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함
뒤로가기버튼 작왕전 [E]

작왕전 1권 (1)

2018.11.09 조회 625 추천 4


 #프롤로그
 
 
 
 허름한 군영. 모든 병사들이 출진 준비를 마치고 떠나간 막사는 늘 많은 것들을 남긴다. 침상 위로 남겨진 발자국들과 주인을 기다리는, 어지럽게 널려진 개인 소품들. 이 시간이 되면 심장은 미친 듯이 뛰다 못해 오히려 차분해지는 느낌이다. 기분 좋은 떨림이 감각을 지배하고, 흥분은 주체할 수 없는 쾌락을 선물한다.
 짧은 금발의 남자가 그런 막사를 돌아보다가 몸을 일으킨다.
 남자는 호리호리한 체구와 곱상한 얼굴을 가졌지만, 온몸에는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무수한 흔적이 남아 있다. 조금 전 채찍을 맞은 것 같은 구불구불한 수백 개의 상처들도 기이하지만 그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남자의 양쪽 어깨에 그려져 있는 기하학적인 문양의 트라이벌 타투였다.
 남자는 막사의 한쪽 구석으로 다가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검은색 갑주를 걸치기 시작했다. 팔과 허벅지에 찬 금속 보호대에는 작은 비도들의 손잡이가 밖으로 나와 있다. 얼핏 보이는 것만 해도 10개는 넘는 비도.
 남자는 상체를 전부 덮어 버리는 갑옷을 걸쳤다. 혼자 입기에는 힘겨운 중갑이었지만 남자는 익숙한 동작으로 서두르지도 않고 꼼꼼하게 착용했다. 그의 등갑옷에 달려 있는 6개의 창은 그의 머리 뒤로 삐쭉 솟아, 멀리서는 꼭 6개의 뿔을 가진 검은색 악마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이마 부근에 날카로운 뿔이 달린 검은색 투구를 썼다. 이제 그의 금발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그 어떤 병사와도 다른 특이한 복장의 남자로 탄생했다.
 남자가 막사를 나선다. 큰 키는 아니지만 이마의 뿔과 등에 달린 창들 때문에 일견 거대한 존재감을 심어 준다. 그가 막사 밖으로 나서자, 그와 똑같은 복장의 검은색 갑주를 착용한 30여 명의 남자들이 도열해 있는 게 보인다. 그들의 등에는 창이 달려 있지 않고 투구에도 뿔이 나 있지 않지만 검은색 갑옷의 빛깔과 재질은 같은 것이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투구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모르는 자는 없다.
 “우리에게 불가능한 임무란 없다. 항상 생각해라. 그리고 기억해라. 너희들은!”
 남자가 거기까지 말하자 30여 명의 남자들이 왼발로 땅을 힘껏 구르며 동시에 대답했다.
 “질풍!”
 그 기백과 서로 간에 흘러넘치는 묘한 자신감이 꿈틀거리며 주변을 압도한다.
 “눈으로 보기 전에 인식해라. 생각하기 전에 반응해라. 질풍은!”
 남자와 수십의 병사들은 동시에 다시 한 번 땅을 구른다.
 “무적이다!”
 
 
 
 #재능 없는 아이
 
 
 
 꿈틀!
 온몸에 땀을 흘리고 있는 소년의 눈이 갑자기 번쩍 뜨이고, 소년의 몸이 하늘을 향해 활처럼 휘어진다.
 ‘아냐, 뭔가 잘못된 거야. 무슨 놈의 수련법이 이렇게 고통을······.’
 “큽!”
 소년은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했다. 전신을 태울 것 같은 아픔. 피부 껍질이 아니라 내장이 쥐어짜지는 것 같은 느낌!
 소년은 필사적으로 비급에 쓰여 있었던 방법을 떠올리며 몸에 흐르는 마나를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비록 스승도 없고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지만 이 숨 쉬는 방법을 통한 마나 모으기는 분명 가문의 비전이 확실하다. 그런데 왜?
 몸속의 피가 흐르는 큰길을 회전하며 배꼽 아래 마나샘에 모여야 할 정제된 마나들이 지금 역류하고 있다. 아니, 역류로 모자라 점점 거세지며 마나샘을 깨뜨리려 하고 있다. 그런 일련의 사건은 통증이라는 감각으로 소년에게 생생하게 전달된다.
 ‘이렇게······ 죽는······ 건가?’
 고통의 끝자락이 도래했음을 소년은 느낄 수 있었다.
 콰륵!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뭔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나샘이 파괴당했다. 그동안 이곳에 와서 불철주야 연공했던 노력이 모두 낱낱이 흩어지고 있다. 마나샘에 모였던 그 힘의 원천들이 몸의 곳곳으로 퍼지는 것이다.
 펑!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다.
 ‘잠에서 깨어야 해. 이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아냐!’
 필사적으로 눈을 깜짝여 보지만 꿈은 깨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금까지의 고통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교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의 파도가 소년의 몸을 후려갈겼다.
 소년의 몸이 벼락 맞은 개처럼 웅크려졌다가 펴지길 반복하며 가녀린 신음을 흘렸다. 그렇지만 앙다문 어금니에서 피가 날 정도로 소년은 비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차라리 지옥이 편할 것 같은 시간들이 흘러가고, 소년은 평온한 얼굴로 곤히 잠이 들었다. 고통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지만 조금 전에 비하면 무척 다행스러운 표정이다. 한쪽 입꼬리도 살짝 올라가 있다.
 소년은 오늘 무엇을 잃었는지 무엇을 얻었는지 전혀 모른 채, 그렇게 달콤한 꿈나라로 향했다.
 
 “으으음.”
 비즈타는 힘겹게 눈을 떴다. 서늘한 바람 탓에 온몸에 오한이 밀려온다. 그러다가 어젯밤 마나샘이 부서졌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정좌를 하고 앉았다.
 “후우.”
 몸에 흐르는 마나를 조금씩 감지하던 비즈타의 얼굴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모이지 않아······ 모래처럼, 바람처럼 그냥 바스라져······.”
 비즈타의 말대로 비즈타의 몸 안에 흐르는 마나는 아무리 노력해 봐도 잡히질 않았다. 몸속에 있는, 배꼽 아래 마나샘이라는 곳에 모여야 할 마나들이 지금은 장난꾸러기 아이들처럼 전신으로 퍼져서 뛰놀고 있다.
 몸속에 있는 그 길을 따라 마나들을 유도해 보려고 해도, 마나샘을 지나치는 동시에 전부 흩어져 버린다.
 그러면서 느껴지는 고통!
 “크흑.”
 ‘뭔가 잘못됐어. 이런 건······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아.’
 비즈타는 품에서 한 권의 얇은 책을 꺼내 들춰 보며 한 손으로는 저릿한 배를 문지른다.
 애초에 답을 주지도 않았던 책이다. 들여다볼수록 오히려 더 미궁으로 빠질 뿐.
 비즈타는 허탈한 얼굴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작은 산. 듬성듬성 보이는 누군가의 무덤들과 작은 나무들. 너무도 평화로운 풍경 사이에서 단 하나의 무덤만이 훼손돼 있었다. 다른 곳은 멀쩡한데 오직 어머니의 무덤만 폭풍이 지나간 듯 파헤쳐졌다.
 어젯밤 이곳에 도착해서 얼마나 놀랐던가. 아직 잔디도 다 자라지 않았을 정도로 만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무덤이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누가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떠오르지도 않는다. 들짐승의 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극심하게 망가져 있는 무덤.
 ‘어머니.’
 비즈타는 어금니를 콰득, 소리가 날 정도로 깨물었다.
 어제 너무도 놀라고 화가 나서 본능적으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호흡법을 했다가 오히려 잘못돼서 마나샘까지 잃었다.
 이제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기운을 차려서 무덤을 복구해야 하는데 마나샘 탓인지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비즈타 아니냐?”
 비즈타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머리를 홱 돌렸다.
 “주트 아저씨?”
 “그려, 이 녀석아!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옥수수 빵을 팔 때 단골손님이었던 주트. 그가 지금 황당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대답해 줄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주트는 이리저리 다니며 어머니의 무덤을 조금이라도 추스르려고 했지만 한계가 있는지 철퍼덕 주저앉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한 남자와 소년은 그렇게 허망하게 무덤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 주트가 비즈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네가 마을에서 사라져서 사람들이 다들 걱정을 많이 했단다. 그간 어디에 있었느냐?”
 비즈타는 주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말을 한다고 해도 믿어 줄지 의문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자세한 이야기는 어머니의 치부로 생각되어 꺼려졌다.
 그런 비즈타의 모습에 주트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래, 힘들었겠지. 이제 돌아온 게냐?”
 비즈타는 그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또다시 침묵이 근처를 맴돌고, 비즈타는 멍하니 뭔가 커다란 힘에 으깨진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어머니의 무덤을 황량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다시 한참이 지난 후, 문득 주트는 비즈타를 보며 이마를 구겼다. 비즈타가 입고 있는 옷. 경황이 없어서 지금에야 발견했는데, 비즈타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평민들은 구경도 하지 못할 고가의 비단옷. 마을에서는 찾아보기도 힘든 그런 의복이다.
 주트가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비즈타에게 다시 물어보려고 할 때, 갑자기 저 멀리에서 빠른 속도로 말이 달려오는 소리가 났다. 1마리가 아니었다. 아무리 작은 동산이라고 해도 말들을 저렇게 거침없이 몰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비즈타는 움찔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전신이 물에 흠뻑 젖은 듯 무거웠고, 겨우 손가락이나 움직일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은 이렇게 앉아 있는 것만도 벅차다.
 8마리의 말이 시야에 들어왔다. 말들은 그제야 속도를 점차 줄이기 시작했다.
 “아! 저들이로군. 영주님의 기사들을 다시 보게 되다니, 이런 영광이!”
 주트는 웃음을 지으며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이런 시골에서 영주님의 기사단을 보게 되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런데 비즈타는 주트의 그 말을 듣고 뭔가 괴상한 예감이 스쳤다.
 “다시······라고요?”
 “저들은 영주님의 기사들 중에서도 가장 이름 높은 흑색창기대의 기사님들이란다. 너도 어서 일어나서 예를 취해라. 무슨 경을 치려고 그렇게 앉아 있느냐?”
 “아니, 주트 아저씨, 방금 다시라고 하셨어요?”
 “그랬지. 저분들을 예전에 한번 뵌 적이 있었거든. 이 근처에서 약초를 캐다가 아주 우연히 마주쳤단다. 이런 은혜가 또 있다니!”
 비즈타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아주 묘한 확신이 엄습한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 일은 없겠지만, 한번 떠오른 생각은 무럭무럭 커져만 갔다.
 그사이 말들이 그들의 앞에 도착했다.
 검은색 갑옷으로 무장하고 말 옆구리에 긴 창을 꽂아 놓은 8명의 사람들. 가슴에는 2개의 창이 교차한 그림이 멋지게 그려져 있고, 눈빛은 부리부리한 게 절로 위압감이 들었다.
 “도련님.”
 가장 선두의 남자가 입을 열었는데, 흘러나온 말 때문에 주트는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머리를 치켜들었다. 뭔가 잘못 들었던 것 같은데 그걸 확인하려고 한 것이다.
 “도련님, 가셔야 합니다.”
 그의 말은 무척이나 정중했지만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주트는 무척 차갑다고 생각했다.
 비즈타는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남자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머리만 흔들었다. 도망을 치면서도 잡힐 거란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그들의 눈을 피해 도망을 친 것 자체가 기적이기도 했으니.
 “도련님을 모셔라!”
 남자의 말에 다른 남자가 말에서 내리며 비즈타에게 걸어왔다. 비즈타는 자신의 몸을 부축해서 일으키는 그 힘에 저항해 보려 했지만 남자의 몸은 꼭 돌덩이 같았다.
 고작 12세 비즈타가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돌아간다.”
 선두의 남자가 주트를 한번 노려보더니 말 머리를 돌렸다. 그때까지도 비즈타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남자에게 안겨 허공만 바라볼 뿐이고, 주트는 그들이 떠나고 한참이 지나도록 그 자리에서 한 발도 움직이지 못했다.
 어머니가 죽은 다음 날 갑자기 마을에서 사라진 소년.
 그 소년이 반년 만에 돌아왔지만, 주트는 그가 왜 도련님이라고 불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무려 영주님의 기사단이 그렇게 불렀다는 것 또한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 * *
 
 “무슨 생각을 한 거냐?”
 비즈타는 작은 석실에 발가벗겨져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어른 하나가 누우면 꽉 찰 것같이 작은 공간. 삼면이 막혀 있고 한쪽 면은 창살이 꽂혀 있었다.
 그 안에 죄인처럼 비즈타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창살 밖으로 한 여인이 표독한 눈초리로 비즈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중년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탄력 있는 피부가 눈에 띄는,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인.
 “네 어미의 무덤에 있었다고 들었다. 보고 싶었던 게냐?”
 무덤이라는 단어에서 비즈타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여인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그랬습니까?”
 12세 아이가 쓰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투가 비즈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반년이긴 했지만 비즈타는 그렇게 교육을 받았고, 그것이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여인은 비즈타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비즈타의 눈에 사나운 기세가 어렸다.
 “왜 그러셨습니까?”
 비즈타가 확신을 담아 물었다. 그러나 여인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너는 지금 큰 죄를 지었단다. 말도 하지 않고 영주성을 나갔다는 것도 그렇지만, 네가 이걸 가지고 있더구나.”
 여인의 손에는 한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어디서 났느냐?”
 비즈타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거라는 집념이 비즈타의 전신에서 풍겨 나왔다.
 여인은 조금 화가 난 얼굴로 비즈타를 응시하더니 몸을 돌리며 말했다.
 “넌 벌을 받을 거야.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여인이 사라지는 그사이에도 비즈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비즈타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다. 비즈타는 분노를 참고 있었다.
 “왜! 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비즈타가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절규하며 창살을 잡고 흔들었지만 여인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으아아아아!”
 비즈타의 고함이 감옥을 울렸다.
 
 다음 날 오후.
 비즈타가 있는 감옥에 한 사람이 찾아왔다. 다부진 몸과 딱 벌어진 어깨. 청년의 티를 벗고 있는 건장한 남자였다.
 “괜찮냐?”
 그 목소리에 비즈타는 머리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형······.”
 “그래, 나다. 자식아, 왜 그런 일을 벌인 거야? 얘기는 들었어. 비급에 대한 건 내가 말했다. 곧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야.”
 필데르 루라이.
 2영지를 지배하는 루라이 가문의 장남이자 외동아들이었던 남자.
 비즈타는 그를 만나면 꼭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에게조차 이유 없이 화가 났다.
 필데르는 그 후에도 몇 마디 더 비즈타에게 이것저것을 묻고 자리를 떠났다.
 그 후로 보름. 비즈타가 있는 감옥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비즈타는 그렇게 발가벗겨진 채로 어린 짐승처럼 감옥에서 분노를 삼켰다.
 
 * * *
 
 “비즈타 님이야. 눈 마주치지 말고······.”
 저 앞에서 걸어오는 시녀들의 말소리가 얼핏 들려온다. 그녀들의 시선은 아주 묘하다. 존경과 두려움보다는 질투와 어리둥절함이 더 많이 느껴진다.
 조금 고개를 숙여 비즈타를 지나친 그녀들은 뒤돌아 비즈타를 힐끔 훔쳐보고는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자신을 만날 때 모든 사람들의 반응은 다 비슷하다. 저 시녀들처럼 아직은 그저 구경거리 이상은 아니었다.
 큰 세상에 혼자 버려진 느낌. 지저분한 시장의 바닥을 굴러도 이보다 더러운 기분은 아닐 것이다.
 영주성에서의 삶.
 동화 속 신데렐라는 없었다. 어머니가 병으로 죽은 뒤 비즈타는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루라이 가문의 가주가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사실.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정도로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버지였다는 것도 모자라, 비즈타는 하루아침에 루라이 가문의 둘째 아들이 되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이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새어머니가 생겼고, 형이 생겼다. 그러면서 동시에 귀족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았다. 그렇게 반년.
 영주성에 처음 왔을 때, 필데르는 비즈타에게 한 권의 책을 주었다. 동생이 생겨서 기쁘다며, 책에 적힌 대로 열심히 수련하면 큰 힘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비즈타는 그 말을 믿었고, 반년 동안 귀족이 되기 위한 수업에서 배운 글도 조금씩 익혀 나가기 시작했다.
 책에 적혀 있는 것은 하나의 호흡법과 창술이었다.
 아주 간단한 호흡법이었지만 그것은 배꼽 아래에 마나샘이라는 것을 만들 수 있게 해 주었다. 마나샘이 생긴 다음부터는 체력 단련이나 창술 수업에서 조금 여유가 생겼을 정도로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그게 파괴되었다.
 왜인지 알 수도 없었고, 이유도 몰랐다. 그 책을 전해 준 필데르에게 물어봐야 했지만 필데르는 그날 감옥에서 본 것을 끝으로 더 이상 만날 수도 없었다.
 비즈타는 씁쓸하게 웃으며 수련장으로 향했다.
 탈출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사건이 있은 뒤로는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나빠졌다. 전에는 단순히 무시였다면 이제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뀌어 있다.
 그런데도 웃기는 건, 그 누구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비즈타는 연병장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보며 뛰어갔다. 창술을 가르쳐 주는 선생. 이름도 고귀한 흑색창기대의 대주.
 그런 사람이 선생이다. 그만큼 무서운 사람이었고 행동하는 데 있어 가차가 없다.
 “창술은 무엇이냐?”
 비즈타는 수업의 시작을 알리는, 늘 똑같은 질문 공세에 긴장하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수업을 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거스를 수는 없었다.
 “창이라는 병기를 이용해 가장 효율적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허면 루라이의 창술은 무엇이더냐.”
 “창술의 모든 경지를 초월한 예술적 수법이라고 배웠습니다. 따라갈 병기가 없으며 마주할 상대도 없고, 뽑으면 반드시 적을 죽일 수 있는 대륙의 혈창이라고 들었습니다.”
 대주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우리 루라이의 창술은 곧 법. 대륙의 시건방진 여타의 가문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가벼운 검 나부랭이나 얄팍한 활쟁이보다는 중후하고 모든 공격이 일격필살의 묘를 담고 있는 창술이야말로 병장기 중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지.”
 오후에 있는 수업은 늘 이렇게 진행된다.
 한 시간가량 이론 수업을 하고 실기로 들어간다. 이론이라고는 해도 그저 단순 암기와 문답이 전부라서 잘 외우기만 하면 되는 것들뿐, 문제는 직접 몸을 사용해서 창술을 익힐 때부터다.
 끄응.
 비즈타는 전보다 더 들기 힘들어진 장창을 두 손으로 힘겹게 들어 올렸다.
 “창의 기본은 찌르기요, 가장 강력한 공격도 찌르기다. 본래 창이 그런 용도로 시작되어 발전되었으니 찌르기는 창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공격 수단이다. 허나 그것을 익히려면 바탕에 체력이 밑받침되어야 하는데, 너는······ 갈수록 퇴보하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등이 젖어 간다. 10킬로그램이 넘는 철창을 들고 자세를 잡는 것만 해도 버거운데, 아무리 체력을 길러 본들 이 창을 나뭇가지처럼 휘두를 수는 없을 것 같다.
 “몸이 조금······ 안 좋습니다.”
 “흐음, 무사는 수련에 있어 어떠한 핑계도 용납되지 않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직 수련. 반복된 그 수련은 나중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배신하지 않지. 너에게 다소 무거운 그 창을 들게 한 것도 적응을 하는 데 더없이 좋은 수법이라 그랬다. 사람 몸은 참으로 신통해서 처음에는 힘들게 느껴지는 것들도 반복을 하다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 약한 소리는 하지 말거라.”
 비즈타는 입맛을 다시며 창을 들어 올렸다.
 분명 뭔가 잘못되었다. 예전에는 그런대로 들어 올릴 수 있었던 창이 오늘은 너무도 힘겹다. 마나샘에 이상이 생긴 것이 큰 이유인 것 같은데, 그걸 물어볼 수 없는 현실이 서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필데르를 찾아야 해.’
 비즈타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고 창을 가누며 오후를 보냈다. 그의 머릿속에는 빠른 시일 안에 필데르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비즈타의 그런 바람은 그 후 반년이 지난 뒤에도 이뤄지지 않았다.
 오전의 교양 수업은 계속되었지만 창술에 소질이 없다고 판단해 버린 대주는 비즈타에게서 손을 털었다. 자유 시간은 늘어났지만 마음속에 쌓인 답답함은 무럭무럭 자라서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문제가 있는데 방법을 찾을 수 없다. 누구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고 물어볼 수도 없다.
 밤마다 필사적으로 마나를 끌어 모으려 해 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고통뿐.
 비즈타는 그렇게 12세의 겨울을 마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비즈타의 눈에 서서히 탁한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답답하고 화가 나는데 그 어디에도 화를 분출할 수 없는 삶.
 이때까지도 아버지라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이건 사람이 사는 게 아니었다. 그랬기에 탈출을 했던 것인데 허무하게 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잡혀온 후에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분노만 더욱 강해졌다. 무엇에 대해, 누구에 대해 그런지는 스스로도 몰랐지만 막연하게 적대감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 감정은 비즈타의 눈에 독기라는 것을 서리게 했다.
 꾸준히 마나 수련을 해 봤지만 마나는 더 이상 모이지 않고 지독한 고통만 따랐다. 그래도 비즈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고통이 비즈타에게 아직 살아 있다는 느낌을 전해 줬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행할 뿐이었다.
 고통을 찾아 삶을 느끼는 시간들. 그런 지독한 하루하루가 느릿하게 흘러갔다.
 
 * * *
 
 하늘에서 몽실몽실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한 어느 날 오후, 비즈타는 수련장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디가 잘못된 걸까? 수련법이 틀린 건가?
 비즈타의 손에는 나무로 만든 창이 하나 들려 있었다. 루라이 가문이 사용하는 철창은 아무리 발악을 해도 휘두를 수가 없었다.
 필데르가 준 책에 기록되어 있었던 하나의 창술. 마나 수련이 아직도 제자리라는 것이 답답해서 요즘은 오후에 주어진 자유 시간에 그걸 연습하고 있는데, 아주 단순한 6개의 동작이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휘두른다. 찌르고, 던진다. 횡으로도 베고 올려치기도 하며 동작들을 연계한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찍기도 하지만 그 모든 동작을 스승 없이 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무로 만든 창 때문에 연습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백 번을 봤던 책이지만 빼앗긴 뒤로는 기억도 가물가물해져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 까먹을 것 같았다.
 비즈타는 한숨을 쉬며 창을 놓고 근처의 작은 돌을 집어 저 멀리 던졌다.
 툭. 툭.
 왜 살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답답했다. 하루 동안 만나는 사람이라고는 시녀와 교양 선생이 전부였다.
 글을 배우고, 교양이라고 이름 붙여진 여러 가지 수업을 병행한다. 말 타는 법, 예의 있게 말하는 법, 제젠의 역사와 그 제젠을 지배하는 각 가문의 이야기들.
 아르함이라는 나라의 글까지 배우고 있지만 비즈타는 왜 이런 것들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배울 뿐이었다.
 시키니까. 그걸 해야만 잠시라도 분노를 잊을 수 있으니까.
 비즈타는 후우,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돌을 던지다가 답답한 마음에 창을 집어 일어서서 힘껏 던졌다. 창대가 불안하게 흔들리며 허공에서 몸을 뒤틀던 창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다.
 고작 10미터 남짓 날아간 창. 13세의 체력도 그랬지만 마나샘이 사라진 이후 고작 이 정도가 한계였다.
 비즈타는 씁쓸하게 웃으며 걸어가서 창을 집어 들었다. 그러다가 허리를 펴는데, 시야에 1마리 새가 들어왔다. 얼마나 잘 먹었는지 통통한 새는 날기도 벅차 보였다.
 비즈타는 눈을 빛내며 다시 창을 던졌다.
 쌔액! 창이 새의 바로 근처까지 날아가서 처박혔다. 아주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새에도 닿았을 정도로.
 후드득.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던 비즈타는 잠시 서서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창을 집어 들고 창촉을 바라보았다.
 아주 조금만 더 힘이 있었다면······.
 반대로 힘을 좀 더 적게 사용할 수 있다면?
 비즈타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뭔가 방법이 필요하다. 다시는 그렇게 무력하게 끌려오지 않을 것이다. 언제고 이 답답한 곳을 나가려면 힘이 필요했다.
 대루라이 가문의 차남?
 ‘그런 건 개나 줘 버려!’
 비즈타는 독기가 서린 눈으로 창대를 잘랐다. 창촉에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한 공간만 남겨둔 채 미련 없이 창대를 버렸다. 그러고 나니 무게가 가벼워서 그런지 휙휙 잘 휘둘러졌다.
 창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되어 버린 창.
 창보다는 커다란 비도라고 부르는 게 맞을 정도였다.
 비즈타의 얼굴이 비장하게 변해 갔다.
 휘두를 수 없다면 던진다. 이 날카로운 창끝이 닿기만 하면 위력적인 공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고작 새 1마리 잡지 못하지만, 언젠간 어머니의 무덤을 그렇게 만든 흉수의 가슴에 이 창이 박힐 것이다.
 비즈타는 눈에 이상한 기운을 담고 저 멀리 거대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영주성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성.
 이때까지만 해도 비즈타는 자신의 눈에 담긴 그것이 살기라는 것을 몰랐고,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차라리 새처럼 날아서 이곳을 나가고 싶었지만,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되는 삶.
 그 후로 3년이 흘렀지만 비즈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그저 묵묵히 창만 던졌다. 분노와 살기를 담아서······.
 
 
 
 #훈련소로 가는 길
 
 
 
 봄기운이 완연하다. 비즈타는 한 시간 동안 달리기를 하고 땀에 흠뻑 젖어 수련장에 대자로 누웠다. 푸른 하늘에 몽실몽실 떠 있는 구름들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것 같다. 이렇게 따스한 날들이 계속된다면 좋겠는데······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은 견디기 힘들었다.
 날이 좋을 때 조금이라도 더 열심히 달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는데, 저 멀리서 시녀가 총총히 뛰어오는 게 보였다.
 “비즈타 도련님!”
 뭐가 그렇게 급한지 숨을 헐떡이며 혀를 길게 뺀 시녀가 황급히 말한다.
 “이러고 계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준비하셔야 해요. 어서요!”
 “뭘 준비해요?”
 시녀는 설명하기도 싫은지 비즈타의 소매를 잡아끌고 달리며 말했다.
 “가족 분들과 점심 약속이 되어 있어요! 저도 조금 전에 알았다고요! 어서요!”
 비즈타는 깜짝 놀라며 시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뭐라고요?”
 “아얏! 아파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시녀장님이 갑자기 도련님을 모셔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지금 모두 기다리고 계시다고.”
 비즈타는 달렸다. 4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가족과의 식사라니, 생각도 못 했는데 이렇게나 갑자기!
 시녀가 뒤에서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만 비즈타는 듣지 않고 가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전력질주했다. 달리기를 멈추고 문을 열고 나서야 자신의 몸에서 땀내가 풀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늦었습니다.”
 비즈타의 등장으로 잠시 모였던 시선이 다시 흐트러졌다.
 처음 본 아버지는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상태고, 새어머니는 비즈타를 보며 활짝 웃어 주었다. 처음 보는 눈부신 미소였다. 새어머니의 옆에는 필데르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비즈타를 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다. 이리 와서 앉아라. 아직 식전이지?”
 배터지게 점심을 먹었지만 비즈타는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새어머니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아직 식지 않았으니 들자꾸나. 오늘은 구운 오리가 일품이라고 하니 많이 먹어라.”
 새어머니는 비즈타에게 손수 오리 다리를 찢어 주는 믿지 못할 친절함까지 보여 주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시녀들이 음식을 치우고 차를 내오자 비즈타를 향해 인자한 웃음도 지어 보였다.
 “네가 이 집에 온 것도 벌써 4년이 지났구나. 그때는 작은 아이였는데 어느덧 대장부가 다 되었어.”
 비즈타는 끌어 오르려는 감정에 머리를 숙였다.
 뭐지, 이 더러운 기분은? 새어머니는 차를 몇 모금 홀짝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만······.”
 비즈타는 불안한 예감에 고개를 들어 새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분쟁 지역에 대해 알고 있겠지? 그래, 3영지의 북쪽에 있다는 그곳 말이다. 사실 귀족들도 한 대에 1명은 군에 다녀와야 한단다. 그래야 진정한 남자로 거듭나고 가문을 잘 이끌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전쟁터라고는 하지만 귀족들은 높은 위치에서 근무를 하기 때문에 안전은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비즈타는 혼란스러워지는 머리를 가까스로 부여잡고 새어머니의 말을 경청하려 애썼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지만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하는 것이니까.
 “알다시피 우리 가문은 손이 무척 귀하단다. 원래는 네 형이 군에 가야 하지만 군에 가서 잘 적응을 할지 걱정도 되고, 행여나 그곳에 가서 루라이 가문의 대가 끊기지는 않을까 걱정도 된단다.”
 불안한 예감이 점점 현실로 다가온다.
 “너도 내 아들이니까 형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부르게 되었단다. 비록 내 배 아파 난 자식은 아니지만 너희는 형제고 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아들이니까.”
 머리를 헝클이던 수많은 불순물들이 한순간에 폭발하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렸다.
 “고작 4년이란다. 네가 루라이가에 와서 지낸 시간하고 비슷하고, 복지가 잘되어 있다고 하니 불편한 점은 없을 것이야. 할 수······ 있겠지?”
 선명하게 하나의 그림이 머리에 그려졌다.
 예쁜 옷과 멋진 방. 맛있는 음식들과 그 많은 수업들.
 그런 모든 것들이 무려 4년이나 무상으로 지급되었다. 루라이가의 차남이라는 신분으로 보자면 당연한 것이지만, 비즈타는 그동안 자신이 루라이가의 식구라는 걸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의 냉대를 받았었다.
 영주성에 들어오기 전에 그 시골 촌구석에서도 들었었다. 군에 들어갔다던 마을의 아저씨들이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그 무섭고 교활한 오크에 대한 것들을.
 “군······대라고요?”
 비즈타의 낮은 목소리가 식탁을 떠돌지만 그 누구도 답해 주지 않았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새어머니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이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저 사람이 가진 금발과 풍기는 위압감이 말해 준다. 그가 아버지라고. 그러나 그는 애초에 비즈타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지난 4년 내내.
 “형······.”
 비즈타의 허탈한 음성이 필데르를 잡아끌지만 그조차 괴로운 얼굴로 비즈타를 외면했다.
 비즈타는 하늘이 노랗게 질려 가는 것을 느끼며 허탈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런 것이었나? 이것 때문에 날 이리로 데려온 거냐?’
 비즈타는 분노와 황당함이 극에 달해 오히려 멍해져 버렸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상을 뒤엎으며 고함을 지르고 싶었지만 뭔가에 얻어맞은 듯이 공황상태에 빠져 버렸다.
 비즈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이러려고 절 데려왔군요. 그래서 제가 이곳에 갇혀 있었어요.”
 비즈타가 똑바로 새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두 눈 가득 사이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제가 이 집의 아들이 맞긴 한 건가요? 어머니의 무덤은 어떻게 된 거죠? 당신이 제 아버지가 맞나요?”
 울분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지난 4년 동안 쌓인 분노가 일거에 폭사되었다.
 쾅!
 비즈타의 두 주먹이 식탁을 때렸다.
 “입이 있다면 대답해 보라고요!”
 비즈타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소리에 놀랐는지 식당의 문을 열고 기사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새어머니!”
 비즈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는 새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머리를 흔들며 시선을 피했다.
 비즈타는 어금니를 깨물며 시선을 돌려 말했다.
 “아버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해 본 단어. 이렇게 쓸 줄은 몰랐는데, 이런 상황에서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는데!
 “흐음.”
 아버지라는 사람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일어나서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비즈타는 머리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아버지라면, 적어도 저와 같은 핏줄을 가졌다면 이래선 안 되는 겁니다! 낳은 책임을 묻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렇게 바라보면 안 되는 겁니다!
 비즈타는 놀라운 속도로 식탁을 밟고 뛰어올랐다.
 저 등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하고 싶었다.
 똑바로 나를 바라보라고, 내 눈을 보라고!
 당신이 만들어 낸 자식의 얼굴을 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비즈타의 몸이 식탁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등을 돌리지 않았고, 비즈타는 아버지와 거의 닿기 직전에 뭔가 큰 힘에 눌려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크흑!”
 거대한 압력에 눌리며 땅에 떨어져서 그런지 한순간 숨이 막혔다. 뒤통수와 등을 지그시 누르는 한 남자는 무심한 눈으로 비즈타의 위에서 그를 속박하며 명령을 기다렸다.
 “으아. 으아······으아아아아!”
 비즈타가 쓰러진 채 절규했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세상을 다 잃은 노인처럼 피맺힌 그의 비명이 온 영주성을 울렸다.
 
 * * *
 
 그날의 점심 식사 이후 겨우 보름이 지났을 뿐인데 비즈타는 마차를 타고 영주성을 떠나고 있었다. 말을 탄 호위까지 6명이나 붙어 있고, 마차도 아버지가 평소 사용하시는 최고급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마차를 타고 분쟁 지역으로 가는 이 순간에도 자신이 왜 군대에 가야 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창살이 없을 뿐이지 비즈타는 마차가 감옥같이 느껴졌다.
 ‘형이 위험하다고? 그럼 나는? 그 무거운 루라이의 창을 가진 사람도 혹시나 위험할지 모르는 곳인데 나는 어찌 돼도 상관없다는 건가?’
 비즈타는 4일 전 자신에게 찾아온 필데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방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감금 생활.
 “나도 미처 몰랐다.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뭐가 미안한지, 뭘 몰랐다는 건지!
 “내가 준 비급은 진척이 좀 있니?”
 부드러운 말에도 비즈타는 대답할 수 없었다.
 “이걸 써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지.”
 한눈에 봐도 공이 많이 들어간 비도들. 날이 잘 선 그 비도들은 무척이나 귀해 보였다.
 그리고 그날 이후 미친 듯이 그 비도를 던지기 시작했다. 방에 있는 모든 가구가 부서졌고, 침대는 벼락을 맞은 듯 찢어졌다. 그러다 보니 벌써 오늘이 되었고, 비즈타는 어떤 배웅도 없이 마차에 올랐다.
 더럽고 치사한 기분이 처음이었다면, 지금은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었다.
 ‘생각해 보면 날 찾을 이유가 없었지.’
 어머니는 평민이었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머니가 죽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낯선 사람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위대한 루라이가의 영주가 아버지라고 말해 주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단 한 번도 따스하게 바라봐 주지 않았던 아버지라는 사람과 친절할 이유가 없었는데 자상할 정도로 잘해 준 새어머니. 그리고 대주나 노인의 반응들.
 머릿속의 조각난 퍼즐들이 어지럽게 어울려 놀다가 드디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억울하고 비참한 상황이라 해도 자살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러기에는 지난 4년이 너무도 억울했다. 어머니의 무덤이 왜 그 꼴이 되었는지, 자신은 왜 이런 처지가 되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 전까지는 죽어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훈련소까지는 6일이나 가야 하는 먼 거리.
 그 시간 동안 비즈타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처음에는 강한 적개심이 머리가 터질 것같이 몰려들었다. 이렇게 군대로 끌려가는 자신의 처지도 웃기고.
 도망을 칠까도 생각했다. 그 잘난 아버지와 새어머니에게 골탕을 먹여 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나는 그저 도구였나?’
 지난 4년의 시간이 무섭도록 치가 떨려 왔다.
 그들은 4년 동안 자신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차라리 영주성에 오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잘 지내고 있지 않을까?
 ‘나는 루라이가의 차남이 아니다.’
 그 위대하신 루라이 가문은 자신을 그저 필데르 대신 군대에 보낼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이라도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법인데!
 그런 막연한 분노가 지속되다가 며칠 시간이 지나자 비즈타는 어느덧 현실에 조금씩 순응하기 시작했다.
 더럽고 치사해도 이미 벌어진 일이다.
 어떻게든 다시 돌아간다. 오기라고 해도 좋고, 치졸한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지만 필데르가 못 했던 군 생활을 떳떳하게 마치고 돌아와서 아버지 앞에 당당히 설 것이다.
 ‘그래. 방법이 없다면 이겨 낸다. 그리고 다시 보자. 그때도 그렇게 거만할 수 있는지.’
 비즈타를 태운 마차는 하염없이 달렸다. 철저한 호위로 위장한 감시 속에서.
 그렇게 인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루라이······.
 
 빌어먹을 훈련소.
 “첫째도 군기요, 둘째도 군기라 했다. 교관이 물으면 답하는 것은 기본! 모두 엎드린다. 실시!”
 귀족이고 뭐고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훈련은 마치 지옥 같았다. 하지만 3일이 지나 기본적인 병기본을 배운 뒤로는 각자의 취향에 맞는 무술을 수련할 시간이 주어졌다.
 물론 교관들이 수업을 하는 과목에 참여해 상점을 버는 방법도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비즈타는 달랐다.
 훈련소에 입소할 때부터 느낄 수 있었다.
 분쟁 지역은 절대 안전하지 않다. 앉아서 이론 수업을 받을 시간이 있다면 한 번이라도 더 창을 던지든가 스스로 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비즈타는 묵묵히 창을 던졌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무려 3주였다.
 처음 비즈타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던 사람들도 그 끈질김에 두 손을 들었고 비즈타는 괴짜로 평가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비즈타에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제 어설프게나마 창을 비도처럼 던질 수 있게 되었지만, 훈련소에서 많은 상점을 획득하지 못한 비즈타는 3주가 지나 보직을 선택할 때 선택권이 없었다. 게다가 철저하게 혼자였다. 혼련소로 입소한 다른 귀족들은 이미 훈련소에서 뭘 배우는지 알고 있었고, 대부분 각 가문에서 교육까지 받은 상태였다. 이미 따라잡기에는 늦었다. 그래서 비즈타는 더욱 필사적으로 창을 던지고 또 던졌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평가되는 행정이나 보급 쪽은 이미 성적에서 상위권을 기록한 귀족들이 꿰찼고, ‘중대장’급은 각 가문의 직계 자손들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이곳에서 다시 중대장 교육을 4주 동안 받고 떠난다는 것을 들었지만 비즈타가 보기에는 모든 것들이 다 짜고 치는 도박이었다. 그런데 비즈타는 대루라이 가문의 차남이면서도 중대장의 보직에서 열외되었다. 그것이 ‘그 사건’ 때문이었는지, 혹은 모종의 뭔가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교관들은 어떠한 질문에도 답해 주지 않았다.
 “가장 이름을 알리기 좋은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비즈타가 한 말이었고······.
 “그렇다면 좋은 곳이 있지.”
 교관이 한 말이었다.
 이왕 세력을 등에 업을 수 없다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야 했다. 비즈타가 훈련소에서 느낀 것은 모든 것이 철저하게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자신처럼 누군가의 희생양으로 온 사람은 절대 안전한 위치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행정이나 보급을 아무리 잘해도 영웅이 될 수는 없겠지.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어떻게든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뱀처럼 똬리를 틀며 비즈타의 머리를 가득 메운다. 두 가지는 분명 서로 다른 길이지만 비즈타에게는 하나로 느껴졌다.
 그렇게 비즈타는 3주 동안의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분쟁 지역 연합군 제젠 소속 3중대 294소대 소대장으로 발령받게 되었다.
 
 * * *
 
 분쟁 지역의 특이한 점은 히쿤다와 가르텐이다. 히쿤다 산맥은 넘을 수 없는 산으로 불린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대륙을 가로질러 동쪽과 남쪽의 바다로 흐를 만큼 거대한 이 산맥은 총길이가 1,387킬로미터가 넘을 정도로 거대하고, 높은 봉우리가 8,897미터에 이를 만큼 험하기 그지없다.
 인간은커녕 오크들도 이곳에는 가지 않으며 기괴한 몬스터들과 유사인간들이 소수 살고 있다고 전해지지만 본 사람은 없다.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각 나라의 왕들마저 금지나 사지로 인정하고 있다.
 가르텐 강은 히쿤다에서 출발해 대륙의 동쪽 끝 바다에 이르기까지 긴 여정을 하며, 대륙의 중앙에서 갈라져 남해와 동해를 향해 흘러간다.
 총길이가 7,000킬로미터에 다다르고, 넓은 곳의 강폭은 8킬로미터에 육박할 정도로 경이롭다. 이 깊고 넓은 강을 인간들은 가르텐이라는 이름을 붙여 신성화시켰다.
 비즈타가 향한 곳은 제젠의 서북쪽 히쿤다 산맥과 인접한 부대였다. 히쿤다에서 시작된 가르텐이 거칠게 흐르고 1, 2중대가 1번 포인트를, 3, 4, 5중대가 2번 포인트를 방어한다. 오크들이 대규모로 강을 넘을 수 있는 이런 포인트별로 중대들이 방어선을 치고 있었는데, 비즈타는 3중대에 소속되었다. 1, 2중대가 히쿤다에 걸쳐 강의 초입 부분을 담당하고 있지만 어쩐 일인지 오크들은 히쿤다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분쟁 지역의 서쪽을 통해 공격해 들어올 때는 비즈타가 소속된 2포인트로 가장 많이 넘어온다고 하니 최전방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하지만 오크들이 마냥 대규모로 넘어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규모로 넘어와 군의 이목을 피해 남하하여 인간들의 마을로 흘러드는 경우가 더욱 많은데, 그런 일들 때문에 3중대 휘하의 소대는 무척이나 바쁘다.
 정찰과 섬멸. 분쟁 지역 전역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국지전.
 “지금 중대장님의 자리는 공석입니다. 곧 취임하시겠지요. 비즈타 님은 이미 발령이 난 상태이니 소대원들을 바로 만나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쪽입니다.”
 전령은 익숙하게 막사들을 가로지르며 비즈타를 안내했다. 3중대는 1개의 돌로 지은 건물과 100개의 천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돌로 지은 건물은 중대 본부라고 해서 중대장과 행정병, 보급병들이 사용한다고 했다.
 막사들에는 하나당 병사 20명과 소대장 1명이 산다. 막사들은 거대한 원을 그리며 둥그렇게 지어져 있었는데, 막사의 중앙 공터는 연무장이라고 했다.
 즉 1개 중대의 규모는 2,000명이 조금 넘는 것이 된다. 행정과 보급병을 제외한 숫자이니, 이런 중대가 130개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비즈타는 막사의 앞에 ‘294’라고 팻말이 박힌 곳에 안내되었다.
 “오늘부터 근무하실 부대입니다.”
 전령은 막사의 입구에 닫힌 천을 걷어 내고 안으로 들어가며 크게 소리쳤다.
 “모두 기상! 오늘부터 너희들의 소대장으로 부임하신 비즈타 님이시다. 거기 자는 놈! 당장 일어난다! 실시!”
 전령이라고 해도 귀족이다. 당연히 일반 병사들보다는 계급이 높았다. 전령과 보급병들은 기본적으로 소대장의 위치를 가진다. 중대장보다는 낮지만 일반 병사들보다는 확실히 높다. 그런데도 큰 파워를 가지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아 나, 누가 왔든 무슨 상관이오? 어차피 얼마 후면 불귀의 객이 될 텐데. 귀찮은데 인사는 나중에 저승에서 합시다.”
 직접 전투를 뛰는 병사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주 자연스럽게 행정과 보급병들을 무시한다. 가끔 실전으로 2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병에서 소대장으로 진급한 인물들은 두려워하지만 오늘 오는 신임 소대장의 정보는 이미 입수한 상태.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에게 고개를 숙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13훈련소에서 왜 그렇게 군기를 강조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흠흠. 내 역할은 여기까지요. 몸조심하시구려.”
 꼭 줄행랑을 치는 것같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막사를 나가는 전령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비즈타는 자신을 바라보는 20개의 무시무시한 눈빛을 마주하고 피식 웃었다. 이곳에서도 모두 적밖에 없다는 생각에 서러워진 것이다.
 “소개 좀 해 보시오. 내일 뒈진다 해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면 인연인데. 혹시 아우? 나중에 제사상이라도 차려 줄지.”
 “······.”
 막사에 침묵이 감돌았다.
 어딜 가나 환영받기는 힘든 인생인가 보다. 얼핏 봐도 텃새는 이미 도를 넘었다. 저들은 다수고 비즈타는 혼자였다.
 비즈타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비즈타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으니 혹시라도 내가 묻거든 성실하게 답하도록!”
 비즈타는 그 말을 끝으로 막사의 입구에 있는 개인 침상에 가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처음부터 기가 죽어서도 안 된다. 아까의 그 전령처럼 대해서도 안 된다. 그저 시간이 해결해 줄 일.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 자신은 저들에 비해 약자다.
 “푸하하하! 애송이 소대장! 혹시 약 했소? 요즘 귀족님들 사이에서 혼을 쏙 빼놓는 마약이 유행한다더니만 그걸 이곳까지 들고 온 거요? 어디 나도 좀 주시오! 제정신으로 버티기도 슬슬 힘든 참이었으니까!”
 이렇게 여기저기에서 비웃음을 들으며 비즈타의 294소대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리 부대는 294소대요. 뭐, 조금 더 있어 보면 알겠지만 200번부터 299번 소대는 이 근처에서 아주 유명하다오. 다른 부대는 두 달에 한 번꼴로 전선에 나간다고 하는데 우리는 한 달을 못 넘기고 출정을 하니 그만큼 죽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오. 4중대에서 우리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시오? 자살 부대요. 내가 여기 온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전역을 한 병사는 1명도 못 봤소. 그게 무얼 말하는지 알겠소?”
 자살 부대······.
 “보통 귀족 양반들은 중대장으로 부임을 하거나 행정, 보급으로 빠지는데 애송이 소대장은 왜 소대장으로 왔소? 소대장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기나 한 거요? 다른 귀족들이야 전장에 직접 투입되지 않지만 소대장은 병사들과 같이 나간단 말이오. 소대장 인생도 참 기구하구려.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벌써부터 그렇게 줄을 못 서서야. 여튼 잘해 봅시다.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나는 소대장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이 남자는 카락이라는 이름을 가진 제젠의 노예병이다.
 3일 동안 294소대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으며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무시를 당했는데, 카락은 먼저 말도 붙여 주었고 이것저것 궁금한 것들도 말해 주었다. 대부분 비관적인 얘기들뿐이었지만 그래도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비즈타는 위안을 받았다.
 294소대에는 병사들끼리도 나름대로 위계질서가 있었다. 신병들은 귀족보다도 고참을 더 무서워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중대와 소대를 제외하고도 이곳에는 특이한 2개의 세력이 더 있었다. 이들은 아르함에서 온 사제와 성기사로 묶인 소대 규모의 한 무리, 돈을 벌기 위해 입대한 ‘용병’들로 이뤄진 집단이었는데, 카락에게 이야기만 들었지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다.
 카락은 소대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가지 더 해 주었다.
 폴이라는 남자는 제젠의 노예 출신이라고 했다. 얼굴에 큰 검상이 있으며 자존심이 강해 보였다. 모두가 그를 조심스럽게 대하는데, 놀라운 것은 폴이 군에서 복무한 지 2년이 넘었다는 사실이었다. 돈에 미쳐서 전역도 하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하는데, 카락의 말대로라면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미친개라서 피아를 구별하지 않고 물어뜯는다고 했다.
 2년을 복무하고도 아직 병사라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뜻.
 카락과 동기라는 콰르는 평소 말이 없고 온순해서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성실하고 상황 판단에 능하다고 한다. 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자가 많다고 하니 친해져야 할 인물이었다.
 마지막으로 메이비라는 남자. 20세가 넘지 않았을 것 같은 앳된 외모와 차가운 표정의 얼굴. 몸놀림이 잽싸고 빠른 달리기 실력을 가졌다고 한다. 거기에 뛰어난 검술 실력도 겸비했다고 하는데 평소 모습은 그저 불량배처럼 보일 뿐. 소대에서 카락과 함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훈련소에선 일반 병사들에게 3주 동안 주야장천 검술만 가르친다. 귀족 교육생과는 다르게 실전에서 꼭 필요한, 다시 말해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교육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메이비는 변칙적인 검술을 사용한다고 한다. 입대하기 전에 뭔가 사연이 있었을 거라는 것이 카락의 설명이다.
 서로 오랜 시간 봐 왔지만 이렇게 서로에 대해 잘 모를 정도로 이곳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봐야 오늘 내 이야기를 들어준 녀석이 내일은 황천으로 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이 말라 가는 것이다.
 나머지 16명은 최근에 들어온 신병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4명의 기존 세력은 나머지 16명과 거의 말을 섞지 않는다. 어차피 죽을 놈들에게 정을 줄 필요가 없다는 듯이 보였다.
 비즈타는 적어도 왕따를 당하던 훈련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20명과 친해지면 끝이었고, 그중에서도 4명과 친해지면 나머지 16명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다.
 이미 1명은 친해졌으니 조금씩 허물어 가면 될 것이라 생각한 비즈타는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전장에서 등 뒤를 맡겨야 할 전우.
 이들과 친해진다는 것은 생존과 가까워진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보름이 지났다.
 비즈타가 그동안 알게 된 것은, 노예들로 이뤄진 취사병들이 부대 뒤편에서 병사들과 귀족들이 먹을 음식을 만든다는 것들과, 음식의 재료들은 3일에 한 번 보급이 온다는 것. 다른 소대장들과는 다르게 그래도 자신에게는 귀족의 밥상이 나온다는 것 정도였다.
 근무에 관한 것이라면 하루 2개의 소대가 경계 근무를 선다는 것. 가르텐이 워낙에 넓고 강을 넘어 남하하려는 오크들이 강 건너편에서 모이려면 사전에 경계를 서는 병사들에게 발각되기 때문에 기습은 실질적으로 힘들다는 것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넓고 광대하기 때문에 소규모의 오크들이 넘어오는 것은 사전에 포착할 방법이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비즈타는 괴상한 놈 취급을 받으며 자신의 특별함을 3중대에 과시하고 있었다. 귀족 출신의 소대장인 것도 이상한데 비즈타에게는 귀족 특유의 거들먹거림이 없었다. 다른 귀족을 만나면 늘 먼저 고개를 숙였고, 자신에게 나온 맛있는 반찬도 소대원들과 나눠 먹는 믿을 수 없는 짓까지 하며 병사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졌다. 역으로 다른 귀족들에게는 눈총을 받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비즈타가 아니었다.
 게다가 비즈타는 294소대에 발령받은 그다음 날부터 보급부에 부탁을 해서 6자루의 창을 얻어 연병장에서 죽어라 던지고 있었다.
 이미 비즈타는 주변의 시선이나 소곤거림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 경지까지 올라섰다. 그래서 더 고립되었지만, 비즈타는 굴하지 않았다. 눈칫밥을 먹은 지 벌써 4년이 넘었다. 그 시간들은 비즈타에게 체력보다는 정신력을 더욱 키워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새로운 3중대장이 부임한다는 소식에 100명의 소대장들과 행정, 보급을 맡는 귀족들이 연병장에 도열했다. 자리가 넉넉하지 않아서 병사들이 모두 나오지는 못했지만, 나온 병사들은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이때는 그 보기 힘들다는 용병단의 대장과 아르함의 사제도 모습을 보였다. 비즈타가 생각하기에 아르함의 사제들은 머리에 뿔이라도 달렸을 것 같았는데, 오히려 더 온순하고 수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들이었고, 더욱 의외였던 것은 용병단의 대장이 여자였다는 점이다. 은색의 갑옷과 투구로 온몸을 가려서 얼굴은 확인이 되지 않지만, 체형을 보거나 갑옷의 형태를 보면 분명한 여자였다.
 이들이 다 나올 정도로 일반 귀족들과 중대장은 엄연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중대장이 맡은 작전 하나가, 내리는 지시 하나가 병사들의 목숨과 직결되는 것이다. 만약 중대장이 특정 소대에 악감정을 품고 있다면 ‘2포인트 인근 목책이 좀 부실하다, 가서 보수하고 와라.’라는 명령 하나로 간단하게 하나의 소대를 몰살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을 벌인다면 중대장의 경력에도 문제가 생기겠지만 경력과 목숨은 그 무게부터가 다른 것이다.
 “오셨다!”
 환호성이 터지고, 전령과 함께 한 남자가 말을 타고 연병장에 도달했다. 허리에 아름다운 쌍검을 착용했는데, 그 순간부터 비즈타는 취임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느끼지 못하고 막사로 복귀했으며, 그날 저녁 소대장들과 중대장의 간담회 겸 식사 자리에서 중대장에게 들은 한마디 때문에 그날 밤잠을 설치게 되었다.
 신임 3중대장의 이름은 호타루 디스하라.
 2영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8영지. 제젠의 동쪽 가르텐 강을 길게 접해 있고, ‘디스하라’라는 성을 사용하며 강을 끼고 어업과 농업을 해서인지 풍요하다. 디스하라가의 검술은 2개의 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데 그들의 쌍검술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변화가 심하고 신통방통한 변칙 공격으로 인해 처음 상대해 보면 무척 까다로운 검술이다.
 역사 시간에 배웠던 정보들이 원하지 않아도 머리에 떠오른다.
 그런 8영지의 첫째 아들 호타루 디스하라.
 
 -잘 지내보자고. 198번 교육생, 아니, 294소대 소대장이었던가?
 
 비즈타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수척해지기 시작했다. 13훈련소에서 수석을 했던 그놈이다. 거기에서 본 놈들은 그 누구도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과거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훈련소 시절에도 자신을 보는 눈초리가 절대 곱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앞길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떤 놈은 중대장으로 시작하고, 누구는 소대장으로 시작한다.
 똑같이 대가문을 등에 업고 훈련소로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이렇게나 대우가 갈리고, 인생이 달라진다.
 더러운 세상.
 궁지에 몰린 인생.
 비즈타는 그날의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꼬일 줄 몰랐는데······ 신의 장난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날, 훈련소에 들어간 첫날.
 비즈타는 그를 보았다. 디스하라가의 장남, 호타루 디스하라를.
 
 “네가 루라이 가문의 비즈타냐? 난 디스하라의 호타루다.”
 손을 내미는 녀석을 보며 비즈타는 울컥한 감정을 삼키려고 노력했다.
 “다른 쓰레기들과 우린 다르잖아? 선택받은 사람들끼리 어울려야지. 게다가 미래를 생각하면 이렇게 만난 것도 잘된 일이지. 이거 민망한데? 내 손을 언제까지 이렇게 둘 거냐?”
 한 손을 내민 녀석을 보며 비즈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녀석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너무 무방비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가해진 공격에 호타루는 전혀 대비하지 못했고, 비즈타는 그의 몸에 올라타서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날려 댔다.
 “뭐가 루라이냐! 선택받았다고? 웃기지 마! 쓰레기는 바로 루라이다!”
 세 번째 주먹이 호타루의 얼굴에 접근할 때쯤 비즈타는 턱에 호타루의 주먹을 얻어맞고 튕겨 날아가서 벽에 처박혔다.
 놀라운 힘. 그런 자세에서 주먹을 휘둘러 올라탄 사람을 날려 버릴 만한 괴력을 호타루는 가지고 있었다.
 “미친놈······ 뭐야, 갑자기?”
 호타루의 그 말을 들으며 비즈타는 정신을 잃었었다.
 하필 그놈이 중대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녀석이 3주 내내 자신을 어떤 눈으로 쳐다봤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는데······ 앞으로의 일이 보지 않아도 눈에 그려졌다.
 “비즈타 소대장님?”
 비즈타는 노을이 아름답게 내리는 가르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등 뒤에서 들리는 청아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비즈타가 알기에 3중대에는 여자가 없는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 고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물론 분쟁 지역에도 여자는 있다. 그 용병단 대장이 그랬고, 일반 병사로 들어올 수는 없지만 귀족 중에서 아들이 없거나 정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들 대신 딸을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사례만 남아 있을 뿐이지 누구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이미 그녀로 인해 3중대는 난리가 났는데도 비즈타는 심적으로 너무 힘든 일에 마주하고 있어 소란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군대에 여자 간부가, 그것도 남자만 2,000명이 있는 곳에 홀로 있다면 남자들이 무슨 상상을 하겠는가?
 게다가 이렇게나 아름다운 여자라면!
 하늘거리는 붉은 생머리와 커다란 눈망울. 가녀린 목선과, 회색의 후줄그레한 군복이 저렇게 섹시하게 다가올 수 있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완벽한 몸매와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풍만한······.
 “눈 깔아요! 이래서 남자들이란. 어떻게 반응이 죄다 똑같아? 유명인이라더니 똑같네요!”
 “아!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누구신지.”
 “오늘부로 3중대 290소대부터 299소대까지의 보급을 책임지게 된 나타시아라고 해요. 잘 부탁드려요, 294소대장님.”
 294를 딱딱 끊어서 말하며 노려보는 나타시아의 기세에 비즈타는 한발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비즈타라고 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나타시아는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잘해 봐요, 우리!”
 등을 보인 상태에서 팔을 들어 흔들며 떠나가는 그녀의 모습에 비즈타도 막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하루도 별일 없이 지나갔다. 정말 하루하루가 피가 바짝 마르는 느낌이다.
 지은 죄가 있어서 떳떳하지도 못하고 똥마려운 개처럼 좌불안석이다.
 당장이라도 중대장실로 호출당해 ‘생각해 봤는데 말야, 포인트 인근에 화장실이 필요할 것 같아. 쓸모없다고 생각하지 말게. 병사들이 근무를 서다가 배가 아파서 곤란해지면 어떡하겠나? 대단하신 294소대장께서 설치 좀 해 주고 오지 않겠나?’라고 말하며 간악하게 웃는 그놈을 볼 것 같았다.
 잠을 자면 꿈에서도 시달리니 비즈타의 정신적 고통이 얼마나 심한가는 294소대원까지 알 정도였다.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이를 딱딱 부딪치며 식은땀을 흘리기도 하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었다. 물론 비즈타가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비즈타의 이런 예감은 불행하게도 별로 빗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비즈타는 스스로가 만든 불안에 도취되어 가고 있었다.
 지독한 열등감.
 진득하게 느껴지는 패배감.
 이곳에서도 혼자라는 사실과 여러 가지 불쾌한 감정들이 맞물리며 비즈타는 조금씩 지쳐 가고 있었다.
 
 “카읏! 뭐야, 갑자기?”
 카락이 늦은 새벽 전투 군장을 갖추며 짜증을 부린다.
 “낸들 알아요? 까라면 까는 거지! 늦을수록 따라잡기 힘드니까 서두르자고요!”
 메이비라는 남자가 대답했다.
 “아, 그래! 안다고 알아! 까라면 까는데, 내가 짜증 나는 건 왜 하필 우리 소대냐고! 100개가 넘는 소대가 있는데 왜 하필 우리만 콕 찝냐고!”
 카락과 메이비는 대화를 하면서도, 다른 이들이 아직 절반도 입지 못했을 때쯤 무장까지 다 한 상태로 막사의 입구에 섰다. 그러자 바로 2명의 남자가 전투준비를 끝마치고 그들 곁에 선다.
 폴과 콰르.
 비즈타를 포함해 17명은 아직도 허둥지둥한 상태. 막사의 입구에 서 있던 전령은 그런 모습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눈은 비즈타를 향하고 있지만 시선은 폴을 향하고 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죠. 대략 10마리 안팎의 오크들이 강을 넘어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해요. 294소대는 즉시 오크들을 따라잡아 격멸하라는 중대장님의 지십니다. 추적병과 관측병의 보고에 따르면 강을 넘은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고 하니, 말을 타고 추격하면 날이 밝기 전에 조우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폴이 뭔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저음의 목소리를 낸다.
 “임무는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지금까지 용병대가 맡아서 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돈 되는 건수를 놓칠 이유가 없을 텐데요?”
 “난 지시받은 대로 전할 뿐이다. 준비가 끝난 것 같으니 나머지는 밖의 추격병에게 묻도록!”
 전령은 폴의 시선을 피해 막사를 나갔고, 비즈타와 병사들은 조급한 몸짓으로 막사에서 나와 말에 올랐다.
 “출발합니까?”
 추격병의 물음에 비즈타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대원들을 돌아보았다. 아직 자신도 뭐가 뭔지 모를 임무였지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안다. 그래서 비즈타는 일단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이랴!”
 22마리의 말이 적막한 3중대를 거친 말발굽으로 깨운다.
 이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전령은 뭔가를 떠올리고 이마를 찡그리며 머리를 저었다.
 어차피 명령일 뿐이다. 나는 말과 말을 옮기는 전령일 뿐.
 그의 시야에 아련하게 사라져 가는 294소대가 보인다.
 이것이 군대. 시키면 하는 것이다. 개인의 의견 따위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전령은 칫, 소리를 내며 등을 돌렸다.
 
 다다다닥.
 “하악. 하악.”
 말을 장시간 타면 초보자들은 말보다 먼저 지치게 된다. 게다가 소대에서 보유한 말은 그다지 상급의 군마가 아니다.
 품종 좋은 상급의 육중한 군마들은 대부분 각 가문의 기사대에 소유되어 있다. 2영지 루라이 가문의 흑색창기대와 같은 기사대 말이다. 이름은 각기 다르지만 각 가문은 그런 기사대를 보유하고 있고, 이곳 분쟁 지역을 훈련 장소로 생각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각 가문의 교육기관에서 훈련을 하다가 18〜20세가 되면 분쟁 지역에서 5년을 보내게 된다. 그런 다음 영지로 복귀하면 영지의 치안을 관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위치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불의를 보면 즉결 처분할 수 있는 힘과 막대한 권력과 무력을 보유하고 있어, 그들이 다수가 모인 집단은 분쟁 지역에서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들은 군과 별도로 움직이며, 그들이 상대하는 것은 오직 갈색갈기오크족이다. 일반 야생 오크 위에 군림하는 그 공포의 오크들은 일반 병사가 막기 힘들다. 때문에 각 가문의 기사들이 분쟁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왜 비즈타는 그 기사대에 들어가지 않은 걸까?
 그것이 바로 법이었다. 귀족의 의무. 가문의 직계 자손들은 무조건 전방에서 참모나 지휘관 같은 중대장급의 근무를 해야만 한다. 후방으로 가거나 기사대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직계가 아닌 귀족들이 전령이나, 아주 가끔 소대장급으로 오게 되는 것이다.
 일단 비즈타는 점점 체력이 고갈되는 것을 느끼며 손을 들어 말을 잠시 멈추자는 수신호를 보냈다.
 “거리는 얼마나 떨어져 있지?”
 비즈타의 물음에 추격병은 땅에 난 오크 발자국과 주변의 지형을 보며 30분 정도라고 말해 주었다.
 “10분간 휴식한다. 각자 경계는 소홀하지 않게 최선을 다하며 쉬도록.”
 비즈타는 감각이 없는 엉덩이를 주무르며 나무에 기댔다.
 가장 처음의 추격병은 대부분 용병단에 있는 용병들이 보유한 귀중한 전력이었다. 군에서는 처음 추적의 기술을 지닌 용병에게 부탁을 해서 추적술을 지닌 병사들을 대량으로 육성하기 시작했고, 각 중대에 배치했다. 관측병도 마찬가지인데, 이들이 없다면 소규모로 남하하는 오크들을 처리하기가 무척이나 난감해진다.
 군은 오랜 전쟁으로 많은 발전을 해 왔다. 대장장이들도 각 중대에 보유하고 있고, 어느 부대는 오크의 척추 뼈에 쇠사슬을 달아 아르함에 팔거나, 노예로 중대에서 부리기도 한다.
 올해로 3년차 추격병 요델리는 자신에게 이것저것 물어 오는 어린 소대장을 바라보며 기이한 눈빛을 보냈다.
 ‘오크를 어떻게 추적할 수 있지? 나중에 가르쳐 주겠나? 오크는 어떤 냄새가 나는가?’ 등등 어린 소대장은 무척이나 괴상한 사람이었다.
 보통 이런 건 알려고 드는 귀족이 없는데, 뭉친 근육을 풀기도 짧은 쉬는 시간에 질문을 하다니.
 요델리는 이 소대장이 아직 오크를 본 적이 없어서 두려움에 자꾸 입을 여는 것이라 판단하고 대충 성의 없이 툭툭 내뱉듯 답변해 주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말에 올라타며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더 차이가 벌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조금 무례하게 보이는 행동에도 어린 소대장은 전혀 기분이 상하지 않은 표정이다. 하긴, 괴짜라고 소문이 자자하니 뭔가 여느 사람과는 다르겠지.
 22마리의 말들은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제 곧 그들은 이 땅의 북쪽을 지배하는 사악한 포식자들과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진정한 군인이 될 것이다.
 
 히익!
 한 병사의 입에서 섬뜩한 비명이 작게 들리고 그 비명은 다른 21명의 심정을 대변했다.
 비즈타는 보았다.
 그리고 생각한다.
 빌어먹을!
 “아무리 봐도 적응이 힘들다니까. 카악! 퉤!”
 카락이 말에서 내리며 침을 뱉는다. 그와 동시에 메이비, 폴, 콰르도 말에서 내리고, 신병들도 엉거주춤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미 비즈타는 뭔가를 통제할 자신이 없어졌다. 다리는 자꾸 떨리고, 손가락 끝이 저릿하다. 갑자기 배가 슬슬 아파 오고 두통이 엄습한다.
 ‘저것들이 처먹고 있는 게 그거 맞지?’
 한 놈이 식사하는 데 거슬렸는지 힐끔 비즈타를 째려본다. 도망도 가지 않는다. 별다른 경계도 하지 않는다.
 양 떼에 둘러싸인 한가운데서 식사하는 사자는 결코 주변의 양을 경계하지 않는다.
 사자는 사자고 양은 양일 뿐이다.
 놈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 거였어?”
 비즈타는 혼잣말을 하며 오른손에 들린 창대를 부서질 듯 쥐었다.
 이곳은 3중대에서 남쪽으로 말을 타고 3〜4시간가량 달리면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마을 중 하나다. 마을이라기보다 밭농사를 짓는 소작농들이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임시로 지어 둔 숙소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당하다.
 그런 임시 숙소 3개 중 2개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고, 찢겨지고 분해된 사람들의 시신만 열 구가 훨씬 넘는다.
 그놈들은 그런 곳에서 느긋하게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바닥에 흥건한 붉은 피는 벌써부터 응고되기 시작했다. 그만큼 이놈들은 대식가고, 비즈타는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콰드득.
 8마리의 오크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일어났다. 웅크리며 식사를 할 때와는 또 다른 존재감을 풍겨 댄다.
 평균 190센티미터의 키에 150킬로그램의 몸무게. 하지만 지방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죄다 근육이라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보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인 맹수와 마주한 것처럼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외모.
 몸이 떨려 온다. 놈들에게 우적우적 씹히고 있는 그것이 곧 자신의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본능적인 공포.
 그리고 알 수 없는 분노.
 죽을 수 없다. 고작 저런 것들에게 죽기에는 가슴속에 품은 한이 너무도 짙다.
 비즈타의 눈빛이 변했다. 그와 동시에 폴이 소리친다.
 “놈들이 온다! 포위되면 안 돼! 흩어져서 하나씩 노려!”
 그 말이 환청처럼 아련하게 머리를 울리고, 오크라는 괴물들이 사납게 다가오는 와중에 비즈타의 몸이 움직였다.
 4년 동안 휘둘렀던 창술. 3년 동안 던졌던 창.
 그 긴 시간 동안 쌓였던 분노가 한 번에 터져 나오며 오른팔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뭔가를 진정으로 죽이고 싶다는 느낌. 아주 거대한 살기가 비즈타를 일깨웠다.
 머리에서 폭죽이 터지며 두 눈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그때 아주 이상한 감각이 비즈타의 오른쪽 어깨에서 감지되었다.
 온몸에 흩어졌던 마나들이 모이는 느낌. 머리가 핑핑 도는 그 와중에 아주 또렷하게 그 감각이 전해진다.
 무엇이든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힘!
 4년 가까이 반응이 없었던 그 마나가 처음으로 머리를 치켜들었다.
 “으아아아!”
 비즈타는 더 참지 못하고 손에 든 창을 힘껏 던졌다.
 쓰아아악!
 창이 빛처럼 직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조금은 푸르스름하게 빛 무리를 내고 있어서, 긴 꼬리를 가진 유성처럼 아주 빠르게 날아간 창은 그대로 달려오던 오크의 몸에 박혔다.
 오크는 달려오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창을 가슴에 안고 뒤로 날아갔다.
 퍼퍽! 창의 절반 정도가 완전하게 오크의 몸을 뚫었다.
 “하아. 하아.”
 모였던 마나가 전부 다 빠져나갔다. 엄청난 공복감이 전신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달려오던 오크들도 멈췄고, 대원들도 놀랍다는 눈으로 비즈타를 바라보았다.
 “휘유! 역시 루라이군! 대단한 창술이야! 역시 한가락 한다는 건가?”
 누가 한 말인지 비즈타는 몰랐다. 단지 그 말 때문에 비즈타는 살기 어린 눈빛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머리를 휙 돌렸다.
 카락이 보였다.
 “나는 루라이가 아니다.”
 카락은 비즈타의 말에 뭔가 대꾸하려다, 다시 움직이는 오크들의 모습을 보며 외쳤다.
 “다시 온다! 조심해!”
 오크들은 잔뜩 경계하며 다시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창을 던져 버려서 빈손이 된 비즈타에게 누군가 창을 건네줬다.
 군에서 흔히 쓰이는 장창.
 비즈타는 그걸 받아 들고 머리를 한번 흔들었다.
 루라이라는 단어에 화를 낼 때가 아니다. 이곳은 생과 사가 갈리는 전장의 중심.
 비즈타는 코앞까지 다가온 오크들을 보며 자세를 잡았다.
 “크아아! 살려 줘!”
 대원 하나의 팔이 오크에게 잡혀 산 채로 뜯겨 나갔다. 허공으로 피가 솟구치고 여기저기에서 고함이 터져 나온다.
 지옥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못하면 먹혀 버리는 무간지옥의 중심.
 비즈타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고 창을 열심히 휘두르며 오크의 공격을 피했다. 주먹을 맞고 바닥을 구르면서도 어떻게든 일어나서 자세를 잡았다.
 고작 이런 것들에게 죽을 수는 없었다.
 아까처럼 다시 마나를 모으려고 애를 써 봤지만 몸속의 마나들은 그를 배신했다.
 살점이 튀고 붉은 안개가 주변에 가득 퍼진다. 그러면서도 오크들의 숫자는 줄어 가고 있었고, 고참급 4명은 신중하게 움직이며 오크들을 상대했다.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지금까지 배운 것들은 모두 다 쓸모가 없었다.
 죽을힘을 다해 피하고, 기회가 생기면 죽지 않으려고 공격을 한다. 땅을 구르고, 모래를 잡아 뿌리면서라도 우선 살아야 했다.
 그렇게 지옥의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모두가 지친 숨을 내쉬며 주변을 훑었다.
 남은 오크는 4마리. 서 있는 사람은 고작 12명.
 그때 비즈타의 근처에 있던 오크가 거대한 괴성을 지르며 비즈타에게 달려들었다.
 만만해 보였는지, 혹은 가장 지쳐 보였는지 오크는 비즈타에게 달려들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도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3마리의 오크 때문에 비즈타에게 올 수가 없었다.
 “소대장! 피해!”
 비즈타는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났다. 고작 이 정도로 복수를 꿈꾸다니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던 것이다. 그렇다고 죽어 줄 수는 없다. 이런 괴물에게 죽기 위해 그동안 그렇게 버텼던 것이 아니다.
 “흐압!”
 비즈타는 손에 든 창을 힘껏 던졌다. 조금이지만 마나가 반응했다.
 휘두를 때는 전혀 움직이지 않던 마나가 던지니 반응을 한다.
 어깨에서 빠져나가는 마나를 느끼며 비즈타는 오크에게 달려들었다.
 던지는 순간 알았다. 창이 빗나갈 것을.
 퍽!
 오크의 왼쪽 골반을 맞고 튕겨 나간 창.
 달려오던 그대로 창의 힘 때문에 빙글 돌며 땅에 쓰러지는 오크의 등에 뛰어올라, 언제 들었는지 큰 돌을 두 손으로 움켜쥔 비즈타가 사정없이 오크의 머리에 돌을 내리찍었다.
 콰직!
 녹색의 피가 비즈타의 얼굴로 튀었다.
 오크는 몸을 꿈틀거리고 괴성을 지르며 발악을 했지만 비즈타는 굴하지 않고 한 번 더 돌을 내리찍었다.
 퍽!
 돌에 녹색의 피가 흥건하게 묻었다. 그런데도 오크는 아직 살아서 비즈타를 떼어 내려고 팔을 휘두른다.
 비즈타가 세 번째 공격을 하려고 돌을 치켜들었을 때 휘두르던 오크의 팔이 비즈타의 옆구리를 때렸다.
 “흑!”
 땅으로 처박힌 비즈타는 고통을 참으며 다시 일어나 막 몸을 일으키는 오크에게 달려갔다.
 지난 4년 동안 마나 수련을 하며 당했던 고통에 비하면 이런 고통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즈타는 있는 힘을 다해 오크의 골반을 걷어찼다. 창이 가격했던 그곳.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는 그곳을 정확하게 발로 찼다.
 윽!
 쿠아아아.
 돌덩이를 걷어찬 것 같았다. 비즈타의 신음성과 오크의 비명이 동시에 울린다.
 비즈타는 다시 오크에게 달려들었다. 손에 무기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가슴속의 분노가, 심장에 맺힌 한이 그러라고 부추긴다.
 비즈타는 훌쩍 뛰어올라 발광하는 오크의 등에 타고 양팔로 오크의 목을 졸랐다. 그러면서 오크의 귀를 힘차게 깨물었다.
 크아아! 크라락!
 입안 가득 비릿하고 역겨운 피와 귀의 살점이 씹힌다. 비즈타는 그것을 뱉어 내며 다시 한 번 오크의 귀를 깨물었다.
 오드득 하는 느낌과 함께 귀의 연골이 씹힌다.
 더럽고도 처절한 장면.
 비즈타는 갑자기 내동댕이쳐지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땅으로 머리부터 처박혔다.
 오크의 손에 뒷덜미가 잡힌 것이다.
 그리고 그때, 오크의 몸에 2개의 검이 꽂혔다.
 콰르와 메이비가 오크의 몸에 검을 내지르며 비즈타를 바라본다.
 “흐으. 흐으.”
 비즈타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억누르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났다. 두 눈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고, 입가에는 녹색의 피가 가슴까지 흘러내렸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본 비즈타의 눈에 더 이상 살아 움직이는 오크는 보이지 않았다.
 비즈타의 시선을 받은 대원들이 움찔거린다.
 생전 처음 마주하는 독기 어린 인간의 눈빛.
 비즈타는 갑자기 밀려오는 안도감에 그대로 허물어져 내렸다.
 부르르.
 대원들은 다가가지 못하고 그런 비즈타를 보며 굳었다. 질렸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귀족이라 했다. 대루라이 가문의 차남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지금 본 모습은 그저 한 마리 악귀였다. 처음 보여 준 창던지기 이외에는 루라이를 떠올릴 만한 강력한 창술이나 힘은 없었다.
 독종!
 “뭐해! 소대장님을 모셔라! 부상자들을 살펴!”
 폴의 고함에 퍼뜩 정신이 든 대원들이 그제야 움직였다.
 정신을 잃은 비즈타를 내려다보며 폴은 놀람을 감췄다. 뭐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평소 눈빛에서 그늘이 보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그는 왜 이렇게 처절하게······.
 마치 자신의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무려 루라이 가문의 차남이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일까?
 
 그렇게 비즈타의 생애 첫 번째 전투는 8마리의 오크를 격멸, 11명의 소대원이 죽고 2명이 크게 다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들은 부대로 복귀했다.
 “죽고 사는 건 여기서 다반사요. 아무리 강해도 죽을 놈은 죽고, 아무리 약해도 살 놈은 살지요. 세상 일이 다 그렇지 않소? 건강해서 오래 사는 게 아니라, 오래 살면 그게 건강한 거요. 슬퍼하지도 말고, 고민하지도 마시오. 최선을 다했는데도 나오는 죽음은 누구의 탓도 아니니까.”
 카락의 말을 곱씹으며 비즈타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살인을 했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그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악마에 가깝다. 오히려 뿌듯함도 없지 않아 있을 정도. 단지 그 과정에서 생긴 일련의 죽음들이 비즈타를 괴롭게 만들었다. 너무도 허무하게 죽어 가는 사람들. 그건 남의 일이 아니었다.
 꿈이라고 해도 끔찍해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악몽.
 비즈타는 그 악몽에 깊숙이 한발 더 내딛고 있었다.
 
 
 
 #출병
 
 
 
 폴은 말한다.
 “지난번의 전투는 아주 사소한 일상 중의 하나요. 그건 아주 안전한 작업이라 할 수 있죠.”
 메이비는 말한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스물에 열이 죽는 건 이곳에서 성공한 작전 축에 드니까.”
 콰르는 침묵했고, 카락이 말을 받는다.
 “우린 적어도 10개의 소대가 동시에 전투를 치를 정도의 규모를 두고 출병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위험하고 뒈지는 놈들이 많다는 얘기지요. 그런 전투가 한 번씩 있을 때면 부대가 싹 물갈이가 되는 거지요. 낄낄.”
 그날을 떠올리면 비즈타는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 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11명의 죽음. 그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고,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달걀을 손에 쥐고 터뜨려 본 적이 있는가?
 오크는 사람의 머리를 쥐고 그걸 할 수가 있다. 비상식적으로 아귀의 힘이 강한 게 오크다. 그 손에 한번 잡히면 인간의 힘으로는 빠져나오기가 무척이나 힘겨울 것이다.
 쎄에에엑.
 창이 날아 나무로 만든 과녁에 가서 박힌다. 머리 하나만큼 빗나갔고, 마나샘의 마나도 전혀 줄지 않았다.
 비즈타는 치잇, 소리를 내며 다시 창을 잡아 든다.
 오크들은 대단히 질긴 피부와 단단한 뼈 골격을 가졌다. 칼로 베어 봐야 얇은 상처엔 타격도 받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공격을 한 뒤 움찔거리는 그 순간을 포착해 역공한다. 칼로 무를 베다가 대나무를 베어 보면 그 차이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오크는 단단함에 유연성까지 겸비했다.
 퍽!
 창대가 바르르 떨린다. 역시 집중이 실패했다는 뜻.
 
 호흡이 고르고, 정신이 개안하면 위대한 자연은 하나가 되고 거친 비바람은 지붕이 될 것이니 만물의 기운이 네 것이고, 네가 곧 만물이다. 들숨에 천지를 마시면 날숨은 질풍이 되어 세상에 뿌려지니 그날이 곧 개벽이니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예전의 비급을 떠올리며 수련을 해 봐야 더 이상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영웅이 되겠다고? 웃기는 소리! 이곳에 내가 생각하는 영웅은 없다. 그저 가장 오래 살면 영웅이 된다. 그런 곳이다, 여기는!
 오크는 지능이 있다. 인간에는 못 미치지만 8〜10세 정도의 지능이 있다고 한다. 감은 안 오지만 그 공포의 갈기오크족 어쩌고는 더욱 똑똑하다고 한다. 그것들은 그 무서운 야생 오크를 수족처럼 부리고, 먹을 게 없으면 잡아먹기까지 한다고 하니, 비즈타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오크들이 서로 잡아먹어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
 “소대장은 왜 그렇게 열심히요?”
 비즈타는 등 뒤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몸을 돌렸다.
 “보아하니 루라이의 창법을 배운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창을 던지는지. 살고 싶어서요?”
 폴이다. 그의 얼굴에 길게 드리워진 상처가 꿈틀거리며 호기심을 표현하고 있다.
 “소대장은 귀족이오, 평민이오? 마나를 사용하는 거요, 못하는 거요?”
 비즈타는 폴의 질문들에 단 하나도 대답하지 못했다. 곤란해서라기보다는 폴의 이런 모습에 익숙지 않아서였다.
 “마나는 사람마다 다 달라서 뭐라고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익숙해지면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오. 사람에게 꼬리가 있거나 날개가 있다면 그와 비슷한 느낌일 거요. 소대장이 지금 헤매는 이유는 갑작스럽게 생긴 꼬리, 혹은 날개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겠지. 맞소?”
 비즈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수천수만 번의 칼질을 하고, 그걸 통해서 그 마나라는 놈을 조금이지만 느끼게 되었소.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연습으로 휘두르는 게 아니라, 생사의 길목에서 휘두르다 보면 한 수 한 수에 모든 것을 걸 수밖에 없었지. 내가 보기에 소대장에게 필요한 건 집중력이오. 꼭 필요하다 생각하는 정신력. 그때 그 창과 같이 절실함이 담긴 그 심력.”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호하다.
 “익숙해지면 아마 알게 될 거요. 배움이 짧아서 나도 더 이상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소.”
 폴은 그 말을 끝으로 비즈타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몸을 돌려 떠나갔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비즈타는 전신에 오한이 몰려들었다.
 ‘어떻게 바로 뒤에 접근할 때까지 그의 존재를 몰랐지?’
 비즈타는 제자리에서 몇 걸음 걸어 보았다. 작은 돌이 바스러지는 소리와 중력에 의해 사람이 걸을 때 반드시 날 수밖에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나는 왜 몰랐지? 어떻게!’
 비즈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어떤 것에 대해 끊임없이 상념에 사로잡혀 멀뚱하게 서 있었다.
 
 비즈타가 294소대에 온 것도 오늘로 32일 하고도 반나절이 지났다. 과묵하기 이를 데 없는 폴조차도 ‘다시없을 평화의 시기로군.’이라며 요즘의 한가로운 나날들을 평가했다.
 병사들은 평소 훈련을 하지 않는다. 가벼운 몸 풀기나 장비 손질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들의 목숨과 직결되는 것이기에 스스로 알아서 했으며, 오크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기에 늘 대기 상태로 지내는 것이다.
 신병 중에 하나가 ‘2년도 금방 가겠는걸요?’라고 말했다가 전투에 한 번 참전한 적이 있었던 병사에게 두드려 맞은 사건은 3중대에서 아주 소소한 일 중의 하나일 뿐이다.
 지금은 폭풍 전야다. 더 거센 폭풍을 몰아치기 위해 대기의 수증기를 모조리 빨아먹고 있는 그 시기.
 그래서인지 294소대 베테랑 4인조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무거워졌다.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출병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요즘 들어 2포인트 주변으로 오크들이 자주 포착된다는 관측이 들어오고 있다. 강을 건너려면 1시간은 걸리니까 대비를 못 할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해서 장애물을 보수할 생각인데 소규모로 움직이기보다는 많은 병사들이 한 번에 일 처리를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부관의 생각은 어떤가?”
 100명의 소대장과 3중대장의 시선이 부관의 입에 모인다. 올해 경력 3년의 실력 있는 참모. 그저 부관으로 불릴 뿐,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는 인물이다.
 부관이 특유의 얼굴 표정을 만들어 내며 말했다. 오른쪽 입가만 씰룩이며 말하는 그의 표정은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만사에 자신이 있는 것 같기도 한 느낌을 풍긴다.
 “40개 소대 정도면 적당하겠군요. 그 인원이 움직여도 하루 이틀 걸리는 작업이 아니니 빠를수록 좋을 겁니다.”
 “그러지. 그럼 명령을 하달하겠다. 200번 소대부터 239번 소대까지 작업 복장을 갖추고 연병장으로 집결하도록. 나머지 60개의 소대는 전투 군장을 착용한 채 대기한다. 오크 놈들이 기습하기라도 하면 바로 작업 병력과 교대해 전투를 할 수 있게끔 긴장을 유지하라. 혹시 모를 교전에 대비해 전령들은 인근 중대에 파발을 띄우고 지금 이 시간부로 비상경계 1을 발동한다.”
 올 것이 왔다. 비즈타는 중대 본부를 나서며 과연 작업 병력으로 뽑히지 않은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막사로 복귀해서 바로 알 수 있었다.
 “죽을 놈들은 뭘 해도 죽을 뿐이오. 내 예전에 장애물 보수하다 목책이 무너져 깔려 죽는 놈도 봤으니까. 차라리 잘됐우. 이 더운 날 땀 흘리며 고생하는 것보다는 낫지. 일단 눈 좀 붙이쇼. 처음에야 비상경계 대기 때 뭣 모르고 눈에 불을 켜지만 좀 지나다 보면 다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알게 될 테니까. 쉴 때 쉬는 거요.”
 카락은 그 말을 끝으로 주섬주섬 전투 군장을 착용하더니 드러누워 코를 골기 시작했다. 전투 군장이라고 해 봐야 단검, 붕대와 같은 간소한 의료 장비, 하루 먹을 양의 육포와 귀중품을 보관할 수 있는 작은 주머니가 달린 허리띠를 매는 것뿐이다.
 아르함의 성기사들은 방패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제젠의 병사들은 기본적으로 무기에 대한 규제가 없다. 스스로 가장 몸에 익은, 즉 살아남기 위해 가장 편한 무기를 사용하면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병사들에게는 회색의 군복이 지급되지만 가죽이나 갑옷 같은 것들을 스스로 구해 걸치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병사들의 복장은 모두 제각각이다.
 무기류는 막사 한쪽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어디서 주웠는지 메이비만 어른 머리만 한 작은 손 방패를 사용한다.
 보통 전장에서 습득한 물건은 소유할 수 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오크들이 쓸어 가기 때문인데, 전투 군장에 귀중품 주머니가 있는 이유도 혼전 중에 오크들보다는 인간들이 쉽게 찾을 수 있게 해 준 배려였다. 간혹 막사 내에 귀중품을 두고 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도둑도 있었고 몸에 지니는 것만큼 안심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피가 마르는 대기 시간은 만 하루를 꼬박 넘겼고 다시 점심때가 가까워졌다. 입안이 타들어 가는 긴장으로 잠도 자지 못한 6명과는 다르게 유독 4명의 병사는 농담도 하며 윤기가 흐르는 얼굴로 느긋하게 앉아 있다.
 “아흐! 경계만 내리면 밥이 시원찮으니 알고 보면 이게 더 쥐약이라니까? 아무리 빨리 먹고 다시 대기해야 한다고 해서리 맨날 죽만 먹고 어떻게 산다냐?”
 카락의 넋두리에 메이비가 방패를 손질하며 히죽 웃는다.
 “작년 12월 생각 안 나요? 3일 동안 밥도 못 먹고 그 추운 날 망할 것들하고 대치하느라 발가락에 동상까지 걸렸던 거! 개자식들. 쳐들어올 거면 빨리빨리 올 것이지 간보느라고 어기적거리는 통에 우리만 피똥 쌌네! 이렇게 죽이라도 먹을 수 있을 때 많이 먹어 둬야 한다고요.”
 메이비의 말에 신병들의 얼굴이 핼쑥해지고, 카락이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 그랬지! 고놈들도 슬슬 머리를 쓰기 시작한단 말야. 자, 밥이나 먹으러들 가세!”
 카락이 몸을 일으키자 다른 병사들도 우르르 막사를 나서려 하는 그때, ‘뿌우〜!’ 하는 소리가 모두의 몸을 떨리게 만든다.
 “3중대 전 소대원들은 연병장으로 집결한다! 시간 없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제길! 밥은 좀 먹고 싸움을 시킬 것이지! 애송이 소대장? 뭐해요? 어서 집결해야지!”
 등을 떠미는 카락의 손길에 정신을 차린 비즈타는 소대원들을 이끌고 연병장에 섰다.
 “약 600의 오크들과 소수의 자이브가 2번 포인트로 접근하고 있다. 작업 병력이 복귀하고 있으니 그들이 전선에 합류할 때까지 여러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틴다. 알겠나!”
 우렁찬 대답 소리에 섞여 카락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제길!’이라는 말을 연발한다.
 “목책과 장애물의 보수가 거의 끝난 시점이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각 소대장들은 신속하게 포인트로 이동해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상!”
 3중대의 막사에서 포인트까지의 거리는 달려서 20분이 조금 넘게 걸린다. 강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목책과 그 목책 주변으로 깔려 있는 장애물들은 강을 넘어 진격하는 오크들의 발길을 잡아끌 것이다. 그렇다 해도 시간이 촉박한 것은 당연지사.
 저 멀리 푸른 강물 사이로 오크들의 머리가 수백 개나 보인다. 몸이 완전히 잠긴 채 머리만 내밀고 필사적으로 수영을 하는 오크들을 보고 있자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기분이다.
 예전에는 목책 위나 근처에서 강을 넘어오는 오크들에게 활을 쏘았다고 하는데, 오크들의 질긴 피부도 그렇거니와 머리 위로 방패를 들어 화살을 가볍게 막아 내는 오크들의 전략에 어느덧 화살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활이라는 것은 하루 이틀 연습해서 쓸 수 있는 병장기가 아니다.
 이곳의 수심은 그렇게 깊지 않다. 포인트들의 공통점이기도 한데, 그래서인지 강물 속에 있는 오크들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머리만 내밀고 헤엄치는 강아지 같기도 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소대장, 그거 아쇼?”
 그렇게나 여유롭던 카락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발견한 비즈타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저놈들이 600이고, 우리가 1,200······ 작업 병력이 빨리 도착하지 않으면 우린 오늘 이후 햇빛을 보기 힘들 거요. 처음엔 다 그렇지만 누구나 긴장해서 가만히 있기 마련인데, 조금만 버티면 지원 병력이 도착하니까 어떻게든 평소처럼 빨빨거리고 돌아다니쇼. 그래야 살 확률이 높으니까.”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강물이 불기도 하고 줄기도 해서 목책은 강과 상당한 거리를 벌려서 만들어져 있다. 대형 통나무를 뾰족하게 깎아서 만든 것들인데, 그것들 주변으로는 날카로운 가시들과 구덩이, 예리한 쇳조각들과 부서진 병장기의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신발을 신지 않는 오크들을 조금이라도 더 저지하고자 만들어져 있는 것들이다.
 그런 목책의 뒤로 1,200의 병사들이 줄지어 도열해 있다. 오크 하나를 병사 하나가 감당하기 힘드니 이렇게 길게 늘어서야 협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올라왔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첫 번째로 강을 넘은 오크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몸을 부르르 털어 물기를 제거한다. 원래대로라면 오랜 수영으로 체력이 빠졌을 지금 공격을 해야 맞지만 그것보다는 목책과 장애물이 거두는 효과가 더 크기에 이렇게 바뀐 것이다.
 “다행이야. 늦지 않고 도착해 줬다.”
 카락이 뒤를 돌아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즈타가 돌아보자 레이스가 잔뜩 달린 하얀색 옷을 입은 20여 명의 사람들이 막 도착한 상태다.
 아르함의 사제와 성기사들.
 아르함의 일반 병사들은 대부분 아르함 제국이 있는 분쟁 지역 쪽에 소속되어 있어서 보기 힘들지만 저들은 가끔 본 적이 있었다.
 신성력이라는 특별한 힘을 부여받은 능력자들. 각 중대에 20여 명이 전부인 만큼 그들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소대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독자적으로 각 중대장들의 직속으로 움직이는 저들은 사제나 성기사가 되기 위한 힘겨운 고행을 이겨 낸 전사들이다.
 작은 지팡이를 든 18명의 사제와 무거운 중갑에 검과 방패를 든 성기사 넷. 수는 적었지만 그들의 존재감은 1,200의 병사를 압도했다.
 잠시 그들에게 시선이 가 있는 동안 모든 오크들이 육지로 상륙해 거친 콧바람을 뿜어내고 있다.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거대하고 박력 있는 오크들의 진면목을.
 이 빠진 꼬챙이를 손에 든 놈, 거대한 도끼를 든 놈, 맨손이지만 바위라도 부술 수 있을 것 같은 우락부락한 손.
 그리고······.
 크라라라라롸!
 그놈들의 입에서 터지는 포식자의 포효.
 오금이 저린 신병들은 벌써부터 이를 질끈 깨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넘어오는 것일까? 한번 넘어오면 상처입어 강을 다시 건너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죽을 각오로 넘는다는 것인데, 무엇이 오크들을 수백 년 동안 강을 넘게 만들었는지 아직도 불가사의다.
 지금 이곳 말고도 122개의 포인트 어딘가에서도 오크들은 강을 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지금 비즈타가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가질 것이다.
 비즈타는 손에 들린 창을 바라보았다. 찌르기용으로 군에서 보급된 것인데, 장검을 쓰는 병사들과 달리 루라이에서 왔다니까 특별히 보급이 나온 창이다. 제젠에서 창 하면 루라이였으니까.
 이 창이 저 몸뚱이를 뚫을 수 있을까? 저번처럼 그런 일이 가능할까?
 직접 오크들을 보고 있자니 손에 들린 창이 꼭 장작개비같이 느껴진다. 8마리일 때 느껴지는 그것과 수백의 오크에게서 느껴지는 그것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크로로로로롸롸!
 두두두두두두.
 오크들이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먹음직한 먹이라도 발견한 미친개처럼 입가에는 침을 질질 흘리며, 목책을 부수기도 하고 발바닥에 난 상처에 비명을 지르기도 하며 다가오고 있다.
 어떤 놈들은 함정에 빠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했지만, 그 기세란 거의 생전 처음으로 겪어 보는 공포 그 자체였다.
 “대열을 정비하고 절대 물러나지 마라!”
 한 소대장의 외침이 들려오고, 18명의 사제들 지팡이가 번쩍 들렸다.
 그들이 뭐라고 주문을 외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뭘 했는지는 바로 확인이 되었다.
 몸이 가벼워졌다. 사람의 컨디션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격투기를 하거나 운동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용기가 샘솟고 투지가 생긴다. 무섭게만 보이던 오크들의 얼굴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고, 창을 잡은 손에 자신감이 넘친다.
 반대로 오크들은 움직임이 조금 둔화된 것 같았다.
 훈련소에서 배운 것을 종합해 보면 사제들은 그 특별한 능력으로 전투 중에 다친 사람들을 치료해 줄 것이다. 죽을병에 걸렸거나 불구를 일어서게 할 능력은 없지만, 사제들의 치유는 상처를 아물게 한다. 전투 중에 가장 죽을 확률이 높은 것이 과다 출혈이다. 그것을 사제들이 막아 주는 것이다.
 믿을 수 없었지만 등 뒤에 버티고 있으니 믿을 수밖에.
 성기사 하나가 뭐라고 말을 하자 성기사들이 사제들의 곳곳에 선다. 저들은 아마 전투에 참여하기보다는 사제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크오오오!
 오크들이 목책을 완전히 넘어 접근하고 있었다. 사제들의 축복을 받은 병사들이 입을 꾹 다물고 오크들을 쏘아본다.
 “놀아 보자! 흐아아압!”
 병사들이 자리를 박찼다. 신병들 또한 소리를 지르며 전의를 불태운다. 분쟁 지역으로 온 병사들이 첫 전투에서도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비결. 비즈타는 그것이 저 사제들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저들의 축복은 마약이다.
 마음속에 두려움이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게 만든다. 죽으면 그냥 죽는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오히려 무슨 짓을 한 건지 오크들의 얼굴이 피곤해 보일 지경이었다.
 “294소대! 진격! 다 죽여 버려! 으아앗!”
 비즈타답지 않게 과격한 외침을 지르며 창을 힘껏 던졌다. 오크는 불과 6미터 앞에 있다. 지근거리에서는 사용하기 어려운 창보다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손에 익은 검을 사용하는 것이 나았다. 비즈타는 창을 던지고 재빨리 검을 들어 싸울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비즈타의 손을 떠난 창이 정확하게 한 오크의 목을 뚫으며 땅으로 처박혔다.
 직접 해 놓고도 믿을 수 없는 성과. 가슴을 겨냥했는데 목이 뚫렸다.
 “애송이 소대장 최고다! 으하하핫! 우리도 간다!”
 다른 소대장들이 병사들의 뒤편으로 빠져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병사들 대열에 서 있는 비즈타가 확연히 눈에 띈다.
 카락의 웃음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사기가 무섭게 올라간다. 3년 동안 연습했던 투척술이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돌을 던지는 것과 창을 던지는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는데, 오늘 억세게 재수 없는 오크 1마리 때문에 병사들은 전투의 시작을 부담 없이 출발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그 창에 마나의 힘이 실리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런데도 오크는 죽었다.
 피가 흩날린다.
 그것이 내 몸에서 흘러 하늘로 비상한 것인지, 다른 병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혼전에 혼전이 거듭된다.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죽는다.
 비명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때문에 귀는 먹먹하고 사제들 덕분에 머릿속에서 분출된 신경 물질은 마약처럼 온몸에 힘을 불어 넣는다.
 두려움은 없다. 힘이 있다면 오크의 머리를 손으로 잡고 척추를 뽑아내고 싶은 심정이다.
 한 녀석이 질린 얼굴로 싸늘하게 식어 바닥을 구른다. 배가 뭔가에 찢겨 내장이 흘러나왔다. 녀석의 얼굴이 낯익다. 소대원 중 1명이었던 것 같은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 갈증을 조금 더 해소해야 한다는 것뿐. 녹색의 피를 조금이라도 더 손에 묻혀야 할 것 같다.
 그 와중에도 2마리 오크가 엄청난 기운을 뿌리며 인간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수사자처럼 갈색의 갈기를 휘날리며 일반 오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신장으로 무기까지 사용하는 그것들은 같은 오크들조차 회피하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을 가졌다.
 쓰어억.
 등에 뭔가 날카로운 것이 스치고 지나갔는지 불에 덴 것처럼 뜨겁다. 그런데 바로 기분 좋은 느낌이 포근하게 등을 어루만지고, 상처가 아물어 버린다. 푸딩이 등 전체에 물컹하게 발라지는 느낌이다.
 더욱 큰 투지가 생겨난다. 죽어 뒹구는 녀석들이 점점 더 많아지지만 오크들의 수도 많이 줄었다. 팔을 거칠게 휘두르며 한 병사의 얼굴을 팔꿈치로 뭉개는 오크의 목에 비즈타는 비도를 날렸다. 그러면서 왼쪽에서 느껴지는 풍압에 양팔을 교차해 얼굴을 감싼다.
 비즈타가 날린 비도는 정확하게 오크의 가슴에 박혔지만 비즈타는 그것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로 다른 오크가 거대한 어깨를 들이받았기 때문이다. 팔로 감싸지 않았다면 안면이 함몰되었을 정도로 무서운 공격!
 비즈타는 땅을 데굴데굴 구르며 고통으로 몸을 비틀었다.
 마무리를 하려는 듯 오크가 달려와 비즈타의 머리를 큰 발로 밟으려고 한다. 비즈타는 그걸 느끼면서도 피할 수 없었다.
 크앙!
 오크가 뒤꿈치에 힘을 실어 내리찍는다.
 절체정명의 순간!
 비즈타의 눈에 독기가 어린다. 수백의 오크를 보며 그 박력에 잊고 있었던 본연의 기운. 어떻게든 살아서 복수를 해야 한다는 집념.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낸 살기!
 콰직!
 “크헉!”
 오크의 두꺼운 무릎이 비즈타의 갈비뼈를 부쉈다. 조금만 더 비껴 맞았어도 심장을 터트릴 뻔했다.
 “일어나 새꺄! 포기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왜 그렇게 설쳐!”
 비즈타의 몸 위로 쓰러진 오크의 등에서 검을 뽑으며 소리치는 폴의 모습이 보인다. 비즈타를 공격하려다 등에 검이 박혀 중심을 잃은 오크가 쓰러지며 무릎으로 비즈타의 갈비뼈를 부순 것이다.
 울컥!
 비즈타는 피를 한 움큼 뱉어내며 바들바들 떨면서도 일어나려 애썼다. 사제의 치유가 몸을 덮는 것이 느껴졌지만 내상은 치료가 되지 않는지 고통이 여전하다.
 “지원군이 왔다! 용병대와 작업 병력이 도착했다! 조금만 더 버텨라!”
 귓가에 누군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비즈타는 성큼성큼 자신에게 다가오는 오크에게 비도를 날리며 땅을 굴러 자리를 피했다.
 “크아!”
 비즈타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몸을 구르자 날카롭게 부서진 갈비뼈가 내장을 찌르는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정신을 날려 버린다.
 “더러운 오크들 씨를 말려 버리자!”
 으아아아아아!
 속속 도착하는 지원군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전장을 찢어발긴다. 때맞춰 막 강을 넘은 자이브들도 목책을 넘어 오크들을 돕는다. 거의 100마리는 될 듯한 숫자다. 자이브는 늑대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갑각을 가진 기괴한 생물이다. 오크들은 인간이 개나 말을 기르듯 자이브를 길러 사육하고 활용한다. 훈련소에서 배운 것처럼 오크들보다 수영 실력이 모자라서 지금에서야 도착한 것 같다. 하지만 800명의 지원군이 모두 전쟁에 참여하자 오크들은 크게 밀리기 시작했다. 숫자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용병대의 활약은 두드러졌다. 은색의 갑옷을 입은 용병대의 대장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전장의 곳곳에서 녹색의 빛이 찬란하게 터진다. 그 모습에 병사들의 안색이 굳어지지만 병력의 차이는 큰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일어나! 숨을 작게 쉬고, 다리에 힘을 줘!”
 비즈타는 자신을 부축하는 폴의 모습을 보며 일순 긴장이 탁 풀려 버렸다. 그가 반말을 하는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
 “부상자들을 발견하면 신속하게 이탈해서 복귀한다! 애송이! 정신 차려라!”
 폴은 의식을 잃은 비즈타를 들쳐 메고 전장을 빠져나왔다. 주변에 오크가 산재해 있었지만 새롭게 나타난 지원 병력 덕분에 공격을 당하진 않았다.
 그 후로 2시간이나 처절하게 계속된 전투는 오크 602마리를 죽이고 4마리를 생포, 자이브 97마리를 사살했지만, 병사들 974명이 사망하고 62명이 큰 부상을 당하는 뼈아픈 손실을 입었다.
 
 그날의 모든 것들이 꿈처럼 느껴진다.
 “우웩!”
 컥컥거리며 토악질을 하는 비즈타의 등을 카락이 다가와 두드려 준다. 비즈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날 살아남은 신병들의 대부분이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며칠 동안은 힘들 거니까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첨엔 누구나 다 그러니까. 어이! 그 녀석 좀 침상에 눕혀.”
 카락은 사람들에게 말하며 비즈타의 등을 계속해서 두드렸다.
 사제들이 사용하는 축복의 부작용이라고 한다. 익숙해지면 참을 만하지만 처음에는 이렇게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느낌이 며칠 지속된다고 했다. 그 덕분인지 오크들을 죽이며 느꼈던 그 감촉이나 흥분은 느낄 새가 없었다.
 “그래도 사제 분들이 없으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맞서 싸우지도 못하지. 다들 뼈저리게 느껴 봤으니 알 거 아냐? 익숙해지는 방법밖에 없으니까 참으라고들.”
 크웨엑!
 비즈타는 토악질을 할 때마다 부러진 갈비뼈가 고통을 수반해 죽을 맛이었다. 눈물 콧물이 줄줄 흐를 정도로 괴로움의 극치였다.
 그날 밤까지 그렇게 죽을 만큼 괴로운 시간을 보낸 비즈타와 신병들은 녹초가 되어 잠이 들었고, 붕대를 칭칭 감은 비즈타가 다시 걸어 다니기 시작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다른 신병들이 2일 후 거동을 시작한 것에 비하면 믿기 힘든 회복 속도였다.
 비즈타는 점심도 거르고 초점 없는 눈으로 저 멀리 아름답게 흐르는 가르텐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유유히 흐르는 거대한 강. 그 거대한 자연의 위에서 인간과 오크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무의미한 싸움 속에서 생명들이 부질없이 사그라져 간다.
 두 번의 전투 때문에 얼마 전까지 같이 웃고 떠들던 14명의 소대원들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 누구도 비즈타를 진정한 소대장으로 인정해 주지는 않지만 비즈타는 그 14명의 죽음이 견딜 수가 없었다.
 인간사 죽고 사는 건 다반사라고 하지만 한 달이나 같이 생활했던 이들이 죽어 빈자리만 남겼다는 사실이 가슴을 쓰리게 만든다.
 또 전쟁이 벌어지면 294소대의 누군가는 떠나게 되겠지.
 그게 내가 아닐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 따위는 떠올릴 수조차 없다. 이 분쟁 지역에서 죽음은 어느덧 일상의 깊숙이 침투해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어이, 소대장! 오늘 신병들 오는데 안 나가 볼 거유?”
 무덤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찾아든다. 그들은 알까? 이곳의 진실을. 비즈타는 지금에서야 폴과 카락의 눈빛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가야지. 어디에서 온다는데?”
 “글쎄? 6이라는 것 같기도 하고, 9라는 것 같기도 하는데, 보면 알 거 아니우. 그게 뭐 중요한가? 어차피 머릿수만 채워지면 우리야 고맙지.”
 행정부의 전령들은 전투가 끝나는 시점부터 바빠진다. 거미줄처럼 연계가 되어 있는 각 행정부와 훈련소, 총본부까지 어떤 전투를 벌였으며 얼마의 사상자가 났고, 어떤 이들이 죽었는지 파악하고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근 훈련소에서 배정을 받는 것이 보통인데 비즈타는 13훈련소에서 3중대까지 오게 되었으니 그가 얼마나 특이 케이스였는지는 훈련소와의 거리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여러분을 지휘하는 3중대의 중대장이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중대장의 연설이 신병들의 주변을 떠다닌다. 얼마나 군기가 잡혀 있는지 신병들은 긴 중대장의 연설에도 일절의 미동도 않는다.
 연병장 근처에 쪼그려 앉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비즈타는 중대장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대규모 전투를 한번 해 보니 그동안의 고민이 너무도 우스워져 버렸던 것이다.
 “오! 저놈은 좀 괜찮고, 저 검은 머리 녀석은 별로고만. 저기 저 예쁘장하게 생긴 놈이나 왔으면 좋겠네!”
 카락이 떠들지만 비즈타는 무겁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신병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죽고 사는 것. 그것의 무거움이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6훈련소에서 온 요자르라고 합니다! 유서 깊은 3중대로 오게 되어 영광입니다!”
 14명의 신병들이 막사의 입구에서 쭈뼛거리며 서 있다.
 “누가 그러디?”
 “예?”
 “아 나, 귓구멍이 막혔냐? 누가 3중대가 유서 깊은 어쩌고 했냐고?”
 “그, 그건.”
 방금 지어 낸 것인 게 분명한 요자르가 당황하자 카락이 손사래를 치며 흥미를 잃은 듯 말했다.
 “됐다. 다들 빈자리 아무거나 잡고 써. 궁금한 건 차차 스스로 알아 가든가 알아서들 하고.”
 “예! 소대장님!”
 카락이 배를 잡고 구르고 폴까지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메이비는 한술 더 떠 아예 목울대가 보일 정도로 대소를 하고 있고, 신병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한다.
 비즈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날 저녁.
 조촐한 신병들의 환영 파티가 벌어졌다. 원래는 이런 일이 드물다고 했는데, 이번엔 전투에서 살아남은 스스로를 위로하려는 이유 때문에라도 자리를 마련했다. 카락은 믿을 수 없게도 나타시아를 찾아가 곡주 4병을 받아 오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 줬으며, 대놓고 밖에서 먹지는 못했지만 막사 안에서 둘러앉아 말소리를 줄이고 소곤거리며 신병들을 환영해 주었다.
 술은 워낙에 부족하고, 애초에 전쟁터 한복판에서 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아는 병사들이었기에, 목만 축이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었다. 신병 14명은 그런 분위기를 잘 몰랐지만 비즈타를 포함해 7명의 남자들은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취했는데 오크라도 쳐들어오면 그냥 죽는다. 그건 말 그대로 개죽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사실 좀 놀랐우. 난 소대장님이 그렇게 창을 잘 쓰는지 몰랐거든. 게다가 비도도 수준급으로 던지더니만, 언제 익힌 거유? 2영지는 창으로 유명하다더니 사실인 거요?”
 갑작스러운 말에 비즈타가 얼굴을 붉힌다. 부끄러운 게 아니라 2영지라는 단어에 울컥한 것이다.
 “처음 나가서 오크 1마리라도 죽이면 대단한 거지. 너희들이야 모르겠지만, 나만 해도 칼 밥 먹은 게 1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놈들 앞에 서면 오금이 저리거든. 소대장님이 이렇게 온순하게 보여도 아마 지금까지 3마리는 죽였을걸? 싸움만 시작되면 악귀로 변한다니까?”
 오오!
 감탄과 존경의 눈초리가 가득 쏘아지자 비즈타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때는.”
 “그렇다고 해도 다른 귀족 분들과 달라서 마음에 들었수다! 소대장이라는 것들도 대부분 우리만 앞으로 내몰지 저희들은 뒤에서 눈치만 보는 게 일상이었으니! 내 잔 한잔 받으시우. 이제야 제법 남자다운 눈빛을 가진 걸 축하하며! 건배!”
 호탕하게 웃어젖히는 카락의 모습이 비즈타마저 웃게 만든다. 그런데 그때, 불청객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아주 중대가 떠나가라 퍼마시고 있군요!”
 나타시아가 새침한 눈빛을 보내며 비즈타를 쏘아보았다.
 “아이고! 나타시아 님! 여기까지 어쩐 일로 다 오셨습니까!”
 카락이 눈을 크게 뜨고 호들갑을 떨었다. 비즈타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내가 조용히 마시라고 했던 것 같은데? 카락! 내 말이 우습나 보지?”
 이것이 귀족의 모습이다. 몸에 녹아 있는 자연스러운 하대와 자신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비즈타 소대장님 무용담에 심취하다 보니 조금 시끄러워졌나 봅니다.”
 “흐음, 무용담이라고요?”
 나타시아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비즈타를 바라보았다.
 “별거 아니에요. 소란스러웠다면 죄송합니다. 조심하도록 하죠.”
 “호호.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말아요! 나도 남자들의 무용담을 좋아하니까. 카락! 계속해 봐. 비즈타 소대장님이 어땠는데?”
 그렇게 시작된 카락의 이야기는, 비즈타가 오크의 머리를 산 채로 뽑아 괴성을 질렀다는 것부터 시작해 나중엔 비즈타가 날린 창이 오크를 4마리나 꼬치처럼 뀄다느니 하는 얘기까지 흘러나오게 했다.
 비즈타는 슬슬 아파 오는 이마를 손으로 누르며 막사를 나섰다. 바람을 쐬고 온다고 말했는데 그 뒤를 나타시아가 따라붙었다.
 “좋은 밤이죠?”
 이 아름다운 밤보다 나타시아의 옆모습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 남자만 득실거리는 통에 치마 입은 할머니도 여자로 보일 처지인데 아름다운 나타시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네요.”
 “호호.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집에 있을 때는 이런 세상이 있다는 걸 생각지도 못했는데 사람들도 다 좋고, 이렇게 비즈타 님도 만났잖아요?”
 살짝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뜨며 비즈타를 바라보는 나타시아의 모습에 비즈타는 얼굴이 붉어져서 고개를 홱 돌렸다.
 “호호호. 농담이니까 그렇게 극단적으로 반응할 필요는 없어요. 역시 재미있다니까.”
 여자는 무섭다. 남자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무기를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걸 스스로 알고 활용하는 여자 앞에 남자들은 그 어떤 가드도 할 수 없다.
 “적당히 마시고 주무세요. 제 꿈꾸면 안 돼욧! 호호호.”
 총총히 멀어지는 나타시아의 뒷모습에 비즈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죽을 위험에 빠졌을 때 그녀의 얼굴이 얼핏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감정은 참 오랜만인데, 아마 그녀는 별생각 없이 저렇게 한결같은 모습으로 다닐 것이다. 그것이 남자에게 얼마나 큰 혼란으로 작용할지는 꿈에도 모른 채.
 그래서 요즘 그녀를 사모하는 병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비즈타는 그녀에 대한 생각을 쉽게 털어 버리고 한동안 더 그렇게 밤이슬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그녀는 그녀 스스로도 모르게 남자들을 이용하고 있다.
 모든 남자는 그녀에게 본능적으로 친절할 수밖에 없고, 그건 그녀의 천부적인 기술이다. 다른 이를 그렇게 자신의 뜻대로 부린다는 것.
 스스로 강해지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의 힘을 끌어다 쓰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게 과연 부끄러운 것일까?
 이곳은 전장이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첫 번째 과제이며, 목표가 되는 곳이다.
 비즈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을 응시하며 그렇게 밤을 보냈다.
 
 휘이잉!
 비도가 목표를 한참 벗어나 땅으로 떨어졌다.
 고맙게도 그날 전투에서 사용했던 창과 비도를 병사들이 회수해서 가져다주었다. 흔치 않은 물건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귀족의 물건이다. 비즈타가 죽었다면야 주운 놈이 입 닦고 슬쩍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살아남았기에 비도는 여러 명의 손을 거쳐 다시 비즈타에게 돌아온 것이다.
 비즈타는 요즘 비도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전장에서 오크에게 접근하지 않고 타격을 줄 수 있는 비도는 한번 전투를 치러 본 비즈타에게 너무도 소중하게 와 닿았다. 창도 매력이 있지만 비도도 무시할 수 없다.
 요즘 오전에는 비도를 던지고, 오후에는 창던지기와 창술을 연습한다. 하루를 다시 바쁘게 살기 시작한 것이다. 혼자 그 넓은 연병장에 나와 땡볕에서 헥헥거리고 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좋게 보지는 않았지만, 비즈타는 그런 시선들을 쉽게 무시할 만한 ‘왕따’계의 실력자였다.
 퍽!
 정확히 말뚝에 박힌 비도가 부르르 떤다. 10미터 거리. 한 뼘의 나무 말뚝에 3개를 던져 2개가 명중한다. 백발백중이 되기 전까지는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야 한다.
 내가 1마리라도 더 오크를 죽일수록 내 소대원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올라간다. 솔직히 전투 중에 사제들의 축복을 받으면 주변 사람을 신경 쓸 정신이 없다. 그러니 평소에 더 연습해서 몸에 완벽하게 익을 정도로 만들어야 한다.
 포인트 근처에는 장애물이 아주 많다. 그런 것들은 모두 비도가 될 수 있다. 단 한 번의 전투가 비즈타를 무섭게 성장시키고 있었다.
 비즈타는 몸이 쉴 때도 머리는 계속해서 굴렸다.
 그날의 모든 것을 기억해 내려 애를 쓰고, 살아남는 자들의 특성을 분석해 보았다.
 폴은 뛰어난 실력자이다. 그는 꼭 필요한 위치에서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병사들이 많은 곳에 자리했고, 상처 입거나 방심한 오크를 기습했다. 절대 오크의 정면에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메이비는 그 빠른 다리로 오크의 시선을 빼앗으며 도망치는 데 선수였고, 카락이나 콰르도 오크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안전하게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오크들이 공격권에 들어오면 치명타를 줄 수 있는 공격 방법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그들을 이 자살 부대에서 오래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그날 비즈타가 상처를 입은 것은 전장을 넓게 보지 못하고 오크의 무리에 들어가서였다. 보통 병사 셋이 오크 하나를 상대하는 것이 안전한데 그날은 오크에게 기습을 허용할 정도로 무지했다. 시야 밖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오크의 어깨.
 전투 중에도 분명히 시선이 따라가지 못하는 사각이 존재했고, 그 사각에서 공격이 날아온다면 피할 수 없다. 수천이 뒤엉켜 전투를 벌인다 해도 지금 당장 내가 노리는 적은 단 하나일 수밖에 없다. 그 적의 사각은 반드시 존재하고, 그 사각에 들어갈 수 있다면 손쉽게 죽일 수 있다. 그다음 재빨리 다른 목표의 사각에 들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걸 반복하다 보면 집단 전투에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는 사신死神이 될 수 있다.
 사각지대. 전투의 곳곳에 있는 그 생명과 죽음의 공간.
 뭔가 머리에 잡힐 듯 말 듯 하면서도 떠오르지 않았다.
 비즈타는 머릿속이 엉키는 걸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볍게 치는 걸로 날려 버리고 다시 일어나며 비도를 손에 잡았다.
 이 작은 생각의 시작이 훗날 비즈타를 왕王으로 만들어 준다는 걸 이날의 비즈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용약관 유료이용약관 개인정보처리방침 청소년보호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