.
 
 “그 말 참고하지! 크하핫!”
 
 선술집 밖이 소란스러웠다. 욕설, 비명, 그리고 철컥― 거리는 병장기 소리까지 들려왔다.
 오르크 파우스트는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했다. 왕실 인장을 위조하고 도심 한가운데에서 습격하는 집단이다. 시시껄렁한 해적이 아니다.
 오르크는 해적이 가진 플린트락 머스킷과 커틀러스를 챙겼다. 해적 몸을 수색했지만 총알과 화약은 없었다. 처음부터 한 발만 장전하고 들어온 것이다.
 
 “미끼였군.”
 
 오르크가 연금술 비약을 사용하도록 유도한 희생양이다.
 오르크는 롱코트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오우거 비약 두 개가 더 남아 있지만 당장 사용할 수는 없다. 오우거 비약을 연달아 마시면 정신착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오르크는 고개를 돌렸다. 큰 소리 내던 선원들은 일찌감치 도망갔는데, 취객이 아직 남아 있었다. 취객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허리에 찬 검을 슬쩍 끌어당겼다. 군인이 사용하는 날렵한 세이버*나 팔라쉬*가 아니라, 크고 묵직한 롱소드였다.
 
 “기사?”
 “전(前) 왕실기사 호일 반이라고 합니다. 오르크 파우스트 백작. 당신을 돕겠습니다.”
 “나를 말인가? 왜?”
 “국왕 폐하의 명령입니다.”
 
 오르크는 환하게 웃었다.
 오르크의 연금술 능력은 에르나 왕국의 국력과 연결된다. 국왕에게 진상되는 마이너 넥타르는 말할 것도 없고, 군에 납품되는 각종 비약 역시 군사력 증진 효과를 가져오고 있다. 오르크 곁에 비밀 경호원―겸 감시자―이 하나쯤 붙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거 든든하군!”
 
 전 왕실기사 호일 반은 롱소드 손잡이에 왼손을 올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세 걸음 떼기도 전에 허리를 굽히고 오바이트했다.
 
 “우웩―”
 “···방금 한 말 취소하지. 신뢰가 전혀 안 가는군.”
 “우웁― 걱정하지 마십시오. 웁― 제가 술이 약하긴 해도······.”
 
 호일 반은 자신의 말을 증명해 보였다. 선술집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해적을 향해 롱소드를 휘둘렀다. 아니, 휘둘렀다고 생각된다. 롱소드를 뽑는 동작도, 롱소드가 움직이는 궤적도 보이지 않았다. 해적의 두 손이 땅바닥에 떨어지고 피가 솟구친 다음에야 롱소드의 피 묻은 칼날이 보였다.
 
 “···그래도 해적 놈들 정도는 문제없습니다.”
 “멍청아! 숙여!”
 
 오르크는 호일 반의 목덜미를 잡고 끌어내렸다. 검술이 뛰어난 건 분명한데 머리가 좋지 않은 모양이다. 선술집 밖에서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타타탕! 탕! 탕탕! 타―앙!
 
 “왕실기사 출신이면 총알 안 박히나?”
 “아, 아닙니다.”
 “그럼 숙이고 있게!”
 
 창문이 깨지고, 술병이 터지고, 테이블이 부서지고, 의자가 망가졌다. 선술집이 눈 깜짝할 사이 난장판이 되었다. 그리고 침묵이 찾아왔다. 태풍의 눈으로 들어온 듯한 기이한 고요함이다.
 플린트락 머스킷은 재장전까지 최소 20초가 걸린다. 그러나 전술이란 것을 생각할 줄 안다면 일제사격에 동참시키지 않은 저격수가 남아 있을 것이다.
 
 “시간이 없으니 시키는 대로 하게. 난 오른쪽 창문으로 나가겠네. 저격수 이목을 끌 수 있을 거야. 그 틈에 자네가 정문으로 치고 나가게. 왕실기사 출신이라면 백병전에서 밀리진 않겠지?”
 “그야··· 뭐··· 잠깐! 나간다고 했습니까?”
 “잔말 말고 움직이게!”
 
 오르크는 의자를 들어 왼쪽 창문으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몸을 돌려 오른쪽 창문으로 뛰쳐나갔다.
 
 “저쪽이다! 쏴라!”
 
 탕탕! 탕!
 
 서너 발의 총성이 울렸다. 호일 반은 잇소리를 내고 정문으로 달려 나갔다. 총구에 꼬질대를 꽂은 해적, 총알 주머니를 뒤적이는 해적, 페이퍼 카트리지*를 찢는 해적 등등이 보였다.
 
 “어? 어어? 저놈은 뭐야?”
 
 호일 반은 롱소드를 길게 내찔렀다. 총구를 다지던 해적 목이 깨끗하게 날아갔다. 그리고 춤추듯 손발을 휘저었다. 롱소드가 한번 움직이면 해적 한 명이 쓰러졌다. 에르나 왕국 최고의 검객집단이라는 왕실기사다웠다.
 
 “저 미친놈부터 쏴! 당장!”
 
 손이 재빠른 해적은 어느새 재장전을 마쳤다. 총구가 호일 반을 향했다.
 
 “까꿍.”
 
 그러나 해적이 상대하는 적은 호일 반 한 명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 오우거 비약을 마신 오르크가 해적 뒤로 다가와 있었다.
 오르크는 해적 목을 분지르고 플린트락 머스킷을 빼앗아 바로 옆 해적에게 쏘았다. 탕! 해적 둘이 동시에 쓰러졌다.
 
 “해적 주제에 좋은 총을 쓰는군.”
 
 오르크는 머스킷을 거꾸로 들고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오르크가 직접 제조한 오우거 비약은 일반 비약보다 효과가 뛰어나다. 그 말인 즉, 오르크의 힘은 진짜 오우거와 비견해도 될 정도다. 개머리판에 얻어맞은 해적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칼에 베이거나 총에 맞은 것보다 더 끔찍한 광경이었다. 해적들의 전투 의지가 빠르게 사라졌다.
 
 “저런 괴물이란 이야기는 없었잖아!”
 “도, 도망쳐!”
 
 ***
 
 오르크는 오우거 비약 효과가 사라지자 가벼운 어지러움을 느꼈다. 연금술사 학회가 권장하는 재사용 시간은 지켰지만, 오우거 비약은 본래 하나만 사용해도 몸에 부담을 주는 물건이다. 제조법이 간단하고 효능이 유용하여 즐겨 사용하지만 건강에 썩 좋은 물건은 아니다.
 
 “괜찮으십니까, 오르크 백작님.”
 “아··· 괜찮네.”
 
 오르크는 관절을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오르크의 나이를 생각하면 어색하지 않은 동작이다― 호일 반에게 다가갔다.
 
 “경황이 없어 인사도 못 했군. 난 오르크 파우스트일세.”
 “호일 반입니다. 전직 왕실기사였고,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금 용병이란 말인가? 어째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왕실기사 자리를 반납했습니다. 그래도 인연이 있어 왕실 일을 돕고 있습니다.”
 “흐음. 대충 알 것 같군.”
 
 에나르 왕국 왕실기사는 최고의 검객들로 구성된 전투 집단이다. 현대전이 화력과 물량대결이라고는 하지만, 경호, 암살, 결투 등의 역할에서는 여전히 솜씨 좋은 검객이 요구된다. 왕가 사람을 경호하는 왕실기사는 검을 쥔 자들 사이에서 최고로 여겨지는 자리였다.
 
 “신분인가, 재산인가.”
 “···밝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실기사라고 화려한 것만은 아니다. 왕실기사가 되는 것은 검술 실력 하나면 되지만, 왕실기사로 살아가는 데는 가문, 인맥, 재산 등이 두루 필요하다.
 기사단장을 비롯한 고위직책은 귀족 출신이 장악하고 있고, 조장 이하 간부직은 부르주아(=신흥부자 세력) 출신이 장악하고 있다. 평민 출신은 평생 가도 평기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르크는 호일 반이 실력과 야망은 있지만 신분과 재산은 없는 케이스라 짐작했다. 검술 실력이 그저 그랬다면 용병으로 부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내 입장에서는 잘됐군. 실력 좋고 신뢰할 수 있는 검객이라.”
 “무슨 뜻입니까?”
 “난 조만간 랑트 시를 떠날 걸세. 자네 임무가 나를 호위하는 것이라면 함께 가는 편이 좋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르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자네 뱃일 좀 할 줄 아는가?”
 
 ***
 
 랑트 시 오르크 저택.
 오르크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여행 짐을 챙겼다. 집사가 유령처럼 다가와 거들었다. 오르크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퇴근하라고 말했지만 퇴근하지 않고 기다릴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해적소탕은 시티가드에게 위임했으니 신경 쓸 필요 없네. 레드 에일 선술집으로 충분한 보상금을 보내게. 한 달은 장사하기 힘들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왕실과 연금술사 학회에 사정을 알렸지만 한동안 귀찮게 하는 사람이 찾아올 걸세. 내 이름을 팔아도 좋고 뇌물을 먹여도 좋으니 말썽이 생기지 않게 처리해 주게.”
 “걱정 마십시오.”
 “어린 마녀에게―레니 뮬이라고 했던가?― 선원 고용을 맡겼지만 무작정 믿고 기다릴 수 없어. 내일 아침 확인하고 일 처리가 미진할 경우 상회 소속으로 선원 몇 명 뽑도록 하게.”
 “그리하겠습니다.”
 
 오르크는 아무렇지 않게 지시 내렸고, 집사는 대수롭지 않게 지시받았다. 지난 20년간 함께해 온 사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오르크는 연금술 비약, 연금술 서적, 실험기구, 재료 상자 등등으로 성인 남자 두 명은 들어갈 대형 트렁크를 꽉꽉 채웠다.
 
 “내일 점심 출발할 걸세. 내가 없는 동안 상회 일을 잘 부탁하네.”
 
 집사는 외눈 안경을 벗어 렌즈를 닦았다. 그리고 셔츠 주머니에 고이 넣으며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두들겨 패서라도 말리고 싶지만, 그런다고 포기하실 분이 아니죠. 부디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
 
 스쿠너(Schooner) :
 세로돛을 장착한 중형범선(세로돛은 역풍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 유용하다). 돛대가 2개 이상이며 모두 세로돛을 장착한다. 유사한 세로돛 범선인 욜(yawl)이나 케치(ketch)와 비교하면 앞 돛대(포어마스트) 돛보다 주 돛대(메인마스트) 돛이 크고 높은 것이 특징이다.
 
 브리그(Brig) :
 가로돛을 장착한 중형범선(가로돛은 순풍에서 속도를 내는 데 유용하다). 돛대가 2개 이상이며 모두 가로돛을 장착한다. 주 돛대에는 스팽커를 장착한다.
 
 카락(Carrack) :
 캐러벨에서 발전된 중형범선. 돛대가 3개 이상인 중형범선이다. 선수누각이 낮고 선미누각이 높다. 선수루가 뱃머리 너머로 길게 뻗은 것이 특징이다. 선폭이 넓고 선체가 깊어 적재 용량이 많으며 원해항해에도 적합하다. 화물선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넥타르 :
 작중에 등장하는 불로불사 비약. 전설로 전해지는 최고의 연금술 비약이다. 본래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의 음료 이름이다.
 
 마이너 넥타르 :
 작중에 등장하는 오르크 파우스트의 오리지널 비약. 신체를 젊게 만든다. 약효가 1년 정도 지속된다. 약효가 떨어지면 본래 나이로 돌아간다. 오르크 파우스트가 유라피아 대륙 최고의 연금술사임을 공인받은 비약이다.
 
 페닝 :
 작중에 등장하는 유라피아 대륙 화폐 단위. 1페닝―100로닝―100론스로 사용된다.
 
 세이버(Sabre) :
 사브르(=프랑스), 샤벨(=네덜란드)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펜싱을 잘 아는 사람은 사브르가 더 익숙하고, 일본만화 건X 등을 잘 아는 사람은 샤벨이 더 익숙할 것이다). 기본 형태는 한 손으로 사용하는 외날 곡도(曲刀)다. 칼날이 완만하게 휘어져 베기에 유용하다. 가볍고 날렵하게 다룰 수 있어 고대부터 근대까지 기병용 도검으로 애용되었으며, 근대 이후에는 더욱 경량화되어 결투 및 스포츠 무기로 명맥을 이어 갔다.
 
 팔라쉬(Pallasch) :
 세이버와 비슷한 기병용 도검이나, 곡도(曲刀)가 아닌 직도(直刀)다(‘pala’ 뜻이 터키어로 ‘곧은’이다). 세이버로 베기 힘든 중갑병을 찌르기 위해 사용되었다. 폴란드의 유명한 기병대 ‘윙드 훗사르’는 세이버와 팔라쉬를 모두 소지하고 적의 무장 정도에 따라 무기를 달리 썼다고도 한다.
 
 페이퍼 카트리지(Paper Cartridge) :
 일명 종이 탄피. 총알과 화약을 함께 말아 놓은 물건이다. 종이를 입으로 찢고 총알과 화약을 한 번에 총구로 밀어 넣는다. 페이퍼 카트리지가 발명되기 전에는 총알 주머니와 화약 주머니를 각각 들고 다녀야 했으며, 장전시간이 오래 걸리고, 장전하는 화약량이 일정하지 못해 불발이 잦았다. 현대총기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머스킷 시대에는 혁신적인 발명품이었다.
 
 
 # 2장. 첫 출항
 
 랑트 시 조선소.
 오르크는 출항준비를 서둘렀다. 식량과 식수는 조선소에서 바로 적재시키고, 항해에 필요한 추가 자재―예비용 돛, 예비용 밧줄, 목재, 못, 공구, 구급약 등등―는 닥치는 대로 구입하여 조선소 근방 4번 부두로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르크 파우스트 어르신?”
 “딱 맞춰 왔군!”
 
 전직 마녀 레니 뮬이 아홉 명의 선원과 함께 도착했다. 레니 뮬은 하루 만에 오르크의 정체를 알아냈다. 하긴, 워낙 유명인사라서 정체를 모르기가 더 힘들 것이다. 오르크는 레니 뮬이 신의를 지킨 것에 감사하며 말했다.
 
 “오늘 오후 출항한다.”
 “엥? 바로요?”
 “무슨 문제 있나?”
 “그건 아니지만······.”
 
 오르크는 아홉 명의 선원을 쭉 훑어보았다. 나이 많은 숙련 선원도, 나이 어린 견습 선원도 있었다. 레니 뮬이 무슨 기준으로 선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뱃일을 안 해 본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난 오르크 파우스트라고 하네. 에르나 왕국 백작이고, 랑트 시 선주연합 일원이며, 파우스트 상회 대표일세. 그리고 오늘 출항 예정인 스쿠너······.”
 
 오르크는 조선소 외벽 너머로 삐쭉 솟아오른 스쿠너를 보았다. 오전 내내 고민해도 답을 찾지 못했는데, 출항을 앞두니 쉽게 결정 내려졌다.
 
 “‘알케미스트 호’ 선장이지.”
 
 ***
 
 레니 뮬을 비롯한 선원들도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나이, 경력, 출신지 등은 제각각이지만, 인상이 좋고 말투가 점잖은 점은 비슷했다.
 오르크는 선원들에게 자재적재를 지시하고 레니 뮬과 함께 부둣가로 나왔다.
 
 “선원들을 무슨 기준으로 선발했나?”
 “어르신이 사용한 방법을 그대로 따라 했죠.”
 “응?”
 “선원들에게 100페닝 씩 나눠 주고 오늘 아침 6시까지 모이라고 했어요. 돈만 먹고 도망간 사람, 술에 진탕 취한 사람, 약속 시간보다 늦은 사람을 제외하고 나니까, 어머나! 놀랍게도 딱 9명이 남더라고요. 신기하죠?”
 
 오르크는 조용히 웃었다. 오르크의 테스트를 정확히 읽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레니 뮬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저 포함해서 총 10명인가요?”
 “아니. 한 명 더 올 걸세.”
 “누구요?”
 
 오르크는 선창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싸구려 셔츠를 반쯤 풀어헤치고, 한 손은 롱소드 손잡이 위에 올리고, 다른 한 손은 어깨에 멘 배낭끈을 잡고 휘적휘적 걸어오는 남자가 있었다.
 
 “양반은 못 되는군. 저기 오네.”
 
 전직 왕실기사 호일 반이 약속대로 찾아왔다. 호일 반은 오르크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그리고 레니 뮬을 힐끔 보았다. 호일 반과 레니 뮬은 동시에 생각했다.
 
 ‘뭐지, 이 구닥다리 마녀는?’
 ‘뭐야, 이 건달 아저씨는?’
 
 오르크는 청춘남녀의 의미심장한 시선 교환을 보며 홀로 만족해했다.
 
 “첫 만남부터 뜨겁군. 아주 좋은 징조야.”
 
 ***
 
 오르크는 레니 뮬과 호일 반을 포함한 총 11명 선원에게 직책과 임무를 맡겼다.
 레니 뮬은 부선장 겸 항해사. 호일 반은 갑판장 겸 포수장. 그리고 나이가 많은 숙련 선원 알프레드를 조타수로 삼았다.
 
 “수문을 열어라!”
 “물이 들어온다! 바닷물이 들어온다!”
 
 독(Dock) 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놓은 수문이 활짝 열렸다. 바닷물이 순식간에 들이닥쳐 선거(船渠)를 채우고 스쿠너를 들어 올렸다. 곧이어 보트 두 대가 동원되어 스쿠너를 조선소 밖으로 끌어냈다.
 첫 출항은 아니지만, 첫 선장과 첫 항해사와 첫 갑판장을 태우고 떠나는 알케미스트 호의 작은 진수식이 있었다.
 오르크는 수표 한 장을 꺼내 서명 후 수석 조선공에게 건네주었다.
 
 “파우스트 상회로 가져가면 잔금을 지급받을 수 있을 걸세. 수고했네.”
 “하핫! 어르신 의뢰는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르크는 잔금계산을 마치고 보트에 올랐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알케미스트 호의 모습은 드라이 독* 위에서 본 모습과 너무나 달랐다. 어쩌면 ‘내 배’라서 다르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상회 소속 대형 갤리온*을 여러 번 올랐지만 지금과 같은 느낌은 없었다.
 
 “어르신! 아니, 선장님! 배 정말 좋은데요? 깔깔!”
 
 가장 신난 것은 레니 뮬이었다. 그리고 항해경험이 적거나 소형범선만 타 본 젊은 선원도 갑판을 기웃거리며 재미있어 했다. 가장 무덤덤한 것은 호일 반과 알프레드였다.
 오르크는 알케미스트 호 갑판에 올랐다. 자리 배정, 임무 배정, 항로 선정 등등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오르크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부선장.”
 “옙! 선장님!”
 
 레니 뮬은 마법지팡이를 머스킷처럼 꼿꼿하게 세우고 대답했다.
 
 “본 함은 현 시간 플론 시까지 시험운행을 시작한다. 부선장은 즉시 임무 수행하도록.”
 “예··· 옛?”
 
 ***
 
 오르크는 고물 아래 위치한 선장실로 들어갔다.
 선장실은 아주 크지도 그리 작지도 않았다. 침대 하나, 책장 하나, 책상 하나, 연금술 실험대 하나가 배치되자 딱 맞아떨어졌다. 오르크가 머물 선장실이며 연구실이었다.
 오르크는 연금술 비약과 연금술 재료를 알파벳 순서로 정리하고 실험기구가 흔들리지 않도록 실험대 위에 고정시켰다. 그리고 책을 모두 꺼내어 전문서적, 교양서적, 오락서적으로 분류했다.
 
 “똑똑. 계십니까.”
 
 레니 뮬은 입으로 노크 소리를 내었다. 오르크는 교양서적인지 오락서적인지 애매한 책을 들고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들어오게.”
 
 레니 뮬은 잠깐 사이 5년은 늙은 듯했다. 항해경험이 전무한, 그것도 나이가 어린 여자가 잔뼈 굵은 선원을 통제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선원 배치 완료했습니다. 선실과 창고 확인 요청드립니다. 본 함은 현재 남서풍 타고 동북북 방향으로 미속 전진 중입니다. 선장님이 허락하면 추가 돛을 전부 전개하여 속력을 올렸으면 합니다.”
 “난 뱃일을 잘 모르네.”
 “···망할 영감탱이.”
 “···지금 뭐라고 했나?”
 “예? 제가 무슨 말 했나요?”
 
 오르크는 의심 가득한 눈길을 보냈지만 레니 뮬은 순진무구한 눈길로 응수했다. 오르크는 미심쩍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자네가 데려온 선원이니 자네가 통솔하는 것은 당연하네.”
 “제가 아니라 선장님을 믿고 온 사람인데요.”
 “그리고 난 자네를 믿고 있지. 그럼 된 거 아닌가?”
 “으으으··· 상식으로 반박하고 싶지만 논리로 이길 자신이 없다······.”
 
 오르크는 빙그레 웃으며 나가 보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갑판장 호일 반을 불러 주게.”
 “건달 아저씨요?”
 “건달이 아니라 기사지만, 뭐 비슷하긴 하지.”
 
 레니 뮬이 나가고, 잠시 뒤 호일 반이 선장실로 찾아왔다. 그사이 오르크는 책 정리를 마무리하고 의자에 앉아 쉴 수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백작님.”
 “어르신이라 부르게나. 선장님도 괜찮겠군.”
 “그럼 어르신이라 부르겠습니다.”
 
 호일 반은 군기 바짝 든 군인처럼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오늘 바다가 잔잔해서 다행이다.
 
 “자네가 뱃일을 해 본 적 있어서 다행이군.”
 “어릴 적 일입니다. 그리고 이런 큰 배도 아니었습니다.”
 “어린 항해사를 많이 도와주게.”
 “혼자 잘하고 있습니다. 마법지팡이 휘두르는 솜씨가 일품이더군요.”
 
 오르크는 껄껄 웃었다. 랑트 시 해양조합에서도 보았지만 성깔이 제법 있었다.
 
 “자네도 요구사항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게.”
 “예. 알겠습니다.”
 “선임 선원 알프레드를 불러 주게.”
 “예. 알겠습니다.”
 
 오르크는 총 11명의 선원을 차례차례 불러 인사하고 당부하고 회유했다. 오르크가 호출한 순서가 곧 지휘체계가 될 것이다. 오르크는 뱃일은 잘 모르지만 사람 다루는 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
 
 오르크는 선원 면담을 끝내고 기지개를 쭉 켰다. 가장 중요한 업무가 끝났다. 기강이 잘 잡힌 기성집단에서는 불필요한 일이지만, 이제 막 구성된 신규집단에서는 한 번쯤 해야 하는 일이었다. 선원을 보았으니 선내를 돌아볼 차례였다.
 오르크는 갑판 위로 올라갔다. 이물 너머로 탁 트인 북해가 보이고 고물 너머로 랑트 시가 가물가물하게 보였다. 선원 분위기를 살펴보니 제법 차분해져 있었다. 레니 뮬이 생각보다 선원 장악력이 뛰어난 모양이다. 선원 한 명이 인사차 말을 건넸다.
 
 “선장님? 선내 순시하십니까?”
 “그래. 그냥 쉬게나.”
 
 오르크는 갑판을 한번 돌아보고 선창 아래로 내려갔다.
 선장실 아래가 부선장실이다. 선장과 부선장 외에는 3~4명이 선실 하나를 쓰도록 만들었다. 레니 뮬이 직책별로 선실을 잘 배정했다.
 조리기구와 오븐을 갖춘 주방, 바닥 아래로 구멍 뚫린 화장실, 텅 빈 무기창고, 자재가 조금 쌓인 화물창고, 쥐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식량창고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앗! 선장님!”
 
 주방과 창고관리 업무를 맡은 젊은 선원이 벌떡 일어났다.
 
 “식량이 며칠이나 가겠나?”
 “다들 얼마나 먹는지 모르지만, 제 기준에서 보면 열흘은 문제없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오르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항해일정을 간략히 이야기했다.
 
 “이틀 뒤 랑트 시로 돌아올 예정이니까.”
 
 ***
 
 플론 시.
 플론 시는 에르나 왕국 최북단에 위치한 광업도시 겸 공업도시였다. 검은 산맥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철과 구리와 석탄으로 무기, 농기구, 기계부품 등을 제작한다. 특산품 또한 자연히 농기구, 공구, 그리고 총과 대포였다.
 레니 뮬은 점점 커지는 플론 시 항구를 보며 물었다.
 
 “선장님, 여기 오신 이유는······.”
 “무장해야지.”
 
 호일 반의 표정이 밝아졌고, 레니 뮬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알케미스트 호는 플론 시 우측 항구로 입항했다. 경험 많은 조타수 알프레드는 세밀한 솜씨로 부두에 접현했다. 오르크는 선원들을 모아 놓고 간단히 통보했다.
 
 “내일 아침 출항한다. 부선장과 갑판장은 따라오고 당직 이외 선원은 자율시간을 가진 뒤 내일 오전 8시까지 복귀하도록.”
 “와우!”
 “만세!”
 
 오르크는 레니 뮬과 호일 반을 데리고 교역소로 찾아갔다.
 교역소는 지역 내 상회가 모인 일종의 상인길드다. 생산량을 확인하고, 상품등급을 매기고, 가격을 조정하며, 외부 상인과 중계역할을 수행한다. 교역소가 생기기 전에는 외부 상인들이 각 상회를 돌아다니며 가격과 품질을 비교하고 흥정해야 했으나, 교역소가 생긴 뒤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어랍쇼? 오르크 어르신?”
 
 오르크는 랑트 시 파우스트 상회 대표였다. 북해를 근거지로 하는 여러 상회와 연줄이 있었다. 그중 일부는 플론 시 교역소 소속이었다.
 
 “교역을 하고 싶어 왔네.”
 “어르신께서 직접요? 별일이네요.”
 
 교역소 직원은 서류 몇 장을 꺼내 책상에 늘어놓고 주판을 튕겼다.
 
 “지난 곡물 가격에서 큰 변동은 없습니다. 추가교역인 만큼 물량에 따라 시세 하락은 있겠지만······.”
 “곡물을 팔려는 것이 아니네. 무기를 좀 사고 싶은데.”
 “무기요? 안 될 것은 없지만··· 정말 의외입니다.”
 
 교역소 직원은 서류를 바꿨다. 판매품목, 생산연도, 재고량, 제작자, 상회 이름 등이 나열되어 있는 서류였다.
 
 “현재 확보된 상품과 수량은 이 정도입니다.”
 
 오르크는 서류를 확인했다. 그리고 난색을 표했다. 구체적이고 꼼꼼한 자료지만 용어가 이해되지 않았다.
 
 “팔코넷*, 세이커*, 캘버린*, 데미 캘버린*, 칼로네이드*······.”
 
 오르크는 무기 목록을 쭉 읽다가 그만뒀다.
 
 “우선 실물을 봐야겠네.”
 
 ***
 
 교역소 직원은 상회 소속 상인을 불러 무기창고로 안내하게 했다. 잠시 뒤, 오르크 일행은 큼지막한 창고에서 가득가득 쌓여 있는 총기와 대포를 보았다.
 
 “엄청나군. 1개 사단도 무장시키겠는데.”
 “저희도 처치 곤란한 상품입니다. 아이란드 왕국 내전 때 왕창 만들었는데, 전쟁이 생각보다 일찍 종결되어서 재고가 남아 버렸죠. 전쟁이 일찍 끝났다고 화낼 수도 없고, 이거 참······.”
 
 오르크는 호일 반에게 눈짓을 했다. 군대 짬밥을 먹은 것이 호일 반뿐이니 안목을 발휘해 보라는 뜻이었다. 호일 반은 어깨를 으쓱이고 대포 덮개를 걷었다.
 
 “호오, 캘버린 포군요.”
 “오! 맞습니다. 그 옆에 놈은 데미 캘버린이죠. 사거리도 우수하고 정확도도 뛰어나요.”
 “우리 배는 소형 스쿠너입니다. 캘버린 포는 크기부터 좀 부담되는군요. 칼로네이드 포는 없습니까.”
 “그렇죠! 역시 함포는 칼로네이드가 제일이죠!”
 
 상회직원은 창고 안을 뛰어다니며 덮개를 벗겼다. 레니 뮬은 ‘우리 가고 저거 다시 씌워야 할 텐데······.’ 등을 걱정했다. 3~4m 크기의 대포에 덮개를 씌우는 것도 일은 일이었다.
 호일 반은 칼로네이드 포의 상태를 확인한 후 긍정의 사인을 보냈다. 에르나 왕국군에도 납품되는 대포인 만큼 품질은 보장되었다.
 
 “그런데 얼마나 구매하실 생각입니까?”
 
 오르크는 두 동료를 보았다. 호일 반과 레니 뮬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8문!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8문! 그 이상 장착할 곳도 없어요!”
 
 상회직원은 대상인 오르크 파우스트가 꼴랑 8문 사려고 원산지까지 찾아왔냐며 조그맣게 투덜거렸지만, 못 팔면 아쉬운 것은 본인들이기에 군말 없이 칼로네이드 포 8문을 알케미스트 호로 배달 보냈다.
 
 “총기와 화약도 좀 보고 싶은데.”
 “어이구! 이쪽입니다!”
 
 오르크가 추가 구매품목을 제시하자 상회직원은 언제 인상을 찌푸렸냐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안내했다.
 
 “구식 아쿼버스부터 최신식 플린트락 머스킷까지 전부 있습니다. 골라만 보세요.”
 
 오르크는 플린트락 머스킷 한 정을 꺼냈다. 콕(Cock=공이)을 당기고 프리즌(Frizzen=화약 접시 뚜껑 겸 마찰용 부싯돌)을 밀어 작동을 확인했다. 너무 헐겁지도 너무 뻣뻣하지도 않게 잘 움직였다.
 
 “역시 플론 산 머스킷이군.”
 
 오르크는 호일 반에게 머스킷을 주었다. 호일 반은 총열 내부, 개머리판 각도 등도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상회직원은 두 손을 비비며 물었다.
 
 “얼마나 사실 겁니까?”
 “플린트락 머스킷 100정 주게.”
 “어이구! 감사합니다!”
 “잠깐만요, 선장님! 100정요?”
 
 오르크는 수표를 꺼내 금액과 서명을 했다.
 
 “가격도 괜찮고 부피도 적게 나가지 않은가. 첫 교역품으로 이만하면 나쁘지 않지. 여차하면 우리가 쓰면 되고.”
 “으으음··· 알겠어요.”
 
 알케미스트 호는 탐험선이다. 그리고 탐험선은 여건에 따라 해적선이 되기도 하고 무역선이 되기도 한다. 오르크는 탐험과 무역을 겸할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그것은 좋은 판단이었다. 오르크가 부자라고는 하지만 에르나 왕국 밖에서는 당좌수표가 통용되지 않는다. 항해하면서 소지하고 다닐 수 있는 금화에도 한계가 있다. 또한 외해에서는 금화보다 무기, 식료품, 공예품 등이 더 우대받기도 한다.
 
 “혹시 피스톨은 없나?”
 “왜 없겠습니까. 이쪽으로 오십시오.”
 
 오르크는 플린트락 피스톨 4정을 추가로 구매했다. 정확히 말하면 3정을 돈 주고 사고 1정은 공짜로 얻었다. 대량구매에 따른 서비스였다.
 오르크는 총탄, 포환, 화약도 넉넉하게 사들여 알케미스트 호로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
 
 오르크는 혁대를 조금 손봐서 홀스터(Holster=권총집) 네 개를 추가했다. 오른쪽 혁대에 두 정, 허리 뒤에 한 정, 왼쪽 혁대에 한 정을 매달았다. 오르크는 오른손잡이라 오른손으로 다루기 쉽게 배치한 것이다. 호일 반이 롱소드 위에 손을 올리고 물었다.
 
 “어르신, 무장이 너무 과한 것 아니십니까?”
 “응? 모험가라면 이 정도 무장은 하고 다니지 않나?”
 “···해적하고 모험가하고 헷갈린 모양이십니다.”
 
 오르크는 피식 웃으며 불안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넘겼다. 오르크는 자신의 영지라 할 수 있는 랑트 시를 벗어났다. ‘적’에게 위협받을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권총과 연금술 비약은 최소한의 무장이었다.
 오르크는 시험사격을 해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도시에서 총을 쏘았다가는 시티가드들이 우르르 몰려올 것이다. 레니 뮬이 지루한 듯 작게 하품을 하고 물었다.
 
 “선장님? 이 도시에서 볼일은 끝난 거예요?”
 “그래. 알케미스트 호의 시험항해 겸 무장이 목적이었네. 덤으로 시세보다 값싼 교역품도 구했지 않은가.”
 “그럼 오늘 바로 출항해도 됐겠는데요? 내일 아침까지 뭐 하죠?”
 
 오르크는 롱코트를 걸쳐서 권총과 연금술 비약을 가렸다. 그리고 쑥스러운 듯 고개를 조금 돌리고 말했다.
 
 “오늘은 자네들과 술 한잔하려고 하네. 자네들은 나의 첫 선원이자 첫 동료이지 않은가.”
 
 ***
 
 플론 시 ‘아이스&아이언’ 선술집.
 선원과 인부들이 즐겨 찾는 부둣가 선술집은 세간 이미지와 달리 조용하고 차분하다. 험한 뱃일과 힘든 선창 일을 마치고 값싼 럼 한 잔으로 피로를 푼다. 가끔 싸움이나 조촐한 파티가 벌어지기는 하지만 대체로 말없이 술잔만 기울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부터 죽을 둥 살 둥 일하는데 저녁까지 요란 떨며 술 마실 여력은 없었다.
 오르크 일행도 선술집 구석에서 조용한 술자리를 가졌다.
 
 “연금술사의 고질병이라 비웃겠지만, 난 자네들과 만난 것이 운명이라 생각하네.”
 “헤에? 진짜 저러는구나.”
 
 연금술사는 의사이며 과학자이며 신비주의자다. 연금술이란 학문 자체가 황금을 만들겠다는 공상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비주의자란 행운의 징조, 우연의 법칙, 운명의 힘 등을 맹신한다.
 물론 대중적인 이미지가 그렇다는 뜻이다. 군인은 무뚝뚝하고 간호사는 상냥하다 수준의 사회통념일 뿐이다. 어디에나 개인차가 있는 법이니까. 오르크 파우스트는 신비주의자보다 과학자에 좀 더 가까웠다. 다만, 현실을 긍정하면서 현실 너머의 낭만을 찾고자 하는 기이한 낭만주의자였다.
 
 “모험을 떠나는 날 만나게 되었으니 운명이 점지해 준 동료라 생각하네.”
 
 호일 반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말했다.
 
 “어르신과 만난 건 어제가 처음이 아닙니다.”
 “···언제부터 주변에 있었나.”
 “두 달쯤 됐습니다.”
 
 호일 반은 왕실에서 고용한 비밀 경호원 겸 감시자였다. 손님으로, 행인으로, 부랑자로 위장하여 오르크 주위를 맴돌았을 것이다.
 오르크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모험을 떠나는 날 정체를 밝히게 되었으니 운명이 점지해 준 동료라 생각하네.”
 
 레니 뮬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선장님이 생각해도 완전 억지죠?”
 “···시끄럽네.”
 “그냥 운명으로 엮고 싶은 거죠?”
 
 레니 뮬은 마녀이자 드루이드였다. 연금술사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할 이유가 없는 신비주의 계통이다. 그런 레니 뮬조차 납득하지 못하는 운명이라면 문제가 좀 있다.
 오르크가 다시 고민에 잠기자 호일 반과 레니 뮬은 지겹다는 듯 동시에 술잔을 들었다.
 
 “운명은 잘 모르지만 어르신을 계속 경호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운명이고 나발이고 그냥 만나서 반가운 걸로 하자고요!”
 
 오르크는 한숨을 쉬고 술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쳤다. 목제 맥주잔이 둔탁한 소리를 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이날 오르크는 첫 부하이자 첫 동료의 주량과 주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호일 반은 맥주 두 잔 비우고 테이블 위에 머리를 처박고 잠들었고 레니 뮬은 맥주 반 통을 비운 후 고래고래 노래 부르다가 쫓겨날 뻔했다.
 오르크는 오우거 비약을 마신 후 두 취객을 각자 방에 집어 던졌다. 호일 반은 시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고, 레니 뮬은 쉴 새 없이 잠꼬대를 중얼거렸는데 아무래도 욕설 같았다. 오르크는 취기와 비약 후유증에 어지러움을 느끼며 한숨 쉬었다.
 
 “손이 많이 가는 동료들이군.”
 
 오르크가 첫 동료에게 내린 종합적인 평가였다.
 
 
 ―――
 
 드라이 독(Dry Dock) :
 건선거(乾船渠). 선박을 정비하기 위한 조선소 시설이다. 수심 깊은 바다와 인접한 곳에 설치한다. 선박을 시설 내부로 들은 후, 수문을 닫고, 바닷물을 빼내어 선박 아랫부분이 물 밖으로 드러나게 한다. 배가 기울지 않도록 요철(凹) 모양 구조를 가졌다. 그 아래에서 수리, 보강, 청소 등의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갤리온(Galleon) :
 카락에서 발전된 대형범선. 선폭과 선체 길이 비율이 1:4 정도로 길쭉한 범선이다. 카락보다도 선수누각이 작고 선미누각이 크다. 상선으로 주로 사용되지만, 기동력이 우수하고 적재 용량이 높아 포열갑판을 개조할 경우 군함으로도 사용된다.
 
 팔코넷(Falconet) :
 15세기 개발된 소형 대포. 17세기까지도 사용되었으나 구경이 작고 사거리가 짧아 위력은 기대할 만한 수준이 안 되었다. 주로 화기를 모르는 원주민이나 야생동물을 쫓아내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세이커(Saker) :
 16세기 개발된 중형 대포. 팔코넷보다 크고 데미 캘버린보다 작다. 포신길이 2.9m, 무게 860kg, 사용 시 약 1.8kg의 흑색화약을 사용하여 약 2.4kg의 포환을 발사한다.
 
 데미 캘버린(Demi―Culverin) :
 16세기 말 개발된 중형 대포. 세이커보다 크고 캘버린보다 작다. 포신길이 3.4m, 무게 1,500kg, 사용 시 약 2.7kg의 흑색화약을 사용하여 약 3.6kg의 포환을 쏘아 낸다.
 
 캘버린(Culverin) :
 16세기~18세기 주로 사용된 대형 대포. 크기에 따라 대형, 중형, 소형으로 분류된다. (데미 캘버린은 중형 캘버린으로 분류된다) 대형 캘버린의 경우 포신길이 4.5m, 무게 2,200kg이 나가며, 약 9kg 무게의 무지막지한 포환을 사용하였다.
 
 칼로네이드(Carronade) :
 18세기~19세기 주로 사용된 중형 대포. 캘버린과 비교하면 구경은 늘리고 포신길이는 대폭 줄었다. 큰 구경과 짧은 포신으로 관통력과 탄속은 떨어지지만, 그만큼 타격력이 높아 해상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다. (크고 무거운 포환이 느리게 날아가니, 명중 시 파괴되는 면적이 넓다. 이런 원리를 타격력, 혹은 저지력이라고 표현한다. 현대에도 고의적으로 탄두면적을 넓이고 탄속을 낮춘 총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주로 테러진압용 총기)) 동일 구경 대포와 비교할 때 부피가 적게 나가고 대물파괴 능력이 뛰어나 함포로 애용되었다.
 
 
 # 3장. 연금술사의 항해일지
 
 플론 시 북부 25마일 지점. 공해(公海).
 오르크는 알케미스트 호 고물 난간에 기대어서 주갑판을 구경했다. 레니 뮬과 호일 반이 갑판 위를 바쁘게 돌아다니며 명령했다.
 
 “장전이 끝나면 바로 보고해!”
 “제1포 준비 완료!”
 “제2포 준비 완료!”
 “OK! Fire!”
 
 선원은 몸을 낮추고 방아쇠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부싯돌이 튀면서 화약이 점화되고 32파운드(약 15kg)나 되는 거대한 포환이 창공으로 쏘아졌다. 포환은 가상의 표적을 격파한 후 수면 위로 떨어졌다. 쿠어―악! 개울물에 큼지막한 돌을 집어 던진 것처럼 거센 물보라가 일어났다.
 
 “좋아! 다음 준비해!”
 
 알케미스트 호 선원은 3인 1조로 교대하며 포술 훈련을 진행했다. 포환도 화약도 넉넉했기에 아낌없이 실사격했다. 결국 대포가 과열되어서야 훈련을 끝냈다. 호일 반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졌다.
 
 “좌측포를 써도 되는데······.”
 “악! 악악!”
 
 호밀 반의 제안은 선원들의 거친 항의로 무마되었다. 오르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칼로네이드 포를 선택한 걸 잘한 것 같군.”
 “사거리와 관통력은 24파운드 캘버린 포가 낫지만, 파괴력과 살상능력은 32파운드 칼로네이드 포가 더 우수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피가 덜 나가죠.”
 
 칼로네이드 포는 짧고 두꺼워서 배불뚝이 대포 같았다. 외형은 다소 볼품없지만 위력과 실용성 모두 우수했다.
 
 “전투훈련은 이 정도면 되었고, 슬슬 출발하지.”
 “aye―aye, sir!*”
 
 알케미스트 호 선원들은 쉴 시간도 안 준다며 잠시 투덜거렸지만 정말 잠시였을 뿐이다. 돛을 모두 펴고 랑트 시로 귀항하기 시작했다.
 날씨는 화창하고 바람은 적당하며 선원은 활기찼다. 오르크는 첫 항해가 성공적이라 결론 내렸다.
 
 ***
 
 알케미스트 호 선장실.
 오르크는 책상 위에 양가죽 표지로 된 책 두 권을 꺼내 놓았다. 아무 내용도 적혀 있지 않은 빈 공책이다. 그러나 용도는 정해져 있다. 하나는 연금술 연구일지, 하나는 항해일지다.
 오르크는 펜에 잉크를 묻히고 항해일지 첫 장에 적을 문구를 고민했다. 사소해 보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고민이다. 첫 문구가 선박의 목적과 선장의 교양 수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신앙심이 독실한 선장은 첫 장에 성경 문구를 써 넣고, 문학적 소양이 뛰어난 선장은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시를 써 넣는다고 한다. 오르크에게는 둘 다 해당하지 않는다.
 
 “음··· 흐음······.”
 
 오르크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무작정 펜을 대었다.
 
 연금술사의 항해일지
 
 ···써 놓고 보니 무척 초라하다.
 오르크는 자신에게 문장력이 없음을 한탄한 후 2페이지를 작성해 나갔다.
 
 신력 1605년 155일. 랑트 시. 날씨 맑음. 바람 남서풍.
 투 마스트 스쿠너. 함명 알케미스트 호. 전장 20야드. 배수량 35만 파운드. 무장 칼로네이드 포 8문. 선장 오르크 파우스트. 부선장 레니 뮬. 갑판장 호일 반. 에르나 왕국 랑트 시에서 첫 출항하다. 플론 시로 시범 항해 실시하다.
 
 항해 중 특이사항은 없지만, 첫 일지인 만큼 선박 정보와 선원에 대해서 기록할 것이 많았다. 알케미스트 호 제원. 시설. 무장. 화물. 간부 및 선원 인적사항. 등등. 기록은 꼼꼼하게 남겨야 한다.
 오르크는 사흘 치 항해일지를 정리한 후 잠시 기지개를 켰다. 회중시계를 열어 보니 자정이 조금 지나 있었다. 오르크는 옷걸이에 걸어 둔 롱코트를 걸치고 선장실 밖으로 나갔다. 선실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리고 벽 너머로 파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르크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하며 갑판 위로 올라갔다. 타륜을 잡은 당직 선원이 모자를 살짝 벗으며 인사했다.
 오르크는 이물로 향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측으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가 별의 향연이 끝나는 수평선까지 이어져 있고, 좌측으로는 울퉁불퉁한 대지가 검은 장막처럼 늘어서 있었다.
 
 “연금술사의 항해일지라.”
 
 오르크는 피식 웃었다. 오르크는 11척의 선단을 보유한 파우스트 상회 대표이다. 그러나 선단은 투자금으로 운영되는 상회자산일 뿐 진정한 의미로 ‘오르크의 배’는 아니었다.
 사실 오르크는 바다와 인연이 없었다. 진수식에 참석하거나 여객선을 타 본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다 처음으로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나만의 배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도 유람선이 아닌 무장한 탐험선이다.
 혹자는 오르크가 노망났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부와 명예를 모두 가졌으면서 무엇이 아쉬워 위험천만한 모험을 떠나느냐고 말이다. 그 대답은 단순했다.
 
 “연금술사와 항해. 제법 어울리지 않나?”
 
 오르크는 연금술사였다.
 철과 구리로 황금을 만들고자 했던 욕심 많고 무모한 탐험가의 후예였다.
 
 ***
 
 랑트 시 부두.
 
 “알케미스트 호― 알케미스트 호― 4번 부두 입항―”
 
 랑트 시 등대지기가 종을 두드리며 알케미스트 호의 입항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무장한 전함도 아니고 거대한 상선도 아닌, 소형 스쿠너의 입항은 별다른 관심거리가 못 되었다. 연금술사 오르크 파우스트의 개인 선박이란 것을 아는 극소수 사람만 눈길 한번 주었을 뿐이다.
 오르크는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9시 20분이 막 지나고 있었다. 선원들에게 짤막하게 명령했다.
 
 “저녁 6시 출항하겠네.”
 “우우― 우―”
 
 선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항의를 보냈다. 이틀짜리 단거리 항해였고, 플론 시에서 하루 휴식하였기에 피로가 쌓이거나 향수병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술 마시고 사창가 기웃거릴 시간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한 의례적인 항의였다.
 
 “그 시간까지 승선하지 않으면 무단이탈로 간주하겠네.”
 “선장님 말씀 안 들려? 해산해!”
 
 선원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지엄한 선장의 명령을 복창한 후 흩어졌다. 불만이 있어도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오르크가 주는 급료는 그만큼 셌다.
 오르크는 당직 선원 두 명 이외에는 모두 내보낸 후 선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뒤, 레니 뮬이 선장실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선장님? 여기 계속 계실 건가요?”
 “그러네만.”
 “자택이나 상회에는 안 가 봐도 돼요?”
 “일을 위임해 놓고 자주 들락거리면 좋지 못하지. 권위 문제도 있고, 신뢰 문제도 있고.”
 “아? 그런가요? 그런데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오르크는 연금술 실험대에서 막사발로 잎사귀 비슷한 것을 빻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치료약을 제조하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치료용으로 쓰기는 꺼려지는 물건들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새까만 즙이 흐르는 풀잎이나 부글부글 끓는 피 등이었다.
 
 “연금술 비약을 만드는 중일세.”
 “헤에? 이렇게 만드는구나.”
 
 오르크는 막자를 잠시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비약 제조법은 연금술사의 비의(秘儀)일세.”
 “아? 아앗! 죄송합니다!”
 
 레니 뮬도 마법사인지라 비외부전의 비의(秘儀)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비의를 훔쳐보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사생결단이 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냥 해 본 말일세. 자네는 연금술사도 아니고, 이 제조법은 연금술사 학회를 통해 이미 공개한 것이니.”
 
 오르크는 약초즙과 끓인 피를 일대일로 배합하여 알코올램프 위에 올렸다. 액체가 보라색으로 변하더니 은은하게 달콤한 냄새를 내기 시작했다.
 
 “무슨 비약인가요?”
 “오우거 비약일세.”
 “아하! 힘이 엄청 세지는 비약이죠?”
 “속된 말로 가성비의 비약이라고도 하지.”
 
 오우거 비약은 제조가 쉽고 값이 저렴하여―어디까지나 비약치고 저렴하다는 뜻이다―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제조자 솜씨와 재료상태에 따라 효능이 천차만별이고, 심할 경우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자타공인 최고의 연금술사 오르크 파우스트의 오우거 비약은 AAA급으로 분류될 만큼 뛰어난 효능을 자랑한다. 그 증거로 오르크 본인 역시 즐겨 사용하고 있었다.
 오르크는 앰플을 꺼내 눈금에 맞춰 비약을 나눠 담았다. 그리고 헝겊으로 앰플 입구를 막고 밀랍으로 단단히 봉인했다. 오우거 비약 3개가 뚝딱 만들어졌다.
 
 ‘저거 하나가 2천 페닝이지?’
 
 레니 뮬은 눈을 반짝였다. 저 작은 약병 하나가 서민의 한 달 생활비였다. 오르크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느끼고 앰플을 슬그머니 롱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자네는 여기서 뭐 하나?”
 “저도 갈 곳이 없어서··· 집도 내놨고 친한 사람도 없고···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전 포비아 왕국 출신이거든요.”
 
 오르크는 연금술 도구를 정리하고 책을 뺐다. 그러는 중에도 레니 뮬은 선장실 앞에서 꼼지락거렸다. 오르크는 그만 나가 보라는 눈짓도 하고 할 말이 있으면 하라는 제스처도 취했지만 꼼짝하지 않았다. 오르크는 책을 덮고 작게 한숨지었다.
 
 “뭐가 문제인가?”
 “아니. 그냥. 뭐 시키실 거 없나 해서요.”
 “없네.”
 “정말요? 저 부선장인데?”
 
 오르크는 롱 코트를 손에 들고 일어났다.
 
 “···나가지.”
 “어디를요?”
 “부선장이 심심해 죽으려고 하니 일을 줘야지.”
 
 ***
 
 오르크와 레니 뮬이 갑판으로 올라오자 대포에 기대어 럼을 홀짝이던 호일 반이 자연스럽게 따라 붙었다. 오르크는 호일 반을 힐끔 보고 별말 하지 않았다. 알케미스트 호의 갑판장인 동시에 에르나 왕실의 고용인이기도 했으니까.
 오르크, 레니 뮬, 호일 반 3인은 랑트 시 시장을 돌았다. 거침없이 걸어가지만 목적지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포목점에서 옷감을 살펴보고, 정육점에서 갓 잡은 돼지고기를 구경하고, 과일가게에서 살구 등을 맛보고는 그냥 나왔다. 레니 뮬이 지루함을 못 참고 물었다.
 
 “뭘 사려는 건데요?”
 “뭘 사려는 것이 아닐세. 뭘 살까 고민하는 것이지.”
 
 오르크는 시장 구석구석을 살피며 말했다.
 
 “랑트 시 특산품은 산악목장 양모로 만든 모직물이지. 허나 모직물 판로는 고정되어 있는 데다 알케미스트 호처럼 작은 배로 소량 운송해서는 큰 수익을 내기 힘들어.”
 “어? 그런가요?”
 “이제 자네가 할 일을 알겠지?”
 “예··· 예?”
 “소량으로도 수익을 낼 수 있고, 장기보관이 가능하며, 위험부담이 가급적 적은 교역품을 찾게.”
 “악! 그런 물건이 있으면 너도나도 무역하죠!”
 “그거 좋군. 너도나도란 말에 걸맞게 우리도 시작하지.”
 
 오르크는 뒷짐 쥐고 한발 물러났다. 레니 뮬은 큰 소리로 따지고,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고, 안 들리게 욕을 한 다음 상품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레니 뮬이 떠난 뒤, 호일 반은 롱소드를 조금 기울이며 물었다.
 
 “정답이 뭡니까?”
 “응?”
 “어르신이 말씀한 조건에 맞는 상품 말입니다. 어르신도 모르는 것을 부선장에게 찾으라 하진 않았을 테고, 어르신께서는 이미 생각해 둔 상품이 있으시겠죠.”
 
 오르크는 빙그레 웃었다.
 
 “향수네.”
 “향수?”
 “랑트 시는 모직물 사업만큼이나 향수 사업도 발전했어. 연금술사 학회 영향이지*. 추출하고 분석하고 조합하는 것이 전문이니까.”
 
 호일 반은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향수는 단가가 높은 만큼 물량이 적어도 수익이 많이 남는다. 그리고 밀봉만 잘 되어 있으면 장기보관이 가능하다.
 
 “부선장이 얼마 만에 숙제를 끝내는지 두고 보지. 어쩌면 향수보다 더 유용한 상품을 찾아낼지도 모르고.”
 
 오르크는 시장을 가로질러 연금술사 학회로 향했다.
 유라피아 대륙의 여러 연금술사 학회 중에서도 최고봉으로 꼽히는 랑트 학회였다. 옛 성문을 연상시키는 으리으리한 대문을 통과하자 황금 평야 일부를 떼어 옮겨 놓은 듯한 드넓은 정원이 나타났다. 정원을 가로지르니 아기천사가 오줌을 누는 분수대가 보였다. 그리고 아기천사상 너머로 붉은 벽돌과 대리석을 품위 있게 배열한 랑트 학회 본당이 보였다.
 오르크가 본당으로 들어서자 숙련 연금술사부터 어린 도제까지 반갑게 인사해 왔다.
 
 “오오! 오랜만에 뵙는군요.”
 “안녕하세요, 어르신!”
 
 오르크는 이름을 아는 몇몇에게 인사를 건네고, 이름을 모르는 대다수에게는 고개를 주억거려주었다.
 호일 반은 건물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신기해했다. 건물 외형은 어느 귀족 가문 저택과 비슷하지만, 이해 불가능한 단어들로 점철된 보고서와 정체가 의심스러운 동식물 파편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다. 오르크가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지식을 나누는 학회 역할도 수행하지만 비약과 재료를 공급하는 상회 역할도 수행하네.”
 “그렇군요.”
 
 오르크는 학회지를 조금 챙기고 건물 지하창구로 내려갔다. 지하는 서늘하고 어두컴컴하며 복잡했다. 계단 옆 카운터에는 두 남녀 판매원이 앉아 있었다. 그중 젊은 여자가 반갑게 인사했다.
 
 “오르크 어르신? 오랜만에 오셨네요?”
 “오거 혈액, 하늘버섯, 만드라고라 뿌리를 조금 구하고 싶은데.”
 “앗! 잠깐만요. 오거 혈액··· 하늘버섯······.”
 
 여자 판매원은 보유품목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품목이 많은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 오르크는 학회지를 훑어보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바로 그때, 창고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오르크? 오르크 파우스트··· 맞죠?”
 
 오르크는 고개를 돌려 상대를 보았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지하에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블라우스와 장갑, 그리고 새하얀 머리카락이었다. 지적이고 인자하게 느껴지는 노(老)부인이다.
 
 “제니?”
 
 ***
 
 오르크는 학술지를 치우고 소매를 다듬고 호의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상대를 보았다. 예의 바르고 침착한 동작이다. 허나 오르크의 속마음은 꽤 복잡했다. 상대는 오르크의 속마음을 정확하게 짚었다.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꽤나 놀랐나 보군요.”
 “으음······.”
 
 제니라 불린 노부인은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참으로 귀부인다운 동작이었다. 호일 반은 두 남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하여간 옛날 사람들이란.’
 
 오르크는 겉보기에 20살처럼 보여서 할머니와 손자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옛 연인, 혹은 이루지 못한 첫사랑의 느낌이었다.
 
 “당신은 옛날 그대로군요.”
 “당신도 변함이 없소.”
 “호호. 그럴 리가요. 전 완전히 늙었는걸요.”
 
 오르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넥타르로 젊음을 가장하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었다.
 
 “모험을 떠나신다면서요?”
 “···그렇소.”
 
 오르크는 부끄러워했다. 제니의 차분한 목소리로 ‘모험’이란 단어를 듣자 마치 철부지 장난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제니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럼 제 작은 부탁 하나를 들어주시겠어요?”
 
 ***
 
 오르크는 연금술 재료를 구매하여 연금술사 학회를 나왔다. 호일 반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호일 반은 시장을 벗어나 항구로 나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은 빠르고 입은 무겁다는 왕실기사다운 태도였다. 결국 오르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 사제(師弟)라네.”
 “사제라면, 어르신과 함께 연금술을 배운 분입니까?”
 
 오르크는 멈칫했다. 그리고 쌓인 게 많은 목소리로 다시 설명했다.
 
 “···사실 ‘배웠다’고 말하기 힘드네. 그 시절은 지금과 다르게 제대로 된 도제교육이 이뤄지지 않았으니까. 스승은 제자에게도 비의를 숨기지. 제자보다 조수나 심부름꾼에 가까워.”
 “아, 예.”
 
 오르크는 수평선 저 너머를 보면 회상에 잠겼다.
 싱그러운 10대 시절. 몸은 굶주리고 핍박받았지만 꿈과 희망으로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던 시절. 그 추억 속에 갈색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깡충깡충 뛰는 어린 소녀가 있었다.
 
 “사랑은 아니네. 연모는 더더욱 아니지. 그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친구보다는 가깝고 연인보다는 먼?”
 “오호. 그거 괜찮은 표현이군.”
 
 오르크는 가볍게 박수를 쳤다. 그리고 제니와의 일화를 무덤덤하게 늘어놓았다. 스승님의 연금술서를 함께 훔쳐본 일. 정체불명 비약을 만들어 먹이는 바람에 밤새 딸꾹질에 시달린 일. 귀족 청년에게 고백받아 질투한 일 등등. 우습고 황당한 일이 대부분이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즐거운 추억이었다.
 호일 반은 지겹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노부인의 부탁을 들어줄 겁니까?”
 
 오르크는 호일 반을 잠시 노려본 후 말했다.
 
 “그래야지. 어려운 부탁도 아니니까.”
 
 오르크는 알케미스트 호 선장실로 돌아와 연금술 재료를 정리하고 느긋하게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않았다. 책장을 다섯 장쯤 넘겼을 때일까.
 
 “선장님! 선장님! 선장니임!”
 
 밝고 쾌활한 목소리가 갑판 위에서 선실 계단으로 이어졌다. 오르크는 한숨을 쉬고 책을 덮었다.
 
 “빨리도 왔군.”
 
 오르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오르크는 인상을 찌푸렸다.
 
 “선장에 대한 존경이나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거론하지 않겠지만, 문화인으로서 노크 정도는 하는 것이 어떤가?”
 “앗! 죄송합니다!”
 
 밝고 쾌활한 목소리는 우렁차게 사과하고 선장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입으로 노크 소리를 내었다.
 
 “똑똑! 레니 뮬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게.”
 
 레니 뮬은 싱글벙글 웃으며 선장실로 들어왔다. 만점 답안지를 자랑하는 우등생처럼 손에 든 꾸러미를 내밀었다.
 
 “선장님이 찾으신 상품입니다!”
 
 오르크는 꾸러미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크고 작은 유리병이 빼곡히 들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랑트 시 명품 향수였다.
 오르크는 빙긋 웃으며 합격점을 주었다.
 
 “출항시간이 얼마 안 남았네. 전표를 끊어 줄 테니 금액에 맞춰 구매하도록.”
 “aye, sir!”
 
 레니 뮬은 어설프게 경례하고 다시 선장실을 나갔다.
 오르크는 안도하고 책을 들었다. 그러나 본인이 말했듯 출항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땡― 땡― 땡―
 
 태양이 바다 너머로 슬금슬금 숨어드는 시간. 알케미스트 호는 종을 치며 출항 사실을 알렸다.
 
 “어두워지기 전에 항구를 벗어나야 한다! 서둘러!”
 “그러니까 내일 아침 출발하면 되잖아요.”
 “내 말이 그 말이지.”
 
 알케미스트 호 선원들은 투덜거리면서도 각자 할 일을 했다. 수기를 흔들고, 닻을 올리고, 돛 줄을 당겼다. 알케미스트 호의 크고 작은 돛은 바람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곧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레니 뮬은 선원과 선체 모두 이상 없음을 확인한 후 갑판 위로 올라온 오르크에게 물었다.
 
 “선장님. 항로가 어떻게 됩니까?”
 “북서쪽으로 유지하게.”
 
 레니 뮬, 호일 반, 그 외 오르크 근처 선원들 머릿속에 일제히 항해도가 그려졌다. 랑트 시 북서쪽이면···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잉그비아 왕국인데?”
 
 ***
 
 알케미스트 호는 랑트 시를 벗어나 북서쪽으로 나아갔다. 섬 하나 보이지 않는 공해를 지나 유라피아 대륙 북단 섬나라 잉그비아 왕국 해안에 도착했다. 잉그비아 왕국기를 단 선박이 드문드문 보였다. 호일 반을 비롯한 몇몇 선원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에르나 왕국과 잉그비아 왕국은 대대로 앙숙이었다. 기술과 문화교류도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정치와 군사적 충돌도 있었다. 수백 년 전 이야기는 할 것도 없다. 불과 20여 년 전 잉그리아 남쪽 해안 폴라 곶에서 대규모 해전을 치렀다. 에르나 왕국이 승리하기는 했으나, 양쪽 모두 피해가 막대했다.
 조타수 알프레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뱃놈에게 국경은 없다지만, 에르나 왕국기를 달고 입항하면 썩 좋은 대접은 못 받을 텐데요.”
 “항구에는 볼 일이 없네. 폴라 곶으로 가지.”
 “폴라 곶? 알겠습니다.”
 
 북해의 관문이라 불리는 폴리모 해협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반나절만 돌아가면 되었다.
 알케미스트 호는 미끄러지듯 서쪽으로 나아갔다.
 몇 시간 뒤, 잉그비아 남쪽 해안에서 뿔처럼 돋아난 곳이 보였다.
 레니 뮬, 호일 반을 비롯해 한가한 선원들은 고물에 서서 폴라 곶을 구경했다. 그중 나이가 어린 견습 선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가 중요한 곳인가요?”
 “폴리모 해협을 장악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야. 이 자리를 장악하기 위해 잉그비아, 에르나, 포비아 3개국이 수없이 싸웠지. 20년 전에도 그러했고.”
 
 어린 견습 선원에게는 20년 전이 200년 전과 동급으로 들렸기에 고개를 한번 갸웃거리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일을 기억하는 장년 나이의 숙련 선원들은 침울해했다.
 20대 초반 레니 뮬 역시 기억하는 바는 많지 않았지만, 해상학교에서 폴라 해전에 관해 심도 있게 배웠기에 알고 있었다.
 폴리모 해협의 북해의 해상관문에 해당한다. 따라서 폴리모 해협을 장악하는 국가가 북해를 장악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폴리모 해협은 정통 해양강국 잉그비아 왕국의 영해였으나, 외해 진출을 꾀하는 에르나 왕국 입장에서는 반드시 빼앗아야 할 요지였다.
 전쟁의 시작은 다분히 계획적이면서 의도적이었다.
 폴리모 해협 인근에서 에르나 왕국 상선이 잉그비아 왕국 사략해적*에게 나포된다. 내해에서 사략행위는 흔하지 않거니와, 설령 사략선과 조우한다 해도 전시가 아닌 이상 상납금만 지불하면 풀어 주는 것이 보편적이다(전시에는 전쟁물자 차단을 위해 화물약탈, 혹은 선박 자체를 침몰시킨다). 그러나 이번만은 조금 달랐다.
 에르나 왕국 선주는 상납금을 지불했음에도 무참히 살해당했다. 물론, 사략해적도 해적인 만큼 무자비한 강탈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살해당한 선주가 국왕의 사촌 동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에르나 왕국은 즉각 군사행동에 돌입했다. 사죄와 피해보상 요구는 무의미했다. 에르나 왕국이 원하는 보상은 잉그비아 왕국이 결코 내주지 않을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에르나 왕국은 폴리모 해협으로 함대를 파견할 명분으로 삼았다.
 북해의 찬바람이 움츠러드는 6월 중순. 에르나 왕국의 75척 전함과 잉그비아 왕국의 67척 전함이 폴라 곶 앞바다에서 격돌했다.
 
 “수백 문의 대포가 불을 토하고 수천 명의 병사가 선상 위로 뛰어들었는데··· 결론만 말하면 에르나 왕국이 승리했어. 폴라 해전을 계기로 에르나 왕국은 북해 물류수송을 장악하고 외해 진출에 성공했어.”
 “아니. 정확히는 포비아 왕국의 승리지.”
 
 오르크가 선수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선원들은 모자를 가볍게 벗으며 인사했다. 모자를 쓰지 않은 견습 선원이 눈을 반짝이며 질문했다.
 
 “포비아 왕국이요? 왜요?”
 “그 사건은 처음부터 포비아 왕국이 유도한 것이었으니까.”
 
 폴라 해전 이후 7년 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3년 전 밝혀진 사실로는, 에르나 왕국 상선을 공격한 사략선은 잉그비아 왕국이 아니라 포비아 왕국의 위장선이었다.
 외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잉그비아 왕국을 억제하고, 군사력 강화에 열을 올리는 에르나 왕국을 견제하기 위한 술수였다.
 결과적으로 잉그비아 왕국은 외해 영향력을 잃었고, 에르나 왕국이 군사를 보충하기 위해 숨 고르기 하는 사이, 포비아 왕국은 외해 식민지를 대거 장악했다. 손 안 대고 코 푼 포비아 왕국이 진정한 승리자였다.
 
 “포비아 왕국은 자신도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었어. 에르나 왕국은 외해 진출에 성공했으니 크게 불만을 가지지 않았고. 잉그비아 왕국만 미치고 팔짝 뛸 일이지.”
 
 오르크는 폴라 해전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코트 안에서 생화(生花) 한 송이를 꺼냈다. 선원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역사책에는 나오지 않은 이야기도 많다네. 출세를 위해 야심 차게 배에 올랐던 어린 사관. 전쟁보다 손주가 그리웠던 늙은 부사관. 그리고 병약한 아내가 걱정되어 전역을 고민하던 젊은 장교······.”
 
 오르크는 폴라 곶 앞바다로 꽃을 던졌다.
 
 ‘자네가 지킨 조국과 아내는 모두 잘 지내네. 걱정하지 말고 푹 쉬게나.’
 
 오르크는 고개를 숙이고 묵념했다. 그 순간 바람이 멈췄다.
 잔잔한 갈매기 소리도, 묵직한 파도 소리도 잦아들었다. 짧지 않은 시간, 폴라 곶 앞바다는 깊고 깊은 침묵에 잠겼다.
 
 “아······!”
 
 어린 견습 선원의 뒤늦은 감탄사가 침묵을 깨트렸다.
 바람이 다시 불고, 갈매기가 다시 울고, 파도가 다시 쳤다. 호일 반은 안도했고, 레니 뮬은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오르크는 어느 쪽 아니었다. 대단치 않아도 꼭 해야 하는 일, 그러니까 식후 설거지를 마친 듯한 기분으로 활기차게 말했다.
 
 “그럼 출발하세나. 조타수, 남서항로로 잡게. 폴리모 해협을 통과해 서해로 나갈 테니.”
 
 
 ―――
 
 방아쇠줄 :
 대포 점화장치와 연결된 노끈. 대포를 빠르고 정확하게 발사하기 위해 발명된 도구다.
 초기 대포는 심지를 이용하여 점화하였는데, 심지가 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만큼 빠르고 정확한 발사가 어려웠다. 점화구(화약접시)에 직접 불을 붙이는 방법도 사용하였으나 사고 위험이 높았다. 그래서 개량된 방법이 부싯돌을 이용한 방아쇠줄이다.
 기본적인 점화방법은 플린트락 머스킷과 동일하다. 포신 안에 부싯돌로 된 점화장치를 설치하며 노끈을 당겨 부싯돌을 움직여서 점화한다.
 
 aye―aye, sir :
 옛 해군이나 뱃사람이 사용한 지시이행 긍정어. Yes, sir과 기본의미는 같다. (영화 ‘캐리비언의 해적’, ‘마스터 앤 커맨더’ 등을 보면 자주 나온다) 지시거부는 Nay라고 한다.
 현대에는 고어로 취급하여 잘 쓰이지 않으나, 의회투표나 혼인서약 등 격식을 갖추어 분명한 의사표명을 하는 자리에서 한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보통은 aye라고 말하지만, 긍정의미를 강조할 때는 반복하여 aye, aye라고도 한다.
 aye=나는 이해했다. (나는 긍정한다)
 aye, aye=나는 이해했고, 그것을 즉시 수행하겠다. (강조)
 
 연금술과 향수 :
 현대적 의미의 향수는 연금술의 영향으로 탄생하였다. 옛 향수는 물이나 기름에 향료를 섞어 몸에 바르거나 작은 주머니에 향료를 넣어 다니는 방식이었으나, 연금술사가 알코올을 발견하면서 몸에 뿌릴 수 있는 향수가 등장하게 된다. 알코올은 용해력이 뛰어나 향료를 쉽게 녹이고, 휘발성이 높아 신체나 옷에 향기만 남겨 놓을 수 있다.
 
 알코올의 간략한 역사 :
 10세기경 아라비아 연금술사가 포도주 증류 과정에서 알코올을 발견한다(알코올은 아랍어다). 알코올은 화장수와 부패방지제로 사용되다가 유럽으로 전해지면서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13세기 스페인 연금술사가 포도주를 증류한 최초의 브랜디 ‘아쿠아 비테’를 만들고, 14세기 헝가리에서 알코올에 로즈마리 잔여물을 첨가한 최초의 향수 ‘헝가리 워터’를 만든다. 이후로도 알코올은 음료, 연료, 사치품, 의료품 등 다방면으로 이용되며 인류에게 꼭 필요한 물품으로 자리한다.
 
 사략해적 :
 국가로부터 권리를 인정받은 국가공인 해적. 17세 전후 유럽 국가들은 재정 확보와 해군력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사략 특허장’이란 것을 발부했다. 사략 특허란 요약하면 ‘자유로이 무장하고 자유로이 군사행동 하라’로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적국 상선을 합법적으로 털어라’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략해적은 평시에는 적대국 상선을 약탈하여 적대국 상업에 타격을 입히고, 전시에는 군선으로 편입되어 전쟁 임무를 수행한다. 사략해적은 국가에 재화를 가져다주는 자금원이자 유사시 즉각 동원 가능한 해군력인 셈이다. 가장 유명한 사략해적으로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는 데 크게 일조하였던 ‘프렌시스 드레이크’가 있다.
 사략해적은 17~18세기 활발히 활동하였으나 1856년 파리선언으로 대다수 나라가 사략 제도를 폐지하였고, 이후 1907년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서 국제법으로 금지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진다.
 
 <『연금술사의 항해일지』 1-2권에 계속>

댓글(11)

eh*********    
중간중간 각주 넣은것만 빼면 정말 완벽하게 제 취향인 글이네. 선작 박고 달립니다.
2018.10.24 20:28
겨울제비    
설명이 너무 많아서 보기 좀 힘들지만 요즘 나오는 것들에 비하면 괜찮네요
2018.10.29 01:21
미려한    
설명때문에 못 읽겠네요.
2018.11.01 18:04
김영한    
오 재미땃
2018.11.06 00:22
김영한    
들은 후 들인 후
2018.11.06 00:32
김영한    
해 본 해본
2018.11.06 00:41
어머님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페인 ..수습항해학교 대항해시대가 그리워지네요 ^^
2019.02.03 19:26
디어    
글 중간중간에 설명을 왜 이리 넣어 놨나요? 글 몰입을 다 해치는데 . 요즘 저런 설명 다 읽어 가면서 보는 사람이 몇명이나 된다고 ...
2019.03.04 23:05
MR.Kang.    
설명이 좀 많긴한데 약간 거창한 느낌도 잇으면서... 섬세하기도 하고 설명은 대강 읽으면서 넘겨야지...
2019.03.06 14:01
k4****************    
먼치킨은 아님?
2020.04.05 20:11
0 / 3000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