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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령의 제왕 1화

2018.10.19 조회 2,396 추천 11


 [화령의 제왕 1화]
 
 
 
 
 
 
 제1장 불 이야기 (1)
 
 
 캔버스를 가득 채운 채 당장이라도 연기가 피어오를 것 같은 불꽃을 조심스럽게 다듬어 나가는 강유진의 손길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붓은 어느 순간 멈춰지더니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불만이 가득했다. 누가 봐도 명작이 분명한 그림이었지만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러고도 한참 동안 그림을 노려보던 유진은 결국 신경질적으로 붓을 들어 캔버스에 X자를 마구잡이로 새겨 넣었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벌써 찢었다가 다시 그리기를 수십, 수백 번이었다. 그림에 불의 기운을 집어넣으려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캔버스에 그려진 것은 그저 그림일 뿐 불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유진은 지금 이 시간에도 불과 씨름하고 계실 아버지를 떠올리며 과거를 회상했다.
 
 “이 녀석아, 불이라고 하는 녀석은 다가가려고 할수록 멀어지는 법이다. 더구나 자신을 우습게 보려 들면 가끔은 투정을 부리며 자신을 깔보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는 하지.”
 “그럼 아버지는 불을 이해한단 말이에요?”
 “내 수십 평생 불과 가까이하고는 있다만 감히 불을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못한다. 다만 불을 좀 더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쨍그랑!
 말을 마친 아버지는 손에 쥐어진 망치로 가마에서 막 꺼낸, 푸른빛이 감도는 타오르는 불길이 상감된 도자기를 거침없이 깨 버렸다. 소년 유진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빛나는 자기를 부수는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 왜 어렵게 만든 도자기를 깨 버려요?”
 “허허! 이 녀석은 겉만 번지르르하지 깊이가 없구나. 사람도 마찬가지다.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항상 말썽이라는 괴물이 쫓아다니지. 이런 건 가치가 없어.”
 쨍그랑!
 방금 깬 도자기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도자기가 또다시 산산조각으로 변해 바닥으로 흩어졌다.
 “고생 고생해서 만든 건데 너무 아깝잖아요!”
 아버지는 그런 유진을 보면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왜 우리 가문이 불의 정화를 얻으려 애쓰고, 세계 제일의 청자를 만들려고 하는지 들어 보거라. 원래 관요의 도공이었던 조상님이 임진왜란 중에 이곳 강진으로 피란을 오셔서 부서진 청자의 조각을 발견하셨지. 백자만 만드시다가 보게 된 청자의 아름다움이 어떠했겠느냐. 그때부터 완벽한 청자의 재현과 세계 최고의 청자를 만드는 것은 우리 가문의 숙명이 되고 말았다.”
 수북이 쌓여만 가는 도자기 조각들을 아까운 눈으로 쳐다보던 유진은 재미도 없는 조상들의 이야기나 하고 있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 우리 가문의 조상님 중의 한 분이 민족의 정기를 받아 좋은 청자를 만들기 위해 화순의 운주사 천불천탑으로 가셔서 치성을 드리게 되었단다. 그때 우연히 어느 선사로부터 화령보결을 얻은 뒤로 우리 가문은 더욱 불을 잘 알고,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청자를 원형에 가장 가깝게 복원할 수 있게 되었지.”
 마침내 아버지가 마지막 남은 도자기마저 아낌없이 부숴 버리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쩝!”
 가마에서 꺼낸 도자기가 부서지지 않고 팔리는 날은 어김없이 유진의 주머니에도 제법 두둑한 용돈이 들어오는데, 오늘은 틀린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이번에도 쓸 만한 녀석을 건지지 못했군!”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유진에게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신 아버지가 몸을 일으켜 연장들을 챙겼다. 말과는 달리 아버지의 얼굴은 서운하다거나 하는 표정은 전혀 없었다.
 “그만 돌아가자.”
 뾰로통해진 유진은 그저 말없이 아버지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집에 도착한 아버지가 목욕을 마치고 방 안으로 들어가서는 명상을 시작했다.
 유진도 아버지와 나란히 정좌하고 앉아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으나 조각으로 변한 도자기들 때문에 정신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진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나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화령심법을 배웠다. 화령심법을 가르칠 때의 아버지는 평소 온화한 성품과는 달리 매우 엄하셨다. 수련 도중에 자리를 뜨는 일 따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화령심법이란 대대로 도요지를 운영하는 집안에 내려오는 보물인 화령보결에 적힌 명상 수련법이었다. 화령심법은 모두 4단계로 구분되어 있으며, 세상의 기운 중에 포함되어 있는 불의 기운만을 호흡법을 통해 체내로 흡수해 불과의 친화력을 높이는 것이다.
 극에 이르면 손가락 끝에 불이 피어오르게 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을 만큼 가문에서 소중히 여기는 수련법이었다.
 특히나 가마에 불을 때고, 도자기에 미치는 온도의 변화에 극히 민감해야 하는 도공을 업으로 하는 가문으로서는, 수련을 하면 할수록 불의 성질과 온도 등에 대해서 잘 알게 되는 화령심법은 그 어떤 보물보다도 값어치가 있는 것이었다.
 “유진아.”
 혼란스러워진 유진이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아버지의 나직한 음성이 고막에 파고들었다.
 “네, 넷.”
 화들짝 놀란 유진이 재빨리 대답했다.
 “모레가 네 엄마의 기일이구나.”
 ‘아! 정말로 그렇구나.’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의 얼굴을 머릿속에 그려 본 유진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아버지는 그저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어? 다른 때 같았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터인데 웬일이지?’
 “유진아, 네 책상 서랍을 열어 보거라.”
 “제 책상 서랍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아버지는 다시금 명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서랍 속에는 한 권의 낡은 책과 봉투가 들어 있었다.
 화령보결.
 아까 아버지가 했던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것과 같은 제목의 낡은 책에는 네 개의 글자가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독특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 옆에 있던 봉투에는 ‘사랑하는 아들에게’라고 시작된 장문의 편지와 지폐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장문의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유진의 눈가가 붉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무언가 굳은 결심을 하는 듯 입술을 악무는 것이었다.
 
 “그래! 여기서 포기할 수 없다. 그림에 불의 기운을 집어넣을 수 없다면 어떻게 도자기에 불의 기운을 불어넣어 가업을 이을 수 있겠는가!”
 회상에서 깨어난 유진은 다시금 그림을 그릴까 싶어 붓을 들었다. 그러나 흐트러진 마음이 정돈되지 않아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정좌하고 화령심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익힌 것이라 금방 심법에 몰입해 들어간 유진은 혼란스러워진 머릿속을 정리하며 명상 속으로 빠져 들었다.
 따르릉! 따르릉!
 막 무아경에 접어들 즈음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명상에서 깨어난 유진이 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나 민기다. 바쁘냐?]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진에게 라이벌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김민기였다. 두 사람은 라이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민기의 숨 가쁜 목소리를 들은 유진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오늘 소개팅이 있는데 어때?]
 “야야! 나 그렇게 한가한 놈 아니다. 끊자.”
 [유진아, 자, 잠깐만······.]
 민기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전화를 끊어 버리며 중얼거렸다.
 “소개팅이라······.”
 잠시 재잘거리는 여자들의 모습들을 떠올려 보던 유진은 금세 마음을 다스리면서 캔버스 앞에 앉았다. 머릿속에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떠올리며 그것을 그대로 그림으로 옮겨 놓기 시작했다.
 스슥, 사사삭.
 삼매경에 빠져 그려 나가는 손길은 전과는 달리 거침이 없었다.
 화르륵! 화륵!
 완성된 불꽃 그림은 마치 닿으면 델 듯 맹렬하게 타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제 색만 입히면 되는데.”
 그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색을 집어넣는 것이다. 어떤 색을 어떻게 집어넣느냐에 따라 그림의 생동감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크게 심호흡하고 물감을 짜려는 순간 인기척이 들려왔다.
 쿵쿵쿵!
 “유진아, 나 민기야. 문 열어!”
 ‘짜식! 소개팅에 나간다면서 여기는 또 왜 온 거야?’
 덜컥!
 “꺄악!”
 반바지만 달랑 입은 채 문을 연 유진은 여자의 뾰족한 비명 소리를 듣기가 무섭게 문을 밀어 닫았다.
 쾅!
 “빌어먹을 자식, 일행이 있으면 있다고 말할 것이지.”
 상의를 걸친 유진이 다시금 문을 열자 얼굴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던 여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민기 혼자인 줄 알고 그만······.”
 “괜······찮아요.”
 “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유진이 한쪽으로 비켜서자 민기와 여자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민기, 너 나중에 두고 보자.”
 “흐흐! 얼마든지!”
 유진이 바닥에 흩어진 쓰레기들을 주섬주섬 집어 대충 방 안을 정리하는 동안, 민기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시종일관 싱글벙글이었다. 어지러웠던 방을 대충 정리하고 허리를 편 유진은 서글서글한 용모의 미녀와 눈이 마주쳤다.
 “미라 씨, 인사해요. 아까 말한 유진이라는 괴짜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최미라예요. 민기 씨가 칭찬을 많이 하더군요.”
 “유진입니다.”
 유진은 미라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민기를 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와우! 새로 그리는 그림이구나.”
 민기가 활활 타오르는 불꽃의 형상을 쓰다듬으며 소리치자 두 여인의 시선도 캔버스로 향했다.
 “배경도 없이 불꽃만 달랑 있어서 그런지 그림이 참 특이한 느낌을 주네요.”
 “불에 미친 놈이에요. 그림을 그려도 불만 그리고, 여행을 가도 불이 있는 곳만 다니죠.”
 무언가 대단한 것을 일러바치는 듯 이야기하는 민기를 다시 한 번 째려본 유진은 미라를 향해 말했다.
 “그런가요? 이런! 내 정신을 보게. 손님이 왔는데 이러고 있다니······ 커피들 하시죠?”
 “야야! 커피보다는 우리 시원한 맥주나 한잔 하자. 오케이?”
 “난 찬성!”
 “저도 좋아요.”
 민기가 여자들에게 동의를 구하자 여자들도 흔쾌히 그의 말에 동의했다. 뜻하지 않은 방문객으로 인해 그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는 유진은 마지못해 민기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
 
 신촌은 언제나 젊은이들의 열기로 가득한 곳이다. 밤이 되면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청년들이 있는가 하면, 연인들끼리 서로 스킨십을 나누며 사랑을 속삭이는 아름다운 광경도 흔하게 접할 수 있었다.
 “어디로 갈까?”
 “내가 자주 가는 곳이 있는데 그리로 갈까요?”
 민기의 파트너인 효진이 현대백화점 건너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아, 우리 천사가 가자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지.”
 민기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화답하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지하도를 건너 주점들이 늘어서 있는 먹자골목으로 들어설 즈음 갑자기 사람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글쎄. 저쪽에 무슨 일이 있나 본데. 가 보자.”
 유진이 사람들이 뛰어가는 쪽으로 달려갔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저 앞에 보이는 건물에서는 검은 연기와 불꽃이 창문을 넘어 일렁거렸다. 건물 앞에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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