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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토마키아 1권 (1)

2018.12.13 조회 1,719 추천 18


 어둠 속에서 부르는 목소리
 
 
 
 -도와줘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에 난 깊은 잠에서 깨었다.
 주위는 온통 어둠이다.
 도대체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있었던 걸까?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난 나 자신을 되새겨 봤다. 하지만 기억들은 아스라이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도와줘요.
 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그 목소리를 향해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빛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그리고 앞으로······ 부탁해요.
 그 목소리가 내게 말했다. 그리고 동시에 온 몸이 찢겨나가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크윽!
 난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지만, 목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고통이 더욱 심해졌다. 난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내 모든 힘을 다해 있는 힘껏 비명을 질렀다.
 “크아악!”
 그리고 끝내 정신을 잃었다.
 
 
 
 오나르 가의 바보 공자
 
 
 
 1. 제국력 819년 8월
 
 “금화 2닢!”
 “금화 2닢에 은화 15닢!”
 경매장 안은 경매가 한참이다. 대상은 이제 갓 20대로 보이는 젊은 사내. 곳곳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번 전쟁의 포로임에 틀림없다.
 난 단상 주변을 훑어 봤다.
 노예 경매장이라 해서 생각한 것처럼 으리으리한 곳은 아니다. 그저 커다란 공터나 광장에 무대를 마련해 놓고, 무대를 중심으로 커다란 천막을 치는 것으로 끝이다. 그럼 사람들이 알아서 경매 시작 시간에 모여 무대 위로 차례로 나오는 노예들을 지목하면 된다.
 난 천막 입구에 가만히 기대어 서서 잠시 경매장 안을 둘러보았다. 다들 노예 사기에 바쁜 모습이다.
 “은화 70닢!”
 “은화 70닢 나왔습니다. 다른 분 없으십니까?”
 빙고! 난 방금 경매를 부른 네지네르란 이름의 뚱땡이를 주목했다.
 쳇, 누가 지독한 수전노가 아니랄까봐 얼굴은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것이, 떨어지는 기름만 받아도 평민들 겨우내 기름 값 걱정 없을 듯하다. 볼은 또 왜 그리 쳐졌는지, 아마도 주체 못할 욕심을 볼에까지 꾸깃꾸깃 쳐넣어서 그런 모양이다.
 그런 주제에 사람들의 그런 시선을 뻔뻔스럽게 무시하고는, 자신의 호위와 시시덕거리다 배를 두들기며 방긋 웃기까지 한다. 우엑!
 크라토스에게 턱짓으로 녀석을 가리켰다. 크라토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사람들 틈으로 섞여들어 갔다.
 크라토스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야 경매에 참가하는 척하며 슬쩍 녀석에게 다가갔다. 놈 곁으로 다가가자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와 함께 역겨운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빌어먹을 자식! 좀 씻고 다니기나 할 것이지 향수만 디립다 처바르면 다냐?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 무렵 사회자가 새로운 노예를 무대 위로 끌고 나왔다.
 철그렁, 쿵! 철그렁, 쿵!
 지금까지 나왔던 노예들과는 달리 그는 손과 다리에 차고를 찼고, 그것도 모자라 발목에는 두 개의 철구가 매달려 있다. 그 바람에 그가 걸을 때마다 쇠사슬 소리가 무대에 묵직하게 울렸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머리와 구리 빛 피부를 지닌 이국적인 생김을 하고 있었다. 비록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고, 너덜거리는 옷을 입었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와 타고난 근육은 잘 그가 잘 단련된 전사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리자 사회자가 살짝 입 꼬리를 올리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자아 주목하십시오! 이번 품목은 정말로 진귀한 물건입니다. 바로 저 멀리 남쪽, 이국의 땅! 신비와 전설이 숨 쉬는 그곳. 바로 투란의 전사입니다!”
 사회자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투란이면 저 멀리 있는 이국의 제국을 말한다. 이곳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종교와 전혀 다른 전투기술을 가졌다고 하던가?
 이곳과는 너무 먼 탓에 투란의 전사가 노예로 팔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이 흑단석 같은 머릿결과 구릿빛 피부를 보십시오. 다들 아시다시피 투란 제국의 남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전사라고 불립니다. 이 자를 보면 그 말이 왜 나왔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이 전사의 우람한 근육들을!”
 사회자가 노예의 너덜거리는 옷을 찢었다.
 “오오.”
 “후우.”
 상처와 함께 노예의 탄탄한 근육들이 고스란히 드러나자 귀부인들이 부채를 흔들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회자가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어떻습니까? 호위로 써도 좋고, 긴긴밤을 외롭게 지내야 하는 귀부인들께선 밤의 말동무를 삼아도 좋습니다. 남편분이 질투만 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하하하.”
 사회자의 걸쭉한 농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럼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경매는 금화 1닢부터입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돈을 올려 부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경매 가는 금화 5닢까지 치솟았다.
 “금화 5닢이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투란의 전사를 손에 넣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손에 넣는 다면 모든 이들의 부러움을 사게 될 것입니다.”
 “금화 6닢!”
 “금화 6닢에 은화 50닢!”
 “여기 금화 7닢!”
 네지네르란 이름을 지니고 있는 돼지 녀석이 지팡이를 든 손을 치켜들며 말했다.
 주변에서 네지네르를 두고 숙덕이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어머, 어쩐 일이래? 평소 미소년들 엉덩이만 상대하더니 그새 질렸나 보네요?”
 “흥, 랜카스 제국 상인들은 반반한 계집 대신 반반한 소년들 엉덩이만 쫓아다닌다면서요?”
 “누가 아니래요? 호색한 같으니.”
 우엑! 듣기만 해도 정말 구역질이 나는군.
 “금화 7닢이 나왔습니다. 금화 7닢. 더 없습니까? 금화 7닢 한번. 금화 7닢 이상 더 없습니까? 금화 7닢 두 번 마지막입니다. 더 없으시면 이 노예는 네지네르님께······.”
 사회자가 방망이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네지네르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2. 제국력 819년 8월
 
 “금화 7닢하고 은화 10닢!”
 손을 번쩍 들며 외치자 사람들의 시선에 순식간에 내게 쏠렸다. 그리고는 또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누구지? 귀족인가?”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입고 있는 옷을 봐. 귀족차림은 아니잖아. 게다가 얼굴도 처음 보고.”
 “어머, 저 금빛 머리카락 좀 봐. 잘생겼네?”
 탕탕탕!
 사회자가 봉을 두들겨 장내를 조용히 시켰다. 그리곤 점잖게 입을 열었다.
 “이보시게 꼬마신사. 경매는 장난으로 하는 게 아닐세.”
 “경매는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게 아니었소? 난 저 노예가 필요하고, 그래서 경매에 참가하는 거요.”
 반쯤 하대하는 내 말투에 사회자가 헛기침을 하더니 못마땅하다는 듯 살짝 인상을 구겼다.
 “흠흠. 하지만, 그거 아나? 경매를 낙찰 받으면 그 즉시로 대금을 내야하네. 만약 그렇지 못하면 큰 벌을 받게 될 것이야.”
 “그런 것도 모르고 어찌 경매에 참가하겠소? 돈은 충분하니 이만 경매를 진행하시오.”
 “크흠.”
 사회자가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아 방금 꼬마 신사 분께서 금화 7닢하고 은화 10닢을 불렀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난 슬쩍 돼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돼지 녀석이 나를 노려보며 축 늘어진 볼을 씰룩거린다.
 “금화 8닢!”
 돼지 녀석이 지팡이를 들며 외쳤다.
 “금화 8닢이 나왔습니다. 금화 8닢 이상 부르실 분 더 없습니까?”
 “금화 8닢하고 은화 10닢 더!”
 “크으! 금화 10닢!”
 “금화 10닢하고 은화 10닢 더!”
 “크악!”
 내가 녀석이 부른 것보다 항상 은화 10닢을 더 붙여가며 값을 부르자 녀석이 분에 못 이겨 전신을 부르르 떨어대기까지 한다.
 난 그런 녀석에게 슬쩍 혀를 내밀어 보였다. 그리곤 입모양만으로 ‘돼지’란 말을 만들어 보였다. 녀석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지팡이를 부러뜨렸다.
 “이, 이놈이! 금화 15닢!”
 “오오!”
 “금화 15닢씩이나?”
 사람들의 놀라며 쑥덕거렸다.
 금화 15닢이면 은화로 1,500닢. 일반 평민이 5년간 벌어야 하는 금액이다.
 아무리 이번에 나온 매물이 이국의 전사라고는 하지만, 15닢은 너무 과한 액수였다.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돼지 녀석이 어떠냐는 표정으로 날 보았다.
 “금화 15닢하고 은화 10닢 더.”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난 녀석이 부른 금액에서 은화 10닢을 더 쳐서 불렀다.
 “크악!”
 녀석이 만류하는 호위를 제치고 나에게 덤벼들 듯이 했다. 하지만, 놈은 절대 내게 다가 올 수 없었다. 이런 일을 예상해 일부러 사람들을 중간에 두고 거리를 둔 것이다.
 사람들에 가로막혀 다가오지 못하자 대신 놈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네, 네놈이 지금 날 놀리는 것이냐?”
 난 어깨를 으쓱 거렸다.
 “거참, 내가 언제 놀렸다고 그러오? 난 그저 경매에 참가하고 있을 뿐이오. 안 그렇습니까?”
 난 주위를 돌아보며 억울하다는 듯 물었다.
 이미 돼지와 나와의 싸움을 재밌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내 편을 들어 주었다.
 “맞아! 맞아!”
 “경매에 자신이 없으면 물러나면 되지. 경매를 왜 방해하고 그래?”
 “맞아. 경매를 계속 진행해라!”
 한쪽은 은근히 메린다 왕국을 깔보는 랜카스 제국의 상인이고 다른 한쪽은 금발의 멋진 소년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누굴 편들지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후후, 이래서 사람은 잘생기고 봐야 한다니까?
 돼지 녀석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사회자에게 따지듯 물었다.
 “이보시오. 사회자! 도대체 언제부터 이 경매장이 꼬맹이들의 놀이터가 된 것이오! 저 꼬맹이를 썩 쫓아내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앞으로 난 이 경매장과는 다신 거래하지 않을 것이오!”
 놈이 입에 거품을 물며 외쳤다.
 “흥, 놀이터고 뭐고 일단 돈만 있으면 누구나 참여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너 같은 꼬마가 무슨 돈이 있다는 거냐?”
 “돈이 없다고? 있으면 어쩔 건데?”
 난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치켜들고는 흔들었다. 주머니에서 묵직한 돈 소리가 짤랑거리며 울렸다.
 “흥, 기껏해야 은화나 몇 개 있으면 다행이지.”
 “은화라고? 과연 그럴까?”
 난 경매장 단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주머니를 뒤집어 쏟았다.
 “오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누런 금빛을 자랑하는 금화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단상 위에 쌓였다. 난 돼지 녀석을 향해 돌아섰다.
 “정작 당신이야 말로 돈도 없이 경매에 참가한 것은 아닌가? 난, 이렇게 돈을 보였다. 하지만 당신은 말만 앞세웠지 정작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았어. 궁금하군. 정작 당신이야 말로 돈을 가지고 경매에 참석 했는지 말이야!”
 “그렇다! 돈을 보여라!”
 “맞소. 저자는 말만 앞세웠지 돈을 보지 않았어. 소년도 돈을 보였으니 저자도 돈을 보여주어야 한다!”
 내 말에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돼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돼지가 씩씩거리며 품에 손을 넣었다. 순간 돼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놈이 급히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없다. 없어! 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돼지 녀석이 그러는 사이 누군가 살짝 내 뒤로 다가왔다. 그리곤 내 손에 제법 묵직한 주머니를 올려놨다.
 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크라토스가 눈웃음을 지었다.
 녀석. 해냈구나. 하긴, 그냥 부딪친 것만으로도 상대의 품안에 있는 주머니를 끄집어 낼 수 있는 녀석이다. 방금 전 돼지 녀석이 내게 달려들려 할 때 한바탕 작은 소란이 있었다. 그런 소란까지 있는데 실패할 녀석이 아니지.
 “돈을 꺼내라고 했지 누가 춤을 추라고 했나? 설마 그 춤으로 돈을 대신하겠다는 말인가?”
 “와하하하하!”
 내가 노골적으로 녀석을 비웃자 사람들이 일제히 웃었다. 돼지가 시뻘게진 얼굴로 고함쳤다.
 “이놈들! 감히 내가 누군지 아느냐?”
 “누구긴 누구야 돼지지.”
 “와하하하”
 내 말에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이, 이놈들! 난 랜카스 제국의 상인 네지네르다! 네 놈들을 카탈뤼오 백작께 고해 가만 두지 않겠다.”
 돼지 녀석이 급기야 자신의 뒷배를 들먹였다. 좌중이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카탈뤼오 백작이라면 메린다의 금권을 한 손에 쥐고 있는 가문으로, 왕국 재상으로 있어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텔레오 후작가와, 총사령관 자리를 차지하고 군권을 장악하고 있는 오나르 백작가와 함께 메린다 왕국의 3대 실세 가문 중 하나다.
 사람들이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넌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난 놈의 위협에 코웃음으로 응수했다.
 “그런데 어쩌라고? 그렇게 따지면 난 오나르 백작가의 공자다.”
 “네, 네. 이놈! 귀족을 사칭하다니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 줄 알기나 하는 것이냐?”
 돼지가 입에 거품을 물었다.
 난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이놈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날뛰는 녀석을 무시하곤 사회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보시다시피 저 사람은 돈도 없이 참석한 것 같은데 이럴 때 어찌해야 하오?”
 난 짐짓 근엄한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사회자가 난처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한다. 원칙대로 따지면 돈이 없는 것이 밝혀진 즉시 돼지 녀석을 내쫓아야 하지만 사회자는 저 녀석의 신분을 알고 있는 눈치다. 따라서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돼지 편을 들자니 방금 말한 내 말이 걸리는데다, 조금 전 나에게 했던 말이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사회자가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와 돼지 녀석의 눈치만 살피자 참다못한 돼지 녀석이 씩씩대며 날 노려보더니 호위와 함께 사람들을 밀치고 경매장 밖으로 빠져 나갔다.
 “흥! 스스로 부끄러운 줄 아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사회자. 이제 저 노예는 누구의 것이오?”
 난 일부러 목청을 높여 조롱하듯 말했다. 그런 내 행동에 사람들이 수근 거렸다.
 “왜 대답이 없소?”
 “달리 나설 분이 없다면 공자님의 것이 됩니다.”
 내가 다시 사회자를 채근하자 사회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난 뒤로 돌아 사회자 대신 사람들에게 외쳤다.
 “누구 금화 15닢과 은화 10닢 이상 더 부를 분?”
 “없소!”
 “저 노예는 저 공자의 것이오!”
 사람들이 재밌다는 듯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보다시피 없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이 노예는 공자님의 것이오.”
 사회자가 방망이를 두드렸다. 그때 경매장 뒤쪽에서 소란이 일더니 돼지의 째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놈이오. 저놈!”
 후후. 올 줄 알았지.
 난 느긋하게 경비병을 대동하고 들어서는 돼지를 보며 코웃음 쳤다.
 
 
 3. 제국력 819년 8월
 
 경비병들은 안으로 들어서자 내게 창을 겨눴다.
 “네 놈이 귀족을 사칭한 놈이더냐?”
 “사칭? 난 사칭한적 없소”
 “뭐라고! 내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거늘! 어디서 발�이냐!”
 돼지 녀석이 길길이 날뛴다.
 “분명히 네 놈이 오나르 백작가의 공자라 하지 않았더냐!”
 난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녀석의 째진 목소리에 귀가 다 멍할 지경이다. 한 동안 귀를 안 팠더니 귓밥이 조금 묻어 나온다. 마커스에게 파달라고 해야겠군.
 내가 시큰둥한 표정이자 경비병이 다가왔다.
 “저자의 말대로 네가 오나르 백작가의 공자라 사칭한 것이 참말이냐?”
 “사칭?”
 경비병에게 얼굴을 쓰윽 내밀자 경비병이 움찔한 표정을 짓는다.
 “사칭이란게 뭔지? 사칭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관계에 있어 진실이 아닌 것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남들에게 속이고 다는 것을 사칭이라고 말하지 않아? 하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사칭이 되지 않잖아. 그렇지 않아? 그러니 난 사칭을 한 게 아니지. 난 진실을 밝혔을 뿐이니까. 안 그래?”
 내 현란한 말솜씨에 말에 경비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그건 맞소. 하지만 그렇다면 공자가 그······.”
 “맞아. 내가 그 오나르 가의 공자야.”
 내 말에 돼지 녀석과 경비병 모두 아연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돼지 녀석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좋아, 그럼 우리 내기할까?”
 “내기?”
 난 단상 위에 돈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 있는 돈을 모두 합치면 금화 50닢. 이 돈을 놓고 내가 정말로 오나르 가의 공자인지 아닌지를 가지고 내기하는 거야. 어때?”
 내가 그렇게 나오자 돼지 녀석이 켕기는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런 내기를 해야 하지? 그 정도 돈은 여기 있는 누구라도 구할 수 있다. 잔말 말고, 경비병 저 녀석이 다른 수작을 부리기 전에 어서 끌고 가시오.”
 “그래? 그렇다면 여기에 이걸 더하지.”
 난 크라토스에게서 건네받은 놈의 주머니를 꺼내선 단상 위에 쏟아 부었다.
 짜르릉!
 주머니에서 금화와 함께 다채로운 각종 보석들과 두 개의 반지와 한 개의 목걸이가 쏟아졌다. 금화와 다른 장신구들을 빼더라도 보석만 얼추 100골드는 넘어 보인다.
 “오오!”
 “우와!”
 주머니에서 쏟아지는 보석과 금화를 본 사람들과 경비병들이 입을 벌린 채 다물 줄 몰랐다. 하긴 나조차 놀랄 정도인데 그들은 오죽하랴?
 비단 놀란 것은 나와 주변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돼지 녀석은 아예 입을 벌린 채 다물 줄 몰랐다. 내가 쏟은 것이 자기 주머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 본 까닭이다. 녀석이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이! 도둑놈! 언제 내 주머니를 훔쳐갔느냐! 그건 내 것이다!”
 “헐.”
 나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곤 주위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이제 보니 이 보물을 보고 탐이 나셨나 보군. 이봐, 눈앞에 보물이 보이면 모두 당신 건가?”
 “옳소! 꼬마의 말이 옳소!”
 “무작정 자기 거라니 저런 날강도가 어딨담?”
 사람들도 내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그 분위기에 휩쓸린 경비병도 이젠 오히려 네지네르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내쫓아야 할 자는 바로 저자다. 아까부터 돈 한 푼 없이 생떼만 부리고 있지 않은가?”
 “좋다, 네 녀석의 내기를 받아 주마!”
 돼지 녀석이 이를 갈며 큰소리로 외쳤다.
 좋았어! 걸려들었어!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런 속마음과는 달리 겉으로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이 그런 내 표정을 읽고는 득의양양해 했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럴 돈이 있을까? 노예 하나 사지 못하는 당신이?”
 “흥!”
 돼지 녀석이 품 안에서 종이 세 장을 꺼냈다.
 “이것은 펠리온 성기사단에서 보증하는 금화 100닢짜리 수표 세 개다. 이것이면 네 놈이 가진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녀석이 찢어낸 수표를 모든 이가 볼 수 있도록 높이 치켜들었다. 확실히 수표 앞쪽에는 금화 100닢이란 숫자와 함께 펠리온 성기사단의 문장이 찍혀 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주신 펠리온의 신전은 대륙에 있는 각 나라마다 신전을 두고 있었다. 펠리온 성기사단은 그러한 점을 이용해 여행자들이 돈을 예치시키면 그 돈에 해당하는 금액만큼 수표를 내 주었다. 그리고 언제, 어느 곳에서든 여행자들이 다시 돈을 되돌려 받길 원하면 그 즉시 수표에 적힌 금액만큼 돈을 내주었다.
 이것은 위험한 대륙을 여행할 필요가 있는 여행자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비록 돈을 예치할 때 비싼 수수료를 물어야 했지만 수중에 돈을 들고 다니다 강도를 만나 모두 털리는 것보단 훨씬 저렴했고, 또 안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에 수수료가 비싸 어지간히 지체 높은 귀족이나 대상인이 아니면 꿈도 꾸지 못할 물건이다.
 돼지 녀석은 수표를 소리 나게 단상위에 내려놓고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소리쳤다.
 “모두들 잘 들으시오! 당신들은 지금 이 사기꾼이자 도둑놈에게 속고 있는 것이오! 이 녀석은 영악하게도 이 많은 돈을 내세워 나와 여기 모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치려했던 거요. 하나 애석하게도 이 도둑놈은 두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소.”
 “두 가지 실수라고?”
 내 물음에 녀석은 의기양양해 하며 주변을 향해 더욱 목청껏 외쳤다.
 “그렇다. 네 녀석의 배짱은 감탄할 만 했다. 하지만, 네 녀석이 저지른 실수의 첫 번째는 바로 나를 만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많은 돈이 걸린 내기를 강요하면 혹시나 싶어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넌 나도 그러리라 생각했겠지? 하지만 사람을 잘못 봤다. 내 담은 그리 작지 않다!”
 “두 번째는?”
 “두 번째는 네 놈이 그 많은 귀족들 중 하필이면 오나르 백작가의 공자를 사칭한 것이다. 후후, 만일 네 놈이 다른 귀족가의 공자를 사칭했다면 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오나르 백작가의 공자를 사칭한 것은 네 놈 스스로 발목을 잡은 것이 되었다.”
 “어째서 그렇지?”
 “왜냐하면, 난 오나르 백작가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나르 백작가에는 모두 세 아들이 있는데, 그 중 첫째와 둘째 공자는 지금 전장에 나가 있다. 수도에 남은 것은 오직 셋째 카젤 공자뿐이다.”
 “내가 바로 그 막내인 카젤이다.”
 내 말에 돼지 녀석이 조롱하듯 더욱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 지금 네 놈이 한 그 말이 결정적으로 네 말이 거짓임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네 놈이 사칭한 오나르 백작가의 막내는 바보이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수군수군 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나르 가의 막내아들이 바보라는 소문은 그들도 들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돼지 녀석의 말을 들은 경비병들도 돼지 녀석의 말이 맞다고 판단했는지 창을 들어 나를 겹겹이 포위했다.
 “푸하하! 이제 모든 사실이 탄로 나니 겁이 나는 모양이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경비병 저 놈을 당장 끌고 가시오!”
 녀석이 이를 심하게 간 뒤 득의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경비병들이 내게 다가왔다.
 
 
 4. 제국력 819년 8월
 
 “이 무슨 소란이냐!”
 경매장 안에 또 한 번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이번에도 경매장 뒤쪽에서 들려왔다. 사람들은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쪽에서부터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소리친 자의 모습을 드러냈다.
 “헉! 왕국 감찰관 오이네스다.”
 “저 사람이 여길 왜?”
 사람들이 새로이 나타난 오이네스를 알아보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찌 오늘 같은 날 이토록 소란을 피운 것이오!”
 오이네스가 큰소리로 꾸짖었다. 경매장이 일시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돼지 녀석이 재빨리 오이네스에게 다가가선 두 손을 비벼대며 그 뚱뚱한 몸을 굽실 거렸다.
 “헤헤, 왕국 감찰관님께서 여긴 어찐 일이십니까?”
 “그대는 랜카스의 상인이 아니던가?”
 “맞습니다요. 헤헤.”
 오이네스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돼지 녀석은 넉살도 좋게 헤헤거릴 뿐이다.
 “무슨 일인가?”
 “실은 어떤 고약한 사기꾼 놈이 감히 귀족을 사칭해서 그놈을 잡아들이는 중이었습니다요.”
 “뭐라? 귀족을 사칭해? 그런 고연 놈이 있다니! 그 놈이 대체 누구냐?”
 오이네스가 소리치자 그와 나 사이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좌우로 물러서며 길을 내었다.
 돼지 녀석이 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놈입니다.”
 “아니!”
 오이네스가 소리쳤다.
 “카젤 도련님 아니십니까?”
 “그렇습니다. 놈은 카젤······. 도련님?”
 녀석의 얼굴이 멍한 표정이 되었다.
 “하하, 오이네스 경 오랜만입니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이건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습니다. 저 놈은······.”
 “닥쳐라! 감히 오나르 백작가의 공자님께 이 무슨 불경이냐!”
 오이네스가 대로하며 외쳤다.
 살기에 눌린 돼지 녀석이 얼굴을 하얗게 질리더니 뒤로 엉덩방아를 찍었다.
 “헉! 정말로 오나르 가의 막내 공자라니!”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모였던 사람들도 드러난 사실에 저마다 놀라워하며 나를 주목했다. 왠지 어깨가 으쓱거린다.
 “뭣들 하느냐? 어서 이놈을 체포하지 않고! 네 놈이 혈맹인 랜카스 제국의 상인이라고는 하나. 감히 왕국의 귀족을 모독하였으니 어찌 가만 두고만 볼 수 있을까? 반드시 너의 죄를 물을 것이다!”
 “으헉!”
 놈은 사색이 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비로소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이 세계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다. 귀족을 모욕한 죄는 즉석에서 사형에 처해도 할 말이 없다. 게다가 상대는 깐깐하기로 유명한 왕국의 감찰관 오이네스다.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죽게 생겼다.
 사람들은 황급히 주변으로 물러섰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벼락 맞는다고, 괜히 자신들에게까지 불똥이 튈까 두려운 탓이다.
 돼지가 바닥을 기어 내 발밑까지 와선 발을 붙잡고 애걸했다.
 “도련님 제가 눈이 어두워 알아보지 못해 제발, 제발! 살, 살려주십시오!”
 “뭣들 하는가? 어서 저 자를 붙잡지 않고?”
 돼지 녀석의 작태에 오이네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미적대던 경비병들이 재빨리 다가와 돼지을 붙잡았다.
 “공자님!”
 돼지가 경비병들에게 질질 끌려가며 절규를 토해냈다. 하지만 난 녀석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봤다. 이제 저 녀석은 그동안 자신이 지은 죄 값을 치룰 것이다.
 돼지가 천막 밖으로 사라지자 오이네스가 다른 경비병들에게 눈짓해 사람들을 천막에서 내보냈다. 사람들도 더 이상 구경거리가 없자 순순히 밖으로 흩어졌다.
 더 이상 남은 사람들이 없자 오이네스가 다가왔다.
 “그러지 않아도 잔뜩 벼르고 있던 참이었는데, 이번에 도련님의 도움으로 저자를 잡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별말씀을······. 참,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필리아란 여자 아이 말씀이시라면, 오나르 가로 이미 보내드렸습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더군요.”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봐도 그들이 그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려 했을지 뻔했다.
 “그럼 나중에 댁에 한번 찾아가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오이네스가 다시 목례를 하곤 몸을 돌려 천막을 나갔다.
 “수고했어.”
 난 오이네스를 데리고 온 마커스의 노고를 칭찬했다. 마커스가 가벼이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크라토스가 다가왔다. 크라토스가 가만히 내 앞에 무릎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누나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난 크라토스를 일으켰다. 그리고 마커스에게 말했다.
 “이 아이와 함께 가서 소포스를 집으로 데리고 와. 남은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마커스는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흔쾌히 웃으며 대답하곤 크라토스를 데리고 나갔다.
 정리를 마친 후 난 단상으로 걸어갔다. 단상에는 아직 돼지 녀석의 주머니에서 나온 금화와 보석들,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목걸이와 반지 두 개, 녀석의 수표가 한데 쌓여 있었다. 모두 합치면 모르긴 몰라도 물경 금화 500닢은 족히 되어 보였다.
 “공자님. 이 노예는 어찌 할까요?”
 내가 금화와 물건을 챙겨들자 사회자가 조심스럽게 물어 온다. 그렇군, 노예를 샀었지?
 난 슬쩍 단상 위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엔 아직까지 팔과 다리에 차고를 차고 있는 노예가 무심한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법 눈빛이 살아 있고, 기개가 있어 보인다. 그래도 뭐 내겐 필요가 없으니.
 내가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 찰나 사회자가 간사한 표정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공자님께서 저희 경매장을 찾아 주신 기념으로 이 노예에 대한 셈은 저희 경매장에서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주겠다는 데 안 받을 이유는 없겠지.
 “그런가? 고맙군. 그런데 이 일을 어쩌지? 급하게 나온 터라 미처 마차를 준비하지 않아서 말이야.”
 “아!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저희 쪽에서 마차를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사회자가 황급히 무대 뒤쪽으로 뛰어 나갔다.
 
 
 
 카젤 이야기
 
 
 
 1. 제국력 817년 3월
 
 여기서 잠깐 내 소개를 하고 넘어갈까?
 내 이름은 카젤. 메린다 왕국의 3대 실세라 일컫는 오나르 백작가의 막내아들이지. 하지만 진짜 내 이름은 따로 있다.
 대한민국 28세 활기 발랄한 청년 이한우.
 이것이 내 본래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이냐고? 그건 나도 모르겠다.
 원래 내 본업은 사람들의 감춘 돈을 꺼내 널리 이롭게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아트라고 하기도 하고, 일부 몰지각한 놈들은 소매치기라고도 한다.
 내 주 직장은 동대문이었는데, 거기에서 난 번개라 불렸다. 손이 빠르고, 발이 빠르고, 눈앞에 번개가 쳐도 꿈쩍도 않을 배짱을 갖고 있다 해서 번개다.
 적어도 동대문에 번개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나름 한 유명했다.
 그랬던 것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고, 동대문 상권을 놓고 벌이는 양 조직간 세력 다툼에 재수 없게 말려들었다가 칼침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보니 낯선 세계,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맨 처음 눈을 떴을 땐 정말 황당했다. 생각해 보라. 깨어나 보니 웬 이상한 사람들이 주위에 둘러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하지만 내가 누군가? 번개가 아니던가?
 난 침착하게 날 내려다보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웃으면서 한마디 해줬다.
 “Hello? 아임 파인 탱큐 앤 듀?”
 손까지 흔들면서······.
 ······.
 그런데 그 말이 그들을 화나게 했었나보다. 그들의 안색이 갑자기 변하더니 내게 이상한 약물을 먹이지 않나, 머리를 부여잡고 흔들어 대지 않나, 심지어 등짝을 죽어라 패기까지 했다.
 “하우 두 유 두”라고 했어야 했을까? 아니 어쩌면 “나이스 글래드 미츄”란 말을 빼먹어서 그랬는지도······.
 어쨌든 그런 일이 있고 얼마 후, 갑자기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파왔다. 혹시 편두통을 앓아 본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알 것이다.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이 얼마나 참기 어려운지. 그때 내가 겪은 고통은 그 편두통의 10배, 아니 100배는 됐을 거다. 과장이 너무 심하다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직접 겪어 보길 바란다.
 여하튼 그랬는데 머릿속으로 갑자기 모든 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적 없고, 전혀 알지 못하던 얼굴들, 이름들, 그리고 언어들. 심지어 이 녀석의 과거까지 전부.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어쩌면 그것은 카젤의 기억이 내 영혼에 전이되면서 벌어진 현상은 아닐까 추측한다. 영혼은 떠났어도, 뇌가 가지고 있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법이니까.
 그렇게 기억을 전이 받은 후 이곳이 내가 살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곳은 내가 살던 지구와는 전혀 다른 낯선 세계였다.
 그렇게 기억을 전이 받고 정신을 차리자 저택은 또 한 번 난리가 났다. 내가 정상으로 되돌아 왔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이 카젤이라는 녀석은 어릴 적부터 명성이 자자한 신동이었다. 광명의 신 펠리온의 성전聖典을 3살 때 줄줄 외우고, 4살 땐 성국 이스프리의 교황 다리오스 3세 앞에서 직접 만신경萬神經을 거꾸로 외우기까지 했단다. 그 일로 인해 교황 다리오스 3세로부터 직접 천재로 공인 받기도 했단다.
 그랬던 녀석이 5살 때부터 갑자기 아프기 시작하더니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성국의 교황 다리오스 3세는 특별히 고위 사제를 보내 치료하게 했지만, 이 녀석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 만 갔다.
 성국의 고위 사제마저 고치지 못할 병이라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자 그때부터 대륙의 내로라하는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이 녀석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여들기 시작했고, 누가 이 녀석에게 발생한 병의 원인을 밝히느냐에 대해 마법사들과 신관들의 자존심 싸움으로까지 비화되었단다.
 그렇게 치료를 받은 지 2년 후. 녀석의 병은 더 이상 악화되지 않았지만, 예전의 천재성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 녀석에게 일어난 병의 원인도 밝혀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이 세상은 마나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생명체도 그 내부에 그 생명체만의 고유한 마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무엇 때문이지 그 마나가 서서히 고갈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마나가 말라가면서 생긴 그 공백에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한 마나들과 신성력들이 쌓이기 시작했단다. 원래는 마법사의 마법도 그렇고 신관들의 신성력도 한번 몸 안에 들어오면 자연스레 빠져나가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녀석의 몸에는 그것이 적용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해서 이질적인 마나들과 신성력들이 유입되어 엉켜 굳어져 버린 상태라고 한다.
 심각한 것은 그로 인해 앞으로 난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사나 기사가 될 수 없는 것은 물론, 심지어 신관들의 신성력도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 되었단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마나가 말라가는 와중에 머리에 이상이 생겨 지능이 퇴화되었단다. 한마디로 말해서 바보가 되었다는 소리다.
 그 후로도 3년간 가문에선 어떻게든 바보가 된 카젤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국 아무런 차도가 없자 그들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말이다, 녀석은 바보가 되었음에도 어느 정도의 지능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덜컥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아마도 천재에서 바보로 떨어진 데에 따른 주변의 동정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부모의 기대가 내심 이 녀석에게 스트레스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빌어먹을 녀석! 그렇다고 자살을 시도하다니. 세상에서 내가 제일 경멸하는 녀석이 카젤처럼 조금 어렵다고 덜컥 죽음을 택하는 녀석이다.
 어쨌든 그랬던 카젤이 자살에서 깨어난 후, 다시 지능을 회복했으니 그들이 그처럼 난리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또다시 한바탕 검사를 한다 어쩐다 하면서 난리를 피웠다.
 그리고 결국 자살로 인해 정체되었던 마나가 흔들려 그로 인해 예전과 같은 천재성으로 되돌아가지는 못했지만, 일반인 정도의 지능은 회복되었다고 결론내렸다.
 그 이후 난 많은 고민 끝에 녀석의 삶을 대신 살기로 맘먹었다. 어차피 카젤 스스로 포기한 삶이다. 내가 녀석의 삶을 대신 산다고 해서 미안해 할 것은 없다. 또한 당시의 내겐 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 카젤이란 녀석이 워낙 오랜 기간 동안 바보로 살아 왔던 터라 내가 간혹 실수를 하거나 이곳 생활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간다는 점이다.
 그렇게 해서 난 카젤이란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2. 제국력 817년 4월
 
 “도련님!”
 처음 유모를 만났을 때, 난 정말 내 눈을 의심해야 했다. 난 유모라고 하기에 다소곳하고 곱상한 아줌마를 기대했건만 이건······. 프로레슬링 선수 급이다. 그런 거구의 아줌마가 내 얼굴보다 큰 가슴을 출렁이며 달려드는 모습은 가히 공포다.
 내 유모인 로기아는, 남편 타그마가 이번 전쟁에 둘째 형의 부대 소속으로 참전했었다가 전사하는 바람에 잠시 집에 내려가 있던 중이었다.
 어머니는 유모의 그간의 공을 생각해 직접 사람을 파견하여 유모의 일을 돕도록 하셨을 뿐 아니라 그녀의 아들 마커스까지 저택에서 살도록 선처하셔서 아들과 함께 다시 저택에 돌아왔다.
 “하이고 도련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다행이에요.”
 로기아는 나를 보자마자 덥석 나를 껴안았다. 그녀의 거대한 가슴에 얼굴이 파묻혔다. 아니, 짓눌렸다.
 윽. 나도 여자 가슴을 좋아 하지만, 이건 아니라고!
 난 그녀의 가슴에 눌린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윽, 윽. 유모! 숨, 숨!”
 “어머, 도련님.”
 그녀는 내가 질식해 죽기 직전에서야 날 놔주었다.
 “도련님! 소식 들었습니다. 어쩌자고 그러셨어요. 신께서 도우셨기에 망정이지.”
 “유모 말대로 신께서 도우셨나봐.”
 “네, 그렇고말고요. 천만다행으로 이번 한번은 신께서 도우셨지만 앞으론 절대 그러시면 안 됩니다.”
 “미안해 유모.”
 살짝 유모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내가 잘못했어. 날 이렇게 사랑해 주는 사람이 많은데, 그래선 안 되는 거였어. 다신 안 그럴게”
 내 말에 로기아가 감격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만 울어. 바보같이. 앞으로도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그럼요. 그럼요.”
 유모가 눈물을 찍어내며 대답한다.
 난 이들에게 죄를 짓는 것은 아닐까? 고작 살겠다는 말 한마디에 눈물 흘리는 유모를 보면서 난 참 나쁜 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소식 들었어. 정리는 잘하고 왔어?”
 난 말을 돌렸다.
 그녀가 내 말에 깊은 장탄식을 터뜨렸다.
 “네, 도련님. 마님께서 사람까지 보내주셔서 수월하게 정리를 마칠 수 있었답니다. 마커스, 이리 오너라.”
 로기아가 고개를 돌려 뻘줌하게 서 있는 마커스를 손짓해 불렀다.
 “이리와 인사해라. 도련님, 제 아들놈이랍니다.”
 로기아의 소개에 소년이 다가와 넙죽 고개를 숙였다. 나이는 나와 같은 14살인데 덩치는 내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인다. 그러면서도 선이 굵은 눈썹이며, 굳게 다문 입술이 녀석을 더욱 다부지게 보이게 했다.
 마커스가 로기아 곁으로 다가오더니 내게 꾸벅 인사했다.
 “마커스라고 합니다.”
 “반가워, 이번 일은 정말 안됐어.”
 “아닙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맡은 일을 다 하셨을 뿐입니다. 단지, 단지 그 뿐입니다.”
 난 가만히 마커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타그마는 훌륭하신 분이야. 그처럼 전쟁터에서 그렇게 자신의 맡은 자리에서 맡은 바 임무를 훌륭하게 해 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그 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 받아 마땅해. 그 분은 용기 있는 분이셨어.”
 “감사합니다.”
 내 말에 마커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런 마커스에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럼, 앞으로 친구로 지내자.”
 “도련님!”
 로기아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마커스도 내밀어진 손을 보며 난처한 표정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다. 아직 작위를 받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난 귀족이다. 귀족이 평민에게 손을 내밀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구라니, 세상천지에 귀족과 친구가 되는 평민이 어디에 있겠는가?
 “괜찮아 로기아. 마커스는 유모의 아들이잖아? 앞으로 친구로 지내고 싶어.”
 “저기······.”
 마커스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로기아가 펄쩍 뛰었다.
 “안됩니다. 도련님. 친구라니요. 그럴 순 없습니다.”
 “타그마의 신분이 어떠하든 그는 우리 가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어. 신분이 어떠하든 그는 가문의 충신이야. 그런데 그가 귀족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충신의 남은 가족을 허투루 대하라고? 난 그럴 수 없어.”
 로기아의 얼굴이 감격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지하에 계신 그이도 도련님이 이처럼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면 기뻐 하 실 겁니다. 하지만 도련님의 그 말씀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도련님이 진정으로 저와 마커스를 생각하신다면 차라리 시종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유모!”
 “어머니!”
 나와 마커스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것이 마커스를 위한 길이기도 합니다. 혹여 누군가 도련님과 마커스가 친하게 지낸다는 것을 알아보십시오. 저흰 일개 평민에 불과합니다. 평민과 친구가 된다면 다른 귀족들이 도련님을 조롱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비단 도련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에 누를 끼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로기아는 자신이 한 말에서 조금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어쩔 수 없군.
 “저기요······.”
 마커스 녀석이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녀석도 어머니의 저런 처사가 불만이리라.
 “후우, 좋아. 그럼 로기아의 말에 따를게. 하지만 마음으로는 여전히 마커스를 나의 친구로 대할 거야. 그것만은 막지 말아줘.”
 “고맙습니다. 도련님.”
 로기아가 눈물 흘리는 가운데도 활짝 웃었다.
 “저기요······. 그러니까······.”
 “그래, 마커스 너도 들었지? 너도 기쁜 모양이구나. 어여 도련님께 새로 인사드리려무나.”
 “저기······.”
 “저기고 자시고, 어여!”
 로기아가 살짝 언성을 높였다.
 으음······. 로기아는 타고난 전사다. 그녀가 살짝, 아주 살짝 언성을 높였을 뿐인데도 왠지 방안이 춥다. 아니, 가슴 한쪽이 서늘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 면에서 마커스는 역시 난 놈이었다. 녀석은 로기아가 내뿜는 그 무시무시한 압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버텼다.
 “그게 아니라, 어머니, 잠시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오호, 그래? 오냐. 오랜 만에 모녀지간에 친밀한 대화를 나누어야 하겠구나. 호호, 도련님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로기아가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곤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마커스의 귀를 잡곤 끌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들려오는 무지막지한 소리.
 “크윽, 어미니 그게 아니라요. 우윽! 커헉!”
 마커스를 위해 잠시 묵념······.
 얼마 후 방문이 다시 열리며 로기아와 마커스가 다시 들어왔다. 로기아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애로운(?) 목소리로 마커스를 불렀다.
 “마커스? 자 어서 새로 인사드리렴.”
 “넵!”
 아까와는 달리 군기가 바짝 들은 마커스가 내 앞으로 달려와선 한쪽 눈이 시퍼렇게 멍든 얼굴을 숙인다.
 “시종 마커스 인사 올립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응? 으응······.”
 ······.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3. 제국력 817년 4월
 
 우여곡절 끝에 마커스를 시종으로 받아들인 나는 서둘러 로기아를 밖으로 내 보냈다. 로기아가 자리를 비우자 마커스도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방금 전 마커스가 시종의 인사를 했지만 그것은 로기아의 강제에 의한 인사였지 마커스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인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난 그런 식으로 사람을 얻고 싶지 않았다.
 “여기 앉지.”
 난 아침이 담겨 있는 쟁반을 멀찍이 치우곤 내 맞은편을 가리켰다.
 마커스도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와 눈싸움을 시작했다. 기선을 잡으려는 건가?
 후후, 가소로운 녀석.
 이런 싸움이라면 내가 녀석보다 몇 줄은 위라는 것을 보여주지.
 녀석과 난 탁자에 마주앉자 아무 말 없이 거의 30여 분간을 노려보기만 했다. 이런 싸움은 인내심의 싸움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내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왜냐하면 이 몸은 어쨌거나 녀석보다 살아 온 날이 더 많지 않은가? 그 살아 온 날의 대부분도 바닥 중에서도 제일 밑바닥에서 굴러먹었다. 연륜으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녀석보다 우위인 셈이다.
 결국 녀석이 더는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입니까?”
 피식.
 난 녀석의 말에 대놓고 피식거렸다. 녀석의 눈썹이 상큼하게 치켜 올라갔다.
 “뭘?”
 “몰라서 묻습니까? 절 끌어들이신 이유 말입니다.”
 난 녀석의 말을 들으며 귀를 후비적거렸다. 음, 귓밥이 있나보군, 나중에 유모에게 파달라고 해야겠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 하십시오.”
 녀석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녀석의 얼굴은 티꺼운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나중에 손 봐야겠다는 절실함을 느낀다.
 “앞으로 어쩔 작정이야?”
 “저택에 머무르면서 그동안 백작님께서 저희에게 베푸신 은혜에 백분지 일이나마 갚아 나갈 작정입니다.”
 “워워.”
 녀석의 상투적인 대답에 난 손을 저었다.
 “우리 좀 솔직해지자. 나도 마음 없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내 말에 녀석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기사가 될 겁니다.”
 “기사?”
 “네.”
 마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의 약속입니다.”
 그 말로 충분했다. 아마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 무시무시한 로기아의 협박에도 버텼을까?
 “좋아. 기사시켜 줄게.”
 “네?”
 마치 주머니에 물건 꺼내듯 너무나 쉽게 말하는 내 대답에 오히려 마커스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이내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버럭 화를 낸다.
 “전 진심입니다. 그렇게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나 역시 진심이야. 내가 그리 허투루 말하는 것 같아? 네 아버지 타그마는 기사를 꿈꾸며 누군가의 종자로 있었겠지. 그러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중도에 포기 했을 테고, 결국 너에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게 하려고 했을 거야. 넌 그런 네 아버지에게 반드시 기사가 되겠다고 약속했겠지? 그렇지 않아? 그래서 기사가 되려는 거겠지.”
 난 자세를 바로하고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그쳤다.
 마커스가 놀란 눈으로 말조차 더듬었다.
 “그, 그걸 어떻게······.”
 과연 내 짐작이 맞았군.
 난 한쪽 손을 턱에 괸 후 녀석에게 물었다.
 “그럼 넌 어떻게 해서 기사가 될 작정이지?”
 “아는 분의 종자가 될 것입니다.”
 “종자? 시동을 거치지도 않고?”
 보통 기사가 되려면 7살부터 상대 기사의 시동으로 들어가 기초 훈련과 더불어 기본적인 예의와 덕목, 그리고 기사를 시중들면서 그들과의 친밀도를 높인다. 그리하여 14살 때 정식으로 종자가 되어 본격적으로 기사가 되기 위한 엄격한 훈련과 예절을 가르침을 받게 된다.
 때문에 기사들은 종자를 뽑을 때, 자신의 시동들 중에서 뽑을 뿐, 외부에서 뽑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종의 내제자 형식이라고 할까?
 “이미 시동으로서 배워야 할 것들은 아버님으로부터 전부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지간한 사이가 아니라면 중간에 종자로 받아들이지 않을 텐데?”
 “예전에 아버님께서 종자로 모셨던 기사 분이십니다. 옛정을 잊지 않으시고 아들인 저를 아버님 대신 종자로 받아주시기로 했습니다.”
 녀석의 말에 나도 모르게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냄새가 났다.
 “호오, 대단하신 분이군. 아무런 조건 없이 단지 과거에 자신을 모셨던 종자의 아들이라 해서 아무 조건 없이 다시 종자로 삼겠다니.”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마커스 녀석이 말꼬리를 흐린다.
 녀석이 말을 흐리는 것만으로도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녀석은 너무 어리숙하다. 한마디로 등쳐먹기에 딱 좋다는 의미다.
 “조건이 있군? 하긴 뒤늦게 받아들이는 건데 아무런 조건이 없을 순 없겠지. 그래 얼마를 요구했지?”
 “그것이······.”
 마커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순순히 털어 놓았다.
 “금화 50닢입니다.”
 “으음.”
 난 신음을 흘렸다. 금화 50닢이라면 상당한 금액이다. 아무 기술이 없는 일반 평민이 하루에 벌 수 있는 돈이 하루에 은화 1닢이다. 금화 1닢은 다시 그런 은화 100닢과 바꾼다.
 다시 말해 금화 50닢이라면 은화 5,000닢과 같다. 일반 평민들이 하루도 쉬지 않고 꼬박 14년을 일해야 겨우 모을 수 있는 돈이다.
 그걸 다시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3천5백만 원 정도. 내가 살던 세상에도 일반 서민이 쉽게 만질 수 있는 돈이 아니다.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할 참이지?”
 “아버님이 모아 두신 돈이 있습니다. 그게 금화 30닢이 됩니다. 그리고 이번에 집과 전답을 팔고 남은 돈과 아버님께 지급된 수당을 합치면 얼추 될 듯도 합니다.”
 “필사적이군.”
 그들의 삶이 눈에 훤했다. 마커스를 기사로 만들겠다는 그 일념 하에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아왔으리라.
 “어머니는 알고 계시고?”
 “네.”
 마커스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면 그 모든 사실을 알고도 마커스를 내게 시종으로 들인 건가? 영악하군, 로기아도. 하긴 30년간 귀족들을 모셔 온 로기아니 귀족들의 생리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겠지. 바보 같은 건 오히려 이 녀석이라고 해야 할까?
 “좋아, 얼마나 모자라지?”
 “네?”
 “아직 그 기사에게 아직까지 가지 않은 것을 보면 돈이 모자란 게 아니었나?”
 내 말에 마커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직 금화 10닢이 부족합니다.”
 금화 10닢이면 은화로 1,000닢, 저쪽 돈으로 7백만 원 정도.
 “좋아. 모자라는 돈은 내가 빌려주지.”
 마커스의 눈이 찌푸려졌다.
 “동정입니까?”
 “노노!”
 난 손가락을 저었다. 난데없는 영어에 마커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일종의 투자라고나 할까? 대신 갚을 땐 10배로 갚는 조건이야. 어때?”
 “으음······.”
 마커스가 신음을 삼켰다. 말이 10배지 이 정도면 폭리다. 난 그런 마커스를 보며 살짝 비웃듯 말했다.
 “자신 없으면 없던 일로 하지. 금화 10닢이면 모으는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한 10년 정도? 그럼 그때 네 나이는 얼마나 될까? 종자로 들어가긴 너무 늦은 나이겠군. 할 수 없지. 네 아버지의 염원을 이번엔 네 아들이 잇는 수 밖에.”
 그렇게 말하곤 난 자리에서 일어날 듯한 행동을 취했다. 마커스가 급히 소리쳤다.
 “좋습니다. 10배로 갚겠습니다.”
 됐어! 걸려들었어.
 “그래? 좋아. 그럼 그 사람과 언제 만날 것인지 약속을 확실하게 정하고 다시 와.”
 난 그 말을 끝으로 마커스와 함께 방을 나섰다.
 
 
 4. 제국력 817년 4월
 
 “도련님”
 밖으로 나가자 로기아가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할 말이 있음을 알고는 눈치껏 마커스를 먼저 보냈다.
 “로기아 왜?”
 “마커스 이 녀석이 또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하던가요?”
 로기아가 불쑥 물어왔다.
 쳇, 밖에서 다 듣고 있었군.
 “내 이 녀석을 당장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 놓겠습니다.”
 “그만둬. 로기아. 난 마음이 떠난 녀석을 굳이 곁에 두고 싶은 생각은 없어.”
 “죄송합니다. 도련님.”
 로기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로기아는 울보구나? 걱정 말아. 그렇다고 녀석을 포기한 것은 아니니까.”
 “네?”
 로기아가 무슨 소리냐 싶어 고개를 들었다.
 “일단 그 녀석도 알아야 하지 않겠어?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자기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야. 안 그래?”
 “도, 도련님!”
 로기아의 얼굴에 당황스런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후후, 나만 믿으라고.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난 로기아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주곤 아버지가 있는 서재로 향했다.
 
 “아버님”
 “오, 카젤이구나. 들어오너라.”
 “도련님 오셨습니까?”
 서재에 들어서니 아버지와 가문의 마법사인 스퀼로가 직접 일어나 날 반겼다. 책상엔 이번 전쟁에 관련된 1급 기밀 서류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져 있다. 과연 왕국의 군권을 잡고 있는 실세의 서재답다고나 할까?
 “여기 앉아라. 차라도 한잔 하자꾸나.”
 아버지는 날 서재 한 귀퉁이의 소파로 이끌었다. 그 사이 스퀼로는 차를 내왔다.
 스퀼로는 참 특이한 마법사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호리호리한 체격에 지적인 이미지가 강하다면 스퀼로는 그 반대다. 우락부락한 체격에 장비를 연상케 하는 수염으로 얼굴을 덮은······. 뭐랄까 꼭 산적 두목 같다고 할까?
 생김이 그러다보니 하는 짓도 그러해서,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매사에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반해 스퀼로는 마법보단 몽둥이를 먼저 앞세운다.
 오죽 했으면 기사단장 푀ㄹ론이 스퀼로에게 메이스만 쥐어 주면 전장의 기사로도 쓸 수 있을 정도라 할까?
 그런 스퀼로가 차를 내려놓고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그 커다란 체구에 소파가 작아 보일 정도다.
 “훌훌, 도련님 오랜만이시군요.”
 스퀼로가 눈을 번뜩인다. 좋은 실험재료를 탐하는 전형적인 마법사의 눈이다. 외모는 저래 보여도 역시 본질은 마법사라는 것일까?
 “그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제가 검진을 해드릴 수도 있는데.”
 “됐거든?”
 스퀼로의 제안을 난 일언지하 거부했다. 또 다시 몰모트가 되라고? 내가 미쳤냐? 그 고생을 사서하게?
 “뭐, 정 그러시다면.”
 스퀼로가 입맛을 다신다. 젠장맞을 녀석!
 “그래, 무슨 일이더냐?”
 아버지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내려놓고는 그윽한 눈빛으로 물었다.
 “돈 좀 빌려 주십시오.”
 “돈을?”
 아버지가 의아한 눈빛으로 스퀼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스퀼로도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흐음, 그래 얼마나 필요하냐?”
 “금화 100닢이면 됩니다.”
 “금화 100닢이나!”
 아버지가 눈을 번쩍 뜬다. 아무리 메린다 왕국의 실세라 일컫는 오나르 백작가라지만 일시에 금화 100닢을 내주기에는 적지 않은 금액이다.
 “금화 100닢이면 적지 않은 돈인데, 그렇게 많은 돈을 어디다 쓰려고 그러느냐?”
 “쓰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난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말했다.
 “딱 열흘만 빌렸다가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흐음······. 그래 대체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 있겠느냐?”
 “사람을 사려 합니다.”
 “흐음. 사람을 사는 일이라······.”
 아버지는 잠시 고민에 잠기셨다. 난 가만히 앉아서 아버지와 눈을 마주쳤다. 한동안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가 마침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좋다. 네 부탁인데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겠지. 스퀼로!”
 “네. 각하.”
 “금화 100닢을 내주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스퀼로가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아버지가 다시 나에게 물어왔다.
 “또 필요한건 없느냐?”
 “있습니다. 아무래도 금액이 금액이니만큼 스퀼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스퀼로를?”
 아버지가 난처한 표정으로 스퀼로를 돌아봤다.
 스퀼로가 비록 가문의 전속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함부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스퀼로는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봤다. 나 역시 그를 마주 보았다. 흔들림 없는 내 눈빛을 본 때문일까? 스퀼로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무척 재밌는 일이 될 듯하군요.”
 스퀼로가 그렇게 말하자 아버지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마커스를 얻다
 
 
 
 1. 제국력 817년 4월
 
 약속은 금방 잡혔다. 마커스로부터 돈이 마련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상대는 흔쾌히 만날 약속을 정했고, 약속된 당일. 마커스는 아침 일찍부터 날 찾아왔다.
 난 식사를 하는 동안 일부러 마커스를 세워둔 채 외면했다. 어차피 칼자루를 쥔 것은 내 쪽이다. 내가 조급할 이유가 없다. 내가 여유를 부릴수록 마커스는 안달이 났다.
 마침내 내가 식사를 다 마치자 마커스가 급한 마음에 쪼르르 다가왔다.
 “왜 무슨 일이야?”
 난 능청스럽게 물었다.
 “그때의 약속 때문입니다.”
 “그때의 약속? 아아! 그래, 맞아.”
 꿀꺽!
 녀석의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내 시종이 된다고 약속했었지?”
 “도련님!”
 내 능청스런 말에 마커스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짜식 성질부리기는.
 “그게 아니라면, 설마, 금화 10닢을 빌려준다는 그 약속 말인가?”
 “네, 맞습니다. 바로 그거요.”
 “그거라면 잊지 않고 있지.”
 휴우
 녀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 쉰다.
 녀석의 한숨 소리를 들으며, 난 품 안에서 어제 밤늦도록 작성한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한껏 기대하던 마커스는 돈 대신 종이가 튀어 나오자 이게 뭐냐는 눈으로 쳐다본다.
 “뭐, 꼭 믿지 못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매사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어? 그래서 작성했지. 어제 말한 대로 10배로 갚겠다는 차용증이야.”
 “네에?”
 녀석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식사와 함께 나온 차로 입가심을 한 후 느긋하게 깍지를 꼈다. 이러니깐 내가 꼭 사채업자가 된 기분이군. 아예 이런 쪽으로 나가볼까? 음, 나쁘지 않은걸?
 “혹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딴 소리 하는 건 아니시겠죠?”
 “킁!”
 난 코웃음을 쳤다.
 이게 누굴 날강도로 아나? 설마 내가 차용증만 쓰게 한 후 돈을 떼어먹을까.
 난 녀석 앞에 직접 주머니를 꺼내고선 그 안에서 금화 10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어제도 말했지만, 이건 널 믿고 빌려 주는 게 아니라 유모를 믿고 빌려주는 거야. 갚을 자신 없으면 지금이라도 그만 둬.”
 내가 금화만 보이고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으려 하자 녀석이 재빨리 차용증을 집었다.
 “알겠습니다. 여기 밑에 싸인을 하면 되죠?”
 “그래 맞아. 잘 읽어보고 싸인 해.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말고. 분명히 말해 두지만 갚을 땐 10배야.”
 “네, 네. 명심합지요.”
 녀석이 이를 갈며 차용증에 자신의 싸인을 그려 넣었다.
 똑똑
 “도련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때마침 스퀼로가 방문을 두드렸다.
 “응, 들어와.”
 내 허락이 떨어지자 방문이 열리며 스퀼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커스가 그를 알아보곤 해연히 놀란 표정으로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오오, 자네가 로기아의 아들 마커스로군.”
 스퀼로가 마커스의 어깨를 두들기곤, 내게 다가와 말했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들었지? 너도 가서 준비하고 오도록 해.”
 “네?”
 마커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혼자서 가려했단 말이야? 그 돈을 들고서? 스스로 실력에 자신 있다면 그래도 상관없겠지만.”
 내 말에 마커스가 뭔가를 퍼뜩 깨달은 모양이다.
 “그럼······.”
 “이왕 도와주기로 한 거니깐. 배달까지 맡아주지. 그래서 스퀼로도 부른 거야.”
 “그, 그렇게까지! 고맙습니다.”
 마커스가 진심어린 표정으로 인사해 왔다. 난 별거 아니라는 듯이 손을 저었다.
 “일을 확실하게 하고자야. 괜히 중간에 돈을 잃었다느니, 혹은 강도를 만났다느니 하면서 괜스레 내가 의심 받는 것은 질색이거든.”
 “아, 아닙니다. 제가 감히 어찌!”
 “아아, 됐어. 뭐든 확실한 게 좋지. 빨리 준비하고 나와.”
 “알겠습니다.”
 마커스가 꾸벅 절을 하곤 후다닥 방을 나섰다.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난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가 부탁한 건?”
 “여기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며칠 동안 밤을 새야 했습죠. 훌훌.”
 스퀼로가 품 안에서 작은 수정조각을 꺼내 보이며 말했다. 난 재빨리 손을 놀려 스퀼로에게서 그 수정 조각을 낚아챘다.
 “알았어. 나중에 검진 받을게. 됐지?”
 “훌훌. 잊지 마십시오.”
 쳇, 마커스 녀석 때문에 팔자에 없는 검진(이라 쓰고 몰모트가 되는 일이라 읽는다.)까지 받게 되었다. 이 빚은 반드시 갚아 주겠다고 다짐하며 방을 나섰다.
 
 저택 앞으로 나가자 마커스가 대기시켜놓은 마차 곁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도련님, 옷이!”
 마커스가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은 날 보곤 깜짝 놀랐다.
 “뭐해? 안 탈거야?”
 난 그 녀석에게 퉁명스럽게 쏘아주곤 마차에 올랐다. 잠시 망설이던 마커스가 서둘러 내 뒤를 따랐다.
 
 
 2. 제국력 817년 4월
 
 저택을 빠져 나온 마차는 바로 도심으로 향했다.
 도로 근처엔 아무렇게나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고, 마차 뒤로는 누더기를 입은 새까만 얼굴을 한 아이들이 쫓아오며 구걸했다. 장기간 끌어 온 전쟁의 여파로 빈민으로 전락한 이들이나 고아가 된 아이들이 수도에 몰려 온 탓이다. 그들을 보니 왠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저기입니다.”
 마커스가 한 건물을 가리켰다.
 삐쭉 튀어 나온 간판엔 술과 침대, 그리고 포크와 나이프가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엔 붉은 장미 한 송이가 그려져 있다.
 “도련님. 도련님도 가시게요?”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나까지 내릴 줄은 미처 몰랐던지 마커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 온다. 실없는 녀석. 그럼 가려고 내렸지 배웅하러 내렸을까.
 “출발하기 전에도 말했지? 난 확실한 게 좋다고.”
 조금은 억지스런 말이었지만 마커스 녀석은 그러려니 수긍한다.
 “참, 그리고 괜히 귀찮은 일은 질색이니까, 그 기사 앞에선 나 보고 도련님 어쩌고 하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야하죠?”
 “그냥 카젤이라고 불러.”
 “하지만, 제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라면 해. 안 그럼 그 돈을 다시 회수 할 테니까.”
 “헉! 아, 알겠습니다.”
 마커스가 기겁하며 품에 쥔 돈 자루를 움켜쥔다. 짜식 누가 정말로 가져갈까봐.
 여관 주인에게 물어 보니 마커스가 만나기로 한 프토마란 기사는 302호실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난 마커스를 앞장세우곤 곧장 그가 있는 방으로 올라갔다.
 
 똑똑.
 “누군가?”
 방 안에서 제법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커스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키더니 대답했다.
 “마커스입니다.”
 “오오, 마커스!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50대의 건장한 체구를 지닌 남자가 우리를 맞았다. 흐음. 이 자식이 프토마라는 녀석이군.
 “응? 이 자는 누구지?”
 “아, 네······.”
 마커스가 나를 소개하려 할 때, 잽싸게 내가 먼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마커스의 친구인 카젤이라 합니다. 아버님은 성 내에서 신기료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친구 마커스가 기사님의 종자로 들어간다기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같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흐음······. 잘 왔다. 들어오려무나.”
 프토마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내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순순히 나와 마커스를 안으로 들였다.
 “그래, 준비는 다 되었느냐?”
 녀석은 방에 놓인 탁자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며 물었다. 마커스가 품 안에서 커다란 주머니를 꺼내 녀석이 있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난 녀석이 테이블 위의 주머니를 보며 눈을 번뜩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말씀하신 금화 50닢입니다. 전부 금화로 맞출 수는 없어서 은화와 함께 섞었습니다.”
 “오오, 수고했다.”
 프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종자를 받아들이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너도 알 게다. 무구도 갖춰줘야 하고, 여러 다른 기사들에게도 소개시켜서 그들에게 인정받도록 해야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책임을 내가 회피할 생각은 아니다. 내가 네게 금화 50닢을 마련해 오라고 한 것은 너에게 그만한 의지가 있는 지를 시험하고자 했던 것이야.”
 “아!”
 마커스가 탄성을 터뜨린다.
 “이왕 이 돈을 갖고 왔으니, 일단은 내가 보관토록 하마. 그리고 나중에 네게 맞는 장비를 사는데 쓰도록 하자. 기사가 되었을 때 아무런 장비도 갖추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창피를 당하겠느냐? 마침 내가 아는 상인이 있으니 그에게 부탁한다면 제법 쓸 만한 장비를 갖출 수 있을 게다.”
 “알겠습니다. 프토마님만 믿겠습니다.”
 마커스가 넙죽 허리를 숙인다. 그런 마커스의 머리를 녀석이 기특하다는 듯이 쓰다듬는다.
 마커스와 대화를 마친 프토마가 이번엔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는 무슨 일인가?”
 “사실, 여기 있는 마커스와 저는 어릴 적부터 친한 친구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마커스가 기사님의 종자가 된다는 소식을 듣고, 저도 참을 수 없어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저 역시 기사님의 종자가 되고 싶습니다. 받아 주십시오.”
 난 대뜸 녀석의 발아래 무릎 꿇었다.
 마커스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프토마는 무릎 꿇은 나를 바라보느라 미처 마커스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흐음. 하지만, 자네도 방금 전 보았듯이 종자가 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네.”
 “맞습니다, 방금 전 기사님의 말씀을 듣고 저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약소하나마 저도 의지를 보이려고 합니다.”
 난 얼른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과연 예상대로 프토마가 시큰둥한 표정을 짓는다. 주머니의 부피로 보나, 들린 소리로 보나, 얼마 들어 있지 않음을 쉬이 눈치 챘을 테지.
 “자네 마음은 알겠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
 프토마가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난 그가 보는 앞에서 주머니를 뒤집었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 미리 나누어 담은 금화 20닢이 손 위로 쏟아져 내렸다.
 “금화 20닢입니다만. 하아. 역시 이 정도로는 부족하군요.”
 난 작게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프토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재빨리 얼굴 표정을 수습하곤 다시 근엄한 투로 말했다.
 “허어,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네. 그 정도로도 부족한 게 맞긴 하지. 하지만, 자네의 의지가 있으니 일단 내가 맡아 두고, 좀 더 자네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도 좋겠지. 만일 자네가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돌려주면 될 것이 아닌가?”
 “아아, 그렇군요.”
 난 밝게 웃으며 프토마에게 주머니를 건 낼 듯이 살짝 내밀었다. 프토마가 돈 주머니를 받으려 했다. 하지만, 난 이내 돈 주머니를 거둬들였다. 프토마의 눈에 의혹이 어렸다.
 “아! 마침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내일까지 제가 이 돈을 배로 만들어 오겠습니다. 그럼 금화 40닢이 되는 셈이니 저도 기사님께 당당할 수 있을 테고, 기사님의 부담도 한결 줄어 들 것입니다.”
 “내일까지 배로?”
 금화 20닢을 내일까지 배로 튀긴다니, 세상에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프토마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날 믿지 못해서 그런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아닌가?”
 “천만에 말씀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기사님께 그러겠습니까? 여기 있는 마커스 못지않게 저 역시 기사가 제 꿈입니다. 이런 좋은 기회를 저 역시 놓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내일까지 기필코 이 돈을 두 배로 만들어 오겠습니다. 정 믿지 못하겠다면 이걸 맡기겠습니다. 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며 남기신, 제겐 너무나 소중한 어머님의 유품입니다.”
 품 안에서 스퀼로가 건네 준 예의 그 작은 수정조각을 꺼내 두 손으로 바치며 말했다. 프토마가 미심쩍은 눈으로 수정조각을 취하곤 한발 물러섰다.
 “알았네. 약속의 증표로 이것을 잠시 맡아 두도록 하지. 하지만, 명심하거라. 네 스스로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기사를 모독한 죄를 묻을 것이야.”
 “물론입니다. 이미 이 돈은 기사님의 돈입니다. 제가 어찌 기사님의 돈을 갖고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곤 난 얼른 주머니를 다시 품 안에 넣었다. 프토마의 얼굴에 아쉬운 빛이 스쳐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럼 기사님께서 내일도 여기 계실 것인지요?”
 “그렇다네. 당분간 일이 있어 한동안 이곳에 머물러 있지.”
 “그럼 내일 이곳으로 바로 오겠습니다.”
 난 프토마에게 꾸벅 절하곤 멍청한 표정으로 서 있는 마커스를 끌고 방을 나왔다.
 
 
 3. 제국력 817년 4월
 
 “도······.”
 방을 나오자 마커스가 내게 뭔가 말을 하려는 듯 했지만 난 재빨리 마커스의 입을 막았다. 그리곤 그를 끌고 한층 아래로 내려갔다.
 “여기입니다.”
 2층 복도 끝 쪽에 있던 방문이 살짝 열리며 스퀼로가 손짓했다. 난 어리둥절해 하는 마커스를 억지로 그 방에 밀어 넣었다.
 난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스퀼로에게 물었다.
 “어때? 가능하겠어?”
 “제가 누굽니까? 이 정도 거리면 충분하지요.”
 스퀼로가 수정구를 꺼내선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곤 수정구를 향해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다.
 스퀼로의 주문이 끝나자 수정구가 마치 전등에 불이 들어오듯 확하고 빛이 났다.
 “됐습니다.”
 스퀼로가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수정구에서 희미하게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방금 전 만난 프토마의 목소리였다.
 -백 여든 아홉, 백 아흔, 백 아흔 하나.
 “이게 뭡니까?”
 “쉿! 가만히 듣고만 있어.”
 난 마커스를 조용히 시켰다.
 -후우, 하나같이 동화 아니면 은화로군. 타그마의 아들놈이니 어쩔 수 없었는가?
 놈이 돈을 세다말곤 지껄였다. 그 소리를 들은 마커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나름대로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쯧쯧.
 -이걸로는 아직 부족한데, 역시 그 녀석의 돈을 빼앗았어야 했나? 그나저나 이건 얼마나 하려나?
 놈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아마도 내가 건네 준 수정 조각을 들여다보는 모양이다.
 똑똑!
 -누군가?
 -접니다.
 -오오, 네지네르님. 어서 오십시오.
 프토마가 누군가를 깍듯하게 맞았다. 저 프토마가 깍듯하게 맞을 정도라면 상당한 인물이라는 건데, 누구지?
 “네지네르라면 랜카스 제국의 상인이군요. 제법 거물인데 프토마 같은 작자가 어떻게 저런 거물급 상인과 교류가 있는 건지 궁금하군요.”
 스퀼로가 내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흐음, 랜카스 제국이라면 메린다 왕국과 동맹인 왕국으로 지금 전쟁을 후원해 주고 있는 혈맹과도 같은 곳이다. 다시 말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작자라는 것.
 -그간 평안 하셨습니까?
 -하하, 프토마님이야말로 바쁜 와중에도 잊지 않고 절 찾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 이렇게 부르신 걸 보니 드디어 돈이 마련된 모양이군요.
 네지네르가 웃으며 답한다.
 -그게 실은.
 -왜요? 설마 오늘도 돈이 마련되지 않은 겁니까?
 -후우, 그렇게 되었습니다. 아직 금화 270닢 밖에 모으지 못했습니다.
 -으음, 금화 30닢이나 부족하다니. 아무래도 이번 거래는 취소하는 것이 좋겠군요. 아시다시피 그 물건을 원하는 사람은 부지기수입니다. 그간의 정리를 생각해 어지간하면 기사님께 물건을 넘기려 했던 것인데, 금화 30닢씩이나 차이가 난다면 저희로써도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그 물건을 가지고 있기도 힘듭니다. 죄송합니다만 다른 구매자를 물색해야겠습니다.
 -아, 그러지 마시고 며칠만 시간을 더 주십시오.
 -며칠 시간을 더 드린다고 해서 모자란 금화 30닢을 마련 할 수 있겠습니까? 알다시피 저희 입장에선 하루를 늦추면 늦은 만큼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기다려 주신다면 금화 10닢을 더 치르겠습니다.
 -금화 10닢을 더요? 그렇다면 말이 달라지지만, 흐음. 이제껏 모으지 못한 돈을 며칠 사이에 모은다는 것은 아무래도 믿기 힘들군요.
 -걱정 마십시오. 이번에 새로 종자가 되겠다고 찾아 온 놈이 있습니다.
 -그 얘기는 일전에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타그마의 아들 녀석이었고, 이번엔 다른 놈입니다. 그놈에게서 며칠 내로 돈이 나올 겁니다. 그때까지 조금만 참아 달라는 겁니다.
 -그것이 확실하다면야. 그나저나 종자를 둘씩이나 새로이 들여서야 어디 물건에 제대로 익숙해질 시간이라도 있겠습니까?
 -그건 걱정 마십시오. 어차피 녀석의 애비처럼 놈들도 대충 맛만 보여주고 내쫓을 작정입니다.
 “이 자식!”
 듣고 있던 마커스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기세다. 난 급히 스퀼로에게 눈짓을 해 마커스를 붙잡게 했다.
 마커스가 스퀼로의 팔에 매달려 발버둥 쳤다.
 “놔요. 내 저놈을 가만 두지 않겠습니다!”
 “가만두지 않으면, 네가 저놈을 이길 수 있겠어? 저놈이 아무리 저래도 기사야! 네가 아무리 날고뛴다 하더라도 기사를 이길 순 없어. 게다가 네가 설혹 저 놈을 이겼다 치자. 그 후엔 어쩔 건데? 평생 쫓기며 살 거야? 좋아, 네가 고작 그런 놈밖에 안된다면 더는 나도 널 도와주지 않겠어. 스퀼로, 당장 놔버려. 가서 죽게 놔둬. 저런 한심한 녀석을 아들이라 믿고 기대하던 로기아만 불쌍하군.”
 내 말에 스퀼로가 마커스를 잡았던 팔을 풀었다. 마커스가 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터뜨렸다. 억울하겠지.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도 같은 방식으로 당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대로는 억울해서, 억울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나를 믿어라. 네 돈을 찾아 주는 건 물론이고, 네 대신 저놈에게 복수해 주마.”
 “정말입니까?”
 “물론.”
 잠시 흐느끼던 마커스가 울음을 그치고 내게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제 대신 복수를 해주신다면 평생 시종으로써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그 말은 틀렸어.”
 “네?”
 “그 말은 복수를 끝낸 다음에 하도록 해.”
 프토마와 네지네르의 대화는 그 뒤로도 지루하게 이어지더니 결국 5일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곤 헤어졌다. 네지네르가 나가자 프토마는 혼자 방에서 서성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제길, 그 카젤이란 녀석이 그때까지 돈을 마련 할 수 있을까? 으드득! 콜로스, 날 무시한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해주마.
 “콜로스?”
 “남부에 영지를 갖고 있는 남작입니다. 이제 보니 저 프토마란 작자가 콜로스 남작의 휘하 기사였던 모양이군요. 그런데······.”
 “쉿!”
 난 급히 스퀼로의 말을 막아야 했다. 프토마가 또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후후, 머지않았다. 콜로스! 기간트가 내 손에 들어오면 반드시 네 놈을 제일 먼저 짓밟아 주마!
 “헉! 기간트!”
 스퀼로가 놀라며 소리쳤다.
 뭐야, 기간트가 그렇게 놀랄만한 물건이야?
 “기간트는 전쟁병기입니다. 절대 개인이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구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 하나면 저놈의 장담대로 성을 점령할 수도 있는 물건입니다. 때문에 국법으로 개인간 기간트 매매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국법을 무시하다니. 당장 잡아들여 요절을 내야겠습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런데, 그런 엄청난 병기가 왜 저렇게 함부로 굴러다니는 거지?
 “으음, 아무래도 그 네지네르란 작자가 전쟁에 쓰일 물자를 몰래 빼돌린 모양입니다.”
 글쎄? 과연 그럴까?
 “어쨌건 당장 잡아 들여야 합니다. 기간트가 함부로 돌아다닌다는 것은 자칫 큰 변란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스퀼로가 펄쩍 뛰었다.
 “아아, 진정해 진정하라고, 아직 저 녀석 손에 들어간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아까 들어보니 네지네르란 작자가 랜카스 제국의 상인이라며? 그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거 아냐?”
 “그렇지만 기간트를 지니고 있으면 말이 다릅니다. 그것은 엄연히 국법에 의해 금지된 물품입니다.”
 훗, 스퀼로도 의외로 순진하군.
 “그걸 무슨 수로 증명할 건데? 무턱대고 내놓으라고 할 건가? 설마 지금 저 녀석을 체포한 연후에 그 증언을 토대로 조사할 건가? 보나마나 그 네지네르란 자는 저 프토마란 기사를 전혀 모른다고 딱 잡아뗄게 분명한데 그땐 어쩔 건데? 아니, 그 전에, 저 프토마란 작자를 체포함과 동시에 네지네르란 작자의 귀에 들어가게 될 걸? 그는 제국의 상인이야. 적법한 절차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지. 그 절차를 다 밟고 정식으로 조사할 때 쯤엔 이미 그 기간트인지 뭔지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다음이겠지.”
 “으음.”
 스퀼로가 신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저 놈과 네지네르를 동시에 잡아야 해. 놈들이 옴짝달싹 못하도록 말이지. 이미 증거를 확보해 놓은 다음에는 네지네르도 더는 발�을 못할 테지. 그러니 지금부터 네지네르의 주변을 감시하면서 증거를 찾아내도록 해.”
 “하지만, 네지네르가 쉽사리 기간트가 있는 곳을 들키겠습니까?”
 “걱정 마,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까. 장담하지. 놈이 반드시 기간트 있는 곳을 실토하도록 만들어 주겠어.”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날 믿으라고. 대신 알지?”
 난 스퀼로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도련님만 믿겠습니다. 물론 검진은 없습니다.”
 후후! 그래야지. 좋아, 그럼 이제부터 복수의 깃발을 올려 볼까?
 
 
 4. 제국력 817년 4월
 
 다음날 아침 난 일찍 혼자 프토마에게 찾아갔다.
 “어서 오게. 갔던 일은 어찌 되었나?”
 프토마는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맞았다.
 후후, 어찌 그렇지 않을까? 수중에서 떠난 돈이 다시 굴러 왔으니. 난 그에게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내보였다. 어제보다 한결 두툼한 주머니다.
 “일이 잘 풀렸습니다. 어제 약속드린 대로 금화 40닢입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제가 어찌 기사님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자, 보시죠.”
 난 일부러 그의 눈앞에서 주머니에 든 금화를 쏟아 부었다. 40개의 금화가 찬란한 금빛을 뽐내며 탁자위에 쏟아졌다.
 프토마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쌓인 금화를 쳐다봤다. 심지어 금화를 집어다 입으로 깨물어보기까지 한다.
 “제가 틀림없다고 말씀 드렸지요? 전 기사님께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체 어떻게 한 건가? 설마 마법이라도 부린 건가?”
 “설마요. 그것은······.”
 난 다급히 말을 끊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프토마가 눈빛을 빛내며 다그쳤다.
 “이제부터 자넨, 내 종자라네. 종자는 모시는 기사에게 절대로 거짓을 말하거나 숨기는 게 있어서는 안 되지. 사실대로 말하게.”
 “후우······.”
 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비밀로 해주십시오. 만일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면 제 목숨은······.”
 “그것은 걱정 말게. 자넨 기사인 날 못 믿는가?”
 “사실······.”
 난 슬쩍 목소리를 낮추었다. 프토마가 내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저희 아버님이 겉으로는 신기료 장수지만 실상은 지하로 흘러드는 군수품을 매매하는 지하 상인의 일원이시기도 합니다.”
 “군수품?”
 “쉿! 목소리가 크십니다.”
 “아, 알겠네. 계속해서 말해보게.”
 “기사님도 혹 소문으로 들어 아시겠지만, 종종 많은 귀족들이 자신이 맡은 부대의 군수품을 몰래 내다 팔곤 합니다. 그 경우 보통 원가에 10분지 2내지 3에 거래가 되지요. 그럼 상인들은 그것을 사들여 다시 군부에 되팝니다.”
 “허어, 그게 가능한 일인가?”
 프토마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전쟁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자주 있는 것은 아니고 1년에 한두 차례 정도입니다. 워낙 많은 돈이 드는 일인지라 어느 한 사람이 할 수는 없는 일이고, 때문에 믿을 수 있는 상인들끼리 모여 출자 합니다. 그리고 그 출자액에 따라 다음날 이익을 분배하지요. 이번에 대규모 군수품 발주가 있어서 또다시 길드가 결성 되었는데 마침 그 연락을 제가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기사가 되고 싶은 마음에 아버님껜 말하지 않고, 길드에다가는 아버님 대리로 왔다고 하고 제가 대신 출자해 이렇게 금화 40닢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돈은 엄연히 기사님의 돈이기 때문에 전 일절 손대지 않고 고스란히 가져온 것입니다.”
 “오오! 자네는 내 충직한 종자이자, 보물일세.”
 말을 다 듣고 난 프토마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난 그 앞에 고개를 조아리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가? 무엇이든 말해보게. 내, 다 들어주겠네.”
 “정말 마커스를 종자로 받아 드리실 작정이십니까?”
 “으응? 그건 왜 묻나?”
 자아, 지금부터다.
 난 얼굴 가득 못마땅한 표정을 잔뜩 지었다.
 “사실 어제는 미처 말씀을 못 드렸지만 그 마커스란 놈은 기사가 될 만한 자격이 없는 놈입니다.”
 “어허! 친구를 그렇게 모욕하다니 그럼 되겠는가?”
 프토마가 짐짓 꾸짖듯 말한다.
 “친구라뇨! 그 녀석이 기사가 될 거라고 떠벌리기에 잠시 친한 체 해 준 것이지 어찌 남의 집 하인 놈과 친구가 되겠습니까?”
 “흠흠, 그래 그것은 그렇다 치고, 내게 부탁할 것은 무엇인가?”
 프토마가 헛기침을 하며 물어왔다.
 “전, 마커스 같은 천한 놈과 함께 종자로 있고 싶지 않습니다. 그 놈을 쫓아내 주십시오.”
 “허허,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
 “물론, 이미 기사님께서 한 번 꺼내신 말이라 주워 담기 어렵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그딴 천한 놈이 기사님의 종자가 된다면 자칫 기사님의 명예가 손상될까 두렵습니다. 만일 그 놈을 쫓아내신다면 대신 제가 그놈이 받쳤던 돈 만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난 탁자 위에 있는 금화를 가리켰다.
 “저 돈을 내일까지 두 배, 즉, 금화 80닢으로 만들어 오겠습니다.”
 “뭣이라? 여기서 다시 두 배로 만들어 오겠다고?”
 프토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습니다. 제게 맡겨만 주십시오. 반드시 내일까지 두 배로 만들어 오겠습니다.”
 꿀꺽.
 프토마의 침 삼키는 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려왔다.
 “제가 기사님께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이미 눈으로 확인하셨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틀림없으니 믿어 주십시오.”
 “아니, 자네를 믿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그럼 믿어 주십시오. 반드시 내일 이 돈을 두 배로 만들어 오겠습니다.”
 난 그렇게 말하곤 다시 금화를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5. 제국력 817년 4월
 
 다음날 이번엔 주머니에 남은 금화 전부를 넣고 찾아갔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 앞에서 금화를 쏟아 부었다. 금화 90개가 그의 앞에 우르르 쏟아졌다.
 “정, 정말 이게 다 금화란 말인가?”
 “의심스러우시면 세어 보십시오. 이번엔 운이 좋아 두 배에서 조금 더 받아 금화 90닢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 돈이 아니라 기사님의 돈일 따름이지요. 전 단지 기사님의 종자로 대신 투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마커스는······.”
 “그 놈은 걱정 말게, 나도 그런 천한 놈을 종자로 들일 생각은 없으니까. 더욱이 자네가 있는데 내가 어찌 그런 천한 것에 눈을 돌리겠는가?”
 “역시 기사님은 제가 존경하고 따를만한 분이십니다. 이번에 기사님을 따르기로 한 것이 정말 잘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하, 좋네. 그럼 이 돈은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다가 자네가 후일 기사가 되면 되돌려 주겠네.”
 “천만에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렸다시피 그 돈은 제 것이 아니라 기사님의 것입니다.”
 내 말에 프토마가 함박웃음을 짓는다. 그리곤 뭔가를 생각했는지 눈을 반짝인다.
 “참 그런데 혹, 오늘도 거래가 있나?”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하더군요. 최근의 전황으로 인해 다음 거래는 언제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거래는 제법 크다고 하더군요. 더욱이 기간트까지 걸려 있다고 하더군요.”
 “기간트라. 그것이라면 당연히 액수가 커질 수밖에 없겠군. 이번에 출자하면 얼마나 돌아 올 것 같은가?”
 기간트란 말에 프토마가 납득한 눈치다.
 “글쎄요? 음, 90닢 정도를 다시 출자하는 거니까, 두 배에서 조금 더 쳐줄 테고, 이번엔 규모가 커서 돌아오는 것도 많을 테니, 200닢 정도가 되겠군요.”
 “200닢이나!”
 프토마가 깜짝 놀랐다.
 “그럼 많이 출자한 자들은 얼마나 가져가나?”
 “글쎄요? 많이 출자한자들의 최소한 금화 500닢씩 네 배니까······.”
 “네 배! 그, 그럼 금화 2,000닢!”
 프토마가 신음하듯 말했다.
 됐어! 걸려들었어! 하지만 여기서 바로 낚아채면 오히려 의심을 받는다. 이럴 땐 슬쩍 뒤로 한 발 물러서야 한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최소 금화 500닢 이상을 출자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에겐 그럴만한 돈이 없습니다. 그리고 금화 200닢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허허, 물론 그렇기는 하네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돈이······.”
 “돈이라면 걱정 말게. 내 마련해 줌세. 자네는 내 대신 돈을 투자하면 되는 것이야. 그럼 내 그 배당금에서 일부를 떼어 자네에게 줌세.”
 “하지만······.”
 “어허! 기사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뭔 말이 그리 많은가?”
 내가 슬쩍 뒤로 빼니 오히려 녀석은 더 몸이 달아올라 내게 채근해 댄다.
 “좋습니다. 그럼 기사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대신 이번 한 번 만입니다. 꼬리가 길면 들키는 법입니다.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전 죽은 목숨입니다.”
 “고맙네, 고마워.”
 프토마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럼 이럴게 아니라, 지금 당장 움직여야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남은 금화 410닢은 갖고 계시죠?”
 “사실, 지금 있는 것은 260닢 밖에 되지 않네.”
 “네에!”
 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150닢이나 모자라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이번 일은 포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허, 남은 150닢을 내 마련해 주면 될 게 아닌가?”
 “정말 가능하시겠습니까?”
 “말해보게. 언제까지 마련해 주면 되겠는가?”
 “출자 마감시간이 네 시까지입니다. 그 전까지만 마련이 되면 되긴 하는데······. 하지만, 너무 무리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 지금 있는 돈만으로도 두 배 반, 그러니까 금화 1,000닢은 족히 될 것입니다.”
 “어허, 걱정하지 말래도. 네 시까지라고 했나? 기다리게. 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돈을 만들어 오도록 하지.”
 “그럼 기사님만 믿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지금 있는 것만으로도 금화 1,000닢은 족히 벌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알겠네.”
 “참, 제가 그때 드린 조각상은 지니고 계시죠?”
 “아, 그건 내가 잘 보관하고 있네.”
 “그걸 꼭 가지고 가십시오. 제 어머님께서 성국에서 구한 것으로 지니고 있으면 신의 가호와 행운이 따라 온다고 합니다. 대신 돈을 구하시고 나면 꼭 저에게 돌려 주셔야 합니다. 이번 일은 저에게도 행운이 필요하니 말입니다.”
 “오, 그 조각상에 그런 비밀이? 과연, 어제 오늘 내게 연달아 행운이 있다 싶었더니 그 조각상 덕분이었군 그래.”
 프토마는 고개를 끄덕이곤 책상 서랍에서 조각상을 꺼내 품에 넣었다. 그리곤 촌각이 아깝다는 듯이 여관을 빠져나갔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남은 것은 느긋하게 앉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후후후. 난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깍지를 낀 채 기지개를 켰다.
 
 6. 제국력 817년 4월
 
 시계를 보았다. 얼추 네 시가 가까웠다.
 복도를 뛰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녀석이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녀석의 얼굴이 초췌해져 있었다. 돈을 구하느라 꽤나 고생한 모양이다.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저는 일이 틀려진 줄 알고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릅니다.”
 “아아, 미안하게 됐네. 아직 늦지는 않았겠지?”
 “지금부터 달려가면 간신히 도착할 정도는 됩니다. 그나저나 돈은 구하셨습니까?”
 “아는 상인을 통해 모자라는 돈을 간신히 채울 수 있었네.”
 프토마가 제법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받게. 금화 500닢이네, 여기에 내 모든 재산을 털었지. 심지어 내 갑옷과 장원까지 잡혔다네.”
 “그깟 장원, 이제 금화 2,000닢이면 성을 사실 수도 있을 겁니다.”
 난 프토마에게서 받은 주머니를 내 품안에 고이 간직했다.
 “암, 그래야지.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될 시에는······.”
 “맹세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정 의심스러우시다면 같이 가셔도 좋습니다.”
 내 말에 프토마의 얼굴에 드리워진 한 가닥 불안이 사라졌다.
 “오오, 그래도 되겠나? 그렇다면 내 기꺼이 호위를 서도록 하지. 자네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네. 세상이 워낙 험하다 보니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르지 않는가?”
 “그래 주신다면야 저도 안심입니다. 참, 제 어머니의 유품은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네. 과연 행운의 조각상일세.”
 프토마가 품 안에서 조각상을 꺼내 건네려 했다.
 콰당!
 “프토마! 널 체포한다!”
 방문이 거칠게 부서지며 수 명의 기사들이 방 안에 들이 닥쳤다. 그리곤 재빨리 주변을 포위하고 칼을 겨누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난 기사 프토마다! 기사를 모욕하지 말라!”
 “흥, 콜로스의 기사 프토마, 널 국법을 어긴 죄로 체포한다.”
 뒤늦게 한 사람이 방안에 들어서며 말했다.
 “오이네스? 당신이 여기엔 왜? 무슨 죄목으로!”
 “랜카스 제국의 상인 네지네르란 자를 모르지 않겠지? 네가 그 놈과 결탁하여 왕께서 금하신 기간트를 사사로이 매매하려는 것이 만천하에 밝혀졌다. 이에 국왕 폐하께서 내게 내린 왕국 감찰관의 권한에 따라 그대를 체포하는 바이다.”
 “그, 그럴 수가!”
 프토마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아닙니다! 기사님은 절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내가 재빨리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네 놈은 누구냐?”
 “전 이 분의 종자입니다. 이분은 절대 그런 짓을 하실 분이 아닙니다. 이건 모함입니다.”
 “종자 따위가 기사들의 일에 끼어들려 하는가!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네 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증거를 대십시오. 저의 기사님이 그런 짓을 했다는 증거를 말하십시오.”
 “닥치거라. 이미 저 놈이 사려는 기간트가 있는 곳도 발각이 되었다. 이래도 발�을 하려는가?”
 “에잇!”
 난 틈을 봐 프토마를 둘러싼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기사들의 포위가 흐트러졌다.
 “기사님 어서 도망치십시오! 여긴 제가 막겠습니다.”
 “카젤!”
 “어엇, 이놈이!”
 “타핫!”
 프토마가 재빨리 칼을 뽑아 기사들의 칼을 물리쳤다. 그리곤 뒤로 물러났다.
 “이놈이, 비켜라!”
 “안 된다. 못 간다.”
 “이 녀석이!”
 기사가 내 몸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난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크아악!”
 “카젤! 네 은혜는 잊지 않으마!”
 프토마가 그렇게 외치곤 창문 밖으로 뛰어 내렸다.
 “뭐해! 어서 저 놈을 쫓아!”
 오이네스의 외침에 기사들이 우르르 방을 빠져 나갔다. 곧이어 여관 밖에서 호각소리와 함께 쫓고 쫓기는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오이네스가 말했다.
 난 바닥에서 일어나 옷을 털었다.
 “연기 괜찮았어? 스퀼로?”
 뒤늦게 방 안으로 들어선 스퀼로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스퀼로가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그런데 그 피는 어떻게 된 겁니까?”
 “이거?”
 난 옷에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오기 전에 주방에 들려 돼지피를 방광에 담아왔지. 그리고 기회를 봐서 터뜨린 거야.”
 
 사람은 욕심의 동물이다. 처음 금화 20닢을 배로 만들어 오겠다고 했을 때, 프토마는 믿지 않았다.
 그게 정상이다. 세상천지에 한두 푼도 아니고 금화 20닢이 다음날 40닢이 되는 일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 되어 다가오자 그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그의 눈앞에서 직접 금화를 쏟아 부은 것이 그의 욕심을 더욱 부채질 했다. 말 타면 경마 잡고 싶다고 했다. 말로 얼마를 벌어왔다고 백번 듣는 것보다, 직접 눈앞에서 돈이 불어난 것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 금화 40닢이 이번에 90닢이 되어 돌아왔다. 눈이 뒤집힐 만 했다. 게다가 나를 의심하기엔 내가 너무 어렸다. 아무리 잘사는 집의 아이라 하더라도 90닢을 만질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마커스를 생각해 보라, 그의 아버지가 평생을 벌고, 그 목숨 수당까지 받았음에도 고작해야 40닢이 한계였다.
 물론 좀 더 침착하고 냉정하게 생각하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 앞에 금화 90닢을 쏟아 부었을 때, 그의 이성은 망가졌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선택을 강요받았다. 현재 가지고 있는 돈만으로 1,000닢을 벌 것인가? 아니면 조금 무리해서 내일 2,000닢을 벌 것인가? 결국 이미 욕심에 사로잡힌 그는 내일 불확실한 2,000닢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아직 이성이 남아 있었다.
 사람이 정점에 올랐다가 한순간에 망가지면 아무런 이성적 행동을 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기사들이 들이닥치고 모든 일이 틀어졌을 때의 프토마가 바로 그렇다. 내일이면 2,000닢을 수중에 넣을 수 있는 바로 그때, 그의 모든 것이 이루어지려는 바로 그 직전에 그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시점에서 프토마의 이성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건네진 한마디, 기간트가 들통 났다는 말 밖에 남지 않게 된다.(그것은 그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다.) 그는 그 길로 곧장 네지네르에게 달려갈 테고, 네지네르는 흥분한 그에게 기간트를 보여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도청 장치 마법이 걸린 조각을 지닌 채 말이다.
 결국 내 생각대로 프토마는 기간트가 숨겨있는 창고에서 네지네르와 함께 기사들에게 붙잡혔다.
 재판에서 네지네르는 랜카스 제국 상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교묘하게 처벌을 피해갔다.
 프토마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 기사 작위만 박탈당했을 뿐 사형만은 면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지녔던 전 재산은 이미 전당 잡혀 있었기에 그는 말 그대로 알거지가 되었다.
 결국 그의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남은 빚을 갚지 못한 그는 그에게 돈을 빌려 주었던 어느 채무자들에게 시달리다 결국 종적을 감췄다. 그가 불쌍하다 생각하는가? 하지만, 난 동정하지 않겠다. 녀석이 마커스 부자에게 한 짓은 그보다 더 심한 짓이었으니까.
 
 
 7. 제국력 817년 4월
 
 “받아라.”
 “고맙습니다.”
 마커스는 내가 건넨, 자신의 돈 주머니를 받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짜식 사내답지 못하게 울기는.
 이해는 한다. 그 돈에는 녀석의 아버지 목숨 값도 같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커스가 내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고개를 조아렸다.
 “보잘 것 없는 마커스, 주인님께 충성을 바칩니다. 시종으로 절 거둬주십시오.”
 “마커스. 꿈은 포기한 건가?”
 무릎 꿇은 마커스에게 물었다. 마커스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네?”
 “기사를 시켜준다는 말.”
 “아!”
 “아직도 기사가 되기를 원하나?”
 “네! 원합니다.”
 짜식, 그래야지.
 “좋아, 원한다면 기사를 시켜주지.”
 “정말입니까? 정말 절 기사로 만들어 줄 수 있습니까?”
 “당연하지. 넌 아직도 모르고 있군. 비록 지금의 나에겐 아무런 힘이 없지만, 언젠간 나에게도 영지가 주어질 거야. 영지가 주어지면 자신의 기사를 임명할 권리가 생기지.”
 “아!”
 마커스는 그제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미련하기는. 이 녀석 곰이다 곰.
 “약속하지. 내게 영지가 생기는 날, 내 권한으로 널 기사로 임명하겠다. 단, 그때까지 네가 기사가 되길 포기하지 않는다면.”
 “맹세합니다. 전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아울러 제 충성 또한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치 않겠습니다. 당신은 제 진정한 주인이십니다.”
 “그냥 도련님이라 불러.”
 “네, 도련님”
 마커스가 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쳇, 유모나 그 아들이나 둘 다 울보로군.
 “그건 그렇고 계산은 해야겠지?”
 난 녀석에서 손을 내밀었다.
 “네?”
 “그때 빌려간 돈 말이야.”
 “아!”
 마커스가 황급히 주머니를 열었다. 그리곤 금화 10개를 내 손에 얹었다.
 “왜 이것뿐이야?”
 “네?”
 “쓰읍! 이거 잊었어? 이거?”
 난 마커스의 눈앞에서 차용증을 흔들어 보였다.
 마커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난 마커스의 손에 있던 주머니를 다시 빼앗았다.
 “헉! 도련님!”
 “어디보자, 이게 금화 40닢이니깐 앞으로 금화 50닢 남은 건가? 모자라는 것은 앞으로 네 봉급에서 까겠어. 불만 없지?”
 난 녀석 앞에 다시 차용증을 흔들었다. 녀석이 결국 한숨을 푹 쉰다.
 “알겠습니다.”
 “아참, 내일부터 기사단장 푀ㄹ론에게 가봐.”
 “그건 또 왜입니까?”
 마커스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기사가 되려면 그에 따른 힘이 있어야 하지 않아? 푀ㄹ론이 널 봐 준다고 했으니까 앞으론 그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해.”
 “그게 정말입니까?”
 “그럼, 설마 내가 거짓말하겠어?”
 “오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녀석이 기쁜 표정으로 말한다.
 “자 받아.”
 난 녀석에게 주머니에서 금화 10닢을 내보였다.
 “그건 왜?”
 “답답하네, 그 꼴로 가르침 받을 거야? 정식으로 가르침을 받으려면 최소한 기본적인 무기하고 방어구는 있어야 할 거 아냐?”
 “아!”
 그제야 깨달은 듯 마커스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아아! 제가 잠시 도련님을 오해했던 모양입니다.”
 “오해는 무슨······. 참, 갚을 땐 10배인 거 알지? 뭐, 싫으면 관두고.”
 “커헉! 도, 도련님!”
 
 
 
 소포스와의 만남
 
 
 
 1. 제국력 819년 8월
 
 “안 됩니다. 절대 안 돼요!”
 마커스가 팔짝 뛴다. 난 살짝 귀를 후볐다. 그렇게 소리칠 것 까지는 없잖아.
 “정 그렇다면, 넌 여기 있어. 나 혼자 살짝 나갔다 올 테니까.”
 “그것도 안 됩니다.”
 “우씨! 그럼 어쩌자는 말이야.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왜 안 되는 것 밖에 없어? 안 되면 되게 하란 말도 몰라?”
 “그런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긴, 들어 본적이 없겠지. 그 말은 저쪽 세상에서 쓰던 말이니깐.
 “어쨌든 난, 나갔다 오겠어. 그러니 따라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도련님! 도련님이 무단으로 저택을 나간 것을 알면, 제가 어머님께 죽는단 말입니다!”
 “그럼 죽으면 되겠네.”
 난 심드렁히 말했다.
 “우!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십니까!”
 “됐거든? 빨리 결정해. 따라 올 거야 말거야?”
 “으으! 도련님!”
 
 왜 이렇게 옥신각신 하냐고?
 카젤로 살게 된지도 어언 2년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한 번도 성내를 제대로 구경한 적이 없었다.
 저택 밖을 나간 것이라곤 마커스의 일로 성내에 있는 여관에 한 번 들른 것과, 외할아버지 댁에 한 달간 머물고 온 것이 전부다.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의 걱정은 이해한다. 최근의 전쟁으로 인해 수도엔 피난민들이 더욱 늘어났다. 그로인해 치안이 급속히 불안해졌고, 이에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일체의 외출을 금지시킨 상태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피에라 왕국과의 전쟁이 끝났다. 그것도 승전으로.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메린다의 국왕 펠리프 3세는 일주일간 전승 축제를 선포했다. 덕분에 수도는 지금 승전을 축하는 사람들로 한참 북새통이다. 이곳에 와서 처음 맞는 축제다. 그것도 일주일 간 계속되는 승전 축제! 그러니 내가 어찌 나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마저 포기한 채 이 저택 안에 처박혀 있다간, 모르긴 몰라도, 갑갑해서 내가 먼저 죽을 것 같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난 방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꿀꺽. 이, 이번엔 또 뭡니까?”
 내 미소를 본 마커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긴장했는지 침까지 삼킨다.
 하긴, 내가 방긋 웃을 때마다 숱하게 시달려왔으니 저절로 저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하다. 이것을 가리켜 파블로프의 조건반사라 하던가?
 “몰래 나갔다가 구경만 잠깐 하고 오는 거야. 아무도 모르게, 로기아도 모르게 말이야. 그러면 아무 일도 없지 않겠어? 솔직해봐. 너도 축제에 가고 싶잖아? 그동안 저택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시내 구경한 적 없잖아? 안 그래?”
 “그다지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만.”
 “대신 경비 일체를 내가 대도록 하지.”
 “정말입니까? 나중에 10배로 갚으라느니 하는 건 아니겠죠?”
 짜식! 결국 돈 문제냐?
 “당연하지. 내가 그리 쫀쫀해 보이디?”
 “네”
 ······.
 으음, 반성한다. 그간 내가 너무 풀어줬나 보다. 앞으론 보다 철저히 원금 및 이자에 대해 신경 쓰도록 해야겠다.
 “히익! 도, 도련님 그게 아니라 말입니다.”
 “시끄러! 같이 나갈 거야, 말거야.”
 “나갑니다! 나간다고요.”
 쓰읍! 진작 이렇게 나올 것이지 꼭 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요.
 
 
 2. 제국력 819년 8월
 
 “와아!”
 “잘한다!”
 시내는 축제답게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특히나 축제의 중심지인 광장 인근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우와, 우리나라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 줄 미처 몰랐군요.”
 마커스조차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처음 본다는 듯 말할 정도니 많긴 많은가 보다.
 축제는 과거 저쪽 세상의 서커스에서 보던 것과 흡사했다.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광대가 커다란 공을 타고 재주를 부리는가 하면, 입에서 불을 내뿜는 묘기를 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옆에선 음유시인이 멋들어지게 류트를 타며 구경꾼의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거뒀다.
 이쪽 세상에 와서 처음 맞는 축제라서 그런지 내 눈엔 모든 게 신기했다. 옆에 있는 녀석만 뺀다면.
 “아따, 누가 보면 촌에서 올라온 줄 알겠습니다. 그만 좀 두리번거리세요. 같이 있는 내가 다 창피할 정도입니다.”
 “시끄러!”
 난 녀석의 엉덩이를 또 한 번 걷어찼다.
 그때 내 등줄기로 묘한 느낌이 자르르 흐르고 지나갔다. 마치 오래된 친구와도 같이 익숙한 느낌. 곧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나를 지금까지 있게 해왔던 것. 나로 하여금 바람이란 별명을 갖게 했던 것. 그렇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 나를 타깃으로 아트(?)를 하려는 느낌이었다.
 쯧쯧, 누군지 몰라도 나를 타깃 삼다니. 난 상대에게 잠시 조의를 표했다. 이곳의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몰라도 나 역시 번개라 불리던 몸이다.
 “왜 그러십니까?”
 마커스가 눈을 껌뻑이며 물어왔다.
 둔한 녀석 같으니.
 “네?”
 “아냐. 이번엔 저쪽으로 가보자.”
 난 마커스의 손을 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일부러 찾아 들어갔다.
 “아, 저긴 또 왜요!”
 마커스가 투정을 부렸지만 난 상콤하게 무시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느냐고? 원래대로라면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야하는 게 맞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나 역시 기술을 아트로 끌어 올린 몸. 그런 내가 상대에게 겁을 먹고 도망쳐서야 되겠는가? 자아, 와라! 배틀이다!
 “네? 배틀이요? 어디요?”
 ······.
 마커스는 무시하자.
 과연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오자, 나를 노리는 놈의 움직임도 적극적으로 변했다. 지금까지 멀찍이서 따라오던 놈은 용기를 얻었는지 점차 가까이 다가왔다. 난 직감적으로 놈과의 거리를 잴 수 있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지금!
 누군가 부딪쳐왔다. 난 재빨리 상대를 확인했다.
 응? 이런 상대는 이제 고작 10살 남짓한 어린아이다. 설마?
 순간 난 보았다. 아이의 손이 내 몸을 더듬어 오는 것을. 난 재빨리 발을 헛디딘 듯 휘청거리는 척하며 아이의 손길을 흘림과 동시에, 녀석을 마커스쪽으로 밀었다.
 “어엇?”
 “인석, 조심해서 다녀야지.”
 녀석과 부딪친 마커스가 한마디 했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곤 급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원, 녀석도.”
 마커스가 이미 사람들 틈으로 사라진 아이를 향해 혀를 차곤 몸을 돌렸다.
 “응? 왜 그런 표정이십니까?”
 마커스가 날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다. 자신을 불쌍하게 쳐다보는 내 표정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쯧쯧,
 난 아직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마커스를 향해 혀를 찼다. 소드 익스퍼트에 오르면 감각이 예민해지고, 반응이 빨라진다더니 다 헛소리인 모양이다.
 “아, 또 왜요?”
 “네, 주머니는 무사하냐?”
 “네? 제 주머니가 어때······. 으응?”
 마커스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럼!”
 “쯧쯧.”
 “으아아! 그게 어떻게 모은 돈인데!”
 마커스가 바닥에 털썩 무릎 꿇고 소리쳤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런 마커스를 쳐다봤다.
 “크흑! 수전노 같은 주인에게서 한푼 두푼 어렵사리 모은 돈을 소매치기 당하다니! 신이시여! 어찌하여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뿌드득! 아주 연설을 해라.
 땡그랑.
 지나가던 행인들이 못내 불쌍해 보였던지 동전을 던져줬다. 마커스가 재빨리 그 동전을 향해 몸을 날렸다.
 ······.
 
 
 3. 제국력 819년 8월
 
 “자자, 그만 진정해.”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그 돈을 어떻게 모았는데 크흑!”
 “어차피 돈이야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게 돈 아니겠냐? 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
 광장 한쪽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좌절에 빠진 마커스를 위로했다.
 “이러고 있을 순 없습니다.”
 마커스가 벌떡 일어났다.
 “아, 왜 또!”
 “돈을 찾아야겠습니다. 크흑! 그게 어떤 돈인데.”
 “자자, 진정해. 어차피 그 돈은 다시 돌아 돼있어.”
 “아니, 주머니에 발이 달렸답니까? 지 혼자서 어떻게 온다고 그럽니까?”
 거참, 이 자식 주인 말 진짜 안 믿네.
 “그럼 제가 이 마당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믿게 생겼습니까?”
 “좋아, 그럼 주머니가 되돌아오면, 지금까지 쓴 경비에, 앞으로 쓸 경비까지 모두 마커스가 부담하는 거야. 어때?”
 “만약 돌아오지 않으면요.”
 “그땐, 마커스가 잃어버린 금액을 내가 물어 주지.”
 “정말입니까?”
 “물론 정말이지 말고. 자, 그러니깐 기분 풀라고.”
 “네······.”
 마커스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때 내 귀에 솔깃한 소리가 들렸다.
 “자아! 자신이 소레온의 가호를 받았다고 확신하시는 분은 도전하십시오! 참가비는 단 돈 은화 1닢! 하지만, 우승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은화 10닢입니다.”
 사회자가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소레온이라면 이쪽 세상에선 대지와 수확의 신이다. 그리고 아울러 술의 신이기도 했다.
 “이번엔 저쪽으로 가보자.”
 “또요?”
 난 죽을상을 짓는 마커스를 억지로 잡아끌고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을 파고들었다.
 그곳엔 커다란 테이블에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이 심호흡을 하고 있었고, 그 들 앞엔 그들의 머리통만큼이나 커다란 잔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난 눈이 반짝였다.
 그렇다! 잔 안에 가득 들어 있는 것은 그 이름도 찬란한 맥주다. 꿀꺽! 저쪽 세상에 있을 때 내가 가장 좋아 하던 술은 두 가지. 하나는 막걸리요, 다른 하나는 맥주였다. 그 쌉쌀하면서도 시원하게 넘어가는 맥주의 맛이란 캬아〜
 그러나 불행이도 이쪽 세계에 와서는 맥주를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이놈의 귀족가에선 맥주가 일반 평민들의 술이라 해서 아예 저택 안에 갖다 놓지도 않았다. 제길, 이 놈 세상엔 술에도 귀천이 있나?
 “더 없습니까? 없으면 이대로 시작하겠습······.”
 “잠깐!”
 “히익! 도련님 어쩌려고요!”
 사회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 손을 번쩍 치켜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마커스가 놀란 얼굴로 날 말리려 했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사회자가 눈을 껌뻑이며 무슨 일이냐는 듯 날 보았다. 난 품에서 은화를 꺼내 번쩍 쳐들었다.
 “나도 참가합니다!”
 “오, 꼬마형제! 술은 먹을 줄 아는가?”
 “당연하지! 덤비라고!”
 내가 호기 있게 외치자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와아!”
 “이봐, 저 꼬마들에게도 기회를 주라고!”
 “좋습니다! 여기 당당한 꼬마 영웅 두 분이 나섰습니다. 이 두 꼬마 영웅들이야 말로 소레온의 가호를 듬뿍 받은 것이 틀림없겠군요!”
 “와하하하”
 “난 아니라고요!”
 졸지에 나와 함께 술 먹기 대회에 참가하게 된 마커스가 급히 외쳤지만, 사회자의 걸쭉한 재담에 넘어간 사람들이 터뜨린 대소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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