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ude
비가 흩날리고 사방이 캄캄한 어느 날 오후.
짙은 어둠으로 덮인 웅장한 저택의 한 내실 안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이 맨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무릎 앞에는 문방사우가 놓여 있었고 그의 왼손은 가느다란 붓을 쥐고 한지 위에 용사비등한 필체로 거침없이 혼신의 힘을 다해 글을 적어 내려갔다.
······소신 천군영이 돈수백배하고 아뢰옵니다. 신이 듣자하니 거란의 왕 아보기가 또다시 15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성으로 와 진을 치고 있어 요동성의 함락이 목전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에 신이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병상에 있는 몸이라고 하나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 이렇게 붓을 들었나이다.
폐하, 저들이 근 20년간 왜 이토록 집요하게 요동을 노리고 있겠습니까? 요동은 이른바 상도(上都,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의 남서쪽에 위치해 있어 거란과 아국 사이에 방패가 되는 군의 중요 요충지입니다.
만약 이곳을 장악한다면 저들은 아국을 치기 위한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게 될 것이며, 저들은 본격적으로 아국에 대한 공략에 나설 수 있는 전초기지가 될 것입니다.
요동이 함락되면 거란은 다시 대군을 일으켜 아국의 각 부(府)에 대한 공세를 펼칠 것이며 파죽지세로 진군해 종국엔 부여군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만약 부여군마저 함락되면 더 이상 저들의 앞을 가로막을 성 하나 없어 상도의 위험하기가 마치 조로(朝露, 아침이슬)와 같이 될 것입니다.
하여 소신이 엎드려 간곡히 청하오니 지금 즉시 각 부의 정병을 소집해 요동으로 원병을 보내시옵소서. 비록 요동에 있는 아국의 군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움에 임하고 있다고 하나 이대로 방치한다면 필경 요동성은 저들의 손에 함락될 것이 분명합니다.
모쪼록 폐하께서는 요동을 속히 구원하시어 아국의 2백 년 사직을 굳건히 하셔야 할 줄로 아뢰옵니다.
거침없이 장문의 글을 적어내린 그는 이윽고 붓을 멈추고 핼쑥한 얼굴로 잔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콜록.
이에 문 밖에서 조용히 호위를 서고 있던 붉은 갑주를 걸친 무장 하나가 서둘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장군! 괜찮으십니까?”
걱정스런 얼굴로 묻는 무장의 물음에 그는 억지로 기침을 참으며 답했다.
“······괜찮네.”
“장군. 다른 생각은 마시고 우선 몸부터 살피셔야 합니다. 편지는 다른 이를 불러 대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다 적었으니 되었네. 미안하지만 나를 저 침상까지 데려다 주겠나?”
“예, 장군.”
무장이 대필하는 이를 부르려고 하자 그는 손을 들어 말린 뒤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침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장은 그의 옆으로 다가와 부축한 뒤, 뒤편에 있는 침상 위에 그를 눕혔다. 침상 위에 누운 그는 핼쑥한 얼굴로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무장에게 말했다.
“이보게, 위 교위.”
“예, 장군.”
“내가 적은 저 서신을 황제 폐하께 올려 주게.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장군.”
그의 부탁을 받은 무장은 재빨리 그가 적은 편지를 집어 들고 곱게 접어 갈무리 한 뒤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무장이 밖으로 나간 뒤 그는 침상 위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커먼 창밖을 바라보았다.
휘이이이잉.
쏴아아아아······.
창밖은 여전히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고 곳곳에서 세찬 돌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그의 심정은 너무나 비장했고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이름은 천군영.
한때 옛 고구려의 영광을 다시 이어 나간 대발해국 사람으로,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니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뛰어난 재기와 총명을 지닌 이였다.
그의 나이 13살 때 군문에 투신해 그 뒤로 각처를 돌아다니며 수많은 전쟁을 겪었다. 전쟁이 있을 때마다 신묘한 군략과 병법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머쥔 명장이었고 또한 뛰어난 책사였다.
게다가 그는 학식이 깊고 교양이 넓어 치수, 축성, 정치, 상업, 농업과 같은 내정에도 뛰어낸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문, 역학(譯學), 산학(算學) 같은 각종 잡학에도 능했다. 또한 처세에도 뛰어나 달변이었고 뛰어난 인심장악술(人心掌握術)을 지니고 있는 불세출의 기재였다.
하지만 그는 시대를 잘못 타고 난 덕분에 불운한 일생을 보냈다.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출세가도를 달려 불과 나이 20대 초반이 되었을 때 황궁의 숙위를 담당하는 좌맹분위(左猛賁衛)의 장군 자리까지 올랐다.
하지만 일국의 장군 자리를 아직 30세도 안 된 나이의 그가 차지한 것은 그의 일신에 있어 안 좋은 일이었다.
그 즉시 모함과 비방이 난무했고 이를 견디다 못한 황제는 그의 관직을 강등시키고 변방인 요동성으로 쫓아 보냈다.
하지만 천군영은 이 같은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수행했다. 이 무렵을 전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거란군을 맞아 번번이 그들을 물리치며 필사적으로 요동성을 사수했다.
이 요동성의 중요성을 통감하고 있는 거란군은 그 뒤로도 계속 군대를 보내 성을 공략했지만 천군영은 최선을 다해 이를 막았다.
비록 중앙에서의 지원은 거의 전무했고 다른 곳에서의 도움도 별로 기대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 계속되었지만, 뛰어난 재능과 통솔력, 그리고 뭇 사람들을 믿음과 의리로 대하는 천군영의 모습에 요동성에 있던 모든 이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시련을 극복해 나갔다.
그러나 그 뒤로 10여 년이란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란군의 맹공을 막고자 몸을 혹사시킨 천군영은 이 무렵 심각한 중병을 얻어 더 이상 군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약해졌다. 결국 그는 황궁에 서신을 보내 후임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이자 그는 요동성을 후임에게 넘기고 상도로 돌아와 저택에서 요양에 들어갔다.
생각해 보면 지난 20년 동안 그가 얻은 것이라고는 빛이 바랜 영광과 병든 몸이었으니 지금 그의 심정은 공허하고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콜록 콜록 콜록.
마치 폐부를 찌르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심한 기침이 또다시 그를 괴롭혔다. 간신히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옆에 탁자에 놓인 차갑게 식은 차를 몇 모금 마신 뒤에야 간신히 기침이 가라앉았다.
기침이 가라앉자 그는 벽 쪽에 등을 기대고 가죽과 뼈만 남은 병든 몸을 내려다보며 한탄했다.
“어찌 하늘이 이리 무심하단 말이냐.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요동성에서 물러나 요양에 들어간 지 불과 반년이 지났다. 그런데 거란에서 또다시 15만이나 되는 대군이 침공해 왔다는 사실을 며칠 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때 병든 자신의 몸이 매우 원망스러웠다. 10년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지켜 내었던 요동성은 그에게 있어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말을 타고 달려가 싸우고 싶었다.
“이왕 이렇게 죽을 거라면 전쟁터에서 죽어야 할 것을.”
자신의 몸이 회복되기는커녕 날로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울적했다. 사람도 엄연히 동물이다. 자신이 죽을 때가 가까워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번쩍!
우르르르릉······.
그사이 창밖의 비는 더 세차게 내리 퍼부었고 이제는 천둥 번개까지 치고 있다. 이에 그는 다시 침상 위에 누워 창밖을 보며 울적한 심정을 달래었다.
웅성웅성.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나 싶더니 아까 그의 편지를 들고 떠났던 부하가 다급한 발걸음으로 달려왔다.
“장군, 장군!”
“아니, 위 교위! 무슨 일인가. 벌써 황궁에 갔다 온 건가!”
생각보다 빨리 부하가 돌아온 것을 보고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부하는 편지는 더 이상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듯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장군, 지금 황궁이 발칵 뒤집혀졌습니다. 폐하께서 어전 회의를 소집하시어 3사 3공의 주요 대신들은 물론 원임 대신(현직에서 물러난 원로대신)들까지 황궁으로 속속 입궁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변고라도 생긴 것이냐? 아직 시간이 한밤중인데 어전 회의라니.”
“예, 저도 그 점이 궁금해 수소문해 보았는데······.”
“어서 말하라.”
부하는 더 이상 말하기가 난처한 듯 우물쭈물해 했다. 그러자 천군영은 갑갑하다는 얼굴로 서둘러 다음 말을 하라고 재촉했다.
“요동성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합니다.”
“뭐, 뭐라!”
충격적인 소식에 천군영의 얼굴이 시커멓게 질렸다. 요동성에 거란군이 공격해 왔다는 첩보가 도착한 것이 불과 10일 전인데 그 사이에 이렇게 허무하게 함락되었을 줄은······.
생각조차 못했기에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어떻게 성이 그렇게 순식간에 함락된다는 말이냐! 그 성에는 2만이 넘는 병사가 있는데 어찌 10일도 못 버티고······ 크악.”
“장군!”
분노한 얼굴로 침상에서 윗몸을 일으킨 뒤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던 천군영은 갑자기 말하다 말고 입가에서 한 움큼의 시커먼 피를 토해 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부하는 놀란 얼굴로 천군영의 곁으로 다가와 그를 안고 밖을 향해 황급히 외쳤다.
“밖에 누구 없느냐. 장군께서 위중하시다. 의원을 속히 불러라. 어서!”
“예!”
부하의 목소리에 밖에 있던 다른 하인들이 서둘러 저택 밖으로 후다닥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군영의 상세는 매우 심각했다. 그의 각혈은 그 뒤로도 계속되어 무려 두 말〔斗〕의 피를 토한 뒤에야 각혈이 멈췄다.
쿨럭 쿨럭.
“크으음.”
천군영은 간신히 각혈이 멈추자 다시 고개를 들어 부하를 바라봤다. 좀 전까지만 해도 초점을 잃고 있던 그의 두 눈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정광을 번뜩였다. 그 모습에 이를 지켜보던 부하는 그가 예전의 총기가 어렸던 눈빛이 되돌아온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섬뜩함을 느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마치 다 탄 양초가 꺼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 차례 밝은 빛을 내는 것처럼.
부하는 천군영의 목숨이 다했음을 깨달았다.
“위 교위.”
“예, 장군.”
“그동안 나를 곁에서 호위하느라 고생 많았네.”
“어디까지나 제 임무는 장군을 호종하는 일입니다. 고생이라니 당치도 않으십니다.”
“위 교위, 마지막으로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겠나?”
천군영은 자신이 죽었을 때가 다 되었음을 알고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부하는 붉어진 눈시울을 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말씀하십시오, 장군.”
“내 일가친척은 예전에 거란 놈들에게 학살당해 내 시신을 수습해 줄 사람이 없네. 그 일을 자네가 맡아 주겠는가?”
천군영의 이 같은 부탁에 부하는 눈물을 흘리며 비통한 얼굴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예, 장군.”
부하의 대답을 들은 천군영은 그제야 안심하는 얼굴로 마지막으로 유언을 했다. 어느새 그의 두 눈은 점점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내가 죽거든 내 두 눈을 뽑아 나라 밖에 버려 주게. 차마, 죽어서도······ 내 조국이 멸망하는 꼴을 지켜볼 수가 없······ 허억!”
“장군! 장군!”
필사적으로 마지막 유언을 얘기한 천군영은 갑자기 크게 숨을 몰아쉬더니 그대로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발해 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불세출의 기재였던 흑발(黑髮)의 장군, 천군영은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에 평소 그를 따랐던 많은 부하들과 병사들이 슬퍼했으며 수많은 백성들 또한 눈물을 흘렸다.
그가 죽은 이 날, 하늘도 그의 죽음을 슬퍼했는지 그 뒤로 무려 4일 동안 엄청난 비바람이 몰아쳐 내렸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나라의 존망을 걱정하던 한 남자를 그리며······.
프롤로그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만이 그가 볼 수 있는 전부였다. 흔히 죽음하면 언급되는 염라대왕이나 저승사자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그가 느낄 수 있는 건 끝없는 어둠과 숨 막힐 것 같은 정적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으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어둠의 세계. 그것이 그가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
‘하긴 죽어 보지도 않았던 이들이 지껄였던 말이 사실일 리가 없건만.’
생각해 보니 염라대왕이니 저승사자니 하는 말은 어차피 살아 있던 이들이 말했을 뿐, 죽은 사람은 말을 할 수가 없으니 죽음의 세계가 어떤 곳인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이대로 푹 쉬는 건가······ 영원히?’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시간은 끝없이 흘러갔다. 마치 영겁의 시간인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는 완벽한 어둠 속에서 길고 긴 시간을 보내며 편안한 마음으로 느긋하게 사색을 즐겼다. 이렇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13살 이후로는 수많은 전장터를 돌아다니며 전공을 세우는 데 바빠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의 나이 34살에 죽음을 맞았지만 일찍 죽었다는 억울함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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