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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 읽는 감정사 1권 (1)

2018.11.20 조회 9,801 추천 80


 유물 읽는 감정사 1권 목차
 
 프롤로그 - 이름 모를 석실에서···
 피는 속일 수 없다
 마법을 시전하다
 새로운 일거리
 마원(馬遠)의 매화서원
 고미술 감정사로서의 첫걸음
 사자 조련사의 의미
 기록되지 못한 유산
 두 장의 그림
 경매의 승자 (1)
 
 
 
 프롤로그 - 이름 모를 석실에서···
 
 
 칠흑같이 검은 석실 안은 옛 모습을 잃어버리고 사방이 뒤집어진 채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특히 바닥 여기저기는 곡괭이로 파헤쳐져 흙바닥이 보이기도 했다.
 
 석실의 한쪽 벽에 걸어놓은 작은 LED랜턴에서 나오는 빛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손조차 볼 수 없었을 거다.
 
 “어이, 박씨! 뭐해? 빨리 나오라니까!”
 
 억지로 소리를 죽였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다급함에 윤석은 자기도 모르게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붉게 충혈된 윤석의 눈은 어둠에 가린 흙더미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있어!’
 
 꼭 누군가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얼핏 뭔가를 갉아먹는 것처럼 ‘사각사각’ 거리는 것 같지만 계속 듣다보면 무슨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윤석은 홀린 것처럼 흙을 파기 시작했다. 대나무칼이나 호미로 파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손으로 흙을 파헤치는데 마치 그것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아는 것처럼 흙을 파는 윤석의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숨겨져 있는 그것이 훼손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생각도 못 한 게 맞다.
 
 “박씨! 지금 공안이 오고 있다고! 미쳤어? 그만 나와!”
 “기다려··· 기다려···.”
 
 윤석은 밖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조씨에게 그저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미친··· 나는 갈 거야. 알아서 하라고. 17일까지 청도항으로 와. 늦으면 기다릴 수 없는 거 알지?”
 “······.”
 
 윤석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흙을 파나갔다. 희한하게도 단단하게 뭉쳐있어야 할 흙은 놀이터의 모래 바닥처럼 힘없이 파헤쳐졌다. 평소였다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텐데 그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에이··· 날 원망하지 말라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멀어져간다. 윤석이 있는 석실을 뚫은 자그마한 통로를 통해 기어나간 거다. 이미 많은 유물을 도굴했으니 잘만 처분하면 큰돈을 만질 텐데 괜히 시간을 끌다 공안에 붙잡힐 수는 없었을 터.
 
 하지만 이건 윤석도 마찬가지다. 그를 기다리는 아들을 생각한다면 무조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쳐야 하지만 이미 이성을 상실하고 미친 듯이 흙을 파헤치는 윤석의 머릿속엔 오로지 그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헉헉···.”
 
 미친 듯이 흙을 파헤친 결과 그의 손에 검은 목곽 하나가 잡혔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는지 윤석은 목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흙을 털어냈다.
 
 “썩지 않았단 말이야?”
 
 이 무덤에서 나온 유물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최소 수백 년 이상은 된 것들일 것으로 추정됐다. 그런데 이 목곽에는 생전 보지 못했던 기묘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오랜 세월 동안 전혀 썩지 않았다. 어쩌면 나무가 아닐지도 모른다.
 
 끼릭···
 
 윤석은 흠칫 놀라 몸이 경직됐다. 분명 열지 않았다. 아니, 손이 스쳐간 것 같기도 한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무 무늬조차 없는 검은색 직사각형의 무엇. 윤석은 목곽을 버리고 그것을 품에 넣고는 몸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만한 자그마한 통로로 몸을 들이밀었다.
 
 탈출할 시간이었다.
 
 
 
 피는 속일 수 없다
 
 
 그 날도 어김없이 밤늦게 집으로 향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노가다를 뛰느라 허리가 욱신거리고 팔 근육이 땡겼지만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편의점에 들렀다. 축 처진 육체만큼이나 지쳐버린 정신을 위로하려면 집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곁들인 소주 한잔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헉··· 헉···.”
 
 달동네에 위치한 그의 집은 올라가다보면 저절로 숨이 거칠어진다. 무려 10년을 넘게 같은 집에 살고 있고 노가다로 다져진 체력임에도 도무지 이 언덕만큼은 적응이 되질 않았다.
 
 끼이익···
 
 비명을 지르는 낡은 철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간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의 방 유리창에서 밝은 불빛이 비쳐 나왔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그의 방에 불이 켜져 있다면 그가 떠올릴 수 있는 가정은 두 가지. 하나는 도둑이 침입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년 전에 집을 떠났던 그의 아버지가 다시 나타나는 것이다.
 
 이 동네 사정이야 거의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에 도둑이 들 리 만무했다. 그러니 해진은 그 불빛을 보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아버지! 아버지!”
 
 비록 아무것도 해준 것 없던 아버지지만 이제 그에게 있어 단 하나 남은 가족이었기 때문인지 미움보다는 그리움의 감정이 더 컸다.
 
 그래서 문을 열고 허겁지겁 들어서며 아버지를 외쳤다.
 
 “해진아.”
 “어? 아버지!”
 
 하얗게 센 머리와 몇 달은 깎지 않은 듯한 수염은 얼핏 보면 산에서 도를 닦다 내려온 사람처럼 보였다. 해진도 밖에서 제대로 살피지 않는다면 몰라보고 지나쳤을 정도다.
 
 그런 아버지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쓰러져 아들을 부르고 있으니 해진은 얼이 빠져서 그에게 다가가 뒷목을 받치고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일단 119 부를게요. 조금만 참아요.”
 
 해진의 아버지인 윤석은 아들이 뭐라고 하던지 신경 쓰지 않고 천천히 그의 가방에서 신문지에 싸인 물건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이거···.”
 
 신문지에 곱게 싼 그것은 굳이 풀어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또 어디 가서 도굴한 유물일 게 분명하다.
 
 “됐어요. 이런 거 없이도 잘 살 수 있어요.”
 
 119에 도움을 요청하는 해진을 바라보며 윤석은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알면 일어나세요.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때가 된 것이지. 너도 알잖니?”
 
 언젠가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 해진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일본의 한 악덕 미술상에게 협박당해 강압적으로 몇 년간 도굴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무리하게 도굴하다 폐질환을 앓게 됐고 이후 무릎 수술까지 받으며 몸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었다.
 
 당시엔 몸이 안 좋으니 다른 일을 해보자고 했지만 아버지는 인사동 쪽에 얼굴을 내밀다 별로 돈을 벌지 못하자 다시 도굴에 손을 대기 시작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전쟁통에 태어나 배운 거라곤 도굴뿐이었으니 말이다.
 
 “조금만 버티세요. 전에도 이러다 말았잖아요. 조금 그러다 다시 호전될 거예요.”
 “이번엔 다르다. 나는 알아. 이제는 버틸 수 없다.”
 
 윤석은 고개를 저으며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들어 올려 해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가여운 것. 모두 내 탓이다. 나를 원망해라.”
 “괜찮아요. 나쁘지 않았어요. 세상 어느 누구도 저처럼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낸 아들은 없을 거예요. 저는 좋았어요.”
 “가여운 것··· 가여운 것···.”
 
 윤석의 눈가에 가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해진의 얼굴을 쓰다듬던 그의 손은 점차 힘이 빠지더니 결국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지고 말았다.
 
 “아버지!”
 
 그 날, 해진은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장례는 간소하게 치렀다. 누구 하나 찾을 사람도 없기에 화장하고 바닷가에 유골을 뿌렸다. 평생 남의 무덤을 진저리 치게 봐왔을 아버지이기에 무덤 따위는 무조건 사양했을 그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해진은 방 한구석에 던져지듯 버려진 그것을 주워들었다.
 
 윤석은 어린 해진을 데리고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을 돌며 유적을 도굴했다. 해진은 도굴을 하는 짓이 나쁜 짓이라고 생각해 만류했지만 아버지는 그만두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는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이후 도굴해서 번 돈은 먹고 살만큼만 남겨두고 해외에 있는 선조의 유물을 사 와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은밀히 기증하고는 했다.
 
 이해할 수 없었던 내게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였던 할아버지가 골동품 상인을 하면서 해외에 많은 우리나라의 유물을 팔아넘겼었다고 했었다. 그것 때문인지 아버지는 병색이 깊어진 이후 할아버지가 지은 죄를 갚고 싶어 했다. 마치 그것이 삶의 목적인 것처럼.
 
 나중에는 해외에서 도굴한 우리나라의 유물들을 은밀히 가지고 오기도 했는데, 늘 했던 말이 그것이었다.
 
 “이렇게라도 우리나라의 유물을 가져오지 않으면 할아버지가 우리나라에 진 빚을 갚을 수 없다.”
 
 남의 나라 무덤을 도굴해 국내 유물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신념이었기에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방학과 개학을 막론하고 돌아다니는 아버지 때문에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중,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를 치러야 했지만 대신 고미술을 보는 지식과 눈은 어지간한 전문가를 능가했다.
 
 그 덕분인지 해진은 전문적인 고고학자가 되고자 지방의 고고미술사학과를 1년 정도 다녔었다. 도굴꾼이 될 생각은 절대 없었다. 그저 아름다운 고미술품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을 뿐.
 
 그러던 와중 아버지가 캄보디아에서 유물을 밀매하다 붙잡혀 2년 동안이나 징역을 살게 됐다. 해진은 그런 아버지를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그때까지 모은 재산과 유물을 모두 처분해 아버지를 감옥에서 빼오게 된다.
 
 해진은 그 이후로도 윤석의 도굴을 말렸지만 그는 아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때문에 해진은 아예 고미술에 관한 일을 하지 않고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는데··· 이제는 모든 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해진은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신문지를 찬찬히 벗겨나갔다.
 
 “뭐야···.”
 
 허탈함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대단한 유물은 아닐 지라도 뭔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물건일 줄 알았는데 시커먼 벽돌 같은 게 떡하니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문득 벽돌치고 굉장히 가볍다는 걸 느낌이 들었다.
 
 “어?”
 
 벽돌이 아니었다. 질감은 거칠지만 돌이나 금속처럼 차갑지 않았다. 마치 짐승의 가죽 같은 느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짐승의 가죽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물건을 바닥에 놓고 무릎을 꿇은 채로 얼굴을 그것에 가까이 가져갔다.
 
 자세히 보니 옆 부분에 긴 실선이 간 것이 보였다. 그제야 이것이 책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남의 무덤을 도굴하다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오랜 시간 고통 받다 죽은 것을 알기에 해진은 이 세상에 저주라는 게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고민했다. 열어보아야 할까? 하지만 왠지 기분이 나쁘다.
 
 그냥 버릴까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눈길이 그것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을 노려보며 고민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놀랍게도 날이 저물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9시. 순식간에 5시간이 흐른 거다. 신기한 건 다리가 저리지 않았다는 것.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서 저런 것을 가지고 왔을까? 순간 어제 혼자 결제해서 봤던 공포영화가 생각났다. 페이크 다큐로 원인 모를 자연현상을 증명하고자 젊은이들이 폐가에서 공포체험을 하는 거였는데···
 
 어젯밤에 봤던 영화를 떠올린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책의 표지를 넘겨버리고 말았다.
 
 “시팔···.”
 
 자신이 했지만 자신이 한 것이 아니다. 손이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제멋대로 책을 펼친 것이다.
 
 ‘이제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책의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바탕에 피처럼 붉은 글씨로 쓰여 있는 그것들은 처음 보는 문자였다. 나름 도굴꾼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지금껏 그가 모르는 글자는 몇 개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저주가 분명하다. 이것을 보면 영화나 소설에서처럼 미치거나 환영에 사로잡히다가 사람들을 죽이고 자살하고 말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스렌지를 켜고 저주받은 시커먼 책을 불에 올렸다.
 
 타닥타닥···
 
 처음엔 불이 잘 붙지도 않았다. 마치 잘 타지 않는 숯처럼 한참을 불에 대고서야 그것은 조금씩 불길을 키워나갔다.
 
 무엇으로 만든 책인지 이 불길한 물건은 마치 비닐을 태우는 것처럼 시커먼 연기와 생전 맡아본 적 없는 역겨운 냄새를 풍겼다.
 
 그래도 그것이 완전히 타서 재로 화할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한 순간이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가 다시 나타날 것만 같은 공포감 때문이었다. 왜 그런 영화 있지 않은가?
 
 완전한 재가 되어버린 그것을 잘 모아 집밖에 버리고 나자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후련해졌다.
 
 “아버지는 왜 이런 물건을 나한테 남겨서는···.”
 
 이 정체불명의 물건이 뭐가 마음에 들어서 가지고 왔을까? 아마 아버지는 그것이 가진 기분 나쁜 기운을 못 느꼈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날 밤, 아주 이상한 꿈을 꿨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그의 머리를 쥐고 흔들어대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데 들어본 적 없는 언어였는데도 이상하게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잠에서 깨자 습관적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직 날이 밝아오지 않은 새벽. 시계를 보니 5시를 조금 넘겼다.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웃기네··· 요즘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웃길 수밖에 없다. 그 언어는 소설에서나 봤던 마법을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요즘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너무 많이 본 탓에 그런 꿈을 꾼 게 아닌가 하고 머리를 흔들며 TV를 켰다.
 
 일은 며칠 쉬기로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니 이제 더 이상 막노동을 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막상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몸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모아둔 돈도 어느 정도 있으니 몇 달 정도는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예능프로와 드라마를 몰아보며 뒹굴고 있으니 어느덧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볶음밥이나 먹을까?”
 
 배가 고파 중국집 전단지 하나를 들어 주문하려고 하는데 익숙한 이름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와 항상 같이 일했던 황 반장 아저씨다.
 
 “여보세요?”
 “어, 나야. 잘 지냈어?”
 “그냥 그렇죠.”
 
 아버지 상으로 쉬는 걸 알면서도 잘 지냈냐고 물어 본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뭔가 꺼내기 어려운 말을 하려는 것일까?
 
 “흐음··· 실은 말이야, 지금 현장에서 이상한 게 나왔거든. 이런 쪽으로는 네가 잘 알잖아?”
 
 시체 같은 게 나왔다면 해진이 아니라 경찰에게 전화했을 터. 그에게 이상한 게 나왔다고 전화했다면 딱 한 가지밖에 없다. 오래된 고미술품. 해진이 고미술사학과를 나왔기에 예전에도 이런 일로 한 번 물어왔던 적이 있었는데 꽤나 도움이 됐기에 이번에도 전화한 것이 분명하다.
 
 “건물주에게는 말했어요?”
 
 지금 진행하는 공사는 낡은 2층짜리 주택을 허물고 5층짜리 빌라를 올리는 것인데, 고미술품이 나왔다면 공사를 진행하는 건물주에게 알려야 한다.
 
 “당연히 알지. 그런데 건물주에게 네 이야기를 하니까 한번 알아봐 달라는 거야. 너도 알지? 이거 올리기 위해서 여기 건물주가 엄청 대출을 받았대요. 그런데 여기 공사 중단돼버리면 완전히 망하는 거야. 우리 공사대금도 제대로 못 받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여튼 내 말 알지?”
 
 단순히 유물 한두 개가 땅에 숨어 있다가 나왔다면 그것만 나라에 알리고 다시 공사를 시작하면 된다. 물론 몰래 처분해도 된다. 그런데 아주 중요한 사적지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라에 신고하고 결과를 기다려서 사적지로 지정된다면 공사를 중단하고 발굴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건물주 입장에서는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래서 고미술품에 조예가 있는 해진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알았어요. 한번 가볼게요.”
 
 사실 해진이 간다고 해도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도움이라고 해봐야 문화재관리청 직원이 오기 전에 결과를 미리 받아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정도? 또 하나가 있다면 땅속에 있다 나온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있다는 것.
 
 전화를 끊자마자 서둘러 씻고 집을 벗어났다. 이상하게 흥분이 된다. 아버지가 새로운 고미술품을 볼 때 아마 이랬을 것 같다.
 
 이래서 피는 속일 수가 없다.
 
 
 * * *
 
 
 “반장님.”
 
 해진이 도착한 곳은 경기도 구리의 한 주택가.
 
 주택을 부수고 남은 잔해를 거의 치워가는 단계인지라 본격적으로 지반을 다져야 하는데 인부들은 보이지 않고 50대 장년의 사내와 70대처럼 보이는 늙은 할아버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여기 이 친구가 박해진입니다. 인사드려, 건물주 되시는 양상만 어르신이셔.”
 
 작업반장은 구리에서 발이 꽤나 넓어 많은 공사를 따냈다.
 
 “안녕하십니까.”
 “아주 훤칠한 친구구만. 젊은데 이런 곳에서 일할 친구로는 안 보이는데···?”
 
 양상만이 해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해진은 180cm의 키에 어디를 가더라도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지고 있어 종종 왜 이런 일을 하냐는 말을 듣는다.
 
 작년 여름에는 용달차를 몰고 홍대 쪽을 지나다가 너무나 예쁜 여자가 있어 헌팅을 시도했는데 놀랍게도 전화번호를 따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 후 몇 달 사귀다가 헤어지긴 했지만, 그 외에도 몇 번이나 여자들에게 번호가 따일 정도로 상당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직업에 귀천이 있나요? 일단 나온 물건부터 볼까요?”
 “그래, 일단 이리로 와 보게.”
 
 상만은 현장과 동떨어진 곳으로 해진을 데리고 갔다.
 
 어떤 물건을 보게 될지 기대가 됐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황 반장에게 말을 건넸다.
 
 “다른 분들은 다 어디 가셨어요?”
 “어? 아··· 오늘은 아예 쉬었어. 그냥 너 올 때까지 기다린 거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만 그때는 이렇게까지 비밀스럽게 하지는 않았었다. 그렇다면 이걸 발견한 것이 황 반장 혼자였다는 소린데···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허름한 골목의 복덕방이다. 작은 열쇠로 따고 들어가는 것을 보니 이 복덕방의 주인이 바로 상만인 듯했다.
 
 “여기 앉아 봐. 커피 마실란가?”
 “네,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요즘은 요 인스턴트커피 때문에 일이 편해. 예전에는 손님마다 물어봐야 했거든. 오래전에 이 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다방이 있었는데 거기 뭐더라··· 이름이 갑자기 생각이 안 나네. 하여튼 그 가시나가 커피 하나는 기가 막혔는데 말이야.”
 “그러셨어요.”
 
 궁금하지도 않은 말을 주절거리는 상만의 말에 대꾸해주며 시간을 보내니 종이컵에 커피 두 잔을 타서 해진과 황 반장의 앞에 놓는다.
 
 “말은 들었지? 내, 보여주기 전에 다짐 하나만 하세. 꼭 비밀로 해야 하네. 무슨 말인지 알지?”
 
 보아하니 물건이 별 거 아니면 그냥 밀어버릴 모양이다. 돈도 안 되는 물건 가지고 유적이네 뭐네 하다가 공사 중단되고 보상도 제대로 못 받으면 망하기 때문일 거다.
 
 더 솔직하게 표현하면 국보급 유물이 떼거지로 나오는 게 아니면 밀어버릴 생각일 거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려, 내 그 말 믿네.”
 
 상만은 해진의 손을 꼭 잡고 당부한 뒤 안쪽 문을 열고 들어가 한참을 뒤적이다 다시 나왔다. 그의 손에는 하얀색의 도자기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자, 한번 봐줘. 이게 값이 나갈랑가?”
 
 행여 금이라도 갈까 아기처럼 보듬어 안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탁자에 올려놓았다.
 
 보는 순간 알았다. 이건 진짜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가방에서 작은 돋보기 하나를 꺼내 그것을 자세히 살폈다.
 
 그것은 옆에서 보면 주둥이와 바닥면의 모양은 일반 백자와 비슷하지만 중앙의 배 부분이 각져 있어 위에서 보면 12각형으로 반듯하게 도형을 이루고 있었다.
 
 높이는 20cm 정도. 입과 밑의 지름이 12cm 정도로 작은 편은 아닌데 특이한 것은 몸통의 매화나무와 대나무 문양이 붉은빛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보존 상태는 상당히 좋아 단순히 땅에 박혀 있었다고 믿기지는 않았고 아마도 오래된 장이나 창고에 보관되어 있었을 것 같았다.
 
 “주점(朱點)이네요.”
 “주점? 그게 뭔가?”
 “아, 글이나 그림을 진사(辰砂)로 칠한 뒤에 유약을 입혀서 구워내면 이렇게 붉은색을 띠거든요. 옛날에는 주점사기(朱點沙器)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진사백자라고 불려요.”
 “오래된 건가?”
 “이게, 정확하게 측정이 안 되는 거라··· 딱 그 시대에 쓸법한 문양이나 글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그리고 이 진사백자는 고려시대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만들어져서 제가 이 자리에서 시대를 특정 짓기는 무리가 있네요.”
 “그래도 느낌이라는 게 있을 거 아녀?”
 
 백자라고 하니 상만이 애가 닳나 보다.
 
 “흐음··· 솔직히 말하면 조선 후기 쪽에 가까울 것 같아요. 진사백자가 유행하던 때는 18, 9세기였고 병에 그려진 문양도 매죽조문(梅竹鳥紋)이라 매화나무에 새가 앉아 있잖아요? 이건 민간에서 만든 대표적인 문양인데 이것도 보통 18세기 이후에 많이들 썼거든요. 게다가 보존 상태가 좋아서 그렇게까지 오래된 것 같아 보이지 않기도 하고··· 물론 정확한 건 저보다 훨씬 전문가에게 물어봐야겠지만요.”
 
 사실 전문가들에게 물어봐야 별거 없다. 측정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 도자기 연대측정이라는 게 전문가들이 도자기에 그리거나 새긴 글자, 가형, 굽, 안료, 유약, 흙 등을 다각적으로 고려해서 연대를 측정하는 건데 결국 완벽한 측정은 아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측정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단어가 맞다.
 
 보통 연대 측정이라고 하면 탄소 연대 측정법을 생각하지만 도자기는 특성상 주재료가 무생물인 흙이고 높은 온도로 만들어져 탄소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도자기를 상대로 탄소 연대 측정을 하지는 않는다.
 
 “그려, 이게 그냥 땅에 묻혀 있었던 게 아니고 웬 땅속에 커다란 장롱 하나가 묻혀 있었더라고. 그 안에 고이 모셔져 있어서 보관상태가 아주 완벽하다니까. 그, 그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하겠는가?”
 “글쎄요. 만약 제 생각대로 18, 9세기경에 만들어졌다면, 주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골동품 상인에게 팔 경우에 오백에서 천만 원 내외일 것 같네요. 물론 경매장에 올리면 얼마까지 받을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래? 진짜 천만 원이나 받을 수 있는가?”
 
 천만 원이 큰돈이긴 하지만 당장 공사가 중단될 판인데도 상만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발견된 유물이 하나가 아닌 거다.
 
 게다가 보아하니 이걸 문화재청에 알릴 생각도 없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것도 그럴 만한 게 땅속에 묻어져 있었다면 사적지가 될 가능성이 있겠지만 땅속에 묻힌 장롱에서 나왔다면 누가 몰래 숨겨놨을 가능성이 더 크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제는 모든 관심이 도대체 얼마만큼의 백자를 손에 넣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에 어젯밤 꿈이 스쳐 지나갔다.
 
 ‘그 마법···.’
 
 꼭 현실 같긴 했다.
 
 웃긴 것이, 보통 꿈을 꾸고 일어나면 조금 생각나다가 시간이 지나면 무슨 꿈을 꾸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번 꿈은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내용을 말했는지 너무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한 가지 이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가지고 오셨던 그 책. 그 책을 태워버린 후 저주에 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 저주와 같은 언어를 내뱉는 것이 무섭기도 하고 또한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사물의 기억을 떠올린다니···.’
 
 어젯밤 꿈에서 머릿속에 심어놓다시피 한 그 저주받은 주문은 바로 사물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 초능력의 일종인 사이코메트리 능력을 마법으로 시전 하는 것이다.
 
 한참을 고민했다.
 
 주문의 원리는 안다. 어떻게 아는 건지는 모른다. 마치 태어나면서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 그래서 더욱 입 밖으로 그것을 내뱉기가 두렵다.
 
 “고맙네. 이건 내, 수고비로 주는 거니까 넣어 둬.”
 
 백자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데 상만이 지금은 거의 나오지 않는 노랑 봉투를 내민다.
 
 감정비와 비밀유지비로 주는 것인데 안 받을 이유가 없다.
 
 “감사합니다.”
 
 원래 이 정도 물건을 감정해주면 최소 수십만 원은 받아야 한다. 하지만 굳이 얼마를 주셨냐고 묻지 않았다. 보아하니 골동품에 대한 개념도 잡히지 않은 분인데 이 바닥이 어떠니 하는 썰을 풀 이유가 없다.
 
 일단 받고 다시 고민을 시작했지만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 눈치를 주는 황 반장의 태도에 접기로 했다.
 
 호기심이 진동하기는 했지만 고통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자 그 호기심이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몇 마디 형식적인 인사 후 바로 복덕방을 나왔다.
 
 아마도 저 복덕방 할아버지와 황 반장이 물건을 팔고 난 수익을 나눌 것이다.
 
 슬쩍 봉투를 열어보니 누런 신사임당 선생님이 여섯 장이나 모셔져 있다. 모르는 와중에도 꽤나 챙겨줬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르는 분이라고 확신한 이유는 어디서 팔아야 하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거다. 만약 팔 곳을 정해놨다고 하면 자신을 부를 이유가 없다. 이미 그곳 상인에게 감정을 받았을 테니까.
 
 집에 돌아와 다시 집돌이 생활을 이어나갔다.
 
 황 반장도 이후 연락이 오지 않아 알아서 해결하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밤, 또 다시 같은 꿈을 꾸었다.
 
 검은 머리카락, 핏빛 눈동자, 그리고 검은 손톱.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마녀였다. 그녀는 전처럼 주문을 외우며 그의 머리를 흔들어댔다.
 
 고통스러웠다.
 
 그녀의 목소리는 먹을 것을 다 토해내고 싶을 만큼 역겨웠고 끔찍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고통을 이겨내고 꿈에서 깼을 때는 덮고 있던 이불이 전부 젖을 만큼 땀을 흘린 상태였다.
 
 그 끔찍한 꿈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내용은 똑같았다. 아니, 주문은 조금씩 달라졌고 갈수록 고통이 심해져 왔다.
 
 꿈이 삼 일을 넘어가자 주문을 시전해야 이 빌어먹을 꿈이 끝날 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그런데 꿈이 나흘째 이어지던 날, 누군가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이 봐! 해진이! 해진이 거 있나?”
 
 꿈을 잊기 위해 한참 드라마에 집중하는데 난데없이 들리는 분기어린 고함소리에 벌떡 일어섰다. 안 그래도 신경이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롭게 서 있는데 그 고함 소리가 더욱 해진의 기분을 날카롭게 후벼 팠기 때문이다.
 
 “누구야!”
 
 짜증이 치솟은 해진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자 황 반장이 깜짝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 해진이 있는 거야?”
 “아저씨가 여기 웬일이세요?”
 
 느끼지 못 했지만 해진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신경질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래서인지 황 반장의 목소리도 누그러졌다.
 
 “아니··· 전에 도자기 봐줬잖아?”
 “그랬죠. 왜요?”
 “그거 가짜래! 진짜 도자기 볼 줄은 아는 거야? 거, 뭣도 모르면서 아는 척한 거 아니야?”
 
 분한지 두 주먹을 치켜들고 소리를 지르는데 순간 도자기가 황 반장 물건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그거 진짜 맞아요. 어디 이상한 곳에서 눈탱이 맞으셨나 본데 왜 저한테 분풀이 하세요?”
 “뭐? 눈탱이?”
 “물건 들고 가니까 대뜸 가짜라고 후려치죠? 보아하니 경매장에 내놓지 않고 인사동 상인에게 다이렉트로 알아본 모양인데··· 그렇죠? 그걸 날름하고 문화재청에다 안 알린 거죠?”
 
 황 반장은 흠칫하더니 이내 다시 소리를 지른다.
 
 “문화재청에 알리면 우리 다 죽는 거 알면서 그래? 그리고 우리도 이상해서 감정하는 곳에 맡겼다고! 거기 전문가가 가짜라고 도장을 콱 찍어부리던데?”
 
 도대체 황 반장은 그 백자를 팔고 얼마를 받기로 했길래 이렇게 날뛰는 걸까?
 
 “그래서 감정비 준 거 달라는 거예요?”
 “그, 그래. 감정을 잘못 했으니 돈은 돌려줘야지.”
 
 고작 30만 원 받기 위해서 오지는 않았을 거다. 분풀이를 할 데가 없으니까 달려왔겠지.
 
 그깟 30만 원 주고 다시 안 보면 되는데··· 그런데 열불이 치솟았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온갖 유물과 기물을 보아왔던 박해진인데, 감히 내가 진짜라고 감정한 물건을 가짜라고 해?
 
 “어디서 감정받으셨는데요?”
 “뭐? 그, 그거야··· 진짜 자신 있으면 양 어르신한테 함 가볼 텐가?”
 “그럼 갑시다. 그 어르신하고 같이 감정 받은 데로 가자고요. 옷 입고 나올 테니 잠깐 기다려요.”
 
 황 반장은 해진이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청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나온 해진을 보고 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그럼 가자고. 나도 황당하니까 온 거지. 그런데 진짜 물건 볼 줄은 아는 거야?”
 “어이가 없네요. 그걸 못 믿으면 아예 처음부터 보여주질 말았어야죠.”
 
 퉁명스럽게 답하자 그가 머쓱해 하며 시선을 돌렸다.
 
 “나야 그 전까지는 보는 눈이 다 비슷한지 알았지. 전에도 잘 봐줬으니까 이번에도 잘 봐줄 줄 알았는데 실수해 버리니까···.”
 
 황 반장은 그 전문가라는 사람을 철썩같이 믿는지 아직도 해진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뭐, 상관은 없다. 어차피 이렇게 서먹해진 사이가 된 이상 안 보면 되는 거니까. 단지 최소 수백, 많게는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백자를 가짜라고 씨부린 전문가의 얼굴이 보고 싶은 거다.
 
 “거기가 어디예요? 감정받은 곳.”
 “참, 가봤자 다를 거 없다니까. 하여튼 ‘천지인감정원’이라고 인사동 한복판에 있는 아주 유명한 감정원이라고 하더라고. 괜히 찾아가서 개창피 당하지 말고 이따가 어르신께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돈 내놓고 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가기나 하죠.”
 “거, 참···.”
 
 아버지는 단순한 도굴꾼이 아니셨다. 대학까지 정상적으로 졸업하셨다면 이미 대한민국에서 존경받는 고미술학자로 이름을 날리셨을 게 분명했다.
 
 인사동 일대에서 전설이라 불릴 정도로 아버지 이름을 모르면 간첩이었으니까.
 
 그런 대단한 고미술 전문가이자 도굴꾼인 윤석은 해진이 말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박물관과 미술관을 데리고 다녔고 글을 읽기 시작할 때는 한글은 물론 중국어까지 가르쳤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는 직접 도굴에 참여하지는 못해도 거기서 출토되는 기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자랐다.
 
 또한, 남들이 국영수 학원을 다닐 때, 자신은 아버지에게서 그림, 조각, 자기 등 온갖 미술품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만약 도굴해서 얻은 재산으로 땅을 사고 아파트를 샀다면 지금쯤 한 지역의 유지쯤 되는 거부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윤석은 그렇게 번 돈으로 해진을 데리고 루브르 박물관, 대영 박물관, 대만 고궁박물관 등 전 세계를 돌아다녔기에 지금 해진이 이런 달동네에 사는 것이다.
 
 물론 윤석을 감옥에서 빼 오기 위해 가지고 있던 기물과 전 재산을 처분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어르신! 글쎄 이놈이 자신이 감정한 게 맞으니까 같이 가서 알아보자는데요?”
 
 황 반장이 끌고 온 곳은 전에도 왔었던 허름한 복덕방. 낡은 책상에 앉아 있던 양상만은 며칠 사이에 더 늙었는지 잔뜩 허리를 구부리며 나와서는 해진을 노려본다.
 
 “알아보긴 뭘 알아봐? 다 끝난 일이구만. 뭐, 잘 된 거지. 진짜라고 해도 그거 팔아봐야 얼마나 된다고. 공사 중단될 일 없으니 황 반장도 살고 나도 산 겨. 새파란 놈한테 뭘 물어본다고, 어이구 내가 미친놈이지··· 넌 돈이나 내놓고 어여 썩 꺼져!”
 
 이럴 줄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화는 나지만 그 감정한 인간에게 화가 나서 상만과 같이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그 가짜라는 물건, 저에게 개당 백만 원에 파세요. 제가 다 사죠. 아, 전에 주셨던 30만 원은 돌려드리구요.”
 “뭐라?”
 “그거 제가 다 산다구요. 어차피 문화재청에 알릴 것도 아니고 싹 다 밀어버릴 거잖아요? 설마 그 물건들 전부 그 감정사에게 헐값으로 넘기고 온 건 아니죠?”
 
 만약 그렇다면 진짜 최악이긴 한데, 그 정도로 멍청한 인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쪽에서 약을 치고 시간이 지나길 기다리고 있을 거다.
 
 “그건 아니지만··· 진짜 개당 백만 원에 사겠다고? 잠만, 하나가 아닌 건 어찌 알았담?”
 “꼴랑 돈 천만 원에 그렇게 좋아할 일이 아니잖아요? 몇 개 되겠죠. 어쨌거나 저한테 파세요. 이왕 이렇게 된 거 개당 백만 원에 파는 게 낫잖아요?”
 
 이렇게 되니 상만과 황 반장이 서로 시선을 맞추며 해진의 눈치를 본다. 하지만 그 눈빛은 전문 감정원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해진을 비웃는 느낌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 누구라도 노가다하는 학생보다는 감정사의 말을 더 신뢰할 수밖에 없으니까.
 
 “진짜 개당 백만 원에 산다 그 말이지? 참말이지?”
 “진짜예요. 지금 당장 계좌로 부쳐드릴게요.”
 
 노가다를 하며 벌어놓은 돈이 현금으로 2천만 원가량 된다. 설마 집터에서 나온 백자가 스무 개가 넘겠는가?
 
 “좋아! 그렇게 하자고!”
 “아이고, 어르신. 이렇게 갑자기 결정하시면···.”
 
 황 반장은 고함을 지르며 단번에 결정해버린 상만을 달래려 했지만 그는 어린놈을 혼구녕 내겠다는 듯 물러서지 않았다.
 
 “뭐가? 개당 백만 원이나 쳐주겠다는데, 잘 됐구만. 어디 쓸데도 없는 저 잡것들 처분하고 나도 속 편하게 공사 시작하면 되겄네.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꼼짝하지 말어!”
 
 상만은 해진이 달아날까 단단히 주의를 주고는 급히 복덕방 안쪽 문을 열고 들어가 물건을 꺼내왔다. 하나 둘 쌓이는 그것은 무려 5개에 달했다.
 
 “어디, 이거 다 살 텐가? 응?”
 
 주르륵 나열된 백자들은 하나같이 귀한 진품이었다.
 
 하나는 아무 무늬 없는 밥그릇이라 별거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유약과 태토 모두 양질의 고급품인지 은은한 광택이 흐르면서 회색빛이 감돈다.
 
 다른 것은 모두 청화(靑花)백자인데 그중 하나는 처음 봤던 그릇처럼 매화와 대나무가 그려진 연적(먹을 갈 때 벼루에 따를 물을 담아 두는 그릇)이고 나머지 세 개는 모두 높이 30cm 정도의 항아리로 진사백자였다.
 
 모아놓고 보니 더 좋다. 백자는 청자와 달리 소박하면서도 밋밋한 듯하지만 청백색의 신비한 빛깔 덕분에 오래 봐도 질리지 않아 그 가치가 대단한 것인데 이건 그 고운 자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계좌번호 알려 주시구요. 저랑 양도서 하나 쓰시죠.”
 “어쭈? 뭘 쓰자고?”
 “저 그릇들 저에게 개당 백만 원에 넘긴다고 양도서 쓰자구요. 왜요? 가짜라고 들었다면서요? 저에게 넘기고 난 다음에 나중에 뒷말하는 거 듣기 싫습니다.”
 “허허···.”
 
 상만은 기가 막힌지 계속 ‘허허’만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게 시간을 끌기 위한 것이라는 건 초딩들도 알 법한 뻔한 짓이다.
 
 “왜요? 팔고 나서 보니 진짜일까 봐 그렇습니까? 그럼 저한테 30만 원 주신 거 안 돌려드려도 되죠? 다시는 저 귀찮게 하지 마세요. 본인 눈을 탓해야지···.”
 
 화가 나 한바탕 퍼부어대니 상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좋아! 쓰자면 누가 못 쓸 줄 알어? 이거 어린 노무 자식이 말뽄세 하고는··· 좋아, 나중에 애걸복걸 하덜 말어!”
 
 상만은 프린터에서 새 종이 하나를 쑥 뽑아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
 
 “자! 돈 보내고 여기 지장 찍어!”
 “알겠습니다.”
 
 스마트폰의 은행거래 앱에서 바로 상만의 계좌로 5백만 원을 송금하고 그에게 입금됐다는 화면을 보여주었다.
 
 “여기 보이시죠? 송금했습니다.”
 
 곧바로 엄지에 인주를 잔뜩 묻혀 각서에 찍고는 두 장 중의 하나를 챙겼다.
 
 “이제 여기 이 물건은 전부 제 것이죠?”
 “그, 그렇지.”
 “그럼 이거 제가 전부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30만 원은 그대로 돌려 드리는 겁니다.”
 
 전에 줬던 그대로의 노란 봉투를 상만의 탁자에 탁 내려놓고는 바로 콜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복덕방 옆에 있는 작은 슈퍼마켓에 가서 안 쓰는 종이박스와 신문지를 구해 그것들을 정성껏 하나하나 쌌다.
 
 외진 곳이라 콜택시가 오는데 시간이 걸려 슈퍼마켓 앞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기다리는데 상만이 은근히 다가온다.
 
 “이제 어디로 갈랑가? 그 감정사한테 가보려는가? 그래봐야 소용 없을 걸? 다시 찾아간다고 가짜가 진짜로 바뀌나?”
 “가짜가 진짜로 바뀔 리가요.”
 “그럼?”
 “원래부터 진짜였으니 바뀔 수가 없지요.”
 “허···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만. 요즘 젊은 것들은 돈 귀한 줄을 몰라. 자고로 아끼고 절약해서 지금부터 한 푼, 두 푼 모아서 살 생각은 안 허고, 응? 돈 오백이면 월세 보증금을 할 수 있는 돈이여!”
 
 악담을 퍼붓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판 물건이 가짜이기를 바라는 마음인 거다.
 
 “어르신, 골동 구매해보신 적 없으시죠?”
 “응?”
 “사보신 적은 없으실 테고, 팔아보신 것도 제가 처음이죠?”
 “커흠···.”
 
 허를 찔러오는 질문에 답이 궁했는지 헛기침으로 때운다.
 
 “골동이라는 것은 말입니다. 자기 손에 들어온 물건은 절대로 쉽게 팔아서는 안 되는 겁니다.”
 “뭔 뜻이여, 그게?”
 “이게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말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쇼.”
 
 마침 도착한 콜택시에 행여 금이라도 갈까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실었다.
 
 “아이고, 미쳤는 갑다. 모범이네, 모범. 돈 아까운 줄 모르고. 이 까만 택시가 엄청시리 비싼 건데···.”
 
 상만은 연신 혀를 찼지만 해진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말과는 달리 상만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다급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꾸도 안 하고 문을 닫았다.
 
 “아저씨, 이거 굉장히 중요한 물건입니다. 이거 금가면 아저씨 차 팔아야 해요. 그러니 완전히 조심스럽게 운행해주세요. 요금은 많이 나와도 괜찮습니다.”
 “그럽시다. 나야 좋은 거 아니겠소.”
 
 머리가 희끗한 택시기사는 이게 웬 횡재냐며 차를 몰고 천천히 움직였다.
 
 “어? 어?”
 
 상만은 차마 차를 잡지 못하고 허공의 공기만을 움켜쥐다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제야 느꼈을 거다. 그 어린놈의 자식이 태도가 너무 자신만만했다는 걸. 그리고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다는 걸.
 
 “그런데 어디로 갈까요?”
 “아, 서울로 가주세요, 종로요.”
 
 솔직히 아까는 화가 치밀어 상만에게 더 쏘아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진짜 나쁜 놈은 따로 있고 상만은 피해자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인사동이 아니라 종로라고 한 이유는 골동품인 것을 티내기 싫기도 하고 가까운 비즈니스호텔에 물건을 두고 오기 위함이다.
 
 택시비로 무려 13만 원이 나왔지만 쿨하게 카드로 결제했다. 백자 하나만 팔아도 얼만데 그깟 택시비가 아깝겠는가?
 
 호텔에 도착해서 물건을 룸에 옮겨 놓은 뒤, 그 중에 연적 하나를 들고 인사동으로 향했다.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고작 도자기 몇 개 가지고 있는 건데 왜 이렇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까? 괜스레 아버지가 보고 싶어진다.
 
 
 
 마법을 시전하다
 
 
 원래는 그냥 경매장에 가려고 했었다.
 
 어떤 사연이 있든지 간에 이미 자신의 손에 들어온 백자인데 굳이 남의 일을 들추고 싶지 않았기도 하고 이 물건이 자신의 손에 들어온 것을 알리고 싶지 않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발길은 목적지인 대한옥션을 지나쳐 인사동 깊은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선조들의 귀한 유산을 가지고 장난 친 그들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다.
 
 “저긴가···?”
 
 허름한 건물의 2층 간판에 ‘천지인감정원’이라고 쓰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곧바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문을 열자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어서 오세요. 감정하러 오셨나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해진을 바라보며 밝게 웃는다.
 
 고리타분하다면 충분히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게 예쁘면서도 단정한 여성이다. 마치 대기업 직장인처럼 보였다.
 
 “네, 백자 하나 감정하러 왔는데요.”
 “백자요? 아··· 잠시 기다리시겠어요? 커피 괜찮으신가요?”
 “아무거나 주세요.”
 
 그녀는 안쪽 문을 열고 잠시 들어갔다 나오더니 인스턴트커피 하나를 내어줬다.
 
 10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쿠, 젊은 사장님이시네. 이리 앉으시고··· 여기는 내 친구이자 전문가나 마찬가지니까 그냥 편안히 보여주시면 됩니다.”
 “흐음··· 그러죠.”
 
 넉살 좋게 맞이하는 남자는 50대 초반에 개량 한복을 입고 있는데 왠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인사동에서 일하면서 낯이 익을 이유는 하나뿐이다. 아버지와 같이 있을 때 봤을 거다.
 
 “백자를 가지고 오셨다구요? 요즘 백자를 보여주시는 분들이 많으시네요? 사실 백자라는 게 얼핏 보면 하얀 그릇일 뿐이라 전문가가 아니면 쉽사리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죠.”
 
 보여주기도 전에 썰을 풀어대는데 그 옆에 있는 40대로 보이는 남자는 미묘한 웃음을 지은 채 해진과 감정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아버지와 인사동 사람들을 함께 볼 일은 아주 어렸을 때밖에 없다. 주로 해외로 많이 돌아다녔기에 같이 발굴에 참여한 이를 제외하면 자신의 얼굴을 아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아버지와 함께 인사동을 돌며 안목을 익힐 때 자주 봤던 사람임이 분명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정감이 든다거나 봐줄 생각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품에서 곱게 싼 연적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포장을 풀었다.
 
 눈처럼 하얀 바탕에 푸른색으로 멋을 부린 연적이 모습을 드러내자 그 감정사는 흠칫 놀란다.
 
 “그런데 성함도 듣지 못했네요. 설마 이름이 천지인은 아니시죠?”
 “그, 그럴 리가요. 강철상입니다. 인사동 바닥에서 이 강철상 모르면 간첩이죠.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며칠 전에 이걸 본 것 같아서 말이죠.”
 “그런가요? 사실 제가 오늘 인연이 생겨 이 물건을 구입했는데요. 이것의 가치가 얼마나 될지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오늘 구입하셨다구요? 혹시···.”
 “나이가 꽤나 드신 영감님이었습니다. 글쎄 그 영감님이 이 귀해 보이는 백자를 가짜라고 하면서 한숨을 푹푹 쉬시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개당 백만 원에 다 샀죠.”
 “개, 개당 백만 원이요?”
 
 깜짝 놀라는 철상. 아마 그의 물건이라 생각했던 것을 도둑맞은 기분일 거다.
 
 “네. 까짓 도박하는 셈치고 거금 오백을 투자했죠.”
 “크흠···.”
 
 철상과 철상의 옆에 앉은 장년의 남자는 연적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민에 빠진 모습이다.
 
 어찌될까? 여전히 가짜라고 우길 것인가? 아니면 이 고귀한 청화백자에 대한 예의를 지킬 것인가?
 
 사실 가짜라고 우기면 방법이 없다. 전에도 말했듯이 도자기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측정이 불가능하다.
 
 형태와 모양, 색, 문양 등을 가지고 인문학적 추리를 통해 어느 시대, 어느 가마에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다다.
 
 그렇기에 전문가들이 감정하는 것이라 해도 틀린 경우가 종종 있다.
 
 종목이 다르긴 하지만 일반인들이 잘 아는 예를 들어보면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다.
 
 그림을 그린 본인은 자신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하는데 전문가라는 이들은 그녀가 그린 그림이 맞다고 한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을까?
 
 따라서 철상이 이 청화백자가 가짜라 우긴다고 해도 법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다.
 
 “아쉽게도 말이죠, 진품이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일단 이건 먼저 아셔야 합니다. 사실 도자기를 볼 줄 모르는 사람들은 색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청화백자를 좋아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가장 많은 모조품이 만들어지는 게 바로 청화입니다. 발색이나 문양을 보면 대략 조선 중후반 물건이긴 한데 그 시대의 물건이라고 하기에는 보존상태가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이 밑을 보시면 한자 보이시죠?”
 “네, 박(朴)이라고 쓰여 있네요.”
 
 연적 아래에 무심하게 흘려 쓰인 한자. 이것을 만든 장인의 성일 게 분명하다.
 
 “조선백자는 기본적으로 장인들이 본인의 이름을 새기지 않았습니다. 무명(無名)을 기본 덕목으로 삼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입을 꾹 다문다.
 
 이게 가짜라는 이유인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보존 상태가 좋은 건 공기의 접촉 없이 그만큼 보존을 잘했기 때문이다. 또한 백자를 만드는 장인들이 본인의 이름을 새기지 않았던 게 보통인 건 맞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희귀한 물건이라는 뜻이다.
 
 가짜라고 우기려면 다른 이유를 대야 하는데 그 스스로도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걸까? 반박을 해줄까 고민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랬다간 이 자리에서 해진이 대놓고 호리다시(물건을 싸게 후려쳐 수십, 수백 배 이득을 취하는 행위로 골동품을 거래하는 사람들이 쓰는 은어)하는 것처럼 보일까봐서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머릿속에는 한 가지 주문이 맴돌았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고통이 커져감에 따라 언젠가는 마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오늘이 그 날이 되리라 생각했기에 이 자리까지 왔다.
 
 은밀하게 핸드폰 녹음 기능을 키며 탁자 위에 놓인 물을 검지로 찍었다. 그리고 무심하게 손을 휘저었다.
 
 “그럼 이 물건이 가짜인가요?”
 “아··· 개당 백만 원씩이나 주며 구매하셔서 마음이 아프시겠지만 제가 봤을 때는 가품이 확실합니다.”
 “그래요?”
 
 손을 휙휙 움직여 원하는 문양을 만든 후 은밀히 주문을 외웠다. 가슴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고 머리는 한 대 세게 맞은 것처럼 아팠다.
 
 “네? 지금 뭐라고···?”
 “아닙니다. 흐음··· 이게 정말 가짜 맞는 거죠?”
 
 무섭고 두려웠다. 금방이라도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들면서도 과연 진짜로 주문이 먹힐지 궁금했다.
 
 “아니요. 이건 진품입니다.”
 
 철상은 말을 내뱉고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네?”
 “어? 강 사장, 무슨 말이야!”
 
 철상의 옆에 앉아 있던 장년의 남자가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아무리 놀랐다고 해도 해진보다 놀랐을까?
 
 “진품이라구요? 정말요?”
 “지, 진품 맞습니다.”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하겠는지 말을 하고 나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옆의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럼 왜 아까 가짜라고 하셨어요?”
 “그거야 전에 가짜라고 했으니까 그랬지! 아무것도 모르는 그 늙은이를 홀랑 벗겨먹으려고!”
 
 그는 변명을 하고 싶었던 마음과는 다르게 입에서 거짓말이 계속해서 나오자 당황해서 고함을 지르며 발악했지만 말은 그가 원하는 대로 나와 주지 않았다.
 
 “하하···.”
 
 자신이 마법을 걸었음에도 허탈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걸 마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건 저주나 마찬가지다.
 
 “도대체 왜 그래? 미쳤어? 미친 거야?”
 
 장년의 남자가 철상을 붙잡고 흔들었다.
 
 “이 빌어먹을! 모르겠어! 어떻게 된 게 틀림없다고!”
 “그 할아버지에게 사기를 치신 거네요. 전 이대로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녹음되었다며 핸드폰을 흔들어 보여주니 이제 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갔다.
 
 “다 그놈 잘못이지! 귀물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한 그놈 탓이지! 진품이라고 했으면 그 너구리같이 나이만 처먹은 놈이 나한테 팔았을 거 같아? 그놈은 이 물건을 가질 자격이 없어!”
 “그만 좀 해! 제발!”
 
 장년의 남자가 말려보려 했지만 철상의 입에서는 봇물 터지듯 진실이 흘러나왔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쇼.”
 
 다급히 연적을 챙겨 비틀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추스르고 감정원을 빠져나왔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다. 남에게 저주를 걸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우웩···.”
 
 결국 담벼락을 부여잡고 오바이트를 쏟아내고 말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 중에 방금 사용한 것은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도록 하는 마법이었다. 그냥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는데···
 
 원래는 피로 주문의 형상을 그렸어야 했다. 하지만 가볍게 할 생각에 물로 했던 것이니 지속시간은 오래 가지 않을 거다. 다행이다.
 
 기본요금도 안 나오는 거리를 억지로 택시를 타고 겨우 돌아왔다. 원래는 바로 옥션에 들를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병원에 가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우니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온몸이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누워있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상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통쾌하기도 했다. 원래 인사동 바닥이 사기꾼 천지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저런 사람들 때문에 골동상인들이 전부 사기꾼 취급을 받는 거다.
 
 저런 사기꾼들을 골려주니 막노동을 하며 돈을 벌었던 것과는 다른 묘한 쾌감이 전해져왔다.
 
 아버지가 도굴꾼이었던 원죄로 항상 죄를 짓는 것 같았는데 어쩌면 이 능력과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배웠던 지식을 통해 좋은 일을 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다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헉··· 헉···.”
 
 눈을 뜨니 여전히 밖은 밝다. 그런데 문득 시계를 보니 8시를 가리키고 있다.
 
 “뭐야, 설마 하루가 지난 거야?”
 
 핸드폰에 찍힌 날짜도 분명 하루가 지나있었다. 놀랍게도 16시간을 넘게 잠들었다 깨어난 거다.
 
 침대에서 일어나 가볍게 뛰며 팔을 휘저어보니 의외로 몸에 활력이 넘쳤다. 생기가 모조리 빠져나간 것같이 텅 비었던 허전함은 알 수 없는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팔··· 제대로 걸린 거야.”
 
 이 알 수 없는 충만함과 활력은 오히려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마치 악마의 힘이 몸속에 들어온 것 같다.
 
 호텔 방을 한동안 서성였지만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번 꿈을 꿨을 때는 그 고통이 현저히 줄어든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다시 마법을 쓰지 않기 시작하면 그 고통이 다시 늘어날까? 아마도 그럴 것 같다.
 
 그런데 만약 이게 저주가 아니라면? 로또보다 더한 행운이 분명하다.
 
 일단 옥션에 가기로 했던 일정을 마무리 짓기 위해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 입은 뒤 호텔을 나섰다.
 
 인사동 옆의 대한옥션은 대한민국 대표 고미술 경매업체로, 대부분의 자산가들이 이곳을 통해 고미술품을 취득하고는 한다. 물론 그보다 훨씬 자산이 많은, 속칭 재벌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이곳 말고도 자신들만의 경로를 통해 물건을 확보한다.
 
 “어서 오세요. 저희 대한옥션 회원님이신가요?”
 
 일단 저주고 나발이고 신경 끄기로 했다.
 
 아버지, 이제 저도 좀 사람답게 살아볼게요. 네?
 
 
 * * *
 
 
 고미술품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사동을 떠올린다. 그런 면에서 대한옥션은 상당히 괜찮은 자리에 위치한 셈이다. 인사동 초입에 위치해 있으니 말이다.
 
 사실 해진도 대한옥션은 처음 방문해본다. 아버지는 물건을 얻으면 항상 비밀리에 매입해주는 중개상과 거래했기 때문에 경매장을 방문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해진은 수많은 사람이 경매장을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서울에 처음 올라온 시골뜨기처럼 두리번거리며 헤매기 시작했다.
 
 이 바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부딪치니 당황하고 만 것이다.
 
 그런 해진을 도와주기 위함인지 깔끔한 투피스 정장을 갖춰 입은 여성이 다가왔다. 동글동글한 인상에 폭 파인 보조개가 상당히 귀엽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차분한 목소리와 정중한 응대에 그제야 제 정신을 차렸다.
 
 “아, 제가 여기 처음이라서요.”
 “그런가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오늘 프리뷰에 참여하러 오셨습니까?”
 
 프리뷰란 경매 1, 2주 전에 참여할 작품을 전시하는 행사다. 이론으로는 빠삭하니 당연히 알고 있는 내용이다.
 
 “아뇨, 전 응찰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혹시 위탁하러 오셨나요?”
 
 위탁은 경매 회사에 작품을 팔기 위해 내놓는 것을 말한다.
 
 “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위탁하고자 하는 물품이 어떤 것인지 알면 제가 빠르게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상냥한 웃음기를 머금고 응대해주니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백자입니다, 청화백자. 연적이구요.”
 “아, 그럼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그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르니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오늘 프리뷰전시에는 어떤 작품들이 나오나요?”
 “중국 송, 원, 명 대의 작품 몇 가지, 고려, 조선 시대의 작품 몇 가지와 일제시대의 여러 작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중국 물건이 몇 가지나 나온다구요?”
 “네, 이번에 개인 소장하고 계셨던 분께서 내놓으신 물건입니다.”
 “아···.”
 
 근래에 들어 거의 모든 나라들이 문화재 반출에 극히 예민하다. 그것은 중국도 마찬가지라 개인 소장품이 아니면 경매에 나오는 건 상당히 힘들다.
 
 “그래서 오늘 프리뷰전시에 오신 분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겠네요.”
 
 4층에 오르니 1층과는 또 다른 인테리어가 눈에 띈다. 엘로우톤의 아늑한 조명이 심플한 인테리어를 은은히 비추는 것이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시겠습니까?”
 
 작은 회의실로 안내한 그녀는 주스 한잔을 놓고 사라졌다.
 
 대한옥션에서 나온 간행물을 보며 기다리기를 20여분쯤 됐을까? 드디어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대한옥션에서 도자기 감정평가를 하고 있는 홍미진이에요.”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은 검은 뿔테안경을 고쳐 쓰며 명함을 건넸다. 외모에서부터 상당히 엘리트적인 면모가 보인다.
 
 “반갑습니다. 일단 이거 먼저 보시죠.”
 
 그녀는 해진이 내놓은 연적을 한참 동안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좋은 물건이군요.”
 
 아주 간단한 말이었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다행이네요.”
 “다음 메이저 경매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감정보증서는 제 이름으로 나갈 거구요. 더 궁금한 점 있으신가요?”
 “아뇨, 됐습니다.”
 
 그녀는 흥미로운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해진을 바라보았다.
 
 “이상하네요. 보통 경매 시작가는 얼마가 될지, 평균적으로 얼마 정도에 낙찰 받을 수 있을지 물어보시는데···.”
 “진품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럼 물건의 가치만큼 받겠죠.”
 
 제대로 된 골동의 가치를 가장 제대로 쳐서 팔 수 있는 방법이 정말 경매장일까? 해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품의 가치는 물건을 볼 줄 아는 사람에게 팔아야 제값을 받는다. 어중이떠중이 모아놓고 경매해봤자 물건을 볼 줄 모르는 사람들밖에 없으면 똥값이 된다.
 
 경매장에서 팔리는 가격이 정말 제대로 된 가치라면 왜 중개상들이 경매장에 내놓지 않겠는가? 그들은 물건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들에게 제값을 받기 위함이다.
 
 물론 물건이 진품이라는 가정 하에 그렇다. 진품이 아니면 당연히 호구나 잡으려고 할 테지만.
 
 그럼에도 경매장에 물건을 내놓은 이유는 제값을 치를 사람을 만나기까지의 번거로움 때문이다. 그리고 설마 이런 아름다운 백자를 두고 마음이 동하지 않을 리 없다는 자신감 때문이기도 하다.
 
 “우문현답이군요.”
 “흐음··· 저야말로 궁금한 게 있는데, 왜 이 물건이 어디서 난 건지 묻지 않으시죠?”
 
 물건의 출처는 굉장히 예민하면서 중요한 문제다. 장물을 팔았다가는 대한옥션의 이미지가 땅에 떨어질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
 
 “제가 본 적 없는 물건이니까요. 제가 모르는 물건이면 장물일 리 없죠.”
 
 설사 장물이더라도 전혀 세상에 나온 적이 없는 물건이라면 문제 될 수 없다는 말인데, 대단한 자신감이다.
 
 세상에 나온 모든 백자는 자신이 다 알고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리고 장물이라면 사장님처럼 그렇게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물건을 내놓을 리 없으니까요. 어쨌든 소중한 첫 거래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좋은 물건이 있다면 언제든지 저희 대한옥션을 이용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로 첫 거래의 수수료는 8%로 진행하겠습니다.”
 “그것 마음에 드네요. 안 그래도 남은 게 몇 개 더 있거든요.”
 “그럼 기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2층에 프리뷰전시라도 둘러보고 가시겠어요?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저 혼자 둘러볼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녀와 헤어진 해진은 2층으로 내려갔다. 고미술품을 보는 것은 언제라도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역시 전시장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는데 미술품을 보러 온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다들 옷차림부터가 달랐다.
 
 해진도 그들 사이에 끼어서 조용히 작품들을 감상하는데 옆에서 바짝 가시 돋친 음성이 들려왔다.
 
 “볼 줄도 모르는 게···.”
 
 아무 상관도 없는 해진이 들어도 확 기분 나빠질 것만 같은데 이 말을 들은 상대방은 어떨까? 궁금함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돌아갔다.
 
 “내가 볼 줄 모른다고?”
 
 백옥 같은 피부, 유려하게 뻗은 눈썹, 도도하면서도 깊은 눈동자, 오똑한 콧날, 하물며 화가 치밀어 한쪽 입술을 깨무는 것까지 아름다운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해진은 어디 가서 못 생겼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용달차를 끌면서 여자를 헌팅하는 불가사이한 기적을 일으킨 것 아니겠는가?
 
 아버지에게 반항 좀 해보겠다고 노가다로 번 돈을 홍대 클럽에서 써제꼈던 그도 지금껏 실물로 이 정도까지 아름다운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하긴, 또 사기당하지 않으려면 경매장에서 사는 게 안전하지. 그러게 왜 대단한 물건이니 뭐니 해서 사기를 당하니? 내가 다 쪽팔린다, 얘.”
 
 저 아름다운 여인에게 무차별 폭격을 쏟아내는 여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 아닌 것이 없었다.
 
 마스크도 상당히 괜찮아 어딜 가든 남자들이 한 번쯤 돌아볼 것 같은 미인이지만 방금 전에 천사 같은 미모를 봤던 해진에게 있어 그녀 역시 일반인 중 하나일 뿐이다.
 
 “후··· 그래, 내 실수니까 인정해야지. 그런데 넌 여긴 웬일이야? 너희 아버지 조만간 검찰 소환된다고 뉴스에서 난리인데, 이런데 올 정신은 있니?”
 
 예쁘다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거라 예단한 것은 해진의 커다란 착각이었다. 그녀 또한 혀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뭐?”
 “괜히 없는 돈 주고 샀다가 압수되는 거 아닌가 해서. 지금부터 해외에라도 나가 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
 “우, 웃기지 마!”
 “내가 듣기로는 ···가 자금을 관리··· 굉장히 태연해 보이네.”
 
 상대방에게 연신 총을 쏴대는데 소음기라도 달았는지 가까이 있던 해진에게나 가까스로 들릴 정도로만 말한다.
 
 더 자세히 듣고 싶은데 중간중간 들리지 않으니 더 듣고 싶어 은근슬쩍 한 걸음 다가갔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데 검찰들 저러는 거 한두 번 아니야. 허공에 총질하다가 마는 게 어디 한두 번이니? 하긴, 경영이라고는 고작 싸구려 몇 개 가져다 놓은 동네 미술관이나 운영하는 네가 뭘 알겠니? 그런 머리라도 있었으면 우리 집 막내도 당하지 않을 사기나 당하진 않았겠지. 아, 내가 말했던가? 우리 막내가 지금 초등학교 5학년인데.”
 
 이러다 둘 사이에 죽빵이라도 오갈 분위기다.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 반, 기대하는 마음 반으로 지켜보는데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그만하시죠, 아가씨.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까 선빵을 날린 까칠한 여자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이가 다가와 말렸다.
 
 그는 나이가 마흔은 충분히 넘어 보였는데 키도 그리 크지 않고 몸집이 우락부락한 것도 아니어서 단순히 경호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아, 내가 좀 흥분했죠. 미안해요. 안목 떨어지는 친구를 보면 내가 괜히 흥분해서··· 정말 나는, 돈은 많은데 미술품 보는 안목이 없는 아이들을 보면 너무 화가 나. 막 화가 난다니깐?”
 
 이쯤 되니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어떤 작품을 보고 그러신 거예요?”
 
 ‘어?’
 
 그 수행원이 흥분하는 그녀를 끌고 사라질 줄 알았는데 다 꺼져가는 장작불에 불씨를 하나 던져 넣는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부채질을 시작했다.
 
 “아니, 이걸 봐요. 이 옥불상을 보고 고귀하다느니, 최소 수십억은 하겠다느니 하는데 나도 모르게 여기서 걸음을 멈췄다니까요? 그런데 글쎄 그 말을 은혜 얘가 하고 있었네? 너는 그 안목으로 부모님한테 은혜나 갚겠니?”
 
 이런 썩을 드립 하고는··· 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은혜라는 걸 알게 되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반대로 은혜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의 수행원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말한 옥불상은 바로 해진의 앞에 있었는데 예닐곱 살 어린아이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옥불상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시중에 파는 관광상품처럼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다.
 
 유리관에 보관되어 있기에 눈으로만 봐야 하는데 그 아래 설명으로는 명대(明代) 물건으로 추측된다는 것 말고는 없었다.
 
 “흐음··· 명대의 옥불상이군요. 빛깔이 고우나 선이 투박하고 좌우의 균형이 묘하게 틀어져 있네요. 게다가 자세히 보니 도포 자락의 끝이 부서져 나갔구요. 흐음··· 저라면 10억 이상은 힘들겠네요.”
 
 은혜가 그 수행원을 뚫어지게 바라본 이유가 있었다. 단순한 수행원이 아니라 개인 감정사나 마찬가지였나보다.
 
 은혜라고 불리는 그 미녀는 얼굴이 홍시보다 더 빨갛게 물들었다. 사기까지 당했다고 하더니 마치 사춘기 때의 일기장을 내보인 것처럼 민망하고 부끄러운 거다.
 
 이렇게 되니 그녀를 돕고 싶어졌다. 딱히 이유라고 할 것은 없다. 그냥··· 예쁘니까. 이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한 이유가 필요한가?
 
 슬쩍 손가락에 침을 발라 옥불상의 유리관에 그림을 그리고 혼자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나직하게 주문을 외웠다.
 
 “허억···.”
 
 순간 머리가 띵 하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눈앞의 시야가 캄캄해지다가 다시 시력이 돌아왔을 때는 그의 앞에 그 눈부신 미녀가 보였다.
 
 “괜찮으세요?”
 “아, 예. 괜찮습니다. 어제 먹은 술이 덜 깨서 그런가 봐요. 그런데··· 제가 그냥 지나가려고 했는데 너무 황당해서 그냥 지나갈 수 없겠네요.”
 
 솔직히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그냥 지나가고 싶어졌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며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했다.
 
 “네?”
 “이 옥불상이요. 고작 생긴 것으로 이러쿵저러쿵 나불대는 것을 보니 안목이 형편없으신 것 같아서요. 저런 안목이면 분청사기도 빛깔이 칙칙하다고 내다 버릴 사람 같은데···.”
 
 그 나이 많은 수행원의 얼굴이 급격히 굳어졌다.
 
 
 
 새로운 일거리
 
 
 마법을 구동하는 방식은 이렇다.
 
 먼저 자신이 시전하고자 하는 마법의 문양을 아무 곳에나 그리고 나서 주문을 외우면 된다. 그러면 몸에서 마력이 빠져나가고 마법이 시전된다.
 
 해진이 시전한 마법은 사물의 기억을 끄집어내서 보여주는 것. 사이코메트리와 비슷하지만 다른 점은 시전자가 원하는 시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해진은 물건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를 상상하며 시전했고 찰나의 시간 동안 그 시대상이 사진처럼 머릿속에 박혔다.
 
 “오만하군. 자네가 뭐 하는 친구인지는 모르지만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네.”
 “말을 함부로 하는 건 제가 아니라 당신인 것 같네요. 특히 이런 귀한 물건을 앞에 두고 말이죠.”
 
 여든 먹은 할아버지처럼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픈 건 몸에 쥐뿔도 없는 마력이 상당 부분 빠져나가면서 생긴 후유증이다.
 
 때문에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지껄이는 것도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올려야 가능했다.
 
 “이유가 있나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물어오는 은혜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옥불상이 아닙니다.”
 “호호, 이거 웃긴 인간이네? 그냥 옥불상이 아니면?”
 
 가만히 지켜보다 어이가 없었는지 옆의 다른 여자가 한껏 비웃음을 머금고 끼어들었다.
 
 “이 옥불상은 명나라 사천지방의 한 가문에서 태어난 물건입니다.”
 
 일부러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도 주변 사람들이 호기심에 은밀히 엿듣고 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 위함이다.
 
 “가문? 어느 가문? 뭘 알고 지껄이는 거야?”
 “지금부터 그 가문의 이야기를 말씀드리죠.
 
 사천의 유력 가문이었던 우씨가의 가주였던 송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내 사랑이 지극했던 송은 가신들의 권유에도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첩을 들이지 않았고 가문을 이을 후손을 단 하나밖에 두지 않았었죠.
 
 그런데 그만 이민족이 쳐들어오게 됩니다. 의협심이 강했던 송의 아들 민은 군대에 자원해서 이민족을 소탕하러 가게 됩니다.”
 “그게 이 옥불상과 무슨 관계지?”
 
 안 그래도 숨이 차던 차에 타이밍 좋게 장년의 감정사가 숨 쉴 틈을 내준다.
 
 “이제 곧 나옵니다. 귀중한 물건은 성급하게 겉으로만 봐서는 그 가치를 정확히 알기 어렵죠.”
 “크흠···.”
 “알았으니까 계속해봐. 헛소리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예쁜 분께서 성격이 급하시네요. 알겠습니다. 후우···
 
 민이 이민족을 소탕하러 집을 떠나자 아버지였던 송은 아들이 무사귀환하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주를 돌던 늙은 중이 송의 집에 들렀다 마당에 심어진 복숭아나무를 보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 복숭아나무가 병 든 것을 보니 아비의 기도가 헛되이 되겠구나.’ 이렇게요.”
 “그래서요?”
 
 은혜는 궁금했는지 자연스레 이야기의 박자를 맞췄다.
 
 “그 이야기를 하인에게서 들은 송은 얼른 사람을 보내 그 늙은 중을 집 안으로 불러들입니다. 들어보니 그 말이 범상치 않은데 혹시 아들이 돌아오지 못 하는 거 아니냐고 묻지요.
 
 이에 늙은 중이, 복숭아는 씨가 하나인데 나무가 병이 들어 죽어가는 걸 보니 하나 남은 씨가 더 이상 씨를 뿌리지 못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고 말하지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크게 낙심한 송이 아들이 돌아올 방법이 없겠냐고 물으니 그 늙은 중이 방법이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곤륜산에서 난 귀한 화전옥(和田玉)에 가장 귀한 물건을 넣어 불상을 만들어 절에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럼 이게···?”
 
 은혜는 놀란 얼굴로 옥불상을 다시 돌아보았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곤륜산에서 나는 화전옥은 해발 3,500 ~ 5000m의 고산 암반층에서 나는 귀한 옥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쉽게 채취한다지만 그 당시에는 쉽지 않았죠.”
 “그게 진짜라고···?”
 
 옆의 여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흘겼지만 해진은 멈추지 않았다.
 
 “송은 하인들을 시키지 않고 직접 곤륜산에 올라 옥불상을 만들 옥을 캤습니다. 추위에 발가락이 전부 썩어들었지만 멈추지 않았죠. 오로지 아들을 살리겠다는 부모의 집념이었습니다.
 
 결국 옥을 캐낸 송은 아내가 남긴 가장 중요한 패물인 옥으로 만든 가락지 한 쌍을 이 옥불상에 넣어 절에 시주했습니다.”
 “아···.”
 
 감탄사는 은혜를 비롯한 주변 곳곳에서 들려왔다. 해진의 목소리에 주변 갤러리들이 모두 집중하고 이야기를 들은 것이다.
 
 “아버지의 공덕 덕분인지 결국 아들인 민은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비록 다리 하나를 잃긴 했지만 그 후 아내를 얻고 자식을 낳아 대를 이어갈 수 있었죠.”
 
 갤러리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야기에 감동 받아 눈물을 글썽이는 이도 있었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해진을 노려보는 감정사를 향해 한껏 비웃어줬다.
 
 “옥불상의 균형이 묘하게 틀어져 있다고 하셨죠? 그건 옥불상 안에 가락지를 넣기 위해 먼저 구멍을 파고 가락지를 넣은 다음 옥불상을 깎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균형이 틀어져 보기 싫어진다면 피사의 사탑을 만든 건축가를 비웃는 꼴이겠지요.
 
 이건 그냥 옥불상이 아닙니다. 자식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이 담긴 귀한 유물입니다. 그러니 수십억을 주고 산다고 해도 결코 비싼 게 아니지요.”
 “그럼, 그럼.”
 “이 물건의 시작가가 얼마지?”
 
 이 옥불상의 인기는 순식간에 치솟았고 전시회의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옆의 여자는 불길을 토해낼 듯한 눈빛으로 해진을 노려보았다.
 
 “지금 한 말, 진짜야? 증명할 수 있어?”
 “청나라 초기에 주윤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온갖 희귀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이였는데, 말년에 그 이야기를 묶어 세설기경이라는 책으로 냈지요. 거기에 이 옥불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저도 그것을 여기에서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저 안에 아무것도 없으면?”
 “간단합니다. 그 책에 보면, 옥불상 아랫부분에 가락지를 넣기 위해 파내고 메운 흔적이 있다고 했으니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겠죠.”
 
 사실 세설기경이라는 책이 있다는 건 그냥 지어낸 이야기다. 하지만 옥불상 안에 가락지가 들어있으니 세설기경이 없다고 한들 큰 문제는 없다.
 
 “흥! 소 뒷걸음치다 쥐 잡았네? 축하해.”
 
 그녀는 은혜를 향해 싸늘하게 내뱉고는 몸을 돌려 전시장을 빠져나갔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장년의 감정사는 해진을 빤히 바라보고는 말 한마디를 던지고 그녀를 뒤따라갔다.
 
 “나중에 또 보겠군. 오늘 인상 깊었네.”
 
 나중에 또 볼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이 사라지자 한숨 돌렸다.
 
 “후아··· 죽겠네.”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억지로 허리까지 오는 차단봉을 지지하고서는 은혜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고마워요.”
 “뭘요. 입이 어찌나 험한지 가만히 들어주기 어렵더라구요. 그리고 정말로 이 옥불상을 욕한 건 그들이 실수한 겁니다.”
 
 사실 해진도 마법을 시전하기 전까지는 이 옥불상이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을 줄 전혀 몰랐다.
 
 “고미술품에 대한 조예가 대단하시네요. 혹시 어느 학교를 나오셨어요?”
 “아···.”
 
 순간,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은 학교에 가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반면에 은혜는 눈치가 빠른지 해진이 좋은 학교를 가지 못했음을 알아챈 것 같았다.
 
 “뭐, 학교가 중요한 건 아니죠. 미안해요. 누굴 만나면 꼬치꼬치 묻는 게 습관이라서···.”
 “맞습니다. 그게 꼭 좋은 습관이라고는 볼 수 없죠, 하하하.”
 “식사 안 드셨으면 제가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데요?”
 
 이게 웬 떡인가? 역시 미인을 도우면 하늘이 보살피는 법이다. 문제가 있다면 지금 초인적인 인내로 버티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을 듯이 힘들다는 데 있었다.
 
 “오늘은 힘든데 어쩌죠? 혹시 내일이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녀는 설마 오늘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는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내일 좋아요. 어디서 뵐까요?”
 “내일 점심 때 교정문고라는 서점에 있을 건데, 그때 거기서 뵙는 거 어떠세요?”
 “좋아요. 그럼 내일 뵐게요.”
 
 그녀는 명함을 주고 고개를 살짝 끄떡여 보이곤 쿨하게 뒤돌아 멀어져갔다.
 
 그녀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택시를 잡아 호텔로 들어왔다.
 
 “아이고, 죽겠네···.”
 
 머리가 팽팽 도는 것처럼 어지러워 씻지도 못하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역시나 일어나 보니 날이 바뀌어 있었다. 몸에 활력이 넘치는 것 또한 똑같았다.
 
 급하게 씻고 나와 목적지인 서점에 도착하니 어느새 약속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조금만 더 늦잠을 잤다면 늦었을 거다.
 
 그녀에게 전화하니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서둘러 달려가니 마치 화보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그림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 가져오셨나요?”
 “아닙니다.”
 “그럼, 제 차로 가시겠어요?”
 “그러시죠.”
 
 쪽팔림에 중고차라도 미리 한 대 뽑아놨어야 하나 생각했지만 그녀가 해진을 데리고 그녀의 차로 데려간 순간 차라리 차를 안 뽑은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도 아름다웠던 그녀는 포르쉐 마칸의 운전석에 앉는 순간 섹시함까지 더해졌다. 완벽한 여자다.
 
 “제가 아는 곳으로 모실게요. 스테이크 잘 하는 집인데, 괜찮으시죠?”
 “그럼요. 저 스테이크 좋아합니다.”
 “풉! 그래요.”
 
 웃는 모습도 어찌 저리 예쁠까? 더없이 완벽한 모습에 이제는 주눅까지 들려고 한다.
 
 여자 앞에서 주눅 든다는 건 해진의 인생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건만, 예쁜 데다가 돈까지 많으니 괜히 아버지랑 같이 더 많이 도굴해서 부자가 될 걸 그랬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녀가 해진을 데리고 간 곳은 신라호텔의 한 양식당. 이제는 그녀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미술관을 운영한다는 말을 얼핏 듣기는 했지만 고작 해봐야 이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도대체 어느 집안의 딸내미인지···
 
 확실히 스테이크는 지금까지 그가 먹었던 스테이크와는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맛있기는 했다. 먹는 내내 별다른 말 없이 식사에 열중하던 그녀는 후식이 나오자 해진과 시선을 맞췄다.
 
 “맛있게 드셨어요?”
 “네, 맛있네요.”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흐음···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을까요? 실례일 줄은 알지만 저는 이렇게 사람을 만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꼭 알아야 해요. 그렇게 배웠거든요.”
 
 범상치 않다. 뭐 하는 사람이냐? 고미술은 어떻게 그리 잘 아냐? 그냥 물어보면 될 텐데··· 그렇다고 예의로 똘똘 뭉쳐있는 사람인가 하면 어제 옆의 여자와 치고받던 대화를 생각할 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네, 물어보시죠.”
 “고미술 쪽에 조예가 깊으시던데, 하시는 일이 어떻게 되시나요?”
 
 노가다한다고 말하기도 쪽팔리지만 실은 아버지 따라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덤을 파헤치는 도굴꾼이었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얼마 전까지 노가다를 뛰었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그런지 아니면 생각이 깊은 건지 얼굴에 실망하는 티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전보다 더욱 흥미롭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노가다만 하셨다기에는 조예가 깊으시네요. 어제 그 사람 누군지 모르죠? 대한민국에서 고미술품에 대한 조예로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분이에요.”
 
 아무리 조예가 깊어봤자 마법을 사용하는 자신을 따라올 수 있을까? 사실 마법을 쓰기 전에도 자신이 어느 누구에 비해 부족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전에는 다른 전문가와 비교해서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이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로 올라섰다는 게 다를 뿐.
 
 “그런가요?”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는 듯한 해진의 말에 그녀는 한쪽 입술을 깨물며 눈웃음을 지었다.
 
 “이것 봐요, 전혀 기죽지 않잖아요? 우리 할아버지도 고미술품에 관해서는 그의 의견을 존중하셨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네?”
 “나는 당신이 궁금해요.”
 
 마치 사랑고백을 받기라도 한 듯 심장이 철렁이며 배꼽까지 내려갔다 올라온 느낌이다.
 
 궁금하다고? 연애라도 하자는 건 아닐 테고···
 
 “푸훗! 긴장하지 말아요. 사귀자는 건 아니니까요.”
 
 살짝 실망스러웠지만 혹시 오해하지나 않을까 표정을 관리했다.
 
 “하하, 그런가요? 괜히 놀랐네요.”
 “흐음··· 제가 그래도 인기가 없는 편은 아닌데, 어째 차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인가요?”
 
 이대로 그녀의 주도권에 휘말릴 수 없다고 느끼곤 더 세게 나갔다.
 
 “전 외모만 보고 쉽게 사랑에 빠지는 편은 아니라서요.”
 “어머, 그럼 제가 예쁘긴 하다는 말이네요? 고마워요.”
 
 보통 강적이 아니다.
 
 “큼··· 그럼 뭔가 원하시는 게 있다는 건가요?”
 “사실 전 할아버지로부터 미술관을 하나 얻어서 관리하고 있어요.”
 
 동네 커피숍을 물려받아 운영한다고 해도 대단한데 미술관을 얻어서 관리한다니, 스케일이 다른 진정한 금수저가 여기 있었다.
 
 “부럽네요.”
 “남들이 보기에는 부러울 수 있지만 제 입장에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에요. 아까 들으셨죠? 사기당했다는 말.”
 
 부끄러울 수 있는 일인데 그녀는 덤덤하게 말했다.
 
 “네, 들었습니다.”
 “좋은 물건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서둘러 진행했는데 그만 사기를 당해 버렸네요. 문제는 신고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가족··· 아니, 다른 이들이 알았다가는 미술관도 지키기 어려울 게 뻔하거든요.”
 
 보통 집안이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가족 간에 알력이 있는 건 확실해 보인다.
 
 “곤란하겠네요.”
 “맞아요. 그런데 단순히 사기를 당해 돈을 날리게 된 것 때문에 곤란하단 건 아니에요. 그깟 사기당한 돈은 잊어버리면 그만인데, 자꾸 이런 일이 생기면 아까처럼 저의 실책에 대해 말이 돌 수밖에 없어요. 예린이는 저를 미워하긴 하지만 결코 입 밖으로 그 말들을 꺼내지 않을 것이기에 걱정하진 않는데··· 어쨌든 다른 이들의 귀에까지 들어가면 안 되거든요.”
 “아까 말싸움하시던 여자분 이름이 예린인가요? 생각보다 입이 무거운 성격인가 보네요? 그렇게 보이지 않던데···.”
 “아뇨, 그 친구 입은 새털보다 가벼워요. 단지, 나도 예린이의 약점을 하나 잡고 있거든요. 그래서 섣불리 소문내고 다니지는 못할 거예요.”
 “아··· 그럼 제가 도와드려야 하는 게 조용히 그 사기꾼들을 잡아달라는···.”
 “푸훗! 아, 미안해요.”
 
 조금 기분 나쁠 뻔했지만 그녀의 미소를 보니 눈 녹듯 녹아내린다.
 
 “괜찮습니다.”
 “흥신소 하시는 것도 아니시잖아요? 제가 원하는 건 저를 도와주셨으면 하는 거예요.”
 
 그제야 그 예린이라는 드센 여자 옆에서 감정사를 했던 남자를 떠올렸다.
 
 “개인 감정사를 해달라는 말씀인가요?”
 “맞아요. 초면에 무례한 부탁인 줄 알지만 제가 많이 급한 상황이라 부탁드리는 거예요. 이른바 스카웃한다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조건은 대기업 과장급으로 대우해 드릴게요.”
 “과장급이라면···.”
 “연봉 8천에 보너스 400%, 거기다 좋은 물건을 싸게 구하게 되면 추가 보너스를 지급해 드릴게요. 또, 회사 이름으로 중형차를 지원해 드릴거예요. 회사 차긴 하지만 그냥 자기 차다 생각하고 쓰시면 돼요. 1년 계약 후 서로간의 합의 하에 정직원으로 전환될 수 있는 조건이에요.”
 
 괜찮은 조건이다. 백자를 얻기 전이었다면 더더욱 좋은 조건일 거다. 하지만 제일 좋은 건 이제 그녀와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거? 하지만 대답은 그녀의 기대와 달랐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어렵겠네요.”
 “흐음··· 왜죠? 이유가 궁금하네요.”
 “원래 제 꿈이 한량이었거든요. 도와드릴 일이 있으면 따로 연락을 주세요. 그때, 그때 프리랜서로 도움을 드리죠. 물론 원하신다면 비밀은 철저히 지켜드릴 겁니다.”
 
 그녀는 묘한 얼굴로 해진을 바라보다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제가 오만했나 봐요. 충분히 좋은 조건이라고 생각할 줄 알았거든요. 방금 전에는 건설업에 종사한다고도 하셨고···.”
 
 노가다라는 말 대신에 건설업에 종사한다고 표현해주는 걸 보니 상대방에 대한 배려심이 상당해 보인다. 저 정도로 많은 걸 가지고 태어났으면 남을 무시할 법도 한데 일단 겉으로 봐서는 정말 교육을 잘 받은 것 같다.
 
 “좋은 조건은 맞아요. 그런데 제가 노가다를 한 건 꼭 돈이 없어서만이 아니었어요.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반항심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런 것 때문에 일부러 힘들게 돈을 벌었으니까요. 뭐, 그래봤자 엄청난 능력을 가진 건 아니었지만 이제는 노가다를 뛰어야 할 필요도 없고, 한 직장에 얽매여 살아야 할 만큼 힘들지 않으니까···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싶다고 할까요?”
 “그렇군요. 아쉽네요. 그럼 프리랜서로 업무를 의뢰하면 들어줄 생각인 건 맞으신가요?”
 “그럼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은혜 씨의 부탁인데 들어 드려야죠.”
 “후훗. 그건 마음에 드네요. 좋아요. 그럼 정식으로 업무를 의뢰할게요. 자세한 내용은 회사로 찾아와주세요. 세연 갤러리라고 들어보셨나요?”
 
 들어본 적이 있는 것뿐만이 아니라 찾아가본 적도 있다.
 
 “북촌에 위치한 갤러리 말씀하시는 거죠?”
 “어머, 알고 계시는군요.”
 
 잘 알다마다. 아버지가 종종 해외에 팔고 다녔던 골동품이 세연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광경을 몇 번 보곤 했다. 그때 얼마나 놀랐던지···
 
 중국 등지에 장물로 거래된 유물이 어떻게 바다를 건너 한국의 미술관에 전시될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지만 그렇다고 미술관장에게 어떻게 샀느냐 물어볼 수 없어 궁금증만 가진 채 물러서야 했었다. 그런데··· 그 미술관장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니···
 
 “흐음··· 알겠습니다. 내일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요. 어떤 업무를 의뢰할지 말이에요.”
 “저도 해진 씨와 같이 일하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녀는 해진을 서점 앞에 다시 데려다주었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지만 알려주지 않았다. 도둑도 들 생각을 안 하는 달동네가 집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백자만 팔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자신은 고미술품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어차피 아버지의 도굴을 막기 위해 반항심으로 했던 노가다도 이제는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아예 집을 서울로 옮기고 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비록 아버지는 도굴꾼의 인생을 살았지만 나는 양지에서 당당하게 고미술 감정사로 성장할 것이다. 아니, 그걸 넘어서 아버지를 협박해 죽음에 이르게 했던 악덕 미술상을 찾아 복수할 것이고 억울하게 빼앗겼던 선조의 유물들도 되찾아 올 거다.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가슴이 뛴다. 이 모든 일들이 그냥 일어난 것 같지 않았다. 어쩌면 이 일들은 내게 아버지의 마지막 바람을 이루게 하라는 하늘의 계시인지도···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핑계를 대던 나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하나하나 시작을 해볼 것이다.
 
 기왕 시작한 것, 정말로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유물들을 모을 수 있다면, 우리 선조의 유물을 가져가서 자기네 수집품이라고 우기는 자들에게서 우리의 유물을 되찾아 올 수 있다면, 그 또한 보람찬 일이 되지 않을까?
 
 그날 밤, 해진은 밤하늘을 보면서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곧바로 근처 공인중개사에 들러 가까우면서 적당한 가격의 오피스텔을 찾았다. 현재 남은 돈 중에 천만 원을 보증금으로 써야 했지만 아직 오백만 원이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바로 택시를 타고 살던 집으로 돌아가 늦은 저녁까지 짐을 정리했다. 옮길 짐은 많지 않았다. 불필요하고 옮기기 힘든 것들은 이웃들에게 나눠줬다. 그리고 딱 상자 세 개 분량의 필요한 짐은 편의점 택배로 붙이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그때 시간이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다음 날,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나서 가까운 백화점으로 가 기성양복을 한 벌 구입했다. 한 벌에 50만 원이나 했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름 전문가처럼 보여야 하는데 캐쥬얼 복장으로 갈 수는 없으니까.
 
 세연 갤러리에 도착한 시간은 11시경. 업무 이야기를 하고 점심을 같이 먹기 딱 좋은 시간이다.
 
 느긋하게 갤러리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화려하게 채색이 들어가 있는 커다란 화병이 눈에 들어왔다. 사슴과 노루가 뛰노는 산속의 풍경을 그린 화병인데 무척이나 보존이 잘 되어 있어 색감이 뚜렷하고 빛깔이 화사했다.
 
 모르는 이들이 보더라도 귀한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 것인데, 해진에게 있어서도 이 화병은 결코 낯선 물건이 아니었다. 이 화병은 아버지가 도굴해서 중국 밀매업자에게 넘겼었던 물건이었던 것이다.
 
 도자기에 관심이 조금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 화병이 중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걸 분명히 알 터인데도 아무 문제 없이 국내에 반입됐다는 것 또한 이상했다.
 
 “예쁘죠?”
 
 얼굴도 예쁘면서 어쩜 목소리도 저렇게 청아할까?
 
 고개를 돌려보니 타이트한 H라인 스커트와 화사한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은혜가 뿌듯한 얼굴로 화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좋은 물건이네요.”
 “우리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 중 하나예요.”
 “아··· 할아버지를 좋아하셨나 봐요?”
 “절 많이 예뻐하셨으니까요. 이제는 돌아가시고 안 계시지만 가끔 할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그분께서 좋아하셨던 물건들을 계속 봐요. 그러면 꼭 옆에서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올 것 같거든요.”
 
 감수성도 풍부해라. 다른 사람이 이러면 궁상떨고 있다고 하겠지만 그녀에게는 왠지 모를 측은함이 들기도 했다. 이게 미녀의 효과인가?
 
 “할아버지가 왜 은혜 씨를 좋아하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호호, 그런가요? 들어가실래요? 업무 이야기를 여기서 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죠.”
 
 그녀는 갤러리 안쪽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아무래도 재력가나 고위층의 사람들이 자주 오는 만큼 그녀의 사무실은 화이트톤의 심플함을 강조하면서도 곳곳에 보이는 고가의 그림과 인테리어로 고급스러움을 유지했다.
 
 “실은 급하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얼마 전에 우리와 주로 거래를 해왔던 쪽에 문제가 생겨서 다른 쪽을 알아보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신뢰가 가지 않아요.”
 “문제가 생겼다는 건, 그쪽에서 음···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말을 이어가다가 그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그녀의 반응을 살피니 은혜는 웃으며 말했다.
 
 “그냥 편하게 이름 부르세요. 제 나이에 사장님이나 관장님은 이상하잖아요?”
 “명함에는 직함이 쓰여 있지 않더라구요.”
 “공식적으로는 실장이라고 하지만 그 명함에는 직함을 쓰지 않았어요. 비즈니스로 만나는 사람에게 주는 게 아니었거든요.”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아··· 그렇군요. 크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면, 문제가 생겼다는 건 그쪽 브로커에서 문제가 있는 물건을 넘겼다는 말인가요?”
 “맞아요. 가품으로 저를 속였죠. 지금 찾고 있기는 한데 그 사기꾼을 찾는 것보다 곧 다가올 전시회에 내놓을 물건이 부족한 게 더 급한 문제예요.”
 “경매장에서 찾은 옥불상은···?”
 “그건 제가 염두에 두고 있긴 한데 해진 씨가 너무 크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잘못하면 저희가 낙찰받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경매장에서 이번 회계연도에 쓸 수 있는 금액이 정해져 있거든요.”
 “그렇겠네요. 그럼 주로 브로커를 통해 물건을 들여오시나요?”
 “경매장을 통해 가지고 오는 게 70% 정도고 나머지는 인사동을 통해 가지고 와요. 아시다시피 인사동을 통해 들어오는 건 정말 싼 가격에 좋은 물건인 것도 있지만 지금처럼 가품인 경우도 있어서 거래할 때마다 불안해요.”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렇게 들여온 물건들을 갤러리에서 다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 같고··· 어떻게 처분하세요?”
 “그룹에서 사가는 편이 많죠. 사실 입구에서 보셨던 화병도 사촌오빠가 많이 원했어요. 꼭 가지고 싶다고···.”
 “그룹이라면···?”
 “화진그룹이요. 사촌오빠가 화진그룹 부회장님이세요.”
 
 세상에··· 재벌집 딸이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대한민국 최고 그룹의 핏줄이었을 줄이야···
 
 “아··· 대단하신 집안이네요?”
 “아니에요. 저희는 엄밀히 말하면 화진그룹과는 상관없다고 봐야 해요. 지분이 1%도 없으니까. 어쨌든··· 도와주실 거죠?”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
 
 “물론이죠.”
 
 
 
 마원(馬遠)의 매화서원
 
 
 중국의 이름 모를 무덤에 십수 명의 사람들이 북적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누구는 사진을 찍어댔고 누구는 바닥에 남은 족적을 조심스레 찍어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이끄는 40대 중반의 양췬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 문화재관리팀 팀장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게 도대체 몇 번째인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도굴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있다면 단연 중국이다. 중국 황실의 주요 문화재는 전부 대만의 고궁박물관에 있다고는 하지만(국민당의 장제스가 국공내전에 패하면서 황실의 문화재를 전부 들고 대만으로 도망쳤는데 그 양이 무려 70여만 점에 이른다) 민간이 소유하고 있는 문화재는 아직도 어마어마한 양이고 지하에 파묻혀 빛을 보지 못하는 문화재 또한 엄청난 양일 거라고 추정되고 있다.
 
 물론 중동지역 역시 수많은 문화재가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해당 지역에 들어가면 각종 테러조직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하기에 수많은 도굴꾼들이 중국으로 모여드는 건 어쩌면 필연적이라고 봐야 했다.
 
 문제는 아무리 불법 도굴을 막고 싶다고 해도 한계가 있다는 것. 모든 인력을 이쪽에 투입할 수도 없으니 사건이 벌어지고 난 다음 이렇게 뒷북만 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매장된 유물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으로 일직선으로 파고 들어온 모양이 깔끔하고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그놈 같습니다.”
 
 양췬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보고하는 저우쉰을 바라보았다.
 
 “그럼 해외로 나가지는 않겠네?”
 
 지금껏 수십여 년 동안 가장 그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 그놈이다. 이름도 모르고 어느 국적인지도 모르지만 지금껏 같은 수법으로 수십여 개의 무덤을 도굴해왔다.
 
 이상한 건 그놈은 도굴한 문화재 중 해외로 유출시킨 건 몇 되지 않는다는 것. 항상 중국 암시장에 대부분의 유물을 은밀히 팔아넘기곤 돈만 챙겨서 빠져나가는 방법을 취했다.
 
 일부 유물이 중국내 권력층과 조폭 등에게 은밀히 전해졌지만 그쪽은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어쨌든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대로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상한 게 발견됐는데요?”
 
 저우쉰은 하얀 면장갑을 낀 손으로 검은색 목곽을 양췬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야?”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문양이거든요.”
 
 북경대학교 고미술학과를 나온 수재인 저우쉰은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긴 하지만 꽤나 똑똑한 놈이다. 때문에 이놈이 본 적이 없는 문양이라고 하면 정말 희귀한 물건이라는 뜻이다.
 
 양췬은 주머니에서 흰색의 면장갑을 꺼내 끼고는 저우쉰이 주는 목곽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그리고 밑바닥부터 뚜껑까지 하나하나 세심히 살폈다.
 
 “흐음··· 재질은 나무 같은데··· 어떤 유약을 발랐는지 도통 감도 안 잡히네? 4백 년이 지난 무덤에서 썩지도 않았고 말이야. 문양도 처음 보는 것이고··· 진짜 뭐지? 그리고 이 정도 물건을 왜 챙겨가지 않았을까? 잠깐, 이게 어디에 있었다고?”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럼 이 안에 뭔가가 있었다는 거네? 그치?”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흐음··· 아무래도 우리 쪽에서는 감정이 안 되는 물건인 것 같다. 이걸 감정위원회로 가지고 가. 분명 아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럼 이 안에 있던 건···.”
 “이 목곽이 뭔지를 알아야 이 안에 있었던 게 뭔지 알 거 아냐! 암시장 쪽에 이 문양과 비슷한 게 풀려있을지도 모르니까 잘 체크하고. 그런데 내 느낌상 왠지 이건 암시장에 넘기지 않았을 것 같아.”
 
 저우쉰은 평소 과학적인 수사를 즐겨 하는 양췬이 저런 비과학적인 단어를 언급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느낌이라구요?”
 “그래, 왠지 이건 파는 물건이 아닌 것 같거든.”
 
 저우쉰은 파는 물건이 아니라는 말이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지만 의문을 접어두고 그 목곽을 조심스레 포장했다. 이것만 넘기고 여자친구와 놀러 갈 생각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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