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2006-2007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vs 아스널
올드 트래포드에 방문한 관중들의 함성은 엄청났다. 긴장감 속 한울의 두 손엔 진득한 땀이 뱄다.
UEFA 챔피언스 리그 8강전.
1차전을 4:1 대승을 가져간 아스널은 누구 하나 의심할 것 없이 최강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독일의 수문장 골키퍼 옌스 레만부터 시작해 철혈의 포백을 구축하고 있는 갈라스, 요한 주루, 콜로 투레, 에부에.
미드필더엔 융베리, 밥티스타, 파브레가스, 알렉산더 흘렙.
그리고 공격진엔 판 페르시와 한울이 최강의 콤비를 이루고 있었다. 2003-2004 시즌의 무패 우승을 이룬 구성원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대한민국 국적의 한울이 이 팀의 일원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강점이라는 게 세간의 평가였다.
1976년생인 한울은 1994년 프랑스 리그 AS 모나코에서 데뷔해 1999년 아르센 벵거의 부름을 받아 아스널에 입단했다.
그해 데뷔 시즌, 한울은 33경기에 출전해 17골 1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거너팬들을 열광케 했다.
그리고 지금 한울은 아스널의 주장으로서 올드 트래포드의 필드에 발을 들였다.
한울은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하프 라인 부근에 선수들을 한곳에 불러 모았다.
“4대1로 승리하고 있지만,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어. 방심하지 말고 전력을 다하자고!”
그 말에 최고 연장자인 레만이 한울의 머리칼을 흩뜨리며 동조했다.
“이번에 이기면 내일 저녁은 내가 쏘지!”
“정말이야? 그 말 꼭 지키라고.”
옆에서 줄리우 밥티스타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한울은 덩치에 맞지 않게 아이 같은 웃음을 짓는 밥티스타에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스널은 4-3-3 형태의 수비 지향적 전술을 구사했다. 반대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호날두, 루니 그리고 박지성을 앞세운 3-4-3 형태의 공격적인 전술을 들고 나왔다.
곧바로 주심이 휘슬을 울렸다.
선축은 상대 진영이 먼저 가져갔다.
전반 12분.
포르투갈의 신성 호날두는 하프 라인에서 찔러주는 박지성의 패스를 받은 직후 돌연 우측 라인을 타고 질주했다.
이에 갈라스가 황급히 달려들어 오른발을 뻗었다. 그 순간 호날두는 발을 빼며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쓰러졌다.
주심은 달려와 그 즉시 휘슬을 불며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에 갈라스는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며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왜 옐로카드야! 발이 닿지도 않았다고. 이 자식 지금 다이빙했다니까?”
호날두는 해명 없이 축구화를 고쳐 신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2006년 월드컵이 끝난 직후 현존하는 최고 유망주로 성장한 호날두였다. 한울은 심판에게 항의하는 갈라스를 만류하며 유유히 킥을 준비하는 그에게 다가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릿광대 같으니라고.”
그 말은 호날두의 귓가에 정확히 전해졌다. 스물한 살의 어린 호날두는 한울의 도발에 참지 못하고 귓불까지 뻘게졌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호날두는 분개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지나쳐가는 한울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한울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어릿광대라고 했다, 멍청아! 이참에 진짜로 광대 분장을 해보는 건 어때? 응? 어울릴 것 같은데.”
“이 새끼가!”
결국, 참지 못한 호날두는 한울의 가슴을 밀쳤다. 그 순간 한울은 기다렸다는 듯이 뒤로 나자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주심! 저 녀석이 날 밀쳤어!”
“아, 아니. 주심! 오해예요. 그리 세게 밀치지도 않았다고!”
호날두는 다가오는 주심에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하지만 주심은 가차 없이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최고였어.”
갈라스가 다가와 한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손을 맞잡으며 일어났다. 이어 한울은 호날두의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곁눈질로 살피며 유유히 페널티 에어리어로 달려갔다.
후반 10분. 스코어 0:0
결국, 호날두는 한울의 도발에 말려들어 제 기량을 펼치지 못하고 올리베이라 안데르손과 교체되었다.
후반 24분. 스코어 0:0
올드 트래포드 구장에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응원가인 ‘Glory! Glory, Man United’가 들려왔다.
이에 맞춰 거너팬들은 ‘Arsenal Till I Die’라는 열띤 응원가를 구장이 떠나가라 불렀다.
“죽을 때까지 아스널!
우린 죽을 때까지 아스널!
우린 안다. 확실하다!
우린 죽을 때까지 아스널이다!”
후반 40분.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맨체스터의 선수들의 얼굴엔 패색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애초에 1차전에서 4점을 실점한 상황에서 아스널을 상대로 5분 사이에 5골을 몰아넣는 건 불가능했다.
“조금만 버텨.”
한울은 자신을 지나쳐가는 파브레가스의 뒤통수를 툭 치며 말했다. 파브레가스는 후반 10분에 밥티스타와 교체되어 필드에 발을 디뎠다. 그는 미래가 기대되는 유망주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대 진영 선수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그런데도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리오 퍼디낸드만큼은 달랐다. 그는 연신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팀원들의 사기를 북돋으려고 노력했다.
추가 시간은 2분이 주어졌다.
상대 진영 페널리 에어리어 바깥에서 안데르손이 반칙하는 바람에 프리킥이 주어졌다.
한울은 프리킥 키커로 나서고 숨을 깊게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골대와의 거리는 24m.
한울은 해 볼 만하다고 느꼈다.
홈런을 때려도 함성이 터져 나올 상황이었다. 이미 승리는 정해졌으니까. 그런데도 한울은 거너팬들을 위해 선물을 주고 싶었다.
곧 그는 세 걸음 뒤로 물러서며 눈을 빛냈다.
삐익!
휘슬이 울리고 한울은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다 냅다 뛰어가 발등으로 공을 찼다.
불규칙하게 흔들리며 궤적을 그리고 날아간 공은 절묘하게 우측 골 포스터 아랫부분을 파고들어 골망을 흔들었다.
맨유의 수문장 판 데 사르가 반응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강력한 무회전 슛.
그 순간, 거너팬들에게서 전에 없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연신 ‘한! 한!’을 외쳐 댔고 한울은 달려오는 선수들과 거친 포옹을 나누었다.
그날 매체는 ‘맨 오브 더 매치(MOM)’로 한울을 선정했다.
데일리 메일, BBC 등 영국 매체들은 앞다퉈 한울을 추앙하기 바빴다.
서른한 살의 베테랑 공격수 한울은 이미 아스널을 넘어 세계가 알아주는 월드 클래스 반열에 올랐다. 그는 이미 20대 후반의 나이에 안드리 세브첸코를 누르고 세계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진다는 발롱도르를 수상한 경력마저 지녔다.
경기가 끝난 다음 날 레만은 공언한 대로 자신의 저택에 선수들을 초대했다.
선수 관리에 철저한 아르센 벵거도 오늘만큼은 자축을 허락했다.
한울은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와이셔츠에 검은색 바지 차림새로 전신 거울 앞에 서며 옷매무새를 한 번 더 체크했다.
이후 주차장으로 향하자 멋스러운 스포츠카와 SUV가 우아한 자태를 뽐냈다.
“내 멋쟁이들.”
한울은 괜스레 뿌듯함을 느끼며 번들거리는 보닛을 손등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야경이 아름다운 타워 브릿지를 지나 세계에서 가장 큰 자명종 시계가 달린 빅 벤 앞에서 한울은 차를 천천히 서행시켰다.
트래펄가 광장 앞이 유달리 소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한울은 트래펄가 중앙 분수대 쪽을 바라보며 미묘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패싸움이라도 났나?”
한울은 창밖으로 머리를 빠끔히 내밀었다. 사람들의 웅성임이 오갔다. 분수대에서부터 몇몇 사람들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로 뛰쳐 나왔다. 한울은 의아함을 느끼며 정차시켰다. 시동을 끄고 운전석에서 내린 그는 천천히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빅 벤에서부터 테러가 일어날 거야. 진짜라고!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죽을 거야. 그러니 어서 달아나. 달아나라고!”
사자상 앞에서 너저분한 옷차림의 노인이 목청껏 소리치고 있었다. 백발의 노인은 지나가던 사람들의 어깨를 붙잡기도 하거나 사자상 위에 올라가려는 위험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을 잊지 않았다.
“빅 벤에서 테러가 일어날 거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을 거라고. 그러니 어서 달아나!”
듣고 보니 똑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그 말을 가볍게 무시했지만 몇몇 이들은 불길하다며 황급히 광장을 벗어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인은 관리 요원에 의해 강제로 어디론가 끌려갔다. 자연스레 몰려들었던 인파도 하나둘씩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울은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싸움이라도 난 줄 알았네.’
“한···?”
막 뒤돌아 걸음을 움직이려는 때 한울은 지나가던 행인이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것을 보며 속으로 아차 싶었다.
‘모자라도 눌러쓰고 오는 건데.’
유럽 최고의 스타인 한울이었다. 축구의 나라 영국에서 그런 한울이 광장 한복판에 서 있다면 그 누구든 달려가 사인부터 요청할 것이다.
“맙소사! 진짜 한울이잖아! 사진 한 장만 찍을 수 있을까요?”
거너팬인 듯한 남성 팬은 한울을 보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한울은 가벼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어제 경기는 정말 놀라웠어요. 그렇게 멋진 궤적으로 날아가는 골을 눈앞에서 볼 줄은···! 난 당신의 팬이에요. 우리 딸도 당신의 열성 팬이죠. 집에 유니폼만도···!”
남성 팬은 한울과 어깨동무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주절거렸다. 한울은 애써 고개를 주억거리며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은 곧 한울을 알아보고 접근하는 또 다른 팬들에 의해 접을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강!
“무슨···!”
갑자기 요란한 굉음과 함께 지축이 뒤흔들렸다. 인근에 있던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몸을 움츠렸다. 한울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남성 팬은 당황하는 얼굴로 외쳤다.
한울은 두 눈을 부릅뜨고 굉음의 근원지를 돌아보았다. 빅 벤이라 불리는 시계탑에서부터 화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테, 테러다!”
“그 노인의 말이 맞았어!”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너무나 소란스러워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을 정도까지 됐을 때 또 한 번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이 일어났다.
콰강!
폭발의 여파로 사방으로 파편이 날아들었다. 어느덧 웅성거리는 소리가 울부짖음으로 바뀌었다.
한울은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면서도 넋 나간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사자상 앞에서 노인이 경고했던 대로 빅 벤이 느닷없는 테러를 맞아 붕괴하고 있었다.
곧 한울은 바닥에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뻣뻣한 고개를 들었다. 굉음과 함께 큼지막한 잔해가 무서운 속도로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며 한울은 그만 입을 떡 벌렸다.
“이런 미친···!”
빠각!
차진 파열음의 끝으로 한울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새로운 삶
눈을 떴을 때 처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새파랗게 바랜 형광등이었다.
“으으.”
한울은 의식이 들자마자 머리부터 부여잡았다. 골이 울리는 통증에 그는 한껏 표정을 구기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한울은 통증이 지속하는 와중에도 기억을 더듬었다. 트래펄가 광장에서 소란이 일어났고 남루한 복장의 노인이 빅 벤에 테러가 일어날 것이라 예언했다. 그래서 광장에 있는 이들이 모두 죽을 것이라는 오싹한 소리를 내뱉었다.
“··· 맞아. 그랬었지.”
차츰 두통이 완화되었다. 한울은 이맛살을 찡그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문득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분명 커다란 잔해가 자신을 덮쳤다. 그럼 이곳은 병실인가.
“이게 대체···”
한울은 미간을 구겼다. 그 상황에서 구조되었다면 병실이어야 했지만 누가 봐도 병실의 구조가 아니었다.
5평 남짓한 방안은 장롱 및 갖가지 집기류들로 누울 자리만 겨우 나오는 수준이었다.
한울은 딱딱한 바닥을 손으로 더듬으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드르륵.
장지문이 열리고 낯선 노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머리칼에 펑퍼짐한 몸매의 노파를 보며 한울은 두 눈을 의심했다.
“누구···?”
“학교 안 가냐, 이놈아?”
노파의 늙수그레한 외침에 한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교··· 요?”
“아직도 꿈나라네, 우리 강생이. 어서 이불 개고 학교 갈 채비해라. 밥상 차려 놨으니까.”
툭 내뱉듯이 말하며 노파는 바닥에 있던 밥상을 밀어 넣었다. 한울은 여전히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침 메뉴는 된장국과 흰쌀밥 그리고 굴김치였다. 노파는 손으로 김치를 반으로 가르며 한울의 숟가락 위에 얹어 주었다.
“큰고모가 보내준 김치다. 어서 먹어봐라. 무령아!”
“··· 예, 우선은 잘 먹겠습니다.”
한울은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할머니는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잘 해주는 걸까. 마치 손자 대하듯이 하는 태도에 완강히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무령이라니. 지금 눈앞의 할머니는 자신을 다른 사람과 착각하는 게 분명하다.
밥이 코로 넘어가는 듯한 불편한 자리였지만 어쨌든 식사는 끝이 났다.
“이제 세수하고 학교 갈 채비해야지.”
노파는 한울을 재촉했다.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기, 할머니?”
“와? 우리 강생이.”
눈가에 주름지게 미소를 띠며 돌아보는 할머니에 한울은 괜스레 마음이 약해졌다.
하지만 한울은 이내 표정을 굳히며 사실을 토로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무령이도 아니고 할머니의 강생이도 아닙니다. 제 이름은 한울이에요. 아스널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울이요. 기사에도 많이 나오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자주 얼굴을 비쳤는데··· 혹시 저 모르시겠어요?”
그 물음에 오히려 노파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당황했다.
“우리 강생이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게냐?”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강생이가 아니고 한울입니다. 한울. 사람 잘못 보셨어요. 손자 분이신 것 같은데··· 아니, 게다가 지금 제가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말을 하다 말고 한울은 답답함을 호소했다. 처음부터 궁금했던 질문이었다. 왜 자신이 이런 오래되고 비좁은 방 안에 있는가.
그러나 답답함을 호소하던 한울은 곧바로 이어진 노파의 행동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노파가 손을 뻗어 한울의 뺨을 감싼 것이다.
“우리 강생이 어디 아프노? 갑자기 와 그라노. 열이 있는 것도 아닌데.”
노파는 걱정 어린 얼굴이 되어 한울의 뺨과 이마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노파의 손길을 피해 두 걸음 물러났다.
“무, 무슨 짓입니까, 이게!”
“강생아. 진짜 어디 아픈 기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강생이가···!”
“아이고, 우야면 좋노! 우리 강생이가 아프데이!”
한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노파가 느닷없이 자리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한 탓이다. 한울은 당혹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병원 갈 준비하그라.”
노파의 두 눈엔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한울은 어쩐지 큰 실수를 한 것만 같아 입만 벙긋거렸다.
“애비한테 전화 좀 해야겠다. 잠시만 기다리그라.”
“아, 아니. 그러니까···”
한울은 다급히 수화기를 드는 노파의 행동에 이마를 짚었다.
‘··· 뭐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약 5분이 지나서야 한울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이해했다기보단 강제로 깨우쳤다.
결국, 노파의 말을 따르기로 한 한울은 1평 남짓한 화장실에서 세수했다. 그러다 눈앞의 거울을 보곤 그만 실소를 머금고 말았다.
“하, 하하?”
한울은 거울 속의 소년이 자신을 따라 웃는 것을 보곤 이내 화들짝 놀라며 두 발짝 물러섰다. 때맞춰 거울 속의 소년도 얼굴을 한껏 구기며 뒤로 주춤거렸다.
“··· 뭐?”
곧 그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다시 거울을 향해 다가섰다. 손을 들어 뺨에 가져가려던 한울은 보드라운 손을 보곤 흠칫했다.
“믿을 수 없어···.”
한울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거울 속엔 눈썹을 살짝 덮는 머리칼, 남자치고는 예쁘장한 소년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그리고 한울은 그 모습이 자신의 현재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게 나라고?”
우스운 소리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울은 볼을 힘껏 꼬집었다. 아팠다. 알싸한 통증이 눈물을 찔끔 나게 할 만큼 아팠다.
믿기지 않는 소리지만 지금 자신은 한울이 아니었다. 이해했지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순간 멘탈이 나가 버린 한울은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아 버렸다.
‘맙소사···.’
* * *
2007년 8월.
무더운 여름.
내리쬐는 햇볕 아래 한 소년이 정차하는 버스에 탑승했다.
이름은 강무령. 두 달 전, 그 소년의 몸엔 한울의 영혼이 스며들었다. 버스 안은 한적했다. 한울은 빈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땐 ‘이름 한 번 촌스럽구나’ 하며 우스워했다. 하지만 곧 그 이름을 평생 안고 가야 한다는 게 자신이라는데 새삼 암울해졌다.
비단 이름 탓만이 아니다.
무령이라는 낯선 소년의 몸으로 눈뜬 한울은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힘든 적응기를 거쳤다.
처음 눈뜬 그 날 한울은 할머니, 문운선과 함께 개인 병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는 종합 병원 원장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토로하며 울분을 토해냈다.
그 결과 한울은 ‘편집증’이라는 진단명을 받았다. 이에 한울은 흥분에 겨워 책상 위에 있던 명패를 집어 던지며 난장을 부렸다.
그렇게 그는 병결로 두 달간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그는 수없이 자살을 떠올렸다. 이대로 확 죽어 버리면 다시 본래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편집증, 즉 한순간 정신병자가 된 손자를 극진히 보살피는 문운선 때문이었다.
‘아야, 우리 강생이 배고프제? 할미가 죽 끓여왔다.’
“강생이 빨리 나아서 다시 친구들이랑 뛰어놀고 해야지. 할미는 공부 잘하고 그런 거 안 바란다. 그냥 우리 강생이가 건강하고 잘 크면 된데이.”
그렇게 말하는 문운선의 인자한 눈빛에선 그 어떤 물질적인 바람도 없어 보였다.
그 순수한 애정에 한울은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먹먹한 감정마저 느꼈다.
무령은 삼대독자였다. 소년의 아버지 강병재는 목수로 수도권에서 공사판을 전전하며 매달 문운선에게 양육비를 보내면서 지냈다. 무령이 아버지를 만나는 날은 1년에 손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리고 어머니 권미야는 무령이 3살 때 강병재와 합의 이혼 끝에 새 삶을 찾아 떠났다.
이제 17세가 된 무령은 어머니에 관해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한울은 그 사실을 일기장을 통해 알았다. 책꽂이에 빼꼭히 채워진 수십 권의 일기장은 7살 때부터 지금까지 약 10년간의 기록이 채워져 있었다.
마치 서사시 읽는 듯한 기분.
거기엔 아버지를 만났던 날과 언젠가 할머니에게 큰 집을 사주겠다고 약속한 일화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모르겠군.’
한울, 아니 무령은 눈을 감고 미간을 찡그렸다.
소년과 달리 한울은 가족이 없었다. 천애 고아로서 태어난 그 순간 어머니의 품을 떠나 교회에 마련된 베이비 박스에 버려졌다.
본래라면 조사를 거쳐 보육원에 보내졌겠지만, 목사 양철중은 어째선지 철제 박스 안에서 울고 있는 자신을 양자로 거두었다.
그리고 열 살이 됐을 때, 한울은 목사 양철중과 함께 프랑스 빈민가 페르피냥에 이민했다.
양철중은 그곳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한울이 15세가 되던 그해, 갑작스러운 심근 경색으로 숨을 거뒀다.
‘무뚝뚝한 양반이었지.’
양철중은 한울에게 무관심했다. 마치 서로를 마주 보고 큰 벽이 세워져 있는 것만 같았다. 한울은 그와 단 한 번도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양철중 역시 필요한 말들만 건네는 게 대화의 전부였다.
한울이 14세가 되던 날, 우연히 모나코 스카우트 제르망의 눈에 들어 유소년 아카데미에 입단하게 되었을 때도 ‘수고했다.’ 이 한 마디가 다였다.
그때의 표정조차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양철중이 죽고 나서 한울은 슬펐다. 하지만 대성통곡할 만큼은 아니었다. 자신을 구제해 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엔 어떤 무언가가 크게 결여됐던 것도 분명하다.
‘어쩌면 난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던 건지도 몰라···.’
짧고도 긴 두 달 동안, 문운선의 극진한 보살핌에 무령은 마음속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중요한 무언가가 깨어난 기분이었다.
가족.
아무런 대가 없는 애정이 스며든 가족이란 단어, 바로 그것이다.
특히나 문운선의 애정은 아버지 강병재과 비교해 봐도 남다른 수준이었다.
‘3살 이후로 쭉 곁에서 보살펴 주셨구나.’
강병재는 두 달 혹은 석 달에 걸쳐 공사 현장을 옮기는 판에 한 곳에 계속 거주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무령을 문운선에게 맡겼다.
‘달라.’
무령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덧 버스는 목적지까지 한 정거장을 앞두고 있었다.
양철중과 문운선이 대하는 방식은 확연히 차이가 날 정도로 달랐다.
문운선은 무령을 애정으로 대했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손자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을 정도니까.
반대로 양철중은 보금자리를 주고 굶지 않게 인스턴트 식품을 사다 준 게 전부였다.
한울이 무얼 하든 양철중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선교 활동에만 전념했을 뿐.
그때였다.
[지금 정류장은 경남예술고등학교, 경남예술고등학교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집현, 집현입니다.]
스피커에서 안내 멘트가 나오자 무령은 정차 버튼을 꾹 눌렀다. 한울이 이 몸을 차지하기 전의 무령은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 아니었다. 경남예술고등학교라 하면 진주에서도 알아주는 특목고였지만, 아쉽게도 무령은 예술고등학교 진학생도 아니다.
‘대동고등학교라···.’
경남예술고등학교에서 1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대동고등학교, 그곳은 실업계였다. 그리고 양아치들이 판치는 곳이기도 했다. 교복만 봐도 7080세대의 검정 교복이라 위압감을 풍긴다.
정류장에 내려선 무령은 손가방을 어깨에 들쳐 멘 채 어슬렁거리며 걸어가는 무리를 보곤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 몸뚱이의 원래 주인은 조용한 편이었지. 그것도 심각할 정도로.’
무령이 병결로 결석한 시점은 딱 방학 하루 전날. 그래서 실제로 무령이 결석한 횟수는 고작해야 2주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무령에게 안부 차 찾아오거나 연락한 학생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재밌겠어.’
새로운 생활에 관해 기대감에 무령은 가슴이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 * *
진짜 무령은 상당히 조용한 편에 속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평소 반 학생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처음 몇 주는 몇몇 반 친구들이 먼저 다가와 축구를 함께하길 제안하기도 했다. 남녀 공학이긴 하나 여성의 비율이 1:30 수준인 이곳에서 남자들은 땀을 흘리고 부대끼며 친해지길 선호했다.
하지만 무령은 그런 활달한 성격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축구엔 일절 관심도 없었다.
‘실업계, 그것도 진주시 촌구석에 박힌 학교에 인조 잔디가 깔려있다는 건 꽤 좋은 소식이야.’
무령은 교문 너머 푸른 필드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 나이 때쯤은 대부분 축구에 열광한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기점부터 대중들의 축구에 관한 관심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남녀노소 불문하고 대한민국에 축구라는 스포츠의 인기를 끌어올린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물론 1979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엄청난 클래스를 보여준 차범근이 첫 번째였겠지만 인터넷 문화가 차츰 발달하기 시작한 2000년대 초에 들어와 그 바통을 이어받은 이는 한울이었다.
한울은 1999년 모나코에서 아르센 벵거의 부름을 받아 아스널에 입단했다. 14번을 달고 뛴 한울은 7시즌 연속 20골 이상을 기록하며 아스널의 킹이라 칭송받았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린 꿈나무들이 한울을 멘토로 삼았다는 기사가 나돌 만큼 그는 명성을 크게 얻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나아가 유럽에서조차 대단하다고 입 모아 말하던 그 기록은 쥐구멍에 숨어들기라도 한 것처럼 깔끔히 사라졌다.
‘한울에 관한 기삿거리가 하나도 없었어.’
처음 무령은 두 눈을 의심했다.
프랑스 리그를 호령하고 EPL에 진출해 월드 클래스의 반열에 오른 한울이었다. 그런데 기사가 단 하나도 없다니··· 그로서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2007년 3월 빅 벤에서 벌어졌던 테러에 관한 기삿거리도 찾을 수 없었다. 더불어 한울이 그 잔해에 깔려 섬뜩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두 눈 크게 뜨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뭐가 어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아예 사라진 것만은 분명해. 하지만 한 가지는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무령은 살포시 미간을 구겼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아스널의 14번은 한울이 아닌 티에리 앙리였다. 그는 프랑스 국적의 공격수다.
그리고 무령은 그를 부정했다. 티에리 앙리는 1999년 모나코에서 아르센 벵거의 부름을 받아 아스널에 입단했다. 이전의 한울과 도플갱어로 비유될 만큼 일생이 똑같았다. 딱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2004년 세브첸코를 누르고 발롱도르를 수상했던 자신과 달리 앙리는 아직 수상하지 못했다는 점.
그런데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다.
동영상 플레이를 통해 수십 번도 더 앙리의 플레이를 관찰해 왔다. 그리고 동영상 속 거너들은 한울이 아닌 티에리 앙리를 킹이라 찬양했다. 뭔가 해낼 것만 같은 기대감과 신뢰 깃든 외침을 들을 때면 괜스레 거너들에게 배신감이 차올랐다. 하지만 무령은 수십 번의 관찰로 앙리가 아스널의 킹이라 불릴 만한 재목이라고 인정했다.
‘오프사이드 선상에서 감각적으로 침투하는 것부터 스피드, 드리블, 무게 중심 등 모든 것을 고루 갖춘 무결점 스트라이커야. 유연성과 동료와 주고받는 연계 능력은 나보다 한 수 위일 정도고.’
단점이라면 건장한 체격에 반해 헤더 경합이 턱없이 취약하다 정도일까.
확실한 건 전성기 시절의 자신과 비교해 봐도 전혀 모자람 없는 선수라는 것이다.
‘아니, 조금은 나보다 모자라. 전성기 시절의 난 최고였으니까.’
무령은 자찬했다.
기량이 만개했던 03/04 시즌엔 당시 AC 밀란에서 뛰던 득점 기계, 안드리 세브첸코를 누르고 발롱도르까지 수상한 한울이다. 나아가 아스널의 무패 우승을 이룬 주역으로 발돋움한 그는 리그뿐만 아닌 세계에서조차 최고의 선수라고 불렸을 정도다.
그때 당시 팀의 구성원은 축구사상 역대 최고의 팀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섀도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라 불리던 데니스 베르캄프부터 아스널의 스타 로베르 피레, 프랑스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아스널 전성기의 주역이라 하면 한울과 함께 제일 먼저 거론되는 파트리크 비에라까지.
당대 내로라하는 최고의 선수들과 한울은 어깨를 나란히 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영광은 이젠 오직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유영하듯이 떠다녔다.
‘··· 지금 상황만 놓고 보면 나 스스로에 관한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야. 내가 정말로 편집증을 앓는 게 아닌가 하는···’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했다. 역대급이라는 기록도 존재하지 않았고 어깨를 나란히 했던 베르캄프, 비에라, 피레의 곁에는 한울이 아닌 티에리 앙리가 함께였다.
“후우.”
무령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그간 쌓아온 커리어가 한순간 이 세상에서 증발했다. 정상인이라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와 명성 모든 게 의식을 차린 순간 몽땅 날아가 버렸으니까.
이는 분명 신의 농간이다. 그렇지만 투정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자신은 한울이 아닌 무령이 되어 있었으니까.
이제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한울을 붙들고 있는 것보단 새로운 미래를 그려 나가는 데 주력해야 할 시점이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니 꽤 고단한 나날이겠지만 말이야.’
걷는 내내 들끓던 머리가 차츰 차갑게 식었다.
무령은 학교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교무실로 향했다.
“그래. 이제 몸은 좀 괜찮은 거니?”
어느덧 무령은 눈앞의 선생님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합니다. 걱정 끼쳐 죄송했어요.”
나영미는 눈앞의 무령을 보며 내심 안도했다. 2년 차 기간제 교사인 그녀는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에 따른 불안감을 항상 안고 있었다. 특히 그녀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담임을 맡으면서 초조함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을 정도다.
자신의 반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 순간 정규직 교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수군덕대며 비꼬았기 때문이다.
‘역시 기간제는 기간제야. 어찌 애 하나를 제대로 못 잡아?’
‘그래서 기간제에서 못 벗어나는 거야. 조만간 또 사고 터진다. 한 번 잠자코 기다려 봐라.’
나영미는 매일같이 그런 비아냥거림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가끔은 무령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왜 하필 자신이 담당하는 반 학생이 된 거냐며 혼자 방구석에서 술을 먹고 눈물을 훔친 적도 있었다.
“그럼 저 이제 가봐도 될까요?”
나영미가 아련한 시선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만 보자 무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에 나영미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아, 그, 그래. 아니, 선생님이랑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을까? 2주 동안 못 봤으니 다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친구들에게 인사하는 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무령이 도중에 말을 끊었다. 나영미의 시선에선 다소 건방지게 보일 수도 있는 태도였다. 그러나 나영미는 훈계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워했다.
평소 자신이 알던 무령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전의 무령은 자신의 질문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반 아이들과 어울리기는커녕 혼자서 고독을 즐기는 것처럼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기 일쑤였다. 학교 내에선 벙어리라는 소문이 오갔을 만큼.
“그, 그럴래?”
무령은 당황한 나영미의 모습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이내 교무실을 벗어나는 무령의 뒷모습을 보며 나영미는 헛것을 본 사람처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드디어 사춘기가 끝났나···?”
* * *
드르륵.
교실 문을 열자 익숙지 않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흠집이 잔뜩 난 나무 책상이 교탁을 기준으로 삐딱하게 있고 좌측 벽면엔 철제 수납장이 떡하니 있었다.
한울에게 이곳은 낯선 공간이었다. 그는 페르피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곤 그 이후부턴 축구에만 매진했기 때문이다. 공통점이라면 친구 관계였다. 한울이었을 때 그 역시 많은 친구를 사귀지 않았으니까.
“어? 무령이다.”
“쟤 몸이 안 좋다고 한 것 같았는데 드디어 왔네.”
“듣기론 머리에 좀 문제가 있었다던데?”
반 학생들이 무령의 존재를 인식하고부터 자기들끼리 수군덕대기 시작했다. 무령은 가볍게 무시하고서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찾아 수납장을 열었다.
슬리퍼로 갈아 신은 무령은 딱 한 자리만 유독 깔끔하게 비워진 것을 보며 눈을 빛냈다.
‘저기가 내 자리였구나.’
그렇게 앉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등 뒤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드디어 납셨네.”
“···.”
일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에 아무렇지 않게 손을 얹었다. 무령은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며 뒤돌아보았다.
짧은 머리칼에 17살치고는 상대적으로 큰 키, 햇볕에 잘 그을린 피부를 지닌 소년이 무령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 주호?’
무령은 곱씹으며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떠올렸다. 진짜 무령이 써놓은 일기장엔 몇몇 학생들에 관한 이야기도 곁들어 있었다. 특히 눈앞의 이주호는 일기장에 자주 호명되던 소년이다.
‘축구부 출신의 이주호··· 귀찮은 녀석이라고 일기장에 적혀 있었던 것 같아.’
“몸은 좀 어때? 이제 좀 괜찮아?”
이주호의 물음에 무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해.”
“··· 어?”
순간 이주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령은 왜 이주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일기장 내용을 보면 이주호는 시시때때로 무령에게 다가가 친근한 척 대화를 유도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령은 일체 무시하며 자기 할 일만 했다. 할 일이라고 해봤자 독서 혹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 것밖에 없었지만.
진짜 무령은 이주호의 끊임없는 관심에 자신의 시간이 빼앗긴 기분이 든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일기장엔 이주호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뤘다. 멍청이니, 눈치가 없다니, 일부러 스트레스를 주려 한다는 등, 그때의 격앙된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을 정도다.
“입학 이후로 처음이네?”
이주호는 다소 신기하다는 눈길로 입을 열었다. 무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너, 말하는 거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 보는 것 같아서 말이야. 거기에다 내 대화에 응해줬어!”
“물어봐서 답한 것뿐이야. 크게 해석하지 마.”
무령은 살포시 미간을 구겼다. 이주호의 눈길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하게 빛났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교실 뒷문이 열리고 불량해 보이는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는 다소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외쳤다.
“야, 이주호!”
이주호는 어깨를 움찔 떨며 뒤돌아보았다.
“왜?”
“오늘 점심때 축구 한판 붙자.”
“왜, 어제 진 게 분해서?”
능청스러운 이주호의 물음에 소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젠 우리 측 애들 주전 몇 명이 빠진 채로 붙어서 그래. 그러니 이번엔 달라. 우리가 확실하게 발라줄 테니 한판 붙어보자고.”
이주호는 혀를 차며 검지 끝을 좌우로 까딱였다.
“대결에 응하려면 뭔가 좋은 걸 걸어야 할 것 같은데?”
“이익! 그래, 좋아. 매점빵! 어때?”
“매점빵은 당연한 거고 너희들이 대결을 신청했으니 우리 반에 혹할 만한 무언가를 줘야 할 거 아냐.”
무령은 가만히 그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교실 뒷문 앞에서 거들먹거리던 소년은 이주호의 제안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그, 그건 우리 반 애들한테 물어보고 결정해야 해.”
“너희 반이 아니고 백돌한테 물어보는 거겠지. 걔가 대빵이잖아. 그리고 내가 아는 백돌은 당연히 내 제안에 응할 것 같은데?”
백돌은 대동고 축구부의 부주장이었다. 고작 열일곱 살의 나이에 2학년, 3학년 선배들을 제치고 부주장에 올랐다는 건 그만큼 실력과 리더십을 갖췄다는 소리였다.
아마 싸움도 잘할 것이다.
‘백돌에 관한 일화도 꽤 있었어.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2학년 선배를 때려 눕혔다지.’
우스웠다. 평소에 주변 학생들에게 비춰온 무령은 무뚝뚝하고 말 없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무령은 한 번씩 화젯거리를 터뜨린 아이들에 한해선 마치 소설가가 된 것처럼 일기장을 빼곡히 채웠다.
‘전지적 작가 시점, 뭐 이런 거냐.’
진짜 무령이 어떤 생각을 품었는지 일기장을 통해 모두 본 무령은 그만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좋아! 백돌한테 말해서 점심에 아이스크림 쏘는 거로 할게. 됐지?”
결국, 불량소년은 이주호의 꾐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이주호는 흔쾌히 응하며 그 즉시 뒤돌아 무령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너도 같이 뛸래?”
# 축구부에 입부하다
대동고등학교는 축구로 그리 크게 알려진 학교가 아니었다. 축구부를 신설한 지 고작 3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많은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고 선수 수급에 있어 대체로 평범한 수준의 학생들이 지원을 해왔다. 자연스레 높은 성적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무령은 이주호의 제안대로 축구에 참여하기로 했다. 점심시간은 딱 한 시간.
내기에 참여한 학생들은 곧장 인조 잔디 구장으로 향했다.
무령도 썩 배가 고프진 않았기에 이주호를 뒤따랐다.
“입학하고 처음이네.”
이주호가 학교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무령은 그 말의 의미를 그새 파악하고선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그렇지.”
한울에게 프로 선수가 아닌 아마추어, 그것도 유소년에 해당하는 고등학생을 상대하는 건 다소 지루한 일이다. 이미 EPL에서 7시즌 동안 활약한 그로서는 당장 K-리그에 입단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굳이 이번 내기 게임에 참가한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몸 상태가 어떤지 알아야겠어.’
일기장을 토대로 본 진짜 무령은 운동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독서를 좋아하고 인디 음악을 듣는 것을 선호하며 혼자서 주변을 관찰하거나 상상하는 걸 좋아하는 학생.
그게 전부.
딱히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없었고 미래에 대한 꿈같은 것도 가지지 않았다. 그저 문운선에 관한 애정과 이루지 못할 큰 집을 선물해 함께 살아가겠다는 헛된 망상만 그려나갔을 뿐.
‘이게 말로만 듣던 중2병이라는 건가···.’
인조 잔디 구장엔 스무 명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각자 몸을 풀거나 한 데 모여 수다를 떨었다.
“자, 축구화”
이주호는 구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무령에게 축구화를 건넸다.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만 보자 이주호는 머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축구화 없을 거 같아서 옆 반에서 빌려 왔어. 270mm인데 발 사이즈가 맞을지는 모르겠다. 뭐, 안 맞으면 또 빌려 오면 되는 거니까.”
“그래, 고맙다.”
무령은 자신의 발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곧바로 이주호에게서 축구화를 건네받았다. 이에 이주호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뭔가 이상하네. 네가 이렇게 나한테 살갑게 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은 똑바로 하자. 살갑게 대하진 않았어.”
다소 차갑게 사실을 일러 준 무령은 신발을 갈아 신기 위해 근처에 있던 벤치로 다가갔다. 이주호는 그 쌀쌀맞은 태도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잃지 않았다.
“포지션은 어디가 좋아?”
어느새 강아지처럼 졸래졸래 따라와 질문하는 이주호에게 벤치에 앉은 무령은 살포시 눈썹을 늘어뜨렸다.
“뭐든 좋아. 수비도 좋고 골키퍼도 상관없어.”
“축구는 해봤어?”
그 물음에 무령은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한 번도 안 해봤어.”
지금 자신은 한울이 아닌 무령이었다. 그리고 무령은 단 한 번도 축구를 해본 적이 없었다. 더불어 자신 또한 현재 이 작은 소년의 몸에 익숙지 않았기에 그렇게 답변한 것이다. 이주호는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러면 왼쪽 수비수를 맡아 주면 되겠다. 센터백에 그나마 좀 뛸 줄 아는 녀석을 배치하면 되니까. 그리고 크게 부담감은 가질 필요 없어. 져도 상관없으니까.”
무령은 대답 대신 몸을 숙여 운동화를 벗고 축구화로 갈아 신었다.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무령의 태도에 이주호는 눈동자를 굴리며 뺨을 긁적거렸다.
“일단 난 애들이랑 이야기 좀 하고 있을게. 준비 다 되면 내 쪽으로 와.”
그렇게 말하고서 이주호는 단상 아래 학생들이 모인 곳으로 뛰어갔다.
* * *
무령의 키는 대략 173cm, 몸무게는 60kg였다. 축구를 하기엔 다소 왜소한 체격이다. 특히 거친 EPL에서 뛰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피지컬.
물론 키가 작더라도 세계 4대 리그라 불리는 프리미어 리그, 라리가, 분데스리가, 세리에 A에서 활약하는 엄청난 선수들도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영국 출신인 션 라이트 필립스.
그는 맨체스터 시티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2005년 첼시로 이적한 선수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그의 신체 조건이 고작 166cm, 64kg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록 첼시로 이적한 후 데미안 더프, 아르연 로번, 조 콜과 같은 정상급 선수들과의 주전 경쟁에서 밀려 주로 서브 자원으로 활용되어 온 그다. 그러나 특유의 빠른 발과 남미 선수 못지않은 발재간을 지니고 있어 수비 뒷공간을 파고드는 돌파력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났다.
한때 제2의 베컴이라 불렸을 만큼 영국에서 거는 기대감도 컸을 정도.
그러나 한울은 그런 유형의 선수가 아니었다. 186cm의 큰 키에도 불구하고 유럽 4대 리그를 통틀어 빠른 스프린트를 구사하는 것만은 비슷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뛰어난 장기는 공중 장악력이었다. 로베르 피레, 지우베르투 시우바의 크로스를 헤더로 따 골을 결정짓는다. 최전방에서의 그는 뛰어난 결정력으로 공격의 마침표를 찍는 선수였다. 또한, 압도적인 피지컬로 상대 진영의 수비수들을 무참히 부수는 것을 즐겼다.
이내 무령은 자신의 현재 신체에 한탄하며 짧게 탄식했다.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기를 비는 수밖에 없겠군···.’
시간에 쫓기듯 상대 팀의 학생들은 각자의 위치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주호는 경기가 시작되기 직전 반 아이들을 한곳으로 집결시켰다. 조금 전의 천진한 미소와 달리 그는 열띤 얼굴로 팀원들을 돌아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제와는 확실히 달라. 상대 팀엔 백돌이랑 김영광, 김승빈이 합류한 상태니까. 우리가 패배할 공산이 크지만, 그렇다고 탈탈 털리기엔 쪽팔리니까 최선을 다하자고.”
방금 이주호가 말한 세 명의 선수는 모두 대동고 축구부원이었다. 김영광은 빠른 발을 주력으로 하는 공격수, 김승빈은 중앙 미드필더, 그리고 백돌은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축구부 부주장이었다.
무령은 눈길을 돌려 한곳을 빤히 응시했다. 그곳엔 184cm는 되어 보일 듯한 큰 키, 축 쳐진 눈매의 남자가 제 자리에서 간단히 몸을 풀고 있었다. 겉보기에도 탄탄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저놈이 백돌이군. AFC 19세 이하 팀으로도 뛰었다지.’
비록 로테이션 멤버였지만 대표 팀에 승선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클래스가 남다른 존재였다.
바로 그때 백돌의 시선이 무령의 시선과 교차했다.
‘음?’
백돌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무령을 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새로운 멤버인가?’
처음 보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왜소한 체격에 선이 고운 무령은 한눈에 봐도 축구의 축 자도 모르는 애송이처럼 보였으니까.
‘축구 할 사람이 그렇게도 없었나 보군.’
이내 백돌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무령은 시선을 먼저 피해 버리는 백돌에 살짝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그의 마지막 눈길엔 명백한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이것 봐라?’
무령은 입가에 실소를 머금기까지 했다. 서른한 살 평생을 살아오면서 고작 고삐리에게 그런 비웃음 담긴 시선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주호의 전술 설명은 끝이 났다. 동료들은 각자의 위치로 이동했고 무령은 느긋한 걸음으로 왼쪽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곧 경기가 시작되었다.
무령은 눈대중으로 상대 팀의 포메이션을 확인했다.
‘겉으론 4-4-2 형태지만, 자세히 보면 4-2-3-1 형태의 공격적인 전술이야.’
최전방엔 김영광이 바로 그 아래엔 김승빈이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도맡았다. 그리고 포백 바로 앞엔 백돌이 벽처럼 버티고 서있었다.
전반 15분.
이주호는 동료의 패스를 받아 하프라인에서부터 질주를 시도했다. 그때 순식간에 달려온 백돌에 부딪쳐 그만 볼품없게 넘어졌다.
후방 지역에서 이를 본 무령은 두 눈을 빛냈다.
‘제법이군.’
반칙이라고 항변할 수도 없을 만큼 깔끔한 경합이었다. 단지 이주호가 백돌과의 피지컬 싸움에서 완전히 밀렸다고밖에 볼 수 없을 만큼.
무령은 아린 듯 왼팔을 감싸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주호를 보며 생각했다.
‘수준 차가 확실히 나는군.’
경기는 거의 일방적으로 전개되다시피 했다.
백돌이 공격을 차단하고 미드필더와 공격수 사이에 있던 김승빈에게 공을 연결한다. 이어 김승빈은 정비되지 않은 수비 사이 공간에 공을 찔러준다. 그 순간 김영광은 수비 뒷공간을 파고들어 골키퍼와의 1대1 찬스를 제공한다.
그렇게 골키퍼는 김영광의 슈팅에 반응도 하지 못하고 골을 허용해 버렸다.
1학년 1반은 사전에 이를 대비해 파이브백을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축구부원들의 팀플레이에 속절없이 포메이션이 붕괴하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20분 만에 3골을 내줬다.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20분.
이대로는 대패였다.
“민승아! 김영광 전담 마크해. 걔 꽁무니만 계속 따라붙어!”
이주호의 외침에 조민승은 헐레벌떡 김영광의 옆으로 달려가 붙었다.
“어쭈, 그러면 골 못 넣을까 봐?”
김영광은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의 조민승을 돌아보며 비아냥거렸다. 이에 조민승은 시뻘겋게 붉어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내가 맡을게.”
김영광은 아리송한 표정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왼쪽 구역을 책임지고 있던 무령이 느긋한 걸음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에 김영광은 조소를 머금었다.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죄다 쪼끄만 놈들투성이네. 어디 막아볼 수 있으면 막아보라지!’
22분.
김영광의 플레이 스타일은 빠른 발을 주력으로 수비수의 뒷공간을 뚫고 기회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곳 대동고에서만큼은 어떤 수비수든지 뒷공간을 뚫을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1학년 1반의 수비진은 거의 붕괴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뒤늦게 포지션 변경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김영광의 자만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치솟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건 변화가 있고 난 후 고작 2분 만에 일어났다.
백돌에게서 장거리 크로스를 받은 그는 곧바로 우측 사이드 라인을 타고 질주했다.
이에 맞춰 중앙 센터백에 있던 수비수 한 명이 잽싸게 달라붙었다. 예상했다는 듯 김영광은 페인팅 동작으로 가볍게 제치며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중앙으로의 침투를 노렸다.
난데없는 상황이 벌어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라?’
갑자기 누군가가 뒤쪽에서부터 백태클을 시도했다. 무엇보다 그 태클은 완벽했다. 오직 공만을 건드려 위기 상황을 모면했으니까.
뒤늦게 김영광은 발이 걸려 볼품없게 나자빠졌지만, 평소처럼 항의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정교하고도 깔끔한 태클에 저도 모르게 인정해버린 것이다.
그보단 자신에게 백태클을 성공시킨 사람이 누구인지 새삼 궁금했다. 그리고 고개를 든 순간 김영광의 얼굴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처음부터 무시하고 있던 무령이 어느덧 눈앞에 떡하니 서서 손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 무슨···!’
한순간 자존심이 바닥을 친 김영광은 무령의 손을 잡지도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이후로도 수차례 무령의 수비에 완벽하게 말려든 그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김영광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이주호는 전방에서 무령의 플레이를 관찰하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처음이라더니. 보기보단 제법이잖아? 아니, 여기 있는 애들 중에서도 태클 타이밍만큼은 가장 뛰어나.’
이주호는 생각했다. 무령의 현재 움직임은 둔한 편이었다. 자리에서 크게 이탈하지도 않았고 대부분 시간을 처음 지정해 준 그 위치를 사수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상대팀의 역습 상황 시 무령은 태세를 전환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표범처럼 웅크려 있다가 순식간에 김영광에게 이어지는 기회를 차단해버린 것이다.
‘무령이 아니었다면 벌써 3골 이상은 더 먹혔을 거야.’
김영광과 마찬가지로 백돌의 표정 또한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리고 두 눈동자에선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처음엔 꼽사리로 낀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어.’
그 시선은 센터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한 무령에게 못 박힌 듯했다. 백돌은 수비에 이어 빌드업에 능한 미드필더다. 공격수에게 공을 배급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AFC 19세 이하 팀에서도 정평이 날 정도로 예리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장기인 장거리 크로스가 축구부원도 아닌 고작 왜소한 체격의 소년에게 번번이 끊기고 있었다. 마치 가위로 잘라 내는 것처럼 아주 간단하게.
주위 학생들이 보기엔 김영광이 무령의 수비에 막혔다고 보지만 이는 틀린 판단이다.
백돌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3:0으로 이기고 있었고 반드시 이길 테지만 지금껏 무령과 1대1 대결에서 패한 자는 김영광이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말도 안 돼.’
딱히 태클을 제외하곤 눈에 띄는 동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태클이 백돌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치명타였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10분.
그 짧은 시간 안에 반격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 이제 이 싸움은 무령과 백돌의 대결이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이었다.
‘어디 누가 마지막까지 웃는가 보자고.’
그 순간 이를 악문 백돌이 수비 진영에서 이탈해 앞으로 달려나갔다.
* * *
백돌이 선택한 수단은 간단했다. 피지컬로 압살해 버리기. 소위 말해 기세를 죽여 놓을 참이었다. 백돌이 뛰쳐나오자 김승빈은 자연스레 전방에서 중앙으로 내려왔다.
치기 어린 승리욕이었다. 하지만 이는 대회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뛰어난 발재간으로 상대를 농락하는 선수를 향해 달려가 고의적인 반칙을 범하는 것.
상대 팀 동료들은 항의하겠지만 반칙을 당한 자는 본능적으로 위축돼 제대로 된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무령은 백돌의 자존심에 큰 흠집을 내고 말았다.
발재간을 부린 건 아니지만, 백돌은 그 이상으로 분개했다. 축구부 부주장으로서 이런 치욕은 두 번 다시는 없어야만 했다.
한편 무령은 썩 내키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몸뚱이··· 생각보다 구려.’
이전의 한울은 들소 같은 움직임으로 상대 수비진을 박살 내다시피 했다. 그런데 지금 몸뚱이는 그랬다간 오히려 자신이 나가떨어질 것만 같았다. 실제로 경기 초반 몇 번의 볼 경합에서 김영권의 피지컬에 밀려 수차례 엎어진 무령이다.
이에 무령은 방식을 바꿨다. 사전 길목을 차단하거나 스피드를 활용해 김영광을 뒤에서 공략하는 식으로.
그리고 예상대로 김영광은 속절없이 자신의 수비에 막혀 들고 말았다. 김영광은 씩씩대며 분개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불만족스러웠다.
‘내가 하고 싶은 플레이가 아니야.’
무령은 거칠게 몸싸움을 하는 것을 선호하는 스트라이커였다. 비록 수비수의 입장이긴 했지만 크게 다를 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대로는 무리다. 무엇보다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신체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운동을 안 했으면 얼마 뛰지도 못했는데 벌써 다리가 저린 거야.’
막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상대 진영에서부터 또 한 번 장거리 크로스가 올라왔다.
무령은 자신의 발 앞에 뚝 떨어지는 공을 보며 그대로 멀리 거둬 낼 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퍽!
백돌이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며 무령의 등짝을 어깨로 밀쳤다. 한순간 필드 위에 패대기쳐진 무령은 장기가 뒤흔들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두 눈을 치떴다.
“야 인마!”
멀찍이서 이 광경을 본 이주호가 버럭 언성을 내지르며 황급히 달려왔다. 백돌은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아아, 실수. 나도 모르게 흥분했나 봐.”
그러면서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무령에게 손길을 내밀었다. 무령은 살포시 미간을 구기며 백돌을 올려다보았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 눈빛만큼은 매섭기 짝이 없었다.
‘이놈, 일부러 그랬군. AFC 국대 출신이라 이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피식하고 웃음이 흘러나왔다. 백돌은 무령의 미소가 자신을 비웃는 것이라 착각하며 한쪽 뺨을 씰룩거렸다.
그리고 그때.
탁!
무령은 백돌이 건넨 손길을 가볍게 쳐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백한 거절 의사에 주위에 몰려들었던 아이들에게서 묘한 긴장감이 오갔다.
이주호는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두 사람 다 뭐하는 거야!”
그러나 그 시선은 무령이 아닌 백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백돌은 뺨을 긁적이며 눈살을 찡그렸다.
“사과하려 했어. 그런데 거절하지 뭐야.”
“너 그게 사과라고···!”
“정당한 경합이었어.”
이주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갑자기 무령이 그의 말을 잘랐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무령의 발언에 백돌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정당한 경합이었다고?”
“그래. 단지 난 몸싸움에서 밀린 것뿐이야. 그래서 꽤 과장되게 넘어진 것뿐이고.”
말을 하다말고 무령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다이빙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 사과는 내가 해야 하는 게 맞지. 미안해.”
“······.”
무령은 이주호를 지나쳐 백돌에게 선뜻 손길을 내밀었다. 겉으로 보기엔 정중한 사과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백돌은 이 역시 도발로 간주했다.
‘해보자··· 이건가?’
무령은 백돌의 두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왜, 애송이로 보였던 놈이 예상 밖의 행동하니 당황하기라도 했냐?’
무령은 이러한 더티 플레이에 이전부터 이골이 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울이었을 때 14세의 나이로 모나코 유소년 아카데미에 입단한 그는 인종 차별을 비롯해 갖가지 수모를 당하며 성장해 왔기 때문이다.
우선 낯선 동양인인 것부터가 문제였다. 세계 어디를 가나 인종차별주의자는 널리고 널렸다.
한울은 유소년 아카데미 내의 그 누구보다 실력이 출중했지만, 동양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선발 기회를 보장받지 못했다.
코치의 간곡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선발을 내세웠을 때도 당시 유소년 감독 ‘알랭 나단’은 한울을 벤치에만 앉혀 두기 일쑤였다.
포지션 훈련조차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주 포지션인 공격수가 아닌 수비수 혹은 골키퍼 훈련을 지시했다.
어쩌다 한 번 출전하게 되면 한울은 여지없이 고립되었다. 태반이 프랑스 자국 선수로 이루어진 유소년 팀에서 선수들은 한울을 무시하며 공간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패스조차 시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비교하면 지금 백돌이 자신에게 한 도발은 가소로운 수준이었다.
덥석.
백돌은 뜸을 들이다 말고 무령의 손을 맞잡았다.
“나도 앞으로 조심하지. 미안해.”
경기는 재개되었다.
흥분됐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된 백돌은 수비 지역으로 다시 위치하며 무령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이지? 저 정도 실력이면 적어도 진주시 안에서는 이미 입소문이 나고도 남았을 텐데···.’
혜성처럼 나타났다는 말이 딱 와닿는다.
그리고 지금 무령은 조금 전과 달리 수비 지역에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김영광은 고립되었다. 자신과 김승빈의 패스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 탓이다.
무엇보다 파이브백을 구축했던 수비수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엉성했던 이전의 움직임과 달리 수비수들은 일사불란하게 라인을 점거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엔 무령이 존재했다.
‘라인 컨트롤까지 주도한다 이건가···!’
백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본디 센터백은 경기를 읽는 흐름이 좋아야 한다. 또한, 상대측의 공격 루트를 사전에 파악해 라인을 주도하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수비수라 할 수 있었다.
이 역할에 가장 부합하는 대표적인 선수는 바르셀로나의 푸욜이었다.
푸욜은 완성형 수비수이자 오프사이드 트랩을 진두지휘하는 라인 컨트롤의 귀재다. 그의 파트너인 라파엘 마르케스가 바르셀로나의 알토란같은 역할을 할 수 있던 것도 옆에 푸욜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마르케스는 세트피스 시 전방으로 올라가 수차례 골 맛을 봤다.
푸욜의 뛰어난 수비 조율에 상대측 공격수들은 제대로 된 슈팅조차 시도하지 못했다. 가까스로 라인을 뚫었다 한들 오프사이드가 되어 진이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백돌은 눈앞의 무령을 보며 푸욜을 떠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경기 종료까지 7분이 남은 상황에서 김영광과 김승빈이 수비 지역에서부터 발이 꽁꽁 묶여 버린 것이다.
경기 초반을 기준으로 지금까지 슈팅을 15개 이상을 때렸다면 현재는 패스 줄기부터가 차단돼 공을 만질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분노를 넘어 경외감마저 들 정도다.
‘고작 몇 분 사이에 엉성했던 수비를 바로잡았다고?’
백돌은 저도 모르게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무령은 백돌과의 충돌이 있고 난 후 잠시 팀원들을 불러 모아 수비 지역에 변화가 필요함을 피력했다. 그 누구도 무령의 발언에 토를 다는 사람이 없었다. 불과 몇십 분 사이에 보여 준 무령의 축구 센스를 모두가 인정한 셈이다.
경기 초반, 상대팀은 뻥뻥 뚫리는 수비진에 슈팅을 난사하는 수준으로까지 치달았다.
이에 무령은 오히려 내려앉았던 수비 라인을 끌어올려 김영광과 김승빈을 가둬 버리는 공략을 펼쳤다.
경기 결과를 뒤집기는 무리였다. 그러나 이대로 꽁꽁 싸매 버리면 이 상태로 끝나는 것만으로도 상대팀 측의 몇몇 녀석들은 분개할 것이 자명하다.
예상대로 김영광과 김승빈은 오프사이드 트랩에 걸리거나 백돌과 동료들이 찔러주는 패스의 연결이 중앙에서부터 끊어져 고립되었다.
그렇게 남은 7분이 지나고 경기는 끝이 났다. 그리고 백돌은 인사치레도 없이 구장을 빠르게 벗어났다.
경기가 끝나고 난 뒤, 무령은 벤치에 앉아 꿀꺽꿀꺽 생수를 들이켰다. 그때, 이주호가 다가와 뜬금없이 어깨에 팔을 걸치며 친근한 척 굴었다.
“오늘 정말 대단했어. 졌지만 속이 다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고. 그런데 왜 축구 할 줄 모른다고 한 거야?”
“몰랐으니까.”
“응?”
“내가 잘할 줄 몰랐다고.”
정확히는 이 몸뚱이에 대한 의문을 품은 것이다. 그리고 짧게 뛰어본 결과 무령은 속으로 오만가지 욕지거리를 토해냈다.
‘벌써 온몸이 쑤시면 어쩌자는 거야. 게다가 1대1 몸싸움에선 종잇장 수준이야. 이런 피지컬로는 성인팀에서 뛸 수 없어.’
냉정한 자가 진단이었다. 유소년 팀에서 아무리 날고 긴다 해도 성인팀으로 올라간 순간까지 피지컬의 발전이 없으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일 수밖에 없다.
특히나 몸싸움 경쟁이 심한 EPL에선 피지컬이 없으면 살아남기가 힘들다.
‘키도 좀 더 커야 하고 근력도 늘려야 해. 물론 체력도··· 조금 뛴 거로 금세 숨이 차고 난리냐고.’
무령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훈련을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그러자 금세 이마가 지끈거려왔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라니···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무령으로 살아가기로 한 이상 변화는 필수 불가결이다. 그는 EPL로 복귀를 강하게 열망했다. 그것도 빅 4라 불리는 아스널로.
무령의 심장은 여전히 그곳을 향해 박동하고 있다. 거너들의 뜨거운 환호와 에미러츠 스타디움의 압도적인 열기는 그 어떤 스타디움에서도 볼 수 없는 활화산과도 같았다.
무령은 다시 한번 아스널의 팬들에게 킹이라 칭송받는 것을 상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기필코 돌아가고 말 테다.’
* * *
수업 종이 울리고 나머지 7교시가 모두 끝났다. 반 학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메고 교실 문을 벗어났다.
하지만 무령은 잠자코 앉아 미간을 구깃거리고 있었다.
‘이놈의 몸뚱이···.’
불과 몇 시간 사이에 근육통이 찾아왔다. 허벅지는 터질 듯이 비명을 질렀고 허리를 숙이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하. 신의 농간이라도 이건 너무하잖아.’
마치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그것도 걸음마조차 떼지 못한 갓난아기.
“같이 갈래?”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난 무령은 껌딱지처럼 달라붙는 이주호를 돌아보며 얼굴을 와락 구겼다.
‘어째서 일기장에 이 녀석에 대한 온갖 비난 글이 쓰여 있었는지 알겠어.’
이주호는 자신을 빤히 노려보는 무령을 보며 아리송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보다 가방 좀 들어 줄래?”
“무리했구나. 어쩐지 아까부터 표정이 좋지 않더라니.”
이주호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무령의 가방을 들어 주었다.
무령은 그런 이주호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태생이 착한건 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군.’
그렇게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드르륵.
뒷문이 열리고 일단의 무리가 교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뭐야?”
이주호가 다소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어느새 눈앞에서 거들먹대는 무리들을 노려보았다. 그때 그들 사이를 비집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너한테 볼일 없어.”
“··· 백돌?”
이주호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뒤편에 서 있던 무령은 한층 가라앉은 눈길로 백돌을 응시했다.
“나랑 얘기 좀 하자.”
백돌은 이주호를 가볍게 무시하며 다짜고짜 무령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에 이주호는 발끈하며 턱을 추켜세웠다.
“그냥 나랑 이야기하지?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넌 빠지라고 했다.”
“왜, 네 장기인 크로스가 무령이한테 막혀서 보복이라도 하려고? 반 친구로서 그 꼴은 내가 가만히 볼 수 없을 것 같은데?”
“그것 때문에 온 거 아니니까 그냥 빠져.”
그렇게 말한 백돌은 가차 없이 이주호를 옆으로 밀쳤다. 방심하고 있던 탓에 이주호는 크게 밀려나며 벽에 부딪혔다.
“이 새끼가···!”
순간 참지 못한 이주호는 활어처럼 튕겨 나오며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바로 그때였다.
“멈춰.”
무령의 그 한 마디에 이주호는 백돌의 한 치 앞에서 주먹을 멈췄다. 그리고 그는 백돌을 매섭게 노려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허튼짓했다간 가만 안 둔다.”
사나운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이주호의 협박에도 백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령은 차가운 눈길로 백돌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뭐지?”
“너 말이야···.”
백돌이 말했다. 그러고서 약 1분간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소 뜸을 들이는 그 모습에 무령은 살포시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간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백돌은 입을 닫았다 벌리기를 반복하던 끝에 푹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혹시 축구부 입단 테스트해 볼 생각 없어?”
* * *
백돌의 난데없는 제안에 무령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찬가지로 옆에 있던 이주호 역시 놀란 얼굴로 입을 떡하니 벌렸다.
“입단 제안이라고?”
이주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 순간 그는 백돌이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주호는 백돌과 함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동창생 출신인 질긴 인연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돌의 성향이 어떠한지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았다.
고등학교 입학 초 건방 떤다며 시비를 건 2학년 선배를 때려눕힌 백돌은 순식간에 대동고의 화제 인물로 떠올랐다. 물론 그전부터 학생들 사이에선 축구 실력으로 유명했던 녀석이다.
‘무슨 꿍꿍이지?’
이주호는 백돌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고 타협보다는 투쟁을 통해 무조건 상대를 꺾으려 드는 성향을 지녔다. 그래서 이주호는 백돌이 자신의 장기인 장거리 크로스를 간단히 차단한 무령에게 해코지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너, 혹시 더위 먹었냐?”
이주호의 다소 진지한 질문에 백돌은 얼굴을 붉혔다. 그 또한 이러한 상황이 굉장히 낯설었다. 누군가를 인정하고 축구부 동료로서 함께 해주겠냐는 말을 건넨 것이 그로서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고작 한 경기만으로 판단한 것도 어쩌면 착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백돌은 무령의 플레이를 관찰하며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묘한 무언가를 느꼈다.
분노에서 경외감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심장이 살아서 뛰고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드디어 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머릿속에 차가운 얼음이 퐁당 빠져든 것처럼 알알하면서도 시원했다. 여전히 심장은 방방 뛰기 바빴다. 고양감에 휩싸일 때의 기분이 딱 이러할까.
무령은 입매를 느슨하게 늘어뜨리고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 차가워 보이기까지 한 시선에 백돌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좋아.”
긴 정적 끝에 무령은 입을 열었다.
무령의 결정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대동고 축구부를 통해 프로 리그 데뷔를 위한 발판으로 삼기로.
단지 시간을 끌었던 것은 미래를 대략적이나마 머릿속으로 곱씹었기 때문이다.
‘곧 백록기 전국 고교 대항전이 열린다지. 그때 활약을 해서 관계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으면 되겠어.’
최종 목표는 변함없다. 세계 최고가 되는 것. 그러기 위해선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무대가 준비되어야만 했다.
무령은 생각했다. 제주도에서 열리는 전국 고교 축구대회인 백록기야말로 무령이 딱 원했던 규모의 대회라고.
프로축구연맹 규정상 대한민국에선 만 18세부터 프로 계약이 가능하다. 그래서 무령이 암만 뛰어난 활약을 펼쳐도 K리그의 데뷔는 어려웠다. 이 때문에 떡잎부터 다른 유망주들은 대부분 해외 리그로 이적했다.
K리그 관계자들의 눈에 들면 해당 클럽과 협약한 명문 고등학교의 유스 팀에 입단할 가능성이 높다. 예로 전남 드래곤즈와 협약을 맺은 고등학교는 광양 제철고이듯이.
이외에도 재능이 있는 유소년들에 한해선 대한축구협회가 유학까지 보내주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무령은 후자를 노렸다.
‘협회 측에서 아스널 같은 빅 클럽과 연계시켜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나마 가장 나은 방식이니까. 최고 좋은 건 유럽 스카우트들이 이번 대회에 스카우트하러 오는 건데 말이야.’
그러나 유럽 스카우트들이 이번 백록기 대회에 방문할 가능성은 작았다. 축구로만 치자면 메마른 사막과도 같은 대한민국에 비싼 돈 들여가며 굳이 방문할 리가 없으니까.
‘우선은 발판부터 마련해야지.’
이틀 뒤, 주말.
무령은 백돌과 함께 대동고 감독인 이광수를 찾아갔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부원들은 이번 백록기를 대비해 한 사람도 빠짐없이 훈련에 참여했다.
그리고 이광수 감독은 단상 위 철제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의 시선은 콘을 이용한 패스 훈련에 몰두하고 있는 부원들을 향해있다. 그러면서도 간간이 한 손에 들린 휴대폰 속 게임 화면을 힐끔거렸다.
“감독님.”
이광수는 등 뒤에서 들려온 부름에 움찔 어깨를 떨며 황급히 휴대폰 폴더를 닫았다. 뒤를 돌아보자 백돌이 서 있었다.
“어, 백돌이 왔구나.”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광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휙휙 내저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어차피 기본 훈련하고 난 뒤에 연습 경기할 예정이었으니까. 그보다 뒤에 있는 애는 누구냐?”
이광수는 백돌의 덩치에 완전히 가려진 무령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의문을 던졌다. 백돌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강무령이라고 합니다. 이번에 축구부 입단 테스트 좀 봐주셨으면 해서요.”
“입단 테스트라고···?”
순간 이광수는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눈앞의 소년은 암만 봐도 축구와는 담쌓은 아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말 그대로 희멀건 소년이었다. 햇볕 한 번 쬔 적 없는 듯 허약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강무령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무령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이광수는 한쪽 뺨이 씰룩거리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저기, 미안한 소리지만 우리는 중등부가 아니라 고등부인데? 이번 백록기도 고등부만 참여할 수 있고···.”
“무령은 고등학생입니다. 저희 대동고 1학년 1반이죠.”
“아아, 그래? 그것참··· 뭔가 고등학생치고는···.”
“형편없죠.”
난처한 얼굴로 말을 질질 끄는 이광수를 보며 무령은 예상했다는 듯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 느닷없는 발언에 백돌이 당황하며 무령의 어깨를 팔꿈치로 툭 하고 건드렸다.
이광수는 의외의 대답에 조금은 호기심이 동했다. 무령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바가 다가 아닙니다.”
이광수는 뺨을 긁적거렸다.
“축구는 피지컬적인 요소가 꽤 중요한 종목이야. 축구 인생만 어언 30년을 살아온 나다. 딱 보면 안다고. 저런 흉흉한 녀석들을 네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이광수는 일부러 무령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빈정거렸다. 그가 가리킨 검지 끝엔 인조 잔디 위 콘을 이용한 패스 훈련을 하는 선수들이 있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그들 모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숨을 헐떡거렸다.
곧 무령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쟤들이 저를 감당하지 못할 거예요.”
그 거만해 보이기까지 한 말을 듣는 순간 이광수는 허벅지를 탁 치며 크게 웃었다.
“하, 하하! 웃긴 녀석일세! 백돌이 데려온 이유를 알겠구먼. 그래, 깡다구 하나는 인정하마. 하지만 방금 그 말 확실한 거냐? 아니면 단순히 어린아이의 치기냐.”
이광수의 시선은 어느덧 낮게 가라앉았다. 방금 발언은 자신이 키우고 있는 축구부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때 백돌이 무령을 거들었다.
“무령의 축구 실력을 보신다면 분명 놀라실 거예요. 축구 지능만큼은 여기 있는 누구보다 압도적인 수준이···!”
“넌 가만히 있어.”
이광수가 백돌의 말을 끊었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무령을 향해 있었다.
‘요놈, 지금 보니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아.’
사람을 외관만 보고서 판단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이광수는 축구 선수의 체격을 우선시했다. 체격조차 갖추지 못한다면 치열한 프로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봤으니까.
아무리 발재간이 좋고 자질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기본이 되는 체격이 갖춰지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 부분만 봐서는 무령은 완전한 불합격이었다.
하지만.
‘백돌이 선수를 추천할 줄이야···.’
이광수가 본 백돌은 자존심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강한 아이였다. 상대를 인정할 줄도 모르고 아집이 드센 녀석이 천재라며 추켜세울 정도면 의심을 해볼 만했다.
더군다나 눈앞의 무령은 자신을 마주하고서도 거만하고 당당하다.
큰 덩치와 험악한 인상 탓에 소싯적 ‘깡패’라 불렸던 이광수다. 축구부원들조차 그의 서슬 퍼런 시선에 움츠러들기 일쑤였다. 그런데 무령은 그런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지.”
이광수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연습 경기를 해보는 거야. 거기서 네가 우리 선수들을 상대로 대등하게라도 싸워준다면 입단을 허락하마.”
그 말에 백돌의 표정이 새삼 환해졌다. 그러나 옆에 있던 무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이광수는 이맛살을 찡그렸다.
‘싸가지 없는 녀석인 것만은 분명하군.’
* * *
“모두 모여!”
이광수의 부름에 휴식을 취하고 있던 선수들은 황급히 단상 아래로 집결했다. 모두 모인 것을 확인한 그는 굽어보는 눈길로 목소리를 높였다.
“앞으로 10분 뒤에 연습 경기를 하겠다. A팀, B팀으로 나뉘며 A팀은 내가, B팀은 강정원 코치가 담당할 거다.”
그렇게 말하며 이광수는 자신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던 무령을 가리켰다.
“여기 우리 대동고 축구부에 입단하려는 애송이다.”
그 순간 집결해 있던 선수들이 하나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광수는 힐끔거리는 시선으로 무령을 돌아봤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민망함에 멋쩍은 듯 웃거나 자존심이 상한 나머지 얼굴을 붉힌다. 그러나 무령은 무심한 시선으로 선수들을 쭉 살펴볼 뿐이다.
‘이것 보게?’
보면 볼수록 호기심이 동하는 녀석이었다.
한편, 무령은 선수들을 둘러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김영광, 김승빈, 이주호···’
이틀 전, 자신과 함께 경기에 임했던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자신에게 발이 꽁꽁 묶여 버렸던 두 사람은 무령의 시선을 슬그머니 회피하고 있었다. 반대로 자신과 한 팀이었던 이주호는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미소로 손을 방방 흔들어 댔다.
이에 무령은 시선을 돌려 모른 체했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서 말이야. 뭐가 좋다고 실실 쪼개는 건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눈길을 돌리다 말고 무령은 어느 지점에서 시선을 멈추며 두 눈을 크게 떴다.
‘··· 박찬?’
부원들 사이로 머리 한 뼘은 더 큰 소년이 자신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다소 거친 이미지였던 백돌과는 달리 소년의 인상은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부드럽고 깔끔한 이미지였다. 그러나 체격만큼은 백돌 못지않다.
‘대동고 축구부의 주장 박찬이라···.’
무령은 눈을 빛냈다. 박찬은 고등학교 3학년이자 중앙 미드필더 자원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미 경남 FC와 프로 입단을 위한 서면 계약을 맺은 대동고 역사상 첫 번째 프로 선수가 될 유능한 선수였다.
무엇보다 진짜 무령의 일기장에도 종종 박찬에 관해 거론되곤 했다.
진짜 무령은 축구에 일절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화제의 인물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진짜 무령은 창밖을 통해 자주 축구부원들의 경기를 관전하곤 했다. 대부분 그가 관심이 있던 인물들이 축구부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박찬에 대해서는 감정이 남달랐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온 친형 같은 사이···?’
일기장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을 빤히 노려보고 있는 박찬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완전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데?’
마치 두 눈동자에 불꽃이 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내 무령은 어깨를 들먹였다.
‘뭐, 내 알 바 아니지.’
* * *
강정원 코치가 담당하게 된 B팀엔 백돌 그리고 이주호가 포진해 있었다.
“이야~ 무령이가 우리 축구부에 입부하게 될 줄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걸!”
여지없이 이주호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무령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에 무령은 살포시 미간을 구기며 검지와 엄지만으로 그의 손을 떨쳐 냈다.
그런데도 이주호는 배시시 웃었다. 그때, 단상에서 이광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강정원 코치가 다가왔다.
“자자. 모두들 이리로 모여 봐.”
강정원은 팀원들을 집결시키며 곧바로 전술에 관해 설명했다.
“상대 팀엔 박찬이 있어. 모두가 알다시피 박찬은 중원 장악력이 뛰어난 선수지. 아마 중원에서 상당히 치고 박는 싸움이 지속될 거야.”
상대 진영에 박찬이 있다면 B팀엔 백돌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유형의 선수인 두 사람은 예전부터 서로를 경계했다.
강정원은 경기를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해선 점유율과 전방에서의 압박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김영광과 김승빈은 빠른 발이 주력이지. 애석하게도 우리 팀에선 김영광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는 선수가 없어. 그러니 처음부터 상대 수비진을 못살게 굴어야 해.”
그렇게 말한 강정원의 시선이 하품하던 이주호에게 못 박혔다. 순간 움찔한 이주호는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강정원이 이어서 말했다.
“그 역할은 이주호, 네가 맡아야 해. 곧 백록기에 참가해야 하니 몸을 적당히 사리는 선에서 수비진을 흔들어 버려.”
“맡겨만 주십시오!”
이주호는 가슴을 탕 치며 힘차게 대답했다. 다음으로 몇몇 선수들에게 강정원은 역할 지시를 내렸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무령에게 그 시선이 멈췄다.
“백돌이 너를 추천했다면 그만한 실력을 갖췄다는 거겠지.”
이광수와 달리 강정원은 차분하고 변별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생김새만 보더라도 박식한 학자풍이다.
그 질문에 무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정원은 실테 안경을 고쳐 쓰며 재차 물었다.
“혹시 선호하는 포지션이 있나?”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뛰고 싶습니다. 어차피 그 자리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데요.”
“공격형 미드필더라고? 수비수가 아니라?”
그 반문은 강정원의 입에서가 아닌 백돌에게서 나왔다. 무령은 백돌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내 피지컬로는 수비를 맡기엔 버거워.”
“하지만 이틀 전에 보였던 네 플레이는 분명···!”
“네가 나한테 몸으로 밀어붙였듯이 저쪽에서도 그러고 나오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그러면 나한텐 치명적일 수밖에 없거든. 게다가 지금은 어제처럼 얍삽하게 움직이기도 힘들어”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시선이었지만 더는 항변할 이유도 없었다. 무령은 다시 강정원을 마주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체격으로는 저 건장한 녀석들을 상대로 버티기 힘들어요. 그러니 공격형 미드필더에서 뛰게 해달라는 겁니다.”
“달리기가 빠른 편인가?”
“지금은 아닙니다.”
무령은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현재 자신의 몸 상태는 가히 최악이다. 근육통도 가시지 않은 판국에 이틀 전보다 더욱 몸이 굼뜰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그 대답에 강정원은 미덥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하나 짚어 주자면 수비수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해 봤자 몸싸움에 취약하다는 건 마찬가지야. 특히나 박찬은 공수를 오가는 활발한 선수라고. 과연 네가 감당할 수 있을까?”
“수비수로 있을 때보다 공격형 미드필더로 뛸 때가 제 움직임이 좀 더 자연스럽습니다. 만약 제대로 플레이를 펼치지 못한다면 도중에 저를 교체해도 상관없습니다.”
무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자신감에 강정원은 피식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뭐,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니까. 우선은 네가 원하는 대로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뛰어 보도록 해.”
전술 설명이 끝나고 곧 A팀과 B팀은 각자의 진영으로 위치했다. 그때 무령의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꼴에 자신감만 가득 차서는 한번 주장한테 호되게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듣기론 이틀 전에 백돌을 압살해 버렸다던데?”
“개 소문이야. 그걸 누가 믿냐? AFC 국대 출신인 백돌을 저 희멀건 새끼가 어찌 이겨. 살짝만 툭 하고 건드려도 부러질 것 같은데.”
“10분 뒤에 봐라. 아니, 5분! 장담하지. 혼자 필드 위에 넘어져서 엉엉 울고 있을 거야.”
피아 구분 없이 무령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 오갔다. 무령은 대놓고 자신을 비아냥대는 선수들의 면면을 훑어보며 다소 섬뜩한 미소를 띠었다.
‘이것들이 나를 개 병신 취급을 해?’
화가 난다기보다는 재밌었다. 한울로 살아가던 시절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자신을 아랫것 보듯 바라보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은 동경, 경외, 경탄을 담아 자신을 우러러보았을 뿐.
깡그리 뭉개고 싶은 기분이었다. 모나코 유소년 때의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유스 감독의 천대 속에 간간이 경기에 출전하였을 때 프랑스 선수들은 자신을 팀원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선수들은 자기들끼리만 패스를 주고받았다.
그때엔 확실히 지금보다 심했다. 뛰어난 축구 실력을 보여 줬음에도 일절 무시하던 그들에게 한울이 다음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싸움이었다. 그렇다. 한 명, 한 명을 상대로 치고받고 싸우면서 그는 점점 그들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다.
‘뭐, 축구 역시 싸움이라면 싸움이지.’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곧바로 휘슬이 울렸다.
삐익-!
강정원은 4-1-2-1-2 형태의 독특한 전술을 들고 나왔다. 윙어 없이 중앙을 기점으로 하는 극단적인 공격 형태였다. 최전방 투톱엔 오프 더 볼 움직임이 좋은 이주호와 그나마 팀에서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진성을 배치했다. 바로 그 아래엔 두 사람에게 볼을 배급할 무령을 위치시켰다.
강정원은 그에게 프리롤 임무를 부여했다.
중앙 미드필더인 두 선수에겐 조금 더 편히 공격 전개를 펼칠 수 있도록 백돌을 최후방에 두었다. 그의 이번 역할은 홀딩 미드필더였다. 홀딩 미드필더는 수비진과 가까운 위치에서 태클을 통해 볼 소유권을 탈취하는 게 주된 임무다.
‘게다가 패스에도 능하니 장거리 크로스를 통해 한 방을 노릴 수도 있지.’
그러나 윙어가 존재하지 않기에 양 사이드가 뚫릴 위험성이 있었다. 특히 김영광과 김승빈은 서로 연계가 좋은 선수들이라 더욱 경계해야만 했다.
‘수비 시 중앙 미드필더들이 측면을 커버하겠지만··· 되도록 역습 상황을 만들어선 안 돼. 그러니 초장부터 전방과 중원을 지배해야만 한다고.’
가장 우려하는 인물은 무령이었다. 아직 강정원은 무령의 실력을 가늠하지 못했다. 비록 백돌이 인정했다곤 하나 겉보기엔 비실대 보이는 소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강정원에게 있어 무령은 양날의 검이었다.
‘프리롤 위치에서 볼 배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공격이고 중원이고 한순간 무너지고 말아. 그러니 제발 중간만이라도 하자.’
볼 배급만 된다면 대동고의 핵심 공격수인 이주호가 알아서 수비진을 흔들어 놓을 터다.
* * *
전반 11분.
강정원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눈으로 보기에도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저럴 수가···!’
강정원의 시선은 백돌의 장거리 패스를 받은 무령에게 못 박혀 있었다. 무령이 공을 받는 순간 왼쪽 측면에 있던 이주호가 수비 뒷공간을 파고들어 페널티 박스 안으로 침투했다. 우측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에 있던 무령은 수비수들이 달라붙는 것을 보며 그 즉시 공간 사이로 아웃프런트 패스를 시도했다.
그때, 활시위처럼 휘어져 날아간 공은 이주호의 발등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탕!
그 순간, 이주호는 강력한 발리킥을 시도했다. 골문은 텅텅 비어있었다. 골키퍼는 무령이 슈팅할 것이라 예상한 나머지 이미 왼쪽으로 몸이 기운 상태였다.
강정원은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그때였다.
탕!
어디서부터 달려왔는지 모를 박찬이 앞으로 뛰어올라 강력한 헤딩으로 공을 걷어 냈다. 곧바로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린 박찬은 필드 위에 가슴부터 떨어졌다. 몸을 사리지 않는 엄청난 커팅.
“제길!”
강정원은 허공을 주먹으로 때리며 아쉬움을 토해 냈다. 완벽한 찬스를 무령이 제공했고 완벽한 슛을 이주호가 구사했다. 그러나 상대 진영 또한 완벽한 수비로 공을 걷어 냈다.
완벽함의 3박자.
강정원으로서는 굉장히 아쉬운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찬스는 수차례 지속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강정원은 무령의 플레이에 진심으로 경탄했다.
무령의 움직임은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다. 프리롤을 부여받긴 했지만, 왼쪽, 오른쪽을 자유분방하게 오가기보단 한곳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수비수들이 달라붙으면 스텝을 주며 혼란을 야기했고 공을 받는 순간 간단한 페인팅으로 수비수들을 순식간에 따돌렸다. 그러고선 길게 끌지 않고 전방으로 볼을 배급시킨다.
‘엄청나게 여유롭잖아···!’
마치 프로 선수가 아마추어 간의 시합에 참여한 듯한 퍼포먼스다.
‘··· 자신의 취약점을 잘 알고 있어.’
강정원은 무령이 몸싸움을 피하려고 최대한 공을 받는 즉시 패스를 선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은 이러한 상황 시 압박감에 패스 정확도가 떨어지는 반면 무령의 패스는 남달랐다.
공간을 파고들거나 혹은 수비수들의 머리를 넘기는 정교한 크로스를 올리며 두 명의 공격수에게 정확히 배달했다.
말 그대로 패스 기계.
강정원은 힐끔 곁눈질로 단상 반대편 벤치에 앉아있는 이광수를 살펴보았다. 그 역시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다.
두 눈은 빠질 듯이 커졌고 초조한 듯 두 다리는 연신 떨고 있었다.
강정원은 생각했다.
‘잘됐어. 마침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엔 김승빈 말고는 딱히 무난한 애들이 없었는데··· 잘하면 이번 백록기에서 높은 성적을 기대해도 되겠는걸?’
한 소년의 플레이를 관찰하면서 이토록 심장이 방방 뛰는 것은 처음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강정원은 표정을 굳히며 습관처럼 안경을 고쳐 썼다.
‘문제는 박찬이야. 무령이 제공한 찬스를 박찬이 매번 걷어 내고 있다고.’
아슬아슬한 순간 박찬이 무서운 활동량을 보이며 손을 제외한 온몸으로 골문을 지켜 내고 있었다.
‘이래서는 우리 공격진이 골 맛을 보기도 전에 체력이 고갈되고 말 거야.’
조금 더 강수가 필요하다고 느낄 시점 전반전이 끝이 났다.
스코어는 0:0
벤치로 들어오는 선수들을 보며 강정원은 기운을 북돋으려 저마다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잘했다. 아주 훌륭했어! 상상 이상으로 완벽한 게임이었다고.”
몇몇 선수들은 땀을 비 오듯이 흘리는 와중에도 무령을 힐끔거렸다. 강정원은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무령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된 뒤로 무령이 환상적인 플레이를 펼치니 기가 질리다 못해 움츠러든 것이겠지.
몇몇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경외감이 깃든 시선으로 무령을 바라보기까지 했다.
그리고 강정원은 벤치에 앉아 생수로 목을 축이는 무령을 보며 눈을 빛냈다.
‘욕심이 생기는 녀석이야.’
* * *
이광수는 무령의 플레이에 혀를 내둘렀다. A팀 선수들이 하나 같이 진이 빠진 얼굴로 벤치에 들어오는 와중에도 그 시선은 단상 반대편에 있는 무령에게 고정되었다.
‘거만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
무령은 자신의 재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필드 위에서 저런 여유로운 플레이를 구사할 수 없다. 어느덧 땀에 전 손바닥을 문대며 이광수는 시선을 돌렸다.
벤치에 앉아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는 박찬을 보며 이광수는 눈을 빛냈다.
“어때?”
그 질문에 박찬은 우득우득 뼈 소리를 내며 무심하게 답했다.
“굉장합니다.”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어 보였다. 이광수는 입꼬리가 귀에 걸리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입을 오물거렸다.
‘무령이라는 녀석을 끌어들인다면 확실히 전국 대회에서도 높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겠어. 더불어 내 명성도 끌어올릴 수 있을지 몰라!’
이광수는 야망이 큰 인물이었다. 비록 감독으로서 능력이 출중하지 못한 탓에 고등부 내에서만 방황했지만 언제든 기회가 생기면 프로 리그로 올라갈 꿈을 품고 있었다.
‘백록기에서 좋은 성적을 이루면 어쩌면 코치로서라도 고용해 줄지 모르지.’
이광수는 자신의 한계가 어디쯤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프로 리그의 감독보다는 코치로서 여생을 좀 더 호화롭게 살고 싶은 바람이었다.
* * *
고작 40분, 전반전밖에 실시하지 않은 플레이였지만 무령이 보여준 능력은 최고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 골만 없었지 전방을 완전히 장악하다시피 했으니까.
‘활동량은 많지 않지만, 적재적소마다 공간을 뚫는 패스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광수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부원들을 불러 모았다.
“보다시피 상대측에서 극단적인 공격 전술을 가지고 나왔다. 박찬의 커버가 없었다면 대량 실점했을 거야.”
이광수는 포백을 구축했던 수비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에 그들은 대역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렸다.
“하지만 너희들 탓만이 아니다. 상대측 공격형 미드필더가 단지 압도적으로 잘했던 것뿐이니까. 마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을 만큼.”
이광수는 선수들의 자존심을 건드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수비 지역에서부터 탈탈 털리니 중원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막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상황에서 골을 내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천운이야.”
이광수는 전술을 변경하기로 마음먹었다. 뛰어난 인재를 발견했다곤 하나 지금 현재 자신은 경기를 치르는 입장이었다. 그것도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감독으로서.
자신의 부관이기도 한 강정원 코치에게 패배한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기존 4-4-2 포메이션을 고수하되 볼 점유율을 포기한다.”
그 말에 선수들이 서로를 보며 웅성거렸다. 축구에 있어 볼 점유율은 곧 공격으로서의 우선권을 가져간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이광수는 선수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다소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상태로는 구태여 볼 점유율을 유지하려 들었다가 아까처럼 엉성하게 역습 상황을 허용해 버리고 말 거다. 그러니 볼을 무리하게 전방으로 연결하지 말란 소리야. 백돌이 전방으로 길게 볼을 연결하면 수비수들은 고민하지 말고 공을 멀리 쳐내라. 라인 밖으로 걷어 내도 상관없고 상대 진영에다 멀리 날려도 괜찮아. 단순하게 플레이하라고!”
이광수의 험악하게 구겨진 인상에 수비수들은 반항 한번 못해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음으로 그는 김영광을 주시했다. 김영광은 그 우악스럽기까지 한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못 박히자 움찔 몸을 떨었다.
“영광이 너는 측면을 파고들어. 골 욕심 버리고 상대 센터백을 최대한 끌어내라고. 자꾸 중앙을 파고들려고만 하니까 발이 꽁꽁 묶이잖아. 엉?”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승빈이는 영광이가 수비수들 끌어내면 그 즉시 페널티박스 안으로 침투해. 영광이는 희생정신 좀 발휘하고!”
재차 이어진 이광수의 핀잔에 김영광은 움찔대며 고개를 거듭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이광수는 박찬을 돌아보았다. 백돌과 유사한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였지만 자세히 보면 서로 간의 장단점이 다른 선수였다.
빌드업과 수비에 능하다는 건 두 선수 모두 동일했다. 하지만 백돌은 볼 키핑 과정이 다소 투박하지만 박찬은 매우 안정적인 키핑 능력을 갖췄다. 불과 2년의 차이지만, 박찬이 기량 면에선 한 단계 위라고 봐도 무방했다.
“박찬이 너는 무령을 맨마킹해. 그러다 공을 탈취하는 순간, 빠르게 전진해라. 수비수를 제외한 중앙 미드필더, 공격수 할 것 없이 모두 올라가.”
맨마킹은 한 선수가 상대편의 특정 선수를 일대일로 막아 내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박찬에게 중요한 임무는 모두 맡긴 셈이다. 한순간 경계 대상 1순위에 오른 무령을 맨마킹 하는 것부터 공격 전개의 시초를 도맡는 것까지.
반대로 박찬이 흔들리면 이 전술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만큼 이광수는 박찬을 신뢰하고 있었다. 전반전 경기 양상은 박찬과 무령의 1대1 공방전이라 봐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치열했다.
이에 박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 10분간의 휴식을 취한 후 후반전이 시작되었다.
무령은 포메이션 변화 없이 나서는 A팀을 보며 잠시 의문을 품었다.
‘연습 경기라 이건가?’
전반전 경기 형태는 B팀이 A팀의 굳게 닫힌 문을 계속해서 두드리는 방식이었다. 비록 상대팀의 집중력이 생각 이상으로 좋아 열리진 않았다. 그러나 순간 한눈파는 사이 골을 내줄지도 모를 만큼 공격의 활로는 크게 열려 있었다.
강정원은 포메이션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대신에 후방 홀딩 미드필더로 있던 백돌을 중앙 포지션 자원과 변경하며 공격 전개를 더욱 활발히 하려 들었다. 자칫하다간 수비에 구멍이 뚫릴 수도 있는 판단.
‘하지만 공격 작업에 있어선 한결 수월해지겠지.’
무령은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에 떡하니 버티고 선 박찬을 주시했다.
‘저 녀석만 아니었어도 벌써 몇 골은 넣었을 텐데.’
아쉽진 않았다. 이미 자신은 이 필드 위에서 프리롤 임무를 충분히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으니까.
그보다는 박찬의 뛰어난 수비 능력에 감탄했다.
‘곧 있으면 프로 리그로 데뷔를 앞둔 녀석이라 그런지 확실히 달라. 게다가···.’
무령은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몸싸움을 걸어오지 않아.’
전반 내내 무령은 박찬과 공을 탈취하는 데 있어 자주 부딪쳤다. 7:3 비율로 박찬을 간결한 동작으로 속이며 공을 전방으로 길게 뿌린 무령이다. 하지만 어느샌가 골대 앞엔 박찬이 다시 나타나 공을 멀리 걷어 냈다. 활동량만큼은 이 필드 위의 그 누구보다 뛰어남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박찬이 자신에게 직접적인 몸싸움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녀석 정도의 실력이라면 몸싸움을 통해서 내 움직임에 제약을 줄 수도 있을 텐데···.’
괜스레 짜증이 났다. 마치 자신을 배려하는 듯한 그 행동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반 10분.
무령은 A팀의 전술적인 부분이 변경됐음을 파악했다. 백돌이 빌드업 과정으로 자신에게 공을 연결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박찬이 그림자처럼 자신을 뒤에서 맨마킹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신체 접촉 없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
빠득.
순간 무령의 이마에 핏대가 돋았다.
‘이 새끼가 나를 어린애 취급해?’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박찬의 다부진 체격에 비해 자신의 몸뚱이는 아주 왜소한 편. 그러니 서로가 부딪치면 크게 흔들릴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그런데 박찬은 경기 내내 몸싸움을 활용하지 않았다. 적정선에서만 공을 끊고 간격을 유지하기를 반복했다.
무령에게 있어 이만큼 열 뻗치게 하는 도발도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퍼억!
“크윽!”
갑자기 무령이 박찬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탓에 무령은 박찬의 단단한 등에 안면을 부딪치며 나가떨어졌다.
“무슨···!”
뒤늦게 박찬의 당혹 어린 외침이 들렸다. 무령은 필드에 주저앉은 채 욱신거리는 코를 부여잡았다.
방금 박찬은 백돌의 패스를 차단하기 위해 순식간에 자신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이에 무령은 가차 없이 뒤에서 등을 들이박았다.
고의적인 파울.
경기 내내 군더더기 없는 플레이를 펼치던 무령이 처음으로 반칙을 범했다.
인중을 타고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하지만 무령은 입가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몇몇 선수들이 황급히 달려오는 것을 보며 무령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멍청한 짓이었어.”
그때 경기 내내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박찬이 타이르듯 입을 열었다. 무령은 손등으로 인중을 문대며 말했다.
“그러니까 똑바로 해.”
“··· 뭐?”
“봐주지 말라고.”
무령의 시선은 차갑다 못해 시렸다. 박찬은 단단히 화가 나 보이는 그 모습에 살포시 미간을 구겼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박찬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무령이 그의 말을 가로채며 씹어 뱉듯이 쏘아붙였기 때문이다.
“형이라고 봐주지 말란 소리야. 어릴 땐 어릴 때고 괜한 추억 부여잡고 옛날처럼 날 대하지 말라고.”
“너 진짜···!”
그 말대로다. 박찬은 지금껏 무령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일기장을 통해서 본 박찬은 무령을 친동생처럼 아껴주었다. 진짜 무령이 또래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반드시 찾아가 혼쭐을 내주었고 먹을 것이 생기면 아낌없이 퍼서 주다시피 했다. 하루에 반나절은 붙어 다녔던만큼 두 사람 간의 우애는 돈독했다.
무령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5년 만이잖아. 형 노릇은 이쯤 해둬. 지겨우니까.”
“···.”
무령은 일부러 박찬을 자극하려고 그런 발언을 했다. 예상대로 박찬은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을 보였다.
무령은 또다시 주르륵 흘러내리는 코피를 손등으로 문대며 한 마디 더 덧붙이며 뒤돌아섰다.
“감싸주는 건 이쯤이면 됐어. 더 했다간 멍청이로 볼 테니 그런 줄 알아.”
그러나 무령의 자극적인 발언에도 불구하고 박찬은 자신을 진심으로 상대하지 않았다.
분노한 나머지 마지막 1분엔 페널티 박스 외각에서 강력한 중거리 슛으로 골망을 흔들었다. 박찬의 맨마킹은 후반 들어 급격히 느슨해졌다. 오히려 무령의 도발이 그에겐 정신적으로 치명타를 입힌 것이다.
결국, 경기는 무령의 활약으로 2:0으로 끝이 났다.
주르륵.
벤치에 들어서는 순간 또다시 인중을 타고 코피가 흘렀다.
‘이놈의 썩을 몸뚱이···!’
무령은 휴지를 콧구멍에 새로 갈아 끼우며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작 한 경기만으로 온몸의 진이 빠져 버렸다. 아마도 집에 도착하는 순간 뻗어 버리겠지.
바로 그때였다.
“대단해!”
이광수가 기다렸다는 듯 헐레벌떡 다가와 엄지를 치켜들었다. 입단 여부는 그의 헤벌쭉해진 표정만 봐도 유추할 수 있었다.
“역시 백돌이 추천한 선수라 그런지 기본기가 아주 훌륭해!”
경기 전과 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이광수다.
어느 정도의 휴식을 취한 끝에 이광수는 누가 채가기라도 할까봐 다급히 부원들을 집결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령을 소개했다.
“오늘부로 우리 팀에 새로 입단하게 된 강무령이다. 함께 경기를 뛰면서 다들 느꼈을 테지. 무령이는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매우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오늘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잘했어! 그렇다고 위축되지 마라. 주전 경쟁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그러니 앞으로 백록기가 오기 전까지 공정한 기회를 제공할 테니 열을 올려!”
이광수는 선수들이 의욕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주먹을 불끈 들어 힘차게 외쳤다. 뛰어난 선수가 입단하게 됐음에도 이광수는 마냥 기뻐할 수도 없었다. 해당 포지션의 경쟁자들은 초조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만큼 설 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미 이광수의 눈엔 몇몇 선수들이 벌써부터 불안해하는 것이 보였다. 이에 감독으로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단 하나다.
그들이 자괴감에 빠져 도태하지 않도록 멘토 역할을 성실히 이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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