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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가다로 게임지존 1권 (1)

2018.11.22 조회 4,097 추천 28


 # 프롤로그
 
 
 
 
 
 
 
 
 
 
 모네터리 필드.
 통칭 달빛 광산.
 게임 ‘루나틱’에는 수많은 필드가 존재하지만 이 필드는 개중에서도 특별한 필드에 속했다.
 바로 ‘수집형’ 필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공격적인 몬스터의 등장 빈도가 현저히 낮다는 뜻이다.
 까앙! 까앙! 까앙!
 달빛 광산 내부는 돌 깨는 소리, 금속 두들기는 소리 따위로 가득했다.
 광석을 캐는 사람들은 대부분 허름한 차림에, 한 손에 곡괭이를 들고 있는 모양새였고, 표정은 거의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루나틱’은 게임이고, 게임은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즐기려고 접속해 놓곤 이렇게 좁아터진 광산에서, 속된 말로 ‘노가다’만 종일 하고 있으니.
 “······으아! 숙련도 더럽게 안 오르네! 아저씨, 아저씨도 숙련도 채우러 왔어요?”
 한 유저가 곡괭이를 내던지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곁의 중년 남자는 듣는 둥 마는 둥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피곤에 찌든 눈으로 광석을 캘 뿐.
 “이런, 빌어먹을. 어딜 가도 작업장 새끼들밖에 없네. 이게 게임이냐.”
 말을 건 유저는 욕설과 함께 경멸 섞인 눈으로 중년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유야 간단했다.
 작업장 때문에 제 작품 시세가 떨어지니까. 즉, 자신의 이득이 그만큼 감소하니까.
 이곳은 재료가 나오는 필드다.
 1시간 내내 광석을 캐면 3개의 광석을 얻을 수 있다, 운이 좋다면 4개 까지도.
 그 광석 3개를 팔면 10골드를 받을 수 있다.
 수요가 넘쳐 나니까.
 까놓고 이런 작업장 유저, 혹은 몇 안 되는 전문 직업 유저들이 아니라면 값이 2배까지 치솟을 정도로 말이다.
 어쨌든 10골드는 현금으로 10만 원이었고. 루나틱에서의 시간이 현실보다 2배 빠르다는 걸 감안하면, 이것은 시급 20만 원짜리 최고급 막노동이었다, 실제 육체엔 아무런 페널티가 없는.
 ‘······빌어먹을, 누군 안 지루한 줄 아나. 어린놈이 버르장머리도 없어.’
 졸린 눈으로 광석을 캐던 중년 남자, ‘모아이’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사실 그도 짜증이 났다.
 아니, 이게 짜증 나지 않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게임이라지만 졸려 죽을 것 같았으니까.
 ‘이게 몇 시간째냐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작업장에서 당장이라도 쫓겨날 상황이다.
 쫓겨나면?
 안 그래도 빚더민데 길바닥에 누워야 할 판이다.
 ‘그놈의 코인만 아니었어도······.’
 모아이가 다시금 멍한 눈으로 곡괭이를 들었다.
 그러던 그때······.
 “야아아아! 메미 떴다! 도망가아아아!”
 “튀세요! 빨리! 메미요, 메미!”
 사람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곡괭이를 냅다 던지고 뛰쳐나가는 사람들.
 잠이 달아났다. 모아이는 눈을 크게 뜨고 광산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대로 몸을 돌려 뛰려던 그 찰나의 순간.
 어둠 너머에서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거대한 괴물이 시야에 잡혔다.
 “이런 제기랄. 산 넘어 산이네.”
 메카 미노타우로스. 통칭 메미.
 광산에서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녀석으로, 200레벨을 상회하는 강력한 몬스터였다.
 원래 광산의 주인이었던 드워프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설정의 보스몹.
 저 녀석들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선 특별한 광석 문스톤이 필요했고, 그 문스톤이 바로 모아이가 방금까지 캐던 광석이었다.
 “크워어어어어!”
 귀를 찌르는 포효.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몸을 돌리려던 모아이는 멈칫, 바로 곁의 카트를 바라보았다.
 수북하게 담긴 문스톤.
 이걸 못 챙기면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운이 없었다.
 바로 전까지 기계적으로만 움직이던 육체는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
 털썩. 땅이 뺨을 때렸다.
 넘어졌다는 사실을 자각한 건 바로 다음 순간, 이미 그는 메카 미노타우로스와 눈이 마주친 뒤였다.
 
 
 
 
 
 
 # 1장
 
 
  * * *
 
 “그건 네 사정이고.”
 “······예?”
 모아이, 김민혁은 멍청하게 대답하곤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책상에 다리를 쫙 벌린 채 거만하게 앉아 있는 남자. 그가 무심한 얼굴로 손톱을 정리하며 다시 말했다.
 “아, 그러니까. 그건 네 사정이라니까. 아무튼 오늘 이자는 못 갚겠다는 소리 아냐?”
 “그, 그러니까요. 사장님, 한 번만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사흘 만에 메카 미노타우로스 뜬 거 아시잖아요.”
 “민혁아, 몇 번 말하게 하냐?”
 남자는 손톱깎이를 책상에 내려 두고, 손깍지를 낀 채 김민혁의 눈을 마주 보았다.
 “네 사정이라니까. 내가 알 바 아니잖아, 응?”
 “하, 하지만 사장님······.”
 남자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뒈질래?”
 “······죄송합니다.”
 움찔.
 김민혁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저 남자는 원래 이런 남자였다. 겉으로는 양복 차림의 젠틀한 이미지지만, 그 본질은 검디검은 사채업자. 애초에 통할 리 없는 이야기였다.
 남자가 다시금 손톱을 손질하며 말했다.
 “어쨌건 저녁까지 이자 만들어 놓고, 안 되면 너랑 나랑 인연은 여기까지인 거지.”
 “하, 하지만······.”
 “왜 그래? 알잖아. 돈은 어떻게든 만들게 해 준다. 안 되겠으면 오늘은 그냥 쉬고. 내일 연락 줄 테니까, 이해했지?”
 싱긋. 남자가 웃었다.
 그 표정에 김민혁은 직감했다, 진짜 좆 됐다는 사실을.
 
  * * *
 
 김민혁은 운이 없었다.
 김민혁 자신도 일찌감치 인지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힘들게 살아왔는데, 어떻게 한 번쯤은 하늘이 도와주지 않을까.
 그렇게 막연한 생각을 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 탓에, 캐릭터의 레벨을 올리지도 인맥을 만들어 두지도 않았다. 작업할 때의 게임기 사용은 무료였지만 그 외 시간엔 상당한 요금을 지불해야만 했으니까.
 꽤나 부담스러운 돈.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내려면 낼 수 있는 돈이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빨리 이 작업장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마음에······ 모조리 빚을 갚는 데 써 버렸을 뿐.
 ‘진짜 좆 같은 세상이네.’
 술이 썼다. 김민혁은 마지막 모금을 마신 소주병을 내려놓고 광안대교 난간에 몸을 기댔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 더럽게 곱네. 너~무 곱고 고와서 아니꼬울 지경이야.”
 피식.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스멀거리는 그림자처럼 과거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릴 적엔 달리 특별한 것도 없었다. 그저 가난의 연속이었을 뿐. 고달픈 기억이긴 했지만 그건 단지 그 정도에 불과했다.
 애초에 부모 없는 고아로 자라 왔기에 그게 불행한 것인지도 몰랐으니까.
 결국 스무 살, 성인이 된 김민혁은 예정된 수순처럼 일터로 뛰어들었다.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열심히 살았기에 돈은 꽤 벌었다,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딱 먹고살 만큼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거면 충분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4차 산업혁명인지 뭔지가 찾아왔다. 코인이라고 했다.
 
 -전부 돈 번다니까. 굳이 안 팔아도 돼. 그냥 넣어 두고 시간만 지나면 무조건 불어나니까······.
 
 주변의 권유와, 어떻게든 이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강한 욕구에, 김민혁은 코인판에 뛰어들었다.
 
 -코리아 프리미엄. 그 끝은 어디인가.
 -가상 화폐 연일 폭등! 투기판이 되어 버린 가상 화폐 거래소.
 -코인 투자자들의 삶 : 가즈아!-> 구조대 언제 오나요······.-> 가즈아!
 -계속된 호황에 청년 재벌들이 급등했다는······.
 
 모든 언론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코인을 언급하고 열광하고, 좌절했다. 김민혁은 열광하던 쪽이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친구의 제안은 그때 찾아왔다.
 
 -너만 알고 있어라. 다른 놈한텐 아직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으니까. 이번에 도는 카더라가 있는데······.
 
 거부감은 없었다. 친한 친구였고, 또한 꽤나 그럴듯한 설명이었으니까.
 인생을 한 방에 뒤집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대출을 받았다, 한계까지. 실패해 본 적이 없었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지, 미안하다.
 
 친구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자신도 많이 잃었다고 했다. 페이스북에 포르쉐가 올라오기 전까진 그 말을 믿었다.
 이후는 뻔한 인생이었다.
 빚. 빚. 빚.
 돈을 빌린 업자가 추천해 준 작업장에서 일하고, 먹고, 자고. 그렇게 기계처럼 살아왔으나······.
 ‘이젠 그나마도 쉽지 않겠네.’
 김민혁은 쓰게 웃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잘못이라면 잘못이지만, 그 대가는 너무 가혹했다.
 “알래스카 대게잡이라니, 이렇게 해외로 나갈 생각은 없었는데.”
 사채업자는 일자리를 알선해 준다고 했다. 알래스카에서 대게 좀 잡다가 돌아오면, 빚은 눈 녹듯이 없어져 있을 거라고.
 당연히 일주일에 1명씩 죽어 나간다는 사실이나, 수수료 명목으로 절반 가까이 떼어 간다는 이야기는 뒤늦게 들었다.
 석 달 동안 목숨 걸고 받는 돈이 2천만 원.
 그야말로 벼랑 끝까지 밀려난 인간들이 향하는 곳.
 새우잡이네, 원양어선이네, 듣긴 했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은 그보다도 몇 배는 삭막했다.
 “도망칠까.”
 말하기 무섭게 김민혁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부산 전역은 그 업자 놈이 꽉 틀어쥐고 있었고, 어쩌면 지금도 지켜보고 있을지 몰랐으니까.
 까드득.
 김민혁은 힘없이 소주 뚜껑을 열었다. 2병째였다. 한 모금 마시고,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설마 뒈지기야 하겠어.”
 힘없는 물음. 잠시 멍하니 있다가 김민혁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우라질, 뒈지기야 하겠어? 지금까지 운이 없었는데, 설마 거기서 죽기야 하겠냐고!”
 콱! 눈물이 차올랐다. 살고 싶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다. 그렇게 다짐한 순간.
 빠아아아아앙-!
 귀청을 찌르는 경적음. 무슨 일이지,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생각이 멈추었다.
 순간 김민혁의 눈에 비친 건,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돌진해 오는 거대한 트럭이었다.
 ‘뭐 이딴······.’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거센 충격. 의식이 끊어진 채 김민혁은 대교 아래로 힘없이 떨어졌다.
 
  * * *
 
 팟.
 김민혁은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아니, 익숙하다곤 해도 낯선 느낌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것임에는 틀림없는데, 머릿속 어딘가에 파묻혀 있는 기억 속에서나 봤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
 김민혁은 몸을 일으켰다. 정신이 멍했다.
 ‘알래스카. 대게. 빚. 코인. 작업장······.’
 방금 전까지의 기억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갔다.
 멍하니 시선을 돌렸다.
 2평이나 될까. 좁디좁은 방. 분명 기억 속에 있는 공간이었다.
 과거, 사회로 처음 나왔을 때 지내던 고시원이었다.
 “무슨······ 꿈 같은 건가?”
 그때 곁에 놓인 몇 세대 전의 스마트폰이 보였다. 아마 지금 이런 걸 들고 다닌다면 신기하게 바라볼 정도로.
 스윽. 김민혁은 이상야릇한 감각 속에서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화면이 켜졌다.
 구식 감성의 배경화면에 떠 있는 날짜.
 그건 정확히 20년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8시간이 지났다.
 낡은 고시원 방.
 20여 년 전 쓰던 구형 스마트폰.
 통장에 남아 있는 300만 원 잔고와 결정적으로.
 “라이버 코인이 1개에 600원이라니.”
 가상 화폐 거래소에 떠오른 코인의 가격까지.
 꿈은 절대 아니었다. 이렇게 실감 나는 꿈은 있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8시간 만에 김민혁은 결론을 내렸다.
 ‘과거로 돌아왔다.’
 믿을 수 없지만 그랬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유는 몰라. 중요하지도 않고.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이 상황이 기회라는 것.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기회.
 미래에 마주하게 될 구더기 같은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마침내 찾아온 것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불행했던 게 이 순간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르지.’
 문득 떠오른 잡생각을 밀어냈다.
 머리를 차갑게 식혀야 한다.
 ‘내가 지금 당장 해야 할 것.’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김민혁이 취할 수 있는 이득은 엄청났다.
 복권. 주식. 코인.
 결과가 정해지지 않은, 그러나 김민혁 자신은 그 결과를 알 수 있는 것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 정보를 선점하고 있다는 메리트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코인을 사자.’
 끄덕.
 김민혁은 결정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자신이 가장 확실하게 아는 분야. 거기에 세상 그 무엇보다 압도적인 가치 상승을 보인 자산이니까.
 ‘그렇다면······.’
 스륵.
 통장을 열었다.
 320만 원. 이게 현재 가진 현금의 전부.
 딸깍.
 이번엔 가상 화폐 거래소를 확인했다.
 아직 시장이 활성화되지 않았기에 홈페이지 인터페이스가 깔끔하진 않았지만, 중요한 건 구매해 둔 코인.
 ‘라이버 코인 3천 개.’
 대략 180만 원어치의 코인을 구매해 둔 게 보였다.
 이때만 하더라도 단타. 그러니까 조금의 시세 차익만 먹고 빠지던 때였다. 시장 자체도 작고,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지도 않았으니까.
 ‘이게 5년만 지나면······.’
 1개당 600원 하던 코인. 그게 5년 뒤엔 600만 원의 가치를 지닌다, 시장이 커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물론 과거엔 고작 몇백 원 상승한 것에 희희낙락하던 자신이 있었지만.
 ‘이제는 다르지, 알거든.’
 일단 구매해 둔 라이버 코인은 그대로 넣어 두고, 어느 정도 급등했을 때 팔아야 한다.
 과세 정책, 그리고 관련 법안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며 라이버 코인은 대폭락을 맞이할 테니까.
 김민혁의 진짜 관심사는 그게 아니었다.
 바트 코인.
 원조 코인이라 불리며, 코인계의 달러화 아니, 사실 가상의 황금이 되어 버린 코인이다.
 현재도 라이버 코인의 200배에 달하는 12만 원의 가치를 지닌 코인. 심지어 미래엔 12만 원은커녕 수십억에 달하는 상승 폭을 보일 녀석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지.’
 지금부터 대략 6년 후.
 라이버 코인, 다크리움 코인 등 유망했던 코인들이 일제히 대폭락해 버리는 시기가 온다.
 바로 김민혁 자신의 인생이 박살 났던 그때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다른 코인들이 폭락한 순간, 바트코인은 전고점을 돌파하며 끝없이 상승하기 시작한다.
 ‘그때가 기회야.’
 미래의 자신은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심지어 그에 대한 보상도 없었다.
 이미 고생해 본 경험이 있으니까, 욕심내지 않고 다시 열심히 노력한다면 그럭저럭 먹고살는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기회가 찾아왔다.
 신의 선물인지 혹은 악마의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인생역전.
 아니, 그 이상. 꿈도 꾸지 못할 만큼 화려한 인생을 살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트 코인에 투자해야만 한다.
 ‘4년? 아니, 5년이구나.’
 바로 그때다.
 5억, 아니, 최소한 20억은 있어야 한다.
 그럼 그때부터 일 같은 건 안 해도 된다.
 돈이라는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종잣돈.
 투자금이란 크면 클수록 이익이 말도 안 되게 늘어나니까.
 즉, 시드 머니가 필요하다.
 ‘어떻게?’
 복권 번호라도 알고 있으면 또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온 김민혁이었다.
 어쨌거나 그에게는 5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뭐가 됐든 돈을 벌어야 한다.
 ‘대출만큼은 절대 안 돼.’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신약 임상실험, 가상현실 게임 작업장, 마지막에는 알래스카 대게잡이까지.
 밑바닥의 나락이 얼마나 사람을 지독하게 괴롭히는지는 이미 뼈저리게 느꼈다.
 ‘어디까지나 건전하게.’
 속으로 굳게 다짐하는 김민혁이었다.
 게다가 문제는 하나가 더 있다.
 코인 열풍이 세지자 정부에서 급속히 제정한 법안 하나.
 이른바 ‘코인 거래 관련법’은 한창 타오르던 투자자들에게 찬물을 부었다.
 코인 순이익의 절반에 가까운 세금을 부과한다거나.
 입출금 액수를 엄격히 제한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많은 말들이 있었고, 실제 5년 후 정권이 바뀌자마자 법안은 대폭 개정된다.
 그때 홀로 날개 돋치듯 뛰어오르는 게 바트 코인의 가격이다.
 전 세계적으로 블록체인 기술이 발전했는데, 그중 가장 신뢰도가 높은 게 바트 코인이었기 때문이다.
 일단 바트 코인을 산다는 건 정했다.
 그럼 자금을 어디서 모을 것인가?
 김민혁은 고민해 보았다. 그러다 이내 눈을 부릅떴다.
 “루나틱.”
 손뼉을 친 김민혁이 시계를 보았다.
 루나틱은 1년 전에 나온 게임이다.
 가상현실 게임의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완벽히 구현화해서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이끌고 있는 통칭 갓 게임.
 하지만 지금은 아직 가상현실 자체가 낯선 콘텐츠인 시기.
 가상현실이 일상에 녹아든 미래와 달리, 지금의 게임기기는 한 대에 수백만 원을 호가했다.
 몇 달간 허리띠를 졸라매도 살 수 없는 금액.
 그러나······.
 김민혁은 스마트폰을 켰다.
 그리고 아이템 현금 거래 사이트를 검색해 들어갔다.
 국내에서 가장 큰 아이템 현거래 사이트, 게임마켓.
 대한민국은 물론 외국의 마이너한 게임까지 개별 항목이 있었다.
 항목을 내리던 손가락이 한곳에서 멈춘다.
 크게 빛나는 ‘N’ 자의 옆.
 ‘있다, 루나틱.’
 3년.
 단 2년 사이에 루나틱의 주가는 정점을 찍었다.
 게임 아이템 시장이 양지에 나온 것도, 루나틱 때문이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자신이 죽기 전까지만 해도 그 세는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즉, 하기만 하면 무조건 돈이 되는 게임이라는 뜻이다.
 ‘이거다. 이걸로 자본금을 모으자.’
 김민혁은 확신에 찬 어조로 중얼거렸다.
 6년.
 사채업자가 시킨 일 중, 루나틱 작업장의 오토로 일한 시간이다.
 누구보다 루나틱을 잘한다는 자신감?
 그런 건 없다.
 대신, 누구보다도 성실히 루나틱에 몰두할 자신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남들에게는 없고 김민혁에게는 있는 또 다른 것.
 20년 후 미래의 대략적인 정보가 있다.
 현실이 아닌, 게임 루나틱의 미래에 대한 정보가.
 달칵. 달칵.
 김민혁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드 위키에 들어가 보았다.
 온갖 잡다한 매체에 대한 정보를 기록해 두는 우드 위키.
 ‘루나틱’ 세 글자를 치자 여러 항목이 나왔다.
 “1. 개요, 2. 콘텐츠······.”
 역시나 제대로 된 항목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미래의 우드 위키는 달랐다.
 각종 패치 정보는 물론 유저들이 찾아낸 온갖 꿀팁들이 다 적혀 있었다.
 물론 적힐 때는 이미 단물 다 빠진 구닥다리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그 정보는 김민혁의 머릿속에 잘 쌓여 있었다.
 작업장에서 수익을 내기 위해선 그런 건 놓치지 말아야 했다.
 트럭에 치이기 전에는 쓸모없던 정보.
 하지만 지금은?
 형체 없는 황금이나 다름없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김민혁은 일단 게임기부터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향한 곳은 집 근처 백화점이었다.
 화신 백화점, 버츄얼 게임기 매장.
 코너 안으로 들어온 김민혁이 지나가던 직원을 불러 세웠다.
 “저기요.”
 직원이 돌아보았다.
 “예, 뭐, 찾으시는 거 있으십니까?”
 김민혁을 쳐다본 직원의 눈매가 짧은 순간 일그러졌다.
 다 늘어난 추리닝, 떡진 머리, 아무리 봐도 백화점 같은 곳에서 쇼핑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쯧, 또 간만 보려는 사람인가.’
 이런 사람들이 하루만 해도 몇십 명이나 찾아온다. 사지도 않을 거면서 이런 질문, 저런 질문 해 대면서 귀찮게 군다. 흔히 말하는 ‘간잽이’인 것이다.
 그렇다고 쫓아낼 수도 없고, 진상이나 다름없는 손님들이다.
 직원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금세 표정을 누그러트렸다.
 “루나틱 게임기 좀 보려고 왔는데요.”
 김민혁이 말하자 직원의 표정이 금세 누그러졌다. 어찌 되었건 그는 프로였다.
 “이쪽입니다.”
 직원은 김민혁을 매장 중앙 코너로 안내했다. 어떤 통로를 가도 이곳을 교차해야만 하니까, 가장 사람들 눈길을 끄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이거 어때?”
 “아니야. 그보다는 이게······.”
 유선형 기계 앞에서 두 남녀가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도 수많은 기종이 저마다의 모습을 뽐냈다.
 VR 시스템 장치가 이미 대중화된 상태였다.
 “이 모델이 가장 최신형입니다.”
 직원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흰색 기계 앞이었다.
 사람이 들어갈 만한 유선형 몸체, 매끈하게 코팅된 기계 표면은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독일제로 뇌파 송수신 속도가 훨씬 개선되어 있고, 사용자의 신체에 가해지는 부담이 최소화된 모델입니다.”
 직원의 설명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나 김민혁의 시선은 한곳을 향해 있었다.
 
 -12,000,000\
 
 이 게임기의 가격이다.
 김민혁의 한 달 생활비는 대략 120만 원.
 식비, 전기비, 방세 등을 모두 모아 더 이상 깎을 수 없는 최소선이었다.
 ‘지금은 저런 고급품을 살 수 없어.’
 생각을 마친 김민혁이 물었다,
 “여기 제일 싼 기기는 얼마죠?”
 “200만 원 선입니다.”
 점원의 대답에 김민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20년 전의 과거인 지금이라 해도 분명히 최저가 모델이 있었다.
 100만 원쯤 했던가?
 하지만 이 백화점은 그런 저가형 모델은 들여놓지 않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예, 예? 손님? 손님?”
 김민혁은 짧은 대답과 함께 밖으로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 그를 부르던 직원은 한숨과 함께 투덜댔다.
 “그럼 그렇지, 뭐.”
 어차피 별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며 직원은 다시 매장 안내 코너로 향했다.
 
  * * *
 
 “여기 설치할게요.”
 “네. 서랍 치우고요.”
 덜커덩.
 군복 바지와 메리야스만 입은 남자들이 원룸 안팎을 연신 들락거렸다.
 한번 움직일 때마다 집 한구석에 검정색 장치가 윤곽을 갖춰 가는 게 보였다.
 결국 김민혁은 하는 수 없이 중고 거래로 VR 시스템 장치를 샀다.
 가격은 100만 원.
 원래 150만 원이었던 것을 흥정을 통해 50만 원이나 깎아 낸 것이다.
 “그럼 수고하세요.”
 설치를 마친 배달부들이 떠나자, 김민혁은 슬슬 장비를 살폈다.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 이를 갈았다.
 “사기꾼 새끼!”
 역시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적응 감도의 최적화라던가, 접속 후 싱크로율 조절 장치 등.
 없어도 못 돌리는 건 아니지만 사기를 당한 것이다.
 “개새끼, 설마 이딴 식으로 통수를 치네.”
 중고 거래 사이트에 들어간 김민혁은 상대방의 별점을 최대로 내려놓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했다.
 법적인 문제로 끌고 가기에는 당장 가진 돈이 얼마 없었다. 민사로 처리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후우······.”
 화는 나지만 당장은 이런 거라도 해야 했다. 더 저렴한 기기가 없었으니까.
 왜냐하면······.
 삐비빅!
 문자를 받은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보나 마나 내용은 방세 독촉일 것이다.
 “옛날 생각나네.”
 김민혁은 장비를 천천히 뜯어 이곳저곳을 손봤다.
 전생에선 나름 작업실에서 굴러 보았던 몸.
 뒷세계 기술자들이 머신을 어떻게 다루는지 정도는 어깨너머로 숱하게 훑어봤었다.
 몇 번은 직접 기기를 수리하기도 했었다.
 그래야 돈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문가 수준은 아니지만 이런 구닥다리(?) 정도 기기는 개조할 수 있었다.
 높은 곳에 떠 있던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김민혁은 마침내 수리를 끝냈다.
 “드디어······.”
 감도 오버클럭.
 실시간 동기 장치 on.
 그리고 강제 종료 시 알림 장치까지.
 이 정도면 얼추 성능을 2배는 끌어 올렸다고 봐야 했다.
 ‘이거, 이 짓거리만 하고 다녀도 돈 꽤 버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서자, 어깨너머로 배운 보잘것없는 재주로 나대느니, 확실한 길로 가는 게 낫지.’
 그리 생각한 김민혁은 시트에 누웠다.
 이제 시작이다.
 김민혁은 고글을 썼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삐익.
 화면이 점멸됐다.
 
  * * *
 
 하얀 세상 속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캐릭터의 이름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웨인.”
 김민혁이 답했다.
 닉네임은 배트맨의 주인공, 브루스 웨인의 이름을 따왔다.
 그처럼 넘치는 부를 갖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스킵.”
 
 -시나리오를 스킵합니다.
 
 “예스.”
 시작 전 간단한 세계관 설명 등이 있었으나, 김민혁은 모두 스킵해 버렸다.
 이미 모두 알고 있으니까, 그뿐만 아니라 자신은 즐기러 온 게 아니었다.
 돈을 벌기 위해 온 것이다.
 
 -외형을 설정합니까?
 
 “아니.”
 그래서 외형 커스터마이징도 일부러 하지 않았다.
 루나틱에서 캐릭터의 겉모습을 바꾸는 것은 현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단 기본 조작 튜토리얼만큼은 확실히 수료했다.
 영구 스텟.
 게임 내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그것을 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주 잘했네! 자네는 장차 훌륭한 영웅이 되겠구먼.”
 튜토리얼 담당 NPC의 격려.
 그러나 웨인에게는 백 마디 칭찬보다 나레이션이 알려 주는 알림 하나가 더 중요했다.
 
 -영구 스텟 5를 획득했습니다.
 
 됐다.
 루나틱이 갓 오픈한 지금.
 소위 ‘꿀팁’을 알지 못하는 이상, 아무리 잘해 봤자 스텟 3이 한계였다.
 즉 지금 웨인은 남들이 얻지 못한 2의 스텟을 이득 본 셈이었다.
 튜토리얼이 끝나자 눈앞이 다시 어두워졌다.
 
 -초보자 마을을······.
 
 “랜덤.”
 
 -루나틱 온라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새로운 세계를 직접 체험하십시오.
 
 파앗!
 안내음이 끝나자마자 눈앞이 밝아졌다.
 모든 감각이 실제와 똑같은 건 여전했다.
 “후우.”
 웨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살짝 놀라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이 적긴 하네.”
 
 -스위티 마을
 
 기본적인 시설과 NPC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게임을 시작하는 장소이니만큼 밝고 화사한 녹음과 숲이 깔려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마을에 바로 들어설 수는 없다.
 그 전에 우선 마을 외곽의 목장에서 다음 단계의 튜토리얼을 클리어해야 했다.
 
 -튜토리얼을 완수해 주세요.
 
 간단한 전투의 방식부터, 채집, 제조, 승마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더 거친 후에야 비로소 한 사람의 유저로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로라의 목장으로 향해 주세요.
 
 눈앞에 아른거리는 가상 화살표를 따라가니 목장에는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근처에는 튜토리얼을 수행 중인 유저들이 가뭄에 콩 나듯 보였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게임 아니랄까 봐, 꽤나 한산한 풍경이었다.
 ‘뭐, 전체 유저 수는 아직도 꽤 있는 편이겠지만.’
 그래도 이건 지금만 누릴 수 있는 여유였다.
 당장 유저 수가 적은 건 기기값 때문이 대부분이다. 조금만 지나도 기기값이 떨어지게 된다. 반년, 아니, 3개월만 지나도 이 목장에는 초보자로 미어터질 것이었다.
 ‘내가 일찍 시작하긴 했군.’
 웨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정면으로 향했다.
 나무 책상 하나, 그 뒤로 중세풍 차림의 소녀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유저님? 저는 튜토리얼 담당 NPC 중 1명인 로라예요. 여러분께서 루나틱에 더욱 빨리 적응하실 수 있도록 도움을 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에요.”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분씩 저에게 와 주세요.”
 새로 접속한 유저들이 1명씩 로라에게 다가갔다.
 웨인도 대열에 합류했다.
 멀리서 보자 자그마한 카드와 펜이 보였다.
 ‘옛날에는 이렇게 했다고 위키에서 본 적은 있지만.’
 이런 건 웨인, 과거의 김민혁도 처음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미래에는 이곳에도 초보자가 미어터질 만큼 많아진다.
 그때부터는 가상의 카드가 눈앞에 나타나는 방식이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자 곧 웨인의 차례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유저님. 그럼 이 카드를 작성해 주세요.”
 로라가 미소와 함께 카드와 펜을 내밀었다.
 상단에는 왕국 시민 등록증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내용은 똑같군.’
 루나틱에는 수많은 국가가 있다.
 현재 웨인이 소환된 스위티 마을은 ‘바츠 왕국’의 산하 마을이었다.
 즉, 바츠 왕국 내의 콘텐츠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왕국 시민이 되는 게 필수였다.
 “이건 왜 작성하는 거예요?”
 그때, 한 유저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게임 내에서 시민 등록증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유저님, 튜토리얼 안내 영상을 제대로 안 보셨군요.”
 “아, 원래 그런 건 바로 끄는 성미라서요.”
 로라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루나틱 온라인의 NPC들은, 이곳에서만큼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진짜 사람들과 동일하기 때문이에요. 유저 여러분은 ‘모험가’라 불리며 다른 세계의 존재들로 치부되긴 하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도 저마다 경제와 문화를 누리고 있죠. 여러분의 세계에서도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수상한 사람으로 의식 되듯이, 루나틱에서도 시민 등록증이 없으면 각 나라를 왕래할 때 불편한 점이 있을 수 있답니다.”
 그녀의 성실한 대답에 유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대로 루나틱 온라인의 NPC들은 다른 게임의 AI들과는 차원이 다른 완성도를 자랑했다. 진행 편의상 극히 일부의 NPC는 로라처럼 이곳이 게임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말 그대로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 때문에 형식상으로 이런 서류가 필요한 것이다.
 ‘흐음.’
 웨인은 서류를 내려다보다, 이내 그걸 다시 로라에게 내밀었다.
 “에? 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로라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웨인은 조용히 말했다.
 “무소속으로 하겠습니다.”
 “예?”
 이런 일은 처음인지 로라의 모습에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유저님의 의향은 존중해 드립니다만, 특정 국가에 소속되지 않으면 불공평한 대우를 받으실 수도 있어요.”
 이건 웨인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느 왕국의 시민이 되면, 그 왕국의 NPC와 시설에서 갖가지 혜택을 받게 된다.
 같은 국가에 소속된 NPC와의 초기 호감도 부여.
 각종 통행세, 관문세 등의 할인, 혹은 면제.
 해당 왕국의 대장간이나 시설 사용에서의 할인.
 모두 초반뿐 아니라 중, 후반까지도 유용하게 쓰이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권리가 있으면 의무도 있는 법.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국가에 소속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충분히 생각해 보고 결정한 일입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알겠습니다.”
 로라는 한숨과 함께 빈 카드에 무언가를 적고 사인했다.
 바츠 왕국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시민증은 항상 지급된다.
 “뭐야, 저 사람?”
 “원래 저런 사람 있어, 남들하고 다르게 가면 멋있는 줄 아는 사람.”
 “아, 뭔지 알겠다.”
 주변 유저들이 서로 쑥덕거렸다. 키득거리며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이미 정한 바였으니까.
 동시에 2개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바츠 왕국과의 호감도가 +10에서 0으로 감소했습니다.
 -바츠 왕국 소속 NPC 로라와의 호감도가 +10에서 0으로 감소했습니다.
 
 각오했던 일. 조금도 상관없었다.
 수많은 유저들의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도와 시행착오 끝에 축적된 후대의 꿀팁들.
 그것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생각해 보면, 초반에 입을 손실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로라는 튜토리얼 유저들을 목장 한편의 풀밭으로 데려갔다.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풀밭 안에는 흰 덩어리들이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어머, 귀여워.”
 “만져 보고 싶다.”
 바로 토끼였다.
 울타리에 기댄 채 토끼를 감상하는 유저들을 향해 로라가 박수를 서너 번 쳤다.
 “자, 그럼 이제 진짜 튜토리얼을 시작해 볼게요. 여러분, 혹시 몬스터와 퀘스트에 대해서 알고 계시나요?”
 유저들이 머뭇거렸다.
 개중엔 피식 웃거나 혀를 차는 사람들도 보였다.
 각종 RPG 게임으로 단련된 대한민국의 남녀노소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하지만 막상 말해 보라 하면 머뭇거리는 것도 또한 한국 사람들의 특징이다.
 모두가 서로 눈치를 보던 그때, 웨인만이 손을 번쩍 들었다.
 “네, 웨인 유저님.”
 “몬스터는 유저와 NPC에게 적대적인 생물, 혹은 그에 준하는 것.”
 “그리고요?”
 “퀘스트는 NPC, 혹은 게임 상의 의지를 가진 어떤 존재에게 받을 수 있는 의뢰, 혹은 부탁이나 명령입니다.”
 사전적인 뜻을 축약해서 말한다.
 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완벽하시네요, 웨인 유저님! 잘 대답하셨어요.”
 
 -튜토리얼 확장 퀘스트를 달성하셨습니다. 보너스 능력치가 1 상승합니다.
 
 웨인에게만 떠오른 알림창.
 조작 튜토리얼 외에도 이런 곳에서 틈틈이 능력치를 얻어 둘 수 있다.
 숨겨진 요소였다, 추후에는 널리 알려지게 되지만.
 그 때문에 미래에서는 멀리서 목장과 같은 튜토리얼 장소를 보면 ‘손’만 둥둥 보인다는 괴담이 있을 지경이었다.
 상태창을 확인한 웨인이 슬쩍 웃었다.
 ‘이 다음은······ 토끼 잡이인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라가 양손 가득 보따리를 들고 왔다.
 “자, 이제 제가 유저분들에게 퀘스트를 하나 드릴게요. 아, 아까처럼 지루한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가 보따리를 뒤집자, 나무칼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럼 여러분, 토끼 잡이를 시작해 볼까요?”
 “축하드려요. 훌륭하게 토끼 5마리를 모두 잡으셨군요! 이제 1명의 훌륭한 모험가가 되셨습니다. 이 장비들을 받으시고 루나틱의 세계를 즐겨 보세요!”
 “감사합니다.”
 “가시는 길에 축복이 있으시길.”
 튜토리얼은 간단했다. 토끼 5마리를 모두 잡으면 끝났으니까.
 막 걸어 나가던 두 사람이 풀밭 구석으로 시선을 향했다.
 “야, 근데 저 사람은 대체 뭐냐?”
 “몰라, 아까부터 토끼만 잡고 있던데.”
 “아무리 잡아 봤자 경험치도 안 줄 건데, 텍스트도 제대로 안 읽나? 쯧쯧.”
 험담이 대놓고 들려왔지만, 웨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같이 들어온 이들은 목장 밖으로 나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있으니까.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닌데 말이야.’
 그리 생각하며 토끼들을 내려다본다.
 순박한 눈동자로 올려다보는 털복숭이들.
 귀엽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칼을 치켜들었다.
 빡!
 대가리가 터져 나가는 토끼.
 벌써 웨인이 때려잡은 토끼의 수만 40마리가 넘어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슬슬 웨인을 피했다.
 하나같이 별 미친놈을 다 본다는 눈빛.
 그러나 신경 쓰지 않는다.
 ‘아직 부족해.’
 웨인은 피 묻은 나무칼을 들었다.
 그리고 가까이 있는 토끼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슈욱, 빡! 빡! 빡!
 사람들의 사이클이 두세 번 더 돌았을 무렵.
 ‘98, 99······ 그리고 이걸로 100마리째.’
 마침내 목표량을 채운 웨인이 로라에게 향했다.
 “보상.”
 “에, 예?”
 로라는 조금 겁먹은 듯 보였다.
 웨인이 재차 손을 내밀었다.
 “보상 달라고요.”
 “아, 네.”
 멍청하게 눈을 끔벅이던 로라가 보상을 꺼내려던 때였다.
 갸웃.
 “어?”
 이럴 리 없다는 듯, 놀란 표정으로 가방 안과 웨인을 번갈아 본다.
 “뭐 해요? 보상 안 주시고?”
 웨인의 독촉에 로라가 답했다.
 “저어, 그······ 죄송합니다. 잠시 확인 절차를 거치느라 늦었어요. 이런 건 처음이라······.”
 “뭐길래 그래요?”
 “그, 여행자님께서는······ 숨겨진 과업을 훌륭히 완수해 내셨습니다.”
 
 -새로운 업적 달성!
 -칭호 <토끼 살해자>를 획득했습니다!
 -스테이터스창에서 칭호 <토끼 살해자>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건 여행자님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아이템이에요. 숨겨진 과업을 완수해 낸 보상입니다.”
 로라는 다른 이들이 받은 것과는 다른 장비를 건넸다.
 
 -<향상된 초보자 세트>를 획득했습니다.
 
 “세트는 인벤토리에서 사용하시면 장비가 지급돼요. 그······ 여행자님이 가시는 길에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NPC 로라와의 호감도가 10 하락합니다.
 -NPC 로라가 당신을 혐오하기 시작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가 살짝 떨린다.
 그야말로 마지못해 하는 인사인 것 같다.
 웨인은 신경 쓰지 않고 목장을 나섰다.
 어차피 이곳을 빠져나가면 다시는 보지 않을 NPC다.
 ‘과거의 기억대로다.’
 조금 전, 웨인이 얻은 보상은 버그가 아니었다.
 유저가 게임 내에서 실제로 모험을 하다가 보물을 얻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숨겨 놓은 ‘업적’ 중 하나였다. 흔히 ‘히든 피스’라고 불리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그야말로 한정적인 칭호거든.’
 이 ‘토끼 살해자’ 칭호에는 재밌는 요소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이 업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딱, 지금, 초창기를 막 벗어나려 하는 지금밖에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임이 커지고, 이용자 수가 많아질 무렵, 유저들의 불만이 폭주한다.
 
 -토끼를 의도적으로 죽여야 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업적 얻으려고 다들 나가지 않아 튜토리얼 퀘스트를 완료할 수가 없는데, 이것 때문에 게임을 시작할 수가 없다!
 
 칭호를 얻기 위해 제대로 시작도 못 하고 튜토리얼 지역에서 죽치게 되는 유저부터.
 
 -나는 그 업적 얻지 못했다. 남들은 다 얻고 다니는데, 왜 유저를 차별하냐? 이게 제작사가 느끼는 ‘재미’인가?
 -히든 피스 요소 자체는 좋다. 하지만 이벤트를 넉넉하게 푸는 것도 아니고, 시작 선상에서부터 이렇게 차별을 줘 버리면 다른 유저들이 느낄 박탈감은? 전부 캡슐 사고, 월 정액 내면서 게임하는데 왜 처음부터 차별을 하는가?
 
 심각한 문제라는 걸 인지한 게임사는 핫 픽스를 통해 ‘토끼 살해자’ 히든 피스를 삭제하게 된다.
 물론 ‘누구나 알고 있는 히든 피스는 히든 피스가 아니다.’라는 변명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유저의 불만 때문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해당 시점 이후로 널리 퍼지게 된 히든 피스는 점차 삭제되고 있는 추세였다. 20년 후의 미래에서 이 칭호를 가진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니까.
 ‘하지만 아직은 게임 초창기. 미래에 삭제될 히든 피스들도 널려 있거든.’
 웨인은 그리 생각하며 씨익 웃었다.
 “인벤토리.”
 
 <향상된 초보자 세트>
 -사용자가 원하는 형태로 변환 가능하다.
 
 <향상된 초보자용 토끼 가죽 인벤토리>
 
 여기서부터 이미 차이점이 드러난다. 일반적인 초보자 세트보다 향상된 물건들.
 ‘토끼 살해자 같은 유명한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면, 나머지도 거저먹기지.’
 향상된 초보자용 장비들을 착용하던 김민혁이 눈을 빛냈다.
 
 <토끼 살해자>
 -등급 : 레어
 -분류 : 칭호
 -대표 옵션 : 토끼에게 +10% 추가 데미지
 -일반 옵션 : 토끼에게서 받는 데미지 -10%
 
 레어 등급의 칭호.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향상된 초보자의 셔츠>
 -등급 : 매직.
 -분류 : 상의
 -내구도 : 30/30
 -제한 : Lv.20 이상은 착용할 수 없다.
 -효과 : 방어력 +3
 -기타 : 특별한 조건을 만족한 탐험심 있는 모험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선물이다.
 
 <향상된 초보자의 바지>
 -등급 : 매직.
 -분류 : 상의
 -내구도 : 25/25
 -제한 : Lv.20 이상은 착용할 수 없다.
 -효과 : 방어력 +3
 -기타 : 특별한 조건을 만족한 탐험심 있는 모험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선물이다.
 
 총 6개의 장비.
 모두 비슷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역시나······.’
 전부 다 매직 등급.
 모든 초보자 아이템이 노멀 등급 중 최하위라는 걸 생각해 볼 때, 이건 사실상 치트나 다를 바 없었다.
 거기다 ‘토끼 살해자’ 칭호까지 있으니 시작부터 금수저를 물고 진행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띠링!
 
 지급된 아이템들을 착용하자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알림창이 떴다.
 
 -세트 아이템을 착용하셨습니다.
 -세트 효과 <시작부터 두 걸음>이 발동합니다.
 -<시작부터 두 걸음>의 효과로 올 스텟이 +2만큼 상승합니다.
 
 초보자용 세트 아이템의 효과는 올 스텟 +1이 끝.
 사실상 세트 효과가 무엇인지 알려 주는 용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대부분은 10레벨 전에 일반적인 아이템으로 장비를 갈아 끼운다.
 하지만 ‘향상된 초보자 세트’는 다르다.
 각 장비마다 붙어 있는 우월한 방어력.
 거기다 모든 장비를 착용했을 때의 세트 효과까지 더하면 사실상 동급의 어떤 아이템도 따라갈 수 없는 성능을 갖췄다.
 미래의 루나틱 온라인에서도 그 평가는 여전했다.
 추후 레벨 20 이상은 착용할 수 없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꽤나 고가에 거래되는 것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김민혁은 되뇌었다.
 ‘아직 부족해.’
 미래의 루나틱은 모두가 인정하는 갓 겜이었지만, 서비스 초기에는 꽤나 엉성하고 틈이 많았다.
 모두가 인정하는 갓 겜으로 거듭나기까지는 수많은 패치와 업데이트가 이어져 왔던 것이다.
 중요한 건 그 패치와 업데이트가 이뤄지기 전에 존재하는 틈.
 이것을 이용해 모두가 성장하기 전 최대한 속도를 내서 성장 차이를 벌려 놓아야 했다.
 진짜배기 천재들이 재능을 발휘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를 만들어야 한다.
 다행히도 그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그 어떤 천재들보다 낫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6년 동안 몸에 밴 작업장 경험에 20년 전의 팔팔한 몸.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루나틱이 걸어온 수많은 패치 목록.
 이것이야말로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의 레시피였다.
 
 
 
 
 # 2장
 
 
 
 
 
 
 
 
 
 
 <스위티 마을>
 
 목장 밖으로 나오자, 머리 위로 지명을 나타내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운이 좋군.’
 루나틱 온라인 내에는 초보자 마을이 수십 개나 존재한다. 개중에서도 스위티 마을은 수도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곳이었다.
 왕국 내 경제의 중심지인 수도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쓸데없이 움직일 필요가 없어진다. 그것만으로도 운이 좋다고 생각할 이유는 충분했다.
 ‘시작은 좋은 편이지만, 지금부터가 진짜 게임이지.’
 웨인은 그리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 중앙에는 이미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그와 같은 초보자들이지만, 그렇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도 보였다.
 “야! 김수현!”
 “왜 이렇게 늦게 와?”
 목장 쪽.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몇몇 유저가 신규 유저들을 반겼다. 친구, 연인, 지인인 듯한 사람들이 보였다.
 그사이에는 또 다른 부류도 있었다.
 “저희 길드 보러 오세요!”
 “오래 같이할 사람 구합니다!”
 웨인은 혼잣말을 했다.
 “벌써부터 북새통이군.”
 저 사람들은 다름 아닌 호객꾼이었다.
 “지금 저희 길드에 오시면 ‘하급 힐링 포션’ 5개에, 매직급 무기를 클래스에 맞게 드려요!”
 “어쩔래? 포션이랑 무기 준다는데.”
 “괜찮은데? 가자.”
 루나틱 온라인은 아직 서비스한 지 얼마 안 된 게임이다. 이제 막 길드가 태동하는 시기.
 각 길드들은 어떻게든 인원을 충당하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었다. 사실, 고레벨 유저를 꼬드기는 건 힘든 일이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자들이라도 데려오려는 얄팍한 생각이긴 했지만 말이다.
 ‘인원 수가 깡패긴 하니까.’
 그리 생각하던 웨인에게도 호객꾼들이 다가왔다.
 웨인이 거절의 말을 준비하려던 때였다.
 “저기······.”
 “님아, 저 사람은 조금······.”
 “네?”
 막 말을 꺼내려던 호객꾼이 멈칫했다.
 바로 전에 영업했던 초보자 셋이 일제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게······.”
 “왜요?”
 “저 사람은 조금······ 이상한 사람 같아요. 퀘스트를 끝냈으니 더 잡을 필요도 없는 토끼를 굳이 학살까지 하고.”
 “국적도 대놓고 무소속으로 하질 않나.”
 “조금······ 사이코패스나 중2병 같아서······. 아무튼 저 사람이 오면 저흰 그냥 나갈게요.”
 “으음.”
 호객꾼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까지 반발이 나오는데 그걸 무시하기도 뭐하다.
 결국 그들은 웨인에게서 거리를 벌리고 다른 초보자들을 향해 가 버렸다.
 ‘다 들려, 새끼들아.’
 웨인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들을 무시하고 마을 안쪽으로 향했다.
 ‘그래도 아직 ‘토끼 살해자’에 대한 정보가 널리 퍼지지 않은 건 틀림없어.’
 호객꾼들의 모습, 장비로 보아 초보 티는 벗은 걸로 보인다. 이제 막 성장의 재미를 알게 된 그들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할 요소가 무엇일까?
 정보. 그중에서도 남들보다 강해지기 위해 필요한 정보다. 한데 그런 이들조차 왜 토끼를 잡는지 모른다.
 ‘그 말은, 아직 이 정보를 써먹을 여지가 있다는 거지.’
 웨인은 그리 생각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자신의 머릿속에는 수년간 축적된 루나틱 온라인의 노하우들이 그대로 들어 있지 않은가.
 저벅. 저벅.
 스위티 마을 외곽에 위치한 언덕. 거기에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건물 한 채가 우뚝 서 있었다.
 전직의 신전.
 루나틱 온라인의 유저들에게 직업을 알선해 주는 곳이다.
 추후에 게임의 인기가 더 많아지면 이 언덕을 오르는 길이 호객꾼들의 주 무대가 될 것이다.
 루나틱 온라인의 직업은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신전의 전직사가 유저에게 적합한 직업을 엄선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직업을 얻은 유저는 길드적인 차원에서 빠르게 영입하려 들었다.
 ‘뭐, 미래의 얘기지만 말이야.’
 웨인은 그리 생각하며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모험자님.”
 전직의 신전 안에는 경건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탁 트인 정중앙에 앉아 있던 미모의 여사제가 웨인에게 다가왔다.
 “직업을 정하러 왔습니다.”
 “예, 앞으로 어떤 길을 걸으실지 스스로 선택하시러 오셨군요. 좋습니다, 이리 가까이.”
 여사제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로라와 같은 종류의 NPC로서, 이 세계가 게임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슉.
 허공에 직사각형의 상태창이 나타났다.
 “웨인 님께서 선택하실 수 있는 직업은 이 정도로군요.”
 “흐음.”
 웨인은 여유롭게 화면을 바라봤다.
 총 6개의 칸. 앞의 세 칸에는 가장 기본적인 직업이 있었다.
 전사, 마법사, 도둑. 힘과 지능, 민첩을 상징하는 대표 직업들. 적성과 상관없이 누구나 고를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게 끝일까? 당연히 아니다. 나머지 세 칸에는 유저의 체질과 성향, 적성에 맞추어진 특수 직업들이 보였다.
 ‘흐음, 옛날과 똑같군.’
 망치의 문장. 덫의 문장. 일본도의 문장.
 웨인에게 주어진 추가 직업은 각각 대장장이, 트래퍼, 사무라이였다.
 ‘트래퍼는 별 볼 일 없고, 사무라이는 레어 직업이긴 한데······.’
 사무라이는 단일 DPS만 따지면 그 어떤 직업도 따라가기 힘든 강력한 근접 딜러. 또한 자신의 체력이 낮아질수록 공격력과 민첩성이 상승하는 ‘예리한 검격’을 패시브로 달고 있고, 일대다(多), 일대일(一)을 가리지 않고 활약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추후, 미래에 나오게 될 유저들의 등급 표에 의하면 당당히 A급에 위치되어 있기도 했다.
 ‘미래에는 몇 번이나 저 직업을 고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작업장에 취직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대장장이 적성’을 가진 캐릭터가 있을 것이다. 당연히, 작업장에서 일을 하려면 대장장이를 선택해야 했다.
 ‘길드 단위에서 키워 주는 게 아니면 성장하기 힘드니까.’
 사무라이는 장점에 맞는 페널티가 있다. 그런 게 없으면 밸런스 똥망 겜이란 소리를 피할 수 없을 테니까.
 무기는 오직 도검, 그것도 ‘일본도’로 분류되는 아이템만 착용할 수 있다. 방어력도 다른 근접 딜러보다 낮아, 불나방 신세를 면하기 어려운 직업이기도 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내 의지로······.’
 잠깐의 생각을 끝낸 웨인이 입을 열었다.
 “대장장이로 하지.”
 “전사라는 직업은······ 예?”
 “대장장이로 하겠다고 했다.”
 “······더 안 들어도 괜찮으시겠어요? 직업은 장차 모험자님의 여행에 있어서 절대 뗄 수 없이 중요한 것인데.”
 웨인은 대답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관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망치와 모루의 길을 걷게 되는 웨인 님을 환영합니다. 항상 꿈꿔 왔던 환상, 루나틱에서 이루시기를······.”
 
 -대장장이로 전직합니다.
 -대장장이의 성장 능력치는 힘 1, 체력 1, 손재주 2입니다.
 
 “문 밖으로 나가시면 자동으로 시작 마을로 가시게 될 겁니다. 추후 다시 볼 때까지, 달빛의 축복이 그대 몸에 깃들기를.”
 전직이 끝나자 신관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웨인은 아직 용건이 남아 있었다.
 “무, 무슨 볼일이라도 남으셨나요?”
 “더블 클래스를 하겠습니다.”
 “······예?”
 “더블 클래스를 하겠다고요.”
 더블 클래스.
 한 캐릭터로 2개 이상의 직업을 동시에 키우는 걸 말한다.
 이것에는 두 가지의 장점이 있었다.
 첫째. 두 직업의 능력을 동시에 쓰니 동 레벨의 일반 유저에 비해 훨씬 강한 힘을 낼 수 있다.
 둘째. 한 클래스를 마스터, 즉 만렙을 찍었을 시 더블 클래스는 각 직업의 최종 스킬이 합쳐진 ‘11등급’ 스킬을 얻을 수 있다.
 루나틱의 스킬은 1~10까지의 숫자로 등급이 나뉜다.
 11등급은 그 한 단계 위에 있는, 말하자면 최종적인 필살기 같은 느낌이 강했다.
 필살기답게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해, 최고위 던전의 보스 몬스터들을 공략하는 열쇠가 되곤 했다.
 특정한 직업의 11등급 스킬이 없으면 공략 자체가 불가능한 던전이 있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유저들이 더블 클래스를 하지 않는 이유는······.
 여사제가 만류했다.
 “모험가님, 한 몸에 2개의 클래스를 담는 건 굉장히 고되고 위험한 일입니다.”
 타악.
 여사제와 웨인의 사이에 비커 2개가 나타났다.
 하나에는 물, 다른 하나에는 기름이 담겨 있었다.
 “이게 하나의 클래스, 그리고 다른 것이 또 다른 하나의 클래스입니다.”
 말을 마친 여사제가 손짓하자 2개의 비커에 있던 것들이 한데 섞였다.
 예상했던 대로 두 액체는 제대로 섞이지 못했다.
 “모험자님께서 하신 말씀은 지금 보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걷는 길보다 많이 고되고 위험하지만 그에 비해 얻는 것은 적지요.”
 비유는 저렇지만 사실 그 내용은 간단하다.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
 더블 클래스로 캐릭터를 육성하면 분명 눈에 띄는 강점도 있지만, 그걸 덮을 만큼 더욱 큰 단점이 있다.
 각 클래스에서 오르는 경험치가 절반이 되고, 그것도 모자라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도 1레벨당 120퍼센트로 오르기까지 한다.
 성장시켰을 때의 능력은 무섭도록 강력하지만 그만큼 캐릭터 자체가 웬만해서는 키우기 어려운 것이다.
 “하나의 클래스를 완전히 받아들인 다음, 또 다른 클래스를 선택해도 늦지 않으니······.”
 “상관없습니다, 그대로 진행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웨인 님. 그럼 어떤 직업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포기한 여사제가 물었다.
 “문신사.”
 “예?”
 “문신사로 전직하겠습니다.”
 “······모험가님에게 적합한 클래스 중에는 그런 클래스가 없으신데요?”
 6개의 창에는 확실히 문신사라는 직업명이 없다.
 하지만 웨인은 무시하고 밀어붙였다.
 “문신사. 할 수 있을 겁니다. 찾아서 시도해 보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여사제가 검색을 시작한다.
 “아, 찾았습니다. 적성은 맞지 않습니다만······.”
 “시도해 보라니까요?”
 “음······ 아, 예.”
 눈을 감는 여사제.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게, 웨인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건 원래 불가능한 일이다.
 루나틱의 시스템 자체가 적성에 맞는 직업만을 고를 수 있도록 기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루나틱에는 치명적인 ‘버그’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간 먼 미래.
 ‘무혈사신’이라는 닉네임의 유저가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는 최상위권 중에서도 유달리 특출하게 빛났다.
 또한 소위 말하는 ‘지존급 레이드’에 항상 1순위로 껴 있는 자였다.
 최강의 소규모 레이드 길드 ‘미라클’의 일원인 것만으로도 그 능력은 증명되었다.
 당시 최상위권 유저들의 대다수는 더블 마스터.
 즉 200레벨을 훌쩍 넘긴 자들이다.
 하지만 무혈사신의 레벨은 그 와중에도 고작 100밖에 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는 2배나 차이 나는 레벨임에도 다른 최상위권 유저들을 압도했던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가 처음으로 이 버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무혈사신의 직업은 용기사, 사무라이, 인챈터, 몽크(전투 사제).
 ‘쿼드로플 마스터’라는 말도 안 되는 특성을 가진 덕에 100레벨 유저임에도 그게 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루나틱 인벤과 우드 위키에서 하고 싶은 직업을 미리 정해 놓고, 여사제가 아무리 만류해도 무시한 채 바로 4개의 직업을 갖고 시작했다고 했다.
 그만큼 고된 육성 과정을 거쳤지만 결국 버텨 냈고, 그 대가로 최강의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적성에 맞지 않아도 원한다면 모든 클래스를 고를 수 있는 치명적인 버그!
 웨인이 알고 있기로 그것은 토끼 가죽 히든 피스와 비슷한 시기에 막힌다.
 즉, 지금은 아직 이것이 통하는 시기라는 말!
 ‘여기서부터가 시작이다.’
 웨인은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그의 몸 주변에 일렁이는 빛을 본 여신관이 말했다.
 “피부에 스며드는 영혼의 예술의 길을 걷게 되신 웨인 님, 환영합니다.”
 
 -문신사로 전직합니다.
 -문신사의 성장 능력치는 손재주2, 지혜1, 매력1입니다.
 -더블 클래스!
 -더블 클래스 보정을 받습니다.
 -웨인 님의 성장 능력치는 손재주 1, 지혜 1, 매력 1, 체력 1입니다.
 -대장장이 클래스에서 받는 경험치가 50%가 됩니다.
 -문신사 클래스에서 받는 경험치가 50%가 됩니다.
 -레벨 업에 필요한 총 경험치량이 120%로 증가합니다.
 
 굉장한 페널티.
 전투 직업만 3개, 보조 직업 1개의 무혈사신과는 달리, 서브 직업만 2개를 골랐기에 고달픈 겜생이 될 것 같다.
 ‘그래도 상관없다. 문신사는 반드시 필요한 직업이니까.’
 회심의 미소를 짓는 웨인.
 그가 신전 밖으로 돌아나가려 할 때였다.
 “아, 모험가님, 신전 밖으로 나갈 때 텔레포트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아직은 모험가님이 오신 스위티 마을에서만······.”
 입구 앞까지 도달한 웨인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슈웅.
 웨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신전 밖으로 나온 웨인은 스테이터스창을 펼쳤다.
 
 -이름 : 웨인
 -레벨 : 1
 -종족 : 인간
 -소속 : 무소속 / 무소속
 -칭호 : 토끼 살해자(레어)
 -직업 : 대장장이 / 문신사 (더블 클래스)
 힘(str) : 7(5+2)
 -민첩(azi) : 7(5+2)
 -손재주(de x) : 7(5+2)
 -체력(vit) : 7(5+2)
 -지능(int) : 7(5+2)
 -지혜(wiz) : 7(5+2)
 -매력(cri) : 7(5+2)
 -행운(luk) : 7(5+2)
 -남은 스테이터스 포인트 : 10
 
 ‘괜찮군.’
 1레벨임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능력치다. 이 정도면 충분히 안심이었다.
 웨인은 스테이터스창을 닫고 마을 바깥으로 나갔다.
 입구의 경비병을 지나치려는 순간, 그의 팔이 눈 깜짝할 새 웨인의 눈앞을 막았다.
 “잠깐, 젊은 모험가여, 마을 밖은 아직 자네가 나가기엔 너무 위험하다네. 조금 더 수련을 한 다음에 나가는 게 어떤가?”
 
 -띠링!
 -경비병이 당신을 제지합니다.
 -레벨 3이 되면 경비병이 더 이상 당신을 제지하지 않습니다.
 -지금 제지를 무시하고 나갈 수 있으나, 그 경우에는 불이익을 받습니다.
 
 “괜찮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직 자네는 준비가 덜 된 것 같네.”
 “상관없다. 지금 나가겠어.”
 “······뜻이 정 그렇다면 말리지는 않겠네. 다만 그 책임은 오롯이 자네의 것이라는 걸 명심하게나.”
 원래대로라면 마을 안에서 잡다한 퀘스트를 마치며 레벨을 올리는 게 일반적인 루트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경비병도 어쩔 수 없었다.
 스위티 마을 주변. 목장에서 본 것과 같은 토끼, 혹은 다람쥐 등등이 마찬가지로 돌아다니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웨인의 눈앞으로 알림창이 떴다.
 
 -경비병의 제지를 무시하고 마을 밖으로 나왔습니다.
 -사망할 시 페널티가 2배가 됩니다.
 
 안 좋으면 안 좋지,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알림이다.
 하나 웨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내디뎠다.
 타탓.
 마침 눈앞에 토끼 1마리가 귀를 쫑긋거리고 있다.
 막 주먹으로 녀석을 때려눕히려는 찰나였다.
 “저기요!”
 “······?”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자 웬 여자 1명이 이쪽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초보자용 옷을 입은 걸로 보아 갓 마을 밖에 나온 유저 같았다.
 “후유, 이제 살았다.”
 “잠깐만, 잠깐만요.”
 양옆에는 지인으로 보이는 남자 둘이 엉거주춤 걸어오고 있었는데, 초보자용 옷을 입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웨인이 무시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앞에 있던 토끼가 숲 쪽으로 멀리 달아나 버렸다.
 “······.”
 “후유, 이봐요. 당신 지금 큰일 날 뻔했어.”
 가까이 다가온 3명 중 왼쪽 남자가 말했다.
 “큰일?”
 “네. 저 몬스터들, 아까 목장의 토끼랑 똑같이 생각하시면 안 돼요.”
 젊은 여자가 입을 열었다.
 “저 토끼들, 겉보기엔 저래 봬도 아주 만렙 토끼야. 만렙 토끼.”
 “혼자서 잡으려다간 죽을 수도 있어요. 아까 진혁 오빠도 멋모르고 때리다 죽을 뻔했거든요. 저희들이 안 왔으면 웨인 님도 큰일 났을 거예요.”
 “게임사가 미친 게 분명해. 3명이서 토끼 1마리를 못 잡는다고?”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한 오른쪽 남자가 투덜댔다.
 그사이 웨인은 셋의 닉네임을 확인했다.
 닉네임 감추기 기능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머리 위쪽에 해당 닉네임이 <귀요미팡팡>, <헷지호그>, <화공대남자>.
 “그래서 말인데······.”
 거기서 여자, 귀요미팡팡이 손을 내밀며 제안했다.
 “웨인 님도 저희 파티에 오시면 사냥이 얼추 될 것 같은데, 어떻게 같이하면 안 될까요?”
 “파티?”
 “네. 분배는 4분의 1씩 공정하게 해 드릴게요.”
 말을 마친 귀요미팡팡이 눈웃음을 쳤다.
 하지만 대답이 들려온 순간, 그녀는 그 표정 그대로 굳어 버렸다.
 “제안은 고맙지만 필요 없어. 다른 파티원을 찾아보는 게 나을 거야.”
 성큼성큼.
 미처 설득할 시간도 주지 않은 웨인이 근처의 다른 토끼를 향해 가 버린다.
 졸지에 벙해 있던 귀요미팡팡은 잠시 후 씩씩거리며 외쳤다.
 “아, 아니,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야! 네가 그렇게 잘났어?”
 “민지야, 내버려 둬. 몇 번 죽어 봐야 상황 파악을 할 놈이야.”
 “말이 안 통하는 놈이야. 다른 사람을 찾아보자.”
 “오빠······ 후우, 알았어요.”
 귀요미팡팡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남자가······ 에효.’
 속으로 투덜거리며 웨인에 대한 걸 단념하는 셋.
 그러거나 말거나 웨인은 아까 봐 둔 토끼에게로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확실히 저 말이 맞지.”
 토끼 앞에 선 웨인이 홀로 중얼거렸다.
 다른 게임은 1렙 몬스터 3마리가 1렙 1명을 상대한다.
 하지만 루나틱의 1렙 몬스터는 그 반대로 3명의 유저를 상대할 수 있었다.
 수십 년 전 화제가 되었던 프 x 게임사의 다크 x x을 연상케 할 정도.
 아까의 셋도 그 때문에 자신에게 들러붙으려던 것이리라.
 “웃차.”
 웨인은 주먹을 휘둘렀다.
 공격을 받은 토끼가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팟!
 날카로운 앞니가 위협적인 모습으로 빛났다.
 하지만 웨인은 스텝을 밟아 어렵지 않게 그것을 피해 냈다.
 키익!
 헛손질을 한 토끼가 짧은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시 이쪽으로 돌진해 왔다.
 달려들고, 그리고 피하고,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자 토끼는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자리에 누웠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5코퍼를 획득했습니다.
 -<토끼 생고기>를 획득했습니다.
 
 웨인은 몸이 지칠 때까지 사냥을 반복했다.
 그것은 족히 20마리가 넘는 토끼를 때려눕히고서야 끝났다.
 “후우.”
 풀밭에 드러누운 웨인이 생각했다.
 ‘깡토끼 사냥, 작업장에서 필요한 최소 레벨을 올릴 때까지 물리도록 해 왔지.’
 작업장 캐릭터는 1분1초라도 빨리 광석과 약초를 캐야 했다.
 그 때문에 웨인, 현실의 김민혁은 시작부터 필드로 내몰리길 수없이 반복해 왔었다.
 ‘그때는 죽지 못해 하는 거였는데, 설마 여기서 도움이 될 줄이야.’
 일반인, 심지어 프로게이머나 운동선수 들도 이걸 처음 할 땐 꽤나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웨인은 그걸 몇십만, 몇백만 번이나 반복해 왔다.
 지금의 그는 토끼의 공격 정도야 눈 감고도 피할 수 있었다.
 거기다 한 가지 더.
 ‘토끼 살해자’라는 칭호의 효과로, 지금의 웨인은 토끼들에게 추가 데미지가 들어간다.
 맨주먹에 1레벨임에도 토끼들을 학살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그래서 직업도 이렇게 자신 있게 골랐고.’
 대장장이와 문신사.
 둘 다 생활 계열의 직업이다.
 생산 / 제작에 힘이 들어갔기에 그만큼 몬스터 사냥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만약 웨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몇 날 며칠 사냥터에 있었어도 죽만 쒔을 것이다.
 “경험치······.”
 경험치 칸을 확인한 웨인은 짧게 혀를 찼다.
 더블 클래스의 고통인지, 벌써부터 경험치가 안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것이 그가 파티를 하지 않은 이유였다.
 안 그래도 경험치가 많이 필요한데, 거기서 더 나누라고?
 ‘어느 세월에 레벨을 올리라고.’
 성장 차이가 순식간에 벌어질 것이다.
 시간도 그만큼 버리고, 차라리 사냥이 가능한 지금 이렇게 하는 게 나았다.
 웨인은 다시 토끼를 향해 다가가 주먹을 휘둘렀다.
 작업의 시작이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경험치를······.
 -레벨이 올랐습니다!
 
 ‘후우, 힘들어 죽겠군.’
 웨인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내내 토끼만 잡은 지 벌써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웨인은 정말 최소한의 생활만 하며 사냥에 집중했다.
 ‘그래도, 드디어!’
 웨인은 만족한 시선으로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레벨 5.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이틀이면 찍었을 레벨이다.
 웨인이 쌓아 온 경험치를 똑같이 환산한다면 최소한 8레벨은 됐을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더블 클래스니까.’
 아무리 웨인이 토끼의 패턴을 모두 파악하고, 칭호로 이득을 본다 할지라도 이 정도가 한계였다.
 애초에 전투 클래스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지. 대장장이, 문신사. 둘 다 5레벨이 되기 전까지는 스킬이 하나도 없으니까.’
 입술을 핥던 웨인이 혀를 찼다.
 ‘그래도 그렇지, 확실히 이건 진짜 힘드네.’
 웨인은 투덜거리며 마을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다시 태어나면 절대 이 짓은 안 한다고는 했었지.
 그리 생각하며 피식 웃고 있을 때였다.
 삐잇!
 귀여운 울음소리와 함께 수풀에서 토끼 1마리가 나타났다.
 한데 이놈······ 조금 컸다.
 ‘······회색 토끼?’
 웨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회색 토끼.
 사냥터의 보스 몬스터라 할 수 있는 놈이다.
 ‘지금 상대할 수 있을까?’
 회색 토끼의 레벨은 5. 웨인하고 동등한 레벨이다.
 그러나······.
 ‘일반 몬스터의 기준이 같은 레벨의 플레이어 3명, 그리고 보스 몬스터는 정확히 그 2배였지.’
 즉, 산술적으로 5레벨의 보스 몬스터를 잡기 위해서는 5레벨의 플레이어가 6명이 필요하다. 공방 밸런스가 알맞은 직업의 파티가 6명이란 소리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도망가는 게 상책, 하지만······.
 ‘회색 토끼는 빠른 속도와 강한 한 방 공격력이 특징. 도망가 봤자 금방 따라잡힐 거다.’
 웨인은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오랜 경험과 눈칫밥 생활 덕분에 이런 점에 있어서 그는 언제나 정확하고 간결했다.
 ‘죽어서 잃는 경험치는······ 제길, 생각해 보니까 더블 클래스라 떨어지는 경험치도 2배잖아. 이거 레벨 다운이 될 수도 있겠군.’
 그건 곤란한 일이다.
 하지만 도망갈 수도 없다.
 어차피 싸우다 죽으나 도망가다 죽으나, 경험치를 잃는 건 똑같다.
 ‘어쩔 수 없군.’
 그 순간 웨인을 바라보던 회색 토끼가 입을 벌리고 포효했다.
 삐이익!
 그대로 달려온다.
 ‘이 녀석 패턴이······ 처음에는 몸통 박치기였지?’
 토끼가 온몸을 둥글게 말아 튀어 오른 순간이었다.
 웨인은 가까스로 풀밭을 향해 굴렀다.
 이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그는 재빨리 손을 뻗어 회색 토끼의 긴 귀를 붙잡았다.
 토끼형 몬스터들의 약점은 공통적으로 귀가 예민하다는 점이다.
 삐이삐익!
 예상대로 귀를 잡힌 회색 토끼가 길길이 날뛴다.
 끼이익! 끼익!
 온몸을 풀밭에 굴리는 회색 토끼.
 그때마다 웨인의 HP가 실시간으로 떨어진다.
 원래 이 패턴의 회색 토끼는 돌진을 계속해서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게 낫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사람이 없다.
 잠시 후, 토끼가 포효하는 순간 웨인은 바닥에 엎드렸다.
 
 -회색 토끼의 포효를 들었습니다.
 -공포 상태가 됩니다.
 -이동속도와 공격 속도가 10% 감소합니다.
 
 2페이즈에 들어선 회색 토끼는 크게 포효를 내지른 후, 경직된 유저를 덮쳐 큰 데미지를 준다.
 여러 명이서 잡는 만큼, 빠른 대처가 중요했다.
 크게 소리친 회색 토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끼익?
 순간적으로 엎드려 누운 웨인은 지금 바닥에 착 달라붙어 있는 상태.
 회색 토끼의 눈에는 웨인이 마치 방금 전까지 자리에 있다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보스의 인식권에서 벗어나면 어그로가 풀린다.
 조금만 레벨이 높아져도 통하지 않는 방법이지만, 회색 토끼는 보스 중에서도 최약체.
 끼이이······.
 양옆을 두리번거리던 회색 토끼의 등 뒤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흠!”
 끽? 키이익! 캬아앗!
 등 뒤를 선점한 웨인은 몇 번이고 회색 토끼의 코끝을 때렸다.
 
 -크리티컬 히트!
 -크리티컬 히트!
 -크리티컬 히트!
 
 코끝은 원래 신경이 집중되어 약할 수밖에 없다.
 그 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상상 이상의 데미지가 나왔다.
 끼이이이잇! 끼이이잇!
 회색 토끼는 바로 3페이즈로 들어가 마구잡이로 몸을 굴렀다.
 불규칙적인 발광 패턴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기에 아차 하는 사이에 레이드가 실패할 수도 있는 가장 위험한 부분이었다.
 웨인은 슬쩍 뒤로 빠져서 회색 토끼의 몸통 박치기를 피했다.
 수없이 해 본 일이라 언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너무 뻔했다.
 그렇게 몇 차례 맨주먹으로 치고 돌을 던지자 마침내 끝이 왔다.
 삐익······!
 회색 토끼는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띠링!
 -<회색 토끼 가죽>을 획득했습니다.
 -<회색 토끼의 심장>을 획득했습니다.
 -50코퍼를 획득했습니다.
 
 ‘······오, 이건!’
 웨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회색 토끼 가죽’은 거의 100퍼센트 드롭되는 전리품.
 하지만 심장은 아니다.
 10%의 확률로 떨어지는 아이템.
 섭취 시 민첩을 영구적으로 1 올려 준다.
 중복이 되진 않으나 상당히 괜찮은 레어 아이템이다.
 ‘꽤 짭짤한데.’
 그리 생각하며 아이템을 수급할 때였다.
 
 -죽인 토끼가 총 1만 마리가 되었습니다.
 -조건 충족!
 -<토끼 살해자> 칭호 승급!
 -새로운 업적 달성!
 -칭호 <토끼 학살자>를 얻었습니다.
 -스테이터스창에서 칭호 <토끼 학살자>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것도 있었나?’
 이건 웨인도 금시초문이었다.
 심지어는 위키나 인벤에서도 얻지 못했던 정보다.
 하긴 이 게임에서 토끼를 상대할 일은 거의 드물다.
 초반이 지나면 거의 나오지 않는 말하자면 최약체 몬스터 종류이기 때문이다.
 칭호 승급이라······.
 좋으면 좋았지 나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유니크인데 옵션이나 한번 확인해 볼까.’
 웨인은 스테이터스창을 열었다.
 그리고 새 칭호를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뭐야, 이게?”
 
 <토끼 학살자>
 -등급 : 유니크
 -분류 : 칭호
 -대표 옵션 : 토끼에게 데미지 +15%
 -일반 옵션 : 포유류에게 데미지 +5%
 
 옵션을 확인한 순간 웨인은 깜짝 놀랐다.
 토끼에게 추가 데미지를 주는 건 아무래도 좋다.
 ‘모든 포유류에게 데미지가 상승하다니. 미친 옵션이잖아!’
 칭호에는 대표 옵션과 일반 옵션이 있다.
 대표 옵션은 착용해야만 오르는 것이고, 나머지는 얻은 순간부터 항시 적용이 된다.
 포유류에게 데미지가 증폭되는 일반 옵션.
 비록 5%밖에 안 되는 작은 수치이지만, 항시 적용된다는 점이 크다.
 ‘게다가 포유류라면······.’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완전 미친 옵션이군.’
 결투장이나 진영전, 길드전 등의 PVP에서 웬만한 장비 하나만큼의 프리미엄을 얻는 것만큼의 효과다.
 게다가 이건 ‘유니크’ 등급이다.
 레어라면 모를까, 유니크 등급은 게임 내에서 오직 최초의 단 1개만 존재한다.
 아이템도 그렇고 칭호도 마찬가지다.
 ‘이런 게 있는 줄 알았다면 사무라이, 하다못해 전투 계열의 직업을 하는 건데.’
 만일 이 칭호를 얻은 게 암살자류 직업이었으면, 그는 극강의 탱커라도 원콤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웨인의 현 직업은 결국 생산직.
 직접 전투에서 멀어지는 만큼 그만한 효율은 낼 수 없다.
 조금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하여튼 좋은 건 좋은 거니까.’
 어쨌든 얻지 못한 것보단 낫지 않은가?
 웨인은 그리 생각하며 마을로 향했다.
 5레벨을 찍었다.
 이제는 자신도 스킬을 배울 차례였다.
 웨인이 처음 향한 곳은 마을의 대장간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촌장의 심부름에 따라 잡일을 하며 자연스레 들르게 되는 곳이다.
 까앙, 깡!
 풀무 위로 망치가 내리치고, 안쪽의 고로에선 뜨거운 기운이 연신 솟아 나온다.
 비릿한 쇠 냄새 사이로 가끔씩 시뻘건 불똥이 튀었다.
 작은 마을이라 해도 있을 건 다 있었다.
 웨인은 그사이로 보이는 한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스킬을 배우러 왔다.”
 중년인이 고개를 들었다.
 “흠, 새로운 여행자인가? 그런데 쇠를 다루는 것보다 먼저 예의부터 배우고 오는 게 어때?”
 첫 만남부터 대뜸 퉁명스러운 말을 던지는 중년인.
 태도도 태도지만, 무국적자이기 때문에 떨어진 호감도도 한몫했다.
 그러나 웨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롤플레잉을 할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
 NPC와의 교감? 물론 필요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보다 지금은 스킬을 먼저 배우는 게 우선이었다.
 “알았으니까 스킬 북이나 내놓지그래.”
 “하여간 요즘 것들은······ 잠깐 기다리고 있어 봐라.”
 탁.
 망치를 놓은 중년인, 대장장이가 앞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옜다. 5레벨 스킬 북. 5실버만 내.”
 “잠깐, 원래 가격은 3실버일 텐데?”
 “쳇, 마음대로 해.”
 호감도가 낮아서 가격이 비싸졌지만, 웨인은 그걸 그냥 받아넘길 생각이 없었다.
 속셈을 들킨 대장장이가 툴툴거리며 가격을 낮췄다.
 그렇다고 해도 상당히 비싼 건 사실이다.
 하지만 웨인은 서슴없이 스킬 북을 구매했다.
 “사용.”
 
 -대장장이 스킬을 익혔습니다.
 -초급 제작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초급 제련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초급 수리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초급 강화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제작, 제련, 수리, 강화.
 대장장이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스킬이다.
 스킬창을 펼치자 상세 설명이 떴다.
 
 <초급 제작>
 -분류 : 비전투
 -등급 : 1
 -속성 : 무
 -효과 : 아이템을 제작한다.
 -스킬 레벨 : 1
 -스킬 숙련도 : 1/100
 -기타 : 모든 아이템 제작에 레시피가 필요하다. 승급이 가능하다.
 
 <초급 제련>
 -분류 : 비전투
 -등급 : 1
 -속성 : 무
 -효과 : 자연물에서 얻는 재료를 용도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가공한다.
 -스킬 레벨 : 1
 -스킬 숙련도 : 1/100
 -기타 : 특정 아이템의 제련엔 레시피가 필요하다. 승급이 가능하다.
 
 <초급 수리>
 -분류 : 비전투
 -등급 : 1
 -속성 : 무
 -효과 : 장비나 아이템의 내구도 복구한다.
 -스킬 레벨 : 1
 -스킬 숙련도 : 1/100
 -기타 : 수리 키트가 필요하다. 승급이 가능하다.
 
 <초급 강화>
 -분류 : 비전투
 -등급 : 1
 -속성 : 무
 -효과 : 장비의 등급을 상승시킨다.
 -스킬 레벨 : 1
 -스킬 숙련도 : 1/100
 -기타 : 강화석이 필요파다. 승급이 가능하다.
 
 기본이자 끝.
 이것들 이외에도 많은 스킬들이 있으나, 사실상 본류는 이 네 가지라고 봐도 무방했다.
 ‘좋아, 이제 문신술을 배우러 가 볼까.’
 이번에는 대장장이 스킬처럼 그리 간단히 배울 수는 없다.
 애초에 문신사 자체가 직업 적성이 맞는 사람이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웨인은 뒷골목으로 향했다.
 목장 마을이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삐걱-.
 타투 전문점이라는 간판이 달린 오두막.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일렬로 누운 남자들의 등짝이었다.
 저 사람들에게는 볼일이 없다.
 웨인은 침대 사이를 지나 안쪽으로 향했다.
 “잠깐만.”
 “······?”
 “처음 보는 놈이군. 뭐 하러 왔지?”
 두꺼운 팔뚝이 웨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웨인은 그의 모습을 머리부터 천천히 훑어보았다.
 터질 듯한 팔과 다리의 근육.
 웨인보다 머리 1개는 더 큰 키.
 빡빡 깎은 민머리 위로 닻 모양 문신이 반짝인다.
 “스킬을 배우러 왔다.”
 “스킬?”
 흐음 소리를 낸 장한이 눈매를 아래로 내렸다가 올렸다.
 “······모험가로군.”
 “그래.”
 “알았다, 들어가도 좋아.”
 장한이 팔을 치웠다.
 문 안쪽은 붉은빛으로 가득한 커다란 방이었다.
 벽가에는 사슴이나 곰의 머리, 그리고 검과 다트판 등이 걸려 있었다.
 도둑 길드.
 도적 계열의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이 스킬을 배울 때 들러야 하는 곳이다.
 그리고 대다수가 모르는 사실이지만, 문신사 전용 스킬도 이곳에서 배워야 했다.
 문신사 자체가 히든 클래스에 가까워, 스킬을 익히는 장소를 찾는 것마저도 쉬운 게 아니었다.
 웨인이 이곳을 아는 것도 인벤을 잘 봐 둔 덕분이었다.
 작업장에서 일하던 시절, 그나마 자유로이 할 수 있던 게 루나틱 인벤이었는데, 거기서 어떤 유저의 질문 게시 글을 기억에 담아 뒀던 것이다.
 ‘앙투와네트······였었나?’
 초딩스러운 말투 때문에 유머 게시 글로 올라왔지만, 그 내용만큼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앙투와네트 : 문신사 스킬은 어디서 배우나양?
 -앙투와네트 : 그게 어디예양?
 -알리사 : 아, 그거요. 도둑 길드 가시면 돼요. 거기서 배울 수 있어요.
 -앙투와네트 : 거기가 어디예양?
 -알리사 : 아······^^;
 
 계속되는 질문에 짜증이라도 낼 법하련만, 알리사란 유저는 친절하게 답변을 해 주었다.
 
 -알리사 : 어디든 시작한 마을에서 뒷골목 쪽으로 들어가면 타투 가게가 있어요. 거기서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면 돼요. 스타팅 마을은 전부 위치가 똑같으니까 참고하시면 될 거예요!
 -앙투와네트 : 저기요. ㅡㅡ
 -알리사 : 그냥 들어가려고 하면 입구에서 막을 거예요. 명성치가 부족해서 그런데, 그때 막는 사람한테 문신 스킬 배우러 왔다고 하면 들여보내 줘요. 그 안에서 타투라고 써진 자리로 간 다음에 하라는 대로 하시면 돼요.
 
 거의 위키나 가이드북처럼 상세한 댓글의 연속.
 게시 글의 제목은 ‘관종 콘셉트러 응징.jpg’였지만, 생각해 보면 그 내용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 문신사 적성.
 그것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초보자 가이드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작업장 일을 하며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알리사라는 누구나 알아주는 최상위 랭커에 대해서.
 그녀는 직접 위키에 정보를 추가할 정도로 열성적인 유저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웨인도 어떤 식으로 캐릭터를 키울지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혹시 보게 된다면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군.’
 그리 생각하며 웨인은 도둑 길드 내의 타투 시술소로 향했다.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꾸민 타투 시술소와 다르게, 진짜 시술소에는 찬 공기가 감돌았다.
 안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아니, 사람 자체가 단 1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이지?”
 시술소 안에 혼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입구의 장한과는 달리, 그는 팔과 다리에 복잡한 문신 두어 개만을 새긴 평범한 모습이었다.
 “문신 스킬을 배우러 왔다.”
 “문신사인가? 요즘 세상에 문신사를 하는 여행자도 다 있군.”
 루나틱 온라인의 NPC들은 플레이어를 신이 보낸 여행자로 알고 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불멸의 모험가.
 그들은 항상 영웅이 되기만을 바랐다.
 직접 검을 휘두르고, 마법을 써서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잡소리는 됐고 스킬 북은?”
 “물론 가지고 있지.”
 말을 마친 남자가 오른손으로 동그라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5실버.”
 웨인은 즉각 값을 치르고 스킬 북을 건네받았다.
 
 -문신사 스킬을 익혔습니다.
 -<블랙&그레이>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레터링> 스킬을 습득했습니다.
 
 <블랙&그레이>
 -분류 : 비전투
 -등급 : 1
 -속성 : 무
 -효과 : 피시전자 1명에게 지속 시간 30일의 문신을 그린다. 피시전자는 30일간 근력, 민첩, 체력이 각각 5씩 상승한다.
 -스킬 레벨 : 1
 -스킬 숙련도 : 1/100
 -필요 재료 : 검은 염료, 흰 염료, 문신용 바늘.
 
 <레터링>
 -분류 : 비전투
 -등급 : 1
 -속성 : 무
 -효과 : 피시전자에게 지속 시간 30일의 문신을 그린다. 피시전자는 문신의 글귀에 따라 해당 능력치가 상승한다.
 -스킬 레벨 : 1
 -스킬 숙련도 : 1/100
 -필요 재료 : 무색 염료, 문신용 바늘.
 -기타 : 현재, 한 캐릭터당 1개의 문신을 부여할 수 있다.
 
 ‘끝······?’
 웨인은 생각했다.
 겨우 스킬 라니.
 비싼 가격치고는 너무 가성비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생산직 직업들은 본래 하나의 클래스를 마스터한 다음부터 선택하는 게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자.”
 남자가 아이템을 건넸다.
 웨인이 손을 뻗는 순간, 알림창이 하나 떴다.
 
 -문신 키트를 구매합니다. 가격은 25실버입니다.
 -현재 인벤토리의 잔액이 부족하여 구매할 수 없습니다.
 
 “염료는 필요 없나?”
 “나중에.”
 남자의 질문에 웨인은 고개를 저었다.
 염료, 특히 고급 염료의 값은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비싸다.
 2개의 스킬 북을 연속으로 산 지금, 더 이상의 과소비는 금물이었다.
 ‘문신 한 번에 그렇게 비싼 값을 받는 것도 그래서였군.’
 작업장 시절 보스 레이드 때문에 문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가격을 현금으로 따지면 건당 30만 원이 넘었다.
 지금 보니 재룟값을 충당하려면 어쩔 수 없이 비싸게 받아야 했던 것이다.
 “그럼······.”
 웨인은 도둑 길드에서 나왔다.
 스위티 마을 한복판.
 그는 천천히 로그아웃을 하고 눈을 감았다 떴다.
 파앗.
 낯익은 천장이다.
 집에서 눈을 뜬 김민혁은 기어에서 몸을 일으켰다.
 꼬르르륵.
 정신없이 게임을 하느라 배가 고픈 것도 모르고 있었다.
 김민혁은 부엌으로 가서 라면을 끓였다.
 “웬만하면 식사 시간에 맞춰서 알람을 설정해 둬야겠어.”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 때문에 건강을 해쳐서야 될 말인가.
 라면이 끓자 김민혁은 그것을 테이블로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먹으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인벤.
 수십 년 전의 고전 게임부터, 바로 어제 나온 새 게임의 정보까지 모두가 총망라된 게임 사이트.
 최근 그 인벤은 루나틱의 이야기로 달아올라 있었다.
 비단 인벤뿐만이 아니다.
 게임메카, 루리웹, 우드 위키, 디시인사이드 등등.
 커뮤니티는 물론 심지어 지상파 뉴스에도 간간이 얼굴을 비칠 정도다.
 김민혁은 그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외우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벤을 보는 것은, 혹시나 놓칠지도 모를 사소한 정보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중국 탄센트사가 루나틱에 관심······ 북미, 유럽권에서도 뜨겁다······ 음?”
 남은 면발을 먹으며 정보를 훑던 김민혁이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인벤의 헤드라인에 새로운 핫뉴스 1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루나틱 온라인 최초로 유니크 칭호가 2개?”
 기사를 터치한 김민혁은 정신없이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내용은 간단했다.
 트윈헤드 오우거를 레이드해서 유니크 칭호를 서버 최초로 얻은, ‘트윈헤드 오우거 슬레이어’ 알렉.
 하지만 기자들이 기사를 위해 게임사에 문의하자, 루나틱사는 이런 답변을 내놓았다.
 “사실······ 최초로 유니크 칭호를 얻은 건 그가 아닙니다. 누군지는 알려 드릴 수 없으나, 알렉 님보다 먼저 서버 최초로 유니크 칭호를 얻은 사람이 분명 있습니다.”
 트윈헤드 오우거 사냥이라는 위업을 최초로 달성해 낸 남자.
 그런 그보다 먼저 유니크 칭호를 얻은 사람이 있다는 말에, 온 게임계가 경악에 휩싸였다.
 
 -akrntm : 와, 이걸 뺏기네.
 -마리아체 : 미라클 길드주 떡락 가즈아 ㅋㅋㅋㅋ
 -크림슨킹존 : 트윈헤드 오우거 잡는 거 실시간으로 봤는데, 톱니바퀴 돌아가듯 몰아가는 폼이 절로 감탄이 나오더라고요. 첫 번째에는 졌더라도 마지막에는 이길 거라 확신합니다. 미라클 길드분들 힘내십시오. 응원합니다.
 -데블핸드 : 뛰는 알렉 위에 나는 루나틱 있다.
 
 무려 3만 개가 넘게 달린 댓글 창들.
 그 외에도 웹진 뉴스나 소식지마다 최초의 유니크 칭호에 대한 기사들이 수두룩했다.
 ‘알렉······이었나?’
 20년 후, 루나틱 온라인의 이용자들 사이에서 정점에 오른 자였다.
 작업장 생활만 하던 김민혁도 그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세운 길드가 바로 미라클 길드.
 20년 후까지 루나틱 길드 최고, 최강의 자리를 지키는 곳이었다.
 어찌나 커졌는지 그때의 미라클 길드는 삼송이나 LH그룹 같은 재벌들도 쉽사리 건들지 못할 만큼 커져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서 첫 유니크를 빼앗아 온 건가.’
 묘한 흥분감 속에서 인벤을 계속 살피는 김민혁.
 거기서는 과연 누가 첫 유니크 칭호를 가져갔는지에 대한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제목 : 첫 유니크 칭호 보유자에 대한 합리적인 예측(스압).
 -작성자 : 병무청티모
 -댓글 수 : 9,921
 
 -제목 : 인벤러들이 유니크 칭호 신경 써 봤자 필요 없는 이유. jpg
 -작성자 : 빠요엔미미
 -댓글 수 : 327
 
 뻘글이 대부분이었지만 그중 일부는 진지한 분석이 들어가 있었다.
 김민혁은 천천히 게시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피식.
 웃지 않으려 해도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불을 켜고 찾는 첫 번째 유니크 칭호가 토끼에게서 나왔다는 걸 알면 저 사람들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다.
 라면을 다 먹은 김민혁은 통장 잔고를 확인했다.
 140만 원.
 ‘······이대로라면 세······ 아니, 두 달.’
 그것도 최대한 아껴 써야 가능한 일이다.
 뭐가 됐든 빨리 돈을 벌어야 했다.
 ‘일을 해야지.’
 김민혁은 그날 더 이상 게임을 하지 않고 쉬었다.
 아무리 시간이 없다 해도 스태미나 관리는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다음 날까지 스태미나를 보충한 김민혁은 다시 기기를 열고 웨인이 되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웨인은 말을 마치고 뒷골목으로 향했다.
 
  * * *
 
 “형씨, 모험가지?”
 웨인은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을 건 남자를 응시했다.
 “일거리를 찾고 있지 않아? 대가는 후하게 쳐 줄게.”
 
 -수수께끼의 남자가 의뢰를 하려고 합니다.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알림창을 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퀘스트가 취소되었습니다.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남자가 되돌아간다.
 혼자 남은 웨인은 다시 골목길을 어슬렁거렸다.
 그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도 벌써 수 시간째.
 현실 시간으로 따지면 얼마 되지 않지만, 게임 시간으로는 그 몇 배나 더 길었다.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인벤과 사이트를 뒤지면서 기억해 낸 정보.
 거기에 따르면 분명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
 “이봐, 할 일을 찾나?”
 가죽조끼를 입은 장한이 다가와 물었다.
 웨인은 고개를 저어 완곡한 거절의 뜻을 표했다.
 
 -퀘스트가 취소되었습니다.
 
 뒷골목 사람들이 말을 걸어온 것만 벌써 여섯 번째다.
 그들의 퀘스트를 받는 것도 좋겠지만, 웨인은 엄격히 선을 그었다.
 뒷골목에서 하는 퀘스트는 십중팔구 범죄와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악업에 관련된 퀘스트를 하면 명성이 낮아진다.
 경비대에게 쫓기거나 혹은 기사, 현상금 사냥꾼으로 구성된 토벌대가 쫓아오기도 한다.
 그건 웨인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어둠의 루트로 육성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건 하이리스크에 로우 리턴, 내가 갈 길은 아니다.’
 그렇게 웨인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뒷골목을 서성거렸다.
 밤이 깊은 저녁.
 퍼억!
 허름한 술집의 문이 한 남자를 뱉어 냈다.
 그 뒤로 따라 나온 대머리 뚱보가 연신 발을 굴렀다.
 “이 새끼가 뭐라고? 그렇게 마시고 술값이 없어?”
 뚱보의 손에 들렸던 곤봉이 허공을 날았다.
 엎어져 있던 남자는 아무 저항 없이 그것을 맞았다.
 “크크······ 술값치고는 조금 약한데?”
 “뭐야?”
 뚱보는 귀 끝까지 시뻘게져서는 남자를 두어 대 더 차고 들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남자는 씨익 웃던 채로 드러누웠다.
 “이렇게 사니 편하구나. 진작 이렇게 살 것을.”
 하늘을 보던 그의 눈이 감긴다.
 바로 그때 웨인이 길모퉁이에서 걸어 나왔다.
 남자를 부축한 그는 천천히 마을 바깥으로 향했다.
 스위티 마을 근처의 필드.
 토끼나 여우 등의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는 사이로, 다 쓰러져 가는 폐가 한 채가 있었다.
 “······여기가 맞군.”
 웨인은 남자와 함께 폐가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남자가 정신을 차렸다.
 “으으······ 머리가 깨질 것 같군.”
 “드시오.”
 기다리고 있던 웨인이 물 잔을 건넸다.
 단숨에 잔을 비운 남자가 트림을 해 댔다.
 “끄윽, 좀 살 것 같구먼.”
 “그거 다행이군요.”
 “그러니까 한 병만······ 한 병만 더 줘.”
 웨인은 미리 옆에 두었던 술병을 내놓았다.
 어젯밤 술집에서 팔던 것 중 가장 싼 술이다.
 꿀꺽. 꿀꺽.
 술병은 순식간에 바닥을 보였다.
 저 쓴 싸구려 독주를 저렇게 마시는 것도 재주다.
 “크흐.”
 “기술을 배우러 왔습니다.”
 “기술?”
 “최고의 대장장이가 되고 싶습니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당신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로드릭.”
 “최고의 대장장이?”
 로드릭이 낮게 웃었다.
 “흐흐, 최고의 대장장이라······ 흐하하하하하!”
 점차 크게 웃던 로드릭이 광소를 터뜨렸다.
 “어디, 손 좀 보지.”
 “손 말입니까?”
 “그래.”
 웨인이 손을 내밀었다.
 로드릭은 웨인의 손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펴보다 말했다.
 “대장장이는 섬세한 직업이지. 체력도, 근력도, 다 필요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후천적으로 만들 수 있는 거니까. 자, 보니까······ 소질은 있어 보이는데 말이야.”
 로드릭이 손을 팽개쳤다.
 “자네 혹시 귀족인가?”
 “아닙니다. 모험가입니다.”
 “모험가라. 한데 최고의 대장장이는 왜 되려고 하는 거지?”
 “제 직업이 대장장이니까요.”
 “그럼 가서 대장장이 스킬 북이나 사서 배우지 그러나?”
 “그런 걸로 최고의 대장장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로드릭이 피식 웃었다.
 “어디서 나에 대해 들었나?”
 “로드릭 디에르고. 한때 왕국 최고의 대장장이로 손꼽혔던 남자, 아닙니까?”
 “옛날 말이지. 최고의 대장장이라, 그리운 어감이군. 하지만 이제 술주정뱅이일 뿐이야.”
 로드릭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내 침상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집 안을 휘적거렸다.
 잠시 후 어디선가 그가 가져온 것은 한 권의 낡은 책이었다.
 “내 야금술은 이미 내 대에서 끝내기로 결심한 몸이다. 모험가 주제에 이런 퇴물을 알아낼 정도로 절박한 것도, 또 그 노력도 가상하니 그냥 돌려보낼 순 없겠군. 이거나 가지고 꺼져.”
 쉭, 책을 던진 로드릭이 그대로 침상에 몸을 던졌다.
 “두 번 다시는 날 찾아오지 말게!”
 확고한 분위기로 말하는 로드릭.
 강제성은 없어 보이나, 절대로 꺾이지 않는 철옹성 같은 분위기다. 웨인은 책을 집으며 그리 생각했다.
 
 -<디에르고 가문의 대장장이 입문서> 스킬 북을 습득하였습니다.
 
 ‘됐다, 이걸로 왕국 최고의 대장장이 기술을 익혔다.’
 “기회가 되면 다시 오겠습니다.”
 “꺼져! 더 말 안 할 테니까.”
 웨인은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집 밖으로 나왔다.
 씰룩,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
 로드릭 디에르고는 왕국 최고의 대장장이 NPC. 왕국 내에서 퀘스트와 인과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히든 NPC이기도 했다.
 당장 저자에게서 기술을 모두 전수받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목적은 달성했다.
 ‘습득.’
 
 -<로드릭의 대장장이 입문서>를 습득하였습니다.
 -대장장이 기본 스킬이 강화됩니다.
 -<로드릭의 야금술> 스킬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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