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ologue
“그러니까 내 이름이 뭐라고?”
“라울 카스트로이십니다.”
“나는 라울이 아니라니까 그러네요. 저는 최서진이거든요? 여긴 어디고 당신은 누구예요?”
정신을 차리자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 일단은 귀족이다.
2018년 여름.
나는 정말 오랫동안 기다린 여름휴가를 맞아 친구들과 함께 부산 해운대로 휴가를 떠났다.
후회를 남겨서는 안 된다며 열심히 놀고 있었을 때만 해도 그런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다.
‘윽 쥐가···.’
분명 준비 운동을 했을 텐데 갑작스럽게 다리에 쥐가 나며 서서히 나는 물속으로 빨려 들고 있었다.
어떻게든 헤쳐 나오려 발버둥 쳤지만, 점점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사, 사람 살―!”
입을 열 때마다 살려 달라고 외쳤지만 밤이라서 그런지 나를 도와주러 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이제는 얼굴을 물 밖으로 빼내는 것조차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휴가 첫날인데 이렇게 가는 건가 싶어 억울함에 힘을 내봤지만, 쥐가 난 다리는 주인의 목숨은 필요 없다는 듯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점점 숨이 막혀 오기 시작했다.
‘아직 살날이 많은데.’
올해로 27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그럴듯한 기업에 취직해서 드디어 꽃길만 걷나 싶었는데 몇 걸음 떼지도 못하고 죽으리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밤중에 수영을 하겠다며 무리를 한 자신을 자책하고 있으니 시야조차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안녕 세상아.’
죽음을 직감하고 눈을 감으니 27년 인생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이것이 사람들이 죽기 전에나 경험한다는 주마등을 벌써부터 경험할 줄은 정말로 몰랐다.
이제는 정말로 한계인지 점점 정신 줄을 놓으려 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죄송해요. 저 먼저 갈게요.’
마지막으로 부모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마침내 정신을 잃어버렸다.
“···소영주님!”
“···으.”
정신을 차렸을 때 푸른 눈과 금발을 자랑하는 외국인이 눈앞에 보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가,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저승을 한 발자국 앞에 두고 이승으로 돌아오자 온갖 감정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금의 감정대로라면 이 외국인이 나의 1년 연봉을 달라고 해도 웃으면서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가 연신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자 외국인이 당황한 듯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고개를 들어 주십시오. 제가 어찌 소영주님께 감사를···!”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제가 어떻게 감사를 안 드리겠습니까.”
“소영주님께서 함부로 고개를 숙이시면 안 됩니다! 게다가 말에서 떨어져 기절을 하셨을 뿐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십니다!”
당황해 하는 외국인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뭔가 이야기의 핀트가 안 맞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분명 바다에 빠져서 질식사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갑자기 말에서 떨어졌다고 말하는 외국인을 보며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저기 말에서 떨어졌다뇨? 저는 분명 바다에 빠져 질식사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요.”
“존댓말을 하시다니요! 말을 놓아 주십시오!”
“저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시는데 제가 어떻게···.”
“소영주님 앞에서 나이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게다가 소영주님이 저에게 말을 편히 하지 않으시면 제가 더 곤란합니다!”
도대체 소영주는 누구이고 왜 존댓말을 하면 곤란하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제야 외국인 뒤쪽으로 보이는 배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기 여긴 어느 병원이죠?”
“···병원 말씀이십니까?”
외국인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외국인에게 병원이라고 하면 못 알아들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하지만 영어로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자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라고 설명하자 그제야 알아들은 듯 외국인이 대답했다.
“신전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신전?”
“혹시 아프신 곳이 있으십니까? 당장 신관을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당장이라도 바깥으로 달려 나가려는 외국인을 붙잡고 잠깐 혼란에 빠진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소영주라고 칭하는 것이나 병원이 아닌 신전에서 사람을 치료한다는 말이나, 도대체 이해가 가는 것이 없었다.
“저기···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존댓말을 삼가 주십시오!”
“아, 알았어.”
너무나 박력 넘치는 그 모습에 움찔거리면서도 말을 놓았다.
하지만 오히려 내가 말을 놓자 불안해하던 얼굴이 편해지는 모습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모습이었다.
“여기 부산이 맞아?”
“부···산 말씀이십니까?”
“어.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 말이야.”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곳은 카스트로 영지입니다.”
카스트로···? 듣기만 해서는 동아시아보다는 유럽 쪽의 지명 같았다.
이럴 수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잃은 동안 바다를 건너 유럽에 도착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지만 혼란에 빠진 머리는 그런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어느 나라의 지방이야? 코리아 몰라?”
“계속해서 이상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벨하임 왕국의 카스트로 공작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코··· 리아 라는 나라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상한 말만 하는 건 이 외국인 같은데···.
생명의 은인인 것은 분명한데 약간 다른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 같았다.
그나저나 여기는 도대체 어디의 호텔인가 싶었다.
친구들과 머물기로 한 펜션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인테리어와 딱 봐도 최고급일 것 같은 침대의 안락함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아! 휴대폰 좀 빌려줘.”
“휴··· 대폰은 무엇입니까? 설명해 주시면 바로 구해 오겠습니다.”
세상에나!
휴대폰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니!
이런 호텔에 머물 정도라면 어지간한 재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휴대폰을 모른다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니면 이런 부자들은 휴대폰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 존재하는 건가?
“그··· 멀리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가전제품 말이에요.”
“···아! 통신구 말씀이시군요!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름 모를 외국인은 방을 나가 버렸다.
소란스러웠던 외국인이 방을 나가자 넓은 방에는 나 혼자 남게 되었고 천천히 방을 둘러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그런데 TV도 없고 컴퓨터도 없고 냉장고도 없고··· 뭐 이래?”
그 흔한 TV 하나가 없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역시 ‘부자들의 삶은 우리와 같은 서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몸을 움직이는데 전혀 고통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가볼까?”
방을 빠져나간 외국인이 있었지만 휴대폰도 모르고 자꾸 소영주라고 말하는 것이 약간 머릿속이 이상해 보였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이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걱정하고 있을 친구들과 부모님에게 자신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불에서 빠져나와 발을 바닥에 디뎠을 때 그제야 나는 내 몸이 작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뭐야?”
182cm라는 적당한 키에서부터 나오는 시점은 어디 가고 작달막한 키에서 나오는 시점은 간신히 진정된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왜 이렇게 작아?”
팔다리가 모두 멀쩡한데 갑작스럽게 줄어든 눈높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한쪽에 놓여 있는 거울로 눈이 갔다.
그리고 거울을 확인한 나는 턱이 벌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멍하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짝―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뺨을 강하게 때렸지만 얼얼한 통증만 올라오며 눈물만 날 뿐 꿈에서 깨는 일은 없었다.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가며 확인했지만,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이제야 12살은 됐을 법한 아이가 나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뭐, 뭐야 이게!!!”
“소영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을 때 바깥으로부터 황급히 문이 열리며 갑옷을 입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중세 시대에나 쓰일 법한 갑옷과 검을 확인했을 때 나는 정신 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음으로써 조금 편해지는 것을 선택했다.
***
“그러니까 저는 최서진이라니까요. 당신들이 말하는 라울 카스트로가 누군지 저는 몰라요. 그러니까 제발 저 좀 돌려보내 주세요.”
“흠···.”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누워 있는 침대 주변에는 남자 세 명과 여자 한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내 몸에 빛을 내거나 이상한 기분이 들게 하더니 그들끼리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흑마력의 기운은 없습니다.”
“저주도 아닙니다.”
“그럼 내 아들이 어떻게 됐다는 거야!”
“아무래도··· 기억 상실인 것 같습니다.”
“기억··· 상실?”
“네. 말에서 떨어질 때 머리를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으로 이상이 생기신 게 아니실지···.”
아니 내 기억은 멀쩡하다니까.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 그럼 기억을 되찾을 방법은 있나?”
“···죄송합니다.”
“라울아!”
하급자로 보이는 남성 두 명이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안절부절못하던 여성이 나를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경직된 상태로 여성을 떼어 놓기 위해 노력했다.
“저, 저기 저는 라울이 아니라 최서진이라니까요. 라울이 누구인지는 정말 모른다니까요!”
이런 내 모습이 그들에게는 심각한 기억 상실로 다가왔는지 더더욱 침울한 분위기로 바뀌어 버렸다.
“여보 어떡해요··· 라울이, 라울이!”
“걱정 마시오. 어떻게 해서든 라울의 기억을 되돌려 놓을 테니··· 톰! 톰을 데려와라!”
“공작님 우선 소영주님께서는 안정이 필요합니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는 것이···.”
“수고했네.”
남성 두 명이 등을 보이지 않으면서 방을 나가자 곧 자신을 구해 주었던 외국인이 시대착오적인 갑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끌려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안절부절못하는 생명의 은인을 바라보고 있을 때 공작이라고 불린 남성의 호통이 시작됐다.
“토― 옴! 네 죄를 네가 알겠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스스로가 죽을죄라고 알고 있으니 죽어야 마땅하지! 끌고 가라!”
“자, 잠시만요!”
“소, 소영주님!”
나는 톰을 죽인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 톰을 끌고 가려는 기사들을 제지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명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내가 다친 것으로 인해 톰이 책임을 지고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어찌 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생명의 은인을 죽게 만들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었다.
“라울. 너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 무리하지 말거라.”
“그, 그게 아니고 토, 톰?”
“네! 소영주님!”
“지금 톰을 죽이시려는 겁니까?”
“공작가의 식솔로서 너를 다치게 만들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더냐?”
“다치게 만들다니요! 오히려 저를 구한 사람이 톰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톰이 너를 제대로 보필했다면 그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누군지 모를 남성은 톰을 바라보는 얼굴과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너무나 달랐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여기서 가장 높은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지만 이 몸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가 불확실했다.
“저, 저기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십니까?”
“오! 이럴 수가··· 이 아비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냐.”
자신을 아버지라고 말한 남성은 정말 애석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고 그 모습에 자신의 옆에 있던 여인은 눈물을 흘렸다.
“그, 그럼 당신은···.”
“네 어미란다. 기억나지 않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자신에게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몸은 라울이라는 어린이, 정신은 27살 먹은 최서진이나 그들에게는 최서진이 아닌 라울이 보일 뿐이었다.
결국 라울의 몸에 들어와 있는 나는 이 사람들을 부모라고 여겨야 할지 아닐지를 결정해야 했다.
“네가 죄송할 게 어디 있겠느냐. 다 저 녀석이 잘못한 일을.”
“그래. 많이 혼란스럽겠지만 어떻게든 네 기억을 되돌려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순식간에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된 듯한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가야 할지 모르고 있다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무튼 톰을 살려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냐. 너의 몸을 상하게 만든 것은 죽음으로도 속죄할 수 없는 일이거늘.”
“제, 제 마지막 기억은 톰이 저를 살려 준 광경입니다. 이대로 톰이 죽는다면 저는 생명의 은인을 죽게 만든 사람이 되고 맙니다.”
“···너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을 수는 없다.”
“가, 감사합니다! 소영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끌고 가 감옥에 가두어라. 죄는 나중에 라울의 기억이 돌아오면 묻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들에 의해 방에서 끌려 나가면서도 톰은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겨우 머리 조금 다치게 만들었다고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어떻게 된 사람들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우선 조금 더 쉬도록 해라.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이 힘들 테니.”
“감사합니다.”
# 안타깝게도 나쁜 귀족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3대 제국 중 하나인 빌마이어 제국의 3명뿐인 공작의 외동아들이다. 이거야?”
“그렇습니다.”
“하···.”
나는 지금 메이드의 안내를 따라서 서재에 와 있었다.
사람이 말에서 떨어지는 걸 보호하지 못했다고 사람을 죽이려는 세상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는데 생각보다 더욱 판타지스러운 세계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어디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세계관을 파악하고 나니 톰을 죽이려고 했던 상황도 조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봉건제의 사회 속에서 평민인 톰이 귀족 중의 귀족인 나의 죽음을 방치할 뻔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외동아들이라니, 공작의 분노가 어마어마했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지금은 괜찮아. 볼일 보다가 저녁 시간이 되면 알려 줘.”
“그럴 수는 없습니다. 도련님을 절대 혼자 두지 말라는 공작님의 엄명이 있으셨습니다.”
“···그럼 알아서들 해,”
책을 읽는 것이 뭐 그리 대수라고 몇 명이나 되는 메이드들이 따라붙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아들을 잃을 뻔한 공작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불편한 것은 불편한 것이었다.
지긋―
생각해 봐라.
몇 명이나 되는 메이드들이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자신을 지켜보는 광경을, 거기에 메이드들이 모두 한 외모 하는 여성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이 집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저기요.”
“말씀을 낮춰 주십시오. 저희는 도련님의 존대를 받을 만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너무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책을 못 읽겠는데.”
최소한 곁눈질로라도 보던가, 내가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의도에서 말을 꺼냈지만 메이드들은 내가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는지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나 싶어 고민하고 있을 때 갑자기 메이드들이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기 시작했다.
“송구스럽지만 저희가 아둔하여 어떤 점이 도련님의 심기를 어지럽혔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십시오.”
“저, 저기 지금 뭐 하는 거야?”
“한 번만 용서를 부탁드립니다!”
그녀들의 반응에 깜짝 놀라 외치자 그녀들의 몸이 눈으로 보일 정도로 떨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녀들을 다시 일으키려 노력했지만, 접착제라도 발라 놓은 듯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십니까!”
다시 한번 그녀들의 외침이 서재에 울려 퍼지자 밖에서 기사가 황급히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그 기사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와 엎드려 있는 메이드들을 바라보더니 익숙하다는 듯 검을 뽑아 들었다.
“···오늘은 누구입니까?”
스릉― 하고 울려 퍼지는 검을 뽑는 소리에 메이드들의 몸이 조금 전보다 더욱 심하게 떨려 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숨기려 했지만 미처 숨기지 못한 약간의 경멸과 함께 이런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기사와 두려워하고 있는 메이드들을 보며 기사가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파악한 나는 대경실색했다.
“뭐 하는 거야?!”
“아···! 오늘은 검집으로 하라는 말씀이시군요.”
“지금 장난해?!”
다시 검을 검집으로 집어넣은 기사는 당장이라도 검집을 휘두를 듯 높이 들어 올렸고 나는 기사가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소리만 지르고 있었다.
“당장 안 내려놔?!”
“···죄송합니다.”
나는 아직도 엎드려 있는 메이드들을 간신히 진정시켜 일으켜 세우고 나서야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했다.
이 분위기에서 도저히 책을 읽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기 위해 기사와 일대일로 대화를 시작했다.
“갑자기 검은 왜 뽑아 든 거야?”
“그거야 메이드들이 소영주님께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 아닙니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에게 실수를 한 적도 없고 설사 실수했다 하더라도 검을 뽑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저는 소영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기사를 다그치자 오히려 기사는 내가 이상한 말을 하고 있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기사의 말은 내 입에서 황당한 소리를 내뱉게 만들었다.
“모두 소영주님이 지시하신 일인데 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내··· 가?”
“정말로 기억을 잃으신 겁니까?”
원래 몸의 주인이었다는 놈이 얼마나 쓰레기였길래 자그마한 실수를 했다고 검을 휘두르거나 검집으로 패려고 했을까.
거기에다 직접적으로 지시했다고 들으니 메이드들이 그렇게 벌벌 떤 것이 이해가 갔다.
기사가 경멸의 표정을 지은 것도 그런 이유였겠지.
“이후에 할 일이 있어?”
“소영주님을 호위하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그럼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명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메이드가 덜덜 떨며 가져다준 차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이 몸에게 시달렸으면 내가 한마디를 하자마자 바닥에 바짝 달라붙어서 벌벌 떨고 있었을까.
안쓰러운 감정과 함께 미안하다는 감정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번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미안해하고 있는 거지?’
그들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한 것은 27세 최서진이 아니라 12살에 불과한 라울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최서진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내가 미안해할 이유는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원래의 몸 주인이 그런 짓을 하는 데 관여한 바가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일까 생각하고 있었을 때 앞의 기사가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광경이 보였다.
하긴 주군의 아들이지만 쓰레기와 일대일로 대면을 하고 있으니 어떤 불똥이 튀길지 불안한 것도 이해가 갔다.
“일단 이름이 뭐야?”
“데런 밀러입니다.”
“나이는?”
“스물여섯입니다.”
“형님이네.”
“혀, 형님이라니 그런 말씀은 하시면 안 됩니다.”
형님이라는 한 단어에 쩔쩔매는 데런을 보면서 나는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데런의 신상 정보가 궁금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언제부터 여기서 일했어?”
“···4년 정도입니다.”
여덟 살이라···.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을 것을 생각하면 알 건 아는 나이라고 봐도 괜찮을 듯했다.
“내가 궁금한 게 있어.”
“말씀하십시오.”
“나는 어떤 놈이었어?”
“네?”
이런 질문을 받을지는 몰랐던지 약간 삑사리가 나자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리는 데런이었다.
아마 저런 행동도 이 몸의 주인이 했던 짓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 주인인 나는 삑사리가 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어. 너희들의 행동을 보면 어지간한 쓰레기였던 모양인데 말이지.”
“쓰, 쓰레기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봐. 나는 어떤 놈이었어?”
“······.”
데런은 내가 하는 말을 정말로 믿어도 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사실대로 말했다가 이 미친놈이 무슨 지랄을 할지 두려워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동안 이 몸의 평가가 궁금할 뿐이었다.
“솔직하게, 어떤 말이 나오더라도 그걸 가지고 꼬투리 잡는 일은 없을 거야.”
“···정말이십니까?”
“공증인이라도 필요하나?”
하지만 몇 년간 쌓여 왔던 감정이 한순간에 사라질 리는 없었다.
여전히 머뭇거리는 데런을 위해 공증인이라도 부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그들 속에서 나는 공증인 따위 있으나 마나 한 인간일 테니까.
“···소영주님을 믿겠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저 또한 소영주님을 모신 것은 얼마 되지 않아 소문으로 들은 정보들이 많습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 주십시오.”
“소문이든 뭐든 괜찮아. 알고 있는 대로 말해.”
데런은 다시 한번 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결심을 했는지 말을 시작했다.
한번 열린 입은 그동안 담아 두었던 것들이 많았는지 끊이지 않고 나왔으며 주변에 있던 메이드들이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였다.
데런도 창백한 메이드들의 안색을 살피고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은 듯 입을 다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는 무슨, 내가 한 일인데. 이야기가 더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이어서 말해 봐.”
“괜찮으십니까?”
나의 쿨한 반응이 이어지자 자신의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었는지 데런이나 메이드들이 놀라는 것을 알지 않으려 해도 알 수 있었다.
그전이라면 이미 목이 날아가도 한참 전에 날아갔을 상황에서 조금의 화도 내지 않자 데런도 조금 더 수월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종합해 보면 아버지의 권력만 믿고 나대는 쓰레기였군?”
“그, 그 정도까지는···.”
“뭐가 그 정도가 아니야,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쓰레기구만. 수고했어. 궁금한 점은 이제 없으니까 자리로 돌아가 봐.”
“저, 정말이십니까?”
“이야기할 게 남아 있어?”
“그, 그것은 아니지만 제 목을 치시거나 제 기사 작위를 박탈하신다거나···.”
“분명 내 입으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했을 텐데? 기사 작위에 불만이라도 있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데런이 황급히 문을 빠져나가자 서재에는 나와 메이드들만 남게 되었다.
메이드들은 아직까지도 왜 자신들의 목이 붙어 있는지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면서 그들끼리 숙덕숙덕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중간중간 나에게 들리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정말로··· 기··· 상··· 었어?”
“반응··· 보면 ··· 진··· 가 봐.”
아마 하루 만에 너무 달라진 태도에 내 기억 상실을 의심하던 메이드들이 혹시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집중해서 책을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시선이 계속됐지만, 공작의 명령이 떨어진 이상 시선을 치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감수해야만 하는 시선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개쓰레기였군.”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갑자기 시선이 확 몰리는 것을 느꼈지만 무시하고 데런과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데런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이 몸은 쓰레기 중의 쓰레기가 분명했다.
평민들을 개미 보듯 했으며 어린 주제에 성추행은 기본이었고 조금만 실수해도 감옥에 가두는 일이 빈번했다.
그 외에도 어떻게 12살이 그런 짓을 생각해 냈을까 하는 것들이 참 많았다.
“아버지에게 가자.”
“알겠습니다.”
# 과거 청산부터.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조금만 더 걸으시면 도착합니다.”
넓었다.
영주성은 더럽게 넓었다.
내가 누워 있던 방에서 서재를 갈 때에도 이곳이 넓다는 것은 얼추 체감할 수 있었지만 공작의 집무실까지 찾아가는 길은 험하지는 않았지만 어마어마하게 멀었다.
아직까지 바깥으로 나가 보지는 못했지만, 건물이 이 정도 크기이면 마당은 얼마나 넓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어쩌면 드라마에서나 보던 차를 타고 다녀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억··· 증이라··· 요.”
“근데··· 일까?”
“또 모··· 지. 기억··· 척··· 서 괴롭힐 사람을··· 있다던가.”
“무섭··· 요.”
성이 넓은 만큼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며 걸을 수밖에 없었는데 모두 허리를 숙이며 길을 비켜 주기 바빴다.
물론 내가 지나가고 나면 서로 수군수군 대느라 바쁜 것 같았지만.
청각은 좋은지 자그마한 목소리로 수군대는 것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정도로는 들려왔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내 험담을 하기 바쁘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상한 점은 억울하거나 분노 대신에 부끄럽다는 감정이 생긴다는 것이다.
내가 한 일도 아닌데 이런 감정이 든다는 것은 정신보다 육체에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는 뜻일까.
“소영주님을 뵙습니다.”
“아버지를 뵙고 싶은데요.”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집무실을 지키고 있던 이름 모를 기사가 안으로 들어가자 홀로 남은 기사가 나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메이드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기사들까지 이러고 있으니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들어오시라는 영주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안에 들어갔던 기사가 공작의 말을 전해 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자 기사는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어 주었다.
이제 그런 반응은 너무 많이 봐서 놀랍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푹 쉬라고 했는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왔느냐? 몸은 괜찮은 것이냐.”
“덕분에 멀쩡합니다. 아··· 버지.”
아버지라 말하는 내 입이 쉽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한테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27년을 길러 주신 부모님이 멀쩡히 살아 계셨다.
이제야 만난 지 며칠밖에 안 되는 중년의 남성을 아버지라고 불러야 한다니, 당연히 부르기 쉽지 않았다.
쉽게 떨어지지 않는 아버지라는 소리에 공작도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이내 안색을 회복했다.
“그래. 아직 쉽지 않겠지. 천천히 해 나가면 된다.”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뭐 있겠느냐. 일단 자리에 앉거라.”
엉거주춤하며 자리에 앉자 공작이 말을 이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부탁? 말해 보거라.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들어주마.”
“제 실수로 감옥에 들어간 이들을 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을?”
내 말에 공작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나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더냐?”
“예?”
“허어··· 네가 가둔 것이니 네가 요청하니 풀어는 주겠다만 이상한 일이로구나.”
“감사합니다.”
“너는 나가서 요한을 좀 불러오거라.”
“알겠습니다.”
공작은 옆에 있던 메이드에게 요한을 데려오라 말했고 메이드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당연하게도 나는 요한이 누구인지 몰랐다.
“요한도 기억이 나지 않느냐?”
“송구합니다.”
“괜찮다. 지금의 너를 요한이 보면 참으로 좋아할 게다.”
“하하···.”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 어색한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지금의 나를 보면 좋아할 거라는 건 예전에는 싫어했다는 뜻 아닌가.
약간은 어색할 수도 있는 시간이 지나자 밖에서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 요한입니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들어오게.”
끼익―
문을 열고 들어온 요한은 약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외모와 함께 딱 봐도 한 직책 할 것만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요한은 나와 공작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찾으셨습니까.”
“그래. 라울이 감옥에 넣으라고 한 사람이 몇 명이지?”
“죽은 이가 14명, 감옥에 갇혀 있는 이는 총 43명입니다.”
“생각보다 적군?”
“대부분 영지에서 추방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원래 주인이 개망나니라는 것은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피해자들의 상황을 듣게 되니 마음속에서 죄책감이 올라왔다.
잊고 있었던 흑역사를 다시 듣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결코 흑역사 수준으로 끝날 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기분이었다.
“라울이 할 말이 있다는군.”
“공자님께서 말씀이십니까···?”
“네. 그들을 풀어 주십시오.”
“···정말이십니까?”
요한은 내가 뭘 잘못 먹었나 싶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조금의 실수만 저질러도 검집으로 후려 패던 인간이 갑자기 자신으로 인해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을 풀어 달라고 하는 것이었으니까.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정말이에요.”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석방하도록 하겠습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마음이 바뀌기 전에 일단 실행부터 하려는지 방을 떠나려 하는 요한을 붙잡고 늘어졌다.
단순히 풀어 주는 것만으로 그동안 고통받았던 그들의 고생을 퉁칠 수는 없었다.
“허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구나. 요한.”
“예 영주님.”
“감옥에 갇혀 있는 이들은 라울과 잘 상의해서 풀어 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최종 책임자인 공작이 저렇게 말한 이상 별다른 이유만 없다면 나로 인해 감옥에 들어간 이들은 모두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요한도 찬성하면 찬성했지 반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공작에게 인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요한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어디 앉아서 이야기하죠.”
“모시겠습니다.”
터벅터벅.
휴게실로 가는 동안 나와 요한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요한이 누구인지, 어떤 종류의 사람인지 파악이 덜 끝나서 그렇고 아마도 요한은 내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에 대해 파악이 안 되서 그럴 것이다.
지금쯤 ‘기억을 잃었다더니 정말인가?’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만, 기억 상실이 아니라 아예 사람 자체가 바뀌었다고 말해 봤자 믿어 줄 것도 아니고 이제는 기억 상실로 밀어붙이기로 했다.
“깔끔하네요.”
“공작님 덕분입니다.”
테이블 위로 순식간에 간단한 간식거리들이 올려졌다.
과자가 입으로 들어갈 때마다 수제의 품격을 느낄 수 있는 맛이었다.
“그런데 누구시죠?”
그들을 풀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공작이 불렀으니 어느 정도 직책이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지만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돌아다니며 정보를 얻을 만한 처지도 아니었으니까.
서재도 오늘에서야 드나들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로 저에 대한 기억이 없으십니까?”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오히려 기억을 잃은 지금이 전보다 훨씬 보기 좋습니다.”
“···칭찬인가요?”
“단연코 칭찬입니다. 저는 카스트로 영지의 재무관으로 일하고 있는 요한 요하네스입니다. 기억을 잃기 전까지 아마 공자님이 제일 싫어하던 인물이 저일 겁니다.”
“당신을요?”
데런에게는 듣지 못했던 정보에 귀가 쫑긋했다.
아무래도 데런보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있었으니 나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알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12살짜리가 재무관을 가장 싫어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공자님의 돈줄을 최대한 막았으니까요.”
결국 돈이었다.
하긴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유흥을 즐기고 다녔겠는가.
당연히 공작으로부터 돈을 받아서 사용해야만 했을 텐데 영지의 재무관인 요한으로서는 돈 귀한 줄 모르고 써 재끼는 내가 아니꼽게 보일만도 했다.
하지만 차기 후계자가 달라는데 뭐 어쩌겠는가.
최대한 줄이기는 했어도 어쩔 수 없이 주긴 줬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 영지의 도박장에는 비상이 걸렸을 겁니다.”
“도박이요?”
“하루가 멀다 하고 도박장에 돈을 들이붓던 공자님이 며칠째 들리시지 않으셨으니까요.”
“도박도 했어요?”
도대체 이 어린 몸으로 안 한 짓이 뭐란 말인가.
12살짜리가 벌써부터 도박장이나 다니고 있고, 이대로 영지를 계승이라도 했으면 부자는 망해도 삼 대가 간다는 속담이 무색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영지 1년 세금의 5%는 공자님의 유흥비로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책에서 찾아본 영지의 크기는 만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빌마이어 제국은 제국이라는 이름다운 크기를 자랑했고 그중에서 5%에 가까운 크기를 차지하는 것이 카스트로 공작가의 영지였다.
5%라고 말하지만 전생의 나는 상상도 못 할 금액인 것은 확실했다.
“도박은 불법 아니에요?”
“공자님이 도박장의 VIP이십니다. 붙잡더라도 공자님이 곧 풀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별말씀 안 하셨고요?”
“카스트로 가문의 3대 독자가 공자님이십니다.”
3대 독자.
평범한 집안에서도 3대 독자라고 하면 오냐오냐해 주기 바쁠 텐데 공작가의 3대 독자라.
얼마나 오냐오냐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12살짜리가 도박도 하고, 수틀리면 감옥에 집어넣고 그랬겠지.
“당장 잡아들여요. 불법이라면서요. 그리고 앞으로 도박장에 가는 일은 없을 테니 유흥비는 영지를 위해 사용해 주세요.”
“정말이십니까?!”
지금까지 대화 중에서 요한은 가장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높였다.
그동안 범법자들을 놓아준 것이 몇 번인가.
이제는 잡아가도 별 신경조차 쓰지 않는 범죄자들 때문에 기사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불법이라고 잡으라고 하는 것도 모자라 유흥비를 쓰지도 않겠다니.
“그 돈으로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에게 보상금 좀 넉넉히 챙겨 주셨으면 하는데요.”
“공자님께서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말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군요.”
“하하하 솔직하시네요.”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제는 대놓고 말을 하는 요한이었다.
아마 기억을 잃기 전에 싫어했던 이유 중에는 돈도 있겠지만 할 말은 하고 사는 저 성격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게요.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죠.”
***
“그럼 치료 후에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거나 원한다면 여기에 취직을 시켜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 주세요.”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요한과 헤어지고 나서 다시 침실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이렇게 누워 있기에는 이 녀석이 한 악행이 아직 많지만, 한순간에 처리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요한 덕분에 뭔 짓을 하고 다녔는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기에 분명한 소득이 있었던 하루였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사실 할 건 많았다.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도 바꾸어야 하고 한동안 살아야만 하는 이곳에 대한 정보도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단기적인 시각을 제외하고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지구로 돌아가는 것]
부유한 귀족 가문의 외동아들인 것도 좋고, 말 한마디면 웬만한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도 좋지만 역시 나는 대한민국의 27살 회사원 최서진일 때가 가장 어울린다.
지금쯤 원래의 내 몸은 어떻게 됐을까.
적어도 시체라도 찾았을까?
매번 싸우기에 바빴던 동생은 내 죽음에 슬퍼해 줄까.
부모님이 너무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도련님. 저녁 시간입니다.”
누워 있다 보니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메이드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고 나니 창문을 통해 노을이 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공기가 깨끗해서일까 지구에서 바라보는 노을보다 훨씬 멋진 느낌이었다.
“몇 시지?”
“여섯 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미안한데 물 좀 가져다줄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제는 메이드들을 하대하는 것도, 부리는 것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예전에 추측한 것처럼 육체가 정신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았다.
차가운 물을 마시고 나니 조금 몽롱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식당으로 가자.”
“모시겠습니다.”
그동안 식당에서 밥을 먹는 인원은 나와 공작, 그리고 공작 부인뿐이었다.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면 기다렸지, 늦게 도착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서둘러 2층의 식당에 들어서자 다행히 텅 빈 테이블이 보였다.
메이드가 뒤로 당겨 준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공작과 공작 부인이 함께 식당으로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그래. 요한과는 잘 이야기했느냐?”
“네. 죄 없는 이들은 모두 풀어 주기로 했습니다.”
“잘했다.”
“몸은 좀 괜찮으냐?”
“이제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머니.”
“그래 정말 다행이구나.”
공작 부인은 나와 마주칠 때마다 내 몸 상태에 관해 물어봤다.
이런 사랑을 받았으면서 그런 짓이나 하고 다니다니, 아니 오히려 이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짓을 했던 건가?
아마 그런 짓을 해도 그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공작과 공작 부인이 자리에 앉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테이블에 식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벌써 며칠째 여기서 끼니를 때우고 있지만, 토종 한국인인 나의 입맛에는 전체적으로 너무 기름졌다.
“오늘도 속이 안 좋은 것이냐?”
“조금 그렇군요.”
하지만 요리사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의 요리가 이런 식으로 발전한 것을 어쩌겠는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처럼 절에 있을 수밖에 없으면 좋아하도록 노력해 봐야지.
요리 방법만 알았어도 재료를 구해서 어떻게 만들어 보겠지만, 라면과 3분 요리라는 문명의 이기는 4년 자취에도 불구하고 할 줄 아는 요리가 없게 만들어 줬다.
치킨 정도는 몇 번 하다 보면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치킨도 기름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주방장!”
“부르셨습니까.”
“요리를 어떻게 만들기에 며칠째 식사를 제대로 못 하는 겐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요리사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바뀌어 버린 제 속이 문제겠지요.”
“도, 도련님···!”
요리사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구원 줄이 내려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별로 놀랄 것도 없었기 때문에 식사에 집중을 했다.
요리 가지고 짜증도 많이 냈다더니 요리 자체는 맛있는 편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잠시 이야기 좀 하자.”
모두가 식사를 끝내고 식당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공작이 나를 불러내었다.
나와 공작은 소화도 시킬 겸 마당으로 나갔다.
“모두 물러나 있거라.”
“하지만···.”
“영주성 한복판에서 무슨 위험이 있겠는가.”
“알겠습니다.”
호위하는 기사들까지 물리고서 나와 단둘이 남게 되었을 때 공작이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기억은 그대로더냐?”
“죄송합니다.”
“몇 번을 말하지만 네가 죄송할 게 무엇이 있겠느냐.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거늘.”
공작은 한숨을 푹 쉬더니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공작이 무슨 말을 하려고 따로 불러내었을까 생각하며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오늘 황궁에서 연락이 왔다.”
“황궁에서요?”
“그래. 엘릭서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엘릭서라.
마법은 판타지일 뿐인 지구에서도 낯설지만은 않은 단어이었다.
결국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에서나 등장하는 단어지만 그 속에서도 전설로서 알려지는 어떠한 상처라도 치료가 가능한 물약이었는데 여기서도 다르지는 않은 듯했다.
“아마 마시기만 하면 예전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 게다.”
“그렇군요.”
“너는 기억을 되찾길 원하느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생각해 보지 않았던 말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당연히 아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공작이라면 아들의 기억을 되찾아 주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만 들으면 엘릭서를 먹을지 말지 내가 선택하라는 듯 들렸다.
“너의 과거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요한에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구나. 냉정하게 말하면 과거의 너는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공작의 입에서 쓰레기라는 말이 나오다니.
이 말을 꺼내기 위해 공작이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상상이 갔다.
기억을 잃은 아들에게 과거의 너는 쓰레기라고 말하다니, ‘혹시나 아들이 상처 입지는 않을까 그래서 과거보다 더 엇나가는 것은 아닐까.’라는 고민이 절절히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하지만 그런 너라도 내 아들이었다.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너를 감싸 줄 이유로는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며칠 전 네가 기억을 잃었다.”
공작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잠시 동안 나를 지켜보던 공작은 이내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과거의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현재의 네가 훨씬 보기 좋구나. 그래서 나는 네가 기억을 되찾지 않았으면 한다.”
사고가 났을 때만 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억을 되찾아 주겠다는 공작이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작의 목소리는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모두 자기 아들이 뛰어나길 바란다. 이 아비도 다를 바는 없었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두렵다. 기억을 되찾고 나면 네가 다시 과거의 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지.”
과연 어떻게 될까.
사실 이쯤 되니 나도 장담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정말 대한민국의 27살 최서진인지, 아니면 최서진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뿐인 라울 카스트로인지.
엘릭서를 먹어서 기억을 회복하면 내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알고 싶다.
예전에 교과서에서 호접지몽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
나비의 꿈을 꾸고 일어났더니 나비가 장자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의 상황을 한 번에 나타낼 수 있는 사자성어였다.
“그래. 그거면 됐다. 엘릭서는 최대한 빨리 가져오라고 말해 놓겠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엘릭서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
단순히 라울의 기억이 돌아오는 것뿐일까?
어쩌면 나의 인격은 사라지고 라울의 인격이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나는 다시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 자그마한 희망 때문에라도 공작의 염원을 당장 들어줄 수는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만 들어가자.”
공작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배웅을 하고서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오늘따라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
“요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카스트로 영지가 자그마한 국가 수준을 자랑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요한 혼자서 일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문제는 내가 들어옴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이 일을 멈추고 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겠지.
“말씀을 하셨으면 제가 찾아뵈었을 텐데요.”
“바쁘게 일하시는 분을 제가 오라 가라 할 수는 없지요.”
요한은 내가 불편해하는 걸 느꼈는지 장소를 옮겼다.
“아직 공자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제 업보인걸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영주성에서 이곳까지 가까운 거리도 아닐 텐데요.”
가까운 거리가 아니긴 했지만 걸어온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힘들 건 없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들을 좀 보고 싶어서요. 지금 어디에 있죠?”
“그들을요?”
“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요한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과거의 나를 대놓고 까던 요한답지 않았다.
“과거의 공자님이 아니니 그들에게 해코지를 하시려는 건 아닐 테고 사과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맞아요.”
“그렇다면 관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설마 관두는 편이 좋겠다는 말을 들을지는 몰랐던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정말로 그들에게 사과를 하고 싶은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공자님이 바뀌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공자님이 바뀌었다는 걸 모릅니다.”
“그건 상관없는 일이에요.”
“상관이 있습니다.”
요한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그에게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공자님 때문에요.”
“잘 알아요. 그래서 사과를 하고 싶다는 거잖아요.”
“공자님은 스스로 편해지기 위해 사과를 하시려는 겁니까?”
그 말에 솔직히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한 짓도 아닌 일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경계를 당하다니.
게다가 ‘나’는 불편할 이유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들을 위해 서에요.”
“그렇다면 더더욱 만나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왜요?”
“그들은 공자님의 사과를 사과로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요.”
“가식적이라는 뜻인가요?”
“공자님의 뜻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공자님이 사과하신다고 해서 그들이 사과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요한의 말에 머리를 망치로 친 듯한 충격이 들었다.
그제야 너무 내 입장만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때리던 범죄자가 갑자기 미안하다며 사과를 해도 그걸 받아들일 사람은 없겠지.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내 위치가 두려워 받아들이는 척할 뿐.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요한이 나를 말리는 이유도 납득이 갔다.
“···알겠어요.”
“건방진 소리를 했습니다.”
“아니에요. 잘 생각해 보니 요한의 말이 맞아요. 시간을 뺏어서 미안해요.”
요한과 헤어진 후 나는 다른 곳에 들르지 않고 영주성으로 돌아왔다.
내 표정을 본 데런이 “괜찮냐.”며 물어 왔지만 대답하지 않은 채 침대에 틀어박혔다.
피해자의 입장을 생각해 보지 못한 나의 실수였다.
# 엘릭서.
“자. 빨리 마셔 보거라.”
지금 내 손에는 보랏빛으로 빛나는 정체불명의 물약이 들려 있었다.
이 요상한 색깔의 물약이 정말로 기억을 되돌려 줄까?
시간을 몇 시간 전으로 되돌려 보자.
“소영주님!”
그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하루가 시작되었다.
갑작스럽게 쳐들어온 데런만 아니었어도.
항상 노크 후 들어오라는 말이 들릴 때까지 기다리던 데런이었는데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노크조차 하지 않은 채로 허겁지겁 들어온 상태였다.
“무슨 일이야?”
예상하지 못한 등장에 들고 있던 찻잔을 떨굴 뻔했지만 다행히 찻잔이 깨지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화, 황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황궁에서?”
“그렇습니다.”
갑자기 황궁에서 왜 사람을 보냈을까.
곰곰이 생각을 하다 보니 보름 전 아버지가 엘릭서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 생각났다.
황궁에서 이곳까지 만만한 거리가 아닐진대 보름 만에 왔다면 생각나는 것은 엘릭서 외에는 없었다.
“소영주님도 어서 접견실로 오라는 공작님의 명이십니다.”
“알았다. 가자.”
몇 시간 동안 머리를 쥐어짜며 설계도를 그리고 있던 종이를 서랍 안에 넣은 후에 접견실로 향했다.
누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황궁에서 사람이 온 이상 늦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소영주님을 뵙습니다.”
“들어가도 돼?”
“도착하는 즉시 안으로 들어오라는 영주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그럼 수고해.”
접견실로 들어가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처음 보는 중년의 남성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서로 모르는 사이는 아닌 듯했다.
“부르셨습니까?”
“오 드디어 왔구나. 인사해라. 내 친우인 가로우 옵시디언 후작이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라울 카스트로입니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사실인가 보구나.”
“저를 아십니까?”
“지금의 너는 모르지만 과거의 너는 잘 알고 있었지.”
“그런데 어째서 자네가 왔는가? 이런 일까지 할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을 텐데.”
“그만큼 엘릭서가 귀중하다는 뜻이지. 겸사겸사 오랜만에 자네 얼굴도 볼 겸해서 자청해서 왔네.”
대화 내용만 들어 봐도 두 분이 정말 친한 사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화기애애한 두 사람 속에서 어색하게 서 있자 아버지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듯 친우를 재촉했다.
“그래서 엘릭서는 어디 있는가?”
“가져오느라 고생 좀 했지.”
가로우 후작은 자신의 품에서 자그마한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 안에는 선명한 보랏빛을 자랑이라도 하듯 광채를 내뿜는 액체가 들어 있었다.
“자 빨리 마셔 보거라.”
가로우 후작은 나에게 엘릭서를 쥐여 주더니 흥미진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와 반대로 아버지의 표정은 초조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마시면 되는 것입니까?”
“그래.”
엘릭서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포도주스가 약간 투명해진 것 같은 색감은 마시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약간 흔들어 보니 끈적끈적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유리병의 뚜껑을 여니 은은한 향이 유리병에서 흘러나왔다.
“후우···.”
엘릭서의 양은 두 모금 정도로 매우 적었다.
천천히 입에 가져다 대면서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내 의식은 이대로 사라질까?
그럼 지구에 있는 나는 다시 살아나는 걸까?
여기 있는 몸은 다시 라울의 의식이 차지하는 걸까?
꿀꺽―
“어, 어떠냐?”
엘릭서를 다 마신 후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유리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뭐가 되었든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억이 돌아왔느냐?”
절레절레.
“그럴 리가!”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나의 표현에 아버지보다 오히려 가로우 후작이 더욱 놀랐다.
하지만 돌아오지 않은 것을 돌아왔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저 물을 마신 것처럼 나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짜 엘릭서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무렵 가로우 후작이 날뛰기 시작했다.
“지, 지금 자네 그 표정은 뭔가?!”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다는 건가?”
아버지를 보니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의혹이 담겨 있었다.
가로우 후작은 당황해서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나.”
“그런데 그 표정은 뭔가!”
“내 표정이 어떻다는 건지 잘 모르겠군.”
가로우 후작은 두 손으로 나를 붙잡더니 앞뒤로 흔들어 댔다.
몸은 앞뒤로 흔들리지만 머리는 상하좌우 가리지 않고 흔들리다 보니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정말 기억이 안 나?”
“저, 정말입니다.”
“허어··· 엘릭서가 치료하지 못하다니. 전례가 없던 일이야.”
“저 말고도 엘릭서로 기억을 되찾은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 선선대 황제 폐하께서도 어릴 적 기억을 잃었지만 엘릭서를 먹고 기억을 되찾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니.”
어찌 되었건 맥 빠지는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길 기대했던 나도, 아들이 기억을 되찾고도 올바른 길을 걸어가길 바랐던 아버지도 모두 허탈해하고 있을 때 가로우 후작은 주먹만 한 유리구슬을 꺼내 들었다.
가로우 후작은 잠시 동안 유리구슬을 바라보더니 곧 구슬 속에서 사람이 투영되었다.
[네. 알렌 워커입니다. 누구···.]
“워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가로우 후작님이십니까?]
“그래 나다!”
[얼굴이나 보자고 통신구를 쓰지는 않으셨을 거고 엘릭서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네놈이 만들었으니 네가 잘 알겠지.”
[엘릭서는 아무 문제 없이 잘 만들어졌습니다. 바꿔치기라도 당하신 거 아닙니까?]
“이놈이!”
통신구 속 인영은 심드렁한 얼굴을 하고서 귀를 후비고 있었다.
통신구를 통해서라지만 후작을 앞에 두고 귀를 후빌 수 있는 태평함에 감탄하고 있었을 때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워커 백작. 날세.”
[카스트로 공작님을 뵙습니다.]
하지만 워커 백작도 아버지의 앞에서 예를 갖추고 인사를 나눴다.
아버지는 진지한 목소리로 워커 백작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 물었고 워커 백작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나를 찾았다.
“라울 카스트로입니다.”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인가? 워커라고 불러.]
워커 백작은 나에게 엘릭서를 제대로 마셨는지, 기억 상실이 확실한지, 마신 후에 머리가 아프지 않았는지 등 몇 가지를 물어봤고 나는 내가 겪은 대로 설명을 했다.
한동안 말이 없던 워커 백작은 떠오르는 것이 있는지 입을 열었다.
[흠···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입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지금은 그 가설이라도 절실하군. 말해 보게.”
[엘릭서는 전설로야 죽은 자도 살리는 약이라지만 아시다시피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알고 있네.”
[아직까지 ‘기억’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확실한 정의를 할 수는 없지만 이 머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본론이 뭐야?”
워커 백작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툭툭 치면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성질 급한 가로우 후작은 이야기를 뱅뱅 돌리는 듯한 워커 백작을 향해 소리쳤다.
이야기를 끊고 들어오는 가로우 후작을 흘깃 쳐다본 워커 백작은 가로우 후작의 말대로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제 가설일 뿐이지만 머리에서도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 감정을 담당하는 부분, 생각을 담당하는 부분 등 이렇게 역할이 나뉘어 있을 겁니다.]
“라울은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에 문제가 생긴 거로군.”
[지금까지 기억 상실을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라울 공자는 기억을 담당하는 부분이 아예 죽어 버리고 새로 생긴 것 같습니다. 완전히 죽어 버린 이상 엘릭서로도 방법이 없죠]
“···그렇다면 라울의 기억이 돌아올 방법은 없는 건가?”
[어디까지나 제 가설일 뿐입니다만··· 가설에 근거하면 그렇습니다]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와 무슨 말로 아버지를 위로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가로우 후작을 뒤로하고 나는 워커 백작의 지식에 놀라고 있었다.
벌써 내가 이곳에 떨어진 지 3주가 되고 있었는데 그동안 파악한 이세계의 사회 수준은 지구의 중세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물론 마법의 존재로 어떤 면에서는 더 뛰어난 부분도 있었지만, 역으로 마법의 존재 덕분에 과학이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런 지식수준에서 인간의 뇌를 이 정도까지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버지 저는 괜찮습니다.”
“그, 그래! 과거의 일이 뭐 그리 중요한가. 사내라면 과거보다 미래를 생각해야지!”
그럼에도 아버지는 상심이 크신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다.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아닐세. 엘릭서를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자네는 할 일을 다 했네. 이 일은 나중에 꼭 보답하겠네.”
곧 통신구는 다시 평범한 유리구슬로 모습을 바꾸었고 방 안에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어차피 자랑할 만한 과거도 아니었고 새롭게 태어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정말 사내다워졌구나! 속 썩이던 아들이 이렇게 정신 차렸으니 자네도 너무 그렇게 슬퍼하지만 말게.”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방을 안내해 줄 테니 쉬도록 하고 저녁때 보도록 하지.”
아버지는 직접 방으로 안내해 주겠다며 가로우 후작과 함께 접견실을 빠져나갔고 곧이어 나도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접견실을 나섰다.
구상하고 있는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었다.
“소영주님!”
문밖으로 나서자 데런을 포함한 호위기사들과 메이드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 내가 기억과 함께 옛날의 포악함을 되찾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듯싶었다.
“기억은 무사히 되찾으셨습니까?”
그나마 최근에 나랑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데런이 나서서 질문했다.
“엘릭서도 소용이 없더라. 방으로 돌아가자.”
“모시겠습니다!”
되찾지 못했다는 말에 순식간에 목소리가 밝아졌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소영주가 상처를 회복하지 못했다는데 기뻐하다니, 이런 불경한.’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말 없이 넘어갔다.
이제는 메이드들조차 나를 볼 때마다 불안해하던 것이 많이 사라졌으니까.
슬슬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희망을 걸었던 지구로 돌아갈 방법이 하나 무산됐지만 실의에 빠지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쉽게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 만년필.
“와! 그런 게 있으면 정말 편하겠네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만드는 거죠?”
“그건 이제부터 네가 생각해 봐야지.”
문과와 이과의 차이 中에서.
***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나는 지금 방 안에서 초조하게 누군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똑똑―
“소영주님. 조제가 왔는데 들여보낼까요?”
“어서 들어오라고 해.”
끼익―
“소영주님 명령하신 물건입니다.”
“오! 드디어 완성한 거야?”
“여기 있습니다.”
나는 뚜껑으로 닫혀 있는 나무상자를 열었고 상자 안에는 내가 그토록 원했던 물건이 낯익은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
“아오. 시발!”
벌써 몇 번째 잉크통을 엎지르는 것인지 모르겠다.
간단한 글을 쓰려고 해도 이세계의 필기도구는 내게 너무 불편했다.
공기 중에 오랫동안 접촉하면 쉽게 응고돼서 쓰지 않을 때는 뚜껑을 닫아야 했는데 매번 그러자니 매우 귀찮기도 했고 그렇다고 뚜껑을 안 닫고 사용하자니 가끔 잉크통을 손으로 치면서 엎지르는 경우도 있다 보니 현대의 훌륭한 필기도구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깃펜이라는 로망 덕분에 참아 가면서 사용하려 했지만 결국 로망이 로망으로만 남게 된 이유를 깨달아 가고 있었다.
“소피아!”
“부르셨습니까?”
안타깝게도 이세계에서는 귀족들은 전부 깃펜을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짧은 수명과 자주 잉크를 충전해 줘야 한다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깃펜을 대신할 필기도구가 없는지 의문이었다.
아마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깃펜이 불편하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비교할 만한 필기도구가 없다시피 했으니까.
“여기 좀 치워 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소피아가 엎질러진 잉크를 닦는 동안 곰곰이 만년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생일도 다가오고 있으니 겸사겸사 만들어서 선물도 겸하면 좋을 것 같았다.
“소피아 혹시 주변에 대장간이 있어?”
“대장간은 소음 탓에 조금 오래 가셔야 하는데 준비할까요?”
바깥을 보니 아직 해가 다 떠오르지도 않았다.
점심을 바깥에서 먹는다고 치면 저녁까지는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점심은 바깥에서 먹을 테니까 준비해 줘.”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소피아와 다른 메이드들의 도움을 받아 대장간에 나갈 준비를 했다.
매번 옷을 갈아입는 때마다 메이드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니 이것도 나름대로 익숙해졌다.
“데런. 밖으로 나갈 거야. 따라올 거지?”
“저야 항상 소영주님 곁에 있을 겁니다.”
처음에는 경멸의 표정을 지었던 데런도 이제는 나를 모시는 것에 별 부담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나에 대한 시선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이 슬금슬금 눈에 띌 정도로 보이고 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가까운 대장간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30분 동안 마차를 타고 이동하니 대장간이 모여 있는 상업 지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영지 소속의 대장간으로 들어갔다.
“헉! 소영주님 나오셨습니까!”
영지에 내 얼굴을 나쁜 의미로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영지에 고용됐다고 할 수 있는 대장간의 직원이 나를 못 알아본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호들갑 떨지 말고 수석 대장장이에게 안내해 줘.”
“넵! 모시겠습니다!”
땅― 땅―
바깥에서도 들리던 철을 두드리는 소리는 작업장 안으로 들어가자 귀를 막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 정도로 울려 퍼졌다.
귀를 해칠 정도의 소음에 자연스럽게 얼굴이 찌푸려지자 직원이 미리 준비해 놓은 듯한 솜을 건네주었지만 현대의 이어플러그에 비하면 안 낀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제롬 대장장이님! 소영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뭐?”
제롬은 황급히 자신이 만들고 있던 농기구를 보조 대장장이에게 맡긴 후 라울을 데리고 작업장을 빠져나갔다.
최근에 성격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는 말이 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겪어 보지 못한 제롬에게 라울은 걸어 다니는 폭탄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괜히 눈 밖에 나가는 일이 없도록 제롬은 최선을 다했다.
“이 먼 곳까지 무슨 일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까? 부르셨으면 제가 갔을 텐데요.”
“항상 수고하는데 시간 남는 사람이 왔다 가야지.”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시간 남는 대장장이 있나?”
“누구의 명인데 시간이 없겠습니까. 말씀만 하시면 바로 만들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품에서 설계도를 꺼내 제롬에게 보여 주었다.
내 기억에 의존해서 그려 내긴 했지만 만년필의 구조는 잘 알고 있었으니 크게 차이가 나진 않을 것이다.
차이가 있을지라도 점점 고쳐 나가면 내가 알던 만년필에 가까워지지 않겠는가.
제롬은 처음 보는 설계도에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건 무엇입니까?”
“닙이라고 하는 부위인데 금으로 만들어 줄 수 있나?”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크기는···.”
그 뒤로 한참 동안 설계도에 대해서 설명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구조의 물건에다가 만년필이 원리는 간단해 보여도 실제로 만들려면 복잡한 구조를 자랑했기 때문에 나도 설명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으니 몇 번 만들다 보면 쓸 만한 물건이 나올 것이다.
“저 혼자서는 기술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과 공유를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완성되면 제 아들을 시켜 영주성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부탁 좀 하지.”
“맡겨만 주십시오.”
오 일 뒤에 제롬으로부터 물건을 전달받았다.
“이게 첫 시제품이야?”
“아버지께서는 설계도를 그대로 따라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복잡했을 텐데 고생 많았네.”
일단 겉보기로는 내가 알던 만년필과 다른 점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모든 물건이 그렇듯 겉만 완벽하다고 해서 제대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조심해서.
벅벅―
역시 처음부터 성공할 수는 없다는 것일까.
미리 준비해 놓은 잉크를 충전하고 글씨를 써 봤지만 메인 잉크 채널이 너무 넓었던 탓인지 제대로 잉크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반드시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만년필을 보면서 경을 칠 거라고 생각했는지 조제는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고 내 설계도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조제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조립되어 있던 만년필을 해체해서 조제에게 보여 주었다.
“여기 이 관 보이지? 이걸 아주 조금만 더 작게 만들어서 가져와 봐.”
“알겠습니다!”
“단번에 성공할 거라고 생각 안 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만들어 와.”
“네!”
조제가 방 밖으로 나가자 기대에 차 있던 얼굴이 맥 빠진 얼굴로 변한 데런이 질문했다.
“그런데 굳이 그 만년필이라는 걸 만드실 필요가 있습니까? 깃펜으로도 글은 잘 쓸 수 있는데요.”
“너는 부엌칼과 명검이 있으면 뭘 쓸래?”
“당연히 명검이죠.”
“그거랑 똑같은 거야.”
마차가 있는데 자동차를 발명한 것처럼.
활이 있는데 총을 발명한 것처럼 더 높은 효율을 위해 발명한 사례는 세지 못할 정도로 많다.
만년필도 필요한 이유도 깃펜이 불편하니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조제가 나를 찾아왔다.
그때마다 나는 해결책을 아는 것은 수정하게끔 했고 모르는 문제는 몇 번이나 시도해서 결국 제대로 된 만년필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게 그 만년필입니까?”
“그래. 일단 작동은 제대로 하네.”
쓱쓱―
아직 손에 익지 않아서 필기감이 어색하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쓰다 보면 나만의 필기구가 완성되는 것이었다.
전생에도 이 필기감에 푹 빠져서 만년필을 애용하곤 했다.
“몇 자루나 더 만들 수 있지?”
“틀은 잡혀 있으나 세세한 부분은 직접 세공을 해야 해서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미안하지만 몇 자루만 더 부탁할게. 비용은 내가 요청했다고 하고 받아 가.”
“최대한 빨리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만년필을 만들었다는 만족감에 종이를 몇 장이나 도배를 하고서야 테이블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
“요새 제롬의 아들이 자주 찾아온다고 들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숨길 생각도 없긴 했지만, 아버지가 이 일을 거론하실 줄은 몰랐다.
사실 더 놀라운 것은 아버지가 제롬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지만.
“그렇습니다.”
“뭔가 필요한 것이 있느냐?”
“아닙니다. 거의 완성 단계에 있습니다. 걱정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한 달 뒤에 손님들이 오기 시작할 게다.”
그러고 보니 만년필을 만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여유가 있었던 아버지의 생신이 벌써 한 달 가까이 찾아왔다.
“심려 끼치지 않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래. 지금의 너라면 믿을 수 있지.”
어깨를 두들기며 격려를 해 주던 아버지는 갑자기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황녀 전하께서도 오신다고 하시니 실망시키지 않도록 해라.”
“황··· 녀 전하께서요?”
“그러고 보니 알려 주는 걸 깜빡했구나. 네 약혼 상대이니까 말이다.”
“네?”
# 황녀, 만년필 그리고 마법.
빌마이어 제국의 황성.
제국의 황제가 머무르는 이곳에서 한 남성과 소녀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있었다.
“저는 절대로 안 가요!”
“아버지의 명령이야. 그렇게 고집을 부릴 일이 아니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 인간은 꼴 보기도 싫다고요!”
“하아···.”
현 황제에게는 1명의 황후와 4명의 첩을 두었는데 황후로부터 1남 1녀를, 4명의 후궁으로부터 4남 2녀를 슬하에 두고 있었다.
아직 후궁들의 아이들은 태어난 지 10년도 되지 않았으나 1황자인 아벨 빌마이어 와 1황녀인 아리엘 빌마이어는 각각 18살, 14살이었다.
그중에서도 아벨 빌마이어는 어떤 면에서나 뛰어난 모습을 보이며 자타 공인 차기 황제로 유력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아벨에게도 고민거리는 존재했으니 앞에서 떼를 쓰고 있는 자신의 동생 아리엘이 그 고민이었다.
‘왜 아버지께서는 아리엘까지 동행을 하라고 하셨는지···.’
아리엘이 카스트로 영지로 가지 않으려 고집을 피우는 이유는 아벨도 잘 알고는 있었다.
[라울 카스트로.]
일찍이 아버지와 카스트로 공작의 약속으로 인해 아리엘과 라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약혼을 하게 된 사이였다.
당연하게도 어릴 때부터 망나니라고 소문났던 라울을 아리엘이 좋다고 할 리가 없었고 그와 반대로 라울은 아직 채 피지 못했음에도 뛰어난 외모를 자랑하고 있던 아리엘에게 추파를 보내기 일쑤였다.
결국 얼굴 한 번 보고 나서부터 아리엘은 라울을 보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 이번에는 황제가 아리엘을 콕 집어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라울과 대면을 해야만 했다.
황제의 명령은 절대적이었고 황녀의 신분인 아리엘이라 할지라도 명령은 실패를 하더라도 일단 수행해야만 했다.
그런데 아예 수행조차 하지 않겠다며 고집을 피우고 있으니 아벨로서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기껏해야 이틀일 뿐이야. 그게 그렇게 힘드냐?”
“오라버니는 그 눈빛을 안 보셔서 그래요! 소름 끼친다고요!”
“그래서 네 기분 때문에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겠다고?”
“······.”
차마 명령을 어기겠다는 말은 꺼내지 못하는 아리엘이었다.
아리엘 그녀도 그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의 아버지인 이반 빌마이어 황제는 딸내미가 싫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명령을 뒤바꿀 사람이 아니었다.
“소문에 의하면 라울 공자가 기억 상실에 걸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더라.”
“흥! 제 관심을 끌기 위한 개수작일 뿐이겠죠.”
“글쎄, 아버지께서 엘릭서까지 내리셨다는 걸 보면 진짜일 확률이 높아 보이는데.”
“그런 망나니에게 엘릭서가 쓰였다니, 차라리 국경에서 죽어 가는 병사를 살리는 게 더 좋았을 텐데요.”
아리엘은 그냥 기억을 잃은 김에 콱 죽어 버렸으면 싶었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크게 경을 칠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카스트로 가문은 제국의 기둥이었고 라울은 그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으니까.
아리엘이 황녀라 할지라도 대놓고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기억을 되찾았데요?”
“아니, 워커 백작의 말로는 소용이 없었다고 하더구나.”
“아까운 엘릭서만 날려 버렸네요.”
“아무튼 보름 뒤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출발할 거다. 가기 싫다고 한다면 묶어서라도 데려갈 테니 그리 알고 있어라.”
“오라버니!”
“알아들었으리라고 믿는다.”
어찌 보면 매정하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아벨로서도 어떻게 해 줄 방법이 없었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그 녀석을 싫어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황제 폐하가 결정하신 일에 토를 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마음이 바뀌거나 소문이 소문으로 끝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이건 뭡니까?”
“만년필이라고 하는 건데 한번 써 봐.”
황실에서 황녀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그 스트레스의 장본인인 나는 요한을 만나고 있었다.
서른 초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카스트로 영지의 재무관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 딱지치기로 얻은 것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뛰어난 능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궁금한 점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았다.
“만년필입니까? 조제가 공자님의 방을 발에 불이 나도록 오간다더니 그 물건인가 보군요.”
“고생 좀 했지.”
“어떻게 사용하는 겁니까?”
나는 조제가 추가적으로 만들어 온 만년필 한 자루를 요한에게 보여 줬다.
제롬은 제롬대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숫자를 생산할 수는 없었지만, 요한에게 선물을 할 정도는 되었다.
“신기하군요. 잉크도 묻히지 않았는데 글을 쓸 수 있다니.”
점점 만년필을 바라보는 요한의 얼굴이 흥미롭게 변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필기도구의 혁신이라고도 할 수 있었으니까.
“원래 만년필은 남에게 빌려주지 않는 건데 한번 써 봐.”
추가로 나는 내가 사용하던 만년필을 꺼내 요한에게 건네주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꽤나 많은 양의 글을 썼기 때문에 만년필은 어느 정도 나에게 맞춰져 있었다.
새 만년필 대신 내가 사용하던 만년필을 사용한 요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건···.”
“필기감이 다르지?”
필기감을 위해 많이 쓰긴 했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알아차리기 힘든 미묘한 차이였을 텐데 그 차이를 알아낸 요한에게 감탄을 내뱉었다.
“불량품입니까?”
“말하는 것 하고는, 사람마다 필기체가 똑같을 수 없는 것처럼 만년필도 똑같은 게 없는 거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만년필의 펜촉을 보여 주며 설명을 이어 갔다.
“글을 써 가면서 아주 조금씩, 조금씩 펜촉이 마모되는 거야.”
“그럼 안 되는 게 아닙니까?”
“아니지. 그게 만년필의 장점인걸. 그렇게 펜촉이 마모되면서 사용자의 필기 습관에 길들어진, 단 하나뿐인 나만의 만년필이 완성되는 거야.”
“흠···.”
그래도 여전히 요한은 아직까지는 아리송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경험에 의해 이게 팔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와는 다르게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요한이었다.
“일단 써 봐. 써 보고 이야기하자고.”
“알겠습니다.”
“원래는 몇 년은 써야 체감할 수 있는 건데 요한은 펜 쓸 일도 많잖아? 금방 차이점을 알게 될 거야.”
미심쩍어하는 요한을 어서 사용해 보라며 밖으로 내보낸 이후에 나는 만년필을 분해했다.
지금으로도 만년필의 역할은 충분히 해 줄 수 있었지만 조금 더 개량할 여지는 있었다.
한동안 나의 손은 만년필로부터, 눈은 설계도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아버지를 찾아가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아버지는 너무나도 흔쾌히 허락했고 나는 그날부터 가문의 마법사와 함께 공부를 시작했다.
“마나를 느끼시는 게 빠르시네요. 엘릭서를 먹어서일까요?”
“사샤의 수업이 좋아서라고 하면 어때?”
“말씀만이라도 감사하네요.”
마법을 배우기로 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내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내 위치상 호위도 없이 혼자서 돌아다닐 일은 별로 없겠지만 이세계는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세계였다.
스스로를 보호할 안전장치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두 번째로는 연금술에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가치 없는 금속을 금으로 만들기 위해 발전했다는 연금술.
이세계도 크게 차이는 없었다.
값싼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하지만 그냥 금을 사는 것이 이득이니 소용없는 이야기지.”
“연금술에 흥미가 있으세요?”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연금술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생각하지도 않았던 공돌이 기질이 슬금슬금 올라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세계에서는 마법이라는 학문 덕분에 과학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현상을 재현해 낼 수도 있었다.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잉크를 충전하지 않아도 되는 만년필처럼.
“그래도 연금술에 본격적으로 입문하려면 룬 마법은 필수로 익히셔야 해요.”
이세계의 연금술은 사실상 마법진으로부터 시작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법진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론 룬 문자.
그런 룬 문자를 이용하는 룬 마법은 연금술을 위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학문이었다.
“우선 룬 문자를 외우는 것부터 시작이에요.”
사샤는 종이 위로 룬 문자를 그려 나에게 보여 주었다.
총 24자로 구성된 룬 문자는 한글로 비유하면 자음과 모음이었다.
각각의 룬 문자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서 불을 뿜어내기도 하고 물을 생성하기도 하는 마법진을 만들 수도 있었다.
내가 한참 룬 문자를 그리며 외우고 있을 때 사샤가 신기하다는 듯 물어봤다.
“그런데 왜 연금술은 배우시려는 거예요?”
“이유가 필요해?”
“꼭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연금술을 배우려는 사람은 거의 없는걸요.”
사샤의 말처럼 대부분 메이지가 되려고 하지 연금술사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연금술사의 특성상 전투력은 메이지에 비해 부족했고 바탕이 되는 룬 마법도 사용하는 것에 있어 조건이 까다로웠다.
엘릭서를 제조할 수 있는 워커 백작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천대받는 직업이었다.
“흥미 하나만으로도 배우려는 이유는 충분하지.”
“하긴 도련님이시니까요. 아 그거 잘못 쓰셨어요.”
이야기를 하느라 흐트러진 글씨를 사샤가 지적했다.
생전 처음 보는 문자를 쓰다 보니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실패하곤 했다.
조금의 차이도 용납하지 않는 문자이다 보니 한 획을 그을 때마다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그런데 정말 편리하네요. 중간에 잉크를 묻힐 필요도 없고.”
“부럽지?”
“네. 저도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지금은 힘들고 나중에.”
사샤에게는 미안했지만 아무나 선물할 수는 없었다.
펜촉이 금으로 만들어야 하는 만큼 하나하나가 기본적인 제조 가격이 비싼 측에 속했다.
물론 귀족들에게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긴 했지만 말이다.
광고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만년필은 곧 귀족들 사이에서 필수품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
“공자님!”
요한에게 만년필을 선물해 준 그날부터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평소와 같이 마법서를 뒤지며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연락도 없이 요한이 나를 찾아왔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이거, 이거···!”
요한은 급하게 뛰어온 모양인지 숨을 헐떡이면서도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들어 올렸다.
지친 몸과는 다르게 요한의 눈은 흥분으로 젖어 열정을 품고 있는 듯했다.
“쓰다 보니까 다르지?”
“네. 정말 달랐습니다. 공자님을 뵈러 오는 길에 깃펜은 전부 버리면서 왔거든요.”
요한에게 만년필을 선물해 준 지 고작해야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카스트로 영지의 재무관으로 일하고 있는 요한의 작업량은 말이 필요 없었다.
일하는 거의 모든 시간을 서류와 함께 동고동락하는 처지의 요한이다 보니 만년필이 효과를 깨닫는 것도 남들보다 빠를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만년필을 맛본 이상 깃펜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펜촉이 마모되어 가면서 필기체에 펜이 맞춰지다니···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대충 얼버무렸지만 요한은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던 모양인지 캐묻지 않고 넘어갔다.
이후에 해야 할 일에 비하면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팔릴까?”
“팔립니다. 문제는···.”
“문제는?”
“광고입니다.”
요한은 역시나 내가 고민하고 있던 부분을 정확하게 찔러 왔다.
나와 요한은 만년필을 직접 써 봐서 어떤 부분이 좋은지 알고 있었지만, 만년필을 사용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따로 잉크를 묻히지 않아도 되는 깃펜으로 보일 수도 있었으니까.
예비 구매자들에게 깃펜과는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라는 것을 인지시켜 줘야만 했다.
“만년필이 사용자에게 길들기 전까지는 조금 편리한 펜 정도로 생각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걸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데? 오랜 시간 사용하면서 나만의 만년필을 만드는 게 만년필의 최대 장점이라고.”
“장점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눈을 확 끌어당길 만한 요소가 필요한 건 사실입니다.”
나와 요한은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면 눈 높은 귀족들이 만년필에 매달리게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외형은 이대로도 괜찮습니다. 금으로 만들어진 펜촉은 눈에 확 들어오니까요. 깃펜 하나도 최고급을 고집하는 귀족들에게 플러스 요소면 플러스지. 마이너스 요소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많이 팔 수는 없을걸? 잘만 관리하면 반평생도 사용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건 조금 더 고급화하면 됩니다. 오히려 그 점을 부각하면 고급품의 이미지를 부여할 수 있겠죠.”
하지만 계속된 회의에도 어떻게 하면 깃펜에 익숙한 귀족들을 만년필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을지에 대한 방안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귀족들을 모아 놓고 쇼케이스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귀족들에게 선물을 할까? 호기심에 써 보긴 할 거 아니야. 자연스럽게 입소문도 날 테고.”
내 제안에 잠시 생각을 하던 요한은 좋은 방법이 떠올랐는지 박수를 쳤다.
“보름만 있으면 영주님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귀족들이 몰려들 겁니다. 몇 분에게 시험 삼아 드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아버지에게 선물으로 드리려고 했는데 좀 그렇지 않나?”
“그러니까 격이 되는 분들에게 자연스럽게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퍼져 나가겠죠.”
요한은 문득 생각나는 점이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는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도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두 분에게 선물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는 마법을 배우느라 정신이 팔려 잠시 까먹고 있었던 황녀에 대해 떠올렸다.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영지에 찾아온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마법을 공부하느라 황자와 황녀에 대해 정보를 수집할 시간이 부족했다.
요한은 뭔가 알고 있지 싶어 물어보자 금세 입을 열었다.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는 어떤 분들이야?”
“모르십니까? 조금만 노력해도 금방 아실 수 있을 텐데요. 공자님과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닌데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좀 바빴어.”
“아무리 바쁘셔도 이번엔 좀 심하셨습니다. 당장 보름 후면 오시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물어보잖아. 설명이나 해 줘.”
요한은 잠시 떠오르는 말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더니 오랜만에 진중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지금 현 황제 폐하이신 이반 빌마이어 폐하께서는 한 분의 황후 마마로부터 1남 1녀를 얻으셨습니다. 이번에 오실 아벨 전하와 아리엘 전하입니다.”
“나이는?”
“공자님보다 각각 6년, 2년 많으십니다. 우선 아벨 전하는 가장 유력한 황위 계승 1순위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문무 양면으로 천재 소리를 들으셨고 백성을 사랑하고 부패한 귀족을 찾아내서 엄벌하는 등 마치 신께서 축복하신 듯한 성장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와는 완전 반대잖아?”
“지금의 모습이라면 그렇게까지 밀리시지도 않습니다. 사샤에게 듣자 하니 벌써부터 간단한 마법 정도는 사용하신다면서요?”
“사샤가 입이 가볍네.”
“사샤도 입이 근질근질할 겁니다. 그래도 저에게만 알려 줬으니 모른 척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감출 생각도 없었으니까. 황녀 전하는?”
사실 황자는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요한에게 들어 보니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성장 스토리였고 그 뒤로는 들어 봤자 아래로는 존경받고 위로부터는 인정받는, 듣지 않아도 뻔히 예상되는 스토리는 들어 봤자 시간만 아까웠다.
“황녀 전하보다 황자 전하가 훨씬 중요하신데 말이죠.”
“어차피 뻔하잖아. 넘어가자고.”
“정 그러시다면 황녀 전하로 넘어가겠습니다. 황녀 전하는 아무래도 대외 활동의 비율이 낮으시다 보니 황자 전하에 비해 정보가 적습니다.”
“내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있어?”
“일단 황녀 전하는 공자님을 엄청나게 싫어하십니다. 아니 거의 혐오한다는 표현이 맞을 겁니다.”
이런 젠장할.
아무튼 과거의 인연 중에서는 도움이 되는 인연이 없었다.
똥은 예전 주인이 싸질렀는데 왜 치우는 건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째 날 좋아하는 사람이 없냐.”
“뿌리신 대로 거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구체적으로 황녀 전하에게 내가 뭔 짓을 했길래 혐오까지 가는 거야?”
뭘 잘못했는지 파악은 하고 있어야 화해의 물꼬라도 틀어 볼 것이 아닌가.
1황녀가 나를 질색한다는 것은 높은 확률로 1황자도 나를 싫어한다는 건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장차 제국의 황제가 될 황자와의 사이가 틀어진 상태로 지속되는 것은 내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우선 약혼 자체가 황제 폐하와 공작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겁니다. 황녀 전하의 의지는 포함되지 않았죠.”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물론 그것만 가지고 싫어하신 건 아닙니다. 4년 전이었나요? 지금과 비슷하게 공작님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당시 14살, 10살이셨던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가 영지를 방문하셨습니다. 아리엘 황녀님은 당시부터 아직 여물지 않은 꽃으로 이름이 높았지요.”
왠지 그때 당시의 상황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미쳐 날뛰는 망나니와 자존심 높을 고고한 꽃의 조합이라니, 이후의 일은 듣지 않아도 뻔한 것 아니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라고 해 줘 제발.”
“공자님이 생각하시는 그대로 일 겁니다. 그동안 황녀 전하를 소문으로만 들었던 당시의 공자님은 실제로 황녀 전하를 보시고서는 눈이 돌아가셨죠.”
“그, 그만···!”
“참다못한 황녀 전하께서는 공자님의 뺨을 후려갈기셨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공자님과 황녀 전하가 만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내가 상상한 그대로의 스토리였다.
만약 이런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었다면 상상력이 빈곤하다며 타박을 줄 정도로 뻔한 스토리였다.
문제는 그 뻔한 스토리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용케 약혼이 유지되고 있네.”
“황제 폐하의 명은 지엄한 법입니다.”
결국 황제의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파혼될 수 있는 관계라는 뜻이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이 약혼자인 것도 억울한데 첫인상부터 제대로 엉망이었다.
차라리 파혼을 하고 관계를 정리하는 게 마음이 편할 수도 있었다.
“엉망진창이네.”
“어쨌든 이번에는 얼굴을 마주치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때 달라진 공자님의 모습을 보여 주면 달라지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리가. 이미 첫인상이 이보다 나쁠 수가 없는데, 아마 지금쯤 기억을 잃은 것도 자기한테 관심 끌려고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할걸.”
“그렇다고 안 만나실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요한의 말처럼 안 만날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황녀가 원하는 대로 “우리 파혼하자.”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애초에 약혼 자체가 황제와 아버지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황제의 명을 무시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황녀 전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만년필을 어떻게 하면 더 잘 팔 수 있을지나 생각해 봐.”
“알겠습니다.”
알아서 잘하겠다는 내 말에 약간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우지 못한 요한이지만 명백한 축객령에 방을 나갔다.
요한이 나가고 난 방에서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에 빠졌다.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황녀의 호감도를 올려서 나에 대한 인상을 바꾸던가.
어떻게든 무사히 파혼을 하던가.
“에이씨. 내가 언제부터 멀리 있는 일을 생각했다고. 어떻게든 되겠지.”
아직 아버지의 생신까지는 보름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에 비하면 황녀에 대한 건은 여유가 넘치다 못해 한숨 자고 일어나도 될 정도의 문제였다.
미래의 일은 미래의 내가 해결해 주기를 바라며 현재의 나는 현재의 일에 신경을 쓰기로 했다.
“어디 보자···.”
미래의 내가 아닌 현재의 나에게는 황녀보다는 한창 배우고 있는 마법이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 아버지의 생일 파티.
요한과 만년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날로부터 보름이 흘렀다.
아버지의 생신은 당장 코앞으로 다가왔고 제국의 수많은 귀족들이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카스트로성으로 몰려들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런 귀족들을 맞이하는 건 내가 할 몫이었다.
“몇 명이나 올라갔지?”
“열여덟 명입니다.”
초청장을 받은 귀족들만 벌써 열여덟 명을 넘겼다.
그 외에도 아버지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몰려드는 귀족들까지 세다 보면 끝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제 몇 분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참으시죠.”
어차피 내가 나서서 맞이해야 하는 귀족들은 초대장을 받은 귀족들뿐이었다.
제국에서도 한 끗발 날리는 수준의 귀족은 되어야 초대장을 받을 수가 있다 보니 그들을 맞이함에 있어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황자 전하와 황녀 전하는 어디쯤이신가?”
“30분 전에 외성을 통과하셨다고 하니 조금 있으면 보이실 듯합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 멀리 황실의 깃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온 사람들이 그냥 커피였다면 황자와 황녀는 T.O.P였다.
나는 조금이라도 풀어졌을지 모르는 긴장감을 다시 가다듬으며 황자와 황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자 전하, 황녀 전하.”
“···흥.”
나는 두 눈 가득 경멸을 담은 황녀의 눈빛을 보고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말조차 섞으려 하지 않는 황녀를 곤란한 눈으로 쳐다보던 황자는 황녀를 대신해 나와 인사를 나눴다.
“오랜만이네. 기억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몸은 괜찮은가?”
“황제 폐하의 은혜로 다행히 무사합니다.”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승마조차 못 할 줄은 몰랐네요.”
“아리엘!”
말하는 저 싸가지 좀 봐라.
‘얼굴이 마음만 못하다.’라고 평한 사람들의 머리를 이곳에 데려와 황녀의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 봤자 내가 잘못한 게 너무 많아서라고 말하겠지만.
그 말을 내뱉은 황녀는 더 이상 나의 얼굴을 보고 서 있기도 싫었던지 사람들을 재촉해 영주성으로 들어갔다.
얼떨결에 나와 남게 된 황자는 당황했다는 것이 눈에 띄었는데 아무리 황녀라고는 하나 황녀가 나에게 보여준 언행은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다.
“아리엘을 대신해서 내가 사과하겠네. 먼 거리를 이동하느라 조금 피곤한가 보군.”
“괜찮습니다. 아버지께서 두 분 전하를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들어가시지요.”
“실례하겠네.”
먼저 지나가 버린 황녀를 뒤따라 황자까지 내성으로 들어가자 생각보다 쉽지 않겠다는 걸 깨닫고 한숨을 내쉬었다.
말조차 섞으려 하지 않는 황녀와 무슨 수로 써야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어떠십니까?”
“뭐가?”
“관계가 어쨌든 공자님의 약혼자가 아닙니까. 지금의 공자님에게는 처음으로 보는 약혼 상대인데 첫인상이 어떻습니까?”
“첫인상은 무슨, 나랑 말도 안 하려는 거 안 보여?”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요한을 타박했다.
옆에서 내가 개무시를 당하는 걸 뻔히 봤으면서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궁금했다.
더욱이 황녀는 아직 14살이었다.
이제야 갓 중학생이 되었을 아이를 상대로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는 저 너머로 귀족들이 몰려오는 광경을 보면서 다시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
“힘드네,”
“이제 연회장에 나가실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좀만 쉬었다가 하자. 하루 종일 사람들을 맞이하느라 지쳤다고.”
발부된 초대장의 숫자와 하나의 오차도 없이 초대장을 수거하자 나도 사람들을 맞이하는 걸 그만두고 내성으로 들어왔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기 때문에 시작하기 전에 들어가 있기 위해서는 나도 빨리 준비를 해야 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알았어. 가면 되잖아.”
메이드들에게 고집을 부려 봤자 없던 시간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고 지친 몸을 이끌고 메이드에게 움직임을 맞춰 주었다.
간신히 의복을 갖춰 입자 더 이상 늦장을 부리면 정말 안 될 것 같은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는?”
“영주님께서도 준비를 하고 계실 겁니다.”
“그래?”
서둘러 아버지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연회의 주인공답게 예복을 갖춰 입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라울입니다.”
“너도 너 나름대로 바쁠 텐데 어쩐 일이냐?”
“연회장에 들어가기 전에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들어가서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네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리는 자리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라고 믿는다.”
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의복을 정리하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입장해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기억을 잃어버렸다죠?”
“완전히 사람이 바뀌었다는군.”
이세계로 넘어온 후 시간이 지나면서 한동안 듣지 않았던 수군거림이었지만 여전히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수군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열심히 수군대라며 속으로 씹어 대며 조금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앉았다.
“이게 누구야! 라울 공자 아니신가?”
이제 쉬면서 아버지가 연회장으로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던 내 앞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물이 다가왔다.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임에도 숨길 수 없는 껄렁거림은 내가 기억을 잃기 전 알고 지냈던 인물임을 짐작게 했다.
“누구십니까?”
“왜 이래? 우리 사이에, 도박장을 휩쓸고 다니던 우리의 우정을 잊어 먹었어?”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겠고, 딱히 친해지고 싶지도 않습니다. 좀 비켜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 새끼가, 친한 척해 주니까 기어오르려고 해?”
순식간에 욕설을 내뱉는 개념 없는 녀석에게 손을 써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연회장에 집사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메로 카스트로 공작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집사의 한 마디에 약간 소란스러웠던 연회장이 순식간에 적막에 감겼다.
내 앞에 있던 양아치 또한 아버지가 들어온다는 말을 들었는지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고 자신이 있던 자리로 물러났다.
자리로 돌아가는 마지막까지 양아치다운 모습을 보여 주며 내 눈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도대체 예전의 라울은 얼마나 호구 짓을 했기에 저런 녀석에게도 얕잡아 보였던 걸까.
공작의 아들이라는 위치를 생각하면 이렇게 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기억할 가치조차 없어 보이는 양아치를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문이 열리며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두 내 생일을 맞이하여 먼 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아버지는 천천히 연회장을 둘러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미소를 지으셨다.
“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내 아들이 큰 사고를 무사히 넘긴 것을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하오. 라울!”
사전에 이야기하지 않은 말에 당황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자신에게 다가오라며 손짓했다.
잠시 머뭇거리며 당황하던 나는 곧 표정을 가다듬고 아버지가 앉아 있는 단상 아래로 다가갔다.
“누구보다 네게 먼저 축하한다는 말을 듣고 싶구나.”
그 말을 듣자 나는 왜 아버지가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망나니였던, 아직도 어리긴 하다만 비비 꼬인 전형적인 양아치 같은 성격을 가졌던 라울이 제 부모에게라고 살갑게 대할 리가 없었다.
거의 100% 확률로 물주 취급하지 않았을까 싶다.
“당연히 제가 제일 먼저 축하드려야죠. 정말 축하드립니다. 아버지.”
“···지금이라도 그 말을 해줘서 고맙구나.”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나는 미리 정성껏 준비한 만년필을 꺼내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렸다.
포장되어 있어서 상자 안에 든 선물이 무엇인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의 감동은 있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를 달래자 주변에서 더 난리였다.
“제가 몇 년 동안 빠짐없이 왔었는데 라울 공자가 공작님의 생신을 챙기는 건 처음 보네요.”
“소문이 사실이었단 말이야?”
“우리 아들도 한번 기억을 잃게 해야 하나?”
뒤에서 다른 귀족들이 뭐라 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아버지는 상자를 열어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나에게 물었다.
“이건 무엇이냐?”
“만년필이라고 합니다.”
어느새 요한이 종이를 가져왔고 아버지께서는 만년필을 이용해 글씨를 쓰시더니 이내 만족한 웃음을 얼굴에 띄웠다.
“필기감이 아주 좋구나. 정말 고맙다.”
“별말씀을요.”
이렇게 공개적으로 선물을 전달하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는 아버지의 말처럼 내가 바뀌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그동안 카스트로 공작의 유일한 오점으로 소문났었던 내가 기억을 잃은 후 예의 바른 행동과 한 번도 준비하지 않았던 선물을 준비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원래 잘했던 놈이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놈이 잘하면 훨씬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원리였다.
두 번째로는 요한과 이야기했다시피 만년필을 알리기 위해서.
처음에 생각했던 건 자연스럽게 만년필을 어필하는 것이었는데 조금 다른 의미로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있었다.
필기도구로서의 ‘만년필’을 알린 것이 아니라 라울 카스트로가 처음으로 카스트로 공작에게 선물한 선물로서 관심을 끌었지만 어찌 되었건 관심을 끄는 것 자체는 성공했으니 만점은 아니더라도 8~9점은 줄 만한 성과였다.
내 뒤로도 값진 물건들이 아버지에게 바쳐졌지만 내 만년필보다 더 기쁜 선물은 없었던 듯 그 이상의 미소를 보여 주지는 않으셨다.
“모두 정말 고맙소. 모두 좋은 추억 남기길 바라겠소.”
아버지의 그 말을 시작으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연회가 시작되었다.
***
“공작님께서 걱정을 더시겠어.”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던가? 자네에게 딱 맞는 말이로군.”
“기회를 잡기 위해서 노력해야지요.”
“그 마음가짐을 잘 간수하거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회장은 자연스럽게 세 무리로 나뉘었는데 우리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중년의 귀족들, 그리고 황자를 중심으로 한 젊은 귀족들.
마지막으로 나와 같이 연회에 어울리지 못하거나 지쳐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이들이었다.
“에구구, 졸리다.”
이런 파티는 친구들과 몇 번 놀러 간 것이 고작인 나에게 격식을 차려야 하는 연회는 매우 지치는 일이었다.
게다가 칭찬도 한두 번 들어야지, 같은 칭찬을 여러 사람에게서 듣는 것도 고역이었다.
연회에 참석한 아버지뻘의 귀족들을 한 바퀴 돌고서 체력이 방전된 나는 쉬기 위해 연회장 구석으로 피신했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
아무런 걱정 없이 술을 마시며 춤을 추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문득 해운대에서 같이 놀고 있었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내가 혼자서 밤바다에 뛰어들지만 않았어도 우리는 즐겁게 술을 먹고 놀면서 세상 걱정 없다는 듯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물론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호사는 누리지 못하고 회사에 매달려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생각하면서 사색에 잠겨 있자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거는 것이 느껴졌다.
“지쳐서 앉아 있다니 자네답지 않군.”
“황자 전하.”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자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서 말을 걸고 있었다.
원래 황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장소를 살펴보니 아니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황자 저하께서 웃음이라도 터트리시면 저 사람들이 저를 죽이려고 달려들 것 같습니다.”
“자네를 위해서라도 웃지 않도록 노력해야겠군.”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지요. 그런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첫인상과 다르게 유머를 유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싶어서 찔러봤는데 표정이 바뀌지 않는 것이 둘 중의 하나다 싶었다.
나를 정말 혐오하지만 그걸 숨기고 있거나, 나에 대해서 크게 별생각이 없거나.
“자네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어서 말이야.”
“저보다는 저기에 있는 황자 전하와 말 한마디 섞어 보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자네와의 이야기가 끝나면 그러는 게 좋겠군.”
“차후에 저들이 저한테 고마워할지 미워할지 모르겠군요.”
다시 저들에게 황자를 돌려보낼 나를 고마워할지, 자신들이 황자와 이야기할 기회를 없애 버린 나를 미워할지는 저들의 선택에 달렸지만 아마 미워하는 쪽이 100%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눈빛만 모아도 사람 한 명은 죽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황자가 마음대로 찾아온 건데 원망은 내가 받고 있었다.
“미워하면 어떤가. 내가 황자고 자네가 카스트로 가문의 후계자인데, 미워해 봤자 저들이 할 수 있는 건 없다네.”
“그도 그렇군요.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약간 편하게 앉아 있었던 자세를 고쳐 앉았다.
조금 전까지는 나와 황자 사이의 가벼운 조크에 불과했다면 지금부터는 황제와 공작의 후계자들의 대화가 될 터였다.
내가 자세를 고쳐 앉자 황자의 눈빛이 바뀌었다.
“예전의 자네였다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바뀌긴 한 모양이군.”
“다들 그렇게 말하더군요.”
“기억을 잃은 건지, 아니면 연기를 하는 건지는 몰라도 제국의 큰 복이로군.”
“그전까지는 큰 흉이었다는 말씀이시군요.”
“뭐, 아리엘에겐 큰 흉이었겠지.”
생각하지 않았던 황녀의 이름이 나왔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황녀에 대해서는 별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나쁜 인상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만큼 황녀에게 내가 큰 흉이든, 복이든 나에게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었다.
“뭐, 황녀 전하의 걱정이 사라졌다는 말로 듣겠습니다.”
“내가 말을 잘못했군. 큰 흉이라네.”
그래서 뭐 어쩌라는 표정으로 황자를 쳐다보았다.
무례라면 무례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할 말을 빙빙 돌리는 건 내가 싫어하는 행동 중 하나였다.
어느 나라에서는 직설적인 말을 피하는 것이 예의라고 하지만 나는 직설적인 말을 좋아했다.
게다가 과거형이든 현재형이든 뭔 상관이란 말인가.
이미 나는 바뀌었고 그걸 받아들이는 건 황녀의 몫인데.
“현재형이시군요.”
“아리엘과는 이야기를 나눠 봤나?”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이 너무 파격적이라 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더군요.”
“비집고 들어가려곤 했나?”
황자는 내 옆에 놓인 의자를 뒤로 빼더니 자리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길어질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아리엘이 행복했으면 하네.”
“행복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의 아리엘은 행복해하지 않지.”
슬슬 황자가 왜 나에게 찾아왔는지 알 것 같다.
내가 정말로 바뀌었다면 황녀와의 관계도 개선을 해 보라는 뜻인 것 같은데,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겠지만 다른 사람의 입으로 “이것 좀 해!”라는 소리를 들으면 더 하기 싫어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겠는가.
“황녀 전하께서는 저와 이야기조차 나누려 하지 않으시는데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은 있나?”
“저를 싫어하는 사람이랑 어떻게 결혼을 하겠습니까. 어떻게든 매듭을 풀어야지 않겠습니까.”
물론 푸는 방법이 하나하나 풀어 나갈지, 누구처럼 칼로 잘라 버릴지는 모를 일이었다.
황자에게는 안타깝게도 나는 일방적으로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달라붙을 정도로 대인배는 아니었다.
“그러면 지금 테라스로 가 보는 것이 어떤가?”
황자는 오른손으로 한쪽의 테라스를 가리켰다.
황자의 말을 조금만 생각해도 그곳에서 황녀가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야 상관없지만 황녀 전하가 저랑 이야기를 나누려 할까요?”
“그건 걱정하지 말고 가 보게”
나는 황자의 강제 섞인 요청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은 그래도 나를 다시 봤다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면 지금은 나를 여전히 싫어하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그래도 메이드들이나 요한, 데런과 같이 내가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면 황녀의 경우는 정반대의 입장이었다.
쉬려고 구석으로 도망쳤던 건데 혹 하나를 떼려다가 더 붙인 격이 되어 버렸다.
황자가 가리켰던 테라스로 들어가니 역시나 황녀가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고개를 획 돌려 버렸다.
내 예상대로였다면 꼴도 보기 싫다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거나 사라지라며 소리칠 줄 알았는데 황자에게 한 소리 들은 모양이었다.
“연회는 즐기고 계십니까?”
“할 말이 있으면 빨리하고 꺼져요. 오라버니의 말이 아니었으면 당신과 이야기할 일도 없을 테니까.”
첫 마디를 듣자마자 쉽게 가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호감도를 ―100부터 +100까지 나타낼 수 있다면 황녀가 나에게 가진 호감도는 ―50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무슨 말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야 할지 잠깐 고민을 했지만, 위에서 말했듯 나는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파혼하시겠습니까?”
황녀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정반대를 보고 있던 얼굴을 휙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황녀의 표정은 분명 당혹과 짜증이 섞여 있는 표정이었다.
“뭐라고요?”
“파혼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말씀드렸습니다.”
여전히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저나 황녀 전하나 서로 원하지 않는 관계이지 않습니까. 굳이 관계를 이어 나갈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말하는 거예요? 기억을 잃었다더니 머리까지 같이 이상해진 모양이죠?”
“그럴 리가요. 기억을 잃은 건 사실이지만 머리는 다친 곳 없이 멀쩡합니다.”
정상적인 생각으로 말했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황녀는 정신 나간 사람을 보는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몇 초간 황당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은 황녀는 곧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쳐다보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왜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아! 알았어요! 그럴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파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황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파혼은 있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나는 왜 그렇게까지 단호할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것까지 설명해 줘야 하나요?”
“저는 오히려 왜 그렇게까지 부정적이신 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희 둘의 결혼은 아버지와 카스트로 공작님의 약속이에요. 우리 둘이 파혼하고 싶다고 깨트릴 수 있는 약속이 아니라고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황녀에게 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파혼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희 둘이 파혼하고 싶다고 해서 파혼할 수는 없다면 황제 폐하께서 저희를 파혼시키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면 됩니다.”
“반역이라도 저지르시게요?”
“그건 저한테 일방적으로 피해가 오지 않습니까. 파혼하고 싶은 건 황녀 전하이신데 저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럼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하죠?”
이제야 들을 마음이 생겼는지 그제야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어차피 내가 뭘 어떻게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결혼할 상대를 데려오십시오.”
***
“결혼할 상대를 데려오십시오.”
“뭐라구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고서부터 황녀의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자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황녀가 황당해하건 말건 내가 할 말을 이어 갔다.
“단! 황제 폐하에게 황녀 전하와 결혼함으로써 저보다 더한 이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으로요.”
“당신 정말 제정신이에요?”
황녀는 손가락만 머리에 가져다 대고 돌리지 않았을 뿐이지 미친놈을 본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린 소녀가 그런 눈으로 쳐다보자 마음 깊숙한 곳에서 아픔이 느껴졌지만 최선을 다해 그 눈빛을 무시했다.
“그러면 제가 먼저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파혼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황제 폐하께서도 혼인으로 인한 이득을 얻음과 동시에 저희 아버지와의 사이도 틀어지지 않으실 테니 파혼을 생각해 보시지 않을까요?”
“당신··· 진심이군요?”
“저는 처음부터 진심이었습니다.”
내 말을 들은 황녀는 머뭇거리더니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에요.”
“왜입니까?”
“애초에 당신보다 조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 봤자 다른 제국의 1황자 정도는 돼야 할 텐데, 다른 제국의 황자들은 전부 결혼할 상대가 정해져 있다고요.”
그 점까지 신경 쓰지는 못했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방법을 말할 뿐이고 실행 여부는 황녀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까.
“그거야 황녀 전하께서 어떻게든 하실 일이지요.”
“그런 무책임한···!”
“무책임하다뇨. 예로부터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닙니까.”
너무나 당연한 나의 말에 반박할 말이 없는지 황녀는 입을 다물고 부들부들했다.
파혼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먼저 입에서 꺼낸 것은 나였지만 나보다는 황녀가 더욱 원하는 일이었으니까.
다른 일이었다면 다른 이들에게 우물을 파게 한 후 가장 먼저 물을 마셨을 황녀였지만 이 건은 오직 나와 황녀, 둘만의 문제였다.
“···꼴 보기 싫으니까 사라져요.”
“혹시 다른 방법이 생각나시면 최선을 다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론 그 최선은 내가 피해를 입지 않을 때의 최선이긴 하지만 말이다.
표독한 표정의 황녀를 테라스에 남겨 두고 연회장으로 돌아오니 그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황자가 보였다.
황녀와 이야기한 내용을 미주알고주알 알려 줄 생각도 없었고 황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주변을 벗어났다.
“별문제는 없지?”
“네. 딱히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없고, 음식들도 충분합니다.”
연회장 바깥으로 나가자 진두지휘를 하고 있던 요한을 볼 수 있었다.
직책은 재무관인데 영지의 중요한 일들은 거의 요한을 거치는 걸 보면 대단하다 싶었다.
“황녀 전하와 이야기 좀 나누셨습니까?”
“말도 마라. 몇 마디 하다가 꼴 보기 싫다고 사라져 달란다.”
“그래도 이야기는 나누셨군요.”
그게 파혼에 대한 이야기이긴 했지만 말야.
물론 조금 전에도 말했듯 내가 나서서 파혼을 할 생각은 없었다.
현 황제의 사위이자 차기 황제의 매제가 되는 일이었다.
황녀와의 결혼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내가 공작가의 후계자이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고서도 어마어마한 이득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 이득을 내가 스스로 걷어찰 이유가 없었다.
물론 황제가 “너희 파혼해!”라고 하면 한 치의 미련도 파혼하겠지만 황녀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런 이유도 없이 황제가 먼저 파혼하라고 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 보였다.
그런데 왜 파혼이라는 이야기를 꺼냈을까.
글쎄··· 심술이 났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연회장에서 안 보이시던데.”
“공작님께서는 정원으로 가셨습니다.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 혼자서?”
“예.”
이번에야말로 쉬려고 했는데 내 방으로 돌아갈지 아버지를 찾아 정원으로 향할지 고민하다가 정원으로 향했다.
방으로 돌아가 봤자 얼마 쉬지 못하고 다시 내려올 바에야 정원 쪽이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
“그럼 수고해.”
“네. 공자님도 즐기시길 바랍니다.”
요한과 헤어지고 정원으로 나서자 테라스에서 불었던 바람과는 다른 느낌의 바람이 불어왔다.
아무리 테라스라고 해도 건물 안과 건물 바깥의 차이였을까, 분수대로 향하니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네가 여기에는 무슨 일이냐?”
“잠깐 쉬려고 바깥으로 나왔는데 아버지가 공원에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냐.”
아버지는 분수대에서 올라오는 물줄기를 주시하시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황녀 전하와는 이야기해 보았느냐?”
역시나, 황자와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주목을 끌었나 보다.
황자와 이야기한 직후 테라스로 향했으니 어느 정도 눈치가 있다면 내가 누구를 만나기 위해 테라스로 향했는지는 알아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워낙 인상이 나쁜 탓에 이야기 몇 마디 나눈 것이 끝입니다.”
“황녀 전하께서도 곧 네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실 거다. 아직은 네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실 뿐이다.”
“저만 잘하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구나.”
이야기가 끝나고 부자간에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아버지가 머뭇거리는 걸 보면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입을 달싹거리시는지 궁금했다.
“너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들어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구나.”
“앞으로는 수없이 들으실 겁니다.”
“그래. 그럴 거라고 믿는다.”
부자간의 훈훈한 정이 오가던 저녁이었다.
다행히 그날 연회는 아무런 사고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제국에서 3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공작과 차기 황제로 유력한 황자가 참여한 만큼 사고를 칠만한 인물은 없겠지만 술이 들어가면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연회에서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성을 떠나는 귀족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다음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건 제 선물입니다.”
수많은 귀족들을 일일이 배웅해 주느라 고개를 수십 번은 숙인 것 같았다.
다른 귀족들이 모두 떠나자 마지막으로 황자와 황녀가 출발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족한 점이 있으십니까?”
“잘 챙겨 주신 덕분에 부족한 점 없이 충분합니다.”
조금 더 시간이 흘러서 마지막 짐까지 수레에 싣자 황자와 황녀가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먼 길 가시는 동안 아무런 사고도 나지 않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고작해야 보름인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요.”
하기야 사고가 발생하라고 기도를 해도 사고의 ‘사’ 자도 보이지 않을 길이 카스트로성과 수도의 도로였다.
제국의 수도와 최대 크기의 영지답게 주기적으로 순찰을 돌고 있었으며 잘 정비된 도로는 수십 명이 한꺼번에 다녀도 될 만한 크기를 자랑했다.
“다음번에는 웃는 얼굴로 뵀으면 좋겠습니다.”
“······.”
하루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뚱한 표정의 황녀를 뒤로하고 황자와 헤어짐의 인사를 나눴다.
외성 멀리 사라지는 황자 일행을 보면서 이제야 끝났다는 후련함이 마음을 채웠다.
“그럼 손님들도 돌아갔고 나도 내 할 일을 해 볼까.”
뒷정리?
그런 건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그건 바로 수면을 취하는 일이지.
연회가 끝날 때까지 남아 있어야 했던 것도,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 인사를 해야 하느라 쌓였던 피로를 풀 시간이 되었다.
***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아버지의 생일 파티가 끝난 지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초여름이었던 계절도 이제는 늦여름이 지나가고 있었고 건조한 기운도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대단하세요! 고작해야 3개월이 지났을 뿐인데 룬을 전부 사용하실 수 있으시다니!”
“고작해야 한 글자일 뿐이야.”
“에이, 겸손해하시긴! 재능 있다는 자들도 4~5년은 걸려야 가능한걸요.”
“칭찬은 됐고,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3개월 동안 놀고먹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한 듯 드디어 24개의 룬 문자를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샤는 이렇게 재능이 있었는데도 어릴 때부터 마법을 배우지 않은 걸 아쉽게 여기고 있는 듯했지만 안타까워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진도를 나가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다음 위계는 룬 문자를 조합해서 단어를 만드는 건데···.”
“건데?”
“여기서부터는 가르쳐 드릴 수가 없어요.”
“갑자기 왜?”
갑자기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는 사샤를 바라봤다.
내가 알기로는 사샤는 단어를 넘어서 룬 문자로 문장을 발현할 수 있는 단계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마법사가 다음 위계의 마법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현재 위계에 익숙하다는 걸 증명받아야 해요.”
“누구한테?”
“배우고자 하는 다다음 위계에 있는 마법사에게요.”
“귀찮게··· 영지의 다른 마법사분에게 증명하면 안 되나?”
“어차피 증명서를 받으려면 본인이 마탑에 가야 해서요.”
“귀찮게··· 그냥 배우면 안 돼?”
“안타깝지만 불법이라서요.”
괜히 자신의 능력도 가늠하지 못한 채로, 무리하게 마법을 사용하다가 리바운드로 피해를 입는 걸 방지하기 위해 생긴 법이라는데, 어길 놈들은 어긴다지만 나와 같은 귀족들이 어겨서 좋은 꼴을 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수도에 갔다 와야 하나?”
“이 이상 배우고 싶으시다면요. 수도에는 볼 것도 많으니 한번 가 보시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이세계로 넘어온 뒤로 카스트로성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점을 한 번 인지해 버리니 성안에 머무르는 것이 답답하게 느껴져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
“수도에? 괜찮겠지.”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오랜만에 마탑에 들러 스승을 만나겠다는 사샤와 호위를 맡은 데런 외 4명의 기사와 병사 수십과 함께하는 여행이 시작되었다.
<『착한 귀족이 되어보자』 1-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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