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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마도사 - 1 -

2013.08.10 조회 21,732 추천 180


 <무한의 마도사 1권 - 상>
 
 
 
 
 
 
 
 
 프롤로그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툭하면 쌀이 떨어져 굶고 겨울에 난방도 들어오지 않은 냉방에서 식구들이 벌벌 떨며 지내는 게 예사였다.
 그로 인해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돈의 중요함을 절실히 깨달았고 은밀히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는 친구들이 만화와 소설을 보며 키득거리고 있을 때 나는 도서관에 처박혀 돈 버는 방법에 관한 책들을 읽었다.
 주식 투자와 부동산에 대한 책들.
 어려운 전문 용어와 복잡한 수식으로 점철된 책들도 많았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지만 계속 읽다 보니 점차 그것들의 원리가 머릿속에 들어왔다.
 내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만큼 절실했기 때문이다. 나는 가난이 너무 싫었다. 정말 돈을 벌고 싶었고, 반드시 부자가 되고 싶었다.
 그 간절한 염원이 내게 종일 경제 서적들에 미친 듯 몰두하게 만들었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용어 사전을 찾아가며, 혹은 어른들에게 물어가며 책을 읽어나갔다.
 전단지 배포, 신문 배달, 우유 배달, 새벽시장 짐꾼, 공사장 막일 보조 등등 정말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당시 보수로 받은 돈들은 지금 생각해 봐도 무척 적었지만 악착같이 모으다 보니 제법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친구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 나는 작은 치킨집을 개업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가난으로 고생을 했던 것 때문일까? 대체로 그 뒤부터는 운이 술술 풀렸다. 치킨집을 개업한 지 1년 만에 투자한 돈을 모두 회수했다.
 곧바로 군대에 가기 위해 치킨집은 프리미엄을 붙여 팔았다. 그러자 1년 전에 비해 내 돈은 무려 4배나 불어 있었다.
 그렇게 쌓인 돈 중 반은 은행에, 반은 앞으로 유망하다는 주식에 넣은 후 군대에 들어갔는데, 제대 후 주식에 넣은 돈이 무려 10배로 늘어나 있었다.
 그 돈으로 당시 유망하다는 오리구이 집을 개업했고 사업은 번창했다. 웬만큼 장사가 잘되면 프리미엄을 받고 처분한 후 다른 사업을 벌였다.
 어려서부터 갖가지 아르바이트와 사업을 전전하는 동안 나름대로 쌓인 경험이 나로 하여금 돈벌이에 대한 동물적인 감각을 갖게 해주었다.
 돈은 쌓여갔고, 쌓인 돈은 다시 투자했다.
 비록 대학에 가지는 않았지만 경제 신문을 꼼꼼히 읽었던 덕에 추후 유망한 사업들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실제적인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유망한 사업과 관련된 우량 기업의 주식에 여유 자금을 꾸준히 투자해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해 보니 돈을 버느라 포기한 것이 너무 많았다.
 돈 빌려달라는 친구들을 멀리하다 보니 주변에 친구도 없었다. 여자를 사귀어 본 적도 없었다.
 모두가 공부를 하고 연애를 하며 청춘의 열기를 불사르고 있을 때 나는 돈만 벌었다. 그래도 나는 후회는 하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틈틈이 공부는 했다. 어디 가서 무식하단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서다.
 26살에 야간 대학 경영학과에 등록을 한 후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공부하느라 당시 제대로 잠을 자본 적이 없었다.
 28살이 되었을 때 나의 자산은 수십억이 넘어갔고, 그것은 날이 갈수록 불어 30대 초반이 되었을 때는 부동산을 제외한 현금 자산만 100억이 넘어가는 갑부가 되어 있었다.
 드디어 어렸을 때부터 그토록 꿈꿔온 부자의 반열에 들었다. 물론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가진 부자들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어디 가서 가난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이룬 것이라 나름 뿌듯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이 다시 공허해졌고,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이전보다 더욱 돈벌이에 집착했다.
 바로 그때!
 전혀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 날 나는 경매로 나온 서울 강남의 자그마한 건물 한 채를 감정가의 반도 미치지 못한 싼 가격에 낙찰 받아 아주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법원에서 나와 승용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한 대형 트럭이 앞을 가로막았다. 곧바로 의식을 잃었다.
 그대로 죽은 것은 아니다. 아주 잠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큰 수술 중이었던 같았다. 의사의 무섭도록 착 가라앉은 눈빛을 보며 내게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울컥 눈물이 나왔다.
 정말로 죽고 싶지 않았다. 너무 억울했다.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것을 써보지 못하고 죽게 되어 억울한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인생을 정말 재미없게 살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가난이 싫어서 돈을 좀 많이 벌고자 했을 뿐인데, 그러다 보니 돈에 너무 집착하고 말았다.
 죽음 앞에 서니 돈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금은 돈을 덜 벌더라도 인생을 재미있게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연애도 해보고 여행도 가고 많은 친구도 사귀었어야 했다. 흥미로운 소설도 읽고 게임도 해보고 말이다. 그렇게 뭔가 돈이 아닌 다른 것들에서도 소소한 재미와 성취를 이뤄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진짜 이대로 인생 끝이란 말인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야 한단 말이냐?
 아놔! 젠장! 내 인생 정말 더럽게 재미없게 살다 가는구나.
 의식이 완전히 흐려지는 순간까지 눈물이 끝없이 쏟아졌다.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정말로 내게 다시 한 번 인생을 살아갈 기회가 있다면…….
 
 * * *
 
 지금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죽어 영혼이 된 것인가?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혹시 신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가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버려진 것인가.
 아아, 나는 사라지고 있는가? 모습도 없고 형체도 없다. 그저 생각하고 있는 나만 있다. 이 생각조차 사라져 버린다면 끝이다. 정신을 놓지 말자. 정신을!
 ‘……!’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아득한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하고, 찰나 같기도 했다. 갑자기 암흑 속에서 환한 빛이 비춰졌다.
 
 -그대는 이제 필리아스 대륙에 태어나게 된다.
 
 육성으로 들리는 음성이 아닌 기이한 울림을 통해 뜻이 전해져왔다. 그러나 나는 말을 할 수도 없고 뜻을 전할 수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그대는 크루만 제국의 유망한 귀족인 피델리오 백작가의 제이스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날 것이다.
 
 이게 대체 뭔 소리냐?
 크루만 제국의 피델리오 백작가?
 설마 환생?
 귀족으로 태어난다니 나쁘지 않네.
 
 -그대는 하루 중 새벽 2시부터 4시 사이에 마나와 가장 친숙하며 새벽 5시부터 7시 사이에는 마나와 가장 친숙하지 않다.
 
 근데 웬 2시부터 4시 사이?
 마나와 가장 친숙하다니?
 마나는 또 뭐냐?
 게다가 왜 하필이면 그렇게 애매한 새벽 시간인가?
 나의 놀람과 상관없이 울림은 계속되었다.
 
 -그대는 어둠보다 빛에 있을 때 강하며, 물보다 땅에서 더욱 강하다. 차가움보다 뜨거움이 그대에게 힘을 더하여 줄 것이다. 정열의 붉은 루비는 그대에게 편안한 휴식과 회복을 주겠지만,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는 그대의 힘을 서서히, 에메랄드는 급격히 약화시킬 것이다.
 
 빛, 땅, 뜨거움, 정열의 붉은 루비……. 이런 것들이 내게 도움이 된다는 건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울림은 이어졌지만 그 뒤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큰 울림이 내 마음을 때렸다.
 
 -이제 그대의 모든 기억은 지워질 것이고 새로운 세상에서 생명을 얻는다. 부디 그대에게 주어진 숨겨진 재능들을 많이 찾아내 새로운 삶을 멋지게 살아가도록 하라…….
 
 그 울림과 함께 나는 서서히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나는 무너지는 의식을 계속 붙잡았다.
 떠나가는 연인의 바지끝자락을 부여잡고 안 놓는 사람처럼 꽈악 쥐었다.
 지금 이 상황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결론은 내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그토록 바라던 새로운 삶을 또다시 이전과 같이 재미없게 살고 싶지는 않다.
 지난 생에서의 어리석었던 삶이 반복되지 않도록 지금의 이 기억이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반드시! 흐려지는 의식을 나는 계속 붙잡았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다.
 환생한다고 내 영혼이 어디 가겠나. 귀족으로 태어나면 뭘 하냐? 그 바보 같았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면 나는 또 세상을 그따위로 살지도 모른다. 그런 삶을 반복하느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게 낫다.
 기억이 흐려지고 다시 모이고, 흐려지고 다시 모이길 반복했다. 그러나 나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붙들었다. 암흑과 빛이 교차하며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어느 순간 다시 전해오는 울림에는 약간의 탄식이 섞여 있었다.
 
 -허어, 그토록 그 기억을 잡고 싶은 것인가. 그렇다면 특별히 허락하지. 허나 그로 인해 그대는 지난 생의 반에 해당하는 수명을 희생해야 한다.
 
 으음? 이게 무슨 소리야? 지난 생의 반에 해당하는 수명이라면? 그럼 내가 31살에 죽었으니 15살 반에 해당하는 수명이 깎인다는 건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15년 3개월 정도일 텐데…….
 
 -또한 그대의 새로운 삶은 이제 평화롭고 풍요로운 필리아스 대륙이 아닌, 몬스터가 많고 험하기로 유명한 로카이난 대륙의 헬파 숲에서 시작되리라.
 
 뭐? 숲이라고?
 우아한 귀족 가문이 아닌 험악한 숲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니 그게 웬 말이냐?
 그래. 귀족은 아니라도 좋다. 그런데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숲은 좀 아니지 않은가.
 왠지 고생문이 훤해 보인다.
 그럴 바엔 차라리 기억을 잃은 채 그냥 귀족으로 태어나는 게 나을지도.
 
 -자, 이제 부디 그대의 새로운 삶을 멋지게 살아가도록 하라…….
 
 안 돼! 잠깐만요! 다, 다시 좀 얘기합시다!
 뭔가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더 이상 내게 협상(?)의 여지는 없었다.
 아득한 암흑 속에 휩싸였다가 찬란한 빛을 보았을 때 나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1. 낯선 숲, 새로운 시작
 
 
 
 
 므므므므므!
 맴맴맴맴.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환한 햇살. 정체불명의 새소리와 더불어 매미 울음 비슷한 소리도 들려왔다.
 체인 메일에 롱소드를 차고 있는 훤칠한 체격의 은발 미소년이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으음? 여기는?’
 소년은 일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사방을 둘러봐도 빽빽하게 우거져 있는 밀림지대였다.
 ‘내가 왜 여기에…….’
 소년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자신은 분명 교통사고를 당해 위중한 상태로 병원의 수술실에 누워 있지 않았던가?
 의사가 가망이 없다며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을 보며 죽음을 짐작했었고, 실제로 죽었다.
 성민은 죽은 게 확실했다.
 그런데 대체 왜 여기에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인가? 그것도 알 수 없는 산속에서 말이다.
 잠시 멍하니 그렇게 서 있었을까?
 ‘으음! 그러고 보니…….’
 차츰 기억이 돌아왔다.
 사실 성민은 아득한 우주 공간 같은 곳에서 영혼을 울렸던 그 신비한 울림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정신을 잃었었다.
 그 후로 필리아스 대륙의 한 귀족 가문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고 대략 16년 정도가 흐른 상태였다.
 피델리오 백작가의 차남 <리안 위그 피델리오>.
 그가 바로 새로운 인생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리안의 삶에 있어서 그동안 성민의 존재는 없었다. 새롭게 태어나며 전생의 기억 자체가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득한 공간에서 신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약속한 대로 성민은 이제 전생의 기억을 다시 찾게 된 것이다.
 정확히 전생에 살았던 기간의 절반에 해당하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말이다.
 
 -그로 인해 그대는 지난 생의 반에 해당하는 수명을 희생해야 한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성민은 씁쓸히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내가 이곳 세계에서 태어난 지 정확히 15년 3개월 만이네. 계산 하나는 정확하군.’
 사실 당시에는 지난 생의 반에 해당하는 수명을 희생해야 한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긴 했었다.
 그게 설마 이런 식으로 15년 3개월 동안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니.
 ‘다행히 수명이 깎이는 건 아니었어.’
 성민은 당시 전생의 기억을 유지하는 대가로 이번 생의 수명이 그만큼 줄어든다고 생각했기에 왠지 꺼림칙하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저 어린 시절 동안 전생의 기억이 사라진 정도라면 그리 꺼림칙해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전생의 기억을 회복했으니 그리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건가.’
 돈에 집착하다 인생을 재미없게 살았던, 그런 바보 같은 삶을 이번 생에는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니, 사실상 성민의 의도대로 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부터는 성민이 제 수명을 다할 때까지 인생을 즐기며 흥미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그나저나 내가 지금 왜 이 낯선 숲에 서 있는 거지?’
 성민은 잠시 멍해졌다. 온갖 생각이 복잡하게 뒤섞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급작스레 전생의 기억이 돌아와 혼란스러운 것인가?
 그보다는 오히려 지난 16년 동안 이곳 세상에서 리안으로 살았던 기억들이 성민에게 새롭게 흡수되는 상황이었다.
 성민과 리안.
 이 2개의 자아가 겹쳐진 특이한 현상 속에서 현재 남아 있는 자아는 성민뿐이었다.
 방금 전 리안이라는 자아는 성민에게 현생에 대한 기억만 남겨 준 채 흡수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성민은 현생의 기억을 차분히 떠올리며 정리해보기로 했다.
 ‘역시 나는 귀족으로 태어나긴 했군.’
 크루만 제국은 필리아스 대륙에서 가장 강한 국가였고 리안의 가문인 피델리오 백작가는 제법 명망 있는 지방 귀족 중 하나였다.
 적어도 리안이 태어날 때까지는 말이다.
 불행한 일은 대략 10여 년 전, 그러니까 리안의 나이 5세 무렵 발생했다.
 리안의 부친인 제이스 백작과 피델리오 백작가의 기사단이 반인반사(半人半蛇)의 몬스터인 나가들과의 전쟁에서 전멸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신체의 반은 뱀이고, 반은 인간의 모습을 한 흉측한 모습의 나가들! 그 끔찍한 놈들에게 리안의 부친이 죽은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당시 병환 중이었던 리안의 모친 마리아도 그 당시 부친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리안의 7살 연상 친형인 카오가 12세에 영주가 되었지만 그 후로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피델리오 백작가의 영지는 현재 10분의 1도 남아 있지 않았다.
 수십 개 마을로 이루어진 좁은 영지. 그곳을 지키는 자그만 성(城) 한 채.
 암담하지만 그것이 피델리오 백작가의 현실이었다.
 가문이 그렇게 몰락하게 된 이유는 물론 제이스 백작의 죽음이 결정적이었지만, 나가와의 전쟁이 끝난 이후 벌어진 크루만 제국의 내전 중에 영지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던 까닭도 있었다.
 그나마 피델리오 백작가가 지금이라도 명맥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리안의 형 카오 백작과 그의 검술 스승인 포인테르 남작이 기를 쓰고 영지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그러한 덕분에 리안은 비교적 큰 고생 없이 자랄 수 있었다.
 검술에 뛰어난 자질을 지닌 카오와 달리 리안은 불행히도 검술에 그다지 재능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검술에 흥미를 느끼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리안은 검술보다 마법에 관심이 많았지만 어려운 영지의 형편상 마법 스승을 초청할 수도 없었고, 수업료가 비싼 마법 아카데미에 갈 수도 없었다.
 대략 10세 때부터일까?
 리안은 결국 가문의 서재에 쌓여 있던 마법 서적들을 탐독하며 혼자 마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역시나 마법은 연구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었다.
 지루하고 고된 검술 수련과는 달리 마법은 리안에게 무척이나 흥미로운 분야였다.
 그래서 검술은 형식적으로 하루에 두어 시간 정도만 수련하고, 나머지 시간은 마법 연구에 몰두했다.
 그렇게 4년이 지나자 리안은 중급 수준의 마법을 펼칠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중급 수준의 마법사가 되려면 초등 마법 학원인 프라이머리 아카데미(6년)를 거쳐 시니어 아카데미(4년)의 과정까지 마쳐야 하는데, 리안은 독학으로 불과 4년 만에 그러한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딱 거기까지였다.
 리안의 마법은 중급의 수준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가문의 서재에는 상급 수준의 마법 서적이 단 한 권도 없었기 때문이다.
 상급 마법은 마법사 길드에서 운영하는 상급 아카데미인 칼리지에 입학해야 배울 수 있다.
 시중에서 상급 마법서를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가격도 터무니없이 비쌌다.
 아무리 마법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상급 마법을 배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평범한 중급 마법사로 평생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리안에게 아주 특별한 일이 발생했다.
 서재의 고서들을 훑어보던 중 아주 생소한 이름의 두툼한 마법서를 한 권 발견했던 것이다.
 그 마법서에는 기존 마법 학계에 단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경천동지할 위력의 기괴한 마법을 익히는 방법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조의마법(造意魔法).
 이 특별한 마법은 필리아스 대륙과 로카이난 대륙을 비롯해 이곳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마법사들도 알지 못하는 아주 특이하고 괴상한 마법이었다.
 호기심이 많았던 리안은 곧바로 조의마법의 연구에 몰두했다.
 몇 개월 후 조의마법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조의마법을 펼칠 수는 없었다.
 마법서에는 조의마법을 펼칠 수 있는 결정적인 비법이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그 비법이 적혀 있는 장소에 대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맞아. 그 책의 맨 뒤에 그려져 있는 지도 때문에 내가 여기에 온 거였어.’
 성민은 비로소 모든 현생의 기억을 정리할 수 있었다.
 자신이 왜 이곳 낯선 숲에 와 있는지도 이해가 되었다.
 신비한 조의마법을 익힐 수 있는 비법이 숨겨진 장소!
 바로 그 장소를 찾아서 성민은 필리아스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 이곳 로카이난 대륙의 험지인 헬파 숲까지 찾아온 것이다.
 그로 인해 무려 8개월이나 되는 긴 여행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후후, 이거 정말 흥미로운걸.’
 성민은 가슴이 설레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마자 모험인 것인가? 확실히 전생의 재미없던 삶과는 차원부터 달랐다.
 ‘다시 한 번 보자. 지도에 그려진 대로라면 이 근처 어디인데?’
 성민은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조의마법서의 맨 뒷장에 그려져 있는 지도였다.
 ‘표범 머리 형상의 바위를 지나 남쪽으로 계곡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푸른 하트 모양의 잎사귀가 울창한 나무 아래 숨겨진 동굴이 나온다고?’
 표범의 머리와 비슷하게 생긴 큰 바위는 아까 지났다. 계곡을 타고 올라온 지도 한참이 지났다.
 그렇다면 푸른 하트 모양의 잎사귀가 울창한 나무를 찾아야 한다.
 ‘오! 바로 저 나무야.’
 커다란 아름드리나무의 잎사귀들이 푸른 햇살을 받아 하트 모양으로 아름답게 번쩍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 넝쿨 사이로 숨겨진 자그만 동굴의 입구가 보였다.
 ‘저 동굴 안에 경천동지할 마법의 비법이 숨겨져 있다 이거군.’
 
 * * *
 
 조의마법은 아공간인 조의공간 속에 자신이 상상하는 사물 즉, 조의물을 창조한 후 그것을 소환하는 마법이라 했다.
 그렇다면 소환마법의 일종인 것인가?
 그렇다고 보기에는 다소 애매했다.
 보통 소환 마법이라 하면 어딘가의 공간에 존재하는 정령이나 마물, 마수, 환수 등을 특별한 계약이나 주문을 통해 소환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조의마법은 조의공간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해 조의물을 창조한 후 소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존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서 창조해내는 것이니 여타의 소환 마법들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고 봐야 했다.
 소환된 조의물은 특이한 몬스터가 될 수도 있고, 마법 무기와 같은 것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뭐든 창조해서 소환할 수 있다 이거잖아.’
 그런 사기적인 마법이 세상에 존재할 줄이야.
 정말로 그러한 마법이 가능한 것일까?
 일단은 가능하다고 치자.
 다만 문제는 조의물을 창조할 수 있는 조의공간을 어떻게 만드는지 성민이 모른다는 데 있었다.
 조의마법서에는 그에 대한 비법이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마도 여기에 조의공간을 만들 수 있는 비법이 숨겨져 있겠지?’
 동굴 속으로 몇 걸음 걷자 어둠이 앞을 가렸다.
 차앙!
 성민은 롱소드를 빼든 후 가볍게 주문을 외웠다. 순간 롱소드의 검신이 환하게 빛나며 동굴 안을 밝혔다.
 ‘후후, 마법이란 역시 편하군.’
 중급 수준에 이르렀던 리안의 마법 지식에 대한 모든 기억이 흡수된 터라 이 정도 마법을 펼치는 건 성민에게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잠시 걷자 굳건한 철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동굴 안에 철문이 있어?’
 대체 누가 이곳에 철문을 만들어 막아 놓았다는 말인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철문은 녹슬어 있었는데, 문고리는커녕 열쇠 구멍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 안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성민은 철문을 유심히 살폈다.
 ‘잠김 마법 같은 게 걸려 있는 게 분명해. 인텔리전스 언락!’
 혹시나 싶어 중급의 잠금 해제 마법을 펼쳐봤지만 철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긴 철문이 쉽게 열렸다면 벌써 누군가 안의 보물을 가져가 버렸을 것이다.
 섣불리 또다시 마법을 펼치기보다 다시 한 번 철문을 살펴보기로 했다.
 성민은 배낭에서 헝겊 조각을 꺼내 철문에 묻은 먼지를 닦았다.
 ‘글자가 적혀 있네.’
 역시나 먼지를 제거해보기 잘했다. 철문의 중앙 부분에 필리아스 대륙의 고대 문자인 라티지드 문자가 조그맣게 새겨져 있었다.
 
 <오직 인연이 있는 자만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 두 손바닥을 철문에 대고 지도에 적힌 주문을 외우라.>
 
 ‘주문을 외우라고?’
 성민은 지도를 꺼내 다시 살펴봤다. 지도가 그려진 종이의 맨 위에는 라티지드어로 ‘하야툰’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걸 말하는 건가?’
 성민은 양 손바닥을 펴서 철문에 댄 후 나직이 외쳤다.
 “하야툰!”
 순간 철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치 애초부터 철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동굴은 안쪽으로 이어져 있었다.
 ‘신기하군.’
 성민은 빛이 깃든 롱소드를 앞으로 뻗으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몇 걸음 디뎠을까?
 화악!
 갑자기 주변이 환해졌다.
 ‘여기는?’
 공간이 바뀌었다.
 성민은 어둑한 동굴이 아닌 화려한 자색의 빛으로 가득한 특이한 공간 속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벽도 없고 바닥도 없고 천정도 존재하지 않는 특이한 방이었다. 성민은 자색의 빛을 밟으며 앞으로 걷고 있었는데 마치 허공을 걷는 느낌이었다.
 ‘여긴 마법 결계 속인가?’
 잠시 걷자 앞에 화려한 금색의 테이블이 보였다.
 성민은 상기된 표정으로 테이블 위를 쳐다봤다. 그곳에는 두루마리 서신 2개와 푸른색 팔찌가 놓여 있었다.
 ‘웬 편지들이?’
 성민은 두루마리 서신 한 개를 펼쳐 읽어 보았다.
 
 <어쩌면 수백 년, 아니 그보다 아득히 오랜 이후가 될지 모르지만 장차 조의마법과 인연이 있는 자에게 남기노라.
 그대가 하야툰을 장착하는 순간부터 그대와 하야툰은 하나가 될 것이라.
 하야툰은 그대의 삶이며 운명이니 그것을 벗으려 하면 그대에게 파멸이 찾아옴을 명심하라.
 하야툰은 계약의 팔찌이니 하야툰을 가진 자는 장차 이곳 세계에 다가올 커다란 환난에서 사악한 무리들과 맞서 싸워나가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하야툰은 또한 약속의 팔찌이다.
 그대가 하야툰을 버리지 않는다면 하야툰 역시 영원히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
 -용자 자크 칼로스-
 
 내용을 보니 서신은 최소한 수백 년 전에 작성된 듯했다. 용자 자크 칼로스란 인물이 누군지 모르지만 하야툰의 본래 주인이었거나 혹은 하야툰을 만든 자라 추정되었다.
 나머지 두루마리 서신을 펼쳐 읽어보니 그곳에는 하야툰을 사용하는 방법과 그것을 통해 조의마법을 수련하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제법 방대한 내용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두루마리를 읽는 순간 머릿속에 선명히 기억되었다. 두루마리에 특별한 마법이 깃들어져 있었던 모양이다.
 성민은 테이블 위의 푸른색 팔찌를 들어 살펴봤다.
 번쩍!
 투명한 푸른빛의 오러를 발하는 아름다운 팔찌.
 그것의 이름은 하야툰이라 했다.
 하야툰은 조의마법의 조의물을 창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아공간인 조의공간과 연결된 팔찌였다.
 조의공간에서 조의물을 창조해 소환하는 것이 조의마법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이 팔찌가 있어야 조의마법을 펼칠 수 있다는 말이었군. 이 하야툰 자체가 조의마법의 숨겨진 비법이었어.’
 조의공간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조의물 창조도 불가능하다.
 조의마법의 위력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펼치지 못하면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하야툰을 장착하면 조의공간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니 조의물을 마음껏 창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자유롭게 사용할 때까지는 어느 정도의 수련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성민은 하야툰이 당연히 탐이 났다.
 두루마리를 좀 더 읽어보니 하야툰을 장착하면 신체의 마나가 모두 조의마법에 특화되어 다른 계열의 마법을 펼치기 힘들어진다는 대목이 있었다.
 조의마법을 익히려면 다른 모든 마법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건 다른 어떤 계열의 마법을 익혀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마법이건 중급의 경지를 넘어서는 강력한 수준에 이르려면 마나가 오로지 한 가지 계열의 마법에 특화되어야 하니 조의마법이라 해서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그러한 사실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내용이다.
 다만 계약의 팔찌가 어쩌고 하는 대목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장차 다가올 커다란 환난에서 사악한 무리들과 맞서 싸워야 할 의무를 가진다는 말이 왠지 부담되었다.
 ‘커다란 환난? 사악한 무리들?’
 그런 것들이 앞으로 생겨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런 거창한 건 크루만 제국의 황제나 마탑의 마도사들이 관심 가질 만한 일이지 나 같이 평범한 인간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성민은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이 팔찌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는 일이겠지.’
 팔찌를 포기하는 것은 곧 조의마법을 포기한다는 말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까짓것 사악한 놈들이 나타나면 좀 싸워주면 되는 거 아니겠어?’
 힘이 있으면 그에 대한 책임은 응당 따르는 법.
 만일 성민이 경천동지할 위력의 조의물을 소환할 능력이 되면 그때 가서 사악한 무리들을 작신작신 밟아줄 수도 있을 것이다.
 성민은 본래 소심한 성격은 아니었다. 그저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은 심정에 잠시 망설였을 뿐이다.
 차칵!
 그러나 결심을 굳힌 순간 망설임은 없었다. 성민은 그 즉시 하야툰을 왼쪽 손목에 장착했다.
 츠으으읏.
 팔찌에서 눈 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쾅! 콰아아앙!
 흡사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거대한 굉음과 함께 성민이 있던 마법 결계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산산조각 나 흩어져 버렸다.
 그 와중에 성민이 입고 있던 옷과 방어구, 장신구들이 가루로 변해 사라졌고, 왼 손목에 장착된 하야툰만이 투명화 상태로 남아 있었다.
 콰앙!
 또 한 번의 폭발이 일었다.
 성민은 눈부신 휘광과 같은 빛에 의해 휩싸인 채 동굴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으윽!’
 그 충격에 성민은 정신을 잃었지만, 다행히 성민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왼쪽 손목에서 빛나는 투명한 푸른빛의 팔찌 하야툰이 성민의 전신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르르르.
 잠시 후 세찬 진동과 함께 하야툰이 숨겨져 있었던 동굴이 무너져 내렸다.
 
 * * *
 
 “미임! 밈!”
 “맴맴맴맴!”
 매미 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려왔다.
 ‘으음!’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성민은 인상을 찡그리며 일어났다.
 ‘으! 어떻게 된 거냐?’
 하야툰을 장착하는 순간 거대한 폭발과 함께 정신을 잃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놀랍게도 온몸은 멀쩡했다.
 그러한 엄청난 폭발의 와중에 몸에 상처 하나 입지 않을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일단은 무사하니 안심이 되었지만 골치 아픈 일이 발생했다.
 성민은 벌거숭이 소년이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왼 손목에 투명화 상태로 장착되어 있는 팔찌 하야툰을 제외하고는 성민의 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옷도 장신구도, 체인메일과 롱소드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뿐인가?
 20골드 정도 남아 있던 돈주머니와 비상 건량, 틈틈이 읽던 마법서적들은 물론, 신분패와 여벌의 옷이 들어 있던 배낭까지 몽땅 가루로 변해 버렸다.
 이 모든 건 하야툰을 장착하는 즉시 벌어진 일이었다. 마치 태아가 모친의 배에서 나올 때처럼 성민은 벌거숭이 상태였다.
 ‘이거 참 막막하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던 성민은 문득 갈증이 나 근처의 계곡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일단 물이라도 마시고 정신을 차리자.’
 벌컥! 벌컥!
 시원하고 맑은 계곡물을 양손 가득 퍼서 마시고 나니 갈증이 가셨다.
 ‘엉?’
 그러던 성민은 멍해졌다. 계곡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확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
 하늘빛이 감도는 은발 아래 눈 내린 듯 하얀 피부, 흡사 청금석을 녹여놓은 듯 선명하게 푸른 눈동자, 시원스레 뻗은 콧날, 불그스름한 작은 입술은 왠지 고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귀엽기도 했다.
 ‘이…… 이게 내 얼굴이야?’
 게다가 굳이 물에 비춰보지 않아도 육안으로 충분히 확인이 가능한 늘씬한 근육질의 몸.
 전신에 군살이라고는 한 군데도 찾아보기 힘들었고 하복부에는 그 만들기 힘들다는 완벽한 식스팩 복근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복근이었다.
 ‘정말로 이게 나란 말이냐?’
 성민은 믿기지 않아 다시 자신의 얼굴을 계곡 물에 비춰보았다.
 대략 16세 정도의 은발 소년.
 ‘……!’
 아, 그러고 보니 생소하지는 않다. 생소하기는커녕 무척이나 익숙한 소년 리안의 외모였다.
 ‘참나!’
 성민은 피식 웃었다.
 ‘내 모습을 보고 놀랄 게 뭐냐? 내가 원래 여기선 꽤 잘 생기게 태어났잖아.’
 사실 리안은 피델리오 영지뿐 아니라 크루만 제국에서도 눈에 띄는 미소년이었다.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전생의 평범했던 외모를 떠올렸다가 현생의 빼어난 미소년의 육체를 가진 자신을 보며 놀랐던 것이다.
 자연스레 현생의 기억을 흡수하긴 했지만 아직도 꽤 혼란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후후. 어쨌건 기분이 좋은걸.’
 자신의 얼굴이 기막히게 잘생겼다는 것에 기분이 나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에 있었으면 아이돌 스타는 따 놓은 당상이었겠군.’
 단언컨대 성민이 전생에서 보았던 그 어떤 아이돌 배우도 지금의 자신처럼 마력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는 못했다.
 기분이 들뜬 성민은 슬쩍 다시 계곡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봤다.
 ‘흠.’
 조각처럼 잘생긴 얼굴도 얼굴이지만 신비스러운 하늘빛의 은발이야말로 매력 포인트였다.
 머리카락뿐 아니라 눈썹 또한 은빛이라. 근데 이거 좀 여자 같아 보이는 거 아닌지.
 이런 걸 전생에서는 꽃미남이라고 했었지?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인상이 다소 차갑다는 것.
 그것은 현재 성민의 눈빛이 너무 또렷하기 때문이다. 무표정한 얼굴에 매서운 안광까지 뿜어져 나가니 인상이 차갑게 느껴지는 건 당연하리라.
 물론 만만해 보이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굳이 흠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만.
 어쨌건 성민은 자신이 꿈속에서나 본 듯한 몽환적인 미소년이라는 것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
 한참을 지켜보던 성민은 계곡물에서 시선을 거뒀다. 새로운 삶을 영위할 육체가 마음에 드는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게 뭐하는 짓이냐.
 ‘쯧! 내가 애들도 아니고, 외모를 보며 자화자찬이라니.’
 겉은 비록 16세 소년의 몸이지만 내면은 이미 30살이 넘은 자아를 가지고 있는 성민이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 얼굴 보며 싱글거리는 건 좀…….
 그러면서도 성민은 힐끗 다시 계곡물을 쳐다봤다. 다시 봐도 만족스럽다.
 ‘참!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빨리 숲을 벗어나야지.’
 불현듯 현재 자신의 처지에 대해 다시 자각한 성민은 긴장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험악한 몬스터들이 득실거리고 있는 로카이난 대륙의 험지인 헬파 숲이다.
 무기도 방어구도 없는 지금 상태로 몬스터들과 마주친다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인 것이다.
 다행히 현재 성민이 있는 헬파 숲의 북단이라 북쪽으로 이틀 정도만 올라가면 숲을 벗어날 수 있다.
 ‘서둘러 숲을 벗어나자. 그전에…….’
 아무리 인적이 드문 숲이지만 남자의 중요한 부분을 훤히 드러내 놓고 다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성민은 널찍한 풀잎과 넝쿨들을 이용해 하체를 가린 후 기다란 나무 막대기를 하나 주워 지팡이로 삼았다.
 맨발로 숲을 거닐 수는 없으니 풀잎과 나무 조각들을 넝쿨로 묶어 나막신처럼 만들어 신었다.
 ‘이거 원시인이 따로 없군.’
 투박하지만 벌거숭이에 맨발로 다니는 것보다는 왠지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었다.
 특히나 성민의 마음을 가장 뿌듯하게 만든 것은 왼 손목에 차여져 있는 신비한 팔찌 하야툰이었다.
 하야툰을 얻은 이상 이제 조의마법을 펼쳐 조의물을 소환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기왕이면 강력한 조의물을 창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재 성민의 마나 및 제반 마법 지식수준으로는 중급 수준의 조의물을 간신히 창조할 수 있을 뿐이다.
 상급의 조의물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꾸준히 마나를 쌓아 마나량을 대폭 늘려야 할 뿐 아니라, 상급 수준의 각종 마법서들을 탐독해 마법에 대한 고급 지식을 방대하게 갖춰야 한다.
 ‘일단 하야툰을 얻은 기념으로 간단한 조의물이라도 하나 창조해볼까?’
 하지만 아까 두루마리에는 그에 대한 경고가 적혀 있었다.
 조의물을 섣불리 창조하기에 앞서 몇 가지 연습을 충분히 하라고 했는데?
 ‘그럼 연습부터 해야겠군. 기본적으로 2가지 조의물이 있다고 했던가?’
 아까 마법 결계에서 두루마리를 읽으며 기억해둔 내용을 떠올리던 성민은 문득 안색을 굳혔다.
 “미이임-.”
 아까부터 귀를 시끄럽게 하던 매미 소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맴맴맴맴! 미이임-.”
 전생이었다면 그다지 신경 쓸 필요 없을 것이다. 숲에서 매미들이 시끄럽게 울어대는 거야 흔한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 세계 특히 로카이난 대륙의 헬파 숲에서의 매미 소리는 그 의미가 전혀 달랐다.
 성민은 이 소리를 내는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시케스터들이군.’
 시케스터들은 무려 2미터가 넘는 거대 매미 형상의 몬스터들이다.
 기다란 촉수에 검처럼 날카로운 앞발을 가지고 있어 어지간한 맹수들도 가볍게 찢어 삼켜버린다 한다.
 오래전 마법사 길드에서 발간한 몬스터 도감에는 시케스터들에 대한 전설도 나와 있었다.
 
 <시케스터는 숲에 들어와 길을 헤매다 죽은 이들이 숲의 저주를 받아 거대 매미 형상의 몬스터로 부활한 것으로 이것들에게 죽음을 당한 자들 역시 시케스터로 부활하게 된다.
 이것의 촉수에는 강한 독이 있고 인간이 그 독에 당하게 되면 점차 몸이 굳어져 죽게 되는데, 신비의 약초인 아사 풀잎이 있으면 쉽게 치료가 가능하다…….>
 
 전설 그대로 시케스터가 이곳 숲에서 죽은 사람들이 몬스터로 부활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시케스터에게는 매우 무서운 독이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헬파 숲에 들어왔다가 시케스터들의 독에 당해 죽음을 당한 이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케스터들이 나타나는 곳 주변에는 신비의 약초라 불리는 아사 풀잎이 있다는 전설도 있다.
 아사 풀잎은 단순히 해독초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귀한 포션의 재료로 쓰일 만큼 모든 종류의 상처와 부상 치료에 탁월한 효능을 가진 약초였다.
 ‘저놈들이 가까이 왔다면 이 근처에 아사 풀잎이 있을 수도 있겠군.’
 아사 풀잎을 발견할 수 있다면야 시케스터들의 독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놈들의 독에 당하지 않고 해치울 수 있도록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바스락.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 거친 숨소리. 그것은 점차 가까워졌다.
 “밈-.”
 곧바로 흉측한 거대 매미 형상의 몬스터 시케스터가 나타났다. 놈은 몬스터 도감에서 봤던 그대로 매미와 흡사하게 생겼는데 시뻘건 눈이 섬뜩하면서도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밈! 미이이이-.”
 시케스터가 입을 쩍 벌린 채 황소처럼 돌진해왔다. 성민은 재빨리 옆으로 피하며 나무 지팡이를 내리쳤다.
 콰직!
 나무 지팡이는 정확히 시케스터의 머리를 박살내 버렸다.
 “꾸어억!”
 시케스터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곧바로 뒤집어졌다.
 벌레형 몬스터들은 덩치가 크건 작건 죽게 되면 뒤집어지는 모양이었다.
 ‘의외로 싱겁네.’
 비록 검술에 재능은 없다 해도 포인테르 남작의 지도 아래 10년 이상 꾸준히 연마해온 리안의 검술 실력을 그대로 가진 성민이었다. 시케스터 한 마리 정도는 가볍게 해치울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안도하기는 이른 것일까?
 “미임-.”
 왼쪽 수풀을 헤치고 또 한 마리의 시케스터가 나타났다.
 “미이임-.”
 오른쪽에 또 하나, 계속해서 뒤쪽에서도 기척이 느껴졌다.
 ‘이것들이 떼로 몰려오는 거 같은데?’
 순식간이었다. 성민은 10여 마리의 시케스터들에게 포위되어 버렸다.
 ‘골치 아프게 됐군.’
 성민은 나무 지팡이를 머리 위로 곧추세운 채 시케스터들을 노려봤다.
 사실 시케스터들의 개별 전투력은 그리 겁낼 것이 없다. 숫자가 많다고 해도 현재의 성민을 크게 위협할 만한 수준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 와중에 놈들의 촉수에 묻어 있는 독에 당하기라도 하면 성민 역시 처참한 죽음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미임-.”
 그때 시케스터 한 마리가 성민을 향해 대뜸 달려들었다. 성민은 놈의 머리를 향해 나무 지팡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콰직!
 “끄이익!”
 가볍게 한 마리를 해치움과 동시에 성민은 앞으로 달려 나가 또 한 마리의 시케스터를 박살 내 버렸다.
 곧바로 성민은 지팡이를 사납게 휘두르며 포위망을 돌파했다.
 ‘저것들이 더 몰려들기 전에 최대한 멀리 달아나자.’
 “미임-.”
 성민은 정신없이 달리며 시케스터들의 추격을 따돌렸다.
 간혹 앞을 가로막는 시케스터들이 있었지만 성민의 지팡이 아래 머리가 박살 나 널브러졌다.
 “제길! 이놈들 정말 끝이 없군.”
 성민은 점차 지쳐가고 있었고 숲의 시케스터들은 성민을 넓은 반경으로 포위하며 지속적으로 따라붙었다. 그 숫자는 성민이 예상하기에 수백 마리가 넘어 보였다.
 ‘이러다 날이 저물면 끝장이야. 뭔가 수를 써야 돼.’
 조의마법을 펼칠 수 있게 된 이상 특별한 조의물이라도 창조해 소환한다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직 조의마법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지는 않았다.
 하야툰을 통해 조의물을 창조하는 연습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능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급박하게 마법을 펼치는 건 가급적 지양해야 한다. 자칫 마나가 폭주해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밈! 미이임!”
 그 사이 뒤쪽에서 시케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성민은 다시 나무들 사이를 바람처럼 빠져나가며 수풀 위를 마구 내달렸다.
 계곡을 건너뛰자 자줏빛 별 모양의 풀잎들이 우거진 자그만 초지가 있었다.
 ‘……!’
 그곳을 밟고 지나던 성민은 황급히 멈춰 섰다.
 ‘이 향기는?’
 근처에는 향긋한 허브 냄새가 진동했다. 자줏빛을 띠고 있는 널따란 별 모양의 풀잎으로 감촉이 매끄러우면서도 부드러웠다.
 ‘이것들은 약초 같은데? 가만! 별 모양의 자줏빛 풀잎이라면?’
 예전의 리안이 쌓아둔 지식을 통해 성민은 어렵지 않게 풀잎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건 분명 아사 풀잎이야.’
 시케스터들의 무서운 독을 해독할 수 있는 희귀한 약초.
 그뿐 아니라 각종 심각한 부상이나 상처도 순식간에 치료하는 신비한 효능을 가지고 있다는 아사 풀잎이 틀림없었다.
 ‘시케스터들이 있는 곳에 아사 풀잎도 있다는 전설이 거짓이 아니었어.’
 성민은 재빨리 왼손으로 아사 풀잎을 한 움큼 뜯었다. 경황 중이지만 아사 풀잎을 몇 장 챙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다.
 “미임-.”
 그런데 그 순간 성민의 앞에 거대한 동체 하나가 나타났다.
 ‘헉!’
 다른 놈들에 비해 2배는 큼직한 거대한 덩치의 자이언트 시케스터였다.
 
 
 
 
 
 
 
 
 
 
 2. 조의마법
 
 
 
 
 ‘대장 놈인가?’
 성민을 쏘아보는 눈빛이 소름 끼치도록 사나웠다. 덩치와 기세를 보아하니 시케스터들의 우두머리가 분명했다.
 “미임!”
 자이언트 시케스터는 촉수를 날려 성민의 가슴을 공격했다. 성민은 잽싸게 옆으로 몸을 날려 촉수를 피했다.
 콰앙!
 촉수가 성민의 뒤쪽에 있던 나무를 후려갈겼다. 놀랍게도 촉수가 작렬한 나무 기둥이 진동하며 움푹 파였다. 자이언트 시케스터답게 촉수의 파워가 보통이 아니었다.
 “밈밈밈!”
 자이언트 시케스터가 맹렬히 울부짖으며 다시금 촉수를 날렸다. 촉수가 물결치며 공간을 갈랐다.
 파아앗-!
 성민은 훌쩍 도약해 촉수를 피해내고는 달려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죽엇!”
 휘잉!
 그러나 자이언트 시케스터는 흡사 비웃기라도 하듯 옆으로 가볍게 이동해 성민의 지팡이를 피해 버렸다. 그리고는 곧바로 입을 쩍 벌리고 달려들었다.
 성민이 옆으로 몸을 굴려 피하자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시커먼 앞발 중 하나가 성민의 왼쪽 옆구리를 베고 지나갔다.
 “으윽!”
 화끈한 통증과 함께 옆구리가 갈라졌지만, 지금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시케스터의 독이 침투하며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촤악!
 비틀거리는 성민의 가슴을 향해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촉수가 날아들었다. 성민은 정신이 핑핑 도는 와중에도 아사 풀잎을 상처에 비비며 촉수를 피해냈다.
 ‘오!’
 아사 풀잎은 확실히 해독에 엄청난 효능이 있었다. 어지럼증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그뿐 아니라 상처도 금세 아물고 있었다. 성민은 힘이 나서 지팡이를 세차게 휘둘렀다.
 휘잉! 휭!
 파공음이 연이어 일자 자이언트 시케스터가 놀랐는지 촉수를 움츠리는 게 보였다.
 성민은 뒤따라 붙으며 시케스터의 머리를 노려 지팡이를 내리쳤다.
 휘잉!
 그러나 지팡이는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제기랄!’
 “미임-.”
 그 순간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시커먼 앞발이 성민의 목을 향해 사납게 날아들었다. 성민은 황급히 지팡이를 들어 막았다.
 서컥!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날카로운 앞발과 부딪힌 지팡이가 대번에 뭉떵 잘려져 나갔다.
 “제길!”
 성민은 토막 난 지팡이를 집어던지고 뒷걸음질 쳤다.
 “밈밈밈밈!”
 그런데 언제 왔는지 뒤쪽에서 수십여 마리의 시케스터들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이, 이런!’
 성민이 멈춰 서자 자이언트 시케스터가 입을 쩍 벌리며 다가왔다. 느긋하게 다가오는 모습을 보니 승리를 확신한 듯했다.
 성민은 하야툰을 장착한 왼손을 앞으로 내밀며 마나를 끌어 올렸다.
 ‘어쩔 수 없군.’
 성민은 아직 하야툰을 사용해 보지 못했다.
 두루마리에 적혀 있었던 설명대로 몇 번의 연습을 수행해야 제대로 펼칠 수 있겠지만, 상황이 그럴 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급박하게 펼치다가 자칫 마나가 폭주할 위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화염의 손!’
 츠으읏!
 생전 처음 시도해보는 조의마법.
 화염의 손은 하야툰을 장착하는 순간부터 곧바로 창조해 소환할 수 있다는 2가지 기본 조의물 중 하나였다.
 성민은 필사적인 심정으로 정신을 집중시켰다. 두루마리의 설명을 떠올리며 말이다.
 ‘외…… 왼손으로 기운이 모였어!’
 어느 순간 뜨거운 기운이 왼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기운은 금세라도 손끝을 뚫고 나와 바깥으로 분출될 것처럼 들끓었지만 성민의 피부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화르르!
 그러다 일순 왼손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아니, 그것은 빛이 아니라 불이었다.
 ‘헉!’
 갑자기 손이 불에 타는 것 같아 성민은 기겁했지만 여전히 손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어떻게 손이 시뻘건 불꽃에 휩싸여 있는데 화상을 입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화상은커녕 뜨겁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게 바로 조의마법의 조화인 것일까?
 혹시 이 불이 바로 조의물인 화염의 손?
 불을 보자 자이언트 시케스터가 움찔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뒤쪽에 있던 다른 시케스터들도 기겁하며 물러났다.
 화르…….
 그런데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인가?
 왼손에 생성되었던 불이 세차게 흔들리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미임!”
 자이언트 시케스터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쩍 벌리며 다가왔다. 뒤쪽으로 물러났던 다른 시케스터들도 일제히 성민을 향해 다가왔다.
 성민의 왼손에서 타오르던 신비한 불이 사라지자 시케스터들은 더 이상 성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츠으읏.
 성민은 다시 마나를 끌어 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화염의 손과 더불어 사용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본 조의물을 창조해 소환해보기로 했다.
 ‘냉기의 손!’
 그 순간 왼손에 다시 기운이 뭉쳤다. 차가운 기운이었다.
 쩌저저정-.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을 것 같은 극한의 냉기가 왼손에 뭉치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성민의 손이나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미임!”
 그 사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자이언트 시케스터가 커다랗게 울며 달려들었다.
 성민은 본능적으로 왼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왼손에서 시퍼런 뭔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슈우욱!
 그것은 손이었다.
 차갑고도 푸른 그 손은 여자의 손처럼 자그맣고 아름다웠다. 흡사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손처럼 푸른 광채를 발산했다.
 “미, 미임!”
 자이언트 시케스터가 흠칫 놀라며 뒤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그 아름답고 작은 손은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머리를 빛살처럼 빠르게 관통하고 지나갔다.
 콰직!
 “끼아악!”
 머리가 박살 난 자이언트 시케스터는 잠시 몸부림치다 축 늘어졌다.
 후닥!
 후다다닥!
 대장이 죽음을 당하자 뒤쪽에서 지켜보던 시케스터들이 일제히 달아나며 흩어져 버렸다.
 스윽.
 성민은 이마에 가득 흐르는 땀을 닦았다.
 위급한 상황이라 엉겁결에 펼치긴 했지만 냉기의 손이 설마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머리를 두부 깨듯 박살 내 버릴 줄은 몰랐다.
 ‘다행이야. 어쨌건 살았군.’
 그래도 아직 안심하기는 이르다. 달아난 시케스터들이 혹시라도 다시 돌아올지 모르니 그전에 이곳을 빨리 뜨는 게 좋을 듯했다.
 ‘잠깐! 저것들을 좀 챙겨갈까?’
 자줏빛 아사 풀잎의 효능은 과연 소문 그대로였다.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앞발에 스치며 갈라진 성민의 옆구리가 지금은 말끔하게 회복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지금은 상처 자국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피부가 벗겨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극심한 상처를 순식간에 원상태로 회복시킬 만큼 불가사의한 회복 능력을 가진 풀잎이 존재할 줄이야.
 그만큼 귀한 가치가 있을 것이니 최대한 챙겨가기로 했다. 마탑 같은 데다 팔면 제법 돈도 받을 테니 말이다.
 성민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툭! 투욱-! 투두두둑!
 아사 풀잎을 채취하는 작업은 흡사 토끼풀을 뜯는 것처럼 간단했다.
 성민의 앞에는 어느새 수백 장도 넘는 아사 풀잎이 쌓여 있었다. 어느새 근처에 있던 아사 풀잎을 몽땅 딴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들을 어떻게 가져가지?’
 배낭이나 자루 같은 것이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성민은 간신히 벌거숭이를 면한 반나체 소년이었다. 당연히 소지품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 넝쿨을 이용해 잘 묶으면 배낭처럼 멜 수 있겠군.’
 성민은 널찍한 나뭇잎들과 넝쿨들을 이용해 아사 풀잎들을 한데 묶은 후 등에서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조여 맸다.
 마지막으로 지팡이가 필요했다.
 제법 단단한 나무 지팡이가 있었지만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날카로운 앞발 공격에 너무도 무력하게 잘려나가고 말았다.
 지팡이 없이 이 숲을 돌아다니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몬스터가 나타날 때마다 매번 마나가 소진되는 마법을 펼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어디 좀 더 단단한 막대기는 없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성민은 문득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사체를 쳐다봤다.
 시커먼 뱀과 같이 축 늘어진 촉수와 끝이 낫처럼 날카로운 앞발들.
 ‘차라리 저걸 뽑아 써볼까?’
 보기만 해도 징그럽기 짝이 없는 거대 곤충 괴물의 다리를 뽑아 쓴다?
 솔직히 그리 내키지는 않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못 할 것도 없었다.
 성민은 성큼 다가가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한쪽 앞다리 관절을 꺾으며 잡아당겼다.
 ‘끄응! 쉽게 안 뽑히네.’
 뚜두둑.
 그래도 한참 힘을 주자 결국 앞 관절이 부러져 다리를 뽑아낼 수 있었다.
 후웅!
 끊어진 관절에 묻은 역겨운 진액을 땅바닥에 털었다.
 ‘흠.’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앞다리는 조금 휘어져 있긴 했지만 쇠처럼 단단했고, 같은 크기의 나무 막대기보다 몇 배는 가벼웠다.
 게다가 끝에는 낫처럼 날카로운 날이 있어 뭔가를 베어낼 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민은 그것을 사용해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반대쪽 앞다리도 빼들었다.
 관절 부분을 날카로운 앞발로 베어내니 아까와 달리 손쉽게 빼낼 수 있었다.
 검이라 보기에는 다소 투박하긴 했지만 위력은 별반 차이가 없을 듯했다. 시커먼 색이니 흑검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사각!
 날카로운 흑검이 생긴 이상 지팡이로 삼을 수 있는 기다란 지팡이 하나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슥슥.
 내친김에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촉수도 뽑아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돌기들이 달려 있는 촉수의 끝은 독이 있어 잘라내 버렸다.
 나머지 부분은 채찍처럼 휘어지면서도 질겨 여러 용도로 사용이 가능할 것 같았다.
 ‘이건 허리띠로 써도 되겠군.’
 촉수의 부드러운 부분을 허리에 잘 감으니 허리띠 대용으로 삼을 수 있었다.
 성민은 흑검 한 개를 등짐에 꽂아 넣고 나머지 하나는 허리의 촉수에 묶어 찼다.
 그 사이 해가 서편으로 지며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벌써 날이 저물었네.’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숲에서 밤에 이동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밤을 안전하게 보낼 장소를 찾아봐야겠구나. 그전에 일단 배부터 좀 채우고.’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더니 배가 고프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다행히 숲에는 식용 과일들이 제법 많았다. 과일로 배를 채우고, 계곡의 물을 마시며 갈증을 풀자 좀 살 것 같았다.
 그러다 성민이 발견한 곳은 이름 모를 짐승의 오래된 뼈들이 흉물스럽게 굴러다니고 있는 자그만 동굴이었다.
 
 * * *
 
 혹시라도 몬스터가 살고 있는 동굴일 수도 있어 조심스럽긴 했지만, 날이 어둑해진 상황이라 성민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동굴은 꽤 오랫동안 비어 있었던 게 분명해.’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고 역한 고기 냄새 같은 것이 심하게 나지 않는 것을 보아 성민은 그리 추측했다.
 다만 동굴 안에 갖가지 형상의 뼈들이 뭉개져 있거나 널려 있는 것을 보면 예전 이곳 동굴의 주인은 상당히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포식자 몬스터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서늘해지긴 했다.
 그래도 무턱대고 밤의 숲을 헤매는 것보다는 이곳 동굴이 안전할 것이다.
 ‘하룻밤만 신세를 지고 떠나자.’
 성민은 뼈들을 몽땅 바깥쪽으로 밀어내고는 동굴 안 평평한 곳에 나뭇잎들을 가져다 쌓았다. 잠시 후 투박하지만 그럭저럭 훌륭한 잠자리가 완성되었다.
 또한 허리에 두르고 있는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촉수 중 하나를 입구 위쪽에 돌출되어 있는 나무뿌리에 길게 묶어 두었다.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사체 일부를 매달아 두는 것!
 이는 이 동굴 안에 자이언트 시케스터보다 강한 존재가 있으니 그보다 약한 놈들은 접근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 표시였다.
 물론 그러한 방법이 실제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성민은 그저 본능적인 직감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었다.
 “크워어어어어어!”
 “쿠쿼어! 크카카카캇!”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낯선 몬스터들의 포효.
 그것들은 괴력의 몬스터인 외눈박이 거인 사이클롭스일 수도 있고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체를 가졌다는 거구의 몬스터 미노타우루스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크루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바다를 건너 이곳 로카이난 대륙의 헬파 숲으로 달아났다는 반인반사의 몬스터 나가들일지도 모른다.
 성민이 이곳 세계에 대한 리안의 모든 기억을 흡수했다 해도 지금 들려오는 포효만으로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몬스터들의 것인지 추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놈들인지 모르지만 성민으로서는 그저 웬만하면 그것들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그것들이 성민이 있는 동굴로 다가오는 기척은 없었다.
 한동안 숨죽여 동굴 바깥의 동정을 살피던 성민은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자긴 다 틀렸군.’
 어차피 잠을 잘 생각은 없었다. 머릿속에서 둥둥 떠돌고 있는 조의마법에 대한 내용을 잘 정리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흠. 조의마법이란 그러니까 상상을 통해 원하는 뭐든 만들어 소환할 수 있다고 했는데…….’
 리안이 이해했던 조의마법에 대한 난해한 지식을 성민이 자연스레 알게 되었지만 아직 자유자재로 펼치지는 못했다.
 사실 불완전한 조의마법의 이론서를 공부했던 예전의 리안이 조의마법에 대해 완벽한 이해를 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러한 지식을 흡수한 성민이 조의마법에 혼란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마법 결계 속에서 보았던 두루마리에는 하야툰을 통해 조의마법을 완벽하게 펼칠 수 있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성민은 눈을 감고 그것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그렇게 대략 1시간 정도가 지나자 자의적으로 얼마든지 조의마법을 펼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은 화염의 손과 냉기의 손에 국한될 뿐 그 밖의 새로운 조의물을 창조하지는 못했다.
 조의마법으로 만들어진 조의물은 상상을 통해 무조건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조의공간 속에서 생성되는 수많은 조건들과 합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조의물을 창조하려면 흡사 난해한 퍼즐을 맞추듯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대폭 단축시키는 방법은 아주 강력한 상상력을 통해 대상을 구체화시키는 것으로 즉, 상상 속 사물을 구체화시키는 능력이 뛰어나면 날수록 조의마법을 보다 쉽게 펼칠 수 있다.
 물론 거기에 해당 조의물 수준에 필요한 마나는 물론 다른 마법들에 대한 방대한 지식은 필수다.
 예를 들어 중급 수준의 능력을 지닌 조의물을 창조하려면 각종 중급 수준의 다른 마법 지식에도 해박해야만 한다나?
 다행히 과거의 리안이 책벌레였던 덕분에 현재 성민의 마법 지식은 어지간한 중급 수준의 마법사를 능가하고 있었다.
 이는 성민이 구체화된 상상력을 발휘만 한다면 중급 수준의 위력을 발휘할 만한 각종 조의물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좋아. 나도 한번 만들어 봐?’
 기왕이면 화염의 손이나 냉기의 손 따위보다는 좀 더 강력한 걸 상상해 보기로 했다.
 성민은 곧바로 눈을 감고 하나의 형상을 떠올린 후 조의마법을 펼치기 위한 마나 배열을 시작했다.
 츠으으.
 순간 조의공간 속에서 기다란 총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전생에 성민이 군대에 있었을 때 사용했던 자동소총이었다.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이 공간에서 자동소총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상당히 든든하지 않겠는가?
 자동소총이라면 화염의 손이나 냉기의 손 등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화력을 가졌을 것이니 말이다.
 츳! 츠으읏!
 그런데 이내 상상 속 형상이 흐릿해지더니 자동소총은 무참히 박살 나 가루로 변해 버렸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체내의 마나만 소모될 뿐 원하는 자동소총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거야 원.’
 생각대로 뭐든 마음대로 쓱싹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조의공간에서 돈이건 보석이건 혹은 강력한 무기든 마음속에서 떠올리는 대로 마구 만들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신이 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조의마법에 대한 크나큰 오해였다.
 예를 들어, 자동소총 조의물을 창조하려면 그것에 마법적 지식을 부가시킨 마법의 자동소총을 상상해야 한다.
 이른바 마나를 주입해 작동하는 자동소총.
 총알 대신 마나를 주입해 방아쇠를 당기면 총구를 통해 마나가 탄환 모양으로 변환돼 날아가는 형태랄까?
 아니면 탄환이 아닌 흡사 레이저 건처럼 마나의 파동이 쏘아져 가는 형태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상을 했다 해도 그것이 곧바로 조의물로 창조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조의공간은 안정된 공간이 아닌 갖가지 마나의 기운들이 휘돌고 있는 혼돈의 공간이라, 그 안에서 어떤 변형이 일어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의마법사는 조의공간 속에서 적게는 수백 번, 많게는 수만 번도 넘는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다양한 시도를 해보아야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조의물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기본 조의물인 화염의 손과 냉기의 손도 그러한 과정에서 도출된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새로운 조의물을 창조하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그 대신 한 번 창조에 성공한 조의물은 마나만 충분하면 언제든 손쉽게 다시 창조할 수 있기에 위급한 상황에서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현재 그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조의물은 화염의 손과 냉기의 손, 이 2가지뿐이다.
 ‘어쨌건 조의물 창조는 무턱대고 시도할 게 아니군.’
 성민은 한동안 조의마법의 이론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기왕 조의마법사가 되었으니 이제 쓸 만한 조의물의 창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특히 앞으로 조의물 창조를 많이 시도해봐야 한다.
 시행착오를 많이 겪으면 겪을수록 하나의 완성된 조의물이 창조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안전한 공간에 있을 때의 일이지, 지금처럼 언제 몬스터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위태한 곳에서 하고 있을 일은 아니었다.
 ‘일단은 숲부터 벗어나는 게 급선무야.’
 심하게 신경을 썼더니 피로가 밀려왔다. 성민은 꾸벅 잠이 들었다.
 
 * * *
 
 -그대는 어둠보다 빛에 있을 때 강하며, 물보다 땅에서 더욱 강하다. 차가움보다 뜨거움이 그대에게 힘을 더하여 줄 것이다…….
 
 ‘차가움보다 뜨거움이……?’
 성민은 문득 잠에서 깬 후 고개를 들었다. 동굴 바깥으로 환한 햇살이 내리 비추고 있었다.
 조의마법의 연구를 하다 꾸벅 잠이 들었는데 벌써 아침이 왔을 줄이야.
 그 사이 동굴에 침투한 몬스터들의 흔적은 없었다.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촉수를 매달아 놓은 것이 나름 위력을 발휘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잠결에 언뜻 생각났던 게 뭐였지?’
 어둠보다 빛에 있을 때 강하며, 물보다 땅에서 더욱 강하다. 특히 차가움보다 뜨거움이 힘을 더하여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성민이 전생에서 죽은 후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들었던 말 중 하나였다.
 피곤에 지쳐 잠을 자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머리에서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물론 그것 말고도 몇 가지 더 있었다. 보석에 대한 내용도 있었고, 마나와 친숙한 시간대에 관련된 것도 있었다.
 성민은 잠시 그것들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그래. 일단 차가움보다 뜨거움이 힘을 더하여 준다면?’
 성민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혹시 나의 경우는 아이스 계열의 마법보다는 파이어 계열의 마법이 훨씬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말이 아닐까?’
 상당히 신빙성이 있었다.
 예전에 리안의 경우 파이어 계열의 마법을 훨씬 빠르게 익혔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마법에 집착하기보다는 다양한 마법을 알고 싶어 파이어 계열의 마법만 파고들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화염 특화의 속성은 조의물에도 적용되는 것이겠군.’
 화염의 손과 냉기의 손.
 이 2가지 조의물 중에는 화염의 손이 훨씬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았다.
 ‘시험해 볼까?’
 어차피 동굴을 떠나기 전에 화염의 손과 냉기의 손, 이 2가지 기본 조의물들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미리 연습해두려고 했다.
 지금 당장 어렵게 새로운 조의물을 창조하려 애쓰지 말고 기존에 있는 것들부터 잘 활용하는 게 현명한 일.
 물론 기본 조의물들을 창조해 소환하는 건 성민에게 이제 아주 쉬운 일이었다.
 다만 손쉽게 소환할 수 있는 것과 그것들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능력은 별개였다.
 능숙해지려면 지속적으로 소환해서 다루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화염의 손!’
 순간 성민의 왼손이 붉게 물들더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왼손이 타는 것이 아니라 왼손에 붉게 타오르는 화염의 손이 소환된 것이었다.
 어제는 성민이 무의식적으로 펼쳤던지라 여기까지가 한계였지만, 이제는 화염의 손이 가진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슥.
 성민이 왼손을 가볍게 흔들자 화염의 손이 동굴 바깥으로 날아가 커다란 나무 밑동에 달라붙었다.
 화르르르.
 화염의 손이 스치고 지나간 나무밑동에 즉시 불이 붙었다. 화염의 손은 계속해서 나무 주변을 새처럼 빠르게 날아다녔고 순식간에 나무 전체가 화염에 휩싸여 타오르고 있었다.
 ‘오! 제법 강력한데?’
 이 정도면 어지간한 몬스터쯤은 가볍게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성민은 원격 조종이 가능한 화염 방사기 비슷한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화염의 손이 소멸되지 않은 채 근처의 다른 나무들 사이를 요란스럽게 휘저으며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뭐야? 저 녀석은?’
 그것은 흡사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성민이 통제하지 않자 제멋대로 움직이며 불을 질러댔다.
 화륵! 화르르르르!
 어느새 대여섯 그루의 나무들이 불타올랐다. 이대로 두면 산불을 제대로 내 숲을 홀랑 태워버릴 기세였다.
 ‘소멸!’
 조의마법사는 조의물을 창조, 소환, 통제, 소멸시키는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화염의 손은 성민이 ‘소멸’이라는 주문을 외우자마자 즉시 사라져 버렸다.
 ‘꽤나 요란한 녀석이군.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화염의 손은 위력이 강력한 만큼 성민이 정신 빠짝 차리고 통제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냉기의 손!’
 성민은 이번에는 다른 조의물을 소환해보았다. 순간 체내의 마나가 조금 전 화염의 손을 소환할 때보다 무려 두 배 이상이나 빠져나갔다.
 츠으읏.
 곧바로 왼손에서 푸르고 아름다운 얼음 손이 생겨났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고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이 녀석은 제법 얌전하군.’
 조의물에도 성격이 있는 것일까? 화염의 손이 다혈질의 장난꾸러기 소년이라면 냉기의 손은 차분하고 다소곳한 소녀를 보는 느낌이었다.
 (저 불을 꺼라!)
 성민은 냉기의 손을 향해 마음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슈우욱!
 성민이 명령을 내리자 냉기의 손이 앞으로 날아가더니 가까이에 있는 나무 한 그루에 하얀 냉기를 쏟아 부었다. 그 모습은 흡사 화재 현장에 냉각 가스를 쏟아 붓는 것 같았다.
 쩌정! 쩌어어엉.
 화염이 급속도로 소멸되며 나무 한 그루가 시퍼런 얼음으로 뒤덮였다.
 냉기의 손이 가진 능력에는 강력한 타격을 주어 뭔가를 파괴하는 것도 있었지만, 차가운 냉기를 쏟아 부어 대상을 얼리는 능력도 있었던 것이다.
 ‘오! 괜찮은데?’
 그 순간 냉기의 손이 흐릿해지더니 저절로 소멸되었다.
 ‘고작 한 그루가 한계인가?’
 한 번에 대여섯 그루의 나무를 불태우고도 힘이 남아돌았던 화염의 손과 달리 냉기의 손은 지속시간이 비교적 짧았다.
 ‘확실히 내가 불쪽에 강하긴 강한가 보군.’
 화염의 손을 소환하는 데는 냉기의 손을 소환하는 것보다 마나도 훨씬 적게 소모됐다.
 그런데도 지속시간이 훨씬 긴 이유는 태생적으로 뜨거움과 친숙한 성민의 체질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리라.
 ‘그나저나 저 불을 어떻게 끈다?’
 그 사이 산불이 크게 번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냉기의 손을 계속 소환해 불을 끄다간 성민의 마나는 금세 소진되고 말 것이다.
 숲에서 어떤 몬스터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함부로 마나를 소진시킬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천만다행일까? 때마침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오! 비가 오는구나!’
 하늘이 순식간에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였고 굵직한 장대비가 쏟아졌다.
 쏴아아아.
 덕분에 산불이 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아침이 밝는 대로 북쪽을 향해 떠나려 했던 성민은 어쩔 수 없이 비가 그칠 때까지 동굴에 남아 있어야 했다.
 ‘일단 아침을 먹어둬야겠군.’
 어제 몇 개 챙겨두었던 과일들을 먹으며 성민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비는 점점 더 세차질 뿐 쉽게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으슬으슬해지네. 모닥불이라도 피워볼까?’
 성민에게 이제 불을 피우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 간단한 일이었다. 화염의 손을 소환해 불을 지르면 되는 일이니 말이다.
 ‘밖에 나가 땔감을 좀 주워와야겠군.
 비에 젖어 축축해진 나무들이 불에 잘 탈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거대한 나무를 순식간에 화염 덩어리로 만들어버리는 화염의 손의 강력한 화력을 생각하면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보다는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는 동굴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니 심난하기 짝이 없었다.
 ‘흠. 가만있어 보자.’
 성민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혹시 조의물을 시켜 땔감을 구해오게 할 수는 없을까?’
 조의물을 고작 땔감을 구해오는 심부름의 용도로 쓰겠다는 황당한 발상이라니.
 성민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조의물을 어느 정도까지 폭넓게 활용할 수 있는지 시험해볼 필요는 있어.’
 손에 닿으면 뭐든 불이 붙어버리는 화염의 손은 이러한 작업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냉기의 손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었다. 땔감들이 바싹 얼어붙었다 해도 화염의 손을 가져다 붙이면 금세 불이 붙을 테니 말이다.
 ‘냉기의 손!’
 곧바로 성민의 왼손에서 푸르고 예쁜 냉기의 손이 생겨나 앞으로 뻗어나갔다.
 둥둥.
 아까처럼 냉기의 손은 요란하게 쏘다니지 않고 성민의 바로 앞 허공에 다소곳이 떠 있었다.
 ‘역시 이 녀석은 꽤 얌전하다는 말이야.’
 성민은 흐뭇하게 웃으며 다시 명령을 내렸다.
 (자, 나가서 땔감을 좀 구해와라. 할 수 있겠지?)
 사실 성민은 냉기의 손에게 이런 식으로 명령을 내려도 되는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다.
 과연 냉기의 손이 ‘땔감’이라는 것의 의미와 그것을 ‘구해온다’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성민의 명령이 타당성을 가지려면 조의물에 불과한 냉기의 손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가진 자아 인격체 비슷한 존재여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론대로라면 가능할 수도 있어. 상급 조의물일 경우에는 제법 고지능의 인격도 가질 수 있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성민은 조의물이 조의물을 창조한 조의마법사의 일부 지식이 주입된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내용을 떠올렸다.
 물론 조의물이 그런대로 고지능의 자아를 가지려면 조의마법사의 경지가 적어도 상급의 수준에는 이르러야 한다.
 성민의 현재 경지는 중급 수준이기에 그러한 고지능을 가진 인격체로서의 조의물 창조는 불가능했고, 그저 어느 정도 흉내만 낼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냉기의 손은 움직이지 않고 멀뚱히 떠 있었다. 성민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흠. 역시 땔감이라는 말이 어려운 건가?’
 성민은 냉기의 손을 쳐다보며 다시 말했다.
 (좀 더 쉽게 설명해줄까? 땔감은 불을 땔 수 있는 나무다. 가서 나뭇가지를 잘라와. 크기는 대충 내 팔 길이 정도면 되겠지. 그런 것들을 좀 구해와. 알겠냐?)
 성민이 오른팔을 들어 보이며 제법 자세히 설명했지만 냉기의 손은 손바닥을 살짝 흔들기만 할 뿐 여전히 이동하지 않았다.
 그것은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는 반항의 행위라기보다는 아직 성민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 같았다.
 ‘음, 대체 뭐가 문제지? 혹시 ‘좀’이라는 말의 의미를 못 알아듣는 거 아냐?’
 아무래도 지능이 좀 떨어지는 조의물이니 ‘좀’이라는 애매한 말을 쓰기보다 구체적인 숫자를 언급해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좋아. 그럼 다시 명령을 내리지. 땔감 나뭇가지를 30개만 구해와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냉기의 손이 동굴 바깥으로 바람처럼 사라졌다.
 ‘오!’
 성민의 안색이 환해졌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냉기의 손은 구체적인 숫자를 언급하지 않아 혼란스러워했던 것이다.
 ‘어떻게 땔감을 만드는지 볼까?’
 성민은 동굴 밖으로 시선을 돌려 냉기의 손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살펴봤다.
 슥! 스걱! 스스슥!
 놀랍게도 냉기의 손은 흡사 날카로운 칼날처럼 나뭇가지들을 자르고 있었다.
 잠시 후 바닥에는 정확히 성민의 오른팔 길이만 한 땔감 나뭇가지들이 쌓였다. 냉기의 손은 땔감들을 향해 가볍게 냉기를 쏟아냈다.
 쩌저저정-.
 땔감들 주위로 하얀 얼음 그물이 형성되었는데 그것은 밧줄로 묶은 것 못지않게 견고해 보였다.
 스으으.
 곧바로 땔감 더미가 둥둥 떠서 허공을 날아왔다. 냉기의 손이 밑을 떠받치고 있었다.
 ‘이거 제법 쓸 만하구나.’
 몬스터의 머리를 두부처럼 으스러뜨려 버리는 가공할 파괴력이 있는 것도 좋긴 하지만, 그보다 이런 잡일로 부려 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 마음에 썩 들었다.
 그에 반해 화염의 손은 뭔가를 불태우는 용도 외에는 딱히 써먹을 데가 없을 듯했다.
 ‘이번에는 지속시간도 꽤 기네.’
 나뭇가지를 자르는 데 그리 많은 힘이 소모되지 않았던 것일까?
 냉기의 손은 땔감을 가져다 두고도 여전히 소멸되지 않은 채 성민의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했다. 앞으로 내가 좀이라는 말을 하면 대충 30개 정도로 알아들으면 돼. 꼭 기억해 둬라.)
 다음에 소환되는 냉기의 손이 이 말을 기억할지는 알 수 없지만 성민은 그 말을 전한 후 그것을 소멸시켰다.
 화르르.
 곧바로 화염의 손을 소환해 땔감에 불을 붙이자 동굴 안은 훈훈한 온기로 가득 찼다.
 예상대로 마른 땔감이 아니어도 불을 붙이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화염의 손이 발하는 화력은 그만큼 강력했던 것이다.
 쏴아아아.
 그 사이 바깥의 빗줄기는 더욱 세차져 있었다. 성민은 한동안 멍하니 바깥을 응시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군.’
 어찌 보면 무척이나 심란한 상황이었지만 성민은 마음이 후련하기도 했고 설레기도 했다.
 다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데서 오는 설렘일 것이다.
 ‘그래. 성민아. 이번에는 정말 멋지게 살아보자. 찌질하게 돈에나 집착하다 죽지 말고 말이야.’
 전생에서 못해봤던 여행도 실컷해보고, 의리 있고 괜찮은 친구들도 만들어 보자.
 또한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결혼도 하는 거다. 그 밖에도 흥미진진한 일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중에서 특히 여자에 대해 생각하던 성민의 얼굴은 미소가 가득했다.
 ‘후후, 나 정도 외모면 어디 가서 절대 못생겼다고 타박을 맞을 일은 없을 테니.’
 못생겼다고 타박을 맞기는커녕 성민은 많은 여자들의 관심거리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이곳 세상의 여자들은 매끈하고 잘생긴 남자보다 강하고 힘센 남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긴 하다.
 그래도 성민과 같은 전설의 미소년을 싫어하는 여자들은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 생각을 하자 성민은 빨리 숲을 벗어나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나저나 그 녀석은 혼자서 잘해낼지 모르겠군.’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행복한 환상에 부풀어 있던 성민은 문득 피델리오 영지에 남아 있는 카오가 생각났다.
 카오는 신체적 나이로 치면 리안보다 7살 많은 형이지만, 30살이 넘게 살았던 성민에게는 한참 어리게 느껴졌다.
 그러다 보니 성민은 자신도 모르게 카오에게 ‘녀석’이라는 말을 붙이고 있었다.
 ‘하긴 알아서 잘하겠지. 고집스런 만큼 힘도 타고 났으니까 말이야.’
 타고난 근력을 가진 카오의 검술 실력은 일취월장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다.
 비록 빼앗긴 영지를 수복하지는 못해도 현재 남아 있는 영지를 지킬 능력은 있는 것이다.
 사실 리안이 조의마법의 비법을 얻기 위해 험지인 헬파 숲까지 찾아온 진정한 이유는 그저 조의마법에 대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형 카오 백작을 도와 피델리오 가문의 옛 영지를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가공할 위력을 가졌다는 조의마법을 리안이 펼칠 수 있다면 음흉한 스카 백작의 기사단과도 능히 맞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카 백작은 피델리오 영지와 인접해 있는 스노어 영지의 영주로 리안의 선친인 제이스 백작과 제법 절친한 친구 사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제이스 백작과 피델리오 가문의 기사단이 나가들과의 전쟁에서 전멸한 이후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황도에 내전이 발발하며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이용해 영지전을 벌여 피델리오 가문의 영지를 침탈해 갔다.
 리안의 마음속에는 스카 백작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예전의 리안이었다면 형 카오와 힘을 합쳐 빼앗긴 영지를 수복하고 스카 백작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데 심혈을 기울였겠지만, 현재의 성민은 그에 대해 조금은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장 내가 돌아간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당분간은 무슨 수를 써도 상황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일단 스카 백작과 전쟁을 벌이려면 강한 군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카오의 휘하에는 고작 1백여 명의 병사들과 4명의 기사가 있을 뿐이다.
 그 정도 병력으로는 성을 간신히 방어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타 영지와 전쟁을 벌일 수는 없다.
 영지군이 없다면 용병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에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피델리오 영지는 영지 규모가 축소돼서 재정의 규모 또한 대폭 줄어든 상황이었다.
 영지의 마을들에서 거둬들이는 적은 세금으로 성을 유지하기란 턱도 없어 따로 사업을 벌여야 할 만큼 재정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전쟁을 벌일 수 있겠는가?
 영지를 빼앗긴 것은 억울하고 원통한 상황이지만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은 무모하게 전쟁을 벌이기보다는 묵묵히 힘을 비축해야 할 때다.
 그 기간이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단기간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작은 영지가 큰 영지를 상대할 정도로 강해지는 건, 가난한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어찌 보면 돈이랑 비슷했다.
 돈은 있을 때 잘 지켜야 한다.
 과거에 아무리 많은 돈이 있다 해도 그것이 어떠한 경우이든 사라져 버렸다면, 그것을 다시 모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쉽게 말해 100억의 돈이 있을 때 10억을 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평범한 사람이 무일푼에서 10억을 벌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 아닌가?
 전생에서 무일푼으로 시작해 100억 이상을 벌었던 성민이었기에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영지를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켰어야 했어. 이제 와서 되돌리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물론 모든 건 제이스 백작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용맹했던 제이스 백작과 피델리오가의 기사단이 나가들에게 전멸당하지 않았다면 스카 백작은 감히 피델리오 영지를 침탈할 꿈도 꾸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어쨌건 장차 카오의 검술 실력이 단신으로 스카 백작의 기사단을 모조리 궤멸시키고도 남을 만큼 불가사의할 정도로 강해지든가, 혹은 상단을 통해 거액의 돈을 벌어들여 대규모의 용병을 고용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승산이 없다.
 그렇다 해도 성민이 피델리오 영지로 돌아간다면 평생 그것에 대해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리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성민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렵게 얻은 새로운 인생을 복수와 전쟁으로 물들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다소 무책임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현재 자아의 주류가 리안이 아닌 성민이라 해도, 리안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심지어 리안이 가지고 있던 감정들도 적지 않게 느껴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한 감정들에는 피델리오 영지를 침탈한 스카 백작에 대한 복수심뿐 아니라, 부친 제이스 백작을 죽인 나가들의 우두머리 쎄이푼에 대한 복수심도 있었다.
 나가들의 우두머리인 쎄이푼은 제이스 백작을 비롯한 크루만 제국의 많은 무장들을 쓰러뜨린 후 제국으로 진군했지만, 마탑의 대마도사인 로핀 공작에게 패퇴한 후 어딘가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이곳 헬파 숲이라는 말도 있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어쨌건 성민에게는 그보다는 새로운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은 다분히 이기적인 욕구가 더욱 많았다.
 ‘미안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살아야겠어. 지난 생에 너무 재미없게 살았거든. 이번 생은 좀 재미있게 살고 싶단 말이야.’
 성민은 가급적 전쟁과 복수는 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들에 휘말리는 순간 돈에 집착했던 것보다 더욱 험난하고 재미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 약속하지. 나중에 혹시라도 내게 아주 큰 힘이 생기거나, 아주 많은 돈이 생기면 피델리오 영지가 다시 예전의 힘을 되찾을 수 있도록 반드시 지원해주겠다. 물론 그 쎄이푼이란 놈도 내가 죽일 힘이 있으면 꼭 죽여주마.’
 그것은 리안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곧 성민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기도 했다.
 
 
 
 
 
 
 
 
 
 
 
 
 
 
 
 
 
 
 
 
 
 
 
 3. 나가족의 미소녀
 
 
 
 
 ‘비가 그쳤군.’
 잠시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끝없이 쏟아질 것만 같았던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서둘러 떠나야 하리라.
 북쪽으로 꼬박 이틀은 걸어야 숲을 벗어날 수 있다. 성민은 날이 밝을 동안 최대한 멀리 이동하기로 했다.
 곧바로 성민은 동굴 입구에 매달아 놓았던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촉수를 다시 허리에 휘감았다. 자이언트 시케스터의 날카로운 앞발, 이른바 흑검 2자루는 각각 등과 허리에 찬 후 기다란 나무 지팡이를 짚고 동굴을 나섰다.
 성민의 등에는 어제 잔뜩 챙겨두었던 아사 풀잎들이 한 짐을 이루고 있었다. 성민은 그것들의 일부를 헬파 숲 북부에 위치한 자그만 나라인 벤투스 왕국의 도시에서 처분할 계획이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돈이 있어야 불편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은 벤투스 왕국에서 잠시 머물다 어디로 갈지 생각해봐야겠군.’
 필리아스 대륙으로 돌아갈지, 아니면 이곳 로카이난 대륙에 그대로 머물지도 아직 결정하지 않은 터였다.
 돌아가려면 대략 4개월 정도가 걸리는 긴 항해도 해야 하는데, 그에 소요되는 경비도 적지 않다. 게다가 귀족 신분패도 없어진 이상 배를 타고 여행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리안 위그 피델리오 자작.
 제이스 백작의 죽음 이후 백작의 작위는 장남인 카오에게 계승되었고, 동시에 차남인 리안의 경우는 자동적으로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자작의 작위가 계승되었다.
 물론 개인 영지는 없는 명목상의 신분일 뿐이지만 필리아스 대륙 최강의 국가인 크루만 제국의 귀족임을 의미하는 신분패가 있으면 어디서든 정중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성민의 귀족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피델리오 영지 내라면 모를까 이 머나먼 타국에서 신분패 없이 귀족이라고 외쳐봤자 누구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따라서 차라리 이 경우에는 돈으로 신분패를 하나 만들어 두는 것이 편할 듯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자유 용병 신분패다.
 약간의 돈이 있다면 굳이 자격시험을 보지 않아도 하급 자유 용병 신분패 하나쯤은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물론 그보다 훨씬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자유 여행자 신분패이긴 하지만, 국가마다 자유 여행자에 대한 기준이 다르고 간혹 입국에 제약을 두는 경우가 있다.
 반면, 용병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그러한 제약을 두지 않는다. 게다가 오히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데 있어서는 귀족 신분패보다 나은 면도 있다.
 아무리 크루만 제국의 귀족 신분패가 있다 해도 크루만 제국과 적대 관계에 있는 나라들의 경우에는 입국이 허용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자작에서 하급 자유 용병이라!
 자존심이 무척 강한 예전의 리안이라면 혀를 깨무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민은 자유롭고 편하게 여행을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다.
 ‘그나저나 이 아사 풀잎이 얼마에 팔릴지가 문제겠군.’
 아사 풀잎은 회복력이 무척 뛰어나 포션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잎사귀 자체로도 어지간한 포션을 능가하는 효력을 가지고 있기에 이것을 잘 활용하면 잎사귀 한 장으로만 포션을 서너 병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보통 포션 1병의 값은 최하 5골드에서 비싸게는 10골드 정도라 했는데, 그렇다면 아사 풀잎 한 장의 값어치는 어느 정도일까?
 포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재료도 많이 필요하다지만 아사 풀잎과 같은 고도의 회복력을 지닌 약초가 필수다.
 아사 풀잎 한 장으로 포션을 여러 병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니, 아사 풀잎 한 장은 적게 잡아도 포션 1병의 값 정도는 받을 수 있다고 봐야 했다.
 ‘대략 5골드로 생각해보자.’
 그러한 아사 풀잎이 수백 장, 언뜻 봐도 4백 장 정도는 충분히 되어 보이니, 그것들을 모두 처분하면 거의 2천 골드 정도가 수중으로 들어온다는 말이었다.
 2천 골드!
 그것은 이곳 세계에서 대략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까?
 피델리오 영지에서 기사가 받는 한 달 봉급이 대략 4골드 정도고 영지병은 그에 10분의 1 수준이다.
 1골드가 100실버이니 영지병들의 봉급은 40실버.
 그러나 그 40실버만 해도 평범한 영지민 가정의 경우에는 그럭저럭 한 달 정도를 하루 두 번 빵과 고기를 넉넉히 먹으며 살 수 있을 만한 큰돈이라 했다.
 서민 가정의 넉넉한 한 달 생활비가 40실버.
 그렇다면 5골드는 서민 가정의 무려 1년 치 생활비에 해당되는 막대한 돈이다.
 현재 피델리오 영지의 1년 예산이 대략 2천 골드를 약간 넘어서는 것을 고려해 보면 2천 골드는 그야말로 엄청난 돈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리안이 영지를 떠날 때 형 카오 백작에게 받았던 여비가 40골드 정도였으니 말이다.
 ‘후후, 그럼 이것만 잘 팔면 난 꽤 부자가 되는 건가? 평생 놀고먹고도 남겠어.’
 성민이 전생에서 이 정도 가치의 돈을 모으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평생이었다.
 그런데 이번 생에서는 너무도 쉽게 그러한 돈을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잘됐군. 이 정도면 더 이상 돈을 벌려고 궁리할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야.’
 그러나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사 풀잎이 정말로 그만한 가치로 팔릴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예상대로만 팔린다면 그중 반 정도인 1천 골드를 피델리오 영지의 카오 백작에게 부쳐줄 생각이었다.
 그 돈이면 재정난에 허덕이는 카오 백작에게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정도가 현재 성민이 카오 백작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음?”
 아사 풀잎을 팔아 막대한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 행복한 기대감에 잠시 부풀어 있던 성민은 문득 뭔가가 은밀히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고 멈춰 섰다.
 스으으.
 앞쪽 멀리서 수풀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지?’
 아직은 은밀히 접근하는 것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다.
 스으으!
 소리가 다소 기괴했다.
 발로 지면을 박차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흡사 뱀과 같은 것이 수풀 사이를 뚫고 기어오는 것도 같았다.
 성민은 지팡이를 즉시 바닥에 내려놓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흑검을 오른손에 쥐었다. 동시에 왼손은 언제고 조의물을 소환할 수 있도록 위로 치켜들었다.
 대체 어떤 몬스터가 오고 있는 것일까?
 일단 이 근처에서 가장 조심해야 될 포식자 몬스터는 소의 머리에 거인의 형체를 가진 미노타우루스다.
 미노타우루스는 예전의 리안이라고 해도 감히 상대하기는커녕 전력을 다해 달아나야 할 만큼 막강한 괴력을 가진 초대형 몬스터다.
 그러나 다행히도 미노타우루스를 미리 피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놈의 덩치가 워낙 커서 멀리서도 잘 보일 뿐만 아니라, 수시로 포효를 날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습성을 보면 지금 은밀히 다가오는 것은 절대 미노타우루스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어제 마주쳤던 시케스터와 같은 비교적 소형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았다.
 ‘미노타우루스만 아니면 크게 위험할 건 없어. 정신만 바짝 차리면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 침착하자.’
 성민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스으으으!
 잠시 후 수풀이 갈라지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가 싶더니 성민의 전방 십여 미터 앞에서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잿빛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또렷한 붉은 눈동자를 가진 대략 20세 정도의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엉?’
 성민의 두 눈이 커졌다.
 당혹스럽게도 그녀의 헝클어진 긴 머리 사이로 풍만한 두 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옷을 한 조각도 입고 있지 않았다.
 ‘으음!’
 아름다운 여자의 나체를 보고도 무심할 수 있는 남자는 없으리라.
 성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때 아닌 눈요기에 두 눈이 휘둥그레지긴 했지만 한 가지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갑자기 이 숲에 웬 여자가 나타난 것일까?
 그것도 나체 상태로 말이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하체 쪽을 쳐다본 성민은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치고 말았다.
 그녀의 허리 아랫부분은 인간의 다리가 아닌 뱀의 형상이었다.
 ‘저…… 저건 설마?’
 
 * * *
 
 상반신은 인간이지만 하반신은 뱀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면?
 성민의 뇌리에 끔찍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20여 년 전 난데없이 출몰해 이시스 왕국을 멸망시킨 후 크루만 제국과 무려 10년 가까이 전쟁을 벌였던 반인반사의 사악한 몬스터 나가.
 ‘틀림없어. 나가야.’
 나가가 이곳 헬파 숲으로 달아났다는 얘기가 뜬소문은 아니었나 보다. 성민은 꺼림칙하단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 인간?”
 그때 성민을 발견한 나가 역시 흠칫 놀라더니 대뜸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인간은 사악하고 탐욕스런 존재! 죽어야 한다.”
 곧바로 나가는 커다란 대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제길!’
 나가는 가공할 괴력에 사악한 흑마법까지 구사해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 같았다.
 인간의 말도 알고 있을 만큼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죽엇!”
 대검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들자 성민은 흑검을 들어 막았다.
 카앙!
 대검이 위에서 아래로 성민의 흑검을 찍어 눌렀다.
 ‘우윽!’
 엄청난 힘에 성민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했다.
 언뜻 보면 무척 여려 보이는 여성의 외모를 가진 나가였지만 오래도록 검술로 단련한 성민의 힘으로도 쉽사리 버티기 힘들 만큼 가공할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가는 대검을 위로 올렸다 다시 아래로 내리쳤다.
 카캉!
 성민은 대검을 받아낸 후 재빨리 우측으로 빠져 나가의 옆구리를 노렸다.
 “에잇!”
 비록 상반신뿐이라 해도 영락없이 인간 여인의 몸을 가지고 있는 나가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것은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망설이다가는 무식한 대검에 목이 뎅겅 잘려나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가의 빈틈이 보이자마자 사정없이 흑검을 휘둘렀는데, 나가는 마치 그것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뒤로 슥 물러나 피해버렸다.
 ‘어디로 간 거야?’
 나가는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성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특별한 마법을 통해 자신의 몸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분명 근처에 있겠지.’
 성민은 흑검을 정면으로 겨눈 채 사방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침착하자. 충분히 막을 수 있다.’
 나가는 잠시 후 성민이 쉽게 방어하지 못하는 방향에서 기습을 가해올 것이다.
 그것을 막아내지 못하면 나가는 무자비하게 성민의 전신을 고기 썰 듯 토막을 내버릴 게 분명하다.
 그 생각을 하자 성민은 전신에 오한이 들었다. 어느새 성민의 뒷목은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화염의 손!’
 성민은 잽싸게 조의마법을 펼쳤다. 화염의 손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데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때 좌측의 공기가 살짝 흔들리더니 나가의 대검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성민을 향해 날아들었다.
 성민이 급히 흑검을 휘둘러 막았지만 나가는 그것을 예상했다는 듯 곧바로 대검의 방향을 틀어 반대쪽으로 내리쳤다.
 쒸잇!
 성민은 옆으로 몸을 굴리듯 날렸다. 대검이 아슬아슬하게 성민의 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촤아아악!
 등짐으로 지고 있던 아사 풀잎들이 검에 맞아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런!’
 아까운 아사 풀잎들이 흩날리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성민은 재빨리 몸을 회전시켜 일어났다.
 그 순간 나가의 기다란 뱀 꼬리가 날아와 성민의 몸을 휘감았다.
 ‘윽!’
 미처 흑검을 휘둘러 꼬리를 벨 틈도 없었다. 꼬리가 성민의 몸을 허공으로 번쩍 들었다가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콰앙!
 “크윽!”
 다리가 부러지는 듯한 극심한 충격을 받은 성민은 오른손의 흑검을 놓치고 말았다.
 “오호홋! 건방진 인간!”
 나가는 꼬리로 휘감은 성민의 몸을 자신의 상반신 가까이로 끌어당긴 채 차갑게 노려봤다.
 그 순간 성민은 가까이에서 나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가 뒤로 쓸리자 환하게 드러난 얼굴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맑은 흰 자위 사이로 루비처럼 번쩍이는 신비한 홍채, 조각이라도 해놓은 듯 도도하게 솟은 콧날,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하얀 피부.
 그러나 그러한 마력적인 외모와 달리 나가는 핑크빛 입술로 섬뜩하도록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 위로 대검을 곧추세우는 것을 보니 성민의 목을 자르려는 모양이었다.
 성민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좀 전에 소환했던 화염의 손을 찾았다. 어이없게도 그것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한가하게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설마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적을 공격하지 않는 것인가?
 아무리 저지능의 조의물이라 해도 주인이 위기에 처했는데 남의 집 불구경이나 하듯 방관하고 있을 줄이야.
 (지금 뭐하는 거냐? 어서 이 나가를 공격하지 못해!)
 화르르륵!
 화염의 손은 그제야 바람처럼 방향을 선회해 나가를 향해 날아들었다.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손이 날아오자 나가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소용없는 짓.”
 나가는 꼬리로 휘감고 있던 성민의 몸을 살짝 밀어내더니 대검을 휘둘러 화염의 손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파앗!
 그러나 화염의 손은 갈라진 즉시 다시 합체되었다.
 나가가 흠칫 놀라며 다시 대검을 휘둘렀지만 화염의 손을 막아내지 못했다. 화염의 손은 불쑥 다가들어 나가의 복부에 달라붙어 버렸다.
 화륵! 치이이이-.
 이글거리는 시뻘건 불덩이가 몸에 착 달라붙을 때의 고통은 어떤 것일까? 나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는 것을 보니 가히 상상을 초월한 고통일 것은 틀림없었다.
 “아아악!”
 나가는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더니 괴이한 주문을 외웠다.
 “어으…… 아브칼!”
 곧바로 나가의 몸에 은빛의 막이 생겨나 화염의 손을 튕겨냈다. 화염의 손은 빙글 회전하며 나가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은빛 막을 뚫지는 못했다.
 화륵! 화르르륵!
 화염의 손은 성이 난 듯 더욱 빠른 속도로 나가의 주위를 맴돌았고, 나가는 낭패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성민은 잽싸게 나가의 꼬리에서 벗어나 바닥에 떨어진 흑검을 주워들었다.

댓글(5)

가상화폐    
재미있나? 모르겠네요
2015.11.13 13:36
정구의검    
흑우없제
2018.07.24 21:49
ko******    
이 소설도 설명충이네 했던설명 또하고 산속에서 나와서 마을이나 도시에 도착 후 영지로 가도 몇번은 갈걸 지긋지긋하게 설명만 늘어놓네 독백 그만좀 하고 진도좀 나가지
2018.09.10 20:17
ko******    
그리고 백작가의 자제가 아사풀잎을 어찌알어 지가 약초 전문가도 아니고 백작성에서 자란놈이
2018.09.10 20:19
wg****    
조의마법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건 안되는 건가요?
2019.07.27 0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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