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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가기버튼 더 원(The One) [E](종료230808)

더 원(The One) -1-

2013.08.08 조회 17,984 추천 158


 프롤로그
 
 나는 현실이 싫다.
 빚 때문에 자살한 아버지도 싫었고 5살 된 나를 버리고 간 어머니도 싫었다.
 그뿐인가? 세계 최강의 남자로 만들어 준다며 13년 동안 나를 지옥같이 단련시킨 미친 인간도 싫었고, 최강의 자리에 오르자 내 돈의 대부분을 가로챈 미친 인간의 파트너도 싫었다.
 전부 싫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현실이 싫다.
 싸움으로는 전 세계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었지만 정작 나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괴물에게 처참히 무너졌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을…….
 
 
 @ 시작
 
 The One, 그것은 게임이었다. 2123년 코텍이라는 회사에서 만들어 낸 신감각 온라인 게임.
 뭐, 그렇다고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종종 나오던 가상현실 기술로 만들어진 게임은 아니었다. 단지 기존의 온라인 게임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로운 요소를 지닌 인기 있는 온라인 게임일 뿐이었다.
 코텍은 이 게임 하나로 단 3년 만에 세계에서 손꼽히는 게임회사로 성장했다.
 엄청난 숫자의 세계인이 하나가 되어 즐기는 온라인 게임… 나는 그 게임의 골수중독자였다.
 나는 오픈 베타 때부터 5년간 그 게임만 했다. 정말 죽어라 했다. 현실의 나를 잊고 싶은 나머지 밥 먹고 게임만 했다.
 돈? 돈은 조금 있었다. 비록 대부분의 돈을 빌어먹을 두 영감탱이가 가로챘지만 그래도 워낙 많은 돈을 벌었기에 평생 먹고살 정도는 되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사람도 많았고 수없이 많은 모험이 나를 반겨 주었다. 나는 능력을 키워 많은 모험을 완수했고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았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원의 최강자를 꼽으면 언제나 한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하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더 원 최고의 전성기였던 2, 3년째를 넘어 4년째에 들어서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났다.
 게다가 때마침 경쟁회사에서 출시한 가상현실 게임은 더 원의 몰락을 더욱 부채질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재미를 찾아 더 원이라는 게임을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에게 더 원은 제2의 삶이었기에 쉽게 떠날 수 없었다.
 5년이 흘렀다. 더 원이라는 게임 안에는 정말 사람이 없었다. 오죽했으면 두 달 동안 NPC만 보며 사냥을 했을까…그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간혹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옛 추억을 되살려 본다며 들어오는 사람들이 전부였다. 하지만 거의 6년째에 접어들면서 그런 사람들조차 구경하기 어려워졌다.
 나는 궁금했다. 왜 서버를 닫지 않을까?
 더 원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여 이제 다른 분야에서도 엄청나게 커져 버린 코텍이 아직까지 더 원에 미련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다.
 이유야 어쨌건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만약 서버를 닫는다고 했으면 맨몸으로 코텍 본사를 향해 돌진했을지 몰랐다. 내가 이만큼 키워 놓은 제2의 인생을 망가트린다면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내가 더 원을 한 지 7년째가 되는 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코텍이 더 원 출시 7년 만에 더 원 파트 2-꿈의 세계를 내놓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코텍이 다시 게임에 도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이미 컴퓨터와 가전제품 분야에서 큰 성장을 기록해 전 세계의 30대 기업에 들어간 코텍이었다. 때문에 포기했다고 생각한 게임분야에 다시 도전장을 내밀다니…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약간의 불안함을 느꼈다.
 더 원이 변하다니… 내가 그동안 이룩했던 것들이 없어지지는 않을까 고민이 된 까닭이었다.
 그러던 와중 나에게 연락이 왔다.
 그들은 더 원 고객지원팀이라고 했다. 나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나는 일단 차분히 전화를 받았다.
 
 ***
 
 “거참, 미친놈이네.”
 더 원 고객팀 최원호 대리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전화를 끊었다.
 “왜 그래? 무슨 문제 생겼어?”
 “아니, 문제는 아닌데… 내가 이번에 아직도 더 원 파트 1 계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한테 더 원 파트 2 클로즈 베타 테스터 참가기회와 3개월 무료이용권을 준다고 안내하고 있잖아.”
 “그렇지. 뭐, 200명 정도밖에 안 된다며?”
 “그래, 그 정도야. 대부분 휴면계정이고, 계정을 쓰던 사람도 게임을 플레이 하는 사람은 없지. 근데 방금 웬 미친놈이 자기는 아직도 게임을 플레이 하고 있으니 서버를 닫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우기네.”
 “뭐? 하하! 거참, 미친놈이네. 정식은 아니지만 2년 전에 사실상 서비스중지가 된 게임인데… 뭐, 그동안 서버를 안 닫은 것은 파트 2에 관련해 실험할 것이 몇 개 있어서라지? 근데 아직도 게임을 플레이 했다고? 그놈 이번 기회에 한몫 잡아 보려고 쇼하는 거 아냐?”
 “내 말이 그거지. 그래서 한바탕했다니까? 휴, 좋은 말로 해도 들어 먹지를 않으니, 으휴!”
 “잘했어. 우리도 인간인데 그런 놈들한테까지 살살거리며 얘기할 필요 없잖아.”
 “쩝, 그렇지… 근데 더 웃긴 건 이놈이 기다리라는데? 자기가 찾아온다고, 후훗!”
 “뭐? 하하핫, 멍청하군. 국내 최고의 보안 시설을 자랑하는 코텍 본사에 찾아오겠다고? 보나마나 경비실에서 혼쭐이 나고 쫓겨나겠지. 아니, 진짜 찾아오긴 할까? 보통 그런 놈들이 허풍이 심하잖아.”
 “후후, 진짜 찾아왔으면 좋겠다. 와서 떡대 경비들한테 혼 좀 나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렇긴 하네, 하하핫.”
 “흐음, 입구에 있는 동기 녀석한테 연락해 놔야겠네. 행패 부리는 고객이 있으면 호출하라고, 후훗”
 “오! 그런 수가 있었군. 좋아. 재미있는 구경은 놓칠 수 없지. 빨리 연락해 놔.”
 최원호는 머릿속으로 즐거운 상상을 하며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
 
 코텍 본사는 생각보다 내 집에서 가까웠다. 그건 내 집이 워낙 중심가에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좀 더 정적인 것은 내가 법으로는 금지된 최신형 개조 에어바이크를 타고 왔기 때문이었다.
 시속 400킬로를 훌쩍 넘는 개조 에어바이크는 그 안전성 문제로 금지된 마의 기계였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예전부터 죽음이나 안전과는 담을 쌓고 지낸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니 개조 에어바이크는 당연히 나의 주요 운송수단이 될 수밖에 없었다.
 [띠리링, 코텍 본사입니다. 입구에서 용무를 말씀해 주세요.]
 나는 딱딱한 기계음을 들으며 안내데스크까지 걸어갔다.
 “사장을 만나야겠다.”
 “사장님이요? 약속은 하셨나요?”
 “아니, 약속 따위는 안 잡았다.”
 “네, 네? 그럼… 안 되는데요…….”
 안내데스크 직원은 뭔가 험악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목소리였다.
 꽝!
 쩌적!
 “내 인생을 가지고 노는 놈 얼굴 좀 보겠다는데 왜 안 돼!”
 “꺄아아악!”
 내 주먹 한 방에 금이 가 버리는 안내데스크.
 삐이익! 삐이이이익!
 여직원의 비명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에서 경비원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4번 게이트! 괴한 출현! 빨리 뛰어!”
 ‘괴한이라…….’
 순식간에 괴한이 된 나는 정면에서 달려오는 경비원들을 보며 슬쩍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척척척!
 과연 세계 30대 기업 중 하나인 코텍의 경비시스템은 우수했다. 내가 잠깐 난동을 피운 사이 채 2분도 안 돼 엄청난 수의 경비원들이 나를 둘러쌌다.
 찌리리릿!
 경비원들은 고압전류가 흐르는 스턴건을 들고 나를 위협했다. 그냥 봐도 한 덩치 하는 경비원들이 20명 가까이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야.”
 한 경비원이 나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내가 가소로운가? 한때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지상최강의 사나이, 배틀머신, 악마의 사나이라고 부르며 두려움에 떨었는데… 그런데 내가 가소롭다고?
 휘익!
 퍼퍼퍽!
 내 하이킥은 조용하고 빨랐지만 결코 목표물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일명 악마의 발차기라 불리는 내 하이킥에 걸린 제물은 볼 것도 없이 정신을 잃었다.
 그 첫 번째 제물은 나를 비웃은 경비원이었다.
 “컥!”
 털썩!
 경비원들은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황했다. 당연하다. 내 발차기는 보통사람이 육안으로 확인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떤 스포츠 과학자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의 신체능력과 격투센스는 현대 과학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라고…….
 나는 내 몸을 믿었다. 그리고 비록 실전에서는 떠났지만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련은 내 몸에 일부분이 된 지 오래였기에 게임을 하면서도 수련은 꾸준히 했다.
 그렇기에 지금 눈앞에 있는 경비원들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뭐… 뭐냐!”
 짤랑!
 나는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손에 쥐었다. 다수를 혼자서 상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호흡이었다.
 내 호흡을 그들의 호흡에 맞추어 한 번에 격파하는 것, 그것이 다수를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휘익! 짤랑!
 나는 동전을 허공에 던졌다. 이것은 저들의 호흡과 나의 호흡을 맞추기 위한 일종에 계기였다.
 순간적으로 이 동전을 바라보게 되는 경비원들은 내가 의도한 대로 나의 호흡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그럼 그때부터 사냥은 시작이다.
 “응?”
 “음?”
 무의식적으로 동전을 쳐다보는 경비원들, 나는 몸을 움직였다. 한때 번개라고도 불렸던 나의 움직임은 경비원들이 따라올 그것이 아니다.
 퍼퍼퍽! 퍽!
 순식간에 경비원들 사이로 파고든 나는 그들이 들고 있는 스턴건을 쳐 내며 온몸으로 경비원들을 상대했다.
 주먹과 발만이 나의 무기가 아니었다. 무릎, 어깨, 팔꿈치 등 머리 모든 신체부위가 다 나의 무기였다.
 분명 경비원들은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뛰어난 신체능력을 지녔다. 하지만 나에겐 보통 사람과 별 차이 없다.
 어차피 보통 사람이나 경비원들이나 나에겐 똑같이 한 방에 불과했다.
 퍽퍽! 퍽!
 “크억!”
 “으아악!”
 20명을 처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들과 호흡을 맞춘 순간, 폭발적인 추진력으로 단 4호흡 만에 해결한 것이기에 대략 4분 정도 걸린 것 같았다.
 “녹슬었군.”
 전성기 때의 나라면 3분이면 해결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실전을 하지 않다 보니 실력이 조금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스으윽!
 나는 다시 안내 데스크를 향해 걸어갔다.
 아직 사장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용무가 끝나지 않았다.
 우르르르르!
 20명을 처리한 지 불과 5분도 지나지 않았건만 전보다 몇 배는 많은 경비원들이 나를 둘러쌌다.
 어림잡아 50여 명 정도로 코텍 본사에 있는 경비원은 다 몰려온 것 같았다. 처음과 달리 그들은 보통 스턴건이 아닌 원거리 스턴샷건이 들고 있었다.
 나는 또 한 번 웃었다.
 겨우 50명밖에 안 되는 인원과 그깟 스턴샷건으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건 나를 잘못 봐도 너무 잘못 본 것이었다.
 언젠가 조폭들이 법으로 철저히 금지된 총을 들고 공격할 때도 가볍게 제압한 나였다.
 지상최강의 사나이라는 말은 딱지치기로 딴 것이 아니었다.
 “후훗.”
 뚜두둑!
 나는 온몸에 힘을 집중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뼈마디는 굵직한 마찰음을 내며 내 명령을 기다렸다.
 일촉즉발의 상황!
 내 발이 떨어지는 순간부터 10분! 딱 10분이면 이들을 전부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처리할지는 이미 머릿속에 잡혀 있는 상태였다.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진 최적의 격투라인이 머릿속에 들어온 이상 이들은 나의 상대가 아니었다.
 “견적 나왔어.”
 스으윽!
 나는 오른발을 살짝 뒤로 뺐다. 이제 이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앞으로 튀어 나가기만 하면 된다. 바로… 지금!
 “그만!”
 멈칫!
 그때였다. 나의 호흡을 정확하게 읽은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호흡을 읽혔다는 것은 이미 상대방이 대응 가능하다는 뜻이었기에 미련 없이 멈췄다.
 스윽!
 나를 멈추게 한 사람은 의외로 깔끔하게 생긴 남자였다. 감색 줄무늬 정장에 새하얀 와이셔츠를 받쳐 입은 남자는 흰 피부에 또렷한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꾹 다문 입매에서는 절제된 동작이 느껴졌으며 짧은 머리 스타일만큼이나 강인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생김새를 봐서는 나를 멈추게 할 만큼 뛰어나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의 능력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만 해도 180센티의 키에 70킬로그램밖에 되지 않는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최강의 자리에 오르지 않았는가? 자고로 사람은 겉보다는 속이 중요했다.
 내가 흘낏 쳐다보자 남자는 씩 웃었다. 마치 지금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였다.
 “저를 만나시겠다고 이 난리를 부리신 걸로 아는데… 올라오시죠.”
 의외였다. 그 유명한 코텍의 사장이 저토록 젊은 남자라니… 게다가 순순히 나를 만나겠다고 하다니…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내가 계산한 견적에서 많이 벗어나는 요소들이었다.
 ‘뭐지?’
 나는 의문을 느꼈지만 티를 내지 않았다. 지금은 일단 저 남자, 아니, 코텍의 사장을 따라가는 게 급선무였다.
 
 “휘이! 대단하군요.”
 “…….”
 “이런 분이 계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얘기지?”
 “더 원 캐릭 명 건, 레벨 347 클래스 마법사… 전설이라 불리는 10서클 마법까지 마스터. 모아 놓은 아이템은 갓급 4개, 소울급 17개, 레전드 20개, 엘리트 22개, 유니크 78개, 레어 105개, 나머지 매직급은 셀 수도 없고… 거기에 1억 골드라… 허! 이거 말이 안 나오는군요. 대충 3년 전 더 원 몰락기 시세로만 따져도… 현금으로 20억 이상의 계산이 나오네요.”
 “그래서?”
 사장은 대단하다는 듯 감탄을 연발했지만 나는 별로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돈이 아쉬운 게 아니라 취미로 모은 것이었기에 팔 생각은 없었다.
 “더 원 몰락기에 사람들이 250레벨 정도도 지존이라고 떠들었는데 347레벨이라… 이거 계산도 안 나오는군요.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었죠?”
 “그건 내 인생이었다. 난 인생을 열심히 산 것뿐이다.”
 나는 내 인생에 최선을 다했을 뿐 어떤 이익을 위해 의도한 바는 없었다.
 “하아… 대단하군요. 그리고 대단한 것은 여기서 끝이 아니죠. 백, 건, 씨.”
 “내 이름을 알고 있나?”
 사장이 나를 알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물론 나름대로 유명했던 나였지만 거의 8년 전 얘기였고, 지금 모습과는 약간 달랐기에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알고 있죠. 지상최강의 사나이 백건 씨.”
 “음…….”
 남자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제가 한때는 그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솔직히 백건 씨의 팬이기도 했고요. 당신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는 많이 실망했죠.”
 “과거일 뿐이다.”
 “그렇죠. 과거일 뿐이죠. 하지만 그거 아시나요?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직도 많습니다. 지상최강의 사나이 백건. 이 타이틀은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을 능가하는 남자가 그쪽 세계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나는 관심 없다.”
 정말 관심 없었다. 어차피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것이다. 그쪽 세계는 그랬다.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도태되는 곳이었다.
 “뭐, 어쨌든 영광입니다.”
 “난 그런 것보다는 지금 내 인생에 더 관심이 있다. 서버를 닫지 마라. 서버유지 비용이라면 내가 낼 수도 있다. 너희 맘대로 내 인생을 끝내지 말란 말이다.”
 “흐음… 하지만 그 문제는 어쩔 수 없습…….”
 휘익!
 꽝!
 후다다닥! 처저적!
 내 주먹은 사장의 책상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경비원들은 뒤늦게 나를 둘러쌌다.
 “휴, 이러지 마세요. 저는 백건 씨를 도울 방법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나를 돕는 방법은 서버를 닫지 않는 것이다.”
 파지지직!
 스턴건은 내 몸에서 불과 5센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자칫하면 전기 찜질을 당할 상황, 하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5센티의 거리라면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만! 됐어요. 나가 보세요. 여기서 무슨 소리가 들려도 다시는 들어오지 마세요.”
 사장은 의외로 통이 컸다.
 스윽!
 내가 주먹을 빼는 것과 동시에 경비원들이 사장실을 나갔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뭘 도와줄 수 있다는 거지?”
 “흐음… 지금의 인생은 이어 가게 해 드리지 못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인생을 이어가게 해 드리죠.”
 “무슨 소리지? 간단히 말해라.”
 “간단히 말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장담하건대 이번 인생은 짧지도 않을뿐더러 전보다 더욱 환상적일 것입니다.”
 “…….”
 “물론 지금까지 쌓아 올리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제가 확신하죠. 사실 이번에 시작하는 더 원 파트 2 클로즈 베타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운이 매우 좋거나 특별히 선발된 인원, 단 500명에게만 주는 특권이죠.”
 “난 별로 새 인생을 만들고 싶지 않군.”
 “휴우, 좋습니다. 그 마음 백번 이해합니다. 지금까지 이룩하신 걸 포기하기가 힘드시겠죠. 대신 제가 조건을 걸죠. 제가 힘을 쓸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단 한 가지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물론 게임에 관한 것입니다. 아마 백건 님도 게임을 해 보셔서 알겠죠? ‘너무 많은 것을 얻은 자는 재미만은 얻을 수 없다.’”
 나는 생각했다. 새로운 인생이라…….
 두근!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이었다.
 “새 인생이라…….”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예.”
 “좋다. 받아들이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원하시는 소원은 어떻게, 지금 말씀하시겠습니까?”
 “소원이라…….”
 사실 나에게 소원 따위는 필요 없었다. 사장의 말대로 진정한 재미는 스스로 이룩해야 느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소원 같은 것은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거라면…….’
 “생각하셨습니까?”
 끄덕!
 “내 소원은…….”
 
 나는 사장이 갑자기 내민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코텍 본사를 나왔다. 역시 사장은 바보가 아니었다. 영악하게도 나의 소원을 들어주는 동시에 나를 광고모델로 사용하겠다고 했다.
 물론 내가 직접 광고를 찍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웹상에 떠도는 내 이미지를 모아 광고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것은 일종에 초상권 계약이었다. 나는 귀찮은 나머지 그냥 허락했다. 어차피 불법으로 내 초상권을 쓰는 곳도 많은 마당에 코텍에서 허락을 받고 쓴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사장은 사장 나름대로, 나는 내 나름대로 합의점을 찾았기에 둘 다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내 새로운 인생이었다.
 이번 인생에서는 그동안 그토록 찾던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위이잉!
 설명서에 나와 있었지만 직접 겪으니 더 울렁거리는 느낌이었다.
 ‘처음 몇 번만 그런다고 했으니 참아야지.’
 파팟!
 눈앞에 빛무리가 터지면서 새하얀 공간이 나타났다.
 [또 하나의 세계, 환상이 있는 더 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꾀꼬리 같은 음성,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고 귀를 즐겁게 하는 음성은 내 기분도 즐겁게 했다.
 “으음… 뭐지?”
 [안녕하세요. 백 건 고객님. 저는 고객님의 캐릭터 생성을 도와드릴 인공지능 No.3426입니다.]
 “호오, 인공지능? 엄청나군.”
 나는 나이에 맞지 않게 구닥다리였다. 게다가 워낙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는지라 이런 인공지능이 마냥 신기했다.
 [저희 더 원에 클로즈 베타 인원으로 뽑히신 백건 님은… $#@#$#… 백건 님은 $%#@#$… 치이이익!]
 “응?”
 [@@#$%&*%$@##…….]
 “왜 이러지?”
 [$%#@#&*#$@… 아! #@$%# 아아! 휴, 이제 되는군요. 죄송합니다.]
 “흠?”
 [휴우… 백건 님, 제 메일을 확인하지 않으셨나요? 이럴 것 같아서 제가 미리 메일을 드렸는데요.]
 메일? 아마 확인 안 한 지 백 년도 넘었을 것이다.
 “메일은 잘 안 봐서…….”
 [그런 줄 알았으면 차라리 전화를 드리는 건데 그랬군요. 어쨌든 긴급운영자 권한으로 인공지능 대신 제가 접속했으니 다행이네요. 하마터면 연쇄적으로 인공지능이 에러를 일으킬 뻔했습니다.]
 “음, 내가 잘못한 건가?”
 [뭐, 조금은요. 그렇지만 해결했으니 괜찮습니다. 메일에서 설명했지만… 아! 안 읽으셨다니 간단히 설명드리죠. 아시다시피 백건 님의 캐릭터는 저희가 따로 디자인했습니다. 저희도 상부에서 ‘그것’을 만들라고 지시 받았을 때는 웬 미친 짓인가 했지만, 대략 사정을 들었으니 거기에 대해 언급은 안 하겠습니다.]
 확실히 내가 요구한 ‘그것’은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나에겐 결코 그렇지 않았다.
 [솔직히 이건 매우 위험합니다. 사장님과 백건 님이 그 부분까지 얘기를 끝냈다고 하니 다른 말은 안 하겠지만 조심하세요. 사실 불법이기도 하고요.]
 불법이면 어떤가!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말했을 뿐이었다.
 [휴, 캐릭터 명은 원하신 대로 ‘건’ 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장님이 특별히 드리는 것이라며 인벤토리에 선물을 넣어 놨습니다. 사장님 말을 빌리자면 성의 표시라고 하네요.]
 “고맙군.”
 나는 선물이라면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 백건 님의 앞날에 행복을 빕니다. 참, 혹시라도 이상 징후가 생기면 저에게 꼭 연락 주세요. 연락처는 메일에 첨부했습니다.]
 끄덕!
 [그럼, 안녕히 계세요.]
 파파팟!
 맨 처음 공간이 생길 때와 비슷하게 이번에는 공간이 깨져 나가며 밝은 빛이 생겼다.
 빠바바바! 바바바! 바바바밤!
 나팔 소리가 음률을 타고 들리며 시야가 회복되자 제일 먼저 나무여관이라고 쓰여 있는 여관이 눈에 들어왔다.
 “뭘 해야 하나?”
 물론 대충 뭘 해야 할지는 생각했다. 단지 뭘 먼저 할까를 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온라인 게임 경력이 몇 년인데 뉴비-게임을 처음 접하는 초보유저-처럼 굴겠는가!
 “그나저나 대단하군.”
 게임 속 광경은 주변과 더불어 건물 하나하나까지 완벽하게 현실처럼 느껴졌다. 왠지 정말 다시 태어난 느낌이었다.
 “일단 매뉴얼에서 본 것들을 해 볼까?”
 상태창 오픈!
 
 [이름] 백건 [호칭] 무(無)
 [직업] 무 [성향] 무
 [종족] 인간 [계급] 평민
 [레벨] 0 [0%]
 [근력] 1 [근골] 1
 [민첩] 1 [인내] 1
 [지혜] 1 [지능] 1
 [매력] 1 [행운] 1
 [보너스 능력치] 0
 [생명(HP)] 100/100
 [마력(MP)] 20/20
 [공격력]2 [방어력]:2
 [스킬] 무
 [속성친화력(미구현)]
 [화] 0 [수] 0
 :
 :
 몇 페이지를 넘어가는 상태창은 아직 정립된 것 같지 않았다. 말 그대로 클로즈 베타 테스트였기에 아직은 많은 것이 부족했다.
 “신기해.”
 반투명의 상태창이 내 앞에 펼쳐져 있는 모습은 신기루와도 같았다. 진짜 현실에 이런 것이 생긴 느낌이랄까? 왠지 이 게임에 푹 빠질 것 같았다.
 “그나저나 선물이 뭐지? 가방 오픈!”
 매뉴얼에서 본 대로 외쳤더니 이번에는 널찍한 판처럼 생긴 창이 떴다. 이것이 인벤토리 같았다.
 인벤토리에는 기본적으로 주는 1골드를 제외하고 반지 하나와 쪽지가 있었다. 나는 쪽지를 펼쳐 보았다.
 [백건 님, 이건 제 조그만 선물입니다. 솔직히 백건 님의 소원을 들어드렸지만 조금 불안하군요. 위험할 수도 있는데… 뭐, 어쨌든 백건 님을 믿습니다. 이 반지는 엄청난 아이템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건 님에게는 쓸모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행복하게 시작하세요.]
 나는 쪽지를 놓고 반지를 들었다.
 “아이템 상태창 오픈!”
 
 <기적의 반지> (---급)
 [설명] 백건 님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기능] 단 한 번 사용 가능. 10초간 모든 마법타격과 물리적 타격을 무효화. 사용 후 자동 파괴.
 
 급도 정해지지 않은 반지 역시 사장의 파워로 급조한 아이템 티가 팍팍 났다. 하지만 그 기능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사장의 말대로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될 중요한 반지였다.
 다른 사람들도 충분히 탐낼 만한 반지였지만 아무래도 나보다는 덜 필요할 것이다.
 나는 반지를 끼고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간간히 보이는 존재들은 전부 NPC였다.
 “구경 좀 해 볼까?”
 현재 게임 안에는 나 혼자였다. 내가 워낙 특수한 경우였기에 코텍에서 하루 먼저 열어 주었다. 먼저 들어가서 적응을 하라는 의미였다.
 “특혜를 너무 많이 받은 건가?”
 나는 특혜 때문에 재미가 반감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할 것이다. 누가 보면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냐고 묻겠지만 오늘은 철저히 게임에 적응만 할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과는 좀 다르다. 그것 때문에 이런 특혜를 받았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내가 말한 다르다는 의미는 결코 좋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마을을 돌며 주변을 구경했다.
 걸음과 호흡, 모든 것을 조절하며 천천히 적응해 나갔다. 내가 사장에게 요구한 소원은 이런 것이었다.
 바로 현실감!
 나는 가상현실 게임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현실과 똑같이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사장의 말에 의하면 보통 유저들의 싱크로율 한계는 60%로 강제적으로 그렇게 정해 놨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게임 속에서 느껴질 수 있는 고통 때문이었다. 게임 속에서는 다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 게임 속에서 현실과 똑같이 느낀다면? 자칫 잘못하면 쇼크사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 한계를 60%로 정했다고 했다. 뭐, 사람마다 싱크로율이 조금씩은 다르지만 평균 40% 정도라고 했다. 그중 감이 좋은 사람은 한계치인 60%까지도 기록한단다.
 나는 그 한계를 없앴다. 즉 100%까지 가능한 캐릭터로 만든 것이다.
 사장은 나에게 말했다. 내 싱크로율의 한계를 없애도 정작 실제 싱크로율은 40%에 머물 수도 있다고…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한계보다 내 자신이라고 했다.
 나는 나 자신을 믿었다. 누구보다 내 육체를 잘 알았고 과학자들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육체를 통제했다.
 나는 내 심장과 근육을 마음대로 조종해 멈추게 했다 다시 뛰게 할 수 있었다.
 물론 미친 늙은이의 도움이 있었지만 결국 이런 나를 완성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지금 나는 게임을 느끼고 있었다. 게임 개발자들은 무슨 해괴망측한 짓이냐고 하겠지만 나는 분명 느낄 수 있었다.
 게임 속 나는 현실의 나와 같다. 다리 근육, 팔 근육, 그리고 심장까지… 모두 내 통제 안에 들어왔다.
 확언하건대 지금 내 싱크로율은 100%였다.
 
 ***
 
 “얼마지?”
 주식회사 코텍의 젊은 사장 김동혁, 그는 지금까지 코텍이 급성장한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현재 동혁은 더 원 종합상황실이라 불리는 곳에서 보고를 받고 있다.
 “말도 안 됩니다.”
 보고를 하는 남자는 꽤나 흥분한 상태였다.
 “흥분하지 말고 보고를 하게. 수치가 얼마로 나왔지?”
 “후우… 120%입니다.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수치입니다. 한계가 100%인데…….”
 “크음!”
 동혁은 신음성을 흘렸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기껏해야 80% 정도 되겠지 하고 생각한 싱크로율이 100%를 넘어 이해할 수 없는 정도의 수치로 나타나다니… 예상 밖의 일이었다.
 “당장 중지해야 합니다. 이건 너무 위험합니다. 그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환상을 느낄 겁니다.”
 “…….”
 “자칫 잘못하다간 진짜 쇼크사할 수도 있습니다.”
 “…….”
 “중지해야 합니다.”
 “그만.”
 “하지만…….”
 “그는… 백건이다. 자네는 모르겠지만 그는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수준의 인간이 아니야. 그는 지상최강의 사나이야.”
 “그래도 이 수치는…….”
 “어쩔 수 없어. 이미 기호지세야. 호랑이 등에 탔으니 계속 이대로 갈 수밖에…….”
 “으음.”
 “특별히 신경 써서 잘 체크하고 문제가 생기면 즉시 조치할 수 있도록 관리해.”
 “네.”
 위이잉!
 동혁은 상황실을 빠져나와 집무실로 향했다.
 상황실에서는 기호지세라고 말했지만 사실 불안하기는 했다.
 ‘그래도 백건이니까… 내 인생을 다시 일으켜 준 남자니까 한 번쯤은 믿어 봐야겠지.’
 왠지 백건과 무슨 관계가 있어 보였다.
 ‘휴, 어쩌면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건지도 모르겠군.’
 동혁의 한숨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
 
 와드득!
 귀찮다는 이유로 먹는 압축식량이었지만 그 맛은 정말 최악이었다. 이러니 군인들의 전투식량에서도 제외된 것이겠지.
 “슬슬 다시 열릴 시간이군.”
 시계 바늘이 오후 1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앞으로 10분, 슬슬 준비를 해야 할 때였다.
 위이잉!
 어제도 느꼈지만 이 울렁거림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파파팟!
 눈을 뜨자 어제 접속을 끊었던 무기점 앞이었다. 비록 500명의 클로즈 베타였지만 이 게임의 기대수치를 봤을 때 한 번에 많은 사람이 무기점에 몰릴 것이었다.
 나는 기다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연히 미리 무기점 앞에서 대기했다.
 ‘몰리기 전에 생각해 놓은 무기를 사야겠군.’
 끼이익!
 무기점 안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아마도 내가 첫 손님이겠지.
 “어서 오세요.”
 나는 종업원 NPC의 인사를 받으며 무기점 안으로 들어섰다.
 스윽!
 그리고 말없이 무기와 방어구들을 살펴봤다. 다른 유저들이 몰려와 시끄러워지기 전에 쇼핑을 끝낼 생각이었다.
 일단은 작은 검과 방패를 구입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순간 계획을 바꿨다. 재질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은은한 광택을 내는 검은색 건틀렛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나는 마음에 드는 것은 꼭 사고 마는 스타일이었다.
 “좋아, 마음에 드는군.”
 건틀렛의 옵션 따위는 관심 없었다.
 “다크 건틀렛(Magic)을 사시겠습니까?”
 “그러지.”
 차르륵!
 난 품 안에 있는 1골드 전부를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99실버, 계산 완료했습니다. 1실버는 잔돈입니다. 그리고 이 밧줄은 저희 가게의 첫 손님에게 드리는 사은품입니다.”
 ‘사은품도 주나? 좋군. 그럼 이제 무기를… 음!’
 나는 손바닥에 놓인 1실버 동전을 어이없게 바라보았다. 나도 모르게 한 충동구매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만들었다.
 결국 내가 1골드라는 거금-1골드는 100실버, 1실버는 100브론즈. 1골드라는 돈은 꽤 거금으로 초반 방어구와 무기를 전부 맞추고 다른 필요한 잡화를 살 수 있는 돈이다-을 다크 건틀렛이라는 매직 아이템과 더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밧줄과 바꾼 것이다.
 “젠장! 초장부터 꼬이는군.”
 
 <다크 건틀렛(Magic등급)>
 [설명] 흑철(黑鐵)로 만들어진 마법 아이템, 꽤 유명한 전사들이 애용한 아이템이다.
 [기능] 방어 +10 체력 +50 근력 +2 민첩 +2
  내구력 300/300
 
 분명 좋은 아이템이었지만 현재 나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휴… 무기가 없으면 맨손으로 해결해야 하나?”
 맨손도 충분히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었지만 맨손으로 싸우는 것은 싫었다. 맨손박투라면 현실에서 지겹게 해 본 싸움이었다.
 “응?”
 나는 옆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는 밧줄을 쳐다보았다.
 
 <무기점의 밧줄(Nomal 등급)>
 [설명] 무기점에 널려있는 밧줄 중 하나, 다른 것은 몰라도 엄청 튼튼한 밧줄.
 [기능] 무(無)
 [특이사항] 어지간한 힘에도 끊어지지 않는다.
 
 “사은품을 주려면 좀 제대론 된 것을 주던가.”
 휘익!
 턱!
 나는 풀밭에 드러누웠다. 사냥을 가야 했지만 도저히 맨손으로는 싸우기 싫었다. 뭔가 수를 내야 했다.
 ‘무기가 필요한데… 아무것이나… 아!’
 나는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면 된다고 어차피 맨손만 아니면 되는 것 아닌가? 나는 옆에 있는 밧줄을 집어 들었다.
 “어차피 인생은 즐기는 거야.”
 나는 밧줄을 들고 미리 생각해 놓은 사냥터로 이동했다.
 
 오크.
 분명 초보가 잡을 몹이 아니었다. 매뉴얼에도 레벨 10 이상의 유저가 잡을 몹이라고 나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 있었다. 원래는 오크가 아니라 리자드맨을 생각했으나 그것보다는 조금 안전한, 오크로 수정했다. 처음부터 너무 무리를 하는 것은 좋지 않았다.
 스으윽!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오크들이 자주 나오는 숲 속을 향해 걸었다.
 실제 현실과 너무나도 흡사한 이곳, 그래서 나는 더욱더 좋았다.
 현실에서의 내 움직임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물론 이곳에서 내 힘과 민첩 등은 1로 고정되어 있기에 현실처럼 큰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무기가 있었다.
 그 무기와 내 전투요령이 합쳐진다면 분명 오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취잇! 취잇!
 그때 눈앞에서 오크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다행히 한 마리뿐이었다.
 스륵! 스륵!
 나는 밧줄을 치렁치렁하게 들고 다닐 수 없어 손에 감았다.
 “후우, 후우.”
 호흡을 고르며 기회를 엿봤다. 현실에서도 그렇듯 지금도 호흡을 읽어야 했다. 오크도 생명체인 만큼 호흡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읽어서 단 한 번에 끝내야 했다.
 그것이 모든 능력이 오크에 미치지 못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취익!
 “히합!”
 오크와 호흡이 일치하는 순간 힘차게 뛰어올랐다. 오크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호흡은 내 것이었다.
 퍼퍽!
 내 양발은 오크의 가슴을 두들겼다. 이어 그 탄력을 이용해 빙그르 회전하며 오크를 넘어 오크 등 뒤로 착지했다.
 “이햡!”
 상대적으로 힘이 부족한 내가 오크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다른 힘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원심력과 중력이었다.
 실제로 어제, 게임 속에서 모든 물리적 법칙이 통하는 것을 확인했다. 그랬기에 이번 공격은 성공할 것이라 믿었다.
 우드드득!
 오크를 뛰어넘으며 슬쩍 풀어 놓은 밧줄은 정확히 내가 노린 위치, 즉 오크 목에 감겼다.
 그리고 착지와 동시에 원심력을 이용해 밧줄을 잡아당기자 생각보다 쉽게 오크가 딸려 왔다.
 유도의 업어치기를 응용한 밧줄 업어치기는 원심력과 중력의 힘이 합쳐지면서 오크를 즉사시켰다.
 꽝! 키엑!
 스르르륵!
 첫 사냥은 성공이었다. 신기하게 오크는 죽자마자 흐릿해지며 사라져 버렸다.
 띠링!
 [전투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확인하세요.]
 단 한 마리를 잡았는데 레벨이 올랐다.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1레벨도 아니고 무려 3레벨이나 올라 있었다.
 “사냥 속도가 느려서 그렇지 확실히 경험치는 끝내주는군.”
 비록 사냥감을 찾고 사냥을 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이 단점이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평범한 사냥보다는 1.5배 정도 빠른 성장이었다.
 “거기에 보상도 짭짤하고…….”
 나는 오크가 남겨 놓은 은화와 몇 가지 아이템을 집어 들었다. 확실히 레벨에 비해 짭짤한 소득이었다.
 “좋아. 견적 나왔어.”
 나는 팔에 다시 밧줄을 감으며 살며시 웃었다. 이제부터가 진정, 새롭게 시작하는 인생을 위해 죽도록 노력할 때였다.
 
 ***
 
 “어이가 없군요.”
 “저런 사냥법이 가능하리라 생각했었나?”
 “어느 정도 현실에서의 능력이 영향을 미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저 정도로 이용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흐음… 밸런스가 붕괴될 정도인가?”
 “부분적으로 봤을 때는 아닙니다. 확실히 대단한 사냥이긴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한 마리씩 천천히 잡아야 하기 때문이죠. 물론 보통 사람들보다 빠른 성장을 하겠지만 사냥 자체로만을 따졌을 때는 밸런스가 무너질 정도는 아닐 거 같습니다.”
 “부분적?”
 “예, 부분적이죠. 그의 사냥은 위험하지 않지만 그가 만들어 낸 전투 스킬은 약간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더 원의 메인 컴퓨터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때로는 저희의 예상 범위를 벗어나는 스킬을 생성시키는데… 지금이 그런 경우입니다. 저 전투 스킬과 직업은 밸런스에 상당한 위협을 줄 수 있습니다.”
 “스킬이라… 혹시 저 스킬을 다른 사람도 쉽게 습득할 수 있을까?”
 “그건 좀 어렵겠군요. 일단 저 플레이어의 경우는 말도 안 되는 섬세한 조작을 통해 저 스킬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기껏해야 60%의 싱크로율이 한계인 보통 유저는 저런 스킬을 만들 수 없습니다. 싱크로율도 싱크로율이지만 저 유저의 몸놀림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라…….”
 “후후, 역시 녹슬지 않았군.”
 “네?”
 “아닐세. 어쨌든 내가 봤을 때는 저 스킬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퍼지지만 않으면 그렇게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네. 어떻게 보면 저런 스킬을 쓸 수 있다는 것도 그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고 말이야.”
 “그건 그렇지만…….”
 “일단은 그냥 지켜보는 걸로 하세. 후에 문제가 된다면 메인 컴퓨터를 설득해 수정하는 쪽으로 해 보자고.”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 정말 여러모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요. 도대체 정체가 뭐죠?”
 “나도 잘 모른다네. 단지 패배를 모르는 남자라는 것 정도밖에는… 어쨌든 대단한 남자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네.”
 종합 상황실에서의 대화, 그들이 얘기하는 남자는 당연히 백건이었다.
 
 ***
 
 이 게임은 레벨도 중요했지만 스킬의 숙련도 또한 중요했다.
 그럼 스킬은 어떻게 배울까?
 그것은 간단했다. 어떤 기술을 익히고 싶으면 그 기술을 배우면 된다.
 배운다는 의미는 곧 노력한다는 의미였다. 즉 낚시 스킬을 배우고 싶으면 낚시를 열심히 하면 된다.
 물론 전투 스킬의 기초는 NPC가 가르쳐 주거나 스킬북을 구해서 보고 익히는 것이 대분이었지만 어쨌든 그것들도 처음만 그럴 뿐 나머지는 스스로 반복 수련하는 것이 중요했다.
 계속 사용하고 연구한다면 스킬의 숙련치는 올랐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줄어들었다. 즉 어떤 기술이든 배울 수는 있지만 기계가 아닌 이상 여러 가지 스킬을 한꺼번에 키우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내가 그것을 깨달은 것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였다.
 게임 속에서 사냥을 하고 열심히 생활하다 열어 본 상태창, 스킬란에는 괴상한 스킬들이 생성되어 있었다.
 스킬을 배우지 않았는데 왜 생겼을까?
 하지만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스스로 스킬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매뉴얼이 생각났던 것이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킬을 만들어 냈다. 그 스킬들의 이름은 섀도우 스텝(25.34%), 섀도우 하이딩(31.04%), 이글아이(20.11%), 와이어 기본 스킬(30%), 와이어 마스터리(7.5%)였다.
 섀도우 스텝와 섀도우 하이딩은 말 그대로 기척을 숨기고, 걷고, 숨는 기술이었고 이글아이는 목표물을 정확히 읽어 내는 능력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와이어 마스터리는 끈 종류 무기를 쓰는 능력이었다.
 스킬 숙련치는 생각만큼 높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는 마스터리 스킬을 제외한 스킬들을 마스터하면 그것의 상위 기술로 변환한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레벨 업보다 더 어려운 스킬 숙련법이었다.
 클로즈 베타 테스트가 시작된 지 한 달이 흘렀다. 어느덧 내 레벨도 20이 되었다. 마을에서 슬쩍 소문을 들으니 현재 최고 레벨이 16이라고 한다.
 점점 차이를 벌려 한 발짝 앞선 사냥터에서 사냥을 해야 했다. 내 사냥의 특성상 여러 사람들이 사냥하는 곳에서는 사냥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사냥터가 필요했다. 아직은 다른 사람들보다 2, 3단계 앞선 사냥터를 사용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 실력차가 줄어들 것을 감안할 때 좀 더 빨리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더 노력해야겠군.”
 클로즈 베타 테스트는 두 달 후면 끝난다. 다행히 오픈 베타 테스트로 바뀔 때 완전 초기화가 아닌 숙련치와 레벨의 반을 깎는 부분 초기화를 한다고 하니 지금 빨리 성장하는 것이 중요했다.
 “클베가 끝날 때까지 레벨 60은 만들겠어.”
 약간은 힘들지 모르는 목표였지만 달성할 자신이 있었다. 지금의 사냥법도 점점 손에 익어 가고 능력과 장비도 좋아지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했다.
 꾸욱!
 철컹!
 나는 손에 든 얇은 쇠사슬을 꽉 잡아당겼다. 처음에는 밧줄을 사용하다 점점 알맞은 끈으로 바꿨고,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이 얇은 쇠사슬이었다.
 쇠사슬은 쇠사슬이지만 가죽 끈처럼 유연함을 지닌 쇠사슬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사냥해 얻었던 것들을 전부 투자했다.
 아직 내가 원하는 만큼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원하는 형태를 갖추었다. 귀한 흑철을 작고 정교한 고리로 엮은 것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쇠사슬의 정체였다.
 현재는 시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단계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좀 더 좋은 아이템을 구할 수 있다면 쇠사슬의 두께나 모양을 좀 더 실용적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절삭력이 강력한 것이 좋았다.
 “조금씩 바꾸면 돼.”
 오픈까지는 게임 시간으로 두 달, 아직 시간은 많았다.
 스윽!
 조금 휴식을 취했으니 다시 사냥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아직 내가 갈 길은 멀고 험했다.
 
 쉬익… 쉬익.
 그놈은 무지개 숲의 폭군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나는 멀리서 이글아이를 이용해 놈을 관찰했다. 그것도 3일간…….
 이제 3일 후면 오픈 베타 테스트, 사람들은 오픈 베타가 오기 전에 쓸모없는 아이템을 정리한다고 난리였다. 은행이 모조리 리셋 되고, 오로지 자신의 장비와 아이템만 가져갈 수 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이미 다 정리했다. 시간 아깝게 장사 같은 것을 하지 않고 상점에 모조리 팔아 흔히 레인저 세트 또는 도적 세트라 불리는 사냥꾼 가죽 갑옷 세트를 장비했다. 남들이 보면 침을 흘리며 탐낼 아이템들도 꽤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은 말 그대로 준비 기간, 진짜 시작은 오픈부터였다.
 레벨도 목표인 60을 찍었기에 더 이상의 사냥은 무의미했다. 그렇다고 준비 기간에 장사 같은 것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남들이 정리를 하며 시간을 보낼 때 나는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기념할 만한 일을 계획했다.
 그 누구도 도전할 생각을 못한 바로 ‘그놈’때려잡기!
 그놈은 이 숲의 공포 그 자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녀석에게 죽임을 당했고, 나 역시 한 번 당한 적이 있었다.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죽음을 경험했는데… 그것은 생각보다 꽤나 고역이었다.
 현실에서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 봤지만 죽는 경험은 하지 못했기에 그때 느낀 감각은 솔직히 나로서도 생각하기 싫은 끔찍함이었다.
 고통에 대해 어느 정도 면역이 있다고 생각한 나였지만 트윈헤드의 양손이 나의 양팔을 부러트리고 무시무시한 힘에 의해 바닥으로 내팽개쳐졌을 때는 정신을 잃을 뻔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필사의 도주로 더 이상의 타격은 없었지만 부러진 양팔과 바닥에 팽개쳐질 때 생긴 데미지는 내 체력을 0에 가깝게 깎아 먹었고, 결국 나는 죽었다.
 생각하지도 못했던 고통, 나는 높은 싱크로율의 위험성을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고통뿐만이 아니었다. 더 원은 죽음으로 인한 페널티가 무시무시하기로 유명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떨어지는 레벨인 1~3이 랜덤 하게 떨어졌다.
 그뿐인가? 죽음과 동시 모든 아이템의 내구도는 1이 되고 장비하고 있는 아이템 중 한 개와 인벤토리에 있는 아이템 3개가 랜덤 하게 떨어졌다.
 거기에 결정적인 마지막 하나. 죽음과 동시에 2일(게임 시간 6일) 동안 게임 속에서 유령플레이어-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로 변해 죽은 장소에서 대기하다 시간이 다되면 가까운 라이프 포인트-생명을 임시로 저장해 두는 신비로운 수정-에서 다시 살아났다.
 각설하고 내가 이렇게 놈을 찾아 해매는 이유는 단 하나. 복수 때문이었다. 나는 그 누구도 도전하지 못했던 무지개 숲의 폭군 트윈헤드오우거를 향해 복수를 결심했다.
 ‘역시… 저 지역이 놈의 사냥터였군.’
 나는 3일간 놈을 관찰하며 놈의 생활 패턴을 알아냈다. 놈은 일정한 지역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주치는 생명체는 모조리 죽였다.
 먹기 위한 사냥이 아니라 살육을 즐기는 놈이었다.
 ‘내일 이 시간, 놈을 잡는다.’
 나는 결전의 시간을 정했다. 놈은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마무리할 마지막 사냥감이었다.
 다음 날 같은 시간, 나는 눈앞의 큰 사냥에 대비해 마음가짐을 단단히 했다.
 스으윽!
 우선 섀도우 스텝를 이용해 놈에게 최대한 접근했다. 비록 내가 은밀하게 움직이는 능력을 지녔지만 놈의 감각은 상상을 초월했기에 만족할 만큼 접근하지는 못했다.
 스르릉!
 나는 미리 준비한 두 자루의 단도를 뽑았다. 단도는 최근에 사용하기 시작한 무기였다. 왠지 끈 하나로만은 살상력이 너무 부족해 투척용으로 사용하는 무기였다.
 사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숙련도가 낮았기에 능숙하지 못한 손놀림으로 단도를 다뤘다.
 ‘조금만 더.’
 나는 오우거가 내 쪽으로 다가서기를 기다렸다. 비록 섀도우 스텝으로 좀 더 다가가는 것은 무리였으나 섀도우 하이딩으로 기다리는 나에게 녀석이 다가오는 것은 가능했다.
 다행히 놈은 점점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물론 내가 3일간 관찰하고 놈이 움직일 것이라 생각한 방향에 잠복한 영향도 있었지만 약간의 운도 따랐다.
 ‘조금만 더.’
 쿵쿵!
 오우거는 육중한 몸을 움직이며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후우, 후우.”
 평소처럼 호흡을 맞췄다. 이제 진짜 마지막 한 발자국!
 쿵! 파팟! 휘릿!
 오우거와 내가 호흡이 일치하는 순간, 나는 단도를 던졌다. 오늘의 단도는 평소와 달리 구하기 힘든 포이즌 포션을 먹인 단검이었다.
 팟!
 첫 번째 단검은 아쉽게도 빗나가고 말았다. 하지만 두 번째 단검이 바로 뒤를 이어 날았다.
 푸슛!
 적중! 단검은 정확히 오우거의 다리에 박혔다.
 크아아악!
 나는 오우거의 괴성을 들으며 재빨리 움직였다. 오우거가 흥분하면 평소보다 더 힘이 세졌기에 빨리 제압해야 했다.
 촤르르륵!
 휘리릭!
 내 양 손목에서 빠져나온 얇은 와이어가 오우거의 양팔에 휘감겼다.
 오우거의 가장 큰 무기는 무지막지한 힘으로 휘두르는 양팔과 양다리였다.
 하지만 팔은 내가 직접 제압했고 다리는 독이 퍼지면 제압이 가능할 것이다.
 크아아악!
 출렁!
 나는 새삼 오우거의 힘, 특히 저 트윈헤드오우거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일명 박(搏)이라 불리는 기술이었지만 오우거의 힘을 제압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크음!”
 나는 오우거의 양팔을 제압하고 시작하려는 마음을 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제압보다는 숨통을 끊는 것이 더 중요했다.
 촤르르륵!
 오우거의 팔에서 풀려 나온 와이어는 내 손목으로 귀환했다.
 “좋아, 해보자!”
 나는 오우거를 바라보며 천천히 움직였다.
 크어어억!
 오우거는 매우 흥분한 몸짓으로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 기세는 큰 바위도 부숴 버릴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휘익!
 나는 멍청하게 오우거와 정면충돌 할 생각은 없었다.
 흥분한 오우거의 돌격은 무서운 기세였지만 내가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살짝 한 바퀴를 돌아 오우거를 피한 나는 그대로 한 팔을 들어 올렸다.
 계속 오우거에게 공격주도권을 넘겨주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촤르르륵!
 와이어 기본 스킬 삭!
 비록 얇은 쇠사슬로 이루어진 와이어라 절삭력은 약했지만 회전력을 최대한 가미해 삭의 능력을 최대화시킬 수는 있었다.
 그 기술이 바로 삭(削)이었다.
 푸슛!
 “크억!”
 와이어는 오우거의 옆구리를 갈랐다. 깊게 갈라진 옆구리에서는 상당량의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방출한 와이어를 회수하면서 나머지 팔도 들어 올렸다.
 촤르르륵!
 와이어 기본 스킬 박!
 우드득!
 나는 오우거의 목을 와이어로 감았다. 잡는 것으로는 오우거를 질식사시킬 수 없었지만 굳이 잡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촤르륵!
 우드득!
 나는 나머지 와이어마저 오우거의 목에 감았다. 물론 두 개의 목 중 남은 하나의 목이었다.
 크어어억!
 오우거는 나에게 다시 돌진했다. 오우거의 돌진 때문에 팽팽했던 와이어는 느슨하게 늘어졌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오우거.
 그때 오우거의 오른쪽 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꽝!
 하지만 나는 막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맥없이 당하고 있지만도 않았다. 내가 기다린 것은 오히려 이 공격이었으니까.
 부우웅!
 나는 오우거의 힘에 의해 허공을 날랐다.
 물론 주먹에 맞아 기절할 정도의 충격을 입은 채 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오우거의 무지막지한 힘을 역으로 이용하기로 마음먹은 나였다.
 나는 오우거의 주먹을 등으로 맞았다. 등에 맞은 것이 아니라 등을 이용해 오우거의 힘을 이용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했다.
 권투선수가 맞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움직여 충격을 줄이는 것과 같이 나는 최대한 오우거 주먹의 힘의 방향 쪽으로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며 힘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나는 약간의 타격을 입으며 공중으로 날았다. 물론 정신도 말짱했다. 워낙 강력한 타격이라 속이 약간 울렁거렸으나 견딜 만했다.
 부우웅!
 철컹!
 날아오르던 나는 어느 순간 멈췄다. 와어어가 아직 오우거의 목에 감겨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렸다.
 차앗!
 와이어 기본 스킬 회!
 나는 빠른 속도로 와이어를 회수했다. 각각 다른 방향으로 목을 긁으며 돌아오는 와이어! 두 개의 와이어와 오우거의 목이 일으키는 마찰력은 한마디로 굉장했다.
 콰드드득!
 키에에에엑!
 트윈헤드오우거는 두 개의 목을 전부 없애지 않는 이상 쓰러지지 않는 괴물이었다.
 콰드득! 툭! 투툭!
 그래서 나는 간편하게 살을 내주고 뼈를 꺾었다.
 순식간에 내 양팔로 복귀한 현은 트윈헤드오우거의 두 목을 땅바닥에 떨어뜨리는 신위를 발휘했다.
 이것으로 그동안 그토록 별러 왔던 복수가 끝났다.
 그리고 클로즈 베타 테스트도 끝났다.
 슈우우욱!
 나는 사라지는 트윈헤드오우거의 시체를 보며 살며시 웃었다. 준보스급이라고 할 수 있는 이놈을 잡기 위해 나는 상당히 무리를 했다.
 “퇫! 꽤 아프군.”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아무래도 내부 장기 한 곳이 터져 나간 것 같았다.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면서 체력 게이지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오우거의 시체가 완전히 사라지자 몇 개의 잡동사니 아이템과 투박하게 생긴 짧은 단검이 보였다.
 나는 잡동사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단검을 주워 들었다.
 “흐음… 뭘까?”
 당장 마을로 복귀해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이었지만 왠지 아이템의 옵션이 궁금했다.
 “보면 되지.”
 찌이익!
 나는 미리 준비해 온 아이템 검증 스크롤을 찢었다. 궁금한 것은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직성이 풀렸다.
 
 <레드문 숏소드(레어등급-세트)>
 [설명] 트윈문의 정기를 받은 단검, 세트 아이템으로 블루문의 정기를 받은 단검을 구하면 세트 효과.
 [기능] 120~150(단검류)
  민첩 +20(세트)
  단검마스터리 +20(세트)
  쌍검마스터리 +20(세트)
 
 “호오!”
 처음 만져 보는 레어 아이템이었다. 그것도 세트!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하면서 가장 대박인 경우였다.
 “블루문만 모으면… 완전 대박이군.”
 레드문 하나로는 레어로서 부족한 것이 많았으나 블루문만 모은다면 유니크 급 옵션이었다.
 “어쨌든 운수대통이군.”
 나는 기분이 좋았다. 오픈을 앞둔 마지막 클로즈 베타 테스트 날 이런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복수도 하고 아이템도 얻으니 정말 일석이조의 날이었다.
 
 
 @ 그리고…
 
 “내일이지?”
 “뭐가?”
 “더 원 오픈 베타 하는 날.”
 “벌써 내일인가? 휴, 깜박할 뻔했네.”
 “짜식, 나한테 고맙다고 해.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더 원 파트 2가 드디어 시작이구나.”
 “크으, 나도 클로즈 베타부터 했어야 하는데…….”
 “하긴, 혜택이 있다더라. 클베 한 사람들 정말 대박이겠네.”
 “그럼, 당연하지! 더 원이잖아. 오픈 베타 예상 접속자만 1억 명에 다다를 것 같던데…….”
 “1억 명? 좀 오버 아냐?”
 “오버가 아니지! 이번에 개발한 리얼 가상현실 시스템과 전 모든 유저가 한 서버에서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갓(God) 서버시스템이라면 1억 명은 최소로 잡았을 때 나오는 수치야.”
 “이야, 대단한데? 그럼 전 세계인이 한 서버에서 게임을 즐기는 건가?”
 “그렇지. 대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세계를 크게 4등분해서 동서남북 대륙으로 만들었다고 하더라.”
 “그래? 그럼 4개 대륙에서 각각 게임을 하는 건가?”
 “그건 아니고 중앙 대륙이란 곳이 있는데, 이곳이 대박인가 봐. 그러니까 동서남북 대륙은 전초기지고 각 대륙에 사람들이 충돌하는 구조는 중앙 대륙인가 봐. 중앙 대륙을 통해야지만 서로 왕래가 가능하다고 하니 아무래도 시간이 흐르면 중앙 대륙이 가장 북적이는 곳이 되겠지. 물론 중앙 대륙으로 가는 길도 장난이 아니라고 하니까 시간이 많이 지나야겠지.”
 “으흐,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이게 얼마나 기다렸던 진정한 게임이냐!”
 “그러니까. 크크, 내가 코텍이 일낼 줄 알았다. 클베 플레이어들이 남긴 소감문 봤는데 딱 한마디로 요약하더라.”
 “뭐?”
 “환상!”
 “캬!”
 나는 신나게 떠들고 있는 두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사이버 편의점 앞에 서서 떠들고 있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얘기하는 주제는 바로 더 원… 내가 하는 게임이었다.
 확실히 더 원은 요즘 엄청난 관심을 끌고 있었다. 코텍의 공격적인 마케팅 덕분이기도 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은근히 소문난, 게임의 재미 덕분이었다.
 이건 나도 보증하고 싶었다. 더 원은 두 남자의 마지막 말처럼 다른 말은 다 필요 없이 환상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이 가능했다.
 ‘훌륭한 선택일 것이다.’
 나는 두 남자를 응원하며 사이버 편의점에 주문 목록을 입력했다. 오픈 베타가 열리기 전 현실에서 일주일간의 휴식은 나에게 또 다른 준비 기간이었다.
 장기간 집에서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으니 그동안 먹을 식량과 여러 생필품을 미리 사 놔야 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적당량의 영양분은 섭취해 줘야 했다.
 부스럭!
 나는 로봇 배달 서비스를 받지 않고 스스로 많은 양의 물건들을 짊어지고 나왔다. 배달료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운동을 할 생각에서였다.
 아무래도 게임에 집중하다 보니 운동이 조금 부족한 듯했다. 물론 간간히 최소한의 운동을 해 줌으로써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했지만 이렇게라도 틈틈이 운동을 하는 것이 좋았다.
 현실에서의 내가 건강하고 컨디션이 좋아야 게임도 잘되는 것이다.
 오픈 베타까지는 정확히 18시간 남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위이잉!
 이제는 많이 적응이 되었다. 뭐, 썩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에 몇 번만 울렁거렸을 뿐 다음부터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일주일 만에 접속이어서 그런지 약간 어색한 느낌이었다.
 시끌벅적!
 역시 대단한 인파였다. 더 원은 첫 접속 시 26개 A~Z까지의 초보도시 중 하나로 가게 된다. 이렇게 많은 인파가 26개 무리 더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더 원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럴 줄 알고 조용한 곳에서 접속을 끊었는데 강제로 옮겨졌군.’
 오픈이 되면서 부분 리셋이 있었기에 강제로 옮겨진 것 같았다.
 나는 자리를 옮겨 도시 입구 부분에 한적한 곳으로 갔다.
 ‘음, 얼마나 다운 됐나…….’
 “상태창 오픈!”
 지잉!
 
 [이름] 백건 [호칭] 트윈오우거 헌터
 [직업] 와이어헌터 [성향] 무
 [종족] 인간 [계급] 평민
 [레벨] 30 [0%]
 [근력] 38 [근골] 3
 [민첩] 73 [인내] 3
 [지혜] 3 [지능] 3
 [매력] 3 [행운] 3
 [보너스 능력치] 0
 [생명(HP)] 450/450
 [마력(MP)] 110/110
 [공격력]232 [방어력] 174
 [스킬] 섀도우 스텝(D,50%), 섀도우 하이딩(D,50%), 이글아이(D,50%), 단검 던지기(D,20.23%), 더블샷(D,15.45%), 와이어 기본 스킬(D) + 단검 마스터리(5.78%), 쌍검 마스터리(6.23%) 와이어 마스터리(15.34%)
 [속성친화력(미구현)]
 [화] 0 [수] 0
 
 레벨이 반으로 깎긴 것보다 더 아까운 것은 스킬 숙련치의 하락이었다.
 레벨 올리는 것이 쉽다고는 할 수 없으나 스킬 숙련치 관리가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었다.
 레벨은 계속 올리기만 하면 되지만 스킬 숙련치는 꾸준히 관리가 필요했다. 말 그대로 계속해서 반복해서 사용해줘야 숙련도를 올리거나 유지할 수 있었다.
 클베 때는 최하급 스킬인 D급 스킬만 공개되었다. 물론 나는 거의 모든 주력 스킬(마스터리는 급이 없음으로 제외)을 마스터(100%) 했지만 이번 리셋으로 반이나 되는 숙련치를 잃었다.
 ‘젠장…….’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하는 사람들보다는 분명 축복 받은 것이기에 만족해야 했다.
 ‘공지 내용과 특별히 다른 것은 없겠지.’
 나는 장비를 확인했다. 몸에 장비하고 있던 다크 건틀렛이나 가죽 갑옷 세트는 그대로였다.
 “인벤토리 오픈!”
 지잉!
 “역시 아무것도 없군.”
 인벤토리도 텅 비어 있었다. 역시 공지내용 그대로 적용된 듯했다.
 스르릉!
 나는 내 허리춤에 있던 단검을 뽑았다. 트윈헤드오우거를 잡고 나온 그것이었다.
 두둑! 우드둑!
 나는 몸을 조금씩 풀며 사냥을 준비했다. 내 사전에 첫날이라고 쉬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초반에 차이를 벌려 놔야 나중에 사냥하기가 편하다.
 “가 볼까?”
 첫 사냥터는 레벨 40대의 유저가 자주 가는 무지개 숲 오크캠프로 잡았다. 오크나이트와 오크메이지가 나오는 그곳 근처에서 두 녀석을 유인해 잡으면 짭짤한 경험치가 보장된다.
 철컥!
 나는 단검을 검집에 넣고 무지개 숲으로 향했다. 대략 도보로 10분 거리였기에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그때였다.
 “꺄아아악!”
 별로 유쾌하지 않은 비명소리, 나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지만 가는 방향에서 일어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보았다.
 두 마리의 고블린에게 쫒기는 한 명의 유저, 딱 보기에도 뉴비였다. 그것도 여자. 더 원은 성별이 그대로 유지되기에 현실에서도 여자일 것이다.
 ‘죽겠군.’
 그걸로 끝이었다. 실력이 모자라면 죽는 것은 인지상정, 요행을 바라거나 도움을 바라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었다.
 죽기 싫었다면 애초에 무리를 하지 않으면 된다. 고블린 두 마리에게 쫓긴다는 것은 동족의식이 있는 고블린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냥을 했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사냥을 할 자세가 틀려먹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죽어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고 다음부터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도와준다면? 물론 도움을 주는 것이 어렵지는 않지만 만약 도와준다면 그것은 저 여성 플레이어에게서 진정한 게임의 재미를 뺏는 것이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랬다.
 그러나 여자의 생각을 다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여자가 나를 보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쳇! 귀찮게 됐군.’
 “살려 줘요!”
 여자는 애원하듯 소리쳤다. 솔직히 애원을 해도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나는 어쩔 수 없이 고블린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여성 플레이어가 나에게 접근하면서 고블린들이 나에게까지 적대감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더 원의 몬스터들은 인공지능이 너무 뛰어나서 탈이었다. 이런 경우 나를 무시한 채 여성 플레이어만 쫒아 가면 되는데 괜히 나에게까지 적대적인 오라를 방출해서 내 신경을 건드렸다.
 물론 여기서 내가 고블린을 건드리지 않으면 고블린도 단지 적대적인 것으로 끝내고 여성 플레이어만을 쫓아갈 테지만 나는 나에게 적대감을 표시하는 존재들을 가만히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스르릉!
 조용히 뽑히는 단검.
 파팟!
 서걱! 서걱!
 단검은 별로 화려하지 않게 움직였지만 그 간단한 움직임의 결과는 아주 깔끔했다.
 키에엑!
 투툭!
 단 일합이면 충분했다. 고블린 따위는 레벨 1~5의 초보들이나 잡는 몬스터였다. 단 두 번의 칼질은 고블린의 목을 바닥에 떨어트리기 충분했다.
 철컥!
 나는 조용히 단검을 원위치 시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나를 적대시하는 고블린을 죽였을 뿐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나만의 생각, 여성 플레이어는 자꾸 나와 다르게 생각했다.
 “저기요! 잠깐만요.”
 “…….”
 나는 그냥 걸었다. 여성 플레이어와 대화할 시간에 사냥을 하는 것이 더 좋아 보였다.
 “잠깐만! 그냥 가면 어떻게 해?”
 “…….”
 “잠깐만이라고! 좀 멈춰 봐.”
 “…….”
 “야! 내 말 안 들려? 잠깐 멈추라고 했잖아! 그냥 쌩 까고 가면 기분 좋냐?”
 멈칫!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당신을 안전한 곳까지 모셔야 하나? 아니면 당신에게 회복포션이라도 줘야 하나?”
 나는 기분이 나빴다. 도와달라고 애원할 때와 지금의 말투가 너무나 달랐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이중성이었다. 즉 나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
 “아, 아니… 그런 것은 아니라도,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척 보니 클로즈 베타를 해서 레벨이 조금 있나 본데, 렙 좀 높다고 이렇게 사람을 무시해도 되는 거야?”
 황당했다. 대체 뭐 하는 여자인가?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했다. 그냥 조용히 P.K라도 할까? 아니면 겁이라도 줄까?
 내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에도 여자는 계속 떠들었다.
 “이것 봐, 계속 쌩 깐다 이거야? 잘나신 클베 유저 나리! 당신이 얼마나 잘났는지는 몰라도 우리 오빠도 클베 랭커였다고! 쳇, 오빠만 있었어도 너 같은 개뼈다귀한테는 도움 받지 않았어! 에이, 재수 없어!”
 나는 그제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했다. 그리고 결정한 이상 행동은 빨랐다.
 스르릉! 파팟!
 “진짜 재수도 없… 앗! 꺄아아악!”
 여기서 P.K를 해서 좋을 것은 없었다. P.K를 하면 범죄자로 낙인찍혀 한동안 행동에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왜 내가 쓸모없는 여자 하나 때문에 귀찮아져야 하는가? 그래서 나는 그냥 좀 겁(?)을 주기로 했다.
 내가 단검을 뽑고 여자의 눈앞에 그것을 보여 주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였다. 레벨 30과 레벨1~5의 차이는 컸기에 저 여자는 내 움직임을 따라올 수 없었다.
 “그냥 지껄인다고 다 말이 아니다. 앞으로 사람을 대할 때는 좀 더 예의를 지켜라.”
 “나… 난…….”
 휘릭! 철컥!
 나는 손 위에서 단검을 한 바퀴 돌린 후 다시 허리에 꽂았다.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휙!
 이어 미련 없이 돌아서 가던 길을 갔다. 등 뒤에 서 있던 여자는 겁을 먹고 뭐라 말을 못하고 있었지만 억울하다는 듯 두고 보자는 표정이었다.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여자의 오빠라는 사람이 와도 상관없었다. 나는 도전하는 사람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기든 지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투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나는 패배를 겁내지 않았다. 어떤 경우든 패배는 있을 수 있지만 회피는 없었다. 두렵고 힘들어도 피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전진과 돌파만 있을 뿐 후퇴와 우회는 없었다.
 
 오크나이트는 경험치와 숙련치를 올리기에는 좋지만 아이템은 별로였다. 재미있는 것은 오크메이지는 그 반대라는 것이었다. 아이템은 매직류의 좋은 것들이 떨어지지만 경험치가 별로였다.
 결국 두 가지 몹이 합쳐진 오크캠프는 아주 훌륭한 사냥터였다. 아직 3일밖에 안 돼서 그런지 이 근처에 유저가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예상으로는 이틀 안에 이쪽까지 진출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팀을 짜서 올 것이다. 나처럼 캠프 외곽에서 하나하나 몹을 잡는 사람들이 아니라 캠프 안으로 진입해 몰이사냥을 하는 그룹들이다.
 ‘뭐, 어차피 나도 오늘만 여기서 잡고 옮기려고 했으니까.’
 현재 레벨 33, 이제 슬슬 사냥터를 옮길 때였다.
 내가 사냥터를 옮기지 않는 이유는 이곳에서 가끔 소환되는 오크로드를 잡기 위해서였다.
 오크로드는 운이 좋으면 레어급 아이템까지 떨어트리는 초보 보스 몹이었다.
 클로즈 베타 테스트 때도 2마리를 잡았는데 그때는 레어가 떨어지지 않고 좋은 매직 아이템이 떨어졌었다.
 리스폰 타임이 대략 보름 정도로 알려졌으니 이제 슬슬 나올 때가 되었다.
 ‘오크로드만 잡고 리자드맨 서식지로 옮긴다.’
 리자드맨 서식지는 무지개 숲 안쪽에 위치한 늪지대였다. 그곳에서는 보통 리자드맨보다 강력한 리자드맨워리워나 리자드맨샤먼이 나타났다. 그곳은 아이템보다는 경험치가 짭짤한 곳으로서 클로즈 베타 테스트 때도 꽤 많이 이용한 사냥터였다.
 헌터 기본 스킬 이글아이!
 나는 이글아이를 이용해 주변을 살폈다. 사냥감을 찾는 중이었다.
 ‘빙고!’
 내 눈에 오크메이지 한 마리가 들어왔다.
 스윽! 촤륵!
 나는 조용히 와이어를 풀었다. 내 직업은 와이어헌터, 직업이란 것은 자신이 어떤 스킬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자동으로 선택되었다.
 나는 헌터, 그것도 와이어헌터다. 그런 직업을 얻은 이유는 와이어와 단검을 가지고 조용히 몬스터를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와이어를 가지고 몹을 힘으로 밀어붙였으면 와이어파이터 정도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용하고도 은밀하게 몹들을 사냥했기에 헌터가 되었다.
 그래서 그럴까? 내 스킬들은 대부분 헌터나 로그의 스킬들과 유사했다. 와이어 전문 스킬을 제외한 타 스킬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은밀함을 포기하고 지금부터라도 힘으로 승부하는 스타일로 바꾼다면 내 직업은 와이어파이터로 바뀔 것이고 검을 들고 싸운다면 대략 소드파이터나 블레이드워리어 정도가 될 것이다.
 더 원은 그랬다. 모든 것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바뀌는 자유의 공간이었다.
 나는 오크메이지를 지켜봤다. 오크메이지는 강력한 마법을 구사하는 대신 체력이 약했다.
 그래서 오크메이지를 사냥하는 방법은 일격필살, 온 힘을 다해 한 방에 끝내는 것이 좋았다.
 누가 보면 일격필살의 사냥이라면 정말 편한 것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오히려 평범한 사냥이 편했으면 편했지 일격필살은 결코 쉬운 사냥이 아니었다.
 한순간에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폭발적으로 내뿜어 단 한 방에 상대를 제압하는 것이 쉽다면 세상에 강자는 널리고 널렸을 것이다.
 나는 오크메이지의 움직임을 읽으며 최적의 공격 타이밍을 찾았다. 이글아이는 계속해서 내 마나를 소비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일격필살을 위해서는 마나를 전부 사용해야 했다.
 마나가 떨어지기 전에 기회가 오기를 빌어야 했다.
 나는 파(破),탄(彈),박(搏),삭(削),방(防),환(幻),회(回)로 이루어진 와이어 기본 스킬 중 가장 위력이 강한 파자 결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파자 결은 내가 가진 마나에 10분의 1을 먹는 강력한 기술로서 마나 소비는 크지만 위력은 상당했다. 한마디로 일격필살에 어울리는 기술이었다.
 ‘지금!’
 오크메이지가 순간적으로 경계의 눈빛을 늦춘 지금이 움직일 때였다.
 나는 오크메이지의 탐색마법을 피하기 위해 상당히 먼 거리에서 탐색을 했다.
 파자 결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좁혀야 했다.
 나는 오크가 방심한 틈을 타 순간적으로 뛰어나갔다.
 오크는 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늦었다.
 와이어 기본 스킬 파!
 촤르르륵!
 퍼퍽! 콰득!
 정확히 오크의 머리를 부숴 버리는 와이어! 일격필살은 성공이었다.
 흐릿!
 오크메이지의 시체가 흐려지며 바닥에 몇 가지 아이템이 떨어졌다. 대부분이 잡동사니였기에 몇 가지 재료만 챙기고 나머지는 버렸다.
 “지금까지 잡은 오크메이지 중 최고의 거지군.”
 보통 하급매직 아이템이라도 주던 오크메이지였는데 이번 것은 상당히 거지였다.
 “그나저나 오크로드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 안 나오네.”
 내가 돌아다니는 지역은 오크로드 출몰 지역이었다. 앞서 잡았던 두 마리도 다 이 근처에서 잡았다.
 “오늘까지만 기다리자.”
 더 이상 기다리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오늘도 안 나오면 어쩔 수 없이 사냥터를 옮겨야 했다. 조금 아쉽지만 어차피 오크로드도 초보 때나 잡는 몹, 초보들을 위해 풀어 놓은 샘플용 보스 몹일 뿐이다.
 촤륵!
 나는 와이어를 회수하고 다시 숲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헌터라면 주변 사물과 동화하는 능력이 뛰어나야 했다. 나는 능력 있는 헌터였기에 주변 사물과 거의 완벽하게 동화가 가능했다.
 나는 조용히 이동했다. 오크로드가 안 나온다면 오크나이트나 오크메이지라도 잡아야 했다.
 꽈과광!
 나는 갑자기 들려온 소음에 인상을 구겼다. 이곳에서 소음이 들릴 이유는 단 하나, 나에게는 불청객, 오크들에게는 적, 즉 다른 유저가 이곳에 온 것이다.
 ‘아직은 올 만한 유저가 없는데…….’
 오픈 베타가 열리고 3일째,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했던 유저들, 그중에서도 상위 랭커였던 유저들이라고 할지라도 레벨이 20대 중반이었다.
 그들이 팀플레이를 한다 해도 이곳 캠프는 무리였다.
 나처럼 조용히 한 마리씩 잡는다면 모르겠지만 팀을 짜서 조용히 사냥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팀이 아니라면 어떤 미친놈이…….’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이동했다. 도대체 얼마나 미친놈인지 그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크엑! 꽝! 꽈광!
 나는 오크캠프 입구를 보고 있었다. 완전 아수라장, 그곳에는 확실히 미친놈이 있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분명 획기적인 생각이기는 했지만 너무 무모했다.
 분명 저 미친 인간은 오크캠프라고 해서 캠프 안에서만 오크들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크캠프는 저 나무 울타리 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 울타리를 중심으로 사방에 숲이 전부 오크캠프였다. 저 인간은 전투에 대한 연구는 획기적이지만 사냥에 대한 연구는 0점이었다.
 입구에서 조금 떨어져 입구 안으로 마구 마법을 난사하는 미친 인간은 분명 마나가 떨어질 때까지 마법을 난사하고 도망갈 생각일 것이다.
 아이템은 다 포기하고 경험치만 왕창 먹겠다는 심보. 보아하니 그것을 위해 공격마법만 죽어라 익힌 밸런스가 무너진 캐릭터로 보였다.
 레벨은 대략 20대 초반? 파이어 볼과 파이어 월을 쓸 수 있는 것으로 보아 20대 초반이 확실했다.
 공격력이 뛰어난 파이어 계열의 공격마법을 난사하는 마법사, 그는 자신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다른 오크정찰병이나 오크나이트, 오크메이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법사치고는 생각이 단순하군, 후훗!’
 나는 왠지 모르게 그 미친 인간에게 정이 갔다. 단순한 행동도 그렇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런 무식한 사냥법이 마음에 들었다.
 ‘도와줄까?’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깜짝 놀랐다. 내 스스로 누구를 도와주려는 마음을 먹은 것은 처음이었다.
 ‘뭐, 한 번쯤은…….’
 촤르륵!
 오크나이트 2마리, 오크정찰병 3마리. 다행히 껄끄러운 오크메이지가 없었다.
 물론 나라고 해도 5마리의 오크를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오크를 잡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시간을 좀 끌어 주면 된다.
 와이어 기본 스킬 삭!
 와이어 기본 스킬 환!
 촤르륵!
 촤르륵!
 나는 와이어를 양손에 들고 두 가지 기술을 사용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던 양손기술이었지만 사용하다 보니 실력이 점점 늘었다. 역시 현실에서도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어쨌든 두 가지 기술을 각각 다른 손으로 사용하는 것은 지금처럼 큰 위력을 발휘했다.
 5마리의 오크는 내가 만들어 낸 와이어의 견제 때문에 더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막을 순 없지만 이렇게 하면 저 미친 인간이 마나를 다 쓸 때까지는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이어 볼!]
 [파이어 에로우!]
 [파이어 핸드!]
 [파이어 월!]
 [파이어 에로우!]
 [파이어 볼!]
 미친 마법사는 정말 미친 듯이 마법을 사용했다. 마법마다 쿨타임이 있는데 그는 그것을 계산이라도 해 왔는지 쉬지 않고 마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만큼 마나의 소비는 빨랐다.
 [파이어 필드!]
 “헉!”
 마법사는 너무 빨리 마나를 소비해서인지 파이어 필드를 외친 후 살짝 비틀거렸다. 내가 봐도 저 짓은 할 짓이 아니었다.
 “젠장! 누군지 몰라도 고맙다! 내가 나중에 한턱 쏜다!”
 마법사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후훗, 재미있게 미친놈이네.’
 나는 미친 마법사에게 점점 호감이 갔다. 분명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도 일단 시작한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이 마음에 들었다. 또한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하는 상황에서 고맙다고 크게 외칠 정도로 통이 큰 것도 그러했다.
 후다닥!
 마법사는 그제야 용무가 끝났다는 듯 바쁘게 후퇴했다.
 ‘나도 물러나야겠지.’
 촤르르륵!
 나는 와이어를 회수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괜히 여기 있다가 성난 오크들에게 화를 당하기는 싫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오크로드를 못 잡을 것 같았다. 정감 있는 미친 마법사 덕분에 오늘 사냥은 여기서 마무리해야 했다.
 ‘흠, 바로 리자드맨 서식지로 가는 것도 좀 그렇고… 오랜만에 마을에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가끔은 쉬면서 여러 정보도 모으고 다른 유저들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도 필요했다.
 
 “고블린 이빨 다량으로 구입합니다! 늑대 발톱, 자이언트마우스 꼬리도 삽니다!”
 “렙 10전사가 늑대소굴 파티 구해요!”
 “각종 포션 팝니다. 포이즌 포션도 있습니다!”
 도시는 언제나 시끄럽다.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들리는 소문에는 벌써 유저가 1억 명에 달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예상치를 3억 명으로 잡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대박 게임이 5천만 명의 유저를 기록한 ‘초월자(超越者)’라는 가상현실 온라인 게임이었다. 그것을 봤을 때 3억 명은 엄청난 수치였다.
 사실 더 원은 말이 오픈 베타 테스트였지 사실상 유료 게임이나 다름없었다. 게임 요금은 내지 않았지만 게임에 접속하는 데 필요한 가상현실 헤드 셋은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헤드 셋이 무척 비싼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이라고 해도 용돈을 모으면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 간 사람들의 숫자였다. 1억대가 넘게 팔려 나가는 헤드 셋…결국 코텍은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벌고 있었다.
 조만간 유료화가 감행되면 유저가 조금 줄어들 수 있겠지만 내가 봤을 때는 그리 크게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더 원은 상당히 중독성이 강한 게임이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으로도 이 게임을 계속할 것이다. 결국 더 원은 세계 최고의 온라인 게임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이번 인생은 엄청 길고… 환상적이겠군.’
 코텍의 젊은 사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했던 말은 점점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야 좋지.’
 “어서 오세요. 코텍 은행입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은행에 도착했다.
 “백건 계좌 오픈!”
 “고객님의 계좌를 오픈 해 드립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지이잉!
 눈앞에 모든 유저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은행 인벤토리가 열렸다. 돈을 더 투자하면 은행 인벤토리의 사이즈를 늘릴 수 있었지만 아직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척척!
 나는 그동안 인벤토리에 쌓여 있던 몇 가지 아이템을 은행으로 옮겼다.
 상점에 팔기는 좀 아깝고 당장 팔기는 귀찮은 그런 아이템들이었다.
 그렇게 대충 짐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걸었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부터 파티를 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할 일 없이 구경을 하는 사람들까지 또 하나의 완벽한 세상이다.
 사람들은 점점 이 세상에 빠져 들고 있었다. 나도 그렇지만 분명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빠져 들고 있을 것이다.
 더 원은 확실히 무서운 게임이었다. 그 강력한 몰입성 때문에 게임 시간으로 12시간 플레이 후에는 강제적으로 2시간 동안 휴식을 주는 시스템이 있었다. 또한 강제가 아니어도 중간에 로그아웃을 하면 곧바로 다시 접속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로그아웃이 되면 2시간은 반드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시스템이 없었으면 더 원은 사람 여럿 죽였을 게임이었다.
 ‘현실이 싫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지.’
 나처럼 현실을 기피하는 사람들이라면 더 원을 추천해 주고 싶었다. 더 원은 또 하나의 현실이기에…….
 꽝!
 오랜만에 조용한 휴식을 방해하는 소음이 들렸다.
 숲 속에서도 불협화음이 일어나 내 사냥을 멈추게 하더니 이번에는 마을에서까지 들려 내 휴식을 방해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다수의 유저들이 한 유저를 둘러싼 채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씨발! 니들이 쪽수를 믿고 덤비는 거냐!”
 화르륵!
 중간에 둘러싸인 한 명의 유저는 마법사였다. 그것도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마법사, 오늘 내 사냥을 그만두게 한 그 미친 마법사였다.
 “크레이지법사 용, 네놈이 정말 미치긴 미쳤구나. 감히 우리 천상연합에게 덤비다니!”
 “크크, 천상연합(天上聯合)? 웃기는 소리 하네. 초보들 등이나 쳐 먹는 네놈들이 무슨 천상이냐? 너희들은 지하연합이 더 잘 어울린다, 이 쓰레기들!”
 “뭐야!”
 “이놈이!”
 챙! 채챙!
 다수의 전사들은 검을 뽑아 들고 당장이라도 마법사를 죽일 것 같이 행동했다.
 “잠깐!”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나머지 사람들의 행동을 막았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좋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다. 이것의 대답 여하에 따라 지금까지 너의 행동이 용서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처절한 보복이 있을 수도 있다.”
 “퇫!”
 마법사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인상을 구겼다.
 “크레이지법사 용, 천상연합에 들어와라. 클베 때 마법사 랭킹 2위였던 너라면 충분히 자격이 있다. 천상연합에 들어와 더 원을 평정하자.”
 “미친놈! 나도 미친놈 소리는 많이 듣지만 넌 정말 미친놈이다. 이 게임을 즐기는 유저가 1억 명을 넘었다. 그런데 이 게임을 평정한다고?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이제부터 내가 너를 크레이지듀크라고 불러 주마.”
 “크음, 너의 선택이 결국 그것이냐?”
 “그래. 너희 같은 놈들에게 붙느니 차라리 신비의 랭킹 1위 유저를 찾아서 그 녀석 하수인이나 하련다, 알았냐?”
 “멍청한 놈. 없애 버려!”
 아무래도 마법사와 전사들은 쌍방 자유전투 상태인 것 같다. 마을에서 전투가 가능하다는 것은 서로 전투 상태를 인정해 전투 모드가 된 경우나 아니면 범죄자로 구분되는 유저를 다른 유저들이 공격할 경우밖에 없었다.
 ‘왜 전투 상태를 인정했지?’
 이유는 몰랐지만 마법사가 상당히 무모한 선택을 한 것은 확실했다.
 “내가 왜 미친 폭탄이라고 불리는지 알려 주마!”
 4서클 마법 파이어 볼.
 꽈광!
 확실히 미친 마법사였다. 폭발형 마법인 파이어 볼을 자신의 코앞에서 터트리다니… 분명 제정신을 가진 마법사라면 못할 짓이었다.
 “큭!”
 몇 명의 전사가 마법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리 큰 타격은 아니었다. 마법사도 전사들에게 충격을 주려고 파이어 볼을 코앞에서 터트린 것은 아니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드러났다. 폭발의 영향으로 흙바닥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센스가 있군.’
 확실히 전투에 센스가 있었다. 지금은 정면대결보다는 일단 적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헌터 기본 스킬 이글아이!
 완벽하게는 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글아이라면 어느 정도 시야가 회복될 것 같았다.
 꽈광!
 퍼퍼펑!
 흐릿하게 보이는 인영들, 지금 저들은 상대방을 제대로 보고 기술을 쓰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왠지…….’
 나는 이글아이를 시전 한 상태에서 먼지가 일어난 지역 주변을 살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마법사는 어느새 먼지구름 사이에서 빠져나와 캐스팅을 하고 있었다.
 “뒈져라!”
 3서클 마법 파이어 월!
 화르르륵!
 “크아악!”
 “크어억!”
 먼지구름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화염은 마법사를 포위했던 전사들의 반수를 집어삼켰다.
 ‘한 방 제대로 성공시켰군.’
 마법사가 손도 못 쓰고 당할 상황에서 이 정도의 성과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었다. 전사들의 반수는 이미 먼지구름과 화염 속에서 빠져나와 마법사를 잡기 위해 움직였다.
 “크하하하! 어리석은 천상연합 놈들아! 너희들이 여기서 나를 죽인다고 해도 내 의지만은 죽이지 못한다. 난 은혜는 열 배로 원한은 백만 배로 갚는 놈이다!”
 마법사는 더 이상의 반발은 하지 않고 조용히 최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확실히 재미있어.’
 나는 살며시 와이어를 풀었다. 왠지 자꾸 도와주고 싶은 마법사였다.
 전사들은 마법사가 저항을 포기하자 천천히 마법사를 포위해 갔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기회를 잃을 터였다.
 ‘지금!’
 와이어 기본 스킬 박, 환!
 촤르르륵!
 촤르르륵!
 한 개의 와이어는 전사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또 하나의 와이어는 마법사의 몸을 낚아챘다.
 채채챙! 챙!
 “뭐야!”
 “헉!”
 스르륵! 휘익!
 나는 잽싸게 달렸다. 민첩이 높은 나의 걸음걸이는 다른 사람보다 빨랐다.
 특히 레벨 차이에서 오는 속도의 차이는 전사들과 나의 사이를 벌리기에 충분했다.
 “잡아!”
 우르르!
 나는 적당히 뛰다가 마을 밖 숲으로 숨어들었다. 저들이 아무리 뛰어난 전사라고 해도 숲과 같은 곳에서 나를 찾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대충 성공한 것 같은데… 이제 나 좀 풀어 주는 게 어떨까요?”
 나는 아직도 와이어에 묶여 내 옆에 쓰러져 있는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이 마법사를 구했을까? 그건 나도 모르겠다.
 촤르륵!
 나는 와이어를 회수하고 일어났다. 충동적으로 구하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어색했다.
 “아우, 생각보다 쪼이는 게 아프네. 그나저나 영락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맙소. 내가 보기에는 벌써 두 번이나 도움을 받은 것 같은데… 내가 남에게 이렇게 많이 도움을 받은 적은 처음이오.”
 마법사는 이번이 두 번째 도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별로… 마음이 내켜서 한 일이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간다. 이것이 새로운 인생을 사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다. 이제 더 이상은 타의에 의해 살아가고 노력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휴, 그래도 은혜는 은혜, 나는 용… 뭐, 신용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게임 명은 용이니 용이라고 부르면 되오. 직업은 파이어위자드… 뭐, 나름대로 데미지 딜러 역할은 좀 한다고 자부하고 있소.”
 확실히 불 계열 공격마법들이 파워가 강력해 뎀딜로는 최적이었다.
 “나는 건. 와이어헌터.”
 평소의 나라면 그냥 갔을 테지만 왠지 오늘은 얘기를 하고 싶었다.
 척!
 마법사, 아니, 용이라는 사람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하자는 뜻이었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꽈악!
 “반갑소. 내가 지금까지 이 게임을 하면서 제일 마음에 드는 사람을 꼽으라면 왠지 당신을 꼽을 것 같소.”
 사실 나는 누구와 악수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주먹을 맞대고 싸운 적은 많아도 이렇게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다.
 쓰러지거나 도망가거나, 그것이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묘하군.’
 나는 묘한 맛을 느끼며 손을 내렸다.
 “여기 좋네. 공기 좋고 한적하고 난 이런 곳이 좋더라.”
 처억!
 용은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포션병이었다.
 “자, 우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런 자리에서 이게 빠질 수 없지. 한 모금 쭉 들이키슈.”
 나는 용이 내미는 포션병을 받았다. 다치지도 않고 중독되지도 않았는데 포션을 왜 마시라는지 몰랐지만 왠지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꿀꺽!
 ‘헉!’
 나는 놀랐다. 이 맛은 분명 현실에서 술이라고 말하는 그것과 똑같았다.
 “허허, 놀라는 표정을 보니 처음 먹는 모양이구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더 원에는 술이나 음료수 같은 것들도 존재하오. 물론 그 맛이 100%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감지덕지지, 크크!”
 술맛은 현실과 같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에게는 그랬다. 왜냐하면 나는 현실과 같은 환경에서 게임을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술맛이 현실과 같다면 실감나고 좋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술이 무척 약하다는 데 있었다.
 한 모금밖에 먹지 않았지만 갑자기 기분이 묘하게 변했다. 흔히 취했다고 말하는 상태? 어쨌든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좋…군”
 “캬캬, 역시 내가 사람을 잘 봤어.”
 꿀꺽! 꿀꺽!
 “캬아! 이 맛이거든! 흐흐, 건 님? 에이! 딱 보니 나랑 나이도 비슷한데 님은 얼어 죽을 님이야. 그냥 우리 말 놓고 편하게 지냅시다. 맞다, 친구! 그거 하면 되겠네. 오픈 베타 시작하면서 친구 기능인가 뭔가가 업데이트 됐다고 하던데 우리 친구합시다. 아니, 친구하자, 크크!”
 용은 기분 좋게 웃으며 나에게 친구 신청을 했다. 친구…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한 말이었다.
 사실 나는 친구가 없었다. 현실에서도 여기에서도… 그런데 용이라는 엉뚱한 마법사가 나에게 친구가 되자고 한다.
 내 기분은 취한 것과는 또 다르게 묘해졌다. 뭔가가 마음속에 날아와 둥지를 튼 기분이랄까.
 “좋아! 친구 하자.”
 [용 님이 친구 신청을 하셨습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Y/N]
 “Yes.”
 나는 용의 친구 신청을 승낙했다. 친구… 그 말로만 듣던 친구가 나에게도 생겼다.
 꿀꺽! 꿀꺽!
 나는 용에게서 술병을 빼앗아 마구 들이켰다.
 친구도 생기고 술도 마시니 기분이 너무 좋았다.
 다소 갑작스러웠지만 그래도 좋았다.
 나는 그렇게 기분 좋게… 정신을 잃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기분은 좋았다.
 
 ***
 
 나는 마법사다. 그것도 공격만 전문으로 하는 데미지 딜러 마법사. 화염계 마법 중 공격마법만 익힌 내 직업은 어느새 파이어위자드가 되어 있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곳은 오크캠프였다. 다소 엉뚱한 사냥 계획을 세우고 오크캠프로 향했던 나는 그곳에서 그의 도움을 받았다.
 그곳에서는 그의 얼굴은 고사하고 그림자도 못 봤다. 단지 길고 얇은 쇠사슬이 왔다 갔다 하는 것만 보였다.
 참 재미있는 무기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은혜를 입었다는 것과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큰소리로 고맙다고 외치고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에 돌아오니 재수 없는 놈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칭 ‘더 원의 고수들의 모임’이라고 자랑하고 다니는 천상연합 놈들이었다.
 대부분이 클로즈 베타 테스트 때 랭커들로 이루어진 천상연합은 정말 재수 없는 놈들만 있는 모임이었다. 말이 고수지 하는 짓은 양아치 짓 같았다.
 자신들의 연합 소속 초보들의 사냥을 위해 다른 초보 유저들을 사냥터에서 내쫒는 일은 물론이고 연합 이름을 팔아 아이템을 싸게 사들여 비싸게 팔고는 했다.
 한마디로 쓰레기들이었다.
 그런 쓰레기들이 나를 도발했다. 나는 겁쟁이라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그런데 그들은 나에게 겁쟁이라고 말했다.
 결국 나는 분을 참지 못하고 전투신청을 했다. 물론 내가 지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엔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겁쟁이가 아니다. 저들이 나를 죽인다고 해도 그것만은 인정할 것이다.
 저들은 나를 탐내고 있었다. 현재 더 원의 마법사들 중 가장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는 마법을 가진 나에게 연합에 들어오라고 권유했다. 아니, 권유가 아니라 협박이었다. 쓰레기들다운 수법이다.
 저들하고 어울리느니 차라리 게임을 그만두는 게 나았다.
 전투가 벌어졌다. 질 게 뻔한 나였지만 그래도 한 놈이라도 죽여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했고 결국 놈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제 죽을 일만 남았다.
 그런데 살았다. 이번에도 나를 도와준 것은 길고 얇은 쇠사슬이었다. 그러나 처음과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얼굴을 보았다는 점이다.
 그는 나를 둘러메고 달렸다. 무척 빨랐다. 아무래도 도적 계열이나 헌터 계열 직업 같았다.
 어쨌든 그렇게 쓰레기들을 따돌린 나는 그와 얘기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나를 두 번이나 구해 준 것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친근감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가장 아끼던 레드블러드를 꺼냈다.
 레드블러드는 주점 사장 NPC에게 아부 떨기와 일 도와주기 작업을 해 호감도를 올린 후 거금 1골드를 주고 산 최고급 술이었다.
 뭐, 다량의 경험치를 얻는 퀘스트라서 열심히 한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 맛이 현실에 술과 가장 가까워서 아껴 먹던 것이었다.
 나는 그 술을 꺼냈다. 기분 좋은 오늘은 이 술을 다 마셔도 좋았다.
 그는 건이라고 했다. 나는 건과 친구가 되었다.
 기분이 좋았다.
 친구를 안 사귀어 본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건은 레드블러드를 마구 마셨다. 하나도 안 아까웠다. 이런 것이 친구인가? 건이 즐겁게 웃자 나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정말… 이상한 느낌이다.
 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나는 술에 취해 기절까지 한 건을 들쳐 업었다.
 게임 속에서 술에 취해 기절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어쨌든 건은 기절했다.
 나는 건을 업고 다시 마을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전투 상태도 끝났을 테지만 무엇보다 건을 이곳에 방치할 수 없었다.
 술 취한 사람을 업는다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특히 나 같은 마법사들에게는 중노동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
 
 내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여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기절을 하다니… 아무리 내 싱크로율이 높다지만 기절까지 할 줄은 몰랐다.
 ‘조심해야겠군. 큰 충격에 기절할 수도 있겠어.’
 다른 사람들은 충격을 받아도 시스템상에서 충격의 대부분을 제거하기 때문에 정작 느끼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현실과 거의 같은 충격을 받았다. 즉 나는 남들보다 몇 배의 고통을 참아 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뭐, 그 정도 참는 거야…….’
 이 정도는 감수하고 있었다. 애초에 현실과 같은 게임을 원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나저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문 앞에서 졸고 있는 용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용… 친구라…….’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첫인상은 무모할 정도로 무식했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그 무모함 속에서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다.
 용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나보다는 못해도 상당한 수련(?)이나 경험을 쌓은 사람이 분명했다. 내 특유의 감각으로 그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용과 나는 친구가 되었고 나는 난생처음 생긴 친구를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친구란 자기 자신보다 서로를 더 아껴야 하는 존재라고 알고 있다. 비록 내가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모든 것이 서툴지 몰라도 노력하면 잘 될 것이다.
 “으음… 쩝!”
 용은 잠꼬대를 하고 있다. 어제 마신 술이 상당히 독한 술이었는지 주량이 세 보이던 용도 술기운에 잠을 자고 있었다.
 촤륵!
 두득!
 나는 눈을 감고 내 몸 상태를 점검했다. 천천히 내 몸의 근육들을 관조(觀照)했다. 심장, 다리, 팔, 가슴,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이상은 없군. 단순히 취한 것으로 기절이라…….’
 한마디로 리얼리티의 극치였다.
 ‘그나저나 깨워야 하나?’
 용이 워낙 곤히 자고 있어서 깨우기가 좀 꺼려졌다. 결국 나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몸을 꿈틀거리던 용이 잠에서 깨어났다.
 “아움! 내가 깜박 졸았네. 얼마나 잔 거지?”
 “한 2시간 정도. 그래도 강제 로그아웃이 안 된 걸 보니 가상수면 상태였나 보네.”
 더 원에서는 수면 상태에 빠지면 강제로 로그아웃 된다. 하지만 수면 상태가 가상수면-현실에서는 잠이 들지 않고 더 원 속에서만 잠이 든 상태-면 로그아웃 되지 않는다.
 “그 독한 레드블러드를 먹었으니 가상수면 상태에 빠질 만도 하지. 어쨌든 숙취가 풀리니까 좀 살 것 같네. 그건 그렇고 너 정말 술 약하더라.”
 “으음, 현실에서의 주량과 여기에서의 주량이 똑같을 줄은 나도 몰랐다.”
 “크크! 하긴, 나도 술이란 것을 먹어 보고 알았지.”
 “어쨌든 좋은 경험이었다. 어제 인사하긴 했지만 오늘 다시 정식으로 인사하지. 난 백건 그냥 건이라고 불러라.”
 “건! 이름 좋군. 크크, 나도 너와 같은 외자다. 신용. 역시 그냥 용이라고 불러라.”
 “역시 통하는 것이 좀 많군.”
 나는 기분이 좋았다. 이름부터 궁합이 잘 맞는 느낌이었다. 건과 용이라… 왠지 찰떡궁합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지 않는가?
 “크크, 원래 진정한 친구는 첫 만남부터 필이 통하게 되어 있다니까.”
 “그런가? 후훗!”
 “그나저나 이제 뭘 하지? 또 술을 마시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얘기나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좀 그렇고…….”
 “사냥을 해야지.”
 당연히 사냥을 해야 했다. 지금까지는 혼자 사냥을 해 왔지만 이제는 다르다. 친구가 생겼다는 것. 용은 오로지 공격마법만 전문적으로 익힌 데미지 딜러… 분명 도움이 될 만한 친구였다.
 “사냥?”
 “응.”
 “하지만 난 천상연합 그 쓰레기들한테 찍혀서 어지간한 사냥터에는 발도 못 붙이는데…….”
 천상연합이 쓰레기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적을 향한 엄청난 보복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내가 용을 데리고 갈 곳은 천상연합 쓰레기들 따위가 감히 다가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이었다.
 “걱정 마. 오늘부터는 그 쓰레기들과 얼굴 안 보고 사냥해도 되니까.”
 “뭔가 비밀 사냥터라도 알고 있는 거야?”
 “비밀? 아니, 공개된 사냥터야.”
 “그렇지만 공개된 곳은… 설마?”
 용은 그제야 내가 오크캠프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았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래, 난 거기서 사냥을 했었지. 뭐, 이제 너와 같이 할 테니 더 상위에 사냥터로 옮겨야겠지만…….”
 “하지만 상식적으로…….”
 용은 상식적인 사냥방법을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비상식적인 사냥방법을 사용했다. 이제 그 사냥방법을 용에게 알려줄 때였다.
 “상식은 버려. 잘 들어. 이제부터 우리는 눈빛만 봐도 상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있는 수준까지 호흡을 맞추어야 해. 그리고 내가 그동안 해 왔던 비상식적인 사냥을 시작한다. 그러면 끝이야. 성장 속도는 내가 보장하지. 단적인 예로 현재 내 레벨은 33이다. 지금 나를 제외한 고렙 유저들이 20대 중반인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지.”
 “대단하네. 그럼 네가 그 소문에 숨겨진 1위 랭커? 이야! 이거 정말 영광이다.”
 “됐다. 그딴 감투 따위는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서 하이퍼넷 사이트에 정보 공개도 모조리 비공개로 해 놓은 것이고…….”
 “역시! 내 친구답다. 이거 친구 따라 강남이라도 가려면 지금부터 열심히 수련해야겠는걸?”
 “그래. 오늘부터 특훈이다. 적어도 내 친구라면 어디 가서 맞고 다니면 못쓰지.”
 친구가 없을 때라면 모를까 일단 친구를 만든 이상 나는 내 친구가 누구에게 당하는 꼴은 못 볼 것 같았다. 친구가 약하다면 내가 강하게 만들면 된다. 물론 용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부족했다.
 천상연합, 그 쓰레기들 정도는 가지고 놀 만한 수준으로 단련시켜 줘야 한다. 물론 그것은 가능했다.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춘다면 그 누구라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환상의 콤비다. 아니, 환상의 콤비가 될 것이다. 이건 내가 확신한다.
 이것으로 훗날 귀폭(鬼爆)콤비라 불리는 전설의 콤비는 탄생되었다.

댓글(14)

    
1화를 보고 전권구매를 눌렀습니다. 상당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이어서, 마음놓고 질렀습니다.
2013.09.17 21:46
Cura    
자..잠깐만요.. 이 더원이 그 더원이엇음??/ 헐
2013.09.20 02:17
요롱롱    
더 로드 보고 으잉 더원? 하고 왔음 ㅋㅋㅋ 더 로드의 게임제목이 소설의 제목이라... 뭔가 비슷할려나?! 정주행 가봅니다 ㅎㅎ
2014.02.09 18:11
운도실력    
어엇 이거 볼려고했는데 책방에 책이 안들어와서 못본그건가!? 이게 바로 그 몹이 뭘드랍할지 알게해주는 프로그램돌리면서 게임하는그건가!?
2014.04.02 18:32
운도실력    
아니네.. 와이어액션의 그거였구나 봣던거네..
2014.04.03 00:10
제롤라모    
이글은 대여가 안되나요? 대여되면 보고싶은데 대여되게 해주세요~!
2014.11.21 18:50
엘리엘르    
후후후 내가 운 좋게 더 원 전권을 발견해서 구매하고 조아라를 찾아서 오늘 여기까지 왔다아~ 재밌게 보고 있어여 ㅎㅎ 이런 재밌는 작품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08.15 20:55
골드충전중    
헉 13년도 작품 넘 오래된 작품 인데 읽어도 괴찬을런지
2020.10.20 14:10
신사임    
? 처음1분읽고 못읽겠던데 겜유저가 망한겜 섭종한다고 본사가서 난리치는데...
2020.10.21 21:12
니프아벤    
한때 번개라고 불리던 나의 움직임은 경비원이 따라올 그것이 아니었다ㅋㅋㅋㅋㅋ
2020.10.22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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