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킬링 타임 [E]

킬링 타임 1권 (1)

2018.10.24 조회 1,104 추천 9


 #사람은 꿈을 꾸는 법
 
 
 
 “실례합니다!”
 도장 청소를 하고 있던 하진은 도장 문을 열고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 여기가 류진철 선생님 댁이죠?”
 이 도장의 사범이자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대는 두 남자를 보며 하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를 찾아온 손님인가?’
 “아버지께선 검도인연합회 모임이 있어서 나가셨습니다만, 무슨 일이시죠?”
 “아, 아드님 되시는군요. 저희는 리미트 사社에서 나왔습니다.”
 “리미트?”
 아마 요새 주가가 급등하고 있는 게임사일 것이다. 하진은 게임사에서 검도장엔 왜 찾아온 건가 의아해했다.
 “저희 회사에서 검도인연합회 분들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습니다. 그 보답으로 저희 회사의 게임 캡슐 몇 개를 무료로 설치해 드리기로 했거든요. 아버님이 그중 하나를 이 주소로 수령 신청을 해 두셨습니다.”
 “헤에?”
 리미트 사의 게임이면 아마 서비스를 개시한 후 2년 동안 점유율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가상현실 게임 인피니티일 게 분명했다.
 인피니티의 게임 캡슐은 꽤 비싸기도 하고 검도장을 하는 집안 분위기상 자신과는 꽤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물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무슨 회사 일을 도와주고 사례를 받았다고 회도 사 들고 오셨지.’
 그 회사가 리미트였던 모양이다.
 “2층에 남는 방이 있다고 하셨는데, 올라가도 될까요?”
 “아, 예. 가장 안쪽 방일 겁니다.”
 “감사합니다!”
 두 사내는 잠시 밖으로 나가더니 다른 몇몇 사람과 함께 커다란 박스들을 2층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2층은 아버지와 하진이 사용하는 곳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래.’
 의아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자 껄껄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게 벌써 왔냐? 그 무슨 게임 만드는 데 검도 데이터가 필요하다고 해서 도와줬거든. 그랬더니 사례금도 주고 게임 캡슐도 몇 개 준다고 해서 하나 얻었다. 그거 할 만한 나이의 자식 있는 집 중엔 우리 집만 없더라.
 “요새 가장 인기 많은 게임이니까요. 아버지가 해 보시게요?”
 -난 날마다 모임 나가고 애들 지도하고 하는데 시간이 어디 있냐. 너 할 거면 해라. 흥미 없으면 도로 팔아도 되고.
 “흐음. 알았어요.”
 하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통화를 끝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상현실 게임이라. 리미트 사의 인피니티가 현실성과 시스템이 독보적이니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실제 검도 사범들의 움직임까지 데이터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류진철은 꽤 알아주는 검도가라 부탁을 받았던 모양이고.
 게임에 별로 관심이 많지는 않았지만 요새 할 일도 없고 하니 어쩔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대학 생활도 재미없고 별다른 취미도 없으니 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청소하긴 글렀구나.’
 캡슐을 설치하러 나온 직원들이 도장을 들락날락하는 통에 기껏 청소해 놓은 부분도 다시 더러워지고 있는 판이었다.
 하진은 고개를 젓고는 목검 하나를 꺼내 와서 적당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도에 별로 큰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몇 년 동안 진지하게 검을 배운 적도 있었다. 지금은 손을 뗀 지가 꽤 되어 가고 있긴 했지만.
 “실례합니다!”
 한참 내려치기를 계속해 땀이 흐르기 시작하는 차에 도장 입구에서 또 누군가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번엔 익숙한 얼굴이었다.
 “어? 네가 여긴 웬일이냐?”
 대학교 같은 과의 친구인 세준이었다. 눈매가 조금 사납긴 하지만 항상 싱글싱글 웃고 다녀서 좋은 인상을 주는 녀석이었다.
 세준은 하진을 발견하고는 씨익 웃더니 도장 문을 활짝 열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우르르 몰려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하진은 황당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뭐, 뭐야?”
 “아, 우리 동아리 사람들이야. 봉사 활동 가는 길이거든.”
 그럼 가던 길 가지 왜 여기에 쳐들어와서 기껏 청소한 도장을 더 어지럽히는 거냐······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하진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준 외에는 모두 모르는 사람들이라 별수 없었다.
 “그, 그러냐?”
 “아, 갑자기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흥미롭게 도장을 구경하던 사람들 중 한 여자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에? 아뇨, 괜찮습니다.”
 “야, 너도 같이 좀 가자. 힘쓰는 일이 필요한데 남자가 좀 부족해서.”
 “뭐?”
 확실히 몰려든 여섯 명 중에 남자는 세준을 포함해 둘뿐이었다. 세준은 별로 힘이 좋은 편이 아니었고, 다른 한 명도 몸매가 가냘픈 모범생 타입으로 보였다.
 자신을 보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는 세준네 동아리 사람들을 보며 하진은 잠시 고민했다.
 청소를 하긴 해야 했지만 그리 급한 것도 아니고, 봉사 활동을 돕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남들 돕는 일 하는 거니 나쁠 것도 없고.
 그때 2층에서 리미트 사 직원들이 우르르 내려오며 인사를 건넸다.
 “설치 끝났습니다. 설명서와 가이드북은 탁자 위에 뒀으니 참고해 주세요. 저희 회사의 홈페이지나 상담 창구를 이용하셔도 괜찮고요.”
 “아,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하하, 선생님께 감사했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럼 손님도 오신 거 같으니 저희는 가 보겠습니다.”
 다음 방문지도 있는 건지, 리미트 사의 직원들은 인사를 하고는 금방 도장을 떠났다.
 우르르 몰려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좀 멍한 표정을 짓던 세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진을 돌아보았다.
 “뭐야? 무슨 일?”
 “아, 리미트인가 하는 회사에서 게임 캡슐을 설치해 주러 온 거야. 아버지가 무슨 일을 도와줬다고 하더라.”
 “리미트? 그럼 인피니티네? 너 게임 시작하려고?”
 “아직은 모르지.”
 동아리 사람들과 함께 흥미로운 눈으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바라보던 세준은 곧 자신의 용건을 기억해 내고는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서 어떡할래? 어차피 방학이라 할 것도 없을 텐데 같이 좀 가자.”
 이미 그러기로 마음을 먹고 있던 하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준을 따라나섰다.
 
 * * *
 
 “우와, 힘들다.”
 하진은 묵직한 박스를 내려놓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다. 어릴 때부터 나름 단련한 몸이긴 했지만 벌써 30분째 짐을 나르고 있으려니 근육이 땅겼다. 사실 단련이라고 해도 주로 검도를 위한 단련이었으니 이런 육체노동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긴 했다.
 “대충 열 개 정도 남았나?”
 아직 옮겨야 될 박스들을 떠올려 본 하진은 팔을 휘두르며 좁은 창고를 나섰다. 한창 대청소가 진행되고 있는 고아원 내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세준은 봉사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평소 동아리에서 지원을 나가던 고아원이 대청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군으로 하진을 불러낸 것이었다.
 “요, 할 만하냐?”
 세준이 싱글거리며 다가와 손을 들어 보였다.
 봉사 활동이라는 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해서 그냥 따라 나왔지만 힘쓰는 일만 계속하고 있으려니 좀 맥이 빠진 하진은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어깨가 뻐근해. 너도 좀 도와라.”
 “난 청소 중인걸. 청소기도 의외로 무겁다?”
 “······.”
 능글맞게 말하는 세준을 보며 하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여기 아는 사람이라곤 같은 과인 세준뿐이니 이렇게 혼자 일하는 게 편하기도 했다. 조금 내성적인 성격의 하진이었기에 초면의 사람들과 금방 섞이기가 힘들었다.
 “후후, 고생하시네요.”
 걸레를 손에 든 중년의 여인이 웃으며 둘을 바라보았다. 고아원의 원장이었는데, 아이들과 섞여서 가장 열심히 일을 하고 있던 데다 얼굴도 푸근한 인상이라 하진은 왠지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그래요? 오늘 처음 보는 분인데 너무 고생시켜서 정말 미안해요.”
 “파하하! 이 녀석 생긴 것만 무뚝뚝하지 속은 착하고 순해 빠진 녀석이라 괜찮아요, 원장님.”
 “······너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나 자신이 막 싫어진다.”
 “어쭈, 칭찬을 해 줘도 그러냐?”
 “그게 어디가 칭찬이야?”
 하진은 세준과는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 때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겨우 1년 만에 서로 아무런 허물 없이 대할 정도로 친해졌고, 또 1년이 지난 지금은 가장 친한 친구를 꼽는 데 서로를 들 정도가 되어 있었다. 둘은 서로 상성이 잘 맞았다.
 투덕거리는 둘을 보며 원장은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둘을 한방으로 안내했다.
 “좀 쉬고 하세요. 놀이방은 정리가 다 끝나서 아이들도 잠시 쉬고 있어요.”
 “아, 예.”
 원장의 안내로 하진과 세준은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커다란 방으로 들어갔다. 세준은 이곳에 일을 도와주러 자주 와 여기서 생활하는 아이들과 잘 아는 사이인지 아이들과 장난을 쳐 가며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대부분이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닐 나이로 보였다.
 방 안에 세준 외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전혀 없었기에 하진은 좀 어색해하며 바닥에 앉았다. 커다란 TV를 틀어 놓고 보고 있던 아이들이, 처음 보는 얼굴에 호기심을 느꼈는지 하진을 살피듯 쳐다보았다. 조금 어린 아이들은 경계심 없이 가까이 다가와 방긋 웃기까지 했다.
 다행히 아이들이 자기를 별로 어려워하지 않고 몇몇 아이들은 오히려 반기는 듯 바로 옆으로 다가와 앉기까지 하자 하진은 내심 안도했다.
 “형은 누구야?”
 다섯이나 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남자아이가 눈을 동그랗고 뜨고 질문하자 하진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아, 형은······.”
 세준이 불쑥 끼어들었다.
 “내 부하야, 한일아. 하진이 형이라고 하지.”
 “내가 왜 네 녀······ 네 부하야?”
 차마 아이들 앞에서 험한 말은 쓰지 못하고 급히 말을 바꾼 하진이었지만, 세준은 오히려 그걸 잡고 늘어졌다.
 “저 봐, 이 형한테 겁먹어서 말도 더듬잖냐, 움하하!”
 “내가 너한테 겁을 먹느니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고 졸도를 하겠다!”
 “너 강아지도 무서워하냐? 한심하긴.”
 “얌마!”
 “꺄하하!”
 둘이 투덕거리는 모습에 아이들이 폭소를 터트렸다. 그러는 와중에 하진은 순식간에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진은 세준이 일부러 자신을 신경 써 장난을 걸었다는 걸 알고는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을 보고 세준이 왜 그런 느끼한 눈으로 보냐는 듯 해괴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과연 뜻이 전달되었는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하진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어쨌든 그런 과정이 끝난 후 하진은 왠지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한 한일이를 무릎 위에 앉히고 같이 TV를 보기 시작했다.
 무슨 개구리를 캐릭터화한 듯한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고 있었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즐겁게 시청하던 애니메이션이 끝나고, 광고 방송이 시작됐다. 왠지 광고의 배경이 중세 시대풍의 성이라고 하진이 생각한 순간, 아이들이 갑자기 탄성을 내질렀다.
 “와! 인피니티다!”
 “광검의 루카르트야!”
 “와아아!”
 아마 인피니티의 광고인 모양이었다. 15세 이상만 이용이 가능한 게임의 광고에 아이들이 반응을 보이는 게 신기했지만, 하진은 별생각 없이 광고를 시청하기 시작했다.
 광고는 인피니티는 이런 게임이라고 소개하는 형식이 아니라, 한 유저가 성에 침입한 몬스터들과 싸워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구해 내는 내용을 보여 주는 듯했다.
 방금 전에 집에 인피니티의 게임 캡슐이 설치된 것도 있고 해서 하진은 흥미를 느끼며 광고에 집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거기에 빠져들었다.
 광고에 등장한 검사는 굉장히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고 멋있게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화려한 움직임으로 검을 휘두를 때마다 몬스터들은 힘없이 튕겨 나가거나 쓰러졌고, 검사는 은빛 망토를 휘두르며 화면 속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었다.
 아이들이 광고를 볼 수도 있다는 걸 고려했는지 잔인한 장면은 모두 편집한 듯했지만, 그 사실성은 익히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웬만한 영화보다 훨씬 화려한 액션이었다.
 간단한 설정이지만 사람들, 특히 여자와 아이들의 비율이 높은 사람들을 멋지게 구해 내는 모습은 한 편의 영화와 같았다.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검을 들어 괴물들을 멋지게 쓰러트리는 용사!
 아이들이 환호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고 생각하는 하진이었다. 자신도 왠지 넋을 잃고 보게 되는 모습이었으니까.
 세준이 그런 하진을 보고는 혀를 찼다.
 “쯧, 네가 애냐? 뭘 그리 감동하고 있어?”
 “아, 멋있어서. 대단한데?”
 “저 광고 처음 봤냐? 요즘 꽤 화제가 되고 있는 건데. 실제 유저를 섭외해서 플레이 영상을 편집한 거기도 하고······ 아, 넌 게임에 별로 관심 없었으니 말해도 모르겠네.”
 “난 TV도 잘 안 보니까. 흐음, 저게 인피니티구나.”
 하진이 왠지 감격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듣고 세준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관심이 생긴 거 같은데 한번 해 봐. 가상현실 게임의 위력을 느낄 수 있을 거다. 뭐, 저 루카르트라는 유저처럼 싸우려면 한참 노력해야겠지만. 꼭 전투가 다도 아니고, 몬스터 구경하는 맛도 있고 재밌는 직업도 많고, 할 만하거든.”
 “정말 대단하네. 잘 만들었어.”
 완전 반해 버린 듯한 하진의 모습에 세준은 저 광고 만든 사람들이 이 모습을 봤으면 참 흐뭇해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저 모습은 완전 남자의 로망을 완벽하게 표현해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긴 하니까. 뭐, 여자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참 멋있죠?”
 원장이 후후 웃으며 대화에 껴들었다. 하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 그러네요. 대단한데요?”
 “저희도 인피니티 게임 캡슐을 몇 개 가지고 있어서 아이들도 관심이 많아요. 후후.”
 “게임 캡슐을요?”
 게임 캡슐 가격이 상당하다는 걸 알고 있는 하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진이 보기에 고아원 사정이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은 듯했던 탓이다. 사실 그래서 세준의 동아리에서 계속 봉사 활동을 나오곤 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하진의 의문을 이해한 듯 원장이 다시 웃었다.
 “예전에 기부 비슷하게 받았거든요. 팔까 생각도 했는데 인피니티로도 돈을 벌 수 있다고 나선 아이가 있어서요.”
 게임 머니가 합법적으로 현금 거래가 되고 있어 인피니티만 열심히 해도 먹고살 만은 하다는 말까지 우스갯소리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게 단순한 우스갯소리로 끝나지만도 않는다.
 그런 얘기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었기에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지영이라고, 여러분 또래라 이미 성인인데도 저를 돕겠다고 여기서 같이 살고 있어요. 세준 군은 몇 번 본 적이 있죠. 지금은 잠시 외출 중이라 소개시켜 드리질 못했네요.”
 “아, 괜찮습니다.”
 “지영이 누나 진짜 예쁘다, 형? 나중에 봐 봐.”
 한일이가 자랑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하진은 작은 손을 열심히 휘두르며 설명하는 한일이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렇긴 한데 내가 볼 땐 너무 얼음 가루가 날려서······.”
 “우······ 아니야! 지영이 누나 얼음 아니야!”
 “맞아!”
 “지영이 누나가 얼마나 착한데!”
 세준이 슬그머니 약한 험담을 하자 한일이를 비롯한 주변의 아이들이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세준은 말도 못 하게 한다고 투덜투덜하다 아이들의 육탄 공격에 깔려 항복을 외쳐야 했다.
 아이들의 반응을 보니 그 지영이란 사람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즐거운 소란이 끝난 후 대청소가 다시 시작되었다.
 하진은 나르던 박스들을 마저 날랐고, 세준은 동아리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이들의 짐을 정리해 주고 청소를 도맡아 했다. 박스를 다 나르고 할 일이 없어진 하진도 거기에 끼어 아이들과 어울려 청소를 시작했다.
 몇 시간이 흘러 대충 모든 정리가 끝나자 하진과 세준 일행은 원장과 아이들의 환송을 받으며 고아원을 나섰다.
 “오늘 고마웠어요.”
 “잘 가! 형들, 누나들! 나중에 또 놀러 와!”
 “하진이 오빠, 안녕!”
 “바이바이! 또 와요!”
 짧은 시간에 친해져 또 오라고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보며 하진은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세준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지 환히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고아원의 작은 운동장을 지나며 세준이 입을 열었다.
 “후아, 모두 고생했어. 밥은 내가 쏠게!”
 “또 분식집 가려고요?”
 “학교 후문 밥 골목에서?”
 “우와, 사 준다고 하고도 욕을 먹어야 한다니!”
 “오빠가 만날 짠돌이처럼 구니까 그렇죠.”
 투덕거리는 세준과 동아리 멤버의 대화를 들으며 하진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까 본 인피니티의 광고가 뇌리에 콱 박혀 떠나지 않았다.
 세준이 말없이 걷는 하진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 쳤다.
 “무슨 생각 하냐?”
 “아, 아까 광고가 생각나서.”
 “인피니티? 캡슐도 생겼으니 한번 해 보라니까. 게임에서 만나면 내가 도와줄 테니. 이래 봬도 꽤 레벨 높다, 나. 그나저나 아까 그 광고가 꽤 인상적이었나 보지?”
 “응, 멋있더라. 나도 저렇게 한번 되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
 솔직하게 말하는 하진이었다.
 화끈하고 통쾌하게 몬스터들을 무찌르고 사람들을 위험에서 구한다! 그 자체로 얼마나 멋지고 기분 좋은 일인가. 허구한 날 벽 보고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몬스터들을 무찌르고 힘든 모험을 떠나는 게 훨씬 흥미가 가고, 멋지게 보였다.
 역경을 뚫고 몬스터를 해치우고 그로 인해 인정도 받는다. 그 루카르트라는 사람처럼 되어 보고 싶었다.
 소설에서나 읽던 영웅이 될 수 있는 곳이 인피니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멋있긴 하지. 그 루카르트라는 유저, 실제로 인간성도 좋아서 인피니티 내에서 이런저런 일을 많이 해결하거든. 유저들 사이에서도 NPC들 사이에서도 선망의 대상이지.”
 정말 대단한 사람인가 보다 하고 하진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어쨌든 인피니티 시작한다면 나는 환영······ 어?”
 세준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운동장 안으로 들어서는 여자를 발견한 탓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세준이 붙임성 있게 인사를 하자 그 여자도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별다른 말 없이 고아원 건물로 걸어갔다. 하진은 그 모습을 슬쩍 돌아보았다. 짧게 커트한 머리에 날씬한 몸매의 상당한 미인이었다.
 “누구야?”
 “아, 저 사람이 지영 씨야. 아까 원장님이 말했지?”
 “아······.”
 그 인피니티를 해서 돈을 번다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별로 차가운 줄은 모르겠는데?”
 “쩝. 붙임성이 없다고 해야 되나? 나랑은 잘 안 맞더라. 사실 얼굴 본 적도 몇 번 없고.”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지영이란 여자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아이들을 안아 들고 있었다. 나쁜 사람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도중에 대화가 끊어지긴 했지만, 하진은 스스로 인피니티를 시작해 보기로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모험을 즐기며 강한 몬스터를 퇴치하고,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광고에 나왔던 루카르트라는 사람의 이미지에 가깝게 가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오늘 봉사 활동을 하면서 오랜만에 남을 돕는 것에 대한 따뜻함도 느낀 탓에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화끈한 모험도 즐기고 남들을 위해 검을 드는 검사라.
 지겨워 한숨지으며 목검이나 휘두르는 것보단 훨씬 좋다.
 ‘인피니티······라.’
 하진은 왠지 두근대는 심장에, 희미하게 웃으며 일행과 함께 버스에 올라탔다.
 
 * * *
 
 “아까워라. 조금만 일찍 왔으면 하진 군하고 인사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지영은 아쉬워하는 원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진? 누구예요?”
 “세준 군 일행하고 같이 온 청년이야.”
 “아······.”
 아까 들어오며 마주친 일행에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는 걸 떠올린 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좋아 보이더라. 아이들도 좋아하고.”
 지영은 주변에 와글와글 모여서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영도 이 고아원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이들이 모두 친동생처럼 느껴졌다.
 “하진이 형 또 온다고 했어. 누나 보러 온대!”
 한일이의 말에 원장이 방긋 웃음을 지었다.
 “한일이가 특히 좋아하더라고, 후훗. 그리고 들어 보니까 하진 군이 인피니티에 관심이 있는 것 같더라. 한번 시작해 볼까 하는 거 같아서 네가 있으면 한번 얘기해 보라고 하려 했는데, 아쉽네.”
 “······.”
 세준 일행하고는 전혀 친하게 지내지 않아서 새 친구라도 사귀어 보게 할 생각이었던 원장이었다.
 지영은 고아원 일을 돕는다며 이런저런 일들을 하느라 정작 친구도 거의 없었다. 원장은 거기에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영은 별말 하지 않고 인피니티의 게임 캡슐이 설치되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조금 있으면 인피니티의 시간으로 정오가 되기 때문에 빨리 접속해야 했다.
 “원장님, 전 인피니티를 좀 하고 있을게요. 중요한 일이 있어요.”
 “그러니? 난 잘 모르지만 조심하렴. 무리하지 말고.”
 지영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아이들을 방으로 보낸 후 캡슐이 설치된 방으로 들어섰다. 조금 작은 방에 캡슐 세 개가 나란히 설치돼 있었다.
 자신이 전용으로 사용하는 캡슐 안으로 들어간 지영은 능숙하게 캡슐을 가동시키며 좌석에 앉아 헤드셋을 썼다. 부드러운 벨트들이 저절로 몸 곳곳을 감으며 고정시켰다.
 팟!
 순간 시야가 잠시 점멸했다.
 화악!
 그리고 다시 밝은 빛이 사방을 메우며 시야를 밝혔다.
 마지 공중에, 아니 우주에 떠 있는 듯한 감각. 가상현실로 들어서는 초입, 관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인피니티에 접속합니다.
 -사용자를 확인합니다.
 -잠시 눈을 깜박이지 말아 주세요.
 홍채 인식과 뇌파 인식을 순식간에 끝내고, 새로운 세상으로의 여행이 허가되었다.
 -인피니티의 세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렌시아 님.
 “고마워.”
 버릇처럼 감사의 말을 건네는 순간 사방이 빛으로 감싸였고, 빛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지영, 아니 렌시아는 인피니티 내 최강국인 발론 왕국의 동부에 위치한 대도시 가랜드의 중앙 광장에 서 있었다.
 활기차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상쾌한 공기가 느껴졌다. 렌시아는 슬며시 웃으며 배낭을 추슬렀다.
 “그럼 동쪽으로 가 볼까?”
 인피니티에서 그녀가 가진 직업은 패스 파인더Pass finder, 일종의 탐험가였다. 이미 상당한 명성을 쌓았고, 덕분에 게임사 리미트와 일종의 계약까지 맺은 상태였다.
 현실성과 유저들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탓에 게임사 측은 대대적이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탓에 게임의 난이도와 구상해 둔 시나리오 조정을 위해 여러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게임 내에 영향력을 행사하곤 했다.
 인피니티 내에서 일종의 치안을 담당하는 드래곤 기사단에 대한 조력이라든가 NPC들과의 연계를 통한 유저들의 편의성 추구라든가 하는 것들이 주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렌시아 같은 유저들과 계약을 맺어 인피니티의 정보들을 수집하는 것도 있었다.
 직접 손을 못 댄다 해도 게임 자체의 정보야 얼마든지 가지고 있는 게임사지만 인피니티 내의 활동들은 유저들에게 맡겨져 있는바, 새로운 사냥터나 던전은 일단 유저든 NPC든 누군가가 발견을 해야 공표를 하고 이벤트든 뭐든에 써먹을 수 있었다. 때문에 고용된 사람 중 하나가 렌시아였다.
 게임 머니나 플레이 중 얻는 아이템을 파는 것만으로 만족할 만한 금액을 벌기 힘들다고 느끼고 있던 지영으로서는 정말 좋은 기회였다.
 “루코 산맥에 새로운 던전이 있어야 할 텐데······.”
 기본적인 수고비에 던전 하나를 찾아낼 때마다 백만 원을 받는 계약을 맺고 있는 렌시아는 새로운 던전을 찾기 위해서 루코 산맥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아원은 항상 운영비가 부족한 상태였다. 국가로부터의 지원은 그리 많지 않았고, 들어오는 기부금도 매우 적었다. 어릴 적부터 고아원에서 생활한 그녀는 원장 선생님의 고생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도우려고 고아원에서 함께 지내며 아이들을 돌봤고, 인피니티에도 뛰어들어서 돈을 벌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맺고 있는 계약은 가계약이라 실적이 없으면 다시 갱신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나오는 급료는 적고, 새로운 던전이나 좋은 사냥터를 찾아낼 때 나오는 돈이 더 큰 수입원이었다.
 때문에 던전을 찾는 것이 그녀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그녀 스스로보다는 고아원과 아이들을 위해서.
 인피니티 자체를 분명 즐기고 좋아하기도 했지만 렌시아, 지영에게는 그보다 돈을 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가랜드 동쪽의 커다란 산맥, 루코 산맥으로 향하던 렌시아는 문득 원장님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인피니티를 새로 시작하려는 사람이 있다던 이야기.
 ‘그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인피니티를 하게 될까?’
 분명 자신과는 다른 이유,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인피니티에 발을 들이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만 그가 인피니티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이 세계에서 분명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고 있으니까.
 잠깐 스쳐 지나가느라 흘깃 보고 넘겼던 하진이란 사람을 잠시 떠올려 보던 렌시아는 곧 생각을 접고는 걸음을 빨리했다.
 지금 생각해야 하는 건 새로운 던전의 발견이다.
 그녀에게는 고아원의 아이들과 원장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첫 일주일, 도둑고양이와의 사투
 
 
 
 “그래서 한번 해 보려고?”
 “요새 특별히 하는 것도 없고 하니까요.”
 식탁에 앉아 같이 밥을 먹고 있던 아버지의 물음에 하진은 선선히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학교도 휴학하고 싶다면서 집에서 뒹굴고만 있어서 걱정이었는데······ 잘됐네. 벌써 대학교 4학년에 올라가서 졸업 준비를 해야 할 놈이 게임이나 하며 구르고 있는 것도 문제일 것 같긴 하다만.”
 “······.”
 “그 게임 회사 일 도우면서 생각해 보니까 그 게임 하는 걸로도 검도를 웬만큼 닦을 수 있을 것 같더구나. 물론 보조 개념이라 거기에 빠져들면 오히려 망가질 수도 있겠지만, 실전 감각을 살리는 데는 꽤 좋겠지.”
 현실성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긴다는 인피니티의 최고 장점에 대한 얘기였다. 실제 검도 사범들을 초빙해 게임 데이터를 확장하고 하는 걸 보니 이해가 갔다.
 “그러니 이왕 하는 거 게임에서도 검을 써라.”
 “······.”
 하진은 잠시 입맛을 다시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익은 무기가 편하기도 할 테고, 깊은 감명을 받은 루카르트라는 유저도 검을 쓰질 않았던가. 가장 폼 나는 무기가 검이기도 하고.
 사실 진철은 몇 년 전부터 검에 흥미를 잃어버린 하진 때문에 게임 캡슐을 집으로 들여놓은 것이기도 했다. 게임사에서 검도 데이터 수집에 도움을 주면서, 인피니티가 그냥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가상현실이라는 것의 장점을 잘 살린 훌륭한 것임을 깨달은 탓이었다.
 분명 실제 검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테고, 무엇보다 몬스터인가 하는 괴물들과 싸우다 보면 실전 경험도 쌓고 다시 검에 흥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진이 검도에 관심을 끊은 게 뚜렷한 재미와 모티브가 없어서임을 잘 알고 있는 진철이었기에, 인피니티 속에서 자신의 실력도 뽐내고 하다 보면 효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뭐, 그럴게요. 사실 저도 그럴 생각이었고요.”
 “음. 다행이군.”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진철이 다시 눈을 번뜩이며 하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검도란 단순히 살생을 위한 것이 아님을 꼭 기억하거라. 인피니티를 하면서도 검을 통해 남들을 돕고 자신의 신념을 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건 아버지로서 그리고 네게 검을 가르친 스승으로서의 부탁이다.”
 “예.”
 좀 쓸데없이 무게를 잡는다는 기분도 있었지만, 굳이 따지자면 자신도 존경받는 영웅적 유저가 되는 것이 목표였기에 하진은 진철의 말을 쉽게 받아들였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크게 만족한 진철은 표정을 풀고는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거야 네가 어련히 알아서 할 테고, 내가 볼 땐 그 몬스터 잡는 게 여간 재미있어 보이는 게 아니더라. 도장하고 협회 일이 바쁘지만 않았으면 나도 뛰어들어서 검을 휘둘러 보고 싶더만.”
 껄껄 웃는 아버지를 보며 하진은 유전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도 포효하는 몬스터들과 멋진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생각하며 한껏 기대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괴물과 생사를 건 싸움 끝에 얻어 내는 승리감! 거기에 더불어 그 모습을 보며 감탄하는 예쁜 아가씨라도 있으면 금상청화가 아니겠는가. 뭐,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남자도 크게 나쁘지는 않다.
 어쨌든 뒤의 문제는 부차적인 거고 하진은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다닌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기껏 배운 검을 아무 생각 없이 마구 휘두를 수 있다는 점도 최고다. 세상 번뇌를 모두 잊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럼 해 보기로 한 거 맘 편히 즐겁게 해 보거라. 조금 있으면 중등부 애들이 올 시간이니 난 준비를 해야겠다.”
 진철은 휘파람을 불며 1층의 도장으로 내려갔고, 하진은 그릇들을 정리하고는 팔을 휘두르며 몸을 풀었다.
 인피니티에 대한 간단한 상식이나 정보 들은 어제 잠들기 전에 가이드북 대충 한번 훑어본 걸로 만족하기로 하고 당장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어릴 적엔 아버지에게 붙들려서 검도를 강제적인 취미로 삼아 검만 휘둘렀고 고등학교 때는 공부, 대학 들어가서는 흥미도 없고 기회도 없었기에 게임을 해 본 기억은 거의 없었지만, 현실과 비슷한 인피니티라고 하니 적당히 하다 보면 플레이 방법은 저절로 익힐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장 안쪽의 방으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간 하진은 당당히 서서 위용을 뽐내고 있는 게임 캡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좋아, 들어가 볼까?”
 기대감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하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캡슐의 문을 열어 보았다. 안락한지 어떤지는 앉아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푹신해 보이는 의자와 조금 복잡해 보이는 기기들이 이리저리 자리하고 있었다.
 좌석에 조심스레 앉은 하진은 헤드셋을 뒤집어썼다. 머리의 반을 가리는 큰 헤드셋이 시야를 가리는 것과 함께 좌석의 고정대가 자연스럽게 몸을 감쌌다.
 팟팟!
 시야가 점멸하고······.
 화악!
 순간적으로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공간 전체가 밝아졌다.
 “어라?”
 하진은 자신이 이 밝은 공간을 보고 있기는 하지만 육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채고는 신기해했다.
 -인피니티에 접속합니다.
 -사용자를 확인합니다.
 -잠시 눈을 깜박이지 말아 주세요.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새로운 사용자를 등록합니다.
 -새로 등록할 캐릭터명을 정해 주세요.
 “하진.”
 하진은 별생각 없이 자신의 이름을 댔다. 굳이 번거롭게 현실과 가상현실의 이름을 다르게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탓이었다.
 -같은 캐릭터명이 일흔여덟 개 존재합니다. 하진으로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하진으로 등록합니다.
 -새 사용자 등록이 완료되었습니다.
 -인피니티의 새로운 유저로 모험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원하는 시작 지점이 있으십니까?
 가상현실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배우기도 해서 대충 알고 있지만 인피니티라는 게임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자세히 알지 못했기에 하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실상 현재 몸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생각만 그럴 뿐이었지만.
 가이드북에 좋은 시작 지점 추천까지는 없었던 것 같았기에 잠시 고민하던 하진이 말했다.
 “사람도 많고 사냥터도 가장 많은 곳으로!”
 이왕이면 활발하고 사냥감도 많은 곳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현재 가장 많은 인구수의 시작 지점은 발론 왕국의 가랜드 성입니다. 발론 왕국은 검의 진명 계승자 NPC 비하르트가 통치하고 있는 인피니티 최강국입니다. 가랜드는 발론 왕국에 존재하는 네 개의 부수도 중 하나로 도시가 갖추어야 하는 모든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새 유저들을 위한 사냥터들로는······.
 “······설명은 넘길 수 없을까?”
 -그럼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시작 지점, 발론 왕국, 가랜드.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
 -인피니티 내에서의 신체를 구성하겠습니다. 기본은 현실과 동일하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하얀 공간 안에 하진의 몸이 나타났다. 하진은 자신의 몸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보고 있다는 사실에 즐거워졌다.
 ‘유체 이탈이 이런 기분일까?’
 -신체 구성을 변경하시겠습니까? 변경 범위는 리미트 사에서 정한 기준으로 본체에서 30% 이내입니다.
 하진은 다시 고민에 잠겼다. 딱히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콤플렉스를 느낄 만큼 못생긴 얼굴도 아니었고, 특별히 외모를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결국 하진은 머리카락을 좀 길게 해 눈가를 살짝 가리는 것으로 외모 설정을 마쳤다.
 -기본 의상을 설정합니다. 처음 주어지는 청바지와 티셔츠, 운동화는 내구력이 무한하며 소멸하지 않습니다. 색상을 골라 주세요.
 그냥 평소 입던 대로 검은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를 고르자 하진은 순간 눈앞에 있던 자신의 몸이 사라진 걸 눈치채고 움찔했다. 그리고 방금 자신이 설정한 몸을 스스로 움직이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확실히 별로 차이는 없군.’
 현실과 여러 감각이나 움직임은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에 새삼 감탄하는 사이 음성이 들려왔다.
 -새 사용자 등록이 모두 끝났습니다.
 -그럼 접속합니다.
 -인피니티의 세상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하진 님.
 “고마워!”
 드디어 인피니티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에 감격한 하진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빛이 잠시 깜박했다고 느끼는 것과 동시에, 그는 어느새 땅을 밟고 서 있었다.
 
 * * *
 
 “······좀 허무한데?”
 인피니티에서의 첫 감상이었다. 너무 한순간에 접속이 끝난 탓이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 하진은 주변을 돌아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은 아마 광장의 한구석인 모양이었다. 가운데 커다란 분수가 물을 뿜고, 그 주변으로 빈 공간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빈 공간은 중세식으로 보이는 벽돌과 목조가 뒤섞인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건물들 뒤로 보이는 거대한 성. 다큐멘터리 프로에서나 보던 유럽의 성들보다 훨씬 박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하진은 계속 감탄했다.
 주변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도 진기한 구경거리였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사람에서 망토를 두른 사람, 로브를 입고 후드를 얼굴까지 푹 눌러쓴 사람, 현실에서처럼 깔끔하게 입고 있는 사람 그리고 들고 다니는 무기들. 수많은 유저들은 이곳저곳에 모이고 흩어지며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몇몇이 초보가 나타났다며 흥미를 가지고 눈길을 보내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와아.”
 하진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정말 대단한데?’
 특히 현실에서는 느끼기 힘든 상쾌한 공기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나저나 아이템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가이드북에서 보니까 처음에 몇 가지 아이템은 준다고 했던 거 같은데?
 하진은 대강 훑어보는 바람에 희미하게만 남아 있는 게임의 지식을 애써 끄집어내며 자신의 몸을 살폈다.
 허리춤에 작은 가죽 주머니가 달려 있었다.
 “으음?”
 주머니에 손을 가져가자 눈앞에 반투명한 창 같은 게 나타났다. 하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창 안에는 ‘내 컴퓨터’나 ‘휴지통’ 같은 아이콘 대신 작은 물통과, 단검 모양의 아이콘이 들어 있었다.
 하진은 문명의 발전에 크게 감탄했다. 시야에 꼭 맞게 들어오는 이 테크날러지의 결정체라니! 그것도 중세 시대에서!
 “······.”
 하긴 어차피 가상현실 안이긴 하지만.
 “그나저나 이거 어떻게 꺼내는 거지?”
 터치스크린처럼 손가락으로 찍으면 되는 건가 하던 하진은 주머니에 넣은 손을 움직이자 아이콘들에 작은 손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의 움직임에 따라 저 손이 마우스 커서처럼 이동하는 모양이었다.
 하진은 단검에 손을 가져가 꾹 쥐고는 주머니에서 빼냈다.
 별로 날카로워 보이진 않지만 분명 날이 선 단검이 바깥 공기를 마시며 첫 선을 보였다.
 
 무딘 단검
 공격력 2~4. 내구력 15/15.
 대륙을 처음 밟는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호신용 단검.
 날카롭진 않지만 경우에 따라선 치명적 상처를 입힐 수 있다.
 무게 2.
 
 
 눈앞에 떠오르는 설명을 보니 확실히 별로 좋은 무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름부터가 이미 무딘 단검이라지 않는가.
 햇살을 받아 반짝 빛난다든가 하는 효과까지 기대하기에는 조금 성능이 떨어져 보이는 녀석이긴 했지만 찌르면 찔리긴 할 것이 분명했다.
 “으음, 이왕이면 장검이면 좋았을 텐데.”
 그게 더 멋있기도 하고 손에 익을 것이 분명했기에 한 생각이지만, 이제 시작한 초보이니 거기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어디 보자, 캐릭터 정보는······ 상태 창이라고 말하면 되던······.”
 하진은 곧바로 눈앞에 떠오르는 정보 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캐릭터명 : 하진
 레벨 : 1 직업 : 없음(초보 여행자)
 상태 : 일반
 명성 : 0 악명 : 0
 생명력 : 100 마나 : 100
 힘 : 10 민첩 : 10
 체력 : 10 근성 : 10
 지혜 : 10 지력 : 10
 행운 : 10
 공격력 : 3~5 방어력 : 4
 마법 저항력 : 없음
 
 보유 스텟 : 0
 
 †인피니티 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여행자.
 †앞으로의 노력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추구할 길을 정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딱히 보고 말고 할 것도 없는 보잘것없는 내용이었다. 스킬 창을 열어도 있는 거라고는 ‘기본 검술 : Lv. 1(0%)’이라는 정보뿐이었다.
 아직 멋진 모험가를 꿈꾸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으며 하진은 피식 웃었다.
 이제 게임을 시작한 것이니 별로 억울할 것도 없다. 오히려 앞으로 성장해 나가는 재미가 있을 터! 그리고 하진은 생전 처음 보는 중세의 풍경과, 전혀 모르는 신천지에 발을 디뎠다는 것만으로도 한껏 흥분하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음······ 이제 어쩔까?”
 당장 몬스터라는 것들과 한판 붙으러 나가고 싶었지만, 처음 접속한 뒤 일주일은 도시 안에만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나 하진은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 시간으로 일주일이라고 했으니 게임 내의, 인피니티의 시간으로는 무려 스무하루다. 뇌의 인식 작용을 조절해 대부분의 가상현실 게임은 현실보다 세 배 빠르게 시간이 가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어쨌든 당장은 뭘 해야 할지 몰라 주변만 둘러보는 하진이었다.
 광장을 살펴보니 자신처럼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똑같이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방금 접속한 초보가 분명했다. 묘한 동질감을 느끼던 하진은 몸의 감각을 확인하듯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일단 현실과 별 차이가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몸을 슬슬 움직여 보려는 의도였다.
 ‘일단 둘러볼까.’
 어쨌든 처음 접속하기도 했으니 이 도시를 구경하며 어떻게 할지 고민하기로 결정하고 걸음을 옮기려는 때였다. 누군가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기쁨이 한껏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인피니티 대륙에 온 걸 환영하네!”
 “······예?”
 고개를 돌린 하진은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중년의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얼마나 환하게 웃고 있는지, 자신이 그와 예전에 헤어진 혈육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어쨌든, 그는 하진이 인피니티에서 처음 만난 NPC였다.
 보통 유저와 NPC가 스스로가 밝히지 않는 한 구분하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이 중년 사내는 한눈에 보기에도 NPC임을 알 수 있었다. 왼팔에 NPC라고 적힌 노란 완장을 차고 있었으니까.
 하진도 눈이 있기에 그 완장을 볼 수 있었고, 그 완장이 눈에 보인다는 점에서 잠시 자신의 시력을 의심해 보다 결국 인피니티 내의 NPC들은 팔에 NPC 완장을 차고 다니나 보다 1차 결론을 내렸다.
 “······환영 감사합니다. NPC이신가요?”
 중년 사내는 광채가 뿜어질 것 같은 미소를 더욱 진하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여기 완장도 있지 않나, NPC라고.”
 “······아, 역시 NPC들은 그런 완장을 차고 다니나 보죠?”
 “응? 아하하, 역시 우리 대륙에 처음 방문한 이계인이로군. 아니네. 난 특별한 경우라 이걸 차고 있는 거지!”
 “특별한 경우요?”
 “그래, 난 인피니티 가이드라네!”
 “······.”
 하진은 이 상황을 뭐라 설명해야 하는가 잠시 고민해 보고는, 게임 가이드북을 제대로 읽어 보지 않은 자신의 부덕함을 탓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생각해 보니 초보들을 위한 가이드들이 곳곳에 존재한다는 글을 어렴풋이 읽은 기억도 있는 것 같았다.
 “인피니티······ 가이드요?”
 중년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우리 대륙에 처음 오는 이계인들을 도와주는 역할이지. 자, 뭐든지 물어보게! 아니면 내가 알아서 설명해 줄 수도 있지! 이래 봬도 인피니티 가이드를 시작한 지 5년이나 되는 베테랑이니 실망할 일은 없을 걸세!”
 하진은 간단한 계산을 통해 인피니티가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 약 2년 전이니 이 NPC는 서비스 개시 후 대부분을 이 일에 종사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확실히 베테랑이라면 베테랑이다.
 “아, 예. 그러시군요. 수고하시네요.”
 “수고는 무슨! 나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하핫!”
 “······먹고살자고요?”
 보수라도 받는단 말인가?
 “난 드래곤 기사단에 정식 고용된 가이드라네. 초보 이계인들을 도와주고 그 성과에 따라 기사단에서 수고료를 받지. 그러니 부담 가지지 말고 뭐든 부탁해 보게!”
 “······.”
 그러니까 초보들을 도와주고 뭔가 대가를 받는 직업이라는 소리였다. 드래곤 기사단이 뭘 하는 사람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게임사와 연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초보들을 위해 만든 시스템이 분명해 보였다.
 유저들도 인피니티를 하면서 돈을 벌곤 한다더니 NPC마저 돈을 버는 세상인 모양이었다. 하긴 게임 머니가 현실에서도 가치를 가진다면 게임 머니 자체가 통용되는 인피니티 내에서도 가치가 있을 테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자, 뭐든 부탁해 보게나! 퀘스트가 필요한가? 이 도시에 대한 정보? 아니면 대륙의 정세? 아니면 지금 가장 촉망받는 직업군은 무엇인가? 혹은 새로 진명을 계승한 유저는 누가 있는가? 뭐든 부탁해 보게!”
 어쨌든 NPC가 이렇게 거리낌 없이 퀘스트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기술력이나 현실성의 접목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구나 느낄 수 있었다. 실제 유저도 아닌 NPC가 이렇게 똑똑하다니!
 제발 좀 부탁해 달라고 눈으로 외치고 있는 중년 사내를 보며 하진은 조금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 이유가 돈줄을 물었기 때문인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초보 유저들도 NPC 완장을 찬 사람들에게 붙들려 있었다. 이렇게 가이드 노릇을 하는 NPC가 이 사람 하나인 건 아닌 모양이었다.
 초보들에게 편하긴 하겠다고 생각하며 하진은 동시에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라 눈앞의 NPC가 반갑게 느껴졌다.
 “알지 모르겠네만 대륙을 처음 찾아온 이계인들은 스무하루 동안 도시 안에서 적응 기간을 가져야 한다네. 그동안 이 대륙에 대해 알아 가라는 주신의 뜻이지! 내 그 기간 동안 할 만한 일들을 추천해 주겠네! 맡겨 주게나!”
 하진은 너무 기뻐하며 신 나서 외치고 있는 NPC 사내를 보며 진땀을 흘리다 입을 열었다.
 “혹시 이 도시에 검도장 같은 곳이 있습니까? 제가 검도를 배운 적이 있어서 연습을 좀 해 보려고요.”
 “검도장? 있지! 성 북쪽에 수련장이 있다네! 검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무기들을 수련할 수 있는 곳이지. 초보들을 위해 연습용 무기도 대여해 준다네! 수련장에선 노력에 따라 스텟을 열다섯 개까지 올릴 수 있어서 의지 있는 사람들이 들르곤 하는······.”
 하진은 왠지 내버려 두면 설명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급히 끼어들었다.
 “아,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거기 위치가 어떻게 되나요?”
 NPC는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곧 위치를 설명해 주었다.
 “저 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쭉 올라가다 보면 보일 걸세. 담도 낮고 안에 허수아비들이 잔뜩 서 있으니 알아보긴 쉬울 게야.”
 “아, 감사합니다.”
 “또 물어볼 건 없나? 얼마든지 대답해 줄 수 있네만.”
 더 물어봐 달라는 듯 눈을 빛내는 NPC였지만 하진은 슬쩍 뒤로 물러나며 그 눈빛을 피했다.
 “아······ 일단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럼 나중에 뵙죠.”
 NPC 사내는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요즘 초보들은 예전같지 않구먼. 알았네, 그럼 좋은 시간 보내길 빌어 주지. 또 궁금한 일이나 부탁할 게 있으면 날 찾아오게나. 내 이름은 파크네!”
 “아, 전 하진이라고 합니다. 그럼.”
 “그래, 잘 가게!”
 조금 아까워하는 표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환송해 주는 파크를 보며 하진은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가능하면 자주 들러 볼까?’
 자신에게도 이득이 되고 파크도 돈을 벌 수 있다니 궁금한 점을 물으러 자주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손에 쥔 단검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며 걸어가다 보니 길옆에 늘어선 여러 상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게임 하면 빠질 수 없는 무기점은 물론 여관에 술집에 심지어 꽃집과 이불을 파는 상점도 있는 것을 발견한 하진은 감탄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역시 인피니티에도 독자적인 문화나 경제 순환 체계는 잡혀 있는 모양이었다.
 인피니티에 대해 더 자세하게 알아 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이 세상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면 강해지는 것은 무리다.
 “아, 여긴가?”
 한참을 걷던 하진은 낮은 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운동장 같은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쪽에 나지막하면서도 꽤 넓어 보이는 건물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야외에 설치된 수많은 허수아비들이 더 인상적이었다. 몇몇 허수아비들에는 사람들이 가까이 서서 무기를 휘두르고 있기도 했다.
 의외로 초보들만 있는 게 아니라 척 봐도 고렙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차림의 사람들도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매끈한 가죽 갑옷을 입은 남자가 다가왔다.
 “어서 오게. 처음 보는 얼굴이군. 나는 이 수련장을 관리하고 있는 교관인 하넬이네. 무엇을 수련하러 왔나?”
 “아, 검을 휘둘러 보려고 왔습니다.”
 “저쪽으로 가면 수련용 무구들이 있네. 사용 후에는 꼭 제자리에 돌려놓아 주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하넬 사범님.”
 “음, 예의가 바른 이계인이군. 그럼 마음껏 단련하게나.”
 이계인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NPC인 모양이었다.
 하진은 담 옆의 의자에 앉아 눈을 감는 하넬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나무로 만들어진 수련용 무구들이 거치대에 걸려 있었다.
 “흐음.”
 창이나 도끼 같은 무기들도 있었지만 하진은 거기선 눈을 금방 돌려 버리고는 목검을 살펴보았다.
 ‘······서양식인데?’
 배경이 유럽 중세풍이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목검들은 모두 양날에 검신도 일자 형태였다. 하진이 단련하던 검은 외날에 검신이 살짝 휘어진 일종의 도에 가까웠기에 모양이 상당히 달랐다.
 “뭐, 별수 없나?”
 어차피 같은 검이긴 하고 수련용 목검을 가지고 이것저것 따지기도 뭐했다. 그리고 어차피 게임이기에 구하는 무기에 따라 사용하는 검의 모양이 계속 바뀔지도 모르니 이런 형태의 검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사실 지금 하진의 검의 경지가 진철처럼 높은 것도 아니고 그냥 수련생에 가까운데, 내 실력은 한국 전통형의 검이 아니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우스웠다.
 적당히 하나를 골라 든 하진은 허수아비 하나를 앞에 두고 서서 목검을 휘둘렀다.
 퍽!
 “음······.”
 하진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퍼벅! 퍽! 퍽! 퍼버벅!
 무자비하게 허수아비를 두들겨 패던 하진은 결국 결론을 내리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움직이는 건 똑같긴 한데······ 느낌이 조금 이상한가?”
 통감 같은 감각은 현실의 20%로 조정되어 느껴진다는 설명을 떠올리며 하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촉감 같은 부분에서는 크게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지만, 검의 반동 같은 면에서는 미묘한 위화감 같은 게 느껴졌다.
 ‘직접적인 공격에 의한 통증은 아니지만······ 이것도 조정이 되나?’
 아니면 단순히 현실과 가상현실의 차이일 수도 있다.
 어쨌든 자신이 지금 서서 검을 휘두르는 곳은 현실이 아니라는 점이 확실히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신경에 거슬린다거나 할 것까진 아니지만 분명 존재하는 미묘한 위화감.
 검도를 배우면서 모든 부분에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던 탓에 살짝 걸리는 면이 있었다.
 “어쨌든 움직임엔 이상 없으니 상관없지.”
 하진은 적당한 결론을 내리고는 신이 나서 허수아비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냥 허공에 대고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뭔가 풀리는 게 있었다.
 ‘허수아비 때리는 게 이 정도면 몬스터를 사냥할 때는 더 즐겁겠는데?’
 퍼거걱!
 “앗······!”
 콧노래를 부르며 검을 휘두르던 하진은 순간 엉뚱한 곳을 후려치고 말았다. 긴장을 풀고 마구 검을 휘두르던 사이 허수아비의 어깨 어름을 강타하려던 게 실수로 목 부분으로 가 버린 것이었다.
 아버지가 이 꼴을 봤으면 자세 교정으로 검을 한 천 번은 휘둘러야 했을 거라는 생각이 순식간에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 뜻밖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강력한 공격을 성공시켰습니다!
 “······?”
 덩달아 왠지 목이 덜렁거리는 허수아비!
 하진은 벙찐 표정으로 왠지 매가리가 없어진 허수아비를 바라보았다.
 ‘급소를 쳤다는 건가?’
 하긴 사람이면 목이 가장 위험한 부위 중 하나이긴 하다. 목의 동맥이라도 베이면 수습할 도리가 없으니까. 아마 그게 반영된 모양이었다.
 하진은 인피니티 내에도 급소라는 개념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볼을 긁적였다.
 사실 검도를 배울 때 급소에 대해 공부하긴 했지만 같은 수련생을 상대로 사생결단을 낼 일은 없으니 오히려 대련 시엔 위험한 부위의 공격은 지양하는 편이었다. 그게 당연한 일이고 예의 중 하나다. 물론 아버지와 가끔 대련을 할 때는 아무리 위험한 공격을 해도 상관이 없긴 했지만.
 어쨌든 신체 급소에 대해선 대략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진은 허수아비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뭐, 어차피 여기서 사람 상대로 싸울 일은 없을 테니 상관없는 사실이긴 한데······.’
 미친 습격범이 죽이려 달려든다거나 전쟁에 참가하지 않는 한은, 같은 유저나 NPC와 싸울 일은 없으니 당연했다.
 ‘아, 하지만 몬스터에게도 급소가 존재한다는 소리긴 하네.’
 목이야 공통적인 급소일 터. 심장도 마찬가지다. 동물형이라면 상황이 좀 다르겠지만 사람하고 비슷하게 이족 보행을 하는 몬스터라면 이런 지식이 도움이 된다.
 “이거 검도를 써먹을 수도 있겠는데?”
 방금은 얼떨결에 잘못 휘두른 거였지만, 실수가 아니라 마음먹고 급소를 치면 성공할 확률이 더 올라갈 게 분명했다.
 “후우.”
 하진은 목검을 들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까 강력한 공격을 먹였던 목을 목표로 하고, 정확하고 강력하게 목검을 후려친다!
 퍼억!
 -강력한 공격을 성공시켰습니다!
 “오오.”
 허수아비의 목이 더 늘어지는 것을 보며 하진은 탄성을 내질렀다. 분명 무작위로 휘두르던 것에 비해 이렇게 호흡까지 가다듬고 급소를 쳐 버리니 공격력이 올라가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여기는 가상현실! 검은 위험한 것이니 신중을 기해 싸우는 상대가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고 조심스레 사용하라는 말 따위 따를 필요가 없는 곳인 것이다!
 공격은 가능한 한 정확하고 강력하게 급소를 치면 되는 것!
 검도 인생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기뻐하며 하진은 몇 시간을 연속해 목검을 휘둘렀다.
 그 노력의 끝에 허수아비 셋의 목을 아예 날려 버린 하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다.
 ‘계속 목만 쳐선 안 되겠네.’
 이러다가 수련장 내 허수아비들이 모두 목 없는 괴이한 형상이 될지도 모른다.
 하진은 다른 급소를 찾아보기로 하고는 다시 목이 날아간 허수아비 앞에 서서 목검을 추어올렸다.
 “핫!”
 푹!
 목검이 허수아비의 심장 부근을 파고들었다. 찌르기보다는 베기를 중점적으로 배우긴 했지만 그래도 혼신의 힘을 담은 일격이었다.
 -강력한 공격을 성공시켰습니다!
 “오오!”
 역시 심장도 급소다! 현실에서 이런 공격을 했다간 진철 외 다른 사범들에게 몰매를 맞고 죽었을지 모르지만 여기서는 상관이 없는 것!
 이렇게 급소들을 파악해 두면 나중에 몬스터들을 잡을 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하진은 신이 나서 목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전에 진철에게 한창 시달릴 때는 거의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른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리 힘들진 않았다. 오히려 자세가 나쁘다고 구박을 당하며 허공이나 베던 것에 비하면 아무런 제약 없이 죽어라 허수아비를 치는 지금이 더 행복할 정도였다.
 그때 또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스텟, 힘이 1 증가했습니다.
 -수련장에서 올릴 수 있는 스텟, 앞으로 14.
 “오오?”
 하진은 기뻐하며 상태 창을 확인해 보았다. 힘이 11로 증가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인피니티 가이드 파크가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것도 같았다고 생각하며 하진은 더욱 힘이 솟는 걸 느꼈다.
 확인해 보니 모르는 사이 기본 검술 스킬도 Lv.2로 올라 있었다.
 꼭 사냥이 아니더라도 생활이나 움직임 속에서도 스텟이나 스킬은 성장하곤 했다. 그리고 수련장에서 수련하는 것은 확실하게 스텟을 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특히 급소를 제대로 쳐 보겠다고 호흡까지 가다듬으며 일격을 날리기도 했으니 그것도 인정을 받았을 수 있었다.
 곧 하진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목검으로 허수아비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스텟을 하나 더 올려 보자는 목표가 생긴 탓이었다. 그냥 애매하게 한 천 번 검 휘두르면 조금은 강해지겠지 하던 현실과는 달리 노력한 만큼 능력이 수치화되어 성장하는 인피니티의 시스템이 의욕에 더욱 불을 지피고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하진은 스텟 올리는 걸 포기하고 수련장을 터덜터덜 나서야 했다.
 배가 고파서 더 움직이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물통에 원래 차 있던 물도 다 마신 지 오래라 목도 탔다.
 “굳이 이런 것까지 현실에 맞춰 둘 것까지야······.”
 하진은 투덜거리며 대로를 걸어갔다. 처음 접속했을 때는 아침이었는데 어느새 해가 중천을 지나 점점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처음 지급되는 은화 하나를 꺼내 든 하진은 길옆의 노점으로 다가가 풀빵과 주스 하나를 구입했다. 가격은 다 해서 동화 열 개였다.
 동화, 쿠퍼 백 개가 은화인 실버 하나고, 실버 열 개가 금화인 골드 하나다. 대충 쿠퍼 하나가 100원, 실버가 만 원, 골드가 십만 원 정도의 가치를 가진다고 여길 수 있었다.
 하진은 풀빵을 입에 물며 한탄했다.
 처음에 주는 돈이 고작 만 원밖에 안 된단 말인가? 요샌 초등학생 용돈도 이것보단 많이 줄지 모른다고 투덜거린 하진은 의외로 맛있는 풀빵의 맛에 만족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가면 길거리 풀빵만 먹어도 열 끼 뒤엔 거지 신세다. 어떻게든 돈을 구해야 했다.
 “퀘스트라도 해야 하나?”
 아무래도 일주일, 여기 시간으로 스무하루 동안 수련장에서 검만 휘두르는 건 무리다. 현실이나 가상현실이나 돈이 있어야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법! 세상은 자본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하진은 주스를 들이마셨다.
 사실 스무하루 동안 내내 허수아비만 치는 정신 나간 짓을 할 생각도 없긴 했지만.
 하진은 결국 돈을 벌 수 있는 퀘스트를 찾기로 결정했다.
 ‘그럼 그 파크라는 NPC를 찾아가 볼까?’
 하진은 다시 광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발론 왕국의 부수도 중 하나인 가랜드 성에서 인피니티 가이드 일을 한 지 어언 5년. 베테랑 인피니티 가이드 파크는 요즘만큼 힘든 시기는 겪어 보지 못했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처음 가이드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수입도 빵빵하고 하루하루가 보람차고 바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새로 대륙을 찾는 이계인들은 날마다 늘어 가고 끊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창창한 앞날이 보장되는, 신이 내린 직장이었던 것이다.
 하나 시간이 흐르고 5년이 지난 지금, 파크는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며 우울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새로 찾아오는 이계인들의 수도 줄었고, 초보들이 찾는 시작 지점도 점점 늘어나 그나마 또 분산되어 버렸다. 거기다 인피니티 가이드의 숫자마저 점점 많아져 고객 유치가 힘든 것이 현재의 실정이었다.
 거기다 굳이 가이드를 찾지 않아도 이미 많은 정보가 풀려 있어 초보들도 가이드를 찾아오는 일이 많이 줄었다. 이젠 퀘스트마저 자기들이 돌아다니며 알아서 찾곤 했다. 물론 꾸준히 가이드를 찾는 이들도 있긴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격감한 것이 지금의 상황이었다.
 “허어, 정녕 평생직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파크는 현 사회의 심각한 문제점 중 하나를 몸소 체험하며 불투명한 내일을 걱정했다.
 물론 고객이 줄어들어도 기본적으로 나오는 고용료는 있으니 기본적인 생활은 가능하겠지만 이런 한가하고 적적한 나날은 그리 다음에 들지 않았다.
 번쩍!
 광장 한구석에서 새로운 이계인의 등장을 알리는 빛이 일었다. 파크는 순간 움찔했지만 이미 다른 인피니티 가이드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 혀를 차며 포기했다.
 이 무서운 경쟁 사회의 실태라니.
 이제 몸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절감하며 파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근처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가이드로서의 직감이 그가 고객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반색하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아까 봤던 초보 이계인이 바로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어엇? 자네는······.”
 “아까 뵀던 하진이라고 합니다.”
 “그래, 하진! 수련장은 잘 다녀왔나? 하하.”
 오늘 아침에 인피니티 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이계인이었다. 신세대 초보답게 별로 궁금한 게 없다는 듯 갈 길을 물은 것 외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습을 감췄던.
 그래도 완전 신세대 이계인은 아닌 듯 자신을 다시 찾아온 것을 보며 파크는 내심 감동했다.
 ‘아직 하늘은 날 버리지 않았구나!’
 아직 자신이 쓸모없지 않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파크는 힘을 냈다. 절로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허허, 어서 오게! 그래, 이번엔 무슨 도움이 필요한가? 정보? 퀘스트? 직업? 뭐든 물어보게! 내 온 힘을 다해 도와주지!”
 자신을 반기는 파크를 보며 덩달아 환한 미소를 지은 하진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호오, 지금까지 계속 수련장에 있었나? 자네도 체력이 대단하군!”
 “아하하, 원래 하던 일이라 그리 힘들진 않았거든요.”
 “그랬군! 하지만 계속 수련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단 거지? 수련장에서 밥까지 주는 건 아니니 말이네.”
 “맞습니다.”
 “보자, 보상으로 돈을 받을 수 있는 퀘스트가······.”
 파크는 두루마리를 하나 꺼내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신이 소개해 줄 수 있는 일들을 적어 둔 두루마리였다.
 “자네는 성벽 밖으로 나가지 못하니 토끼를 잡아 오는 퀘스트도 못 하겠군. 으음, 성안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어디 보자, 이제 곧 날이 저물 테니······.”
 하진은 술집 종업원 아르바이트나 가게 청소 같은 잡일 퀘스트들을 들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별로 마음에도 들지 않을뿐더러, 보수도 짰다. 딱 하룻밤 일해 하루 먹을 식비밖에 나오지 않을 게 분명해 보였다.
 초보이니 별수 없는 운명이긴 했지만 조금 서글퍼졌다.
 파크가 그런 기색을 읽고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수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군. 아, 먹을 걸 구하려는 거면 차라리 이런 일은 어떤가? 말린 과일을 파는 내 친구가 부탁한 건데 요새 밤마다 도둑고양이들이 난리도 아니라고 하더군. 건물 안에 보관해서 새들은 걱정 없는데 고양이들이 기어들어 와서 상품을 물어 간다나? 수고비도 주고 보답으로 말린 과일도 좀 주도록 해 볼 테니 어떤가?”
 하진은 잠시 생각해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것 같았다. 술집에서 알바하는 것보다야 재미도 있을지 모르고.
 “해 보겠습니다.”
 “그래? 하핫, 그럼 내 특별히 보수에 신경을 써 주라고 적어 주도록 하지.”
 파크는 기뻐하며 가게의 위치를 설명해 주고는 소개장이라며 작은 두루마리 하나를 건네주었다.
 잠시 후, 나중에 또 보자며 손을 흔드는 파크를 뒤로하고 하진은 광장을 빠져나갔다.
 파크가 설명해 준 곳을 힘들게 찾아가자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중년의 NPC가 하진을 맞았다.
 “요새 도둑고양이들이 아주 극성이야. 며칠 전엔 아예 건포도 자루를 통째로 물고 도망갔지 뭔가! 내가 지켜보고 있으려고 해도 낮에 장사를 해야 하니 피곤해서 밤새 지켜볼 수도 없고······ 날 좀 도와주게! 파크의 부탁도 있었으니 내 보답은 넉넉히 하겠네.”
 띠링!
 
 
 도둑고양이로부터 창고를 지켜라!
 가랜드의 상인 모르의 부탁.
 최근 도둑고양이들이 창고를 터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밤새 도둑고양이들의 손에서 창고의 물건들을 지키자!
 인피니티 가이드 파크의 소개로 추가 보상이 있다.
 난이도 : E
 
 
 
 “물론 도와 드리겠습니다.”
 띠링.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상인 모르는 기뻐하며 창고로 안내해 주었고, 하진은 해가 진 뒤에 돌아와 창고를 지키기로 약속했다.
 “흐음, 밤을 새워야 할 것 같으니 준비를 해 두는 게 좋겠지?”
 하진은 다시 수련장으로 돌아가 허수아비를 좀 두드리다가 노점상에서 야식으로 풀빵과 주스를 좀 사서 창고로 돌아왔다. 창고에서 편하게 밤을 새우며 도둑고양이나 쫓으면 되는 임무이니 긴장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 받은 퀘스트니 잘 해내려는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게 결코 편한 퀘스트가 아니라는 건 금방 밝혀졌다.
 
 * * *
 
 캬아아아앙!
 “······이봐, 우리 잠시 이성을 찾고 협상을 해 보자고.”
 캬아아앙!
 갸르르릉!
 “······그래, 내가 실수했군. 친구 고양이 군이 하나 더 있었군. 자네들, 자네들 나와 협상을 좀 해 보자고. 우선 여기 창고의 말린 과일들이 아주 맛있어 보인다는 건 내가 인정해. 하지만 말이지······.”
 캬아아아아앙!
 갸르르릉!
 캭! 캭!
 “······으음, 아무리 그래도 남의 장사 밑천에 손을 대는 건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생각해. 그리고 사실 난 오늘 하루만 이 창고를 지키기로 되어 있거든. 그러니 부디 오늘은 참아 주고······.”
 캬아아아아!
 갸르르릉!
 캬캭! 캬캭!
 냐아아아앙!
 “······협상 중에 아군의 숫자를 늘리는 건 좀 불공평하다고 생각······ 에라, 이 잡것들이!”
 하진은 어둠 속에서 눈을 살벌하게 빛내며 달려드는 도둑고양이들을 향해 악을 쓰며 주먹을 휘둘렀다.
 하진이 생각하는 도둑고양이라 함은 사람을 무서워하고 사람 눈을 피하며 돌아다니는 녀석이지 자기들을 가로막는다고 전의를 불태우며 달려드는 이해 불가능한 괴생물체는 결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현실의 도둑고양이와 인피니티의 도둑고양이를 똑같이 생각한 그의 실책이었다.
 어쨌든 지금의 문제는 달려드는 도둑고양이들이었기에, 하진은 창고 안에서 마구 날뛰며 고양이들과 치고받고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끄악! 이, 이 빌어먹을 괭이가! 긁지 마!”
 캬아아아아앙!
 “끄아아아악! 물지도 마, 이 썩을 도둑괭이!”
 캭! 캭!
 “해보자 이거냐! 그래, 다 덤벼!”
 캬아아앙!
 갸르릉!
 냐아아앗!
 캭! 캭!
 하진은 도둑고양이들을 상대로 생명력이 거의 바닥까지 떨어지는 사투를 벌인 끝에 겨우 말린 과일들을 사수할 수 있었다.
 온몸에 시뻘건 손톱자국과 이빨 자국들이 아로새겨진 후의 일이었다.
 
 * * *
 
 “자, 자네 괜찮은가?”
 파크는 어깨에 곶감 한 줄을 짊어진 채 힘없이 걸어오는 하진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하룻밤 새에 사람이 저렇게 변하다니!
 1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하룻밤이면 사람이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란 말인가!
 자신이 준 퀘스트가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힌 건 아닌가 걱정하며 파크는 하진을 맞았다.
 “······다시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네요.”
 지난밤 도둑고양이에게 죽어 이승을 떠나는 건 아닐까 진심으로 걱정했던 탓에 하진의 말은 진심을 담고 있었다.
 사실 죽어도 곧 부활할 수 있긴 했겠지만.
 “허허, 고생한 모양이군. 요새 도둑고양이들이 좀 극성맞아지긴 한 모양이야.”
 “극성맞다 뿐이겠습니까.”
 하진은 파크가 앉은 벤치 옆에 털썩 주저앉아 등에 멘 곶감을 몇 개 풀어 내렸다.
 잠시 후, 곶감을 입에 문 파크가 허허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모르가 특별 보수는 두둑이 챙겨 준 모양이군! 정말 맛있는걸, 이 곶감. 하핫!”
 “예, 맛있네요.”
 하진은 쓰게 웃었다.
 아침에 창고로 들어온 모르가, 피투성이가 되어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세상을 저주하고 있는 하진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리며 내준 것이 이 곶감이었다. 보름 만에 처음으로 창고의 피해가 전무한 덕에 가족들과 먹으려고 만든 곶감을 선뜻 내준 것이었다.
 그 진심 어린 감사에 그나마 기분은 풀렸지만, 그래도 아직도 몸이 쓰라려 한숨이 나오는 하진이었다.
 그렇게 파크와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하진은 곧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럼 전 수련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퀘스트를 시켜 주셔서 감사하다고 곶감을 좀 드리러 온 거였거든요.”
 “아······ 그랬나? 그럼 오늘도 수고하게!”
 파크는 자신의 5년 베테랑 인피니티 가이드 생활의 보람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내 인생은 틀리지 않았어!
 감사 인사를 하러 왔다는 말에 감격한 파크의 환송을 받으며 하진은 수련장으로 향했다. 아직 곶감도 많이 남았으니 허수아비를 상대로 하루 종일 분풀이나 할 생각이었다.
 “오, 이거 맛있군. 우물우물. 그럼 오늘도 수고하게!”
 하진이 건넨 곶감 몇 개를 받아 든 수련장의 교관 하넬 역시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하진이 신세를 지고 있다는 말과 함께 내미는 곶감에서 직업적 보람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기뻐하는 하넬을 뒤로하고 목검을 다시 손에 쥔 하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허수아비를 마구 후려치기 시작했다. 허수아비가 어젯밤의 빌어먹을 도둑괭이들로 보여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퍼버버버버버벅!
 그렇게 하진의 분풀이는 하루 종일 계속됐다.
 
 
 
 띠링.
 
 
 도둑고양이로부터 창고를 지켜라!
 가랜드의 상인 모르의 부탁.
 도둑고양이들이 비록 한 번 물러가기는 했지만 오히려 복수전을 다짐하며 낮에 가게 주변을 정찰하고 돌아갔다. 분노한 도둑고양이들의 손에서 창고의 물건들을 지키자!
 친밀도가 높아 상인 모르로부터 추가 보상이 있을 수 있다.
 인피니티 가이드 파크의 소개로 추가 보상이 있다.
 난이도 : E
 
 
 “······.”
 하진은 눈앞에서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인 모르와 허허 웃고 있는 파크를 보며 옅은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하루 종일 허수아비를 친 덕에 겨우 스텟 힘 1 증가라는 성과를 거두고 광장의 파크를 찾아오니 왜인지 모르가 같이 서서 하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낮에 고양이들이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가게와 창고를 정탐하고 돌아간 탓이었다.
 하진은 제발 부탁한다며 고개를 숙이는 모르와 난감한 얼굴로 허허 웃고 있는 파크를 잠시 지켜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곶감이 맛있긴 했지.’
 좀 양이 적은 감이 있긴 했지만 끼니를 때우는 것치고는 훌륭한 맛이었다. 곶감을 건네준 덕에 교관이 도시락도 조금 나눠 줬고, 수련 내내 자신을 신경 써 주는 효과도 있었다. 내일 또 곶감을 주면 교관 하넬도 아주 기뻐하리라.
 거기다 그 망할 도둑괭이들이 자기가 없는 새 말린 과일을 훔쳐 내고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기라도 한다면?
 고양이가 어떻게 웃느냐는 현실적인 의문 따위는 어젯밤 도둑고양이들과 생사투를 벌인 탓에 고개도 들지 못했다.
 하진은 아무래도 자신은 고양이들과 악연인 모양이다 생각하며 퀘스트를 수락했다.
 그리고 그날 밤······.
 “끄아아악! 이 비겁한 놈들! 숫자를 더 늘려 오다니!”
 캬아아아아!
 갸르르릉!
 캬악, 캭!
 냐아아아아아!
 “할퀴지 마! 물지 마! 곶감에서 손 떼, 빌어먹을 도둑괭······ 꾸에엑!”
 하진은 숫자가 더 늘어난 도둑고양이 군대와 밤새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 했다.
 다음 날 보상에는 곶감에 말린 사과가 추가되어 있었다.
 
 
 
 #빌어먹을 도둑괭이가 이끈 인연
 
 
 
 “왠지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
 “흐음, 며칠 동안 종일 게임만 하다가 기어 나오더니, 그 인피니티인지가 꽤 어려운 모양이지?”
 밥상을 마주하고 앉은 진철의 의문에 하진은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고양이하고 사투를 벌이느라 진이 빠진 것뿐이라고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던 탓이다.
 몬스터들의 손에서 힘없는 사람들을 구해 내는 대영웅의 길을 꿈꾸었건만 고작 도둑고양이들과 치고받고 싸우고 있는 자신의 상황이 더욱 서글프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의 성과가 있어서 퀘스트를 완수하는 동안 레벨도 4로 올랐고, 이제 고양이들과 싸우는 것에도 요령이 생겼다. 그 결과 도둑고양이들이 모르의 말린 과일 창고를 일용할 양식을 얻는 장소 리스트에서 배제하고 창고를 습격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진의 ‘대對도둑고양이 퇴치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젠 모르의 옆 건물에서 장사를 하는 건어물 상인이 모르와 함께 의뢰를 하게 된 것이다.
 결국 하진은 창고 두 개를 책임지게 되었고, 며칠 뒤 고양이들은 말린 과일 창고와 건어물 창고는 습격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또 끝은 아니었다. 그다음은 건어물 가게 옆의 생선 가게 주인 그리고 그 옆의 빵집 주인, 모르의 반대편 옆집의 일반 과일 가게로 의뢰를 하는 이들이 점점 불어난 것이다. 이젠 심지어 모르와 창고를 맞대고 있는 반대편 길의 가게에서도 함께 공동 의뢰를 하는 판이었다.
 결국 지금에 이르러 하진은 밤마다 무려 여섯 개의 창고를 지키는 뛰어난 경비 요원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 상대가 도둑고양이 무리라는 점 때문에 자랑스러운 기분도 들지 않는 상황이긴 했지만.
 하진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고, 그 모습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진철은 그릇을 정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잘은 모르겠다만 힘든 일을 겪을수록 인간의 가치란 점점 높아지는 법이다. 시련을 이겨 낼 때야말로 최고의 보람도 느낄 수 있는 법이고.”
 “······명심하지요.”
 하긴 실제로 자신의 가치가 높아지긴 했다고 생각하며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창고 한 개에서 여섯 개로.
 “······.”
 강력한 몬스터를 쓸어버리는 대영웅의 길은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하며 하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흐음······ 역시 꼭 눈에 띄는 급소가 아니어도 공격이 제대로 들어가면 강력한 공격이 되기도 하나 보지?”
 하진은 오늘도 어김없이 허수아비를 후려치고 있었다. 급소를 제대로 가격하는 기술이 꽤 늘어 눈앞의 허수아비는 군데군데가 달랑달랑 흔들리는 꼴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 눈앞의 허수아비뿐만이 아니라 하진 주변에 서 있는 허수아비들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겠다는 듯이 곳곳이 부서지고 떨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꽤나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지금 하진은 꼭 목이나 심장 같은 곳을 치지 않고 옆구리에 회심의 일격을 적중시켜도 가끔 급소 치기가 성공된다는 것을 알아낸 참이었다.
 “후우.”
 호흡을 가다듬고, 목검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을 가하며, 정확하게 휘두른다!
 퍼억!
 이미 한 대 강하게 얻어맞아 반쯤 부서져 나간 허수아비의 옆구리에 목검이 날아들었다.
 -강력한 공격을 성공시켰습니다!
 “흐음.”
 그냥 평범하게 후려치는 걸로는 안 되지만 이렇게 집중해 일격을 날리면 급소 치기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
 검도 데이터도 방대하게 적용했다고 하더니, 일반적인 공격보다는 검도 무리에 맞는 일격을 훨씬 높게 치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검도를 배우고, 그걸 이용하고 있는 자신이 남들에 비해 훨씬 유리하다!
 하진은 그 사실을 깨닫고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어릴 적부터 얻어터지며 배운 게 쓸모가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
 눈앞에서 거의 넝마가 되어 흔들리고 있는 허수아비를 잠시 바라보던 하진은 잠시 슬쩍 주변을 곁눈질하고는 다른 허수아비로 옮겨 갔다. 날마다 허수아비를 죽어라 부수고 다녔더니 좀 눈치가 보였던 탓이다.
 안 그래도 하진처럼 수련장을 이용하는 유저들은 그가 허수아비를 때려 부수는 것을 보며 웬 해괴한 녀석을 다 본다는 듯한 눈을 하곤 했다. 거기다 부순 허수아비의 꼴이라는 게 죄다 목이 날아가고 심장이 뚫리고 옆구리가 터져 나가고 가끔씩은 ‘남자만의 급소’ 부분이 뭉개져 있다는 것은······ ‘저 미친 초보 녀석 발광하네.’ 같은 소리를 하며 피해도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부서진 부위 중 마지막의 경우에는 하진도 별로 하고 싶은 짓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확실한 급소가 없기에 가끔 시험해 보곤 하던 부분이었다. 허수아비의 아래쪽을 칠 때마다 왠지 스스로도 아픈 기분이 들곤 했지만 그래도 분명 확실한 급소이긴 하니까.
 ‘아아, 내가 정말 많이 타락했구나.’
 그런 급소를 현실에서 노렸다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아주 뭉개 버리고 다니고 있다니.
 어쨌거나 그렇게 정신적으로까지 타격을 입어 가며 연구하고 수련한 덕에 급소 치기에 대한 수준은 높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스텟 성장은 생각보다 잘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하루에 하나씩 오르는 꼴이었는데 점점 그 텀이 길어지더니 지금은 사흘 내내 허수아비를 두드리는데 하나도 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증가한 스텟은 힘 네 개와 체력 두 개, 근성 한 개로 총 일곱 개의 스텟이 수련장에서의 허수아비 치기로 성장했다. 열나흘 동안의 노력이 가져온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사흘, 스텟은 오르지 않고 있었다. 앞으로도 수련장에서 여덟 개를 더 올릴 수 있을 텐데 더 이상 오르지 않으니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캐릭터명 : 하진
 레벨 : 4 직업 : 없음(초보 여행자)
 상태 : 일반
 명성 : 0 악명 : 0
 생명력 : 180 마나 : 115
 힘 : 14 민첩 : 25
 체력 : 12 근성 : 11
 지혜 : 10 지력 : 10
 행운 : 10
 공격력 : 6~13 방어력 : 4
 마법 저항력 : 없음
 
 보유 스텟 : 0
 
 †인피니티 대륙에 처음 발을 디딘 여행자.
 †앞으로의 노력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능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추구할 길을 정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하진은 자신의 능력치들을 확인하며 빵 하나를 입에 물었다. 도둑고양이 퇴치를 의뢰하는 상인들의 숫자가 늘어나며 특별 보상으로 받는 물건의 종류도 꽤 다양해졌다.
 하진은 지금까지 레벨이 오르며 생긴 여유 스텟 열다섯 개를 모두 민첩에 투자하고 있었다. 도둑고양이들의 움직임이 빠른 데다 숫자도 늘어나서 좀 더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열다섯 개 올린 참이지만 효과를 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이제 요령이 생겨서인지 고양이들을 상대하는 데 많이 능숙해졌다.
 그 점이야 긍정적이었지만 문제는 수련장에서의 수련이 답보 상태라는 거라 하진은 혼자 끙끙거리고 있었다.
 “허! 허수아비 하나를 또 부숴 먹었군. 자네가 온 뒤로 허수아비를 고쳐야 할 일이 상당히 늘어났단 말이야.”
 교관이 마른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교관 하넬은 날마다 선물한 말린 과일, 건어물, 빵, 과일들 덕에 하진과 친해져 있는 상태였다. 수련을 지켜보다 가끔은 간단한 조언도 해 주곤 했다.
 어쨌든 자신 때문에 그의 일이 많아졌다는 것은 에누리 없는 사실이기에 하진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 자네가 죄송할 건 없지. 나야 오히려 자네가 점점 급소 치기에 능숙해지는 걸 보니 기쁘기 그지없으니까. 대부분이 급소는커녕 그냥 무식하게 두들겨 패는 통에 항상 한심스러워하고 있었거든. 하하핫!”
 하진은 유쾌하게 웃는 교관 하넬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NPC이긴 하지만 그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냥 거의 뇌물에 가까운 선물 공세 탓에 그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왠지 걱정이 있어 보이는데, 왜 그러나?”
 “아, 급소 치기는 괜찮습니다만, 사흘 동안 스텟이 하나도 오르지 않아서요. 제가 알기로 수련장에서 열다섯 개까진 스텟을 올리는 게 가능하다고 했는데 변함이 없어서 말입니다.”
 “아, 그거 말인가?”
 교관 하넬이 무슨 소린지 알겠다는 기색이자 하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유를 아십니까?”
 “물론이지. 수련장에서 수련하면 스텟을 하나 얻을 때마다 점점 필요한 노력이 많아진다네. 내가 알기로 열다섯 번째 스텟 상승을 위해서는 거의 보름 동안 검만 휘둘러야 한다던가?”
 “······.”
 하진은 그 충격적인 사실에 할 말을 잊었다. 레벨 하나 올리면 스텟 다섯 개가 주어지는데 겨우 스텟 하나 얻자고 열흘이 넘게 허수아비를 쳐야 한단 말인가?
 경악한 하진의 표정을 보며 교관은 킬킬 웃었다.
 “몰랐나 보군. 사실 그래서 수련장을 찾는 사람이 많이 없는 거야. 보통은 스텟 하나 얻자고 몇 시간 동안 허수아비만 치는 것도 귀찮아하거든. 뭐, 대여섯 개까지는 얻고 가는 사람도 꽤 있지만, 그 이상은 효율상 별로 좋지 않지. 자네도 꽤 많이 노력한 케이스라네. 하긴 초보 이계인들은 스무하루 동안 사냥도 못 하니 허수아비를 치는 것도 나쁘지 않긴 해.”
 “하아.”
 설명을 듣던 하진은 갑자기 궁금한 것이 떠올라 질문했다.
 “그런데 스텟 열다섯 개를 다 올린 사람이 있긴 한가요?”
 “응? 몇 명 있다네. 후후, 검사인데, 이계인으론 처음으로 스텟 열다섯 개를 모두 얻어 내고는 검사의 진명眞名인 광검光劍을 얻어 냈지. 자네도 알걸. 광검의 루카르트라고, 대륙의 검사들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지.”
 “아······.”
 광검 루카르트라는 이름에 하진의 눈빛이 반짝였다. 목표로 삼고 있는 유저의 이름이 나와 놀란 탓이다.
 ‘그 사람이 수련장을 돌파한 첫 유저?’
 역시 게임은 노가다라고, 이런 노가다를 해내는 사람이 강해지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수련장에서 스텟 열다섯 개를 모두 얻으면 진명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 뒤로 몇 명이 더 성공하긴 했는데, 검사에서는 물론 다른 직업에서도 광검 외 다른 진명은 나타나지 않아서 금방 시들해졌지. 최근 2년 동안은 성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
 “······.”
 아무래도 노가다도 그냥 노가다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진이 대세를 따라 포기하기로 내심 결정을 내리고 있는 동안 교관 하넬의 설명은 이어졌다.
 “뭐, 어차피 스텟 열 개만 얻어 내면 수련장 수료증을 받을 수 있어서 거기까지는 해내는 사람들도 꽤 많지.”
 “······수료증요?”
 그런 걸 준단 말인가?
 보름이 넘게 여기서 목검을 휘두르고도 모르고 있던 사실에 하진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그것도 몰랐나? 날마다 나오기에 노리고 있는 줄 알았더니. 하핫. 수료증을 받으면 명성도 조금 올라가고 몇몇 보상 같은 게 있다네. 보상이야 수련 내용에 따라 다 다르지만.”
 “그렇군요.”
 보상이란 말에 하진은 귀가 솔깃해졌다. 이왕 스텟 일곱 개를 얻어 낸 거 열 개까지 올려서 수료증을 받아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팔랑귀가 조금 한심스럽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결정일 것 같았다.
 “그 수료증은 많이들 따 가나요?”
 “나름대로. 얼마 전에 수련장 교관 모임에서 집계된 걸 보니 전 대륙에서 거의 십만 명은 되는 것 같더군.”
 전 세계에서 접속하는 인피니티의 유저 수가 약 1억 정도 된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어쩌면 한국 유저만 친 숫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천만 명은 가뿐히 넘으니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수료증을 따 간 것은 아니었다.
 ‘하긴 이런 노가다를 누가······.’
 하진 자신도 앞으로 스텟 세 개를 올리려고 며칠을 고생할 걸 생각하니 걱정이 되는 판이었다. 성 밖으로도 나갈 수 있으면 허수아비 말고 몬스터하고도 즐겁게 싸울 수 있는데 수도자도 아니고 누가 여기서 목검이나 휘두르고 있겠는가.
 그래도 십만 명쯤은 된다니 그들을 본받아 수료증까지는 따 볼 생각을 하는 하진이었다.
 “사실 보상이란 게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선 웬만한 퀘스트만도 못해서 수료증도 별로 인기가 없더군. 그래도 노력한 보람은 있을 테니 자네도 힘내서 수료증을 따 보게나. 아마 자네라면 좋은 보상이 있을 거야. 자네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분명 예사롭지 않으니까 말이네. 하핫.”
 교관 하넬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하진은 조금 기대를 품었다. 교관하고도 많이 친해졌으니 정상을 참작해 좀 좋은 보상을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검도를 적용해서 허수아비를 치는 데에 뭔가 특별한 효과가 있는 것이 분명한 이상, 거기에 맞게 보상도 특별해질지도!
 하진은 의지를 불태우며 다시 허수아비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 전에 교관에게 아껴 뒀던 곶감을 나눠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교관 하넬은 죽어라 허수아비를 패고 있는 하진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짓다가 곶감을 입에 넣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몇 시간 뒤, 하진은 겨우 스텟 상승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또 온몸을 덜렁거리고 있는 허수아비의 목을 날리는 깔끔한 일격이 제대로 들어간 후였다.
 퍼벅!
 -강력한 공격을 성공시켰습니다.
 띠링.
 -스텟, 힘이 1 증가했습니다.
 -수련장에서 올릴 수 있는 스텟, 앞으로 7.
 “후아.”
 하진은 목검을 내리고 숨을 골랐다. 이제 스텟 두 개만 더 올리면 수료증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앞으로 걸릴 시간이었다.
 “······.”
 여덟 번째 스텟을 올리는 데 대충 만 사흘이 걸렸다. 그럼 아홉 번째는 나흘? 닷새? 그럼 열 개째 스텟은? 성 밖으로 못 나가는 제한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는데?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며 하진은 목검을 제자리에 가져다놓았다. 해도 지고 있고, 광장으로 파크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그게 인피니티에서 하진의 일과였다.
 교관에게 남은 건어물을 통째로 건네준 하진은 하나 들고 온 오징어 다리를 씹으며 대로를 걸어갔다. 아까 들은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다.
 ‘광검 루카르트라.’
 광고도 찍은 유명한 유저!
 소설 속 영웅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은 듯한 모습!
 사실 그 이면에 피나는 노가다의 흔적이 보이는 듯도 했지만 하진은 여전히 그를 거의 동경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광고에 등장한 그의 모습은 그 정도로 멋졌으니까.
 ‘······그러고 보니 진명이 뭐야?’
 아까 교관이 루카르트가 처음으로 수련장을 돌파하고 진명 광검을 얻었다고 한 것을 뒤늦게 상기한 하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가이드북에 있었던가?’
 기억엔 없었다. 어쩌면 친절히 공개까지는 하지 않는 숨겨진 게임 시스템일 수도 있다.
 “파크 아저씨한테 물어볼까?”
 하진이 생각하기엔 모르는 게 없는 인물이 바로 파크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파크는 하진이 건네준 사과를 베어 물며 선선히 설명해 주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하진의 눈동자를 보며 다시 한 번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탓이다.
 아, 이 뿌듯한 기분. 이계인이 모르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야말로 가이드의 보람이자 궁극적 목표가 아닌가.
 “진명은······ 그래, 각 직업마다 있는 계승자라고 해야겠군. 과거 아직 인간들이 대륙에 뿌리를 잡지 못했던 때, 인간들을 위해 분연히 일어난 이들이 있었다네! 바로 각 분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수많은 용자들이었지. 그들은 서로 힘을 합쳐 대륙에 인간들의 낙원을 만들어 갔다네! 그리고 드디어 몬스터들을 내몰고 대륙에 인간들을 위한 국가를 세우게 되자, 영웅들은 각지로 흩어져 곳곳에서 자신들의 절기를 전수하기 시작했지! 바로 각 직업 길드의 시초라고 할 수 있네!”
 “오오.”
 조금 미묘한 내용이긴 했지만 그래도 영웅 대서사시 같은 이야기에 하진은 작게 탄성을 질렀다. 파크의 얼굴에 실린 뿌듯한 감정이 더욱 진해졌다.
 “영웅들은 자신들의 절기를 모두 공개하며 인간들에게 힘과 기술을 주었지만, 자신들이 가진 특별한 기술 몇 가지는 자신의 이름을 이어받는 계승자에게만 전해 주었다네! 바로 진명 계승이지! 진명을 계승한 이들은 그 직업의 다른 이들과는 다른, 진명 계승자만의 스킬을 익힐 수 있고, 다른 메리트도 가질 수 있지!”
 “말하자면 히든 클래스군요?”
 가지고 있는 빈약한 게임 지식에서 끄집어낸 단어를 내뱉자 파크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는 이계인들도 있더군. 어쨌든 진명 계승자들은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온 특별한 힘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지! 물론 오랜 시간 동안 사라지고 약화된 기술들이라 그걸 발전시키는 건 당대의 계승자의 몫이고, 그 효과도 각기 달라서 일반 직업보다 좋다거나 나쁘다고 하기도 힘들지만. 어느 부분은 뛰어나지만 어느 부분은 떨어지는 경우도 많고.”
 “호오.”
 “우리 발론 왕국의 국왕이신 비하르트 님도 진명 계승자시네! 검사의 진명 가운데 하나인 패검覇劍의 계승자지. 내가 알기로는 방어보다는 상대를 찍어 누르는 공격에만 특화된 진명이라더군.”
 “그러니까 공격력은 강하지만 방어력은 낮은 핸디캡이 있다는 거군요.”
 “그렇지.”
 파크는 기특한 제자를 보는 듯한 눈으로 하진을 바라보았다.
 “각 직업에 진명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라, 어떤 직업에 어떤 진명들이 있는지는 모르네. 검사 직업에만 공개된 진명이 지금 세 개인데 그걸로 끝인지 더 있는지도 모르지. 공개하지 않는 이들도 많고. 가장 최근에 공개된 진명은 대장장이 직업의 용장龍匠인데, 이름만 멋있지 능력은 개뿔이라고 괴로워하고 있다던가 하더구만.”
 “······.”
 그러니까 뭐가 걸릴지 모르는 제비뽑기 도박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괜히 진명이라고 좋아하다가 웬 쓸모없는 직업이라도 얻게 되면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일 것이다.
 “뭐, 그래도 희소성이든 가능성 때문이든 진명 계승은 해서 나쁠 것 없는, 원하는 사람이 넘치는 숨겨진 직업 같은 걸로 인식들 하고 있지. 진명을 계승하면 남들에겐 없는 여러 가지 능력을 가질 순 있으니까.”
 어쩌면 루카르트도 광검이라는 진명이 가진 특수 능력 덕분에 이름이 알려진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 좋게 뛰어난 능력을 지닌 진명을 가진 모양이었다. 역시 될 놈은 되는 법이다.
 ‘아, 이 불공평한 세상이라니.’
 누구는 좋은 진명을 얻어서 광고를 찍는데 웬 대장장이는 쓸데없는 진명을 얻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니, 이 무슨 우주의 부조리함을 그대로 보여 주는 슬픈 상황이란 말인가.
 하진은 그 괴로워하고 있다는 대장장이를 위해 잠시 묵념하고는 파크와 함께 웃으며 사과를 베어 먹었다. 누군지도 모르고 볼일도 없는 사람이니 동정이 그리 오래가진 않은 탓이었다.
 “그럼 지금 진명이 몇 개나 나왔는데요?”
 “내가 알기론 대충 마흔 개 정도라던가? 그런데 진명은 일부러 공개를 안 하는 사람들도 많으니 얼마나 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네. 아직 계승되지 않은 진명도 많을 테고.”
 “오오.”
 하진은 어쩌면 자신도 그 진명이란 걸 계승하는 행운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망상에 빠져 보았다. 별로 가능성은 많지 않을 것 같았지만 사람은 누구든 꿈을 꾸는 법이니까.
 둘이 사과를 먹으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낯익은 NPC가 다가왔다. 말린 과일을 취급하는 상인 모르였다.
 “아, 오셨군요?”
 하진이 반갑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밤마다 고생하긴 해도 그 고생 이후에 얻는 식량이 많았기에 이제 하진은 도둑고양이를 상대하는 걸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네 표정이 좀 이상한걸.”
 함께 모르를 맞이하던 파크가 좀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진도 다시 살펴보니 모르의 표정이 정말 평소와 조금 달랐다.
 왠지 결연한 표정?
 “하진 군!”
 “예?”
 갑자기 모르가 손을 꼭 붙잡아 오자 하진은 몸을 움찔 떨었다. 확실히 뭔가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게!”
 “예? 창고 경비라면 얼마든지 들어 드릴 수 있······.”
 “그게 아니네!”
 “예?”
 “무슨 소린가?”
 파크도 의아한 듯 껴들어 왔다. 모르는 여전히 그 결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하진 군에게 의뢰를 하고 있던 상인들끼리 회의를 한 끝에, 이렇게 도둑고양이들에게 떠는 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네! 하진 군도 며칠 뒤면 성 밖으로 여행을 떠날지 모르고, 걱정이 든 탓이었지.”
 하긴 하진은 닷새 뒤면 성 밖으로 나갈 수 있고, 그때가 되면 도둑고양이나 상대할 필요가 없다. 지금 이 퀘스트를 하고 있는 건 단순히 성안에서 할 수 있는 퀘스트 중엔 식량 확보에 가장 좋다는 이유뿐이었으니까.
 “허어, 그래서?”
 “그래서 우리는 이 위기의 근본을 제거하자고 결정했네!”
 도둑고양이들이 창고를 터는 걸 가지고 위기 운운하는 게 조금 웃기긴 했지만 도둑고양이들이 얼마나 지랄맞은지 몸소 체험하고 있는 하진은 그 속에 담긴 절절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근본을 제거한다고요?”
 “그렇다네! 우리는 하진 군이 도둑고양이들의 아지트를 공격해 도둑고양이 무리를 해산시켜 줬으면 하네!”
 “······예?”
 “평소처럼 창고를 막고 있으면 도둑고양이들이 후퇴할 것 아닌가! 그 뒤를 쫓으면 놈들의 본거지를 알아낼 수 있을 거네! 그곳을 습격해 놈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해 주게! 그러면 창고의 습격도 줄거나 약화될 것이 분명해!”
 뭐, 나름대로 일리는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하진이었다. 도둑고양이들이 사람과 생사투를 벌이는 세상이니 도둑고양이들이 조직을 이루고 아지트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도둑고양이들과 묵은 원한도 있으니 그렇게 반격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띠링.
 “······알겠습니다. 해 보죠.”
 
 
 도둑고양이 무리의 아지트를 공격하라!
 가랜드의 상인 모르와 다수의 상인들의 부탁.
 이대로 도둑고양이들을 방치할 수는 없다! 이제는 반격의 때가 도래했으니, 창고 습격에 실패한 도둑고양이 무리의 뒤를 쫓아 아지트를 파악하고, 그곳을 공격하라!
 도둑고양이의 창고 습격 방지를 위해!
 가랜드상점연합의 평화를 위해!
 친밀도가 높아 상인 모르와 그 외 상인들로부터 추가 보상이 있을 수 있다.
 인피니티 가이드 파크의 소개로 추가 보상이 있다.
 난이도 : E+
 
 
 쓸데없이 격정적인 설명 문구가 조금 걸리긴 했지만 하진은 순순히 승낙했다. 아마 이게 상인들을 위해 하는 마지막 퀘스트일 테니 최선을 다하려는 생각이었다.
 “고맙네! 우리는 자네만 믿고 있겠네!”
 모르는 신뢰가 듬뿍 담긴 눈으로 하진을 바라보다가 가게로 돌아갔다.
 “흐음. 어려운 퀘스트일지도 모르겠구만. E+의 퀘스트면 아직 직업도 없는 초보 이계인에겐 버거울 수도 있다네.”
 “이미 승낙했잖아요. 그리고 상인들을 위한 일인 데다, 아마 마지막 부탁이 될 거 같으니 해 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음, 좋아. 나도 성공하길 빌어 주겠네.”
 파크가 왠지 감동한 목소리로 말하며 하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진은 다 먹은 사과의 남은 부분을 옆의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는 고민에 잠겼다.
 도둑고양이들의 아지트라면 지금까지 중 가장 많은 도둑고양이들과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진 열 마리를 넘어간 적이 없지만 그 이상이 모여 있다면? 좀 요령이 생겼다고는 해도 위험할 가능성이 있다!
 ······고양이랑 싸우면서 위험 운운하려니 슬픈 감도 있긴 했지만 하진은 진지하게 고민을 계속했다.
 지금까지는 맨손으로 싸우거나 가끔 단검으로 공격하는 수준이었지만, 숫자가 많다면 좀 더 강력한 무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좀 긴 무기가.
 ‘그렇다고 장검을 하나 사기도 힘들고.’
 예전에 무기점에 들러 확인한 기본 장검의 가격은 무려 2골드! 하진의 현 전 재산은 고작 1골드 안팎이다.
 ‘하긴 고양이한테 진검을 휘두르기도 좀······.’
 도둑고양이들도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장검으로 베어 죽이는 것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드는 하진이었다. 동물 보호 같은 데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 어떻게 보면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는 동안 도둑고양이들과 정마저 들었을지 모른다.
 결국 장검 구입도 포기한 하진은 곧 다른 방면에 생각이 미쳤다.
 ‘아, 목검!’
 수련장에서 사용하던 목검이 떠오른 것이다. 길이도 길고, 열흘이 넘게 죽어라 휘둘러서 손에도 익다. 목검이니 어지간해선 도둑고양이들이 죽지도 않을 터!
 하진은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는 건가?”
 “예. 준비도 좀 하고요.”
 “그래, 힘내게! 내일 무사히 만날 수 있길 빌겠네!”
 파크의 응원을 뒤로하고 하진은 광장을 나섰다.
 
 * * *
 
 “좋아. 대신 내일까진 꼭 반납해 주게.”
 목검을 하룻밤만 빌리고 싶다는 부탁에 교관 하넬은 선뜻 승낙했다. 그동안 친밀도가 상당히 올라간 덕인지 이유도 묻지 않고 쉽게 목검을 내준 것이다.
 하진은 반드시 반납하겠다고 약속한 후 수련장을 나섰다.
 수련장을 나서는 동안 해는 이미 반쯤 모습을 감췄고, 서쪽엔 노을이 붉게 지고 있었다.
 “좋아, 서두를까!”
 익숙한 발걸음으로 골목길로 들어선 하진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스산한 뒷골목 분위기가 나는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 하진은 이미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지켜 온 상점가 뒤편의 창고 지역에 도착했다.
 조금 있으면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위협적인 도둑고양이들이 슬슬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다.
 하진은 의뢰한 상인들의 창고들 가운데쯤에 서서 주변에 귀를 기울였다. 지켜야 하는 창고가 늘어나면서 어느 창고에 도둑고양이들이 들어가는지 알기 힘들어져서 최근엔 창고 주변 바닥에 많은 방울들을 설치해 놓은 하진이었다.
 좀 똑똑하다고 해도 고양이들. 놈들은 하진의 존재를 의식해 결코 외따로 떨어져 행동하지 않았고, 무리를 지어 창고를 습격했기 때문에 수많은 방울 중 하나도 건드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가장 털기 쉬운 상품에도 방울을 달아 놔서, 방울 트랩을 지나더라도 다음 위협은 존재한다.
 자신이 이룩한 이 경보 시스템에 자부심을 느끼며 귀를 기울이는 순간, 아련한 방울 소리가 울렸다.
 ‘왔다!’
 목검을 꾹 움켜쥔 하진은 방울 소리가 들린 창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늘의 습격지는 건어물이 잔뜩 쌓인 창고였다. 용케 창고 주변의 방울은 통과했는지, 이미 창고 안에 몰려든 도둑괭이들이 입에 마른 생선과 오징어를 물고 있었다.
 2차 경보 방울이 아니었으면 놓쳤다!
 “이 빌어먹을 도둑괭이들! 오늘이야말로 끝장을 내 주마!”
 키야아아앙!
 캬아아앙!
 냐아아아앙!
 도둑고양이들이 비명을 지르듯 울며 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했다. 몇몇 녀석들은 놀라서 물고 있던 건어물들까지 툭 떨어트리고 도망가고 있었다. 지난 시간 동안 도둑고양이들에게 하진의 존재는 그들의 먹이를 빼앗는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평소 같으면 도망가는 도둑고양이들을 쫓는 대신에 망가진 방울 트랩을 손보고 몇 시간 뒤에 다시 시도될 습격에 대비했겠지만, 오늘은 창고의 사수보다 도둑고양이들의 아지트 소탕이 최종 목적이었기에 하진은 도망치는 고양이들을 뒤쫓았다.
 캬아아앙!
 냐아아?
 컁! 캬 !
 평소와는 다른 하진의 추격에 당황한 듯, 도망치던 도둑고양이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시끄럽게 울어 댔다.
 마치 의견을 모으는 듯한 그 모습에 하진이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결사대로 뽑힌 듯한 도둑고양이 세 마리가 몸을 돌려 하진에게 달려들었다.
 아아, 겨우 고양이 주제에 이런 기민한 대처라니!
 하진은 내심 감탄하며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이 세 마리를 처리하다가 많이 늦는 날에는 도둑고양이들이 죄다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찻!”
 달리던 중 땅을 박차고 큰 보폭으로 뛴 하진이 목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경험상 이 도둑고양이들의 무시무시할 정도로 질긴 생명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손 속에 사정은 없었다.
 빡!
 캬 !
 회색 도둑고양이가 목검에 얻어맞고 날아갔고, 하진은 그대로 앞으로 달려갔다. 다른 두 도둑고양이가 놀라서 달려들었지만, 하진은 깨끗이 무시하고 골목을 질주했다.
 목표는 아지트!
 희생양으로 선정된 잔챙이들에게 관심 따윈 없도다!
 무시당한 도둑고양이들은 자신들이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결사대로 남았다고 내심 외치고 있을지 모르나 하진은 저 멀리 도망치는 도둑고양이 무리를 쫓을 뿐이었다.
 캬아아아앙!
 저 멀리서 항상 도둑고양이들을 이끌던 삼색 줄무늬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와 함께 또 세 마리가 등을 돌려 거꾸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덩달아 뒤쪽에서 무시당한 세 마리도 계속 쫓아오고 있다!
 이렇듯 적을 무시하고 무조건 달려 나가서는 위태로운 포위 상태에 빠지는 법!
 하지만 그건 사람 대 사람의 전쟁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이지 도둑고양이를 상대로 그런 전술적 고뇌 따위는 하고 싶지 않은 하진이었다.
 “우랴앗!”
 역시 바로 앞을 막고 달려드는 한 마리를 정확히 공격한 하진은 또다시 결사대를 무시하고 앞으로 달려갔다.
 캬캬 !
 냐아아앙!
 야아아아아!
 등 뒤에서 자신들을 무시하지 말라는 울분에 찬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하진은 꿋꿋이 삼색 줄무늬 고양이가 이끄는 본대를 노릴 뿐이었다.
 ‘······그래도 여섯 마리쯤 되니까 뒤가 좀 근질거리긴 하네.’
 등 뒤에서 여섯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어 머리끄덩이를 물고 늘어지기라도 하면······ 상당히 아플 게 분명했다. 등에 할퀸 자국이라도 남으면 아물 때 긁지도 못하고 상당히 괴롭다.
 ‘그래도 목표는 아지트다!’
 과연 도둑고양이들이 진짜 아지트까지 가지고 활동하는지는 의문이었으나 퀘스트에서 있다 하니 있구나 할 수밖에 없었다.
 “헤엑, 헤엑, 그런데 이놈들은 어디까지 뛰어가려는 거야?”
 하진은 턱 밑까지 차오르는 호흡을 애써 억누르며 골목을 뛰어갔다. 앞에서 도망가는 도둑고양이 본대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뛰다간 심장이 터져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솔솔 들었다.
 “에라, 도둑괭이들 따위에게 체력으로 밀릴 순 없다!”
 의지를 불태우며 하진은 필사적으로 도둑고양이들을 뒤쫓았다.
 그때 삼색 줄무늬 고양이를 필두로 도둑고양이 본대가 담을 뛰어넘어 모습을 감춰 버렸다. 도둑고양이답게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이런 젠장!”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도둑고양이 무리!
 하진은 달리는 와중에 쌍욕을 내뱉었다.
 인간적으로 도둑고양이들과 뒷골목 심야 추격전이라니! 인간한테 불리해도 너무 불리한 거 아닌가!
 투덜거리면서도 하진은 포기하지 않고 담 위로 몸을 날렸다. 손으로 담 위를 잡고, 벽을 발로 차며 위로 몸을 튕겨 몸을 넘겼다.
 “으랴!”
 도둑고양이들은 너무도 쉽게 뛰어넘은 담을 이리 힘들게 넘어야 한다는 게 열 받치긴 했지만, 바동거리며 담을 뛰어넘은 하진은 무릎을 굽히며 바닥에 착지했다. 지체할 시간 없이 계속 달려가야 했다.
 하지만 계속 달려갈 골목길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라?”
 눈앞에 있는 것은 어느 건물의 뒤편으로 보이는 허름한 벽뿐이었다. 자신이 뛰어내린 곳은 아마 집 뒷마당의 화단 같았다. 잘 살펴보니 건물에 뒷문으로 보이는 미닫이문도 달려 있었다.
 “소, 속았나?”
 골목길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해 뛰어넘은 다음에 산개해 도망? 정말 그 빌어먹을 괭이들이 그런 고위 도주법을 사용했단 말인가?
 사실 정말 고위의 수법인지는 미심쩍었으나 하진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뒤쫓아 오던 결사대 여섯 마리가 등 뒤의 담 위에 올라서는 것과 동시에, 화단과 건물의 지붕 위에서도 도둑고양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완벽히 포위당했다!
 “헉!”
 놈들은 도망치기 위해 담을 넘은 게 아니라 포위 공격을 위해 담을 넘은 것이다!
 “마, 망했다.”
 주변을 포위한 고양이들은 무려 스무 마리가 넘었다. 평소 상대하던 도둑고양이들의 두 배에 가까운 숫자다. 하진의 무기가 나름 업그레이드되긴 했지만 그래도 버거운 숫자였다.
 위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하진의 앞에 보통 고양이보다 한 배 반은 되는 듯한 큰 고양이 한 마리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온몸이 칠흑같이 검은 털로 뒤덮인 매끈한 몸매의 고양이였다. 노랗게 빛나는 두 눈동자가 꽤 섬뜩했다. 뚱뚱해서 몸집이 큰 게 아니라, 몸매는 더없이 완벽하나 종 자체가 다른 듯 큰 녀석이었다.
 완벽하게 보스의 기를 내뿜고 있다.
 “네, 네가 보스 괭이냐?”
 하진의 외침에 대답하듯 검은 고양이가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뒤로 습격대의 대장이던 삼색 줄무늬 도둑고양이가 호위를 서듯 내려앉았다.
 그리고 하진은 깨달을 수 있었다. 녀석들은 포위를 위해 담을 넘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군. 여기가 네놈들의 아지트였구나!”
 그래서 보스까지 등장하고 평소의 두 배나 되는 도둑괭이들이 주변을 포위할 수 있었던 것!
 하진은 씨익 웃으며 목검을 추어올렸다.
 “좋아, 덤벼라! 오늘이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인연에 종지부를 찍어 주마!”
 샤아아아아!
 왠지 소름이 끼치는 보스 검은 고양이의 울음과 함께 사방에서 도둑고양이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선착은 등 뒤에서 뛰어내린 결사대 여섯 마리!
 하진은 몸을 돌리며 목검을 힘껏 올려쳤다. 도둑고양이 한 마리를 쳐 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른 두 마리는 그대로 어깨 위로 달려들어 날카로운 발톱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크엑! 이 괭이들이, 할퀴지 말라니까!”
 하진은 몸을 마구 흔들어 도둑고양이들을 떼어 내며 목검을 휘둘렀다. 달려들던 다른 고양이들이 목검에 얻어맞아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진과 도둑고양이들의 싸움은 곧 최근접전 도그파이팅으로 발전했다.
 “끄아아악! 귀는 물지 마, 빌어먹을 도둑괭이!”
 부우우웅!
 목검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악을 쓰는 하진이었다. 도둑고양이들은 그 공격을 민첩한 몸놀림으로 피하며 다시 달려들었다.
 그나마 다행히 보스 검은 고양이는 보스답게 달려들지 않고 날카로운 눈으로 하진을 노려보기만 했다. 대신 공격에는 삼색 줄무늬 고양이가 앞장서고 있었다.
 “고작 고양이 주제에 폼을 잡다니!”
 하진은 알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 목검을 휘둘렀다. 아예 몸에 들러붙은 도둑괭이들은 무시하고 제대로 공격할 수 있는 놈들만 공격할 심산이었다. 창고를 털다 싸움이 붙은 게 아니라 아지트에 쳐들어온 적을 공격하는 거라 그런지 도둑고양이들도 죽을힘을 다해 공격해 오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하나하나 행동 불능에 빠트려야 한다!
 하진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무조건 공격을 시작했다. 몸에 들러붙은 녀석들이 할퀴고 깨물고 난리도 아니었지만 하진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그걸 무시하며 떨어진 곳의 도둑고양이들만 공격했다.
 “끄아아아, 으랴!”
 냐아아앙!
 “으아악, 내 등······! 하압, 죽어랏! 아악, 내 귀!”
 캬아아아앙!
 “에라, 받아······ 끄에엑!”
 캬, !
 제3자의 입장에서 들었으면 꽤나 웃길 법한 소리를 내지르며 노력한 결과, 하진은 순식간에 다섯 마리의 도둑고양이들을 행동 불능에 빠트리는 실적을 거둘 수 있었다.
 문제는 생명력이 절반 밑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아아, 정말 세상 살기 힘들구나.’
 하진은 내심 한탄하며 이를 악물었다. 삼색 줄무늬 고양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빛내며 달려들어 오고 있었다.
 “오냐! 와라, 썩을 도둑괭이!”
 온몸에 매달린 고양이들이 무지하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하진은 애써 그것을 무시하며 중간 보스 삼색 줄무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캬아아아아앙!
 “하아아아압!”
 삼색 줄무늬 도둑고양이와 목검을 든 사람의 격돌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었으나, 두 생물체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탓!
 부우웅!
 삼색 줄무늬 괭이가 점프해 날아드는 순간, 하진의 목검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허공을 가로질렀다.
 뻑!
 캬앙!
 허공에서 목검에 얻어맞은 삼색 줄무늬 고양이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공교롭게도 보스 검은 고양이의 바로 앞이었다.
 샤아아!
 보스 검은 고양이가 눈을 부릅뜨며 낮게 울었다. 그 와중에 하진은 마구 몸을 흔들며 목검을 휘둘러 도둑고양이 두 마리를 더 전투 불능 상태로 몰아넣었다.
 자박.
 그리고 드디어 보스 검은 고양이가 앞으로 나섰다.
 샤아아아아!
 그 소름 끼치는 울음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하진은 몸을 흠칫했다. 도둑고양이들도 마찬가지인 듯 멈칫하더니 하진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땅으로 내려서 주변으로 빠르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다시 포위망을 형성한 도둑고양이들을 뒤로하고, 검은 고양이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드디어 최종 보스의 등장이냐!”
 하진은 전신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들을 애써 무시하며 목검을 바로 세웠다.
 생명력이 반도 남지 않은 지금 상태에선 보스와 일대일로 결투를 벌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좋아! 덤벼라, 보스 괭이!”
 샤아아앗!
 보스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들었다. 다른 고양이들보다 몸집도 커서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하진은 침착하게 목검을 내리쳤다.
 아무리 덩치가 커도 고양이는 고양이! 고양이를 보고 겁먹기엔 지난 고난의 시간이 너무 길었도다!
 “으랴!”
 부우웅!
 거칠게 내려쳐진 목검! 그 멋들어진 공격을 보스 괭이는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으로 쉽게 피해 버렸다.
 “헉! 공중에서 방향 전환을?”
 그 믿기지 않는 광경에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보스 괭이가 하진의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화끈한 통증이 옆구리를 덮쳤다.
 “크윽!”
 하진은 급히 몸을 돌리며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하진과 위치가 바뀐 보스 괭이가 어둠 속에서 샛노란 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여, 역시 최종 보스! 강하군, 보스 괭이! 좋아, 네놈을 강자로 인정해 이제부터 네로라고 불러 주마! 검은 고양이 하면 역시 네로지. 내 친히 네 이름을 붙여 주마, 네로. 넌 오늘부로 내 호적수다!”
 샤아앗!
 자신을 인정해 주는 호적수를 보며 보스 괭이는 오늘은 보내 주겠으니 실력을 더 쌓고 훗날 오라는 의리 넘치는 말을 하는 대신 다시 하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무리 강해도 고양이가 말을 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흐윽.’
 그 당연한 사실에 숨길 수 없는 아쉬움을 느끼며 하진은 상체를 급히 뒤로 젖혔다. 보스 괭이가 코앞으로 날아들어 발톱을 휘두른 탓이었다.
 우득!
 허리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린 듯했지만, 하진은 그대로 튕기듯 상체를 일으키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보스 괭이의 뒤를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
 그 세 가지 동작을 억지로 이은 덕에 그 공격은 보스 괭이를 맞히는 대신 낡은 건물의 뒷문에 명중하고 말았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