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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으로 떨어진 남자 1화

2018.12.03 조회 1,814 추천 16


 1.
 
 
 「YOU DIED.」
 
 어느새 까맣게 물들어 버린 시야 가운데로 떠오른 것이었다. 피 묻힌 손가락으로 휘갈겨 쓴 듯한 그 문구를 마주하는 순간 나는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아, 이번에는 진짜 느낌 좋았는데에에에······.”
 빈말이나 핑계 삼아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다.
 랜덤으로 돌려서 나온 난이도도 좋았고, 첫 번째 거름망이라고 부르는 대역병에서 이익까지 챙기면서 살아남았으니까. 그 뒤에 이어지는 대전란에서도 승리하는 쪽에 붙어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고생에 고생을 거듭하면서 쌓은 힘을 이용해 막 세력을 넓히려는 순간······.
 “거기서 뒤통수가 말이 되냐고!!”
 나는 애꿎은 바닥을 주먹으로 두들겼다. 쾅쾅하는 소리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흔히 샷건이라고 부르는 행위였다. 아까운 것도 사실이었고, 예상치 못한 뒤통수에 화가 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이렇게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게임을 파고든 이래로 게임 오버를 당하는 것쯤은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으니까.
 그럼에도 과한 액션을 취한 것은 지금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을 수많은 ‘시청자’들이 고통 받는 내 모습을 보고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한 연출이었다.
 바닥에 좌절 자세로 엎드린 채로 티 나지 않게 눈을 굴리자 채팅창 위로 떠오르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채팅창은 어느새 ‘ㅋㅋㅋㅋㅋ’로 도배되어 있었다. 조금 전의 행동이 의도한 대로 먹혀들었다는 증거였다.
 “아니, 여러분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충성도가 99! 99였다구요! 100에서 단 1점. 딱 1점 모자랐을 뿐인데 배신이라니! 통수라니이이!”
 
 「변명 역겹죠?」
 「아, 현웃 터졌다.」
 「100도 아닌데 믿은 게 잘못이지.」
 「맞아. 강화 확률이 100퍼라고 적혀있는데도 실패하는 겜도 있었는데 뭘.」
 「헬조선겜이 조선했을 뿐인데 무슨 문제라도?」
 「근데 좀 오바긴 했다. 충성도 90 넘기는 게 얼마나 힘든데 99에서 배신이라니.」
 「오늘 꺼 레전드 영상각. 인정?」
 「크, 비올레타가 뒤에 서 있다가 그대로 스트리머 등에 칼 꽂는 거 소름. 스트리머한테 동기화하고 있다가 지릴 뻔했자너.」
 「사실 지린 건 아니고?」
 
 채팅창을 확인하고 있던 나는 시청자들의 신경이 분산되기 시작했음을 깨닫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진짜 엔딩 볼 수는 있는 겁니까? 벌써 99회차거든요? 저는 한 게임 이렇게 오래 해 본 적은 처음이에요.”
 
 「뭐지? 자기과시?」
 「근데 공략신 정도면 자기 과시 할 만하지.」
 「그럼 뭐해 못 깨고 있는데.」
 「이데아가 그만큼 갓겜이란거지. 갓겜 이데아 차냥해.」
 「그건 인정한다.」
 
 채팅창 위로 떠오른 반응을 살피고 있던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공략신.
 취미 삼아 즐기던 게임의 플레이 영상을 우연찮게 동영상 사이트에 올린 것을 계기로 내게 붙은 칭호였다.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 자랑스러운 칭호였다. 그만큼 사람들이 내 실력을 인정해 주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럼, 뭐해.’
 물론, 지금 현실은 게임 하나를 깨지 못해서 그것에 매달려있는 신세였지만 말이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그런 이가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아,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이로서 99회차 공략 녹화를 마치겠습니다.”
 그렇게 클로징 멘트를 던진 나는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플레이 내내 이어지고 있던 녹화를 종료했다. 지금부터는 방송을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다시 한 번 인터페이스를 조작하자 까맣게 물들어 있던 주변의 풍경이 평범한 방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방 가운데에 놓인 책상에 앉은 나는 올라오는 채팅 중 몇 개에 답변을 해 주며 방송을 끝낼 타이밍을 쟀다. 그러고 있으니 내 시선을 사로잡는 질문이 있었다.
 
 「근데 다음 회차가 100회차죠? 100회차인데 어떤 플레이를 보여 주실 건가요?」
 
 ‘읔······.’
 벌써 100회차라니. 생각해 놓은 것이 없었던 나는 볼을 긁적였다. 뭘 하면 좋을까? 그런 고민이 이어지려는 찰나 머릿속에서 뭔가가 번뜩였다.
 “보고 싶은 거 있으세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시청자들에게 선택권을 넘기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생각이 든 즉시 입에서 튀어나온 내 물음에 채팅창 위로 시청자들의 욕구가 듬뿍 담긴 리퀘스트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몇몇 이들은 꼭 보고 싶은 플레이가 있었던 것인지 후원까지 서슴지 않았다.
 쏟아지는 요청을 하나하나 읽으며 머릿속으로 검토하던 내 눈앞으로 1,000,000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누군가 후원으로 100만 원을 쐈다는 것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메시지를 확인하는 즉시 나는 몸을 일으켰다. 여러 번에 나눠서 그 정도 금액을 하는 이는 있어도, 한 번에 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100만 원 후원 감사드립니다. 훌라 님!”
 
 「퍄 100만 원······.」
 「건물주님 클라스······.」
 「이거 후원하신 분 리퀘 받아 드려야 되는 거 아니냐?」
 
 채팅창 분위기가 그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물론 개중에는 반대하는 의견을 내는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과한 것만 아니라면, 들어줘도 괜찮을 분위기였다.
 “훌라 님? 혹시 보고 싶은 플레이가 있으신가요?”
 
 「최약 캐릭터로 어디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지 생존 플레이 좀 볼 수 있을까요?」
 「오, 괜찮을 듯.」
 「오랜만에 공략신 클라스 나오나?」
 
 그리고 리퀘스트 내용도 나쁘지 않았다. 최약체 플레이는 기본적으로 웃음을 이끌어 내기 좋은 소재인 데다가 불리한 조건을 실력으로 극복해 내면 보고 있는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감탄을 이끌어 낼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감탄은 곧 후원으로 이어지고 말이다.
 “좋습니다. 다음 회차 플레이는! 누가 봐도 최약체인 캐릭터를 이용해 이데아 속에서 얼마나 살아남을 수 있을지! 생존 플레이로 가보겠습니다!”
 「와, 다음 플레이 꿀잼각일 듯.」
 「ㅇㅈ 치킨 시켜놓고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빨리 쉬고 돌아와라.」
 “내일은 휴방이니까 하루 쉬고, 주말인 토요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 토요일에 봬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방송을 종료했다. 방송을 종료하고 나니 피로가 몰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캡슐에서 나갈지, 아니면 모레 방송에 쓸 캐릭터를 미리 만들어 둘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생각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번에 끝내 놓고 푹 쉬자.’
 특정한 콘셉트를 잡고 그에 걸맞은 캐릭터를 선택하는 것은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그걸 방송을 켠 채로 하는 이들이 있기는 했지만, 내가 볼 때 그것은 보러 온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세팅 정도는 미리 끝내 놓는 것이 맞으리라.
 결정을 내린 나는 인터페이스를 조작해 조금 전까지 내가 플레이하던 게임을 다시 실행시켰다. 평범한 방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듯 무너졌다. 무너지는 그래픽 위로 새로운 풍경이 덧씌워졌다. 울창한 숲과 그 숲에 둘러싸인 대리석으로 된 건물이었다.
 하늘을 가리고 있는 거대한 나무들 사이로 새어나온 빛이 건물을 비출 때 눈으로 들어오는 광경은 몇 번을 보아도 신비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신전의 안쪽으로 향했다.
 신전 내부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였다. 99번이나 왔던 곳이니까. 나는 플레이어가 신전 내부에 발을 들여놓으면 안내를 위해 나오는 신관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우측으로 방향을 꺾었다.
 쭉 뻗어진 복도를 따라 내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이 멎었을 때 내 눈앞으로 등장한 것은 나무로 된 거대한 문이었다. 그것에 손을 가져다 대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문에 달려 있는 녹슨 경첩이 내지르는 끼익 하는 비명 소리는 덤이었다.
 천천히 열리는 문 사이로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틈이 생겼을 때 나는 더 기다리지 않고 그 사이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간 나를 반긴 것은 거대한 도서관의 풍경이었다. 쭉 늘어선 책장과 그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책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사람을 압도하는 뭔가가 있었다.
 끝을 모르고 뻗어져 있는 풍경에 잠시 시선을 두고 있던 나는 그것을 옆쪽으로 돌렸다. 옆으로 돌아간 내 시선이 닿은 곳에는 나무로 된 카운터와 그것을 지키고 있는 한 명의 여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살포시 지은 미소와 함께 던져진 인사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몇 번을 보아도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는 미모였다. 이데아의 그래픽은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생생하기로 유명했는데 지금 눈앞의 여성의 외모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현실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게임 속 세계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미모도 미모였지만, 그녀의 몸에 감도는 신성함 때문이었다. 잠시 넋을 놓고 눈 안으로 들어오는 풍경을 감상하던 나는 다시금 떠오른 미소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아, 그······ 책을 찾고 싶은데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몸을 숙였다. 어깨에 살짝 걸쳐져 있던 그녀의 탐스러운 금발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비 내린 뒤의 숲속에서 맡을 수 있을 법한 청량한 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뭔가를 내려놓을 때 날 법한 탁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리자 동그란 수정 구슬 하나가 비어있던 카운터 위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내려놓은 여성은 이미 뒤로 물러난 지 오래였다.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기꺼이 카운터 쪽으로 다가가 그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구슬과 맞닿은 손바닥에서 약간의 서늘함이 느껴짐과 동시에 눈앞으로 익숙한 창이 떠올랐다.
 도서관 내부에 있는 책들을 검색하기 위해서 마련된 창이었다.
 ‘이게 없었으면······.’
 수억 권이 훌쩍 넘는 책들을 일일이 뒤져 보며 원하는 책을 찾아야만 했으리라. 그 사실을 떠올리며 쓰게 웃은 나는 눈앞으로 떠오른 창에 손을 가져갔다.
 창 하단부에 있는 조건검색란을 펼친 나는 그곳에서 난이도 버튼을 눌러 그것을 조정했다.
 ‘별 네 개 반부터 다섯 개까지······.’
 최고 난이도와 그 바로 아래 단계까지로 조건을 설정한 나는 그대로 검색 버튼을 눌렀다. 잠깐의 로딩 끝에 검색 결과가 눈앞으로 나열되기 시작했다.
 나열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던 갱신이 끝나자마자 맨 위에 있는 것부터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책들의 내용은 설정해놓은 난이도답게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폐렴에 걸린 빈민가의 고아.
 사형을 이틀 앞둔 사형수.
 성병에 걸린 창남까지.
 ‘흠······.’
 빠르게 내용을 훑던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이거다!’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우면서도 어찌어찌 헤쳐 나갈 수 있을만한 여지가 있는 게 좋은데 말이지······.’
 사실 위에 것들도 극한 난이도에서의 생존 플레이가 콘셉트라는 조건에 부합하기는 했다. 누가 봐도 살아남기 어려워 보이는 상태였으니까. 그러나 그것들은 시청자들의 니즈를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뭐하지만, 내 방송의 콘셉트는 피지컬을 내세운 공략 방송이었으니까.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와 이걸 어떻게 깨.’라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한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내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그것을 헤쳐 나가는 플레이일 터였다. 그냥 꽥하고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머릿속에 새긴 채로 책들을 확인하던 작업을 이어 나가던 나는 눈 안으로 들어오는 한 책의 설명에 시선이 고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삼촌에게 가주 자리를 빼앗긴 조카라.’
 나쁘지 않은 소재였다. 일단 초반부터 삼촌이라는 뚜렷한 적이 존재하는 상황이었으니까. 흥미가 돋은 나는 책의 내용을 조금 더 면밀하게 살피기 위해 그것을 클릭했다.
 눈을 가늘게 좁힌 채로 책의 내용을 꼼꼼히 살피던 나는 입꼬리가 점점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책의 내용을 살피면 살필수록 스트리머로서의 촉에 찌릿찌릿하고 감이 왔기 때문이었다.
 ‘이건 된다.’
 책의 내용을 끝까지 살핀 나는 확신했다. 이걸로 100회차 플레이를 한다면 대박이 터질 것이라는 걸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가진 바 능력을 십분 발휘할 필요가 있겠지만.
 결정을 내렸으니 더 고민할 필요가 없는 상황.
 나는 책의 번호를 확인한 뒤에 수정 구슬에 가져다 대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결정하셨나요?”
 “네.”
 그에 맞춰 다시 내 쪽으로 다가온 여신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65967646번으로 부탁드립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여신관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이 닿아 있던 곳에서 가죽으로 된 표지를 가진 책 하나가 떨어졌다. 그것을 받아드는 여신관의 행동은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이건······.”
 “음?”
 “여기 있습니다.”
 건네받은 책을 품에 안고 도서관을 벗어나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여신관의 얼굴 위에 번진 미소가 막 돌아가려던 내 몸을 붙잡았다. 그림으로 그대로 옮긴다면 단번에 명화의 반열에 올라갈 법한 모습. 그러나 내가 멈춰 선 것은 그 모습이 아름다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특별함.
 나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스타팅 구간만큼은 완벽하게 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번 달라졌던 플레이와는 다르게 이 스타팅 구간의 내용은 99회차 동안 전혀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신관의 얼굴 위로 떠오른 자그마한 미소. 그로 인해 그 예상은 깨어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왜 그러한 일이 발생했냐는 것인데.
 ‘이벤트······인가?’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플레이를 99회차 동안이나 반복하는 사이에 내가 만족시킨 어떠한 조건이 방아쇠가 되어 지금 이 순간을 불러일으켰을 터.
 “벌써 100번째······이던가요.”
 “아, 예.”
 이 이벤트로 인해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방송을 끄지 않은 채였다면, 이 특별한 장면을 내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녹화라도 켜 둘 걸 그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여신관이 움직였다. 살짝 몸을 숙여 손을 책상 아래로 밀어 넣은 그녀가 꺼내든 것은 자그마한 병이었다. 그 재질이 유리가 아니라 사기였던 탓에 내용물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그맣게 귓가로 울려 퍼진 찰랑거리는 소리로 볼 때 안에는 모종의 액체가 들어있는 것 같았고, 여신관의 손에 잡혀 책상 위에 올라오게 된 그것이 내 앞으로 들이밀어졌다.
 ‘마시라는 건가?’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여신관은 미소만 지을 뿐 내 의문을 풀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마시라는 건가요?”
 “마실지 말지는 당신의 선택입니다.”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나는 병을 집어 들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발생한 이벤트이니 거절하는 것보다는 수락하는 것이 나을 테니까. 병의 표면과 접촉한 손가락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것을 느끼며 병을 요리조리 돌려 보던 나는 그것의 뚜껑 역을 하고 있는 마개를 뽑은 뒤 입가로 가져가 기울였다.
 병 안에 든 액체가 잠시 입 안에 들렀다가 그대로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병을 깔끔하게 비웠지만,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속으로 고개를 갸웃한 나는 이제는 비어 버린 병을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여신관 쪽을 응시하는 순간.
 ‘음?’
 이쪽을 응시하고 있던 그녀의 두 눈이 반짝하고 빛난 것처럼 느껴진 것은 기분 탓일까?
 “다시 나가시면 됩니다.”
 “아, 네.”
 그러나 그 의문을 해결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 이어진 여신관의 축객령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책을 품에 안은 채로 몸을 돌렸다. 안으로 들어올 때 이용했던 문은 여전히 열린 채였다.
 나는 도서관과 복도의 경계를 바로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한 걸음만 더 옮기면 100회차 플레이의 시작이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그대로 걸음을 내딛은 순간.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빛이 터져 나와 눈을 때렸다.
 ‘윽······?’
 평소보다 플레이 시간이 길었던 탓일까, 그 어느 때보다 빛이 강렬한 느낌이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바닥이 훅하고 꺼지는 듯한 아찔한 느낌과 함께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럼 더욱 실감나는 이데아의 세계를 마음껏 즐겨 주시기를.”
 기도하듯 읊조리는 듯한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의식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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