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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천극무예록 [E]

천극무예록 1권 (1)

2018.09.07 조회 1,683 추천 14


 #서장
 
 
 북경의 북쪽 외곽에 있는 진가촌陳家村은 이십여 호의 인가만이 자리한 작은 산골 마을이다.
 평소 관리라고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진가촌에 관복을 입은 두 명의 관리와 일단의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조금 전의 일이었다.
 다른 때라면 무슨 일인가 궁금할 법도 했지만 진가촌 주민들은 그들이 궁인으로 쓸 아이들을 데려가려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궁금함보다는 자식들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두 명의 관리 중 상급자로 보이는 우측의 관리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관리 특유의 거드름을 피우며 앞으로 나선 관리는 잔뜩 겁을 먹은 채 전면에 모여 있는 진가촌의 주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황제 폐하께서 성은을 내려 무지한 그대들의 자식들을 궁인으로 황궁에 입궁시키고자 하시니 십오 세 미만의 남아와 십 세 미만의 여아를 지금 이곳으로 데려오기 바란다. 이것은 대명의 하늘이신 황제 폐하를 위한 일이니 지체 없이 행해야 할 것이다.”
 관리의 말이 끝나자 주민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짐작은 했지만 난데없이 쳐들어와서 자식들을 내놓으라고 하니 그들로서는 심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는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가 이루어진 탓이었다. 북경으로 황도를 옮긴 후 황궁은 새로운 인력이 필요했고, 지금 진가촌의 상황은 그것을 위한 것이었다.
 상부에서는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장려하고 있었지만 실무를 담당하는 하위 관리들은 대부분 권력을 이용해 강제적으로 궁인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것이 더욱 빠르고 편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속사정과는 상관없이 강제로 자식들을 빼앗기게 생긴 진가촌 주민들은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것 같았다.
 황궁으로 들어가 호의호식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드문 일이었고 한번 황궁에 들어간 자식은 다시는 볼 수 없으니 부모로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어떻게 부모의 허락도 없이 자식을 데려간단 말입니까?”
 모여 있던 주민들 중 한 명이 용기를 내어 관리에게 물었다. 그는 진씨 일가가 모여서 만든 진가촌에서 가장 인망이 두터운 진충이라는 젊은이였다.
 그의 아내는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게 소중하게 얻은 자식을 잃게 생겼으니, 상대가 관리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선 것이다.
 그의 말에 주민들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관리가 무서워 차마 말은 못 하고 있었지만, 말을 꺼낸 사내와 같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갖은 품은 다 잡고 말을 꺼낸 관리는 전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네놈이 감히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내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으나 황제 폐하께서 그런 터무니없는 명을 내리지 않으셨음은 알고 있소.”
 “뭐라? 네깟 놈이 황제 폐하의 뜻을 어찌 안다는 것이냐?”
 “본인은 비록 촌민이나 글을 알아먹을 정도의 머리는 가지고 있소. 내 북경성 북문에 붙은 벽보를 읽었는데, 원하는 사람에 한해서만 모집하라는 명이었소. 아니 그렇소?”
 진충이 논리 정연하게 말했다.
 일자무식인 다른 촌민들과 달리 그는 어느 정도 글을 읽을 수 있었고, 일전에 북경성에 나갔다가 궁인을 모집한다는 벽보를 보았던 것이다.
 진충의 말에 진가촌의 촌민들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관리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험악해졌다. 그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뒤쪽에 시립한 병사들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잔뜩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저놈을 죽지 않을 만큼 쳐라! 감히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하려 들다니.”
 “누가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 크윽!”
 황명을 거역했다는 관리의 말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반박하려던 진충은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관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진충을 무자비하게 때리기 시작한 것이다. 병사들은 창대를 이용해 진충의 머리며 어깨를 가리지 않고 타격했다.
 퍼억! 퍼억!
 “크윽! 아악!”
 매질을 견디지 못한 진충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나 매질은 멈추지 않았다. 관리의 명이 없고서는 병사들도 매질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창을 거두는 대신 이번에는 발로 밟아 대기 시작했다. 진충이 신음을 지르며 몸을 최대한 움츠렸다. 본능적으로 취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때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조그만 아이가 튀어나왔다. 이제 여덟 살이나 되었을 법한 소년은 바로 진충의 외아들로, 진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만 때려요! 우리 아버지 그만 때리란 말이에요!”
 진유가 병사들에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그러나 병사들의 발길질은 계속되었다.
 “그만 때리란 말이에요!”
 진유가 병사 중 한 명을 힘껏 밀었지만, 병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 손을 한번 내저어 진유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아악!”
 진유가 바닥에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진유야! 이놈들아! 네놈들은 처자식도 없단 말이냐?”
 몸을 움츠리며 충격을 줄이던 진충이 아들의 비명에 눈을 번뜩이며 벌떡 일어났다. 진충의 체격은 군병들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눈을 번뜩이자 군병들이 움찔거렸다. 그들의 행동이 아주 잠깐 멈춘 사이 진충은 아들을 밀어 넘어트린 병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소중한 아들을 막무가내로 데려간다는 데다 상처까지 입히자 더 이상 참지 못한 것이다.
 군병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창을 움직였다. 반복된 훈련의 결과로 무의식중에 창을 찔러 넣은 것이다.
 군병은 자신의 창이 진충의 가슴을 향함을 깨닫고 뒤늦게 멈추려 했지만, 달려들던 진충의 움직임과 맞물리며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푸욱.
 “크윽.”
 군병의 창이 진충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입에서 비명이 토해져 나왔다.
 “아버지!”
 진유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그와 함께 진유가 진충을 향해 달려갔다.
 푸악.
 군병의 창이 빠져나오는 순간 진충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창날을 타고 딸려 나왔다. 그의 몸이 고통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진······유······야!”
 진충은 힘겹게 고개 돌려 진유를 찾았다.
 쓰러지려는 진충을 진유가 부여잡았다.
 하지만 그의 힘은 진충의 건장한 몸을 감당할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
 진충이 쓰러지며 진유의 몸도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는 아버지의 몸을 떠안고 있는 탓에 상당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고통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진충의 가슴을 타고 흘러나온 피가 옷깃을 적셨고, 피부에 차갑게 와 닿았다. 소름이 끼칠 만큼 진득한 느낌도 잠시, 아버지가 죽어 간다는 사실에 진유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육체적인 고통 따윈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아버지, 아버지! 정신 차려 봐요, 아버지!”
 진유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아버지를 일으켜 세워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 죽지 마요, 아버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죽지 말라고 외쳐 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진충은 이미 정신을 잃었고,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뭣들 하느냐? 저놈을 거두지 않고.”
 진충의 몸 아래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진유를 가리키며 관리가 말했다. 그에게는 인정이라곤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병사들이 진충을 거칠게 밀쳐 내고, 눈물범벅이 된 진유를 일으켜 세웠다.
 진유는 아버지에게 손을 뻗으며 다가가려 했지만 병사들의 손길이 너무도 억셌다.
 그들은 몸부림치는 진유를 잡아끌고 한쪽으로 데려갔다.
 “놔, 놔요! 아버지를 살려야 한단 말이에요. 이거 놓으라고요!”
 진유는 있는 힘껏 발버둥 쳤지만 어른의 힘을 당해 낼 수 없었다.
 “너, 너무하지 않소! 사람을 죽이다니.”
 진충의 죽음 그리고 서럽게 울부짖는 진유의 모습에 젊은 사내 하나가 분개하며 소리쳤다.
 “아무리 높으신 나리라고 하지만 이럴 수는 없소.”
 “진충을 살려 내시오.”
 한 명이 나서자 여기저기서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진충 부자의 안타까운 모습에 분노를 느낀 나머지 관부나 관리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예상치 못한 진충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관리였으나 진가촌 주민들의 집단적인 반발에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곧 냉정을 되찾고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가, 감히 저자들이! 뭣들 하느냐! 당장 움직이지 않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진가촌 주민들을 마구 때리고 짓밟기 시작했다.
 퍼버벅.
 “아악!”
 구타 소리와 비명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분개하여 반항하긴 했지만 그들은 평범한 촌민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병사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무지렁이들이 어디서 감히 반항을 하고 있어. 하여간 무식한 것들은······.’
 언제 반항했냐는 듯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질러 대는 촌민들을 보며 관리는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진가촌의 촌민들은 개미 새끼만도 못한 존재였다. 그들이 죽든 말든 그에게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단지 이곳의 아이들을 궁인으로 만들어 실적을 올리는 것이 중할 뿐이었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있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돌아가는 경우는 별로 없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진가촌의 촌민들은 병사들의 폭력에 처참히 망가져 신음을 흘려 댈 뿐 어떤 결과도 이루지 못했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랑스러운 자식을 빼앗겨야 했다. 막고 싶어도 막을 힘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진가촌의 아이들 열세 명은 부모들의 설움을 뒤로하고 황궁으로 끌려갔다.
 그 안에는 이제 여덟 살이 된 진유도 포함되어 있었다.
 진유는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내내 땅바닥을 붉게 물들이며 쓰러진 진충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아직 어렸으나 살고 죽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진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살아 있지 않음을 똑똑히 알았다. 지금이 진충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도.
 그 때문인지 병사들에게 질질 끌려가는 내내 진유의 눈은 진충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진충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시선을 돌렸다.
 고개 돌린 그는 원독에 가득 찬 눈으로, 말을 타고 가는 관리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그 눈은 마치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하나의 원한이 소년의 가슴에 아로새겨지고 있었다.
 
 
 
 #진유
 
 
 명나라 이전에는 환관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환관이 글을 알면 정치에 관여하게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환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임금의 명령을 조정에 전달하는 것인데, 이때 환관은 두 가지 방식으로 황명을 전달했다.
 첫째는 임금이 말한 그대로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조정에 전달하는 것이고, 둘째는 임금이 내리는 글을 원본 그대로 조정에 전달하는 것이다.
 이 전달 과정에서 변조를 꾀했다가 발각되면 당연히 환관은 목숨을 잃거나 중벌을 당했다. 특히 글로 써서 내린 교지나 비답이 변조되면 국가적인 중대 사건이 발생할 수 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환관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즉, 글을 아는 환관이 자신의 마음대로 교지의 내용을 바꾸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기 마련이다. 환관이 글을 모르면 그를 부리는 황제의 입장에서는 결코 편한 일이 아니었다.
 왕조가 바뀌면서 황제들은 점차 글을 아는 환관들을 선호했고, 명 황조皇朝에 이르러서는 아예 환관들을 가르치는 학교가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내서당內書堂이었다.
 하지만 명 황조 초기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명조를 일으켜 세운 홍무제 주원장은 환관의 정치 개입을 막고자 학문 교육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홍무제의 증손자인 선종 대에 이르러 환관들을 전문적으로 교육시키는 교육기관인 내서당이 설립되었다. 진유가 황궁에 들어온 지 정확히 사 년이 지난 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환관이 내서당에 입학하는 시기는 대개 열 살 전후였다. 학생 수는 삼백 명 이하고, 교사들은 모두 한림원의 학사들이었다.
 학생들이 배우는 과목은 우선 환관들의 내규에 해당하는 내령, 즉 내정의 규칙을 비롯하여 ‘천자문’, ‘효경’, ‘논어’, ‘대학’, ‘중용’, ‘맹자’ 등이었고, 이 외에도 대표적인 시와 백성들의 성씨에 대해서도 배웠다.
 시험은 암기, 읽기, 해석, 쓰기 등의 형태로 치러졌고, 성적이 나쁜 학생은 벌을 받았으며, 성적이 좋은 학생은 환관 임용 시 좋은 자리에 배치되었다.
 삼백 명이라는 숫자는 황궁에서 살아가는 환관들을 생각하자면 턱없이 적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내서당을 나온 환관들은 일반 환관들에 비해 더 높은 직위를 얻고 출세한다는 것.
 당연히 내서당 입당은 그만큼 경쟁이 치열했고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서당이 생기고 처음 맞이한 학생들의 대부분은 든든한 배경을 가진 동 내관들이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아무런 배경이 없는 소년들도 있었다. 오직 재능만 보고 뽑힌 자들이었다. 그중에는 놀랍게도 진유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진유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아버지 진충이 그에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촌민에 불과한 진충이 어떻게 글을 익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진유는 글을 알 뿐 아니라 누구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총명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내서당에 들어갔다. 그에게는 불행 중 다행한 일이었다.
 처음 남성을 잃었을 때 진유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잃은 듯했다. 무엇보다 여덟 살의 나이에 아비를 잃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힘들었다.
 하지만 진유는 곧 한 가지 목표를 정했다. 그것은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게 만든 자를 향한 복수였다.
 황궁으로 끌려올 당시 진유의 눈에 떠오른 원한을 생각한다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것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황궁에 들어와 선배들의 말을 들어 보니 높은 위치에 있는 환관들은 일반 관리보다 강한 권력을 지닌다고 했다. 그 정도의 권력이라면 지방의 관리쯤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진유는 그자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미 말했듯 그는 머리가 꽤나 영민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절대로 잊어버릴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만큼 진유의 원한은 컸다.
 그렇게 복수심을 마음 한구석에 심어 놓은 진유는 당당히 내서당에 입학했고, 한림학사들의 가르침을 열심히 받아들였다.
 
  * * *
 
 내서당의 숙소는 밤 열 시가 되면 소등을 실시한다. 겉으로야 다음 날의 일과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불을 밝히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려는 조치였다. 그 절감된 비용이 내서당의 최고 관리자인 사례태감司禮太監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환관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소등을 확인하기 위한 환관들의 순시가 끝난 후 내서당의 숙소 한곳에 희미하게 불이 켜졌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 안.
 열네 살 된 진유는 자신의 이불로 문가를 가렸다. 불빛이 문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오늘도냐?”
 진유가 작업을 끝마치기 무섭게 누워서 잠을 청하던 동 내관 하나가 질렸다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로 미루어 진유의 이런 행동은 하루 이틀이 아닌 모양이다.
 “미안.”
 진유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른 친구들이 잠을 청하는 시간에 호롱불을 켜 놓은 것이 미안했던 것이다.
 “걸리지나 마라. 너 때문에 우리까지 치도곤을 당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호롱불 빛을 피하기 위함인지 동 내관이 돌아누우며 말했다.
 “걱정 마라. 들키더라도 나 혼자서 책임질 테니까.”
 진유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가 작아서 못 들은 것인지 아니면 그의 말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인지, 동 내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진유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호롱불을 벗 삼아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소등이 끝난 이 시간에 진유가 위험을 무릅쓰고 호롱불을 켠 것은 책을 보기 위함이었다.
 진유는 내서당에 들어온 순간 확고한 목표를 세웠다.
 매해 다섯 명만 선발한다는 사례감司禮監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례감은 환관들이 몸담은 이십사아문衙門 중 최고 기관이다. 진유는 바로 그곳에 들어가고자 했다.
 굳이 사례감을 택한 것은 권력을 얻고자 해서였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권력을 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권력을 얻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아버지를 죽인 그 관리와 병사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그 일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현재 진유가 가진 단 하나의 목표는 그것이었고, 권력은 그 목적을 이뤄 줄 유일한 수단이었다.
 
  * * *
 
 사람이 모이면 파벌이 생기기 마련이다. 특히나 권력과 관련된 곳일수록 그런 현상은 더욱 심했다.
 환관들이 득세하는 명 황조의 특성상 내서당은 향후 황궁의 권력을 좌지우지할 만한 환관들이 모인 곳이다.
 이런 곳에서 파벌이 형성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사례감에 들어갈 것이 확실한 자들과 친해지면 훗날 호가호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서당에도 하나의 파벌이 존재했다.
 왕평王平이란 동 내관을 정점으로 한 파벌이었다.
 왕평은 똑똑할 뿐 아니라 배경마저 내서당 제일이었다. 그의 배경은 다름 아닌 현 사례태감 왕진이었다.
 황제마저 좌지우지한다는 무소불위의 권력자 왕진의 지지를 받고 있다면 이미 말 다한 것이다.
 그렇듯 재능과 배경을 겸비한 그에게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했다. 왕평 역시 그런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얼핏 오만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에겐 그럴 자격이 충분했다.
 대체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는 자들은 자신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이 장점으로 삼는 부분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높다.
 왕평에게는 짜증 나는 일이었지만, 내서당에 그런 자가 한 명 있었다. 바로 진유였다.
 조사한 바로는 평범한 촌민의 자식이라고 하는데, 그는 자신에 비견될 만큼 똑똑했다.
 사례감에 들어갈 수 있는 최종 성적은 오 등까지였다.
 하지만 왕평은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고, 일등으로 사례감에 들어가고 싶었다. 진유는 그 목표의 최대 방해자였다.
 어제 치른 암기 시험에서도 진유는 그를 제치고 일 위를 차지했다. 다른 시험은 몰라도 암기에서 진유는 단 한 번도 일 위를 놓치지 않았다.
 암기는 타고난 머리도 중요하지만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소등되고 나서도 책을 보는 진유를 왕평은 도저히 당해 낼 수 없었다.
 자연히 왕평은 심기가 좋지 못했다.
 “그놈은 밤중에도 등을 켜 놓고 책을 본다던데.”
 지금이 기회라는 듯 한 소년이 넌지시 진유의 비밀을 이야기했다. 사실 비밀이랄 것도 없었다. 진유와 한방을 쓰는 동 내관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니 말이다.
 왕평의 옆에서 얄팍한 모습을 보이는 소년 역시 진유와 한방을 쓰는 동무에게 들은 내용이었다.
 “그래서?”
 왕평이 얄팍한 인상의 소년에게 고개를 돌리며 반문했다. 그의 얼굴에는 궁금증이 어려 있었다.
 “그놈의 버릇을 고쳐 줄 좋은 기회라 이거지.”
 “버릇을 고쳐?”
 “왕평 너는 내서당 동 내관들의 장을 맡고 있으니, 생도들의 잘잘못을 따져 물을 권한을 가졌잖아. 물론 내서당을 담당하는 유 태감님에게 사실을 말할 수도 있지만, 분명 몇 마디 훈계만 듣고 끝날걸. 유 태감이 겉으로는 냉정해 보여도 우리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크니 말이야. 진유가 아무리 규정을 어겼다 해도 서책을 보느라 그랬다고 하면 유야무야될 게 뻔하지. 더구나 진유 그놈은 성적도 좋아서 예쁨을 많이 받으니 그럴 가능성이 더욱 크지 않겠어?”
 “그러니까 나더러 직접 진유 놈을 벌하라 이거냐?”
 “너는 단지 명령만 내리면 될 뿐, 나머지는 우리들이 하면 되지.”
 얄팍한 인상의 소년이 주위에 몰려 있는 같은 또래의 소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모두 왕평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이었다.
 왕평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밑에 둘 정도로 진유는 작은 그릇이 아니었다. 즉, 회유하는 것보다 지금 이 기회에 확실히 눌러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상길이 너는 지금 당장 진유 그놈을 네 앞으로 데려와라.”
 왕평이 옆에 서 있던 덩치 좋은 소년에게 말했다.
 상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손에 붙들려 누군가 질질 끌려왔다. 상길이란 소년에 비해 너무도 왜소해 보이는 진유였다.
 “지금 뭐하는 거냐?”
 상길에게 끌려온 진유가 왕평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이번 일의 근원이 그라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너! 소등 시간 이후에도 등불을 켜 놓고 책을 본다며?”
 “······그래서?”
 진유는 내심 흠칫하며 반문했다.
 “너! 내가 내서당 생도들의 장을 맡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겠지?”
 “그래서 선도라도 하겠다는 거냐?”
 진유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 그런 셈이지.”
 “무슨 속셈이지?”
 “속셈은 무슨, 그저 다음부터는 규칙 위반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려는 거지. 사실 그런 일을 고자질하는 것도 우습잖아.”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곧 알게 될 테니까 너무 보채지 마라. 다들 뭐해? 시작하지 않고.”
 왕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위에 모여 있던 소년들이 일제히 진유를 둘러쌌다.
 “네가 준비한 게 이거냐?”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확실히 깨달은 듯 진유가 물었다.
 “그래. 규칙을 위반한 것에 대한 최소한의 벌은 받아야 하지 않겠냐? 다들 시작해라.”
 왕평의 말과 함께 소년들이 진유를 마구 두들기기 시작했다. 본래 왜소한 체격인 데다 여러 명의 소년들이 손을 쓰는지라 진유는 속절없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
 “정 태감이 나타났다!”
 망을 보고 있던 소년이 다급히 외쳤다.
 “모두 피해!”
 왕평의 말과 함께 진유를 때리던 아이들이 우르르 자리를 벗어났다. 내서당의 환관들끼리 다툼을 벌이면 중벌을 면치 못한다. 정 태감은 내서당의 교감이다. 그에게 발견되기 전에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진유 역시 정 태감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괴로운 몸을 이끌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숙소에 돌아온 진유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으드득.
 ‘두고 봐라. 오늘 일을 반드시 후회하게 해 줄 테니.’
 왕평 등의 얼굴을 떠올린 진유는 이를 갈며 다짐했다.
 규칙을 위반한 것을 벌한다는 이유를 붙이긴 했지만,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왕평의 눈빛에 담긴 적의를 똑똑히 읽은 것이다.
 그가 왜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
 그것이 진유의 마음가짐이었다.
 오늘 일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더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출세하고 권력을 얻어서 그들에게 오늘 일을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진유야, 괜찮아?”
 방문이 열리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바닥에 누워 육신의 괴로움을 달래던 진유가 고개를 돌렸다.
 “만영이로구나.”
 방 안으로 들어온 소년 환관의 얼굴을 확인한 진유가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진유가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한방을 쓴 동무였다. 내서당이 생긴 후에도 운 좋게 같이 들어왔고, 지금까지 우정을 나누고 있었다.
 만영의 가문은 본래 명문가였으나, 정난지변으로 순식간에 몰락했다고 한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자진해서 황궁에 들어왔고 환관이 되었다.
 진유와는 다른 과정을 거쳤으나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동무라 여긴다는 것이 중요했다.
 “또 왕평 놈들이 그런 거지?”
 듣지 않아도 뻔하다는 듯 만영이 물었다.
 진유가 그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이다.
 “뭐, 그렇지.”
 진유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얼굴로 만영이 진유에게 다가앉았다. 그러고는 그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 부러진 곳은 없어?”
 “응. 정 태감님께서 나타나셔서.”
 “천만다행이네.”
 “아직 죽을 때가 아닌 모양이지.”
 “이렇게 다치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진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죽지만 않으면 언젠가 복수할 수 있으리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만영에게는 왠지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소년들이 친구를 사귀듯 그렇게 만영과 지내고 싶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잠시 기다려 봐. 뜨거운 물 가져와서 찜질 좀 해 줄 테니.”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아무 말 말고 기다리고 있어.”
 “······고맙다.”
 “친구 사이에 고맙기는.”
 만영이 시답잖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말하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진유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아가는 황궁에서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존재가 만영이었다. 그가 있기에 지금처럼 버티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진유에게 만영은 소중한 존재였다.
 
  * * *
 
 어느덧 열다섯이 된 진유는 갈기갈기 찢어진 자신의 서책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벌인 일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이런 일을 하도 겪다 보니 이제는 화조차 나지 않았다.
 “또 그 짓이냐?”
 찢어진 진유의 서책을 보고 만영이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한방을 쓰다 보니 그 역시 이런 모습을 자주 목격한 것이다.
 “너 책 다 봤냐?”
 당장 내일이 시험이다.
 뒷부분을 아직 보지 못한 진유로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아직 다 못 봤는데.”
 “그래······.”
 “금방 보고 줄게.”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한데.”
 “아니야. 어차피 거의 다 봤어.”
 “그래, 알았다.”
 
 황궁에는 한밤중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황제나 황자들의 야참을 준비하는 어선방御膳房 휘하 야식당夜食堂이었다. 항상 야참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황제나 황자들이 언제 갑자기 먹을거리를 찾을지 몰랐으므로 새벽까지 대기해야 했다.
 그곳은 진유가 주로 이용하는 공부 장소이기도 했다.
 소등 시간이 지난 후 등불을 켜는 것은 한방을 쓰는 동무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일인지라 궁리 끝에 찾아낸 곳이 바로 야식당이었다.
 내서당 환관들의 숙소와 붙어 있기에 내관들의 눈을 피해 몰래 가기도 용이했고, 간간이 간식거리를 주는 숙수도 있었기에 진유에게는 참으로 좋은 장소였다.
 익일 시험을 앞두고 서책이 훼손되어 공부를 하지 못한 터라 진유는 오늘도 야식당에서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만영의 책을 빌려서 보는 것이다.
 “서생들이 너처럼 공부했으면 과거 급제는 따 놓은 당상이었을 게다.”
 진유를 친자식처럼 여기는 숙수 장오張五가 금방 훑어 낸 듯한 누룽지를 한 손에 쥐고 말했다.
 “저 같은 것이 어찌 서생들과 비교가 되겠어요?”
 “부모 잘 만난 것들이 서원에 다니는 것뿐 아니겠냐? 내 보기엔 진유 너처럼 똑똑한 데다 노력까지 하는 서생은 그리 많지 않을 듯싶구나.”
 “목표가 있으니까요.”
 “목표?”
 “아저씨에게 말씀드릴 만한 것은 아니에요.”
 “이거 섭섭한데.”
 장오가 짐짓 서운한 척 말했다.
 “서운해하지 마세요. 정말 별것 아니니까요.”
 그의 목표를 장오에게 비밀로 할 까닭은 없지만, 굳이 과거를 밝혀서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래, 알았다.”
 장오도 그러려니 하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나저나 손에 들고 계시는 거, 저 주시려는 것 맞죠? 어차피 주실 거면 어서 주세요. 무거우시잖아요.”
 장오의 손에 들린 누룽지를 쳐다보며 진유가 말했다.
 “누가 너 준다고 하더냐?”
 “아니면 말고요.”
 “어쭈! 배가 불렀다 이거지?”
 “등짝에 닿은 제 배를 보시고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이 녀석, 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변죽뿐이로구나.”
 “다 아저씨 덕분이죠.”
 “그거 참으로 영광이로구나. 자! 시답잖은 소리는 여기까지 하자꾸나. 네 공부를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이 누룽지 먹고 열심히 보아라.”
 “항상 고마워요, 아저씨.”
 누룽지를 받으며 진유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기는. 열심히 해라. 난 그만 가 볼 테니.”
 “감사해요.”
 진유는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는 누룽지를 한쪽으로 치우고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언제 장오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냐 싶게 진유는 무섭게 집중했다.
 뚜렷한 목표가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무섭게 파고드는 법이다. 지금 진유의 모습처럼 말이다.
 
 다음 날 내서당의 훈육관에서 시험을 마친 환관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백여 명의 환관들이 밖으로 빠져나간 후 진유와 만영이 나란히 훈육관을 나왔다.
 “잘 봤냐?”
 만영이 물었다.
 “별로.”
 “이번에도 일등이겠네.”
 “응?”
 “너 시험 끝날 때마다 별로라고 하면서 결과 나오면 매번 일등이잖아.”
 만영이 진유의 어깨를 툭 밀쳤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면 다 네 덕분이다.”
 진유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지난밤 서책을 빌려 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뭘 그런 걸 가지고. 어차피 나 볼 건 다 보고 빌려 준 건데.”
 “그래도 누가 나한테 책을 빌려 주겠냐. 왕평이 눈치 보느라 그러지도 못하잖아.”
 “그러니까 너! 나중에 나 모른 척하면 안 된다.”
 “훗. 너나 그러지 마라.”
 “그건 걱정 마라. 어서 가자! 배고프다.”
 만영이 진유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진유가 고개를 끄덕이며 식당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담이지만, 진유는 금번 시험에서 또다시 일등을 차지했다. 아무리 방해를 한다 해도 진유의 독기 어린 노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재능과 지독한 노력을 겸비한 진유는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 *
 
 “만영아, 혼당사混堂司에 가지 않을래?”
 어느덧 열여덟 살이 되어 한층 성숙해진 진유가 방에 앉아서 서책을 들여다보는 만영에게 물었다.
 혼당사는 환관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는 목욕탕이다. 진유와 만영은 내서당의 교육이 끝나고 시간이 나면 함께 혼당사를 찾아 하루의 피로를 풀곤 했다.
 열심히 책을 보던 만영이 고개를 들었다.
 “벌써? 아직 나 이거 다 못 봤는데.”
 서탁에 펼쳐진 책을 가리키며 만영이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함일까. 그의 눈 밑에는 검은 달이 그려져 있었다.
 “귀신이 지금 널 보면 놀라서 뒤로 자빠지겠다. 그렇게 죽치고 앉아 있는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 내가 볼 때 넌 너무 열심히 하는 게 탈이야.”
 진유가 픽 웃자 만영이 얄밉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난 누구처럼 머리가 좋지 않거든.”
 “내 말은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면 뭔데?”
 “한없이 앉아서 책을 들여다보면 성과가 좋을 것이라 여기겠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만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는 책을 오래 본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외우고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유가 그것이 아니라 말하니 의아함이 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깨끗이 무시할 만영이었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이 다름 아닌 내서당에서 일이 등을 다투는 진유이니 차마 무시하지 못했다.
 진유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책을 보는 데 투자하는 시간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얼마나 집중해서 책을 보느냐 이거거든.”
 “집중력이라······.”
 “너처럼 무한정 책만 들여다보는 것은 능률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인간의 체력은 한계가 있고, 체력이 떨어지면 자연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거든.”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이 헛수고다 이거네.”
 “헛수고까지는 아니지만 노력에 비해 얻는 게 크지 않지. 그러니까 적절히 쉬어 가면서 체력을 유지하고, 반면 책을 볼 때는 최대의 집중력을 발휘하라는 거지. 그러면 지금보다 훨씬 능률이 오를 거라고 본다.”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런데 그 좋은 걸 왜 이제야 가르쳐 주는 건데, 이 나쁜 놈.”
 내심 진유의 생각이 옳다 여긴 만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진유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물론 장난을 치는 것이다.
 “캑, 캑. 야! 숨 막혀. 일단 놔 봐.”
 진유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어림없는 소리.”
 “아, 알았다. 내 사과하마.”
 “좋아. 이번만은 용서해 주지.”
 만영이 빙긋 웃으며 팔을 풀었다.
 “하여간 무식하게 힘만 강해서는.”
 “뭐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본데······.”
 “아, 아니야.”
 진유는 뒤로 물러나면서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힘으로는 만영을 못 당하는 것이다.
 그 모습에 만영이 픽 웃었다.
 진유가 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사람마다 공부하는 방법이 다 다르거든.”
 “응? 아!”
 빙그레 웃던 만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적으로 무슨 말인가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진유의 말뜻을 이해했다.
 “그래서 보고만 있었던 거야. 오늘은 하도 답답해서 말을 한 거고.”
 “진작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부터 그렇게 하면 되지. 혼당사에나 가자. 피로를 푸는 데는 뜨거운 물에 목욕하는 게 최고거든.”
 “그래, 알았다.”
 씩 웃은 만영이 수건이며 속옷 등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진유도 빙긋 미소 지었다.
 만영이 준비를 끝내자 두 사람은 숙소 건물을 나와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일각여 만에 혼당사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진유와 만영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환관들이 꾸벅 인사를 했다. 두 사람이 내서당 소속임을 나타내는 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서당에 속한 환관은 일반 환관들보다 높은 위치다. 그만큼 출세할 가능성도 높다.
 따라서 일반 환관들은 훗날을 위해 그들에게 결코 함부로 하지 못했다. 나이가 어려도 말이다. 혼당사의 환관들이 두 사람에게 깍듯이 예를 취하는 이유였다.
 진유와 만영은 환관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목욕을 시작했다.
 환관들은 남에게 몸을 내비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남성을 상실한 몸을 타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것은 같은 환관끼리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정말 친한 사이가 아니면 같이 목욕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보면 진유와 만영의 우정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었다.
 “후우, 이제 임관도 얼마 안 남았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만영이 분을 바른 듯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물을 묻히며 말했다.
 “아직 일 년이나 남았잖아.”
 진유가 손으로 물장난을 하며 대꾸했다.
 “일 년은 금방이야. 우리가 황궁에 들어온 지도 벌써 십 년이 다 되어 가잖아.”
 “하긴, 처음엔 하루도 못 살 것 같았는데 벌써 십 년이 됐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 거세를 당했을 때는 단 하루도 버텨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벌써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물론 그 세월을 버텨 온 데에는 복수심이 한몫했지만, 인식하지 못한 사이 십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은 사실이었다.
 “훗. 처음 너를 봤을 때가 생각난다.”
 “어땠는데?”
 진유의 물음에 만영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있는 슬픔이란 슬픔은 다 짊어진 아이 같았지.”
 “그때는 정말 그랬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그래.”
 진유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지만, 진유의 마음은 언제나 허전하고 텅 비어 있었다.
 죽은 아버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 언제나 가슴이 터져 버릴 듯한 기분에 휩싸여 살아온 것이다.
 “하긴, 넌 아버지의 죽음을 직접 보았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아직도 그자에게 복수할 생각이냐?”
 만영은 진유가 하려는 일을 알고 있었다.
 그간 혼당사에서 목욕을 하며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사실들을 공유했다.
 “물론.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잖아.”
 진유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 간 자를 결코 용서할 마음은 없었다.
 성인군자들이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며 떠들어 댔지만,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는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해도 반드시 복수하고 말리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지금처럼만 하면 금방 복수할 수 있을 거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라.”
 만영은 진유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그가 복수에 연연하기보다는 온전히 그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를 원했다.
 하지만 진유의 결심은 너무도 확고했다. 절친한 동무인 만영으로서도 돌려세울 수 없을 만큼.
 “글쎄······.”
 “내서당에서 일이 등을 다투는 진 공공의 출세는 이미 보장된 것 같은데 그 자신 없는 표정은 뭐냐? 설마 염장 지르려는 것은 아니겠지?”
 왠지 무거워진 분위기를 느낀 만영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세상일은······ 속단할 수 없다고 본다. 내가 눈앞에서 아버지를 잃고 환관이 되었던 것처럼. 앞일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거잖아.”
 “걱정도 팔자다. 등이나 밀어 주라.”
 “훗, 그래.”
 만영의 말에 진유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물밑에 숨겨져 있던 거세의 흔적이 드러났다. 그것이 진유의 가슴에 품은 분노를 대변해 주는 듯했다.
 
 
 
 #감서내관
 
 
 대명 천하의 중심이 되는 곳 자금성.
 남북으로는 장장 이 리에 육박하고 동서로는 일 리 반의 길이를 가진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규모의 성은 중원을 지배하는 대명제국의 위상을 실감케 하기에 충분한 위용을 자랑했다.
 거대한 규모의 성답게 웅장함을 뽐내는 전각군 사이로 종종걸음을 걷는 소년들이 보였다.
 열일고여덟의 나이로 보이는 그들은 중요한 일이 있는지 걸음을 재촉했다.
 그들 모두 동일한 복식이었는데, 그것은 내서당에서 교육받는 환관들의 복식이었다. 약관의 소년들은 모두 내서당의 환관인 것이다.
 이 열로 이동하는 무리의 뒤쪽에 눈에 익은 얼굴이 있었다. 평범한 얼굴이지만 총기 가득해 보이는 눈빛을 지닌 소년과 둥글둥글한 얼굴에 누가 봐도 호감이 가는 소년, 바로 진유와 만영이었다.
 뒤쪽에서 열심히 걸음을 옮기던 만영이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로 옆쪽의 진유에게 입을 열었다.
 “진유야, 안 떨리냐? 난 떨려 죽겠다.”
 만영의 얼굴에 떠오른 긴장감. 무엇이 그를 긴장시키는 것일까.
 그것은 간단했다. 드디어 오늘이 내서당 환관들의 임관이 결정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첫 임관이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것은 아니지만 향후 황궁에서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내서당의 환관들에게 오늘은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만영이 이처럼 긴장하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진유가 이상한 쪽에 포함된다고 할 만했다.
 “조금. 만영이 네 성적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니잖아. 그러니 그렇게 긴장하지 마라.”
 진유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진유의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내서당에서 그의 최종 성적은 일등이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가 일 순위로 지원한 사례감에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로서는 딱히 긴장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적어도 만영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부러운 놈. 내 성적으로는 사례감에 들어가기에 빠듯하니 그렇지.”
 “걱정하지 마라. 다 잘될 거야.”
 “그렇지? 그렇겠지?”
 “그럼.”
 “네 말을 들으니 조금 안심이 된다.”
 적어도 오늘 이 순간만큼은 진유의 말에 묘한 마력이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만영의 긴장된 마음이 스르르 풀어졌다.
 “하여튼······.”
 진유가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백여 명의 내서당 환관들이 자금성의 정문인 오문午門에서 교태전交泰殿의 좌측 전각군 중 한 건물인 내궁內宮에 도착했다.
 그러자 내궁을 지키던 위사 한 명이 급히 안으로 들어갔고, 얼마 후 동 내관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내서당의 책임자인 태감 유필이 위엄을 갖추고 걸어 나왔다.
 동 내관들에게 현재 가장 두려운 이가 바로 유필이었다. 훗날에는 바뀌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그랬다. 그런 유필의 뒤에는 십여 명의 환관들이 따라 나오고 있었다.
 뜻이 맞는 이들과 수군거리던 환관들이 유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자세를 바로 했고, 장내는 곧 조용해졌다.
 유필은 임용을 앞둔 내서당 환관들의 앞에 서서 한차례 시선을 보낸 뒤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너희들이 일할 곳을 일러 주겠다. 잘 듣고 각자의 상관을 따르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네!”
 백여 명의 환관들이 일제히 답했다.
 명 황조는 제도적으로 환관의 직무를 그 소관 역할에 따라 십이감監, 사사司, 팔국局으로 구분했다. 이를 합쳐 이십사아문이라 명명했다. 오늘 임용을 받는 백 명의 환관들은 그중 십이감의 한 곳에 임관될 예정이었다.
 “참고로 너희들의 보직은 장인태감 어르신을 비롯하여 높으신 분들께서 깊이 숙고한 결과이니 불만을 갖거나 하는 불경을 저지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어떻게 될지 너희들이 더 잘 알 터이니 더 이상 말하지 않으마.”
 내서당 환관들을 쭉 둘러보던 유필이 말을 이었다.
 “먼저 도지감都知監에 속해 업무를 행할 자들이다. 내서당 최종 성적 구십오 등부터 백 등까지인 자들이 이에 속한다. 위현偉賢······. 이 다섯 명이다. 호명된 이들은 저쪽 끝에 자리한 도지감 소속의 환관을 따라 이동한다.”
 도지감은 황제의 외정 행차 시 도로를 정비하고 경계 임무를 총괄하는 곳이다. 이름이 불린 다섯 명의 내서당 환관들이 재빨리 앞으로 나갔다.
 다섯 명의 신상을 확인한 도지감 소속의 환관이 그들을 이끌고 장내를 벗어났다. 그들이 사라지기 무섭게 유필이 다음 임용자를 발표했다.
 “다음으로 직전감直殿監에 속해 업무를 행할 자들이다. 내서당 최종 성적 팔십오 등부터 구십오 등까지가 이에 속한다. 장우張宇, 금영金英······. 이 열 명은 앞으로 나와 저쪽에 서 있는 직전감 소속의 환관을 따라 이동한다.”
 호명된 열 명이 유필의 손이 가리키는 환관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갔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신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직전감 소속의 환관이 그들을 이끌고 장내를 벗어났다.
 도지감과 직전감에 이어 각자의 보직이 발표되었고 인솔자인 상관을 따라 자리를 떠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참고로 만영은 옥새를 비롯한 인장을 관리하는 상보감尙寶監에 소속되었다. 사례감에 들어가기를 원했던 만영으로서는 꿈이 꺾인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리 실망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진유는 일단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어느덧 장내에는 진유를 포함한 여섯 명의 환관들만이 남았다. 그리고 초보 환관들을 인솔할 상급 환관 역시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장내에 남은 여섯 명은 내서당 최종 성적 일등부터 육 등까지인 자들이었다. 그들을 한차례 훑어본 유필의 시선이 진유에게서 잠시 멈추었다.
 ‘왜 그러시지?’
 진유는 그 시선에 왠지 모를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것 같아 고개를 갸웃했다. 진유가 의문을 갖는 사이 유필은 진유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무감정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황제 폐하의 일상사 및 업무를 돕는 사례감 소속이다. 이에 속할 자들은 내서당 최종 성적 이 등부터 육 등까지다. 왕평······ 조상길. 이상 다섯 명이다. 호명한 사람은 앞으로 나오도록.”
 유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진유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호명된 사람들 중 자신만 빠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서당 일등은 사례감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이다. 그런데 지금 그 관례가 깨진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십이감 중 진유는 그 어떤 곳에도 임용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의문에 휩싸인 진유의 앞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진유가 고개를 들었다. 비릿한 웃음을 짓고 있는 소년 하나가 보였다. 내서당 최종 성적 이 등인 자, 지겹도록 자신을 괴롭혔던 왕평 바로 그였다.
 ‘뭐지?’
 진유가 인상을 찌푸렸다.
 의아해하는 그를 향해 왕평이 작게 중얼거렸다.
 “평생 지하에서 썩어 봐라, 건방진 놈아.”
 왕평은 득의양양한 미소와 함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던졌다. 그러고는 사례감 소속의 환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는 질문 따위를 던질 틈도 주지 않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사례감 소속의 환관을 따라 내궁 앞마당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장내에는 이제 유필과 진유 단둘이 남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 전개에 진유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뇌리에 왕평이 던진 한마디가 계속해서 메아리쳤다.
 비록 왕평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나중에 두고 보자고 생각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의 실력으로 충분히 출세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임관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자신이 사례감을 비롯한 십이감에 속할 일은 없어 보였다. 왠지 특별한 일이 맡겨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일이 결코 좋지 않을 듯했다. 악의로 가득한 왕평의 말을 생각해도 그렇고, 왠지 모르게 안타까움을 담고 자신을 바라보던 유필의 시선도 마음에 걸렸다.
 진유가 유필을 향해 입을 열었다.
 “태감 어르신! 저는 아직 보직을 받지 못했습니다.”
 불안감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알고 있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유필은 아무 설명 없이 그 말만 남기고는, 몸을 돌려 내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유는 그가 실수한 것이길 바랐는데, 그의 태도로 보아 전혀 그렇지 않은 듯했다. 자연 진유의 불안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렇듯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내궁 안으로 들어선 진유는 유필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곳은 유필의 개인 집무실로, 업무를 보는 책상 하나와 차를 마시는 탁자가 전부인 단순하기 그지없는 방이었다.
 화려한 것을 즐기지 않는 유필의 취향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권력과 거의 상관없는 내서당의 태감에 만족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곳에 앉아라.”
 유필은 탁자를 가리키며 진유에게 자리를 권했다.
 “네.”
 진유는 유필이 말한 탁자로 가 앉았다. 십 년 동안 유필의 밑에서 환관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지만 직접 유필의 집무실에 들어와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진유가 자리에 앉아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는 것을 본 유필은 아무 말 없이 구석으로 가더니 자신이 즐겨 마시는 차를 내왔다.
 평소 동 내관들을 교육할 때 보여 주던 무서운 모습과 달리 직접 자신에게 차를 가져다주는 유필을 보자 진유는 왠지 모를 불편함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친절은 좋은 의미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유가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다. 이 방에 들어온 이상 너도 손님이니 그냥 있도록 해라.”
 “하지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내 이미 괜찮다고 했다.”
 진유는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아 유필이 차를 따르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즐겨 마시는 오룡차烏龍茶이니 마셔 보아라. 꽤 괜찮을 것이다.”
 “네, 태감 어르신.”
 말과 함께 유필이 차를 마시자 진유도 오룡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자신을 따로 불러서 송구하게도 직접 차를 대접하는 그의 행동은 진유로 하여금 차 맛을 음미할 여유를 주지 못했다. 진유는 그저 이 어색하고 불안한 분위기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태감 어르신, 무슨 연유로 저만 이곳으로 부르신 것입니까?”
 진유의 물음에 유필 역시 마시던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유필의 눈빛은 꽤나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지만, 진유는 미처 그것을 헤아리지 못했다. 복잡한 감정을 담은 시선으로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자, 진유는 더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유필을 불렀다.
 “태감 어르신!”
 유필이 한숨과 함께 드디어 입을 열었다.
 “후우, 너는 감서내관監?內官이라는 직책에 대해서 아는 바가 있느냐?”
 동시에 진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서내관, 말 그대로 보면 책을 관리하는 내관을 이르지만, 황궁의 직위 체계를 모두 정확히 머릿속에 집어넣은 그로서도 전혀 들어 본 적 없는 직책이었다.
 “아닙니다. 처음 들었습니다.”
 유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황궁서고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있느냐?”
 “네. 황궁의 갖가지 서책들을 모아 놓은 곳이 있는데 그곳을 황궁서고라 부른다 들었습니다. 혹시 거기가 제가 일할 곳입니까?”
 진유는 혹시나 하고 물었지만 유필은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슷하다만 아니다.”
 유필의 대답에 진유가 ‘그렇다면 왜 황궁서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신 겁니까?’라는 의문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유필은 그 의문에 답을 해 주는 대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황궁비고皇宮秘庫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느냐?”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황궁서고와 비슷한 이름이라 기억을 뒤져 보았지만 좀처럼 찾아낼 수 없었다.
 “들어 보지 못한 게 당연할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유필은 황궁비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명을 세우신 태조께서 무림 세력의 도움을 받아 원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너도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원을 몰아낸 이후에는 오히려 도움을 주었던 무림의 힘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지. 그런 염려를 없애기 위해 태조께서는 고심 끝에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내셨다. 그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천하에 존재하는 모든 무학을 황궁 안에 모으고자 한 것이다. 그것으로 만에 하나 있을 무림의 준동을 방비코자 한 것이지. 너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느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하였으니 무림인의 무학을 알고 있으면 그들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여기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설명하는 도중 이어진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진유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의 대답을 들은 유필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계속했다.
 “너의 말이 옳다. 그런 뜻에서 태조께서는 천하의 모든 무학을 모으고자 하셨고 상당한 성과를 이루셨지. 그렇게 모인 무공 서적들은 경중에 따라 분류됐고, 가장 중요한 서적들은 따로 관리하기로 결정되었지.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황궁비고이니라. 무공 서적들 중 가치가 높은 것뿐 아니라 천금을 주고도 사지 못할 여러 분야의 귀한 서적들만 보관된 장소가 바로 그곳이지. 그래서인지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황제 폐하와 태자 전하 그리고 황제 폐하의 윤허를 받은 자로 제한되었다. 처음에 황궁비고를 만든 목적과는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지금에 와서는 황궁 최고의 금지나 다름없는 곳이 바로 황궁비고이니라.”
 황궁 최대의 금지를 굳이 자신에게 설명하는 이유를 진유는 충분히 짐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추측이 틀리길 간절히 바라며 물었다.
 “서, 설마 제가 일할 곳이 거기는 아니겠지요?”
 하지만 유필에게 들려온 대답은 불길한 짐작 그대로였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동 내관에 불과한 그에게 해 주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니, 바로 그곳이 앞으로 네가 일할 장소다. 감서내관은 황궁비고를 관리하는 직책으로, 대외비로 취급된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황제 폐하를 비롯해 열을 넘기지 않을 만큼 기밀이지.”
 “그, 그렇게 중요한 곳인데 어찌 저 같은 것이 들어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진유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너도 조금은 짐작하겠지만 그곳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금제가 필요하다.”
 “금제라시면······?”
 평생 지하에서 썩어 보라던 왕평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설마 하는 마음이 일며 진유의 얼굴에 불안감이 한가득 피어올랐다.
 “들어갈 수는 있지만 나올 수는 없다.”
 유필의 입이 열리고 청천벽력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했다.
 진유는 자신이 잘못 들었기를 간절히 바라며 물었다.
 “그, 그곳에서 평생 나오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안타깝지만 그렇다.”
 진유는 마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직 책밖에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평생 혼자 있어야 한다니, 자신이 무엇을 그리 잘못했기에 아버지의 곁에서 강제로 떨어져 환관이 되고, 이제는 감옥과 같은 곳으로 가야 하는지 정말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은 없다고 여겼는데 하늘은 그런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오늘과 같은 절망을 다시금 안겨 주었다. 그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절망만을 골라서 밀어 넣고 있는 것이다.
 절망감이 역력한 진유를 묵묵히 바라보는 유필 역시 마음이 좋지 않았다.
 환관은 권력을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도 아닌 것들이라는 말들이 많지만 오랫동안 환관들의 교육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 유필은 그들과는 달랐다.
 사례감에 속해 있긴 했지만 환관들의 교육기관인 내서당은 권력과 어느 정도 괴리된 부분이 있었고 다년간 내서당에서 일한 유필은 담백한 성격으로 권력 지향적이지도 않았다.
 유필의 밑에서 교육을 받는 어린 환관들이 보기에는 그의 성정이 냉혹할지 몰라도 그것은 교육적인 목적에 따른 것일 뿐 본래 성정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환관이 된 유필은 그와 처지가 같은 어린 환관들을 가르치며 남모르게 많은 정을 품었는데, 어떻게 보면 지옥과도 같은 곳으로 진유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도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를 따라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도 그로서는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너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상부에서 내려진 결정이다. 너에게는 정말 안된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유필은 내심과 달리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여기서 동정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왜, 왜 저입니까? 내서당 최종 성적 일등인 제가 어째서 그곳에 들어가야 한단 말입니까?”
 진유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따졌지만, 유필은 묵묵부답이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음모가 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조금 전 왕평 놈이 저에게 평생 지하에서 썩어 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태감님의 말을 듣고 나니 그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그놈은 제가 황궁비고에 들어가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분명 그놈이 이번 일에 개입된 것입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실 것입니까? 네? 한번 설명해 보시죠, 태감 어르신.”
 마치 울부짖는 듯 칼칼한 음성이 진유의 목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는 이번 일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흑막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거기에 왕평이 개입된 것은 자명한 일.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에 불덩이 하나가 생겨난 것 같았다. 그 불덩이를 당장이라도 토해 내 그를 이렇게 만든 이들을 다 없애 버리고 싶었다.
 “······상부의 결정일 뿐 이유는 없다.”
 잠시 뜸을 들이던 유필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진유가 왜 황궁비고로 들어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지만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지 않는 자, 결국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지도 모르는 자로 낙인찍힌 것이다.
 하지만 유필은 그것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요. 위에서 지시를 내리면 군말 없이 따라야 하는 것이 태감님과 제 위치임을 잠시 잊어버렸습니다. 크크.”
 진유의 입에서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굳이 유필의 대답을 듣지 않고서도 이번 결정이 왕평과 관련이 있음을 확신했다. 정확히는 왕평의 후견인이라고 소문난 왕진과 관련 있는 것임을 말이다.
 황제와도 같은 권력을 가졌다는 왕진이 이런 결정을 내렸다면 그 누구도 뜻을 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진유는 진심으로 분노가 일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인물이 그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에 화를 감출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처참하게 죽이고 싶을 만큼 그들이 증오스러웠다.
 그런 감정은 앞에 있는 유필에 대한 말투마저 변화시켰다. 항상 공손함을 견지하던 말투는 어느새 비아냥거림으로 바뀌었다. 평소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태도였다.
 유필은 그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그 정도는 충분히 보아 넘겨줄 아량을 지닌 것이다.
 “마음을 정리하여라. 잠시 후 황궁비고로 갈 것이니 말이다.”
 유필이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괜한 동정심을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냉정한 것이 좋았다.
 “그럴 순 없습니다. 제가 왜 그곳으로 가야 한단 말입니까? 네? 말씀을 해 보세요. 말씀을 해 보란 말입니다! 으아아!”
 진유는 결국 분을 참지 못했다.
 자신의 무력감에, 힘을 가진 자들의 횡포에 분노의 감정이 일며 자연스럽게 울부짖게 된 것이다.
 유필은 그런 진유를 묵묵히 지켜봤다. 지금은 어떤 말도 진유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울부짖던 진유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생명력이 모조리 빠져나간 듯한 얼굴이 되어 유필을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필은 그가 자포자기했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가 이곳에서 아무리 광분한다 해도 상부의 결정은 결코 뒤집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나 진유나 상부의 결정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시죠.”
 감정이 전혀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진유가 말했다.
 짧은 시간에 포기라는 이름으로 마음을 정리한 진유의 모습이 더욱 안타까웠지만 유필로서는 달리 해 줄 것이 없었다.
 유필은 대답 없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그런 유필을 따라 진유 역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인생에서 두 번째 절망 속으로······.
 
  * * *
 
 내궁을 나선 유필은 몇 개의 모퉁이를 돌아 건청궁乾淸宮으로 들어서는 대문인 건청문乾淸門 앞을 지나 서화문西華門 방향으로 한참을 걸어간 후에야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장방형의 건물 앞이었다.
 말없이 뒤따르던 진유는 도착한 건물의 규모에 잠깐 놀랐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곳이 황궁서고다.”
 앞서 있던 유필이 몸을 돌려 진유에게 말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여기가 어떤 곳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진유의 대답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가자.”
 그럼에도 유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가자는 말을 남기고는 몸을 돌려 황궁서고의 정문으로 걸어갔다.
 “후우······.”
 진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뱉어 내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유필이 건물의 입구로 다가서기 무섭게 황궁서고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위사 한 명이 길을 막아섰다.
 “신분과 목적을 말씀하십시오.”
 황궁비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황궁서고 역시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사전에 허락된 자만이 입장할 수 있다.
 “내서당 태감 유필과 새로운 감서내관 진유, 목적은 감서내관의 인계. 이상이오.”
 유필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는 패牌를 허리춤에서 꺼내 보여 주며 간단히 말했다.
 “확인이 끝났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유필의 앞을 막아선 위사는 아침에 상관에게 받은 지시 사항을 떠올리고는 두 사람을 황궁서고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 위사에게 내려온 지시 사항은 감서내관이라는 자가 도착하면 곧바로 들여보내라는 것이었다. 그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직명職名이라 의아하긴 했지만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었다.
 이곳에서 쓸데없는 데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특히 자신처럼 말단일수록 더욱 그랬다.
 위사의 확인을 거쳐 황궁서고의 정문을 넘어서자 긴 회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필과 진유는 회랑을 돌아 새롭게 나온 문 앞에서 다시금 앞을 가로막은 위사에게 확인 작업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황궁서고의 실내로 들어섰다.
 진유는 서고의 규모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금은 무언가에 감탄할 만한 입장이 아님에도 황궁서고의 방대함을 두 눈으로 확인하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키의 두 배 정도 높이에 오 장은 될 법한 길이의 서고가 좌우로 죽 도열했는데 그 수가 대충 보아도 백여 개는 넘었다. 유필의 말에 따르면 이십만 권의 장서가 이곳에 있다고 하니 놀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감서내관이 되어 황궁비고로 들어가는 입장만 아니라면 이곳에 온 것이 큰 영광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진유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가자.”
 황궁서고를 둘러보던 진유를 유필이 재촉했다.
 “황궁비고도 이곳에 있습니까?”
 그를 황궁서고로 데려오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하는 질문이었다.
 “이곳 지하라고 들었다.”
 “지하라······.”
 ‘평생 지하에서 썩어 봐라.’라고 했던 왕평의 말이 떠오르자 그나마 가라앉았던 분노가 다시 솟아올랐다.
 하지만 분노를 뿜어낼 상대가 없었다. 유필을 상대로 화풀이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또다시 침묵을 불러왔다.
 침묵에 잠긴 둘은 몇 개의 서고를 지나 입구의 맞은편 좌측 끝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역시 거기서도 또 한 번의 확인 작업을 거치고는 그 문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계단을 따라 지하 일 층에 도착하자 천장이 커다란 야광주로 장식된 복도가 나타났다. 밝은 곳에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찬란한 빛을 발한다는 야광주가 반 장 거리로 박혀 있는 호화찬란한 복도였다.
 ‘과연 황궁이구나.’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지하임에도 복도는 전혀 어둡지 않았다.
 야광주에서 나오는 빛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복도를 따라 반 각쯤 걸어가자 중간 부분에 두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한 명은 백의를, 다른 한 명은 흑의를 걸쳤다.
 “새로운 감서내관인가?”
 좌측에 서 있던 흑의인이 유필을 향해 물었다.
 다짜고짜 하대하는 것으로 보아 흑의인이 유필보다 높은 위치임을 짐작게 했다.
 맨 처음에 신분을 확인했던 위사처럼 그들도 오늘 일에 대해 뭔가 지시를 받은 듯했다.
 “그렇습니다.”
 유필이 대답하자 백의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흑의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이만 나가 보도록. 여기서부터는 황제 폐하의 윤허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 그리고 잘 알겠지만 이 비고에 대한 이야기는 입 밖에 꺼내지 않는 편이 그대의 신상에 좋을 것이다.”
 흑의인이 날카로운 기운을 쏘아 보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유필은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진유를 잠시 바라본 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 눈빛에서 안타까움을 읽었지만 진유는 아무런 말 없이 그의 뒷모습만 바라볼 뿐이었다.
 “나를 따라오너라.”
 유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흑의인이 진유를 데리고 복도 끝으로 향했다. 지금까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백의인도 진유의 뒤를 따랐다. 복도 끝에는 일 장 높이에 사람 세 명은 족히 들어갈 너비의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진유가 고개 들어 편액을 보니 ‘황궁비고’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비로소 황궁비고에 도착한 것이다.
 “비고를 개방하도록.”
 “네.”
 지금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백의인이 명령하자 흑의인이 대답과 함께 지체 없이 석문 옆 벽면에 있는 기관을 조작했다. 그곳에 설치된 기관으로 작동되는 모양이다.
 익숙해 보이는 몇 번의 손놀림이 끝나자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조각이 새겨진 좌우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하지만 곧바로 황궁비고가 나타날 것이라 여긴 진유의 예상과 달리 또다시 빈 공간이 나타났다.
 “이곳부터는 우리도 들어갈 수 없으니 혼자 가라.”
 “어떻게······?”
 “쭉 걸어가면 문이 하나 나올 것이다. 그곳이 황궁비고다. 어서 들어가라.”
 진유는 혼자 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워서 한 말인데 백의인은 방법을 묻는 줄 알았는지 친절하게(?) 알려 줬다.
 백의인의 말이 끝났음에도 진유가 안으로 들어가기를 주저하자 흑의인이 그를 억지로 밀어 넣고는 기관을 조작해 비고의 문을 닫아 버렸다. 정말 인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물이었다.
 문과 문 사이에 홀로 남은 진유는 서러움이 밀려와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것을 애써 참으며 그는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문을 바라봤다.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크기. 자신이 평생 지내야 할 곳의 입구.
 그곳을 향해 진유는 손을 뻗었다.
 
 
 
 #영생비록
 
 
 이곳까지 오기 위해 도대체 몇 개의 문을 지났는지 모른다. 그토록 은밀한 곳에 평생 동안 갇혀 지내야 한다니 참으로 막막한 심정이었다. 이미 포기했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현실을 마주하자 분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자연스럽게 일었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진유는 마지막 문의 손잡이를 움직였다. 그그긍 소리와 함께 문이 서서히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황궁서고와 같은 구조의 방이 나타났다. 단지 규모만 차이 날 뿐이었다.
 “후우······.”
 진유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버릴 듯했다.
 그런데······.
 “어린놈이 웬 한숨이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비고 안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동굴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와도 같았기에 진유는 깜짝 놀라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일순 마음이 심란하여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방금 들린 목소리가 너무도 현실적이었던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고 안쪽을 향해 외쳤다.
 “누, 누구요?”
 밀폐된 지하라 그런지 진유의 입에서 흘러 나간 소리가 메아리쳤다. 하지만 기대했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진유는 ‘그러면 그렇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스스슥.
 그런데 이번에는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조금 겁을 먹은 얼굴로 연방 주위를 살폈다. 불현듯 귀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조금 전이지만, 귀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진유는 잘게 떨리는 눈동자로 사방을 살폈다.
 스스슥.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그의 눈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으, 으악!”
 깜짝 놀란 진유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앞에 나타난 두 사람은 비슷한 나이의 중년인으로, 한 명은 좀 마른 체형인 데 반해 다른 한 명은 다부진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진유는 순간적으로 놀랐지만 곧 사람임을 확인하자 가슴이 진정되었다.
 “가,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게 합니까? 놀랐잖아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진유는 두 사람이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는 황궁비고에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자신 앞에 갑자기 나타난 것만을 따졌다.
 그런 진유를 조금 마른 중년인이 한심한 듯 바라보며 물었다.
 “네가 조가 놈 대신 온 놈이냐?”
 “조가 놈이라니요?”
 중년인의 물음에 진유가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얼마 전에 죽은 환관 말이다. 네놈이 그놈을 대신해서 이곳에 들어온 것 아니냐?”
 마른 중년인의 대답을 듣고서야 진유는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감서내관이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이전에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그로 미루어 봤을 때 마른 중년인이 말하는 조씨 성의 환관은 자신의 선임자가 분명했다.
 즉, 바로 얼마 전까지 감서내관이라는 조씨 성의 환관이 있었는데, 그 환관이 죽음으로써 공석이 된 감서내관 자리를 진유가 대신하게 된 것이다.
 진유가 마른 중년인을 향해 말했다.
 “죽은 환관의 성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대신하는 것은 맞는 듯합니다. 그런데 두 분은 누구신지······. 아! 이곳은 아무나 들어오지 못한다 들었는데, 두 분께서는 어찌······?”
 별생각 없이 말하던 진유는 별안간 그 사실을 인식하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놈 눈에는 우리가 보잘것없다는 소리구나.”
 마른 체격의 중년인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진유가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주먹을 뻗어 낼 기세로 말이다.
 “그, 그것은 아니지만 이곳에 들어올 만큼 대단해 보이진 않습니다만.”
 진유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살짝 빼며 말했다.
 “으하하하! 이 어린놈이 웃기지 않습니까, 형님?”
 그는 그리 대단할 것 없는 복식의 두 중년인을 보고 자신이 느낀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지만, 마른 중년인은 그것이 재미있는 모양이다.
 “제법 솔직한 놈이 들어왔구나. 조가 놈은 너무 소심해서 재미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심심하지 않겠구나.”
 “그렇지요?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도대체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의 어딜 보고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왜 말끝마다 놈놈 하는지······.
 진유는 여러 가지로 당혹감을 느꼈다. 게다가 자기들끼리 신이 난 두 사람을 보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르신들, 제가 조금 전에 누구냐고 여쭸는데······.”
 “이놈아! 어린놈이 먼저 ‘저는 어디서 온 누구누구인데 어르신께서는 누구십니까?’ 이렇게 물어야 할 것 아니냐? 하여간 요새 어린것들은 통 예의를 모른다니까. 쯔쯧.”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어린놈이 영 버릇이 없어 보입니다. 조가 놈은 소심했어도 예의는 발랐는데 말입니다.”
 형님이라 불린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한 소리 하자 마른 체격의 사내도 이에 질세라 한마디 덧붙였다.
 ‘끙.’
 두 사람의 핀잔에 진유는 앓는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달갑게 들리지 않았지만 형님이라고 불린 중년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기에 바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흠흠, 제가 경황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제 이름은 진유이고 올해 나이는 열여덟 살입니다. 여덟 살에 황궁으로 끌려와 환관이 되었고, 결국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간단히 소개를 마치자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노골적인 시선으로 진유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는 중년 사내가 혹시 남색가는 아닐까 하여 움찔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다부진 체격의 중년 사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진유라고······. 괜찮은 이름이지만 재수는 없는 모양이로구나. 이 몸은 마정명이라고 한다.”
 진유는 스스로도 재수가 없는 인생임을 인정했지만 남에게 직접적으로 그 말을 듣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참아 넘겼다.
 마정명의 표정으로 보아 나쁜 뜻이 있다기보다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했다. 그의 말을 곱씹는 와중에 마른 중년인이 이름을 밝혔다.
 “이 몸은 갈혁이라고 한다.”
 “······너무 간단하네요.”
 달랑 이름만 말하고 끝내자 진유는 그들이 소개를 한 건지 안 한 건지 모를 기분이 들었다.
 마정명과 갈혁.
 진유는 알지 못했지만 무림에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자들이었다. 최강의 무인인 십대초인十大超人이나 실질적으로 무림을 운영하는 강호삼십육강江湖三十六强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강호이괴江湖二怪라 칭해지며 무림에서는 꽤나 인지도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 갑자기 무림에서 사라져 호사가들의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렇듯 황궁비고에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두 분은 왜 이곳에 계신 것입니까?”
 진유는 이 두 사람이 어이해 비고 안에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는 네놈은 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감서내관으로 온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알면서 뭐하러 묻느냐는 얼굴로 진유가 대답했다.
 ‘고놈 성깔 있네.’라고 생각한 갈혁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도 너랑 같다.”
 “그게 무슨······. 그럼 두 분 다 환관이란 말입니까?”
 진유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예상치 못한 반문에 갈혁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하더니 이윽고 대소를 터트렸다.
 “으하하하하!”
 진유는 의아한 시선으로 갈혁을 바라봤다.
 “네 눈에는 나와 형님이 환관으로 보인단 말이냐? 으하하하. 형님, 이놈 정말 웃기지 않습니까?”
 “이 수염을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네놈이 환관인지도 의심이 되는구나.”
 마정명이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수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가 제정신이 아니구나.’
 진유는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탓하며 다시 물었다.
 “하면 어떻게 여기에······?”
 “네가 감서내관으로 이곳에 있다면 우리는 감서무관監?武官으로서 이곳에 있는 것이다.”
 “감서무관요?”
 들어 본 적 없는 직명에 진유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 년 전 어떤 간 큰 놈이 황궁비고에 도둑질을 하러 온 적이 있었지. 그 후로 이곳을 지키는 무관을 두었고, 그것이 감서무관이지.”
 “그렇군요. 그런데 두 분도 강제로 이곳에 들어오신 건가요?”
 “감히 누가 우리를 강제로 이곳에 보낼 수 있겠느냐? 우리는 스스로 원해서 이곳에 들어왔다.”
 마정명과 갈혁의 가문은 같은 곳에 멸문지화를 당했다. 우연히 만나 그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원수를 갚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다.
 강호이괴라 불릴 만큼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두 사람의 무공은 원수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더구나 원수는 두 사람이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복수를 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어 고민하던 두 사람은 어느 날 한 가지 제안을 받았다. 마정명이 소싯적 형제처럼 지내던 친구의 제안이었는데, 다름 아닌 황궁비고에서 무관 직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삼십 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 동안 황궁비고 안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당시 복수를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다짐한 두 사람이었기에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황궁비고의 감서무관을 맡기로 했다.
 그러니 이괴가 스스로 황궁비고에 들어왔다는 것은 거짓이 아닌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인이 아닐뿐더러 황궁비고가 무림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모르는 진유로서는 그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뭐하러 스스로 들어오셨죠? 이곳에 뭐 좋은 게 있다고.”
 “네놈은 무인이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무인에게 이곳은 천하의 보고이지.”
 갈혁의 말처럼 신공 비급이 수두룩하게 쌓인 이곳은 무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장소였다. 물론 진유에게는 아직까지 전혀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어르신의 말처럼 이곳이 천하의 보고면 무엇합니까? 평생 나가지 못하는데, 그게 무슨 필요가 있죠?”
 진유가 회의에 찬 얼굴로 물었다.
 “평생? 누가 평생 이곳에 있겠다고 했느냐? 우리는 삼십 년 동안만 이곳을 지키기로 되어 있다. 그 이후에는 자유로운 몸이 되지.”
 갈혁의 말에 진유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왠지 모르게 안쓰러움이 묻어나는 눈빛이었다.
 ‘삼십 년 후면 늙어 죽는데 무슨 소용이죠?’
 이 말이 목구멍 끝까지 나왔지만 차마 하지 못하고 삼켜 버리는 진유였다. 무인의 삶은 평범한 이들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할 수 있는 참으로 귀여운 생각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진유는 비고의 마지막 문을 열고 들어선 자리에 아직까지 그대로 서 있음을 깨닫고는 갈혁에게 말했다.
 “그런데 이곳에 계속 계실 건가요?”
 “아 참! 따라오너라. 네놈이 지낼 곳을 알려 줄 테니.”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가볍게 친 갈혁이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비고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가자.”
 마정명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진유가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앞으로 생활하게 될 조그만 방을 보았다. 작은 책상과 침상 그리고 탁자만 있는 단순한 실내였다.
 이곳에서 평생 지낼 일을 생각하니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옆에 이괴가 있어 아주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비록 진유는 깨닫지 못했지만 이괴의 존재 그리고 그들과의 짧은 대화는 황궁비고로 들어오기 직전 진유가 느꼈던 절망감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주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힘이 됨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진유는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절망과 위안을 함께 느끼며 황궁비고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 * *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진유가 비고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한 달여가 지나갔다. 그래도 처음에는 혹시나 빠져나갈 구멍이 있지 않을까 싶어 이곳저곳 살펴보았지만 역시나 황궁이란 곳은 그처럼 허술하지 않았다.
 황궁비고에는 감서내관과 감서무관을 위한 작은 공간 그리고 간단히 몸을 씻거나 용변을 보는 정방淨房을 제하고는 화포로도 쉽게 뚫리지 않는 철벽뿐이었다. 한마디로 입구를 제외하고는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굳이 감서무관이 존재해야 하나 싶었지만 진유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원해서 들어왔다니, 당위성을 따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진유는 황궁비고를 탈출하겠다는 생각은 들어온 지 이틀도 채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 버렸다. 불가능한 것을 붙잡고 있어 봐야 자신만 괴로워질 뿐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는 구세주와도 같은 이괴와의 하루하루가 이어지면서 처음 가졌던 그의 절망감도 많이 희석되었다. 그 대신 지루함이라는 또 다른 무서운 적이 그 자리에 조금씩 똬리를 틀었지만 절망감보다는 지루함이 더 나은 것은 틀림없었다.
 그가 비고에서 하는 일은 실질적으로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조금 과장되게 말해서 비고에 존재해야 하는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만큼 진유는 전혀 하는 일이 없었다.
 비고는 지하에 위치했지만 대명의 황궁이니만큼 고급 기술력이 총동원되었기에 일반적으로 지하에서 발생하는 습기 문제는 없었다.
 서책을 관리하는 데 습기만큼 해로운 것도 없는데 비고는 그런 문제를 미연에 방지했고, 만인에게 공개된 곳도 아니어서 손을 많이 타 서책이 훼손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먼지를 털어 주거나 가끔, 아주 가끔 발견되는 훼손된 서책을 손보는 일이 전부였다.
 처음에는 비고에 갇혀 지낸다는 기분을 없애려고 괜히 일을 만들어 가며 수고를 했지만 그것도 칠 주야 정도뿐 나중에는 뭐하러 몸을 피곤하게 하나 싶어서 편하게 지내는 쪽으로 방향을 수정했다.
 그런데 편한 것도 하루 이틀이지 시간이 지날수록 몸이 근질근질하고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비고에서 같이 생활하는 마정명과 갈혁은 진유로 하여금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존재들이었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무공 수련으로 보냈다.
 그 때문에 진유로서는 혼자서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는데 밀폐된 비고에서 할 일이라고는 사방에 널린 서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사례감에 들어가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온 그의 생활 방식은 이제 습관을 넘어 진유 그 자체라 해도 좋았다.
 시간이 지나자 지금까지의 생활 방식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칠 주야가 지날 무렵부터 비고에 있는 서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한 것이다. 재미가 있건 없건 습관적으로 읽어 나갔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을 때부터는 무공을 익혔다.
 평생 비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는데 무공을 익힐 이유가 있나 싶었지만, 어차피 남는 시간이라면 뭔가에 집중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절망감이 상당히 희석되었다곤 해도 진유의 가슴에는 아직도 원한과 복수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으로는 해결하지 못할 것들이었다.
 어떻게 해 볼 수 없을 바에는 그 감정에 매달려 지내기보다 서책을 보거나 무공을 익히는 것이 그에게 훨씬 이로웠다.
 물론 비고를 나갈 수 있다면 복수를 위해 살아가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일에 심력을 소모하기보다는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이 좋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비고에는 수백 종의 무공이 존재했다.
 그중에서 진유가 익히는 것은 진양공眞陽功이라 이름 붙은 내공심법이었다. 진양공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동자공童子功의 한 지류였다. 도문道門에 몸담은 한 기인이 만든 것으로, 환관인 진유가 익히기에 딱 알맞은 심법이었다.
 그가 이 진양공을 익히게 된 것은 이괴의 추천에 따른 결과였다.
 동자공의 원리를 따르는 내공심법들은 꾸준히 연마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심법을 익히는 순간 여인을 품으면 안 되는데, 그것을 지키는 것이 말처럼 쉽지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불가나 도문의 내공심법들을 제외하고는 이 동자공의 원리를 잘 이용하지 않는다.
 진양공 역시 수련을 시작하면 여인을 품을 수 없다. 극경極境에 달하기 전에 그리하면 그동안 쌓았던 공력이 여인의 비문을 타고 한순간에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반면 내공 증진 속도는 다른 심법들보다 확실히 빠른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 장점이 아니라면 동자공과 같은 내공심법이 만들어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진양공이 가진 장점과 단점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진유에게는 최고의 내공심법이었다. 여인을 품을 수 없는 몸이니 진양공의 단점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이괴에게 이런 설명을 들은 진유는 그날부터 진양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사실 비고 안에서 더 많은 내공을 쌓아 봐야 얻는 것은 없지만, 이왕이면 더 빨리, 더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택하는 것은 당연했다.
 
 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진양공을 수련하던 진유가 눈을 떴다.
 “역시 좋단 말이야.”
 심법은 기본적으로 육신의 원기를 북돋아 준다. 따라서 심법을 운공하면 몸 안에 쌓인 피로가 사라진다. 진양공 역시 그런 공능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비고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익히기 시작했지만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것과 같은 공능을 접하면서 진유는 무공 자체에 점점 관심을 가졌다.
 무공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떠나서 비고 안에서 무료하지 않게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었다.
 진양공의 운공을 끝낸 진유는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사방 삼 장 정도인 조그마한 방을 나섰다. 그리고 세 번째 서고에 있는 책들을 빼냈다가 꽂아 넣기를 반복했다.
 그가 지금 하는 행동은 다름이 아니라 오늘 하루 동안 읽을 책을 고르는 작업이었다. 무료함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일이라 해도 아무 책이나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왕이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책을 읽고 싶은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여전히 눈에 띄는 책을 골라내지 못한 듯 책을 빼내 제목과 내용을 잠시 살펴보다가 책을 덮고는 다시 꽂아 넣는 일을 반복했다.
 진유는 또다시 한 권의 서책을 꺼냈다.
 좀 낡아 보이는 책인지라 그의 손길은 자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영생비록永生秘錄’이라······.”
 제목대로라면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기록해 놓은 책일 듯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제목이라니. 그래도 한번 읽어 볼까나.”
 말도 안 된다 여기면서도 진유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책을 펼쳤다. 아니, 펼쳐 보려 했다.
 그런데 영생비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낡은 책이 펼쳐지지 않았다.
 “뭐지?”
 진유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어렸다.
 펼쳐지지 않는 책이라니,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혹시 귀신이 씌었나.”
 그는 다시 한 번 영생비록을 펼쳐 보려 했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에이, 몰라.”
 진유는 더 이상 생각하기 귀찮다는 듯 영생비록을 도로 제자리에 꽂아 넣었다. 내용이 궁금하긴 했지만 펼쳐지지 않으니 그로서도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는 다른 서책들을 꺼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몇 가지 책들을 골라서 방으로 향했다.
 진유의 운명을 뒤바꿀 영생비록과의 첫 만남은 그렇게 흐지부지 지나갔다.
 
  * * *
 
 황궁비고 안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황궁서고와 연결된 배식 통로를 통해서 음식이 들어오고, 그것을 받아서 먹은 후 다시 그곳으로 잔반을 내놓으면 된다.
 진유는 세 명분의 만두를 들고 이괴가 무공을 수련하는 장소로 향했다. 황궁에서 감서무관의 직책을 마련하면서 무공을 수련할 수 있는 조그마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괴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진유가 만두를 들고 나타나자 이괴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젠장, 또 만두냐?”
 “그러네요.”
 갈혁의 말에 진유 역시 맘에 들지 않는다는 어조로 답했다.
 “내 이곳을 나가면 반드시 그 숙수 놈을 쳐 죽여 버릴 것이다. 하고 많은 음식들을 놔두고 허구한 날 만두만 보내다니, 그놈을 가만두면 내가 갈혁이 아니라 진혁이다, 진혁!”
 “어째 그 이름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흥분한 갈혁의 말에 진유가 농을 쳤다.
 “뭐? 이놈아!”
 “농담입니다, 농담. 그만 화내시고 어서 드시죠. 이거라도 먹어야지 어쩌겠습니까?”
 “그래, 배만 채우면 되지. 어서 먹자.”
 진유에 이어 마정명까지 나서자 갈혁은 그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진유와 마정명도 작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세 사람은 만두를 먹기 시작했다.
 “진양공은 잘돼 가냐?”
 만두 하나를 깨물며 갈혁이 물었다.
 “그럭저럭요.”
 “내공심법만 수련하면 흥미가 떨어지니 다른 것도 한번 해 보아라.”
 “다른 것요?”
 “그래. 보신법이 좋을 것 같구나.”
 “걷는 법요?”
 “뭐, 따지고 보면 걷는 법이지.”
 “그것을 왜 배워요?”
 아직은 무공에 대한 지식이 없는지라 진유가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음, 일단 한번 보아라.”
 말로 설명하려던 갈혁은 차라리 몸으로 보여 주는 것이 낫겠다 생각하고는, 만두를 입안에 넣고 몸을 일으켰다.
 진유가 만두를 오물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스팟.
 순간 갈혁의 신형이 쭉 늘어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본래 서 있던 위치에서 삼 장의 거리를 이동했다.
 진유의 눈이 동그래졌다.
 “대, 대단하네요.”
 “이것이 바로 보신법이다. 이제 왜 익히는지 알겠냐?”
 “네.”
 “뭐, 너는 평생 이곳에 처박혀 있어야 할 몸이니 필요는 없겠다만, 배워서 나쁠 것은 없을 게다. 아니지. 혹시 아냐? 보신법을 극성으로 익히면 나중에 이곳에서 몰래 도망칠 수 있을지.”
 “그러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있겠어요.”
 진유라 해서 어찌 이곳을 나가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애초에 기대를 갖지 않았다. 그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여기는 진유였다.
 “일곱 번째 서고에 보면 ‘천환보千幻步’라는 비급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좀 어렵겠지만 그만한 보법도 없다.”
 아무런 말 없이 만두를 먹던 마정명이 지나가듯 말했다.
 “일곱 번째 서고의 천환보라고요?”
 “그래.”
 “알겠습니다. 찾아서 익히죠.”
 진유는 천환보를 익히기로 마음먹었다. 갈혁의 보신법을 보고 나니 한번 익혀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었던 것이다.
 더구나 진양공을 익히면서 무공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 터라 딱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두 분도 천환보라는 비급을 익히셨어요?”
 진유가 오물거리던 만두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물었다.
 “아니다.”
 “그럼요?”
 “능광단공보凌光斷空步라는 보법을 익혔다.”
 “능광단공보라······. 이름만 들으면 빛보다 빠르겠네요.”
 “왜, 아닐 것 같으냐?”
 마정명 대신 갈혁이 물었다.
 “설마 사람이 빛보다 빠르단 말입니까?”
 진유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당연히 아니지. 사람이 어떻게 빛보다 빠를 수 있겠느냐.”
 “그럼 그렇죠.”
 진유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그런 이름이 붙을 만큼 빠른 것은 사실이지.”
 갈혁의 장난에 피식 웃은 마정명이 능광단공보가 허명이 아님을 이야기했다.
 “그러면 천환보와 능광단공보 중 어떤 것이 더 좋은 보법인가요?”
 “그것은······ 왕소군과 초선이라는 두 사람의 미인을 두고 누가 더 예쁘냐고 묻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어리석은 질문이지.”
 마정명과 갈혁, 이 두 사람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지금처럼 어리석은 질문이라 생각되면 주저 없이 어리석다고 말했다. 진유도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말씀인가요?”
 “능광단공보는 빠름에 중점을 두었지. 상대와의 거리를 한순간에 좁혀 공격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능광단공보이지. 방어보다는 공격을 지향하는 무인들에게 효과적인 보법이다.”
 마정명이 잠시 말을 멈추는 사이 갈혁이 끼어들어 설명을 계속했다.
 “반면 천환보는 일순간에 수많은 환영을 일으켜 상대를 혼란시키는 데 주안점을 둔 보법이지. 공격에도 효과가 있지만 그보다는 방어에 더욱 뛰어난 효과가 있다.”
 “그러니까 두 분 말씀은 자신에게 맞는 보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로군요.”
 그제야 진유는 처음 마정명이 했던 말을 확연히 이해했다.
 “그렇지. 그래도 아주 멍청하지는 않구나.”
 갈혁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 하하! 그래도 지금껏 멍청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고 살았습니다.”
 “직접 본 것이 아니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끄응.”
 진유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갈혁은 이런 식의 말장난을 좋아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런 말을 들으면 딱히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진유였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의중이 정확히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결코 얕지 않다는 것을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은 이런 절망적인 곳에서 그를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 * *
 
 진유가 황궁비고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오 년이 지나갔다. 그동안 진유는 황궁비고에 존재하는 서책을 대부분 읽었다.
 그리고 진양공을 통해 반 갑자에 달하는 공력을 얻었으며, 천환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환영을 만들어 냈다.
 게다가 일 년 전부터는 이 두 가지에 더해 구천십이검九天十二劍이라는 검법을 익혔다. 비고 안에는 수련할 때 사용할 만한 검이 없었지만 손에 검이 들려 있다고 생각하며 수련했다.
 진유와 함께하는 이괴가 보기에도 그의 생활은 정말로 치열했다. 서책을 보고 무공을 익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치열하게 오 년을 보냈음에도 진유는 한 가지 생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버지를 죽인 자 그리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들에 대한 복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어차피 나갈 수 없으니 의미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쑥불쑥 그자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마음 깊은 곳에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이괴와 함께 있을 때는 덜했지만 홀로 무공을 수련하거나 서책을 볼 때 그런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도 쉽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복수심,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는 상황. 그것이 황궁비고에서 생활하는 진유를 가장 괴롭히는 점이었다.
 본래 육신의 괴로움보다 정신적인 괴로움이 사람을 더욱 지치게 만드는 법이지만, 진유는 그것을 잘 견디며 오늘도 책을 고르기 위해 방을 나섰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책을 우선적으로 읽은 그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을 읽는 중이었다. 세 번째 서고로 들어간 진유는 서책의 제목들을 살폈다. 그렇게 한참 살펴보던 끝에 드디어 책 하나를 빼 들었다.
 
 永生秘錄영생비록
 
 예전에 읽어 보려다가 책이 펼쳐지지 않아 읽지 못했던 바로 그 책이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진유는 책을 펼쳐 보려 했지만,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뭣 때문에 펼쳐지지 않는지······.”
 진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력을 쓰면 되려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영생비록을 잡은 양손으로 진양공의 공력을 흘려 넣었다.
 쩌어엉.
 공력을 사용하기 무섭게 항아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영생비록이 좌우로 펼쳐졌다.
 “뭐지?”
 깜짝 놀란 진유는 어느새 펼쳐진 영생비록을 보기 위해 시선을 내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의아한 얼굴로 영생비록을 보던 진유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낡은 부적 한 장이 들어왔다.
 “술법이 펼쳐져 있었던 것인가?”
 진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영생비록에는 고대의 술법 중 하나인 부적술이 펼쳐져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 진양공의 공력으로 깨진 것이다. 본래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지만, 워낙 오래전에 펼쳐진 술법인지라 너무도 쉽게 파해되었다. 진유로서는 행운이라 할 만한 일이었다.
 진유는 그 연유를 알 도리가 없었지만, 이왕 펼쳐진 것 영생비록을 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시 봐도 허풍의 끝을 말하는 듯한 제목에 한차례 웃음 지은 그는 서책의 가장 앞쪽으로 책장을 넘겼다.
 가장 앞쪽, 그러니까 표지 바로 다음 장에 짤막한 글이 쓰여 있었다.
 
 이 책을 읽게 될 연자緣者여······ 의심하지 마라. 그리하면 영생의 일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이야기하는 듯한 문구였지만, 진유는 알 수 없는 호기심을 느끼며 한 장을 더 넘겼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여 시작이 있으면 끝이 존재하는 것이 당연지사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는 그 끝을 거부하려 수없이 노력하니 그것이 인간의 욕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영생불사를 추구하는 이는 태고 이래로 셀 수 없이 많았으나 가장 가까이 다가선 자는 시황제始皇帝 영정텻政이었다.
 시황제는 중원을 일통한 연후에 영생불사의 도를 얻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것은 몇 가지 방법을 통해 진행됐다.
 그 첫째가 영단의 술術이었다.
 현문정종, 명문도가道家에서 내려오는 영단의 술術을 통해 시황제는 영생불사를 이루고자 하였다.
 그 두 번째가 영혼전이술靈魂轉移術이었다.
 자신의 영혼을 타인의 육신에 옮김으로써 영생을 추구하는 비술이 그것이다.
 그 이외에도 몇 가지 방법이 병행되었다고 하나 각각의 방법은 서로 독립적이고 은밀하게 진행되었기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내 조부에 의해 진행된 두 번째 방법인 영혼전이술은 수년간의 연구에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고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시황제는 살인멸구라는, 그로서는 간단한 방법으로 비밀을 숨기고자 했다.
 영혼전이술을 연구하던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내 조부이신 황상黃祥은 그동안 연구한 기록들을 챙겨 도주할 수 있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짐작하고 만반의 준비를 해 둔 결과였다.
 참고로 이야기하자면 영단의 술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알려졌으나 시황제가 영생불사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아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림인에게 다시없을 보물인 각종 영단이 이 연구에서 비롯되었으니 다른 의미로는 성공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간신히 목숨을 건진 내 조부께서는 숨이 다할 때까지 영혼전이술의 연구에 매달렸고, 그것은 내 아버지에게로 그리고 나에게로 이어졌다.
 영혼전이술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일생을 건 조부님과 아버님이 이해되지 않았다. 너무나도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자신의 영혼을 타인의 육신으로 옮긴다니 그것은 삼척동자도 웃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백여 년간 이루어진 연구의 핵심을 기록해 놓은 연구 일지를 들여다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연구 일지를 보는 순간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허무맹랑하다고 여겼던 영혼전이술이었으나 연구 일지를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드디어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는 앞으로의 내 삶이 결정지어졌다.
 세상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장장 오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영혼전이술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었고 드디어 하늘의 섭리를 거부하는 역천逆天의 도를 얻었으니 그것을 이곳에 남겨 놓으려 한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인간의 삶은 유한한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시황제의 지시에 따라 몇 가지 방법이 연구되었다. 그중 하나인 영혼전이술이 오랜 연구를 통해 드디어 성과를 얻었고 이것을 글로 남긴다.’라는 것이었다.
 누가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진유 역시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느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영혼전이술에 대한 기대감이라기보다는 막연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다음 장은 영생비록을 쓴 저자 자신의 경험담을 적어 놓은 부분이었다.
 
 이 책의 내용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모두 내가 직접 경험을 통해 증명한 것들이다. 본 자가 바로 영생불사를 경험했다는 말이다.
 본 자의 나이 육십구 세에 이르러 육신의 쇠약함을 느끼고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직접 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비술을 펼친 결과 성공적으로 새로운 육신을 얻었다.
 새 육신의 나이는 이제 막 십 세가 지난 상태였으니 다시 태어난 것과 진배없는 결과였다.
 나는 세상을 모두 얻은 듯 기뻐했고 비술을 더욱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세 번에 걸쳐 이 역천의 비술을 사용했고, 무려 사백 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았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사백 년을 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행복한 일만은 아니었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삶으로 결국 인생의 무상함만을 느꼈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런 이유로 더 이상 비술을 펼치지 않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죽음을 각오하고, 많은 고민 끝에 영생비술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결심했다. 많은 고민을 했지만 인간의 마지막 욕심은 평생 동안 연구한 이 비술을 사장시키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댓글(2)

뽀마르03    
음...환관은 양물이 없어 양기가 없는데 어찌 동자공을 익힐수 있을지...
2018.09.10 13:13
극치    
옜날소설이라 긍가 고구마네여... 일단 고자인거에서 시작하자마자 독자 90퍼는 나갈거 같음... 보아하니 다른방법으로 고치긴하겠다만...
2018.09.11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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