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기쁜 날이다.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남자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일 수도 있었다.
“충성! 병장 김진수 전역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그렇다. 오늘 그는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군대를 떠나게 되었다. 전역을 신고하는 진수의 입가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배웅 나온 후임병들도 기뻐하고 더러는 진수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지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크흑! 드디어 개말년 꼬장이 가는구나. 제발 좀 가라.”
“밖에서 나 보면 죽을 줄 알아라, 이 자식아!”
많은 후임병들이 눈물을 훔치면서 주먹을 흔들었다. 그렇게 전우들의 우정을 온몸으로 느끼며 진수는 위병소를 나섰다.
“후후, 드디어 해방이군.”
휘파람을 불며 길을 재촉하는 진수. 그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 밖에 없었다.
여자!
할머니를 흰 머리 소녀라고 부르는 곳이 군대다. 산골짜기에 처박힌 군부대에서는 여자 구경하기가 무엇보다 힘들다.
더욱이 진수는 아직도 순결(?)을 유지하고 있는 천연기념물이다.
그는 전역 후 여친을 만들어 보자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말년 때 정말 열심히 운동했다.
부대 내 헬스장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식스팩을 완성했고, 행보관의 눈을 피해 열심히 선텐하고 다녔다.
적당한 키와 구릿빛 피부에 다부진 자신의 몸을 보며 나름 여자들에게 먹힐 거라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얼굴은 영 아니었다.
진수 본인은 괜찮게 생겼다고 생각하지만 그 같은 외모는 널리고 널렸다.
어쨌든 자화자찬하던 진수의 평범한 얼굴에 한 줄기 근심이 어렸다.
“다 좋은데 돈이 없군.”
성격 나빠도 얼굴만 예쁘면 착한 여자지만 잘 생기고 몸 좋아도 돈 없으면 못난 남자다.
진수는 잠시 집안 사정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부모님 손에 맞아 죽긴 싫었다.
이래저래 궁리를 해 보아도 스스로 돈을 버는 수밖에 없던 진수는 한숨을 쉬며 걸어가는 도중 길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보았다.
“지갑?”
본능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진수. 하지만 이런 산골짜기에 어느 누가 지나가겠는가.
진수는 슬쩍 군화 끈을 매만지며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자연스런 동작으로 지갑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험험, 날씨 좋구나.”
진수는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면 미쳤다고 생각하겠지만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수는 주머니에 있는 지갑의 두툼함을 느끼느라 자신이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대박!’
진수의 입이 귀에 걸렸다. 손끝으로 느껴는 감각에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속이 꽉 찬 이 느낌!
진수는 자신도 모르게 광소를 질렀다.
“으하하하! 하늘이 나의 앞길을 돕는구나!”
진수가 소리치자 하늘도 그에 대답하는지 우르릉거렸다. 먹구름을 보아 하니 꽤 세찬 비가 내릴 거 같았다.
진수가 하늘을 보며 기뻐하던 그 순간!
우르르릉 꽈꽝!
“허억!”
진수는 보았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번개를.
하지만 본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번개를 맞는 순간 주변이 암흑으로 변해 갔다.
‘안 돼······ 난 아직 총각······.’
그 생각을 끝으로 진수는 정신을 잃었다.
1화 차원이동
1
“으윽.”
진수는 격통이 느껴지는 머리를 붙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살펴보고 크게 놀랐다.
마치 동굴에 들어온 듯 주변은 온통 돌뿐이었다. 이에 걸맞게 자신은 돌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이게 뭐야?!”
어떻게 자신이 이런 곳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진수는 오늘 있었던 일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지긋지긋한 군대를 떠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아침에 전역 신고를 하고 2년에 가까운 군 생활을 끝냈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지갑을 줍는 행운까지 생겼다.
꽤 많은 돈이 들어 있는 지갑을 보고 하늘을 향해 만세를 부르는 순간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이 떨어졌고 곧 정신을 잃었다.
“으흠, 병원은 아닌 거 같은데······.”
다시금 주변을 살펴보아도 무슨 커다란 동굴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이리 환한 거지?”
동굴이라면 분명 어두워야 할 터인데 대낮처럼 환한 탓에 진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올려다 본 천장에는 형광등보다 더욱 밝은 빛을 내는 구체가 있었다.
너무 밝은 빛에 진수가 더는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일 때 동굴 한 쪽 벽이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누구세요? 여긴 어디죠?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어, 외국인이네?”
진수는 반가운 마음에 나타난 인영을 향해 질문을 퍼붓다 금발의 남자를 보고 놀랐다.
영어하고는 원수처럼 지내는지라 어쩔 줄 몰라 하는데 금발의 남자가 갑자기 진수의 머리에 손을 갖다 댔다. 그러자 순간 남자의 손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사람 손에서 빛이 터져 나오다니, 놀랍기 그지없는 광경이었지만 놀랄 틈도 없이 진수는 머리를 쪼갤 듯한 통증을 느꼈다.
“크으윽!”
머리가 깨질 듯 아프면서 진수의 눈앞에 이상한 모양의 글자들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영어도 불어도 아닌 처음 들어 보는 말들이 그의 귓가에 윙윙거렸다.
한동안 정신 사납게 돌아다닌 그것들은 곧 진수의 머릿속으로 들어갔다.
“이제 됐군, 내 말 들리나?”
금발의 남자가 손을 떼며 말했다.
진수는 갑자기 무거워진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으윽, 한국말은 아닌데······ 도대체 누구시죠? 여긴 어디예요?”
“여기는 아트레이아 대륙이고 나는 골드 드래곤 이카루테로니안이라고 한다. 그냥 이카루라고 불러라.”
“······.”
진수는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이 사람, 미친 사람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카루는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진수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신이라도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 터.
인간 따위에게 잘 대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어쨌든 눈앞에 있는 인간은 그가 무려 이천 년을 고생해서 만든 작품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듣게. 일단 자네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죽었다는 뜻은 아니고 차원 이동을 했다는 말이지.”
골드 드래곤 이카루테로니안.
그는 이천 년 전부터 하나의 마법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차원 이동 마법.
차원 이동 마법은 신의 영역이라는 10클래스의 마법이었다.
드래곤은 중간계의 지배자로서 9클래스까지 익힐 수 있는 절대 종족이다.
하지만 이카루는 신의 영역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중간계를 넘어 신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드래곤에게는 보이지 않는 욕심이란 감정이 그의 정신을 지배했다.
어쩌면 인간들 사이에서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유희를 해서인지도 몰랐다.
일반적으로 드래곤들은 굳이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9클래스까지 도달했다.
이카루는 자신이 10클래스 마법을 익혀 그런 드래곤 중에서도 최강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레어에 틀어박힌 채 연구를 시작했다.
그렇게 연구를 시작한 지 천 년쯤 지났을 때, 그는 다른 차원계를 발견했다.
하지만 차원계는 그의 생각보다 많았다. 그 후로도 그는 수많은 차원계를 발견했다.
다른 차원계를 발견한 그는 이후 다른 차원계로 가기 위해 또다시 천 년을 연구했다. 천 년간의 수많은 실험과 연구 끝에 간신히 방법을 알아냈다.
육체는 놔두고 영혼만 이동하는 방법인데 이것은 극히 위험한 방법이었다.
만약 이동한 차원계가 마계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혹은 신계나 천계 같은, 드래곤보다 상위의 존재가 있는 차원계라면?
본체를 가지고 차원 이동하고 싶지만 차원 간의 압력은 상상을 초월해 드래곤의 육체라도 산산이 조각나고 말 것이다.
이카루는 고민 끝에 방법을 달리했다. 바로 다른 차원계 생명체를 이쪽으로 데려오는 방법이었다.
이카루는 차원 이동을 위한 매개물을 아무 차원계에나 던져 놓은 뒤 신호를 기다렸다.
진수가 ‘누군가 흘리고 간 지갑’이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이카루가 보낸 차원 이동의 매개물이었다.
진수가 그 지갑을 줍는 순간 신호가 왔고 이카루는 바로 차원 이동 마법을 시전했다.
“헐······.”
진수는 기가 막혔다. 자신이 마치 실험용 쥐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진수가 그렇게 느끼거나 말거나 이카루는 어느 정도 설명을 해 줬다고 느끼는지 이제는 본인의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도 처음 자네를 보았을 때 놀랐네. 다른 차원계에도 인간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지. 비록 영혼만 데려왔지만 나는 자네가 인간임을 잘 알고 있네. 오랜 기간 유희를 하면서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까. 혹시 자네 세상에도 드래곤이 살고 있나? 그리고 문화는 얼마나 발달되었나? 아트레이아 대륙보다 훨씬 발전된 문명인가?”
이카루는 드래곤답지 않게 두서없이 말을 쏟아 냈다.
진수가 멍청한 표정으로 이카루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잠깐! 영혼만 넘어왔다고요?!”
분명히 이카루가 말하길 육체를 데려올 수 없어 영혼만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말하고 움직이는 이 몸은 뭐란 말인가!
진수는 경악한 얼굴로 이카루를 바라보았다.
이카루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하하하, 다른 인간의 육체를 가져와 자네의 영혼을 집어넣었지. 오직 드래곤만 가능한 9클래스의 마법이지. 어때, 대단하지 않아?”
말하는 도중 허공에서 갑자기 커다란 거울이 나타났다. 이카루가 마법으로 거울을 꺼낸 것이다.
진수는 찬찬히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온 황금빛 머리칼이 가장 눈에 띄었다. 크고 동그란 눈에 에메랄드 눈동자는 신비로워 보였고 오뚝한 콧날에 자그마한 입술까지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미소년의 모습이었다.
‘일본 만화 주인공처럼 생겼군.’
간단하게 평을 내린 진수.
원래의 얼굴보다 엄청나게 잘 생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군대 말년에 엄청난 공을 들여 만든 근육질 식스팩은 사라지고 이런 비리비리한 몸매를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마법사라면 감격해마지 않을 9클래스 마법에도 흥미가 없었다.
사실 지금 진수에게는 그런 것 따위가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언제 집으로 갈 수 있냐는 것이다. 마법이고 근육이고 다 필요 없었다.
댓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